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http://www.zoglo.net/blog/wujihuo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529 ]

인생은 누구나 자기만의 행복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만족할 때 행복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다를 수 있고 내가 느끼는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행복의 정의는 각자들의 추구와 실천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두어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로 정의된다. 이는 지난 11월 22일, 내고향 달라자의 동생벌 친구 리영식(75)네 부부가 동네잔치를 마련하고 기뻐서 하는 영식씨의 “머리 말”의 중심이다. . “우리에게는 우리대로의 삶법이 있습니다. 우리네 가정이 물론 남들에 비하면 별로겠지만 나는 우리네 삶이 결코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만하면 살만하고 오늘의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네 수준으로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75세 나이에 “자신의 책임”을 다 하려는 영식씨의 미덕이라 하겠다. 영식씨는 왕청현(현 도문시) 석현진 달라자(1911년에 건툰)원주민의 2세로 리경렬, 오채옥부부의 4남 3녀 자녀중 맏이이다. 가야하와 해란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달라자는 10년에 6,7년은 큰물이져 지난세기 60, 70 년대까지만해도 식량을 거의 해마다 국가의 반소량(구제량)에 의거하였다. 리경렬네는 식솔이 많고 게다가 식성이 세다보니 먹거리고생으로 해마다 도문에 다니며 도시사람들의 옥수쌀을 꿔먹고는 번마다 좁쌀이나 입쌀로 갚아주었다.                                                                                                                                          사진                                                     환갑상을 받은 리경렬 오채옥 가난의 년대에 소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농사일에 몸을 담군 영식씨는 선천적으로 말이 적으나 마음이 한량이 없이 고우며 유전적으로 술은 못 마이지만 일찍부터 담배를 피우고 고기잡이에 빠진데서 동네서 “담배지골”에 “강태공”으로 불렸고 “영식이는 법이 없어도 산다”는 평이 뒤따랐다. 리경렬네 집이 가난하기로 동네의 1,2번인데다가 영식이가 책가방끈이 짧고 7형제 맏이다보니 같은 또래에 비해 결혼이 지체되다가 “집체호 년대”에 달라자동네가 도시교구이고 총각이 하도 마음이 곱다는 말에 외지의 “도시호구”처녀를  만나 결혼하였다. 지난 “문화혁명” 때 나의 백부님이 억울한 “특무”모자를 쓰고 타살되자 20대 나이에 큰집에 얹혀 살던 나는 정치적권리를 박탈당하고 생산대양돈장에서 사양원으로 5년간을 지냈는데  영식씨가 2년을  나와 함께 돼지사양원으로 일했다. 그때 영식씨는 남들이 감히 우리 집에 나들지 못하는 정치환경에서도 매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 놀려와 나를 동무했는데 그가 원래부터 말이 없고 잠이 많다보니 동무를 한다는 것이 초저녁부터 한쪽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자다가 늦밤에 깨여나서 돌아가군 하였다. 속담에 "밭머리 벗어놓은 사갓도 동무가 된다"고 나는  영식이가 매일 저녁 책을 보는 나에게 코콜이로 동무해준 것에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겹게 감사하다. 영식씨로 말하면 “도시청년들이 성시로 돌아 가는” 나라의정책이 영식씨부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철도가속의 큰딸인 그의 안해 (崔成子)가 취직하자 큰아들로 부모동생들과 한집에서 동거하던 영식이네(딸 2명)가 분가하여 도문에 집을 잡았다. 도문철도 모건축회사에 배치받고 한동안 출근하는 그의 안해는 엉뚱한 생각으로  어느날에 단위의 책임자를 찾아가서 “내 남편이 달라자 건축기건대에서 일을 하는데 남편의 농민신분을 그대로 하고  내대신에 남편을 출근 시키면 더 좋지 않습니까?”는 건의를 했더니 책임자가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다”며 통쾌하게  동의하였다. 그레서 영식씨는 고정적인 건축일을 하면서 장끼를 피운데서 북경유람까지 하였고 조선보따리장사가 한창일때 성자씨는 도문통상구의 우세를 리용하여 도문서 선참으로 해삼장사를 하다가  수입이 짭짤하자 손하의 두 시누이를 이끌고 해삼장사를 크게 벌려  몫돈을 벌었다.                                                                                                                                            사진                                                오늘의 생활에 만족하는 행복한 부부 손에 몫돈을 쥐게되자 성자씨는 아빠트에 상업가계(门市房)까지 사놓고 “뿌리있는돈벌이”를 하면서 두 딸을 미국과 일본에 출국시켜 홀로서기를 시겼다. 영식이네 부부는 “저희들이 탈없이 잘 살면 된다”면서 지금까지 손군까지 있는 두 딸의 결혼식 차림은 념두에도 없다. 한편 성자씨는 “일이 없이는 못 산다”며 닭사양을 하면서 도시주변에 버려져 있는 땅을 찾아 가꾸며 생산한 농산물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베품의 삶”을 살고 “강태공”인 영식씨는 전주 낚시경지에서 “낚시 대왕”으로 오토바이대상을 쟁취하였다. 이번 코리나가 터지자 영식씨네는 달라자에 회농하여 농사일과 짐승치기로 재미를 보고 있다. 이것이 영식씨가 말하는 ”그들만의 행복한 삶법”이다. 영식씨가 마련한 22일 동네잔치에는 외국에 갔던 동생들, 사촌형제, 조카들, 그리고 동네분들로 30여명이나 한자리를 하였다. 온돌구들이 모자라서 젊은들의 술상은 부엌의 마루장판에 차렸건만 서로가 불편이 없다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날 영식씨의 감동적인 모듬발언 몇단락이다. ㅡ 우리 동네사람들은 코로나로 하여 더욱 뭉쳤습니다. 서로간 채소나 토닭알을 나눠먹고 서로를 도와 줍니다. ㅡ 요즘에 내동생(리창식)한국에서 한족제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는 한족제수씨가 맘에 들어 빼울가봐 걱정합니다.(웃음소리) 이에 따라 그의 큰 녀동생(리미숙)이 말참견을 하였다. “나도 손자자랑을 하겠습꾸마. 우리 큰 손자가 대학 2학년에서 입당을 한답니다” ...이날에 특히 사람들의 인기화제로 한국에서 온 한족제수가 팔을 걷우고  가마목에 않아 후근을 거의 전담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처음 만난 강씨(한족제수)를 불러 자아 소개를 부탁한뒤 이 동네는 지난 80년대에 전국인대주임 교석이 방문한 영광의 동네라고, 이 집은 큰시형의 사촌동생 리영춘네 집인데 37년(1985년)전에 이집에서 이 동네를                                                                           사진                                                             웰남전쟁영웅보고단의 “새각씨”류호련 참관할때 동네부녀들이 이집에서 “월남전쟁영웅보고단”의 유일한 영웅기장 류호련 에게 첫날 각시 한복을 입혀 줬다고, 그리고 37년후 이집에서 영식씨가 한족제수씨를 맞이 한다며 이집은 한족녀성들과 특별이 인연이 깊은 집이라고 소개하자 “그렇구나!”는  기쁨의 환성을 울려퍼졌다.                                                                                            사진                                                                                                                                                     리창락부부 자기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리없이 살아가는 영식씨부부의 인생이야말로 비범한것으로 한낱 돋보인다. 필자는 이날 모임에서 향양촌의 선임 서기와 선임촌장들이 하던 말로 이 글을 맺는다. “그래도 이 동네서 작은 일까지 눈에 밟혀 베풀며 사는 영식이네 삶이 진짜 멋지고 행복해 보입니다.”  오기활 2022년 12월 15일    
428    “내 탓”이라 생각하는 행복한 삶 댓글:  조회:1830  추천:0  2022-12-01
혹시 일신쌍두(一身双头)로 태여난 아이를 두사람으로 볼가? 아니면 한 사람으로 볼가?  는 이 물음에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다른 한쪽 머리가 비명을 지른다면 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이 그냥 반응이 없으면 두사람이다”고 했다. 내가 아파할때 너도 아파하면 두 머리가 한사람으로되는 것이다. 일신쌍두인이 한 머리(头)가 “내 탓”이란 마음을 가지면 다른 한 머리도 “내 탓”의 마음을 갖게 된다.  “내 탓”으로 여길 때는 용서와 리해가 쉽고 너에 대한 정겨움과 고마움이 우러나지만 “네 탓”으로 여길 때는 불신이 싹트고 미움과 증오가 커진다. “내 탓”이란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믿음과 꿈, 사랑과 감사로 살기에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고, 장애로 불편하게 산다고 해도 행복을 누릴(느낄) 수 있다. 행복은 전염되는 것으로 내가 행복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따라 행복해지고 “내 탓”이란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럴 때  나, 너, 우리가 가장 진실한 숨결을 함께 나누며 심원하고 경건한 만남을 이룰수 있다. 설령 마주보지 못해도, 말이 없어도 우리는 이런 만남을 통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어느 시인의 시다.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임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여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임을 알겠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할 때이다.  필자는 비록 후회에는 약이 없다고 하지만 늦게나마 “이는 내 탓입니다”는 마음의 가치를 알게되여 “내 탓”이란 비방으로 전생의 후회를 미봉할 것이다. 오기활 
427    어금니례찬 댓글:  조회:1462  추천:0  2022-11-30
일전에 치과의사가 하던 얘기다 흔히 치과의사를 찾는 손님들이 어금니는 눈에 잘 띄우지 않으니 아무거나 값싼 걸로 하고 앞 이는 비싼 걸로 예쁘게 해달라고 한다. 분명 어금니는 남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치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중한 일을 하기에 더 소중하게 다루며 대접을 잘해야 하는데 말이다. 치과의사의 “어금니례찬”에서 허상림선생님(원 연변대학공학원원장)이 소개하던 방학봉교수가 떠올랐다. 방학봉교수(80)는 “발해사연구”를 위해 남모르는 “어금니’로 묵묵히 일해왔다. 1949년 9월 연변대학력사계 1기생 방학봉은 돈화현 륙정산에서 정혜공주묘와 진릉의 발굴, 정리에 참가하고 우리민족의 발해사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려는 뜻을 품고 심신을 바쳐 고군분투로 75세에 이르러 “발해사연구”총서 등 발해사연구관련 저작을 35부나 펼쳐냈다. 그간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의 역경속에서도 갖은 억울함을 당했어도 자기만의 큰 뜻을 접지 않고 발해사연구의 “어금니”로 되여 51세—59세 사이에 6부의 저작을, 60세—75세 사이에 29부의 저작을 출판하였다. 기간 그가 혼자몸으로 심산속을 헤가르며 발해무덤탑고찰을 다니다가 외로운 죽음을 당할번한 사례가 몇 번이나 된다. 칠십고령에도 려행단체를 따라다니며 가이드로 “알바”를 하면서 저작출판 경비를 해결하였다. 그가 펼쳐낸 저작은 중국조선족의 발해사연구에 공백을 메웠고 한국, 일본 등 국외 력사학계의 권위들은 방교수를 “발해왕” “중국발해연구의 최고권위자”라 칭한다. 외적으로 드러나 눈에 반짝거리는것만이 보석이 아니다. 우리가 가져야 함은 마음의 량식이다. 민족의 력사의 발굴, 정리를 위하여 반짝거리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숨긴 곳에서 자기 혼자만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보배로운 걸음을 걸어온 방교수야 말로 참된 보석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만이 보배인양 다투어 나서서 일순간을 반짝하고는 어느새 퇴색해 버린다. 또 어떤 사람은 윗사람에게만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보여진다. 외면보다도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보석처럼 진선미로 꾸며진 삶이 참된 삶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망은 그래도 주덕해를 대표한 개혁개방 전 30년 우리민족의 로혁명가, 과학가, 로력모범들의 덕망과 위훈으로 하여 수립되였다.”는 허상림선생님의 사관에 동감이다. 최근 30년에 반짝이는 우리 민족의 앞니들도 예쁘지만 30년전 우리 민족의 “어금니”들이 그립고 거룩하다. 이 시각 발해사의 발굴, 정리를 위해 일편단심 “어금니”로 일해온 방학봉교수를 좀 더 일찍 “60주년에 만나본 60인”(《길림신문》공화국창건60돐특별기획)에서 정체적으로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오기활                          (《길림신문》2009.5.11.)    
426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댓글:  조회:941  추천:0  2022-11-22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나이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기없는 말이다. 나이는 먹을수록 정신은 강해진다고 한다. 부분적인 기억력이 떨어지는것은 뇌가 쇠약해져서가 아니라 살아가는데 익숙해져서 뇌에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늘 세상을 살피면 백살에도 치매를 모른다.”고 한다. 일본의 “백발”족들은 후반생을 제 2 인생의 시작이라며 사회에 다시 진출한다. 단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흥취를 발휘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생활을 보탬하며 움직일 때까지 일하고 공부한다. “자신이 아직도 젊었음을 과시하고 사회에서 아직도 자기를 수요한다”는 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연길성보호텔 정영채회장은 60을 시작으로 혼자 몸에 연변에 와서 역경을 이겨내며 오늘의 성공을 이룩했다.   유용한 사람은 늙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손자병법에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 한다.”고 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이미 “나를 알고 있다.” 그러니 잘 싸워 승리할 밑천이 있다. 최종승부는 후반전에 난다. 후반전에 승리한 사람이 진짜 성공한 사람이다. 세계 1000명 발명가를 조사한데 따르면 창조력의 평균년령이 74세로 나타났다. 젊음은 선택이다. 미국의 랑만시인(롱뗄로)은 백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시를썼다. 그는 싱그러운 피부를 유지하며 활기찬 여생을 보냈다. 청춘의 비결이 무엇인가는 물음에 “나이가 든다고 생각하기보다 매일 조금씩 성장한다고 생각하는것”이라고 답했다. 로쇠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기를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온다. 남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즐기는 일을 찾아 하는 활동적인 사람이면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드는것은 어찔수 없지만 정신을 젊게 함은 스스로가 선택할수 있다. 늘 웃고 활동적으로 살면 주름은 늘어도 생기가 넘친다.   “신문독서와 즐기는 일로 현대화를 따라 간다”는 김봉구옹(84세)이 이를 말해준다. “인간은 자신의 립장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을 변화 시킬수 있다” 긍정의 힘으로 자기의 선택을 1%만 바꿔도 인생은 달라진다. 한국인간관계교원 정태일원장의 말을 추천한다. “정년을 마치고 발견한것이 있습니다. 60대는 설계의 초반이고 70대는 중반, 80대가 되여야 완성합닌다.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길림신문》2009.1.6.)                    
