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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24효 이야기
2012년 07월 15일 17시 36분  조회:6797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중국 고대 24효 이야기
 
“효”는 유가 륜리사상의 핵심이며 천백년래 중국사회에서 가정 관계를 유지시킨 도덕 준칙이며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으로서 중화민족 전통문화의 정수입니다. 중국 원나라때의 곽거경이란 사람이 당시 민간에서 류전되는 효자의 이야기 스믈네편을 수집하여 《24효》라는 책을 편집하였는데 효도를 선양하는 대표적인 통속 독물로 광범하게 리용되여 왔습니다. 오늘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효”의 작용은 여전히 매우 큰 현실적 의의가 있습니다.
아래에 《24효》에서 14가지를 선택하여 실었습니다.

    
01 (孝感动天) 효성이 하느님을 감동시켰다
舜은 전설중 원고시기의 제왕으로서 삼황오제중에서 오제의 한 사람이며 성은 姚씨요 이름은 重华이며 호는 虞氏로서 력사에서는 虞舜이라고 부름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계모와 이복 동생과 짜고들어 여러번 그를 해치려고 꾀하였습니다. 한번은 순더러 창고 지붕을 수리하라 시켜놓고 창고에 불을 질러 놓았습니다. 순은 두손에 삿갓을 쥐고 뛰여내려 위험에서 벗어 났습니다. 또 한번은 순더러 우물 안에 들어가 우물을 가시게 하고는 우물에 흙을 채워 메워 버렸습니다. 순은 땅굴을 파고 나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순은 조금도 그들을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기색이 없이 여전히 부친을 공경하고 동생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의 효행은 마침내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순이 厉山에서 농사질을 하는데 코끼리가 나와 밭을 갈아 주었으며 새들이 날아와 기음을 매 주었습니다. 尧제왕은 순이 매우 효성스럽고 政事를 처리하는 재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두딸 娥皇과 女英을 그에게 시집 보냈으며 다년간의 관찰과 고험을 거쳐 마침내 순을 자기의 계승자로 선정하였습니다. 순이 천자가 된후에도 여전히 부친을 공경스러게 대했으며 이복 동생을 제후로 봉해 주었습니다.    

 
02 (亲尝汤药) 탕약을 친히 맛보다
한문제 刘恒은 한고조 류방의 세째 아들로서 고후8년(前180)에 황제로 되였습니다. 그는 인자하고 효성스럽기로 천하에 소문이 높았으며 자기의 모친 薄太后를 섬기면서 종래로 태만한적 없었습니다. 모친이 병석에 누워 삼년동안 그는 한번도 시름놓고 자 본적이 없었으며 모친이 복용할 탕약을 번마다 친히 맛본후에야 시름놓고 마이게 하였습니다. 그가 재위하여 24년 동안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례의를 흥기시켰으며 농업발전을 추진하여 서한사회가 온정되고 인구가 왕성하게 하였으며 경제가 회복되고 발전하여 그와 한경제의 통치시기를 가리켜 文景之治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03 (百里负米) 백리밖에서 쌀을 메고 간다
仲由의 자는 子路 혹은 季路라고 하였는데 춘추시기의 로나라 사람으로서 공자의 자랑할만한 제자였으며 성격이 곧고 용감하였으며 부모에게 아주 효순하였습니다. 어렸을때 가세가 빈궁하여 항상 자기로 산나물을 캐여 먹을것을 만들면서도 백리밖에서 쌀을 메고 가서 부모를 공대하였습니다. 부모가 사망한후 그는 촉나라에 가서 큰 벼슬을 하게 되였는데 따르는 차량이 백대가 되였으며 창고에는 량식이 만석이나 되였습니다. 두터운 비단자리를 깔고 앉아 풍성한 연석을 먹으면서도 그는 항상 부모를 그리워 하였으며 “내가 오늘 산나물이 먹고 싶고 부모에게 쌀을 메여 가고 싶지만 다시는 기회가 없게 되였구나!” 하고 개탄하였습니다. 공자는 “너는 부모한테 그야말로 생전에는 효성을 다하였고 사후에는 그리움을 다 하는구나!” (《孔子家语·致思》) 하고 찬양하였습니다.


