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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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포럼) 한 민족이 자기의 상제문화가 없어선 안된다--성원 댓글:  조회:3990  추천:0  2012-07-16
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 主题发言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玄盛元   各位领导,各位专家,各位佳宾,同志们,朋友们: 2009年6月,“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吉林省非物质文化遗产,从此,朝鲜族丧葬习俗不再是迷信活动,不再是陋习,是一种宝贵的朝鲜族传统民俗文化。 我们要继续加强我们民族的文化建设,将朝鲜族丧葬习俗提升为有根系、有体制的更高一级的真正的朝鲜族丧葬文化,为提高朝鲜族文化质量而增添宝贵的成分和营养。 为了实现这一目标,我们要探讨如下的几个学术性问题: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历史发展中的作用;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传统民俗中的位置;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现实生活中的意义。 今天我们召开“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首先要探讨以上几个学术性问题,在此基础上,集中讨论怎样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问题。 下边,根据我在这几年对朝鲜族丧葬习俗的研究和一年多的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经验,发表我的浅薄的观点。   一、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历史发展中的作用 李朝太宗12年(公元1412年)朝廷下令全国效仿中国的《朱子家礼》,李朝成宗16年(公元1485年)颁布《经国大典》,全面实行推崇儒教,排斥佛教的政策,从此,包括丧祭礼仪在内的李朝社会的一切礼仪活动,都推行中国儒家的礼仪。 朝鲜后期学者李縡在中国《朱子家礼》基础上还掺和朝鲜民族很多传统习俗和理念,编纂《四礼便览》,全面阐述朝鲜民族“冠婚丧祭”礼仪规范,李朝宪宗10年(公元1844年)首次发行。 中国朝鲜族的先民,多是在1850年以后,自朝鲜半岛迁入到中国东北地区定居的,经过100多年的历史沿革,逐渐发展成为当代中国的一支少数民族。 中国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半岛丧葬文化的一个分支,中国朝鲜族在朝鲜半岛的本源地比较广泛,他们带到中国来的丧葬习俗,也按地方大同小异,他们在中国特定环境下共同生活的过程中,还逐步形成了中国特色的朝鲜族丧葬习俗。 文革以前,中国朝鲜族基本上还是实行从朝鲜半岛带过来的传统丧葬制度,村村有“丧舆契”之类的民间相助治丧组织,集体出资打造丧舆,在村外僻静处盖库房保管,选一人当都监,负责管理有关丧葬的事务,村里出丧事,统一安排丧舆抬夫和掘墓人。座上大人(村里最高年长者)严格监督村里举行的每一次丧祭仪式,以此,治理家风、端正族风,保证民族传统代代相传。 朝鲜族丧葬习俗的基本思想是传统的儒家思想,其核心是“孝道”,是千百年来维持社会秩序和家庭关系的东方民族的道德准则。在朝鲜族传统丧葬活动中集中表现孝道思想,朝鲜族的先人们就是利用葬礼和祭祀的形式传授孝道思想,继承民族传统的。 所谓的“孝”是具有两种含义:一是孝敬,二是办丧。在我们祖先的时代里对父母长辈不孝是天大的罪孽,普遍信奉“孝为百行首”,“人间百善孝为先”,深信“犯不孝,天诛地灭,误祭祀,断子绝孙”。因此,一旦父母长辈去世,就尽最大努力去办好厚葬,向社会表明自己是大孝子。平时曾经对父母长辈欠孝的人更是要利用厚葬的手段来掩盖自己的耻辱,填补心理的空虚。这是古代朝鲜人重视葬礼的重要原因之一。 葬完之后还有“三年守孝”之特习,就是在父母坟前打草棚守墓三年。在这期间不洗脸、不吃肉、不回家,确实是苦行。这种人也叫做“孝子”,他们苦行的目的就是弥补在父母生前没有尽到的孝道。现在来看是很愚昧的行为,可是我们从中可以看出我们的祖先在落后的古代意识形态的条件下还是要坚持优良道德准则的一片苦心。 朝鲜族丧葬习俗伴随朝鲜族先民进入中国以后,默默分担朝鲜族先人们死亡之痛苦和悲伤,默默安抚朝鲜族先人们对于死亡的恐惧和失望,默默指挥每次朝鲜族葬礼之大事,与朝鲜族先人们一起走过来了一百多年的风风雨雨,凝聚着朝鲜族先人们的深厚情感和理念。 二、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传统民俗中的位置 民族是人类在历史上形成的共同语言、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以及表现于共同文化上的共同心理素质的一定历史阶段的共同体。随着时代的发展,如今在中国,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不再是代表一个民族的重要特征。中国有56个民族,他们都是中国公民,都是在中国境内生活,可以自由流动。在这种情况下一个民族向社会展示自己的手段主要是自己的特色文化,没有自己的特色文化,或者抛弃了自己的特色文化,这个民族已经失去了以民族自居的社会基础,在素质和各方面都已经丧失了优势。 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如果没有自己的丧葬文化,或者是抛弃了自己的丧葬文化,这个民族很可能是还没有成熟的民族,或者是正在退化的民族。 我们朝鲜族民俗文化中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如果没有自己的丧葬文化,我们民俗文化就失去其完美性。 朝鲜族历来很重视喜庆的民俗文化(抓周、结婚、花甲等),而当今正在进入辉煌期,到处设有婚礼厅、生日厅,厅厅响彻祝福歌。 可是朝鲜族的丧葬文化的处境好比是遗弃在北邙山坡的古碑,人人惧而远之,任凭风吹雨打,没有人管理,没有任何保护措施。 其实,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族传统“冠婚丧祭”文化中不可或缺的重要部分,朝鲜传统家礼指导书《四礼便览》共四册八卷,仅是“葬礼”部分就占五卷,其他“冠礼”、“婚礼”、“祭礼”只占各一卷,可见,朝鲜族先人们欲把民族的传统习俗和理念集中表现在葬礼中,朝鲜族葬礼可以说是最能代表朝鲜民族的民俗文化。 中国有句“红白喜事”之说法,结婚叫做“红喜事”,死人叫做“白喜事”,两者合起来叫做“红白喜事”。结婚叫做“喜事”,人人皆知。可是中国人死人也叫做“喜事”。一方面哭鼻子办丧事,是人之常情。还一个方面叫做“喜事”,而确实是“喜事”。世界好比是公共巴士,先上车的乘客到了目的地下车,就有空间新的乘客能上车。世界也是一样,先出生的人生活好自己一生以后慷慨死去,就有空间新的生命能诞生。假如孔子、秦始皇至今还是服用“长生不老药”而未死,他们已经是两千多岁,这个地球人满为患,很可能已经爆炸了。因此,丧葬文化不仅是表示对死者的哀悼,也是表现对活人的希望。 千百年来,人们都是为了过好日子而奔波,为幸福生活而奋斗。时代到了今天,我们应该还要考虑如何死的好,如何提高死亡质量的问题。正确处理死亡问题的民族,才是有前途的民族。生老病死是人间常事,朝鲜族民俗文化并不是贪喜文化,不应该只为结婚、生孩子、生日等喜庆之事而服务,应该还要为死亡等悲痛之事而服务,这才是成熟民族文化的正确态度。   三、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现实生活中的意义 所谓葬礼通俗地讲就是人死以后处理其遗体的仪式,主要具有两种功能:一是将失去生命功能的遗体送还自然的自然功能,二是终结与死者的社会关系和情感关系的社会功能。 葬礼实际上对于死者来说是毫无意义的。人死以后魂魄到底去哪里谁也说不明白。古代孔子曰:未知生,焉知死。就是说“活着时候的事情还没有搞明白,怎能知道死后的事情呢?”。表面上看葬礼好象是把死者的灵魂送到美好天国的仪式,其实不然。葬礼实际上是活人为获得精神依托和心理安慰的文化手段。因此,葬礼不是为死者所必要的,而是为活人所必要的。 葬礼在现实生活中大体上具有如下的几种意义: 葬礼是孝道的延续,补充和完成。 当今时代竞争激烈,年轻一代在开辟自己人生路的征途上往往是照顾不周自己的父母。取得一定的成功以后再回来要好好孝敬父母的时候,父母往往已经是太老了或者是已经去世不在了。 人们通过葬礼可以以自己的方式弥补对父母生前未尽到的孝道,可以向已故父母表示愧疚,请求宽恕,得到安慰。 葬礼是家庭义务的新分工,是家庭的新出发点。 人生活在一个家庭,都赋予特定地位和特定义务。一个人的死亡意味着一个家庭里空了一个位子,必然破坏原来的家庭平衡。如果是一家之主去世更为如此。在这种情况下葬礼上照例首先确定丧主,他就是家庭的新代表。传统来讲丧主必须是长子、长孙,而如今若没有儿子,长女、女婿也可以当丧主。在这个基础上家里的其他成员也自动调节自己的义务,形成家庭的新的平衡,开始家庭的新的生活。 3、葬礼是对于死者生前人生价值的评估和总结。 人生在世,创造财富,生儿育女,建功立业。因此,人死后充分评估他的生前人生价值,这就等于给活人留下有用的精神遗产。人们办丧开追悼会,一般在悼词中多讲死者的功德,不讲死者的缺点,这是因为死者的功德对于活人是有意义的,可是死者的缺点对于活人是没有任何意义的。 4、葬礼是人们对于自己人生进行反省的机会。 人一出生就决定某一天注定要死,这是不可违背的天约。人们在办丧的时候强烈意识到人对死亡的无可奈何,与此同时反观自己,感觉到对人生的紧迫感。 5、葬礼是关系到自己尊严、家族尊严、民族尊严的大事。 人是有尊严的,自己父母的葬礼也办不好,何以谈尊严?办丧有体面不一定要场面大,而是应该有自己民族特色,有成熟而精炼的章法,这样的葬礼才有体面的。 6、葬礼是传统教育的有效形式。 人们通过父母的葬礼,可以给孩子们传授孝道思想,可以给孩子们讲讲祖先的优良传统,增强孩子们的家族观念和民族观念。 … … … … … … … …   四、关于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几个问题 自从去年6月,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省级非物质文化遗产以来,做为保护单位的我们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为了不辜负时代赋予我们的历史使命,在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工作中,积极开展了一些新的尝试。 我们主要以三个方面开展工作:1、发掘、研究、整理,2、提出合理化建议,3、指导、服务。 1、在一年多的工作当中,我们对朝鲜族传统丧葬习俗进行一系列的发掘、研究工作,已经初步整理出来了结合现实朝鲜族丧葬活动的新的丧礼程序。在新整编的过程中我们着重考虑了以下三个方面:1、遵守国家的“殡葬管理条例”,2、精简而不草率,沉痛而不凄惨,3、突出显示朝鲜族特色。现在的主要问题不是去粗取精,如今糟粕、精髓都被冷冻,只要择精恢复就是。我们在新整编的朝鲜族丧礼程序中增加了读祝文和诵挽歌的内容,祝文和挽歌本来就是我们朝鲜族传统丧葬文化最精彩的一部分,此一举已经受到社会的普遍欢迎和肯定。今后我们不断总结经验,不断进行改进,与有关部门和有关学者们合作,为编纂一本完整的现代朝鲜族丧礼指导书而继续努力。 2、在向政府的相关部门和社会的相关单位提出合理化建议方面,虽然效果不甚理想,我们还是义不容辞,继续坚持。 第一个提出的建议:作为朝鲜族自治州的延边地区的四大殡仪馆中竟然没有一间朝鲜族告别厅,这显然是美中不足。就此,我们已经向有关方面提出了“在延吉殡仪馆设立朝鲜族告别厅的建议”,而且,州文化局的积极沟通和努力的结果,有关部门已经下文件认可和同意了我们的建议。下一步我们准备向有关部门提供拟设置的朝鲜族告别厅内部设计图和仪式程序,希望在这次研讨会上评估解决。 第二个提出的建议:朝鲜族丧葬习俗中“殓袭”(给死者穿寿衣、包裹)是一项很重要的程序,是每一家朝鲜族遗家属首要关切的事项。不过,这一领域现在却变成了社会上的一些人捞取钱财的自留地。这是我们民族没有保护好自己丧葬文化的后果。社会上的有些人专门利用朝鲜族遗家属的悲痛、着急的心情,诱骗他们提供一些糊涂服务以后,狮子大开口要钱,没有讲价的余地,其主要场所就是医院和福利院。就此,我们向延边州卫生局和延边医院等相关部门和相关单位提出了“在殓袭领域实现规范化、组织化的建议”,而且,已经得到了州卫生局、州护士协会等有关部门的积极的响应。可是,因为部门之间还是缺乏沟通,大部分医疗单位和福利单位还是没有完全理解我们的善意,客观上给社会上的那些人提供了可乘之机。 3、我们认为保护朝鲜族丧葬习俗最行之有效的方式是在丧葬活动中直接给朝鲜族遗家属提供指导和服务。我们不能指望每一位朝鲜族人都要熟悉朝鲜族丧葬知识,我们还没有权利处罚损害朝鲜族遗家属利益的那些人。在这种情况下我们能作到的只能是建立一支有规律、有素质的自己的丧葬服务队伍来占领这个领域。可是要占领这个领域,没有各地医院和福利院的协助是不可能的。我们三番五次地请求各地医院和福利院协助我们工作的基本理由就在于此。 在指导性工作方面,我们已经在延吉市各街道办事处进行了关于朝鲜族传统孝文化的演讲,已经在延边广播电台和延吉广播电台的早晨直播节目中进行了关于朝鲜族丧葬习俗的广播演讲,今后我们继续推进这方面的工作。我们还开设了咨询电话,认真解答各地朝鲜族遗家属提出来的有关丧葬的各种问题。 在服务性工作方面,我们已经在工商管理部门注册设立了“白花相助(丧葬)服务中心”,还缺少什么手续我们会继续补办。我们严格管理收费标准和服务质量,凡是与朝鲜族丧葬有关的所有事务上提供具体的、全面的指导和服务。一旦家里出丧事,只要拨打我们的服务热线,繁琐的丧葬事务就可以又体面又方便地OK了。我们的服务工作跟殡仪馆的工作并不发生冲突,恰恰相反,我们的服务工作就是殡仪馆工作的补充和提升。 我们认为设立朝鲜族丧葬服务中心是保护朝鲜族丧葬文化的有效保障。我们把朝鲜族丧葬服务中心搞好,而且长期坚持下去,只要功能健全的朝鲜族丧葬服务中心继续存在,朝鲜族的丧葬文化就可以继续发扬光大。 我们研究会是社会团体,在财务上没有国家的财政补帖,没有任何部门的经费支持。我们为民族保护民俗文化,可是事业经费都是靠个人出资,靠自力更生。在这种情况下设立朝鲜族丧葬服务中心,以服务养保护是唯一可取的解决方法,政策上也是支持的。 如果朝鲜族丧葬服务中心经营的不好,会直接影响保护朝鲜族丧葬文化的事业,如果朝鲜族丧葬服务中心经营的很好,必然促进保护朝鲜族丧葬文化事业的发展。 经营朝鲜族丧葬服务中心,自然涉及到争取服务对象的问题,我们只能以市场模式提供服务。现在个体户拼命与我们争抢客户,这不仅影响我们的经营效益,而且,严重阻碍我们事业计划的实施。 对此,我们制定了如下的对策方案: 抓住“保护单位”这一使命,争取政府扶持和行政支持; 充分利用广告、演讲等手段,继续扩大知名度和影响力; 提高服务质量,增加服务项目,进一步满足客户的要求; 加强与医院、福利院等相关单位的沟通,争取协助和支持; 联系有关部门,逐步实现职业培训、持证上岗的行业管理方法。   总而言之,保护朝鲜族丧葬文化是全社会性的事业,单靠一个部门、一个团体的努力是远远不够的,只要政府支持,各部门协助,全社会参与才能完成。 我们相信今天的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对于我们民族的丧葬文化事业具有积极而深远的意义,对于今后我们的工作会起到积极的推动作用。 谢谢! 2010-12-14  
47    (칼럼)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리광평 댓글:  조회:4914  추천:0  2012-07-16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안도현 신툰 진남순 할머니 상례와 제례 실기— 세미나 문건집에 수록                   리    광    평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   조선반도의 우수한 조선민족문화를 간직한대로 중국에 이주하여온 중국조선민족은 반만년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하고 그 전통을 계승, 발양하면서 중국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화하(華夏)문화의 자양분을 부단히 섭취하여 점차 자기의 주체적인 나름새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중국 다민족문화의 구성부분인 동시에 세계적 범위에서의 조선민족정체(整體)문화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이중성격을 지닌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조선민족의 전통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중국 및 주변 국가 여러 민족 문화들과의 상호교류와 영향속에서 자기의 좌표를 한결 뚜렷이 하였으며 광활한 중국의 동북지대를 활무대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오면서 고유한 민족적 정기와 향기를 무르익혀 왔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7 《민속사》의 간행사에서 인용 함) 한개 민족의 풍속은 그 민족의 력사의 일부분이며 문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를 하느라고 줄기차게 뛰여다니던 나는 2001년 7월 27일 한국 사진가 강위원과 동행하여 안도현 장흥향 신툰(安圖縣長興鄕新屯)에 다녀갔다가 뜻밖에도 이 마을에서 치르는 진남순(陳南順) 할머니 상례와 제례에 참가할수 있어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거행되는 전통적인 의례를 직접 기록할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지성으로 꾸미는 상여 2001년 7월 26일과 27일, 나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객좌교수로 계시던 한국사진가 강위원과 함께 안도현 장흥향 신툰에 다녀와 이 마을의 이민사도 조사하고 강교수님이 쓴 《조선족의 오늘》의 사진설명문에 대한 이 마을 로인님들의 의견들도 수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만주)전역을 점령한 일제는 1936년에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 (在滿朝鮮人 指導要綱)》을 제정하여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 세대, 5만여 명의 이주민을 연변과 동변도(東邊道)지역의 23개 현에 이주시키고자 계획하고 1938년에 39개 현(길장지구 포함)으로 확대하였다. 그 결과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만주지역에 이민한 조선인 집단이민(集團移民)은 무려 125개 촌에 9,226세대, 49,600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신툰의 전신은 바로 일제의 계획에 따라 1938년 3월 25일에 설립된 연길현 명월촌 도안구 집단이민부락 (延吉縣明月村島安溝集團移民部落)이다. 한국 경상도 합천군의 30세대, 밀양군의 30세대와 거창군의 40세대가 1938년 3월 25일 도안구에 60세대, 주가툰에 40세대로 나뉘여서 집단이민부락을 꾸리기 시작했단다. 그들은 이미 조선으로부터 완전한 민족풍속을 지니고 와서 연변이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기 민족풍속습관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당시 만척은 유화정책으로 흥농회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민속적인 행사를 보급하였는바 1941년에는 관혼상제례를 위한 상여와 가마, 사모관대, 활옷 등과 명절이나 행사 농악놀이에 필요한 북이나 장구, 매구, 징, 꽹과리 등을 보급했다. 이리하여 신툰에서는 부락이 서서부터 지금까지도 사람이 세상 뜨면 조선민족민속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시대와 지역의 변천에 적응하면서 상례와 제례를 실시하고있다. 그 무서운 문화대혁명시기에 상여와 상여당이 무작정 부셔졌다만 1년 좀 지나 다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있다.      7월 26일 점심 저들이 한창 이 마을 로인님들을 모시고 취재를 하고있는데 이 마을 진남순(1923년 합천군 출생) 할머니께서 안도현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사망했으므로  27일 상례와 제례를 치려달라는 진남순의 맏아들 정도영(鄭道永)의 기별이 전해왔다. 이 마을 로인회 회장 리상준(李相俊, 합천군 출생)은 골간들을 모아놓고 구체적배치를 하는것이였다. 상례(喪禮)란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사람이 죽어서부터 장사를 지내기전에 진행하는 행사를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부모가 사망한 후 자식들이 상제로 있는 동안에 행하는 모든 례절을 말한다. 제례(祭禮)는 죽은 사람의 넋에 음식을 차려놓고 일정한 의식(儀式)을 치르는것을 말한다. 언녕부터 전통적인 상례와 제례를 기록하려고 벼르고 벼르던 나는 우연하게 이 절호의 기회를 만난지라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 27일 아침, 로인회장의 인솔밑에 10여명 로인들이 문화실 마당에서 홍송나무로 관을 짜서 안도현병원에 실어 보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나는 로인님들한테 물으면서 상여당을 촬영하려갔다. 상여(행두라고도 부름)란 령구를 인공적으로 메여 운송하는 도구를 말하고 상여당이란 상여와 상례, 제례에 쓰는 제구, 식기들을 보관하는 집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상여당은 마을 밖 500∼600m 되는 곳에 짓는다. 마을의 동남쪽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500여m 걸어가니 귀틀막에 벼짚이영을 이은 상여당이 보였다. 방금 상여를 실어갔으므로 텅 비였는데 주먹만한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객사한 사람의 령구를 집안이나 마을 안에 들여오지 않으므로 다이야수레에 실어온 상여를 마을 북쪽출구 길옆에 내려  놓았다. 강영운(姜永云), 곽인영(郭仁永) 등 마을의 좌상어른들이 리덕순(李德淳) 촌당지부서기와 촌장 등 10여명 중년들을 이끌고 지성을 다해 상여를 꾸미였다. 먼저 6대의 가름대를 놓고 그우에 2대의 대채대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령구에 씌울 집을 따로 만들었다. 먼저 벽널 4쪽을 비녀로 서로 물려 조립하고 붉은 천에 흰 무늬를 새긴 천을 둘러치고 수탉대가리조각 8개를 꼽고 둥그스럼한 덮개를 덮었다. 그리고는 청천대 4대를 세워서 동여매고 가운데는 흰색이고 변두리는 붉은 색인 청천을 치고 청천대 웃끝에 헝겊방울을 각각 하나씩 단다. 령구집 정면에 직경이 반메터 될 흰 꽃을 달고 옆과 뒷면에 흰색, 분홍색, 록색의 꽃을 달아놓았다. 이어서 검은 천으로 만든 바땋이줄을 대채대 량옆의 가름대에 두줄씩 매여놓았고 령구를 동이는 새끼줄도 다 매여놓았다. 바로 이렇게 담배쉼도 없이 10여명이 한시간 남짓이 부지런히 일한 보람으로 상여는 다 준비되였다. 이 마을 사람들이 꾸며놓은 멋들어지고 아름다운 상여에는 우리 민족인민들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 조선민족풍속의 풍요로움과 숭고함, 그리고 우리 민족 선배님들의 지혜와 슬기가 슴배여있음이 분명하였다.   오전 10시 반 되여 령구를 실은 자동차와 상제, 복인 빈객들이 도착되였다. 마을 장년 넷이 굵직한 바줄로 관을 들어 상여의 대채대우에 올려놓자 여러 사람들이 새끼로 령구와 대채대를 十자형으로 두곳이나 묶었다. 이어서 다 준비한 령구집을 천천히 들어 령구를 덮어주었다. 이어서 발인제를 행했다. 상여가 집을 떠나 묘소로 가는것을 발인이라고 한다. 상여앞에 돗자리를 펴고 제사상을 차려놓은후 맏상제인 정도영이 제사상앞에 꿇어앉아 자기절로 술을 한잔 부어서 제사상우에 올려놓고 절을 두번 드리고 물러섰다. 그러자 집사가 《령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靈輀旣駕 往卽幽宅 載陳遣禮 永訣終天: 령여에 모셔 발인차비를 다 했으니 가시는 곳은 유택입니다. 견례를 행하여 영원히 작별 하고자 합니다.)》라고 발인축을 고했다.     《영결종천》하는 소리가 끝나자 상여군들이 일제히 상여를 메고 일어서서 묘지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한쪽 가름대 어간에 상여군 2명씩 들어서서 바땋이줄을 어깨에 걸었다. 그러니 한쪽에 10명씩, 모두 20명 상여군들이 상여를 멘것이다.            애달픈 상여소리 출상할 때 명정을 든 사람이 앞에 서고 그다음 공포(功布)를 든 사람, 종구쟁이와 상여군들이 서고 그뒤에 상여 맨뒤의 가름대를 붙잡은 상제들이 따르고 복인, 빈객들이 따라섰다. 상제인 녀인들을 제외한 다른 녀인들은 묘지로 가지 않고 마을에서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였다.  상여소리는 령구를 상여에 싣고 묘지로 갈 때에 부르는 노래이다. 상여소리는 보통 호상(好喪―늙은 로인이 사망된 경우)에만 내고 액상(厄喪―젊은 사람이 사망된 경우)에는 내지 않는다. 이 부락의 상여소리는 고정적인 가사가 없고 흔히 즉흥적으로 엮어댄다. 이 마을에선 리교영(李交榮, 원 이름은 리범룡) 로인님이 제일 처음으로 종구쟁이를 맡으셨댔는데 오늘엔 안영춘(安永春, 50세)이 제3임 종구쟁이로 나섰다.  상여앞에서 왼손으론 대채대를 잡고 오른손엔 구리종을 쥔 종구쟁이가 종을 흔들면서 상여군들을 향해 구슬프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선소리를 먹인다. 그러면 상여군들이 그 소리를 받아 일치하고도 우렁차게 후렴을 부르면서 맞추어 나간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영영 리별 나는 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인간 세상 하직하고      북망산천 찾아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천년 집을 하직하고      만년 집을 찾아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부모님께 효성하고      자식을랑 다 키웠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좋은 세상 더 살자니      요놈 병에 끝장났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내가 비록 떠났어도      너희들은 잘 살아라.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린 하늘에선 비가 담방 쏟아질듯 하고 산골짜기사이로 뻗은 달구지길은 지난밤에 내린 비로 하여 즐벅즐벅하였다. 붉은 천에 흰색으로《孺人麗陽陳氏之柩》라고 쓴 명정을 앞세우고 말도 없고 웃음도 없이 고개를 숙인채 느릿느릿 걸어가는 비장한 출상행렬. 애처롭고 거치른 종구쟁이의 먹이는 소리와 둔탁하고 처량한 상여군들 남성저음의 특유한 받음소리. 그리고 상제들의 애짭잘하고 목 메인 흐느낌소리와 터벅터벅 흙탕길을 짓밟는 흐트러진 발자국소리. 이 모든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 모든것에 초목도 떨고 산천도 울부짖고 하늘도 흐느낀다.          이 마을의 상여소리가사에 대하여 리교영 로인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줬다. 가사내용은 일반적으로 사망한 로인님의 인생경력과 업적, 자식들과 친척들에 대한 간절한 부탁과 희망, 그리고 상제와 복인, 빈객들이 사망자에게 바치는 효성과 바램, 출상행렬이 지나는 과정 등 내용들을 즉흥적으로 엮어서 부른단다. 때문에 종구쟁이로 나서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식이 높고 사망자와 그 가정에 대해 잘 알아야 하며 강한 호소력, 령활한 조직능력과 변화무쌍한 환경에 임기응변을 하는 재간을 가져야 한단다. 출상행렬이 울퉁불퉁한 자그마한 둔덕길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멈춰 서서 종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선소리를 먹이고 상여군들도 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가기는 가겠는데 길이 험해 어쩌겠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맞상제 맞상제여 로자 없어 못 가겠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종구쟁이가 대채대를 뒤로 밀자 상여군들이 뒤걸음을 친다. 맞상제인 정도영 부부가 술병을 들고 상여앞에 나와 먼저 령구에 절을 두번 올린후 술을 부어 종구쟁이와 상여군들에게 권하고 상여 맨앞 왼쪽 가름대에 선 상여군에게 부의금을 맡긴다. 상제가 절을 올리면 상여군들이 일치하게 허리를 굽혀 답례하고서 권하는 술도 마이고 한참 노래를 부르면서 멈춰 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간다. 출상행렬이 작은 물도랑앞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멈춰 서서 노래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대강이 가로 놓여 다리 없어 못 건너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둘째상제 어데 있소 빨리 나와 다리 놓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둘째상제 정순영(鄭淳永) 부부가 상여앞에 나와 절을 두번 올리고 상여군들에게 술과 담배를 권하고 부의금도 낸다. 출상행렬이 길 복판의 자그마한 물웅덩이앞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또 멈춰 서서 노래를 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대해가 망망하여 배가 없어 못건너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큰사돈 어데 있소 돛배 하나 갖춰주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큰사돈 부부가 상여앞에 나오자 종구쟁이가 상여군들을 이끌어 물구덩이에 딱 붙어섰다. 큰사돈부부는 막무가내로 물구덩이에 엎드려 옷을 적시면서 절을 올린후 부의금을 낸다.   바로 이렇게 종구쟁이가 즉흥적으로 노래를 엮어 부르면서 상제들은 물론 복인과 빈객들도 불러내여 령구에 절을 올리고 부의금을 내게 한단다.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호상일 경우엔 부의금을 별도로 내지 않고 상여가 나갈 때에 낸다. 이날 출상행렬은 상여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걷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뒤걸음도 하면서 두공리 되는 길을 한시간 반동안 걸었다. 저승의 새집들이 사람들은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저승에 가면  새집에 들기 마련이 아닐가? 하여 나는 령구를 매장하는 것을 저승의 새집들이라고 말한다. 25년전에 사망된 진남순의 남편 정현태(鄭鉉泰)를 이 마을 공동묘지에 모신 정황에서 상제들은 진남순의 묘소는 별도로 쓰지 않고 그의 남편묘소에 합장하기로 했다. 로인회에서는 이미 동네사람들을 보내 아침 일찍 정현태 묘소중간 왼쪽에 합장할 묘혈을 파놓았다. 정현태 묘소에 후토가 있기에 진남순은 후토를 따로 두지 않는다. 상여가 묘소에 이르자 령구집을 벗겨내고 령구를 동이였던 새끼줄들을 풀어낸 다음 네 사람이 참바로 령구를 들어 묘혈에 가져다 하관(下棺)하였다. 하관할 때 령구의 머리쪽을 산꼭대기로 향하게 했다. 이때 상제들이 몰려들어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한다. 그 처절한 곡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는듯하고 눈물이 흐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굴심을 책임졌던 김태호(金泰浩) 로인과 종구쟁이를 맡았던 안영춘이 손을 맞추어 묘혈에 들어가 령구를 바로 잡아놓고 동네사람들더러 령구 변두리에만 흙을 채우게 한다. 그런 다음 안영춘이 장판을 닦는 아낙네처럼 관을 가로 타고 엎드려 공포로 관우의 흙을 말끔히 닦아냈다. 홍송으로 된 관 널판자가 새하얀 빛을 반사한다. 이어서 김태호와 안영춘이 《孺人麗陽陳氏之柩》 라고 쓴 명정을 관우에 바르게 덮었다. 그리고 김태호 로인께서 참대젓가락 2대를 령구의 머리쪽 위치의 정현태 령구 흙벽에 꽂아 주면서 부드럽게 여쭌다. 《오작교를 놓았으니 서로 련애하러 밤낮으로 잘 다니시소.》 이 참대젓가락은 부부의 령혼이 서로 오가는 오작교를 상징한다. 김태호가 묘혈에서 나오자 맏상제와 둘째상제가 저마다 옷섶에 묘혈에서 파낸 흙을 담아서 령구의 머리쪽, 중간, 아래쪽 세곳에 쏟아놓는다. 이것을 《사방토를 놓는다.》고 한다. 그다음 상여군들이 통곡하는 상제들을 물리치고 부지런히 삽질하여 령구를 묻고 봉분한다. 이 마을사람들은 봉분한 흙우에 풀뿌리 떼짱을 큼직큼직하게 떠서 차례로 덮으면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삽으로 힘주어 두들겨준다. 그러면서 또 낫으로 떼짱우의 풀들을 말끔히 베여버린다. 이러고보니 합장한 큼직한 묘소엔 파아란 풀들이 잔디처럼 붙어있어 이미 있던 묘소나 새로 만든 묘소가 한데 서로 어울려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무덤의 아래머리에 묘제를 지내는 너비가 약 반메터, 길이가 약 2메터되는 제단을 흙으로 만들었다.   효성을 바치는 추모 사람들은 제례를 통하여 사망된이를 추모하면서 못 다한 효성을 바치는 한편 사망된 이의 관심과 조력을 받아보려는 심리를 가지고있다.  성분제례는 로인회 리상준 회장께서 집사를 맡았다. 먼저 상제들이 후토자리에 종이를 펴고 음식을 간단히 차려놓은후 맏상제가 술을 한잔 붓고 절을 두번 하였다.   후토제를 지낸 다음 묘제(성분제)를 지냈다. 상제들이 집사의 지도하에 제단우에  흰 종이를 펴고 음식을 차린다. 앞줄(무덤과 가까운 곳)에는 밥그릇, 물그릇 같은것을 놓고 뒤줄에는 반찬을 놓는다. 돼지고기, 소고기 같은 육류는 서쪽에 놓고 물고기는 동쪽에 놓는다. 그리고 검은 액틀에 넣은 진남순의 사진을 앞줄 한복판에 놓았다. 집사의 안내로 상제와 복인들이 제단의 오른쪽에 모여서고 빈객들이 제단 왼쪽에 모여 섰다. 집사께서 고 진남순의 제사를 시작한다고 선포하자 상제와 복인들이 일제히 곡을 하다가 그치고 제단앞에서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먼저 맏상제부부가 술을 한잔 부어 제단우에 놓고 절을 두번 하고 헌작한 술을 제단 변두리에 부어버리고 음식들을 조금씩 무덤 앞부분에 던져 주면서 고인들께서 많이 잡수시라고 알린다. 이어서 상제와 복인들이 사망자와의 직계, 방계 등 친척관계순서로 제단앞에 나와 상술한 방법대로 헌작, 배례한다. 상제와 복인들의 헌작, 배례가 끝나자 빈객들도 나와서 헌작하고 무덤을 향해 세번 경례를 올리고 상제와 복인들에게도 경례를 한번 올린다. 그러면 상제와 복인들도 답례로 빈객을 향해 경례를 한번 한다. 헌작, 배례가 끝나자 상제와 복인들이 제단앞에 가로섰다. 맏상제가 상제와 복인들을 대표하여 마지막 술을 한잔 부어 제단우에 놓았다.  그러자 상제와 복인들이 일제히 허리 굽혀 절을 두번 했다. 바로 이렇게 《하직절》을 마치자 맏상제 정도영이 천천히 걸어서 부모님의 무덤  머리쪽에 쪼크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면서 말한다. 《아버지, 25년만에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언제든 한국 고향에 가 보시겠다던 소원을 이루게 못하여 죄송합니다. 이젠 부모님께서 서로 잘 지내시면서 계속 자손들과 친척들이 잘 되게끔 보살펴주옵서소. 다음날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쉰 정도영은 제단앞에 다시 돌아와 전체 사람들더러 제사상에 놓았던 음식을 조금씩이라도 음복(飮福)하게 권한다. 정도영의 안해도 여러 사람들이 음복하도록 하고는 제단앞에 놓인 시어머니사진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한다. 《어머니, 이젠 모든 근심을 버리고 잘 계십시오. 내일 안신제를 지내려 오겠습니다.》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조금씩 음복하고는 모두 마을로 돌아왔다.  로인회에서 녀성들을 동원하여 촌문화실과 몇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산소에 다녀갔던 사람들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을 청하여 음복하게 했다. 그리고 상여가 나갈 때 받아들인 부의금을 로인회에서 점검한후 로인회에서 조직하면서 쓴 모든 경비를 지불한 외에 나머지는 몽땅 상주집에 넘겨주었다. 이 부의금은 절대로 상여군 등 개인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기념품 사는데 쓰지 않으며 로인회거나 촌에서도 한푼도 점하지 않는다. 혹시 경제형편이 괜찮은 상주집들에서 고맙다고 로인회에 돈을 좀 주면 그 돈은 상여나 상례, 제례에 쓰는 제구, 식기들을 갖추는데만 쓴다.   나는 이 마을 진남순 할머님의 상례와 제례에 참가하여 많은것들을 배웠고 또 많은것들도 생각해보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사망자의 평생공적을 찬송하고 참다운 인생비결을 찾고 인생도리를 밝힘으로써 살고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길과 인생가치를 재인식하고 참답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조상전래의 조선민족미풍량속을 연변이란 특정된 자연환경, 사회환경, 력사환경에 알맞게 계승, 발전시키고있으며 이런 미풍량속을 후세들이 이어가도록 본을 보여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서로간의 믿음과 친선을 늘이고 마을공동체사상을 수립함으로써 제반사업을 내미는 원동력을 키운다. 이런 행사에선 참가자가 간부이든 평민이든, 시가지사람이든 촌민이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사지휘에 복종한다. 이런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진하여 자기가 해야할 일을 찾으며 또 에누리없이 완성한다. 그리고 서로 잘 도와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 정착한지 6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어찌하여 이처럼 자기민족 미풍량속을 잘 지켜갈수 있을가? 나는 그 리유가 다음과 같지 않겠는가 제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옳바른 민족정책이 있기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중화민족대가정속에서 다른 형제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떳떳한 주인이 되어 자기 민족문화를 이어가고 발전시켜가고있는것이다. 지구촌 140여개 나라와 지구에 널려 사는 조선민족들가운데서 중국에서처럼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하는 곳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마을에서 간직하고 있는 미풍량속은 반만년의 풍부한 민족문화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 및 주변국가 여러 민족문화의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시대의 발전에 맞게 계승되고 발전되였기에 다른 문화가 대신할수 없는 강대한 생명력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자기 민족문화를 지켜가고 발전시켜 가는 훌륭한 선줄군과 지도자가 있고 이들을 받들고 따르는 훌륭한 조선민족 군중들이 있으며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인민들의 도움과 성원이 있었기때문이다. 지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마을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조선민족의식과 인구, 교육, 그리고 농촌체제개혁 등 여러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겪고있다. 특히 녀성들과 젊은이들의 도시진출로 하여 이런 미풍량속을 이어갈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것이 뚜렷한 문제로 나서고있는 현실이다. 때문에 앞으로 당과 정부와 관계기관, 단체 및 전문가, 학자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더 관심하시길 바라는것이 나의 소원이다.      2003년 7월
46    (론문) 신툰의 조선족 전통 장례습속에 대한 천담--정종인 댓글:  조회:5118  추천:0  2012-07-16
(论文)浅谈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 研讨会上发表 安图县文物管理所  郑钟仁   葬礼习俗是一个民族、一个地区或一个部落、一个家族在特定的历史发展进程和环境条件下,携带着当时当地历史、经济、文化、意识形态等多方面信息,从不同侧面反映当时的文明水平的一种文化遗产。安图县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作为中国朝鲜族典型葬礼习俗,具有一定的文化价值、历史价值和使用价值。保护和传承这一习俗,对于研究如何“保护为主、抢救第一、合理利用、传承发展”葬礼习俗类文化遗产,有其特殊的意义。   一、渊源、沿革与基本状况 安图县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是在中国朝鲜族传统葬礼习俗中较好地传承朝鲜族葬礼习俗的典型葬礼习俗。目前的中国朝鲜族丧葬习俗,究其来源是形成于朝鲜的李朝时期(1392——1910),又在中国朝鲜族居住地经过漫长时期的演变而形成的。 在李氏朝鲜以前的较长时期,土葬和火葬并行,由于崇尚佛教,火葬也比较盛行。到李氏朝鲜时期,统治者由于推行崇儒抑佛政策,把火葬看作是严重违背孝道的葬俗。认为“祖父母安于地下,则子孙安,不尔则反是,且人之生于世,然木之拖根于地,焚其根株,则枝叶凋瘁,安有发荣滋长之理乎”。朝鲜国王“传旨礼曹司宪府曰:┄┄无知之民,或有不葬其亲,而烧焚之。毁风俗,蔑彝伦,莫甚于此。祖宗以来,已有禁令,然恐习俗犹踵前弊,自今内而宪府,外而监司守令,痛行禁断。如有犯者,依律论罪,其族亲邻里,知而不禁者,并重论”。礼曹呈国王、经国王同意的整治火葬的规定尤为严酷,“其从尊长遗言,将尸烧火者,杖一百。┄┄子孙毁弃祖父母、父母死尸者斩”。于是三番五次下令严禁火葬。从此,朝鲜人民逐渐形成火葬不可为的观念,土葬成了葬俗的规则,火葬风俗随之消失。直到二十世纪六十年代以前,中国朝鲜族人民中,也曾长期存在着把火葬看作违背孝道的、不可为的、不愿为的观念。二十世纪六十年代开始,尤其是改革开放以后,中国朝鲜族人民逐渐破除实行火葬是对父母不孝的陈旧观念,逐步接受火葬风俗,根据条件实行火葬或土葬。 朝鲜族旧时丧葬的丧期较长,丧服实行五服习俗,运棺工具为丧舆,禁忌较多,程序也十分复杂,现多为简化。就丧葬程序来说,从人死到安葬的过程包括属纩、招魂、小殓、大殓、成服、迁棺、发靷、出殡、安葬,比较繁多,丧期也较长。从二十世纪六十年代之后,随着时代的步伐,为了适应生产生活的需要缩短了葬期,丧葬程序也逐渐简化,现在一般包括招魂、殓、成服、出殡、安葬或火葬等程序。 安图县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主要继承今位于韩国东南部庆尚道的葬俗,其传承渊源和历史沿革已无从考究。二十世纪三十年代中期,迁居中国后的首任护丧(丧事中负责安排和处理各种事情的指挥者)的代表人物是李姓老人,他较完整地继承了朝鲜族的葬礼习俗,并把葬俗较完整地传给后任护丧。后来随着生活环境、思想观念变化和时代的进步,又几经传承和演变,丧葬风俗已有不少变化和简化,但固有的主要葬礼习俗基本上较好地传承下来。   二、新屯葬俗与其特点及价值 新屯现行葬俗基本上是土葬三日葬风俗,其具体办法和程序大致如下: 1、招魂。临终之人一旦咽气,儿子(儿子不在,近亲)就为死者招魂。招魂过后,死者亲属们开始哭号,亲属们分为丧制(死者的配偶、子女、儿媳、、孙子等)和服人(死者的兄弟、姐妹、女婿、侄子等旁系亲属)。丧制要哭出“哀高—哀高—”,服人则哭出“哦咿—哦咿—”的之声。接着向外地的亲属和朋友发出讣告,打电话告知丧事。丧家发出哭声之后,邻里前来吊唁。 2、殓。招魂过后,将袭、小殓、大殓、成服等程序并在一起进行。其大体过程是:脱去死者旧衣,换上寿衣,“含饭”,用酒精棉堵塞七窍,脸盖冥帽,手带白手套,脚穿白纸鞋或白袜,用白布带从肩到脚腕捆扎七道,把扎好的尸体放在七星板上,盖上被子,拉一道幔帐遮挡。紧靠幔帐摆上食桌,既用于上食,也用于灵桌,死者的遗像放在灵桌幔帐处。客人前来吊唁时,在灵桌上斟上一杯酒,磕头三次,并向丧制表示慰问。什么时候做好了棺材,就什么时候进行大殓。大殓之后,书写铭旌垂挂在幔帐上。铭旌的一般书写方式是;若死者是男,写“显考学生府君神位”;若死者是女,写“显妣孺人XX(籍贯)X(姓)氏神位”。大殓后,死者的亲属(男臂系白布带,女头系白布条)系带丧服标志举行入棺祭祀。三天丧期内,上食桌上一日三次摆桌,上一些菜、饭、酒等。 3、出丧(出殡)。出丧包括迁棺、发靷(丧舆从家里出发)及其祭祀、出丧、安葬、山神祭祀和墓祭等程序。把灵柩从屋里抬到外边称迁棺,出殡时把灵柩抬进丧舆后,在丧舆前举行出丧前发靷祭祀,此时,丧舆契(专管丧葬的部落民间组织)的肩夫们把肩挑的丧舆做前低后高的姿势,使丧舆上的灵柩前头随之向下倾斜,做磕头还礼状,意为棺中人在离家前向邻里朋友们对生前关心和死后的帮助表示感谢并道别。 发靷祭祀结束后,丧舆开始出发。出发前丧舆都监喊发靷祝文,丧舆随即出发。此时,领柩者手持铜铃,丧舆前引路,领唱丧舆歌,每唱两句,肩夫们齐唱副歌,其声十分悲壮。离开新屯时领柩者代死者说:“我去了,我去了,我去XX,别了,永别了”等语。离村后丧舆一路行至已挖好的墓穴里安好灵柩,棺盖上覆盖铭旌,由丧制衣襟兜起挖墓穴的新土,撒在棺材四角或头部、中部、脚部处,称“四方土”。之后众人动锹圆坟。修完坟墓,先在墓旁祭祀山神,后进行墓祭,最后行告别礼返家。返家后丧主以酒食招待参加葬礼的人们。 第二天,去墓地举行安神祭,之后选择时机立墓碑,并年年清明和中秋节祭祀。 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以朝鲜族传统文化为基调,包含儒教中积极的思想,表现中国朝鲜族人民情感、孝道思想和民俗文化,经过演变,形成了适合当地文化、生活的、具有代表性的中国朝鲜族传统葬礼风俗。以此为特征的这一风俗,主要有如下价值: (1)历史价值。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开始形成于朝鲜半岛,自清末开始,随朝鲜移民大量移居中国而带入中国。此葬俗经过新的环境下的考验和几经传承、演变,如今仍在实行,有其存在的合理性和必要性。这一习俗对于研究中国朝鲜族历史及其文化、民俗演变具有重要的价值。 (2)文化价值。新屯葬俗具有深厚的朝鲜族文化底蕴,在传承演变中去其糟粕,留其精华,既较好地传承固有的基本葬礼习俗,又在社会主义环境下吸取先进文化,今天已形成为中国朝鲜族不可缺少的较先进的民俗文化。 (3)使用价值。在走完人生最后必由之路时,需要一定的程序、礼仪来慰藉死者及其亲人亲属和邻里亲友,抚平死者家属的悲痛心情,以此来悼念故人并激励人们不要虚度年华,要珍惜生命,珍惜时间,团结互助,和睦相处,努力奋斗,对国家和邻里,对家庭和亲友多做好事,多做贡献,积极争取活得有意义、有价值。   三、保护为主、抢救第一、合理利用、传承发展 尽管新屯葬礼风俗有合理性的积极意义,但其传承处于濒危境地。老一辈护丧等熟悉丧葬风俗的人大多过世,在世的人也不多,而且年事已高。新屯现仅存三人,年龄均八十岁以上,而年轻一点的大多受到现代观念的冲击,忙于挣钱,不愿学习、传承,到这些老人过世后,可能断档,较完整的丧葬风俗将面临逐渐失传的困境。 丧葬习俗,这一人类文化遗产是历代前人馈赠给当代和未来人们的珍贵礼物和宝贵财富。它帮助后人去识别对与错、好与坏、事物的相关性和不相关性。以及时间的有限性和无限性。当代人没有权利把前人留给自己和未来人们的礼物和财富,断送在自己的手中,一定要留给子孙后代,这是我们的历史使命。为了保护和传承发展新屯葬礼习俗等文化遗产,我们要努力做到以下几点: 1、加强领导,提高认识,加大执行非物质文化遗产的“保护为主、抢救第一、合理利用、传承发展”这一方针。安图县成立了非物质文化遗产保护领导小组,做了大量的工作,取得了较好的成绩,但也有不足之处。领导的重视程度,往往决定人力、物力、财力的投入力度,进而影响工作效益的高低和成果的大小及执行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方针的认真程度。因此,我们要积极争取领导重视、关心和参与。当然,不能奢望或提出不切实际的要求,理解他们的苦处和难处,但一定要争取非物质文化工作所需要的领导重视和支持,争取必需的人力、物力、财力,以利于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顺利进行。 2、建立机构,加强宣传、保护、研究、挖掘、传承发展工作。要建立民俗研究学会。学会集研究、交流、挖掘、宣传、培训、保护、传承、发展民俗文化的功能和作用,必定起着非物质文化遗产保护领导小组无法代替的特殊作用。只要有领导和相关部门的实际行动支持,民俗研究学会一定会完成自己的使命。同时,通过媒体宣传等各种形式,加大非物质文化遗产保护方面的宣传,提高全社会保护非物质文化遗产意识,参与到共同保护、共同所有、共同享受文化遗产的社会活动中来。 3、建立培养传承人队伍机制,把非物质文化遗产代代相传。长期以来,人们对非物质文化遗产的传承性一直认识不足,实际上无论是保护、抢救还是利用,核心问题终究还是传承,而传承的关键在于传承人问题。解决一时一地的一项非物质文化遗产的传承人问题,终非长久之计,所以,党政有关部门和民间组织要共同努力,鼓励有条件的人们参加非物质文化遗产传承事业,同时,以培训形式和师承制等传授与学习的有效途径,有计划地解决传承人培养问题。 总之,非物质文化遗产保护的本质是文化的传承与发展的问题。人类文明在世代的文化创造和积累中不断发展进步,原有的文明,过去创造的非物质文化遗产,有些作为可以利用的价值和因素被传承下来,有些则被历史遗忘。新屯中国朝鲜族葬礼习俗作为可以利用的价值和因素被传承下来,只要我们保护中传承,传承中发展,将来无论丧葬习俗怎样演变,其固有的本质和基本原则将会长期传承下去。                       二0一0年十二月十日    
45    (칼럼) 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김선화 댓글:  조회:4423  추천:0  2012-07-16