425    보이지 않는 도움의 힘 댓글:  조회:1917  추천:0  2022-10-17
성공이라는 정상에 올라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과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들의 주위에는 그를 아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황금열쇠는 결코 혼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지 않고 독불장군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자만심이 가득하기에 제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 혼자서는 많은 일들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설사 그런 리기적인 마음으로 운이 좋게 성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얼마를 버틸수 있을가를 본인도 잘 모르고 지낸다. 모두에게 타인들과 서로 힘이 되여주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때문에 모든 일이 잘되여 성공했을 때에는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가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세계적인 명작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친구가  알렉스 헤일리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 친구는 친구의 사무실에 걸린 사진을 보고 의아해 하였다. 사진은 거북이 한 마리가 높은 담장 위에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였다. 그래서 친구는 비양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웬 거북이 사진인가? 이 사진은 자네의 명성과는 걸맞지 않는 초라한 작품이로군.” 이에 헤일리가 대답했다. “례사로 보면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진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는 둘도 없는 사진이네.  거북이는 걸음이 느리고 또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담장 위에 오를 수 없지,. 분명히 누군가 도와준 것이야. 이 사진은 ‘내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만에 빠질 때마다 큰 가르침을 주네.” “거북이처럼 모자라고 부족한 내가 이 높은 자리에까지 어떻게 올라오게 되였는가를 말이야. “이 사진은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굉장한 사람’이가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말일세.” 친구는 ‘굉장한 사람’의 이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뭇사람들의 조그만한 정성이 쌓이고 쌓임으로써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저는 원님의 덕분에 나팔을 많이 불었습니다”는 말처럼... 오기활
424    우리가 마음속에 誠자 하나만 갖고 살면... 댓글:  조회:1978  추천:0  2022-10-01
사람은 권력, 돈, 명예...등 모든 걸 다 갖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도 거의 많은 사람들은 모든 걸 다 갖고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고뇌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이 정신적 만족을 얻었다면 곧 행복한 삶이다. 정신적 만족을 느끼는 자만이 진정 성공한 자이고 진정 행복한 자이며 보람있게 사는 자이다. 고금중외의 인생사를 살펴보면 정신적 만족을 느끼려면 그저 마음속에 성(誠)자 하나를 깊이 뿌리내리고 살면 될것 같다. 성(誠)”은 이쁠 성이요 공경할 성이며 또 살필 성이고 진실 성이며 정성 성이라고 하겠다. “성”은 믿음을 갖고 사는 것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갖고 사는 것이며 주위를 두루 살피면서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거짓도 없이,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의 길”을 걸으며 사는 것이다. “誠”은 말씀 언(言)에 이를 성(成)의 합자(合字)로 “말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誠”자를 좌(左)순으로 보면 “말(言)이 된다(成)”로 이는 일이 잘 풀려 해결될 실마리가 보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誠”을 마음에 품고 살면 모든 일이 수월히 풀리고 겪어야 하는 괴로움에서 절로 풀려 나오게 된다. 또 “誠”자를 우(右)순으로 보면 “성공(成)적인 대화(言)”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성공적인 대화”는 혼자서 떠벌리며 살거나 혼자서 독차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말을 나누며 가진것은 함께 나누면서 성심성의로 남을 돌보며 부드럽고 일관하게 산다면 곧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곧 시작할 때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건성건성 살지 말고 “성”자 하나를 마음에 두고 살면 건강, 행복, 성공을 이룰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열심히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옳게 판단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뜻을 바로 세우고 모든 열과 성을 다해 살아 간다면 바로 당신이 뜻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하늘은 근로한 사람을 도우니까(天道酬勤).   오기활
423    밀려난 “孝”일가? 소외된 “孝”일가? 댓글:  조회:3542  추천:0  2022-08-12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情谊)와 사랑만은 수치로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바다처럼 넓고 하늘 같이 높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이 비록 컴퓨터 만능시대라고 하지만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딱 집어 “이만...한 것”이라고 밝힐 수 없다는 점이 과학문명에 쫓기고 있는 우리가 한 가닥의 구원을 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일전에 도문시 옥림1구 사회구역 물업사무실 사무원이 하는 말이다. “이번에 도문서 크게 소문을 놓게 되였습니다. 글쎄 역병통제기간에 도문서 한 로인은 집에서 자살하고 다른 한 로인은 층집에서 뛰여내리는 투신 자살을 하였답니다.” 실로  놀라운 소식이였다. 필자는 두분 로인의 확실한 자살원인을 알수는 없지만 그들의 자살원인이 밀려난 “효”? 아니면 소외된 “효”일가에  의문이 따른다.  필자가 금년 봄에 목격한 일이다. 어느 날 아침 8시 경에 필자가 도문시법원부근을 지나는데 한 로인이 두 팔목 걸음으로 다리를 끌면면서 큰길을 건너였다. 이에 호기심은 물론 측은한 생각이 떠올라 로인분한테 다가가서  아침부터 어디로 가는가고 물으니 한심하게도 자식들을 고소하려고 법원으로 간단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인을 물었더니 “나는 곡수촌에서 회계, 서기를 지낸 진x x요, 올해 80인데 다섯 자식들이 모두 부모를 멀리 하기에 자식들을 고발하려고 법원을 간다오”라는 것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떠올라 한동안 생각해 보니 이분이  40년 전에 필자가 홍광향정부에서 사업할때 홍광향 홍위촌남새대대(현 곡수촌)에서 회계로 지내던 “말더듬이” 진모모(한족, 당원)였다. 물론 80로인의 말씀만 듣고서 사실의 진가를 알수는 없지만 아무튼 부모가 자식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밀려난” 것만은 확실한듯 하였다. 두 로인의 자살, 그리고 80대 진 옹의 처사는 가정에서 소외당하는 로인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함을 말해주는 충격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학술적인 조사통계에 의하면 가정에 있는 로인이 복지시설에 있는 무의탁 로인보다도 소외감을 더 느끼고 우울증도 심한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는 봉양할 자식이 없는 로인에 대한 양로보호를 운운할 단계를 넘어서 바로 집안에 있는 로인에 대한 경로문제가 사회의 관심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례의가 바르고 “효도” “효순”하며 도덕을 으뜸으로 숭상하던  전례의 미풍량속과 우리의 윤리관이 근대화의 세례에 이처럼 핵분렬로 가치관이 뒤집힌 것을 보면 인간이정의와 사랑에만 안일할 수가 없다는 차가운 느낌이 든다. 사회에 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채찍질하는 세대교체는 무직업 로인층의 증가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로인문제를 사회의 정책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시급한 대책을 강구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에 앞서 경로와 “효”의 현대적 해석과 실천이 보다 선결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필자는 복고적으로 어릴 때부터 유교사상을 주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납득되고 리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양로, 경로, 효도 기준을 계시해 주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도문 ㅡ 연길택시에서 목격한 일이다. 동석했던 60대 남성이 택시기사와 오가는 말이다. 손님:  “연길에 가서 한 20분을 기다려 주오. 내가 일을 보고 인츰 돌아 설테니...” 기사:  “어머니를 보려 간다면서 어찌 인츰 돌아섭니까?” 손님:  “한 20분이면 되지. 엄마가 내가 가면 손을 잡고 울면서 놓지 않소. 남들 보기가 민망스러워서...” 기사:  “그게 바로 부몹지...” 손님:  “11시전에 돌아가서 마작을 놀아야 하오. 어떤 날에는 한 2000원씩 나드오...꼭 기다려 주오...” 그가 내리자 기사가 하는 말이 저 손님이 엄마를 보러 해바라기를 사들고 간다는 것이다. 손님이 내린후 동석한 70대 할머니의 넉두리다. “지금은 별난 세월이오. 자기를 낳아준 에미도 모르니...” “그 마작판이 제 에미보다 더 중할가, 아들의 손을 잡고 우는 제 에미가 그렇게 민망한가? “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에 “글쎄...”라고 답할가 아니면 저런일이 많겠습두...” 어쩐지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효부모”는 있어도 “효자녀”가 없다던 누구의 말이 떠오른다. 오기활        2022년 “로인절”을 맞이하며 (8월 12일)  
422    “최상의 대잔치”에 최상의 영광 댓글:  조회:1932  추천:0  2022-08-10
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 기념해이다. 필자는 자랑찬 주민(州民 )으로 우리 민족자치주 70수연을 열렬히 축하한다.  나는 1963년도에 중학을 졸업하고 귀향농민으로부터 도문시홍광공사,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실에서 공무원, 연변일보기자로 근 60년간을 지냈는데 그중 기자로 근 40년을 활약하였다.   40년간 필자는 연변일보사 특파기자로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를 취재하였고 중한수교의 전기인물 한성호를 비롯하여350여 명의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 들을 인터뷰를 하였고 정년퇴직후에도 많은 신문기사와 언론을 발표하고 연변대학건교70주년 헌례작품으로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조,한문)을 비롯한6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필자는 자치주70주년수연을 맞으며 37년전  “중국인민해방군윁남전투영웅방문단”의 연변방문환영행사를 나의 고향 달라자에서 진향할때 그 행사를 내가 총기획한 그때를 떠올리게 되였다.  그번 행사는 나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최대의 영광이고 자랑이였으니 말이다. 내가 연변일보사 도문시 주재기자로 활약하던 때인 1985년 11월 중순 어느 날, 도문시당위 선전부 조호길 부부장이 나를 찾더니 오는 11월 30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웥남전투영웅보고단”이 연변에 오는데 주에서는 연변을 대표하여 도문시 홍광향 향양촌 달라자에서 영웅보고단 환영행사를 진행하가로 결정했다면서 이 행사의 조직사업을 달라자 출신인 오기자가 맡을수 없겠는가는 물음었다. 이에 나는 그자리에서 동의 하고 조직에서 절대적으로 나를 믿으라고 하였다. 달라자는 당의 개혁개방정책후에 연변의 첫 “부자동네”와  첫 “텔리비죤마을”로 소문을 떨친데서 곡목을 비롯한 전기운, 류화청, 진모화, 왕광미 등 수명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달라자를 방문한 연변의 전형적익 농촌이다.  나는 조부장의 부탁을 맡자 달라자에 주재하면서 촌 당지부, 생산대 대무위원회, 부녀회, 로인협회에 상급의 정신과 기대를 전달하고 그들과  함께 반복적으로 토론하고 이런 원칙과 내용을 제정하였다. 1, 행사를 조선족의 미풍량속으로 ‘최상의 대잔치’를 베푼다. 2, 전체 촌민들이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첫날 새각시를 맞이하듯이 보고단일행을 맞이한다. 보고단의 유일한 녀성인 영웅기장 류효련을 조선족온돌방에 따로 모셔 우리 민족의 첫날색시옷단장을 시킨다. 3, 조선족의 풍속을 살려 큼직한 미닫이문짝위에 잔치상차림을 하고 붉은고추를 물린 삶은 수탉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상을 차린다.      4, 항미원조 전투에 참가여 부상을 입은 최창욱(64세)이 영예군인, 군속(막내아들이 군복무중), 로인협회, 전문호(양계전문호)를 대표하여 환영사을 올리고 잔치상의 첫술을 붓는다. 5, 마을의 젊은 각시들이 전체 영웅들에게 우리 민족 첫날각씨들이 남성들에게 드리는 전통적인 례물로  꽃쌈지와 꽃방석을 선물한다. 6,  조선족의 특색음식으로 “신선로”를 올리고 연변의 신제품을 홍보하고저 도문시 고체연로 화학공장의 최신 제품인 “고체연료”를 윁남 참전용사들에게 선을 보인다. 이런 원칙과 내용으로 “최상의 대잔치”는 조선민족이 친자식처럼 영웅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멋과 맛을 한껏 풍기였다. 29일밤, 영웅기장 류효련에게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첫날옷을 입히고 춤추고 노래하며 맞이하자는 합의는 보았는데 대체 류효련의 키와 몸배가 어떤지,... 이 밤에 어디서 옷을 챙길가... 등등의 궁리늘 돌리던 부녀대장 김숙자의 머리에 불시에 며칠전에 리순임이 새로 치마저고리를 준비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임이는 키가 크고 몸매도 고왔다. 그래서 이틑날 이른 아침 식전에 순임이를 찾아가 사연을 말했더니 순임이도 기뻐하며 자기도 입어 못 본 새치마저고리를 선듯 내놓아 큰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류호련에게 첫날옷차림을 시키고보니 키가 1.73메터나 되는 류효련에게 저고리는 그런대로 품이 맞는데 치마가 무릎치마여서 키골이 장대한 영웅색시의 무릅팍에 동동 매달릴 줄이야... 그래도 ”첫날 색시”는 허물을 모르고 기뻐하며 제법 조선족의 절까지 올리고 “이후에 북경에 갈 때마다 이 조선족옷을 입고 가겠다”고 말했다. 꽃방석과 꽃쌈지를 영웅들에게 선사하기로 했다는 결정이 선포되자 동네의 새각시들이 저마다 농짝을 뒤졌다. 김옥자녀성은 이것저것을 고르다가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시어머니를 졸라서 시집올때 시아버님게 올렸던 꽃방석을 도로 찾아냈고 한복순아주머니는 시집 간 딸의 몫까지 꽃방석을 네개나 준비했다. 부녀대장 김숙자는 새 꽃방석에 주름이 간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산뜻하게 다리미질하고도 성차지 않아 포근한 새솜을 더 놓았다.  환영사와 첫 술잔 “임무”를 맡은 최창욱로인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항미원조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상처를 매만지면서 온밤을 뜬눈으로 새하얗게 보냈다. 이틑날 이른 아침, 최로인은 시집 간 큰딸에게 도문에 가서 제일 고급적인 포도주를 사오라고 부탁하고 로친에게 제일 큰 수탉을 잡아서 통채로 삶고 입에 커다란 붉은 고추를 물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큰상에 오른 붉은 고추를 문 수닭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던 영웅들이 안내자의 번역소개를 듣고서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최상의 대잔치”를 보았다며 열정적인 박수로 사의를 표하였다. 