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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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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0    [그것이 알고싶다] -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댓글:  조회:3340  추천:0  2019-11-10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보이저 1·2호에 실어 보낸 인류 메시지 2019.11.10.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구리 함유 레코드판 ‘골든 레코드’ ㆍ외계 생명체 찾기 일환으로 탑재 ㆍ55개국 인사말·음악 27곡 등 담아 보이저 2호 동체 겉면에 붙어 있는 골든 레코드. NASA 제공 국내에 2017년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미국 영화 에는 어느 날 갑자기 각국 영토로 진입한 외계 비행물체가 등장한다. 여기서 내린 생명체는 문어를 닮은 몸을 지녔지만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췄다. 생물학적·기술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인간과는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외계 생명체들과 끊임없이 접촉한 지구인 언어학자가 그들의 기호 체계를 하나둘 익힌다. 외계 생명체의 말을 알아들으면서 진보된 지적 능력까지 얻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지구인은 외계인을 깊숙이 연구한 영화 속 박사가 유일하다. 완전히 다른 별에서 생겨난 문명과 대화를 하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20세기 중반 우주 시대를 열면서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 가능성은 과학계의 화두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외계 지적생명체 탐색계획(SETI)’이라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프로그램에 속한 과학자들은 접시처럼 생긴 크고 작은 전파망원경에 눈과 귀를 고정하고 외계인이 만들었을 법한 인공적인 전파를 찾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만 외계 생명체가 전파를 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특정 천체로 전파를 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좀 더 능동적인 외계 생명체 찾기다. 지난해 11월 태양이 내뿜는 에너지의 영향권, 즉 ‘태양권’을 벗어난 보이저 2호에는 조금 특별한 방식의 외계 생명체 찾기 프로그램이 실려 있다. 바로 동체에 부착된 레코드판이다. 비슷한 시기 발사된 보이저 1호에도 실린 이 레코드판은 구리로 만들어졌고 지름은 30㎝이다. 레코드판 전체에 금이 입혀져 있다. 이 때문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골든 레코드’라고 부른다.  골든 레코드의 목적은 명확하다. 외계 생명체가 보이저호를 우연히 발견할 경우 지구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레코드 탑재를 주도한 건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과학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던 칼 세이건이다. 같은 스테디셀러의 저자이다. 그는 NASA와 협의해 음악 27곡, 사진 115장, 55개국의 인사말 등을 실었다. 음악은 클래식이 많다. 모차르트와 바흐, 베토벤의 곡을 짤막짤막하게 녹음했다. 음파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외계 생명체라면 감정이 움직일 만한 것들이다. 사진들은 매우 다채롭다. 우선 달 표면과 목성, 지구의 사진을 넣었다. 남녀로 구분되는 인간의 신체적 특징, 키와 몸무게를 알려주는 정보도 실려 있다. 사람의 일상을 표현한 사진들은 무척 구체적이다. 어린이의 공부를 지도하는 교사,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주부, 트랙에서 전력 질주 중인 육상 선수, 교통체증 상태에 놓인 도로의 모습 등이 내장돼 있다. 인간이 외계로 보내는 메시지인 만큼 인사말도 수록됐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고대어부터 중국 방언까지 다양하다. 한국어도 실려 있다. 골든 레코드에 수록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NASA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지금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한 여성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주는 워낙 방대해 이 메시지가 외계 생명체에게 발견될 확률은 낮은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우주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이 메시지는 지구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의 속삭임… “태양권이 숨쉬는 폐와 닮았어요”  2019.11.10.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보이저 1호 측정한 ‘태양권 범위’, 6년 만에 관측한 2호에선 감소 ㆍNASA “태양풍 양 증감 따라 호흡하는 상황처럼 크기 달라진 듯” 1977년 3월 발사 5개월을 앞두고 최종 점검 중인 보이저 2호. 당초 목표는 태양계 행성 탐사였지만 발사 뒤 성간 우주로 나아가는 것으로 임무가 변경됐다. NASA 제공 1977년 8월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육중한 덩치의 ‘타이탄 3E 센타우르 로켓’이 불꽃과 흰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이 로켓에는 여행자란 뜻을 가진 ‘보이저(Voyager)’ 탐사선이 실려 있었다. 중량은 722㎏, 덩치는 소형버스 정도였다. 당시 발사된 건 보이저 2호였으며 비슷한 형태와 임무를 가졌던 보이저 1호는 2호보다 2주 늦게 우주로 향했다. 보이저 2호는 발사 뒤 2년 만인 1979년 목성을, 1981년에는 토성을 탐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보이저 2호를 인도한 뒤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번엔 태양계를 벗어나 먼 우주를 탐사하는 임무를 시작한 것이다. 각종 측정 장비를 움직이는 전기는 탐사선에 내장된 핵물질인 플루토늄을 통해 얻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 임무가 가능한 특징을 십분 살린 결정이었다. 먼저 태양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보이저 1호였다. 이동 경로가 2호와 달랐던 보이저 1호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2년 이른바 ‘태양권(heliosphere)’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보이저 2호는 이보다 늦은 2018년 11월5일 태양권을 돌파했다. 태양권은 뭘까. 우리가 익히 아는 태양계는 태양과 함께 태양의 중력에 묶여 있는 천체들을 일컫는다. 수성과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 크고 작은 행성들이 주요 구성원이다. 하지만 태양권은 개념이 다르다.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기의 성질을 띤 입자의 바람, 즉 태양풍이 미치는 범위를 뜻한다. 태양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태양풍이 미치는 범위인 태양권은 태양계보다 훨씬 넓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태양의 영역인 셈이다.  보이저 2호가 이 태양권을 넘어선 지 1년 만인 이달 초 NASA는 태양권의 크기가 일정치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보이저 1호가 2012년 통과했을 때 측정한 태양권 경계의 위치가 지난해 보이저 2호가 지나갔을 때와 달랐다는 것이다. NASA에 따르면 보이저 1호는 122.6AU 지점에서 태양권을 벗어났지만, 보이저 2호는 119.7AU에서 태양의 힘을 뿌리쳤다. 1AU는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인 1억5000만㎞를 뜻하는 천문학 개념이다. 6년 만에 태양권이 꽤 많이 좁아졌다는 뜻이다.  태양에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NASA는 태양 활동이 11년 주기로 활발했다 잠잠해졌다를 반복하는 것에 주목했다. 문용재 경희대 우주과학과 교수는 “태양 활동이 활발하다는 건 태양풍의 양이 증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보이저 1호가 태양권 계면을 통과한 2012년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저 2호가 태양권 계면을 통과한 지난해는 2012년보다 태양 활동이 훨씬 줄어 있었다. 이 때문에 태양풍의 양도 줄어 태양권 크기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NASA는 태양권의 범위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상황을 빗대 “숨을 쉴 때 폐가 확장하고 수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양권은 외계 별에서 날아오는 우주 방사선의 70%를 막아내며 지구와 다른 행성들을 보호한다. 이런 보호막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는 사실이 보이저 1호와 2호가 연달아 태양권 계면을 통과하며 입증된 것이다.  NASA 보이저 프로젝트 담당자인 에드 스톤 캘리포니아공대 물리학과 교수는 “보이저 2호가 보낸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는 보이저 1호의 자료가 태양권의 일반적인 특징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우주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태양권을 넘어 먼 우주로 들어선 탐사선은 지금까지 보이저 1호와 2호 단 두 기에 불과하다. 현재 보이저 1호는 태양에서 220억㎞, 보이저 2호는 182억㎞ 떨어진 거리에서 맹렬하게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보이저 2호에서 지구로 불빛을 겨냥해 쏜다면 지구인들은 16시간 반은 지나야 볼 수 있는 먼 거리다. 먼 우주에 나가 있는 척후병처럼 소중한 존재이지만 보이저 1호와 2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인류에게 아쉬운 대목이다. 동력원인 플루토늄이 2024년쯤에는 탐사선에 내장된 장비를 돌릴 수 있는 수준의 전기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보이저 탐사선은 지구에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전하지 않는 ‘방랑자’가 된다.  NASA는 보이저 탐사선들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한정된 전력을 최대한 아낄 예정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장비에는 보온용 전기를 끊는 식이다. 우주는 영하 200도가 넘는 강추위 때문에 장비의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보온용 장비가 같이 탑재돼 있다.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향하는 보이저 탐사선들의 임무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정호 기자
741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통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85  추천:0  2019-11-10
“동·서독 ‘보이지 않는 벽’ 여전… 격차 해소 반세기 걸릴 수도”  2019.11.10.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메르켈 “자유·인권·관용 지켜야” / 슈타인마이어 “美 동반자 돼야” / 자국 우선주의 트럼프에 비판적 / 동독 1인당 GDP 서독 75% 그쳐 / 평균임금·생활비용 등도 격차 커 / 주한 독일 대사 “머지않은 미래에 / 한국도 통일·자유 기릴 수 있기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9일(현지시간)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장벽 붕괴 기념일은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지만, 한편으로 현재 마주하고 있는 증오와 인종차별, 반유대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장벽의 붕괴는 자유를 제약하고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 벽이 너무 높고 두껍더라도 결국 뚫린다는 가르침을 준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유럽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관용을 지켜내야 한다”면서 “이런 가치는 항상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자유는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동서 지역 모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은 30년 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선전담당 비서가 TV 회견을 통해 “서독으로 상시 왕래가 허용될 방침”이라고 밝히자 동독 주민들이 장벽에 몰려들면서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린 날로, 이듬해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됐다. 메르켈 총리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뿐 아니라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 주변국 정상들도 참석해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숨진 동독 시민들을 함께 추모하고 장벽 붕괴 30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현지시간) 베를린 장벽기념관에서 촛불을 켜고 있다.연합뉴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평화혁명을 이뤄낸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미국이 국가 이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존중받는 동반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촉구했다.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1987년 6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을 찾아 “장벽을 무너뜨리자”고 연설했던 것을 언급하며 “이 외침을 여전히 듣고 있다”고 했다. 전날 미 대사관저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레이건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9일(현지시간)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베를린=AFP연합뉴스 이날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기념사에는 국제 질서 유지의 동반자이자 자유주의 수호의 중심이었던 미국을 향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슬람국가(IS)’ 격퇴전 동맹이었던 쿠르드족과 상의 없이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 노선을 택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유럽의 비판적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전날 메르켈 총리도 “미국과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독일 통일의 길을 도왔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을 ‘상업적인 대상’으로 본다”며 “미국이 전략적인 이슈들에 대해 우리(유럽)에게 빠르게 등을 돌리고 있고, 어떤 식의 전략적 의사 결정이 이뤄지든 간에 미국과 다른 동맹국 사이에 사전 조정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시민단체에서도 멕시코 접경에 ‘이민 장벽’을 건설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독일의 비영리단체 ‘열린사회 이니셔티브’는 이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남은 콘크리트 덩어리 일부를 트럼프 대통령에 보냈지만 백악관이 수령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장벽 표면에는 ‘베를린 시민’ 명의로 “장벽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미국이 헌신해온 사실을 당신께 일깨우려 이 조각을 보내드린다”라는 내용이 새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주 베를린에서만 혐오 배제, 화합, 자유의 가치를 내세운 200여 관련 행사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동·서 간에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슈테펜 마우 베를린 훔볼트대 사회학 교수는 “독일의 동·서는 많은 부분에서 그 차이가 좁혀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동독 출신 독일인들이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고 지적했다. CNN에 따르면 통일 직후인 1991년 옛 서독지역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2687유로의 약 43%에 불과했던 동독지역 1인당 GDP(9701유로)는 그동안 상당 폭 증가했으나, 2018년 현재에도 여전히 서독지역 1인당 GDP(4만2971유로)의 75%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기준 양쪽의 연평균 임금 차도 1만유로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으며, 한 달 평균 생활비 격차도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옛 동독과 서독 지역 간 격차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격차를 해소하는 데 반세기가 더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분단국인 한국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특별한 의미일 수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이날 보도했다. WP는 베를린에서 8000㎞ 떨어진 서울 이태원에서 장벽 붕괴 기념 파티가 열렸다고 소개하며, 이는 독일 통일 사례로부터 교훈을 찾으려는 분위기라고 해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슈테판 아우어 주한 독일대사는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 역시 통일과 자유를 기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조성민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이민 장벽 건설 트럼프 겨냥해 베를린 장벽 선물한 시민단체 2019.11.1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獨 시민단체 ‘열린사회’ 선물  “영원한 장벽은 없다”는 뜻 백악관 거부…“미 전역 홍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 독일 시민단체 '열린사회'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베를린 장벽 조각이 세워져 있다. [AFP=연합뉴스] 독일의 한 시민단체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장벽의 잔해 일부를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단체는 과거 미국이 베를린 장벽 붕괴를 도운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했지만, 실제 의미는 따로 있었다.  독일 dpa통신은 9일(현지시간) 비영리단체 ‘열린사회 이니셔티브’(열린사회)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남은 콘크리트 잔해 일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고 보도했다. 열린사회가 백악관에 보내려던 장벽 조각은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높이에 무게만 2.7t에 달하는 대형 콘크리트 덩어리다. 단체는 지난 3일 민간 후원금을 통해 이 잔해를 사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열린사회 측은 장벽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장벽들에 맞서는 장벽’(The Wall AgainstWalls) 캠페인의 일환으로 이 같은 일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남미 불법 이민을 막겠다며 미국 남부와 멕시코 국경지대에 ‘트럼프 장벽’을 건설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고립주의 정책을 강화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캘리포니아주의 국경에 설치되고 있는 장벽 건설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AP=연합뉴스] 이 단체가 보낸 장벽 표면에는 ‘베를린 시민’ 명의의 “우리는 장벽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 헌신한 미국의 노고를 기념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베를린 장벽의 마지막 조각 중 하나를 보내드린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열린사회 측 관계자는 “존 F. 케네디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데 있어 수십 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베를린 장벽은 이제 파편으로만 남아 그 어떤 장벽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면서도 “우리 사회는 새롭게 지어지는 물리적 장벽들뿐만 아니라 사람들 머릿속에 지어지는 새로운 벽들로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장벽 조각의 수령을 거부하고 있다. 현재 조각은 백악관 인근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열린사회는 만일 백악관이 계속 수령을 거부할 경우 장벽 조각을 싣고 미 전역을 돌며 적극적 홍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이승호 기자
7418    [그것이 알고싶다] - 독일 통일의 상징 = 브란덴브르크 문 댓글:  조회:5030  추천:0  2019-11-10
두산백과 브란덴부르크문   [ Brandenburg Gate ] 요약 독일 베를린의 파리저 광장에 위치한 건축물로 독일의 상징과도 같다. 이미지 크게보기 브란덴부르크 문 원어명 Brandenburger Tor 독일 베를린의 중심가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건축물로 운터덴린덴로(Unter den Linden)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독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독일 통일과 함께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이 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의 명령으로 1788년에서 1791년에 걸쳐 건축됐다. 프로이센 제국의 건축가였던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설계했다.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26m, 가로 길이는 65.5m 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정문인 프로필라에(Propylaea)를 본따 설계한 것이다. 문 위에 올려진 '승리의 콰드리가'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Schadow)가 조각한 것으로 네마리의 말이 승리의 여신이 탄 마차를 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전소되지 않고 남았다. 전쟁이후 1956년 부터 약 1년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독일 분단 시절에도 일반인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협정됐으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 받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11월 약 10만 여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독일 통일과 함께 1990년 서독 정부가 이 문의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보수공사와 함께 검게 그을린 자욱을 지워내는 등 새단장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에서 발행하는 우표와 주화에 등장했던 이 문의 모습은 현재 독일에서 주조하는 50센트 유로화에 새겨져 있다.   참조항목 베를린, 파리저광장 역참조항목 카를 랑한스, 운터덴린덴로, 베를린장벽, 성의 대문, 서양의 문 카테고리 문화예술 > 건축 > 각종 건축물 > 기타건축물 역사 > 유럽사 > 독일사 > 근세 지역 > 유럽 > 독일 > 베를린 관련이미지 1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베를린 장벽과 브란덴부르크 문독일 베를린. 동·서 베를린을 남북으로 나누었던 길이 45km의 경계선으로, 통독 이후 현재에는 슈라이쉐스 토어 부근에만 잔재가 남아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두산백과)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브란덴부르크 문   [ Brandenburg Gate ] 이미지 크게보기 브란덴부르크 문 분류 해외여행 > 관광지 지역 유럽 > 독일 > 베를린 유형 시설물·건축물 주소 Pariser Platz 10117 Berlin-Mitte 가는방법 U5를 타고 Brandenburger Tor 역 하차 1791년 완공한 프로이센의 개선문.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본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했다. 베를린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이 문은 높이 26m, 폭 65.5m로 6개의 원형 기둥과 그 사이로 5개의 길이 나 있다. 중앙의 양 기둥 사이가 가장 넓으며 그 길로는 왕과 그의 손님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는 프로이센의 국력을 과시하고 베를린의 새로운 관문을 건축할 목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의 건립을 지시했다. 문 중앙 상단을 장식한 청동상인 은 브란덴부르크의 상징이다. 이 조각상은 1806년 프로이센을 함락했던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다가 1814년 다시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문 주변으로 폭격이 자주 있었고 이로 인해 청동상 일부와 기둥에 손상이 생겼다. 그러나 냉전시대였으므로 별다른 보수를 하지 못했고 1961년 독일의 동서가 분단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한 통행도 금지되었다. 그로 인해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과 함께 독일 분단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부각되었다. 한동안 방치되던 문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수많은 인파로 성시를 이루었다. 이후 서독의 수상과 동독의 총리가 이 문을 통해 만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분단이 아닌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다만 몰려든 인파로 인해 문이 많이 훼손되었고 오랜 복원 및 보수 공사를 거쳐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현재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대형 문화, 스포츠 행사의 주요 장소로 사용되며 여행자들에게는 꼭 들러야 할 핵심 코스로 꼽힌다. 문의 모습은 독일에서 주조하는 30센트 유로화에도 새겨져 있다. 브란덴부르크문 위치   일반 지형 위성 확대보기 마지막 수정일 2019. 6. 27. (본문 내용 업데이트) 길찾기 http://travel.justgo.kr/default.aspx?lid=4900&hUid=1&eUid=1 관련이미지 브란덴부르크의 문칼 고트하르트 랑그한스, 베를린, 1788~9년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 1989년 9월에 라이프치히 에서 시작된 월요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동독 전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번진다. 동독지도부는 시위대를 달래기위해 여행자유화 정책을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 58분경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 개방이 시행되느냐?"는 질문을 했고, 휴가 후 복귀하자마자 회견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에서 결정한 정책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동베를린 SED 총서기 귄터 샤보프스키가 지연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 라고 대답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여행자유화 조치를 베를린 장벽붕괴로 착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장벽들 넘었던 것입니다.   출처 : 나무위키 /베를린 장벽 항목 ​   베를린 장벽 - 나무위키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독 의 경찰 과, 미소를 짓고 있는 동독 국경수비대 원이 미묘하게 비교된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반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동독 국경수비대 준사관 들과 악수 를 나누려고 하는 것 같은 서독 사람들의 모습. 독일어 Berliner Mauer 영어 Berlin Wall 프랑스어 Mur de Berlin 러시아어 Берлинская стена 1 . 개요 2 . 왜 생겼는가? 2.1 . 독일과 베를린의 특이한 상황 2.2 . 육지의 섬 3 . 베를린 장벽 ... namu.wiki ================================///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은 초기 고전주의적인 양식의 개선문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다. 프로이센(Prussian) 왕국의 제4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헤름 2세(Frederick William II )의 명을 받아 1788년부터 1791년까지 건설되었고, 건축가는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 이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했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그 상단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 Schadow)가 조각한 마전차(馬戰車) 모습의 청동상인 "콰드리가(Quadriga)" 그리고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Victoria)"로 장식했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의 콰드리가(Quadriga) 와 빅토리아(Victoria) 19세기 이후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이 개선할때 반드시 통과하는 장소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괴되었다가 1957년부터 1958년까지 복원 공사를 했다. 독일의 재통일 전에는 베를린 장벽의 상징적인 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의 야경 =============================/// 최신기사 장벽붕괴 기념일에 메르켈 "동서격차 해소, 반세기 더 필요"(종합) 2019-11-10        30주년 기념식서 "자유 당연히 얻는게 아냐…증오·인종주의에 맞서야"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 정상들 참석 베를린 장벽붕괴 기념행사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르켈 총리 [EPA=연합뉴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현지시간) "장벽의 붕괴는 자유를 제약하고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 장벽이 너무 높고 두껍더라도 결국 뚫린다는 가르침을 준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구도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기념일이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지만, 한편으로 현재 마주하고 있는 증오와 인종차별, 반(反)유대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관용을 지켜내야 한다"면서 "이런 가치는 항상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자유는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서 지역 모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옛 동독지역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다 동독 경비병의 총격에 숨진 동독 시민들을 추모했다. 옛 서독지역 함부르크에서 1954년 태어난 메르켈 총리는 생후 3개월 만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했다. 남아있는 장벽 앞에 있는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동유럽 국가 정상들 [EPA=연합뉴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옛 동독과 서독지역 간의 격차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격차를 해소하는 데 반세기가 더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기념식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평화혁명을 이뤄낸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에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체코, 헝가리 등의 정상들도 참석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독일, 전 세계를 위한 역사의 새로운 길의 시작이자 자유의 여명"이라며 "분단과 증오의 벽이 없는 유럽은 시민이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베를린에서는 이날 저녁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있었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린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도 참석한다. 공연에서는 독일의 세계적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 아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심포니가 연주하고, 독일의 유명 뮤지션들도 출연한다.   (c) 연합뉴스
7417    [그것이 알고싶다] - 력사속에서의 "베를린 장벽"... 댓글:  조회:4063  추천:0  2019-11-09
  두산백과 베를린장벽   [ Berlin Wall음성듣기 ] 요약 1961년 동독 정부가 인민군을 동원하여 동베를린과 서방3개국의 분할점령 지역인 서베를린 경계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 이미지 크게보기 포츠담광장 베를린장벽 1945년 5월 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참조항목 독일, 독일통일, 베를린문제, 베를린협정, 브란덴부르크문 역참조항목 공산권, 베를린의 역사, 프리덤 공원, 뉴지엄 카테고리 역사 > 유럽사 > 독일사 > 현대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포츠담광장 베를린장벽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장벽 [Berlin Wall] (두산백과)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베를린 장벽   [ Berlin Wall음성듣기 , -障壁 ] 이미지 크게보기 1961년 베를린 장벽 동 · 서 베를린 경계선 약 45.1킬로미터에 걸친 콘크리트 벽으로, 1961년에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과 동독 마르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 오랜 기간 동 · 서 냉전의 상징물로 인식되어 온 베를린 장벽은 동유럽의 민주화로 1989년 11월 9일에 철거되었다.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베를린 장벽ⓒ 이봉섭/NAVER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 장벽 [Berlin Wall, -障壁]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도시는 역사다 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1989년 12월 25일, 세계적인 음악가 레오나드 베른슈타인(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는 가운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악보에는 ‘환희’가 들어갈 자리에 ‘자유’가 들어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단일팀이 아니라 서독과 동독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혼성팀이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서독과 동독,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서독 정부는 브란트(Willy Brandt)가 베를린 시장 시절 만들어 낸 어법에 따라 ‘수치의 벽’이라고 일컬었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세계인들은 베를린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이 장벽을 떠올렸고, 이 장벽은 철의 장막으로 여겨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1) 베를린장벽 건설은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WalterUlbricht)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8월 12일 자정 동독군과 경찰이 전격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철조망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킬로미터였고,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킬로미터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와 더불어 동독 주민 대부분의 서독 방문이 불가능해졌고, 이산가족까지 생겼다. 서베를린은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렸다. 브란트 시장을 비롯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철조망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동독 장교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고 있다. 1962년 6월에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미터 이내에 있던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 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제4세대 장벽’이다. 높이는 3.6미터, 폭은 1.2미터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아홉 곳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침머 거리(Zimmerstraße) 구석에 있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다. 연합국 소속 요원과 외국인만 통행할 수 있던 이 검문소는 오늘날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게 동유럽 진영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징표로 베를린장벽 철거를 촉구했다.2)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이건 자신을 비롯해 장벽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독 대사관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Erich Honecker)는 사임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Egon Krenz)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포츠담 광장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컸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월 22일이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년 6월 13일이었다. 다음 달 1일 동독이 서독 통화를 수용하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도 공식 종료되었다. 장벽 붕괴의 논리적 결과인 통일은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고,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1991년 11월까지 철거되었다. 오늘날 포츠담 광장에 남은 장벽은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1961년 베를린 장벽베를린 봉쇄 13년 뒤, 동독 정부는 서방을 행한 탈출을 막기 위하여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축조하였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도시는 역사다)   세계사 개념사전 베를린 장벽  하나 되는 독일, 해체되는 소련   목차 제3세계의 등장 - 미국도 싫고, 소련도 싫다 공존의 시대 -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다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 동유럽에 분 자유화 바람 베를린 장벽 붕괴 - 무너지는 장벽, 하나의 독일 개혁 개방 정책 - 고르바초프가 몰고 온 개혁 독립 국가 연합의 탄생 - 무너진 ...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다 남한과 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을 보았어.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괜스레 눈물이 나더라고. 정말 빨리 통일이 되어서 저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처럼 서로 갈라져 있다가 통일이 된 독일 국민들은 얼마나 기뻤을까?   제3세계의 등장 - 미국도 싫고, 소련도 싫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29개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했어. 이들은 오랫동안 식민 지배에서 신음했던 나라들이었지. 그래서 강대국 중심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고 서로 단결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느새 세계가 동·서로 나뉘어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거야. 이들의 선택은 동·서 어디와도 동맹1)을 맺지 않겠다는 ‘비동맹 중립’이었어. ‘제3세계2)’를 선택한 거지. 1961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 등이 1차 ‘비동맹 회의’를 열고 미국,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지 않은 모든 국가의 결속3)을 다짐했어. ‘제3세계’의 탄생은 동·서 진영4)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 이들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거든. 물론 이들이 강대국에 맞설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이들의 협력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질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어. 비동맹 회의 참가국이 계속 늘고, 국제 연합에 가입하는 나라가 늘면서 총회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세지기 시작했거든. 공존의 시대 -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다 미국과 소련, 동행의 길로 들어서다 쿠바 위기를 넘기면서 미국과 소련은 극단적인 대결을 삼가고, 각자 자기들의 체제5)를 유지하면서 함께 행동하는 사이로 바뀌었어.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는 자본주의 세력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외교 정책을 펼쳤어.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체제를 헐뜯으면서도 각자의 진영 내에서 제일 맏형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이였던 거야. 각자의 편을 향해 ‘너희들 마음대로 하다간 쟤들이 우리를 무너뜨릴 거야. 그러니, 이 형 말을 들어!’ 이런 식이지.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핑계로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였고, 소련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짓밟았어. 그러나 미국, 소련 둘 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1960년대부터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두 개의 진영을 형성한 것이 마치 건전지의 양극과 같다고 해서 냉전 체제를 ‘양극 체제’라고 해. 하지만 점차 극이 여러 개로 변화하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어. 다극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거야. 첫 번째 변화는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거야.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일찍부터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했고, 1956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어. 또한 1960년대에는 중국이 소련과 국경 문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차이로 대립하다 중국이 제3세계의 지도자로 등장했어. 두 번째 변화는 유럽의 경제가 회복되면서 ‘유럽 공동체(EC)’가 만들어지고, 경제 면에서 미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세 번째 변화는 제3세계의 등장이야. 네 번째 변화는 프랑스가 미국과 따로 가겠다며 나토를 탈퇴하고,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고 나선 거야. 마지막으로 일본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지. 다극 체제로의 변화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해. 이런 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1969년 미국의 닉스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 더 알아보기 세계의 외교를 바꾼 스포츠 공산권의 중요한 나라인 중국과 미국이 스포츠를 계기로 은근슬쩍 화해하기 시작했어.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중국과 미국이 같은 탁구 대회에 참가한 거야. 우선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 가서, 나중에는 미국이 중국에 가서 탁구 대회를 했어. 스포츠를 계기로 정치권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세계는 화해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거야. 우리나라도 북한과 정치적으로는 계속 대립하면서도 남북한 단일팀을 만들어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어. 스포츠 정신은 정말 위대한 것 같아.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 동유럽에 분 자유화 바람 바웬사의 대통령 당선 1970년대부터 동유럽 사람들은 정부와 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불신은 커져만 갔어. 군사비에 막대한 돈을 써서 경제가 말이 아니었고, 소련의 간섭도 계속되었거든. 조선소 전기공에서 대통령이 된 폴란드의 바웬사는 1980년 정부와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연대’라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어. 동유럽 중 공업화가 가장 잘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고, 헝가리는 기업의 자유를 강화했어. 경제 개혁을 시작으로 정치에도 자유화 바람이 불었어.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 루마니아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이를 탄압하려는 공산당 정부가 대립하면서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결국 독재자였던 차우셰스크를 몰아냈어. 한번 일어난 자유화 움직임은 결코 꺾이지 않았지. 드디어 1989년 폴란드에서는 동유럽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바웬사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같은 해 헝가리에서도 자유 선거를 했지. 결국 동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 일당 독재가 폐지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거야. 새롭게 정권을 잡은 것은 대부분 공산당이 아니었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약속했어.   더 알아보기 프라하의 봄이 뭐예요? 196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이것이 정치의 민주화 요구로 발전하면서 공산당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개혁이 추진되었어. 결국 1969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서기장이 된 두브체크는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진할 것을 약속했어. 드디어 그동안 공산화로 인해 얼어붙었던 나라에 봄이 온 거야. 그러나 소련은 이런 개혁을 소련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진압했어.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지. 이 민주화 운동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해.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연방 분리에 합의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어.   베를린 장벽 붕괴 - 무너지는 장벽, 하나의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의 통일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면서 동독 주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장벽을 뛰어넘었어.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어.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서독과 동독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국제 연합에도 가입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는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어. 마침 1980년대 동유럽에서 불어 온 개혁과 자유화 바람이 독일의 통일에 힘을 실어 주었어. 그러나 동독 정부는 그 변화를 모른 척했고, 여기에 실망한 동독 사람은 200만 명이나 서독으로 탈출했고, 9월에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지. 결국 독재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동독 정부는 자유 총선거를 통해 서독과 통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어. 마침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렸어. 문을 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저마다 망치와 삽을 들고 나와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어. 벽이 무너지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고 웃으며 기쁨을 나누었어. 다음해 1990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마침내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었지. 나뉘어진 지 41년 만이야. 동독 사람 토르스텐 뢰셔의 통일 적응기 “저는 원래 바이올린 만드는 기술자인데, 동독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난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싶어서 서독으로 왔어요. 제가 동독에서 일했던 ‘무지마’라는 곳은 2,000여 명의 종업원을 둔 국영6) 대기업이었는데, 통일 후 민영화가 되면서 종업원이 150명으로 줄어들었어요. 공장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모두 서독 출신이었어요. ‘기업의 구조 조정7)은 돈에 눈이 먼 서독 사람들의 떼돈 벌기 수작’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어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고향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길몽이 실업자라는 악몽으로 둔갑했다고 한탄했어요. 우체국 직원이셨던 저희 부모님 역시 일찍 퇴직하도록 강요받다시피 했고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라는 아버지가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줬어요. 노동은 신성한 의무였으니 실업은 아예 존재할 수 없지요. 물론 최저 생계를 보장하는 대신 끊임없는 통제와 감시가 따랐지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 이외에 경쟁이라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파는 것도 신경 써야 해서 힘들어요. 예전의 동독에서는 만들어서 품질 검사에 합격만 하면 됐거든요. 통일이 되어 오시8)(동독인)로 베시9)(서독인) 세상에서 살면서, 삶을 꾸리고 책임지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지금 제가 사는 비스바덴에서는 동독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진 않지만, 왠지 정이 좀 없는 것 같아요. 동독 사람들은 인정과 여유가 넘치거든요. 그러나 이건 동독인과 서독인 간의 이해 부족이라기보다는 지방마다 나타나는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독은 동독을 자신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동독은 늘어가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이 되었어." hastitle="Y" height="686" origin_height="1372" origin_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1779_000_1/20120423120223987_KVH4LP7TC.jpg/bh4_91_i5.jpg?type=m4500_4500_fst_n&wm=Y" origin_width="1340" source="세계사 개념사전"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0892_000_1/20120423120223987_KVH4LP7TC.jpg/bh4_91_i5.jpg?type=w670_2&wm=Y" style="border: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690px;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670" /> 통일 이후 동독은 서독 사람들이 들어와 싼 값에 공장을 사고는 많은 사람을 해고해서 실업자들은 점점 늘어만 갔어. 서독은 동독을 자신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동독은 늘어가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이 되었어. 더 알아보기 독일 통일에서 배우는 교훈은? 독일 통일은 너무 짧은 시일 안에 이뤄지면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어. 화폐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망하는 동독 회사가 아주 많았고, 이에 따른 실업 문제는 가장 큰 문제였지. 두 지역의 물가, 화폐, 체제 때문에 준비 과정이 꽤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거든. 