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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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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수질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85  추천:0  2020-01-16
  '호주에 비' 불 끄고 있지만… 또 다른 걱정 생겼다  2020.01.16.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머니투데이 최연재 인턴기자]비 내리기 시작하는 호주 산불 지역//사진제공=BBC 날씨 트위터 캡쳐 사상 최악의 산불로 피해를 본 호주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호주 일부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그러나 당분간의 비로 산불이 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수질오염과 산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15일 오후부터 멜버른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가 내렸다. 또 산불 피해 지역인 뉴사우스웨일즈(NSW)에도 저기압의 영향으로 큰비가 내리기 시작해 120건의 산불 중 32건을 ‘상황 종료’ 시켰다. 이날 세인트올번스 등 일부 서쪽 교외 지역은 77mm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같은 날 아발론에서는 30분 만에 44mm가량의 비가 쏟아지고, 110km에 이르는 돌풍이 몰아치기도 했다. 호주 기상청은 오는 호주 기상 당국은 오는 16일부터 19일 사이 30 ~ 80mm가량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으며, 이번 비는 최대 몇 달 간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호주 기상청 강우량 예보/사진제공=호주 기상청 트위터 영상 캡쳐한편, 호주 기상청은 많은 양의 비는 산불 진화에 큰 도움이 되지만, 산사태와 수질오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무들이 잿더미로 변한 산에서 산사태가 발생할 수 있고, 흘러내린 빗물이 강과 호수 등 수원을 오염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한 폭풍우와 뇌우도 문제다. 현재 멜버른 공항은 당일 폭풍우로 활주로가 폐쇄되었고, 일부 비행기 운항이 연기된 상태다. 지난 14일 빅토리아주 동부 그레이트 오트웨이 국립공원에서 발생한 번개는 화재로 이어지기도 했다. 호주 당국은 이번에도 동부 집스랜드와 호주 북동부 지역에 유사한 번개와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의를 촉구했다. 현재 당국은 댐 주변에 오염 방지막을 설치하는 등 대도시인 시드니의 수질오염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세우고 있다. /최연재 인턴기자 =============================/// 4달째 계속되는 화재 해소할 '반가운 비'내리는 호주… 전문가 "산사태·홍수 유의해야" 화재가 일어났던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탬워스(Tamworth)시에 비가 내리고 있다. / 사진 = 뉴욕포스트   지난해 9월부터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는 호주의 '메가 화재'가 다음주까지 예보된 집중 호우로 잦아드는 모양새다. 15일(현지 시간) 폭스뉴스·뉴욕포스트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오후부터 멜버른(Melbourne)시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집중 호우가 내리고 있다. 화재의 핵심 지역인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세인트올번스 시(City of St Albans)에는 강수량 77mm의 많은 비가 내리기도 했다.  화재를 진압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이번 비는 다음주까지 계속될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매체 시드니모닝해럴드의 호주기상청(BOM) 보도에 따르면 이번 주말은 물론 오는 20일까지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며, 일부 지역에는 100mm에 달하는 호우가 내릴 전망이다. 호주기상청의 기상학자 올렌카 듀마(Olenka Duma)는 "뉴사우스웨일즈 남동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시드니 전역에 30~50mm의 비가 예상된다"면서 "일부 지역에는 폭풍우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 강우량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호주의 15일(현지 시간) 이후 예상기상도. /사진 = 호주기상청 트위터 갈무리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산불방재청(RFS) 소속 벤 셰펴드(Ben Shepherd)대변인은 "이 비가 모든 산불을 없애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진화 작업에 대한 수고를 덜어줄 것"이라면서 "비가 그친 후에 기온이 쌀쌀해지만 산불 진화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번 호우가 산사태나 홍수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돼 당국은 추후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호주의 기상학자 사라 스컬리(Sarah Scully)는 "이번 호우는 양날의 칼"이라면서 "호우가 진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불탄 지역의 약해진 나무와 지반을 자극해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고 지적했다.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응급 구조 기관 긴급구조관리청(NSWSES)은 "이번 집중 호우로 지반 붕괴나 홍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며 "유관 기관과 거주민들은 새로운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7539    [세계국제] - "우주인" = "거북이" 댓글:  조회:3902  추천:0  2020-01-16
  [단독] 전쟁 겪고 의사된 남성··· 한인 첫 우주비행사됐다 2020.01.16.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국계 의사 출신 조니 김이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달·화성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임무를 부여받게 될 새 우주비행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NASA] 한국계 최초로 NASA 우주비행사 된 조니 김 “한국계 이민 2세로 정체성 혼란을 겪던 어린 시절 덕분에 우주비행사를 꿈꾸게 됐습니다. 우주는 종교·피부색·출신 배경을 따지지 않는 인류 모두의 것 아닌가요. 가진 것 없이 태어나도 다음 세대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한인 최초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로 선정된 조니 김(Jonny Kim·35)은 15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소감을 전했다. 지난 2년간 NASA 기초훈련을 마치고 유인(有人) 달 탐사 임무 ‘아르테미스’를 수행할 최종 13인에 이름을 올린 조니 김은 인류 최초로 화성을 밟고 싶다는 포부도 드러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 교포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니 김은 두뇌와 체력을 겸비한 ‘우주 최강’ 스펙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특수부대 중의 특수부대, 미 해군 네이비실 요원으로, 이라크 등에서 100여 차례 전투를 치렀다. 당시 미군에게 수여되는 훈장 중 셋째로 높은 은성 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하버드대 의대에 진학,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로 근무했다.  미 해군 특수부대 출신에 하버드대 졸업한 의사 하버드 출신 의사로 충분히 존경받는 삶을 누릴 수 있던 그가 우주비행사가 됐다는 소식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휴스턴 소재 존슨우주센터에서 열린 NASA 훈련 졸업식에 참석한 테드 크루즈(공화당) 텍사스 상원 의원은 조니를 “말도 안 되는(ridiculous) 경력의 소유자”라고 소개하며 “당신은 우주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살릴 수도 있다”고 농담까지 건네며 추켜세웠다.  날 때부터 신동일 것 같은 조니 김은 사실 이민 2세로 암울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화 통화로는 다 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 많았다”며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굉장히 변변치 않은(humble)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 꿈도, 자신감도 없던 내가 인류를 위해 희생과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시작은 미약해도 그 끝은 창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라크서 동료 죽음 목격, 의사의 길 밟아 고등학교에서 ‘말수가 적은 소심한 아이’였던 조니 김은 졸업 직후인 2002년 네이비실에 지원했다. 그는 “해군 입대는 내 인생에서 최고의 결정이었다”며 “겁이 많고 조용했던 한 소년이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줬다”고 말했다.  조니 김은 이라크 파병 도중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며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2006년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동료가 얼굴에 총상을 입었는데, 피가 기도를 막지 않게 부축할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며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력감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 속에서 연민이라는 감정을 뼛속 깊이 사무치게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해군 장교와 내과 의사는 언뜻 관계가 없는 직업군으로 보이지만, 조니 김은 두 가지 경험이 우주비행사가 되는데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네이비실에서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는 회복력(resilience) 등 하드 스킬을 배웠고, 의사로서는 환자와 소통하고 연민을 가지는 소프트 스킬을 키웠다”며 “모두 우주 탐사에 나서는 데 필요한 능력”이라고 말했다.  "한국 우주 탐사, 이소연 이후 10년간 정체 안타까워" 그는 한국의 정체된 우주탐사와 산업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조니 김은 한국 정부가 지금부터라도 유인 탐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은 2008년 첫 번째 우주인인 이소연씨를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보낸 이후로 유인 우주 탐사를 멈추었다고 들었다”며 “세계 각국이 서로 다름으로 인해 갈등을 빚고 있지만, 인류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우주에 있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제 우주라는 대상은 탐사를 넘어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도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힘을 보태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조니 김은 두 살 때 이후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늘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국계) 아내와 늘 서울에 가고 싶다고 얘기하지만, 일이 바쁘고 아이가 셋이나 되다 보니 좀처럼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며 “한국에 여전히 친척들이 살고 있어 언젠가 꼭 방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되돌아 올 수 없는 화성탐사라도 당연히 나설 것" 세 명의 자녀와 아내를 두고 최악의 경우 되돌아올 수 없는 화성 유인 탐사에 정말 나설 수 있겠냐고 묻자 조니 김은 “물론이다”며 힘차게 답했다. 그는 “올해 9살이 된 첫째 아이가 NASA 졸업식에서 울면서 걱정을 하더라”며 “아이의 감정은 당연하고 인간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며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나”고 말했다.  조니 김은 인류가 화성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는 미래를 꿈꾼다고 했다. 그는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0년 내로 달에 간다’고 말했을 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현재 화성 여행도 영화 속 상상으로만 여겨지지만, NASA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으로 가능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주인은 울타리 옆에 등장한 바다거북" 조니 김이 가장 존경하는 우주비행사는 존 글렌과 닐 암스트롱이다. 그는 “국가에 봉사한 것뿐 아니라 겸손한 그들의 태도를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NASA 훈련 졸업식에서 조니 김의 겸손한 발언은 화제가 됐다. 그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우주비행사는 거북이라고 별명을 붙인 일화를 소개했다. 조니 김은 “울타리 옆에 바다거북 한 마리가 있다면, 혼자서 거기까지 갔을 리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며 “이 무대에 서 있는 13명 모두 NASA의 직원, 국민의 응원으로 덕분에 성장하고 움직이는 거북이”라고 말해 관중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다.  /배정원 기자
753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동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481  추천:0  2020-01-16
'석 달 넘게 불탄 호주'에 반가운 단비… 산불 진화 숨통  2020.01.16.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최악의 산불로 고통받고 있는 호주에 반가운 단비가 내렸습니다.  다음주 월요일까지 일부 지역은 최대 100mm 비가 올 것으로 예보됐는데 산불 진화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방주희PD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터] 시원한 빗줄기가 메마른 대지를 적십니다.  석 달 넘도록 이어진 최악의 산불로 고통 받는 호주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반가운 단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비로 모든 산불이 꺼지지는 않겠지만 산불 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날까지 100여 개의 산불이 타고 있던 뉴사우스웨일스 주 전역에 최고 15mm의 강우량이 예보돼 산불위험지도 대부분이 안전 상태인 '녹색'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는 다음주 월요일까지 오고, 일부 지역에는 100mm에 달하는 강우량을 보일 것으로 예보됐습니다.  "저기압이 확장하면서 광범위한 지역에 비가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빅토리아주의 더 넓은 지역에 비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주 산불로 지금까지 남한 면적에 해당하는 1천만 헥타르, 10만㎢의 면적이 불탄 것으로 추정됩니다.  코알라와 캥거루 등 10억 마리가 넘는 야생동물이 희생됐고 40명이 넘게 숨지거나 실종됐습니다.  산불 연기는 지구 반바퀴를 돌아 태평양 너머 남미 칠레와 아르헨티나까지 도달했고, 우주에서도 관찰될 정도였습니다.  이번 산불로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최소 4억 톤, 호주 연간 평균 배출량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역대 최악으로 기록될 이번 산불은 호주를 넘어서 전 세계 기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연합뉴스TV 방주희입니다. 
7537    [세상만사] - "돈다발"... 댓글:  조회:3184  추천:0  2020-01-16
英 시골마을에 떨어진 돈다발… 6년 만에 미스터리 풀렸다 (ZOGLO) 2020년1월16일  영국 북동부 해안 옛 탄광촌 거리에서 잊을 만하면 발견되던 돈다발의 정체가 6년 만에 밝혀졌다. 익명의 자선가들이 지역 노년층과 취약계층을 위해 놓고 간 돈이었다. 14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인구 5000명이 채 안 되는 영국 블랙홀 콜리어리 마을에서는 2014년 이후 주기적으로 돈다발이 발견돼왔다. 20파운드짜리 지폐 묶음으로 한 번에 최대 2000파운드(약 300만원)씩 발견되기도 했는데, 6년 동안 이렇게 발견된 돈의 총액은 2만6000파운드(약 4000만원)에 달한다. 돈다발을 발견한 주민들은 경찰에 바로 신고했으나 경찰은 돈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후 발견된 돈은 신고자에게 주어지곤 했다. 지난해에도 네 번이나 길에서 돈다발이 발견되자 경찰은 돈의 출처를 파악하기 위해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이 미스터리를 처음 공개적으로 밝히고 관련 제보를 당부했다. 마을 주민과 각종 단체, 우체국, 지역 은행 등을 상대로 탐문에 나섰으나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최근 돈다발 주인이 경찰에 결국 정체를 밝혔다. 경찰은 지난 13일 "두 사람이 이 마을의 자선가라는 사실을 털어놨다"며 익명으로 남기를 원하는 두 사람의 뜻을 존중해 이들을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칭했다. 경찰은 "두 사람은 모두 근래 예상 밖의 소득이 생겼으며, 이를 블랙홀 콜리어리 마을에 돌려주고자 했다"며 "한 명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 마을 주민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후 감정적 유대를 느꼈고, 그녀가 받은 친절을 되돌려주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주로 노년층과 취약계층이 찾을 가능성이 큰 곳에 돈다발을 뒀다. 이들은 누군가 돈다발을 주워드는 장면을 확인한 뒤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경찰은 두 사람이 돈다발을 어떻게 묶었는지 등 세부사항에 관해 정확히 설명했으며, 이에 따라 두 사람을 돈다발 주인으로 특정했다고 NYT는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은 돈을 주웠던 사람들이 그 돈을 쓰는 데 꺼림칙해 했다"며 "이번에 돈의 출처와 의도가 확인된 만큼 그들도 이제는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753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날씨+기후",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00  추천:0  2020-01-15
  물 빠진 '물의 도시' 베네치아… 곤돌라 못 다니기도 2020.01.14.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의 운하가 말라붙고 있습니다. 물의 도시란 말이 무색할 만큼 뱃길에 물이 빠지고 있는데요. 두 달 전에 홍수로 바닷물이 도시를 덮쳤을 때 하고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예원 기자입니다. [기자] 움직일 수 없는 곤돌라입니다. 두 달 전엔 물이 넘쳐 운항을 멈췄고, 지금은 물이 바닥나 갈 수가 없습니다. 질펀한 진흙으로 뒤덮인 운하 바닥까지 드러났습니다. 물 높이가 바닷물 표면보다 50cm나 더 내려간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모습입니다. 올해 들어 비가 내리지 않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 데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다시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두 달 전 53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홍수로 도시의 80% 이상이 물에 잠겼던 상황과 대조적입니다. 지난 2008년엔 뱃길에 물이 완전히 빠지는 최악의 사태를 겪기도 했습니다. 곤돌라 관광길과 주요 운송로가 말라붙으면서 당국과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선 폭설과 홍수가 도시를 덮쳤습니다. 눈이 쌓인 지붕이 무너지고 고속도로가 폐쇄되면서 지금까지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상그래픽 : 김정은) /이예원 기자 /[영상편집: 최다희]
753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동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86  추천:0  2020-01-15
  '땅굴 개발업자' 웜뱃이 산불에 지친 호주인을 웃게 했다 2020.01.15.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웜뱃. Martin Pelanek/Shutterstock 대규모 산불사태로 호주 내 수많은 동물들이 희생된 가운데, 화재시 자신의 땅굴을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웜뱃의 습성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코알라, 캥거루와 함께 호주를 대표하는 웜뱃은 호주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물로 땅속에 깊은 굴을 짓고 산다. 영국의 온라인 미디어 UNILAD는 지난 12일 “웜뱃의 따뜻한 영웅적 일화가 산불 위기를 겪고 호주의 소셜미디어에 넘쳐 흘렀으며 호주 역사의 어려운 순간에 희망을 가져왔다”고 보도했다.  생태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웜뱃은 자신의 굴에 다른 동물이 들어와 사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다른 동물을 보살피는 습성(sheperding behavior)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산불에 쫓긴 작은 동물들이 웜뱃 굴을 피난처 삼아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린피스 뉴질랜드 등은 웜뱃이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안전에 끌어들이는 ‘양치기’ 행동을 보인다고 전했다.  웜뱃의 이러한 이타적 습성에 감명을 받은 호주인들은 소셜미디어에 웜뱃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하는 글을 게시했다. 그린피스 소셜미디어 갈무리. 한 네티즌은 “웜뱃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방 정부 전체보다 더 큰 리더십과 공감을 얻고 있다”라고 전했다. 트위터 갈무리. 한 네티즌은 “화재로 영향을 받은 지역의 웜뱃이 다른 동물들을 자신의 굴로 안내한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연방 정부 전체보다 더 큰 리더십과 공감을 얻고 있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산불사태에서 실제로 웜뱃의 굴이 피난처가 된 사례가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됐다. UNILAD는 “호주의 아름다운 야생 동물들이 산불로 인해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는 황폐해진 마음이 이 ‘진정한 슈퍼 히어로’ 이야기를 믿고 싶게 한 것”라고 전했다.  미국 abc 뉴스도 "산불로부터 다른 야생동물을 보호한다는 웜뱃의 영웅적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다만 사막의 넓은 면적에 분포하는 웜뱃의 굴은 평소에도 많은 동물들이 드나들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이 의도치 않게 도움을 줬을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굴속의 온도는 지표면의 온도와 비교해 매우 안정적으로, 화재중 안전한 피난처를 원하는 다른 동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생물학자 마이클 클락은 “과거의 화재 동안 우리는 개똥벌레나 왈라비 등이 웜뱃 굴에서 불을 피하는 놀라운 행동을 보았다. 하지만 정말 크고 빠른 새조차도 화재에 희생될 정도로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불 앞에 취약하다”라고 말했다. 수개월간 계속되고 있는 호주 산불로 남한 면적 이상의 숲과 농지가 불탄 가운데 10억 마리 이상의 동물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노정연 기자
753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08  추천:0  2020-01-15
  초록으로 바뀌는 히말라야 만년설  2020.01.15.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애니멀피플] 만년설 녹은 곳에 고산식물 확장…14억 물 공급원 영향 주목히말라야 해발 4900m 지점에 펼쳐진 아빙설대 식생대의 모습. 최근 확장하고 있다. 앞에 쿰부와 촐라체 봉이 보인다. 카렌 앤더슨 박사 제공. 기후변화로 에베레스트 산 자락 등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그 자리에 식물이 자라는 면적이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빙설대의 식생대 확장이 히말라야의 물 공급 체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제3의 극지’로 불리는 히말라야와 티베트고원 일대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지구에서 가장 큰 곳 가운데 하나로, 아시아 최대 하천 10곳이 여기서 발원해 이 지역 14억 주민에 물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카렌 앤더슨 영국 엑시터대 박사 등 연구자들은 1993∼2018년 동안 미 항공우주국의 랜새트 인공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분석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과학저널 ‘지구 변화 생물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자들이 주목한 식생대는 ‘아빙설대’라 불리는 곳으로 나무가 더는 자라지 못하는 수목 한계선과 만년설이 쌓인 설선 사이의 구간이다. 여기서 봄에 눈이 녹으면 넓게 드러난 나지 곳곳에 고산 초본과 키 작은 진달랫과 관목이 짧은 여름 동안 꽃을 피운다. 연구자들은 “분석 결과 아빙설대의 면적은 빙하나 만년설로 덮인 지역보다 5∼15배 넓었다”며 “이곳의 식생이 물과 탄소 순환에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히말라야 아빙설대에는 고산 초본과 키 작은 진달랫과 관목 등이 주로 자란다. 카렌 앤더슨 박사 제공. 앤드슨 박사는 “히말라야 지역의 얼음이 사라지는 속도가 2000년과 2016년 사이에 곱절로 빨라졌다는 연구를 포함해 많은 연구가 이 지역에 관해 이뤄졌다”며 “그렇지만 아빙설대가 빙하와 만년설 지역보다 훨씬 넓어 얼음의 감소를 아는 데 중요한데도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의 해발 4150∼6000m 지역을 분석했는데, 아빙설대가 가장 현저하게 늘어난 곳은 해발 5000∼5500m 지역으로 드러났다. 낮은 고도에서는 가파른 사면에서, 높은 고도에서는 평지에서 주로 식생대가 확장했다. 만년설이 녹아 나지가 드러나고, 거기서 식물이 자라기 시작하면 눈에 덮였을 때보다 햇빛의 적외선을 더 많이 흡수해 토양의 온도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식물이 들어와 자라면서 생기는 증발산과 토양피복이 어떻게 눈을 녹이는 속도에 영향을 끼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인용 논문: Global Change Biology, DOI: 10.1111/gcb.14919 조홍섭 기자
753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44  추천:0  2020-01-13
  산불로 터전 잃은 야생동물 위해 당근·고구마 2,200kg 뿌린 호주 2020.01.13.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사진 출처 = 매트 킨(Matt Kean) 장관 페이스북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당국이 초대형 산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들을 위해 수 천kg의 당근과 고구마를 항공기와 헬리콥터에서 뿌리고 있다. 지난 11일(이하 현지 시각) 데일리메일 호주판은 산불이 발생한 뉴사우스웨일스주 국립공원과 야생동물 보호단체 등이 식량 살포를 통해 '바위 왈라비' 구출 작전에 시동을 걸었다고 전했다. 왈라비는 호주 등에 서식하는 캥거루과 동물이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한 주 동안 뉴사우스웨일스주 당국은 바위 왈라비를 위해 여러 국립공원 상공에서 총 2,200kg 이상의 신선한 채소를 떨어뜨렸다. 매트 킨 뉴사우스웨일스 환경 장관은 "야생동물들이 산불로부터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먹을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며 "왈라비는 일반적으로 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나 산불로 인해 제한되는 식량으로는 견디기 힘들다"라고 밝혔다. 킨 장관은 "왈라비들이 이미 (산불 전 이어진) 가뭄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움 없이는 생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식량 섭취량과 살아남은 동물의 개체수, 다양성 등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식량 살포는 자연에서 식량과 물이 다시 재생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라는 것이 킨 장관의 설명이다. 또 9뉴스 등 호주 현지 언론은 주 정부가 왈라비가 원래의 습관을 되찾을 때까지 포식자 개체 수를 조절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도 보도했다. 지난해 9월부터 호주 남동부에서 이어진 이번 산불로 서울 면적의 약 100배가 불에 탔다. 이상 기후로 인해 비가 내리지 않고 기온이 치솟으면서 진압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 세계자연기금(WWF)은 지난 9월 시작된 호주 산불로 약 12억 5천만 마리의 동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이번 산불로 소방관 1명을 포함해 최소 2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YTN PLUS 문지영 기자
753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거북선...???...!!! 댓글:  조회:3830  추천:0  2020-01-12
  조선 실학자가 직접 보고 그린 ‘거북선 그림’ 찾았다 기사입력 2020.01.1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 정확한 실제 모습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인데, 조선 후기 실학자가 직접 보고 그린 거북선 그림이 최근 발견됐다고 합니다. 김석 기자가 소개해드립니다. [리포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돌격선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거북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거북선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미술사 연구자가 조선 후기 실학자의 서화첩에서 뜻밖의 장면을 찾아냅니다. 19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하백원이란 실학자가 충남 보령 유배 시절인 1842년 보령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합니다. 지금의 충청 수영, 즉 조선 수군 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유람을 마친 일행이 시와 그림을 모아 펴낸 서화첩입니다. 하백원이 직접 그린 그림 한쪽에 배 두 척이 보입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선박인 판옥선 옆에 있는 배를 자세히 보면, 갑판 위에 거북 모양의 구조물이 얹혀 있고, 거북 등껍질 무늬가 선명합니다. 영락없는 거북선입니다. [황정수/미술사가 : "실제 거북선의 모습은 어땠는지 그게 매우 궁금했는데, 아마 판옥선이나 그런 데 위에 거북의 모습을 장식해서 매우 튼튼한 형태로 만든 게 거북선이 아니었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백원은 그림과 함께 실은 시에서 "거북을 숨겨 오묘하게 사용했던 이충무공의 전함이 물가에 가로놓여 있다"고 적었습니다. 실물을 보고 그렸다는 얘깁니다. 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거북선 그림이 남아 있긴 하지만, 당대 인물이 실제 거북선을 보고 그린 건 이 그림이 유일합니다. 거북선이 1842년까지도 운용됐음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기록입니다. [황정수/미술사가 : "단순한 회화라기보다는 실학적 사상을 담고 있는 회화라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그동안 자료 부족에 시달려온 거북선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KBS 뉴스 김석입니다. /김석 기자
753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03  추천:0  2020-01-12
  봄인 줄 알았나… 너무 일찍 깬 개구리 2020.01.12.    슬퍼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서울 남산서 한 달 일찍 겨울잠 깨 포접 중인 산개구리 발견 ㆍ기후변화로 몇년 전부터 목격…다시 추워지면 동사 우려도 지난 9일 서울 남산 중턱 자락에서 산개구리 한 쌍이 포접 중인 모습. 시민과학자 조수정씨 제공 삼라만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3월5일)’이 두 달 가까이 남았는데, 개구리들이 벌써 잠을 깨기 시작했다. 예년보다 포근한 겨울 날씨가 이어진 탓이다. 서울환경운동연합은 지난 9일 시민과학자 조수정씨가 서울 남산에서 산개구리 한 쌍이 포접 중인 장면을 포착했다고 12일 밝혔다. 포접은 암컷 개구리가 물속에 산란할 때 이를 수정시키기 위해 수컷이 등 뒤에서 포옹하는 것을 말한다.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들은 가장 먼저 포접과 산란을 한다. 통상 서울 개구리들은 2월 초중순 이후 잠에서 깨 포접에 들어가는데, 이번에 발견된 산개구리들은 한 달가량 일찍 잠에서 깬 것이다. 개구리들의 이른 기상은 기후변화로 인해 변화무쌍해진 겨울 날씨와도 관련이 있다. 변온동물인 개구리는 온도에 민감해서 평년보다 포근한 날이 계속돼 임계치를 넘기면 잠에서 깨버린다. 개구리 등 양서류는 세계자연보전연맹이 지정한 기후변화로 인해 멸종할 확률이 가장 높은 생물종이기도 하다. 최영 서울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개구리의 이른 기상은 몇년 전부터 목격된 것으로 올해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라며 “올해 겨울이 상대적으로 온화한 데다 며칠 전 겨울비가 길게 오면서 개구리가 산란철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실제 요즘 개구리는 옛날 개구리보다 겨울잠을 덜 잔다. 국립공원공단이 2010년부터 10년간 지리산국립공원 구룡계곡 일대에서 북방산개구리의 첫 산란 시기를 관찰한 결과, 경칩이 있는 3월에 산란이 시작된 경우는 단 2차례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는 도심에 위치한 남산보다 지리산 산중의 기온이 더 낮기 마련인데 2014년에는 2월1일, 2013년에는 2월4일, 2017년에는 2월6일에 개구리의 산란이 시작됐다. 기상청의 2010~2019년 기온자료를 보면 1월 평균기온은 10년 전에 비해 2.78도 상승했다. 기후위기 시대를 요즘 개구리가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일찍 깬 개구리는 다시 매서운 추위가 시작되면 알과 함께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송재영 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연구원 박사는 “잠에서 깼는데 봄철 같은 따뜻함이 유지되다 갑자기 다시 추워지면 적응을 못해서 동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7530    [그것이 알고싶다] - 한글 "훈민정음" 문자 과학적이다... 댓글:  조회:3664  추천:0  2020-01-09
