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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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뒤를 돌아보면 앞이 보인다 댓글:  조회:2479  추천:43  2012-11-09
사람들은 각종 회때마다 흔히들 틀에 박힌 말로 앞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하라, 만사대길하라면서 고무격려한다. 강조되고있는것이 “전진”과 “앞”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라는 말은 크게 하지 않는다. 앞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하라는 말은 과시 틀린 말은 아니다. 전진은 약동이고 생명의 증명이고 그리고 앞이라는건 곧 목표나 희망이나 성공을 의미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달리기전의  준비사업을 홀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준비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앞으로 달리라고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착실한 준비가 없이 서둘러 달리다가는 자칫하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엎어질수도 있고 상할수도 있으며 심지어 생명을 잃을수도 있다.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행위인즉 어제를 검토하고 성찰하는 과정으로 지난날을 돌아보는 사고방식이다. 참다운 자기성찰은 인간의 정신을 가볍게 만들어 달리기가 훨씬 쉬워진다. 성찰은 도덕적완성에로 이르는 필요불가결의 요소로서 성찰을 통해 인간은 무거운 짐이 되는 여러가지 오물들을 부려놓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  태여나 홀가분한 육신으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중국 속담에 “과거를 징계하여 금후를 삼가하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잘못을 거울로 삼으라는 뜻으로 어제를 잘 총화하는것이 금후의 행로에 큰 도움이 된다는것으로 풀이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저라한 흠집이 있다. 다만 크고작음의 구별이 있을뿐이다.  위대한 인물도 례외가 아니다. 그래서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을것이다. 뒤를 돌아볼줄 모르면 개인일 경우 상황이 엄중하면 개인을 망칠수도 있으며 나라를 책임진 사람일 경우 나라를 망칠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뒤를 돌아보는 작업은 모든 사람들의 몫이 되여야 할것이며 돌아봄의 미학이 모든 철학의 앞장에 서야 할것이다.   기독교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승려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념주를 헤고 좌선(坐禪)하는 과정 모두가 사실은 뒤를 돌아봄의 미학이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과정도 다른 방식으로서의 뒤를 돌아봄의 미학 역시 다를바없다. 다만 그 정도가 차이가 있어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건성으로 할뿐이다. 인간을 타락의 심연으로 몰고가는 부정적인 물욕, 귄세욕, 정욕, 치부욕, 패왕욕 등이 사회를 썪게 하는 근본인데 이런 사악은 법률과 함께 돌아봄의 미학으로 치유하여야 한다. 한 사람의 행위는 후세에 거대한 영향을 준다. 일개 가장일 경우 그의 흐트러진 삶이 자녀에게 영향을 줄것이요, 스승일 경우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이 제자에게 이런저런 양향을 줄것이다. 서산대사가 아래와 같은 명시를 써 후세를 경계한바 있다. 눈덮힌 벌판을 걸을 때(踏雪野行去) 부디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不須胡亂行) 오늘 남기 내 발자취가 (今日我行跡) 후날  뒤사람의 리정표가 될지리니(逐作後人程) 내가 걸어온 발자취가 곧은지 비뚠지는 반드시 뒤를 돌아보아야 알수 있다. 뒤를 볼아보고 바르지 못한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성찰이 잘 된다면 도박쟁이는 더는 도박쟁이가 아닐것이며 사기군은 더는 사기군이 아닐것이며 부랑뱅이는 더는 부랑뱅이가 아닐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찰이 잘 안되면 도박쟁이는 영원한 도박쟁이로, 사기군은 영원한 사기군으로 남을것이다. 친구사이, 이웃사이, 가정생활, 직장생활 등에서도 항상 뒤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돌아봄의 미학은 작은 일에서도 필요하거니와 큰 일에서도 필요하며 소인에게서도 필요하거니와 위인에게서도 필요하다. 가령 히틀러나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고금중외의 전쟁사를 참답게 돌아보았더라면 모든 침략전쟁은 모두 패한다는것을 알았을것이고 따라서 세계를 재패하려고 무모하게 침략전쟁을 발동하지 않았을것이다. 결국 그들은 지난날을 착실하게 돌아보지 않았기때문에 멸망을 자초하고말았다. 모택동은 중화인민화국을 창건한 국부이며 위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일시 돌아봄의 미학을 홀시한 까닭에 빛나는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만약  모택동이 문화혁 직전이라도 반우파투쟁과 대약진, 인민공사 등 극좌적인 정책이 나라와 인민에게 불리한 정책이라는것을  알았더라면 중국을 비극에로 이끈 문화혁명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것이다.  돌아봄의 미학은 개인에게도 필요하고 군체에도 필요하고 나라에도 필요하다. 뒤를 돌아보면 앞이 보인다.
14    귀중한 선물, 감동의 드라마―'장백산아래 나의 집' 댓글:  조회:2505  추천:2  2012-09-25
9월 3일부터 9월 19일까지 중앙TV에서 황금시간대에 30부 드라마 ‘장백산 아래의 나의 집’을 상영했는데 사회 각계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있다. 이 드라마의 성공을 축하하여 최근 길림성에서 전문가들이 모여 ‘순박함으로 미를 창출한 성공작’이라는 표제로 좌담회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헌례작품이며 바야흐로 열릴 중국공산당 제18대 당대회를 앞두고 내놓은 민족단결의 드라마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 대가정이 그 구성원의 일원인 조선족에게 주는 귀중한 선물이다.   드라마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순수하고 풍부한 제재와 소박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로 광범한 시청자들의 심혼을 사로잡은 성공작이다. 궁정투쟁편, 전쟁편, 간첩전, 피비린내 나는 무술편, 고부간의 알륵이나 동서지간의 알륵을 다룬 암투편, 개인우상주의편 등 드라마에 지루하던 청중들은 순박하면서도 진솔하고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백산아래 나의 집'을 보고 신선한 감동의 도가니에 휩싸이고있다.   이 드라마는 두개 가정의 4대 인물들의 겪는 비환리합(悲欢离合)을 주선으로 조선족들이 걸어온 60여년의 세기의 풍운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있다. 드라마는 4세대가 엮고있는 운명의 기복과 복잡다단한 인생궤적, 따스한 정감세계와 변화무상한 심령의 발자취들을 생생히 보여주고 조선족들의 삶의 실태와 생존의지, 생명가치를 사시적으로 폭넓게 그려내고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문화융합을 감명깊게 펼쳐보이고있다.   이 드라마가 청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까닭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안고있기때문이다.   첫째로 조선민족의 정신실질을 리얼하게 그려내고있다. 한 민족이 자강자존하자면 반드시 독특하고 풍부한 민족정신이 뒤받침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민족정신은 한 순간에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축적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품에서 김은준과 리창선이라는 로일대들의 숭고한 정신이 표본으로 되였기에 그 후대들이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정신의 정기를 발휘하게 된다. 김인준은 외손녀 박순옥에게 '남한테는 웃는 얼굴을 보이고 눈물은 속으로 삼키라'고 교육하고 리창선은 박순옥에게 큰 산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박순옥은 그들의 말대로 하여 고상한 인간미를 소유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드라마는 조선족의 순박하고 근면하고 용감하고 강의한 성격기질과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는 조선민족 고유의 천성적인 기질을 스토리의 갈피갈피에 자연스럽게 관통하고 투사시키면서 조선족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이룩한 간고한 창업사와 더불어 생존지혜와 찬란한 문화, 농후한 정감세계를 감동의 화폭으로 펼쳐보이고있으며 조선족의 귀중한 민족정신을 소리 높이 구가하고있다. 그 정신이 곧 가정과 나라를 열애하는 정신이며 고생을 이겨내고 간고분투하는 정신이며 성실과 신용을 앞세우는 정신이며 어른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인정과 우의를 중시하는 륜리정신이며 문화를 중히 여기고 과감하게 전진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는 창업정신이다.   다음으로 이 드라마는 조선족의 독특하고 선명한 민족특색과 지방색채를 진하게 보여주고있다. 울울창창한 장백산, 그로부터 뻗어나간 면면한 산발, 그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화려한 조선족춤, 감미롭고 흥겨운 조선족의 음악, 하늘하늘 나붓기는 조선족의 치마, 특이한 생활방식과 생산방식, 그 어느 민족과도 구별되는 례의범절 등이 상세하게 소개되고있어 이 한편의 드라마로 조선족을 속속들이 리해할수 있다. 그러되 이러한것들이 경박하거나 단독으로 펼쳐지는것이 아니라 인물의 운명궤적에 부착되여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조선민족의 령혼을 부각시키고있다.   또한 이 드라마는 특징의 하나로 정(情)이 전반 드라마의 령혼과 귀속점으로 되고있다. '장백산아래 나의 집'이 성공할수 있은것은 바로 이 정이 뜨겁게 숨쉬고있기때문이다. 박순옥과 권광식의 진지한 사랑, 죽은 남편을 그리며 양언문과 장영묵의 사랑을 거절하는 김정숙의 정조관, 김인준과 리창선의 특이한 우정, 리영강과 진정의 파란 많은 사랑 로맨스, 박순옥과 무용교원 로혜선과의 도타운 사생지간의 우정, 한기섭주장과 리창선의 혁명적 우의, 정록수의 짝사랑이야기…… 등등, 인정을 교감의 바탕으로 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반 드라마의 세절에 적당히 가미되면서 입맛을 돋구어준다.   그리고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선명한 장백산문화를 창출하고있다. 이 드라마의 화면에서 장백산의 장엄한 풍경, 해란강반의 우미한 자연과 인문풍광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연변특유의 문화가 창출된다. 작품은 대량의 렌즈언어들을 동원하여 장백산문화의 정화를 빼여나게 펼쳐보이고있다. 장백산은 길림성과 동북지역문화의 상징이다. 중국문화와 중화문화의 중요한 조성부분인 장백산문화는 장백산지역의 각족 인민들이 사회발전과정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이다.   끝으로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민족의 단결과 융합을 구가하고있다. 향촌의 한족의사 장영묵은 리영강이 상했을 때 정성을 다해 살뜰히 보살피며 조선족인 김정숙을 사모한다. 상해처녀 진정은 부모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변의 조선족사나이 리영강과 결혼한다.   총적으로 조선족인민들에게 선물한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사시특색, 민족특색, 자연특색을 교모하게 결합시키면서 사상성, 예술성, 흔상성의 유기적통일을 이루고있다.   드라마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길림성의 드라마백화원에 민족제재 헌례드라마라는 새로운 품종을 증가시켰으며 우리 나라 민족제재드라마 창작에 새로운 경험과 범례를 제공해주었다고 할수 있다.
13    스스로 죽이기 (3)ㅡ무너진 사회과학원 댓글:  조회:3274  추천:7  2012-07-26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것이 새로운것을 세우는것이요 가장 쉬운것이 이미 세워진것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난수이파(難樹易破)의 도리는 크고 작은 일 모두에 통한다.  하나의 층집을 짓는데 빠르면 1년, 길면 몇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허무는데는 불과 한달여,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요즘에는 폭발약해체법을 채용해 단지 눈깜할 사이에  거대한 고루대하(高樓大廈)를 단번에 허물어버린다. 각필하고 오늘은 십여년전에 사라져버린 연변사회과원을 아릿한 추억으로 떠올려본다. 중국에는 모두 30개의 민족자치주가 있는데 사회과학원이 있는 자치주는 유독 연변뿐이였다. 실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연변사회과학원을 일떠세우는데 적어도 4.5년의 시간이 걸렸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연변의 학자들이 북경을 4,5차례 드나들면서 연변사회과학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성(省)의 아래에 있는 지구급의 자치주에 과학원을 세운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중앙정부는 연변지구가 문화가 발달했다는 사정을 감안하여 그리고 그 간절한 소망에 감화되여 선례를 타파하고 특수한 우대정책을 베풀어 연변사회과학원의 성립을 비준하였다. 이 특수한 은혜와 배려에 대해 우리 조선족은 중앙정부에 향해 고두백배 (叩頭百拜) 사례하여야 할것이다. 연변사회과학원은 설립된후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다.  헌데 그 누가 알았으랴. 이러한 과학원이 십년도 되나마나하여 사라지리라고는. 알고보면 이 역시 스스로 빚어진것이였다. 연변사회과학원이 무너지기 직전 1,2년 사이에 내부에서 1.2등 보좌를 놓고 두파로 나뉘여 자리다툼이 심하였다.   이러하 상황을 보고 대노한 주정부에서는 2002년에 연변사회과학원을 해체해버렸다. 자체로 결정해서 해체를 했는지 아니면 중앙정부의 동의를 거쳐 해체했는지 똑똑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연변사회과학원이 해체된것만은 사실이다. 이리하여 근 20년간 존속하던 연변사회과학원이 력사속에서 영영 사라고말았다. 이에 분개한 연변의 지성인들이 연변사회과학원의 부활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벌렸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요 행차뒤의 나발이라 별무도리였다. 지금 5층짜리 건물만 외롭게 남아 지난 력사를 아프게 추억하고있다. 해체의 원인을 캐보면 손금보듯 환하다. 첫째는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권력에 혈안이 되여 암투를 일삼은 원 과학원 지도층의 더러운 소행때문이다. 그들이 화근을 빚어낸 죄의 장본인이다. 다음으로는 해체의 결단을 너무 조급히 내린것이다. 웬간하면 능력이 있는 새 지도부를 물색하여 어렵게 세운 과학원을 유지하는데로 나아가야 했건만 무슨 영문인지 너무 급급히 해체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상술한 요인이 작동하여 연변사회과학원을 무너뜨리는 “폭파약”이 돼버렸다. 한번 무너뜨린것을 새로 세운다는것은 천만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목청을 높혀 말한다해도 소잃고 외양간고치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큰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다시는 자기에게 차례진 귀중한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쉽게 팽개쳐버리는 불미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12    만져주기 긁어주기가 흠 댓글:  조회:2586  추천:0  2012-06-21
95년도 문단대문을 노크하다말고 머리를 잠시 뒤로 돌려보면 대체적으로 큰 말썽거리가 없이 조용하고잠잠하게 살아왔다는것이 우리 보선족문단가족의 상황이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잔잔하다는 그 자체가 곧 평범무이함을 의미하고 선행의식, 초탈의식, 갱신의식의 결여를 의미하고 궁극적으로는 물의를 일으킬만한 작품(명작도 좋고 시비거리문 제작품도 좋다)들이 별반 없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편집부에선가 1등을 줄만한 작품이 없어 빈 자리로 남겼다는 이야기도 들은적 있지만 사실 지난해 조선족문단에는 괄목할만한 작품, 격절탄상할만한 작품이 별로없었다. 문단기후가 너무 순후하여 빼여난 작가와 작품을 낳지 못했는지 빼여난 작가와 작품이 없어 문단기후가 순후해졌는지 생각할수록 아리숭하지만 아무튼 그 주요책임을 평론계가 안아야 할것 같다. 공명정대하고 엄숙하면서도 뜨거움이 흐르는 평론이나 너른 마당쓸기나 반지르르한 겉치레가 아닌 구체작품에 정식호적을 붙이고(절대 림시호적이 아니다) 그 내면세계를 알뜰히 파헤친 평론, 한마디로 선도적역할을 하는 평론이 적었기때문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본다. 우리 평론이 좀 더 성실한 태도로 적극적이고 책임적인 자세로 나왔더라면 혹시 우리가 그저 그러루하다고 보고 무심히 스쳐지나왔던 작품들중에서 시비거리가 될만한 색다른 작품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또 가령 그런 새 맛이 나는 작품이 있었다 할 때 론단에 올려놓고 열을 올렸더라면 사방에서 과 을 느껴 문단이 지금보다는 훨씬 활기를 띠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만져주고 긁어주면서 편안히 잠재워주는것이 우리 흠이다. 그러니 추물도 푸물인지 모르고 난쟁이도 난쟁인줄 모르고 미인도 미인인줄 모른다. 이것은 좋은 징후가 아니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어제에 대한 만족의 일종 다른 모슴에지나지 않으면 현유를 부정하고 더 높은 문학봉우리를 점령할만한 용기가 없다늗데 대한 스스로의 투항에 다름아니며 명철보신의 대명사에 다름아니다. 포식의 만족감과 무조건적인 슨응에 매달리기보다는 항시 배고품을 느껴야 할것이고 모험을 동반한 엉뚱한 행위가 있어야 할것이고 그 대가를 선뜻이 치를만한 여유작작한 용기와 담략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제 구미에 맞게 생각해본다. 이것이 곧 문단이 쳄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가. 춘하추동이 선명한 속에서 일취월장하는 길이 아닐가, 진정으로 정상의 길에 들어서는 길이 아닐가. 그런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지난해의 묻능을 두고 얼마간 안위를 얻을수 있는것은 다행히도 문단의 고요한 호수에서 생생한 파문 몇쪼각을 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8월에 박화시인이 에 김성휘시비(詩碑(락성과 관련해 란 글을 실어 처음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글의 골짜는 한 시인이 詩碑를 세우는데 도대체 무슨 是非가 그리도 많으냐 하는것이였다. 이에 화답해 전국권 평론가도 (에 대한 是非 )라는 글을 써 두 번째 파문을 일으켰다. 그 골짜는 우리 문단에 문인상경, 문인우애의 분위기가 형성되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이어 감학철선생이 라는 글을 써 를 30년 우려먹는 현상이비단 [관계벼슬마당 ]이나 [관리사회]에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문단에도 역시 나타나고있다면서 세 번째 파문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잠잠하던 침묵의 귀퉁이가 조금 열리게 되었고 문단은 약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상술한 분들이 문단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준것이야말로 얼마난 반가운 일인가. 이분들의 글들은 각이 선명하고 날이 예리하여 문단에다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곰곰ㅎ ㅣ따지고보면 여기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세분의 글들은 평론으로서는 흠잡을나위없이 훌륭하지만 문단도덕에만 차중하여 열을 올리고 구체적인 작품에 대하여는 시야비야를 외면해버렸기에 작가와 작품을 키우는 작업ㅇ에 큰 도음을 줄수는 없었다. 문단의 기후와 문단의 도덕에 대해 운운하는것도 확실히 필요한것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있어야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선차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것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성실하고 랭정한 해중고 이로부터 기대되는 유망한 작가, 빼여진 작품들의 속출이지 이러저러한 여론에 대한 해명은 부차적인것 같다. 문단기후와 문단도덕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경우 까딱하면 불필요한 배척이 생기고 불화의 씨가 심어지는 등 평론의 붓끝이 엉뚱한 곩으로 향해질수 있다는것도 념두에 두어야 할것이다.
11    6월의 시첩에서 댓글:  조회:2333  추천:0  2012-06-18
6월의 시첩에서 -기울어진 저울대 ㅡ참여의식 요지음 시의 모습이 궁금하여 6호, 3호, 3호를 뒤적거려보았다.  우리의 시들은 점차 진정한 자아왕국으로 들어가고있고 그 자아왕국의 대문에 누구도 범접못하게 견고하고도 성스러운 잠을쇠를 잠그려 하고있다. 대부분 시인들이 자신을 그 왕국의 주인으로 임명하고 그 신 ※※ 울리는 당당한 자시와 목소리로 자기중심의 노래를 엮어가고있다. 총적으로 보아 주류를 점하는 밝은 색갈의 시들도 그렇고 지류를 이루는 흐린 색갈의 시들도  그렇고 기쁨이니 슬픔의 뿌리를 시인 자신의 **련결시킬뿐 객관세계와 크게 련력시키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자아중비을 떠나 참여의식으쪽으로  향하려는 시들은  감정의 촉수를 객관세계에로 뻗치며 대결으 양상을 띤다. 시인의 아믕속에서 괴여오르는 아픔이나 불만족  즉 심리불평형이 객관세계의 부조리때문이라고 느껴질 때 그 심리배설이 나무람, 원망, 트집, 한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또 충자와 폭로, 고발과 관계를 맺게 도니다. 세 잡지에 틀고앉은 6월의 시들을 보면 참여의식의 시가 근근히 세수 정도로서  시의 중량이 기본상 에 쏠리고 참여의식의 시들은 렬세와 위축에 빠지게 되였다.  
10    스스로 죽이기(2) ㅡ민족언어와 민족문자위기 댓글:  조회:3232  추천:11  2012-04-17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짓이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다. 남들의   핍박에 못이겨  죽는것은 동정과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남들이 살라고 극력 부추키는데도 굳이 죽겠다고 하는것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 이 글에서는 민족의 언어와 문자위기를 화두의  대상으로 삼는다, 중국은 56개민족으로 구성된  대가정이다. 이 대가정속에서 모든 민족은 일률로 평등하게 정치,경제,문화의 향수를 받으면서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진력하고있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소수민족정책이 잘된 나라로 평판이 나있다. 우선 행정에서 소수민족 집거지구에 자치구, 자치주,자치현을 설치하여  소수민족들이 각 분야에서 자유롭게 발전할수 있는 조건과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이러한 혜택적인 정책은 세계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미국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서는  소수민족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있다. 한때 구쏘련은 소수민족들에 대해 를  실시하여 마치도 쏘련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펴는것처럼 떠들었다, 얼핏 보면 소수민족들에게  이라는 나라를  선물하였으니 얼마나  통이 큰 소수민족정책인가. 허나 실질을 캐보면 껍대기는 풍성하고 화려하나 내막은 엉성하고 초라하고 창백하였다. 대로씨아주의를 강행하여 각 가맹곡화국에서 일률로 로씨야어를 사용하고 소수민족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강박적으로 금지시켰다. 쓰탈린도 분명히 소수민족인 그루지아아인인데 그가 어찌하여 대로씨아주의를 강행하면서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말살시키려 했는지 실로 모를 일이다. 쓰딸린의 대로씨아주의의 강행으로 이른바 사회주의 쏘련이라는 나라에서 모든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한 때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민족도 큰 피해를 받아 쏘련 이주 1세대가 우리 말과 글을 좀 알고있을뿐 2,3세대는 기본상 모르고있다. 민족은 혈통도 무시할수 없지만 주요하게는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자기의 문자와 언어를 모르면  민족기질과 민족혼이 갖추어질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사람은 민족구성원의 일원으로 될 자격이 없다. 그가 만약 자기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전혀 모르고 한결같이 다른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자기가 현재 사용하고있는 언어와 문자의 주인, 그 민족의 무리에 가담하여야 한다. 신규식선생은 1920년에  쓴 《한국혼》에서 이렇게  말한바있다. “민족혼이 없으면 나라가 있어도 없는것이요, 민족혼이 있으면 나라가 없어도 있는것이다. ” 뜻인즉  민족혼의 유무(有無)에 의해 민족의 생존과 파멸이 결정된다는것이다. 중국정부는 건국이래 시종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발전에 대해 큰 관심을 돌려왔다. 심지어 자기의  문자가 없는 어루춘족 같은 민족에게는 정부에서 새로이 문자를 만들어주어 민족혼을 지키도록 배려를 돌려주었다. 하다면 우리 민족은 어떠한가.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도 다른 소수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일관된 관심을 받아왔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세인이 공인하는 우수한 언어요, 문자다. 우리는 이로하여 무한한 자호와 긍지를 느끼고있다. 우리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날이 갈수록 세인들의 인정과 선호를 받고있다. 지금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조선어(한국어)계를 설치하였고 민간에서도 전례없던 조선어학습열조가 일어나고있다.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조선어(한국어)계를 설치한 대학이 백여개를 넘으며 적지 않은 나라의 고등학교들에서 조선어를 제2 혹은 제3 외국어로 배우고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민족공동체중의 어떤 사람들은 눈에 곰팽이가 끼였는지 보물을 보물인줄 모르고 마치 누더기인양 스스로 팽개치려고 하고있으니 한심해도 이만저만 한심한게 아니다. 정부에서는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라고 하는데 일부 사람들이 왜서 그 아름다운 민족어를 괄시하고 팽개치려는 하는지, 왜서 부득부득 스스로 죽이려고 하는지 그 저의가   참으로 궁금하다. 이런 사람들은 민족문화의 상실이 곧 민족의 사멸과 이어진다는 극히 간단한 도리도 모르고있는것  같다. 만약 알면서 그랬다면 그는 민족의 반역자이다. 우리 나라의 력사에서 이러한 사례를 찾아볼수 있다. 만족은 명나라를 멸한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한어와 한자를 통치언어로 정하고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포기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팔아서 《청》이라는 나라를 산것이다. 민족혼과 나라를 바꾼것이다. 그후 청나라가 망한후 어떻게 되였는가. 둥지도 잃고 알도 잃고 나무까지도 잃고말았다. 오늘 만족은 자기의 언어와 문자가 없다. 정부에서 만족어복원사업을 시도했으나 만족어에 능한 학자가 없어 큰 가망이 없다고 한다. 오늘 만족은 말이 만족이지 사실 명실상부한 민족이 아니다. 단지 호적상의 만족으로, 껍대기로만 존재하면서 실상의 아닌 허상으로서의 민족구실을 할뿐이다.   만족은 한개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려다가 모든것을 잃고 후손들에게 천추에 다    못갚을 큰 죄를 남기고말았으니이것이야말로 만족의 최대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이제 우리 민족을 말해보자. 정부에서는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소수민족지구에서는 해당 소수민족언어와 문자를 첫자리 놓게 하였다. 그 관철의 구체적인 일환으로 간판에서 우에다 민족어를 쓰고 밑에다 전국  공용인 한자를  쓰도록 규정했다. 이것은 분명 히소수민족에 대한 크나큰 배려이다. 헌데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중에 이런 배려를 배려인줄 모르고 싫다고 거절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으니 참 기막힌 일이다. 그런 사람들로 하여 민족어의 존엄과 위상이 나날이 저락되고있다. 사람들은 주덕해  시기를 그리워하고있다. 그때는 연변지구에서는 그 어디를 가든 친근하고 정다운 우리 말이 으로 행세하여 짜장 조선족자치주다왔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후부터 점차 민족문화를 홀시하는 일부 어르신네가 나타나 지위에 있던 조선어, 조선말이 급기야 의 지위로 일락천장하고말았다. 지금 줄느런히 걸린 간판만을 보면 일색으로 우에는 조선어로 되여있어 소수민족정책관철이 아주 잘된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일단 내막을 파고들면 판판 다르다. 은행,호텔,기차역,공안국, 법정, 등에 가서 일을 보려면  한어를 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모든 크고작은 회의는 한어로 하고 일체 문건이 한어로 작성되고 하달된다. 회의 참가자중 조선족이 50-60명이고 한족이 한둘이 끼여도 한어로 회의를 진행한다. 마치도 “모든 회의를 일률로 한어로 하라”는 국무원의 최고지시나 비밀지령을 받은것처럼말이다. 모든 일에서 한어를 모르면 안되니 한어를 잘하는 사람은 큰 불편이 없지만 로인들이나 한자나 한어에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모든것이 불가능한지라 큰 불편을 겪는다. 특히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본지통역이 없이는 만사불형통이다. 그들은 조선족자치주에서 조선말이 통하지 않으니 참 괴상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례는 중국소수민족정책의 형상에 먹칠을 하는것으로 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을 망신시킨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괄시한 대가로 조선어무용론이 태여나 적지 않은 조선족가정들에서 자녀들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바람이 불어 교육위기가 우려되고있는 상황이며 이러한 교육위기가 또 문학,예술, 출판업계에까지 파급되고있는 사정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깊이 사고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우리는 우수하고 귀중한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아끼도 사랑해야 한다. 어느땐가 청도에서 외자유치회의를 했었는데 그때 내몽골 포두시와 연길시에서도 참가했다. 포두시의 몽골족시장은 몽골어로 발언하고 비서가 번역하게 하였는데 연길시의 조선족시장은 직접 한어로 연설했다. 그 당시 회장에 있던 조선족기업인들이 “저 자식이 조선족이 맞긴 맞아?” 하면서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고 그 시장은 외자유치에서 빈 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포두의 몽골족 시장이 한어가 약해서 몽골어로 발언했겠는가? 아니다. 민족의 위상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민족어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민족어를 말살한 덕으로 정부의 칭찬을 바랄지 몰라도 중국정부는 결코 소수민족 자신이 자기의 문화를 훼멸하고 동화시키는 행위를 결코 찬성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위배되기때문이다. 정부는 겉치례만 화려한 민족자치를 바라지 않을것이며 속과 겉이   모두 튼실한 그러한 명실상부한, 진짜로 된 민족자치를  바랄것이다. 우리 민족이 나라의 건설에서 큰 기여를 하자면  자신을 충실히 하여야 한다. 그 충실속에 언어와 문자를 비롯한 제반 문화건설도 포함된다. 이쯤하면 구태여 긴 말이 필요없다.우리는 우수하고 귀중한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아끼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하는 길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캐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우리 민족공동체 성원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고 특히 민족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이 되여 우리 말, 우리 글 지키기에 총궐기 하여야 할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을 지키는 길이요, 우리 민족의 부강창성을 이룩하는 길이 될것이다.