최창욱의 환영사가 끝나자 당년에 항미원조전투에 참가했던 “훌륭한 간부”대표 장옥루가 제꺽 일어나 최령감위 손을 굳게 잡더니 오늘이 뜻 깊은 로전우와의 만남이라며 기자들을 청하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 첫술잔을 받은 “독담영웅” 진흥원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 서더니 “나는 이때까지 상한 눈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만은 최아바위와 함께 술잔을 나누렵니다.”며 단모금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입에 술잔을 대지도 않던 최령감도 두손 들어 술잔을 굽을 내고 나서 “나를 선배로, 전우로 대해주는 젊은 영웅들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고맙다”며 허리굽혀 감사를 표하였다.... 오후 세시경, 영웅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자 뻐스가 “뿡” “뿡”경적을 울리며 몇번이나 시간을 재촉하는데도 군민들은 석별의 눈물을 머금고 끼리끼리 모여서 기념사진을 남기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조선족들은 우리 자제병에게 특수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친인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리를 눈물로 바래겠습니까!  우리들은 돌아가서 잘 싸우겠습니다. 절대로 조선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독담영웅”진흥원이 눈물을 머금고 하는 말이다. 차들이 부르릉 거리며 당금 떠나려는 때였다. “좀 기다리세요, 이걸...” 멀리서 부녀대장 김숙자가 헐금씨금 달려 오더니 “책임자 동무 , 이 치마가 꼬리 치마여서 류호련에게 딱 맞을 겁니다.”며 곱게 싼 치마를 주었다. 그때야 사람들은 어느 사이 에 숙자가 자기가 입었던 비로도치마를 바꿔 입은 것을 발견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사랑만은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도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과 같이 높다고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사가 끝난 이틑날 출근하니 조호길부부장이 기자사무실을 찾아와 “오기자, 어제 대잔치를 정말 멋지고 뜻깊게 조직하였습니다.”며 감사해 하였고 며칠후 도문시당위 반공실 김두국주임이 나를 만나 “지난 행사를 총 책임진 주당위 문교서기(김성화)가 오기활기자가 쓴 “최상의  대잔치”를 잘 보았다면서 도문서 이번 행사를 참 잘 조직하였다는 표양전화가 방금 왔다고 하였다. 최상의 영광은 이뿐만아 아니다.  이듬해  8월초 “최상의 대잔치”에  무상으로 신선로 설비와 연로를  제공했던 도문시 고체화학연료공장 리흥범공장장이 필자를 찾아와 “오기자가 “최상의 대잔치”에 선을 보인 우리공장제품이 “ 8.1특별 선물”로 선정되였답니다”며  자랑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86년 6월 26일, 이 공장의 회계(김광훈)가 일로 하여 성도 에 가는 걸음에 지난번에 “최상의 대잔치”에 성도군구 윁남전투영웅들에게 선을 보인 고체연료를 우(雨)량이 많고 우기가 긴 남방지구에서 홍보하고저 샘풀을 가지고 갔다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중윁전쟁의 제1선 참전군인 성도군구 정치부 군중사업부를 찾아가서 자기네 공장에서 생산하는 고체연료를 “”8.1 선물”로 증송하겠다고 하니 군중사업부 주임이 “성의는 반갑게 받겠지만 지방의 위문품을 받지 말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다”고 하기에  한번만 써보라면서 고체연료샘풀을 넘겨주고 주숙처를 알려주고 돌아 왔더니 이틀후  낯모를 군인 2명이 찿아와서 동무네 제품을 시험사용을 해보고 너무나 좋기에 군구 제1사령원인 료사령원이 “동무네 공장의 위문품을 받으라는 특별허가를 하였습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이 공장에서 지난 7월 24일 자기공장 제품 10상자를  “8.1특별위문품””으로 청도군구에 부쳤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각 필자는 37년전의 “최상의 대잔치”를 떠올리 최상의 영광을 만끽한다. 필자는 이 글을 연변조선족자치주 70수연례의 “최상의 대잔치” 선물로 올리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쟈유(加油)!! 를 높이 웨친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2.7.27
421    내가 본 중국인민해방군 대좌 댓글:  조회:2145  추천:0  2022-08-01
《8.1》 건군절을 며칠 앞두고 필자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 리광남을 만나 1박 2일을 함께 식사하고 주숙한 기회를 가졌다. 리광남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장비부 고급공정사, 전문기술대좌이다.  리광남(1950년 출생)은 1970년에 참군, 1995년 대좌계급을 수여받았다. 그는 선후로 과학연구항목 수십건을 완수하여 1, 2, 3등 공을 기입받고 3차나 파격진급을 하였다. 리광남은 1994년 전군영웅모범대표, 공군사회주의정신문명건설 본보기, 제1차중국청년과학기술창업상 수상자, 북경인민정치협상회의 제10기 위원이다. 2006년 예술영화 《은제비의 수호신(猎鹰守护神)》은 국산 전투기의 고장을 해제하여 막대한 손실을 제거한 업적을 주제로 한 공군 1등 공신인 리광남의 사적과 형상을 노래한 영화이다. 그런데 필자가 만난 리광남은 수수한 평복차림에 류창한 우리 말 사투리를 하는 소박하고 열정적인 《농촌생산대장》이였다.  그래서 필자가 고 물었더니 고 답했다. 부모님들이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 하는 말이 고 하더란다. 그로부터 리광남은 부모님들의 기대에 따라 이 안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자기만이 아닌 그의 두 딸도 덜된사람이 아닌 참된사람으로 키우려고 집에서 조선말을 하도록 강요했단다.   음식을 주문할 때 그는 수수한 민족음식, 평민들이 즐겨마시는 연변산 술 등으로 접대측의 고급술과 비싼 료리를 대체하였다. 우리 둘만의 간단한 아침식사때에도 그는 《오랜만에 맛본 어머니 손맛》이라며 우리 민족의 음식을 제일 좋아하였다. 그리고 식비 결산도 기어코 자기가 나서서 결산했다. 필자는 50년대에 마을에 주둔한 부대사관들을 본적 있는데 군관들의 일상적인 생활 잔일은 통신병 혹은 보위병들이 모두 챙겨드리는것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모한 수장들을 통신병이나 보위병들이 수행하며 여러모로 도와주는줄로만 믿어왔다. 그런데 리광남공군대좌는 호텔에서 손님에게 빨래봉사도 해주는것을 알면서도 자기 손으로 여러 벌이나 되는 옷을 깨끗이 빨았다. 심지어 때밀이 손수건까지 휴대하고 다니며 평민들마저 찾는 때밀이도우미를 청하지 않았다. 필자가 더욱 감동을 먹은것은 그가 《흰 빨래는 자신이 없어 부인에게 의탁한다》며 입었던 흰적삼을 그렇게도 정연하게  차곡차곡 개여 트렁크에 넣는 모습이였다. 《어쩌면 대좌가 그렇게도 세심하고 알뜰합니까?》 《40여년간 해온 군생활 습관이지요.》 실로 한방울의 물방울로 태양을 볼수 있었다. 리광남의 고향사랑, 민족사랑은 보통정도가 아니였다. 그는 번마다 인터넷에 오르면 습관적으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연변인터넷방송 순으로 신문공부를 한단다. 그리고 길림신문은 집에까지 배달된다면서. 지금 화룡시경제고문을 맡은 그는 이번 걸음에도 피뜩이나마 화룡과 룡정에 다녀왔다며 연변의 발전에 일가견을 내놓았다. 이번 자치주 60환갑에 몽골족이 축가를 부른다는 필자의 말을 듣고 《그러면 안되지, 그래도 춤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는 민족으로 소문난 우리 조선족이 주제가를 불러야 한다》며 당장 구체정황을 알아보겠단다. 리광남은 자기의 모교도 잊지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리는 시각부터 스케줄이 촘촘이 째였지만 그는 아무리 바빠도 새 교사를 짓는다는 건공소학교를 찾아 봐야 한단다. 모교를 사랑하고 모교의 건설에 한몫을 담당하는것은 학생의 직책이라면서. 내가 만난 공군대좌는 간고소박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조선족의 중국인민해방군으로 초심을 잊지않는 학습형의 비범한 조선족 공군대좌였다. /오기활   [ 길림신문 ]:  2012-07-30
420    자치주 창립 60돐에 선물하는 나의 기자생애 30년 댓글:  조회:1569  추천:0  2022-07-24
        9월 3일은 우리 주 환갑날이다. 이 기꺼운 명절을 맞아 필자는 영예로운 주민(州民)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산파이며 초대주장인 주덕해동지를 심심히 추모한다. 1984년 5월 12일, 중공중앙 호요방총서기는 연변을 시찰하며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의 아주 훌륭한 동지이며 조선족의 수령이다》, 《모주석과 주총리는 여러번이나 주덕해동지를 훌륭한 동지라고 말씀하셨다》며 연변에 주덕해기념비를 세울것을 지시하였다. 1986년 7월 3일, 《주덕해기념비》제막식에서 당중앙을 대표해 황광학동지는 《주덕해동지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걸출한 대표이며 중국조선족인민들이 공인하고 경모하는 지도자이며 우리 나라 소수민족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이 60년이라면 필자는 거의 30년을 기자로 지냈다. 이는 자치주가 30년간 필자를 기자로 키웠다는 말이다. 오늘 필자는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나는 이렇게 기자사업을 하였다》는 내용을 자치주 환갑에 올리는 선물로 올린다. 2006년 11월 21일, 나는 《기자와 꽃》이라는 글을 길림신문에 발표하였다. 아래는 《기자와 꽃》전문이다. - 11월 8일은 기자절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연길시당위에서 기자절 축하로 드린 생화바구니가 신문청사 로비에서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 시각 나의 기분은 1988년 2월 14일, 도문시 김종수시장이 전 시 년말총화대회에서 《오기활기자를 표창할데 관한 도문시인민정부문건》을 읽으며 《연변일보사 오기활기자에게 기공(記功)표창을 한다》고 선포하던 그때만큼 기쁘고 감사했다. 나는 언제부터 기자를 꽃에 비교한다. 지난 1964년 연변인민방송국 서명준기자가 사회주의공작대로 우리 마을에 파견되여왔다. 그때 서기자는 우리에게 많은 세상사를 들려주었다. 나는 기자가 정말 부러웠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한대로 된다》고 하더니 서명준기자를 만나 꼭 20년만에 나는 행정승진을 포기하고 연변일보사 도문시 주재기자로 입선되였다. 나는 기자를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한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해사, 《신》(상급)의 뜻과 인간(백성)의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는 《천사》라고 말한다. 바로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거금을 주고 살수 없다는 우량고추종자(황관단)를 무상으로 기증받아 연변의 남새생산발전에 일익을 주기도 했다. 또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엄동설한에 강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원한 도문시양로단의 고만길의 영웅적사적을 신문에 발표하여 전 연변은 물론 전 성교통분야에서 《뢰봉학습 우수로동자》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를 일으킬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자의 사회적책임감으로 연변의 《이웃절》을 발기하였다. 나는 기자를 꽃에 비긴다. 옛날 하늘의 《신》이 천사를 불러 지상에서 3가지 아름다움을 보고 돌아오라고 했다. 천사는 천상과 손색없는 아름다운 꽃과 어린아이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지상의 아름다움으로 선택하였다. 꽃은 지상과 천상의 미의 상징이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다. 꽃은 묵묵히 향기를 뿜는다. 꽃은 철을 어길줄 모르며 음지와 양지를 탓할줄 모른다. 눈속에서도 어김없이 약속대로 제철에 핀다. 아름다운 련꽃은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른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삭막하고 어두울 때 꽃을 보면 저도 몰래 부드러운 위로를 받는다. 사색, 사랑, 희망, 용기를 주는 꽃은 인생의 영원한 오아시스다. 나의 좌우명은 《먼저 인간이 되고 후에 기자로 되자》이다.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로 되지 말고 참다운 언론인이 되자, 독자들의 가슴속에 메아리를 치는 글을 쓰며 꿈틀거리는 사건현장에서 십자가의 참된 천사로 되자.) 이는 내가 기자사업을 시작한 초심이며 기자로서 지켜야 할 도덕이며 평생을 지켜갈 맹세이다. 필자는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소박하고 부지런한 손이 되여 언제 어디서나 오염을 모르는 《련꽃기자》가 되려는 다짐으로 이 밤을 설친다. x x x 실로 그랬다. 나는 지난 30년간 수십만자에 달하는 기사를 써내 연변의 물질문명건설과 정신문명건설에 기여를 했다. 아래에 《기자와 꽃》에서 곁들었던 세가지 실례로 이를 증명하련다. 먼저 고추종자이야기다. 1987년 1월 10일, 《연변일보》는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는 나의 기사를 톱기사로 발표했다. 기사 전문이다. -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 당장 청년들을 묶어세워 문화실이라도 꾸려야 하지요.》 지난해 순수입을 만원이상 올린 도문시 홍광향 향양촌 리명달농민이 지난 12월 26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농민들의 절박한 수요는 무엇입니까?》 《과학기술전수와 기술정보이지요. 전 시적으로 우리네 오이생산량이 제일 높은 축입니다. 그런데도 지난해에 포기당 오이가 60여개씩 열렸지만 대부분이 절로 떨어져 결국 한포기에서 10개밖에 뜯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제문제를 가지고 과학기술부문에서 단위당 수확고를 높일데 관한 기술을 전수해준다면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내가 어느 잡지에서 보았는데 산동성 이남지구에 외국에서 인입한 고산량 고추품종이 있다는데 고추 하나 무게가 250그람 내지 750그람씩 된답니다. 이런 우량종자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면 어느 농민이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기자의 물음에 주는 보통농민의 갈망적인 대답이다. x x x 이 기사가 발표된 후 필자는 이 신문기사와 함께 조선족농민들의 간절한 념원을 담은 편지를 산동성 이남현남새연구회에 부쳐보냈더니 1987년 2월 16일에 이 연구회의 주순(朱順)이 조선족에 대한 열렬한 기대를 담은 간단한 편지와 함께 다 팔고 더는 없다며 30여개의 귀중한 미국품종 《황관단》고추종자를 보내왔다. 기자로서는 너무도 뿌듯하였다. 나는 이 고추종자를 리명달농민에게 전달했다. 몇년간 노력으로 리명달이 번육한 《황관단》고추는 매 평방메터당 10킬로그람의 고산량을 따내 동네를 놀래웠다. 《황관단》고추의 한개의 평균 무게는 450그람, 큰것은 750그람이나 되였다. 이로 하여 주변에서 《오이보다 더 무거운 고추가 나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입소문으로 퍼지며 이 고추가 길림성우량고추품종에 평선되였다고 했다.   1989년 6월 11일 연변일보 1면에 실렸던 《황관단》고추 보도   다음은 고만길에 관한 보도다. 1987년 3월 13일, 연변일보는 1면 톱기사로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라는 제목으로 나의 글을 실었다. 글은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조선족로동자 고만길이 1986년12월 24일 엄동설한에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낸 감동적인 사적을 소개하였다. 그때 필자는 40여일간 고만길이 걸어온 발자국을 밟으며 근 100여명의 목격자를 취재하였다. 고만길은 1971년이후 몇년간에 선후로 4차례나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했고 남을 위하여 가는 곳마다 수두룩한 좋은 일을 하였으며 5차례나 선진생산자로 표창을 받았다. 1987년 3월 10일, 중공도문시위와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고만길에게 《자기를 잃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그에게 1등공을 기입하였다. 동년 8월 7일, 중공연변주위와 주인민정부는 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자기를 잊고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1988년 5월 28일, 길림성교통청은 도문서 전 성 교통계통표창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뢰봉학습우수로동자》란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도문시인민정부에서 필자를 기공(記功)표창하자 연변일보가 《본사 력사에서 본사기자가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기는 오기활기자가 처음이다》는 소식을 발표하였다.   