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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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미궁, 그리고 유머와 황당성의 미학 -김정권의 단편소설 《모기정전》읽기 김몽  1. 머리글 《모기정전》은 “모기”와 인간의 대결을 다룬 작품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동화와 흑색유머기법의 결합으로 씌여진 작품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존재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흑색유머기법은 20세기 20,30년대에 미국에서 형성되였고 그후 남미주에 파급되여 적지 않은 작가들이 흑색유머작품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도 있다. 중국의 노벨문학 수상자 막언의 소설에도 적지 않게 흑색유머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흑색유머는 일종의 황당하고 변태(變態)적이고 병태(病態)적인 문학류파로서 지금까지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흑색유머는 현실의 황당성에 대해 깊은 고통과 분노를 토하며 흔히 무가내한 풍자와 유머를 함께 아우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눈물을 머금은 슬프면서도 잔인한 풍자와 유머로 특징지어진다. 작가가 황당한 현실을 폭로하고 질타하는 목적은 그러한 현실을 개변시키기 위한 데 있다.  《모기정전》을 읽기 앞서 흑색유머작가로 유명한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간단히 알아보기로 한다. 마르께스는 콜롬비아 출신으로 중남미 현대소설의 최고봉이라 평가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어릴 적부터 독재자가 살판치는 암흑한 현실을 직접 보고 느꼈다. 특히 어릴적에 마을 사람 3천여명이 미국인 바나나 농장주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받았는데 그러한 삶의 편린들이 기억의 굴레 속에서 형성된 신화적 요소들과 만나 독특한 마술적 문학세계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문학세계가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며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백년동안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1967.)인데 그 내용과 형식,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중남미인들의 집단창작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까닭은 대다수의 중남미 국가들의 백성들이 작품에서 펼쳐지는 그러한 암담하고 처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사실주의의 틀을 깨고 신화와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전개되어 인간의 운명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신화 속에 감추어 버린다. 이성주의와는 거리를 둔 채 마르께스는 마술적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이 세계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중남미 현실 그 자체를 대변한다. 신화적 시간과 력사적 시간을 중첩시켜 현실과 비현실의 벽을 허문 채 21세기의 중남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정권의 《모기정전》은 신화적 혹은 동화적 상상을 동원하여 일부 인간쓰레기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본질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부정부패 그리고 법이 아직도 제 구실을 못하는 사회현실을 유머와 황당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신랄하게 폭로하고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근래의 우리 소설계에서는 찾아보기 보기 힘든 흑색유머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나뉘여 살펴볼 수 있다. 2. 약자와 강자의 대립구도 이 소설은 선명하면서도 아주 간단한 구도로 만들어졌는데 구도의 특징은 대립구도이다. 물론 모든 소설은 대립구도를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모기정전》읽기에서 대립구도를 특히 언급하게 되는 것은 이 소설이 여느 소설들과는 다르게 대립구도가 시종일관 관통되여있고 그것이 너무나 선명하고 적라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이 세상에 진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진리가 꼭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작품 전반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모기어머니와 모기딸과 모기며느리이가 등장한다. 우리는 이 모기네들의 가정을 약자들의 대변인 혹은 약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한촌장과 돼지똥집여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강자의 대변인으로 부정부패와 패륜의 대표인물로 상징된다. 소설은 모기네 가정과 한촌장과 돼지똥집녀인과의 싸움에서 모기네가정의 철저한 파멸과 사회를 해치는 진짜 죄인 한심해와 돼지똥집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김정권은 몇천년 동안 철칙이나 법보로 되어왔던《권선징악》(勸善懲惡)의 미학관에 강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착한자가 이기고 악한자가 진다는 것이 천고의 진리로 되여왔지만 그 천년의 진리가 오늘 김정권의 손에 이르러 스르르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작자가 자기의 소설을 이렇게 매듭지은 것은 악하고 추악한 자들의 힘과 부정부패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암시해 주려는 데 있으며 궁극극적으로는 사회의 악세력을 제거하고 진리를 고수하려면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려는 데 있다. 작품의 한 대목과 만나보기로 하자.  “자! 그럼 지금부터 판결을 선포하겠습니다. 피고 암모기는 시종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거짓말을 밥먹 듯 하였으며 거기다 또 불륜까지 저질러 그 죄질이 극히 악렬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치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한다. 형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죄가 20년, 거짓말을 한죄가 30년, 불륜을 저질은 죄가 60년, 도합 110년 도형에 떨군다.” 이 판결문을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모기가 사람의 피을 빨아먹은 죄는 확실히 죄이지만 인간들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고 가벼운 죄이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선 피를 빨아먹지 않으면 아니되는 모기들의 처지,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큰 죄가 되어 며느리모기는 110년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결국 모기네가정은 한심해와 똥집녀인과의 대결에처서 처참하게 붕궤되여 딸모기와 엄마모기는 죽고 며느리모기는 죽을 때까지 옥살이을 하게 된다.  3. 아이러니로서의 하늘의 “그물”  이 작품의 다른 한 특색은 대결구도를 이루는 쌍방이 모두 죄인이라는 점이다. 모기는 사람의 피를 먹으며 살기에 아무리 변호해도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결코 지유로울 수 없다. 다만 그 죄질이 고의적이 아니고 생존을 위해 막부득이 범한 죄라는 점이 다르다, 피를 먹도록 생겨난 모기, 하여 모기는 자신들을 모기로 탄생하게 한 조물주를 원망한다. 딸모기의 일기를 보자. 일기1. 나는 조물주를 저주한다. 왜 하필이면 우리를 모기로 만들어놓았는지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를 범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로 만들었더면  누가 감히 우리를 깔보겠는가 헌데  우리는 가엾게도 모기로 태여나  남의 피를 먹지 않으면 아니 되고 항상 죽음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아, 저주로운 조물주여, 당신이 한번 모기나 파리로 태여나 보라. 그러면 이 세상의 불공정과 고통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일기2 나는 오늘 어린 아이의 피를 빨아 먹으려고 주둥이를 꼽으려다가 아이의 해맑간 눈망울을  보고 인차 주둥이를 거두어버렸다. 일기3  만약 자칼의 자궁이 있다면 나는  다음 생애에서는 부지런한 꿀벌로 환생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고 싶다. 우리는 이 일기를 통해 자신을 모기로 만들어준 조물주를 저주하고 원망하는 모기,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로서의 모기, 자신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싶어하는 모기를 보게 된다.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착한 마음을 가진 자는 설사 죄를 지었다 해도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도 이른바 진리의 하나로 각인되여왔다. 중국의 옛 성구에 天網恢恢 蔬而不漏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의 그물은 성기여도 누구나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고 내재된 진의(眞意)는 법은 공정하고 엄하여 그 어떤 죄인도 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저명한 시인 정호승은 이 성구를 전개시켜 《하늘의 그물》이라는 시를 써 정지용 문학상을 탔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이 시에서 새끼들을 데리고 그물을 빠져나가는 기러기들은 어떤 죄를 지은 기러기들이다. 이 시의 주제는 모성애 앞에서는 죄도 사면을 받는다는 뜻과 착한 마음을 가진 자는 용서를 받는다는 뜻이 함께 담겨져 있다. 만약 정말 이러하다면 모기네 식구들은 응당 그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까닭은 모기엄마가 바로 새끼들를 데리고 하늘의 그물을 벗아나려고 모지름을 쓰는 기러기와 같기 때문이다. 두번째 까닭은 딸모기는 비록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죄를 짓긴 하였어도 착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례를 딸모기의 일기를 통해 여실히 보아낼 수 있다. “ 나는 오늘 어린 아이의 피를 빨아 먹으려고 주둥이를 꼽으려다가 아이의 해맑안 눈망울을 보고 인차 주둥이를 거두어버렸다” 특히 모기며느리의 소행에서 우리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효성과 인간애를 발견하게 된다. 며느리모기는 시어머니모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의 피를 시어머니에게 먹이는데 그 모습이 눈물겨웁도록 아름답다. “며느리모기는 시어머니모기의 배를 타고앉아서 축 처지긴 하였지만 그래도 제일 만만한 젖꼭지에다 주둥이를 박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먹은 피를 토하여 시어머니모기에게 먹여주었다. 그제야 조금 제정신이 든 시어머니모기는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모기정전 》에서는 새끼를 거느린 모기엄마와 모기딸, 모기며느리는 모두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신 모기네들보다 천배 만배 더 큰 죄를 지은 한촌장 같은 인간들은 법의 그물에서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전도된 진리, 진리의 미궁을 보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크고 한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정권이 하늘의 그물을 쫙쫙 찢어버리고 이와 같은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펼쳐보이는것은 죄의 진의와 법의 진의를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 오늘 전 세계적으로 부정부패가 범람하여 부정부패척결에 총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도 례외가 아니다. 《모기정전 》이 노리고있는 점이 부정부패에 대한 폭로와 비판에 있으므로 중국의 부정부패현상에 대해 좀 자상히 말하려고 한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중국은 법치를 중요시하고 법 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원칙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흔히 우뢰소리는 크나 비방울은 작았으며 룡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법(法)은 제도이고 치(治)는 다스리는 것인데 제도는 멀쩡했으나 치가 제구실을 못해 부정부패가 련속부절하였고 이에 백성들이 원성이 높았다. 그러다가 습근평주석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는 전대미문의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부정부패척결이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대사중의 대사라고 판단하고 부정부패에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이 투쟁에서 휘황한 성취를 이룩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탐오, 비리, 횡령죄로 붙잡힌 당, 정 ,군 고위급간부가 이미 40여명을 웃돈다. 그 중에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주영강(周永康), 중앙군위 부주석 서재후(徐才厚),통전부 부장 령계획(令计划),공안부 부부장 리동생(李东生),사천성 성위주석 박희래(薄熙来)…등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이런 고위급에 속하는 부정부패분자들을 큰범(大老虎)이라고 부르고 있다. 큰범들은 또 새기치기를 하여 그들의 밑에는 수백을 헤아리는 새끼범들이 있다. 큰범, 새끼범들이 탐오하고 횡령한 재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서재후 한 사람이 탐오한 돈과 금은 해방패 한대에 다 못 실을 정도다. 범죄분자들이 해외로 빼 돌린 돈이 자그만치 3조억이 된다니 정말 기가 막힐 일이다. 금전과 부화방탕은 쌍둥이형제다. 주영강에게는 애첩만 29명이 있고 이외도 400여명의 녀성들과 성관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부패의 엄중성을 인식한 중국정부는 큰 결심을 내리고 나라를 해치고 백성을 해치는 큰 범, 작은 범들을 사정없이 잡아내고 있으며 정부의 이러한 쾌거에 속이 후련해진 13억 인민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습근평 주석이 말했 듯이 부정부패의 뿌리를 철저히 뽑자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의 5천년의 력사는 부정부패라는 암덩어리를 함께 안고 걸어온 력사이기도 하다. 원체 뿌리가 하도 크고 깊기 때문에 일조일석에 뿌리를 뽑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김몽,《법치를 말하다》, 《중국민족》잡지 2015년 6호) 중국의 이런 현실상황으로 볼 때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폭로, 비판하고 풍자 한 김정권의 《모기정전》은 커다란 현실적 의의를 안고 있다. 4. 유머와 황당성의 미학  김정권은 《모기정전 》에서 근래에는 보기드믄 멋진 유머와 해학, 황당성을 선보이고 있다. “더구나 운수가 개떡같이 사나운 날이면 뉘집 안깐의 오줌물에도 빠져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믐에 콩 나듯이 젊은 녀자가 별로 없는 마을에서 그 녀자는 살은 좀 쪘지만 대신 주름살 하나 없이 빤빤한 편이여서 아직 성감기능에 고장이 나지 않은 남정네들이 그런대로 꽤 봐줄만한 녀자였다. ” 이와 같은 유머성분이 다분한 표현들은 작품의 가독성 획득에서 큰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사상, 내용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예술기교상에서 가장 정채로운 것이 결미, 며느리모기를 재판하는 과정이고 판결을 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 유머와 황당성이 집중되여있다. 황당성과 황당성에 업히운 유머, 풍자가 서로 짝짝쿵을 치면서 괴이한 세계, 멋진 황당성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피고석에서 답변하는 모기며느리의 걸죽한 유머와 신랄한 풍자는 법정을 웃음판으로 만든다. 며느리모기는 자기가 한촌장의 사타구니의 피를 빨아먹은 것은 당뇨검사를 하기 위해서였고 돼지똥집녀자의 얼굴피를 빨아먹은 것은 미용을 해주기 위해서라고 답변한다. 가장 정채롭고 황당한 것은 황둥개와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법관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욕하자 되려 “요새 고양이와 쥐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못들었습니까” 라고 반문한다. 결국 법정에서는 며느리모기를 다음과 같이 재판한다. “자! 그럼 지금부터 판결을 선포하겠습니다. 피고 암모기는 시종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였으며 거기다 또 불륜까지 저질러서 그 죄질이 극히 악렬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치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법에 따라 엄중 처벌한다. 형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죄가 20년, 거짓말을 한죄가 30년, 불륜을 저질은 죄가 60년, 도합 110년 도형에 떨군다.” 변호를 하는 며나리모기의 답변도 유머적이고 황당하지만 판결서도 그에 못지 않게 유머적이고 황당하다.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시머머니모기가 한촌장과 돼지똥집녀인이 공금을 떼먹고 땅을 투기한 죄를 까밝히면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정신병자로 취급되여 기소가 기각된다. 이 부분이 바로 소설이 최종적으로 노린 점이 아닐까고 생각해본다.  위에서 보다싶이 인용한 부분은 구구절절이 풍만한 유모와 싱싱한 풍자 그리고 푸등푸등 살이 오른 황당성이다. 작자는 엄엄하고 긴장한 기분이 도는 법정을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장난의 놀이터로 만듦으로써 무능한 법치에 침을 뱉고 있다.  작자는 결미에서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다. 처음에는 법정을 웃음의 놀이터로 만들다가 최후에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며느리모기는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피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이윽고 며느리모기는 차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부르릉거리며 달리였다.  이때 시어머니모기가 젖먹던 힘까지 다 해서 날아가더니 차창유리에 부딫쳤다.  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며 멀리 사라지였다. 모기네가정의 비극적인 파멸은 한 가정을 벗어나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것이 죄가 되어 세상한테 억울하게 당하고있는 모든 약자와 민초들의 운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진짜와 가짜가  혼돈되는 세계, 추와 악이 헛갈리는 세계, 오늘도 지구촌에는 이와 같은 불공정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활개를 치고있다. 이미 미궁으로 돼 버린 진리와 정의, 우리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죄수차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사색도 함께 달려가고 있다.  2016년 4월 21일 연길에서 씀
34    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댓글:  조회:1547  추천:0  2016-08-08
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김몽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리우 올림픽을 눈앞에 둔 지금 지구촌이 벌써부터 열광에 들떠있다.       그런데 문득 올림픽을 떠올리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갈마드는것은 웬 일일까.     그것은 울림픽 력사에 우리 민족으로서는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아프고도 서러운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7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제11차  올림픽 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당장 2차대전을 일으킬  만단의 준비를 마친 상황하에서 세인의 이목을 가리고저 세계평화니 민족평등이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번 경기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인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깨고 우승의 금메달을 따내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고  침울하였다. 종점을 통과하자 손기정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선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기에 손기정은 부득불 일본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였던것이다. 손기정은 비록 일등을 하였지만 망국노로서 일본을 대표하여 운동에 참가한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손기정이 종점을 통과한 다음 겉에 입었던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품을 벗어버리고 미리 밑에 입었던 태극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들이 꾸며낸 사건인지는 딱히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온 후인 8월 3일에 당시《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리광수가 손기정을 인터뷰하고 신문에 커다랗게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는데 유니품에 새겨져있던 일장기표식을 지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페간되고 리광수는 편집국장에서 해임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사건이다. 그후부터 손기정은 마라톤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더는 일본의 얼굴에 분칠을 해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렇듯 손기정은 민족심이 강한 애국자였다.       제11차 올림픽에 손기정 외에 또 한명의 조선인 녀자 륙상선수가 참가했는데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800메터에서 금메달의  월계관을 따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능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것이다.       1936년, 금릉녀자대학(金陵女子大學)에 강미려(姜美麗) 라는 평양 출신의 녀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마라톤선수로 유명했다. 중국 국내의 큰 경기 때마다 우승을 했으나 중국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번마다 수상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여러모로 노력하였고 학교 측에서도 적극 나섰으나 일이 그냥 꼬이기만 했다. 이 일로 강미려 본인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때 강미려에게 눈독을 들이는 한 일본외교관이 있었다. 그 일본외교관이 일본정부로부터 강미려를 쟁취하여 일본국적을 만들어 미구에 독일에서 열리는 제11차 올림픽에 내보내라는 비밀지시를 받았다. 일본외교관이 중국정부 중앙철도국의 국장인 장경립(張競立)에게 강미려를 유인하여 쟁취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장경립은 친일파였다. 마침 장경립의 집이 금릉녀자대학 근처에 있었고 그의 둘째 딸이 금릉녀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장씨 부부는 둘째 딸을 내세워 강미려를 자주 집에 초청하여 맛있는 음식도 해먹이고 선물도 사주면서 은혜를 베푸는척 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때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한 장경립이 중국에 있으면 전도를 망치게 되고 일본에 가면 앞길이 창창할것이라고 꼬드겼다.  장경립이 달콤한 말로 꼬드기니 강미려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장씨가 부지런히 쐐기를 박았다.        애국단 단원들로부터 이런 상황을 회보받은 김구는 일본인들의 흉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김구의 한 측근이 김구를 보고  강미려가 영화황제 김염의 독실한 팬이라고 귀뜀했다. 김구가 김염을 불러 강미려의 마음을  돌려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김염은 당시 촬영 스케쥴이 빽빽했지만 상해로 가지 않고 곧장 강미려를 찾아갔다. 그는 강미려 앞에서 일본인들이 조선반도와 중국땅에서 저지른 침략만행을 낱낱이 성토하고 나서 조선인으로 민족의 기개와 량심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고 만약 일본국적으로 넘어가 일본을 위해 일하면 매국역적이나 다를바 없다고 단단히 모를 박았다. 강미려는 자기의 우상이였던 김염이 몸소 찾아와서 타이르는지라 그 자리에서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김염은 자신이 가지고 간 사진에다 싸인까지 해주었고   “나라와 민족에 루를 끼치는 삶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백의동포라는것을 절대 잊지말라!”는 쪽지까지 써주고 돌아갔다.   하지만 김염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미려는 허영심과 금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한 다음 장경립의 집에 얼마간 머물러 있다가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체육총회에 가입했고 프로선수가 되였다.        강미려는 이름을 안창숙으로 바꾸고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일년 후에 베를린에서 거행된 제11차 올림픽에서 녀자 800메터 금메달을 따내 아시아권 최초의 육상메달리스트로 되였다.       결국 제11차 올림픽에서 조선인이 큰 종목에서 금메달을 두개나 따낸것이다. 그러나 금메달 두개가 모두 일본의 몫으로 되여버렸다. 애국자 손기정의 이름은 오늘까지도 빛을 뿌리고 있다. 하지만 조국을 배반한 강미려의 이름은 력사에 영원히 매몰되고 말았다.  잡지 2016-4호  
