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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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려장》무덤떼 팔가자에 있었다. 댓글:  조회:4374  추천:0  2013-11-17
《고려장》무덤떼 중국 연변의 팔가자에 있었다.   《고려장》(高麗葬)이란 부모가 늙어서 일할수 없게 되면, 산속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부모를 버려 두었다가, 죽게 되면 장례를 지냈다는 전설속 고려인들의 장사 풍속으로서, 오늘날에는 늙고 쇠약한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이 《고려장》과 관련하여 두가지 판본의 전설이 있다.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농부가 자기 부친이 늙고, 일할수 없게 되니, 그를 지게에 담아 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땅굴을 파서 가두어 놓은후, 지게마저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그 농부의 어린 아들이 그 버린 지게를 도로 가지고 가자고 조른다. 왜서냐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시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늙으신 자기 부친을 다시 집으로 모셔 내려와 지성으로 봉양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 근거하여, 한국에서는 1963년도에 김기영 각본, 감독으로 된 《고려장》이란 흑백영화까지 한부 찍은적이 있다.   또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선비가 당지의 풍습대로 늙으신 자기 어머니를 버리려고 산에 업어 같는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자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갈때 길을 잃을까봐 걱정되여, 나무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놓았다. 그 선비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어머니를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필을 가지고 와서 고려의 대신들더러 어미와 새끼를 가려내라고 하였다. 모두들 가려내지 못하는데, 그 선비의 어머니가, 그 말들을 하루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서, 먼저 먹는 놈이 새끼이고, 양보하는 놈이 어미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수 있었다. 그 뒤로 조정에서는 늙은이들에게는 젊은이들에게 있을수 없는 보귀한 경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령을 내려 늙은 부모를 버리는 악습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전설《고려장》은 우리민족의 수치라고 여겨져, 고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따름이고, 실제 력사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전설은 결코 력사가 아니다. 그런데 전설《고려장》 원형이라고 의심 할만한 력사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여 있다. 《조선왕조실록》세종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4월 4일(기묘)세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天性)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외방(外方)의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부모가 죽으면 도리어 간사한 마음으로 즉시 그 집을 무너뜨리고, 또 부모가 거의 죽어갈 때에, 숨이 아직 끓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 비록 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더라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장사지내는 날에는 향도(香徒)들을 많이 모아서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베풀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니, 어찌 유속(遺俗)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는가. 아아. 사람은 진실로 각기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이 있으니, 누가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리요마는, 다만 오래도록 습속(習俗)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지금부터는 유사(攸司)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교조(敎條)를 명시(明示)하여, 가가(家家)로 하여금 구습(舊習)의 오점(汚點)을 환히 알도록 하여 자신(自新)해서 인효(仁孝)의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다. 만약 혹시 고치지 않는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엄격히 금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알수 있는바, 옛날 고려인들의 장사풍속에는 거의 죽어 가는 부모를 아직 숨을 거두기 전에 외사로 옮기는 풍속이 있었다. 외사란 원집 바깥에 있는 사랑채로 인식할수도 있고, 또 다른 그 어디에 특별히 마련해 놓은 자리일수도 있는데, 땅굴이나 돌무덤도 외사로 인식할수 있다. 이 풍속이 전설《고려장》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옮겨가는 대상이 일반적인 늙으신 부모가 아니라, 거의 죽어 가는(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을수도 있는) 부모라는 점이며, 공동한 점이라면, 옮겨가는 대상이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로부터 세종대왕께서 교지에서 질책하신 《고려 말기 외방의 무지한 백성들》의 장사풍속이 바로 《고려장》의 유속일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전설《고려장》과 비슷한 장사 풍속이 우리 민족의 력사에 진짜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고려장터》라고 불리우는 곳이 진짜로 있었으니, 바로 중국 길림성 화룡현 팔가자 상남부락 북쪽켠에 있었다. 필자가 바로 팔가자 태생인데, 문화혁명전까지 팔가자는 서성향에 소속되여 있었으므로, 전 향적으로 운동대회를 열거나, 어떤 축제가 있게 되면, 팔가자 사람들은 명절차림을 하고, 도보로 근 10리길을 걸어서 서성으로 갔었다. 전반 구간의 큰길에 꽃의 흐름처럼 기다란 장사진을 이룬 그 장면이 참으로 가관이였다. 상남마을에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금방 벗어나면, 길 량옆에 키들이 풀속에 묻힌 황페한 돌무덤떼가 나타 났는데, 우리는 어른들로 부터 그곳을 《고려장터》(高麗葬地), 혹은 《고려장군묘지》(高麗葬群墓地)라고 익히 들어 왔었다. 그곳의 돌들이 모두 타곳에서 옮겨온 돌이 분명함에도 엄청나게 커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어린 소견에, 힘이 엄청 센 고려장군들이야 이깟 돌을 꽁기돌 다루듯이 하면서 적들과 싸웠을 거라고 상상도 해 보았지만, 후에야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최근에 우연히 팔가자의 그 돌무덤떼와 상관되는 재료를 접하게 되였는데, 당년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 오르며, 금방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으니, 바로 전설《高麗葬》이 실제 력사 사실일수 있으며, 어쩌면 그 유적지의 하나가 곧 바로 팔가자의 그 돌무덤떼일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 돌무덤떼와 상관되는 전설도 대체로 우리의 《高麗葬》 전설과 비슷하였다. 즉 부모가 60이 되면 그곳에 돌무덤을 쌓아놓고, 부모를 돌무덤 안에 모시고, 먹을것을 조금씩 공급해 주는데, 렬악한 환경때문에 부모는 얼마 못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큰 돌로 돌무덤을 봉해 버리고, 장례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 고려장터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5키로되는 곳에, 바로 한때는 발해국(기원698년~926년)의 首府로 까지 되면서 흥성했던 중경현덕부 엣터가 있다. 당지에서 《북고성》이라고 불리우는 그곳의 주위에는 지금도 당시 왕궁 성곽의 흔적이 력력히 남아 있다. 지금은 이미 국가급 력사 유적지로 지정되여 보호성 수건을 받고 있다.   1964년에 중조고고련합고찰단이 팔가자 돌무덤떼와 그 주위의 유적들을 답사한적이 있으며, 1973년에 연변박물관과 화룡문화관에서 련합으로 이 돌무덤떼를 상세히 답사한적이 있다. 력사 유적지 당안에는 이곳이 《북대무덤떼》로 명명되여 있는데, 발해때의 것으로 이미 확실하게 고증이 되였다. 그렇다면 발해때의 돌무덤떼가 고려와는 어떤 상관이 있었기에 《고려장터》라는 이름을 가졌을가? 가능하게 이 돌무덤떼는 발해국 고구려 후예들의 무덤들일수 있다. 당시 발해의 주체민족은 말갈인이라고 하였으나, 인구 대부분의 백성들이 고구려 후예들이 였다는 것은 이미 상식적인 력사 사실이다.   《북대무덤떼》에 관한 답사 자료를 살펴 보노라면, 역시 흥미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즉 상세한 답사기록이 있는 쉰네자리 돌무덤에서 열네자리 돌무덤의 남쪽벽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를 냈다는 점이다. 이미 사망한 사람을 일차성적으로 안장할 시에는 위로부터 유체를 무덤안에 넣으면 되는건데, 하필이면 통로를 낼 필요가 무었이였겠는가? 무덤에 통로를 냈다는 것은 평소에 무덤안을 드나들 필요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안장 초기에 그 무덤안의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며, 가능하게 무덤안의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통로였을수도 있었다. 바로 전설《고려장》 특징과도 대체로 부합되는 해석이다.   《고려장》이 실제로 있은 력사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산생 원인도 평가해야 하는데, 반드시 그 당시 력사적 환경을 료해하고, 그에 기준하여 분석해야 할것이다. 그 당시는 해마다 전란으로 정세가 몹시 불온정 하였고, 먹을것은 극도로 결핍하였으며, 장정들은 대부분 군대에 뽑혀가 끝없이 남정북전 해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였다고 감안할때, 《고려장》을 어쩔수 없이 택하게 되였을 당시 사람들의 처지를 어느정도 리해할수 있을것 같다. 그리고 쉰네자리 돌무덤에서 열네자리 돌무덤에만 바깥통로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장》이 결코 고구려 후예들의 보편성 풍속이 아니라, 특수경우의 특수현상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돌무덤의 규모로 보아서는 상당한 인력과 물력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단지 생활 형편이 어려워 늙으신 부모를 버리게 되였다고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할 문제는 아닌것 같다.   1980년도 전까지 이 고려장터는 보존이 괜찮게 되여 있었는데, 지금은 언녕 혼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부분 자리는 이미 논밭으로 되여 버렸고, 남쪽켠에는 팔가지 림업국 직공 아빠트가 빼곡히 들어 앉아 있으며, 돌들은 몽땅 아빠트를 건축하면서 기초돌로 리용되였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2013-11-17  
12    실용 조선족 장례제사 규범 댓글:  조회:4671  추천:1  2013-10-22
吉林省非物质文化遗产“朝鲜族丧葬习俗”传承资料     一, 현재 지킬수 있는 조선족 장례규칙   우리민족은 자고로 효도를 모든 행위의 첫째준칙(孝为百行首)으로 삼아 왔으며, 례의를 모든 행사에서 선행(礼当万事先)시켜 왔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의 핵심리념은 효도이고, 그 주체가 례의입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를 성의있게 지키므로써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달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도가 무엇인지 알수 있고, 례의가 어떤지를 배울수 있으며, 자식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줄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규범은 원래 그 내용이 많고, 절차가 몹시 번잡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화 되였습니다. 아래에 장의관에 가서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간소함을 견지하고, 민족 특색을 살리면서, 현재 지킬수 있는 조선족 장례규칙을 실용의 요구에 맞게 정리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보귀한 의견을 요청합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렴습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시체가 굳어지므로, 보통 한시간 이내에 끝내야 합니다. 친척이나 친구들중에 누가 할수 있는 분들이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라도 당황하시지 마시고, 인츰 상조에 련락하십시요.   2, 염습이 끝나고, 령구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발인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추모관이나 혹은 집에 돌아와 객실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고 조문객을 맞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삼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상주와 유가속을 상대로 맞인사를 하고, 위안의 말을 하며, 상가에 부의금을 건넵니다. 조문을 끝낸 손님들은 장례에 따로 참석하지 않아도 실례가 되지 않습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子時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기간에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수질을 돌리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 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는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리고, 강신, 독축, 초헌, 아헌, 종헌, 첨작, 유식, 사신, 이러한 순서로 진행합니다.(《안신제 지내는 방법과 절차》참조) 마지막에 기름내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으면서 상모, 수질, 몽상, 상장등을 모두 살읍니다.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은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함께 절을 세번 올립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곳에 버리거나,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납골당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제사때문에 골회함을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먼저《(今日祭祀暫遷, 敢告!) 오늘 제사때문에 잠시 움직이오니 그리 아룁니다!》하고 말씀 올리고,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 례의입니다.     二, 조선족 렴습의 방법과 절차   렴습전 준비 물품: 1,수의(남녀각기 웃옷 세벌, 아래 세벌); 2,버선; 3,악수; 4,실타래; 5,쌀; 6,면백; 7,명모; 8,령침; 9,렴포(130×500); 10,포끈; 11,천금; 12,지요; 13,명정   렴습 실시 인원이 갖추어야 할 물품: 1,위생복; 2,장갑; 3,마스크; 4,소독약; 5,약솜; 6,습건; 7,가위; 8,핀센트; 9,손톱깍개; 10,나무숟가락; 11,분필   조선족 장례에서 렴습(殓袭)은 현재 보존된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가장 완미하게 보존된 풍속의 하나입니다. 현재 병원에 가서 사망한 시신을 렴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렴습 실시 인원을 두사람으로 하는것이 좋으며, 먼저 세심히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렴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호칭을 부르고 “돌아 오시요!”하고 세번 부릅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종이에 싼후,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드립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몸 아래를 속벌까지 내리고, 습건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 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드립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속벌까지 벗기고, 습건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드립니다. 두손을 배우에 포개여 놓고 묶는데, 남성의 경우에 왼손을 위로, 녀성의 경우에 오른손을 위로 합니다. 그다음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드립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습건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드립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드리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 하고 외움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드립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이고, 명모를 쓰이여 드립니다.   6, 小殓: 전폭의 렴포로 유체를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고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 될수록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씁니다.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렴을 마친 유체우에 덮습니다.   8, 发引礼: 렴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렴을 마친 고인의 유체 주위에 모이게 하고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 다 함께 세번 허리굽혀 례를 올립니다. 첫번째 례는 시조에게 올리는 례요, 두번째 례는 조상들께 올리는 례며, 세번째 례가 고인에게 올리는 례입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현재로선 관을 쓰지 않으므로 령구차가 온후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담가에 담고, 머리부터 바깥으로 나가고, 발부터 영구차에 실으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될수록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三,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방법과 절차   골회함을 릉묘에 모시는 행사는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현대에 새롭게 생긴 풍속으로서 여기에는 두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화장이 끝난후 골회함을 직접 릉묘에 모시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납골당에 보관했던 골회함을 다시 릉묘에 옮겨 모시는 경우인데, 보통 두번째의 경우가 많습니다.   첫번째 순서: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모셔 내올때, 먼저 골회함을 보관했던 보관함 문을 열고, 그 앞에서 상주가 머리숙이고 조용히 아룁니다: 《(今日吉辰遷宅,敢告!)오늘 길한날에 새집으로 옮겨 모시겠으니, 그리 아룁니다.》 상주는 세번 경건히 경례한후 골회함을 두손으로 받혀들고 납골당을 나옵니다. 보통 지정한 차에 앉아 릉묘까지 가게 되는데, 상주는 차에 앉아서도 골회함을 시종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가는것이 례의입니다.   두번째 순서: 릉원에 도착하여 상주는 차에서 내린후 친지들의 옹위를 받으며 골회함을 받들고 가족들과 함께 릉묘로 향해 천천히 걸어 갑니다. 년중절이여서 사람들이 특별히 많을때 좋기는 한분이 앞에서 길을 내며 인도하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세번째 순서: 릉묘에 도착한후 골회함을 릉묘대에 올려놓고,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지냅니다. 그,다음 상주를 중심으로 일동이 골회함을 마주하여 섭니다. 사회자가 웨침니다: 《平土-成墓 讀祝입니다!- (默哀)묵념!-.》 일동이 골회함을 향하여 머리숙이고 묵념하는 사이 사회자가 축문을 읽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 모일 (孝子[女]某某 敢昭告于) 효자(녀)모모 감소고우 (顯考某官府君) 현고모관부군이요-(母喪-현비유인 모씨) (灰歸芚席 魂魄遊天) 회귀둔석 혼백유천 (幽宅旣成 伏愉尊靈) 유택기성 복유존령 (舍舊從新 是憑是依) 사구종신 시빙시의라 하였사와, 골회를 여기에 두시고 혼백은 하늘을 노시나이다 새 유택 다 지었사오니, 엎드려 여쭙건대 존령께서는 낡은것을 버리시고 새것에 좇으셔, 이곳에 기대시고 의지하소서.   네번째 순서: 독축이 끝나면 역공들이 서둘러서 골회함을 릉묘의 함실에 넣고 덮개를 덮고 릉묘를 봉합니다. 역사가 끝난후 상주를 중심으로 일동이 다시 릉묘앞에 섭니다. 사회자가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님의 안택을 부디 빌어 경례를 올립시다: 첫번째 경례!- 다시 경례!- 또다시 경례!-》   다섯번째 순서: 순서가 이쯤되면 안장행사는 끝났으나 전통례의에 근거하여 안택안신제사를 지냅니다. 보통 릉묘앞은 자리가 비좁으니 자리를 옮기여 따로 제사장소를 정합니다. 자리가 정해진후 제사상 차려놓고 유가족과 제사객들이 제단의 왼쪽에 서고 사회자가 제단의 오른쪽에 섭니다.   제사를 시작하여 첫순서로 가족에서 제문을 작성하여 읽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제사방법은 기본적으로 묘제사 방법을 기준하고 축문은 이미 읽었으니 만가(挽歌)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았는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두갑자도 못삽니까? 하늘에서 오셨다가 다시하늘 가셨지만, 이세상에 쌓은공덕 달과함께 빛나리다!   식구들을 별하시고 기왕이면 가셨으니, 재난액운 오늘로써 끝을내여 주옵소서! 이가문에 아직까지 질고여건 남았다면, 깨끗하게 말끔하게 씻어가져 가옵소서!   자식손군 번영하고 백년가업 흥성토록, 존령께선 구천에서 보우하여 주옵소서!   화장하여 골회함을 직접 릉묘에 모시는 경우에는 위의 두번째 순서부터 실행하고, 안장이 끝난후 안신제사를 따로 재냅니다. 안신제사는 따로 안신제사 방법에 기준하면 되겠습니다.     四, 골회를 살포장 하는 방법과 절차   골회를 살포장 하는 것은 현재 제창하는 안장방식으로서 골회를 버린다고 생각하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살포장 하였다 하여도, 안신제사와 돐제사, 삼년제사까지는 명심하고 지내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골회를 살포장 함에 있어서, 크게 네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 유체를 화장하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   유체를 화장한후 골회를 따로 받지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안신제사와 돐제사, 삼년제사까지는 명심하고 지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두번째: 유체를 화장하고 골회를 받아서 따로 살포하는 경우   유체를 화장한후, 상주는 골회주머니 혹은 골회함을 받아서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지정한 차에 앉아서 예정한 살포 현장으로 갑니다. 살포현장은 강이나 산야로 할수 있습니다.   살포할때 살포자는 손에 흰장갑을 끼고, 골회를 한줌씩 쥐여서 정중히 살포합니다. 본인들의 의향에 따라서 가족과 친척 친우중에서 그 누구나 손수 살포에 참여할수 있습니다. 골회함을 기울여 쏟아 버리거나, 골회함 통채로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살포가 끝난후, 빈 골회함은 땅에 묻거나 불에 살읍니다. 그대로 버리는 일은 없도록 합니다.   살포장이 끝난후 간단히 안신제사를 지냅니다.   세번째: 납골당에 보관했던 골회함을 살포장하는 경우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모셔 내올때, 먼저 골회함을 보관했던 보관함의 문을 열고, 그 앞에서 상주가 머리숙이고 조용히 아룁니다: 《(今日吉辰遷移,敢告!)오늘 길한날에 다른곳에 옮겨 모시겠으니 그리 아룁니다.》 상주는 세번 경건히 경례한후 골회함을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납골당을 나옵니다. 보통 지정한 차에 앉아 예정한 살포현장까지 가게 되는데, 상주는 차에 앉아서도 골회함을 시종 두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갑니다.   그다음 살포절차는 위와 같습니다.   네번째: 낡은묘를 면례하여 해골을 태운후 살포장하는 경우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묘를 지켜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인 절차입니다,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줍니다. 원래 비석이 있었다면 일을 끝내면서 광안에 묻어 주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해골은 화장터에 위탁하여 화장하는것이 편리합니다. 골회를 따로 받지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가 많으며, 또는 골회를 받아서 따로 강이나 산야에 살포장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포장이 끝난후, 합당한 자리를 정하여 유상이나 지방을 놓고, 간단히 안신제사를 지냅니다.     五, 안신제사 지내는 방법과 절차 (조선족제사 사회자 집행구령)   사망자의 골회함 혹은 유상을 모시고 제사상 차립니다. 상주를 비롯한 유가속은 제단의 왼쪽에 서고, 기타의 조문 객들은 제단의 정면에 서며, 사회자가 제단의 오른쪽에 서고, 집사가 그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먼저 간단히 인사의 말을 올립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의 핵심리념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우리민족의 장례풍속을 성의있게 지키므로써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달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도가 무엇인지 알수 있고, 례의가 어떤지를 배울수 있으며, 자식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줄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부모님 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 사랑을 가졌습니다. 오늘 부모님들은 파란많은 인생을 마치시고,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의 유지를 마음으로 받들고, 더욱 열심히 살면서,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는 것으로, 구천에 계시는 그이들을 안심시켜 드립시다.   방금전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고 모모모 존령님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지금 존령께서는 형체를 금방 잃으시고, 몹시 불안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풍속에 좇아, 가속과 함께 안신제사를 정중히 올리여, 존령님의 안신과 명복을 삼가 빌겠습니다.   첫번째 순서로 降靈,開飯揷匙입니다. 존령께서 제사 받으려 강림하십니다. 일동 묵-도! (3초,묵도필입니다) 일동이 묵도하는 사이, 집사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로 독축,초헌 (讀祝,初獻)입니다. 상주부부 나와서 시립하시요. 축문을 읽어 올리겠습니다: (維歲次 干支年某月某日) 유—세차 간지년 모월모일 (孝子賢孫 敢昭告于) 효자현손 감소고우 (顯考府君○公之靈) 현고부군 ○공지령-(母喪-현비유인) (日月不居 奄及初虞) 일월불거 엄급초우 (夙興夜處 哀慕不寧) 숙흥야처 애모불녕 (謹以淸酌 庶羞哀薦) 근이청작 서수애천 (安事 尙饗) 안사에 상향하시라 하였사와 … … 일월성신 쉼 없어 벌써초우 웬일인고? 슬픈생각 아픈생각 밤낮으로 불녕하야, 맑은술과 음식으로 안신제를 올리오니, 두루 흠향 하옵소서!                  (독축 필입니다.)   상주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상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상주주부 함께 초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상주부부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아헌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아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아헌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 안해, 혹은 상주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종헌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종헌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종헌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문헌작은 끝나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상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상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고인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로 첨작(添酌)입니다. 첨작자 나와서 시립하시요.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첨작자는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드시요. 집사는 세번 꺾어 한잔술 부으시요.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단위에 놓으시요. 첨작으로 삼배 올립니다.   시조님께 선배요, 조상들께 재배요, 존령님께 삼배요, 첨작자 퇴장입니다. 집사가 술을 퇴주그릇, 혹은 제단주의에 쏟습니다. 가속에 여쭈어 보면서 여러가지 관계로 오신 손님들이 빠뜨림 없이 모두 인사할수 있게끔 보장합니다.   여섯번째 순서로 유식(侑食)입니다. 존령께서 조용히 진지 드시는 순서입니다. 일동 묵-도! 일동이 묵도하는 사이 집사는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놓고, 반찬도 집어 놓으면서, 존령의 식사시중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의 저가락을 움직여 놓습니다.  (9초, 묵도 필입니다.)   일곱번째 순서로 송신(送神)입니다. 숙주 한그릇 따라 올리겠습니다. 집사가 물 한그릇 따라서  제단우에 올려놓습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오늘 승천하시였습니다! 존령님의 안신과 명복을 부디 빌어 모두 함께 세번 경례를 올립니다:   시조님께 첫번째 경례!- 조성들께 두번째 경례!- 존령님께 마지막 경례!- 경례 필입니다.   마지막 순서로 철찬(撤饌)입니다, 가속에서 계속하여 기름내(油香味)피우시고, 오늘의 안신제사는 이로서 끝냅니다. 오늘의 안신제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음덕을 많이 입으시고, 부디 건강하십시요! 가속에서 서둘러 제사상을 치우고 기름떢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우며 기름내 피우면서 몽상, 상장, 축문, 등 장례비품들을 모두 살읍니다. 다음 제단에 기름떡 아홉개만 그릇에 담아 올려놓고 상주와 주부만 나와서 함께 세번절, 혹은 세번인사를 올립니다. 이것으로 안신제사가 끝납니다.     六, 조선족 전통제사 순서    1, 진설(陳設) (1) 먼저 령좌를 앉히고 신주를 모십니다. (2) 령좌앞에 제사상을 진설합니다. (3) 제사상앞에 모사, 향안 등을 놓습니다. (4) 자손들이 제사상 왼편에 차례로 섭니다.   2, 강신(降神) 참신(參神) (1) 일동이 곡을 시작합니다. (2) 제주(장손)가 향안 앞에 꿇어앉아 향을 피웁니다 (3) 제주가 손을 씻고 향안 앞에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술을 반잔쯤 따릅니다. (5) 제주가 세번 나누어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6)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집사가 문을 조금 열어 강신을 맞이합니다. (8) 제주이하 자손들이 함께 삼배하니 참신입니다.    3, 초헌(初獻) 독축(讀祝) (1) 제주(초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제주는 반잔만 모사에 붓고 술잔을 신주옆에 놓습니다. (4) 집사가 메밥두껑을 열어 놓습니다. (5) 제주는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6) 축관이 축판을 듭니다. (7) 제 자손들이 모두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8) 축관이 축을 읽습니다. (9) 축이 끝나 일동 일어나고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10) 집사가 남은 반잔의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4, 아헌(亞獻) (1) 주부(아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주부는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5, 종헌(終獻) (1) 근친(종헌자)이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근친이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6, 첨작(添酌) (1) 종헌이 끝난후 또 헌작자가 있으면 첨작이라 합니다. (2)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3) 첨작자가 손을 씻고 꿇어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5) 첨작자가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합문(閤門)유식(侑食) (1) 일동이 곡을 그칩니다. (2) 메에 숟가락을 꽂고 반찬에 젓가락을 놓습니다. (3) 일동이 문밖에 나가 남녀가 서로 마주하고 섭니다. (4) 문을 닫고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8, 계문(啓門) 진차(進茶)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엽니다. (2) 집사가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립니다. (3) 엄숙히 잠깐동안 묵도합니다.   9, 사신(辭神) 철찬(撤饌) (1) 집사가 수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납니다. (2) 일동이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3) 신주를 내립니다. (4) 제사상을 물리고 축문과 지방을 살읍니다.   ※: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와 제사에서 남녀를 구별하여 두번절과 네번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들은 보편적으로 세번절을 하여 왔습니다. 계속 남녀 구분없이 세번절을 하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七, 제사상 차리는 방법   조선족 장례와 제사에서는 령좌와 제사상을 보통 한상에 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제사에서 령좌와 제사상을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제사상 안쪽 중간을 신위로 하고, 유상과 지방을 놓습니다. 유상을 좀 높이 걸어 놓을수도 있습니다. c, 신위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신위 앞 첫줄에는 메밥, 물,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전, 적, 그리고 기타 반찬들을 정연하게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떡류와 부식품들을 보기좋게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K,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특정 제사상 차릴때에도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되겠습니다.    (참고)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리면서 주의할점   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에 남향으로 앉히고,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기고, 그 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1, 제사상 진설 원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梨枾.   2, 제사상 진설 설명; 동쪽은 좌양이요, 서쪽은 우음이라, 생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고, 익은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으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낮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우이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아래니 후에 놓으며,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고,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습니다.   3, 제사상 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 줄에는 반찬류를,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4, 제물 금기: 제사상에 개고기와 칼치, 멸치, 꽁치 등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조선족 제사에서 상중제, 돐제, 삼년제까지는 魂제사라고 하고, 그외의 기제, 시제, 묘제는 神제사라고 합니다. 