고만길취재를 마치고(뒤줄 왼쪽부터 고만길, 필자, 도문양로단 당지부서기 박봉구) 올해는 뢰봉 타계 50주년이며 모택동주석이 《뢰봉을 따라 배우자》는 제사를 쓴 49주년 기념해다. 중국공산당 제17기 제6차 전체회의에서는 《뢰봉을 따라배우기 활동을 깊이있게 전개할데 관한 결정》을 지어 뢰봉을 따라배우는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 핵심가치체계를 구축하는 필요한 고리이며 사회주의 문화강국을 건설하는 유력한 조치라고 하였다. 지난 2월 29일 필자는 당의 호소에 따라 25년만에 두번째로 고만길을 취재하고 《80년대 연변의  오늘은 어떻게 지낼가?》는 기사와 함께 당년에 연변일보에 실렸던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란 기사의 전문을 인터넷길림신문에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기사전문을 인민넷(조선문판)을 비롯한 흑룡강신문, 연변인민방송국 등 신문매체에서 전재하였다. 그 다음은 《이웃절》발기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세포단위다. 가정과 가정, 이웃과 이웃간 화목은 조화사회를 건설하는 기초의 기초의 기초다. 그런데 도시의 거주문화변화와 농촌호도거리보급은 도시와 농촌에서 《이웃사랑》이 식어가는 현실을 초래했다. 이런 실정을 파악하고 필자는 2005년 10월에 《이웃절을 내오자》는 글을 《지부생활》편집부에 보냈다. 글에서 필자는 《이웃절》이 있게 되면 사회공덕, 후대교양, 민족단결에 유리하고 간부와 백성 관계를 개선하는데 필요하며 빈부차이를 줄이는데 리롭다는 근거를 밝혔다. 지부생활편집부는 조화사회건설에서 《이웃절》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때에 가늠하고 필자의 글과 함께 편집부의 글을 실었다. 지부생활편집부는 《이웃절》전문란을 설치하고 전문기자를 배치하는 등 여러 가지 조치로 《이웃절》을 보도하고 《이웃절》에 따르는 지상토론을 벌였다. 지상토론에서 지부생활편집부는 《편집자의 말》2편, 문자기사 29편, 사진보도 19폭을 발표, 독자, 사회구역, 주, 시 관계부문 책임자들이 참여한 《이웃절좌담회》를 조직하며 《이웃절》토론을 종심에로 이끌었다. 2006년 4월 11일, 연길시 북산가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은 지금 연길, 왕청, 룡정, 돈화 등 시와 현에 파급되여 《이웃절》이 자원적이고 대중적인 《필요명절》로 부상, 몇년전의 《친척잔치》로부터 오늘의 《동네잔치》로 파급되고있다.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은 연변서 연길시 소영진 인평촌,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의 《이웃절》활동을 취재, 정치문화부 원건달부주임은 수십년간 민족보도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이라며 인민일보에 연변의《이웃절》을 대서특필하였다. 나의 30년 기자생활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키워낸 30년이다. 나는 기자사업을 무한히 사랑한다. 나는 연변일보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지금까지 길림신문사에 초빙되여 1선기자로 활약하고있다. 2009년 11월 10일, 나는 기자절 10주년을 맞이하여 《기자정신만세!》를 발표했다. 필자는 글에서 《엄격한 자기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 출중한 자신감, 벼슬을 싫어하는 , 거기에 평생 분투한 정신이 오늘의 기자정신을 키웠다》고 고백했다. 언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자치주 환갑에 필자는 30년간 기자선문집인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오기활기자가 만난 사람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다-오기활 일사일언》을 책으로 출판해 《환갑선물》로 하고저 원고를 연변인민출판사에 교부했다. 나는 이 책이 출판되면 연변의 두가지 문명건설에 단 얼마만의 힘으로라도 될것임을 굳게 믿는다. 나는 《비문없는 벼슬》선배님들을 본보기로 《평생기자》에 도전하며 평생을 《피줄속에서 잉크 흐르는 기자》로 될것임을 다시금 다져본다. 이 글을 맺으며 힘차게 불러본다. 연변 화이팅! 기자정신 만세!   오기활        길림신문              2012-09-17  
419    품격 있는 인간으로 가는 첫걸음 댓글:  조회:2506  추천:0  2022-07-13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상치 못했던 이(일)들이 큰 도움을 준 경우가 많았다. 사실 세상일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아군이 되고 래일에 또다시 적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가능하면 많은 이들로부터 호감을 사두는 게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호감을 살 수 있을까?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인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갖고 있다고 해도 서로 사이에 대화가 없으면 알 수가 없다. 대화를 하려면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서로 알기 전에는 각기 다른 섬과 섬으로서 그 섬에 다리를 놓는 것이 바로 인사이다. 이런 실화가 있다. D라는 영업사원이 어느날 수차나 다녔지만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던 거래처에 또 다시 갔다. D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중년 사내가 허겁지겁 뛰여오는 것이 보였다.  D는 열림 버트를 누르고 기다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날이 덥지요?” 중년 사내는 D를 힐끗 돌아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D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후 이 회사의 자재 과장을 찾아가 자기 회사의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열심히 제품카탈로그를 보이면서 설명을 했다. 그러나 자재 과장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 오늘도 틀렸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좀전에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D는 다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니,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 우리네 부사장님을 어떻게 아세요?” 자재과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놀란 D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자 부사장이 D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자재 과장의  설명을 들은 그는 잠시 D네 회사의 카탈로그를 살펴보았다. “김 과장, 이 회사에서 생산한 자재라면 믿어도 돼.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직원들이 생산한 자재거든.”   D가 일 년 동안 드나들고도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던 회사와 단숨에 거래를 틀수 있게한 것은 화려한 미사려구도, 여러 차례의 접대도 아닌 단 두번의 인사였다. 성공한 사람은 대개 인사를 잘 한다고 한다.  1990년 11차 북경아세아경기때에 필자가 경험한 사례이다. 그번 기회에 한국 통일원에서 중국 연변일보사에 무상으로 기증할 채색텔레비와 사진기(각각 10여 건)를 갖고 왔다며 연변일보사 림장춘부사장이 북경아세아경기 취재팀 부주필 팀장에게 한국 통일원의 서씨를 찾아가 한국에서 보내온 기증품을 찾으라고 하였다. 이에 팀장이 기증품을 찾으려고 북경공항 해관에 갔더니 공항측에서 상당한 액수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하기에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림장춘부사장이 그 임무를 필자에게 맡겼다. 그래서 한국통일원 서씨와 함께  직접 북경공항해관관장실을 찾아갔더니 사무실의  문은 열려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것으로 알고 기다리던중 관장사무상의 유리밑에 깔려 있는 “전국우수해관관장회의 기념사진”을 발견하였다. 필는 혹시 그 사진에  도문해관관장이 있는가는 호기심에서 사진을  한참 보고 있는데 키골이 장대한 녀성이 들어왔다. 필자는 그분을 관장으로 짐작하고 "관장님 안녕합니까?"며  허리굽혀 인사를 올리고 나서 “내가 이 사진에 혹시 도문해관의 염홍록과장(전국 해관일꾼모범임)이 있는가고 함부로 사진을 보는 중입니다”며 미안함을 표했더니 그 녀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나와 함께 사진을 보면서 간단한 설명을 하였다. 나는 바로 이 때를 기회로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그 녀가 하는 말이 “기증품”과 “증정품”은 의미가 다르다고 해석하고 나서 “원래는 얼마의  세금을 내야 하는데 오늘은 세금을 내지 말고 그냥 찾아 가세요”라고 하였다. 그때 한국통일원의 서씨는 "오선생이 신문사 령도분이 못해 낸 일을  해냈습니다”며 정말 대단하다며  기뻐하였다.  .  인사란 한마디로 인간생활의 “상식”이다. “동의보감”에 “인사는 사람으로서 할 일과 해야 할 일이다”고 하였다. 인사는 노력하면 누구나 다 잘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인사를 아부로 여기거나 느끼하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성공은 커녕 사회 생활을 할 자격조차 없다. 출군할때 아내에게 “여보, 갔다 올게, 감사해”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일찍 출근하시네요.”  회사에 도착하면 “안녕하세요,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 따라 얼굴이 환해 보이시네요” “아마도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 ...등 고운말로 인사 하는 습관을 기르자.   훌륭한 인사는 품격있는 인간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 하겠다.   오기활  
418    자택양로를 선도하는 《의창가호》(医创家户) 댓글:  조회:2524  추천:0  2022-07-10
‘양로’는 로인을 봉양하는 일로서 고령화시대 뭇사람들의 보편적인 관심사로 되고 있다 . 느닷없이 들이닥친 코로나19사태로 하여 많은 로인들이 병을 보이는 면에서 불편을 겪는 실제문제에 립각하여 연길시 익수당종합진료소(益寿堂综合门诊) 리철범 원장은 ‘의창가호'(医创家护)라는 양로브랜드를 개발하고 경영에 들어섰다. 의창가호는 병원을 기반으로 하여 가정도우미와 온라인, 오프라인 방문 및 병치료를 일체화한 회사차원의 양로브랜드이다. 이 품목은 엄격한 전문양성훈련을 거친 가정보호사(가호사)와 심리자문사들로 봉사가 필요한 로인들이 자택에서 생활보호와 건강회복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종 생활기구 수리며 생활용품 구매, 비용납부 등 일상 처리를 대신해주고 로인들의 식사와 약 복용을 관리해 드리면서 로인들로 하여금 자택에서 편안한 양로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의창가호의 총경리 일을 맡고 있는 리경옥 녀사는 “자식들이 부모들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가 불편한 점이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전문적이지 못하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여 병원을 기반으로 로인들의 건강을 책임지면서 어떻게 로년생활을 안전하게 편안하게 의미있게 보내게 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에서 10년 생활했고 귀국하여 대련에서 16년간 살면서 중국의 전문학교들과 손잡고 간호사며 가호사를 양성하여 일본양로시설에 보내는 사업을 해 오던 중 년로한 친정어머니를 돌보러 연길에 와 눌러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의 선진적인 양로시스템과 이곳 양로현실을 비교해 보면 ‘도와주는 것’과 ‘도맡는 것’이 전체적인 차이”라고 한다. 일본은 최대한 로인들의 자립성을 강화하고 못하는 부분을 도와주면서 될 수 있는 한 로인들을 고무격려하여 자립하도록 한다.그리고 식단을 보면 로인들마다 다르고 매끼마다 다른 것에서 참 존엄있고 인격 있는 대우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은 가정보호사들이 모든 일을 도맡아하면서 로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하고 또 그것을 서비스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의창가호는 이런 차이를 고려하면서 아픈 로인들한테 치료를 거쳐 될 수 있는 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서비스를 하려는 가호사들과 서비스를 받으려는 로인 쌍방에 대한 교육을 우선 하면서 쌍방의 존엄과 인격을 수호하고 보호받도록 하며 쌍방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적합한 관리를 한다. 다음은 가호사들의 마음가짐, 기교, 기능을 가르쳐 전문성을 높이고  ‘보모'나 ‘시중드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도우미'로서 로인들이나 한 가정을 보호하고 문화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제2인생을 산다'는 인식을 바꾸도록 교육을 한다. 또한 서비스를 원하는 로인들 가정방문을 하고 로인들 신체상황, 경제조건, 가정환경을 체크하여 서비스가 필요한 부분과 합당한 시간대며 양로방식을 합의하고 3방계약을 맺고 관리를 진행한다.  가정보호사는 남녀를 불문하고 50세로부터 70세에 이르는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이 년령대에는 시간이 많은 분들이 많다. 50세-70세의 건강한 분들을 교육시켜 이런분들이 지금 80세-90세 로인을 섬기면 자신들도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고 또 그들이 80-90대가 될 때면 전문성이 높고 존엄있고 인격있는 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란다. 현재 의창가호에서는 로인들의 실제상황에 따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주1차서비스- 일주일에 한번(월 4차) 씩 영양음식 마련, 약 사용관리, 청소와 목욕, 빨래를 책임지며  기타 비용 대리납부,각종 기구 수리. 둘째, 반자립양로- 청소, 빨래, 목욕, 음식 서비스 제공, 수리, 구매, 비용납구 대신 처리, 필요시 의사 왕진 치료.  전문 가호사, 건강관리사, 심리자문사 배동하며  8시간-24시간씩 매주 월요일-토요일. 셋째, 완전보호양로 –청소,빨래, 목욕, 대리 사무처리, 영양음식 마련, 약 사용 관리와 지도, 필요시 왕진 치료. 전문가호사, 건강관리사, 심리자문사 배동, 매일 8시간-24시간 월요일-토요일까지.  넷째, 일탁식(日托)양로-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 저녁 두끼 식사, 물리치료, 문체활동, 저녁 귀가. (현재 환경조건 마련 중) 다섯째, 룸메이트식(合伙) 양로- 3명, 4명 로인들이 한집에서 보호사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가정적인 생활을 한다. 청소, 빨래, 영양음식제공, 약 사용 관리와 지도, 필요시 왕진치료. 전문가호사, 건강관리사, 심리자문사 배동, 로동시간 (8시간-24시간). 리경옥 총경리는 “새로운 양로문화를 만들어 어머니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들까지도 쭉 이런 인격있는 양로를 받고 싶어 스타트를 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양로문화를 바꾸는 일은 현시대인들의 사명이고 이런 효문화를 실천하는 것 역시 신생사물로서 사회 각계의 지지와 성원이 필요하며 많은 봉사자분들이 동참하여 함께 노력할 것을 권장한다. /김청수기자                                       길림신문  2022-04-21
417    알고 보니 선물이란? 댓글:  조회:2327  추천:0  2022-07-01
