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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6) 댓글:  조회:3402  추천:0  2020-06-18
16.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 길림농업대학 곡안근(谷安根) 교수는 나보다 1년 년상으로서 그의 일본어수준은 상당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일어로 마음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이다. 우리는 모두 길림성에 있는 농업대학의 교수들인지라 사업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하여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밀접해졌다. “김교수한테 부탁하시오.” 1988년 7월에 길림성정부에서는 길림성 동부식물자원보편조사활동을 벌렸는데 이 활동의 기술고문으로 나를 초빙하였다. 그 때 성정부에서는 내가 주, 현(시) 2급 농업기술간부 식물조사훈련반 강의와 야외실습 지도에 최선을 다했다고 나에게 표창장까지 주었다. 통화지구 정우현에서 소집된 길림성 동부식물자원보편조사 관련 회의 때이다. 회의장에는 정우현에서 채집한 15,000장의 식물표본들이 전시되였는데 적지 않은 표본에 식물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전시장의 기술간부가 곡안근 교수를 찾아가 이름이 없는 식물표본을 감정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곡안근 교수가 “나는 식물생리학 전공이니 식물분류와 식물감정에 자신이 없습니다. 이 분이 전문가이니 이 분에게 부탁해보시오.”라고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표본감정에 나섰는데 다행히도 부탁을 받은 모든 식물표본들이 내가 능히 감정할 수 있는 것들이라 제때에 정확하게 감정한 데서 참가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 1980년 3월경이다. 연변식물보호소 송동무와 나는 장춘에서 소집된 길림성식물보호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내용은 길림성에서 일본산 살초제 ‘살단(杀丹)’(수전살초제)을 시용한 결과를 일본제약공장 기술담당자에게 회보하는 것이였다. 송동무는 회의 전날에 20페지(A4용지)에 달하는 중문보고서를 나에게 주면서 일본어로 번역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보고서에 있는 식물명사들이 거의다 내가 아는 것들이라 나는 그 날로 번역을 끝냈다. 회의장에서 일본기술자들이 나의 일어번역에 매우 감탄해하였다. 당시 동북사범대학에서도 일어수준이 높다는 모 교수를 청해다가 번역임무를 맡겼는데 그 교수는 한동안 번역을 하느라 애를 썼지만 끝내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난 후 초대파티에서 곡안근 교수가 나를 찾아와 “당신은 일어수준도 상당합니다. 당신은 길림성에서 식물표본동정의 제1인자요!”라고 하며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다. “김교수의 퇴직은 농학원의 큰 손실입니다.” 내가 정년퇴직을 한 후에 장춘에서 곡교수를 만나 한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때 서로 말이 오가던 중 곡교수가 어떤 말 끝에 “연변농학원에서 김교수를 정년퇴직시켰는데 내가 볼 바엔 농학원의 큰 손실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다짜고짜로 “쉿… 교수님, 큰코를 다칠 말씀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롱담이면 몰라도 진담이면 큰일 납니다.”라고 하면서 곡교수님에게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계속하여“우리 연변농학원의 어떤 선생님도 이러루한 말을 했다가 뒤조사를 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헛소문이라고 증실되였지만 말입니다.”라며 일부러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나에 대한 곡교수의 평가가 과분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평가가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 그 후 나의 사업의 동력으로 되기도 하였다.
331    [수기] 할머니의 유산 댓글:  조회:3119  추천:0  2020-06-12
                            필자 전복선  해마다 청명이면 나는 조상님들의 산소에 가지 못하는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기분이 착잡하기만 하다. 게다가 간밤에 밤새도록 내린 궂은비가 마침 하늘에 계시는 조상님들의 눈물처럼 생각되여 청명이면 누구보다도 할머니가 각별히 그립다. 아마 내가 예닐곱살쯤 되던 해 청명이였을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앞마당 터밭에서 마늘을 심다가 제사 상차림을 들고 산소에 가는 동네분들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엔 생활이 하도 가난한 때라 혹시라도 산소에 가야 만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산소에 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철없이 말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나중에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죽어서 저 뒤산에 묻히면 너희들도 저 사람들처럼 제사상 음식을 챙겨들고 산소에 갈게다. 그 때에 너도 해마다 청명이면 날 보러 올거지?” 하며 웃으시였다. 그 때 나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면서도 약속을 하듯이 해마다 청명이면 할머니를 보러 꼭꼭 산소에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그 때 내가 할머니와 주고 받았던 그 얘기와 약속이 내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든다. 할머니 최금순은 18세 꽃나이에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결혼 첫날, 할아버지 얼굴을 처음 봤을 때 할머니는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밤새껏 바자굽에 나가 달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죽이며 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홍역 후유증으로 얼굴이 울퉁불퉁한 곰보로 되여 가까이에서 보면 거의 흉할 정도였다. 이팔청춘 꽃나이에 할머니는 얼굴이 예쁘고 손재간이 뛰여나 동네방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할머니는 동그스름한 얼굴에 버들잎 같은 입술,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항상 웃는 듯한 실눈을 갖고 있었다. 행인들은 저 멀리서 할머니가 오시면 보고 또 보면서 할머니가 지나간 뒤에도 머리를 돌려 한참씩이나 뒤모습을 돌아보군 했단다.                                                                    최금순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가 비단결 같은 마음이여서 결혼 후 한번도 소리 내여 다툰적이 없었고 할머니는 한평생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할가, 두분은 결혼한 후로 두분 만의 사랑과 금슬이 넘쳐서인지 열두 자식을 낳으셨는데 열한 자식은 알지도 못할 병으로 요절되고 요행 외독자로 아버지(전원상) 한분 만을 겨우 키워냈다 한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자식을 잃은 슬픈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철없는 나이여서 할머니의 마음속에 깊이 묻힌 아픈 상처를 가늠할 수 없었고 할머니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올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도 나를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워준 할머니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혜롭게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할머니에게서 더 많이 배웠다. 할머니는 사리가 밝고 마음이 착하셔서 동네분들을 돕는 것을 락으로 생각하셨다. 무엇보다 바느질 솜씨가 각별히 뛰여난데서 동네 이웃들의 옷이랑 예쁘게 지어 드리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 그 때 할머니가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어린 나한테 한뜸한뜸 배워준 바느질 솜씨 덕에 어른이 된 지금 옆사람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써먹고 있다. 할머니는 삼베천도 아주 깔끔하게 잘 짜셨다. 할아버지가 봄철에 심은 삼을 가을철에 베여 오시면 할머니는 그것을 가마에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다시 오리오리 실을 뽑아서 삼베천을 짜셨다. 삼껍질을 벗길 때면 저녁을 먹고 온집식구가 마루에 몰려 앉아서 어른들의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밤을 새웠다. 그 때 헐망한 초가집에서 생활했지만 화목하고 행복하게 보낸지라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할머니는 가지각색의 음식도 잘 하셨는데 특히는 증편을 빚는 솜씨가 뛰여났다. 동네 잔치상에 증편이 필수로 올랐는데 증편을 빚는 일은 무조건 우리 할머니의 몫이였다. 증편은 발효가 잘 되지 않으면 보송보송하게 부풀어나지 않아서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쌀가루 발효는 온도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아도 안되고 시간도 적당하게 잘 맞추어야 한다. 보리싹을 물에 풀어 수분을 적당하게 맞추어 잘 이긴 쌀가루에 고루고루 섞은 다음 따뜻한 가마목에 놓고 이불을 덮어서 6시간 정도 발효시켜야 하는데 할머니는 냄새를 맡고 발효완성도를 짐작하시고 판단했는데 그야말로 프로급이였다. 할머니가 만든 증편에 예쁜 연지를 찍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였다. 나는 가는 나무가지를 십자형으로 쪼개서 염색물을 묻혀서 동실하게 부푼 증편우에 찍었는데 매번 증편을 할 때마다 연지를 찍으려고 가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언제나 가마뚜껑을 열겠는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군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시군 했다. 증편 외에도 할머니는 오그랑죽, 호박죽, 설기떡, 찰떡, 기름떡, 옥수수잎떡, 떡국 등 다양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잘 만드셨는데 할머니는 색다른 음식을 하실 때면 나에게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으며 늘 나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셨다. 우리 집에는 떡 방아가 있었는데 매번 떡을 할 때마다 나와 오빠가 숨을 할딱거리며 방아를 찧었다. 할머니는 방아돌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무 막대기로 방아돌의 쌀가루를 골고루 휘저어 주셨다. 방아를 찧을 때 맥이 풀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동년시절은 너무나 가난해서 1년에 추석과 설에만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생선은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때 요행 생선이 생기면 아껴 먹느라고 소금에 푹 절여서 밥알만큼씩 먹었는데 생선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생선반찬이 있으면 뼈까지 꼭꼭 씹으시면서 “바다물고기는 썩어도 맛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선을 먹을 때마다 메아리처럼 귀가에서 울린다. 할머니는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셨기에 글에는 눈뜬 소경이였다. 그 때 생산대에 로인독보조가 있었는데 로인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드렸다. 할머니는 저녁에 독보조에서 낸 숙제를 할 때면 늘 나에게 물으셨는데 나는 그 때마다 제법 선생인 듯 우쭐했다. 동네분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는데 보도원 선생님이 “원상(아버지 이름)이네 집 애들은 할머니를 닮아서 공부를 잘하는 것 같아요. 원상의 어머님은 독보조 로인들중에서 년세도 가장 많으신데도 숙제를 제일 잘해요. 그 년세에 당의 기본로선이랑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암송해 오십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라고 할머니를 칭찬하더란다. 할머니는 년세가 드셔서 무릎 관절도 아프고 허리도 휘였지만 주말마다 독보조에 가시는 일만은 한번도 빼놓지 않으셨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서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밀차에 앉히고 독보조 문앞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했다. “우리 부모는 녀자는 공부해서 쓸 데 없다면서 아들만 공부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남매중 남동생만 학교에 다녔고 우리 세 녀자들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 마당에 가서 창문 너머로 강의하는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그 때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부모님을 맘속으로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지금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하냐! 세상이 좋아서 공짜로 공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할매를 보더라도 너들 열심히 공부해서 꼭 대학에 붙어야 한다.” 할머니의 가슴 시린 말씀은 우리 형제가 열심히 공부하게 된 동력이 되였다. 우리 4남매를 대학공부 시키려고 어머니(오인옥)는 생산대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한편 사시장철 두부장사를 하셨다. 할머니는 매일 새벽 3시에 어머니와 함께 일어나서 콩 갈고 콩물을 짜고 부엌에서 한시간 남짓이 손풍구를 돌렸다. 할머니는 우리 4남매를 모두 업어 키우셨고 손주들의 뒤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한데서 늘그막에 허리가 거의 90도로 휘였다. 손주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74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헤여지던 그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6년 2월말, 개학날이 되여 집을 떠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여 내 손을 꼭 잡고 수염수염 논두렁까지 기어코 나오셨다.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는 이슬 맺힌 눈으로 그윽히 바라보시더니 뼈밖에 남지 않은 갸냘픈 몸을 내 몸에 기댄 채 한참 락루하셨다. “늙은이들의 일은 누구도 모른다. 이게 너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네 손을 놓고 싶지 않구나. 시간이 늦겠다. 이젠 그만 가보거라. 공부 꼭 잘해야⋯”라고 하시면서 말끝을 맺지 못하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 얼굴을 닦아 드리면서 “할머니 여름방학이 되면 또 올겁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셔야 돼요”라고 위로했다. 눈물고인 할머니의 그 애달픈 눈빛, 허물어지듯 논두렁이에 주저앉아 나의 뒤모습을 응시하며 손짓하시던 할머니,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에 조각상처럼 오래오래 그 자리에 앉아서 백발을 흗날리시면서 뻐스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젓던 할머니⋯ 하늘이 무심키로 그 날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나는 고향에 가면 할머니가 앉아 계셨던 그 논두렁을 보면서 손녀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생전에 할머니는 딸 자식이 없는 것을 몹시 서운해 하셨다. 할머니는 딸이 없어서 어디에 놀러다닐 데도 없고 속이 타도 시원히 털어놓을 데도 없다는 말씀을 몇번이나 하셨다. 그래서 특별히 손녀인 나한테 정이 많으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어머니보다도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꿈이였다. 할머니가 좋아 하시는 생선도 실컷 사드리고 할머니가 맛보지 못하셨던 귤이랑, 복숭아랑 바나나랑 사드리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꿈이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의 대학졸업도 지켜보지 못하고 총총히 떠나셨다. 손녀가 번 돈을 일전도 써보지 못하고 손녀가 해 드리는 반찬 한번도 드시지 못하고 산더미 같은 가난에 짓눌리시다가 하늘나라에 가셨다. 나의 할머니 최금순은 나에게 땅이나 집 같은 재물보다도 훨씬 값진 유산으로 ‘강한 생활력, 알뜰한 살림살이, 긍정적이고 남을 돕는 것을 락으로 하는 옳바른 삶’을 유산처럼 남기셨다. 할머니는 ‘가난뱅이 마음의 부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34년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가 후세에 남겨주신 유산은 나의 생활의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슴배였고 할머니의 유산을 광동이라는 타향에서도 굳건히 지켜가며 해외에서 공부하는 딸에게도 전수하고 있는 나다. 하늘 나라에 계시는 할머니 사랑합니 /전복선 [ 길림신문 ]  2020-05-25
330    [수기 ] ‘미태혼’으로 맺은 ‘잠자는 공주’와의 사랑 댓글:  조회:3542  추천:0  2020-06-01