제사상에 복숭아와 토마토는 보통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신제사 음식에 고추가루와 마늘양념을 보통 쓰지 않습니다. 신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않고,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이념상에서 신들은 자극성 냄새와 붉은색을 가장 싫어 한다고 합니다. 제사에서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하며, 개수와 번수와 상관되는 모든 일에서 단수로 합니다. 장례나 제사는 陰에 속하고, 단수는 陽에 속하니, 음양을 평형시키는 도리입니다.   八, 돐제사와 삼년제사   돐제가 소상(小祥)이고 삼년제가 대상(大祥)입니다. 삼년제 지내고 탈상합니다. 소상과 대상은 축문이 조금 다를뿐,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사망일이 되는 전날 저녁, 해지는 것을 기준하여 집에서 석전(夕奠)을 올리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아침에 조전(朝奠)을 올리고, 낮에 산소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혹은 경우에 따라 전날의 석전제나 새벽제, 조전 등을 모두 취소하고, 당날의 한번 제사로 모두 끝낼수도 있습니다. 만일 산소를 쓰지 않았고, 골회함도 보관하지 않았다면, 사망일 아침에 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제사날 오후가 되면 객실에 제사상을 미리 차려놓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될수록 북쪽켠에 차리되,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인정하고, 그에 기준하여 차립니다.   첫번째 순서; 강신,개반삽시(降神,開飯揷匙)입니다. 해 지는것을 기준하여 사회자가 자리를 정돈합니다. 제주(장례때의 상주가 제사에서 제주가 됩니다.)와 주부를 비롯하여 직계가속은 제사상을 기준하여 왼쪽에 서고, 방계친속과 기타의 사람들은 제사상 맞은켠에 서며, 사회자가 제사상 오른쪽에 섭니다. 따로 집사가 있을 경우, 사회자의 맞은켠에 서서 술을 붇고 쏟는 시중을 듭니다. 사회자가 기침을 가볍게 하며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일동을 지휘하여 세번 경례 시킵니다: “존령 강림이요!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장례나 제사에서 보통 세번절 혹은 세번경례를 하는데, 상징적으로 첫번째 절, 혹은 경례는 가문의 시조님께 드리는 것이고, 두번째 절, 혹은 경례는 조상님들께 드리는 것이며, 세번째 절, 혹은 경례가 바로 망자에게 드리는 것으로 됩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한번 가볍게 하고는, 메밥두껑을 열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우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두번째 순서; 독축,초헌(讀祝,初獻)입니다. 제주부부가 나와 제단앞에 머리 숙이고 서 있습니다. 사회자가 높은 소리로 祥祭 축문을 읽습니다(략-제사에서 축문은 필수) 그리고 만가를 읽습니다(략-만가는 가문에서 작성할수 있음) 축문, 만가가 끝나면 제주는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제주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부부 함께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세번째 순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아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아헌자는 사망자의 반려, 혹은 제주의 형제가 됩니다.   네번째 순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종헌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종헌으로 가속의 헌작은 끝났지만,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종헌자는 제주의 형제로 할수도 있고, 제주의 아들로 할수도 있으며, 또 망자의 사위로 할수도 있습니다.   다섯번째 순서; 첨작(添酌)입니다. 종헌후의 헌작은 첨작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많아서 세번을 초과하지 않지만, 지금은 경우에 따라 증가할수 있습니다.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하시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첨작자가 나와 허리 굽히고 두손으로 빈잔을 받혀 듭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 부어주면, 첨작자는 술잔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제사상에 놓고 세번 절하고 물러 갑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그 술을 모사, 혹은 퇴주그릇에 쏟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유식(侑食)입니다. 사회자, 혹은 집사가 기침을 가볍게 하고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떠서는 국그릇에 세번 놓습니다. 그리고 메밥우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 그릇우의 저를 움직여 놓습니다. 잠시 묵도를 드립니다(9초좌우).   일곱번째 순서; 리성(利成), 사신(辭神)입니다. 사회자가 물 한그릇을  제단우에 올려놓고 웨침니다: 고 모모모 존령께서 승천하신지도 어느덧 한돐(혹은 두돐)이 됩니다! 고 모모모 존령님의 명복을 부디 빌어 다 함께 세번 경례를 올립시다: 첫번째 경례!- 두번째 경례!- 세번째 경례!-   여덟번째 순서; 사회자가 석전제의 결속을 선포합니다. 제사상은 밥과 국만 내리우고, 다른 제물들은 다치지 않고 새벽제에 다시 씁니다. 가족에서는 제사객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그들이 휴식할 장소를 알아 봅니다.   아홉번째 순서; 새벽제는 자정(0시)을 기준하여 지내는데, 그 기본절차는 석전제때와 같습니다. 새벽제가 끝나면 이튿날 묘제를 지낼경우 제사상을 정리하고, 보충할것을 보충하여, 낮에 산소나 납골당에 가지고 갈 제물들을 따로 포장하여 놓습니다.   열번째 순서; 사망일 당날 아침, 해 뜨는것을 기준하여 간단하게 조전(朝奠)을 올립니다. 메밥과 국, 그리고 간단한 반찬을 올리고, 제주 부부가 와서 술을 붓고 세번 절을 합니다. 일동이 서둘러서 아침을 먹고, 산소에 갈 차비를 합니다.   열한번째 순서; 산소를 썼거나,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 묘제를 산소나 납골당에 가서 지내는데,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고,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습니다. 그 다음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절차인데, 기본 순서는 안신제때와 같습니다.   마지막 순서: 묘제를 끝낸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이 외에도 생일제사와 환갑제사 등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지내면 되겠고, 단 환갑제사에서 상주가 환갑옷 한벌을 갖추어 제상에 놓으며, 축문은 亡親壽神 축문을 읽습니다.   九, 청명제사와 추석제사   청명제사: 중국에서 청명은 한식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해마다 양력으로 4월5일에 들며, 몇년에 한번씩 4월4일에 들때도 있습니다. 한식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기 진문공(晉文公)이 임금이 되기전에 국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허기져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 살렸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청명날이 되면 술과 여러가지 과일과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조상과 부모님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고 성묘를 합니다. 청명때에는 삽 한자루 가지고 산소에 가는데,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서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 놓고 술을 한잔 붓고 절을 세번 합니다. 묘제를 지낼때마다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땅을 파고, 초목을 베기 전에 묘를 지켜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로서 자연에 대한 존중를 표시합니다. 그 다음 삽으로 봉분을 보수하고, 다듬으면서 잔디풀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을 속칭 가토라고도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세번씩 절, 혹은 경례를 합니다. 마지막에 숙주(냉수)를 올리고, 다 함께 세번절, 혹은 세번경례를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가문의 묘소가 한곳에 여러자리 있을 경우, 다른 제물들은 여러번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제각기 갖춥니다. 먼저 자기 부모의 묘소에 제사 제내고, 그 다음 직계조상의 제일 윗대부터 차례로 성묘합니다. 후토제는 부모묘소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추석제사: 추석은 한가위라고도 하는데, 해마다 음력 八월十五일에 듭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추석에 행하여지는 여러가지 세시풍속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조상과 부모님 산소에 가서 벌초하고, 성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추석 제사음식은 다른 때 제사음식과 대비하여 음식재료와 과일을 될수록 햇것으로 쓰는것이 특징입니다. 추석이 되면 보통 농촌에서는 햇곡식이 나오게 되며, 여러가지 과일도 한창 수확계절이 됩니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가장 잘 여문 햇곡을 정성들여 고르고 찧어서 메밥을 짛고, 떡을 만들었으며, 과일도 직접 나무에서 조심스럽게 뜯어서 제물로 썼습니다. 새해 농사의 성과를 조상들에게 먼저 맛보인다는 정성이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棗栗梨枾라고 하였으니 대추, 밤, 배, 감이 그것이며, 이런것들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옛날의 일이고, 지금은 거기에 너무 구애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정황에 따라 사과, 귤, 바나나, 석류, 참외 등의 여러가지 과일중에서 편리한대로 자유롭게 몇가지 준비할수 있습니다.  추석제사에서는 주요하게 낫을 가지고 산소에 가서, 먼저 후토를 찾아 제사 지낸후 여름동안 산소와 그 주위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베여 버리는데, 속칭 “벌초”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갖고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청명제사때와 같습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성시에서 릉원에 가서 제를 올릴 경우, 위의 절차들을 참조하면서 적당히 조절하여 행사합니다. 납골당에 골회함을 보관시켰을 경우에는, 이날 골회함을 찾아 내와 합당한 자리를 찾아 제물을 간단히 차려놓고,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제를 지냅니다. (부록): 지방(纸榜):지방은 나무로 만든 신주의 대용품입니다.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에서 사당을 짓고 선조를 모신 대부호 가문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직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시다가 제사가 되면 신주는 모두 지방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류별에 따른 지방의 서식표 类   别 格    式 고조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증조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안해 亡室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백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백모 顯伯母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형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 (姓名) 神位 아들 亡子 秀才 (姓名) 之靈 父生前职称 顯考 (职称) 神位   지금 이 풍속은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지금은 제사에서 유상을 쓰기 때문에 지방이 필요없지만, 전통문화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지방을 리용한다면 그로서의 리유가 서는 것입니다. 전통 지방의 서식에서 사망한 부친과 모친의 신위를 한개 纸榜에 써야 할 경우에, 북쪽을 향하여 종이를 놓고, 서쪽에 부친을, 동쪽에 모친의 신위를 씁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지방에 성명을 쓰지 않지만 지금 대다수 유가족에서는 고인의 성명을 지방에 써 넣을것을 요구하니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十○; 차례 지내는 방법과 절차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우리 연변에도 지금 설날이나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점잖은 가문이 적지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문에서 차례를 지낸다는 것은 생활에 여유가 많다는 것으로 설명이 되므로, 기왕 차례를 지낼바에는 간편함만 추구하지 말고, 의의를 깊게하고, 될수록 표준적으로 지낼것을 권장합니다. 차례 지내는 방법은 원래부터 제사나 기타 다른 행사에 비해 비교적 간단합니다. 축문을 읽지 않고, 차례상에 술은 한번만 올리며, 밥과 국은 올리지 않고,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같은 쉬운 음식을 올립니다. 차례에서 제사지낼 대상은 4대 조상까지라고 하지만 우리 연변의 경우에는 2대조상까지라도, 즉 할아버지의 신주(神主)라도 모시고 있는 가문이라면 대단한 효자가문이라고 하겠습니다.   ★ 차례상 차리는 원칙 첫줄: 시접, 잔반, - 떡국(송편)은 우측, 술잔은 좌측. 두번째줄: 어동육서(魚東肉西) - 어찬은 동쪽, 육찬은 서쪽. 세번째줄: 탕류 - 육탕, 소탕, 어탕 순. 네번째줄: 좌포우혜(左脯右醯) - 왼쪽에 포, 오른쪽에 식혜. 포(脯)—물고기 등 수산물을 가공하여 말린것 혜(醯)—찹쌀밥을 발효시켜 엿가루에 섞어 만든 전통음료 다섯번째줄: 조율이시(棗栗梨枾) -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실은 동, 흰 과실은 서.   ★ 차례상 차림시 주의사항 차례상을 차리기 전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마늘, 파 등 냄새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정갈하고 정성을 다해 조리합니다. 복숭아, 토마토, 꽁치, 삼치, 칼치, 고추, 마늘 등은 차례상에 올리지 않으며, 식혜, 탕, 면 등은 건더기만 사용합니다   ★      차례를 지내는 법 진설(進設) 북쪽(방위상 북쪽을 뜻하나, 차례장소의 형편상 북쪽을 택할수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위를 모시는 방향을 북쪽이라고 인정함)에 병풍을 치고, 병풍앞에 교의(神主나 혼백상자를 모신 의자)를 모신 다음, 차례상 차리는 원칙에 따라 제물을 차립니다. 제수는 간소하게 하되,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몇가지 더 곁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진설이 다 되면, 고인의 사진이나 지방을 교의나 제사상에 모십니다.   분향강신(焚香降神) 제주는 꿇어 앉아 향에 불을 달아 향로에 꽂고 재배합니다. 그 다음 제주가 술잔을 받쳐들면 집사가 세번 꺾어 한잔술을 따르고, 제주는 그 한잔술을 정중히 차례상에 올려 놓습니다.   참신(參神) 진찬(進饌) 헌다(獻茶) 제주와 참석자 모두 함께 재배(두번절) 합니다. 설 차례에서는 떡국, 추석 차례에는 송편을 제상에 올립니다. 물그릇에 물을 따라서, 조상어른 순서에 따라 올립니다.   개반(開飯) 삽시(揷匙) 집사가 떡국그릇의 뚜껑을 열고 차례로 적을 올립니다. 순서는 좌측부터 조부 조모순이며,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조부모와 부모까지 2대 봉사만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집사가 시접에 담겨있는 숟가락을 떡국에 꽂고, 젓가락은 시접 위에 가지런히 걸쳐 놓습니다. 젓가락의 손잡이가 서쪽을 향하게 놓습니다. 흔히 젓가락을 세번 굴리고, 여기저기 제물 위에 옮겨 놓기도 하지만, 시접위에 가지런히 놓는것이 바람직합니다. 제주는 다시 재배하며, 모든 참석자는 조상이 진지 드시는 동안 조용히 서서 생전의 조상을 기리며 묵념합니다.   철시복반(撤匙復盤) 떡국(송편) 그릇의 뚜껑을 덮고, 수저를 거두어 세번 굴리고, 시접에 놓습니다.   사신(辭神) 철상(撤床) 음복(飮福) 참가자 모두가 재배를 올리고, 지방을 향로위에서 사릅니다. 모든 제사 음식을 물리며, 차례상 위쪽으로부터 다른 상으로 공손히 옮겨 물립니다. 제물을 차례상에서 거두고, 禮衣를 입은 그대로 조상이 드시고 남은 제물을 음복하는 것으로 차례는 끝나게 됩니다.   가문마다 자기 가문의 전통 가법이 있을수 있으니, 꼭 위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상에게 정성을 다하는 진지한 마음가짐이라고 하겠습니다.     十一: 면례(緬禮)와 합장(合葬)   면례(緬禮) 조선족 전통장례 풍속에 의하면, 면례란 원래 장례를 다시 지낸다는 뜻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그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잘 정리한후 다시 그 자리에 묻고, 만일 그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산자리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데, 풍수지리에 따른 일종의 효행이였습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사 가고, 부유하면 묘 옮긴다(穷搬家,富迁坟。)”고 하였습니다. 면례를 통하여 무거운 사상 보따리와 실제 부담을 덜수 있으므로 지금도 어느정도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첫번째 순서: 면례하여 새롭게 산소를 쓸 경우에는, 먼저 새로운 산자리를 정하고 굴심을 하는데,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면례하여 화장할 경우에는 빈의관에 련계하여 할수도 있고, 또 자체로 태울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순서: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세번째 순서: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네번째 순서: 가속에서 상주나 대표인이 먼저 세삽을 뜹니다. 그 다음 역공들이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다섯번째 순서: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화장할시에는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 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 니다. 만약 해골 화장이 목적이라면 해골의 골격 순서를 맞출 필요가 없고, 버드나무 가지 얼마간을 준비하였다가 해골과 함께 처리합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주며, 원래 비석이 있었을 경우에는 무덤자리에 넣어 묻어 줍니다.   일곱번째 순서: 새롭게 산소를 쓰는 경우, 칠성판을 광에 묻고, 봉분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내는데, 기본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화장하는 경우, 보통 골회를 받아서 산이나 강물에 뿌리여 처리한후, 안신제를 지냅니다.   합장(合葬) 합장은 돌아가신 부모를 한자리 묘소에 함께 묻는것을 말하는데,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홀로 모시던 부모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한 부모의 묘를 째고, 그 옆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중에서 한곳을 면례하여, 가져다가 합장하는 것이며, 세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를 모두 면례하여, 다른곳에 가져다 합장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한 묘혈에 두개 광을 파는데, “北陰南陽, 西高東皐, 西貴東卑, 西考東妣, 西男東女,”등 전통원칙에 따라, 망자들의 머리를 북쪽을 향하게 하고, 서쪽이 顯考(사망한 부친)자리가 되고, 동쪽이 顯妣(사망한 모친)자리가 되는데, 결과적으로 男右女左가 됩니다. 지금의 경우에 보편적인 男左女右 원칙으로 합장하는 실례도 많은데, 크게 틀린다고 할수 없으며, 자손들의 리해와 선택에 따를 일입니다. 두 광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벽을 두고, 그 벽 중간에 통로를 내고 채색 사다리를 놓는데, 그 뜻인즉 두분 망령이 자주 래왕하게끔 편리하게 한다는 자손들의 지극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사망한 부모의 두 골회함을 한곳에 합장할 경우에도, 위의 방법을 참작하여 조절하여 행하시면 되겠습니다.   면례하여 합장하는 경우에는, 면례의 절차와 매장의 절차를 결합하여 지킬것이요, 먼저 사망한 사람의 묘를 째고, 후에 사망한 사람을 겹장할 경우에는, 장례때의 매장의 절차를 따르면 되겠습니다. 합장을 끝내고, 성분제 지낼때는 합장축문을 읽습니다.      十二: 립비제사   사망한 친인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는 것도 일종 아름다운 소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물론 묘소에 반드시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때에 묘비를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세웠다 해도 림시로 목비를 세우는 정도였습니다. 그후 조건이 허락되면 자금을 모아서 비석을 깎아 세웠는데, 일종 효행으로 간주 하였습니다.   비문의 통용 격식은 보통 정면 중간에 “故 某某某之墓”라고 내리쓰고, 왼쪽 변에는 “某年 某月 某日生”이라고 내리쓰고, 오른쪽 변에는 “某年 某月 某日卒”라고 내리쓰며, 뒤면에 고인의 생평, 혹은 자식들의 이름과 비석을 세우는 데 부의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 혹은 단체의 명칭을 쓰기도 합니다. 합장비석일 경우에는 합장된 망자들의 위치에 따라 비문을 씁니다. 이 외에도 많은 격식들이 있으니, 각 가문의 뜻에 따라 적당한 격식으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들은 비석을 세우는 날을 보통 음력 구월구일 중양절로 선택하며,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음력으로 칠월칠일 칠석, 오월오일 단오, 삼월삼일 양춘, 이 세날중에서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외에 주역이나 황력으로 택일을 하여 행하기도 합니다. 립비 사전에 필요한 준비공작을 원만하게 합니다.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순서: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두번째 절차: 비석을 세울 자리에 삽으로 광을 팝니다.   세번째 절차: 광앞에서 간단한 의식을 가집니다. 축인이 석물(石物)축을 읽습니다. (석물축 략) 석물축을 읽고는 축문에 불을 달아 광안에 던집니다.   네번째 절차: 역공들이 비석을 세울 대를 쌓고, 비석을 세웁니다. 그리고 망자의 아들부터 시작하여, 가문과 단위의 주요 성원들이 차례로 흙을 한삽씩 떠서 상징적으로 묻습니다.   다섯번째 절차: 역공들이 다 함께 흙을 묻고 다짐니다.   여섯번째 순서: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비석제를 지냅니다. 기본 절차는 청명이나 추석때의 묘제사와 같습니다.   十三: 조선족 장례,제사 금기사항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들이 많았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금 와서는 많이 취소되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와 제사는 어디까지나 슬픔과 불행을 처리하는 엄숙한 행사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연히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되며, 잘못을 범할가봐 조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에 기초하여, 지금도 사회적으로 장례, 제사와 상관되는 적지않은 금기사항들이 보류되여 있거나,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장례, 제사와 상관하여, 현존하는 금기사항들을 몇가지 정리하여 적었습니다.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렴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으며,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임신한 딸은 장례에 참가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의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 처리하며,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기지 않고 소각처리합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미봉하는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합니다.   K, 친인이 객사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장례용품이나 제사소물을 살때, 흥정을 하지 않으며, 가격이 너무 비쌀경우, 사지 않거나, 다른 곳을 선택하는 것으로, 대방이 스스로 값을 낮추게끔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복숭아와 토마토는 제물로 쓰지 않으며, 제사음식에 고추가루, 마늘, 파 등을 쓰지 않습니다   N, 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 않으며,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O,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해에 자기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P,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새로운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Q,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 … … … … …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정리 시대상조복무중심 집행 봉사열선전화: 203-2224 자문전화: 138-9438-7438 위치: 연변병원동대문 뻐스정차점 맞은켠 5층   二○一三年十月     
11    조선족 巫俗과 저승 세계 댓글:  조회:3589  추천:0  2013-10-02
조선족 巫俗과 저승 세계     무릇 한 공동체의 장기적인 군체생활 가운데서, 일정한 력사적 환경에 의하여 산생된 어떤 한가지 풍속이, 초기에는 아무리 미신적이고 황당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 실행한 시간이 길면, 그것이 곧 일종의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 력사에서는 토종종교라고 할수있는 고대 巫俗문화가 있었는데, 력사 드라마에서 종종 볼수 있는 무당이 귀신을 쫓기 위하여 괴상한 동작을 하면서 굿(푸닥거리라고도 함)을 하는 바로 그런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장례제사에 그 리념의 흔적들이 얼마간 남아 있는데, 이를테면 령혼이요, 저승이요, 귀신이요 하는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력사의 쓰레기 무지까지 뒤지면서, 이런 썩어빠진 것들마저 다시 끄집어 내여 살펴보는 것은, 거기에 우리민족의 한가닥 뿌리가 묻혀 있고, 거의 잃어져 가는 우리민족 넋의 원래의 냄새가 슴배여 있으며, 우리민족의 우세로 될수 있는 원색적인 어떤 특색과 지혜를 찾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1,    우리민족의 고대 巫俗에서는 세상의 만사만물에 모두 령혼을 부여하여 인식하였으며, 사물마다, 장소마다, 현상마다에 모두 신이 존재한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한 집을 놓고 보아도, 성주신(집터를 관리), 궁야신(집마루를 관리), 문턱신(문턱과 문설주를 관리), 부엌신(부엌을 관리), 조왕신(음식그릇을 관리), 측신(변소를 관리), 수문신(대문을 관리), 용초부인신(지붕을 관리), 업신(쌀뒤주 관리)…등등의 신들이 있었으며, 농기구나 일상도구에도 모두 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도 오래되면 신이 될수 있었는데, 옛날 어른들이 길을 가다가 오랜 고목을 보면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는 리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심지어 질병에도 신이 있었습니다; 눈병에는 눈신, 부스럼에는 부스럼신, 전염병에는 온역신…등이 있었으며, 그 퇴치법 또한 아주 특이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화공법(불로 지지고, 뜸을 뜨는 등), 구타법(환자를 때리며 구타함, 지압, 안마 등), 경악법(환자를 깜작 놀라게 함, 딸꾹질 퇴치에 특효), 자상법(신체 특정 부위에 상처를 냄, 손가락 따는 방법으로 체증 치료 등), 봉박법(신체를 대신하여 다른 물건에 시술함), 곡물법(곡물로 시술함), 공손법(제사 등 형식으로 신에게 정성다해 공을 드림), 부적법(그림이나 글씨에 신의를 부여함), 음식법(지금의 식의료법과 비슷함), 등이 있었습니다. 2,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魂, 魄, 靈 등 세개 부분으로 나뉜다고 하였습니다.  魂은 정신이요, 하늘나라로 올라가 神靈으로 되여 보편적인 인간세상의 선과 악을 두루 살피여 처리하고, 魄은 넋이요, 유체와 함께 땅에 묻히여 풍수지맥으로써 후손들의 흥망성쇄를 주도하며, 靈은 유령(귀신)이요, 저승에 가서 이승의 가족들이 올리는 제사음식을 먹으면서 정과를 수련하여 삼년제사까지 받고는, 이루어진 정과에 따라 령기가 되여 다시 이승에 환생한다고 하였습니다.     巫俗 리념에 따르면, 하늘나라의 최고 권위는 옥황상제이고, 그 아래에 많은 신선들이 있는데, 바로 하늘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인 셈이죠. 神仙이란 기실 두가지 개념인데, 즉 특정한 天職이 있는 하늘의 관리를 神이라 하고, 이를테면 天神, 雷神, 山神, 水神, 土地神, 財祿神… 등이 그것이며, 일정한 天職이 없이 자유로히 하늘을 떠돌아 다니며 자기의 재주를 부리는 하늘나라 백성들은 仙이라고 하며, 이를테면 八仙過海, 七仙女, 天仙配, 詩仙李白…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神靈으로 된다고 하였는데, 신령이란 우에서 말한 神과 仙에서의 仙에 가깝습니다. 우리민족 전통 장례풍속에서는 장례때의 상중제사와 삼년제사까지는 저승의 혼령에게 올리는 魂제사라고 하고, 그외의 기제, 시제, 묘제 등은 모두 신령에게 올리는 神제사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분석할때 옥황상제란 노자가 말한 《道》를 상징하고, 신령이란 인간의 여러가지 전통문화를 상징합니다. 시작을 알수 없는 그 어느때부터 이미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갔습니다. 그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지능성적인 혼이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 신령으로 승화되여 있다고 하니, 그것이 곧 우리 인류가 몇천년 내려오며 축적한 문화재부요, 그로하여 오늘의 인류문명이 이렇듯 휘황하게 발전할수 있었다는 우리 조상들 식의 사유방식입니다.   3,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넋은 유체와 함께 땅에 묻히여 풍수지맥으로써 후손들의 흥망성쇄를 주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 전통 장례풍속에서 풍수선생을 청하여 음택의 명당자리를 찾게 된 유래입니다. 그런데 풍수관념에서는 산자리를 잘 쓰면 후손들의 흥성에 유리할수 있지만, 산자리를 잘못쓰면 도리여 후손들에게 불리하다고 하였으니, 차라리 산자리는 쓰지 않는것이 무탈을 보증하는 믿음직한 방법이 아닐가? 하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우리민족 전통리념에서 이 방법은 자식된 책임을 회피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서 자기의 운명에 규정되여 있는 귀인을 잃게 되여, 어려운 인생에서 필요한 도움을 받을수 없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되며, 世代가 끊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미신적인 관념이지요.    옛날 서민 장례에서는 보통 동네의 좌상어른이나 비교적 유식한 분을 청하여 산자리를 보게 되는데, 그 령험성에 대하여 확신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면례》라는 방법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즉,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원 산자리의 풍수가 확실히 괜찮다고 확신되여, 해골을 잘 정리하여 칠성판에 모시여 다시 원 자리에 묻고, 장례도 다시 후하게 치려 드리며, 만일 그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원 산자리의 풍수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데, 이것을 移葬이라고 하며, 서민들의 일종의 소박하고 실용적인 명당자리 선택 방법이였습니다.    우리민족 전통 장례풍속에서 산자리 선택에는 엄격한 풍수 표준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지를 “山环水抱”의 양지쪽 비탈로 선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북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山环), 동남쪾은 하천에 안겨 있는(水抱) 양지쪽 룡맥부위에서 중심을 기준하여 합당한 자리를 골라 墓穴로 합니다. 풍수에서는 묘의 왼쪽 산맥을 左靑龍이라고 하는데, 官運을 상징하고, 묘의 오른쪽 산맥은 右白虎라고 하는데, 財運을 상징하며, 묘의 서북쪽, 즉 묘뒤에 둘러있는 산을 背玄武라고 하는데, 조상들의 陰德을 상징하고, 묘의 동남쪽, 즉 묘앞 개활지역을 面朱雀이라고 하는데, 人爲, 즉 자손들의 노력을 상징하며, 주작을 가로질러 河川이 흐르는 것을 명당자리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으로 인정하는데, 그것은 물은 천지의 氣를 고착시키는 공능이 있고, 생명력을 상징하므로 자손들의 노력에 생기를 부여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전통 풍수술에 대하여 과학적 원리로 해석하려고 애쓰는데 기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문화는 그 자체의 당당한 존재 리유가 있으므로 그 자체의 방식으로 존재하게끔 내버려 두는 것이 좋으며, 억지로 소위의 과학에 얽매여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전세기 60년대 70년대에 있었던 “문화혁명”이 시대적 착오였다고 비판하는데, 그 리유의 하나가 바로 소위의 과학적 의식형태로 모든 전통문화를 혁명하고 개조하려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와서 과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 정확한 진리로 오식되여 있으며, 과학적으로 해석할수 없는 특별 문화들은 일률로 간사한 미신으로 의심받고, 그의 합리성이 인정받기 어려우며, 세계를 단일하게 과학적으로만 인식하려 합니다. 이것은 기실 “문화혁명”의 사유방식이 아직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는 표징입니다. 기실 과학이란 것은 근대 유렵 산업혁명의 산물로서, 일종의 선진적인 방법론일 뿐이며, 시기 제한성과 환경 제한성이 강하며,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대표성 사물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증명을 통하여, 보편성 규률과 특수성 규률을 찾아내여, 定律 혹은 论文의 형식으로 체계화, 리론화 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과학적인 것이 가장 선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것이 반드시 真理인것은 아니며, 이 세계에는 아직도 과학으로 해석할수 없는, 또는 과학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많은 종교와 문화들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결코 과학을 유일 표준으로 하는 단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현대 풍수학은 환경과학의 일종이며, 비록 고대의 풍수술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지만, 그 연구 대상과 연구 목적, 그리고 그 연구 방법이 이미 고대의 풍수술과는 많이 다름니다. 그리하여 현대 풍수학을 리유로 우리의 전통 풍수술에도 과학이라는 겉치레 옷을 걸치여 준다면, 그것은 2천년전에 만들어진 진시황 병마용 몸에 고급 서양복을 입히고 넥타이를 매여 주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기실 우리의 전통 풍수술은 비록 과학은 아니지만 이미 몇천년의 생명력을 가진 일종의 생활 문화이며,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문화와 제사문화도 비록 아무런 과학적 도리가 없지만 이미 500여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직도 그 실용가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4,    우리민족 고대 巫俗에서는 사람이 죽어 靈은 유령이 되여 저승에 가서 이승의 가족들이 올리는 제사음식을  먹으면서 정과수련을 거쳐 령기로 되여 이승에 환생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저승이란 우리의 이승 세계(此世)와 이념적으로는 중첩이 되면서도, 또 실제 공간적으로는 영원히 서로 상관이 없는 허무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소위의 저쪽 세계(彼世)로서, 곧바로 사람들이 죽어서 소위 유령들이 모여 산다는 추상적인 세계입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고대 무속을 향도로 모시고, 전설적인 우리민족 저승세계에 들어가 특별한 려행고찰을 한번 다녀 오겠습니다;    우리민족 저승세계의 최고 권위는 염라왕이라고 하며, 그 염라왕의 밑에는 이승 사람들의 命簿를 관리하는 최판관이란 鐵面無私한 신이 있는데, 이승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자기명이 다 하여 죽을때가 되면, 최판관은 명부에 적혀 있는 그 사람의 죽을 날짜에 맞추어, 구속영장, 혹은 초청장을 발부하여 두 저승사자에게 주어서 이승에 내려가 해당 사람의 유령을 체포, 혹은 모셔오라고 명령합니다. 일반사람에게는 구속영장을, 고귀한 사람에게는 초청장을 보낸다고 하지만, 초청장이라 하여도 일방적인 강박 초청이기 때문에 체포해 가는거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 두 저승사자는 이승에 내려와 해당 사람을 찾은 후, 먼저 그의 혼을 유혹하여 육체를 떠나게 합니다. 