우리가 살다보면 선물 문화속에서 “이상체험”(异常体验)을 하게 된다. 인생에서 갖는 “평상체험” 시간을 속(俗)시간이라고 하면 새옷을 갈아입고 변신을 하는 “이상체험” 시간을 성(聖) 시간이라고 한다.  선물은 바로 이 성(聖)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변신의 대가 라고 할 수 있다. 선물의 어원은 신령의 제사를 지내는 제상에 올린 제물을 뜻하는 선물(膳物)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즉 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신의 은총이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제상에 오른 “膳物”을 신령과 더불어 나눠 먹는 공식(共食), 즉 제사를 지낸 후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음복(饮福)이란 절차가 바로 이것이다. 이로부터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가족과 친지들에게 신의 은총을 고루나눠 주기 위해 그 제상에 올랐던 제물을 갖고 돌아가 고루 나눠 먹었던 행위가 선물(膳物)인 것이다. 즉 평상시와는 달리 신과 접했던 “이상체험”(异常体验)으로 평등하게 나눠 갖는 행위가 선물이였다. 우리가 려행을 하고 돌아올 때에 반드시 선물을 사들고 오는 관습도 바로 외지에 가서 겪은 새롭고 신기한 체험을 가족이나 이웃, 친지와 고루 나눈다는 제사의 선물에서 유래된 공동체 정신의 발현이다. 그 선물은 “이상체험”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과의 거리감을 메우는 심리적이고 사회적 효과를 나타낸다. 이로보아 선물은 소공동체 속에서 평등 정신의 표현인 동시에 제한된 좁은 생활마당에서만 살아 았던 우리 민족이 발상한 문화의 발명이라 하겠다. 하긴 서양사람들도 려행지에서 기념품을 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려행 기념이나 추억을 위한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 우리 민족의 선물처럼 “타인지향적”(他人志向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에 마을마다 향약이라는 규약이 있어 선물 문화를 규법으로 정해놓기끼지 했다고 한다. 곧 마을에 어려운 사람이나 불행을 당했거가 애경조사 등 큰일이 있으면 응분의 출손을 하도록 가장 리상적인 제도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땅 한뙈기 없는 좁은 땅에서 가난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위화감이 없이 살아올 수 있은 것이 바로 선물 문화의 체질화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화가 되면서 이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 정신이 이지러지면서 선물 문화가 오염되여 선물과 뢰물의 한계가 모호해진 것은 근대화가 물고 온 불행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독일문자의 선물에는 膳物과  毒이라는 뜻도 지녔다고 하니 선물과 뢰물은 바로 이웃이라는 말이다.  선물이란 받지 말아야 할 한계를 분명히 지킬 때만이 제노릇을 한다. 이에 벌써 중국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자는  “칠불수” 의 기준으로 받아야 할 선물과 받지 말아야 할 “선물”울  갈라 주었다.  묵자의 “칠불수”다. 1, 일불수계(一不受戒): 나의 신분이나 명예, 그리고 직위가 승진때 선물은 받지 않는다. 2, 이불수계:  나 자신의 길흉사가 아닌 처계, 모계, 등 방계의 길흉사에 들어오는 선물은 받지 않는다. 3, 삼불수계:   내가 상대방이 판단으로 아쉽고 상대방의 리득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였을때 그 상대방이 보내는 선물은 받지 앟는다. 4, 사불수계: 인정에 의한 리해를 초월한 선물이 아니라 나의 권한을 의식한 선물은 받지 않는다. 5, 오불수계: 나의 명예나 명분에 결함을 가져오거나 꾸중거리 선물은 받지 않는다. 6, 륙불수계: 내가 돌려받아야 할 적정하고 응분의 값보다 한결 많고 큰 금품의 선물은 받지 않는다. 7, 칠불수계: 선물을 보내는 명분이나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나 선물 심부름한 사람이 선뜻 그러하리라는 리유가 분명하지 않을 때 받지 않는다. 필자는 묵자의 선물 “칠불수” 지혜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하는 기준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본다.  오기활          
416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웃을 줄도 모른다” 댓글:  조회:2529  추천:0  2022-06-14
올 5월 16일(음력)은 아버지(오호준)탄신 105주년 기념일이다. 아버지는 1917년 5월 16일에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읍 이포면 장덕리 장덕동에서  탄생하였다. 1920년대 초에 할아버지(오창범)가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살길을 찾아 아들 3형제(오광준, 오호준, 오형준)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첫 삶터로 도문 곡수에 잡았다가 량부모가 돌아가자 백부(오광준)님이 두 동생을 데리고 “오씨네동네”로 불리는 강건너 마을인 달라자에 이주해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1947년 5월 9일, 30살에 나를 낳고 1957년 1월 12일 40살에 불행하게 사망되였다. 오늘 필자는 지난 5월 18일(양력) 가정의 날을 기념하여 쓴 수필(응모작품 27)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웃을 줄도 모른다”를 아버지 탄신 105주년을 기념하여  하늘나라에 계시는 선침님과 뱀부님을 비롯한  모든 고인분들에게 올리면서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빈다.   .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웃을 줄도 모릅니다”                                                                                      (글:오기활 랑독:윤련순 음악배경:변소화)   “인생 70고래희”라는데 나는 어느덧 70 대중반이지만 지금도 신사물에 호기심이 많고 언행이 천진하다.  그런데 요즘에 셈이 든다고 할가, 종종 지난날을 돌아보며 “내가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자문해 본다.  그런 와중에 “나는 눈물도 헤푸고 웃음도 헤푸게 살아왔다”는 엉뚱한 답으로 남들을 당황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 사나이가 아니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걸려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웃을 줄도 모른다”며 자기를  변명한다.  지나온 인생을 반추해보면 나는 확실히 울음도 헤프고 웃음도 헤프게 살아왔다. 어느 신경정신과 의사는 “남자들이 녀자들보다 알콜중독자가 세 배이상이 됨은 남자들이 녀자들보다 눈물을 자주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라며 ”남자들은 알콜의 도움으로 자신의 분노나 슬픔을 해소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알콜의 도움이 없이도 웬간한 자극을 받기만 하면 순간사이에 눈물을 흘린다.  . 나는 2살에 엄마를,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16년을 큰집에 얹혀서 5촌 12명이 한구들에서 살았다. 그래서 제 설음으로 흘린 눈물이 많았겠다는 생각이다. 1   먼저 곡문(哭门)으로 들어간다 나는 지나 온 설음으로? 아니면 동정심이 많아서? 또 아니면 소박한 계급감정에서?.. 아무튼 “뢰봉”영화도 손수건을 손에 쥐고 봐야 했다.  나는 부모사랑갈증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얼굴도 기억이 없는데도 엄마생각이 점점 더 나면서 어릴 때 누님들을 따라 부르던 노래로 혼자서 “엄마생각”을 부르려고 해도 애절한 노래말에 목이 메여 한번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엄마생각”의 가사이다. 1절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죽어 나비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여 그때마다 안아주세요 2절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서 피가 흐른다  .... ...   1절 시작부터 가슴이 저리고 2절은 목이 메여 계속하여 부를래야 부를 수가 없었다. 곡(哭) 자랑을 할려니 나에게는 두 번이나 대성통곡을 한 과거가 있었다. 한 번은 내가 큰집에서 한집식구(食口)로 16년을 살다가 1975년 국경절에 결혼하고 이듬해 1월에 큰집에서 세간을 나던 날이다. “한집식구”란 한 지붕을 쓰고 사는 한집식솔이 한구들에 앉아서 한가마 밥을 함께 먹는 食口를 말한다.  食口란 먹고 말하는 입(口)을 말한다.  입은 살아있는 인간수를 계산하는 제1 인체구조이다. 하기에 한집의 식솔이 얼마냐를 “그집에 食口가 몇이냐”로, 한 나라 사람이 얼마냐를 “그 나라 사람의 입이(人口)이 얼마냐?”고 묻는다.   그러니 내가 큰집이란 대가정에서 “한집식구”로 사랑과 대접을 16년이나 받다가 래일부터 “딴식구”로 딴가마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생각할수로 설음이 앞서며 눈물이 앞섰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한집식구가 남이 되는 시작이 형제들이 결혼하고 세간을 나는그 날부터다”고 하였다. 뜻인즉 친형제간이 한집에서 살다가 결혼하고 세간을 나면서부터 촌수가 1촌, 2촌, 3촌. 4촌, 5촌, 6촌..,8촌...12촌....으로 늘어나면서 나중에 촌수가 멀어져 남이 된다는 것이다.  친형제가 남이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처음에는 무섭게 들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해 보니 그 말씀이 도리 있고 정말 맞는 말씀이였다 그러래서 오늘에 그 말씀을 처으로 실감하니 큰집에서 뼈가 굳고 살이 찐 내가 래일부터 ‘딴식구”로 “남”이 되기 시작한다니 나로서는 대성통곡을 안 할래야 안 할수가 없었다. 세간 나던 날 오전 11시경, 나는 소수레를 몰고 땅땅 얼어붙은 북강을 건너면서 서북쪽에 자리한 큰집을 향해 “형님에!ㅡ 형님에!...형님에!” 하며 애절하게 부르고 또 부르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밖에도 내가 대성통곡을 하는데는 이런 원인도 있었다. 큰집의 사촌형님(오기풍)은 나의 명실공한 엄부형(严父兄)이였다. 왜냐면 나와 형님의 년차가 18년, 형님과 아버지의 년차 역시 18년이니 형님은 확실하고 당당하며 엄숙하한 나의 아버지다.  마른 명태마냥 몸이 깡마른  형님은 슬하에 무남3녀로하여 백부님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부터 “서방을 빨리 가서 아들을 낳아 큰집에 양자로 맡기고 형님의 앞을 세우라”고 재촉 하였다.  약한 다리에 침질이라고 형님은 중년에 신장병을 치료하다가 마이시링(链霉索)중독에 걸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걸음까지 휘청거려 동네서 약자의 취급을 받았다.  70년대는 나라가 계획경제때여서 거의 모든 생필품이 공급제였고 설명절때 돼지고기까지 분배하는 시대에 큰집에 내가 없으면 동네서 남자없는 집으로 없이움을 당하는 것 같아서 큰집의 이 모든 처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큰집의 신세가 측은하고 형님이 불쌍하고 가련하였다. 그래서 큰집쪽을 바라보며 형님을 부르고 또 부르며 대성통곡을 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대성통곡사는 아들의 결혼때다.   아들의 결혼에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했다면 많은 청자들이 의문스러워 했고 친척이나 친지들 마저 믿을수 없단다.  시집가는 딸의 결혼도 아니고 새 사람을 데려오는 아들의 결혼식에 기뻐서 춤이 절로 나올 판에 대성통곡을 했다니 말이 되느냐고? 나는 일본에 간지 10년이 되는 아들이  2010년 9월16일에 결혼하러 집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으로 며칠전부터 밤을 하얗게 보내였다. ㅡ조실부모로 하여 아들이라고 못 불려본 내가1976년10월 28일에 금쪽같은 아들을 낳고  아버지로 되였으니 얼마나 기뻤던가.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가 매년 제사날(음력 10월 20일)이면 흰 눈이 내리기에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가 우리에게 흰이불을 하사했다며 기뻐했는데 글쎄 아들의 출생에 때아닌 10월에 아침부터 큰눈이 내리더니 12시경 아들이 출생하자 내리던 눈이 멎고 중천에 붉은 해가 걸렸으니 이는 정녕 장손의 출생에 어머니가 기뻐서 흰이불을 하사한 것이라며 얼마나 기쁘던지....  ㅡ아들의 예비이름을 12이나 지어놓고 한자 한자씩 해자하다가 백두대간 불로송이 떠올라 茂松이라작명하고 그 뒤를 茂자돌림으로 큰 조카(동생의 큰 아들)의 이름을 茂成, 둘째 조카의 이름을 茂林으로 3형제의 공명이 松成林이라 그야말로 명실공한 백두대간의 불로송으로 진짜 뿌듯하였다. ㅡ아들의 소학교 입학부터 중학교까지 부자간이 함께 반급벽보를 꾸렸고, 아들의 특장과 흥취를 살려 손품금도 사주고 서법이며 글짓기에 인도를 하면서...  ㅡ북경아세아운동때 연변일보 특파기자로 취재를 떠나던 날 아들이 부탁하던 로라스케트를 사느라고 길치매인 이 애비가 얼마나 동분서주 했던가...... ㅡ그리고 부모들의 가슴속에 잊을 수 없는 아픈 일로 아들이 애비의 휴대용록음기를 몰래 갖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고 독선적인 이 애비가 겁나서 부모들 모르게 록음기를 사겠다고 부모 몰래 16살에 도문시립병원에 다니며 1200그람의 피를 팔았다는 소식을 남을 통해 뒤늦게  알고 이 애비가 울분이 터지는 가슴을 짓누르며 시립병원 원장을 찾아가서 “미성년의 피를 사서 시립병원이름을 콱 날리라”며 울음으로 호소하던 날이 어제 같은데...  ㅡ아들이 일본류학을 갈때 엄마는 흥진촌에 가서 송아지 한마리를 사서 그자리에서 잡고... 소고기를 삶아서 말린 고기가루로 짐을 꾸리면서  배고플때 아무때나 물에 풀어 먹으라고 당부하고는 떠나는 아들에게 곱게 포장한 국기를 주면서 어디서나 애국심을 간직하라고 당부하던 그모습...  이 애비가 미국의 성공대가 ㅡ 라폴레온 힐이 쓴 책 (성공의 법칙)을 아들에게 주면서 너의 일생의 좌우명을 하라고 부탁하던 그 날이 어제 같은데...  ...금쪽같은 아들이 결혼하고 돌아가는 날 이제부터 아들이 “딴식구”로 된다고 생각하니흐르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게다가 항간에서 떠도는 “유능한 아들은 국가 아들이고 효도하는 아들은 사돈집 아들이며 무능한 아들이 내 아들이다”는 말에 “유능하고 효도하는”내 아들이 이제부터 “남의 아들”로 될 것이라 생각하니 이 애비는 금쪽같은 아들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감히 볼 수 없어서 집에 혼자남아 볼멘소리로 “아들아, 아들아...”를 부르며 대성통곡하였다...  2 哭门을 나와서  笑门을 연다. 나는 선천적이라고 할가 아무튼 웃음을 동무하여 재직때에연길집의 출입문 벽거울에 “오늘 세번 웃었습니까?”를 유표히 붙혀놓고 출퇴근 때마다 거울을 마중하고 세번씩 웃는것을 습관화를 하였다. 나는 어디서나 나를 소개할때면 나의 이름은 오짜, 기짜, 활짜로 오기활, 한자이름을 해자하면 나라 吴, 터 基, 살 活로 “吴나라에서 基본상 살活아가는 사람이라”고, 한편 나의 이름을 꺼꾸로 부르면 “활기”라면서 “나는 이름 그대로 활기스러운 사람이다”고 자찬한데서 청자들로 하여금 때아닌 웃음을 짓게 하였다.  내가 이 글에 특필함은 아들의 “제철효도”로  남들이 우리를 “기쁨이네 가정” 이라고 칭하는 얘기이다.  12년전, 결혼후 아들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하는 약속이다. “나는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잘 배워주는 것으로 부모효도를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아들의 말에 다른 기대를 두지않고 흘러보내는 말로 “그래라, 그래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후 아들내외는 “우리말로 해라”를 “가훈”으로 한것 같다.  아들과 며느리는 얘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말을 가르쳤기에 손녀가 두살때 벌써 우리말로 “99”를 7단까지 외우는 동영상을 보내와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 동영상을 우리 친척들게 돌렸는데 친척들 모두가 “아버지가 박사니깐...”하면서 경탄을 자아냈다. 심지어 며느리는 한국 나들이를 할 때마다 얘들을 데리고 다니며 얘들을 한국 “어린이 집”에 보내여 우리말을 배우게 하였다.  공든탑이 무너지랴?! 그후 우리가 한국에 다녀보니5살짜리 손녀의 우리말 수준은 한국드라마에서 나오는 동역에 못지 않았다. 우리가 전등이나 텔레비를 “죽여라”고 하면 손녀가 그 자리로“할아버지, 텔레비를 죽여라가 아니라 텔레비를 꺼라고 해요”라며 어른들의 틀린 말과 사투리를 바로잡아 주었다. 한번은 손자가 놀음에서 손을 떼고 나에게 “내가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하랍니까?”고 묻기에  나는 별 생각이 따로 없이 “저기 가서 자라”고 했더니 손자가 “내가 우리 말로 했는데도...”하면서 “할아버지가 우리 말을 알아 못듣는다”며 이상해 하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입(口)의 역할이 식(食)과 설(说)이라면 입(口)이 우리 3대를 “한집식구(食口)”로 만들었다. 우리가 3대가 한집, 한상에서 한가마 밥을 먹고 3대 서로가 “딴말”이 아닌“우리말”을 하니까 웃어도 함께 웃고 욕을 해도다 같은 말로 “인민전”을 벌리니 이것이 “한식구”가 아니고 “딴식구”인가.  얘들의 “우리말”은 효도와 정비례를 하였다. 손군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방에 찾아와 배꼽인사를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편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편히 주무세요”는 아침저녁 문안을 하였다.  