04 (芦衣) 갈꽃 옷을 입고도 계모한테 효순한다
闵损의 자는 子骞이요 춘추 로나라 사람이였는데 공자의 제자로서 공가문중에서 그의 덕행은 안연과 마찬가지로 평가되였습니다. 공자는 “민자건은 정말 효성이 지극하구나!”(《论语·先进》) 하고 찬양한적 있습니다. 민순은 어렸을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밑에서 자라게 되였는데 계모한테서 또 두 이복 동생이 생겼습니다. 계모는 항상 그를 학대하였는데 겨울이면 두 동생에게는 면화를 넣고 지은 두터운 솜옷을 입히고 그에게는 갈꽃을 넣고 지운 엷은 옷을 입혔습니다. 하루는 부친이 길을 떠나게 되였는데 견마 잡던 민순이는 너무 추워 오돌오돌 떨다가 그만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친은 민순이를 질책하며 채찍으로 때리자 옷이 째지며 갈꽃이 사방에 날렸습니다. 그제야 자기 아들이 학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부친은 후처를 쫓아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민순이는 부친앞에 엎드려 빌면서 계모를 용서해 줄것을 사정하였습니다: “모친을 남기여 내 한사람만 추위를 참으면 되지만 모친을 쫓아내면 세 아이가 추위에 떨게 되나이다.”  부친은 민순의 말을 듣고 감동되여 후처를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계모도 민순의 말을 듣고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으며 그후부터는 민순이를 자기 친자식과 똑 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05 (身葬父) 자기를 팔아서 부친의 장례 지낸다
董永은 동한시기의 千乘(今山东高青县北)사람으로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병란을 피하여 부친과 함께 安陆(今属湖北)에 이사하여 살게 되였습니다. 그후 부친이 사망하자 동영은 자기를 한 부자집에 노예로 팔아 장례비용을 해결하였습니다. 일하러 가는 길에 홰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녀인을 만나게 되였는데 자기는 어디로 갈곳 없다고 하기에 둘은 부부를 맺었습니다. 그 녀인은 한달 사이에 삼백필의 비단을 짜서 빚을 물고 동영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홰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 녀인은 동영에게 자기는 옥황상제의 딸로서 명을 받들어 동영을 구하려 내려 왔었다고 말하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후부터 그 홰나무 그늘 아래를 孝感이라고 이름하게 되였습니다.

 
06 (行佣供母) 머슴살이 하여 어머니를 섬긴다
江革은 동한때의 제나라 临淄사람으로서 어리서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한테 효성이 극진하였습니다. 전란중에서 강혁은 어머니를 업고 피난을 다니면서 몇번 도적떼들을 만나 죽을번 하였는데 그때마다 강혁은 울면서 “내가 죽는건 큰일 아니지만 년로한 어머니를 돌볼 사람 없나이다.” 하고 근심하기에 도적들도 차마 그를 죽이지 못 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강소의 下邳에 정착하여 살면서 부자집 머슴살이 하여 어머니를 섬겼는데 자기는 째지게 가난하면서도 어머니의 생활만은 불편함이 없게 보장하여 드렸습니다. 明帝때에 그는 孝廉으로 천거 되였고 章帝때에는 贤良方正으로 천거되여 五官中郎将의 벼슬까지 지내게 되였습니다.

     
07 (怀遗亲) 귤울 품에 감추어 어머님께 갖다 드린다
陆绩은 삼국시기의 오나라의 吴县华亭(今上海市松江)의 사람으로서 여섯살때 하루는 부친을 따라 구강에 가서 袁术을 만나보게 되였습니다. 원술은 귤로써 그들을 초대하였는데 륙적은 귤 두개를 가만히 품속에 감추었습니다. 돌아가려 하는데 륙적의 품속에서 귤 두개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원술은 웃으며 “우리집에 손님으로 왔다가 가면서 주인의 귤을 훔쳐 가는구나.” 하고 말하자 륙적은 “어머니가 귤을 몹시 즐겨하시기에 가져다가 어머님께 맛 보이려 했소이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원술은 륙적이 어린 나이게 벌써 어머니에게 효성할줄 아는것이 아주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륙적이 성장한후 학문이 연박하고 아는것이 많았으며 천문과 력법, 산술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는 《浑天图》를 직접 그렸으며 《易经》에 주해를 달고 《太玄经注》를 편찬하였습니다.
 

08
(埋儿奉母) 자기 아이를 묻어 버리고 어머니를 봉양한다
郭巨는 晋나라때의 隆虑(今河南林县)사람으로서 원래는 가세가 비교적 넉넉한 형편이였습니다. 부친이 사망한후 그는 재산을 두몫으로 나누어 두 동생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작은집 한채만 가지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였는데 효성이 지극 하였습니다. 그후 가세가 점점 어리워 지면서 안해가 아들 하나 낳게 되였습니다. 곽거는 이 아이를 키우노라면 필연코 어머니에게 등한해 질것이 근심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해와 상의하고 “아들은 낳으면 다시 있을수 있지만 어머님은 죽으면 다시 있을수 없으니 이 아이를 묻어 버리고 량식을 절약하여 어머님을 잘 공대합시다.” 하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지하 두자 깊이 되는 곳에서 불연듯 황금 항아리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하늘이 곽거에게 주는 것이니 관가에서 가져갈수 없고 민간에서 빼앗을수 없다.” 하는 글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황금을 얻은후 돌아와 어머님을 더욱 극진히 모실수 있었으며 아이도 더욱 건실하게 키울수 있었습니다.