통일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은 거야. 이를 통해 진정한 통일을 이루려면 체계적인 준비가 필수라는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의 장벽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야. 서로를 인정하기 쉽지 않았거든.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단 걸 알 수 있지. 개혁 개방 정책 - 고르바초프가 몰고 온 개혁 1986년 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어.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터키와 이탈리아, 독일까지 방사능10)에 오염되는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대피하라는 명령이 늦게 내려져 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았어. 바로 한 해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결심했어. 첫 결실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었어. 그동안 모든 권력이 일부 공산당에게 집중되고, 국민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거든. 그런데 개방 정책으로 국민들이 자기 의견이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부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어.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지나친 군비 경쟁으로 하루가 다르게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어.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일부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이상 소련은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했어. 그동안 정부가 은행과 회사, 공장 등을 소유하고 통제했는데, 개혁 정책 실시로 보통 사람들도 기업이나 은행을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어. 또한 그동안 서로 앙숙처럼 지내던 미국과 핵무기를 줄이는 조약을 맺고, 자본주의 국가들과도 서로 친한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어. 1990년 대통령제 도입 후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 개방 정책을 폈어. 독립 국가 연합의 탄생 -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몰타 섬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냉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어. 또한 1991년에는 무기를 서로 줄이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그즈음 미처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어.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거야. 그때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개혁 세력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어. 이 사건으로 공산당 세력은 완전히 약해지고 옐친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어.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개혁을 원했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소련을 만들고 싶어 했어. 결국 1991년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11개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CIS)’을 결성하면서 마침내 소련은 해체되었어.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거야. 읽을 거리 러시아에만 있다. 레닌-코카콜라, 맥-레닌? 코카콜라와 햄버거는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동시에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음식이지.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 곳곳에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음식들이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공산권 문화의 상징인 레닌을 이용한 광고가 많이 등장하고 있어. 자본주의를 뒤엎으려고 했던 레닌이 자본주의의 상징에 쓰이는 것을 알면 레닌의 기분이 어떨까?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장벽 붕괴 - 하나 되는 독일, 해체되는 소련 (세계사 개념사전)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연도 1989년 11월 9일 저자 존 스위프트 독일 국민들이 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의 길을 열다. 독일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냉전의 상징이었던-의 양쪽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벽을 무너뜨렸다. 28년 전, 이 벽을 건설한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동독 국민들을 보호하는 "반파시스트 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에 속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동독 국민들이 대규모로 보다 풍요로운 서독으로 이주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서독은 동독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지난 세월 동안 몰래 벽을 넘어 탈출한 사람들도 있고, 벽을 넘으려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지만, 베를린 장벽은 굳건하게 동독 체제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이러한 안정도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변화를 간절하게 갈망하던 동독 시민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개혁이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로 귀착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공산당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시민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이는 결국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헝가리를 통한 탈출이 쇄도하였다. 당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천 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향했다. 1989년 10월, 동독을 살리려는 절박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서 에곤 크렌츠로 교체되었다. 크렌츠 정권은 점점 악화되는 위기 상황을 놀랄만큼 무능력하게 대처했다. 서방으로의 여행 규제를 완화할 것이라고 공표했으나, 세부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았다. 장벽이 개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수천 명이 검문소로 몰려들었다. 질서가 무너진 군인들은 군중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동독 정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라는 국가 자체도 명운을 다했다. "바스티유 함락과 신년 축하의 떠들썩함이 결합..." 타임지, 1989년 11월 관련이미지 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세계사 개념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法, 청계천 '베를린 장벽' 그라피티 그린 예술가에 1500만원 배상 판결 김경아 인턴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 좋아요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2019.09.17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독일 ‘베를린 장벽’ 조각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예술가에게 15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9단독 조정현 부장판사는 서울시가 그라피티(Graffiti⋅낙서처럼 그리는 거리예술) 화가 정태용(29)씨를 상대로 배상금 3000만원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정씨는 서울시에 배상금 15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   서울 중구 청계2가 베를린광장 안 베를린 장벽이 지난해 6월 정태용씨의 그라피티로 훼손돼 있다. /서울시 제공 정씨는 지난해 6월 6일 오후 11시 30분쯤 서울시 중구 청계2가 베를린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조각 양면에 스프레이로 그라피티와 자신의 브랜드 이름을 그려 넣었다. 이 사건은 정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서 알려졌다.  해당 베를린 장벽 조각은 한국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에서 독일 베를린시가 실제 장벽의 일부를 2005년 서울시에 기증한 것이다.  분단된 독일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의 양면은 대조적이다. 공산진영인 동독 쪽 벽은 깨끗한 반면, 자유진영인 서베를린 쪽 벽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독일인들의 그림과 낙서가 가득하다.  서울시는 예산을 투입해 훼손된 베를린 장벽을 복원하고, 정씨에게 복구비용과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지난 2월 정씨에게 배상금을 2000만원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지만, 서울시와 정씨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지난 4월 수원지법 형사12부도 공용물건을 손상한 혐의로 기소된 정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모든 그라피티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 도의감에 반하는 행위로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도 원심을 유지했다.    좋아요  ⓒ 조선일보 청계천 '베를린 장벽'에 그림 그린 예술가, '1천 500만 원' 배상 판결 /이소현  /2019.09.19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독일 베를린 장벽 조각 위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예술가가 서울시에 1천 5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9단독은 서울시가 그라피티(Graffiti⋅낙서처럼 그리는 거리예술) 작가 정태용 씨를 상대로 제기한 배상금 3천여만 원 규모의 소송에서 "정 씨는 서울시에 배상금 1천 50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정 씨는 지난해 6월 6일 서울시 중구 청계2가 베를린 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조각 양면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글씨를 그려 훼손했습니다. 이 베를린 장벽 조각은 지난 2005년 독일 베를린시가 한국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로 서울시에 실제 장벽의 일부를 기증한 것입니다. 서울시는 사건 발생 후 9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장벽을 복원하고 정 씨에게 관련 비용과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지난 2월 법원은 정 씨에게 배상금을 2천만 원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지만, 서울시와 정 씨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조정이 불발됐습니다.   정 씨는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형사재판에도 넘겨져 지난 4월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정 씨는 불복해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뉴스 픽' 입니다. (사진=연합뉴스)    출처 : SBS 뉴스
741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변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51  추천:0  2019-11-09
[안녕? 자연] ‘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마저 녹기 시작했다(연구). . . 2019.11.09.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알래스카 타쿠 빙하의 2014년 8월 당시 위성사진2018년 8월에 촬영한 타쿠 빙하의 위성사진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산악 빙하 중 하나가 마침내 지구 온난화에 굴복하고 있다는 새로운 분석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USA투데이 등 해외 언론의 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니콜스칼리지 연구진은 알래스카 주노 주 북부에 있는 타쿠 빙하(Taku Glacier)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평균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두께와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타쿠 빙하는 알래스카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이자, 세계 20대 빙하 중 하나이다. 표면에서 밑바닥까지의 두께가 1477m에 이른다. 연구진은 지금까지 추적관찰한 빙하 250개가 모두 녹아내리는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 중 하나인 타쿠 빙하만큼은 큰 변동이 없었으나, 최근 타쿠 빙하마저도 질량이 감소해 녹아내리는 빙하 중 하나에 합류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미국항공우주국(NASA) 지구관측소가 2014년 8월과 2018년 8월에 찍은 위성 사진을 분석한 뒤, 1946년 타쿠 빙하를 관측한 이래 처음으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를 이끈 마우리 펠토 니콜스칼리지 빙하학자는 “이번 연구결과는 (타쿠 빙하는 그동안 지구온난화에도 큰 변화가 없던 거의 유일한 빙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면서 “지구 온난화로 매년 3600억t의 눈과 얼음이 녹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타쿠 빙하를 관찰한 이래 가장 큰 빙하 질량 손실이 확인됐다. 이러한 변화는 주노 주에서 기록된 가장 따뜻한 7월, 빙하가 녹는 수준과 일치한다”면서 “타쿠 빙하의 이러한 현상은 몇 년 동안 지속돼 온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결과는 지난달 스위스 온라인학술지출판연구소(MDPI)가 발행하는 원격탐사저널 ‘리모트 센싱‘(Remote Sensing) 최신호에 실렸다. /송현서 기자
741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 비상사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21  추천:0  2019-11-09
과학자 1만여명 ‘기후 비상사태’ 첫 선언 (ZOGLO) 2019년11월6일  “말할 수 없는 고통 야기” 경고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청소년 기후파업 집회 도중에 연설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전세계 과학자들이 “지구는 명백하고 분명하게 기후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이행해야 할 6가지 광범위한 정책 목표를 제시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 등이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53개국 1만1258명의 과학자들은 이날 ‘세계 과학자들의 기후 비상사태 경고’라는 새 보고서를 발표했다. 바이오사이언스지에 발표된 보고서에서 과학자들은 “기후 위기가 부유한 생활 방식에 따른 과도한 소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정책 입안자들이 관련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과학자들이 공식적으로 기후변화를 ‘비상사태’라고 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WP는 전했다. 과학자들은 “우리는 과학자로서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며 “인류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기후변화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야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드니 대학의 수석 저자인 토머스 뉴섬 박사는 “비상 사태란 우리가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가축 생산을 줄이며 토지 개간과 화석연료 소비를 줄임으로써 기후 변화의 영향에 대해 행동하거나 대응하지 않을 경우, 그 영향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지난 40년 간 세계 기후 협상을 벌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사업을 해왔고 이 곤경을 대부분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에 인류가 가장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교체, 메탄과 매연 같은 기후오염 물질의 배출량 삭감, 육류 섭취 감소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생태계 복원 및 보호, 탄소없는 경제 구축, 가족계획 서비스와 여학생 교육 투자를 통해 인구 증가를 안정화시키는 것도 6가지 정책 목표에 포함됐다. ///헤럴드경제    
7414    [민족의 자랑] - "중국의 주시경" - 최윤갑 댓글:  조회:3045  추천:0  2019-11-09
90세를 바라보는 중국 조선어연구 선구자 최윤갑 (ZOGLO) 2019년7월25일  인물이름 : 최윤갑          최윤갑(崔允甲),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학창시절 때의 교재들, 책장에 꽂힌 우리말 도서, 신문잡지에서 본 문장, 대학입시때 작성한 답안지...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의 기틀을 마련한 선배가 바로 최윤갑 연변대학 원로교수다. 그만큼 중국 조선족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90세를 바라보는 지금, 최윤갑 원로교수의 학문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의 탐구 정신과 실사구시 정신은 젊은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어 연구에 빠진 사나이   1930년 2월 28일 룡정(현 연변주 룡정시)에서 태여난 최윤갑 원로교수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1기 졸업생이다. 일본침략자 통치세월을 친히 겪었던 그에게 조선어를 배울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였다. 조선어를 잘 배우는 것으로 민족의 력사를 제대로 지키겠다는 것도 당시 열혈 청년의 다짐이다.   교수들로부터 학문연구의 옳바른 자세를 배운 그는 재학기간 교수와 부동한 견해를 단호하게 밝힐 수 있었으며 견해에 근거해 론문도 발표했다. 론문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학구적인 정신과 용기를 보여주었고 그후 발표한 론문 《의성의태어에서의 밝은 소리와 흐린 소리》는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문연구의 자세와 남다른 열정 때문에 그는 1952년에 졸업하고 바로 교원으로 학부에 남게 되였다.   두각을 일찍 낸 그는 1956년에 조선의 저명한 언어학자 정렬모 교수로부터 “앞으로 대학자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날의 성과를 거둘 줄은 당시 누구도 모르는 미래일 뿐이였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그에게 뜻 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1970년경 연변대학에서 ‘문화대혁명’이 고조되면서 그는 학문연구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촌에 내려가 2년반 동안 로동개조를 당했다.   그래도 그의 생활 속에서는 우리 말 연구가 떠난 적 없었다. 늘 품사의 성질이나 특정된 쓰임새들을 생각하는 등 농사일을 하면서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이였다. 새로운 법칙을 깨닫거나 알 수 없는 구조가 확연히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될 때마다 그는 환희를 느꼈다. 뿐만 아니라 휴식의 틈을 빌려 학생들에게 조선어 문법리론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담론하였다. 그 시절이 허송세월이 아니고 그에게는 아주 값진 연구의 시간이였다.   1972년 농촌 로동개조를 마친 그는 대학 강단으로 돌아왔지만 학술자유는 여전히 박탈되던 때였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을 강의하던 중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강의한 죄로 ‘불온학자’로 지목되여 로동자선전대의 감시와 문초를 수없이 당했다. “로동인민이 력사를 창조한 것이지 어찌 왕이 문자를 창조할 수 있느냐”는 식의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학자의 량심을 꺾지 않고 력사문헌에 따른 사실주의 원칙을 견지했다. 후날 이러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의 실사구시 학문정신은 해내외 학자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회의를 이끌고 있는 최윤갑 원로교수(자료사진)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 기틀 마련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조선족들의 민족언어 사용이 점차 줄어들고 중국 조선어가 한어식으로 동화되가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중국 조선어를 살리기 위해 조선어학계가 뭉치고 나섰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최윤갑 원로교수, 그는 중국조선어학회 부리사장(1981~1988), 중국조선어학회 리사장(1988~1993),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주임(1986~1999) 등 직을 력임하며 근 20년 동안 조선어 연구와 중국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주도했다.   앞서 최윤갑 원로교수는 1957년 젊은 나이에 벌써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 문제》 문장을 발표하는 것으로 일찍부터 중국 조선어 규범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임직기간 그는 중국조선어 표준문법(규범집)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조선어문법(연변인민출판사, 1983년)》 편찬을 주도했고 《조선어 규범집 해설(수정본, 1987년)》 편찬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실사구시 정신으로 중국의 실정에 맞게 중국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지도했다. 중국 조선어의 표준문법과 규범화 작업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 조선어가 자기만의 문법체계를 갖게 되였으며 문화, 교육, 일상생활 등 제반 령역의 조선어 사용 혼란을 바로잡은 동시에 앞으로의 발전방향도 제시했다. 다른 측면에서 중국 조선족이라는 정체성 수립에도 큰 역할을 발휘한 것이다.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에 대한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규범화사업을 직접 주도하면서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와 조선어 사용 현황(1996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사업에 대한 회고와 현재 부딪친 문제(1997년)》, 《조선어 띄여쓰기의 변화로부터 생각되는 조선어 띄여쓰기 통일안(1997년)》 등 론저를 발표해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을 완선화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2012년에 82세의 고령으로 론문 《사잇소리표기에 대하여(2012년)》를 발표하고 사잇소리 표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학술회 때마다 강조했다.   독보적인 기능주의 문법사상 등 학술성과 주렁   최윤갑 원로교수는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어떠한 출국류학, 국내연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형편에서 개인만의 노력으로 조선어 연구의 권위학자로 성장해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중국 조선어를 살리고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서 힘을 얻은 것이다.   그는 1980년에 자신의 학술성과를 집대성한 리론문법서 《조선어문법(료녕인민출판사)》을 출간해 조선과 한국의 문법체계를 그대로 직수입하는 1970년대 이전의 연구풍토를 바꾸고 부동한 시각에서 조선어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단어는 어휘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를 동시에 갖춘 언어적 단위’라는 단어의 정립기준을 세웠고 전통문법의 한계를 넘어 유럽의 구조주의 언어학, 미국의 기술언어학 및 현대언어학 리론을 대담히 수용하여 남과 북의 학자들과 다른 독보적인 기능주의 문법사상을 수립하였다.   특히 80세 고령에 출간한 《한국어문법 신강(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9년)》을 통해 ‘결합가’ 리론을 ‘문법 지배’ 리론으로 한걸음 더 발전시켜 한국어 품사 하위분류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였다. 한국어의 동사, 형용사, 명사에 대한 하위분류법은 특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음이 중국의 한국어교육 현장에서 증명되고 있다.   지금까지 최윤갑 원로교수는 《조선어문법(1980)》, 《한국어문법(2000)》, 《한국어문법 신강(2009)》 등 13부의 학술저서를 펴냈고 조선어연구 론문 60여편을 발표했다. 론문들은 고대조선어로부터 현대조선어에 이르기까지, 음운론으로부터 통사론에 이르기까지, 방언학으로부터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본체론 연구로부터 대조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연구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교재편찬, 인재양성 등 후대교육에 ‘한마지로’   조선어 연구 뿐만 아니라 후대교육에서도 그는 상당한 공을 들였다. 연변대학 어문학부 교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 학과장, 연변대학 언어문학대학 학장, 연변대학 초빙교수 등을 력임하면서 조선어(한국어) 전문인재를 양성함과 동시에 여러종의 대학교과서를 편찬하여 연변대학 국가중점학과 건설과 국내 대학 한국어학과 건설에 ‘한마지로’를 다했다.   대학시절 교재없이 힘들게 공부한 경력이 교재편찬을 시작한 계기였다. 당시 교수가 우에서 강의를 하면 그는 밑에서 철필로 마분지에 죽기내기로 필사를 해야 했다. 불편한 그 시절을 겪은 그는 연변대학 교원으로 남게 되자 교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부터 가졌다.   1957년에 그는 당시 쏘련이나 조선에서는 어음, 문법, 문장, 어휘를 배운다는 것을 참조해서 자신이 배우던 《조선어문법》에 이러한 내용들을 첨가하여 《현대조선어》로 고치고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어음론은 리세룡 교수, 어휘론은 김학련 교수, 문장론은 최윤갑 교수가 맡았다. 당시는 인쇄도 안되는 시기라 그들은 손으로 직접 적어서 등사하여 교재를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착수한 과목이 고대조선어였다. 같은 해 연변대학에서 북경대학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북대반’이 생기면서 그는 북경대학 류열 교수와 친분을 맺고 북경대학에 가서 《룡비어천가》, 《금강경언해》 등 자료들을 빌려올 수 있게 되였다. 그는 빌려온 자료들을 카드가 집에 넘치도록 필사를 하여 《고대조선문선집》 등사본 교재를 만들어냈고 중국 경내에서 최초로 《고대조선어강독》이란 과목을 개설하였다. 그후 조선어학강좌는 전 교의 모범강좌로 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편찬한 《조선어어음론》과 《조선어문장론》도 줄곧 대학 교과서로 사용되였다. 1977년에 그는 교연실 동료들을 동원하여 《언어개론참고서》, 《조선어어음론참고서》, 《조선어형태론참고서》, 《조선어문장론참고서》, 《조선어어휘론참고서》, 《고대조선어참고서》 등을 인쇄본으로 출간하였다. 1984년에는 리세룡과 함께 《조선어학사전》을 집필하여 연변인민출판사를 통해 출간하였고 1987년에는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와 도서관에 련계를 취해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언해본), 《룡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설》, 《월인석보》, 《구급방언해》 등 20여권의 고전저서들을 얻어다 비교연구를 깊이 한 기초 우에서 마침내 실용가치가 큰 24만자에 달하는 《중세조선어문법》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교재들은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중점학과로 자리매김하고 조선언어문학전공과 조선어전공이 국가 특색전공으로 선정되는 데 중요한 포석으로 되였다.   특히 중한 수교후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중국인 학습자들이 많아지면서 그는 70세에 《한국어문법(2000년)》을, 79세 고령에 《한국어문법 신강(2009년)》을 편찬했다. 이 책들은 중국내 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필독교과서로 큰 환영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학교육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반 중국 조선족의 민족언어 교육 발전에 착안점을 두었다. 1987년에 《조선어문을 대학입학시험 과목에 넣지 말아야 하는가》를 시작으로 《중국 조선민족 산재지구에서의 아동들에 대한 조선어 교육(1991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교육과 사용으로부터 본 조선어 통일의 필요성(1995년)》 등 론저를 통해 민족언어 교육 발전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고민을 토로했다.   최윤갑 원로교수는 대학 재직 48년간 수만은 조선어(한국어) 인재를 양성했는데, 대부분 제자들은 국내 대학들에서 조선어(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부분 제자들은 훌륭한 언어학자로도 성장하였다. 류은종(연변대학), 최희수(연변대학), 전학석(연변대학), 강은국(복단대학), 강보유(복단대학), 렴광호(청도대학), 최순희(북경언어대학) 등은 중국의 대표적인 한국어 연구자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그중 류은종 박사는 2006년 한글날에, 강은국 박사는 2012년 한글날에, 강보유 박사는 2016년 한글날에 각각 한글발전 유공자로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포상’을 받았다.   최윤갑 원로교수는 일생의 심혈을 중국 조선어 발전과 한글 세계화에 기울였다. 이러한 학문업적을 기리여 김병민 전 연변대학 교장은 그를 우리 조선민족이 낳은 ‘중국의 주시경’이라고 평가했다. '구순 로인' 최윤갑 원로교수의 학문연구에는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              /료녕신문
7413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서도 "청년바람"이 불었으면... 댓글:  조회:3586  추천:0  2019-11-08
직장까지 그만두고 간 곳… 지방 빈집에 부는 '청년 바람' 2019.11.08.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우리나라 전체 면적의 10%를 조금 넘는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올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모두가 서울로 수도권으로 모여드는데, 한편에서는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박병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전남 목포의 명소 유달산. 중장년 관광객들 사이로 20대 청년들이 눈에 띕니다. 모두 서울 청년들로, '목포에서 석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 중입니다. [서지은(29세) : (여기 오게 된 계기가 있어요?) 서울에서 사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좀 지치고 그냥 뭔가 항상 급하고.] 이들을 인솔하는 김한나 씨 역시 지난해 여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아예 눌러앉게 됐습니다. [김한나 (28세·목포 정착) : 끝나고 나니깐 너무 아쉬운 거예요. 이 친구들이랑 헤어지기가…사실 목포도 정이 들었지만.] 지난 한 해 목포살이 참가자 60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28명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박은혜 (29세) : (부모님께서 여기 내려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어땠어요?) 저희 아빠는 미쳤다고 했고, 목포까지 가서 뭐 하냐고? 그런데 지금은 그래 잘살고 있으면 됐다고…] 빈집을 고쳐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를 운영하는 이도 있고 망한 가게를 세내어 채식 전문 식당을 연 사람도 있습니다. [정정이/목포 주민 : 이런 (젊은) 분들이 오시면서 여기 구도심이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조선소와 자동차공장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젊은 층 인구가 급감한 전북 군산에도 새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인천서 내려온 27살 백서희 씨는 군산에서 빈집을 고쳐 사진관을 열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근대의상을 빌려주고 사진도 찍어줍니다. [백서희 (27세) : 인테리어 같은 경우에는 그냥 도면 그리고 컨셉을 짜고 뭐 하나 하나 사는 것까지 제가 했습니다.] 백 씨 말고도 서울, 수도권에서 내려온 13팀의 청년들이 한 대기업의 창업 지원을 받아 군산 살리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인천 원도심에 넘쳐나는 빈집도 참신한 사업 아이템이 됐습니다. 30대 청년 최 환 씨는 빈집을 고쳐 청년들에게 임대하는 이른바 '빈집은행'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반지하 빈집에는 버섯 농장도 여러 곳 만들었습니다. [최 환 (35세·'빈집은행' 대표) : 서울이었으면 경쟁이 치열해서 아무도 기회를 저희한테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이 아닌 지방, 신도심이 아닌 구도심이기에 오히려 기회와 도전의 문이 열렸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VJ : 윤 택)    、박병일 기자
7412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울리다... 댓글:  조회:3410  추천:0  2019-11-04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울렸다   2019-10-21  편집/기자: [ 김영화 ] [ 길림신문 ][ 2019-10-20 ]   19일, 연변주당위 선전부와 연변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및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주최하고 연변가무단과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주관한 제1기중국조선족시가절행사가 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이며 주석인 정봉숙의 사회로 진행되는바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백경승, 저명한 작가이며 중외작가 교류캠프조직위원회 주석인 조안표,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 임백, 저명한 작가이며 중국시가학회 상무리사 장경화, 저명한 시인이며 작가넷 부주필 안기, 이외에도 미국, 먄마, 라트비아 등 외국 유명 작가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김기덕은 축사에서 “아름다운 중국 신선한 연변 2019년 제1기 ‘중국조선족시가절’은 ‘민족시가의 전통문화 발양, 문화관광 융합발전을 추진, 변강사회 조화로운 번영’을 취지로 한다. 또한 민족문화특색을 부각시키고 시가문화정신을 전승하며 민족문화자신감을 지켜가고 대외문화교류를 주선으로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독특한 지역, 인문자원 우세를 발휘해 건국70주년과 개혁개방 40년래 새 시대 연변인민의 생활수준과 정신면모에서 생겨난 거대한 변화로 민족시가창작과 연구에서 풍성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연변의 농후한 민족특색과 풍부한 관광문화자원을 선전, 전시하여 연변의 지명도를 알리고 문화영향력을 제고하여 ‘문화강주’, ‘관광강주’로 일떠세우기 위해 정신문화력량을 힘써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경승은 축사에서 “‘중국조선족시가절’의 발족은 중국작가협회의 력사에 길이 남을 한페지로 그동안 연변작가협회는 수많은 민족문학인재들을 배출해내며  문학창작에 힘써 왔다”면서 앞으로도 습근평 총서기의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의 인솔지도아래 연변작가협회는 새 시대 더 깊이 있고 품격있는 작품들로 번영발전하는 연변의 주선률을 노래하며 문학예술에 더 큰 기여를 희망했다.         행사에서는 특별히 리욱, 김철, 김성휘, 조룡남, 리상각, 리삼월, 한춘, 최룡관, 남영전, 박화, 정몽호 등 11명을 건국70주년 조선족 특수공헌시인으로 선정하여 상패와 영예증서를 수여했다. 이어 연변텔레비죤라지오방송 아나운서들이 무대에 올라 격정에 넘치는 시랑송을, 연변가무단과 예술학원에서 준비한 문예공연으로 시가절 분위기를 무르익혀갔다.     시인들의 큰 잔치...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 (ZOGLO) 2019년10월19일  "조선족시인들과 국내외 시인들의 만남의 장" "시와 사진, 시와 예술의 만남으로 조선족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한 좋은 시들이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하다니 과히 놀랍도다" "감동 그 자체였다. 민족이 따로 없이 시와 노래로 하나가 된 축제" ... 건국 70주년을 맞으며 조선족시인들의 큰 잔치인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이 10월 19일 국내외 시인들과 조선족시인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개막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 선포   연변주당위선전부, 연변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는 시랑송대회, 대형시화전, 공로시인 표창, 문예야회, 시창작세미나, 현지답사, 대형다큐멘터리제작 등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이 사회를 한 이날 개막식에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이 환영사를,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이 축사를 했다.   환영사를 하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   김기덕 부장은 " 문화가 흥(兴)하면 국운도 흥성하고 문화가 강대해지면 민족도 강대해진다"며 "시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시가절행사를 계기로 전통문화를 고양하고 문화로써 관광산업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는 전국정협 상무위원 겸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 백경성 부주석은 "연변문련과 연변작가협회가 설립된이래 문학예술면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육성해냈으며 따라서 좋은 작품들도 많이 나왔다."면서 "조선족의 문학과 예술은 중국 70년의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이를 장식했다. 이는 시인들과 예술인들의 헌신정신, 피타는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개막식 사회를 하는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 이날 조선족시단에서 혁혁한 공훈이 있는 리욱, 김철, 리상각, 한춘, 조룡남,리삼월, 김성휘,박화, 남영전, 최룡관,정몽호  등 11명 시인들을 표창했다. 그중 8명은 작고한 원로시인들이다. 수상자 및 대리수상자와 함께  "리욱 원로시인은 해방전과 해방 후 두 시대에 걸쳐 시창작을 진행하여 조선족시단을 개척하고 정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향토신이라 지칭하기에 손색없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로 시창작을 하고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심사평을 밝혔다.(이하 략함)   모택동이 1936년에 쓴 시"시원춘설"을 읊조리는 임지원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는 건국 70주년 맞이 두만강천리답사 계렬활동을 펼치면서 현지답사를 통해 더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물은 오늘에 전시된 시화이며 "중국조선족시선집"을 편찬해낸 것.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시창작위원회 주임이자 이번 행사를 총 기획한 김영건은 "시인들은 현지답사를 통해 삶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하는 좋은 시화들을 창작해냈다. 오늘은 어쩌면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리라고나 할가. 시화를 전시하고 시선집을 펴내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와 춤으로 시와 예술의 만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건국 7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련다."며 "'뿌리 깊은 나무'를 주제로 한 '시가 흐르는 야회는 당의 민족정책의 혜택아래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산해관 넘어 대륙으로 대서양 건너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가는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담아냈다. 전반 무대를 시가 흐르는 야회로 장백산의 산생, 그날의 자취를 찾아 인정의 세계로 펼쳐지는 진달래 산천으로 펼쳐지며 우리 민족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뿌리 깊은 토대를 바탕으로 이 땅에 당당한 주인 된 오늘을 노래하고 우주의 주인으로 세상속에 그 뿌리를 뻗치는 건실한 미래를 구가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이번 야회는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서사시처럼 고도로 째이고 전반을 시의 흐름으로 풀면서 우리 무용의 최고의 경지로 옷 입고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전반을 이어나갔으며 특수처리 등 수법으로 매 장의 아름다운 화폭을 보여주면서 서로가 어울려 하나의 예술적 무대로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무대하 할 수 있다.     시가절의 일환으로 오후 연길 상우호텔에서 시가세미나를 개최했으며 20일에는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글 문야/영상 방호범     시화전 한장면   시선집   파일 [ 43 ]                                         
7411    활무대는 서로 다르지만 불멸은 같다... 댓글:  조회:2807  추천:0  2019-11-04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퇴계 이황 14대손으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 -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친가·외가 모두 선비 집안, 독립운동으로 평생 17차례 피검, 투옥돼... 지조와 절개 번뜩이는 시 36편 남기고 광복 1년 전 베이징서 순국   9월 24일 중국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기념관의 벽시계는 9시30분에 멈춰서 있었다. 107년 전 그날의 거사 시각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 안 의사 흉상을 지나면 ㄷ자 형의 좁은 공간에 성장과 거사 과정 등이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이곳 안쪽에서 유리벽 너머로 기차역 플랫폼이 내다보인다. 도착한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렸다. 플랫폼의 바닥에 삼각형과 사각형 표시가 선명하다. 플랫폼의 천장에는 ‘안중근 격살 이등박문 사건 발생지’란 팻말이 걸려 있다. 1909년 10월 26일, 세계를 뒤흔들었던 현장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열차에서 내려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했다. 거리는 불과 5m. 이토에게 3발이 명중됐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사서(四書)와 등을 읽으며 자랐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을 익혀 명사수로도 이름났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귀국한 뒤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다. 그러나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그는 반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된다. 거사 5개월 만인 이듬해 3월 26일 안 의사는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31세 나이로 순국한다. 여기 또 한 명의 독립지사가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맞섰다. 그도 조부로부터 사서를 배우고 교육에 참여했다. 그리고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명사수가 된다. 총을 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안 의사 기념관에서 떠올린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1904∼1944) 시인이다. 안 의사의 흔적을 찾아간 여행에 마침 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75) 여사가 동행해 분위기는 숙연했다. 시인은 왜 권총을 들었을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10월 1일 육사가 태어난 마을을 찾았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다. 안동시청에서 퇴계로를 따라 북쪽으로 25㎞를 가면 도산서원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산 하나를 넘으면 퇴계종택이다. 다시 퇴계 묘소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육사의 고향 원촌이다. 마을 입구에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확장공사로 휴관 중이다. 진성 이씨 집성촌인 원촌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쇠락했다. 육사가 살 때만 해도 100여 호에 가까웠다고 한다. 육사의 생가는 옮겨지고 그 자리엔 지금 ‘청포도’ 시비와 시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웃한 목재(穆齊)고택에서 이옥비 여사를 만났다. 조선 철종 시기 대사간을 지낸 목재 이만유의 증손 이원봉은 육사와 8촌이었다. 이 여사는 이 집에 머물며 문학관 일을 돕고 있다. 먼저 28세 육사로 돌아간다. 1932년이다. 당시 육사는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기자를 그만두고 중국 펑톈(奉天), 즉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간다. 거기서 의열단 창립멤버이자 핵심인 윤세주를 만난다.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는 육사가 ‘일거리를 찾아 펑톈으로 갔다’고 돼 있다. 육사는 처음에 테러를 일삼는 의열단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육사는 결국 의열단이 설립한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한다. 군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졸업하면 일제의 요인을 해치우는 등 비밀조직원이 된다. 교장은 의열단장인 김원봉이었다. 육사는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거기서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운다. 놀랍게도 당시 육사는 권총 사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룬 모양이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는 권총 5자루를 촛불을 꺼놓고 해체한 뒤 짧은 시간에 다시 조립해낼 만큼 무기를 잘 다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말을 타고도 명사수였다고 한다. 나라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펜 대신 총을 든 것이다. 육사는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넉 달 뒤 귀국한 그는 언론계 복직과 문필 활동을 계획한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귀국한 지 8개월이 지난 1934년 3월 육사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진 것이다. 육사는 당시 일제 경찰의 고문이 혹독해 몇 차례 옷이 피로 얼룩졌다. 그가 풀려난 직후인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가 경성으로 보고한 ‘이원록 소행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위에 선전할 우려가 있으며 (…) 본인의 성질로 보아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육사는 이때부터 문학에 뛰어든다. 시작(詩作) 활동을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기백을 키우고 길러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곧 행동이오.” “시를 생각하는 것도 곧 행동이오” ▎육사의 고향에 들어선 청포도 시비.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를 통해 당시 민족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1939년 8월 그는 지에 시 ‘청포도’를 발표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는 스스로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시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1943년 7월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지인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라며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일본도 곧 끝장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했다. 안동시는 최근 육사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도산면 도로변에 청포도 단지를 조성했다. 올해는 ‘264청포도 와인’도 선보였다. 육사는 시를 쓰면서 말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가까웠던 신석초 시인은 “동동주를 연거푸 아홉 사발 마시고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신석초는 육사가 시를 쓰거나 술을 마실 때 즐겨 쓴 한 구절이 있었다고 했다. 에 나오는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거워도 탐닉하지 않고 슬퍼도 상하지 않는다)’이다. 한결같은 자세다. 전하는 시 36편 중 ‘절정’ 등 12편이 1940∼41년에 발표된다. 하나같이 지조와 절개가 번뜩인다. 1943년에는 ‘만등동산(晩登東山)’ 등 한시 3편만을 남겼다. 일제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1943년 4월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독립 투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일제에 무릎을 꿇고 변절했다. 친일로 돌아서 침묵했다. 한 술 더 떠 일제의 앞잡이가 돼 민족을 기만하는 지식인도 있었다. 육사는 홀연히 견위수명(見危授命: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하는 선비의 길을 걸었다. 당시 중국행은 무기를 들여와 무력항쟁을 도모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두운 밤에 더 빛나는 별빛과도 같은 행보였다. 베이징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육사는 1943년 7월 귀국한다. 그는 안동에서 어머니와 맏형의 소상(小祥,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른 뒤 잠시 서울에 머물던 중 다시 검거된다. 이제 그의 삶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부인 안일양은 동대문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만난다. 이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딸 옥비의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이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이옥비 여사는 기자에게 “당시 아버지께서 밀짚으로 얼굴을 가린 용수를 쓴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고 증언했다. 모습이 특이해 어렸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그렇게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두고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했다. 당시 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는 베이징 감옥의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길로 달려가니 육사는 옷이 피로 낭자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육사의 눈을 쓸어 내리면서 “육사! 조국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제 고이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육사의 마지막 모습이다. 억울한 옥살이 뒤 ‘육사’를 필명으로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성장 과정은 문사에 가까웠다. 육사의 조부 이중직은 향리에 신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을 세워 초대 교장을 지내는 등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육사는 여섯 살 때 조부로부터 을 배우고 10대에 경서를 외는 등 한학을 공부했다. ‘은하수’라는 육사의 수필에는 한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논어나 맹자에 시전(詩傳), 서전(書傳)을 읽는 선비라면 어느 권에 무슨 장이 나올는지 모르니까 전질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됨으로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외조부 허형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장 왕산 허위와 사촌이다. 육사에게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어머니로부터 “(나라를 찾는 날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 되었다. (…)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규모’는 이 마을에 내려온 정신일 것이다. 이처럼 육사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선비요, 독립운동가인 환경에서 자랐다. 육사는 16세 때 대구로 나간다. 이듬해는 부친의 엄명으로 혼인한다. 육사는 직후 처가가 관여하던 영천 백학(白鶴)학원을 다니고 9개월 동안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을 쓴 김희곤(62) 안동대 교수는 “이 시기에 육사가 민족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육사는 귀국해 대구 조양(朝陽)회관에서 신문화운동에 참여했다. 도서실·신문사·문화운동단체 등이 들어서 청년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던 공간이다. 1925년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한다. 1927년 육사가 귀국하자 대구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뜨린 장진홍 의거다. 일경은 1600명을 투입하고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육사 형제도 잡혀 들어갔다. 폭탄상자 겉면에 적힌 글씨가 육사의 동생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정작 거사의 주인공은 사건 1년 4개월 뒤 일본 오사카에서 붙잡힌다. 육사는 당시 혹독한 고문을 받는 등 1년 7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이때 수인번호가 264번. 필명 ‘육사(陸史)’의 유래다. 한자는 ‘식민지 역사를 베어낸다’는 뜻을 담았다. 옥고를 치른 뒤 1930년 육사는 기자가 된다. 당시 기자들은 다수가 언론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1931년 육사는 기자 신분으로 2개월간 구금된다. 광주학생사건 이후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을 대구에 뿌린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육사는 신문기자를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육사는 일생 17차례 피검, 투옥된다. 육사는 일제의 탄압이 가혹해지는 생의 마지막에 시 ‘광야’를 썼다. 이 작품은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에 발표된다. 시로 쓴 유언이었다.   ▎육사의 마지막 시 ‘광야’의 시상지인 ‘쌍봉·윷판대’에서 바라본 왕모산과 낙동강. 앞에 펼쳐진 들판은 원촌의 강 건너 마을인 내살미다.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 지녀 이육사문학관 건너편 산에는 ‘광야’의 시상을 다듬은 곳이 있다. 원촌 마을을 떠나면서 그곳에 들렀다. 깊은 산속에 큰 강이 흐르고 이런 탁 트인 들판이 있을까 싶은 곳이다. 육사는 옥중에서 일제에 맞서는 용기와 광복의 희망을 심었다. 그러면서 순국하는 그날까지 일제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위해 기꺼이 권총을 든 눈 속 매화 같은 선비였다. 이옥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현장에서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며 “아버지도, 기회가 주어졌으면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상은 “그에게는 시보다도 문학보다도 조국이 더 컸었다. 조국을 찾은 뒤에야 시도 있고 문학도 있었다”고 기렸다. 이육사에게 광복은 곧 지조이자 절개였다. 하얼빈에 동행했던 도진순(57)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육사는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를 지니고 옥중에서 유언을 남겼다는 점에서 안 의사와 닮았다”고 말했다. 한학을 공부하고 명사수가 된 것도 공교롭다. 물론 사상은 차이가 있다. 육사는 나이가 안 의사보다 25년 아래다. 기록은 없지만 육사는 틀림없이 안 의사를 흠모했을 것이다. 육사는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생명을 던져 의를 취하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 선비가 아닐까. [박스기사] 한국의 ‘별’ 이육사 | 북간도의 ‘별’ 윤동주 - 출신, 사상, 시 세계 달랐지만 일제에 맞서다 옥중 순국 ▎민족시인 이육사(왼쪽)와 윤동주.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시는 한국과 중국 조선족 교과서에 모두 실렸다. 이육사는 ‘민족시인’으로 불린다. 묘비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 다른 민족시인이 있다. 올 초 란 영화로 친숙해진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윤동주는 북간도(北間島)로 불린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옌볜의 김승종(53) 시인은 “윤동주는 북간도의 ‘별’, 이육사는 한국의 ‘별’로 밤하늘 별처럼 남북에 드리운 한줄기 빛”이라고 표현한다. 또 이육사와 윤동주는 이상화·김소월과 더불어 한국은 물론 옌볜 조선족의 교과서에도 작품이 동시에 실린 시인이었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두 시인의 성장 배경은 판이하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선비 집안에서 자랐다. 윤동주는 살기 어려워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디아스포라(離散: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집단) 3세다. 육사가 요즘 말로 ‘금수저’라면 윤동주는 ‘흙수저’라고나 할까. ‘살신성인하는 좌경적 유교’가 육사의 사상적 바탕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최근 중국이 윤동주의 국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룽징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가면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한글·한자로 함께 쓴 바윗돌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인으로 만들려고 한 이른바 동북공정 역사 왜곡의 흔적이다. 이곳에 들른 한국 관광객들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분노하는 이유다. 사상적 바탕을 보면 이육사는 유학이다. 김관웅 옌볜대 교수는 “그것도 살신성인하는 좌경적인 유교”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군사훈련까지 받은 이육사를 “직업적인 혁명투사”로 표현한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또 서구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시(詩) 세계도 달랐다. 이육사는 선비의 기개로 일제에 항거하고 타협할 줄 몰랐다. 반면 윤동주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언제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했다. 육사의 시 ‘광야’, ‘절정’은 선비풍이 느껴진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 ‘서시’는 속죄하는 인간을 그린다. 김관웅 교수는 “윤동주는 투사이기보다 항일을 양심적으로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두 시인이 주는 감동의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나이는 이육사보다 13년 아래다. 활동무대도 서로 달라 생전에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일제에 맞서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그만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불멸의 공통점이다.  /글 송의호 기자