한번은 3살짜리 손자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를 사다가 줬더니 손자는 딸기를 받자마자 먼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누나의 몫까지 챙겨놓더니 나중에 자기의 몫이 없게 되자 울음을 터뜨릴 뿐 자기가 분배했던 딸기를 되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손군들로 하여 일본이 이국이라는 감이 별로 없기에심지어 인사말이라도 일본말을 배우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를 다니나 손군들이 동행하니깐. 한번은 며느리 생일에 내가 아들며느리 몰래 “생일선물 깜짝쇼”를 했더니 아들 며느리가 ‘말도, 글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어떻게...?’하면서 “동전눈”을 짓기에 “나에게는 전담번역관(손녀)이 있다”니 모두다 손자손녀에게 엄지를 내들며 웃음판을 만들었다. 나는 손군들과 다니면서 일본의 공중질서와 례절을 배웠다. 손녀는 내가 사진찍기를 즐긴다는 것을 알고 그가 수영을배우는 수영관을 갈때마다“할아버지 수영관에 가서는 사진을 찍지 말아요”를 몇번이나 당부했고 손자를 데리고 공원놀이를 할때 소변을 보겠다는 손자에게 저쪽 나무숲속에 가서 소변을 보라고하니 “그건 안되요”하면서 끝내 공공화장실을 찾았다. 우리 “기쁨이네 가정”의 남없는 웃음자랑거리로 우리 아들이 일본 케이오대학의 방문학자로 가족을 데리고 2년간 미국하버드대학에 연수하는 사이에 며느리가 아이들에게 우리 글과 한자를 열심히 배워 준데서 지난 1월에 손자손녀가 련명으로 쓴 편지와 동영상을 받은 것이다. 며느리가 보내온 동영상은 손녀의 아리랑 노래에 흥이 난 손자의 피아노 반주, 할아버지 할머니 수연례에 올리는 축수의 말과 생일축하노래...그리고 한집식구들이 식사를 하는 푸짐한 밥상등이였다. 지금 우리는 부모, 아들, 딸이  3국에서 사는 리산가족이지만 3국에서 오가는 동영상과 우리말 소통으로 웃음으로 가득찬 “한집식구”의 생활이 즐겁기만 하다.   아래는 손군들이 보내온 편지 전문이다.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동안 잘 보냈어요? 가예랑 수민이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내가 우리말로 편지할 줄 몰랐죠? 나는 한국말도 잘 쓸수 있어요. 가예랑 수민이는 미국학교에서 매일 재밋게 보내요. 공부도 제일 잘해요. 그래서 반 친구들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나를 선생님이라며 나한테 물어봐요. 그러면 가예가 배워줘요. 그리고 11월이 되면 우리도 백신을 맞을수 있다고 해요. 참 잘 됐죠? 그리고 우리는 학교에서 한주일에 한번씩 코로나 검사도 하고 있어요.  요즘 우리식구는 4명이 함께 학교에 다녀요, 수민이와 가예가 같은 뻐스로, 아빠랑 엄마랑 같은 뻐스로 다녀요 그리고 아빠랑 엄마랑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요. 아빠가 많이 날씬해졌어요. 3키로 뺏어요. 76키로까지 뺄거래요. ㅎㅎㅎ 우리식구들 재밌죠.  오늘은 이만 끝! 2021년 10월 24일, 가예랑 수민이가.   ”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이다. 한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중 가장 기본은 언어이다”(황유복교수) . 손자손녀들의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노래”는 우리 3대 “기쁨이네 가정”에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 으로 아름다운 철꽃을 활짝피워 준다.  세계적인 명인들의 말로 이 글을 맺는다. “눈물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선물이다”  “ 눈물을 자유로이 활용하는 것에 부끄러울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일린 로이 매기니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이 할 수 없다는 일을 해낸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다 하는 것도 못한다는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웃겨도 웃지 않는 사람이다”(성공의 대가 트레이시) “웃지 않고 보낸 날은 실패한 날이다”(챠플린) 이로 보면 나는 울음이란 하늘의 선물을 만끽하면서 웃음으로 어리석지 않는 살맛나는 기쁜 삶을 사는 인간이라 하겠다.   부언으로 “우리말로 해라”는 아들의 제철효도,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 배워줌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는 며느리에게 감사, 감사, 또 감사를 보낸다.   오기활, 2022년 5월 16일 (아버지 탄신 105주년을 기념하여)    
415    내가 글 쓰는 리유 댓글:  조회:2695  추천:0  2022-06-01
나는 2006년에 사에서 정년토직하였다. 퇴직전 나는 사 홍길남사장과의 담화에서 로 될것임을 밝혀 홍사장의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운이 좋기로 내가 퇴직 하자바람으로 에 초빙되여 로 활약하게 되였다. 나는 인생을 2벌농사로,  60을 2벌농사의 시작으로 “후반전에 더 멋진 꼴을 넣기”위해 몸살을 태웠다. 그런데  나의 쉴줄 모르는 글쓰기를 상당수의 사람들이  “돈벌이”라며 부러워하며 글로 돈을 얼마를  버는가고 물었다. 기실 나는 으로 재직때나 지금이나 언제 한번 원고료를 달라거나 재촉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저 하면서 . 오죽하면 내가 재직때 응당받아야 할 광고원고비(광고수입의 10%) 2만 3천원을 내가 달라는 말을 안(못)하고 (알아서 주겠지 )한데서  그냥 못받고 퇴직을 하였다.  뻔한 큰돈을 받지 못(안)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 사우(社友)들마저 이를 믿지 않거나 나를 라고 했다. 또 례하면 정년퇴직을 앞두고 흔히 다른 사람 들은 직함공자를 위해 “직함쟁취”에 신경을 쓰는데 나는  만 중시하고  엔 등한하였다. 지금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대기자, 명기자, 고급기자라고 부르는데 기실  나는 고급기자직함도 없고  에 따르는 직함공자도 없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지들게서 는 말을 곧 잘 듣는데  나는 이네들의 말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재직때도   해마다 조직에서 안배하는 년휴가를 단 한번도 향수하지 않고 글에만 열중했다.  정년퇴직후에는 며 많은 신문기사와 신문언론을 썼고 책도  6권을 출간하였다.  이에 만약  고 묻는다면 나는 이런 재밋는 이야기로 답할것이다. ㅡ 어느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잡아서 챗바퀴 속에 가두어 놓았다. 다람쥐는 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챗바퀴 속을 계속 돌아쳤다. 이를 보고 개가 물었다. 다람쥐의 말에 개는 네가  아무리 뛰여도 제자리 뛰길뿐 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 다람쥐는 더 뛰지 않았다. 이에 소년은 화가 나서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 다람쥐는 배가 고파 다시  뛰였다. 개가 또 물었다.   이렇게 대답한 다람쥐는 배를 채운 후 또 뛸 필요가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되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좁은 챗바퀴 안에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 시키는 건 뛰는 외 다른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다람쥐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랬다. 다람쥐가 존재의 확인을 위하여 뛰기를 계속 했다면 나는 글을 쓴다. 지나온 한 때에 를 몰랐다면 이로부터 유의미한 삶에 대한 답은 단 한 하나, 임을  자각하게 되였다. 그래서 필자는 비록 문법도, 철자도 변변치 않다는 열등감을 멀리하고  남아 있는  시간이 인생의 에 접했다지만 여생의 삶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저 세상에서 나를 부를 때까지 이세상에서 삶의 챗바퀴를  돌릴 것이다. 오기활    2022, 4, 26. 도문서            
414    딸아이와 우리글 공부 댓글:  조회:2615  추천:0  2022-05-31
딸애가 태여나서 유치원에 가기전까지 나는 우리말로 아이와 대화하면서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한어보다 우리말이고, 우리말을 알면 고향의 친척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수 있고 아이의 민족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재잘재잘 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조선족 엄마로서 언제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보통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조선족 가정에서는 어릴때부터 아이한테 당시 백수를 외우게 하고 한어로 대화하는 가정들이 많다. 어릴때부터 미리 한어를 가르쳐야 학교에 가서 언어소통에 지장이 없이 어휘력이나 문장 구사능력 또는 사자성어를 잘 익힐 수 있다는 리유에서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면 우리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특히 우리 조선족은 두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축복받은 민족인데 말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전해줘야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한테 달렸다.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문화를 대대손손 후세까지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유치원에 붙으면서 하루종일 한족 선생님, 한족 애들과 한어로 대화하니 우리말을 점점 잊기 시작하였고 우리말로 묻는 말에 우리말로 대답하기조차도 어려워했다. 그렇게 소학교 2학년이 되니 우리말 말문이 막혀버리면서 아예 벙어리가 되였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로심초사하면서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나면서 나는 좀처럼 우리말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연변의 자그마한 변방도시 도문의 평범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우리말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때는 장국에 배추김치를 찢어서 먹으면서도 구수한 우리말 “반찬”이 있어서 비록가난했지만 항상 행복했다. 특히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가진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던 우리말들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뜨끈뜨끈한 가매목에 날래 앉아서 손가락 과재랑 옥시티개랑 해자블을 까면서 나눠 먹깁소 ”  “이매 피두 채 안마른 선선아 대여섯이 구새통옆에서 담배를 피우메 휘파람 불면서 창개를 하메 놀잼두?”  “공부를 써거지게 답새긴다”  “저 남자애 입은 우티 와늘 죽임다”… 이렇게 사투리까지 섞인 우리말은 어릴때 어머니가 끓여준 슝늉처럼 구수했다. 집에 전화기도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공중전화박스앞에 가서 청년생활, 연변녀성 등 우리말 간행물들을 사서 읽은 후 친구들한테도 빌려주기도 했었다. 그후 나는 량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일찍 대도시에 나와서 부평초처럼 살았다. 고향 을 떠나서 상해 포동에 자리잡고 살면서 처음 길에서 조선족을 만나서 우리말을 할때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처럼 우리말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말랐던 것이다. 처음 만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나는 수없이 그동안 못했던 우리말로 그녀한테 내 이야기를 늘어놓군 하였다. 17년전 포동에는 조선족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어려서부터 배운 우리말이 그리워서 처음으로 조선족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면접보러 왔습니다.” “ 방갑소 ~ 연변에서 왔구나. 나도 연변사람이요.” 나의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사장님이 정겨운 연변말로 반갑게 맞아주니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했다. 면접에 무사히 통과된 나는 입사후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마음껏 우리말을 하면서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좋은 상사와 동료들을 만난 것이 나의 복이라면서. 외지에서 한족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그들은 내 서툰 한어 말투를 듣고 어디 사람인가 묻군 했다. 그때마다 나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조선족은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이쁘고 깨끗하고 특히 조선족 여성은 온화하고 현처량모형이 많습니다 ” 내가 만난 한족들은 조선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높히 평가하면서 가끔 조선족여성을 흠모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왜 그리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이가 소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더 늦어지기전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워야 했다. 어릴때 배우지 않으면 커서는 더 배우기 어렵다. 우리말을 배워주는 학교는 없을가? 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구세주같은 조선족 주말학교가 나타났다. 2010년 10월 16일에 설립한 상해조선족주말학교는 학생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이고 선생님들중 서울대석사학위를 받은 조선족선생님들이 여러명이나 계실 정도로 교수진은 탄탄한 실력을 갖추신 분들이었다.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력과 청춘을 바쳐서 타지에서도 우리 민족의 언어를 지켜가고 있었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를 모두 구사할수 있는 조선족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은 상해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겠다는데 굳이 싫다면서 한족들처럼 한국에 류학을 보내어 몇십만이라는 비싼 학비를 팔 필요가 있을가? 박형군교장선생님은 “애들이 소학교 6학년만 졸업하면 우리글을 읽고 쓰고 하는데 전혀 문제 없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학교만 졸업하면 어디나가서도 자랑스러운 조선족으로 거듭나갈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우리말은 마치 교장선생님의 몸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와 같았다.  딸아이는 매주 토요일마다 늦잠을 자지 못하고 주말학교를 다니면서 하루에 2시간씩 공부를 하였다. 타지에서 아이들을 우리말 공부를 시키려고 온 학부형들이 의외로 많았다. 학교는 민항구 룽바이2 촌의 교실을 빌려서 수업을 했는데 포동, 칭푸, 송강, 곤산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운전해서 왕복 3시간반이상의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아이를 조선족 주말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열정에 나는 탄복을 했다. 앞으로 조선족의 미래가 보이는 같아서 마냥 설레이기도 했다. 딸애가 다니는 반급에는 학생이 20여명, 20여개 반급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주말학교에 보내놓고 그제야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는 시간집중은 잘 하는지, 공부는 잘 하는지, 숙제는 하는지를 한번도 확인한적이 없었고 기계적으로 학교에 보내기만 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아이더러 교과서 과문을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한줄도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것이였다. 