[앵커] 한글 창제 오백일흔세(573) 돌 . 한글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적인 문자라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겠지만, 왜 과학적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기정훈 기자가 짚어 드립니다.   [기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음소문자'입니다. '뜻 문자'인 한자나 '음절문자'인 일본 문자는 비할 게 못 됩니다. 게다가 같은 음소문자인 로마자 알파벳에 견줘도 훨씬 과학적입니다. 먼저 소리가 나오는 곳 모양을 분석해서 문자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입과 이, 혀와 목구멍 모양으로 자음을 만들었고, 모음엔 하늘과 땅, 사람을 뜻하는 철학까지 담았습니다. 어느 문자보다 규칙적입니다. 자음에 획을 더해 된소리나 거센소리를 만드는 방식이 규칙적이고, 모음을 합성하는 방식도 규칙적입니다. 특히 이 규칙들은 5백여 년이 지난 요즘의 스마트폰 문자판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모음의 합성 원리를 가져다 '천지인' 입력방식이 나왔고, 자음에 획을 추가하는 규칙을 이용해 '나랏글' 방식이 나왔습니다. 쉽게 익혀 입력할 수 있습니다. 또 자음과 모음, 자음, 즉, 초-중-종성을 그대로 풀어서 쓰지 않고 모아쓰는 방식이 규칙적이고 실용적입니다. 한 실험에 따르면 자모음을 풀어쓰는 것보다 모아쓸 때 2.5배 더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한 글자가 대부분 한 소리를 냅니다. 영문 알파벳의 A는 Apple과 Garden, Water에서 모두 다른 소리를 내지만, 한글 모음 'ㅏ'는 아리랑에서든 아버지에서든 같은 소리를 냅니다. 또 종성, 즉 받침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고 초성과 같은 자음을 쓰도록 한 것도 돋보이는 점입니다. [한재영 / 한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종성자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초성과 중성자를 만들고 그것을 조합해서 그것도 음절단위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언어를 음운론적으로 제대로 파악을 한, 오늘날의 눈으로 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경지였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모든 내용은 세계 언어학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문자의 사용 설명서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됐고 이 책은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으로도 등재됐습니다. 세계적인 발명품, 한글. 573돌 한글날, 뿌듯한 마음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글을 아끼려는 마음도 되잡아야 할 이유입니다. /YTN 기정훈 ========================/// 천재학습백과 초등 국어 6-1 한글의 자음자와 모음자에 대하여 알기     교과과정 초등학교 > 6학년 > 1학기 > 국어 6-1 > 11. 뉴스의 관점 목차 1. 기본 자음자와 기본 모음자 알아보기 1) 기본 자음자 2) 기본 모음자 2. 합성 자음자와 합성 모음자 알아보기 1) 합성 자음자 2) 합성 모음자 3) 자음자와 모음자의 순서 3. 컴퓨터 자판에서 한글의 자음자, 모음자 배치 알아보기 1. 기본 자음자와 기본 모음자 알아보기 1) 기본 자음자 한글은 기본 자음자 열네 자와 기본 모음자 열 자로 이루어진 스물네 개의 자모로 소리를 적는 문자 체계입니다. 한글의 자음자는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의 모양을 보고 소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ㄱ, ㄴ'은 이들 글자를 소리낼 때의 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ㅁ'은 입의 모양, 'ㅅ'은 이의 뾰족한 모양, 'ㅇ'은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입니다. ㄱ 기역 ㄴ 니은 ㄷ 디귿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옷 ㅇ 이응 ㅈ 지읒 ㅊ 치읓 ㅋ 키읔 ㅌ 티읕 ㅍ 피읖 ㅎ 히읗 2) 기본 모음자 모음자는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뜬 '·'와 땅의 평평한 모양을 본뜬 'ㅡ',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뜬 'ㅣ'를 기본으로 하여 서로 결합하여 만들었습니다.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 이 2. 합성 자음자와 합성 모음자 알아보기 1) 합성 자음자 합성 자음자는 기본 자음자를 겹쳐 쓴 방법으로 만든 것으로, 된소리로 발음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ㄲ 쌍기역 ㄸ 쌍디귿 ㅃ 쌍비읍 ㅆ 쌍시옷 ㅉ 쌍지읒 2) 합성 모음자 합성 모음자 'ㅐ, ㅒ, ㅔ, ㅖ'는 기본 모음자에 'ㅣ'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ㅘ, ㅝ'는 기본 모음자를 결합하여 만든 것이고, 여기에 'ㅣ'를 덧붙여 'ㅙ, ㅞ'를 만들었습니다. ㅐ 애 ㅒ 얘 ㅔ 에 ㅖ 예 ㅘ 와 ㅙ 왜 ㅚ 외 ㅝ 워 ㅞ 웨 ㅟ 위 ㅢ 의 3) 자음자와 모음자의 순서 자음자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모음자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3. 컴퓨터 자판에서 한글의 자음자, 모음자 배치 알아보기 컴퓨터 자판 합성 자음자는 Shift 키와 기본 자음자의 키를 함께 눌러서 입력할 수 있습니다. 합성 모음자 중 'ㅒ, ㅖ'는 Shift 키와 모음자의 키를 함께 눌러서 입력할 수 있고, 'ㅘ, ㅙ, ㅚ, ㅝ, ㅞ, ㅟ, ㅢ' 등의 합성 모음자는 두 모음자 키를 차례대로 눌러서 입력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글의 자음자와 모음자에 대하여 알기 (천재학습백과 초등 국어 6-1) ================///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 닿아서 나는 소리, 홀로 나는 소리     우리글은 소리글자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요? 소리글자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음은 우리말로 '닿소리'라고 하고, 모음은 '홀소리'라고 부르지요. 닿소리란 닿아서 나는 소리를 말하고, 홀소리란 홀로 나는 소리를 말해요. 친구가 리코더를 불고 있습니다. 친구는 손가락으로 연방 리코더 구멍을 막았다 열었다 하면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리코더는 구멍을 어떻게 막느냐에 따라 소리가 다르게 납니다. 이렇게 리코더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서 여러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말은 혀와 입술이 입 안의 여기저기에 닿아 그곳을 막아서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소리가 닿소리, 바로 자음입니다. 리코더로 '파'보다 조금 높은 '반음 파' 소리를 낼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혀끝으로 바람이 들어가는 피리 구멍을 반쯤 막으면 되지요. 그러면 좁은 곳으로 바람이 들어가니까 높은 소리가 나게 됩니다. 말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요. 폐에서 나가는 바람이 우리 입을 통과하면서 여러 소리가 나는 거예요. 입 안을 좁히거나 넓히거나 모양을 달리하거나 하면 바람이 입 안을 통과하면서 여러 소리를 만들어 내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소리가 홀소리, 곧 모음이에요. 설명을 듣고 보니 자음과 모음이라는 말보다 닿소리와 홀소리라는 말이 훨씬 소리의 성질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닿소리(자음)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14개와 'ㄲ, ㄸ, ㅃ, ㅆ, ㅉ' 5개 이렇게 모두 19개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닿소리를 19개 소리로 듣고 인식한다는 의미예요. 무슨 말이냐고요? 영어에서 [v] 소리와 [b] 소리는 다른 소리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두 소리 모두 [ㅂ] 소리로 들어요. 마치 우리가 수많은 색으로 되어 있는 무지개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이렇게 일곱 가지 색깔로 보는 것처럼요. 홀소리(모음)는 단모음과 이중모음으로 나누어져요. 단모음은 'ㅣ, ㅔ, ㅐ, ㅏ, ㅜ, ㅗ, ㅓ, ㅡ, ㅟ, ㅚ' 이렇게 10개가 있습니다. 단모음은 발음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소리와 끝날 때 나는 소리가 같은 모음을 말합니다. 'ㅏ'소리를 내 보세요. 처음에도 [ㅏ]이고, 끝날 때의 소리도 [ㅏ]이지요? 그래서 'ㅏ'는 단모음입니다. 이중모음은 'ㅑ, ㅕ, ㅛ, ㅠ, ㅒ, ㅖ; ㅘ, ㅝ, ㅙ, ㅞ; ㅢ' 11개가 있습니다. 이중모음은 단모음과 달리, 발음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소리와 끝날 때 나는 소리가 다릅니다. 'ㅑ'를 천천히 슬로 모션으로 발음해 보세요. 처음에는 [ㅣ]소리가 나다가 맨 마지막에는 [ㅏ] 소리만 들리지요? 그래서 'ㅑ'를 이중모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자음은 19개, 모음은 21개, 합해서 총 40개입니다. ♣ 24개야, 40개야? 어떤 책을 보면 우리말 자음과 모음의 개수를 24개라고 하고, 또 어떤 책을 보면 우리말 자음과 모음의 개수를 40개라고 말하는 책도 있어요. 어느 말이 맞는 걸까요? 둘 다 맞습니다. 뭐 이런 황당한 대답이 있냐고요? 우리말에서 글자로 표기하는 자음과 모음은 40개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기본이 되는 자음과 모음은 자음 14개, 단모음 10개 이렇게 24개예요. 나머지 16개의 자음과 모음은 기본이 되는 자음이나 모음을 결합해서 만든 소리랍니다. 된소리인 'ㄲ, ㄸ, ㅃ, ㅆ, ㅉ'는 각각 기본 자음인 'ㄱ, ㄷ, ㅂ, ㅅ, ㅈ'을 합해서 만든 글자이고, 이중모음 11개도 두 개의 단모음을 합해서 만든 글자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음과 모음의 개수가 24개라고 하는 것은 기본이 되는 자음과 모음의 개수가 그렇다는 것이고, 자음과 모음의 개수가 40개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에서 표기하는자음과 모음의 글자 수가 40개라는 뜻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닿아서 나는 소리, 홀로 나는 소리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자음   [ 子音 ] 음성은 성대를 통과한 소리가 어디에서 장애를 많이 받느냐 않느냐에 따라 구분되는데, 자음은 숨이 어디에서 일단 완전히 막혔다가 나오든가 그렇지 않더라도 통로가 아주 좁아서 발음기관들의 마찰을 일으키고 나오는 소리들, 즉 많은 장애를 받으면서 나오는 소리들이다. 국어의 자음 분류는 다음과 같다. 자음 자음 구분 소리를 내는 위치 순음 치조음 구개음 연구개음 후음 소리를 내는 방법 안울림소리 파열음 예사소리 ㅂ ㄷ   ㄱ   된소리 ㅃ ㄸ   ㄲ   거센소리 ㅍ ㅌ   ㅋ   파찰음 예사소리     ㅈ     된소리     ㅉ     거센소리     ㅊ     마찰음 예사소리   ㅅ     ㅎ 된소리   ㅆ       울림소리 비음 ㅁ ㄴ   ㅇ   유음   ㄹ       [네이버 지식백과] 자음 [子音]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모음     음성은 성대를 통과한 소리가 어디에서 장애를 많이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되는데, 모음은 발음기관들의 마찰이 없이 나오는 소리들, 즉 장애 없이 자유롭게 통과되어 나오는 소리들이다. 국어의 모음 분류는 다음과 같다. 모음 모음 구분 혀의 위치 전설모음 후설모음 입술모양 평순 원순 평순 원순 혀의 높이 고모음 ㅣ ㅟ ㅡ ㅜ 중모음 ㅔ ㅚ ㅓ ㅗ 저모음 ㅐ   ㅏ   국어의 모음 가운데 ‘ㅏ, ㅐ, ㅓ, ㅔ, ㅗ, ㅚ, ㅜ, ㅟ, ㅡ, ㅣ’는 발음하는 도중에 입술이나 혀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모음을 단모음(單母音)이라 한다. 단모음은 혀의 앞뒤 위치, 입을 벌리는 정도, 입술 모양이 둥글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구별된다. 입천장의 중간점을 기준으로 하여 혀가 그 앞부분에 있을 때에 발음되는 모음을 전설모음(前舌母音), 뒷부분에서 발음되는 모음을 후설모음(後舌母音)이라 한다. 발음할 때에 입이 조금 열려서 혀의 위치가 높은 모음을 고모음, 그보다는 입이 더 열려서 혀의 위치가 중간인 모음을 중모음, 입이 크게 열려서 혀의 위치가 낮은 모음을 저모음이라 한다. 또 입술을 둥글게 오므리며 발음하는 모음을 원순모음이라 하고, 입술을 둥글게 오므리지 않고 발음하는 모음을 평순모음이라 한다. 관련이미지 1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훈민정음언해 중 모음 설명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모음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어 용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모   [ 字母 ]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개설 알파벳식 자모 성운학상의 자모 자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ᅀ ㅇ 10. ㆁ 11. ㅈ 12. ㅊ 13. ㅋ 14. ㅌ 15. ㅍ 16. ㅎ 17. ㆆ 모음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10. ㅣ 11. · 정의 철음(綴音)의 기본이 되는 글자. 개설 알파벳(alphabet)을 일컫기도 하고, 한자(漢字)의 성모(聲母)를 나타내는 특정의 기호자(記號字)를 일컫기도 한다. 한글의 자모에는 자음자모와 모음자모 및 쌍자모·복자모 등이 있다. 알파벳식 자모 어떠한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일련의 문자를 알파벳이라 하는데, 이것을 자모라 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문자는 일정한 방법으로 배열되어 기억되고 있다. 알파벳이라는 말은 그리스자모의 처음 두 자의 이름 알파(α)와 베타(β)에서 따온 말로, 영어의 ABC와 같은 것이다. 본래는 그리스자모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뒤에 라틴자모에 전용되었고, 현재는 많은 언어의 문자에 대하여 쓰이고 있다. 그리스자모의 이름인 알파·베타·감마·델타는 셈어에서 유래하고, 이것은 다시 시나이문자(Sinai文字)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자모의 원형으로서, 각 문자가 알파(셈어의 ‘소’)·베타(셈어의 ‘집’)와 같이 대상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알파벳은 대체로 일자일음(一字一音)의 순수한 음소문자라 할 수 있으며, 비교적 정확하게 그 언어를 표기할 수 있고, 언어를 전사하는 최고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여러 나라의 자모는 라틴어에서, 러시아어의 자모는 그리스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언어에 따라 문자와 자수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한편 셈어의 자모는 동진(東進)하여 고대 인도의 여러 가지 자모를 낳게 하였고, 그것은 다시 티베트문자(西藏文字)·위글문자(回訖文字)·파사파문자(八思巴文字)는 물론 우리의 훈민정음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에서 자모의 개념이 도입된 것도 고대 인도 범어(梵語)의 자모개념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운학의 자모개념은 성모에 국한되는 것으로 알파벳식 자모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런데 원나라 때에 이르러 제정된 파사파문자의 자모개념은 이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원나라 주종문(朱宗文)의 증수(增修)로 알려진 『몽고자운(蒙古字韻)』에 의하면 권두에 ‘몽고자전자모도(蒙古字篆字母圖)’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모라는 말은 종래의 성운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나, 모음자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점에서 알파벳식 자모의 개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조선 초기의 성운학자들은 대체로 한자음의 성모를 자모라고 하였으나 훈민정음에서의 초성자를 자모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모의 경우는 성운학에서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종 때에 이르러 최세진(崔世珍)이 한글을 언문자모(諺文字母)라 하고,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ㅋ, ㅌ, ㅍ, ㅈ, ㅊ, ᅀ, ㅇ,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 로 열거하였다. 이것은 알파벳식 자모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글을 자모라고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 자모를 성운학의 성모를 지칭하는 경우와 한글을 지칭하는 경우에 서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한글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ㄱ, ㄴ, ㄷ……’과 같이 단음문자(單音文字)를 가리키는 경우와 ‘가, 낭, 단, 람……’과 같이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서 된 음절자(音節字)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를 자모라고 하는 것은 자모의 본래의 개념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가나(假名)를 때에 따라 자모라고 호칭하는데, 가나는 단음문자가 아니고 음절문자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모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자모는 음소 표기를 목표로 한 단음문자, 즉 일자일음이 기준이 될 때에만 사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자모를 구성하는 문자는 각각 단음을 나타내는 것이 원칙이기는 하나, 그 음은 꼭 일정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영어의 경우, a로 표기되는 음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일자일음의 경우에도 성조(聲調)나 음조(音調)에 의한 차이는 무시되는 것이므로 각 문자에 의한 표기는 반드시 엄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자모는 서사(書寫)의 여러 형식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음과 문자와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정하여진 것이며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자모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한 일람표를 자모표(字母表) 또는 자모도(字母圖)라고 한다. 자모도에 나타난 자모의 배열순서는 기억하는 데 편리하도록 관습화되어 표기행위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기억된 자모의 체계는 때때로 차례를 나타내는 서수(序數)와 마찬가지로 순서를 나타내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성운학상의 자모 한자는 표어문자(表語文字)이기 때문에 1자는 1음절로 되어 있어, 한 자음은 알파벳식 자모와는 대음하지 못한다. 남북조시대 이후 운서(韻書)의 편찬이 성행하면서 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반절법을 이용하여왔다. 이 반절법은 자음을 성(聲)과 운(韻)의 두 조각으로 분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 등운학자(等韻學者)들에 의하여 이것을 다시 성모(聲母)+개모(介母)+핵모(核母)+운미(韻尾)의 네 조각으로 분석하고 여기에 다시 성조를 가산하였다. 운서에 있어서의 성모의 표시는 반절상자(反切上字)가 대신하는 것으로, 이 반절상자는 일정한 수로 계련(系聯)되기도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성모를 음운론적으로 일정한 수(數)와 차례를 정하고 그것을 일정한 문자로 표기한 것을 자모라고 하였는데, 최초로 이 자모를 체계화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고대 인도의 범자의 전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양(南梁)의 한비구(漢比丘)·수온(守溫)이 창시한 다음의 30자모가 현존하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순음(脣音) 不·芳·竝·明 설음(舌音) 端·透·定·泥 (설두음) 知·徹·澄·日 (설상음) 아음(牙音) 見·溪·群·來·疑 치음(齒音) 精·淸·從 (치두음) 審·穿·禪·照 (정치음) 후음(喉音) 心·邪·曉 (후중음) 匣·喩·影 (후중음) 이 배열은 변별적 자질에 따라 분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의 표시는 조음점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이 경우에 ‘日’이 설음에, ‘來’가 아음에, ‘心, 邪’가 후음에 배속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나, 이러한 분류는 범어의 체계와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양나라의 고야왕(顧野王)이 편찬한 『옥편(玉篇)』에 이르러, [표 1]과 같이 36자모로 수정된다. [표 1] 36자모   자모 자모 區分 牙音 舌頭音 舌上音 唇重音 唇輕音 齒頭音 正齒音 喉音 舌齒音 全淸 見 端 知 幇 非 精 照 影   次淸 溪 透 徹 滂 敷 淸 穿 曉   全濁 群 定 澄 橙 奉 從 牀 匣   不淸不濁 疑 泥 娘 明 微     喩 來 日 全淸           心 審     半濁半淸           斜 禪       이 [표 1]의 각 칸에 들어 있는 자류를 자모라 하고, 자모를 이와 같이 배열한 도식을 자모도라고 한다. 이 자모는 일정한 음소를 나타내는 기호로 쓰인 것이다. 예컨대 ‘見’은 시대에 따라 또는 방언에 따라 음성적 차이가 있으나, 이것이 자모로 쓰인 경우에는 언제나 /k/라는 음소를 나타내는 기호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 자모가 다른 언어에 이식될 때에는 그 언어의 서열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가져오는 일도 있다. 예컨대 이것이 몽골어의 전사에서는 /g/를 표기하는 데 쓰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것은 중국어와 몽골어의 음운체계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양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하기 때문이다. 중국어 k k’ g’ ŋ 몽골어 g k k’ ŋ 자 모 見 溪 群 疑 그러나 ‘見’은 일반적으로 /k/에 대응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진다. 앞의 자모도는 변별적 자질에 따른 음운대립의 관계를 나타내는 구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종(從)의 서열, 즉 전청음(全淸音)·차청음(次淸音)……하는 것은 제2차조음에서 변별되는 성문폐쇄(聲門閉鎖)·후두긴장(喉頭緊張)·성대진동(聲帶振動)·비강공명(鼻腔共鳴) 등의 자질을 나타내고, 횡(橫)의 서열, 즉 아음·설두음……하는 것은 조음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칸은 구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운학에서 이 36자모도는 성모의 기술에 기준이 된 것이나, 자모의 수는 음운의 변천에 따라 각 운서마다 차이가 있다. 우리의 『동국정운』 자모도 이것을 기준으로 삼은 것인데, 설두와 설상, 순음중과 순음경, 치두와 정치가 통합되어 23자모로 된 점에 있어서 중국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겠다. [표 2] [표 2] 동국정운 23자모   자모 자모 區分 牙音 舌音 唇音 齒音 喉音 半舌音 半齒音 全淸 君 斗 得 卽 分     次淸 快 呑 漂 侵 虛     全濁 适 覃 步 慈 洪     不淸不濁 業 那 彌   欲 閭 穰 全淸       戌       全濁       邪         자음 ㄱ 현행 한글자모의 첫째 글자. ‘기역’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혀뿌리[舌根]를 높여 여린입천장[軟口蓋]을 막았다가 뗄 때 나는 소리, 즉 연구개 파열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例義篇)에서는 “ㄱ은 어금닛소리니 군(君)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ㄱ牙音如君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制字解)에서는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은 모양을 본떠서 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이 소리를 어금닛소리[牙音]의 전청음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무성무기음(無聲無氣音)인 것을 보였다. 그러나 이 소리는 어두(語頭)에서는 무성음[k]로 나고, 어중(語中)의 유성음 사이에서는 유성음 [g]로 나며, 음절의 말음 자리에서는 연구개를 막은 혀뿌리를 떼지 않은 상태, 곧 내파(內破)의[{{8}}]로 난다. 『훈몽자회』(1527) 범례에 처음으로 자모의 이름이 보여서 ‘초성종성통용팔자란(初聲終聲通用八字欄)’에 ‘ㄱ 其役(기역)’이라 적혀 있고,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에서 ‘기역’으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서는 “ㄱ 엄쏘리니 君군ㄷ字 처 펴아나 소리 니라.”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ㄱ’에서 볼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받침 없이 모음으로 끝나는 소리이며, 그 모음은 양성모음계열이라는 것을 최소한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첫번째였다. ㄴ 현행 한글자모의 둘째 글자. ‘니은’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날숨을 콧구멍으로 나오게 하여 코안[鼻腔]의 공명을 일으켜서 내는 콧소리[鼻音]를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혀끝이 윗잇몸에 붙은 모양을 본떠서 ㄴ자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이 소리를 혓소리[舌音]의 불청불탁(不淸不濁)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콧소리임을 보였다. 그리고 같은 설음 글자인 ‘ㄴ, ㄷ, ㅌ’ 가운데에서는 가장 약하게 발음된다고 하여 설음 글자의 기본글자로 삼았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ㄴ은 혓소리니 나(那)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ㄴ舌音如那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다. 『훈몽자회』 범례에 처음으로 자모의 이름이 보여서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 ‘ㄴ 尼隱(니은)’이라 적혀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니은’으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서는 “ㄴ 혀쏘리니 那낭ㆆ字 처 펴아나 소리 니라.”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ㄴ’에서 볼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받침이 없이 모음으로 끝나는 소리이며, 그 모음은 양성모음계열이라는 것을 최소한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여덟번째였으나, 『훈몽자회』 이후로 두번째가 되어, 이것 또한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ㄷ 현행 한글자모의 셋째 글자. ‘디귿’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혀끝을 윗잇몸에 붙여 날숨을 막았다가 뗄 때 나는 소리, 즉 치조(齒槽) 파열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같은 설음에 속하는 ‘ㄴ’자를 기본으로 하고, ‘ㄴ’음보다 세게 발음된다고 하여 획을 하나 더하여 ‘ㄷ’자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이 소리를 혓소리의 전청음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무성무기음인 것을 보였다. 그러나 이 소리는 어두에서는 무성음[t]로 나고, 어중의 유성음 사이에서는 유성음[d]로 나며, 음절의 말음 자리에서는 연구개를 막은 혀뿌리를 떼지 않은 상태, 곧 내파의[{{01}}]로 난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ㄷ은 혓소리니 두(斗)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ㄷ舌音如斗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다. 『훈몽자회』 범례에 처음으로 자모의 이름이 보여서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 ‘ㄷ 池末(디귿)’이라(末은 중세국어로 ‘귿’) 적혀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디귿’으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서 보이는 “ㄷ 혀쏘리니”에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받침 없이 모음으로 끝나는 소리이며, 그 모음은 양성모음계열이라는 것을 최소한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아음인 ‘ㄱ’자를 첫번째로 하여 다섯번째였으나 『훈몽자회』 범례부터 세번째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ㄹ 현행 한글자모의 넷째 글자. ‘리을’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유음(流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이 문자의 음가는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 “ㄹ은 반혓소리니 려(閭)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ㄹ半舌音如閭字初發聲).”라고 하여 ‘閭’자의 한자음으로 설명되어 있고,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는 ‘ㄹ’을 반설음의 불청불탁에 소속시켜 설측음 또는 그와 가까운 음인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국어에서 이 소리는 음절말 위치에서는 혀끝을 윗잇몸에 대고 혀 양옆으로 날숨을 내보내며 목청을 울리게 해서 내는 설측음[1]로, 모음과 모음 사이에서는 목청을 울리면서 혀끝으로 윗잇몸을 한번 두들기고 내는 탄설음(彈舌音)[r]로 발음되는데, 이러한 사정은 15세기 중세국어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이 문자의 이름은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 처음으로 ‘ㄹ 梨乙(리을)’이라 적혀 있는데,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리을’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 나오는 “ㄹ 반혀쏘리니”에서 볼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받침 없이 모음으로 끝나는 소리이며, 그 모음은 양성모음계열이라는 것을 최소한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스물두번째였으나, 『훈몽자회』 범례부터 네번째로 기록된 이후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ㅁ 현행 한글자모의 다섯째 글자. ‘미음’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위·아랫입술로 입을 다물고 날숨을 코안으로 내보내며 목청을 울려서 내는 유성양순비음(有聲兩脣鼻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ㅁ은 입술소리니 미(彌)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ㅁ 脣音 如彌字初發聲).”라고 설명하고, 또 제자해에서는 순음의 불청불탁에 소속시켜 이 음이 양순비음임을 보였다. 이 글자는 ‘상구형(象口形)’이라고 하여 입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것으로서, 같은 순음에 속하는 ‘ㅂ, ㅍ, ㅁ’음 가운데 이 ‘ㅁ’이 가장 세지 않다고 하여 이 글자를 순음의 기본글자로 삼았다. 이 자모의 이름은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 처음으로 ‘ㅁ 眉音(미음)’이라 적혀 있는데,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미음’으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 나오는 “ㅁ 입시울쏘리니”에서 볼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최소한 양성모음계열로 끝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열두번째였으나, 『훈몽자회』 범례부터 다섯번째로 기록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ㅂ 현행 한글자모의 여섯째 글자. ‘비읍’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위·아랫입술로 입을 다물었다가 떼면서 날숨을 뿜어내는 무성 무기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이 소리는 어두에서는 무성음[p]로 나고, 어중의 유성음 사이에서는 유성음[b]로 나며, 음절의 말음 자리에서는 연구개를 막은 혀뿌리를 떼지 않은 상태, 곧 내파의[{{02}}]로 난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순음에 속하는 ‘ㅂ, ㅍ, ㅁ’ 가운데에서 ‘ㅁ’이 가장 약하다고 하여 기본글자로 삼고 이보다 세게 난다고 하여 ‘ㅁ’자에 획을 더하여 ‘ㅂ’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ㅂ은 입술소리니 별(瞥)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ㅂ脣音如瞥字初發聲).”라고 하여 ‘瞥’자의 한자음으로 ‘ㅂ’자의 음가를 설명하였으며, 제자해에서는 ‘ㅂ’음을 순음의 전청에 소속시켜 이 음의 음가가 무성무기양순파열음임을 보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 처음으로 ‘ㅂ 非邑(비읍)’이라 적혀 있는데,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비읍’으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 나오는 “ㅂ 입시울쏘리니”에서 볼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최소한 양성모음계열로 끝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아홉번째였으나, 『훈몽자회』 범례에서 여섯번째로 기록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ㅅ 현행 한글자모의 일곱째 글자. ‘시옷’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앞혓바닥을 입천장의 앞바닥에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올려서 그 사이로 날숨이 갈면서 나가게 하여 내는 무성마찰치경음(無聲摩擦齒莖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ㅅ은 잇소리니 술(戌)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ㅅ齒音如戌字初發聲).”라고 설명하고, 또 제자해에서는 치음의 전청에 소속시켜 이 음이 무성무기음임을 보였다. 현대국어에서 ‘ㅅ’은 종성에서는 발음되지 않고[t]로 중화되지만, 15세기 중세국어에서는 종성 자리에서 ‘ㄷ’음과 ‘ㅅ’음이 구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자는 『훈민정음』(해례본) 종성해에서 ‘상치형(象齒形)’이라고 하여 이[齒]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것으로서, 같은 치음에 속하는 ‘ㅈ, ㅊ, ㅅ’음 가운데 이 ‘ㅅ’이 가장 세지 않다고 하여 이 글자를 치음의 기본글자로 삼았다. 