9    스스로 죽이기(1) ㅡ 민족인구위기 댓글:  조회:2997  추천:16  2012-03-26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꼭 말하지 말았으면 하는것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꼭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어떤 사람들은 회피하고 감추고 싶어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당당히 나서서 진실을 파내고싶어한다. 오늘의 작은 화두는 민족인구위기에 관한 얘기가 될터인데 민족인구위기를 조장한 일부 장본인들은 이런것을 꺼내는것을 무척 꺼려하고 두려워할것이지만 민족의 오늘과 미래를 걱정하는 민족의 지성인들은 그것을 꼭 끄집어내여 꼬집어야 직성이 풀릴것이다. 이러한 꼬집음이 “귀한 자식 매 한매 더 때린다”는 선의의 다른 한 표현이므로  림시는 아플지 몰라도 민족의 렬근성을 치유하고  민족의 번영창성을 위하서는 필요적실한 약임을 귀띰하고싶다. 거두절필하고, 지금 우리 조선족은 인구의 감소를 두고  큰 몸살을 앓고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기가 그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완전히 스스로가 자초한 자작지얼(自作之孼)이고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 무지한 소행의 결과라는데서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아니러니하고 또 슬프기도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초기  전 중국의 인구는 4억 5천만이였고 조선족인구는 2백 10여만이 좀 넘었다. 63년이 지난 오늘은 어떤가. 중국의 인구는 3배가 훨씬 넘어 14억이지만 우리 민족의 인구는 고작 2백만이 될까말까 하는 가련한 꼴이다. 증가는커녕 뒤걸음을 친것이다. 하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서 돋은것인가? 계획생육이다. 1955년 1월, 북경대학 교장이며 유명한 경제학 박사인 마인초(馬寅初)가 《신인구론》이라는 책을 써 계획생육이라는 새로운 인구리론을 주장했다. 그 당시 마인초가 언감생심 “사람이 많으면 힘이 크다”(人多力量大)라는 모택동의  인구론에 맞섰으니 무사할리 있었겠는가. 마인초의 《신인구론》은 중국의 실정에 어울리는 진보적인 론리이고 모택동의  인구론은 중국의 실정과 어긋나는 그릇된것이였지만 마인초는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는 를 반대한 죄로 반동으로 락인되여  북경대학교장직에서 해임되였다. 1979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후 마인초의《신인구론》이 진리로 확증되여 전국적으로 전대미문의 계획생육 대열조가 일어났다. 중국정부는 계회생육을 중요한 국책의 하나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계획생육은 인구가 과잉속도로 늘어나는 한족을 상대한것이였지 소수민족을 겨냥한것은 아니였다. 헌데 계획생육에서  전국적으로 제일 앞장에 서서 내달린것이 조선족, 특히는 연변지구였다. 연변지구는 해마다 계획생육모범이 되여 찬란한 면류관을 썼다.아주 철저하게, 아주 견결하게, 아주 확고하게 계획생육정책을 밀고나갔다. 심지어는 세번째 아이를 낳으려고 심심산골에 숨어  분만을 준비하는 임신부를 찾아내여 배를 가르고 8개월이 넘는 아이를 류산시킨, 이러루한 사건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 결과 지도자들은 해마다 계혜획육모범이 되여 꽃다발을 달고 상장을 타고 급을 췄지만 조선족인구는 처참할정도로 내리막기을 걸었다. 몽고족, 위글족,장족들은 계획생육을 하지 않아 인구가 오뉴월의 오이덩굴처럼 잘도 뻗어나갔건만 조선족인구는 십년 가물을 만나 곡식처럼 난쟁이꼴을 면하지 못했다.. 이것은 죄악이다. 해방후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들은 인구가 거의 3.5배 증가되였만 조선족인구는 줄어들었다. 다른 민족의 비례대로 성장했더라면 한다면 지금쯤 우리 민족의 인구가  적어도  6백만 내지 7백만을 웃돌아야 정상이다. 지금 우리 민족은 인구가 2백여만이지만   중국의 사회주의건설에서 큰 기여를  하는 과학가,정치가. 군사가, 예술가들이 비례적으로 그 어느 소수민족들보다 많다. 가령 우리의 지금 인구가 6백만이나 7백만이 된다고 한다면 필연토 지금보다  3,4배가 넘는 인재들이  나타나 사회주의  건설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을것이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 중국처럼 소수민족정책이 잘 된 나라는 없다. 중국정부는 종래로 소수민족을 보고 아이를 적게 낳으라고 강요했거나 명령한적이 한번도 없다. 모두가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그 뿌리를 캐보면 우리 민족이 무엇이나 어디에서나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기질때문이 아닌가 싶다. 앞장서기가   다 좋은것이 아니다. 좋은 일에서는 앞장서야 하지만 나쁜 일에서는 꼴찌면 꼴찌일수록 좋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이 참가하였고 제일 피를 많이 흘렸고 제일 많이 희생되였으며 제일 큰  공을 세웠다. 이런 위대한 일에서는 천번 만번 앞장서도 과분하지 않다. 그런데 반우파투쟁과 대약진, 문화대혁명에서도 가장 앞장에 서서 우쭐거린것도 조선족이다. 원인은 세가지, 하나는  언제나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기질때문이고 다음은 판단에 대한 무지이고 그 다음은 상급의 지시라면 오금을 못펴고 무조건 복종하고 칭찬을 받기 좋아하는 허영심때문이다. 한 민족의 발전은  민족공동체를 전제로 하며  민족공동체는  개개인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없이 어찌 민족공동체를 운운할수 있으며 더구나 민족의 흥성이니 번영창성이니 하는것을 론할수 있겠는가. 조선족인구의  위기, 이를 두고 우리 민족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되고 함께 가슴 아파해야 되고 함께 슬퍼해야 되고 함께 방도를 모색해야 될것이다. 후대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너무 늦지는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인구줄이기운동이 아니라  아니라 인구늘이기운동에 앞장서면 어떨가.     
8    인내의 철학 댓글:  조회:2631  추천:5  2012-03-23
일력을 들추어보니 어느덧 립춘이 코앞이다. 립춘, 얼마나 포근하고 따스한 이름이냐. 립춘을 생각하니 금시 사쁜사쁜 봄이 걸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듯 싶고  아지랑이가 나풀나풀 날아와 온몸을 감싸안는듯 싶다. 아마도 석달이라는 기나긴 기다림끝에 만나게 되는 봄이여서 그 즐거움이 배가 되는것이리라. 봄과 얽힌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고려시대의 선비들은 겨울이 시작되면 큰 종이에다 꽃송이가 백개 달린  매화나무를 그려넣고  하루밤 자고나면 한송이씩 지워버렸다. 100송이의 매화꽃이 다   지워지는 날이면 드디여 창밖에서 진짜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다.  급해하지 않고 여유작작하게  차분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릴줄 아는 智慧로운 그 마음 가짐이 참으로 넉넉하고 군자답다. 흔히 우리 민족을 일컬어 “빨리빨리”민족, 한족을 일컬어 “만만디” 민족이라고 말들 한다. “빨리빨리”라는 말속에는 칭찬보다는 모든것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한다는 비하적인 색채가 더 많이 섞여있다.  허물을 캐면 듣기 싫지만 승인할것은 과감하게  승인하여야 한다. 세상에 우리 민족처럼 이사를 자주 하는 민족도 드물다. 우리 민족은 어디에 가면 느긋이 안착하지 못하고 쩍하면 이사짐을 챙긴다. 회사에 입사했어도 어느 떡이  더  클가 하여 자주 자리를 옮기는 페단도 많다. 다른 민족한테도 이런 현상이 없진 않겠지만 상대적으로 우리 민족이 더한것 같다.. 인내가 부족하기때문이다. 인내가 없으니 때론 남한테 가볍게 보이고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잃을 때도 있게 된다. 헌데 뿌리를 캐보면 우리 민족은  사실 아주 자랑할만한 인내의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탄생초기부터 인내의 철학에 뿌리를 두었으니말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가 그 증거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삼백개를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세상을 다스릴 때 곰 한마리와 범 한마리가 한굴에서 살고있었다. 그들이 인간이 되고싶어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1개를 주면서 100일간 꾸준히 먹으면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그 말에 응해 그날부터 곰과 범은 사람이 되고자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급한 범은 견뎌내지 못하고 중도이페하고 곰은 환웅이 시키는대로 끝까지 견지하여 마침내 아릿다운 웅녀로 되여 환웅과 배필을 묻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곧 단군인 왕검이다. 곰은 100일간의 인고를 거쳐 우리의 시조모로 된것이다. 인내의 철학에 뿌리를 둔 민족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유독 우리 민족 하나뿐이 아닌가싶다. 인내는 귀중한 진리이고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이다. 인내는 큰 일에서도 필요하지만 작은 일에서도 필요한바 거창한 일에서 성공을 할수 있는 한 요인으로 작동할수 있을뿐아니라 친구지간의 우정, 이웃간의 화목, 가정의 우애 등을 도모하는데서도 필요하다. 조상의 인내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거니 우리도 항상 인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가.    
7    룡의해 임진년에는 합창을 댓글:  조회:2080  추천:3  2012-03-13
독창도 독주도 듣기 좋지만 그 장중함과 우미함과 장쾌미와 거창미에서는 합창이나 합주에 비길바가 못된다.  합창이나 합주는 음악의 고급형식으로서  하모니(화음)를 주요형식으로 한다. 하모니란 여러개의  높이가 같지 않은  음이 동시에 울리는것을 말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이나 차이꼽스끼의 교향곡 《비창》 같은 명곡들을 음미하면 무어라고 딱히 짚어서 형언할수 없는 사이비한 힘이 거대한 촉수마냥 심혼을 황홀케 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이것이 바로 조화의 미학이요 어울림의  미학이다. 조화와 어울림보다 더 큰 파워를 발휘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알고 보면 자연이 위대하고 거창한것은 바로 부동한 삼라만상이 조화롭게 어울려 살고있기때문이다. 돌, 산, 풀, 꽃, 새, 강, 물 ,짐승, 구름, 달, 해, 인간 등에서 단순히 어느 하나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연이 아니며  이것들 중에 하나만 빠져도 완전무결한 자연은 아닐것이다. 이처럼 자연에 있어서  존재자체가 형형색색의 부동한 물체들로 이루어진 화합의 총체인것처럼 자연에서의 소리도 수많은 화음으로 구성된 하나이 거대한 합창이요 교향곡이다. 자장가처럼 조용히 흐르는 시내물소리, 바위를 후려치는 파도의 장쾌한 소리,  온갖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풀벌레들의 정겨운 울음소리,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 …… 등의 각가지 소리들이 한데 얼싸안고 장엄무비한  대자연의 합창, 대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고있는것이다. 임신년의 첫아침, 하냥 하는 버릇대로 산등성에 오르니 까치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참새들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소나무숲을 핥으며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들린다. 매번 느끼는바지만 이것이야야말로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선물인가. 대자연이 부르는 합창을 돈 한푼 안내고 감상하는것 자체가 얼마나 사치하고 호화스로운것인가. 대자연의 [합창]을 감상하다가 문득 일년전에 우리 민족은  은 잘 하나 은 잘 못한다고  하던 한 한족문인이 말이 생각났다. 단결이 잘 안되는 우리 민족을 가볍게 꼬짚는 말이였다.  나는 그때 그런 말을 듣고서도 반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변명거리가 궁했기때문이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용감하고 지혜롭고 총명하여 두번째 유태인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사실 우리 민족은 긍지와 자호를 가질만한 민족이다. 그런데 혼자서는 재기를 훌륭히 발휘하는데 일단 어울려지면 문제가 생긴다. 다  그런것은 아니로되  말썽이 많고 단결이 잘 안도는것이 우리 민족의  큰 흠이다. 항일전쟁시기에 주은래, 곽말약 등 동지들이 조선족혁명투사들을 고도로 찬양하면서도 종파투쟁과  불단결현상을 두고 비판한적이 있다.   [독창]도 잘 해야 하려니와 민족공동체가 번영하자면 특히 [합창]을  잘 불러야 한다.  삼라만상이 조화롭게 어울려  대자연이 되고 대교향곡을 연주하듯이 인간도 어울야만이 큰 파워를 발산할수 있다. 어울리자면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의 존재가치를 긍정해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아닌 공생공존(共生共存)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오늘 중국공산당에서 [화해사회]를 국책의 근본으로 삼고 그것의  구현을 호소하고있는데 이는 바로 자연의 섭리와 순리에 따른 훌룽한 정책이라 할수 있겠다. 새로운 한해가 서서히 얼굴을 내밀고있다. 우리 민족 성원 모두가 자기의 총명고 지혜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독창]도 잘 하는 한편 좀더 힘을 기울려 [합창]까지 잘 한다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창창할것이고 전도는 양양할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55개 민족중에서   일등 민족으로 부상할수도 있을것이다. 용기와 용맹과 위엄을 상징하는 룡의 해 임신년에 우리 모두 합창을 불러보자, 하늘땅을  쩡쩡 울리며  온 세상이 부러워 하도록 멋지에  불러보자!    
6    조명희 시의 양상고찰 댓글:  조회:1407  추천:7  2011-06-22
조명희 시의   양상고찰 김룡운 조명희는 한국문학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시인으로 “프로문학의 선구자, 분단의 장벽으로 매몰된 작가, 문학사에서 실종된 작가 등으로 단순하게 정의할수 없는 다양한 의미망을 가진 작가이다.”1)(민병기, <포석 조명희의 생애와 문학> <포석 조명희 전집> 447쪽 동양일보 출판국) 조명희는 운이 나쁘게 한국문학사에서는 근 반세기동안 파묻혀 있었지만 조선문학사에서는 20년대 카프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으로 높이 추대되여 홍명희, 리기영, 최서해 강경애 등과 더불어 큰 비중으로 다루어져왔다. 단지 1938년도에 쓰딸린 정권에 의해 일본간첩죄로 총살당했다는 사실만은 숨겨왔다. 조명희의 대표작 <락동강>은 광복후 줄곧 조선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올랐고 중국조선족고중학교 교과서에서도 <락동강>이 올라 조선과 중국조선족에게는 조명희가 결코 낯선 존재가 아니였다. 그러나 조명희의 시와 희곡, 수필 등에 대해서는 자상히 소개된 것이 없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해금문학 조치가 이루어져 포석회가 생기고 <조명희전집>이 나오면서부터 중국조선족문학권에서도 조명희의 옹근 문학을 접촉할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였다. 선행연구자들이 이미 조명희의 문학에 대해  값에 해당하는 귀중한 가치평가를 하였다. 하지만 조명희의 시를 전면적으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에서 어느정도 미흡한 점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보완의 일환으로 동경에서 쓴 초기시  <노수애음>부와 <혈면오음>부, 조선에 와서 쓴 중기시중에서 <봄잔디 위에서>부, 쏘련에 가서 쓴 말기시들을   가지고 조명희 시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1.     방황과 반항- <노수애음>과 <혈면오음> 조명희의 초기시들은 내용상 거개가 방황, 고민 고독, 저항의 양상을 보인다. 그 까닭은 주로 성장환경과 사회제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조명희의 간력을 보면 그 가정이 원래는 대단한 권력가이고 대부자였지만 한일합명 이후 몰락하였고 네살에 부친을 잃었고 우국지사였던 큰형 조공희가 지리산에 칩거한다. 한마디로 가정의 몰락과 주권의 상실 ,부친이 사망과  큰형의 칩거 등이 어린 조명희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 후에 그가 무산계급의 작가로  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다음 동경에 간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와중에 엄혹한 현실앞에서 <로동인가? 문학인가?>를 두고 심한 허탈과 모순에서 허덕인다. 이상이 성장환경으로부터 돋아난 방황과  반항이라면 다음은 사회제도에 대한 불만에서 야기된 방황과 반항이다. 일본에 간후  사회제도에 대해 불만을 품고 학생운동에 뛰여든다. 하지만 명확한 판단을 할수 없어 결국 환멸을 느낀다. 그 시기를 조명희는 이렇게 회상하고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환멸이 닥쳤다. 동지에 대한 환멸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임이다. 유심론자들이 으레 하는 말마따나 사회개조보다도 인심개조가 더 급하다고 나는  부르짖었다. 2)([생활기록의 단편] [조명희전집] 331쪽) 이리하여 조명희가 택한 길은 반항이다. “그리하여 나는 반항의 길을 걷게 되였다. 사람이라면 욕하고 저주만 하려 하였다. 그  다음에는 자기 차례다. 자기의 추악면을 들여다 볼 때, 남에게 하던 욕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허무다, 절망이다, 말기 자연주의 문학사상이 가져오는 과학적숙명이다.…때카니즘을 잡을까? 종교적신비주의를 잡을 까 ? 더 한걸음 반항이다. 현실도피다. 신비의 문을 두드리라. 알수 없는 어떤 엄숙한 님앞에, 신앞에 엎드리라. 빌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수 없다.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자기를 구원해 낼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3)(동상) 이상의 고백은 초기시들, <노수애음>부와 <어둠의 춤>부의 시들을 해석하는데서 필수적인 열쇠로 된다. 이 시기의 시들은 완전한 사실주의시들이 아니고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에서 심하게 고민하면서 해탈과 허무, 회의 등을 반항으로 뿜어내는 강렬한 스트레스이다. 하기에 이 시기의  시들을 줄잡아 사실주의시로  보는 어떤 평자들의 견해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듯 보인다.     초기의   시들은 <노수애음>( 蘆水哀音) 부와 <어둠의 춤>부로 나뉘여있다. 우선 <노수애음>이라는 표제부터 눈박아볼 필요가 있다. 조명희의 호가 노적(蘆笛)임을 감안하면 < 蘆水哀音)>을 “갈대(내)가 물가(이 세상에서)에서 슬피 우는 소리”로 풀이할수 있다. 이것은 생활난에 모대기고 사상적으로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실의에 빠졌던 당시의 작가의 흔들리던 심리와도 잘 어울린다.  이런 까닭으로 <노수애음>부의 시들은 차겁고 회색적이고 많이는 소멸의 미학에 기대고있다..   성근 낙목형해(落木形骸) 사이 등불은 냉막(冷寞)으로 꿈으로 비쳐 너의 언 가슴속으로 쉬어나오는 한숨같이 지면을 스쳐가는 바람에 구르는 잎 사르르 굴러 또 사르르 스러져가는 세상 외로운 자의 넋인가 아아 황금의 면영(面影)은 자취도 없다 지금은 가을이다 찬밤이다 바이올린이 떠는 소리도 굴러온 이 마음은 시들은 풀속 벌레의 꿈같다 바람이 부닥치는 외잎 소리에도 혼이 사라지랴든다   -<떨어지는 가을> 시적분위기가 아주 우울하고 차겁다. 입 떨어진 <나무해골 > 사이로 한숨을 타고 나뭇잎 하나가 굴러가면서 스러져가는 세상, 외로운 자의 넋으로 흐느낀다. 원래는 황금의 면영으로 되여야 제대로 된 세상이고 제대로 된 가을인데 지금의 세상은  앙상한 낙목형해의 음산한 몰골이다. 하여 시인의 마음은 “시들은 풀속 벌레의  꿈같이 / 바람이 부는 외잎 소리에도 혼이 사라지랴든다” <고독의 가을>은 고독과 방황의 정서가 더 적라라하게 더 명료하고 더 구체적으 표출되고있는 장시다. …….. 나의 주가( 住家)ㅡ 고독의 세계 그곳은 ‛황량(荒凉)과 묘막(渺漠) 여기가 너의 방황 임종의 세계다, 하는 사막 그러나 거기에 알수 없는 신비의 금자탑이 흰 구름 위에 높이 솟아 가없는 회색 안개 속에 감추어 있어 그 꼭대기 위에 요염의 애인이 초록색 고운 면사를 가리고 나의 어린 영혼 돌아보며 손짓하다 …….. 오오 사라져가거라 아로새긴 환영아 사막에 곤두박질던 꿈아 대밭에 피투성이 하던 기억아 사라져 가거라 제발 사라져 다만 나는 노래하리라 또 노래 하리라 -<고독의 가을 > 일부 시적 주인공은 자기가 살 집을 찾아 헤매인다. 찾고본즉 아득한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은 <고독>이란 집인데 < 荒凉과 渺漠 여기가 너의 방황 임종의 세계다> 하는 <문패>가 걸려있다. 그 집 위에는 신비의 금자탑이 솟아있고 그 탑 위에서 면사포를 가린 요염한 애인이 <나의 어린 령혼을 돌아보며 손짓한다>.  세상을 개조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나 합당한 방도와 진로를 찾지 못해 헤매이는 당시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고있다. <금자탑>이나 <애인>은 바로 시인이 찾고자 하는 유토아피아, 그것에 다름아니다. 시인은 금자탑을 찾아, 애인을 찾아 광막한 사막을 필사적으로  헤매이나 끝내는 찾지 못하고 광막한 사막에 쓰려져 슬피 운다. 급기야 시인은 이제껏 자기가 바라던 아름다은 꿈ㅡ <금자탑>이나 <애인>이 한낱 허무의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고 세상을 한탄하며 자기를 저주하며 구슬피  노래부른다   오오 사라져 가거라 아로새긴 환영아 사막에 곤두박질하던 꿈아 대밭에 피투성이 하던 기억아 사라져 가거라 제발 사라져 다만 나는 노래하리라 또 노래 하리라. -<고독의 가을> 시인은 <제발 사라져 가라고>고 하면서도 <또 노래하리라>고 웨친다. 이 역설적인 울림에서 비록 실패하였지만 계속 멈추지 않고 리상세계를 찾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꿋꿋이 일어서고있다. <고독자>에서도 실패자, 외로운자, 방황자로서의 모습이 력력히 엿보인다.   밤중달이 그의 그림자를 조상(吊丧)함에 그는 가슴을 안고 시들은 풀위에 쓰러지다 바람이 마른 수풀에 울어지날제 낙엽의 넋을 좇아 혼을 끊도다 -<고독자> 일부 시적화자는 세상으로부터 언녕 버려진  존재, 죽은 존재로 되고 화자와 세계가 완전히 단절의 상태에 이른다. 이 시기에 창작된 시들 <노수애음>부와 <어둠춤>부의 시들에는 <낙엽>, <사라지다>,<쓰러지다>,<죽음> ,<떠나가다>등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면서 소멸의 미학에 기대게 힌다. <어둠의 춤>부의 시들은 고독, 방황, 반항 등에서 <노수애음>부와 많은  상사성을 보이나 리듬이 더 굵고 격정이 더 세차다. 그리고 다듬지 않아보이는 그곳에 오히려 더 진실한 감정이 흘러나오는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둠의 춤>부의 시들중에서 수작중의 하나가 <혈면오음>(血面嗚音)인데 제목부터가 <노수애음>에 비해 더 격렬하고 처절하고 선뜻한 감을 준다. <노수애음>이 잔잔한 물처럼 흐르는 서글픈 노래라면 <혈면오음>은 피투성이 얼굴의 사나이가 웨치는 피맺힌 통곡소리라고 할수 잆다.   …….. 아아 나는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 현실이란 잿더미를 디디고 서서 허무한 나락에 혼을 굴리어 주려 죽은 갈가마귀의 넋을 길들일 곳이 있지 썩은 외가지의 그늘조차 부딪칠데 없어라   우주란 영원의 미(迷)의 명부(冥府) 인세란 영구(永久)의 고(苦)의 환권(环圈) 진리란 허황한 미지의 음부(阴府) 시인이 감지하고있는 일제치하의 현실은 잿더미이고 나락이다. 이런 세상이기에 시인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부정한다. 우주란것도 한낱 명부(冥府:염라대왕이 사는곳)에 지나지 않고 인세란것도 인간들을 몰아넣은  고통의 울타리에 자나지 않고 진리란것도 한낱 지옥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문학사상 20년대 초기에 쓴시들 중 세상을 이와 같이 철저하게, 용감하게 부정한 시는 아마 없는줄로 안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을 뒤엎기 위해 싸울것을 맹세한다.  “눈먼 광승(狂僧)의 피 흘린 발자취를 따르리라 ” 그러나 투쟁결심은 굳으나 아직까지 방황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순 없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눈먼 광승>이라는 구절이다. 。“눈먼 광승(狂僧)의 피 흘린 발자취를 따르리라 ”는 이런 사상이 훗날 조명희가 무산계급작가로 되는 뿌리가 되였을것이다. 보다싶이 동경류학시 쓴 초기시들은 내용상 방황과 고독, 반항이 많으며 미학적으로는 소멸의 미학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시들에는 <신>, <기도> 등의 시어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오리무중에서 길을 찾는 방법중의 하나였을것이다.  총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시들은 완전하 자아를 찾지 못한, 그리하여 부득불 방황과 고독과 반항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아니될 그런 복합적인 모습의 시들이라 하겠다. 이런 분석은 이  시기에 대한  조명희의 회상ㅡ  인간의 힘, 자기의 힘으로는 구원해낼수 없어 반항은 하면서도 현실도피도 하려 했고 신비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신 앞에 엎드려 빌기도 했다는 시인의 고백과도 사개가 맞물린다. 2.     생명례찬과  신랑만주의경향- <봄잔디 위에서>부   동경에서 조선에 돌아와 쓴 시들은 시풍이 많은 정도로 바뀐다. 동경시기의 시들이 암울함과 차거움, 반항적정서가 주류인데 반해 조선에 와 쓴 시 <범잔디위에>부의 대부분의   시들이 잔잔하고 신비하고  따스하고 밝고 명랑하다. 이전에 세상을 랭혹하게 보던 날카로운 눈초리가 온화하고 정다운 눈길로 바뀐다. 물론 귀국하여 쓴 시들중 <봄잔디위에>부를 제외하고는 고민 ,현실비판, 방황, 반항 등을 다룬 시들이 여전히 많지만 이러한 시들의 성격이 동경에서 쓴 <노수애음>부와 <혈면오음>부의 시풍격과 상사한데가 많으므로 함께 다루지 않고 이 부분에서는 다만 새로운 시풍으로 눈길을 끄는 <봄잔디위에> 부에 실린 시들만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조선에 와서 쓴 초기시들의 시풍이 변한 까닭을 작자의 고백에서 찾아볼수 있다. “자기의 생각의 걸음은 점점 더 회색 안개속으로 들어만 가고있다. 절대 고독의 세계로 혼자 들어가자. 그 광막한 고독의 세계에서 무릎 꿇고 눈 감고 앉아 명상하자. 가슴속에서 물 밀려나온는 고독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기도하자. 그 기도의  노래를  읊자.”4)([생활기록의 단편] 조명희 전집 328쪽)    그 기도의 노래의 결과가 바로 조선에 돌아와서 쓴 시들    <봄잔디위에서>부에 실린 시들이다. 조선에 돌아온 후 시인은 지난 날을 점검하면서 경건한 구도자의 자세로 <수련>에 몰입한다. 수련을 통해 생명과 인간과 우주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며 따라서 인간과 우주를 보다 맑고 밝은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이 시기 조명희   시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타골의 시 <기탄젤리>이다. 여기서 조명희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비와 사랑, 우주에 대한  경건함을  배운다. 그러나 이런 시기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극심한 생활고에 모대기자  “이때까지 쌓아왔던 관념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 ” “해  타골류의  신랑만주의냐, 그렇지 않으며 고리끼류사실주의냐? ”5)(동상)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주의다, 현실에 부닺치자, 뚫고 나가자”는 쪽으로 인생의 키를 돌린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르죠아관념병>에 걸렸다는 조소ㅡ가능하게 타골의 영향을 받은 조명희의 시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일것이다ㅡ를 받자 결심이 더욱 굳어진다. “현실을 비판하고 체험하며 지식위에 사상의 기초를 쌓자”6)(동상 333쪽)   가난한 자에게 가장 유혹적인 것이 사회주의다. 당시 일제치하의 조선은 너무나 암담하여 인구의 80%되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였다. 이런 현실에서 <착취계급을 타도하고 모두가 골고루 잘 살자>는 사회주의 구호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지 않을리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여서 항일과 사회주의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개념으로 간주되였다. 조명희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고 할수 있다.  <현실을 해부하고 비판하자>고 결심을 내린 후 조명희는 조선에 돌아와 쓰기 시작했던 타골식의 신랑만주의를 팽개치고  날카로운 현실반항시ㅡ <내 령혼의 한쪽 기행>을 쓴다.   굴종이냐-방랑이냐 그 무엇이냐 박암(薄暗)의 창공이 새로 열리며 방랑! 방랑! 쇠북소리 같이 울려오다 옳다! 방랑이다 내 령(灵)은 여기서 길봇짐 싸다   -<내 령혼의 한쪽 기행>  이 시에서의 방랑은 동경시절의 방향없던 그런 방랑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준비된, 쏘련에로의 망명과 이어진 방랑이다. 그래서 <길봇짐 싸다>를 읽을 때 눈물겨웁다. 어찌보면 그는 쓰딸린한테 가 죽으려고 길봇짐을 쌌던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의 마지막 시 <무제>를 남긴다.   