반학기동안 배운 공부가 나미아미타불이 되였다. 나는 할수없이 아이를 아래 학년에 내려앉히고 다시 배우게 하였다. 한달 후 다시 아이가 공부를 하는 것을 확인해 보았는데 일정한 시간만 지나면 한줄도 읽어내려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알고보니 딸아이는 일주일에 2시간만 공부하다 보니까 그동안 배운 내용을 다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내여준 숙제를 전혀 하지 않고 집에서 복습도 시켜주지 않으니 다음 주 주말학교에 갈 때는 지난 주에 배운 과목을 새까맣게 잊었다. 우리가 자랄 때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우리말을 했고 집에서도 동네에서나 티비에서 우리말을 접할 수 있으니 학교에서 배운 말과 글들은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타지에서 자란 아이들한테는 주변환경이 허락하지 않아 심지어 우리말을 영어를 배우기보다 더 어려워했다. 한 학기가 지나니 같이 다니던 애들이 차츰 보이지 않았고 반급의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길에서 같은 반급 다니던 학생 학부형을 만났다.  “애가 주말학교에 안나오던데...웬일이에요?” “우리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어요? 요즘 경기가 안좋아서 상해에 한국회사가 절반이상 철수하고 문을 닫았어요. 이젠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취직이 어려워졌어요. 우리애들 세대에 한국회사에서 어디 취직이나 하겠어요?” “취직을 위해서 우리말을 배우는게 아니잖아요? 조선족으로 태여났으면 우리말도 할줄 알고 우리 글도 알아야 조선족이라고 할수 있지요. 신분증에 조선족이라서 번듯하게 써있어서 조선족이라고 할수 없어요. 우리 애들이 조선말을 할줄 모르면 앞으로 우리민족이 없어져요.” 그는 내 말을 귀등으로 들었는지 웃으면서 “그 시간에 영어학원을 보내는게 더 나아요.”라고 했다. 자기 민족언어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 언어를 기를 쓰고 배우는게 나로서는 조금은 리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마다 아이를 양육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옆에서 뭐라고 할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 즈음 같은 반 학부형을 여러명을 만났는데 너무 멀어서, 애가 싫어해서, 영어학원때문에, 애가 재미없어 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서...등 여러가지 리유때문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우리말을 배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견지를 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우리 후대에서 언어가 사라지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민족의 뿌리는, 우리의 문화는...나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이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를 또 다시 아래 학년에 내려앉힐 수 없어서 나는 모든 과외를 다 끊고 편안하게 우리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나섰다. 주말학교에서 배운 숙제를 무조건 시키고 검사를 했고 낮에 배운 과문을 세번씩 읽게 하였고 단어를 5번씩 쓰게 하였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과문을 세번을 읽고나서 목이 아프다고 하고 글을 쓰라면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면서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교 숙제가 많아서 부담되는데 왜 주말학교 공부까지 해야 되냐면서 내게 빡빡 대들었다. 우리말, 우리말이 도대체 머냐고? 하면서 … 우리말이 기억하기 힘들다고, 하기 싫어서 포기하겠다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이를 너무 힘들게 닥달한거 같아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교장선생님 말대로 딱 6년만 견지하자,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언젠가는  엄마가 제일 잘한 것이 내가 엄마한테서 언어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그것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 값진 재산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매주 토요일 저녁은 모음과 자음, 받침을 읽고 쓰게 하였다.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수 있다는 훈민정음은 우리글을 간단히 익힐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가. 꽃밭 [ 꼳빧 ] , 시작해요 [ 시자캐요 ] , 특별활동 [ 특뼐활똥 ] , 옷이야 [ 오시야 ] , 잃어버리지 [ 이러버리지 ] , 있겠어 [ 읻께써 ] , 똑같은것 같아요 [ 또가튼거 가타요 ]…이처럼 읽을 때와 쓸 때 다른 글을 받아쓰기 하면 아이는 굉장히 어려워하였다. 과도한 훈련보다는 딸아이와 같은 눈높이에 맞추어 천천히 꾸준히 견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았다. [ 소곤소곤  ] [ 수군수군 ] [ 방글방글 ] [ 뾰족뾰족 ] [ 방실방실 ] [ 조곤조곤 ] [ 울긋불긋 ] [ 아장아장 ]... 아 , 얼마나 표현력이 풍부한 우리말인가. [ 선생님과 문화를 배워요 ] 는 매 과목마다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었고 비교적 길다보니 매번 내가 읽어주고 낱말 뜻풀이를 구체적으로 해주면서 아이와 다시 언어 연습을 하는 기쁨과 흥취를 느꼈다. 그처럼 나는 지칠줄 몰랐다. 2020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우리는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하였다. 학교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온라인 반급 목표는 100개이고 수업의 퀄리티를 보장하기 위하여 반급별 학생수는10명으로 제한했다. 학교는 전국각지 조선족어린이들의 온라인 수업방식으로 우리말 우리글을 배울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인터넷만 된다면 북경,강소성, 절강성,심천 등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은 수업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온라인 수업의 시간은 1시간이였는데 의외로 집중력이 엄청 높았다. 딱 한달 했는데 한주 ( 1회 모두 4시간) 딸 아이한테서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딸아이는 교과서 과문을 뜯어서 읽기 시작하더니 줄줄 내리읽었다. “시험 보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 안돼요”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미역이 미끄러워 시험에서 떨어진다”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이였다. 글을 먼저 배우니까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차츰 아이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한어로, 영어선생님과 영어로, 집에 와서는 우리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다양하고 풍부하고 이쁜 언어를 더 잘 배우는 방법은 없을가? 부모랑 친구랑 더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대화하는 방법은 없을가? 아이의 우리말 실력을 조금 더 제고하기 위하여 나는 고민끝에 지난해부터 아이와 함께 세계를 강타한 한국드라마 ”오징어 게임”보기를 시작하다가 “기황후” “ 태양의 후예”“사랑의 불시착” 같은 중국어 자막이 나오는 드라마를 같이 감상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인물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눈으로, 입으로, 귀로, 머리로, 마음으로 편안하게 즐겁게 한국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드라마를 감상하면서 나는 아이의 순수하고 맑은 내면세계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이정혁동지 세리동무를 좋아하재? 이정혁동지 우추부레 하구나. 와 ~ 여자한데 뽀뽀를 하면서 ”“행복 하시라요”“알갓소” 아이는 가담가담 드라마속 북한 말투를 배워서 나를 웃게 하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는 나도 부르지 못하는 한국드라마 주제곡을 외울 정도로 한국음악에 흠뻑 도취되였다. 아이는 한국노래가 중국노래보다 곡이 더 듣기 좋다면서 한국과 중국노래의 구별점을 내게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어느날 아이는 한국노래를 부르다가 가사를 보면서 “엄마, 나 여기 나오는 한국글자를 다 읽을수 있어요. 너무 간단해요.” 라고 방방 뛰면서 신이나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덕분이에요. 엄마는 주말학교 선생님해도 되겠어요.”라고 하면서 나를 잔뜩 칭찬해주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돌중에서 BLACKPINK 를 제일 열광했다. 2016년에 데뷔한 그룹인데 외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들의 생일이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무릇 BLACKPINK 가 부른 노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밥상에 마주 앉아서 부르기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흥얼거리는 그야말로 못말리는 팬이였다. 그렇게 딸아이는 12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국어 숙제를 하다가 아이는 이런 질문을 했다. “엄마는 내가 왜 우리말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조선족이라서, 엄마 딸이라서 무조건 배워야 된다고, 그외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 “있지 , 있구 말구 ~ ! 엄마는 지영이가 엄마 배속에 있을 때 일기를 썼어. 태여나서 첫돐 쇠기까지… 너의 성장이야기가 적혀있어.”  “그럼 엄마가 읽어주면 되겠네요.”  “니가 우리글을 잘 배워서 너 절로 읽어. 그건 너의 이야기이니깐.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리고 엄마는 글도 하나 쓰고 싶어. 지영이가 엄마 첫번째 독자가 되여주렴.”  “우리글을 견지해서 잘 배우고 엄마가 쓴 일기도 읽고 엄마 글의 첫 독자가 되여줄게요.” 아이는 나와 손가락깍지를 걸고 대답을 했다. 우리글을 더 잘 배우려는 동력이 생기자 아이는 우리말 공부에 애착하고 스스로 공부했고 나는 우리말로 된 공식계정에 올라온 영상시를 아이와 같이 들으면서 아이에게 우리말로 지속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딸애는 내 생일날에 나한테 생일 카드 한장과 핸드폰 위챗으로 빨간 봉투를 보내주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저를 낳아주고 이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를 잘 이겨내세요. 엄마, 사랑합니다.” 카드에 우리글로 손글씨로 축하의 메세지를 보내준 딸아이가 너무 대견스러워 꼬옥 안아줬다. 그 순간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고마워 내 딸 ~ 엄마도 우리딸 사랑해 ~아주 많이 ~ ” 그동안 우리글을 가르치면서 함께 했던 기억들이 영화장면처럼 떠올랐다. 딸애의 우리글로 쓴 축하메세지가 내게는 큰 위로가 되였고 코로나 비상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 얼마전 아이는 우리글 숙제를 하면서 말했다. “엄마, 저는 앞으로 우리글을 열심히 배워서 중한번역관이 되겠어요.”  “니가 그림을 잘 그려서 미술쪽으로 발전한다면서 목표를 바꾸었어?”  “번역관이 돈을 더 버니깐요.” 아이는 신나서 말했다. “돈을 더 잘 버는 일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 행복하단다. 엄마는 우리딸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우리말 덕분에 아이와 관계가 좋아졌고 소통이 더 원활해졌고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말투도 부드러워진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작 더 어렸을때 우리말을 가르칠 걸 그랬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언녕 주말학교를 졸업했을텐데 말이다. 나와 아이사이를 더 돈둑해지게 해준 우리말이 고맙다. 3년만 더 공부를 하면 주말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 이제 곧 사춘기를 맞이할 아이를 인정하고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온전히 아이를 잘 키울 자세가 되여있다. 엄마의 성급함을 뒤로 하고 아이앞에서 먼저 달리지 말고 아이의 뒤에 한발 물러서서 잘 커가는 아이 모습을 사랑으로 밀어주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요즘 딸아이가 유난히 좋아 하는 시가 있다.   서시 윤동주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딸아이가 이 시를 몇번 읽더니 줄줄 외우면서 랑독을 어찌나 잘하는지 너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시인 윤동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잊지 않고 끝까지 지켜 찬란한 문화유산을 세상에 남겼다. 우리 세대, 우리 후세들도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 조선족 문화를 사랑하 그 소신과 명맥이 세상 어딘가에 고스란히 뿌리 내렸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면서 이 글을 끝낸다. 허해란                    (본작품은 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  (26기)응모작품임)  
413    기자의 기쁨과 보람 댓글:  조회:2424  추천:0  2022-05-14
“신문에는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연변25시”편집부의  사로에 따라 필자가 언론을 쓰기시작한 “경영우언”을 박금룡 주필이 “일사일언"으로 바꿔 고정란으로 독자들과 대면시킨지도 어느덧 15년이 된다. 필자가 단 기자의 사명감과 사회에 대한 책임 하나로 시작한 언론이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글이 될가?”는 우려를 했는데 다행히도 독자들에게 읽혀진데서 지금은 나의 짧은 필자의 책임담을 담는 “그릇”이 되여 여론한마당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그간 북경의 독자는 “일사”를 보내며 “일언”을 부탁했고 많은 독자들이 전화와 댓글로 필자에게 돌격의 "나팔”을 불어 주었다. 도문시의 리인규(78세)옹은 필자의 글을 읽고 “불평대학”을 졸업하고 “깔깔(웃음)대학”에 입학했다고, “나무뿌리 명품으로 후반전에 멋진 꼴을 넣겠다”는 글을 보내고도 만족되지 않았는지 80대 로친더러  토닭곰을 해서 직접 필자네 집까지 가도록 했다. 길림성 구태현의 리수남씨(중학교 교장)는 필자의 글에 감사하다며  안면이 없는 필자에게 “인마하의 물고기가 특별히 맛있다”며 신선한 인마하물고기를 쾌속택배로 두 번이나 부쳐왔다. 연길시의 40대 독자인 리철룡씨는 필자의 기사를 읽고 기사속의 주인공들을 직접 찾아가서 만난다며 필자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방문하던중 필자가 재일본 조선족1세들의 삶의 현장을 책(왜 갔느냐면 일본에, 왜 사느냐면 일본서)으로 출간 한다는 것을 알고 집적 나서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련계를 달아주고도 필자가 일본에 간 사이에 필자몰래 모든 출판비용을 전담하였다. 이에 필자가 귀국한후 만여원의 현금을 준비하고 그에게 줄려니 기어코 받지 않았다. 이 밖에도 국가 “철도부 우수교육사업자”의 영예를 지닌 목단강철도로간부 리헌(86세)옹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1주년 축하 행사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필자의 글 20여편을 선택하여 “오기활의 목소리”란 책을 자작하여 길림신문사 홍길남 사장과 필자에게 부쳐왔다.  이시각 필자는   두손모아 허리굽혀 존경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 감사 또 감사를 표한다. 필자는  필자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과 무한한 기대에서 한없는 기쁨과 보람, 그리고 자랑을 느낀다.  보람이란 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결과에 대한 만족감이다. 보람은 실패에서도 느낄수 있고 손해에서도 느낄수 있다. 느끼는 것으로 보람을 얻고 또 보람을 바라는 욕심에서 하는 일에 충성하고  전전긍긍 하게 된다.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뜻이 누구에게나 고르듯이 누구나 보람의 기회는 다 주어져 있다. 단 개체에 따라 차려진 보람을 느끼는 차이가 다를 뿐. “많이 원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말이 있다.  더 크고 더 많은 보람만을 원한다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에서 보람의 기쁨을 얻지 못한다.  로자는 “지족자부(知足者富)”라 했다. “지족자부”란 결코  작은 리익을 탐하고 작은 보람에 만족하며 정체부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보람은 우연이나 운수가 아닌, 자기의 노력과 능력을 발휘했을 때만이 얻어진다.  “녀성은 꽃이라네”는 노래는 남편이 병에 시달리는 안해를 모델로 지은 것이다. 남편은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녀성의 필요성을 그토록 절감했기에  남녀로소가 즐겨부르는“장수노래”를 지었다.  남편은 이 노래로 하여 남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낄 것이다. 보람은 먼데 있거나 쥐기 어려운 것이 아닌, “내 집”, 내 곁에 있는 작지만 값진 “보약”인 것이다.  나에게 값진것이 남에게 보잘것없는 것이 될수 있고 남에게 하찮은 것이 나에게는 값진것으로 될 수 있다. 내가 존경하는 독자, 나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있음으로 하여 나의 짧은 글이 가치가 더해지고 살이 찐다.  보람을 아는 자는 마음이 부유하다.            오기활                                       2022년 4월 20일  