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 세미나 응모작품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 김선화   《장례》하고 《죽은 사람》하면 머리카락이 쭈볏이 일어서고 밖에 나가기조차 무서워하던 필자는 박물관에 와서 많은 시간을 오래된 문물들과 접촉하면서, 특히 올해에 있은 전국 《귀중문물 데이터베이스(数据库database)》 건설에 참가하여 룡정부분을 책임지고 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 국가급 일급 문물인 상여를 진일보 가까히 접촉하고 그에 관한  재료를 수집하면서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였고 문물 하나 하나에 담겨진 그 의미를 진일보 터득하게 되였다. 웅장하면서도 비감한 상여군들의 상여소리에 맞추어  명정을 선두로 공포, 요여, 만장, 상여, 그뒤로 상인, 조객 등으로 길게 늘어진 상여행렬은  20세기 6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연변지구 농촌에서 흔히 볼수있었던  한개 경관이였다. 상여는 장례시 죽은 자의 시체를 장지로 운반하는 공구인데 행상 또는 령여, 향두라고도 부른다. 상여가 제일 처음 문자로 문헌에 기재된 것은 조선의 《주자가례》라고도 할수 있는 리재가 쓴 《사례편람》인데 《대여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기 힘들므로 상여를 사용해도 된다.》라고 씌여 있다. 그리고 8권으로 된 《사례편람》에서  3권부터 8권까지는 상례와 제례에 관한 부분이다. 이로부터 효도와 조상숭배를 인륜의 첫째 준칙으로 주장하는 유교륜리에 의하여 관혼상제의 사례 (四礼) 가운데서 상례와 제례는 그 절차가 얼마나 번잡하고 까다로웠는가를 엿볼수가 있다.  상여는 장례때 씌이는 여러가지 물건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물건으로서 과거 상여의 정교함과 호화로움은 그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은 자에 대한 효도와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상여는 종족끼리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준비하여 쓰는것도 있었다. 이것은 비상업적인 행위로서 세를 놓는것이 아니고, 공익성적으로 마을에 상사가 생기면 서로 빌려다 쓰군 하였다. 상여의 좋고 나쁨은 한 마을의 명예와도 관계되기 때문에 매 마을에서는 자기마을의 상여제작 과정중에서 자연히 호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였다. 그리고 종족에서 준비하는 상여일 경우에는 상여의 좋고 나쁨이 그 종족의 지위와 재력을 직접 표현하기 때문에 상여의 제작공예나 재료에 더더구나 성본을  아끼지 않았다. 60년대 초기까지만 하여도 연변의 조선족 마을마다에 거의 상여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상여막을 짓고 그곳에 보관하였다가 유사시에만 가져다 쓰군 하였다. 우리가 답사한데 의하면 덕신향 석문촌에는 원래 상후동 (지금의 석문4대 )과 간촌(지금의 석문2대)에 각기 향두막이 있었다. 마을과 좀 동떨어진 곳이였는데 향두막은 돌을 쌓아 벽을 하고 짚으로 지붕을 이였는데 문은 하나만 냈다. 향두를 관리하는 사람을 “향두워량”이라고 불렀는데 마을 어른들이 일년에 한번씩 회의를 하고 선거를 하였다. 향두를 써야 할때에는 먼저 “향두워량”과 상의해서 쓰군 하였다. 60년대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잡귀신을 때려잡는다고 하여 향두를 불살라버리고 향두막도 허물어 버렸다. 우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상여는 피나무와 적송으로 된것인데 1989년 훈춘현 마적달향 마적달진에서 수집한 것이다. 1960년대에 제작한 것이고 16명이 메도록 만들어졌다. 이 상여는 양장, 웃덥개, 몸체, 운각, 들대, 장식등 6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다. 양장은 너비1.5메터, 길이 3메터의 연푸른색 광목천 변두리에 15센치메터의 검은색 광목천 변두리를 둘렀고, 그 옆에 흰색천으로 레스모양을 만들어 달았다. 양장은 길이가 약 2메터 되고 직경이 7센치메터 좌우의 두대의  x자형 양장대로 긴 들대에 고정시켜 쓴다. 덮개는 앞뒤 두장의 반원모양의 룡수판을 세오리의 가름대로 고정시키고, 그위에 검은색 광목천을 덮어 지붕모양을 만들었다. 혼백이 검은 의복을 입은 저승사자에 안내되어 북방으로 간다고 생각하여 관 위를 검은색천으로 덮어서 사용하였다. 그 위에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머리를 각기 앞뒤로 향하고 몸체를 칭칭 감아 서로 얽힌 두마리 운룡모양의 조각을 마룻대에 얹어 고정시켰다. 그 룡조각위에는 또 하나가 크고 두개가 작은 꼭두각시 세개가  꽂혀 있다. 가운데 큰 인형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는데  이는 동방삭을 의미한다고 한다. 동방삭은 보통 사자를 탄 모습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사자를 타지 않고 직립하고 있다. 전설에서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하는 동박삭은 죽은 자의 망령을 좋은 곳으로 안내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크기가 같은 두개의 꼭두각시는 하나는 남자모양으로, 하나는 여자모양으로 되여 있다. 죽은자가 남자이면 남자 꼭두각시를 앞에 꽂고, 죽은자가 여자이면 여자 꼭두각시를 앞에 꽂는다고 한다. 전체 조각은 피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는데 특히 룡조각은 모양이 생동하고 선이 미끈하여 흠잡을데가 없다. 하나의 상여는 조각기술과 목공기술 및 미공기술의 종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체부분은 아래위 두개의 네모난 틀로 되였는데 네귀에 4개의 기둥을 세워 련결하였다. 몸체 조성이 완성된후 기둥 웃부분에 봉황새 조각을 꽂고 휘장을 드리우면 된다. 휘장은 흰색을 위주로 홍, 황, 청 세가지색을 곁들어 이쁘게 만드는데 상여안의 관이 보이지 않게하는 작용을 한다. 운각은 윗틀 휘장을 고정시키는데 쓰는 둘레 막이인데 너비가 13센치메터인 널판자로 되여있다. 이 상여는 네쪼각으로 된 운각을 쓰기 편리하게 돌쩌귀로 연결해 놓았다. 운각에도 먹으로 국화, 련꽂 등 도안을 그려 넣은것을 볼수가 있다. 운각과 몸체 웃틀에는 상응한 디(卯)가 나있어 계자순자 (鸡子榫子)를 꽂아 고정할수 있게 만들었다. 이 상여에는 앞뒤에 각각3개씩 6개, 좌우에 각각 5씩 10개, 모두 16개의 계자순자가 있다. 계자순자의 다른 한가지 용도는 장식용 술을 거는 것이다. 들대로는 장강(长扛)과 횡강(横扛)이 있다. 장강은 길이가 5메터 남짓히 길고, 지름이 15센치메터인 두대의 적송으로 되였는데 그 한쪽에 나란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5개의 꺽쇠모양의 부속이 달려있다. 이는 횡강을 꽂아 사용할때 고정하는 곳이다. 두대의 장강은 세대의 길이 60센치메터 되는 단강으로 연결되여 있다. 횡강은  길이가 2.5메터 남짓하고  지름이 8센치메터 되는 다섯개의 나무대로 구성되였다. 상여를 멜때에는 횡강 사이를 기다란 흰광목천으로  련결한후 그 천을 상여군들이 어깨에 메고 횡강을 손으로 잡는다. 이 상여는 모두 50여개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였지만  한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장부구조로 련결되여 있다는 것이 특점이다. 사용이 끊난후에는 작은 부속품들을 분해하여 130×40×40인 작은 상자에 넣을수 있어 운반과 보관이 간편하게 만들었다. 이번의 자료수집에서는 또 한국의 많은 상관 자료들을 접촉하게 되였는데 우리의 상여와 한국 상여의 차이점도 보아내게 되였다. 한국에서 수장하고 있는 상여들의 룡수판에는 구호수법으로 대부분 벽사적 역할을 하는 룡의 머리나 도깨비 얼굴모양을 그려넣은 것이 특징이나, 우리가 수장하고 있는 상여의 룡수판은 반월형 널판자에 련꽃과 물고기등 그림을 먹으로 그려넣고 글자를 쓴것이 특점이다. 상여와 마찬가지로 룡수판 역시 지방, 사회계층, 제작자의 취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제작된다. 또한 룡수판은 전문가가 제작한 불교 공예품과는 달리 마을에서 솜씨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에는 만든 이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꼭두각시 조각들은 기법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색갈을 내여 색감이 화려하지만 우리의 것들은 간단면서도 미끈한 기법으로 그냥 봉황만 약간의 색갈을 올렸을 뿐이다. 총적으로 한국에서 수장하고 있는 상여들은 색채나 조각면에서 현란하고 호화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우리의 상여는 소박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할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필자는 상여와 더불어 쓰이는 도구들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도구인 관과 수의에 대해서도 간단한 조사를 해보았다. 필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과거에는 집에 년령이 60에 가까워지는 로인이 계신다면 자식들이 관널과 칠성판을 준비해 두는것이 효도라고 생각하였다. 보통 2~3센치메터 두께 되는 옹이 적은 홍송널이 관널 재료로는 상등품이라고 하였다. 생활에 여유가 있어 가정에서 자식들이 홍송널을 준비해 주면 로인들은 자기 집널을 좋은것으로 마련하였다고 즐겨워 하고, 남들 앞에게 자랑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60환갑에 가까워 오면 안노인들은 내외 두분의 수의(속옷, 겉옷, 폭건, 악수, 버선)도 생전에 베천으로  만들어서 풀까지 빳빳이 먹여서 장롱속 깊은 곳에 고이 넣어 두었다. 과거 조선족 민간에서는 노인을 위해 생전에 수의를 미리 마련해 두면 더욱 오래 앉을수 있다는 관념이 류행되였다. 력사의 흐름과 시대의 발전에 따라 연변지구에서 50년대 까지만 하여도 흔히 볼수 있었던 상여행렬은 60년대를 기점으로 전통 장례풍습이 사라져감에 따라 력사의 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풍격이 독특한 상여는 력사의 세례를 겪었어도 의연히 그 소박함과 고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여기 용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는 민간으로 부터 수집한 상여와 제례에 상관되는 문물이 족히 백여건에 달한다. 비록 물건들은 세월의 세례속에서 좀이 먹고 색이 바랬지만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조형으로부터 이 물건들의 당년의 그 기품을 그대로 보아낼수 있다.   2010-11-29
44    (론문) 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한광운 조경희 댓글:  조회:9189  추천:0  2012-07-16
(론문) 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 세미나에서 발표 연변박물관 한광운 조경희   머리말 상여라 하면 사람들은 인츰 죽음을 떠 올리게 된다. 상여라 함은 죽은사람을 메여 내가는 도구로써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축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것이고 나이 많은 분들은 기억으로나 남아 있을지 상여에 대해 거론할때가 거의 없다. 필자도 어릴적에 상여를 본적이 있고 상여로 관을 메여 내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었으며 무시무시한 상여막에도 호기심으로 접근해 본적도 있었다. 상여란 어구는 민속에 접촉하면서 알게 된것이고 그전에는 라고 들어었다. 사무실에 앉아서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 근래에 민간조사를 하면서 생각밖으로 를 재차 목격하게 되였다. 어릴때는 무서워서 접근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란 차원에서 친근감을 느끼면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직접 만지면서 그젯날 조상들의 넋을 떠올리였다. 다행스럽게도 2009년에 가 길림성 비물질 문화유산 대표성 명록에 등재되여 보호를 받게 되였고 상여도 상례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서 문화유물로 보호를 받게 되였다. 아래에 상여에 관련해서 필자의 감수를 적으려 한다. 여러 전문가, 학자들께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1.연변지역 상여보존현황 조선족이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에 이주해온 력사도 어언간 150년이나 된다. 비록 간고한 이주력사를 걸치고 파란곡절 많은 삶을 영위해 왔지만 민족의 전통만은 잃지않고 항시 전승해 왔다. 상여도 우리민족의 넋을 담은 문화전통으로 끈질기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필자는 20세기80년대 후기부터 민속사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점차 문화적 시각으로 우리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에 대해 접근하였다. 필자의 고향은 훈춘이여서 자주 훈춘지역을 들락거리였다. 1989년에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훈춘에 방문갔다가 우연하게 당시의 마적달향에 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츰 박물관에 알리고 조사를 진행할것을 제의 하였다. 사실 1988년에 필자(고향은 훈춘시 삼가자향 동강자촌임)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장례식은 전통식으로 치렀으며 로 관을 메여 내갔던것이였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훈춘지역에선 이 시기에 기본상 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3명으로 구성된 룡정박물관 조사일군들은 마적달향에 도착하여 쉴 사이도 없이 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여 실물을 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가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필자 고향의 상여와는 다른 인형도 있고 새도 있고 그림도 있는 상여였다. 그 형태로부터 볼때 가마형 상여였다. 아쉽게도 유물 수집에만 급급하다보니 상세한 내용조사는 못하고 그렇다할 기록도 남기지 못하였다. 허나 조선족의 대표성적인 문화유물인것만은 사실이였다. 현재 이 유물은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다.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보관장소가 합당하지 않은 탓으로 많이 좀이 먹어들어 갔고 시급히 수리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2008년 연변박물관에서는 조선족 민속전시를 새롭게 꾸리면서 룡정민속박물관의 상여를 본따서 김광혁이란 공예 미술가를 초청하여 원모양대로 복원해 놓았다. 대채의 길이는 4.3메터정도이고 너비는 75센치메터였다. 몸체의 길이는 260센치메터, 너비는 75센치메터, 총높이는 125센치메터였다. 조각품으로는 룡두 2개, 오리모양의 큰새 4개, 오리모양의 작은새 16개, 선비인형 1개, 동자인형 2개이다. 그림으로는 앞 룡수판(룡두를 올려놓는 반원형 나무판)에 그린 물고기가 룡으로 화한 그림, 뒤룡수판의 련꽃, 물고기 그림, 란간에 그려진 매화, 국화 꽃무늬가 있었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 훈춘시 마적달향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1989년에 룡정조선족 민속박물관에 수집, 소장하고 있음 조선족 조각예술가 김광혁선생이 상여를 복원하고 있음(2008)   2007년부터 필자는 연변지역 민간조사를 규모있게 진행하였었다. 조사 주제는 상여가 아니였지만 상여를 적지않게 발견하게 되였다. 새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의 장례방식은 많이 바뀌였다. 나라적으로 화장법을 제창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토장법은 거의 사그러져 갔고 깊은 산간마을에서만 아직도 가담가담 토장법은 계속 실행하고 있었으며 상여도 어느정도 사용한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상여가 있어도 멜 사람도 찿기 힘든 상황이며 동력운수도구를 사용할때가 더욱 많다. 2007년 가을 룡정시 부유향 하마래촌(현재 부유향을 취소하고 삼합진에 합병)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을 지나게 되였는데 1970년도에 제작된 소수레에 조합해서 만든 상여를 발견하였다. 동네로인들과 문의하였는데 하마래촌의 김종식(1939년생)로인이 만든것이라 한다. 김종식로인은 하마래촌에서 태여나서 어릴때부터 목수일을 익혀왔으며 문화대혁명초기에 원래의 상여가 없어지자 수레에다 상여를 조합하는 착상을 내놓아 산길에서도 쉽게 오르내릴수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만 있는 새로운 상여를 만들었다. 그 상여구조를 보면 조선족 전통의 팔간기와집 지붕을 본딴것인데 루각식 상여의 일종이라 할수 있다. 아쉽게도 이 상여는 그 당시 크게 파손되였는데 타민족의 페품수구하는 사람들이 에 들어가 수레의 축과 바퀴테의 쇠붙이만을  빼내갔고 상여를 분리해서 사처에다 널어놓았다. 정말로 량심없는 인간들이였다. 조선족들은 옛날부터 황디막에 보통 접근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그 근처에서 장난질 하는것도 제한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오랜세월이 흘렀어도 인위적으로 상여가 파손되는 현상은 매우 드물었다. 필자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널려져있는 상여 부분품들을 황디막에 들여놓아 어느땐가 수집해 가려고 하였다. 헌데 그 이듬해 재차 갔는데 그 나머지 마저도 불을 때려고 누군가가 가졌갔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이 특이한 상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게 되였다. 하마래촌은 도시의 화장터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금도 토장법을 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젠 전통식 상여로 장례를 치를수가 없게 되였다. 룡정시 삼합진 하마래촌에서 1970년에 제작한 수레에 조합한 상여 하마래촌에서 제작한 상여의 부속물-혼백함 2008년 가을, 필자는 훈춘시 마적달향 마적달촌으로 내려가 재차 민간조사를 진행하였다. 본촌의 진장춘(당시71세), 정기수(당시62세) 두 로인의 안내하에 마을 서북쪽에 위치한 으로 갔다. 은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은 없었다. 비나 눈을 막기 위한 것이였다. 이 마을의 상여는 그 구조가 매우 간단하였는데 필자의 고향마을의 상여와 흡사했다. 대채와 몸체로 구성되였는데 대채는 그 규격이 길이가 41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70센치메터였다. 몸체는 기둥과 보로 이루어졌는데 조선족 가옥구조와 비슷했다. 몸체의 규격을 보면 길이 200센치메터, 너비 70센치메터, 높이 68센치메터였다. 몸체 중간에 관을 놓게 되였는데 관의 규격은 보통 길이가 180-20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45센치메터이며 높이가 30센치메터였다고 한다. 관을 놓은후 몸체 사면은 붉은 천으로 두르고 웃지붕은 흰천으로 쳐놓는다. 그리고 흰천으로 품바를 만들어 관을 메게 앞뒤채에다 열십자로 동여 매놓는다.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의 상여-대채 2009년 음력설이 금방 지난후 필자는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원래는 동신향에 속했는데 후에 동신향이 취소되고 천교령진에 합병)을 조사하였다. 태양촌은 20세기 30년대에 일제의 강제이주로 인해 생겨난 집단부락이였다. 주로 조선반도 경상북도 안동, 문경에서 많이 이주해 왔는데 지금도 경상도 말씨를 사용하고 있다. 태양촌 서북쪽 강변에 (상여를  보관하는 막집)이 세워져있다. 지금도 상여가 보관되여 있다. 현재의 매장법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은 화장법이나 토장법을 모두 채용할수 있다. 허나 지금은 토장은 거의 치르지 않고 화장하는데 연길이나 도문의 화장터로 가야한다. 태양촌에 원래 오래된 상여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시기에 없어졌다가 1970년 이후에 로인독보조에서 다시 원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 이곳의 상여는 기타 지방보다 많이 다르다. 이 상여를 만든이는 태양촌의 72세 되는 신창순로인인데 태양촌에 살다가 지금은 동신촌에서 멀지않은 하동촌에 이사하였다고 한다. 신로인은 목수재간이 있고 경상북도에서 전해진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문적인 상여조직도 있었는데 지금은 로인협회에서 관리한다. 그전에 상여소리를 하는 로인들도 계셨는데 모두 세상뜨고 가석하게도 후세에 전해주지 못하였다. 상여의 형태로 보아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로서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 상여인듯 하였다. 조각품은  란간에 꽂혀있는 쐐기인데 머리쪽에다 봉황과 물고기를 그렸다. 그리고 지붕 앞뒤면에 각기 두마리의 룡과 두마리 학을 그려놓았다. 지붕 중간에 붉은 룡주를 달아놓았다. 색조는 오방색을 취하였는데 대채는 누른색, 지붕은 누른색, 기둥과 보는 푸른색, 란간은 붉은색을 칠하고 몸체에는 검은색천을 두르고 푸른색, 누른색, 붉은색천으로 장식물을 만들어 달아놓았다. 휘장은 흰색바탕에 변두리에 하늘색을 대였으며 네귀에 푸른색, 하늘색, 누른색, 붉은색으로 조합해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 현재는 상여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에 보존되여 있는 상여 이상은 필자가 민간조사 과정에 상여에 대한 직접 보고 느낀것이다. 조선족로인들은 그래도 전통적인 장례방식에 대해 고집하고 있으며 별로 사용하지않는 도구라고 하지만 버리기 아쉬워하며 우리민족의 문화전통으로 세세대대로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다. 2.상여에 관련된 민속 내용 상여에 관련해서 여러문헌들에 적지않게 소개되였다. 조선의 서책에서는 상여를 아래와 같이 귀납하였다. 상여는 시체를 운반하는 기구이다. 상두, 령여라고도 한다. 상여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며 가마보다 더 길고 몸체좌우에는 멜채가 길게 뻗어있어 그 량쪽끝에 채 막대기를 가로 대고 앞채 막대기 좌우로 두줄씩 끈(천)을 달아 뒤채 막대기에 붙잡아 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멜방망이를 좌우로 끼여 사람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 끈을 어깨에 메도록 되여있다. 몸체는 단청식으로 여러가지 채색을 하고 네귀에는 기둥을  세워 우로 포장을 쳐 해빛을 가리우며 상여 뚜껑에는 련꽃 또는 봉황새등으로 장식하였다. 상여는 마을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 (상두막, 상구막, 행사막)라는 집을 공동으로 짓고 그안에 보관해두고 사람이 죽으면 가져다가 리용하였다. 상여를 보관할때는 분해하였다가 사용할때마다 조립하군 하였다.[1] 여기에서 상여막이 거론되는데 상여를 보관하는데 필수적인 시설인것이다. 연변지역에서는 상여를 황두라고 부르는데 황두라는 말은 옛날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상사때에 서로 도와주는 상호부조 조직이였던 에서 유래된 것인데 향이 황, 도가 두로 음이 와전된 것으로 인정한다.[2] 상여막은 마을에서 500메터안으로 떨어진 좀 편벽한곳에 설치하는데 15-20평방메터의 면적에 벼집지붕 모양으로 지었다. 벽면을 만들어 문을 달아 자물쇠를 잠그기도 하였고 산간지대에서 벽면도 없이 기둥과 지붕만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새나 짚으로 지붕을 얹어 놓았지만 20세기70년대후에는 세멘트기와나 붉은기와를 얹었다. 사람들은 상여막을 가까이 접근하는것을 꺼리였으며 아이들이 상여막 근처를 가지못하도록 단속하였다. 길을 가다가 상여막이 맞띄우면 길을 에돌아서 지나간다. 이렇게 상여막은 범접할수 없는 금지구역으로 되여 고스란이 유지되여 왔다.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 서북쪽에 위치한 황두막   장례식때 상여를 동반하여 상여소리가 이어지는데 상여소리는 장례때에 부르는 노래로서 상여군들이 고인의 령구를 실은 상여를 메고 묘지까지 가면서 부르는 추도곡과 같은 노래이다. 상여소리에는 긴 상여소리와 잦은 상여소리가 있는데 집에서 상여를 멜때부터 마을을 벗어 날때까지는 긴 상여소리를 부르고 상여가 마을을 벗어나면 잦은 상여소리를 불렀다. 상여소리에서 특징적인것은 고인을 넋을 대신하여 노래 잘 부르는 선소리군이 먹이는 소리와 상여군들이 받아부르는 소리로 되여있는 것이다. 긴 상여소리는 먹이는 소리가 길고 받는 소리가 짧고 그 음악형상은 한없이 구슬프고 애절하다. 잦은 상여소리는 선소리군이 고인의 넋을 대신하여 부르는 노래인 동시에 상여행렬을 다그쳐나가기 위한 지시를 주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잦은 상여소리의 먹이는 소리와 받는 소리는 같은데 그 음악형상은 처량하면서도 활기 있는것이 특징이다. 상여가 묘지에 도착하면 이어 제사를 지내고 관을 묘자리에 묻었는데 이때 상여군들은 달구로 무덤을 다지면서 를 불렀다.[3] 안도현 신툰과 왕청현 태양촌에서는 20세기 90년대까지도 장례식때 상여 소리를 불렀다고 한다.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상여소리를 부르는 로인들이 세상뜨면서 점차적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는데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연변에서 류행되던 상여소리 가사 두곡을 살펴보기로 하자. 상여소리1: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저승길이 멀다해도 대문밖이 저승일세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 오지는 못하리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평풍에 그린 저닭이 홰를 치면 다시 오리 (리상철 창,김태갑 수집)[4]   상여소리2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넌 안산이 북망일세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이길로 한번 돌아가면 어느 황천에 다시볼가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인제가면 언제오리 올날이나 일어주소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시내안산에 우지지고 차천명월이 밝아온다.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새벽접동이 지저울고 강상두루미 춤을 춘다.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5]   상여와 관련되는 민속내용에서 상여조직도 매우 중요한 한부분이다. 이러한 상여조직을 상여계라고 하는데 연변에서는 향도계라고도 하였다. 향도는 민간에서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무어진 생활조직이다. 향도는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우선 성원들 호상간 친목을 도모하였다. 다음으로 상사일을 서로 도와 주었다. 상여계는 전문적으로 상례와 장례를 치르는 민간조직이다. 20세기60년대 이전까지 조선족 마을에는 거의다 상여계가 건립되여 있었다. 호수가 200-300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은 단독으로 상여계를 건립하고 호수가 몇십호밖에 안되는 마을은 몇개 마을이 련합하여 상여계를 건립하였다. 18세이상 되는 남성 촌민들은 모두 상여계에 참가하며 집에 로인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는 18세미만의 소년도 상예계에 가입하였다. 상여계의 관리인원들로는 존위(尊位), 도감, 집사, 소임등이 있다. 기타의 성원들은 제원(诸员) 이라고 한다. 존위는 상여계의 우두머리로서 년세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 담당한다. 상례와 제례행사에서 실제적 지휘는 도감이며 집사는 도감을 협조하여 구체적 행사를 집행하는 사람이다. 소임은 심부름군이다.[6] 2008년 9월에 필자가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을 조사하면서 상여계에 관련되는 내용을 어느정도 알게 되였다. 이 마을에는 황디월이라는것이 있는데 주로  상사때 장례식을 도와 나서는 조직이라 한다. 황디월의 좌상되는 사람을 (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이라 하는데 시신을 렴하고 부고를 내는 일을 맡아 한다. 그 아래에 (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이란 직무가 있는데 장례식의 구체적일을 맡아 처리한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 황디월에서 거두는 비용항목)을 거두기도 한다. 이러한 은 옛날에는 인민페50전씩 거두었는데 현재는 10-20원정도를 거둔다고 한다. 촌민들이 모두 황디월에 참여할수 있는데 과부만은 참여 못하며 돈만 기부하면 된다고 한다. 매년 섣달 20일좌우에 황디월 회의를 소집하여 좌상을 선거한다고 한다. 그러면 매년 한번씩 좌상을 바꾸는 셈이다. 대부분 조선족 마을에서는 현재 전문적인 상여조직을 내오지 않고 로인협회에서 그 직능을 리행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왕청현 태양촌과 룡정시 하마래촌도 그러한 상황이였다. 3.상여의 구조와 장식물의 문화적함의 상여의 구조는 크게 가마형과 루각건물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가마형은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를 말하며 다시 상여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과 지붕 량쪽에 박공 2개를 접속 고정한 박공형(朴工形)이 있다. 루각건물형은 다층 루각형태로 된 상여로서 상여의 상단을 기와집의 형태로 마감하여 기와와 처마 등을 갖춘 기와집의 구조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말한다. 임금이 타던 련(辇)이나 고관대작들이 타던 화려한 가교(驾轿)처럼 비슷하게 꾸며서 죽은 이가 평소에 탈수 없었던 것을 죽어서나마 한번 타보라고 하는 것이다.[7] 연변지역의 조선족 마을에서 류행되던 상여는 가마형이 대부분이며 루각건물형도 간혹 볼수가 있었다. 룡정박물관에 소장되여있는 상여는 가마형의 박공형 상여이고 왕청현 태양촌의 상여는 가마형의 별갑형 상여라 할수있다. 룡정시 하마래촌에 있었던 수레에 조합한 상여는 루각건물형이라고 할수있는데 단층으로 된것이라 할수있다. 상여는 저승(陰間)과 이승(陽間)령역, 그리고 신성(祖上神) 령역과 일상 령역의 통합, 또는 전이 단계에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상여와 그 장식물은 이 량자적 령역을 동시에 수반하는 속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삶의 방위는 동쪽이나 남쪽에 두고 죽음의 방위는 그와 반대인 서쪽이나 북쪽에 두는 사례가 많다. 유교에서도 죽음의 방향을 북망산(北邙山: 하남성[河南省] 락양[洛阳]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음.)으로 두고 있다. 죽음은 두려움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고 삶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상여는 상례문화 안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이며 그 장식으로 인해 화려함과 더불어 가장 구체적인 형상물이 제시되는 상징 공간이다.[8] 상여 장식물은 조선왕조시기의 유교적 상례문화와 함께 성행한 예술적 산물이다. 충렬왕 16년(1290년)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주희(朱熹,1130~1200)의 가례(家礼)는 조선 례제 (礼制)의 기본이 되였고 이를 토대로 (经国大典) (1469)과 (国朝五礼仪)(1474)가 편찬되여 유교식 의례의 보편화가 진행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유교식 상례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중기까지는 고려의 불교식 화장(火葬)문화의 영향으로 유교식 매장의례는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유교식 상례문화가 정착된 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서 중국식 가례를 수용하였지만 있는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조선반도의 실정에 맞는 부분은 받아 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버리는 형태로 취하였다. 조선왕조 후기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상례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인 상여에서도 그 구조와 장식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호화로운 건축물화 현상이 나타나고 장식적인 측면에서는 민화적 성격을 갖춘 그림과 더불어 각종 목조 장식물이 부착되였다. 상여 장식물은 유교적 의례 활동을 통해 량반 신분으로의 상승을 보여줄수 있는 중요한 표상물(表象物)이였다. 연변의 조선족 에게는 그러한 화려함이 이어지지 못하고 서민층에서 보편화된 간이한 상여가 전승되였다. 그러나 민화적인 장식물과 그림들이 활용되였다. 상여에 나타난 민화적 소재를 보면 가구나 도자기 그리고 수예품에서 늘 볼수있는 동식물 문양들이였다. 룡정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는 상여는 비교적 대표적인 장식물이 부착된 나무공예품인 것이다. 상여의 몸체의 지붕꼭대기에 꼬인 룡두가 앞뒤로 향하게 놓여 있고 룡몸뚱이 우에는 선비인형과 동자인형이 박혀있다. 룡두를 받치는 룡수판에는 룡으로 화한 물고기, 련꽃과 물고기가 각기 그려져있고 배경으로는 산, 물, 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몸체 네귀퉁이에는 오리모양의 새 네마리가 조각되여 꽂혀 있고 란간을 고정하는 쐐기머리는 오리모양의 작은 새로 조각되였다. 란간에는 사군자의 일종인 매화, 국화가 그려져 있었고 물결무늬가 보인다. 여기서 인형은 망자를 인도하는 시자(侍者)라 볼수 있고 새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령혼의 안내자라 볼수 있다. 왕청현 태양촌의 상여에는 그려진 봉황과 물고기가 보이고 룡과 학 그림이 보이며 해와 산, 구름도 보인다.          선비인형(복제품) 동자인형(복제품) 룡두와 인형(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봉황과 물고기문양(왕청현 태양촌 상여의 부분품) 이러한 상여 장식물들은 삶의 소망을 담아 죽음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이 연장될 것이라는  삶에 대한 축복의 함의로 묘사되는 것이다. 옛날엔 여러가지 소재로 된 자연적인 문양들이 장소나 내용에  맞게 제작되였으며 부귀다남 (富贵多男), 부귀공명(富贵功名), 무병장수(无病长寿) 등의 의미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소망을 담아 일상 기물과 같은 친숙한 소재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기물과 상여 장식물에 많이 등장하는 것들 중에서 모란꽃은 꽃중의 왕으로 부귀와 명예를 상징한다. 모란과 다른 문양이 서로 결합되여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모란을 병에 꽂은 형상은 부귀평안을 상징하며 모란과 백조 한쌍이 결합되면 백발이 될때까지 부귀를 누린다는 뜻을 나타낸다. 매화의 자연현상을 보면 늙은 줄기에서 새 가지가 돋아 나오며 추운 겨울을 견딘후 꽃이 피기 때문에 로쇠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민간에서는 매화가 다섯잎으로 되여 있기에 오복인 복(福), 록(禄), 수(寿), 희(喜), 재(财)를 표시한다고 여기여 길상 문양으로 많이 리용된다. 련꽃무늬에서 련뿌리와 줄기가 서로 얽혀 있는것은 형제자매의 우애, 련꽃열매와 씨앗은 다산을 소망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련꽃의 자연특성을 보면 비록 진흙에서 피여 나지만 어지럽게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며 수명 또한 길다. 룡은 옛날 봉건사회에서 하늘의 권위와 왕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대자연의 여러가지 동물을 상상해서 조합한 것이였다. 십장생 문양은 각각에 다른 의미가 있는데 태양은 세상을 밝게 비추어 앞날을 환하게 함을 의미하며 산은 한마음 한뜻으로 변함이 없음을 의미하며 구름은 속세를 벗어난 자유로움을 의미하며 물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며 소나무는 굳은 절개, 참대와 학은 높은 기상을 의미하며 사슴은 선함과 평화를 상징하며 거북이는 수호신과 복을 상징하고 불로초는 불로장생을 의미한다. 부귀를 나타내는 어구에서 련년유여(连年有余)라는 말이 있다. 즉 해마다 나머지가 있게 풍족하다는 의미이다. 민간에서는 이런 의미를 련꽃과 물고기에 의탁했는데 이 동식물의 명칭은 중문으로 련년유여와 같은 발음이였다. 그리고 련꽃과 물고기의 자연속성이 부귀와 련관이 있기에 장식무늬로 같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后汉书) 《리응전》 (李膺传)에서 등룡문(登龙门)이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배알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등룡문(登龙门)은 전설적인 이야기인데 그 기본내용을 보면 황하 상류의 룡문이라는 협곡에서 해마다 봄철이면 잉어들이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기 위해 앞다투어 협곡을 뛰여 오르는데 그곳을 성공적으로 뛰여넘는 잉어가 룡으로 화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학문에 진력하는 선비들을 이 전설속의 잉어에 비유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변하여 룡이되는 것에 비유하였던것이다. 룡수판에 그려진 련꽃과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룡으로 화한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지붕앞면에 그려진 룡두(왕청현 태양촌의 상여 문양) 지붕뒷면에 그려진 학(왕청현 태양촌 상여) 사군자 무늬중의 국화와 매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사군자 무늬중의 국화와 매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그리고 사군자에 속하는 매화, 란초, 국화, 참대는 색채가 담담하고 향기가 청신하며 그윽하고 외진곳에서 자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력대의 문인들은 그들의 생태적 특성을 군자의 도덕적 심성이라든가 절개와 련관시켜 관념적인 대상물로 보았다. 오리(鸭)는 갑옷이라는 갑(甲)이 있어 장원급제함을 나타내고 원앙은 부부금실을 뜻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의 소망은 삶의 흔적으로 상여 장식물에 남아 있었으며 또한 망자에게 죽은 이후에도 삶이 있다면 새롭게 재탄생되는 념원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맺는말 상여는 다만 사람이 죽은후 시체를 운반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문화적 함의가 농후한 공예품으로 보아야 한다. 장시기동안 인간의 삶과 죽음의 령역에서 령혼을 이어주는 역할을 착실히 해온 상여는 비록 일상생활에서 도외시 될때도 많았지만 신비하면서 상징적인 표상물로서 매우 큰 인상을 남기였다. 조선족의 상례문화에서 빠뜨리면 안되는 상여는 현재 흔적으로만 남아있어 어느땐가 소실되지 않을가 하고 우려심이 들때가 많다. 상여를 박물관의 소장품만이 아닌 민간의 상례문화에서의 표연품으로도 활용되였으면 한다. 어떻게 보면 정중한 상례의식이 아니라 예술이 담긴 표연항목으로 재현 하는것도 바람직한 것이다. 조선족 상례가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여 있는 상황에서 상여를 상례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 간주하고 방법을 모색하여 보호하고 어떻게 하나 그것이 재현되게 하는것이 방향인듯 싶다. 우리 모두 합세하여 조선족의 상례문화의 흔적-상여를 문화적 차원에서 적극 보호하고 리용해야 한다. 2010년12월2일 [1]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2]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3]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4] 민요집성 김태갑 조성일 편주 연변인민출판사 1981년 216페지 [5] 민요집성 김태갑 조성일 편주 연변인민출판사 1981년 217페지 [6]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7-민속사 민족출판사 1998년 [7] 리현경 민속학연구 제25호 [8] 리현경 민속학연구 제25호
43    (론문) 조선족 상장문화 보호와 발전문제에 관하여--천만수 댓글:  조회:3891  추천:0  2012-07-16
(论文)关于朝鲜族丧葬文化保护与发展问题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上发表          中共延边州委党校 千万修   2009年6月,我州《朝鲜族丧葬习俗》被延边朝鲜族自治州政府和吉林省政府批准为“非物质文化遗产”。这是我州朝鲜族民族文化建设史上的一件大事,也是我们朝鲜族丧葬习俗,能够合法保护、传承和发展的客观依据。一年来,在党和政府的关怀和支持,尤其是州文化局的正确领导及负责保护的单位的共同努力下,我州朝鲜族丧葬文化的保护与发展工作,有了新的起色。 朝鲜族传统丧葬习俗,在我州有100多年历史,又经历了那么多的风风雨雨,却到今天还能保护和传承,并使之发扬光大,固然离不开本民族自身的努力,但更重要的是得益于中国共产党对少数民族的关怀和各兄弟民族的帮助。因此,我们没有任何理由来,衰减或削亡我们民族的文化遗产,使传统的朝鲜族丧葬文化造成边缘化、趋同化和散失化。 包括丧葬礼仪在内的各民族的风俗习惯,在一定程度上表现和反映着一个民族的生活方式、历史传统和心理感情,是民族文化的重要组成部分,是民族特点的一个重要方面。现代化的推进过程中必然伴随着对传统文化的冲击,这是世界现代化进程和当代社会发展中极具普遍性的问题。不论发达国家还是发展中国家,不论占人口多数的民族还是少数的民族,都是如此。而从传统向现代转变的过程中,必然要经历文化的转型和文化的整合。在现代化的强烈冲击和国家及社会各种力量自觉保护的双重作用下,当前我国少数民族传统文化的基本状况是复兴、衰退和变异三种现象并存。不可否认,在现实中少数民族文化的确在国家相关政策的保护和本民族人民的坚持下存在一些复兴和繁荣的景象,但总体上,在现代化进程中,少数民族文化仍面临的危机比繁荣景象多。 有人认为,现代化必将导致多元文化的消失,多元将归于一元。但是,事实上现代化作为人类社会文明进步的标志,它更应该是各种文化交相辉映、共同繁荣发展的一种多元文化共存的现实。现代化并不意味着文化的同质化,也不是文化的同一化,它是多元文化的统一体。而少数民族文化的现代化是在保持现有民族特色的基础上,充分吸收和利用现代科学所带来的文明成果,它体现的是一种现代的、文明的生活方式,体现的是一种有秩序、和谐的生存状态。中国共产党历来认为,民族问题没有小事,在民族之间的交往中,是否尊重各民族的风俗习惯,关系到是否坚持民族平等和民族团结等原则问题,于是制定一系列政策措施,以保护少数民族的风俗习惯。   一、加强对朝鲜族传统丧葬文化遗产的抢救与保护的重要意义   1.这项工作关系到我州党政领导干部是否自觉遵守党纪国法的一件大事。因为,中国共产党在法律和政策上规定尊重少数民族风俗习惯。从《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共同纲领》到《中华人民共和国宪法》、《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无一例外地规定“各民族有保留或改革自己风俗习惯的自由”;1979年7月第五届全国人民代表大会第二次会议通过的《中华人民共和国地方各级人民代表大会及地方各级人民政府组织法》第33条,则把“尊重少数民族的权利和少数民族的风俗习惯”作为县以上各级人民政府的一项重要职责规定下来。为了更好地贯彻落实上述规定,《中华人民共和国刑法第147条又进一步规定:“国家工作人员非法剥夺公民的宗教信仰和民族风俗习惯,情节严重的,处二年以下有期徒刑或拘役”。 2.它是保存人类文明多样性的要求。众所周知,现代化在文化上的本质要求是保存文化的多样性,以实现世界文明的多样性。文化的多样性是人类文化得以延续和保存的重要前提,也是人类文化保持自身活力的重要条件。同时,文化多样性所要求的不同文化之间的多元关系,成为各种文化之间的张力赖以保持的可靠保障,而不同文化之间的张力关系恰恰为人类文明的存在和发展提供了不竭的动力。正如《2000年世界文化报告》中科学委员会主席阿里斯佩所说“文化的多样性是人类的精神创造无法抑制的表达……没有任何一种力量能够压制和窒息它”。少数民族文化作为中华民族文化艺术宝库的重要组成部分,在现代化进程中,保护民族文化的多样性,就是保存人类文明的结晶,就是保存中华民族的生机与活力。目前,在世界范围内,对保护文化的多样性有了广泛的共识。2000年6月在巴黎举行的首届国际文化论坛上通过了《文化性和文化多样性权利宪章》要求有关国际组织和各国政府采取措施,加强管理,使各民族的文化教育和宗教信仰得到尊重和保护。此外,保护文化多样性也成为人类共同创造地球未来的七项行动原则之一。 3.它是保护民族平等权利的一种体现。文化权利也是民族的基本权利之一。人类学家乔健认为:“族权中最具体、最重要也最具迫切性的便是对文化(包括语言)的尊重与维护。其重要性与迫切性不是基于人权的观念,因为人权论者主要着眼于个人权益而非文化的存亡;乃是基于一个现代社会新的价值观——要求尽量保存人类文化的多样性,而弱势民族的文化却正在迅速消失中。”一种民族文化代表着一个民族的历史发展,也是一个民族尊严和价值观的象征。在法律上保护一个民族的文化权利,不仅在于将它视为一种文化历史遗产而予以保护,而且在于承认一个民族有发展本民族文化的能力和要求。 4.它是提升民族凝聚力的一种途径。文化是民族区分的基础,是一个民族区别于其他民族、屹立于民族之林、并将民族成员联合起来的凝聚核心,它不仅表现一个民族的外在风貌,而且内存着它的“灵魂”。民族文化的形成过程,是一个民族道德观念、价值取向和对外部世界认知方法的培养积累过程。当一种文化被所有的本民族的社会成员所共同认同时,民族文化就成为民族内部共有的精神坐标和价值体系,成为这个民族看不见、摸不着,但却能强烈地感受到的一种民族凝聚力、向心力和整合力,民族因文化而被聚合成为一个有机整体。因此,保护民族文化,对增强民族认同感、提高民族自信心和自豪感,具有重要的意义。   二、对朝鲜族丧葬文化保护和改革的对策   在人类历史上,任何一种文化都不是单线进化的结果,相反,对不同文化的接纳和吸收是一种文化充满生机的表现。文化就其本质来说,从来就是一个历史的、开放的、变化的、发展的动态概念,而不是封闭的、停滞的、一成不变的静止概念。文化随着时代的变化处在不断地运动变化之中,但少数民族文化的变迁并不意味着民族文化的消亡与同化,相反,在某种程度上是民族适应时代发展的需要,在更高、更先进、更合理层次上的重构。一种有生命力的文化,必然是与其他文化不断交流、碰撞、融合的文化。民族传统文化的弘扬必须根据变化的社会实践与时代特点不断更新自己,使民族传统文化与时代精神和民族社会实践有机结合起来,构建新的民族文化传统,只有在这样的不断更新和创造中,民族文化才会永葆青春与活力。因此,在现代化进程中,少数民族必须要有文化适应的准备。虽然我州朝鲜族丧葬文化转型与价值重构是一个痛苦的过程。事实上,任何一个民族要生存和发展,都不得不适应环境来调整自我。当前,我们保护和改革朝鲜族丧葬文化,要抓好如下工作: (一)坚持党的领导,落实好党的民族政策 这是保护和改革朝鲜族丧葬文化的关键。中国共产党历来有着尊重少数民族风俗习惯的一贯政策,而主张:“各民族都有保持和改革本民族风俗习惯的自由”、“风俗习惯的改革,要依靠民族经济基础本身的发展,不要乱改”、“少数民族地区的风俗习惯是可以改革的。但是,这种改革必须由少数民族自己来解决”等等。来自美国、加拿大、朝鲜半岛的朝鲜人,来到延边考察后,都为中国的朝鲜族能够如此完整地保留本民族的风俗习惯而赞叹不已,都认为中国共产党的少数民族政策好。我们作为中国的一个少数民族,必须坚持党的领导,坚决拥护党的民族平等、民族团结政策。只有这样,才能经得起党和国家的考验,保持和传承朝鲜族丧葬风俗习惯。 (二)紧紧依靠国家政府支持和自治州本民族的主观努力 这是保护和改革朝鲜族丧葬文化的基本途径。 1.没有国家政府的有力支持,就不能抢救和保护朝鲜族传统丧葬的风俗习惯。当前,我州朝鲜族丧葬文化建设中存在三大问题:一是失散的比保留的多;二是缺乏保护的物质载体:三是保护人员的队伍建设滞后。如果没有政府的支持、单靠民间组织开展工作,就无法解决上述问题。 2.我州朝鲜族传统文化受中华民族文化和朝鲜半岛朝鲜人文化的双重影响,虽然具有多样性,但还有自治州区域的独特性。因而,保护和改革我们的丧葬民风习俗,决不允许外人横加干涉,任意指责。保持什么和如何保护,什么时候改和怎么改均取决于我州朝鲜族干部和群众。  (三) 保护和改革朝鲜族的丧葬文化应注意以下几个环节: 1.认知和定位  有种观点认为传统代表着保守、惰性和僵化,是与现代化完全对立的。但是在现实中任何国家或民族的现代化或社会经济的发展,都不可能完全抛弃一切传统的东西。某种角度看现代化就是与传统相对而言的社会变迁,现代化的发展仍然需要传统的积淀。因此,如何正确看待民族的传统文化很重要。不能对民族的传统文化一概否定,要充分认识其在文化传承中的价值,任何一个民族一旦丧失文化上的个性,它的发展亦将失去重要的动力源。但也不能一概美化,认为传统的都是好的,都是精华。就如同对待任何事物一样,我们必须两面来看,两面来分析,趋利避害,留其精华、去其糟粕是最客观和理性的态度,而这种认知与定位对于少数民族的文化适应是非常关键的。 2.摒弃与保护  每个民族要进步,在不断创造和吸收新的文化因素的同时,都必须舍得丢弃自己落后的东西,不能在强调传统特色的同时形成文化上的保守主义。传统文化并不等于优秀文化,不等于优秀文明。如一些民族中存在的原始家族观念、婚姻上的近亲习惯、丧葬上的繁琐形式和封建迷信活动等等都是与现代观念格格不入的。它们的确是传统的东西,但它们的失落、衰退实际是民族文化的进步。对于这些文化内容,我们所采取的态度不应是保留,而是摒弃。 而对许多有历史价值且具有不可再生性的传统文化,如旧的生产工具和生活器具,它们都有浓郁的民族文化特色,在现实社会中它们已失去了原有的使用价值,但却忠实地反映着某一民族的生产生活状况,印刻着这一民族的历史痕迹。又如一些已经不再使用的文字和无法传承的技艺、艺术、原始宗教及礼仪等,它们都是各民族传统文化的重要构成,反映着民族特色,也记载着人类的文明。对这些文化内容应该利用博物馆、影视、文字档案、文物收集等手段,尽可能使这些即将消失且不能再生的文化成为“标本”保留下来。 3.创新与发展  任何文化的存在和发展都离不开自身创新和外来文化的补充,保护传统文化不是制造“保留地”,从长远来讲,民族文化既要与现代社会进程相适应,又要保持民族文化的个性与多样性,才能真正向前发展。正是在开放创新中,形成了各民族丰富的民间文化艺术,在相互交流和互补中,实现了各种文化的优化与发展。   总之,全球化大潮汹涌而至,少数民族文化必然面临巨大的挑战,在外部环境的冲击下将出现民族特性嬗变的过程,前景充满激荡。同时,机遇与挑战同在,社会的开放和多种文化相融合的包容性在一定程度上打破了传统意识的封闭和狭隘性,并创造了一种各民族文化共享的广阔空间,极大地改善和丰富了人们文化多元欣赏的状况。社会变革与经济发展为传统民族文化的发展开拓了广阔前景,扩大了民族文化的辐射面,使民族文化有条件实现自然性、社会性和实践性的结合与统一。因此,朝鲜族丧葬文化只有在现代化进程中加快自我调适、不断创新的步伐,才会使自身的独特性和多样性,闪烁出时代的光辉。   2010-11-29   [参考文献]: 1.《毛泽东著作选》下册P697 2.《周恩来统一战线文选》P388 3.《民族多元与多元文化》 乔健 《广西民族学院学报》 1999年 第4期