어둠에 사는 인간일수록 밝음이 더 그리웁다 자연이 더 그리웁다 산 생명이 펄펄 뛰노는 생활이 몹시 그리웁다 그러나 우리는 한마디 말을 더 하여두자 “어둠에 사는 자는 희미한 빛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 큰 광명이 아니면 차리리 큰 어둠을 바란다 어둠을 지쳐가자 어둠을 지쳐가 그리운 햇빛을 보기 위하여, 그리운 그를 만나기 위하여 이 기나긴 어둠을  전사같이 지쳐 나가자   -<무제>일부   <햇빛>과 <그>는 조명희가 동경하여 마지않던, 착취 없고 살기 좋은 리상세계, 구체적으로는 당시의 쏘련일것이다. <무제>를 국내에서의 마지막 시로 매듭짓고 <전사>임을 선언한 후 소설창작으로 전격 방향을 바꾸었고 결과 처녀작 <땅속으로>를 기점으로 당시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락동강”을 창작한다.    조명희가 타골류의 신랑만주의를 팽개친 것은 어찌보면 비극이다. 조명희는 시집 <봄잔디위에>를 출간한후 시를 전혀 쓰지 않고 소설창작에만   전념하다가 쏘련에 가서 다시 시창작을 하지만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는바 <봄잔디위에>를 시작과 끝으로 하여 조명희의 진정한 시문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고 말할수 있다.  <성숙의 축복>은 하찮은 생물에다 생명의 의의를 부여함으로써 불교적사랑의 경지를 구축한다. <노수애음>이나 < 어둠의 춤>에서 가을이 조락과 사멸의 이미지로 많이 이어지지만 <성숙의 축복>이 와서는 생명례찬으로 된다.    모든 이삭들은 고개를 숙여 ‛땅의 어머니여! 우리는 다시 그대에게로 돌아가노라    동무여 고개 숙여 기도하자 저 모든 이삭들과 한가지로… -<성숙의 축복>   땅에서 태여나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륜회의식, 어머니는 땅이면서 이 세상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하는 거룩한 절대자로 상징된다.    <경이>(惊异)는 조명희의 시작품중에서 가장 우수한 시라고 볼수 있다.    어머니 좀 들어주서요  저 황혼(黄昏)의 이야기를  개천 물소리도 더 한층 가늘어졌나이다  숲 사이에 어둠이 엿보아 들고  나무 나무들도 다 기도(祈祷) 드릴 때입니다    어머니 좀 들어주서요  손잡고 귀 기울여 주서요 저 담 아래 밤나무에 아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뚝” 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우주(宇宙)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합니다 등(灯)불을 켜 가지고 오서요 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가십시다   -<경이>전문 첫련은 새 생명이 태여나기 직전의 분위기인데 아주 고요하고 조용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마음이 사뭇 경건해진다. 새 생명의 탄생은 신비와 거룩함을  동반한다. 하기에 어둠도 가만히 엿보고 개천물도 소리 죽여 조심조심 흐른다. 그리고 모든 나무들이 탄생을 고대하며 엄숙하게 기도를 드린다. 둘째련은 탄생과 영접을 노래한다. 엄숙하고 경건한 기도가 끝나자 아람 하나가, 새 생명 하나가 <뚝>하고 땅에 떨어지며  우주의 새 아들이 고고성을 알린다. 그 신비하고 황홀한 정경을 보고 시적주인공은 <등불을 켜 가지고>, < 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가십시다>며 어머니에게 권고한다. 땅우에 떨어진 밤 한톨에서 위대한 생명의 탄생을 보아내는 시인의 심경이 대견스럽고 미쁘다. 이 시에는 불교의 화업사상의 후광과 생명찬미의 사상이 잔잔히 흐르고있다. 이 시에서 어머니는 여러가지 복합적의미를 안고있다.  이에 대해 민병기 교수가 <어머니의 이미지는 종교의 의미와 모성애적의미, 우주적의미, 대지적의미, 천상적의미, 생명에 대한  근원적의미가 포함되여있다.> 5)( [포석 조명희의 생애와 문학] [포석 조명희전집]447쪽)고 했는데 아주 적중하여  그 이상의 해석이 필요없다. <봄잔디위에>도 생명의 환희와 신비가 흘러나오는 시다.    내가 이 잔디밭 위에 뛰노닐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주실 수 없을가   어린 아기가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어리광함같이 내가 이 잔디밭 위에 짓뒹굴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참으로 보아주실 수 없을까   미칠듯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엄마!엄마!” 소리를 내였더니 땅이“우애!”하고 하늘이“우애!” 하옴에 어느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수 없어라   -<봄잔디위에>전문 드넓고 따스한 동화적세계에서 생의 감동이 마음껏 뛰여다니고있다.  잔디밭은 이 세상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품이기도 하다. 잔디밭 위에서 마음껏 뛰놀수 있다는것에 생명의 환희를 느끼고 감격에 목메여 <엄마!엄마!> 웨치니 땅과 하늘이 “우애!”, “우애!” 하며 그 소리에 화답한다. 땅과 하늘 모두가 화답하니 시적 주인공은 도대체 누가 자기 의 어머니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감동이다. 이 우주 전체가 어머니인것이다. 이 세상을 <잿더미>로 <천길나락>으로 흘겨보면서 <혈면오음>으로 <어둠의 검>을 뽑아들고 <어둠의 춤>을 추던 시인이 <봄잔디위에>와 같은 시를 쓴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이 시에서도 어머니는 우에서 말했듯이 우주적의미, 천상적의미, 대지적의미,종교적의미, 모성적의미 등의 의미를  함께 안고있다. <봄>도 맑은 향내가 풍기는 시다. <어린 풀싹>과 <작은 새>가 커다란 봄, 우주를 만들고있으며 창조의 신으로 칭송되고있다. (례문은 략함) <감격의 회상>은 절대적권위자 앞에 드리는 절절한 고백이나 경건한 기도문 같은 시로서 신비와 거룩함이 공존한다.   아아 그때 나는 비로소 이 우주덩이를 보았나이다 처음으로 님을 만났었나이다   때는 이미 오래더이다 지금 다시 그대를 마음 가운데 그려보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기도를 드리나이다 아아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책상 위에 놓았던 한낱의 도토리!   <인간초상찬>은 불교적시각으로 인간의 화해와 사랑을 읊조린 시다. 조명희가 도대체 불교에  어느만큼 심취했고 어느만큼 신봉했는지는 불확실하나 타골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만은 분명하다.   태양은 곳곳에 미소를 뿌리고 바람과 물결도 가사(袈裟)의 춤을 추거든… 사람에게 만일 선악(善恶)의 눈이 없었던들 서로서로 절하고 기도하올 것을…   -<인간초상찬>(人间肖像赞) 마지막 련    시는 시인의 심목중의 가장 위대한 어떤 인물, 신의 모델로서의 인간을 칭송함과 아울러 범애주의, 인간화해, 인간리해 등을 다루고있다.  이상의 살핌을 통해 <봄잔디위에>부의 시들이 이왕의 암울하고 처절하고 반항적이던 시풍과는 달리 생명찬미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으며 전에없이 맑고 따스하고 신비하다는 것을 보아냈다. 독단이려니와 가령 조명희가 계속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가능하게 한반도에서 시인으로서   굴지의 자리에 오를수도  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1928년 쏘련으로 망명해간 후부터 조명희의 시는 철저하게 고리끼식의 사회주의사실주의시에 경도되며 볼쉐비크정권을 수호하고 찬미하는 시들을 쓰게 된다. 그러나 찬미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대신  1938년, 일본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3.   망명시기의 시문학ㅡ사회주의현실주의시 1928년 조명희는 <락동강> 의 녀주인공 로사가 택했던 길을 따라 쏘련으로 망명하여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의 품에 안기며 그때로부터 시풍이 완전히 바뀌여 사회주의현실주의에 경도한다. 사회주의현실주의는 쏘련에서 산생한 문학사조로서 한시기 사회주의국가의 문학을 통솔하였다. 이 사조의 정초자는 막씸 고리끼다. 1928년부터  쏘련문학계가 쏘련문학의 성질을 새롭게 확정하기 위해 토론을 전개하였고 1932년 5월 쏘련의 <문학보>가 처음으로 사회주의현실주의를 쏘련문학의 성질로 규정하였다. 그해 10월 쓰딸린이 작가들과의 좌담회의에서 이<주의>를 긍정, 1933년 9월 제1차 전쏘작가대표대회에서 <장정>으로 통과, “사회주의사실주의가 쏘련의 문학창작과 문학비평의 기본방침”이라고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그 핵심은 현실의 혁명발전중에서 진실하게 구체적으로 현실을 묘사하며 사회주의 혁명정신으로 광대한 로동인민을 개조하고 교육하는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회주의현실주의는 쏘베트정권을 가송하고 수령을 칭송하는 문학도구로 전락되고말았다..  조명희는 쏘련에 간후 첫 작품으로 <짓밟힌 고려>를 창작하고 이어 9수의 시와 8수의 동요를 쓰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그중에서 문학적재부로 인정할만한 것이 <짓밟힌 고려>이다. 이 산문시에서  시인은 고국의 참담한 현실을 가슴 아파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규탄하고 일제를 타도하자고 호소한다.  첫련에서는 구조적측면에서 일제의 감옥으로 된 고려의  참담한 모습과 일제의 죄장을 개괄적으로 폭로하고있으며 2련에서는 그 감옥 같은 세계에서 개개인이 겪고있는 노예 같은 삶을 펼쳐보이며 3련에선 힘을 합쳐 원수 일제를 뒤엎자고 부르짓는다. 이 시는 일제의 죄장을 단죄하는 론고장으로, 뜨거운 애국시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기교적인데서는 미흡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 고려의 광명한 미래를 확신하고있다.   저 ㅡ동쪽 하늘에서 붉은 피로 물들인 태양을 떠받치어 올릴것을 거룩한 프롤레타르의 새날이 올것을 굳게 믿고 나아간다! -<짓밟힌 고려> 일부   <10월의  노래>는 쏘베트공화국을 찬양한 시다.    북방에 높이 솟은 새 히말라야산ㅡ소비에트 공화국! 그 앞에 낡은 제도는 골짜기 같이 무너졌다 온 세계는 바다같이 끓는다. 오, 우리의 모국 소비에트공화국의 거룩한 탄생이여!   -<10월의 노래> 일부  솟구치는 격정으로는 족하나 시로서는 별로 할말이 없는 시다. 이 시기의 조명희의 시가 다 이러한데 그렇다고 시인을 나무랄 처지도 못된다. 쏘베트정권하에서 이런 시가 아니면 발표할수 없었기때문이다. 이외 <볼쉐비크의 봄>,<녀자돌격대>,<맹세하고 나가자> 등 기타 시들도 엄격히 말해서 정치구호나 선동문이지 참다운 시는 아니다.  쏘련에 망명한 후 조명희는 창작성과는 미미했지만 쏘련에다 망명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는 점에서는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쏘련망명시기의 시들과 평론들을 보면  조명희는 진정으로 쏘베트정권을 옹호하고 찬양하였고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위해 일체를 다하였다. 그러나 아이니컬하게도 바로 자기가 충성했던 그 정권에 의해 조명희는 일본간첩죄로 처형당한다. 포석 조명희는 시와 소설, 희곡으로 1920년대의 한국문학을 화려하게 장식한 사람으로, 쏘련에다 한국문학권을 구축한 사람으로 그 방명이 한국문학사에 길이길이 남아있을것이다.   2011년 6월 13일 씀.                          
5    2010년의 - 시 교향곡 댓글:  조회:1410  추천:20  2011-03-07
 1. 서장. 들어가면서 2010년의 마지막 해의  뒤모습이 아스란히 사라져가는 이즈막, 지난 1년간 《연변문학》에 올랐던 시들과 마주낮아 대화를 나누려고 하니 생각이 사뭇 길어진다. 충족치 못한 에네지를 갖고잇는 필자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초부하작업이라 하겠으나 한편 왈가불가의 평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성실한 독자의 신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으리라 생각하니 무거운 마음의 탕개가 한결 느슨해지는것 같다. 이 시대는 시인에 대해 그렇게 너그럽고 상냥한것만은 아니여서 소외와 랭대를  받을 때가 많다. 시에 대한 찬사나 추파 따위같은덴 너무나 린색하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 문학의 위기설을 두고 말씀들이 무성한것이  오늘의 풍조가 아닌가 싶다. 위기설의 바탕으로 되는것이 인터넷, 전자매체, 사이버공간의 확대로 현실공간이 좁아졌다는것, 이로하여 시의 독자가 줄어들고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느다는것 등이며  물론 여기에 민족공동체의 해체로 인한 각종 현상들도 까닭이 된다. 하긴 상술한 리유들이 충분히 까닭이 될만도 하다. 하지만 랭정히 사고해보면 좀 지나친 엄살인것 같고 지나찬 공포증이 아닌가 싶다.시 위기가 존재하는것만은 사실이나 우리가 떠드는것처럼 너무 한심한 정도에까지는 이른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금년의 시 작황만 보아도 시 현황이  우리가 놀라고 떠드는것처럼 그렇게 험악한 상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된다. 시문학이 이런 저런 문제점들을 안고있긴 하지만 여전히 제멋대로 제궤도를 따라 전진하고있다. 원로시인들이 의연히 로익장의 자세로 시창작에 매진하고있고 기성 중견시인들이 맹활약하고있고 신인들이 뒤를 이어 나타나고있으며 새 시집들이 륙속 줄지어  머리를 내밀고있다. 알고 보면 우리 시가 홀대를 받게 된데는 우에서 렬거한 객관적 리유에서 비롯되였다는것음을 부인할수는 없지만 주요하게는  시력사의 발전궤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시가 찬란한 면류관을 쓰고 영웅으로 추대되던 시기도 있었다. 랑만주의가 권위로 군림하던 시기, 랑만주의 리론가들은 시인을 계몽을 위해 하늘에서 강림한 존귀무비한 영웅으로 높이 받들었다.[워즈워스] 랑만주의 대표자인 쉴러는 “ 시인은 사이비한 령혼의 사제이며 <미래>를 <현재>에 투사하여 반영하는 거대한 거울이다…. 전가(战歌)를 부르면서도 그것이 호르래기인줄을 모르는 사람이며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힘이며 이 세상에서 종래로 있어 본적이 없었던  립법자이다”([시를 위한 변호])고 시인을 찬양했다. 그러나 시리론이 모방론으로부터 실용론, 표현론, 최후에 객관론으로 발전함에 따라 시인은 본채에서 행랑방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였다. 작품 객관론의 취향이 랑만주의 중심론을 대체하게 되였던것이다. 특히 니체가 “ 하느님이 죽었다”고 했듯이 로랑.바터가 ”독자의 탄생은 어떤 작가의 죽음을 대가로 한다 ”는 도전을 하여 작가를 절대적인 궁지에로 몰아넣었다. 객관론, 독자중심론은 사실상 작자를 죽인것이 아니라 작자가 혼자 독점했던 권력을 작자, 택스트,독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려는데 있었다. 이리하여 작자의 종래의 권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진행중이다.(아직 연변문단에는 영향이 그렇기 크게는 미치지 않았음) 허나 시인들은 계속 제 갈길을 지금도 걸어가고있다. 지난해의 《연변문학》의 시들만 보아도 이런 상황이 립증된다. 비록 이런저런 허점들이 두루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총적으로 우리의 시들은 기본상 제구실을 하면서 꽤나 들을만한 시교향곡을 엮어냈다고 보아진다. 첫째,부동한 년령층이 동원되여 손을 잡고 하나의 원을 이루면서 흥겨운 강강수월래를 연출했다. 원로시인들은 로익장의 자세를 보였고 기성시인들이 활보했고 신인들이 생기를 불어넣었다. 둘째, 부동한 부류의 시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목한 공생공존의 분위기가 형성되였다. 셋째, 특집란이라는 명목으로 각 지방 문학단체들이 골고루 등장함으로써 산재지구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고《연변문학》을 통해 중국조선족문학을 료해할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였다. 넷째,시조문학과 아동문학 특집이 마련되여 시조문학과 아동문학에 대한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다섯째, <이달의 시>와 <이달의시인>란으로 기성시인들의 창작욕구를 자극했다. 여섯째,<신작릴레이>란으로 시인발굴과 새로운 시의 대량산출을 유도했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2010년의《연변문학》의 시들은 여러가지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그렇게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못할지라도 꽤나 흔상할만한 시의 교향곡을 연출하였다고 보아진다. 본고는 필자의 단순한 인상착의에 근거하여  몇가지 류형으로 나누어 고찰을 하게 된다. 많은 시들을 일일이 체크, 분류, 해석할수 없어 그중 일부만을 간추려 선택적고찰을 할수밖에 없었음을 미안스레 생각한다. 2장. 향수와 망향, 실향의 소야곡 이주민으로 락인된 민족에게는 어쩔수없이 망향의식이나 실향의식이 돋아나게 마련이고 그것이 승화하면 민족우환의식이 된다. 본고에서 굳이 따로 <향수와 망향,실향의 소야곡>이라는 장을 마련한것은 향수나 망향, 실향이 근년에 민족공동체에 일어난  변활로  말미암아 중국족선족에게서 떼여낼수없는 삶의 한갈래로 되고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문학으로 반영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느던 그때부터 이미 망향과 실향을 등에 지고 다녔다. 하여 그 어느민족보다 망향의식과 실향의식이 농후하다. 일제치하 만주국 시기에 애향, 실향의 문학작품이 대량 산출되였고 건국후부터 개혁개방중기까지는 잠잠하다가 근년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과 연해지구에로의 대이동, 농촌의 피페 등이 그 주요원인이였다.이러한 시대적변화가  새로운 <망향가>,<실향가>, <애향가>의 탄생계기가 되였고 그  진두에 선 이들이  지성인들과 작가, 시인들이였다. 우선 강효삼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강효삼시인은 일생을  고생스럽게 농촌에서 살면서 시종일관하게 농민과 농촌을 노래불러온 <북방의 제일 푸닥거라군>이다. 농민과 농촌을 껴안고 하는 그의 푸닥거리는 그렇듯 진지하고 뜨겁고 구슬프다.     조촐한 벽돌집 앞마당엔 하얀 빨래 대신 알락달락 빨래들이 두루두루 걸리고 이사군이 먹이는 검정개는 오히려 흰옷입은   마을사람들 낯설다고 왕왕 짖어대네   <어느 산간마을에서>(연변문학 9호)   <하얀 빨래>와 <알락달락한 빨래>,<검정개>와 <흰옷>들이 강렬한 대립적구조를 이루면서 몰락당한 조선족마을의 황페상이 고발되고있다. <왕왕>짖어다는 개소리가 섬찍할 정도의 이질감을 유발시킨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판국, 주객이 바뀐 아픈 풍경이다. 고향에 대한 아픔과 애틋함과 서러움이 추호의 주춤이 없이 그대로 펑펑 솟아나온다. 이제 멀지 않아 더는 흰빨래가 보이지 않을것이며 대신 알락달락한 빨래만 온 마을에 가득 널릴것이며 검정개의 사나운 울음소리만 더 높아질것이다… 시인이 가슴 아파하고 서러워 하는 까닭은  단순히 모두가 떠나서가 아니라 떠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있다. <슬프다 떠나서 슬픈것이 아니라 /잃고 잊고 버리고 가서 슬프다>. 따지고보면  누구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탓이다. 힘들게 키운 나무와 금싸락같은 농토를 제손으로  팔고 갔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돌을 들어 제발들을 깐 신세, 자작지얼의 보응일진대 조선족마을의 몰락상은 심각성을 유발시키며 참여의식같은 시를 써야할 당위성을 요청하게 된다. <노오란 참새 두마리>(리상각, 연변문학 제5호>는 락엽과 참새라는 판이한 두가지 이질적인 대상을 동질이미지로 전환시키면서 시를 구축하고있다. 락엽은 필경 떨어지기 마련이고 떨어져서는 날려가기 마련이다. 시인은 마가을 찬 바람속 나무초리에 앉은  두마리 참새를 락엽으로 상상하고 텅빈 마을의 삭막한 몰골을 그려내고있다. 락엽의 신세가 바로 황페해가는 우리 조선족농촌마을의 신세에 다름아니다. <아담한 마을은 빈집 빈 뜨락/ 바라보니 눈물겨웁고/ 목메여 울지 못하는 두마리 참새도 /어차피 떠나야 하리 락엽이 되여…> <실향>(연변문학 9호)은 상술한 두수의 시와 한족속에 드는 시다. 시인의 맘속에 안주하고있던 고향은 <따끈한 가마목에 엉덩짝을 지지면서/군감자 홀홀 불며 먹던> 그런 곳이였지만 오늘의 고향은 <페교된 학교운동장에서/시름없는 삽살개 뒤마리/번갈아 짖어대는>곳이다. 우의 시들이 실향시라면 <북경왕부징의 밤>(전병칠,연변문학 9호)은 망향시라 하겠다. 오늘의 우리의 망향시는 산업혁명의 산물로 이 시대가 준 반갑지 않는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 선물을 뿌리칠 능력이 없다. 그리하여 좋으나 궂으나 망향가를 부르지 않을수 없다. 산데리아 불빛이 휘황한 밤 고향의 그리움에 허기진 사람들이《갈색의 향수를 차곡차곡/술잔에 부오넣고》 한껏 취해본다. 《꼬깃꼬깃 마음에 얹어놓았던 /그리움과 한을/ 세월의 길목에 /오종종 내려놓고》노랴가락으로 즈려밟아본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급기야는 《또 하나 타향의 望竿 》 세워놓고 거기에 기여올라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내가 살던 고향과 내가 사는 이곳에 비가 내린다》(김미화, 연변문학 7호)도 망향시다. 그리움의 힘에 의해 시공이 하나로 이어져 내가 《비가 되여 고향의 창문을 두드리고》 현현된 나의 그리움을 어머니가 창가에서 보듬어주신다.  망향이나 실향을 읊조린 시들은 대채로 의미전달의 목적에서는 성공하고있으나 시적발효에서는 미흡한 시들이 두루 보였다. 감정이 겉으로 흘러나와 오희려 감정이 약화된 시들,  장황한 설교로 함축미를 상실한 시들이 그러하다. 라체보다 적당히 가려진 몸체가 더 신묘하고 유혹적임을 상기시키고싶다. 제3장. 형의상학적류형의 시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대파는 여러 류형의 서구문학사조를  통털어 일컬으른 말인데 그 공통한 특점이 형이상학에 기대고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부추키고 키워온것이 영미신비평이다. 한때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현대파사조를 놓고 전통문학과 현대파문학사이에 론쟁이 많았다. 여러 류형의 시들이 공존공생하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흑백론리로 시의 우렬을 가리려  하며 구미에 맞지 않는 시들을 무조건 구축하려 하는데 이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닌것 같다. 상호보완의 태도로 부동한 시들을 포섭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할것이다. 현대파시들일 경우 의미의 전달, 전달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회피하면서 굴절과 해체작업에 열중하다보니 독자들과의 괴리나 소외현상이 나타나며 따라서 난해와 몽롱의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다. 심지어는 언어의 테로리스트로 몰리울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분명 존재자유와 존재가치가 있다. 전위성, 과감성, 시의 자률성과 언어의 창조성 내포과 외연의 불가분리성, 함축미탐구 등에서는  긍정할바가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파괴나 난해는 언어유희 그 자체에 머물고 말므로 제창할바가 못되는줄로 안다. 금년에 강효삼, 김동진, 리문호 세 시인이 시에 대한 소감을 말할때 현대파시에 대해서도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였는대 참고가치가 크다고 본다. 문제는 어떤 류형의 시를 쓰는가에 있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있을것이다. 현대파시의 효시로 불리우는 파운드의 <지하철>, 블레이크의 <장미>, 워즈워드의 <저녁소네트>와 같은 명시를 쓴다면 그 누가  감히  이렇쿵저렇궁 하겠는가. 2010년도에 《 연변문학》편집부는 형이상학적인 시에 신경을 쓰는 시인들에게도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60대에는 현대파 로장들인 한춘과 김파, 최룡관이 등장했고 40대에는 조광명, 김영건, 김창희, 전춘매, 박초란, 허옥진, 리범수 등이  있었다. 한춘은《21세기 신심우도》를 들고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흐트러진 발자국우에/은방울꽃이 스들어가고있다/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못질하지 않기로 했다/ 깨여진 거울이 잠들면 /홀로선 내 적막이 /속빈 강대로 무너질것이니.》(연변문학 2호) 자아의 부단한 탈피,갱신,자성, 부활의 의지가 아닐가. 이런 풀이를 뒷바침해주는것이  《21세기신심우도.1》 이다.《지난 밤 꿈이야기는 /지나치는 빛발에 맞아 /지친듯 얼음판에 쓰러졌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꿈쪼각아래/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 <흐트러진 발자국>,<시들어진 은방울>,<홀로선 적막>,<속빈 갈대> 등이 불만족을 유발시키는 어제날의 자신의 시나 어떤 삶이 아닐가. 하다면 이 시는 새로운 희망,갈망, 목표 등 새로운 지평의 열림에 대한 갈구가 아닐가. 이렇게 풀이하면 아리숭하던 시의 기표에 미약하나마 한가닥의 등불이 켜지게 된다. 최룡관은《 S가 사전속으로》와 《 빤질빤질한 달이 뜬 밤》(연변문학 7호)에서 초현실주의수법을 실험하고있다. 전자에서는 지식의 무궁한 힘을 괴상하게 노래하고있다. 사전이 광할한 운동장으로, 주렁진 포도원으로, 강물로 산으로 벌판으로 되며 그속에  《 천년을 숨쉬고 만년을 걸어다니고 억년을 뛰여다니는  》제우스가 있고 석가모니가 있고 꽃뱀이 있고 히드라가 있다. 그 신묘하고 무궁한 지혜에 취해 시의 주인공이 드디어 취해버린다. 후자에선 《쪼각달이 모자를 달고/ 견장을  쓰고/수갑을 신고/신을 낀다  》. 시비가 뒤죽박죽이 된 이 세상의 어떤 부조리현상에 초점을 둔듯 한데 두수의 시는 심한 해체를 전제로 한다. 개별언어의  복수 혹은 주관성이 객관성에 대한 복수다. 이런 시에서 구태여 미학을 찾으라고 한다면 해체의 미학 산만성의 미학 혹은 무질서의 미학이라고 말할수밖에 없다. 김파는 《 지도를 보면서》(연변문학 1호)는 폭군의 야먕과 야망의 괴멸을 예고한 정치폭로시로 보여진다.  《품은 새끼들이 야금야금/어미거미를 잠식하면서/아침해를 키우고있다/새끼들이 흩어지던 날/ 지도를 다시 보니 /어느덧 어미거미는 존재하지 않는다》어미거미가 폭군으로,야먕으 괴멸과정이 <잠식>으로, 야먕의 종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로 처리되고있다. 조광명은 은유와 역설의  구축에 신경을 쓰는 시인인것처럼 보인다. 은유와 역설은 신비평이 주장하는 유기체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부룩스는 《 은유론》에서 《현대시의 기교를 은유의 발견과 은유에의 완전한 귀의로 요약할수 있다 》고 말했다. 조광명의 《 어둠의 역설》을 살펴보면 어둠이 단단한 알이 되고 돌멩이가 신음한다. 어둠에서 맥박소리 들리고 그러다가 갑자기 조약, 승화하여 어둠이 닭알로 태양으로 탈바꿈한다. 《 견고한 알속에 잉태된 /도고한 신앙을 믿어/그렇게 따스한 껍질속에 노란 태양을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볼수 있다》시인은 어둠속에서 탄생하는 장엄무비한 창조의 거대한 힘에 희열을 금치 못해 《 손의 기억에 느낌표를 적어준다 》 김영건도 형이상학적취향에 경도하는 시인으로 보인다. 김영건의 조시《 상실의 시대, 사람의 숲에서》(연변문학 6호)에서 시인은 앓고있는 인간세상을 진단하고 고치려 한다. 시인이 인지하고잇는 이 세상은 《사람의 탈을 쓰고 /온갖 짐승이 활보하는 세상이며 》(사자바위에 앉아)《 태양도 앓고있는 세상이며》,《우왕좌왕 짐승들이 숲에서 날뛰는  》세상이다. 시인은  건강한 세상의 도래를 믿어마지 않기에《빛으로 태여날 아름다운 /역설이 지금 목메여/찬란한 전설을 부른다》고 웨친다. 김창희는 시창작의 초기부터 삶의  한 모퉁에서 묵묵히 제나름대로의 시만들기에 혼신을 쏟아온 시인이다. 그의 시는 아픔이 묻어나는 시다. 그러면서도 넌짓이 엉뚱하게 아이니컬한 세계를 빚고있는 시인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흔히 회색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세월의 울너머 》(연변문학 9호)에서도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시인의 삶의 편린들은《몽환으로 만나는 허상의 그림자 》들이고 그 허상의 실체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고/날리는 눈꽃에 피멍이 들고 》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니컬하게도 그것이 바로 《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고름이 되고 웃음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향해 눈을 흘기는것이 아니라  삶을 확신하고 희망의 향불을 태운다.《 오늘을 꼬집으며 /깊어가느 산자락에 들꽃의 향을 산발합니다》 이상 현대파시로 유표하다고 보아지는 일부 시들을 총망하게 읽어보았다. 이들  외에도 인간의 간사한 이중심리를  재치있게 펴보인 전춘매의 《 자유와 복종》(연변문예 9호), 풍자의 묘미를 보인 리범수의 《 추운 날의 우화》(연변문예 9호), 부재속에서 실재를 확인하고있는 《박초란의 세월의 겁질》(연변문예9호), 무의식의 빛에 의거하여 인간의 소외와 이질성을 그려낸 허옥진의 《 사라지는 물》(연변문에 9호) 등등도 충분히 론의의 대상에 올릴만한 시들이였으나 편폭의 제한으로 응당 해야 할 말을 못하여 아쉽다. 이상으로 형이상학적취향의 시들이라고 생각되는 일부 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읽어보기를 했지만 필자로서도 제대로 파악했는지가 심히 의심스럽다. 일일이 지적하진 않겠지만 일부 시들이 지나치게 난해하여 솔직히 말해서 부득불 시읽기에서 상상을 통한 어림짐작에 기대일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폭력조합도 한계가 있어야 하고  정도가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파괴는 장난에 머무르고 말수도 있다. 현대파시를 좀 연구한다는 필자조차 알송달송한것이 있을진대 일반 독자들이 그런 너무 난해한 시를 과연 포용할수 있겠는가가 심의 걱정스럽다. 까딱하면 김동진 시인의 말처럼  《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 도깨비 기와장 넘기는 소리》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금후 언어의   굴절, 언어의 폭력조합에서 현대파시를 쓰는 시인들이 좀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4장. 전통의 맥 잇기 《연변문학 7호 》에 《 민족의  서정, 겨레의 혼불》이라는 테마로 연변시조사의 시조특짐을 실어 2010년의 시의  교향곡에 구수한 가락 하나를 더 보탰다. 분량으로 보면 얼마 안되는 시조들을 특별히 본고의 론의에 넣은 목적은 민족의 혼불로서의 시조의 위상과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현황을 감안하여 시조에 대한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의 충동을 받았기때문이다. 시조는 분명 우리 민족의 귀중한 정신재부요 문화재부이지만 지금 명분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조를 문학권에서 배제하여 음악쪽으로 넘기자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심지어 시조가 귀족들의 향락거리라고 치부하여 이미 문학에서 추방한지 오래다.. 이런 시점에서 볼 때 시조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적실할 때가 아닐가고 생각한다. 