90대 로부부의 사랑 이야기 나는 연변농학원 정년 퇴직 교수인 김수철이다. 1925년 4월 1일에 룡정시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고 일곱살에 백부님의 계자로 앞을 섰으며 열살에 마을의 서당인 ‘양홍사숙’에서 배움을 시작하여 1942년 1월에 결혼 나이(18세)가 되자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 때인 1월 31일에 결혼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부 사랑은 73년 간 이어졌다.                                                                                                김수철교수 아버지의 ‘선견지명’ㅡ‘미태혼(未胎婚) ’ 운명론자의 얘기로 세상에서 자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할 배필을 하늘이 정해준 ‘천생배필’ 또는 ‘운명의 씨앗’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네 약혼례가 전무후무로 사전에도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 우리 스스로 아버지가 ‘선견지명’으로 정해 준 ‘미태혼(未胎婚)’라 했다. 1920년대에 아버지 김창구(金暢九)가 연길시 백석구 4대에서 살면서 겨울이면 동내야학교를 다녔다. 그 때 웃동네 맹영철이란 동반 선배가 있었는데 맹의 문화수준이 아버지보다 높은 데다가 필법(笔法)과 구변(口辩)까지 좋고 경우가 바른데서 아버지는 맹씨를 숭배하였다. ‘저분과의 인정을 튼튼히 맺으면 천상 랑패가 될 일이 없겠는데…’ 언녕부터 이런 속궁리를 해오던 아버지는 어느 날 엉뚱한 생각으로 ‘맹씨와 사돈을 맺는 것이 묘안이다’ 고 생각하며 지체 없이 맹씨를 찾아가서 말을 건넸다. “맹유사(孟有司)…에!..에!...”, “…”, “…” “김유사(金有司), 오늘은 어찌된 일이요? 에, 에 …”, “그런게 아니라… 에…어떻게 말씀을 올린다…”,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요, 할 말이 있으면 시원히 하라니까…”, “예, 그럼 감히 말씀을 올리는데 우리가 사돈을 정하면 어떻소이까?”, “아니, 사돈이라니? 뚱딴지 같은 소리를…” “아니…예…말하자면 내가 딸을 낳고 맹유자가 아들을 낳으면…”, “아, 그런 말이였구만, 알만하이, 단마디로 우리 두집에서 낳는 자식을 약혼시킨다는 말이구려… 약혼을…” , “맹유자는 실로 말귀가 빠르네요, 바로 그런 말씀이우이다”, “아무렴, 그만한 말기야…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집 사람이 태기도 없는 데다가 지금의 청년들이 자유 련애를 하는 판에 설마 혼사가 끝까지 성사될가 걱정되네요. 혼사말은 허타히 하는 것이 아닌데…” “후에 자식들의 혼령이 되면 그 때에 다시 …”, “…자식들의 앞날 일은 이쯤으로 마무리를 합시다.” 그날 저녁에 이렇게 아퀴를 짓고 두분은 조용한 곳을 찾아 대작을 하면서 아직까지 량가 부인들이 태기(胎氣)도 없는데 ‘미태혼’을 축복했다. 1924년 음력 8월 15일에 맹씨가 큰 딸로 맹영자가 출생했고 1925년 음력 4월 1일에 김씨도 큰 아들로 나 김수철(아명 乙祿)을 출생한데서 나와 맹영자의 결혼이 량가의 ‘부정배필(父定配匹)’로 이어졌다.   백부님의 강권                                                                               신랑 김수철, 신부 맹영자 공맹지도는 한 가문에 후대(아들)가 없다면 조상에 대한 불효라고 하였다. 하여 ‘갓바위집’ 제9대인 김창윤(金暢胤, 김수철 백부)이 아들을 잃고 ‘갓바위집’ 10대 장손으로 김수철이 7살에 백부의 계자로 되였다. 1941년 12월, 내가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한 기쁘던 날에 집에 갔더니 생각 밖에 백부님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결혼을 나에게 강권하며 무조건 순종하란다. 백부님은 언녕부터 계자가 결혼 년령(18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기에 1942년 첫날 내가 18세가 되자바람으로 동생(친부)을 불러 하루속히 손군을 안아보겠다며 며느리감을 곁드니 아버지는 며느리 감은 언녕 정했다고 했다. 백부님은 동생의 구구한 설명에 당장에서 친척을 밀사로 파견하며 손금보듯이 맹녀의 정황을 알아오도록 했다. 며칠 후 밀사의 회보에 따르면 맹씨 가문은 례절 밝고 인심이 좋고 경제가 넉넉한 가문이라고, 맹씨네 자녀는 5남 1녀로 모두 건강하고 총명하다고, 인물 좋은 맹녀의 단 한가지 흠이라면 아버지가 딸을 공부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백부님은 구수하벌에서 농촌 색시로 공부를 한 18세의 색시를 보고 죽자고 해도 못 찾는다며 결혼을 재촉하였다. 아버지의 선택에 백부님의 강권을 못 이겨 나는 1942년 1월 31일 (음력12월 6일)을 결혼 길일로 스스로 정하였다.   신랑의 〈아리랑〉에 신부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결혼 전날인 1942년 1월 30일 저녁이다. 나는 6간 초가집 방에서 초불을 켜놓고 9촌 할아버지(金炳活)의 지도하에서 ‘큰글’을 섰다. ‘큰글’이란 신부집에 보내기 위한 것인데 내용은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신랑의 결심서’이다. 결혼 후 리혼을 하면 이 ‘큰글’종이를 절반으로 나눠서 각기 보관한단다. 이틑날 이른 아침, 아직 해 뜨지 않았지만 신랑이 떠날 준비로 모두가 서둘렀다. 신랑의 몸차림은 나의 주장대로 그냥 중학생 학생복과 겨울모자 차림이였다. 나는 이상분들에게 “색시를 잘 데려 오겠습니다”며 큰절을 올린 후 길을 떠났다. 조양천에서 삯을 내서 붉은 종이로 꾸린 꽃마차는 방울소리를 절렁절렁 울리면서 하얗게 눈이 덮인 산길을 따라 해뜨는 동남 백석구쪽으로 반시간 푼히 달려 20여호의 초가집이 산재한 백석구의 남향쪽 6간 초가집 마당에 서서히 멈췄다. 명절 옷차림을 한 하객들이 사방에서 신랑을 보려고 꽃마차 두리에 몰렸다. 여기저기서 “아무리 봐도 신랑 같지 않다”, “중학생이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꽃마차에 내린 내가 구두를 신은대로 ‘디딜패’를 밟으며 집문 앞에 이르니 신랑측 생빈이 다른 길로 문앞까지 와서 준비한 례단을 올린 후 전안례(奠雁礼)까지 끝내고 신랑 방에 들어서니 크게차린 신랑상이 들어왔다. 그럭저럭 큰상을 처리하고 나니 신부가 떠날 시각이 되였다. 이제부터는 신랑신부가 상면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아버지가 어떤 제비를 뽑고 나더러 펼쳐서 보라고 할가?’ 이런 생각이 앞섰지만 아버지가 정한 일이니 할 수 없었다. 하얀 꽃너울을 쓴 녀인이 나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서로 따로 서면 나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살결은 일반 녀인들보다 퍽 흰 편이다. 낯은 반반하고 특별이 보기 싫게 튀여 나온 곳이 없었다. 눈길도 아주 순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증명되였다. 꽃마차가 영원히 운명을 함께 할 맹양(孟娘)을 싣고 백석의 동구령의 오르막 길을 달리는데 말발굽 소리가 그렇게 가볍고 신나게 들렸다. 집마당에 도착하니 동내외의 하객들이 웅성거리며 밀려온다. 신랑신부가 꽃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었던지 6명의 한족 나팔(새납)쟁이들이 잔치집 마당에 나타나 축하의 나팔을 불어댔다. 그에 따라 온마당의 남녀로소 하객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부를 맞이했다. 한족 나팔쟁이들에 따르면 지나가던 걸음에 조선족의 잔치 집을 만나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매에도 잊지 못할 감사한 분들이였다. 어느덧 밤이 되여 결혼 축하 오락판이 펼쳐졌다. 참석자들이 5, 60명이 잘 되였다. 한동네 청년이 큰 박수로 오락 시작을 선포하고 신랑신부 상견례, 신랑신부 선물교환, 신랑신부의 독창과 합창...순으로 오락판이 이어졌다. 신랑이 절절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넘기고 신부를 걱정했는데 생각 밖에 신부는 물찬 제비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숙여 수줍은 인사를 하고 나서 미루 준비 했는지 〈홍도야 울지마라〉를 그렇게도 간절하게 불렀다. 신랑신부 합창으로 부부가 손 잡고 〈도라지〉룰 부르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다음은 중학교 동창 리수호의 축사에 이어 신랑의 발언과 신혼 려행이다. 신랑신부 려행은 신랑신부서로가 팔을 끼고 방안을 한 고패 도는 것이다. 신혼 려행을 끝내니 신랑더러 략사(略史) 보고를 하란다. 나는 략사보고에서 우리들의 약혼은 ‘미태혼’이라는 것, 그 사이 신부가 너무나 보고 싶어 남들의 눈을 피해 늦은 밤길을 다니며 맹녀를 만나 보았다는 등 ‘아름다운 거짓말’로 하객들을 웃기였다. 오락판은 전체 하객들의 합창과 춤으로 여흥을 푼 다음 모두의 기립 박수로 페식을 선포하였다.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밤새에 싸락눈이 내려 땅을 덮었다. 항간에서 신부가 다녀온 길을 눈으로 덮으면 신부가 시집에 안착하고 시집살이를 잘 한다고 전해지기에 모두가 기뻐했다. 아침 식사 후 사람들이 놀려왔는데 강희태씨가 간밤에 난데없는 부엉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겨울에 들리는 부엉의 울음소리는 경사의 길상이라고 했다. 실로 우리 부부는 4남 1녀를 낳고 금혼잔치까지 지내고 90이 넘도록 동고동락하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나는 ‘안해’를 ‘집안의 해(태양)’라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중하듯 안해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딸과 함께 행복했던 안해 맹영자(왼쪽)   이하는 부인 탄신 93주년에 올린 나의 축수문이다. “오늘은 맹모의 93주년 생신 날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명심하여 준비하고 참여하신 귀빈 여러분과 온집 식구들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로약한 몸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장모님을 부양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위 최명림(崔明林), 딸 김혜란과 보모( 保母), 그리고 맏아들 김상술 부부를 비롯한 자녀, 자부와 손자, 손녀, 증손 일동에게 맘속으로 깊이 간직해 오던 치하를 합니다! 맹모가 산출한 4남 1녀와 그의 자손으로 이뤄진 27명의 대가정은 모두 맹모의 잉태와 양육의 노력으로 이룩되였습니다. 그만큼 맹모는 위대한 녀성이며 나의 둘도 없는 ‘록색로친’ 입니다! 인생의 자연적인 산출과 사회생활, 찬란한 문화, 문명, 절대적인 사랑, 꿈, 행복 등 인류세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바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창조한 걸작입니다. 한국의 안영희박사가 훈춘 경신 방천에서 아름다운 사막공원과 련꽃 늪을 비롯한 중, 조, 로 3국의 풍경을 만끽하면서 마음속 찬탄을 못이겨 올리는 말씀이 ‘어머니가 나를 낳았기에 나는 오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보게 되였습니다!’며 자기 몸을 낳아준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도 50대 중반에 천신만고를 마다하고 두번째 장백산이라고 불리는 화룡 청산의 베개봉 절정에 올라가 만물을 굽어보며 베개봉의 암석에 ‘어머니’라는 위대한 석자를 새겼답니다. 세상에서 엄마를 잃은 젖먹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이 순간 엄마를 잃은 아이가 부르던 노래 말이 떠오릅니다.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필 때마다 안아 주세요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눈에서 피가 흐른다 … … … 눈물이 앞을 가려 더는 읽을 수 없습니다…. 맹모는 문화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며 백석(白石)에서 순진하게 자랐고 18세에 갓바위 집 김룡천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철이 없는 부군(夫君)의 랭대를 받으면서도 수십년을 힘겨운 수전 농사일에 종사하였습니다. 맹모는 젊은 나이에 조상들의 추석 성묘로 가는 길에서 늙으신 시아버님을 업고 구수하강을 건너며 시부모 효도를 다 하였습니다. 맹모는 4남 1녀의 잉태와 양육에서 갖은 생활난을 겪어냈으며 매서운 양력설날 추위에도 홀옷 맵시로 부군과 함께 산에 가 땔나무를 하면서도 아무런 군말이 없었습니다. 맹모는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한마디 불평 없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온 손색없는 참된 어머니 용사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어머님 품에서 자란 자식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은혜에 보은하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우리 대가정의 창성 발전의 길을 펼쳤습니다. ‘사랑’은 인생의 비운을 구원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항상 몇십년을 갈라졌던 리산가족이 상봉하는 그날처럼 서로 꼭 껴안고 쓰다듬어주면서 이날을 마지막으로 갈라지는 날처럼 아끼면서 서로가 산다면 그 인생의 길은 비단길이며 만화방초가 만발한 꽃길로 삶의 영원한 디딜패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단길 개척자 맹영자 만세! 세상의 위대한 어머니들 만세! 만만세!!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건강 행복 만세! 2016년 추석 , 김수철올림    ‘잠자는 공주’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린 최대의 선물이 래일의 일을 오늘에 모르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2017년 5월 7일, 내가 훈춘 경신에 가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식물을 찍고 돌아온 이틀 후인 5월 9일에 부인이 94세로 고종명을 하였다. 지난해 부인의 생일에 올린 축수문이 아직 1년도 못되여 추도문으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 축수문에서 내가 욕심을 버리고 ‘맹영자 만세!’를 ‘맹영자 백세!’로 표했다면 혹시 백세를 살았을 것인데 말이다. 후회막급으로 모대기였다. 맹녀와 함께 한 나의 인생사는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 함께 파란곡절을 이겨내면서 분수에 넘친 우리들의 욕망을 실천한 인생사였다. 나는 맹영자씨를 평생의 동반자로 존중했다. 하기에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위해 90고령에 혼자서 삼성촌에서 자취하면서 주방 벽에 부인의 사진을 정히 모시고 늘 감사한 마음을 표하군 했다. 2017년 추석 맹녀의 생일 날에 나는 ‘맹영자묘석비(孟英子墓石碑)’를 세울 때 비문을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선택했는데 자녀들이 그저 ‘자녀일동립비(子女一同立碑)’라고 쓰려니 늙은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고 묵묵히 따라 주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지 못해 나는 〈잠자는 공주〉의 노래말을 오선생에게 보인다. 앵두빛 그 고운 두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여나 나에게 하얀 미소지을가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나는 ‘미태혼’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의 ‘미태혼’은 전무후무한 혼사(婚事)이다. 아버지에 순종함이 나의 효도였다. 아버지의‘선견지명’이 우리 부부의 금술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    / 오기활 대필
329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5) 댓글:  조회:3482  추천:0  2020-06-01
15. 못 잊을 기생 1994년 음력 1월 2일이다. 나는 한국의 이상래 박사, 이종일 교수, 안상덕 박사의 안내하에 3대루의 하나인 경상남도 진주의 남강 기슭에 자리한 촉석루를 유람했다. 촉석루는 고려말에 김춘광(金春光)이 세운 웅장한 목조루각이다. 이날 나에게 눈도장이 찍힌 것은 촉석루 뒤에 우뚝 솟은 의기사당(义妓祠堂)이였다. 의기사당에는 채색으로 그려진 명기생 주론개(朱论介)의 령정이 모셔져있었고 사당 앞 선바위에는 주론개의 애국정신을 노래한 시가 주옥같이 새겨져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론개의 애국절개를 상징하는 참대나무들이 의젓하게 자라고 있었다. 의기사당엔 한(恨)의 피눈물이 슴배여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丰臣秀吉)는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반도에 출정했다. 일제놈들은 경상남도 진주성을 함락하고 절승경개를 자랑하는 촉석루에서 승리의 축하연을 열었다. 그 때 왜놈들은 조선의 젊은 녀인들을 끌고 와 흥청망청 술을 마셔대며 희롱하였는데 끌려온 녀인들중에는 주론개라는 기생도 들어있었다 그 날 연회에서 론개는 언녕부터 사무치는 원한이 있었는지라 거나하게 된 왜장을 껴안고 분노에 사품치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나는 의기사당을 돌아본 후에야 론개가 실존인물임을 알게 되였고 기생의 신분으로 나라에 충성한 론개의 애국정신에 매료되여 발걸음을 멈추고 필을 들어 그 자리에서 주론개를 노래한 주옥 같은 시문을 필기하였다. 론 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라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리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그런데 내가 소홀했던 걸가? 그만 시인의 방명(芳名)이 빠진 것이다. 너무나 유감스러웠다. 나는 촉석루를 떠나면서 아쉬워 몇번이고 다시 뒤돌아보았다. 남강의 푸른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재빛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의기사당의 상공을 빙빙 돌고 있었다. 날새들도 슬픔과 한에 찬 우리 민족의 력사를 잊지 못하여 의로운 기녀인 론개를 기리는 듯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조선시대 충절의 본보기인 주론개의 생가와 마을의 복원공정이 1999년말까지 한화 50억원 투자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론개의 생가는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다. 일설에는 론개는 장령의 부인으로서 왜놈 장령을 죽이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들의 축연에 참가했다고 하는데 그 진위 여부는 앞으로 연구할 문제이다. 나는 한국 유람을 통해 명기생 주론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였고 론개의 애국정신에 감동을 받아 이 글로 론개를기린다.