7410    "새 래일을 갈망, 아우성 칠 때 새 래일의 주인공이 된다"... 댓글:  조회:4009  추천:0  2019-11-01
최신기사 민족을 위해 살다간 '떠돌이' 문동환 목사의 삶 | 2019-03-10       6.15공동행사 해외측 준비위 공동위원장이었던 고인이 2005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2005.8.13.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3월 9일 별세한 문동환 목사는 스스로 '떠돌이 목자'라 불렀다. 고인은 목사이자 교육자, 신학자였고, 민주화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세상은 고인이 한곳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지만, 어느 곳에서든 그는 민족과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떠돌이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펼친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친동생으로 알려졌지만, 고인 역시 큰 족적을 남긴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다.   고인은 일제를 피해 고국을 떠난 이들이 모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한 근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의 지도자 김약연 목사를 보며 6세 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민족을 위해 살겠다는 꿈을 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는 명동촌을 일구고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웠다. 명동학교는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나운규 등을 배출했다. 고인은 어린 시절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고인은 명동촌에서 1921년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 김신묵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CBS TV가 지난 1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북간도의 십자가'는 당시 북간도 출신 마지막 생존 인사였던 고인의 육성을 담았다. 고인은 "김약연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교사였고 만주 일대 한국인의 지도자였다"며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진다"며 "내가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말한 대로 목사가 된 고인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에 뛰어들어 역사와 통하는 삶을 살았다. 1961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다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1975년 해직됐다. 해직 교수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치던 그는 생명문화 공동체 '새벽의 집'을 열었다.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살겠다는 시도였다. 고인은 명동성당에서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됐다. 2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인은 명상기도와 성서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 죄수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면서 민중신학의 실마리를 잡았다. 출옥 이후 '새벽의 집'은 민주화운동의 둥지가 됐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구속자 석방을 위한 농성과 시위를 벌였고, 1979년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그 해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됐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한신대 교수로 복직한 고인은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고인은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고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까지 지냈지만 1992년 유학 시절 만난 미국인 아내 페이 핀치백(한국명 문혜림)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도 세계 현안과 한국의 현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말년까지 성서 연구와 집필에 매진했다. 고인은 2009년 자서전 '문동환 자서전 -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2012년 '바벨탑과 떠돌이'를 펴냈다. 90대 중반 나이에도 '예수냐, 바울이냐' (2015년), '두레방 여인들'(2017년) 등을 출간했다. 고인은 80대에 접어들면서 민중신학을 넘어 '떠돌이 신학'을 펼쳤다. 고인은 저서에서 "성서에서 새 역사를 창출한 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온 민중과 다르다"며 "강자들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완전히 밀려난 떠돌이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떠돌이라는 개념을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도 접목해 설명했다. 고인은 "자본주의 산업 문화가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하여 떠돌이들이 양산되고 있다"며 "그들이 떠돌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새 내일을 갈망하면서 아우성을 칠 때 새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 문동환 목사 별세 2019-03-09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거짓과 싸워온 개혁가이자 공동체운동가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사 100년 온몸 겪어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월남 형 문익환 목사와 민주화운동…투옥·망명 한때 정치 참여…5·18특위 위원장 맡기도 “안으론 따뜻했지만 밖으론 단호했던 분”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9/0309/00500465_20190309.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590px;" title="생전의 문동환 목사. 자료사진" /> 생전의 문동환 목사. 자료사진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으로 불렸던 문동환 목사가 3월 9일 오후 5시50분께 별세했다. 향년 98.     고인은 해사스런 귀공자형의 외모처럼 편하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한맺힌 민중들을 놓을 수 없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떠돌이’를 자청한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일제시대 북간도 한인사와 독립운동사, 교육사, 민중사, 민주화운동사, 기독교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00살이 다 되도록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명하면서 거짓들과 싸운 종교개혁가이자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공동체운동가였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 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 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이 공부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 강원용 등이 수학했다. 은진중 교목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었다.   194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교사로 근무했던 용정 명신여중 교정에 서 있는 문동환 목사. 1946년 5월 ... 월남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고인은 어린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같은 이가 되고 싶어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한다. 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전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의 안내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회고한바 있다. 그는 그 이후 거제도 아양리라는 농촌으로 내려가 1년간 목회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1961년 12월16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올린 결혼식에서 신부 문혜림과 함께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문동환 목사. 맨오른쪽이 주례를 한 은사 김재준 목사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독재가 시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 않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 대중 앞에 나설 때, 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1972년 낸 이란 책의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토론하고 발표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하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도입했다. 그의 제자였던   정호진 목사는 “고인의 라는 수업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혁명적 전환으로 스스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 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특별한 점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늘 실천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삶을 배우기 원했고, 캠퍼스 자체가 민주적 삶의 체현장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그가 학생과장으로 재직 때 학생, 교수, 직원, 교수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게 캠퍼스생활위원회였다. 이 생활공동체를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등의식과 참여의식을 배우고 실천케 한 것이다.   1980년 3월1일 사면 복권 소식을 듣고 부인 문혜림(왼쪽 둘째), 딸 영미(오른쪽 둘째)씨 등 가족들에 싸여 기뻐하고 있는 문동환 목사.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게 선교신학대학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 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 세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만든 ‘새벽의집’ 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 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과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 유신헌법 공포는 그를 더욱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삭발을 하며 투쟁을 하다 1975년 해직됐던 그는 동료 해직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76년 3월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와이에이치(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유신정권의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시작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80년 이른바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하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 은퇴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9/0309/00500473_20190309.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600px;" title="1987년 2월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 부인 문혜림(왼쪽), 형수인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자료사진" /> 1987년 2월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 부인 문혜림(왼쪽), 형수인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자료사진 그는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다. 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합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 절대권력, 권위주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을 본 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문동환(뒷줄 왼쪽 넷째)·문혜림(왼쪽 다섯째)씨 부부가 형수 박용길(왼쪽 여섯째), 조카 문성근(앞줄 맨왼쪽), 딸 문영미(앞둘 왼쪽 둘째)씨 등 가족들과 2002년 2월 중국 룡정시 동커우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의 한신대 제자였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며 “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 숭배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2008년 7월21일~10월3일 ‘길을 찾아서-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연재하고 이듬해 같은 제목으로 으로 펴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혜림씨와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씨, 사위 정의길( 선임기자)씨 등이 있다. 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이다. ...   /조현 기자 
7409    [그것이 알고싶다] - 나운규와 아리랑을 부른 가수... 댓글:  조회:3753  추천:0  2019-11-01
연예스타 나운규 '아리랑' 첫 상영 가수는 유경이 페이스북 트위터공유하기 최종수정 2019.10.01  구글번역 아시아경제  뉴스듣기 인쇄하기스크랩RSS 폰트축소폰트확대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1926년 10월1일 나운규의 ‘아리랑’이 처음 상영했을 때 ‘아리랑’을 부른 가수가 유경이로 확인됐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단성사가 발간한 ‘조선영화소곡집’에 실린 자료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1일 전했다. 이 자료에는 아리랑의 악보와 유경이의 사진이 실려있다. 사진에는 ‘유경이양(劉慶伊孃)’이라는 이름과 함께 ‘스테이지에서 노래한 분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아리랑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담긴 무성영화다. 변사가 해설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상영됐다. 재상영에서는 김연실 등 가수 다수가 참여했다. 연합회 측은 “첫 상영 당시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며 “영화 필름이 없는 현재 이를 통해 개봉 당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조선영화소곡집이 단성사 영화구락부에서 발행된 책이라는 점 또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아세아경제  /이종길 기자 
7408    [그것이 알고싶다] - 나(라)운규와 영화 "아리랑" 댓글:  조회:3515  추천:0  2019-11-01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아리랑   [ Arirang ] 해설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년,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년).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은 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년 ‘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편,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 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년,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편’은 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총 4,947표)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 등이 있다. 줄거리   서울에서 전문학교에 다니던 영진(나운규)은 3·1 운동 때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정신이상자가 되기 전까지는 친구인 현구(남궁운)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던 건강한 청년이었다. 영진의 동생 영희(신일선)는 오빠의 친구인 현구를 사랑하고 있다. 한편 악덕 지주의 머슴 오기호(주인규)는 영진네 빚을 빌미로 영희에게 흑심을 품는다. 그해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농악제가 열리던 날, 오기호는 혼자서 집을 보는 영희를 범하려 든다. 마침 영진을 찾아 왔던 현구가 영희를 구하기 위해 오기호에게 달려들고 정신이상자인 영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 남자의 격투를 구경할 뿐이다. 그러다가 영진은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다. 상인이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으려 하자 영진은 순간적으로 낫을 들어 상대방을 후려친다.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고약한 오기호였다. 영진은 비로소 제정신을 되찾는다. 그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선생, 악덕지주, 일본 순사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영진의 손에 포승이 묶여지자 사람들은 영진을 에워싸고 오열한다. 그때 영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부디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 일본 순사에게 잡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의 뒤로 청년회 깃발을 든 청년들이 말없이 따른다.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관련영화   크게보기 아리랑(1926) 평점 9.98  개요 한국 | 19261001 | 0분 | 감독 나운규 출연 나운규       관련이미지 출처: EBS 어린이 지식e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랑 [Arirang]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   시사상식사전 나운규의 아리랑               1926년 춘사 나운규가 만든 영화. 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흑백 무성영화이다.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 '신아리랑'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주인공 영진 역은 나운규가 맡았고 영진의 동생 영희 역은 신일선, 영진의 친구이자 영희의 연인인 현구 역은 남궁운, 악덕 지주의 청지기인 오기호 역은 주인규가 각각 연기했다. 촬영은 이명우가 맡았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 였다고 표현할 만큼 영화 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어 온 겨레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나운규의 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화시킨 것이다. ■ 아리랑의 줄거리 '3·1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미친 영진은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여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영진의 친구 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벌인다.  실성한 영진은 오히려 이 모습을 재미있게 여긴다. 이때 갑자기 환상에 빠져든 영진은 반사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가 그 낫에 찔려 죽고 그 충격으로 영진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경찰에게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의 아리랑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羅雲奎,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관련이미지 41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7407    [그것이 알고싶다] - "아리랑"... 댓글:  조회:3986  추천:0  2019-11-01
창악집성 아리랑     요약 「아리랑(본조아리랑)」은 경기 민요다. 일반적으로 「아리랑」이라고 한다. 분류 경기소리 - 민요 목차 노랫말과 풀이 해설 관련항목 노랫말과 풀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十里)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엔 수심(愁心)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  ] 부분은 후렴 해설 「아리랑」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민요다. 그 종류가 매우 많으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로 널리 퍼진 「아리랑」은 1926년에 나온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아리랑」이다. 이를 다른 「아리랑」과 구분하기 위해 「본조(本調)아리랑」이라 한다. 본조란 본바탕이란 의미보다는 서울 본바닥이라는 의미다. 수많은 「아리랑」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아리랑」은 강원도 지방의 토속민요인 「정선아리랑(정선아라리)」이다. 「정선아리랑」은 「정선긴아리랑」과 「정선엮음아리랑」으로 구분된다. 조선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강원도 지방의 인부들이 부른 「정선아리랑(정선아라리)」이 영향을 미쳐 서울 · 경기제의 「긴아리랑(서울긴아리랑)」과 「서울자진아리랑」이 나타난다. 이 「서울자진아리랑」을 변주한 새로운 아리랑이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 부르기로 함에 따라 「서울자진아리랑」은 「구조(舅調)아리랑(구아리랑)」이라 부른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정선아리랑」을 변주한 신민요풍의 새로운 「아리랑」이 나타나는데 이를 「강원도아리랑」이라 부른다. 또한 「정선엮음아리랑」을 서울 · 경기제로 부른 「정선엮음아리랑(서울 · 경기제)」도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아리랑」이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해주아리랑」 등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 여러 지방에서 수많은 「아리랑」이 있고, 새로운 「아리랑」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항목 「정선아리랑」, 「긴아리랑(서울긴아리랑)」, 「구조(舅調)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서울 · 경기제)」,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해주아리랑」 참고문헌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관련이미지 4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2010 by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Foundation 원본보기 출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창악집성, 2011. 07. 04., 하응백)   ====================================///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아리랑     아리랑 목차 정의 역사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게 된 신민요의 제목 또는 그 이전부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불리던 아리랑 계통의 악곡과 그 이후에 만들어져 불리는 다양한 아리랑 계통 악곡 모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름. 역사 은 ‘아리아리’, ‘아라리’, ‘아라성’, ‘아리랑’ 등의 입타령으로 된 후렴을 수반하는 장절형식의 민요군을 가리키며, 그 제목에 주된 전승 지역의 이름을 붙여 ‘○○아리랑’ 또는 ‘○○아라리’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아리랑 계통 악곡으로는 향토민요로 전승되는 노래를 포함하여 통속민요와 신민요, 나아가 대중가요나 예술가곡 작품으로 만들어진 악곡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 중 통속민요로 전승되는 아리랑은 , , , , , , , 등이 있다. 또한 이들 노래의 가락을 조금 변형하거나 가사를 다양하게 붙여 부르면서 제목을 달리하는 많은 노래들이 전승되고 있다. 함경도의 이나 평안도의 ·를 아리랑계 악곡으로 보려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계 입타령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아리랑 계통 악곡에 넣지 않는다. 오늘날 아리랑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악곡은 경기민요의 하나인 이다. 이 곡은 1926년 나운규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졌다. 그 이전과 이후의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또는 이라 불리다가, 성경린·장사훈의 『조선의 민요』(1949)에서부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내용 다양한 갈래의 아리랑계 악곡 중 향토민요로 전승되는 것은 강원도 지역의 노래들이다. 강원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 등으로 불리는 노래가 널리 전승된다. 3소박 3박을 기본 리듬으로 하고, 메나리토리의 선율로 구성된 이들 악곡은 비교적 느리게 불리기 때문에 흔히 라 부른다. 강원도의 중에서는 정선 지방의 노래가 널리 알려져서 흔히 이 노래를 또는 이라 부른다. 정선 지역에서는 를 부르다가 중간에 해학적인 내용을 담아 사설을 길게 확대하고, 이를 빠른 속도로 촘촘하게 엮어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노래를 라 한다. 반면에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2소박과 3소박으로 구성된 혼소박 리듬의 가 등의 노동요로도 불린다. 이 노래는 강원 영서 지역뿐만 아니라 경기도 동부와 충청북도, 경상도 북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불리고 있다. 오늘날 전승되는 아리랑계 악곡 중 향토민요(토속민요)로 확고한 전승 기반을 지닌 노래는 강원도에 바탕을 둔 위의 세 가지 아리랑이다. 따라서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의 원형은 이들 세 아리랑이라 할 수 있다. 강원도 지역에 전승되던 향토민요 아라리계 악곡들이 조선 후기에 유희요로 통속화되면서 후렴의 ‘아라리’ 또는 ‘아리아리’라는 말이 ‘아리랑’이라는 말로 변하여 , , 등으로 그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들이 경기 명창들의 공연용 악곡으로 수용되면서 은 , 은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강원도 정선 지방에서 향토민요로 불리는 과 경기 명창들이 부르는 은 사설을 엮어 부르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경기 명창들의 노래를 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의 경우는 전문 음악인인 경기 명창들이 강원도 지역의 향토민요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공연종목으로 삼은 경우이다. 전문 음악인들은 음악적인 훈련을 거쳐 뛰어난 음악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악어법의 노래도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부를 수 있으나, 음악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서민·대중은 다른 지역의 음악어법으로 된 노래를 그대로 부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강원도 지역의 아리랑계 악곡들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음악어법이 변화되어 새로운 노래를 만들게 되는데, 이 같은 변화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는 조선 말기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따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자, 강원도 지역의 인력도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목재의 주된 생산지였던 강원도에서는 다량의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서 남한강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서울 지역으로 수송할 인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무렵 대표적인 뗏목의 출발 지역인 강원도 정선 지역의 인력이 대거 한양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강원도의 향토민요 아리랑이 서울·경기 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의 아리랑이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지면서 본래 강원도의 음악어법인 메나리토리로 짜였던 노래가 서울 지역의 보편적인 음악어법인 경토리(진경토리)로 변화되어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1896년 헐버트H. Hulbert, 1863~1949가 채보한 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현재 경기 통속민요 중 이라는 곡명으로 전승되는 곡이 헐버트 채보의 과 같은 곡임을 볼 때, 이 곡은 19세기 말경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흔히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의 전승 과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곡은 영화 음악인 이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이 곡은 나운규 감독이 단성사 악단에 편곡을 의뢰하여 완성한 것이라 한다. 편곡자는 당시 단성사 극장의 변사이자 영화감독이었고, 작곡가이기도 하였던 김영환金永煥, 1898~193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운규는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청진까지 이어지는 철도 공사를 위하여 남쪽에서 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가락을 기억하였다가 이를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하는데, 영화 음악 의 후렴 선율을 살펴보면 강원도 지역의 선율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즉 메나리토리로 된 후렴 구절의 선율을 경토리로 변화시킨 것이 영화 음악 후렴구의 선율과 같다. 결국 나운규가 고향에서 들었다고 하는 선율은 함경도의 남쪽인 강원도 지역의 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강원도 지역의 메나리토리 곡조인 이 서울지방의 진경토리로 변화되어 경기민요 이 되었고, 강원도 이 전문 음악가의 편곡을 통하여 영화 음악 이 된 것이다. 그런데 메나리토리 구성음 중 최저음이 종지음이 되는 는 진경토리에 잘 맞았지만, 메나리토리의 중간음 ‘라’로 종지하는 는 진경토리와 달리 ‘솔·라·도·레·미’의 5음 음계 중 중간음인 ‘도’가 종지음이 되어 마치 서양 음악의 5음 음계 도선법, 즉 일본 음악의 요나누키 장음계와 같은 음계 구조를 갖게 되었다. 영화 의 대중적인 인기와 더불어 영화 음악 도 짧은 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로 민족적인 감성의 표현인 동시에, 피압박 민족의 저항의식까지를 드러내는 노래로 한민족의 정서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녹음된 유성기 음반의 아리랑 곡조들은 서양 악기의 반주에 창가식 창법으로 불렀으며, 전통민요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창법이나 시김새 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영화 음악 은 그 초기에는 민요라는 인식보다는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음악 은 대중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하고, 경기민요의 일반적인 특성인 5음 음계 진경토리와 구성음을 공유한다는 음악적 유사성을 더하여 ‘신민요’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전통음악을 연주하던 민요 명창들이 을 자신들의 공연 종목으로 수용하고, 유성기 음반에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과의 구별을 위하여 이 곡을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의 ‘본조’란 모든 아리랑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요 명창들이 부르는 통속민요 아리랑계 악곡 중 서울 지방의 음악어법을 지닌 주된 아리랑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을 떠나 해외로 이주한 동포들은 고향 땅을 떠나던 무렵에 전국적으로 불리던 을 조국의 상징처럼 여기게 되었으며, 타향에서 고향을 떠 올릴 때면 으레 아리랑을 부르면서 망향의 한을 달랬다. 이후 아리랑은 한민족 해외 이주민들에게는 조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제2의 국가처럼 온 한민족의 민요를 대표하는 노래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기 명창들은 이나 등의 노래를 음반에 남기기도 하였으며, 강원도의 곡조를 바탕으로 이라는 이름의 노래를 유성기 음반에 녹음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기 명창들은 혼소박계통의 악곡인 강원도 를 수용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오늘날의 통속민요 이 되었다. 한편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박남포는 의 선율을 차용하고, 밀양 지역의 설화 등을 토대로 노랫말을 붙여 을 만들었다. 다른 아리랑계 악곡에 비하여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의 이 곡은 광복군의 군가처럼 불리면서 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의 모곡으로 보이는 은 오늘날 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으나, 해주 지방과의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대금 명인 박종기는 1930년대에 의 곡조를 짰는데, 이 곡은 전라도 지역에서 불리던 향토민요 의 선율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후렴을 붙인 것이다.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는 저마다 자기 고장의 전설이나 유명한 소재를 노랫말로 지어 다양한 아리랑 선율에 얹어 부르면서, 자기 고장의 이름을 앞에 넣어 ‘○○아리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제목의 수 많은 아리랑이 있으나, 이들 악곡의 모곡이 된 것은 주로 , , , 등이다. 특징 및 의의 강원도의 향토민요였던 아리랑 계통 노래가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지고, 영화 의 주제곡으로 거듭나면서, 한민족의 민요를 대표하는 악곡이 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아리랑계 악곡을 생성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수많은 아리랑계 악곡의 모곡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의 차원을 넘어 세계 속에서 한국과 한민족을 상징하는 문화코드가 되었으며, 이제 아리랑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민요 아리랑에 대한 북한의 인식 태도(김영운, 한국 음악연구54,한국국악학회, 2013), 북한에 전승되는 민요 아리랑 연구(김영운, 한국민요학39, 한국민요학회, 2013),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이보형, 한국민요학5, 한국민요학회, 1997), 아리랑소리의 생성문화 유형과변동(이보형, 한국민요학26, 한국민요학회, 2009), 아리랑 형성과정에 대한음악적 연구(김영운, 한국문학과 예술7,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1) 집필자 김영운(金英云) 갱신일 2019.01.22.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아리랑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원본보기 목록구분 대표목록 등재연도 2012년 국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목차 지역 정보 본문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전승 정보 무형유산의 의미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은 역사적으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일반 민중이 공동 노력으로 창조한 결과물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여음(餘音)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해온 두 줄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 보편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한편, 지극히 단순한 곡조와 사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흥적인 편곡과 모방이 가능하고, 함께 부르기가 쉽고, 여러 음악 장르에 자연스레 수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아리랑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새로운 사설을 지어 낼 수 있고, 그런 활동을 통해 아리랑의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는 계속 늘어나고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아리랑은 한민족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애창되며 사랑받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지방 민요인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리랑은 또한 영화·뮤지컬·드라마·춤·문학 등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와 매체에서 대중적 주제이자 모티프로 이용되어 왔다.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한민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아리랑은 심금을 울리는 한민족의 노래이다. 지역 정보 아리랑은 한민족의 가장 대표적 민요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랑은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 지역의 ‘진도아리랑’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 등 3가지이다. 아리랑은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어 세계 어디에 거주하든 한국인과 대한민국, 또 한국인과 다른 한국인 사이를 이어주는 문화의 탯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적인 연결 끈은 특히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이주하여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본·중국·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된다. 아울러 비교적 최근에 이민을 통해 이주한 브라질·독일·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아리랑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본문 한민족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리랑을 알고 즐겨 부른다. 아리랑은 단일한 하나의 곡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곡조로 전승되었다. 전문가들은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의 수가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여음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의 사설로 발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아리랑의 가사(사설)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음)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사설)” 아리랑의 사설은 특정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 일반 민중이 공동으로 창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랑, 연인과의 이별, 시집살이의 애환, 외세에 맞선 민족의 투쟁 등 민중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노랫말에 담았다.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라는 영역을 넘어 초현대적인 한국 문화의 모든 장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리랑은 발라드·로큰롤·힙합 등의 다양한 현대의 대중가요 장르는 물론이고 관현악곡 등으로도 편곡되어 폭넓은 청중에게 호소하며 한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의 비공식적 국가(國歌)로 묘사되기도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는 2011년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아리랑 선율을 주제로 편곡한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피겨스케이트 프로그램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아리랑은 영화·연극·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상품명이나 식당 이름, 방송국 회사 이름 등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아리랑은 한민족이 보편적으로 애창하는 곡이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지방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아리랑의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적·사적 영역에서의 노력은 동시다발적이고 열정적이며 또한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 정부 및 각 지방 자치단체는 예능보유자 및 기능보유자 또는 단체를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또는 시·도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으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이들의 기예가 전승될 수 있도록 전수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전수 단체 및 개인은 미래 세대에게 아리랑을 전승할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아울러 지역의 많은 민간단체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존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대부분 해당 지역의 명창이 주도하고 있는 아리랑 보존회들은 전문 소리꾼, 그리고 특별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있다. 아리랑 보존회는 공연, 전수교육, 홍보, 해당 지방 아리랑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면서 해당 아리랑의 보존 및 전승에 힘쓰고 있다. 이들 단체 중에서도 특히 정선아리랑 보존회, 진도아리랑 보존회, 밀양아리랑 보존회 등이 대표적이다. 전승 정보 한국인이라면 요람에서부터 아리랑을 배운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로서 아리랑의 폭넓은 인기는 일상생활에서의 지속적인 노출과 광범위한 공교육 프로그램의 힘이 컸다. 명창, 각종 보존회, 전문 음악가, 초등학교·중학교 및 국립국악원 등은 아리랑의 보급 및 전승을 위한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의 노력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중의 요구와 열정이라는 원동력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국가가 지원하는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및 전승 프로그램은 아리랑의 세대 간 전승을 위해 주력한다. 국가 공인 예능보유자들은 주민의 열정적인 참여 속에 1주일에 1번 또는 2번 단위로 정규 전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매년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고 선보임으로써 사회의 문화적 소외 계층에게도 다가가고 있다. 공교육 기관에서도 아리랑을 광범하게 교육하고 있다. 아리랑은 초등학교·중학교 음악 수업 및 방과 후 활동의 의무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각 지방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역 문화센터에서는 아리랑 보존회와 명창을 초청하여 아리랑을 교육하거나 관련된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최고 기량의 한국 전통 음악인들의 전당인 국립국악원은 참신한 전통 음악 축제를 통하여 아리랑 홍보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그 분원인 국립부산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진도 소재) 역시 수준 높은 공연을 통하여 국내외 아리랑의 홍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형유산의 의미 2006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민족문화상징’ 중 하나로 아리랑을 선정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가장 널리 불리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근대 이전의 아리랑은 전통 사회의 서민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개인적·국가적 차원의 고난, 가슴속에 품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한국인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가락을 타고 전달되는 이러한 희망과 바람 덕분에 아리랑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으로서 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오늘날 아리랑은 한민족의 통합에 있어서도 한몫 하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대표팀은 올림픽 경기장에 공동 입장하면서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2002년 한국 - 일본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열정적인 응원단체인 ‘붉은 악마’는 아리랑을 날마다 불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매순간에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을 지닌 아리랑은 심금을 울리는 민족의 노래라고 여겨져 왔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를 때마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한편, 고국의 동포들은 각 지방의 아리랑이 해당 지방의 정체성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아리랑은 또한 영화·뮤지컬·드라마·춤·문학 등을 포함하는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와 매체에서 대중적인 주제이자 모티프로 이용되어 왔다. 해외에서 일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열풍과 함께 오늘날의 아리랑은 한국을 가장 명확하게 대표하는 문화 상징이자 음악적 영감의 순수한 원천으로서 전 세계인에서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관련이미지 4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2009 by Jeongseon Arirang Research Institute 원본보기 출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영/불어 원문))  