42    (론문) 조선족 빈장습속에 대한 문화적 해석--허휘훈 댓글:  조회:3912  추천:0  2012-07-16
(论文)朝鲜族殡葬习俗之文化阐释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上发表       延边大学  许辉勋        殡葬是人类对失去自然生命的同类所采取的告别活动, 其间积淀着厚重的文化内涵,是一定文化的特定存在形态,它体现了人类对生命的认识、理解与把握。而殡葬习俗是人类处理亡者遗体的方法、规范经过漫长的发展和演变而逐渐形成的一种特定民俗。我国各民族都有自己独特的殡葬习俗,这种习俗是各个民族生活文化的一部分。   一、殡葬习俗的表现形态   殡葬是一个重要的民俗现象,古人曾说:“生,人之始也;死,人之终也。终始俱善,人道毕矣。故君子敬始而善终。”因而殡葬在世界范围内无一例外地受到重视,从而在世界各地形成了多种多样的殡葬习俗。 殡葬习俗作为一种文化现象,它的表现形态主要有如下两个方面:     1)处理遗体的方法及其器具 处理遗体的方法与器具,又称为葬法和葬具。人们选择什么样的葬法和葬具,来源于传统的殡葬习俗,而这些约定俗成的习俗又源于人们所处的自然环境和经济文化发展水平。 通观我国各民族安葬亡者的形式,计有土葬、火葬、风葬、野葬、水葬、天葬、塔葬、悬棺葬等。其中土葬是自古到今较为普遍的葬法。 多数民族认为,土地是万物之母,生命之本,人死后只有回归母体,才能使灵魂得以再生,因此实行土葬。还有火葬也是较为古老,而且对现今社会影响很大的葬法。 实行火葬的民族认为,火是光明洁净之神,火可以把亡者灵魂送上天堂。当然,传统历史上的火葬和当今社会提倡的火葬在其内容和形式上有着本质的区别,但在形式上对现代人接受火化起到了类同而易于接受的作用。 葬具是放置亡者遗体的器皿。历史上传承下来的葬具,主要有由木、石、陶、金属等制成的,其中最为悠久的是数千年前就已经出现的木制棺。 2)殡葬礼仪 殡葬礼仪是指安葬、悼念亡者的一系列礼仪活动。人类的殡葬礼仪早在旧石器时代晚期就已经出现。如生者在死者身上或身旁撒些红色的赤铁矿粉就是那时的殡葬礼仪,其意图是给死者以新的血液,赋予新的生命。后来,人类社会的殡葬礼仪走过了从简到繁,直至系列化、程序化而完整配套的历程。 根据春秋战国时期的《仪礼》和宋代的朱子《家礼》,我国传统的殡葬礼仪大体上分为三个部分:葬前之礼、安葬之礼、葬后之礼。 葬前之礼又叫治丧礼俗,它包括从准备后事到出殡之间的各项仪式,主要有临终、招魂、沐浴、饭含、大小敛、成服、朝夕哭奠等。 安葬之礼又称下葬礼俗,它包括从出殡到下葬的各项仪式,主要有打墓、出殡、路祭、下葬等。 葬后之礼又叫服丧礼俗,它包括安葬之后的各种礼仪活动,主要有虞祭(或称安神祭)、小祥、大祥、除服等。 殡葬礼仪作为人生的最后一个通过仪礼,它具有特定的“转换”功能:葬前之礼和安葬之礼侧重于人向灵魂的转换,而葬后之礼则侧重于家庭从非常状态向常态的转换。   二、殡葬习俗的文化内涵   殡葬习俗是人们在长期的丧葬活动实践中所创造的一种特殊的文化。殡葬所包藏的文化内涵最深厚,对人的心灵震撼最深刻,因而对社会各方面的影响也最为深远。 传统的殡葬习俗包含着一些从古时传下来的观念意识。其一为古老的灵魂观念,它认为人的肉体和灵魂能合能分,而且灵魂是不死的,人死后灵魂还在,它只不过是脱离亡者的肉体去往别处,所以殡葬就是为死者灵魂在另一个世界的生活做准备。这种观念是传统殡葬习俗的思想基础。其二为魂归故里观念,它认为死是回老家,也就是说人死后便回到祖宗那里,与已故祖宗团聚。这种观念产生的最初动机是古人朴素的感恩观念和祖灵庇荫意识。其三为儒家的孝道思想。它认为人必须对父母生养死葬,延续香火,事死如事生,从而将殡葬视为孝子履行孝道的一个重要环节。父母对子女有十月怀胎、多年怀抱哺育、终身关爱之恩情,他们过世,子女应通过祭奠来怀念父母的恩情,以表达孝心,正如古人所说“孝为德之始”。其四为葬先荫后观念。它认为把已故祖先安葬在风水宝地,其子孙就会得到祖灵的庇佑,得以大富大贵。 从历史和文化的角度来看,殡葬习俗的内涵极其复杂多样,在经历了长期的探索和考察的今天,我们可以对殡葬习俗的本质作出如下的解释: 无可避免的死亡是对人生的不可抗拒的否定,因而是最深刻的人生问题,也是最沉重的悲苦意识的渊薮。然而在传统观念中,死亡只属于肉体,灵魂却能永存,所不同的是它伴随着人的死亡而转入另一个世界。于是,围绕死者灵魂在另一个世界里的生活,人们进行一系列的殡葬活动。换句话来说,殡葬就是把死亡虚构成生命形式转换的一种特殊的文化现象。人们通过生者对死者灵魂的抚慰和祝愿来表达一种期冀,即期冀死者欢悦,以达到死者保佑生者的目的。这就是自古至今的殡葬习俗的本质之所在。 毋庸置言,殡葬是生者按照自己对生命、人生的理解所设计的,也是办给生者看的,一场殡葬是否合格也是由生者来评判的,它的最终目的仍是生者。因而,殡葬文化本质上是一种特殊的生存文化,其中隐藏或寄托了对人生归宿、生命价值的理解,对永生的追求,对现存社会的反映等。 从人道的立场来看,所有人的生命都是宝贵的,殡葬文化就应该承载对逝者的尊重,以及让活着的人在寄托哀思时,对逝者先贤有一颗敬畏之心,同时“凝聚孝心,传递爱心”,爱惜自己和他人的生命,这也是社会和谐的一部分。      三、对朝鲜族殡葬习俗之审视   朝鲜族殡葬习俗是朝鲜族民俗文化中的一个重要环节,它是朝鲜族传统的人生仪礼中的一个重要的“通过仪礼”。 在民俗学里,人生仪礼又称“通过仪礼”,它作为社会民俗的重要组成部分,是指人的一生中在不同的年龄阶段所举行的具有一定标志意义的仪式,主要有如下的四大仪礼:如出生仪礼,表示婴儿脱离母体来到社会;成年仪礼则意味着一个人发育成熟,被接纳为社会的正式成员;婚礼,表示一对男女建立配偶关系来组建家庭和繁衍子孙;葬礼则表示一个人走完人生旅途,最终离开人间。 朝鲜族的传统人生仪礼则与上述的四大人生仪礼有所不同。朝鲜族传统的人生仪礼叫做“冠婚丧祭”,包括成年仪礼、婚礼、丧礼,还有祭礼(葬礼以后定期举行的祭祀仪式)。此外,还加上给老人祝寿的寿礼和给小孩过的百日和周岁等。在一般的人生仪礼环节中,刻意加上具有浓厚的“祖先崇拜”氛围的祭礼,正反映出朝鲜族注重“尊长尊老”的传统观念。 对于朝鲜族来说,丧葬仪礼是告别人生的一项“通过仪礼”,它的主要内涵为:(1)表现生者对死者的哀悼;(2)怀念死者生前的功德;(3)超度亡灵,使死者的灵魂得到安息;(4)寄托对于死者的美好愿望。 朝鲜族的传统殡葬习俗,基于东方式的农耕文化和血缘宗法关系,自古就接受儒家文化的影响,并把古代中原的士大夫殡葬习俗接受过来,并据此建构其基本构架。如朝鲜族传统葬礼的程序就是基本上遵循朱子《家礼》而成的,而且一直把这个传统保持下来。 朱子《家礼》里所记载的殡葬程序,是我国宋、元、明、清时期一直沿袭下来的古代士大夫阶层丧葬礼仪的基本程序,直到封建末期没有大的变化。然而到了近代,中原的殡葬礼仪虽在程序上参考了士大夫的丧葬礼仪,但仪式的内容却变成平民化的民间习俗,与朱子《家礼》里的古代礼制多有不同。 可见,朝鲜族和汉族的殡葬礼仪,尽管其基本构架都来源于古代中原士大夫的殡葬习俗,但前者在经历许多社会变化的过程中,基本上保存下来朱子《家礼》的传统,而后者则在以平民化取代贵族化的过程中,使朱子《家礼》的传统丢失殆尽。朝鲜族传统文化里多留有古代中原文化的远古遗存,而这些远古遗存恰恰在如今的中原文化里是找不到的,这是值得进一步研究的文化现象。 再说,朝鲜族的殡葬习俗作为殓殡祭奠死者的仪礼,它既有社会民俗的特点,又有信仰民俗的性质。也就是说,朝鲜族的殡葬习俗将民间的社会习俗和信仰习俗杂糅在一起,因而既存在对死者的一生作为进行评价和追念,又包括对死者转入俗信中的另一个世界的祝福。朝鲜族传统人生仪礼中的祭礼,作为丧葬以后的追荐仪式,就属于信仰习俗中的仪礼。如果说,葬礼是对人的最后仪礼,那么祭礼就是由人转向“鬼灵”、“祖灵”的仪礼。所以说,朝鲜族的传统祭祀礼仪就是古老的“祖先崇拜”之遗风。它把殡葬习俗所体现的深深的孝道精神提升到对祖先英灵的敬仰上。祖先崇拜,含有崇高的怀念性质,人们希望祖先在天之灵能够关心其后代,保佑人丁兴旺,繁荣昌盛,因而崇拜中寄托着极其美好的情感。 至于朝鲜族传统殡葬习俗的文化定位,可从以下两点予以涉及。其一,朝鲜族传统殡葬习俗作为一种文化传承,它无疑是一种文化创造。其二,朝鲜族传统殡葬习俗又作为历史遗存,掺杂着与如今的社会发展和文明进步不相适应的旧习俗。今天我们重视传统丧葬习俗,并不意味着盲目地宣扬和赞颂那些千百年来积淀而成的旧俗的全部内容,而是继承和弘扬传统殡葬习俗中的优秀部分的同时还要剔除其糟粕,并以符合现代文明规范的新的殡葬习俗替代陈旧过时的旧丧俗。 建立优秀文明的殡葬文化,其意义在于,灌输健康的生命意识,提升人性,淳化风俗,倡导“尊长尊老”,以促进社会风俗之良性发展。 继承和发展朝鲜族殡葬文化的问题上,需要科学地探讨的是:在现代社会生活的条件下,能否贯彻“原汁原味地保存”的原则,原原本本地保留传统殡葬习俗?如何处理传统丧俗之保护与殡葬改革的关系?这些问题值得进一步深入研究。 孔子曾说:“未知生,焉知死。”如果把这句话倒过来:“未知死,焉知生。”意味着只有从死亡出发才能理解生命、把握生命。而殡葬无疑是进行这种生命教育的一项文化活动。古往今来,人们对殡葬的关注以及殡葬所体现的人文及生命内涵,逐渐形成了殡葬文化,这种特殊的文化形态在传达着一种文化信息——生命教育,朝鲜族的殡葬习俗也正是如此。                作者:许辉勋,延边大学朝鲜-韩国学学院 教授、博士生导师,               延边朝鲜族民俗学会 会长   2010-11-30
41    (론문) 조선민족 전통 상제례의를 서술해 본다--천수산 댓글:  조회:4194  추천:0  2012-07-16
(论文)谈谈朝鲜民族传统丧祭礼仪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上发表       地方志 千寿山   丧祭礼仪是指人死之后举行的初丧礼、葬礼、祭礼三种礼仪。初丧礼是指人死之后到举行葬礼之前进行的丧礼。 中国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追溯其本源,来自朝鲜半岛李朝时期(公元1392年~1910年)的丧祭礼仪。经过一百五十多年的历史发展,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已经在好多方面发生了新的变化和发展。为了更好地了解朝鲜的传统丧祭礼仪,本文想从如下几个方面作一番探讨和简要的阐述。 A;丧祭礼仪在朝鲜民族生活史上的重要地位 朝鲜民族自古以来十分重视丧祭礼仪,主要表现在如下几个方面: 1、把丧祭礼仪视为生活中的大事 在历史上,十分重视丧祭礼仪成为举国上下的共同观念。在李朝时期,统治者们说;“国之大事,无过丧祭”。这个意义是说,国家的大事没有超过丧祭礼仪的。这主要是针对国王的去世而说的。国王是最高统治者,他的去世关系到国家的政治统治,意味着一代统治结束,将要开始新一代国王的统治,所以把国王的丧祭看做国之大事。 对于平民百姓来说,丧祭礼仪同样属于生活中的大事。在《礼记》里说;“大事,死丧之事也”。这里所反映的虽然是中国古代儒家的丧祭观点,但因李朝时期全国上下都崇尚儒学,重视丧祭礼仪的观点同样成为朝鲜民族的观点。 2、把丧祭礼仪视为十分重要的人生礼仪 在人的一生中,在不同的阶段按照本民族的习俗举行特殊的礼仪,这种礼仪称作人生礼仪(又称通过礼仪)。在朝鲜族人的一生中,要举行好多种人生礼仪。在20世纪30年代以前,把冠(女为笄礼)、婚、丧、祭当作最重要的四大礼仪。在此四大礼仪中,丧礼和祭礼占了一半,可见其重要性。30年代后,冠礼(女为笄礼)消失,但是,丧礼和祭礼仍居于重要的地位。 3、把“事宗庙”视为男女婚娶生子的重要目的 对“婚礼”一词的概念,中国儒学家们解释说;“婚礼者将合两性之好,上以事宗庙,而下以继后嗣也”。这个意思是说,男女结为夫妻的目的有两个方面;其一是为了给祖先举行祭祀,其二是为了传宗接代。给祖先举行祭祀要想做到香火不断,就得有后代不断接续。所以从根本上讲,传宗接代的目的仍在于给祖先举行祭祀。在李朝时期编写的《四礼便览》一书中,把中国儒学家们对婚礼所下的定义,原原本本地记载于书中。因而,“事宗庙”也成为朝鲜民族在封建社会时期举行婚礼的重要目的。 4、为了掌握丧祭礼仪中的祝文而学习汉字 过去,朝鲜族在举行丧祭礼仪的过程中,要宣读好多祝文。所谓祝文是向神灵禀报的报告文,各种祝文都是用汉字书写的,不懂汉字就无法领会和书写祝文。学习汉字的途径是到书堂就读。书堂是20世纪30年代以前,朝鲜族农村惟一的民间办学机构,如同汉族的私塾。在书堂所学的《千字文》、《童蒙先习》、《论语》、《孟子》等课文都是用汉字书写的。要想进入书堂念书,要交纳训料(学费)。男孩子多的人家,如果交不起学费,往往只把长子送到书堂学习。其目的一方面是为了掌握必要的文化知识,另一方面是为了学习汉字,以后能够懂得丧祭礼仪中的各种祝文和讣告、铭旌等有关应用文的读法和写法。有了知识才能够更好地掌握丧祭礼仪方面的知识。这样就可以在父母去世以后,能够很好地担负起丧主的责任。 5、丧舆契 文化革命以前,东北各地的朝鲜族村屯普遍建有丧舆契(又称香徒契)。它是村民自发组建的专门办理村民丧葬事务的民间组织。全村各户必须有一名男性青壮年加入这一组织。家里有老人的人家,如果没有青壮年男子,未成年的男子也得参加。丧舆契里设有尊位、都监、执事等职位,各有分工。一旦谁家有丧事,就有丧舆契出面办理丧事,所以村民们对丧舆契很重视。对于丧事,不仅本村的村民们重视,邻村的村民也很关心。当某村的丧舆从邻村的村边路过的,该村的青壮年主动出来帮助扛丧舆。文化大革命期间丧舆契被当作封建迷信的东西取消。文革以后,实行土葬的地方有的又重新组建了丧舆契。没有丧舆契的村子,一般由老人协会出面办理丧事。 B;朝鲜族传统丧祭礼仪的特点及文化内涵 (一)、朝鲜族传统丧祭礼仪的特点 朝鲜族传统丧祭礼仪特点主要体现在如下两个方面: 其一、中国朝鲜族的丧祭礼仪传承了朝鲜半岛李朝时期庶民阶层的丧祭礼仪,它同贵族阶层的丧祭礼仪有明显区别。贵族阶层的丧祭礼仪场面隆重,程序繁杂;庶民阶层的丧祭礼仪相对地来说,场面比较简朴,程序也不那么繁杂。古代的统治者们主张;“礼不下庶人”,所以当初不论在中国还是朝鲜,儒学家们所制定的丧祭礼仪都是以贵族阶层为对象来制定的。这种丧祭礼仪不符合庶民阶层的生活实际。所以,庶民阶层的人们对儒家学者们制定的丧祭礼仪,采取了便通实行的办法。因此,中国朝鲜族的丧祭礼仪同李朝时期制定的丧祭礼仪比较起来,有很多不同之处,对此,可以举出如下例子: (1)、丧服制度 贵族阶层实行的丧服制度里,根据与死者关系的远近分为斩衰、齐衰、大功、小功、缌麻等五种服亲。不同的服亲所穿的丧服和服丧期限各有区别。中国朝鲜族把服亲只划分为丧制和服人两种。死者的直系亲属为丧制,旁系亲属为服人。 (2)、祠堂与四龛 贵族家庭后院通常建有专门供奉神主的祠堂。中国朝鲜族在里屋设置四龛,供奉四代祖先的纸榜或魂帛,称做供奉四龛。只供奉已故父母魂帛的设施称做丧门。 (3)、祭祀种类 贵族阶层的祭祀种类包括虞祭、小祥、大祥、卒哭、禫祭、四时祭、称祭、墓祭、节日祭等好多种。中国朝鲜族的祭祀主要包括虞祭、小祥、大祥、节日祭、生日祭等。以虞祭来说,分为初虞、再虞、三虞,此三种虞祭何时举行,礼书上都有具体规定。但中国朝鲜族不遵行礼书上的规定,另有自己的时间安排。通常是举行葬礼的当天举行初虞祭,称做返魂祭祀。第二天举行再虞祭(在延边称做安神祭),第三天举行三虞祭。 其二、中国朝鲜族丧祭礼仪的传承,不是靠学者们的引导和礼书上的有关规定,而是以言传身教的方式来传承。在20世纪80年代以前,用于朝鲜民族丧祭礼仪方面的书籍匮乏,只能依靠言传身教的方式一代一代地传承。因而各地的丧祭礼仪有好多不同之处。 (1)、招魂 礼书上记载的招魂方法是,由一个人手持死者的上衣,站在院子里或者站在屋顶上,面向北方先喊死者的姓名,而后连喊三声“复—复—复—”。但是各地朝鲜族的招魂方式五花八门,有的喊“某村的某某,把衣服拿走!”,有的喊“某某人,看衣服罗!”。居住在内蒙古乌兰浩特市乌兰哈达乡三合村的朝鲜族招魂的方式更为奇特,他们招魂时喊“某某人上西天吧!”。实际上这不是招魂,是送魂。 丧祭礼仪程序中存在的诸如此类的差别实例不胜枚举。 (2)、祝文 日伪统治时期曾经出版的《流行金玉尺牍》是记载丧祭礼仪各种祝文的范本,可是朝鲜族人中持有这种书的人极为罕见。各地朝鲜族持有的绝大多数是手抄的祝文,所以存在着不同程度的谬误。从现在的情况看,懂得丧祭祝文的人很少,所以干脆取消了宣读祝文的程序。 (3)、祭祀口诀 由于传统的丧祭程序相当复杂,不好掌握,有人编出了一套口诀: 设主参香降神初,启饭读祝哭再拜, 亚络添插正阖立,嚱启茶成纳烧退。 举行祭祀时,按照上述口诀的顺序进行就行。但因各地的祭祀口诀都是传抄的,有些字词不尽一致,所以对口诀的理解也不相同。 (二)、朝鲜族传统丧祭礼仪的文化内涵 朝鲜民族的先人们在远古时期最早实行的是土葬。到了朝鲜半岛的三国时期,随着佛教的传入,实行火葬的人逐渐增多,到了李朝时期,实行抑佛崇儒政策,认为对已故父母遗体进行火化的做法严重违背孝道。于是对一般人禁止火葬,推行土葬,并于太宗十二年一月,国王“特命似司,丧祭之仪一依文公家礼”。《文公家礼》是中国明朝时期的邱浚根据宋朝时期的大学者朱熹有关冠、婚、丧、祭等方面的理论编写的礼书。从此以后,这本书在朝鲜半岛成为士大夫阶层遵行的正统的礼书。 除此之外,中国古代的阴阳五行学说很早传入到朝鲜半岛,对朝鲜民族的宇宙观和丧祭礼仪文化产生了重要影响。 根据朝鲜民族在历史上受到的上述几个方面的文化影响,在朝鲜族传统的丧祭礼仪中所蕴含的思想理念主要体现在如下四个方面: 崇拜祖先观 祖先象征着一个民族和家族的血统。崇拜祖先的观念起始于远古时期。《隋书》记载:百济“立其始祖仇台庙于国城,岁四祠之”。《北史》记载:高句丽有神庙二所;其一供奉高登神(高句丽开国之君高朱蒙);其二供奉夫餘神(高朱蒙之母何伯女)。 祠堂是供奉祖先神主的处所。朝鲜民族有一种观念,家里一旦遇到火灾或水灾,首先抢救神主,而后抢救财物。 朝鲜民族在旧历年(春节)、端午节、秋夕(中秋节)、等传统节日,天亮后作的第一件事情是给已故的四代祖先举行祭祀,谓之“茶礼”。中国朝鲜族一般只在旧历年举行茶礼,这种习俗延续到上个世纪50年代,个别家庭现在仍有举行茶礼的。 灵魂不灭观 对于中老年人的去世,朝鲜族一般不说“死了”,而是说“回去了”,或者说“离开了人世”。这个意思是说人死之后,灵魂不死,另有去处—阴间世界。这种观念主要来源于佛教的生命轮回观。佛教认为,有生命的东西永远像车轮一样在天堂、地狱、人间等范围内转化。 灵魂不灭的观念体现在朝鲜族丧祭礼仪的好多方面: (1)、招魂 人去世之后,首先要招魂,让游荡在空中的灵魂返回到躯体里。 (2)、使者床 招魂之后,在大门口或院子里放一张小桌,上面陈设草鞋、米饭、酒之类,谓之“使者床(桌)”,象征阴间使者前来引领死者。 (3)、饭含 对遗体进行小殓时,用柳木勺往死者口里放入三勺米,同时喊:“百石、千石、万石!”,以此象征死在阴间所需的口粮。除了米粒而外,还往死者口里放入珠子、硬币之类,以此象征死者携带的财宝。 (4)、过关费 桓仁县雅河村的朝鲜族人对遗体进行小殓时,用绞带捆扎十二道。同时用白纸折叠12个三角形(象征白银),塞入十二道绞带里,以此作为死者经过十二道鬼门关时候的过关费。 (5)、人情 柳河县姜家店乡曙光村、集安市凉水朝鲜族乡永泉村的朝鲜族,举行大殓时,往棺材里放入“人情”,所谓人情是白纸条(原来是白衬领),象征馈赠给死者的礼物。遗体入棺之前把一张张人情分给丧制们,遗体入棺后,由执事收取每个人的人情放入棺内,同时口称:“这是某某人的人情,希望日后多多给予保佑”。 (6)、虞祭 虞祭有安慰之意,虞祭是为了安慰死者的灵魂而举行的祭祀。 (7)、迎神和送神 在屋内举行祭祀时,要把房门开个小缝,以便让神灵进屋。神灵就餐时丧制和服人们到门外等候一会儿。进屋时还是先咳嗽一声,以免惊动神灵。祭祀结束,也要把门开个小缝,以便让神灵返回。 (8)、缅礼 安葬父母遗体之后,过了若干年,对其遗骸进行合葬,谓之缅礼。合葬时,两具骸骨安放在同一个墓穴里,中间砌一道矮小的隔墙。此时在隔墙中间留出一个小口,以便两个人的亡灵相互往来。 人们相信死者到阴间以后,对活在人间的亲人还能给予帮助。这种荫助观念由来已久。 《三国遗事》里记载了这样一个传说:新罗儒理王时,伊西国人入侵,新罗人难以招架。正在危机关头,突然杀出一群身披竹叶的军队,把侵略者打得狼狈逃窜。原来这支从天而降的军队是由已故的未邹王在阴间派遣的。 如今,相信人死后灵魂尚存的人已经不多了,但是“告慰在天之灵”,“向英灵致敬”,“安于九泉之下”之类的习惯性话语仍不难听到。 阴阳五行观 阴阳说和五行说合在一起称做阴阳五行说,产生于中国古代。阴阳说是把宇宙的万物划分为相互对立的阴与阳两个方面。五行说是把宇宙间的物质归纳为水、火、金、木、土五种物质。阴阳五行说早在朝鲜半岛的三国时期就已经传入到朝鲜半岛,并对以后包括丧祭礼仪在内的朝鲜民族的文化产生很大影响。 《三国遗事》里有“女为阴,其色白,白西也”,“草构五方神像”,“又十月,四天王寺五方神弓弦皆绝”等语。由此可知,此时阴阳五行说在社会上已经产生了影响。 在中国朝鲜族的丧祭礼仪中阴阳五行观念主要体现在左右位置与上下方位上。 (1)、丧主丧服 患者一旦咽气,丧主即穿丧服。此时,父丧不套左袖,母丧不套右袖。现在有好多地方举行丧礼时丧制们只在臂上扎白布带,父丧时扎在左臂,母丧时扎在右臂。 (2)、小殓 用小殓布包裹遗体时把死者的两只手叠放在腹部。此时,男性左手在上,女性右手在上。在阴阳五行观念里,天为阳,在上;地为阴,在下,男属阳,女属阴。 (3)、选择墓地 选择墓地,选在青龙、白虎之间。以遗体为本位,左侧的山丘为青龙,右侧的山丘为白虎。此时,左为东,右为西。按五行学说的颜色观,东为青色,西为白色。这里的“龙”,指龙状的山脉形状。 (4)、安葬 把灵柩放入墓穴,覆盖铭旌之后,先由丧主把墓穴土兜在衣襟上,撒在灵柩的上中下三处,谓之五方土。 (5)、祭桌 在祭桌上摆放水果时,按“红东白西”的顺序陈放。按阴阳五行观,东方与红色同属阳性,西方与白色同属阴性。   报本尽孝观 蕴涵在朝鲜族传统丧祭礼仪中的文化内涵中,最主要的是报本尽孝观念。 所谓报本尽孝的含义是报答父母的养育之恩,尽到孝敬父母的责任。 在一个人的道德修养方面,以孔孟为首的儒家的观点是“立身有义而孝为本”。其意思是说,做人要符合一定的道德标准,其中最重要的标准是孝道。在朝鲜族的传统观念中孝为百行之源,是各种美德之首。孔安国在《古文孝经序》里说:“孝者,人之高行,经常也。自由天地人民以来,而孝道著矣”。这个意思是说,孝道这一经久不变的美德,在人类历史上源远流长。 那么,作为子女怎样做才算尽到了孝道呢?中国的儒学家们说:“孝子之事亲也,有三道焉:生则养、没则丧、丧毕则祭。生事之以礼,死葬之以礼,祭之以礼”(《礼记》)。这个意思是说,要想成为合格的孝子,必须作到如下三点:其一,父母在世的时候要以爱戴之心很好地奉养;其二,父母去世之后要按照有关的礼仪办好葬礼;其三,葬礼结束后,要按时举行祭礼。对此,朝鲜民族的儒学家们持有完全相同的观点。在做为书堂课本的《启蒙篇》里写道:“人非父母无从而生,且人生三岁然后始免于父母之怀,故欲尽其孝,则服勤至死。父母没,则致丧三年,以报其生我之恩”。 丧祭礼仪包括好多程序,在这些过程中怎样做才算尽到了孝道呢?对此,儒家学者们提出了两条原则:“丧礼惟哀为主”,“祭以敬为主”(《礼记》)。这种观点在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中也得到了充分的反映。对此,可以举出如下例子: (1)、父母去世,儿女们以罪人自罚 父母一旦去世,儿女们认为自己没有尽到很好地奉养父母的责任,把自己当作罪人,在举行丧祭礼阶段穿质地最粗糙的麻布衣服,不喝酒,不吃肉,不吃干饭,喝稀粥。 (2)、以哭声代礼 朝鲜族有一种说法:“丧家应该哭声不断”。吊客们到丧家吊唁时,丧制和服人们以哭声迎客和送客。 (3)、祭祀饮食 朝鲜族做祭祀饮食时,强调诚意和干净。秋季打场时,留出最饱满的谷粒,经过精心加工成米之后,用以做饭或糕饼,作为祭品。举行秋夕节祭祀时,用新粮做的糕饼和新下来的果物作为祭品,谓之荐新。摆放祭桌上的食品种类,不恪守礼书上的规定,但不忽略死者生前喜欢吃的食品。 儒家学者们讲的蕴涵在传统丧祭礼仪中的“报本尽孝” 观念,“丧礼唯哀为主”,“祭以敬为主”的观念,在今天看起来也有积极的意义和重要的参考价值。 结 束 语 中国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传承于朝鲜半岛李朝时期庶民阶层的丧祭礼仪。在一百五十余年的历史发展过程中,原有的丧祭习俗又不断地变化发展,形成了具有自己特色的丧祭礼仪。 蕴涵在朝鲜族传统丧祭礼仪中的最主要的文化内涵是报本尽孝观念和缅怀亲情的观念。随着对外开放政策的实施,资本主义社会金钱至上,惟利是图的观念正在冲击着朝鲜族崇尚的孝道观念。父母关爱子女,子女爱戴父母的观念,不仅是朝鲜族的传统美德,也是中国其他各民族的传统美德。 丧祭礼仪是生活中的大事,关系到千家万户,关系到每一个人。对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我们既不能完全肯定,也不能全盘否定,应当结合时代精神,取其精华,弃其糟粕,使其得到健康发展。 朝鲜族的丧祭礼仪,场面不宜过分隆重奢华,程序不宜繁杂,但也不能办得过分简陋草率,应当提倡内涵健康,文明雅观的符合时代精神的丧祭礼仪形式。       2010-12
40    <조선족 전통장례> 세미나 개최 댓글:  조회:3851  추천:0  2012-07-15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   主管部门:延边州文化局 主办部门:延边州非物质文化遗产保护中心 承办单位: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召开日期和地点:2010年12月14日在大洲酒店会议厅 研讨会宗旨:一、通过研究和讨论进一步确定朝鲜族丧葬文化在朝鲜族发展历史中的积极作用和朝鲜族民俗文化中的位置及朝鲜族现实生活中的积极意义。             二、研究保护朝鲜族丧葬文化工作中的若干问题。 特邀参加部门和单位:延边州民政局、延边州卫生局、延边州老龄委、延边医院、延吉市医院、宁养医院、延吉殡仪馆、延边州老年会、非遗专家委员会、延边博物馆、龙井博物馆、安图县文体局、延边社会福利院、… 领导讲话:--------延边州文化局 沈秀玉局长 发表论文:1、谈谈朝鲜族传统丧祭礼仪 (千寿山)           2、朝鲜族殡葬习俗之文化阐释 (许辉勋)           3、关于朝鲜族丧葬文化保护与发展问题 (千万修)           4、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 (한광운 조경희) 承办单位发言:关于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几个问题(玄龙洙) 各参加单位代表和专家发言: 1、讨论如何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问题。 2、讨论通过《朝鲜族丧葬习俗文明公约》 3、评估“延吉殡仪馆朝鲜族告别厅”设计方案和运营程序   备考:《研讨会论文集》收录的其他论文:   1、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 (김선화)   2、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리광평)   3、浅谈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 (安图县文物管理所  郑钟仁)   4、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 (玄龙洙)   召开研讨会经费:              1.支付论文费:500.00元×4人=2000.00元              2,订册论文集:10.00元×100册=1000.00元      3,会场费、招待费、其他:3000.00元                  合 计:                    6000.00元            联系电话:0433-283-8389(州文化局)                              1380-448-3654(延艺李任远)                              138-9438-7438(延礼玄会长)   延边州非物质文化遗产保护中心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39    망자가 불러주는 삶의 노래- 상엿소리 댓글:  조회:3824  추천:0  2012-07-15
망자가 불러주는 삶의 노래- 상엿소리 정말이지 그 이유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체온으로 촉감을 나누던 그 사람인데 딸깍하고 숨넘어가는 순간 피부 닿는 게 싫어지고 손이라도 잡으려면 섬뜩하거나 꺼림직 해지기까지 하는 이유를 말입니다.   ▲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주검,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만지는 것은 물론 보기조차 꺼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든 죽은 다음엔 이렇듯 관속에 들어갑니다.   ⓒ 임윤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과 피부를 접촉하는 것뿐 아니라 창백해진 모습을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 질 정도로 무섭거나 공포감까지 느낀다고 하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깝던 사이였더라도 죽은 사람으로 시체가 되어있으면 그 사람 만지기를 꺼려합니다. 죽은 지 오래되었다면 살점이라도 썩어 문드러질지 모르지만 체온도 채 떨어지기 전인 사망의 순간부터 원인 모를 거리감이 생깁니다. 심한 경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도 임종과 운명의 고비를 넘어서는 순간 생전의 관계에 아랑곳없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죽은 사람은 잊고, 살아있는 사람 편안하게 잘 살라고 정 떼고 떠나려 일부러 무섭게 보이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고 시체 만지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그 이유를 물어보면 '미생물학적 요인, 사체로부터 박테리아 등에 의한 질병 감염에 대한 우려나 심리적 요인' 등을 들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싫거나 무섭고, 기분이 나쁘거나 꺼림직 해서라는 정도입니다.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군대를 가기 전까지만 해도 상가(喪家)엘 가면 비위가 거슬려 끼니조차 거르곤 했습니다. 그냥 죽은 사람이 있는 집이란 생각에 먹는다는 게 꺼림직 했고 속까지 메슥대거나 울렁거리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일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대로 먹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며 모자라면 찾아다 먹을 만큼 적극적일뿐 아니라, 그래야 된다면 주검조차도 기꺼이 만지려합니다. 꽃상여 앞에서 요령 흔드는 선소리꾼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옛날 같으면 상가의 궂은일 중 하나인 상여메기는 천민들의 몫이거나 역할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른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 상여는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친 누군가를 저승으로 옮겨주기는 운반수단이기도 하지만 영가를 위한 마지막 꽃단장이며 치장이기도 합니다. 상여를 메는 사람들은 상여꾼 또는 향도꾼이나 상두꾼이라고도 합니다.   ⓒ 임윤수   죽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수 없으니 장사란 누구든 치러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 일만은 누군가가 대신해 주길 바라며 자신만은 하고 싶어 하질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 인류의 역사라면 시체를 정리하기 위한 장사(葬事) 또한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야 할 불가분의 대사(大事)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게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일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장의업을 하거나 그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는 호소는커녕 눈길로도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주검이 된 한사람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덜 허망하게 잘 갈무리 해드리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주저하거나 꺼리는 궂은일이기에 서툴지만 기도하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그런 일들을 맞아들입니다. 상두꾼들의 발놀림 따라 너울너울 춤추며 구불구불 흘러가듯 집 떠나고 있는 꽃상여, 알록달록 꽃송이 나풀거리는 상여 앞에서 딸랑딸랑 요령 흔들고 이러쿵저러쿵 선소리 넣으며 요령잡이를 한 지 어언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 언뜻 두부장수가 흔들거나 자선냄비와 함께 연말에만 등장하는 종모양이지만 꽃상여 앞에서 사용하는 요령입니다. 장례식장에서조차 점차 듣기 어려운 상주들의 곡소리를 대신해 딸랑거리는 요령소리로 영가된 이의 명복을 빌고 선소리를 빌어 망자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습니다.   ⓒ 임윤수 목소리가 구성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점차 볼 수 없어지는 그런 풍경을 비슷하게라도 답습해 간직하고, 죽은 이의 마지막 길, 저승 가는 길이 너무 쓸쓸하고 황망해 보는 이들이 서럽지 않도록 상여소리로라도 길동무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 중 누군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들리고 3일이나 5일 후쯤이면 볼 수 있었던 상여 행렬은 장관이었습니다.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흉물처럼 동구 밖 상엿집에 보관되었던 상여가 장삿날이 되면 날이 밝기도 전부터 상가의 마당으로 옮겨져 조립되고 꾸며집니다. 상여를 에둘러 선 상제들, 누런 빛깔의 삼베상복에 짚으로 꼰 새끼줄 허리띠를 두르고 굴건제복을 한 상제들이 '애고'거리며 곡들을 합니다. 죽은 이가 살던 집을 떠나 북망산천이 되는 묘를 향해 떠나갈 준비가 되어있음이 상가의 울타리를 넘어 온 동네에 알려집니다. 발인제가 끝나고 영가된 이가 집을 떠날 때쯤이면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달려 사람들의 손에 들린 명정과 만장들이 바람결에 나풀대고, 선소리꾼이 흔들어대는 요령소리가 '딸랑딸랑'들려옵니다. 요령소리를 신호로 12명의 상두꾼들이 양쪽으로 6명씩 나뉘어 무릎을 쪼그리고 앉습니다. 어깨에 상여에 매여 있는 광목 끈을 걸머메고 무릎 펴고 허리를 곧추세우면 꽃상여가 일어섭니다. 상두꾼들의 어깨위로 올라선 상여가 12명의 상두꾼 발놀림 따라 일렁이듯 흐느끼듯 조심스레 좌로 우로 움직입니다. 마당 한가운데서 발걸음 따라 너울춤이라도 추며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고하듯 처마 끝에 기대 높은 하늘을 향해 한바탕 슬픈 몸짓들을 합니다. '어~허'거리는 상두꾼소리와 '애고'거리는 상제들의 곡소리가 한바탕 뒤섞이면 흔들어대는 요령소리에 박자 맞춰 애간장 우려낼 듯 청승스럽고 애달프기까지 한 선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요령잡이의 선소리는 마냥 구슬프고 처량해 듣기만 좋은 소리인줄 알았는데 이제야 생각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요령잡이가 하던 선소리는 죽은 자에 대한 예송이며 그가 살아간 한평생을 희로애락으로 농축한 삶의 고백이며 위령의 노래, 영가를 위한 진혼곡이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을 기승전결로 정리했고 저승세계서 받게 될 심판내용까지 담겨있어,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가르침이기도 했지만 대사(大事)를 치르기 위한 커다란 지혜였습니다.   ▲ 요령에서 울려나오던 딸랑 소리는 상두꾼들의 힘을 돋우는 응원의 소리며 흔들리지 않게 균형을 잡기위한 중심 추의 소리입니다. 요령도 이렇듯 그 크기가 다르니 울려나오는 소리도 다릅니다.   ⓒ 임윤수   요즘은 시골길도 웬만하면 자동차가 쑥쑥 들어갈 만큼 널찍하지만 60년대까지의 시골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작로를 제외한 대부분 길들은 겨우 사람 하나 걸을 수 있는 논두렁길이거나 밭두렁길 아니면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전부였습니다. 길이 그러니 그 좁다란 길에 널찍한 요즘의 대로를 걷듯 상여를 멘 상두꾼들이 양쪽으로 늘어서서 꼿꼿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상엿소리는 진혼곡이며 좁다란 길을 걷게 하는 지혜의 중심 추 좁은 길로 올라선 양쪽 상두꾼들은 서로 의지해 길 가운데로 발은 모으고 어깨 쪽이 벌어지는 V자 대열로 몸을 기울여만 논두렁 외길을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요령에서 울려나오던 딸랑 소리와 선소리,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차곡차곡 이어지던 상두꾼들의 후렴소리는 힘을 돋우는 응원가며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추가 되어 외나무다리에서도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지침의 소리였습니다. 선소리와 그 후렴은 무게가 만만치 않아 어깨를 짓누르는 상여의 무게를 잠시 덜거나 잊게 해주는 환각의 역할도 했지만 죽은 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커다란 흔들림 없도록 상두꾼들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고이 모시게 하는 안무가 같은 구령이기도 합니다.   ▲ 영가된 이 마지막 가는 길에 흔들림 없고 너울춤이라도 추듯 사뿐히 모시려, 자박자박 내딛는 상두꾼들의 발걸음을 고르게 하기위해 움켜쥔 요령을 위로 흔들고 아래로 흔들며 박자를 맞춰줍니다.   ⓒ 임윤수   요즘 상여는 옛것처럼 분해하고 조립해서 반복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알록달록하고 치렁치렁한 헝겊이나 널판으로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종이와 비닐 그리고 각목으로 만들어진 1회용으로 그 규모 또한 8명이나 10명의 상두꾼만 필요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목소리는 물론 요령을 흔들던 손까지 떨리던 그때, 처음으로 선소리를 넣던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요령을 흔들기 전이면 지극한 마음으로 가시는 길 고이 모시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상두꾼들을 모으기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한바탕 요령을 흔들고, 상두꾼들이 모여들면 발맞추고 입(소리) 맞추기 위해 두세 번 정도 후렴구인 '어~허~'소리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상두꾼들과 주고받으며 이산 혜연선사의 발원문을 빌어 발원의 선소리를 시작합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어~허~어~허~' '팔만사천 큰법보화' '어~허~어~허~' '보살석문 스님네께' '어~허~어~허~' '지성귀의 하옵나니' '어~허~어~허~' '자비하신 원력으로' '어~허~어~허~' '굽어살펴 주옵소서' '어~허~어~허' 발인 날자와 영가(죽은 이)된 이의 본관 성명, 생전 거주지를 들어 모든 정령들께 누군가가 꽃상여를 타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극한 마음으로 고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모여든 친빈(親賓)들에게 망자 생전에 맺었을지도 모를 악연이나 서운함, 미운감정이나 서운했던 일, 다퉜던 일, 화났던 일 모두 잊어버리고 명복만을 빌어달라는 당부의 말도 한풀이 하듯 빼놓지 않습니다.   ▲ 사람들의 손에 들린 기다란 장대 끝에는 보내는 이의 마음, 살아남은 자들의 서럽고도 애통한 마음이 담긴 만장들이 한풀이라도 하듯 나풀나풀 흔들리고 있습니다.   ⓒ 임윤수 푸념이라도 하듯 영가된 이 생전의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 놉니다. 잘 아는 이일 경우엔 아는 대로, 모르는 이일 경우엔 모르는 대로 사람이 살다보면 모두 공감하게 되는 그런 이야길 너스레라도 떨 듯 8자씩 끊어 선소리로 이어갑니다. '천년만년 살 거라고' '어~허~어~허~' '먹고픈 것 아니 먹고' '어~허~어~허~' '가고픈 곳 아니 가고' '어~허~어~허~' '입고픈 것 아니 입고' '어~허~어~허~' '쓰고픈 것 아니 쓰며' '어~허~어~허~' '동전 한 닢 아껴가며' '어~허~어~허~' '아등바등 살았건만' '어~허~어~허~' '인생이란 일장춘몽' '어~허~어~허~' '공수래에 공수거라' '어~허~어~허' 넋두리 같고 하소연 같은 선소리가 몇 소절 이어지다 보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이별의 소리가 들려오고, 찔끔찔끔 흐르는 눈물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회심곡과 명심보감, 채근담은 물론 여기저기서 듣고 기억하는 좋은 말들을 상황에 맞도록 딸랑딸랑 요령소리에 맞춰 선소리로 꾸며갑니다. 상제들의 울음과 덩달아 훌쩍거리는 문상객들의 비통함이 자박자박 내딛는 상두꾼들의 발걸음에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돗자리처럼 펼쳐집니다. 여한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한바탕 축원 같은 선소리가 끝나면 꽃상여,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고 있는 망자를 태운 꽃상여를 둘러멘 상두꾼들은 돌아오지 못할 그 황천길을 향해 자작자작 걸어갑니다. 대문을 나선 상여는 생전의 오욕칠정, 부귀명세 모두 놓아버리고 훠이훠이 장지를 향해 떠나갈 뿐입니다. 그렇게 길을 가다 도랑이라도 나오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몸부림이라도 하듯 한바탕의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생전이야 마음대로 건네던 다리였지만 이제는 다시 건네지 못할 다리니 그냥 갈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 만장에는 추모의 글도 있지만 삶을 예찬하고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진리의 글도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설움을 적은 글들도 있습니다.   ⓒ 임윤수 '이 다리는 웬 다린가' '어~허~어~허~' '이승에서 맺은 악연' '어~허~어~허~' '이승에서 쌓은 악업' '어~허~어~허~' '남김없이 끊으라는' '어~허~어~허~' '저승 가는 세심굔가' '어~허~어~허~' '속세번민 인생팔고' '어~허~어~허~' '벗어나는 해탈굔가' '어~허~어~허~' '능파교간 극락굔가' '어~허~어~허~' '이 다리를 건너가면' '어~허~어~허~' '이제다신 못 올 텐데' '어~허~어~허~' '애달고도 설운지고' '어~허~어~허~'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십 분에서 한두 시간 정도 이렇듯 선소리와 상두꾼들의 후렴소리가 반복됩니다. 선소리에는 동지섣달 긴긴밤을 홀로 지새우며 청춘의 뜨거움을 홀로 식혀야 했던 청상과부의 한숨소리와 애환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딱하고도 급급하기만 했던 홀아비의 궁상맞은 삶의 얘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던 사람이 대접받으며 살아나갈 내세이야기도 들어있지만 악하게 살던 사람이 고통 받게 되는 저승세계 지옥이야기도 들어있습니다. 발원하며 돌이키고, 축원하며 영가의 명복이라도 빌다보면 상여는 어느덧 장지에 도착합니다. 지관이 잡아준 천하길지 명당에 좌향(坐向) 맞춰 반듯하게 파진 금정(金井)에 영가된 이가 들어있는 널을 조심스레 안장합니다. 그리고 흙을 다지는 달구(회다지)를 할 때 다시 한 번 선소리를 넣으면 선소리꾼 요령잡이의 역할은 마무리 됩니다. 선소리와 후렴구로 불러주는 삶의 노래, 망자의 노래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되어 모두의 가슴에 아름아름 내려앉습니다. 출처 : 망자가 불러주는 삶의 노래 (1) - 상엿소리 - 오마이뉴스      
38    부모님이 살아계실때 효도합시다. 댓글:  조회:2577  추천:0  2012-07-15
부모님이 살아계실때 효도합시다. 부모님이 살아계실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효도를 하고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부모님의 자식걱정에 앞선 잔소리 때문에 그 앞에서는 떨어져 있을 때보다는 잘해야 겠다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사그라 지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저도 항상 잘한다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디 부모님맘을 따라가겠나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0살 먹은 노부모가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뒷따라오는 80먹은 아들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뒤로 잡게하고 건너면서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고 앞장서서 건넌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자식 입장에서는 따라 갈수가 없나 봅니다. 문득 생각난 부모님 생각에 3가지 사례를 들어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때 조금이라도 더 효도하고 마음 편하게 해드릴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생활이 부유해졌지만, 무슨소용인가 제겐 한 선배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모두 병으로 잃고 누이집에 얹혀 살면서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졸업 무렵에 술자리에서 자신은 연봉1억을 향해 달릴거라고 말하더군요. 그선배 올해 연봉 협상하더니 1억 달성했다고 지인들을 불러 연초에 술을 지인들에게 축하겸 사준일이 있습니다. 대학시절 부모님이 안계셔서 무척 어려웠는데 지금은 안산에 자신의 저택을 지을 정도로 부유해 졌습니다. 옆에서 가끔 연락하고 만나면 참으로 열심히 살긴 살더군요. 그 선배가 작년엔 집을 짓더니만, 올해 연봉 1억을 달성한 술자리에서 말한 다음의 한마디가 가슴을 아리게 만들더군요. " 이제 살게 되었고 부유해 졌는데, 다 무슨소용인가. 부모님과 함께 였다면 효도하고 기쁨이 두배일 텐데. 성공한것처럼 보여도 부모님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파 반쪽성공 같아 슬프다. " 시집간 누나 시댁 형님의 부러움 섞인 조언 누나가 시집을 간 후 일전에 들려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시댁의 형님은 부모님이 시집온 후 얼마 안가서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어릴적에 사고로 돌아가셨답니다. 어느날 이 시댁형님이 시집온 누나집에 놀러와 몇일 묵은 적이 있는데요. 이러한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걸 보고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더군요. " 동서, 시집오면 친정엄마한테 소홀해지기 마련이야. 살아계실때 시간 자주내서 맛있는 거라도 해서 자주 들리고 그래. 그거알아? 돌아가시고 나면 그런거 못해준거 가슴에 한으로 남고 가끔 생각나면 가슴 아프고 그런다. " 제작년 조상님묘 정리하면서 고모부의 말 평소 작은 아버지는 재산탐욕에 부모님 가까운 곳에 살면서 부모님을 홀대하고 재산에만 눈이 멀었습니다. 헌데, 지금은 그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상태죠. 저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군요. 그분들의 묘를 이장하고 그 선대의 조상묘를 제작년에 정리를 하면서 참석하신 고모부가 저에게 한마디 하시더군요. " 조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안그래? 살아계실때 효도하는거야, 지하에 계신 분들이 뭘 알겠어. 좋은 자리 양지바른 곳으로 옮긴다는건 다 자기 좋으려고 하는 이기적인거지 막상 돌아가신 분들은 뭘 알겠어, 죽고 돌아가시면 그 뿐인게지. 살아계실때 한번이라도 더 둘러보는게 효도지. 안그래? " 제 경우의 경우 위와같은 말들과 경험을 가끔가다가 하게 됩니다. 정말 곰곰히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살아계실때 하는 효도가 진정한 효도이자 부모님을 위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후에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들 가슴 한켠에 부모님이 안계시다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채울수도 없는 그런 텅빈 훵한 공간이 자리잡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더 애틋하게 사랑을 쏟아붓고 고생하시면서 돌아가신 후나, 어려서 헤어지거나 돌아가고 안계신 분들에게는 그 빈자리와 아련함의 공간은 더욱 크리라 생각됩니다. 살아계실때 효도해야 하는 이유.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합니다.