328    암과 동행하는 장수비결 댓글:  조회:4278  추천:0  2020-05-22
필자는" 2012년 6월에 대장암 2기로 수술을 받은후부터 암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식생활을 완전히 바꿨다"는 환자를 통해 한국 국립 암쌘터 이(리)진수원장의 “암과 동행하는 장수비결”을 소개받고 이(리)원장의 일가견이 “참 독특하다!”는 필자의 생각과 믿음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저 이 글을 올린다. 이(리)진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서 류학공부를 마치고 세계적인 암 치료병원으로 불린 미국 텍사스 MD엔더슨 암 센터에서 19년 동안 “닥터리”로 이름을 날린(192001년 미국 최고 의사)의사다. 특히 1999년 12월에 삼성 ‘이건희’ 회장을 직접 치료하면서 그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후 “한국의 암치료에 기여하는 것을 조국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고 귀국하여 한국 국립암센터부속병원장, 폐암센터장, 연구소장을 지냈다.   이하는 암에 대한 이(리)원장의 독특한 일가견이다. ㅡ 인간이 늙어지면 이런저런 병에 걸려 어차피 죽는다. 대부분의 암은 인간이 나이 들면 생기는 흰머리나 주름살과 같다. 우리는 ‘암=죽음’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암을 완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안고서 함께 가야 할 ‘육체의 가시’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명이 있는 자는 죽게 돼 있고 죽은 뒤엔 반드시 심판이 있게 된다. 83세에 폐암으로 사망한 영화배우 ‘폴 뉴먼’을 암에 걸려 죽었다고 말하기보다 늙어 죽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ㅡ 무엇보다 암 치료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바뀌어야 한다. 1, 암세포는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으로 일생에서 누구에게나   6번 내지 10번의  암세포가 발생한다. 암세포는 수십억개까지 자라야만이 진단이 가능하다. 암이 완치되었다고 함은 암세포가 작아져서 안 보인다는 말이지 다 치료되였다는 말이 아니다. 2, 인체내에 면역체계가 왕성하면 암세포를 파괴하고 암세포의 증식을 막아 종양으로 자라는 것을 방지한다. 3, 암에 걸렸다는 것은 여러 종류의 영양결핍에 걸렸다는 것으로 그 원인이 유전, 환경, 생활습관등에서 기인된다. 복합적 영양결핍을 극복하려면 보조식품을 포함한 섭생방식을 바꿔 인체의 면역력을 강화해야한다. 4, 화학료법은 급속히 자라는 암세포를 독물로 죽이는 것으로 암세포의 죽음과 함께 소화계통장기를 손상시키며 간, 콩팥, 심장 폐 등을 손상하게 된다. 방사선 치료도 암세포를 파괴하는 동시에 정상세포와 기관을 파괴하고 상처를 남긴다. 5, 초기 화학료법과 방사선 치료는 종양의 크기를 줄일 수 있을 뿐 장기간을 치료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6, 화학치료와 방사선치료로 그 독(毒)이 루적되면 면역체계가 와해되어 환자가 다른 감염과 부작용에 굴복하게 된다. 화학적, 방사능치료에 암세포가 변종되여 내(耐)성을 갖게 한다. 절제수술도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퍼지게 한다. 7, 효과적인 암 투병 방법은 암세포가 증식할수 있는 먹거리를 차단하여 암을 굶어 죽게하는 것이다. 암이 좋아하는 식품으로 설탕과 그 대용품이다. 식탁용 소금은 표백제 때문에 해롭고 천일염이 좋다. 우유도 해롭다. 우유를 대신하여 무과당 두유가 암을 굶주리게 할 수 있다. 암은 산성체질로 알카리성으로 바꿀 것, 육식은 산성이므로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피하고 생선을 먹는 것이 좋다. 닭고기는 조금 먹어도 좋다. 건과류와 과일을 먹으면 알칼리 체질이 된다. 콩의 조리 음식을 먹는것이 바람직하다. 녹(록)즙은 생 효소를 공급하여 쉽게 흡수되고 건강세포를 잘 자라게 한다. 커피, 초코렛을 피한다. 대신 항암성분이 있는 녹(록)차가 좋다 ㅡ 암은 마음, 신체, 정신의 병이다. 항상 긍정적이며 분노, 미움, 스트레스를 피하고 인생을 즐기며 편히 쉬여야 한다. 소식, 긍정적 태도, 마땅한 주거 환경을 가춰야 한다. 황금색 카레는 암병 예방에 가장 좋고 치매도 막아준다. 암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카레를 먹는 것을 일상화함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이상을 제공하며 선택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오기활
327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4) 댓글:  조회:3933  추천:0  2020-05-20
14. 박사연구생 반욱(槃旭)이와 함께 첫 만남 아이산(阿耳山)은 대흥안령의 명승지이며 몽골족의 성지이다. 아이산에는 기화이초(奇花异草)도 많고 물고기가 떼를 지어 춤추는 대천(大川)도 많다. 내가 지금 펴내고 있는 ≪길림성식물지도감≫에 참고되는 희한한 식물들이 아이산에 수두룩하게 나있다고 생각하니 어깨춤이 절로 났다. 2016년 6월 9일 오전 9시 30분에 나는 길림성 서북의 신흥도시인 송원으로 향하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훈춘‒울란호트고속도로로 달리는 뻐스가 오후 3시경에 송원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저 로인이 70이래. 꼬부랑 할배가 꽃구경을 다니다니, 어쩌자구 저러노?” 내가 가는 곳마다에서 이구동성으로 이런 후론(后论)들이 뒤따랐다. 후론들이 여하하든 90대 로인을 70대로 보니 귀맛이 좋기만 하였다. 기실은 이번 원정도 92세 나이를 아랑곳않고 ≪길림성식물지도감≫에 배합할 사진을 찍으려고 혼자몸으로 떠났는데 말이다. 나는 송원에서 기차로 백성에 가서 하루를 묵고 울란호트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나는 뻐스의 차창 너머로 가고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내몽골초원의 산천초목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오매불망하고 찾아온 아이산거리는 오색이 령롱한 네온싸인으로 극락세계를 방불케 하였다. 번화한 거리중심의 값싼 려관은 이미 만원이였다. 겨우 찾은 려관방이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일박에 20원씩하는 허줄한 지하방이였다. 비록 호주머니에는 돈이 두툼히 있었지만 앞으로의 려정을 생각하니 눅거리 려관도 안식처로 느껴졌다. 오히려 고급호텔에 들었으면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였을 것이다. 이튿날은 비가 꽤나 내리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도시 주변의 산에서 등산길을 찾느라고 종일 헤맸는데 등산길이 모두 인위시설(人为施设)로 막혀있었다. 맥없이 려관에 돌아오니 날이 벌써 어두워졌다. 이튿날엔 아침부터 묻고 또 물으면서 앞산에 설치된 케블카시설이 있는 스키장으로 올라갔다. 상대고도가 500m 정도의 산기슭에 이르니 기화이초들이 나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노랑양귀비, 서홍닥나무, 아시아톱풀 등이 나를 보고 빨리 오란다. 허기 찬 호기심을 겨우 누르면서 45도 정도의 경사진 벼랑도 맥 없는 줄 모르고 톺아올랐다. 식물삼매경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금년 봄 연길 중관촌전자상가에서 산 묵직한 디지털사진기로 첫여름의 여러가지 식물 100여장을 사진기에 담았다. 여기는 자연보호구역이여서 식물이 잘 보존되여있었다. 저녁에 려관에 돌아오니 딸과 사위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할빈에 있는 동북림업대학의 류삼규(柳参奎) 교수가 나한테 자기의 박사연구생 반욱을 보내니 현지 식물분류실습을 잘 지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란다. 3일후 젊은 한족 청년이 만면에 웃음을 담고 나를 찾아왔다. 젊은 박사연구생이 식물을 배우려고 할빈에서 나를 찾아왔다니 려관집 할머니와 젊은 부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나는 젊은이의 체면을 고려해 지하방을 물리고 지상의 중급 방으로 옮겼다. 허허!… 젊은 박사연구생이 나의 몸값을 올린 셈이였다. 결국 자초지종을 캐여물으니 반욱이의 론문쩨마가 ‘미꾸리꿰미풀’인데 이 풀이 안달(安达)지역에 있기는 한데 도대체 몇가지가 있으며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였다. 아무래도 도와주어야 시름이 놓일 것 같아 반욱이와 함께 류삼규 교수의 안달실험기지를 향해 떠났다. 식물연구기지에서 아이산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우리는 대경을 거쳐 내가 10년전에 3년 동안이나 드나들며 정을 묻혔던 안달에 도착했다. 안달에는 류삼규 교수의 식물연구기지가 있다. 나는 3년간 안달실험기지에서 알칼리땅에서 자라는 식물을 조사, 연구하면서 류교수를 도와 2006년에 ≪동북염지채색식물도감(东北盐地彩色植物图鉴)≫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그동안에 류교수의 소개로 일본 동경대학의 저명한 교수들과 친분을 맺었고 동경대학의 초청으로 란 론문을 발표해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영광까지 지니였다. 그러니 류교수의 식물연구기지는 나의 학습장으로 나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 잊지 못할 실험지이다. 이곳은 평소에는 거의 비여있었다. 내가 있는 동안에 성실한 한족 로부부가 기지를 지키며 나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면서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나는 반욱이와 함께 3일간 미꾸리꿰미풀의 여러가지 모양의 견본을 찾아 표기하고 번호를 달아 금후의 검색에 차실이 없도록 면밀하게 꾸며놓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이번 걸음에 종류에 따라 감정을 하려고 했으나 자료문헌이 부족하고 실체현미경도 없어서 별수없이 조건이 마련된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안달‒할빈고속렬차를 타고 할빈에 갔더니 동북림업대학의 요인 두명이 할빈역에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하고는 화려한 동북림업대학호텔로 안내하였다. ‘미꾸리꿰미풀’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나의 연구와 생활의 근거지인 조양천의 삼성촌에서 춘향이 리도령을 기다리듯 나를 고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루가 삼추같이 느껴져 잠자리에서 애써 눈을 감아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장백산천지행 반욱이는 사물감수능력이 뛰여났다. 그리고 려행, 참관, 견학 등 행사에서 기록을 확실하고도 상세히 할 뿐더러 또 여러 갈래의 경로를 통하여 지도, 사진, 려행안내 등 정보수집도 잘했다. 그 외의 몇번의 동행에서 그에게서 받은 제일 깊은 인상은 전화, 핸드폰, 컴퓨터, 팩스 등 현대적인 설비로 친필편지가 까맣게 잊혀져가는 시대에 그는 부지런히 손편지를 쓰는 것이였다. 그는 어디를 가나 우편엽서를 많이 샀고 쉴새없이 속필로 편지를 썼다. 한번에 적을 땐 10여장, 많을 땐 60여장에 이르는 친필편지를 려관에서도 쓰고 덜컥거리는 차에서도 쉼없이 쓰고 또 썼다. 나는 그렇게도 흥미롭게 편지를 쓰는 사람을 처음 봤다. 언젠가 최명림씨가 반욱이를 중, 조, 로 3국 접경지인 방천을 관광시킬 때도 반욱이는 조선과 로씨야의 토산물, 우표와 여러가지 기념품들을 빼놓지 않고 많이 수집하더란다. 이튿날에 장백산천지를 가기로 하였는데 이 소식을 접한 류삼규 교수의 친우들인 려춘성(연변대학)과 송씨(조양천농업은행) 부부가 반욱이를 동무해주기로 하였다. 장백산천지는 반욱이만 오르고 나머지 6명은 황송포습지에서 식물촬영을 하였다. 이번 걸음에 황송포습지 직원들의 친절한 협조와 려춘성과 송씨 부부의 도움으로 예기치 못했던 많은 종류의 식물들을 촬영할 수 있었다. 할빈역에서 2016년 6월 중순에 나는 반욱이와 함께 할빈‒연길고속렬차를 타려고 할빈역에 왔다. 할빈역에서 나는 민족의 독립투사인 안중근이 로씨야와 일본 군경들의 틈새로 몸을 빼면서 조선을 송두리채 수중에 넣은 주범인 이등박문을 보기 좋게 사살한 후 떳떳하게 “꼬레아 우라!”(로어로 ‘한국 만세!’)를 세번 웨친 광경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안중근을 그리였다. 안중근은 진작부터 이등박문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3년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결하여 속죄하기로 맹세했다. 마침 이등박문이 할빈을 방문하게 되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류동하와 함께 할빈으로 왔고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로씨야측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나오는 이등박문을 쏘아눕혔다. 31세에 나는 안중근은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3월 16일 10시에 단정한 자세로 “대한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피끓는 심장을 멈추었다. 절세의 애국자 안중근의 붉은 피는 아직도 식지 않고 이 땅을 적시며 사람들의 붉은 심장을 불태우고 있다…
326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 (련재13) 댓글:  조회:3164  추천:0  2020-05-10
후반전에“멋진 꼴!”을 인생은 2모작이다. 인생을 100으로, 50은 전반생, 50후는 여생이 아닌 후반생이다. 후반생은 전반생에서 저축해 온 것을 토대로 살아간다. 인생 60을 시작으로 후반전이다. 축구를 보면 멋진 꼴이 거의 모두 후반전에 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로 후반생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랜드모스는 71세에 그림을 시작했고 갈릴레오는 74세에 마지막 저서를 출판했으며 파블로카 찰스는 85세에 백악관에서 연주를 했고 버나드쇼는 96세때 가지를 치기 위해 나무에 올랐다가 다리를 상했다. 지능과 창의력은 다르다고 한다.  지능은 20쯤에 가장 완숙하고 창의력은 30후에 서서히 발달하다가 70부터 또 다시 상승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명가 1,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최고 창의력의 평균년령이 74세로 나타났다. 최종승부는 후반전이다. 후반전에 성공한 사람이진짜 성공한 사람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수자에 불과 하다. 나는 후반전에 승부를 걸고 더 멋진 꼴을 넣었다. 첫 “꼴”은 중조변경에서 1987년에 내가 정령퇴직을 하니1990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도문동식물검역국”에서 나를 “延辺中朝辺境檢疫性杂草, 田園杂草種類及其分布調査硏究”사업 기술고문으로 초빙되였다. 하여 우리는 조사팀을 조직하여1992년 9월 20일까지 조사사업을 마무리를 하고 다음 보고문건을 작성하였다. 1, 項目鑑定大钢 2, 延辺中朝辺境檢役性杂草田園杂草種類及分布調査硏究工作報告 3, 調査点分布圖(地圖) 4, 延辺中朝辺境主要檢疫性杂草, 田園杂草名錄 5, 延辺中朝辺境田園杂草分區圖 6, 延辺中朝辺境田園杂草檢索表 그때 우리가 조사구역내에서 발견한 잡초가 모두 71科에 256属, 504種이였다. 그 중에는 검역성잡초 1종, 水田잡초 132종, 旱田잡초 169종, 果園잡초 337종, 熟地잡초 137종이 포함된다. 성해당부문에서1992년 9월 27일에 감정회를 소집하였는데 길림성정부에서 파견한 심양농학원식물보호전업의 백교수가 감정위원회 주임을, 장교수가 부주임을, 冠廣淸, 金洙哲 등이 위원으로 감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감정회는 만장일치로 우리가 작성한 보고문을 통과하고 성정부에 보고하니 성정부 해당부문에서 제때에 본 감정을 통과하였다. 이는 내가 후반전에 중조변경에서 넣은 첫번째 멋진 “꼴”이였다.     두 번째 멋진 “꼴”은  서울에서 1994년 8월 한국 “아카데마서적”에서 金洙哲, 安相得, 李相來의 공저로 세상 처음으로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을 출판하였다 “장백산은 “식물의 宝庫”로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장백산은 세상에서 만병통치의 灵葯으로 불리는 산삼의 분포 중심지역이고 잣나무, 오리나무더부살이, 참돌꽃 등 량온대의 유용자뭔식물의 분포지다.”“중, 한 두 나라전문가들이 ‘우리가 물려받은 자연은 그대로 보존하고 보호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며 유용한 식물은 순화, 번식, 개발하여 멸종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는 취지로 팀을무어 2년간 백두산의 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한 기초상에서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 등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배우는 각계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백두산 자원식물에 대한 좋은 지침서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원색백두산자원식물”을 집필하였다” 이는 “원색백두산자원식물”의 “머리말”의 한 단락이다   (부록); “원색 백두산자원식물”속의 뒷 이야기 ㅡ 나의 맏아들 相术이는 국비로 일본동경에서 전기공학연수를 마치고 돌아 올 때 나에게 니컨패카메라를 선물하였다. 나는 정년퇴직을 하자3ㅡ4년간 이 사진기로 백두산의 700여종의 식물을 선택적으로 찍고나서“백두산자원식물도감”을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원고를 가지고 연변인민출판사에가니 출판사에서 아직까지 원색사진 출판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동양자원식물학회 회장으로 지내는 리상래박사와 강원도 춘천대학의 안상득박사가 서울에서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중, 한관계래왕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우리 농학원의 김병진교수가 친히 관계부문을 찾아 다니며 나의 원고의 출국수속을 끝내고 원고를 우편으로 안상득박사에게부쳐 보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갈려니 근친의 초청이 없이는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리상래박사가 나서 동분서주하면서 끝내 나의 출국수속을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1994년 1월에 중국 천진에서 비행기에 올라 상해를 경과하여 서울 김포공항에 내리니 리상래박사와 안상득박사가 마중을 나와 나를 서울대학 근처인 관악구의 어느 하숙집으로 안내하였다. ㅡ 나는 하숙집에서 독방을 차지하였다.리상래회장이 이부자리를, 안상득박사가 채색텔레비죤을 마련해 주었다. 하숙비가 한달에 한화로 40만(인민페로 4000원)이라고 하는데 리상래회장이 전담하였다. 나는 한 달을 기한하고 원고를 추고하며 내가 찍은 식물사진을 정리하면서 편집사업에 전념하였다. ㅡ 나는 밤 늦게까지 원고와 씨름을 하기에 아침늦게까지 잠을 자야 했지만 아침식사가 6시 반으로 제정되여 그때 너무나도 힘 들었다. 나의 방에 드나드는 사람은 단 초등학교를 다니는 6, 7살이 되는 계집애로 이름이  李宝美다. “아저씨 아침진지 드세요” 보미가 나를 부르면 어머니가 “할아버지라고 불어야지 아저씨라면 버릇이 없는 짓이야” 라고 딸애를 가르쳤다. 어느날 보미가 나에게 자기가 그렸다는 그림책을 들고와 자랑을 했다. 구레용으로 지면을 꽉 채운 그림은 구도가 좋았고 잘 그렸다. 내가 참 잘 그렸다니 보미는 국제미술경기에서 우수상을 따냈다며 은질컵까지 보여주었다. ㅡ 대개 열흘간을 지나니 하숙집 아줌마가 “이 방에 손님을 한 분 더 모실려니 될가요?”라고 묻기에 나는 대뜸 된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崔進旭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방한구석에 조립식 옷 걸이를 설치하더니 대뜸 10여벌의 옷을 상품처럼 진열 하였다. 수일이 지나자 그는 나와 허물이 없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로 오기 전에는 어떤 독신녀와 동거를 하다가 갈라 졌다며 자기가 쓰던 물건을 그녀에게 다 주고 와도 아까운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최씨는 부산에 처가 있는데 자기가 늙었다고 곁에 가면 발길로 차내면서 싫어 하니까 새로운 애정을 찾으려고 서울에 왔다며 자기가 지금 어느 과자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는데 월급을 많이 받는다면서 서울서 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부산에 있는 처자들에게 돈을 붙이지 않아도 그들이 아무 문제없이 살아 간다며 아무런 주저도 없이 시원스럽게 말을 했다. 최씨는 기술이 팔방이라며 어선에서 큰 고기를 낚고 찍은 멋진 사진까지 보여주며 자기 자랑을 하였다. ㅡ하숙집 옆방에는 또 장기적으로 하숙하는 郑昌吉이라는 50대 남자가 있었는데 정씨는 나와 그냥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기에 서로간 허물없이 대화하는 사이로 되였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정씨는 자기가 다니는 奉天基督敎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나는 신자가 아니기에 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서울의 世波도 알겸 사회생활도 체험 할 겸 한번 다녀 오는 것도 랑패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교회의 마당에 이르니 일부 신자들이 길 좌우에 줄을 서서 환영하였다. 어떤 신자들은 나의 손을 잡으면서 “무엇을 도와 드릴가요?”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례배당입구도 그 모양이 였다. 례배당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곁에 있는 신자들이 나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책상 안에는 성경책이 있었고 례배당 벽 좌우에서 악사들이 줄지어서 찬송가를 불렀다. 례배가 끝날 무렵 돈 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복무원이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 다녔다. 정씨가 “내가 당신의 몫까지 희사할 테니 념려 마십시요”하면서 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례배가 끝나고 마당으로 나오니 역시 사람들이 길 량 옆에 줄지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날 교회에 다녀온 것 역시 인생을 연구하고 교인을 알고 그네들과 단결할 줄 아는 과당이였다고 생각하였다. ㅡ 근 40여 일간의 노력으로 편집을 끝내니. 어느날 리상래회장이 와서 “그간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유활동 시간입니다. 서울부근에 경치 좋은 곳이 많으니 구경을 떠납시다”고 하였다. 나는 평시에 생각했던 요구를 서슴지 않고(렴치없이) 제기 하였다. “나는 서울 구경보다도 우리 宗祖와 先祖들의 聖地를 參拜하고 싶습니다. 경주에 있는 中始祖金陽의 墓所,, 경상남도 固城에 있는 宗祖墓域, 전북 高敞의 斌吉公墓所를 참배하고 싶습니다. 이는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 리상래회장은 나의 모든 요구를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만족시켜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고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제기 했구나는 생각으로 낯이 뜨거워 난다. ㅡ 2010 년 어느 여름에 내가 조양천 삼성촌에서 텔레비를 보는데 미국에서 진행된 국제급 골프경기에서 李宝美가 일등으로 “우승컵”을 수여 받는 장면을 보았다.   宝美란 이름이 하도 인상이 깊었기에 내가 나이를 따지며 계산해 보니까 확실히 내가 서울하숙집에서 함께 지낸 宝美가 옳았다. “보미만세!” 나는 혼자서 두손들어 보미만세를 부르고 “이 세상이 너를 위해 태여 났구나!”며 혀를 끌끌 찼다. 보미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부럼이 없이 이름값을 하면서 잘 살기를 기원한다.   세번째 멋진“꼴”은 연변대학에서 2004년에 “장백산 몇가지 항암식물 및 그의 약학연구 평가”란 제목으로 내가 쓴 영문론문이 “연변대학학보”에 실려 2등 우수론문으로 평선되였다. 2006년 4월2일에 연변대학 학보편집부에서 성대한 우수론문수상파티를 조직하였다.    내가 후반전에 넣은 “꼴”은2007년 아세아최고학부로 불리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백두산식물세미나”에서 내가 “장백산의 야생식물”을 독강(獨講)등으로 계속하여 이어진다.  