이 자모의 이름은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 처음으로 ‘ㅅ 時衣’이라 적혀 있는데,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시옷’으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본)에 나오는 “ㅅ 니쏘리니”에서 볼 수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 글자의 이름은 최소한 양성모음계열로 끝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열여섯번째였으나, 『훈몽자회』 범례에서 일곱번째로 기록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ᅀ 훈민정음 23자모 가운데의 한 글자. 흔히 ‘반치음’으로 부르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16세기말경까지 국어 표기와 한자음 표기에 쓰였고, 그 뒤로는 한자음 표기나 외국어음 표기에 이따금 쓰였다. 15세기 중세국어의 자음 가운데, 혀끝을 윗잇몸에 가까이 대고 그 사이로 날숨을 내보내면서 목청을 울리게 하며 내는 유성치경마찰음(有聲齒莖摩擦音)인[z]음을 표기하는 데 쓰였고, 한자음 표기 때에는[z]음과 비슷한 음가를 가졌던 한자음의[z]·[○]음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ᅀ은 반잇소리니 (穰)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ᅀ 半齒 音如穰字初發聲).”라 하여 ‘穰’자의 한자음으로 음가를 설명하였다. ‘ᅀ’음은 중세국어에서 모음과 모음, 반모음[j]와 모음, ㄴ·ㅁ과 모음, 모음과 ㅇ[○], ○[β]음과 같은 어중의 음성적 환경에만 쓰였고, 이따금 사잇소리나 의성어·의태어, 외래어의 어두음 표기에 쓰였다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에 걸쳐서 소실되었다. 한글의 자모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는 ‘ᅀ 而’라 적혀 있다. ㅇ 현행 한글자모의 여덟째 글자. ‘이응’이라 읽는다. ① 아무런 음가 없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단어나 음절의 초성으로 쓰이며, ② 혀뿌리를 연구개에 대어 숨길을 막고 날숨을 코안으로 내보내며 목청을 울리게 해서 나는 유성연구개비음(有聲軟口蓋鼻音)[ŋ]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아무런 음가 없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의 초성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이따금 한자음 표기의 경우 모음으로 끝나는 음절의 종성으로 잠시 사용되었고, 유성연구개비음의 표기에는 ‘ㆁ’자가 쓰였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ㅇ은 목구멍소리니 욕(欲)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ㅇ喉音如欲字初發聲).”라 하였고, 제자해에서는 ‘ㅇ’음을 후음의 불청불탁에 소속시키고 종성해에서는 “ㅇ은 그 소리가 맑고 비었다(ㅇ聲淡而虛).”라고 설명하여 ‘ㅇ’음이 무음가(無音價) 또는 [○]임을 시사하였다. 실제로 15세기 중세국어를 표기하는 데 있어서 ‘ㅇ’자는 음가 없는 초성이나 어중에서[○]을 가진 초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이후 훈민정음 창제 당시[ŋ]을 표시하였던 ‘’이 사용되지 않음과 함께 종성에서 ‘ㆁ’이 나타내던 음을 ‘ㅇ’으로 대신 표기하게 되었다.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는 ‘ㅇ 伊(이)’라 적혀 있는데, 현재의 ‘이응’이라는 명칭은 ‘’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 데에서 연유한다. 곧 『훈몽자회』의 ‘초성종성통용팔자란’에는 ‘ㆁ 異凝(이응)’이라 되어 있는데, 이 ‘ㆁ’이 사용되지 않는 대신에 그것의 기능을 ‘ㅇ’이 흡수하게 되자 그 명칭까지도 ‘ㅇ’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 글자의 순서 또한, 훈민정음 창제 당시 스물한번째였으나 『훈몽자회』의 ‘ㆁ’의 순서를 대신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여덟번째로 규정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0. ㆁ 훈민정음 23자모 중의 하나. 흔히 ‘옛이응’이라고 부른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16세기 말엽까지 쓰이다가 그 뒤로 ‘ㅇ’자에 통합되었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예의편에서는 “ㆁ은 어금닛소리니 (業)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牙音如業字初發聲).”라고 설명하여 ‘業’자의 한자음 첫소리를 가지고 ‘ㆁ’자의 음가를 설명하였으나, 제자해에서는 ‘ㆁ’자로 표기되는 음이 “혀뿌리를 가지고 목구멍에서 입안으로 통하는 통로를 닫고 날숨을 뿜어 내는 소리(雖舌根閉喉聲氣出鼻)”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세국어에서 어두에 ㆁ[ŋ]음은 존재하지 않았고, ‘당다’와 같이 종성이나 어중의 초성으로 쓰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훈몽자회』 범례에 처음으로 ‘異凝(이응)’이라 적혀 있지만, ‘ㅇ’이 ‘ㆁ’을 통합하게 됨에 따라 그 이름을 ‘ㅇ’자에 넘겨 주고, 대신에 ‘옛이응’이라고 통칭되고 있다. 11. ㅈ 현행 한글자모의 아홉째 글자. ‘지읒’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앞혓바닥을 센입천장[硬口蓋]에 넓게 대었다가 날숨으로 그 자리를 터뜨리되 마찰도 함께 일으키며 나는 소리, 곧 무성무기경구개파찰음(無聲無氣硬口蓋破擦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치음인 ‘ㅅ’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치음의 기본글자로 삼은 ‘ㅅ’자에 획을 더하여 ‘ㅈ’자를 만들었다. ‘ㅈ’음은 국어의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나 종성(받침)으로 쓰일 경우에는 ‘ㄷ’음의 내파음과 똑같은 상태로 끝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ㅈ은 잇소리니 즉(卽)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ㅈ齒音如卽字初發聲).”라고 설명하고, 또 제자해에서는 치음의 전청에 소속시켜 이 음이 무성무기음임을 보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서는 ‘ㅈ 之’라고 하였으나, 국문연구소의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1909)에서 ‘지읒’이라 정한 이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지읒’이라 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자의 자모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열세번째였으나, 『삼운성휘(三韻聲彙)』(1751)에 실려 있는 ‘언자초중종성지도(諺字初中終聲之圖)’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ㅌ, ㅋ, ㅍ, ㅎ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과 같이 아홉번째가 되었다. 12. ㅊ 현행 한글자모의 열째 글자. ‘치읓’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앞혓바닥을 센입천장에 넓게 대었다가 터뜨리되 날숨을 거세게 내뿜으면서 내는 소리, 곧 무성유기경구개파찰음(無聲有氣硬口蓋破擦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치음인 ‘ㅈ’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ㅈ’자에 획을 더하여 ‘ㅊ’자를 만들었다. ‘ㅊ’음은 국어의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나 종성(받침)으로 쓰일 경우에는 ‘ㄷ’음의 내파음과 똑같은 상태로 끝난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는 “ㅊ은 잇소리니 침(侵)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ㅊ齒音如侵字初發聲).”라고 설명하고, 또 제자해에서는 치음의 차청음(次淸音)에 소속시켜 이 음이 무성유기음임을 보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서는 ‘ㅊ 齒’라고 하였으나, 「국문연구의정안」에서 ‘치읓’이라 정한 이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치읓’이라 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자의 자모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열다섯번째였으나, 『삼운성휘』의 ‘언자초중종성지도’에 열번째로 실린 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3. ㅋ 현행 한글자모의 열한째 글자. ‘키읔’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혀뿌리를 높여 여린입천장에 대고 입길을 막았다가 터뜨리되 목청을 울리지 않고 거센 날숨을 내뿜으면서 내는 소리, 곧 무성유기경구개파찰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아음의 기본글자인 ‘ㄱ’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ㄱ’자에 획을 더하여 ‘ㅋ’자를 만들었다. ‘ㅋ’음은 국어의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나 종성(받침)으로 쓰일 경우에는 ‘ㄱ’음의 내파음과 똑같은 상태로 끝난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ㅋ은 어금닛소리니 쾌(快)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ㅋ牙音如快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제자해에서는 이 소리를 어금닛소리[牙音]의 차청음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무성유기음인 것을 보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서는 ‘ㅋ 箕(키)’라고 하였으나, 「국문연구의정안」에서 ‘키읔’이라 정한 이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키읔’이라 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자의 자모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아음인 ‘ㄱ’자 다음의 두번째였고, 『삼운성휘』에 실려 있는 ‘언자초중종성지도’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ㅌ, ㅋ, ㅍ, ㅎ과 같이 열두번째였으나,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ㅌ’과 순서를 바꾸어 열한번째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4. ㅌ 현행 한글자모의 열두째 글자. ‘티읕’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혀끝을 윗잇몸에 붙여 날숨을 막았다가 뗄 때에 목청을 울리지 않고 내되 날숨을 거세게 뿜으면서 내는 소리, 곧 무성유기치조파열음(無聲有氣齒槽破裂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설음인 ‘ㄷ’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ㄷ’자에 획을 더하여 ‘ㅌ’자를 만들었다. ‘ㅌ’음은 국어의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나 종성(받침)으로 쓰일 경우에는 ‘ㄷ’음의 내파음과 똑같은 상태로 끝난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ㅌ은 혓소리니 탄(呑)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ㅌ牙音如呑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제자해에서는 이 소리를 혓소리[舌音]의 차청음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무성유기음인 것을 보였다ㅍ. 이 글자의 이름은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 ‘ㅌ 治’라고만 하였으나 「국문연구의정안」에서 ‘티읕’이라 정한 이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티읕’이라 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자의 자모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아음인 ‘ㄱ’자로부터 일곱번째였고, 『삼운성휘』에 실려 있는 ‘언자초중종성지도’에서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ㅌ, ㅋ, ㅍ, ㅎ과 같이 열한번째였으나,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ㅋ’과 순서를 바꾸어 열두번째로 정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5. ㅍ 현행 한글자모의 열셋째 글자. ‘피읖’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위·아래 입술로 입을 다물었다가 날숨을 거세게 내뿜으면서 내되 목청을 울리지 않고 내는 소리, 곧 무성유기양순파열음(無聲有氣兩脣破裂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순음인 ‘ㅂ’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ㅂ’자에 획을 더하여 ‘ㅍ’자를 만들었다. ‘ㅍ’음은 국어의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나 종성(받침)으로 쓰일 경우에는 ‘ㅂ’음의 내파음과 똑같은 상태로 끝난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ㅍ은 입술소리니 표(漂)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ㅍ脣音如漂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제자해에서는 이 글자를 입술소리[脣音]의 차청음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무성유기음인 것을 보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서는 ‘ㅍ 皮’라고 하였으나, 「국문연구의정안」에서 ‘피읖’이라 정한 이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피읖’이라 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자의 자모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열한번째였으나, 『삼운성휘』에 실려 있는 ‘언자초중종성지도’에 열세번째로 적힌 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6. ㅎ 현행 한글자모의 열넷째 글자. ‘히읗’이라 읽는다. 국어의 자음 가운데, 목청이 울리지 않을 정도로 좁혀 그 사이로 날숨을 내보낼 때 나는 무성성문마찰음(無聲聲門摩擦音)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같은 후음(喉音)인 ‘ㆆ’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ㆆ’자에 획을 더하여 ‘ㅎ’자를 만들었다. ‘ㅎ’음은 국어의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나 종성(받침)으로 쓰일 경우에는 ‘ㄷ’음의 내파음과 똑같은 상태로 끝난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ㅎ은 목소리니 허(虛)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ㅎ喉音如虛字初發聲).”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제자해에서는 이 소리를 목소리[喉音]의 차청음에 소속시켜 이 소리가 무성유기음인 것을 보였다. 이 글자의 이름은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초성독용팔자란’에 ‘ㅎ 屎’라고 하였으나, 「국문연구의정안」에서 ‘히읗’이라 정한 이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히읗’이라 정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자의 자모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열아홉번째였으나, 『삼운성휘』에 실려 있는 ‘언자초중종성지도’에 열네번째로 적힌 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7. ㆆ 훈민정음 23자모 중의 하나. 흔히 ‘여린 히읗’이라고 부른다. 같은 후음에 속하는 ‘ㅇ’음보다 소리가 세게 난다고 하여 ‘ㅇ’에 획을 더하여 ‘ㆆ’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1459년경까지 주로 한자어의 표기에 쓰이다가 폐지되었다. 목청으로 날숨을 가볍게 막았다가 터뜨리며 내는 무성성문파열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에서는 “ㆆ은 목소리니 읍(挹)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ㆆ喉音如挹字初發聲).”라고 설명하여 ‘挹’자의 한자음 첫소리를 가지고 ‘ㆆ’자의 음가를 설명하였고, 제자해에서는 이 소리를 후음의 전청에 소속시켜 ‘ㆆ’음이 성문 파열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세국어에 ‘ㆆ[○]’이 하나의 독립된 음운단위로 존재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글자는 창제 당시부터 그 사용범위가 제한되어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에서 초성에 쓰이거나(예: 安○), 입성 운미(韻尾)를 이영보래(以影補來)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며(예: 戌○), 받침소리 없는 한자어 밑에 사잇소리로 쓰이기도 하였다(예: 先考ㆆ ). 국어에 쓰인 경우는 극히 제한되었는데, 관형형 어미 ‘―(으)ㄹ’과 합용으로 사용되는 정도였다(예: ○ 배, 예외: 하○ ). 이 글자는 세조초부터 차차 쓰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중종 때의 『훈몽자회』의 범례에 실려 있는 언문자모란에는 ‘ㆆ’자가 제외되었다. 모음 ㅏ 현행 한글자모의 열다섯째 글자. ‘아’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입안의 날숨(呼氣) 통로를 벌리고 혓바닥의 가운데 부분을 입천장 쪽으로 올리며 목청을 울리고 입술을 평평하게 해서 내는 중설비원순개모음(中舌非圓脣開母音)[a]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8}} 는 담(覃)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8}} 如覃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ㅏ 覃땀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覃’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8}}’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8}}’자를 기본 중성글자들인 ㅣ와 ·를 결합시켜 만들고, 15세기 중세국어의 7단모음(單母音)체계 가운데에서 ·, {{7}}, {{8}} 세 모음을 같은 계열의 모음으로 보아, ‘{{8}}’음은 ‘·’음에 비원순성 자질이 가미되어 입술을 평평하게 해서 발음하는 후설비원순모음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중세국어 이후로 ‘{{8}}’음은 중설에서 조음되고 있다. ‘{{8}}’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해례본)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1447년의 『석보상절』(1447) 등부터 ‘ㅏ’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창제된 순서에 따라 ·, ㅡ, ㅣ 다음으로 다섯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中聲獨用十一字欄)’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안」에서도 이 순서가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ㅑ 현행 한글자모의 열여섯째 글자. ‘야’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반모음[j]와 주모음(主母音)[a]가 결합되어 구성한 상향이중모음(上向二重母音)[ja]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2}}는 양(穰)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2}}如穰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ㅑ 穰ㄱ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穰’자음의 모음을 가지고 ‘{{2}}’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2}}’음을 ‘{{8}}’음과 마찬가지로 비원순성 자질을 가진 음으로 보고, ‘{{2}}’음은 ‘ㅣ’음과 ‘{{8}}’음이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은 ·, ㅡ, ㅣ, {{7}}, {{8}}, {{9}}, {{0}} 등 7모음이었으나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중성은 무릇 열한 글자이다(中聲凡十一字).”라고 하여 이중모음인 {{1}}, {{2}}, {{3}}, {{4}} 도 훈민정음 11중성체계 속에 포함시켰다. ‘{{2}}’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해례본)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ㅑ’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 ㅡ, ㅣ, {{7}}, {{8}}, {{9}}, {{0}}, {{1}} 다음으로 아홉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이 순서를 그대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 중성해에서는, 중세국어와 한자음의 중모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2}}’음과 결합된 ‘{{6}}, {{0}}, {{3}}ㆈ’와 같은 중모음 글자들도 보였다. ㅓ 현행 한글자모의 열일곱째 글자. ‘어’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입안의 날숨 통로를 벌리고, 혓바닥의 가운데부분(中舌) 또는 혀뿌리[舌根, 後舌]를 입천장 쪽으로 올리며 목청을 울리고 입술을 평평하게 해서 내는 중설비원순반폐모음(中舌非圓脣半閉母音)[ə]음과, 후설비원순반개모음(後舌非圓脣半開母音)[○]음을 표기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어’자가[ə]음을 표기할 때에는 ‘없다[ə:p―ta]’와 같은 긴 모음을 나타내며,[○]음을 표기할 때에는 ‘업다[負][○p―ta]’와 같은 짧은 모음을 나타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0}} 는 업(業)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0}}如業字中하여 ‘業’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0}}’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0}}’자를 기본 중성글자들인 ·와 ㅣ를 결합시켜 만들고, 15세기 중세국어의 7단모음체계 가운데에서 ㅡ, {{9}}, {{0}} 세 모음을 같은 계열의 모음으로 보아, ‘{{0}}’음은 ‘ㅡ’음에 비원순성 자질이 가미되어, 입술을 평평하게 해서 발음하는 중설비원순모음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중세국어의 ‘{{0}}’음은 중설모음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0}}’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해례본)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ㅓ’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 ㅡ, ㅣ, {{7}}, {{8}}, {{9}} 다음으로 일곱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이 순서가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ㅕ 현행 한글자모의 열여덟째 글자. ‘여’라고 읽는다. 국어 모음 가운데, 반모음[j]와 주모음[ə](또는[○])가 결합하여 구성한 상향 이중모음[jə](또는[j○])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4}} 는 별(彆)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4}} 如彆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4}}는 彆○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彆’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4}}’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4}}’음을 ‘{{0}}’음과 마찬가지로 비원순성 자질을 가진 음으로 보고, ‘{{4}}’자는 ‘ㅣ’자와 ‘{{0}}’자가 결합된 것, 아울러 ‘{{4}}’음도 ‘ㅣ’음과 ‘{{0}}’음이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은 ·, ㅡ, ㅣ, {{7}}, {{8}}, {{9}}, {{0}} 등 7모음이었으나,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중성은 무릇 열한 글자이다.”라고 하여 이중모음인 {{1}}, {{2}}, {{3}}, {{4}} 도 훈민정음 11중성체계 속에 포함시켰다. ‘{{4}}’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해례본)·『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ㅕ’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 ㅡ, ㅣ, {{7}}, {{8}}, {{9}}, {{0}}, {{1}}, {{2}}, {{3}} 다음으로 열한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어서, 이 순서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 중성해에서는, 중세국어와 한자음의 중모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4}}’음과 결합된 ‘{{5}}, {{2}}, {{5}}’와 같은 중모음 글자들도 보인다. ㅗ 현행 한글자모의 열아홉째 글자. ‘오’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입안의 날숨 통로를 벌리고 혀뿌리를 연구개 쪽으로 올리며 목청을 울리고, 입술을 둥글게 해서 내는 후설원순반폐모음인[o]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7}}는 홍(洪)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7}}如洪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ㅗ 洪ㄱ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洪’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7}}’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7}}’자를 기본 중성글자들인 ·와 ㅡ를 결합시켜 만들고, 15세기 중세국어의 7단모음 체계 가운데에서 ·, {{7}}, {{8}} 세 모음을 같은 계열의 모음으로 보아, ‘{{7}}’음은 ‘·’음에 원순성 자질이 가미되어 입술을 둥글게 해서 발음하는 후설원순모음이라고 설명하였다. ‘’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ㅗ’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국어의 ㅗ[o]음은 다른 언어에 비하여 원순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며, 조음 위치가 15세기 이전에는 폐모음이었다가 14세기경에 15세기 중세국어와 같은 반폐모음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창제된 순서에 따라 ·, ㅡ, ㅣ 다음으로 네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이 순서를 택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ㅛ 현행 한글자모의 스무째 글자. ‘요’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반모음[{{03}}]와 주모음[o]가 결합하여 구성한 상향이중모음[jo]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1}}는 욕(欲)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1}}如欲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ㅛ 欲욕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欲’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1}}’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1}}’음을 ‘{{7}}’음과 마찬가지로 원순성 자질을 가진 것으로 보고, ‘{{1}}’자는 ‘ㅣ’자와 ‘{{7}}’자가 결합된 것, 아울러 ‘{{1}}’음도 ‘ㅣ’음과 ‘{{7}}’음이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은 ·, ㅡ, ㅣ, {{7}}, {{8}}, {{9}}, {{0}} 등 7모음이었으나,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중성은 무릇 열한 글자이다.”라고 하여 이중모음인 {{1}}, {{2}}, {{3}}, {{4}} 도 훈민정음 11중성체계 속에 포함시켰다. ‘{{1}}’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해례본)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ㅛ’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 ㅡ, ㅣ, {{7}}, {{8}}, {{9}}, {{0}} 다음으로 여덟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이 순서가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 중성해에서는 중세국어와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음과 결합된 ‘{{6}}, {{9}}, {{3}}’와 같은 중모음 글자들도 보였다. ㅜ 현행 한글자모의 스물한째 글자. ‘우’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입안의 날숨 통로를 벌리고 혀뿌리를 연구개 쪽으로 가까이 올리며 목청을 울리고, 입술을 둥글게 하여서 내는 후설원순폐모음인[u]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9}}는 군(君)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9}}如君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ㅜ는 君군ㄷ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君’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9}}’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9}}’자를 기본 중성글자들인 ㅡ와 ·를 결합시켜 만들고, 15세기 중세국어의 7단모음체계 가운데에서 ㅡ, {{9}}, {{0}} 세 모음을 같은 계열의 모음으로 보아, ‘{{9}}’음은 ‘ㅡ’음에 원순성 자질이 가미되어 입술을 둥글게 해서 발음하는 후설원순모음이라고 설명하였다. ‘{{9}}’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ㅜ’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국어의 ㅜ[u]음은 다른 언어에 비하여 원순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며, 조음위치가 15세기 이전에는 중설폐모음이었다가 14세기경에 후설폐모음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창제된 순서에 따라 ·, ㅡ, ㅣ, {{7}}, {{8}} 다음으로 여섯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이 순서가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ㅠ 현행 한글자모의 스물두째 글자. ‘유’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반모음[j]와 주모음[u]가 결합하여 구성한 상향이중모음[ju]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3}}는 슐(戌)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3}}如戌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ㅠ는 戌○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戌’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ㅠ’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3}}’음을 ‘{{3}}’음과 마찬가지로 원순성 자질을 가진 음으로 보고, ‘{{3}}’자는 ‘ㅣ’자와 ‘{{9}}’자가 결합된 것, 아울러 ‘{{3}}’음도 ‘ㅣ’음과 ‘{{9}}’음이 결합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은 ·, ㅡ, ㅣ, {{7}}, {{8}}, {{9}}, {{0}} 등 7모음이었으나,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중성은 무릇 열한 글자이다.”라고 하여 이중모음인 {{1}}, {{2}}, {{3}}, {{4}} 도 훈민정음 11중성체계 속에 포함시켰다. ‘{{3}}’자의 자형은 초기 문헌인 『훈민정음』(해례본)과 『용비어천가』에서 창제 때의 자형대로 쓰였으나, 『석보상절』 등부터 ‘ㅠ’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음글자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글자가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 ㅡ, ㅣ, {{7}}, {{8}}, {{9}}, {{0}}, {{1}}, {{2}} 다음으로 열번째였으나, 한글자모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도 이 순서를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민정음』 중성해에서는, 중세국어와 한자음의 중모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3}}’음과 결합된 ‘{{5}}, {{1}}, {{5}}’와 같은 중모음 글자들도 보였다. ㅡ 현행 한글자모의 스물셋째 글자. ‘으’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구강(口腔) 통로를 열고, 혓바닥의 가운뎃부분을 높이고서 입술을 평평하게 벌린 상태에서 목청을 울려 내는 중설비원순폐모음[○]음을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당시의 철학사상에 의하여 “ㅡ자는 우주 만물 형성과정에서 두번째로 생긴 땅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으며, 혀를 조금 옴츠려 발음하고 소리는 깊지도 얕지도 않다.”고 하여 ‘ㅡ’음이 중설모음임을 말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ㅡ는 즉(卽)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ㅡ如卽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ㅡ는 卽즉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卽’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ㅡ’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때의 학자들은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을 ·, ㅡ, ㅣ, ㅗ, ㅏ, ㅜ, ㅓ 등 7모음체계로 보고, 이들을 ·, ㅗ, ㅏ 계열과 ㅡ, ㅜ, ㅓ계열의 대립으로 보았으며(ㅣ모음은 중립), ㅡ, ㅜ, ㅓ계열 가운데에서는 ‘ㅡ’모음을 기본모음으로 생각하였다. ‘ㅡ’모음을 중심으로 하여 원순성 자질을 가진 것이 ‘ㅜ’음이고, 비원순성 자질을 가진 것이 ‘ㅓ’음이라고 설명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모음글자를 만든 순서에 따라, ‘ㅡ’자는 ‘·’자 다음으로 두번째였는데, 한글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서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라고 한 뒤,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자만 없어졌을 뿐,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0. ㅣ 현행 한글자모의 스물넷째 글자. ‘이’라고 읽는다. 국어의 모음 가운데, 구강 통로를 열고, 혓바닥의 앞부분을 높이고서 입술을 평평하게 벌린 상태에서 목청을 울리어 내는 전설비원순폐모음[i]를 표기하는 데 쓰인다.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에서는 한글의 제자원리가 상형에 있음을 밝히고, ‘ㅣ’자는 당시의 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우주 만물 형성과정에서 세번째로 생긴 사람을 본떠 만들었으며, 혀를 옴츠리지 않고 발음하고 소리는 얕다.”고 하였으며, 아울러 ‘ㅣ’음이 전설모음임을 말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ㅣ는 침(侵)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ㅣ如侵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 국역본에서는 “ㅣ 侵침ㅂ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侵’자 음의 모음을 가지고 ‘ㅣ’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때의 학자들은,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을 ·, ㅡ, ㅣ, ㅗ, ㅏ, ㅜ, ㅓ 등 7모음체계로 보고, 이들이 ·, ㅗ, ㅏ계열과 ㅡ, ㅜ, ㅓ계열로 대립을 이루었으며, ‘ㅣ’음은 중성이라고 생각하였다. 한글의 순서는 훈민정음 창제 때 우주 생성과정에 따라 ·, ㅡ, ㅣ와 같이 되어 있었는데, 한글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는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자만 없어졌을 뿐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ㅣ’음은 여러 모음과 결합하여 중모음을 구성할 수 있어서, 훈민정음 11중성체계 안의 ㅛ, ㅑ, ㅠ, ㅕ 외에도 『훈민정음』(해례본) 중성해에는 {{0}}, ㅢ, ㅚ, ㅐ, ㅟ, ㅔ,ㆉ, ㅒ, ㆌ, ㅖ, ㆇ, ㆊ, ㅙ,ㅞ, ㆈ, ㆋ 등의 중모음이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1. · 훈민정음 11중성체계의 첫째 글자. 흔히 ‘아래아’라고 읽는다. 훈민정음 창제 때, 당시의 철학사상에 의하여 “우주 만물의 형성과정에서 맨 처음으로 생기는 하늘을 본떠 ‘·’자를 만들고, ‘·’음은 혀를 옴츠려서 발음하며 소리는 깊다.”라고 하여 ‘·’음이 후설저모음임을 말하였는데, 15세기 중세국어의[○]모음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훈민정음』(해례본) 본문에서는 “·는 탄(呑)자의 가운뎃소리와 같다(·如呑字中聲).”고 하고, 『훈민정음』(국역본)에서는 “· 呑ㄷ字 가온소리 니라.”라고 하여 ‘呑’자 음의 모음으로 ‘·’음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때의 학자들은, 15세기 중세국어의 단모음을 ·, ㅡ, ㅣ, ㅗ, ㅓ, ㅜ, ㅓ의 7모음체계로 보고, 이들이 ·, ㅗ, ㅏ계열과 ㅡ, ㅜ, ㅓ계열로 대립을 이루며, ·, ㅗ, ㅏ계열 가운데에서 ‘·’를 기본모음과 기본글자로 하여 원순성 자질을 띠고 이루어진 것이 {{7}}(음과 글자), 비원순성 자질을 띠고 이루어진 것이 {{8}} (음과 글자)라고 하였다. ‘·’음은 16세기에 제2음절에서 ‘ㅡ’음으로 변하였고, 18세기에는 제1음절에서 ‘ㅏ’음으로 변하여 아주 소실되었다. 글자로서는 20세기까지 쓰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한글자모에서 제외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때에는 하늘을 본떠 만들어진 글자라고 해서 모든 중성글자의 첫째였으나 한글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인 『훈몽자회』 범례의 ‘중성독용십일자란’에는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로 되어 있고, 이 순서가 20세기까지 일반화되어 오고 있는 데다가 ‘·’음이 ‘ㅏ’음으로 변한 단어들이 많아서 ‘·’자를 흔히 ‘아래아’자로 일컬어 왔다. 참고문헌 『훈몽자회(訓蒙字會)』 『훈민정음(訓民正音)』(解例本) 『국어학사』(강신항, 보성문화사, 1979) 『국어음운사연구』(이기문, 탑출판사, 1972) 『개화기의 국문연구』(이기문, 일조각, 1970) 『신고국어학사』(유창균, 형설출판사, 1969) 『국어음운학』(허웅, 정음사, 1965) 『국어학개론』(이희승, 민중서관, 1955)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41; 고친판 1961)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Fisher, J. E.,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자모 [字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529    [그것이 알고싶다] - 뿌리찾기.. 김해 김씨 댓글:  조회:3340  추천:0  2020-01-09