37    효도에 관한 시조 모음 댓글:  조회:5275  추천:0  2012-07-15
효도에 관한 시조 모음 1. 뉘라서 가마귀를 뉘라서 가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반포보은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허하노라 지은이 : 박효관(1781-1880) 조선 철종, 고종 때의 가객(歌客). 제자 안민영과 더불어 가집 를 엮음 말뜻 : 하돗던고 - 하였던고. 하더란 말인가? 반포보은(反哺報恩) - 까마귀(반포조,효조(孝鳥)라 함)의 새끼는 다 자란 뒤에는 제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가 먹여준다.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것을 말한다. 못내 - 잊지 못하고 늘 슬허하노라 - 슬퍼하노라. 감상 : 미물인 까마귀도 효도를 행하는데 사람 가운데에는 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많다. 2. 반중 조홍감이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지은이 : 박인로(朴仁老, 1561-1642) 호는 노계. 그의 작품은 대개 고사(故事)를 많이 인용하고 한문을 많이 쓰는 흠이 없지 않으나,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를 지었다. 말뜻 : 반중(盤中) - 소반 위. 소반에 담은. 조홍감(早紅枾) - 일찍 익은 감. '조홍시'라 해야 옳은 듯함. 보이나다 - 보이는구나! 유자(柚子) - 추운 지방에 자라는 귤(橘)의 한 가지. 반길 이 - 반가워할 사람. 즉, 지은이의 어머니를 가리킴. 글로 - 그것을. 그것으로. 그런 까닭에 감상 :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성어(故事成語) - 옛날 중국 오나라의 육적이, 6세 때에 원술의 집에서 접대로 내놓은 유자귤 세 개를 슬그머니 품안에 숨겨 나오다가 발각이 되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대답하여, 그 지극한 효성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 이 시조(時調)는 한음 이덕형이 접대로 내놓은 감을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라 한다. - 보통 조홍시가(早紅枾歌)라 불린다. -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를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옛글귀를 연상케하는 시조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하며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3. 왕상의 잉어 잡고 왕상의 잉어 잡고 맹종의 죽순 꺾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를 증자같이 하리라. 지은이 : 박인로 말뜻 : 왕상(王祥)의 잉어 - 옛날 중국의 왕상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앓으면서 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왕상이 옷을 벗고 강의 얼음을 깨고 들어가려 하였더니, 두 마리의 잉어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맹종(孟宗)의 죽순(竹筍)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맹종은 늙은 어머니가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니 대숲에서 슬피 울며 탄식하니, 죽순이 겨울에도 솟아 나왔다고 한다. 위의 두 효자의 이야기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을 새삼 깨닫게 하는 고사(古事)이다. 노래자(老來子)의 옷 - 칠순(七旬)의 나이에도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부리면서 늙으신 부모님을 즐겁게 했다는 효자(孝子) 노래자의 이야기. 양지성효(養志誠孝) - 어버이를 잘 봉양하여 그 뜻을 기리는 정성스러운 효성. 공자(孔子)의 수제자인 증자(曾子)는 효자로서 유명하다. 감상 : '조홍시가(早紅 歌)'의 둘째 수이다. 중국의 유명한 효자인, 왕상, 맹종, 노래자, 증자 못지 않게 나도 그들처럼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이다.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기에 훌륭한 성현들은 모두 효자였다는 사실을 유념해야겠다. 4. 어버이 날 낳으셔 어버이 날 낳으셔 어질과저 길러 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몸 나서 어질소냐 아마도 지극한 은덕을 못내 갚아 하노라. 지은이 : 낭원군(朗原君, ? - 1699) 선조 임금의 손자이며 효종의 당숙(堂叔). 학문에 조예(造詣)가 깊고 시가에 능하였다. '산수한정가(山水閑情歌)', '자경가(自警歌)' 등 시조 30수를 남겼다. } 말뜻 : 어질과저 - 어질게 되게 하고자 아마도 -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감탄사로서, '그럴 것 같다'는 뜻으로 많이 쓰임. 못내 갚아 하노라 - 못다 갚을 것 같아 안타깝다. 감상 : 어버이 날 낳으셔 어떻게든 어진 사람되라고 고이고이 길러 내시니, 두 분이 아니시면 어찌 내가 사람다운 사람될까보냐? 이 지극한 은혜 어이 다 갚을꼬? 5. 어버이 살아신제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지은이 : 정철(鄭澈,1536-1593) 호는 송강(松江). 고산(孤山) 윤선도, 노계(盧溪)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조 3대 작가 중 으뜸으로 손꼽히며, "단가에 윤고산, 장가(長歌)에 정송강"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사(歌辭)의 제1인자. 시가집 '송강가사'안의 작품에는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 장가(長歌)를 비롯하여, 장진주사, 훈민가 등과 같은 단가(시조) 77수가 실려 있다. 감상 : 송강 정철의 訓民歌중의 '자효(子孝)'이다. 효도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며, 불효(不孝)는 죄(罪) 중에 대죄(大罪)이다. 그러니 효도는 미루었다가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 계실 적에 효(孝)를 게을리 해선 안된다. 훈민가(訓民歌) / 정철(鄭澈) (일부) (전략)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사라시랴. 하늘 같은 은덕을 어찌 다혀 갑사오리. (중략) 어버이 사라진 제 셤길일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곳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후략) 반중 조홍감이/박인로 반중(盤中)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노라 ▶해설 소반(쟁반)에 놓인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비록 유자가 아니라도 품어갈 마음이 있지마는, 품어 가도 반가워해 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그를 서러워합니다. ▶감상 한음 이덕형으로부터 감을 대접받고 느낀 바가 있어 지었다는 이 작품은 '조홍시가'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孝(효)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귀한 음식을 대했을 때 그것을 부모님께 갖다 드렸으면 하는 것은 당연한 심정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것을 갖다 드리지 못하는 서운함을 노래하고 있다.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 효도하라는 風樹之嘆(풍수지탄)의 교훈이 담긴 시조이다. ▶성격 思親歌(사친가) ※ 風樹之嘆(풍수지탄)의 교훈을 담고 있음. ▶표현 인용법 ▶제재 조홍감 ▶주제 孝心(효심). 지극한 事親(사친)의 정 6. 어버이 날 낳으셔 (낭원군) 어버이 날 낳으셔 어질과저 길러 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몸 나서 어질소냐 아마도 지극한 은덕을 못내 갚아 하노라. 지은이 : 낭원군(朗原君, ? - 1699) 선조 임금의 손자이며 효종의 당숙(堂叔). 학문에 조예(造詣)가 깊고 시가에 능하였다. '산수한정가(山水閑情歌)', '자경가(自警歌)' 등 시조 30수를 남겼다. } 말뜻 : 어질과저 - 어질게 되게 하고자 아마도 -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감탄사로서, '그럴 것 같다'는 뜻으로 많이 쓰임. 못내 갚아 하노라 - 못다 갚을 것 같아 안타깝다. 감상 : 어버이 날 낳으셔 어떻게든 어진 사람되라고 고이고이 길러 내시니, 두 분이 아니시면 어찌 내가 사람다운 사람될까보냐? 이 지극한 은혜 어이 다 갚을꼬?   7. 어버이와 자식 사이 어버이와 자식 사이 하늘 아래 지친(至親)이라 부모 곧 아니면 이 몸이 있을 소냐 까마귀 반포(反哺)를 하니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라. * 김상용(金尙容, 1561-1637) :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 자는 경택(景擇).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시조로 《오륜가》 5장, 《훈계자손가》 9편이 전하고,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이 전한다.1) * 지친(至親) : 더 없이 친함. (아주 가까운 친족이라는 뜻으로) '부자간' 또는 '형제간'을 이르는 말. 8. 가마귀 열 두 소리 가마귀 열 두 소리 사람마다 꾸짖어도 그 삿기 밥을 물어 그 어미를 먹이나니 아마도 조중증자(鳥中曾子)는 가마귄가 하노라 * 김수장(金壽長, 1690- ?) : 조선 후기의 가인(歌人). 자는 자평(子平), 호는 십주(十洲) 또는 노가재(老歌齋). 김천택과 더불어 숙종·영조기를 대표하는 쌍벽의 가인. 시조 작품으로는《해동가요》 을해본에 16수, 계미본에 117수,《청구가요》에 3수 등이 있다. 9.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온갖 질병이 다 있으니 부모를 섬긴들 몇 해를 섬기겠는가 아마도 못다한 효성을 일찍 베풀어 보아라. * 박인로(朴仁老, 1561-1642) :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조 3대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자는 덕옹(德翁).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는 무인(武人)으로도 활동하였다. 그의 생애 전반이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면, 후반생(後半生)은 선비요, 가객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다. 시조로《조홍시가(早紅枾歌)》, 《선상탄(船上歎》 등 68수가 전하고, 가사로《영남가》, 《노계가》 등 9편이 전한다. 10. 왕상의 잉어 잡고 왕상의 잉어 잡고 맹종의 죽순 꺽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를 증자같이 하노라. * 박인로 * 감상 : '조흥시가'의 둘째 수인데, 왕상이 겨울날 잉어를 얻어 어머니의 병을 고치고 맹종이 겨울에 죽순을 얻어 그 어머니를 기쁘게 했고 노래자가 칠순의 나이에도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부려 어머니를 즐겁게 했으며, 증자가 어버이를 잘 보양하여 지극한 효성을 다 했듯이 나도 그들 못지 않게 효도를 해야겠다.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니 덕이 높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효 자였다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다. 11. 인생 백세 중에 인생 백세 중에 질병이 다 이시니 부모를 섬기다 몇 해를 섬길는고 아마도 못다할 성효를 일찍베퍼 보렸도다. * 박인로 * 백세 중 : 백년 동안 / 다 이시니 : 거의 전부이니 성효 : 정성과 효도 / 베퍼 : 베풀어 / 보렸도다 : 볼 것이로다 12. 반중 조흥감이 반중 조흥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은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없을새 글로 설어 하노라. * 박인로 * 감상 : 중국 오나라의 육적이 6세에 원술의 집에서 접대로 내놓은 유자 3개를 몰래 숨겼다가 발각이 되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싶어 그랬노라고 대답하여, 그 지극한 효성이 모두를 감동시켰다는 고사가 있다. 이덕현이 접대로 내놓은 감을 보고 위의 육적 회귤(陸積懷橘)의 고사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지었다고 한다.2) 13. 백발의 어머님 백발의 어머님 강릉에 계시는데, 이 몸 서울 향해 홀로 떠나는 마음. 고개 돌려 북평(北坪) 때때로 바라보니, 흰 구름 나는 하늘 아래 저녁 산이 푸르구나. *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 시·글씨·그림에 능하였다고 한다. 위 시조는 서울의 시가(媤家)로 가면서 지은《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지은《사친(思親)》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 가를 알 수 있다. 14. 뉘라서 까마귀를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 박효관(朴孝寬, 1781-1880) : 호는 운애(雲崖), 자는 경화(景華). 조선 고종 때의 가객(歌客). 안민영(安玟英)과 더불어《가곡원류》를 편찬하여 가곡 창(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시하였다. 그의 작품 13수가《가곡원류》에 전해진다. * 감상 : 세상 사람들은 까마귀를 흉조(凶鳥)라 하여 꺼려한다. 그러나 그 까마귀는 반포보은(反哺報恩)의 갸륵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효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데에 비하면, 까마귀가 비록 사람들이 싫어하는 새에 지나지 않지만,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우리는 이 까마귀에게서 효를 배워야겠다. * 반포보은(反哺報恩) : 까마귀가 제 어미가 늙으면, 어릴 적에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다가 주었듯이 거꾸로 먹이를 물어다가 먹이므로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 15. 천세를 누리소서 천세를 누리소서 만세를 누리소서 무쇠 기둥에 꽃피어 여름 열어 따드리도록 그제야 억만 세밖에 또 만세를 누리소서. * 신위(申緯. 1769-1845) : 호는 자하(紫霞)·경수당(警修堂), 자는 한수(漢수). 조선 후기의 문신·화가·서예가. 우리 나라 한문학을 마무리하는 구실3)을 하였으며,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했다. 저서로는《경수당전고》와 김영택이 600여수를 정선한《자하시집》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16. 뫼는 길고길고 뫼는 길고길고 물은 멀고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많고 하고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가느니. * 윤선도(尹善道, 1587-1671) :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조로는〈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이 있다. 문집《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4) ?? 뫼 : 산(山) / 하고하고 : 크기도 크구나 17. 어버이 살아실제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도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鄭澈, 1536-1593) :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송강(松江), 자는 계함(季涵). 가사(歌辭)의 일인자. 그는 시가작품집인《송강가사》에〈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등의 4편의 가사와《장진주사》,《훈민가》 등 시조 77수가 있다. 시문집으로는 《송강집》이 있다.5) ?? 감상 : 송강의《훈민가(訓民歌)》중〈자효(子孝)〉이다. 평생이 고쳐 못할 일이 어버이 섬기기니 어버이가 살아계실 적에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18. 이고 진 저 늙은이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 정철 * 감상 : 송강의《훈민가》중〈반백자불부대(班白者不負戴)〉이다. 무거운 짐을 진, 노인 짐을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기에 돌도 무겁지 않습니다. 인생이 늙어감도 서러운데 무거운 짐까지 지어야 되겠습니까. 경로사상을 강조한 시조다. 19. 청춘소년들아 청춘소년들아 백발노인 웃지마라 공변된 하늘아래 넨들 매양 젊었으랴 우리도 소년 행락이 어제련가 하노라. * 정철 * 감상 : 늙음을 언짢아 하는 백발 노인을 청춘 소년들아 비웃지 말아라. 하늘의 섭리는 공변한 것, 너희들도 언젠가는 늙을 것이니, 우리도 소년 시절이 있었으니 인생은 이렇게 무상한 것이다. * 공변된 : 치우침이 없이 공평한 / 매양 : 늘, 언제나, 번번이 20. 아버님 날 낳으시고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 대여 갚사오리. * 정철 * 가없는 : 끝이 없는 / 대여 : 견주어, 비교하여 21. 아버님 살아실 아버님 살아실 제 섬기지를 못했서라 운명(殞命)이 경각인 제 가슴치고 우노매라 뒤 늦게 허물 뉘우친들 씻을 길이 없노라. 어머님 숨 걷을 때 부르시던 이 자식이 무덤 앞에 부복하니 가슴이 찢기는 데 어디서 소쩍새 애끊듯 저리 울어 예는고 아바도 가단말까 어마도 가단말까 목 메고 가슴 터져 외롭기 가없구나 계실 제 깊 넓고 높 큰 공 늦깨닫고 우나니 어버이 다 가시니 외롬이 산이로고 가신 뒤 뉘우치니 허물이 바다로고 생전에 못다한 장성 나의 애를 끊노매. 태산이 높다하되 아바 은에 더하오리 바다가 깊다한들 어마 공에 견주오리 이제사 깨우쳐 울어도 갚을 길이 없노라 어마도 더나시고 아바도 가셧으니 고애자 울음울어 몸둘곳 없노매라 생전에 베프신 어진 덕 빛내일까 하노라. * 윤철순   22. 세월이 여류하니 세월이 여류하니 백발이 절로 난다 뽑고 또 뽑아 젊고자 하는 뜻은 북당에 친재하시니 그를 두려워함이라. * 김진태(金振泰, 연대미상) : 영조 때의 가인 경정산단가의 한 사람. 속세에 때묻지 않은 선경(仙境)을 노래한 시조 26수가 해동가요에 전해지고 있다. * 감상 :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 머리에도 흰머리가 절로 나게 되었다. 그것을 뽑고 또 뽑는 것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자식된 몸으로 어버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 선인의 효성을 느끼게 하는 시조이다. 23. 어버이 날 낳으셔 어버이 날 낳으셔 어질고져 길러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몸 나서 어질소냐 아마도 지극한 은덕을 못내 갚아 하노라. * 낭원군(郎原君, 1640-1699) : 선조의 손자인 인흥군(仁興君)의 아들이며, 효종의 당숙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가에 능하였다. 왕실작가 중 가장 많은 시조작품을 남겨 30수의 시조가 전한다.《청구영언》진본(珍本)에만 20수가 전하고, 나머지 10수는 여러 시조집에 산재한다.6) * 감상 : 어버이께서 날 낳으시고 어진 사람으로 길러 주시니, 이 두분 아니면 내가 어찌 어진 사람이 되겠는가? 이 은혜를 갚지 못할까 그것이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24. 아버님 날 낳으시니 아버님 날 낳으시니 은혜 밖의 은혜로다 어머님 날 기르시니 덕 밖의 덕이로다 아마도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 대어 갚사올고. * 김수장(金壽長. 1690-?) : 조선 후기의 가인(歌人). 자는 자평(子平), 호는 십주(十州, 十洲) 또는 노가재(老歌齋). 김천택과 더불어 숙종·영조기를 대표하는 쌍벽의 가인이다. 1775년 3대시조집인《해동가요》을해본(일명 박씨본)을 편찬하였는데, 그뒤로도 80세가 넘도록 개수를 계속했다고 한다. 남긴 시조로는《해동가요》을해본에 16수, 계미본에 117수, 《청구가요》에 3수 등이 실려 있다.7) * 은덕 : 은혜와 덕 / 갚사올고 : 갚을 것인가 25. 부모님 계신 제는 부모님 계신 제는 부몬 줄을 모르더니 부모님 여읜 후에 부몬 줄 아노라 이제사 이마음 가지고 어디다가 베푸료. * 이숙량(李淑樑, 1519-159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업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만 치중하였는데, 후일 천거에 의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8) * 계신 제는 : 살아 계실 때는 / 여윈 : 돌아가신 26.부모 구존하시고 부모 구존하시고 형제 무고함을 남 대되 이르기를 우리 집 같다더니 어여쁜 이 내 한몸은 어디 갔다가 모르뇨. * 이숙량 * 구존 : 살아있다 / 무고 : 탈없이 지내다 남 대되 : 남이 모두 / 어여쁜 : 가엾은, 불쌍한 27. 어버이 자식 사이 어버이 자식 사이 하늘 삼긴 지친이라 부모 곧 아니면 이 몸이 있을소냐 오조도 반포를 하니 부모 효도하여라. * 김상용(金尙容. 1561-1637) :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함. 시조로 《오륜가(五倫歌)》5장과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이 전해지며, 문집으로 《선원유고》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 봉정사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9) * 삼긴 : 만들어 낸, 지어 낸 / 지친 : 더없이 친함 / 오조 : 까마귀 반포 :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를 먹여 살린다는 뜻(자식이 자라서 늙은 부모를 섬김) 28. 바릿밥 남 주시고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아라. * 정인보(鄭寅普, 1892-?) : 한학자·교육자.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담園)·미소산인(薇蘇山人). 일제 시대에는 정치적·문화적 계몽 활동을 주도하며 광복 운동에 종사하였고, 국내에서 비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바릿밥 : 놋쇠로 만든 여자의 밥그릇의 밥 보공 : 시체를 관에 넣고 빈 곳을 옷가지 따위로 채워서 메우는 물건
36    중국 고대 24효 이야기 댓글:  조회:6798  추천:0  2012-07-15
중국 고대 24효 이야기   “효”는 유가 륜리사상의 핵심이며 천백년래 중국사회에서 가정 관계를 유지시킨 도덕 준칙이며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으로서 중화민족 전통문화의 정수입니다. 중국 원나라때의 곽거경이란 사람이 당시 민간에서 류전되는 효자의 이야기 스믈네편을 수집하여 《24효》라는 책을 편집하였는데 효도를 선양하는 대표적인 통속 독물로 광범하게 리용되여 왔습니다. 오늘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효”의 작용은 여전히 매우 큰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아래에 《24효》에서 14가지를 선택하여 실었습니다.      01 (孝感动天) 효성이 하느님을 감동시켰다 舜은 전설중 원고시기의 제왕으로서 삼황오제중에서 오제의 한 사람이며 성은 姚씨요 이름은 重华이며 호는 虞氏로서 력사에서는 虞舜이라고 부름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계모와 이복 동생과 짜고들어 여러번 그를 해치려고 꾀하였습니다. 한번은 순더러 창고 지붕을 수리하라 시켜놓고 창고에 불을 질러 놓았습니다. 순은 두손에 삿갓을 쥐고 뛰여내려 위험에서 벗어 났습니다. 또 한번은 순더러 우물 안에 들어가 우물을 가시게 하고는 우물에 흙을 채워 메워 버렸습니다. 순은 땅굴을 파고 나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순은 조금도 그들을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기색이 없이 여전히 부친을 공경하고 동생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의 효행은 마침내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순이 厉山에서 농사질을 하는데 코끼리가 나와 밭을 갈아 주었으며 새들이 날아와 기음을 매 주었습니다. 尧제왕은 순이 매우 효성스럽고 政事를 처리하는 재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두딸 娥皇과 女英을 그에게 시집 보냈으며 다년간의 관찰과 고험을 거쳐 마침내 순을 자기의 계승자로 선정하였습니다. 순이 천자가 된후에도 여전히 부친을 공경스러게 대했으며 이복 동생을 제후로 봉해 주었습니다.       02 (亲尝汤药) 탕약을 친히 맛보다 한문제 刘恒은 한고조 류방의 세째 아들로서 고후8년(前180)에 황제로 되였습니다. 그는 인자하고 효성스럽기로 천하에 소문이 높았으며 자기의 모친 薄太后를 섬기면서 종래로 태만한적 없었습니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삼년동안 그는 한번도 시름놓고 자 본적이 없었으며 모친이 복용할 탕약을 번마다 친히 맛본후에야 시름놓고 마이게 하였습니다. 그가 재위하여 24년 동안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례의를 흥기시켰으며 농업발전을 추진하여 서한사회가 온정되고 인구가 왕성하게 하였으며 경제가 회복되고 발전하여 그와 한경제의 통치시기를 가리켜 文景之治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03 (百里负米) 백리밖에서 쌀을 메고 간다 仲由의 자는 子路 혹은 季路라고 하였는데 춘추시기의 로나라 사람으로서 공자의 자랑할만한 제자였으며 성격이 곧고 용감하였으며 부모에게 아주 효순하였습니다. 어렸을때 가세가 빈궁하여 항상 자기로 산나물을 캐여 먹을것을 만들면서도 백리밖에서 쌀을 메고 가서 부모를 공대하였습니다. 부모가 사망한후 그는 촉나라에 가서 큰 벼슬을 하게 되였는데 따르는 차량이 백대가 되였으며 창고에는 량식이 만석이나 되였습니다. 두터운 비단자리를 깔고 앉아 풍성한 연석을 먹으면서도 그는 항상 부모를 그리워 하였으며 “내가 오늘 산나물이 먹고 싶고 부모에게 쌀을 메여 가고 싶지만 다시는 기회가 없게 되였구나!” 하고 개탄하였습니다. 공자는 “너는 부모한테 그야말로 생전에는 효성을 다하였고 사후에는 그리움을 다 하는구나!” (《孔子家语·致思》) 하고 찬양하였습니다. 04 (芦衣顺母) 갈꽃 옷을 입고도 계모한테 효순한다 闵损의 자는 子骞이요 춘추 로나라 사람이였는데 공자의 제자로서 공가문중에서 그의 덕행은 안연과 마찬가지로 평가되였습니다. 공자는 “민자건은 정말 효성이 지극하구나!”(《论语·先进》) 하고 찬양한적 있습니다. 민순은 어렸을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밑에서 자라게 되였는데 계모한테서 또 두 이복 동생이 생겼습니다. 계모는 항상 그를 학대하였는데 겨울이면 두 동생에게는 면화를 넣고 지은 두터운 솜옷을 입히고 그에게는 갈꽃을 넣고 지운 엷은 옷을 입혔습니다. 하루는 부친이 길을 떠나게 되였는데 견마 잡던 민순이는 너무 추워 오돌오돌 떨다가 그만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친은 민순이를 질책하며 채찍으로 때리자 옷이 째지며 갈꽃이 사방에 날렸습니다. 그제야 자기 아들이 학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부친은 후처를 쫓아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순이는 부친앞에 엎드려 빌면서 계모를 용서해 줄것을 사정하였습니다: “모친을 남기여 내 한사람만 추위를 참으면 되지만 모친을 쫓아내면 세 아이가 추위에 떨게 되나이다.”  부친은 민순의 말을 듣고 감동되여 후처를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계모도 민순의 말을 듣고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으며 그후부터는 민순이를 자기 친자식과 똑 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05 (卖身葬父) 자기를 팔아서 부친의 장례 지낸다 董永은 동한시기의 千乘(今山东高青县北)사람으로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병란을 피하여 부친과 함께 安陆(今属湖北)에 이사하여 살게 되였습니다. 그후 부친이 사망하자 동영은 자기를 한 부자집에 노예로 팔아 장례비용을 해결하였습니다. 일하러 가는 길에 홰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녀인을 만나게 되였는데 자기는 어디로 갈곳 없다고 하기에 둘은 부부를 맺었습니다. 그 녀인은 한달 사이에 삼백필의 비단을 짜서 빚을 물고 동영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홰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 녀인은 동영에게 자기는 옥황상제의 딸로서 명을 받들어 동영을 구하려 내려 왔었다고 말하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후부터 그 홰나무 그늘 아래를 孝感이라고 이름하게 되였습니다.   06 (行佣供母) 머슴살이 하여 어머니를 섬긴다 江革은 동한때의 제나라 临淄사람으로서 어리서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한테 효성이 극진하였습니다. 전란중에서 강혁은 어머니를 업고 피난을 다니면서 몇번 도적떼들을 만나 죽을번 하였는데 그때마다 강혁은 울면서 “내가 죽는건 큰일 아니지만 년로한 어머니를 돌볼 사람 없나이다.” 하고 근심하기에 도적들도 차마 그를 죽이지 못 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강소의 下邳에 정착하여 살면서 부자집 머슴살이 하여 어머니를 섬겼는데 자기는 째지게 가난하면서도 어머니의 생활만은 불편함이 없게 보장하여 드렸습니다. 明帝때에 그는 孝廉으로 천거 되였고 章帝때에는 贤良方正으로 천거되여 五官中郎将의 벼슬까지 지내게 되였습니다.       07 (怀橘遗亲) 귤울 품에 감추어 어머님께 갖다 드린다 陆绩은 삼국시기의 오나라의 吴县华亭(今上海市松江)의 사람으로서 여섯살때 하루는 부친을 따라 구강에 가서 袁术을 만나보게 되였습니다. 원술은 귤로써 그들을 초대하였는데 륙적은 귤 두개를 가만히 품속에 감추었습니다. 돌아가려 하는데 륙적의 품속에서 귤 두개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원술은 웃으며 “우리집에 손님으로 왔다가 가면서 주인의 귤을 훔쳐 가는구나.” 하고 말하자 륙적은 “어머니가 귤을 몹시 즐겨하시기에 가져다가 어머님께 맛 보이려 했소이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원술은 륙적이 어린 나이게 벌써 어머니에게 효성할줄 아는것이 아주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륙적이 성장한후 학문이 연박하고 아는것이 많았으며 천문과 력법, 산술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는 《浑天图》를 직접 그렸으며 《易经》에 주해를 달고 《太玄经注》를 편찬하였습니다.   08 (埋儿奉母) 자기 아이를 묻어 버리고 어머니를 봉양한다 郭巨는 晋나라때의 隆虑(今河南林县)사람으로서 원래는 가세가 비교적 넉넉한 형편이였습니다. 부친이 사망한후 그는 재산을 두몫으로 나누어 두 동생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작은집 한채만 가지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였는데 효성이 지극 하였습니다. 그후 가세가 점점 어리워 지면서 안해가 아들 하나 낳게 되였습니다. 곽거는 이 아이를 키우노라면 필연코 어머니에게 등한해 질것이 근심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해와 상의하고 “아들은 낳으면 다시 있을수 있지만 어머님은 죽으면 다시 있을수 없으니 이 아이를 묻어 버리고 량식을 절약하여 어머님을 잘 공대합시다.” 하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지하 두자 깊이 되는 곳에서 불연듯 황금 항아리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하늘이 곽거에게 주는 것이니 관가에서 가져갈수 없고 민간에서 빼앗을수 없다.” 하는 글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황금을 얻은후 돌아와 어머님을 더욱 극진히 모실수 있었으며 아이도 더욱 건실하게 키울수 있었습니다.       09 (乳姑不怠) 게으름 없는 젖 며느리 崔山南은 당나라때의 博陵(今属河北)사람으로서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山南西道节度使 벼슬을 지냈적 있다하여 사람들은 그를 “山南” 이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당년에 최산남의 증조모 长孙夫人은 년세가 이미 많아 이빨이 모두 빠져 버렸습니다. 조모 唐夫人은 효성이 매우 지극한 분이였는데 매일 목욕하고 후당에 가서 자기의 젖으로 시어머님을 공대하였습니다. 이렇게 몇해를 지내니 장손부인은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도 신체가 여전히 건강하였습니다. 장손부인이 병이나서 임종하게 되니 온집 식구들을 모여놓고 “나는 며느리의 은덕을 보답할 길이 없는데 증손자와 증손며느리들은 그가 나에게 효성했던것처럼 그에게 효성하기를 부탁한다.” 하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후 최산남은 큰 벼슬을 하게 되였는데 과연 장손부인의 유언을 받들고 조모 당부인을 극진히 공대 하였습니다. 10 (卧冰求鲤) 얼음우에 엎드려 잉어를 구한다 王祥은 琅琊사람으로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가 들어 왔는데 계모는 여러번 부친의 앞에서 왕상의 나쁜말을 하여 부자 관계를 리간질 하였습니다. 부모가 모두 병에 걸리게 되니 왕상은 한번도 편안히 자지 못하며 극진히 시중들었습니다. 계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왕상은 엄동설한에 옷가슴을 헤치고 얼음우에 엎드려 얼음을 녹였습니다. 불연듯 얼음이 녹으면서 잉어 두마리가 튀여 나왔습나다. 계모는 그 잉어를 먹고 과연 병이 낳았습니다. 왕상은 20여년 은거한후 후에 温县의 县令으로부터 大司农、司空、太尉등의 벼슬을 하였습니다.       11 (恣蚊饱血) 모기가 자기피를 빨아 먹게 한다 吴猛은 晋나라때의 濮阳사람으로서 여덟살때부터 부모에게 효성할줄 알았습니다. 가정이 빈궁하여 모기장도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면 모기들이 성화부려 부친은 편히 주무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맹은 저녁이면 맨몸으로 부친의 침대옆에 앉아서 모기들을 자기한테 유인하여 자기피를 실컷 빨아 먹게 하여 부친을 편히 쉴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2 (哭竹生笋) 대나무를 짚고 울어 죽순이 돋아나게 한다 孟宗은 三国시기의 江夏사람으로서 어려서 부친을 여의였고 어머님도 로쇠하고 병이 많았는데 의사는 신선한 죽순으로 탕을 끓여 대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는 바로 엄동이라 신선한 죽순이 있을수 없었으니 맹종은 혼자서 대나무숲에 가서 대나무를 짚고 슬피 울었습니다. 불연듯 땅이 갈라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많은 죽순들이 돋아 났습니다. 맹종은 너무 기뻐 그 죽순으로 탕을 끓여 어머님께 대접하니 어머님의 병은 가신듯 낳았습니다. 그후 맹종의 벼슬은 司空에 이르렀습니다.       13 (尝粪忧心) 분변을 맛보며 부친의 병을 근심한다 庾黔娄는 南齐때의 高士로서 孱陵의 县令으로 부임된적 있습니다. 부임되여 열흘도 안되였는데 불연듯 가슴이 떨리고 식은땀이 돋으니 집에서 큰 일이 났다고 예감하고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집에 와서야 부친이 이미 중병에 걸려 이틀이 되였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의사는 병세의 길흉을 알려면 오직 병자의 분변의 맛을 보아야 하는데 쓴맛이면 좋아질 조짐이라고 하였습니다. 黔娄는 서슴없이 부친의 분변을 받아 맛을 보니 단맛이라 몹시 근심하였습니다. 그는 밤에 북두성을 향하여 무릎 꿇고 빌면서 부친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며칠후 부친은 사망하니 黔娄는 부친을 안장하고 삼년동안 守孝를 지냈습니다.   14 (弃官寻母)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 떠난다 朱寿昌은 宋나라때의 天长사람으로서 칠세때에 생모 류씨가 부친의 정실부인의 질투를 받아 재가해 갔는데 50년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神宗때에 주수창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였는데 혈서로 《金刚经》을 베끼면서 사방에 수소문 하여 섬서의 어머님의 행처를 알아 냈습니다. 그는 곧 벼슬을 버리고 섬서로 어머님 찾아 떠나면서 어머님 찾기전에는 절때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끝내는 陕州에서 어머님와 두 동생을 찾아내고 기쁘게 상봉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 올때에는 어머님은 이미 칠십 고령을 넘었었습니다. 현성원 번역작성
35    우리민족 전통 제사(祭祀) 규범 댓글:  조회:4146  추천:0  2012-07-15