다 알다싶히 전통이란 고금을 통털어 련결되는 뚜렷한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시조는 오랜 력사속에서 다듬어진 민족적 생리에 맞는 심층구조이다. 필자는 시조에 대한 지식이 박약하므로 이 원고의 집필을 위해 특히 리영지의《 한국시조문학론》을 열독하고 참조하였다. 시조가 초장, 중장, 종장의 3구분이 되는데 이 자그마한 문학형식에 놀랍게도 3구분의 동서방의 철학이 녹아있다는것을 발견하였다. “성경에서의 성부, 성자, 성신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주의 질서를 3계층으로 설정했고 단테는 신곡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축도로서 지옥,련옥,천국편으로 론하여 신화체계를 형성시켰다. 성서   창세기의 기록에도 3계층으로 나누며 불교사상에서도 3계가 있어서 중생들이 생사왕래하는 세계가 된다. 대우주로 섬기는 동양의 천.지.인인 세계와 인간의 몸체에서 다시 우주를 찾는 동양사상은 문학성으로 3재지도인   천지문(天之文),지지문(地之文),인지문(人之文)의 구분을 갖는다. 이러한 구조적 3구분은 독립된것일수 없어서 유기적 관계를 갖고있고 어느 문학작품에서 겉으로 드러나든 숨어있든간에 이 원리를 함유하고있다.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있는것은 한국문학쟝르상의 시조로 볼수 있고 이는 세계문학상의  론리를 표면구조화한 뚜렷한 한국 고유의 문학적의미로 확대되게 된다.”(리영지, 한국시조문학론) 한마디로 시조는 단순한 노래형식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원리가   깔려있는것이다. 시조특집에 오른 시조들은 모두 다듬어지고 소박하고 쉽게 안겨들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시조가 <섬>,<구름>,<진달래>,<수석>등과 같이  풍물을 노래하고있어 우리의 시조들이 일게 모르게 고대시조의 풍격을 그대로 이어가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선보인 모든 시조들이 짧은 형식속에다 인생의  도리를  다져넣고있었으며 짜임새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리상각은《 섬》에서 고독과 그리움을 세우고《해돋이 》에서는 탄생의 장려함을 구가하고 조룡남은《 버려전 꽃》으로 공즉득(空即得)의 불교적철리를 노리고 《구름 》에서는 이 세상에 무려무우(无虑无忧)의 인간이 없음을 말한다. 김경석은 《백발 》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넉두리하고 김해룡은 《단풍송 》과《공훈메달에서  》값진 희생정신을 읊조리고있다. 안병렬은 《내고향 범우리 》고향애를, 김동진은《 천지꽃》에서 혁명의 선구자를, 최문섭은《수석 》을 통해 하찮은것의 위대함을 노래하며 한동해는《 아내의 코 고는 소리》에서 부지런한 아내를 자랑하고 김철학은 《 고무풍선》에서 인간의 출세욕을 빈정거리고 최기자는《낚시터에서 》를 통해 인생의 허무한 기다림을 한탄하고 최옥란은 《 백지》에서 님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내고있다. 하지만 거의다가 평시조뿐이여서 단일감과 단순감, 평이감을 주는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어떤 시조들은 철리가 빈약하였다. 사실 철리가 없는 시조는 이미 시조가 아니다. 제한된 짧은 형식속에 철리를 다져넣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것이므로 깊은 탐구가 있어야 될것 같다. 우선 시조에 대한  기본공부터 착실히 닦아야 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다음으로 시조의 다양화가 요청되는 시점인것 같다. 평시조외 엇시조, 사설시조, 파격적인, 현대시조 등도 가끔씩 생산되였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시조의 무한한 가능성이 알려질수 있다. 자칫하면 후학들에게 시조란 큰 연구가 없어도 쉽게 쓸수 있다는 착각이나  인상을 줄수도 있다. 아니, 사실 지금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평시조처럼 3장 6구격식이 확연히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런 구분이 숨어있을수도 있다는데에 관심을 돌리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시조에서 3장 6구의  구조가 숨어있음을 립증한 리영지의 해석을 보기로 하자. 리영지는  김소월의《진달래 》와 《 산유화》, 리륙사의 《 광야》와《청포도 》를 시조의 특징으로 풀이하고있다. 편폭상 김소월의  《 진달래꽃》과 리륙사의《청포도 》만 보기로 한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쁜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   이 시에서 1련을 초장으로, 2련을 중장으로, 3련을 종장으로 보며 첫련과 중복되는 4련은 생략해도 무관한 허구의 리듬으로 본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주절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빛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돛 단 배가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 마련해 두렴 <청포도>   《 청포도》에서 1련을 초장으로2련을 초.중장으로 3련을 초.중장으로 4련을 초.중장으로 5련을 초.중장으로 6련을 종장으로 본다. 끝련의 《 아이야》는 음위률이나 감탄사로서도 고시조에서 흔히 볼수 있는 구조이다. 고시조의 신화적기호와 동일한 《아이야 》하나만으로도 《청포도 》가 시조의 원형을 갖춘 시로 해석된다. 오늘날 많은 현대시에서 자유시의 작품이 극치에 달하면 그것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시조의 원형적본질이 들어이있다.(조창환, 소월시의 구조) 이러한 평가가 정답일지는 미지수라하겠지만 시조가 그렇게 쉽게 씌여지는  쟝르가 아님은 알수 있고  무한한 연구가치가있는 문학의 한 형태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우리의 시조문학이 더 엄숙해지고 더 진지해지고 더 분발할 때가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5장. 아픔과 슬픔 그리고 해탈의 몸짓 기쁨과 행복이 삶의 한 부분인것처럼 아픔과 슬픔도 역시 삶의 한 부분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가 하이데거는 진정한 행복은 아픔에서 온다고 말한바 있다. 사실 인류력사를 되돌아보면 보면 기쁨과 행복보다 아픔과 비애가 더 많았다. 하기에 고금중외를 물론하고 문학에서 고통이나 슬픔이 시종 취급되여왔다, 세계명작치고 인간의 고통이나 비애를 다루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런데 2010년의 시들을 보니 이상하게도 아픔이나 고민 고통을 다룬 시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본장에서는 아픔과 슬픔을 다룬 시들을 골라 시대적아픔과 개인적아픔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강효삼과 리상각, 박룡길, 김영건 등 시인들이 시대의 아픔내지 민족군체의 아픔을 썼다. 그중 <이달의 시인>에 올랐던 두 시인의 시를 살펴보려고 한다. 강효삼의《어느 산간마을에서 》의 통증은 떠남에서 비롯된다. 《남쪽에서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사람들 모두 떠나 》《 낡고 헌 지붕에 기와쪼각 부셔져내리고/ 텅빈 집들은 금세 떠밀어도 넘어질듯 》하기때문에 아프며 《하얀 빨래  》대신 《 알락달락한 빨래들이》널렸기때문이며 이사온《 검정개》기 오히려 《흰옷입은 사람들 》을 보고《낯설다고 왕왕 》짖어대기때문에 아프다. 땅까지 남의것이 되여 《 조상의 무덤마저 파옮겨야 할》처지니 그 아픔이 오죽하랴. 시인은 해탈의 출구를 돌아옴에서 찾지만 그것이 결국 불가능으로 남아 아픔과 슬픔 해소될 가망이   묘연하다.   김영건은 《상실의  시대, 사람의 숲에서 》인성을 상실한 시대적고민을 읊조리고있다. 시인이 가슴 아파하고 괴로와 하는 리유는 《 사람의 탈을 쓴》《 온갖 짐승들이 거리로 활보》하고있기때문이다. 시인은 그 치유방책을 《사자(使者》의 힘에 기탁하고있다.《상실의 시대 사람의 숯에서/사람 건질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 사자바위를 저기/십자로 중심에 높이 세우는일이다 》 우의 시들이 시대나 민족의 아픔을 쓴 시들이라면 아래의  시들은 개채의 아픔과 슬픔을 다룬 시들이라 하겠다. 《 세월의 울너머》(김창희)에서 시적주인공의 아픔은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한데서 비롯된다. 《몽환으로만 만나는 허상의  그림자들이 /오늘을 저어가는 노래인줄 진작 알았더라면/래일을 위한 돛을 깁느라/밤샘을 한 흰머리를 /세월을 낚는 닻줄로 마구 허비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구체적으로는ㄴ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고/날리는 눈꽃에 피멍이 들고 》이다. 그러나 아픔으로부터의 탈출은 랑만적인 제스처로 해결된다.《오늘을 꼬집으며 /깊어가는 산자락에 들꽃의 향을 산발해봅니다. 》 한영남은 2010년에 이달의 시인란에 두번 뛰여오른 시인이다. 그의 시는 활달하고 호방하고 시원하며 내면세계에 깊히 천착한다. 시의 샘구멍이 깊고 터져나오는 서정의 량이 충족하다. 또 그의 시는  흔히 긴 제목으로 너스레를 떠는데 그것도 이 시인이 특점의 하나로 된다. 그는 이전부터 심령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시인의 삶의 쪼각들에는 상처자국이 루루하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죽을만큼 아픈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되는듯 싶다. 헌데 이 시인은 그것을 여유롭게, 넉살좋게, 엉뚱하게 해학으로 풀어버린다. 서정서사시《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는 시인의 일생에서 가장 괴로왔던 파멸된 사랑을 소재로 한 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사랑파멸의 주인공이였던  두 사람이 [늙은이]가 되여 만나는데 그 장면이 자못 눈물겹도록 슬프고 아름답다. 《 너의 빠진 이로는 씹어낼수 없는 낙지와/나의 젖은 간으로는 마셔낼수 없는 배갈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아/우리는 걸레처럼 웃어보자》.시의 마지막에 가서는 《 자 그러면/ 굿바이 이 문드러진 계집아/굿바이 이 늙어빠진 시인아》라고 웨친다. 아픔과 슬픔을 자학과 유머와 해학으로 안위하기에 오히려 아픔과 슬픔의 농도를 더 해준다. 장시《저 계절더러 이 마음을 가져가라 하십시요 》는 우의 시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사랑을 비롯해 잃어버렸던 지난날들의 모든 소중함을  푸닥거리한 시다. 그것이 소제목《삼월에 》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어느해 삼월에 입었던 상처가 가장 컸던 모양이다.《 누가 만일 내게서 삼월을 사가신다면 /나는 내 젊음의 한토막까지 서슴없이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이 시인의 아픔으로부터의 탈출은 자학적인 해학과 유모 그리고 통쾌한 스트레스이다. 이상으로 2010년 《연변문학 》시읽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제법 모양새를 갖춘, 꽤나 들어볼만한 시의 교향곡이였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허나 그렇게 만족스러운것은 아니였다. 응당 끼여들지 말았어야할  조잡한 불협화음들이 적지 않았다. 겉은 익었으나 속까지 익지 못한 시들, 단순히 묘사에만 치중하는 시들, 글장난을 하는 시들이 두루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시들은 너무 쉽게 씌여지는것 같다. 파운드는  “독자가 시작품을 대한다는것은 곧 어떤 신과 대화하는 순간처럼 엄숙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인의 분신인 제2의 생명을 감수하는 작업이다.”고 하면서 시가 간고하게 탄생하며  신적인 성스러운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우리 시인들이 좀더 깊은 사고를 가지고 엄숙하고 신중한 자세로  시창작을 해야 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본고는 시의 우렬을 보고 례문에 올린것이 아니고  주제의 론증에 적중한 시들만을  골라 론의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례문에 올랐다고 하여 다 좋은 시인것만은  아니고 론의에서 제외되였다 하여  다 나쁜 시가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그리고 어디끼지나 한 평범한 독자의 나름대로의 시읽기였음을 덧붙히는마이다. 새해에 여러 시인들이 더 곱고 건강한 시들을 많이 낳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2010년 12월 마지막 날에 마무리지음                          
4    화해와 융합,사랑의 기치를 추켜든 시인- 남영전 댓글:  조회:1201  추천:37  2009-11-09
[대담]화해와 융합,사랑의 기치를 추켜든 시인 –남영전대담자: 남영전 장백산잡지사, 길림조선신문사 사장, 주필,시인김룡운 문학평론가,동북아연구문화원  비교문학연구소 소장일시: 2009년 9월 11일 오전 9시장소: 길림조선문신문사 사장사무실 현재 장백산 잡지사 사장, 길림조선신문사 사장이며 주필이며 시인인  남영전은 근래에 중국시단에서 인기가 높아 중국문단에서 남영전 연구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일컬어 필자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명명한다. 남영전 시인은  잡지와 신문을 잘 꾸리는 한편 시창작에서도 풍만한 결실을 따내 지금까지 도합 15권의 시집을 펴냈다. 남영전 시인은 80년대 중기까지는 사실주의 시로 명성을 얻었고 그 후로는 토템시인으로 토템연구가로 자리를 굳혔다. 남영전 토템시의 핵심은 화해와 융합과 사랑이다. 남영전 시인은 중국에서 독특한 견해를 가진 토템연구가이고 처음으로 토템계렬의 시를 창작한 사람이다. 2003년에 42수의 토템시를 묶은 시집 «원융»을 내놓아 중국 시단에 이채를 가미했고 그 해에 또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노래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펴냈다. 화해와 융합과 사랑을 주창하는 토템미학사상을 시적행위로 증명한 이 시집은 또 한번 중국시단을 놀래웠다.  중국문단에서는 남영전의 토템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2003년, 2006, 2008년에 무한과 북경과 장춘에서 각각 규모가 큰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개최하였다. 한 소수민족 시인의 작품을 가지고 세 차례나 륭중한 세미나를 개최한 사례는   중국문단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남영전 시인은 풍성한 창작성과로 하여 큼직큼직한 문학상도 여러차례 수상했다. 남영전 시인은 지금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 작가학회 부 회장, 중국소수민족 당대문학연구회 부회장이고  시계시인대회 영국캠브리지 종신회원이며  영국과 미국의  셰계명인센터로부터 네개의 성과상 메달을 받았다. 남영전시인의 이름이 [중국신세기문학사전],[중국당대문예가명인록], [중국문학사전] 등 40여부의 사전에 올라있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김룡운: 잡지사, 신문사의 일로 무척 다망하심에도 불구하시고 대담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할 말이  많은데 우선 선생님의 가정사로부터 말꼭지르 떼 봅시다. 제가 알기로서는 선생님은 혁명렬사의 자식이고 유복자이시고 어린 시절을 아주 기구한 환경에서 지내셨지요? 죄송합니다. 혹시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는지..남영전: 예, 저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가정의 함의는 사실 부모인데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 배속에서 다섯달 되었을 때 전쟁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잇달아 세상을 뜨다 보니 저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불행아이지요. 다른 애들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버지에게 막 매 달리며 무엇을 사 달라고 조를  때 그런 때가  나에게는 너무 부럽고 슬픈 때였습니다. 철부지  시절에는 가정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차차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나도 아비지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졌습니다. 김룡운: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크다보니  선생님께서는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 하시더군요. 할머니를  소재로 시도 많이  쓰셨고… 선생님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였습니까?남영전: 저의 할머니는 저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저는 할머니의 크나큰 사랑과 인도 밑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는 평범하면서도 또 평범하지 않은 분이였습니다. 광복후에 마을에 쥐병이 만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소이산 마을에 털없는 쥐들이 우글우글 했다고 합니다. 일본놈들의 세균전과 관계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때 쥐병으로 사흘 사이에 우리 할아비지와 두 고모가 돌아갔습니다. 45년도에 삼촌이 참군하였다가  47년도에 전사했고 저의 아버지는 47년도에 참군하였다가 잇달아 희생되었습니다. 얼미후 저의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남은 것이란 할머니와 저 뿐이었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할머니께서는 몇번이고 자살을 기도하시다가 손자 때문에 단념하군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45세였습니다.. 저의 할머니가 손자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는 실로 일구난설입니다. 다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저 이쯤 알아두시지요..  할머니는 흉금이 넚고 낙관적인 분이였으며 이웃들과 늘 화목하게 지내셨습니다. 저 보고는 늘 너는 부모 없는 애니깐 부모 있는 애들보다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할머니는 비록 지식은 없어도 이야기를 굉장히 구수하게 잘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저의 문학세포를 키워준 듯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부오와  같고 인생의 스승과 같고 문학세포를 심어준 계몽스승과도 같습니다. 1984년도에 길림일보사 기자가 우리 집에 왔다가 할머니를 만나 보고 저에게 하는 말이 당신의 할머니는 평범하면서도 위대하다. 만약 당신이 손자로서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다면 당신은 작가 자격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란  수필을 썼는데 반향이 좋았었지요.. 1994년도에 그 수필을 서정시로 고쳐서 발표했고 상까지 탔습니다.김룡운: 듣고 보니 선생님의 할머니는 할머니이자  부모이고 스승이였군요. 참 위대한 분입니다. 대화의 방향을 장백산 잡지로 옮겨봅시다 선생님은 장백산의 창시자이지시요? 장백산 잡지에서 많은 작가들을  키워냈습니다.. 오늘 장백산은  번영과 창성의 일로를 달리면서 조선족문단에 거대한 기여를 하고 있지만 장백산의 초창기에는 아주 힘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장백산의 역사에 대해서  원로 문인들은 대개 알고 있지만 젊은이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 번장백산 잡지의 흘러간 어제에 대해 간단히 추억해 주시지요.남영전: 돌이켜 보니 세월이 참 빠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겠지요. 장백  잡지가 태어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거의 30년이 돼 오는군요. 1980연대 통화지구에 조선족이 12만이 넘었지만 조선문 잡지가 없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통화지구의 지성인들이 모여 수많은 토론을 한 뒤에 상급에다 조선문잡지를 꾸리겠다고 신청을 했지요.. 당시 저는 류화현의 선전부에서 사업하고 있었는데  통화지구문련에서 잡지를  꾸릴 중임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 때 제 나이 바아흐로 32세였지요. 저는 선뜻이 임무를 맡았습니다. 몇 달간의 긴장한 준비과정을 거쳐 1980년 5월에 장백산 잡지가 마침내 고고성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잡지가 잘 꾸려지니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의 관심과 지지도 받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인 정령, 애청, 왕몽, 공목, 마라친부 등이 장백산에 축하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잡지사가 통화에 있으니 여러모로 불편하였습니다. 저는 집지를 성급으로 승격시키고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잡지를 성급으로 올리고 잡지사를 성 소재지에 옮기려고 저와  저의 동료들이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르고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릅니다. 장장 5년 , 장장 5년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985년 7월 마침내 잡지가 성급으로 승격하고 잡지사도 장춘으로 이사했습니다.김룡운: 듣고 보니 참 선생님께서 큰 일을 하셨군요. 이제부터 중심화제로 들어갑시다. 지금 중국문단에서는 선생님의 토템시를 놓고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평자들은 42수의 시로 세상을 들썽했다고 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봅니다. 한 소수민족 시인이 이 엄청난 대국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을 일으켰다는 자체가 실로 대서특필할만한 장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선생님을  모시고 할 말이 참 많습니다만  먼저 선생님의 초기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사실주의 시들에 렌즈를 돌려보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할머니», «휘우듬한 그림자»,«아버지», «스믈네살의 영혼» 등의 사실주의 가작들로 상을 타셨는데 창작경위거나 혹은 당시의 중국문단의 반향 같은것들을 듣고 싶습니다.남영전: 위에서도 잠간 말씀을 롤렸습니다만은 84녀도에 길림신문 기자가 저의 집에 왔을 때 저의 할머니의 인생사를 듣고 나서 손자로서 저런 훌륭한 할머니를 쓰지 않으면 당신은 작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한 마디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할머니는 단순히 한 사람의 할머니가 아니고 전 인류의 할머니라는 것을 깨닫고 «[할머니», «휘우듬한 그림자», «가지 마세요,가지 마세요»,를 창작했습니다. «[할머니» 로 제2기 전국소수민족문학상 1등상을 받았고«[휘우듬한 그림자»로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을 받았고 «아버지»로 제1기 길림성정부 최고문학상인 [장백산문예상]을 탔습니다. «아버지»를 쓰게 된 동기는 할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영웅적 전투사적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족 문단에서는 상술한 시들에 대해 평판이 좋았습니다. 주로 진실성으로 감동의 세계를  만든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김룡운: 선생님께서는 우리 글과 한어 두가지 언어로 구사하고 창작을 하고있어 다른 조선족작가들에 비해 우세를 차지합니다. 우리 조선족작가들 중에 한어로 창작하는 작가들이 극 소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세에 처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2백만만을 상대로 하는 글이다보니 울타리가 너무 좁아 중국문단이라는 큰 세계에 알려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조선족문학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남시인께서는 어떻게 생가하고 계십니까?남영전: 예, 저는 다행스럽게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합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모국어로 창작하해야만 자기 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 알리려면 부득불 다른 민족의 문자로 창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외 번역을 하는 방법이 있구요. 조건이 허락된다면 된다면 구가지 언어, 혹은 그 이상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 하지요. 21세기는 문화의 겨룸이고 경제는 글로벌입니다. 오늘의 중국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를 널리 알리려면 한어로 창작하든가 영어로 창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것이 지금 어렵거든요. 이전에 이근전 선생이 한어로  «범바위»를 썼고 이욱선생이 한어로 시를 썼습니다. 지금 우리 문단에서 전용선, 김용호,김인순 등이 한어로 창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글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민족 냄새가 풍기지 않아 한족이 쓴 것같은 감을 줍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타민적의 문자로 쓰더라도 민족정신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해 드리지요. 위글족 시인 테이프. 아리예브는 위글족 언어로 수천 수의 시를 창작한 사람으로서 위글족들한테 우상으로 받들립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하였습니다. 그의 시를 왕일지 선생이 한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왕일지 선생은 우리 나라에서 위글족 언어를 한어로 옮기는 데서는 절대적인 권위입니다. 그러니깐 물론 번역도 잘 되였지요. 그런데 한족문단에서는 이게 다 시인가 하면서 아리예브의 시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번역은 아주 잘 했지만 민족혼이 체현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자기 민족의  문화,풍습, 역사 등을 잘 알고 다른 민족의 언어로 창작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몽골작가 마라친부가 바로 그러하지요. 지금 우리가 당장 이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지요. 당면의 시급한 과제는 우선  번역을 통해 우리 문학을 세싱에 알리는 것입니다. 번역대오를 증강시켜야 되겠지요. 그리고 금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우리 글 뿐 아니라 한어 혹은 기타 언어로도 창작할 수 있는  기량을 닦아야 합니다. 김룡운: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재가 생각하건대  선생님께서는 민족과 개체를 초월한 문화관심과 문화운명감을 가지고 토템시를 창작합니다. 그러니깐 바로 여기에서 이른바 세계의 모든 민족, 전 인류적인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한족문단의 일부  평자들이 남영전 시인을 일컬어 조선족 시인이자 중화민족의 시인이며 나아가서는 전 인류에게 속하는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토템미학관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한번 자신의   .미학주장을 말씀해주시지요.남영전: 민족은 역사발전의 산생물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물이 산생과 사멸의 일로를 걷는 것처럼 민족도 산생, 발전의 과정을 겪다가 종국에는 사멸합니다. 지금의 세계는 여러 개의 민족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공동으로 발전해야 세계의 모습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마다 고유의 우수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단이 서로 교류하고 장점을 섭취하는 중에서 본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교류와 소통이 계속 되면 민족지간의 거리가 가까와지고 최종적으로 통일에로 나아가게 됩니다..그 때 가면 민족이 없어집니다. 이 것이 곧 인류원초의 문화에로의 회귀지요. 민족과 민족 사이에는 뛰여넘지 못할 장벽이 없습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민족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래서 나의 미학주장은 전 인류의 화해와 융합이고 사랑입니다.김룡운: 선생님의 말씀을 듣노라니 금시 세상이 따스해 지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한 민족에게 기껏해야 토템물이 한두개 정도 있다고 생각하고있었으며. 이런 생각이 통념으로 되여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한 민족에게 토템이 하나인 것이 아니라 여러개라고 주장 하시는데 그 이론적  근거가  무엇입니까?남영전:토템산생과정을  보게 되면 지금 사람들의 모든 성씨는 토템과 관계가 있습니다. 보통 한개 성씨마다 자기의 고유한 토템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군의 성이 왕(王)씨므로  왕씨성을 가진 사람들은 단군과 관계가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고려시조 왕검(王剑) 때 왕씨 성이 흥성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조(李朝)가 서자 왕씨네는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부득불 자기들의 성 王 씨를 全-田-玉-申-车 등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 민족 중에 왕씨 성이 적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신라왕 박혁거세의 시조는 밀양박씨의 시조로서 단군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 신라 경순왕의 후예는 투후 김알지로서 역시 단군과 관계가 없습니다.