​ 김해 김씨(金海 金氏)에 대(對)하여 ​ 1. 김해 김씨(金海 金氏) 시조(始祖) : 김수로왕(金首露王) 2. 김해 김씨(金海 金氏) 유래(由來) : ​ 시조(始祖)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駕洛國)에는 본래(本來)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地方)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萬若)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어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黃金)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김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伽倻)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首露)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性)을 김(金)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 이 수로왕(首露王)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가 바로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김해는 가락국(駕洛國)의 고도로서 지명(地名)도 여러 가지로 변했으나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 김해(金海)부가 설치(設置)됨으로써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하였으며 가락김씨(駕洛金氏)라 고도 불리 우고 있다. ​ 수로왕(首露王)이 즉위(卽位)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中部地方)의 고대국가)의 공주(公主)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王妃)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金氏)로 왕통(王統)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王妃)의 간곡한 요청(要請)으로 왕비(王妃)의 성인 허씨(許氏)인 (태인허씨(泰仁許氏))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화(歸化)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許氏)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있으며 세 성씨(姓氏)가 다 같은 혈족(血族)이라며 종친회(宗親會)도 '가락중앙종친회(駕洛中央宗親會)'로 하였다. ​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世孫)인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가락국(駕洛國)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자이며 무열왕(武烈王)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婚姻)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新羅)의 장군(將軍)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仇衡王)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當代)의 이름난 장군(將軍)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 3. 김해 김씨(金海 金氏) 삼현파(三賢派)에 대(對)하여 ​ 1). 김해 김씨(金海 金氏) 중시조(中始祖) : 김관(金管) 2). 김해 김씨(金海 金氏) 유래(由來) : ​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의 1세조(世祖)인 김관(金管)은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하고 학교(學校)를 설립(設立)하여 유학(儒學)을 진흥(振興)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金克一)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兄弟)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金馹孫)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親交)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怨恨)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登極)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參與)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發見)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金馹孫)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罪)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棺)을 꺼내어 시체(屍體)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金馹孫)의 강직(强直)한 기개와 재능(才能)은 후일(後日)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中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世上)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金馹孫)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哀惜)하게 여겼다. ​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김일손(金馹孫)이 참수(斬首)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平生)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個月)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辭職)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김일손(金馹孫)의 증손(曾孫) 김언유(金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名望)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屛風), 족자(簇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不參)하여 면직(免職)되자 청빈하게 여생(餘生)을 마쳤으며, 시(詩), 서화(書畵)에 모두 능(能)했다. ​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심하(深河)의 전투(戰鬪)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硏究)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能通)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朝鮮) 풍속화(風俗畵)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編纂)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 ​ 4. 김해 김씨(金海 金氏) 과거(科擧)급제자(及第者)(조선시대) ​ 김극검(金克儉)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김기손(金驥孫) : 문과(文科) 성종13년(1482)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유신(金庾信)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명악(金命岳, 1821 辛巳生) : 문과(文科) 철종5년(1854)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세진(金世鎭, 1838 戊戌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경준(金敬濬,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고종23년(1886) 함경도과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빈(金○,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태종16년(1416) 중시 을과(乙科) 김현성(金玄成, 1542 壬寅生) :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식년시 병과(丙科) 김덕승(金德承,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광해군11년(1619) 별시 을과(乙科) 김상환(金商煥, 1699 己卯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정시 을과(乙科)등 모두 12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 * 과거 급제자는 본관이 같고 계통이 다른 본관과 구분이 안된 것이다. ​ ​ 5. 김해 김씨(金海 金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 김해(金海)는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시(金海市) 일대(一帶)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南西)쪽에 위치(位置)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여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가 1012년(현종 4)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으나 1018년부터는 의안군(義安郡: 昌原)·함안군(咸安郡)·칠원현(漆原縣: 漆原面)·웅신현(熊神縣: 鎭海)등을 영현으로 삼았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293년(충렬왕 19) 현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김해부(金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 ​ 6. 김해 김씨(金海 金氏) 시조(始祖) : 太祖王태조왕(수로) ↓ 2세 : 道王도왕(거등) ↓ 3세 : 成王성왕(마품) ↓ 4세 : 德王덕왕(거질미) ↓ 5세 : 神王신왕(이시품) ↓ 6세 : 神王신왕(좌지) ↓ 7세 : 惠王혜왕(취희) ↓ 8세 : 莊王장왕(질지) ↓ 9세 : 肅王숙왕(겸지) ↓ 10세 : 讓王양왕(구형) ↓ 11세 : 世宗(세종) 武力(무력) 武得(무득) ↓ 12세 : 率友(솔우) 舒玄(서현) ↓ 13세 : 庾信(유신) ↓ 14세 : 三光(삼광) ↓ 15세 : 允中(윤중) ↓ 16세 : 長淸(장청) ↓ 17세 : 雄允(웅윤) ↓ 18세 : 擎柱(경주) ↓ 19세 : 成海(성해) ↓ 20세 : 挺喆(정철) ↓ 21세 : 琇胤(수윤) ↓ 22세 : 天授(천수) ↓ 23세 : 商佐(상좌) ↓ 24세 : 浩(호) ↓ 25세 : 華齊(화제) ↓ 26세 : 振酉(진유) ↓ 27세 : 承意(승의) ↓ 28세 : 天精(천정) ↓ 29세 : 恒齡(항령) ↓ 30세 : 洙聖(수성) ↓ 31세 : 商欽(상흠) ↓ 32세 : 성우(成雨) ↓ 33세 : 일서(一曙) ↓ 34세 : 광국(匡國) ↓ 35세 : 종백(宗栢) ↓ 36세 : 수(繡) ↓ 37세 : 이탁(以琢) ↓ 38세 : 서천(瑞天) ↓ 39세 : 양철(陽喆) ↓ 40세 : 시추(是秋) ↓ 41세 : 진국(鎭國) ↓ 42세 : 규상(奎祥) ↓ 43세 : 도협(道浹) ↓ 44세 : 탕우(湯雨) ↓ 45세 : 만서(萬瑞) ↓ 46세 : 사맹(師孟) ↓ 47세 : 상주(相宙) ↓ 48세 : 방직(邦直), 용직(龍直), 중시조(中始祖) 48세 : 용직(龍直), 중시조(中始祖) ↓ 49세 : 관(管) 김해 김씨(金海 金氏)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1세 → 즉 김해 김씨 시조 49세는 김유신장군의 38세이고, 삼현파 1세임. ↓ 50세 : 문숙(文淑)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2세 ↓ 51세 : 항(伉)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3세 ↓ 52세 : 서(서)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4세 ↓ 53세 : 극일(克一)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5세 ↓ 54세 : 건(健) 군수공파(郡守公派), 맹(孟) 집의공파(집의公派), 용(勇) 한림공파(한림공파(翰林公派), 순(順) 진사공파(進士公派), 인(靭) 녹사공파(녹사公派), 현(鉉) 진의공파(진의公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6세 군수공 건(健)파 집의공(참판공)맹(孟)파 한림공 용(勇)파 진사공 순(順)파 녹사공 인(靭)파 진의공 현(鉉)파 로 나누어지며 그 외에도 분파를 본다면, 문민공(文愍公) 일손(馹孫)파 삼족당(三족足堂) 대유(大有)파 남창공 현성(玄成)파 진사공 태일(兌一)파 판서공 경진(景振)파 선무랑공 적(積)파 둔암공(김의경)파 치오공파 등오 나누어 분파합니다. ↓ 55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7세 ↓ 56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8세 ↓ 57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9세 ↓ 58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0세 ↓ 59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1세 ↓ 60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2세 ↓ 61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3세 ↓ 62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4세 ↓ 63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5세 ↓ 64세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16세○현(顯) ↓ 65세 / 17세 : 재(再)○ ↓ 66세 / 18세 : ○규(圭) ↓ 67세 / 19세 : 창(昌)○ ↓ 68세 / 20세 : ○두(斗) ↓ 69세 / 21세 : 용(容)○ ↓ 70세 / 22세 : ○곤(坤) ↓ 71세 / 23세 : 鍾(종)○ ↓ 72세 / 24세 : ○洙(수) ○泰(태) ↓ 73세 / 25세 : 相(상)○ 東(동)○​ ↓ 74세 / 26 : ○煥(환) ○熙(희) ↓ 75세 / 27세 : 廷(정)○ 在(재)○ ↓ 28 / 76세 : ○鎬(호) ○鎭(진) ↓ 29 / 77세 : 永(영)○ 汶(문)○ ↓ 30 / 78세 : ○根(근) ○杓(표) ↓ 31 / 79세 : 炳(병)○ 炅(경)○ ↓ 32 / 80세 : ○埰(채) ○基(기) ↓ ​ ​ 7. 김해 김씨(金海 金氏) 다음은 각 보첩에 기록된 삼현파의 항렬표 입니다. ​ 1792년?(洪武紀元後八壬子)고(稿) 수단하한(收單下限)1911년 譜(세보) 昌(창)○, ○두(斗), 容(용)○, ○坤(곤), 鎭(진)○, ○洙(수), 東(동)○, ○煥(환), 在(재)○ ​ 1914년 갑인보(대동보) ○圭(규), 錫(석)○, 浩(호)○, ○植(식), ○煥(환), 用(용)○, 鎭(진)○, ○永(영), ○根(근), 然(연)○, 喜(희)○, ​ 1954년 갑오보(해방후 최초 대동보) 容(용)○, ○坤(곤), 鍾(종)鎭(진)○, ○泰(태)洙(수), 東(동)○, ○熙(희), 奎(규)○, ○錫(석), 洛(낙)○, ○相(상), 熹(희)榮(영)○, ○壎(훈)在(재), ○善(선)錡(기), 洪(홍)○, ○夏(하), ○載(재)圭(규), 鉉(현)錫(석)○, ○源(원)浩(호), ○植(식), ○煥(환) ​ 1960년간 경자보(1954년갑오보의 증보판) 21세容(용)○, 22세○坤(곤), 23세鎭(진)鍾(종)○, 24세○洙(수)泰(태), 25세東(동)○, 26세○熙(희), 27세奎(규)○, 28세○錫(석), 29세洛(낙)○, 29세○相(상), 30세熹(희)榮(영)○, 31세○壎(훈)在(재), 22세○善(선)錡(기), 34세洪(홍)○ ​ 1974년간 갑인보(용산보, 대동보) 自判書公十九世로起昌字(19세에 창자) 19세 昌(창)○, 20세 ○斗(두), 21세 容(용)○, 22세 ○坤(곤), 23세 鍾(종)鎭(진)○, 24세 ○洙(수)泰(태), 25세 相(상)東(동)○, 26세 ○煥(환)熙(희), 27세 基(기)奎(규)○, 28세 ○鎬(호)錫(석), 29세 永(영)洛(낙)○, 30세 ○植(식)柱(주), 31세 熹(희)○, 32세 ○在(재)壎(훈), 33세 錡(기)善(선)○, 34세 ○洪(홍), 35세 東(동)○, 36세 ○夏(하) ​ 2001년간 신사보(辛巳譜,대동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西紀2001年辛巳 鍾路譜) 自判書公十六世로 起顯字(판도판서공으로부터 16세에 현자) 16세 顯(현)○, 17세 再(재)○, 18세 ○圭(규), 19세 昌(창)○, 20세 ○斗(두), 21세 容(용)○, 22세 ○坤(곤), 23세 鍾(종)○, 24세 ○洙(수)泰(태), 25세 相(상)東(동)○, 26세 ○煥(환)熙(희), 27세 廷(정)在(재)○, 28세 ○鎬(호)鎭(진), 29세 永(영)汶(문)○, 30세 ○根(근)杓(표), 31세 炳(병)炅(경)○, 32세 ○埰(채)基(기), 33세錫(석)銘(명)○, 34세 ○洪(홍)淳(순), 35세 柱(주)桂(계)○ , 36세 ○夏(하)烈(열) ​ ​ 8. 김해 김씨(金海 金氏)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삼현파(三賢派) 항렬표(行列表). ​ 16 / 64세 : ○현(顯) 17 / 65세 : 재(再)○ 18 / 66세 : ○규(圭) 19 / 67세 : 창(昌)○ 20 / 68세 : ○두(斗) 21 / 69세 : 용(容)○ 22 / 70세 : ○곤(坤) 23 / 71세 : 鍾(종)○ 24 / 72세 : ○洙(수) ○泰(태) 25 / 73세 : 相(상)○ 東(동)○ 26 / 74세 : ○煥(환) ○熙(희) 27 / 75세 : 廷(정)○ 在(재)○ 28 / 76세 : ○鎬(호) ○鎭(진) 29 / 77세 : 永(영)○ 汶(문)○ 30 / 78세 : ○根(근) ○杓(표) 31 / 79세 : 炳(병)○ 炅(경)○ 32 / 80세 : ○埰(채) ○基(기) 33 / 81세 : 錫(석)○ 銘(명)○ 34 / 82세 : 洪(홍)○ 淳(순) 35 / 83세 : 柱(주)○ 桂(계)○ 36 / 84세 : ○夏(하) ○烈(열) ​ 김해 김씨(金海 金氏) 判圖判書公諱 管派(판도판서공휘관파)(삼현파) 항렬표(行列表) 현재까지 사용하는 항렬표 ​ ※ 判圖判書公諱 管派(판도판서공휘관파)(삼현파)自判書公十六世로 起顯字 16세 顯(현)○ 17세 再(재)○ 18세 ○圭(규) 19세 昌(창)○ 20세 ○斗(두) 21세 容(용)○ 22세 ○坤(곤) 23세 鍾(종)○ 24세 ○洙(수)泰(태)​ 25세 相(상)東(동)○ 26세 ○煥(환)熙(희) 27세 廷(정)在(재)○ 28세 ○鎬(호)鎭(진) 29세 永(영)汶(문)○ 30세 ○根(근) ○杓(표) 31세炳(병)○炅(경)○ 32세 ○埰(채) 基(기) 33세 錫(석)銘(명)○ 34세 ○洪(홍)淳(순) 35세 柱(주)桂(계)○ 36세 ○夏(하)烈(열)   ※ 김해 김씨 선원 대동세 보(2001년 종로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西紀2001年辛巳 鍾路譜)발췌 ​ ​ 9. 김해 김씨(金海 金氏) 주요(主要)세거지(世居地) ​ - 전라남도 진도군 일원 - 전라남도 해남군 일원 - 전라남도 신안군 일원 - 전라남도 영광군 일원 - 전라남도 진도군 일원 - 전라남도 완도군 일원 - 전라남도 나주시 일원 - 전라남도 무안군 일원 - 전라남도 영암군 일원 - 전라남도 화순군 일원 - 전라북도 장수군 일원 - 전라북도 남원시 일원 - 전라북도 고창군 일원 - 전라북도 부안군 일원 - 전라북도 김제시 일원 - 광주직할시 광산구 일원 - 경상북도 포항시 일원 - 경상북도 김천시 일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일원 - 경상북도 상주시 일원 - 경상북도 경산시 일원 - 경상북도 구미시 일원 - 경상남도 창원시 일원 - 경상남도 진주시 일원 - 경상남도 창녕군 일원 -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 - 경상남도 사천시 일원 - 경상남도 남해군 일원 - 강원도 인제군 일원 - 강원도 정선군 일원 - 강원도 철원군 일원 - 충청남도 부여군 일원 - 충청남도 금산면 일원 - 충청남도 공주시 일원 - 충청남도 논산시 일원 - 충청남도 보령시 일원 - 청남도 아산시 일원 - 충청북도 청원군 일원 - 충청북도 옥천군 일원 - 충청북도 괴산군 일원 - 평안남도 용강군 일원 - 함경남도 북청군 일원 -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 함경남도 북청군 일원 - 함경북도 나진시 일원 - 함경북도 경성군 일원 - 함경북도 명천군 일원 ​ ​ 10. 김해 김씨(金海 金氏) 인구수(人口數) ​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김해 김씨는 1985년에는 총 892,330가구 3,767,065명, 2000년에는 총 1,295,080가구 4,124,93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752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산림화재",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180  추천:0  2020-01-07
  도망치기엔 느려도 너무 느렸다, 호주산불에 코알라 멸종위기  2020.01.07.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호주 북동부를 휩쓸고 있는 산불 속에서 불에 타서 도망가는 코알라의 모습이 공개됐다. 채널 9이 지난해 11월 20일(현지시간) 공개한 영상. [유튜브 캡처] 화상을 입은 코알라가 불이 붙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닌다. 하지만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나뭇가지에 걸터앉는다. 지나던 여행객에게 구조된 코알라는 목이 마른 듯 물을 필사적으로 빨아들인다. 6개월째 산불이 계속되고 있는 호주에서 매일 소셜미디어(SNS) 등에 올라오는 코알라의 모습이다.  지난 가을 시작된 호주 남동부의 산불이 점점 거세지면서 호주를 상징하는 동물인 코알라가 사실상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미국 뉴스위크,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동물복지전문가들은 산불 피해가 가장 극심한 뉴사우스웨일스(NSW)주에서만 약 8000마리의 코알라가 불에 타 죽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NSW주에 살고 있는 전체 코알라수의 약 3분의 2에 해당한다.  코알라 서식지 80% 불에 타 지난해 12월 27일 호주 아들레이드에서 더위에 지친 코알라가 물을 마시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수많은 동물 중 코알라가 유독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움직임이 느리고, 이동을 싫어하는 습성 때문이다. 생태학자 마크 그레이엄은 이번 산불과 관련된 의회 청문회에서 “코알라는 불의 확산을 피해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서 “특히 기름으로 가득한 유칼립투스잎을 먹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보다 불에 약하다”고 설명했다.  퀸즈랜드대 크리스틴 아담스-호킹 박사도 내셔널지오그래피와의 인터뷰에서 “새는 날 수 있고, 캥거루는 매우 빨리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코알라는 너무 느리다”고 말했다. 이번 화재로 코알라의 서식지인 유칼립투스 숲의 80%가 불 타 없어지면서, 코알라라는 동물이 독자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기능적 멸종 상태’에 접어들었단 분석도 나온다.  산불로 호주서만 동물 5억 마리 희생 산불을 피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온 캥거루. [AFP=연합뉴스] 시드니대 생태학자들에 따르면 지난 9월 시작된 대규모 산불로 인해 호주 전역에서 약 5억 마리의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가 희생됐다. 세계자연기금(WWF) 호주 지부는 현지 언론에 “호주의 많은 동물들이 산불에 대처하도록 적응해왔지만, 이번 화재는 야생 동물들이 피하기엔 너무 크고 뜨거웠다”고 밝혔다. 또 “화재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굶주림과 탈수, 질병 등에 노출되어 생명을 이어가기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SNS에는 불에 타 죽은 동물들의 모습이나 코알라와 캥거루 등을 구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미국 서핑선수 켈리 슬레이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어린 캥거루가 타 죽은 모습을 담은 사진을 게시해 현지의 끔찍한 상황을 알렸다.  호주 산불로 불에 타 죽은 어린 캥거루. [사진 켈리 슬레이터 인스타그램] 하지만 화재에서 동물을 구하는 방법이나 기준 등이 마련돼 있지 않아 안전 문제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사이언스 포 와일드라이프(Science for Wildlife)의 켈리 레이 박사는 NSW주 의회에 출석해 “화재 지역에서 야생 동물을 구하기 위한 예산도 계획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서 “규정이 없어 야생동물 보호단체조차도 재난 지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지난 해 9월 시작된 이번 산불로 NSW주에서만 약 400만 헥타르에 달하는 녹지가 잿더미가 됐다. 호주 전체로 보면 약 600만 헥타르의 숲과 공원 등이 화마의 피해를 입었다고 BBC는 전했다. 600만 헥타르는 서울특별시의 약 100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는 5일(현지시간)까지 24명으로 집계됐다.  /이영희 기자 ==============================///  기자] 호주 남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다섯 달째 지속된 산불로 서울 면적(605㎢=약 6만ha)의 약 100배인 600만㏊가 잿더미로 변했다. 수백 개의 산불이 불바다를 이루고, 화염 토네이도까지 만들어 냈다. 산불 연기로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이웃 뉴질랜드의 빙하는 재가 덮여 갈색이 됐다. 시드니 서부 팬리스 기온이 역대 최고인 섭씨 48.9도를 기록하는 등 호주 대부분 지역이 절절 끓고 돌풍까지 불면서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7일 호주 현지 매체와 외신을 종합해보면 퀸즐랜드주와 뉴사우스웨일스주(NSW)에서 작년 9월 첫 째주 이미 100여건의 화재가 발생해 대재앙을 예고했다. 특히 작년 9월 2일 골드코스트 인근 사라바에서 시작된 산불이 빠르게 번졌고, 10월 초부터 이번 산불 사태가 본격화됐다. 최근 NSW주와 빅토리아주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산불 피해 면적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블룸버그 통신은 NSW주에서만 500만 ㏊가 소실됐다고 보도했고, 로이터 통신은 NSW주와 빅토리아주에서 600만 ㏊ 이상이 탔다고 전했다. 호주 매체인 나인 뉴스는 호주 전역에서 590만 ㏊, 세븐 뉴스는 600만 ㏊를 태웠다고 각각 보도했다. 산불 지역 주민 10만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졌고, 사망자는 최소 24명, 실종자도 20명이 넘는다. 주택 수천 채가 불에 탔다. 캥거루와 코알라 등 야생동물 5억 마리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호주에서 세번째로 큰 섬으로 '야생동물의 보고'로 불리는 캥거루섬도 호주 남동부를 휩쓴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호주 애들레이드 부근 세인트빈센트만 입구에 있는 이 섬은 약 5만 마리 코알라들에게는 '천혜의 보호구역' 같은 곳이다. 육지와 바다로 격리돼있어 치사율이 높은 클라미디아(chlamydia) 성병 등 유행병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호주에서 들불처럼 확산한 산불이 섬 전체 면적(4천350㎢)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7만ha(1천700㎢)를 휩쓸면서 이 지역에 서식하는 코알라의 절반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영국 가디언지 등 외신이 보도했다. 그동안에도 호주에 사는 코알라는 도시화와 기후변화, 개간, 개발사업 등으로 개체수가 점점 줄어 멸종위기에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서식지에서 밀려난 코알라가 길을 헤매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개의 공격을 받고 희생되는 경우도 크게 증가하는 가운데 최악의 산불이라는 '재앙'을 맞게 된 것이다. '캥거루섬 야생공원'을 운영하는 샘 미첼은 "코알라 개체 수의 50% 이상이 사라졌다"면서 "나머지도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몇주 내로 집단 아사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애들레이드대 연구진도 "캥거루섬의 코알라는 전체 코알라의 생존을 위한 보험과 다름없다"며 "캥거루섬 외에도 코알라의 집단 서식지인 빅토리아주 깁스랜드 등지에서 8천마리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심각성을 강조했다. 온실가스로 '멸종의 물결'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해 온 기후학자들은 이번 산불이 재앙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사우스웨일스대 생태계 과학센터의 리처드 킹스포드 교수는 이번 산불의 규모와 심각성 면에서 수많은 동식물종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이며, 숲의 생물다양성을 수십 년 후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킹스포드 교수는 이어 "동물들은 이러한 재해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며 "침묵의 죽음이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산불 현장에서 날아온 재와 연기에 따른 고통도 크다. 에어비주얼(Air visual)에 따르면 6일 오후 기준으로 호주 수도 캔버라의 대기오염지수(US AQI)가 285를 기록, 전 세계 95개 주요 도시 중 최악으로 꼽혔다. 시드니 등 대도시는 '회색 도시'로 변했고 호흡기 질환자가 속출했으며 일부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산불 재가 식수를 오염시킨다는 우려도 나온다. 산불 재는 이웃 나라인 뉴질랜드까지 날아가 빙하를 덮고, 관광용 헬기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가렸다. 시드니 인근 주요 식수 취수시설의 오염 가능성도 제기됐다. 산불로 인해 발생한 재가 식수 공급시설에 흘러 들어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폭염과 가뭄, 돌풍'은 이번 산불 사태를 키운 세 가지 원인으로 꼽힌다. 본래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대륙 중 하나로 연평균 강우량이 600㎜ 미만이다. 남반구라서 9∼11월이 봄이고, 12월∼2월이 여름인데, 작년 9월 초봄부터 기온이 30도가 넘는 등 이상고온 현상을 보였다. 폭염에 예년보다 심한 가뭄이 이어지니 나무가 물을 빨아들여 땅이 더 메마르고, 마른벼락 등 자연발화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에 시속 35∼45㎞의 돌풍까지 부는 등 악재들이 겹치면서 한 번 시작된 산불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호주 정부는 산불이 너무 광범위해 인력으로 끄기는 어렵다고 보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앙 정부는 예비군 최대 3천명에게 동원령을 내려 화마와 싸우고 있는 의용 소방대를 돕도록 배치했다. 또, 불길을 피해 해안가로 달아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함정, 항공기, 헬기 등 군 자산을 동원하고, 다른 나라의 도움도 적극적으로 받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온 소방대원들이 호주 산불 진화에 뛰어들었지만 역부족이다. (사진=연합뉴스) /이영호기자
752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5억... 댓글:  조회:3670  추천:0  2020-01-06
  호주 산불로 야생동물 5억여 마리 죽었다 2020.01.06.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생태학자들, 산불로 파충류, 포유류, 새 등 죽은 것으로 추산 [최용락 기자]  지난 9월부터 4개월째 잡히지 않고 있는 호주 산불 때문에 5억여 마리의 야생동물이 죽었다고 호주 CNBC가 3일(현지시각) 보도했다.  CNBC에 따르면, 시드니대학 생태학자들은 9월 호주 남동부에서 산불이 시작된 이래 4억8000만여 마리의 포유류, 새, 파충류가 죽었다고 추산했다. 산불이 잡히지 않음에 따라 사망 동물의 수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드니대학 생태학자들은 28일(현지시각) 성명을 통해 "피해 동물 중 상당수는 화재에 의해 직접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나머지 동물은 음식과 피난처의 고갈, 그리고 야생 고양이와 붉은 여우의 포식 때문에 목숨을 일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호주인들의 SNS 계정에는 검게 그을린 코알라가 의학적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 죽은 동물이 땅에 쓰러져 있는 모습, 캥거루가 화염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올라오고 있다. 디어터 오촐리(Dieter Hochuli) 시드니대학 교수는 "위험에 처한 잘 알려진 종뿐 아니라 수분과 영양 순환 면에서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곤충도 화재에 민감하다"며 "그들의 수와 기능이 회복될 것인지는 미지의 영역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미 수가 줄고 있던 취약종인 코알라가 이번 화재로 특히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생태학자들은 이번 산불로 8000여 마리의 코알라가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산 레이 호주 연방환경부 장관은 방송 인터뷰에서 "이 지역 코알라 서식지의 30%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같은 비율의 코알라가 죽었을 수도 있다"며 "화재를 진정시키면 더 정확한 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주 산불은 현재까지 1000채 이상의 집과 900만 에이커의 땅을 태웠고, 1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로 인한 기록적인 고온과 가뭄을 이번 산불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최용락 기자