우리민족 전통 제사(祭祀) 규범 제사(祭祀)의 종류 제례란 원래 근본에 보답하고 조상의 은혜와 덕을 기리며 추모하고 정성드려 기념하는 의식이며 행사로서 자손 된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사람 같이 해야하고 없어진 사람 받들기를 있는 사람 같이 해야 한다 (禮記事死如事生 死亡如事存) 우리나라는 과거 수 백년동안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종손 집 장남이 지내 왔으며 근본과 조상을 배반하면 망한다는 원리를 철칙으로 알아 온 것이 봉건시대의 관례적 풍습이었다 그리하여 제사는 엄격하였으며 우선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을 가다듬어 깨끗하게 비우는 제계(齊戒)를 하며 냄새가 나는 자극성 음식을 먹지 않고 내외가 잠자리를 삼가하여 제사를 정성것 모셨다 가. 시제(時祭) 일년에 네번 사시절(四時節)의 중월(中月), 봄(二月), 여름(五月), 가을(八月), 겨울(十日月)로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냈던 종묘의 시제로서 거의 사라젔다 나. 차례(茶禮) 음력 매달 초하루 보름(每月 朔望)과 그리고 생일 날에 올리는 것으로낮에 간단히 지내는 것인데 거의 없어 졌다 다. 기제(忌祭) 해마다 죽은 날에 지내는 기제사(忌祭祀)로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이며과거에는 종가집 장손이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하였는데 가정의례 준칙제 16조에 참가 범위를직계 자손으로 정해 놓았다 제사 지내는 시간은 사망일인 자시(子時 : 전일 11:00 ~ 당일 01:00)에지낸다. 즉 죽은날 첫 시간에 해당된다. 제사를 밤을 타서 지내는 것은 신(神)은 음기(淫氣)라 음이 음을 불러오게 한다는 뜻이다. 라. 년시제(年時祭) 해마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에 세배 드리는 차례(茶禮)는 한해를 시작하는 의미로 아침에 올리며 무축 단잔(無祝單盞) 즉 술을 한잔만 올릴적엔 축을 안 읽는다 마. 절사(節祀) 옛날에는 동지(冬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에 절사를 올렸으나 간소화되어 추석에 햇곡으로 메를 올리고 송편을 빚으며 햇과일을 차려놓고 예를 올리는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의 뜻이 담겨있다 바. 묘제(墓祭) 해마다 한식이나 음력 十月에 날짜를 받아서 지내는 墓祭는 일년에 한번 지낸다하여 세일제(歲一祭)라고 부른다. 시조(始祖)에서 오대조(五代組)이상의 조상 묘에 가서 올린다 하여 墓祭라고도 한다 ※ 가정의례준칙은 기제사,년시제인 차례와 절사인 추석제만을 허용한다 ■기제사 홀기 해설(忌祭祀 笏記 解說) 가. 개복정장(改服正裝) 정제일 오후 일곱시(술시)부터 제관은 소세하고 복색을 갖춘다.주제는 유건,도포,포대를 착용하고 가족 일동은 원색이 아닌 담색복을 깨끗하게 입는다. 또한 대문을 열어 혼령을 모실 차비를 한다 나. 서립(序立) 제 자손이 정청(대청)앞에 나가 차례로 선다 다. 진설(陳設) (1) 먼저 조과(과자)부터 올리고(先進 造果) (2) 다음 과실을 올리고(次進 果實) (3) 다음 포와 식혜를 올리고(次進 脯醯) (4) 다음 소채를 올리고(次進 蔬采) (5) 다음 시접을 올리고(次進 匙접) (6) 다음 초접을 올리고(次進 醋접) (7) 다음에는 잔반을 올리고(次進 盞盤) (8) 다음에는 어육을 올리고(次進 魚肉) (9) 다음에는 떡을 올리고(次進 餠) (10)다음에는 밥과 국을 올리고(次進 飯羹) (11)다음에는 탕을 올린다(次進 湯) (12)제주병과 강신잔,모사기와 주전자,퇴주기를 향안(향로와 항합을 올려 놓는 상) 앞에 준비 한다 (13)향로와 향합을 향안에 설치하되 향로는 서쪽, 향합은 동쪽, 축판은 향안 왼쪽에놓는다. 라. 강신(降神) (1) 주인(초헌자)이 향안 앞에 꿇어 앉아 향을 피운다 (2) 재배후 조금 물러 선다 (3) 주인과 집사가 꿇어 앉아 왼쪽 집사가 빈잔을 주인에게 주고 집사가 술을 반잔정도 따른다 (4) 주인이 왼손으로 잔대를 잡고 오른손으로 잔을 잡아 향로위를 세번 두르고, 모사위에 세번(중,좌,우)부은 다음 반잔을 집사에게 주면 집사는 받아 제 자리에 놓고 물러난다. 이것을 뇌주(뢰酒)라 한다. (5) 주인이 머리 숙였다가 일어나 재배하고 물러난다 마. 참신(參神) (1) 주인이하 제자손이 재배한다 ※ 신주를 모실때는 참신을 먼저 한다 바. 초헌(初獻) (1) 주인이 손 씻고 향안 앞에 꿇어 앉는다. 집사가 왼쪽으로 신위 앞에 가서 고위(考位) 반잔을 받들어 주인에게 건네면 주인은 향안 앞에 동향하고 잔을 받든다 (2) 오른쪽 집사가 서쪽으로 서서 술을 따른다 (3) 집사는 주인의 반잔을 받들고 자리에 올린다 (4) 다음 비위(비位)의 잔도 (1),(2),(3)번처럼 반복한 다음 향안 앞에 북향하고 꿇어 앉는다 (5) 주인이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한다 (6) 집사는 우적을 도적 옆에 올리고, 첩상(대접)에 정저(수저는 그대로 두고 젓가락을 도적위에 바로 놓음)하고 물러난다 사1. 독축(讀祝) (1) 축관은 주인 왼쪽에서 축판을 든다 (2) 제 자손이 꿇어앉는다 (3) 축관이 축을 읽는다 (4) 주인이하 제 자손이 일어난다 (5) 주인이 재배하고 물러난다 (6) 집사 두 사람이 좌우로 가서 고위와 비위의 반잔을 들고 향안 앞에 와서 술을 퇴주기에 비운다음 빈 잔을 자리에 올린다 사2. 아헌(亞獻) (1) 아헌자(주부,근친)가 손을 앃고 향안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이고 꿇어 앉는다. 집사는 왼편 신위 앞에 나아가 고위 반잔을받들고, 아헌관은 잔대를 받들어 향안앞에 동향한다 (2) 오른쪽 집사는 서쪽으로 향하여 술을 따른다 (3) 주인이 반잔을 받들면 집사는 잔을 받들어 자리에 올린다 (4) 다음 비위(비位)의 잔도 (1)~(3) 처럼 하고 향안 앞에 북향하고 꿇어 앉는다 (5) 계적(鷄炙)을 올리고 계적위에 젓가락을 바로 놓는다 (6) 아헌 자가 재배후 물러난다 아. 終獻종헌) (1) 종헌자(사위 또는 근친)가 손을 앃고 향안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이고 꿇어 앉는다. 집사는 왼편 신위 앞에 나아가 고위 반잔을받들고, 아헌관은 잔대를 받들어 향안 앞에 동향한다 (2) 오른쪽 집사는 서쪽으로 향하여 술을 따른다 (3) 주인이 반잔을 받들면 집사는 잔을 받들어 자리에 올린다 (4) 다음 비위(비位)의 잔도 (1)~(3) 처럼 하고 향안 앞에 북향하고 꿇어 앉는다 (5) 어적(漁炙)을 올리고 어적위에 젓가락을 바로 놓는다 (6) 종헌자가 재배후 물러난다 첨주가 있을시는 종헌자는 술잔을 조금만 채운다 자. 첨주 (1) 주제의 아우나 아들등이 종헌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되 조금씩 세번 붓는다 (2) 재배한다 차. 합문(閤門)유식(侑食) (1) 메(밥)그릇 뚜껑을 열고 그 위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바르게 고쳐 놓는다. 숟가락의 안쪽이 동쪽을 향하게 하며, 젓가락은 어적이나육적 위에 가지런하게놓는다. 제주는 재배한후 제자리로 돌아간다. (2) 제 자손이 모두 문밖에 나와 남녀가 서로 바라보고 선다 (3)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린다 카. 계문(啓門)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연다 타. 진차(進茶) (1) 집사가 고위와 비위의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린 후 물러난다 (2) 엄숙히 잠깐동안 기다린다 파. 사신(辭神) (1) 집사가 시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난다 (2) 제 자손이 재배한다 ※ 신주를 모실 때는 주인과 주부가 올라가 각각 고위와 비위를 독(독)에 모시고 사당으로 간다 하. 철찬(撤饌) (1) 집사가 모든 제수를 물리고 축관은 축문과 지방을 살은다 ■설날 차례(茶禮 혹은 설 茶祀) 1. 차례준비 가.아침에 행한다. 현재 봉사하고 있는 조상을 가지런히 함께 모신다 좌편을 상위로 하여 모신다 첫째 줄에서 넷째 줄까지는 기제 진설도와 같고, 제수는 기제에 비해 간소하게 올린다 나.재계(齋戒) 하루 전부터 집안 안팎을 청소하고 목욕 재계하여 차례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다.제상과 제구의 설치 차례를 드릴 장소를 정하고, 미리 여러 제구를 깨끗이 닦아 준비한다. 라.제수(祭需) 준비 주부이하 여러 여인들이 제수를 준비하나 남자들도 거든다. 마.제복입고 정렬하기 명절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제복을 입고, 제상 앞에 남자들은 우측(동)에 여자들은 좌측(서)에, 제주와 주부는 앞에 대체로 연장자 순서대로 선다. 바.제상 차리기 먼저 식어도 상관없는 제수를 차린다. 사.신위 봉안 고조부모이하 부모까지(물론 2대조, 3대조 등 가정에 따라 다름) 순서대 로 신주나 지방을 모신다. 산소에서는 이 절차가 없다. 2. 차례홀기 가.강신(降神, 신내리기) 주인이 읍하고 꿇어앉아 향을 세 번 사르고 강신의 예를 행한다. 집사가 잔반에 따라 주는 술을 모사기에 세 번 나누어 붓고 재배한다. 그리고 제자리에 와서 선다(산소에서는 땅바닥에 한다. 모사기란 곧 땅을대신하는 제구 이다. 산소에서는 참신후에 강신한다) 나.참신(參神, 합동 참배) - 주인 이하 모든 참사자들은 일제히 강림한 신에대해 두 번 절하며 인사드린다. 다.헌작(獻酌, 잔 올리기) - 주제가 제상 앞에 꿇어앉아 열위(列位)한신위에게 차례로 술을 가득 올리고, 재배한다. 차례로 숟가락을 떡국에 걸치고 젓가락을 골라 시접(匙煊)에 걸쳐놓는다.이를 낙식(落食)이라고도 한다. 라.유식(侑食, 식사 권유) 참례자 일동이 7-8분간 조용히 부복(?伏)하거나 양편으로 비껴 시립(侍立)해 있는다. 바.철시복반(撤匙覆飯, 수저 걷기) 숟가락을 거두어 세 번 고른 다음 제자리에 놓는다. 사.사신(辭神, 합동 배례) 신위를 전송하는 절차다. 참사자 전원은 재배한다. 지방(紙榜)을 불사른다. 신주는 사당으로 다시 모신다. 이로써 차례 절차는 모두 끝난다. 아.철상(撤床, 제상 정리) 제상을 치운다. 자.음복(飮福, 음식 나누기) : 참사자 전원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음복을 하면 조상들의 복을 받는다는 속신(俗信)이 있다. 기제와는 달리 이웃들을 초청하거나 음식을 이웃에 보낼 필요는 없다. ■추석 차례(茶禮 혹은 茶祀) 1. 차례준비 가.아침에 행한다. 현재 봉사하고 있는 조상을 가지런히 함께 모시며,좌편을 상위로 모신다. 첫째 줄에서 넷째 줄까지는 기제 진설도와 같고, 제수는 기제에 비해간소하게 올린다 나.재계(齋戒) 하루 전부터 집안 안팎을 청소하고 목욕 재계하여 차례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다.제상과 제구의 설치 차례를 드릴 장소를 정하고, 미리 여러 제구를 깨끗이 닦아 준비한다. 라.제수(祭需) 준비 주부이하 여러 여인들이 제수를 준비하나 남자들도 거든다. 마.제복입고 정렬하기 명절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제복을 입고, 제상 앞에 남자들은 우측(동)에 여자들은 좌측(서)에 제주와 주부는 앞에 대체로 연장자 순서대로 선다. 바.제상 차리기 먼저 식어도 상관없는 제수를 차린다. 사.신위 봉안 고조부모이하 부모까지(물론 2대조, 3대조 등 가정에 따라 다름)순서대로 신주나 지방을 모신다. 산소에서는 이 절차가 없다. 2. 차례홀기 가.강신(降神, 신내리기) 주인이 읍하고 꿇어앉아 향을 세 번 사르고 강신의 예를 행한다. 집사가 잔반에 따라 주는 술을 모사기에 세 번 나누어 붓고 재배한다. 그리고 제자리에 와서선다(모사기란 곧 땅을 대신하는 제구 이다) ※ 산소에서는 땅바닥에 한다. 산소에서는 참신후에 강신한다 나.참신(參神, 합동 참배) - 주인 이하 모든 참사자들은 일제히 강림한 신에대해 두 번 절하며 인사드린다. 다.헌작(獻酌, 잔 올리기) - 주제가 제상 앞에 꿇어앉아 열위(列位)한신위에게 차례로 술을 가득 올리고, 재배한다. 차례로 숟가락을 떡국에 걸치고 젓가락을 골라 시접(匙煊)에 걸쳐놓는다.이를 낙식(落食)이라고도 한다. 라.유식(侑食, 식사 권유) 참례자 일동이 7-8분간 조용히 부복(?伏)하거나 양편으로 비껴 시립(侍立)해 있는다. 바.철시복반(撤匙覆飯, 수저 걷기) 숟가락을 거두어 세 번 고른 다음 제자리에 놓는다. 사.사신(辭神, 합동 배례) 신위를 전송하는 절차다. 참사자 전원은 재배한다. 지방(紙榜)을 불사른다. 신주는 사당으로 다시 모신다. 이로써 차례 절차는모두 끝난다. 아.철상(撤床, 제상 정리) 제상을 치운다. 자.음복(飮福, 음식 나누기) 참사자 전원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음복을 하면 조상들의 복을 받는다는 속신(俗信)이 있다. 기제와는 달리 이웃들을 초청하거나 음식을 이웃에 보낼 필요는 없다. ■묘제홀기(墓祭笏記) 槿具請 行事 근구청 행사 삼가 (13대) 조 할아버지 시제를 모시겠습니다 獻官及 諸子孫 入就체下 拜位 헌관급 제자손 입취체하 배위 헌관 및 모든 자손은 절할 위치에 서서 앞으로 손을 모으고(왼손이 위로 오도록) 정중히 선다 行 降神禮 初 獻官 詣 관洗位 행 강신례 초 헌관 예 관세위 신위를 영접하여 음식 드시기를 청 한다. 초 헌관은 洗手(손을 씻는다)를 한다 因詣 香案前 궤 三上香 인예 향안전 궤 삼상향 이어서 제주는 신위 앞에 나가 꿇어앉아 향에 불을 부친후 세번 들어 올린후 향로에 꽂는다 (봉향은 오른쪽에서 향을, 봉로는 왼쪽에서 향로를 받든다) 俯伏 ~ 興 小退 再拜 궤 부복 ~ 흥 소퇴 재배 궤 업드렸다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서서 두번 절한 후 다시 꿇어앉는다 取 考位 盞盤斟酒 灌于 茅上 취 고위 잔반짐주 관우 모상 봉작은 고위의 잔대를 내려 헌관에게 주고 전작은 헌관이 든 잔대에 술을 잔에 차지 않도록 조금 따른다 헌관은 잔대를 봉작에게 주고 봉작은 술을 묘 앞에 세 번 나누어 붓는다(중,좌,우) 봉작은 빈잔을 받들어 제자리에 올린다 俯伏 ~ 興 小退 再拜 궤 부복 ~ 흥 소퇴 재배 궤 업드렸다 일어나 뒤로 물러서서 두번 절한 후 다시 꿇어 앉는다 取 考位 盞盤斟酒 灌于 茅上 취 고위 잔반짐주 관우 모상 봉작은 잔을 내려 헌관에게 주고 전작은 술을 잔에 차지 않도록 조금 따라 주고, 헌관은 술잔을 봉작에게 준다 봉작은 묘 앞에 세 번으로 나누어 붓는다(중,좌,우) 봉작은 빈잔을 제자리에 올린다 俯伏 興 小退 再拜 因降 復位 부복 흥 소퇴 재배 인강복위 업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한후 제자리로 물러난다 行 參神禮 행 참신례 (강신 하시었으므로) 참배의 예를 시작 합니다 獻官以下 皆서立 再拜 拜 ~ 興, 拜 ~ 興 헌관이하 개서립 재배 배 ~ 흥, 배 ~ 흥 모든 사람이 차례로 서서 두번 절을 한다. ※ 참신 : 제사에 참여하여 조상님께 인사드림 行 初獻禮 獻官詣 墓位前 궤 행 초헌례 헌관예 묘위전 궤 초헌례를 시작 합니다 헌관은 묘 앞에 꿇어 앉으시오 奠爵 進饌 전작 진찬 봉작은 술잔을 내려 헌관에게 주고 전작은 잔대에 술을 따른다, 헌관은 오른손으로 술잔을 잡고 향로에 들러서 봉작에게 준다 봉작은 술잔을 받아 제자리에 올린다 전작은 우적을 올려 도적 옆에 놓는다 啓飯盖 揷匙 西柄正箸 계반개 삽시 서병정저 밥뚜겅을 열어 수저 안쪽을 동쪽(자루가 서쪽)으로 향하여 꽂은다음 젓가락을 가볍게 세번 두두린 다음 손잡이가 서쪽을 향하도록 도적(제상위의 적)위에 올려 놓는다. 獻官以下 皆 俯伏, 祝進 獻官之左 궤 讀祝 ~ 興 헌관이하 개 부복, 축진 헌관지좌 궤 독축 ~ 흥 헌관이하 모두 부복하고, 축관은 축판을 가지고 나가 헌관 왼쪽에서 동편을보고 꿇어 앉아 축을 읽는다. 다읽은 축은 향탁자 왼쪽에 놓아둔다. 헌관이하 제 자손들은 조용히 일어 난다. 獻官 小退 再拜 撤酒 返還 故處 因降復位 헌관 소퇴 재배 철주 반환 고처 인강복위 헌관은 뒤로 물러나 두번 절하고 봉작은 술잔을 내려 퇴주하고 잔을 전에 있던곳에 다시 놓는다. 초헌관 퇴장. 行 亞獻禮 행 아헌례 아헌례를 행한다 獻官詣관洗位 因禮 墓位前 궤 헌관예관세위 인예 묘위전 궤 아헌관은 손을 앃는다, 자리 앞에 나가 꿇어 앉는다 奠爵 進饌 正箸 전작 진찬 정저 봉작은 술잔을 내려 헌관에게 주고 전작은 잔대에 술을 따른다, 헌관은 오른손으로 술잔을 잡고 향로에 들러서 봉작에게 준다 봉작은 술잔을 받아 제자리에 올린다. 전작은 계적을 올려 우적 옆에 놓는다 獻官 俯伏 興 小退 再拜 궤 헌관 부복 흥 소퇴 재배 궤 헌관은 뒤로 조금 물러나 두번 절한 다음 꿇어앉는다 撤酒 返還故處 因降復位 철주 반환고처 인강복위 봉작은 술잔을 내려 퇴주하고, 잔을 전에 있던곳에 다시 놓는다. 아헌관 퇴장. 行 終獻禮 獻官詣 관洗位, 因詣 墓位前 궤 행 종헌례 헌관예 관세위, 인예 묘위전 괘 종헌례를 행한다 종헌관은 세수를 하고 자리앞에나가 꿇어 앉는다 奠爵 進饌 正箸 전작 진찬 정저 봉작은 술잔을 내려 헌관에게 주고 전작은 잔대에 술을 따른다, 헌관은 오른손으로 술잔을 잡고 향로에 들러서 봉작에게 준다 봉작은 술잔을 받아 제자리에 올린다. 전작은 어적(魚炙)을 올려 계적 옆에 놓는다 獻官俯伏 興 小退 再拜 궤 因降復位 헌관부복 흥 소퇴 재배 궤 인강복위 헌관은 나즈막히 업드렸다 일어나서 두번 절한후 꿇어 앉는다 行 進茶禮 행 진다례 (술과 식사를 마쳤으므로) 차(물)를 올리겠습니다 撤羹 進塾冷 入匙 철갱 진숙냉 입시 봉작이 국을 물리고 냉수를 올린다 獻官以下 皆俯伏 ~ 興 헌관이하 개부복 ~ 흥 제 자손은 몸을 구부리고 있다가(九食頃 -> 밥을 아홉번 뜨는시간)제 자손이 일어난다 下匙合飯盖 祝告利成 하시합반개 축고이성 봉작은 수저와 젖가락을 거두고 밥이나 국수의 뚜겅을 덥고 물러나 자리로 온다 이것으로 삼가 시제를 마치겠음을 고하나이다 行 辭神禮 獻官以下 皆 再拜 拜, 興, 拜, 興 행 사신례 헌관이하 개 재배 배, 흥, 배, 흥 사신례를 행한다 헌관이하 모든 자손은 두번 절한다 初獻官 詣 西체上 北向立 초헌관 예 서체상 북향립 초헌관은 왼쪽으로나와 북쪽을 향해 서서 祝 奉祝辭 焚于 西체上 禮畢(飮福禮) 축 봉축사 분우 서체상 예필 축문을 불태운다음 묘제를 끝낸다(제 자손 음복) ■ 제수의 진설 제수란 제사에 드리는 제물을 말하는 것으로 간소하고 깨끗하게 마련하되집안의 형편에 맞도록 하여 정성껏 준비한다 기제사시에는 깨끗이 목욕을 하고 부정한 음식이나 오신채(五辛采 : 다섯가지 매운맛나는 소채, 부추,염교,파,마늘,생강)를 먹지 않으며 하루전에제기등 제사에 쓸 용품을 깨끗이 닦아 준비한다. 가. 제물의 종류 (1) 조과(造菓) 제조된 과실 대용물로 유과(油果),다식(茶食),산자(散子),강정(江丁),엽과(葉果)중에서 세가지이 상은 넘지 않는다 (2) 실과(實果) 삼색실과(밤, 대추, 곳감), 사과, 배, 은행등을 쓰되 적으면 세가지 많아도 다섯가지 이상은 쓰지 않는다 (3) 포(脯) 문어, 전복, 건어(乾魚) 혹은 육포(肉脯) 등의 마른 고기등을 쓰되적으면 두 가지 많아도 다섯 가지 이상은 넘지 않는다 (4) 해(醯),해(해) 식혜(醯 : 건더기만 쓴다)를 쓰는 것이나 젓갈(해)을 써도 된다 (5) 숙채(熟菜 나물) 1 채를 올리거나 3채를 올린다. 1채를 쓸 때에는 한접시에 고사리, 도라지, 배추 나물 등의 3색 나물을 곁들여 담는다. 3채는 가채 (家菜), 산채(山菜), 해채(海菜)를 말한다. 가채는 콩나물, 숙주나물, 호박, 가지 등이고, 산채는 고사리, 도라지, 취 등이며, 해채는 미역, 파래등이다. (6) 침채(沈菜:김치) 동치미,무우,배추김치등 두가지나 세가지를 쓴다 (7) 저채(菹菜) : 김치는 생김치를 쓴다 (8) 어물(魚物) : 생선을 쓴다(꽁치,삼치,갈치등 치자 어물은 안쓴다) (9) 육물(肉物) : 간회(肝膾),천엽(千葉) 우회(牛膾)등을 쓴다. (10)청장(淸醬) : 간장을 쓴다 (11)조(醋=초) : 식초를 쓴다 (12)병(餠 : 편) 떡은 낮으면 다섯둘금, 높아도 일곱둘금으로 한다.현란한 색깔은 피하므로 팥고물을 쓸 때도 껍질을 벗겨 내어 가급적이면흰 빛깔이 되게 한다. 보통은 백설기나 시루떡을해서 사각의 접시에 보기 좋게 놓고, 신위의 수에 관계없이 한 그릇만 올리기도 한다.떡과 함께 편청이라 부르는 꿀이나 조청 또는 설탕을 한 종기 올린다. (13)반(飯 : 메) 제사밥을 말하며 여러번 씻은 쌀로 제사 지내기 바로 전에 지어 올린다. 메 다음줄엔 면(麵:국수)을 놓는데 혹 국수를 좋아하는 어른은 그 기호에 맞게 하기 위함이다. 면을 쓸때는 국물은 쓰지 않고 건더기만을 쓴다 (14)갱(羹) 갱은 국을 말하며 살아서와는 반대로 메의 오른쪽에 놓는다. 이것은음양의 원리로 산자는 양이고 죽은자는 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위의 수대로 대접 또는 주발에 담고 뚜껑을 덮는다. 재료는 쇠고기와 무우를 네모로 작하게 썰어서 함께 끓인다. 고춧가루, 마늘, 파등을 쓰지않는다. (15)술(酒) 제주라고 하며 맑은 술(淸酒)을 쓰지만 경우에 따라 탁주도 쓰며, 술잔의 위치는 메와 국사이에 놓는다 나. 진설방식(陳設方式) 과채탕적(果菜湯炙)이라 하여 제주가 앉은 자리에서 과실을 맨 앞줄에놓고, 그 다음줄에채소를 놓고 세 번째 줄에는 탕을 놓으며, 네 번째 줄에 적이나 전을 놓는다. 흔한 과일류나 채소류는 멀리놓고 다음으로 육류나 생선류를 그 다음에 놓으며 주식(밥,국,술)을 가장 가깝게 놓는다 (1) 조율이시(棗栗梨枾) 진설 진설자의 왼편으로부터 조(대추) 율(밤) 이(배) 시(곶감)의 순서로 진설하고 다음에 호두 혹은 망과 류(넝쿨식물)를 쓰며, 끝으로 조과 류(다식,산자,약과)를 진설하되 반듯이 우수(짝수)로 한다 ※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색 과일은 동쪽, 흰색 과일은 서쪽(조율시이중 선택) (2) 반찬류 놓는 차례 좌포우혜(左怖右醯)라 하여 포(문어, 명태, 오징어등)를 왼편에 식혜를 오른편에 진설하며, 생동숙서(生東熟西)라 하여 침체(김치,동치미등),는 동쪽에 숙채(삶거나 쩌서 익힌나물)는 서쪽에 진설하고, 청장(간장)을 그 가운데 놓는다 (3) 탕을 놓는 차례 어동육서(漁東肉西)라 하여 물고기 탕은 동쪽(우측) 육류탕은 서쪽(좌측)에 설치하고 그가운데 채소 두부등으로 만든 소탕을 진설하고단탕, 삼탕, 오탕등 반드시 음수(홀수)로 진설하고, 양념에 파,마늘,고추 등을 쓰지 않는다. 1탕일때는 쇠고기,생선,닭고기를 같이담고, 3탕일때는 육탕(쇠고기),어탕(생선),계탕(닭고기) 혹은 소탕(蔬湯)을 모두 건더기만 탕기에 따로 담는다(소탕이란 고기없이 지진 두부와 다시마를 넣고 맑은 장에 끓인 것을 말함)5탕일때는 소탕(蔬湯),육탕, 어탕, 봉탕, 잡탕을 쓴다. (4) 적과 전을 놓는 차례 - 전(煎) : 기름에 튀기거나 부친 것으로 육전과 어전 두 종류를 준비한다. 육전은 쇠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져서 둥글게 만들어 계란을 묻혀 기름에부친다. 어전은 생선을 저며 계란에 무치고 기름에 부친다. - 적(炙) : 적은 육적(肉炙), 어적(漁炙), 계적(鷄炙)의 3적을 올린다. 육적은 쇠고기를2~3등분하여 길게 썰어 소금구이 하듯이 익혀 사각 접시에 담는다. 어적은 생선 2~3마리를 고춧가루를 쓰지 않고 익혀서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이때 머리는 동쪽으로 하고 배는 신위 쪽으로 가게 담는다. 계적은 닭의 머리, 다리, 내장을 제거하고 구운 것으로 등이 위로 가게하여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적을 올릴 때는 적염(炙鹽)이라 하여 찍어먹을 소금을 접시나 종지에 담아 한 그릇만 준비한다. (5) 어동육서(魚東肉西) 어류를 동쪽에 육류(黃肉:쇠고기,저肉 : 돼지고기)를 서쪽에 진설하고 그 가운데 두부채류를 진설한다. 또한 두동미서(頭東尾西)라 하여 어류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진설한다 (6) 동병서면(東餠西麵) : 떡은 동쪽에 국수는 서쪽 (7) 잔동접서(盞東접西) : 잔은 동쪽으로 시접은 서쪽 (8) 건좌습우(乾左濕右) : 마른 종류의 제물은 서쪽에, 습한제물은 동쪽 (9) 반좌갱우(飯左羹右) : 밥은 왼쪽(서쪽)에, 국은 오른쪽(동쪽) (10)반서갱동(飯西羹東) : 밥은 서쪽, 국은 동쪽이다. (11)고서비동(考西비東) : 고위(考位)는 서쪽, 비위(비位)는 동쪽이다. (12)적전중앙(炙奠中央) : 적은 2열의 가운데에 놓는다. (13)생동숙서(生東熟西) : 날 것은 동쪽, 익힌 것은 서쪽.(김치는 동쪽, 나물은 서쪽) (14)좌포우혜(左脯右醯) : 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 (16)음양조화(陰陽調和) : 첫 줄과 셋째 줄에는 홀수로, 둘째 줄과 넷째 줄은 짝수로 하여 음양을 구분한다. ■지방을쓰는 법 1. 지방을 쓸 때는 반듯이 몸을 청결하게 하고 정성을 들여 쓰되 제삿날저녁흰 백지 위에 붓으로 쓴다 가. 지방의 규격은 6Cm×21Cm 정도가 좋으며 주로 한지를 사용한다 나. 고위(考位)를 왼편에 비위(비位)를 오른 쪽에 쓴다. 또한 한 분만 돌아 가셨을 경우는 중앙에 쓴다 다. 아내의 지방에는 현(顯)자를 고(考자)로 고쳐 쓰고 동생이하 비유(比喩)에는 망(亡)자로 고쳐 쓴다 라. 자식의 지방에는 미혼시에는 수재(秀才)로, 기혼(旣婚)은 학생으로 쓴다 마. 생전에 벼슬을 했을 경우에는 학생대신 벼슬의 직급인 이사관 혹은 도지사등공무원의 직위를 쓴다 2.계, 촌별 지방 서식 구 분 서 식 고조 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 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관 姓)氏 神位 증조 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 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관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관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관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부인 亡室 孺人 (本관 姓)氏 神位 큰 아버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큰 어머니 顯伯母 孺人 (本관 姓)氏 神位 형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관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이름 神位 아들 亡子 秀才이름 之靈 생전 직위 顯考 (직위명) 神位    
34    성씨의 유래 댓글:  조회:3341  추천:0  2012-07-15
성(姓)의 연원(淵源)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는 알 수 없는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夫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는 씨족 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어로·농경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 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으로 삼고, 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는 자못 민주적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사회학·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 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신수(신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신씨(신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의 유래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등 우리나라 옛 사헌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주몽은 그 신하 재사(再思)에서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연거(연居)에게 소실씨(小室氏)의 성을 사성하였다 한다.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하며,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 3대 유리왕 때에 6부(6촌)에 사성하여 량부(알천양산촌)에 이씨, 소작부 : 돌산고허촌)에 최씨-崔氏(유사에는 정씨-鄭氏), 점량부(무산대수촌)에 손씨, 본피부(취산진지촌)에 정씨(유사에는 최씨), 한지부(금산가리촌)에 배씨, 지북부(명활산고랑촌)에 설씨의 성을 주었다고 하며, 김관가랑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시대(540~576)에 건립한 경남 창령, 서울 북한산, 함흥 황초령, 단천 마설령에 남아 있는 진흥왕의 네 순수비(巡狩碑)와 진지왕 3년(57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수오작비(戊戍塢作碑)와 진평왕 시대(579~632)에 건립된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등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姓)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각 비문에서 한 두가지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창령비(昌寧碑 진흥왕 22년, 561년 건립), 마운령비(磨雲嶺碑 진흥왕 29년 건립) : 훼(喙)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훼(沙喙) 거사부지(居社夫智) 이간(伊干) 사훼(沙喙) 심표부지(心表夫智) 급척간(及尺干) 사훼부(沙喙部) 령력지(령力智) 간( 干) 촌주(村主)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 본부(本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 이상 표시한 것처럼 성(姓)은 없고 우리말로 된 이름 뒤에 그 사람의 본(本)이라 할 수 있는 소속부명 또는 촌명을 썼는데, 훼부(喙部)는 량부(梁部) 즉, 알천영산촌(閼川楊山村)이요, 사훼부(沙喙部)는 급량부(及梁部) 즉,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이요, 본 부(本 部)는 본피부(本彼部) 즉, 취산지지촌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 밑에 붙어 있는 지(智)· 지(知)는 존칭이오, 일척간(一尺干)·이간(伊干)· 간( 干)·대아간(大阿干)·내말(奈末)·대사(大舍)·소사(小舍)는 경위(京位) 즉 중앙관위요, 간( 干)·일벌(一伐)은 외위(外位) 즉 지방인에게 주는 관위다.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한 바와 같이 유리왕 때에 6부에 사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훼부(喙部)는 이씨(李氏), 사 부(沙 部)는 최씨(崔氏), 본피부(本 部)는 정씨(鄭氏)의 성을 써야 할 것인데, 성을 쓰지 않고 소속 부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6부의 사성(賜姓)은 진평왕 이후의 일일 것이며, 또 우리는 성보다 본을 먼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한서(漢書)≫ 이하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의 국왕과 기타 인명을 보면, 고구려는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주몽왕(朱蒙王)이 보이고,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에 추(騶)와 관(官)-태조왕· 성( 成)-차대왕(次大王)·백고(伯固)-신대왕(新大王)및 대가 승(大加 升)이 보이고, ≪삼국지≫ 고구려전·공손도전(公孫度傳)에도 추(騶)·관(官)· 성( 成)·백고(伯固)와 함께 이이모(伊夷模)-고국천왕(故國川王)·위관(位官)-산상왕(山上王)과 기타 대가(大加)·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등이 보이고, ≪진서(晉書)≫ 모용 전(慕容傳)에 소(고국원왕(故國原王))·安(광개토왕-光開土王) 이 보이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의 ≪상서(床書≫에 이르러 장수왕(長壽王)을 고련(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익(高翼)·마루(馬婁)·손수(孫漱)·구(仇)·동등(董騰)등 장수왕이 보낸 사신도 모두 성을 썼다. 그리고 백제는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여영(餘暎)-전지왕(典支王)·여비(餘毗)-반유왕(畔有王)· 여경(餘慶-개로왕(蓋鹵王)·여융(餘隆)-무령왕(武寧王)·여명(餘明)-성왕(聖王)·여창(餘昌)-위덕왕(威德王)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진서(晉書)·상서(床書)·남제서(南齊書)·량서(梁書) ·진서(陳書)·위서(魏書)·주서(周書)·남사(南史)·북사(北史)) 29대 무왕(武王)-부여장(扶餘璋) 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수서(隋書)·당서(唐書)),그리고 신라는 23대 법흥(法興)왕에 해당하는 임금을 ≪량서(梁書)≫에 모명진(募名秦)으로 기록하였는데, ≪남사(南史)≫와 ≪통전(通典)≫에는 이것을 성모(姓募) 명진(名秦)-모진(募秦)으로 기록하여 신라 왕실의 성을 모(募)씨로 표시하고 ≪북제서(北齊書)≫에 진흥(眞興)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가 보인다. 이상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9~491)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346~376)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듯하다. 백제는 마한(馬韓) 50여개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동안 부족국가 생활을하다가 4세기 초에 마한(馬韓) 여러나라를 통일하고 근초고왕 27년(372)에 처음으로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어중국과 교류하고, 신라도 진한(辰韓) 12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동안 부족국가 생활을 하다가 4세기 후반 내물(奈勿)왕 시대(356~402)에 려(麗)·제(濟) 양국과 접촉하였으나 국력이 미약하였다. 6세기 중엽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경상도 지방을 통일함과 동시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 진흥왕 25년(564)에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처음으로 직접 중국과 교류 하였으므로 신라는 진흥왕 시대,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으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3국 중에 지일 먼저 일어나고, B.C 107년에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현도군(玄도郡)이 고구려지방에 설치되어 건국 이전부터 중국인과 접촉하였으며, 전한(前漢) 말기 왕망(王莽)시대(9~25)부터 중국과 교통하여 전한(前漢)·후한(後漢)·위(魏)·진(晉)의 문화를 수입하고,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오고 또 대학을 설치하여 장수왕 이전의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장수왕, 이후의 기록이기는 하나≪위서(魏書)≫(북조-北朝) 고구려전에 주몽의 전설을 자세히 기록하고 성을 고(高)씨라 하였으며,≪삼국사기≫에도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支), 좌보(左輔) 송옥구(松屋句), 태조왕 때의 좌우보(左右輔) 직도루(稷度婁)·고복장(高福章),신대왕(新大王)때의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 산상왕 때의 국상 을파진(乙巴秦), 동천왕 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명림어수(明臨於漱), 봉상왕(烽上王)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등 장수왕 이전에 성을 쓴 사람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고구려는 장수왕 이전에 이미 성을 쓴 듯 하나, 어느 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 없으나, 대개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국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성(金姓)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는데,≪삼국사기≫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三國)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는 고씨(高氏), 백제는 여씨(餘氏), 신라는 김씨(金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고, 그 밖에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우(于)·주(周)·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 을지(乙支)등 10여종, 백제는 사(沙)·연(燕)·해(解)·진(眞)·국(國)·목(木)·묘(苗)의 8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흑치(黑齒) 등 10여종,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의 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성 및 장(張)·요(姚) 등 10여종에 불과하다. 신라의 경우, 앞에 든 진흥왕순수비에 성을 쓴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귀족·관료들도 다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람, 예를 들면 김인문(金仁問), 김정종(金貞宗), 박우(朴祐), 김지량(金志良),김의충(金義忠), 등과 같이 사신이 되어 당(唐)나라에 갔다 온 사람, 최치원(崔致遠)·최리정(崔利貞)·박계업(朴季業)· 김숙정(金叔貞)등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장보고(張保皐)와 같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야의 제해권(制解權)을 잡고 당나라와 일본에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尙州)의 원종(元宗)·애노(哀奴), 죽주(竹州)-죽산(竹山)의 기명(箕蓂), 북원(原州)의 량길(梁吉)-良吉,태봉왕 궁예(弓裔)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명(甄蓂)의 부장인 관흔(官昕)·상귀(相貴)·상달(尙達)·웅환(熊奐),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각각 남양홍씨(南陽洪氏) 경주배씨(慶州裵氏)·평산신씨(平山申氏)·목천복씨(목川卜氏)등의 시조가 되는데, 그들이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권능이 많은 까닭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이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마(馬)·상(象)·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자로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돈(豚)은 돈(頓),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쓰지 아니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특성 우리나라의 성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성명(姓名)의 구성과 개념에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家門)을, 명(名)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행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男系)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한국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칭(共稱)이 아니라 원래의가계(家系)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이 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가(甲家)에서 을가(乙家)에 입적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처는 김(金)성 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漢)나라때에는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엇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족(父族)과 부족(夫族)의,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잇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한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金)이라면 자식의 성도 김(金),새로 온 며느리도 김(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안다. 한국의 그와 같은 성씨제도는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 혈족 관념상 자기의 생족(生族)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한 성씨 본래의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한국에 있어서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초를 이뤄 사상·문화·도덕·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씨제도의 하나인 사성(賜姓)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귀화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제도로 나타난 성을 볼 때 거기에는 대체로 세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유덕(有德)한 자를 표창하는 일종의 영전(榮典)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고, 둘째 봉건시대 제후(諸侯) 대우의 표준으로서 사용되었고, 세째 혼인을 정한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엇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지난날의 성에는 여러가지 존비(尊卑)의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성의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는 이처럼 특수한 기원(起院) 연혁(沿革)과 복잡한 조직, 관습이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http://net-in.co.kr/02wd/
33    주자가례(朱子家礼) 댓글:  조회:3484  추천:0  2012-07-15