325    현 운동대회에 참가하던 그날 댓글:  조회:4035  추천:0  2020-05-02
올해 내 나이 76살, 지금까지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세가지를 잊을 수 없다. 하나는 11살에 왕청현소학생운동대회 육상 선수로 선발된 것이다. 두번째는 처음 기차를 타 본 일이며 세번째는 지난해 75세 나이에 시급 로인운동대회에서 오성붉은기를 손에 들고 주석대 앞을 지나며 검열을 받은 것이다. 소학생 때 달리기를 잘한 나는 학급 1등은 내몫이였다. 1956년 ‘6.1’절에는 왕청현운동대회 100메터 달리기경기에서 2등을 따내 상품으로 필기장과 연필을 타기도 했다.                                      지난해 로인절 활동에 참가한 필자(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네번째) 당년에 석현진(왕청현 제7구) 대표로 선발된 륙상 선수로 진내 몇개 소학교에서 선발된 선수들과 함께 석현에 모여 집체훈련을 받고 ‘6.1’ 절에 왕청현소학생운동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11살이였다. 처음 기차를 타 보는 기쁨으로 련며칠 밤잠을 설치며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우리 마을(달라자) 바로 앞은 곡수 기차역이기에 우리는 밤낮이 따로 없이 분주히 오가는 기차들을 다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정작 운동선수로 선발되여 기차를 타고 왕청에 간다고 한 다음부터는 지나가는 기차를 볼 때마다 언제면 저 기차에 앉아 볼가는 생각만 했다. 어떻게 기차에 올라가는지, 기차 안엔 전기불이 있는지, 기차에서 대소변을 보려면 어떻게 하는지… 별의별 오만가지 의문들이 다 있었다. 생각 할수록 마음이 급해났다. 그때 기차라는 말만 들어도 걱정스러웠는 데 아마 우리 할아버지께서 하신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60대 중반이였는 데 그때까지 기차를 타 보지 못했다면서 한번은 맹랑하게도 발길이 몇걸음 늦어서 눈앞에서 기차를 놓쳐버렸다 했다. 그때 나보다 한살 아래인 외사촌 남동생이 겨울방학에 왕청에서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 갈 때 할아버지께서 손자를 기차에 태워 보내려고 곡수역까지 데리고 갔다. 마을 앞 도문북강(해란강과 가야하가 곡수에서 합쳐서 도문북강을 이룸)의 얼음강판이 너무나 미끄러워서 조심스레 걷다보니 그만 시간을 지체해서 곡수역 대합실에 금방 들어서자 기차는 고동을 치며 떠나려 했다. 이에 너무나도 다급했던 할아버지는 허둥지둥 대합실을 나서 문앞에서 두손을 마구 흔들며 “여보! 여보! 조금만 기다려 주오, 여기 왕청 갈 얼나(어린애)가 있소!” 하고 높은 소리로 기차를 불렀단다. 하지만 무정한 기차는 들었는둥 말았는둥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떠나더니 점점 더 빨리 달아나더라는 것이였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나의 귀전에서 맴돌며 나의 마음이 한없이 불안했다. 드디여 그날이 왔다. 우리 선수들은 줄을 서서 석현역 플래트홈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기쁨과 설레임과 함께 나의 마음은 행동이 늦으면 기차를 타지 못할가봐 초조함으로 가슴이 풍덩풍덩 뛰였다. 순간 저 멀리서 “뿡!ㅡ” 하는 기적소리가 울리며 달려오던 기차가 어느덧 “칙~푹~” 하면서 눈앞에 와 섰다. 뒤따라 멋진 철도복을 입은 렬차원들이 기차문을 쫙 열더니 손님들이 하나하나씩 층계를 밟고 내리자 우리 일행은 우쭐우쭐 층계를 밟고 기차에 올랐다. 그날 선수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나 같은 촌닭들이 많아서인지 우리 일행은 안으로 밀고 들어갈 념은 안하고 문어구에 콩나물마냥 빼곡히 붙어서서 밀치락닥치락 하면서 다음 역(삼도구)까지 서서 갔다. 그래도 기차를 타고 간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둥둥 떠 있었다. 삼도구역에서 승객들이 줄줄이 내리더니 렬차원은 한무리나 되는 우리들을 떠밀며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나는 뜻밖에도 운 좋게 빈자리가 있어서 자리에 앉아 가게 되였다. 두리번두리번 기차안을 살펴보니 천장에는 전기불이 켜져있고 유리창문으로 바깥세상 구경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인지 누가 말하는지 “다음 역은 신흥역이니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하여주십시오”라는 말까지 들렸고 대소변을 해결할 수 있는 칸까지 있다기에 너무 놀랐다. 기차에서 내린 후 우리는 운동회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농촌에서 태여나서 농촌학교에 다니다나니 성대한 운동대회나 검열식을 본적이 없다. 처음 수천명 학생들이 집체복장 차림으로 나란히 줄을 지어 검열하는 모습을 보니 꿈만 같았다. 맨 앞엔 대대장들이 교기를 들었고 그뒤로 항아리 만큼 큰 대고를 앞에 멘 녀학생들이 둥~둥~ 대고를 두드르며 주석단을 지나가고 그 다음으로는 나팔수와 관악대들이 띠띠따따를 불며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새하얀 치마에 해군복 적삼을 바쳐입은 소고대가 소고를 두드리며 주석단 앞을 지나며 검열을 받았다. 나는 그저 눈이 휘둥글해지며 “야! 야!” 하며 황홀하기만 했다. 한편 검열대오 밖에 서있는 나 자신이 점점 초라해보이고 실망스러웠다. 선수로 뽑혀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까지 깜박 잊었다. 그처럼 멋지고 자랑스럽던 그들이 너무 부럽기만 했다.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해인가 도문시제2소학교 ‘6.1’절 경축대회에서 나의 딸들이 고운옷차림에 소고를 치고 새장구를 치며 경축활동에 참가했을 때 나의 소원이 성취한 것처럼 생각하고 흥이나서 더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남들앞에서 더 많은 자랑을 늘여놨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어제일 같지만 세월은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어 내 나이가 벌써 70대 중반이 되였다. 마음이 늙지 않아 북 치고 장구 치며 선수로서 우쭐거리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되여 로인활동실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으니 믿어지지 않는다. 때마침 지난해 ‘8.15’ 로인절에 도문시 로간부국에서 로인들을 조직하여 운동대회를 열었다. 나는 물찬 제비마냥 새파란 적삼에 흰바지를 받쳐입고 머리엔 새하얀 모자까지 쓰고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씩씩한 모습으로 주석대 앞을 활보하며 검열을 받았다. 멋지고 자랑스러우며 행복했던 그날의 모습을 나는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하련다. / 최정금
32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2) 댓글:  조회:4309  추천:0  2020-05-01
“후날에 봅시다!” 1977년에 을 제정할 때 나는 동천궁(东川芎), 동당귀(东当归), 매발톱나무, 개암나무, 화서 등 중초약식물들의 약효, 세포조직해부, 분말현미경구조 등 부분을 담당하고 감정통과를 하여 해당 부문과 권위학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연변주약검소에서는 나를 약검소 임직원들과 다름이 없이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손형범은 연변주약검소의 요원으로서 ≪중국민족약지(中国民族药志)≫를 편찬할 때 적지 않은 부분의 편집을 담당했었다. 그 때 그는 동천궁, 동당귀의 조직해부도와 분말현미경구조 등 나의 자료들을 그대로 ≪중국민족약지≫에 편집해넣었는데 내가 이 약지편찬에서 큰 공을 세웠다며 ≪중국민족약지≫ 두권을 나한테 선물로 주었다. 그 후부터 나와 손형범은 더욱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1980년 10월 3일, 우리는 함께 중초약탐사로 룡정시 지신향 큰 쓰레산으로 가자고 약속하였다. 큰 쓰레산은 가파로운 벼랑이라는 뜻으로 작명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탄 택시가 지신향 원동골 산길을 따라 큰 쓰레산 기슭에 당도했을때는 오전 10시경이였다. 우리는 택시를 돌려보낸 후 가파로운 벼랑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산꼭대기에 오르니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했지만 무성한 나무숲들이 꽉 들어찬 데서 우리는 길도 없는 산정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도시락으로 저녁을 대충 때운 우리는 풀밭을 담요로, 저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이불로 삼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행히도 내가 신문지 두장을 갖고 왔기에 한장은 깔고 다른 한장으로는 배를 가리웠다. 우리는 추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왕년 같으면 10월 3일이면 서리가 내렸을 수도 있었지만 마침 흐린 날씨 때문이라고 할가, 아니면 하늘이 우리를 측은히 생각했다고 할가 다행히도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더니 동녘하늘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님이 방긋 웃으며 솟아올랐다. 해님은 우리의 몸을 녹여주기라도 하려는듯 따스한 해 빛을 더 밝게 비춰주는 것이였다. 하늘의 덕분으로 우리는 감기에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길가에서 여러가지 약초와 풀, 나무들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지친 줄도 모르고 또다시 식물조사에 나섰다. 지신에 도착하니 그동안 겪었던 모든 어려움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푸짐한 점심상을 마주한 우리는 권커니 작커니 술을 마시면서 고진감래의 즐거움 속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손씨가 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기어코 연길로 가자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나는 “난 오늘의 일을 절대 래일로 미루지 않습니다. 후날에 봅시다!”라고 말하며 손씨와 헤여진 후 곧바로 나의 연구실이 자리한 삼성촌으로 발길을 돌렸다. “후날에 봅시다!”라는 약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23    서로간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고치자. 댓글:  조회:3906  추천:0  2020-04-21
진정한 화합과 소통은 서로간의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고쳐면서 "큰면에서 공동한면을 찾고 작은면은 보류"( 求大同 存小义  )하면  이뤄진다.   당의 17기 6차 전원회의에서는 “백화만발 백가쟁명”을 조화로운 문화를 건설하고 인민을 교육하며 사회를 위해 복무하고 발전을 추진하는 역할로 발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론어』에 군자(君子)는 다른 사람과 화합하되 자기주장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배(小人輩)는 리익에 따라 뭉치되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을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和)와 동(同)은 음식에 비춰 한 말로 다양한 재료와 물과 불이 어우러져 내는 맛을 ‘화’라고 하면 비슷한 재료만으로 만들어낸 맛 없는 국물을 ‘동’ 이라는 것으로 필자는 리해한다.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전설적인 성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의 이야기다. ‘ 하우는 백성이 물에 빠지면 자신이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물에 빠지게 했다고, 이는 그가 물에 빠진 백성의 립장에서 백성들의 분노까지  헤아린 것이며 후직은 굶주리는 백성이 생기면 자신이 일을 잘못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했다는 반성으로 백성의 굶주림을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한 추진력은 사회구성원들의 유기적인 협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러한 협력을 이끌어내는 건강한 피돌림이란 바로 소통(疏通)이다. 한국 서울영동농장 제 6 농장 오경배대표의 말이다.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은 부동한 개념으로 서로간 다름은 인정하면 되고 틀림은 고치면 됩니다.” “나와 김용복회장(서울영동농장)은 성격부터 음식 식성까지 완전히 다릅니다. 김회장은  대단한 애주가로 아낌없이 나눠주는 반면에 나는 술 한잔도 못하는 짠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23년간이나 서로 손을 잡고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둘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잘 맞는것 같습니다.” .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잘 맞는다”는 “동극(同極)은 서로 배척하고 타극(他極)은 서로 흡인”하는 음양학설에 맞는 말이다. 소금은 염소와 나트륨의 화합물로 생명체가 소금을 못 먹으면 죽지만 그렇다고 염소와 나트륨을 따로 각각 먹어도 중독되여 죽는다.  물은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로 산소는 불을 잘 붙게 하는 물질이고 수소는 불에 잘 타는 물질이지만 이 두 물질을 화합하면 불을 끄는 물이 된다.  자연계는 이렇게 괴상한 화확적현상과 놀라운 물리적현상으로 조화를 이룬다. 인간관계도 사람들 서로의 맞지 않는 의견들이 소통을 통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하고 옳바른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그런데 지난 “계급투쟁” “정치돌출” 때엔 사람들이 사회생존을 위해 틀에 짠 말과 남의 눈치에 따라 입발린 말을 해야 했고 정치와 권력자의 구미에 따라 “만장일치”와 “100%통과”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묵묵부답”까지 “다른 의견이 없으니 동의하는 것으로 통과한다”며 “만장일치”, 단결, 승리의 대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나중을 보면 “만장일치”와 “100% 통과(동의)”된 결의가 시달이 흐지부지했고 그 날 “공동히 책임진다“던 결의가 나중에 누구도 책임을 안 지는 “공동한 무책임”으로 흐지부지하게 되였다.  고대 유태사회의 “산헤드린”(판관들의 모임으로 최고 법원역할을 한 이스라엘의 재판기구)는 투표결과로 “만장일치”는 무효로 다음 날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가 다시 투표를 했다고 한다. 이네들은 언녕부터 신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일에 문제가 없이는 100%동의나 만장일치가 될수 없다는것으로 “부동한 의견이 없는 사회를 건강치 못한 사회”라고 했다.  공자는 “군자는 화합하되 자기 주장이 없이 휩쓸리지 않고 소인배는 자기 리익에 따라 뭉치되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며 군자의 화(和)는 각자의 견해, 주장을 하나로 잘 조화, 융합하는 것이고 소인배의 동(同)은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타인들과 같은 척 꾸미며 맹목적으로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취급했다.   화합은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대화로 “대동소이”(大同小異)로 화합을 이룬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이 어울려 함께 사는 인간사회에서 서로간 소통이 안되고 화합의 묘미를 깨닫지 못하면 그 사회의 발전이 요원하다.  모두어 말하면 서로간의 다름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틀림은 고치면서 “대동소이”와 화합이 이뤄지게 된다. 오기활    
32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1) 댓글:  조회:3846  추천:0  2020-04-13
