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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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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33  추천:0  2020-02-05
빠르게 녹는 남극 ‘최후의 날 빙하’… 따뜻한 물 발견 충격 2020.02.04.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스웨이츠 빙하의 모습.(사진=NASA/OIB/제러미 하벡)남극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녹는 것으로 알려져 ‘최후의 날 빙하’로도 불리는 서남극의 스웨이츠 빙하 아래에서 따뜻한 물이 발견됐다고 과학자들이 밝혔다. 이는 이 빙하가 점점 더 빨리 녹거나 침식하는 원인임을 지적함과 동시에 세계 해수면 상승에 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발견이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미국 뉴욕대(NYU) 환경유체역학연구소장 겸 NYU 아부다비 지구해수면변화센터장인 데이비드 홀랜드 박사는 “이곳의 따뜻한 물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지구에서 발생할 끔찍한 변화에 대한 경고로 작용해야 할 것”이라면서 “만일 이 물이 빙하가 녹은 것이라면 이 결과 탓에 해수면 상승은 더 많은 지역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빙하가 어는 점보다 2℃ 이상 높은 것으로 기록된 따뜻한 물은 스웨이츠 빙하 밑으로 흐른다. 이는 빙하의 중요 구역인 지반에서 발견됐다. 여기서 지반은 주변 영토를 5만㎢ 이상 덮은 빙하 얼음인 빙상과 남극대륙과 이어져 바다에 떠있는 두께 300~900m의 얼음인 빙붕 가운데 있는 구역을 말한다. 문제는 스웨이츠 빙하가 소실되는 것만으로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빙하의 면적은 19만2000㎢로, 한반도(22만㎢)와 비슷한데 이미 앞바다인 아문센해로 흘러들어간 얼음의 양은 30년간 두 배로 급증, 이는 세계 해수면 상승 영향의 약 4%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부 학자는 다가올 미래의 세계 해수면 상승에 있어 스웨이츠 빙하를 가장 녹기 쉬워 중요한 것으로 본다. 이 빙하가 갑자기 붕괴하면 해수면은 약 65㎝ 상승하지만, 이 빙하에 의해 지지가 되는 주변 빙하들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지면 해수면을 추가로 2.44m 높여 전 세계 연안 지대를 위협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지난 10년간 이 빙하가 녹거나 침식하는 빙하 후퇴 현상을 관찰해왔지만, 이전까지는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홀랜드 박사는 “스웨이츠 지반의 한 구역을 따라 방금 우리가 따뜻한 물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이 빙하가 해수면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막을 수 없는 빙하 후퇴를 겪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NYU 연구팀이 시추 구역을 파내는 모습.(사진=데이비드 홀랜드)오로라 바진스키 NYU 연구원이 스웨이츠 빙하 시추공으로 내려보낼 난류 측정기를 들고 가는 모습.(사진=데이비드 홀랜드)지난 1월 초 이들 과학자는 빙하 밑을 조사하기 위해 깊이 600m, 폭 35㎝의 구멍을 뚫어 감지 장치를 설치해 물이 흐르는지를 측정했다. 이 장치는 이른바 난류로 부르는 물의 흐름뿐만 아니라 수온 등 다른 특성도 측정한다. 그 결과, 빙하에서 녹아 나온 것으로 보이는 신선한 융빙수가 염도 높은 해수와 혼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웨이츠 빙하의 해저 활동을 시추공을 통해 접근해 측정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구멍은 지난달 8일부터 9일에 걸쳐 만들어졌고, 그다음 날인 10일부터 11일까지 측정하는 데 쓰였다. 이에 대해 난류를 측정한 NYU의 오로라 바진스키 연구원은 빙하 지반에서 관측한 결과, 따뜻한 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난류의 수준과 그에 따른 빙붕의 융해율도 관찰됐다고 말했다. 영국남극조사단(BAS)의 또다른 연구원인 키스 니콜스 박사는 “서남극 빙상의 이 위태로운 지반에서 난류의 소산(흩어져 사라짐)을 측정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라서 이번 연구 결과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7579    텁썩부리 죽림이라는 바보애가 누구더라??? 댓글:  조회:1581  추천:0  2020-02-04
                     "시지기- 죽림"은 누구???... 본관: 김해 김씨 삼현파 익조패(반석패). 조부: 김유익  조모: 해주 최씨 부친: 김해 김씨 김홍영(1924년생)  모친: 파평 윤씨 윤금자(철산, 1926년생) 형제들: 누님- 김후남          맏 형님- 김갑종          둘째 형님- 김명종 성명: 김승종(金勝鐘) 아호: 죽림(竹林) 적관: 중국 길림성 연변 화룡시 로과향 죽림촌. 1984년부터 1987년까지, 화룡시 복동진 소학교 교원 근무. 1987년부터 2005년 2월까지, 화룡시농촌신용련합사 근무.   1,-   1979년도(고중시절), 문학써클 조직, "새싹" 등사본 작문지 발간(증명인; 시인 최룡관, 연변대학 일어학부 교수 김학천 고중동창생, 동화작가 고 허충남). 1984년도(교원시절), 동북3성 "새별"문학사 설립, 초창 맨버 활동.(증명인; 국제방송국 기자 김호림, 길림신문사 기자 김태국). 1987년도~1991도(금융시절), 화룡시 투도, 룡수평, 동성, 룡문 등지 중심 "평강벌문우회" 설립, 조직 활동, 등사본 "평강벌"문학지 발행.(증명인; 소설가 김영자, 시인 고 현규동, 소설가 고 차룡순, 소설가 고 박은, 소설가 고 하태렬).  1991년도~1994년도(금융시절), 화룡시 덕화지역 남평 중심 "두만강문우회" (증명인; 시인 최룡관, 시인 고 신창수, 시인 김영건) 설립, 조직 활동. 화룡시문화관 조직, 주관 "천리봉'문학사" 우수회원.(증명인; 시인 고 현규동,시인 고 김문회, 시인 리근영, 소설가 고 하태렬, 동시인 한동해).  "연변문학", "장백산" 잡지 조직 "개간지"부간, "장백산"부간 문학강습. 연변작가협회 문학원 제2기 문학강습반 수료(증명인; 연변대학 박사 김관웅, 시인, 랑송가 송미자, 문화인 디자인너, 작가 김춘택). "연변문학" 잡지 발행사업 화룡지역 일조(증명인; 시인 김응룡, 소설가 홍천룡, 소설가 류흥식).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별나라" 잡지 발행사업 일조(증명인; 편집, 주필, 시인 김현순, 소설가 량영철).   1998년도부터 화룡시청년시회 회장 력임(증명인; 료녕조선문보사 부주필, 시인 김룡호, 강소성 무석과학기술대학 한국어과 교수 시인 황춘옥). 1988년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1998년 6월 26일, 연변작가협회 회원,  2007년도, 연변작가협회 제8기리사단 리사(시가창작위원회).  ****년부터 ****년까지, 화룡시작가협회 주석 력임(증명인; 전임 화룡시문화예술련합회 주석 류재학, 소설가 김영자, 현임 화룡작가협회 주석, 작가 안수복). 시작가협회 주석 담임 시, 후비작가력량 중시(례켠대, 현재 문단 활약 작가들- 량영철, 구호준, 안수복, 김호식, 전광훈 등등). 2002년 2월호, "문학과예술" 잡지(연변사화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김승종시작품세미나특집" 등재.  "김승종시의 모지름과 해체작업 그리고 가치(최삼룡)", 초사실적인 추상예술의 가능성(한춘)", "우리 시단에 던진 새로운 충격(최룡관)", "'시음병자'와 그의 시적 그라프(김룡운)", "'류행따르기'와 '전통지키기'(김관웅)". 화룡시문화예술계련합회 주관지 "청산리"잡지(증명인; 전임 주석 류재학 촬영가, 소설가 김영자, 시인 허옥진) 발행, 시편집 담당. "청산리"잡지 제호 건의,제의, 통과, 사용. 전주 문화예술계 대호평. "동북아신문" 주관 "재한동포문인협회(시분과 부장 담당)" 설립, 초창 맨버,  "동포문학" 동인지 제호 건의, 제의, 현재 "동포문학" 제호 사용 중(증명인; "동북아신문" 대표, 소설가 리동렬, 시인 김추월, 소설가 강호원).   2011년도, "두동네 회색 카니발" 동인 시집 출간 시 한화 300만(인민페 2만) 출판경비 사비지원(증명인; 시인 최룡관, 시인 고 한춘). 연변작가협회 시분과 주관, 본시집출판기념회 및 시세미나 조직, 진행(증명인; 시인 김영건, 시인 림금산).  2011년도~2017년도, 대한민국 경상북도 도청(성정부 해당), 경상북도 안동시 시청(시정부 해당), 안동간고등어주식회사, 안동리륙사문학관, 안동병원 등등 기관, 단체 근 3년반 설복, 설득, 취득, 유치 성공. 연변작가협회(증명인; 전 주석 소설가 최국철, 전 련락부 주임 소설가 우광훈, 작협 재무과), 연변대학(증명인; 박사, 평론가 김호웅, 박사 평론가 우상렬) 주체, 주관. "중국조선족리육사문학제" 만 7년동안(사드문제 후 단절) 해마다 유치활동경비 한화 천만씩, 그후 천이백만씩 입금(재무관계 일절 불관여, 유치비 일절 사절), 유치, 조직, 진행(증명인; 한국 경상북도 안동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 이육사 무남독녀 이옥비 녀사).    평백성으로서 량심이 있고 뼈와 주대가 있는 문학인으로서, 우리 작가후비력량 대오가 끊힌다는 량심적인 각도에서 적수공권으로 신임 하나로 당당하게 우리 당정기관 산하인 연변작가협회에 그것도 "연변"이란 이름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타이틀을 붙혀서 전 중국 조선족대학생(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어로 글짓기를 하는 타민족 포함)들을 아우러 문학축제를 유치하여 진행하끔 한 유일무일한 장본인.  처음부터 한시도 드팀없이 유치비 사절했으며, 당정기관 관방에서 주체, 주관하는 연변작가협회와 연변대학을 선호했음.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안동병원 제휴. 생활난 병사경력 작가 무료건강검진 유치. 첫회 안도현 김일양 시인 출국, 무료검진 진행 성공.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예미정" 内 "시지기 죽림" 诗轩房 있음. 중국 연변왕달무역회사와 한국 안동간고등어회사 제휴, 룡정왕달간고등어회사 유치(증명인; 한국 "매일신문" 기자 권동순 북부 본부장, "조선일보" 기자 권광순, 법인대표 김봉운 총경리), 공로상 수상. 2015년부터 "조선족네트워그(조글로)"에서 "시지기-죽림" 대형 블로그 설치, 문학, 문화, 예술 등등 창달(현재 2020년 2월초까지 7천건 곱셈하기 3 = 2만여건 게재, 증명인; 김삼 대표, 문야 기자).   2017년도후 현재, 룡정윤동주연구회(초창 설립 맨버 중 일원, 증명인; 소설가 김혁, 박사, 평론가 리광일) 리사, "용두레"독서회 리사(증명인; 소설가 김혁, 시인 심명주) 맹활약. 2013년 8월, 중국소수민족문학관(내몽고사범대학 내)에 고서적- 의서 한질 기증(증명인; 내몽고사범대 박사도사, 평론가, 몽고족 작가 고 터싸음바야얼 전 관장, 몽고족 임언 현임 관장). 2019년도, 도서 6백여권 룡정시도서관 무료증정,  2019년도, 2천원 가치 사물놀이 징 두매 단군문학회(증명인; 신봉철 회장, 엄철인 사무국장) 무료증정. 2013년 12월, 서장자치구, 내몽고자치구, 신강위글족자치구, 연변림업국 등 과학기술 조림처에 시험용 은행나무 종자를 각각 보내줌(증명인; 동창생 김학천). 2013년 1월, 7월, 서장자치구 인민정부 인구및계획생육위원회 복리처에 구호물품 세차례 보내줌(증명인; 복리처 처장 국길, 동창생 손하준).  40여년동안 문학생애에서 애지중지 마련했던 "보물"들인 도서(큰마대로 열다섯마대)와 우표 한상자, 문학상장꾸레미 등을 몰상식한 인간들의 무지로 인해 페기처분 되여 "술값"으로 전락된 통탄 할 "문단유사"가 발생했음...!!!(증명인; 원 화룡시농업은행 부행장 최태산, 원 화룡시인민은행 발행과 과장 김후남).   2,-   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와 일회용 삶", (2001년도,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주최            본 시집 출간기념회 및 시연구세미나 개최).  시집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2005년도, 화룡시문련, 화룡시작가협회 주최            본 시집 출간기념회 및 시연구세미나 개최).  동인 시집 "두 동네 은회색카니발(공편저)",  (2011년도,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주최         본 동인시집 출간기념회 및 시연구세미나 개최). 시론저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2013년도 출판). 시집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2016년도,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수상시집, 중국 연변작가협회 주최, 대한민국 옥청군 군청, 옥청문화원 후원, 연변대학 예술홀 수상회 개최). 연변음악가협회 아동가요 우수상, 연변주문련 "선경대컵"가곡창작 은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시분과 "두만강여울소리" 시우수상,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2013년도),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2013년도),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2016년도), "중국조선족대학생리육사문학제" 유치 연변작가협회 공로상(2016년도), 대한민국 세계계관시인문학회 시본상(1998년도) 수상,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리육사문학관 공로상(2016년도) 수상, 중공 연변조선족자치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주최 제9회 "진달래문예상(2020년도 9월 29일)" (시집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수상. 한국 "호미곳 조선족시문학상" 수상. "송화강" 시문학상 수상.   3,-   자유기고인, 조선민족작가로서 화룡시작가협회 산하와 및 기타 지역의 문학사업촉진발전에 40여년래 큰 공헌, "화룡 문화의 별" 수상.   4,-   版本图书馆CIP数据核字 认定 시집, 론저;- 2001년도, 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와 일회용 삶(17만자)" (ISBN 7-80648-679-8/I.198), CIP (2001) 第074395字,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05년도, 시집 "보리 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15만자)" (ISBN 89-5800-031-7.03810), 대한민국 도서출판 신세림 출판, 등록번호: 제2-1298호. 2013년도, 시론저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30만자)"(ISBN 97-8962-883-4. 46623>), 홍콩 파랑새출판주식회사 출판, (港) 第1203-NO28字.  2016년도,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16만자)" (ISBN 978-7-5449-4841-8), CIP (2016) 第208072字,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08년도부터 현재까지, 연변교육출판사(ISBN 2008 978-7-5437-6996-0) (民课)출판, 중국 조선족고급중학교교과서 조선어문(고중 필수 3) 제4단원: 자연과 인류, 제25과 "무루의 극" 생태시 련속 게재됨. 현재 문학발표 77여만자수. 중국 중앙도서관, 중국소수민족문학관, 청화대학도서관, 북경대학도서관, 중앙민족대학도서관, 북경사범대학도서관, 상해도서관, 천진도서관, 장춘 단군문학관, 연변도서관, 연변대학도서관,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시집박물관, 상술 출간 시집, 론저 상재됨. ========================================================================== 获奖情况及重要影响 : 1987年7月获延边音乐家协会儿童歌谣优秀奖。 2004年8月获延边州艺术界联合会歌曲原创作品银奖。 2008年10月获延边作家协会诗歌创作委员会诗优秀奖。 2015年2月获延边作家协会网络诗文学奖。 2015年3月获“延边日报”海兰江文学奖。 因2013年度同人合诗集''两个村子的故事”出版时,本人筹私经费志援贰万元整人民币。 因2011年至2017年,连续7年促成延边作家协会和延边大学联合举办“中国朝鲜族大学生李陆史文学节”,于2016年12月获功劳奖。 2016年9月获延边作家协会第20届郑芝溶文学奖。 2020年9月延邊州政府"金達來文藝賞". 本人已发表诗歌77余万字,其中,已结集出版4本(其中2本诗集出版国外)诗集。 诗歌作品收录在中国朝鲜族高级中学校“朝鲜语文”自习读本教科书 。 诗集, 论著藏于中国中央图书馆、上海图书馆、清华大学图书馆、 中央民族大学图书馆。  
757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작가보호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17  추천:0  2020-02-04
  백기 든 문학사상사… 이상문학상 사태 사과  2020.02.04.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상처 받은 문인·독자께 사의" 올해 수상자 내지 않기로 저작권 3년 양도 조항 폐지 표제작 금지 조항도 없애기로 작가들 반발 여전…불씨 남아 소설가 이상(李箱·1910~1937) 정신을 계승하고, 동시대 최고 소설가를 격려하고자 1977년 제정돼 올해로 44회째를 맞은 이상문학상 수상자가 올해 호명되지 않게 됐다. 저작권 3년 양도 조항과 표제작 사용 금지 규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촉발된 이후 이상문학상 논란을 둘러싼 문인과 독자의 사과 요구, 문학사상사 보이콧 해시태그(#) 확산, 기수상 작가인 윤이형 소설가 절필 선언, 독립서점과 일반 독자의 문학사상사 불매운동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문학사상사가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동시에 수상자를 내지 않기로 결정해서다. 이상문학상을 운영하는 문학사상사는 4일 '제44회 이상문학상 관련 물의에 대한 문학사상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상문학상 진행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와 그와 관련해 벌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깊은 책임을 느낀다"는 문구로 시작되는 임지현 문학사상사 대표 명의 입장문에는 "이번 사태로 상처와 실망을 드린 모든 분께 먼저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권위를 되찾고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향한 진정 어린 질타와 충고를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입장문에는 기수상 작가와 독자에게 전하는 사과, 불합리한 조항 개정·삭제, 대책위 조직을 포함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문구가 실렸다.  눈에 띄는 변화는 대상 수상작 저작권을 문학사상사가 3년간 가져가던 조항을 폐지하고 '출판권'만 1년간 설정하는 형식으로 변경된다는 점이다. 논란을 촉발한 이상문학상 첫 번째 독소조항은 "수상작 소유권을 상을 운영하는 문학사상사가 3년간 가져간다"는 내용의 양도 강요 문구였다. 산고(産苦)의 시간을 거치며 탄생한 작품을 출판사가 독점한다는 사실은 문인과 독자 양측에서 비난을 불렀다. 향후 출판권만 가져가면 문학사상사는 수상작품집을 출간할 수 있는 권한만 가져간다. 임 대표는 "수상자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계약에 반영할 수 있도록 숙의와 논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며 "출판권만 1년 설정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 최소한의, 문학상 운영을 감안한 부득이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독소조항으로 거론됐던 표제작 규제도 수상 1년 후에는 전면 해제된다. 대상 수상작 제목을 작가 개인 소설집 표지 제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던 조항을 폐지한다는 뜻이다. "수상작 저작권과 관련한 상세 조항을 시대 흐름과 문학 독자 염원, 또 작가 뜻을 존중해 최대한 수정·보완하도록 하겠다"고 임 대표는 밝혔다. 우수상 수상작에는 저작권 양도와 표제작 규제가 적용되지 않을 전망이다.  관심을 끌었던 이상문학상 올해 수상자는 발표되지 않는다. 임 대표는 "오랜 고민 끝에 올해 이상문학상은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9년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선보인 작가와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손꼽아 기다리셨을 독자 여러분께 매우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제44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가는 현재 공개되지 않았으나 막판까지 발표 여부를 두고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문학상 논란이 문학사상사의 이번 입장문으로 일단락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문학사상사의 사과와 해명을 두고 불씨가 여전해서다. 사태 초기 단계에서 문학사상사 측이 "직원 실수"라고 밝힌 부분에 대해 최은영 소설가는 통화에서 "이번 사태에 '직원 실수'가 있었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이상문학상 운영위원,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이사, 대표와 같은 사람이 끝까지 '직원 실수'를 운운하며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윤이형 작가도 "작가가 작품집 수록을 허락하는 형태가 되어야지 '작품집에서 빼면 상을 주겠다. 받겠느냐, 말겠느냐' 하는 형태는 말이 안 된다. 예전에 받겠다고 한 사람만 준 건지에 대한 해명과 사과도 빠졌다"고 비판했다. 김금희 소설가도 "우수상 수상자의 출판권에 대한 언급이 '의견수렴'으로 뭉뚱그려지는 입장문은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수상자, 수상후보, 심사대상 어디에도 제 이름이 거론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제 바람이 존중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고 일침을 놨다. 올해 대상 수상자에게 이미 대상 수상이 고지된 상태에서 출판사 귀책사유로 발표하지 않는 점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사상사 측의 표제작 사용 제한 규정으로 인해 소설집 출간 당시 다른 제목으로 작품집을 내야 했던 작가들의 상처도 깊다.  [김유태 기자] =================================/// 결국 올해는 접은 '이상문학상'… 구겨진 44년 권위  2020.02.04.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44년 동안 이어온 이상 문학상이 올해는 수상자 없이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상을 받으면 작가의 저작권을 달라고 했던 출판사 문학사상사는 한 달 만에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비판은 여전합니다. 강나현 기자입니다. [기자] 이청준·최인호·김훈·한강. 44년 동안 이상문학상을 거쳐간 소설가들입니다. 1977년 문인 이상의 이름을 내세워 만든 문학상, 한국 문학의 오늘이 궁금한 독자들은 매년 이맘때 나오는 수상작품집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만날 수 없습니다. 수상자 명단에 있던 작가가 부당한 계약조건을 알리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작가와 독자들이 주관사 문학사상사를 아예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고, 최근엔 지난해 대상을 받았던 작가마저 더이상 작품을 쓰지 않겠다며 동참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서야 문학사상사는 입장문을 내걸었습니다. 대상을 받으면, 출판사가 3년 동안 저작권을 갖기로 돼 있던 조건을 없애고 1년 동안 해당 작품집을 출판할 권리만 갖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나 입장을 내놓은 과정도 매끄럽지 못 했습니다. 처음엔 피해를 본 작가들에게 사과했다가 나중엔 이 부분을 빼면서 또 다른 비판을 떠안았습니다. [김원중/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사무국장 : 꼬리 자르기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직원의 실수, 관행이었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맨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김금희 작가는 이번 사과로 단번에 아물 상처는 아니라며, 출판계의 불합리한 관행들이 바뀌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강나현 기자  [영상취재: 이승창 / 영상편집: 김지훈] ===============================================================/// [단독] 이어령 “이상문학상은 작가, 출판사, 독자가 함께 만든 것 … 공멸 안 된다” 2020.02.04.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저작권 한국일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김금희, 최은영 등 작가들의 수상 거부 선언으로 시작돼 작가 수십 명이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 해시태그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상문학상 파문에 대해 문단 원로로 이상문학상 제정에 관여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 전 장관은 3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상문학상은 작가, 출판사, 독자 셋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만들어온 상”이라며 “상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저작권법에 따라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은 1977년 문학사상 주간 시절 소설가 이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상문학상을 제정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1985년 주간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이상문학상을 이끌어 나갔고 김승옥, 이청준, 박완서, 최인호 같은 굵직한 작가들을 수상자로 배출해냈다.  저작권 논란에 대해 이 전 장관은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처음 상을 만들었을 당시 저작권법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고,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희박했고, 시장도 좁아 작가와 주최 양측의 호의 하에 묵계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러나 이후 저작권법이 도입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상에서 탈락한 작품들에게 우수상을 주는 것에 대해서도 “대상 이외 후보작을 우수상 명목으로 공개했던 건 단순히 상을 주고 받는 것을 뛰어넘어 그 해에 가장 읽을만한 소설 여러 편을 독자에게 소개해보자는 취지였다”며 “허물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상인만큼, 법적으로 가릴 것은 가리되 누구도 공멸하지 않는 방향에서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9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상문학상 제정에 관여한 원로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상문학상 파문은 계속 번져가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등 작가 관련 단체들도 잇달아 성명을 내고 문학사상측의 사과와 빠른 사태 수습을 촉구했다. 작가회의는 이날 낸 성명에서 “문학사상사의 이상문학상 운용과 관련한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작가들의 목숨과도 같은 저작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 행위이며 나아가 작가의 인격과 명예에 대한 모욕”이라고 밝혔다. 앞서 2일 성명을 낸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도 “이번 문제가 된 이상문학상의 저작권 양도 요구 조항 등은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상조차도 작가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며 “‘출판권’이 아닌 ‘저작권’을 요구하며 실질적인 매절을 강요하는 업계의 불공정한 저작권 양도 관행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상문학상’ 파문은 지난달 소설가 김금희, 최은영 등이 수상작의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이 부당하다며 상을 거부하면서 일어났다.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인 윤이형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고 황정은, 권여선 등 수십 명의 작가들이 문학사상사 보이콧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 수상작 발표를 미룬 문학사상사는 파문이 불거진 뒤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소범 기자
7577    [시공부 101] - 10... 댓글:  조회:3214  추천:0  2020-02-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가 무슨 뜻인가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입에 착착 달라붙는 후렴구, 여기 모여라! 유랑민의 비애, 「청산별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과 공동체 저는 우리 고전 시가 중 「청산별곡」을 좋아해요. 후렴구를 입에 담고 웅얼거리면 뭔가 옛사람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기분이에요. 입에 착착 달라붙는 후렴구, 여기 모여라! 고려 가요는 노래마다 각각의 후렴구가 따로 있습니다. 「청산별곡」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이지만, 「서경별곡」은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이고 「가시리」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입니다. 「동동」은 “아으 동동다리”, 「쌍화점」은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이지요. 이 말들은 아무런 뜻도 없지만 리듬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마도 현악기의 소리를 흉내낸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지요. 그럼 이참에 「청산별곡」 텍스트가 지닌 의미까지 한번 알아볼까요? 후렴구를 즐겨 부르려면, 나머지 부분도 알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지요? 유랑민의 비애, 「청산별곡」 「청산별곡」은 사회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떠돌이로서의 운명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전란 중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이거나, 무신란 때 쫓겨난 지식인이거나, 실연의 슬픔을 잊고 청산으로 도피하려는 사람이라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시적 화자는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유랑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1연)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우는구나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2연) 어디에 던지던 돌인가, 누구에게 맞히던 돌인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우는구나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5연) 가다가 배부른 독에 설진 강술을 빚는구나 조롱꽃 누룩이 매워 잡으니 내 어찌할까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8연) 「청산별곡」 중에서 전체 8연으로 되어 있는 고려 가요입니다. 주요 부분만 인용했는데 일단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라 얄라”가 인상적이지요. ‘ㄹ’, ‘ㅇ’을 반복해서 음악적인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1연에 등장하는 ‘청산’은 현실과 대비를 이루는 자연적인 공간입니다. 현실의 근심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인 것입니다. 2연에는 시적 화자의 처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울고 있는 새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슬픔이 더 크고 오래된 것임을 호소하고 있지요. 3연은 자신이 떠나온 현실에 대한 미련이 나타나 있고, 4연에는 밤이 되어도 오갈 데 없는 처지를 비관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5연의 내용은 화자의 처지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임을 말해 줍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울고 있다는 화자의 모습에서 전쟁이나 난리 같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고려 민중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하니 민중은 억울할 수밖에 없겠지요. 6연에는 공간이 뒤바뀌어 청산 대신 바다가 등장하는데 상징적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7연에는 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요. 8연은 화자가 독한 술을 빚는 곳을 지나치는 장면을 그립니다. ‘누룩이 맵다’는 말은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이며, 화자는 그 냄새에 못 이겨 결국 술로써 자신의 시름을 달래려 합니다. 술을 마시고 현실의 고통과 설움을 잊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청산별곡」은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려는 고려 민중의 아픔이 절실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막상 의미를 들여다보니 어떤가요? 혹시 후렴구가 내용에 비해 너무 가볍고 흥겨운 느낌이 들어 시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요? 그렇다면 한번 을 떠올려 보세요. 혹자는 이 후렴구에서 우리 민요 의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삶의 고달픔도 애달픈 가사도 구성진 목소리와 흥겨운 춤사위로 승화시키던 멋이 「청산별곡」에서도 느껴지지 않는지 말이지요. 현대 시에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작품이 있는데 고려 때에는 그런 작품이 없었나요? 고려 시대는 전란도 많았고 무신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치적인 혼란도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방관리들은 농민들을 탐욕스럽게 수탈했습니다. 고려 농민들은 이런 수탈을 노래로 표현하여 비판했지요. 그 대표적인 작품이 「사리화(沙里花)」입니다. 이 작품은 고려 때에 지어진 민요로 본래의 가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제현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창작된 민요이니 「상저가」처럼 고려 가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날아가느냐 /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 늙은 홀아비 홀로 농사지었는데 / 밭의 벼와 기장을 다 없애 놓다니” 작품에 등장하는 참새는 일 년 농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벼와 기장을 수탈해 가는 권력자, 혹은 탐관오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늙은 홀아비는 권력자에게 수탈당하며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힘없고 가난한 농민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이 시는 당시 권력자의 수탈과 횡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의 ‘사(沙)’가 ‘목이 쉬다’라는 의미를, ‘리(里)’가 ‘근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농부들이 목이 쉬도록 참새를 쫓고 속을 태워 얻은 곡식을 뜻한다고 전해집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가 무슨 뜻인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76    [시공부 101] - 9... 댓글:  조회:3148  추천:0  2020-02-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중세 시대, 우리나라의 유행가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임의 발목을 잡는 노래, 「정석가」 부모님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사모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에 대한 흥미 고등학교 국어Ⅱ 문학의 효용과 문학 활동 고려 가요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 불렀다고 하는데 그럼 요즘 사람들이 부르는 유행가와 비슷했던 것인가요? 고려 가요의 내용이 주로 어땠는지 알고 싶어요. 임의 발목을 잡는 노래, 「정석가」 고려 가요는 귀족의 노래가 아니라 평민의 노래였습니다. 신라 향가를 주로 화랑이라든가 승려가 지어 불렀던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그런 점에서 고려 가요는 현재 대중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 즉 유행가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를 보면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거나 사회현실을 풍자한 노래들이 있습니다. 또한 현실에서 느끼는 고단함이나 어려움을 토로한 노래도 있고 반면에 밝고 경쾌한 인생관을 담은 노래도 있습니다. 이처럼 대중가요를 살펴보면 대중이 느끼는 정서와 감정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지요. 