752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저작권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334  추천:0  2020-01-06
이상 생긴 '이상문학상' '저작권 3년 양도'에 반발 김금희·최은영 등 수상 거부 최성욱 기자 2020-01-06  문화   2020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김금희(사진 왼쪽)·최은영(사진 오른쪽) 작가.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수상자들의 수상 거부로 무기한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문학과사상사는 6일로 예정됐던 ‘2020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당일 오전 밝혔다. 이상문학상을 주최하는 문학과사상사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대상과 우수상 수상자를 공표할 예정이었지만, 우수상 수상 예정자이던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작가가 저작권 문제를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면서 당분간 발표를 보류하기로 했다.   문학과사상사는 당초 대상 수상자 1명과 우수상 수상자 10여 명을 선정해 발표할 예정이었다. 우수상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간 작가 중 대상 수상자를 제외한 작가들에게 주어진다. 수상자에게는 상금을 수여하고, 매년 1월 말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수상작을 소개한다.    문제가 된 것은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문학과사상 측에 양도하고, 단편집에 싣더라도 표제작으로는 쓸 수 없도록 한 조항이다. 수상을 거부한 김금희 작가는 지난 4일 트위터를 통해 “수상집에 작품을 수록하는 것과 관련해 계약서를 받아 확인하고는 게재를 못 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저작권을 해당 출판사에 3년간 ‘양도’한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 조항에 따르면 사실상 우수상 상금이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는 매절 원고료나 다름없는 셈이다. 또 다른 우수상 후보였던 최은영 작가 역시 계약서상 문구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주최 측에 수상 거부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번에 수상 거부 의사를 밝힌 이들은 한국 문단의 기대주로 주목받는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문학계에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경애의 마음’ ‘오직 한 사람의 차지’ 등의 쓴 김 작가는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고,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을 쓴 최 작가는 황순원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실제 동료 작가들 사이에서는 수상 거부 작가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작가는 “‘작품을 우수성을 널리 알린다’는 상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독소 조항”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불황을 겪고 있는 출판업계에서는 주최 측이 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출판권마저 갖지 못한다면 문학상을 운영할 이유가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문학과사상사 측은 “과거에도 같은 조건으로 작품집에 실리는 것을 동의하는 작가에게만 우수상을 수여해왔다”며 “비슷한 시기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작품이 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출판을 제약하기 위한 조항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해당 조항은 이상문학상 제정 이후 유지돼오다 2010년 무렵 폐지됐지만 지난해 부활했다. 문학과사상은 계약서 수정을 포함해 해당 작가들과 수상 여부를 재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문학상은 문학과사상 설립자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소설가 이상의 뛰어난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77년 제정한 문학상이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과 함께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자리 잡으며 박완서, 이문열, 은희경, 김훈, 한강 등 수많은 등 유수의 작가들을 배출해 왔다.  /최성욱기자  /서울경제   "저작권 넘기느니 상 안 받겠다"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사태  2020.01.0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저작권 3년 양도·표제작 금지 반발…"수상 거부" 최은영·이기호 작가도 같은 이유로 수상 거부 문학사상사(상 운영사), 수상작 발표 무기 연기[앵커] 국내 대표적인 문학상의 하나인 '이상문학상'이 저작권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상을 받으려면 저작권을 양도하라는 계약 조항 때문에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들이 잇따라 수상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기정훈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수상 거부를 먼저 알린 작가는 소설가 김금희 씨입니다. 우수상 선정 소식에 기뻐하다가 계약서를 받아보곤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는 건 물론, 개인 단편집을 낼 때도 표제작으로 쓸 수 없다는 저작권 조항을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문열과 최인호, 신경숙, 한강 등 1977년 이래 당대 최고 작가를 수상자로 배출해 온 훌륭한 상이었기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김금희 / 소설가 : 이 중요하고 전통 있는 상이 작가를 격려하는 방식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그걸 그대로 받기에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작가는 트위터로 이 사실을 알렸고 이후 최은영, 이기호 작가도 같은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파문이 커지자 상을 운영하는 문학사상사는 수상작 발표 기자간담회를 무기 연기하고 해명에 나섰습니다. 저작권 조항은 대상에만 요구했던 조건인데, 지난해부터 직원 실수로 우수상에도 추가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대상 수상작이라 해도 과도한 요구라는 지적은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임지현 / 문학사상 대표 : 대상 저작권은 저작권 기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상황을 인지했으니까, 이를 충분히 검토해서 수상작가의 입장을 고려한 개선책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문단에선 이번 사태를 시대 변화에 뒤처진 출판계의 관행 탓으로 보고 있습니다. 낙후된 저작권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겁니다. [김금희 / 소설가 : 기본 전제로 "작가한테 저작권을 양도받을 수 있다, 지금 이 상을 운영한다는 이유 만으로." 그런 생각을 문학사상사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YTN 기정훈 //////////////////////////////////////////////////////////////=== "상 주고 3년 저작권 달라"… '이상문학상' 거부 잇따라 기사입력 2020.01.06.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국내 최고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이상문학상'은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상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작가들이 잇따라 상을 안 받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최 측이 상을 주는 대신에, 3년 동안 작품의 저작권을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강나현 기자입니다. [기자] 소설가 김금희 씨는 작가 생활 11년 만에 처음 받을 뻔했던 이상문학상을 거부했습니다. 우수상을 받는 조건으로, 작품 저작권을 출판사에 3년 동안 넘긴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금희/소설가 : 작가에게 불리한 것을 취하고 독자들에겐 상을 포장하는 셈이에요. 이건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죠. 상의 의미는 격려잖아요.] 함께 수상 명단에 오른 소설가 최은영 씨와 이기호 씨도 "다른 문학상에선 이런 조건을 겪은 적이 없다" 며 상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만든 이 상은 가장 권위있는 국내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매해 발표된 뛰어난 중단편 소설을 골라 대상과 우수상을 엮은 작품집을 1월마다 내놓습니다. 출판사는 대상 작품의 저작권을 3년간 행사해 왔고, 지난해부터는 우수상 작품까지 이 규정을 확대 적용해왔습니다. 작가들의 수상 거부가 이어지자 출판사는 오늘(6일) 하려던 수상작 발표를 무기한 연기했습니다. 문단에선 작가들의 소중한 노동의 결과물을 상을 준다는 이유로 빼앗아선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번 수상 거부가 출판계의 옳지 않은 관행을 바꾸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지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화면제공 : 소리목·문학동네·서울시여성가족재단·채널예스) /강나현 기자  =================///   시사상식사전 이상문학상      1977년 월간 이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 문학의 뛰어난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문학상             외국어 표기     李箱文學賞(한자)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李箱)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그의 작가정신을 계승하여 한국 소설계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1977년 문학사상사가 제정한 문학상이다. 중ㆍ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시상하며 수상작과 후보작을 매년 이라는 작품집을 통해 발표한다. 심사위원은 문학평론가와 신문사 문화부기자, 문학잡지의 애독자, 문학전공 교수로 구성된다.   심사 대상작 전년도 심사 대상작 이후 발표된 작품들로부터 당해년도 자료조사 마감일까지 발행된 문예지를 중심으로 해서 각종 정기간행물에 발표된 작품성이 뛰어난 중ㆍ단편소설을 망라하여 심사한다. 문단 경력이나 업적, 소설 길이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적인 완성도와 실험성이 가미된 작품 위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   심사(예심/본심) 수상 대상작은 예심과 본심에 걸쳐 심사한다. 예심은 1년 동안 각 매체에 발표된 작품을 수집하여 이상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대학교수, 문학평론가, 작가, 각 문예지 편집장,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 등 약 100여 명에게 추천을 의뢰한다. 이상문학상 운영위원회는 편집위원과 문학사상사 경영진 및 편집진으로 구성된다. 또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추천 작품 선정에 참고하는 등 모든 자료를 일괄하여 편집위원들의 지도를 받아 본심에 올릴 작품을 선별한다. 본심에 오른 작품을 대상으로 문학평론가와 각 신문사 문화부 기자, 문학잡지의 독자, 문학을 전공한 교수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수상작을 선정한다.   수상 내역 및 상금 대상 1명과 특별상 1명, 추천 우수작상 10명 이내로 한다. 이 중 특별상은 이미 대상을 수상한 기(旣)수상작가를 포함한 중견ㆍ원로작가와 이상문학상의 우수작상을 여러 차례 받은 수상자의 작품이 심사 대상으로 오르게 되며, 당해년도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에게 수여한다. 상금은 대상 3,500만 원, 특별상 500만 원, 추천 우수작상은 각각 300만 원이 수여된다. 당선된 수상작은 문학성과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매년 작품집 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대상 수상작의 출판 저작권은 문학사상사에 귀속된다. 단 2차 저작권(번역출판권, 영화화ㆍ연극화 등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고 발행 후 3년이 경과하면 저자의 작품집에 수록할 수 있다. 단 우수작상 및 특별상은 상금에 매절 원고료가 포함된 출판 관습과 본상 규정에 따라, 수록된 당해년도 작품집에 한하여 문학사상사가 계속 제한적인 저작권(사실상의 저작이용권)을 갖는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의 표제(대상 작품명)와 중복되거나 혼동의 우려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대상 작품명을 대상 수상작가의 작품집 서명(書名ㆍ표제작)으로는 쓰지 못한다. 이상문학상의 제1회 수상작은 김승옥의 이었다. 2012년 제36회 대상 수상작은 김영하의 가 선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문학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두산백과 이상문학상   [ 李箱文學賞 ] 요약 소설가 이상(李箱)의 작가정신을 계승하고 한국 소설계의 발전을 위해 1977년 문학사상사(文學思想社)가 제정한 문학상. 분야 한국문학 주최기관 문학사상사 주최시기 및 기간 1월 시작년도 1977년 시상내역 중·단편 소설 대상은 문단경력이나 업적, 소설 길이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 위주로 선정하며, 심사위원은 문학평론가와 각 신문사 문화부 기자, 문학잡지의 독자, 문학을 전공한 교수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1월부터 12월까지 발표한 작품 중 작품성이 뛰어난 중단편 후보작을 골라 그중에서 대상 1편을 뽑아 시상한다. 상금은 대상 3,500만 원, 추천 우수작상 300만 원, 특별상 500만 원 등이다. 대상 수상작품은 추천우수작들과 함께 문학사상사에서 발행하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다.    * 역대 수상작 * 역대 수상작 회 연도 대상 수상작 수상자 1회 1977년 김승옥 2회 1978년 이청준 3회 1979년 오정희 4회 1980년 유재용 5회 1981년 박완서 6회 1982년 최인호 7회 1983년 서영은 8회 1984년 이균영 9회 1985년 이제하 10회 1986년 최일남 11회 1987년 이문열 12회 1988년 임철우 한승원 13회 1989년 김채원 14회 1990년 김원일 15회 1991년 조성기 16회 1992년 양귀자 17회 1993년 최수철 18회 1994년 최윤 19회 1995년 윤후명 20회 1996년 윤대녕 21회 1997년 김지원 22회 1998년 은희경 23회 1999년 박상우 24회 2000년 이인화 25회 2001년 신경숙 26회 2002년 권지예 27회 2003년 김인숙 28회 2004년 김훈 29회 2005년 한강 30회 2006년 정미경 31회 2007년 전경린 32회 2008년 권여선 33회 2009년 김연수 34회 2010년 박민규 35회 2011년 공지영 36회 2012년 김영하 37회 2013년 김애란 38회 2014년 편혜영 39회 2015년 김숨 40회 2016년 김경욱 41회 2017년 구효서 42회 2018년 손홍규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문학상 [李箱文學賞] (두산백과)  
752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풍선쓰레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303  추천:0  2020-01-01
풍선날리기 행사하다 야생동물 잡을라…비판 여론에 잇단 취소  2020.01.0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새해 첫 날 흔히 볼 수 있는 행사 중 하나가 소원을 적은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내는 건데요. 올해는 일부 지자체가 해당 행사를 시작 몇 시간 전 부랴부랴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유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사람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풍선을 날립니다. 저마다의 소망이 하늘에 닿기를 기원합니다.  고다영 / 경기 안성시  "대학교 잘 가게 해달라고 소원 빌었습니다"  새해 소망을 담은 풍선이지만 일각에서는 환경피해를 일으킨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풍선이 터지거나 바람이 빠져 산이나 바다로 떨어지면 결국 쓰레기가 되고, 야생동물의 목숨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기네스북에 오르려고 대량으로 날려보낸 풍선들이 호수에 떨어지면서 배가 뒤집혀 인명피해가 나기도 했습니다.  김정덕 / 정치하는 엄마들 공동대표  "(풍선 날리기가) 정말로 소망을 이루기 위한 어떤 희망을 담는다면서 생명에 위해가 되는 것이라면 전혀 맞지가 않잖아요. 취지에도."  올해 해맞이 행사를 앞두고는 풍선날리기를 취소해 달라는 국민청원까지 등장 했습니다. 구설수에 오르자 일부 자치단체들은 부랴부랴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최태규 / 해돋이 행사 기획 관계자  "환경오염이란 것 때문에 풍선 날리는 것이 많이 자제가 되고 있어" 각종 행사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풍선 날리기. 이제 추억의 행사로만 남도록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TV조선 이유진 입니다. 
7524    [세상뒷끝] - 물고기 한마리 = 300萬 댓글:  조회:3821  추천:0  2020-01-01
5억에 팔렸습니다" 오늘의 HOT 뉴스  2019-12-3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7523    [그것이 알고싶다] - 타종 = 33 댓글:  조회:3859  추천:0  2019-12-31
보신각 종 33번 타종의 의미  - 종교적 의미 : 불교에서 유래. 불교의 우주관, 28계 33천 신앙에서 유래.새벽이 열리는 인(寅)時에, 4대문을 여는 파루(罷漏)는 33번 타종.저녁 유(酉)時에는 28번 타종.(동양적 사고로는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고도 함.33천을 도의천이라 하는데 그곳의 天民들은 건강하고 무병장수 하므로 밝아오는 새해와 밝아오는 아침에는 우리 국민들이 33천민들 처럼 건강하고 무병장수하기를 기원. - 민족적 의미 : 33천은, 동서남북 사방에 각 8계층의 하늘이 있고, 그 가운데 이 모두를 지휘하는 하늘을선견성(善見成)이라 하는데,우리나라를 세우신 국조단군이 바로 이 선견성의 성주인,환인천제의 아들이므로 단군의 개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광명이세(光明以世)의 이념이 널리 선양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이다. 보신각은 고종 32년(1895) 이전까지만 해도 종루로 불리웠던 곳으로, 종을 달아 조석을 알리던 곳인데,그 종은 태조 5년(1396)에 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종루와 함께 불타버린 것을,임란 직후인 1594년 종루를 재건하고 원각사에 있던 종을, 불타버린 종을 대신해 내걸었다. 이 종은 원래 태조의 제 2비인 신덕 왕후의 능인 정릉의 능사에 있었다. 이 정릉사가 폐사되자 원각사로 옮겼다.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보신각종은 정릉사종이라 불러야 맞다.이 종은, 고종 32년(1895), 종루가 보신각으로 이름이 바뀜에 따라, 보신각 종이라 불리게 되었고,현재의 종은 또다시 새로 조성된 것이다.어찌되었든, 33번의 타종은, 우리민족, 우리국가는 무력이 아닌, 홍익인간, 광명이세를 근간으로 인, 의, 예, 지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 할 것임을 33천, 즉 우주 전체에 맹세한다는 의미이며 이러한 통치이념이, 종이 울릴 때 마다 상징적으로 표현된다고 하겠다. =================================/// 【한국의 옛 시보】 통신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밤에 별을 보거나 물시계를 써서 시각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시보를 하였는데, 그 방법은 종을 치거나 북을 쳐서 소리로 시각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시보는 주로 밤시간을 알렸다. 8세기의 신라 공혜왕(恭惠王) 시대에는 구리 12만 근이나 되는 큰 종을 만들어 새벽과 저녁에 종소리로 시각을 알렸고, 14세기의 조선 태조(太祖) 때도 큰 종을 쳐서 밤시각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보법이 확정된 것은 15세기 예종(禮宗) 때로, 이때는 북을 쳐서 밤시각을 알렸다. 예를 들면, 2경 1점(二更一點)에는 북을 2번, 징을 1번 치기를 5회 반복한다. 시보의 시작은 초경 3점이고 마지막은 5경 3점이다. 이 동안에 경점에 따라 북을 295회, 징을 303회 친다고 기록되어 있어 마지막의 5경 3점에는 북 5회, 징 3회만 치고,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러한 경점시보 이외에 초경 3점 때를 인경[人定]이라 하여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시각으로 삼아, 28수[二十八宿]의 뜻으로 큰 종을 28회 쳤다고 한다. 한편 새벽의 5경 3점에는 바라[罷漏]라 하여, 33천(三十三天)의 뜻으로 큰 종을 33번 쳐서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렸다. 1884년(고종 21) 왕명에 의하여 오정(午正) ·인경 ·바라에 금천교에서 포를 쏘게 한 일도 있는데, 오포(午砲)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1895년 가을 종전의 인경과 바라에 타종을 폐지하고 오정과 자정에 종을 치게 하였으며, 1910년(융희 4) 4월 l일 한국의 11시를 일본의 12시에 맞추어서 정오로 하고, 오포를 쏘아서 포성(砲聲)으로 시각을 알렸다.   
7522    [그것이 알고싶다] - 거인 = 3.5km 댓글:  조회:3908  추천:0  2019-12-31
키 3.5㎞ 거인 형상… NASA, 호주 지상그림 최신 사진 공개 2019.12.3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키 3.5㎞ 거인 형상…NASA, 호주 지상그림 최신 사진 공개지난 20여 년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호주의 거대그림 ‘마리 맨’(Marree Man)을 촬영한 새로운 사진을 최근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공개했다. 이 사진은 지난 6월 22일 NASA의 지구관측위성인 랜드샛8호에 탑재된 OLI(Operational Land Imager)라는 관측장치로 촬영한 것이다. 마리 맨은 1998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애들레이드시에서 북쪽으로 589㎞ 떨어진 ‘마리’라는 마을 근처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견됐다. 이 때문에 마리 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거인 윤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직선 길이는 약 3.5㎞, 팔다리와 몸통, 머리 등 전체 윤곽의 길이는 28㎞에 달하며, 깊이는 발견 당시 20~30㎝로 파여 있어 하늘에서도 볼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은 거인의 모습이 왼손에 작은 사냥용 막대 또는 부메랑을 든 원주민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마리 맨은 세월이 흐르면서 풍화 작용으로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해 2016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됐었다.이에 따라 그해 8월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인근 주민들은 마리 맨이라는 명소가 없어지는 것을 우려해 지상그림을 복원하기로 했다. 이들은 원작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정확한 GPS(위성항법시스템) 좌표를 가지고 5일 동안 그레이더라는 중장비를 이용해 폭이 최대 35m에 달하는 선으로 이뤄진 마리 맨을 다시 바닥에 새겼다. 특히 이 복원 작업에서는 마리 맨이 쉽게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땅을 원작보다 깊게 파서 거기에 초목이 자라도록 해 거인의 윤곽을 푸르게 만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리 맨의 윤곽을 따라 약 9m 간격으로 250개가 넘는 대나무 말뚝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말뚝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전 원작자가 일종의 스케치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여전히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조종사 트레버 라이트에 의해 마리 맨이 처음 발견된 지 1년 뒤인 1999년, 지역 단체 등에 누군가가 팩스로 마리 맨의 존재를 알리는 서류를 보냈다. 특히 이 서류는 미국기와 오륜기 그리고 원주민 사냥 관행에 관한 책에서 인용한 명판이 남아 있던 마리 맨의 위치를 가리켰다. 게다가 거기에는 미국식 철자나 계측 단위가 쓰여 있다는 점에서 마리 맨을 어떤 미국인 예술가들이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반면 많은 현지인은 이 그림이 예술가 바디우스 골드버그가 2002년 임종 당시 자신의 작품임을 인정했다면서 그가 주도해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호주 유명 기업인인 딕 스미스는 지난해 6월 마리 맨의 기원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5000호주달러(약 405만원)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아직 이를 받아 간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NASA /윤태희 기자
752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44  추천:0  2019-12-30
  "타이어에 낀 여우부터 바다표범까지" 英 동물보호단체 '2019 올해 구조된 동물' 공개  2019.12.30.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영국 왕립 동물학대방지협회, '올해 기억에 남았던 동물구조' 사진 공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격 진지에서 구조된 바다사자 등 구조 참여자들 "성공적으로 구조돼 너무나 다행"브리스톨에서 구조된 여우/사진=영국 더 선 화면 캡처 [아시아경제 김가연 기자] 영국의 한 동물보호단체가 연말을 맞아 올해 구조된 동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29일(현지시간) 영국 더 선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왕립 동물학대방지협회 RSPCA는 이날 페이스북 계정과 홈페이지를 통해 '2019년 올해 기억에 남는 구조'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RSPCA 측은 "우리는 매년 11만 마리 이상의 동물들을 구조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격 진지에서 발견된 바다표범에서부터 세탁기 안의 고양이까지, 올해의 하이라이트를 공개한다"며 동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여러 장을 공개했다. RSPCA는 지난 2월 요크셔 동부 해안에서 부상을 입은 회색바다표범을 구조했다. 당시 바다표범은 10피트(약 3.04m) 높이의 제2차 세계대전 사격 진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어 구조대원들을 쩔쩔매게 했다. 담당자인 리앤 호네스 헤더와 부감독관 클레어 미첼은 바다표범이 갇힌 지 24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헤더는 "안타깝게도 바다표범은 눈을 다친 상태였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며 "굉장히 가파른 경사와 높이 때문에 구조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간신히 바다표범을 그물로 유인해 구출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 2월 요크셔 동부 해안에서 구조된 회색바다표범/사진=영국 더 선 화면 캡처 지난 4월 더비셔주 발버러에서 노루를 구조했던 사건도 인상 깊었던 순간으로 꼽혔다. 당시 노루는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 교회 묘지 주변으로 도망치다가 펜스 사이에 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구조에 참여한 케이틀린 맥노튼은 "노루가 굉장히 겁을 먹은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부상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소방당국의 도움을 받아 창살을 열어주자마자 도망쳤다. 정말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 또 협회 측은 브리스톨에서 여우를 구조했던 순간을 언급했다. 한 물류창고 직원들은 낡은 타이어 가운데 머리가 낀 채 움직이지 못하는 여우를 발견했다. 수의사는 여우의 목과 머리에 윤활유를 발라 조심스럽게 타이어에서 머리를 빼냈다. 구조된 여우는 발견된 지역 인근으로 방생됐으며, 직원들은 여우에게 '미쉐린'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앨런 반스 경위는 "미쉐린은 운이 좋게도 덤불 사이에서 발견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며 "그 사건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너무나도 다행이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밖에도 새장에 갇힌 다람쥐와 타이어에 낀 여우, 50m 높이 절벽 위에서 발견된 바다표범, 세탁기에 꼬리가 낀 고양이, 정원 담장에 몸이 낀 여우, 철조망 사이에 낀 양, 폐파이프에 갇힌 페럿 등이 꼽혔다.   /김가연 기자
7520    [요지경] - 하나는 "주자하고" 다른 하나는 "갖자하고"... 댓글:  조회:3709  추천:0  2019-12-30