33    21세기의 수필문학에 대한 사고 댓글:  조회:1216  추천:0  2016-04-29
수필의 문학성과 상상력 오늘 필자는 수필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 성실한 독자의 신분으로 《길림신문》에 발표된 일부 수필들과 한자리에 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련다.  지금 수필을 쓰는 사람이 엄청 많다. 그러나 수필이 대량적으로 발표되고있다고 하여 수필의 질도 그만큼 높아졌다고는 말할수 없다. 수량적으로는 많으나 알찬 수필이 적은것이 큰 문제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허점이 수필의 문학성이다. 알고보면 수필은 결코 만만한 글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너무 쉽게 쓰고있다. 그리하여 수필은 무성하지만 오히려 사막화되고 오아시스를 찾게 된다. 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필을 진정한 문학으로 보지 않거나 “3류문학”이라고 홀대하고있다. 수필에 문학성이 가미되지 않는 한 수필가들은 이러한 비난과 홀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해  메타(초월)와 퓨전(융합)이라는  말에 모든것이 귀결되는 시대인것 같다. 퓨전이란 기존의것이 가지고있는 고유한 성격을 해체함으로써 다양한 가치와 그로 인한 존재의 의미를 확정시키기 위해 불기 시작한 바람이며 이 바람의 속성은 혁신이고 혁명이다.(윤재천)  퓨전문학을 둘러싸고 할 말은 많지만 주로 우리 수필의 가장 큰 문제 그리고 수필의 생명력이라고 할수 있는 문학성과 상상력만을 주로 다루련다. 우선 수필은 나눔의 고유한 미를 미적향기로 담아내야 하며 진한 인간미를 수용하여 창작적품위를 갖춰야 한다. 시가  언어의  집이라면 수필은 인간의 행로이고 결국은 인간학이다. 그러므로 인간적향기의 탐구와 탐색은 수필의 본령이다. 다음으로 수필은 감동적이여야 한다. 감동적인 수필은 단순히 자신의 서정이나 서사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대를 확인하면서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한채 인간을 예술적으로 형상화시킬수 있는 힘의 원천이 그 주체가 되여야 한다. 우에서 말한 인간미를 수용한 미적향기, 인간적향기의 탐구 등이 있어야만 감동의 출산이 가능하며 그러자면 수필은 감동의 잉태와 분만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잘 조률된 수필의 디자인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줄수 있다. 필자는 조률된 디자인을 총체적으로 문학성이라고 말하고싶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트, 비유, 은유, 기지, 해학, 과장, 유머, 아이러니 등 여러가지 수사기법이다. 문학성은 상상력을 떠날수 없다. 상상력을  펼쳐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고 언어에 날개를 달아줄 때 문학성이 탄생한다. 문학성과 상상력은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말할수 있다. 상상력이 없으면 문학성을 운운할수 없고 문학성이 없다는것은 곧 상상력이 없다는것과 같은 말이다. 인간적향기에 대한 탐구와 탐색은 필연적으로 문학성과 상상을 전제로 한다.  우리 수필에서 흔히 범하고있는 문제인데 작품에서 주제는 적극적으로 로출되지 말고 작품속에 은밀히 용해되여야 한다. 주제가 강하게 표면에 로출되면 문학적미감이 손상을 받고 문학성이 결여하게 된다. 음미의 미학은 시나 소설뿐만아니라 수필에서도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작품을 살펴보자.   김동진선생의 수필 “사라진 종소리는 메아리가 없다”는  표제부터  신선미를 안고 여운을 유발시키고있다. 문학성이 체현된 글이다. 작가는 수필에서 아픈 심정으로 민족의 교육위기를 절규하고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서술이  너무 많은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깨여진 마을에는 종소리가 없고 사라진 종소리는 메아리가 없다”라는 아주 좋은 구절이 있다. 작가는 응당 여기에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헌데 작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러고 보니 잃어버리고나서 그리워하는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것 없는것인줄 조금은 알것  같다”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써 화사첨족이 되였고 주제를 표출시키는 실수를 하고말았다. 김동진선생의 미니수필 “침묵에서 피여나는 시간의 꽃”은 한편의 서정시이다. 작가의 시적재능이 엿보이는 수필이다. 작가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왜소함을 노래하고있다. “자연이 침묵속에서 고독의 시간을 씹어 천만가지 무성의 꽃을  빚고있는줄 알겠습니다”, “나의 시간은 부끄럽게도 허공에서 부서진 꿈이였습니다”,  “침묵속에서 침묵보다 무거운 나의 시간의 꽃을 빚기 위해 스스로 가슴을 끓이는 생명의 모닥불을  지펴야겠습니다”. 보다싶이 이 수필은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며 그만큼 문학성이  강하다. 그런데 마지막구절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만 주제를  드러내고말았다. 총적으로 김동진선생의 수필은 괜찮은데 마지막 부분에 주제를 로출시키는것이 흠이다. 수필도 음미의 여지가 있어야 하고 그것 역시 문학성의 일부분이다.  수필에 상상력이 차한것은 다수의 수필가들이 안고있는 공통한 결함이므로 상상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련다. 한국의 수필대부 윤재천선생은 “상상력은 어머니 자궁에서 잉태되는  신성한 생명력”이라고 했고 시드니는 “신(神)이 무의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한것처럼 작가는 세상에 없는것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상상력을 크게 중시했던 칸트는 “감각적지각의 자료를 사유속에서  종합하는 능력이 상상력이고 상상력은 감각과 오성(悟性)을 종합하여 현실적인식을 성립시키며 현실에 체험하는것과 자유라는것을 련결시켜주는 의식적장치”라고 했다.   최진옥선생의 수필 “저 강뚝에는 봄꽃이  피여나고있다”는 자연으로서의 강뚝으로부터 민족정체로서의 강뚝을 유도해나가면서 리산으로 인한 민족의 비운을 가슴 아파하고 민족사회의 단결을 갈구하고있다. 표제도 좋고  문학성도 어느 정도 체현되였으나 주제를 너무 적라라하게 드러내고있어 결국은 문학성이 많이 삭감되였다. 례하면 “든든한 강뚝과 더불어 우리 민족사회의 기반을 더 든든하게 다져갈것을 기대한다”는 이 구절은 호소문, 연설문으로서는 제격이나 문학작품으로서는 크게 손색이 간다.  김영애선생의 수필 “바람이 있어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넣고있다. 작가는 바람우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 세상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함께 날면서 사색을 줏고있다. 그 와중에 “출렁이는 강물에 꿈을 동동  띄워”보기도 하고 “꿈과 함께 까르르 웃어보기”도 하며 때론 “망가진 꿈과 짓뭉개진 랑만을 수선해보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일컬어 자유에 날개를 달고 언어에 날개를 단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바람의 세례 즉 여러가지 시련을  겪는중에서 생명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고 꿈을 이룩할수 있다는 철리를 펴내고있다. 그런데 문장이 좀 지루한 감이 나고 마지막 부분에서 주제를 공개하여 작품의 맛을 좀 죽인것 같다. 이런  사례는 아마도 우리 수필이 안고있는 공통한 허점인것 같다.  김경희선생의 수필 “바다를 보셨습니까”는 한편의  서정장시를 방불케 한다. 수필이 보다 나은 문학의 한  분야로 성숙하기 위해 다른 문학쟝르가 갖고있는 우점을 수용하여 자기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다는 그 깊은 맛으로 들뛰는 정서를 차분히 길들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풀떡이는 감정덩어리들 같은 고기떼들”, 바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구절들이 있어 문학성을 획득했고 수필다운 수필로 될수 있었다. 그런데 좀 지루한 감이 든다. 수필은 될수록  짧아야 한다. 긴 수필을 쓰기 좋아하는것도 우리 수필문학의 공통한 약점인것 같다. 길림신문 2016-8-28  
32    해체와 융합과 그리고 초월 댓글:  조회:1412  추천:0  2016-04-13
해체와 융합과 그리고 초월   글/김몽   시대가 변하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이데올로기를 빼놓고는 서로가 벽을 허무는 시대이다. 시대가 변하는 이런 시점에서 자기것만을 고집하는것은 세계화의 흐름을 막는 우둔한 생각이다. 요즘의 사회현상을 “해체”와 “융합”, “초월”이라는 단어에 모든것이 귀결되고 있다. 해체와 융합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은 그것이 세계적 추세이기 때문이다.  결국 해체란 기존의것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틀을 해체함으로써 다양한 가치와 그로인한 존재적 의미를 확대하는것이다. 한마디로 해체를 통해 융합을 이루며 융합을 통해 초월에 이르는것이다. 오늘 문학이나 력사, 철학이라는 지엽적 경계의 벽이 허물어지고 “인문학”이라는 용어로 통합되고 있다. 문학에서도 각 장르가 서서히 해체가 시작되여 서로가 기존의 틀을 깨고 들락거리면서 시적 소설이니, 소설적 시니, 시적 수필이니 ,수필적 시 등등 새로운 문학이 고개를 쳐드는 시대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므로 만약 융합과 해체가 서로 충돌하며 새로운것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존립에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것만을 옳다고 여기며 어느 하나만을 진리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이미 녹이 쓴 과거로 되고 말았다. 복식문화는 언녕 해체되였다. 지구촌 촌민 모두가 복식이 비슷하여 단지 복식만으로는 그 소속 민족을 구분하기 어렵다. 가장 전형적인것은 청바지와 양복이다. 150여년전 미국의 광산로동자들이 입던 청바지를 지구촌 어디에 가서도 볼수 있으며 지난날 영국신사들이 입던 양복이 누구나 입을수 있는 평상복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은 더욱 고급화에로 치달아 매일이다싶이 새로운 복장이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음식문화도 그렇다. 지구촌 촌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음식만 먹던 시대는 지나갔다. 김치가 더는 우리만의 점유물이 아니며 짜장면이 더는 중국인의것만이 아니며 치즈가 더는 유럽사람들만이 먹는 음식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구미에 맞으면 민족여하를 떠나서 자기것으로 만들며 나아가서는 창조성을 발휘하여 더 새로운것으로 변모시킨다. 융합을 하자면 수용의 자세와 버림(해체)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타자의 장점을 취하고 자신의 약점을 버릴줄 알아야 한다. 해체와 융합의 진정한 목적은 이를 통해 자신을 초월하려는데 있다. 해체와 융합과 초월의 례를 중국의 축구를 통해 생생하게 보아낼수 있다. 중국은 축구의 발생지이다. 하지만 여태껏 월드컵에서 우승을 해본 적이 없다. 금년에도 월드컵선발예선전에서 유감스럽게도 탈락하고 말았다. 오늘 중국은 축구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습근평 주석은 아르헨티나를 국사방문했을 때 중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한바 있다. 중국은 축구에서 당하고 있는 수모를 설원하고 축구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 우선 축구에 대량의 투자를 하여 외국인 감독과 선수들을 많이 영입하였다. 16개 슈퍼리그에 진입한 팀의 감독이 모두 외국인이며 각 팀마다 외국인 선수가 평균 3,4명 있다. 이들한테 투자하는 금액은 적어도 해마다 수십억원이 될것이다. 중국축구는 외국인감독과 선수들한테서 많은것들을 배웠고 그 과정에 서로 다른 민족들과의 우의도 돈독하게 다졌다. 그 결과 초월이 이루어져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광주 항대팀이 월계관을 안아왔고 이에 13억 중국인이 미친듯이 환호하였다. 가령 중국이 그냥 민족성이나 자력갱생을 운운하면서 외국인 감독이나 선수들을 영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까?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외국인을 영입한것은 바로 자기에 대한 해체과정이며 수용의 자세이며 융합이다. 남들의 우수한 점을 배우는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남의 장점을 알고 자기의 단점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남의 장점은 적극적으로 배우고 자기의 단점은 아낌없이 버리는 자세를 취한다면 가능하게 그 어느 날엔가는 초월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해체와 융합 그리고 초월의식은 국가나 단체뿐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필요하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크게 변할것이다.▣  잡지 2호 
31    신뢰가 행복을 만든다 댓글:  조회:1995  추천:3  2016-02-04
북유럽국가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살기 좋은 나라중의 하나이다. 지난해 타임스지의 통계에 따르면 덴마크가 181개국중에서 행복지수가 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무슨 힘이 덴마크를 이러한 나라로 만들었을까? 바로 신뢰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개인과 개인 사이, 이웃과 이웃 사이, 국민과 나라와의 사이에서 신뢰를 우선으로 내세운다. 로씨아의 작가 아. 톨스토이는 일찍 “신뢰는 두번째 생명”이라고 말한바 있다. 덴마크 사람들이 신뢰를 삶의 신조로 삼기에 덴마크를 부유한 나라, 행복한 나라로 만들수 있었다. 이 나라에는 기차역이나 뻐스역에 매표원이 없다. 국가가 국민들을 믿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스스로 표를 사고 차에 오른다. 그렇다고 하여 CCTV를 설치한것도 아니다. CCTV를 걸치하면 국민을 믿지 않는것으로 되기에 설치하지 않은것이다. 농장주들이 자기가 생산한 농산품을 길거리에 있는 무인매대점에 진렬해놓으면 고객들이 가격표에 따라 돈을 놓고 물건을 사간다. 농장주가 고객들을 믿기 때문에 무인가게에서 상품거래가 이루이지는것이다. 이웃간에도 신뢰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믿기 때문에 말다툼이 없으며 자물쇠가 뭔지 모르고 산다고 한다. 신뢰는 감옥에서도 이루어진다. 죄수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가서 집식구들은 만나고 온다. 감옥이 죄수들을 믿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하루가 지나면 어김없이 감옥으로 돌아온다. 간수들은 죄인들에게 두려움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 총을 휴대하지 않으며 평소에 죄인들과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화시킨다. 이리하여 간수와 죄수 사이에 자연스럽게 교감이 형성되고 죄수들은 새사람으로 다시 태여난다. 이런 연고로 덴마크는 세계에서 감옥이 제일 적고 죄인이 제일 적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감옥이 많고 죄인이 많은 나라는 국가와 국민사이에 신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그러한 나라는 전도가 암담하다. 덴마크국왕이 거주하는 왕궁에는 보초병이 없다. 역시 국가가 국민을 믿기 때문이다. 국왕은 가끔 호위병도 없이 길거리에서 국민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견해를 듣군 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고 천방야담같은 이야기지만 덴마크에서만은 희귀하 일이 아니다. 일년전에 덴마크에 다녀온 한 문우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 했지만 엊저녁 텔레비죤을 보고서야 진정으로 믿게 되였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나라이다. 월소득의 35% 내지 50%를 국가에 납부하지만 국민들은 불만이 없다. 그것은 국민들이 나라를 믿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자기들이 납부한 세금을 국가가 병원, 학교, 로인복지 등 사회 공공시설 및 서비스에 쓰며 결국 세금이 자기들을 위해 쓴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데모나 폭력같은 사건이 제일 적게 발생하는 나라도 덴마크이다. 중요한 원인은 국민들이 국가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데모나 폭력이 잦다는것은 국민과 국가간에 소통이 잘 안되고 국가를 믿지 않는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나라일수록 경찰이 많고 감옥이 많기 마련이며 나라는 전도가 암담하다. 덴마크는 또 세계적으로 부정부패가 가장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 국회의원들의 월급이 일반 공무원보다 약간 높고 특수대우도 없으며 출퇴근할 때 자전거를 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관리들이 대부분 청렴하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국민들이 국가를 믿지 않겠는가. 불신은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다. 불신은 갈등으로 발전하고 갈등은 살육으로 이어진다. 최근 몇년간 미국에서는 총기살인사건이 련이어 발생하고 있다. 그중에서 흑인과 백인간의 마찰이나 갈등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다수를 차지한다. 불신은 개인지간에는 살인으로 치닫을수 있고 국가지간에는 전쟁을  유발시킬수도 있다. 오늘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총포소리가 요란하고 수많은 생령들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근원을 캐고 보면 집단과 집단 사이, 국가와 국가 지간에 불신의 곬이 깊기 때문이다.   중국정부가 제창하고 있는 부강, 민주, 자유, 화해, 우애 등 12가지 정책은 캐고 보면 그 뿌리가 신뢰이다.   오늘 지구촌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것이 상호 신뢰다. 지구촌 곳곳에서 신뢰의 탑이 구축된다면 세계는  평화와 번영의 일로를 걷게 될것이다. ▣ 잡지 2016년 1호  
30    광고는 진실해야 한다 댓글:  조회:2123  추천:2  2015-10-29