고려 가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 가요에는 고려 시대 민중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편수는 역시 남녀 간의 애정담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삭삭기1) 세모래2) 벼랑에 나 삭삭기 세모래 벼랑에 나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난다면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난다면 유덕(遺德)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그 꽃을 바위 위에 접을 붙입니다 그 꽃이 세 묶음 피어나면 그 꽃이 세 묶음 피어나면 유덕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정석가」 중에서 이 작품은 고려 가요 중에서 임과 이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때 ‘임’은 간혹 ‘임금’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사랑하는 임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작품의 내용은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면 그때에 임과 이별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임과 이별이 불가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려 가요는 임과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습니다. 몇몇 고려 가요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먼저 「가시리」에는 겉으로는 임과의 이별에 체념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경별곡」은 대동강을 건너는 임에 대한 원망을 배를 내어 주는 뱃사공에 대한 원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동동」은 일 년 열두 달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려 낸 점이 특징적이지요. 이와 같이 고려 가요도 현대의 대중음악처럼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자주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부모님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사모곡」 여러분은 대중음악 중에서 뜻밖의 곡들이 사랑을 받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인순이의 라든가, 지오디의 등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도 그중 하나이지요. 이런 곡들처럼 고려 가요에도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모곡」입니다. 호미도 날이 있지마는 낫처럼 들 리가 없어요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마는 위 덩더둥셩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어요 아아, 임들이여!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어요 「사모곡」 아버지들이 「사모곡」을 보면 아쉬움이 크겠지만 이 작품은 어머니의 사랑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미와 낫에 비유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크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네요. 농기구에 아버지, 어머니를 비유한 것이 조금 어색할 수도 있지만 농경 사회에서는 가장 친근한 물건이었으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대해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이 외에 「상저가」라는 방아 찧는 노래에도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덜컹 방아를 찧어서 거친 밥이라도 지어 그 밥을 아버님 어머님께 먼저 드리고 남거든 먹겠다는 「상저가」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이 부모님을 각별히 공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지요. 자, 이제 고려 가요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겠지요. 비록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남녀의 사랑이라든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들을 살펴보니 고려 시대에나 현대에나 사람의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저가」, 방아 찧는 노래는 노동요라고 할 수 있나요? 고려 가요 「상저가」는 노동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아를 찧는 노동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부른 노래인 것이지요. 작품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듥기동 방아나 찧어 히얘 / 거친 밥이나 지어 히얘 / 아버님 어머님께 받잡고 히야해 / 남거시든 내 먹으리 / 히야해 히야해” 작품의 길이도 대단히 짧고 내용도 단순해서 민요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고려 가요도 민요가 발전해서 만들어진 노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중세 시대, 우리나라의 유행가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7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로거수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09  추천:0  2020-02-03
14년 만에 천연기념물 뽕나무 두 그루 됐다  2020.02.03.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경북 기념물 1호 상주 두곡리 300살 노거수 승격 지정  천연기념물 제559호로 지정된 상주 두곡리 뽕나무. 문화재청 제공 14년 만에 천연기념물 뽕나무가 두 그루로 늘었다. 300살인 경북 상주시 노거수(老巨樹)가 새로 지정되면서다.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호인 ‘은척면의 뽕나무’를 ‘상주 두곡리 뽕나무’로 이름을 바꿔 바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59호로 승격했다고 3일 밝혔다. 지금까지는 천연기념물 뽕나무가 2006년 제471호로 지정된 창덕궁 관람지 뽕나무뿐이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마을 끝자락 농가 뒤편에 있는 이 뽕나무는 높이가 10m에 이른다. 가슴높이(지면에서부터 1.2m 높이) 둘레는 3.93m이고, 잎이 무성한 부분의 폭은 12.7∼16.2m이다. 나이는 약 300년으로 추정된다. 키가 12m에 400살로 짐작되는 창덕궁 뽕나무보다 약간 작고 젊지만, 가슴높이 둘레는 1.5m가량 굵다.  뽕나무로는 드물게 오랫동안 아름다운 형태를 유지했고, 지금도 열매인 오디가 많이 열릴 정도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쌀ㆍ곶감ㆍ누에가 많이 생산돼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불리는 상주가 양잠(누에를 사육해 고치를 생산)으로 번성했음을 알려주는 지표여서 역사적ㆍ민속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천연기념물 제471호인 창덕궁 뽕나무. 문화재청 제공 두곡리는 1980년대 초반까지 농경지에서 주로 뽕나무 묘목을 길렀지만, 양잠업이 쇠퇴하면서 뽕나무가 대부분 사라졌다는 게 주민들 전언이다.  문화재청은 상주 두곡리 뽕나무 천연기념물 지정 기념 행사를 열고 국가지정문화재 위상에 맞는 체계적 보존ㆍ관리 계획을 수립해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권경성 기자
7574    [타산지석] - "저작권문제", 불 불 불... 댓글:  조회:3757  추천:0  2020-02-02
윤이형 작가의 절필이 지핀 ‘불’… 문학사상사 보이콧으로 ‘활활’ 2020.02.02.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이상문학상 공정성 논란 확산 최근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윤이형(44)이 이상문학상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절필 선언’을 하면서 문학사상사의 청탁을 거부하는 동료 작가들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독자들도 불매운동에 나서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황정은·권여선·장류진·천희란…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 해시태그 동료 작가 지지·청탁 거부 이어져 서점·독자들은 불매운동 선언해 소설가 황정은·권여선·조해진·구병모·정세랑·백수린·장류진·최은미·천희란, 시인 오은·권창섭 등이 트위터에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를 올리며 보이콧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독자들은 ‘#문학사상사_독자_보이콧’이란 해시태그를 달고 불매운동에 나섰다.  황정은 작가(왼쪽), 장류진 작가 동참 작가들이 5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문학계의 불공정 관행을 시정하려는 작가들의 단체행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문학사상사는 사태가 커지자 “이상문학상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밝혔다.  ■ 불공정성 논란, 절필과 보이콧으로  윤이형은 지난달 31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자신의 ‘절필 선언’ 이유를 밝혔다. 트위터에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해시태그를 붙이며 보이콧 운동에 동참한 작가들의 글. 이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동료 작가들의 지지와 함께 문학사상사 청탁 거부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2016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소설가 황정은은 “고통을 겪고 있을 수상자들에게 연대하고 싶다. 문학사상사는 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더는 작가들에게 떠밀지 말고 제대로 사과하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밝혔다. 2008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권여선도 “이상문학상의 기수상자로서 관행이란 말 앞에 모든 절차를 안이하게 수용한 제가 부끄럽다. 이상문학상의 기형적 운영은 문학사상사의 독단적 운영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바닥부터 새롭게 바꿔나가 달라”고 밝혔다. 지난해 을 펴내며 주목받은 장류진도 “문학사상사가 이상문학상을 운영하면서 수상작가들의 저작권을 갈취해온 것과 그로 인해 마땅히 격려받아야 할 작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 전까지, 문학사상사로부터 모든 업무와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서점과 독자들 또한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독립서점 고요서사와 손목서가 등도 당분간 문학사상사에서 출판한 책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북튜버’ 김겨울 또한 “제대로 된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문학사상사 책을 다룰 일은 없겠다”고 밝혔다. 트위터 이용자 ‘은수(@vogonspoetry)’는 “작가가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서 발표되는 작품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연기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던 문학사상사는 이르면 3일 공식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밝혔다.  임지현 문학사상사 대표는 2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월요일(3일)이나 화요일(4일) 공식 입장을 표명할 계획이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상문학상 ‘저작권 3년 양도 조항’ 등을 뜯어고치고 사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반복된 이상문학상 불공정 논란 불공정 논란의 핵심은 이상문학상이 대상 및 우수상 수상작품을 대상으로 ‘저작권 3년 양도’를 요구하고, 수상작을 다른 작품집 표제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조항이다. 지난달 초 소설가 김금희·최은영·이기호가 ‘저작권 양도’가 부당하다며 우수상 수상을 거부해 논란이 됐고,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인 윤이형이 “작품이 훼손됐다고 생각한다”며 ‘절필’을 선언해 사태가 확산됐다.  문학사상사는 대상 수상작에 대해 ‘저작권 양도’를 요구하는 서류가 우수상 수상작가에게 잘못 전달됐다며 “직원의 실수”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상문학상의 저작권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9년 수상 작품집 법정다툼 등 문학상 제도 낡은 관행 도마 위에 문단 내 갑질 해결하는 계기돼야 1999년 김승옥·박완서·이청준·조세희 등 작가들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제작·배포를 금지하고 저작권 사용료를 내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수상 3년 이후 출판 건에 대한 저작권료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문학사상사 임홍빈 회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수상작에 대한 저작권 제도는 문학의 위상을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훌륭한 작품이 이 책 저 책에 실려서 흔한 취급 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윤이형은 “문학사상사는 회장님 한 사람의 억압적 명령에 따라 이상문학상을 자의적으로 운영한 것, 우수상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불공정한 방식으로 빼앗은 것, 형식상 계약서를 보내며 거래하듯 상을 수여해 작가들에게 부당한 상황을 만든 것, 직원의 실수라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상처받은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 문학상 제도 낡은 관행 도마에  이상문학상 논란은 문학계의 낡은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자음과모음은 중·단편 신인문학상의 상금을 선인세로 지급하기로 했다가 논란이 되자 이를 수정했다.  당초 자음과모음은 제10회 신인문학상 공모를 시작하며 상금 500만원에 대해 ‘인세가 상금을 상회할 경우 초과분에 대해 인세로 지급한다’고 공지했다. 이에 대해 이름만 ‘상금’일 뿐 사실상 선인세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2018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당선자 박선우 작가가 “작가가 쓴 원고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무시하는 일이며, 신인상 당선자가 해당 출판사에서 첫 책을 내야 한다는 업계의 관행을 오용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자음과모음은 “상금은 500만원이며, 단행본 출간 인세와는 무관하다. 단행본 계약은 작가와 추후 상의해 결정한다”고 정정 공지를 했다.  이 밖에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 신춘문예 시 당선자들이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되는 에 해당 출판사에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가 관련돼 있다는 이유로 작품 수록을 거부했으며, 원고료를 명시하지 않은 청탁에 대한 거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젊은 작가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기존의 잘못된 관행에 윤리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환영하고 선배 문인으로서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학사상사뿐 아니라 유명 작가에게는 인세 등 혜택을 많이 주고, 신인이나 무명 작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부당한 관행이 철폐되길 바란다”며 “문단 내 성폭력, 표절 등을 포함한 부당한 ‘갑질’과 ‘권력남용’이 차제에 해결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경 기자 
7573    [공부공부공부] - "이(머릿니)타령" 댓글:  조회:2906  추천:0  2020-02-02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이타령     목차 정의 개관 사설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머리에 살았던 이[蝨]를 해학적으로 그렸으며, 이를 잡아 죽이는 과정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유희요. 개관 은 문학적 분류로는 유희요에 해당한다. 유희요에는 세시유희요·경기유희요·언어유희요·놀림유희요·자연물 대상 유희요·가창유희요가 있는데, 이 노래는 그 가운데 가창유희요에 해당한다. 은 위생의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지난날 머리에 흔했던 피를 빨아먹고 살던 작은 곤충에 관한 민요이다. 사설 갈강아 갈강아/ 서대기 데리고 잘 있거라/ 석석바오 난간에 빨래질 가다/ 맞바우 만나믄 나는 죽는다 - 국악방송, 전북 진안, 2009. 옷에 이야 백단춘아 머레 이야 깜동춘아/ 니발이 육발이믄 이리 팔팔 걸어봤나/ 니 등어리 납닥하마 성에 성에 집 질 적에 돌 한 딩이 실어봤나/ 니 조디이 납닥하마 성에 성에 질 직에 옥지 한 번 불어봤나 - 국악방송, 경북 경산, 2009. 갈강아 갈강아/ 쌔갱이 동상 데루고 잘 있거라/ 나는 나갔다가/ 두 방구[바위] 틈에 찌기면 올지 말지 하다 - 현지조사자료, 강원 삼척, 2003. 내용 서로 다른 곳에서 채록된 을 견주어보면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니 등어리 납작한데 형님 집 질 적에 돌 한 덩어리 실어봤냐, 니 주둥이 납작한데 형님 집 질 적에 옥지 한 번 불어봤나”라는 노랫말은 흔하게 보이는 것이다. 위 노래에서 ‘갈강이’는 갓 태어난 이의 새끼를 말하고 ‘서대기’ 또는 ‘쌔갱이’는 서캐(이의 알)를 말한다. 잘 있으란 말은 사람 눈에 띄어 죽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마지막이 해학적이면서 비극적인데 “맞바우 만나믄 나는 죽는다”와 “두 바위 틈에 끼면 올지 말지 한다”라는 대목이다. 여기서 두 바위는 다름 아닌 사람의 두 엄지손톱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 머리 위로 돌아다니다가 사람 눈에 띄는 날에는 여지없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다. 두 엄지로 이를 눌러 터뜨리는 소리를 묘사한 노래도 있는 것을 보면 이와 사람 사이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에는 이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점, 납작해서 사람 머리에 착 달라붙는 점, 입이 조그만 점 등을 노래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혐오하는 벌레인 이에게 노래를 만들어줬던 옛 사람들의 관심과 세밀한 관찰이 잘 드러나고 있다. 집필 [네이버 지식백과] 이타령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타령」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야길 56[자산리 613-1] 출처 디지털진안문화대전-「이타령」 목차 정의 개설 채록/수집 상황 구성 및 형식 내용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에서 이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유희요. 개설 「이타령」은 사람의 몸에 기생하면서 피를 빨아먹는 작은 벌레인 이의 생김새를 익살스럽게 그려낸 노래이다. 이를 잡으면서 부르기도 했고 노래 부르기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가창 유희요로 부르기도 했다.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 주로 가창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이타령」은 한국학 중앙 연구원 어문 생활 연구소와 안동 대학교 민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 개정·증보 사업’ 전북 조사팀이 2010년 2월 23일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최복순[여, 1936년생]으로부터 채록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지원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웹 서비스[http://gubi.aks.ac.kr/web]를 통해서 조사 자료 텍스트와 연동되는 디지털 음원을 들을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이타령」은 4·4조 4음보 율격이다. 혼자서 부르기도 하고 여럿이 모여 있을 때 누군가 먼저 부르면 같이 따라서 부르기도 했다. 내용 머리털에서 기생하는 머릿니는 검고 옷 속에 붙어사는 몸이는 하얗다. 「이타령」은 이의 주둥이, 등, 배, 발 등 생김새를 들먹이며 이로운 일을 한 것이 무엇이냐고 시비를 걸면서 죽어 마땅하다고 비난하는 내용이다. 피를 빨아먹는 뾰족한 입은 말 한 마디도 못 하고, 납작한 등으로는 등짐 한 짐도 싣지 못하고, 빨아먹은 피로 가득한 배는 먹통 같지만 천 자 한 마디 읽고 쓰지 못하며, 발을 여섯 개 가지고 있어도 십리 걸음조차 걸어본 적이 없고 이로운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를 잡아서 엄지손톱으로 눌러 터트리는 소리를 표현하면서 ‘똑죽이’라고 별명을 붙인 점이 흥미롭다. 머릿니는 검검수름 옷의 이는 백발이요/ 네 입이 뾔쪽한들 말 한 마디를 해여 봤냐/ 네 등허리 넓죽한들 짐 한 짐을 실어봤냐/ 네 배지가 먹통인들 천 자 한 마디를 읽어 봤냐/ 네 발이 육발인들 십리 걸음을 걸어 봤냐/ 똑 죽어라 똑 죽어라 네 이름이 똑죽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생활이 어렵고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던 지난날에는 머리나 몸에 이가 기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에는 한가한 시간에 부녀자들이 아이들의 머릿니를 잡아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이는 지난날 우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현황 위생 관념이 보편화된 오늘날 진안 지역에서 이는 거의 사라졌고 「이타령」을 가창 유희요로 부르는 일도 거의 없지만 이 노래를 기억하는 일부 가창자들이 간혹 부르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이타령」은 사람의 머리와 몸에 기생하면서 피를 빨아먹고 사람을 괴롭히는 이를 비난하는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대개 곤충이나 벌레를 다루는 노래들이 그렇듯이 이 노래 역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사설이 구성되어 있어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재미있게 들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타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타령」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출처 디지털영암문화대전-「이타령」 목차 정의 개설 채록/수집 상황 내용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전해지는 이를 잡으며 부르는 노래. 개설 「이타령」은 이의 생김새를 묘사하며 부르는 노래로, 「거미 타령」이나 「빈지래기 타령」 등과 유사한 민요이다. 이의 생김새를 모사하는 데 영암 사람들의 뛰어난 익살과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채록/수집 상황 이순임[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정동 마을, 1923생, 여]이 구연한 「이타령」이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 위원인 이소라에 의해 채록되어 『영암의 민요』에 사설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이타령」은 “이야 이야 옷엣 이야/ 니야 발이 여섯인들/ 단 십리를 걸어 봤냐/ 니 주뎅이가 쫑긋한들/ 만좌중에 모인디가/ 말 한마디를 하여 봤냐/ 니 등거리가 납작한들/ 너거 선산 석출헐 때/ 묏장 한번이나 져 봤느냐/ 니 배아지가 먹통인들/ 천자 한 자를 기려 봤냐/ 니 이름이 작은인게/ 작근 작근 죽여불자”는 내용으로 영암군에서 수집한 것들도 모두 동류의 것이다.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 이순임이 구연한 「이타령」은 아래와 같다. 이야 이야 뚱이야/ 니 주뎅이가 납작한들/ 공사판에 가 공사 한번이나 해봤느냐/ 니 등거리가 납작한들/ 너거 선산에 석출헐 때/ 묏장 한번이나 져 봤느냐/ 이야 이야 뚱이야/ 아직끈 자직끈 죽여불자 영암군 시종면 신연리 나명순이 구술한 「이타령」은 아래와 같다. 이냐 발이 여섯인들 남북 댕길손가/ 니 주댕이가 기다 한들 열두 골 출력들 때 나발 한번 불린손가/ 니 등거리 넓다 한들 열두골 출력들 때 떼 한 장을 지을 손가/ 니 먹통이 크다 한들 열두 골 출력들 때 먹 한 장을 줄릴 손가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내의나 속옷 속에 성하던 이를 잡으며 부르던 노래이다.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노래 중에는 이의 삶에 사람의 한평생을 비유한 것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타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7572    [공부공부공부] - "서캐타령" 댓글:  조회:2572  추천:0  2020-02-02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캐 타령」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야길 56[자산리 613-1] 출처 디지털진안문화대전-「서캐 타령」 목차 정의 개설 채록/수집 상황 구성 및 형식 내용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에서 부르는 서캐를 소재로 한 유희요. 개설 사람 손에 잡히면 꼼짝없이 죽는 서캐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서캐를 잡으면서 부르기도 했고 노래 부르기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유희요로 부르기도 했다.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 주로 가창하였다 채록/수집 상황 「서캐 타령」은 한국학 중앙 연구원 어문 생활 연구소와 안동 대학교 민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 개정·증보 사업’ 전북 조사팀이 2010년 2월 23일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최복순[여, 1936년생]으로부터 채록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지원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웹 서비스[http://gubi.aks.ac.kr/web]를 통해서 조사 자료 텍스트와 연동되는 디지털 음원을 들을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서캐 타령」은 4·4조 4음보 율격이다. 내용 「서캐 타령」은 사람 손에 잡혀 손쉽게 죽음을 당하는 서캐의 상황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서캐[시캐]는 이의 알이고, 깔갱니는 갓 태어난 이의 새끼이다. 이가 서캐들에게 사람 손에 잡히면 꼼짝없이 죽을 터이니 어린 깔갱니를 잘 지키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두 바위가 작신 하면 죽는다는 표현은 사람의 두 엄지손톱에 눌려 죽는다는 뜻이다. 이 노래를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두 바우가 작신 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죽는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거대한 폭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민중의 삶과 애환이 읽힌다. 시캐들아 시캐들아 우리 깔갱니 잘 거쳐내라/ 석석바우 끝이 가먼 두 바우가 작신 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죽는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생활이 어렵고 위생 상태도 좋지 않았던 지난날에는 머리나 몸에 이와 서캐가 기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서캐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곤충은 아니지만 지난날 우리 삶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현황 「서캐 타령」을 기억하는 일부 가창자들이 부르고 있다. 「이타령」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른 제보자는 언젠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서캐 타령」을 했더니 좌중이 매우 우스워했다고 하면서 이와 서캐에 관한 노래가 추접스러운 것은 아닌지 걱정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타령」에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별로 유익할 것 없는 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면, 「서캐 타령」은 서캐의 입장에서 사람에게 손쉽게 잡혀 목숨을 잃는 처지가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서캐와 같은 미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해학적 표현력이 잘 어우러진 노래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캐 타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7571    [시공부 101] - 8... 댓글:  조회:2853  추천:0  2020-02-0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바뀌는 이유는 뭘까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한문학의 발달 평민들이 즐겨 부르는 고려 가요의 등장 고려 귀족의 시가 : 경기체가와 시조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신라의 대표 장르는 향가, 고려의 대표 장르는 한시라고 배웠어요. 이렇게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바뀌는 이유가 있을까요? 한문학의 발달 고려 때에도 향가는 창작되었습니다. 고려 초에 균여대사가 지었다는 「보현십원가」가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그 이후 향가는 차츰 소멸해 버렸습니다. 대신 한시가 발달하였습니다. 과거 제도가 실시되고 국자감이라는 교육기관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한문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 제도는 경전을 이해하는 것보다 시와 글을 짓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문을 창작하는 능력은 귀족이 갖춰야 할 필수 교양이었지요.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어가고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저 물은 언제쯤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정지상, 「송인(送人)」 이 시는 임을 보내는 정한이 아주 잘 나타나 있는 작품입니다. 비가 그친 뒤의 풀빛은 더욱 푸르러 생기가 넘치지만 시적 화자는 ‘그대’를 보내야 하는 마음에 슬픈 노래만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생기가 넘치는 풀빛은 시적 화자의 슬픔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 줍니다. 3행에 등장하는 ‘대동강 물’은 그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인데 우리 시에서 ‘물’은 이별의 안타까움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마지막 구에 따르면 대동강 물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더해지는 까닭에 마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임과의 이별이 지속적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시적 화자가 임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한시를 창작한 대표적인 작가로는 이인로, 이규보, 이승휴, 이색, 이제현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히 이규보와 이승휴는 각각 「동명왕편」과 『제왕운기』와 같은 민족 서사시를 창작하여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각성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한문학이 발달하여 신라 향가는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사회 변화가 예술 장르의 융성과 쇠락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평민들이 즐겨 부르는 고려 가요의 등장 한편 고려 시대에 민간에서 불리던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려 가요, 혹은 고려 속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려 가요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요가 발전하여 형성된 것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조선 초기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악장가사』와 같은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 가요의 특징은 3음보로 되어 있다는 것과 후렴구가 발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주로 남녀 간의 사랑, 이별의 아쉬움 등 고려 평민들의 소박하고 풍부한 정서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문 구절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했고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감정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대(大平盛大) 날러는 엇디 살라 고 리고 가시리잇고 나 위 증즐가 대평성대 잡와 두어리마 선하면 아니 올셰라 위 증즐가 대평성대 셜온 임 보내노니 나 가시 도셔 오쇼셔 나 위 증즐가 대평성대 「가시리」 이 작품은 고려 가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별의 정한을 다루고 있지요. 눈치챘겠지만 우리나라의 시가 문학에는 이별의 슬픔을 다룬 작품이 끊임없이 창작되어 왔습니다. 고조선 노래 「공무도하가」, 백제 노래 「정읍사」, 정지상의 「송인」, 민요 에 이르기까지 말이지요. 「가시리」도 이러한 시가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아마도 이런 전통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나라가 외침이 자주 있었던 탓일지 모르겠습니다. “위 증즐가 대평성대”는 후렴구입니다. 나라가 평안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인데 작품의 본래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지요. 따라서 고려 가요의 후렴구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각 구절 끝에 놓이는 ‘나’이라는 말도 가락을 맞추기 위한 의미 없는 여음입니다. 고려 귀족의 시가 : 경기체가와 시조 고려 가요가 민간에서 유행하자 귀족들도 고려 가요처럼 쉽게 즐길 수 있는 노래를 창작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형식이 경기체가입니다. 경기체가라는 이름은 시가의 끝 구절에 ‘경(景)긔 엇더하니잇고’라든가,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감탄형 문장이 등장하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림별곡」, 「죽계별곡」등이 있는데 주된 내용은 선비의 학식과 체험을 노래하여 선비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성이 높지 않으며 유흥적이고 향락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경기체가만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대부들이 만들어 낸 문학 형식으로 시조가 있습니다. 시조는 고려 중엽에 발생하였고 우리말만으로 표현하여 훗날 귀족과 평민을 아우르는 국민 문학으로 성장했습니다. 고려 향가는 「보현십원가」 외에는 없나요? 고려 시대에는 향가와 비슷한 성격의 노래가 두 작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향가계 여요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한 편은 고려 의종 때 정서가 지은 「정과정」인데 그 내용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은 고려 예종 때 예종 스스로 지은 작품으로 「도이장가」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려 건국 당시 태조 왕건을 위험에서 건지고 대신 목숨을 잃은 신숭겸과 김락, 두 장수를 추모하며 부른 작품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바뀌는 이유는 뭘까요?