                     11. 송림 속에서 무명렬사를 만나다 나는 만년에 식물채집을 하면서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고행을 겪었다. 2006년 9월 10일, 나는 식물조사의 지점을 또 지신으로 정하였다. 그 때 나의 나이는 81세였다. 룡정에서 지신 성남까지는 그래도 택시를 불러서 멋지게 갔다. 다음부터는 도보였다. 식물조사라는 이 일은 자기의 ‘11호차’를 리용하지 않으면 안될때가 많았다. 떠날 때는 다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일단 현지에 도착하면 보고픈 초목들로 하여 흥에 겨웠고 종일 다녀도 피로한 감을 느끼지 못했다. 지신의 산은 온통 송림으로 덮였는데 이 때면 송이채집군들이 산을 메주밟듯 돌아다녀 수림 속 풀밭에 남은 그들의 발자국으로 하여 나는 외롭다는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한창 식물채집에 도취되여 여념이 없는데 뜻밖에도 송림 속에서 ‘동북해방무명렬사비’를 발견하게 되였다. 주변에 잔디풀이 깔리고 우거진 나무숲 속에 가리워져있었기에 발견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순간 마음이 퍼그나 아프고 괴로웠으며 그 정신적 위압에 눌려 불시에 내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따라서 혁명사업에 보귀한 생명을 바치고 고이 잠든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나의 고생이 얼마나 보잘것없음을 느끼게 되였다. 나는 렬사비 앞에서 렬사들에게 묵묵히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다. 연변은로혁명근거지로서 수많은 무명렬사들을 낳은 곳이기도 하다. 갑자기 젊었을 때 불렀던 가 떠올랐다. 가슴 우에 손을 얹고 쓰러진다 혁명군 가슴에서 흐르는 피 푸른 풀에 질벅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 눈굽이 젖어들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신 죽는 법이 있다면 늦었지만 렬사들 대신 내가 죽고 렬사들이 나 대신 살아나 오늘의 행복을 누려보았으면…’ 혁명렬사들의 바람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남부럽잖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였을가? 이날 나의 머리 속에서는 혁명렬사비가 사라질 줄 몰랐고 “우리 나라 오성붉은기에 조선민족의 붉은 피가 슴배여있다.”고 한 모택동 주석의 말씀이 떠날 줄 몰랐다. 큰 쓰레산에 이르니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나는 준비한 비닐박막으로 큰 바위에 의지해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의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지금은 맹수들도 거의 없게 되였고 또 이 나이를 먹으니 귀신도 두렵지 않았다. 단지 비바람의 습격만 두려울 뿐이였다. 9월의 밤인데도 다행히 밤날씨가 좋았기에 혼자몸이였지만 심산 속에서 안전하게 야영을 할 수 있었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자 나는 또 수림 속을 향해 걸어갔다. 남쪽 벼랑에 이르니 2~3m 높이의 기둥모양으로 된 석림(石林)이 한눈에 안겨왔다. 순간 천불지산(千佛指山)이 머리에 떠올랐다. 1985년 ≪룡정현지명지≫에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왔으므로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였다. 천불지산 정상에 오르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길림신문≫에서 본 룡정시 오정묵중의의 천불지산 관련 이야기이다. 천불지산은 룡정시 백금향, 삼합진, 지신진을 망라하여 총면적이 7만여헥타르에 달하는데 야생산삼과 송이버섯 등 진귀한 식물들이 많이 난다. 내가 부처님이 하사했다고 ‘천불지산’이라 불렸다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그저 항간에서 구전되는 속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명된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90년대 초반의 어느 날, 등산길에서 약재 캐는 로인을 만나 이 말 저 말을 나누던 끝에 산이름을 물었더니 천불지산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로인의 이야기를 허망한 전설로 마이동풍으로 흘러보냈는데 후날에 자료들을 찾아보니 그 전설 속의 인물이 실존인물(룡성스님)로서 그가 유명한 반일지사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천불지산에 비춰 “절승경개가 여기에 있으니…”란 시구가 떠올랐다. 나는 천불지산의 경관을 연길 모아산에 옮겨다 심는다면 얼마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아쉽도다! 지금은 관광객이 나 혼자뿐이니 천불지산이 독수공방 신세로구나!’ 이런 아쉬운 심정으로 천불지산을 등지고 한참을 걸으니 발목까지 빠지는 습지가 나타났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순군락(纯群落)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지신에서 삼합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에 이르니 지신림장 일군들이 한창 북적이며 멋스러운 집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오십니까?” “지신에서 오긴 했는데…” “무얼 하려고 오셨습니까?” “식물채집이지요.” “할아버지, 이곳은 식물채집이 금지된 구역이니 다시는 오지 마세요. 한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오리다. 그런데 여기서 대명동(지금의 부유촌)까지 가려면 몇리를 더 걸어야 하오?” “70리를 더 가셔야 합니다.” 70리라는 말에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다른 한 젊은이가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사실은 대명동까지 70리가 안됩니다. 대략 17리 좌우 되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십시오.” 참 사람냄새가 나는 젊은이였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니 정말 고맙구려…” 나는 젊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동남쪽으로 열린 골짜기를 향해 걸어갔다. 사실 내가 건설장의 일군들에게 “지신림장에서 한동안 일을 본 적이 있는 김상래를 아시오? 내가 바로 상래 아버지요…”라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그네들이 이 주책없는 늙은이에게 잠자리도 마련해주고 때시걱도 반반히 차려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숲속에서 나 홀로 야영을 하는 것이 더 편안할 것 같아 갈길을 재촉했다. 나는 남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을 참 싫어한다. 지금도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심지어 로친까지도 딸집에 보내고 혼자몸으로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계속 길을 걷다가 길가에서 엄청나게 큰 독활(独活)을 만나니 여기는 확실히 심산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산곡간을 걸으면서 곡간을 건너갔다가는 다시 건너오는 것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짐작으로 25리는 잘되게 걸었는데도 17리 좌우 된다던 대명동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럴 즈음에 변덕스럽게도 “꽈르릉…” 하고 귀청을 때리는 듯한 우뢰소리가 울려 이 늙은이를 경악케 했다. 게다가 급하게 내물을 건느는 바람에 어지럼증으로 돌에 걸려 넘어져 온몸이 물참봉이 되였다. 더는 갈 수 없게 되였다. 사위가 어둑컴컴하여 좀처럼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낙비까지 억수로 퍼붓기 시작하여 나는 물가에서 꽤나 굵직한 버드나무를 꺾어 두 버드나무 사이에 걸쳐놓고 거기에 비닐박막으로 주머니모양의 하우스를 만든 후 그 속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하지만 말이 하우스지 앉지도 서지도 못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순간 숲속에서 만났던 혁명렬사들이 떠오르면서 이까짓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보낸 이번 2박3일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야영이였다. 날이 밝자 바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산골을 따라 내려가니 하마양식장의 사나운 개가 길을 막아나섰다. 이 때 집주인이 나와서 돌아가는 길문을 열어주었다. 순간 넓은 시야에 삼합청천저수지가 안겨왔다. 다행히도 대명동(부유촌)에서 삼합진으로 가는 빈 택시를 만나 잡아타고 룡정에 있는 집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만년에 호기심에 의해 떠난 2박3일간의 식물조사에서 나는 찬비를 맞으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지만 하느님의 덕분이였던지 감기에도 안 걸리고 성공적으로 조사를 끝마칠 수 있어 나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였다.
321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다 댓글:  조회:4023  추천:0  2020-04-09
B녀는 전업주부로 안정적인 가정과 남편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친한 이웃이 찾아와서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녀자가 있다는 소문을 알리니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싶지 않아, 때로는 너무 알아서 상처를 입기도 하니까. 나는 내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해”라며 무엇을 더 알려고 하지 않기에 친한 이웃이 더는 아무 말도 못했다.    “모르는 게 약이다”, “무지가 축복이다” 는 속담이 있듯이 무엇을 알게 되면 그에 따른 고민과 걱정으로 괜한 병을 만들수 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듯 말이다.    로신은 평생 많은 사람들의 질투와 지탄을 받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립장을 해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바깥 세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립장을 고수한 채 계속하여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붓끝으로 령혼을 구원했다. 그에게는 붓끝이 무기였고 수술칼이였다.  로신은 붓끝의 힘을 믿었고 침묵하는 것이 해명하는 것보다 낫다며 애써 해명할 필요가 없는 리치를 언녕 알았던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랭대를 받거나 편견에 시달리면 억울한 나머지 어딘가에 한바탕 발산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된다. 이때 평가가 좋건 나쁘건 간에 그대로 신경을 쓰면 안된다. 화를 내는 것도 해명을 하는 것도 모두 소용이 없다.    “때론 활시위를 팽팽하게 하고 때론 느슨하게 하는 문무의 도를 하라”는 말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웃으며 비판을 듣고 “타인들이 지적한 결점이나 잘못에 문제가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에 힘쓰는 원칙”을 지킨다. 요컨대 칭찬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진심인지 거짓인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자처하거나 거드름을 피우지 앟는다.   로신은 바깥세계의 평가를 듣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태도로 대했다. 즉 바깥 세계의 평가를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자신의 길만을 묵묵히 걸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수그려 유자의 소가 되련다..."   이는  로신이 자신에 대한 모사이자 그의 강경한 의지였다..   때론 많이 생각하는 것이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많이 듣는 것이 안 들은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귀를 슬쩍 틀어막고 듣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다”고 한다.   귀를 슬쩍 막는 것은 만사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건 나는 내가 갈 길을 간다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다. 좋은 의견과 건의는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첨이나 무시의 말은 마이동풍으로 듣고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바깥 세계의 평가가 어떻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시종일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할뿐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앟다.   오기활
32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0) 댓글:  조회:3999  추천:2  2020-04-01
10. 비 내리는 야밤에 도적으로 몰려 룡정현 삼합에서 지신으로 이어지는 오랑캐령은 나에게 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오랑캐령은 백여년전 할아버지가 아홉 식솔을 거느리고 조선 명천에서 연변으로 이주해올 때 피눈물을 흘리며 넘던 산마루로서 그 때 우리는 첫 인연을 맺게 되였다. 오랑캐령에는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산봉우리가 많고 락락장송—적송(赤松)이 우거지고 철따라 피는 철꽃들이 많아 대자연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룡정에서 가까운 이 명산은 나에게 식물학을 배우게끔 꿈을 키워준 ‘도사’이고 ‘은인’이며 나를 식물학자로 배육한 종자이며 옥토이다. 1976년 6월 3일, 채전의 도마도가 불그스레 익기 시작한 여름철에 나는 삼합행 뻐스를 타고 가다가 중도인 오랑캐령도로관리소 부근에서 내렸다. 그 때는 사진기도 없어 빈손에 두 눈만 챙기고 산야를 두루 누비며 식물고찰을 하던 시기였다. 때는 오전 아홉시 반이였다. 산골짜기에 들어서니 천남성이요, 등칡이요, 노랑송이풀이요 하는 보기 드문 식물들이 눈에 띄였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얼결에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한시가 지났다. 이제 30분후이면 룡정으로 돌아가는 막뻐스가 여기를 지나가는 판이다. 그런데도 나는 식물채집에 열중하다보니 룡정으로 가는 뻐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암, 될 대로 되라지. 오늘 밤으로 룡정에 도착하면 되니까 마음 놓고 식물을 관찰하고 표본을 채집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뻐스를 놓친 나는 오후 2시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나무숲을 헤치며 식물채집을 계속하였다. 날이 어슬어슬 어두워져서야 나는 천불지산으로 가는 남북방향의 자동차길을 걸어 성남촌을 지나 지신진으로 향하였다. 뒤잔등에 비닐봉지로 정히 싸서 넣은 묵직한 식물표본배낭을 메고 걸어가는데 반디불들이 사방에서 켜졌다 꺼졌다 하며 숨박곡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나는 처음 걸어보았다. 언제 또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걸어볼 수 있겠는가! 순간 힘듦도 지침도 배고픔도 어느새 싹 가셔지는 것만 같았다. 지신을 지나니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동서로 이어지는 승지촌의 외골목이 지친 나에게는 끝없이 멀고 멀어보였다. ‘승지촌에 들려 룡정현당교에서 학습중인 상욱(둘째아들)이를 찾아갈가…지금 쯤은 한창 꿈속에 빠져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인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야밤중에 옷이 다 젖고 또 지친 몸을 끌며 아들을 찾아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더라도 속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순간 무겁던 발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고 무겁던 등짐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재바위골 어구도 지나고 신화촌도 룡정 서쪽 어구에 자리한 양계장도 지났다. 룡정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쉼을 하려고 길옆 채소밭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후 채소밭을 지키던 한족청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더니 다짜고짜로 한밤중에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느냐며 등뒤에 멘 짐을 수색하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나의 짐에는 귀중한 것이 들어있으니 아무에게나 보여줄수 없다면서 생고집을 부렸다.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은 내가 도마도 밭머리에 앉아있으니 등에 진 것이 도마도라고 여겼던 것이다. 시원히 보여주었으면 쉽게 끝날 것을 내가 막무가내로 그들을 뿌리치고 길을 떠남으로써 일이 커졌다. 다행히 그들이 거의 합성리까지 따라오다가 지쳤는지 포기하고 돌아갔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번했다. 내가 새벽 2시경에야 집에 도착하니 집식구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의 처사가 너무 경솔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식물채집을 하면서 집식구들에게 많은 심려를 끼쳤다. 나는 이 글로 집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집식구들이 나의 사업과 흥취에 대해 리해하고 지지해준 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319    20 세기 말에 “챵비” 당한 원고 유감(遗感) 댓글:  조회:4071  추천:0  2020-03-25