광고는 진실해야 한다                         김몽   광고는 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시장경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중국의 백성들은 광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헌데 지금은 광고가 하도 범람하여 백성들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릴 정도다.    광고도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광고는 리윤을 목적으로 한다. 속되게 말하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 실사구시적이고 진실한 광고는 기업에 리윤을 창출해줄뿐 아니라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을 주므로 마땅히 제창하여야 한다. 하이얼(海尔)이나와하하(娃哈哈),노바이진(脑白金),세리팅(泻痢停 )같은 상품들이 지금까지 왕성한 생명력을 이어 오게 된것은 바로  진실성 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아왔기때문이다. 이에 반해 잔뜩 부풀린 허위성 광고는 그 사기성으로 말미암아 나라도 해치고 사회도 해치고 특히는  소비자를 해친다. 허위성 광고는 잠시는 득을  보는것 같지만 종당엔 허위성과 사기성의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되여 허위성광고가 활개를 치고있는것은   량심에 곰팽이 낀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며   해당기관의 관리와 단속이 허술하기때문이다.                       허위성 광고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엄중한것이 약과 의사에 대한 광고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약과 의사에 대한 광고만을 화두에 올리려고 한다. 잡지나 신문,  그리고 판플레트로 찍여나오는 수많은 의학광고들을 보면 손바닥만한 연길에 저명한  의사와 유명한 교수가 우글우글하고 못 떼는 병이 없다. 그런데 아이니컬하게도 인구 비례로 따지면 연변지구에 환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허위성광고는 의사와 잡지사 혹은 신문이 짜고들어 만든 이다. 광고를 내 주는 편에서도 돈을 위해서이고 광고를 내는 쪽도 돈을 벌기 위해서인데 부플리기 재능이 이만저만이 아니여서 어리무던한  백성들이  거기에 속혀워 피땀으로 번 돈을 날치기당하고 있다.    허위광고의 례를 들자면  수두룩하지만  몇가지만 말하려고 한다  필자가  아주 잘 알고있는 한 의사는 소학교도 변변히 졸업못했건만 어느 잡지는 그가 미국 모 대학에서 박사칭호를 받웠다고 소개하고 명의라고 춰 세워 수많은 환자들이 사기를 당했다. 알고 보니 이른바 박사증은 돈을 주고 돈을 주고 산것이였다. 그 는 할아버지때부터 내려오는 비방이라고 하면서 페병환자나 간경화환자나 심장병환자나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쥐똥같이 생긴  똑 같은 약을 준다. 이 잡지는 한번도 아니고 근 십여년간 잡지표지에다  의 사진늘 번듯하게 올려놓고  똑 같은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였다.  어느 한번은 건강신문에 조선에서 배워온 비방으로 위병을 잘 때는 명의사가 있다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를 낸 의사는  “만약 병을 떼지 못사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하였다.  위병이 있는 필자는 반신반의하며서도 의사를 찾아갔고 약을 사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신문사에 가서 시비를 따지니 자기네들은 의사의 말대로 했기에 잘못이 없다고 변호했고 의사를 찾아가 “당신의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자기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한적이 없고 신문사에서 자기들의 맘대로  그렇게 쓴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알고 보니 그 의사는 의사증도 없는  사람이였다. 단지  광고만 보면 정말 화타가 왔다가 울고갈 지경이다. 대부분의 의학광고를 보면 거의 다가 들이고 그들이 쓰는 약은 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라는 말에 속히운다. 남성정력제    광고를 보면 대개가 장족비방,묘족비방, 몽골 비방, 아랍비방, 궁중비방,조상때부터 내려오는 비방 등등인데 한개 료정을 복용하면    굵기가 5-6cm, 길이가 8-9cm증가된다고 소개한다. 터무니없어도 너무나 터무니없건만 이런 광고를 믿고 행여나 하여 헛돈을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어떤 광고를 보면 한가지 병만 제대로 떼도 대단한데, 뗄수  있다고 하는 병이 보통 수십가지에 이른다. 우에서도 말했지나 이렇게 명약이 많고고 명의가 많은 연변에 인구 비례로 따지면 연변이  전국에서 화자가 제일 많다고 하니 참 소  웃다  꾸레미 터질노릇이 아닐수 없다. 한번은  당뇨병과  암을 때는 명의사가 있다는 광고도 보았다. 당뇨병과 암은 세계적으로도 못 때는 병인데  자그마한   연길에 이런 병을 떼는 명의가 있다고 하니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광고를 낸 의사도 황당하고 한심하지만 그런 광고를 내는 사람들 역시 무지해도 한참이나 무지하다.   필자는 허위광고로 사기치는 현상이 유독 연길뿐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한다.  약과 의사는 환자의 생명과 련관되여 있으므로 제발 부탁하거니와 약과 의사를 홍보하는 광고는 천만 진실하고 진지하고  엄숙해야 한다. 돈벌이에 눈이 어두어 백성을 사기치는 광고는 당장  근절되여야 한다. 광고를 내려는 사람과 광고를 내 주는 사람들은  모두 량심을 지켜야 하며  위생국을 비롯한  유관부문은 허위광고가 발을 못 붙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할것이다.   2015년 9월 17일  
29    불가사의,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 댓글:  조회:1091  추천:1  2014-11-11
    불가사의,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   ㅡ방산옥의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평함                                   김몽                        1. 방산옥시인이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출산했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방순애의 하이퍼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 다음으로 내놓은 두번째 하이퍼시집이다. 45년간 록색생식의학연구에 몰입하면서 수많은 아가들을 선물하였고 건강한 삶, 행복한 짝을 지어주었던 의학자가 이번에는 그 자신이 문학과 미친듯이 짝짓기를 하여 예쁘고도 포동포동한 아기,하이퍼시집을 낳았으니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다. 오늘 필자는 69세가 되여 늦둥이를 출산한 산모를 경하하려고 이 자리에 앉았다. 시집을 읽으면서 감탄과 경이로움도 함께 읽었다. 중국어로 «中华妇女临床医学研究»,«中华实用临床医学防治研究»,«健康你我她»를 내놓고 우리 글로 «성을 알면 삶이 아릅답다»와 그리고 60만자에 달하는 «삶과 짝»을 저술한 의학자가 불과 2,3년 사이에 동시집 «바람도 빼똘빼똘»을 만들고 200여수의 하이퍼시를 창작했으니말이다. 그중에서 92수를 골라 묶은것이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이다. 시집은 제목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여서 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시인은 책머리글에서 최룡관선생님을 알게 되여 세심하고 열정적인 지도를 받았다고 말하고있다. 이 세상에서 인연이라고 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만나 교향곡 제5번이 탄생했고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울이 로상에서 예수를 만나 결국 오늘과 같은 기독교가 있게 되였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문학의 경우 중국문학권의 영향도 무시할수 없지만 주로는 개혁개방으로 국문이 열린 덕분에 한국문학과 인연이 맺어져  서방현대파문학리론을 접수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현대파문학이 세워지게 되였다. 하이퍼시 경우도 마찬가지다. 디지털문학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나라들에서 하이퍼텍스트문학이 시작된지 오래다. 한국은 서구와 인연이 맺어져 십년 뒤늦게야 하이퍼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한창 실험단계에 있으며 론쟁도 많이 진행되는것으로 알고있다. 우리 문학은 이번에도 한국과 인연이 닿아 하이퍼시를 알게 되였고 지금 일부 시인들이 하이퍼시에 경도하는 바람이 일고있다. 최룡관시인을 주축으로 하이퍼시 동아리가 형성되였고 대련에서는 김파시인이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몰입하고있다.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읽으면서 생각이 깊었고 고민도 두터웠다. 비평문학은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감상괴 리해,해석과 가치판단을 통해 삶을 대하는 눈과 마음을 넓혀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걸어가도록 구도하고 그 자신이 순례자로서 걸어가는 삶의 길을 찾기에 다름 아니다. 무릇 시를 비평하는 사람은 독자의 눈과 귀를 가져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인의 마음과 손의 감각을 감지하여야 한다. 아니, 어쩌면 비평가란 그 어느쪽에도 속할수 없는 경계선상에 서있는 경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희려 그런 리유로  해서 그런 경계인이야말로 가장 첨예하게 시를 읽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산옥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곤혹스러웠던것은 하이퍼시의 특성때문이였다.하이퍼시의 특성을 간단하게 개괄하면 탈관념, 초월과 건너뜀의 기법,시간경계의 무시, 다선구조, 무한한 공간 등등이다. 이런  특성들이 또 언어의 폭력조합과 어울려져  난해성 내지 불가사이성이 가중된다. 매 수의 시를 정확하게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최룡관선생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의  서평  «새로운 천지에서 타오르는 시의 불길»에서 다만 새로운 시 령역의 개척과  이미지폭력조합만 건드렸을뿐 구체적인 시해설은 한수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이퍼시를 일목료연하게, 깨끗하게 해석하고 분석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난해성이다. 문학의 한 류파인 포스터구조주의와 포스터모더니즘은 신비를 추구하고 사이비를 제창한다. 이들은 “불가사이한것이 언제나 아름답고 아름다운것은 언제나 불가사이하다고 주장한다.”하이퍼시의 초월과 건너뜀의 기법은 이들의 리론과 많이 닮아있다. 결국 하이퍼시와 대화한다는것은 불가사이한 물체와 대화하는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유일정확한 답이 있을수 없다. 명확한 풀이를 할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하이퍼시가 아닐것이다. 이런 리유에서 하이퍼시를 일목료연하게 해석한다는것 그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필자는 하이퍼시와 대화를 나누기로 하였다. 첫째는 비평가의 사명감이였고 둘째는 해석의 열쇠를 찾아보려고 미궁에서 헤매는것이 비록 피곤하고 고단한 일일지라도   바로 거기에 또 시 읽기의 다른  한 재미가 있기때문이였다.                   2. 방산옥시인은 소재발굴에서 새로운 령역을  개척하고있어 주목을 끈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이 주역과 의학소재를 다루고있다. 최근년에 우리 시단에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는 시인들이  나타나  시단에 활력소를  가미해주고있다.  광주의 박운호시인이 주역을 기본 핵으로 하여 미묘하고 신비한 마방진시를 쓰고있고 미국에 있는 홍군식시인이 순 불교를 소재로 130수의 시를 만들어 «원묘»라는 표제로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하고있다. 그 본인은 불교시라고 하는데 내가 보건대 소재는 불교이지만 형식은 하이퍼시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학을 소재로 시를 쓴는  시인은 방산옥 한사람뿐인것 같다.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시적상상력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있는 주역적사유와 의학적사유가 시의 내면공간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견인력으로 작용하고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독자적특수성과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특수성으로 하여 방산옥의 시는 남들과는 다른 개성적인 얼굴을 가지게 된다. 방산옥의 시를 여러가지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음양결합을 바탕으로, 주로 생명시학에 시각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방산옥의 시가 여러가지 내용을 포괄하고있지만 생명 또는 섹스에  관한 내용이 가장 비중있게,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있다. 표제들만 보아도 그것이 립증된다. “삼월이 분만한다”, “옥문”,“안개의 젖통을 스친다”, “짝사랑”, “자궁은 랭장저장고”, “송이버섯의 결혼” 등등. 그래서  필자는 시평의 표제를 «불가사이, 그 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이라고 달았다. 방산옥의 시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탄생하고 활발하게 숨쉬면서 푸덕이는것은 시인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시인 방산옥은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인줄로 알고있다. 그는 특히 성박사로 소문이 나있다. 그는 “성을 알면 삶이 아름답다”, “삶과 짝ㅡ생식과 전신건강”등 저서를 출간한 사람이다. 하기에  시인은 알게  모르게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생명례찬과 신비, 혹은 생명의 탄생과 부활, 성의 신성함을 시의 핵으로 다루고있는것 같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음과 양의 결합을 전제로 한다. «고물주를 수송합니다»가 전형적인 례로 된다. 시에서 남성의 생식기 남근은 «물구나무», «호랑이심장으로 만든 기차»로 은유되여 그 거대한 힘이 과시되고 있고 녀성의 생식기 질은 «불아궁이»,«동굴»로 은유되여  남근을  정복할수 있는 더 큰 힘으로 묘사되고있다.   남근이 «물구나무» 나 “호랑이처럼 힘이 세지만 녀성의 힘이 더 세여 그 “연장이”“불아궁이”에 들어가자  “그슬러 검정버섯이 ”된다. 성교를   해학으로 풀어낸 시라고 볼수 있겠다.     구들목에 앉았던 고양이 병아리소리에 연장이 부풀어납니다 질이라고 쑥 들어간 연장은 불아궁이에  그슬러 검정버섯이 되였습니다 ……중략 호랑이 심장으로 기차 만들고 위장으로 기차길을 닦았습니다 기차는 음낭역을 떠나 질역으로 고물주를 수송합니다   ㅡ«고물주를 수송합니다» 일부  “고물주”라는 단어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필자는 “고물주”를 남성의 “정자”(精子) 가 아닐가고 생각한다. “기차가 음낭역을 떠나 질역으로/고물주를 수송”했기에 이로부터 수많은   생명이 탄생하거나 부활하여 방산옥의 시들은 생명의 약동으로 부풀어오른다.   집안에서 나는 응아 소리에 태양의 빨간 청각, 파란 미각, 투명한 시각들이 창문을 깨고 날아들어옵니다   ㅡ«버들과 련꽃형제» 일부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환희가 시줄에 앉아 춤을 추고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얼마나 급했으면 “태양”이 아기를 보려고 창문을 깨고 들어왔겠는가. “빨간 청각,파란 미각,투명한 시각”이라는 언어조합이 전반 시에 감미롭고도 싱싱한 숨결을 부어놓고있다. «산문을 열다»는 굉장한 상상의 힘을 빌어 만물을 창조하는 대자연의   신비무궁함을 시화하고있다.   새들은 향기를 부채질하여 친구들을 부르고 꽃들은 구름을 펼쳐 새아침 목청을 그린다   목동의 초막에서는 천문가가 아침 정적을 울리는 첫울음을 터뜨리고 심산의 근육수축으로  양수가 터진다   천년송에 머리박으며 울부짓는 바람은 사지를 무겁게 끌고다녀도 정에 취한 청산은 건(乾)도 손(選)도리(离)도… 모두들 품어준다   ㅡ«산문을 열다» 일부    대자연으로서의 산은 하나의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이 된다. 그 자궁이 수축하여 양수가 터지자 삼라만상, 안개, 나무잎,아침이슬,꽃, 목동, 구름 등이 태여나 세상은 생명의 숨결로 굼실거린다. 이 시의 구조상의 특징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데 있다.원인이 마지막 련에 누어있고  결과가 앞부분에 서있다. 필자는 산문을 열다를 “자궁을 열다”로 리해하고있다. 어머니로서의 산은 단지 수많은 아기들을 낳을뿐 아니라 보호하고 따스하게 품어주는것도 있지 않고있다. 천년송에 머리 박으며 울부짖는 바람은 사지를 무겁게 끌고 다녀도 정에 취한 청산은 건(乾),손(選)도 리(离)도… 모두들 품어준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 이미지결합은 “목청을 그리다”이다. 시인이 화가가 되여 소리를 그리고있는것이다.  이상은 주역적사유속에서 만들어지고있는 생명을 소재로 한 시들의 일부였다.우에서도 말했지만 방산옥의 시에는 주역적사유 못지 않게 의학적사유로 만들어진 시들도 적지 않다. «초경»은 인체의 생리변화로 새로운것의 탄생을 례찬한 시라고 본다.   제비 한마리 치마폭을 감싼다 제비 새끼가 첫 고고성을 울리며 얼굴을 뾰족히 내민다   우물가 수양버들에서 회색강아지들이 먹거리 찾아 우물에 뛰든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달님은 별아가들을 업고 앞마당에 내린다   자고 일어난  소녀의 침대머리에 장미꽃이 피여난다 어두운 협곡을 뚫고 13년만에 답은 선물   ㅡ«초경» 전문 초경을 장미꽃에 비기고 그것이 “어두운 협곡을 뚫고/ 13년만에 찾아온 선물”이라는 표현은 칭찬을 받을만한 시구다. 시인은 초경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장미꽃향기로 승화시키고있다. 더욱 눈박아 보아야 할것은 인간과 자연의 화합하고 인간과 자연이 동격을 이룬다는 점이다.  시인은 갓 태여난 제비새끼와 버들개지, 별아가, 초경을 맞은 소녀 등을 한줄에 세워놓고 함께 탄생을 축하해주고있다. 우리는 «용광로에 빠진다»에서 생명의 과정을 묘사한  새로운  신선한 시를 만나게 된다.   코가 바람을 잘근잘근 씹어삼킨다 인후바위를 비비며 호수들은 계곡을 가득 채우고 갑문을 연다   동그란 바람호수들이 낭떨어지로 미끌어떨어지며 붉게 달아오르는 용광로에 빠진다   심장펌프가 물을 퍼낸다 물은 도랑을 따라 전야를 적시며 점점 검푸른 옷을 입는다   강물은 새길 찾아 돌아오며 검푸른 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붉은 옷과 푸른 옷은 뱅글뱅글 옷만 갈아입다가 동년의 꿈을 꾸며 잠든다   ㅡ“용광로에 빠진다” 전문   제1련은 코로부터 호흡을 하여 산소가 페에 들어가는 현상을 말하고 2련은 산소가 심장에 이름을 말한다. 시인은 심장의 박동을 “심장펌프가  물을 퍼낸다”에 견주고있으며 수많은 모세혈관이 온 몸에  펴지는 현상을  «물은 도랑을 따라 전야를 적신다”고 묘사하고있다.   동맥을 “붉은 옷”으로, 정맥을 “푸른 옷”으로, 그리고 동맥과 정맥의 순환현상을 “붉은 옷과 푸른 옷은 /뱅글뱅글 옷만 돌려입다가/동년의 꿈을 꾸며 잔다”라고 노래부르고있다. 생명의 과정을 의학적도리로 설명했으나 이미지가 생신하고 선명하기에 읽으면 재미가 돋아난다. 이외도 의학적사유로 생명의 탄생과 환희를 읊조린 시들이 아주 많다. 례하면 “언덕에서 목을 쭉 빼든 민들레가/노란 꽃망울진 유방과 속삭일 때마다/젖무덤에서 한잎한잎 꽃잎이 피여난다” «처방전1» ,“침들을 한줌 쥔 손바닥은/침모내기에 구슬따 흘린다/ 땀방울은 파란 잔디밭을 키우고/벼꽃을 만발시킨다”«침모내기»,“올챙이들이 갤갤/새들이 짹짹/산에서 목탁이 딱딱딱/계곡에 노래를 심습니다”«옥문». 방산옥시인은 신선한 이미지창출에서도 재기를 보인다. “빨간 청각 파란 미각,투명한 시각”,“우뢰가 우주의 귀뺌을 치다”,“글자가 삐뚤삐뚤 길을 닦고/길은 모양을 조각하며 소리를 낳는다”주문의 마디마디가 /푸른 잎에서 쫑쫑 뛰여내린다”. “우주핸들”,“침모내기”.이런 잘 구사된 이미지조합들은 시를 시로 만드는데서 관건적인 구실을 하고있다. 방산옥시인이 열심스레 탁마해낸 이미지에 대해 할말이 퍼그나 있으나 편폭을 고려하여  더이상 론의하지 않기로 한다.                   3.     오늘 이 자리를 빌어 하이퍼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 시단에서  하이퍼시를 두고 엇갈리는 견해들이 상충하고 있어 약간의 조률과 해석이  필요하기때문이다. 하이퍼시에 너무 매료된 어떤 사람들은 하이퍼시가 가장 우수한 시고 여타의 시들은 시가 아니거나 한층 낮은 수준의 시라고 하고 반대로  하이퍼시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은 하이퍼시는 인간과 세상을 등진 무의미한 동화적장난이라고 폄한다. 필자는 하이퍼시는 시대가 낳은 문학사조의 하나라고 본다. 그러나 하이퍼시가 최고의 시형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이퍼시는 그로서의    강점과 단점을 모두 갖고있다. 그러므로 강점은 배우고 단점은 삼가해야  한다는 립장이다. 언젠가 김철호시인이 자기가 하이퍼시를 공부하는것은   하이퍼시를 쓰기 위함보다는 자기의 시를 더 풍부히 하기 위한데 있다고 했는데 필자는 이러한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학사조는 모두 저마다의 강단점이 있으므로 서로가 대방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걸러내여 자신을 더 충실히 하는것이이 참다운 문인이 걸어가야 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공생공존(共生共存),  호경호존(互敬互爱)의  정신은 문학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와 견해가 같지 않다고 하여 무조건 대방을 비방하거나 폄하는 일은 부디 삼가해야 한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데가주망과 앙가주망을 두고 끊임없이 론의가 계속되고있는데 그것을 화두에 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 아다싶히  간단하게 정의하면  데가주망은 절대적자유,자기해방, 현실도피 등을 의미하고 앙가주망은 현실과 어떤 인연이나 관계를 맺는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참여와 통하기도 한다. 시문학에서는 순수시와 참여시로 구분된다. 사르르트의 앙가주망개념이 가장 대표적이다. “작가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상에 나서서 [나는 세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수 없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이는 이상 작가는 말할줄 모른느척 할수는 절대로 없는것이다. 의미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것이다.”(사르르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두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다시말해서 문학은 문학을 위해서도 존재하고 사회를 위해서도 존재한다. 괴테는 “시는 남자가 세계에 하는 키스이다. 그러나 빈 키스에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갈파한바 있다. 아내가 아니라 연인에게 하는 키스는 단순히 애정의 표현일뿐이여서 연인은 아내처럼 아이를 낳거나 생활계획과 같은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된다. 괴테의 말은 서정시의 무목적성 즉 순수성을 지적한 말이다. 에드리 앨렌포도 “시는 시이고 그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놓았는데 역시 같은 맥락에 선다. 그러나 시는 이들이 말하는것처럼 단순한 감성의 표출로 끝날수는 없다. 시는 모종 의미에서 사회와 력사, 사상과 인식의 거울이 되여야 하다. 그렇다고 하여 시가 정치의 노예가 되야야 한다는것은 아니다. 순수와 참여, 시의 이러한 량면적속성에  주목하여 토마스 엘리엣은 “사상을 한다발 장미의 향기로 표현하라”는 주문을 내세운바 있다. 사상을 전하되 아름다운 장미의 향훈으로 감싸라는 뜻이다. 사상을 사상으로 전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정치나 철학으로 될것이다. 어떤 사상도 예술의 옷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플라늘레르 역시 시에서 사상을 과일의 영양소처럼 숨겨놓으라고 권고하고있다. 사과의 아름다운 향기와 맛에 끌려 한줌 베어먹는 순간, 사과의 영양소도 함께 흡수되는것이다. 지금 우리 시단의 경우 순수와 참여(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세상과의 교류와 인연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일체, 비희고락, 분노, 사랑 등을 모두 아우른다)의 대립이  상충상태로 존재하고있다. 그중 제일 많이 의론되고있는것이 하이퍼시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순수와 참여의 대립을 넘어서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는 소통과 화홥의 지형도를 국축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드러나는 시도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실과 너무나나 동떨어진 시도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사료된다. 하이퍼시는 초월과 건너뜀의 기교를 통해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을 제공하고 사유의 비약을 도모하며 생신한 이미지창출을 꾀하고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의미를 뜻하는 랭혹한 탈관념과 지나친 언어폭력조합은 커다란 난해의 미궁을 만들어 세상과 독자와의 고립이거나 소외, 단절의 위험이 초래될수 있을것이다.  독자가 외면하는 시집을 찍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이퍼시가 안고있는 가장 큰 위험은 까딱하면 문자유희나 장난 그 자체에  머무르고만다는데 있다.  시가 아무리 순수를 겨냥한다 해도 시인이 세상밖이나 진공상태에서 살수는 없는 이상 현실과 교감하는 어느정도의 삶의 숨결은 있어야 한다는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오늘 필자가 례문에 올린 방산옥의 시들은 정도부동하게  관념이 슴배여있는 숨쉬는 시들이였다. 례문에 올리지 않은 시들중에서도 «오염된 부르하통하»,«어둠이 산문을 삼킨다» 등 시들은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자연의 파괴,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를 고발한  시들이였다. 