(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70    [시공부 101] - 7... 댓글:  조회:2544  추천:0  2020-02-0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대 국가도 "애국가"를 불렀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는 노래, 「안민가」 승려가 전하는 유교적 메시지? 하늘에 해가 두 개 떠서 부른 노래, 「도솔가」 다채로운 신라 향가의 모습 4구체 향가 8구체 향가 10구체 향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과 사회적 소통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가 있잖아요? 고대에도 애국가 같은 노래가 있었을까요?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는 노래, 「안민가」 신라 시대에도 처럼 공적인 목적을 지닌 노래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노래가 처럼 모든 신라인들에게 불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노래의 가사라든가 창작 의도를 보면 처럼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창작된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제목은 ‘안민가(安民歌)’인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함께 감상해 볼까요? 군(君)은 아비여, 신(臣)은 사랑하실 어머니여, 민(民)은 어린아이라고 한다면 민(民)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백성 이들을 먹여 다스리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한다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 것입니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충담사, 「안민가」 「안민가」는 신라 경덕왕 때에 승려 충담사가 지어 부른 것입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정치 · 사회적 분위기와 관계가 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시절에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뜨는 등 천재지변이 백성의 삶을 위협하고 귀족들이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등 정치 · 사회적 위기 상황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경덕왕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고자 충담사에게 노래를 지어 부를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충담사가 지은 작품이 바로 「안민가」입니다. 승려가 전하는 유교적 메시지? 신라가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이고 지은이가 승려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성격은 유교적입니다. 경덕왕은 당시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자 중국식 제도와 학문을 따랐다고 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유교의 통치 이념을 널리 퍼뜨리려 했다고 합니다. 시에 언급된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는 유교 경전 『논어』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또한 이 작품은 임금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자식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가족적인 사랑과 유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 노래는 목적성이 매우 강한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의 가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듯이 「안민가」는 나라가 태평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였지요. 충담사는 승려였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 「안민가」라는 유교적인 작품을 창작했던 것입니다. 하늘에 해가 두 개 떠서 부른 노래, 「도솔가」 신라 향가 중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성을 띤 노래를 한 편 더 소개하자면 「도솔가」를 들 수 있습니다. 「도솔가」 역시 신라 경덕왕 시절에 지어진 노래입니다. 어느 날 하늘에 해가 두 개가 뜨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해가 두 개 뜬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지요. 아마도 천재지변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해가 임금을 상징하니, 해가 두 개라는 말은 정치 권력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때 일기를 맡아보던 신하가 경덕왕에게 스님이 꽃을 뿌리며 정성을 들이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충고합니다. 이에 경덕왕은 신하의 충고를 받아들여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승려 월명사에게 기도문을 지어 부르게 합니다. 월명사는 기도문 대신 향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가」입니다. 오늘 이에 산화(散花)의 노래 불러 뿌리온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심부름하옵기에 미륵 좌주를 모셔라! 월명사, 「도솔가」 작품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꽃을 뿌리며 곧은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미륵 부처님을 모시자는 것이지요. 미륵 부처에게 국가의 안녕을 빌었던 것입니다. 월명사가 왕에게 시를 지어 바친 후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해 하나가 사라져서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노래 역시 집단과 사회의 안녕을 위해 지어 부른 목적성이 매우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채로운 신라 향가의 모습 4구체 향가 신라 향가에는 이 밖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존재했습니다. 먼저 4구체 향가인 「서동요」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며, 「풍요」는 민요로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헌화가」는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꽃을 수로부인을 위해 꺾어 바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8구체 향가 4구체 향가가 두 번 반복된 형태인 8구체 향가는 「모죽지랑가」와 「처용가」가 있습니다.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이라는 화랑을 추모하면서 그의 낭도가 지어 부른 노래이며, 「처용가」는 아내를 범한 역신을 노래를 불러 물리쳤다는 처용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0구체 향가 10구체 향가에는 죽은 누이를 추모하며 부른 「제망매가」, 서쪽에 떠 있는 달에게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왕생가」,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양하며 부른 「찬기파랑가」, 신하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며 왕을 원망하며 부른 「원가」, 이 외에도 「우적가」, 「혜성가」 등 다양한 주제를 지닌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신라 향가는 당대에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어서 진성여왕 때에는 『삼대목』이라는 향가집까지 출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삼대목』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요. 만약 그 책이 남아 있다면 신라 시대 향가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처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하였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날씨를 보는 관직)이 아뢰었다. “동해(東海)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 주어 풀어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 때문에 그곳을 개운포라 불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도록 하고, 관직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질병을 옮기는 신)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한 처용은 이처럼 동해 용왕의 아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처용은 누구였을까요? 후대 사람들은 그가 신라의 호족 출신 중에 한 명일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에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현재 민간에 전래되는 처용탈을 보면 호족보다는 아라비아 상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고대 국가도 애국가를 불렀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69    [시공부 101] - 6... 댓글:  조회:2798  추천:0  2020-02-02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구려와 백제의 작품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을지문덕, 고구려의 기상을 노래하다 백제 상인의 아내, 그리움을 노래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신라 향가는 25수가 전해 온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나요? 고구려와 백제도 신라에 못지않은 문화를 발전시켰으니 몇 작품은 남아 있겠지요? 을지문덕, 고구려의 기상을 노래하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고구려와 백제의 노래는 아쉽게도 각각 한 편씩밖에 없습니다. 한 편은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지은 한시이며, 또 다른 한편은 백제의 노래로 어느 행상인의 아내가 지은 「정읍사」라는 노래입니다. 을지문덕의 시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고, 정읍사는 『악학궤범』이라는 조선 시대 문헌 속에 전해지고 있지요.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는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살수대첩 중에 지은 한시입니다.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는 30만 군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적군에게 항복한 뒤 적진을 정탐한 후 탈출했습니다. 이에 수나라 군사가 추격해 오자 을지문덕은 일부러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는 유도 작전으로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킵니다. 연이은 전투로 인해서 수나라 군대는 지쳤고 추위와 배고픔도 견디기 어려웠지요. 을지문덕은 적군을 평양성 30리까지 유인하고 나서 그제야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보냅니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하였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통하였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 「여수장우중문시」 이 작품은 겉으로는 을지문덕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우중문의 지혜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의도는 상대방을 조롱하는 데 있습니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낸 까닭은 상대방의 마음을 흐트러뜨려 사기를 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중문은 이 시를 건네받고서야 자신이 을지문덕에게 속은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후회하며 군대를 후퇴시키지만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끝까지 추격하여 살수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을지문덕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를 내비치면서 우중문을 자극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지략과 고구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지요. 백제 상인의 아내, 그리움을 노래하다 고구려의 작품이 한시로 지어졌고 강인한 남성성을 표출한 반면에, 백제의 노래는 우리말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노래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두 작품이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 노피곰 도샤 달님이시어 높이높이 도드시어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멀리멀리 비춰 주십시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걍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교요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긔야 즌를 드욜셰라 어긔야 진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나 짐을 놓으십시오 어긔야 내 가논 어긔야 당신 가는 곳이 졈그셰라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 이 시의 화자는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요? “저쟤 녀러신교요(시장에 가 계신가요)”라는 표현으로 볼 때 남편은 행상을 하는 인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상을 떠난 남편이 오래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고갯마루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노래에 등장하는 ‘달님’은 시적 화자가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달은 높이높이 떠서 어둡고 위험한 밤하늘을 비춰 주는 광명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달님은 화자와 임의 사랑을 유지해 주는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반해 ‘즌 데’는 위험한 곳을 가리킵니다. 어두운 밤에 질퍽하게 땅이 ‘진 곳’은 그야말로 무거운 짐을 들쳐 멘 행상인에게는 위험한 곳이지요. 학자에 따라서는 ‘즌 데’를 다른 여자, 남편을 유혹하는 존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보나 ‘즌 데’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로서는 매우 부정적인 공간입니다. 그런 까닭에 시적 화자는 달님이 더 높이높이 돋아서 멀리멀리 비추길 간절히 기원했던 것입니다. 이 시의 배경 설화는 『고려사』의 가요편 ‘악지’를 해설하고 있는 『악학궤범』에 전해 내려오는데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가 서 있던 자리에 마침내 망부석이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이 그만 돌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망부석(望夫石)은 글자 그대로 남편을 바라보다가 돌로 변해 버린 아내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고려 가요나 시조, 김소월의 시에 등장하는 ‘임을 기다리는 여성상’은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노래인 「정읍사」에 이미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망부석 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또 있나요? 현대 시 중에서 김소월의 「초혼」에도 망부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는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돌’은 곧 망부석 설화의 돌과 같은 것이지요. 「정읍사」와 함께 김소월의 「초혼」을 감상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고구려와 백제의 작품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나요?(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6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저작권보호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923  추천:0  2020-02-02
  윤이형 절필 이어 최은영 사과 요구… 이상문학상 파문 확산 2020.02.0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작년 대상’ 윤이형 “상 돌려주고 싶지만 방법 없어 활동 중단”  ‘올해 우수상 거부’ 최은영 “반성할 사람들은 반성 안 하고…”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상작 발표 연기를 부른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의 파문이 더 크게 확산될 조짐이다. 지난해 대상 수상자인 윤이형(44)이 절필을 선언하며 출판사에 사과를 요구한 데 이어, 올해 우수상 수상을 거부한 최은영(35)까지 사과 요구 움직임에 가세하면서다.  윤이형 작가는 지난달 31일 트위터 계정에 원고지 27매짜리 입장문을 올려 “작가를 그만둔다”고 밝혔다. 윤 작가는 “제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 저는 이미 상금을 받았고 그 상에 따라오는 부수적 이익들을 모두 받아 누렸다. 더불어 저작권 개념에 대한 인식 미비로 양도 문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제 작품을 그 일에서 떼어낼 수도 없게 됐다. 그래서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절필 배경을 설명했다. 이상문학상의 저작권 양도 요구 조항이 절필 선언의 이유임을 처음 밝힌 것이다.  윤 작가는 “작년 1월 이상문학상 수상 통보를 받은 직후 저는 ‘대상 수락 및 합의서’에 서명했다. 거기에는 작가는 작품의 저작권을 (이상문학상 주관사인) 문학사상에 양도하고, 3년 뒤에 개인 작품집이나 단행본에 수록할 수 있지만 대상 수상 작품은 표제작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공개했다. 이어 “이것은 오랫동안 이상문학상 작품집 뒤에도 실려 있던 약관이다. 그러나 저는 평소 그 상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았고 그때까지 문제의식이 없기도 했다”고 해명했다.  “저에게만 온 문서이기 때문에 우수상 수상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그는 김금희와 최은영, 이기호 등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됐던 작가들이 수상 거부 선언을 하는 모습을 보며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고, 이제 더 이상 문학계에서 어떤 곳을 믿고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우수상 작가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났는데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거기에 일조한 상황이 됐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제가 무엇에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부조리에, 범죄에, 권리 침해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윤 작가는 “지금껏 문학계에서 어떤 문제를 제기했을 때 연루된 작가들의 피해가 제대로 보상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이런 제도와 관행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윗세대 문학인들인데 피해는 젊은 작가들만 보게 된다. 아무도 작가들의 상처에 대해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저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일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것이 제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둔다”라고 천명했다.  윤 작가는 “문학사상사는 회장님 한 사람의 억압적인 명령에 따라 이상문학상을 자의적으로 운영한 것, 우수상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불공정한 방식으로 빼앗은 것, 형식상의 계약서를 보내며 거래하듯 상을 수여해 작가들에게 부당한 상황을 만든 것, 그리고 이것이 직원의 실수라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상처 받은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사과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이 상의 운영 방식과 저작권 관련 방침을 개선해 정상적으로 운영할 것임을 약속해 주시기 바란다”고 글을 맺었다.  이상문학상 주관사인 문학사상사에 사과를 요구한 최은영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 작가의 입장 발표 직후 최은영 작가도 블로그에 글을 올려 문학사상사에 사과를 요구했다. 글에서 최 작가는 “윤이형 작가님의 입장문을 읽고 한 사람의 동료 작가로서 안타까움과 슬픔, 분노를 피할 길이 없었다. 왜 반성해야 할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고 부당함에 피해를 입은 작가가 절필을 선언해야 했을까. 지금까지의 저의 침묵이 윤이형 작가님의 고통에 한몫한 것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 하루였다”고 했다.  이어 최 작가는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뒤 “이번 사건이 발생하고, 저는 작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분별없이 수상에 동의하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올해의 수상 작가님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라며 “우수상 수상자였던 저조차도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던 저의 안일함을 지난 몇 주간 돌아보며 채찍질했는데, 대상을 받으셨던 윤이형 작가님이 느꼈을 충격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동료 작가로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윤이형 작가님과, 윤이형 작가님의 문학을 잃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책임을 직원 개인의 ‘실수’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부당한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 문학사상사에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한다”며 “문학사상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한 사과를 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지난달 6일 예정됐던 올해 수상작 공개를 무기한 미루고 한 달 가까이 공식 입장 표명도 보류 중인 문학사상사는 파문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기색이다. 윤 작가도 “문학사상사 측에서 공식 입장 발표를 최대한 늦추기로 했다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논란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작가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조만간 공식 입장을 피력해 사태를 진화하고 수상작도 2월 중에는 공개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권경성 기자 ============================/// 이상문학상 불공정 논란, 윤이형 '절필'에 이어 ' #문학사상사 업무 거부'로 일파만파 2020.0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소설가 윤이형이 문학사상사에서 운영하는 이상문학상의 불공정성 때문에 ‘절필 선언’을 하면서 문학사상사 청탁을 거부하는 동료 작가들의 운동이 어어지고 있다. 소설가 황정은, 권여선, 조해진, 구병모, 장류진, 천희란, 정세랑, 최은미, 김이설, 우다영, 시인 오은, 권창섭 등이 트위터에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를 올리며 보이콧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현재 선언에 동참한 작가는 수십명에 이른다.  소설가 윤이형은 지난달 3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내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라며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자신의 ‘절필 선언’ 이유를 밝혔다.  이에 SNS에선 동료 작가들의 지지와 함께 문학사상사 청탁 거부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등을 펴낸 소설가 황정은은 “윤이형 작가의 피로와 절망에 그리고 절필에 책임을 느낀다. 고통을 겪고 있을 수상자들에게 연대하고 싶다. 문학사상사는 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더는 작가들에게 떠밀지 마시고 제대로 논의하고 사과하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밝혔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들이 연이어 문학사상사에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08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권여선도 “이상문학상의 기수상자로서 관행이란 말 앞에 모든 절차를 안이하게 수용한 제가 부끄럽다. 이상문학상의 기형적 운영은 문학사상사의 독단적 운영과 맞닿아 있다.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바닥부터 새롭게 바꿔나가달라”고 밝혔다. 2018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소설가 조해진도 “염치없게 목소리 하나 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행동을 해야 힘이 된다는 것도 알기에 공식적으로 말한다. 문학사상이 정식으로 사과하고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전까지 문학사상으로부터 모든 업무와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젊은 소설가들의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을 펴낸 장류진도 “문학사상사가 이상문학상을 운영하면서 수상작가들의 저작권을 갈취해온 것과 그로 인해 마땅히 격려받아야 할 작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 전까지, 문학사상사로부터의 모든 업무와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했던 소설가 최은영은 지난달 31일 밤 블로그에 글을 올려 문학사상사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최은영은 자신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거부하게 된 이유로 “작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제가 분별없이 수상에 동의하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올해의 수상 작가님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라며 “우수상 수상자였던 저조차도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던 저의 안일함을 지난 몇 주간 돌아보며 채찍질했는데, 대상을 받으셨던 윤이형 작가님이 느꼈을 충격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동료 작가로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윤이형 작가님과, 윤이형 작가님의 문학을 잃고 싶지 않다”며 “모든 책임을 직원 개인의 ‘실수’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부당한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 문학사상사에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상문학상 불공정을 이유로 ‘절필 선언’을 한 소설가 윤이형. 이상훈 선임기자 이상문학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설가 김금희·최은영·이기호가 2020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하며 불거졌다. 소설가 김금희는 지난달 우수상 시상 조건으로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하게 한 조항 등이 불공정하다며 문제제기했고, 이에 지난해 대상 수상작가인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했다. 문학사상사는 매년 초 발표해오던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무기한 연기한 채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거부한 소설가 김금희(왼쪽부터), 최은영, 이기호. /이영경 기자 --------------------------------------------------///   소설가 윤이형, 이상문학상 파문에 절필 선언 2020.0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작년 대상 수상자…"항의할 방법은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뿐"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소설가 윤이형(44)이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파문과 관련, 작가로서 영원히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상문학상 운영 방식에 항의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게 윤이형의 설명이다. 문학계의 불공정한 관행과 불신 등에도 너무 지쳐 더는 활동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이유다. 윤이형은 지난달 31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면서 "그래서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 더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일할 수 없다"면서 "일하지 않는 것이 내 작품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를 그만둔다"라고도 했다. 이어 "수상을 무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일조한 책임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면서 "그러나 이제 앞으로의 활동을 영구히 중단했으니 조금은 말할 자격이 생겼다"며 문학사상사 대표를 향해 공식 입장 표명과 사과, 운영 방식 개선 등을 요구했다. 윤이형은 이 글을 올리기 하루 전날 연합뉴스에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절필 선언이 맞는지 확인하는 질문에 "이상문학상 논란 이후로 어디를 믿고 일을 해야 할지, 나에게 내려진 평가가 정당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회의가 느껴져서 그렇다"면서 "문단 전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열심히 일해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부당함과 부조리에 일조해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소설가 윤이형[연합뉴스 자료사진] 앞서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로 결정된 김금희·최은영·이기호 작가가 잇달아 수상을 거부하면서 지난달 6일 예정한 수상자 발표가 무기한 연기되는 등 논란이 확산했다. 이들은 최근 '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주최 측 문학사상사 요구에 반발해 수상을 거부했다. 최은영 등은 여전히 문학사상사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 3명이 수상을 거부함에 따라 수상작품집 출간도 불투명해진 상태다. 올해 수상 대상자는 대상 1명, 우수상 5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문학상은 작품집을 출간하지 못하면 운영하기 어려운 구조다. 문학사상사는 이달 중 공식 해명과 함께 대상과 일부 우수상 수상자를 발표할 복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제정한 이상문학상은 이문열, 이청준, 최인호, 신경숙, 김훈, 한강 등 당대 최고로 인정받던 작가들을 수상자로 배출하면서 권위를 쌓아왔지만, 이번 사태로 작지 않은 흠집이 났다.
7567    [그것이 알고싶다] - 무지개 색갈???... 댓글:  조회:4425  추천:0  2020-02-01
재미있는 날씨와 기후 변화 이야기 무지개 색깔은 나라마다 달라요?     무지개는 몇 가지 색깔일까요? ‘빨주노초파남보.’ 우리는 무지개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일곱 색깔이라고 알고 있지요. 하지만 무지개 색깔은 나라마다 달라요. 지금은 일곱 색깔이라고 말하지만,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오색 무지개라고 했어요. 미국에서는 남색을 제외한 여섯 가지 색깔,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 인은 검은색, 하얀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다섯 가지 색깔, 아프리카 사람들은 두세 가지 색깔로 무지개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요. 도대체 무지개는 몇 가지 색깔로 되어 있는 것일까요? 사실 무지개의 색깔은 몇 가지냐 하면······. 놀라지 마세요. 무려 134~207색까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해요. 이렇게 무지개 색깔이 많은데, 왜 우리는 무지개 색깔을 일곱 가지로만 나눈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옛날 사람들이 하늘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무지개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어요. 그래서 무지개의 색깔도 별이나 신을 나타내는 성스러운 숫자 7과 관련지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답니다. 요즘에는 무지개를 잘 볼 수 없어요. 특히 도시 지역에서 무지개를 보기가 더 힘든데, 그것은 도시의 공기 중에 오염된 물질이 많기 때문이에요. 도시의 공기가 맑아진다면 예쁘고 둥근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있겠지요? 폭포 근처에 뜬 무지개 생생! 날씨 인물 무지개의 색깔을 정한 뉴턴 뉴턴(1642~1727년) 무지개가 여러 가지 색으로 되어 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뉴턴이에요. 뉴턴은 빛의 성질을 연구하던 어느 날,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가느다란 빛줄기를 프리즘에 통과시키고 그 빛이 여러 가지 색깔로 나누어진 것을 보았어요. 그 후 뉴턴은 무지개의 색깔을 일곱 가지로 정했지요. 그 당시 7을 신성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숫자로 여겼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네이버 지식백과]무지개 색깔은 나라마다 달라요?(재미있는 날씨와 기후 변화 이야기)  