혼이 떠난 육체는 곧 죽음에 진입하는데, 그것은 저승사자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그들은 해당 사람의 유령을 잡아 이끌고 부랴부랴 鬼門關을 넘어서 저승길에 나섭니다. 저승길은 황천길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누가 쓴지도 모르는 《黃泉路》라는 옛시 한수 있으니 잠깐 감상하고 넘어 갑시다; 奈何桥上道奈何,是非不渡忘川河。 三生石前无对错,望乡台边会孟婆。    우리말로 해석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하다리에 올랐으니 어찌하리오? 인간 시비도리는 망천하 넘지 못하네. 삼생석 앞에 옳고 그름 따로 없는데, 망향대옆에서 맹파녀신 만나누나.    《黃泉》이란 말을 풀이하면 원래는 지하수, 혹은 지하 暗河라는 뜻이 되지만, 전통 사망문화에 채납되여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 혹은 죽은 후의 세계라는 뜻으로 되였습니다.    전설적인 황천길 북쪽켠에서는 한갈래 강이 도도히 흐르는데, 이름은 《忘川河》라고 하며, 바로 이승과 저승의 분계선입니다.    강 량안과 저승길 량옆에 《曼珠沙华》라는 고귀한 이름을 가진 붉은 꽃들이 도처에 피여 있는데, 그 꽃모양이 마치도 하늘에 대고 그 무슨 사연을 간절히 기원하는듯 두손을 합장한것처럼 생겼습니다. 원래 《曼珠》는 꽃의 이름이였고, 《沙华》는 잎의 이름이였는데, 꽃이 필때면 잎이 아직 없고, 잎이 나오면 꽃은 이미 지고 하여, 한줄기에서 자라면서도 종래로 서로 볼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몇천년을 이렇게 서로 사무치게 그리워 하며 살다가, 한번은 드디여 용감히 천규를 위반하고 사사로히 만났는데, 그로하여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이렇게 저승에 와서 피면서 저승에 들어오는 유령들의 슬픈 마음을 달래여 준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이승의 다른 꽃들은 그때부터 한줄기에서 잎과 함께 자유로히 피면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할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량산백과 축영대》 못지않은 너무나 애틋한 사연입니다.    강은 점점 깊은 협곡을 이루면서 급히 흐르는데, 강을 건널수 있게 북쪽으로 이끼가 낀 외나무 다리가 댕그랗게 놓여져 있습니다. 그 외나무 다리 교두에는 《奈何橋》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奈何》란 옛문구로서 우리말로 《어찌하리오?》하는 뜻인데, 유령이 일단 이 다리를 건너 갔다고 하면 완전히 철저히 죽은 것이니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병원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모두들 유령이 아직 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여서 가능했던 것이죠.    강옆에는 큰돌이 박혀 있는데, 《三生石》이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그 돌앞에 가서 서면 자기의 前世, 今世, 來世의 因果緣分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인생에서 채 마무리 하지못한 인정 여건들을 팔을 한번 휙- 저어서 깨끗이 끝내 버릴수 있습니다.    교두에 《望鄕臺》가 있어서 다리를 거느기전에 마지막으로 자기가 살던곳과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영화를 보듯이 한번 휘- 돌이켜 볼수 있습니다.    그 옆에 허술한 초막이 하나 있는데, 초막앞에는 《孟婆茶》라고 쓴 기발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리를 건느기전의 제일 마지막 사무을 끝내야 합니다. 흉물스럽게 생긴 맹파녀신이 큰 바가지로 큰 차물독의 차물을 푹 떠서는 넘겨 주는데, 유령은 그 차물을 받아서 꿀꺽꿀꺽 단모금에 마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들이 금시 말끔히 지워집니다. 이승에서 그렇게도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던 그 무슨 리상이요, 포부요, 그리고 사랑, 증오, 기쁨, 슬픔, 집착, 유감… 등은 여하 불문하고 더는 필요가 없게 되니 이렇게 깨끗하게 끝내여 주는 것이죠.    孟婆茶를 마인후 두 저승사자는 앞뒤에서 유령을 옹위하여 奈何橋를 조심조심 건너는데, 눈을 싸매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다리 아래 거세차게 흐르는 급류속에는 많은 악귀들이 우글거리는데, 일단 어림증이 나서 다리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날에는 순식간에 그 악귀들한테 넙적 먹히워 버리고 맙니다.    奈何橋를 건너서는 陰曺地府라는 저승 관아에 가서 심사를 받고 통과되면, 정식 저승에 입적한 것으로 되며, 路引을 발급받고 저승을 자유로히 떠돌며, 이승의 가족들과 제사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정식 정과수련할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우리의 저승에서는 18층 지옥 제도가 페지되여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이승에서의 貧富貴賤, 善惡德罪와 상관없이 정상 사망의 경우에 모든 유령들이 대체로 평등하게 됩니다. 단지 비정상 사망의 경우, 이를테면 병사, 객사, 전사, 초년사, 모함사, 어굴사, 분노사, 타살, 자살… 등의 경우에는 죽은자 마음에 아직 풀지 못한 너무 깊은 한이 서리여 있어 그윽한 저승의 환경을 깨뜨릴수 있으므로 일시 저승에 입적하지 못하고, 귀신(鬼)이나 도깨비(魔)의 신분으로 저승 입구에서 헤매고 있게 됩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는 한사람 이상의 정상사망한 유령의 보증이 있어야만 저승사회에 입적할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를 보증하여 줄 유령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멀정한 사람을 잘못 해치는 경우가 있지요.    사람이 죽어서 유령이 저승에 정식 입적한 후에라야 정과수련을 시작할수 있으며, 그가 생전에 이룩한 공덕과 가족들이 올리는 삼년제사, 그리고 유령의 자체 노력에 근거하여 정과가 이루어져 부동한 차원의 령기로 되는 것입니다. 보시다 싶이 부모 삼년제사는 사망한 부모님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과수련을 돕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사망한 부모님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은 부모님들 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님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고 고급적으로 갖추기 보다는 필요한 것만 갖추고,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유령은 이렇게 삼년동안 정과수련을 한후 그 이룩한 정과에 따라 부동한 차원의 령기로 되여 다시 이승에 환생하는데, 정과가 특출하여 높은 차원에 오른 령기는 고귀한 가문의 자식으로 환생할수 있고, 정과가 그닥지 않은 령기는 그 차원에 따라 비천한 가문의 자식으로 환생하거나, 심지어 여러가지 동물, 혹은 벌레로 환생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전통적으로 아무리 가난하여도 삼년제사만은 특별히 중시하였는데, 어찌보면 사망한 부모님들의 정과수련에 한힘을 보태여 높은 차원의 령기로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래세에 가서 좋은 가문에 환생하게 하거나, 동물이나 벌레로 환생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목적에서 산생한 풍속일수도 있습니다.  ............................................................................(끝) 2013-10-02 현성원 씀  
10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철학편 댓글:  조회:6743  추천:0  2013-07-22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1, 이번까지 몇기에 나누어,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의 기본 맥락을 더듬어 가면서, 그 유래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알아 보았습니다. 원래는 《조선족 전통 생사관 연구》라고 제목을 달았다가, 과제가 너무 아름찬것 같았고, 또 이미 중앙민족대학 崔榮根 연구윈의 비슷한 과제의 박사론문이 있으므로 하여, 무의미한 중첩과 충돌을 피하여,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으로 고치고, 내 나름대로의 방식과 관점으로 자유롭게 천술하여 보았습니다. 앞으로 계속하여 시간이 되는대로 우리민족 전통 사망관에 대하여 나의 직업적 시각으로 다시 한번 참답게 관찰해 보려고 하는데, 결코 우리민족 특색을 특별하게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민족 전통리념과 전통지혜에서 적극적인 것을 골라내여 유익한 유산으로 남기고 싶을 뿐입니다.   2, 인생의 도리가 천가지, 만가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모종의 의미에서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명의 결속이라고 하기 보다, 생명의 완성이요, 령혼의 승화라고 하는것이 도리에 맞습니다. 자기가 지금 살아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직 진짜 삶이 아닌 것처럼, 자기가 이미 죽었음을 자각할수 있다면 그것 역시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그 만큼 죽음은 영원한 미지의 세계입니다. 죽음은 과학으로 연구하기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의학도 죽음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춥니다. 죽음은 그래도 종교적, 문화적,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비교적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에 와서 아직 과학적으로 해석할수 없는 특별 관념들은 대부분 미신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신의 구체적 표준에 대하여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미신이란 추악한 것이며, 시대적으로 퇴페적이고 락후한 관념을 대표합니다. 근대 유럽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뉴톤, 와트, 에디손 등 대 발명가들에 의하여 과학적 연구방법이 탄생하였습니다. 과학적 연구방법이란 대표성 사물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증명을 통하여, 보편성 규률과 특수성 규률을 찾아내여, 定律 혹은 论文의 형식으로 체계화, 리론화 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한 결론을 과학적 도리라고 정의 하자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표준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는 본질성입니다. 과학적 도리는 반드시 사물의 본질을 설명할수 있어야 합니다. 표면 현상만 설명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과학적 도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둘째는 통일성입니다. 과학적 연구방법으로 증명해낸 결론은 그 누가 그 어느때에 몇번이고 다시 증명하여도 그 결과가 같아야 합니다. 동일한 사물에 대하여 이사람의 증명과 저사람의 증명이 서로 다르고, 이때의 증명과 저때의 증명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과학적 도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세째는 예측성입니다. 과학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바로 목전 사물의 발전 추세에 대하여 정확하게 내다 보고, 휼륭한 새 방안을 미리 내오려는 것입니다. 사물의 발전 추세에 대하여 예측 하지 못하거나, 그 예측이 틀린다면 그것을 과학적 도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오늘에 와서 과학적 도리는 유일 정확한 도리로 오식되여 진리와 거의 동의어가 되여 있습니다만, 기실 과학이란 일종의 방법론일 뿐이며,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도리라고 하여 반드시 真理인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것이 가장 휼륭한 것이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몇백년의 세계적인 근대력사와 현대력사가 증명하였으며, 또 계속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적 기술연구 령역에서 과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도 죽음앞에서는 영원한 실패자입니다. 과학은 죽음을 지연시킬수 있을뿐 완전히 막지는 못합니다. 죽음은 두번 다시 할수 없으므로 과학적 방법으로 죽음의 본질을 실험할수 없습니다.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령혼에 대해서도 사람이 죽은후에 관찰할수 없기 때문에 죽은후의 령혼은 소실된다고 의심합니다. 하지만 관찰할수 없다는 것이 소실되였다는 것과는 다르지요. 존재 방식이 바뀌였을 수도 있으니깐요. 노자와 공자가 죽은지 이미 2500여년이 되였지만, 그들이 창시한 도교사상과 유교사상은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존재하면서 찬란한 빛을 뿜고 있지 않습니까?   3, 사람이란 생명과 령혼의 결합체입니다. 철학적 개념에서 생명은 물질의 범주에 속하고, 령혼은 정신의 범주에 속합니다. 철학이란 세계를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방법론인데, 세계를 크게 물질과 정신이란 두개 범주로 나누고, 물질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하는 문제에 대한 관점에 따라 유물론과 유심론으로 나눕니다. 유물론에서는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며, 물질이 1차적이고, 정신은 2차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와 반대로 유심론에서는 세계의 본질은 정신이며, 정신이 1차적이고, 물질이 2차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물론 시각에서 죽음이란, 생명물질 쇄망과 정신활동 정지에 불과하고, 유심론 시각에서 죽음이란, 령혼이 하늘로 승화하는 신격적인 사건입니다. 유물론의 경우 사람의 일생을 비통속에서 끝내야 하고, 유심론의 경우 사람의 일생을 虛僞속에서 끝내야 하는데, 기실 이 두가지 관점이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모두 편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별도로 《唯能論》을 숭상합니다. 우리의 《唯能論》은 焉敢生心 사회변혁을 목적으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사람의 죽음을 더욱 생활에 가깝게 합리적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4, 우리 《唯能論》에 의하면 우주의 본질은 결코 물질이 아닙니다. 정신도 아닙니다. 우주의 본질은 에네르기(能量)입니다. 물질이란 고도로 조합화 된 에네르기로서, 특정된 시공간에서 특정된 조건에 의하여, 각종 형식으로 조합된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정신이란 고도로 지능화 된 에네르기 입니다. 바로 각종 정보를 포함한 우주의 에네르기가 고급적인 뇌 물질의 고급적인 사유운동에 의하여 가공되여 나온, 비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에네르기야말로 우주의 일체 운동을 추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소입니다. 우리 인류가 생활하고 있는 지구에는 주로 두가지 에네르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성 에네르기로서, 례하면 물리에네르기, 화학에네르기, 생물에네르기, 핵에네르기, … 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성 에네르기 입니다; 례하면 과학, 기술, 지식, 정보, 정신, … 등입니다. 자연성 에네르기는 지구 고유의 물질성 에네르기로서, 그 존재형식을 부단히 변화시킬수 있을뿐, 소멸하거나 생성하지는 못합니다. 사회성 에네르기는 특수한 자연성 에네르기가 기나긴 세월의 진화와 우질화를 통하여 형성된 비 물질성 에네르기 입니다. 사회성 에네르기에서 사람의 정신이 가장 강유력한 지도성 에네르기 입니다. 지구상에서 물질성 에네르기가 사회성 효과를 가져 올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성 에네르기도 물질성 효과를 가져올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에네르기는 모두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필연적은 인소로서, 그 어느 한가지라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우주 블랙홀(黑洞), 여기에서 가장 희미하고, 가장 작은 흰점 하나도 모두 우리의 태양과 비슷한 항성입니다. 5, 우주에서 99.99% 이상의 지역은 물질이 아닌 虛虛 時空間입니다. 時란 시작도 끝도 없이 영구함을 말하고, 空이란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끝없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주의 대부분의 시공간은 텅 비여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여러가지 우주 에네르기로 충만되여 있습니다. 우리 지구와 태양을 포함하여 하늘에 은싸락처럼 널려 있는 은하수와 무수한 별들은 기실 우주에서는 너무나 미세한 존재이며, 우주 에네르기 무한 운동 과정에 대비할때, 일종의 반짝 존재형식에 불과합니다. 현대 물리학과 화학에는 “物質不滅定律”이란 것이 있는데, 기실 우주에서는 불멸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에네르기 입니다. 그러므로 우주학에서는 “能量不滅定律”라고 합니다. 우주에서 물질은 지구에서와 달리, 생성, 성장, 성숙, 쇄망, 등 과정을 겪습니다. 우주에서 물질의 생성은 블랙홀의 대 폭팔에 의하여 진행되는데, 블랙홀이란 우리 은하수 범위와 비슷한 광범한 지역의 모든 물질과 에네르기가 우주 특유의 힘에 의하여 탁구알만한 한점에 수축되면서 거대한 흡인력을 과시하고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블랙홀의 생성은 물질이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에네르기로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빛까지도 송두리채 흡수되여 들어 가므로 이 지역을 관찰할때는 마치도 우주에 검은 구멍이 뻥 뚤린것처럼 어둡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우주의 “黑洞”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블랙홀에 물질과 에네르기가 부단히 흡수되여 들어가 反物質로 되면서, 언젠가는 끝내 내외 압력 평형이 파괴되면서 거대한 폭팔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주학에서 “宇宙大爆炸”라고 합니다. 우주 대폭팔은 반물질이 다시 물질로 환원되고 조합되는 과정으로서 폭팔에 의하여 많은 에네르기가 방출되는 순간에 많은 物質元들이 생기면서 새 물질원자들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곧 새 물질의 기원이며, 이로부터 항성, 행성을 포함한 수없이 많은 물질들이 조합되면서 새 일대 물질가족의 기니긴 려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개 블랙홀에서 폭팔하여 생성된 물질들이 보통 한개 은하수 가족을 형성하는데, 그들은 거대한 팽창력으로 전 방위적으로 기나긴 시간을 통하여 확산되여 나갑니다. 그리하여 그 어느때에 가서 이 가족 물질들이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영향력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희박해 진후, 각기 다른 블랙홀에 흡수되여 들어 가면서, 이 가족 물질들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은 에네르기 유일한 조합형식은 아닙니다. 우주 대폭팔중에서 블랙홀의 크기와 특성에 따라 에네르기는 여러가지 조합형식을 가질수 있으며, 물질이 아닌 다른 더욱 고급적인 조합물을 생성시킬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합물이 장기적인 진화와 우질화를 거쳐, 혹시 우리 인류의 생명형식보다 더욱 고급적인 차원에 도달할수도 있습니다. 가령 그 어느때에 가서 우리 인류가 지구밖의 문명을 발견한다면, 그 문명형식이 꼭 우리 인류처럼 생명을 기초로 한 지능형식만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 더욱 고급적인 에네르기 조합물을 기초로 한, 더욱 고급적인 지능 형식일수도 있습니다. 오늘까지 이 방면에 대한 인류의 지식고는 여전히 공백으로 되여 있습니다.   6, 상식적으로 物質은 많은 分子들로 구성되였고, 분자는 많은 原子들로 구성되였으며, 원자는 또 原子核과 電子로 구성되였고, 원자핵은 또 質子와 中子로 구성되였습니다. 현대 과학가들은 또 질자를 분해하여 跨克라는 립자까지 발견하였습니다. 이렇게 무한히 세분하여 내려 간다면 그 극한은 의심할바 없이 “無”에 도달하게 되며, 빈 공간만 남게 됩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말하는 原子요, 電子요, 質子요 하는 등등의 개념은 물질 성분 결구의 부동한 차원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 단위 본신의 크기가 그 기본 단위 활동 궤도의 크기에 대비하여 볼때, 몇만분의 일, 몇억분의 일, 혹은 그 보다도 더욱 미소합니다. 유관 자료에 의하면 태양 직경이 약139만키로, 지구 직경이 약1.3만키로,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궤도의 직경은 약3억키로가 됩니다. 이 수치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비유해 볼수 있습니다; 가령 지구의 공전 궤도를 직경이 300m되는 올림픽 운동장 만큼 축소 한다면, 태양은 운동장 중앙에 놓인 직경이 약 1m 되는 고무풍선에 상당하며, 지구는 운동장 주위를 도는 직경이 약1cm 밖에 안되는 작은 유리알에 상당합니다. 보시다 싶이 지구 공전 구역의 절대 대부분 지역은 텅빈 공간이며, 거기에는 각종 우주 에네르기가 충만되여 있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시각을 바꾸어, 가령 물질의 기본원소인 원자를 올림픽 운동장 만큼 크게 확대 한다면 어떻게 될가요? 그때에 원자핵은 운동장 중앙에 놓인 축구공에 상당하며, 전자는 운동장 주위를 도는 유리알에 상당합니다. 가령 계속하여 또 원자핵, 질자, 跨克까지 차례로 운동장 만큼 크게 확대한다면 그 결론은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소위의 물질이란 기실 내부로나 외부로나 텅 빈 공간이며, 단지 여러가지 형식으로 조합된 에네르기가 충만되여 있을 뿐입니다. 물질은 우주의 한개 보통성원에 불과하며, 우주의 유일한 대표가 아닙니다. 물질이란 기실 우주 에네르기의 일종 표현일 따름이며, 단독으로 우주 본질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7, 유심론은 관념론이라고도 하는데, 유심론에서 말하는 정신에는 인간 정신외에 또 초인간 정신이란 것이 있습니다. 즉 하늘, 땅, 산, 강, 나무, 바위, 동물, …등 모든 자연성 물질에 모두 정신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유심론은 주로 신을 믿고, 종교신앙을 가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신을 믿고, 여러가지 종교신앙을 가지고 있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리하여 그 누가 경솔히 유심론이 이렇게 저렇게 틀린다고 말했다가, “그럼 지구의 70%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틀리는 관념으로 살아 간단 말인가?” 하는 식의 질문을 받게되면 답변이 궁굼할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란 지능성 활동으로서, 의식적, 주관적, 지배적인 힘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주관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지배합니다. 사람에게는 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 한 부류 사람들이 공동으로 준수하는 집단적 정신입니다. 신앙에 예속되지 않는 정신은 성숙된 정신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신은 신앙에 의하여 자기의 가치를 사회에 나타냅니다. 정신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유물론과 유심론에서는 각기 부동한 견해가 있습니다. 유물론에서는 사람의 두뇌가 인체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계의 각종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접수한후, 일련의 사유와 실천의 가공과정을 거치여 정신이 산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유심론에서는 정신이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이 정신이 생명을 선택하여 사람을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세계는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으며, 또 그 해석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운영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견해와 다른 남의 견해의 합리성을 볼줄 알아야 하며, 자기만 옳고, 남의 것은 틀린다는 식의 태도야 말로 기실 가장 틀리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질이란 고도로 조합화 된 형태성 에네르기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신도 고도로 지능화 된 비 형태성 에네르기라고 하는데 어째서 그러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과학기술은 제일 생산력”이라는 등소평의 명구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력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생산력이란 원래 생산인, 생산공구, 생산대상, 이 세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등소평에 의하여 과학기술도 생산력으로, 그것도 일약 제일 생산력으로 승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성공적인 조화의 결과입니다. 위대한 사상의 사회발전에 대한 결정적 역활, 선진 과학기술의 생산활동에서의 결정적 역활, 훌륭한 작전방안의 전투승리에서의 결정적 역활, 사람 지혜의 사람 행위에서의 결정적 역활, 이런것은 기실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확실한 현실입니다. 정신이 비록 사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일을 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에네르기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으니 구구히 더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이란 것도 기실 우주 에네르기의 일종 표현일 따름이며, 단독으로 우주 본질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8, 우리들이 생활하는 주위의 시공간은 우주 시공간의 일부분으로서,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우주 에네르기가 잠재하여 있습니다. 우주 에네르기는 자연성 에네르기와 사회성 에네르기의 구별이 따로 없이 혼돈의 형식으로 우주 공간에 충만되여 존재합니다. 그 누가 에네르기 원자재가 수요된다면 우주에는 그런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으니, 당신은 아무런 대가도 내지 않고 수요에 따라 그것들을 가질수 있으며, 또 자기것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택과 학습의 방식으로 우주 에네르기 원자재를 받아들여, 사유와 실천의 방식으로 가공하여 고급적인 정신 에네르기로 승화시킨후, 마음의 창고에 저장 하였다가, 그것으로 다시 자기의 행위를 지도하여 더욱 고급적인 효과를 가져 옵니다. 사상은 우주 에네르기를 인입하는 대문입니다. 사유와 실천은 우주 에네르기를 정신 에네르기로 가공하는 공장입니다. 마음은 정신 에네르기를 저장하는 창고입니다. 사상을 전 방위로 해방하고, 사유와 실천을 만부하로 가동하고, 마음을 바다같이 넓혀 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가장 충족한 우질 에네르기를 받아 드릴수 있고, 가장 고급적인 정신 에네르기로 가공해 낼수 있으며, 가장 충분한 정신 에네르기 완성품을 저장할수 있습니다. 당신이 용기가 부족합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용기가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받아 들여 용맹한 사람 되십시요. 당신이 유관 지식이 부족합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유관 지식이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받아 들여 박사가 되십시요. 당신이 신체가 허약합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건강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받아 들여 무병장수 하십시요. 당신이 지금 돈이 모자랍니까? 당신 주위 우주에 돈 벌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그 기회 잡고 부자 되십시요. 당신 인생에서 무엇이 수요되면, 당신 주위 우주에는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어떤 에네르기가 있습니다. 관건은 당신이 진정 그것들을 가지려 하는가? 그것을 가지기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려 하는가? 하는 마음 가짐에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 그것들을 가지려고 마음 먹었고, 또 그것을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려 한다면 당신 주위 우주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않고, 당신이 요구하는 에네르기를 충족하게 공급하여 줍니다. 이렇게도 수지 맞는 좋은일에 체면 차릴 리유가 없습니다. 어쩌다 한번 온 인생인데, 풍요로운 인생 살아보고 죽기 위하여 대담히 우주에 향하여 욕심을 부려 보시지요.   9, 사람이란 생명과 령혼의 결합물이고, 사람의 죽음은 생명의 완성이요, 령혼의 승화입니다. 사람에게서 생명물질과 령혼은 엄연히 구별되면서도 완미하게 결합되여 있습니다. 변증법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대립물의 통일이지요. 생명물질은 주로 물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핵산,…등 여러가지 유기물질과 여러가지 미량원소로 조합 되였는데, 사물 발전의 한단계 과정에 불과 합니다. 생명물질의 조합형식이나, 운동형식에 문제가 생기면 인체에는 소위의 장애가 생기는데 병에 걸렸다고도 합니다, 그 장애가 엄중해 져서 생명물질 운동이 중지된다면 그것이 곧 인체의 죽음입니다. 정신이란 인체 뇌물질의 주요 운동공능으로서 구체적으로 분석, 선택, 창조, 기억, 지령, 등 공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특색적인 공능이 창조성 공능이고, 가장 중요한 공능이 지령성 공능입니다. 지령성 공능에는 인체 내부 운행에 대한 식물성 지령 공능과 인체 외부 행위에 대한 동물성 지령 공능,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뇌의 공능에는 또 喜怒哀樂, 驚恐愛慾, …등 감정성 공능이 있는데, 인체의 생명활동에 대하여 보조적인 작용을 합니다. 뇌가 직접 훼손을 당했거나, 인체 생명활동이 정지되면서 뇌에 대한 영양물질 공급이 중지 된다면 뇌의 죽음이 오는데, 인체의 내부나 외부에 대한 지령성 공능이 중지되므로 인체의 전반 생명활동이 중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물의 각도에서 해석한 사람의 죽음 현상입니다. 생명현상은 지구의 특수한 현상입니다. 리론상에서 생명현상이 지구에만 있는 유일한 현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지구외의 다른 성구에서 생명의 자취를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 생명이 형성되는 과정은 단세포 물질이 고급적인 생명물질로 조합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에네르기가 생물로 조합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생명은 부모 생육의 방식으로 생명인자를 한세대 한세대 물려 주면서 이어져 내려 가는데, 정상적인 경우에 매 세대의 생명마다 모두 출생, 성장, 성숙, 로쇠, 사망, 등 과정을 거칩니다. 생명의 발전은 이 몇개 과정을 원만히 거쳐야만 비로서 자기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생명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을 또 령혼의 승화라고 하였습니다. 령혼이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 령혼이 있기 때문에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정도 부동하게 물질 재부와 정신 재부를 창조하게 되며, 자식들을 낳아 기르게 되며, 주의의 사람들과 여러가지로 인연을 맺고 정분을 쌓게 되며, 사회의 여기 저기에 자기존재의 흔적과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령혼은 상관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고, 사회의 기록에 남게 되며, 그가 생전에 이룩한 어떤 성과에 남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죽은 후에 그가 생전에 이룩한 그 무엇이 계속 사회와 가정에 유익하게 리용되는 과정에서 체현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사람이 죽은후에 령혼이 소실된 것이 아니라, 그 존재방식이 개인적인 방식에서 사회적인 방식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10, 인생의 도리가 천가지, 만가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모종의 의미에서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바라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생명의 결속이라고 하기 보다, 생명의 완성이요, 령혼의 승화라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 살아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직 진짜 삶이 아닌 것처럼, 자기가 이미 죽었음을 자각할수 있다면 그것 역시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우주의 본질은 결코 물질이 아닙니다. 정신도 아닙니다. 우주의 본질은 에네르기(能量)입니다. 물질이란 고도로 조합화 된 에네르기로서, 특정된 시공간에서 특정된 조건에 의하여, 각종 형식으로 조합된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정신이란 고도로 지능화 된 에네르기 입니다. 바로 각종 정보를 포함한 우주의 에네르기가 고급적인 뇌 물질의 고급적인 사유운동에 의하여 가공되여 나온, 비 형태성 에네르기 입니다. 우주의 99.99% 이상의 지역은 물질이 아닌 허허 時空間입니다. 時란 시작도 끝도 없이 영구함을 말하고, 空이란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끝없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주의 대부분의 시공간은 텅 비여 있는 것이 아니라, 기실 우주 에네르기로 충만되여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란 지능성 활동으로서, 의식적, 주관적, 지배적인 힘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주관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지배합니다. 사람에게는 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 한 부류 사람들이 공동으로 준수하는 집단적 정신입니다. 신앙에 예속되지 않는 정신은 성숙된 정신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신은 신앙에 의하여 자기의 가치를 사회에 나타냅니다. 세계는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으며, 또 그 해석에 따라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운영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견해와 다른 남의 견해의 합리성을 승인할줄 알아야 하며, 자기만 옳고, 남의 것은 틀린다는 식의 태도야말로 기실 가장 틀리는 태도입니다. 사상을 전 방위로 해방하고, 사유와 실천을 만부하로 가동하고, 마음을 바다같이 넓혀 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가장 충족한 우질 에네르기를 받아 드릴수 있고, 가장 고급적인 정신 에네르기로 가공해 낼수 있으며, 가장 충분한 정신 에네르기 완성품을 저장할수 있습니다. 당신 인생에서 무엇이 수요되면, 당신 주위 우주에는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어떤 에네르기가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 그것들을 가지려고 마음 먹었고, 또 그것을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려 한다면 당신 주위 우주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않고, 당신이 요구하는 에네르기를 충족하게 공급하여 줍니다. 어쩌다 한번 온 인생인데, 풍요로운 인생 살아보고 죽기 위하여, 대담히 우주에 향하여 욕심을 부려 보시지요.   (전부 끝, 스크랩 불허)   