그리고 김파시인이 장백산집지에 발표한 디지털하이퍼시에도 «안개 낀 미로»를 비롯하여 옅은 관념의 옷을 걸친 시들이 몇수 보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하이퍼시에도 어느정도의 관념을 집어넣을수 있다는 도리를 립증해주고있다. 필자가 절대적인  탈관념에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부딪치고있는 현실상황때문이다. 멀리로는 서아프리카에 무서운 전염병인 에블라 바이러스가 발생하여 수천명이 죽어가고있으며 그것이 미국과 구라파까지 확산하여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있다. 중동에서는 전쟁과 폭란으로 수많은 인생이 살륙되고있어 세상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이다. 시인들이 이런 현실을 모르는척 할수 있겠는가. 가까이로는 중국의 고위급간부들이 수십억, 수백원의 나라돈을 탐오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사무친다. 문인들이 이런 현싱에 눈 감은채 그냥   음풍영월만 할수 있겠는가. 더 가까이로는 한반도가 매일 갈등으로 으르릉거리고 있으며 중국조선족은 해외진출로 부를 창조하였지만 그 대가로 교육위기, 가정파탄 등 위기도 함께 겪고있다.  이런것도 우리가 그냥 못본척 할수 있겠는가. 더 더 가까운 례를 들어 나의 누이나 어머니나 딸이 괴한에게 강간당할 때 그 광경을 보면서도 그 곁에서 그냥 수수께끼같은 시를 읊을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결코 구호식이나 탄원식의 정치시를 쓰라는것은 아니다. 엘리옷의 말처럼 사상을 예술적으로 장미의 향기처럼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이퍼시에서도 일정한 정도의 관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연구하고 하이퍼시를 쓰고있는 한국의 최진연시인의 말에  큰 공감을 갖고있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문학의 량대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심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같은 관념 ”을 쓰려고 한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것이 더 좋으리라고 생각해서이다.”(최진연 [하이퍼시의 리해]) 하이퍼시가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한다면 세상과의 화합도 이루어지고 따라서 독자층확보도 가능해질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폭력조합에 대해서 몇마디 덪붙히려고 한다. 신비평에서는 언어의 폭력조합을 아이러니견제와 균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적당한  견제와 균형은 시 앙금을 증강시키고 사색의 심도와 광도를 확대하여 시의 품위를 높이지만 지나치면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일반적인 시도 읽이지 않는 시대인데  하물며 수수께끼같은 시야 더 말할나뉘가 있겠는가. 독자층의 외면은 너무나 당연할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폭력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무릇 세상일이란 모두 적당하면 좋다. 과하면 탈이 생긴다. 하이퍼시는 21세기에 군림한   문학의 한 사조로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 탈관념과 언어의 조합에서 조금 더 유연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하이퍼시가 많은 사람들의 긍정을 받을거이며 미래가 양양하고 창창할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퍼시의 존재가치와 이후의 운명은 어느 한두사람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력사에 의해 증명될것이다. 하이퍼시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방산옥  시인의 시집출간에 다시한번 뜨거운 축하를 보낸다. 금후 더 훌륭하고 예쁘고 멋진 하이퍼시를 낳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2014년 10월 18일 연길에서   방산옥의 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세미나에서 발표한 론문          
28    살아있는 시, 그리고 머물러있는 시 댓글:  조회:1024  추천:2  2014-10-27
평론       살아있는 시, 그리고 머물러있는 시 ㅡ 김학송의 기행조시에 붙혀                                         김몽 김학송의 기행조시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이 두 형태는 아무런 관계없이 각기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참된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문학이다. 참된 문학은 영원히 지속하는 문학이다. 그것은 학문을 위해 또는 시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고 조용히 엄숙히 걸어간다. 가짜문학을 흘러가는 문학이라고 부르고  참된문학을 머물러있는 문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문학을 살아있는 문학이라고 할수 있고 가짜문학을 죽은 문학이라고  할수 있다. 시의 경우 많은 시들이 세상에 태여나지만 태여나자마자 요절하여 화장터로 향하는  시들이 수두룩하다. 이 말인즉 비록 시라는 이름을 띠고 세상에 나왔지만 겨우 한번 정도 읽히우거나 혹은 한번도 읽히우지 못한채  휴지통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하다면 어떤 시들을 일컬어 살아있는 시라고 할수 있겠는가. 생각컨대 그러한 시들이란 바로 오래오래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으면서  찬연한 원광을 뿜기는 시들일것이다. 례하면 김소월의 «진달래»나 윤동주의 «서시» 같은 시들말이다. 시의 밑바닥으로부터 삶을 응시하고 가드듬게 하고 휘우뚱거리는 몸체를 곧게 세우게 하는 장중한 목탁소리가 은은히 흘러나오는 시, 그리하여 마침내는 인생에 관한 어떤 계시거나 법열을 줏게 하는 시, 이런 시야말로 과시 살아 숨 쉬는  시, 흘러가지 않고  가슴속에 머물러있는 시가 아닐가. 생명이 있는 시로 되자면 시의 외곽만 하려해서는 안되는바 그 외곽안에 인간의 말씀과 인간의 냄새와 인간의 숨결이 있어야 한다. 인생의 비희고락을 다독여주며 존조리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야 하고 무언가를 시사해주는 은근하고도 묵직한 성성(圣声)이 들려야 한다. 채 여물지 못한 어설픈 생각과 경박스런 감성으로 속된 감각을 아무데나 사정하는 시, 값싼 자아위안거리 시,그리고  자아과대망상증에 걸려 횡설수설하는 시들은 결국은 요절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졸평에서는 최근에 창작한 김학송의 기행조시를 살핌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학송의 시들은 단지 풍물기행시로서  망막에 안겨드는 경물들을 손쉽게 즉흥적으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바다밑까지 깊숙히 하강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사랑과 슬픔을 개성적인 호흡과 맥박으로 형상해 가려는 제스처가 보인다는데서  주목을 끌었다. 김학송의 기행조시들을 보면 거개가 시의 숨소리가 들리고 말소리가 들리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다. 즉 생명이 각인되고 확실시 되는것 같다.   산자락에  웅크린 삶들은 멀리 도회지를 바라보다가 날이 어두워 돌아선다 고독을 지팽이 삼아 산을 넘는 꿈들 꿈은 산처럼 깊어가고 야윈 노을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산을 넘는다   ㅡ«꿈은 산처럼 깊어가고» 일부   시인이 기차에서 바라보는 황혼 무렵의 시골모습인데 어쩐지 추연한 감정을 자아낸다. 시인의 마음은 시골의 황혼과 교감하고있으며 시골의 경관과 교감하고있으며 시골사람들의 마음과 교감하고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잔잔한 시적전률이 생겨난다. 시인은 황혼무렵의 시골모습에서 창백하고 야윈 시골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보아내고 감상에 갈마든다. “웅크린 삶”, “고독을 지팽이 삼아”, “야윈 노을” 등등의 회색빛이 짙은 시어들이 자연스럽게 시골삶의 하모니로 울리면서 여윈 삶을 살찌우려고 아글타글하는 시골사람들의 내면세계를 핍진하게 그려내고있다. 산처럼 깊어가는 시골사람들의 꿈이 과연 현실로 될것인가. 그것은 숙제로 남는다. “야윈 노을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산을 넘는 ” 순간,  우리의 마음에도 정감의 황혼이 깃을 펴면서 사색의 호수에 잠기게 된다. 김학송시인은 북대하유람차 23수의 기행조시를 썼는데 필자가 그중에서 8수를 선정하여 화두에 올렸다. 기행조시 대부분이 바다를 소재로 하고있다. 시인은 광대무변한 바다에 사색의 낚시를 드리우고 펄떡거리는 싱싱한 시들을 낚아올리고있다. 그러되 그 모양새는 각각이다. 바다는 하나의 단순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로  둔갑하면서 여러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있다. “눈물의 바다”에서의 바다는 “고열에 몸을 떨며 눈부신 절망 부르짖는 바다”이며  “죽음의 예감으로”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바다”이며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 /찢어지며 펄럭이는  바다”이다. 한마디로 어떤 옥죄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바다이며 무엇인가 새롭게 태여나려고 광란의 춤을 추는 바다이다. 이 시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구가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찢어지며 펄럭인다”이다. 이것은 화려한 절망이다.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성공  모두를 아우르는 예쁘면서도 숨가쁜 절망이다. “내 마지막 녀인”이 구경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것은 파도가 표효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짜릿한 파괴의 감각이며 그 감각이 빚어내는 별미에 있는것이다.이 시는 이렇듯 생생히 살아 숨쉬는 시라는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면서도 한편 간결미의 소홀이라는 지적에서도 자유로와질수 없는것 같다. 서두의 3행과 결말의 두행은 어쩐지  군더더기로 보이는바 차라리  다 없애고 “가시 돋힌 강물들이 바다의 살속에 곤두박힌다/천만갈래 검은 손이 바다의 목을 옥죄인다/고열에 몸을 떨며 눈부신 절망을 울부짖는 바다/죽음의 예감으로 바다는 /쓰러지며 일어선다/ 내 마지막 녀인의 치마자락이/찢어지며 펄럭인다”로 하였다면 함축성이 획득되고 더 미끈하게 되지 않았을가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일가견이다. “파도의 언어”에서는 파도가 시인이 되여 수줍고 웅굴진 목소리를 시를 읊는 가관이 벌어진다. 시의 뜻은 수수억년 다져온 속내를 담은것이기에 너무나 깊고 너무나 무거워 파도가 쓰는 시는 그 기상이 “깊어진만큼 더 높이 치솟는다” «파도»가 사용하고있는 시어는 “하늘의 언어”이다. “하늘의 언어”란 도대체 무엇일가.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있는 인어일것이다. 그것은 또 추호도 가공하지 않은, 추호도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의 최고의 록색의 언어일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거창하고 위대한 언어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왜소하고  인간이 쓰고있는 시는 너무나 무기력할것이다. 하기에 바다를 마주한 시인은 커다란 외경심을 갖고   너의 앞에서 시인의 언어는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구나   하고 고백하고있다. 시 “파도의 언어”는 파도가 수수억년 다져온 우주의 력사를 “하늘의 언어”를 대신해 신비무궁한 시를 쓰고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깔끔한 형상의 옷을 입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시로,  우리의 내면에 머무는 시로 된다. 김학송시인은 북대하유람에서 수확이 적지  않았는바 파도에서 하늘의언어를 발견할뿐  아니라 나무에서도 하늘의 언어를 발견하고 제 멋에 취해 무등 즐거워 한다. 시인은 대자연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시어를 본다. 시인의 발견한 «나무의 언어에»는 온도가 있고 표정이 있고 바람의 매듭이 숨어있다. 더더욱 가관인것은 «나무의 언어»에는  희한하게도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이 고여있다”.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 세상에 이보다 더 예쁘고 더 숭엄하고 더 구슬프고 더 귀중한 눈물이 또 어디에 있으랴. “달빛으로 발효된 눈물 ”에는 너무나 많은 애틋한 사연이 깔려있고 너무나 많은 고운 비밀이 숨겨져있다. 그 사연,그 비밀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즐기는것이 곧 시읽기의 재미일것이다. 시 «나무의 언어»는 대자연의 언어에 찬사를 하는 한편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제스처를 보내고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고뇌거나 고통에 빠질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의 가치를 획득하고 생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 까닭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젊어있는” “나무의 언어”,“하늘의 언어»가 항시 인간세상과 대화하고있기때문이다. 바다는 언제나 고요하고 유순하고 얌전한것만은 아니다. 때론 “악마”로 둔갑하여 세상을 소란시키고 재앙을 낳는다. 시 «악마»는 폭풍우가 휘물아치는 바다를 묘사하고있다. 천길만길 솟구치며 표효하는 파도가 검은 상복을 입고 큰칼을 휘두르며 해변의 노래를 찍어넘기고 어선의 꿈을 베어버리며 사람과 선박을 닥치는대로 집어삼킨다. 시인은 거역할수 없는 대자연의  무서운 힘을 묘사하고있다. 이 시에서 눈박아볼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능청맞은 해학이다. 처참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악마»의 무서운 행패를 이야기 하다가  느닺없이 슬그머니 “드디어 계절을 놓쳐버린 /지각한 내 사랑도 삼켜버린다”를 끼워놓음으로써 팽팽하던 분위기를 역전시키며 순간에 해학미를 얻고있다. “드디어 계절을 놓쳐버린 /지각한 내 사랑도 삼켜버린다”라는 이 구절이 이 시를 산 시로 만드는데서 커다란 구실을 하고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싶다. 우에서 김학송의 기행조시에서 바다가 여러가지 이미지로 작동한다고 말했거니와 «바다일기»에 와서 바다는 또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바다일기»에서는 바다가 «우물»이 되기도 하고 바다의 변형으로 된 «시»가 하늘이 되기도 하고 «내»가 시의 품에 안기기도 한다.   마실수록 갈증나는 저 우물 시의 하늘속에 내가 안긴다 흘러가고 흘러오며 눈물짓는 바다여 “랑도사”에 목메여 너울치는 바다여 파도는 해변에   남겨진  무수한 발자국을 지우지만 지울수 없는건 시의  해살우에 남아있는 따사로운 령혼의 발자취로다   ㅡ«바다일기» 전문    바다는 거창함과 무궁함의 극치이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보다 더 커서 광활한 바다가 다만  “마실수록 갈증나는 저 우물”에 불과하다. 시인은 “시의 하늘속”에 안기고 싶어한다. “시의 하늘속”이란 인간과 우주의 모든것을 갖고있는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이다. 그 신비의 세계에서 영원히살고싶은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하기에 시인은 “시의 하늘속에 내가 안긴다”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의 포옹이며 인간과 시의 포옹이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짝짓기가 이루어져 아름다운 시가 태여난다. 이 시는  또 추억의 영원성 내지 시의 영원한  생명력도 제시되고있다. 파도가 해변가에 남겨진 무수한 발자국을 지울수 있지만 “시의 해살우에  남아있는/ 따사로운 령혼의 발자취만은 지울수 없다” 상상해보라. 해살우에 오렷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곱게 미소 짓고잇는 시의 모습을!  아름다운 시는 영원히 살아있다. «남대하»는 눈물을 감추고 속으로 울고있는 바다의 이야기를 묘사하고있다. 바다가 울고있는 까닭은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연들이 /머물다가 떠나”갔기때문이며 “옛 꿈을 철썩이던 돛배와 목선이” 호객하다가 지쳐서 잠들었기때문이며 “해물행상객의 조각난 흥정이/안타까운 바위로 굳어진 곳”이기때문이다. 아무튼 불만족스러운 기억들이 많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밤에도 바다는 /젖은 날개를 감추며 /울고있다” 시인은 «남대하»에 서러움에 젖은 옛 사연들이  많이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목격자인 «돛배”와 “목선”, “임자없는 바람”과 “달빛”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결국 종당엔 “남대하는 슬프다”라는 [판결]이 내려지게 된다. «북대하의 여름»은 아름다운 꿈을 보듬어주는 살틀한 애무와 세상을 따스하게 만드는 시의 울림으로 유표하다. «북대하의 여름»은 시원한 샘물이 되여 “물의 혀로 너럭암반에/만고의 시편 새기며//갈한 청춘들을 불러/현실의옷 벗게 하며//다심하고 살틀한 손으로/객손들의 마음의 비상 풀어주며//낮이면 사향가를 밤이면 자장가를푸른 목소리로 소근거리며//예고없이 피고 지는 물꽃처럼 땀에 젖은 중국의 무더위를 녹이며//북대하의 여름은 슬그니/우리 모두의 꿈속으로 걸어온다”  «북대하의 여름»을 읽노라면 유정하고 다정한 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김학송은 다산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5월 22일부터 5월30일,8일사이에  사이에 무려 23수의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수가 시의 기품을 갖춘 괜찮은 시들이다. 화두에 올린 8수의 시들은 기본상 살아 숨쉬는 시들이며 우리의 가슴에 머물며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들이다.  우리 시인들은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21세기의 문명적지각변동 앞에서 우리 시인들은 개인적자아의 탐색과 더불어 인류공동체의 운명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새로운 출구전략을 세우자면 겸허한 자기점검과 더불어 치렬한 자기갱신의 의지를 가다듬어야 할것이다. 그래야만 영원히 살아있는 시,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물수  있는 시를 창출해낼수 있을것이다.    
27    보수와 진보 댓글:  조회:1231  추천:2  2014-08-25
    김몽 우리들의 두뇌는  오래동안 보수는 다 나쁘고 진보는 다 좋다는 쪽으로 쇠뇌(洗脑)되여왔다. 즉 보수(保守)는 지금의것을  그대로 지켜나간다는 뜻으로, 진보(进步)는 현재를 부정하고 개조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만 리해하여왔으며  따라서  진보는 흔히 혁명으로, 그리고 보수는    낡은것을 고수한다는 수구( 守旧)와 같은 개념으로 인지하여왔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는 서로 상반되는 절대불변의 대립되는 개념인것은 아니다.  많은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보수와 진보는 변증법적법적관계를 를  갖고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재밌게도 보수가 때로는 진보로 될수 있고 진보가 때로는 보수로 될수도 있다. 이것들을 분별하고 가늠하는 자대가 바로  진리(真理)와 정의(正义)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쪽이  인류에게 리롭고 사회발전에 리로운가 하는것이 판단의 표준이다.  진리와 정의를 고수하려는 보수는 옳은 보수가 될것이고 그런 보수를 반대하고 다른 무엇을 추구하는 진보라면 그것은 그릇된 진보일것이다.  보수를 다른 표현으로 우파라고 말하기도 하고 진보를 좌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프랑스대혁명시기에 열렸던  프랑스국회회의에서 유래된것이다.  이 회의에서 왼쪽에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공화당파가 앉았고 오른쪽에는 왕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저 하는 왕당파가 앉았다. 이렇게 급진적이고 개량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파들이 왼쪽에 앉았기때문에 좌파라고 부르고 점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파들은 오른쪽에 앉았기때문에 우파라고 부르게 되였다. 오래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수를 낡은것만 고집하는 수구파라고 인정하여왔는데 사실은 완전히 그런것만은 아니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집권당의 상황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성질이 달라지게 된다. 보수와 진보는 진리와 정의라는 전제하에서 판단해야지 단순히 개념 자체를 가지고 판단하면 오류의 기로에 들어서게 된다. 보수에도 옳은 보수가 있고 그른 보수가 있고 진보에도 옳은 진보가 있고 그른 진보가 있다.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떠올려 보자. 손중산이 천창만공이 된 청정부를 뒤엎기 위해 일으킨 신해혁명이 중국의 력사를 바꾸어놓은 위대한 혁명이고 청사에 특기할만한 진보적행위였다면 낡고 썩어빠진 청왕조를 계속 보전하려고 날뛰였던 왕정파들의 행위는 력사의  질타를  받아야만 했던 보수적 행위였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국가의 주권과 령토완정을 수호하기 위해 벌린 5.4운동은 중국에서의 신민주주의혁명의 발단이였으며 위대한 진보행위였다. 반면에 5.4운동을 피비리게 진압한 당시의 군벌정권은 력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한심한 보수였다. 항일전쟁초기 소극항전, 적극반공을 한 국만당정부, 항전승리후 내전을 발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국민당정부의 모든 정책은 중국의 발전을 저애하는 보수였고 그에  맞선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을 광명에로 이끄는 진보였다.  중화인민공확국이 창건된후 중국공산당은 새 중국을 건설하는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걷우었는데 당시로서는 이런 로선을 지켜내고 견지하는것이 정확한 였고 새 중국을 뒤엎으려는 국민당반동파들의 적대적행위는 인것이 아니라  반동였고 반혁명이였다.  중국의 대약진과 인민공사, 특히 중국을 대 재난으로 몰고간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현대사와  모택동의 위대한 업적에 큰 허물로 남은 유감의 력사였고 중국의 발전을 퇴보시킨 력사에 보기 드믄 대비극이였으며 이런 비극을 극대화시키고 견지하고 실행한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은 천추에 용서못할 보수파들이였다. 그리고 대약진이나 인민공사나 문화대혁명을 반대한 팽덕회나 류소기, 등소평은 중국을 재앙에서 구해내려는 진보파였다. 오늘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화해롭고 조화로운 분위기속에서 중국의 거창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있으며 그결과 중국은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부상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있다.  때문에 13억중국인들은 오늘과 같은 정책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즉 현실을 하려고 한다. 만약 그 누가 라는 명분을 내걸고   개혁개방을 반대하고 조화로운 사회건설을 반대한다면 이런 는 가 아니라 의 탈을 쓴 퇴보이며 반혁명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 상충되는 개념은 가정, 직장, 집단, 공동체 안에서도 늘 존재할수 있다. 우에서도 간단히 말했지만 이럴 때  시비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하고  가장  간단한 자대가 정의와 진리이다.   