7566    [그것이 알고싶다] - "판도라" 댓글:  조회:4428  추천:0  2020-02-01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판도라 신화 속 여인 [ Pandora음성듣기 ] 요약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을 빚어서 만들게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판도라가 온갖 불행을 가두어 둔 상자를 호기심에 못 이겨 여는 바람에 인류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판도라원본보기 외국어 표기 Πανδώρα(그리스어) 구분 신화 속 여인 상징 사악한 아름다움, 치명적인 호기심 어원 모든 선물 별, 별자리 토성의 판도라 위성 관련 상징 상자 또는 단지 관련 사건, 인물 프로메테우스, 인류의 창조, 판도라의 상자 목차 판도라 인물관계도 신화 이야기 인류의 탄생 판도라의 탄생 판도라의 상자 피라와 데우칼리온 판도라 인물관계도 ※ 관계도 내 인명 클릭시 해당 표제어로 연결됩니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창조하였다. 판도라는 인간을 창조하고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하여 새 인류의 조상이 되는 딸 피라를 낳았다. 피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결혼하여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티탄 신족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다. 신화 이야기 인류의 탄생 만물이 창조될 때 에피메테우스는 형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모든 짐승과 인간에게 각각 재주와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뒤늦게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에피메테우스는 미리 앞뒤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짐승들에게 좋은 재능을 다 써버린 나머지 가장 늦게 만들어진 인간에게 줄 것이 남지 않게 되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파울 루벤스, 1618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금지한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몰래 불과 지혜를 선사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로 인해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채 독수리에게 날마다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밤새 온전히 회복되어 계속해서 새롭게 고통 받아야 했다. 판도라의 탄생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을 받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을 한 가지 한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헤파이스토스에게 진흙을 빚어서 만들게 한 최초의 여성 아리따운 판도라였다. 판도라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69년, 개인 소장 헤파이스토스는 판도라를 불멸의 신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판도라가 만들어질 때 신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테네는 옷과 손재주를 주었고, 아프로디테는 인간이 이 새로운 존재를 사랑하도록 아름다움을 주었고, 헤르메스는 그녀 마음속에 거짓과 속임수를 넣어 주었다 (판도라는 ‘모든 선물’이라는 뜻이다). 판도라의 상자 판도라해리 베이츠, 1891년. 테이트브리튼 갤러리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이름처럼 제우스의 의도를 미리 짐작했던 프로메테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절대로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덜컥 선물을 받아들여 판도라를 아내로 삼았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전달하는데 그 안에는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온갖 나쁜 재앙과 악덕이 다 들어있었다. 헤르메스는 상자를 건네주며 판도라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어 그것을 열어보게 하였고, 그 결과 인간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희망도 들어 있어 인간이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판도라의 상자는 헤르메스가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에피메테우스의 집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에피메테우스가 형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인간과 동물을 만들었을 때 그들에게 온갖 좋은 재능을 다 부여하고 남은 나쁜 것들을 죄다 담아 놓은 상자였는데, 판도라가 그만 그것을 열어버렸다는 것이다. 피라와 데우칼리온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 사이에는 딸 피라가 태어나는데 피라는 나중에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과 결혼하였다. 피라와 데우칼리온은 제우스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내렸을 때 프로메테우스의 귀띔으로 미리 방주를 만들어둔 덕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물이 빠지고 난 뒤 두 사람이 신들께 제사를 올리자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지라는 말이 들려왔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이를 대지의 뼈인 돌을 뒤로 던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하였더니 돌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은 남자가 되고 피라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되어 새 인류가 생겨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또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이 태어났다. 참고자료 헤시오도스, 『일과 날』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플라톤, 『대화편: 프로타고라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토마스 불핀치, 『그리스 로마 신화』 M. 그랜트, J. 헤이즐,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범우사 피에르 그리말,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열린책들 W. H. Roscher, 『Ausführliches Lexikon der griechischen und römischen Mythologie』 관련이미지 12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명화 속 그리스 신화 [네이버 지식백과]판도라 [Pandora] - 신화 속 여인 (그리스로마신화 인물백과)   ===============================/// 부활하는 보물 판도라의 상자 아름다운 재앙 [ Pandora Box ] 소유자 판도라 시대 고대 그리스 지역 그리스 출전 신통기 등 물건의 형상 항아리, 상자 목차 판도라의 항아리 아름다운 재앙 여러 가지 이설(異說) 판도라는 고대 여신 금단의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죽음과 병을 안겨준 처녀 판도라. 그러나 원전을 찾아가면 원래 그녀 자신이 인류에 대한 재앙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과연 최후에 남은 '희망'은 나쁜 것이었을까, 아니면 선한 것이었을까?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읽어보자. 판도라의 항아리 판도라 이야기는, 사람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는 그리스판 죽음의 기원 신화이다. 이런 종류의 신화로는 구약성서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견줄 만큼 중요하다. 판도라 이야기는 긴 역사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왔는데, 그러면서 각각 시대에 맞도록 조금씩 내용이 변화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살아남아 성장해온 신화이다. 그 증거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판도라가 연 것은 상자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원전을 기록한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그리스 신화의 원전 『신통기(神統記)』의 저자. 기원전 8∼9세기의 사람)의 기술에 의하면 원래는 '판도라의 항아리'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식품 보존을 위해 사용되었던 피토스라는 종류의 항아리에 온갖 재앙이 봉인되어 있었다. 항아리가 상자로 바뀐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인 것 같다. 또한 판도라의 속성도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도 오리지널에서는 그녀 자신이 제우스가 인류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재앙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재앙 헤시오도스가 기술한 전승에서 판도라 이야기는 거인 프로메테우스와 신들의 왕 제우스 사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싸움들 속에 등장한다. 거인 프로메테우스('앞을 보는 자'라는 의미)는 신들 중에서도 특출한 지혜를 지닌 자이며 인간들의 편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 인간을 창조한 자였다고도 한다(원래 남성만의 종족이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물로 바쳐진 소의 몫에 대해 인간의 편의를 꾀하고, 제우스의 뜻을 거스르고 인류에게 불과 기술(문화)의 지식을 전달했다. 이로 인해 둘은 대립하게 되고 후에 프로메테우스는 카우카소스 산 봉우리에 결박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독수리에게 간을 갉아먹히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전에 제우스는 불을 얻게 된 복만큼의 재앙을 인류에게 보내주려고 했다. 제우스의 뜻에 따라, 우선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흙으로 꽃조차 부끄러워하는 처녀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지혜와 기술의 여신 아테나는, 그녀에게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한 재능과 띠와 옷을 선물했다. 아프로디테는 처녀에게 사랑스러움을 주었다. 이처럼 신들이 계속해서 선물을 주고 마지막으로 헤르메스가 그녀의 가슴에 거짓, 아첨, 교활함, 호기심을 채워주고 처녀에게 신들로부터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판도라라는 이름을 붙였다(판도라의 어원에는 아주 다양한 해석이 있다). 이리하여 '최초의 여자' 판도라가 탄생했다. 이것은 신들이 힘을 기울여 창조한 아름다운 재앙이고, 남자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였다. 헤시오도스는 말한다. 실로 판도라에게서 시작된 여성의 계보야말로 남자들에게는 최대의 재앙이라고. 제우스는 신들의 사자(使者)인 헤르메스에게 명하여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 앞으로 데려갔다. 에피메테우스('후에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 지혜로운 프로메테우스와 비교하면 다소 우둔한 동생)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선물은 인간에게 화를 미치기 때문에 받지 말고 돌려보내라"라는 말을 들어왔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이 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기뻐하며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나중에서야 겨우 실수를 깨닫게 된다. 한편 에피메테우스의 저택에는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온갖 것들이 봉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서 호기심을 부여받은 판도라는 그 안을 확인해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어느 날 항아리를 살짝 열어보고 말았다. 그러자 안에서 죽음과 병, 질투와 증오와 같은 수많은 해악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사방에 흩어지게 되었다. 판도라의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재앙으로 괴로워하게 되었다. 판도라는 허둥대며 항아리를 닫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모든 해악은 풀려나오고 만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항아리 안에 들어 있었던 희망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판도라 이야기의 원형이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 헤시오도스가 남긴 전승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나 의문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설들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판도라가 연 것은 온갖 좋은 것들은 가득한 상자였다는 이야기도 그 하나이다. 이 이야기에서 판도라는 제우스가 인간에게 준 성실한 선물이었고 상자는 신들로부터의 결혼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판도라가 부주의하여 항아리를 열어보고 말았기 때문에 좋은 것들은 모두 날아가버리고 유일하게 희망만이 남겨졌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왜 희망이 나쁜 것들의 항아리에 봉인되어 있었는지는 역시 커다란 의문점이었던 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어느 때에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며 이것을 품고 있는 한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일은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헤시오도스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세 사람들은 제각각 이 이야기에 수정을 가했고, 현재 폭넓게 연상되고 있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유일한 희망'은 곧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구원'으로 인식되고 재앙을 초래한 여자 판도라라는 이미지를, 마지막 희망을 안고 일어서는 기특한 처녀 판도라로 변화시킨 것이다. 판도라는 고대 여신 이에 대한 감성의 차이는 이야기 속의 판도라(여성)의 취급에도 잘 나타나 있다. 헤시오도스는 원전(『신통기』, 『일과 나날』)에서, 요컨대 남자의 모든 재앙의 원인은 여자라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되풀이하여 여성을 멸시한다. 여기에는 헤시오도스 자신의 개인적 여성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황금 양피의 마녀 메디아도 그랬던 것처럼 여성은 그다지 좋은 역할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제우스로 대표되는 부권적 권위가, 대지모신을 대표로 하는 모권적 권위로부터 사회의 주도권을 빼앗았다는 고대 그리스 역사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 모성은 고대를 향한 반작용으로 부당하게 명예를 손상당했다. 판도라도 사실상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원래 대지의 여신, 생명을 잉태하는 모신의 다른 이름 중 하나였다. 헤시오도스 시대에서조차 제의나 이름이 이미 잊혀져버렸을 정도로 오래된 존재였던 것 같지만, 원래는 오래된 여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최초의 여자'로서 전승되게끔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하여 현재는 판도라라는 이름의 어원은 헤시오도스의 기술과는 매우 다르게 '전부를 주는 여자'였다는 게 정설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가 항아리에서 날려보낸 것은 원래 대지의 혜택(곡물 같은)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판도라 상자의 이야기에는 독자가 이처럼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게 만드는 공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 이외의 이야기가 녹이 슨 지금도, 판도라 상자는 살아남아 변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시켜 알맹이의 형태를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이 금단의 상자 전승은 앞으로도 역시 살아나갈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판도라의 상자 [Pandora Box] - 아름다운 재앙 (부활하는 보물)  
756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저작권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35  추천:0  2020-01-31
"이상문학상 불공정 때문에 활동 중단" 소설가 윤이형 입장 표명 2020.01.31.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상문학상 공정성을 문제삼으며 ‘작품활동 중단’을 선언한 소설가 윤이형.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제가 받은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작품활동 중단’을 선언한 소설가 윤이형(44)이 공식적인 입장을 31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밝혔다. ‘작품활동 중단’ 이유가 최근 이상문학상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 때문임을 밝히며 문학사상사에 해명과 사과, 운영 정상화를 요구했다. 윤이형은 “상을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 이미 상금을 받았고 그 상에 따라오는 부수적 이익들을 모두 받아 누렸다. 더불어 저작권 개념에 대한 인식 미비로 양도 문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제 작품을 그 일에서 떼어낼 수도 없게 되었다”며 작품활동 중단 이유를 밝혔다. 윤이형은 지난해 중편소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이상문학상은 매년 초 수상작을 발표하지만 2020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소설가 김금희·최은영·이기호 등이 ‘공정성 논란’을 제기하며 우수상 수상을 거부해 발표가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관련 기사) 김금희 등은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 조건으로 수상작품의 저작권을 3년 동안 문학사상사에 양도하도록 한 조항 등이 불공정하다고 문제삼았다. 문학사상사는 대상 수상작에 대해서 “대상 수상 작품의 저작권은 주관사가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이를 지난해부터 우수상 작품에도 요구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문학사상사 관계자는 “직원 실수로 대상 수상자에게 갈 서류가 착오로 우수상 수상자에게도 갔다”며 “공식 입장을 추후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저작권 양도 조항’. 윤이형은 “지난해 1월 이상문학상 수상 통보를 받은 직후 ‘대상 수락 및 합의서’에 서명했다. 작품의 저작권을 문학사상사에 양도하고 3년 뒤에 개인 작품집이나 단행본에 수록할 수 있지만 대상 수상작은 표제작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적혀있었다”며 “용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저작권’과 ‘출판권 및 배타적 발행권’을 구별하지 못했다. 자세히 보지 않았고, 그때까지는 문제의식이 없기도 했다. 또 우수상 수상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문학사상사 전 직원’의 말을 인용하며 “우수상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문학사상사에 묶어 놓는 부당한 조항은 지난 두 해만 적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문학사상사 회장이 우수상 작가들에게 보내라고 했다고 들었다”며 “작가로부터 저작권을 풀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풀어주었고, 들어오지 않으면 그대로 3년 동안 개인 작품집에 수록할 수 없도록 묶어놓는 것으로 진행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윤이형은 “활동 중단을 결심하고 청탁과 계약들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수치심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고, 더 이상 문학계에서 어떤 곳을 믿고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작가가 마음 놓고 일을 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나”라며 “더이상 제가 무엇에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부조리에, 범죄에, 권리 침해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계약금, 선인세 혹은 상금을 받았기 때문에 대응할 방법이 없어 찜찜한 상태로 일을 계속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혔다. 이어 “문학계에서 어떤 문제제기를 했을 때 연루된 작가들의 피해가 제대로 보상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기시감과 환멸이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윤이형은 “문학사상사는 이상문학상을 자의적으로 운영한 것, 우수상 수상자들의 저작권을 불공정한 방식으로 빼앗은 것, 형식상의 계약서를 보내며 거래하듯 상을 수여해 작가들에게 부당한 상황을 만든 것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상처받은 작가들과 독자들에게 사과하길 바란다”며 “상의 운영방식과 저작권 관련 방침을 개선해 정상적으로 운영할 것임을 약속해주기시 바란다”고 밝혔다. 윤이형은 이날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10일 문학사상사에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 마음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글을 쓸 수 없는 상태”라며 “올해 출간이 예정된 다른 작가들과 함께 참여하는 단편집 두 권은 이미 원고가 넘어간 상태여서 출간되겠지만, 앞으로 단독 저서 출판은 문단에서 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제 작품을 지킬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디를 믿어야할지 모르겠고,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무서운 마음이 크다”고 덧붙였다. 동료 작가와 독자들은 윤이형의 ‘활동 중단’ 소식에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소설가 김초엽은 “윤이형 작가님과 작품들을 너무 사랑해서 문학사상사에 더 화가 난다. 이 엄청난 손실을 어쩔 것인가”라고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밝혔다. 트위터 이용자 ‘마녀’(@VIOLET_RAI)는 “윤이형 작가님의 작품활동 중단은 한국에서 여성작가의 삶 뿐만 아니라 청년작가로서 지금껏 ‘관행’이 되어온 옳지 못한 절차에 대한 최후의 결정이다. 단지 이상문학상 만의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윤이형입니다’ 전문 보기 /이상훈 기자 /이영경 기자 
7564    시와 그림, 그림과 시 댓글:  조회:4036  추천:0  2020-01-30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림시     그림시에서 시인은 낱말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즉 말하는 화가이다. 그림이 눈으로 포착된 외부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시적 그림화 현상은 단번에 눈으로 감지되는 장면들 즉 일련의 시각적 단위들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각각의 단위는 바로 그림들의 목록으로 읽혀지게 된다. 작품들은 단번에 눈으로 파악해서 포착되어 질 것 같은 장면들, 말하자면 일련의 시각적 단위들로 나뉘어 지고 그래서 시의 구절들이 회화의 카탈로그 식으로 읽혀진다. 시각적이고 생생한, 세밀한 묘사와 더불어 표현이 풍부한 형상과 형태를 묘사하고 시간과 공간의 특수화 현상이 뚜렷하다. 근본적으로 시의 본질은 언어를 표현매개로 하는 반면 그림은 색을 창조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상호 관계는 부적절해 보이지만, 시인과 화가가 눈으로 지각된 외부 세계를 그릴 때 그 둘을 동일한 존재로 간주해 왔다. 시와 그림의 내적 동일화(identificationintime)의 개념은 모방이론에서도 확인된다. 즉 시는 현실의 모방에 있으며, 그림은 인간의 행위, 본질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행위의 모방에 다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호라티우스(Horatius)의 시 이론 이후에 시와 그림 간에 아주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이것들이 동일한 예술로 인식되어 응용되어왔다. 17세기의 페늘롱(Fenelon)은 시는 모방이고 그림이고 시인은 곧 화가라고 쓰고 있다. 그림시가 가능하기 위해서 시인에게는 시각의 고유 통찰 능력이 요구된다. 즉 통찰력있는 시선과 실체의 강렬한 관찰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화가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시인은 수많은 디테일로 장면들을 시각화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시적 장면들이 그림같은 장면들로 구성되게 된다. 특히 17세기 바로크 시인들에게 보통 시의 장면이 사상의 암시나, 하나의 상징, 혹은 세계관의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바로크 시인들은 장면의 심오한 가치 부여보다는 그런 장면의 조형적이고 회화적인 면이 더 민감하다. 만일 시인이 한 장면을 세밀하게 그리려고 한다면 화가가 그 장면의 모든 부분을 동시에 캔버스 위에 제시할 수 있는데 반해, 시인은 반드시 전체의 다양한 부분 부분의 디테일을 늘어놓아야 한다. 즉 시인은 일련의 묘사적 싯구로 제시하는 수밖에 없다. 이와같이 바로크 시인은 시의 전체적인 조망을 이미지와 윤곽을 병렬함으로써 짧고 적은 색의 터치를 더하고 누적시키는 점묘파화가들의 방식으로 묘사한다. 시의 그림화가 바로 시와 그림의 구별을 없애도록 해 주었다. 또 그림시 이론은 더욱 확산되었고 17세기 바로크 시의 이론에도 더욱 영향을 비치게 되었다. 말하자면 17세기 시인들은 시와 그림의 동화를 시도했는데, 이에 대해 르네 웰렉(Rene Wellek)과 오스틴 워렌(AustinWarren)의 시와 그림의 '교신'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생-따망(Saint-Amant)은 시와 그림의 내밀의 동화를 시도하면서 이 두 예술의 관계를 같은 부모의 피를 받은 사촌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 시적 원칙을 해설하고 주석하는 기준점으로 그림, 혹은 회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회화에 대한 정통한 지식과 기법, 그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바로 그의 시적 글쓰기에 깊이 스며들어있는데, 진정한 시가 대가의 모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창성에 있다는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그의 지론은 시와 그림의 비교를 통해서 설파된다. 근본적으로 시인은 직접적인 생동감이나 색깔의 공간성을 제시하는 화가와 동일할 수는 없으나,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화가를 모방하려고 할 수 있다. 회화시는 그림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문학적 시도로 머물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수사적 기법을 통해서 자기가 재현하고 있는 것의 특수성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키고자 한다. 생-따망은 자신을 화가로 간주하면서 그는 화가와 같은 역할 즉 오브제를 보면서 스케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화가는 시인보다 그만큼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시인은 시적 주제에 있어서 더 광범위한 영역을 모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시인은 말하는 붓이 가는 뛰어난 필치로 보이지 않은 것, 소리, 생각, 화음,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그리는 화가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시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정선의 그림 속에 살아나는 이병연의 시     이병연의 시, 「소악후월」 이병연의 시가 없으면 정선의 그림이 무색해지고, 반대로 정선의 그림이 아니면 이병연의 시가 빛을 잃었으리라 생각될 만큼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었다. 친척 한 사람이 이병연의 집을 방문했다가 서재 가득 쌓아 놓은 중국 서적을 보고, 어떻게 이 많은 서적을 수집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내 친구 정선의 그림이 중국에서 인기가 있어 고가로 팔린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와 친구 사이로 많은 그림을 얻었다. 사행으로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정선의 그림을 팔아서 책을 사 오라 했다. 그렇게 모은 책들이다.” 정선의 그림이 중국에서 고가로 거래되었다는 사실과, 이병연이 정선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였다는 사실을 잘 설명하는 일화이다.   정선, 「소악후월(小岳候月)」1740~41년, 비단에 채색, 23.0×29.2cm, 간송미술관 소장. 이들 두 사람은 비록 표현 매체가 시와 그림으로 달랐으나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약속 아래 서로의 작품을 비평, 격려, 추만(推輓)하여 조선 예술사상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 냈다. 시와 그림을 바꾸어 보자는 뜻을 형상화한 시화상간화(詩畵相看畵)를 진경산수가 아니라 이념산수로 표현한 사실도 재미있다. 시냇가 풀밭 노송 아래 두 노인이 시축과 그림을 놓고 비교하며 담론하는 한유(閒遊)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다음과 같은 이병연의 화제(畵題)가 실려 있다. 나와 겸재는 시가 가면 그림이 오도록 왕복을 기약하여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자 하였다. 시와 그림의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는가. 시는 가슴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서 이루어지니, 누가 쉽고 누가 어려운지 모르겠더라. 정선, 「시화상간(詩畵相看)」1740~41년, 비단에 채색, 29.0×26.4cm, 간송미술관 소장. 이처럼 이병연의 시풍은 평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라 평생의 지기이며 당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예술 경향과 연관이 있다. 또한 당시에 고조되었던 문원(文苑)의 대세를 반영했다고 보아야 하며 스승인 김창흡으로 소급해 보아야 한다. 김창흡은 형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과 함께 문명을 날렸는데, 노론학파가 18세기 초에 와서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는 분기점에서 낙론의 핵심 인물이 된 학자이다. 18세기 후반 정조는 이들 형제의 시문(詩文)을 이렇게 평했다. “농암 김창협의 시문은 우아하며 깨끗하고, 삼연 김창흡의 시문은 맑고 고담(古淡)하다. 김창흡은 부귀한 가문의 자제로 초야에서 종신(終身)하였으니, 그 형제의 시도 그러하다.” 형 김창협의 시문이 우아하고 깨끗한 데 비하여 동생 김창흡의 시문은 맑고 고담하다는 평은 형제의 시문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평가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문체가 식암 김석주(息庵 金錫胄, 1634~1684년)와 농암 김창협에 이르러 일변했고, 조선의 문폐(文弊)1)가 여기서부터 유래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체는 김석주와 김창협에 이르러 일변하여 한 세상을 풍미하니 모두 이를 좇았다. 대개 전 시대 사람을 능가한 듯싶지만 원기(元氣)는 아득하여 부진하였다. 문폐가 이에서 점차 생겨났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학문이나 학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두 사람의 문체만을 모방함으로써 생겨난 부작용을 지적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문체가 정치의 흐름을 반영한다는 발상을 하고, 문풍복고(文風復古)의 기치로서 문체반정(文體反正) 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문화 정책을 탕평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으로서, 노론 벽파 계열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김석주나 김창협의 문체가 비판 대상이 된 것은 정조가 표방하는 고문(古文), 즉 순정문(醇正文)의 문체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고문의 문체에 위배된다는 것은 조선적 색채가 강한 문체를 구사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니, 두드러진 조선풍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속담, 속어, 조선의 제도, 지명, 관명 등 문물 제도가 시어로 구사 되는 문풍을 비판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선의 그림 속에 살아나는 이병연의 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7563    시와 문장부호 댓글:  조회:2866  추천:0  2020-01-30
시는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과 함께 문학의 한 갈래입니다. 다른 장르들과는 다른 시 만의 특징이 있다면 운율이 있다는 것과 가장 함축적이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특징 외에도 언어에 대한 변형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도 시가 가지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김영랑 시인의 시 가운데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과 같은 시구를 예를 들어 볼게요. '찬란한 슬픔'이라는 구절은 사실상 말이 안 되는 표현이죠. 슬픔이 찬란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시적 기교인 역설을 이용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또한 문장 전체가 '나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어순이 도치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문학적인 장치로 어법을 파괴한 것이지요.   제가 위와 같은 설명을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시에 부호(, . ! ?)를 쓰는 것은 시를 쓰는 시인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문장부호 외에도 다른 기호나 화살표와 같은 것을 시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변형이나 형식에서 자유로운 것이 바로 문학 장르 가운데도 시라는 장르입니다. 심지어 그림을 시에 삽입하는 시인도 있지요. 오히려 기본적인 문장부호보다 훨씬 폭 넓은 일상 생활의 기호나 상징들이 시에 들어갑니다.    한국 현대시들을 살펴보면 부호가 많이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부 교수나 시인들이 시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에게 시의 감정을 문장 부호로 나타나게 하는 것을 막고 시어를 통해 감정이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문장부호를 쓰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1.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2.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의 시의 일부입니다. 1번과 2번 중에 어디가 더 절절하게 다가오나요? 느낌표가 붙어 있는 2번일 겁니다. 시에는 느낌표가 됐든 어떤 다른 부호가 됐든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실제로도 많은 시들이 그렇게 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이나 시인의 강의에서 쓰지 말라고 한 것은 교육적 차원일 겁니다. 강의를 듣고 있다면 그 가르침에 따라 쓰지 않고 시어를 통해서 시를 쓰는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시작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영국 시인들은 수백 년 전부터 시(운문)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고 했는데 구어체시(운문)를 완성하려면 당연히 붙여야 하지요.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시(운문)란 뜻은 운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운문)를 말하는 거니까요.   현대시에서 말하는 운율의 정체는-대한민국에서 잘못 가르치는-음률(리듬)적인 것이 아니라 [고아한 품위가 있는 기상적 개념]이랍니다. 그러므로 시(운문)는 그저 심상이나 좋은 느낌 따위를 서술하거나 묘사한 작문(시)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진정한 시(운문)는 고아한 품위가 있는 기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문장만을 뜻하는 거랍니다.   영국 시인들이 쓴 구어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 한글로도 구어체 시를 써 보면   저절로 여러가지 부호를 사용하게 된답니다.   한글로 된 어떤 시 문장이 구어체 시인지 증명도 못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설도 많은데 잘 생각해보시길.   참고로 한글로 된 대표적 구어체시 몇 편을 제시하면 이상님의 , 김수영님의 , 윤동주님의 , 이육사님의 , 김영랑님의 등등.  