‘기자인 줄 알았는데…’ 주민 제보로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훔친 일당 검거 2019.12.30.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훔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일당은 성금을 훔치기 위해 며칠째 잠복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를 수상히 여긴 인근 주민의 결정적 제보와 경찰의 발 빠른 대처로 천사의 선행은 20년째 이어지게 됐다. 전주 완산경찰서는 30일 특수절도 혐의로 A 씨(35) 등 두 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5분경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 옆에 있는 ‘천사공원’에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이 든 상자를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노송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동사무소 뒤쪽으로 가보세요’라는 전화를 받고 직원들이 나가봤지만 성금을 찾을 수 없었다. 천사가 4분 뒤 다시 전화해 장소를 알려주며 ‘확인했냐’고 물었지만 이미 상자가 사라진 뒤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오전 10시 37분경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로부터 절도 신고를 접수한 뒤 인근 폐쇄회로(CC)TV를 분석하고 탐문수사를 벌여 용의자들의 차량 번호를 알아냈다. 한 주민은 최근 수상한 차량이 주차돼 있자 차량 번호를 적어뒀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이를 전달했다. 이 주민은 “26일과 27일 동네에서 보지 못했던 차가 주차돼 있어 얼굴 없는 천사가 이 때쯤 찾아오니까 기자들이 왔다고 생각했다”며 “오늘 오전 10시경 세금을 내기 위해 우체국에 가는데 차량 앞쪽과 뒤쪽 번호판이 가려져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을 2003년부터 17차례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전후해 전달해왔다는 것을 용의자들이 미리 알고 잠복 등으로 계획적인 범행을 준비했다고 판단했다. 일당은 오후 2시경 대전 유성구와 충남 계룡시에서 전북지방경찰청의 공조요청을 받고 추적에 나선 충남경찰에 의해 각각 붙잡혔다. 범행 발생 4시간여 만이다. 일당은 붙잡힐 당시 “훔친 돈을 쓰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조사를 위해 전주 완산경찰서로 압송되면서 ‘왜 돈을 훔쳤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들을 상대로 자세한 범행 경위 등을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절도범들이 붙잡히면서 성금 6000여만 원도 회수됐다. 훔친 박스에는 5만 원권 지폐를 100만 원 단위로 묶은 현금 12다발과 노란색 돼지저금통,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메시지가 적힌 A4 용지가 들어 있었다. 회수한 돈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르면 직접 피해자인 ‘얼굴 없는 천사’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천사의 선행 취지가 퇴색하지 않도록 피해자를 ‘주민센터’로 특정해 이 돈을 주민센터에 다시 전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 4000원을 주민센터 인근에 놓고 간 것을 시작으로 매년 수천만¤1억원 상당을 기부했다. 지난해까지 19년 동안 성금 6억 834만 660원을 놓고 사라졌다. 아직 돼지저금통에 든 동전이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은 이번 성금을 포함해 6억 7000만 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노송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천사도 성금 도난으로 많이 놀랐다고 들었다. 범인을 붙잡고 성금을 회수해 천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주=박영민 기자  =================================/// 30일 오후 7시 전북 전주시 전동 전주 완산경찰서 1층 로비. 모자 달린 점퍼를 입은 남성 2명이 나타나자 일제히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 둘 다 모자와 마스크를 한 상태여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쯤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 2명이다. "왜 거액의 돈을 훔쳤나" "계획된 범행이었나" "얼굴 없는 천사에게 할 말 없나" "훔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등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두 남성은 묵묵부답이었다.  친구 사이로 추정되는 A씨(35)와 B씨(34)는 이날 오후 2시 25분과 2시 40분쯤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각각 붙잡혔다. 경찰은 주민센터 주변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용의 차량(흰색 SUV)을 추적해 주거지 인근에서 이들을 붙잡았다.  이들이 훔친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만원도 되찾았다. A4용지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성금은 용의자 중 1명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이 범행에 이용한 차량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이번 도난 사건은 이날 오전 10시 3분쯤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익명의 전화가 걸려온 전후에 발생했다. 40~50대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주인공은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가 분명했다.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졌다. 지난해에는 12월 27일 오전 9시 7분쯤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에 A4용지 상자를 두고 갔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 10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5020만1950원이었다. 상자 안에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 2000년 4월 초등학생을 시켜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중노2동주민센터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남몰래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19년째 모두 20차례에 걸쳐 그가 두고 간 성금 총액은 6억834만660원이다. 올해가 20년째다. 그동안 그가 건넨 성금은 생활이 어려운 4900여 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 등으로 전달됐다.  이날도 '얼굴 없는 천사'는 "(성금이 든 상자를)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놨으니 가보세요"라고 짤막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반가운 마음에 주민센터 뒤편에 있는 천사공원에 달려갔지만, 성금이 든 상자는 없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가 두세 차례 전화를 걸어 "성금을 찾았느냐"며 상자 위치를 재차 알려줬다. 직원들이 30분 넘게 주민센터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성금 상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성금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이날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 [연합뉴스] 주민센터 직원들은 이날 오전 10시 40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며 전주 완산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은 주민센터 주변 CCTV를 분석해 약 4시간 만에 30대 용의자 2명을 검거했다.  경찰 관계자는 "두 사람이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가져간 사실은 확인했다"며 "정확한 범행 동기와 경위는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얼굴 없는 천사' 기다린 도둑들… 성금 두자마자 '슬쩍'  2019.12.30.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닷새 잠복 끝 성금 상자 절도 이맘때 연말이면 전주의 한 주민센터에는 현금 수천만 원을 가져다 놨으니 찾아가라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며 20년째 누군가가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해 온 겁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돈을 두고 갔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이 돈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JTV 송창용 기자입니다.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얼굴 없는 천사의 전화가 걸려온 건 오전 10시 3분쯤. 지난 2000년 이후 해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주민센터 근처 어디쯤에 성금을 두고 왔으니 가져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며칠 전부터 전화를 기다렸던 직원 3명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성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박종표/노송동주민센터 주무관 : (못 찾고 있으니까 이분이) 전화를 또 하셨어요. (조형물) 쪽에 있으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고 해서 갔는데 못 찾아서 들어와서 경찰에 연락한 거죠.] 경찰은 인근 CCTV를 조사해 절도범 차량을 특정하고 일당 2명을 사건 발생 4시간 만에 충남과 대전에서 각각 붙잡았습니다. 성금 6천여만 원도 대부분 회수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충남 출신인 이들은 뉴스로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을 알게 된 뒤 지난 26일부터 전북 전주에 와 기다린 끝에 천사가 성금을 두고 떠나자 곧바로 훔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주 노송동 주민 : (수상한 차량이 지난주) 목요일, 금요일 이틀 있었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는 없었고 오늘 아침에 번호를 가리고 있었어요.] 경찰은 그동안 신분 노출을 극구 꺼려온 얼굴 없는 천사를 고려해 회수한 6천만 원을 다시 주민센터에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영상취재 : 김준태·권만택 JTV)     /JTV 송창용 ==========================================/// 【 앵커멘트 】 연말이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몰래 기부를 하는 '얼굴 없는 천사'분들이 있는데요. 남을 돕지는 못할 망정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훔쳐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주민의 눈썰미에 범행 4시간 만에 붙잡혔습니다. 강세훈 기자입니다. 【 기자 】 전북 전주에는 '천사 마을'이 있습니다. 지난해까지 벌써 19년째 '얼굴 없는 천사'가 다녀갔습니다. ▶ 인터뷰 : 박다희 /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 직원 -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적게는 50만 원, 많게는 7천만 원까지 기부를 하시는 '얼굴 없는 천사'를 기리려고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그동안 기부한 성금만 6억 원이 넘습니다. ▶ 스탠딩 : 강세훈 / 기자 -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오늘 아침 주민센터 뒤편에 있는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성금을 놓고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 훔쳐간 겁니다. 다행히 범인은 충남에서 범행 4시간 만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훔쳐간 성금 6천만 원도 회수했습니다. 주민의 날카로운 눈썰미가 범인 검거에 한몫했습니다. ▶ 인터뷰 : 노송동 주민 - "이 동네 차가 아니어서 좀 수상했어요. (오늘 아침에는) 차 번호판이 이상하게 그 차인데 하얀색으로 가려져 있더라고요." 경찰은 30대 김 모 씨 등 2명에 대해 범행 동기를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MBN뉴스 강세훈입니다. 영상취재 : 조계홍 기자 영상편집 : 이우주 ===============================///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전북 전주시 노송동의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수천만 원의 성금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붙잡힌 30대 피의자들에 대해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의 범행은 단 30초 만에 끝났다. 그러나 목격자 진술, 주민신고, 특히 증거인멸 계획 등이 틀어지면서 결국 수사당국에 덜미를 잡혔다. 전주 완산경찰서는 31일 특수절도 혐의로 A(35)·B(34)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전날(30일) 오전 10시40분께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 뒷편 '희망을 주는 나무' 주변에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6000여만원이 담긴 기부금 박스를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경찰은 "성금이 사라진 것 같다"는 주민센터 측 신고를 받고 주변 폐쇄회로(CC)TV분석과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탐문수사에 나섰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지난 26일부터 주민센터 주변에 세워져 있던 SUV 차량 1대가 수상하다는 주민 제보를 받고 충남경찰청과 공조해 논산과 대전 유성에서 이들을 붙잡았다. 또 용의자들이 갖고 있던 기부금 6000여만원을 회수했다.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을 훔쳐 달아난 용의자의 모습.사진=전북지방경찰청 제공 ◆ 범행까지 '30초'…차량 번호판 가림막 시도  이들의 범행 계획은 치밀했다. 31일 전북지방경찰청이 공개한 CCTV 영상을 보면 30일 오전 10시3분께 범행 장소인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에 A 씨 일당이 나타났다. 이들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후드티셔츠로 머리와 얼굴을 가렸다. A씨의 손에는 빨간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30초 뒤 A씨가 다시 차 조수석으로 돌아왔고 운전석에 있던 B씨와 함께 범행 현장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이 인근 CCTV에 담겼다. A씨 등은 차량을 몰고 충남으로 향했다. 이들의 차 번호판은 휴지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며칠씩 범행 장소 주변에 머물며 사전 모의를 하던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주민이 경찰에 차량 번호를 제보하면서 덜미가 잡혔다. 경찰은 차량 번호로 용의자를 특정했다. 이어 고속도로 순찰대, 충남 경찰과 공조 수사를 통해 범행 4시간만인 오후 2시30분께 이들을 충남 논산과 유성에서 각각 붙잡았다. A씨 등은 "컴퓨터 수리점을 한 곳 더 열기 위해 기부금을 훔쳤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남 논산경찰서가 범인들로부터 회수한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놓고 간 박스에 들어 있던 성금.사진=논산경찰서 제공 경찰은 회수한 성금 6000여만원을 '얼굴 없는 천사'가 기부하려고 했던 노송동 주민센터에 오는 2일 전달할 예정이다. 한편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이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천만원이 담긴 종이박스를 몰래 놓고 사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것을 시작으로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는 해마다 연말을 기점으로 이뤄졌다. /한승곤 기자 ==============================///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친 30대 남성 2명은 경찰 수사 결과 지난 28일부터 사흘간 주거지인 충남 논산과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를 오가며 잠복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범행 당일에는 차량 번호판을 물 묻은 휴지로 가렸지만, 이전에 답사할 때는 차량판을 가리지 않아 주민들의 의심을 산 것으로 확인됐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한 주민 제보가 이들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전주 완산경찰서는 31일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A씨(35)와 B씨(34)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 30일 오전 10시 7분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상자를 통째로 차량(흰색 SUV)에 싣고 도주한 혐의다. 이들은 이날 오후 2시 25분과 2시 40분쯤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각각 검거됐다. 경찰은 주민센터 주변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용의 차량(흰색 SUV)을 추적해 주거지 인근에서 붙잡았다.  이들은 범행 당일 자정 무렵 논산에서 출발해 오전 2시쯤 주민센터에 도착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난 오전 10시까지 8시간 동안 차량 안에서 기다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전주에 오기 전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 화장지에 물을 묻혀 번호판을 가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전주에 올 때는 번호판을 가리지 않았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논산 지역 선후배 사이다. A씨는 논산, B씨는 공주에 산다. B씨는 A씨 고교 1년 후배 동창으로 알려졌다.  범행을 주도한 A씨는 논산에서 컴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경찰에서 "유튜브를 통해 '얼굴 없는 천사'의 사연을 알게 됐다"며 "컴퓨터 수리업체를 하나 더 차리려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A씨가 무직인 B씨에게 먼저 범행을 제안했다. 경찰은 A씨 휴대전화에서 '노송동주민센터'를 검색한 인터넷 기록을 확인했다.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졌다. 지난해는 12월 27일 오전 9시 7분쯤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에 5000여만원이 든 A4용지 상자를 두고 갔다. 상자 안에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연합뉴스] 그는 지난 2000년 4월 초등학생을 시켜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중노2동주민센터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남몰래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19년째 모두 20차례에 걸쳐 그가 두고 간 성금 총액은 6억834만660원이다. 그동안 그가 건넨 성금은 생활이 어려운 4900여 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 등으로 전달됐다.  도난 사건이 일어난 30일에도 오전 10시 3분쯤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40~50대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가 분명했다.  '얼굴 없는 천사'는 "(성금이 든 상자를)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놨으니 살펴 보세요"라고 짤막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주민센터 뒤편에 있는 천사공원에 달려갔지만, 성금이 든 상자는 없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가 두세 차례 전화를 걸어 "성금을 찾았느냐"며 상자 위치를 재차 알려줬다. 직원들이 30분 넘게 주민센터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성금 상자를 발견하지 못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A씨 등이 여러모로 어수룩하고 범행 수법도 허점이 많다고 봤다. 두 사람은 동종 전과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용의자 중 1명은 항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범행 당일 오전 10시 40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는 주민센터 측의 신고를 받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주민이 제보한 용의 차량의 차주는 A씨였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경찰에 따르면 평소 A씨를 알고 있던 충남경찰청 소속 한 형사가 A씨에게 '너 어디냐. 지금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훔친 돈을 가지고 논산 쪽으로 도주하던 A씨는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훔친 성금을 B씨에게 맡기고 대전 유성에 있는 커피숍에 내려줬다. 그리고 계룡시 모처에서 해당 형사를 만났다고 한다. A씨는 처음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다가 형사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내가 성금을 훔쳤다"고 자백 후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체포 당시 커피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현금 6000만원이 든 성금 상자도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됐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들어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들이 도주 과정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훔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0원 한 장도 안 썼다"고 했다.  경찰이 확보한 A4용지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세어 보니 6016만3210원이었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 2000년 4월부터 20년간 모두 21차례 기부한 성금 총액은 6억6850만3870원에 달한다.  경찰은 이번 도난 사건의 피해자를 '얼굴 없는 천사'가 아닌 노송동주민센터로 보고 회수한 성금을 전주시에 돌려줬다. "절도는 타인이 소유하거나 점유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말하는데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 소유권을 주민센터에 이전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경찰 측은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2명 이상이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특수절도 혐의를 적용했다"며 "일반 절도는 6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형이 있는데, 특수절도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벌금형이 없어 처벌이 훨씬 무겁다"고 말했다. 경찰은 A씨 등이 범행에 사용한 차량 번호를 제보한 주민에게 포상금과 감사장을 줄 계획이다.  /전주=김준희 기자
7519    [그것이 알고싶다] - 천자문 110 댓글:  조회:3562  추천:0  2019-12-27
"이렇게 다양했어?"… 천자문 110종 한자리에 2019.12.27.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천자문은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글자의 입문서죠. 이 천자문도 시간이 흐르면서 한글 표기나 그림 해설이 덧붙으면서 변했다는데요. 구민성 기자가 알려드립니다.  [리포트] 옛날 옛적 학동들이 서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천자문. 1754년에 해서체로 쓴 한석봉의 천자문은 컴퓨터로 찍어낸 듯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대가인 이항복의 글씨도 단아함을 뽑냅니다.  오래된 천자문일수록 중국어 발음에 가까웠습니다. 하늘 천은 하늘 텬, 땅 지는 따 디로 표기 됐습니다.  춘정공 박팽년과 김인후의 천자문은 흘림체로 당시 글씨 교본으로 널리 사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기봉 /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한자만 보통 써있습니다. 왜냐면 서당에서 스승이 가르치고 뜻을 해석해주고 외우게 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들어오면서부터는 혼자공부하는 인구가 많아서 한글 해설문이 달리고….”  근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림 설명이 들어가고 다양한 서체 표기가 포함되는 등, 시대에 맞춰 천자문도 변했습니다  전분경 / 경기도 안산 “오늘날에 이르러서 우리들이 외래어만 자꾸 신경을 써서 그런데만 몰입해서 공부하려고 해서 천자문에 대해서 유래가 어떻게 되나 알고자 왔고….”  천자문은 오랜 시간동안 우리 역사를 담아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왔습니다.  TV조선 구민성입니다.  ====================================///다른 자료... 윤동주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시인' 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하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병자호란 순국지사를 기리는 경주 양동마을 고택 낙선당입니다.  대문에 사유청문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사유란, 군주가 나라를 이끄는 네 가지 강령 '예의염치'를 뜻합니다. 예의 법도 청렴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입니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금수'라고 했습니다.  신소설 '금수회의록'에서는 여덟 짐승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금수만도 못한 인간을 꾸짖습니다. 그중에 벌은 '입에는 꿀을 머금고 배에는 칼을 품은' 인간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 ...
751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재활용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486  추천:0  2019-12-25
 '무색' 용기... 사이다·소주에 화장품까지 2019.12.25.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재활용법 개정안 시행…사이다·소주 무색 페트병으로 유색 페트병·PVC 포장재 사용 불가…라벨도 떼기 쉽게 변경 재활용 등급 4단계 중 '어려움' 등급→환경부담금 최대 30%[앵커] 유색 페트병처럼 재활용할 수 없는 용기는 부담금을 내야 하는 자원재활용법 개정안이 오늘부터 시행됐습니다. 이 때문에 소주와 사이다가 담긴 페트병에서 고유의 초록색이 사라졌습니다. 화장품 용기도 차차 바뀔 예정입니다. 박소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대형 마트 소주 판매대가 평소와 달라 보입니다. 익숙하던 초록 페트병이 무색으로 변한 탓입니다. 사이다 페트병도 투명해졌습니다. 손님들은 어색해 하기도 하고, 반기기도 합니다. [김나미 / 서울 홍제동 : 기존의 소주 같지가 않고 생수 같아요. 아직은 그래도 저는 이 색깔이 좋은 것 같아요, 녹색이.] [허혁 / 서울 망원동 : 갑자기 투명으로 바뀌니까 의아한 거에요. 그런데 또 바뀌니까 깔끔하고 괜찮네요.] 페트병 색깔은 달라졌지만, 담긴 술이나 음료의 맛이나 유통기한은 똑같습니다. [강현중 / 롯데칠성음료 홍보팀 : 1년 동안 제품 실험과 유통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맛, 향, 탄산 강도 그리고 음료 색 등의 품질 안전성 검증을 다 마무리했고요.] 재활용하기 어려운 유색 페트병과 폴리염화비닐로 만든 포장재를 쓸 수 없게 하는 재활용법 개정안이 시행된 첫날 풍경입니다. 특유의 갈색인 맥주 페트병도 재활용이 어려운 소재입니다.  하지만 제품 변질을 막기 위해 선택한 색깔인 특성이 있는 만큼 맥주업계는 아직 대안을 찾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맥주 페트병에 대해서는 법 시행을 유예하고 다른 용기를 찾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생활용품 가운데에서는 바디워시 제품이 눈에 띕니다. 불투명하던 용기가 투명해졌고, 라벨도 쉽게 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화장품 용기는 구조가 복잡하고 부품도 여러 가지라 당장 바꾸지 못했습니다. 업체들은 최장 2년까지 가능한 유예기간 동안 새 용기를 개발한다는 계획입니다. [김지현 / 아모레퍼시픽 홍보팀 : 기능성 원료의 변색과 변취 등 효능 저하를 막기 위해서 색상이 들어간 유리병 사용이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재활용이 용이한 용기 등 제품 생산을 할 예정입니다.] 유리병은 무색과 갈색, 녹색만 재활용할 수 있는데, 와인이나 위스키 업계는 현실적으로 병을 바꾸기 어려운 만큼 그대로 쓰면서 환경부담금을 낼 것으로 보입니다. /YTN 박소정
7517    [그것이 알고싶다] - 윤봉길 거사 뒷 얘기... 댓글:  조회:3098  추천:0  2019-12-24
라이프 윤봉길 의사, 젖먹이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에 '울컥' 현재 근황은? 2019-10-27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F.E TIMES(F.E 타임스)=조재성 기자] 윤봉길 의사가 물통 폭탄을 던지기 전 두 아들에게 유서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고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 행사에서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다.      이에 요시노리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가와바타 사다츠구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일본군 주요 인사가 큰 부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는 이 일을 치르기 전에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눈에 밟히는 두 아들을 두고 길을 나섰다.   윤봉길 의사는 편지에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흐르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라고 시작하는 글을 남겼다.   이어 윤봉길 의사는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을 적었다.   당시 윤봉길의 첫째 아들 윤중은 세 살이었으며 둘째 아들 윤담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   윤봉길의 아들 중 작은 아들은 안타깝게도 두살 때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윤봉길의 장남 윤종에게서는 장손녀 윤주경과 장손자 윤주웅이 나왔는데 장손녀 윤주경은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인수위에 소속돼 활동했으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했다.  [F.E TIMES(F.E 타임스)=조재성 기자]
751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페트병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209  추천:0  2019-12-24
‘쓰레기 몸살’ 주범 페트병… 의약품 원료로 재탄생 가능해졌다 2019.12.24.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전남 신안군 자은면 내치해변에 중국글씨가 있는 어구와 페트병이 해변에 널려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플라스틱 전쟁’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일회용 페트병이 의약품 원료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 한국화학연구원은 연구원 소속 김희택ㆍ주정찬ㆍ차현길 박사팀과 고려대 김경헌 교수팀, 이화여대 박시재 교수팀이 공동으로 페트병을 분해해 의약품이나 화장품의 성분으로 쓰이는 소재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24일 밝혔다.  연구진은 페트병의 주성분인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를 화학적으로 분해하는 데 주목했다. 이들은 물을 이용해 PET를 단량체(단위 분자)로 분해한 후, 미생물을 이용해 유용한 소재들로 전환하는 전략을 설계했다.  버려진 PET는 화학적으로 테레프탈산과 에틸렌글리콜로 분해된다. 이어서 미생물을 이용해 테레프탈산은 핵심 중간산물인 프로토카테큐산을 거쳐 갈산, 피로갈롤, 카테콜, 뮤콘산, 바닐릭산으로 전환된다. 에틸렌글리콜은 해당 물질의 대사균주를 이용해 글라이콜산으로 전환된다. [자료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먼저, 섭씨 230도에서 PET를 물과 반응시켜 테레프탈산과 에틸렌글리콜을 얻어냈다. 이후 미생물을 이용해 이들을 의약품이나 화장품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소재로 전환했다. 테레프탈산을 갈산ㆍ카테콜ㆍ피로갈롤ㆍ뮤콘산ㆍ바닐락산으로, 에틸렌글리콜을 글라이콜산으로 탈바꿈했다. 갈산은 의약품(항산화제) 중간체로 쓰이고, 바닐락산도 의약 및 화장품용 방향 성분으로 쓰인다. 뮤콘산은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단량체에 쓰여 새로운 플라스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성분이다.  기존 방식 한계 극복…" 폐플라스틱 자원화 등 기술 개발 기대" 이번 연구에서 페트병이 다양한 소재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된 만큼, 기존 재활용 방식의 한계가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버려지는 플라스틱 감축에도 기여할 수 있다.  기존의 방식을 살펴보면, 크게 기계적 방법과 화학적 방법 두 가지로 이뤄진다. 기계적 방법은 파쇄ㆍ세척ㆍ건조를 통해 PET 섬유를 회수한 다음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공 중 섬유의 길이가 짧아지는 품질 저하가 일어나는 문제가 있었다. 화학적 방법은 비용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이는 PET 섬유를 분해하고 단량체를 회수해 활용하는 방식인데, 재활용 비용이 높은 탓에 경제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한국화학연구원 김희택 박사는 “기존에 폐기물로 취급됐던 폐플라스틱의 원료화 및 소재화 기술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라며 “앞으로 폐플라스틱 자원화 및 소재화 기술 개발이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미국화학회에서 발간하는 국제학술지인 ACS Sustainable Chemistry& Engineering(지속 가능 화학 및 공학) 12월호에 게재됐다.  /권유진 기자
751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방사능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301  추천:0  2019-12-23
  후쿠시마 방사능물 결국 바다에 버릴 듯 2019.12. 23.   화나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일본이 벌써 120만 톤 가까이 저장돼 있고 매일 늘어나는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를 결국 바다에 버리려는 쪽으로 점점 더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오늘(23일) 관련 회의가 있었는데 도쿄 유성재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제16차 소위원회에서 일본 정부가 오염수 처리 방안을 압축해 공표했습니다. 그동안 검토되던 다섯 개 방안 가운데 일단 희석한 뒤 증발 시켜 수증기로 배출하거나 물과 섞어 바다에 버리는 방안 두 가지로 줄인 겁니다. 전기 분해와 지하 저장, 지층 주입 등 나머지 세 가지 방안은 과거 사례도 없고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했습니다. 대기 중 증발은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 때의 선례가 있다는 설명이지만, 그동안 도쿄 전력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해양 방류 외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해 온 것을 감안하면 결국 해양 방류로 결정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일본 정부는 바다에 방류해도 인체 영향이 미미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쿠시마 오염수의 삼중수소 예상 누적 총량은 내년 1월 기준 860조 베크렐로 전례가 없는 양이어서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소위원회는 오염수의 처리 시기에 대해서는 정부가 책임을 갖고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결정으로 일본 정부가 해양 방류로 결론을 내리고 시기를 저울질할 가능성이 한껏 높아졌습니다. (영상취재 : 문현진, 영상편집 : 장현기)     /유성재 기자 ===========================/// [뉴스데스크]◀ 앵커 ▶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를 보관하지 않고, 결국 버리는 것으로 사실상 결정했습니다. 오염수 문제를 검토해 온 정부 자문위원회가 오늘 결과 보고서 초안을 내놨는데, 바다 또는 대기 중에 방출하는 방안만을 결론에 포함시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도쿄에서 고현승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후쿠시마 제1원전 내 991개 탱크에 보관 중인 방사능 오염수는 117만여 톤. 핵연료 냉각에 쓴 물과 원전에 스며들어 오염된 지하수, 빗물 등 오염수는 하루 170톤씩 늘고있어, 탱크를 더 늘리지 않으면 2022년 여름에 꽉 차게 됩니다. 이 오염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해온 정부 자문위원회가 오늘 3년여 만에 결과 보고서 초안을 내놨는데, 사실상 오염수를 버리기로 결론냈습니다. 위원회는 검토해온 6가지 처리방안 중 해양 또는 수증기 방출, 그리고 이 둘을 병행하는 방법 등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해양과 수증기 방출 모두 전례가 있는 데다, 방사선 추가 피폭량도 연간 최대 0.62 마이크로시버트로, 일상생활에서 피폭되는 자연방사선량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층 주입, 수소분해, 지하매설은 규제, 기술, 시간상 문제로 어렵고, 탱크를 더 짓는 방안은 원전 내 땅이 부족하고, 원전 밖으로 옮기는 것도 어렵다고 결론냈습니다. [세키야 나오야/日 정부 자문위원(도쿄대 교수)] "부지가 극도로 줄게 되어서 어떤 방법이든 처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현실적으로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후쿠시마에선 즉각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오가와라 사키/원전사고 피해자단체연락회] "(오염수) 육상 보관을 요구해 왔는데, 이번에 수증기 방출과 해양 방출 방안 밖에 나오지 않아 매우 불만입니다." 해양과 대기방출 모두 방사성 물질을 대량 배출해 피해 범위가 늘어난다는 환경단체 비판도 제기됐습니다. [스즈키 카즈에/그린피스 재팬] "바다와 대기를 쓰레기통으로 쓰겠다는 발상 자체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 자문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나오면 이를 토대로 일본 정부가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우려해온 대로 사실상 결론을 내려놓고 절차만 남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MBC뉴스 고현승입니다. (영상취재: 김진호(도쿄), 편집: 안광희) /고현승 기자 =====================/// PICK 안내 ...반대에도··· 후쿠시마 오염 처리수 바다로 내보낸다 2019.12.23.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경산성 전문가 소위원회 23일 정리안 발표 지하매설·지층주입·전기분해 등 방안은 배제 현지 주민들 '생계 위협한다'며 반발하는 안 강력히 반대하는 한국과 외교 갈등 불가피 지난 2월 촬영한 후쿠시마 제1원전 부지의 오염 처리수를 담아둔 대형 물탱크들. 처분하지 못한 오염 처리수가 급격히 늘며 현재 부지에는 오염 처리수 100만t이 물탱크에 담긴 채 보관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 처리수를 바다와 대기로 방출하는 방안을 사실상 확정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3일 전문가 소위원회를 열어 이 같은 정리안을 발표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강하게 반대해온 방식이어서 일본 정부의 강행 여부에 따라 한·일 외교 갈등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날 니혼게이자이 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오염수를 두 가지 방식으로 처분할 계획이다. 현재 원전 오염수를 정화한 뒤 탱크에 저장 중인 '오염 처리수'를 물에 섞어 바다로 내보내거나, 가열해 수증기 형태로 대기 중에 방출한다는 것이다. 다만 소위원회는 "방출 시기나 기간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결정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당초 소위원회는 ^전기분해를 통한 수소 방출 방식 ^약 20m 지하에 매설하는 방식 ^약 2500m 아래 지층에 주입하는 방식 등도 검토했지만, 전례가 없는 데다가 ‘규제·기술·시간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이유로 최종안에선 배제했다.  오염 처리수의 해양·대기 방출은 일본 국내에서도 이미 논란이 됐다. 원전 오염수는 정화시설(다핵종제거설비·ALPS)을 거쳐도 방사성 물질인 삼중수소(트리튬)는 걸러내지 못해서다. 이 때문에 현지 주민들은 생계 위협을 이유로 이 같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반대해왔다. 당장 소비자들은 후쿠시마 인근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의 구매를 꺼릴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오염 처리수를 충분히 희석해 기준치 이하로 방출하면 과학적으로 무해하다는 입장이지만, 반발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국인 한국은 강력 반대 입장이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에 오염수 처리가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국제사회에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주변국에는 충분히 설명한 뒤 반드시 협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지난달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원자력안전 고위규제자회의에서도 이런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한국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일본 측은 ‘오염수 처리 방법은 정해진 게 없다’며 피해 나갔다. 지난 9월 10일 하라다 요시아키(原田義昭) 당시 환경상이 퇴임을 앞두고 작심한 듯 '바다로 방출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말했을 때도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번에 해양·대기 방출 방침이 확정된 만큼 한국 정부의 대응 수위도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김상진 기자