사실 매개 성씨마다 자기의 토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토템은 자기 시조의 탄생신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중국 광주에  중화토템박불관과 중화성명박물관이 섰습니다. 토템박물관에는 화하토템기원, 성씨토템, 가족토템, 띠토템과 상품토템 천여건이 진렬되어 있습니다.백개 토템에 백개성씨를 전시한 한족은 적어도 백개 이상의  토템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여러 씨족, 부족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결코 토템이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가령 우리 민족이 토템이 하나라면 언녕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개 민족의 토템의 풍부함과 빈약함은 그 민족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의해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신화를 보존하고 있는 민족은 토템물도 풍부하지만 신화가 없는 민족은 토템물도 빈약합니다.김룡운: 참 신선한 이야기입니다. 매 성씨마다 토템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경우 도대체 토템이 얼마나 될가요?남영전: 한개 민족을 하나의 그릇으로 본다면 이 그릇 안의 성원들은 모두 부동한 성씨로 조성되여 있습니다. 실상 매개 성씨마다 시조탄생신화로서의 토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후대들이 그 것을  모르고 있을 뿐 이지요. 지금 한족들은 성씨를 적게 잡아 만개가 넘는 걸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렇다고 할 때 그 토템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 민족도 280 여개의 성씨를 갖고 있습니다. 각 성씨의 시조탄생신화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많은 수자의 토템물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발굴과 연구 작업이 필요합니다마는  자료가 없어서 아주 어렵습니다.김룡운: 선생님은 또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된다는 «민족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민족은  문화에 의해 구분된다는 ”민족문화론»을 주장하고 계시는데 이 문제 상에서도 반발하는 분들이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남영전: 이 세상에는 원래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민족이란 인류발전의 산생물입니다 인류사를 보면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가족사회,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나타났으며 또 여러 씨족, 부족들의 끊임없는 융합과정에서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 이 네가지 요서가 상호 작용하여 민족을 산생시켰습니다. 민족은 단일혈통의 집합체가 아니라 부동한 혈통의 집합체로서 민족의 본질은 공유한 문화의 공유입니다. 민족을 문화의 개념으로 보느 것은 민족개념의 본질, 핵심을 꿔뚫은 논리이지만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 한다면 정체성 확보에 페단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실상 매 개인의  민족신분은 자신이 어느 민족의 문화를 고수하는가 하는 문제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 민족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우리 민족의 말을 모르고 풍속습관과 예의범절 등 문화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타민족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원래는 타민족 성원이지만 그가 우리 민족문화를 받아들이고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 민족 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성원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룡운: 예,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 핸들을 시집쪽에 돌려봅시다. 남시인께서는 2003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 사이에 [사스]와의 투쟁을 묘사힌 시집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펴내어 중국시단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산동대학의 오개진(吴凯秦) 교수는 «이 작품은 시인의 진정한 사랑과 인도주의 정신, 강렬한 사회 책임감을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북경대학의 사면(谢免)교수는 «가령( 꽃이 없는 이 봄날에)라는 시집이 없었더라면, 가령 우리의 친애하는 조선족 형제 남영전이 <사스>와 진행한 생사판갈의 영웅적 사적을 쓰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시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럽고 유감스러웠겠는가!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체면이 서게 되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중국당대문학사에서 한권의 작은 시집이 이와 같이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져준 사례는 매우 드믑니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되어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창작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그 창작 배경이나 계기 같은 걸  좀 이야기해 보시지요.남영전: 인간은 자연에서 왔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진정한 어머니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탄생시키고 키워주었는데 배은망덕한 인간이 군주로 자처하고 무자비하게 자연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그 자작지얼( 自作之孽)의 대가로 인간은 사스-즉 자연의 보복을 당한 것이지요.그리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더 심각한 마찰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이런 것들을 념두에 두면서 시집 «꽃이 없는 이 봄날에»다 중국의 전통문화의  정수인  천인합일의 사상을 체현시키려 했지요. 꽃이 없으면 봄이 있을 수 없고 봄이 없으면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이 시집에서 저는 저의 반성을 통해 인간의 반성을 촉구했고 가령 금후에도 인간들이 계속 깨닫지 못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심각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겸하여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이 시집에 대한 한족문단의 평가가 너무 높아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도 위에서 말씀했지만 사면 교수가 이 시집을 보고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체면이 서게 되었다»고 평가했는데 과분한 것 같아 오히려 몸 들바를 모르겠습니다.김룡운: 제가  한족문단에서 발표한 평론가들의 글을 퍼그나 봤는데 확실히 남영전 선생님의 토템시에 대한 평가가 높습니다. 일례로 곽지우 선생은 «민족토템시를 쓰고 그 것을 계렬화 한 것으로는 남영전이 시 역사에서 첫 자리를 차자한다»고 말했고 바이족 시인이고 평론가인 률원소적(栗原小狄)은 «남영전은 재일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준비 있고 목표 있게 그리고 끈질기게 토템시를 창작한 사람이다…남영전의 토템시는 중국의 시단을 심미정도(審美正道))에로 오라고 부르는 초혼이다» 고 말한바 있는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들이 중국시단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2003년  6월과 2006년 3월,2008년에 무한과 북경,장춘에서 각각  남영전토템시 세미나가 열리게 되었지요. 그런 회의들에서 어떤 평가를 했는지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 조선족 문단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퍼그나 많습니다. 남영전: 확실히 중국문단에서 저의 토템시에 대해 주목하고 관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의 토템시를 가지고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두번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조직했고 두번은 중국문단에서 조직했고 한번은 한국의 대학과 중국의 대학이 공동으로 국제세미나를 조직했댔습니다. 무한에서 열린 회의에는 제가 의식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본인이 회의장소에 앉아 있으면 어떤 발언자들은 눈치를 볼 수 있고 속말을 제대로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깐요. 결과적으로 대부분 평자들이 토템시에 대해  긍정해주고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물론 토템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구요. 수도사범대학에서 세미나를 할 때 중국시평계의 권위 인사들인 사면, 장오동, 양관한, 주천숙, 유사걸 등이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 어떤 학자들은 남영전은 토템시의 실천자이고 토템시의 명명자라고 평가 했고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은 새로운 시의 쟝르를 개척하여 미진한 중국문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놓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과분한 칭찬이어서 부끄러웠습니다. 기타 회의에서도 부동한 견해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로는 모두 좋은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김룡운:  지금까지 선생님의 토템시에 관한 전문저서, 이를테면 평론집, 감상집, 시서화집 전각집 등 11권의 단행본이 출간 됐고 그중에 두권은  우리 말 번역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책들을 저술한 작자들과 어떤 관계인지 그 것이 궁금하군요. 한번 말씀해 주십시요. 남영전: 추건군 선생이 제일 처음으로, 그러니깐 2003년 11월이지요. «원시토템과민족문화» 라는 평론집을 내 놓았습니다. 추건군은 이족인데 중남민족대학 문학원 연구생지도교수이고 중국소수민족문학연구가입니다. 1987년에 중국에서 최초로 «중국신시사전»>을 출판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2002년도에 그가 장춘에 회의를 왔다가 저를 만나자고 하여 두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고....주로 소수민족의 문학을 두고 말을 했는데 의기상투했지요. 그 때가 첫 대면이었습니다. 그가 저의 작품에 흥치를  가지기에 저의 토템시집을 주었습니다. 2003년도 7월에 그가 무한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조직했습니다. «남영전토템시감상»을 쓴 률원소적은 바이족고 사천의 유명한 시인이고 평론가입니다. 2003년도에 토템시집 «원융‟»이 나간 후 일년만에 그가 «남영전토템시감상»을 썼고 2005년에는 «시서화의시대공진» 전시회를 열고 화첩까지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서신과 전화로 연락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명규는 절강성 호주 사범학원 인문학과  교수입니다. 2003년도에  저한테  편지가 왔었습니다. 그는 률원소적을 통해 «남영전토템시감상‟을 봤다고 하면서 유관 자료를 요구하였습니다. 2006년도에 «남영존토템시론정수»를 편찬했고 2007년도에 «남영전토템시학»을 저술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분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2006년도에 «남영전토템시탐론»을 편찬한 오사경은 수도사범대학의 교수이고 중국의 저명한 평론가입니다. 언젠가 장춘에 회의를 왔을 때 잠간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돌아갈 때 저의 시집을 갖고 갔습니다. 얼마 후에 그가 수도사법범대학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조직하였습니다. 북경대학의 저명한 교수 사면 선생도 장춘에서 잠간 만난 알면지교의 관계구요. 그외 저의 시를 평해주신 양광한, 주선수, 류사경, 등 유명한 평론가들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분들입니다. 김룡운: 예, 참 잘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결국 선생님의 토템시가 뉴대가  되어  평글을 쓴 분들이군요. 또 하나의 기이한 문화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토템시와 서법,회화의  포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토템시와 서법, 미술이 결합한 화책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이 것 역시 아주 신선한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것은 시문학의 한 현상으로 될 뿐 아니라 서법과 회화에서도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도 아시는 대로 이야기 해 주십시요.남영전: 요컨대 토템시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이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아마 화가 ,서예가들이 토템시에 눈길을 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이 방면에서 또 률원소적이 대단히 흥치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는 비단 유명한 시인이고 평론가일 뿐 아니라 이름있는 서예가이고 화가입니다. 2005년도에 이 분이 발 벗고 나서서 활동을 조직했습니다. 중국서부문예통감위원회,사천대학교문학과 인류학 연구소, 서남민족대학교 예술학원, 사천사범대학교 현대미술학원, 성도시 서법가협회의 연함주최로 «남영전토템시명가서화연합작품초청전람회»(南永前图腾诗名家书画联合招请展缆会)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저명한 서법가, 미술가들이 남영전의 토템시를 미학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람회의에 내 놓은 작품이 40여 점이 었는데 그중 태반이 넘게 선택된 작품들이 잡지 «미술계»,«성성»,«서부려유특간»에 실렸으며 선택된 작품들을 모아 주강문예출파사에서 «시서화의 공진시대»(诗书画的共振时代)라는 화책을 출간하였습니다.김룡운: 그리고 또 하나, 중국에서 조선족의 유일한 전각가(篆刻家)인 신승우(申承佑) 선생이 전체(篆体)로 토템시를 가지고 인장(印章)을 조각하여 «남영전토템시자구인 »(南永前图腾诗字句印)이라는 특수힌 책을 만들었더군요. 전체란 중국 고대의 6가지 상형문자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신승우 선생이 고대의 상형문자를 알고 있다니 참 대단합니다.주정(周青)이라는 전각 전문가가 그 책에 대하여 «남영전 토템시자구인»을 보고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전각과 토템시의 모체정신의 이미지가 십분 조화를 이룬다.»고 절찬했는데 어떻게 되어 «남영전토템시자구인 »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요.남영전: 승우선생은  길림신문사의 고금촬영가이고 중국조선석의 유일한 전각가입니다. 2003년에 북경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가 열렸을 때 그도 참가하였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토템시 몇수를 가지고 «토템시자구인»(图腾诗字句印) 몇개를 만들었습니다. 시대문예출판사 부주필인 장홍라(张弘罗)가 그 것을 보고 «이 전각이 아주 수준이 있다. 42수를 몽땅 전각자구인으로 만들라. 책은 내가 찍어주마» 라고 했습니다. 결구 이렇게 되어 «남영전 토템시자구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겁니다. 승우선생 본인은 창작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촬영 애호가이고 전각 애호가이다. 직업상의 원인으로 근 심여 년간 촬영에만 몰두하고 전각에선 손을 떼었다. 그러던 중 남영전의 토템시에 매료되어 전각 충동이 다시 일어 났다. 어쩐지 시화된 원시토템과 유구한 전각예술이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이 나간 공로는  신승우선생한테 있습니다.김룡운: 토템시의 감화력이  확실히 크군요. 잠 자고 있던 전각가도 깨어나고… 또 하나 궁금증이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학계나  외국학계에서 선생님의 토템문화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영전: 지금 중국사회과학원, 중국작가협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학자들은 남영전의 토템문화와 토템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지간의 조화관계를 호소하는 것으로 인류의 생존위기를 극복하는데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토템연구를 국제에로 확대시키는 것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금년 년말에 중국작가협회와 한국의 부경대학이 연합으로 남영전토템시연구세미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최종목적은 중국과 한국간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일부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남영전토템문화연구세미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온 소식입니다마는 인류학자 진자복이 »남영전토템시와 인류학시학»이라는 저서를 이미 탈고 했고 선박이라는 교수는 «신화, 토템, 원융»이라는 저서를 집필중에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말씀 드리자면 절강성 호주(湖洲)사범대학 인문학원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를  대학의 공공선택과목으로 선정하였고 학생들이 흥치를 가지기에 앞으로도 계속 설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대학원에서 교수들이 공동으로 토템시교수안을 만들고 학생들은 토템논문집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 학교에 서예에 조예가 깊은 멍디신(孟狄锌)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52수의 토템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김룡운: 들어 보니 대단히 기쁜 소식이군요. 토템의 영향력이 이렇게 클 줄은 정말 상상밖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42수의 토템시를 썼는데 최근에 쓴 것은 없습니까?남영전: 예.새로 쓴 것이 있습니다. 발표는 아직 하지 않았지만 2007년8,9월에 토템시 «들소»를 창작하였고 금년 1,2월에 «물고기»를 비롯하여 아홉수를 창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도합 10수를 새로 창작한 셈이지요. 길림성작가협회에서는 국경 60주년을 맞으면서 국경경축기념으로 성과가 있는 부분적인 작가들의 작품집을  내 주게 되는데 저도 운수좋게 그 중에 들었습니다. 원래의 42수에다 10수를 첨가해서 «남영전토템시집»이라는 표제로 북경작가출판사에서 찍게 됩니다. 이 책은 매 수의 토템시에 해설문, 그림, 전각이 함께 들어가서 아마 좀 새로운 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룡운: 들어만 봐도 아주 독특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책일 것 같군요. 그 책이 하루 빨리 세상에 나오기를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읍니다. 선생님의 금후의 구상이나 타산 혹은 계획을 간단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남영전: 한 마디로 말씀 올리면 요컨대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 창작은 금후 내 후반생의 전부를 차지할 것입니다. 모든 정력을 오직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 창작에 몰부을 것입니다. 국내외에서의 토템문화연구와 토템시 창작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려는 취지에서 토템문화연구원을 세우려고 합니다. 지금 한창 추진 중에 있습니다. 김룡운: 선생님의 꿈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잡지와 신문 일로 눈코 뜰새 없이 돌아치면서도 이렇게 만나 주셔 고맙고 더구나 우리 조선족 문화발전에 도움이 될 귀중한 말씀을 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금후 장백산 잡지와 길림조선문이 우리 민족의 문화창달에 더 큰 기여를 하고 선생님께서 토템문화 연구와 토템시 창작에서  더 일친 수확을 따낼 것을 미리 축원하며 선생님께서 화해와 융합과 사랑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계속 줄기차게 전진할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시 갱신의 길에서 몸부림치는 시인 최룡관 댓글:  조회:1413  추천:51  2009-11-09
시 갱신의 길에서 몸부림치는 시인 최룡관 김몽1.최룡관 시인의 문집이 세상에 나왔다. 이는  비단 최룡관 시인의 영광일뿐만 아니라 우리 시단의 일대 희사이기도  하다. 이 자리를 빌어 오늘 잔치의 주인공인 최룡관 시인에게 뜨거운 축하를 드리고  그리고 그를 경하하러 온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최시인은 지난 40연간 특히 90년대초부터 득도의 길을 걷는 고행승처럼 치령한 시정신을 가지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왔다. 그의 시정신의 특징은 리론으로 창작을 이끌고 창작으로 창작으로 리론을 충실히 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을 충실히 했을뿐만 아니라 제자양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우리 시단의 새로운 시분위기 형성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는바 이 면에서 최룡관 시인은 충분한 긍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우리 조선족 시단에서 시 혁신에 앞장선  이들로는 60대에서 한춘, 김파, 남영전을 들수 있겠다. 40대에서는 일찍 김혁이 신오감도를 갱신을 시도한바 있고 조광명이 불교시로 새로운  시령역을 개척한바 있다. 한춘과 김파와 최룡관과 남영전은 문학에 대한 지대한 사명감을 안고 현대시의 창작과 보급과 선양에서 모두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쌓은 공신들이다. 남영전은 현대파시는 아닐지라도 토템시라는 새로은 기치를 세워 우리 조선족시단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시단에다도 강렬한 반향을 일이켰다. 이네들의 시혁신은 개혁개방후인  80년대 중기와 90년대 초기로부터 시작된다. 더 가까이에서 말하면 서구현대파문학사조의 접근과 함께 발걸음을 떼게 된다. 당시 한춘은 중국문단을 통해 서구문학사조를 접하였고 김파와 최룡관은 한국이이라는 통로를 통해 접하게 되였다. 이들은 현유의 시질서에 회의와 반감을  가지고 혁신을 시도하였다. 즉 부정을 전제로 한것이다. 요컨대 부정은 혁명의 근본요인이다. 1561년 콜롬보스가 지부랄타르해협을 건널 때 거기에서 [세상은 여기서 끝난다]는 패쪽을 보았다. 콜롬보스는 그 패쪽을 떼여버리고 대신 [세상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는 패쪽을 세웠다.최룡관을 포함해서  우에서 말한 혁신파들이 여지껏 단일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주의시 혹은 가짜 현실주의에 물젖고  얽매여있다가 갑자기 아주 낯선 문학사조와 부딛쳤을 때 그 신비감과 황홀감과 경이로움은 비할데 없이 컸을 것이다. 이들이 모더니즘의 금자탑인 엘리엣의 [황무지]와 신비평의 경전인 [성스러운 숲]을 만났을 때, 해체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창시자 데리다를 배알하고 이미지즘의 창시자 파운드를 접견하고 구조주의 창시자 소쉬르, 상징주의 사부 보들레르와 통성명하고 과학적 언어는 일차적이고 예술의 언어는 다치적이라고 주장하는 리성주의자 렌셈을 알게 되고 그리고 라캉,랭보, 말라메르, 도르카, 준자로부 등 명인들을 알게 되였을 때 을 때, 이들은 마치 광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 콜롬보스가 신대륙을 발견한듯 신비와 경이로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감동의 폭이  가장 크고 넓은것이 최룡관시인이였다고 생각된다.이네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은유와 상징의 본질, 그로부터 언어의 변형과 파괴의 참뜻을 알게 되였다. 이들이 시혁신의 기치를 추켜들었던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반기를 들고 이단자로 몰았다. 어찌보면 집단무의식의 결과라고도 볼수 있다. 물론 지금은 우리의 시가 화해와 공존의 마당에 들어서고는 있지만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나 쉐르알리즘에 대한 반감은 일부 사람들중에서 지금도 계속되고있다.최룡관 시인을 비롯해서 시혁신파들의 각성은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시어란 대관절 무엇인가  하는데로부터 시작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어는 왜서 일상어와 달라야 하는가 ? 일상어와 시어의 구별점은 구경 무엇인가? 왜서 시어는 변형되지 않으면 아니되고 다의성 내지 난해성, 모호성을 띠지 않으면 아니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하려는데서부터 발단하고 발전한다.최룡관시인의 경우 오래동안 사실주의 시를 써 오다가 서구현대파문학사조를 접한후 크게 깨닫고 참회와 각성으로 누벼진 피나는 고백의 시를 쓰는데 이른다. 그는 나의 도솔천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도솔천]은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고 수련과 고행을 통해 다달은 정화된 부활의 보금자라라고도 볼수 있겠다) 《나의 청춘에 나의 머리가 없었다. 남의 머리를 나의 어깨우에 붙히고 다녔다. 나는 남의 말을 받아하는 앵무새였고 살풍경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는 소경이였다. 다리는 나를 업고 남으 꽁무니만 따라다녔다….먼 후날 내 머리가 아님을 알았을 때 람루한 청춘이 환히 보여 미칠것만 같았다. …찾은 다음에는 내문에서 피가 나왔다. 새빨간 피를 흘리고 나서 세상을 보았을 때 세상은 한가지 색갈이 아니고 무지개처럼 현란한 여러가지 색갈이였다.》 이 시는 뼈저린 각성과 참회라고 볼수 있는데 인간적인 참회와  시적인 참회 모두를 포괄하는것 같다. 그 다음 시인은 참회와 각성을 통해 깨도의 대문에 들어섰음을 증명하고자 시어를 마음대로 변형시키변서 스스로 시의 향연에 도취한다. 《하늘을 먹는다.하늘은 먹을수록 맛있다 임으로도 먹고 코로도 먹고 손으로도 먹고 …제일 고소한것은 심장으로 먹는거다 심장으로 먹는것은 내가 하늘을 먹는지 하늘이 나릉 먹는지 모른다 실컷 먹고나면 하늘이 나인지 내가 하늘인지 모른다 하늘이 모여와 내가 되고 내가 흩어져  하늘이 되는 일은 누구나 다 꿈꾸어볼 일이다》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으로 씌여진 이 시는 사앙곡 ㅏ상징의 무한한 힘과 나아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사이비한 신비경을 읊조리고있다. 문학의 갱신에  있어서 특히 시에 갱신에서 사유의 갱신 다음으로  중요한것이 언어의 갱신이다. 다 아다실히 요컨대 언어는 언어는 문학의 시작이고 경과이고  결과이고 모든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궁극적으로는 .시어란 무엇인가에 귀결되며 모든 쟁론거리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시어란 구경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우선 시란 무엇인가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시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이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간단한 것이 [신과의 대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구절 인용해보기로 한다. 말씀이 (言)이 관청에 바쳐지면 시(诗)가 되고 나(吾)에 바쳐지면 말(语) 즉 일상언어가 된다. 관청이란 천자가 있는 곳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있는 곳이다.중국적인 개념으로는 신전(神殿)이다. 이 말은 말씀은 신을 위해 쓰게 되면 시가 되고 나를 위해 쓰게 되면 언어가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대화]는 시(诗)이며 [사람과의 대화]는 언어(言语)가 되는것이다.