7562    [시공부 101] - 5... 댓글:  조회:2992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누가 향가를 지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글자 옷을 입은 민요, 향가 향가를 짓던 신라의 지식인은 누구? 스님이 지은 아름다운 10구체 향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비평과 소통 고등학교 국어Ⅰ 작가의 개성 이해와 작품 감상 향가는 향찰로 기록되었다는데, 한자를 모르고는 향가를 지을 수 없었겠네요. 그렇다면 향가는 대개 어떤 사람들이 지었나요? 그리고 향가는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나요? 글자 옷을 입은 민요, 향가 향가는 향찰로 썼기 때문에 한자를 아는 사람이 기록하거나 창작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야만 향가를 지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향가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 의해 창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해 오는 향가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은 「서동요」입니다. 이 노래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요로 불리던 것이 누군가에 의해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서동요」 외에도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풍요」, 월명사가 지은 「도솔가」, 견우 노인이 지었다는 「헌화가」 등은 모두 형식이 「서동요」와 비슷했습니다. 아주 짧은 4구 형식의 노래인데 이를 두고 4구체 향가라고 부릅니다. 결과적으로 신라 향가는 민요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향가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4구체였던 향가가 그 두 배인 8구체 형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8구체 향가로는 「처용가」와 「모죽지랑가」가 있습니다. 「처용가」는 처용이 아내를 범한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서 지어 부른 노래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득오곡이 부른 노래이지요. 8구체 향가는 두 작품 이외에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습니다. 신라 향가 중에서 가장 발달된 형태는 10구체 향가입니다. 10구체 향가는 8구체 향가에 2구를 덧붙여 만든 것인데 마지막 2구의 첫머리에는 ‘아아’, ‘아으’ 같은 감탄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10구체 향가의 형태는 4구—4구—2구,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지요. 어떤 학자는 이처럼 세 부분으로 나뉘는 형태가 이후에 초장—중장—종장의 형태를 갖춘 시조의 형식으로 발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답니다. 신라 향가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형태는 10구체 향가로서 ‘사뇌가’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향가를 짓던 신라의 지식인은 누구? 이제 여러분이 처음 제기했던 질문, 향가의 작가는 누구였는지 밝혀 보겠습니다. 민요의 형식인 것을 배제하면 향가의 작가는 대개 화랑과 승려가 많았습니다. 특히 10구체 향가는 대부분이 이들에 의해 창작되었습니다. 신라가 화랑의 나라였고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였기에 화랑과 승려가 지은 작품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향찰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지식인층이었기에 무난하게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이 지은 아름다운 10구체 향가 자, 이제 10구체 향가 중에서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만한 작품 한 편을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입니다. 이 작품은 죽은 누이의 제사를 지내며 애도의 뜻을 담은 작품입니다. 생사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월명사, 「제망매가」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누이를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를 지은 사람은 월명사로 신분이 승려였지만 혈육에 대한 정은 남달랐습니다. 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깊이 상심을 했던 것입니다. 3~4구의 “나는 간다는 말도 /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에서 ‘나’는 바로 죽은 누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누이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이라는 구절은 누이가 일찍 세상을 떠났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누이가 어려서 죽은 것이 시인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은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 삶에 대한 무상감을 자연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온저”라는 말에서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가는 곳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고 느끼고 있지요.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혈육을 잃은 슬픔을 극복했을까요? 답은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9구에 제시된 ‘미타찰’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로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를 가리킵니다.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의 ‘아미타유스’에서 온 말로 ‘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이란 뜻입니다. 한자로는 무량수, 무량광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절에 가면 흔히 무량수전이라는 건축물을 볼 수 있지요. ‘아미타’는 원래는 도를 깨우치던 보살이었습니다. 오랜 수행의 결과 현재는 극락 세계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아미타불이 있는 미타찰은 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세계입니다. 시인이 “미타찰에서 만날 나”라고 표현한 것은 일단 누이가 ‘미타찰’로 갔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며, 자신도 언젠가 불법을 닦아 미타찰로 갈 것이라는 의지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도를 닦는 것이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결국 시인은 혈육을 잃은 슬픔을 누이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가 읽고 쓰는 시에 못지않게 격조 있고 아름다운 시이지요? 이처럼 신라 향가, 특히 10구체 향가는 정제된 형식미를 갖추고 아름다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해 낸 우리 문학의 유산입니다. 신라는 불교 국가였으니 불교적인 노래가 많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노래가 있을까요? 신라 향가 중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는 「원왕생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신라 문무왕 때 ‘광덕’이 지은 작품으로 “두 손을 모아 / 원왕생 원왕생 /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소서”라는 구절에는 극락왕생을 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정서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또 다른 신라 향가 「도천수관음가」에도 ‘천수관음’ 앞에서 아이의 눈이 뜨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관련이미지 12 이미지목록 이전     , 《삼국유사》에서"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0912_000_1/20120308234646340_H1FWKHLYA.jpg/ca4_146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3" />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삼국유사 중 도솔가 본문삼국유사 권5에 실려 있는 월명사의 도솔가 본문이다. 1989년 2월 촬영.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누가 향가를 지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61    [시공부 101] - 4... 댓글:  조회:2868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한글 이전에도 우리말 표기법이 있었다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다 향찰의 실제를 보자 “선화공주주은” “타밀지가량치고” 향찰은 왜 고려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을까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이해와 해석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신라 시대에는 향찰을 통해서 우리말을 표기했다고 하는데 향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말은 한자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가 많기는 하지만 한자로는 적을 수 없는 고유어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한자로 문장을 이룬 한문과 우리 문장의 어순은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는 1443년에야 만들어졌지요. 그전까지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사용하면서도 글자는 한자를 쓰는 이중적인 언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노래와 시까지 한자로 적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한자로 표현하는 순간 우리말이 지닌 고유한 느낌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시를 영어와 같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고유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지요. 신라 시대 때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향찰입니다. 향찰이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는 방법이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는 한자를 이용해서 우리말을 적을 수도 있겠다는 참신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향찰의 실제를 보자 여러분도 우리나라 도로 표지판에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을 본 적이 있지요? 우리말의 발음과 비슷한 해당 영문자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향찰 표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다만 로마자가 소리만 빌려 온 것에 비해 향찰은 뜻까지 빌려 온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려운 작품이 아니니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善花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남 몰래(그지) 결혼해 두고 薯童房乙(서동방을) 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서동요」 이 작품은 백제 30대 임금이었던 무왕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노래입니다. 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은 서동이었지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연못가 근처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곳의 용과 정을 통해서 서동을 낳았다고 합니다. 서동이란 이름은 그가 어릴 때부터 마를 팔아서 생활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고 합니다. 그 노래가 바로 「서동요」입니다. 이 노래가 유행가처럼 퍼져 나가 선화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쫓겨난 그녀를 서동이 아내로 삼습니다. 이후 서동은 집 근처에서 발견한 금을 진평왕에게 보내어 사위로 인정받았으며 차차 인심을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 그럼 이제 한자로 표기된 향찰을 우리말로 읽어 볼까요. “선화공주주은” 일단 1구의 선화공주와 3구의 서동방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라 향가는 현대 시의 ‘행’에 해당하는 것을 ‘구’로 부릅니다.) 어차피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1구의 한자를 읽으면 “선화공주주은”이 됩니다. 이때 ‘主’는 ‘주인 주’ 자이지요. 따라서 ‘主’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님’, 아니면 존경과 사랑의 대상을 가리키는 ‘임’과 통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主’는 ‘주’라는 소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임’이라는 뜻을 빌려 온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隱’은 ‘숨을 은’ 자인데, 여기서 뜻을 빌리면 의미가 이상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이 글자는 뜻을 빌린 것이 아니라 ‘은’이라는 소리를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1구는 ‘선화공주님은’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타밀지가량치고” 두 번째 구까지만 살펴볼까요? 두 번째 구는 한자를 “타밀지가량치고(他密只嫁良置古)”로 읽을 수 있습니다. ‘他’는 남이라는 뜻을, ‘密只’는 ‘그윽할 밀’과 ‘다만 지’인데, 이 중에서 ‘密’ 자는 뜻을, ‘只’ 자는 음을 빌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지’라는 단어로 해석했지요. ‘그지’라는 말은 ‘그윽하게’의 옛 표현이며, ‘몰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嫁’는 ‘시집가다’라는 의미이고, ‘置’는 ‘두다’라는 의미이므로 두 글자는 모두 뜻을 빌린 글자입니다. 나머지 글자는 모두 한자의 음을 빌려 왔지요. 여러분이 익히 아는 쉬운 글자 ‘古(고)’의 의미는 ‘옛’이지만 작품에서는 ‘옛’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고’라는 음만 사용되었지요. 이처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쓰는 것이 향찰입니다. 향찰은 왜 고려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을까 향찰은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리기는 했지만 시가를 표현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향찰로 표기된 시가를 향가라고 부르지요. 비록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라 향가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향찰 덕이 크지요. 하지만 향찰의 운명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려 시대에 가서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고려의 귀족은 향찰로 작품을 창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고려의 평민은 어려운 한자를 익힐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도 『균여전』에 실린 「보현십원가」라는 향가가 쓰이기도 했지만 이후에 계속 창작되지는 않았습니다. 향가는 후대 문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신라 향가는 고려 시대에 발생한 시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조는 초장 — 중장 — 종장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0구체 향가가 4구 — 4구 — 2구,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10구체 향가의 마지막은 ‘아아’, ‘아으’와 같은 감탄사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시조의 마지막 종장 3음절이 고정되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까닭에 시조가 향가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글 이전에도 우리말 표기법이 있었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60    [시공부 101] - 3... 댓글:  조회:2559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노래가 마법을 부린다고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노래는 힘이 세다 옛날 옛적, 가야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를 맞으라! 왕이여, 당신의 모습을 보이소서!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노래를 주문처럼 부르기도 한다면서요?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말이에요. 노래는 힘이 세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노래와 시에는 주술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주술이란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적인 힘에 의지해 인간 생활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노래와 시 속에는 어떻게 주술적 힘이 담기게 된 걸까요? 일단 노래는 반복적인 선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한 번만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는 없지요.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르는 새 반복적으로 부르게 되지 않나요? 특정한 가사말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것에 익숙해지고 노래에서 지시하는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담아 둘 것입니다. 광고에서 CM송이 사용되는 것을 보세요. CM송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CM송과 연관된 상품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처럼 노래는 인간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좀 더 자주 반복되거나 대다수 집단이 부르게 되면 강력한 주술성을 지니게 됩니다. 옛날 옛적, 가야에서는······ 고대에 부르던 노래 중에서 주술성을 지닌 노래로는 「구지가(龜旨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가락국(금관가야) 건국 설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육가야 중 하나로 다른 가야국과 비교해 볼 때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합니다. 가락국을 세운 사람은 김수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출생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나 신라의 박혁거세처럼 비범하고 기이했던 것입니다. 자, 이제 김수로 왕의 출생에 대한 설화와 그것과 관련된 노래 한 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아래 작품을 감상하겠습니다. 龜何龜何(귀하귀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 이 노래는 「구지가」라는 이름 외에 「영신군가(迎神君歌)」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영신군’이라는 말은 왕을 맞이한다는 뜻이지요. 즉, 「구지가」는 왕을 맞이하는 노래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를 맞으라! 이 노래가 불리던 시점에는 그 지역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나라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국사 시간에 가야가 삼국 시대에 가장 늦게 만들어진 나라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이 지역의 소국들은 서로 통합되지도 못했고 그런 까닭에 힘도 미약했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치해 줄 신령스런 통치자를 원했습니다. 때마침 그들이 사는 곳 근처, 구지봉 기슭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하늘께서 내게 명령하셨는데 이곳에 나라를 새롭게 하고 왕이 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산꼭대기에서 흙을 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를 맞으라”라는 것이었지요. 이에 부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지봉에 올라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여섯 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여섯 명의 귀공자로 변하여 각각 육가야의 왕이 되었지요. 그중에서 가장 큰 알에서 깨어난 사람이 김수로 왕이었다고 합니다. 김수로 왕에 얽힌 설화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구지가」는 왕을 고대하면서 백성들이 부른 주술성이 강한 노래였던 것입니다. 왕이여, 당신의 모습을 보이소서! 자, 이제 작품을 살펴볼까요. 한눈에 봐도 아주 짧은 작품입니다. 짧다는 것은 그만큼 반복하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서 주술성을 갖추기에 적합한 형태인 것입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북’은 오래전부터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물과 뭍을 오가는 존재이기에 사람과 자연, 사람과 신을 연결해 주는 상징물로 받아들여 졌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머리’는 지도자, 즉 왕을 뜻합니다. 따라서 “머리를 내어라”는 왕을 내어 주길 바라는 민중의 욕망이 표현된 것입니다. 자, 이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째서 ‘거북’과 같은 신령스런 존재에게 “구워서 먹으리”와 같은 위협적인 말투를 사용했던 것일까요.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이 시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민중의 강력한 욕구를 간절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민중의 욕망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른 것처럼 왕이 탄생했으니 말이지요. 이처럼 주술성을 갖춘 노래들이 과거에는 여러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맹세를 어긴 왕에 대한 원망을 담은 시를 나무에 걸었더니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신라 향가 「원가」도, 병을 옮기는 역신을 물리쳤다는 신라 향가 「처용가」도 모두 주술성을 지닌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지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란 어떤 것인가요? 「구지가」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노래를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았고, 또 다른 학자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동안에 불렀던 노래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 밖에 거북의 머리를 남성의 성기로 보고 고대인들의 성욕이 표현된 노래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래가 마법을 부린다고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59    [시공부 101] - 2... 댓글:  조회:2851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집단 가요와 개인 서정시 사이, 「공무도하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시, 「황조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고조선 사람들도 서정시를 알았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언제 지어졌는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집단 가요와 개인 서정시 사이, 「공무도하가」 우리나라는 한글이 창작되기 이전까지 모든 기록이 한자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린 향찰이 한동안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의 노래를 적는 데 활용되었을 뿐 거의 모든 기록물은 한자로 적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시 작품은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해동역사』에 실려 있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 고조선 때의 노래입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임은 마침내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 이 노래의 작가는 백수광부의 아내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수광부란 ‘머리가 하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노래의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그 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물론 이 노래를 부른 여인도 결국에는 남편의 뒤를 따라 물에 빠져 목숨을 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노래에 등장하는 백수광부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적인 인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는 인간과 자연을 이어 주는 무당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는데, 백수광부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적인 인물은 고조선 시대 단군 왕검과 같은 현실적인 지배 권력이 등장하자 자신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술에 가득 취한 채 마지막 굿판을 벌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백수광부를 술의 신, 그의 아내를 음악의 신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개인의 정서가 아니라 집단의 역사를 표현한 노래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시에서 백수광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내의 감정은 충분히 개인적인 정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별과 죽음, 슬픔과 그리움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요. 특히 ‘물’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물은 1구에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는 소재로 쓰였고, 2구에서 이별을, 3구에서 죽음, 곧 영원한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배경 설화에 따르면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여인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던집니다. 따라서 물은 죽음의 의미로만 끝나지 않고 만남과 재생의 의미도 갖게 되지요. 이처럼 「공무도하가」는 개인적인 정서를 담아낸 서정시로 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노래는 집단의 노래에서 개인적인 서정시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시, 「황조가」 「공무도하가」는 집단의 노래가 개인 서정시로 나아가는 형태였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개인 서정시는 언제 쓰인 것이며, 그에 해당하는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아마 고구려의 유리왕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면서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비 없는 자식’이라며 천대를 받고 자라다가 결국에는 아버지를 찾아와 마침내 고구려의 두 번째 왕에 등극합니다. 유리왕에게는 원래 송씨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한 사람은 화희로 고구려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치희로 한나라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유리왕은 동궁과 서궁을 짓고 두 사람을 따로 머물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유리왕이 사냥을 떠나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화희와 치희는 다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치희는 “너는 한나라 여인인데 어찌 이리 무례한가”라는 화희의 말에 부끄럽고 분해서 한나라로 돌아가 버렸지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리왕이 서둘러 치희를 쫓아갔지만 그녀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유리왕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돌아오면서 나무 그늘 아래에 쉬고 있을 때 마침 나뭇가지에서 꾀꼬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습니다. 유리왕은 그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워라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유리왕, 「황조가」 이 시는 전반부에는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경치가, 후반부에는 자신의 감정이 나타난 전형적인 선경후정 방식이 쓰였습니다. 경치를 제시하고 정서를 표현하는 작품은 이후로 줄곧 창작되지요. 1행에서 시적 화자는 암수가 서로 정답게 지내는 꾀꼬리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적 화자의 처지와 대비되는 존재이지요. 유리왕은 치희와 함께 돌아오지 못한 채 쓸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꾀꼬리’는 유리왕의 마음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황조가」는 남녀 간의 애정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소재를 개인적 체험과 정서에 바탕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서정시로 볼 수 있습니다. 「황조가」를 서사시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요? 「황조가」를 서사시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화희와 치희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을 부족 간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희로 대표되는 농경 민족과, 치희로 대표되는 수렵 민족의 분쟁을 다룬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어느 한 개인의 서정이 아니라 부족 간의 분쟁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려 낸 작품이라고 본다면 서사시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 서정시라는 것이 더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58    [시공부 101] - 1... 댓글:  조회:2674  추천:0  2020-01-30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사람들은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가설 하나 : 원시 시대 축제에 답이 있다 가설 둘 : 노동의 피로에 답이 있다 가설 셋 : 인간은 유희적 동물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 갈래의 이해 유튜브를 보면 잘하건 못하건 노래 솜씨 자랑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왜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리고 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게 된 건지 이유가 궁금해요. 가설 하나 : 원시 시대 축제에 답이 있다 인류가 노래를 처음 만들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원시 시대 때부터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 시기 사람들에게 하늘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자 삶의 축복을 기원하는 신앙 그 자체였습니다. 천재지변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만 천혜의 조건에서는 풍요로운 수확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 잘 보이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제천의식이라고 부르지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가 바로 이러한 제천의식이었습니다. 제천의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일단 원시 부족을 이끄는 제사장이 성스러운 의식을 집전했을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그곳에 제물을 올리고 절을 했겠지요. 추석이나 설날을 비롯해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리는 제사들을 떠올리면 그 형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요. 성스러운 의식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 즐기는 축제를 벌였지요. 이는 부족민의 화합을 위해서 필요한 행사였습니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즐거움을 누렸는데 이것이 바로 원시종합예술(Balad Dance)입니다. 원시종합예술에는 음악 · 미술 · 문학 · 무용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가 녹아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이 장단에 맞춰 부르던 소리가 음악으로 발전했고, 가사말은 시로 발전했으며, 몸동작은 무용으로, 분장이라든가 무대를 꾸미는 행위는 미술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시와 노래는 원시종합예술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가설 둘 : 노동의 피로에 답이 있다 노래와 시가 노동의 피로를 이겨 내고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피로가 사라지고 일의 효율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모차르트 효과라고 해서 음악이 인간의 지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의견까지 있었지요. 이처럼 노래와 시가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며 때로는 기쁘게 해서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 분포하는 ‘노동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동요는 민요의 한 형태로서 사람들이 노동을 하며 박자에 맞춰 소리를 내고 그 소리에 가사를 얹어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모내기철에 부르는 노래나 김매기할 때 부르는 노래가 그 예이지요. 이처럼 노래와 시가 노동하는 행위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설 셋 : 인간은 유희적 동물 시와 노래를 부르게 된 까닭이 인간이 지닌 놀이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목적 없이 행위 자체를 즐기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와 실러는 이러한 욕망을 유희 충동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명명하며 ‘놀이하는 인간’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위징아는 사람이 시를 짓고 문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 모두 유희 충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지요. 놀 줄 안다는 것은 인간과 그 밖의 동물을 구별 짓는 여러 가지 특성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하는 게임을 생각해 보세요. 프로게이머가 아닌 이상, 게임을 한다고 좋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성적은 떨어지고 그 때문에 어른들에게 눈총을 받고 사회 적응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게임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게임이 즐거워서입니다. 인간에게 게임을 즐기려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노래와 시가 탄생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당장 경제적인 형편을 나아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직업 가수는 조금 다르겠지요. 하지만 직업으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자기의 내면을 시와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돈이 되지는 않지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스스로 심리적인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래와 시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로부터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정시가 먼저 나왔나요? 서사시가 먼저 나왔나요? 고대에는 개인보다는 집단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서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집단의 의식이 노래로 표현되기가 쉬웠습니다. 또한 집단의 신화적 · 영웅적 내용을 시를 통해 널리 퍼뜨려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필요가 있었지요. 따라서 영웅이나 신화적 존재를 다룬 서사시가 개인적 체험과 정서를 다룬 서정시보다 먼저 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람들은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55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192  추천:0  2020-01-30
[안녕? 자연] 구조된 바다거북 배설물서 인간이 버린 쓰레기 ‘와르르’  2020.01.29.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아르헨티나 해변에서 낚싯줄에 걸렸다가 구조된 바다거북(오른쪽 붉은 상자)의 배설물. 인간이 버린 각종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낚싯줄에 걸렸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바다거북에게서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존재가 발견됐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가 그 정체였다. 라이브사이언스 등 해외 매체의 28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말 아르헨티나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한 남성은 싼끌레멘떼 델 뚜쇼 해변에서 낚싯줄에 걸린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바다거북을 발견했다. 그는 과거 현지 해양동물보호단체로부터 훈련받은 ‘낚싯줄에 걸린 해양동물 구조 방법’을 떠올려가며 조심스럽게 바다거북을 구조한 뒤, 곧바로 인근 구조센터에 전달했다. 구조센터 수의사들은 이 바다거북을 보자마자 심각한 ‘건강문제’가 있음을 눈치채고는 정밀검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바다거북의 배설물에 각종 쓰레기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바다거북의 배설물 안에는 사람이 버린 딱딱한 플라스틱부터 나일론 재질의 가방까지, 온갖 쓰레기가 포함돼 있었다. 무게는 13g 정도로 무겁진 않았지만 부피는 상당했다. 엑스레이(X-ray) 검사 결과도 비슷했다. 바다거북의 뱃속에는 미쳐 배설물로도 나오지 못한 각종 쓰레기가 가득했다. 수의사들은 이 바다거북이 문제의 쓰레기들을 해파리나 해초 등으로 착각하고 삼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수의사들은 약물 등을 투여해 뱃속에 가득 찬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제거하는 치료를 시작했고, 바다거북은 현재 건강을 회복해가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해양동물보호단체에 따르면, 바다거북이 구조센터로 이송된 것은 올 들어 벌써 세 번째다. 지난 12일에는 역시 바다거북 한 마리가 죽은 채 발견돼 구조센터로 옮겨졌는데, 이 바다거북의 소화기관 안에서도 다량의 쓰레기가 발견됐었다. 해당 단체의 한 수의사는 “해양생물이 쓰레기를 삼킬 경우 소화기관에 장애가 생겨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이러한 이유로 멸종위기의 바다거북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다거북의 개체 수가 위협을 받는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 따르면 바다거북의 알을 과도하게 남획하거나 다 자란 바다거북을 사냥하는 사람이 늘면서 바다거북 개체수가 급감했고, 결국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됐다. /송현서 기자 
7556    40여년 문학생애 신토불이... 모든 것 부질없어라... 댓글:  조회:1455  추천:0  2020-01-28
姓名 : 金胜钟 笔名 : 竹林 常用名 : 金胜钟 性别 : 男 身份证号 : 222423196312174218 民族 : 朝鲜族 年龄 : 56 出生日期 : 1963-12-17 籍贯 : 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和龙市 所属团体会员单位 : 延边朝鲜族自治州作家协会 何时加入团体会员单位 : 1998-06 主要从事文学门类 : 诗歌 受教育程度 : 专科 政治面貌 : 中共党员 本人行政级别 : 无 职称 : 无 工作单位以及职务 : 无 单位性质 : 其他,无 通信地址 : 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龙井市吉安街荣成胡同25号《新桥信息》报社 移动电话 : 13904481812 邮编 : 133004 单位电话 :   住宅电话 : 0433-3236785 主要工作经历 :   1984-07-01~1987-07-01 吉林省和龙市福洞镇中心小学校 任教员 1987-07-01~2005-02-01    吉林省和龙市农村商业银行 任科员         2005-02-01 ~ 自由撰稿人     编辑、组织工作成绩、获奖情况及重要影响 : 1987年7月获延边音乐家协会儿童歌谣优秀奖。 2004年8月获延边州艺术界联合会歌曲原创作品银奖。 2008年10月获延边作家协会诗歌创作委员会诗优秀奖。 2015年2月获延边作家协会网络诗文学奖。 2015年3月获“延边日报”海兰江文学奖。 因2013年度同人合诗集''两个村子的故事”出版时,本人筹私经费志援贰万元整人民币。 因2011年至2017年,连续7年促成延边作家协会和延边大学联合举办“中国朝鲜族大学生李陆史文学节”, 于2016年12月获功劳奖。2016年9月获延边作家协会第20届郑芝溶文学奖。 本人已发表诗歌60余万字,其中,已结集出版4本(其中2本诗集出版国外)诗集。 诗歌作品收录在中国朝鲜族高级中学校“朝鲜语文”自习读本教科书 。 诗集, 论著藏于中国中央图书馆、上海图书馆、清华大学图书馆、 中央民族大学图书馆。
755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쓰레기분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32  추천:0  2020-01-27
쓰레기 대란 막으려면?... 갈 길 먼 분리배출 2020.01.27.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올해부터 수도권 자치단체는 수도권매립지로 반입하는 쓰레기의 총량을 줄여야 합니다. 하지만 재활용 분리배출만 잘 하면 어려울 일도 아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리배출 실태를 LG헬로비전 양천방송 심다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양천구의 '모아모아하우스'를 찾았습니다. 주택가에서 나오는 재활용품을 분리해 버리는 곳입니다. 하지만 유리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플라스틱이, 캔 고철을 버려야 할 자리에 종이와 비닐이 가득 버려져 있습니다. [관리 주민 : 이거 봐요. 이거 넣는 곳이 아닌데 이렇게 버리니 되겠어요? 종이라고 써놨는데….] [주민 : (분리배출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완전히 좋다고 생각을 못 하겠어요. 안된다고도 생각하고 아직은 멀었다….] 실제로 쓰레기 처리 시설에 반입되는 물품을 살펴보면 분리배출 비율은 아쉬운 수준입니다. 양천 소각장에 들어오는 쓰레기 중 종이와 플라스틱과 같은 재활용품 비율이 56%에 달합니다. 재활용만 잘해도 쓰레기 처리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는 겁니다. 주민이 올바른 분리배출을 생활화하기 위해 가장 간단히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분리배출' 표시를 확인하는 겁니다. 제품의 용기나 포장재에 분리배출 표시가 있으면 재활용품으로 분리하고 없으면 종량제 봉투에 버립니다. 무엇을 어디에 버릴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것도 도움됩니다. 환경부의 '내 손안의 분리배출' 애플리케이션. 생선을 검색하자 생선뼈는 종량제 봉투에, 나머지는 음식물로 배출하라는 지시가 나옵니다. 분리도 중요하지만 버릴 때 제대로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재활용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언뜻 보면 플라스틱류에 제대로 분리돼 버려져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자세히 보니 이 플라스틱 용기 안에는 과일 껍질과 같은 음식물들이 같이 들어있습니다.  가정에서 버릴 때부터 안에 있는 내용물은 제거하고 물로 깨끗이 씻어서 버려야합니다. 결국 잘 분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방법을 숙지해 선행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플라스틱병에 붙어 있는 비닐은 서로 분리해 버리고, 아이스박스와 컵라면 용기 등 스티로폼은 내용물을 버리고 테이프 상표 등도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환경부는 '비우고 헹구고 분리하고 섞지 않는' 분리배출의 핵심 4가지를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분리배출만 잘해도 연간 종량제 봉투 약 3천억 원의 구매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재활용될 수 있는 물품들을 매립하거나 소각하는 비율까지 고려하면 올바른 분리배출로 인한 금전적 가치는 수조 원에 달합니다. 환경 보전을 위한 주민들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헬로TV뉴스 심다혜입니다.