주자가례 목록   권1 通禮 1. 사당祠堂(사당이란 무엇인가?) 2. 심의제도深衣制度(심의 제작 방법) 3. 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사마광이 지은 집안에서의 각종 예절) 권2 冠禮 1. 관冠(남자의 성인식) 2. 계례?禮(여자의 성인식) 권3 昏禮 1. 의혼議昏(혼사를 의논하다) 2. 납채納采(채택하는 예를 받아들이다) 3. 납폐納幣(폐백을 받아들이다) 4. 친영親迎(신랑이 친히 신부를 맞이하여 오다) 5. 부현구고婦見舅姑(며느리가 시부모를 뵙다) 6. 묘현廟見(신부가 사당을 알현하다) 7. 서현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신랑이 신부의 부모를 뵙다) 권4 喪禮 1. 초종初終(돌아가시다) 2. 목욕沐浴(시신을 목욕시키다), 습襲(시신을 염습하다), 전奠(전제를 드리다), 위위爲位(자리를 만들다), 반함飯含(시신의 입 안에 음식을 물리다) 3. 영좌靈座(영좌를 설치하다), 혼백魂魄(혼백을 만들어 놓다), 명정銘旌(명정을 만들어 세워 놓다) 4. 소렴小斂(소렴하다) 5. 대렴大斂(대렴하다) 6. 성복成服(상복을 정장하다) 7. 조석곡전朝夕哭奠(아침 저녁으로 곡하며 전제를 드리다), 상식上食 (음식을 올리다) 8. 조전부弔奠賻(조상하고 전제하며 부의하다) 9. 문상聞喪(멀리서 상을 듣고 의례를 행하다), 분상奔喪(상을 듣고 장사 지내러 가다) 10. 치장治葬(장사 지낼 터를 조성하다) 11. 천구遷柩(영구를 옮기다), 조조朝祖(조상을 뵙다), 전부奠賻(술을 올리고 부의하다), 진기陳器(제기를 진설하다), 조전祖奠(조례에 술을 올리다) 12. 견전遣奠(상여를 떠나 보내는 제사를 드리다) 13. 발인發引(발인하다) 14. 급묘及墓(묘소에 도착하다), 하관下棺(관을 내리다), 사후토祀后土(후토신에게 제사지내다), 제목주題木主(나무신주에 글을 쓰다), 성분成墳(봉분을 만들다) 15. 반곡反哭(집으로 돌아와 곡을 하다) 16. 우제虞祭(우제를 지내다) 17. 졸곡卒哭(아침 저녁 이외의 곡을 그치다) 18. 부?(합사하다) 19. 소상小祥(소상을 지내다) 20. 대상大祥(대상을 지내다) 21. 담?(담제를 지내다) 22. 거상잡의居喪雜儀(상중의 각종 예절) 권5 祭禮 1. 사시제四時祭(사계절에 제사지내다) 2. 초조初祖(시조에게 제사지내다) 3. 선조先祖(선조에게 제사지내다) 4. 녜?(아버지에게 제사지내다) 5. 기일忌日(기일에 제사지내다) 6. 묘제墓祭(묘소에서 제사지내다)   朱子家礼   宋朱子撰 家礼序 凡礼有本、有文,自其施於家者言之,则名分之守、爱敬之实,其本也。冠婚丧祭,仪章度数者,其文也。其本者,有家日用之常,礼固不可以一日而不修;其文,尤皆所以纪纲人道之始终,虽其行之有时,施之有所,然非讲之素明,习之素熟,则其临事之际,亦无以合宜而应节,是亦不可以一日而不讲且习焉者也。三代之际,礼经备矣,然其存於今者,宫庐器服之制,出入起居之节,皆已不宜於世,世之君子虽或酌以古今之变,更为一时之法,然亦或详或略,无所折中,至或遗其本而务其末,缓於实而急於文,自有志好礼之士,犹或不能举其要而因,於贫窭者,尤患其终不能有以及於礼也。熹之愚,盖两病焉。是以尝独究观古今之籍,因其大体之不可变者,而少加损益於其间,以为一家之书。大抵谨名分、崇爱敬,以为之本。至其施行之际则又略浮文务本实,以窃自附於孔子从先进之遗意。诚愿得与同志之士熟讲而勉行之。庶几古人所以修身齐家之道,谨终追远之心,犹可以复见,而於国家所以崇化导民之意,亦或有小补云。 家礼卷一 通礼   (此篇所著,皆所谓有家日用之常礼,不可一日而不修者) 祠堂(此章本合在祭礼篇,今以报本反始之心,尊祖敬宗之意,实有家名分之首,所以开业传世之本也。故特著此,冠於篇端,使览者知所以先立乎其大者,而凡後篇所以周旋升降出入向背之曲折,亦有所据以考焉。然古之庙制不见於经,且今士庶人之贱,亦有所不得为者,故特以祠堂名之,而其制度亦多用俗礼云) 君子将营宫室,先立祠堂於正寝之东。 (祠堂之制,三间外为中门,中门外为两阶,皆三级。东曰阼阶,西曰西阶,阶下随地广狭以屋覆之,令可容家众叙立。又为遗书衣物祭器库及神厨於其东缭。以周垣别为外门,常加扃闭。若家贫地狭则止为一间,不立厨库,而东西壁下置立两,柜西藏遗书衣物,东藏祭器亦可。正寝谓前堂也,地狭则於厅事之东亦可。凡祠堂所在之宅,宗子世守之不得分析。凡屋之制,不问何向背。但以前为南後为北,左为东右为西。後皆放此) 为四龕以奉先世神主。 (祠堂之内,以近北一架为四龕,每龕内置一桌,大宗及继高祖之小宗,则高祖居西,曾祖次之,祖次之,父次之;继曾祖之小宗,则不敢祭高祖,而虚其西龕一;继祖之小宗,则不敢祭曾祖,而虚其西龕二;继祢之小宗,则不敢祭祖,而虚其西龕三。若大宗世数未满,则亦虚其西龕如小宗之制。神主皆藏於椟中,置於卓上,南向,龕外各垂小帘,帘外设香卓於堂中,置香炉,香合於其上,两阶之间又设香卓,亦如之。非嫡长子则不敢祭其父。若与嫡长同居,则死而後其子孙为立祠堂於私室,且随所继世数为龕,俟其出而异居乃备其制若生,而异居则预於其地立斋以居,如祠堂之制,死则因以为祠堂。主式见丧礼治葬章) 旁亲之无後者以其班祔。 (伯叔祖父母祔於高祖。伯叔父母祔於曾祖。妻,若兄弟,若兄弟之妻,祔於祖。子侄祔於父。皆西向,主椟并如正位。侄之父自立祠堂,则迁而从之。程子曰:无服之殇、下殇之祭,终父母之身;中殇之祭,终兄弟之身;长殇之祭,终兄弟之子之身。成人而无後者,其继终兄弟之孙之身,此皆以义起者也。(笑非按:《说文》 年十九至十六为长殇,十五至十二为中殇,十一至八岁为下殇,不满八岁以下为无服之殇)) 置祭田。 (初立祠堂,则计见田。每龕取其二十之一以为祭田,亲尽则以为墓田。後凡正位、祔者皆放此。宗子主之,以给祭用。上世初未置田,则合墓,下子孙之田计数而割之,皆立约闻官。不得典卖。) 具祭器。 (床席倚卓盥盆火炉酒食之器,随其合用之数,皆具贮於库中,而封锁之不得它用。无库则贮於柜中,不可贮者,列於外门之内) 主人晨谒於大门之内。 (主人谓宗子主此堂之祭者。晨谒,深衣,焚香再拜) 出入必告 (主人主妇近出,则入大门瞻礼,而行归亦如之。经宿而归,则焚香再拜。远出经旬以上,则再拜焚香,告云:“某将适某所,敢告”,又再拜而行,归亦如之,但告云:“某今日归自某所,敢见”。经月而归,则开中门,立於阶下,再拜,升自阼阶,焚香告毕,再拜,降复位,再拜。馀人亦然,但不开中门。凡主妇谓主人之妻,凡升降,惟主人由阼阶,主妇及馀人虽尊长亦由西阶。凡拜,男子再拜,则妇人四拜,谓之侠拜。其男女相答拜亦然。) 正至朔望则参。 (正至朔望前一日,洒扫齐宿。厥明,夙兴,开门,轴帘,每龕设新果一大盘,於卓上每位茶盏托、酒盏盘各一。於神主椟前设束茅聚沙。於香卓前别设一卓。於阼阶上置酒注盏盘一於其上,酒一瓶於其西,盥盆帨巾各二於阼阶下。东南有台架者,在西为主人亲属所盥,无者在东为执事者所盥,巾皆在北。主人以下盛服入门就位。主人北面於阼阶下,主妇北面於西阶下。主人有母,则特为於主妇之前。主人有诸父诸兄,则特位於主人之右少前,重行西上。有诸母姑嫂姊,则特位於主妇之左少前,重行东上。诸弟在主人之右少退,子孙外执事者在主人主人之後。重行西上。主人弟之妻及诸妹在主妇之左少退,子孙妇女内执事者在主妇之後,重行东上。立定,主人盥帨,升,启椟,奉诸考神主置於椟前。主妇盥帨,升,奉诸妣神主置於考东。次出祔主亦如之。命长子长妇或长女盥帨,升,分出诸祔主之卑者亦如之。皆毕,主妇以下先降,复位。主人诣香卓前,降神,焚香再拜。执事者盥帨,开瓶实酒於注,一人奉注,诣主人之右,一人执盏盘诣主人之左。主人跪,执事者皆跪。主人受注,斟酒,反注,取盏盘奉之,左执盘,右执盏,酹於茅上。俛伏,兴,少退,再拜,降,复位,与在位者皆再拜参神。主人升,执注斟酒,先正位,次祔位,次命长子斟诸祔位之卑者。主妇升,执茶筅,执事者执汤瓶,随之点茶如前,命长妇或长女亦如之。子妇执事者先降。复位。主人主妇分立於香卓之前东西,再拜,降,复位。与在位者皆再拜,辞神而退。  冬至则祭始祖毕,行礼如上仪。 望日不设酒不出主,主人点茶,长子佐之,先降,主人立於香卓之南,再拜乃降馀如上仪。 准礼,舅没则姑老不预於祭。又曰,支子不祭姑。今专以世嫡宗子夫妇为主人主妇,其有母及诸父母兄嫂者,则设特位於前如此。 凡言盛服者,有官则襆头公服带靴笏。进士则襆头襴衫带。处士则襆头皂衫带。无官者通用帽子衫带。又不能具,则或深衣或凉衫。有官者亦通服帽子以下,但不为盛服。妇人则假髻大衣长裾。女有室者冠子背子,众妾,假髻背子。) 俗节则献以时食。 (节如清明、寒食、重午、中元、重阳之类。凡乡俗所尚者,食如角黍。凡其节之所尚者,荐以大盘,问以蔬果,礼如正至朔日之仪) 有事则告。 (如正至朔日之仪,但献茶酒再拜讫,主妇先降,复位。主人立於香卓之南,祝执版立於主人之左,跪读之毕,兴。主人再拜,降,复位。馀并同。 告受官,祝版云:“维年岁月朔日,子孝某某官某,敢昭告於皇某亲某官封谥府君,皇某亲某封某氏某,以某月某日蒙恩授某官,奉承先训,获沾禄位,馀庆所及,不胜感慕,谨以酒果,用伸虔告。”谨告贬降,则言:“贬某官,荒坠先训,皇恐无地,谨以……”後同。若弟子,则言某之某某,馀同。 告追赠,则止告所赠之龕。别设香卓於龕前,又设一卓於其东,置净水、粉盏、刷子、砚、墨、笔於其上,馀并同。但祝版云:“奉某月某日制书,赠皇某亲某官,皇某亲某封某,奉承先训,窃位於朝,祗奉恩庆,有此褒赠,禄不及羊,摧咽难胜,谨以……”後同。若因事特赠,则别为文以叙其意。告毕,再拜,主人进,奉主置卓上。执事者洗去旧字,别涂以粉。俟干,命善书者改题所赠官封,陷中不改。洗水以洒祠堂之四壁。主人奉主置故处,乃降复位後同。 主人生嫡长子,则满月而见,如上仪,但不用祝。主人立於香卓之前,告曰:“某之妇某氏以某月某日生子名某,敢见。”告毕,立於香卓东,南西向。主妇抱子进见於两阶之间,再拜。主人乃降复位後同。 冠婚别见本篇。 凡言祝版者,用版长一尺高五寸,以纸书文,沾於其上,毕则揭而焚之,其首尾皆如前,但於皇高祖考、皇高祖妣,自称孝元孙,於皇曾祖考、皇曾祖妣,自称孝曾孙,於皇祖考、皇祖妣,自称孝孙,於皇考、皇妣,自称孝子,有官封谥,则皆称之,无则以生时行第称号加於府君之上,妣曰某氏夫人,凡自称非宗子不言孝。 告事之祝,四龕共为一版。自称以其最尊者为主,止告正位,不告祔位,茶酒则并设之) 或有水火盗贼,则先救祠堂,迁神主、遗书,次及祭器,然後及家财。易世,则改题主而递迁之。 (改题递迁礼,见丧礼大祥章。大宗之家,始祖亲尽则藏其主於墓所。而大宗犹主其墓田,以奉其墓祭,岁率宗人一祭之,百世不改。其第二世以下祖亲尽,及小宗之家高祖亲尽,则迁其主而埋之,其墓田则诸位迭掌,而岁率其子孙一祭之,亦百世不改也) 深衣制度(此章本在冠礼之後,今以前章已有其文,又平日之常服,故次前章) 裁用白细布度用指尺。 (中指中节为寸—— 衣全四幅,其长过肋下,属於裳。 (用布二幅,中屈,下垂。前後共为四幅,如今之直领衫,但不裁破。腋下其长过肋而属於裳处,约围七尺二寸,每幅属裳三幅) 裳交解十二幅,上属於衣,其长及踝。 (用布六幅。每幅裁为二幅,一头广;一头狭,当广头之半。以狭头向上,而联其缝以属於衣。其属衣处,约围七尺二寸,每三幅属衣一幅,其下边及踝处约围丈四尺四寸) 圆袂 (用布二幅,各中屈之,如衣之长,属於衣之左右,而缝合其下以为袂。其本之广如衣之长,而渐圆杀之以至袂口,则其径一尺二寸) 方领 (两襟相掩,衽在腋下,则两领之会自方) 曲裾 (用布一幅。如裳之长交解裁之,如裳之制,但以广头向上,布边向外,左掩其右,交映垂之,如燕尾状。又稍裁其内旁大半之下,令渐如鱼腹而末为鸟喙,内向缀於裳之右旁) 黑缘 (缘用黑缯。领表裏各二寸。袂口裳边表裏各一寸半,袂口布外别,此缘之广) 大带 (带用白缯。广四寸,夹缝之。其长围腰,而结於前,再缭之为两耳,乃垂其馀为绅,下与裳齐。以黑缯饰其绅。复以五彩条,广三分,约其相结之处,长与绅齐) 缁冠 (糊纸为之。武高寸许,广三寸,袤四寸,上为五梁,广如武之袤而长八寸,跨顶前後,下著於武,屈其两端各半寸,自外向内而黑漆之。武之两旁,半寸之上,窍以受笄,笄用齿骨,凡白物) 幅巾 (用黑缯六尺许,中屈之,右边就屈处为横(巾+取),左边反屈之自(巾+取)左四五寸间斜缝,向左圆曲而下,遂循左边至於两末。复反所缝馀缯,使之向裏以(巾+取)当额前,裹之至两髻旁,各缀一带,广二寸,长二尺,自巾外过顶後,相结而垂之) 笑非按:(巾+取),为(辙的车换为巾)的讹字,zhe2,说文:领专(通端)也。广韵:衣领。jie1,广韵:衣衿。黄宗羲之深衣考-幅巾:用黑缯六尺中屈之分为左右剌,左五寸右五寸作巾,额当中作(巾+取),(巾+取)者,从裏提其两畔之缯,向凑而缝之,其中空。乃以左叶交於右,右叶交於左,线缀之。其顶突起,乃屈其顶之缯藏於裏,使巾顶正圆而後缝之。两旁三寸各缀一带,广一寸长二尺,使巾额当前,裹而系其带於後,垂之。 黑履 (白絇繶纯綦) 司马氏居家杂仪(此章本在婚礼之後。今按此乃家居平日之事,所以正伦理,笃恩爱者,其本皆在於此。必能行此,然後其仪章度数有可观焉。不然,则节文虽具,而本实无取,君子所不贵也。故亦列於首篇,使览者知所先焉) 凡为家长,必谨守礼法,以御群子弟及家众。分之以职(谓使之掌仓廪厩库庖厨舍业田园之类),授之以事(谓朝夕所干,及非常之事),而责其成功。制财用之节,量入以为出。称家之有无,以给上下之衣食及吉凶之费,皆有品节,而莫不均壹。裁省冗费,禁止奢华,常须稍存盈,馀以备不虞。 凡诸卑幼,事无大小,毋得专行。必咨禀於家长。(易曰:家人有严君焉,父母之谓也。安有严君在上,而其下敢直行自恣不顾者乎?虽非父母当时为家长者,亦当咨禀而行之,则号令出於一人,家政始可得而治矣) 凡为子为妇者,毋得蓄私财,俸禄及田宅所入尽归之父母舅姑,当用则请而用之,不敢私假,不敢私与。(内则曰:子妇无私货,无私蓄,无私器,不敢私假,不敢私与。妇,或赐之饮食衣服布帛佩帨茞兰,则受而献诸舅姑,舅姑受之,则喜如新受赐,若反赐之,则辞不得命,如更受赐,藏之以待乏。郑康成曰:待舅姑之乏也,不得命者不见许也。又曰:妇若有私亲兄弟将与之,则必复请其故,赐而复与之。夫人子之身,父母之身也,身且不敢自有,况敢有私财乎?若父子异财,互相假借,则是有子富而父母贫者,父母饥而子饱者。贾谊所谓假父耰锄,虑有德色;母取箕帚,立而谇语。不孝不义,孰甚於此!茞,昌改切。耰,音忧。谇,音碎。) 凡子事父母(孙事祖父母同),妇事舅姑(孙妇亦同)。天欲明,咸起盥(音管,洗手也),漱栉(阻瑟切,梳头也),总(所以束发今之头(上须下巾)),具冠带(丈夫帽子衫带,妇人冠子背子)。昧爽(谓天明暗相交之际),适父母舅姑之所省问(丈夫唱喏,妇人道万福,仍问侍者,夜来安否?何如?侍者曰安,乃退。其或不安节,则侍者以告。此即礼之晨省也)。父母舅姑起,子供药物(药物乃关身之切务,人子当亲自检数调煮,供进不可但委婢仆。脱若有误,即其@不测)。妇具晨羞(俗谓点心。易曰:在中馈。诗云:惟酒食是议。凡烹调饮膳,妇人之职也。近年妇女骄倨,皆不肯入庖厨,今纵不亲执刀匕,亦当检校监视,务令精洁)。供具毕,乃退,各从其事。将食,妇请所欲於家长(谓父母舅姑或当时家长也,卑幼各不得恣所欲),退具而供之。尊长举箸,子妇乃各退就食。丈夫妇人各设食於他所,依长幼而坐。其饮食必均壹。幼子又食於他所,亦依长幼席地而坐。男坐於左,女坐於右。及夕,食亦如之。既夜,妇女舅姑将寝,则安置而退(丈夫唱喏,妇女道安置。此即礼之昏定也)。居间无事,则事於父母舅姑之所,容貌必恭,执事必谨,言语应对必下气怡声,出入起居必谨扶卫之,不敢涕唾喧呼於父母舅姑之侧。父母舅姑不命之坐,不敢坐。不命之退,不敢退。 凡子受父母之命,必籍记而佩之,时省而速行之。事毕,则返命焉;或所命有不可行者,则和色柔声,具是非利害而白之,待父母之许,然後改之,若不许,苟於事无大害者,亦当曲从。若以父母之命为非而直行己志,虽所执皆是,犹为不顺之子,况未必是乎! 凡父母有过,下气怡色柔声以谏。谏若不入,起敬起孝,悦则复谏;不悦,与其得罪於乡党州闾,宁熟谏。父母怒不悦而挞之,流血不敢疾怨,起敬起孝。 凡为人子弟者,不敢以贵富加於父兄宗族(加,谓恃其富贵,不率卑幼之礼)。 凡为人子者,出必告,反必面。有宾客,不敢坐於正厅(有宾客,坐於书院。无书院则坐於厅之旁侧)。升降不敢由东阶,上下马不敢当厅,凡事不敢自拟於其父。 凡父母舅姑有疾,子妇无故不离侧。亲调尝药饵而供之。父母有疾,子色不满容。不戏笑,不宴游,舍置馀事,专以迎医检方合药为务。疾已,复初(颜氏家训曰:父母有疾,子拜医以求药。盖以医者,亲之存亡所系,岂可傲忽也)。 凡子事父母,父母所爱亦当爱之,所敬亦当敬之,至於犬马尽然,而况於人乎。 凡子事父母,乐其心不违其志,乐其耳目,安其寝处,以其饮食忠养之,幼事长,贱事贵,皆放此。 凡子妇未敬未孝,不可遽有憎疾,姑教之,若不可教,然後怒之,若不可怒,然後笞之,屡笞而终不改,子放妇出,然亦不明言其犯礼也。子甚宜其妻,父母不悦,出。子不宜其妻,父母曰是,善事我子,行夫妇之礼焉,没身不衰。凡为宫室,必辨内外,深宫固门,内外不共井,不共浴室,不共厕。男治外事,女治内事,男子昼无故不处私室,妇人无故不窥中门。男子夜行以烛,妇人有故出中门必拥蔽其面(如盖头面帽之类)。男仆非有缮修及有大故(谓水火盗贼之类),不入中门,入中门,妇人必蔽之,不可蔽(亦谓如水火盗贼之类),亦必以袖遮其面。女仆无故不出中门,有故出中门,亦必拥蔽其面(虽小婢亦然)。铃下苍头,但主通内外之言,传致内外之物,毋得辄升堂入庖厨。凡卑幼於尊长,晨亦省问,夜亦安置(丈夫唱喏,妇人道万福、安置)。坐而尊长过之,则起。出遇尊长於途,则下马。不见尊长经再宿以上,则再拜,五宿以上,则四拜。贺冬至正旦六拜,朔望四拜。凡拜数,或尊长临时减而止之,则从尊长之命。吾家同居宗族众多,冬正朔望聚於堂上(此假设南面之堂,若宅舍异制临时从宜),丈夫处左西上,妇人处右东上(左右谓家长之左右),皆北向,共为一列,各以长幼为序(妇以夫之长幼为序,不以身之长幼为序)。共拜家长毕,长兄立於门之左,长姊立於门之右,皆南向。诸弟妹以次拜讫,各就列。丈夫西上,妇人东上,共受卑幼拜(以宗族多,若人人拜,则不胜烦劳,故同列共受之),受拜讫,先退。後辈立,受拜於门东西如前辈之仪。若卑幼自远方至,见尊长。遇尊长三人以上同处者,先共再拜,叙寒暄,问起居,讫,有三再拜而止(晨夜唱喏万福安置。若尊长三人以上同处,亦三而止,皆所以避烦也)。 凡受女婿及外甥拜,立而扶之(扶谓搊策)。外孙则立而受之可也。 凡节序及非时家宴,上寿於家长。卑幼盛服序立如朔望之仪,先再拜。子弟之最长者一人进立於家长之前,幼者一人搢笏执酒盏立於其左,一人搢笏执酒注立於其右,长者搢笏跪斟酒,祝曰:“伏愿某官,备膺五福,保族宜家。”尊长饮毕,授幼者盏注,反其故处。长者出笏,俛伏兴,退,与卑幼皆再拜。家长命诸卑幼坐,皆再拜而坐,家长命侍者遍酢诸卑幼,诸卑幼皆起,序立如前,俱再拜就坐。饮讫,家长命易服,皆退易便服,缓复就坐。 凡子始生,若为之求乳母,必择良家妇人稍温谨者(乳母不良,非惟败乱家法,兼令所饲之子性行亦类之)。子能食,饲之,教以右手。子能言,教之自名及唱喏万福安置。稍有知,则教之以恭敬尊长。有不识尊卑长幼者,则严诃禁之(古有胎教,况於已生子。始生未有知,固举以礼,况於己有知。孔子曰:幼成若天性,习惯如自然。颜氏家训曰:教妇初来,教子婴孩。故於其始有知,不可不使之知尊卑长幼之礼。若侮詈父母殴击兄姊,父母不加诃禁反笑而奖之,彼既未辨好恶,谓礼当然,及其既长,习已成性,乃怒而禁之不可复制,於是父疾其子,子怨其父,残忍悖逆无所不至。盖父母无深识远虑不能防微杜渐,溺於小@养成其恶故也)。六岁教之数(谓一十百千万),与方名(谓东西南北)。男子始习书字,女始习女工之小者。七岁男女不同席、不共食,始诵孝经、论语,虽女子亦宜诵之自。七岁以下谓之孺子,早寝晏起,食无时。八岁出入门户及即席饮食,必後长者。始教之以廉让,男子诵尚书,女子不出中门。九岁,男子诵春秋及诸史,始为之讲解,使晓义理。女子亦为之讲解论语孝经及列女传女戒之类,略晓大意。古之贤女,无不观图文以自鉴。如曹大家之徒,皆精通经术议论明正。今人或教女子以作歌诗,执俗乐,殊非所宜也!十岁,男子出就外傅,居宿於外,读诗礼傅,为之讲解,使知仁义礼知信,自是以往可以读孟荀扬子,博观群书。凡读书必择其精要者而读之,如礼记,学记大学中庸乐记之类。它书放此。其异端非圣贤之书傅,宜禁之,勿使妄观,以惑乱其志。观书皆通,始可学文辞。女子则教以婉娩(娩,音晚,婉娩柔顺貌)、听从,及女工之大者(女工谓蚕桑织绩裁缝,及为饮膳。不惟正是妇人之职,兼欲使之知衣食所来之艰难,不敢恣为奢丽。至於纂组华巧之物,亦不必习也)。未冠笄者,质明而起,总角靧(靧,音悔,洗面也)面,以见尊长,佐长者。供食祭祀,则佐执酒食。若既冠笄,则皆责以成人之礼,不得复言童幼矣。 凡内外仆妾,鸡初鸣咸起,栉总盥漱衣服。男仆洒扫厅事及庭。铃下苍头洒扫中庭。女仆洒扫堂室,设倚卓,陈盥漱栉靧之具,主父主母既起,则拂床襞(襞,音璧,叠衣也)衾,侍立左右,以备使令。退而具饮食,得间则浣濯纫缝,先公後私,及夜则复拂床展衾。当昼,内外仆妾惟主人之命,各从其事,以供百役。 凡女仆,同辈(谓兄弟所使),谓长者为姊。後辈(谓诸子舍所使)谓前辈为姨(内则云:虽婢妾,衣服饮食必後长者。郑康成曰:人,贵贱不可以无礼。故使之序长幼)。务相雍睦,其有斗争者,主父主母闻之即诃,禁之不止,即杖之,理屈者杖多,一止一不止,独杖不止者。 凡男仆,有忠信可任者,重其禄,能干家事次之。其专务欺诈,背公徇私,屡为盗窃,弄权犯上者,逐之。 凡女仆,年满不愿留者,纵之,勤旧少过者,资而嫁之。其两面二舌,饰虚造谄,离间骨肉者,逐之。屡为盗窃者,逐之。放荡不谨者,逐之。有离叛之志者,逐之。 家礼卷一 家礼卷二     宋 朱子 撰 冠礼 冠,男子年十五至二十皆可冠 (司马公曰:古者二十而冠,所以责成人之礼。盖将责为人子、为人弟、为人臣、为人少者之行於其人,故其礼不可以不重也。近世以来,人情轻薄,过十岁而总角者少矣——彼责以四者之行,童知之哉?往往自幼至长,愚騃若一,由不知成人之道故也!今虽未能遂革,且自十五以上,俟其能通孝经论语,粗知礼义,然後冠之,其亦可也) 必父母无期丧始可行之 (大功未葬亦不可行) 前期三日主人告於祠堂 (古礼筮日,今不能然,但正月内择一日可也。主人谓冠者之祖父,自为继高祖之宗子者,若非宗子,则必继高祖之宗子主之。有故,则命其次宗子。若其父自主之,告礼、见祠堂、章祝版,前同,但云:“某之子某,若某之某亲之子某,年渐长成,将以某月某日加冠於其首,谨以……”後同。若族人以宗子之命自冠其子,其祝版亦以宗子为主,曰:“使介子某……”  若宗子已孤而自冠,则亦自为主人,祝版前同,但云:“某将以某月某日加冠於首,谨以……”後同) 戒宾 (古礼筮宾,今不能然,但择朋友贤而有礼者一人可也。是日,主人深衣诣其门所,戒者出见如常仪,啜茶毕,戒者起,言曰:“某有子某,若某之某亲有子某,将加冠於其首,愿吾子之教之也。”对曰:“某不敏,恐不能供事以病吾子。敢辞。戒者曰:“愿吾子之终教之也。”对曰:“吾子重有命,某敢不从。”地远则书初请之辞为书,遣子弟致之所。戒者辞,使者因请,乃许,而复书曰:“吾子有命,某敢不从。” 若宗子自冠,则戒辞但曰某将加冠於首,後同) 太常按:文意混乱。戒者,告也。当主人自为之。若地远,则命子弟为戒者。对方称宾为是。 前一日宿宾 (遣子弟以书致辞曰:“来日某将加冠於子某,若某亲某子某之首。吾子将涖之,敢宿。某上某人。”答书曰:“某敢不夙兴,某上某人。” 若宗子自冠,则辞之所改如其戒宾) 陈设 (设盥帨於厅事如祠堂之仪,以帟幕(帟,yi4,幄中坐上承尘,帟幕,帷幄的意思)为房於厅事东北,或厅事无两阶,则以垄画而分,之後放此) 厥明夙兴陈冠服 (有官者公服、带、靴、笏,无官者襴衫、带、靴,通用皂衫、深衣、大带、履、栉、(上须下巾,音须,束发带)掠,皆以卓子陈於房中东领,北上。酒注、盏盘亦以卓子陈於服北。襆头、帽子、冠并巾,各以一盘盛之,蒙以帕,以卓子陈於西阶下。执事者一人守之,长子则布席於阼阶上之东少北,西向;众子则少西,南向。 宗子自冠则如长子之席,少南) 主人以下序立 (主人以下,盛服就位。主人阼阶下,少东,西向。子弟亲戚童仆在其後,重行西向北上。择子弟亲戚习礼者一人为傧立於门外西向,将冠者双紒,四(衣字旁加癸,kui4,衣衩)衫、勒帛、采履,在房中,南向。若非宗子之子则其父立於主人之右,尊则少进,卑则少退。宗子自冠则服如将冠者,而就主人之位) 宾至,主人迎入升堂。 (宾自择其子弟亲戚习礼者为赞。冠者(确切说,应当是宾)俱盛服至门外,东向立。赞者在右,少退。傧者入告主人,主人出门左,西向再拜。宾答拜主人,揖赞者。赞者报揖主人,遂揖而行。宾赞从之入门,分庭而行,揖让而至阶,又揖让而升。主人由阼阶,先升,少东西向。宾由西阶继升,少西东向。赞者盥帨,由西阶升,立於房中,西向。摈者筵於东序,少北西向。将冠者出房,南向。若非宗子之子,则其父从出。迎宾入,从主人,後宾而升,立於主人之右,如前) 宾揖将冠者,就席,为加冠巾。冠者适房,服深(?异体字~~)衣纳履出。 (宾揖。将冠者出房立於席右,向席。赞者取栉(上须下巾)掠,置於席左,兴,立於将冠者之左。宾揖将冠者,即席西向跪。赞者即席如其向跪,进为之栉,合紒,施掠。宾降,主人亦降,宾盥毕,主人揖,升复位。执事者以冠巾盘进,宾降一等受冠笄,执之正容,诣将冠者前,向之祝曰:“吉月令日,始加元服,弃尔幼志,顺尔成德,寿考维祺,以介毕福。”乃跪加之。赞者以巾跪进,宾受,加之,兴,复位,揖。冠者适房,释四(衣旁加癸)衫,服深衣,加大带,纳履出房,正容南向,立良久。 若宗子自冠,则宾揖之就席,宾降盥毕,主人不降,馀立(?当为并~~)同) 再加帽子,服皂衫革带,系鞋。 (宾揖。冠者即席,跪。执事者以帽子盘进,宾降二等受之,执以诣冠者前,祝之曰:“吉月令辰,乃申尔服,谨尔威仪,淑顺尔德,眉寿永年,享受胡福。”乃跪加之,兴,复位,揖。冠者适房,释深衣,服皂衫革带,系鞋,出房立) 三加襆头,公服革带,纳靴执笏。若襴衫,纳靴。 (礼如再加,惟执事者以襆头盘进,宾降没阶受之,祝辞曰:“以岁之正,以月之令,咸加尔服,兄弟具在,以成厥德,黄耇无疆,受天之庆。”赞者彻帽,宾乃加襆头。执事者受帽,彻栉入於房,馀并同) 乃醮 (长子,则宾者改席於堂中间少西,南向。众子则仍故席。赞者酌酒於房中,出房立於冠者之左。宾揖,冠者就席右,南向。乃取酒诣席前北向祝之曰:“旨酒既清,嘉荐令芳,拜受祭之,以定尔祥,承天之休,寿考不忘。”冠者再拜,升席,南向,受盏。宾复位,东向答拜。冠者进席前,跪祭酒,兴,就席末,跪,啐酒,兴,降席,授赞者盏,南向再拜。宾东向答拜。冠者遂拜赞者。赞者(?在)宾左,东向少退答拜) 宾字冠者 (宾降阶东向。主人降阶西向。冠者降自西阶,少东南向。宾字之曰:“礼仪既备,令月吉日,昭告尔字,爰字孔嘉,髦士攸宜,宜之於嘏,永受保之,曰伯某父。”仲叔季唯所。冠者对曰:“某虽不敏,敢不夙夜祗来。”宾或别作辞,命以字之之意亦可) 出就次 (宾请退。主人请礼宾,宾出就次) 主人以冠者见於祠堂 (如祠堂章内生子而见之仪,但改告辞曰某之子某,若某亲某之子某,今日冠毕,敢见。冠者进立於两阶间,再拜,馀并同。 若宗子自冠,则改辞曰某今日冠毕敢见。遂再拜降复位馀并同。 若冠者私室有曾祖、祖以下祠堂,则各因其宗子而见;自为继曾祖以下之宗则自见) 冠者见於尊长 (父母堂中南面坐,诸叔父兄在东序,诸叔父南向,诸兄西向,诸妇女在西序,诸叔母姑南向,诸姊嫂东向。冠者北向拜父母,父母为之起。同居有尊者,则父母以冠者诣其室拜之,尊长为之起。还就东西序,每列再拜应答,拜者答拜。若非宗子之子,则先见宗子及诸尊於父者於堂,乃就私室见於父母及馀亲。 若宗子自冠,有母则见於母如仪,族人宗之者皆来见於堂上,宗子西向拜其尊长,每列再拜,受卑幼者拜) 乃礼宾 (主人以酒馔延宾,及宾赞者。酬之以币而拜谢之。币多少随宜,宾赞有差) 冠者遂出见於乡先生及父之执友 (冠者拜,先生执友皆答拜。若有诲之,则对如对宾之辞,且拜之,先生执友不答拜) 笄 女子许嫁笄 (年十五,虽未许嫁亦笄) 母为主 (宗子主妇,则其中堂。非宗子而与宗子同居,则於私室与。宗子不同居则如上仪) 前期三日戒宾,一日宿宾。 (宾亦择亲姻妇女之贤而有礼者为之。以笺纸书其辞,使人致之。辞如冠礼,但子作女,冠作笄,吾子作某亲或某封。 凡妇人自称於己之尊长,则曰儿,卑幼则以属於夫党。尊长则曰新妇,卑幼则曰老妇,非亲戚而往来者各以其党为称,後放此) 陈设 (如冠礼,但於中堂布席如众子之位) 厥明陈服 (如冠礼但用背子冠笄) 序立 (主妇如主人之位,将笄者双紒衫子,房中南面) 宾至,主妇迎入升堂。 (如冠礼但不用赞者,主妇升自阼阶) 宾为将笄者加冠笄,适房服背子。 (略如冠礼,但祝用始加之辞,不能则省) 乃醮 (如冠礼辞亦同) 乃字 (如冠礼,但改祝辞髦士为女士) 乃礼宾,皆如冠仪。 家礼卷二 家礼卷三  宋 朱子 撰 昏礼 议昏 男子年十六至三十,女子年十四至二十。 (司马公曰:古者,男三十而娶,女二十而嫁。今令文,男年十五,女年十三以上,并听昏嫁。今为此说,所以参古今之道,酌礼令之中,顺天地之理,合人情之宜也) 身及主昏者无期以上丧乃可成昏 (大功未葬,亦不可主昏。 凡主昏如冠礼主人之法,但宗子自昏则以族人之长为主) 必先使媒氏往来通信,俟女氏许之,然後纳采。 (司马公曰:凡议昏姻,当先查其婿与妇之性行,及家法何如,勿苟慕其富贵。婿苟贤矣,今虽贫贱,安知异时不富贵乎?苟为不肖,今虽富盛,安知其异时不贫贱乎?妇者,家之所由盛衰也,苟慕其一时之富贵而娶之,彼挟其富贵,鲜有不轻其夫而傲其舅姑,养成骄妬之性,异日为患,庸有极乎?借使因妇财以致富,依妇势以取贵,苟有丈夫之志气者,能无愧乎?又世俗好於繈褓童幼之时轻许为昏,亦有指腹为昏者,及其既长,或不肖无赖,或身有恶疾,或家贫冻馁,或丧服相仍,或从宦远方,遂至弃信负约,速狱至讼者多多是以。先祖太尉尝曰:吾家男女必俟既长然後议昏,既通书,数月必成昏,故终身无此悔乃子孙所当法也) 纳采(纳其采择之礼,即今世俗所谓言定也) 主人具书 (主人即主昏者,书用牋纸,如世俗之礼。若族人之子则其父具书告於宗子) 夙兴,奉以告於祠堂。 (如告冠仪。其祝版前同,但云:某之子某,若某之某亲之子某,年已长成,未有伉俪,已议娶某官某郡姓名之女,今日纳采,不胜感怆,谨以……以後同。 若宗子自昏则自告) 乃使子弟为使者如女氏,女氏主人出见使者。 (使者盛服如女氏。女氏亦宗子为主人,盛服出见使者。非宗子之女,则其父位于主人之右,尊则稍进,卑则稍退。啜茶毕,使者起致辞曰:吾子有惠,祝室某也,某之某亲某官,有先人之礼,使某请纳采。从者以书进,使者以书授主人。主人对曰:某之子若妹侄孙,蠢愚又弗能教。吾子命之,某不敢辞。北向再拜。使者避不答拜。使者请退,俟命,出就次。若许嫁者於主人为姑姊,则不云蠢愚又弗能教,馀辞并同) 遂奉书以告於祠堂 (如壻(?原文如此)家之仪,祝版前同,但云某之第几女,若某亲某之第几女,年渐长成,许嫁某官某郡姓名之子若某亲某,今日纳采不胜感怆,谨以……後同。) 出,以复书授使者,遂礼之。 (主人出,延使者升堂,授以复书。使者受之,请退。主人请礼宾,乃以酒馔礼使者。使者至是始与主人交拜如常日宾客之礼,其从者以礼之别室,皆(酉+守)以币。) 使者复命壻氏,主人复告於祠堂。 (不用祝) 纳币(古礼有闻名、纳吉,今不能尽用,止用纳采、纳币以从简便。) 纳币 (币用色绘,贫富随宜,少不过两,多不逾十。今人更用钗钏、羊酒、果实之属亦可。) 具书,遣使如女氏。女氏受书,复书,礼宾。使者复命。并同纳采之仪。 (礼如纳采,但不告庙。使者致辞改采为币,从者以书、币进使者。以书授主人,主人对曰:吾子顺先典,贶(kuang4,赐也)某重礼,某不敢辞,敢不承命?乃受书,执事者受币。主人再拜,使者避之,复进请命。主人授以复书。馀并同。) 亲迎 前期一日,女氏使人张陈其壻之室。 (世俗谓之铺房,然所袭陈者,但氊褥帐幔帷幙应用之物,其衣服(金+巢)之箧笥,不必陈也。 司马公曰:文中子曰,昏娶而论财,夷虏之道也。夫昏姻者所以合二姓之好,上以事宗庙,下以继後世也。今世俗之贪鄙者,将娶妇,先问资装之厚薄,将嫁女,先问聘财之多少。至於立契约云某物若干,某物若干,以求售其女者。亦有既嫁而复欺绐(dai4,欺骗)负约者,是乃狙侩卖婢鬻奴之法,岂得谓之士大夫昏姻哉?其舅姑既被欺绐,则残虐其妇以摅(shu2,张也)其忿。由是爱其女者务厚其资装以悦其舅姑者,殊不知彼贪鄙之人不可盈厌,,资装既竭,则安用汝女哉?於是质其女以责货於女氏,货有尽而责无穷,故昏姻之家往往终为仇讎矣。是以世俗生男则喜,生女则戚,至有不举其女者,用此故也。然则,议昏姻有及於财者,皆勿与为昏姻可也。) 厥明,壻家设位於室中。 (设倚卓於两位,东西相向,蔬果盘盏七筋如宾客之礼,酒壶在东位之後,又以卓子置合卺一於其南。有南北设二盥盆勺於室东隅,右设酒壶盏注於室外或别室,以饮从者。 卺音谨,以小瓠一判而两之。) 女家设次於外。  初昏,壻盛服。 (世俗谓新壻带花胜以拥蔽其面,殊失丈夫之容貌,勿用可也。) 主人告於祠堂。 (如纳采仪,祝版前同。但云某之子某若某亲之子某,将以今日亲迎於某官某郡某氏,不胜感怆,谨以……後同。 若宗子自昏则自告。) 遂醮其子而命之迎。 (先以卓子设酒注盏盘於堂上。主人盛服坐於堂之东序,西向。设壻席於其西北南向。壻升自西阶,立於席西,南向。赞者取盏斟酒,执之诣壻席前。壻再拜升席,南向受盏,跪祭酒,兴,就席末啐酒,兴,降席,授赞者盏,又再拜,进诣父坐前,东向跪。父命之曰:往婴尔相,承我宗事,勉率以敬,若则有常。壻曰:诺,唯恐不堪,不敢忘命。俛伏,兴,出。非宗子之子,则宗子告於祠堂,而其父醮於私室如仪,但改宗事为家事。 若宗子已孤而自昏者,则不用此礼。) 壻出,乘马。 (以二烛前导) 至女家,俟於次。 (壻下马,於大门外俟於次。) 女家主人告於祠堂。 (如纳采仪,祝版前同,但云某之第几女若某亲某之第几女,将以今日归於某官某郡姓名,不胜感怆,仅以……以後同。) 遂醮其女而命之。 (女盛饰,姆相之,立於室外南向。父坐东序,西向。母坐西序,东向。设女席於母之东北,南向。赞者醮以酒如壻礼。姆导女出於母左。父起命之曰:敬之戒之,夙夜无违尔舅姑之命。母送至西阶上,为之整冠敛帔(pei4),命之曰:勉之敬之,夙夜无违尔闺门之礼。诸母、姑、嫂、姊送至於中门之内,为之整裙衫,申之以父母之命曰:既呢听尔父母之言,夙夜无愆。非宗子之女则宗子告於祠堂,而其父醮於私室如仪。) 主人出迎,壻入奠雁。 (主人迎壻於门外,揖让以入,壻执雁以从,至於听事。主人升自阼阶,立,西向。壻升自西阶,北向跪,置雁於地。主人侍者受之。壻俛伏,兴,再拜。主人不答拜。若族人之女,则其父从主人出迎,立於其右,尊则稍进,卑则稍退。 凡贽用生雁,左首以生色绘交络之,无则刻木为之,取其顺阴阳往来之义。程子曰:取其不再偶也。) 姆奉女出,登车。 (姆奉女出中门,壻揖之,降自西阶,主人不降。壻遂出,女从之。壻举骄帘以俟。姆辞曰:未教,不足与为礼也。女乃登车。) 壻乘马先妇车。 (妇车亦以二烛前导。) 至其家,导妇以入。 (壻至家,立於厅事,俟妇下车,揖之,导以入。) 壻妇交拜。 (妇从者布壻席於东方,须从者布妇席於西方。壻盥於南,妇从者沃之,进帨。妇盥於北,壻从者沃之,进帨。壻揖妇,就席,妇拜,壻答拜。) 就坐饮食毕,壻出。 (壻揖妇,就坐,壻东妇西。从者斟酒设馔。妇祭酒,举肴,又斟酒。壻揖妇,举饮不祭,无肴,又取卺分置,将妇之前,斟酒,壻揖妇,举饮不祭,无肴。壻出就他室,姆与妇留室中,撤馔置室外,设席。壻从者餕妇之馀,妇从者餕壻之馀。) 复入,脱服,烛出。 (壻脱服,妇从者受之。妇脱服,壻从者受之。 司马公曰:古诗云,结发为夫妇,言自少年束发即为夫妇。犹李广言结发与匈奴战也。今世俗昏姻乃有结法之礼,谬误可笑,勿用可也。) 太常案:结发,犹束发,成年之谓也。 主人礼宾。 (男宾於外厅,女宾於中堂。) 妇见舅姑 明日夙兴,妇见於舅姑。 (妇夙兴,盛服俟见。舅姑坐於堂上,东西相向,各置卓子於前。家人男女少於舅姑者,立於两序,如冠礼之叙。妇进於阼阶下,背面拜舅,升,奠贽币於卓上,舅抚之,侍者以入。妇降,又拜毕,诣西阶下,背面拜姑,升,奠贽币,姑举以授侍者,妇降又拜。 若非宗子之子而与宗子同居,则先行此礼於舅姑之私室,不同居则如上仪。) 舅姑礼之。 (如父母醮女之仪。) 妇见於诸尊长。 (妇既受礼,降自西阶。同居右尊於舅姑者,则舅姑以妇见於其室,如见舅姑之礼,还拜诸尊长於两序,如冠礼,无贽。小郎小姑皆相拜。非宗子之子而与宗子同居则既受礼,诣其堂上拜之,如舅姑礼,而还见於两序。其宗子及尊长不同居,则庙见而后往。) 若冢妇,则馈於舅姑。 (是日食时,妇家具盛馔酒壶,妇从者设蔬果卓子於堂上舅姑之前,设盥盘於阼阶东南,帨架在东。舅姑既坐,妇盥升自西阶,洗盏斟酒置舅卓子上,降,俟舅饮毕,又拜,遂献姑,进酒,姑受饮毕,妇降拜,遂执馔升,荐於舅姑之前,侍立姑後,以俟卒食,撤饭。侍者撤馀馔,分置别室。妇就餕姑之馀,妇从者餕舅之馀。壻从者又餕妇之馀。非宗子之子则於私室如仪。) 舅姑飨之。 (如礼妇之仪,礼毕,舅姑先降自西阶,妇降自阼阶。) 庙见 三日,主人以妇见於祠堂。 (古者三月而庙见,今以其太远,改用三日,如子冠而见之仪,但告辞曰:子某之妇某氏敢见,馀并同。) 壻见妇之父母 明日,壻往见妇之父母。 (妇父迎送揖让如客礼。拜即跪而扶之。入见妇母,妇母阖门左扉,立於门内,壻拜於门外,皆有币。妇父非宗子即先见宗子夫妇,不用币,如上仪,然後见妇之父母。) 次见妇党诸亲。 (不用币,妇女相见如上仪。) 妇家礼壻如常仪。 (亲迎之夕,不当见妇母及诸亲及设酒馔,以妇未见舅姑故也。) 宋史-礼六十八:士庶人婚礼。并问名於纳采,并请期於纳成。其无雁奠者,三舍生听用羊,庶人听以雉及鸡鹜代。其辞称吾子。 亲迎。质明,掌事者设祢位厅事东间,南向。婿之父服其服,北面再拜,祝曰:“某子某,年若干,礼宜有室,聘某氏第几女,以某日亲迎,敢告。”子将行,父坐厅事,南向,子服其服,三舍生及品官子孙假九品服,馀并皂衫衣、折上巾。立父位西,少南,东向。赞者注酒於盏授子,子再拜,跪受,赞者又以馔设位前,子举酒兴,即坐饮食讫,降,再拜,进立父位前,命之曰:“厘尔内治,往求尔匹。”子再拜,曰:“敢不奉命。”又再拜,降出。初婚,掌事者设酒馔室中,置二盏於盘,婿服其服如前服,至女家,赞者引就次,掌事者设祢位,主人受礼,如请期之仪。主人谓女父。女盛服立房中,父升阶立房外之东,西向。非南向者,各随其所向。父立于门外之左,馀放此。赞者注酒於盏授女,女再拜受盏;赞者又以馔设於位前,女即坐饮食讫,降,再拜。父降立东阶下,宾出次,宾谓婿。主人迎于门,揖宾入,宾报揖,从入。主人升东阶,西面;宾升西阶,进当房户前,北面。掌事者陈雁於阶,宾曰:“某受命于父,以兹嘉礼,躬听成命。”主人曰:“某固愿从命。”宾再拜,降出,主人不降送。初,女出,父戒之曰:“往之汝家,无忘肃恭!”母戒之曰:“夙夜以思,无有违命!”诸母申之曰:“无违尔父母之训!”女出,婿先还,俟於门外。妇至,赞者引就北面立,婿南面,揖以入,至於室。掌事者设对位室中,婿妇皆即坐,赞者注酒於盏授婿及妇,婿及妇受盏饮讫。遂设馔,再饮、三饮,并如上仪。婿及妇皆兴,再拜,赞者彻酒馔。见祖祢、见舅姑、醴妇、飨送者,如仪。 家礼卷三 家礼卷四  宋 朱子 撰 丧礼 初终 疾病迁居正寝。 (凡疾病迁居正寝,内外安静,以俟气绝。男子不绝於妇人之手,夫人不绝於男子之手。) 既绝乃哭 复。 (侍者一人,以死者之上服甞经衣者,左执领,右执腰,升屋中霤(liu4,房檐),北面,招以衣,三呼曰:某人复。毕,卷衣降覆尸上。男女哭擗无数。 上服谓有官则公服,无官则襴衫、皂衫、深衣,妇人大袖背子。呼某人者,从生时之号。) 立丧主。 (凡主人,谓长子,无则长孙承重,以奉馈奠。其与宾客为礼,则同居之亲且尊者主之。) 主妇 (谓亡者之妻,无则主丧者之妻。) 护丧 (以子弟知礼能干者为之。凡丧事皆禀之。) 司书司货 (以子弟或吏仆为之。) 乃易服不食。 (妻子妇妾,皆去冠及上服,被发。男子扱(xi1,收取)上衽,徒跣。馀有服者皆去华饰。为人後者为本生父母,及女子已嫁者,皆不被发徒跣。诸子三日不食,期九月之丧,三不食;三月之丧,再不食;亲戚邻里为糜粥以食之,尊长强之,少食可也。 扱上衽,谓插衣前襟之带。华饰谓锦绢红紫金玉珠翠之类。) 治棺 (护丧命匠择木为棺,油杉为上,柏次之,土杉为下,其制方直,头大尾小。仅取容身,勿令高大及为虚檐高足。内外皆用灰漆,内乃用沥青溶泻,厚半寸以上,炼熟秫米灰,铺其底,厚四寸许,加七星版底,四隅各钉大铁环,动则以大索贯而举之。  司马公曰,棺欲厚,然太厚则重而难以致远,又不必高大占地,使矿中宽易致摧毁,宜深戒之。椁虽圣人所制,自古用之,然板木岁久,终归腐烂,徒使矿中宽大不能牢固,不若不用之为愈也。孔子葬鲤,有棺而无椁。又许贫者还葬而无椁。今不欲用,非为贫也,乃欲保安亡者耳。  程子曰:杂书有松脂入地千年为茯苓,万年为琥珀之说,盖物莫久於此,故以涂棺,古人已有用之者。) 讣告於亲戚僚友。 (护丧、司书为之发书。若无,则主人自讣,亲戚不讣,僚友自馀书。问,悉停以书来吊者,并须卒哭後答之。) 沐浴 袭 奠 为位 饭含 执事者设帏及床,迁尸掘坎。 (执事者以帏幛卧,内侍者设床於尸床前,纵置之,施篑去荐,设席枕,迁尸其上,南首,覆以衾,掘坎於屏处洁地。) 陈袭衣。 (以卓子陈於堂前东壁下,西领,南上。幅巾一,充耳二,用白纩如栆核大,所以塞耳者也。幎目,帛方尺二寸,所以覆面者也。握手,用帛,长尺二寸,广五寸,所以裹手者也。深衣一,大带一,履二,袍袄、汗衫、袴袜、勒帛裹肚之类,随所用之多少。) 沐浴饭含之具。 (以卓子陈於堂前西壁下,南上。钱三实於小箱,米二升以新水淅,令精,实於盌。栉一,沐巾一,浴巾二,上下体各用其一也。) 乃沐浴。 (侍者以汤入,主人以下皆出帷外,北靣。侍者沐髪,栉之,睎以巾,撮为髻,抗衾而浴。拭以巾,剪爪。其沐浴馀水、巾栉,弃於坎而埋之。) 袭。 (侍者设袭牀於帏外。施荐席褥枕。先置大带、深衣、袍、袄、汗衫、袴、韈、勒帛、裏肚之类於其上,遂举以入。置浴牀之西,迁尸其上。悉去病时衣及复衣,易以新衣,但未着幅巾、深衣、履。) 徙尸牀置堂中间。 (卑幼则各於室中间,馀言堂者放此。) 乃设奠。 (执事者以卓子置脯醢,升自阼阶。祝盥手,洗盏,斟酒,奠於尸东,当肩巾之。祝以亲戚为之。) 主人以下为位而哭。 (主人坐於牀东,奠北。众男应服三年者,坐其下,皆藉以槀。同姓期功以下,各以服次坐於其後,皆西面南上。尊行以长幼坐於牀东北壁下,南向西上,藉以席荐。主妇,众妇女,坐於牀西,藉以槀。同姓妇女以服为次,坐於其後,皆东向南上,尊行以长幼坐於牀西北壁下,南向东上,藉以席荐。妾婢立於妇女之後,别设帏以障内外。异姓之亲,丈夫坐於帷外之东,北向西上,妇人坐於帷外之西,北向东上,皆藉以席,以服为行,无服在後。若内丧,则同姓丈夫尊卑坐於帷外之东,北向西上,异姓丈夫坐於帷外之西,北向东上。 三年之丧,夜则寝於尸旁,藉槀枕块。病羸者藉以草荐可也。期以下寝於侧近,男女异室,外亲归家可也。) 乃饭含。 (主人哭尽哀,左袒,自前扱於腰之右,盥手执箱以入。侍者一人,挿匙於米盌(=碗),执以从,置於尸西,以幎巾入。彻枕、覆面,主人就尸东,由足而西,牀上坐,东面举巾,以匙抄米实於尸口之右,并实一钱又於左,於中亦如之。主人袭所袒衣,复位。) 侍者卒袭,覆以衾。 (加幅巾、充耳,设幎目,纳履,乃袭深衣,结大带,设握手,乃覆以衾。) 灵座  魂帛  铭旌 置灵座设魂帛。 (设椸(yi2,衣架)於尸南,覆以帕。置倚卓其前,结白绢为魂帛,置倚上。设香炉、香合、珓(jiao4,珓杯,占卜用具)杯、注、酒果於卓子上。侍者朝夕设栉頮(hui4,洗脸)奉养之具,皆如平生。司马公曰:“古者凿木为重,以主其神。今令式亦有之,然士民之家未尝识也。故用束帛依神,谓之魂帛,亦古礼之遗意也。世俗皆画影置於魂帛之後。男子生时有画像,用之犹无所谓。至於妇人,生时深居闺门,出则乘辎軿,拥蔽其面,既死,岂可使画工直入深室,揭掩靣之帛,执笔訾相,画其容貎?此殊为非礼。又世俗或用冠帽衣履装饰如人状,此尤鄙俚不可从也。”) 立铭旌。 (以绛帛为铭旌,广终幅,三品以上九尺,五品以下八尺,六品以下七尺。书曰:“某官某公之柩”,无官即随其生时所称。以竹为杠,如其长,倚於灵座之右。) 不作佛事。 (司马公曰:“世俗信浮屠,诳诱於始死及七七日、百日、朞年、再朞、除丧。饭僧设道塲,或作水陆大会,写经造像,修建塔庙,云为此者,灭弥天罪恶,必生天堂,受种种快乐,不为者必入地狱,锉烧舂磨,受无邉波吒之苦。殊不知人生含气血,知痛痒,或剪爪剃髪从而烧斫之已不知苦,况於死者,形神相离,形则入於黄壤,朽腐消灭与木石等。神则飘若风火,不知何之。借使锉烧舂磨,岂复知之?且浮屠所谓天堂地狱者,计亦以劝善而惩恶也。苟不以至公行之,虽鬼何得而治乎?是以唐庐州刺史李丹与妹书曰:‘天堂无则已,有则君子登;地狱无则已,有则小人入。’世人亲死而俦浮屠,是不以其亲为君子,而为积恶有罪之小人也。何待其亲之不厚哉!就使其亲实积恶有罪,岂赂浮屠所能免乎?此则中智所共知,而举世滔滔信奉之,何其易感而难烧也?甚者至有倾家破产然後已,与其如此,曷若早卖田营墓而之乎?彼天堂地狱若果有之,当与天地俱生。自佛法未入中国之前,人死而复生者亦有之矣,何故无一人误入地狱,见阎罗等十王者耶?不学者固不足言,读书知古者亦可以少悟矣!”) 执友亲厚之人至此入哭可也。 (主人未成服而来哭者,当服深衣,临尸哭尽哀,出拜灵座,上香再拜,遂吊主人,相向哭尽哀。主人以哭对,无辞。) 小敛。(袒,括髪,免,髽,奠,代哭。) 厥明。 (谓死之明日。) 执事者陈小敛衣衾。 (以卓陈於堂东北壁下,据死者所有之衣,随宜用之,若多则不必尽用也。衾用复者。绞,横者三,纵者一,皆以细布或彩一幅而析其两端为三,横者取足以周身相结,纵者取足以掩首至足而结於身中。) 设奠。 (设卓子於阼阶东南,置奠馔及盏注於其上,中之。设盥盆帨巾各二於馔东,其东有台者,祝所盥也,其西无台者,执事者所盥也。别以卓子设洁涤盆、新拭巾於其东,所以洗盏拭盏也。此一节至遣并同。) 具括发麻,免布,髽麻。 (括髪谓庥(xiu1)绳撮髻,又以布为头□也。免谓裂布或缝绢广寸,自项向前交於额上,郤遶髻如著掠头也。髽亦用麻绳撮髻,竹木为簮也。设之皆於别室。) 设小敛牀、布绞、衾衣。 (设小歛牀,施荐席褥,於西阶之西,铺绞衾衣,举之升自西阶,置於尸南。先布绞之横者三於下,以备周身相结。乃布纵者一於上,以备掩首及足也。衣或颠或倒,但取正方,唯上衣不倒。) 乃迁袭奠。 (执事者迁置灵座西南,俟设新奠乃去之。後凡奠,皆放此。) 遂小敛。 (侍者盥手,举尸。男女共扶助之,迁於小歛牀上。先去椀(=碗),而舒绢,叠衣,以藉其首,仍卷两端以补两肩空处,又卷衣夹其两胫,取其正方,然後以馀衣掩尸。左衽不纽,裹之以衾而未结以绞。未掩其面,盖孝子犹俟其复生,欲时见其面故也。歛毕则覆以衾。) 主人主妇凭尸哭擗。 (主人西向凭尸哭擗。主妇东向亦如之。凡子於父母,凭之。父母於子,夫於妻,执之。妇於舅姑,奉之。舅於妇,抚之,於昆弟,执之。(太常案,此段不可解。慿之奉之,或含敬而近之。抚之执之,则触之乎?而舅於妇,亦能抚之乎?坏男女之大别!殊不可解!)凡凭尸,父母先,妻子後。) 袒,括发,免,髽於别室。 (男子斩衰者,袒,括髪。齐衰以下至同五世祖者,皆袒,免,於别室。妇人髽於别室。) 还迁尸牀於堂中。 (执事者彻袭牀,迁尸其处。哭者复位,尊长坐,卑幼立。) 乃奠。 (祝帅执事者盥手,举馔,升自阼阶,至灵座前,祝,焚香,洗盏,斟酒,奠之。卑幼者皆再拜,侍者巾之。) 主人以下哭尽哀,乃代哭不绝声。 大敛。 厥明。 (小歛之明日,死之第三日也。司马公曰:“礼曰,三日而歛者,俟其复生也。三日而不生,则亦不生矣。故以三日为之礼也。今贫者丧具,或未办,或漆棺未乾,虽过三日亦无伤也。世俗以阴阳拘忌,择日而歛,盛暑之际,至有汁出虫流,岂不悖哉!”) 执事者陈大敛衣衾。 (以卓子陈於堂东壁下,衣无常数,衾用有绵者。) 设奠臭。 (如小歛之仪。) 举棺入,置於堂中稍西。 (执事者先迁灵座及小歛奠於旁侧。役者举棺以入,置於牀西,承以两凳,若卑幼则於别室。役者出,侍者先置衾於棺中,垂其裔於四外。司马公曰:“周人殡於西阶之上,今堂室异制,或狭小,故但於堂中少西而已。今世俗多(鑚去金加歹,zuan1,同攒cuan2)於僧舎,无人守视,往往以年月未利,逾数十年不葬,或为盗贼所发,或为僧所弃,不孝之罪孰大於此?”) 乃大敛。 (侍者与子孙妇女俱盥手,掩首,结绞,共举尸,纳於棺中,实生时所落髪齿及所剪爪於棺角,又揣其空缺处卷衣塞之,务令充实不可揺动。谨勿以金玉珍玩置棺中,启盗贼心。收衾,先掩足,次掩首,次掩左,次掩右,令棺中平满。主人主妇凭哭尽哀,妇人退入幕中。乃召匠加盖,下钉,彻牀,覆柩以衣。祝取铭旌,设跗於柩东,复设灵座於故处,留妇人两人守之。司马公曰:“凡动尸举柩,哭擗无筭。然歛殡之际,亦当辍哭临视,务令安固,不可但哭而已。”  按古者大歛而殡,既大歛则累墼(ji1,砖块)涂之,今或漆棺未乾,又南方土多蝼蚁不可涂殡,故从其便。 设灵牀於柩东。 (牀帐荐席屏枕衣被之属皆如平生时。) 乃设奠。 (如小歛之仪。) 主人以下各归丧次。 (中门之外,择朴陋之室为丈夫丧次。斩衰寝苫枕块,不脱絰带,不与人坐焉,非时见乎母也,不及中门。齐衰寝席。大功以下异居者,既殡而归,居宿於外三月而复寝。妇人次於中门之内,别室或居殡侧,去帷帐衾褥之华丽者,不得輙至男子丧次。) 止代哭者。 成服。 厥明。 (大歛之明日,死之第四日也。) 五服之人各服其服入就位,然後朝哭相吊如仪。 服之制,一曰斩衰三年。 (斩,不缉也。衣裳皆用极麤生布,旁及下际皆不缉也。裳,前三幅,後四幅,缝内向,前後不连,每幅作三(辄去车加巾)。(辄去车加巾),谓屈其两邉相著而空其中也。衣长过腰,足以掩裳上际,缝外向。背有负版,用布方尺八寸,缀於领下垂之。前当心有衰,用布长六寸广四寸,缀於左衿之前。左右有辟领,各用布方八寸屈其两头,相著为广四寸,缀於领下,在负版两旁各搀(chan1)负版一寸。两腋下有衽,各用布三尺五寸,上下各留一尺。正方一尺之外,上於左旁裁入六寸,下於右旁裁入六寸,便於尽处相望斜裁,却以两方左右相(上水下曰,ta4)缀於衣两旁,垂之向下,状如燕尾,以掩裳旁际也。冠比衣裳用布稍细,纸糊为材,广三寸,长足跨顶,前後裹以布,为三陬(zou1),皆向右纵缝之。用麻绳一条,从额上约之,至顶後交过前,各至耳结之以为武。屈冠两头入武内,向外反屈之,缝於武。武之馀绳垂下为缨,结於頥下。首絰以有子麻为之,其围九寸,麻本在左,从额前向右围之,从顶过後,以其末加於本上,又以绳为缨以固之,如冠之制。腰絰大七寸有馀,两股相交,两头结之,各存麻木,散垂三尺,其交结处两旁各缀细绳系之。绞带用有子麻绳一条,大半腰絰,中屈之为两股,各一尺馀,乃合之,其大如絰,围腰从左,过後至前,乃以其右端穿两股间而反揷於右,在絰之下。其杖用竹,髙齐心,本在下。屦亦麤麻为之。妇人则用极麤生布为大袖长裙、盖头,皆不缉,布头(xu1,束发之巾),竹钗,麻屦。众妾则以背子代大袖。凡妇人皆不杖。其正服则子为父也。其加服则嫡孙父卒为祖,若曾髙祖承重者也,父为嫡子,当为後者也。其义服则妇为舅也。夫承重则从服也。为人後者为所後父也,为所後祖承重也,夫为人後则妻从服也。妻为夫也。妾为君也。) 二曰齐衰三年。 (齐,缉也。其衣裳冠制并如斩衰,但用次等麤生布,缉其旁及下际。冠以下为武及缨。首絰以无子庥为之,大七寸馀,本在右,末系本下,布缨。腰絰大五寸馀。绞带以布为之,而屈其右端尺馀。丈以桐为之,上圆下方。妇人服同斩衰,但布用次等为异。後皆放此。其正服则子为母也,士之庻子为其母同,而为父後则降也。其加服则嫡孙父卒为祖母,若曽髙祖母承重者也,母为嫡子,当为後者也。其义服则妇为姑也,夫承重则从服也,为继母也,为慈母,谓庻子无母而父命他妾之无子者慈已也,继母,为长子也,妾为君之长子也。) 杖期。 (服制同上,但又用次等生布。其正服则嫡孙父卒祖在,为祖母也。其服降则为嫁母出母也。其义服则为父卒继母嫁而已从之者也,夫为妻也。子为父後则为出母嫁母无服,继母出则无服也。) 不杖期。 (服制同上,但不杖,又用次等生布。其正服则为祖父,母女虽适人不降也,庶子之子为父之母,而为祖後则不服也,为伯叔父也,为兄弟也,为众子男女也,为兄弟之子也,为姑姊妹女在室及适人而无夫与子者也,妇人无夫与子者为其兄弟姊妹及兄弟之子也,妾为其子也。其加服则为嫡孙,若曾元孙当为後者也,女适人者为兄弟之为父後者也。其降服则嫁母出母为其子,子虽为父後犹服也,妾为其父母也。其义服则继母嫁母为前夫之子从已者也,为伯叔母也,为夫兄弟之子也,继父同居父子皆无大功之亲者也,妾为女君也,妾为君之众子也,舅姑为嫡妇也。) 五月。 (服制同上。其正服则为曾祖父母女适人者,不降也。) 三月 (服制同上。其正服,则为髙祖父母,女适人者不降也。其义服,则继父不同居者,谓先同今异或虽同居而继父有子,已有大功以上亲者也,其元不同居者则不服。) 三曰大功九月 (服制同上,但用稍粗熟布,无负版、衰、辟领,首絰五寸馀,腰絰四寸馀。其正服,则为从父兄弟姊妹,谓伯叔父之子也,为众孙男女也。其义服,则为众子妇也,为兄弟子之妇也,为夫之祖父母伯叔,父母兄弟子之妇也,夫为人後者其妻为本生舅姑也。) 四曰小功五月 (服制同上,但用稍熟细布,冠左缝,首絰四寸馀,腰絰三寸馀。其正服,则为从祖、祖父、从祖、祖姑,谓祖之兄弟姊妹也,为兄弟之孙,为从祖父、从祖姑,谓从祖、祖父之子、父之从父也,为从父兄弟之子也,为从祖兄弟姊妹,谓从祖父之子所谓再从兄弟姊妹者也,为外祖父母,谓母之父母也,为舅谓母之兄弟也,为甥也,为从母,谓母之姊妹也,为姊妹之子也,为同母异父之兄弟姊妹也。其义服,则为从祖祖母也,为夫兄弟之孙也,为从祖母也,为夫从兄弟之子也,为夫之姑姊妹适人者不降也,女为兄弟侄之妻,已适人亦不降也,为娣姒妇,谓兄弟之妻相名,长妇谓次妇曰娣妇,娣妇谓长妇曰姒妇也,庶子为嫡母之父母兄弟姊妹,嫡母死则不服也,母出则为继母之父母兄弟姊妹也,为庻母慈己者,谓庻母之乳养己者也,为嫡孙若曾元孙之当为後者之妇,其姑在则否也,为兄弟之妻也,为夫之兄弟也。) 五曰缌麻三月 (服制同上,但用极细熟布,首絰三寸,腰絰二寸,并用熟麻,缨亦如之。其正服,则为族曾祖父、族曾祖姑,谓曾祖之兄弟姊妹也,为兄弟之曾孙也,为族祖父、族祖姑,谓族曾祖父之子也,为从父兄弟之孙也,为族父、族姑,谓族祖父之子也,为从祖兄弟之子也,为族兄弟姊妹,谓族父之子所谓三从兄弟姊妹也,为曾孙、元孙也,为外孙也,为从母兄弟姊妹,谓从母之子也,为外兄弟,谓姑之子也,为内兄弟,谓舅之子也。其降服,则庶子为父後者为其母,而为其母之父母兄弟姊妹则无服也。其义服,则为族曾祖母也,为夫兄弟之曾孙也,为族祖母也,为夫从兄弟之孙也,为族母也,为夫从祖兄弟之子也,为庶孙之妇也,士为庶母谓父妾之有子者也,为乳母也,为壻也,为妻之父母,妻亡而别娶亦同,即妻之亲母,虽嫁出犹服也,为夫之曾祖髙祖也,为夫之从祖祖父母也,为兄弟孙之妇也,为夫兄弟孙之妇也,为夫之从祖父母也,为从父兄弟子之妇也,为夫从兄弟子之妇也,为夫从父兄弟之妻也,为夫之从父姊妹适人者不降也,为夫之外祖父母也,为夫之从母及舅也,为外孙妇也,女为姊妹之子妇也,为甥妇也。) 凡为殇服,以次降一等 (凡年十九至十六为长殇,十五至十二为中殇,十一至八嵗为下殇。应服期者,长殇降服大功九月,中殇七月,下塲小功五月。应服大功以下,以次降等。不满八嵗为无服之殇,哭之以日,易月,生未三月则不哭也。男子已娶女子许嫁皆不为殇。) 凡男为人後,女适人者,为其私亲皆降一等,私亲之为之也亦然 (女适人者降服,未满被出则服其本服,已除则不复服也。凡妇服夫党当丧而出,则除之。凡妾为其私亲则如众人。) 成服之日,主人及兄弟始食粥 (诸子食粥,妻妾及期、九月疏食水饮不食菜菓,五月、三月者饮酒食肉不与宴乐。自是无故不出,若以丧事及不得已而出入,则乘朴马、布鞍、素轿、布帘。) 凡重丧未除而遭轻丧,则制其〈疑四库缺文〉而哭之,月朔设位,服其服而哭之。