여기서 말씀은 곧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교감하면 시가 되고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과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일상언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에서도 시는 신탁이락 해서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고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해서 그냥 뜻을 받들어 전할뿐자기가 짓지 않는다고 했고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뿐 자신의 생각을 말할수 없었다. 그러니깐 시(诗)는  言=神 의 자리 곧 사람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이 같이 자리한 곳인것이다. 그래서 서정시를 [신과의 대화]라고 일컬은다. 오늘에 와서 신이나 주재자나 하느님은 원뜻을 벗어나 거룩한것, 위대한것, 성스러운것을  뜻하며 또 창조와 통한다. 이렇게 보면 시의 혁신은 결국은 사유의 혁신이고 언어의 혁신이다. 우리가 우래동안 통치를 받아왔던 시어는 많이는 시어가 아닌 일상언어였다. 우리들은 긴 세월 과학의 옷을 입은 일상어를 시어라고 착가하며 살아왔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착가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최룡관은 불만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시혁신을 시도한것이다. 일상어로부터 시오로 비약핮면 부득불 은유가 있어야 되고 싱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은유와  상징은 또 불가피적으로 언어의 변형을 주문하게 된다. 진정한 시인은 가장 합당한 변형과 파괴에서 무상의 묘미를 감지한다. 하기에 쵸페탕 포도로프같은 학자는 《문학은 언어로 하여금 스스로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살상도구와 같다 》고 까지 말한바 있다. 최시인의 <언어>라는 시 한수를 보기로 하자. 내가 부르면 상상의 나무가지에 파랗게 날아와 앉는  파랑새무리새들의 노래에 괜히 신들리는 나아야 어여 가갸 거겨 구기한낮이면 구름이 되고한밤이면 별이 되는 너희들 내몸에서 방울방울 흐르는 피여 손가락끝에서 피빛만 보아도아하, 온 몸에 전률이 이는것을 -<언어>최시인의 시각에서 시어란 바로 무궁한 상상의 힘을 지닌 존재로서 내 몸에서 흐르는 피로서의 존재이며 신 들리게 하는 존재이며 전률하게 하는 존재이다.2.최시인은 시종여일 게으름없이 끈질기게 시리론을 탐구하면서 시창작에 매진해왔다. 리론선도를 전제로 시창작을 하고있다는데서 최시인의 시혁신은 남다른 외모를 보인다. 최시인의 혁신에는 인식과정이 있었다. 즉 현대시를 발견하고 인식하고 감동하는 필수과정이었다. 그 과정을 간단하 살펴보고자 한다.  오래동안 단일하고 앙상한 가짜사실주의 시에 얽매여 살아던 시인이 시는 [신과의 대화]라는 엄청남 발견을 하고는 미칠듯이 기뻐한다. 이 발견에는 언어,이미지, 상상, 상징 상관물 등이 속한다. 시인은 이러한 발견을 공허한 부르짖음으로 설교하는것이 아니라 시적행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웨치고 있는데 그것이 귀중하다. 우선 시인이 현대시를 어떻게 리해하고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혼돈혼돈 신기신기 은유의 숲 상징의 숲 빙글빙길 돌아돌아돌아 사람은 하늘을 밟고 뒤여다니고 해는 개미가 뚱 차올리고 그름은 뜰에 내려와 열두발 상모로 하늘으 휘휘 젓는다  감는다 감는다 감는다어제 어제 어제 뜬다 뜬다 뜬다 래일 래일 래일 어디 갔냐 갔냐 갔냐 오늘오늘오늘 자식 현대시 정말정말정말 무무무 시시하다-<현대시>전문시인은 은유와 상징으로 현란하고 신묘하고 무궁무진한 세상을 만들어놓고 미칠듯이 포옹하고있다. 시는 은유와 상징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음을 시사하면서 은유와 상징의 중요성을 시화하고있다.상상의 발견에 대해서는 이렇게 노래부른다. 나는 평생 너의 푸른 마차에 앉아너의 채찍을 맞으며무딘 칼을 갈아야 할 우스운 남자-<너의 채찍을 맞으며>자유자재라는 여기에 상상의 속성이 있고 영원이라는 여기에  상상의 생명력이 있다. 시인은 이 두가지 의미를 포착했기에 <푸른 마차>라는 상관물을 만들어낸다. 상징에 대한 시인의 해답을 보기로 하자. 울긋불굿 웃고있는 꽃들의 향기향기새들의 날개짓에 오르내리는 신비경기이경끝은 어디 -<상징1> 하이얀 저 하늘 끝에 깜장별 하나 나는 그 별을 따고싶어 목이 마른다 ..드디어 깜장별을 잡았다 홀제 껍질이 벗겨지면서 별이 황홀을 드러내다 나는 빛에 화뜰 놀라서  잡았던 손을 푼다 천야만야 떨어지면서 나는 한점의 연기로 사라진다 푸른 하늘에  별 하나 -<상징2>시인은 상징을 [울긋불긋 웃고있는 꽃들의 향기>로 <저 하늘 끝에 걸린 깜장별 하나>라고 의식하면서  그속에서 무한한 신비경을 발견한다. 시인은 묘한 후각이미지, 시각이미지로 상징에 대응하는 <꽃>이미지와 <별>이미지를 창출하고잇다.시인은 상관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괴짜괴짜괴짜보들레르 몸에다 랭보 옷을 입고말라르메 안경에다 발레의 지팽이를 짚은로르카 장갑에다 준자브로 신을 신고 뚜거덕뚜거덕…산파산파산파물속에 들어가 멧새를 낳는바위속에 들어가 망아지를 낳는풀잎속에 들어가 궁궐을 지어내는 으하하 미쳐서 미쳐서 미쳐 사는 꽃이야-<상관물>시인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시키는 상관물의 요지경같은 신비를 미친 < 꽃>에 견주고는 미친듯이 기뻐하고있다.하다면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있는가넌 내 손 잡고 어디로 가니조물주야말짱 첨보는 것들이구나진달랜가 하면 진달래가 아니고바윈가 하면 바위가 아니고강아진가 하면 강아지가 아니고죄다 이생 저생에도 없는것들물과 불의 살놀이로 태여난 이쁨들아-,이미지> 최시인은 이미지가 불조화속에서, 역동속에서 모순속에서 이질속에서 즉 아니러니적인 구조속에서 탄생하고있음을 인지하고있다. 그 전형적인 시구가 <물과 불의 살놀이>이다. 은유, 상상,상징 ,상관물, 이미지 등 현대시에 대한 시인의 발견과  인식이 두터운 발판이 되여 최시인은 본격적으로 이미지시를 쓰게 되도 쉐르알리즘시를 쓰게 되고 인체시 <누드의 언어>를 쓰게 되며 또 풍만한 실천을 바탕으로 <이미지시론>도 쓰게 된다. 아래에 최시인의 인체시, 이미지시,쉬르알리즘시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어보려고 한다. ㄱ) 인체의 언어시 최룡관 시인은 시혁신의 한 실험형식으로 인간의 몸을 가지고 <누드의 언어>라는  시를 썼다. 결국 <누드의 언어>도 이미지시지만 그 형식이 너무나 파격적이고 신선하기에 별도로 론의하게 된다. 한국에서 시백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문덕수 선생은 최룡관의<누드의 언어>에 대해 인체의 언어를 썼다고 찬양한바있거니와 최룡관 시인에 의해 인체의 모든 부위가 시어로 둔갑해 시어의 영예를 지니게 된다. 잠간 살펴보면 따끈한 다리미는 다 구겨진 옷주름을 깔끔하게 펴놓는다 한번 다림이질 하려면 숯불을 마련해야 한다숯불을 마련하자면 검둥이로 되여야 한다 따끔한 다림이는 누구나 요구되지만 검둥이로 되기는 누구나 놓아하는것이 아니다 -<손1.><손>이  <다림이>라는 엉뚱한 사물로 변모하면서 사색을 요구한다. 시인은 다림름이의 이미지를 통해 철학적으로 희생정신을 도출해내고있다. 작자는 <손>을 가지고  7편의 각기 다른 내용의 시들을 쓰고있는데 시각에 따라 손이 어떤 때는 악기로 되고 어떤 때는  요술주머니가 되고 어떤 때는 돌이 되고 칼이 되고 가위가 되고 마치가 되기도 한다. 그냥하늘을 가위질한다 한 자락도 베여내지 못하면서 추운 하늘도더운 하늘도사락사락 -<다리2>두 다리를 형태의 상사성에 비기여 가위로 형상화한것이 돋보인다.하나는 해하나는 달해가 가면 다도 가고 달이 가면 해도 간다낮에도 해와 달 밤에도 해와 달시간을 살리기도 하고 시긴을 죽이기도 한다 한 쌍둥이 먼먼 인생길에 고달파 -,무릎>1두개의 슬개골을 해와 달, 나아가서 쌍둥이 이미지로 설정한것이 돋보인다.<발5>가 아주 기발하게 씌여진것 같다외씨같단 의미를인젠 점알것 같다 외씨속에는 파란 잎이 있고자라는 넌출이 있고노란 꽃이 있다꽃속에는 벌들이 먹는 꿀이 있고꽃 밑에는 고토리만한 외가 외친다따지 말아요 가시로 찌르겠어요 외씨같단 말의 의미를 인제는 좀 알것 같다 -<발5>작자는 평범한것 같은 발 외씨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본다. 살아 숨쉬는 생명의  푸른 세계를 본다.  아름다운 녀인을 본다. 발이 외씨같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녀인의 발을 두고 하는 소리다. 작자는 멋있게도 외씨속에서 고토리까지 발견하므로써 시를 극치에로 이르게 한다.ㄴ)이미지시 최시인의 시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그리고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것이 이미지시인줄로 안다. 일일이 건드릴수 없으므로 몇수만 살핌의 대상으로 삼는다. 가슴에 총총총돌별이 떴다 시의 오리에 별들을 뀌여찬연한 목걸이 만들었다목걸이를 거는 순간나도 그대로 돌이 되노라-<종시>최룡관 시인은 <돌>이라는 표제로 31수의 시를 썼는데 인용한 시는 그 마지막에 놓인 종결시다. 도대체 돌이 무엇일가. 필자의  나름대로  풀거니와 시인의 마음속에 둥지틀고있는 그 어떤 숭고한 우러름의 대상이나  우상의 상징일수도 있고 민족얼의 다른 이름일수도 있다. 아무튼 참된 무엇인것만은 의심할바없다. 문제는 하나의 <돌>이 어떻게 형상화 되여 우리 감각에 와 닿는가에 있다. 이 짧은 시에서 <돌>은 하늘에 떠있는 별로도 되고 아주 진귀한 목걸이로도 되고 시인 자신으로도 되여 다양한 모습을 지니면서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주문한다. <시2호>를 보자꽃잎이 혀끝 내미는 순간바늘귀 떨어져도 우뢰소리잎은 두손을 받쳐들고구름은 숨을 죽이였다드디어 꽃잎들 종소리잔잔한 물구름처럼 퍼져갔다산도 땅속으로 잦아들었다가다시 머리를 든다-<시2호>아름다운것의 탄생의 신비성 내지 무한한 마력을 느슨함과 긴장함의 조화로 묶어내고있다. 아름다운것의 탄생은 신기루같은 황홀경을 동반한다. 여기서 시도 례외일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것이 시니깐. [꽃잎이 혀끝을 내밀때] 즉 아름답고 신성한것이 태여날 때 그 경이로움에 놀라 우뢰가 울고 꽃잎이 두손을 받쳐들고 구름도 숨을 죽인다. 시의 힘이 신의 말씀처럼 종소리로 울리고 산도 감격하여 잦아들었다가 다시 머리를 든다. 이  시는 고요함과 긴장감이 잘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것의 탄생을 노래부르고있다. [별]도 격절탄상할만한  이미지시로 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하늘에 송송 구멍 뚫렸나벌집같은 구멍마다에서등잔불이 가물거린다.누굴 기다려 등불은 장밤을 바르르 떨고있는가-<별>이 시는 표제를 그리움이라고 달아도 될듯 싶다. 시인의  상상력은 아주 기발하여 하늘엣서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벌집으로 둔갑시키고 또 벌집을 무수한 등불로 만든다. <누굴 기다려 장밤 떨고있는가>에 이르러 시가 전반 시가 콱 익어간다. 그  물음이 잔잔한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다. <등불>의 의미에 대해 읽는자는 자기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순간의 즐거움을 누릴수 있다.이미지시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것이 <꽃병의 동화>이다. 꽃병이 온 몸으로 간다누런 잎들이 이즈러진 초행길가면서 배암처럼 껍질을 벗는다껍질을 벗어서 갈길을 줄인다…시인이 꽃병을 직관하는 사이꽃병이 쪼르르르 껍질을 벗겨서시인을 도르르 감느다어느새 시인도 꽃병이 된다두 꽃병이 어깨 나란히향기로운 껍질을 벗어놓는다-,꽃병의 동화> 찬란한 동화 드라마가 펼쳐진다. 주인공은 꽃병과 시인이다. 드라마의 진행에 따라  꽃병과 시인이  동일 이미지로 겹쳐진다. 아름다운 시가 아름다운 시인을 만들고 아름다운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만든다. 이 시는 간단없는 자아부정속에서의  거듭남의 기쁨을 노래부른것 같다.ㄴ) 초현실주의시 최룡관시인의 시에서 초현실주의  시도 적지 않다. 하긴 많은 면에서 리상의 <오감도>를 본보기로 한 흔적이 력력하지만 아무튼 그 실험정신만은 고귀하고 거둔 성과도   충분히 긍정할바이다. 최룡관 시인은 모두 16수의 현대오감도를 창작하였다. 일찍 1990년대 초에 김혁이 <신오감도>를 창작하여 혁신을 꾀한바있고  일정한 파문도 일으킨바 있다.최룡관 시인의 쉐르알리즘의 시들은 주로 현대사회의 비리에 대한 야유거나 조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듯 싶다. 현대오감도3가가 문을 열고 달아난다나가 바가지를 들고달아난다다가 사발을 들고달아난다라가 옷을 벗겨가지고달아난다마가 농짝을 들추어가지고달아난다바가거미줄을 쓸어가지고 달아난다사가 쌀마대를 둘러메고 달아난다빈집 컴컴한 빈집 괴괴한 빈집홀제 부엉부엉부엉 부엉이 울음성우르르  꽝꽝 하늘의 박수성 이 시는 세상의 무질서와 혼란 그런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조소와 풍자로 읽혀진다. 현대오감도 71번이 도적을 잡으라 외친다2번이도적을 잡으라 외친다3번이도적을 잡으라 외친다4번이 도적을 잡으라 외친다…9번도 도적을 잡으라 외친다처음 외침보다 두번째 외침이 더 높다두번째 외침보다 세번째 외침이 더 높다세번째 외침보다 네번째 외침이 더 높다… …아홉번째 외침이 여덟번째 외침보다 더 높다 수량을 따지면 9번이 1번보다 많아 좋고 등수를 따지면 1번보다 9번이 영예가 더 많다 한마디로 이 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이 세상에는 절대적이 진리가 없다는것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다. 이상으로 최룡관 시인의 시들을 서투르게 살펴보았다. 최시인은 이번 문집에 말짱 현대시만 수록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주의 시들의 얼굴도  일부 보여 약간 손상을 주는것 같았다. 최시인은 필경은 현실주의시로부터 발자국을 뗀 사람이라 은연중에 찾아오는 현실주의 옛 그림자를 몽땅 털어버릴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례하면 <고향의 축객령>,<양>, <창문>, <소가 주인을 어떻게 볼가요><정판룡 령전에> 등등이다. 이런 시들은 근근히 1차적 비유 내지 직유에 머무르고 말아 은유와 상징으로서의 현대시의  특점을 나타내지 못하고있는것 같다.  한두수만 보기로 하자 위창문아래창문두 창문이 있다 위창문으로 혼탁한 공기가 나감은아래창문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때문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위 창문만 칭찬하고 아래 창문을 들볶는다-<창문> 시인이 어떤 현상을 비판하려는가는 명백하지만 직설적이여서 시로서는 약하다. 그리고 어딘가 동시같은 맛도 없지는 않다. 내 무슨 죄를 지었기로 이 나무에 달리여찍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백정의 칼을 받아야 하나요 내 무슨 죄를 지었기로가죽을 발리고피를 흘리고꼬치꼬치 굽혀애 하나요내 무슨 죄를 지었기로죽어서도 북이 되여둥-  둥둥둥- 둥둥슬프게 울어야 하나요내발로 다니며이슬 풀을 뜯어먹은 것도 죄던가요내발로 다니며흘러가는 내물을 마신것도 죄던가여-<양>이 시도 사실을 그대로 렬거하여 씹을 맛이 없다. 그러나 이런 시들은 최룡관의 시들에서 극 소수에 불과하다.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한마디로 최룡관 시인은 리론으로 시창작을 끌고 시창작으로 시리론을 풍부히 하면서 현대시창작에서 풍만한 성과를  올린 시인이며 우리 시단에 현대시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시인이며 후대들의 육성에서도  공이 많은 시인이다.  최룡관 시인의 문집의 출간에  다시 한번 축하드린다.
2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 댓글:  조회:1713  추천:40  2009-09-02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 김룡운1.남영전의 인생그라프남영전은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輝南縣) 소의산(小椅山)이라는 한 벽촌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남영전의  모친도 모진 정신타격을 받고 남영전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남영전은 어린 시절부터 모성애와 부성애를 모르고 할머니품에서 자랐다.남영전의 할머니는 다감다정 하시면서도  보기 드믄 강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었건만 모든 슬픔을 속으로 삭이고 손자를 데리고 굳세게 살았다. 연약한 여인의 어깨에 가정의 모든 중임을 떠메고 이악스레 험난한 삶의 길을 헤쳐나갔다. 할머니는 여가가 있으면 어린 손자에게 아버지와 삼촌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용맹히 싸우다가 희생된 영웅적 사적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남영전의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삼촌의 형상이 산처럼 틀고 앉았다. 남영전이 가슴을 울려주는 사실주의 가작 - <아버지>,<스물네살의 영혼> 등 시편들을 써낼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할머니 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큰 작용을 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모든 희망을 어린 손자에게 기탁하고 남영전을 장중보옥처럼 애지중지하고 태양처럼 믿고 살았다. 할머니에게 있어서 손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귀중한 존재였다.  어린 손자에게 보다 훌륭한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1955년 남영전이 8세 나던 해에 소의산(小椅山)에서 백 여리 떨어진 휘남(辉南)현성에 가서 남의 집 북쪽 구들을 세 맡고 모든 정력을 손자의 공부에 몰부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의 집의 보모로 일하였고 일요일이면 산에 가서 등짐으로 나무를 해 왔다. 병약한 몸이라 산길에서 나무짐을  진채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른다. 이러한 눈물겨운 사실들이 그후 남영전의 시  「휘여듬한 그림자」,「할머니」,「가지 마세요」에 생생히 묘사되고 있다.  할머니는 유정 하시면서도 성격이 대쪽 같아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절대로 구원을 바라는 일이 없었다. 두 아들이 혁명열사이므로 어려울 때  나라에 손을 내 미는 것은 너무나 당당한 일이었 것만 할머니는 그 허려운 환경에서도 정부를 향해 그 어떤 요구도 제출하지 않고 자기의 두 손으로  익척스레 일하면서 두 사람의 생게를 이어 나갔다.     할머니의 생각은 오로지 한가지, 어린 손자를 잘 키워 출세를 시키는 것이었다. 남영전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할머니의 사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체 건강히 공부를 잘 하는 것만이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기고 짬짬이 할머니를 도와 집안 일을 하는 한편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그의 성적은 학교에서 언제나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고중 2학년 때  북경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게 될 기회가 있었지만 느닺없이『문화대혁명』이라는  폭풍이 불어와 그의 아름다운 꿈은 꽃봉오리도 맺지 못한 채 무참히 찬 서리를 맞고 말았다.   1967년에 류하현《柳河縣》제1고중을 졸업한 남영전은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갔다. 남영전은 농촌에서 최하층 인간의 쓴 맛을 다 겪으면서 결연히 필을 들고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책 구하기가 힘들어 여기 저기 뛰여다니며 책을 구해 열심히 읽고 필기를 하였다,   1971년에 처녀작이 발표되었다.  농촌에서 일을 잘 한 덕으로 휘남 현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시내에 와서도 무슨 일이나 착실히 하여 성과를 올렸으므로 상급의 중시를 받았고 간부로 발탁되었다. 이 때로부터 남영전의 고난에 찬 비운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고 청운의 새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남영전은 일을 열심히 하는 한편 수많은 고금중외의 명작들을 탐독하였다. 그는 실천 속에서 창작하고 실천 속에서 제고를 가져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시창작의 법칙을 장악하고 문학원리를 파악하였다. 오래지 않아 길림성 시단의 싱싱한 싹으로 두각을 내밀어  중국 시단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모두 한어로 창작한 것들이다. 남영전은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한어와 조선으로 창작하는 몇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남영전이 상을 탄 작품들은 모두가 한어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이 것은 남영전의 큰 우세이다. 가령 남영전이 조선어로만 창작하고 한어로 창작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중국에서 남영전 문화화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겠는지 장담하기 바쁘다. 남영전은 민족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다. 1980년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미 시작 되었지만 남영전이 살고 있는 길림성 통화(通化)지구에는 그때까지도 조선문 잡지가 없었다. 인구가 12만이 넘는 지구에 조선문 잡지가 없다는 것은 불행한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하 많은 조선족 지성인들이 거듭되는 토론 끝에 상급에다 조선문 잡지를 꾸리겠다는 청구서를 올렸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정부에서는 통화지구 조선족 인사들의 청구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당시 남영전은 통화현의 선전부에서 사업하면서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1980년 통화지구 문련(文聯)에서는 조선족 문학조직을 세우고 조선문 잡지를 꾸릴 중임을 남영전에게 맡겼다. 그 때 남영전의 나이 바야흐로 32세였다. 남영전은 선뜻이 임무를 맡았다. 어찌 보면 그 때가 남영전의 운명을 돌려세우는  전환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영전은 우선 조선어로 창작하는 작가들을 두리에 뭉치게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제때에 통화지구 작가들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나가도록 힘썼기에 통화지구의 문학조직이 날따라 장대해졌다.  몇 달간의  긴장한 준비과정을 거쳐 1980년5월, 마침내 『장백산』잡지가 고고성을 울렸다. 186페지의 부피에 30여 만자의 용량, 미구하여 『장백산』으로 사면팔방에서 원고가 날아들었다. 잡지가 잘 꾸려지니 찍자마자 부리나케 팔려버렸다. 이렇게 되자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의 중시도 받게 되었다. 정령(丁令),애청(艾青),공목(公木목),왕몽(王夢),마라친부(馬羅沁夫) 등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이 «장백산»으로 축하신을 보내 왔고 국내의 여러 매체들에서도 소식을 실어 «장백산» 잡지의 특유의 의미를 충분히 긍정해 주었다. «장백산»은  잛디짧은 몇 년 사이에 초창기의 미숙한 단계를 벗어나 정부에서 승인하는 당당한 정식잡지로 되었고 남영전이 주필로  임명받았다.   남영전은 잡지의 편리와 위상을 고려하여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려고 작심하였다. 잡지를 성급잡지로 승격시키고 잡지사를 장춘으로 옮기기 위해 남영전이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고 얼마나 많은 길을 뛰어 다녔는지  모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5년 후인 1985년 7월 마침내 잡지사가 통화로부터 장춘으로 옮겨왔다. 남영전의 인생궤적은 어렸을 때는 고난에 찬 기구한 길이였지만  『문화대혁명』후부터는 성공한 시인의 길이었고 성공한 편집인의 길이었다. 남영전은 시인이고 편집인라는 이중신분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는 잡지도 잘 꾸리는 한편 시 창작에서도 풍만한 결실을 안아 왔다. 그는 선후로 시집    <상사집>(1987년),<푸른 꿈>(1988년>,<산혼>(1990년),<백학>((1990년),<남영전시선집>(1994년),<하늘과 땅과 사람>(1997년),<원융>(2003년), <꽃이 없는 이 봄날에>(2003년) 등 무려 무려 13권의 시집을 펴냈다.  남영전은 시 창작에서 처음에는 사실주의 시로 성취를 거두었고 후에 와서는 토템시로 큰 성취를 따 내여  전반 중국문단의  중시와 관심을 받았다. 남영전은 80년대 중기부터 90년대 말까지 도합 42수의  토템시를 창작하였다. 시의 수량은 얼마 안 되지만 토템시의 특수한 존재의미로 하여 중국문단에 신선하고도 큰 충격파를 주었다.  2003년6월22일 ,무한대학에서  『남영전토템문화재구축』세미나가  거행되었고 2006년3월 28일, 북경사범대학에서 『남영전시가창작세미나』열렸다. 두 번의 회의에서  토템 시에 대해 일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평자들이 남영전의 토템시와 남영전의 토템미학관을 긍정하고 찬양하였다. 중국당대 문학에서 한 소수민족시인에 대해 이렇듯 규모가 큰 학술회의를 가진 사례는 전대미문이다.    남영전의 시 창작성과가 중국시단의 보편적인 긍정과 승인을 받아  1985년에 서정장시 「할머니」로, 1999년 시집『그리움』으로 각기 「전국소수민족상」을 받았고 서정장시「아버지」와「휘우듬한 그림자」 전설시집『천지의 전설』로 길림성 최고문학상인 「장백산문예상」과 중국작가협회「민족문학우수상」을 수여받았으며「사스」와의 투쟁을 반영한 시집『꽃이 없는 이 봄날에』와 토템시집 『원융』으로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영전은 지금 중국민간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부 비서장, 중국소수민족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 북경대학 조선문화 연구소 겸직 연구원,국제고려학회 연구원, 세계시인대회 종신회원으로 있으며 영국 캠브리지 「국제명인전기중심영예상」을 수여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중국신세기문학사전」,「중국소수민족작가략전」등 8개 사전에 올라 있다. 남영전이 꾸리고 있는「장백산」잡지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장백산」잡지는 선후하여 「전국소수민족문학연구 원예상」,「조선족출판대상」을 받았고 길림성 10대우수간행물로 평서되었으며  국가출판총서로부터 『쌍효』(雙効) 간행물로 평의 받았다. 남영전은 지금『장백산』잡지 사장 겸 주필로, 2004 년부터는 길림조선신문사 사장직까지  맡고 눈코뜰새 없이 분망히 보내고 있다.   남영전은 벼슬보다는 문학과 문화를 더 사랑한다. 일찍 1980년대에 남영전이 시창작에서 거둔 성과와 사업에서 발휘한 출중한 사업능력을 보고 길림성 조직부에서  그를 발탁시켜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고 90년대에 북경의 모 부분에서 남영전을 북경으로 전근시켜 중임을 맡기려 하였으나 남영전은 개인의 벼슬길을 단연히 포기하고 시인의 길, 편집인의 길을 고집하면서 인생을 엮어가고 있다.   가령 남영전이 80년대에 성 조직부에 갔거나 90년대에 북경에 가서 벼슬을 했더라면  가능하게 지금보다는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오늘과 같이 이름이 있는 시인으로, 중국을 떠들썩 하게 한 토템시인으로 ,토템연구가로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따라서 중국에서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영전은 자기 자신과 우리 민족과 인류를 위해 명지한 선택을 한 것이다. 2.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   오늘 중국문단에서 남영전의 토템시가 화두에 올라 평론계가 달아 오르고 있다. 짧디 짧은  3 년 사이에 규모가 큰 남영전시가연구 세미나가 두 차례 열렸고 남영전연구론문집이 7권이나 출판되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일괄하여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라고 말한다.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중국당대문학에서 나타난 중요한 문화흐름으로서 전반 중국시단에다 신선하고 충격적인 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석자 얼음이 하루 아침에 언 것이 아닌 듯이 어떤 사물의 형성은 일정한 역사과정이 있게 된다.   우에서도 언급한바 있거니와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에 창작된 남영전의  사실주의 가작들은 중국문단의 충분한 긍정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할머니>, <아버지>,<휘우둠한 그림자> <천지의 전설> 등은 모두 굵직굵직한 상을 받았고 평론가들의 붓 끝에 올랐다. 2003년에 창작한 시집<꽃이 피지 않는 이 봄날에>는 특수한 연대에 특수한 노래로 인류애를 고창한 특수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 받아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는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서 튼튼한 초석이 된다. 중국에서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가 한창 인정을 받을 때 남영전의 토템시가 토템의 기치를 들고 중국문단에 뛰어들자 인차 강렬한 반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가 중국문단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 상태에서 혹은 사실주의시의 기반이 공허한 상태에서 토템시가 문득 선을 보였더라면 가능하게 오늘과 같이 빠른 시일 내에 중국에서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일어나기에는 시기상조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 있어서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는 초석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는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하나는 비운의 가정사를 소재로 한 사실주의시, 다른 하나는  역사에 묻힌 민족혼을 파내고 고양하는 사실주의시, 세번째는 특수한 연대의 특수한 노래를 토템의 미학사상으로 체현한 시대의 사시『꽃이 피지 않는 이 봄날에』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인성의 발굴에 초점을 두고 쓴 시대의 사시는 남영전의 이전의 사실주의 시와는 색다른 사실주의시므로  별도로 취급하고자 한다. ㄱ. 