26    브라질월드컵을 말하다 댓글:  조회:2230  추천:1  2014-07-21
한달동안 온 지구를 뜨거운 도가니처럼 달구던 브라질월드컵이 마침내 아쉽게 막을 내렸다. 월드컵은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대축제이다. 정당도 종파도 리념도 뛰여넘는 월드컵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여 자기 나라팀의 응원에 열을 올린다.   월드컵은 하나의 큰 잔치이면서 또한 하나의 큰 초상이기도 하다. 이긴 팀은 기쁨의 눈믈을 흘리며 미친듯이 환호하고 진 팀은 애통함을 금치 못해 통곡한다. 허나 어찌하랴. 이런것이 바로 월드컵인것을. 모든 팀이 다 이길수는 없다. 무릇 이기는 팀이 있으며 지는 팀이 있기 마련이다. 승부를 두고 투혼을 다 하는 아짜아짜한 대결,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수만의 관중들, 그러다가 꼴이 들어가는 순간 폭풍처럼 터지는 환호성,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 토지는 절망의 신음소리, 거기다 심판의 오판을 비웃는 야유성, 비신자적인 파울을 하는 선수들에게 던지는 비난성, 여기에 바로 월드컵의 재미가 있다.     축구는 이미 겨루기의 의미를 넘어 한 나라의 이미지와 응집력을 과시하는 상징으로되였으며 때로는 진한 정치색채를 띠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지가 브라질월드컵에 진출한 16개국 국민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월드컵에서 지기를 원하는 국가를 묻는 질문에 한국은 당연히 일본을 꼽았고 일본도 서슴없이 한국이 지기를 원했다. 숙적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우 아르헨티나 관중들은 브라질이 다른 팀한테 지기를 바랐고 브라질 역시 아르헨티나가 상대팀한테 지기를 바랐다. 재미로 보는 축구가  때론 재앙을 불러오기도하고 때론 평화를 낳기도 한다.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월드컵 예선전 17일후 전쟁을 벌렸다. 엘살바도르와의 경기에서  온두라스가  지자 온두라스정부는 엘살바도르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이에 본노한 엘살바도르는 온드라스를 침공하였다. 그번 전쟁에서 4천여명이 죽었다. 이렇게 죽구가 전쟁을 발발시켰는가 하면 평화를 낳게도 하였다. 코트디부아르가 사상 최초로 얼드컵에 진출한 2006년 코트디부아르팀의 주장 디디에 드로그바가 텔레비에 나와 무릎을 꿇고 “우리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부디 일주일만이라도 전쟁을 멈머취달라”고 애원했다. 이듬해 정부군과 반군은 5년간 끌어오던 전쟁을 끝냈다.     브라질월드컵은 력사상 이변(异变)이 가장 많은 축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가장 잔혹한 축제, 악몽과도 같은 축제였다. 무적의 함대라고 불리우던 세계 링킹 1위 스페인이 조예선에서 참패를 당해 16강문턱을  넘지 못하는 수치를 당했고 유럽의 강팀으로 소문난 잉글랜드도 16강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말았다. 특히 축구종주국이라고 불리우던 영국이 16강에서 탈락하여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8강을 장담하던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이란과 호주도 16강에서 밀려나 아세아축구체면도 여지없이 구겨지고말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이변은 독일과 브라질팀의 격돌이였다. 브라질이 독일한테 1:7로 대패하여 온 세상을 경악케 했다. 브리질의 축구위신이 일락천장하는 순간, 믿기 어려운 참패에 수모와 분노를 참지 못한 브라질국민들이 대성통곡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브라질축구는  죽었다”고 소리쳤으며 분이 극도에 달한 브리질축구팬들이 대소동을 일으켜 4명이 숨지기까지 하였다. 독일은 24년만에 네번째우승을 함으로써 남미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유럽국가가 한번도 우승을 못했던 력사를 바꾸어놓았다.   이 기회를 빌어 월드컵의 력사를 간단히 거슬러 보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축구종주국이라고 부르고  영국인들도 이로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있다. 1848년에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현대축구가 첫발을 뗐고 1866년에 정식으로 축구규칙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문지기가 없다가 1871년에 문지기기 있게 되였다. 그후 영국의 축구가 스페인을 통해 유럽 각국에 전파되였고 축구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였다. 1904년에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스페인,  네들랜드, 스웨덴, 덴마크 등 7개국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처음으로 국제관리기구인 국제축구련맹   즉 피파(FIFA)를 산생시켰다. 오늘FIFA에 가담한 나라가 208개에 달한다.    그런데 사실 축구의 원뿌리를 캐보면 축구의 진정한 종주국은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일찍 기원전 2,700 여년전  황제시기에  소박한 축구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기원전 135년 한무제시기에 중국 장안에서 정식으로  축구가 있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축구는 게임을 통한 재미가 아니라 군사들의 체력증진을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였다. 공안에 땅땅한 물체를 다져넣어 무겁게 함으로써 군사들이 공을 차는 운동을 통해 하체의 힘을 힘을  증강하게 하였다. 장소는 네개의 벽이 있는 넓은 마당을 택하였는데 각각 12명으로 구성된 두팀이 승부를 겨루었다. 경기를 할 때마다 황제가 구경하였고 이긴 틈에 상을 주었다. 네개의 벽에다 먹으로  일정한 크기의 네모칸을 만들고 그 안에 공을 많이 차넣는 팀이 이겼다. 알고보면 축구는 동양철학의 발현이고 실천이였다. 옛 중국인들은 철학을 운동과 결합시키는 지혜를 갖고있었다. 둥근 공은 태양을 상징하고  네개의 벽면은 사계절을 의미하고 12명의 선수는 1열두달을 의미하였다. 말하자면 자연과 우주의 조화를 념두에 둔 철학적사고의 발상이였던것이다.  손을 쓰지 않고 발로만 하는 운동이였기에 족구(足球)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축구는 오늘의 축구처럼 구체적은 규칙은 없었다. 후에 축구가 중국에서 일반화, 광범화 되지 못하고 근근히 사대부들의 사치한 유희거리로 되다가 점차 중국땅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1848에 영국캠브리지대학에서 축구가 다시 산생하여 오늘의 세계인의 대축제인 월드컵으로 발전하였다.     우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중국이 분명 축구종주국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중국의 축구는 말이 아니다. 금년 브라질월드컵은 물론이려니와 력대의 월드컵에 중국팀은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13억인구가 월드컵경기장이 아니라 단지 안방에서 텔레비를 통해 남의 잔치를 함께 즐겨야 하는 신세니 참 한심하고도 하고   얼굴이 뜨겁기도 하다.   중국의 웅장하고 화려한 꿈에는 중국의 축구도 포함되여있다.  중국은 꼭 중국의 축구꿈을 실현하여 엉망으로 구겨진 축구종주국의 체면을 살려야 한다. 첫단계로 16강을 바라보아야 하고 점차 8강 ,4강을 노리고 최후에는 우승의 월계관을 탈취하여야 한다. 이런 야심을 현실로 만들자면 축구에 대한 전 사회의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탁구를 중시하듯 축구를 중시한다면 중국축구도 언젠가는 쨍 하고 해뜰 날이 있을것이다.   우선 독일처럼 어릴적부터 축구영재를 발견하고 잘 키워야 한다. 다음으로 축구에 대한 정부의 어수선한 관리가 정리되여야 한다.  중국의 축구부진은 정부에도 문제가 있고 감독에게도 문제가 있고 선수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온 사회가 축구를 관심하고 정부가 축구를 중시하고 감독과 선수들이 배가로 분발한다면 중국의 축구꿈은 실현될수도 있을것이다.   월드컵에서 중국구팀이 오성붉은기를 휘날리며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그런 날, 월드컵경기장에 중국국가가 우렁차게 울리는 그런 날, 그리고 최종적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하여 13억의 마음을  기쁨의  눈물로 흠뻑 적실 그런 날을 기대해본다. 해란강닷컴 2014-7-18
25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댓글:  조회:1433  추천:8  2014-06-27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               ㅡ김파의 디지털하이퍼시 경우                                           김몽   중구조선족시단에서 줄곧 시혁신과 시갱신에 몰두하여 온 시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중에 김파신인도 있다. 80년대중기부터 김파시인은 새로운 시탐구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물로 립체시론을 내놓기도 했다. 70이 넘은 오늘도 김파시인은 혈기왕성한 심신으로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줄기차게 달리고있으며 그 와중에 디지털하이퍼시를  만나 사귀게 된다.  요지음 한국에서 이백여수의 시로 묶은 디지털하이퍼시집을 펴낸다고  하니 그 왕성한 창작력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이번호 에 선보이는 10수의 시도 모두 디지털하이퍼시이다. 사실 김파시인은 이전에도 알게 모르게 사물시나 디지털시, 하이퍼시와 류사한 시들을 써왔다. 다만 리론적으로 정립이 되지 않았고 명확하게 지칭을 하지 않았을뿐이다. 이전에  비자각적으로 하이퍼시를 썼다면 얼마전부터는 하이퍼시의 리론을 접수하고 자각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와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국가들에서  하이퍼텍스트문학이 발걸음을 뗐고 그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10여년전부터 신상운, 문덕수, 최진연, 오진연 등에 의해 하이퍼문학열기가 일기 시작했고 중국조선족시단에서도 한국의 영향을 받아 금방 하이퍼시운동이 머리 들기 시작했다. 그 운동의 앞장에 김파,최룡관 등이 서있으며 김파는 창작에서 성과가 돌출한 시인중의 한사람에 속한다.   김파의 시세계를 들여다보자면 우선 얼마간이라도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를 전제로 하여야 할것 같다. 하이퍼의 영어 원뜻은 암소, 계집애, 젊은 녀자를 지칭하는데 거기에 시라는 말이 가첨되여 하이퍼시라는 신조어로 되면서 과도, 초월, 건너뜀,  최고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사로 둔갑하였다. 하이퍼시에서는 탈관념(무의미)을 선언하며 초월,건너뜀의 기법을 제창한다. 련과 련,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인과적관계가 없으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다. 한국에서 하이퍼시의 선두주자인 심상운은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나아가는것이 하이퍼시라고 했고 문덕수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관계를 결합하여 완성하는것이 하이퍼시라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의 고창자들은 하이퍼시의 배경이 첫째로는 탈구조주의와 포스터구조주의라고 보고있으며  둘째로는 21세기의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페러다임아라고  인정하고있다. 디지털은 0과  1로 이루어지는 이진법 론리를 사용해 0과 1의 각종 조합을 만든후 그것의 조작과 처리를 통해 여러기지 정보를 생산, 류통, 전달할수 있도록 하는데 아날로그가 련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나타내는 반면에 디지털은 비련속적이고 단속적이다. 하이퍼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이다 이 리론은 문덕수가 내놓은것으로 풀이하면 행과 행, 련과 련 사에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수의 시를 구성한다. 한마디로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련속적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특성이다.   다음으로 심상운에 의하면 하이퍼시는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인것이 아니라 다선구조라고 말한다. 최진연은 또 아예 뚜렷한 선이 없으므로 비선(非线)、무선(无线)구조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론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고있기때문에 련과 련, 행과 행을 바꿔놓아도 상관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정신적 통일성을 찾을수 없는것도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세번째특징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공간의 확장이다.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극대의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된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디지털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것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류사한 동적, 립체성특징을 갖는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사유의 사물이지만 다지털은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인 사유이다. 하이퍼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탈관념이다.  이것은 무의미하고도 통한다. 추상적관념이란 바로 사랑, 증오, 분노, 폭로, 비판, 찬양 등등인데 하이퍼시에서는 이런 관념을 배제하고 추방한다. 심상운은 “시인의 주관적생각 (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사실 자체에 그치면 탈관념”이라고 말하였다. «최지연, » 심상운의 하이퍼시 한수를 보자. “앉아있는 그녀를 한야 구름이 휩싸고/빨간 뻐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뻐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야 바다위를 달린다(후략)” 이 시를 보고 최지연은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시사(诗史)에서 처음”이라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에 대한 이와같은 소개를 전제로 김파시를 살펴볼수 있다. 10수의 시는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을 종횡무진하면서 다감각, 다정서, 의미지다층차구조로 의미망을 구축하고있으며 독자들에게 무변의 다공간속에서  다감각세계를  맛보게 해주려 하고있다.   «발자국» 은  각 시구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시스템속에서 상호보완적 생산기능을 한다.  ,
24    모천회귀(母川回归)ㅡ 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댓글:  조회:1326  추천:1  2014-06-24
 모천회귀(母川回归)ㅡ 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ㅡ 김학송의 최근시를 보면서                             김몽   김학송은 시인이다.    바야흐로 몸이 무르녹고있다. 살구꽃이 연분홍 미소를 흩날리고 민들레가 파란 노래를 부르고 종달새가 하늘가에 춘향(春香)을 수놓고 아지랑이가 요염한 자태로 만물을 현혹한다.  이런 유정한 봄날, 나는 지금 김학송의 최근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이야기속에서 향내가 묻어난다. 그것은 김학송의 시가 과연 시이며 김학송은 과연 시인이기때문이다. 시라고 하여 모두가 시인것은 아니며 시인이라는 패쪽을 달고있다고 하여 모두가 시인인것은 아니다. 시향이 묻어나는 시라야 시라고 할수 있으며 그러한 시다운  시를 써야 비로소 시인이라고 할수 있다. 김학송은 우리 시단에서 명망있는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의 숲에는 사람이 없다»,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를 미롯하여 무려 20여권의 시집을 산출하여 량적으로 가장 많은 시집을 펴낸 시인이며 «해외 동포상»,  «준마상 »등 굵직한 상을 받은 시인이며 많으 평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아온 시인이다.     황금찬은 “김학송의 시는 읽을수록 정이 가는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시세계가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생명을 절대시하고 우주를 시인의 가슴에 품어주는 높은 시상을 갖고있으며 고도의 상징적기법으로 조용히 구름이 장미를  빚듯이 빚어내고있다.”고 말했고 신동욱은 “평범한 체험속에서 근원적인 님을 탐구하는 감격적인 서정을 보여주었는바 시적감수력이 뛰여나며 서정시편의 질감높은 기량을 느꼈다. 상업주의가 넘치는 시대에 가치의 안정성과 정체성의 인식방식으로 님을 탐구하는 서정시인의 령혼이야말로 고귀한 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했고 임헌영은 “김학송의 시는 이제 연변의 울타리를 벗어나 한국의 독자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서게 된다. 그것은 주제와 소재의 기법에서 충분히 오늘의 한국시에 새로운 충격을 줄수 있기때문이다.”고 평가했다.  물론 평론가들의 말이 모든것을 결정하는것이 아니며  그것이 한 시인의 가치척도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평자들로부터 이만큼한 평가를 받는 시인이라면 적어도 자격이 있는 시인라는 점만은 부인할수 없다.   엎딘김에 절이라고 이 기회에 우리 시단을 살펴보면 중국조선족시단이라는 이 시동네에 시인협회에 가입하여 시인이라는 칭호를 달고다니는 사람이 몇백명이 되지만 진정으로 시인라고고 할만한 명실상부한 시인은 크게 잡아도 몇십명밖에 되지 않는다. 까딱하면 시인들한테   를 맞을 소리같지만 필자의 생각이 이러하니 를  맞더라도 할말은 해야겠다.  우리의 시동네에 말썽이 꽤나 많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시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앞에서는 사뭇 겸손한체 점잖은체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 흉보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문인상경( 文人相敬)의 풍조 대신 유감스럽게도 응당 멀리 하여야 할  문인상경(文人相轻)의 페단이 형성되고있다. 과연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나쁜 시일가.     필자는 이에 답으로 간단히 아래와 같이 분류를 해본다. 첫째,읽기 쉬우면서도 시인  시. 둘째,  읽기 쉬운데 시가 아닌 시  셋째, 읽기 어려운데 시인  시.  넷째. 읽기 어려우면서 시가 아닌 시.        손오공이 여불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듯 모든 시는 이 네가지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상술한 네가지 부류중에서 첫번째와 세번째가 쓰기가 가장 어렵고 두번째와 네번째가 쓰기가 가장 쉽다.  지금 우리에게는 첫번째 부류와 세번째 부류의 시들이 적고 반면에 두번째 부류와 네번째 부류의 시들이 많다. 너무 알기 쉬워 벌거벗은 시들이 적지 않고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시 같은 경우, 세계를 망각한 자의식이 잡음이 많고 너무 두터운 옷을 입어 아무리 하여도 그 속을 전혀 들여다 볼수 없는 시, 시인 자신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시이비한 시들이 적지 않다. 이런 시들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당한다.  미국의한 평론가는 “오늘의 시는 이민선의 3등선실에 탄 가난뱅이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도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닌것 같다. 시인의 가치하락에서 시인도 자유롭지 못한바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것이다. 시인이 자기 위상을 높이자면 오로지 좋은 시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   좋은 시가 되자면 알기 쉽든 알기 어렵든간에 결국엔 시 밑바닥에 삶에 도움이 되는, 또는  귀중한 어떤 계시를 주는 묵직한 철리가 웅크리고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다면 독자는 시를 외면할것이며 시는 독자가 없는 울타리안에서 저희들끼리 좋다고 떠들썩할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삶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을 시로 육화하는 작업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이며 현상의 배후에 있는 시대의 혈색과 호흡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의 유무를 묻는것이 시인의 옳바른 자세이며 이런 자세하에서만이 좋은 시가 탄생한다. 그리고 자격이 있는 시인이 되자면 타인의 마음에도 깃들줄 아는 존재로 되여야 한다. 세계, 내적존재로서의 세상 사람들의 체취를 끊임없이 자아화 함으로써, 그리하여 더더욱 자기 자신을 고양하거나 지양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이 움크게 하야야 한다. 삶과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릴줄 알 때만이 누구 아닌 바로 그 시인으로 영생할수 있다. 김소월이나 윤동주, 정지용 등을 비롯한 많은 명시인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시인으로 살아있는 까닭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주요하게는 다름아닌 그들의 시가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을 움크게 하는 힘”을 갖고있고 “삶과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릴줄 ”알기때문이다.   필자는 김학송을 알기 쉬운 표현으로 상당히  무거운 시를 쓰는 시인으로 보고있다.  최근의 그의 시들을 보면 대개  민족성에 뿌리를 내리고 인생과 세상을 깊이 있게 투사하고있으며 그 와중에 시의 무늬가 수놓아진다.   모색이  이우는 버드나무강변에서 한줄기 우환을 깔고앉아 로인은 퉁소를 분다 마을을 향해 한곡조 강물을 향하여 한곡조 배부른, 할일 없는 소들을 바라보며 또 한곡조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신나는 가락에 어깨를 들썩인다 로인은 분다 저무는 황혼의 비애를 분다 먼저간 이들이 채 못부른 노래 그리고 수천년 이 민족의 가슴에 자리잡은 깊은 한과 고독을 분다   ㅡ«퉁소와 로인» 전문   시를 읊어보면 힘든 낱말이 기본상 없다. 하지만 뇌리에 박혀드는  사연은 결코 적지 않다.  퉁소소리의 울림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안고있는 비희고락의 력사와 현재가 애환의 가락에 앉아 흔들거리며 춤을 추고있는 정경을 보게 된다. 퉁소의 주인인 은  우환을 반석처럼 깔고앉아 불고  과 를 불로 마지막에는 < 이 민족의 가슴에 자리잡은 깊은 한과 고독을 분다> 시적주인공인 은 민족의 대변이이자 민족의 혼이다. 시인이 노래하고있는것은 민족의 오늘과  수쳔년의 력사를 아우르는  민족의 아픔이다. 고뇌와 비애속에서 빚어지는 령혼의 직조( 织造)가 곧 살아서 퍼덕이는 혼의 울림, 시로 탄생하며 아울러 김학송은 시인으로 된다.     모천회귀 ㅡ혼으로 울리는 은은한 가락   김학송의 시를 보면서 문득 모천회귀를 떠올리는 까닭은 김학송의 시가 존재의 시원(始源)을 찾는 언어의 본능을 시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인의 인간적욕망으로 정화시키고있기때문이며 최후의 목적지 내지 정착지가 고향(어머니,민족)이기때문이다.  시원은 시인마다 제마끔 달라 모두에게 그 특유의 시원이 있다. 시원을 찾는 과정이 곧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어떤 시인들에게는 시원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 어떤 시인들에게는 대단히 고달프고  때론 비장하면서도 성스럽기도 하다. 诗자를 보면 말씀 言자와 절  寺자로 구성되여있다. 절(寺) 은 성당(圣堂)을 의미하며 석가모니, 하느님 등 지고무상의 성스러운 존재를 상징한다. 이렇듯 시란 성스러운 존재와의 대화(言)이므로  결국 시도 성스럽게 되니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움을 빚어내자면  구도자(求道者)와 같은  인내와 고뇌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을수 없다.     김학송의 많은 시들이  시원을 고향, 어머니 내지 민족의 뿌리에 두고있다. 연어는 태여난 강이나 하천으로 돌아가는 모천회귀본능( 母川回归本能)을 갖고있다. 강이나 하천에서 태여난 연어는 바다에 나가 성어가 된다. 성어가 된 9개월 뒤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여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란하고 최후를 마친다. 강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있어 치렬한 박투를 하면서 목슴을 내걸고 처절한 행군을 계속한다. 그만큼 고향이라는것은 무서울 정도의 마력적인 힘을 갖고있는것이다. 중국성구에 락엽귀근( 落叶归根)이라는 말과   토끼는 죽을 때 제굴에 가서 죽고 여우는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을 바라본다(兔走旧窟,狐死首丘)는 속담이 이 있다.   식물이나 짐승마저 고향에 대한 사랑이 이렇듯 사무치거늘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기에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고향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많으며 우리 조선족시단에도 고향을 쓴 시들이 수두룩하다. 고향은 흔히 민족이라는 개념과 동일시되여 쓰이는 경우가 많다. 김학송도 고향주제를 많이 다루고있는 시인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되 그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치렬할만큼 고향애착이 집요하다. 하기에 그의 시는 그만큼  민족정서, 고향정서, 노스탤지어정서가 농후하다. 이는 그의 의식적인 시추구에서 비롯된것이다. 시인의 고백이 그의 시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있다. “민족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나선 정신궤적을 두루 다루었다. 어디에서 살든 나는 조선족이다. 이것이 자랑스럽다. 다시 태여나도 나는 조선사람으로 살고싶다.” 김학송의 이러한 진실한 고백이 이번에 에 발표된 시들에서  명백히 드러나고있다. 고향과 민족에 뿌리 내린 그의 시의 정신을 완벽하게 알아보기 위해 먼저 최근에 발표한 시집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 중에서 한수를   골라본다.   바람이 희다 바람이 달다 바람이 맛있다 바람이 길다 바람이 둥글다 바람이 깊다    김치냄새가 난다 청국장냄새가 난다 막걸리냄새가 난다   바람이 삼배저고리 같다 바람이 행주치마 같다 바람이 두루마기 같다   바람이 퉁소를 분다 바람이 묵장구 틴다 바람이 가야금 탄다 바람이 둘래춤 추며 강강수월래를 부른다   옛성터에 부는 바람은 늙어도 늙지 않는 뿌리 깊은 바람이다   ㅡ«옛성터에서 5» 전문   이 시는 우리 민족에 대한 대찬가이다. 이 시의 내용의 깊이와 넓이에 앞서 우선 말짱 고유어로 된 시어가 주목된다. 