9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제사편 댓글:  조회:7423  추천:1  2013-07-01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세번째 부분: 제사(祭祀)   유래(由來): 제사의 본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어떤 소기의 념원의 실현을 위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의식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으로는 의지 교류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초인간적 대상과 의지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소위의 초인간적 능력을 리용하려는 문화적 수단이였습니다. 제사문화는 이미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으며, 과학이 세계를 통치하는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막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인간능력의 보충수단이며, 신앙과 정감의 표현입니다. 중국 西周시기의 金文에서는 제사가 “孝”로 표시되여 있습니다. 례를 들면 《追簋》에 “用享孝于前文人”이란 문구가 있고, 《酒诰》에 “用孝养厥父母”란 문구가 있으며, 《文侯之命》에 “追孝于前文人”이란 문구가 있는데, 모두 제사를 뜻합니다. 이로부터 ”孝”의 사상이 초기에는 고대의 제사활동에서 기원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찍이 上古 殷商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그 당시 제사 대상이 주요하게 일월성신, 나라강산, 선조선왕, 등이였습니다.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道敎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儒敎로 발전하였습니다.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孝道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키여,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켰습니다. 유가사상이 보급되면서부터 人文 제사의 주요 대상이 선조와 사망한 부모로 되였습니다. 제사는 선조와 사망한 부모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과 부모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정감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조상 음덕의 혜택과 유익한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고, 가문의 뉴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제사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보아도,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 지구에 생명인자가 생기면서 부터, 어류, 류인원, 현대인, 이렇게 기나긴 과정의 생명진화를 경과하여 왔으며, 우리의 선조들이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험악한 환경에서 완강히 생존하시면서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으시여 당신에 까지 내려온 것이며,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를 낳으시고, 전부의 심혈을 쏟으여 어렵게 키우시여 오늘에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 생명의 존재만 알고, 선조와 부모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의 생명은 아직 동물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문명 생명으로서, 현명하고 공덕이 많으셨던 우리의 조상들과 陰德의 뉴대가 이어질수 없으며, 다재다난한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생전에 쌓으신 공덕이 후대들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으로 혜택을 주는 것을 陽德이라고 하고, 간접적으로, 정신적으로 두고두고 혜택을 주는 것을 陰德이라고 합니다. 유물의식으론 물론 해석이 안 되죠. 조상 음덕의 혜택을 얼마만이라도 받으시려거든 조상과 부모를 숭상하고, 그들과의 정감뉴대를 건실하게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조상 음덕이란 없다고 의심하십니까? 녜! 그럼 정말로 없습니다. 조상 음덕이란 있다고 믿으십니까? 녜! 그럼요, 확실히 있습니다.   분류(分类):조선족 제사는 크게 네가지 류형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상중제(喪中祭); 바로 장례기간과 그후 3년 탈상하기전의 제사활동을 말합니다. 례하면 成服祭, 成墳祭, 虞祭, 安神祭, 卒哭, 小祥, 大祥 등입니다. 그외에도祔祭, 禫祭, 吉祭 등이 있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2)、시제(时祭); 冬至에 시조의 제사를 지내고, 立春에 고조이상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며, 매계도 중간달(음력 二월、五월、八월、十一월)에 고조까지 선조들의 제사를 지냅니다. 오늘 시제라고 할수 있는 행사는 정월 초하루날의 茶禮를 들수 있고, 기타의 시제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3)、기제(忌祭);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忌日이라고 하는데 小祥(돐제)과 大祥(삼년제)을 포함하여 매년 이날에 지내는 제사가 곧 기제입니다. 지금 대상후의 기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4)、묘제(墓祭); 원래는 청명, 단오, 추석, 중양에 산에 가서, 묘자리가 있는 모든 선조와 부모의 묘를 다듬고, 묘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청명과 추석에만 산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그외에 祠堂祭, 禰祭, 練祭, 年中節祭 등이 있었다는데, 우리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 조선족 제사풍속은 보존된것이 많지 못하며, 순서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볼수 있는 기타의 제사들로는 또 生辰祭, 祀甲祭, 石物祭 등이 있습니다.   지방(纸榜): 사진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는 망자의 遺像을 만들수 없었으므로 사당에 조상들의 位牌를 모두 나무로 깎아 만들어 모셨습니다. 지방은 위패의 림시 대용품으로서 매번 제사에 즈음하여 종이를 접어 만들었는데, 제사가 끝나면 살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불운의 이민사에는 중국에 이민 와서 사당을 짓고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면서 뜨르르하게 사신 대부호 가문은 없었습니다. 또 있을수도 없었습니다. 단지 평소에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부모의 神位를 모시다가, 제사가 되면 위패는 모두 지방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류별에 따른 지방의 서식표 类   别 格    式 고조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증조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안해 亡室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백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백모 顯伯母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형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 (姓名) 神位 아들 亡子 秀才 (姓名) 之靈 父生前职称 顯考 (职称) 神位   지금 이 풍속은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지금은 제사에서 유상을 쓰기 때문에 지방이 필요없지만, 전통문화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지방을 리용한다면 그로서의 리유가 서는 것입니다. 전통 지방의 서식에서 조부 조모의 신위를 한개 纸榜에 써야 할 경우에, 북쪽을 향하여 종이를 놓고, 서쪽에 조부를, 동쪽에 조모의 신위를 씁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지방에 성명을 쓰지 않지만 지금 대다수 유가족에서는 고인의 성명을 지방에 써 넣을것을 요구하니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제사상(祭桌):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에 앉히며, 그 원인은 방위에서 남쪽이 양이 되고, 북쪽이 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아래의 제사상 진설원칙을 장악할수 있습니다. 령좌를 앉히고 그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령좌와 제사상을 한상에 할수도 있습니다.   제상진설 원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진설원칙 해설; 동쪽은 左陽이요, 서쪽은 右陰이라, 익은 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고, 생 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은곳에 달리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보통 땅밑에 있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땅위에 있으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물밑에 있으니 후에 놓으며,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고,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습니다.   제상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는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줄에는 반찬류를 놓고,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합니다.   제사순서(祭祀程序):   진설(陳設) (1) 먼저 령좌를 앉히고 신주를 모십니다. (2) 령좌앞에 제사상을 진설합니다. (3) 제사상앞에 모사, 향안 등을 놓습니다. (4) 자손들이 제사상 왼편에 차례로 섭니다.   강신(降神) 참신(參神) (1) 일동이 곡을 시작합니다. (2) 제주(장손)가 향안 앞에 꿇어 앉아 향을 피웁니다 (3) 제주가 손을 씻고 향안 앞에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술을 반잔쯤 따릅니다. (5) 제주가 세번 나누어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6)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집사가 문을 조금 열어 강신을 맞이합니다. (8) 제주이하 자손들이 함께 삼배하니 참신입니다.    초헌(初獻) 독축(讀祝) (1) 제주(초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제주는 반잔만 모사에 붓고 술잔을 신주옆에 놓습니다. (4) 집사가 메밥두껑을 열어 놓습니다. (5) 제주는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6) 축관이 축판을 듭니다. (7) 제 자손들이 모두 꿇어 앉아 부복합니다. (8) 축관이 축을 읽습니다. (9) 축이 끝나 일동 일어나고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10) 집사가 남은 반잔의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아헌(亞獻) (1) 주부(아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주부는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종헌(終獻) (1) 근친(종헌자)이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근친이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첨작(添酌) (1) 종헌이 끝난후 또 헌작자가 있으면 첨작이라 합니다. (2) 첨작은 많아서 석잔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3) 첨작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5) 첨작자가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합문(閤門)유식(侑食) (1) 일동이 곡을 그칩니다. (2) 메에 숟가락을 꽂고 반찬에 젓가락을 놓습니다. (3) 일동이 문밖에 나가 남녀가 서로 마주하고 섭니다. (4) 문을 닫고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계문(啓門) 진차(進茶)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엽니다. (2) 집사가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립니다. (3) 엄숙히 잠깐동안 묵도합니다.   사신(辭神) 철찬(撤饌) (1) 집사가 수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납니다. (2) 일동이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3) 신주를 내립니다. (4) 제사상을 물리고 축문과 지방을 살읍니다.   지금은 이런 제사순서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으나, 한번 저세상 부모님에게 지극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으신 분들은 제사소물을 풍성히 차리기 보다, 이런 제사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알아 두었다가, 혹은 지도를 받으면서 라도, 한번 제대로 되는 제사를 지내 보는 것도 바람직 합니다.   우제(虞祭):장례가 끝난후의 첫번째 제사인데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가 있습니다. 우제는 망령이 금방 신체를 잃고 몹시 불안해 하므로 련속 세번 제를 지내여 안신시킨다는 뜻입니다. 우제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지내는데 초우제는 장일 당날에 산을 내린후 해가 지기전에 지냅니다. 초우제를 지내고 상가에서는 모두 상복을 벗습니다. 재우제는 장일후의 첫번째 柔日(乙、丁、己、辛、癸),즉 초우제의 이튿날, 혹은 사흩날에 지내고 삼우제는 재우제후의 첫번째 刚日 (甲、丙、戊、庚、壬)즉 재우의 이튿날에 지냅니다. 지금 장례후 한번 안신제 지내는 것은 보편 현상이지만, 련속 세번 우제를 지내는 경우는 극히 드믑니다.   안신제(安神祭): 길림성 연변지구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안신제는 전통 우제와 조금 구별됩니다. 전통 안신제는 장일 이튿날 다시 산에 올라 새 봉분앞에서 지내는데, 냄비에 기름떡 세개를 구우면서 기름냄새를 피운다음, 기름떡이 익으면 제단에 올려놓고, 상주를 비롯하여 일동이 다 같이 세번 절을 합니다. 전통 안신제에서는 술을 붓지 않고 곡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은 고려때에 불교를 숭상하면서 부터 제사에서 의례 향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이민 들어와서 백성들은 향을 얻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가문에서부터인가 시작하여 기름 냄새 피우는 것으로 향 냄새를 대신하게 되였었는데, 그것이 전해져 내려 오면서 오늘에는 이미 우리 연변의 안신제 문화의 독특한 내용으로 고착되였습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여 있는데, 안신제사의 의미는 우제와 기본상 같습니다. 지금 성시의 장의관에서는 유가족들을 위하여 뒤울안에 많은 제단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유체를 화장한후 유가족과 손님들이 다 함께 소위의 안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장례를 끝냅니다. 고인의 띠에 해당되는 제단을 찾아 골회함, 혹은 유상을 신주로 하고, 제단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상주로 부터 가문의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하며, 손님들도 모두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사가 끝난후, 불을 피워 기름내를 피우면서, 혼 부른 옷과 상장 등을 모두 살읍니다. 소위의 안신제가 끝난후 손님들을 모두 식당에 모셔 식사시키는 것으로 장례행사가 전부 끝납니다.   소상(小祥):돐제가 바로 소상입니다. 사망일 전날 저녁 해지기전에 집에서 석전제를 지내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낮에는 산소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의연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대상(大祥):두돐제가 바로 대상인데 삼년제 라고도 합니다. 제사의 절차는 기본상 돐제때와 같습니다. 삼년제가 지나면 혼백을 살으거나 묻어 버리고 탈상합니다. 몽상을 벗었다고도 합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여전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수효(守孝): 중국에는 고대로 부터 “三年守孝”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를 치른후에 아들은 여전히 상복을 벗지 못하고 반드시 삼년동안 집에 머물면서 부모를 추모해야 하였습니다. 이 삼년 수효기간에는 결혼을 하지 못하며, 오락을 하지 못하며, 연회에 가지 못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며, 부부는 한자리에 들지 못하며, 가속에서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삼년수효의 상관 규정에 대하여 력대의 황제들까지도 감히 함부로 위반하지 못하였으며, 관청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벼슬을 사임하고 집에 와서 삼년수효를 마친 후에 다시 복직해야 하였습니다. 林语堂이 쓴 《苏东坡传》에서는 북송의 문학대가인 소동파가 부모의 사망때문에 선후하여 두번이나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돌아와 삼년수효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만큼 삼년수효 규례는 중국사람들의 심중에 天規처럼 뿌리 박혀 있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에서 상주의 삼년 복상기 제도도 중국의 삼년수효 규례에 기초한 것으로서 여전히 그 뿌리가 깊습니다. 이미 서거한 조선의 김정일 위원장도 부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후 온 나라국민과 함께 어렵게 삼년수효를 마친 후에야 정식으로 위원장직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 삼년수효와 상관하여 《论语·阳货篇第十七》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宰我问:“三年之丧,期已久矣。君子三年不为礼,礼必坏;三年不为乐,乐必崩。旧谷既没,新谷既升,钻燧改火,期可已矣。”子曰:“食夫稻,衣夫锦,于汝安乎?”曰:“安。”“汝安,则为之!夫君子之居丧,食旨不甘,闻乐不乐,居处不安,故不为也。今汝安,则为之!”宰我出。子曰:“予之不仁也!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 우리말로 해석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재아문,“삼년상 기한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삼년동안 례를 차리지 않으면 례를 버리게 되고, 삼년동안 례악을 울리지 않으면 례악을 망치게 됩니다. 묵은 곡식을 다 먹으면, 새 곡식을 받아 들여야 하고, 불씨도 해마다 바꿔야 하는데, 일년이면 충족하다고 봅니다.” 공자왈,“이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니 네 마음이 편안 하드냐?” 재아왈,”물론 편안하였지요.” 공자왈,“네 마음이 편안하였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 군자는 상례기간에 무슨 음식 먹어도 맛이 없고, 무슨 음악 들어도 기쁘지 않고, 앉으나 서나 불안하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너는 그래도 편안하였다 하니 그럼 너 맘대루 해 보려무나.” 재아가 나간후 공자왈,“저애는 너무 인의롭지 못하구나. 자식들은 태여나서 삼년후에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니라. 그러니 삼년상 치르는 것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니라. 저애도 삼년동안 자기 부모한테서 사랑을 받았으련만?” 이상의 론어 기록에서 알수 있는바 전통적인 삼년수효 규례는 공자의 전부터 이미 있었으며, 공자는 단지 그 규례의 합리성을 진일보 강조하였고, 자식으로서 부모의 바다같은 은정에 전부 보답할수는 없지만, 자기를 낳아서 걸음마 타기까지의 약 삼년의 사랑만에라도 보답하는 척 하여 성의라도 표시해야 하는것 아니냐? 하는 뜻이였습니다. 吉林省长春息园公墓에는 “孝子坟”이란 묘가 있는데,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清末光绪년간에 신경(지금의 장춘)에는 王梦醒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모친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고, 묘옆에 움막을 지어 놓고, 상복을 입은 채로 수효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익은 음식을 먹지 않고 생쌀만 먹었는데, 아침에 한줌의 생쌀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 그것이 온 하루의 끼니로 되였습니다. 당시에 한 부대의 장관이 그와 절친한 사이여서, 늘상 그한테로 와서는 한담하고 돌아가군 하였는데, 그가 道敎에 대하여 상당히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를 살아있는 신선으로 여기면서 그의 모친 묘에 제사 지내 주고는 동전과 지전들을 놓고 가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따위 돈들을 상관하지 않으니, 결국에 류랑애들이 그 돈을 모두 주어 가군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많은 재부가 있는 걸로 알고 한 부랑뱅이가 그를 찾아 와 목에 칼을 들이 대며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가 돈을 내놓지 못하자 그 부랑뱅이는 칼로 그의 목을 찔러 놓고 도망쳤습니다. 이튿날 경찰이 왔을 때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누구의 짓이냐?고 물으니 그는 그저 고개만 저었습니다. “그럼 하늘이 한 짓이란 말이냐?” 경찰이 짜증내며 물으니 그는 대뜸 고개를 끄덕이였습니다. “하늘이 한 짓이라면,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 자를 잡아서 징벌할 방법이 없구나.” 경찰은 수사를 걷우고 말았습니다. 1934년에 그는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의 모친묘에 합장시켜 주고, 그 묘를 “孝子坟”이라고 이름을 달아 주었습니다. 일본이 동북을 점령한후, 신경을 수도로 위만주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내 확장건설을 하면서 “孝子坟”을 옮기려 하였는데, 누가 묘를 파면 누가 쓰러지군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믿지않고 작탄으로 폭팔시키려 하여도 작탄이 폭팔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선통황제 부의까지 동원하여도 별 방법이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孝子坟”이 령험하다는 소문이 전 동북에 퍼지게 되여, 많은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여기를 찾아서는 향을 태우고 제사 지내고는 돌아 갔다고 합니다. 1958년 9월, 장춘시 인민정부에서는 “孝子坟”을 잠시 다른곳에 옮겼다가, 50년이 지난 2008년에 长春息园公墓에 정식으로 자리를 정하고, 지방 문물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청명제(清明祭):매년 청명, 단오, 추석, 중양이면 산에 올라 묘를 다듬고 제를 지내는데 지금 단오와 중양에는 산에 가지 않습니다. 청명때에는 삽 한자루 가지고 가는데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서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 다음 삽으로 가볍게 봉분을 보수하고 다듬는데 속칭 가토라고도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다음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문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합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성진에서 납골당에 골회함을 보관한 사람들은 이날 골회함을 찾아 내와서는 산비탈 공용 제단에 가서 제사 지내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추석제(秋夕祭):추석에는 낫 한자루 가지고 산에 가는데 봉분우에 자라난 풀들을 깨끗이 베여 버립니다. 이것을 속칭 벌초라고도 합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청명제때와 같습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후일계속 - 스크랩 불허)
8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안장편 댓글:  조회:6177  추천:1  2013-06-25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두번째 부분: 안장(安葬)   굴광(掘圹):굴심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묘혈을 파는 절차로서 전통적으로 마을의 喪與契 치상조직에서 책임지고 해결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주로 고려때 부터 역술풍수에 대하여 독특한 체계를 갖추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고려에서는 道詵국사가 풍수주맥을 이루고 있었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그 주맥을 無學대사가 계승, 발전시키게 되였습니다. 조선태조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족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이성계의 고조부 穆祖가 그의 부친 陽茂장군이 사망하자 산소를 쓸 명당자리를 찾아 고려팔도를 돌아 다니던 중, 강원도 한지방에서 한 도승의 혼자 하는 말에서 계시를 받고, 5대안에 가문에서 대왕이 나올수 있다는 명당자리를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소 백마리로 開土祭를 지내고, 금으로 만든 관을 써야 한다는 부가 조건이 있었습니다. 목조는 어려운 살림 형편에서도 지혜를 발휘하여, 白牛(흰소) 한마리를 얻어서 百牛(백마리 소)를 상징시켜 잡아서는 開土祭를 지냈고, 금빛나는 귀리짚으로 관을 엮어서는 금관을 상징시켜 부친을 모시고 그곳에 정중히 묻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 한국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입니다. 그때로 부터 제 5대에 와서 전주 이씨 가문에는 과연 이성계라는 비범한 인물이 나타나 고려의 최고 장군자리까지 올랐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세우고 태조가 되였던 것입니다. 그후 이씨 조선은 27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518년간 유지되였습니다. 오늘에 와서도 한국에서는 중대한 선거에 즈음하여 일부 候選人들이 풍수인을 내세워 명당자리를 찾아서는 부모나 조상의 묘를 이장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은 지금도 음택의 풍수를 상당히 중시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민족 장례풍속에서 장지 선택에는 엄격한 풍수학적 표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지를 “山环水抱”의 양지쪽 비탈로 선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북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山环), 동남쪾은 하천에 안겨 있는(水抱) 양지쪽 룡맥부위에서 합당한 자리를 골라 墓穴로 합니다. 풍수학 각도에서 묘의 왼쪽 산맥을 靑龍이라고 하는데 官運을 상징하고, 묘의 오른쪽 산맥은 白虎라고 하는데 財運을 상징하며, 묘의 서북쪽, 즉 묘뒤에 둘러있는 산을 玄武라고 하는데 陰德을 상장하고, 묘의 동남쪽, 즉 묘앞의 개활지역을 朱雀이라고 하는데 人爲, 즉 사람의 노력을 상징하며, 주작을 가로질러 하천이 흐르는 것을 명당자리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으로 인정하는데, 그것은 물은 천지의 氣를 고착시키는 공능이 있고, 생명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장지가 결정되면 그 옆에 후토(산신에게 제 지내는 제단)를 만들고 술과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먼저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 다음 묘혈의 좌향을 정하고 굴심을 시작하는데, 일반적으로 묘혈의 길이 중간 연장선이 맞은켠 동남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제일 높은 산봉우리와 일직선을 이루도록 합니다. 묘혈은 일반적으로 길이 2m, 너비 60cm, 깊이 80cm 좌우로 합니다.   상여(丧舆):상여는 장례에서 쓰는 運柩 공구로서, 중국의 옛 문헌 《禮記雜記》에서는 柩輿, 喪車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고, 주희의 《家禮》에서는 靈車로 기록되여 있으며, 우리민족의 《四禮便覽》, 《喪禮備要》등에서 처음으로 喪輿라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李縡의 《四禮便覽》에 따르면, “大與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기 힘들므로 喪與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世宗實錄》, 《純宗國葬錄》에 따르면 大與는 국장에 사용되는 기구였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喪與란 기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大與를 소형화한 小與인 셈입니다. 그런데 《世宗實綠》에서도 大與로 기록되여 있는걸로 미루어 보아, 喪與는 조선중기 이후에 와서야 산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 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종래로 장례를 한 가정의 사사로운 일로 여긴것이 아니라, 마을을 단위로 하는 한 공동체의 공동한 대사로 여기고 공동히 협조하여 처리하였습니다. 우리민족 상여문화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생사관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아래에 여섯개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상여결구, 둘째; 꼭두각시, 세째; 채색그림, 넷째; 상여놀이, 다섯째; 상여행렬, 여섯째; 상여소리 등입니다.   첫째; 상여결구: 아래에 상여의 상관 문제에 대하여 길림성 룡정민속박물관에 수장된 조선족 상여를 모델로 설명을 드립니다. 조선족 상여의 주체는 목제 구조로서, 제조 공예상 쇠못을 쓰지 않으며, 기본상에서 무음식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1,상여틀; 굵기가 6×18㎝이고, 길이가 5m인 두개의 방목으로 너비가 60㎝의 담가 모양의 틀을 짭니다. 상여틀 밑에 다섯개, 혹은 여섯개의 멜채를 같은 거리로 가로 놓는데, 매 멜채의 길이는 2m좌우입니다. 출상할때 관을 상여틀 중간에 올려 놓고, 매 멜채의 량쪽 말단에 붉은 천띠를 매여 전체 멜채를 련결하며, 상여꾼들이 상여를 멜대 붉은 천띠를 어깨에 올려놓고 두손으로 앞의 멜채를 잡습니다. 한개 멜채 량옆에 상여꾼을 각기 한명씩 둘수도 있고 두명씩 둘수도 있습니다. 2,운각; 운각이란 관을 보호하는 장치로서, 상여틀 위의 관의 네변에 각기 높이 60㎝의 기둥을 세우고, 규격이 250×60㎝인 네모틀을 받들게 하며, 네모틀 앞뒤에 각기 반경이 50㎝인 반원형 나무판자를 고정시켜 룡수판과 룡미판으로 하며, 앞뒤 룡수판과 룡미판을 세개의 나무오리로 련결시켜 고정시키고, 그위에 천, 혹은 나무 합판으로 덮어 운각지붕으로 하며, 운각지붕 중간에 두마리의 운룡이 머리를 앞뒤로 서로 몸체를 꼬고있는 조각을 고정시켜 놓습니다. 3,陽蓋帳; 양개장은 천으로 하는데, 색갈은 임의로 선택할수 있고, 양식은 임의로 장식할수 있으며, 3m길이에 1.5m너비로 하며, 운각의 앞뒤에 각기 X형으로 대나무 오리를 고정시키고 그위에 양개장을 펼쳐서 고정시킵니다. 상여의 양개장은 해볓과 비물을 막는 작용을 하며, 또 가마의 화개처럼 고귀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조선족 상여의 결구를 놓고 볼때 의심할바 없이 고대 왕공귀족들이 출행할때 쓰는 가마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마는 앉음식이지만 상여는 누움식이므로 규모상 상여는 가마보다 크고 깁니다. 사람들은 상여를 특별히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서민으로서 한평생 고생만 하면서, 평소에는 가마에 앉아 볼 형편이 못 되였지만, 죽어서 나마 한번 가마에 모시여 귀족의 신분으로 저승에 보냄으로써, 청빈하게 죽은 망혼을 위로해 주려는 뜻도 있습니다.   둘째; 꼭두각시: 조선족 상여에는 여러개의 꼭두각시를 달아 놓았는데, 조선족 전통 나무인형 조각예술이 바로 이 꼭두각시에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상여 꼭두각시의 작용은 주로 두개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1,상징성, 례하면 염라왕, 신선, 운룡…등입니다. 2,실용성, 례하면 새모양의 걸개…등입니다. 상여 꼭두각시의 형태는 주로 세개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1,인물형; 례하면 염라왕, 명부사자, 악공, 시중꾼 동자…등입니다. 2,동물형; 례하면 운룡, 봉황, 천학, 神鳥…등입니다. 3,식물형; 례하면 목란꽃, 국화꽃, 매화꽃, 련꽃…등입니다. 조선족 상여 꼭두각시는 주로 네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저승길을 인도하여 망령이 기로에 잘못 들어서는 것을 방지, 2,망령을 보호하여 사악한 기운의 침습을 방지, 3,망령을 안무하여 공포심리와 불온정 정서를 극복. 4,망령을 시중들어 순리롭게 황천 목적지까지 도착. 우리의 선인들은 사람이 죽어도 령혼은 살아 있다고 믿었으며, 사망이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고, 저승이란 령혼들이 모여 사는 다른 형태의 세계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세째; 채색그림: 조선족 상여 운각의 네면에는 다채로운 채색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주요하게 목란꽃, 국화꽃, 매화꽃, 련꽃 등 四君子 꽃도안입니다. 이것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 더욱 고귀해 지고, 더욱 행복해 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조선족 상여 룡수판에는 일반적으로 룡머리 도안이 그려져 있고, 룡미판에는 일반적으로 어룡, 혹은 학의 도안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어룡 도안에는 “魚化龍”이란 글이 씌여져 있는데, 중국《后汉书-李膺传-登龙门》에 기재된 잉어가 룡문을 뛰여 넘고 룡으로 되였다는 전설을 뜻하는듯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인들은 죽어서라도 출세하고 번신할것을 꿈꾸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족 전통 리념상에서 학은 장수를 상징하는 길조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상징하는 조선족 상여에도 학의 도안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선인들이 죽음을 일종의 장수, 혹은 영구한 장수로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넷째; 상여놀이: 1,상례놀이 역사;   장례식 때 歌舞를 행하는 풍습은 일찍이 《隨書-高句麗傳》에 기재되여 있는데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초종때에는 울며 곡하고, 출상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노래하면서 죽은이를 떠나 보낸다)" 고 하였습니다. 또 이같은 역사서의 기록뿐만 아니라 통구의 무용총(舞踊塚)이나 안악3호분 벽화의 악대행렬도와 무악도(舞樂圖), 그리고 팔청리(八淸里) 벽화고분의 잡기도 등에서도 장례의식에 가무나 잡기, 주악으로써 장송(葬送)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도 문무왕 13년(673년) 김유신을 장사지낼 때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 주악하며,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또 일본서기에도 가무로써 장례의식을 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무가 죽은 사람에 대한 장송의례로서 쓰여진 것은 유교식 상례 이전부터 자리잡혀 있었습니다. 이같은 유습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되여 당시 유학자들의 논란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성종(成宗) 5년(1474년) 정월조에는, 성악(聲樂)과 배우백희(排優百戱)로써 이른바 시체놀이(娛尸)하는 삼남지방의 풍속을 예조에서 논단할 것을 상계(上啓)하고 있고, 성종 20년(1489)에는 부녀의 장례에 시체놀이(娛尸)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유시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에서 시체놀이(娛尸)하는 풍습은 전형적인 유교사회로 일컬어지던 조선중기까지도 계속 유지되였습니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풍습이 상여놀이로 발전하여 전해지면서, 각 지방마다 장례가 있게되면 나름대로 상여로 놀이를 벌렸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해마다 지방에 따라 상여축제가 열리는데, 이미 전통적인 문화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각 팀에서는 특제한 상여를 메고 집체적으로 여러가지 정채로운 기교를 표현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의식에서 벗어나, 죽음의 례사로움과 오락성, 그리고 죽음과 생활과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합니다. 죽음에 대한 존중은 기실 삶에 대한 중시로 되며,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됩니다. 사망한 부모님들을 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신 분들, 그러시고 서도 자기의 소위 찬란하고 가치있는 삶을 꿈 꾸신다면, 어서 깨달으시고 부모님들 망령앞에 진심으로 참회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식들의 리해와 존중, 그리고 자신과 자식들 사업의 발전을 얻을수 있습니다. 자식이란 기실 부모와 조상들이 당신에게 베푸시는 음덕의 충실한 집행자입니다. 문화적 관점에서 부모와 조상들이 구천에서 당신에게 내리시는 벌책과 은혜는 대체로 자식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입니다.   2,상여놀이 내용; 옛날에는 호상(好喪)시에 이른바 “상여놀이”라 하여, 출상 전날 밤에 상주의 친구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여소리”를 하면서,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동리를 돌아다니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출상 전날 밤에는 또 동리사람들이 모여서 오락을 벌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비통해 하는 상주를 웃기기 위하여, 주로 재담이나 노래, 그리고 우스운 병신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상여놀이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습니다. 례로서 황해도에서는 북과 장구를 치면서 상여를 메고 망자의 아들 딸의 집 등을 돌고,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아들 딸, 친척, 친구의 집 등을 도는데, 골목길에 횃불을 달아 놓아 골목길을 훤히 밟게 합니다. 그런데 상여가 공동우물을 지날 때에는 우물을 덮고 지나가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을 돌아다닐 때 상여 뒤를 따라가던 유족들은, 자기 집에 다가가면 미리 가서 상여를 맞이하고, 제물을 차려놓고, 곡을 하며, 상여꾼에게 술을 대접합니다. 