7406    [시학소사전] - "서사시"란?... 댓글:  조회:3457  추천:0  2019-10-30
두산백과 서사시   [ epic음성듣기 , 敍事詩 ] 요약 일반적으로 발흥기·재건기의 민족이나 국가의 웅대한 정신을 신(神)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읊은 시. 어느 민족이나 고유의 신화나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서사시도 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사시의 흐름은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시(詩)로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유사 이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시로서는 BC 800년경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이들 작품은 다 같이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한 그리스 전체의 국민적 서사시일 뿐만 아니라 그후 모든 서사시의 전형이 되었으며 현대에까지 서유럽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헤시오도스에 의해서도 읊어졌는데 '테바이 이야기' 또는 '아루호(號)의 원정' 등이 서사시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로마에서는 베르길리우스(BC 1세기)의 《아에네이스》가 유명한데 로마 문학 황금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중세에서는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인 《롤랑의 노래》, 북유럽의 《에다》, 영국의 《베어울프》 그리고 독일의 비극적 국민시 《니벨룽겐의 노래》가 있다. 《에다》는 북유럽 신화와 영웅전설을 집대성한 것이며 《베어울프》는 주인공이 괴물과 화룡(火龍)을 퇴치하는 무용담이다. 영국에는 아더왕의 전설에서 딴 맬로리의 《아더왕의 죽음》과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또 단테의 《신곡(神曲)》과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은 세계문학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두 작품이 모두 특이한 이야기시인데 《신곡》은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부로 되어 있고 단테 자신이 처음에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다음에는 애인 베아트리체의 선도를 받아 그들의 미지의 세계를 순력(巡歷)하는 이야기이며, 《실낙원》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원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종교시이다. 근세에는 괴테의 《헤르만과 도로테아》, 바이런의 《돈 후안》, 스콧의 《호수의 여인》, 하이네의 《아타 트롤》 등의 발라드와 이야기시가 있으나 이들 작품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적 존재라고 하는 편이 옳으며, 서사시 자체는 사회의 근대화에 따라 산문소설로 변용한다. 한국의 서사시로는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대 작품으로는 서사시다운 것이 거의 없으나 3·1 운동 이후 한때 유행한 김동환(金東煥)의 《국경(國境)의 밤》 《승천(昇天)하는 청춘》이 있고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김용호(金容浩)의 《남해찬가(南海讚歌)》 등이 서사시에 가깝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사시 [epic, 敍事詩] (두산백과)  
7405    한국 최초의 서사시 시인 - 김동환 댓글:  조회:4274  추천:0  2019-10-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동환   [ 金東煥 ] 이미지 크게보기 1901∼? 시인.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파인(巴人), 취공(鷲公), 김파인(金巴人), 파인생(巴人生), 초병정(草兵丁, 창랑객(滄浪客)), 시로야마 세이쥬(白山淸樹)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1년 9월 27일 ~ 미상 성격 시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지 함경북도 경성 성별 남 본관 강릉(江陵) 저서(작품) 국경의 밤, 북청 물장수, 우리들은 7인, 오호 태평양 상의 군신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1901∼?. 시인·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파인(巴人)이다. 아버지 김석구(金錫龜), 어머니는 마윤옥(馬允玉)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필명으로는 강북인(江北人), 초병정(草兵丁), 창랑객(滄浪客), 백산청수(白山淸樹) 등을 썼다. 아명은 삼룡(三龍)으로, 1926년 10월 동환(東煥)으로 개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공립 경성보통학교(鏡城普通學校)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6년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입학했다. 1920년 10월 중동중학교 4학년 재학 당시 고학생 갈돕회 현상모집에서 그가 쓴 시 「이성규(異性叫)와 미(美)」가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1등에 당선되어 『학생계』에 실렸다. 1921년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4년 5월 『금성』에 시「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로 문단에 등단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 함경북도 나남에 있는 북선일일보사(北鮮日日報社) 조선문판 기자로 복무했고,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어 1925년 5월까지 근무했다. 1925년 3월 첫 시집인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1925년 6월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1925년 8월부터 카프(KAR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외일보』 사회부기자,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일보』 사회부 차창을 지냈다.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종합 잡지 『삼천리(三千里)』를 간행했다.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조선가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삼천리』의 자매지로 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했다. 1939년 3월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의 실해위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참여해 간사를 맡았다. 1940년 5월 『애국대연설집』을 편집·발간했다. 1941년 1월 도쿄의 모던일본사가 주관하는 제1회 조선문학상의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같은 달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이 되었다. 8월에는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상무간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경기도 준비위원, 임전대책협력회 준비위원과 상임위원을 맡았으며,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가 되었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경성부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이 공동 주관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의 강사로 선출되어 경성부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5월 『삼천리』를 『대동아(大東亞)』로 개명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위원과 참사로 활동했고, 1943년 8월 징병제가 시행되자 『매일신보』에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발표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1944년 7월 『조선동포에게 고함』을 편찬·간행했으며, 같은 해 9월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6월 대화동맹의 자매당인 대의당(大義黨)의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2월 조만식이 이끈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8월 여러 기행문을 엮은 『삼천리강산』을 편찬해 발간했다. 1948년 5월 삼천리사를 재차 창립하고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자수했고,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문단활동으로는 1925년 제1시집 『국경의 밤』과 제2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靑春)』을 간행했고, 1929년 주요한(朱耀翰)·이광수(李光洙)와 함께 제3시집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을 펴냈다. 이어 1942년 제4시집 『해당화(海棠花)』를 발간했다. 납북된 후 1962년 최정희(崔貞姬)가 그의 유고를 모아 제5시집 『돌아온 날개』를 펴냈다. 저작물로는 1932년 『삼천리』에 실린 논설들을 모은 산문집 『평화(平和)와 자유(自由)』, 1936년 시·소설·평론을 함께 묶은 『조선명작선집(朝鮮名作選集)』, 1941년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半島山河)』, 1952년 수필집 『꽃피는 한반도(韓半島)』 등이 있다. 김동환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78∼35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문학론』(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 2002) 『파인 김동환 탄생 100주년 기념집』(김여익, 선인, 2002) 『아버지 파인(巴人) 김동환』(김영식, 국학자료원, 1994) 『한국근대문인대사전』(권영민, 아세아문화사, 1991) 『친일파군상』(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1948) 「일제 강점 말기 지원병제와 김동환의 시국 대응」(김승구, 『현대문학의 연구』39, 2009) 관련이미지 5                               이미지 이전 승천하는 청춘 / 김동환김동환의 서사시집. A6판. 180면. 작자의 제2시집으로 1925년 시문학사에서 간행되었다. 전 7부 61절로 짜여진 이 시집은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서사시로만 엮어져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김동환 [金東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404    한국의 최초의 서사시 ㅡ "국경의 밤"... 댓글:  조회:2368  추천:0  2019-10-30
한국의 최초의 서사시 ㅡ "국경의 밤"  작자 소개 김동환(1901-?) 시인. 호 파인(巴人). 창씨명(創氏名)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함북 경성(鏡城) 출생. 중동(中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과 수학,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지에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로 일컬어지는 대표작이며 동명 시집인 을 간행, ꡐ우리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다크호스ꡑ라는 평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암담한 현실에 놓인 민족의 설움과 고통을 노래한 그는, 초기에는 당시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에 가까운 시를 썼으나, 차츰 향토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을 토로한,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여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한때 와 의 기자로 일을 하다가 1929년 월간지 를 창간 주재하였고, 1938년 을 발간하여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39년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 등을 에 실어 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한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으로 친일매족의 선봉에 나서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이다. 저서에 , (이광수․주요한 공저), 등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소설과 평론, 수필 등이 있다.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사시 배경 : 시간적(밤). 공간적(북쪽 국경 지방)  어조 : 두만강변 주민의 삶의 애환을 서술하는 북녘 사투리의 남성적 어조 등장 인물  순이 - 젊은 아내  병남 - 순이의 남편  청년 - 옛날 순이와 사랑을 나누던 사나이  표현 : 설명과 대화를 통한 산문적 표현 특징 : 국경 지방에서 밀수출을 하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비극적 삶과 순이의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구조 : 실연(失戀)과 상부(喪夫)의 이중 구조 구성 :  제1부(현재. 저녁→밤. 두만강변) 1장-7장 남편의 밀수 길을 근심함 8장-10장 미지의 청년이 마을을 배회함 11장 요약 반복 12장-16장 순이의 옛 사랑 회상 17장-27장 순이와 청년과의 재회 제2부(과거. 회상. 산곡 마을) 28장-35장 순이의 혈통인 재가승(在家僧)의 내력 36장-46장 순이와 청년의 사랑 47장-57장 신분의 장벽으로 인한 청년과의 이별 제3부(현재. 밤→새벽→낮. 두만강변→산곡 마을) 58장 순이와 청년의 감격적인 재회. 청년의 구애를 거절함 59장-62장 남편 병남이 마적의 총에 맞아 시체로 돌아옴 63장-72장 이튿날 고향(산곡)에 남편의 시신을 매장함  제재 : 일제 치하 두만강변 주민의 애환 주제 : 어느 여인의 슬픈 사랑과 비극적 삶.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애환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 출전 : (1925) 이해와 감상 “국경의 밤”은 전체 3부 7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김동환의 서사적 장시이다. 국경 지대인 두만강변의 작은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현재-과거-현재’의 시간 구조를 채택하여, 밀수꾼 병남(丙南)과 그의 아내 순이, 그리고 순이의 첫사랑이었던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북국의 겨울밤이 주는 암울한 이미지를 통해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고통과 불안을 형상화했다는 점에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 시대 많은 우리 백성들은 만주에 가서 살았다. 강제로 이주되어 간 사람도 있었고, 독립 투쟁을 하기 위해 간 사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였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 체험을, 국경 지방 한겨울 밤의 삼엄하고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극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전편에는 순이, 병남, 청년(옛 애인) 간, 또는 순이와 상황 간의 갈등이 순이의 내부에서 관념적, 낭만적으로만 일어나고 있어, 서사시로서의 특징인 영웅화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제재나 주제가 개인 단위의 정서 표출에 있지 않고 민족사와 그 운명에 대해 치열한 관심을 보여, 1920년대 감상적(感傷的)인 서정의 세계와 획을 긋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작품 전편의 줄거리  1부 (1 - 27장) : 설이 가까운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두만강 유역의 국경 마을에서 한 여인(순이)이 소금 밀수출 마차를 끌고 강 건너로 간 남편(병남)을 걱정하고 있다. 저녁 무렵, 한 청년이 나타나 그 여인의 오두막을 두드리며 주인을 찾는다.  2부 (28 - 57장) : 그 청년은 여인이 어렸을 때 함께 소꿉놀이 하던 친구로, 두 사람은 차차 연정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하였으나, 재가승(在家僧)인 여진족의 후예인 순이는 다른 혈통의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고, 사랑 잃은 소년은 마을을 떠난다. 그 소년이 8년 뒤에 순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3부 (58 - 72장) : 청년은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순이에게 다시 구애(求愛)의 손을 내미나, 순이는 남편에 대한 도리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들어 이를 거절한다. 그 때, 밀수출을 나갔던 그녀의 남편은 마적들의 총을 맞고 죽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시 전문 (전문은 아래에 있음) 1장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명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2장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 산림실이 화부(花夫)떼 소리언만. 3장  마지막 가는 병자의 부르짖은 같은 애처로운 바람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못 건넌 채 얻어맞은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가며 운다 - 겨울에도 한 삼동,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긋는 소리언만, 4장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파수막)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빨-간 불빛이 보인다. 까-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을 부르면서. 5장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 벌에는 외가지 백양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안고 춤을 춘다, 가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놓으면서 - 6장  전선이 운다, 잉 - 잉 - 하고  국교(國交)하러 가는 전신줄이 몹시도 운다. 집도 백양도 산곡도 외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 이렇게 춥길래 오늘따라 간도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장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밤마다 밤마다 외로이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장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 회령서는 벌써 마지막 차고동이 텄는데. 7장  봄이 와도 꽃 한 폭 필 줄 모르는  간 건너 산천으로서는 바람에 눈보라가 쏠려서 강 한판에 진시왕릉 같은 무덤을 쌓아놓고는 이내 안압지를 파고 달아난다, 하늘땅 모두 회명(晦暝)한 속에 백금 같은 달빛만이 백설로 오백 리, 월광으로 삼천 리, 두만강의 겨울밤은 춥고도 고요하더라. 8장  그날 저녁 으스러한 때이었다 어디서 왔다는지 초조한 청년 하나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나 오르명내리명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 "달빛에 잠자는 두만강이여! 눈보라에 깔려 우는 옛날의 거리여, 나는 살아서 네 품에 다시 안길 줄 몰랐다, 아하, 그리운 옛날의 거리여!" 애처로운 그 소리 밤하늘에 울려 청상과부의 하소연같이 슬프게 들렸다. 그래도 이 마을 백성들은 또 '못된 녀석'이 왔다고, 수군거리며 문을 닫아 매었다. 9장  높았다 - 낮았다 - 울었다 - 웃었다 하는 그 소리 폐허의 재 속에서 나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외우는 백조의 노래같이 마디마디 눈물을 짜아내었다, 마치 "얘들아 마지막 날이 왔다"하는 듯이 "모든 것이 괴멸할 때가 왔다"하는 듯도. 여럿은 어린애고 자란 이고 화롯불에 마주 앉았다가 약속한 듯이 고요히 눈을 감는다. 하나님을 찾는 듯이 - "저희들을 구해 줍소서" 그러다가 발소리와 같이 "아하" 부르는 청년의 소리가 다시 들리자, "에익! 빌어 먹을 놈!"하고 침을 배앝는다, 그 머리로서는 밀정하는 소리가 번개치듯 지나간다, - 그네는 두려운 과거를 가졌다 생각하기에도 애처로운 기억을 가졌다. 그래서 그물에 놀란 참새처럼 늘 두려운 가슴을 안고 지내간다, 불쌍한 족속의 가슴이 늘 얼어서! 10장  청년의 노래는 그칠 줄 몰랐다, "옛날의 거리여! 부모의 무덤과 어릴 때 글 읽던 서당과 훈장과 그보다도 물방앗간에서 만나는 색씨 사는 고향아, 달빛에 파래진 S촌아!" 여러 사람은 더욱 놀랐다 그 대담한 소리에 마치 어느 피 묻은 입이, '리벤지'를 부르는 것 같아서, 촌 백성들은 장차 올 두려운 운명을 그리면서 불안과 비포(悲怖)에 떨었다, 그래서 핫! 하고 골을 짚은 채 쓰러졌다. 11장  바람은 이 조그마한 S촌을 삼킬 듯이 심하여간다 S촌뿐이랴 강안(江岸)의 두 다른 국토와 인가와 풍경을 시름없이 덮으면서  벌부(筏夫)의 소리도, 고기잡이 얼음장 그는 소리도, 구화(溝化)불에 마주선 중국 순경의 주정소리도,수비대 보초의 소리도 검열 맡은 필름같이 뚝뚝 중단되어가면서, 그래도 이 속에도 어린애 안고 우는 촌 처녀(처녀)의 소리만은 더욱 분명하게  또 한 가지 방랑자의 호소도 더욱 뚜렷하게, 울며, 짜며 한숨짓는 이 모든 규음(揆音)이 바숴진 피아노의 건반같이 산산이 깨뜨려놓았다, 이 마을 평화를 - 12장  처녀(妻女)는 두렵고 시산하고 참다못하여 문을 열고 하늘을 내다보았다 하늘엔 불켜논 방안같이 환-히 밝은데 가담가담 흑즙 같은 구름이 박히어 있다. "응, 깊고 맑은데-"하고 멀리 산굽이를 쳐다보았으나 아까 나갔던 남편의 모양은 다시 안 보였다 바람이 또 한 번 포효하며 지난다 그때 이웃집으로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우물가 버드나무 째지는 소리 요란히 난다 - 처마 끝에 달아맨 고추 다램이도 흩어지면서 그는 "에그 추워라!"하고 문을 얼른 닫았다. 13장  먼 길가에선 술집막(幕)에서 널문 소리 들린다, 이내 에익… 허… 허… 하는 주정꾼 소리도 "춥길래 오늘 저녁 문도 빨리 닫는가보다"하고 속으로 외우며 처녀(妻女)는 돌부처같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근심 없는 사람 모양으로. 이렇게 시산한 밤이면은 사람 소리가 그리우니 웩 - 웩 - 거리고 지나는 주정꾼 소리도. 14장  처녀(妻女)는 생각하는 양 없이 출가한 첫해 일을 그려보았다 - 밤마다 밤마다 저 혼자 베틀에 앉았을 때, 남편은 곤히 코구르고 - 고요한 밤거리를 불고 지나는 머슴아이의 옥퉁소 소리에 구곡의 청제비 우는 듯한 그 애연한 음조를 듣고는 그만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하였더니 그저 섧고도 안타까워서 - 산으로 간 남편이 저물게 돌아올 때 울타리 기대어 먼 산기슭을 바라보노라면 오시는 길을 지키노라면 멀리 울 리는 강아지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더니 갓난애기의 첫해가 자꾸 설워서 - 그보다도 가을밤 옷 다듬다 뒷서당집 노훈장의 외우는 "공자 왈, 맹자 왈"소리에 빨래 다듬이도 잊고서 그저 가만히 엎디어 있노라면 마을돌이로 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구운 감자 갖다주는 것도 맛없더니 그래서 그래서 저 혼자 이불 속에서 계명(鷄鳴) 때 지나게 울기도 하였더니, "아. 옛날은 꿈이구나!"하고 처녀(妻女)는 세상을 다 보낸 노인같이 무연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녀(妻女)는 운다, 오랫동안을 사내를 속이고 울던 마음이 오늘밤 따라와 터지는 것 같아서, - 그는 어릴 때 아직 머리태를 두었을 때 - 도라지 뿌리 씻으로 샘터에 가면 강아지 몰고 오는 머슴아이, 만나던 일 갈잎으로 풀막을 짓고 해 지기도 모르게, 물장구 치고 풀싸움하고 그러던 일, 그러다가 처녀(妻女)는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옳아, 그이, 그 언문 아는 선비! 어디 갔을까?" 하고 무릎을 친다. 그리고 입속으로 "옳아, 옳아, 그이!"하고는 빙그레 웃는다, 꿈길을 따르면서 - 옛날을 가슴에서 파내면서. 15장  바깥에선 밤개가 컹컹 짖는다. 그 서슬에 "아뿔사 내가 왜?"하고 처녀(妻女)는 황급히 일어나 문턱에 매어달린다, 죄 되는 일을 생각한 것같이. 그러나 달과, 바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산 봉화당 꼭지에선 성좌들이 진치고 한창 초한(楚漢)을 다투는데 - 16장  "아하, 설날이 아니 오고, 또 어린애가 아니었더면 국금(國禁)을 파하고까지 남편을 이 한밤에 돈벌이로 강 건너 외땅으로 보내지 않았으련만 무지한 병정에게 들키면 그만이지. 가시던 대로나 돌아오시랴. 에그, 과부는 싫어, 상복 입고 산소에 가는 과부는 싫어" 빠지직빠지직 타오르는 심화에 앉아서 울고 서서 맴도는 시골 아낙네이 겨울밤은 지리도 하여라. 다시는 인적기조차 없는데 뒷산곡에는 곰 우는 소리 요란코. 17장  이상한 청년은 그 집 문간까지 왔었다, 여러 사람의 악매(惡罵)하는 눈살에 쫓겨 뼉다귀 찾는 미친 개모양으로 우줄우줄 떨면서 모막살이집 문 앞까지 왔었다, 누가 보았던들 망명하여 혼 이방인이 보리(補吏)의 눈을 피하는 것이라 않았으랴. 그는 돌연 "여보, 주인!" 하고 굳어진 소리로 빽 지른다. 그 서슬에 지옥서 온 사자를 맞는 듯이 온 마을이 푸드득 떤다, 그는 이어서 백골을 도적하러 묘지에 온 자처럼 연해 눈살을 사방에 펼치면서 날카로운 말소리로 "여보세요 주인! 문을 열어주세요" 18장  딸그막딸그막 울려나오는 그 소리, 만인의 가슴을 무찌를 때 모든 것은 기침 한 번 없이 고요하였다. 천지 창조 전의 대공간같이…… 그는 다시 눈을 흘겨 삼킬 듯이 바라보더니 "여보, 주인! 주인! 주인?" 아, 그 소리는 불쌍하게도 맥이 풀어져 고요히 앉아 있는 아내의 혼을 약탈하고 말았다. 사내를 사지(死地)에 보내고 정황없어 하는 아내의 - 19장  처녀(妻女)는 그 소리에 놀랐다. 그래서 떨었다 밖으로선 더 급하게 "나를 모르세요? 내요! 내요!" 하고 계속하여 난다, 그러면서 주먹이 똑 똑 똑 하고 문지방에 와 맞힌다. 처녀(처녀)의 가슴도 똑똑똑 때리면서 젊은 여자를 잠가둔 성당 문을 똑똑똑 두다리면서. 20장  처녀(妻女)는 어떨 줄 몰랐다, 그래서 거의 기절할 듯이 두려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남편이 떠날 때, 동리 구장이 달려와 말모개를 붙잡고 "오늘 저녁엔 떠나지를 마오, 부디 떠나지를 마오, 이상한 청년이 나타나 무슨 큰 화변을 칠 것 같소, 부디 떠나지를 마오, 작년 일을 생각하거든 떠나지를 마오." 그러길래 또 무슨 일이 있는가고, 미리 겁내어 앉았을 때 그 소리 듣고는 그는 에그! 하고 겁이 덜컥 났었다. 죽음이 어디서 빤-히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몸에 오소속 소름이 친다. 21장  그의 때리는 주먹은 쉬지 않았다, 똑 - 똑 - 똑 - "여보세요, 내요! 내라니까" 그리고는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있다, 한참을. "아, 내라니까, 내요, 어서 조금만" "아하, 아하, 아하 -" 청년은 그만 쓰러진다. 동사(凍死)하는 거지 추위에 넘어지듯이, 그때 처녀(妻女)는 제 가슴을 만지며 "에그, 어쩌나, 죽나보다 -"하고 마음이 쓰렸다. "아하, 아하, 아하, -" 땅속으로 꺼져하는 것 같은 마지막 소리 차츰 희미하여가는데 어쩌나! 어쩌나? 아하 - "내라니까! 내요, 아, 조금만……" 그것은 확실히 마지막이다. 알 수 없는 청년의 마지막 부르짖음이다 - 이튿날 첫아침 흰 눈에 묻힌 송장 하나가 놓이리라. 건치에 말아 강물 속에 띄워보내리라,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방랑자를 - 처녀(妻女)는 이렇게 생각함에, "에그 차마 못할 일이다!"하고 가슴을 뜯었다. 어쩔까, 들려놓을까? 내 버려둘까? 간첩일까? 마적일까? 아니 착한 사람일까? 처녀는 혼자 얼마를 망설이었다. "아하, 나를 몰라, 나를- 나를, 이 나를……" 그 소리에 그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꼭 한 번 들어본 것 같기도 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물귀신에게 홀린 제주도 해녀같이 그래서 문고리를 쥐었다. 금속성 소리 딸까닥하고 난다, 그 소리에 다시 놀라 그는 뒷걸음친다. 22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청년이었다. 그는 창살에 넘어지는 아낙네의 그림자를 보고는 미친 듯, 일어서며, 다시 "내요 - 내요 -" 부른다. 익수자(溺水者)가 배를 본 듯, 외마디 소리, 정성을 다한 - 23장  처녀(妻女)는 그래도 결단치 못하였다, 열지 않으면 불쌍하고, 열면 두렵고, 그래서 문고리를 쥐고 삼삼 돌았다. "여보세요, 어서 조금만 아하……" 그러면서 마지막 똑똑을 두다린다, 마치 파선된 배의 기관같이 차츰차츰 약하여져가면서 - 24장  처녀(妻女)는 될 대로라듯이 문을 열고 있다, 지켜섰던 바람이 획! 하고 귓볼을 때린다, 그때 의문의 청년도 우뚝 일어섰다 더벅머리에 눈살이 깔리고, 바지에 정갱이 달빛에 석골조상같이 꿋꿋하여진 그 방랑자의 꼴! 25장  어유(漁油)불이 삿!하고 두 사이를 흐른다, 모든 발음(撥音)이 죽은 듯 하품을 친다. "누구세요, 당신은 네?" 청년은 한 걸음 다가서며 "내요, 내요 내라니까 - " 그리고는 서로 물끄러미 치어다본다, 아주 대담하게, 아주 심정(沈精)하게.  26장  그것도 순간이었다 "앗! 당신이 에그머니!"하고 처녀는 놀라 쓰러진다. 청년도 "역시 오랫던가 아, 순이여" 하고 문지방에 쓰러진다. 로단이 조각하여논 유명한 조상같이 둘은 가만히 서 있다, 달빛에 파래져 신비하게, 거루하게. 27장  아하 그리운 한 옛날의 추억이어. 두 소상(塑像)에 덮이는 한 옛날의 따스한 기억이어! 8년 후 이날에 다시 불탈 줄 누가 알았으리. 아, 처녀와 총각이어, 꿈나라를 건설하던 처녀와 총각이어! 둘은 고요히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간 따스한 늘을 들춘다 - 국경의 겨울밤은 모든 것을 싸안고 달아난다. 거의 10년 동안을 울며불며 모든 것을 괴멸시키면서 달아난다. 집도 헐기고, 물방앗간도 갈리고, 산도 변하고, 하늘의 백랑성 위치조차 조금 서남으로 비틀리고 그러나 이 청춘남녀의 가슴속 깊이 파묻혀 둔 기억만은 잊히지 못하였다, 봄꽃이 져도 가을 열매 떨어져도 8년은 말고 80년을 가보렴 하듯이 고이고이 깃들었다 아, 처음 사랑하던 때! 처음 가슴을 마주칠 때! 8년 전의 아름다운 그 기억이여! 제2부 28장  멀구 광주리 이고 산기슭을 다니는 마을 처녀떼 속에, 순이라는 금년 열여섯 살 먹은 재가승(在家僧)의 따님이 있었다. 멀구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 게다가 웃울 때마다 방싯 열리는 입술, 백두산 천지 속의 선녀같이 몹시도 어여뻤다. 마을 나무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을 썼다. 될 수 있으면 장가까지라도! 하고 총각들은 산에 가서 '콩쌀금'하여서는 남몰래 색시를 갖다주었다. 노인들은 보리가 설 때 새알이 밭고랑에 있으면 고이고이 갖다주었다. 마을서는 귀여운 색시라고 누구나 칭찬하였다. 29장  가을이 다 가는 어느 날 순이는 멀구 광주리 맥없이 내려놓으며 아버지더러, "아버지, 우리를 중놈이라고 해요, 중놈이란 무엇인데" "중? 중은 웬 중! 장삼입고 고깔 쓰고 목탁 두다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불러야 중이지, 너 안 보았디? 일전에 왔던 동냥벌이 중을" 그러나 어쩐지 그 말소리는 비었다. "그래도 남들이 중놈이라던데"하고, 아까 산에서 나뭇꾼들에게 몰리우던 일을 생각하였다. 노인은 분한 듯이 낫자루를 휙 집어 뿌리며, "중이면 어때? - 중은 사람이 아니라든? 다른 백성하고 혼사도 못하고 마음대로 옮겨 살지도 못하고" 하며, 입을 다물었다가 "잘들 한다. 어디 봐! 내 딸에야 손가락 하나 대게 하는가고" 하면서 말없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낯에는 눈물이 두루루 어울리고, 순이도 그저 슬픈 것 같아서 함께 울었다, 얼마를. 30장  재가승(在家僧)이란 - 그 유래는 함경도 윤관이 들어오기 전, 북관의 육진 벌을 유목(遊牧)하고 다니던 일족이었다. 갑옷 입고 풀투구 쓰고 돌로 깎은 도끼를 메고, 해 잘 드는 양지볕을 따라 노루와 사슴잡이하면서 동으로 서로 푸른 하늘 아래를 수초를 따라 아무데나 다녔다, 이리저리. 부인들은 해 뜨면 천막밖에 기어나와, 산 과일을 따 먹으며 노래를 부르다가 저녁이면 고기를 끓이며 술을 만들어, 사내와 같이 먹으며 입맞추며 놀며 지냈다. 그러다가 청산을 두고 구름만 가는 아침이면 산령에 올라 꽃도 따고, 풀도 꺾고 - 31장  말은 한가히 풀을 뜯고 개는 꿩을 따르고, 하늘은 맑았고, 푸르고 이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이 일족이 잡아서 먹고서, 먹고서 잡아가지고 - 그래서 술을 먹고 계집질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싸움하고 영지를 빼앗고, 암살이 일어나고 - 추장, 무사, 처, 모, 아이,석부(石釜), 초의(草衣) - 이것이 서로 죽고, 빼앗고 없어지고 하는 대상 평화스럽고 살벌한 세대를 오래 보내었다. 32장  새벽이면 추장이 "얘들아 일어나거라!"하는 소리에, 천막 속 한자리에서 잠자던 부부와 부모와 처자와 모든 것들이 이슬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장정은 활을 메고 들에 나가고 처녀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쪼인다. 추장은 연해 싸움할 계획을 하고서 - 일족은 복잡한 것을 모르고 그날 그날을 보내었다. 33장  그네들은 탐탐한 공기를 모르고 성가신 도덕과 예의를 모르고 아름다운 말씨와 표정을 몰랐었다 그저 아름다운 색시를 만나면 아내를 삼고 그래서 어여쁜 자녀를 내어 기르고 밤이면, 달이 떠 적막할 때, 모닥불 옆에서 고기를 구워서는 술안주하여 먹으며, 타령을 하면서 짧은 세상을 즐겁게 보내었다 몇백 년을 두고 똑같이. 34장  그러나 일이 났다. 앞마을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고 떠들 때, 천막에다 여러 곳에서 나많은 장정들이 모조리 석부를 차고 활을 메고 여러 대 누려 먹은 제 땅을 안 뺏기려, 싸움터로 나갔다. 나갈 때면 울며불며 매여달 리는 아내를 물리치면서 처음으로 대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보면서. 남은 식구들은 떠난 날부터 냇가에 칠성단을 묻고 밤마다 빌었다, 하늘에 무사히 살아오라고! 싸움에 이기라고!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엔 슬픈 기별이 왔었다, 싸움에 나갔던 군사는 모조리 패해서 모두는 죽고 더러는 강을 건너 오랑캐령으로 달아나고, - 사랑하던 여자와 말과 서부와, 석퉁소를 내 버리고서. 즉시 고구려 관원들이 왔었다 이 천막촌에 그래서 죽이리 살리리 공론하다가 종으로 쓰기로 하고 그대로 육진에 살게 하였다, 모두 머리를 깎이고 - 35장  몇 백 년이 지났는지 모른다. 고구려 관원들도 갈리고 그 일족도 이리저리 흩어져 어떻게 두루 복잡하여질 때, 그네는 혹 둘도, 모여서 일정한 부락을 짓고 살았다. 머리를 깎고 동무를 표하느라고 남들은 집중이라 부르든 말든 - 재가승(在家僧)이란 그 여진의 유족. 그래서 백정들이 인간 예찬하듯이 이 일족은 세상을 그리워하며 원망하며 지냈다. 순이란 함경도의 변경에 뿌리운 재가승의 따님. 불쌍하게 피어난 운명의 꽃, 놀아도 집중과 시집가도 집중이라는 정칙받은 자! 그러나 누구나 이 중을 모른다, 집주이란 뜻을 그저 집중 집중 하고 욕하는 말로 나뭇꾼들이 써왔다. 36장  마을 색시들은 해 지기까지 하여서 물터에 물 길러 나섰다, 국사당 있는 조그마한 샘터에로, 그곳에는 수양버들 아래,  오래 묵은 돌부처 구월 볕에 땀을 씻으면서 육감을 외우고 앉아 있었다. 지나던 길손이 낮잠 자는 터전도 되고 -  그 아래는 바로 우물, 바가지로 풀 수 있는 우물, 여러 길에 쓰는 샘물터가 있었다. 또 그 곁에는 치재(致齋) 붙이던 베 조각이 드리웠고, 나무꾼이 원두 씨름아여 먹고 간 꺼-먼 자취가 남았고 샘물 우엔 벌레 먹은 버들잎 두어 개 띄웠고 - 37장  "순이는 벌써 머리를 얹었다네, 으아, 우습다 시집간다더라, 청혼왔다구." "부잣집 며느리 된다고, 어떤 애는 좋겠다" 하며 여럿은 순이를 놀려대이며 버들잎을 가려가며 물을 퍼 담았다. "밭도 두 맥 소쉬 있고 소도 세 마리나 있고 흥!" "더구나 새신랑은 글을 안다더라, 언문을"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며 마을 처녀들은 순이를 놀려대었다. 38장  순이는 혼자 속으로 가만히 '시집' '신부'하고 불러보았다. 어여쁜 이름이다 함에 저절로 낯이 붉어진다, "나도 그렇게 된담! 더구나 그 '선비'하고" 그러다가 문득 아까 아버지 하던 말을 생각하고 나는 집중 집중으로 시집가야 되는 몸이다 함에 제 신세 가엾은 것 같아서 퍽 슬펐다. "어찌 그 선비는 집중이 아닌고? 언문 아는 선비가, 에그 그 부잣집은 집중 가문이 아닌고? 가엾어라" 그는 그저 울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여지면서 멀리 해는 산마루를 넘고요 - 39장  얼마나 있었는지 멀리 방축 건너로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하는 나무꾼의 목가가 들릴 때, 순이는 깜짝 놀라 얼른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았다 가을바람이 버들잎 한 쌍을 물동이에 쥐어넣고 - 40장  동무들은 다 가고 범나비 저녁바람 쏘이려 나왔을 때, 하늘이 부르는 저녁 노래가 고요히 떠돌아 향기로운 땅의 냄새에 아울려 순이를 때릴 때, 그는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 성장한 처녀의 가슴에 인생의 노래가 떠돌아 못 견디게 기쁘었다, 그때 어디서 갈잎이 째지며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새알 만한 돌멩이 발충에 와 떨어진다. 41장  순이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로 돌아섰다. 귓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소년은 뛰어나왔다. 갈 밖으로 벙글벙글 웃으면서 "응, 순이로구나!" 하면서 앞에 와 마주섰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콩쌀금'을 내어 슬며시 쥐어준다. 순이는 오늘따라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였다 늘 하던 해죽 웃기를 잊고 - "너 멀구밭으로 갔던? 어째 혼자 갔나?" "나허구 같이 가자구 하지 않았나? 누가 꼬이든?" "……" "어째 너 나를 싫어하나? 응" 순이는 그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년은 빨개진 소녀의 귓볼을 들여다보며 "왜 울었니? 누구에게 맞았니?" "누가 맞았다니!" "그럼 어째 말을 아니 하니?" 그래도 순이는 잠잠하다. 소년은 손뼉을 치며 하하하 웃으면서 "옳지 알았다 너 부끄러워 우니? 우리 아버지 너 집으로 혼사말 갔다더니 옳지 그게 부끄럽구 우냐!" "……" "얘 너는 우리 집에 시집온단다, 권마성(勸馬聲) 소리에 가마에 앉아서 응" 순이는 한 걸음 물러서며 "듣기 싫다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다!" 그리고는 물동이 앞에 와 선다. 아무 말도 없이 고요히 - 수정(水精)같이 소년은 웃다가 이 눈치를 차리고 얼른 달려들어 물동이를 이워주었다. 그리고는 뒷맵시와 불그레한 뺨빛을 또 한 가지 여왕같이 걸어가는 거룩한 그 자태를 탐내보면서 마치 원광 두른 성녀를 보내는 듯이 한껏 아까워서 - 42장  조선의 시골에는  백일에 짓는 사랑의 궁전은 없으랴. 종이 무서워 무서워 상전을 바라보듯 거지가 금덩이 안아보듯 두려움과 경이가 큐-피트의 화살이 되었다. 43장  그러는 속에도 사랑은 허화(虛火), 봄눈을 뒤지고 나오는 움같이 고려 지방족의 강득한 씨는 아침나절 호풍이 부는 산국(山國)에도 피기 시작하였다. 여성은 태양이다! 하는 소리가 소년의 입술을 가끔 스쳤다, 두 절대한 친화력에 불타지면서 사랑은 재가승과 언문 아는 계급을 초월하여서 붙었다. 44장  그 뒤로부터 비 오는 아침이나 바람 부는 저녁이나 두 그림자는 늘 샘터에 모였다 남의 눈을 꺼리면서, 물 우엔 갈잎 마음속엔 '잊지 말란 풀' 45장  뻐꾸기 우는 깊은 밤중에 처녀의 짓두그릇엔 웬 총각의 토수목 끼었고 누가 쓴 '언문본'인지 뎅굴뎅굴 굴렀다 순이의 맘에는 알 수 없는 영주가 즐어앉았다. 콩쌀금 주던 미소년이 처녀의 가슴에 아아 언문 아는 선비가 안기었다. 46장  소년은 - 날마다 꼴단 지고 오다가 그 집 앞 돌각탑 우에 와 앉았다, 땀 씻을 때에 부르는 휘파람 소리는 어린 소녀에게 전하는 그 소리라. 사랑하는 이의 사랑받으면서 꿈나라의 왕궁을 짓는 하루 이틀 아침은 저녁이 멀고 저녁은 아침이 그리운 만리장성을 쌓을 때 - 47장  쌓기는 왕자, 왕녀의 사랑 같은 사랑의 성을 두 소년이 쌓았건만, 헐기는 재가승의 정칙이 헐기 시작하였다. 꽃에는 벌레가 들기 쉽다고 아, 둘 사이에는 마지막 날이 왔다, 벌써부터 와야 할 마지막 날이 전통은- 사회 제도는 인간 불평등의 한 따님이라고, 재가승의 자녀는 재가승의 집으로 그래서 같은 씨를 십대 백대 천대를 순이도 재가승의 씨를 받아 전하는 기계로 가게 되었다. 죽기를 한하는 순이는  울고 떼쓰다가 아버지 교살된다는 말에 할 수 없이 그해 겨울에 동리 존위(尊位)집에 시집갔었다, 언문 아는 선비를 내어버리고 - 여러 마을의 총각들은 너무 분해서 "어디 봐라!"하고 침을 배앝으며 물긷기 동무들은 "어찌 저럴까, 언문 아는 선비는 어쩌고, 흐흥, 중은 역시 중이 좋은 게지"라고 비웃었다. 48장  이 소문을 듣고 소년은 밤마다 밤마다 울었다. 그리고 단 한 번만 그 색시를 만나려 애썼다. 광인같이 아침 저녁 물방앗간을 뛰마니며 "어찌 갔을까, 어여쁜 순이가 맹세한 순이가 어찌 갔을까?"하면서. 49장  열흘이 지나도 순이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그래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이시여! 이게 무슨 짓입니까 팔목에 안기어 풀싸움하던 단순한 옛날의 기억을 이렇게 깨뜨려좋습니까?" "아, 순아, 어디 갔니 옛날의 애인을 버리고 어디 갔니? 너는 참새처럼 아버지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너는 참새처럼 내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순아, 너는 물동이 이어줄 때, 언문 아는 집 각시 된다고 자랑하더니만 언문도 내보리고 선비도 없는 어디로 갔니?" "멀구알 따다 팔아 열녀전을 쌓겠다더니 순아, 열녀전을 버리고 어디 갔니? 귀여운 말하던 네가 어디 갔니? 귀여운 말하던 네가 어디 갔니? 부엉이 운다 부엉새가 운다 뒷산곡에서 물레젓기 타령하던 때에 듣던 부엉새가 운다 아, 순아!" 50장  소년은 너무도 기막혀 새벽에 칠두성을 향하여 "하늘이시여, 칼을 주소서, 세상을 무찌를 순이가 살고 옛날의 샘터가 놓인 이 세상을 무찌를!" 51장  에라, 나 보아라! 자유인에 탈이 없는 것이다, "가헌(家憲)'이라거나 '율법'이라거나, 모두 짓밟아라 뜯어고쳐라 추장이란 녀석이 제 맘대로 꾸며논 타성의 도덕률을 집중을 사람을 만들자, 순이는 아버지의 따님을 만들자, 초인아, 절대한 힘을 빌려라. 이것을 고치게, 아름답게 만들 게 불쌍한 눈물을 흘리지 말 게. 큐피트의 지나간 뒤는 꿈이 쓰러지고, 박카스의 노래 뒤는 피가 흐르나니. 52장  몇 날을 두고 울던 소년은 열흘이 되자 모든 바람이 다 끊어지고 할 때 산새들도 깃든 야밤중에, 보꾸러미 하나 둘러메고 이 마을을 떠났다 마지막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이 땅을 안 디딜 작적으로 - 구름은 빌까 험하게 분주히 내왕하는데. 53장  소년이 떠난 뒤 하늘은 잊은 듯이 해마다 해마다 풍년을 주었다 때맞춰 기름진 비를, 자갈 돌밭에 출가한 순이의 맘에도 안개비를 농부들은 여전히 호미를 쥐고 밭에 나갔다. 마을 소녀들은 멀리 따러 다니구요 언문 아는 선비 일은 차츰차츰 잊으면서. 54장  몇 해 안 가서 무산령상(茂山嶺上)엔 화차통 검은 문명의 손이 이 마을을 다닥쳐왔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전토를 팔아가지고 차츰 떠났다. 혹은 간도로 혹은 서간도로 그리고 아침나절 짐승 우는 소리 외에도 쇠 찌적 가는 소리 돌 깨는 소리, 차츰 요란하여갔다, 옷 다른 이의 그림자도 붇고, 55장  마을 사람이 거의 떠날 때 출가한 순이도 남편을 따라 이듬해 여름 강변인 이 마을에 옮겨왔다.  아버지 집도 동강(東江)으로 가고요 - 56장  멀구 따는 산곡에는 토지 조사국 기수가 다니더니, 웬 삼각 표주가 붙구요, 초가집에도 양(洋)납이 오르고 - 57장  촌부들이 떠난 지 5년 언문 아는 선비 떠난 지 8년. 이것이 이 문간에서 서로 들추는 아름다운 옛날의 기억, 간첩이란 방랑자와 밀수출 마부의 아내 되는 순이의 아! 이것은 둘의 옛날이 기억이었다. 제3부 58장  -- 청년 너무도 기뻐서 처녀를 웃음으로 보며 "오호, 나를 모르세요. 나를요?" 꿈을 깨고 난 듯이 손길을 들어, "아아, 국사당 물방앗간에서 갈잎으로 머리 얹고 종일 풀싸움하던 그 일을- 또 산밭에서 멀구 광주리 이고 다니던 당신을 그리워 그리워하던 언문 아는 선비야요!" "재가승이 가지는 박해와 모욕을 같이하자던 그러면서 소 몰기 목동으로 지내자던 한때는 봄이 온다고 기다리던 내야요" -- 처녀(妻女) "언문 아는 선비? 언문 하는 선비! 이게 꿈인가! 에그, 아!, 에그! 이게 꿈인가, 이 추운 밤에, 당신이 어떻게 오셨소, 봄이 와도 가을이 와도 몇 가을 봄 가고와도 가신 뒤 자취조차 없던 당신이 이 한밤에, 어떻게 어디로 오셨소? 시집간 뒤 열흘 만에 떠나더라더니만." -- 청년 "그렇다오, 나는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에 못 이겨 열흘 만에 떠났소, 언문도 쓸데없고 밭 두렁도 소용없는 것 보고 가만히 혼자 떠났소. 8년 동안 - 서울 가서 학교에 다녔소 머리 깎고, 그래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을 알고 페스탈로치와 루소와 노자와 장자와 모든 것을 알고 언문 아는 선비가 더 훌륭하게 되었소, 그러다가 고향이 그립고 당신을 못 잊오 술을 마셨더니, 어느새 나는 인육을 탐하는 자가 되었소, - 네로같이 밤낮 - 매독, 임질, 주정, 노래, 춤,-깽깽이- 내가 눈 깨일 때는 옛날이 육체가 없고 옛날의 정신이 없고 아 옛날의 지위까지. 나는 산송장! 오고갈 데도 없는 산송장. 아, 옛날이 그리워 옛날이 그리워서 이렇게 찾아왔소, 다시 아니 오려던 땅을 이렇게 찾아왔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 아하, 어떻게 있소, 처녀 그대로 있소? 남의 처로 있소! 흥, 역시 베를 짜고 있소? 아, 그립던 순이여! 나와 같이 가오! 어서 가오! 멀리 멀리 옛날의 꿈을 둘추면서 지내요. 아하, 순이여!" -- 처녀(妻女) "아니! 아니 나는 못 가오 어서 가세요, 나는 남편이 있는 계집, 다른 사내하고 말도 못 하는 계집. 조선 여자에 떨어지는 종 같은 팔자를 타고난 자이오, 아버지 품으로 문벌 있는 집에 - 벌써 어머니질까지 하는 - 오늘 저녁에 남편은 이것들을 살리려, 소금 실어 수레를 끄을고 강 건너 넘어갔어요 남편도 없는 이 한밤에 외인하고 - 에그 어서 가세요 -" "내가 언제 저 갈 데를 간다고? 백두산 위에 흰 눈이 없어질 때, 해가 서쪽으로 뜰 때 그때랍니다, 봄날에 강물이 풀리듯이요 -" "타박타박 처녀의 가슴을 드디고 가던 옛날의 당신은 눈물로 장사지내구요. 어서 가요, 어서 가요 마을 구장에게 들키면 향도 배장(鄕徒排杖)을 맞을 터인데" 그러면서 문을 닫는다 애욕의 눈물을 씻으면서 - -- 청년 "아니, 아니 닫지를 마세요, 사랑의 성전문을 닫지를 마세요. 남에게 노예라도 내게는 제왕, 종이 상전 같은 힘을 길러 탈을 벗으려면 그는 일평생 종으로 지낸다구요 아, 그리운 옛날의 색시여!" "나는 커졌소, 8년을 자랐소, 굴강한 힘은 옛날을 복수하기에 넉넉하오. 율법도 막을 수 있고 혼도 자유로 낼 수 있소. 아, 이쁜 색시여, 나를 믿어주구려, 옛날의 백분의 일만이라도." "나는 벌써 도회의 매연에서 사형을 받은 자이오, 문명에서 환락에서 추방되구요, 쇠마치, 기계, 착가(捉枷), 기아(飢餓), 동사(凍死) 인혈을, 인육을 마시는 곳에서 폐병균이 유리하는 공기 속에서 겨우 도망하여 온 자이오 몰락하게 된 문명에서 일광을 얻으러 공기를 얻으러, 그리고 매춘부의 부란한 고기에서, 아편에서 빨간 술에서 명예에서 이욕에서 겨우 빠져나왔소, 옛날의 두만강가이 그리워서 당신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당신이 죽었더라면 한평생 무덤가를 지키구요 시집가신 채라면 젖가슴을 꿈으로나 만질까고, 풀밭에서 옛날에 부르던 노래나 찾을까고 -" -- 처녀(妻女) "무얼 또 꾸며대시네, 며칠 안 가서 그리워하실 텐데!" -- 청년 "무엇을요? 내가 그리워한다고." -- 처녀(妻女) "그러믄요! 도회에는 어여쁜 색시 있구 놀음이 있구,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날마다 밤마다 퍼붓는 함박눈밖에 강물은 얼구요 사람도 얼구요, 해는 눈 속에서 깼다가 눈 속에 잠들고 사람은 추운 데 낳다가 추운 데 묻히고 서울서 온 손님은 마음이 여리다구요. 오늘밤같이 북풍에 우는 당나귀 소리 듣고는 눈물을 아니 흘릴까요? 여름에는 소몰기, 겨울에는 마차몰이 그도 밀수입 마차랍니다, 들키면 경치우는- 단조하고 무미스러운 이 살림, 몇 날이 안 가서 싫증이 나실 텐데 -" "시골엔 문명을 모르는 사람만이 언문도 맹자도 모르는 사람만이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만이 소문만 외우며 사는 곳이랍니다." -- 청년 "아니, 그렇지 않소, 내가 도회를 그리워한다고? 비린내 나는 그 도회에를 우정을 도량형으로 싸구요, 명예하는 수레를 일생 두고 끄으는 소와 막잡이하는 우둔한 차부들이 하는 곳을." "굴뚝이 노동자의 육반 위에 서고 호가사 잉여가치의 종노릇하는 모든 혼정(魂精)이 전통과 인습에 눌리어 모든 질곡밖에 살 집이 없는 그런 도회에, 도회인 속에," "데카당, 다다, 염세, 악의 찬미 두만강가의 자작돌같이 무룩히 있는 근대의 의붓자식 같은 조선의 심장을 찾아가라고요! 아, 전원아, 애인아, 유목업아! 국가와 예식과, 역사를 벗고 빨간 몸뚱이 네 품에 안기려는 것을 막으려느냐?-" 그러면서 청년은 하늘을 치어보았다. 모든 절망 끝에 찾는 것 있는 듯이 - 하늘엔 언제 내릴는지 모르는 구름기둥이 조고마한 별을 드디고 지나간다. 멀리 개 짖는 소리, 새벽이 걸어오듯 - 8년 만에 온 청년의 눈앞에는 활을 메고 노루잡이 다닐 때 밤이 늦어 모닥불 피워놓고 고리를 까슬며 색시 어깨를 짚고 노래부르던 옛일이 생각난다. 독한 물지 담배 속에 "옛날에 남 이 장군이란 녀석이……" 하고 노농(老農)의 이야기 듣던 마을 총각떼의 모양이 보인다. 앗! 하고 그는 다시금 눈을 돌린다. -- 처녀(妻女) "그래도 싫어요 나는 당신 같은 이는 싫어요, 다른 계집을 알고 또 돈을 알구요, 더구나 일본말까지 아니 와 보시구려, 오는 날부터 순사가 뒤따라다닐 터인데 그러니 더욱 싫어요 벌써 간첩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내가 미나리 캐러 다닐 때 당신은 뿌리도 안 털어줄 걸요, 백은(白銀) 길 같은 손길에 흙이 묻는다고 더구나 감자국 귀밀밥을 먹는다면 -" "에그, 애닯아라. 당신은 역시 꿈에 볼 사람이랍니다, 어서 가세요." -- 청년 "그렇지 않다는데도, 에익 어찌 더러운 팔자를 가지고 났담!" 그러면서 그는 초조하여 손길을 마주 쥔다, 끝없는 새벽하늘에는 별싸락이 떴구요 - 그 별을 따라 꽂히는 곳에 북극이, 눈에 가리운 북극이 보이고요. 거기에 빙산을 마주쳐 두 손길 잡고, 고요히 저녁 기도를 드리는 고아의 모양이 보인다, 그 소리 마치 "하늘이시여 용서하소서 죄를, 저희들은 모르고 지었으니"하는 듯. 별빛이 꽂히는 곳, 마지막 벌판에는 이스라엘 건국하던 모세와 같이 인민을 잔혹한 압박에서 건져주려고 무리의 앞에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초인의 모양이 보이고요, 오, 큰 바람이어, 혼의 수난이어, 교착이어! "버린다면 나는 죽어요 죽을 자리도 없이 고향을 찾은 낙인(落人)이에요, 아, 보모여 젖먹이 어린애를  그대로 모른다 합니까"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두루루 흘렀다. -- 처녀(妻女) "가요, 가요, 인제는 첫닭 울기, 남편이 돌아올 때인데 나는 매인 몸, 옛날은 꿈이랍니다!" 그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애처로운 옛날의 따스하던 애욕에 끌이면서, 그 서슬에 청년은 넘어지며 낯빛이 새파래진다 몹시 경련하면서, "아, 잠깐만 잠깐만" 하며 닫아맨 문살을 뜯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옥소 철비(鐵扉)와 같이 굳어졌다, 옛날의 사랑을 태양을 전원을 잠가둔 성당을 좀처럼 열어놓지 않았다. "아, 여보 순이! 재가승의 따님, 당신이 없다면 8년 후도 없구요, 세상도 없구요" -- 처녀(妻女) "어서 가세요, 동이 트면 남편을 맞을 텐데" -- 청년 "꼭 가야 할까요, 그러면 언제나?" -- 처녀(妻女) "죽어서 무덤에 가면!" 하고 차디차게 말한다. -- 청년 "아, 아하 아하 ……" -- 처녀(妻女) "지금도 남편의 가슴에 묻힌 산송장, 흙으로 돌아간대도 가산(家山)에 묻히는 송장, 재가승의 따님은 워난 송장이랍니다!" -- 여보시오 그러면 나는 어쩌고. -- 가요, 가요, 어서 가오. 가요? 뒤에는 반복된는 이 요음(擾音)만 요란코 - 59장  바로 그때이었다, 저리로 웬 발자취 소리 요란히 들리었다. 아주 급하게 - 아주 황급하게 처녀(妻女)와 청년은 놀라 하던 말을 뚝 그치고, 발자취 나는 곳을 향하여 보았다. 새벽이 가까운지 바람은 더 심하다, 나뭇가지엔 덮였다 눈더미가, 둘의 귓불을 탁 치고 달아났다. 60장  발자취의 임자는 나타났다. 그는 어떤 굴강(屈强)한 남자이었다 가슴에 무엇을 안은- 처녀(妻女)는 반가이 내달으며 "에그 인제 오시네!"하고 안을 듯한다, 청년은 "이것이 남편인가"함에 한껏 분하였다. 가슴에는 때아닌 모닥불길. "어째 혼자 오셨소? 우리 집에선?" 처녀(妻女)의 묻는 말에 차부(그는 같이 갔던 차부였다)는 얼굴을 숙인다 "네? 어째 혼자 오셨소 네?" 그때 장정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만히 보꾸러미를 가리킨다 처녀(妻女)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이게 무언데?"하고 몸을 떤다 어떤 예감에 눌리우면서. 61장  처녀(妻女)는 하들하들 떠는 손으로 가리운 헝겊을 벗겼다, 거기에는 선지피에 어리운 송장 하나 누웠다. "앗!"하고 처녀(妻女)는 그만 쓰러진다, "옳소, 마적에게 쏘였소, 건넛마을서 에그"하면서 차부도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다. 백금 같은 달빛이 삼십 장남인 마적에게 총 맞은 순이 사내 송장을 비췄다. 천지는 다 죽은 듯 고요하였다. 62장  "그러면 끝내 - 에그 오랫던가" 아까 총소리, 그 마적놈, 에그 하나님 맙소서! 강녘에선 또 얼음장이 갈린다, 밤새 길 게 우는 세 사람의 눈물을 얼리며 -" 63장  이튿날 아침 - 해는 재듯이 떠 뫼고 들이고 초가고 깡그리 기어오를 때 멀리 바람은 간도 이사꾼의 옷자락을 날렸다. 64장  마을서는, 그때 굵은 칡베 장삼에 묶인 송장 하나가 여러 사람의 어깨에 메이어 나갔다. 눈에 싸인 산곡으로 첫눈을 뒤지면서. 65장  송장은 어느 남녘진 양지쪽에 내려놓았다, 빤들빤들 눈에 다진 곳이 그의 묘지이었다. "내가 이 사람 묘지를 팔 줄 몰랐어!" 하고 노인이 괭이를 멈추며 땀을 씻는다, "이 사람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네!"하고 젊은 차부가 뒤대어 말한다. 66장  곡괭이와 삽날이 달가닥거리는 속에 거-먼 흙은 흰 눈 우에 무덤을 일궜다, 그때사 구장도 오구, 다른 차꾼들도, 청년도 여럿은 묵묵히 서서 서글픈 이 일을 시작하였다. 67장  삼동에 묻히운 '병남(丙南)'의 송장은 쫓겨가는 자의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순이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며 '밤마다 춥다고 통나무를 지피우라더니 추운 곳으로도 가시네 이런 곳 가시길래 구장의 말도 안 듣고 -" 68장  여러 사람은 여기에는 아무 말도 아니 하고 속으로 "흥! 언제 우리도 이 꼴이 된담!" 애처롭게 앞서가는 동무를 조상할 뿐. 69장  얼마를 상여꾼들이 땀을 흘리며 흙을 뒤지더니, 삽날소리 딸까닥 날 때 노루잡이 함정만한 장방형 구덩 하나가 생겼다. 70장  여러 사람들은 고요히 동무의 시체를 갖다 묻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71장  거의 묻힐 때 죽은 병남이 글 배우던 서당집 노훈장이, "그래도 조선땅에 묻힌다!"하고 한숨을 휘-쉰다. 여러 사람은 또 맹자나 통감을 읽는가고 멍멍하였다. 청년은 골을 돌리며 "연기를 피하여 간다!" 하였다. 72장  강 저쪽으로 점심 때라고 중국 군영에서 나팔소리 또따따 하고 울려 들린다. -끝-
740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온난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79  추천:0  2019-10-30
30년 뒤 호찌민·방콕 물에 잠겨?… 1억5천만 명 집 잃을 위기 2019.10.30.    슬퍼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기후 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해, 일부 도시들이 물에 잠길 것이란 경고가 제기돼 왔었죠. 예상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넓은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란,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상하이, 방콕 같은 대도시들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기현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순식간에 도시를 덮칩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현실로,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트남 남부 일부 지역은 30년 뒤 물에 잠길 거라 예상돼 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남부 거의 모든 지역, 경제수도인 호찌민 마저 수몰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트남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천만 명이 밀집한 지역입니다. 미국 비영리단체 '클라이밋 센트럴'에 따르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영향 범위가 기존 예상치의 3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형지물을 배제하고 땅의 높이를 보다 정밀하게 측정해보니 예상치가 크게 달라진 겁니다. [벤자민 스트라우스/'클라이밋 센트럴' 대표 : "기존 연구는 위성에 의존해 빌딩 높이와 땅의 높이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태국은 수도인 방콕을 포함해 인구의 10%가 수몰 위험이 높은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체의 1%만 영향을 받을 것이라던 기존 예상치를 훌쩍 넘긴 겁니다. 중국의 상하이와 인도의 뭄바이 역시 도시 중심부 등이 해수면 상승에 취약한 지역으로 조사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 1억5천만 명이 해수면 상승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이라크 바스라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역사 문화유산이 많아 조치가 시급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연구진은 해당 지역들에 임시 방파제를 설치하고 장기적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위험 지역 인구를 재배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KBS 뉴스 기현정입니다. 