전편시에 한자 한마디도 끼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는 민족어의 고유성과 지킴이라는 이 한가지에서도 큰 점수를  따고있다. 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을 통해 민족의 형상, 민족의 특징, 민족의 영원성,창창한 미래까지 현시한 시인의 자태가 돋보인다. 1련에서는 , ,로 우리 민족의  깨끗히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2련에서는 , , 로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단결심을, 3련에서는 , ,로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의 특색을, 4련에서는 , , 로 우리 민족의 복장특색을,   5련에서는 , , , 로 춤과노래를 즐기는 우리 민족의  기질을 노래부르고있으며 마지막 련에서는 “옛성터에 부는 바람은/늙어도 늙지 않는/뿌리 깊은 바람이다”고 하면서 민족의 영원한 창성과 번영발전을 기원하고있다. 한수의 짧은 시에 알기 쉬운 표현으로 민족의 모든것을 일목료연하게 다져놓고있는데 시 전편에 민족정서의 가락이 은은히 울리고있어 사뭇 정겹다. 11수의 시에서 고향애착이 가장 선명한것이 이다. 우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이 시는 고향의 령락과 피페에서 비롯된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과  이로부터 인기된 암울한 정서를 읊은것인데 범용한 서정시의 얼개를 뛰여넘고있다는데서 주목된다. 이미 우에서 간단히 언급했기에 구체적인 살핌을 하지 않는다. 모천회귀성은 모성회귀성과 통하고 모성회귀성은 또 고향회귀성과 민족회귀성으로 통하기도 한다. «어떤 귀향>이 그러한 경우이다.   16년전에 객지에서 떠돌던 사나이는 머리 허연 로인이 되였네 떠날 대는 호기롭게 검은 머리 흔들며 사라졌지만 병든 로구 간신히 이끌고 동구앞에 찬바라 휘몰고 나타난 모습은 그젯날의 그 사람이 아니라네 얼니 냇물에 절을 올리고  늙은 당수목에 머리를 조아려도 그때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고 이 모든걸 헤아려주는 향풍(乡风)만이 너른 품으로 해일처럼 무너지는 육신 안아주네   ㅡ«어떤 귀향» 전문  은 고향의 품일수도 있고 어머니의 품일수도 있고 민족의 품일수도 있다. 16년전에 건장한 몸으로 고향을 떠났던 사나이가  백발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 객지에 돈벌이를 나갔다가 망한것이 분명하다. 하기에 시인은 이라고 묘사한다. 또한 망함의 강도를 강조하기 위해 이라고 말한다. 떠돌이인생에서 망그러진 육체, 해일처럼 무너지는 육체, 하지만 향풍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모든걸 헤아려주는 향풍(乡风)은 한마디 원망도 꾸지람도 없이 그 을 따스하게 안아준다. 은 어머니의 품으로 볼수도 있고 고향의 품으로 볼수도 있고 민족공동체의 품으로 볼수도 있다. 연어가 알밴 배를 터트리려는 욕망에서 고행을 찾아가듯 시인 역시 생명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시의 근원을 탐색한다. 결국 시인은 가장 믿을만 하고 가장 너그럽고 가장 따사로운 곳이 고향이라는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시 에 이르러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고향에는 가장 순정한 향음(乡音)이 있고 가장 편한 휴식이 있다 고향에는 가장 따스한 온기가 있고 가장 애절한 눈물이 있다 고향에는 늙을수록 아름다운 인생이 있고 부를수록 새로운 노래가 있다 고향에는 나의 실패마저 안아주는 손길과 나의 흠결마저 곱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다   ㅡ«고향에는» 전문   이 시는 «어떤 귀향»에 비해 울리는 빛갈이 맑고 흔들리는 가락이 따사롭다. 세상(고향)과 만나는 시인의 력사인식은 유충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완전변태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에 푹 젖어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그런 인식이다. 김학송은 도시에 오기전의 도문의 한 시골에서 흙냄새와 소동냄새를 맡으며 농촌과 인연을 맺었다. 아마도 그러한 삶의 력사가 시인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발효되여있다가 저도몰래 시라는 젖으로 흘러나오은것 같다. 시인의 고향은   모든 소중한것들이 다  있는 유정한 보금자리이며  어머니의 다스한 품이다. 거기에는 , , , , , 심지어  . 고향은 아름다움이고 인정이고 따스함이고  노래이고 춤이고 사랑이고 너그러움이이다. 모천회귀로서의 김학송의 시는 고향을 찬미하는 맑진 목소리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울림이 회색적인데 그것은 민족의 우환의식에서 비롯된것이다. 에서도 그러한 침울한 숨결이 들린다. 개혁개방후 국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연해지구로 해외로 돈벌이 나갔다. 그 와중에  돈은 벌었지만 많은 페단과 비극도 초래되였다. 떠나고싶어 떠난것이 아니고 보내고싶어 보낸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 핍박에 못이겨 떠나고 보낸것이다.   기차는 산해관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기차의 속도로 달리는 마음은 뒤켠에 고향을 부려놓고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간다 친지들의 부름소리가 따라오지만 앞개울을 넘지 못하고 산에 막혀 돌아간다 깊이를 알수 없는 호수가 나그네의 꿈을 삼켜버리고 가도가도 생소한 풍경만이 구름너머에 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갈것들이 다 가버린 부락에선 올것들이 오지 못해 울고있다   ㅡ«나그네는 구름 되여» 전문   살아 생생한, 오늘의 조선족  농촌마을의 축도가 아닐가. 언제부턴가 연길역전과 연길공황은 눈물과 웃음으로 반죽된 조선족들의 리별과 만남의 현장으로 되여버렸다. 우의 시는 그 현장속에서 눈물쪽에 렌즈를 돌리고있다.  시에 등장하는 나그네는  돈이라는 꿈을 위해 에 뛰여든다. 떠나가는 나그네의 등뒤에서  “친지들의 부름소리가 따라오지만/앞개울을 넘지 못하고 산에 막혀 돌아온다”. 은 떠남을 유발한,  떠나지 않으면 아니될 , 떠남을 핍박하는 현실상항이다. 즉 가난에서 탈출하려는,물질적욕구를 만족하려는 갈증이다. 하여 을 넘어 뛰여든 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결국 “갈것들이 다 가버린 동네에서/올것들이 오지 못해 울고있다” «정거장소나무»는 고향의 스산함과 쓸슬함을 고독과 외로움의 무늬로 수놓고있는 시다. 은 현실부재로서의 고향이고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고향의 혼이며 은 고향의 혼을 달래주는 민족의 혼이다. 이 시는 고향은 사라진것 같지만 결국은 미구에 재생할것이며 영원히 소실되지 않을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있다. 그 리유는 장수를 의미하는 가 고향을 지키고있기때문이며 민족의 얼인 이 때문이다. 우리는 를 민족의 자긍과 민족의 정기를 일깨워주고 불어놓어준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 김학송은 때론 다른 방식으로, 시골을 신비화 하는 방식으로 고향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표현하기도 한다. 에서 시인은 사고 , 산다고 말하며 있기때문에 수천년동안 향촌의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왔다고 말한다. 는 것은 가능하게 민족을 민족으로 남게 하는 모든 귀중한것들을 지칭하는것이라고 보아진다. 하기에 시인은 시골의 달빛마저도 사랑스럽고 귀중하여 고 독백한다. 참 정답고 재미있는 시구다. 김학송은 고향과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기때문에 민족이 민족으로 남지 못하고 동화될까바 걱정하기도 한다. 가 그러하다. 민족의 동화를예방하고 민족성을 고수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가상하나 표현이 직설적이여서 재미가 슬하다. 필자는 이 시를 라고 본다. 그래도 건질만한 시구가  하나 있다. 총체적으로 모천회귀과정에서 은은한 령혼의 가락으로 울리고 있는 김학송의 시는 고향과 민족의 뿌리에 파고들어 민족의 혈색과 호흡에 대해 사명감 높은 투시와  천착을 하고있으며 민족의 체취를 자아화하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신성한 기운을 움트게 하며 삶의 깊이와 넓이를 진정으로 헤아리려고 하고있다. 김학송시인이 이후에도 더 시인다운 시인이 되여 더 시다운 시를 쓰기를 기대해본다.   2014년 연길에서 씀    
23    «동양평화론»의 선구자 ㅡ 안중근 댓글:  조회:2222  추천:1  2014-04-14
금년은 안중근(安重根)의사 순국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의사는 비단 불굴의  반침략투사일뿐만아니라 동방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제주의전사이기도 하다. 그가 순국한후 한국인뿐만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도 그의 장거를 칭송하고 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였다. 중국인들은 안중근의사를 자기들의 친밀한 벗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손중산과 주은래 , 우우임(宇佑任) 등이 안중근의사의 영웅적거사를 높이 칭송하였고 심지어 원세개마저도 안중근의사가 순국하자 《동방의 영웅호걸》이라는 제사를 써서 안중근을  추모하였다.   오늘까지도 중국인민들은 인중근의사를 잊지 않고있다. 중국정부는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년을 맞으면서 할빈에다 안중근의사기념비를 세웠다. 자기의 유골을 할빈에 묻어달라는것이 안중근의 유언인데 그 유언을 다름아닌 중국정부가 풀어준것이다. 비록 유골을 찾지 못해 안치하지 못했지만 기념관이 섰으니 구천에 있는 안중근의사도 만족의 미소를 띄울것이며 중국정부에 감사를 드릴것이다. 지난3월 2일, 네델란드(荷兰)의 국제회의때 박근혜대통령은 습근평주석에게 중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워준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시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설립은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발전시키는데서 하나의 디딤돌로 될것이다.   헌데 최근 일본의 외부장관이라는 자가 중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운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안중근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모독하여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침략자에겐 진실이나 정의나 원칙이라는것이 근본상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어불성설인 궤변밖에 없다. 104년전 안중근의사를 사형에 언도할 때도 일본법원은 안중근을 “테러분자”라고 판결을 내렸었는데 오늘 일본정부가 자기네들의 침략조상이 한 말을 곱씹으면서 또다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모독하고있는것이다.   갑오중일전쟁이 일어난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아시아는 동란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필요한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다. 이렇다고 보면 104년전에 처음으로 내놓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 구상은  금후 동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고 동아시아지역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서 중요한 참고가치를 갖고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의 의병참모중장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일본 총리 겸 조선총독부 총감인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였다. 이또 히로부미는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침략을 획책한 악명높은 침략자로서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의 공동의 원쑤였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는 려순의 일본관동도독부감옥에서 3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을 당할 때마다 자신은 테러분자가 아니라 의병중장의 신분으로 정정당당하게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법원은 테러죄로 판결을 내리고 교수형을 내렸다. 안중근의사는  자기가 평생 생각해왔던《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고 사형집행연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말았다. 안중근의사는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구상은 선언, 전감( 前鍳),현상(现状),복선(伏线),문답(问答) 등 5개 부분이였지만 애석하게도 선언과 전감의 일부분밖에 쓰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하고말았다. 가령 《동양평화론》이 제대로 완성되였더라면 력사는 안중근에 대해 더욱 무게있고 찬란한 평가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동양평화론》이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상당히 완정한 동양평화구상을 담고있다. 내용을 귀납하면 아래와 같다.   1. 일본은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을 정지하여야 한다. 2. 일본은 일로전쟁에서 불합리하게 차지한 대련과 려순을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 3. 중국 려순에서 회의를 열고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한 방책을 토론하여야 한다. 4. 려순에 큰 은행을 세우고 중.일.한이 공동으로 사용할수 있는 화페를 발행하여야 한다. 5. 중.일,한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军团)을 조직하고 려순항을 동양의 평화근거지로 되게 하여야 한다.   사형을 앞두고 쓴 《동양평화론》, 지금 읽어봐도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얼마나 동양을 사랑했으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했으면 사형을 눈앞에 둔 사람이 《동양평화론》을 썼겠는가. 실로 고금에 보기 드믄 평화의 수호신이라고 할만하다.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유지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도모하는데 중요한 참고가치를 제공하기에  더더욱 소중하다. 《동양평화론》을 보면서 우리는 서유럽의 《슈만계획》을 떠올리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5년후인 1950년에 프랑스의 외교부장 라벨 슈만은 적대국이였던 독일과 손잡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내놓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중요한 석탄, 강철기지를 바탕으로 서유럽 각국의 석탄, 강철 공업부문과 련합하여 초국가적인 련합경영기구를 건립하고 각국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소문난 《슈만계획》이다. 이 계획은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갖고있던 미국과 쏘련에 대응하여 안정하고 강대한 유럽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출발한것이였다. 이 계획은 서유럽 각국의 호응을 받아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강철련합경영》이라는 이름으로 기초되였다가 다시 《슈만계획》으로 작성되였다. 그것이 후에 유럽련맹으로 발전, 장대해졌고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지금 유럽련맹은 전지구화(地球化) 정도와 구역화(区域化) 정도에서 세계의 앞장에 서고있다. 련맹국가지간에 아무런 규제가 없이 제집처럼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같은 화페를 사용하고있다. 유럽련맹은 이렇게 하면서 화목하고 함께 발전하고 함께 번영하는 리상적인 사회를 구축해가고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지구와와 구역화 정도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고있다. 인원, 물자, 화페의 교류에서 오히려 동아시아구역 외의 국가들의 관계가 동아시아국가들의 관계를 초월하고있다. 비자만 보더라도 일본과 한국은 동아시아 외의 허다한 국가들에게는 무비자 입국을 허락하지만 유독 이웃인 중국에 대해서만은 까다롭고 엄격한 비자심사제도를 실시하고있다.   더욱 근년에 들어와서 일본과 한국, 중국과 일본지간에 령토분쟁으로 모순과 갈등이 나날이 불거지고있다.   이런 악화된 상황에서 절실히 필요한것이 《슈만계획》과 같은 조치이다. 최근에 료녕대학 력사학원 교수이며 료녕대학 동아시아관계연구센터 주임인 권혁수( 权赫秀)가 아래와 같은 구상을 내놓았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104년전에 내놓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에도 커다란 의의를 갖고있는바 그의 정신을 이어 보다 건강하고 평화롭고 발전된 동아시아를 구축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 로, 한, 일은 력사연원(历史缘源)을 갖고있다. 동아시아론단과 동아시아평화기금을 설립하고 동아시아 평화와 합작에 관계되는 각종 연구사업을 지원하며 노벨평화상과 류사한 의의를 갖는 동아시아평화상을 건립한다. 또한 초국가적인 성격의 동아시아평화발전은행을 세우며 이로써 동아시아 각국의 인원, 물자, 화페교류 등 각항 사업과 공정을 지지하고 추진한다.   훌륭하고 리상적인 구상이라고 할만하다. 이렇게만 된다면 동아시아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 강대한 동아시아시대를 안아오게 될것이다. 물론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축에서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나라가 일본이다. 왜냐하면 력사적으로 보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혼란과 불안과 위협을 초래한 주요한  장본인이였기때문이다.   104년전에 안중근의사가 바랐던 《동양평화론》 구상이 21세기의 동아시아식의 《슈만계획》으로 되고 그것이 현실로 된다면 동아시아는 모든 갈등과 모순을 해소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강한 동아시아로 탈바꿈할것이다. 그리고 진정 이렇게만 된다면 하늘에 계신 안중근의사께서도 행복의 미소를 지을것이다. 해란강닷컴  
22    날조와 궤변의 능수 아베 댓글:  조회:1577  추천:0  2014-03-13
최근 들어 아세아의 정국이 아주 불안정한데 캐고보면 주요원인이 일본정부, 특히는 일본총리인 아베때문이다. 미끄라지 한마리가 온 웅뎅이물을 흐리운다는 말이 있다. 아베야말로 아세아라는 평화의 호수를 흐리우는 명실상부한 한마리 미끄라지가 아닌가  싶다. 아베는 집정이후 갖은 파렴치한 망언을 쏟아부으면서 력사에 보기 드믄 추태극을 연출하여왔다. 위안부문제,  남경대학살문제, 한국의 독도와 중국의 조이도(센카이코) 문제 등에서 한번도 진실을 말한적이 없고 모두 흑백이 뒤섞인 궤변투성이 말을 하여 세상의 인심을 잃고 배척을 당하고있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외로운 신세가 된 이베가  사면초가에 빠진  궁상을 얼마간이라도 만회하려고 중국, 한국과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만 력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지 않는한   두 나라는 일본과 대화를 하지 않을것이다. 최근에 아베는 또 “침략전쟁에 대한 그 어떤 정의도 없다”는 괴상하고도 무지한 망언을 하여 세인을 경악케 하고 분노케 하였다. 아베의 뜻인즉 일본이 지난날 아세아 각국을 침략한것이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세아의 안녕과 평화와 공영(共荣)을 위한 미행(美行)이였다는것이다. 그야말로 소 웃다가 꾸레가 터질 노릇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수  없는 괴담인즉 필자는 아베를 이라고 부른다.  사실 아베의 궤변은 그의 발명품이 아니라 어제날의 일본군국주의의 미친 소리를 그대로 옮긴데 불과하다. 아베의 조부되는  사람이 일본 군국주의의 두목의 한 사람이였으니 그럴법도 할만하다.   82년전,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의 동북을 점령하고  괴뢰 을 세운후 일본은 자기네들의 행위가 동방의 안전을 위협하는 서방국가들의 침입을 막고 아세아의 안녕과 번영, 공영을 위한것이였다고 하면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였켰다.  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로씨야가 만주를 침략한것은 바로  동방을  침략한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백색인종이  유색인종을  괄시한것이다. 동방은 반드시 동방인의 동방으로 되여야 한다. 일본,조선, 만주, 중국은 반드시 공존공영하는 국가군체로 되여야 한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영국을 포함해 그 어떤 서방국가도 동방에 대해 부당한 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 오직 동방의 맹주인  일본만이 동방 각 민족의 안녕과 행복을 지키는 위대한 사명을  갖고있다.”( 제3페지) 보다싶히 일본은 아세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아세아의 안녕고 행복을 지키는 미행이라고 나발불고있으며 그 을 오직 그들만이 할수 있다고  미친 소리를 하고있다. 후에 이른바 그 이 수천만의 아세아인을 학살하는 만행으로 되였다는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바이다. 그런데 80여년이 지난 오늘 아베가 또 옛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미친 넉두리를 그래로 외쳐대고있다. 그 의도는 너무나 명백하다. 군국주의 부활을  시도해보겠다는것이다. 그제날 일본은 아세아에 대한 지배와 통치를 꿈 꾸며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가 처참하게 패망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마땅히 심각한 교훈을 섭취하고 자신을 침통하게 뉘우치고 바른 길로 가야 할텐데 도리여 더욱 창궐하게 군국주의라는  비틀린 외길을 가려고 고집하고 있으니 실로 미욱하기를 그지없다 하겠다. 요지음 일본이 요란스레 집단자위권을 부르짖는것도 실상은 보통국가의 신분으로 타국에 군대를 파병알수 있는 명목을 갖추겠다는 것으로서  속셈은 역시 군국주의 부활에 있다.  아베정부가  아무리 군국주의 미몽을 실현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친자의 망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아세아는 그 옛날의 연약하고 무능하고 락후하던 아세아가 아니기때문이다. 특히 어제날 아세아의 로 업신받았던 중국이 오늘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우뚝 솟아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기 어려운 무서운 존재로 부상하고있다.  아베와 그 정부는 정세를 직시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날조와 궤변을 멈추어야 한다. 며칠전에  한국의KBS에서 “반성 없는 아베, 거꾸로 가는 일본 ”이라는 테마로 시사단평을 했는대 아주 지당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반성하고 참회하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고 바른 길로 간다면 지난날이야 어쨌든간에 세계가 량해하여 줄것이다.     한달전인가 이스라엘정부가 독일청리 메리켈에게 칭호를 수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세인이 다 알지만 2차세계대전때 독일 파시스트는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여 천인공노할 큰 죄를 지었으며 이로하여 독일은 유태인들의 철천지원쑤가 되였다. 그런데 독일의 총리가 유태인 나라의  으로 된것이다. 까닭은 독일의 진심으로 되는 허심한 반성과 사과에 있다.   전쟁이 끝난후  독일은 자기들의 저지를 죄를 뼈아프게 뉘우치고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지난날 독일한테 피해를 입은 모든 나라들에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독일이 명지한 선택을 하였기에 세인의 량해와 용서를 받게 되였던것이다.  지금 독일의 피해를 입은 나라들중에서 독일을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정부가 원쑤의 나라 총리에게 < 영예시민>의 칭호를 주었겠는가. 그런데 일본은 오늘까지도 자기들의 침략행위를 승인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죄를 승인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반성과 사과는 더구나 하려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모든 죄악을 날조와 궤변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아배아 아베정부는  독일을  본보기로 하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파렴치하고 몰지각적인 행위를 걷어들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서야 한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허심하고 죄를 뉘우치고 진심오로 반성하고 사과하여야 한다.  오직 이 길만이 일본이 지구촌에서 마음놓고 살아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1    우리 시단의 怪事,奇事,庆事 댓글:  조회:1786  추천:2  2014-03-06