既毕返重服。其除之也,亦服轻服,若除重丧而轻服未除,则服轻服以终其馀日 朝夕哭奠 上食 朝奠 (每日晨起,主人以下皆服其服入就位。尊长坐哭,卑者立哭,侍者设盥栉之具於灵牀侧,奉魂帛出就灵座,然後朝奠。执事者设蔬果、脯醢。祝盥手,焚香,斟酒。主人以下再拜,哭尽哀。) 食时上食 (如朝奠仪。) 夕奠 (如朝奠仪,卑。主人以下奉魂帛入,就灵牀哭尽哀。) 哭无时 (朝夕之间,哀至则哭於丧次。) 朔日则於朝奠设馔 (馔用肉鱼麫米食羮饭各一器,礼如朝奠之仪。) 有新物则荐之 (如上食仪。) 吊奠赙 凡吊皆素服 (幞头衫带皆以白生绢为之。) 奠用香茶烛酒果 (有状或用食物即别为文。) 赙用钱帛 (有状惟亲友分厚者有之。) 具刺通名 (宾主皆有官则具门状,否则名纸题其阴面,先使人通之与礼物俱入。) 入哭奠讫,乃吊而退 (既通名,丧家炷火然,烛布席,皆哭以俟。护丧出迎。宾入,至厅事,进揖曰:“窃闻某人倾背,不胜惊怛,敢请入酹,并伸慰意。”护丧引宾入,至灵座前哭尽哀,再拜,焚香,跪,酹茶酒,俛伏兴。护丧至哭者,祝跪读祭文,奠赙状於宾之右,毕,兴。宾主皆哭尽哀。实再拜。主人哭,出西向,稽颡再拜。宾亦哭,东向答拜,进曰:“不意凶变,某亲某官,奄忽倾背,伏惟哀慕,何以堪处。”主人对曰:“某罪逆深重,祸延某亲,伏蒙奠酹,并赐临慰,不胜哀感。”又再拜。宾答拜,又相向哭尽哀。宾先止,寛譬主人曰:“修短有数,痛毒奈何。愿抑孝思,俯从礼制。”乃揖而出。主人哭而入。护丧送至厅事,茶汤而退。主人以下止哭。若亡者官尊即云薨逝,稍尊即云捐馆,生者官尊则云奄弃荣养,存亡俱无官即云色养,若尊长拜賔,礼亦同此,惟其辞各如启状之式,见卷末。) 闻丧 奔丧 始闻亲丧哭 (亲谓父母也。以哭答使者,又哭尽哀,问故。) 易服 (裂布为四脚,白布衫,绳带,麻屦。) 遂行 (日行百里,不以夜行,虽哀戚犹辟害也。) 道中哀至则哭 (哭避市邑喧繁之处。司马公曰:“今人奔丧及从柩行者,遇城邑则哭,过则止,是饰诈之道也。”) 望其州境,其县境,其城,其家皆哭 (家不在城则望其乡哭。) 入门诣柩前再拜,再变服,就位哭 (初变服如初丧,柩东西面,坐哭尽哀,又变服如小歛,亦如之。) 後四日成服 (与家人相吊。宾至,拜之如初。) 若未得行则为位不奠 (设椅子一枚,以代尸柩,左右前後设位,哭如仪,但不设奠。若丧侧无子孙则此中设奠如仪。) 变服 (亦以闻後之第四日。) 在道至家皆如上仪 (若丧侧无子孙则在道朝夕为位,设奠,至家但不变服,其相吊拜宾如仪。) 若既葬则先之墓哭拜 (之墓者,望墓哭,至墓哭,拜如在家之仪。未成服者变服於墓,归家诣灵座前哭拜。四日成服如仪。已成服者亦然,但不变服。) 齐衰以下闻丧为位而哭 (尊长於正堂卑幼於别室。司马公曰:“今人皆择日举哀。凡悲哀之至,在初闻丧即当哭之,何暇择日?但法令有不得於州县公廨举哀之文,则在官者当哭於侩舎,其它皆哭於本家可也。”) 若奔丧则至家成服 (奔丧者释去华盛之服,装办即行,既至齐衰,望乡而哭。大功望门而哭,小功以下至门而哭。入门诣柩前哭,再拜成服,就位哭吊如仪。) 若不奔丧则四日成服 (不奔丧者齐衰三日中,朝夕为位会哭。四日之朝成服,亦如之。大功以下始闻丧为位,会哭,四日成服,亦如之。皆毎月朔为位会哭,月数既满,次月之朔乃为位会哭而除之。其间哀至则哭可也。) 治葬 三月而葬,前期择地之可葬 (司马公曰:“古者天子七月,诸侯五月,大夫三月,士逾月而葬。今五服年月,敕王公以下皆三月而葬。然世俗信葬师之说,既择年月日时,又择山水形势以为子孙贫富贵贱贤愚夀夭尽繋於此,而其为术又多不同,争论纷纭无时可决,至有终身不葬,或累世不葬,或子孙衰替忘失处所,遂弃捐不葬者,正使殡葬实能致人祸福,为子孙者亦岂忍使其亲臭腐暴露而自求其利耶?悖礼伤义无过於此!然孝子之心虑患深逺,恐浅则为人所抇,深则湿润速朽,故必求土厚小深之地而葬之,所以不可不择也。”或曰,家贫乡逺不能归葬则如之何?公曰:“子游问丧具,夫子曰:‘称家之有亡。’子游曰:‘有亡乌乎齐?’夫子曰:‘有,无过礼。苟亡矣,歛手足形,还葬悬棺而窆,人岂有非之者哉?’昔亷范千里负丧,郭平自卖营墓,岂待丰富然後葬其亲哉?在礼,未葬不变服,食粥,居庐,寝苫枕块,葢闵亲之未有所归,故寝食不安。奈何舎之出逰,食稻衣锦,不知其何以为心哉?世人又有逰宦没於逺方,子孙火焚其柩,收烬归葬者,夫孝子爱亲之肌体,故歛而藏之,残毁它人之尸,在律犹严。况子孙乃悖谬如此!其始盖出於胡之俗,浸染中华,行之既乆,习以为常。见者恬然曾莫之怪,岂不哀哉!延陵季子适齐,其子死,葬於嬴博之间。孔子以为合礼。必也不能归葬,葬於其地可也。岂不犹愈於焚之哉?”抇音骨。恶音乌。齐,子细切。窆,彼歛反。程子曰:“卜其宅兆,卜其地之羙恶也。非阴阳家所谓祸福者也。地之羙则其神灵安,其子孙盛。若培壅其根而枝叶茂,理固然矣。地之恶者则反是。然则曷谓地之羙者?土色之光润,草木之茂盛,乃其騐也。父祖子孙同气,彼安则此安,彼危则此危,亦其理也。而拘忌者惑以择地之方位,决日之凶吉,不亦泥乎?甚者不以奉先为计,而専以利後为虑,尤非孝子安厝之用心也! 惟五患者不得不谨,须使它曰不为道路,不为城郭,不为沟池,不为贵势所夺,不为耕犁所及也。”一本云,所谓五患者,沟渠、道路、避村落、逺井窖。愚按,古者葬地葬日皆决於卜筮。今人不晓占法,且从俗择之可也。) 择日开茔域祠后土 (主人既朝哭,帅执事者於所得地掘兆,四隅外其壤掘中南,其壤各立一标,当南门立两标。择逺亲或賔客一人告后土氏。祝帅执事者设位於中标之左,南向,设盏注酒果脯醢於其前,又设盥盆帨巾二於其东南,其东有台架,告者所盥,其西无者,执事者所盥也。告者吉服入立於神位之前,北向,执事者在其後。东上,皆再拜。告者与执事者皆盥帨。执事者一人取酒注,西向跪,一人取盏,东向跪。告者斟酒,反注,取盏,酹於神位前,俛伏兴,少退,立。祝执版告於告者之左,东向跪,读之曰:“维某年嵗月朔日,子某官姓名,敢告於后土氏之神,今为某官姓名,营建宅兆,神其保佑,俾无後艰,谨以清酌酺醢,祗荐於神,尚飨。”讫,复位。告者再拜。祝及执事者皆再拜,彻出。主人若归,则灵座前哭,再拜,後放此。) 遂穿圹 (司马公曰:“今人葬有二法,有穿地直下为圹而悬棺以窆者,有凿隧道旁穿土室而撺柩於其中者。按古者唯天子得为隧道,其它皆直下为圹,而悬棺以窆。今当以此为法,其穿地宜狭而深。狭则不崩损,深则盗难近也。”) 作灰隔 (穿圹既卑,先布炭末於圹底,筑实,厚二三寸,然後布石灰细沙黄土拌匀者於其上,灰三分,二者各一可也,筑实,厚二三寸。别用薄板为灰隔,如椁之状,内以沥清涂之,厚三寸许,中取容棺,墻高於棺四寸许,置於灰上。乃於四旁旋下四物,亦以薄板隔之,炭末居外,三物居内如底之厚。筑之既实,则旋抽其板,近上复下炭灰等而筑之,反墻之平而止。盖既不用椁,则无以容沥清,故为此制。又炭御木根,辟水蚁,石灰得沙而实,得土而黏,歳乆结为全石,蝼蚁盗贼皆不能进也。程子曰:“古人之葬欲比化,不使土亲肤。今竒玩之物尚保藏固宻以防损汚,况亲之遗骨,当如何哉?世俗浅识惟欲不见而已,又有求速化之说者,是岂知必诚必信之义,且非欲求其不化也。未化之间,保藏当如是耶?”) 刻志石 (用石二片,其一为盖,刻云:“有宋某官某公之墓”,无官者则书其字曰:“某君某甫”其一为底,刻云:“有宋某官某公讳某字某某州某县人考讳某某官母氏某封某某年月日生叙歴官迁次某年月日终某年月日葬於某乡某里某处娶某氏某人之女子男某某官女适某官某人”妇人夫在则葢云:“有宋某官姓名某封某氏之墓”无封则云“妻”夫无官则书夫之姓名,夫亡则云“某官某公某封某氏”夫无官则云“某君某甫妻某氏”其底叙“年若干适某氐因夫子致封号”无则否。葬之日,以二石字而相向,而以铁束束之,埋之圹前,近地面三四尺间,葢虑异时陵谷变迁或误为人所动,而此石先见,则人有知其姓名者庶能为掩之也。) 造明器 (刻木为车马仆从侍女各执奉养之物,象平生而小。准令五品六品三十事,七品八品二十事,非升朝官十五事。) 下帐 (谓牀帐茵席倚卓之类,亦象平生而小。) 苞(bao1,草席) (竹掩一,以盛遣奠馀脯。) 筲(shao1,盛饭竹器) (竹器五,以盛五榖。) 甖(ying1,小口大腹瓶) (梵器三,以盛酒脯醢。司马公曰:“自明器以下,俟实土及半,乃於其旁穿便房以贮之。”愚按此虽古人不忍死其亲之意,然实非有用之物,且脯肉腐败生虫聚蚁尤为非便,不可用也。) 大轝 (古者桺(即柳,指棺木和柩车的装饰)居制度甚详,今不能然,但从俗为之,取其牢固平稳而已。其法用两长杠,杠上加伏兔,附杠处为圆凿,别作小方牀以载柩,足高二寸,旁立两柱,柱外施圆枘,令入凿中,长出其外,枘凿之间湏极圆滑,以膏涂之,使其上下之际柩常适平,两柱近上,更为方凿,加横扄(jiong3),扄两头出柱外者更加小扄,杠两头施横杠,横杠上施短杠,短杠上或更加小杠,仍多作新麻大索以备札缚。此皆切要实用不可阙者。但如此制而以衣覆棺,亦足以少华。道路或更欲加饰,则以竹为之,格以彩结之,上如撮蕉亭,施帷幔,四角垂流苏而已,然亦不可太高,恐多罣(同挂)碍,不湏(同须)太华,徒为观羙。若道路逺,决不可为此虚饰,但多用油单裹柩以防雨水而已。) 翣 (以木为筐,如扇而方,两角高广二尺,高二尺四寸,衣以白布,柄长五尺。黼翣画黼。黻翣画黻。画翣画云气。其縁皆为云气,皆画以紫准格。) 作主 (程子曰:“作主用栗,趺方四寸,厚寸二分,凿之洞底,以受主身。身高尺二寸,博三寸,厚寸二分,剡上五分为圆首,寸之下勒前为颔而判之,四分居前,八分居後颔下。陷中长六寸,广一寸,深四分。合之,植於趺下,齐窍,其旁以通,中圆径四分,居三寸六分之下,下距趺面七寸二分。以粉涂其前面。” 司马公曰:“府君夫人共为一椟”。愚按,古者虞主用桑,将练而後易之以栗,今於此便作栗主,以从简便,或无栗止用木之坚者,椟用黒漆且容一主,夫妇俱入祠堂乃如司马氏之制。) 迁柩 朝祖 奠赙 陈器 祖奠 发引前一日因朝奠以迁柩告 (设馔如朝奠。祝斟酒讫,北面跪,告曰:“今以吉辰迁柩,敢告。”俛伏兴。主人以下哭尽哀,再拜。葢古有启殡之奠,今既不涂殡,则其礼无所施,然又不可全无节文,故为此礼也。) 奉柩朝於祖 (将迁柩,役者入,妇人退避。主人及众主人辑杖立视。祝以箱奉魂帛前行,诣祠堂前。执事者奉奠及倚卓次之,铭旌次之。役者举柩次之。主人以下从哭。男子由右,妇人由左,重服在前,轻服在後,服各为叙,侍者在末,无服之亲男居男右,女居女左,皆次主人主妇之後。妇人皆葢头。至祠堂前,执事者先布席,役者致柩於其上,北首而出。妇人去盖头。祝帅执事者设灵座及奠於柩西,东向。主人以下就位立,哭尽哀,止。此礼盖象平生将出必辞尊者也。) 遂迁於厅事 (执事者设帷於厅事。役者入。妇人退避。祝奉魂帛导柩,右旋。主人以下男女哭从,如前诣厅事。执事者布席。役者置柩於席上,南首而出。祝设灵座及奠於柩前,南向。主人以下就位作哭。) 乃代哭 (藉以荐席如未殓之前,以至发引。) 亲宾致奠赙 (如初丧仪。) 陈器 (方相在前,狂夫为之,冠服如道士,执戈扬盾,四品以上四目为方相,以下两目为魌(qi1,驱鬼时所带面具)头。次明器下帐苞筲甖以牀舁(yu2,擡著)之,次铭旌,去跗执之,次灵车,以奉魂帛香火,次大轝,轝旁有翣,使人执之。) 日晡时设祖奠 (馔如朝奠。祝斟酒讫,北向跪,告曰:“永迁之礼,灵辰不留,今奉柩车,式遵祖道”,俛伏兴,馀如朝夕奠仪。司马公曰:“若柩自它所归葬,则行日但设朝奠哭而行,至葬乃备。”此及下,遣奠礼。) 遣奠 厥明迁柩就轝 (轝夫纳大轝於中庭,脱柱上撗扄。执事者彻祖奠。祝北向跪告曰:“今迁柩就轝,敢告”,遂迁灵座置旁侧。妇人退避。役夫迁柩就轝,乃施扄加楔,以索维之,令极牢实。主人从柩哭降,视载。妇人哭於帷中。载毕,祝帅执事者迁灵座於柩前,南向。) 乃设遣奠 (馔如朝奠有脯,惟妇人不在。奠毕,执事者彻脯纳苞中,置舁牀上,遂彻奠。) 祝奉魂帛升车焚香 (别以箱盛主,置帛後。至是妇人乃葢头出帷,降阶立哭。守舎者哭,辞尽哀,再拜而归。尊长则不拜。) 发引 柩行 (方相等前导如陈器之叙。) 主人以下男女哭,歩从 (如朝祖之叙。出门则以白幕夹障之。) 尊长次之,无服之亲又次之,宾客又次之 (皆乘车马。亲宾或先待於墓所,或出郭哭拜辞归。) 亲宾设幄於郭外道旁,驻柩而奠 (如在家之仪) 涂中遇哀则哭 (若墓逺,则毎舎设灵座於柩前,朝夕哭奠。食时上食,夜则主人兄弟皆宿柩旁,亲戚共守卫之。) 及墓 下棺 祠后土 题木主 成坟 未至,执事者先设灵幄 (在墓道西,南向,有倚卓。) 亲宾次 (在灵幄前十数歩,男东女西,女次北,与灵幄相直,皆南向。) 妇人幄 (在灵幄後,圹西。) 方相至 (以戈系圹四隅。) 明器等至 (陈於圹东南,北上。) 灵车至 (祝奉魂帛就幄,座主箱亦置帛後) 遂设奠而退 (酒菓脯醢。) 柩至 (执事者先布席於圹南,柩至,脱载,置席上,北首。执事者取铭旌,去杠,置柩上。) 主人男女各就位哭 (主人诸丈夫立於圹东西向。主妇诸妇女立於圹西幄内,东向。皆北上,如在涂之仪。) 宾客拜辞而归 (主人拜之,宾答拜。) 乃窆 (先用木杠横於灰隔之上,乃用索四条穿柩底,环不结而下之,置杠上,则抽索去之。别摺细布若生绢兠柩底而下之,更不抽出,但裁其馀弃之。若柩无环,即用索兠柩底两头放下,至杠上乃去索用布如前。大凡下柩,最须详审,用力不可误,有倾坠动摇,主人兄弟宜辍哭亲临视之。已下,再整柩,衣铭旌,令平正。) 主人赠 (玄六纁四,各长丈八尺,主人奉置柩旁,再拜稽颡。在位者皆哭尽哀。家贫或不能具此数,则玄纁各一可也。其馀金玉寳玩并不得入圹,以为亡者之累。) 加灰隔内外盖 (先度灰隔大小,制薄板一片,旁距四墻,取令脗(同吻)合。至是加於柩上,更以油灰弥之。然後旋旋少灌沥清於其上,令其速凝,即不透。板约以厚三寸许,乃加外葢。) 实以灰 (三物拌匀者居下,炭末居上,各倍於底及四旁之厚,以酒洒而蹑实之,恐震柩中故未敢筑,但多用之以俟其实尔。) 乃实土而渐筑之 (下土,毎尺许即轻手筑之,勿令震动柩中。) 祠后土於墓左 (如前仪,祝板前同,但云:“今为某官封諡窆兹幽宅,神其……”後同。) 藏明器等 (实土及半,乃藏明器下帐苞筲甖於侵房,以版塞其门。) 下志石 (墓在平地,则於圹内近南先布砖一重,置石其上,又以砖四围之,而覆其上。若墓在山侧峻处,则於圹南数尺间掘地,深四五尺依此法埋之。) 复实以土而坚筑之 (下土亦以尺许为凖,但湏宻杵坚筑。) 题主 (执事者设卓子於灵座东南,西向。置砚笔墨,对卓置盥盆帨巾如前。主人立於其前,北向。祝盥手,出主,卧置卓上,使善书者盥手,西向立,先题陷中。父则曰“宋故某官某公讳某字某第几神主”粉面曰“皇考某官封諡府君神主”其下左旁曰“孝子某奉祀”。母则曰“宋故某封某氏讳某字某第几神主”粉靣曰“皇妣某封某氏神主”旁亦如之。无官封则以生时所称为号,题毕,祝奉置灵座而藏魂帛於箱中,以置其後。炷香,斟酒,执板,出於主人之右,跪读之曰:“(子同前,但云)孤子某敢昭告於皇考某官封諡府君,形归窆穸(xi1),神返室堂,神主既成,伏惟尊灵,舎旧从新,是凭是依”,毕,懐之,兴,复位。主人再拜,哭尽哀,止。母丧称“哀子”,後放此,凡有封諡,皆称之,後皆放此。) 祝奉神主升车 (魂帛箱在其後。) 执事者彻灵座,遂行 (主人以下哭从如来仪。至墓门,尊长乘车马。去墓百歩许,卑幼亦乘车马。但留子弟一人监视实土,以至成坟。) 坟高四尺,立小石碑於其前,亦高四尺,趺高尺许 (司马公曰:“按令式,坟碑石兽大小多寡虽各有品数。然葬者当为无穷之规。後世见此等物,安知其中不多藏金玉邪?是皆无益於亡者,而反有害。故令式又有贵得同贱,贱不得同贵之文。然则不若不用之为愈也。今按孔子防墓之封,其崇四尺,故取以为法。”用司马公说,别立小碑,但石湏濶尺以上,其厚居三之二,圭首而刻其面如志之葢,乃略述其世系名字行,实而刻於其左,转及後右而周焉。妇人则俟夫葬,乃立面,如夫之志葢之刻云。) 反哭 主人以下奉灵车在涂徐行哭 (其反如疑为亲在彼,哀至则哭。) 至家哭 (望门即哭。) 祝奉神主入置於灵座 (执事者先设灵座於故处。祝奉神主入就位,椟之,并出魂帛箱置主後。) 主人以下哭於厅事 (主人以下及门哭,入,升自西阶,哭於厅事。妇人先入,哭於堂。) 遂诣灵座前哭 (尽哀,止。) 有吊者,拜之如初 (谓宾客之亲宻者,既归,待反哭而复吊。檀弓曰反哭之吊也,哀之至也。反而亡焉,失之矣,於是为甚。) 期九月之丧者饮酒食肉,不与宴乐。小功以下大功异居者可以归 虞祭 (葬之日,日中而虞。或墓逺则但不出是日可也。若去家经宿以上,则初虞於所馆行之。郑氏曰:“骨肉归於土,魂气则无所不之。孝子为其彷徨,三祭以安之。”) 主人以下皆沐浴 (或已晚不暇,即略自澡洁可也。) 执事者陈器,具馔 (盥盆帨巾各二於西阶西东,南上。东盆有台、巾,有架,西者无之。凡丧礼皆放此。酒瓶并架一於灵座东南,置卓子於其东,设注子及盘盏於其上,火炉汤瓶於灵座西南,置卓子於其西,设祝版於其上,设蔬果盘盏於灵座前卓上,七筯居内当中,酒盏在其西,醋楪居其东,果居外,蔬居果内,实酒於瓶,设香桉於堂中,炷火於香炉,束茅聚沙於香案前。具馔如朝奠,陈於堂门外之东。) 祝出神主於座,主人以下皆入哭 (主人及兄弟倚杖於室外,及与祭者皆入哭於灵座前。其位皆北面,以服为列,重者居前,轻者居後,尊长坐,卑幼立,丈夫处东,西上,妇人处西,东上。逐行各以长幼为序。侍者在後。) 降神 (祝止哭者。主人降自西阶,盥手帨手,诣灵座前,焚香,再拜。执事者皆盥帨,一人开酒实於注,西面跪,以注授主人,主人跪受,一人奉卓上盘盏东面跪於主人之左,主人斟酒於盏,以注授执事者,左手取盘盏,右手执盏,酹之茅上,以盘上授执事者,俛伏兴,少退,再退,复位。) 祝进馔 (执事者佐之,其设之叙如朝奠。) 初献 (主人进诣注子卓前,执注北向立。执事者一人取灵座前盘盏立於主人之左。主人斟酒,反注於卓子上,与执事者俱诣灵座前,北向立。主人跪,执事者亦跪,进盘盏,主人受盏,三祭於茅束上,俛伏兴,执事者受盏,奉诣灵座前,奠於故处。祝执版出於主人之右,西向跪读之,前同,但云“日月不居,奄及初虞,夙兴夜处,哀慕不宁,谨以洁牲柔毛,粢盛醴齐,哀荐祫事,尚飨。”祝兴主人哭,再拜,复位,哭止。牲用豕则曰刚鬛,不用牲则曰清酌,庻羞袷合也,欲其合於先祖也。) 亚献 (主妇为之礼如初,但不读祝,四拜。) 终献 (亲宾一人或男或女为之礼,如亚献。) 侑食 (执事者执注就添盏中酒。) 主人以下皆出,祝阖门 (主人立於门东,西向。卑幼丈夫在其後,重行北上。主妇立於门西,东向。卑幼妇女亦如之。尊长休於它所,如食间。) 祝启门,主人以下入哭辞神 (祝进当门,北向噫歆,告启门三,乃启门。主人以下入就位。执事者点茶。祝立於主人之右,西向,告利成。歛主,匣之,置故处。主人以下哭,再拜,尽哀止,出就次。执事者彻。) 祝埋魂帛 (祝取魂帛,帅执事者埋於屏处洁地。) 罢朝夕奠 (朝夕哭,哀至哭,如初。) 遇柔日再虞 (乙丁巳辛癸为柔日,其礼如初虞,惟前期一日陈器具馔,厥明夙兴设蔬果酒馔,质明行事。祝出神主於座,祝辞改初虞为再虞,祫事为虞事为异。若墓逺途中遇柔日,则亦於所馆行之。) 遇刚日三虞 (甲丙戊庚壬为刚日,其礼如再虞,惟改再虞为三虞,虞事为成事。若墓逺亦途中遇刚日,且阙之,须至家乃可行此祭。) 卒哭 (檀弓曰:“卒哭曰成事。是日也,以吉祭易丧祭。”故此祭渐用吉礼。) 三虞後遇刚日卒哭,前期一日陈器具馔 (并同虞祭,唯更设玄酒瓶一於酒瓶之西。) 厥明夙兴,设蔬果酒馔 (并同虞祭,唯更取井花水充玄酒。) 质明,祝出主 (同再虞) 主人以下皆入哭,降神 (并同虞祭) 主人主妇进馔 (主人奉鱼肉,主妇盥帨,奉麪米食。主人奉羮,主妇奉饭以进,如虞祭之设。) 初献 (并同虞祭,惟祝执版出於主人之左,东向跪读为异词,并同虞祭,但改“三虞”为“卒哭”,“哀荐成事”下云“来日隮祔於祖考,某官府君尚飨”。按此云祖考,谓亡者之祖考也。) 亚献,终献侑食,阖门,启门,辞神 (并同虞祭,唯祝西阶上东靣告利成。) 自是朝夕之间哀至不哭 (犹朝夕哭) 主人兄弟蔬食水饮,不食菜菓,寝席枕木 祔 (檀弓曰:“商既练而祔,周卒哭而祔。孔子善商。”注曰:“期而神之,人情然。商礼既亡,其本末不可考,今三虞卒哭,皆用周礼,次第则此不得独从商礼。”) 卒哭,明日而祔,卒哭之祭既彻,即陈器具馔 (器如卒哭,唯陈之於祠堂。堂狭即於厅事,随便。设亡者祖考妣位於中,南向西上。设亡者位於其东南,西向。母丧则不设祖考位。酒瓶、玄酒瓶於阼阶上,火炉汤瓶於西阶上。具馔如卒哭而三分。母丧则两分祖妣,二人以上则以亲者。杂记曰:“男子祔於王父则配,女子祔於王母则不配。”注云:“有事於尊者,可以及卑。有事於卑者,不敢援尊也。”) 厥明,夙兴,设菜果酒馔 (并同卒哭) 质明,主人以下哭於灵座前 (主人兄弟皆倚杖於阶下,入哭尽哀止。按此谓继祖宗子之丧,其世嫡当为後者主丧,乃用此礼。若丧主非宗子,则皆以亡者继祖之宗主此祔祭。礼注云:祔於祖庙,宜使尊者主之。) 诣祠堂奉神主出置於座 (祝轴帘,启椟,奉所祔祖考之主置於座内。执事者奉祖妣之主置於座,西上。若在它所,则置於西阶上卓子上,然後启椟。若丧主非宗子而与继祖之宗异居,则宗子为告於祖,而设虚位以祭。祭讫,除之。) 还奉新主入祠堂置於座 (主人以下还诣灵座所,哭。祝奉主椟诣祠堂西阶上卓子上。主人以下哭,从如从柩之叙,至门止,哭。祝启椟,出主如前仪。若丧主非宗子,则唯丧主、主妇以下还迎。) 叙立 (若宗子自为丧主,则叙立如虞祭之仪。若丧主非宗子,则宗子、主妇分立两阶之下,丧主在宗子之右,丧主妇在宗子妇之左,长则居前,少则居後,馀亦如虞祭之仪。) 叅神 (在位者皆再拜,参祖考妣。) 降神 (若宗子自为丧主,则丧主行之。若丧主非宗子,则宗子行之。并同卒哭。) 祝进馔 (并同虞祭。) 初献 (若宗子自为丧主,则丧主行之。若丧主非宗子,则宗子行之。并同卒哭,但酌献先诣祖考妣前。日子前同卒哭,祝版但云:“孝子某谨以洁牲柔毛,粢盛醴齐,适於皇某考某官府君,隮祔孙某官,尚飨。”皆不哭。内丧则云:“皇某妣某封某氏,隮祔孙妇某封某氏。”次诣亡者前,若宗子自为丧主则祝版同前,但云:“荐祔事於先考,某官府君适於皇某考某官府君,尚飨。”若丧主非宗子则随宗子所称,若亡者於宗子为卑幼,则宗子不拜。) 亚献,终献 (若宗子自为丧主,则主妇为亚献,亲宾为终献。若丧主非宗子,则丧主为亚献,主妇为终献,并同卒哭及初献仪,惟不读祝。) 侑食,阖门,启门,辞神 (并同卒哭,但不哭。) 祝奉主各还故处 (祝先纳祖考妣神主於龕中匣之,次纳亡者神主西阶卓子上匣之,奉之反於灵座。出门,主人以下哭从如来仪。尽哀止。若丧主非宗子则哭而先行,宗子亦哭送之,尽哀止。若祭於它所,则祖考妣之主亦如新主纳之。) 小祥 (郑氏云祥吉也。) 期而小祥 (自丧至此不计闰凡十三月。古者卜日而祭,今止用初忌以从简易。大祥放此。) 前期一日主人以下沐浴,陈器,具馔 (主人帅众丈夫洒扫,涤濯。主妇帅众妇女涤釜鼎,具祭馔。它皆如卒哭之礼。) 设次,陈练服 (丈夫妇人各设次於别所,置练服於其中。男子以练服为冠,去首絰、负版、辟领、衰。妇人截长裙不令曵地,应服期者改吉服,然犹尽其月,不服金珠锦绣红紫。唯为妻者犹服禫,尽十五月而除。) 厥明,夙兴,设蔬果、酒馔 (并同卒哭) 质明,祝出主,主人以下入哭 (皆如卒哭,但主人倚杖於门外,与期亲各服其服而入。若已除服者来预祭,亦释去华盛之服,皆哭尽哀止。) 乃出就次,易服复入,哭 (祝止之) 降神 (如卒哭) 三献 (如卒哭之仪,祝版同前,但云“日月不居,奄及小祥,夙兴夜处,小心畏忌,不惰其身,哀慕不宁,敢用洁牲柔毛,粢盛醴齐,荐此常事,尚飨。”) 侑食,阖门,启门,辞神 (皆如卒哭之仪) 止朝夕哭 (惟朔望未除服者会哭。其遭丧以来,亲戚之未尝相见者相见,虽已除服犹哭尽哀然後许拜。) 始食菜果 大祥 再期而大祥 (自丧至此不计闰凡二十五月。亦止用第二忌日祭。) 前期一日沐浴,陈器,具馔 (皆如小详) 设次,陈禫服 (司马公曰:“丈夫垂脚黲纱幞头,黲布衫,布裹角带,未大祥闲假以出谒者。妇人冠,梳假髻,以鵞黄青碧皁白为衣履,其金珠红绣皆不可用。”) 告迁於祠堂 (以酒果如朔日之仪。无亲尽之祖则祝版而云云……使其主祭告讫,改题神主如加赠之仪。逓迁而西,虚东一龕以俟新主。若有亲尽之祖而其别子也,则祝版云云……告毕而迁於墓所,不埋。其支子也,而族人有亲未尽者,则祝版云云……告毕迁於最长之房使主其祭,其馀改题递迁如前。若亲皆已尽,则祝版云云……告毕埋於两阶之间,其馀改题递迁如前。) 厥明行事皆如小祥之仪 (惟祝版改“小祥”曰“大祥”,“常事”曰“祥事”。) 毕,祝奉神主入於祠堂 (主人以下哭从如祔之叙,至祠堂前,哭止。) 彻灵座,断杖弃之屏处,奉迁主埋於墓侧,始饭酒食肉而复寝 禫 (郑氏曰:“澹澹然平安之意。”) 大祥之後,中月而禫 (闲一月也。自丧至此,不计闰凡二十七月。) 前一月下旬卜日 (下旬之首,择来月三旬各一日,或丁或亥,设卓子於祠堂门外,置香炉、香合、杯珓、盘子於其上,西向。主人禫服,西向。众主人次之,少退,北上。子孙在其後,重行北上。执事者北向,东上。主人炷香熏珓,命以上旬之日曰:“某将以来月某日,祗荐禫事於先考某官府君,尚飨。”即以珓掷於盘,以一俯一仰为吉,不吉更命中旬之日,又不吉则用下旬之日。主人乃入祠堂本龕前,再拜。在位者皆再拜。主人焚香。祝执辞立於主人之左,跪告曰:“孝子某将以来月某日,祗荐禫事於先考某官府君,卜既得吉,敢告。”主人再拜,降,与在位者皆再拜。祝阖门,退。若不得吉,则不用“卜既得吉”一句。) 前期一日,沐浴设位,陈器具馔 (设神位於灵座故处,它如大祥之仪。) 厥明行事,皆如大祥之仪 (但主人以下诣祠堂。祝奉主椟置於西阶卓子上,出主置於座。主人以下皆哭尽哀。三献不哭,改祝版“大祥”为“禫祭”,“祥事”为“禫事”。至辞神乃哭,尽哀。送神主至祠堂,不哭。 ) 居丧杂仪 《檀弓》曰:“始死充充,如有穷;既殡瞿瞿,如有求而弗得;既葬皇皇,如有望而弗至;练而慨然;祥而廓然。” 颜丁善:“居丧始死,皇皇如有求而弗得。及殡望望焉,如有从而弗及。既葬慨焉如不及,其反而息。”《杂记》孔子曰:“少连大连善居丧,三日不怠,三月不觧,期悲哀,三年忧。”《丧服四制》曰:“仁者可以观其爱焉,知者可以观其礼焉,彊者可以观其志焉。礼以治之,义以正之。孝子、弟弟、贞妇,皆可得而察焉。”《曲礼》曰:“居丧未葬,读丧礼。既葬,读祭礼。丧复常,读乐章。”《檀弓》曰:“大功废业。”或曰:“大功诵可也。”(今居丧但勿读乐章可也)《杂记》:“三年之丧,言而不语,对而不问。”(言言已事也,为人说为语)《丧大记》:“父母之丧,非丧事不言。既葬与人立。君言王事,不言国事。大夫士言公事,不言家事。”《檀弓》:“高子臯执亲之丧,未尝见齿。”(言笑之)《杂记》:“疏衰之丧既葬,人请见之则见,不请见人。小功请见人可也。”又,“凡丧,小功以上非虞祔练祥无沐浴。”《曲礼》:“头有创则沐。身有疡则浴。”《丧服四制》:“百官备,百物具,不言而事行者,杖而起。言而後事行者,杖而起。身自执事而後行者,面垢而已。”凡此,皆古礼,今之贤孝君子必有。能尽之者自馀,相时量力而行之可也。 〔以下状文格式见附图〕 家礼卷五  宋 朱子 撰 祭礼 四时祭 时祭用仲月前旬卜日 (孟春下旬之首,择仲月三旬各一日,或丁或亥。主人盛服立於祠堂中门外,西向。兄弟立於主人之南,少退,北上。子孙立於主人之後,重行,西向,北上。置卓子於主人之前,设香炉、香合、杯珓(占卜器具)及盘於其上。主人搢笏,焚香,薰珓,而命以上旬之日,曰:“某将以来月某日诹此嵗事,适其祖考,尚餐。”即以珓掷於盘,以一俯一仰为吉。不吉更卜中旬之日,又不吉则不复卜而直用下旬之日。既得日,祝开中门,主人以下北向立,如朔望之位,皆再拜。主人升,焚香再拜。祝执辞跪於主人之左,读曰:“孝孙某将以来月某日,祇荐嵗事於祖考,卜既得吉,敢告。”用下旬日则不言卜。既得吉,主人再拜降复位,与在位者皆再拜。祝闭门,主人以下复西向位。执事者立於门西,皆东靣,北上。祝立於主人之右,命执事者曰:“孝孙某将以来月某日,祗荐嵗事於祖考。”有司具修执事者应曰:“诺”,乃退。) 前期三日斋戒 (前期三日,主人帅众丈夫致斋於外。主妇帅众妇女致斋於内。沐浴更衣,饮酒不得至乱,食肉不得茹荤。不吊丧,不聼乐,凡凶秽之事皆不得预。) 前一日设位陈器 (主人帅众丈夫深衣,及执事洒扫正寝,洗拭倚卓,务令蠲洁。设高祖考妣位於堂西,北壁下,南向,考西妣东,各用一倚一卓而合之。曾祖考妣,祖考妣考妣以次而东,皆如高祖之位。世各为位,不属祔位,皆於东序西向北上或两序相向,其尊者居西,妻以下则於阶下。设香案於堂中,置香炉、香合於其上。束茅聚沙於香案前及逐位前地上。设酒架於东阶上,别置卓子於其东,设酒注一,酹酒盏一,盘一,受胙盘一,匕一,巾一,茶合、茶筅、茶盏、托、盐碟、醋瓶於其上。火炉、汤瓶、香匙、火筯於西阶上,别置卓子於其西,设祝版於其上。设盥盆、帨巾各二於阼阶下之东西,其西者有台架,又设陈馔大牀於其东。) 省牲涤器具馔 (主人帅众丈夫深衣省牲,涖杀。主妇帅众妇女背子涤濯祭器,洁釜鼎,具祭馔。毎位果六品,菜蔬及脯醢各三品,肉鱼馒头糕各一盘,羮饭各一椀,肝各一串,肉各二串,务令精洁。未祭之前勿令人先食及为猫犬虫鼠所汚。) 厥明夙兴设蔬果酒馔 (主人以下深衣,及执事者俱诣祭所,盥手,设果楪於逐位卓子南端,蔬菜脯醢相间次之,设盏盘、醋楪於北端,盏西,楪东,匙筯居中,设玄酒及酒各一瓶於架上。玄酒,其日取井花水,充在酒之西。炽炭於炉,实水於瓶。主妇背子炊煖祭馔,皆令极热,以合盛出,置东阶下大牀上。) 质明奉主就位 (主人以下各盛服,盥手,帨手,诣祠堂前,众丈夫叙立如告日之仪。主妇西阶下,北向立。主人有母,则特位於主妇之前,诸伯叔母诸姑继之,嫂及弟妇姊妹在主妇之左,其长於主母主妇者皆少进,子孙妇女内执事者在主妇之後,重行,皆北向东上。立定,主人升自阼阶,搢笏,焚香,出笏,告曰:“孝孙某,今以仲春之月,有事於皇高祖考某官府君,皇高祖妣某封某氏,皇曾祖考某官府君,皇曾祖妣某封某氏,皇祖考某官府君,皇祖妣某封某氏,皇考某官府君,皇妣某封某氏,以某亲某官府君,某亲某封某氏祔食。敢请神主出就正寝,恭伸奠献。”告讫,搢笏,歛椟,正位祔位各置一笥,各以执事者一人捧之。主人出笏前导,主妇从後,卑幼在後。至正寝,置於西阶卓子上。主人搢笏,启椟,奉诸考神主出就位。主妇盥帨升,奉诸妣神主亦如之。其祔位则子弟一人奉之。既毕主人以下皆降复位。) 参神 (主人以下叙立如祠堂之仪,立定,再拜。若尊长老疾者,休於它所。) 降神 (主人升,搢笏,焚香,出笏,少退立。执事者一人开酒取巾,拭瓶口,实酒於注,一人取东阶卓上盘盏立於主人之左,一人执注立於主人之右。主人搢笏,跪奉盘盏者亦跪,进盘盏,主人受之,执注者亦跪,斟酒於盏,主人左手执盘,右手执盏,灌於茅上,以盘盏授执事者,出笏,俛伏兴,再拜,降复位。) 进馔 (主人升,主妇从之,执事者一人以盘奉鱼肉,一人以盘奉米麫食,一人以盘奉羮饭从升,至高祖位前。主人搢笏,奉肉,奠於盘盏之南。主妇奉麫食,奠於肉西。主人奉鱼,奠於醋碟之南。主妇奉米食,奠於鱼东。主人奉羮,奠於醋碟之东。主妇奉饭,奠於盘盏之西。主人出笏,以次设诸正位,使诸子弟妇女各设祔位。皆毕,主人以下皆降复位。) 初献 (主人升,诣高祖位前。执事者一人执酒注,立於其右。主人搢笏,奉高祖考盘盏,位前东向立。执事者西向斟酒於盏,主人奉之,奠於故处。次奉高祖妣盘盏亦如之。出笏位前,北向立。执事者二人奉高祖考妣盘盏立於主人之左右。主人搢笏,跪。执事者亦跪。主人受高祖考盘盏,右手取盏,祭之茅上,以盘盏授执事者,反之故处,受高祖妣盘盏亦如之,出笏,俛伏,兴,少退,立。执事者炙肝於炉,以碟盛之。兄弟之长一人奉之,奠於高祖考妣前匙筋之南。祝取版立於主人之左,跪读曰:“维年嵗月朔日,子孝元孙某官某敢昭告於皇高祖考某官府君、皇高祖妣某封某氏:气序流易,时维仲春,追感嵗时,不胜永慕,敢以洁牲柔毛,粢盛醴齐,祗荐嵗事,以某亲某官府君、某亲某封某氏,祇食尚飨。”毕,兴,主人再拜,退,诣诸位,献祝如初。毎逐位读祝毕,即兄弟众男之不为亚终献者以次分诣本位所祔之位酌献如仪,但不读祝。献毕,皆降复位。执事者以它器彻酒及肝,置盏故处。) 亚献 (主妇为之,诸妇女奉炙肉及分献如初献仪,但不读祝。) 终献 (兄弟之长或长男或亲宾为之。众子弟奉炙肉及分献如亚献仪。) 侑食 (主人升,搢笏,执注,就斟诸位之酒皆满,立於香案之东南。主妇升,扱匙饭中,西柄,正筯,立於香案之西南。皆北向,再拜降复位。) 阖门 (主人以下皆出。祝阖门,无门处即降帘可也。主人立於门东西向,众丈夫在其後。主妇立於门西东向,众妇女在其後。如有尊长,则少休於他所。此所谓厌也。) 启门 (祝声三噫歆,乃启门。主人以下皆入。其尊长先休於它所者亦入,就位。主人主妇奉茶,分进於考妣之前,祔位使诸子弟妇女进之。) 受胙 (执事者设席於香案前。主人就席,北靣。祝诣高祖考前,举酒盘盏,诣主人之右。主人跪,祝亦跪,主人搢笏受盘盏,祭酒,啐酒。祝取匙并盘,抄取诸位之饭各少许,奉以诣主人之左,嘏於主人曰:“祖考命工祝承致多福於汝孝孙,使汝受禄於天,宜稼於田,眉夀永年,勿替引之。”主人置酒於席前,出笏,俛伏兴再拜,搢笏,跪,受饭尝之,实於左袂???挂袂於季指。取酒卒饮。执事者受盏,自右置注旁,受饮,自左亦如之。主人执笏,俛伏兴,立於东阶上,西向。祀(党为祝)立於西阶上,东向,告利成,降复位,与在位者皆再拜。主人不拜,降复位。) 辞神 (主人以下皆再拜。) 纳主 (主人主妇皆升,各奉主纳於椟。主人以笥歛椟,奉归祠堂如来仪。) 彻 (主妇还监彻。酒之在盏注它器中者,皆入於瓶,缄封之,所谓福酒。果蔬肉食并传於燕器,主妇监涤祭器而蔵之。) 餕 (是日,主人监分祭胙品,取少许置於合,并酒皆封之,遣仆执书归胙於亲友。遂设席,男女异处,尊行自为一列,南面。自堂中东西分首,若止一人,则当中而坐,其馀以次相对,分东西向。尊者一人先就坐,众男叙立,世为一行,以东为上,皆再拜。子弟之长者一人少进立,执事者一人执注立於其右,一人执盘盏立於其左。献者搢笏,跪,起,受注斟酒,反注受盏,祝曰:“祀事既成,祖考嘉飨,伏愿某亲,备膺五福,保族冝家。”授执盏者,置於尊者之前。长者出笏,尊者举酒毕。长者俛伏兴,退复位,与众男皆再拜。尊者命取注及长者之盏置於前,自斟之,祝曰:“祀事既成,五福之庆,与汝曹共之。”命执事者以次就位,斟酒皆徧。长者进跪受饮毕,俛伏兴,退立。众男进揖,退立,饮。长者与众男皆再拜。诸妇女献女尊长於内如众男之仪,但不跪。既毕,乃就坐,荐肉食。诸妇女诣堂前献男尊长寿。男尊长酢之如仪。众男诣中堂献女尊长寿,女尊长酢之如仪。乃就坐,荐麫食。内外执事者各献内外尊长寿如仪而不酢,遂就斟,在坐者徧俟,皆举,乃再拜退。遂荐米食,然後泛行酒,间以祭馔,酒馔不足则以它酒它馔益之。将罢,主人颁胙於外仆。主妇颁胙於内执事者。徧及微贱,其日皆尽,受者皆再拜,乃彻席。) 凡祭,主於尽爱敬之诚而已。贫则称家之有无,疾则量筋力而行之。财力可及者自当如仪。 初祖 (惟继始祖之宗得祭。) 冬至祭始祖 (程子曰:“此厥初生民之祖也。冬至一阳之始,故象其类而祭之。”) 前期三日斋戒 (如时祭之仪) 前期一日设位 (主人众丈夫深衣,帅执事者洒扫祠堂,涤濯器具,设神位於堂中间北壁下,设屏风於其後,食牀於其前。) 陈器 (设火炉於堂中,设炊烹之具於东阶下盥东,炙具在其南,束茅以下并同时祭。主妇众妇女背子,帅执事者涤濯祭器,洁釜鼎,具果楪六,盘三,杅六,小盘三,盏盘匙筯各二,脂盘一,酒注、酹酒盘盏一,受胙盘匙一。 按,此本合用古祭器,今恐私家或不能办,且用今器以从简便。神位用蒲荐加草席,皆有縁,或用紫褥,皆长五尺濶二尺有半。屏风如枕屏之制,足以围席三面。食牀以扳为面,长五尺濶三尺馀,四围亦以版,高一尺二寸,二寸之下乃施版,面皆黒漆。) 具馔 (晡时杀牲,主人亲割,毛血为一盘,首、心、肝、肺为一盘,脂杂以蒿为一盘,皆腥之,左胖不用,右胖前足为三叚,脊为三叚,胁为三条,後足为三叚,去近窍一节不用,凡十一体。饭米一杅,置於一盘。蔬果各六品。切肝一小盘。切肉一小盘。) 厥明,夙兴,设蔬果酒馔 (主人深衣,帅执事者设玄酒瓶及酒瓶於架上,酒注、酹酒盘盏、受胙盘匙各一於东阶卓子上。祝版、反脂盘於西阶卓子上,匙筯各一於食牀北端之东西相去二尺五寸,盘盏各一於筯西,果子在食牀南端,蔬在其北。毛血腥盘切肝肉皆陈於阶下馔牀上。米实阶下炊具中。十一体实烹具中,以火爨而熟之。盘一,杆六,置馔牀上。) 质明,盛服就位 (如时祭仪。) 降神,参神 (主人盥,升,奉脂盘诣堂中炉前,跪告曰:“孝孙某今以冬至,有事於皇始祖考,皇始祖妣,敢请尊灵降居神位,恭伸奠献。”遂燎脂於炉炭上,俛伏,兴,少退,立,再拜。执事者开酒,主人跪,酹如时祭之仪。) 进馔 (主人升,诣神位前。执事者奉毛血腥肉以进。主人受,设之於蔬北,西上。执事者出熟肉,置於盘,奉以进。主人受,设之腥盘之东。执事者以杅二盛饭,杅二盛肉湆不和者,又以杅二盛肉湆以菜者,奉以进。主人受,设之,饭在盏西,大羮在盏东,鉶羮在大羮东。皆降,复位。) 初献 (如时祭之仪,但主人既俛伏兴,兄弟炙肝加盐,实於小盘,以从祝,辞曰:“维年歳月朔日,子孝孙姓名,敢昭告於皇初祖考,皇初祖妣,今以中冬阳至之始,追惟报本,礼不敢忘,谨以洁牲柔毛,粢盛醴齐,祗荐嵗事。”) 亚献 (如时祭之仪,但众妇炙肉加盐以从。) 终献 侑食,阖门,启门,受胙,辞神,彻,餕 (如时祭及上仪。并如时祭之仪。) 先祖 (继始祖高祖之宗得祭。继始祖之宗则自初祖而下,继高祖之宗则自先祖而下。) 立春祭先祖 (程子曰:“初祖以下,高祖以上之祖也。立春生物之始,故象其类而祭之。”) 前三日斋戒 (如祭初祖之仪。) 前一日设位陈器 (如祭初祖之仪,但设祖考神位於堂中之西,祖妣神位於堂中之东。蔬果碟各十二,大盘六,小盘六,馀并同。) 具馔 (如祭初祖之仪,但毛血为一盘,首心为一盘,肝肺为一盘,脂蒿为一盘,切肝两小盘,切肉四小盘,馀并同。) 厥明夙兴设蔬果酒馔 (如祭初祖之仪,但毎位匙筋各一盘,盏各二,置阶下馔牀上,馀并同。) 质明盛服就位降神参神 (如祭初祖之仪,但告辞改始为“先”,馀并同。) 进馔 (如祭初祖之仪,但先诣祖考位,奉毛血首心、前足上二节、脊三节、後足上一节,次诣祖妣位奉肝肺、前足一节、胁三节、後足下一节,馀并同。) 初献 (如祭初祖之仪,但献两位,各俛伏兴,当中少立。兄弟炙肝两小盘以从。祝词改“初”为“先”,“中冬阳至”为“立春生物”馀并同。) 亚献,终献 (如祭初祖之仪,但从炙肉各二小盘。) 侑食,阖门,启门,受胙,辞神,彻,餕 (并如祭初祖仪。) 祢 (继祢之宗以上皆得祭,惟支子不祭。) 季秋祭祢 (程子曰:“季秋成物之始,亦象其类而祭之。”) 前一月下旬卜日 (如时祭之仪,惟告辞改“孝孙”为“孝子”,又改“祖考妣”为“考妣”。若母在,则止云“皇考告於本龕之前”馀并同。) 前三日斋戒前一日设位陈器 (如时祭之仪,但止於正寝,合设两位於堂中西上,香案以下并同。) 具馔 (如时祭之仪二分。) 厥明,夙兴,设蔬果酒馔 (如时祭之仪。) 质明,盛服,诣祠堂奉神主出就正寝 (如时祭於正寝之仪,但告辞云:“孝子某,今以季秋成物之始,有事於皇考某官府君,皇妣某封某氏……”) 参神,降神,进馔,初献 (并如时祭之仪,但祝辞曰:“今以季秋成物之始,感时追慕,昊天罔极……”馀并同。) 亚献,终献,侑食,阖门,启门,受胙,辞神,纳主,彻,餕 (并如时祭之仪。) 忌日 前一日斋戒 (如祭祢之仪。) 设位 (如祭祢之仪,但止设一位。) 陈器 (如祭祢之仪。) 具馔 (如祭祢之仪一分。) 厥明,夙兴,设蔬果酒馔 (如祭祢之仪。) 质明主人以下变服 (祢则主人兄弟黲(can3,浅青黑色)纱幞头,黲布衫,布裏,角带。祖以上则黲纱衫。旁亲则皂纱衫。主妇特髻去饰,白大衣淡黄帔。馀人皆去华盛之服。) 诣祠堂,奉神主出就正寝 (如祭祢之仪,但告辞云:“今以某亲某官府君逺讳之辰,敢请神主出就正寝,恭伸追慕”,馀并同。) 参神,降神,进馔,初献 (如祭祢之仪,但祝辞云:“嵗序流易,讳日复临,追逺感时,不胜永慕……”,考妣改“不胜永慕”为“昊天罔极”。旁亲云:“讳日复临,不胜感怆……”,若考妣则〈疑四库缺文〉祝兴主人以下哭尽哀,馀并同。) 亚献,终献,侑食,阖门,启门 (并如祭祢之仪,但不受胙。) 辞神,纳主,彻 (并如祭祢之仪,但不餕。) 是日不饮酒,不食肉,不聼乐,黲布素服素带以居,夕寝於外。 墓祭 三日上旬择日,前一日斋戒 (如家祭之仪。) 具馔 (墓上毎分如时祭之品,更设鱼肉米麪食各一大盘以祀后土。) 厥明洒扫 (主人深衣,帅执事者诣墓所,再拜,奉行茔域内外,环绕哀省三周。其有草棘,即用刀斧鉏斩芟夷。洒扫讫,复位再拜。又除地於墓左,以祭后土。) 布席陈馔 (用新洁席陈於墓前,设馔如家祭之仪。) 参神,降神,初献 (如家祭之仪,但祝辞云:“某亲某官府君之墓,气序流易,雨露既濡,瞻扫封茔,不胜感慕……”馀并同。) 亚献,终献 (并以子弟亲宾为之。) 辞神,乃彻,遂祭后土,布席,陈馔 (四盘於席南端,设盘盏匙筋於其北,馀并同上。) 降神,参神,三献 (同上,但祝辞云:“某官姓名,敢昭告於后土氏之神,某恭修嵗事於某亲某官府君之墓,惟时保佑,实頼神休,敢以酒馔,敬伸奠献,尚飨。”) 辞神,乃彻而退  
32    우리민족 특색문화 댓글:  조회:107597  추천:0  2012-07-15
우리민족 특색문화 o 례의범절 o 전통의상 o 조선민족 o 민속음식 --------------- o 민속놀이 o 연변개황 o 중국개황 o 우리언어    
31    조선 민족의 神 댓글:  조회:3520  추천:0  2012-07-15
조선 민족의 神 우리민족의 신에는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숭상하는 가택신(家宅神)이 있고, 부락에서 숭상하는 부락신(部落神)이 있으며, 무속에서 숭상하는 무신(巫神)과 그 밖의 잡신 등이 있다. 김태곤에 의하면 가정에서 숭상하는 신으로는 성주신, 조왕신, 문신, 측신, 지신, 업신, 삼신, 제석신, 조상신, 왕신(王神), 정신(井神) 등 11종이 있으며, 마을신에는 136종이 있고, 무신으로는 114종이 있다고 한다. 이밖에 잡신들 까지 모두 합치면 민간신앙에서 숭상되는 신은 모두 273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민간신앙에서 숭상하는 주요한 신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天上界 (1) 천상신(天上神) : 옥황상제(玉皇上帝), 옥황천존(玉皇天尊), 삼신(三神), 삼황신(三皇神), 삼성신(三聖神), 제석신(帝釋神), 삼불제석(三佛帝釋), 한울님, 성주신, 천신(天神), 천왕신(天王神), 천신대신(天神大神), 천신대감신 (天神大監神), 도당천신(都堂天神), 천지대왕신(天地大王神), 천궁호귀(天宮胡鬼) (2) 일신(日神) : 일신(日神), 일광제석(日光帝釋), 일월신(日月神), 일광보살신(日光菩薩神), 자지당신(紫芝堂神), 해애기씨, 일월성신(日月聖神), 일월호귀(日月胡鬼) (3) 월신(月神) : 월신(月神), 월광제석(月光帝釋), 월광보살신(月光菩薩神), 달애기씨 (4) 성신(星神) : 성신(星神), 칠성신(七星神), 남극성, 노성신(老星神), 별애기씨, 노신(老神), 일월성신(日月星神), 일월성군신(日月星君神), 북두칠성신, 문창성(文昌星) 2. 지상계(地上界 ) (1) 시조신(始祖神) : 단군, 기자, 박혁거세, 탈해, 알지, 고주몽, 수로왕 (2) 영웅신(英雄神) : 최영장군, 임경업 장군, 벽돌대감, 군웅대신, 장군신, 충열신(忠列神), 군웅신(軍雄神), 조장군신, 홍 장군신, 양 장군신, 장 장군신, 남이 장군신, 김유신 장군신, 장수신, 군장신(軍將神), 마장신(馬將神), 용장군신(龍將軍神), 백마장군신(白馬將軍神), 득제제장군신(得濟濟將軍神), 용마장군신(龍馬將軍神), 산상조장군신(山上趙將軍神), 천하제일장군신, 지하제일장군신, 관공신(關公神) (3) 왕신(王神) : 대왕신, 태조대왕신(太祖大王神), 단종대왕신, 뒤주대왕신, 강화도령신 (4) 여신(女神):공주신, 칠공주신, 바리공주, 중전마마신, 강씨마마신, 송씨부인신(단종의 폐비), 본궁신(本宮神):최일장군 마누라신, 임경업 장군 각씨신, 임장군 마누라신, 바리데기, 각씨신, 부인신, 애기씨신, 당아씨신 내전신(內殿神) :계면각씨신 (5) 대감신(大監神) :사신신(使臣神), 권대감신(權大監神), 손대감신(孫大監神) (6) 평민신(平民神) : 궁상이신, 도랑선비신, 말명신, 치원대신, 조상신, 맹인신, 양산보신, 의원선생신, 약국선생신, 지관선생신, 상군신(上軍神), 성인선생신, 감찰신, 목수신, 상사신(相思神), 홍아신(紅兒神) (7) 무속신(巫俗神) : 당금애기, 바리데기, 백조 할망, 삼신 할망신, 조왕 할머니, 작도 대신, 대신, 만신 할머니, 대신 마누라, 대신 할머니, 창부신(倡夫神) (8) 토지신(土地神) : 지신(地神), 터주신, 터주대감신, 터대감신, 토신, 토지신, 동신(洞神), 동경도사신(洞境都事神), 후토지신(後土之神), 후토부인신, 주산토지지신(主山土地之神), 당산토지지신(堂山土地之神), 국사당(國師堂), 본향신(本鄕神), 토주신(土主神), 오토지신(五土之神), 토성귀신(土城鬼神), 도신(都神), 제방신(堤防神), 토주관신(土主官神), 곡매기신 (9) 가택신(家宅神) : 성조대감(成造大監), 성조부인, 재복신(財福神), 조왕신(부엌신), 문전신, 업신, 지신, 삼신, 측신(厠神, 뒷간귀신), 마출각씨, 제석씨, 조상신, 왕신(王神, 처녀귀신), 정신, 걸립(乞粒), 문신 (10) 노신(路神) : 노신, 노중지신(路中之神), 거리신(巨里神), 도신(道神), 사신군행신(使神軍行神), 지대군행신(地垈軍行神) (11) 산신(山神) : 산신, 서낭신, 국수신, 신모신(神母神), 성모신(聖母神), 상산신(上山神), 당산신(堂山神), 백산신(白山神), 여산신(女山神), 할미서낭신, 서낭부인신, 도당산신(都堂山神), 도당할머니신, 산천신(山川神), 주산신, 花山神, 산신령, 산천장군신, 산천존신(山天尊神), 당산하르범신, 도성황신(都城隍神), 성황후토지신(城隍後土之神) (12) 석신(石神) : 석신, 암석신, 선돌바우신, 공알바우신 (13) 방위신(方位神) : 오방신장신(五方神將神), 오방장군신(五方將軍神) (14) 화신(火神) : 화신, 화주신, 조왕신, 화덕벼락장군신, 벼락대신, 화정여신(火正黎神) (15) 기타 : 농신(農神), 전횡신(田橫神), 오곡대신(五穀大神), 업주신, 마당신(馬堂神), 마주대신(馬主大神), 수문신(守門神), 木神, 수풀신, 風神, 풍뇌지신(風雷之神), 걸립신, 가뭉신, 탑신, 태세신(太歲神), 불정신(不淨神), 손님, 호구신, 왕신(처녀신), 삼태귀신, 몽달귀신, 영산, 객귀(客鬼), 상문(喪門) 도깨비, 손각씨 3. 지하계(地下界) (1) 명부신(冥府神) : 시왕님, 십왕신, 오구대신, 염라대왕, 사제삼성, 곽곽선생신, 최판관, 지부사천대왕(地府四天大王) (2) 차사신(差使神) : 차사, 강임차사, 일직사자(日直使者), 월직사자, 천황차사, 地皇차사, 人皇차사 4. 해양계(海洋界) (1) 용신(龍神) : 용신, 용왕님, 동해용왕, 서해용왕, 광연왕, 광리왕, 광택왕, 광덕왕, 물국용왕신, 사해용왕신, 사해용신대감신, 사해용신부인신, 龍子神, 용녀부인신, 천용신, 용궁제석신, 용궁불사신(龍宮佛師神), 용궁칠성신, 용궁대신 (2) 수신(水神) : 수신, 용신, 용신할머니, 해신, 정신(井神), 천신(川神), 대천신(大川神), 수구신(水口神), 물 할망, 수령신(水靈神), 수부신(水夫神), 영산대천신(靈山大川神), 영천택지신(靈川澤之神), 미륵신 (3) 풍신(風神) : 풍신, 영등 할망 (4) 기타 : 배서낭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진 한국인, 과연 우리 토속신은 얼마나 알까. 아마 산신, 도깨비 정도를 넘어가면 궁색해질 것이다. 우리의 신화가 빈약해서가 아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한 줄로 꿰어 엮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설화만 봐도 서양의 신화 못지 않게 극적이다.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와 정을 통해 낳은 알에서 나온 인물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이라고 한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잉태된 것도 아니고 또 알이었다니 탄생부터 파란만장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서관이 최근 개발에 들어간 '오방대제와 한국신들의 원형'은 늦게나마 우리 민족의 의식세계에 내재해 있을 상상력을 자극하고 민족 자긍심을 찾아보자는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헌으로, 이야기로 전해오는 토속 신들을 모두 모아 그 신들의 영역과 그들이 지녔던 물건들을 되돌려주고 서열과 계보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우리 민족은 유교.불교 등 외래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다 보니 우리의 것에 천착할 기회가 없었다. 기초 작업을 거친 결과 서양 신들의 서열이 역할에 의해 매겨지는 것과 달리 우리 신들은 장소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으로 꼽히는 제우스 신은 은혜로운 비를 내리게 하는 천공(天空)을 신격화한 것이다. 제우스는 하늘을 지배하는 동시에 세계를 통치하는 자였다.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셈이다. 반면 우리의 최고신인 칠성신은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는 것으로 통하는데 바로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조선 숙종 때 완성된 '천상열차 분야지도'가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서 힌트를 얻어 칠성신을 최고신으로 잡았다. 칠성신은 그 하위신인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배하는 동방청제. 서방백제. 남방적제. 북방흑제와 함께 오방대제로 불린다. 그리고 상위신이라 하더라도 하위신에게 지시를 내리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칠성신이 동방청제 등에게, 가신(家神)이 변소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들끼리의 관계는 풍속이나 음양오행, 풍수, 민속학 등을 응용하여 개발팀들이 엮어내게 된다. 가설이 개입되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고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가 반영돼야 한다. 당연히 오방대제들은 집을 관장하는 신과 관계를 맺는다. 서방백제의 경우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과는 상충한다. 북방흑제는 이 조왕신과는 대단히 친하나 변소신과는 반목한다. 전통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있으면 해가 질 때 햇빛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음식이 쉬 상하기 때문에 대부분 북쪽에 위치하고, 변소는 많은 미생물이 번식하는 곳이므로 부엌과는 멀찍이 떼 놓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풍수지리학에서 나오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동방청제. 서방백제 등이 일치하는데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거북과 뱀으로 그려지는 현무를 북방흑제의 탈것으로 해석한다.