비운의 가정사로서의 사실주의시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남영전은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남영전의 어머니는 심한 정신 타격으로 일찍 돌아가고  남영전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짬만 있으면 어린 손자에게 비참한 가정사를 들려주었다. 하여 어린 남영전의 가슴속에는 어릴 적부터 보지는 못했어도 아버지와 삼촌의 형상이 깊히 아로 새겨져 있었다. 또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기에 할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특별하였다.    이런 특수한 가정 배경이 남영전으로 하여금 가족사를 가지고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가장 깊은 감동과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쓴 시들이기에 가족사를 다룬 남영전의 시들은 티없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뜨겁고 감격적이다.  이 것은 필자 혼자의 평가일 뿐만 아니라 한족 문단의 평자들의 공통한 견해이기도 하다. 가족을 소재로 하여 쓴 시들은 결국은 가정의 생명시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의 가족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것은 한 가족의 가족사, 가족 생명시이면서 또한 우리 민족의 비운의 민족사이고 민족생명시이다. 여기서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은 민족적인 공감대를  갖게 된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한족을 포함한 기타 민족들 한테서도 공감대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항일투쟁사와  해방투쟁사는 어느 한 민족에게만 연관 되는 일이  아니고  전 중화민족의 공통한 역사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중략……길고 긴 이야기를 등에 지고 해도해도 못다할 전설을 이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다 말없이 말없이 걸어 나오고 있다. -「휘우듬한 그림자」일부  「휘우듬한 그림자」는 시화된 곡선으로서 그 것은 역사에 눌리워 굽어든 곡선이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힘차게 앞으로 전전하는 불굴의 형상으로서의 곡선이다. 할머니는 귀중한 아들을 잃고 문화혁명시기에는 억을한 재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손자에게 모든 희망을 기탁하고  앞날을 바라보며 억척스레 살았다.「휘우듬한 그림자」에는 우리 민족의 슬프고도 견강힌 모습도 함께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읽노하면  백두산의 사스레나무를 연상하게 된다. 누루천연 (屢屢千年) 광풍폭우를 맞아 휘여든 사스레 나무, 하지만 오늘까지도 넘어지지 않고 급은 몸체를 바위틈에 뿌리 박고 억세게 살아가고 있다. 그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시인은 비희고락으로 얽힌 하많은 사연들을 <길고 긴 전설>과 <기나  긴 이야기>에  다져 놓고 있다. 시인은 <휘우둠한 그림자>가 <길고 긴 전설을 등에 지고> < 기나긴 이야기를 이고> <천천히>,<말없이> 걸어가고 있다면서 긴 여운을 울려준다. <휘우둠한 그림자>가 정지상테에 있지 않고 시종 움직이도록 동적인 처리를 함으로써 강한 생명력이 현시되게 한다. 또 <움직이고 있다>, <걸어가고 있다>가 반복 됨으로써 불요불굴의 의지와 강한 생명력이 두드러지며 그리고 여기서 민족의 밝은 미래가 제시된다. 어려운 배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푸른 언덕 향해 용감히 노 젓다가도 암초에 부딪치고폭풍에 휘말려 고달픈 배머리 돌리려 했건만 그 때마다 그이는 배고물에 오르시여조용히 엄한 눈길로키 잡아 주셨더라-「아버지」 일부  위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시인은 유복자다. 아버지의 모습을 단지 열사증(烈死證)에 박힌  흑백사진 한 장으로만 보아왔던 시적 주인공이기에 아버지에 대한 그림움이 그 누구보다 강렬하다. 시인의 가슴 속에는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이 언제나 또렷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에 묘사된 아버지의 형상 역시 시적 주인공의 아버지이면서도 조선족 모든 혁명열사들의 군상(群像)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시도 가족사이면서도 가족 생명시고 민족사이면서도 민족 생명시로 되며 따라서 민족적 공감대를 갖게 된다.    시인은 시에서「아버지」를 단순한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참되 인간으로 되게 하는 이정표(里程標),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 승화시킨다. <암초에 부딪치고 /폭풍에 휘말려/ 고달픈 배머리 돌리려 했건만/그 때마다 그이는 배고물에 오르시여/ 조용히 엄한 눈길로/ 키 잡아 주셨더라 >」   보다싶히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은 뜨겁고 진실하고 격정으로 넘친다. ㄴ.민족 얼을 고양한 사실주의 시들    남영전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격정이 폭발하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가족생명시를 쓰던 당시 시인은 또한 눈길을 민족사와 민족의 얼과 민족의 운명을 관조하는 데로 돌리게  된다. 그는 가족사로부터 가족사와 면면히 이어진 민족사를 내다 보았던 것이다.   우리 조선족 문단에서 민족의 운명을 두고 쓴 시인들이 많이 창출되었다. 남영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남영전은 7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역사에 파묻힌 우리 민족의 심령의 비석을 파내는 작업을 목표로「장군묘」,「호태왕비」,「국내성」,「고구려고분벽화」등 시들과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을 구가한「천지의 전설」을 창작하였고 조선을 방문한 후 분단을 통탄하는 시「판문점」,「끊어진 다리」등을 썼고 한국을 방문하고「경복궁」,「왕릉」등 시들을 창작하였다.  일월의 성스런 빛발하백의 영험한 서기 은장도 날카론 서리 활궁의 강인한 탄력피타는 부르짖음과 지성의 향불들이 모며모여 웅위로운 비석으로 우뚝 솟았다-「호태왕비」일부   민족학의 각도에서 보면 민족이란 민족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으며 기타 유사한 공동체와 구별되는 문화공동체이다. 민족문화전통,가치관념, 심미의식이 시인의 정신세계에 침투되면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민족의식의 기둥으로 된다. <선지선각한 일부 소수민족시인들은 공생공존(共生共存)하는 문학의 시대에 한바탕 번뇌와 고통의 시련을 맛본 후 단연히 자기가 이전에 갖고 있었거나 혹은 존재를 잃어 버리지 않았던 민족정신의 뿌리에로 회귀한다.1)  「호태왕비」는 위와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시이다.「호태왕비」라는 비석은 흘러간 역사에 있었던 민족정신의 일종의 상징이다. 시인은「호태왕비」로 파란만장한 세월의 장하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겪었으나 쇠망하지 않고 꿋꿋이 솟아 있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민족정신의 기둥을 상기시키고 있다. 한편 또 새로운 우람한 비석을 세워 자기의 민족을 부강창성에로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뚝 솟아 세상을 굽어 보고우뚝 솟아 세상을 깨우치며우뚝 솟아 불멸의 넋을 기른다-[호태왕비] 결미가슴을 장쾌하게 하는묘사이다. 한 민족의 정신적 풍격과 이미지가 생생히, 풋풋이 머리 들고 창망한 우주를 당당히 굽어본다. 시인은 평범한 목소리로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장쾌한 재생의 노래, 불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이러한 사례를 「장군묘」에서도 넉넉히 찾아볼 수 있다. 끌날 같은 장수들의 힘쓰기로다하늘 땅 뒤흔드는 입장단 소리 밀어라 어영차 당겨라 어영차얼음길 깔며 영(嶺)넘어 골 지나서기 어린 명당자리 찾아서믿음과 소망으로 의지와담량으로한층 또 한층 쌓아 올리자불사혼의 높이를 쌓아올리자-「장군묘」일부   읽으면 무한한 용기와 신심, 뿌듯한 자호감과 긍지를 주는 시원한 시다. 우리 민족에게는 지난 날에 끌날 같은 장수들이 있었거니와 오늘 날에도 결코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문제는 각성과 자각이다. 오늘과 같이 다재다난한 세상, 강자약육의 세상 ,경제경쟁, 문화경쟁, 과학경쟁이 치렬한 시대에 강자는 생존하고 약자는 먹히운다. 한마디로 강해야 살아남는다. 우리 민족도 자기의 생존을 위해 정신을 바싹 차리고 가장 명지한 선택을 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가 <서기 어린 명당 자리를 찾아/ 믿음과 소망으로/의지와 담략으로> 이 세상을 향해  용감히 도전하면서 <한층 또 한층> 민족의 슬기와 재주를 쌓아 가기만 한다면  기필코 민족의 찬란한 내일이 활짝 웃어줄 것이다.남영전은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87년 조선을 방문한 후 「판문점」,「끊어진 다리」등 통일갈망의 시편들을 썼다. 그때에 그만 이 금이 그어졌다썩어빠진 모든 걸 토해내고 상하였던 원기를 되살려야 하는 때 짓밟혔던 그 몸이 상모 돌리고 집집마다 훈기로 넘쳐나야 하는 때 바로 그 꿈과 같은 시절에그만 이 금이 그어졌다 」-「판문점」(1) 일부   모두 5연으로 된 이시는 첫 구절마다 「그때에 그만 이 금이 그어졌다」를 반복하여 [6.25]의 한을 강조하고 슬픔과 아픔의 무게를 증강시키면서 동강난 한반도의 현실을 통탄하고 있다. 한반도의 동강 이유를 구태어 찾자면 스탈린에게도 있고 처칠에게도 있고 루즈벨트에게도  있다. 1945년 3월에 [얄타]회의에서  이미 3.8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행차 뒤의 나발로 되었지만 이유가 어떻게 되였든지간에 억울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은 우리 민족 뿐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금이 언제면 없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이 것이 더욱 큰 불행이다. 남영전은 우리 민족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전 중국에다 알리는 데서도 공로자로서의 몫을 담당한다. 1979-1980년에 「4.4」체 민요체로 창작한 장편서정시「천지의 전설」은 조선민족의 아름다운 정서를 훌륭히 시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길림성 최고 문학상인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옥황상제의 딸 일곱이 백두산 호수가에 내려와 목욕을 했는데 그중 막내인 천녀가 백두산의 나무꾼 지용이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 이에 대노한 옥황상제가 천장들을 파견하여 지용이를 죽이니 천녀도 낭군의 시체를 끌어안고 호수에 뛰여들어 죽어서도 부부가 된다. 후세 사람들이 천녀와 지용의 변함없는 순결한 사랑을  기리고자 <천녀>에서 [천]자를 따 오고 <지용>에서 [지]자를 따서 백두산 호수를 <천지>라고  불렀다.슬피 울던 하늘 선녀호수 속에 뛰어 둘어낭군 시체 끌어 안고곱게 곱게 눈 감았다…이때부터 세인들이천녀지용 이름 따내이 호수를 천지라고세세대대 불렀더라-[천지의 전설] 일부  [천지의전설]은 사랑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루었지만 백두산이 조선민족의 성산이라는 의미도 간접적으로 체현되어 있다.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편들에서는 토템시의 정신과 기법들이 두루 엿보인다. 이 것은 남영전의 토템시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남영전의 토템시가 민족전통 의식과 민족 심미의식에서 돋아났음을 시사해준다. 원래 있던 남영전의 초보적인 문화현상 열기에 남영전 토템시가 갑자기 기세를 올리니 급기야  물의를 일으키는  문화현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3. 인성의 증명-『꽃이 없는 이 봄날에』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에서 남영전의 사실주의시가 근간(根杆)이 되고 남영전의 토템시가 열매가 된다면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은 토템시의 정신과 사상을 더 구채화, 세밀화 하여 인성을 고도로  체현한 현시대의 특수한 사시(史詩)라고 볼 수 있겠다.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의 탄생으로 하여 남영전의 토템시는 더욱 각광을 받고 금상첨화(錦上添花)격이 되었다.   중문으로 씌여진 『꽃이 피지 않는 이 봄날에 』는 한 시대를 반영한 특수한 의미를 띠고 있었기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중국시단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당대문학에서 하나의  작은 시집이 문단에 크고도 신선한 충격파를 가져다 준 사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오늘 중국의 많은 시인들이 자아의 왕국에 갇혀 스스로 “냉혹한 철리파기”에 열중하고 있으며 자아팽창증(自我膨脹症)에 걸려 근근히 자기만 알 수 있는 시 혹은 자기조차  아리숭한 시 쓰기에 집착하면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있다. 그들은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어도 관계치 않으며 지구의 곳곳에서 총포소리 요란해도 눈 한 번 까딱하지 않는다.   2003년 중국에 불행하게도 『사스』라는 악마가 덮쳐들어 중국대륙에 대 재난이 일어났을 때 많은 문인들이 시선을 외면하였고 일부 문인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신문에「사스」에 관한 한 두 편의 글을 쓴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남영전은 2003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 사이에 시집 한 권을 펴냈다. 그만큼 남영전은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이 강했고 인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다. 가령 남영전이 아니었다면 가뜩이나 백성들로부터 시대를 외면한다는 질책을 받아 왔던 문인들의 체면이 무슨 꼴이었겠는가. “이 시집은 특수한 년대에 백의전사들이 헌신적으로 병마와 싸우고 전국 인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 단결하여 병마와의 싸움에서 위대한 승리를 취득한 사실을 구가한 기록성적인 문학작품이라는 데서 더욱 고귀하다.”2)  “ 이 작품은 시인의 진정한 사랑과 인도주의 정신, 강렬한 사회책임감을 보여준다.”3) “ 가령『꽃이 없는 이 봄날에』라는 시집이 없었더라면 가령 우리의 친애하는 조선족 형제 남영전이 필을 들어 『사스』와 진행한 생사판결의 영웅적 사적을 쓰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시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럽고 유감스러웠겠는가!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체면이 서게 되었다. ” 4)   이상의 글을 통해서도  우리는 「꽃이 없는 이 봄날에」라는 시집 한권이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구축에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남영전의 민족토템시와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양자침(扬子枕)의 말을 빌면 남영전의 토템시와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유기적으로 안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상보상승(相補相承)의 관계를 갖고 있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인류의 원초, 인류의 진실로의 회귀이며 그 목적은 삭막한 오늘의 세상에다 진선미를 살리고 자연과 인간이 화합하며 나아가 전 인류가 융합하는 것이다. 그  실질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토템시의 재현과 승화이다… 바로 시대가 남영전을 수요할 때 그가 나타났고 시가 그를 수요할 때 그의 시가 나타났다. 사실 남영전 자체가 곧 한 수의 시다.”5)   이 시집을 간단히 두가지 방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나》-인성의 대표자 이 시집에는「나」가 자주 등장한다. 설사「나」가 정면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 내면에는 곳곳에「나」가 숨어있다. 「나」는 개인이면서 추상적인 군체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띠고 시대의 대변인으로 대표의 기능을 하며 최종적으로는 인성의 상징으로 된다. 시집의 표제로 되고 있는「꽃이 없는 이 봄날에」와「나의 고백」은 인성에 대한 시인의 진지한 추구와 인류에 대한 사랑이 거룩한 참회와 함께 흐르면서 수많은 사색을 세워준다. 시인은 사상을 강렬하게 울리기 위해 연속반복의 수법을 채용해 특수한 부호로서의 「나」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나」가 열 번 나오고 「나의 고백」에서는 무려 열두 번의「나」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만나는 좋은 시를 쓰지 못해 부끄럽노라…중략….피에 젖었던 그 날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 내 끝없이 끝없이 생각하지만내 밤을 지새우며 구상하지만 나의 언어가 너무나 창백하구나나의 필이 너무나 무디구나 사람들은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만 종래로 있어 본 적 없던생과 사의 갈등을 제대로 쓰지 못해내 부끄러워 하노라-「꽃이 없는 이 봄날에」마지막 연 너무나 겸허한 「고백」이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고백」이다. 왜냐하면 그 겸허한 「고백」속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는 까닭이다. 무한한 사랑을 미처 다 주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고민이고 안타까움이다. 시인은 「사스」와의 투쟁에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서 타인을 구하는 사람들한테서 인성의 광망을 보았고 그 광망속에서 받은 깊은 감동을 사랑의 힘으로 전환시켜 세상에 대고 외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기 시가 창백하고 자기의 필이 무디다고 역설한다. 눈물 나는  인간의 자각이고 산처럼 무거운 이 시대 지성인의 사명감이다. 꽃이 없는 이 봄날에가령 나의 시가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 가령 나의 시가 사랑의 입김이 될 수 있다면가령 나의 시가심령의 안식처로 될 수 있다면가령 나의 시가 펄펄 휘날리는 기발이 될 수 있다면내 기꺼이 낮에 밤을 이어 수많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 그 꽃이 가장 친애하는 사람들과 함께꽃 피는 봄날에 웃게 하리라 꽃이 없는 이 봄날에가령 나의 심장이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가령 나의 눈이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가령 나의 손가락이 한 떨기 꽃으로 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그들을 꺾어순결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극 꽃다발과 쓰러진 친인들이해빛 아래서 미소 짓게 하리라-<꽃이 없는 이 봄날에> 일부「나의 고백」이 인성의 광망(光芒)을 다 주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비장한 자각의 발로라면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인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치겠다는 숭고하고 갸륵한 선언이고 다짐이다. 가장 깨끝한 심령을 지니고 가장 높은 자각을 지니고  인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흘러나올 수 있는, 심혼을 뒤흔드는 희생의 메아리이다.   두 수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나」는 「소아」(小我)로부터 「대아」 (大我)로 승화하면서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울리고 인성의 의미를 최대화 한다. 2.) 백의천사-사랑의 상징 이 시집에서 찬미의 대상으로 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 호사이다. <엽흔(葉欣))의출정>,<이효화(李曉華)의 기탁 >, <정수란(丁秀蘭)의 순백의 두 얼굴>, <웃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여자> 등 시편들은 모두 호사를 찬미한 시편들이다. 시인이 선택한 주인공은 모두 실재한 인물들이다. 사실 <사스>와의 투쟁에서 제일 헌신적으로 싸운 사람들 중에 호사들이 제일 많았다.  그들의 자아희생적인 정신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눈굽을 촉촉이 적시게 하였다. 그녀는 감염되었다동료들이 그의 페를 검사 하자 했지만 가래를 토하게 하려 했지만 그녀는 동료들이 자기 곁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원장과 동료들이 그녀를 보러 왔건만 그녀는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같은 날 그녀에 의해 구원된 환자는 출원했건만 그녀는 고요히 인간 세상을 떠났다 -《염흔의 출정》일부 이 것이 「사스」와 의 투쟁에서 발휘한 중국호사들의 비장한 헌신정신이다. 자기가 구한 환자가 퇴원하던 날 <엽흔>은 죽는다.  환자를 구하기 위해 자기의 입으로 환자의 노폐물을 뽑아내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사랑, 그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만한 자대가 과연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쓰러졌다손에는 아직도한 쌍의 작은 신이 쥐여져 있었다어린 딸을 위해 산 한 쌍의 예쁜 신하나의 벽이어린 딸의 달콤한 미소를 막았다하나의 벽이모녀의 면면한 정을 막았다손에는 아직도 한 쌍의 작은 신이 쥐여져 있었다어린  딸에게 하고픈수많은  말이 쥐여져 있었다-<이효홍의 기탁> 일부또 한 사람, 젊은 호사이고 젊은 어머니인 이효홍(李曉紅), 그녀도 역시  환자를 구한 후 희생된다.  어린 딸에게 주려던 꽃신도 미처 못준 채, 딸에게  하고 싶던 그 많은 말도 미처 못한 채 그녀는 꽃신을 손에 꼭 쥔 채 조용히 조용히 인간 세상을 떠난다.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이 시집에서 「호사」는 한 개인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고 수호하고 감싸주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서 군체적 의미를 띤다. 여기에 바로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의 거대한 숨결이 있다.   남영전은 백의전사들에게 숭고한 감정을 지니고 그들의 영생불멸의 혼을 만고에 전하기 위해  「백의영웅비」를 세운다.   가장 결백하고 우람한 비석초연 없는  전쟁에서 우뚝 솟은 비석  이하 략…그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비석유구한 문명을 가진 중국에서 일떠선 비석결백하고 우람한 비석위험이 살판 치는 비상 시기에천백만의 마음속에서서서히 일떠선 비석 새로운 비석-백의 영웅비 -《백의영웅비》마지막 연 ‟남영전의 토템시의 핵심은 인간의 원초적인 진선미를 발굴하여 오늘 날의 삭막한 인성을 치유하는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전 인류의 화목과 융합을 도모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사상을 전제로 한 남영전의 토템시가 안간의 사랑에 대한 선언이라면『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민족토템시의 재현이고 승화라고 볼 수 있다.”6) “남영전은 자기의 시에서 문화초월을 하고 있다. 문화초월이란 바로 서정적주체가 표현하는 인류애이며 서정적 주체가 표현하는 민족과 개채를 초월한 문화관심과 문화운명감이다.”7) 《꽃이 없는 이 봄날에》는 남영전 토템사상의 구체화이고 재현으로서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고  있다.  4. 남영전토템시의 미학-화해와 융합과 사랑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은 80년대 중기부터 이미 초보적으로 중국시단의 인정과 긍정을  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실상 80년대에 이미  미약하나마 남영전문화현상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남영전의 토템시가 중국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와 신선한 충격을  주자 남영전의 문화열기가 일시에 왕성하게 피어올랐다. 거기다가 토템의 미학사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승화시킨 특수한 시대의 사시 <꽃이 없는 이 봄날에>의 탄생으로 하여 남영전에 대한  관심과 주목이 광범성을 띠게 되었고 토템시의 가치와 위상이 더 높아졌다. 돌이켜 보면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0여 년이라는 시간의 고험과 검중을 거쳐  객관적으로 순리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토템시를 창작하던 초기 남영전은 민족의 뿌리 찾기로부터 착수하였다. 다 알다싶히 토템은 한 씨족의 표지이고 상징이다.  토템이라는 신생어는 일찍 18세기 말 요한 랑그의 ‟번역원 겸 상인인 한 인디안인의 항해와 여행„에서 연유되었다. 그 책에 이런 기재가 있다. ‟토템은 야만인들의 종교성적인 미신의 하나로서 그들 매개인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정령(精灵)이 있었다. 그들은 그런 정령이 자기제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토템이란 인디안이들의 방언으로서 한마디로 형제, 친척 등 혈육관계를 의미한다. 토템시 창작 초기에 남영전은 민족의 뿌리 찾기로부터 착수하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는 인류는 원래 한 뿌리에서 돋아 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점차 의식적으로 창작시각을 민족과 시공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이를 두고  북경대학의 사면(謝免)교수는 남영전은 토템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연구 범위를 민족사,인류문화사, 심미예술사의 광대한 영역에로 밀고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8)   우리가 남영전 문학현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남영전 문화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남영전의 토템시가 순수문학의 범주를 벗어나 인문, 인류사, 민족사,심미예술사  등과도 관계가 있는 까닭이다.   남영전은 18년간의 끈질긴 추구와 각고 끝에 토템을 통해 민족혼을 발굴하고 재주조하여 역사와 현실을 점목 시키고 참된 인성을 되찾으며 인류의 영원한 정신고향을 찾는다.9)    인류의 영원한 정신고향을 찾는다는 여기에 남영전 토템시의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 하기에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단순한 원시복제거나 원형복귀가 아니라 오늘의 인류를 위한 고층차로서의 회귀이며 나선식승화라고 보고 있으며”10) 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는 원시문화와 현대예술의 교묘한 결합이기에 일반적인 신화와 전설을 초과하여 참신한 창작을 하고 있다고 찬양하고 있으며 ”11)어떤 평자들은 “남영전의 토템시의 핵심은 조선족의 것이면서도 중화민족의 것이며 음양의 통일이고 천지인(天地人)의 합일로서 인류적인 것이며 원시적인 것이며 현대적이 것이라고  보고 있다.”12)  이러한 견해들은 남영전의미학주장과 거의 일치하다. 남영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8년 간의 시간을ㄹ 들여 42수의 민족토템시를 창작한 후 조선족의토템물과 중화민족의 토템물이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세계 기타 민족의 토템물과도  혈견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랍고도 기쁘게 발견하였다. 이런 연고로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쓰고 있는 토템시는 비단 조선민족에게 속할 뿐 아니라 중화민족에게도 속하며 나아가 기타 세계민족에게도 속한다. 일축하면 토템은 하나의 기치이고 일종의 정신이고 거대한 응집력이고 형제와 같은 뜨거운 정이며 전 인류가 함께 안고 있는 아름다운 이싱이다.”13)  남영전에게는 민족과 개체를 초월한 문화관심과 문화운명감이 강하다. 그는 항상 이런 초월감을 가지고 토템시를 써 왔다. 그의 창작 주장이 공허한 외침이 아니고 토템시 창작에서 사상적 예술적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국내외 문학계가 큰 중시를 돌리고 있다. 한족 문단의 적지 않은 평자들이 남영전을 일컬어 조선족 시인이자 중화민족의 시인이며 나아가서는 전 인류에게도 속하는 시인이라고   높은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남영전은 자기가 거둔 풍성한 문학 성취로 하여 문학의 영예를 따낸 사람이다. 남영전은 전반 중국 문단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토템연구가이며 첫 번째로 토템계렬의 시를 가지고 중국시단을 놀래운 시인이다. “남영전처럼 의식적으로 계통적으로 민족토템을 묘사하고 구가한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14) 토템에 대한 남영전의 시각은 누구보다 예리하고 투철하며 누구보다 멀리 보고 정확하게 본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 단계를 벗어나 영인(灵人)단계의   지성인처럼 역사와 현실을 접목시키고 현실 속에서 미래를 제시하려고 한다.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민족에게 기껏 해야 토템물이 한 두 개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우리가 여지껏 알고 있던  통념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족에게는 곰토템만 있고 한족에게는 용(龙)토템만 있다고 생각해 왔듯이 말이다. 