7402    [타산지석] - 력사는 다 알고 있다... 세월이 약이다... 댓글:  조회:3148  추천:0  2019-10-30
검열을 딛고 선 한국영화... 삭제 장면 공개  2019.10.29.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영화 검열로 삭제됐던 장면이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통제와 간섭을 받았던 한국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선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영화 '자유부인'은 대학교수 부인이 젊은 남자와 춤바람이 난다는 내용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키스 장면이 잘린 채 상영허가가 났습니다. '피아골'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소위 '반공법' 위반에 걸려 내용을 바꾼 뒤 극장에 걸릴 수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 절망과 좌절 등의 표현이 금기시됐던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가장 많이 가위질당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감독이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의 계몽영화로 바꾸겠다는 각서까지 제출했습니다. 한국영화는 탄생 초기부터 간섭과 통제를 받았고 1996년 '사전 심의'가 위헌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한순간도 검열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장호 / 감독 : 검열보다 무서운 게 자기 검열이에요. 검열을 의식해서 나도 무장이 돼서 미리 작품을 고르며 검열을 하게 되고 이런 장르는 안되고 촬영할 때 밀 빼버리고.] 서슬 퍼런 검열의 역사를 신랄하게 증언하고 있는 이번 전시는 한국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지 생생히 보여줍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관 중이던 필름 자료를 디지털화해 광주민주화운동의 표현 장면 등 1950∼70년대 검열 삭제 영상을 최초 공개했습니다. 당시 배우와 감독들의 실감 나는 증언을 들을 수 있고, 70년대 검열실을 재현해 놓은 곳에서 검열로 삭제된 필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김종원 / 영화사학가 : 이렇게 부끄러운 우리 시대가 있었다는 부끄러운 초상을 우리가 볼 수 있다라는 것. 그걸 통해서 우리가 자성의 마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통제와 간섭으로, 때로는 정치적 도구로 70년 넘게 '검열'로 점철됐던 한국영화, '창작과 표현의 자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내년 3월까지 계속됩니다. YTN 김선희 입니다. '키스도 자살도 안된다'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  2019.10.2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칸 영화제 최고상을 받을 정도로 한국영화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지나 온 100년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영화사는 검열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데요.  그동안 삭제되고 편집된 장면들이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박효정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1960년, 가난한 샐러리맨의 방황을 그린 영화 '오발탄'. 한국 영화 희대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온전히 상영되지 못했습니다. 아기를 업은 여성이 목을 맨 장면, 미군이 여성을 희롱하는 장면 등이 심의에 걸려 삭제됐습니다.  암울한 시대 청년들의 번민을 경쾌하게 그린 '바보들의 행진'은 자살하는 장면과 대학 휴강 장면 등이 가위질 당했고.  "더도 말고 C학점만 주세요. (안돼.) 그럼 D학점이요. (안된대도!) 그럼 E학점! (E학점은 없어. 다음엔 F야.)" 버스 안내양이 회사 내 비리와 성폭력을 견디지 못해 투신하는 내용의 '도시로 간 처녀' 역시 여러 군데 난도질당했습니다.  "검열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우리 영화는 30~50년을 앞질러 갔을거에요. 봉준호 감독이 50년전에 태어났을거야." 한국영상자료원이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영화 장면들과 검열 서류 등을 공개했습니다.  키스 장면은 풍기문란을 일으켜서, 자살은 사회상을 암울하게 그려서 등 검열 명분은 다양했습니다.  정권의 입맛을 거스르는 영화를 만들었다간 구속까지 당했던 시대.  엄혹한 가운데서도 1세대 감독들은 예술혼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검열을 의식한 적이 없어요. 언제나 우리곁에 있는 검열이고 그 검열에 의해 2차적인 피해로 내가 나 스스로 검열하는 입장이 되면 더 위험하다." 험난한 시대를 견뎌내고 세계 수준에 도달한 한국영화.  창작의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되새기는 전시가 될 전망입니다.  연합뉴스TV 박효정입니다. 
740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18  추천:0  2019-10-27
[안녕? 자연]ㅡ  아이슬란드 최대 만년설, 30년 새 이만큼 줄었다 2019.10.26.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유럽 최대 규모 만년설이 지구온난화로 녹아 없어진 모습. 영국 던디대학 연구진 제공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로 지구상의 빙하가 얼마나 사라졌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비교사진이 공개됐다. 영국 스코틀랜드 던디대학 연구진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년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비교하기 위해 드론 장비를 이용한 공중 촬영을 시도했다. 연구진은 지난 2년간 유럽 최대의 빙산인 아이슬란드 남부 바트나이외퀴들(Vatnajökull) 지역을 집중 촬영했다. 고원지방인 바트나이외퀴들에는 곳곳에 많은 활화산이 있으며, 빙원의 녹은 물이 수백 개나 되는 강의 수원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위성항법장치(GPS)가 장착된 장비와 헬리콥터를 이용해 바트나이외퀴들의 빙하와 만년설을 촬영했고 촬영 결과를 3D 매핑기술을 이용해 지도화 했다. 이후 이를 1980년대 당시 아이슬란드 국토조사를 통해 촬영된 항공지도 사진과 비교했다. 그 결과 면적이 7700㎢에 달했던 바트나이외퀴들의 만년설은 지난 30년간 평균 20m씩 그 두께가 낮아진 것을 확인했다. 일부지역은 30년 전에 비해 두께가 100~150m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슬란드대학, 아이슬란드기상청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특정 지역에 어떤 물리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아이슬란드 남동부의 눈과 얼음이 녹는 속도가 빨라진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다행히 우리는 1980년대 사진을 지도화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더 오래된 항공사진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서 “과학과 예술(사진)이 공통의 플랫폼을 공유하는 이러한 활동과 새로운 수단의 개발은 현재 진행중인 기후 변화의 전례없는 규모와 다양성, 복잡성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던디대학 연구진은 최근 같은 기술을 이용해 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이탈리아명 몬테 비앙코)의 눈과 얼음이 기후변화로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송현서 기자 
7400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최초의 영화... 댓글:  조회:3962  추천:0  2019-10-26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최초의 영화 상영     연도 1895년 12월 28일 저자 피터 퍼타도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영화를 선보이지만 결국 사진으로 관심을 돌린다. 파리 카퓌신 대로 그랑 카페 지하의 방은 가득 모인 사람으로 붐볐다. 이들은 어둠 속에 앉아 열 편의 짧은 영화 연속물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 사람들로, 각 영화는 40초 남짓한 길이에 주제는 '담요 위에 뛰어내리기', '아기의 식사', '바다에서 수영하기' 등 일상생활을 직접 관찰하여 가벼운 희극을 섞어 넣은 내용이었다. 상영은 큰 성공이었고 계속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 역사적인 최초 상영회보다 조금 뒤에 촬영한 한 장면은 화면을 거슬러 비스듬하게 달려오는 증기 기관차를 찍은 것으로, 관객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숨기려 들었다. 상영회를 연 것은 리옹의 한 사진사 겸 초상화가의 아들인 30대 초반의 형제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1894년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형식의 에디슨의 영사기 시연을 보고 영향을 받아 아들들에게 영화 실험을 해보라고 격려했고, 둘은 곧 스프로켓 구멍을 이용해 카메라 안에서 필름을 감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895년 초에 두 형제는 카메라, 인화 기계, 영사기 역할을 다 하는 작은 기계 '시네마토그래프'의 특허를 냈다. 최초의 영화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퇴근하는 일꾼들을 담은 것으로 1895년 3월 22일 개인적인 자리에서 상영했지만, 최초로 영화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영화를 스크린에 비춘 것은 그랑 카페에서였다. 두 형제는 그들이 만든 기계를 전 세계에 선보이기 위해 조수를 고용했고,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극장을 개관했다(그들은 극장을 '시네마'라고 불렀다). 영화 한 편은 1900년 파리 박람회 때 거대한 화면에 투사하기도 했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루이 뤼미에르는 곧 이것이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 단정 지었고, 결국 형제는 기계에 대한 권리를 팔고 대신 컬러 사진에 집중했다. "영화는 전 세계를 즐겁게 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있을까…?" 루이 뤼미에르, 영화의 선구자 [네이버 지식백과] 최초의 영화 상영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최초의 유성영화     연도 1927년 10월 6일 저자 리처드 카벤디쉬 앨 존슨이 최초의 유성영화에서 첫 줄의 대사를 연기하는 영광을 누린다. 미국에서 전국 개봉한 최초의 유성영화-적어도 부분 유성영화-는 브로드웨이의 히트작 「재즈 싱어 The JazzSinger」로 워너 브라더스사(社)는 새로운 비타폰 사운드 프로세스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장면은 무성이었지만, 음악 시퀀스와 일부 대화 장면은 사운드를 삽입했다. 이 영화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는 시나고그 독창자인 아버지와 감상적이고 세속적인 곡들을 불러 스타가 된 유대인 소년(앨 존슨 분)의 이야기다. 존슨은 당대 최고의 매력적인 무대 연기자였으며, 활기찬 동작과 제스처, 관객과의 대화를 도입하여 비교적 절제된 보드빌 공연을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감의 소유자였으며 브로드웨이의 주요 작품을 공연할 때는 연기를 중단하고 관객에게 다가가서 공연을 마저 다 보고 싶은지 아니면 지금 당장 노래를 듣고 싶은지 묻곤 했다. 관객들은 언제나 후자를 선택했고, 그러면 그는 한 시간 동안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곤 했다. 1928년 존슨은 「싱잉 풀 Singing Fool」에서 "Sonny Boy"를 불러 미국 최초로 밀리언셀러 앨범을 기록했다. "잠깐 기다려요! 아직 아무것도 못들었잖아요! 기다리라니깐요!" 「재즈 싱어」에서 앨 존슨의 첫 번째 유성 대사 [네이버 지식백과] 최초의 유성영화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739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미세먼지제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42  추천:0  2019-10-26
집 안 공기청정기는 필수… 이젠 집 바깥에서도 '청정기'  2019.10.2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날씨가 쌀쌀해지면 불쑥 찾아오는 미세먼지 많이 걱정되죠. 그러다보니 공기청정기를 집 안에 두고 쓰는 분들 많은데요. 요즘은 집 바깥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조금이나마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박영우 기자가 담아왔습니다. [기자]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단지. 단지 안 버스 정류소가 눈에 띕니다. 이 곳엔 미세먼지를 차단하는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정류소 안에는 공기청정기가 설치돼 있고, 미세먼지 농도도 실시간으로 확인합니다. [임기상/경기 고양시 향동동 : 미세먼지가 버스정류장에 집중되잖아요. 미세먼지 제거시설이 있다는 것은 버스를 이용하는 이용자 입장에서 굉장히 고무적인 거죠.] 이처럼 미세먼지를 줄여주는 버스정류소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하나 둘 늘고 있습니다. 터널 안으로 차량 한대가 들어옵니다. 국내 한 회사가 정부 지원을 받아 만든 미세먼지 정화 차량입니다. 달리는 대형 공기청정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서울시와 함께 미세먼지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지 실험도 진행했습니다. 이 정화 차량이 지나가면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농도가 3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이 효과가 20분 정도만 유지돼 지속시간을 얼마나 늘리느냐가 숙제로 남았습니다. 추워지면 불시에 들이닥치는 미세먼지. 그럴 때마다 외출을 삼가고 밖으로 나갈 땐 마스크를 쓰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한편에선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갖가지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영우 기자 / [영상취재: 이동현,이완근 / 영상편집: 김범준]
7398    [록색평화주의者] - "얘들아, 래일은 전쟁난다. 학교 오지마..." 댓글:  조회:3655  추천:0  2019-10-26
무기를 가까이 하면 죽음도 가까이 있다 2019.10.26.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인쇄하기  보내기 긴장감 도는 최전방에서 남북간 평화통일을 꿈꾸다 [오마이뉴스 글:오문수, 편집:김혜리] ▲  국제평화아트파크에 있는 조형물로 평화를 약속하는 높이 38m의 거대한 반지와 탱크 포신에 커다란 나팔이 붙어있다. 평화를 노래하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 오문수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러시아 정치인 레온 트로츠키가 한 말이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지나간 전쟁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또다시 6.25 같은 전쟁을 겪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며칠 전 지인들과 함께 강원도 화천을 다녀왔다. 서울 잠실 운동장을 떠난 버스가 춘천을 거쳐 화천으로 들어가니 거리 곳곳에 "27사단 해체, 화천군민 분노한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화천 시장에 들러 한 상인을 만나 '27사단이 해체되면 지역 경기에 영향이 있느냐?'고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화천 하면 군인 가족이나 면회객이 대부분입니다. 27사단이 나가면 지역경제에 타격이 큽니다."    ▲  화천군 곳곳에 27사단 해체를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지역경제가 타격을 받는다는 게 이유다 ⓒ 오문수     플래카드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44년 전, 필자는 27사단 모 연대 수색중대에 배치되어 34개월 동안 근무했다. 일명 이기자부대인 27사단. 당시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왜 이기자 부대인가'를 묻자 "사단장 사모님 이름이 '이기자'"라는 우스운 풍문이 돌기도 했다.   난생처음 강원도 땅을 밟고 첩첩산중에서 밤중에 보초 서던 순간 전방이라는 중압감이 밀려왔다. 전방이지만 적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식이 끝나고 기분이 좋아진 주임상사의 무용담은 전쟁을 모르는 졸병을 더 긴장시켰다. 부대에 갓 배치된 동기병들은 노병인 주임상사의 경험담에 귀를 쫑긋하며 등골이 서늘했다.   "우리 수색중대가 최전방 DMZ에서 근무할 때 밤마다 긴장하지 않으면 죽는 수가 많았다. 어느 날 밤 북한 인민군이 철조망을 끊고 내무반에 들어와 군인들을 죽이고 증거로 코를 베어 가면 우리도 복수조를 북한에 보내 똑같이 코를 베어왔다."   다행히 필자가 부대에 배치되기 얼마 전부터 우리 부대는 최전방 DMZ 근무에 배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의 그림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필자는 부대 내무반에 있는 한국 전쟁사 읽기를 좋아해 쉬는 시간이면 종종 전쟁사를 읽으며 일반인들이 몰랐던 6.25 당시의 현장 역사를 알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려 패주하자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유엔군이 당시 필자가 근무했던 지역에서 적의 급습을 받아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 모습. 6.25전쟁 당시 화천과 철원일대를 관할했다고 한다.이 근방에서 살았던 89세된 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6.25가 터지기 하루전인 6월 24일 초등학교 선생님이 "얘들아! 내일은 학교 오지 말아라. 내일은 전쟁이 난다"고 했다고 한다. ⓒ 오문수    그래서일까? 부대 인근에서 구덩이를 파다 미군 잠바에 붙어있던 녹슨 지퍼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일지도 모를 미군의 흔적. 자신의 땅도 아닌 먼 타국까지 와서 죽어간 그를 생각하며 영면을 빌었다.   수색중대는 정찰훈련이 많고 이동도 많다. 어느 날 부대가 이동한 후 막사에서 나온 쓰레기를 보니 상당량이다. 선임하사가 우리 분대에 "땅을 파 쓰레기를 태워 묻어라"고 명령했다. 분대원들은 깊이 70㎝ 너비 5m 정도 땅을 파 쓰레기를 모아놓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선임하사가 감독하기 위해 현장에 와 호통을 쳤다.   "야! 이놈들아! 그 정도 파서 되겠어? 1m 정도 더 파서 불태워 묻어."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구덩이를 겨우 파 힘들었는데 더 깊이 파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에 모두 투덜댔지만 하는 수 없었다. 군대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다시 걷어내고 분대원 하나가 맨 가운데를 삽질하면서 "돌이 있는지 삽이 잘 안 들어가는데요"라고 하자 다른 선임병이 "내가 해볼 테니 삽 이리 줘"라며 돌을 비켜 삽질을 한순간 돌과 다른 물체가 나왔다. 쇳덩어리다. 그냥 쇳덩어리가 아니라 느낌이 이상해 조심스럽게 쇳덩어리 주위를 파자 팔뚝만 한 크기의 80밀리 박격포탄이 나왔다.    6·25 때 사용한 불발 박격포탄이었다. 분대원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임하사의 명령을 안 듣고 쓰레기에 불을 붙였다면 분대원 모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등병으로 진급한 필자는 인근 부대원 몇 명이 수류탄 사고로 희생되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3대 독자의 부모가 부대에 찾아와 부대장 가슴을 쥐어뜯으며 "내 아들 내놔라"고 울부짖는 모습이 부대원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수류탄 폭발사고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사고 현장은 하루 전까지 필자가 보초 근무를 섰던 자리다. 만약 내무반장이 "이것들 근무상태가 개판이야! 내일부터 보초 근무 위치를 변경한다"라며 보초근무지 이동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내무반장의 명령에 따라 필자는 대공초소로, 필자와 보초근무지를 바꿔 나갔던 선임병은 사고 현장으로 나가 변을 당했지만 살아 돌아왔다. 선임병은 다행히 살아남아 복부와 허벅지에 박힌 파편을 빼냈다. 하지만 코뼈 부분에 파편 2개가 박힌 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수술을 담당했던 군의관이 "코뼈 부분에 박힌 파편을 빼내면 흉터가 크게 생긴다. 파편은 독성이 없으니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살아라"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문득 어딘가에 살고 있을 선임병을 만나보고 싶다. 온갖 살상 무기로 가득한 한반도는 언제 또다시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 한반도에 두 번 다시 전쟁이라는 악몽이 불어닥쳐서는 안 된다.      평화를 염원하는 기념물들   ▲  평화의 댐 모습으로 댐높이를 높인 공사현장 모습이 보인다. 총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 저수량 26억 3천만톤인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댐이다. 수도서울이 물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 뉴스를 들은 전국민이 성금 661억을 전달했었다 ⓒ 오문수     일행과 함께 말로만 들었던 평화의 댐 관광에 나섰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평화로 3481-18에 있는 평화의 댐은 북한강 줄기의 최북단, 군사분계선 남쪽 9㎞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총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 저수량 26억 3천만 톤의 대규모 댐이다. 1986년 북한이 200억 톤가량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임남댐을 짓고 있어 만약 붕괴한다면 강원도는 물론이고 서울 국회의사당이 잠기게 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이를 들은 전 국민이 성금 모금에 나서 661억 원을 모아 댐 높이를 높이는 평화의 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  평화의 댐 인근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종 모습. 30여개 분쟁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된 탄피와 포탄, 무기류를 모아 만든 종이다 ⓒ 오문수   평화의 댐 인근에는 세계평화의 종이 있다. 평화의 종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철물을 재료로 만든 게 아니라 세계 30여 분쟁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됐던 탄피와 포탄, 무기류 철물을 모아 만든 종으로 높이 4.7m, 무게 1만 관(37.5t)이다.   평화의 종은 종 위에 달린 비둘기 날개(1관)를 따로 떼어내 보관하고 있다. 비둘기 날개 모양의 1관은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9999관의 종에 1관을 추가해 세계평화의 종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2009년 공원개장식 때는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종식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탄 인물이다.            ▲  평화의 댐 아래 있는 '국제평화아트파크'에는 대북방송용 확성기를 이용해 평화를 뜻하는 영어 'PEAC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오문수     ▲  국제평화아트파크에 있는 조형물로 '우리가 전쟁속에 살고 있다면'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 오문수    평화의 댐 아래에는 '국제평화아트파크'가 있다. 지난 2009년 화천군이 38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만 2000㎡여 부지에 전쟁의 아픔과 안보·평화·생명을 주제로 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 있는 30여 점의 조형물은 전쟁의 상징인 무기를 활용해 평화예술품으로 재구성했다. 노란 나팔을 달고 오색 바람개비로 장식한 탱크, 평화를 약속하는 높이 38m의 거대한 반지, 폐기 처분된 탱크, 자주포, 전투기 등은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화천 인근 호수위에 세워진 조형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없어야 이러한 평화로운 모습이 유지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화천북방 최전방에서는 뺏고 뺏기는 고지전으로 수많은 군인들이 전사했다. ⓒ 오문수   군에서 제대한 지 오래됐지만 가끔 대공초소에서 보초 서던 중 '펑!' 하며 온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던 수류탄 사고와 30미터쯤 하늘로 올라가던 파란색 화약 연기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가끔 생각해 본다. 남북이 극한적인 무력대결을 관두고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아니 평화통일이 된다면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생당할 필요가 있을까?       ///오마이뉴스(시민기자)
7397    [이런저런] - 1... 5억... 댓글:  조회:3503  추천:0  2019-10-26
  '일당 1만원' 어부 6.5kg 앰버그리스 발견… '바다의 로또' 대박  2019.10.25.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향유고래 '토사물'…지속효과 좋아 향수 원료로 사용 발견직후 창고 쳐박아두기도…당국 "5억원 이상 가치"태국 남부 코사무이의 해변에서 47만 달러(한화 약 5억5248만 원) 상당의 고래 토사물을 발견한 줌루스 티아초(55)/사진=호주 야후뉴스 화면 캡처 [아시아경제 김가연 인턴기자] 생활고를 겪던 태국의 한 어부가 47만 달러(한화 약 5억5248만 원) 상당의 고래 토사물을 발견했다. 호주 야후 뉴스 등 외신은 줌루스 티아초(55)가 태국 남부 코사무이 해변을 걷던 중 6.5kg에 달하는 앰버그리스 덩어리를 발견했다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앰버그리스는 향유고래의 장에서 배출되는 회색 향료 물질로, 오징어를 주식으로 삼는 향유고래의 체내에 각질이 축적된 뒤 결석이 돼 배설된다. 용연향이라고도 한다. 앰버그리스 자체에서는 향기가 거의 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향기 성분을 알코올에 녹인 뒤 보류제로 사용된다. 보도에 따르면 티아초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고래 토사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확실하지 않아 창고에 넣어둔 채 매일 400바트(한화 약 1만5532원)를 버는 어부 일을 계속해왔다. 태국 남부 코사무이의 해변에서 47만 달러(한화 약 5억5248만 원) 상당의 고래 토사물을 발견한 줌루스 티아초(55)/사진=호주 야후뉴스 화면 캡처 '티아초가 창고에 고래 토사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확산하자, 이웃들은 그를 찾아가 발견물이 토사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티아초는 "내 조카가 마을 사람들에게 '고래 토사물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몇 명이 찾아왔었다"라며 "그들은 표본 몇 개를 채취해 갔지만 이게 고래 토사물이 맞는지는 아무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후 고래 토사물이 맞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진실을 알고 싶어서 관련 당국에 연락해 확인했다"고 전했다. 수라타니 지방의 주지사 위쇼우트 진토는 전문가들과 함께 지난 22일 티아초를 찾았다. 전문가들은 분석 결과, 티아초가 발견한 덩어리의 80% 이상이 앰버그리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선례들로 미루어보아, 이는 약 47만 달러 상당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티아초는 "이게 진짜 고래 토사물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앞서 지난 2016년 11월 80kg에 달하는 앰버그리스가 오만의 어부 세 명에 의해 발견된 바 있다. 해당 앰버그리스는 약 300만 달러(한화 약 35억 원)에 판매됐다.   /김가연 인턴기자  ===============================/// 국제 ‘바다의 로또’ 용연향 주운 태국 어부… 5억 5000만원 가치 횡재 2019.10.25            태국의 한 어부가 ‘바다의 로또’로 불리는 값비싼 용연향을 건지는 횡재를 만났다. 수컷 향유고래의 배설물인 용연향은 고급 향수 등의 재료로 사용되며, 희소가치가 높아 고가에 거래된다. 횡재를 만난 태국 어부는 올해 55세의 치아콧이라는 어부로, 올해 초 태국 타이만 남서쪽에 있는 사무이섬에서 우연히 커다란 돌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주운 용연향을 작업장에 보관했다. 이후 이웃들에게 자신이 주운 것의 정체를 아느냐 물었고, 값비싼 것으로 보인다는 주민들의 말을 들은 후에야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22일 현지 관청에서 파견된 전문가가 그의 집을 찾았고, 분석 결과 그가 주운 것이 값비싼 용연향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문가는 그가 주운 6.5㎏의 용연향의 가치가 최고 한화로 5억 5240만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용연향의 필수 성분으로 알려진 암브레인의 비율이 80%에 달한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바닷가에서 일하며 하루 평균 400바트(한화 약 1만 5600원)를 벌어 온 치아콧은 “전문가의 분석을 기다리기까지 약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면서 “내가 주운 것이 값비싼 용연향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으며 이를 곧 판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2016년 오만의 한 어부는 80㎏에 달하는 용연향을 발견해 300만 달러(35억 2600만원)를 손에 쥐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송현서 기자 ///서울신문 ======================///     [과학백과사전] 앰버그리스(ambergris)       향유고래의 장내(腸內)에서 배출되는 회색의 향료 물질. 용연향(龍涎香)이라고도 한다. 앰버그리스 자체는 향기가 거의 없으나 향기의 성분을 알코올에 녹여 보류제(保留劑)로 사용한다, 주된 향기성분은 앰브레인이라고 하는 트리테르펜 화합물이다. 향유고래는 오징어를 상식하기 때문에 「오징어의 주둥이」로 불리는 각질이 체내에 축적, 이것이 결석이 되어 몸 밖으로 배설된다. 비중이 작은(0.9~0.92 정도) 왁스(蠟) 상태의 이 덩어리가 앰버그리스인데 포획한 고래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배설되어 해상에 떠 있기도 하며, 해변에 떠밀려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대의 것은 무게가 약 152kg에 이른다.   =============================///     시사상식사전 용연향      수컷 향유고래의 배설물로, 고급 향수의 재료로 사용됨             외국어 표기     龍涎香(한자) ambergris(영어)   용연향은 향유고래의 창자 속에서 생성되는 물질로, 향유고래가 먹은 먹이 중에서 소화되지 않은 부분이 돌처럼 모여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고래의 몸에서 배출되어 바다 위를 떠다니거나 해안가로 밀려나와 발견되기도 한다. 신선한 상태에서의 용연향은 부드러운 질감과 검은 색상을 띠며 악취가 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바다 위를 떠다니며 햇빛과 소금기에 노출되면 딱딱해지면서 검은색이 점차 연해지고, 좋은 향이 나 고급 향수의 재료로 사용된다. 매우 희귀한 북쪽 잉글랜드 연안에서 발견된 향유고래의 용연향. 고급 향수 산업에 사용 됨(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용연향은 바다 위에 오래 떠다닐수록 향이 좋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며, 「바다의 로또」 혹은「 바다의 황금 덩어리」라 불릴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 이처럼 용연향은 값이 매우 비싸 예로부터 「바다신의 선물」으로 일컬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연향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용연향   [ 龍涎香 ] 유형 물품 성격 약재 재질 말향경의 장내 분비물질 용도 약용, 강장제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말향경과(抹香鯨科)에 속하는 동물인 말향경의 장내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건조시킨 약재. 내용 말향경은 크기가 거대하여 14∼23m에 달하고 자웅의 개체 차이가 크다. 이마 부위는 둔원형이고 비교적 세장한 아래턱이 심하게 돌출되어 있으며, 치아가 하악에 붙어 있다. 머리의 꼭대기 왼쪽에 한 개의 분수구멍이 있고, 눈 부위부터 입가 뒤쪽으로 외이공(外耳孔)이 작게 나와 있다. 다리는 비교적 작고 넓은 원형이며 꼬리는 넓다. 몸의 등 부위는 암흑색이며 옆은 담색을 띠고 배 부위는 은회색 또는 회색이다. 열대·아열대지방에 서식하는데, 깊은 바다에서 생활하고 오징어를 즐겨 먹는다. 이 약은 열대 남방지방에서 생산되는 유향(乳香)·몰약(沒藥)·안식향(安息香)과 함께 고려시대에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들어온 것이다. 용연향은 포획 즉시 분비물을 수거하여 건조시킨 것으로 불투명하며 아교상으로 흑갈색을 띠고 때로 오색의 광채를 발할 때도 있다. 성분은 암브레인(ambrein)·회분 등이 함유되어 있다. 약리작용은 소량에서 중추신경의 흥분작용을 나타내고, 대량에서는 억제효과가 있으며, 강심작용과 더불어 혈압강하작용도 있다. 약효는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진통·이뇨작용이 있어서 해소·천식·복통·임질 및 때로 강장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1회 용량은 1g이며, 금속제에 넣어 보관하는 것은 좋지 않다. 참고문헌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김두종, 탐구당, 1979) 『中藥大辭典』(江蘇新醫學院, 上海 科技出版社, 1979) 관련이미지 매우 희귀한 북쪽 잉글랜드 연안에서 발견된 향유고래의 용연향. 고급 향수 산업에 사용 됨(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네이버 지식백과] 용연향 [龍涎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396    [고향사람] - 조선족과 영화... 댓글:  조회:3384  추천:0  2019-10-26
조선족 리송죽 '침략자 타격' 영화에 출연하다 (ZOGLO) 2019년10월21일  인물이름 : 리송죽 [70년 기억속의 연변]    영화 속 아름다운 조선인민군 녀전사 윤옥선을 기억하고 있는가?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가진 이 조선족 처녀는 “50후”, “60후” 사람들의 마음속 녀신으로 자리매김했다. 극중 이 캐릭터를 맡은 주인공은 연변가무단 무용수 리송죽이다.   리송죽은 1936년 룡정에서 태여났다. 16살때 그녀는 로투구 고무공장에서 일을 했다. 젊었을 때 리송죽은 아름답고 활달하며 부지런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선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한번은 공장에서 주최한 문예공연에 참가해 집체무를 추었는데 당시 관중석에는 배우를 고르기 위해 연변가무단에서 기층에 내려온 연출(编导)이 있었다. 리송죽의 잠재력을 보아낸 그는 리송죽을 연변가무단으로 전근시켰다. 이때로부터 리송죽은 조선족 안무가 조득현의 학생으로 되였다. 그녀는 무용에 대해 타고난 재질이 있었는데 한번만 가르치면 인차 몸에 익혔다. 게다가 열심히 노력한데서 그녀는 안무팀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당시 연변가무단의 련꽃춤, 장고무와 물동이춤 등 안무가 큰 인기를 받았는데 리송죽은 안무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1963년 장춘영화제작사 제작진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조선족 연기자를 뽑을 때 리송죽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처음으로 영화에 도전한 그녀는 장춘영화제작사 최우수 연기자로 평선됐다. 1965년 8.1영화제작사에서 항미원조 소재로 된 영화 (打击侵略者)을  촬영할 때 극 중 녀 주인공을 고민하자 감독은 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던 리송죽을 쓰겠다고 했고 장춘영화제작사를 통해 연변가무단에 기별을 보냈다. 령도의 동의를 얻은 후 리송죽은 8.1영화제작사로 잠시 옮기게 되였고 이라는 영화에서 조선인민군 유격대 전사 윤옥선 역을 맡게 되였다.   리송죽과 함께 연기호흡을 맡았던 장용수, 장량은 경험이 풍부한 우수한 연기자들이다. 장량은 영화 중  동존서 역을 맡았고 장용수는 영화 속 참모장 소검파 역을 맡았다. 비록 영화계에서 “대스타”로 부상한 두 사람이지만 리송죽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후배를 잘 이끌어주었다. 리송죽이 전쟁 및 전쟁터에 대한 료해가 부족하자 항미원조에 참가했던 장용수는 중조군민이 어깨 나란히 전투를 하던 광경을 이야기 해주면서 그녀가 빠르게 역할에 몰입하도록 했다. 리송죽은 후에 을 보면서 부족점이 적지 않았다며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 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관중들의 호평이 자자했다. 인민군 녀전사 윤옥선의 아름다운 형상은 청년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그녀가 했던 웨이브식(波浪式) 헤어스타일은 빠르게 류행되기 시작했다. 8.1 영화제작사 책임자는 리송죽을 찾아 와서 전문배우를 할 것을 권했지만 가족이 그리웠던 리송죽은 원 단위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연변의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을 촬영할 때 28살 된 리송죽은 이미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녀의 남편 김영규는 후에 연변대학 외국어학부 주임으로 되였다. 이들 부부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업에서도 서로 도우면서 생활했다.   ///조간신문/연변라지오TV넷    
7395    [그것이 알고싶다] - 단성사와 "아리랑" 영화와 라(나)운규 댓글:  조회:4180  추천:0  2019-10-25
독립운동가 나운규 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 건국훈장 애국장 1993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27. ~ 1937.8.9.     “조선 영화계의 위대한 개척자 나 군이여. 조선의 살림이 좀 더 넉넉하고 문화가 좀 더 발달되었더라면  그대는 벌써 세계적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서광제 이라는 사건   1926년 10월 1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나운규(羅雲奎)의 영화 이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었다.1) ‘마치 어느 義烈團員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2)는 이경손(李慶孫)의 회고처럼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의 열기는 단성사에서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의 탄광에서도 상영되어 조선인 노무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3) 의 주인공은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미치광이가 된 최영진(나운규 扮)이었다. 소작인의 아들인 최영진에게는 여동생 최영희(신일선[申一仙] 扮)가 있었다. 최영희는 오빠의 친구인 윤현구(남궁운[南宮雲]4) 扮)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마름 오기호(주인규[朱仁奎] 扮)가 영희를 차지하려 한다. 미친 영진은 영희와 현구 사이를 훼방 놓던 오기호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   단성사 의 한 장면"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9_167/1475138420889Y50LS_JPEG/17a.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영화 의 한 장면 6․10 만세운동 직후에 제작된 의 근저에는 토지를 매개로 한 계급문제가 있었다. 마치 “토지는 농민에게”와 같은 6․10 만세운동의 슬로건을 연상시킴으로써 6․10 만세운동의 열기를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고소설이나 일본 신파를 번안하여 영화로 만들던 당시에 당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과 이를 극적으로 묘사한 의 제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영화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예컨대 카프 소속의 평론가 최승일(崔承一)은 소설이 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하고 있다며 이전의 조선영화 모두를 불살라버려도 될 정도의 거상(巨像)이라 극찬했다.5) 이렇듯 은 식민지 조선영화인들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나운규는 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기억되었다. 3.1운동 발발과 독립군 활동   나운규 나운규(1902~1937)는 1902년 10월 27일6)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부친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나형권(羅亨權)으로 군대 해산 후 회령에서 약종상을 했다고 전한다.7) 나운규가 수학했던 간도의 명동중학은 독립군 양성 기지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나운규 역시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연해주로 도주한 나운규는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내전이 한창이던 시베리아를 방랑하던 중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로 탈영하여 훈춘(琿春)을 거쳐 북간도로 돌아왔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나운규의 은사이기도 했던 박용운(朴龍雲)이 책임자였던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말고 공부를 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공부를 통해서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에 나운규는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간다.   명동중학교 낙성식 (1918년 4월) 회령 시내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훈춘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고 도판부 책임자인 박용운 등을 곧바로 체포하고 곧이어 나운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 한 나운규는 회령에서 머물던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藝林會)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운규가 가입한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東明劇場)과 함흥극장(咸興劇場)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두 개 극장이 설립되는 것을 계기로 지두한(池斗漢)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청년들이 조직한 소인극단이었다.8) 예림회 단원 대부분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의 여파로 고향으로 돌아온 도쿄유학출신의 학생들이었기에 연극공연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윤백남(尹白南)이 만들었던 민중극단(民衆劇團) 출신의 전문연극인인 안종화(安鍾和)가 문예부장으로 초빙되어 이들을 이끌었다.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나운규는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예림회는 북선공연을 마치고 자금난에 직면하여 문을 닫게 된다. 문예부장 안종화는 민중극단 출신들이 주축이 된 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나운규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던 김태진(金兌鎭, 예명 남궁운), 주인규와 함흥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안종화를 배웅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9) 과 나운규 시대   예림회가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나운규는 반가운 인물과 조우한다. 부산으로 내려갔던 안종화였다. 이 때 안종화가 활약하던 무대예술연구회원 전원은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전속배우로 입사하여 있었다.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미 부산에는 주인규와 김태진이 연구생으로 있었다. 나운규는 이들과 더불어 제2촬영반의 영화감독으로 초빙된 윤백남의 집에 하숙하며 영화배우로 첫발을 내딛는다. 나운규의 영화 데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윤백남 연출의 10)에서 가마꾼 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이다.11) 이 영화가 제작되던 중 윤백남과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윤백남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 결별하고 조연출이던 이경손을 위시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연구생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1925년 윤백남은 백남프로덕션을 세우고 이경손 연출의 을 제작했다. 윤백남을 따라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에서 중요 배역인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했다. 나운규는 살아있는 연기를 위해 실제 소경을 만나 그 모습을 탐구했다.12) 이러한 노력의 결과 나운규는 의 심봉사 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 , 등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된다. 이즈음 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았다. 윤백남을 따라 나섰던 사람들 중 나운규, 이규설, 주인규, 남궁운 등은 일본인 모자상(帽子商) 요도 도라죠(淀虎藏)가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해 있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창립 작품은 이규설의 였다. 일본의 신파물을 번안한 것이었다.   1 (매일신보 1926.9.17.)"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02/1475026020014KEWfE_JPEG/5.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2 5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7.10.15.)"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79/14750260208966okAH_JPEG/9.