412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46) 댓글:  조회:1949  추천:0  2022-05-01
맺는 말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농학원의 1기생이고 필자는 지난세기 70년대 김수철교수의 제자이다. 필자는 스승님의 명성이 높음을 한국에서 알았다.. 1999년에 필자는 “세계자연농업전도사” (사단법인) 한국자연농업협회 회장 조한규박사가 실시하는 제113기 자연농업기본연찬과정을7일간 이수하였다. 하루는 조박사가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이란 두터운 화책을 사서 주었다. “이 비싼 책을 받으려니(책값 5만4000원,한화)과분합니다” 는 필자의 말에 조박사는 “어디가나 책값이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식물전문가들이 2년 동안 백두산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하고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연구의 지침서로 세상에서 처음 되는 보귀한 책입니다.”며 이 책은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님이 주필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필자가 김수철교수님의 제자라고 소개하니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얼마나 행복한가”며 부러워 하였다. 2011년3월28일, 필자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고저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에 게시는 김수철(87세)교수님을 방문하였는데 37년 만에 만난 스승님의 신체가의심할 정도로 건강하셨다. 그래서 수인사로 건강비결을 물었더니 “나는 길옆의 풀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삽니다”고 하였다. 그후부터 필자는 가끔씩 스승님을 만났는데 매번마다 싱싱한 신문소재가 있었다.어느 하루김교수의 신문기사를 읽던 부인이 이렇게 대단한 분을 그의 생전에 책으로 쓰라고건의 했다. 부인의 건의에서 령감(灵感)을 얻은 필자는 스승님을 만나 자서전을쓰겠다는 의향을 밝혔더니 “감사는 한데 김수철이란 평민에게 무슨 남들에게 읽혀질 글거리가 있겠소이까…”며 보기좋은 웃음으로 거절하였다. 필자는 포기하지 않고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서규철연구원(87) 등 필자의 독자팬들의 적극적인 합작으로 스승님이 “핍박에 못 이겨 량산에 오른다“고 하였다.. 2016년 10월 5일, 필자는 언녕 준비했던 40여가지 취재 질문제강을 스승님께 드렸고 2017년 5월에는 훈춘서 식물조사를 하는 교수님을 이틀간 동행 하였다. 그간 필자가 제일 놀랍고도 감동된 것은 90대 고령인 스승님이 “오기자가 낸 ‘숙제’를  필답으로 제때에  완성하겠다”는 약속이였다. 2016년 11월 30일에 필자는 스승님의 약속대로 “숙제책”을받아 가지고 12월4일에 일본에 왔다. 스승님의“숙제책”은 페지마다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조상과 민족에 대한 효와 충성, 영원히 배우고 영원히 현역으로 열중하는 스승님의 위상을 눈으로 보고 귀에서 들리는듯 하였다. 스승님은 대자연이 낳은 김수철이고 백두산이 배육한 김수철이며 대자연을 거울로 자신을 비추며 평생을 대자연에 보답한 김수철이였다. 스승님이 세상에 태여난 리유와 목적은 다름아닌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하기 위함이였다. 스승님은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평생 수집한식물표본에 문자, 그림, 사진을 배합으로 도문병무(圖文幷茂)한 “길림성식물도감”을 출판하고저 90고령에 혼자몸으로 내몽골까지 다니며 식물사진을 찍으면서 3년간이나 고군작전을 하였다.  스승님은 식물학연구에서 국가급수상자이고 길림성로동모범이며 연변주우수당원으로  당당한 학자이고 꾸준한 일꾼이며 지식분자의 손색없는 본보기였다. 그러기에 연변대학의 모책임자는  “연변대학당안관에 ‘김수철인물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비범한 인물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으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서전이 개인의 명리를 위한 소작이 아닌, 인생철학의 대작으로 쓰라”는 스승님의 부탁에 한동안을 망설이게 되였다. 한동안의 추고 끝에 필자는 “피할 수가 없으면 즐기자” “가장 어려운 일을 가장 값진 일”로 하고 계속하여 필을 들었다. … 필자는 자서전의 편집원칙을 이렇게 정하였다.   첫째, 김교수가 90대에60대의 건뇌(健腦)로완성한 “숙제”의 내용과 편폭을 거의 모두 올린다. 둘째, 독자들에게 교수님의 서화술(書畵術)을 공감유하고저 교수님이 90대고령에 그린 자화상, 삽화, 간력을  原圖와 親筆로 올린다. 선현(先賢)들은 한 사람의 고하평가기준을 “身, 言, 判, 書”(몸가짐,언 변능력, 판단능력,필재간)로 하였다. 이“4자”기준에 비춰 보면 스승님은 조목마다 합격된 대재이다. 그러기에 어느 상당급 박사는 김교수님의 사적을 읽고 나서 “김수철교수는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활용하는 동아급(東亞급)식물학자로 당년의 리시진보다 더 위대하다”며 김수철전기의 제목을 다시 선택하라”며 필자를 압력하였다. 이번 출판에 필자가 더욱 감동을 받은것은 책에 배합할 스승님의 초상을 90대 고령에 그린 자화상을 선택한 것이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화가들의 ‘자화상’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타인에게 쉽게 꺼내지못한 고백을자신의 얼굴에 담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스스로를 응시하는 동안 또다른 자신을 ‘발견’하게되고 현재의 겉모습뿐만아니라 지나온 삶의과정을 검색하며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스승님이 그린 자화상을 보고 딸님이 “아버지 눈섭이 없습니다”며 눈섭을 그려 넣으라는 권고에 스승님은 “눈섭을 그려 넣으면 딴 사람이 된다”고 거부하는 모습에서 스승님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히 밝히고 자신을 미용할줄 모르는 순박하고 진실한 분임을 현장에서 감수하였다. 이 밖에 금상첨화라고 할가. 필자가 본 편집을 거의 마무리할 때 “길림신문”사 홍옥편집선생이 필자가 김교수를 모델로 쓴 칼럼(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이 “길림신문”우수칼럼으로 평선되였다는 희소식을 보내주어 “백두대간의 불로송”에 색을 덫칠을 하였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온 김수철교수는 우리민족의 자랑이며 중화민족의 재산이다. 민족의 바탕이 민족문화인만큼 민족문화를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가 바로 민족문화를 기록하고 민족력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근 한 세기를 살아온 김수철의 빛나는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민족력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기록이 정치나 종교와 관계없이 오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양서로 될것이라 확신한다.  끝으로 이 책을 쓰도록 제안한 부인, 필자의 집필을 적극 협력한 서규철 옹, 황영수 옹, 아들 오무송, 그리고 “교두보” 로 연변과 동경을 이어준  최명림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책의 출판을 위하여 애를 쓴  출판사편집선생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018년 5월,동경에서                                  吳基活    
411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댓글:  조회:2419  추천:0  2022-04-19
우리는 심심찮게 “끝없는” 고통이니 “끝없이” 펼져진 사막이니 하는 말들을 하는데 이 말은 사실 뭔가 “끝”이 없다는게 아니라 마치 끝도 없는 것처럼 어떤 힘든 일이 쉽게 잘 풀리지 않는다는 푸념일 것이다. 모든 것에 “끝”이  있는데 기쁘고 즐겁다고 열광하거나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통탄할 필요가? 독일의 철학자, 자신만만한 염세주의(세계, 인생을 불행과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태도)자 쇼펜하우는 “우리는 무슨 일이든 결코 지나친 환희나 비탄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왜냐면 모든 사물은 변화무쌍하므로 언제 어느 때 정반대의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며 행, 불행이나 길, 흉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이 정확하지않아 일찍 자신이 아픔으로 체험한 일도 나중에는 오히려 가장 큰 경사일 수도 있고 후일에 큰 두통거리가 된 것도 이전에 좋다고 날뛰던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분명히 행복할 때는 불행을, 갠 날에는 흐린 날을, 사랑에는 증오를... 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요컨대 변모하는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해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위기속에 기회가 있고 우연속에 필연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전화위복”을 하는가는 우리, 모두. 또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와 함께 흘러가면서  온갖 인내심을 배우냐에 달려있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다 일어나는 것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는 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모든 변화도 결국 끝이 찾아오지만, 또 그 끝이 다시금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영원한 것은 오직 끝없이 변화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적에 어느 마을에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는 로인이 있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자신의 힘겨운 생활을 털어놓은 후 이런 부탁을 하였다.  “저에게 힘이 될수 있는 글을 주십시오, 비탄에 빠졌을 때 희망을 주고 행복에 겨워 있을 때 교훈을 줄수 있어야 합니다. 제발 저에게 그런 진리를 가르켜 주십시오.”  젊은이의 말을 다 듣고난 그 로인이 한동안의 심사숙고 끝에 이런 글을 주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복과 불행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 행복과 불행이 지나가버리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다. 세상이 힘겨움과 고단함만을 선물할지라도  기필히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오늘 지구촌을 위협하는 코로나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오기활
410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45) 댓글:  조회:1907  추천:1  2022-04-03
제 3부                           신문잡지로 읽는 김수철       18,    래일을 생의 마지막날로 삼고 “당신이 얼마나 더 오래살수 있을지,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이런 물음에 확답할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살 것처럼 해야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연변대학농학원식물학박사 김수철(93세)교수는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글을 큼직이 붙여놓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묘 죽음을 맞이한다. 김교수는 정년퇴직후에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하며 인생 후반전에 멋진 ‘꼴’을넣고 있다. 김교수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지...” 하며 몇 년전부터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할 타산이다. 90고령에 안해를 딸집에 보내고 영, 한(汉)문설명문에 직접 그린 2300폭의 그림을 배합하고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지난해부터 혼자몸으로 성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고군작전을 하고있다.. 지난 10월 27일에 김교수가 들려준 얘기이다. “지난 겨울 어느날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 잠에서 깼지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들어서 약 15분간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이에 중풍징조라는 예감이 들어 정신을 가듬고 악을 써 끝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 기어코 “구급상비상자”가 있는데까지 뒹굴며 가서 발바닥에 뜸을 떴지요. 한참지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더라구요.” “그일이 나한테는 죽음체험이 되였지요, 그래서‘ 죽음체험’ 4자를 영, 한문으로 써서 침대머리에 붙여 놓고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며 오늘의 일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어떤 것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삶은 기회이고 아름다움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삶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된다. 독일의 노벨상수상자 하우프트만은 “매일을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 처럼 살라”고 했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수 있고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이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희망과 계획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 할것이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1-09 12:  (본문은 길ㄻ신문 2017년 우수칼럼으로 평선 되였음)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1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