7554    [그것이 알고싶다] - 12가지 띠 댓글:  조회:3879  추천:0  2020-01-25
  모두 12띠가 있다. 곧, 쥐띠·소띠·범띠·토끼띠·용띠·뱀띠·말띠·양띠·잔나비띠·닭띠·개띠·돼지띠가 그것이다. 띠란 “각 사람들의 심장에 숨어 있는 동물”이라고도 일컫는데, 이는 토템사회에 인간이 동물을 숭배하던 유풍에서 발생하였다. 삶을 같이 영위하는 동물은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인간과 유사·유관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곰을 신으로 믿는 부족은 곰이 자기 조상이라고 믿었고, 다람쥐를 신으로 믿고 있는 부족은 다람쥐가 자기 부족의 신이라고 믿었다. 한국 신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곰이라고 하는 동물과 환웅(桓雄)이 혼례식을 치른 것도 그와 같은 하늘의 질서(문화)와 땅의 질서(문화)간의 융합을 뜻한다. 인간의 종교는 숫자를 발견하면 좀더 과학화되고 정교화되었으며 체계를 세우게 된다. 1·3·5·7·9라는 양(陽)의 숫자와 2·4·6·8·10이라는 음(陰)의 숫자를 합치면 조화와 상생(相生)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이른바 음양이론이 그것이다. 우리말로 1은 ‘하나’이다. 하나는 하나[一]라는 뜻 이외에 크다·넓다·많다는 뜻으로 쓰인다. 더 위대한 발견은 0(空·無·zero)이라는 숫자이다. 0은 ‘무한대’의 수이다. 1도 많고 큰데 0을 더했으니 가장 큰 숫자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10이라고 하는 숫자는 하늘의 숫자(甲乙丙…)요, 12라는 숫자는 땅의 숫자(子丑寅…)가 된 것이다. 인간은 10진법을 기본적인 기수법(記數法)으로 생각해 냈으니 이는 인간의 손가락이 10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에서 생긴 존재요, 그 힘과 조화와 협력에 의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활관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천지의 힘, 곧 음양의 이치와 조화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 보았다. 이 같은 삶의 철학 때문에 하늘을 천신(天神), 땅을 지신(地神)으로 상정하여 자연계 동물마저 영수(靈獸) 또는 신수(神獸)로 숭배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12지와 결합된 12지수(十二支獸:12支 동물)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자신의 인생을 영수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에는 특히 불교의 영향이 컸다고 보는데, 약사여래의 12대원을 통달한 12선신(善神)인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에 대한 설정이 그것이다. 궁비라대장(宮毘羅大將)은 쥐인 자신(子神)으로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원(願)을 가진 신이고, 벌절라대장(伐折羅大將)은 소인 축신(丑神)으로 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을 가진 신이며, 미기라대장(迷企羅大將)은 호랑이인 인신(寅神)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며 결핍되지 않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고, 안저라대장(安底羅大將)은 토끼인 묘신(卯神)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다. 또 안비라대장(安備羅大將)은 용인 진신(辰神)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을 지어 모든 계율을 지키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고, 산저라대장(珊底羅大將)은 뱀인 사신(巳神)으로 모든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근(根)이 완전케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며, 인달라대장(因達羅大將)은 말인 오신(午神)으로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부처의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고, 파이라대장(跛伊羅大將)은 양인 미신(未神)으로 일체 여인으로 하여금 모두 남자가 되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다. 그리고 마호라대장(麻呼羅大將)은 잔나비(원숭이)인 신신(申神)으로(四摩의 하나) 외도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을 포섭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며, 진달라대장(眞達羅大將)은 닭인 유신(酉神)으로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고, 초두라대장(招杜羅大將)은 개인 술신(戌神)으로 일체 중생의 기갈을 면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며, 비갈라대장(毘羯羅大將)은 돼지인 해신(亥神)으로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얻게 하려는 원을 가진 신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통일신라시대 경주 원원사지(遠願寺址)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진덕왕릉(眞德王陵)·김유신묘(金庾信墓)·경덕왕릉(景德王陵)·경주 괘릉(慶州掛陵)·흥덕왕릉(興德王陵) 등 능묘(陵墓)의 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나, 고려 태조와 그의 비 신혜왕후의 능인 현릉(顯陵)과 공민왕릉인 현릉(玄陵)의 호석과 그 밖의 조각물, 조선시대 능묘의 호석, 현실(玄室) 내부의 벽화, 사찰의 불화(佛畫), 민화(民畵), 도기·토기·목기 및 각종 장식물의 문양에 나타난 12지 그림의 모습은 불교의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12띠는 한 개의 시간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12시간·12달·12성좌 등 인간이 타고 넘어가야 할 파장이 12를 주기로 하고 있음을 뜻한다. 예컨대 음력 12달에는 12동물이 각각 배속되어 있다. 1월은 범, 2월은 토끼, 3월은 용, 4월은 뱀, 5월은 말, 6월은 양, 7월은 잔나비, 8월은 닭, 9월은 개, 10월은 돼지, 11월은 쥐, 12월은 소이다. 어떻게 보면 띠란 고리나 매듭이나 환대(還帶)를 의미하기도 한다. 음[地·支]과 양[天·干]이라는 큰 고리 속에서 60갑자(甲子)라고 하는 큰 주기가 생기고, 60년은 다시 12년을 주기로 하는 고리(12띠)가 5회 반복된다. 띠는 시간의 개념에서 공간의 개념으로까지 발전한다. 10간(干)이 해요 몸통(밑둥)이라면, 12지(支)는 달이요 가지에 해당한다. 10간 12지가 자연의 진리를 지배할 뿐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믿었다. 관상에서 인상(人相)을 12부위로 나누는 것이나, 국악에서 12음역(音域)으로 음계를 나누는 것이나, 평시조에서 12번 쉬면서 창을 하는 것이나, 무가나 판소리가 12마당으로 이루어지는 것 등등이 모두 같은 사고법에서 출발하였다. 중국 문헌에는 황제(黃帝) 때 띠가 생겼다고도 하고, 노자(老子)가 10간을 장자(莊子)가 12지를 만들었다고도 하나, 곽말약(郭沫若)은 중국 12지의 근원을 고대 바빌로니아의 황도(黃道) 12성좌(星座)의 영향에서 찾기도 한다. 인도의 10진법과 불법을 받아들인 국가마다 자국 문화의 환경이나 형편대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갔다. 곧, 같은 띠라 할지라도 그 동물이 활동하는 시간대(帶)나 장소·방위에 따라 동물이 바뀌기도 한다. 몇 개국의 띠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한국·중국·일본: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몽골족: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쥐·소 이족:닭·개·돼지·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 그런데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는 아예 수신(水神)인 고양이가 들어앉아 있는데, 이는 지역적·종교적 상황 때문이 아닌가 추단해 볼 수 있다. 한편, 태국의 띠는 한국의 띠 순서와 같지만 마지막 띠가 돼지가 아니라 코끼리[象]로 되어 있다. 심지어 일부 이족의 띠 속에는 개미띠까지 있다고 하니, 그것은 그 문화의 환경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화에 나타난 각 띠의 모습과 성격·기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달에는 꺼져 가는 달에다 물을 채우는 만월보살(滿月菩薩)이 있었다. 그러나 달에는 암흑의 신인 마귀들이 들끓어 광명의 물을 퍼부으면 모두 빨아먹곤 하였다. 신이 광명의 물을 길러 가는 동안 인간세계는 암흑세계가 되는 것이다. 마침내 광명보살은 광명의 물을 먹어 치우는 악마를 퇴치하고자 쥐신이 되어 내려왔다고 한다. 또 다른 내용은 아득한 옛날 부처님(하느님)이 뭇 짐승을 초청하였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나한테 세배를 와라, 12등까지 상을 주마.” 하고 약속하였다. 달리기 시합이라면 소는 자신이 없었다. 우직한 소는 그믐날 밤에 일찍 출발하였다. 눈치 빠른 쥐가 이를 보고 잽싸게 소 등에 몰래 탔다. 소가 하늘나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날쌔게 뛰어내려 쥐가 1등을 하여 오늘날의 띠 순서로 안배되었다고 한다. 쥐는 한국의 천지창조신화에서 현자(賢者)의 위치에 서 있다. 천지창조 때 미륵이 탄생하여 해·달·별을 정돈하였다. 그러나 물과 불의 근원을 몰랐기 때문에 생식(生食)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새앙쥐를 붙잡아 볼기를 치면서 “물과 불의 근원을 아느냐?”고 물었다. 새앙쥐는 “가르쳐 드리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미륵은 “세상의 모든 뒤주를 네가 차지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불의 근원은, 금정산에 들어가서 한쪽이 차돌이고 한쪽이 무쇠인 돌로 툭툭 치면 불이 날 것입니다. 물의 근원은, 소하산에 들어가면 샘물이 솔솔 솟아나 물의 근원을 이룬 것을 알 것이요.” 하였다. 이때부터 이 세상은 물과 불을 쓰게 되었다. 그런 후에 미륵은 인간을 만들었다. (손진태, 조선신가유편) 이 글은 쥐가 물과 불의 근원을 아는 영물일 뿐만 아니라, 쥐의 생태적 근원을 밝히고 있다. 쥐는 인간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후에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자신의 활동 범위를 인정받은 영물이다. 오늘날 쥐를 혐오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신라 21대 소지왕 때 상자일(上子日)을 ‘백사를 삼가고, 조신하는 날’로 삼았던 것이나, 조선시대에 ‘자낭(子囊)’이라고 하는 비단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탄 곡식을 넣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일을 미루어 볼 때 쥐는 범상한 동물 그 이상이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12띠 동물 중 음양을 고루 갖춘 동물은 쥐뿐이다. 쥐는 앞발이 4, 뒷발이 5, 모두 9라는 서수(瑞數)를 갖춘 동물이기 때문에 맨 앞에 왔다는 설도 있다. 영국의 작가 더갈 덕슨은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라진다면 다음 주역은 쥐와 토끼일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거니와, 쥐는 현자(賢者)의 상징 이외에 다산(多産), 재물 등을 상징하고 있다. 쥐띠생의 성격은 보통 솔직 담백하다. 남들과 아주 쉽게 사귀고 근면하고 검소하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무엇이든 아끼지 않는다. 겉만 보면 쥐띠생이 내성적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쥐띠생은 실제로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지만 자제력이 뛰어나다. 또한 보통 밝고 명랑하고 사교적이다. 또 친구와 동료와 가족들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쥐띠생은 보통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비난을 하고 비교를 하고 트집을 잡고 흥정을 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쥐띠생의 장애물은 과도한 야심이다. 그는 많은 일들을 빨리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 결과 그의 정력이 분산된다. 쥐띠와 화합하는 띠는 용띠와 잔나비띠(원숭이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말띠이다. 소는 불가에서 천수보살(千手菩薩)이 인간의 잘못된 눈과 손을 고쳐 주기 위해 소가 되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니 소신[牛神]에 해당한다. 원래 소띠생은 우직하고 믿음직하며 조용하고 규율을 잘 지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소띠생은 대체로 마음이 좋아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편이며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때로는 강한 편견까지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순진하게 보이지만 단호하고 논리적이다. 그의 명민함은 과묵하고 내향적인 겉모습에 의해 가려져 있다. 내향적인 기질이 강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그의 강인한 기질이 그를 당당한 웅변가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는 절도 있고 규율적인 생활을 즐기며, 질서를 존중한다. 그리하여 무슨 일이든 자기가 맡은 일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마무리한다. 애정 문제에서 매우 순진한 편이다. 사랑의 계략 같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은밀한 관계까지 발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소띠생들은 전통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소띠 남녀들은 구애기간을 오래 가지려 한다. 그러나 일단 그와 결혼해서 산다면, 그는 결코 상대방을 실망시키지 않고 일생 동안 충실하게 봉사할 것이다. 말보다 실천을 중요시하고 조용하고 참을성 많은 인간형이지만 일단 한번 화가 났다 하면 진짜 무시무시한 존재로 변한다. 이런 경우 그는 미련한 황소처럼 행동하며, 자기 앞길을 막는 사람이 있다면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때문에 아무리 만류해도 별 소용이 없다. 소띠생이 대체로 마음이 좋고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자기 견해를 바꾸게 만들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로 때로는 강한 편견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띠와 화합하는 띠는 뱀띠와 닭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양띠이다. 대륜보살(大輪菩薩)은 모든 별나라를 지배하는 물보살이며 신들의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보살이다. 대륜보살의 화신인 호랑이신(범신, 虎神)은 직접 수레바퀴를 타고 내려와 인간 세상의 권능을 평정한다. 원래 호랑이띠생(범띠)은 원기 왕성한 정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상상력이나 관심을 끄는 일이 있으면 부나비가 모닥불에 뛰어들 듯 몸 전체로 뛰어드는 버릇이 있다. 목전의 일이 정의의 길이요, 살기 위한 자기의 의무라고 여긴다면 이해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100%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야 만다. 역경에 처해 있더라도 새로운 도전이 절실하게 요구될 때 그는 항상 그것에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호랑이띠가 지닌 맹점도 없지 않다. 호랑이는 힘만 믿고 무모하게 달려드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용맹성을 과신한 나머지 만용을 부릴 때 무너지기 쉽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호랑이띠생의 충동성과 원기 왕성함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 대한 그의 정력과 사랑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극한다. 호랑이띠생은 모두가 인도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동물들과 재주하기를 즐기고, 또 잠시라도 자기의 상상력이나 관심을 끄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지 다 사랑한다. 쉴새없이 마구 설쳐대기를 좋아하는 호랑이띠생들은 보통 참을성 없이 행동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성격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조급한 결정을 내리기가 쉽다. 하지만 성미가 급한 만큼 진지하고 다정다감하고 관대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유머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범띠와 화합하는 띠는 말띠·개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잔나비띠이다. 수월보살(水月菩薩)은 인간 세상의 암흑을 막기 위해 달에 광명의 물을 붓는 달을 만드는 보살이다. 실제 달에 광명의 물을 붓는 일보다 달의 원형을 만드는 일에 더 흥미가 있는 보살이어서 물에 비친 모든 달이 실제 달이 되도록 노력하다가 상제의 미움을 받아 직접 내려가 그 달을 건져 오라는 명령을 받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고 한다. 환상의 달을 찾아 지상에 내려온 수월보살은 토끼신이 되었다. 토끼띠의 성격은 대개 상냥하고 온화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내성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그는 완벽성을 좋아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그를 훌륭한 학자로 만들 것이며, 훌륭한 법률가나 정치가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잘 우울해지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곧잘 주위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토끼띠생은 쉽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다툼에 빠져드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또한 내성적이며 예술가적 기질과 훌륭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또 완벽성을 좋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조용하고 온순해 보이는 자신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토끼띠생은 강한 의지와 거의 자기 도취적인 자신감에 취해 산다. 그는 아주 정확한 순서에 따라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이때에도 늘 겸손한 자세이다. 토끼띠생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겉보기에는 무관심한 기색을 나타낼 지 모르지만, 사실은 비판에 겁을 내고 있는 것이다. 토끼띠생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외부인들과의 거래에서는 피상적인 태도, 심지어는 무자비한 태도까지 드러내기도 한다. 토끼띠와 화합하는 띠는 양띠·돼지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닭띠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인간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구원의 목소리로 애원할 때 그 소리를 다 듣고 분석하여 소망을 이루어 주는 보살이다. 이러한 관세음보살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신이 되어 중생들의 소망을 정확하게 듣고 미처 들어 주지 못했거나 잘못 보고하여 혜택을 보지 못한 이들을 도왔다. 용띠생들은 도량이 크며 생명력과 힘이 넘친다.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요구하는 것도 많고 무모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자존심이 강하고 배타적이며 매우 직선적인 용띠생들은, 인생 초기에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높은 기준과 완벽성을 요구한다. 또한 강직하고 단호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재간이 있거나 교활하지 않다. 그는 쉽게 적응하고 교묘하게 협상하는 것을 싫어한다. 용띠생 여자는 모든 띠들 가운데 가장 귀부인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부녀참정권론자나 남녀평등주의자가 될 것이다. 용띠생 여자는 진지한 사람이다. 또한 완전한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강압적 수단으로 그녀를 다루려다가는 실패하기 쉽상이다. 용띠생은 좀스럽지도 않고 인색하지도 않다. 그는 불평을 많이 할지는 모르나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용띠생은 외향적이고 자연을 사랑하는 활동가, 여행가, 그리고 뛰어난 언변가 기질이 있다. 그는 뛰어난 영도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 또 어려서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살아가기를 고집할 수 있다. 용띠생은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이 아니며 또한 구두쇠도 아니다. 용띠생은 매우 적극적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이 설 때면 위험스런 정황에도 겁 없이 뛰어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의 느낌은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결코 동요하거나 겁을 먹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용띠와 화합하는 띠는 잔나비띠·쥐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개띠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무지한 인간들을 일깨워 지혜의 등불을 밝혀 주고 몽매한 중생들을 가르쳐서 올바로 살게 하도록 교육하는 보살이다. 복잡하고 오묘한 중생계에 내려와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를 실제로 체험하고자 관자재보살은 뱀신이 되어 문(文)을 행하게 되었다. 뱀띠생은 타고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나면서부터 신비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품위 있고 부드러운 말솜씨를 가지고 있으며 좋은 책과 음식, 음악, 연주 등을 좋아하고 인생의 모든 멋진 것들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뱀띠생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종교적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완전히 향락적이기도 하다. 말솜씨와 옷차림, 예의 등에서 세련된 뱀띠생은 불필요한 잡담이나 사소한 일에 끼여들기를 싫어한다. 그는 돈에 꽤 대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목적을 성취하고자 할 때는 인정사정 없기도 하다. 어떤 뱀띠생들은 말을 하는데 느리고 게으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그처럼 느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좀더 깊이 생각하고 따져서 자신의 견해를 정확하게 제시하려고 하기 위한 방법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는 매우 소유욕이 강하고 요구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가 사귀는 사람에 대해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다. 약속을 어긴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며, 그와 사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은 신경과민이 되기 쉽고 심지어 편집증까지 나타난다. 뱀띠생 여자는 전형적인 요부이다. 그녀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고전적인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쉽게 매혹시킨다. 뱀띠생 여자들은 세련된 옷과 변화 있고 고전적인 미를 즐기며 보석을 좋아하고 장신구들을 조심스럽게 고른다. 그녀의 상대에 대한 기준 역시 매우 높다. 그녀는 권력과 돈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다. 모든 뱀띠생은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뱀띠생들은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만 또한 바람기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하는 일에 언제나 관능적일 정도로 열심이기 때문에 붙여진 잘못된 평판이다.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뱀띠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강한 힘을 지닐 수 있다. 뱀띠생들은 나쁜 소식과 불운을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목표를 추구한다. 뱀띠와 화합하는 띠는 닭띠·소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돼지띠이다. 여의륜보살(如意輪菩薩)은 자유자재하는 여의주를 만들어 창고에 두었다가 아미타부처님의 지시를 받아 인도 환생하는 인간에게도 주고, 또 별나라의 신들에게도 주는 일을 맡은 보살이다. 인간들에게도 여의주를 주어 보냈는데, 자신의 복락에 취해 여의주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시궁창에 묻어 버리기 때문에 여의륜보살이 여의주를 하나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그 용도를 정확히 알려 주려고 말신이 되었다. 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발랄하고 인기 있으며 기지가 있다. 그는 잘생긴 용모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성적 매력이 많다. 실속 있고 따뜻하게 흥미를 끌며 매우 지각 있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의 변하기 쉬운 기질은 때때로 그 불 같은 성질과 성급함, 또는 고집스러움으로 나타난다. 예측하기 어려운 말띠생들은 쉽게 사랑에 빠지며 쉽게 식기도 한다. 자신감과 생기가 있고 정력적이며 충동적이고 때로는 경솔하기까지 한 말띠생은 멋을 내어 입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밝은 색상과 색다른 치레를 좋아하여 때로는 지나치기 화려하게 보이기도 한다. 말띠생은 훌륭한 진취적인 생각들을 해내고 새로이 활기찬 접근방법을 고안해 내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간다. 부정적인 면으로는, 말띠생은 충동적이고 완고하다. 그리고 불 같이 화를 내는데 자기 자신은 빨리 감정의 폭발을 잊는다. 종종 이러한 성격이 존경이나 신뢰를 잃게 하는 요인이 된다. 종종 잊기를 잘하고 얼이 빠져 있으며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말띠생은 규칙적인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 또 자신이 만드는 계획 외에는 잘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표준적인 일의 실행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말띠 여자들은 기운이 넘쳐 흐른다. 신랄하고 건방지지만 쾌활하다. 쉬지 않고 떠들며 운동을 뛰어나게 잘하고 운전에도 능숙하다. 말띠 여자들은 손톱을 깎으면서 전화도 받고 아이들에게도 신경을 쓰는 등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또한 부드럽고 달콤한 과일처럼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이성을 지니고 있다. 말띠와 화합하는 띠는 개띠·범띠이고, 불화하는 띠는 쥐띠이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헤아릴 수없이 많은 별나라와 인간 세상을 두루 살펴서 그 실정을 아미타부처님에게 보고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보살이다. 대세지보살은 별나라를 유리하다가 가장 복잡다단한 인간 세상을 시찰하고자 지상에 내려와 양신(羊神)이 되었다. 양띠생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슬픈 이야기에 쉽게 눈물을 흘리고, 온화한 태도에 부끄러움을 타기조차 한다. 장점으로는 예술적이고 사교적이며 창조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단점은 자신의 감정에 쉽게 압도되고 회의적이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양띠생은 부드럽고 동정심이 강하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쉽게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다. 엄격한 규율을 싫어하고 지나친 훈련과 비난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들과 동물들을 좋아하는 그는 자연에 가깝고 일반적으로 가정적이며 다양한 분위기에 잘 사로잡히고 강압에 의한 일은 잘 하지 못한다. 또 시간과 돈에 조급해 하지 않는다. 양띠생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항상 엄마 품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찾는다. 생일이며 기념일 등 특별한 경우를 결코 잊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양띠생은 기본적으로 겁이 많다. 그는 비관론에 빠지기 쉽고, 흔히 최악의 경우를 먼저 예상한다. 양띠생의 또 다른 단점은 자신에 관한 일은 무엇이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양띠 여성은 우아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과 어울리는 주름장식이나 장식품들을 쫓아다닌다. 그녀는 거의 무슨 일이나 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고 도자기처럼 연약하게 행동한다. 양띠 여성은 깨끗이 씻고 자신의 위생에 지극한 관심을 갖는다. 또 좋아하는 것을 솔직히 나타내고 그녀가 특별히 여기는 사람들, 막역한 친구들과 매일 밤낮으로 교제한다. 양띠생은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따라가는 경향이 있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는 마음씨가 좋고 친절해서 그가 가진 무엇이나 나누어 쓰기 때문이다. 또한 양띠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기분 상하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갈등을 피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둠으로써 결국은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양띠와 화합하는 띠는 돼지띠·토끼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소띠이다. 십일면보살(十一面菩薩)은 무수한 별나라의 신들이 방문할 때마다 그 별들의 성격과 변화에 따라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든 11개의 각각 다른 얼굴을 지닌 보살이다. 십일면보살은 수만 수억 개의 얼굴들이 있는 인간 세상에 내려가 그 얼굴을 다 접하여 평정하라는 명령을 받고 잔나비신[猴神]이 되었다. 잔나비띠생은 창조자이고 임기응변가이며 다른 사람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자극하는 사람이다. 즉, 모방할 수 없는 간계(奸計)와 매력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잔나비띠생은 재빠른 재치를 지닌 사람이므로 영리하고 융통성 있고 혁신적이다. 복잡한 문제들을 쉽게 풀 수 있으며 배우는 것도 아주 빠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잔나비띠생은 타고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타인을 존경할 줄 모른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아 중심적이며 자기 도취적이다. 또한 그는 어떤 사람이 승진을 하거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질 때면 언제나 시기심에 사로잡힌다. 돈과 성공과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잔나비띠생의 용감성은 남의 추종을 불허한다. 잔나비띠생의 다양한 성격 중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자질은 자신감이다. 그가 아무리 수줍음을 타고 유순해 보일지라도 내적으로는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잔나비띠생은 지능이 좋고 놀라운 기억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가열된다. 영리하고 재주가 좋은 것 외에도 잔나비띠생은 실제적인 면이 있다. 푼돈도 아끼는 그는 결코 모험하느라고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잔나비띠 여성은 생동감 있고 타고난 흥행사여서 어디를 가나 흥분과 자극을 몰고 온다. 쉽게 변화에 적응하며 남을 즐겁게 해주는 화술을 지녔고 막역한 친구가 될 수 있다. 또한 아주 경쟁심이 강하고 관찰력이 예리하며 빈틈이 없다. 무대의 불빛에 끌리며 재능 있는 연예인이 될 수 있다. 잔나비띠 여성은 유행을 따르기는 하나 바르게 옷을 입는다. 잔나비띠와 화합하는 띠는 쥐띠·용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범띠이다. 군다리보살(軍茶利菩薩)은 별나라마다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들을 무찌르고, 선을 지키는 보살이다. 군다리보살은 악마를 지키다가 깜빡 조는 순간에 들이닥친 악마들이 인간 세상을 혼란케 하고, 악마 행위를 자행케 했기 때문에 큰 칼을 빼들고 지상에 내려와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 닭신이 되었다. 닭띠생들은 의기양양해 할 많은 특출한 자질들을 지녔다. 그는 날카롭고 단정하며 정확하고 체계적이며 결단력 있고 곧은 성품에 민첩하고 솔직하다. 야만적인 것에는 아주 비판적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영리함을 과시하면서 논쟁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한다. 때때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으며 반대로 자신의 자존심이 흔들리면 참지 못한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닭띠생은 자아 중심적이고 고집이 세며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다. 그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저절로 획득한 탁월한 견해를 내보이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것은 그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확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닭띠와 화합하는 띠는 소띠·뱀띠이고, 불화하는 띠는 토끼띠이다. 정취보살(正趣菩薩)은 별나라의 신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 흥겹도록 예술을 연출하여 심오한 신비경을 펼쳐 주는 보살이다. 정취보살은 자신의 취향에 빠져 몰두한 탓에 별나라 신들이 모두 깨어나 불평을 늘어놓고, 또 불화가 생기므로 아미타부처님에게 노여움을 사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개신[狗神]이 되었다. 개띠생은 정직하고 지적이며 일관적이다. 그는 충성심이 강하며 정의와 공정함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개띠생들은 활기차고 매력적이어서 성적인 매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상냥하고 잘난 체하지 않는 이들은 지나친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므로 남들과 사이 좋게 지낸다. 평등주의를 지니고 있는 개띠생은 다른 사람과 타협할 줄 알며, 다른 사람들의 이유에 귀기울이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다. 개띠생들은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건 안 하건 사람들을 고정된 범주로 구분하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당신은 친구 아니면 적이고, 선한 사람이 아니면 악한 사람일 것이다. 친구에 대해서는 너그럽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냉정하다. 개띠생은 밝고 명랑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타고난 염세주의자이다. 그는 불필요하게 걱정하는 편이며, 모든 문제에 대하여 신경을 쓴다. 자신이 옳을 때는 고집스럽고 결코 굽히지 않는다. 편견 없는 개띠생들이 한번 마음을 결정해 버리고 나면 그들의 마음을 바꾸도록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개띠와 화합하는 띠는 범띠·말띠이며, 불화하는 띠는 용띠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우주의 본원인 시간과 공간의 주역으로 모든 별나라의 신들과 보살을 지휘·감독하는 아미타부처님이다. 인간의 생명은 얼마나 연장되어야 하며, 인간들에게 부여해야 할 공간의 한계는 어떤가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지상에 내려와 돼지신[猪神]이 되었다. 돼지띠생은 정직하고 솔직하고 단순하며 아주 강인하다. 이 해에 태어난 사람은 튼튼하고 용감하여 주어진 임무에 온갖 힘을 기울여 몰두한다. 그리하여 틀림없이 그 일을 끝까지 해낸다. 돼지띠생은 대결상태에서 남의 화를 돋우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꺼려 하며, 대개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둔다. 너그러운 돼지띠생은 항상 신중하게 움직여 타인과 탁월한 신뢰관계를 쌓는다. 그러나 또한 자유분방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부정적인 특성들이 드러날 때는 비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충실하고 사려 깊은 돼지띠생의 최고 재산은 신뢰성과 성실성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애교를 부리며 겸손할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약한 점을 너그럽게 보아주기를 바란다. 돼지띠생은 주저하는 성격 때문에 사기꾼이나 도적이 거의 없다. 그는 부당한 이득을 얻으면 몹시 불편해 하고 아주 사소한 잘못에도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의 주요한 결점은 자신에게나 가족 또는 친구들에게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양보함으로써 은혜를 베푼다. 돼지띠는 머리가 좋고 박식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깊이가 없다. 피상적인 가치로 사물을 받아들이며 평화스럽게 지내려고 주위 사람들에게 품은 오해들을 숨기지 않고 차라리 풀어 버린다. 돼지띠와 화합하는 띠는 토끼띠·양띠 ㅋㅋㅋㅋㅋ 넘 길어서 죄송...
755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제문제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789  추천:0  2020-01-24
  “인류 파국 100초 전”… 20초 더 당겨진 ‘운명의날 시계’  2020.01.24.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947년 첫 발표 이후 자정에 가장 가까워져 핵과학자회 “파국 순간, 분 단위서 초 단위로” 핵무기 위기·기후변화에 사이버세상 위험 추가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20년 ‘운명의 날 시계’를 발표하고 있는 핵과학자회. 핵과학자회 제공지구 파멸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 분침이 `자정 100초 전'으로 앞당겨졌다. 자정은 지구 파멸의 순간을 뜻한다. 미국의 핵과학자단체 ‘핵과학자회’(BAS)는 23일(현지시각) `운명의 날 시계' 분침을 ‘23시 58분 20초’로 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자정 2분 전'이었던 지난해보다 20초 앞당겨진 것이자, `운명의 날' 시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1947년 이후 자정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레이첼 브론슨 (Rachel Bronson) 핵과학자회 회장은 "우리는 이제 세계가 파국에 얼마나 가까와졌는지를 시간이나 분이 아닌 초 단위로 표현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인류가 처한 상황은 어떤 조그만 실수나 더 이상의 지체를 용납할 수 없는 참으로 위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분침을 앞당기게 한 요인은 크게 핵무기 위험과 기후변화 두 가지다. 핵과학자회는 핵무기 위험의 경우 지난해 북한과 미국의 협상이 헝클어지고 이란과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더욱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북한의 핵실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경노선이 대립하던 2018년 운명의 날 시계를 `자정 2분 전'으로 30초 앞당겨 경각심을 높인 바 있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 경쟁에 한창이던 1953년과 같은 시각이었다.  기후변화에 대해선 "기후 위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로 인해 크게 높아졌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강조했다. 2019년 지구는 전세계적인 기온 상승 요인인 엘니뇨(동태평양의 수온 상승) 현상이 없었음에도 사상 두번째로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핵무기 위험과 기후변화, 사이버 위협이 요인으로 꼽혔다.`지구 종말 시계'로도 불리는 `운명의 날 시계'는 핵전쟁 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1947년 미 시카고대 핵물리학자들이 주도해 고안했다. 원자폭탄 개발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세계의 핵무기 개발 상황과 국제관계 긴장 수준을 반영해 시계의 분침을 수정해 왔다. 2007년에는 기후 변화를 인류 멸망의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추가했다. 브론슨 회장은 "운명의 날 시계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엔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이 가장 큰 위협이었지만, 2007년에 우리는 이제는 기후변화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엔 인공지능, 유전자 편집, 사이버 공격 등 다른 파괴적 기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최근의 위협 요인으로 사이버 공격과 가짜뉴스를 꼽았다. 그는 "정보 환경이 복잡해지고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며 "이것이 다른 모든 위협 더욱 위중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브론슨 회장은 "운명의 날 시계는 대중으로 하여금 핵 안보와 기후변화에 관해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며, 정치 지도자들이 핵 무기에 들어갈 막대한 돈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7년 종말 시계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설정 시각은 자정 7분전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24차례 시간 조정이 이뤄졌다. 종말 시계가 자정에서 가장 멀어졌던 때는 냉전이 끝난 직후인 1991년이었다. 당시 분침은 자정 17분 전으로 후퇴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7552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도 "언 바람태"가 있는데... 홍보문제! 댓글:  조회:3546  추천:0  2020-01-24
겨울에 말린 명태, 묵호 '언 바람태'를 아시나요? 2020.01.24.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묵호 덕장마을 명품 '언 바람태' 겨울 상품으로 인기 [오마이뉴스 조연섭 기자] ⓒ 사진 조연섭기자 매년 겨울이 되면 추위 속에서도 명태 건조작업으로 분주한 마을이 있다. 바로 80년 역사의 동해 묵호항 언덕위 '덕장마을'이다. 이 덕장에서 겨우내 말린 명태를 '언 바람태'라고 부른다. 건조과정 중에 눈, 비를 맞아 검은 색을 띠는 먹태와는 달리 '언 바람태'는 붉은빛을 띤다고 한다.   ⓒ 사진 조연섭기자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눈과 비를 맞지 않고 순수 해풍으로만 단기간에 말려 맛과 영양이 잘 보존되는 것이 특징이다.   ⓒ 사진 조연섭기자 이 언 바람태를 건조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명태를 눈과 비를 피해 20일 정도 바닷바람으로 건조 시키고, 건조가 끝나면 한 쾌에 20마리씩 꿰는 관태 작업을 거친다. 출하 전에 모양을 곱게 잡아주기 위해 언 바람태를 옆으로 가지런히 눕혀 놓고 완성된 언 바람태는 한 마리째 또는 먹기 좋게 잘 찢어서 시중에 유통한다.   ⓒ 사진 조연섭기자 이 마을에서 덕장 일과 통장을 맡고 있는 신경훈(여, 50)씨는"예전에는 골목 집집마다 덕장으로 가득했는데 이제는 여덟 집만 덕장을 이어가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일에 참여하다 보니 일손이 턱없이 모자란다"고 전했다. 언 바람태를 먹는 방법을 물으니 "잘 찢어서 막장이나 마요네즈에 찍어서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라고 전했다.   ⓒ 사진 조연섭기자   ⓒ 사진 조연섭기자   ⓒ 사진 조연섭기자   ⓒ 사진 조연섭기자
7551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서도 "명절 대피소"가 있었으면... 댓글:  조회:3862  추천:0  2020-01-24
"이번 명절도 홀로"... 주목 받는 '명절 대피소'  2020.01.24.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이번 명절도 홀로"…'명절 대피소' 주목 연휴 기간, 수험생들 위한 '명절 대피소' 운영 20·30대 직장인 사이, 이색 '명절 대피소' 인기[앵커] 온 가족이 모여 함께하는 설 명절이지만 교통편이나 취업 준비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에 가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명절에도 쉬지 않고 운영하는 이른바 '명절 대피소'가 주목받고 있는데요 어떤 곳들이 있는지, 김대겸 기자가 돌아봤습니다. [기자] 학생들로 북적이는 이곳에 '명절 대피소'라는 문구가 눈에 띕니다. 연휴 기간 갈 곳 없는 취준생들을 위해 마련된 학습 공간인 이곳은 원래 어학원입니다. 취업 준비 등으로 고향에 가기 어렵거나 명절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고향행을 포기한 학생들에게 일종의 '피난처'를 제공합니다. [박동건 / 서울시 신림동 : 취업 준비는 잘 돼가느냐, 어디 지원은 했느냐 이런 걸 여쭤보시면 아무래도 그런 게 스트레스나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정지원 / 서울시 진관동 : (명절 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도 맞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시는 게 감사합니다.] 2, 3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이색적인 '명절 대피소'가 인기입니다. 은은한 조명을 비추는 열 평 남짓한 작은 동네 서점은 이번 연휴 동안 2, 30대들을 위한 휴식처로 활용됩니다. 현대 한국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관심사를 나누고, 따뜻한 차와 함께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연휴 동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 많으실 텐데요, 모르는 사람과 책에 관해 얘기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젊은 층 사이에 새로운 명절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작은 종이 위에 담아내는 하늘색 풍경,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과 함께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혼자 명절을 보내는 2, 30대가 모여 명절 음식을 나눠 먹고, 미술관도 함께 둘러볼 계획입니다. [조아라 / 서울시 월계동 : 그냥 있지 말고 주변에 혹시 나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기획을 하게 됐어요.] [장석호 / 서울시 신정동 : 이번 명절은 그림 모임도 하고 미술관도 가고 나머지 시간은 친구들과 만나서 (보낼 것 같습니다.)]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늘어나는 '명절 대피소'가 쓸쓸한 명절만은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YTN 김대겸입니다.