     
09 (乳姑不怠) 게으름 없는 젖 며느리
崔山南은 당나라때의 博陵(今属河北)사람으로서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山南西道节度使 벼슬을 지냈적 있다하여 사람들은 그를 “山南” 이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당년에 최산남의 증조모 长孙夫人은 년세가 이미 많아 이빨이 모두 빠져 버렸습니다. 조모 唐夫人은 효성이 매우 지극한 분이였는데 매일 목욕하고 후당에 가서 자기의 젖으로 시어머님을 공대하였습니다. 이렇게 몇해를 지내니 장손부인은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도 신체가 여전히 건강하였습니다. 장손부인이 병이나서 임종하게 되니 온집 식구들을 모여놓고 “나는 며느리의 은덕을 보답할 길이 없는데 증손자와 증손며느리들은 그가 나에게 효성했던것처럼 그에게 효성하기를 부탁한다.” 하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후 최산남은 큰 벼슬을 하게 되였는데 과연 장손부인의 유언을 받들고 조모 당부인을 극진히 공대 하였습니다.


10 (卧冰求鲤) 얼음우에 엎드려 잉어를 구한다
王祥은 琅琊사람으로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가 들어 왔는데 계모는 여러번 부친의 앞에서 왕상의 나쁜말을 하여 부자 관계를 리간질 하였습니다. 부모가 모두 병에 걸리게 되니 왕상은 한번도 편안히 자지 못하며 극진히 시중들었습니다. 계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왕상은 엄동설한에 옷가슴을 헤치고 얼음우에 엎드려 얼음을 녹였습니다. 불연듯 얼음이 녹으면서 잉어 두마리가 튀여 나왔습나다. 계모는 그 잉어를 먹고 과연 병이 낳았습니다. 왕상은 20여년 은거한후 후에 温县의 县令으로부터 大司农、司空、太尉등의 벼슬을 하였습니다.
 
   
11 (恣蚊) 모기가 자기피를 빨아 먹게 한다
吴猛은 晋나라때의 濮阳사람으로서 여덟살때부터 부모에게 효성할줄 알았습니다. 가정이 빈궁하여 모기장도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면 모기들이 성화부려 부친은 편히 주무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맹은 저녁이면 맨몸으로 부친의 침대옆에 앉아서 모기들을 자기한테 유인하여 자기피를 실컷 빨아 먹게 하여 부친을 편히 쉴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2 (
哭竹生) 대나무를 짚고 울어 죽순이 돋아나게 한다
孟宗은 三国시기의 江夏사람으로서 어려서 부친을 여의였고 어머님도 로쇠하고 병이 많았는데 의사는 신선한 죽순으로 탕을 끓여 대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는 바로 엄동이라 신선한 죽순이 있을수 없었으니 맹종은 혼자서 대나무숲에 가서 대나무를 짚고 슬피 울었습니다. 불연듯 땅이 갈라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많은 죽순들이 돋아 났습니다. 맹종은 너무 기뻐 그 죽순으로 탕을 끓여 어머님께 대접하니 어머님의 병은 가신듯 낳았습니다. 그후 맹종의 벼슬은 司空에 이르렀습니다.
 
   
13 (尝粪忧) 분변을 맛보며 부친의 병을 근심한다
庾黔娄는 南齐때의 高士로서 孱陵의 县令으로 부임된적 있습니다. 부임되여 열흘도 안되였는데 불연듯 가슴이 떨리고 식은땀이 돋으니 집에서 큰 일이 났다고 예감하고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집에 와서야 부친이 이미 중병에 걸려 이틀이 되였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의사는 병세의 길흉을 알려면 오직 병자의 분변의 맛을 보아야 하는데 쓴맛이면 좋아질 조짐이라고 하였습니다. 黔娄는 서슴없이 부친의 분변을 받아 맛을 보니 단맛이라 몹시 근심하였습니다. 그는 밤에 북두성을 향하여 무릎 꿇고 빌면서 부친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며칠후 부친은 사망하니 黔娄는 부친을 안장하고 삼년동안 守孝를 지냈습니다.
 

14 (
弃官寻母)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 떠난다
朱寿昌은 宋나라때의 天长사람으로서 칠세때에 생모 류씨가 부친의 정실부인의 질투를 받아 재가해 갔는데 50년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었습니다. 神宗때에 주수창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였는데 혈서로 《金刚经》을 베끼면서 사방에 수소문 하여 섬서의 어머님의 행처를 알아 냈습니다. 그는 곧 벼슬을 버리고 섬서로 어머님 찾아 떠나면서 어머님 찾기전에는 절때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끝내는 陕州에서 어머님와 두 동생을 찾아내고 기쁘게 상봉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 올때에는 어머님은 이미 칠십 고령을 넘었었습니다.

현성원 번역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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