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3"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14/14750260204144JFYw_JPEG/7.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4 영화 제작진들"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56/14750260206833jx9S_JPEG/8.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1 새 영화 (매일신보 1926.9.17.) 2 단성사 (매일신보 1923.12.21.) 3 영화 소설 4  영화 제작진들 5 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7.10.15.) 에 이어 나운규의 이 제2회 작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의 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서양 활극영화와 같은 박진감 있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흥미를 돋우었다. 관객이 쏟아져 들어왔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큰돈을 벌었다. 나운규는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을 보고 (매일신보 1926.10.10.)"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82/1475026881268asuf7_JPEG/10.jpg?type=w646" style="border: 0px; clear: both; display: block;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title="" /> 신 영화 을 보고 (매일신보 1926.10.10.) 의 성공에 고무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에게 곧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나운규가 선택한 작품은 (1926)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운규가 연기한 니콜라이 박이였다. 그는 시베리아 방랑시절의 나운규를 연상시키는 듯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인물로 세탁소를 내서 고학생들을 돕고 악한을 응징하는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했던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들기 시작한 작품이라 시나리오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촬영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예림회 시절부터 함께 활동하던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등 동료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나운규의 독선적인 행동을 이유로 주인규 등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한다. 이들의 빈자리는 나운규의 연락을 받고 회령에서 내려온 윤봉춘(尹逢春)이 메웠다. 나운규는 (1927), (1927)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조선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한다. 그야말로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한 나운규에게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朴承弼)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나와 독립할 것을 권한다. 1927년 9월 나운규는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운다. 나운규프로덕션 시절 나운규는 (1927), (1928), (1928), (1928), (1929)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중 는 라는 원래 제목이 검열에 문제가 되어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작품으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또한 은 나도향(羅稻香)이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다.   1 3간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던 는 일제 경찰의 검열로 영화 제목을 로 변경하였다."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51/1475045294244guqJg_JPEG/13.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2 (1926)"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39/1475045293905W1FVq_JPEG/12.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1 아리랑 선전지 압수 (매일신보 1926.10.3.) 2 나운규영화 (1926) 3 인기배우 나운규를 고등과에서 호출조사 (매일신보 1928.4.10.) 간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던 는 일제 경찰의 검열로 영화 제목을 로 변경하였다. 나운규가 만들어낸 작품은 여전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대구의 만경관(萬鏡館)에서 상영될 때에는 너무나 많은 관객이 들어 극장 2층이 붕괴되었고 진주에서는 무대에까지 들어찬 관객들로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운규의 시대였다. 그러나 실상은 초라했다.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의 살림을 맡았던 형 나민규(羅泯奎)는 나운규와 다투고 회사 운영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나운규의 동료들 역시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과 절제치 못하는 행동에 반기를 들며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한다.13) 혼자 남은 나운규는 일본의 촬영소를 시찰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떠난다. 몰락과 재기   추장복 입은 나운규 (매일신보 1927.11.13.) 도쿄의 가와이영화제작사(河合映畵製作社)를 견학하고 돌아온 나운규는 1929년 12월 30일 서대문의 아성키네마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망년회에 얼굴을 비췄다. 나운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했다. 나운규는 자신에 대한 화살을 일간지 영화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讚映會)에 돌렸다. 우수영화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영화인들 위에 군림했던 찬영회에 대한 조선영화인들의 반감은 컸다. 망년회장은 찬영회 성토회장으로 바뀌었다. 유도선수 출신의 영화배우 이원용(李源鎔)이 조끼를 찢어 깃발을 만들었다. 몇 개의 조를 짜서 찬영회 회원인 중외일보의 최상덕(崔象德), 매일신보의 이서구(李瑞求), 정인익(鄭寅翼), 조선일보의 안석주(安碩柱), 동아일보의 이익상(李益相)의 집으로 향했다. 영화인들은 이들 신문기자들을 불러내 폭력을 가했다. 기자들에 대한 폭력사건으로 경찰에서는 다수의 영화인을 체포했다. 이중 김형용(金形容), 김태진(金兌鎭), 이원용, 홍개명(洪開明), 나웅(羅雄)이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충남 금산으로 도망친 나운규는 사태가 수습되기를 기다렸다.14) 기자들과 영화인들 간의 폭력사건은 기자들이 찬영회를 해체하기로 약속하면서 일단락되었다.15) 찬영회 사건 이후 좌익영화인들은 민족영화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나운규였다. 나운규프로덕션을 지원하던 단성사와 나운규 사이는 를 제작하면서 그 관계가 틀어졌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나운규가 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후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상황에서 원방각(圓方角, ○□△)이라는 영화제작회사를 만든 단성사에서는 이구영(李龜永) 연출로 (1930)을 제작하기로 한다. 의 제작을 위해서는 나운규의 이름이 필요했던 단성사에서는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이후 재기에 골몰하던 나운규를 영화에 출연시킨다. 이 개봉되자마자 나운규에 대한 좌익영화인들의 비난이 시작되었다. 포문은 좌익영화인인 평론가 남궁옥(南宮玉)과 서광제(徐光霽)가 열었다. 특히 서광제는 이 영화가 허무주의와 숙명론을 주입시키는 영화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가 현실적 문제를 들어 반론을 펼쳤다. 이에 대한 서광제의 반론이 이어졌고, 더불어 안종화, 윤기정(尹基鼎), 나운규 등이 가세한 논쟁이 이어졌다. 1930년을 뜨겁게 다뤘던 민족영화인과 좌익영화인 사이의 논쟁은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에 대한 카프영화부의 해산명령으로 인한 좌익영화인들 사이의 분열로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나운규는 카프연극부를 지도했던 최승일과 손잡고 미나도좌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시도했으나 소부르주아적인 연극이라는 비난을 들었다.16) 이어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인 도야마 미츠루(遠山滿)가 세운 원산만프로덕션에 참여하여 (1931)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였고 배구자무용단(裴龜子舞踊團)과 함께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나운규의 갈팡질팡한 행보에 나운규에 대한 영화인들의 성토는 높아졌다. 나운규의 죽마고우인 윤봉춘이 앞장서서 “나운규 성토대회”를 열었다. 박완식(朴完植)은 “羅 氏에게 對하여 아모 企待도 가질 수 업게 되엿다. 오히려 朝鮮映畵界에서 避身하여 주기를 强迫하고 십다”17)고 비난 했으며 심훈(沈熏)은 “천인비봉 千仞飛鳳 기불탁속 饑不啄粟(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18)라며 나운규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으로 얻은 성공의 빛이 찬란했던 만큼 그 그림자는 짙었다. 1932년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규환(李圭煥)은 후원자인 강정원(姜鼎遠)의 도움으로 (1932)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라는 스타가 출연하기를 바랐던 이규환은 나운규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나운규는 출연을 결심한다. 이규환은 뱃사공이라는 배역에 어울리게 삭발을 한 채 나타난 나운규의 모습에 놀랐고 한편으로 고마웠다.19) 나운규가 혼신의 연기를 펼친 는 성공적이었다. 이후를 대표하는 무성영화라는 평을 얻었다. 더불어 나운규는 제작비 부족으로 중단되었던 (1932)을 강정원의 도움으로 완성시킬 수 있게 된다. 의 한 장면"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10/1475035934312ycD4I_JPEG/15a.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title="" /> 영화 의 한 장면 1930년부터 토오키(talkie) 영화20)가 상영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1931년 단성사의 후원으로 이라는 제목의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려 했던 나운규는 기술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와 을 통해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1932년 1월 조선영화 제작의 가장 큰 후원자이던 단성사의 박승필이 사망한 이후에는 영화제작을 지원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운규는 궁여지책으로 연쇄극(連鎖劇)을 제작, 상연하기 시작했다.21)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지방순회극단이던 현성완 일행을 따라 다니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 사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아 적조하던 조선영화계에 영화제작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운규에게도 영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나운규는 을 제작한 바 있었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1935)와 (1935)를 만들었다. 이 사이 차상은(車相銀)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를 세워 (1935)을 제작했다. 관객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신화가 된 이름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나운규는 한양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으로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다시 을 들고 나왔다. 3만원을 투자하여 이태원에 촬영소를 만들고 일본에 가서 녹음기와 조명기를 구입하였다. 촬영은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3개월에 걸쳐 촬영된 필름은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동시녹음 촬영이 실패한 것이다. 부랴부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촬영기사로 활약한바 있었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의 대표 이창용(李創用)의 도움을 받아 재촬영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녹음을 했다. 하지만 이 사이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서는 최초의 토오키 영화 (1935)을 세상에 내 놓았다.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는데 실패한데다가 3,000원의 추가비용까지 들었던 은 손해가 막대했다. 폐병으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큰 빚을 진 상황에서 쉴 틈이 없었다. 조선흥행계의 실력자인 경성촬영소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나운규에게 접근해 왔다. 와케지마 수하에 있던 도야마 미츠루가 만든 원산만프로덕션에서 활동하여 조선영화인들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많은 자본과 최신의 기술이 필요한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흥행업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나운규는 경성촬영소에서 (1937)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는 을 만들기 전, 어느 신문에서 한 무명작가의 소설을 읽고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라는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 소설이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무명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했다. 당시 이태준은 병으로 성북동 집에서 정양 중이었다. 나운규 역시 폐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태준을 문병했다. 이태준은 시대일보에 연재했던 의 스크랩북을 꺼냈다. 십여 년 전 읽었던 그 작품이었다. 이태준에게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고 다행히 승낙을 받았다. 검열을 고려하여 어떤 부분을 고칠 것인지를 상의하고 곧바로 영화제작에 착수했다.22) 촬영은 강원도에서 진행되었다. 쇠약한 몸에 주사를 맞아가며 분투하고 있었기에 신경은 여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촬영 중 전기사용 문제로 시비가 붙자 주먹을 휘둘러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병색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나운규는 와케지마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병든 몸으로 힘들게 완성한 는 1937년 1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한국 영화계의 신화 나운규 나운규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쉬면서 몸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차도가 있자 무성영화로 제작했던 를 발성판으로 바꾸기 위해 도쿄에 다녀왔다.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움직였던 것이 독이 되었다. 폐병이 악화된 것이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11일 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였기에 만드는 영화마다 검열의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나운규가 만든 영화의 밑바탕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실천이 깔려 있었다. “진정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의 지난날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모를 일이다.”23) 1962년 나운규 탄생 60주년 기념을 맞아 오영진(吳泳鎭)이 남긴 추도사의 한 구절이다. 참고문헌 . 《문학신문》. 1957.8.15. . 《朝鮮日報》. 1924.1.8. 金幽影. . 《東亞日報》. 1931.4.12. 羅雲奎. 〈映畵時感〉. 《三千里》 9卷 1號. 1937.1. 朴完植. , 《中外日報》. 1930.3.15. 승일. . 《별건곤》. 1926.12. 沈熏. . 《東光》 제23호. 1931.7. 安鍾和. 『韓國映畵側面祕史』. 현대미학사, 1998 오영진. . 《한국일보》. 1962.11.25. 柳珍山. . 《大韓日報》. 1973.5.8. 李慶孫. . 《新東亞》. 1964.12. 李圭煥. . 《中央日報》. 1979.12.22. 이효인. 「찬영회 연구」. 『영화연구』 53호. 2012.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최창호·홍강성.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평양출판사, 1999.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 편』. 도서출판소도, 2004.     주석 1 당시 영화관에서는 요즘처럼 한편을 여러 번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뉴스와 코미디와 같은 단편과 멜로드라마 류의 장편 여러편을 묶어서 3시간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과 함께 상영된 영화는 미국 유니버셜사에서 만든 (1926)이었다. 2 李慶孫. . 《新東亞》. 1964.12. 346쪽. 3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178쪽. 4 남궁운의 본명은 김태진(金兌鎭)으로 1930년대 이후에는 극작가로 활동했다. 5 승일. . 《별건곤》. 1926.12. 107~109쪽. 6 남한에서 나운규는 1902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청진형무소 수형기록에는 광무6년(1902년) 생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조희문, 위의 책, 35쪽). 반면 북한에서는 나운규의 생년을 1901년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운규의 아들 나종익과 누이동생 나필규가 참석한 1957년 8월 9일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주최한 나운규 서거 20주년 추념식에서 나운규의 생년을 1901년으로 기록했다( 《문학신문》, 1957.8.15.). 이를 통해 보면 나운규의 실제 태어난 해와 호적상의 기록이 다를 수 있다. 7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37쪽. 8 . 《朝鮮日報》. 1924.1.8. 9 安鍾和. 『韓國映畵側面祕史』. 현대미학사, 1998. 72쪽. 10 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는 이다. 11 안종화, 이경손 등은 나운규의 영화데뷔를 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이것이 정황상 맞다. 그러나 나운규와 함께 연구생으로 있었던 이규설, 김태진 등은 나운규가 의 어부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고 전한다. 12 최창호·홍강성.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평양출판사, 1999. 65~68쪽. 13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 편』. 도서출판소도, 2004. 139~141쪽. 14 柳珍山. 〈映畵人 羅雲奎>. 《大韓日報》. 1973.5.8. 15 찬영회 사건에 관하여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했음. 이효인. 「찬영회 연구」. 『영화연구』53호, 2012. 16 金幽影. . 《東亞日報》. 1931.4.12. 17 朴完植. . 《中外日報》. 1930.3.15. 18 沈熏.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東光》 제23호. 1931.7. 61쪽. 19 李圭煥. 〈映畵60年〉. 《中央日報》. 1979.12.22. 20 영사(映寫)할 때 영상(映像)과 함께 음성, 음악이 나오는 영화로 발성영화(유성영화)를 말한다. 기존의 무성영화와 대비. 21 연쇄극이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흥행물이었다. 1919년부터 1920년대 초반 사이에 유행하던 연쇄극을 다시 상연한 것은 토오키 영화의 유행에 따른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22 羅雲奎. 〈映畵時感〉. 《三千里》 9卷 1號. 1937.1. 231쪽. 23 오영진. . 《한국일보》. 1962.11.25.   관련이미지 15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 건국훈장 애국장 1993 (독립운동가, 한상언, 이달의 독립운동가)   ====================================/// 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羅雲奎,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관련이미지 41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   시사상식사전 나운규      한국의 영화감독으로, 1926년 으로 한국 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27년에는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특히 1936년 을 제작하면서 동시녹음을 실시하여 한국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외국어 표기     羅雲奎(한자)     출생~사망      1902~1937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춘사'이다. 1912년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으며, 1918년에는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된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수감되었고, 1923년 출감하였다. 1925년 부산으로 내려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한 뒤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했으며, 이때부터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다 1926년 자신이 원작·각본·주연을 맡은 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조선키네마'에서 (1926), (1927), (1927) 등을 만든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 프러덕션'을 창립해 시나리오 작가·감독·배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왔던 작품들이 그해 5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 1928년 와 , 등이다.  그러다 1929년 초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를 끝으로 잇단 흥행 실패와 운영난에 처해 있던 나운규 프러덕션은 문을 닫게 된다. 나운규는 이후 (아리랑 2편, 나운규 주연, 이구영 감독)을 만들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받는 데는 실패했으며, 1937년에는 수양딸과 아버지에 얽힌 인간의 애욕 문제를 다룬 (1937)를 내놓았다.  나운규는 잇단 흥행 실패 이후 이류 극단을 따라다니며 연기를 했는데, 이때 등 사회주의적 연극을 연출하거나 출연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1937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한편, 나운규는 영화인으로 활동하는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는 15편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7394    [그것이 알고싶다] - 한국영화 100 댓글:  조회:4252  추천:0  2019-10-25
오는 27일은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영화는 눈부신 성장을 해 왔는데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고 명장면은 무엇인가요? 카드뉴스로 만나보시죠! [기획 = 유정화 인턴기자, 그래픽 = 조혜원 인턴기자]  
7393    [그것이 알고싶다] - 한국 최초 영화와 단성사 댓글:  조회:4090  추천:0  2019-10-25
  시사상식사전 의리적 구토      1919년 신극좌 김도산 일행이 만들고 단성사의 사장이었던 박승필이 제작한 연쇄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다.  송산이라는 주인공이 가문에 위기를 일으키는 계모일파를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찾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국어 표기     義理的 仇討(한자)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작품으로 김도산이 감독, 각본 및 주연을 맡고 신극좌의 단원들이 배우로 출연한 연쇄극이다. 연쇄극이란 키노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불리는데,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형식을 말한다. <의리적 구토>에는 약 1,000피트의 필름이 삽입되어 연극 중간에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연쇄극으로 제작되기 앞서 신파 연극으로 우미관에서 공연된 바 있다. 당시 국내 기술진이 전무해 각본과 연출은 김도산이 맡았지만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미야가와 소우노스케에 의해 진행됐다.  <의리적 구토>는 자신을 괴롭히고, 심지어 그의 유산까지 탈취하려는 계모일파에게 온갖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송산이 주인공이다.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송산은 어느날 매초라는 친구를 만나,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권유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계모일파를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찾게 된다.  이 작품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 잠시 연쇄극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연쇄극을 시도하면서 영화 제작에 있어서 한 단계 진보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1962년 '영화의 날 제정위원회'에서는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 제1호로 정하고,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도 이를 두고, 영화사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1923년 4월 9일 상영된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를 한국영화의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는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남자가 착실한 약혼녀의 저축으로 갱생한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비록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영화였으나 완전한 극영화라는 점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적 구토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두산백과 의리적 구토   [ 義理的仇討 ] 요약 1919년에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극. 제작년도 1919년 감독 김도산 각본 김도산 출연 김도산, 이경환 제작 박승필 제작사 단성사 1919년에 단성사(團成社)의 사장 박승필(朴承弼)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다. 제목이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주장도 팽팽하다. 연극 공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삽입한 변형된 연극 형식인 연쇄극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1919년 7월 우미관(優美館)에서 신파연극으로 절찬리에 공연되었다. 김도산(金陶山)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였으며 일본인 미야가와 소오노수케(宮川早之助)가 촬영과 편집을 맡았다. 김도산, 이경환, 윤화, 강원형, 최일, 양성현, 김영덕과 신극좌(新劇座) 단원들이 출연하였다. 송산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불우하게 자란다. 재산을 욕심내는 계모의 간교한 계략으로 인해 집안에서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심하였다. 송산은 복잡한 집을 떠나 보람있는 일을 하려고 결심한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계모는 재산을 차지하려고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죽산과 매초는 분노하며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송산이 만류한다. 송산은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참지만 매일 괴로운 마음을 술로 달랜다. 계모 일당에 의해서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처하여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송산은 눈물을 머금고 칼을 든다.   박승필의 자본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대표 김도산의 인력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신파 연쇄극은 침체된 신파극계에 획기적인 재기를 가져다 주었다. 김도산 일행은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일본에서 촬영기사를 초청하여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이 작품을 완성하였고 1919년 10월 27일에 단성사에서 상영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구체적인 제작의 결과를 기준으로 하여 또한 우리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어 제작하였다는 두 가지 점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두산백과)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의리적 구토   [ 義理的仇討 , Fight for Justice ] 해설   김도산의 본격적 활극. 일명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전 3막 22경으로 구성된 신극좌의 연쇄극으로 가문의 명예와 선친의 유산을 지키려는 전실 아들과 악랄한 계모간의 암투를 그린 내용. 단성사 사장이던 박승필이 제작·기획하고 신극좌를 창설하여 이끌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이 각본·연출·출연했다. 운동이 일어난 그해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기차와 한강 다리를 찍은 김도산 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과 함께 동시 상영됐다. 제작비 5,000원.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으로 우리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이 되고 있다(한국영화 75년사 CD롬, 조선 95. 1. 1). 당시 광고에 보면 입장료는 특등 1원 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 등 4등급이 있고 촬영 장소는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정차장 등으로 밝히고 있다. 줄거리   송산(김도산)은 계모(김영덕)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선친의 유산을 탐내는 계모에게 온갖 설움과 구박을 당하는 등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계모의 흉계는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눈엣가시 같은 송산을 없애려는 음모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송산은 가문과 선친의 명예를 위해 집에서 잠시 떠나 의형제인 죽산(이경환), 매초(윤혁)와 함께 계모 일파와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한다. 계모와 그 일당의 발악이 극에 달했을 때 송산은 정의의 칼을 뽑아 그들을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되찾는다.   [네이버 지식백과]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Fight for Justic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2011. 4. 20., 이세기)    
7392    [고향사람] - 가야금과 "결혼한" 총각선생... 댓글:  조회:3793  추천:0  2019-10-25
가야금 열풍 일으킨 총각선생님–조용군 (ZOGLO) 2019년10월24일  인물이름 : 조용군   [편집자의 말]   길림신문 다큐 처녀작 오늘 첫선… 독자 여러분 시청 바랍니다.    뉴미디어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언론 매체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저마끔 새로운 시도로 개혁에 나서고 있습니다. 와중에 길림신문 역시 올해부터 전통적인 전파형식을 타파한 ‘문자+사진+영상’을 어우르는 매체 융합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독자들한테 조선족사회의 따뜻한, 긍정에너지가 넘치는 이야기를 살아있는 영상으로 체현해 더 현장감있고 생동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입니다. 오늘자 지면신문에 실리는 기사 은 본지와 함께 ‘다큐’(纪录片) 형식으로 영상에 담아 길림신문 사이트와 위챗공식계정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영상기사 은 길림신문 력사상 처음 영상으로 제작된‘인물다큐’처녀작입니다. 앞으로도 생동하고 무게있는 영상 작품으로 여러분들을 찾아가겠습니다. /길림신문 뉴미디어센터 조선족의 전통악기 가야금연주로 기네스북에 도전하고 싶다는 조용군 총각선생님(1982년생), 조용군은 연길시 신흥소학교 음악교원이다. 조용군의 노력하에 보급된 ‘가야금’은 이미 이 학교 명함장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조용군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온 후 가야금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 5-6학년 학생들의 연주는 대학 예술전공 4학년 정도의 수준에 이를 정도입니다.” 신흥소학교 부교장 김향화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남자가 무슨 가야금을 하냐? “어머니, 저 악기 이름이 뭐예요?” 10살되던 해 부모님과 같이 공연 보러 간 조용군은 가야금 제3대 전승인인 김성삼선생님의 가야금연주에 푹 빠졌다. 그리고는 어머니한테 악기에 대해 물어보며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졸랐다. 하지만 “남자가 무슨 가야금을 하냐?”며 부모의 반대로 대학시기까지 가야금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가야금’이라는 세글자는 십몇년간 늘 그의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대학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 그는 가야금 학습반을 찾아 다니며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가야금은 배울수록 참 매력이 있더라구요. 배울수록 더 배우고 싶고 들을수록 더 듣고 싶고 처음에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배우니깐 전문으로 배우고 싶어 졌어요.” 18년만에 꿈의 문을 열어 그러다가 조용군은 끝내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릴 결정을 내리게 된다. 28살되던 해 그는 늦깍이 대학생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가야금 전공 시험을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도 대학입시 석달을 앞두고 … 그의 의외의 결정에 부모는 물론 모든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다. “기초도 없는 네가 이 나이에 너무 늦었어.” “닭알로 돌을 치는 격이야, 포기해라.” “10년정도 책을 놓았는데 어떻게 대학입시 시험을 보겠느냐?” ... 한사람도 지지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가출하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대학교에 입학해 가야금수의 길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예상대로 연변예술학교 고중에서의 첫 3월 월고 성적은 72명 학생중 72명으로 꼴찌였다. 〈이런 성적으로는 가야금을 배우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조용군은 그후부터는 첫시간 강의부터 마지막 강의까지 모두 록음해놓고 100% 외우다 싶이 하면서 악착스레 공부를 했다. 72등에서 40등을, 40등에서 2등의 훌륭한 성적으로 2008년 그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가야금전공에 입학하였다. 대학에는 입학했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하다보니 손이 굳어져 남들이 1-2시간 련습해야 하는 것을 그는 7-8시간씩, 지어 밤을 새며 련습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손이 터지도록 련습해도 내가 좋아하는 가야금을 선택했기 때문에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참 행복하구나 라고 느껴졌어요”. 자신의 화려함보다는 꿈나무 키우는 원예사로 “우리 학교에 오셔서 꿈나무들한테 가야금을 배워주지 않을래요?” 민족예술 보급 취지를 확고히 했던 신흥소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조용군에게 제의한다. 교원들의 가야금공연 작품을 잘 만들어줬던 적 있는 조용군이 아이들도 잘 가르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원보다는 무대에 서서 화려한 가야금수로 멋진 공연을 하는 것을 동경했던 그는 출로의 갈림길에서 스승인 김성삼선생님을 찾아간다. 김성삼선생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많은 꿈나무들한테 꿈을 심어주면서 우리 민족 음악을 보급시키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에 조용군은 배움에 갈망했던 어릴적 자신을 돌이키며 가야금수로서의 진정한 책임감과 의무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원예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당시 신흥소학교를 비롯한 연변 각 소학교에는 가야금 선생님이 적었고 가야금도 보급되지 못한 정황이였다. 게다가 가야금써클에 참가하면 “공부에 지장되지 않을가? 가야금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학부모들도 그의 가야금써클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 반년만에 그는 〈아리랑〉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에 힘 입어 그후 륙속 좋은 작품을 선보이자 연변TV, 북경 공연에 초청되면서 가야금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가야금을 30대에서 60대, 지금은 120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야금써클에 참가하겠다는 학생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한테 잠재해있는 민족 흥 이끌어내야 가야금은 손으로 줄을 뜯어 소리를 내기 때문에 줄과 손의 마찰로 물집이 생긴다. 한번 생기면 괜찮은데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계속 련습해야 하니 그 과정은 고통이 동반된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은 한명도 없다고 한다. “가야금은 두 손으로 하는 악기이기에 집중력 향상, 대뇌 발달에도 좋음을 알게 되였죠. 가야금을 배운 후로 아이가 무대에 오르며 단련 받다보니 내성적이던데로부터 활발해지고 성적도 향상되였습니다.” 6학년 김지민학생의 어머니가 말한다. 특히 올해 이 학교 가야금써클에 참가했던 3명 학생이 예술특장생으로 고중에 입학하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또한 이 학교 가야금팀은 전국중소학생예술류콩클에서 금상을 따냈고 향항에서 열린 아세아청소년예술절에 참가해 80개 팀중 단연 1등을 따내기도 했다. 조용군은 “요즘 애들은 현대가요를 좋아하지만 그들한테는 우리 민족 끼와 흥이 다 잠재해있죠. 이런 흥을 끄집어내고 예술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저의 큰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 높이에 맞게 수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죠.”라고 말한다. 1300여명 가야금연주로 기네스북에 도전해볼 터 이번 학기부터는 3, 4학년을 상대로 매주 1교시로 가야금수업도 진행하게 된다. 학교 전체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보급해야 함은 학교지도부와 그의 공동 희망이다. 제4대가야금전승인이기도 한 조용군은“학생들을 데리고 국내 무대에 서면서 곳곳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죠. 하지만 대부분 고쟁(古筝)에 익숙한 반면 가야금에 대한 인지도가 적음을 알게 되였죠. 금후 전국에 우리 민족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조용군한테는 한가지 소원이 더 있다. 바로 신흥소학교 전교 1300명 학생이 운동장에서 동시에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기네스북 등재에 도전해 국내외에 민족악기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가야금 교육에 모든 꿈을 바치며 아직 결혼도 못한 총각선생님, 그의 아름다운 소망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길림신문 최화,정현관 기자
7391    [력사속에서] - 한국 최초의 영화관 - 단성사(團成社) 댓글:  조회:5353  추천:0  2019-10-24