우리 시단의 怪事,奇事 ,庆事    박운호의 시집를 두고   창의성과 초월성으로 살펴보는 우리 시단의 그라프   시인 박운호가 2000년1월에 첫시집 을 내놓은지 꼭 10년만에 두번째시집 를 내놓았다. 이 시집은  오래간만에 우리 조선족시단에 던진 어벌큰 도전장으로 주목된다. 시집의 표제를 풀이하면 죽었던 혼이 환생하여 꿈에서 본 일들을 적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꿈에서 한번 죽은후 이 세상의 희노애락과  시시비비,진진허허를 자세히 관찰하고 드디어 깨도의 대문을 노크한다. 시인은 꿈꾸는 동안  육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수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인생감오와 시적감오를 얻으며 종당엔 홍진세계의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고 나름대로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 의 탄생은 우리들에게  우리  시단의 모습을 새로이 성찰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는 오래동안 고요하고 잠잠하던 우리 시단에 충격을 준 례사롭지 않는 시집이기때문이다. 우리 시단은 해방후 몇차례의 진통과 탈피의 행로를 밟으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사실 알고보면 중국조선족시단은 시의 혁신과 창의성, 혁명성에서  전통이 있다. 일찍 일제시기 만주에  만주조선인 문학이라는것이  있었다.   1936년7월 부터 8월 사이에   리상이 에 라는 쉐르일리즘 시를 련재하여  한때 큰 센세인숀을 일으켰다. 리상의 오감도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 파격적인 이단으로 문단의 공격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상은 전위적인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허나 현실보다 너무 앞선 이상의 시는 반역으로 이단으로 몰려 9호까지 내고 발표를 단념할수밖에 없었다. 리상의 영향을 받아 당시  시현실동인으로 활약하던 함형수, 이수성,김북원 신동철 등이 1939년과 1940년도에 에 ,,, 등 파격적인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시들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의 조선족시의 첫 혁명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1945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조선족시단에는 력사의 원인으로 하여 이렇다고 할만한 새로운 시혁신운동이 없이 줄곧 사회주의사실주의시가 통치적지위에 있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의 훈풍이 불어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도 시가혁명의 기회가 오게 되었다. 1980년대초에 한춘시인이 현대파시의 기치를 추켜들었고 거기에 호응하여 김정호가 상징주의 시 을 발표화여 40년간 잠자던 시단에 한차례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어 시혁명 비슷한 창작이 이어가기 시작하여 90년대초에 김혁이 22수를 실험하였고  조광명이 불교시를 선보였으며 김파가 립체시를 들고 나오고 최룡관이 이미지시론을 들고 나오고 남영전이 1980년대 중기부터 토템시의 기치를  추켜들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새로운 리론 창조가 아니라 서방기성리론에 대한 선양작업과 답습에 그치고말았다. 오래동안 사실주의시만 보아오던 그들이 갑자기 어느날 서방현대리론을 접촉하게 되자 마치도 콜롬보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를때처럼  격동하고 흥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콜롬보스가 지브랄타르해협의 한섬에 도착했을 때 그 섬에는  “세상은 여기에서 끝난다”는 패말이 꽃혀있었는데 콜롬보스는 그 패말을 뽑아버리고 대신 “세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패쪽을 세웠다. 우리의 대다수 실험시들은 콜롬보스와 같은 전위성, 창조성, 모험성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다만 “세상은 여기서 끝난다”는 패말앞에서 흥분하는데 그치고말았다. 그것을 본것만 해도 너무나 경의롭고 신선했던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시혁명은 서방현대문학리론이 이미 만들어놓은 기성품을 선양하고 옯겨오는   작업, 그것에 다름아니였다. 그러나 설령 이렇다 할지라도 우리문학사에 남겨놓는 공적은  거대하다. 가령 그들의 시혁신운동이 없었더라면  침체되고 고갈되고 진부하던 시단에 활역소가 생길수 없었을것이며 다원화창작과 백화반발의 경상이 나타날수 없었을것이며  시의 개성이나 시의  질의 향상 등을 운운할수 없었을것이다. 오늘 우리 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있는데 이는 모두 시혁신운동과 시혁명운동의 결과물이다. 이들 혁신파들중에서 가장 떳떳하게 나의것으로 인정받은 것이 남영전의 토템시이다. 남영전은 조선족시단은 물론 전 중국시단에서 처음으로 토템시리론을 제기하고 체계화하고 완선화시킨 시인이다. 그는 또 자기의 리론을 립증하는 54수의 토테시를 중문으로 창작하여  전반 중국시단을 놀래웠으며 이른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문화현상을 만들어내게 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시단의 분위기가 오래동안 잠잠하다가 박운호의 출현으로 다시금 새로운 화제거라가 생겨나게 되였다. 즉 가로세로보기 시가 탄생하여 물의을 일으키고있다.   인생은가고오고 생활은고독만이 은은히 오다담는 가고오는해식고 고독다해뜸뜸해 오만담식뜸들인 고이는 고해인가     ㅡ«만가»(시인과 성녀와 대화 )   위의 시는 가로 읽으나 새로 읽으나 똑 같다. 첫행 첫글자에서 시작하여 가로 읽으면 로 되고 첫행 첫글자로부터 내리 읽어도   인 생 은 가 고 오 고   로 된다. 두번째 행에서 첫글자로부터 가로 읽으면 < 생활은고독만이 >로 되고 내리 읽어도   생 활 은 고 독 만 이     로 된다. 모든것이 이와 같다. 마방진에서 가로 보나 세로 보나 똑같은 것과 같은 도리이다. 지금 박운호의 가로세로 시읽기를 두고  우리 조선족문단에 시비가 엇갈리는 찬반의 론조가 있는것 같은데 무척 좋는 현상이라고 보아진다. 박운호시인이 만들고있는것은 루빅큐브식시로서 그 발상이 기상천외이고 아주 어벌이 크고 모험적인 창작이라고 할수 있다.  루빅큐브식은 일명 마방진(魔方陈) 혹은 (魔方)마방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은 영어의 magicspuare에서 온것이다. 마방진의 형식은 1에서 n2까지 정수를 n형 n렬의 정사각형모양으로 라렬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전부 같아지도록 한것이다. 박운호시인이   우리의 훈민정음을 가지고 립체적인 마방을 고안해냈다는것이야말로 실로 칭찬을 받을만한 장거라고 할만하다. 우리 민족언어는 자모결합의 문자로서 한자처럼 글자 하나가 나하 내지 몇개의 뜻을 안고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 상형문자이고 뜻글자인 한자를 리용하여 마방진시를 만들기는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기타 게르만어, 라틴어,슬바브어, 아랍어 등 자모문자를 가지고 루빅큐브식시를 쓴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일이다.  우리 글도 자모음절결함의 문자이지만 천,지,인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우리글의 우수성으로 하여 마방진시가 가능하다. 오늘 박운호시인이 그 가능성을 가능성이 아닌 현실로 바꾸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초월의식이요 전위의식이요, 창조의식이다.  박운호시인은 사각형의 소우주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념주를 세고 좌선(坐禪)을 하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나름대로의 인생감오를 읊조리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글자유희가 아니고 수련을 동반한 고행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말하자면 단순히 가로세로 글을 읽는 무의미한 놀이가 아니라 철리와 사색을 전제로   시혁신과 시혁명을 꾀하고있다. 박운호의 시가 이제껏 창출된  조선족의 시 중에서 동양적숨결이 가장 다분하다는것도 특징의 하나라 되고있다.   2.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거듭나기    는 , ,,, , 등 모두 6개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이들중에서 시적으로 가장 성공하고있는 부분은 와 과 이며 시혁신에서 크게 괄목하만한것은 이다. 와 ,는 개성이 뚜렷하고 심오하고 철리적이고 함축성이 다분하다. 그외 민족의 우환의식을 다룬 와 시조를 다룬 은 어딘가 평범무의한 인상을 준다.  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과 설음이 진하게 내비치고있으나 어지간히 시재가 있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수 있는 그런 시들로서 여지껏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시들을 릉가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시조인  은 현대판  이라고 할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친구의 도리, 삶의 참자세 등을 주로 쓰고있는데 인생에 주는 계시가 적지 않다. 헌데 형식탐구에서 새로운 노림이 없어 아쉽다. 모든 시조가 단순하고 단일한 평시조의 옷을 입고 있어 신선한 맛이 나지 않는다. 좀 파격적인 형식으로  현대시조를 썼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그런 연유로 이 글에서 시조도 살핌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는 와 ,   중에서 일부 시들을 선택하여   옅은 소견을 피력코저 한다. 박운호의 시들을 일별하면 담담한 어조속에  고행의 흔적이 력력하며 그리고 그 고행은 인생에 대한 성찰과 거듭나기로 일관되여있다. 시인은 크게 떠들지 않으면서 세상을 말하고 자신을 말한다. 는 시인이 이 세상을 랭철하게 관조하고 그 느낌을 쓴것이다.  인간의 거듭나기는 고통없이는 불가능하다. 시인은 거듭나기 위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한다.   꿈속 떠돌던 마을어귀 숨죽은듯 고요한 내 무덤앞에는 자그마한 반듯한 비돌이 나지막히 세워져있었다 묵묵히 장사를 치르고 망종을 하면서 굳이 사람 사는 내막을 조금씩알게 되였다 …….. 사람은 한번 죽어보아야 사는 진상이 어렴풋이 짚이였다   ㅡ -   한다는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성찰이며 는것이 바로 거듭나기의 시작이다. 그러되 박운호의 시들은 기본상 불교를 핵심으로 동양사상에 뿌리내리고있다. “동양사상은 가치를 외부에 두지 않는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인간을 배타적인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나 장(場)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로서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있다.”(신영복,[강의] 54쪽) 박운호의 시들은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자신을 수련하고있다.   하늘을 우러르면서 하늘을 속이고 다소나마 알듯하면 부모를 속이고 나름대로 저도몰래 친구를 속이고 괜한걸 가지고 부부간에 속이고 아래도 속이고 우로 속이고   『하계단상』일부   한번 저승에 갔다가 인간세상에 돌아온 후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세상의 한 모퉁이이다. 속임과 속히움이 반복되는 인간세상, 이런 나쁜 근성을 고칠 처방은 없을가. “어쩌면 속아사는게 더 편할수도 있지 않는가/더러는 모르는것이 오히려 부처니까 말이다” 이것이 처방이다. 다음 시인은 의 병인을 밝힌다. “모든 음페된 절차속에는  질서가 있었고/모든 엄연한 사실은 감추어진 결과이다” 음페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감추어진 사실을 까밝아놓는것이 세상을 강건하게하는 방법이다. 시인은 이 세상의 온갖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있다.   지금 세상은 미상불 등불이 휘황하여 밤도 낮같아 가까스로 신변엔 모든것이 마법같은존재 까닭모를 징조는  떠도는 스캔들뿐 고조된 변형, 고조된 갈등 고조된 고민 고조된 불양   『스캔들』일부분    이 세상을 직시하면 수많은 추문들이 란무한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그 안에서 갖가지 추문들이 활보한다. 시인은 마법과 같은 스캔들이 살판치는 현실을 두고 서글프게 넉두리한다. “등불은 지금 고조로 난연하고/덩덩한 이 밤은 저조로 짙어간다”     시인은  인성의 자유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고있다. 시인은 제 나름대로 제 생긴대로 자유롭게 사는것도 재미라는것을 발견한다. 기지와 해학성분이 약간 가미된 『재미있는 세상』은  철리성이 다분하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장자의 『변무(辯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장자는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것이 자연이며 자유이며 도의세계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세상』은 장자의 사상이 어지간히 녹아있는듯 하다. 시인은 『재미있는 세상』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내가 재미있다고 남이 재미있는것은 아니다      내 재미로 남의 재미를 재지 말고  남의 재미대로 꼭 부러워할것까진 없을것 같으니 재미있는 세상에서 한껏 재미를 느끼며 재미있게 사는것이 재미가  아니겠는가   『재미있잇는 세상』 성찰과 거듭나기에서 극치를 이루는것이 『불당에 들어』와 『심성정곡』과 『관음당에 들려 향을 스르다』인것 같다.  시이은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끔하기 위하여 불당에 들어가서 친견한다.     번뇌도 고통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 탄식도 회포도 없는 선경에 닿으려면 거치른 마음에 가득하게 들어있는 거치장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느꼈을때 불당에는 향내가 저으기 진동하고 불상은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있다   『불당에 들어』   거듭나기란 결국은 참삶에 위배되는 모든 비정한 것들을 버리는것을 의미한다. 그러할 때 인간은 이 세상의 축복을 받고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는다. 시에 언급되는 와 는 바로 축복과 찬양 그것에 다름아니다.    『관음당에 들려 향을 스르다』도 우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시이다.   모처럼 마음을 비운 거기가 바로 오매불방 그리던 심령읭 정토이고 모처럼 비워진 거기가 바로 억조창생 극치가 왕생하는 극락정터가 아니가싶었다 영생토록 비우면 비울수록 거기가 바로 령혼이 환생하는 드넓은 왕국이고 령과 혼이 깃든 거기가 바로 왕국이 들어앉을 명당지인가싶었다   -『관음당에  들려 향을 사르며』 우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에게 불리한 모든 나쁜것들을 버려야만 비로소 극락정토에 이를수 있고 심령의 왕국에 도달할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의 철학이다. 시적주인공은 비움의 철학을 실현한다. 그래서 축복을 받아 “향연은 언제 보나 모락모락 피여나고/ 향내는 늘쌍 코앞에서 향긋하게 맴돈다” 마지막으로  『심성정곡』을 살펴보자.   무언한 자연속에  넉넉히 안겨 무명이 없고 망집도 망탄도 없는 무심한 심성을 무념으로 정화하면 무료한 집탈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무아경에 도취하여 신신이 되는듯 무상한 느낌속에   한번쯤 부처가 된다   -『심성정곡』 표제를 풀이하면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망집,망탄, 집탈이 인간을 해치는 잡물들로서 이런것들을 없애면  무아경에 도취하고 한번쯤 부처가 된다. 부처는 모든 깨끗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이름의 상징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경지이다.  박운호는 이 세상을 깊이 통찰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작업에 혼신을 다하는 시인이다.       2.소우주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목탁소리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인생의 고개길을 톺아오르던 시인이 마침내 오도의 대문에 들어서서 자신만의 소우주를 만들어놓고  경건한 자세로 좌선을 하고 념불을 하고있다. 시인은 자기 특유의 집을 짓는다. 건축모양은 마방진식이고 사용한 재료는 대부분 불문에서 가져온것이다. 시인은 불학을 포함해 공자, 맹자, 장자, 묵자 등 동양철학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갖고있다. 가령 동양철학에 대한 연박한  학식이 없었더라면 불교적,유가적냄사가 물씬 풍기는   마방진식의 시를 창출할수 없었을것이다. 보건대 시인은 가로세로세를 쓴느데 엄청난 대가를 치룬것 같다. 박운호시인은 무려 16수의 마방진시를 창작하였다. 이 세상에 없는 을 짓자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한채를 짓자해도 지난하고 아름찬 작업인데 무려16채나 지었으니 실로 놀라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박운호시인의 마방시를 주목하지 않을수 없는 리유는 시인이 만들어놓은 괴상하고 경이로운 소우주가 결코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지은 집이 아니라는 점이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무심히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인은 자기가 안주하고있는 절간을 인생도리를 낳는 요람으로 만들고있으며 하나하나의 목탁소리에다 인간세상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철리적이면서도 유정한 말씀들을 얹어주고있다. 또 하나 주목할것은 시인이 소우주안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대상들이 말짱 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이 동양적사상과 동양적철학에 시핵심을 두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사실상 가로세로보기시  이외의 기타 대부분의 시들에서도 동양철학의 숨결을 다분히느낄수 있다.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것이 인성이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잇는 여러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채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혀나가는 어떤능력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것이다. 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邻) 이라는 구절이 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덕성이 곧 인성이다. 인간이란 존재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동양적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존재에서 구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있는 관계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이다.”(신영복,[강의],41쪽) 여기에 비추어보면 박운호의 시핵심이 동양철학의 인성고양에  뿌리내리고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마방진시들을 보면 모두 , 즉 인간관계로 되여있다. 례하면 , , 등등. 한마디로 인성에 초점을 두고있다. 례문과 마주앉아본다.   천성   -시인과 수녀의 대화   안빈락도성한삶   빈한막심한생엔 락막한자과도견 도심자는시심마 성한과시행이지 한생도심이자성 삶엔견마지성을   위의 시를 전통시 형식으로 고치면 아래와 같다.     安貧樂道 성한 삶 貧寒莫甚한 생엔 樂莫한자 果盜見   道甚者는 是甚麽 聖汗과  施行이지   한생 道心이 資性 삶엔 犬馬之誠을       이 시를 풀이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가난을 즐겁게 여기며 이룩한 삶이요 극빈으로 구차하게 살아온 삶이라  실패한 자는 수행을 착실하게 못했기때문 불문에 들어선자는 마땅히 항상 깊히 사고하며 언제나 땀으로 시행할지어다 참다운 도심이 인간을 만들거늘 자기의 삶에 견마지성을 다해야 하리   이 시는 인간으로 되는 도리를 이야기하고있다. 자신을 항상 돌이켜보고 자기   삶에 충성하라고 귀띰한다.     도의 - -시인과 승녀의 대화   지덕은감여령고 덕성은여실수행 은은한종지론가 감여종성자은한 여실지자심감계 령수론은감계시 고행가한계시록   이 시를 전통시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지덕(智德)은 감여령고(堪輿 靈告) 덕행(德行)은 여실수행(如实修行)   은은한 종지(種智)론가 감여(堪輿) 종성(終成) 자은(自隠)한      여실지자심( 如實知自心 ) 감계 (鍳 戒 ) …. 령수론( 靈遂 ) 은감( 殷鍳)계시 고행( 苦行 )가한 계시록( 启示录 )   이 시의 내용을 풀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지와 덕은 하늘이 내리는것이요 덕성은 참다운 수행끝에 이루어지는것이노라. 부처님이 지혜로우매 하늘과 땅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나니 자신을 참답게 알면 교훈이 될것이로다. 하(夏)나라의 멸망의 력사를  깊이 통찰하고 스스로 고행을 행할지라. 이것이 곧 인생을 살아가는 계시록이니라. 이 시는 자신을 참답게 알면 실수가 없으므로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읽을수 있다..     귀속 -시인과 식차마니의 대화     꽃이이제그유정한옛삶후회없이지네 이젠제법저금은에적이회심어르던맘 이제곷은말없이피다말없이진다해도 제법은광을기리고나없이도진느거야 그저말을속에품지오이제질해거름속 유감없기에꽃으고스락갈때가든타네 정은이리품은듯이품인데시현한네맘 한에피고지고이젠성해가든히그넋은 옛적다나오스품성속여도넌피다지지 삶이말없이락인하여향가고다시지자 후회없이제갈데가도가지고가지않는 회심이도질때시든넌고고히지새는꽃 없어진지해가현히피다가지려는꽃의 이르다는거든한그다지지새는귀의소 지던해거름타네넋지지않는꽃의섭리 네맘도야속네맘은지자는꽃의소리네       이 시를 전통형식으로 고치면 아래와 같다.     꽃이 이제  그 유정한 옛 삶 버리고 후회없이 지네 이젠 제법 저 금은에 적이 회심(會心) 어르던 맘 이제 꽃은 말없이 피다 말없이 진다 해도 제법 은광(恩光)을 기리고 나 없이도 지는거야   그저 말을 속에 품지요 이제 질 해걸은 유감 없기에 꽃은 고스락 갈 때 가는거라네 시현(示顯)한 네 맘 한에 피고지고 이젠 성해 가든이 그 넋은   옛적 다나오스(Danaos) 품성 속여도 넌 피다 지지 삶이 말없이 락인(烙印)해 여향(餘香) 가고 다시 지자 후회없이 제 갈데 가도 가지고  가지 않는 회심이 도질 때 시든 넌 고고히 지새는 꽃   없어 진지(振摯)해 가현(假顯)히 피다가 지려는 꽃의 이르다는 거든한 그 다시 지새는 귀의소(歸依所) 지던 해거름 타네 넋 지지않는 꽃의 섭리 네 맘도 야속해 맘은 지자는 꽃의 소리에       동양의 미덕중에서 남을 위해 무수히 좋은 일을 하였으되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는것이 가장 향기롭고 가장 값나가는 미덕이다. 이 시에서는 바로 유정한 삶을 살았지만 후회없이 지는 꽃을 통해 즉 비록 사라졌으되 결코 사라지지 않은 꽃의 섭리를 통해 불현(不顯)의 미덕을 칭송하고있다.  이제까지 살펴보았지만 박운호의 가로세로보기시는 마치 리상의 처럼 난해하여 제대로 해독을 하자면 품이 많이 들고 숨이 차다. 그  까닭은 첫째 정연한 마방진틀에 치중하다보니 띄여쓰기가 무시되였기때문이고 둘째 일반인들에게는 생경한 불교용어가 허다히 사용되였기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문법규정에 어긋나는 토가 사용되였기때문이다. 그외 틀짜기에 신경을 쓰다보니 행과 행사이에서의 의미련결이 불확실한 점도 적지 않다. 이런 제반 리유로 하여 박운호의 실험시 가로세로보기시는 시해독에서 정력을 많이 허비해야 하는  약점을 드러내고있다.  많은 품을 들여야 대략적인 의미는 파악이 가능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평자들도 이러할진대 일반 문인들이나 백성들이야 더 말할것이 있겠는가.  필자의 일가견이지만 시인은 이쯤에서 발걸음을 멈추는것이 좋을듯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난해한 형식의 시는 시의 대중성과 보편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따라서 대중의 호응이나 찬양을 받을 확률이 대단히 적기 때문이다. 물론 금후 시인이 난해성을 피면하고 대중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전제하에서 마방진시를 계속 쓰겠다면 그것은 별문제로서 필자의 권고는 근근히 로파심에 불과할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는 하나의 귀중한 시혁신이고 시혁명임에는  틀림없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특별한 형식에다 동양철학을 다져넣었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래간만에 우리 시단에 괴상하고도 신기한 선물을 안겨준 는 우리 시단의 경사이다.    의 출간에 진심으로 되는 축하를 보낸다.
20    배우는것과 익히는것 댓글:  조회:1582  추천:1  2014-02-11
  «론어(论语)»의 의 첫구절이 “배우고 때대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學而時習之不亦说乎,有朋自遠方来不亦樂乎,人不知而不怄不亦君子乎)이다. 이 구절의 핵심을 배움과 익힘, 벗, 군자 등으로 나누어 풀이할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론의상의 편리를 위해 배움과 익힘만 담론하려 한다. 학습은 배울 학( 學)과 익힐 습(習)으로 이루어졌다. 배우는것과 익힌는것 중에서 배움도 중요하지만 익히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 까닭은 배우는것보다 익히는 일이 더 어렵고 의의가 더 크기 때문이다. 배우는 목적은 전적으로 익히려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습(習)을 이미 배운것을 복습(复習)하는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고 실천(實践)한다는 의미다. 습(習)자를 분해하면 우에 날개 우(羽)가 있고 밑에 흰백(白)이 있다. 털도 나지 않은 하얀 어린 새가 날기 위해 날개짓(羽)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습(習)을 행동을 한다는 의미, 실천을 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실천의 중요성을 알고있었다. 그것이 속담으로도 증명된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에는 아무리 쉬운 일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 외에 어떤 도리나 리치를 알고있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는 다른 의미도 함께 지니고있다. 또 “백번 듣는것이 한번 보는것만 못하고 백번 보는것이 한번 해보는것보다 못하다 ”는 속담도 있다. 역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지난 날 우리들은 을 리해함에 있어서 만 중시하고 을 경시하였다. 위대한 공산주의전사 뢰봉은 나라와 집체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을 락으로 삼았기에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가 죽은 후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주덕, 류소기,동필무  등 50여명의 중앙 수장들이 제사를 썼다. 모택동은 “뢰봉을 다라 배우자!”고 썼고 등소평은 “진정한 공산주의 전사가 되려면 뢰봉동지의 품덕과 품성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썼다. 하여 한때 전국적으로 뢰봉을 따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으나  오늘에 와서 뢰봉정신은 많은 정도로 희미해지고말았다. 다 일다싶히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구호는 온 나라 방방곡곡에 걸려있으며 13억 인구가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여 무릇 중국인이라면 뢰봉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것이 좋은 일이라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뢰봉이 생소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구호는 단지 구호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말하자면 행동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늘 당과 정부에서는 당내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있으며 전당,전민이 일떠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적발하고 뿌리뽑으라고 호소하고있다. 이것은 인민의 념원이고 나라의 념원이고 당의 념원이다. 하지만 부정부패, 비리라는 바이러스가 의연히 살아숨쉬면서 나라와 인민을 해치고있다. 까닭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부정부패와 비리의 해로운 점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거나 과감하게 실제행동으로 부정부패를 막지 못하기때문이다. 이 경우 해로운 점을 알았다는것은 에 속하고 고치고 막는것은 에 속한다. 단지 배운것으로만은 부족하다. 익힘이 없는 배움은 무의미하다. 배움은 익힘을 위한 전제이며 중요한것은 익힘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배우는것과 익히는것을 결합하여야 한다.