7514    [타산지석] - 리상, -"순간이지만 영원한 문화유전자 남기다"... 댓글:  조회:2748  추천:0  2019-12-22
죽음이 끝 아니라는 이어령, 아들 보낸 이광기가 담아낸 모습  2019년12월22일  '이상의 집'서 열린 문화유산국민신탁 행사 암 투병 이어령 전 장관 '이상의 세계' 강연 "순간이지만 영원한 문화유전자 남겼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강연자로 모습을 드러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행사에 함께 하며 이날을 사진으로 기록한 방송인 이광기씨는 "암 투병 중에도 지치지 않는 지적 열정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진 이광기] “사람에겐 생물학적 죽음 혹은 사회적 죽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떠나도 죽지 않는 것이 있어요. 땅을 많이 남기거나 돈을 남기는 것보다, 죽음 후에도 내 생각이 끝없이 문화유전자처럼 퍼진다면 이게 하나의 희망이 되지 않겠나.(중략) 이상(본명 김해경)을 보세요. 스물일곱 살에 폐결핵으로 객사한 사람이 살던 자리에 우리가 지금 있어요. 순간이지만 영원한 것, 우리가 시간을 이기고 환란을 견디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이상이 보여주는 겁니다.” 여든 일곱 살 노학자의 나지막이 힘준 목청이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 울렸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이상의 집’은 시인이자 소설‧건축가 이상(1910~1937)이 세 살 때부터 20여년 살았던 집터에 자리 잡은 일종의 기념관. 그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은밀한 이야기,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영영 몰랐을,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17일 저녁 풍경이다. 이날 행사는 ‘이상의 집’을 관리하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이하 국민신탁)이 일종의 송년 행사로 열었다. 각계 각지의 문화지킴이들 50여명이 한데 모여 작은 한옥이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암에 걸린 후 ‘투병’이 아니라 병과 친해지는 친병(親病)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해온 이 전 장관의 특강 소식이 전해지면서 취재진도 몰렸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인사를 나누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연극배우 박정자씨. [사진 이광기]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이상의 시를 낭독 중인 연극배우 박정자씨. [사진 이광기] 17일 ‘이상의 집’에서 열린 '이상과의 만남' 행사 때 소리꾼 장사익씨가 ‘귀천’을 노래하자 생각에 잠겨 경청하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사진 이광기] 이들 가운데 탤런트‧방송인 이광기(50)씨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그는 사람들의 친목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소리꾼 장사익씨가 ‘귀천’을 노래할 때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상념에 빠진 이 전 장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상의 시 ‘거울’ 등 두편을 낭송한 연극배우 박정자씨와 반갑게 해후하는 모습도 잡혔다. 한발 떨어진 채, 어쩌면 마지막 될지 모를 어른의 나들이를 조심스레 기록하는 모습이었다. 이틀 뒤인 19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내에 위치한 ‘스튜디오 끼‘에서 이씨를 따로 만났다. 연기자 외에 사진작가, 미술 컬렉터로도 활동하는 그가 문화 창작자들을 매개하고 전시활동을 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이 전 장관과의 인연을 묻자 “매년 1월 김종규 국민신탁 이사장님, 임권택 감독님, 박정자‧손숙 선생님 등과 함께 새해 덕담 모임을 오래 해왔는데 늘 귀한 말씀 해주시는 큰 어른”이라고 소개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건강이 염려됐는데, 그날 뵈니 여전히 왕성한 지적 활력이 느껴져서 기쁘고 감사했다”고 덧붙였다. 탤런트 출신으로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면서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내 문화창작매개공작소 '스튜디오 끼'를 운영 중인 방송인 이광기씨. [사진 끼 스튜디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방송인 이광기씨(가운데)가 정재숙 문화재청장(오른쪽)으로 감사패를 받고 김종규 이사장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씨는 국민신탁의 오랜 후원회원이기도 하다. 2010년 가입 이후 적극적으로 후원회원을 유치해온 활동 등으로 ‘이상의 집’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오기 전에 저랑 친한 개그우먼 이성미‧박미선 누나를 포함해 30명 가입신청서를 또 받아왔다”라는 소감에 박수가 쏟아졌다. ‘이상한 모임’에서 이상의 삶을 부르짖다 "이제 보니 참 이상한 사람들만 모였어요. 문학과는 관계 없는… (건축가 김원을 가리키며) 건축도 있고, 아니, 구청장님도 오셨네. 이상한 모임이예요.(웃음)” 이 전 장관의 농담 섞인 인삿말처럼 참석자 면면은 다양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신임회장,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 등이 함께 했다. 가수 조영남씨 등은 참석이 예정됐다가 자리하지 못했다. 이 전 장관 자신도 외부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황에서 “이건 외부 행사가 아니라 내부 모임”이라는 김종규 이사장 설득에 못 이겨 나왔다. 이를 두고 이씨는 “다른 곳도 아닌 ‘이상의 집’이라 더욱 각별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이상 집터는 2009년 헐릴 뻔하다가 국민신탁 및 각계 후원 덕에 가까스로 보존돼 지난해 말 재개관했다. “이상이 짧은 생을 살아갔지만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서 보여지듯, 그날 이어령 선생님을 통해서 또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힘을 느꼈죠.” 그랬던 이유가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상이라는 ‘잊혀진 유산’을 길어 올린 이가 문학평론가 이어령이라서다. 그가 1972년 문단의 ‘우상 파괴’를 주창하며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했을 때 첫호 표지가 꼽추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였다. 청년평론가 이어령은 이상에 대한 전복적인 해석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진‧자료 등 유품을 모으는 데도 전력을 다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강연자로 모습을 드러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행사에 함께 하며 이날을 사진으로 기록한 방송인 이광기씨는 "암 투병 중에도 지치지 않는 지적 열정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진 이광기]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특강으로 성황을 이뤘다. 이 자리에서 발언 중인 김종규 이사장, 이 전 장관, 정재숙 문화재청장, 이홍구 전 총리.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그 유품이 곳곳에 배치된 ‘이상의 집’에서 이 전 장관은 지친 기색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 톤을 높이며 화이트보드에 맹렬하게 글씨를 휘갈겼다. 대표작 ‘날개’를 시각적‧건축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수평적 삶에서 수직적 삶으로의 이동’을 설명할 때 자리를 메운 이들이 순한 학생들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 장관은 특강에 앞서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도 ‘이상을 한국문학사에 복원시킨 것’을 첫손에 꼽았다. “올림픽‧월드컵 등을 보고 날더러 나라에 공헌했다고 하는데, 그거 내 삶에서 별로 중요한 것들 아니에요. 이벤트 ‘굴렁쇠’야 알지, 내가 공간기호론 쓴 사람인 거 아무도 몰라줘요. 나보고 장관이라 하지만 내 일생에서 장관은 2년 밖에 안 했어요. 오히려 내가 젊은 나이에 이상을 복원시켰고. 소수지만 그 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건축으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다방면에 팬들이 많은 것, 그게 나라에 공헌한 게 아닌가….”   10년 전 아들 잃은 이광기 "생명 순환은…" 이 말을 들으며 이씨는 겨울 나목(裸木)을 떠올렸다고 한다. “겨울나무가 가지 하나 없을 때는 죽었나 싶지만. 봄에 다시 꽃을 피우는 과정이잖아요. 선생님이 ‘만약 내가 없더라도 남겨진 것을 잊지 말라’면서 종자씨 같은 걸 남겨주시는 느낌이었어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맞이한 그대로 즐기시는 모습이랄까.” 뿌리가 썩지만 않으면 다시 꽃이 피는 생명의 순환. 자신의 사진작업과도 맞닿은 화두다. 앞서 이씨는 생화와 조화를 시간 경과에 따라 대조한 뒤 ‘삶이 꽃이라면 죽음은 삶의 뿌리’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한 바 있다. 이를 비롯해 임진각 피스 핀(Peace Pin) 프로젝트 등 전시·설치에 몰두하게 된 데엔 2009년 11월 아들 석규(당시 7세)를 신종플루로 잃은 고통이 깔렸다. 비탄의 낭떠러지에서 그를 끌어올려준 이가 김종규 이사장이었다. 덕분에 이어령 선생을 비롯, 많은 “인생의 어른들”을 만났고, 아이티·브룬디 등 세계 곳곳 재해·낙후 지역 봉사도 다녔다. “슬픔을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배운 요즘은 문화창작·매개 및 봉사활동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세상에 되돌려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말을 하면서도 그는 눈가에 차오른 물기를 닦아냈다. “육신이 사라지더라도 흔적이 남아 떠돌고 그게 DNA로 후세에 이어지잖아요. 그 때 그 모습이 내가 남기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요즘은 옛 것과 새 것을 잇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상의 집'에서 이 전 장관도 이런 말을 남겼다. “바깥에서 이름나는 사람들은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별로 공헌한 게 없어요. 뒷골목에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끌고 갑니다. 늘 그랬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아무도 몰라주고, 외롭게 죽을 때 그는 공헌을 한 겁니다. (중략) 이상은 1930년대 외롭게 죽은 사람이지만 오늘날도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권력이나 돈을 남긴 사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의미죠.(중략) 우리가 모인 이 집은 그가 남긴 정신의 신탁이 돼 오래오래 갈 것입니다.”   '이상의 집'엔 이상의 초상화가 표지로 실린 문학사상 창간호가 전시돼 있다. 이상의 친구였던 꼽추화가 구본웅이 그린 초상화로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수집한 이상 유품들 중 하나다.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2018년 말 재개관한 '이상의 집'에 자리한 이상의 흉상.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2009년 헐릴 뻔했다가 가까스로 보존돼 2018년 말 재개관한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 [사진 문화재청]   중앙일보
7513    [그것이 알고싶다] - 말하는 식물... 댓글:  조회:3786  추천:0  2019-12-21
"물이 부족해요"... 말하는 식물 등장 기사입력 2019.12.21.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식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국내 연구진이 식물 뿌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신호를 분석해 식물 상태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혜리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I need water" (물이 필요해요.) "I need sunlight" (햇빛이 필요해요.) 물과 빛이 부족하다는 음성이 들립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식물. 상태가 좋지 않은 식물에 곧바로 물을 주고 빛을 쪼여 줍니다.  그러자, "Thank you for water. I'm fine" (물 줘서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하는 식물'이 국내 기술로 재현됐습니다. 식물 뿌리 주변에 있는 미생물의 신호를 읽은 덕분입니다. 물과 빛이 충분해 식물의 광합성이 활발해지면 미생물도 활성화합니다. 이때 미생물 주변에서 전자가 생성되는데, 이를 전기적인 신호로 변환해 식물의 상태를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물이나 빛이 부족하면 미생물이 활성화되지 못해, 전기 신호도 약해집니다. 이렇게 식물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전기 신호는 음성 신호로 전환돼 스피커를 통해 표출됩니다. [이은빈 / 건국대 생물공학과 연구원 : 식물에 급수하면 30분 내로는 식물의 상태, 식물의 활성도를 알 수 있게끔 설계했습니다.] 식물 뿌리 주변 미생물이 내보내는 전자는 흙 속에 심은 센서를 통해 간단하게 밖으로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식물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 식물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양윤정 / 건국대 생물공학과 연구원 : (이 기술을 활용하면) 식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있어서 식물 관리가 좀 더 쉽고 식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공기 정화나 정서적인 이유로 실내에서 이른바 '반려 식물'을 기르는 사람이 늘고 있는 상황. 이번 기술을 통해 식물과 색다른 소통을 시도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YTN 사이언스 이혜리
7512    [그것이 알고싶다] - 만약... 만약... 만약... 댓글:  조회:3722  추천:0  2019-12-21
  만약 백두산이 폭발한다면?   2019.12.21.    화나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고요하면서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백두산은 사실 활동을 잠시 멈춘 화산이죠. 최근 백두산 폭발을 가정한 재난영화가 개봉했는데요, 진짜 화산이 폭발하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스브스뉴스입니다. [뉴스 속보입니다. 백두산 화살이 폭발했습니다. 폭발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이번 폭발은 관측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최고 수치의 폭발로 추정되는 가운데.] 백두산이 폭발해 대재난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인데 솔직히 좀 실감이 안 나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백두산의 모습은 차분하고 고요한 천지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천지 안을 들여다보면 거품이 부글부글? 백두산 천지 5km 아래로 확인된 '마그마 방'만 무려 4개. 언제나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활화산이야. 백두산은 과거에 여러 번 폭발했던 적이 있는데 약 1000년 전에 있었던 폭발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로 기록되고 있어. 화산 폭발의 정도를 기록하는 화산 폭발 지수는 0~8까지 있는데, 당시 백두산 대폭발의 추정 등급은 무려 7.4. 무려 우리가 아는 폼페이 화산 폭발보다 수십 배 강한 위력이야. 실제로 2015년 5월 21일, 국민안전처 주관으로 부산대 교수팀이 최악의 백두산 대폭발 상황을 가정해 피해자료를 분석한 연구 자료 결과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천 년 전과 비슷한 규모의 대폭발이 일어나 북동풍이 불어올 경우 백두산에서 뿜어나온 화산재가 48시간 이내에 거의 한반도 지역을 뒤덮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 기계 고장의 원인이 돼서 항공, 교통, 통신 시설을 마비시키고 토양을 황폐화시켜 농작물을 망가트리는데 추정되는 경제적 피해액만 11조 원 이상이래. 이런 최악의 재난 상황이 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행정안전부에서 고시한 화산폭발 대비 국민행동요령에 자세히 나와 있어. 대부분 화산재 피해를 막기 위한 대처들인데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지 않는다? 화산재를 현미경으로 보면 아주 날카로운 형태의 미세한 결정질로 이루어져 있어. 이걸 모르고 혹시 렌즈를 낄 때 자칫 렌즈에 달라붙은 화산재가 각막에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야. 게다가 대부분 황산염 등 유독물질도 함유하고 있어서 호흡기에도 좋지 않지. 세상에 서울에서 500km 떨어진 곳인데도 이렇게 큰 영향을 준다니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영화 백두산까지 본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대재앙이 일어날까 두렵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천 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백두산이 크게 폭발한 적이 없고 다량의 화산재가 발생하더라도 바람의 방향 때문에 한국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는 어려워. [이윤수/포스텍 환경공학부 특임 교수 : 화산재로 해 가지고 다 뒤집어쓰는 거 아니냐. 미세먼지들? 초미세먼지들? 이러한 우려는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2011년 기상청에서 발표한 백두산 폭발 예측 시나리오에 따르면 영화에서처럼 최고 수준의 대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정도가 비교적 낮은 단계인 경우에는 화산재의 영향이 황사주의보에서 경보 정도라고 하거든. 그래도 우리는 가능성이 희박할 수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야겠지? 그러니까 안전을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화산 대응 매뉴얼은 기억해두는 게 어떨까? (책임 프로듀서 : 하현종, 프로듀서 : 조기호, 구성 : 권재경, 편집 : 정혜수, 내레이션 : 박은영, 도움 : 김지영·박은영)         /조기호 기자
7511    한국 최초 녀성신문... 댓글:  조회:2979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여성신문 여성운동의 한 수단으로 쓰인   요약 1947년 5월 2일, 일간지 이 창간. 발행인은 애국부인회를 이끌던 박순천. 신문이 좌우익으로 갈라진 혼란기에, 여성의 의식을 일깨우려는 목적으로 신문을 창간. 1면에는 가정·문화·연예 기사 한글 사용. 2면은 정치·경제·사회 기사 국한문 혼용. 6·25 때문에 창간 3년 만에 중단. 여성을 대상으로 맨 처음 발간된 신문은 이다. 창간일은 1947년 5월 2일. 판형은 타블로이드, 지면은 2면이었으며, 일간이었다. 발행인은 당시 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있던 박순천이었다. 애국부인회라고 하면 이승만 박사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여성단체, 이 산문의 창간도 그런 관계로 인해 계기가 된 것이었다. 광복 후 이박사가 먼저 귀국하고 나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귀국했는데, 그 환영연에서 여성들을 위한 신문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적임자로 박순천을 추천한 사람들이 많았다. 여성 정치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박순천의 당시 나이는 50세였다. 경남 동래 출신인 그녀는 언론계엔 전혀 경험이 없었으나 의욕을 주무기로 해서 신문을 창간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인물들 중 문필과 편집 등 신문 제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있어야 할 편집국장도 지기였던 윤보선을 통해 금방 데려올 수 있었다. 윤보선은 당시 의 사장이었는데, 박순천의 부탁을 받고 막 편집부장으로 입사한 작가 최태응을 의 편집국장으로 보내준 것이다. 1947년이면 신문들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혼란스러운 때였다. 신문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정치적인 것으로, 여성들을 위해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한 때 여성의 의식을 일깨우려는 목적으로 신문을, 그것도 일간으로 창간했다는 사실은 여간한 배짱과 추진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순천은 한편으로 주식을 팔고, 한편으로는 집을 담보로 잡아 운영자금을 확보하여 남대문로 1가에 윤전기를 갖춘 신문사를 설립했다. 창간 당시 멤버로는 최태응 이외에 구상·임옥인·임원규 등이 있었으며, 주필로는 모윤숙이, 그리고 논설위원으로는 전희복이 위촉되었다. 그러나 말이 신문사지 안에 들어가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책상 하나에 주필과 논설위원, 그리고 기자들이 둘러앉아 일을 하고 있었고, 부인회 회원들은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기사 자료를 가져왔다. 그래서 때로는 부인회 회원들의 수다를 들으며 신문을 제작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창간 때의 면면들을 보면 이 신문의 참신성과 패기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시대상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들 멤버의 구성은 불과 2면짜리 일간지지만 편집방향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은 그 창간 취지대로 1면에는 정치 관련 기사를 싣지 않고 가정·문화·연예면 기사를 실었다. 논조는 계몽적이었는데, 읽기 쉽도록 주로 한글을 사용했다. 2면의 정치를 비롯한 경제·사회 관련 기사만 국한문 혼용으로 실었다. 이 신문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운동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성의 문화에 가려 뒤쳐져 있는 여성들에게 자각의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 일이 이전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적극적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구별이 되었던 것이다. 에 참여한 여성들은 그렇게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적극적인 여성운동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 일은 무엇보다도 신문의 보급 과정에서 나타났다. 박순천은 사장으로 일하면서 부인회의 조직을 이용하여 보급망을 넓혀나갔다. 그 규모는 부산·대구·광주·인천 등지에 지국을 둘 정도였다. 그리고 지국에서는 한 부라도 더 보급시키기 위해 먼 시골에까지 걸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부인회 회원은 20리, 30리 되는 길을 매일 걸어서 배달해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런 열성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은 창간 3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6·25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재정난으로 고전을 할 때, 운영비는 거의 지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뜻같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용지를 구하지 못해 신문을 찍을 수가 없었다. 원료를 대부분 북에서 가져왔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그 공급이 일체 중단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결국 최초의 여성 전문 일간지로 발돋움하기 직전 은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여성신문 - 여성운동의 한 수단으로 쓰인 (한국 최초 101장면)  
7510    한국 최초 문학비... 댓글:  조회:3410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문학비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요약 이상화는 라는 시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 시인.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이상화의 처녀작 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쓰임. 대구 서문로의 한 시계포, 명금당 주인 이윤수가 이상화 시비를 세우자고 의견을 냄. 명금당은 문인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였고, 수필가 김소운이 시비 건립을 제안, 만장일치로 합의. 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의 시비시인이 18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썼다는 처녀작 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세워진 문학비는 로 유명한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의 시비이다. 문학비는 그 대상이 되는 문인에겐 영예롭고 고귀한 기념비가 되지만,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는 창의력과 문화적 자존심을 말해주는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로부터 비석에 뭔가 새겨졌다는 것은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남다른 재능을 공인받는 일로도 여겼다. 그래서 병폐도 많았는데, 조선조 때만 해도 백성들 사이에서 개꼬리비니, 수렁밭비니, 또는 꾀꼬리비니 하고 비웃음 섞인 말은 모두 그런 데서 나온 것이었다. 생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 잦은 요즘에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별로 의미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비석이 도로변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오늘을 후인들은 뭐라고 할지···. 그러나 이상화 시비는 그 어떤 야유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문학을 숭상해왔던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살아 있는 혼백이다. 이상화 시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세워진 때는 1948년. 당시 대구에서 발간되던 시 전문지 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웠다. 이상화 시비가 대구에 세워지게 된 것은 시인의 고향이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시비는 충북산 오석으로 높이가 1.8m이며, 폭은 1.2m 정도다. 그 전면에는 그의 시 중 열한 번째 연인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상화는 마흔두 살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상징적인 서정시를 주로 썼던 그는 민족의 운명이 암흑기에 있던 194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2년 앞둔 그해는 시인의 작품에 어려 있는 민족의식을 생각해볼 때 비통한 해인 것만은 분명하다. 시인 이상화는 교편을 잡고 있던 대구 교남학교에서, 나라를 빼앗겼으면 주먹 힘이라도 길러야 한다면서 권투부를 창설했다. 시인은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그의 역사 이야기와 야담 듣기를 더 좋아했고, 교가에 '만주벌 바람 타고'라는 가사를 집어넣었다가 대구서에 구속되기도 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지금도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는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대신 노래해준 명작이다. 그 시인이 끝내 빼앗긴 땅에서 붓을 놓고 만 것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의 대표작 가 시비에 올려지지 않은 것은 가 처녀작이기 때문이다. 상화는 이 시를 18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상화 시비의 글씨는 상화의 셋째아들인, 당시 열한 살 된 태희가 쓴 것이다. 이상화 시비를 세우자는 최초의 의견은 대구 서문로에 있던 한 시계포에서 나왔다 시계포의 상호는 명금당. 주인은 시인 이윤수였다. 이윤수는 명금당을 편집실로 해서 을 발행해오고 있었다. 이 무렵 의 동인으로는 이윤수 외에 유치환·이응창·오란숙·박목월·이호우·이영도·김동사 등이 있었다. 소설가 윤장근이 1995년 12월호에 기고한 '이윤수와 죽순 주변'을 읽어보면 당시 명금당은 대구지역 문학인들뿐만이 아니라, 대구에 내려오는 타지역 예술가들에게도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명금당에 비 오는 9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밤색 중절모를 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수필가 김소운이었다. 문인들은 그래서 술자리를 마련하게 됐고, 거기서 갑자기 김소운이 이상화 시비 건립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고 이듬해 세우게 된 것이다. 이상화의 시에는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의 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한국혼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 시인의 시비가 한국 최초의 문학비로 자리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문학비 -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한국 최초 101장면) 이상화   [ 李相和 ] 이미지 크게보기 1901-1943. 시인. 백조 동인. 이칭별칭 호 무량(無量), 상화(尙火), 상화(想華)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1년 ~ 1943년 성격 시인 출신지 경상북도 대구 성별 남 본관 경주(慶州) 저서(작품)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몽환병, 가상, 구루마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想華)·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佰)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夢幻病)」(개벽, 1925)·「비음(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嘲笑)」(개벽, 1925)·「통곡(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화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문학과 역사적인간』(김흥규, 창작과 비평사, 1980) 『한국근대시인연구』(김학동, 일조각, 1974) 「파토스와 저항」(김준오, 『식민지시대의 시인연구』, 시인사, 1985) 「이상화시(李相和詩)의 연구사적검토」(최동호, 『이상화연구』, 새문社, 1981) 「현대한국의 낭만주의시(詩)에 관한 연구」(김용직, 『서울대학교논문집』 14, 1968)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상화와 고월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이상화 [李相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화1901-1943. 시인. 백조 동인.