두산백과 단성사   [ 團成社 ] 요약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영화관. 이미지 크게보기 단성사 구분 영화관 설립일 1907년 소재지 서울 종로3가 지도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과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웠다. 1909년 이익우가 사장이었으나 한흥석으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일본인 후지하라[藤原雄太郞]에게 넘어갔다. 주로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중반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19년 10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 《의리적 구토》를 상영함으로써 한국영화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하였고, 1926년 나운규(羅雲奎)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개봉하여 서울 장안을 들끓게 하였다. 그 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優美館)과 더불어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인 영화관인 황금좌(黃金座)·희락관(喜樂館)·대정관(大正館) 등과 맞서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무용발표회 등에도 무대를 제공하여 새로운 문화의 매체로 큰 몫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개칭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樂劇)을 공연하였다. 2005년 2월 지하 4층, 지상 9층에 7개 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였고, 이듬해 9월 3개 관을 추가하여 총 10개 관에 1806석을 갖추고 있다. 2008년 4월에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9월 23일 경영악화로 부도처리된 뒤,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성사 [團成社]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성사   [ 團成社 ] 이미지 크게보기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대륙극장 유형 단체 시대 근대/개항기, 근대/일제강점기, 현대 성격 연극영화전문극장 설립일시 1907년 6월 4일 설립자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의의와 평가 정의 1907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있는 극장. 개설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지명근(池明根)·주수영(朱壽榮)·박태일(朴太一) 등이 공동 출자하여 기존 목조 2층의 건물을 가지고 세웠다. 무대설비와 대도구 등의 제작은 경성좌(京城座) 일본인 무대디자이너가 맡았다. 연원 및 변천 단성사(團成社)는 처음에는 기생들의 창이나 무용 등으로 자선공연을 주로 하였다. 1908년 7월 붕괴사고와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908년 10월 문을 닫았다가 곧 다시 개관해서 각종 연희(演戱)를 공연하였다. 1909년이익우(李益雨)가 사장으로 있었으나, 다음해인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와 함께 경영권이 일본인 후지와라 유타〔藤原雄太郎〕에게로 넘어갔다가 1911년최우석(崔禹錫)·장기형(張機衡)·박기영(朴基英) 등 3인 공동경영으로 전환되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광무대(光武臺) 경영자 박승필(朴承弼)이 인수하였다. 박승필에게 넘어가기 전 주로 판소리·창극 등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이었고, 가끔 활동사진도 상영하였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단성사는 영화관으로 사용하였으며, 3층 벽돌건물로 개축하였다. 영화전용극장으로 바뀌고 나서도 개화기의 극장들이 연극과 영화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도 많이 공연되었다. 특히 이 곳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의리의 구토」가 개봉되어 ‘영화의 날’이 이 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1929년 극단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도 단성사에서 창립공연을 하였으며, 대체로 신파극단들이 이곳에서 연극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0년대에는 외국영화도 상영하였고, 1940년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단성사로 환원하였다. 2001년 9월단성사 건물이 철거되고 신축공사로 착공되어 2005년 2월 7개관을 갖춘 규모의 멀티플랙스(Multiplex) 영화관으로 개장되었다가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였다. 2008년 4월에는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부도처리되어 같은해 11월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단성사는 광복 후 악극(樂劇)을 공연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영화관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단성사는 극장이 드물던 개화기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연극과 영화상영의 주요근거지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신극사이야기』(안종화, 진문사, 1955) 단성사(www.dansungsa.com) 관련이미지 12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1930년대 단성사(경성) 극장 건물의 앞모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겨레음악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단성사 [團成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의 극장 ‘수도 서울’ 극장의 자존심: 단성사     목차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위상 해방 이후 한국 영화 중흥 시기 단성사 멀티플렉스 시대 단성사의 우여곡절 1907년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 최초로 민간인이 설립한 실내 극장 단성사가 등장했다. 일제강점기 단성사는 무대예술 공연을 비롯해 영화 제작 및 배급 그리고 상영의 주역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외화 상영관의 대명사를 자처한 단성사는 2015년 폐관할 때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극장으로 존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위상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제국 황실 극장 협률사(協律社)가 문을 열었다. 협률사가 개관한 지 5년이 지난 1907년 한성의 몇몇 실업가들이 종로에 모여 단성사(團成社)를 설립했다. 단성사는 조선이 근대와 제국의 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등장한 극장답게 극장의 운영 방침에 조선인 교육과 자선(慈善)을 앞세웠다. 즉,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시기, 극장은 흥행장 성격을 넘어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장소가 되었다. 단성사가 자리한 종로3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종족(ethnic) 간 거주지 공간 분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곳이었다. 일본인이 조선에 이주하면서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이라는 조선인과 일본인 주요 거주지가 각각 나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거주지에 조선인이 설립한 단성사는 불안정한 재정으로 1917년 일본인 다무라 요시지로(田村義次郎)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조선인 박승필이 극장을 운영하면서 조선인 극장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1910년대 단성사는 극장에서 인기를 누린 서양 영화를 전국 12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했다. 단성사가 조직한 지방 순업대(巡業隊) 덕분에 전국을 돌아다닌 작품은 할리우드 유니버설(Universal)영화사의 연속영화(serial film) (Francis Ford, 1915)이었다. 연속영화는 연속적인 이야기 순서 내에서 짧은 주제의 시리즈로 영화를 구성하고, 각 주제의 시리즈는 위기일발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 형식을 일컫는다. 이러한 영화는 다음 편 주제에서 전편의 이야기를 이어 가는 ‘감질이 나는’ 구성이어서, 다음 편 내용이 궁금한 관객들이 매주 극장을 찾았고 그 결과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단성사는 할리우드 연속영화의 흥행을 지켜보면서 조선 최초의 영화이자 연쇄극 (김도산, 1919)를 제작했다. 연쇄극은 연극 장면과 영화 장면을 무대와 스크린을 통해 번갈아 가며 보여 주는 형식을 말한다. 는 한강철교와 장충단 등 경성의 명소를 비롯해 전차와 기차 등 근대 신문물을 담아내어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단성사는 의 흥행 이후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19편에 달하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발전의 선봉이 되었다. 또한 단성사는 일제강점기 흥행작 (나운규, 1926)을 상영하고,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이명우, 1935)을 개봉하면서 신기술 도입에 따른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소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의 중심이었던 단성사는 1939년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일본인의 손에 흥행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명칭도 대륙극장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한국 영화 중흥 시기 단성사 해방을 맞이하고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은 1946년 3월 1일 단성사는 대륙극장에서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이때 단성사는 개화기 출범 당시 그랬던 것처럼 “계몽 선전 기관”으로서 성격을 다시 부여받았다. 단성사에 대한 공적(公的) 공간으로서 요청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극장은 국방부 정훈국 주최로 일선 사병의 실전(實戰) 보고(報告)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단성사는 기본적으로 흥행 장소였으며, 1953년 영화수입사 불이무역 대표 김인득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으며 본격적인 외화 상영관으로 변했다. 외화 전문 상영관으로서 단성사의 정체성은 1962년 이남규에게 매각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70년대 단성사의 흥행 장르는 홍콩 검술영화 같은 액션 영화였는데, 이들 작품은 인구와 교통의 집산(集散)이 신속히 이뤄지는 ‘종로3가’라는 지리적 상황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흥행 장르였다. 또한 단성사는 극장 인근에 소재한 고등학교 덕분에 학생을 동원한 단체 상영도 가능했다. 1966년 스크린 쿼터(Screen Quota) 제도가 도입되자 외화 상영을 고집하던 단성사도 한국 영화 상영에 동참했다. 국산 영화 보호와 육성을 위해 공보부(公報部)가 시행한 스크린 쿼터 제도는 외화 상설관도 연간 4~6편의 한국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만든 조치였다. 이러한 스크린 쿼터 실시 이후 단성사가 처음으로 상영한 한국 영화는 (김묵 · 설봉 · 박호태, 1966)이었다. 이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반공주의 선전 영화라는 점에서, 단성사의 이 영화 상영은 반공 이념에 기반을 둔 정권에 대응한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1970년대 초중반에 단성사의 한국 영화 상영은 급증했으나 여전히 흥행을 올리는 작품은 할리우드 영화였고, 그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시는 1978년 140일 동안 상영한 (Lewis Gilbert, 1977)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단성사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대표적인 극장이 되었다. 그 기폭제는 바로 (임권택, 1993)였는데, 이 영화는 하루 평균 4318명이 입장해 총 84만6500여 명의 관람 인원을 기록했다. 단성사를 비롯해 서울의 여러 극장에서 상영한 는 6개월 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이와 같은 의 흥행 배경은 일차적으로 영화적 완성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당시 회자된 세계화 구호와 민족주의 상승의 작용 결과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멀티플렉스 시대 단성사의 우여곡절 단성사는 개관 이래 제작과 상영을 아우르며 한국 영화 발전의 중심에 자리하였고,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 시내 개봉관 흥행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강남 개발에 따른 서울 도심의 확대와 1980년대 외국영화 직접 배급의 실시는 단성사를 과거의 명성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급기야 1990년대 후반 스크린을 다수 보유하며 배급 라인을 장악한 대기업의 영화 시장 진출은 단성사의 존립을 위협하였고, 이에 따라 단성사는 극장 회생을 위한 새로운 변신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단성사는 지하 4층과 지상 9층에 7개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고,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여 총 10개관에 1806석을 갖췄다. 이후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체인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부도 처리되어 ‘아산엠단성사’로 변했으며, 2016년 8월 복합 귀금속 쇼핑 문화 공간으로 전환했다. 요컨대, 단성사는 연극장으로 출발하여 영화관과 멀티플렉스를 지나 쇼핑 장소로 변한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흥망성쇠를 겪은 단성사를 보노라면, 인생사 그것과 다르지 않아 숙연해진다. 건물 외관은 변해도 관객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 단성사는 영원히 극장으로 남을 것이다. 참고문헌 송영애(2016). 1960~1970년대 서울 시내 개봉관 연구: 단성사를 중심으로. ≪2016년 한국영화사연구소 심포지엄 은막의 사회문화사: 개봉관의 등장부터 1970년대까지≫ 자료집, 37~56. 한국영상자료원. 이길성 외(2004). 『1970년대 서울의 극장산업 및 극장문화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이순진(2011). 『(조선인 극장) 단성사: 1907-1939』. 영상자료원. 이효인 외(2004). 『한국영화사 공부(1960-1979)』. 이채. 한국영화사연구소 주제사채록연구팀(2010). “ 1960~1970년대 영화관 1: 조상림 · 이용희”. 한국영상자료원. “단성사 신발족”, ≪중앙신문≫, 1946년 3월 1일. “일선사병 실전보고 강연 단성사로 장소변경”, ≪조선일보≫, 1954년 1월 13일 조2면.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www.koreafilm.or.kr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www.kmdb.or.kr 관련이미지 1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단성사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동아일보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수도 서울’ 극장의 자존심: 단성사 (한국의 극장, 2017.01.31, 위경혜)  
739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89  추천:0  2019-10-24
신문 배달 소년이 발견한 1500년전 가야 ‘말 갑옷’ 보물 된다 2019.10.24.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992년 발굴된 함안 마갑총 유물 5세기 철기 제작기술 보여줘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 옷 및 고리자루 큰 칼(김해박물관). [사진 문화재청] 지난 1992년 6월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당시 지명) 아파트 건설현장. 공사가 한창인 주차장 부지를 지나던 신문 배달 소년이 독특한 모양의 녹슨 쇳조각을 발견했다. 소년은 이를 신문지국장에게 알렸고 지국장이 이를 신고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4년 6개월간 보존처리를 거쳐 드러난 쇳조각들의 정체는 말 갑옷(마갑·馬甲)이었다. 비늘 같은 쇳조각 450여 개를 연결한 것으로 길이 226~230㎝, 너비 43~48㎝다. 쇳조각들은 보호 부위에 따라 크기가 서로 달랐고 줄을 꿰는 구멍도 정교했다. 질서정연한 비늘 연결 상태는 철의 나라, 아라가야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됐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최초로 온전하게 발굴된 말 갑옷이었다.  이 공로로 당시 중학생 신문 배달 소년이던 이병춘(44)씨와 사학과 출신의 신문지국장 안삼모(57)씨는 지난 5월 경남도지사상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23일 함안 마갑총(馬甲塚) 조사 때 발굴했던 말 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을 비롯한 가야문화권 출토 중요 유물 5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말 갑옷과 고리자루 큰 칼은 당시 무덤 주인공 좌우에 하나씩 매장됐던 것으로 함께 나온 여러 유물에 대한 연구 결과, 5세기 아라가야에서 제작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반도에서 말 갑옷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삼국이 서로 영토 싸움을 벌이던 4~6세기다. 이 시기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됐지만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극히 드물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황정연 연구사는 “마갑총 외에 5세기 신라 유적인 쪽샘지구 10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것 정도만 원형을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함안 마갑총 출토 당시 모습. [사진 문화재청] 마갑총 마갑은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과 가슴을 가리는 경흉갑(頸胸甲, 목가슴드리개),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또한 함께 나온 고리자루 큰 칼은 철을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모양을 만들고 철제 위에 무늬를 새기는 기법이 고루 적용돼 가야인들의 철 조련 기술, 공예기법 수준, 조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동북아에서 철제 무구와 중장기병 전술이 확산하는 양상과 높은 수준의 철기 제작기술이 개발되고 교류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합천 옥전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3쌍과 큰 칼들도 보물 지정 예고됐다. 이 중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 한 쌍은 1985~1986년 경상대 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야 시대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사슬고리나 S자형 금판고리를 연결하여 기다란 형태를 만드는 독창적 기술은 당대 신라나 백제와 다른 가야 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며 5세기 후반~6세기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옥전 M4호분 출토 금귀걸이는 가야귀걸이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인 가늘고 둥근 주고리아래 속이 빈 공 모양의 장식을 달고 그 아래 심엽형(나뭇잎 모양) 장식과 마지막으로 산치자 열매 모양의 입체형 장식을 달고 있다.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는 출토지와 발견 위치, 함께 출토된 유물이 확실해 고고학적 맥락이 뚜렷하고 현존하는 가야 산치자형 장식을 가진 금귀걸이 중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합천 옥전 고분에서 나온 가야시대 금귀걸이들. 왼쪽부터 각각 28호분, M4호분, M6호분에서 출토.[사진 문화재청] /강혜란 기자
7389    [그때그때] - "단성사" 100 = 한국영화 100 댓글:  조회:3712  추천:0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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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살되는 사과배선조나무 구합시다... 댓글:  조회:3912  추천:0  2019-10-24
근 100년 된 소기촌의 사과배선조나무 구합시다! (ZOGLO) 2019년10월22일    사과배선조나무가 스러질가봐 가슴을 앓는 리태수선생, 정부와 전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소기촌에 있는 사과배선조기념비 키를 한어로 버치(簸萁)라고 부른다. 그런 “버치”가 희한하게도 지명으로 기재되여있는 곳이 있었다. 룡정시 로투구진의 소기촌(小萁村)이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지형이 마치 키처럼 생겼다해서 버치골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소기촌으로 불리웠다고 지명지는 적고 있었다. 지금은 여러 마을들이 합쳐져 용진촌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입버릇처럼 소기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도중에 소기촌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길가던 촌로 한분이 로투구시가지를 들어가기전 다리를 건느지 말고 왼쪽길로 꺽어들라고 신신당부했다. 연길에서는 30키로메터가 넘는 거리였다. 자전거로 한시간 반쯤 달리니 도착했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였다. 특히 연변의 명물인 사과배가 산에서 내릴 때쯤인 10월이면 더욱 떠오르는 고장이기도 했다. 소기촌이 기억에 남는 것은 이곳에 바로 연변사과배의 시조로 되는 사과배선조나무가 있고 그 모수(母树)를 육성해낸 최창호의 전설들이 깃들어있기때문이다. 로투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산골짜기를 따라 2~3키로메터쯤 달렸을 때 오른쪽 길가에 “연변사과배선조나무”라고 쓴 표지석 하나와 사과배고목 한그루가 나타났다. 사과배선조나무는 올해 99세라고 한다. 1921년도에 조선 북청에서 갖고온 배나무 접가지와 당지의 돌배나무를 접해서 육종해낸 나무가 바로 현재 연변의 유명한 사과배선조나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변지역 모든 사과배나무의 원시조로 되는 모수격인 사과배선조나무가 아직 소기촌에 한그루 남아 있는 것이다. 사과배선조나무를 마주하니 풍상고초를 겪을대로 겪어온 백발이 성성한 로인을 마주한 느낌이였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했으나 너무 늙어서 차마 말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듯 그런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제1대 사과배선조나무의 마지막 한그루. “가끔은 사람들이 찾아와 신기한듯 구경하고 가기도 하지요.”방옥하라고 부르는 촌민이 일본은 물론, 한국손님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몇해전 일본에서 온 손님은 연변에 와서 사과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미혹된 나머지 사과배의 유래에 대해 긍금증을 느껴 소기촌까지 찾아왔더라고 방씨는 말했다. “외지에 있는 제 친구들도 많이 보고갔는데 이들도 소기촌에 이같은 연변사과배나무의 시조나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들 말합니다…”방옥하씨는 연변에 살면서도 사과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그 선조나무가 소기촌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다고 말했다. 사실 그러했다. 사과배가 연변의 명물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과배가 연변의 명물로 되기까지는 어떤 내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도 사과배는 원래부터 연변에 있었던 재래종과일쯤으로 쉽게 생각했고 지역명물에 대한 료해가 부족했다. “사과배는 저의 이모부인 최창호어르신께서 1921년도부터 시작해 다년간 알심들여 배육해낸 연변지역의 우수한 배품종이였습니다.”최창호선생의 일가친척벌되는 리태수(79세)선생의 소개였다. 연변사과배선조나무 전승인 자격으로 다년간 최창호선생의 고택에 머물면서 사과배선조나무에 대한 애정을 몰부어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사과배선조나무 전승인의 자격으로 고목을 돌보고 있는 리태수선생. 리태수선생에 따르면 원래는 사과배선조나무를 최창호어르신의 아드님이였던 최승묵과 함께 퇴직 후 고향에 돌아가 함께 돌보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형님벌되는 최승묵선생이 먼저 병으로 돌아가면서 고향의 사과배선조나무를 그가 돌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퇴직 후 리태수선생은 연길에서 소기촌에 옮겨가 최창호선생이 살던 고택에서 살면서 7년간이나 돌보았다. 그사이 말라서 거의 다 죽게 된 늙은 사과배선조나무에 영양제도 투여하고 지극정성으로 관리하면서 죽어가던 나무를 다시 살려냈고 지어는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까지 달리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2년전 들어서 살고있던 고택이 무너질 우려가 있는 위험주택으로 판명나면서 부득불 다시 연길에 돌아와 살고 있다고 했다. 밤에 자다가도 “우찌끈 우찌끈”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고택이 지은지 무려 120년이나 된다고 했다. 그렇게 집을 비운지 2년이 넘어되고 사과배모수에 대한 관리가 힘들어지게 되니 지금은 겨우 한대밖에 남아있지 않은 제1대 사과배모수가 자나깨나 늘 걱정된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했다. 120년이 넘는 최창호선생이 살던 고택. “이게 어떤 나무입니까? 연변의 유명한 명물인 사과배를 전 연변에 퍼뜨린 모수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명물을 배육하기 위해 한생을 분투해온 최창호어르신이 손수 배육하고 키워내신 나무가 아닙니까?! 이제 그 제1대 모수가 1대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이 귀중한 나무를 어찌 관심없이 바라보고 방치해둘 수 있단 말입니까?!” 리태수선생의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안타까움인 것 같았다. 소개에 따르면 1927년에 최창호가 접가지로 접목한 나무에 드디여 과일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달고도 수분이 많고 시원했으며 저장하기도 까다롭지 않았다. 그때는 배이름을 “참배”,“청배”,“큰배”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배품종이 좋다보니 30년대부터 처음 접목에 성공한 제1대 3그루의 사과배나무를 모수로 소기촌에서부터 3헥타르의 과수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뒤를 이어 로투구와 화룡, 도문 등지로 널리 퍼져나갔다. 알고보면 “사과배”라고 정식이름이 붙은  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1952년도에 연변에 온 길림성과일품종조사조는 소기촌에서 세밀한 조사를 거친 후 확실히 새로운 배품종임을 긍정했다. 또한 최창호가 1921년도에 접목한 제1대 모수 3그루를 연변사과배의 모수로 결정하였다. 배처럼 노랗고 사과처럼 붉은 색갈을 띤 과일의 형태를 보고 “사과배”라는 정식이름을 달아주게 된 것이였다. 그후 1954년도에 길림성농업과학연구소의 고모가 연변의 사과배는 추자리(秋子梨)계통과 사리(沙梨)의 자연교잡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해방후 소기촌은 배나무덕에 번신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과배가 있었기때문이였다. 20~30년대부터 심기 시작한 사과배나무가 과일이 잘 열리고 품질이 좋은 장년기에 접어든데다가 거름도 잘내고 관리도 잘해준 보람으로 품질이 좋았던 것이다. 1955년도 가을에 최창호를 비롯한 소기촌의 촌민들은 공산당과 모주석의 은덕으로 농민들이 번신했다는 감사의 뜻을 담아 10광주리의 사과배를 모주석께 보내드렸다고 한다. 사과배 하나에 한근반, 두근씩 되는 희귀한 것들이였다고 리태수선생은 과거를 회억했다. 1961년도 련속 3년 자연재해가 들었던 때에도 소기촌은 부유했었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했다. 그해 사과배를40만근이나 수확했다고 한다. 그때 다른 마을들은 하루에 일공이 3전도 되나마나 했지만 소기촌은 2원 64전5리나 되였고 성급 모범상장도 탔다고 말하면서 리태수선생은 수치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당시 3대 가장기물이던 손목시계, 재봉침, 라지오를 거의다 갖추었을 정도로 잘사는 마을이였다. 시골마을이지만 부유하다보니 전기도 62년도에 일찍 마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였다고 한다. “그게 다 사과배덕이였지요” 리태수선생이 자랑하는 사과배의 덕은 소기촌 하나만 혜택본 것이 결코 아니였다.  연변의 특산물로 유명한 연변사과배. 50년대초 자치주 초대주장이셨던 주덕해가 사과배 새품종의 확대생산을 위해 1951년도에 모아산기슭에 과수원자리를 잡아주고 과수농장건설을 지시격려했다고 력사는 기록하고있다. 그후 불과 40년사이 과수농장의 사과배재배면적이 1만 3000헥타르로 확대되였다. 사과배는 그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길림성은 물론 우리 나라 20여개 성과 조선, 로씨야, 벌가리아 등 해외에까지 전파되면서 현재 총재배면적이 8만헥타르를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특히 내몽골, 청해, 감숙, 료녕성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사과배가 지역의 주요한 과일품종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1976년에 있은 전국배과학연구협작회에서는 설리, 태양리와 함께 사과배를 중국의 3대 명표배로 인정했다. 사과배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강한 저장성과 내한성 그리고 품질이 우수하기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1987년 농목축어업부는 룡정현을 “사과배의 고향”으로 명명했으며 전국의 유일한 량질사과배생산기지로 결정했다. 화룡시는 길림성생산기지로 되였다. 1989년에는 《해란강표》사과배가 농업부의 명표과일로 되였고 1990년에는 사과배가 록색식품으로 되였다. 2002년에는 국가기술질량감독총국의 심사를 거쳐 룡정시가 사과배의 국가원산지보호산품지로 되였다… 흘러간 세월속에 세상에 널리 이름떨친 사과배를 보면서 소기촌의 사과배모수가 우리에게 중요한 리유를 알 것 같았다. “사과배가 어떤 나무입니까? 우리 민족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박고 개척하면서 가꾸어낸 노력의 열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응당 사과배를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생각해야 하며 문화적, 정신적인 유산으로 길이길이 계승하고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리태수선생의 말은 인심을 격동시키는데가 있었다. 1987년 사과배선조나무 비석 락성식 장면(자료사진). “물마실 때 우물 판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어느 위인이 하신 말씀이 있다. 사과배와 최창호의 공덕을 기리여 룡정시인민정부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는 1987년과 1998년도에 각각 사과배재배 성공과 최창호가 재배한 제1대 3그루 사과배선조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소기골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사과배는 연변 여러민족인민들이 연변을 개척한 성과의 하나로서 그 선조나무는 연변인민들이 대자연과의 투쟁에서 따낸 승리의 상징이며 연변경제의 중요한 유산이며 연변인민들의 애국주의와 향토애교양의 산 교과서이다.”고 적혀있었다. 1987년 오장숙, 장룡준 등 당시 지도일군들이 락성식 테프를 끊었다. “이제 2년만 지나면 사과배선조나무도 만 100살이 됩니다. 최창호어르신과 사과배나무 100년은 매우 기념적의의가 있는 매우 소중한 력사적 유산입니다.” 사과배선조나무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리태수선생은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바로 말라가는 고목을 제때에 관리하고 돌볼 수 있는 집을 한채 짓고 사과배선조나무기지에 최창호선생의 석고상을 세워놓고 싶은 것, 그리고 허물어져가는 사과배선조나무비석을 다시 수건하여 우뚝 세워놓고 싶은 것이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1대 사과배모수도 제대로 관리해주기만 하면 아직도 꽤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아직 건강한 제2대 사과배모수도 6대나 있어 사과배브랜드창출과 사과배력사박물관, 그리고 향촌관광에 밝은 전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소기골에서 나는 질좋은 꿀제품과 과일, 목이버섯, 홍송, 소, 양 등 다양한 특색자원들을 리용하면 향촌경제의 미래와 출로는 더욱 밝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과배선조나무를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한다 사과배선조나무를 브랜드로 한 향촌의 민속문화와 지역특색, 그리고 력사를 결부시킨 독특한 사과배문화를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리태수선생의 타산이였다. 그러나 혼자힘으로는 큰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과배선조나무기지의 전승권을 팔라고 찾아오는 개인투자자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지를 결코 양도할 수 없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한다. 어찌보면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과 중국조선족의 엄연한 력사적 유물이기때문이다. 력사유물은 보호하고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100년 유물을 개인투자자들의 돈벌이로 전락시킬 수는 없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한다. 얼마 못가 그 대가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리태수선생은 단호히 거부했다. 현재 리태수선생은 사과배선조나무의 계승과 보호를 위한 정부적 차원의 합작과 도움을 박절히 수요하고 있었다. 해당부문을 찾아 다니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중이라고 한다. 소기골에 사과배문화의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여나 새로운 현대판 사과배의 전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7387    [고향사람] - "중국 조선족의 주시경"... 댓글:  조회:3545  추천:0  2019-10-24
최윤갑교수 한국정부의 ‘화관문화훈장’수훈 (ZOGLO) 2019년10월22일  인물이름 : 최윤갑 연변대학 원로교수인 최윤갑교수 일전 연변대학 원로교수인 최윤갑교수가 한국정부의 한글날 경축행사에서 ‘한글 발전 유공자’훈포장• 표창의 최고 영예인 ‘화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최윤갑교수는 48년간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에서 우리글 전문 인재양성 및 우리 글의 발전과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화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1930년 룡정에서 태여난 최윤갑교수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제1기 졸업생이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도 빼앗긴 채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일제시대의 뼈 아픈 세월을 살아온 최윤갑교수는 조선어에 대한 사랑이 남 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윤갑교수가 받은 ‘화관문화훈장’증서와 메달 최윤갑교수는 1949년도에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 퇴직할 때까지 줄곧 연변대학에서 조선어연구와 교수 및 인재양성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왔다. 지금까지 최윤갑 원로교수는 《조선어문법(1980)》, 《한국어문법(2000)》, 《한국어문법 신강(2009)》 등 11부의 학술저서를 펴냈고 조선어연구 론문 60여편을 발표했다. 론문들은 고대조선어로부터 현대조선어에 이르기까지, 음운론으로부터 통사론에 이르기까지, 방언학으로부터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본체론 연구로부터 대조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연구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최윤갑교수는 대학 재직 48년간 연변대학 어문학부 교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 학과장, 연변대학 언어문학대학 학장, 연변대학 초빙교수 등을 력임하면서 조선어(한국어) 전문인재를 양성했다. 대부분 제자들은 국내 대학들에서 조선어(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부분 제자들은 훌륭한 언어학자로도 성장하였다. 동시에 여러 종의 대학교과서를 편찬하여 연변대학 국가중점학과 건설과 국내 대학 한국어학과 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최윤갑교수는 일생의 심혈을 중국 조선어의 발전과 세계화에 기울였다. 이러한 학문업적을 기리여 연변대학 전임교장이였던 김병민은 그를 우리 조선민족이 낳은 ‘중국의 주시경’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한편 최윤갑교수는 1992년도에 우리 나라 고등교육사업의 발전을 위해 특수한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원의 정부특수당금을 받았으며 1993년도에 한국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기도 했다. ///길림신문 /김룡, 안상근기자
7386    [고향시단] - 시인들의 명절 -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댓글:  조회:3559  추천:0  2019-10-23
시인들의 큰 잔치...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0월19일  "조선족시인들과 국내외 시인들의 만남의 장" "시와 사진, 시와 예술의 만남으로 조선족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한 좋은 시들이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하다니 과히 놀랍도다" "감동 그 자체였다. 민족이 따로 없이 시와 노래로 하나가 된 축제" ... 건국 70주년을 맞으며 조선족시인들의 큰 잔치인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이 10월 19일 국내외 시인들과 조선족시인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개막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 선포   연변주당위선전부, 연변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는 시랑송대회, 대형시화전, 공로시인 표창, 문예야회, 시창작세미나, 현지답사, 대형다큐멘터리제작 등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이 사회를 한 이날 개막식에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이 환영사를,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이 축사를 했다.   환영사를 하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   김기덕 부장은 " 문화가 흥(兴)하면 국운도 흥성하고 문화가 강대해지면 민족도 강대해진다"며 "시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시가절행사를 계기로 전통문화를 고양하고 문화로써 관광산업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는 전국정협 상무위원 겸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 백경성 부주석은 "연변문련과 연변작가협회가 설립된이래 문학예술면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육성해냈으며 따라서 좋은 작품들도 많이 나왔다."면서 "조선족의 문학과 예술은 중국 70년의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이를 장식했다. 이는 시인들과 예술인들의 헌신정신, 피타는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개막식 사회를 하는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 이날 조선족시단에서 혁혁한 공훈이 있는 리욱, 김철, 리상각, 한춘, 조룡남,리삼월, 김성휘,박화, 남영전, 최룡관,정몽호  등 11명 시인들을 표창했다. 그중 8명은 작고한 원로시인들이다. 수상자 및 대리수상자와 함께  "리욱 원로시인은 해방전과 해방 후 두 시대에 걸쳐 시창작을 진행하여 조선족시단을 개척하고 정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향토신이라 지칭하기에 손색없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로 시창작을 하고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심사평을 밝혔다.(이하 략함)   모택동이 1936년에 쓴 시"시원춘설"을 읊조리는 임지원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는 건국 70주년 맞이 두만강천리답사 계렬활동을 펼치면서 현지답사를 통해 더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물은 오늘에 전시된 시화이며 "중국조선족시선집"을 편찬해낸 것.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시창작위원회 주임이자 이번 행사를 총 기획한 김영건은 "시인들은 현지답사를 통해 삶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하는 좋은 시화들을 창작해냈다. 오늘은 어쩌면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리라고나 할가. 시화를 전시하고 시선집을 펴내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와 춤으로 시와 예술의 만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건국 7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련다."며 "'뿌리 깊은 나무'를 주제로 한 '시가 흐르는 야회는 당의 민족정책의 혜택아래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산해관 넘어 대륙으로 대서양 건너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가는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담아냈다. 전반 무대를 시가 흐르는 야회로 장백산의 산생, 그날의 자취를 찾아 인정의 세계로 펼쳐지는 진달래 산천으로 펼쳐지며 우리 민족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뿌리 깊은 토대를 바탕으로 이 땅에 당당한 주인 된 오늘을 노래하고 우주의 주인으로 세상속에 그 뿌리를 뻗치는 건실한 미래를 구가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이번 야회는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서사시처럼 고도로 째이고 전반을 시의 흐름으로 풀면서 우리 무용의 최고의 경지로 옷 입고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전반을 이어나갔으며 특수처리 등 수법으로 매 장의 아름다운 화폭을 보여주면서 서로가 어울려 하나의 예술적 무대로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무대하 할 수 있다.     시가절의 일환으로 오후 연길 상우호텔에서 시가세미나를 개최했으며 20일에는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글 문야/영상 방호범     시화전 한장면   시선집     파일 [ 43 ]                                     
7385    [고향자랑] - 아름다운 장백... 댓글:  조회:2394  추천:0  2019-10-23
장백현  장려한 70년 촬영전 펼쳐 [ 2019년 10월 22일 ]     장백조선족자치현농업은행, 현문학예술가협회, 마록구진, 금화향, 현촬영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장려한 70년, 새 시대에 분투하자’를 주제로 한 새 중국 창립 70주년 촬영전이 10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 현민족문화광장에서 펼쳐졌다. 이번 촬영전에는 240여폭의 사진작품과 60여폭의 서법작품이 전시되였다. 이번 촬영작품은 광범한 과외작가들이 장백산의 아름다운 산과 들을 누비거나 또한 중조변경에 위치한 압록강변을 거닐며 찰칵찰칵 렌즈에 담은 것이다. 작품은 모두가 새 중국 창립 70년간 당의 민족정책의 찬란한 빛발아래 장백의 정치와 경제, 민족단결과 사회의 각항 사업에서 이룩한 휘황한 성과를 열정적으로 구가하고 고향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그대로 생동하게 부각했는바 광범한 관람자들의 발목을 끌었다. 아래에 촬영, 서법작품을 사진으로 본다.   ///길림신문 /윤녕(尹宁) /최창남 기자