7550    한국 시인, 생명운동가 - 김지하 댓글:  조회:4295  추천:0  2020-01-23
두산백과 김지하   [ 金芝河 ] 요약 시인이자 생명운동가.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이다.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 등을 받았다. 출생-사망 1941.2.4 ~ 본명 영일 별칭 필명 형(灐), 반체제 저항시인 국적 한국 활동분야 문학(시) 출생지 전남 목포 주요수상 로터스상(1975), 세계시인대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1981), 정지용문학상(2002) 주요저서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별밭을 우러르며》 《이 가문 날의 비구름》, 산문집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옹치격》 《동학이야기》 《생명》 《대설, 남》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본명은 영일(英一)이며, 지하(芝河)는 필명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안고 있다.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원주중학교 재학 중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池學淳) 주교와 인연을 맺은 뒤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가한 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항만의 인부나 광부 등으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저녁 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되었고, 같은 달 2년 동안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복학해 이듬해부터 전투적인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4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난 뒤, 1966년 8월 7년 6개월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번역과 학생 연극에 참여하는 한편, 1969년 11월 시 전문지 《시인》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저항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단숨에 박정희 군사 독재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의 발행인·편집인이 연행되었고, 《사상계》는 정간되었다. 김지하는 이때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으나 국내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희곡 《나폴레옹 꼬냑》, 김수영(金洙暎) 추도시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였고, 1970년 12월 첫시집 《황토》를 발간하였다. 1971년 이후에는 천주교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계속 저항시 발표 및 저항운동에 전념하면서 연행과 석방, 도피 생활을 거듭하던 중 1974년 4월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4년 사면 복권되고 저작들도 해금되면서 1970년대 저작들이 다시 간행되었고, 이 무렵을 전후해 최제우(崔濟愚)·최시형(崔時亨)·강일순(姜一淳)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 《애린》 《검은 산 하얀 방》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 《이 가문 날에 비구름》,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 등이 있다. 1990년대에는 1970년대의 활기에 찬 저항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2년 그 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하였고, 1994년 《대설, 남》과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간행한 뒤, 1998년에는 율려학회를 발족해 율려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사면과 석방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로, 복역 중이던 1975년에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고, 1981년에 세계시인대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위의 저서 외에 시집으로 《꽃과 그늘》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생명》 《율려란 무엇인가》 《예감에 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지하 [金芝河] (두산백과) ================================/// 시인 김지하에 대해       김지하(金芝河, 본명 김영일(金英一), 1941년 2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박경리의 사위이다.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으며, 종교는 본래 개신교였으나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1964년 한일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가담하여 구속되었다.   1970년 부패된 정권을 비판한 〈오적(五賊)〉이라는 시를 써서 《사상계》 5월호에 실었는데, 이것이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실리면서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0일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7월 9일 결심 공판에서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받았다가 석방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오적 새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등이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의 석좌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1941년 전남 목포(木浦) 출생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8년여 투옥 생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 1969년 「황톳길」 등 시 5편을 『시인 詩人』지에 발표 1970년 5월, 담시 『오적(五賊)』 필화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받음, 7월 무기징역 감형 1975년 2월 출옥후 옥중기 「고행―1974」 발표, 재차 투옥됨 1975년 특별상 수상, 노벨문학상 후보 추대됨 1981년 과 수상 1999년 율려학회 창립     김지하 본인이 말하는 필명이 만들어진 사연             5. 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스물두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詩畵展)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筆名)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길을 갈지 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김지하의 작품             첫 시집 『황토(黃土)』(1970) 이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 『검은 산 하얀 방』(1986), 『애린』(1986),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담시집 『오적』(1993),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의 시집이 있다. 이밖에도 대설(大說) 『南』(전5권, 1994년 완간)을 비롯해, 산문집 『나의 어머니』(1988), 『밥』(1984),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84), 『남녘땅 뱃노래』(1985), 『살림』(1987), 장시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1991), 대담집 『생명과 자치』(1994),『사상기행』(전2권, 1999),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1999), 강연 모음집 『율려란 무엇인가』(1999) 등의 다수의 저서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7549    한국 시인 김지하 장편 풍자 담시 - 오적 댓글:  조회:3771  추천:0  2020-01-23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오적     요약 1970년에 발표된 김지하의 이 시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종류의 오적(五賊)으로 간주하고 풍자․비판한 작품이다. 작가 김지하 (1941년 ~) 발표 1970년 장르 현대시 종류 담시(譚詩) 1.작가소개와 작품해설 2.작품해설 3.작품 속의 명문장 4.작품읽기 & 참고자료 작가소개와 작품해설   김지하 이 작품은 1970년 5월《사상계》에 발표한 김지하의 담시(譚詩)이다. 담시란 “어원적으로 무가(舞歌)에서 출발한 장르로서 서정적, 서사적, 드라마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특수한 형식”(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인 서구의 발라드(ballade)를 번역․차용한 번역어인데, 김지하는 전통적인 민중적 예술 형식인 판소리의 미학을 계승하여 극적 요소, 서정적 요소, 서사적 요소를 모두 결합한 ‘소리’를 ‘담시’라고 규정했다. 김지하는 1970년대에 여러 편의 담시를 창작했는데, 「오적(五賊)」은 그 첫 번째 발표작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 개발독재 과정에서 부정부패로 엄청난 부(富)를 축적한 대표적 인물형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비판한 정치시이자 풍자시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오적’의 구체적 정체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다. 김지하는 이들 다섯 인물 유형의 한자 표기를 ‘개견(犬)’자(字)가 들어가는 새로운 조어로 표기함으로써 그들을 동물화했다. 이 시의 구체적인 배경은 6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인데, 시인은 국민들 대다수가 가난하게 살고 있음에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이들 ‘오적’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 비판하기 위해 이 시를 썼다. 특히 이 시에는 ‘오적’ 이외에도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할 임무를 맡은 포도대장이 등장한다. 경찰이나 사법당국을 상징하는 포도대장은, 그러나 시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오적에게 매수되어 죄 없는 국민들을 투옥하는 권력의 앞잡이로 등장한다. 결국 포도대장은 날벼락을 맞고 갑작스럽게 죽는데, 이는 고전소설의 권선징악을 차용하여 경찰과 사법당국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김지하의 이 작품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사상계》는 폐간되었고, 작가와 편집인 등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오적」은 외화(外話)와 내화(內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판소리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 외화(外話)에는 창작의 배경을 서술한 부분(“~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과 자신의 시가 구전되는 이야기를 집약한 것임을 밝히는 뒷말(“~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의 두 부분이 포함된다. 내용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화(內話)는 9개의 작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대략적인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다.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담시는 민중적 장르이기 때문에 오적에 대한 비판과 풍자는 매우 적나라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시의 화자는 오적 이야기가 마치 전래되는 이야기를 구술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처럼 공간적 배경을 ‘서울’로 설정함으로써 60~70년대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시가 발표될 무렵 우리 사회는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권력의 강압적인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발표 직전인 1969년 9월에는 국회에서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이 단 6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통과됨으로써 군부 정권의 장기 집권 시도가 노골화되었고, 발표 즈음인 1970년 3월에는 정인숙이라는 여인이 한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4월에는 부실 시공한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 33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해 11월에는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며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발표된 「오적」의 영향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이 발표된 《사상계》5월호는 5,000부가 모두 팔려 매진되었다고 한다. 작품해설   「오적」은 외화(外話)와 내화(內話)로 구성되었다. 외화는 창작의 배경을 밝힌 부분과 자신의 이야기가 창작이 아니라 구전되는 내용임을 밝히는 뒷말로 이루어졌고, 내화는 ‘오적’에 해당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부정 비리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작품 속의 명문장   “또 한 놈 나온다. / 국회의원 나온다. /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 가래끓는 목소리로 웅숭거리며 나온다 /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약 휘휘감고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행복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출세만을 살피는 정치인들은 문학의 유력한 비판 대상이었다. 하지만 정치인에 대한 김지하의 비판은 지금 보아도 섬뜩할 정도의 살기와 풍자이다. 특히 박정희를 비롯하여 권력을 장악한 군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은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작품읽기 & 참고자료   크게보기 오적 한글판 + 영문판 김지하 저 답게 2001.10.25 크게보기 탈춤의 민족미학 미학강의 김지하 저 실천문학사 2004.02.15 크게보기 김지하 문학연구 홍용희 저 시와시학사 2000.03.20     관련이미지 담시 오적출처: e뮤지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오적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한국문학 오적   [ 五賊 ] 구분 장편 풍자시 저자 김지하 출판사 사상계 출판일 1970년 작품해설 시인 김지하가 1970년 『사상계(思想界)』 5월호에 발표한 장편 풍자시. ‘이야기조의 시’라는 의미로 ‘담시(譚詩)’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당대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비리의 실상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비유해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의 사회정치적 파장으로 더 유명하지만 양식적인 면에서 전통적 운문양식인 가사, 타령, 판소리사설 등을 현대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새로운 풍자적 장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대담한 사설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 언어의 해체를 부분적으로만 보게 된다면, 시적 긴장이나 정서의 절제보다는 격렬한 사설조에 조소와 풍자의 어조를 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해학을 동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비장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이 풍자의 어조는 운문양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경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이래 으뜸 /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게 일쑤요 /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 (중략) / 서울이란 장안 한복판에 다섯도둑이 모여 살았것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그 풍자성과 격렬한 어조는 시대성 또는 상황성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실천적 의지를 보여준다. 시어의 반복과 대담한 생략, 이념적 추상성을 제거해 주는 의성 · 의태어의 활용, 시의 언어로서 부적절한 것으로 취급되어 온 비어와 속어의 배치 등은 김지하의 담시가 보여주고 있는 수사학적 특징들이다. 이러한 수사적 장치는 권위에 대한 부정, 비리에 대한 풍자와 비판, 시인의 행동적 의지의 적극적인 구현을 위해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지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상은 재벌, 국회위원, 고급관료, 장차관, 장성 등이다. 이 다섯 역적을 탄핵하려 하지만, 포도대장마저 매수되어 오적(五賊)의 개집을 지키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포도대장과 오적(五賊)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벼락을 맞고 급살한다는 결말을 통해 당시 정치 세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발표된 직후 시인 김지하는 반공법(反共法) 위반으로 100여 일간 투옥되었고 잡지 『사상계』는 강제 폐간당한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담시 오적 이미지 갤러리 출처: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오적 [五賊]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뮤지엄 담시 오적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지(紙) 크기 가로 15 세로 21 용도 · 기능 문화예술 > 문헌 > 문학 > 시(詩) 소장처 목포자연사박물관 유물번호 문예역사(문예역사) 140036-000 1993년 5월 솔 출판사에서 펴낸 김지하 시집.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분단 시대를 통과해오면서 우리 민족문학사는 불운과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깊이 상처가 나고 그 상처는 치유를 잊은 대 거듭 덧났다. 민족문학사는 그러나 그 신음의 세월 속에서도 저 찬란한 민족사의 전통과 기억을 마침내 되살려 꽃피우니, 그 화려하고 장엄한 개화가 바로 김지하의 담시(譚詩)이다. 부정과 부패로 찌든대로 찌든 군사 독재 정권이 탄압과 흉계를 노골화하기 시작하던 1970년에 시인 김지하는 통쾌 무비하게 군사 정권의 부패상을 통타하는 내용의 장시를 (담시)라는 독창적인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민족의 무한한 문화적 긍지인 판소리 형식에 실어 당시 부정 부패의 주범들을 (오적 五賊)으로 규정, 이들의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를 통쾌하게 풍자하고 공격한 담시 (오적 五賊)은 살벌했던 군사 공포 통치에 대해 정면 항전을 전개한 민주적이고 민중적이며 애족적인 시인의 행동하는 양심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김지하의 담시가 지닌 귀중함과 탁월함은 단지 이러한 행동하는 양심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더 깊이는 오랫동안 짓눌리면서 무수히 유실되어온 우리 민족의 정통적 문화적 유산을 후련하게 복권시키고 창조적으로 계승한 민족문화사적 의의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김지하 1995년 9월 17일자 일간지에 김지하 시인은 고통과 수난, 압박의 상징이었던 과거의 `지하`란 이름을 버리고 `김형`이라는 필명(筆名)을 사용한다고 하며, 새롭게 태어난 모습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다. 1941년 전남 목포 출생으로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했다. 그는 6.3 사태(1964) 당시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참가한 이후 1970년대를 온통 도피와 체포와 투옥을 거듭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를 날을 애타게 염원하며 절규하듯 살아왔다. 1963년 첫 시 를 발표한 이후, 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특유의 장시(長詩) 계열의 시들, , 등의 빼어난 70년대의 서정시들, 그리고 80년대의 `생명`에의 외경(畏敬)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다운 `생명`의 시편들을 만들어 냈다. 1975년에는 `로터스(LOTUS) 특별상`을 수상. 시집으로 (1970), (1982), (1986), (1988), (1989), 등이 있다. 관련이미지 김지하출처: (CC BY-SA)LTI Korea@wikipedia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담시 오적 (e뮤지엄)  
7548    [세상요지경] - 23년간에 무슨 일이???... 댓글:  조회:3166  추천:0  2020-01-22
이탈리아서 도난 23년만에 발견된 클림트 작품 절도 용의자 등장  2020.01.22.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남성 2명 피아첸차 지역지 기자에 범행 자백 편지…경찰 수사 활기 작년 12월 그림이 발견된 장소. [AP=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작품 도난 사건의 용의자가 등장했다. 21일(현지시간) ANSA 통신 등에 따르면 북부 피아첸차 지역지 '리베르타' 기자인 에르만노 마리아니는 최근 신원이 불분명한 남성들에게서 자신들이 23년 전 클림트가 그린 '여인의 초상'을 훔쳤다는 고백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이들은 편지에서 자신들이 1997년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미술관에 있던 여인의 초상을 훔쳤으며, 이후 이를 모처에 보관해오다 피아첸차에 대한 일종의 선물로 되돌려준 것이라고 썼다. 여인의 초상은 1997년 2월 해당 미술관 내 전시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근 23년 만인 작년 12월 해당 미술관 외벽 속에서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정원사가 미술관 건물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제거하다 사각형 모양의 작은 금속 재질 문을 목격했고, 그 안에서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을 찾아냈다. 도난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누군가가 미술관 천장에서 낚싯줄을 이용해 그림을 끌어 올린 것으로 추정했으나 절도 주체와 그림의 소재는 끝내 파악하지 못했었다. 도난 23년 만에 극적으로 되찾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 [AP=연합뉴스] 범인은 당시 액자를 미술관 지붕에 남겨둔 채 그림만 쏙 빼내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림이 회수된 배경도 의문 투성이였다. 누가, 언제, 어떻게 해당 그림을 그 작은 공간에 넣어놨는지를 놓고 억측과 소문이 무성했다. 심지어 일각에선 작품 가치를 높이려는 미술관 내부 관계자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을 자처한 용의자가 나타나면서 이번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지 미술계 안팎의 관심을 끈다. 이들이 기자에게 편지를 보낸 시점은 그림이 회수됐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직후라고 한다. 경찰은 지난 17일 두 사람을 불러 범행 경위를 추궁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들이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주무대로 절도 범행을 일삼는 조직의 일부인 것으로 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들의 변호인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의뢰인들이 4년 전 그림을 미술관 외벽 속에 넣어놨다고 털어놨으나 현재까지 구체적인 경위나 배경 등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마리아니도 "이들은 당시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고 있으나 그 그림이 도난 이후 줄곧 그 외벽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며 "전문가는 아니지만 만약 20년 이상 그 벽 속에 있었다면 손상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탈리아 미술품 감정 전문기관은 극적으로 회수된 해당 그림이 '아르누보의 대가'로 꼽히는 클림트가 1917년 그린 진품이라고 확인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말년인 1916∼1918년 사이 완성한 여러 개의 여인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갈색 머리를 가진 젊은 여성이 수줍은듯한 표정으로 진녹색의 배경 속에 묘사돼있다. 시가로 6천만∼1억유로(약 773억∼1천288억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미술계에선 평가한다.
7547    [세상속에서] - 1% = 370g 댓글:  조회:3405  추천:0  2020-01-22
1% 생존확률 이겨낸 '370g 소망이'… 6개월 만에 집으로 2020.01.22.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태어났을 때 몸무게가 겨우 370g이었던 아주 작은 아기가 오늘(22일) 건강하게 퇴원했습니다. 처음에 생존 확률을 1%도 안 되게 봤었는데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건강하게 자란 소망이가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G1 이청초 기자입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잡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손과 발에는 보조 장치를 줄줄이 달고 있습니다. 보통 아이보다 넉 달이나 빨리 엄마 뱃속에서 24주 3일 만에 몸무게 370g, 키 25㎝로 태어난 이른둥이 소망이입니다. 가슴에 공기가 차고, 탈장이 생기고, 작은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나들며 전신 마취 수술도 해야 했습니다. [이병국/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교수 : 당장 30초, 1분 후에 아기가 안 좋아지는 급박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정말 24시간 한시도 눈을 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사랑과 의료진의 노력으로 소망이는 강하게 견뎌냈습니다. 젖살이 오르고 울음소리에도 힘이 붙기 시작하더니 6개월 만에 3.5㎏의 건강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1%도 안 되는 생존 확률을 이겨냈습니다. [이현철·김성혜/소망이 부모 : 모든 분이 응원도 해주셨고 많이 사랑도 해주셨으니까, 그만큼 저희 아이도 많은 사람한테 많은 사랑 주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6개월간 수많은 위기를 겪은 소망이가 설 연휴를 앞두고 건강하게 병원을 떠나면서 이름처럼 초미숙아들에게도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김민수 G1, 화면제공 :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G1 이청초
754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우박 = 골프공 댓글:  조회:3584  추천:0  2020-01-21
산불로 몸살 앓은 호주… 이번엔 ‘골프공 크기’ 우박 맞아 기사입력 2020.01.21.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최악의 산불로 큰 피해를 본 호주에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골프공만한 우박과 먼지 폭풍까지 발생했습니다.  박수유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얼음 알갱이들이 맹렬한 기세로 쏟아져 내립니다.  나뭇가지들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집니다.  골프공 크기 만한 우박이 호주 수도 캔버라 등을 강타했습니다.  [캔버라 시민]  "내 평생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갑자기 쏟아진 우박에 지붕에는 구멍이 뚫렸고, 야외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동차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권순걸 / 호주 멜버른 교민]  "차량들이 거의 다 보닛이 망가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보험회사에 너무 많은 양의 클레임(신고)이 들어오니까 연결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또 우박과 함께 엄청난 강풍도 불면서 쇼핑센터 지붕이 뜯겨져 날아가 차량들을 덮쳤습니다.  이번 우박으로 인해 주민 두 명이 다치고, 주택 1천여 채가 정전되는 등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앞서 호주 일부 지역에선 거대한 모래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최고 시속 107킬로미터에 달하는 폭풍이 한 마을을 집어삼킨 겁니다.  [현장음]  "우리가 마치 회오리바람 안에 있는 것 같아."  이번 기상 이변은 폭풍우가 산불로 황폐화된 대지를 지나면서 거대한 먼지를 일으킨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역대 최악의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호주에선 각종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단비가 내렸지만 산불을 모두 진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호주 당국은 기상이 계속 불안정하다며 폭풍우와 모래폭풍 등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채널A 뉴스 박수유입니다.  영상편집 : 강 민   =======================================/// [앵커] 다섯달째 산불로 피해가 극심한 호주에 거대한 먼지폭풍에, 골프공만한 우박까지 쏟아졌습니다. 2500억원 상당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혜림 기자입니다. [리포트] 하늘에서 수천개의 얼음덩어리가 쏟아집니다. 마당은 금세 우박으로 하얗게 뒤덮였습니다.  호주 캔버라 시민 "내 평생 이런 걸 본적이 없습니다. 정말 믿기 힘듭니다."  현지시간 20일 호주 수도 캔버라에 골프공만한 우박이 강타해 2명이 다쳤습니다. 우박 세례에 국회의사당 천장에 구멍이 뚫렸고, 차량들이 망가졌습니다.  호주 캔버라 시민 "이 차처럼 다른 차들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보험회사와 견인차들은 즐거운 하루를 보낼 겁니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을을 집어삼킵니다. 산불 피해가 가장 큰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산더미같은 먼지 폭풍이 들이닥쳤습니다. 수개월 간 가뭄에 최고 시속 116km의 돌풍이 일자 거대한 먼지 폭풍이 생긴 겁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에 2명이 벼락에 맞았고, 1만3800 곳이 정전됐습니다. 구조 요청도 800건 넘게 쇄도했습니다. 보험업계는 폭풍우 전체 피해액을 2560억원으로 추산했습니다.  호주 남동부엔 또다시 고온 건조한 날씨가 예보돼 이미 서울 면적의 180배를 태운 산불의 추가 피해도 우려되고 있습니다.  TV조선 유혜림입니다. 
75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화산재 = 벽돌 댓글:  조회:3321  추천:0  2020-01-18
필리핀, 화산재 이용해 벽돌 제작… "창의적 대응" 2020.01.18.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하노이=연합뉴스) 민영규 특파원 = 지난 12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65㎞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탈(Taal) 화산 폭발로 분출한 화산재를 이용해 벽돌을 만드는 곳이 등장했다.  AFP 통신은 탈 화산 동북쪽에 있는 라구나주(州) 비난시의 환경센터는 화산재를 모래, 시멘트, 폐비닐과 섞어 하루 5천개가량의 벽돌을 만들고 있다고 18일 전했다.  이 벽돌은 지역 건설 프로젝트에 쓰일 예정이다.  필리핀, 화산재 이용해 벽돌 제작[AFP=연합뉴스] 시내 곳곳에 쌓인 화산재를 어딘가에 쌓아두는 대신 유용하게 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환경담당 공무원들이 창의력을 발휘한 것이다.  아르만 디마귈라 비난시 시장은 "화산재와 폐비닐이 모두 풍부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우리의 창의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호수로 둘러싸인 탈 화산은 지난 16일께부터 화산재와 증기 배출이 줄어드는 등 소강상태를 보이지만, 필리핀 지진화산연구소는 위험 경보를 최고 5단계 가운데 4단계로 유지하고 있다.  수 시간 또는 며칠 안에 위험한 수준의 폭발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화산 지진이 이어지고 있는 데다가 호수 바깥쪽 인근 지역에서 도로나 땅이 갈라지는 현상이 계속 나타나거나 심화하고 있어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상태다.  이에 따라 당국은 대피령을 내린 반경 14㎞ 이내에 주민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검문소를 확대하고 있다.  현지시간으로 18일 오전 11시 현재 주민 16만2천여 명이 임시 대피소로 몸을 피한 것으로 집계됐고, 친구나 친척 집으로 대피한 주민도 많아 실제 대피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됐다.  필리핀 탈 화산 폭발로 대피소에 피신한 주민들[AP=연합뉴스 자료 사진] 탈 화산 폭발로 1911년과 1965년에 각각 1천300명, 200명이 사망했다. 이번 화산 폭발로 인해 직접적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었고, 우리나라 교민 피해도 접수되지 않았다. 