경상도에서는 집밖에 넓은 터나, 집 마당에서 북을 치고 〈상여소리〉를 하는가 하면, 전라도에서는 상여꾼들이 출상연습을 겸해서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놀이에서 〈상여소리〉는 대체적으로 죽은 이의 인품이나, 성격, 공덕 등을 나타내거나 망자의 유언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여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사람에게 볏짚을 씌워 말이 되게 하고, 상주를 태워 돌아 다니다가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상주를 희롱하는 연기를 하기도 하고, 웃기는 등, 노래와 재담과 춤으로 여흥을 합니다. 례로서 “진도다시래기” 경우, 첫째과장에는 가상제(假喪制)가 상제 앞에서 희롱하고 웃기는 놀이를 하고, 둘째과장에서는 소경인 거사와 중, 사당의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풍자한 놀이를 하고, 셋째과장에서는 “상여소리”와 북춤, 그리고 허튼춤을 마구 춤니다. 총적으로 이와 같은 마을에서의 상여놀이는, 유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通過儀禮)였다고 할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의지가 담겨있는 예능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다섯째; 상여행렬: 상여행렬이란 바로 발인행렬이며, 전통적인 출상대오입니다. 상여행렬이 출발하기전에 먼저 발인의식을 진행하는데, 조선족 전통 장례의식에서 가장 륭중한 의식입니다. 출상일 아침에 조전을 끝내고, 관을 천구하여 상여에 싣습니다. 그다음 상여 운각을 올려 놓고, 양장을 펼쳐 고정합니다. 상여앞에 병풍을 펼쳐놓고, 그 앞에 간단히 제사상 차려놓고, 발인제를 지냅니다. 상주가 술을 붓고 세번 절을 끝내면 축인이 발인축문을 랑독합니다;”靈輀旣駕,往卽幽宅,載陳遣禮,永決終天(령여가 곧 떠나시니, 가시는 곳은 유택입니다. 보내시는 례의 올리오니, 하늘끝에 영결입니다.)” 발인축문이 끝나면 상여꾼들이 구령에 맞추어 상여를 메고 일어섭니다. 상여꾼들은 또 구령에 따라 먼저 상여를 세번 가볍게 들석여 놓는데, 망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올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상징합니다. 그 다음 지휘자가 작은 구리종을 흔들며 구슬픈 목청으로 상여소리를 뽑는데, 상여꾼들은 한소리로 화답하며 걸음을 뗍니다. 조선족 상여행렬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순서로 걸어 갑니다: 제일앞: 명정(铭旌-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써 넣은 붉은 기발) 그다음: 요여(腰舆-령여, 고인의 혼백과 명함을 담은 작은 가마) 그다음: 만장(挽幛-고인을 추모하는 만사를 써 넣은 여러 색갈의 기발) 그다음: 공포(功布-긴 베천 오리를 달아 맨 기대, 길을 인도) 그다음: 상여(丧舆-령구를 실은 큰 가마) 그다음: 가족(家属-상주와 상제들이 곡을 하며 뒤따름.) 그다음: 조객(唁客-장례에 참석한 손님들이 묵묵히 뒤따름.) 마지막: 상차림(祭物-아낙네들이 상차림 보따리를 이고 뒤따름.) 일부 지방에서는 요여의 앞뒤에 각기 운삽(雲翣)과 불삽(黻翣)을 든 저승무사를 안배하는데, 그들은, 뿔이 난 도깨비 탈을 쓰고 저승길을 방해하는 악귀를 쫓거나 잡아 죽이는 춤을 추면서 망자의 혼백을 장지까지 호송합니다. 상여가 마을 어구에 이르면 로제를 지냅니다. 로제는 보통 망자의 친구, 제자, 동업자들이 주도 하는데, 상여를 내리고, 간단한 제상을 차리고, 만사를 읽은 다음, 술을 붓고 삼배 한후 부의금을 냅니다. 로제가 끝나면 상여는 다시 출발합니다. 만일 호상(好喪-망자가 장수한 노인)일 경우에는 오락의 분위기가 비교적 짙은데, 상여가 굽이돌이, 올리막 길, 다리, 큰나무 등을 만나게 되면 지휘자는 상여소리로 저승길 로비가 모자란다고 노래 하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상주는 황망히 상여 앞에 달려 나와 상여꾼들에게 절을 하면서 술과 돈으로 상여꾼들을 위로 합니다. 이때의 상여꾼들은 저승에서 고용한 役士의 신분이므로 神에 해당합니다. 상주의 위로를 받고 상여는 다시 출발하는데, 그 돈은 보통 사후에 상여 사용비로 “丧舆契” 장부에 기록됩니다.   여섯째; 상여소리: 상여소리는 향두가(香徒歌), 혹은 만가(挽歌)라고도 하는데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는 과정에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부르는 로동가로서 호상에서 많이 부르고 액상에서는 보통 부르지 않습니다. 좀 느린 행진 절주로서 원래는 상여꾼들의 걸음을 맞추기 위하여 부르게 되였는데, 과거 저목장에서 목도꾼들이 큰 나무를 메여 나르며 부르던 목도소리와 그 목적이 같습니다. 상여소리 부르는 기본형식은 선소리꾼이 작은 구리종을 흔들며 가락을 뽑으면 상여꾼들이 한결같이 소리내여 화답하는데 그 가락이 참으로 구슬프고 비장합니다. 아래에 두수의 상여소리를 례로 적습니다; (선소리꾼이 한 소절씩 부르면 상여꾼들이 《에요!데요! 어럼마!데에요!》로 화답합니다.)   北邙山이 머다더니 門前山과 통했고나 黃泉길은 험악하야 많은사람 옹위하에 난생처음 가마타고 마지막길 떠났니라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진다 서러마라 명년삼월 돌아오면 너는다시 피련마는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신오질 못한단다.   銘旌功布 앞을서니 황천길이 분명코나 앞동산에 두견새야 네가나를 불렀느냐 뒷동산에 접둥새야 너도나를 기다리냐 두견접둥 우지마라 내가지금 가고있다.   인제가면 언제올가 돌아올날 기약하자 東方花開 春風時에 꽃이피면 다시올가 말머리에 뿔이나면 구실삼고 다시올가 까마구가 희어지면 어물넘쩍 다시올가 석돌에다 진주심어 싹이나면 다시올가 쪼약돌을 모아모아 높다랗게 광산되야 정을맞아 차에실려 덜렁덜렁 돌아올가 평풍안에 그린장닭 두나래를 활활치며 나를잡아 잡수시오 말을하면 돌아올가. 북망산천 도착하면 사토집을 짛어놓고 송죽으로 울을삼고 두견접동 벗이되야 바람소리 들으면서 쓸쓸함을 달래이며 저하늘의 별과함께 해와달을 보내리라. 자손들이 늘어서서 평토제사 지낼적에 魚東肉西 左脯右醯 삼색과실 채려놓고 꼽싹꼽싹 절을하며 放聲大哭 측은타만 에라인젠 그만해라 나도갈길 급하니라. 어화둥둥 식구들아 저화둥둥 벗님네들 살아생전 많이먹고 늙기전에 많이놀며 부모자식 어루면서 재미있게 잘사시오.   상여소리 [진도만가] (선소리꾼이 한 소절씩 부르면 상여꾼들은 《애-애-애-애- 애애애 애애야!》로 화답합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았는데, 요네나는 어찌하여 두갑자도 못사느냐?   어렸을때 들었니라 노인들이 하는말이 사람죽어 묻힌다는 북망산이 머다더니, 어느결에 닿았느냐 북망산이 눈앞이다.   흰구름도 돌아가고 날짐승도 피해가는 으슬으슬 저승길을 무서워서 어찌갈까?   못가겠네 못가겠네 무서워서 못가겠네 한번가면 다시못올 저승길을 못가겠네.   염라대왕 부르시니 어느어명 거역할가 내차라리 갈바에는 당당하게 가야하지.   비단금포 수의입고 금의환향 금띠띠고 육진삼베 몸에감고 일곱매로 동여서는 오동관에 편히누워 꽃상여에 들려서는 명정공포 앞세우고 진도만가 들으면서 흥얼흥얼 이승떠나 조상동네 찾아갑제 명년가서 청명추석 제사술랑 잊지마소.     안장(安葬):장지에 도착한후 상여에서 관을 내리우고, 간단한 제사가 있은후 네사람이 헝겊띠로 관을 듭니다. 그러면 녀자 상제들이 관을 붙잡고 소리높여 통곡합니다. 관을 천천히 이미 파 놓은 광에 넣는데, 머리 부분이 서북쪽으로, 발 부분이 동남쪽으로 되게 하고, 좌향을 바로 잡습니다. 주부가 공포로 관위의 흙과 먼지를 닦습니다. 호상이 명정을 풀어 관을 덮습니다. 상주가 옷섶으로 새흙을 세번 나누어 받아서 광중에 골고루 뿌려 넣는데, 이것을 “사방토”라고 합니다. 그 다음 모두들 일제히 삽을 날려 흙을 묻습니다. 그다음 봉분을 만드는데, 형태는 반구모양으로 보기 좋게 하며, 봉분의 동남변에 제단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흙을 묻으면서 소리를 뽑으며 달구질을 하는데, 땅과 수평으로 평해지면 평토제를 지냅니다. 그리고는 다시 봉분을 만듭니다. 안장이 끝나면 후토를 잘 정리하는데, 정해진 그 자리를 다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곡(返哭)반혼(返魂):안장을 끝내고 빈 상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곡을 하는것을 返哭이라고 하고,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셔 가는것을 返魂이라고 합니다. 하산하여 집에 돌아 와서는 다시 령좌를 차리고 신주를 모시고 그 뒤에 혼백을 모시고 일동이 한참 곡을 합니다. 상주가 삼배하고 곡을 그칩니다. 이것을 卒哭이가고 합니다. 혼백은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모시다가, 삼년제를 지내고 탈상한 후에 묻거나 살음니다.   면례(缅礼):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람의 령기는 뼈에 슴배여 있다는 관념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부모가 사망 하였어도, 그들의 뼈만 잘 건사 한다면 능히 저승의 부모들과 감응교류를 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緬禮란 원래 장례를 다시 지낸다는 뜻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여 그 색갈과 해화정도를 살펴보아 그 색갈이 노랗고 해화가 잘 되였다면 잘 정리한후 다시 그자리에 묻고 다시 장례 지내는 것을 말하며, 만일 해골의 색갈이 검고 해화가 잘 되지 않았다면 산자리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곳에 자리를 선택하여 묻는데, 遷墳, 혹은 移葬이라고 하였으며, 풍수지리에 따른 일종의 효행이였습니다. 지금은 도로나 기타건설의 수요에 의하여 移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사 가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穷搬家,富迁坟。)”고 하였으니, 형편이 허락 되시면,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 부모님들을 옮겨 모시는것도 아름다운 소행이라 하겠습니다. 면례는 일반적으로 묘의 좌향에 근거하여 길일을 택하여 진행합니다. 면례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순서: 면례하여 새롭게 산소를 쓸 경우에는 먼저 새로운 산자리를 정하고 굴심을 하는데,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면례하여 화장할 경우에는 빈의관에 련계하여 할수도 있고, 또 자체로 태울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순서: 낡은 산소를 찾아 먼저 후토에 제를 지냅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베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인사하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세번째 순서: 무덤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축인이 파묘축을 읽습니다. 면례에서 파묘축은 필수입니다. 네번째 순서: 가속에서 상주나 대표인이 먼저 세삽을 뜹니다. 그다음 역공들이 삽으로 무덤을 헤치고 관의 천개널을 뗍니다. 다섯번째 순서: 한 사람이 광안에 들어가 적토를 청리하고, 해골을 골라 주어 올리면, 우에서 한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칠성판 우에 사람 골격의 순서에 따라 놓습니다. 만약 시체가 완전히 해화되지 않았다면 참대칼로 뼈에 붙은 썩은 살을 깨끗이 긁어 냅니다. 칠성판은 두께 2㎝의 널판자로 180㎝×30㎝의 규격이면 충분합니다. 화장할시에는 종이합판으로 대신할수도 있습니다. 여섯번째 순서: 해골을 점검해 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 다음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쌉니다. 일을 끝내고 헤친 무덤자리에 흙을 세삽 넣어 줍니다. 낡은 묘비는 낡은 묘광에 넣어 묻어 버리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일곱번째 순서: 새롭게 산소를 쓰는 경우, 해골을 감싼 칠성판을 광에 묻고 봉분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내는데, 기본 절차는 장례때와 같습니다. 화장하는 경우, 보통 골회를 받아서 산이나 강물에 뿌리여 처리한후, 안신제를 지냅니다.   합장(合葬): 보통 음양학설에서는 “以南爲陽, 以北爲陰, 陽以東始, 陰以西高, 男左女右…”등을 기본원칙으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민족 저승문화에서는 “陰以西貴” 기본원칙에 근거하여, 또 “西高東皐, 西貴東卑, 西考東妣, 西男東女, 右男左女” 등 구체원칙들이 만들어 졌습니다. 해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므로 남쪽이 陽이 되고, 북쪽이 陰이 되는 것이며, 天上의 日月은 동쪽을 시작으로 하고, 地上의 江河는 서쪽을 시작으로 하므로, 陽界에서는 동을 爲首로 하는 것이고, 陰界에서는 서쪽을 爲上, 爲貴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 이념상의 저승세계 중심도 저 멀리 서북쪽 하늘 가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 사당에서는 령좌를 앉힐때에 반드시 북쪽켠에 남향으로 설치하며, 조상들의 위패는 서쪽을 高位로 하여 동쪽으로 내려가며 차례로 모시며, 조부 조모의 경우, 조부를 서쪽에, 조모를 동쪽에 모십니다. 평소 제사상 차리고, 紙榜 쓰는 방법도 기본적으로 이 원칙에 기준합니다. 합장은 돌아가신 부모(顯考妣)를 한자리 묘소에 함께 묻는것을 말하는데, 전통적으로는 우리민족 저승문화의 “西高東皐, 西考東妣” 원칙에 근거하여, 현고비들의 머리를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고, 현고를 서쪽에, 현비를 동쪽에 모셨습니다. 이렇게 되여 우리민족의 오래된 합장묘는 보편적으로 ”男右女左”가 된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사망한 부모님들의 골회함을 합장 할시에 구경 어느 원칙을 따르는 것이 정확하냐?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통원칙이냐? 혹은 자유원칙이냐? 하는 문제만 존재하며, 전통원칙이든 자유원칙이든 중요한것은, 늦어서 나마 이미 사망한 부모님들에게 성의를 다 하여, 아래 자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합장에는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홀로 모시던 부모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한 부모의 묘를 째고 그 옆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중에서 한곳을 면례하여 가져다가 합장하는 것이며, 세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를 모두 면례하여 다른곳에 가져다 합장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한개 묘혈에 두개 광을 파는데, 두 광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벽을 두고 그 벽 중간에 통로를 내고 채색 사다리를 놓는데, 그 뜻인즉 두분 망령이 자주 래왕하게끔 편리하게 한다는 자손들의 지극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그다음 흙을 묻어 매장하는데 절차는 초상때의 안장과 같습니다. 돌아가신 두 부모님의 골회함을 릉묘에 합장할 경우에도, 위의 방법을 참작하여 조절하며 행하시면 되겠습니다. 합장을 끝내고 성분제 지낼때는 합장축을 읽습니다.    죽음에 대한 존중은 기실 삶에 대한 중시로 되며,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됩니다. 사망한 부모님들을 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신 분들, 그러시고 서도 자기의 소위 찬란하고 가치있는 삶을 꿈 꾸신다면, 어서 깨달으시고 부모님들 망령앞에 진심으로 참회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식들의 리해와 존중, 그리고 자신과 자식들 사업의 발전을 얻을수 있습니다. 자식이란 기실 부모와 조상들이 당신에게 베푸시는 음덕의 충실한 집행자입니다. 문화적 관점에서 부모와 조상들이 구천에서 당신에게 내리시는 벌책과 은혜는 대체로 자식들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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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3 댓글:  조회:6607  추천:1  2013-06-20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명정(铭旌):명정이란 망자의 신분을 써 넣는 기발입니다. 명정의 재료는 반폭으로 두메터 좌우 길이 되는 붉은천으로 하며, 그 우에 흰글로 망자의 시호(諡號), 본관, 성씨 등을 써 넣습니다. 고대에 명정이 망자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필요하였다면, 지금은 단지 하나의 장례문화로 남아 있을 뿐이므로, 쓰는 방법도 보통 통일시호, 통일격식을 사용합니다. 조선족 남성 망자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學生”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이라고 쓰고, 녀성 망자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명정을 쓰는 격식은 남성 망자의 경우에 만약 그의 성이 金씨였고 본관이 金海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金海金公之柩》라고 쓰고, 녀성 망자의 경우에 만약 그의 성이 李씨였고 본관이 全州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라고 씁니다. 다른 성씨, 다른 본관도 모두 이 격식에 맞추어 써 넣으면 됩니다. 諡號란 일찍 중국 주나라때부터 사용되여 왔는데, 원래는 제왕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관리, 혹은 명류들이 죽은후에 조정에서 그들 생전의 공덕에 근거하여 붙여주는 칭호입니다. 그리하여 제왕이나 명류들이 죽은후 보통 시호로 사책에 기록 됩니다. 후에 일반인들에게도 죽은후에 상류의 시호법을 본따 사사로히 소위 시호를 붙여 주는 관습이 생겼는데, 私諡, 혹은 民諡라고 합니다.  조선족 남성 망자들에게 붙여지는 “學生”이란 시호는 民諡에 속하는데, 이 칭호는 원래 고려시대에 서당을 다녔거나 또 다니고 있는 사람만이 쓸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벼슬이 없는 하층 兩班집 자제나, 상층 常民 자제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쓸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學生”은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들에게 폭넓게 쓰였으며, 그후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일반 서민중에서 보편적으로 쓰게 되였습니다. 현재 중국의 조선족들은 남성 망자의 시호를 일률로 “學生”으로 쓰는데, 중국 조선족의 겸손한 낮은 자세 처세원칙에 부합됩니다.  “孺人”이란 칭호는 원래 宋徽宗때에 通直郎부터 承议郎까지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는데, 명나라때에는 7품, 청나라때에는 9품부터 7품까지 별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으며, 고려, 조선시대에서는 9품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습니다. 비록 말단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學生” 안해들의 아무런 품계도 없는 것 보다는 한차원 높은 셈입니다. 상징적으로 “孺人”은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부인에 대한 존칭이였습니다. 《石窟一征》이란 중국 지방지 기재에 의하면, 월동객가 지구에서는 본토인이나 객가인이나 부녀의 묘비에 모두 “孺人”이란 시호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전설이 있습니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赵昺(일설에서는 송나라 명장 文天祥 )이 몽골군의 추격을 당하여 월동객가 산구에까지 왔었습니다. 마침 집체적으로 나무하려 떠나 가는 당지의 부녀들이 저마다 기다란 멜대를 어깨에 메고, 자연적으로 길게 한줄로 늘여서서 호호탕탕하게 산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창을 메고 행군하는 병사들의 대오 같았습니다. 몽골군들은 멀리에서 그 광경을 보고 대부대 구원병이 오는 줄 알고 창망히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후 송나라 황제는 객가지구 부녀들의 그번 행동이 너무나 고마워, 특별히 황제의 명의로 객가지구 부녀들에게 일률로 “孺人”이란 시호를 하사한다고 선포하였답니다. 그 어명이 오늘까지 전하여 내려 오면서, 오늘도 그 지방의 부녀들의 묘비에는 모두 시호를 “孺人”이라고 쓴다고 합니다. 송조 마지막 황제때가 되면 고려에서는 25대왕 충렬왕 시기가 되며, 왕실에는 이미 9품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로 “孺人”이란 칭호가 있었습니다. 이상의 전설이 비록 우리민족의 전설은 아니지만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가 바로 중국 송조때에 大儒家 朱熹의 《주자가례》라는 것을 감안할때, 오늘 날 우리민족이 녀성 망자의 명정에서 시호를 일률로 “孺人”이라고 쓰는 그 유래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명정을 써서는 령구를 가리운 병풍에 걸어 놓는데, 출상할때 기발을 만들어 상여앞에서 들고 길을 인도하며, 하관할때 관우에 덮어서 함께 묻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의연히 성행하는데, 화장을 실시하는 성진에서는 이미 명정을 기발로 쓰지 않습니다. 지금 쓰는 명정의 규격은 너비 30cm좌우로 하고 길이 150cm좌우로 하는데, 쓰는 격식은 위와 같고 흰 석필이나 흰 분필로 써서는 이미 렴습을 끝낸 유체우에 덮었다가 함께 화장합니다.   성복(成服)조문(吊唁):대렴이 끝나면 주부와 상제들도 상복을 바꿔 입는데, 남자 상제들은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굴건과 상관을 쓰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주부(主妇, 고인의 안해, 혹은 상주의 안해)와 녀자 상제들은 머리와 몸의 장신구들을 풀어내고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수질을 두르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복인들은 일률로 상장을 다는데 남자상에는 왼쪽에, 녀자상에는 오른쪽에, 남자들은 팔에, 녀자들은 머리에 답니다. 상복을 바꿔 입고 일동이 제사상 앞에서 한참 곡을 한후 성복제를 올립니다. 전통적으로 상복은 다섯종으로 나누고 복상기는 삼년부터 삼개월 까지 모두 여섯급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보통 상제와 복인으로만 나누는데 상제만 삼년 복상기를 규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복인으로 취급하고 복상기가 따로 없습니다. 복상기란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기한입니다다. 성복제가 끝나면 조문객들을 접대하기 시작합니다. 남자 상제들은 모두 마당에 나가 상장(상사에 쓰는 지팡이)을 짚고 머리 숙이고 가지런히 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합니다. 부상일 경우에는 대나무 지팡이, 모상일 경우에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습니다. 대나무는 성품이 곧고, 굳으므로 남성을 상징하고, 버드나무는 성품이 유연하고, 번식력이 강하므로 여성을 상징합니다. 조문객들이 뜰안에 들어서면 남자 상제들은 곧 소리내여 곡을 합니다. 조문객들은 정문으로 집안을 들어 가는데, 문앞에 도착하여 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면, 집안에서는 일동이 모두 일어서서 곡을 시작합니다. 상주와 주부, 그리고 녀자 상제들은 웃방에 서서 곡을 하고, 복인들은 아래 정지에 서서 곡을 합니다. 조문객은 집안에 들어선후 묵묵히 제사상 앞까지 걸어가서, 고인의 신위 혹은 유상을 향하여 세번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상주와 가속을 상대로 한번 맞절을 하고는 안위의 말을 합니다. 조문객은 물러 가면서 부의금을 상가에 주는데, 상가에서는 받은 부의금을 일일히《조객부》에 기록합니다.       상식전(上食奠):아침에 해뜨는걸 기준하여 조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아침진지도 올리며, 저녁에 해지는걸 기준하여 석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저녁진지도 올립니다. 그 뜻인즉 생시와 마찬가지로 고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제사상에 먼저 밥과 국, 반찬을 올리고 수저를 놓습니다. 곡소리 가운데서 집사가 밥두껑을 열고 제사상 앞에서 고인의 식사 시중을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는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데 그 뜻인즉 고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양치물 한그릇 떠서 올리고 삼배하고는 밥과 국, 반찬을 물립니다. 이것으로 그번 상식전은 끝납니다. 매번의 상식전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매번에 올리는 음식 종류는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기준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사람을 산사람 모시듯 한다는 장례의 기본원칙입니다.   문상(聞喪)분상(奔喪):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았다면 즉시 목을 놓아 곡을 해야 하며, 한참 곡을 한후에 곡을 끊고 사망 연유를 물어보고는 또 계속 곡을 합니다. 부모가 사망했다는데도 곡을 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망칙한 일이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장례에 가지 못할 형편이면 본지방에서 날자를 맞추어 성복제를 지냅니다. 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고 급히 부모의 장례에 가는것을 분상이라고 합니다. 멀리 목적지가 보이면 곧 곡을 시작하는데, 곡을 하면서 집으로 달려가며, 문앞에 가서는 곡소리를 더욱 높이고, 부모를 부르며 집안으로 엎어질듯 달려 들어 갑니다. 이때 집안에서도 곡소리로 맞이하며, 일동이 함께 령구앞에서 목을 놓아 통곡합니다. 전통적으로 상가에는 반드시 곡소리가 있어야 하며, 곡소리가 높을수록 효자가문이며, 슬피 우는 사람일수록 효자, 효부라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그 가문의 흥성발전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며, 불효는 필연적으로 천벌을 받아 후대가 끊기게 된다고 보편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부모에게 좀 소홀했던 자손들은 자기들에게 차례질 소위의 천벌이 두려워 장례에서 수단을 다하여 효성을 표연함으로써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거날에 장례가 특별히 사람들의 중시를 받게된 원인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시대에서는 유물론적 과학적 교육을 주체로 하여 많이 받아 왔고, 문화적 교육은 인위적이로 의식형태의 제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하여 사람의 죽음을 대함에 있어서도 한 생명의 영구한 결속으로만 인식하고, 령혼의 승화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별히 절망스럽고, 고통스럽게 되고, 가속의 경우에는 죽는 친인이 두려워져 멀리하게 되며, 장례를 근근히 불결해진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으로만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인과보응"에 대해서도 종교의 설교일뿐 실제생활에서는 과학적 도리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불효를 범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적 과학적 생사관이 죽음이란 특수 과제 앞에서 상대적으로 문화적 생사관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점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과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문화도 필요하고, 종교도 필요하며, 또 인정도 필요합니다. (후일 계속---스크랩 불허)
6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2 댓글:  조회:5604  추천:1  2013-06-14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발상(發喪):혼을 부른후 고인이 여전히 소생하지 못한다면 상주(喪主)는 서둘러서 상복을 바꿔 입습니다. 고인의 장자, 혹은 장손이 상주로 되고, 가속의 성원들은 모두 상제(喪制)가 되며, 기타의 친척들은 모두 복인(服人)이 됩니다. 상주가 이미 결혼하였다면 머리에 삼베로 만든 굴건(屆巾)을 쓰고, 아직 결혼전이라며 머리에 벼짚과 삼베 오리로 거칠게 꼬아 만든 수질(首絰)을 두르며, 몸에는 삼베로 만든 상포(喪袍)를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요질(腰絰)를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전형적인 옛날 죄수 차림새이지요. 삼베옷(麻衣)이 바로 신라때의 죄수복이였는데, 삼베옷을 상복으로 하는 것은 상주가 부모를 살려내지 못한 죄인이란 뜻이랍니다. 동네 좌상어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고인의 혼백을 접습니다. 혼백이란 이미 육체를 떠난 고인의 영혼을 부착시켜서 임시 거처하시게 한다는 상징물입니다. 령구앞에 령좌를 차리면서 혼백을 중앙에 모시는데, 령구은 이미 생명공능을 상실하고, 자기사명을 완수하여 이제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대상이고, 혼백에 부착되여 있는 영혼이야 말로 바로 오늘 장례를 치러서 저승으로 륭중히 떠나 보내게 되는 중심 대상으로 됩니다. 상주가 상복을 바꿔 입은후 일동은 상주를 배동하여 령좌앞에서 곡을 시작합니다. 곡소리로 초상이 났음을 온 동네에 알리며, 그 곡소리가 높을수로 효자 가문이라고 동네 사람들의 호평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부자집에서 상(喪)을 당하게 되면 높은 소리로 곡을 할수있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쓰기도 하였습니다. 곡을 하는것을 호곡(號哭), 혹은 애호(哀号)이라고 하는데, 고인의 가속, 즉 상제들이 곡을 할때에는 “애고! 애고!(哀告)”하는 소리를 내고, 고인의 친속, 즉 복인들이 곡을 할때에는 “어이! 어이!(厄矣)”하는 소리를 냅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으로 하고 짝수일(双日)로 하지 않습니다. 음양학설에 원리에 의하면 喪事는 음(陰)에 속하고, 홀수는 양(陽)에 속하는데 장례와 장례날자가 서로 음양이 평형되여야만 이번에 당한 상(喪)의 위기를 최소한으로 극복하고 안전하게 넘길수 있다는 철학적 관념입니다. 그렇지 않고 2일장, 4일장처럼 짝수일로 한다면 喪事가 같은 陰氣에 힘입어, 가문의 위기가 가배로 엄중해 질수 있다는 관점이지요. 그리고 쌍수를 둘로 나누면 “같다” 혹은 ”중복되다”로 표현 되지만, 홀수를 둘로 나누면 “다르다” 혹은 “특수하다”로 표현 되므로 장례의 모든 상관 사무에서 홀수를 채용함으로써 장례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이런일이 중복되지 말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례에서는 제물의 개수도 짝수로 하지 않으며, 혼을 부를때도 홀수로 세번 부르며, 절을 할때도 홀수로 세번씩 하며, 한잔술도 홀수로 세번 나누어 붓습니다. 우리민족이 장례시에 삼베천으로 상복을 지어 입는 풍속은 신라의 애국지사인 마의태자를 기념하면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三國史記卷第十二》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935년 10월,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힘이 없게 되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습니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견결히 반대하였으나, 결국 이미 무능해진 왕실에 의하여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작성되었습니다. 태자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왕에게 사직을 고하고,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옆에 초막집을 짓고, 나라를 구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당시 죄수복인 삼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내다가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후 민간에서는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부르면서 가문에서 상(喪)을 당했을 적마다 생전의 그를 본따, 삼베로 거칠게 만든 허름한 죄수복을 입는것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시하게 되였다고 합니다.   소렴(小殮):렴습(殮襲)이라고도 하는데 유체를 목욕시키고, 유체에 수의를 입히고, 유체를 천으로 싸서 묶는 절차로서 마을의 덕망이 있는 분들이 책임지고 집행합니다. 집행인은 먼저 고인의 얼굴을 깨끗이 하고, 몸을 더운물로 닦고, 수의를 입히고, 명모를 씌우고, 악수를 끼우고,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남좌녀우로 고인의 손에 감아 놓으며, 버선을 신기고, 반함을 진행합니다. 수의를 입히면서 옷섶을 좌로 여미고, 단추를 채우지 않고, 고름을 매지 않는데, 이미 속세를 해탈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민족은 결혼을 하면서 부터 안해는 두 내외의 수의를 만들기 시작하고, 남편은 두 내외의 관에 넣을 봇(봇나무 껍질)을 준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수의를 만듬에 있어서 평소에는 감을 마련하고, 만드는 것은 사년에 한번씩 있게 되는 윤달에 만들었는데, 윤달은 공짜달로서 저승과 상관되는 그 무슨일을 하여도 탈이 없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환갑이 되면 자손들이 수의를 선물하는 전통도 있었는데, 효행으로 인정되여 왔습니다. 수의는 전통적으로 비단이나 명주같은 고급감으로 하였으며, 삼베옷은 죄수복이니 수의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와서 왜정시기에 나라가 빈궁해 지고, 물자가 결핍하게 되면서 삼베로도 수의를 만들게 되였는데, 삼베수의가 유체의 해화를 촉진시키고, 뼈의 색갈을 곱게 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점차 삼베수의가 보급되였습니다. 수의는 보통 흰색으로 하는데, 만약 망자가 아직 출가전의 처녀거나 총각일 경우에는 색갈이 있는 고운 수의를 선택하며, 인형, 혹은 화상으로 망자의 신랑, 혹은 신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입관할때 함께 넣어 줍니다. 그렇지 않고 망자의 처녀나 총각 신분 그대로 저승에 보낸다면 처녀망자는 “손각시”로 되고, 총각망자는 “몽달귀신”이 되여,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 의하면 저승의 최고 관리자는 염라왕이고, 여러 부서에서 구체 직책을 맡고 있는 영혼은 神이라고 하고, 직책이 없이 한가히 보내고 있는 영혼은 仙이라고 하며, 출가전에 죽은 영혼은 鬼神라고 하고, 죄를 범하여 징벌을 받아 죽었거나, 자살해 죽은 영혼을 魔鬼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도깨비란 것이 있는데 주로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의 호적 제도에서 귀신은 정상적으로 죽은 한사람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입적할수 있고, 마귀와 도깨비는 정상적으로 죽은 두사람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입적할수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소개인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가 왕왕 애매한 사람들을 붙들어서는 죽게 한답니다. 그리하여 동네의 그 어느집에서 비 정상적인 죽음 사건이 생겼다면 재액과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로 자기집 대문에 처용랑(處容郞) 화상을 그려서 붙여놓는 풍속이 있습니다. 처용랑(處容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동해의 개운포(開雲浦)에 유람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해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 안개가 온통 뒤덮이여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왕이 모사에게 물었더니, "이것은 동해 룡왕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오니, 그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한가지 하사이다" 하고 모사가 대답합니다. 대왕은 곧 룡왕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울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걷힙니다. 그래서 그곳을 개운포라고 하였답니다. 대왕의 뜻에 감사하여 룡왕은 일곱 동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기리하여 춤추며 음악을 연주합니다. 룡왕은 돌아 가면서 동자 한 사람을 대왕에게 바쳤고, 대왕은 그 동자를 서울로 데려가서 정사를 보게 하고,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처용은 급간(級干)의 지위에 올라 특별히 고운 미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심을 품은 역신(疫神)이 인간의 모습을 해 가지고 처용 아내의 침실에 침입했습니다. 처용이 밤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침상우의 이불밑에 발이 네개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처용은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떴습니다(처용가: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가 자리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 둘은 내해요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할꼬?). 역신은 처용의 이런 태도에 너무나 송구하여 그의 앞에 굻어 앉아, "제가 공의 부인을 너무 사모하던 끝에 이런 과실을 저질렀는데, 공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다같은 마음에 탄복합니다. 앞으로는 공의 화상(畵像)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악귀들이 공의 문 앞에서 얼씬하지 못하게 할것을 맹세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처용랑(處容郞)의 문자나 화상을 그려서 문짝이나 기둥, 벽 따위에 붙여서 전염병이나 악귀를 쫓는 풍속이 생겼답니다.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놓는 것은, 고인께서 지금부터 시작하여 자식들을 포함한 속세의 모든 일에 관심을 끄시고, 일심으로 헝클어진 실타래만 풀면서 안온한 마음으로 영원히 휴식하라는 뜻이랍니다. 이승과 저승은 필경 길이 다르니, 부모의 망령이 저승에 가서도 자식들을 잊지못해 이것저것 참견하면서 로심초사 하신다면, 저승에 계시는 부모의 망령에게 미안한 일일뿐만 아니라, 이승의 자식들에게도 참으로 고달픈 일이 된답니다. 