기자들의 직업용어로 누가 쓴 원고가 발표 못 되면 그 원고가 “챵비”(抢毙) 당했다고 한다. 즉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말에 필자는 “연변일보” 기자로 원고를 “챵비” 당한 불미한 력사가 있었다.  비록  십 수년의 기자생애에서 단 한번 “챵비”를 당했건만 너무나도 “억울”해 지금까지도 그 원고를 잊을 수 없어 “챵비”를 당한 원고 유감을 이 글로 올린다.   이하는 “챵비”를 당한 원고와 “챵비”된 원인이다.   도문시 시장에 왜 돼지고기가 없는가?         지난 7월 11일부터 도문시 시내 시장매대에서 돼지고기를 볼 수 없다. 원인은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집체파시( 集体罢市)를 한데서.  이에 기자는  16일부터 몇 일간 여러 부문과 해당책임자들을 찾아 다니며 이번 사건을 조사하였다.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의 불만   1, 돼지고기경영업주들에 따르면 지금 잡은 돼지 한 마리당에 업주들이 내야하는 세금과 비용이 공상관리비(시장관리비) 20원(향상시장은 25원), 도살세 10원, 검역비 16원(실제검역비는 11원, 농업발전기금 6원), 도살비 15원, 돼지교역비 15원이다.  이밖에 위생비 5원, 치안비 4ㅡ5원, 국가세금 360원, 지방세금 40원, 매대비 90ㅡ 130원으로 매달 지출비용이 3000원이나 된다.   2, 관리가 혼란하다 2년래 세금과 비용을 낸후 령수증과 기타 표증을 발급받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물가조절기금으로 매년 20원을 내던 것을 올해는 매월 20원씩 냈다. 그리고 무슨 강습비라며 20원씩 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강습도 받지 못했다. 특히 해당부문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검역을 하거나 수금을 하기에 믿음성이 없고 표증이 없기에 돈을 내고도 무슨 돈을 냈는지 모른다.   3,  불합리하다. 올해 7월부터 시공상행정관리국에서 산돼지(生猪)교역비로 마리당 15원씩 받는데 이 교역비가 이번 파시의 주요한 불씨로 되였다.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의 말이다.   ㅡ 시장관리비라며 잡은 돼지 마리당 20원 (혹은 25원)을 받아가는데 또  “돼지교역비”란 무었인가? 이는 시장관리비를 2중으로 내는 것이 아닌가?  “돼지교역비”는 산돼지를 파는 사양호와 돼지를 사서 잡아파는 도살호가 공동분담 해야 한다. 알아본데 따르면 다른 현과 시에는 “돼지교역비”가 없다.  그런데 도문시공상행정관리국에서는 “길림성 도시농촌무역시장관리조례” 제 23조에 따라 “돼지는 농부산물에 속하므로 교역액의 2%로 15원식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접수할 수 없다.       관계부문의 답복과 해석   1, 시축산국:   우리는 해당 규정에 따라 도살 전과 후의 검역비로 마리당 11원을 받고 시 재정국의 위탁을 받고 농업발전기금을 마리당 6원씩 받았다.  지난 6월 말까지 대리인을 내세워 검역과 수금을 하다가 표증관리가 혼란하고 검역의 질을 보증하기 어려워 7월부터 우리가 직접 검역하고 수금을 한다.   2, 시 물가국:   우리는 1995년 3월에 도살비를 돼지 마리당  15원으로 정했다. 그리고 시정부 4호문건에 따라 공상관리비의 20% 표준으로 부식물가격조절기금을 매월 마리당 5원씩 받았다. 지난해까지 시공상국에 위탁하여 수금을 했는데 올해는 아직 수금을 안했다.  공상관리비수금표준은 시물가국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치안비로 따로 비준한 적이 없다.   3, 시지방세무국:   해당 규정에 따라 돼지도살세로 돼지 마리당 10원씩 받는다. 우리가 타부분에 위탁하여 수금하다보니 수금한 표중이 없는 문제를 몰랐다.  부가가치세(增值税)로 국가세무국에서 정한 월 400원 중에서 우리가 10%로 40원을 받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월소득이 850원이상이면 5% 이상의 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징수정책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4, 시공상행정관리국:   우리는 그들이 “파시” 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원인은 그들이 아직까지 자기들의 단체조직인 개체근로자협회만 찾았을 뿐 시정부나 우리 국을 직접 찾지 않았고 자기들도 “휴식”을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일이 발생한 주요원인으로 “돼지교역비”를 받는 문제라고 인정한다. 일전에 우리는 시당위, 시정부, 시인대 책임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다음의 견해를 조치를 통일하였다. ㄱ, 시공상국에서 정상적인 도경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그들에게 정면교육과 정면 인도를 진행해야 한다. ㄴ, 수금근거가 충분해야 한다. 공상국에서는 20일까지를 “선전교육일’로 정하고 그사이에 “돼지교역비”를 잠시 받지 않고 7월 8일부터 돼지고기경영업주들 속에 내려가 선전교양을 하기로 했는데 11일부터 이 일이 발생하였다. 우리는 1993년 7월에 통과한 “길림성 도시농촌무역시장관리조례” 제 23조에 밝힌 “무릇 무역시장에서 상품을 경영하는 단위와 개인은 모두 공상행정관리부문에 시장관리비를 바쳐야 한다. 농부산물, 경공업품과 기타상품의 수금비률은 교역액의 2%다”는 규정에 따라 돼지는 농부산물에 속하기에  교역액을 추산하여 마리당15원(2%)씩 정했다.   우리가 지금 수금하는 시장관리비 20원(25원)은 돼지고기교역비고 15원은 산돼지 교역비다 우리는 관리인원이 부족한데서 돼지장사군들을 따라 다니지 못하고 또 돼지임자를 찾을 수 없는 정황에서 돼지를 사는 도살호에서 “돼지교역비”를 받기로 하였다.   우리는 1993년 7월에 통과된 “조례”중 집행하지 못했던 규정을 지금 보충집행하는 것이다.   5, 시인대:   일전에 그들의 집체상소를 접대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대는 이런 문제를 직접처리하거나 답복해주는 기관이 아님을 해석한후 그들의 의견을 듣고 그 정황을 해당부문과 책임자들에게 반영하고 조사사업을 진행하였고 다음의 인식을 통일하였다.   1, 개체공상호에 대한 관리를 가강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적극 부추켜야 한다. 지금은 세금보다 관리비가 높고 수금을 중시하고 관리를 홀시하는 현상이 확실히 존재한다.   2, 돼지를 팔고 사는 무형시장(류동시장)에서 세금과 비용을 납부함에서 생산자가 주체로 되여야 할 것이다.  “돼지교역비”를 구경 누가, 어떻게, 어떤 표준으로 내야 하는가는 문제를 심입하여 연구하고 적절한 처리와 조치가 필요하다.  공상행정관리부문에서는 정면으로 도살업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능히 리해하고 접수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위탁문건이 없고 공증을 거친 위탁서가 없이 위탁인을 내세워 수금하는 것은 비법적이다. 위탁서가 없고 확실한 표증이 없이 수금을 할 때 도살호와 돼지고기경영업주들에게 수금을 거부할 귄리가 있다.   상술한 조사과정에서 기자는 해당집법부문에서 돼기고기경영업주(개체공상호)들에 대한 감독, 관리하는 사업에서 부당한 수금, 어수선한 표증관리, 그리고 경영업주들이 법으로 자기들의 합법적궐리를 보호 받는  법제의식 에 문제가 존재함을 발견하였다. 오죽하면 시공상행정관리국 법제반공실의 책임자가 기자에게 “지금 개체공상호들이 납부하는 부당한 금액이 호당 년평균액이 500원이 될것이다” 며 “나는 정년퇴직후 개체공상호의 법률고문이 되여 개체공상호들의 합법적인 권리와 리익을 보호하겠다”고 하겠는가.  기자는 본 안건의 해결관건은 개체공상업주와 해당관리감독부문에서  “길림성 도시농촌 무격시장관리조례” 제 23조를 어떻게 정확히 리해하고 착실하게 집행하는 가에 달렸다고 본다.  각급 해당부문에서는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제기한 많은 물음과 제의에 가급적으로 확실한 답복을 주어 그들의 “조례”집행 의무와 자각성을 제고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조치라고 본다.   본사기자 오기활     오늘에 부언:  필자가 민생문제해결로 당년에 며칠간이나 발품을 팔며 애서 쓴 이 원고가 림장춘부주필의 직접 편집하에 “연변일보” 1면 5단행으로 발고하기로 했는데 [姜:反面文章正面做,意在正面引导。学好,用好意“条例]란 회시(批示)에 따라 “챵비”되였다니 姜이 무슨 근거로 이 원고가 “반면문장”인지 리해할수가 없었다.   혹시 그때 姜의 생각으로  이 원고가 발표되면 돼지고기경영업주들이 더 많은 “알권리”를 찾고저 신나게 해당부문에 찾아다니며  “사단을 피울가봐” 두려워서?        
318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9) 댓글:  조회:3987  추천:0  2020-03-17
                                    9. 버섯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토배기 화실(画室) 버섯이 제일 많이 돋는 시기는 여름방학 때이다. 이에 비춰 나는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버섯그림을 그리기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화실이 없었다. 생각 끝에 룡정 시교에 자리한 광신 5대의 초가 헛간을 화실로 꾸미기로 하였다. 이 헛간은 몇년전에 자식들을 동원하여 흙벽돌로 지은 창고로서 부자간의 합작품이다. 나는 비를 맞으면 안될 짐들을 한구석에 쌓아놓고 공간에 탁자를 놓았더니 화실로는 꽤 훌륭했다. 나는 도화지에 버섯을 스케치한 후 수채화염료로 색칠을 하였더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번이나 그리고는 버리고 또 다시 그리고는 버렸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그리기지만 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가 봐.’ 때로는 이런 원망들이 불쑥 튀여나왔지만 절대 포기할 줄을 모르는 나는 버렸던 그림들을 다시 주어서는 수정하고 색칠을 더했더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수정을 거듭한 결과 그림은 많은 진보를 가져왔다. 적색법(积色法)—이것이 바로 비결이였다. 나는 시작은 연하고 희미하게, 색도(色度)는 묽고 안개처럼 보일락말락하게 한 다음 점점 더 진하게 덧그리는 것이 바로 버섯 회화기법의 핵심이고 기본이며 비법임을 끝내 밝혀냈다. 이는 모두 락심하고 자포자기하던 데로부터 공자가 말했던 중용의 마음가짐, 심평기화(心平气和)의 마음가짐으로 한보, 한보 발전하면서 이뤄낸 성과였다. 따라서 나는 그림에 신심을 가질 수 있었고 제법 그럴듯한 명작품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지루한 시간에 끝없이 이어진 노력으로 한장, 한장의 버섯그림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에 따른 명성까지 얻게 되여 나중에는 지방 신문, 잡지는 물론이고 국가급인 ≪민족화보(民族画报)≫에까지 나의 버섯그림 명작품들이 발표되였다. “당신의 연구성과는 대단합니다!” 1984년 8월 10일,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내몽골 훅호트시에서 ‘동북3성1구식물학학술보고대회(东北3省1区植物学学术报告大会)’가 열렸다. 이 대회는 중국 동북지구의 저명한 식물학자들이 운집한 대회였다. 이번 대회에는 흑룡강성에서 온 세명의 조선족대표들이 있었는데 우리 조선족들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연변의학원의 류영진(柳永镇) 교수와 동행한 데서 마음이 든든했다. 그 때 나는 나이가 57세였고 길림성식물학회 리사였다. 나는 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하였다. 나는 보고에서 송이버섯의 생태에 관하여 삼합진의 반생식물(伴生植物)을 보다 상세히 소개하였고 나의 송이버섯그림을 비롯한 다섯종의 버섯그림도 회람(回览)케 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자 대회의 집행자였던 주이량(周以良) 교수[원 동북림학원 (东北林学院)의 부원장, 동북 식물분류의 최고권위]가 나를 찾아와 “당신의 연구성과는 대단합니다.”라고 하며 나에게 과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이량 교수는 버섯연구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분으로서 나의 버섯연구와 나의 버섯그림을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주이량 교수는 버섯연구에 조예가 깊다보니 나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였고 나의 버섯그림 역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였다. “무엇이든 알려고 애를 써야 숨어있는 비밀을 보아낼 수 있고 소리 없는 곳에서도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학교시절에 어문을 가르쳤던 최영수(崔营洙)선생님이 늘 하시던 이 말씀이 천만번 지당함을 다시한번 감수했다. “아주 목표 있구려…” 나는 동북사범대학 리여광(李茹光) 교수가 길림성을 놓고 말하면 버섯연구에서 가장 권위적인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우리 연변농학원의 리원겸, 함홍석 등 로교수님들과 같이 학술분야에서 활약했으니깐. 나는 이도백하에서 둬번 리여광 교수님을 뵌 적이 있는지라 어느 한번 출장길에 동북사범대학 리여광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표본서랍에 눈이 간 나는 교수님에게 물었다. “제가 교수님의 표본서랍을 열어봐도 괜찮을가요?” “그 표본들은 거의다 ‘떡달’버섯종류이니 부서질 념려가 없소. 그러니 마음대로 꺼내보아도 되오. 근래에는 이런 표본들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오히려 내 쪽에서 고맙구려…” 리교수님은 한동네의 ‘아바이’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는데 나는 이렇게 좋은 분을 늦게 찾아뵌 것이 후회되였다. 나는 호기심이 가는 대로 버섯표본을 꺼내들고 보았다. 과거에 내가 표본감정을 했던 그 버섯과 똑같은 것이였다. “하, 이 사람아! 자네가 서랍에서 꺼낸 버섯표본을 보니 아주 목표 있구려.” “자네도 나처럼 버섯을 연구해보았는가?” “연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저 흥취에 끌려서 야외로 다니면서 버섯도 채집하고 그림도 더러 그려보았습니다.” 리교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 나는 좀더 일찍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련만. 나는 이미 버섯연구에서 손을 떼고 만년을 보내고 있지만 그 때 리교수님을 늦게 찾아간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317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8) 댓글:  조회:4082  추천:0  2020-03-11
8. 식물이야기 창해로 흘러드는 벽계수마냥 흘러간 세월은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90대 늙은이가 지난 동년시절의 일들을 겨우겨우 재생시킴은 염라대왕의 마수에서 단 한쪼각의 동년시절의 추억이라도 빼앗아내기 위함이라 하겠다. 필자는 요행으로 되찾은 기억쪼각들 속에서 몇가지 식물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 계몽선생은 10대 소년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게 되면 그 속에는 꼭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하였다. 공자님의 말 대로라면 나의 계몽선생은 나의 어린 시절의 딱친구였던 박경호를 꼽을 수 있다. 1935년의 화창한 봄날, 연길현 태양구 횡도자의 서쪽 구수하강변의 버들방천에서 나와 나의 딱친구들인 박재호(朴在浩), 박경호(朴景浩, 12살, 재호의 형), 한판돌(韩判乭), 손창익(孙昌翼, 10살) 등이 모여 여러가지 놀이를 하였다. 그 날 우리가 물고기잡이며 숨박곡질로 한창 재미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박경호가 “누가 더 많은 종류의 풀을 뜯어오는가를 내기해보자.” 하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호응해나섰다. 박경호가 버들피리를 불며 시작을 알리자 우리는 너도나도 풀뜯기에 나섰다. 한식경이 지나 박경호가 다시 피리를 불자 우리는 모두 강변 백사장에 모였다. 먼저 박경호가 자기가 뜯은 풀들을 한가지씩 내놓으면서 그 종류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종류가 반복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보니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30종의 풀을 채집하였는데 대체로 민들레, 돌피, 강아지풀, 시금치, 질경이, 마디풀, 소리쟁이, 할미꽃, 씀바귀, 조뱅이, 메꽃, 큰별꽃, 둥굴레, 너삼(쓴너삼), 짚신나물… 등이였다. 그런데 내가 양지꽃을 내놓으니 누구도 그 이름을 몰랐다. 내가 ‘봉기(또는 봉기풀)’라고 알려주니 모두들 “넌 이 풀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며 신기하듯 나를 쳐다봤다. 이리하여 나는 둘째할머니한테서 들은 ‘봉기풀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어느 마을에 어른들이 말하는데 버릇없이 말참견을 하기 좋아하는 계집애가 있었다. 어느 날 그 계집애의 엄마는 동네 아낙네들이 놀러 오기로 약속했는지라 말참견을 하지 못하도록 딸애를 독 안에 숨겨놓았다. 얼마후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다가 한 아낙네가 “봄에 무슨 꽃이 제일 먼저 피는지 아는가?” 하고 물었다. 그 때 독 안에서 “봉기, 봉기…” 하는 계집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후부터 어른들이 말하는데 버릇없이 말참견을 하는 사람을 “봉기…” 하며 책망하였다고 한다. 박경호는 어린 나이에 식물을 종류로 나누어 채집하는 유희를 만들고 체험하게 한 신동이였다. 하여 나는 식물학을 전공하면서 나에게 다양한 식물의 종류를 분류하는 감성적 인식의 대문을 열어준 계몽선생을 딱친구인 박경호라고 말하고 싶다. 앵초(樱草) 병풍바위를 붉게 태우던 진달래꽃도 시들어가던 1934년 5월 중순의 어느 날이다. 나는 송아지친구인 한판돌(14살)과 함께 횡도자 남쪽 부근에 자리한 손창익네 집을 찾아갔다. 그 날도 갸름한 몸매를 자랑하는 창익이가 마중을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창익이네 마당에는 휘늘어진 수양버들이 서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진분홍꽃이 활짝 피여있었다. “을록(나의 애명)아, 이게 무슨 꽃이지?” “앵초꽃이란다.” “난 모르는데 너는 어떻게 알았니?” “우리 둘째할머니가 알려주셨어. 우리 둘째할머니는 풀이름을 많이 알어. 할머니가 나물 캐러 다닐 때마다 난 따라다녔거든.’ “이 꽃은 작년 봄에 내가 서쪽 강변 습지에서 떠다가 여기에 옮긴 건데 이렇게 곱게 피였어…” “야, 참 대단하구나!” “나도 인젠 이 꽃의 이름을 알게 되였구나. 근데 말이야, 이 꽃잎에서 물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는지 네가 아니?” “난 몰라.” “이 꽃잎의 중간에 도드라진 줄이 있단다. 여기를 찢으면 이렇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이지?” “응, 보이는구나! 이 잎줄기에 물이 나오는 구멍이 있구나!” 그 후 나는 중학교에서 식물학을 배울 때 엽맥의 류관(流管) 속에 물과 영양물질을 운반하는 통로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세 사람이 길을 가게 되면 그 속에는 꼭 나의 스승이 있다.”는 공자의 말을 손창익을 통해 또 한번 터득하게 되였다. 손창익은 나의 식물해부학의 계몽선생이였다. 지금 횡도촌에서는 앵초(樱草)가 거의 볼 수 없는 절종식물로 되였다. 바람에 구름이 날리듯 손창익도 어느새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굳이 손창익네 집마당이 아니여도 그의 산소에 그를 기리는 앵초가 한포기만이라도 자랐으면 좋으련만… 나는 오늘도 고 손창익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큰송이풀 명월구 서쪽켠에 자리잡은 남구촌은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남구촌에서 서쪽방향의 산발을 타고 가느라면 엄청난 산령이 남북으로 가로누워있는데 이 산령과 고개가 바로 나의 식물학지식의 꿈을 키워주고 내가 백번을 물어도 백번을 내심히 가르쳐주던 ‘대자연의 도사’이며 아무 때라도 나를 한품에 안아줄 배움의 요람이였다. 이렇듯 나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산줄기의 이름이 바로 하발령이다. ‘하발령’이란 어원은 바로 만주어 ‘하르바’(견갑골)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 하발령은 내가 전업지식이 막히거나 심심할 때 동네돌이를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다니던 곳이다. 2015년 8월 20일, 90세 고령이였던 나는 연길 남역에서 신분증을 보이면서 하발령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매표원은 하발령에서 기차가 멈추지 않으니 그 다음 역인 대석두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여 대석두를 거쳐 다시 하발령으로 떠나야 했다. 