30    명당자리 보는 법 댓글:  조회:3906  추천:1  2012-07-15
명당자리 보는 법    풍수학(風水學)의 유래  풍수학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발생했다. 그 오묘한 이치는 동양 철학에 기인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진리이기 때문에 역리학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는 풍수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진나라 시대 대역학자인 주선도(朱仙桃)라는 분이 수산기(水山記)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명당자리 보는 비법을 밝혔다. 당시 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이구동성으로 그를 미친 사람으로 따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산기가 신통하게도 잘 맞아들어가자 시황제는 수산기를 일반에게 공개하지 못하게 했다. 왜나하면 수산기를 인용하여 왕이 나올 만한 명당자리에 일반이 묘를 써 버리면 왕통이 무너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산기의 저자 주선도에게 죄를 씌워 죽여 없애 버렸다고 한다. 그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 시대에 와서 장자방이란 학자가 총오경과청낭정경을 저술했는데 역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났으며, 또한 당나라에 와서도 최성왕이 금낭경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을 황실에서만 대대로 응용했었다고 한다. 비단 주머니에 금낭경을 넣어두고 역대 황제가 대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짖 않았다. 그런데 당나라 황제가 만약 민간 중에서 왕이 태어난다면 구족을 멸하리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 오히려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결국 당나라 말기부터는 도학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금낭경을 연구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풍수학을 정리하여 전파하게 되니, 그때부터 일반 대중도 널리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삼국 시대에 럭리학이 널리 전파되었다 하며, 이때부터 풍수학자들이 많이 생겨나 궁궐터 성곽,혹은 가옥 묘지에 대한 비결을 저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풍수학설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자 일본에서도 그 지상(地相)의 비결을 신통히 여기게 되었으며, 이 땅을 강점했을 때는 13명의 역리학자를 차출하여 소위 13인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땅의 명당자리의 혈맥을 끊어버렸는데, 예를 들어 명산이라면 그 명산 허리를 끊어 신작로를 낸다든가, 너무 험준하여 지맥이나 산맥을 끊을수 없으면 철봉을 수없이 박아 산의 혈맥을 끊는 등 잔인 포학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용어해설   현무(玄武) : 산의 정상을 뜻한다. 방향은 북쪽   백호(白虎) : 방향이 오른쪽.   청룡(靑龍) : 왼쪽. 좌청룡 우백호라고 하는 지형의 한 형태를 말한다.   재혈난(裁穴難) : 산기운이 뭉처있는 지점. 매우 찾기 어려운 지점으로, 이곳만 제대로 찾아 묘지를 마련하면 자손에게 음덕이 있다고 한다.   주작(朱雀) : 이 지점은 산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쳐져 있어 바람을 막는 그 밑부분의 중심부로 이 주작을 가로 질러 물이 을러가야 산기운이 재혈에 뭉쳐 있게 마련이라 한다.   물(水) : 병풍처럼 들러쳐져 있는 산의 밑부분, 즉 산기운이 뭉쳐 멎을 수 있게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는 곳을 말한다.   석산(石山) : 흙이라고는 별로 없고 거의 암석으로 된 산을 말하는데,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집안이 망한다. 지기(地氣)란 흙을 통해서 흐르게 마련인데, 흙이 없으므로 흐르지 못하고 흐르지 않으니 융합하지 못한다. 돌과 뼈가 불편하게 융합되면 가운은 쇠한다.   과산(過山) : 산맥이 멈추지 않고 뻗어 있는 산을 과산이라 한다. 지기는 본래 산세가 멈추는 곳에 뭉쳐 있게 마련인데, 산세가 뻗어 있으니 지기가 멈출리가 없다. 이런 산에 묘를 쓰면 패가 망신한다고 한다.   독산(獨山) : 산맥이 이어져 다른 산이 여럿 어울려 있지 않고 홀로 서 있는 산을 말한다. 이런 산은 지기가 면면히 흘러 뭉치지 않고 지기 자체도 생겨나지 않아 산으로 적합하지 않다. 이런데 산소를 쓰면 자손이 끊겨 망한다. 지기는 후강전응(뒤는 언덕,앞은 물)하고 중산환합(무리를 이은 산이 둘러쌈) 하는곳에 뭉쳐 있는데 홀로 있는 산은 지기가 있을리 없다는 것이다.   동산(童山) 초목이 없는 황폐한 산을 말한다. 이런 산에서는 음양이 화합하지 않으니 지기가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 이런 황폐한 산에 묘지를 쓰년 집안이 빈곤하고 생계가 대대로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음양 조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산이 있는곳에 물이 있어야 하고 흙이 있는 곳에는 초목이 있게 마련인데, 그렇지 못하니 산기운이 지기(地氣)가 없고 그러므로 묘자리로 마땅치 않은곳이다. 다시 말하면 산맥의 발원지를 찾아야 한고, 태(胎).정(定).순(順).강(强).포(包).장(藏)등 6가지의 체가 순서대로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수구(水口)는, 들어오는 것은 보여도 출구(出口)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아울러 산세는 다시 말하자면 병풍을 두른 것처럼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택(陰宅) : 묘지를 뜻함. 산 사람은 양(陽)으로, 죽은 사람은 음(陰)으로 통한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집, 묘지.   양기(陽基) : 산 사람의 집 또는 도성(都城).읍촌(邑村)을 말함.   용(龍) : 땅의 기복(起伏)을 뜻한다. 말하자면 산맥의 기복이 용과 같다고 하는 데서 비롯된 말.   맥(脈) 혹은 절(節) 지맥이나 산맥의 기복을 용이라 한다면 용신(龍身)에는 음양의 생기가 흘러야 하는 것이다. 이 음양의 생기는 사람의 몸에서 피가 도는 것과 같은데, 이 생기가 흐르는 곳을 맥이라 한다. 이 맥이 일기일복(一起一伏)하고 좌절우곡(左折右曲)하는 것을 목간(木幹)이라고도 한다. 또 가지가 뻗어 나간 것을 절(節)이라 한다.   혈(穴) 용맥(龍脈)중에서 생기가 뭉쳐 있는 곳이다. 즉 정기(精氣)가 있는 곳. 이곳을 혈이라 한다. 침구학에서 사람의 어느 부분을 찾아 침을 놓는 곳을 혈이라 하는 것과 같이 산세에서도 그런 혈이 있다.   사(砂) : 혈(穴) 주위의 형세를 뜻한다. 이것은 지상술(地相術)이 전해 내려오면서 사(砂)라고 부른다.   국(局) : 혈과 사를 합쳐 양기냐 아니면 음택이냐 하는 것을 국이라 하는데, 음택국이니 양기국(陽基局)이니 하는 것이다.   내룡(來龍) : 일국(一局).일혈(一穴)에 이르는 용맥에 붙인 이름으로 맥이 혈에 들어가려는 곳을 말한다.   조산.종산(祖山.宗山) 넓은 의미로 내룡(來龍)중 그 혈에서 가장 멀고 높은 산을 조산(祖山)이라 하고, 가깝고 높은 산을 종산(宗山)이라 한다.   주산.후산(主山.後山) 내룡맥절(來龍脈節)중 혈 뒤에 높이 솟아난 산으로 대개 마을이나 묘지뒤에 있는 산을 뜻하며, 이런 산 밑에 마을이 있으면 마을을 진호(鎭護)한다는 의미에서 진산(鎭山)이라고 부른다.   입수(入首) 좁은 의미에서 내룡의 혈중(穴中)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입수(入首)라 한다. 혈.국을 용두(龍頭)가 들어간 곳으로 보는 것이니까, 이 용두가 마침내 들어가려고 하는 곳을 입수라 한다.   두뇌(頭腦) 입수와 혈과의 접합점(接合點)에서 좀 높게 솟아난 곳을 말하는데, 마치 용의 이마에 해당한다고 하여 두뇌라 한다.   성.사성(城.砂城) 두뇌(頭腦)에서 소맥(小脈)이 일어나 혈 주위로 둘러 쳐진 것을 말한다.   청룡.백호(靑龍.白虎) 혈이 남면(南面)한 곳이라면 혈 뒤의 내맥(來脈)에서 나와 혈 동쪽으로 두르고 혈 앞을 지나 혈 서쪽에서 그치는 산맥을 청룡(靑龍)이라 한다. 또, 혈 뒤 내맥에서 나와 혈 서쪽을 돌아 혈앞을 동쪽으로 뻗어 끝어 끝난 산맥을 백호(白虎)라 한다. 청룡.백호는 수호신(守護神)인 사신(四神 : 청룡,백호,주작,현무)중 그 동쪽과 서쪽을 호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좌청룡.우백호라 하는 것도 그 방위(方位)를 정하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명당(明堂) 이것은 혈의 앞(묘지)인 경우에는 무덤 앞, 집터인 경우에는 주건물(主建物) 앞에 해당되는 땅으로 청룡.백호에 둘러싸인 곳을 말한다. 명당에는 내명당(內明堂)과 외명당(外明堂)이 있는데, 내명당은 혈 바로 앞 평평한 곳을 말하며 "묘지에서는 묘판(墓板)이라는 곳이며, 집터인 양기(陽基)에 있어서는 주건물(主建物)의 앞뜰", 이 내명당에서 앞으로 좀 넓고 광대한 평지는 외명당이라 나누어 부른다. 이 명당이라고 하는 명칭은, 천자(天子)가 군신(群臣)의 배하(拜賀)를 받던 곳을 명당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득.수구(得.水口) 혈 또는 내명당의 양쪽에서, 또는 청룡.백호 사이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물의 발원처 (發源處)를 득(得)이라 하고, 그 물줄기가 그 용호(龍虎)와 서로 껴안는 사이를 흐르는 곳을 파(破) 또는 수구(水口)라 한다.   지현(之玄) 내룡이 바로 입수로 옮겨지려 하는데 그 맥형(脈形)이 가지(之)자와 같거나 검을 현(玄)자와 같이 굴곡되어 뻗어 온 곳을 말한다.   미사(眉砂) 입수에서 두뇌를 거쳐 혈로 옮겨지는 조금 긴 둔덕 또는 판막상(辦膜狀)을 이룬 곳을 말한다. 그 모양에 따라 아미사(蛾眉砂).월미사(月眉砂).팔자미사(八字眉砂)등이 있다.   안산(案山) 혈 앞에 사의 일종으로 좀 낮은 산을 말한다. 혈의 의안(倚案)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산.대산(朝山.對山) 혈 앞 사의 일종으로, 안산에 비해서 높고 큰 산. 마치 빈객(賓客)이 주인에게 절하는 것과 같고 신하가 임금에게 읍하는 것과 같으며, 자식이 부모를 받드는 것과 같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이 혈에 대하여 조공(朝供)하는 것과 같은 산을 말한다.   오성(五星) 산의 모양을 성(星).요(曜)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산형(山形)을 오행(五行)에 배(配)할 때, 또는 구성(九星).구요(九曜)에 배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목성(木星) 의산이란 산형이 목형(木形).목체(木體)를 이룬 것을 말하며, 금성(金星)의 산이란 산의 형태가 금체(金體)에 흡사한 산을 말한다. 이것을 성(星)이라 부르는 까닭에 오행(五行)이 하늘에 있어서는 상(象)을 이루고, 땅에 있어서는 형(形) 을 이룬다는 천지상형(天地象形)의 상응(相應)하는 원리를 따른 것이다.   목성(木星)의 산 : 나무가 바로 선 것과 같이 솟은 산.   화성(火星)의 산 : 불길처럼 뾰쪽하게 속은 산.   토성(土星)의 산 : 평편하고 벽돌 같은 산.   수성(水星)의 산 : 꾸불꾸불하여 움직이는 물결과 같이 뻗은 산.   금성(金星)의 산 : 산마루는 둥글고 아래는 넓어 마치 종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산. 조종산(祖宗山)   구성(九星) 오성(五星)의 정형(正形)에서 변형된것을 구성 또는 구요(九曜)의 산이라 한다. 구성은 빈랑(貧狼:木星의 變體), 거문(巨門:土星의 變體), 녹존(祿存:土星의 變體), 문곡(文曲:水星의 變體), 염정(廉貞:火星의 變體), 무곡(武曲:金星의 變體), 파군(破軍:金星의 變體), 좌보(左輔:金星의 變體), 우필(右弼:金星의 變體),등 오성의 정체(正體)에서 변형된것으로 아홉가지가 있다.(太陽.太陰.金水.紫氣.天財.天是.孤曜.燥士)   낙산(樂山) 산룡(山龍)이 혈을 맞을때는 반드시 이에 의지할 침락(枕樂)이 필요하다. 이 침락을 낙산이라 하는데 혈의 위에 있다는 것이다.   간룡.심룡(看龍.尋龍) 산맥의 내왕(來往)을 답사하고 그 진위(眞僞)와 생사(生死)를 보는 것을 간룡 또는 심룡이라 한다.   형세(形勢) 용의 혈을 맞을 때 내면적으로 생기가 내려와 머물고 융결한 곳을 찾으려면 산국의 형세를 살피고 호위.제사(諸砂)가 구비되었는가를 알려면 외면적 산형(山形)을 보고 혈을 정한다.   좌향(坐向) 혈의 중심,집처인 경우는 주옥(主屋)을 세우는 곳,음택(陰宅)인 경우는 널(棺)을 묻는 곳을 좌(坐)라 하며, 이좌가 정면하는 방위를 향(向)이라 한다. 이 좌향은 일직선상에 있고, 이것을 정하는 데는 내명당의 중앙에 자석을 놓고 자침의 회전축과 좌를 연결한 직선이 갑방위(甲方位:보통 24방위를 쓴다.)의 우로 뻗을 때는 좌(坐)를 갑좌라 부르고 ,이 선의 연장선이 반대축의 을방위(乙方位)로 뻗을때는 을향이라 부른다. 다시 말하면 자좌오향(子坐午向)이란 좌가 정북방에 있고 그 향(向)이 정남방을 향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정북(正北)은 24방위의 자(子)에 해당하고 정면은 오(午)에 해당한다. 풍수에 있어서는 동서남북의 명칭을 四卦,八干,十二支를 결합해서 사용한다.   용론(龍論) 용이란 산맥 즉 지맥을 말하는 것으로 왼쪽으로 뻗어 내린 산밑을 좌선룡(左旋龍)이라 하고 오른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을 우선룡(右旋龍)이라 한다. 곧게 내린 산맥을 직룡이라 하며, 살같이 달리는 듯한 산맥을 직룡이라 한다. 뻗어 나가는 산맥이 방향을 바꾸어 돌아가는 맥로(脈路)를 회룡(回龍)이라 하며, 야산 지대에 순순히 뻗어나간 산맥을 순룡(順龍)이라 한다. 달리는 방향에서 다시 솟구처 되돌아 반대방향으로 뻗어나간 산맥을 역룡(逆龍)이라 한다. 이 모든 행룡에 있어서는 어느 용이든 시발점이 있으니 이것을 가리켜 조산(祖山)이라 한다. 시조가 있기에 분맥이 있는 것이니 길게 뻗어 간 장룡(長龍), 짧게 끌고온 단룡(短龍), 서리서리 뭉쳐온 반룡(盤龍) 혹은 숨고 혹은 크고 작은, 혹은 솟아오르고 엎드리며, 혹은 넓고 얕으며,혹은 구부리고 끊어저 있다. 용이란 어느 낙맥(落脈)을 막론하고 조산, 즉 주산 낙맥을 중심으로 출맥하여 어떤 것은 일어서고,열리고 닫히며, 넓고 좁아 천 가지 만 가지의 기복이 수려하며, 그 생김이 살찌고 원만하며 끝이 단정하여 음양이 분명해야만 진룡진혈(眞龍眞穴)이라 이른다.   사세통설(四勢統說) 사세(四勢)란 주작,현무,청룡,백호를 말한다. 주작이라함은 앞에있는 안산(案山)을 말하며, 안산은 공작이 날개를 펴고 춤을 추는 듯 감돌아 있어 주객(主客)이 상대함에 다정한 모양으로 되어 있음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하여 안산이 등을 지고 승거(勝去)의 형상이면 불미하다. 현무라 함은 뒤에 따라온 산맥을 말함이니,현무는 머리가 곧고 얕게 굽어져 관기 정통한 형상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하여 용공이 기복 없는 형상이면 불가한 것이다. 만약 무현무(無玄武)라면 후백이 풍부함을 필요로 하며 높이 쌓인 것이 혈에서 한층 더 넓으면 실로 좋다고 하겠다. 백호란 오른쪽으로 솟구쳐 감돈 산을 말함이니, 산세가 치닫지 않는 형상으로 순순히 엎드려 혈을 호위하는 듯한 형국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하여 난폭한 형상과 도주하는 모양은 좋지 않다. 청룡,백호는 이중 삼중 겹겹이 둘러 있음을 더욱더 필요로 한다. 청룡이란 좌편에 둘러싸인 산세를 말함이니 청룡은 겹겹이 꿈틀꿈틀 굽어 감도는 듯 혈을 감싸 호위하는 듯한 형국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하여 곧장 내려가거나 반궁(反弓) 형상을 이루게 되면 가히 쓰지 못하는 것이다.    나성정설(羅星定說) 나성(羅星)이란 동서남북 주위에 솟아 있는 산을 말한다. 옛날 도시에 비하면 성곽과 같은 것이다. 부족함 없이 사방의 산이 높고 혹은 얕게 둘러 있음을 말함이니, 성곽이 곳에 따라 문이 있듯 나성에는 물이 들어오고 어느 쪽으로는 물이 나가는 수구(水口)도 있다.   조안정설(朝案定說) 부조안(夫朝案)은 혈 앞에 있는 산을 말한다. 앞에 있는 산을 일러 안산이라 하며,안산 뒤에 있는 산을 일러 조산이라 한다. 안산이 있으면 앞이 허하지 않고 수습이 되며, 주밀하여 사방이 단아하게 보이면 가히 좋다고 할수있다. 조산이 있은즉 더욱 당국(當局)이 빛을 발하니 조산과 안산을 겸비한, 가히 격을 갖춘 산이라 하겠다. 간혹 조산은 있으나 안산이 없고, 안산은 있으나 조산이 없는 땅도 있으나, 크게 구애될 필요는 없다.   영통설(靈統說) 사령(四靈)이란 관.귀.이.요(官.鬼.산신이.曜)을 말한다. 이요는 보이니 숨어 있지 못하고 관귀는 마땅히 숨어 있어서 나타나지 아니한다. 안산 배후에 있는 봉우리를 관(官)이라 이름하여 관의 형국이 돌려 보이는 회두(回頭)가 혈을 바로 비춰주는 듯한 상을 조혈(照穴)상이라 한다. 만약 득혈(得穴)에 관봉(官峰)이 없다면 좋은 자리가 못되는 것이다. 주산(主山)의 배후에 있는 봉우리를 일러 귀(鬼)라 한다. 귀상(鬼相)이 배후에 있되 봉우리 하나로 단정히 있음을 요하며 크게 솟아 있으면 역시 불미한 것이다. 암석(岩石)의 작은 산이 수구 중간 주변에 있는 것을 이(산신이)라 한다. 이봉(이峰)이란 항상 유정하여 서로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필요로 하며 이 가 없으면 불영(不榮)한 땅이라 하겠다. 소산암석(小山岩石)이 청룡백호 밖에 없는 것을 요(曜)라 한다. 요란 서로 뜻이 있어 바라보는 듯한 형국을 필요로 하며, 혹 요봉암석이 없으면 그 혈지(穴地)는 오래 가지 못한다.   논오성정형(論五星正形) 金,木,水,火,土의 다섯 가지 산이 있는데 그 형국에 있어서는 청아하고 둥글게 생긴 형체를 이루되 금산체(金山體)라 하며 머리가 약간 둥글게, 그 체형이 헌출하게 솟은 형국을 목산(木山),줄기차게 봉우리마다 파도처럼 나가다 머무르는 듯한 곡형(曲形)을 수산(水山), 산머리가 뾰쪽 솟아 충천(沖天)하는 듯한 형국을 화산(火山),사면이 후중(厚重) 하는 평평한 형체를 토산(土山)이라 하는것이다. 행룡 낙맥(行龍落脈)에 있어 오성(五星)에 천변만화 하는 양상이 혹은 상극으로 결혈 (結穴)되어 있음을 ㅇ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잘못 판단할 우려가 있다.   금산(金山) 金은 맑고 부드러워 산형 역시 밝고 바르다. 그러므로 金星의 형체를 태양(太陽)이라 하며 나지막이 솟은 형체를 일러 태음(太陰) 이라 한다. 금성이 가지는 행룡낙맥(行龍落脈)에 있어서 많이 모이는 혈처(穴處)가 대개 봉(鳳)이 춤을 추듯,새가 나는 듯한 봉무 비도(鳳舞飛島)의 형국이다. 옛글에 "金星形體에 結穴處가 多生高形 혹은 娥眉之形 혹은 愧凸之形에 結穴 됨도 金星만이 갖는 자연의 이치다."하였다.   목산(木山) 木星은 청수하면 높이 솟아 있어 겉으로는 강하고 안으로는 유하며, 마디마디가 결혈됨이 삼정혈(三停穴),통소형,일자목형,인형등에 낙맥되는 수가 많다. 발복(發福)에 있어서는 반드시 대귀(大貴)한 준걸(俊傑)이 나타나는 것이며 가히 장목성의진득(眞得)이라 한다.   수산(水山) 水星은 형체가 유하게 굴곡하며 그 성(性)이 다변하여 바른 모양이 적고 그 형국이 굽음이 많아 행룡 낙맥에 있어서 용사(龍蛇)와 같은 결혈이 많으며 혹은 曲流之處 나 洋洋曲水에 낙혈됨이 있다. 혈처는 平地連脈에 가장 많으며, 그 氣가 은은하여 형체를 식별하기 어려우므로 세심히 요찰해야 한다.   화산(火山) 火形은 항상 위 끝이 好動하므로 祖宗의 산체가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르는 듯한 형세로 밑으로 곱게 깔렸고, 형국이 비겸지류(남비비鎌之類)와 같아야 결혈처가 있느것이다. 체형이 수려하며 龍穴得局은 極品之地라 하겠다.   대산(大山) 토형은 평평하여그 형체가 순우(純厚)하며 행룡 낙맥이 있어서는 [冕流,玉屛,金書,誥軸]이다. 이와 같은 형국에 결혈이 되며 혹은 각첨(角尖)의 유형에도 결혈이 되는 수가 있다. 혈처가 높이 있어서 진혈(眞穴)로 득지(得地)한다면 발음(發音)이 대개 청규하게 되고, 얕고도 작은 자리는 목민(牧民)의 관이 연출하고 토성이 이어 나갔으면 반드시 부국(富局)이라 하겠다.   용신결혈상생(龍身結穴相生) 오성의 변화가 주산(主山)으로부터 결혈처까지 기복의 마디마디에 상생(相生)하여 결지(結地)되어 있다. 반드시 부귀의 땅이요, 충효 예의의 자손이 속출하는 대지이다.   용신결혈상극(龍身結穴相剋) 오성.용신이 주산으로부터 마디마디 상극되어 결혈되었으므로 반드시 재흉 환래하여 패가 망신하게된다. 자손 중 불충;.불효.불의의 사람이 생기니 이른바 패망의 땅이라 하겠다.   번화룡(번花龍) 행룡맥낙(行龍脈落)의 세가 거의 양편으로 가지를 놓고 달리는 것이 보통 산맥의 형태이다. 이것을 일컬어 용이 갖춘 귀족(貴足)이라 하며, 지네 발이라고도 한다. 번화룡(번花龍)이란 내룡(來龍)의 지각(枝脚)이 순하게 뻗지 않고 역으로 뻗어 있음을 말한다. 용신을 호위하지 않고 역폭한 형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형국에 재혈을 하면 패망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겁살룡(劫殺龍) 행룡의 변화가 심하여 오행을 분별치 못하게 상생상극하며,가다가 정맥을 이탈하여 산만 불수하며 겁맥탈기(劫脈奪氣)한 용신을 겁살룡이하 한다. 가히 대흉 대패의 땅이라 하겠다.   원진수도(元辰水圖) 원진자(元辰者)는 혈암의 득수(得水)가 곧게 흘러나가는 것을 말한다. 수직직거(水直直去),수직무란(水直無亂) 등의 수로를 말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당문파(黨門破)라는 것이 이것이다. 속패(速敗),속망(速亡)하는 충격의 혈지(穴地)이다. 단 원진자라도 앞에 산이나 물을 얻어 산수가 만전횡란(灣轉橫蘭)하게 돌아 있다면 초년의 발음(發陰)이 없다. 또한 복기낙룡 입좌(伏起落龍入坐)의 격은 갖추어져 있으되 오직 물한줄기에 실격으로 결점이 있다면 인위작(人爲作)이라 축항제돈(築항諸墩)하여 재혈한다면 격을 갖추게 되므로 대지가 되는 수가 많다. 여기에 산천 변화의 이(理)가 생하며 오행 변화의 화(化)가 있는 것이다.   반도수도(反跳水圖) 형체가 미묘하고 삼방(三方)이 주밀하여 형국은 되었다 하더라도 흐르는 물줄기가 혈처를 배반도사(背反跳斜)하여 흘러 간다면 천어(千語) 호평이 일언의 가치가 되지 않는다. 장후(葬後)반드시 속성 패산(敗産)의 땅이요 분산패주(敗走)하게 되니 음양의 산수 배합의 법이 아주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반포수도(反抱水圖) 수법(水法)에 있어 반포수는 간혹 있는 땅이다. 흔치 않으므로 혹은 만궁지형(灣弓之形)의 반대쪽에 있으나 때로는 홍국(洪局)으로 보는 데에도 있을수 있다. 반포수에 결혈이 되어 있다면 초년에는 약간 반복되지만 반드시 바뀌어 쇠망하게 되므로 역시 패망의 땅이다.   백룡도(白龍圖) 내롱이 겹겹 개장(開帳)하며 개자중압(個子中押)하여 수려하고 단아하게 결렬됨을 말한다.   생룡지도(生龍之圖) 용형의 변화가 망측하여 생룡됨이 사생으로 호술되어 횡룡(橫龍)이건 순룡(順龍)이건 회룡(廻龍)이건간에 용필(龍必) 요속기(要束氣) 진국(眞局)으로 되어 이기(理氣).생왕(生旺)하여 결렬되어 있음을 말한다. 어김없이 대발.대부.대귀(大發.大富.大貴)의 땅이라 하겠다.   명당(明堂)은 과연 있을까? 풍수설의 근본은 음양오행 사상에 어버이의 유해를 평안히 모시려는 효도의 사상이 합쳐서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하게도 우리 나라에선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방편으로 탈바꿈되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참으로 조상을 위한 마음에서 죽은 이의 영생댁(永生宅)이 되는 묘소를 풍광좋고 풍치 좋으며 조용하고 양지바른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효심으로, 또한 그만한 자리, 즉 풍광 좋고 풍치 좋으며 조용하고 양지바른 곳을 찾으면 그것이 바로 명당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역리학(易理學)이나 지상을 떠난 막연한 이치요 순수한 효심의 발로지만, 그러나 어떤 학술적인 이론도 그 근본은 똑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명당자리는 타산적이 아닌, 참으로 조상을 위한 효양의 마음자세에서 찾고 또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추호라도 타산과 이기심을 앞세워 조상을 명당자리에 모심으로써 부귀와 영화를 누리겠다는, 다시 말해서 조상의 "뼈를 팔아 먹겠다"는 모순된 자세는 고쳐야 한다. 그리고 순후한 효심에서 명당자리를 찾으면 하늘도 그 효심에 감동하여 계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당자리를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명당자리는 왜 음덕(陰德)이 있을까? 여기서 음덕이라 함은 땅의 덕을 말한다. 사함이 땅의 덕을 본다? 사실 그렇다. 사람은 조상한테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날때 자연 지기(地氣)도 유전받게 마련이라 한다.. 이 지기의 유전이 바로 사람 몸을 형성한 뼈인데 뼈는 바로 지기와 통하여 이 뼈가 명당자리, 즉 산기가 뭉쳐있는 곳에 묻히면 저절로 후손들이 부귀와 영화의 음덕을 보게 되는 것으로, 이 지기의 이기(理氣)가 결국은 뼈와 혼합되어 유전의 법칙을 이루므로 산기가 뭉쳐 있는 자리는 반드시 사람이 드러누울 수 있을 정도로 산기의 뭉침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명당자리란 그 재혈만 찾으면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당자리라고 하더라도 청룡이 없거나 두드러지지 않으면 자손이 없어 가운이 끊기는 법이다. 백호가 없거나 두드러지지 않으면 재물이 없어 가운이 가난을 면치 못한다. 또 앞에 주작의 부분을 둘러 막는 물줄기가 없으면 재물과 자손이 없는 법이라 좋지않다. 주작의 앞에 있는 불이 세차게 흐르지 않고 잔잔하며, 유유히 흐르고 물소리가 종용하면 자손이 관운을 받아 영화를 얻으며, 가운이 대대로 평온하고 화목하는 법이다. 이와 반대로 물소리가 슬프고 세차게 들리거나 물살이 빠르면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 않아 멸망할 기운이 있어 결국 그 가문은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명당자리의 토질(土質) 산세가 한데 모이고 앞에 물을 만나 지기(地氣)를 멈추게 하는 것이 명당자리라 했다. 꼭사람이 누울수 있을 만한 너비에 봉분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런 곳이 명당자리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도 명당자리가 되려면 토질을 갖추어야 한다. 바윗덩어리에도 사람이 누울수 있을 만큼 흙이 있어 그 흙만 긁어내면 바로 관이 누울수 있다면 명당자리로 손색이 없다.   좋은 토질이란? 토질에서 오색이 영롱해야 한다 관 넣을 자리를 팔때 흑 빛이 黃,黑,白,赤,靑이 고루 섞인 흙에서 서기가 비쳐 나올 듯이 윤택해야 한다. 습기가 많지 않아야 한다. 습기가 많으면 관운이 없다 물론 가믐에 타격을 주는 흉액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흙이 굳어야 한다. 푸석푸석하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또 크레 출세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큰 문제가 생길 그런 액운이 있는것은 아니라고 한다. 관을 넣을 자리에 물줄기가 있으면 집안에 액운이 그치지 않는다. 그물줄기를 둘려야 한다. 관을 넣을 곳에 돌반석이 있으면 자손이 끊긴다. 그 돌반석에 관을 얹어 놓을 때는 흙이 중간에 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묘지의 풍치림(風致林) 명당자리를 골라 묘를 썼으면 풍치를 돋울 나무를 묘지 주변에 심어야 한다. 묘지는 집과 연결된 곳이다. 산 사람의 집과 같아서 집을 풍치있게 꾸미려면 정원을 마련하여 가꾸듯 죽은 사람의 집(묘짐)도 풍치있게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듯 묘지 주위에도 꽃과 나무를 심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묘지로부터 10미터 밖에 심는다. 집에서도 나무 뿌리가 구들장 밑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와 같이 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무 뿌리가 묘지로 파고들면 좋지 않다고 한다. 또한 10미터 밖에 심더리도 뿌리가 길게 뻗지 않는 종류로 사철 나무나 상록수가 좋을 듯하다 물론 아카시아 따위의 나무는 뿌리가 길게 뻗기 때문에 묘지 주위에서 뽑아 버려야한다. 뿌리가 길게 뻗  지 않는 꽃나무는 어떤 종류든 심어 놓으면 죽은 이를 오래도록 즐겁게 할수 있을 것이다.       명당자리의 풀이비결 인걸은 지령(人傑地靈)이란 말이 있다. 잘난 사람도 나오고 못난 사람도 나오는 것은 모두가 산천의 수려한 기상과 둔탁한 기상에 의한 것이라는 애기이다. 산이 높고 물이 깊고 들이 넓으면 너그럽고 도량이 넓고 큰사람이 나오며, 산과 물이 좁아 협작하면 소견이 좁으며, 산이 험악하고 물이 탁하면 험하고 표독한 사람이 나오며,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면 그 동네가 윤택하여 부자가 많으며, 산천이 맑고 수려하면 얼굴조차 아름다운 법이다. 천을태을(天乙太乙)의 뾰족한 산이 구름 밖에 솟구쳐 있으면 벼슬이 법관에 오르고, 물러가는 문구멍을 짐승과 새 무습을 한 형국에 산과 바위가 감아 주면 한림학사가 나오는 법이요, 산 형국이 왼편에는 깃발이 날리는 듯하고 오른편에는 북이 울리듯 솟아 있으면 대장, 장신이 나올 자리요, 산세가 뒤에는 병풍을 친 듯하고 앞에는 장을 두어 막아주면 재상과 문신이 나올 땅이다. 작은 산이 위에는 뾰족하며 아래가 둥그스름한 형상을 은병(銀甁)이라 한다. 이쯤 되면 석숭(石崇)같은  부자가 생겨나고, 산이 구부러져서 높고 낮음 없이 껴안은 것을 옥막형(玉幕形)이라 하는바 배도(裵度)같이 귀하게 되는 명재상이 나올 땅이다.     상형세가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미인의 눈썹인 듯한 모양은 아미산(蛾眉山)이라 이르는데, 산형세가 이  쯤 되면 딸이 귀하게 되어 왕후 아니면 귀비가 나올 땅이요, 천마의 형국이 남방에 위치하여 머리가 번쩍 들리고 몸통은 약간 낮아 평평히 나아가다가 꼬리가 되어 톡 떨어지면 반드시 왕후가 나올 자리이다. 또   앞뒤 좌우로 기운차게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천 봉우리 만 봉우리 호위한 것은 천궁녀의 기상이요, 앞뒤로 벌어진 낮은 산봉우리가 팔백형화(八百炯火)가 떠오르는 듯한 자리는 모두 극위 극존한 제왕이 나타날 자리이다.     여러 산이 그치는 데 진혈(眞穴)이 있고 여러 산이 모이는데 명당이 있는 것이다. 산체가 모두 등을 져 달아나면 인가파산이 되는 법이요, 한물이 기울어 흘러빠지면 관에서 물러서고 실직하게 되며, 산 형상이 어지러운 치맛자락 같으면 여자가 음분(淫奔)하고 물이 당국 안으로 꿰뚫어 나가면 자손이 절손되는 법이다.
29    명절(歲時風俗)과 24절기(節氣) 댓글:  조회:3660  추천:1  2012-07-15
◈ 명절(歲時風俗)과 24절기(節氣)   목록가기 2002.6/6. 이후 방문       ◈ 잊혀져 가는 세시풍속(명절) 선조(先祖)들이 전승해온 수많은 문화유산과 우리의 각종 풍습이 이미 일부분은 자취를 감췄으며 일부는 사라져가는 위기까지 맞고 있다. 이에 선조들의 지혜와 숨결을 간직한 우리들의 고유 풍습과 함께 안타깝게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세시풍숙(歲時風俗)들을 월별로 엮어놓은 것이다.   ▶사라져 가는 세시풍속에 대한 소고 ▶삼복(三伏) ▶토속신앙 ▶칠월 칠석 ▶정월 설날 ▶칠월 백중 ▶정월 대보름 ▶추석 한가위 ▶2월 영등 할미 ▶구월 중구(중양절) ▶2월 머슴날 ▶시월 상달고사 ▶삼월 삼짇날 ▶손돌풍 ▶한식(寒食) ▶동지(冬至) ▶오월 단오 ▶제석(除夕) ▶유월 유두     ◈ 이십사 절기(二十四節氣) : 춘 春 ▶입춘(立春) : 2월 4일이나 5일
28    현재 우리민족 전통장례와 염습하는 방법 --성원정리 댓글:  조회:3372  추천:3  2012-07-15
현재 지킬수 있는 우리민족 전통장례 자고로 우리민족은 효도를 사회의 첫째준칙으로 삼아 왔으며 례의를 모든 행사에서 선행시켜 왔습니다.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이며 우리민족의 일상생활과 상관되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입니다. 우리민족의 장례풍속을 성의있게 지키므로써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달할수 있고, 부모에 대한 효도를 원만하게 완성할수 있으며, 후대에 대한 전통교육을 효과적으로 진행할수 있습니다. 한생에서 좋은 보답을 받으시려거든 우리민족의 장례풍속을 성의있게 지킵시다.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풍속은 그 내용이 많고 절차가 몹시 번잡하였으나 시대의 발전에 따라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화 되였습니다. 아래에 장의관에 가서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간소함을 견지하고 민족의 특색을 살리면서 현재 지킬수 있는 조선족 전통식 장례절차를 실용의 요구에 맞게 정리하였습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렴습을 해야 합니다. 이 절차는 될수록 전문 복무인원이 하도록 하십시요. 장례 복무중심에 련락하시면 됩니다.   2, 염습이 끝나고 령구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영결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장의관 령구실이나 혹은 집에 돌아와 객실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삼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상주와 유가속을 상대로 맞인사를 하고 위안의 말을 하며 상가에 부의금을 줍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구와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날 장의관에 가서 고별식을 할때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수질을 돌리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 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고별식은 시대의 특색에 맞게 통용식으로 간편하게 끝내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5,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는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리고 강신, 독축, 초헌, 아헌, 종헌, 첨작, 유식, 사신, 이러한 순서로 진행합니다.(《안신제 지내는 방법과 절차》참조) 마지막에 기름내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운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은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함께 절을 세번하면 됩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납골당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제사때문에 골회함을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먼저《(今日祭祀暫遷, 敢告!) 오늘 제사때문에 잠시 움직이오니 그리 아룁니다!》하고 말씀 올리고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것이 례의입니다.   조선족 렴습의 방법과 절차   렴습전 준비 물품: 1,수의(남녀각기 웃옷 세벌, 아래 세벌); 2,버선; 3,악수; 4,실타래; 5,쌀; 6,면백; 7,명모; 8,령침; 9,렴포(130×500); 10,포끈; 11,천금; 12,지요; 13,명정   렴습 실시 인원이 갖추어야 할 물품: 1,위생복; 2,장갑; 3,마스크; 4,소독약; 5,약솜; 6,습건; 7,가위; 8,핀센트; 9,손톱깍개; 10,나무숟가락; 11,분필   조선족 장례에서 렴습(殓袭)은 현재까지 보유되고 있는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가장 중요한 풍속의 하나입니다. 현재 병원에서 사망한 시신을 렴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렴습 실시 인원을 두사람으로 하는것이 좋으며, 먼저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렴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시호와 성명을 부르고 “옥보-,옥보-,옥보-”하고 웨침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드립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몸 아래를 속벌까지 벗기고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줍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속벌까지 벗기고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주는데 녀성의 경우에는 오른쪽에, 남성의 경우에는 왼쪽에 감습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드립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드리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 하고 외움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드립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이고 명모를 쓰이여 드립니다.   6, 小殓: 전폭의 렴포로 유체를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으며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汉字)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만약 생전에 직위가 있었으면 관직을 쓸수도 있습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씁니다. 만약 생전에 모 부문의 국장이였다면 “學生”을 “局長”으로 고쳐 쓰고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고인의 유체우에 덮습니다.   8, 永決礼: 염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가속들을 모두 불러 고인의 유체옆에 모이게 하고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 다 함께 세번 허리굽혀 영결례를 시킵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으므로 령구차가 온후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담가에 담고 머리부터 바깥으로 나가고 발부터 영구차에 실으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7    안신제 지내는 방법과 절차:--성원정리 댓글:  조회:2945  추천:0  2012-07-15
안신제사 지내는 방법과 절차 (조선족제사 사회자 집행구령)   사망자의 골회함 혹은 유상을 모시고 제사상 차립니다. 상주를 비롯한 유가속은 제단의 왼쪽에 서고 기타의 조문 객들은 제단의 정면에 서며 사회자가 제단의 오른쪽에 서고 집사가 그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먼저 간단히 인사의 말을 올립니다: 사람은 태여나면서부터 그 어느때엔가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것은 인류 문명표준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자고로 우리민족은 효도를 사회의 첫째 준칙으로 삼아 왔으며 례의를 모든 행사에서 선행시켜 왔습니다. 우리민족의 장례제사문화는 우리민족의 맥락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이며 우리민족의 일상생활에 상관되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입니다. 우리민족의 장례제사풍속을 성의있게 지키므로써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달할수 있고, 부모에 대한 효도를 원만하게 완성할수 있으며, 후대에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한생에서 좋은 보답을 받으시려거든 우리민족의 장례제사풍속을 성의있게 지켜 주십시요.    방금전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고 모모모 존령님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지금 존령께서는 형체를 금방 잃으시고 몹시 불안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풍속에 좇아 가속과 함께 안신제사를 올리여 존령님의 안신과 명복을 삼가 빌겠습니다.   첫번째 순서로 降靈,開飯揷匙입니다. 존령께서 제사 받으려 강림하십니다. 일동 묵-도! (3초,묵도필입니다) 일동이 묵도하는 사이, 집사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로 독축,초헌 (讀祝,初獻)입니다. 상주부부 나와서 시립하시요. 축문을 읽어 올리겠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모일 (孝子賢孫 敢昭告于) 효자현손 감소고우 (顯考府君○公之靈) 현고부군 ○공지령-(母喪-현비유인) (日月不居 奄及初虞) 일월불거 엄급초우 (夙興夜處 哀慕不寧) 숙흥야처 애모불녕 (謹以淸酌 庶羞哀薦) 근이청작 서수애천 (安事 尙饗) 안사에 상향하시라 하였사와 … … 일월성신 쉬지않아 벌써초우 웬일인고? 슬픈생각 아픈생각 밤낮으로 불녕하야, 맑은술과 음식으로 안신제를 올리오니, 두루 흠향 하옵소서!                   (독축 필입니다.)   상주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상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상주주부 함께 초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상주부부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아헌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아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아헌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 안해, 혹은 상주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종헌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종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종헌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문헌작은 끝나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상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상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고인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로 첨작(添酌)입니다. 첨작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첨작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첨작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첨작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가속에 여쭈어 보면서 여러가지 관계로 오신 손님들이 빠뜨림 없이 모두 인사할수 있게끔 보장합니다.   여섯번째 순서로 유식(侑食)입니다. 존령께서 조용히 진지 드시는 순서입니다. 일동 묵-도! 일동이 묵도하는 사이 집사는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놀고 반찬도 집어 놓으면서 존령의 식사시중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의 저가락을 움직여 놓습니다.  (9초, 묵도 필입니다.)   일곱번째 순서로 송신(送神)입니다. 숙주 한그릇 따라 올리겠습니다. 집사가 물 한그릇 따라서  제단우에 올려놓습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오늘 승천하시였습니다! 존령님의 안신과 명복을 부디 빌어 모두 함께 송신례로 세번 경례를 올립니다:   시조님께 첫번째 경례!- 조성들께 두번째 경례!- 존령님께 마지막 경례!- 경례 필입니다.   마지막 순서로 철찬(撤饌)입니다, 가속에서 계속하여 기름내(油香味)피우시고 오늘의 안신제사는 이로서 끝냅니다. 오늘의 안신제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음덕을 많이 입으시고 부디 건강하십시요! 가속에서 서둘러 제사상을 치우고 기름떢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우며 기름내 피우면서 몽상, 상장, 축문, 등 장례비품들을 모두 살읍니다. 다음 제단에 기름떡 아홉개만 그릇에 담아 올려놓고 상주와 주부만 나와서 함께 세번절, 혹은 세번인사를 올립니다. 이것으로 안신제사가 끝납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6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례의:--성원정리 댓글:  조회:3069  추천:0  2012-07-15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방법과 절차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행사는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현대에 새롭게 생긴 풍속으로서 여기에는 두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화장이 끝난후 골회함을 직접 릉묘에 모시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납골당에 보관했던 골회함을 다시 릉묘에 옮겨 모시는 경우인데 보통 이 두번째의 경우가 많습니다.   첫번째 순서: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모셔 내올때 먼저 골회함을 보관했던 보관함의 문을 열고 그 앞에서 상주가 머리숙이고 조용히 아룁니다: 《(今日吉辰遷宅,敢告!)오늘 길한날에 새집으로 옮겨 모시겠으니 그리 아룁니다.》 상주는 세번 경건히 경례한후 골회함을 두손으로 받혀들고 납골당을 나옵니다. 보통 지정한 차에 앉아 릉묘까지 가게 되는데 상주는 차에 앉아서도 골회함을 시종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가는것이 례의입니다.   두번째 순서: 릉원에 도착하여 상주는 차에서 내린후 친지들의 옹위를 받으며 골회함을 받들고 가족들과 함께 릉묘로 향해 천천히 걸어 갑니다. 년중절이여서 사람들이 특별히 많을때 좋기는 한분이 앞에서 길을 내며 인도하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세번째 순서: 릉묘에 도착한후 골회함을 릉묘대에 올려놓고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지냅니다. 그다음 상주를 중심으로 일동이 골회함을 마주하여 섭니다. 사회자가 웨침니다: 《平土-成墓 讀祝입니다!- (默哀)묵념!-.》 일동이 골회함을 향하여 머리숙이고 묵념하는 사이 사회자가 축문을 읽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 모일 (孝子[女]某某 敢昭告于) 효자(녀)모모 감소고우 (顯考某官府君) 현고모관부군이요-(母喪-현비유인 모씨) (灰歸芚席 魂魄遊天) 회귀둔석 혼백유천이라 (幽宅旣成 伏愉尊靈) 유택기성 복유존령할제 (舍舊從新 是憑是依) 사구종신 시빙시의하소서 골회를 여기에 두시고 혼백은 하늘을 노시나이다 새 유택 다 지었사오니, 엎드려 여쭙건대 존령께서는 낡은것을 버리시고 새것에 좇으셔, 이곳에 기대시고 의지하소서. 네번째 순서: 독축이 끝나면 역공들이 서둘러서 골회함을 릉묘의 함실에 넣고 덮개를 덮고 릉묘를 봉합니다. 역사가 끝난후 상주를 중심으로 일동이 다시 릉묘앞에 섭니다. 사회자가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님의 안택을 부디 빌어 경례를 올립시다: 첫번째 경례!- 다시 경례!- 또다시 경례!-》   다섯번째 순서: 순서가 이쯤되면 안장행사는 끝났으나 전통례의에 근거하여 안택안신제사를 지냅니다. 보통 릉묘앞은 자리가 비좁으니 자리를 옮기여 따로 제사장소를 정합니다. 자리가 정해진후 제사상 차려놓고 유가족과 제사객들이 제단의 왼쪽에 서고 사회자가 제단의 오른쪽에 섭니다.   제사를 시작하여 첫순서로 가족에서 제문을 작성하여 읽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제사방법은 기본적으로 묘제사 방법을 기준하고 축문은 이미 읽었으니 만가(挽歌)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았는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두갑자도 못삽니까? 하늘에서 오셨다가 하늘다시 가셨지만, 이세상에 쌓은공덕 달과함께 빛나리다!   식구들을 별하시고 기왕이면 가셨으니, 모든재액 오늘로써 끝을내여 주옵소서! 이가문에 아직까지 질고여건 남았다면, 깨끗하게 말끔하게 씻어가져 가옵소서!   자식손군 번영하고 백년가업 흥성토록, 존령께선 구천에서 보우하여 주옵소서!   화장하여 골회함을 직접 릉묘에 모시는 경우에는 위의 두번째 순서부터 실행하고 안장이 끝난후 안신제사를 따로 재냅니다. 안신제사는 따로 안신제사 방법에 기준하면 되겠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5    제사상(祭桌)차리는 방법:--성원정리 댓글:  조회:5174  추천:0  2012-07-15
제사상(祭桌)차리는 간이 방법: 조선족 장례와 제사에서는 령좌와 제사상을 보통 한상에 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제사에서 령좌와 제사상을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제사상 안쪽 중간을 신위로 하고 유상과 지방을 놓습니다. 유상을 좀 높이 걸어 놓을수도 있습니다. c, 신위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신위 앞 첫줄에는 메밥, 물,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전, 적, 그리고 기타 반찬들을 정연하게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떡류와 부식품들을 보기좋게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K,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특정 제사상 차릴때에도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되겠습니다.       (참고) 전통적으로 제사상에서의 기본원칙   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깁니다)에 남향으로 앉히고 그 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제사상 진설 원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梨枾.   제사상 진설 방법; 동쪽은 좌양이요, 서쪽은 우음이라, 생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고, 익은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으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낮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우이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아래니 후에 놓으며,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고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습니다.   제사상 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는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줄에는 반찬류를 놓고,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제물 금기: 제사상에 개고기와 칼치, 멸치, 꽁치 등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제사상에 복숭아와 토마토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제사음식에 고추가루와 마늘양념을 보통 쓰지 않습니다. 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않고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합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4    조선족 장례 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성원정리 댓글:  조회:4194  추천:1  2012-07-15
 조선족 장례 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들이 많았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금 와서는 많이 취소되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와 제사는 어디까지나 슬픔과 불행을 처리하는 엄숙한 행사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연히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되며 잘못을 범할가봐 조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에 기초하여 지금도 사회적으로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적지않은 금기사항들이 보류되여 있거나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장례,제사와 상관하여 현존하는 금기사항들을 몇가지 정리하여 적었습니다.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임신한 딸은 장례에 참가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 처리하며,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기지 않고 처리합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합니다.   K, 친인이 객사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장례용품이나 제사소물을 살대 시장식 흥정을 삼가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복숭아와 토마토는 제물로 쓰지 않으며 제사음식에 고추가루, 마늘, 파 등을 쓰지 않습니다   N, 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 않으며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O,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해에 자기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P,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새로운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Q,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3    비석제사:--성원정리 댓글:  조회:3434  추천:0  2012-07-15
비석제사   사망한 친인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는 것도 일종 아름다운 소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묘소에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때에 묘비를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세웠다 해도 림시로 목비를 세우는 정도였습니다. 그후 조건이 허락되면 자금을 모아서 비석을 깎아 세웠는데 일종 효행으로 간주 하였습니다.   비문의 통용 격식은 보통 정면 중간에 “故 某某某之墓”라고 내리쓰고, 왼쪽 변에는 “某年 某月 某日生”이라고 내리쓰고, 오른쪽 변에는 “某年 某月 某日卒”라고 내리쓰며, 뒤면에 고인의 생평, 혹은 자식들의 이름과 비석을 세우는 데 부의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 혹은 단체의 명칭을 쓰기도 합니다. 합장비석일 경우에는 비석의 위치에서 남좌녀우, 남선녀후의 격식으로 비문을 씁니다. 이 외에도 많은 격식들이 있으니 각 가문의 뜻에 따라 적당한 격식으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저승의 모든것을 꺼꾸로 리해하여야 한다는 일설이 있어 두 이름의 위치가 서로 바뀌여 새겨진 합장비석도 있었는데 조상들의 리해에 따를 일입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비석을 세우는 날을 보통 음력 구월구일 중양절로 선택하며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음력으로 칠월칠일 칠석, 오월오일 단오, 삼월삼일 양춘, 이 세날중에서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외에 주역으로 택일을 하여 행하기도 합니다. 립비 사전에 필요한 준비공작을 원만하게 합니다.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순서: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두번째 절차: 비석을 세울 자리에 삽으로 광을 팝니다.   세번째 절차: 광앞에서 간단한 의식을 가집니다. 축인이 석물(石物)축을 읽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 모일 (孝子俯首 敢昭告于) 효자부수 감소고우 (顯考訓長府君之墓) 현고학생 부군지묘(母喪에 현비유인) (伏以 昔行襄奉) 복이하야 석행향봉 (儀物多闕 今至有年) 의물다궐 금지유년 (謹具石物 用衛墓道) 근구석물 용위묘도 (伏惟尊靈 是憑是安) 복유존령 시핑시안   엎드려 여쭙건대 세월이 류수같아 여기에 뫼신지도 여러해가 갔습니다. 오늘 정성들여 비석을 다듬어서 묘소앞에 세웨놓고 우러르자 하오니. 존령께서 부디부디 안신 하옵소서.   석물축을 읽고는 축문에 불을 달아 광안에 던집니다.   네번째 절차: 역공들이 비석을 세울 대를 쌓고 비석을 세웁니다. 그리고 고인의 아들을 비롯한 가문과 단위의 주요 성원들이 차례로 흙을 한삽씩 떠서 상징적으로 묻습니다.   다섯번째 절차: 역공들이 다 함께 흙을 묻고 다짐니다.   여섯번째 순서: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비석제를 지냅니다. 기본 절차는 청명이나 추석때의 묘제사와 같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2    돐제사와 삼년제사:--성원정리 댓글:  조회:3502  추천:0  2012-07-15
돐제사와 삼년제사   돐제가 소상(小祥)이고 삼년제가 대상(大祥)입니다. 삼년제 지내고 탈상합니다. 소상과 대상은 축문이 조금 다를뿐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사망일이 되는 전날 저녁, 해지는 것을 기준하여 집에서 석전(夕奠)을 올리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아침에 조전(朝奠)을 올리고, 낮에 산소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만일 산소를 쓰지 않았고 골회함도 보관하지 않았다면 조전을 좀더 자상히 지내는 것으로 제사를 끝낼수도 있습니다. 혹은 경우에 따라 전날의 석전제나 새벽제, 조전 등을 모두 취소하고 당날의 한번 제사로 모두 끝낼수도 있습니다. 제사날 오후가 되면 객실에 제사상을 미리 차려놓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될수록 북쪽켠에 차리되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인정하고 그에 기준하여 차립니다.   첫번째 순서; 강신,개반삽시(降神,開飯揷匙)입니다. 해 지는것을 기준하여 사회자가 자리를 정돈합니다. 제주(장례때의 상주가 제사에서 제주가 됩니다.)와 주부를 비롯하여 직계가속은 제사상을 기준하여 왼쪽에 서고 방계친속과 기타의 사람들은 제사상 맞은켠에 서며 사회자가 제사상 오른쪽에 섭니다. 따로 집사가 있을 경우 사회자의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기침을 가볍게 하며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일동을 지휘하여 세번 경례 시킵니다: “존령 강림이요!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장례나 제사에서 보통 세번절 혹은 세번경례를 하는데, 상징적으로 첫번째 절 혹은 경례는 가문의 시조님께 드리는 것이고, 두번째 절 혹은 경례는 시조의 자손부터 망자의 부모님까지의 선조님들께 드리는 것이며, 세번째 절 혹은 경례가 바로 망자에게 드리는 것으로 됩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 독축,초헌(讀祝,初獻)입니다. 제주부부가 나와 제단앞에 머리 숙이고 서 있습니다. 사회자가 높은 소리로 축문을 읽습니다(략-제사에서 축문은 필수) 그리고 만가를 읽습니다(략-만가는 가문에서 작성할수 있음) 축문, 만가가 끝나면 제주는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제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부부 함께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의 반려, 혹은 제주의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속의 헌작은 끝났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제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제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망자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 첨작(添酌)입니다.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지만 지금은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첨작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유식(侑食)입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떠서는 국그릇에 세번 놓습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의 저를 움직여 놓습니다. 잠시 묵도를 드립니다(9초좌우).   일곱번째 순서; 리성(利成), 사신(辭神)입니다. 사회자가 물 한그릇을  제단우에 올려놓고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승천하신지도 어느덧 한돐(혹은 두돐)이 됩니다! 고 모모모 존령님의 명복을 부디 빌어 다 함께 세번 경례를 올립시다: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여덟번째 순서; 사회자가 석전제의 결속을 선포합니다. 제사상은 밥과 국만 내리우고 다른 제물들은 다치지 않고 새벽제에 다시 씁니다. 가족에서는 제사객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그들이 휴식할 장소를 알아 봅니다.   아홉번째 순서; 새벽제는 자정(0시)을 기준하여 지내는데 그 기본절차는 석전제때와 같습니다. 새벽제가 끝나면 이튿날 묘제를 지낼경우 제사상을 정리하고 보충할것을 보충하여 낮에 산소나 납골당에 가지고 갈 제물들을 따로 포장하여 놓습니다.   열번째 순서; 사망일 당날 아침 해 뜨는것을 기준하여 간단하게 조전(朝奠)을 올립니다. 메밥과 국, 그리고 간단한 반찬을 올리고 제주 부부가 와서 술을 붓고 세번 절을 합니다. 일동이 서둘러서 아침을 먹고 산소에 갈 차비를 합니다.   열한번째 순서; 산소를 썼거나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 묘제를 산소나 납골당에 가서 지내는데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고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습니다. 그 다음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절차인데 기본 순서는 안신제때와 같습니다.   마지막 순서: 묘제를 끝낸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1    면례(緬禮)와 합장(合葬):--성원정리 댓글:  조회:3553  추천:0  2012-07-15
면례(緬禮)와 합장(合葬)   면례(緬禮) 조선족 전통장례 풍속에 의하면 면례란 원래 장례를 다시 지낸다는 뜻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그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잘 정리한후 다시 그자리에 묻고, 만일 그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산자리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것을 말하는데 풍수지리에 따른 일종의 효행이였습니다. 지금은 도로나 기타건설의 수요에 의하여 移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사 가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穷搬家,富迁坟。)”고 하였습니다. 사회의 수요에 응하시여 자기 가문의 묘를 기꺼히 옮김으로써 사회에 유리하고 가문과 후손들의 번영창성에도 유리할수 있으며 또 면례를 통하여 무거운 사상 보따리와 실제 부담을 덜수 있으므로 지금도 어느정도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첫번째 순서: 면례하여 새롭게 산소를 쓸 경우에는 먼저 새로운 산자리를 정하고 굴심을 하는데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면례하여 화장할 경우에는 빈의관에 련계하여 할수도 있고, 또 자체로 태울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순서: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세번째 순서: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네번째 순서: 가속에서 상주나 대표인이 먼저 세삽을 뜹니다.그다음 역공들이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다섯번째 순서: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화장할시에는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 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줍니다. 일곱번째 순서: 새롭게 산소를 쓰는 경우, 칠성판을 광에 묻고 봉분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내는데 기본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화장하는 경우, 보통 골회를 받아서 산이나 강물에 뿌리여 처리한후 안신제를 지냅니다.   합장(合葬) 합장은 돌아가신 부모를 한자리 묘소에 함께 묻는것을 말하는데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홀로 모시던 부모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한 부모의 묘를 째고 그 옆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중에서 한곳을 면례하여 가져다가 합장하는 것이며, 세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를 모두 면례하여 다른곳에 가져다 합장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한개 묘혈에 두개 광을 파는데 보통 남좌녀우의 원칙으로 망자의 위치에서 顯考(사망한 부친)자리가 왼쪽이 되고, 顯妣(사망한 모친)자리가 오른쪽이 됩니다. 과거에는 저승의 모든것을 꺼꾸로 리해하여야 한다는 일설이 있어 그 반대로 합장된 옛묘가 많은데 조상들의 리해에 따를 일입니다. 두 광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벽을 두고 그 벽 중간에 통로를 내고 채색 사다리를 놓는데 그 뜻인즉 두분 망령이 자주 래왕하게끔 편리하게 한다는 자손들의 지극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사망한 부모의 두 골회함을 한곳에 합장할 경우에도 위의 방법을 참작하여 조절하며 행하시면 되겠습니다.   면례하여 합장하는 경우에는 면례의 절차와 매장의 절차를 결합하여 지킬것이요, 먼저 사망한 사람의 묘를 째고 후에 사망한 사람을 겹장할 경우에는 장례때의 매장의 절차를 따르면 되겠습니다. 합장을 끝내고 성분제 지낼때는 합장축을 읽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20    생일제사와 환갑제사:--성원정리 댓글:  조회:5047  추천:0  2012-07-15
생일제사와 환갑제사   망자의 생일을 기념하여 지내는 제사가 생일제사이고, 망자의 환갑년에 지내는 생일제가 곧 환갑제사 혹은 사갑제로 됩니다. 생일제사 혹은 환갑제사는 집이나 례당에서 지낼수도 있고 또 산소에 가서 지낼수도 있는데 간소함을 제창하는 현실에서 한번의 제사로 끝내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환갑제사에서는 가속에서 의례 환갑옷을 한벌 갖춥니다. 환갑제사상 차릴때에는 환갑축제상 차리는 방법을 참조하여 조금 간소하게 차리며 환갑제사상 안쪽 중간에 고인의 유상과 지방옆에 가속에서 성의껏 준비한 환갑옷을 한벌 놓습니다.   첫번째 순서; 강신,개반삽시(降神,開飯揷匙)입니다. 사회자가 자리를 정돈합니다. 제주(장례때의 상주가 제사에서 제주가 됩니다.)와 주부를 비롯하여 직계가속은 제사상을 기준하여 왼쪽에 서고 방계친속과 기타의 사람들은 제사상 맞은켠에 서며 사회자가 제사상의 오른쪽에 섭니다. 따로 집사가 있을 경우 사회자의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일동을 지휘하여 세번 경례 시킵니다: “존령 강림이요!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 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 독축,초헌(讀祝,初獻)입니다. 제주부부가 나와 제단앞에 머리 숙이고 서 있습니다. 사회자가 높은 소리로 망친수신축문을 읽습니다(략-제사에서 축문은 필수) 그리고 만가를 읽습니다(략-만가는 가문에서 작성할수 있음) 축문, 만가가 끝나면 제주는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제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부부함께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의 반려, 혹은 제주의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속의 헌작은 끝났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제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제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망자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 첨작(添酌)입니다.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지만 지금은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첨작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유식(侑食)입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떠서는 국그릇에 세번 놓습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의 저를 움직여 놓습니다. 잠시 묵도를 드립니다(9초좌우).   일곱번째 순서; 리성(利成), 사신(辭神)입니다. 사회자가 물 한그릇을  제단우에 올려놓고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오늘 생일(혹은 환갑)을 맞음에 살아계셨으면 경사스러울 것이나 승천하셨던들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자손들이 모처럼 생일(혹은 환갑)상 차리고 생일(혹은 환갑)제 올리오니 고 모모모 존령님의 명복을 부디 빌어 세번 경례합시다: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제사비품(환갑옷 포함)들을 모두 살으고 제사를 끝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19    골회를 강에나 산에 살포장 하는 례의:--성원정리 댓글:  조회:3348  추천:0  2012-07-15
골회를 강에나 산에 살포장(撒抛葬) 하는 례의:   골회를 살포장 하는 것은 기실 가장 시대적인 안장으로서 골회를 버린다고 생각하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살포장을 하였다 하여도 안신제사와 돐제사, 삼년제사까지는 명심하고 지내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골회를 살포장 함에 있어서 크게 네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 유체를 화장하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   유체를 화장한후 골회를 따로 받지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안신제사와 돐제사, 삼년제사까지는 명심하고 지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두번째: 유체를 화장하고 골회를 받아서 따로 살포하는 경우   유체를 화장한후 상주는 골회주머니 혹은 골회함을 받아서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지정한 차에 앉아서 예정한 살포 현장으로 갑니다. 살포현장은 강이나 산야로 할수 있습니다.   살포할때 살포자는 손에 흰장갑을 끼고 골회를 한줌씩 쥐여서 정중히 살포합니다. 본인들의 의향에 따라서 가족과 친척 친우중에서 그 누구나 손수 살포에 참여할수 있습니다. 골회함을 기울여 쏟아 버리거나 골회함 통채로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살포가 끝난후 빈 골회함은 땅에 묻거나 불에 살읍니다. 그대로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합니다.   살포장이 끝난후 간단히 안신제사를 지냅니다.   세번째: 납골당에 보관했던 골회함을 살포장하는 경우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모셔 내올때 먼저 골회함을 보관했던 보관함의 문을 열고 그 앞에서 상주가 머리숙이고 조용히 아룁니다: 《(今日吉辰遷移,敢告!)오늘 길한날에 다른곳에 옮겨 모시겠으니 그리 아룁니다.》 상주는 세번 경건히 경례한후 골회함을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납골당을 나옵니다. 보통 지정한 차에 앉아 예정한 살포현장까지 가게 되는데 상주는 차에 앉아서도 골회함을 시종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갑니다.   그다음 살포절차는 위와 같습니다.   네번째: 낡은묘를 면례하여 해골을 태운후 살포장하는 경우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묘를 지켜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인 절차입니다,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줍니다.   해골은 화장터에 위탁하여 화장하는것이 편리합니다. 골회를 따로 받지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가 많으며, 또는 골회를 받아서 따로 강이나 산야에 살포장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포장이 끝난후 합당한 자리를 정하여 유상이나 지방을 놓고 간단히 안신제사를 지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족장례연구사무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03-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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