반함이란 고인의 입에 쌀알을 넣는 절차인데,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세번에 나누어 쌀알을 고인의 입안에 넣어 드립니다. 쌀알을 넣을때 첫 숟가락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칩니다. 그 다음 구슬 세알, 혹은 은전 세잎을 하나씩 넣는데, 차례로 “백량이요”, “천량이요”, “만량이요”하고 외칩니다 (지금은 보통 엽전으로 대체 하거나 혹은 넣지 않습니다). 반함을 하는 의미는 고인께서 머나먼 저승길을 가시면서 써야할 식량과 로자를 충분히 마련해 보낸다는 뜻입니다. 반함이 끝나면 입을 다물구고, 약솜편과 면백으로 얼굴을 싸고, 전폭 백포로 전체 유체를 싸고, 백포오리(绞带라고도 함)로 고인의 어깨부위, 허리부위, 발목부위 등 세곳을 각각 묶고(다섯곳 묶기도 하고 일곱곳 묶기도 하는데, 묶을때 옭매지 않고 오리를 비틀어 묶습니다), 칠성판 위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 위에 렴습을 마친 유체를 모시고, 유체위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대렴(大殓):바로 입관하는 절차입니다. 전형적인 조선족 관의 모양은 장방형 립방체인데 관체와 관 덮개로 이루어 졌습니다. 먼저 령좌를 치우고, 유체를 옮기고, 관을 자리에 놓습니다. 입관할때 먼저 관 덮개를 내리고, 관 바닥에 칠성판을 깔고, 그우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우에 렴을 마친 유체를 넣고 자세를 조절한 다음, 고인의 생전의 옷견지들과 아끼던 물건들로 공간을 채웁니다. 고대의 왕실, 혹은 부자집에서는 장례때 입관하면서 수장품으로 귀중한 물건들도 넣고, 진짜 은전들도 많이 넣었습니다. 고인이 저승에 가서 지내는 환경을 이승과 같은 표준으로 리해하면서, 저승에 가서도 돈과 재물이 많아야 고인이 행복할수 있고, 또 저승에서 고인이 행복해야만 이승의 자손들도 행복할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수장품을 모두 실물로 선택하였지만, 근대에 들어 와서 나라가 혼란하고, 도굴이 우심해 지고, 또 점차 과학상식이 보급되면서 수장품은 거의 모두가 상징적인 물건으로 대체되였습니다. 장례용 지전이거나, 종이로 만든 물건을 불에 살으는 것이 그 실례입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돈, 혹은 물건을 보내는 방법상에서도 직접 실물을 수장하는 방법을 쓰던 데로부터, 제사를 지내거나, 혹은 상징물을 불에 살으는 방법으로 대체하게 되였습니다. 유체를 관에 넣을 때, 사전에 봇을 준비해 두었던 가문에서는 봇 껍질로 유체를 싸는데, 봇 껍질은 부패를 방지하고, 유체를 깨끗하게 해화시키는 공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입관한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고, 관 덮개를 덮고, 은정을 박아 봉관하고, 구의(柩衣)로 관을 덮습니다. 그리고  다시 병풍이나 만장을 당겨 놓아 령구를 가립니다.   수령(守靈):우리민족 전통 효도관념에서는 부모가 사망하면 그 경우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자손들의 불효로서 그 죄가 참으로 심중하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부모를 살려내지 못한 죄이지요. 그러므로 상주는 전통 죄수복인 허름한 삼베옷을 입고, 죽물만 먹으면서, 장례가 끝날때까지 한시도 령구옆을 떠나지 않고 벌을 받습니다. 이것을 수령(守靈)이라고 하는데, 이제 얼마 안되는 시간 후이면 저승길을 영영 떠나가시게 되는 부모의 망령을 기리하여, 영결전의 마지막 얼마 안되는 시간이나마 함께 하여 드림으로써, 부모 생전에 채 드리지 못한 효도와 情意를 다소나마 표시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부분 상주 어른들은 부모의 유체를 빈의관 랭장실에 물건처럼 맡기고는 제집에 돌아가 다리를 쭉 펴고 실컸 제잠을 자고, 장례날 아침에 버젓이 빈의관에 나오는데, 참으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지난밤 부모님께서는 추우신 랭장실에 고독하게 홀로 갇혀서 얼마나 슬피 우셨을가? 우리의 인성이 어찌하여 이 정도까지 되였을가? 지금 조선족의 소위 장례는 장례라고 할수없으며 단지 유체처리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쓰레기 처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밤에 부모님의 령구를 지키지 않는 현상은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 조선족이 유일한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족은 죽은후 령구를 지켜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미 가치가  떨어졌다는 표징이 아닐가 두렵습니다. 조선족의 죽음이 값이 없다면, 살아있는 조선족은 값이 얼마나 될가요?  현대 과학적 관점에서 많은 경우에 사람이 사망하시여 몇시간, 혹은 더 긴 시간동안에 의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육체의 공능은 이미 모두 상실 되였지만, 그들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것이 아니므로 자기의 유체를 수숩하면서 당신들이 하는 모든 말을 그들이 듣고 계실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망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많은 사람들의 진술이 이미 이점을 증명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 당날로 유체를 화장해 버리는 것은 망자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망자 생전에 끼친 미안한 일들에 대하여, 반드시 제사나 참회의 방식으로 망자의 용서를 빌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이 병의 근원이 되거나, 재화의 발단으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보응 관념입니다. 저승과 이승은 공간상에서는 서로 상관이 없지만, 리념상에서는 중첩이 되는 세계이므로 저승의 영령들이 얼마든지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승의 사람들에게 도움, 혹은 징벌을 줄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리하여 제사문화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 의하면 저승사자가 망자의 영혼을 모시고 저승으로 떠나는 시간이 장례 마지막 밤의 자정이라고 합니다. 삼일 장례일 경우, 첫날 밤 자정에도 떠날수는 있었지만, 저승사자들은 하루라도 제사음식을 더 맛보려는 욕심에서 마지막 날까지 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례날자가 길수록 저승사자들에게는 기쁜 일이며, 망자 영혼에 대한 보살핌에도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답니다. 망자의 영혼은 낮에는 양기가 너무 강하여 혼백에 부착되여 감히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밤의 자정이 되면 상주, 혹은 기타 가속 사람들의 꿈, 혹은 환각에 현령하시여 유언같은 것을 남기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밤에는 친속과 친구들이 상주를 동무하여 함께 밤을 새면서 령구를 지키는데, 자정이 되여 망자의 영혼이 현령하실수 있는 시간에 맞추어 새벽제사를 올립니다. (후일 계속---스크랩 불허)
5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1 댓글:  조회:5290  추천:0  2013-06-09
현성원(무형문화재대표전승인)   죽음이란 무었일가? 사회적 의미에서 죽음이란 사람들이 고달픈 인생을 마무리 하고, 영원히 휴식하려 떠나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년 퇴직과 비슷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모종의 의미에서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진정으로 축복을 받아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자기의 정당성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2000여년전에 庄子라는 분은 자기 부인이 사망하자 양푼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족들은 사람이 죽는것을 “白喜事”라고 하면서 명심하고 삼일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도 과거날에는 好死를 축복하여 즐겁게 오락을 놀면서 장례를 치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조선족은 어찌하여 죽음을 이렇게도 무서워 하고, 싫어하고, 홀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친인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을 한번 곰곰히 살펴 보십시요, 쓰레기를 처리하는 과정과 대비하여 그 구별점이 어느정도 됩니까? 이렇게 치하없이 초라하게 떠나보낸 친인들 망혼이 어떻게 구천에서 시름놓고 휴식할수 있겠습니까? 조상덕과 음덕과의 뉴대가 끊어지니, 당신이 하는 사업이 어떻게 흥성발전할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존중하지 않으면 점차 늙은 부모와 어른들이 싫어지게 되며, 결국 자기 자식들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내 부모가 싫듯이, 앞으로 내 자식들도 내가 싫겠으니, 그런 자식에게 많은 투자 필요가 뭐냐? 차라리 그 돈 남겨서 내 로후에 쓰리라. 이것이 죽음을 존중하지 않아 초래하게 되는 악성순환 효과이며, 우리민족 퇴화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을 존중하시라, 죽은이의 망령을 진심으로 축복하여 주시라, 관념을 바꾸시라, 필경은 그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인데 축복으로 보내주시라. 현재 우리민족 생사관은 엄중한 기형병에 걸려 있습니다. 세상의 천가지 만가지 도리가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되는데, 사는것만 중시하고 죽음을 홀시하니 어떻게 좋은 결과가 나을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을 중시하십시요. 이것은 우리민족이 더욱 성숙될수 있는 중요한 도경의 하나입니다. 오늘부터 기를 나누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 장례풍속》의 내용에 따라 거기에 깃든 여러가지 전설들을 살펴 보면서 우리민족 전통 사망관에 대하여 한번 진지하게 해부하여 보려고 합니다. 우리민족 현시대 성숙된 생사관 수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였으면 합니다.   무형문화재《조선족 장례풍속》은 모두 세가지 부분으로 나뉘여 있습니다. 첫째부분은 초상, 둘재부분은 안장, 세째부분은 제사입니다.   첫번째 부분 초상:   속광(属纩):우리 선인들은 사람이 호흡을 멈추는것을 사람육체의 죽음을 판정하는 기본 표준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병자가 림종하게 되면 병자의 코밑에 솜 한쪼각을 찢어 놓고 살피는데 솜털이 팔락팔락 움직이다가 일단 멈추면 병자가 호흡이 정지되였음을 설명하므로 육체가 죽었다고 판정합니다. 이를 가리켜 “숨을 거두었다.”, “숨이 넘어갔다.” 혹은 “숨이 끊겼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민족 생사관에서 한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고 판정하자면 육체가 죽은후 영혼까지 완전히 떠나가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우리민족 전설에서 사람의 영혼은 사람 육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수 있는데, 나왔을 때는 새하얀 쥐의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먼 옛날의 어느 한 밤에 안해가 남편과 함께 자면서 꿈에 기여 다니는 새야얀 쥐를 보고 밟아 죽였더니, 그의 남편이 영원히 깨여나지 못하고 그길로 죽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그 새하얀 쥐가 바로 그의 남편의 영혼이였던 것인데, 코고는 소리가 지겨워 잠시 나와 바람 쇠다가 그런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고복(皋復):고복이란 초혼(招魂)이라고도 하는데 혼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사람의 영혼이야 말로 육체의 모든 활동을 지배할수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방법을 대여 영혼만 육체를 떠나지 않게 할수 있다면 육체는 죽었다가도 다시 소생시킬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미 숨이 끊긴 사람이라 하여도 방법을 대여 혼이 돌아오게 노력해 보아서 여전히 소생하지 못하면 그때에야 비로서 확실하게 죽었다고 판정합니다. 동방의 전통문화에 의하면, 우리의 이승(此世)세계와 이념적으로 중첩되면서도, 또 공간적으로는 영원히 서로 간섭이 없는 허무한 형식으로 저승(彼世)이라는 세계가 존재합니다. 저승이란 곧바로 사람들이 죽어서 영혼들이 모여 산다는 추상적인 세계인데, 그 저승세계의 최고 권력자는 염라왕이라고 합니다. 그 염라왕의 밑에는 판관이라는 무서운 신이 한분 계시는데, 그의 직책이 바로 이승 사람들의 명부(命簿)를 관리하는 일이며, 명부란 즉 천명에 따라 八字의 형식으로 매 사람들의 출생 날자와 사망될 날자를 적은 장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장부에 적힌 자기의 죽을 날자를 절때 거역할수 없으며, 그리하여 속담에 “살인도망 할수 있어도, 팔자도망 못한다.”고 하였답니다. 저승에서는 속세를 초탈하여 령산에 기를 묻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 다니는 영혼을 선(仙)이라고 하고, 저승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고 있는 영혼을 신(神)이라고 합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신통력이 대단하여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신선들 보다도 그 재주가 뛰여났기 때문에 저승에 쳐 들어가 판관을 핍박하여 명부를 내놓게 한후, 자기의 죽을 날자를 먹으로 뻑- 지워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손오공은 오늘까지도 죽지않고, 소설, 영화, 그림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세상에 생생하게 계속 살아 있는가 봅니다. 우리민족 저승문화에서도 한 사람이 자기명이 다 하여 죽을때가 되면 저승에서 최판관이라는 신이 명부에 적혀 있는 그 사람의 죽을 날짜에 맞추어, 구속영장, 혹은 초청장을 발부하여 두 저승사자에게 주어서 이승에 내려가 해당 사람의 령혼을 체포, 혹은 모셔오라고 명령합니다. 일반사람에게는 구속영장을, 위대한 사람에게는 초청장을 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청장이라 하여도 일방적인 강박 초청이기 때문에 체포해 가는거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 두 저승사자는 이승에 내려와 해당 사람을 찾은 후, 먼저 그의 령혼을 유혹하여 육체를 떠나게 합니다. 그러면 그 령혼은 육체를 떠나 잠시적으로 집 룡마루 서북쪽 상공에서 헤매고 있게 되는데, 육체는 그로하여 의식이 없어지면서 숨이 끊기고 죽음 상태에 진입합니다. 이때 그 누가 그 령흔을 다시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른다면 그 두 저승사자는 혹시 만에 한번씩이라도 상식밖의 실수를 범하여 그 령혼을 다시 돌려 보내는 수가 있답니다. 떠났던 령혼이 일단 돌아오면 육체는 다시 소생할수 있지요. 옛날부터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혼을 부르게 된 유래입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혼을 부르는 방법은, 생전에 고인과 관계가 좋던 사람이 구새목, 혹은 지붕우에 올라가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룡마루 서북쪽 방향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이름, 혹은 시호를 부르고 “옥보-옥보-옥보-” 하고 웨칩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종이에 싼후 고인의 머리밑에 조심히 괴여 드립니다. 혼을 부를때 원래는 “복(復)”을 불러야 “돌아오라!”는 뜻이 되는 건데, 글을 배우지 못했던 우리 선인들은 중국에 금방 들어 와서, 평소 장례을 맡아보던 도감이 혼을 부르는 소리를 잘못 기억한것 같습니다. “복”을 길게 부르면 “보-옥”이 되고, 세번 부르면 “보-옥, 보-옥, 보-옥”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선인들은 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앞의” 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뒤의 ”옥” 소리부터 기억했나 봅니다. 그리하여 “옥보-옥보-옥보-”가 되였지요. 비록 잘못 전해진 방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연변조선족은 중국에 들어와서 100여년동안 장례에서 줄곧 이렇게 혼을 불러 왔기 때문에 이미 특색적인 연변조선족 “고복”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에서 혼을 부르지 않았다면 보통 고인한테 책임을 다하지 못한것으로 치부되며, 장례후에 가족들의 꿈에 죽은 사람이 자주 나타나 문책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장례후에 가족들의 꿈에 죽은 사람이 자주 나타나면 장례때에 혼을 제대로 불렀는가 추적 확인해 볼 필요가 있으며, 다시 안신제사를 지내여 아직 유감이 풀리지 않아 저승에 입적하지 못하고 있는 영혼을 안정시키여, 시름놓고 저승에 입적할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제사와 명상은 이승과 저승을 련결하는 기본 도경이요 방법입니다.    사자밥(使者饭):사람이 사망하여 수시(收屍)를 마치고 큰 쟁반우에 밥 세사발, 술 석잔, 초신 세짝과 엽전 세잎을 놓고 이 쟁반을 윗방문 밖의 마루에 놓아 두는데 이것을 사자밥이라고 하며, 그 뜻인즉 고인을 모시려 오는 두분의 명부사자를 위로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의로 한사람분을 더 놓아서 두 명부사자가 서로 다투게 하여, 고인에 대한 통제를 좀 소홀하게 하려는 심산이 있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사자밥에 간장을 뿌리는데 그 뜻인 즉, 두 명부사자가 음식을 짜게 먹게 하여, 저승길에서 자주 물을 찾아 마이게 함으로써 그사이 강박적으로 끌러가는 고인의 영혼이 충분히 다리쉼을 하게 하려는 심산이랍니다. 우리민족 구전설화에 《동방삭설화(東方朔說話)》라는 것이 있는데, 여러가지 판본이 있으며, 공동한 점이라면 동방삭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한갑자가 60년이니 삼천갑자면 십팔만년이 됩니다. 참으로 아무리 설화라고 하여도 그리 쉽게 상상해 낼수 있는 수명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중의 한 설화가 바로 장례때의 사자밥과 련관이 있습니다. 먼 옛날 동박삭이라는 한 심술궂은 아이가 있었는데, 전문 눈먼 봉사들을 우롱하는것을 쾌락으로 삼고, 살구에 똥을 발라 봉사들에게 주는가 하면, 똥구덩이에 봉사들을 유인하여 빠지게 하는 등 별의별 악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한 맹인 신선도 한번 우롱을 당하고는 너무 격분하여 이제 명부 사자에게 일러 바치여 너를 잡아가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크게 겁을 먹은 동박삭은 다시는 악한짓을 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 달라고 그 맹인 신선에게 손이야 발이야 빌었습니다. 그러자 그 맹인 신선은 이제 명부사자들이 너를 잡으려 오면 좋은 음식과 돈으로 여사여사히 잘 대접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겨우 그번 죽음을 모면하고는 그후부터 동방삭은 전문 장례집만 찾아 다니며 사자밥을 정성들여 차려서는 명부사자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후 동방삭이 정말로 죽을 차례가 되여 명부사자들이 그를 데리려 왔다가, 이미 그의 후한 대접을 많이 받아 온 지라 인정상 그를 잡아 갈수가 없어서 그의 구속영장에 적혀 있는 그의 수명 ”三千日”에 한획을 내리그어 “三千甲”으로 만들고는 그대로 돌아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공짜로 삼천갑자를 살고 난 후에 동방삭은 인젠 천문지리에 통달하고 신통력이 뛰여나 저승사자에게 통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승에서는 계교를 꾸미여 저승사자로 하여금 노인으로 변장하고는 내가에서 숯을 물에 씻게 하였습니다. 한 지나가던 사람이 와서 무얼 하느냐? 물어 보기에 “숯을 자꾸 씻으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씻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그사람은 “허!허! 내가 삼천갑자 살아도 처음 듣는 소리군.”라고 합니다. 그말을 듣고 저승사자는 그가 바로 동방삭이라는 것을 알고 얼른 저승으로 잡아 갔다고 합니다. 이 설화에서 우리는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고 신통력이 뛰여났다 하여도 한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또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는 우리민족 전통 생사관의 한 측면을 엿볼수 있습니다.   (후일 계속---스크랩 불허)
4    조선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성원 댓글:  조회:2728  추천:0  2012-07-16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조선족의 소중한 문화유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一、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에게는 아주 찬란하고 풍부한 민속문화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례문화, 특히는 장례문화의 경우에는 특별히 성숙된 문화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리념과 풍속을 가장 전면적으로, 가장 완미하게 반영한 민속문화로서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중국에는 《홍백희사》(紅白喜事)라는 설법이 있는데, 결혼을 홍희사라고 하고, 사람이 죽은것을 백희사라고 하며, 이 두가지를 합하여 홍백희사라고 합니다. 결혼하는것을 희사라고 하는것은 누구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중국사람들은 사람이 죽은것도 희사라고 합니다. 한방면으로 추도회를 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장례를 치르는데, 사람들의 정상적인 정감의 표현입니다. 다른 한방면으로는 또 희사라고 하는데 확실히 희사가 맞습니다. 세상은 마치도 공공뻐스와 같이 승객들이 부단히 바뀝니다. 뻐스에 먼저 오른분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림으로써 또 다른분들이 오를수 있게 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로 먼저 이 세상에 오신분들이 일정하게 생활하신후에 기꺼히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생존하고 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먼 옛날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오늘까지도 “장생불로약”을 먹으면서 죽지않고 모두 살아 계신다면 이 지구는 지금쯤 아마 발을 옮겨 디딜 자리도 없이 비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례는 기실 사망자에 대한 애도뿐만이 아니라 후세에 대한 희망으로도 되며 이런 견지에서 장례문화야말로 인류문명의 척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의 혼례문화는 상당한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대비하여 조선족의 장례문화는 장례와 함께 쓸쓸한 신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으로 관리하는 부문이 없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호조치도 없습니다. 전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는 모두 4대 장의관이 있는데 그중에 조선족 장례풍속을 존중하여 설치한 복무시설이나 복무항목은 한가지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기실 우리민족의 전통적 장례문화도 우리민족의 전통적 혼례문화와 마찬가지로 우리민족의 찬란한 민속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장례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 민속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될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중국 송나라때의 “朱子家禮”에서 기원했는데 몇백년을 내려오면서 점차 우리민족 고유의 장례문화로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기본리념은 유가의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에서는 “효도”와 “례의”의 리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은 문화적 의미에서 “효도”와 “례의”를 원만히 하고 계승하는 과정으로 됩니다. 효도는 자고로 우리민족의 사회질서와 가정 관계를 유지시킨 도덕 준칙이였으며 우리민족 전통문화의 정수입니다. 오늘날 걸음 바쁜 경제 시대에서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효도의 작용은 여전히 매우 큰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선인들은 장례와 제사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는데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련관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장례문화는 시대의 충격에 밀리여 거의 매몰되여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중화민족 대가정 속에서 당당히 자기의 한자리를 계속 확보하려면 우리의 장례문화를 버릴수 없으며 반드시 발굴하고 정리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二、 장례라는 것을 통속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사망하여 그 유체를 처리하는 의식인데, 주요하게 두가지 공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생명공능을 상실한 유체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자연적 공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자와의 생전의 사회관계와 정감관계를 정리하는 사회적 공능입니다. 장례는 기실 철두철미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장례는 사망자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후에 혼백은 진짜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먼옛날 공자가 말한것처럼 《살았을때의 일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죽은후의 일을 어찌 알수 있겠는가?》(未知生,焉知死). 표면상에서 장례는 마치도 죽은사람을 위하여 그의 혼백을 하늘나라의 좋은 곳으로 보내는 성스러운 의식 같지만, 기실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도덕풍상을 지킴으로써 자기의 정신적 의탁과 심리적 안위를 얻으려는 문화적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장례는 사망자를 위하여 필요한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요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장례는 부모나 어른들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의 연속이고, 보충이며, 완성입니다. 경쟁이 심한 현시대에 와서 젊은이들은 자기 인생을 개척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분투해야 하는데 부모들한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한후에 다시 부모에게 효성하고 싶을때에는 부모는 왕왕 늙어서 사망하실때가 되거나 혹은 언녕 사망하시고 하늘나라에 가서 계십니다. 소위의 효(孝)에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부모나 어른들을 잘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나 어른이 사망하여 그들의 장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의 시대에서는 부모나 어른들한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것을 최대의 수치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모나 어른이 사망하면 장례를 될수록 후하게 치르는 것으로 자기가 효자라는 것을 표명함으로써 사회의 인정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평소에 부모나 어른들을 좀 박대했던 사람들은 더구나 장례를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자기의 수치를 감추고, 심리적 불안감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장례를 특별히 중시 하게된 원인의 하나입니다. 장례를 치른후에는 또 “삼년수효”라는 혹독한 풍속까지 있었는데, 상주는 부모의 묘소옆에 움막을 쳐놓고 효복을 벗지 못한채 삼년 제사날까지 지키면서 살아있는 부모님 뫼시듯 조금도 게으름 없이 효성을 들여야 하였습니다. 이 기간에는 세수도 하지 못하고, 육식도 하지 못하며, 또 안해옆에도 가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혹독한 수련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역시 《효자》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효복을 입고 수효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그의 목적은 부모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를 미봉하고 원만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너무나도 우매한 행위였다고 말할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락후한 사회의식 수준에서도 우량한 도덕표준을 지켜 내려는 우리의 조상님들의 고심한 노력을 엿볼수 있습니다. 둘째; 장례는 가정 의무의 새로운 분공이며, 가정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 가정의 특정된 위치에서 특정된 가정의무를 지니고 생활합니다. 한사람의 사망은 한 가정에서 한 자리가 비게됨을 의미하는데, 필연적으로 그 가정의 원래의 평형을 파괴하게 됩니다. 특히 가정의 중요한 세대주가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전통 장례에서는 의례 규칙에 따라 상주(喪主)를 확정하게 되는데, 그가 곧 새로운 가정대표로 됩니다. 전통적으로는 보통 죽은자의 장남이 상주가 되였는데 지금은 만약 장남이 없다면 장녀나 맏사위가 상주로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기초상에서 가정의 기타 성원들도 모두 스스로 자기의 의무를 조절하여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게 되는데, 이렇게 새로운 가정평형이 형성되며 가정의 새 시기가 시작됩니다. 세째; 장례는 사망자의 생전의 인생가치에 대한 평가이며, 총결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기간에 정도 부동하게 재부를 창조하게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르게 되며, 주변 사람들의 생활과 기억에 일정하게 영향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이 사망한후 그의 생전의 인생가치에 대하여 충분히 평가하고 총결하는것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유산을 남기는 것으로 됩니다.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추도문에서 사망자의 공덕을 많이 라렬하고, 사망자의 결점에 대해선 보통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요하게 사망자의 공덕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지만, 사망자의 결점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의도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자기의 인생에 대한 재 검토 기회로 됩니다. 사람은 태여나면서부터 그 어느때엔가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례를 통하여 자기도 어느때엔가는 저 사람처럼 죽게 된다는 것을 강렬하게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지난 인생에 대하여 재 검토하게 되며, 금후의 인생에 대하여 더욱 긴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엄, 가족의 존엄, 나아가서는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대사입니다. 사람이란 생명이 있어서 사람인것이 아니라 존엄이 있어 사람입니다. 장례는 성대히 치러서 존엄이 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치러야 존엄이 섭니다. 훌륭한 자기의 장례문화를 잃어 버리고 남의식으로 자기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서는 그 무슨 존엄을 운운할 여지가 없습니다.   三、 천백년래 사람들은 모두 잘 살기 위하여 분투하여 왔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어 왔습니다. 시대가 오늘에 이르러 이제부터는 잘 죽는것도 생각해야 할 때이며 죽음의 질을 강조해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이 젊어서는 아주 잘 살았었는데 늙으막에 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면 그의 일생을 완미하다고 할수 없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젊어서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다가 늙으막에 와서 행복하게 죽었다면 그의 일생은 참으로 완미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젊어서의 고생은 기실 인생의 보귀한 재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속담에서 젊어서의 고생은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잘 죽을수 있겠는가? 기실 이 문제는 어떻게 죽음의 질을 제고하여 만년을 원만하게  끝마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을 원만하게 끝마쳤다고 평가하자면 적어서 아래와 같은 조건이 구비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장수하신 사람이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였지만 지금은 팔순, 구순이 예사로운 일이며 백세라도 그리 희한하지 않습니다. 장수한 사람의 경우에는 병이나서 사망하는것이 아니라 때가 되여 사망하기 위하여 병이 오는 것입니다. 인류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사회에 많은 새로운 난제가 제출되지만 인류수명의 제고는 총체적으로 인류생명의 질 제고를 의미합니다. 둘째: 행복하게 사망하신 경우입니다. 특히 마음이 편안하게, 고통이 없고 유감이 없이 미소짓고 눈을 감은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사망하실때가 되면 모종의 불치의 병으로 모진 고통을 격게 되는데 이로하여 보편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말기환자라 하여도 보통 임종하시기 전까지 치료를 멈추지 않는것을 의료도덕의 기본적인 표준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랑비가 조성되고 병자의 고통은 가심해만 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방의 일부 나라에서는 “안락사”라는 개념이 나오고 “호스피스”(사망전 정양호리) 모식을 도입하고 있는데 아직 완미하지는 못합니다. 진정으로 “안락사”나 “호스피스”가 현시대의 새로운 문명으로 되려면 아직 많은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조만간에 인류의 지혜에 의하여 원만히 해결되리라고 믿습니다. 사망하는것이 인류의 필연적인 의무라고 할진대, 될수록 고통이 없이 마음 편안하게 사망하려 하는것은 전 인류의 공동한 념원일 것입니다. 세째: 존엄이 있게 사망하셔야 합니다. 자식들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망하셔야 합니다. 사망이란 한사람 생명의 종결을 의미할뿐 결코 그 사람의 존엄의 종결은 아닙니다. 사망한 사람의 존엄은 그 사람이 세상에 남긴 공덕과 더불어 계속 이세상에 남게 되는데 그 공덕이 크면 클수록 그의 존엄도 더욱 오래동안 남게 됩니다. 자식이란 부모가 낳아주고 키워준 신체와 두뇌에 근거하여 학습하고 생활하고 사업하기 때문에 그들의 몸과 행위에는 모두 부모와 조상들의 공덕이 슴배여 있으며 그 공덕이야말로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기본 동력입니다. 불효자식들이 필연적으로 패망하는 리유는 바로 그들이 자기절로 자기의 기본 동력자원을 차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조건들은 기실 모두 자식들의 효성과 사회의 복리를 떠나서는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족 전통장례의 효도사상은 바로 죽음의 질을 제고하여 만년을 원만하게 끝마칠수 있는 륜리적, 도덕적 담보로 됩니다. 조선족 전통장례에는 “好死”라는 것이 있었는데 주요하게 장수하시고 공덕이 많은 로인들의 죽음을 일컬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호사”의 장례는 슬픔보다는 경축과 오락의 분위기가 농후하였으며 조문객들도 유가속에게 위로의 말보다는 치하의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사람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백희사의 경우입니다.   四、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 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의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의 멸시를 받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세계적 특색이 바로 자기의 민족 특색이며, 자기의 민족특색이 짙을수로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장례풍속》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 (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 하였으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연구와 보호사업을 책임진 단위로 지정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한 부문이나 어느한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완성할수 없습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입니다.    