대석두에 도착하니 오전 10시경이였으므로 해가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삼륜차를 잡아타고 하발령 습초지를 향해 떠났다. 멀리 바라보니 첫눈에 안겨오는 것이 큰송이풀이였다. 줄기는 1m 좌우이고 꽃이삭은 무성한 잎 속에서 쭉 빠져나와 공중을 향해 쳐들었다. 분홍색 나비모양의 꽃들이 굵은 꽃줄기에 주렁주렁 걸려있었지만 바람에도 끄덕없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리창복(李昌福)의 ≪대한식물도감≫을 보면 이 식물의 산지가 장백산으로 밝혀져있다. 1994년 2월에 나는 서울대학 자연물연구소 강당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학술보고를 하면서 환등편으로 이 식물을 소개하게 되였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 학자들이 이 식물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데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끝났다. 나의 학술보고가 끝나자 한국 현대식물분류학의 권위로 불리우는 이영로(李永鲁) 박사가 친히 연단으로 올라오더니 나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좋은 보고를 들었다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시각 나는 큰송이풀 덕분에 나의 몸값이 올랐다고 기뻐했다. 이런 연고로 나는 큰송이풀에 관심이 더 쏠리게 되였다. 울로초(乌拉草) ≪동북지서(东北志书)≫에는 “인삼, 담비, 울로초가 동북의 삼보(三宝)”라고 밝혀져있다. 옛날에는 울로가죽신, 또는 도로기, 도록신이라고 부르는 소가죽으로 만든 방한화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도로기신 안에 울로초를 넣고 신으면 발이 얼 근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울로초가 방한에 필요 없으니 ‘동북의 삼보’에 울로초 대신 록용이 올랐다. 나의 둘째어머니는 울로초를 ‘날비풀’이라고 불렀는데 정확한 이름은 ‘큰검정사초’이다. 습지를 다녀보면 울로초와 비슷한 식물들이 수두룩한데 민간에서는 울로초와 류사한 식물들을 통털어서 울로초라고 불렀으며 진짜 울로초처럼 사용하고 있다. 울로초와 류사한 식물들이 길림성 경내에서만도 99종으로 알려져있다. 무더기로 자라나서 덩어리로 되는 울로초를 연변사투리로는 ‘꼬지깨풀’이라고 부르고 울로초가 무성한 습지를 ‘꼬지깨판’이라고 한다. 솔 편자의 말: 김수철 교수는 ≪대중과학≫잡지 1979년 6월호부터 1981년 1월호에 이란 제목으로 연변의 솔종류; 력사와 현실; 솔잎의 유효성분과 작용; 솔잎의 용법; 송주(松酒)의 종류와 제법; 솔잎으로 예방, 치료되는 25종 질병; 비만은 질병의 온상(도해); 솔잎의 콜레스테롤청결작용(도해); 소화기질병; 급성위염; 간장질병; 만성위염; 호흡기질병; 관절염; 신경통; 마비; 부인병; 비뇨, 생식기 질병; 외과질병; 송진, 송화분, 솔씨; 솔의 항암작용 등의 순으로 글을 발표했다. 편자는 본문중 , 두편을 에 올린다. 력사와 현실 중국, 일본, 로씨야, 미국 등 나라의 민간에는 솔잎이 심신을 정화하여 건강장수케 하는 신통한 효과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선인이 되려고 속세를 떠나 산속에 들어가 기공을 하며 건강식으로 연명하는 수도자들이 세상만물중에서 솔잎을 건강식품의 첫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국 고대의 풍부한 림상경험을 기초로 하여 집성한 ≪신농본초경(神农本草经)≫이라는 약물학저서에서도 솔은 오래 먹어도 탈이 없이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는 상약이라고 했는데 의미심장하다. 리시진의 ≪본초강목≫에서도 “솔잎은 기미(气味)가 쓰고 따스하며 독이 없고 풍습을 다스린다. 머리털이 나게 하고 오장을 편안하게 하며 비위(脾胃)를 튼튼하게 하고 주리지 않게 하며 장수하게 한다.”며 인체에 주는 솔잎의 보건 및 의료적 효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솔잎에 뛰여난 건강효과가 있다는 고대인들의 림상경험이 현대의학의 리론과 실험에 의해 륙속 증명되고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솔잎건강활동이 전개되여 솔잎으로 신체를 튼튼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도 2년전부터 송엽액을 계속 쓴 결과 높던 혈압이 내려가고 겨울이면 심하던 기침이 나아졌으며 감기에 덜 걸릴 뿐만 아니라 치통과 잠자기 전에 느껴지던 다리의 불편함 등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칠순의 고령이지만 장백산으로 다니면서 식물조사를 하거나 광주, 란주, 북경 등지와 한국의 제주도, 춘천 등지를 두루 다니거나 밤 늦도록 글을 써도 큰 탈이 없다. 하여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우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본문을 집필하는 바이다. 솔의 항암작용 의사들은 인체의 해부를 통해 암의 자연치유를 적지 않게 발견하고 있다. 암의 맹아가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암을 유발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평생보건에 주의하며 항암활성물질이 풍부한 비타민 등을 적당히 먹으면 부지불식간에 암의 맹아가 위축되여 사람을 해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인류에게 암의 예방과 치료의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복음으로 된다. 송엽액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체액을 인체의 정상적인 생리활동진행에 가장 적합한 알칼리성으로 보장하게 되는데 이는 암과 같은 성인병의 예방에 주요한 생리적 기초를 닦아주는 것으로 된다. 솔잎에는 현대의 약리실험에서 확인된 엽록소, 카로틴, 비타민C, 플라보노이드, 테르펜, 탄닌, 펙틴, 섬유소 등 항암활성성분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몸안에서 암발생요소를 격퇴하는 유력한 통일전선을 이루고 있다. 카로틴, 비타민C, 플라보노이드 등은 항산화제로서 체내 여분의 활성산소를 해체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암증을 예방하거나 암병소를 축소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다. 몸안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활성산소는 체내에 침입한 병원균과 같은 이물을 공격하는 작용을 하기에 건강을 도모함에 필수적인 존재로 된다. 그러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건강에 해로운 습관은 사람의 몸안에 과량의 활성산소가 생기게 한다. 여분의 활성산소는 정상세포까지 공격대상으로 오인한다. 하여 활성산소의 습격을 받아 세포의 지방이 산화되여 과산화지방으로 되면 세포의 로화를 야기하고 유전자가 계속 산화되며 손상을 받아 암유전자로 돌연변이함으로써 몸안에 암세포가 생겨나게 한다. 솔잎을 꾸준히 먹으면 솔잎 속의 항암성분이 활성산소를 억제시키는 작용을 하기에 암발생의 기회가 퍽 줄어들게 된다. 솔을 건강식품으로 장기간 복용하면 건강장수하게 된다는 주요한 리유의 하나로 항암작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솔잎에 많이 들어있는 섬유의 항암작용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암에 쉽게 걸리는 원인의 하나가 바로 식물성 섬유를 멀리하는 데 있다. 솔잎에는 수용성 섬유와 비수용성 섬유가 들어있다. 찌끼를 밭아낸 송엽액에는 수용성 섬유가 들어있다. 섬유는 장내의 발암물질과 유해물질을 흡착하여 해독함으로써 암을 예방하고 세포의 로화를 늦추는 작용을 한다. 또 섬유는 대장에서 분해되는 해로운 세균을 줄여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산생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발암물질이거나 유해물질이 들어있는 변이 머물러있는 직장이나 S자결장은 암발생률이 높다. 섬유는 장의 연동을 촉진함으로써 변의 배출을 촉진한다. 따라서 장내의 유해세균에 대한 분해작용으로 발암물질이 많이 형성되기 전에 배변이 가능하여 대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 때문에 육식을 많이 하고 조섬유를 적게 먹는 서양인들에게는 대장암이 많고 식물성 섬유를 많이 먹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에게는 대장암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므로 솔잎을 짧게 썰어 찌끼가 남지 않을 정도로 절구로 찧은 후 자주 먹으면 건강에 리롭다. 솔의 약효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면 금방 뜯어온 솔잎을 먹어야 한다. 그것은 싱싱한 솔잎으로 만든 록즙에는 그 어떤 고가의 상품약보다 활성상태의 건강소가 더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훈춘해당화 우리 백의동포의 노래에서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海棠花)’라는 가사가 나오면 어쩐지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만큼 해당화는 우리 민족 정신의 구성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두만강 기슭에 자리한 연변의 훈춘 경신마을에 가면 모래언덕에서 아릿다운 모습으로 반겨주는 ‘톱스타’인 진분홍 해당화를 보게 된다. 붉게 타오르는 그 열매는 건강을 지켜주는 비타민덩어리이다. 나는 제철에 그 곳에 갈 때마다 흐르는 세월에 따라 사라지기만 하는 해당화가 아쉬워 떠나기 싫어진다. 해당화의 자생지는 중국 북부 해안 모래땅에 국한되여있지만 거의 멸종되다싶이 하여 그 자생정황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식물연구소의 권위들이 집필한 ≪중국고등식물도감≫에도 해당화가 올려졌는데 그것은 자생종(自生种)이 아닌 원예종(园艺种)이다. 이는 중국에서 해당화는 이미 멸종되여가는 ‘희귀종’임을 증명해준다. 나는 10여년전에 훈춘 반석에서 식물육종에 몸을 담고 있는 나의 제자 박영호(朴永虎, 훈춘시농업방송학교 부교장, 교수급 연구원)를 만나 그에게 “훈춘에 해당화기지를 만들고 관광업을 발전, 확대시키면 엄청난 경제적 수입을 얻게 되고 인민들의 생활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라고 해당화기지에 대해 건의하였다. 그 후 박영호는 훈춘해당화를 자기 식물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아래에 나는 박영호 연구원이 쓴 글을 인용한다. 저는 김수철 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연변농학원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줄곧 훈춘에서 과수육종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2002년도 어느 날이였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이 저의 시험전에 오셔서 제가 운영하는 사과육종시험전을 지도하면서 이런 건의를 하셨습니다. “훈춘 경신에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해당화자원이 풍부합니다.박선생이 경신 해당화를 연구해보세요. 해당화열매는 비타민함량이 아주 높고 항산화물질 또한 아주 풍부한 건강식품원료입니다. 좋은 해당화품종을 자원포(资源圃)로부터 시작하여 잡교육종을 한다면 좋은 과학기술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김교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훈춘해당화 삽목 번식과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14년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2013년부터 연변대학 설계신(薛桂新) 부교수와 합작하여 해당화 성분분석을 주제로 한 해당화 연구과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고 2017년에 성급 감정에 통과되였습니다. 감정회의에서는 “해당화연구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원포(资源圃)로 보귀한 자원을 수집하였고 두가지 좋은 류형으로 품종배육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였습니다. 훈춘은 해양성 기후로 하여 겨울에는 너무 춥지 않고 여름에는 선선합니다. 따라서 경신에는 해양성 기후에 적응된 해당화가 잘 자랄 수 있습니다. 해당화는 장미속 식물입니다. 품질이 좋은 해당화는 국외는 일본의 혹가이도와 혼슈 중부, 로씨야의 연해지구와 깜챠뜨까반도, 그리고 한국의 동서해안 바다가 모래톱에 많이 분포되였습니다. 훈춘의 해당화는 우리 나라 2급 진귀품종, 길림성 1급 진귀식물로 선정되였습니다. 해당화는 키가 1.5m 좌우인데 형태가 개장형(开张形)으로서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고 병충해에 잘 견디며 특히 내한성이 아주 강합니다. 해당화의 가치와 약용을 략술한다면 첫째로는 과학연구가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훈춘 경신진 자생해당화 자연분포만이 생태연구, 생물학연구, 유전자원연구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관상용 가치입니다. 해당화는 꽃, 잎, 열매가 아름다우며 특히 해당화꽃이 뿜는 그윽한 향기는 사람들에게 아주 경쾌한 기분을 선사해줍니다. 그래서 해당화는 ‘꽃중의 왕’이라는 별호로 관상용 식물에서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셋째로는 해당화열매는 건강식품원료입니다. 해당화열매는 비타민C가 풍부하고 항암작용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였습니다. 해당화의 영양분함량은 귤의 22배, 사과의 100배, 딸기의 20배, 키위의 8배, 보리수아재비의 5배입니다. 해당화열매에는 당, 유기산, 단백질, 탄닌 등 18가지의 아미노산과 17가지의 광물질이 함유되였습니다. 특히 칼슘함량이 높기에 어린이들의 영양제로 리용됩니다. 일본, 한국 등 나라의 연구에 따르면 해당화는 약용, 미용, 로쇠방지, 항암, 혈당강하, 복사방지 등 여러가지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였습니다. 특히 해당화는 로쇠한 피부세포를 회복시켜주기에 미용효과에 좋고 피부세포의 활성을 제고하기에 피부재생작용도 합니다. 2018년 10월 20일에 열린 ‘중국원예학회’에서 제가 발표한 이란 론문이 모든 참가자들의 인정을 받았고 또 전문가들로부터 “훈춘에서 이 연구항목을 완성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해당화열매의 가공 및 신선식품종자원포(源圃)를 건립한 것으로서 국가 2급 보호식물을 개발하고 성 1급 진귀식물을 보호하고 개발하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박영호
316    옛이야기속의 인생조언 댓글:  조회:4931  추천:0  2020-03-03
         세상에 공짜가 없다                                               옛날에 지혜로운 왕이 신하들을 불러 “백성을 가르칠 인생의 방법을 쓰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은 온갖 지혜를 모아 “백성을 가르칠 인생의 방법”이란 책 열 두권을 편찬하였습니다.   왕은 책을 보고  근심스레 “이 책은 시간이 바쁜사람들이 읽기가 너무 힘들다.  한권으로 줄여 보아라”고   다시 명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 지혜릏 모아 한권으로 줄이니 왕은 그 책을 보고서 “참 잘 만들었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문맹자들은 볼수 없겠구나”하면서 들으면 바로 알수 있는 단 한줄 줄이라”고 또 다시 명하였답니다.  그래서 신하들의 오랜 연구끝에 나온 한  줄로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였습니다..이에 왕은 대만족하였습니다. 세상의 만사가 가고(去) 오는 (來) 거래입니다. 물이 수증기로 되어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오듯이 인간의 령혼도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는 거래(去來) 입니다. 이 세상에 거래 아닌 것이 없으니 ‘道는 거래다’ 고  합니다. 그러나 공짜 거래는 없습니다.   물건을 샀으면 그 대가로 값을 치루는 것이 거래요 로동을 하였으면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도 거래며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것도 거래인 것입니다.   산속에 들어가 골짜구니를 향해 소리를 질러 봅시다. “너 이놈!” 하면 저쪽 에서도 “너 이놈!” 하고 대답 하고 “사랑해!” 하면 저쪽 에서도 “사랑해!” 하고 대답 합니다. 아뭇소리도 안하면 저쪽 역시 아뭇소리를 안합니다.   나에게 부딛쳐 오는 모든 것을 따지고 보면 자연이 모두 내가 짓고 내가 받는 리치임을 들려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고 미워하면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욕했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結을 맺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가고 옴에 피할 수가 없다[去來難避]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메아리다 “상대성 원리가 없지 아니하다. 착하게 행하면 착함이 오고, 악하게 행하면 악함이 오고, 적선지가(積善之家)에는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는 필유여앙(必有餘殃) 이라“ (도덕경 43면) 이것이 바로 도덕원리입니다. “흔히 운이 좋다“  ”복을 타고 났다“ 는 말을 합니다만 그 운이나 복도 공짜는 아니라고 합니다. 운과 복은 어떻게 다를까요?  福은 전생 차생(此生)에 자신이 쌓아놓은 선행과 공덕의 결과물 이라고 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남을 위해 많은 것을 베풀어 자신의 인생 은행계좌에 저축을 많이 해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 먹는 것을 ”福을 타고 났다“ 고  합니다.   반면에 運은 때때로 그야말로 우연히 올 수도 있습니다. 투기를 해서 성공을 했다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運이라는 말이 ‘돌다, 돌리다’ 라는 뜻이 들어 있듯이 運은 은행에서 돈을 돌려 받은 (대출받은)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運이 좋아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노력 없이 ‘공짜로’ 얻은 것이니 그것은 무형 가운데 빚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불행해지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큰 運을 받고 그것을 유지 하려면 반드시 좋은일을 하여 일부를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福이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것이라면 運은 먼저 받고 나중에 주어야 하는 것 이라고 할까요? .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남의 것 먹고 빚지고 잘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메아리입니다. 주고 받는, 가고 오는 메아리! “여곡응향(如谷應響)-골짜기에서 메아리 치듯이 , 여형수영(如形隨影)- 형태따라 그림자 지듯이 ” (도덕경 63면) 오기활