7384    [그것이 알고싶다] - 돌배나무... 댓글:  조회:5810  추천:0  2019-1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돌배나무     이미지 크게보기 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있는 돌배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 나무 높이는 18m이고, 나이는 200년으로 추정된다. 이칭별칭 꼭지돌배나무, 돌배, 산배나무 유형 동식물 시대 현대 성격 식물, 나무 학명 Pyrus pyrifolia (Burm.) Nakai 생물학적 분류 장미과 배나무속 원산지 한국, 중국, 일본 서식지·소재지 중부 이남 출산·개화시기 4∼5월 목차 정의 개설 생태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정의 장미과 배나무속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또는 소교목. 개설 중부 이남 표고 700m 이하의 산록에 자생한다. 꼭지돌배나무, 돌배, 산배나무라고도 부른다. 원산지는 한국, 중국, 일본이다. 학명은 Pyrus pyrifolia (Burm.) Nakai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의 상리 돌배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태 잎은 어긋나기를 하고 달걀모양의 타원형 또는 달걀형이다. 잎의 길이는 7∼12㎝, 너비는 4∼6.5㎝이다. 잎의 양면은 털이 없거나 혹은 어릴 때 갈색의 솜털이 있다. 꽃은 암수한몸 양성화(兩性花)로 4∼5월에 백색으로 피는데, 6∼9개의 작은 꽃이 산형화서로 달린다. 꽃의 지름은 3.5∼4㎝이고, 꽃줄기에는 어릴 때 작고 가는 털이 있다. 줄기는 곧게 선다. 어린가지는 통통하고 암갈색인데, 처음에는 털이 있다가 후에 떨어진다. 많은 개량종이 있으며 변종으로 일본배나무가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한방에서는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문배나무의 열매를 산리(山梨)라 하여 독성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외용하거나 화농성 골수염에 짓찧어 붙이거나 어혈을 푸는데 사용한다. 민간에서는 갈증해소와 변비에 사용하고, 삶은 후 즙을 내어 먹으면 버섯중독, 구토 증세에 효용이 있다고 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기침이 심할 때 배 속을 비우고 꿀을 넣어 달여 먹는다고 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더위 먹었을 때 열매의 껍질을 달인 물을 마신다고 한다. 목재는 가구재, 기구재로 쓰이는데,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나무는 정원수나 분재용으로 많이 애용된다. 청도의 상리 돌배나무는 청도김씨의 시조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 1190∼1266)의 묘제인 염수제(念修齊) 앞뜰에 자라고 있다. 수령은 약 200년, 높이는 18m, 둘레는 3.68m로 경상도에서 보기 드문 노거수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돌배나무는 대부분 벌목되어 거목은 그리 흔치 않으나 청도김씨 대종친회에서 잘 관리해 온 까닭에 고유의 수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생육상태도 양호하다. 다른 지역의 나무에 비해 열매가 크며 신맛이 강해 돌배나무의 변종 연구에 귀중한 학술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돌배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약초도감 돌배나무     돌배나무 꽃 (4월 5일) 계 식물 과 장미과(Rosaceae) 학명 Pyrus pyrifolia (Burm.f.) Nakai 생약명 이수근(梨樹根, 배나무와 같은 약재) 개화기 4~5월 핵심어 양성화1), 총상화서2) 목차 1. 구분 2. 서식지 3. 특징 잎 꽃 열매 줄기껍질 줄기 속 가지 겨울눈 4. 용도 민간요법 식용방법 5. 계절별로 알아보자 1. 구분 장미과의 잎지는 넓은잎 작은 큰키나무로 줄기가 하나 또는 몇 개가 올라와 키 5~10m 정도로 곧거나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가지가 옆이나 위쪽으로 구불구불하고 길게 뻗어 위쪽이 둥근 반원형이 된다. 2. 서식지 중부 이남의 높은 산 햇볕이 조금 비치는 평원지대에 주로 서식한다. 배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면 돌배가 된다. 3. 특징 줄기껍질이 직사각형의 비늘처럼 갈라지고 아기 주먹만 한 배가 달린다. 잎 길이 7~12㎝ 정도의 잎이 가지에 달린다. 끝이 점점 뾰족해지는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짧은 바늘 같은 잔톱니가 있다. 앞면은 윤기가 조금 있고 뒷면은 회색빛 도는 녹색을 띤다. 어릴 때는 붉은빛이 돌기도 하며 뒷면에 잔털이 있다가 없어진다. 앞뒷면과 잎자루에 털이 없다. 잎자루는 길이 3~7㎝ 정도 된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다. 꽃 4~5월에 잎과 함께 잎 달리는 자리에 흰색으로 핀다. 같은 길이로 어긋나게 갈라진 꽃대가 나와 지름 3㎝ 정도의 꽃이 달린다. 한 꽃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나온다. 암술대는 4~5개다. 꽃잎은 5장이다. 꽃받침잎은 5갈래로 갈라지며 긴 피침형이다. 열매 9월에 씨방이 응어리지고 과육이 많은 지름 2~3㎝ 정도의 둥근 열매가 노란 갈색으로 여문다. 과육에 돌처럼 까슬까슬한 돌세포가 있으며 열매꼭지는 길이 3~5㎝ 정도 된다. 줄기껍질 어린 나무는 연한 갈색빛 도는 회색을 띠며 매끄럽다. 묵을수록 회색빛 도는 갈색이 되며 직사각형의 비늘처럼 잘게 갈라진다. 줄기 속 가장자리는 흰 주황색을 띤다. 안쪽에는 밝은 주황빛 도는 넓은 심이 있다. 한가운데에는 연한 주황색의 작은 속심이 있다. 속껍질은 붉은 갈색을 띤다. 가지 햇가지는 연한 녹색 빛 도는 회갈색을 띠다가 점차 붉은 갈색이 되며 잔털이 있다가 없어지고 윤기가 있다. 묵으면 갈색이 되었다가 회색빛 도는 갈색을 띤다. 짧은 가지는 가시처럼 변하기도 한다. 밝은 갈색의 껍질눈이 있다. 겨울눈 위가 뭉툭한 불룩한 원뿔 모양이다. 갈색을 띠며 잔털이 조금 있다. 4. 용도 약용: 기침 가래, 열병, 폐결핵, 변비 식용: 과실 민간요법 배나무와 같은 약재다. 배나무보다 약효가 낫다. 뿌리(이수근, 梨樹根) · 가지(이지, 梨枝) · 줄기껍질(이목피, 梨木皮) 뿌리와 가지는 수시로, 줄기껍질은 봄에 채취하여 햇볕에 말려서 쓴다. 기침 가래, 열병에 말린 것 30g을 물 700㎖에 넣고 달여서 마신다. 열매(이, 梨) 늦여름~가을에 채취하여 생으로 또는 햇볕에 말려서 쓴다. 폐결핵에 말린 것 15g을 물 700㎖에 넣고 달여서 마신다. 변비에 생즙을 내어 마시거나 같은 양의 흑설탕에 재워서 효소를 만든 뒤 물에 타서 먹는다. 식용방법 열매는 1개월간 재워서 연해지면 과실로 먹는다. 달면서 향기가 매우 좋다. 5. 계절별로 알아보자 ■ 봄 돌배나무 꽃봉오리와 어린 잎 (4월 6일)꽃봉오리에 분홍빛이 돈다. 돌배나무 꽃 (4월 5일)흰색으로 핀다. 돌처럼 딱딱한 배가 달린다고 돌배나무이다.       돌배나무 - 꽃 핀 모습 (4월 2일)나무가 커지면 줄기와 가지가 아주 굵어진다.   돌배나무 어린 잎 (4월 8일)어릴 때는 뒷면에 잔털이 있다가 없어진다. 돌배나무 잎 (5월 2일)잎자루가 길다.         ■ 여름 돌배나무 수형 (6월 23일)여름 모습. 줄기가 하나 또는 몇 개가 올라오며 가지가 옆이나 위쪽으로 길게 뻗어 위쪽이 둥근 반원형이 된다. 키가 5~10m 정도 된다.   돌배나무 잎 앞뒷면 비교 (6월 25일)왼쪽부터 돌배나무, 아그배나무. 돌배나무 풋열매 (6월 20일)붉은빛이 돈다.   돌배나무 열매 (8월 24일)배와는 달리 단단해서 1개월간 숙성시켜 먹는데 숙성이 되면 매우 달다. 돌배나무 열매 채취 (8월 25일)열매 떨어진 모습. 산짐승이 열매를 먹고 이동하여 똥을 싸면서 씨앗들이 멀리 번식된다. 열매 떨어진 자리에 가면 잎이 진 후에도 나무를 찾기 쉽다.       돌배나무 열매 채취 (8월 25일)열매 떨어진 모습. 산짐승이 열매를 먹고 이동하여 똥을 싸면서 씨앗들이 멀리 번식된다. 열매 떨어진 자리에 가면 잎이 진 후에도 나무를 찾기 쉽다.     ■ 가을 돌배나무 - 늦가을 모습 (11월 2일)높은 산의 평원지대에서 볼 수 있다. 멀리에서 보면 회갈색을 띤다. ■ 겨울 돌배나무 겨울 모습 (1월 23일)겨울이 되면 거무스름하게 보인다.   돌배나무 겨울 군락 줄기와 가지 (1월 2일)아래에서 보면 줄기가 여러 개 올라와 가지를 많이 뻗는다. 돌배나무 어린 나무 줄기와 잔가지 (1월 24일)잔가지가 가시처럼 변하기도 한다.   돌배나무 겨울 줄기 비교 (2월 11일)왼쪽부터 아그배나무, 돌배나무. 돌배나무는 가지가 굵다. 돌배나무 겨울눈 (1월 27일)지난해 봄에 나온 햇가지가 윤나는 붉은 갈색을 띠고 있다.         ■ 줄기 돌배나무 고목 밑동 (1월 2일)줄기가 곧고 굵게 나왔다. 돌배나무 줄기 속 (1월 24일)주황빛이 돈다. 돌배나무 고목 줄기껍질 (1월 2일)직사각형의 비늘처럼 갈라진다. 왼쪽은 조각난 줄기껍질이 떨어져 나가 붉은 속껍질이 드러나 있다. 고목이라 이끼가 끼어 있다.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Pyrus pyrifolia (Burm.f.) Nakai)"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2/20161112122138603_H9PVJ7W7W.JPG/ib58_1255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5" />    Pyrus pyrifolia (Burm. f.) 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65_000_1/20150107160947944_C6DLNI8FU.jpg/ia40_1064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pyrifolia (Burm.f.) Nakai)"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2/20161112122210305_T62GF2X7Z.JPG/ib58_1255_i2.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9" />    Pyrus pyrifolia (Bur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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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2/20161112122222231_11WIOB37L.JPG/ib58_1255_i4.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청도 상리 돌배나무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있는 돌배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 나무 높이는 18m이고, 나이는 200년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돌배나무 (약초도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과나무     이미지 크게보기 잘 익은 사과가 달려 있다. 유형 동식물 성격 식물, 나무, 낙엽과수 학명 Malus pumila var. dulcissima KOIDZ. 생물학적 분류 장미과 출산·개화시기 봄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 내용 학명은 Malus pumila var. dulcissima KOIDZ.이다. 봄에 잎이 나옴과 동시에 담홍색의 꽃이 피고, 꽃받기가 비대하여져서 과일로 된다. 사과는 편구형(扁球形)이며 지름 3∼10㎝로 양끝이 들어갔다. 과피는 황색 바탕에 붉은빛이 돌며 9∼10월에 익는다. 사과는 옛날부터 과실의 대표로 불리어 왔다. 사과나무의 원생종은 유럽·아시아 및 북아메리카대륙에 25종 내외가 분포되어 있는데.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주로 유럽과 서부아시아에 분포된 원생종 중에서 개량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재래종 사과인 능금을 재배하기는 하였으나, 현재 우리가 재배하고 있는 개량된 사과가 도입되어 경제적 재배를 하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84년부터 외국 선교사를 통하여 각 지방에 몇 그루씩의 사과나무가 들어와 재식되기는 하였으나, 성공한 예는 드물었고, 대부분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정도였다. 그 뒤 1901년에 윤병수(尹秉秀)가 미국 선교사를 통하여 다량의 사과묘목을 들여와 원산(元山) 부근에 과수원을 조성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경제적 재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 8월에 정부에서는 농상공부 소속으로 뚝섬에 12㏊ 규모의 원예모범장(園藝模範場)을 설치하고, 각국에서 각종 과수의 개량품종을 도입하여 품종비교, 재배시험 등을 실시하는 한편, 모범재배와 육묘(育苗)도 실시하여 과수재배의 국가적인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 과수의 유망성이 국민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하여 과수 재배면적은 급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우리 나라의 1986년도 사과 재배면적은 3만6443㏊로 전체 과수 재배면적의 33%를 차지하고 있으며, 생산량은 53만7737t으로 전체 과실 생산량의 37%를 차지하고 있다. 사과의 연도별 생산량은 재배면적은 줄어들고 있으나 재배기술의 향상으로 늘어나고 있다. 사과의 주산지는 경상북도·충청북도·충청남도로 이들 세 도에서의 생산량이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경상북도의 생산량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었던 주요 품종은 국광과 홍옥으로 전 사과의 55%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 일본으로부터 후지(富士) 등의 우수품종이 도입되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비율로 품종이 구성되게 되었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후지(當士):숙기가 10월 하순 또는 11월 초순인 만생종으로 과중이 300g 정도이다. 과육이 단단하고 신맛이 적고 과즙과 단맛(당도 15도)이 많을 뿐만 아니다. 저장성이 매우 높아 품질이 극히 우수한 품종으로 앞으로도 계속 재배면적의 증가가 예상된다. ② 쓰가루(아오리2호):숙기가 8월 하순으로부터 9월 초순인 중생종으로 과중은 250g 정도이며 과즙이 많고, 당도는 14도로 신맛이 적은 우수한 장려품종이다. 추석기 출하에 알맞는 유망품종으로 그 재배면적이 증가되고 있다. ③ 골덴데리샤스(golden delicious):황색과실로 과중은 200∼250g 정도이며, 즙이 많고 향기가 높아 품질이 매우 좋다. 당도는 13도 정도이고, 숙기는 10월 중순경인데, 12월 정도까지는 저장이 가능하다. 동록[銹]의 발생이 심하여 2회의 봉지씌우기를 하여야 하는 단점이 있다. ④ 육오(陸奧):만생종으로 과중이 430g 정도이고, 당도는 13도 정도이며 과육이 단단하여 저장 및 수송에 용이하다. ⑤ 세카이이치(世界一):만생종으로 과중이 600g 정도인 대과이다. 육질이 치밀하여 과즙이 많고 당도는 12도로 신맛도 적은 우수한 품종이다. 이 밖의 주요 품종으로는 스타킹(Starking)·홍옥·어얼리브레이즈(Eali Blage)·국광·축·혜·인도·왕령 등이 재배되고 있다. 사과는 다른 과수에 비하여 비교적 냉량한 기후를 좋아하므로, 연평균기온이 7∼12℃이며, 4∼10월의 기온이 15∼19℃, 6∼8월의 월평균기온이 18∼24℃인 온대북부지역이 적합하며, 강우량은 1,000∼1,200㎜가 적당하다. 토질은 토심이 깊고 토양산도가 pH 5.5∼6.5인 사양토가 적당하다. 사과나무의 묘목(苗木) 양성은 접목에 의하고 있다. 접목에 이용되는 대목에는 일반대목과 왜성대목(矮性臺木)이 있는데, 1970년대 후반부터 사과의 왜화재배(矮化栽培)가 장려, 보급됨에 따라 왜성대목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보통재배에서 사용하는 일반대목의 종류에는 환엽해당(丸葉海棠)·삼엽해당(三葉海棠)·야광나무(매주나무)·실생(實生) 등이 있고, 왜성대목에는 M27·M9·M26·M7·MM106 등이 있다. 묘목은 배수가 잘되는 토양이면 둥글게 구덩이를 파고 퇴비와 흙을 섞어서 구덩이를 메운 다음 심는다. 구덩이는 일반사과나무일 때는 직경 120㎝, 깊이 90㎝ 정도로 크게 파고, 왜성사과나무일 때는 직경 90cm, 깊이 70㎝ 정도로 판다. 사과는 대부분의 품종들이 자가결실률(自家結實率)이 극히 낮으므로 수분품종(受粉品種:꽃가루받이를 한 품종)을 20% 정도 혼식하여야 하는데, 수분수(受粉樹)가 한쪽에 몰려 있으면 효과가 적으므로 주품종 4열에 수분품종 1열씩 배식하여야 한다. 또한 우량한 과실을 생산하기 위하여서는 착과 후, 적당한 수의 과실만 남기고 나머지를 솎아 주는 적과(摘果)작업을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적과는 일찍 할수록 양분 이용면에서는 유리하지만 수정(受精)의 불완전이나 기타의 영향으로 과실이 발육 초기에 낙과하는 일이 많으므로 너무 일찍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과는 대개 만개일조부터 30일 후에 실시하는 것이 대과의 비율도 높고 다음해의 화아분화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과의 주성분은 탄수화물이며, 단백질과 지방은 비교적 적고 비타민C의 함량이 특히 많다. 사과는 가식부(可食部)가 95%이고, 수분이 90%인데, 생식용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고, 각종 음료와 양조의 원료로도 이용되며, 잼·건과·분말·통조림 등의 가공품과 일부 약품에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상당한 열량이 있어서 보조식량으로의 이용도 가능하다. 참고문헌 『과수원예각론』(이광연 외, 향문사, 1978) 『낙엽과수재배각론』(김성복 외, 선진문화사, 1982) 『농림수산통계연보』(농림수산부, 1987) 관련이미지 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사과나무잘 익은 사과가 달려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사과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배나무   [ Pear tree ] 요약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배나무속의 총칭. 이미지 크게보기 배나무의 수형 학명 Pyrus 낙엽교목 또는 관목으로 꽃은 흰색이고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다. 과피는 갈색이거나 녹색을 띤 갈색이고 과육에는 돌세포[石細胞]가 들어 있다. 암술은 2∼5개, 수술은 여러 개이다. 열매는 꽃턱이 발달해서 이루어지며 2∼5실을 기본으로 한다. 종자는 검은빛이다.  열매에는 당분 10∼14%, 과육 100g에 칼륨 140∼170mg, 비타민C 3∼6mg이 들어 있다. 주로 유라시아의 온대지방에 분포한다. 전세계에 20여 종이 있으며 크게 일본배·중국배·서양배의 3품종군으로 나눈다. ① 일본배(P. pyrifolia var. culta (Makino) Nakai):일본 중부 이남, 한국 남부와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연안 일대에 분포하는 돌배나무(P. pyrifolia)를 기본종으로 개량한 품종군이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온난한 기후에 적합하며 잎은 크고 달걀 모양이다. 열매는 둥글고 육질은 서양배보다 질이 떨어지지만 과즙이 많고 신선한 맛이며 저장성도 강하다. 현재 한국에서 주로 재배하는 품종이다. ② 중국배:중국의 허베이[河北] 지방과 북동부, 한국 북부 등지에 분포하는 산돌배(P. ussuriansis)를 기본종으로 하여 중국에서 개량한 것이다. 중화리(中華梨)와 중국소리(中國小梨)로 나누는데, 그중에 널리 알려진 야리[鴨梨]와 쓰리[慈梨]는 중화리 계통이다. 여름 생육기간에 비가 적은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타원형이거나 둥근 모양이고 꽃 피는 시기가 빠르다. 열매는 대체로 크며 녹색이고 약간 떫은맛이 있다. ③ 서양배(P. communis):유럽 중부로부터 터키 일대에서 야생한 배를 기본종으로 하여 여름에 비가 적은 곳에서 개량한 것이다. 잎은 달걀 모양이거나 긴 타원 모양의 달걀 모양으로 잎자루가 가늘고 길다. 열매는 보통 병 모양의 원뿔형이지만 변이가 많다. 성숙한 것을 따서 다시 후숙하여 먹는다. 돌세포가 적고 향기와 맛이 매우 좋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고실네·황실네·청실네 같은 품종들을 재배하였고, 지방에 따라 금화배·함흥배·안변배·봉산배가 유명하였다. 1906년 서울 근교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세우고 일본배를 도입, 재배하면서 이들 재래배는 점차 사라졌다. 뒤에 일본배 장십랑(長十郞)과 재래배 청실네를 교배하여 단배를 신품종으로 육성하였다. 참조항목 과수, 돌배나무, 산돌배, 장미과 역참조항목 검은별무늬병, 돌세포, 만삼길, 배나무검은별무늬병, 배나무굴나방, 배나무붉은별무늬병, 배나무줄기마름병 카테고리 식물 >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 > 장미목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배나무 밭전남 나주시의 특산물인 배.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배나무 [Pear tree]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배나무     이미지 크게보기 과수원에서 배꽃이 개화한 모습이다. 1985년 5월 촬영되었다. 유형 동식물 성격 식물, 나무, 낙엽과수 학명 Pyrus serotina var. culta (REHDER NAKAI) 생물학적 분류 장미과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 내용 학명은 Pyrus serotina var. culta (REHDER NAKAI)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고실네·황실네·청실네 등 여러 가지 배품종들이 재배되고 있었으며, 생산지에 따라서도 금화배·함흥배·봉산배 등이 널리 알려졌으나, 1906년 뚝섬원예모범장[纛島園藝模範場]이 설립된 뒤에 개량품종들이 보급됨에 따라 점차 도태되어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새로 도입된 품종들은 일본배·중국배·서양배 등이다. 일본배는 일본의 중부 이남과 우리 나라의 남부 및 중국의 양자강 연안에 분포되어 있는 돌배를 기본종으로 하여 일본에서 주로 개량된 품종군으로, 그 분포는 일본과 우리 나라에 국한되어 있다. 서양배는 유럽 중부와 동남부 및 아시아 서부에 분포되어 있는 야생종을 기본종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개량된 품종군들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서양배와 중국배는 우리 나라의 기후풍토에 맞지 않아 장려되지 못하였고, 현재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들은 거의가 일본배이다. 우리 나라의 1987년도 배재배면적은 8,088㏊로 전체과수 재배면적의 7%를 차지하고, 그 생산량은 14만4856t으로 전체 과실생산량의 9%를 차지하고 있다. 배의 주산지는 경기도와 경상남도로 전체 생산량의 51.7%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배의 주요 품종은 장십랑(長十郎)과 만삼길(晩三吉)이 70%를 차지하여 단연 우세를 보여왔으나, 이 중 만삼길은 새로운 우량품종의 도입에 따라 앞으로 점점 감소할 추세이다. 또한 금촌추(今村秋)와 신고(新高)가 20%를 차지하고 있고, 기타 품종으로 단배·이십세기·신흥 등이 있으며, 최근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삼수품종(新水·幸水·豐水)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앞으로는 이들 품종의 재배면적이 증가될 추세이다. 배재배의 적지로는 연평균기온이 11∼16℃로서 4, 5월 평균기온이 20℃, 발육기인 8, 9월에는 평균기온이 22℃가 적온이다. 강우량은 1,200㎜ 정도가 적당하며, 특히 7월 상순∼9월의 과실발육기에는 강우량이 많을수록 우량과실을 생산할 수 있다. 토질은 비옥하고 배수가 잘 되고 표토가 깊은 양토 또는 사질양토가 좋다. 우리 나라는 전국에 걸쳐 재배가 가능하나, 특히 중부 이남이 적지이다. 번식은 아접(芽椄)이나 절접(切椄)을 이용하며, 일본배의 대목(臺木:접목하는 나무)으로는 재배품종의 실생(實生:씨를 심어서 자란 식물)이나 돌배나무의 실생을 이용한다. 배나무는 조기결실성이 강하여 재식 후 3, 4년 후면 경제적 수확이 시작되어, 그뒤 30∼40년간은 경제적 재배가 가능하다. 개원시 주의하여야 할 점은 20%의 수분수(受粉樹:꽃가루받이를 한 나무)를 혼식하여야 된다는 점이다. 재식 거리는 품종 및 재배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5∼9×5∼9m 정도이다. 최근에 배나무의 조기 결실성을 이용하여 조기에 밀식한 뒤 수관 확대에 따라 간벌해나가는 계획밀식재배가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전정은 자름전정[斷切剪定]을 주로 해서 복잡한 곁가지를 줄이며, 수형은 배상형(盃狀形)이나 장간개심형(長幹開心形)으로 한다. 배는 당분과 수분함량이 많아 그 시원한 과즙 때문에 주로 생과로 많이 이용되며, 이 밖에도 통조림·넥타·잼 등도 만들 수 있고, 식초·사탕조림·약용 등으로도 이용된다. 참고문헌 『과수원예각론』(이광연 외, 향문사, 1978) 『낙엽과수재배각론』(김성복 외, 선진문화사, 1982) 『수산통계연보』(농림수산부, 1988) 관련이미지 38 이미지목록 이전         Pyrus pyrifolia var. culta (Makino) 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3044926169_E54DPXUW6.jpg/ib58_1859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pyrifolia (Burm. f.) Nakai var. cultiva (Makino) 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65_000_1/20150107170917884_0W56469PL.jpg/ia40_1239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배나무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과일나무의 하나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배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문배     이미지 크게보기   학명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생물학적 분류 문 : 피자식물문(Angiospermae) 강 : 쌍자엽식물강(Dicotyledoneae) 목 : 장미목(Rosales) 과 : 장미과(Rosaceae) 속 : 배나무속(Pyrus) 개화기 4월~5월 꽃색 백색 형태 낙엽 활엽 교목 크기 높이 10m 목차 분포 특징 잎 꽃 열매 줄기 수피 생육환경 번식방법 이용방안 유사종 분포 한국(홍릉에서 처음 발견) 특징 꽃이 크다. 맹아력이 강하다. 잎 잎은 어긋나기하며, 난상 원형이며, 길이와 폭은 각 5-10cm × 4-6cm로, 양면에 털이 없으며, 가장자리에는 침상의 톱니가 있고, 잎자루 길이 2-5cm이고, 털이 없다. 꽃 꽃은 4-5월에 개화하며, 5-7개씩 편평꽃차례에 달리며, 지름은 3.5cm 이상이고, 백색이며, 꽃받침조각은 삼각상 피침형이고 끝이 둥글며 옆으로 퍼지고, 꽃잎은 거꿀달걀모양이며, 작은꽃대의 길이는 1-2cm로, 털이 없다. 열매 열매는 둥글고, 지름은 3-4cm로, 8-10월에 황색으로 성숙한다. 줄기 높이가 10m에 달하며 줄기는 단립하여 통직하고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잘게 갈라지며 일년생가지는 갈색이며 털이 없다. 수피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잘게 갈라지며 일년생가지는 갈색이며 털이 없다. 생육환경 • 부락 근처 또는 산지에서 자란다. • 내한성이 강하고 음지와 양지 모두에서 잘 자라나 내건성이 약하며, 대기오염에 대한 저항성이 강한 편이다. 번식방법 번식은 가을에 채취한 종자를 노천매장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파종한다. 이용방안 하얀 꽃과 수형이 우아하여 도시의 공원에 적합하며 열매는 생식하거나 술을 담근다. 유사종 • 참배 : 열매의 지름이 5-6cm이고, 과피에 0.5mm정도의 껍질눈이 산재한 것. • 털산돌배 : 잎 뒷면에 털이 있다.  • 금강산돌배 : 잎 뒷면 맥위에 면모가 있고 잎이 타원형, 넓은 타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 청실리 : 열매가 난상 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 남해배 : 일년생가지와 엽병 및 열매자루에 털이 있다.  • 취앙네 : 열매가 지름 4-5cm로서 햇볕에 닿은 곳이 붉은 빛이 돌고 톱니의 길이가 2-3mm이다. 관련이미지 4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154922_AJGQ0SF06.JPG/ib58_1614_i2.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159222_5IFC8NWQ4.JPG/ib58_1614_i3.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217357_P1K5ILA8C.JPG/ib58_1614_i4.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301295_C3GDWWPX3.JPG/ib58_1614_i5.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9" />                  이미지 이전 문배(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이미지 갤러리 출처: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네이버 지식백과]문배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 두산백과 문배     요약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교목. 이미지 크게보기 문배의 꽃이 핀 가지 학명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계 식물 문 속씨식물 강 쌍떡잎식물 목 장미목 분포지역 한국 서식장소/자생지 산지 크기 높이 약 10m, 잎길이 5∼10cm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가 10m 정도이며, 작은가지는 갈색이고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며 길이 5∼10cm이다. 둥글고 끝이 뾰족하며 털이 없다.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피고, 잎겨드랑이에 4∼5개씩 산방꽃차례로 달린다. 다른 유사종의 꽃지름이 3∼3.5cm인 것에 비해 이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꽃받침조각은 끝이 둥글고 옆으로 퍼져 있으며, 암술대 밑부분에 털이 있다. 열매는 지름 3∼4cm로 둥글고 노랗게 익는다. 신맛이 강하다. 한국 전역에 분포한다. 참조항목 낙엽교목, 산돌배, 쌍떡잎식물, 장미과 카테고리 식물 >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 > 장미목 관련이미지 문배출처: doopedia.co.kr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문배 (두산백과)   =================================/// 국립중앙과학관 식물정보 참배     생물학적 분류 계 : 식물계(Plantae) 문 : 피자식물문(Angiospermae) 강 : 쌍떡잎식물강(Dicotyledoneae) 크기 15m 개화시기 5월 분포지 한국 꽃말 위로 특징 수고는 15m까지 자라며 어린가지는 흑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기를 하며 넓은 달걀모양이다. 끝은 뾰족하며 기부는 심장모양이다. 가장자리에는 잔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잎과 같이 흰색의 꽃이 모여 핀다. 자웅동화이며 꽃잎은 5장, 길이는 2.5cm이며 가장자리는 물결모양이다. 꽃받침은 5조각으로 갈라지며 끝은 뾰족하며 잔톱니가 있다. 수술은 20개, 암술은 1개이며 5갈래로 갈라진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5-6cm로 황록색으로 익는다. 중부지방과 북부지방에서 재배하는 낙엽활엽교목이다. 관련이미지 7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4/20161115130636721_URRYVBZ60.JPG/ib58_3721_i2.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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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0" />  이미지 이전 참배 이미지 갤러리 출처: 국립중앙과학관 - 식물정보 [네이버 지식백과]참배 (국립중앙과학관 - 식물정보, 신재성, 유난희, 신현탁, 손에 잡히는 생태수목도감)  
738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사과배나무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207  추천:0  2019-10-16
96년 된 연변사과배 선조나무 지킴이 되여 북청의 참배와 연변의 돌배가 만나 사과배로   2017-06-29        해마다 모아산기슭을 하얗게 덮는 만무과원의 사과배꽃은 연변의 산천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와 함께 이 고장의 봄을 알리는 메시지다. 특히 사과배는 연변의 명물로, 연변 그리고 중국조선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난 24일, 룡정시 로투구진 소기촌에 수령이 96년 되는 연변사과배의 선조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그 곳에서 기자는 연변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나무를 지키고 있는 77세 고령의 리태수선생을 만났으며 그를 통해 연변사과배의 시초에 대해, 90여년 전 이 땅에 처음으로 사과배나무를 심었던 최창호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과배는 가접과수(嫁接果树)로 그 개척자는 최창호(1897-1967)이다. 흔히들 사과배는 ‘사과나무 접가지를 돌배나무에 가접하여 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여러 인터넷포털사이트나 일부 서적들에서는 이같이 설명하고 있으며 여러 문예작품들에서도 이 같은 묘사를 통해 디아스포라인 중국조선족의 민족특성을 비유한다. “사과가 아니라 조선의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접가지였습니다.”리태수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과배나무의 시초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창호는 1909년에 조부를 따라 중국 료녕성 안도현 내두산에 이주했으며 1916년에 연길현 로투구진 소기촌에 정착했다. 당시 동생 최범두는 일본에 류학 중이였는데 ‘일본에서도 조선의 배나무가지를 당지 과일나무와 접목해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형님도 한번 해보라’고 제안했다. 1921년, 최범두는 조선 북청에서 우수한 품종의 참배나무가지를 6대 가져왔는데 최창호가 그 것을 김치움에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4월에 꺼내여 집 뜨락의 돌배나무에 가접했다. 그중 살아남은 것은 세그루, 최창호는 알뜰히 보살펴 1927년에 처음으로 나무에 흰꽃을 피웠다. 달린 과일은 모양이 배 같기도 사과 같기도 했으며 새콤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해 보통 배들과는 다른 뛰여난 맛이였다. “그때의 그 세그루에 달린 과일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연변사과배의 시초였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한그루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말을 하며 리태수선생은 뜰 한켠에 서서 찬연한 해빛 속에 푸른 잎사귀를 펼친 고고한 자태의 배나무를 가리켰다. “7년 전 제가 고향에 왔을 때 보니 남아있던 한그루마저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꽃이 피지 않았고 싹이 돋아있는 가지가 몇대 없었습니다.” 문득 리태수선생은 이 나무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여 친구에게 부탁해 한국에서 생장소 10통을 사들여 부지런히 나무에 주면서 소진해가는 고목의 생명이 다시 푸르게 피여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 선 산자락에 비스듬히 서있는 오래된 팔간초가집은 최창호선생의 옛집이다. 오래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찌그러졌고 흙벽이 부서지는 그 집에 머물면서 리태수선생은 3년을 하루와 같이 매일 선조사과배나무를 돌봤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난 2013년부터는 드디여 고목에 다시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2015년부터는 과일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사과배가 적잖게 열려 수확의 기쁨도 아주 컸다. 사실 배의 이름은 처음부터 ‘사과배’가 아니였다. 시원하고 맛도 좋으며 저장하기에도 까다롭지 않은 이 배를 사람들은 ‘참배’ 혹은 ‘큰배’라고 불렀다. 1952년에 국가에서 과수품종을 전면조사하면서 이 배는 새로운 품종으로 인정됐는데 모양새가 사과 같기도 배 같기도 하여 그 이름을 ‘사과배’라 했다. 지난 80여년 동안 사과배는 연변 각 지에 널리 퍼져 연변경제의 기둥산업의 하나로 되였고 중국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만큼 유명해져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과배의 창시자 최창호의 로고가 가장 크다. 그는 평생을 바쳐 사과배나무를 지켰으며 전지, 과원관리기술, 병충해예방퇴치, 과일의 한항성 등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해나감으로써 소기촌에 완전한 규모를 갖춘 질좋은 사과배과수원을 꾸려갔다. “그 분은 저의 이모부였습니다. 인품도 훌륭했고 또 학식도 대단했지요.” 최창호에 대해 리태수선생은 이렇게 회억했다. 과수원을 갖고 있었던 관계로 최창호는 ‘부농’으로 락인이 찍혀 ‘문화대혁명’기간에는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아낌없이 자신의 고간의 문을 열어 배 고픈 마을사람들에게 량곡을 나눠주고 또 적잖이 장악하고 있는 의술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었으며 사람들에게 글공부도 가르쳤는데 이처럼 후한 인품과 덕으로 마을사람들에게는 항상 존중을 받았고 ‘부농’임에도 불구하고 동란의 년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큰아버지는 다리를 약간 절었고 그때 집에는 말을 못하는 남자가 머슴으로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머슴에게 한자(번체자)를 가르쳤지요. 말로 사람과 소통할 수 없으니 글로 소통하라는 뜻이였습니다.” 말을 하며 리태수선생은 후날 자신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굳히게 된 것도 이모부의 영향이 컸다고 얘기했다. “큰아버지처럼 이 나무도 정말 파란만장한 세월을 다 겪었지요. 일반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령혼 아니겠습니까! 이젠 제가 지켜나가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신의 여생을 다 바쳐 나무 지킴이가 되겠다며 리태수선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연변일보 ///글·사진 박진화 기자 ==========================/// "구문"이지만...   “핑궈리”                    —김태욱   2009-05-14      우리 집 이웃은 산동이 고향인 젊은 부부간이 산다.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애를 키우며 과수원을 다루고있는데 그들과 무랍없이 드나드는 사이이다. 남편의 이름은 손덕량이 (孙德亮)이라 부르는데 이름을 부를 때 한어음대로 《더랑아》로 통한다.  3월 초순에 덕량이가 사과배나무의 전지[剪枝]를 하고 있기에 다가가니 그는 싱글벙글하면서 자기에게 제자가 둘씩이나 생겼다면서 어깨를 살구었다. 반세기나 원예사로 살아온 나의 활발한 인생에는 조선족 젊은 과수업자들이 나를 따르며 《선배님》, 《스승님》이라고 하더니만 모두 과수원을 떠나 외국으로 가버려 제자 하나 없나 서글퍼 했는데 생각밖으로 한족젊으이가 제자로 자리를 잡아 마음의 빈구석을 겨우 달랜다. 득량이 부부는 8년전에 나의 집뒤에 있는 과수원을 임대맡고 늙은 사과배나무의 전지는 골격지를 보호하고 배양해야 질좋은 과일을 생산할수 있다는 나의 훈계를 들으면서부터 열심히 과수기술을 배웠다. 우리들 사이에는 강호에서 술을 마시면서 스승과 제자로 기약한 수준도 없었고 칠판식 기술전수도 없었다. 그저 꿀벌이 붕-붕 날아다니는 과수밑 현장에서 나의 잔소리에 가까운 설교를 듣고 그대로 따르는 소박한 격이였다. 하지만 더랑이는 이제 조선족의 상징이라도 과언의 아닌 연변사과배를 가꾸는 베테랑 원예사로 컸다. 연변 사과배는 여러차례나 우리 나라 북방 과일품종 평의대회에서 《량질과일》이라는 월계관을 안아온 귀중한 품종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룡정시 로투구진 소기촌에 가면 1987년 9월 25일에 세운 《사과배 선조 기념비》가 있다. 비석옆에 서있는 사과배나무는 90년 가까운 년륜을 아로새긴 이 세상의 수천수백만주의 달하는 사과배나무의 《어머니》 나무이시다. 이 사과배나무를 배육하신분은 연변 과수력사에 공훈을 세우신 최창호다. 하기에 최창호라면 연변사과배를 떠올리게 된다.  최창호는 1916년도에 소기골에 정착하시고 양지바른 뒤산비탈밭에 여러가지 과일나무와 야생종 과일나무를 심어 가꾸다가 1927년봄에 사과배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최창호가 배육한 새로운 배품종이 저장력이 강한 특점이 있고 맛좋은 배라는 소문이 펴져나가면서 1930년대초반에 소기꼴에 3헥타르에 달하는 과수원이 일떠섰고 로투구는 물론 세린하와 화룡으로 급파되였고 도문까지 재배되여 해방전까지 일정한 규모의 면적을 갖게 되였다. 그런데 해방전까지 이처럼 훌륭한 배품종은 제 이름없이 《큰배》 혹은 《참배》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청실》이라 불렀지만 《핑궈리》라 부루게 된데는 이런 일화가 있다. 국내해방전쟁 당시 로투구 《대물리거우》에 길동군구 야전병원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과일이 무르익는 가을에 과수원밑에 난 큰길로 관내에서 온 민주련군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하는말이 “아! 여기에 핑궈(苹果)가 많구만” 이들은 사과로 착각한것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당지 사람들은 “이건 핑궈가 아니라 배입니다”라고 말하니 그중 한 군인이 “그렇다면 가능하게 핑궈리(苹果梨)겠습니다” 이때로부터 핑궈리라 불렀는데 우리 말로 사과배이다. 그후 1952년도에 전문가들이 모여서 “핑궈리”라 명명하였으니 오늘까지 우리는 연변 사과배라고 정답게 불러왔다 연변에서 대면적 보급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그래도 최일선선생이다. 연변전원공서에 갓 부임한 주덕해동지는 화룡으로 가시는 길에 화룡 서성 명암촌에 자리잡은 최일선선생의 과수원을 몸소 찾으셔 “연변의 과수사업에 크게 기여를 해주십시요” 하면서 굳게 손을 잡으셨다. 그해부터 화룡 서성에는 두개의 과수묘포장을 꾸리고 해마다 수십만주의 과일묘목을 생산하여 연변 각지에다 공급하여 사과배 과수원 건설에 공헌하였다.  연변 사과배의 창시자이신 최창호님과 수많은 우리 민족의 원예가들이 피타는 노력으로 건설된 사과배 과수원인데 이제 이 사과배나무를 가꿀 후계자가 대를 끊긴것이다. 안타까운 현실다. 외국나들이바람이 일면서 과수원을 남에게 임대해주거나 애당초 매각해버리고 외국으로 떠났다. 이제 누가 최창호의 얼을 지키고 최일선의 정신을 지키랴.  “핑궈리”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하얀 배꽃속에 부지런한 꿀벌들이 날아드는 새봄을 다시 기약해본다.    ======================================/// "구문"이지만... 中 연변 '사과배' 생산·판매 부진에 농가 타격  2012.11.22.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명물인 '사과배'를 재배하는 과수농가들이 올해 작황 부진과 판매량 감소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연변일보가 22일 보도했다. 신문은 연변 지역 90% 이상의 사과배 재배농가가 지난봄 서리 피해와 8월에 몰아친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생산량이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전했다. 또 시장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판매 초기에 가격을 상자당 70~80위안(1만2천~1만2천원)으로 높게 책정하면서 다른 지역의 저가 상품에 밀렸다고 설명했다. 연변 지역 과수농가들은 뒤늦게 상자당 30위안(5천원)까지 가격을 내렸지만 이미 판매 성수기가 지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용정(龍井)의 한 농민은 "예년에는 4천상자를 수확했는데 올해는 작황이 나빠 1천상자를 수확하는 데 그쳤다"면서 "그나마도 200상자밖에 팔지 못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신문은 올해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규모 과수농가들이 연합해 공동 생산·판매에 나서고 당국이 유통 구조 개선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용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배 맛을 내지만 생김새는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정에서 재배가 시작돼 점차 연변 전역으로 퍼졌으며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하다. ======================================/// 역시 "구문"이지만... 中 연변 명물 '사과배' 수확량 40% 감소  2011.10.1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명물인 '사과배'가 작황 부진으로 올해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고 연변인민방송이 10일 보도했다. 방송은 현지 과수 농가들을 인용, 올해 극심했던 가뭄의 영향으로 연변 일대 과수원의 사과배 수확량이 40% 이상 감소했다고 전했다. 연길(延吉)에서 2천 그루의 사과배를 재배하는 한 농민은 "올해는 가뭄 탓에 사과 크기도 작고 생산량도 지난해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고 말했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용정(龍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배 맛을 내지만 생김새는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정에서 재배가 시작돼 점차 연변 전역으로 퍼졌으며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명성을 얻었다. 관광객 유치와 사과배 홍보를 위해 용정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4월 사과배꽃 축제를 개최한다.  ===========================///역시 또 "구문"이지만... 中 옌볜 봄맞이 행사 풍성 2013.03.15.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지난해 '관광객 1천만명 시대'를 연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가 본격적인 관광시즌을 맞아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를 마련해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15일 연변일보에 따르면 중국 내 조선족 최대 밀집 지역인 옌볜주에서는 이달부터 지역별로 특화한 다양한 축제와 행사가 펼쳐진다. 오는 27일부터 4월4일까지는 옌볜주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시에서 '중국·러시아 청소년문화관광축제'가 열려 이국의 정취를 만끽할 기회를 제공한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유명한 룽징(龍井)시에서는 옌볜의 명물인 '사과배꽃 관광축제'가 5월에 개막된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룽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허룽(和龍)시에서는 4월 말~5월 초 '진달래 문화관광축제'가 열리고 안투(安圖)현에서는 5월에 '중국조선족제일촌 민속문화축제'가 펼쳐진다. 관광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옌볜주는 지난해 전년 대비 18.3% 증가한 1천15만4천명의 관광객(외국인 54만1천명 포함)을 유치했으며 138억2천만위안(약 2조4천억원)의 관광수입을 올렸다. ==========================/// 또 역시 "구문"이지만... 中 연변, 사과배꽃축제 내달 9일 개막  2011.04.3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봄 축제인 '룽징(龍井) 사과배꽃축제'가 내달 9일부터 11일까지 열린다. 룽징의 명물인 사과배와 조선족 전통 문화 홍보를 위해 2007년 시작해 해마다 열리는 이 축제는 9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사과배꽃 아가씨 선발대회, 조선족 전통 혼례와 전통 소싸움, 조선족 전통음식 시연회, 민속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내년 연변조선족자치주 건립 60주년을 앞두고 조선족 주인공들을 내세워 1950년대 이후 연변 조선족들의 변화상과 풍습을 담게 될 TV드라마 '백두산 아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 제작 발표회도 열린다. 연변주 정부와 중국중앙(CC)TV가 30부작으로 공동 제작하는 이 드라마는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방송된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룽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배 맛을 내지만 생김새는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한 룽징의 명물이다. 연변주는 여름철에만 몰리는 관광객을 사시사철 유치하기 위해 ▲봄-룽징 사과배꽃 축제 ▲가을-옌지(延吉)ㆍ룽징ㆍ투먼(圖們) 조선족 민속관광축제 ▲겨울-투먼 두만강 빙설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738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25  추천:0  2019-10-16
퍼즐처럼 짜맞춘 토기… 1500년 전 '신라 행렬도' 발견 2019.10.16.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고구려 벽화 보듯…'신라귀족 나들이 풍경' 담겨   [앵커] 1000년의 신라 역사를 품고 있는 경주의 오래된 고분에서 나온 토기 조각을 하나씩 맞춰봤더니 하나의 그림이 완성됐습니다. 말을 탄 사람, 치마나 바지를 입은 무용수, 그리고 활을 들고 사슴과 멧돼지를 사냥하는 사람 마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듯이 생생하고 다채로웠습니다. 1500년 전 신라 귀족들의 나들이 풍경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강나현 기자가 발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기자] 갈기를 뿔처럼 묶어 맨 말의 모습, 전설의 동물 유니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춤을 추며, 혹은 사냥을 하며 뒤따르는 무리 끝에 말 탄 귀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1500년 전인 5세기 신라 사람들이 40cm 높이의 큰 토기에 그린 귀족의 나들이 풍경, 행렬도입니다. 토기에 신라시대의 행렬도가 담긴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종훈/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무덤 주인공 생전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보는 경향도 있고요. 사후 세계로 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사례도 있습니다.]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는 지름 30m의 이 무덤 옆에서 발견됐습니다. 제사 때 쓰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007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평범한 밭이었습니다. 10년 전, 또 다른 무덤에서 발견된 말에 입힌 철갑옷은 이번에 완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5세기 전후 전쟁에 나선 말을 보호한 갑옷은 2.9m 길이에 무게만 36kg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 철갑옷 말의 실체를 확인해주는 유물입니다. 말 탄 장수의 갑옷과 말의 얼굴가리개 같은 부속품까지 한꺼번에 출토된 것은 처음인데, 복원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토기가 나온 무덤을 비롯해 경주 도심에 자리잡은 쪽샘지구에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신라 귀족들의 무덤 1000기 이상이 모여 있습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의 타임캡슐, 쪽샘지구 발굴은 앞으로 6년 뒤인 2025년에야 마무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제공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영상디자인 : 신재훈) 강나현 기자  [영상취재: 변경태 / 영상편집: 이지혜] ▶ JTBC 뉴스
7381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3대 문학상 中 "공쿠르상"... 댓글:  조회:4520  추천:0  2019-10-15
  시사상식사전 공쿠르상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외국어 표기     Le Prix de Goncourt(프랑스어)   프랑스의 아카데미 공쿠르(Academie Goncourt)가 매년 12월 첫 주에 신인작가의 작품 중 가장 우수한 소설 작품을 뽑아 수여하는 상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평가되고 있는 공쿠르상은 르노도상(Prix Renaudot), 페미나상(Prix Femina), 앵테랄리에상(Prix Interalli)와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루스트의 , 생텍쥐페리의 , 말로의 , 보부아르의 , 뒤라스의 등이 대표적인 수상작이다. 상금은 10유로다.   공쿠르 형제 공쿠르(Goncourt)는 소설가인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 1822~1896)와 쥘 드 공쿠르(Jules de Goncourt, 1830~1870) 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사색가인 형과 문장가인 동생이 공동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동생인 쥘은 문체 쪽을 맡았고, 형인 에드몽은 작품의 창조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동생 쥘이 사망할 때까지 , , ,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인상주의적 문체'라는 고유의 특징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이들 형제가 그날그날 적었던 25권의 방대한 양의 는 19세기 후반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일기 문학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카데미 공쿠르 에드몽은 죽으면서 전 재산을 아카데미에 기탁한다. 에드몽 공쿠르의 유언에 따라 가난한 예술가를 돕기 위해 1902년 아카데미 공쿠르가 생기게 되었다. 이 학술원은 1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며 1903년부터 공쿠르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0명의 종신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의 심사 과정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시상 및 상금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은 매년 11월 파리의 드루앙(Drouant) 레스토랑에서 수상자를 시상하고 있으며, 수상자에게는 상금으로 50프랑을 수여한다. 2002년부터는 유로화로 바뀌면서 10유로로 결정되었다. 상금은 상징적인 액수에 지나지 않지만 역대 수상작은 평균 60만 부 이상 팔리고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루스트, 앙드레 말로, 시몬느 드 보롸르, 미셸 투르니에,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프랑스문학의 거장들이 공쿠르상을 수상하였거나 공쿠르상 수상을 계기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수상작 1916년 바르뷔스 1919년 프루스트 1929년 아를랑 1933년 말로 1954년 보부아르 1982년 도미니크 페르난데스 1985년 얀 케펠렉 1989년 장 보트랭 1992년 파트리크 사모아스 1994년 디디에 반 코엘라에르 등 [네이버 지식백과] 공쿠르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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