3    조선족 장례풍속의 뿌리--성원정리 댓글:  조회:2746  추천:0  2012-07-15
조선족 장례풍속 본재료는 현성원 선생이 집필한 《조선족 장례풍속》의 무형 문화재 신청 재료에 근거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의 뿌리 조선족 장례풍속의 뿌리를 찾아보면 바로 중국 송조(기원960~1279)때의 《朱子家禮》이며 원시조는 곧바로 朱熹(기원1130~1200)가 되는 것입니다. 14세기말 고려국(기원918~1392)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家禮혹은 文公家禮라고도 함)를 들여 왔는데 지배계층에서 개혁세력이 우세하게 되면서 불교의 국교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나라적으로 점차 중국 유교사상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였습니다. 그후 조선왕조 (기원1392~1910)가 성립되여 태종12년 (기원1412)에 조정에서는 전국에 령을 내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 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성종16년(기원1485)에 《經國大典》이 정식 출범하면서 조선왕조에서는 유교를 국교로 숭상하게 되였으며 불교를 전면적으로 배척하게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왕조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장례와 제사를 포함한 일체 행위표준과 례의규범이 모두 중국 유교의 례법에 기준하게 되였습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은 중국고대의 유교문화 원고유존들을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이런 원고유존들은 바로 오늘의 중국 중원문화에서는 거의 찾아 볼수 없는 것들입니다. 조선왕조 중기의 학자인 申義慶(기원1557~1648)은 《喪禮備要》라는 책을 써서 《朱子家禮》의 상례에 상관되는 부분들에 상세하게 주석을 달았으며, 조선왕조 말기의 학자인 李縡(기원1680~1746)는 《朱子家禮》에 기초하여 거기에 또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가례 풍속과 리념을 보태여 넣으면서 《四禮便覽》이란 책을 써서 조선민족의 《冠婚喪祭》례의 규범들을 전면적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왕조 헌종10년(기원1844)에 처음으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朱子家禮》의 조선민족화를 최종으로 완성한것으로 됩니다. 유가사상이 인심에 침투되면서 조선왕조의 사람들은 장례에 대하여 새로운 관념이 형성되였습니다; “조부모가 땅밑에 안전하게 뭍여 있어야 그 자손들도 안전할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 반대로 될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것은 나무가 땅에 뿌리박고 사는것과 같은데 그 뿌리와 줄기가 불에 탄다면 그 가지와 잎사귀는 말라 버리고 말것이니 어찌 싱싱하게 자랄수가 있겠는가?” 이런 관념은 조선왕조에서 매장제도의 전면적인 실시를 촉진하는 역활을 하였습니다. 조선반도의 장례문화의 변화와 발전을 시대에 따라 네개 계단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번째 계단은 태고시기로 부터 통일신라 시기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본토리념이 주도였으며 장례의 특징은 여러가지 고대장법이 병존한 것입니다. 두번째 계단은 고려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불교사상을 주도로 하였으며 장례는 화장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세번째 계단은 조선왕조 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유교사상을 주도로 하였으며 장례는 매장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네번째 계단은 근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서방의 여러가지 종교문화가 들어 오면서 동서방의 장례문화가 병존하게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화장도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하나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의 기본리념은 유가의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효도”와 “례의”의 리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은 문화적 의미에서 “효도”와 “례의”를 원만히 하고 계승하는 과정으로 됩니다. 중국 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 이후에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 동북지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0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여러지역에서 들어왔는데 그들이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장례풍속도 지역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특정된 환경에서 장기간 공동히 생활하는 가운데서 점차 중국특색의 조선족 장례문화가 형성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조선족 전통장례에서 썼던 운구 공구, 香徒, 灵輀라고도 함)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문화에서 제일 먼저 재앙을 당한것이 장례문화였습니다.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각지의 반란파들에게 의하여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으며 조선족 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습니다. 초기에 대부분 조선족 주민들은 감정상에서 일시 이렇게 화장하는 장례제도를 접수하기 어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1985년에 국무원 에서는 《빈장관리에 관한 잠행규정》을 내오고,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조례》의 총칙 제6조에는 《소수민족의 장례풍속을 존중하며, 자원적으로 장례풍속을 개혁하려는 것을 타인은 간섭하지 못한다》고 특별히 규정하여 놓았습니다. 나라에서《조례》를 제정하여 화장제도를 실시하게 된것은 시대가 발전했다는 상징으로서 자손만대에 덕을 쌓는 좋은 일이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의 기본리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하여 지탱해 오던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더는 사회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암담해져 가다가 오늘에 와서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였습니다. 만일 우리 조선족들이 뜻을 합쳐 시급히 구급하지 않는다면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철저히 매몰되고 말것입니다.
2    <조선족 장례풍속 >무형문화재 기본내용---성원정리 댓글:  조회:4009  추천:2  2012-07-15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 기본내용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은 크게 세가지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초상(初丧), 2, 안장(安葬), 3, 제사(祭祀).   첫번째 부분: 초상(初丧)   1-1속광(属纩):병자가 병이 위중하게 되면 정침에 옮기여 간호하며 병자가 림종하게 되면 가속에서는 병자의 곁을 지키면서 병자가 유언을 남기는 가를 주의깊게 살핍니다. 병자가 혼미에 빠지면 병자의 코밑에 솜 한쪼각 찢어놓고 살피는데 솜털이 움직이지 않으면 병자가 이미 사망했다고 판정합니다. 지금은 병자가 사망하면 의사가 진단하여 확인하며 사망이 확인되면 사망증명서를 제출합니다.   1-2수시(收屍):병자가 사망하면 친인으로 부터 손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볍게 내리 쓸어 고인의 눈을 안연히 감겨 드립니다. 그다음 의사가 소독한 약솜으로 고인의 입, 코구멍, 귀구멍 그리고 홍문을 틀어 막고 얼굴에 면백을 씌웁니다. 조선족 전통가옥의 웃방의 서쪽벽 남쪽켠에 시상(屍床, 칠성판이라고도 하는데 길이 170cm, 너비 30cm인 널판자로 합니다. 널판자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구멍이 일곱개 뚫여져 있어 그런 이름을 가졌습니다.)을 놓고 고인의 유체를 그 우에 모십니다(머리를 남쪽으로 합니다). 그다음 이불로 유체를 덮고 그앞에 병풍이나 만장으로 유체를 가리웁니다. 병풍앞에 임시로 자그마한 령좌를 차려놓고 그우에 고인의 신위, 혹은 유상을 모셔놓고 그앞에 간단하게 술과 음식을 차려놓은 다음 초불을 달아 놓고 향을 피웁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이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데 병자가 병원에서 사망했다면 시상은 놓지 않습니다.   1-3사자밥(使者饭):큰 쟁반우에 사자밥 세사발, 술 석잔, 초신 세짝과 엽전 세잎을 놓고 이 쟁반을 웃방문 밖의 마루에 놓아 두는데 그 뜻인즉 고인을 데리려 오는 세분의 명부사자를 위로해 주려는 것입니다. 사자밥 세사발은 하루에 한번씩 새밥으로 바꿉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이 풍속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1-4고복(皋復):혼을 부른다고도 하는데 생전에 고인과 관계가 비교적 좋은 남자가 구새목, 혹은 지붕우에 올라가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왼손으로 에리를, 오른손으로 중간을) 서북쪽 방향을 향하여 먼저 고인의 이름 혹은 시호를 부르고 “옥보-옥보-옥보-”(“復”을 길게 부르면 “보-옥”이 되는데 연변에 口傳되는 과정에서 왜전되였음, 다시 돌아 오라는 뜻)하고 웨칩니다. 소위 혼을 부르는 의미는 사람이 사망하게 되면 그 령혼이 사신의 부름을 받고 사람이 아직 숨이 완전히 지기전에 먼저 사람의 육체에서 탈리하여 집의 룡마루 서북쪽 상공에서 헤매고 있다고 하는데 그 령혼을 다시 불러들여 사람의 몸에 붙여 놓아 그 사람을 다시 소생시켜 보려는 최후의 노력을 상징합니다. 혼을 부른후 혼을 부른 옷을 종이에 싸서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드립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여전히 성행합니다. 병자가 병원에서 사망했다면 병실이나 복도에서 창문을 열고 바깥에 대고 혼을 부릅니다. 혼을 부르지 않았다면 보통 고인한테 책임을 다하지 못한것으로 여깁니다.   1-5효복(孝服):혼을 부른후 고인이 여전히 소생하지 못한다면 상주(丧主)는 서둘러서 효복을 바꿔 입습니다. 고인의 장자, 혹은 장손이 상주로 되고 가속은 모두 상제(丧制)가 되며 기타의 친척은 모두 복인(服人)이 됩니다. 상주는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효관을 쓰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효포를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으로 꼬아 만든 요질를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지금은 효복이 없어졌습니다. 상주도 기타 상제나 복인과 마찬가지로 옷에 상장(丧章)을 다는것으로 효복을 대체 합니다.   1-6발상(发丧):상주가 효복을 바꿔 입은후 일동은 상주를 배동하여 령좌앞에서 곡을 시작하는데 곡소리로 동네에 초상이 났음을 알립니다. 상주와 호상이 상의하여 장례 기일을 결정하며 문서가 부고를 써서 각지의 친속과 친우들에게 통지하며 감댁이 장례비용과 물품을 관리합니다. 호상이 장례의 전반 사무를 장악하고 처리합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으로 하고 짝수일(双日)로 하지 않는데 사망이란 불길한 일이므로 쌍(双)으로 오지말기를 기원하는 심리일 것입니다. 이날부터 시작하여 출상하는 날까지 상가집에서는 불을 때지 않기 때문에(유체가 부패해 지는것을 공제하기 위해서 입니다) 옆집들에서 음식을 공급합니다. 지금 친인이 사망하면 부고는 기본상 전화로 전달됩니다. 삼일장도 이미 보기 힘들며 대부분 장례는 이튿날에 끝나고 당날로 끝나는 장례도 많습니다. 많은 전통 금기들이 지금은 기본상 없어졌습니다.   1-7애호(哀号):호곡(號哭)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족 장례와 제사에서는 고인의 가속과 친속에 따라 각기 부동한 두가지 호곡 규범이 있습니다. 고인의 가속, 즉 상제들이 곡을 할때에는 “애고! 애고!”하는 소리를 내고 고인의 친속, 즉 복인들이 곡을 할때에는 “어이! 어이!”하는 소리를 냅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이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여 있습니다. 성진에서는 일반적으로 곡을 하는것을 제창하지 않습니다.   1-8수령(守灵) :효도관념에서는 부모가 사망하면 자손의 불효로서 그 죄가 심중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상주는 가장 초라한 효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물만 먹으며 한시도 령구옆을 떠나지 않으면서 자체로 벌을 받습니다. 밤에도 령구옆에서 밤을 새면서 자정에는 새벽전을 올리는데 친속과 친구들이 상주를 동무하여 함께 밤을 샙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런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여 있습니다. 성진에서는 유체를 빈의관에 보관시킨후 따로 지키는 사람을 남기지 않으며 보통 자기집에 령좌를 차려놓고 밤새 지키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1-9소렴(小殓):렴습이라고도 하는데 습이란 유체를 목욕시키는 절차이고 렴이란 유체에 수의를 입히고 유체를 천으로 싸서 묶는 절차로서 마을의 나이 있는 분들이 책임지고 집행합니다. 집행인은 먼저 고인의 얼굴을 깨끗이 하고 몸을 더운물로 닦고 수의를 입히고 명모를 씌우고 악수를 끼우고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남좌녀우로 고인의 손에 감아 놓으며 버선을 신기고 반함을 집행합니다. 수의는 일반적으로 특제한 것인데 고인이 생전에 아끼던 민족례복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함이란 고인의 입에 쌀알을 넣는 절차인데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세번에 나누어 쌀알을 고인의 입안에 넣습니다. 쌀알을 넣을때 첫 숟가락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칩니다. 그 다음 구슬 세알, 혹은 은전 세잎을 한잎씩 넣는데 차례로 “백량이요”, “천량이요”, “만량이요”하고 외칩니다 (지금은 보통 엽전으로 대체 하거나 혹은 넣지 않습니다). 반함을 하는 의미는 고인에게 명부에 가면서 써야할 식량과 로비를 충분히 마련해 보낸다는 뜻입니다. 반함이 끝나면 입을 다물구고 약솜편과 면백으로 얼굴을 싸고 다섯메터 좌우의 전폭 백포로 유체를 싸고 백포오리(绞带라고도 함)로 고인의 어깨부위, 허리부위, 발목부위 등 세곳을 각각 묶고(다섯곳 묶기도 하고 일곱곳 묶기도 하는데 묶을때 옭매지 않고 오리를 비틀어 묶습니다) 칠성판 우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우에 렴습을 마친 유체를 모시고 그 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여전히 성행하는데 조선족 상례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풍속의 하나입니다. 구체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1-10대렴(大殓):바로 입관하는 절차입니다. 조선족 관은 장방형 립방체인데 길이가 180cm좌우, 너비 50cm좌우, 높이 40cm좌우로 합니다. 먼저 림시령좌를 치우고 유체를 옮기고 관을 그 자리에 놓습니다. 입관할때 먼저 관 바닥에 칠성판을 깔고 그우에 지금(地衾)을 펴고 그우에 동여놓은 유체를 넣고 자세를 조절한 다음 고인의 생전의 옷견지들과 아끼던 물건들로 공간을 채웁니다. 조건이 되는 지역에서는 봇나무 껍질로 유체를 싸는데 봇나무 껍질은 부패를 방지하는 공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입관한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고, 관 덮개를 덮고, 은정을 박아 봉관하고, 구의(柩衣)로 관을 쌉니다. 그리고  다시 병풍이나 만장을 당겨 놓아 령구를 가립니다. 지금도 토장을 실시하는 산촌 지역에서는 이 풍속이 의연히 보존되여 있습니다. 화장을 실시하는 성진에서는 이미 관이 필요없게 되였는데 빈의관 령구차에서 제공하는 유체 넣는 주머니로 관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1-11명정(铭旌):명정이란 말 그대로 고인의 공덕을 써 넣는 기발입니다. 명정의 재료는 전폭으로 두메터 길이 되는 붉은천으로 하는데 그 우에 흰글로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등을 써 넣습니다. 남성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學生”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이라고 쓰고 녀성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의 성이 金씨이고 본관이 金海이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金海金公之柩》라고 씁니다. 녀성의 경우에 만일 그의 성이 李씨이고 본관이 全州라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라고 씁니다. 명정을 써서 병풍에 걸어 놓는데 출상할때 기발을 만들어 령구앞에서 들고 길을 인도하며 하관할때 관우에 덮어서는 함께 묻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의연히 성행하는데 명정의 규격상에서는 조절이 되여 있습니다. 화장을 실시하는 성진에서는 이미 명정을 기발로 쓰지 않습니다. 지금 쓰는 명정의 규격은 너비 30cm좌우로 하고 길이 150cm좌우로 하는데 쓰는 격식은 위와 같고 흰 석필이나 흰 분필로 써서는 이미 렴습을 끝낸 유체우에 덮었다가 함께 화장합니다. 1-12령좌(靈座):대렴이 끝난후 병풍앞에 령좌를 앉히고 그우에 신위 혹은 유상을 올리고 그 오른편에 혼백 (魂帛, 고인의 령혼이 배였다는 상징적 물건, 삼베천 혹은 백지를 접어서 만듭니다)을 놓습니다. 령좌앞에는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상 앞에는 또 향로, 모사를 놓고 또 작은상 하나 놓아 조문하거나 제사 지낼때 술을 붓기 편리하도록 합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여전히 성행하는데 순서와 내용은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으며 혼백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1-13성복(成服):대렴이 끝나면 주부와 상제들이 상복을 바꿔 입는데 전통적으로 상복은 다섯종으로 나누고 복상기는 삼년부터 삼개월 까지 모두 여섯급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보통 상제와 복인으로만 나누는데 상제만 삼년 복상기를 규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복인으로 취급하고 복상기가 따로 없습니다. 남자 상제들은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굴건과 상관을 쓰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주부(主妇, 고인의 안해, 혹은 상주의 안해)와 녀자 상제들은 머리와 몸의 장신구들을 풀어내고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수질을 두르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복인들은 일률로 상장을 다는데 남자상에는 왼쪽에, 녀자상에는 오른쪽에, 남자들은 팔에, 녀자들은 머리에 답니다. 상복을 바꿔 입고 일동이 제사상 앞에서 한참 곡을 한후 성복제를 올립니다. 지금은 상복이 없어졌습니다. 상가에서는 상주이든 상제이든 복인이든 상관없이 일률로 상장을 다는데 남자상에는 왼쪽에, 녀자상에는 오른쪽에, 남자들은 팔에, 녀자들은 머리에 답니다. 장례에 참석하는 녀자손님들은 될수록 흰색의 민족 복장을 입고 남자손님들은 될수로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1-14조문(吊唁):성복제가 끝나면 조문객들을 접대하기 시작합니다. 남자 상제들은 모두 마당에 나가 상곤(상사에 쓰는 지팡이)을 짚고 조문객들을 맞이합니다. 부상일 경우에는 참대 지팡이, 모상일 경우에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습니다. 조문객들이 뜰안에 들어서면 남자 상제들은 곧 소리내여 곡을 합니다. 조문객들은 일률로 정문으로 집안을 들어 가는데 조문객이 문앞에 도착하여 기침을 한번 하면 집안에서는 일동이 모두 일어서서 곡을 합니다. 이때 상주와 주부, 그리고 녀자 상제들은 웃방에 서서 곡을 하고 복인들은 아래 정지에 서서 곡을 합니다. 조문객은 집안에 들어선후 묵묵히 제사상 앞까지 걸어가서 고인의 신위 혹은 유상을 향하여 세번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상주와 가속을 상대로 한번 맞절을 하면서 안위의 말을 합니다. 조문객은 물러 가면서 부의금을 상가에 주는데 상가에서는 받은 부의금을 일일히《조객부》에 기록합니다. 지금 농촌 장례에서 조문하는 풍속이 기본상 변하지 않았지만 절차와 내용은 많이 조절되여 있습니다. 성진의 장례에서는 조문을 기본상 장의관 고별청에서 단체로 진행 하는데 절차는 국가에서 통용되는 고별식 절차를 기준합니다.    1-15상식전(上食奠):아침에 해뜨는걸 기준하여 조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조식도 올리며, 저녁에 해지는걸 기준하여 석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석식도 올립니다. 그 뜻인즉 생시와 마찬가지로 고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제사상에 먼저 밥과 국, 반찬을 올리고 수저를 놓습니다. 곡소리 가운데서 집사가 밥두껑을 열고 제사상 앞에서 고인의 식사 시중을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는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데 그 뜻인즉 고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양치물 한그릇 떠서 올리고 재배하고는 밥과 국, 반찬을 물립니다. 이것으로 그번 상식전은 끝납니다. 매번의 상식전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매번에 올리는 음식 종류는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기준합니다. 지금 농촌에서는 여전히 이런 풍속들이 보존되여 있습니다. 성진에서도 이런 풍속들을 일부 보존하고 있기는 한데 극히 희소합니다.   1-16문상(聞喪):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았을 때 즉시 목을 놓아 곡을 하며 한참 곡을 한후에 그 연유를 물어보고는 계속 곡을 합니다. 만약 장례에 가지 못할 형편이면 본지방에서 날자를 맞추어 성복제를 지냅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런 풍속이 보존되여 있습니다.   1-17분상(奔喪):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고 급히 부모의 장례에 가는것을 분상이라고 합니다. 목적지가 보이면 곧 곡을 시작하는데 곡을 하면서 상가로 달려가며 문앞에 가서는 소리를 더욱 높이고 집안으로 엎어질듯 달려 들어 갑니다. 이때 집안에서도 곡소리를 높여 화답하며 일동이 함께 령구앞에서 목을 놓아 통곡합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런 풍속이 보존되여 있습니다.   두번째 부분: 안장(安葬)   2-1굴광(掘圹):굴심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묘혈을 파는 절차로서 마을의 상조 치상조직에서 책임지고 해결합니다. 조선족은 자고로 음택의 풍수에 대하여 크게 중시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장지를 “山环水抱”의 양지쪽 비탈로 선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북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동남쪾은 하천에 안겨 있는 양지쪽 재혈부위에서 합당한 자리를 골라 墓穴로 하는데 풍수학 각도에서 왼쪽 산맥은 靑龍을 상징하고 오른쪽 산맥은 白虎를 상징하며 서북쪽에 둘러있는 산을 玄武라고 하고 동남쪽 개활지를 朱雀이라고 하며 주작을 가로질러 하천이 흐르는 것을 명당자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인정합니다. 장지가 결정되면 그 옆에 후토(작은 제단)를 만들고 술과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다음 묘혈의 좌향을 정하고 굴심을 시작하는데 일반적으로 묘혈의 길이 중간 연장선이 맞은켠 동남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제일 높은 산봉우리와 일직선을 이루도록 합니다. 묘혈은 일반적으로 길이 2m, 너비 60cm, 깊이 80cm 좌우로 합니다. 지금 이 풍속이 산촌에서는 의연히 성행하는데 절차는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2-2상여(丧舆):상여란 조선족 전통장례에서 쓰는 운구용 가마인데 香徒 혹은 灵輀라고도 합니다. 여덟사람이 메는것도 있고 열사람이 메는것도 있으며 또 스므사람이 메는것도 있는데 장례의 규모에 따라 결정합니다. 지금 연변의 산촌마을에 상여가 몇곳 보존되여 있기는 하지만 이제 얼마 가지 못하고 철저히 없어질 추세입니다. 대부분 산촌에서는 운구용 소수레로 대체 되였고 또 운구용 소형 동력차도 있습니다. 성진에서는 상여가 력사무대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였으며 지금은 전용 령구차로 대체 되였습니다.   2-3천구(迁柩):운관라고도 하는데 집안의 관을 메여 내와서 상여에 올려 놓는 절차입니다. 네명의 역사가 집안에 들어가면 부녀들은 모두 물러 가는데 두가닥의 헝겁띠를 관밑으로 빼내서 량옆에서 네사람이 각기 한쪽 끈씩 잡습니다. 축인이 축문을 읽습니다: “오늘 길진에 천관하오니 그리 알리옵니다!” 독축이 끝나면 네사람이 동시에 관을 들고 머리부분으로 부터 집을 나가는데 천구과정에 문턱을 딛거나 문틀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지금 산촌에서는 이런 풍속들이 여전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성진에서는 유체를 주머니에 넣어 담가로 들어다가 령구차에 실어서 장의관에 옮겨 갑니다.   2-4발인(发引):바로 출상하는 절차인데 조선족 전통 장례중의 가장 륭중한 의식입니다. 출상일 아침 조전을 끝내고 천구하여 관을 상여에 싣습니다. 그 다음 발인제를 지내면서 발인축문을 읽습니다: 《(靈輀旣駕,往卽幽宅,載陳遣禮,永久終天)령여가 곧 떠나가니 가시는 곳은 유택입니다. 보내시는 례를 올리오니 영구한 리별입니다.》 독축이 끝나면 상여군들이 소리를 맞추어 상여를 메고 일어납니다. 상여군들은 지휘자의 구령에 맞추어 상여를 두번 들썩여 놓는데 이것으로 고인이 가택과 동네분들과 작별인사를 함을 표시합니다. 그 다음 지휘자가 작은 구리종을 흔들면서 만가(향두가, 혹은 상여소리라고도 함)를 부르는데 상여군들은 이구동성으로 맞소리를 내면서 노래 절주에 맞추어 명정 기발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전반로정에 만가소리는 그치지 않는데 그 가락이 참으로 슬프고 비감합니다. 조선족 상여행렬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순서로 걸어 갑니다: 제일앞: 명정(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써 넣은 큰 기발) 그다음: 요여(고인의 혼백과 명함을 담은 작은 가마) 그다음: 만장(고인을 추모하는 만사를 써 넣은 기발) 그다음: 공포(베천 오리를 달아 맨 기대, 길을 인도) 그다음: 상여(령구를 실은 큰 가마) 그다음: 가족(상주와 상제들이 곡을 하며 뒤따름.) 그다음: 조객(장례에 참석한 손님들이 묵묵히 뒤따름.) 마지막: 상차림(아낙네들이 상차림 보따리를 이고 뒤따름.)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로제(路祭)를 지내는데 보통 고인의 친구, 동업자, 혹은 제자들이 주도합니다. 상여를 내려놓고 간단한 제상을 차리고 만가를 읽은 다음 술을 붓고 재배하고 부의금을 냅니다. 로제가 끝나면 계속 길를 떠납니다. 만일 호상(로인이 장수하여 사망한 경우)이면 로정에서 다리를 지나거나 작은 언덕을 만나거나 하면 지휘자가 로비가 모자란다는 구실을 대고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나가지 않습니다. 이때면 가속이나 친속에서 달려나와 상여앞에 절을 하며 술과 돈으로 상여군들을 위로해 주어야 비로서 계속 나갑니다. 이 돈은 일부를 상여비용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속에 돌려 부의금으로 합니다. 호상에서 장수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히 행운스러운 일이므로 오락분위기를 조성하여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일부 산촌에서는 발인풍속이 어느정도 보전되여 있기는 하지만 절차는 크게 간소화 되였습니다. 성시에서는 발인의식이 일찍이 간단한 고별식으로 대체되여 있습니다.   2-5만가(挽歌):만가는 향두가, 혹은 상여소리라고도 하는데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는 과정에 선소리군과 상여군들이 부르는 로동가로서 호상에서 많이 부르고 액상에서는 보통 부르지 않습니다. 