315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7) 댓글:  조회:3564  추천:1  2020-03-01
                                          7. 의학과 맺은 인연 내가 6살 때 백부는 주역에 연구가 깊은 조양천의 명진사로 불리우는 최진사를 청하여 나의 팔자(출생 년월일, 시의 간지 두자씩)를 알려주며 나의 사주(四柱)를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때 최진사는 나의 사주팔자를 보고 역출한 운세에 따라 “이 아이의 천직은 명의(名医)이므로 이 아이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시우.”라고 당부했단다. 그래서인지 내가 처음으로 꾸었던 꿈이 의사였다. 나의 의학공부는 1945년 ‘8. 15’해방후 리시진의 ≪본초강목≫, 허준의 ≪동의보감≫ 등 의학서적을 자습하면서부터 시작되였다. 1947년초, 나는 룡정의과대학의 학생모집광고를 본 후 물을 만난 고기마냥 주저없이 소학교 교직을 버리고 응시한 결과 룡정의과대학에 합격되였다. 하지만 룡정의과대학을 룡정에 있는 군정대학에서 이관(移管)하면서 신입생들의 정치심사를 재심하게 되였는데 결과 우리 집 가정성분이 ‘규편중농’이라는 데서 정치심사에 걸려 락방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인 대동아전쟁 말기에 사회적으로 전염병이 류행되며 여러가지 이난병들이 나타났다. 그 때 우리 집에서는 내가 먼저 발진질부사에 전염되였고 내가 병이 나으니 백부와 7촌숙부 내외가 이 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때로부터 나는 의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 백부, 7촌숙부 내외가 련이어 전염병에 걸리자 의원들이 자주 왕진을 다녔고 나도 심부름으로 의원네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 집에 왕진을 다닌 의원들로는 중흥툰(지금의 촌급 단위)에 있는 나의 숙부벌이 되는 김재혁(金在赫) 등 세명이였다. 김재혁은 내가 중의에 흥취를 가진 것을 알고는 나에게 허준의 ≪동의보감≫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 동산 기슭 안굽에서 사는 한족인 왕의사한테도 종종 왕진을 청했는데 나는 약을 지으려고 그 집에 자주 다니기도 하였다. 왕의사는 50대 중년으로서 진단, 진맥을 잘했고 약첩의 음편(饮片)도 깨끗했으며 가루약종이 적었다. 나는 연길서시장에 가기만 하면 주머니를 거의다 털어서 낡은 책들을 구입하여 의사공부를 하였다. 당시는 전란 때여서 신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없었고 다만 낡은 책들을 회수하여 파는 간판도 없는 책가게들뿐이였다. 나는 해방전에 서울에서 출판한 ≪동의강화(东医讲话)≫라는 보급서적을 읽으면서 중의학기초리론을 공부하게 되였다. 토지개혁 때에 우리 집이 부농으로 청산되면서 이 책도 잃어졌는데 책 저자의 성명도 모르며 재독할 기회도 더는 없게 되였다. 해방초에 나는 연길서시장 고서점의 먼지 속에서 ≪편작심서(扁鹊心书)≫라는 작은 책을 입수하게 되였다. 편작은 중국 전국시대의 명의로서 당시 조(赵), 진(秦), 주(周) 나라에서 의술로 행세하였으며 그의 친필저서는 유실되였다고 한다. ≪편작심서≫는 송나라의 한 의사가 민간에서 편작의 약방문(药方文)을 수집하여 지은 책인데 이 책이 진짜로 편작의 약방문인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중의 리론과 림상을 겸한 론저로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에서 중심사상과 편작의 응용리론은 ‘대병의구(大病宜灸)’ 네 글자로 요약되였다. 즉 중병에는 뜸이라는 말이다. 내가 태양구활동중심에 다니며 모택동사상선전대 조직활동을 하던 때인1947년 봄의 어느 날이였다. 오후 세시경에 집에서 사람을 보내여 젖먹이가 생명이 위급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달음박질쳐 집에 도착하니 태여난 지 5개월밖에 안되는 둘째아들 상욱이가 낯이 새파랗게 질리고 들숨보다는 날숨이 더 많아 당금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아들이 사경에 이르렀는데 어디에 가서 의사를 모셔온단 말인가. 그 때에는 촌에 전화도 없어 의사를 모셔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대병의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담요에서 솜을 뽑아 뜸쑥을 대신하여 불을 붙인 후 용천혈(涌泉穴, 발바닥)과 신관혈(神关穴, 배꼽)에 뜸을 반복했다. 한참후 날숨만 심하게 쉬며 울지도 못하던 애가 불시에 “응아―” 하며 울기 시작하더니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고 경련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증상도 사라졌다. 이렇게 솜뜸으로 아이를 살려낸 후에 관찰해보니 아무런 부작용도 후유증도 없었다. 아이의 급병은 풍한감기(风寒感冒)로 온 소아경풍(小儿惊风)으로서 솜뜸으로 깨끗이 치유되였던 것이다. 그 후부터 ‘대병의구’ 네 글자는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강비법으로 되였다. 이 밖에도 몇가지 사례를 곁든다. 1) 1952년에 나는 신장결핵병에 걸려 혈뇨까지 보았는데 연변병원의 항균치료를 받으면서 지탱하다가 결국에는 1953년에 뜸으로 완치되였다. 2) 지난 50년대에 뜸으로 허리병으로 인한 ‘절름발’증상을 치료해 농학원의 뉴스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감기는 도꼬마리로; 배 아픈 병은 리질풀, 익모초, 쑥으로 치료하였다. 62세부터 병원을 몰랐고 94세인 지금도 뜸으로 몸건강을 지킨다. 3) 아들의 20년 허리디스크, 골증식도 한해 겨울 뜸으로 치료하여 완치하였다. 4) 며느리의 갑상선암 수술후 통증도 국부뜸으로 치료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유증이 없다. 5) 딸의 유종병(乳肿病)도 큰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장했지만 딸의 요구에 의해 뜸으로 해결했다. 지금 우리 집 식구들은 몸이 불편하면 나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절로 뜸을 뜨며 병을 치료한다. 2017년 초겨울 어느 날, 나는 창문 밑에 있는 침대에서 자다가 새벽에 문바람을 맞고 한동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생각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초기중풍증세라고 판단하고 정신을 차려 억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후 항상 준비하고 있던 보건상자 앞까지 겨우 기여갔다. 그런 후 용천혈에 뜸을 떴더니 한참후에 몸움직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부터 나는 한문으로 ‘죽음체험’이란 넉자를 침대머리에 붙여놓고는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다그치고 있다.
314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6) 댓글:  조회:3927  추천:0  2020-02-23
                                         6. 저주로운 성분‘딱지’ 나의 백부는 연길현 태양구(태양향) 횡도 9대(지금의 향양툰)에서 논농사를 하는 전형적인 독농가(笃农家)로 소문이 났다. 백부는 1943년전까지는 지주집의 논을 소작하는 소작농이였는데 1943년부터는 연길에 있는 한 지인의 소개로 연길금융부에서 대부금을 받은 후 집 근처의 수전 한쌍을 삼으로써 자작농으로 되였다. 해방후 백부네는 논 한쌍, 여섯칸짜리 초가집 한채, 소 한마리가 있었고 농망기에는 일군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여 1946년 토지개혁 때에 성분이 부농으로 획분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밭, 소, 여섯칸짜리 초가집, 손잡이재봉침까지도 몰수를 당했다. 다행히도 백부가 민분(民愤)이 없었기에 체형(体刑)은 면했지만 횡도 8대 강뚝마을의 헐망한 돌막단칸집에 이사를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돌막단칸집은 비록 헐망하였지만 서쪽에서 흐르는 구수하(조양하) 강물이 하도 좋고 또 마을사람들과도 가깝게 보낼 수 있어 나는 서운한 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 때 분배를 받은 강변땅은 자갈돌이 많아 농사일은 힘들었지만 곡식낟알만은 잘 여물었다. 2년후 상급에서는 우리 집 부농성분을 ‘규편(纠编)중농’으로 바로잡아주었고 청산했던 집재산도 돌려주었다. 그러나 중농 앞에 ‘규편’이란 도장이 찍힌 것으로 하여 우리 가족들은 사회생활과 정치발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규편’이란 부농을 시정하여 중농으로 편성한다는 뜻이였건만 당시에 기층간부와 군중들은 ‘규편(纠编)’을 ‘기편(欺骗)’으로 오해하며 ‘나쁜 편’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당시 당의 농촌계급로선은 “빈하중농에 의거하고 중농과 단결하며 지주부농을 고립시키는 것”으로서 중농은 단결대상이였다. ‘규편중농’은 나의 인생길에서도 거침돌이였다. 1946년 1월에 횡도 7대에 있은 나의 소학교동창인 임철순(任喆淳)의 소개로 나는 태양구중심소학교 교원으로 취직되여 옹근 1년을 동전 한푼 받지 않고 몇리 길을 통근하면서 교직에 충성하였다. 비록 무보수로동을 하였지만 날마다 천진하고 귀여운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이듬해에 룡정의과대학에서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나는 태양에서 도보로 룡정에 가서 시험을 쳤는데 합격되였다. 나의 첫 꿈은 의사였다. 1945년 ‘8. 15’후부터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리시진의 ≪본초강목≫, 허준의 ≪동의보감≫ 등 의학서들을 열심히 자습하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소원을 성취하였으니 그 때의 기쁨을 한입으로 표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룡정의과대학이 개학을 하기도 전에 룡정에 있는 군정대학에서 룡정의과대학을 이관(移管)하면서 신입생들의 정치심사를 다시 하게 되였다. 하여 1주일후에 걸어서 룡정에 가 알아보았더니 그 놈의 ‘규편’딱지 때문에 내가 락방되였다는 것이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35리 길을 걸어 고향에 돌아오니 정들었던 고향사람들이 모두 생소해보였고 또 나를 깔보고 경멸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규편’딱지 때문에 징병모집에도 신청할 수 없었다. 나의 앞길은 갈수록 막막하기만 하였다…
313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련재 5) 댓글:  조회:4207  추천:0  2020-02-19
                       5. 나의 첫 교직생활 1945년 12월, 내가 횡도자(横道子)에서 민주대동맹 태양지부 청년위원으로 한창 활약하고 있을 때 나의 소학교 2학년 동창생인 임철순(任喆淳)이 나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였다. 경상북도 이민의 아들인 임철순은 밤색 얼굴에 우뚝 선 코, 강직한 성격과 강한 결단성으로 하여 그에게서는 남성적인 기질이 다분히 느껴졌다. 게다가 음악, 미술, 체육 등 특장들까지 겸비한 데서 그는  태양구중심소학교의 둘도 없는 엘리트였다. 어느 날 철순이가 나를 찾아와 나에게 태양구중심소학교 교사로 가면 어떤가는 자기의  의사를 밝혔다. 나는 교육학이나 심리학 방면에 문외한이다보니 애들교학을 잘해낼 수 있을지 근심되면서도 마땅한 자리가 있다면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며칠후 철순이의 덕분이였는지 아니면 그 때까지만 해도 소학교교원이 많이 부족했던 사정에서였는지 아무튼 학교당국에서는 별말이 없이 나를 받아들였다. 내가 담임한 학급은 락제생학급으로 불리우는 1학년 2반이였다. 나는 락제생이 말 대로 그렇게 많다(25명)면 필경 담임교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1학년 1반의 담임은 리학림(李学林)선생이였는데 그는 이름 그대로 명실공히 훌륭한 교사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리선생은 교수안도 잘 짜고 학생들의 마음도 잘 헤아려주었기에 모든 학생들이 한결같이 그의 주위에 똘똘 뭉쳐 움직이였는데 나의 재간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못 낼 지경이였다. 나는 얼마간의 체험으로 유치원이나 소학교 저학년을 잘 가르치려면 사범교육을 받아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어느 날 우리 학급에서 모 학생이 학용품을 도적맞힌 사건이 발생했는데 나는 경솔하게 아이들의 말만 믿고 한 학생을 의심하던 데로부터 엄벌하기까지에 이르러 그 학생 부모의 불만을 사게 되였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고 해도, 또 설사 물건을 훔쳤다 해도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는데 나의 너무 경솔한 처사 때문에 일이 커지게 된 것이였다. 교사의 직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나는 도리여 소학교 교직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학생의 이름이 권룡봉(权龙凤)이라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권춘길(权春吉)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 글로써 그들에게 속죄하는 바이다. 내가 가르친 학급의 반장은 김주남(金柱男)이라고 부르는 녀학생이였는데 알고 보면 그 녀학생이 남자이름을 가진 것도 다 원인이 있었다. 주남의 부모님들은 련속 딸만 낳게 되자 주남이가 딸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이름으로 지었는데 그렇게 지으면 다음번에 낳는 애가 남자애일 가능성이 많단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우리 학급에서 공부했던 김주남, 임응수(任应洙), 권룡봉 등 귀여운 학생들이 매우 그립고 또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만약 그네들이 나의 이 글을 읽는다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도 한다. 이 밖에 그 시절에 나와 함께 걸어서 출퇴근하던 엄화수(严和洙)라는 교사도 잊을 수 없다. 그 때 우리 두 남자는 출퇴근길에서 마치 사랑을 나누는 련인마냥 여러가지 끝도 없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서로 푸른 꿈을 키웠다. 엄화수는 나에게 가정생활 얘기도 허물없이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조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 그는 녀자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그들 두 청춘남녀에게는 꿈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은 함께 행복한 가정의 설계도도 그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씨가 녀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와 두 형님이 결사코 반대해나서는 바람에 녀자친구는 울면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엄씨는 그 때 울면서 뛰여가는 녀자친구의 뒤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많이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듣고 난 후에야 그가 항상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였다. 썩 후에 전해들었지만 엄화수는 교직을 그만두고 연변조선족자치주수리국에 전근하여 일하다가 또 안도복흥저수지에 전근해갔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1년간의 소학교 교직생활이였지만 그 사이 정든 교사들의 이야기를 하려니 끝이 없다. 그 때의 많고 많은 얘기들중에서 한가지만은 빼놓을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보탬하려고 한다. 태양소학교 한계성(韩启星) 교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길시중앙소학교에서 전근해온 한교장은 정말 팔방미인이였다. 1946년 8월 여름방학에 한교장은 교사들을 조직하여 태양구 중심인 횡도자거리에서 문예공연을 하였는데 이 때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한교장은 작곡, 작사뿐만 아니라 교원들을 조직하여 라는 노래와 를 무대에 올렸으며 친히 바이올인반주까지 하였다. 그리고 15명의 교사들이 배역을 맡은 이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 연극에서 나는 일제의 통치하에 신음하는 가련한 농민들을 학대하는 경관역을 맡았다. 무대미술은 그의 지도하에서 내가 맡게 되였고 배우들의 화장도 처음에는 그가 하다가 나중에는 나에게 모두 맡겼다. 그 때 우리 학교에는 음악을 가르치는 김유신(金有信)이라는 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한교장의 지시에 따라 무대음악활동을 전부 맡아하였다. 김유신선생은 성악도 잘했고 또 특별히 긴 손가락으로 손풍금도 아주 잘 쳤다. 그뿐만 아니라 쭉 빠진 체격에 얼굴 생김새 또한 톱스타형으로서 그가 만약 지금 시대에서 살았더라면 아마도 숱한 녀성들이 그의 팬으로 되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공연이 너무나도 성공적이여서 공연후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물론 주변의 관중들까지도 태양소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모두 재간둥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6년 일년간의 교직생활은 나로 하여금 사상상에서 진보하고 실천 가운데서 교육에 관한 지식을 익히도록 하였다. 주안상을 차려놓고 서로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즐기던 그 때 그 시절이 70년후인 지금에도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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