7544    [세계국제] - 치마냐... 바지냐... 바지냐... 치마냐... 댓글:  조회:2668  추천:0  2020-01-18
  감옥같은 18세기 파리의 ‘바지 금지 조항’, 아직도 여전히 남아... 2020.01.18.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옷이 길들인 여성의 역사 코르셋부터 드레스, 교복까지 의존적 행동 만드는 의상들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1769년경, 캔버스에 유채, 워싱턴 국립미술관. 10대 시절 매일 입고 다녔던 교복을 떠올리면 곤혹스러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 잠자코 있어도 땀이 뻘뻘 나던 여름날, 답답한 브래지어도 더운데 그 위에 꼭 러닝셔츠를 입어야 했다. 브래지어가 비치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입던 하복은 칼라가 어깨 전체를 덮는 세일러복 스타일. 교실에 에어컨이 없던 그 시절, 선풍기 몇 대로 어떻게 버텼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등·하교를 할 때도 고역은 이어졌다. 하복 상의가 너무 짧아서 버스 손잡이를 잡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치마 안 속옷이 보일까 봐 노심초사였다. 속옷 노출을 막으려 속바지를 입었는데, 그 속바지가 보일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다 귀찮아서 치마 아래로 체육복 바지를 입으면, 이번에는 단정치 못하단다. 더워도 무조건 참고, 뛰지도 말고, 속옷이 보일까 전전긍긍하는 조신하고 순종적인 여학생, 그것이 학교가 원하는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교복은 그 여성상을 구현하도록 채찍질하는 독한 훈련 조교였다. 신발끈도 묶을 수 없게 한 옷들 옷이 여성의 행동을 길들인 역사는 생각보다 유래가 깊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의 는 미술 문외한에게도 익숙한 그림이다. 쿠션을 등에 받치고 오른손으로 책을 쥐어 든 소녀의 옆모습이 한껏 진지하다. 그런데 소녀는 왜 이렇게 작은 책을 읽고 있을까. 이 그림뿐 아니라 18세기 독서하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에서 그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작고 얇은 책을 들고 있다. 의문은 영문학자 린달 고든의 말을 통해 풀린다. 고든은 영국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의 전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자들은 배와 등을 판판하게 하고 가슴이 더욱 풍만해 보이도록 고안된, 단단한 고래수염으로 만들어진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고래수염 틀로 살을 감싸지 않은 여자는 외설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코르셋은 여자들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몸을 굽힐 수 없었기에 책을 읽으려면 손으로 세워 들어야 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소녀는 볼록한 소매, 이리저리 접힌 치맛자락, 목에 두른 풍성한 주름의 칼라렛 띠, 무엇보다 가슴과 복부를 사정없이 누르는 코르셋의 방해를 받아가며 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녀에게 작고 가벼운 책은 최선이었다. 이 시기 여성복은 몸을 옥죄고, 행동을 제약하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슈미즈, 코르셋, 여러 겹의 패티코트, 스타킹 등 열 가지가 넘는 속옷을 챙겨 입은 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드레스를 걸친 여자. 그녀가 혼자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무겁고 꽉 끼는 의복 탓에 여성은 일거수일투족을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코르셋을 착용한 여성은 몸을 앞으로 숙일 수 없기에 다른 이에게 신발 끈을 묶어달라고 해야 했다.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며 남성이 주워 줄 때까지 부채만 파닥거린 것도 같은 이유다. 옷을 입고 벗을 때조차 혼자서는 불가능해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여성들은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자연스레 학습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우리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이 우리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부장제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파리의 여성 바지 착용 금지 조례 그래서였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용 바지가 등장했을 때 사회가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던 것은. 1851년 여성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1818~1894)는 불편한 드레스가 여성들의 신체와 정신을 구속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여성용 바지 ‘블루머’를 만들었다. 그런데 남성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셌다. 여성의 바지 착용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곧 비난이 쏟아졌다. 런던의 잡지 는 “남편들은 아내가 블루머를 입지 못하도록 당장 금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남편들이 드레스를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래지어를 안 했다는 이유로 한 연예인을 괴롭힌 것과 비슷한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이러한 반발에도 드레스라는 족쇄에서 탈출하려는 여성의 시도는 계속됐다. 그 분수령은 자전거였다. 19세기 말 자전거가 유행하며 여성들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드레스 자락이 바퀴에 말려 들어가 다치는 일이 많았다. 그제야 남성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안전을 위해’ 마지못해 묵인했다. 페데리코 잔도메네기, , 1878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렌미술관. 파리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페데리코 잔도메네기(1841~1917)는 이러한 여성복의 극적인 변화를 포착해 화폭에 담았다. 파리의 공원에서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여인이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여전히 짙은 색 스타킹이나 레이스업 부츠로 다리를 가려야 했지만, 코르셋으로 조인 드레스보다 훨씬 편한 모습이다. 이처럼 바지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상징이었으나, 그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불편한 눈으로 보았다. 프랑스에서는 그 흔적이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다. ‘파리 여성의 바지 착용 금지 조례’(1800년부터 시행)가 그것이다. 비록 사문화된 지 오래지만, 파리 여성들이 바지를 입을 때 경찰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규정이 놀랍게도 2013년까지 잔존했다. “문제의 조례는 여성이 남자와 똑같이 옷을 입는 것을 막아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제한하려는 취지로 제정된 것”이라는 프랑스 여성인권장관의 설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코르셋 착용부터 치마 교복까지, 가부장제 사회는 옷을 통해 여성에게 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을 주입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만 지나면 내 딸도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는다. 배정될 학교의 교복이 어떤지 찾아보니 예상대로 치마다. 전보다 여학생의 바지 교복 착용을 허용하는 학교가 늘어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여전히 치마를 원칙으로 하는 학교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열풍이 사회를 휩쓸고 있지만, 유독 학교는 무풍지대인 것 같다. 자유를 가르치려면 여학생에게 바지를 허하기를. 민주를 가르치려면 옷을 통해 여학생을 통제하려는 욕구부터 거두기를. ‘파리 여성의 바지 착용 금지 조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처럼, ‘여학생의 바지 착용 금지’ 규정이 21세기 학교에도 있었다는 게 곧 우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유리
7543    [세상만사] - @@ 댓글:  조회:3790  추천:0  2020-01-18
복권 1등 당첨되면 대통령 전용기 드려요… 현실성은?  2020.01.18.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 멕시코 대통령이 초호화 전용기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산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내놓은 아이디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의 세계, 정다은 기자가 종합합니다.  [기사내용]  [로페스 오브라도르 / 멕시코 대통령]  "1장당 500페소에 복권 600만 장을 발행해서."  멕시코 대통령이 복권 1등 상품으로 전용기를 내걸었습니다.  전용기 가격은 약 1천5백억 원.  앞서 멕시코 대통령은 특권을 내려놓겠다며 전용기를 매물로 내놨습니다.  하지만 1년 넘게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장당 3만 원에 달하는 복권 6백만 장을 발행한 뒤 1등 당첨자에게 전용기를 주는 방안을 제시한 겁니다.  하지만 곧바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빈민가 마당에 전용기가 서 있는 합성사진이 올라오는 등 당첨되더라도 막대한 관리 비용 등이 부담이라는 지적입니다.  @@ 이탈리아에선 쓰레기 봉투에서 발견된 그림이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진품 작품으로 확인됐습니다.  [이탈리아 검사]  "벅찬 마음으로 이 그림이 진품임을 밝힙니다."  '여인의 초상'은 23년 전 이탈리아 미술관에서 사라졌다가 지난해 12월 해당 미술관의 외벽 속에서 발견됐습니다.  이 작품은 약 1천288억 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움직이는 사람'인 27살의 네팔인 카젠드라 타파 마가르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가르의 키는 67.08cm였고, 기네스 기록 보유자였습니다.  그의 몸무게도 6kg에 달했고, 생후 6개월 정도의 몸집이었습니다.  마가르의 사망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의 타이틀은 키 70.21cm인 콜롬비아 출신의 에드워드 니뇨 헤르난데즈에게 넘어갔습니다.  채널A 뉴스 정다은입니다.    영상편집 : 김민정 ===================================/// 구스타프 클림트라는 백 년 전 살았던 오스트리아 화가가 있습니다. 그림 한 점에 지금 1천 억 원 넘게 거래가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한 정원사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을 발견했는데 23년 전 사라졌던 이 클림트의 그림으로 확인돼서 화제입니다. 김윤수 기자입니다. 지난해 12월, 이탈리아 리치 오디 미술관 건물 외벽 속에서 검은 쓰레기봉투가 발견됐습니다. 정원사가 담쟁이덩굴을 걷어 내다 벽에 나 있던 작은 문 안에서 발견한 것인데 봉투 안에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난 1997년 2월, 이 미술관에 전시됐다가 사라진 지 23년 만입니다. 이탈리아 검찰은 정밀 감식 결과 진품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넬라 치카/검사 : 저는 벅찬 심정으로 이 작품이 진품으로 결론 났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발표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00년대 초 키스, 유디트 등의 대표작을 남긴 클림트는 아르누보의 대가로 평가돼 왔습니다. 지난 2006년 '아델레블로흐바우어의초상'은 약 1천 3백억 원에 팔리며 한때 회화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여인의 초상'은 1912년에 완성했던 작품을 5년 뒤 덧칠을 해 재창작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쉽게 가격을 매기기 어렵다는 평가입니다. [안나 셀러리/미술사학자 : 이 작품은 하나의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진 두 개의 작품이라는 독창성 때문에 가격을 매기기가 어려울 정도의 작품입니다.] 대가의 진품이 손상 없이 돌아오긴 했지만, 누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훔쳐 갔다 숨겨 놓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상편집 : 김종태)   /SBS 뉴스 ===========================/// 최신기사 도난 23년만에 쓰레기봉투서 발견된 그림 클림트 진품으로 확인 2020-01-18    이탈리아 검찰, 정밀 감정 결과 발표…도난 배경 등은 미스터리 도난 23년 만에 극적으로 되찾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 [AP=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 도둑맞았다가 23년 만에 의외의 장소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그림이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작품으로 확인됐다. ANSA 통신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 검찰은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으로 추정된 그림의 정밀 감정 결과 진품으로 드러났다고 17일(현지시간) 밝혔다. 이 작품은 1997년 2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미술관 내 전시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거의 23년 만인 작년 12월 해당 미술관 외벽 속에서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정원사가 미술관 건물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제거하다 사각형 모양의 작은 금속 재질 문을 목격했고, 그 안에서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을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실제 클림트가 그린 진품으로 보인다는 초기 감정 의견을 냈으나 경찰은 공식적으로 진위를 가리고자 전문기관에 정밀 감식을 의뢰했다. 작년 12월 그림이 발견된 장소. [AP=연합뉴스]   일각에서는 누군가 장난으로 쉽게 발견될 만한 곳에 일부러 가짜 그림을 숨겨놨다는 등의 풍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이번에 정밀 감정 결과가 나옴에 따라 진위 논란이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 그림은 '아르누보의 대가'로 꼽히는 클림트가 1917년 그린 여인의 초상이다. 말년인 1916∼1918년 완성한 여러 개의 여인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갈색 머리를 가진 젊은 여성이 수줍은듯한 표정으로 진녹색의 배경 속에 묘사돼있다. 시가로 6천만∼1억유로(약 773억∼1천288억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미술계에선 평가하고 있다. 이탈리아 현지 미술계는 1969년 시칠리아의 한 성당에서 홀연히 사라진 카라바조 그림과 함께 당대 최고의 도난 미술품으로 꼽힌 여인의 초상이 흠집 하나 없이 원 상태 그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다만 애초에 누가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훔쳐 갔는지, 그림이 원래 있던 미술관의 외벽 속에 감춰진 배경이 무엇인지 등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은 두고 두고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AP=연합뉴스]   /연합뉴스 ==============================///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 도둑맞았다가 23년 만에 의외의 장소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그림이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작품으로 확인됐다. ANSA 통신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 검찰은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으로 추정된 그림의 정밀 감정 결과 진품으로 드러났다고 17일(현지시간) 밝혔다. 이 작품은 1997년 2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미술관 내 전시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거의 23년 만인 작년 12월 해당 미술관 외벽 속에서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정원사가 미술관 건물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제거하다 사각형 모양의 작은 금속 재질 문을 목격했고, 그 안에서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을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실제 클림트가 그린 진품으로 보인다는 초기 감정 의견을 냈으나 경찰은 공식적으로 진위를 가리고자 전문기관에 정밀 감식을 의뢰했다. 일각에서는 누군가 장난으로 쉽게 발견될 만한 곳에 일부러 가짜 그림을 숨겨놨다는 등의 풍문이 나돌기도 했는데 이번에 정밀 감정 결과가 나옴에 따라 진위 논란이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 그림은 '아르누보의 대가'로 꼽히는 클림트가 1917년 그린 여인의 초상이다. 말년인 1916∼1918년 완성한 여러 개의 여인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갈색 머리를 가진 젊은 여성이 수줍은듯한 표정으로 진녹색의 배경 속에 묘사돼있다. 시가로 6천만∼1억유로(약 773억∼1천288억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미술계에선 평가하고 있다. 이탈리아 현지 미술계는 1969년 시칠리아의 한 성당에서 홀연히 사라진 카라바조 그림과 함께 당대 최고의 도난 미술품으로 꼽힌 여인의 초상이 흠집 하나 없이 원 상태 그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다만 애초에 누가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훔쳐 갔는지, 그림이 원래 있던 미술관의 외벽 속에 감춰진 배경이 무엇인지 등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은 두고 두고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김주리기자
754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재활용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21  추천:0  2020-01-18
[뉴스미션] 방치된 자전거 '3만대 시대'… 재활용 작업해 보니 2020.01.18.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지하철역 옆에 아파트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자전거들 많이 보실 텐데요. 좁은 길을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기도 하고 고철 덩어리로 변해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버려진 자전거들을 수거하고 재활용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요. 뉴스미션 이희령 기자가 함께 해봤습니다. [기자] 이곳은 서울의 한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자전거 보관대입니다. 제 뒤로도 이렇게 방치된 자전거들이 여러 대 보이는데요.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모를 정도로 먼지가 쌓인 자전거도 있고, 여기 와 보면 쓰레기통이 돼 버린 자전거도 있습니다. +++ 녹슬고, 바람 빠진 바퀴… 엎어진 자전거 쓰레기까지… [황경숙/서울 성수동 : 여기 세울 데가 없어 저렇게 놔두면. 어디다 세워. 다 처치 곤란이라고. 저기 그냥 놔두고 안 가져가고.] +++ 이렇게 공공장소에 버려진 자전거라도 바로 치울 순 없습니다.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구청이 오래 방치된 자전거에 수거 안내문을 붙입니다. 처분계획을 14일 동안 구청 웹사이트에 공고한 후 그래도 주인이 찾아가지 않으면 수거합니다. 이곳은 역촌역 앞입니다. 지금 제 뒤로도 이렇게 방치된 자전거들이 보이는데요. 제가 직접 수거작업에 한 번 동참해 보겠습니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 방치된 자전거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자물쇠를 자르고, [하나, 둘, 셋] 자전거의 종류, 색깔, 상태, 발견된 위치를 기록합니다. [안장 소실] 사진도 찍습니다. 한 대에 10kg가 넘는 자전거들을 직접 들어올립니다. [오우 되게 무거운데요] [엄마야]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녹이 많이 슬었네요.] [네, 오래된 거죠, 이거는.] 자전거들이 운송 차량 위에서 쓰러지지 않게 방향을 바꿔가며 세워둬야 합니다. [정영준/약속의 자전거 정비팀장 : 이쪽 핸들이 여기 오게끔 해서 지그재그로 약간 쌓아두시면…] [오영열/약속의 자전거 대표 : 저희가 보통 많이 수거하는 날에는 80에서 100대 정도 수거할 정도로 양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루에.] 수거가 끝나면 자전거들을 실어 재활용 공방으로 가져갑니다. [오영열/약속의 자전거 대표 : 외관상 봐도 여기 녹이 굉장히 심하게 슬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회생 불가능한 자전거로 취급하고 있고 저희가 사용 못 하는…재활용 안 돼요.] 재활용이 가능한 상태의 자전거를 골라낸 뒤 작업을 시작합니다. 몸체를 고정하고 구석구석을 닦아냅니다. 몇 번 닦지 않았는데, 벌써 녹이랑 먼지가 묻어서 이렇게 금방 더러워졌습니다. 녹도 꼼꼼히 제거하고 핸들 길이도 조정합니다. 브레이크도 새로 점검합니다. 기어와 체인 작업까지 마치니 다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정영준/약속의 자전거 정비팀장 : 보통 하루에 한 대 아니면 이틀에 한 대 정도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다 분해하면 되게 시간이 오래 걸려요.] 재활용된 자전거들은 대여하거나 판매, 기증해 시민들의 발이 됩니다. 버려진 자전거 중에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는 자전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에 오늘도 자전거는 버려지고 있습니다. 이웃과 환경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촬영협조 : 약속의 자전거, 은평 구청) (영상디자인 : 최석헌 / 영상그래픽 : 김정은) /이희령 기자 /[영상취재: 손준수,유규열 / 영상편집: 김동훈]
7541    [그것이 알고싶다] - 공룡알 화석 댓글:  조회:5278  추천:0  2020-01-16
  한국의 박물관2(양구선사박물관·경보화석박물관) 공룡알 화석     중생대 지구의 제왕으로 군림한 공룡의 알 중생대가 시작되면서 출현하여 무려 1억 6500만년 동안이나 지상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공룡(恐龍)!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많이 간직한 이 거대한 동물은 ‘무시무시한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디노사우루스(Dinosaurus)’라 부른다. 디노사우루스라는 말은 1841년 영국의 리처드 오언이 가장 먼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어로 ‘무서운 도마뱀’이란 뜻이다. 본래는 무시무시한 파충류라는 의미로 붙였지만 파충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없기에 도마뱀을 대신 사용하였던 것이다. 공룡은 일반적으로 악어나 뱀처럼 파충류로만 알고 있지만 젖먹이 동물인 포유류의 성격을 지닌 것도 많아서 파충류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보통 파충류는 냉혈(冷血)동물이지만, 공룡 중 몸집이 비교적 작았던 육식공룡들은 사냥 때 필요한 폭발적인 스피드와 힘을 가진 것으로 보아서 온혈(溫血)동물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즘은 공룡을 파충류라고 못박지 않고 ‘공룡류’로 따로 분류하는 경향이 짙다. 공룡은 정말 두려울 정도로 몸집이 매우 크다. 특히 육식공룡보다는 초식공룡의 키가 커서 디플로도쿠스 할로룸이라는 공룡은 무려 길이가 50m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콤프소그나투스라는 육식공룡은 크기가 겨우 닭만한 소형 공룡으로 60㎝의 길이에 몸무게는 3㎏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고의 고비사막에서 발견된 벨로시랍토르는 2m가 되고, 북미의 서부에서 발견된 티라노사우루스는 14m나 되는 육식공룡이었다. 이미 이란 영화에 등장하여 많은 영화팬을 사로잡은 바 있는 대형 육식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는 그야말로 공룡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존재였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이다. 영화를 보면 이 공룡은 비교적 영리한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러할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룡의 머리가 몸집에 비하여 매우 작았다는 점을 들어 조류와 비슷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대개 대형 초식공룡의 경우 뇌의 무게는 체중의 10만분의 1 정도에 불과하고, 육식공룡의 경우에도 1000분의 1 정도에 불과해 지능이 과히 높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공룡은 1억 6500만년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탓에 그 종류도 매우 많아 500종에 이르며, 하늘을 날았던 익룡과 바다에서 살았던 어룡과 수장룡 등 하늘과 땅과 바다를 동시에 지배했지만 중생대가 끝나가는 백악기 말, 즉 지금으로부터 약 6640만년 전에 갑자기 지구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공룡의 멸종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중생대 말에는 공룡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숱한 동식물들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게 되는 엄청난 환경변화가 일어났는데 학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외계 물질과의 충돌설이다. 충돌설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루이스 알바레스와 그의 아들인 지질학자 월터 알바레스가 1980년 가장 먼저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뉴질랜드, 덴마크 등지의 지층을 조사하여 중생대와 신생대 지층 경계에서 대량의 이리듐을 찾아내 지금으로부터 6500만년 전 지름이 10㎞가 넘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였다고 밝혔다. 그렇게 거대한 행성이 지구에 부딪히면 먼지가 수십 ㎞ 상공까지 뒤덮여 식물들의 광합성 작용이 정지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초식공룡들이 다 죽게 되고 그에 따라 육식공룡도 멸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는 마치 거대한 핵폭탄이 터지는 경우와 비슷하여 핵겨울과 같은 상태에 빠지므로 지구상의 95%에 이르는 생물체가 모두 죽어버렸다고 한다. 이외에도 혜성이 충돌했다는 설도 있고, 이러한 충돌과 더불어 해수면이 낮아지고 서식지가 분할되기도 하는 등의 복합적인 문제로 공룡이 멸종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룡의 몸집이 너무 큰 까닭에 외부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공룡은 1억년 이상을 살았으므로 화석이 발견되는 곳은 매우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등 중생대 퇴적층에서 공룡뼈와 공룡알 화석이 출토되고 있다. 공룡뼈와 공룡알 화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나오는 곳은 몽골의 고비사막에서라고 한다. 공룡알 화석은 대개 깨어져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알이 화산재로 덮이거나 해서 깨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화석이 된 경우도 더러 있다. 경보화석박물관에 있는 공룡알 화석은 설립자인 강해중씨가 중국에서 구해온 것으로 표면의 미세한 조직과 숨구멍까지 볼 수 있는 완벽한 알화석이다. 공룡알은 큰 것은 무려 농구공만하며 작은 것은 탁구공만한 것도 있다. 그리고 길쭉한 형태도 있다고 한다. 알 껍질의 두께는 1.3~2.4㎜이다. 미세한 표면구조와 숨구멍을 볼 수가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된 공룡알 화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룡알 화석 (한국의 박물관) 돌로 만든 타임머신, 화석 알 화석     공룡은 알을 낳았을까요, 새끼를 낳았을까요? 공룡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금방 알아맞히겠죠. 맞아요. 공룡은 알을 낳았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었을까요? 바로 공룡의 알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랍니다. 공룡의 알 화석은 둥지 형태로도 발견되었는데, 이 둥지 속에서는 알 껍질을 부수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다 된 새끼 공룡이 발견되기도 했답니다. 알 화석의 크기나 모양을 보면 그 알이 어떤 공룡의 알인지도 알 수 있답니다. 티라노사우루스같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는 수각류 공룡의 알은 기다란 타원형이고, 브라키오사우루스같이 목이 길고 몸집이 큰 용각류 공룡의 알은 둥근 원형입니다. 알의 모양뿐만 아니라 알이 둥지에 놓여 있는 모습도 공룡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알이 일렬로 배열된 둥지가 있는가 하면, 나선형으로 돌려가며 알을 낳아 둔 둥지도 있답니다. 또한 공룡의 크기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공룡이 낳은 알의 부피는 2리터를 넘지 않는답니다.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운다는 말이 공룡에게는 딱 들어맞죠. 이렇게 여러 동물들의 알 화석은 그 생물이 어떤 방법으로 새끼를 낳았는지를 보여 주는 흔적 화석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 화석 (돌로 만든 타임머신, 화석) 공룡알 화석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중국 재질 화석 크기 가로 9 세로 9 두께 4 소장처 한남대학교 자연사박물관 유물번호 한남대자연(한남대자연) 415801-000 조각류 (Ornithopoda;鳥脚類)의 일종 또는 이구아노돈티데(Iguanodontidae) 공룡들의 자손들로 추측되는 초식공룡의 알 공룡은 트라이아스기 말에 처음 등장한 이후 백악기 말 생물계의 대량멸종이 나타나기 전까지 파충류와 공룡이 크게 번성했던 기간으로서 공룡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룡알 화석은 1869년 프랑스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현재까지 전 세계 199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특히 중국, 몽고, 아르헨티나, 인도, 미국 등지에서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공룡알 화석의 대부분은 백악기 이후의 것들로서 표본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식류의 공룡알 화석이다. 일반적으로 동그랗게 생긴 것은 초식공룡의 알로, 길쭉한 형태는 육식공룡의 알로 알려 져 있는데, 표본은 초식공룡의 알로 추측되며, 또한 그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이 특징으로 아마 화석으로 생성된 후 지각 변동에 의해서 표면 일부가 변했으리라고 생각되며 퇴적암의 거친 단면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공룡알 화석 (e뮤지엄)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룡알   [ 恐龍- ]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2동 시대 선사/석기 출처 디지털부산문화대전-공룡알 목차 정의 개설 위치 형태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2동에 있는 두송 반도 해안가에서 발견된 공룡알 화석. 개설 중생대 백악기[약 1억 4500만 년 전~6,500만 년 전]에 한반도 남부 지역은 공룡들이 서식하던 곳이었으며, 부산은 그 중 한 지역이었다. 당시 부산 지역에는 하천이 굽이치는 평원과 크고 작은 호수들이 있었으며, 주변에서는 화산 분출이 때때로 일어났다. 공룡알 화석이 산출된 두송 반도 지역은 약 7,000만 년 전 하천이 흐르는 하성 평원 지역이었고, 주변에 공룡들이 서식하면서 알을 산란하였으며, 그 알 껍질 및 부서진 조각들이 범람원 지역에 쌓인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퇴적물 속에 묻히게 되었다. 알 껍질을 함유한 퇴적물이 당시의 건조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석회질로 변화되면서, 석회질로 이루어진 알 껍질이 수천만 년의 세월을 견디며 사질이암(沙質泥巖) 내에 화석으로 남은 것이다. 2004년에 부경대학교 지구환경과학과 백인성 교수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위치 공룡알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2동에 있는 두송중학교 앞 해안에 북북서~남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두송 반도의 서측 해안에 위치한다. 이 해안을 따라 이어져 있는 좁을 길을 따라 입구에서 약 50~100m 정도 걸어가면 공룡알 화석이 산출된 지층을 만날 수 있다. 형태 구형 또는 타원형의 껍질이 남아 있으며, 여러 종류의 공룡알이다. 공룡알의 길이는 5~10㎝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공룡알 화석은 이 지역 해안가 바닥에 산재되어 있는 사질이암으로 이루어진 붉은색의 암석들에서 관찰되며, 대부분이 검은색을 띠는 알 껍질 조각이다. 공룡알 껍질을 함유한 이 암석들은 주변의 절벽에 노출되어 있는 퇴적층으로부터 떨어진 것으로서, 이 퇴적암층을 직접 관찰하는 데에는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다. 현재 이 지역은 유적이나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지 않으며,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이 중생대 백악기 공룡 서식지였음을 알려 주는 유물이다. 또한 공룡알 화석이 산출되는 퇴적층의 발달 특성을 바탕으로 부산 지역의 자연 환경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실재적인 자료이다. 참고문헌 『자원 환경 지질』(대한자원환경지질학회, 1997) 『지질학회지』(대한지질학회, 2006) 「공룡알 화석 부산 첫 발견, 다대포 암석 해안」(『부산 일보』, 2004. 9. 8)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공룡알 화석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두송 반도 해안가에서 발견된 공룡알 화석이다. 구형 또는 타원형 껍질이 남아 있는 상태로 해안가 바닥에 산재하고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네이버 지식백과]공룡알 [恐龍-]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리포터/   "10살 소년 공룡알 화석 발견"입니다.  흙속에 묻힌 둥근 물체를 가리키며 한 소년이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무려 6600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공룡알 화석인데요.  중국 광둥성 허위안시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 10살 소년이 발견한 것입니다.  장양저라는 소년은 어머니와 강둑을 걷다가 흙속에서 돌처럼 생긴 이 화석을 발견했습니다.  평소 공룡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은 유심히 살펴보고 박물관에서 본 공룡알 화석과 비슷하다며 경찰과 박물관에 알렸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이 소년 덕분에 근처에서 10개의 화석을 더 발굴했습니다.    앵커 / 어른들도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데요.  호기심 많은 소년이 귀한 화석을 찾아 경찰과 박물관에 알린것도 기특하네요. ==========================================/// [핵잼 사이언스] 공룡 멸종 원인 ‘화산 vs 소행성’…답 찾았다 (연구)  2020.01.17.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사진=123rf.com공룡 멸종의 원인을 두고 대규모 화산폭발 또는 소행성 충돌 등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가운데, 최근 한 연구진은 소행성 충돌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과학적 근거를 찾았다고 주장해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도 데칸고원의 데칸용암대지 폭발이 대규모 온실가스를 뿜어냈고 이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극도로 심해졌으며, 이 시기가 공룡 멸종 시기와 일치한다는 이유 등으로 공룡 멸종의 원인이 화산폭발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미국 예일대학 연구진은 화산폭발로 인한 다량의 가스 분출은 대량 멸종이 있기 한 참 전에 일어났으며, 이는 공룡 멸종의 주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북대서양 해양 아래에서 침전물 샘플을 채취한 뒤, 성분을 분석했다. 깊은 바닷속 침전물은 프랑크톤의 화석 등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고대 지구의 기온 변화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꼽힌다. 분석 결과 K-Pg (중생대에 해당하는 백악기와 신생대 시작인 팔레오기의 경계)에 발생한 화산폭발이 대규모 가스 분출 및 기온상승에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실제 공룡 멸종이 있던 시기에는 이미 기온이 상당히 낮아진 상태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백악기 후기에 발생한 화산폭발이 약 200년간 점차적으로 지구의 기온을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공룡의 멸종을 가져올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화석 등의 분석을 통해 폭발당시 상당수의 동물들이 북극과 남극으로 이동했으며, 소행성 충돌 이전에 다시 서식지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운석이 충돌한 뒤 육지에서는 포유류가 수 십 만년에 걸쳐 비교적 빠르게 개체수를 회복했지만, 바다 생물이 멸종 뒤 다시 개체수를 회복하는데는 200만 년이 걸렸다”면서 “이는 소행성 충돌로 인해 황이 풍부한 암석들이 폭발했고 이후 산성비가 내리며 해양의 pH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소행성 충돌은 2차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원자폭탄 100억 개의 위력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당시 방출된 황은 약 3250억 t에 달할 것이며, 이것이 해양의 산성화를 변화시키고 지구로 들어오는 햇빛을 막아 급격한 기후변화를 유발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연구진은 “공룡 멸종의 원인이 대규모 화산폭발로 인한 온난화인지, 소행성 충돌인지를 두고 여전히 논쟁은 존재한다. 그러나 공룡 멸종과 관련해 소행성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고 밝혔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최신호에 실렸다. 사진=123rf.com /송현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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