좀 느린 행진 절주로서 원래는 상여군들의 걸음을 맞추기 위하여 부르게 되였는데 기본형식은 선소리군이 작은 구리종을 흔들며 가락을 뽑으면 상여군들이 한결같이 소리내여 화답하는데 그 가락이 참으로 슬프고 비장합니다. 한수를 례로 적습니다; 소리군; 간다간다 나는간다. 이제가면 영별이다. 상여군; 에라! 헤라! 어허럼마 에헤라! 소리군; 여기떠나 어디가냐? 북망산천 내집이다. 상여군; 에라! 헤라! 어허럼마 에헤라! ………………………………. 소리군; 명년가서 청명추석, 제사술을 잊지마라. 상여군; 에라! 헤라! 어허럼마 에헤라! ………………………………. 지금 조선족 전통 만가도 조선족 전통상여와 마찬가지로 력사의 무대에서 기본상 사라졌습니다.   2-6안장(安葬):장지에 도착한후 상여에서 관을 내리우고 간단한 제사가 있은후 네사람이 헝겊띠로 관을 듭니다. 그러면 녀자 상제들이 관을 붙잡고 소리높여 통곡합니다. 관을 천천히 광에 넣는데 머리 부분이 서북쪽으로, 발 부분이 동남쪽으로 되게 하고 좌향을 바로 잡습니다. 주부가 공포로 관의 먼지를 닦습니다. 호상이 명정을 풀어 관을 덮습니다. 상주가 옷섶으로 새흙을 네번 나누어 받아서 광중의 네 변두리에 뿌려 넣는데 이것을 “사방토”라고 합니다. 그다음 모두들 일제히 삽을 날려 흙을 묻습니다. 그다음 봉분을 만드는데 형태는 반구모양으로 보기 좋게 하며 봉분의 동남변에 제단을 만들고 성분제를 지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흙을 묻으면서 소리를 뽑으며 달구질을 하는데 땅과 함께 평해지면 평토제를 지냅니다. 그리고는 다시 봉분을 만듭니다. 안장이 끝나면 후토를 잘 정리하는데 정해진 그 자리를 다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산촌에서는 이 풍속이 성행하고 있는데 그 절차와 내용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2-7묘비(墓碑):묘비는 세우지 않을수도 있고 또 후에 날을 택하여 세울수도 있는데 보통 음력 구월구일 중양절 날로 택합니다. 특수 사정이 있으면 삼삼양춘, 오오단오, 칠칠칠석 등의 날로 택할수도 있습니다. 비문은 일반적으로 한문으로 내리 쓰며 통용격식은 중간에 큰 글로 “故 某某某 之墓”, 이렇게 쓰고 왼쪽에 작은글로 “某年某月某日生”, 이렇게 쓰며 오른쪽에 작은글로 “某年某月某日卒”, 이렇게 씁니다. 그리고 뒤면에 자손들의 이름을 쓸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아주 성행하고 있는데 그 절차와 내용은 상당히 풍부해 졌습니다.   2-8반곡(返哭):안장을 끝내고 빈 상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곡을 하는것을 반곡이라고 하고,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셔 가는것을 반혼이라고 합니다. 하산하여 집에 돌아 와서는 다시 령좌를 차리고 신주를 모시고 그뒤에 혼백을 모시고 일동이 한참 곡을 합니다. 상주가 재배하고 곡을 그칩니다. 지금은 이런 풍속이 없어져서 볼수가 없습니다.   2-9면례(缅礼):면례는 원래 돌아가신 부모를 안장하여 십여년이 지난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파고 해골을 꺼내여 잘 정리한후 다시 묻는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효행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면례가 기본상에서 개장, 혹은 이장과 동의어가 되였습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사가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 고 하였으니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부모의 묘소를 자기의 마음에 드는 명당자리에 옮겨 모시는 것도 일종 미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면례는 일반적으로 묘의 좌향에 근거하여 길일을 택하여 진행하는데 만약 원래자리가 풍수가 좀 못하다고 인정되면 다른곳에 장지를 정하고 묘혈을 파는데 절차는 초상때의 안장과 같습니다. 낡은묘를 팔때 먼저 파묘제를 지내고 파묘축을 읽습니다. 그다음 묘를 째고 해골을 꺼내 참대칼로 깨끗이 긁어서 사람 골격의 순서대로 칠성판에 놓는데 모자라는 작은 뼈는 버드나무 가지로 대체합니다. 그다음 전폭의 백포로 칠성판과 해골을 함께 감싸고 묶은 다음 새로운 관에 넣어(새관을 쓰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새 장지에 가져다가 묻는데 절차는 초상때의 안장과 같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매우 성행하는데 절차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2-10합장(合葬):합장은 돌아가신 부모를 한자리 묘소에 함께 묻는것을 말하는데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홀로 모시던 부모가 사망하면 먼저 사망한 부모의 묘를 째고 그 옆에 묻는 것이고, 둘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중에서 한곳을 면례하여 가져다가 합장하는 것이며, 세째는 두곳의 부모의 묘를 모두 면례하여 다른곳에 가져다 합장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한개 묘혈에 두개 광을 파는데 두 광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벽을 두고 그 벽 중간에 통로를 내고 채색 사다리를 놓는 경우도 있는데 그 뜻인즉 두분 망령이 자주 래왕하게끔 편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흙을 묻어 매장하는데 절차는 초상때의 안장과 같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매우 성행하는데 절차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세번째 부분: 제사(祭祀)   3-1분류(分类):제사란 제물을 차려놓고 초자연적인 신령이나 선조한테 례를 올려 그들에 대한 숭경을 표시하고 보우를 비는 활동입니다. 고대 동방사람들의 제사 대상은 일월성신, 나라강산, 선조선왕 등이였습니다. 유가사상이 보급되면서부터 선조와 사망한 부모가 조선족 제사의 주요한 대상으로 되였습니다. 조선족 제사는 모두 네가지 류형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상제(喪祭); 바로 장례기간과 그후 3년 탈상하기전의 제사활동을 말합니다. 례하면 성복제, 성분제, 우제, 졸곡, 소상, 대상 등입니다. 그외에도 부제, 담제, 길제 등이 있지만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2)、시제(时祭); 동지에 시조의 제사를 지내고, 립춘에 고조이상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며, 매계도 중간달(음력 二월、五월、八월、十一월)에 고조까지 선조들의 제사를 지냅니다. 오늘 시제라고 할수 있는 행사는 정월 초하루날의 차례를 들수 있고, 기타의 시제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3)、기제(忌祭);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기일이라고 하는데 소상과 대상을 포함하여 매년 이날에 지내는 제사가 곧 기제입니다. 지금 대상후의 기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4)、묘제(墓祭); 원래는 청명, 단오, 추석, 중양에 산에 가서 묘자리가 있는 모든 선조와 부모의 묘를 다듬고 묘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청명과 추석에만 산에 가서 묘제를 지냅니다. 그외에 사당제, 녜제, 년중절제 등이 있는데 우리 중국 조선족 장례풍속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 조선족 제사풍속은 보존된것이 많지 못하며 순서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볼수 있는 기타의 제사들로는 또 생신제, 사갑제, 석물제 등이 있습니다.   3-2지방(纸榜):지방은 나무로 만든 신주의 대용품입니다.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에서 사당을 짓고 선조를 모신 대부호 가문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직 집에 자그마한 祠龛이나 丧门을 만들어 놓고 부모의 신위를 모시다가 제사가 되면 신주는 모두 지방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류별에 따른 지방의 서식표 类   别 格    式 고조할아버지 顯高祖考 學生府君 神位 고조할머니 顯高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증조할아버지 顯曾祖考 學生府君 神位 증조할머니 顯曾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할아버지 顯祖考 學生府君 神位 할머니 顯祖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아버지 顯考 學生府君 神位 어머니 顯妣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남편 顯辟 學生府君 神位 안해 亡室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백부 顯伯父 學生府君 神位 백모 顯伯母 孺人 (本贯 姓)氏 神位 형 顯兄 學生府君 神位 형수 顯嫂 孺人 (本贯 姓)氏 神位 동생 亡弟 學生 (姓名) 神位 아들 亡子 秀才 (姓名) 之靈 父生前职称 顯考 (职称) 神位 . 지금 이 풍속은 회복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리대로 말하면 지금의 신주는 모두 유상으로 하기 때문에 지방이 필요없지만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의미에서 지방을 리용한다면 그로서의 리유가 서는 것입니다. 전통적 지방의 서식에서는 남성의 지방에 성명을 쓰지 않지만 지금의 대다수 유가족에서는 고인의 성명을 지방에 써 넣을것을 요구하니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3-3제사상(祭桌):제사에서 먼저 령좌를 앉히는데 보통 북쪽(북쪽이 아니면 북쪽이라고 여깁니다)으로 하고 그우에 신주 혹은 지방을 모시고 그 앞에 제사상을 차립니다. 제상진설 원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제상진설 방법; 동쪽은 좌양이요, 서쪽은 우음이라, 생음식은 음이니 우편에 놓고, 익은음식은 양이니 좌편에 놓으며, 과실은 높으니 먼저 놓고 토종따위는 낮으니 후에 놓으며, 육산물은 우이니 먼저 놓고 해산물은 아래니 후에 놓으며, 습윤한건 음이니 우편에 놓고 건조한건 양이니 좌편에 놓습니다. 제상진설 분류; 신위앞 첫줄에는 밥과 국을 놓고, 숟가락, 저가락, 그리고 술잔을 놓으며, 두번째줄에는 반찬류를 놓고, 세번째 줄에는 어육류를, 네번째 줄에는 과일류를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일률로 짝을 지우지 않고 단수로 합니다. 지금은 이 풍속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으며 절차와 내용은 지방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3-4제사순서(祭祀程序):    진설(陳設)     (1) 먼저 령좌를 앉히고 신주를 모십니다.     (2) 령좌앞에 제사상을 진설합니다. (3) 제사상앞에 모사, 향안 등을 놓습니다. (4) 자손들이 제사상 왼편에 차례로 섭니다.    강신(降神) 참신(參神) (1) 일동이 곡을 시작합니다. (2) 제주(장손)가 향안 앞에 꿇어 앉아 향을 피웁니다 (3) 제주가 손을 씻고 향안 앞에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술을 반잔쯤 따릅니다.     (5) 제주가 세번 나누어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6)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7) 집사가 문을 조금 열어 강신을 맞이합니다.     (8) 제주이하 자손들이 함께 삼배하니 참신입니다.     초헌(初獻) 독축(讀祝)     (1) 제주(초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제주는 반잔만 모사에 붓고 술잔을 신주옆에 놓습니다.     (4) 집사가 메밥두껑을 열어 놓습니다. (5) 제주는 조금 물러나 머리 숙이고 꿇어앉아 부복합니다.     (6) 축관이 축판을 듭니다.     (7) 제 자손들이 모두 꿇어 앉아 부복합니다.     (8) 축관이 축을 읽습니다.     (9) 축이 끝나 일동 일어나고 제주가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10) 집사가 남은 반잔의 술을 모사에 붓습니다.    아헌(亞獻)     (1) 주부(아헌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주부는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종헌(終獻)     (1) 근친(종헌자)이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2)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3) 근친이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첨작(添酌)     (1) 종헌이 끝난후 또 헌작자가 있으면 첨작이라 합니다.     (2) 첨작은 많아서 석잔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3) 첨작자가 손을 씻고 꿇어 앉아 잔을 받듭니다.     (4) 집사가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따릅니다.     (5) 첨작자가 모사에 술을 붓고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합문(閤門)유식(侑食)     (1) 일동이 곡을 그칩니다. (2) 메에 숟가락을 꽂고 반찬에 젓가락을 놓습니다.     (3) 일동이 문밖에 나가 남녀가 서로 마주하고 섭니다.     (4) 문을 닫고 아홉 숟가락 정도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계문(啓門) 진차(進茶)     (1)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엽니다.     (2) 집사가 국을 내리고 숙주(냉수)를 올립니다.     (3) 엄숙히 잠깐동안 묵도합니다.    사신(辭神) 철찬(撤饌)     (1) 집사가 수저를 내리고 반개를 덮고 물러납니다. (2) 일동이 삼배하고 물러납니다. (3) 신주를 내립니다. (4) 제사상을 물리고 축문과 지방을 살읍니다. 지금 조선족 제사의 순서는 비교적 혼란합니다. 초헌, 아헌, 종헌의 구별과 제한이 없습니다. 정돈해야할 과제입니다.   3-5우제(虞祭):장례가 끝난후의 첫번째 제사인데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가 있습니다. 우제는 망령이 금방 신체를 잃고 몹시 불안해 하므로 련속 세번 제를 지내여 안신시킨다는 뜻입니다. 우제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지내는데 초우제는 장일 당날에 산을 내린후 해가 지기전에 지냅니다. 초우제를 지내고 상가에서는 모두 상복을 벗습니다. 재우제는 장일후의 첫번째 柔日(乙、丁、己、辛、癸),즉 초우제의 이튿날, 혹은 사흩날에 지내고 삼우제는 재우제후의 첫번째 刚日 (甲、丙、戊、庚、壬)즉 재우의 이튿날에 지냅니다. 지금 장례후 한번 안신제 지내는 것은 보편 현상이지만 련속 세번 우제를 지내는 경우는 극히 드믑니다.   3-6안신제(安神祭):길림성 연변지구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안신제는 전통적인 우제와 조금 구별됩니다. 안신제는 장일 이튿날 다시 산에 올라 새 봉분앞에서 지내는데 재철로 기름떡 몇개를 구우면서 기름내를 피운다음(연변에서 왜정시기 향을 얻기 어려운 사정에서 기름내 피우는 것으로 대용하면서 기원했다고 함), 기름떡이 익으면 제단에 올려놓고 상주를 비롯하여 일동이 다 같이 세번 절을 합니다. 전통 안신제에서는 술을 붓지 않고 곡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산촌에서는 이 풍속이 여전히 보존되여 있는데 절차와 내용은 많이 조절되고 있습니다. 성시의 장의관에서는 유가족들을 위하여 뒤울안에 많은 제단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유체를 화장한후 유가족과 손님들이 다 함께 소위의 안신제를 지냅니다. 고인의 띠에 해당되는 제단을 찾아 골회함, 혹은 유상을 신주로 하고 제단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상주로 부터 가문의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하며 손님들도 모두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사가 끝난후 불을 피워 기름내를 피우면서 혼 부른 옷과 상장 등을 모두 살읍니다. 소위의 안신제가 끝난후 손님들을 모두 식당에 모셔 식사시키는 것으로 장례행사가 모두 끝납니다.   3-7소상(小祥):돐제가 바로 소상입니다. 사망일 전날 저녁 해지기전에 집에서 석전제를 지내고 사망일 자정에 새벽제를 지내고 사망일 낮에는 산소에 가서 산제를 지냅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의연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3-8대상(大祥):두돐제가 바로 대상인데 삼년제 라고도 합니다. 제사의 절차는 기본상 돐제때와 같습니다. 삼년제가 지나면 혼백을 태우거나 묻어 버리고 탈상합니다. 몽상을 벗었다고도 합니다. 지금도 이 습속은 여전히 성행하며 절차는 경우에 따라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3-9청명제(清明祭):매년 청명, 단오, 추석, 중양이면 산에 올라 묘를 다듬고 제를 지내는데 지금 단오와 중양에는 산에 가지 않습니다. 청명때에는 삽 한자루 가지고 가는데 묘소에 이르러 먼저 후토를 찾아서 산신에게 제를 지냅니다. 그 다음 삽으로 가볍게 봉분을 보수하고 다듬는데 속칭 가토라고도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다음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문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삼배합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성진에서 납골당에 골회함을 보관한 사람들은 이날 골회함을 찾아 내와서는 산비탈 공용 제단에 가서 제사 지내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3-10추석제(秋夕祭):추석에는 낫 한자루 가지고 산에 가는데 봉분우에 자라난 풀들을 깨끗이 베여 버립니다. 이것을 속칭 벌초라고도 합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기본상 청명제때와 같습니다. 지금 이 습속들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데 절차들은 많이 조절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재료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 작성한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 무형문화재 신청재료에 근거하여 번역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1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성립 선언 댓글:  조회:2918  추천:0  2012-07-14
우리민족의 특색문화를 보호하고 발양시키는것은 우리민족의 근본리익과 관계되는 대사 《연변 조선족 례의 연구회》성립 선언 우리 중국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문화 차원이 비교적 높고 경제가 비교적 발전한 선진적인 민족에 속한다. 우리 중국 조선족은 아주 풍부하고도 우수한 민족전통의 특색 문화와 아주 굴강한 민족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 중국 조선족은 세계에서도 제일 방대한 민족인 한족과 공동히 한개 나라를 쓰고 살면서 중국의 우월하고 영명한 민족정책에 의하여 한족과 완전히 평등한 민족으로 존중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 중국 조선족은 지금 자기의 보귀한 가치를 하나, 둘 버리고 있으며 민족 정신은 점점 혼미해 가고 있다. 우리만의 자랑이였던 많은 민속 특색들은 이미 자취조차 없어졌으며 조선족으로서의 자존심은 점점 희박해 지고 있다. 물론 한족들의 선진적인 부분을 따라 배우고 자기의 락후한 부분을 개진하는것은 너무나도 옳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자기의 우수한 부분까지 버려야 하는 리유는 어디까지나 있을수 없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우리 소수민족의 전통적인 특색문화를 나라의 보귀한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삼고 많은 특수 우대정책까지 내오면서 보호하기에 큰 노력을 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의 전통적인 특색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있다. 나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우리 소수민족의 전통적인 특색문화를 보호하는것은 결코 우리 소수민족에게 특수하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서 뿐만이 아니다. 소수민족의 특색문화를 보호하고 계속 발양시키는 것은 우리 소수민족의 근본리익과 발전에 관계되는 대사로 되며 나아가서는 나라의 장원한 리익과 발전과도 관계되는 대사로 되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유구한 력사를 지내오면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 의하여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상대적으로 온정된 공동체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끊임없는 력사적 대 사변에 의하여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이 많이 파괴당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오늘에 와서는 지역이 다르더라도 오직 공동한 언어, 공동한 문화에 의하여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보존하고 있다면 여전히 하나의 민족으로 취급하게 되여 있다. 우리 중국 조선족 선민들은 원래 지금의 한국이나 조선의 선민들과 함께 조선반도에서 한개 나라를 쓰고 살면서 유구한 력사를 기록하여 왔다. 그런데 1892년 《임진왜란》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자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대량의 조선족 이민들이 그 당시 청조의 북간도땅 (지금의 연변지역) 에 건너와 장엄한 력사적 새로운 개척을 시작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 이후 중국의 조선족은 한족의 형제 민족의 신분으로 중국의 항일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참중한 희생을 내였으며 중국에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고 나아가서는 국제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는데 마멸할수 없는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 상공의 요란한 원자탄 폭팔소리와 함께 우리 민족은 끝내는 광복을 맞이하고 나라는 되찾았지만 또 한번의 참혹한 력사적 장난에 의하여 나라가 분단되게 되면서 우리민족은 그만 여러나라에 갈라지게 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한국에 거주하게 된 우리민족은 한국인, 지금의 조선에 거주하게 된 우리민족은 조선인, 지금의 중국에 거주하게 된 우리민족은 중국인… … 이렇게 되고 말았다. 지금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완전히 평등한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신분은 결코 우리 민족이 이민의 신분으로 나라에 국적신청을 올려 비준받아 가진것이 아니다. 중국 조선족의 중국 공민의 신분은 중국 조선족이 한족과 평등한 자격으로 새로운 다민족 공화국 창립에 집적 기여하고 참여한 결과이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당당한 《开国民族》 의 하나이다. 지금 우리 중국에서 《中国人民解放军》군가로 쓰이고 있는 최고 국가급 노래도 우리 중국 조선족 음악가 정률성 선생이 지은 것이다. 중국에는 또 《歌唱祖国》라는 노래가 있는데 중국의 최고 령도자들까지 즐겨 부르는 인기가 대단한 노래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들도 이 노래를 어릴때부터 불러왔으며 줄곧 자기의 노래로 간주하여 왔던것이다. 말하자면 중국 조선족은 언녕부터 중국을 자기의 조국으로 여겨왔다는 말이다. 《조국》이란 말은 기실《조상의 나라》라는 뜻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나라》라는 뜻으로도 풀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은 론쟁할 나위없이 우리 중국 조선족의 당연한 조국인 것이다. 지구가 빈틈없이 몽땅 여러개의 나라에 의하여 차지된 현 시대에 와서 민족은 자기가 귀속되여 있는 구체적인 나라를 떠나서는 운운할수 없게 되였다. 자기의 나라를 떠나서는 민족이란 부평초와도 같게 된다. 나라란 통치기구이자 또한 보호기구로서 정부를 중심으로 군대, 경찰, 법원… … 등 권력기구에 의하여 다스려 지고 또 보호되고 있다. 우리 중국 조선족에게는 중국이라는 위대하고 강대한 자기의 나라가 있으며 또 완전 평등한 중국 공민의 당당한 권리가 있으며 헌법으로 규정된 민족 자치권리가 있다. 우리 중국 조선족은 반드시 중국이 곧 바로 나의 나라라는 신념부터 단단히 굳히고 자기에게 차려진 보귀한 공민의 권리와 민족 자치권리를 굳건히 지켜나가야 할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 중국 조선족이 중국에서 장기적으로 안거락업할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보장이며 중국에서 자기의 민족을 지켜낼수 있는 유일한 보장이다. 그런데 나라의 신념을 강화하여야 한다하여 민족의 신념은 약화시켜야 하는것은 절때 아니다. 바로 나라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하여 민족의 신념을 강화할것이 더욱 필요한 것이며 민족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하여 수선 나라의 신념부터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 민족 발전관으로 문제를 분석하여 볼때 사회주의 력사시기는 민족을 더 한층 발전, 번영시키는 계단이지 결코 그 무슨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시키는 계단이 아니다. 민족문제의 발전 규률을 놓고 보아 일찍 한 위대한 철학가가 지적한바와 같이《먼저 계급이 없어지고 그다음 국가가 없어지며 마지막에 가서야 민족이 없어질것인데 전세계가 모두 이러할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우리 소수민족들이 한족들을 떠나서는 발전할수 없게 되였고 또 한족들도 우리 소수민족을 떠나서는 영구성적으로 발전할수 없게 되였다. 즉 우리 소수민족들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한족의 발전에 의거해야 할뿐만 아니라 한족의 영구성적인 발전도 반드시 우리 소수민족들의 발전을 함께 보장해야만 가능하게 되였다는 뜻이다. 이것이 또한 오늘에 와서 민족 대단결이 더더욱 필요하다는 리유로 되겠다. 발전하려면 반드시 세계에 접근해야 하며 세계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자기 민족의 특색을 강화시켜야 한다. 즉 자기 민족의 특색을 강화 시킬수록 더욱 세계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분들은 《세계가 바야흐로 자그마한 지구촌으로 되여가는 정보화의 현 시대에 와서 그까짓 민족특색을 계속 강조할 필요가 없다. 세계조류를 따라가면서 세계에 접근하는것이 더 바람직 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위 세계조류를 따라가면서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기실 민족적인 것일수록 더욱 나라적인 것으로 되며 나라적인 것일수록 더욱 세계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자기의 특색을 잃게 되면 우세가 없게 되며 우세가 없으면 경쟁에서 이길수 없게 되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발전할수 없게 된다. 이 도리는 국내에서나 국제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조선족은 자고로 례의민족으로 세계에도 이름이 높다. 조선족의 례의는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특색문화의 정수로서 우리 조선민족이 다른 그 어떤 민족과 구별되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조선족의 우수한 전통 례의문화는 엄중히 이질화 되여가고 있으며 응당 보존되여야 할 많은 보귀한 부분들이 이미 자취를 감추고 있다. 우리가 《연변 조선족 례의 연구회》를 성립하는 목적은 건강하고 우수한 조선족 전통 례의 민속에 대하여 전면적이고도 건설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전통적인 조선족 례의문화를 실용적이면서도 민족특색이 짙은 현대식 조선족 례의문화로 발전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세하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특색을 계속 보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종지는 헌법, 법률, 법규와 나라의 정책을 준수하고 사회 도덕풍상을 준수하면서 건강하고 우수한 조선족 례의 민속을 계속 발양하고 빛내이는 것이다.    2009년 10월   현성원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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