7509    한국 최초 시 전문지 댓글:  조회:3171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시 전문지 낭만주의를 표방했던 시 전문 잡지,   요약 1921년 5월 24일, 최초로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 창간. 크기는 사륙판, 23면에 15편의 시가 실림. 그중 1편은 번역시. 표지에 제호 아래 '자유시의 선구'라는 문구로 잡지 동인들의 문학적 태도를 보여줌. 정가는 20전, 광고도 게재하고자 요금표도 실림. 그러나 2호를 내지 못하고 종간.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는 1921년 5월 24일에 창간된 이다. 이 무렵 문예지는 대개 동인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도 역시 상아탑 황석우, 월탄 박종화, 회월 박영희, 수주 변영로, 공초 오상순, 춘성 노자영, 우영 정태신, 근포 신태악, 이훈 등이 동인이 되어 발간된 것이었다. 잡지의 크기는 사륙판으로 23면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1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중 1편은 번역시이다. 이렇게 작은 잡지인데도 은 낭만주의를 맨 먼저 표방하고 나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박종화가 지에 기고한 '문단 1년을 회고하면서'를 보면 어느 정도 참고가 될 것이다. 1921년에 대한 회고다. 그는 힘의 문학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만 사람의 뜨거운 심장 속에는 어떠한 욕구의 피가 끓으며, 만 사람의 얽혀진 뇌 속에는 어떠한 착란의 고뇌가 허덕이느냐. 이 불안의 고뇌를 건져주고 이 광란의 핏물을 눅여줄 靈泉의 把持者는 '力의 藝術'을 가진 자이며 '力의 詩'를 읊는 자이다. 가장 경건한 태도로 강하고 뜨거운 그곳에 觀照하여 暝想의 경지를 넘어선 꿈틀꿈틀한 굵다란 線이 뛰는 듯한 하얀 종이에 시커먼 먹을 적어 椓大의 筆을 휘두른 듯한 그러한 예술의 把持者라야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 문단에는 이러한 소설가가 없으며 이러한 시인이 없다." 3·1운동 이후 많은 신문·잡지 그리고 출판물이 나와 문화적인 면에서 각성과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내용에 있어서 나약한 점을 드러내고 있는 문단에 만족치 못하는 글이다. 이 1921년에 창간되었고, 박종화가 이 문예지의 동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당시 시인들이 어떤 각오를 지니고 이 잡지를 창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표지엔 제호 아래에 '자유시의 선구'라는 문구가 실려 있어 이 잡지 동인들의 문학적 태도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또 그 아래엔 '선언'이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첫 부분에 제호를 이라 한 연유가 있다. "우리들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고뇌의 촌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밟아나가는 길은 고독의 끝없이 삭막한 큰 설원이다. 우리는 이곳을 개척하여 우리의 영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촌, 장미의 훈향 높은 신과 인간과의 경하로운 화혼의 향연이 열리는 촌을 세우려 한다." 발간사에 해당하는 이 글은 수주 변영로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수주는 이 글에서 잡지가 황석우의 주도 아래 창간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판권란을 보면 황석우는 편집인으로 되어 있고, 발행인은 미국인 변영서로 되어 있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의 잡지 발행에 따른 제재를 피하기 위한 편법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잡지를 발행하려면 미리 원고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 비록 출발은 작았지만 계획적이고 패기에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맨 뒤에는 '동인의 말'을 실어 동인들의 근황을 알려 친근감을 주었고, 독자 투고 안내문도 보인다. 정가는 20전. 광고도 게재하겠으니 참고하라면서 요금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2호를 내지 못한 채 종간되고 말았다. 회월 박영희는 1920년대를 '시의 황금시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시기에 우리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던 세 종류의 순수 문예지가 창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서도 그 표현은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가 최초로 출현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동인들의 당시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 은 재기발랄했던 젊은 문인들이 한국 문학사에 찍어놓은 작지만 분명한 족적이었다.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장미촌1921년 5월 24일 창간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최초 시 전문지 - 낭만주의를 표방했던 시 전문 잡지, (한국 최초 101장면)  
7508    한국 최초 출판사... 댓글:  조회:3166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출판사 처음 납활자로 책을 만든 출판사, 광인사   요약 1884년, 근대적인 출판업을 하며 이윤도 추구하는 최초의 출판사 광인사 설립. 목활자 인쇄가 아닌 처음으로 납으로 만든 연활자를 사용/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해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 서적의 제작을 기획에 의해 함. 처음 출판한 책은 , 그밖에 , 이 있음. 단순히 서적을 펴내는 것을 넘어 개화의 한 수단으로 출판을 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음. 1884년 3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제15호에는 여지껏 볼 수 없었던 짤막한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시내에 광인사(廣印社)라는 곳이 있는데, 민간인의 자본을 모아 세운 곳으로 장차 서적을 출판하여 이익을 얻는 한편 문화 창달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 기사는 물론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기사는 다름 아닌 최초의 출판사인 광인사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오늘날의 출판사 설립 보도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출판업을 하겠는데 이윤도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인사는 최초의 출판사로서 신문의 취재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광인사를 출판사의 효시로 보는 이유는 첫째, 종래의 인쇄 방법인 목활자 인쇄가 아닌 납으로 만든 연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둘째,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했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서적의 제작을 기획에 의해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은 종래의 출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일이었다. 말하자면 광인사는 근대적인 출판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설립 시기는 그해 2월로 추정된다. 기사 내용으로 볼 때 광인사는 민간인이 세운 합자회사 형태의 출판사로서, 출판사업을 개화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광인사에서 펴낸 책을 보면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맨 처음 출판한 책은 「충효경집주합벽(忠孝經集註合璧)」이고, 그밖에 「농정신편(農政新篇)」과 「고환당집(古懽當集)」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이 정도이나, 광인사의 시설이나 연조로 볼 때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서적을 출판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 종류의 책만을 참고하더라도 광인사의 의도는 민중을 교화하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여, 부강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농정신편」은 안종수가 지은 것으로, 과거의 농업 전문서적과는 달리 근대과학을 토대로 한 식물학적 견지에서 씌어진 것으로, 농업기술서로서는 당시에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안종수는 4년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농업의 과학화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돌아와 그에 입각해 저술한 것이 바로 「농정신편」이었다. 「고환당집」 역시 그 출판 의도는 「농정신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책은 개화해야 산다고 주장한 강위의 문집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의 문사들과 사귀며 신문물에 눈을 떴고,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에도 그곳에 들어와 있는 서양문물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한 그의 주장은 국리민복과 관련된 것이었다. 광인사의 이러한 출판 의도는 당시로서는 서적을 펴낸다는 차원 이상으로 평가되는 것이었다. 개화의 한 수단으로 출판을 했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광인사에서 발간한 책들은 본문 용지가 한지이고, 제본도 전통의 방법인 한장(韓裝)으로 했다. 종이의 수급이나 제작상의 미비점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광인사의 시설은 꽤 규모를 갖추었던 것 같다. 를 찍었던 관영 인쇄소 박문국이 갑신정변으로 인해 불에 타자 광인사에 와서 를 인쇄하려 했기 때문이다. 광인사는 188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농정신편 / 광인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최초 출판사 - 처음 납활자로 책을 만든 출판사, 광인사 (한국 최초 101장면)  
7507    한국 최초 시집... 댓글:  조회:4530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시집 단행본으로 나온 첫 창작시집, 김억 「해파리의 노래」   요약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은 1921년 안서 김억이 펴낸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우리나라 첫 단행본 창작시집은 1923년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 판형은 사륙판, 총 162면에 83편의 창작시가 수록됨. 3·1운동 이후, 이민족에게 짓밟히는 조국에서 김억은 시집을 통해 좌절과 허무의 분위기를 토해냄.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해파리의 노래"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해파리의 노래 우리 나라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은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펴낸 「오뇌의 무도」다. 1921년의 일이었다. 다음으로 나온 시집은 「기탄자리」. 이 역시 안서가 펴낸 것이다. 이 시집들은 모두 번역시를 수록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뇌의 무도」는 단행본으로 나온 최초의 시집이자 번역시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인으로 자신이 창작한 시를 맨 먼저 시집으로 엮어 발표한 사람은 누구일까? 또 그 시집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는 역시 안서 김억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의 시집은 「해파리의 노래」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사륙판 총 162면에 83편의 창작시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첫 창작시집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이미 출간된 시집은 번역시집 두 종류뿐이었고, 창작시집도, 번역시집도 모두 안서의 이름으로 발간된 것이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한국 근대시 형성에 김억이 끼친 영향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억은 1893년생으로 평북 정주 출신이다. 같은 고향 출신인 김소월을 문단에 소개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의 동인으로 있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처음으로 소개한 일은 유명하다. 「해파리의 노래」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1922년에서 1923년 사이에 종합잡지 월간 을 통해 발표한 것들이었다. 이전의 시들은 시집 맨 뒤에 '부록'이라 하여 실어놓았다. 30대 초반인데 1년 남짓한 시간에 한 권 분량의 시를 썼다는 것은 대단한 창작의욕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활동했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그런 창작의욕은 그자체로 뭔가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4년. 조국은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였다. 감수성 예민한 한 지식인이 그런 시절에 토해낸 시구는 좌절과 허무, 실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런 분위기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이 시집의 권두언에서부터 나타난다. "같은 동무가 다같이 생의 환락에 도취되는 4월의 초순 때가 되면은 뼈도 없는 고깃덩이밖에 안 되는 내 몸에도 즐거움은 와서 한 끝도 없는 넓은 바다 위에 떠돌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나의 이 몸은 물결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입니다. 볶이는 가슴의, 내 맘의 설움과 기쁨을 같은 동무들과 함께 노래하려면 나면서부터 말도 모르고 리듬도 없는 이 몸은 가이없게도 내 몸을 내가 비틀며 한갓 떴다 잠겼다 하며 볶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내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내 노래는 섧고도 곱습니다." 당시의 철자로는 '다같이'가 '다갓치', '하염없이'가 '하욤업시'로 되어 있다. 권두언을 보면 시인이 시집의 제목을 왜 「해파리의 노래」라고 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그것은 곧 좌절의 시대를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 시인의 노래인 것이다. 시집에서 무심코 한 편을 읽어보아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피리'라는 작품이다. "빈 들을 휩쓸어 돌으며 / 때도 아닌 낙엽을 재촉하는 / 부는 바람에 쫓기어 / 내 청춘은 내 희망을 버리고 갔어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위에 / 소리도 없이 달이 오를 때 / 이러한 때에 나는 고요히 혼자서 / 옛 곡조의 피리를 불고 있노라." 안서는 국내에 에스페란토 어를 처음 소개하고 연구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에 에스페란토 지상 강의실을 열어 보급하는 한편 번역에도 인용했다. 그가 번역시를 쓸 때 참고했다는 외국어 중에는 '세계어·영어·일어·불어' 등이 있었는데, 이중 세계어가 바로 에스페란토 어였다. 한국 시의 발전적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던 첫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 그 시인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아직도 인명사전의 생몰년에는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은 채로 있다. 관련이미지 5                               이미지 이전 해파리의 노래 / 김억1923년 간행한 김억의 시집. 시집의 속표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최초 시집 - 단행본으로 나온 첫 창작시집, 김억 「해파리의 노래」 (한국 최초 101장면)  
750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제흡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95  추천:0  2019-12-16
  “항공기 몰면서도 창문 열고 흡연”… 항공사는 ‘나 몰라라’  2019.12.1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비행기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안되죠. 그런데 만약 비행기 조종사가 운항 중 담배를 피운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일부 조종사들이 실제로 담배를 피우고 연기를 빼내기 위해 비상 장치까지 이용한다고 합니다. 김지숙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국내 모 항공사에서 6년 넘게 일한 조종사 김 모 씨. 조종석 흡연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김○○/A 항공사 기장/음성변조 :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봤어요. (전체 조종사의) 30% 정도는 태우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김○○/음성변조 : "활주로까지 가는 길이 있어요. '택시웨이(유도로)'라고 하는데요. 그 사이에도 조종실 창문을 열고서는 태우시는 분들도 가끔 계십니다. 창문을 열고 다시 닫았을 때 혹시 안 닫히진 않을까..."] 보잉 737기 조종석을 재현해놓은 공간입니다. 조종석에 불이 났을 때 연기를 빼내는 장치가 있는데요. 일부 기장들은 이 장치를 담배 연기를 빼는 데 쓴다고 합니다. 장치를 잘못 조작하면 객실 기압이 떨어지고 비행기가 급하강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김○○/A 항공사 기장/음성변조 : "실수할 수 있거든요. 극히 일부라지만 한 번의 비행에서 승객들의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실제로 지난해 7월 중국의 한 항공사 조종사들이 담배를 피우다 이 장치를 건드려 비행기가 급하강한 일도 있었습니다. 직장 익명게시판에는 조종사 흡연 문제를 성토하는 글이 많습니다. 하지만 흡연 시 최대 천만 원의 벌금을 내는 건 승객 뿐이고, 조종사와 객실승무원은 처벌할 규정이 없습니다. [정○○/B 항공사 승무원/음성변조 : "정말 많이 피우시는 기장님들은 정말 안에 들어가면 뽀얗거든요. (기장님들은) 무소불위예요, 그냥. 손님은 담배 피우면 여권 뺏고 공항에 도착하면 경찰한테 인계하고 막 이러는데 기장님들은 왜 저렇게 해 주나..."] 지난 6년간 기내 흡연으로 적발된 승객은 2천여 명. 조종사에게도 흡연시 자격을 정지하고, 항공사에 과태료를 매기는 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논의는 안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증언은 생생한데 정작 국내 여러 항공사들은, 정식 보고된 조종사 흡연은 없었다는 입장만 되풀이했습니다. KBS 뉴스 김지숙입니다. 김지숙 기자
750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흡연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85  추천:0  2019-12-14
하늘에서 담배꽁초가 내려요... 아파트 흡연갈등 여전 2019.12.14.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층간소음만큼이나 아파트 흡연 갈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2018년부터 금연아파트를 지정하고 금연아파트 내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했지만, 자율규제에 머물러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CJ헬로 강원방송 이다혜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원주의 한 아파트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입니다. 위층에서 버린 담배꽁초가 떨어져 창틀이 누렇게 그을렸습니다. 발코니 난간과 에어컨 실외기에 담뱃재가 떨어져 있는가 하면, 공용 복도 창문은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가 쌓여 아예 재떨이가 돼버렸습니다. [아파트 주민 : 베란다 나가면 냄새가 나요. 거실 창문 밑에 꽁초도 떨어져 있더라고요.] [아파트 주민 : 그분들 나름대로 흡연구역에서 피운다고 하는데 거기까지 뭐라고 하기가…주민들 사이에서 얼굴 붉히기도 좀 그렇고.] 이런 가운데 지난 9월 경기도 오산의 한 아파트에서는 유모차에 타고 있던 세 살배기 아기가 누군가 던진 담배꽁초에 맞아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아파트 내 흡연문제가 최근 새로운 갈등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자체마다 금연조례를 제정하고 금연아파트를 지정해 운영하는 등 대안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금연아파트는 입주민 50% 이상의 동의를 얻어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신청하고 선정되면 현관, 복도, 엘리베이터 등의 공용공간에서 흡연이 금지됩니다. 금연아파트로 지정되면 입주민의 금연 독려를 위한 현수막 등 홍보물 설치 비용과 각종 건강프로그램이 지원됩니다. [이규숙 / 강원도 원주시보건소 건강증진과장 : 관에서 일방적인 지정이 아니기 때문에 입주민들 스스로 금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요. 스스로도 자율정화나 서로서로 감시망을 만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러나 원주지역 아파트 180여 개 중 금연아파트로 지정된 곳은 단 4곳뿐. 주민 합의를 이루는 과정 자체가 어려운 데다 실제 지정까지 행정 절차가 까다로워 아파트들이 신청을 꺼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거주하는 주민이 아닌 세대주의 동의가 필요하고 정작 세대 간 갈등을 유발하는 주택 내 금연은 강제할 방법이 없어 실효성에 의문이 여전한 상황. 공동주택 금연구역에서 흡연한 경우 법에 따라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지만, 현재의 담당 공무원 규모로는 물리적 단속이 불가합니다. 때문에 주민자치위원회의 자율에 맡기는 등 제도의 한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주 모 아파트 입주자대표 : 시설물을 변경하는 부분은 소유주가 필요하겠지만, 흡연자의 동의를 받는 것은 현재 거주자가 더 우선시 돼서 거주자의 동의를 받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단순한 불편을 넘어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아파트 흡연 문제. 강제성 없는 법과 조례로 주민 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헬로TV뉴스 이다혜입니다.
7504    [별의별] - "고래 똥" = "바다의 황금" = 8 댓글:  조회:3656  추천:0  2019-12-13
바닷가서 주운 '덩어리'… 알고 보니 8억짜리 '고래 똥' 2019.12.13.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마지막 검색어는 '고래 똥이 8억 원'입니다. 태국의 한 남성이 바닷가에서 무게 17kg에 달하는 용연향을 줍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돌덩이처럼 생긴 이게 바로 수컷 향유고래의 배설물인 용연향입니다. 고급 향수의 재료로 쓰이는데요, 상당히 고가에 팔려서 '바다의 황금' '바다의 로또'라고 불립니다. 이번에 남성이 주운 용연향의 가치도 무려 8억 5천만 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남성은 해변에서 쓰레기를 뒤지다가 떠밀려오는 덩어리를 발견했는데요, 덩어리가 용연향이라는 걸 직감한 그는 라이터로 일부를 녹여 봤더니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바다 위를 오래 떠다닌 용연향일수록 향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 가치도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요. 누리꾼들은 "저것도 아는 사람이나 줍지ㅠㅠ 그냥 돌덩이같이 생겼네요." "고래 배설물이 이렇게 비싼 거였다니~ 나도 고래 똥 주우러 다닐까?ㅋㅋ"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료출처 : 데일리메일)  
750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삼림파괴",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29  추천:0  2019-12-13
▲   현 브라질원주민협회 (APIB)의 소냐 과자자라(왼쪽에서 두 번째) 대표와 부족 리더들이 로마에서 거리 캠페인을 하고 있는 모습 ⓒ 아마존와치 제공 관련사진보기 "저는 브라질 (북동부) 마라냥주에서 온 소냐 과자자라(Sônia Guajajara)라고 하며, 현 브라질원주민협회(APIB)의 대표입니다. 지금 브라질 원주민들의 삶은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농기업, 벌채 및 광산업체들이 아마존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35일 안에 3명이나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브라질 원주민의 삶을 위협하는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지난 2일부터 13일까지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기후변화회의(COP25)를 찾은 소냐 과자자라 대표는 다수 원주민들이 직면한 현실을 알리며 세계를 향해 국제연대를 호소했다. 지금 마드리드에서는 정부기관과 업계가 참여하는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산하 의결기구, 유엔기후변화회의(COP)의 공식 행사와 동시에, 환경-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대안적 행사, '기후 소셜 서밋(Social Summit for the Climate)' 및 원주민 리더들을 위한 대안적 연대체, '밍가 인디지나(Minga Indigena)'도 열리고 있다. 북남미에서도 많은 원주민 환경운동가들이 가세해 행진, 집회, 퍼포먼스, 토론회를 열며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지난 6일, 5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기후비상행진에서 공식 연설자로 초대된 소냐 대표는 군중을 향해 현 브라질 대통령을 비판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우리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단지 브라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입니다. 아마존은 불타고 있으며, 아마존을 보호하고자 싸우는 이들은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열대우림은 과거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행성이 지구 말고 없듯이, 우리는 대안(plan B)이 없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계속된 이 싸움에 우리 모두가 전사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싸움에 중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의 친척 두 명이 고속도로에서 총격사건으로 살해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 유엔기후변화회의 (COP25)를 찾은 소냐 과자자라 대표 마드리드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기후변화회의 (COP25)를 찾은 소냐 과자자라 대표가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 디모크라시 나우 방송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과자자라 부족의 대표격인 피르미노 과자자라(Firmino Guajajara)와 하이문도 과자자라(Raimundo Guajajara)는 사건 당시 환경 관련 미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속도로에서 총을 난사한 후 뺑소니친 용의자의 행방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난주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은 원주민보호지역이지만, 원주민들이 불법 벌채업자와 광산업자로부터 폭력에 자주 노출되는 곳이다. 과자자라 부족은 브라질 내 가장 큰 원주민 부족 중 하나로 약 2만 명의 주민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최근 증가하는 불법 벌채와 토지 점유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하고자 7년 전부터 삼림 보호원단(Guardians of the Forest)을 구성해 정찰을 해오고 있지만, 역부족이기만 하다. 지난 11월 1일에는 삼림보호원이었던 파울리노 과자자라(Paulino Guajajara)가 살해당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 명의 아들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한 그는 지난 9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위험한 일이라 가끔 두려운 생각도 들지만, 머리를 쳐들고 맞서서 싸우고 있다"며 "현재 아마존의 자연이 너무 많이 파괴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토지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공존하는 동물과 새들, 다른 부족도 보호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아마존을 보호해야 한다"며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에는 대략 백만 명의 원주민이 존재하는데, 브라질 내 원주민에 대한 폭력을 모니터링하는 가톨릭단체 씨미(Cimi)에 의하면, 1985년 이래 살인사건만 1119건으로 집계된다. 특히 2017년에는 110명, 2018년에는 135명이 살해당했다.   급격히 증가하는 아마존 파괴와 원주민 대상 폭력   ▲  지난 여름 불타고 있는 아마존 ⓒ 아마존 와치 제공 (katie Maehler) 관련사진보기 지난 1월 극우성향의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아마존 지역의 삼림파괴와 아울러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이 급격히 증가추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린피스는 자체 웹사이트에서 원주민선교위원회(Indigenous Missionary Council)의 통계자료를 인용하며, 지난 1월 이래 브라질에서는 불법 토지점유가 두 배로 증가했고, 원주민보호구역에 대한 공격이 44%나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벌목과 채광, 자원약탈을 목적으로 불법침입한 이 업자들은 종종 중무장을 하는 관계로 원주민들에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 현상을 믿지 않는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과거 선거 캠페인 중에는 원주민들의 권리를 축소하고, 이들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킬 것이며, 아마존 내 원주민보호지역을 개발업자들에게 개방할 것임을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브라질국립우주연구소(INPE)는 위성 자료를 근거로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8개월 동안 발생한 브라질 아마존 화재는 8만 7천 건 이상으로, 지난해(2018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76%나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2010년 이후 가장 많은 화재 건수다. 다수의 환경단체들은 아마존의 화재가 올해 들어 더욱 증가한 배경으로 열대우림을 불태우고 소 방목장과 콩 등의 작물을 키우는 농지, 광업 개발지로 만들려는 업계의 탐욕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브라질에선 건기에 화재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목축지 마련 등을 위해 인위적으로 삼림을 태우기도 한다. 예일대 발표에 의하면, 파괴된 아마존 삼림의 80%에 5천만 마리 이상의 소를 기르기 위한 목축지가 자리잡고 있다.  브라질의 환경단체 '지구의 벗 브라질(Amigos da Terra Brasil)'은 "아마존 산불은 누군가의 실수가 아니다"라며 "아마존 산불 뒤에는 피 묻은 자본이 있다. 이 힘은 지난해 말 대통령으로 당선된 브라질 자이르 보우소나루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고, 이는 아마존 부족들과 아마존에 대한 공격을 용인하고 있다"며 웹사이트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또한 브라질 정부의 환경관리 프로그램 예산 축소 방침에 따라 기후변화에 대한 국가 정책 예산이 95%나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브라질 내 환경 관련 기관과 연구자들에 대한 고소, 해고 등 정부의 공격도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브라질의 현 대통령과 각료의 환경정책은 대내외적으로 큰 비판을 사고 있다. 프랑스는 주요 무역거래를 막겠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노르웨이와 독일은 열대우림 보호기금 기부를 잠정 중단하기도 했다.  "더 이상 원주민들의 피 보고 싶지 않다"    이런 브라질 현 정부의 반환경 정책기조에 대해, '브라질 사회정의 및 인권네트워크'의 마리아 루이사 멘돈사(Maria Luísa Mendonça) 대표는 지난 8월 미국 대안매체 디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제사회가 아마존 삼림파괴를 이끄는 브라질 소고기, 콩, 사탕수수, 목재 등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녀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아마존 파괴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고 있고, 책임을 회피할 핑계를 찾을 것이다"라고 일축하며 "기후변화를 믿지 않는 그를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국제사회가 아마존 농기업 제품(소고기, 콩, 사탕수수, 목재)의 보이콧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브라질 행정부에 재정지원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토지를 보호하며 국내시장의 70%에 해당하는 식량을 생산하고 있는 원주민이나 소농을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독일 매체 도이체벨레는 지난 11월 29일 브라질의 한 인권단체가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고소한다는 브라질 신문 에스타다오(Estadao)를 인용보도했다. 아른스인권위원회(Arns Commission for Human Rights Defense)는 지난 11월 18일 아마존 화재와 원주민 리더 살해사건들과 관련, 현 대통령이 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범죄를 선동했다고 주장하며 '원주민 대학살'로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해마다 수많은 진정서를 접수받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조사나 기소에 이르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만약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그는 30년 종신형과 아울러 벌금, 재산몰수를 당할 수도 있다. 군사독재시절 고문에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브라질의 돔 파올로 에바리스토 아른스(Dom Paulo Evaristo Arns) 추기경의 이름을 딴 이 단체는 총 2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6명의 전직 장관, 언론인, 환경운동가, 변호인 등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단체 공식 홈페이지에 밝히고 있다.   소냐 과자자라씨는 한 달간 독일, 이태리, 스페인 등 유럽에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며 파이낸셜 타임즈에 광고를 내 '아마존 파괴에 앞장서는 기업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최악의 은행 리스트'를 폭로해 눈길을 끌었다. 이 불명예스런 리스트에는 블랙락(BlackRock), 뱅가드(Vanguard), JP모건 체이스, 스페인의 산탠더(Santander), 프랑스 BNP 파리바스, HSBC은행이 이름을 올렸다. 또한 그녀는 원주민 리더들을 공격하는 이런 연속적인 폭력에 대해 자신의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등을 통해 "도대체 이런 (폭력이) 얼마동안 지속될 것인가. 누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인가. 현 당국은 증오와 편견 아래 생명을 빼앗기는 원주민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더 이상 원주민들의 한 방울의 피도 보고 싶지 않다!"고 분노했다. 또한 자신의 트윗에서 "지금은 제도화된 집단학살에 단호히 노라고 말해야 할 때"라고 명백한 어조로 말했다.    유엔기후변화회의(COP25)를 찾은 브라질원주민협회의 소냐 과자자라 대표 (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제31차 실무회의 장춘서  2019년12월13일  조선언어문자의 법제화, 규범화, 과학화추진을 위한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제31차 실무회의가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의 주최로 12일 10일, 장춘에서 개최되였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김명철 부주임이 회의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 책임자 박문수가 회의를 사회했다. 북경, 료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등 중국조선어규범위원회 위원 등 30여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김명철 부주임이 축사를 하고 있다. 김명철 부주임은 1년사이에 《조선어규범집 해설》 10000책을 국내 조선언어문자 사용 단위에 무료로 발행하였고 ‘규범업무양성반'을 조직하였으며‘전국조선어문번역사업 업무골간 고급연수반’을 개최,‘조선문정보기술표준’을 제정, 새 규범 선전을 강화하는 등 사업성과를 올렸다면서 성적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였다. 그러면서 “사업연구를 강화하고 보급응용을 강화하며 기술표준 연구개발을 잘해 소수민족언어문자의 다양화, 규범화, 표준화 수요를 만족시키고 본 민족 언어문자 발전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위원들은 2개 조로 나뉘여 단어 규범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렸다. 4시간 후 각 조마다 진행된 연구결론을 집중, 모든 위원들이 모인 장소에서 최종 심의를 거쳤다. 이번 회의에서는 관광용어 례로 旅游房车 (관광캠핑카),地方陪同旅游(현지가이드), 페기물회수리용용어 례로  再生利用(재활용), 페건전지화학품처리처치용어 례로 蓄电池单体(축전지셀), 새로운 명사술어 례로  城乡(도농), 地球卫士奖(지구환경대상), 女汉子(녀장부), 套路贷(올가미대출),戏精(연기쟁이)등 도합 353개 단어를 심의 통과했다.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 책임자 박문수는 총화발언에서 “민족언어문자에 대한 국가 정책을 잘 관철하고 언어규범의 함의와 목표를 잘 리해해야 하며 새 시대 민족언어사업의 발전수요에 적응해야 하고 봉사수준을 한층 높여야 한다.”고 부탁했다.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는 국내 조선어 전문가와 언어문자사업 행정관리 인원으로 구성된 조선어 규범화, 표준화 심의 조직으로서 위원들은 해마다 한번씩 모여 새 단어에 대한 규범화 회의를 하여 동북3성 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와 정부에 조선언어문자규범화사업에 대한 방침, 정책, 조치에 대한 효과적인 건의를 제출한다. /길림신문 글 최화기자 사진 송광일
7501    화가의 사랑엽서 400통... 댓글:  조회:4378  추천:0  2019-12-12
미술   수수께끼 화가 - 구스타프 클림트 미술이야기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겨서 수수께끼화가라는 말이 붙은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더욱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가 죽은 뒤 50년뒤 재평가 되면서부터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로 손꼽기도 되었다.    어린시절을 알 수 없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도 자세한것을 알기가 어렵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쓰지도 않고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으니 어린시절을 짐작할 수 없는 화가는 아마 유일할 듯 하다. 그는 1862년 빈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중 둘째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라고 한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할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들만큼, 아버지의 직업과 먼훗날 작품에 연관성이 크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미술작품 클림트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라는 작품이다. 꽃이 흩뿌려진 작은 초원위에 서 있는 두 여인은 주변과 분리되어 그들을 마치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빛 아우라 안에서 서로에게 황홀히 취해 있기도 하다.  '금'에 내재된 마술적 혹은 종교적인 함축성뿐 아니라 절대적인 부와 물질 가치의 상징성을 극대화 하고 있다는점이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보다 형태의 물질적인 면을 중요시 여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연인의 머리를 잡고 자신에게 향하게 하여 그녀의 볼에 입맞추고 있는 남자의 남성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클림트는 입맞춤하고 있는 남녀의 얼굴은 전통적인 사실주의로 처리하였지만, 그들의 의상과 배경에는 타원, 삼각형, 곡선과 소용돌이의 문양과 다양한 색채를 모자이크처럼 배치하여 장식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클림트는 많은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코 짧은시간에 완성을 하는것이 아닌, 한 작품 당 보통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초상을 그림에 있어서도 의뢰인의 사실적인 인물묘사에만 치중하지 않고 의상, 행동, 화면의 분위기까지 고려한 신중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인물의 입체감과 공간감이 발견되면서 클림트의 초상화의 실력을 날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일반적인 캔버스보다 세로의 비율이 긴 화면을 많이 사용해서 인물을 제외한 배경의 공간을 줄여서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아마 클림트의 초상화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클림트의 사랑 예전 TV 서프라이즈에 클림트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된적이 있다. 클림트의 걸작에 관한 비화가 방영이 되면서, 클림트의 숨기고 있던 사랑도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날이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여러 여자모델들의 누드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그릴 수 없었던 한 여인이 있었으나 바로 연인 에밀리 플뢰게라고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반하고 나서부터 알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고, 클림트는 에밀리 몰래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기 시작했고, 그의 관능적인 그림은 그때부터 계속해서 탄생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면서 400통이 넘는 엽서를 보내며 마음을 전하기도 했었지만,  카사노바 화가 클림트가 에밀리 앞에만 서면 쑥맥이 되고 키스도 할 수 없는 남자가 되어버려서 자신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지게 되었고 그 후로 에밀리 앞에만 서면 자책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누드화를 즐겨 그리던 클림트는 에밀리가 수수하고 청순했기에 누드화를 그릴 수 없었고, 관능적인 누드화를 그리고 싶어서 구상이 되지 않았고, 다른 여자들은 클림트의 누드화를 좋아했고, 다른여자들을 만나서 그림을 그리게 되어버리지만 에밀리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후 그림에만 몰두한 2년안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라는 작품이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그렸는데 에밀리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모습을 절벽에서 위태롭게 키스를 하는 남녀를 표현한거라고 한다.    위에서 이 그림을 소개할 땐 우주속에 갇혀 있고 황홀한 남녀를 표현한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클림트의 그림속 비화를 알고 나니 이 그림이 슬퍼지게 보이는건 왜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절벽끝에 내몰린 여자의 발이 아슬아슬 해보이기만 하고, 알려지지 않은 클림트의 뒷 이야기를 들으니 내심 재미있고 슬프고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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