19    狂者의 妄言 댓글:  조회:1977  추천:0  2014-01-17
  요지음 동아시아의 분위기가 전에없이 팽팽해지고있다. 그 장본인은 일본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뎅이물을 흐리운다고 했듯이 일본이 무모하게 갖은 집탈을 만들어 동아시가 그 어느때보다도 시끌버적해졌다.   일본 아베정부와 정부를 옹호하는 일부 우익분자들이 해괴한 망언을 서슴치 않고 쏟아내면서 시비를 전도하고있다. 망언이 여러가지지만 그중에서 몇가지 골자만 골라서 광자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위안부문제에서의 망언이다.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에서 위안부는 강제로 모집한것이 아니고 자원이였다고 하면서  후안무치한 낯짝으로 당치도 않은 궤변을 련발하고있다. 2차대전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위안부는 세계인권력사에서 전례가 없던 인권침해다. 하기에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계인의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심지어 미국의 인권단체에서는  위안부소녀상을 세워놓고 전 세계에다 일본침략자들의 죄행을 고발,성토하고있다. 2차대전때 일제는 아시아전역에서 강제로 위안부를 모짐하여 일군의 성도구로 제공하였다. 일제는 위안부를 모집할 때 입으로는 간호사, 방직공으로 모집한다고 기편하였다. 강제로 끌려간 수많은 위안부들이 야만적인 일군에 의해 참혹한 유린을 당했다. 그중 적지 않은 위안부들이 고통에 시달리다못해 자결하였다. 위안부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한국과 중국이다. 오늘 요행 살아남은 위안부들이 일본정부를 향해 천인공노할 죄를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것을 강경히 요구하지만 파렴치한 일본정부는  이른바 위안부는 강제모집이 아니고 자원모집이였다고 흑백이 뒤섞인 망발을 쏟아붓고있다. 둘째, 남경 대학살에 대한 망언과 외곡이다. 19세기 30년대에 중국의 땅에 남경대학살이라는 인류의 최대의 비극이 벌어졌다.  1937년 11월 13일부터  6주동안 남경을 점령한 일군은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감행하여 세상을 놀래웠다. 짦디짧은 6주동안에 일본침략자들은 근 37만에 달하는 백성과 포로들을 총살하거나 생매장하였다.  한 일군의 자백에 의하면 적수공원의 백성들을 묶어놓고 날창으로 누가 더 많이 죽이는가  내기를 벌렸고 마지막에는 날창이 무디여 더 죽일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침략군은 대학사를 감행하는 한편 수많은 부녀들을 강간했다.  어떤 녀인들은  집식구들 앞에서 강간당했고 어떤 부녀들은 륜간을 당하기도 했도  어떤 부녀들은 강간당한후 살해되기도 했다. 일본침략군은 남경을 점령한 후 근 88만책에 달하는 도서와 문서를 략탈했는데 이는 당시 도쿄 상야(上野)도서관의 장서 87만권보다 더 많은 수자다. 일본군의 야만적인 행위는 이에서 그친것이 아니다. 일본침략자의 야만적인 행위에 의해 남경시의 삼분의 일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소각되였으며 남경시  재산의 절반 이상이 훼손되였다. 남경대학살은 인류사에 없던 비인간적인 죄행, 오직 야만인만이 할수 있는 천추에 용납못할 죄행이다. 하여 오늘까지도 중국인민을 포함해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인들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있는것이다. 력사의 죄인으로서의 일본은 마땅히 남경대학살의 죄를 인정하고 중국인민에게 천만번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겠는데   일본정부는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되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혹은 이라고 부르는  참사를 그들만은 이라고 하면서 죄악을 덮어감추려 하고있다. 그들은 남경참살에서 죽은 사람이 2,3만명에 불과하며 그것도 참살이나 도살이 아니라 전사(战死)라고 변명한다. 전쟁중에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정상적인 죽음이라는 뜻이다.  광자의 망언은 이렇듯 황당하다.   셋째, 령토확장과 침략에 혈안이 된 망언이다. 일본제국주의 본질은  침략이다. 1592년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명나라때 명나라의 연해지방을 략탈했었다.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하였고 1932년에 중국의동북을 점령하고 위만주국을 세웠으며 이어 중국을 비롯한 아시에전역에 침략의 마수를 뻣쳤다가 1945년에 망하였다. 이렇듯 일본은 침략에 광분하는 나라이다. 일본의 령토확장야욕과 침략 야욕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아베정부는 한국의 독도를 자기네들의 죽도( 竹岛)라고 우기며 중국의  (钓鱼岛)를 자기네들의 센카쿠군도라고 우기고있다. 일본의 이러한 에누리없는 강도론리는 동북아평화,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화근으로 되고있다. 하기에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엉터리주장에 대해 추호도 양보가 없는  강경한 립장을 취하고있다. 넷째, 집단적자위권에 대한 망언이다. 2차대전후 유엔에서는 일본은 전쟁도발국이므로 군대를 두지 못하고 단지 치안을 유지하는  방위청만을 두게 했는데 그것이 자위대로 명칭이 바뀌였다. 후에 일본은 자위대를 22만 5천명으로 발전시키고 현대화장비로 무장시켰으며 현재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있다. 군사전문가들은 일본이 유사시에는 순간에 100만명 이상의의 군인을 확보할수 있다고 보고있다.  집단적자위권이란 다른 국가가 무력공격을 받을 경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가 피공격국을 원조하여 하여 공동으로 방위할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집단적자위권을 행사할 경우 일본군대가   보통 정상적인 나라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해외에다 군대를 파견할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이 말은 또 침략을 할수 있는 명분을  갖춘다는 말과 통하기도 한다. 결국 이전의 전쟁도발국으로서의 일본이 집단적자위권을 행사한다는것은 백번 말해도 어불성설이다. 근간에 일본은 미국까지 동조하니 집단적자위권행사에 미친듯이 열을 올리고있다. 우리들은 일본의 망발을 군국주의의 부활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경각성을 높여 일본의 일거일동을 면밀히 주시하고 그들이 만약 무모하게 행동한다면 엄정하게 대처하여야 할것이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아시아에서 물의를 빚고있는 일본의 력사교과서문제를 보기로 하자. 일본의 아베정부는 력사교과서수정에 막대한 정력을 소비하고있다. 본심은 자기네들의 침략력사를 미화하고 후대들에게 일본인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주입시키기 위한데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아시아를 침력한것은 침략이  아니라 대동아공영(大同亚共荣)이라고 변명했으며 더 나아가 아시아를 서방국가들로부터 보호하고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을 문명에로 이끌기 위한 미행(美行)이였다고 당치도 않는 망발을 하여왔고 지금도 하고있다. 즉 그들은 침략을 정당화 하면서  력사교과서에다 자기네들의 추악한 침략사를 아시아공영사(亚州共荣史)로 둔갑시키려는것이다. 력사는 광명정대하고진실하다. 둔갑은 언제나 단지 둔갑자체에 그치고말것이다.  지난 11월 한국의 박근혜대통령이 동북아공동력사교과서를 편찬할것을 제의하였다. 이렇게 하면 력사에 대한 공통한 인식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나라들지간의 상호 리해와 소통,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에서였다. 중국정부도 이 제안에 열렬한 지지를 표시했으나 일본만은 극구 반대하였다.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일본정부는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의 침략를 계속 미화하면서 군구주의를 부활시키려고 하려는것이다. 일본이 어떻게 궤변하든 모두 광자의 망언에 불과하다. 력사는 속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력사는 곧 진리이기때문이다.  아베정부의 일련의 비리성적인 망언이나 망발은 근근히 가랑잎으로  눈 가리도 아웅하는데 불과하다. 력사는 그들의 허을을 벗겨버릴것이며 일본의 무모한 행위는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것으로서 세계인민의 질타를 면하지 못할것이다.
18    한석윤론ㅡ<6월을 위한 5월의 노래>출간 댓글:  조회:1401  추천:0  2014-01-08
한석윤론ㅡ출간      최근 연변교육출판사에 의해 한석윤론 가 출간되였다. 원래는 3년전에 기획된것이였지만 본인이 “나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어떻게 나의 작품론이 먼저 나갈수 있냐”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오늘에야 비로소 모습을 보이게 되였다.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는 중국조선족아동작가를 다룬 첫 단행본작가론이라는데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될것이다. 본서는 제1부 작품론-『연필끝에 아롱진 칠색의 세계』, 제2부 인간론-『몸으로 그려내는 동심의 나라』,제3부 『한석윤작품선』으로 엮어졌다. 27편의 문학평론과9편의 인간론으로 꾸며진 한석윤론을 읽노라면 우리는 동시인으로서의 한석윤, 인간으로서의 한석윤, 아동교육가,사회활동가로서의 한석윤을 일목료연하게 알수 있게 될것이다. 한석윤 선생의  좌우명은 “후대를 길러가는 길에 은행나무처럼 깨끗이 살고 초불처럼 몸과 마음 다해 가리 ”이다. 그는 이 좌우명을 인생의 락으로, 분투목표로 삼고 오늘까지 동시창작과 어린이들을 위한 힘겹고도 아름찬 고행의 길을 걸어왔다. 제1부에서는 한석윤선생이 동시창작에서 이룩한 혁혁한 성과를 집중조명였다. 비록 늦깎이로 동시창작에 몰입하였지만 1980년대초에 김득만, 최문섭 등과 함께 동시혁명의 홰불을 높이 추켜들고 동시혁명에 투신하면서 중국조선족동시문학창작의 세 지평을 열었다. 그는 동시는 우선 시로 되여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동시에서의 이미지창출에 혼신을 쏟아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시에서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주장은 황당하고 불가능한것으로 치부되여 반발도 적지 않았지만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으로 증명하여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결과 늦깎이로 동시창작에 뛰여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시간내에 알찬 현대동시들을 륙속 창작하여 동시단을 경악케 했으며 일약 동시단의 선두자로, 거목으로 급부상하였다. 한속윤선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 등 11권의 동시집을 펴냈고 그 보상으로 선후하여 , , , ,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받아안았다. 제2부에서는 아동교육가, 사회활동가로서의 한석윤선생의 업적을 소개하였다. 한석윤선생은 어린이신문사업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석윤선생의 피타는 노력으로 가 로 승격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으며  그후 그 기세를 타고 중국소년아동간행물협회로부터 일류신문으로, 국가신문출판총서로부터 우수신문으로, 길림성신문출판국으로부터 성1급신문으로 평정되였다. 한석윤선생은 청소년문화사업에서도 커다란 업적을 쌓았다. 1982년에 우리 말, 우리 글을 빛내기 위해 행사를 11회 조직하였고  1987년에 창조형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를 발기하고 행사룰 12회조직하였다. 1993년에 청소년들에게 시대적전형을 수립해주기 위해 를 발기하고 행사를 10회  조직하였으며 1994년에 『신동컵수학경연대회 』를 발기하고 한국과 교류하여 학생들을 국제수학경색대회에 출전시켰다. 1998년에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사랑의 일기쓰기공모전』을 발기하고 행사를 10회 조직하였으며1998년에  『중국조선족장학금상』을 제정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을 8차 지원하였다. 한석윤선생은,  2003년에 퇴직한 후에도 조선족청소년사업을 위해 불후의 업적을 창출하였다. 자기돈 4만원을 기초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청소년문화진흥회』를 발족하고 법인대표를 맡았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력사에 기록될만한 수많은 일들을 해냈다.  2006년에 어려움속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청소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초록장학상』을 제정하고 14회에 걸쳐 장학금을 전달하였으며 2007년에 아동문인들이 훌륭한 아동문학작품을 쓰도록 격려하기 위해 『윤정식아동문학상』을 성립하였다. 2008년에 조선족청소년들속에 독서열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변조선족독서사와 함께 『엄마랑 함께 하는 독후감쓰기대회』를 발기하고 5회 조직하였으며 그해에 또  사랑의 동시가 아기들 가슴속에 가 닿도록 하기 위해 『엄마랑 함께 하는 동시랑송대회』를 발기하고 두차례 개최하였다. 역시 같은  해에 조선족유명동시인들을 기리고 민족혼을 고양하기 위해 동시동네를 마련하고 동시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5개의 동시비를 완성하였다. 2009년에는 중한문화교류를 추진하기 위하여 연길, 도문, 안도에서  『시민들과 한께 하는 시화전을 』 두차례 열었으며 2011년에 동시동네에 윤동주시비를 세우고  윤동주포럼을 조직하였고 2012년에  자치주성립60주년을  맞으며 진달래광장에다  『자치주성립경국의 노래』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 축성에 한석윤선생은 자기의 사재 만원을 희사하였다. 제3부분에는 한석윤선생의 대표동시 30수와 한편의 수필, 두편의 칼럼, 두편의 평론이 실려 있어 금후 한석윤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한석윤론 는 한권의 책이라기보다는 한석윤선생이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진  인생총화요, 인생찬가이다. 아동작가치고 어느 누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련만 어린이들에 대한 한석윤선생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넓고 진지하여 실로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있다. “아이들이 좋아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아이들이 귀여워서 함께 뛰놀고 노래 부르며 살아온 20년, 그 시시각각은 정말 너무나 행복한 순간들이였다. ”그렇다. 한석윤선생은 일생을 바로 이렇게 살아왔다. 한석윤 선생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자신의 삶의 전부요, 행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기에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이기도 하다. 미래보도 더 큰 재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한것윤선생의 지나온 발자국을 돌이켜보면 실로 우리 어린애들과 우리 민족을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하여 감탄과 고마음을 금할수 없다.   어떻에 한 사람이 평생에 이토록 많은 일을 할수 있을가. 그 까닭이 무엇일가.  사랑, 사랑이다. 어린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꽃으로 피여 한것윤선생의 삶은 언제나  싱그럽고 향기롭다. 로목개화심불로(老木開畵心不老)란 말이 있다. 아마도 한것윤선생을 두고 한 말인것  같다. 나이가 70이지만 마음속에 항상 사랑의 꽃이 피고있으니 한석윤선생은 늙지 않았다.  일년4계절 꽃을 피우고있는 큰 나무, 언제 어디서나 황금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있는 큰 나무,  그리하여 영원히 늙지 않고 어린애로   살고있는 큰나무,이것이 한것윤선생이다. 한석윤론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가 우리 민족의 문학고(文學庫)에 소중한 보배로 소장되리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17    “모난 돌” 에 대한 생각 한줌 댓글:  조회:3019  추천:1  2014-01-06
우리 속담에 “모난 돌이 정(釘)을 맞는다”는 말이 있고 중국속담에는 “槍打出頭鳥”(머리를 내민 새가 총을 맞는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을 대충 풀이하면 대개 세가지로서 첫째로는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남한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뜻이고 둘째로는 강직한 사람이 남의 배척이나 공격을 받는다는 의미이고 쌧째로는 말과 행동에서 특별히 모(각)가 나면 남의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라 하겠다.  하다면 우리는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를 어떻게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것인가? 필자는 긍정과 부정 두가지로 갈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서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아야 할 때가 있고 모난 돌이 되지 말고 정을 맞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헌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문곡직하고 정을 맞지 않기 위해 모난 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을 교육할 때 우리 조선족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한족들은 “別管閑事”(쓸데없는 일에 삐치지 말라”고 훈계한다. 알고보면 이러한 사상은 많공맹지도의명철보신(明哲保身)에서 비롯된것이다. 명철보신은 자사자리의 일종의 표현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일부 사람들은 깡패들이 길가에서 무고한 사람을 마구 구타해도 못본척 그냥 지나치며 소매기군들이 돈을 훔치는것을 보고서도 모르쇠를 치며 정치권에서도 어떤 정치인들은 상급이 범한 착오나 비리를 번연히 알면서도 일신의 안정과 승진을 위해 그것을 적발하고 폭로할 대신 함구무언하거나 강 건너 불보듯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저질적인 소인배로서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한다.  력사를 보면 모가 나서 정을 맞았지만 후세에 방명을 남긴 위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을 맞을줄을 번연하 알면서도 정의와 진리를 위해 과감하게 모를 세움으로써 천추를 두고 그 이름이 찬연히 빛을 뿌리고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영구불멸의 철칙으로 되여있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아 화형을 당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국공이 합작하여 항일을 하기 위해 장개석을 연금하였다가 변을 당했다. 윤봉길은 일제를 타도하고 나라를 찾기 위해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졌다가 일제에 의해 장렬히 희생되였다. 팽덕회는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화를 입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탄압이나 보복을 당할줄을,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줄을 번연히 알았지만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정의라고 믿었기에 서슴치 않고 “모난 돌”로 되었던것이다. 보다싶히 인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정의와 진리를 위해 “모난 돌”이 되는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상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모난 돌”을 풀이한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모난 돌”로 되지 말아야 할 까닭을 알아본다. 우선 화목한 가정을 위해서 “모난 돌”로 되지 말고 두루뭉실한 돌로 되어야 한다. 가정이 단란하자면 자기 주장만 내 세우지 말고 여러 식솔들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 한 사람의 생각만 고집하면 불화의 불씨가 될수 있어 정상이 엄중하면 가정의 파탄으로도 이어질수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인 문제가 아닌 이상 될수록 자기만 옳다고 우기지 말고 여러 식구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자기의 생각을 그들의 생각속에다 용해시켜 둥글게 만들어야 한다. 친구 사이, 이웃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의 리치이다. 둘째로 민족의 리익을 앞세우고 민족공동체의 호흡에 자기의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민족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위배되는 중뿔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한 사람의 행동이 민족공동체라는 원 밖으로 벗어나게 되면 민족공동체의 배척을 받게 된다, 즉 민족공동체가 내리는 징벌을, 정을 맞게 된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민족의 반역자나 한간이 그 일례라 하겠다.  다음으로 국민으로서의 개개인은 나라의 대기후에 따라야 한다. 오늘 중국의 대기후는 개혁개방을 견지하고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노래를 부르라고 했듯이 우리는 오늘 모두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는 합창을 열창하면서 화합속에서 둥굴어져야 하다. 합창에 합류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내는 어긋나는 행위는 “모난 돌”로서 그에 해당되는 징벌, 인민민주주의독재가 휘두르는 강력한 정을 맞게 된다. 강도, 강탈, 강간,절도. 탐오, 회뢰, 사기,등 모든 범죄는 나라와 인민을 해치는 “모난 돌”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긍정적인 면으로서의 “모난 돌”을 제창하고 부정적인 면으로서의 “모난 돌”을 배격하여야 한다.  중국민족잡지 6호  
16    중용지도를 말하다 댓글:  조회:2561  추천:1  2013-10-21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조 오백년 력사에서 누구에게나 강직하고 청백한 관리이자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1418년에 태종이 세자를 폐위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황희가 나서서 폐장립유(廢長立幼:세자를 폐위하고 다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는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면서 극구 반대하다가 강직되여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하였다. 황희는 정치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도 인간관계에서는 처처에서 관용의 미덕으로 처처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였다.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화가 나서“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이다. 세상사 시시비비를 논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한쪽의 입장만을 듣게 된다. 오히려 황희가 보여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관이 없기 보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뜻 )’라 했던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보아야 하지 않을가? 우리는 황희의 몸에서 중용사상을 엿볼수 잇다. 황희가 두 녀종의 말과 조카의 말을 모두 옳다고 한것이 바로 중용사상의 체현이다. 그는 세 사람의 말을 모두 옳다고 함으로써 세 사람의 인격을 모두 존중하였다. 중용지도(中庸之道) 혹은 중용사상은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각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있다. 중용지도는 지난날 인격을 완성하는 립신철학(立身哲學)의 핵심으로서 많은 지성인들의 중용지도를 자아수양의 최고목표로 삼았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中)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庸)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 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국의 현대사에서는 주은래 총리가 중용지도의 전범이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력사의 긴요한 시기마다 정치적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관용의 자세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문화혁명시기의 주은래 총리의 태도이다. 그는 문화혁명으로 많은 고급간부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모주석의 뜻을 크게 거슬리지 않는 전제하에서 일을 령활하고 타당하게 처리하여 억울하게 페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해에서 건져냈다 중용지도는 한 개인의 인격수양에서도 적용되지만 나라의 정책이나 국제적인 외교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있은 1차국공합작과 2차국공합작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중용지도의 발현이다. 그것은 중국이 중용지도의 출산국였기에 가능할수 있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으로 사분오렬이 되고 경제적으로 엉망진창이 된 낡은 중국을 건지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리념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방책으로 제1차 국공합작을 합작을 선택하게 되었고 항일전쟁때는 외세를 몰아내는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였으므로 국공합작이 가능했다. 중용지도는 한 나라의 국내정치에서도 실행될수 있고 국제사무에서도 실행될수 있다. 일례로 중국이 56개민족에게 베푸는 관용의 정책은 모종의미에서의 중용이며 여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기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중립국들의 태도도 역시 중용지도로 풀이할수도 있다. 그 외 나라와 나라지간에도 중용지도가 통할수 있다. 혹여 이떤이들은 중용지도와 명철보신을 혼동할수도 있는데 량자는 차원이 다르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중용지도에는 자기의 인격을 고상히 하면서도 남을 배려한다는 관용의 미덕이 있지만 명철보신하는 사람들은 정의와 진리를 모두 본체만체하고 오로지 지신의 안위만을 위한다. 중용지도가 개인과 개인 사이, 가정과 가장 사이, 이웃과 이웃사이,나라와 나라사이에 타당하게 적용하면 평화와 화목이 도모될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가끔씩 중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것이다. 중국민족 2013년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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