그러나 남영전은 <역사의 각도에서 보면 조선족의 토템물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 것이다.》고 하면서 우리가 진리처럼 여겨왔던 굳어진 통념에 반기를 든다.  또 남영전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토템물이 한 민족에게 특정된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민족이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견해다. 필자는 이런 견해를 처음으로「토템공유설」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중국의 전설속에서도 토템공유설의 근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전설을 보면 동방의 이족(彛族)들은 뱀이나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중부의 염제족(炎帝族)들은 소를 토템으로 삼았고 남방의 만족(蠻族)들은 맹수를 토템으로 삼았으며 서방의 견륭족(犬隆族)은 개를 토템으로 삼았다.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인  나시족(那施族)에게는 천 이백년 전에 쓰던 『뚱바고서』가 지금까지 현존해 있다.『뚱바고서』란 나시족의 원시종교인 뚱바고의 집사관이 사용하는 종교전적(宗敎全籍)을 일컬으는 책으로서 일명 뚱바문이라고도 한다. 상형부호로 그린 뚱바고서에는 여러 가지 도안이 있는데 그 중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룡도 있고 날개를 퍼덕이는 학도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나시족과 한족은 가능하게 용(龙)을 하나의 토템물로 공유했을 수도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로씨아 원동지구를 상징하는 기발에는 중간에 곰이고 양켠에 각각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로부터 로씨야의 일부 원시씨족들의 토템숭배물과 조선족의 토템숭배물이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상기한 예로부터 판단하면 한 민족에게 다만 토템이 한 두개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토템을 공유할 수 있다는 <토템공유설>은 설 자리가 있게 된다.    토템공유설에 의하여 남영전이 주장하는 민족문화론이 나오게 된다. 이 문제는 새로운 제기법이고 자못 심각한 문제이다.  이리하여 남영전의 토템미학관과 토템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가장 공성을 띠고 있는  보편적인 반론은 “한 민족에게 여러 개의 토템숭배물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다.”15)   어떤 사람들은 남영전의 토템시창작을 두고“자연숭배와 토템숭배를 혼동하고 씨족 혹은 부락토템과 민족토템을 혼동하고 조선민족과 타민족 토템을 혼동하고 원시이미지(혹은 원형,문화이미지)와 원시토템을 혼동한 인식적 오류를 범했다” 16)고 반론을 제기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토템해석은 역사학자나 문화학자들이 문화심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지 시인이 해야 할 몫이거나 마땅히 해야 할 몫이 아니라고말한다.”17)   여기서 가장 큰 분기점은 한민족에게 여러 개의 토템이 있을 수 있는가?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토템을 공유할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가장 확정적이고 유력한 해답은 인류의 기원설에 있을 것 같다. 만약 과연 인류가 초기에 한 뿌리에서 돋아났다면 문제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남영전은 토템공유설과 민족문화론의 근거를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에서 찾고 있는데 이유가 충족한 것 같다.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류는 약 5만 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탄생하였다. 이 선민들이 초기에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다가  인구의 급장성과 식물의 결핍으로 하여 무리를 지어 대 이동을 하였다. 인접대륙인 아세아와 구라파로 천이하였고 베링해협을 건너 북 아메리카에 가서 일부는 인디안인으로 정착하였고 일부는 남아메리카로 가서 인디오족으로 정착하였다. 후에 항해업이 발전함에 따라  전 지구적으로 인구의 대 유동이 진행되었다. 오늘까지도 고고학자들은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인류가 탄생하였다는 중명을 찾지 못하고 있어 아프리카가 인류의 시원이라는데 대하여 인류학자들은 모두가 공동한 인식을 갖고 있다.    필자는 토템연구가거나 인류학자가 아니어서 토템을 놓고 감히 시비를 할 수가 없다. 다만 세계 학계에서 공인하는 인류기원설을 따를 뿐이다. 인류기원설에 바탕을 둔다면 남영전의 다(多) 토템설, 토템공유설, 민족문화론은 설 자리가 튼튼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남영전이 토템시 연구와 창작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와 발견, 핵심은 전 인류의 화해와 융합, 사랑에 있다. 이런 까닭에 오늘 중국문단에서 남영전문화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남영전의 토템시는 조선족의 것이며 중화민족의 것이며 나아가서는 전 인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남영전의 토템시- 생명시학  1). 오늘의 삶을 위한 생명의 노래 한 사회가 미증유의 거창한 변혁기에 이르자 금전이  폭군으로 군림하여 횡포를 부리면서 삶의 풍경을  살벌하게 한다. 이런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반갑지 않는 폭풍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며 곤욕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질서가 파괴되고 인문정신의 가치가 혼란에 빠지고 인성본연의 진.선미가 붕궤의 변두리에 다달으고 있는 이 시대, 생명의 존재는 길 잃고 갈팡질팡 하고 생명의 장력(张力)은 점점 약해지고 인간들의 사상은 빈혈로 헐떡거린다. 이런 시대를 맞으면서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자랑하던 시도 전도된 가치의 광환(狂歡)에 압살되어 나날이 초췌해지고 창백해 가고 있으며 헌 걸레조각처럼 소박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적지 않은 민족지성인들이 시대의 앞장에 서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 우리 민족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무거운 물음을 던지면서 민족의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그 중에 시인 남영전도 서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남영전은 이제껏 누구보다도 못지 않게 우리 민족의 운명에 관심을 돌려 왔으며 누구보다도 못지 않게 민족의식이 짙은 시를 많이 써왔다. 그는 피눈물 나는 가족사를 제재로 <할머니>,<<아버지>,<휘우듬한 그림자>,<스물네살의 영혼> 등 가족의 생명시를 썼고 민족의 역사를 파 헤치면서 <호태왕비>,<장군묘>,<판문점> 등 비장한  민족의 생명시를 썼다 .그는 민족의 어제를 쓰면서 민족의 오늘을 썼다. 그는 죽은 넋에서 새 생명을 부활시키는 민족생명시를 썼다.   이러한 시인이 어찌 민족과 인류가 겪고 있는 정신위기를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시들어가는 정신을 살리는 노래가 필요할 때, 오늘을 참답게 살고 내일을 위해 억센 투지로 용왕매진하게 하는 노래가 필요할 때 남영전이 「토템」을 안고 온다. 남영전은 인간의 모든 비극이 「정신고향」을 잃은 데서 온다는 것을 알고 저 아득히 먼 역사의 수림 속에서 토템을 불러 재주조하여 인성을 되찾고 인류의 영원한 정신고향을 찾으려 한다. 시인은 토템숭배로부터 영원한 현실의의와 생명존재의의를 발굴하고 치유할 「정신고향」을 데리고 현대인 한테로 온다.   18년의 각고 끝에 산출된 42수의 토템시는 역사를 통해 오늘을 살리려는 시인의 거창한 작업의 귀중한 응결물이다. 민족정신, 인류정신의 상징으로서의 42수의 토템물은 42 개의 목소리로 민족의 어제와 오늘의 비희고락을 읊조리면서 미래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의 토템시는 역사생명에 대한 단순한 추억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위한 생명의 노래로 불리운다.  우람한 그림자    엉기적        엉기적 태고의 전설을 읊조리며 백의의 넋 빛내이며 머언 길을 헤쳐 왔노라」-「곰」 마지막 연  시의가 무겁고 진폭이 크며 시풍이 호방하다. 우리 선조들의 끈질긴 생명의식, 개척정신이 슴배여 있으며 오늘의 삶, 미래의 삶을 위한 완강한 의지도 함께 번뜩인다. 오늘의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태산이 앞을 막더라도 그 것을 <엉기적 엉기적> 용감히 끌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결심만 있다면 우리도 우리의 시조모 <곰>처럼 <탄식하지도 않고 /구걸하지도 않고/ 첩첩산중의 천험을 뚫고 나갈 것>이며 종당에 <일월을 휘어잡는 자유의 넋>이 되어 <신단수 아래서 장고 치며 춤 추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창천을 조각조각 받쳐들고 대지를 갈래가래 거머쥐고씨비리 돌개바람 안고 회오리쳤네 ……..잎새마다 넓은 마당가지마다 넓은 공간 .무연한 녹음이 우거지고 장수의 힘뻗치었더라. ……..드팀없이 무궁토록 창천을 받쳐들고 대지를 거머쥐고 거연히,거연히 솟으리라 -「신단수」일부    「신단수」는 무궁한 힘의 상징이고 영원한 생명의 표징이다. 오, 저토록 큰 창창한 하늘을 받쳐들고 저토록 망망한 대지를 거머쥔 그 무궁무진한 신력(神力), 하기에 그 작은 잎새마다 가지마다 생명이 뛰노는 넓은 마당으로, 드넓은 공간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신단수>와 같은 무궁한 힘과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면 칼바람도 불벼락도 물사태도 겁날 것이 없을 것이며 <드팀없이 무궁토록/ 창천을 받쳐들고/대지를 거머쥐고 /거연히/ 거연히> 이 세상 우뚝 솟아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바로 「신단수」와 같은 그런 용기와 담략과 기백이 필요하다.   「두루미」에서는 생명산생의 간고함과 환희, 심령의 순결, 불요불굴의 정신, 찬란한 미래가 예시되고 있다. 억겁의 지하에 묻혀곰팡내 피 비린내에 절고 검붉은  질식속에 몸부림치다층암 뚫고 나온 두루미까만 삿갓 ,까만 두루미,까만 적삼모조리 태워버리고 천지간에 흰색으로 엉기어맺힌 백의 혼이여-「두루미」일부 얼마나 간고한 탄생인가. 얼마나 위대한 탄생인가. 억겁의 지하에서 층암을 뚫고  세상에 나온 두루미, 더욱 더 자호할만한 것은 모든 검은 것들을 다 태워버리고 하얀 혼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일체의 더러움이 깨끗이 배제되고 여과된 심령, 「두루미」는 진,선,미의 화신이다. 세상에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오직 진,선,미밖에 없다. 따라서 진,선,미는 시간과 공간과 우주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시인은 우리 조선민족의 정신을 이렇듯 고도로 찬양하고 있다. 시에서 열 번이나 반복되는 민족의 혼 -<백의 혼>은 때 묻지 않은 순결한 혼이며 강의하고 도고하고 불요불굴한 혼이며 대를 이어 생명이 자라나는 영생의 혼이며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잇는 혼이다. 설령 결백속에 선지피 떨어져백두의 얼음 속에 스며든대도가슴치며 통곡하지는 않으리 더욱더 많고많은 백의혼이 자라나기에백의혼이 일떠서기에 백의혼은강자를 약자로 보고약자를 강자로 본다비바람 속에 덤불길험악해도높은 영마루 바다에 잠긴대도갈망을 향해 메운 활시위다시 접을 수는 없다창천이 부른다 강산이 부른다 백의혼이여        백의혼이여           백의혼이여 -《두루미》일부   우리는 절망에 물앉는 약자가 아니라 갈망을 향해 메운 화살이 되어 우주를 가르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창천이 부르고 있는 한, 백의 혼의 앞날은 기필코 밝을 것이며 그 속에서 민족의 생명은 영생을 획득할 것이다. 2). 생명의 제 양상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는 42개의 상징물이며 42수의 노래이다. 그 노래는 한 민족의 노래이면서 전 인류의 노래이고 우주의 노래이며 생명예찬이다. 남영전의 시는 토템시에 이르러 비약을 가져와 기교가 보다 성숙되고 시의가 깊고 함축되고 철리성이 풍부해진다. “시의 문제는 곧 생명에 관한 문제이며 생활체험을 통해 획득한 생명가치초월의 문제이다.”(딜타이) 필자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남영전의 시들을 살펴본다.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들은 42명이 부르는 인생 대합창이지만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이 아니라 잘 조화된 장엄한 교향곡이다. 그 곡의 주제는 인류구원이고 생명예찬이다. 이리하여 남영전의 시들은 휴머니즘의 대열에 들어서며 남영전은 휴머니스트로 된다.   우중충한 상징의 숲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노래소리, 남영전이 지휘하는 토템합창은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명랑하면서도 장중하고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이어서 생명현상의 모든 양상을 포섭한다. ㄱ). 영생불멸로서의 생명이미지   우리 선조들은 토템물을 생명의 영원성으로 이해했으며 그리하여 자연과의 화친을 도모하려 했다. 자연과의 화친은 인간과 자연이 동격(同格)이라는 불교의 화엄(華嚴)사상에도 부합되고 동양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과도 통한다.    시인은 토템이라는 이 특수한 문을 통해 인류라는 보편적 세계에 들어선다. 토템시는 상상을 떠날 수 없다. 시인은 예수처럼 포도주를 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베푼다. 시적 상상력을 종교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남영전의 경우는 종교적 상상보다는 신화적 상상이다. 처음으로 살펴볼 것이 신화적 상상속에서  태어나는 영생불멸의 생명이다. 이 부류에 줄을 세울 수 있는 시들로는 「달」》,「신단수」,「곰」,「해」,「돌」,「불」등이다. 풍요로움의 원리는 그래서 밀물이고모성의 원리는 그래서 윤회(輪回)이고 생명의  원리는 그래서 연장되노라 - 「달」의 일부   시인은 이즈러졌다 둥글어지고 둥글어졌다 이지러지는 달의 윤회를 섭리로  받아들이고 거기로부터 영생에로 나아가는 한 갈래의 길을 발견한다.「달」은 아름답고 풍만한 모성으로서 끊임없이 생명을 낳기에 생명의 원리는 길어질 수 밖에 없고 영원한 생명이 얻어질 수 밖에 없다.    「곰」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태고적에도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엉기적 > 끈질기게 걸어왔을 뿐 아니라 <일월을 휘여 잡아 자유의 넋으로> 되어 오늘도 의연히 완강한 의력으로 삶을 끌고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 엉기적엉기적 태고의 전설 읊조리며 백의의 넋 빛내이며 머언 길을 헤쳐왔노라 -「곰」일부««» <신단수>가 영생할 수 있는 것은 불요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광대무변한 우주에서/오성을 부르며/지혜를 부르며>, <잎새마다 넓은 마당/가지마다 높은 공간/무연한 녹음이 우거지고/장수힘 뻗치여/ 무수한 혼 부르며/생의 영원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특히는 아래와 같은 형상으로 이 세상에 우뚝 서있기 때문이다. 드팀없이 무궁토록창천을 받쳐들고대지를 거머쥐고 거연히,거연히 솟으리 -「신단수」일부 「돌」이 영원한 생명을 획득 할 수 있는 것은 거룩한 신력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세월의 장하에서 불멸의 영혼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힘은 끝없이 뻗쳐방대한 영체(靈體)를 움직이네 돌은 분신쇄골이 되어도 알알의 모래로 대천세계 끌어안네 -「돌」의 일부 위대한 영혼을 지녔기에 온몸이 가루가 되어도 알알이 모두 거대한 힘이 되어 대천세계를 끌어안는다. 한 알의 모래를 한 인간의 정신이라고 할 때 그런 정신이야말로 얼마나 거창하고 숭고하고 위대한 것인가. 그리하여 시인은 모든 인류에게 호소한다. 돌과 함께 살자 돌같은 뼈대를 가지자 정녕 돌과 운명을 같이 하면 죽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으리-「돌」일부   휘청거리고 있는 오늘의 우리의 민족정신이 「돌」과 같은 영혼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랴. 보잘것 없는 「돌」한테마저 영생을 부여하는 시인의 갸륵한 심성, 실로 시인이야말로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며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다. 「해」는 시인의 붓끝에서 민족영혼의 화신으로, 생명체의 화신으로, 어머니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시인은 특히 백의민족의 혼을 돌출히 하기 위해 「흰」을 강조한다. 「조상의 흰 영광(靈光)」,「조상의 흰 은정」,「조상의 흰 대문」,「조상의 흰 자애」등 등. 생명의 영원성은 <조상과 자손을 이은 흰자리/언제나 눈부신 빛을 뿌린다>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흰 다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민족정신이며 가장 숭고한 인류정신이다. 연속과 이음을 상징하는 그 다리-「해」가 있는 한 인류의 생명은 영원히 빛 뿌릴 것이며 자손만대 복 받을 것이다 아득히 먼 해궁전에  조상의 흰대문이 열려있다  영원히 닫기지 않는 그 문은  자손만대 복 받는 근원이여라 -「해」일부 민족정신의 항구성 내지 인류정신의 항구성을 지칭하는 <조상의 대문이 열려 있다>라는 시구는 격절탄상할만한 기발한 착상으로서 아주 무거운 시 함량을 안고 있다. ㄴ).자아희생으로서의 생명이미지   자아희생은 인류에게 고유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심성이다. 사랑도 자아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자아희생 속에는 진,선,미가 체현되어 있다. 오늘과 같이  인정이 삭막한 시대에 남을 위하는 정신이야말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남영전의 토템시에는 자아희생을 다룬 시들이 아주 많아 현실적 의의가 크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시들로  「흙」,「양」,「황소」,「두꺼비」,「고래」,「산」등 여러 수가 있지만 몇 수만 보기로 한다. 만물을 안아 키우는흙은 신령이런가 … …생명을 배태하며만물을 낳아키운다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푸른 향토를 가꿔 준다-<흙> 일부 자기의 피와 살로 만물을 키워주는 「흙」의 고통인들 얼마나 클소며 또 그 공로는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러나「흙」은 종래로 자기의 괴로움이나 공로를 말 하지 않고 혼자 묵묵히 속으로 삼킬 뿐이다. <생령에 대해 /만물에 대해/ 흙은 언제나 침묵한다/소리없이 잠잠하다/ 듣기만 한다> 어찌 그 뿐이랴. 산악에 짓눌려도 흙은 너그럽게 용서한다 약한자를 내 쫓지 않고 독균이라도 버리지 않으며나중엔 자기 품안에 끌어 안는다 -「흙」의 일부 악한 자, 독균마저도 가슴에 품어주는 흉금과 관용, 너무나 큰 너그러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이러하다면 갈등이  있을소며 싸움이 있을건가. 「흙」의 겸손과 인내, 침묵과  너그러움, 그리고 관용은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해주는바가  크다.  <두꺼비>는 남을 도와주었건만 보상을 받을 대신 되려 멸시와 학대를 받는다. 인과보응이 뒤바뀌고  있다. 가치판단이 혼란에 빠진 이 시대에 와서 많은 경우 인과보응은 통하지 않는다. <두꺼비>의 삶이 그러하다. 어질고 불쌍한 약자 만나면 자신을 도와준 은인 만나면 제한몸 내붙이더라도 있는 힘껏 도와나섰다 대대손손 억룰렸어도 악착스레 뻗쳐왔다 생명의 먼 발치에서보름달을 안아왔다 -<두꺼비>일부   「두꺼비」는 인고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다. 인류에게 빛을 주는 「보름달」까지 안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것은 찬양이 아니라 멸시와 학대 뿐이다. 이유는 단 하나,외모가 추하다는데서이다.여기서 우리는 가치판단의 혼란을 다시 한 번 반추(反芻)해 보게 된다.「두꺼비」는 억울한 상항에 직면해서도 원망도 하지 않고 침묵속에서 이 세상을 담담히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두꺼비」는 무명영웅으로 인격이 우뚝 솟고 그의 생명은 찬란한 불꽃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억겁의 삶에오해받고도 원망치 않았고욕먹고도 성내지 않았다 고인 물처럼 담담하게 창상지변 지켜보았다 -「두꺼비」일부   이제「양」을 보자. 전통관념에서「양」은 순결의 대명사요 제물로서의 대명사다.「양」은 슬프게도 자신을 남한테 희생시키는 것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시에서 보면「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힘을 빌어 즉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불연기와 /뭉게뭉게 흐르는 흰 구름이/경건한 기도와 더불어/하아얀 마음으로 차림새로> 태어난 것이다. 내적미와 외적미를 모두 갖춘 이 영물(靈物)은 하늘 밖의 저 먼 곳에서 이삭 하나 물어다가 이 땅에 신록이 무르익게 하며 굶주린 자들이 밥을 먹게 한다. 어찌 그 뿐이랴. 자기의 옷 마저 벗어 헐벗은 자들을 구제한다. 눈보라는 발가벗은 등허리 후려치고얼음은 바싹 마른 몸뚱이 묻어버리는데 너는 제몸의 다스한 털옷을 바치어 헐벗은 자 떨리는 몸 감싸주고쓰러진 자 다시 일어나 걷게 하누나 -「양」일부 「양」은 신이나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헌신적인 일을 한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차례진 대가는 죽음이다. <기도하는 아침나절에/거룩한 제단 앞에 쓰러졌다> 남의  제물로 충당된 희생양, 「양」의 희생은 자아희생에다 강박희생이 더 가첨되기에 「흙」이나 「두꺼비」의 희생에 비해 참혹성을 띤다.「매,매,매」하는 양의 처량한 울음소리는 소복차림을 한 「양」의 혼이 스스로를 위해 부르는 초혼이다. 우리에게 사색을 던져주는 것은  선량하고 순결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학살이다. ㄷ).용사, 투사로서의 생명이미지   남영전의 토템시에는 용사와 투사의 기질을 부여한 시들도 있다. 이런 시들은 시풍이 호방하고 진폭이 크며 도약공간이 넓고 흐름이 장쾌하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생명에 대한 환희와 약동으로 넘치기에 동원된 시어들이 동작성이 아주 강하다. 이는 남영전의 시가  여타의 시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점이다. 동작성이 강한 시어들은 용사와 투사의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범」,「백마」,「사자」,「매」,「우뢰」등 시에서 돌출하게 보여지고 있다. 밝은 대낮에 어두운 밤중에속세의 음양 샅샅히 살핀다불의가 얄미워 사악이 역겨워따웅- 표효한다 어지럽고 어리석음이 꼴사나와뒤쫓고 덮치고 물어뜯는다잔뼈 하나 남기지 않고통째로 삼켜버린다 -《범》일부   사악과 불의가 파지처럼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이 지구촌, 우리에게는「범」과 같은 진리의 대변인이 참으로 필요하다. 시에서 언급되고 있는 속세는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삶의 현장에 다름아니다. 탐오, 회뢰, 강간,강탈, 살인 폭행... 이런 것에 대해 「뒤쫓고 덮치고 물어뜯」으며 「잔뼈 하나 남기지 않고 /통채로 삼켜버리는」「범」과 같은 정의를 지키는 용사가 참으로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애증이 분명한 시인의 사상을 읽게 된다. 시인은 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 을「범」의 형상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사자》와 《백마》는 내용상에서는 《범》과 비슷하나 기교에서는 《범》보다 더 다듬어졌다.《범》에서는 시의가 좀 드러나는 감이 있지만 《사자》와 《범》에 와서는 시의가 많이 함축되어 있다.《범》에서 싸우는 방식이 뒤쫓고 덮치고 물어뜯고 삼켜버리는 것이라면 《사자》와 《백마》에 이르러서는 싸우는 대방이 어둠과 악마,요귀이고 싸우는 방식은 질주하면서 빛으로 죽여버리는 것이다. 태양이 허허벌판을 질주한다사자의 표효소리천둥치듯 팔방에 울려퍼지고 우뢰치듯 눈사태를 무너뜨린다 해가 빙빙 돌고 별똥들이 쏟아져 어둠이 멀리로 쫓겨났다 악마는 바다 끝에 박히고요귀는 18충 지옥에 갇혔다 -「사자」 번개불 번쩍이고하얀 서기를 휘몰아 쏜살같이 달려온다칡넝쿨 뻗은 숲을 지나흑풍 백풍 몰아내고 야밤의 검은 장막  열어 젖히며 해빛안고달빛안고발길 닿는 곳 흰빛이 깨어난다 -「백마」   시에 언급되는 「해빛」,「달빛」,「별똥」은 정의와 진리일 것이며 악마나, 요귀, 어두움은 정의와 진리에 배리되는 일체의 사악일 것이다. 모든 더러움을 없애야 한다는 용사, 투사, 진리의 목소리가 《광막한 창천에/망망한 광야에/ 메아리친다》. 시인의 삶의 자세는 사뭇 낭만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시인은 이  세계가 밝아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비관정서가 없다. 심지어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 시에도 비관이나 절망이 없다. 이것 또한 남영전 토템시의 특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ㄹ).비극으로서의 생명이미지    고금중외를 물론하고 인간의 삶은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즉 비희고락이 덩어리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를 비희고락의 역사라고 하여도 크게 엇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의 화해와 융합, 인류의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는 남영전의 시들은 구체적으로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 중에는 비극적인 삶을 주제로 한 시들도 적지 않다. 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가령 한 시인이 기쁨만 쓰고 고통을 외면 한다면 그는  적어도 진정한 시인은 아니다. 비극은 자체로서의 특수한 미를 지닌다. 비극성의 폭로는 오히려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아를 강인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니체의 경우 비극은 비관이 아니라 비관주의를 극복하는데 있다. 남영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토템으로 생명의 비극을 쓰는 것은  비극을 보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치유하려는데 있다. 비극적인 생명을 다룬 대표적인 시들로는「백조」,「뻐꾹새」,「개구리」,「까치」등을 들 수 있겠다. 애오라지 북극에 눈보라 사납게 휘몰아쳐보금자리를 빼앗아갔기에 욕질하고 매질하고 내 쫓기어하는 수 없이단꿈 꾸던 요람을 떠났디살던 고향에 눈물 떨구며 -《백조》 어떻게 보면 우리 겨레의 운명이 아닐가. 작자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사색을 하여야 할 것 이다. 우리는 「백조」에서 억울하게 생명의 가치를 상실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눈물이 글썽해서 처량한 몸 이끌고 떠나는신세 억울해라끊엄없이 자리를 옮기며 쉬임없이 간다.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영우너한 안식처는 어디? 한 몸 붙힐 곳 찾지 못해안절부절 못한다강팡질팡 헤맨다-<백조> 일부 남영전은 현실 삶을 직시하는 사람이며 자기의 민족과 전 인류의 운명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오늘 이 지구촌에서  보금자리를 잃고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이 어찌 한 둘이랴. 서러운 생명, 상처 입은 생명, 시인은 그런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시인이란 정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잠간 내 비친  적이 있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남영전의 시각은 궁극적으로는 낭만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그리하여 비극적인 생명을 쓰면서도 희망의 빛을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목숨이 붙어 있는 한두 날개 퍼덕일 수 있는 한보금자리 찾아떠날 수 밖에영원한 따사로움 찾아/따스한 영혼 지키려고 /떠난다/떠난다/떠난다 」-「백조」일부 「개구리」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학대로부터 오는 비극을 시화하면서 서러운 생명을 노래부르고 있다.  북풍에 묻히고.빙설에 묵히고동토에 묻히고세상의 가장 잔인한 무게에 인간의 가장 잔인한 질식에 묻히고 눌리어 울고 있다 -「개구리」일부 시인은 잔인한 인간과 잔인한 세상을 질타한다. 캄캄한 영어(囹圄)속에서 외로운 삶을 사는「개구리」인즉 인간세상의 최하층애서 버림받고 사는 민초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비극적인 생명에다 한 가닥의 빛을 선사함으로써 구원의 사제가 된다.   이 외  「까치」는 민족의 역사의 비극을 노래 부르고  「뻐꾹새」는 전 인류의  공통한 비극을 읊조리고 있는데 해석을 약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상징의 숲에서 울리는 42개의 토템생명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감상하였다.  기본상 잘 조화된 화음이어서 가슴이 사뭇 상쾌하다.   남영전은 우리 조선족시단은 물론이려니와 한족시단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토테시인다. 그의 시의 고귀한 점은 토템으로 민족정신을 부활시키고 궁극적으로 인류의 화해와 융합과 사랑를 도모하고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데 있다.    남영전은 토템시로 한 시대를 찬란히 수놓은 시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6. 남영전 문화현상에 대한 자료적 고찰 하나의 문화현상은 문화위기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초기에는 언제나 찬반론(贊反論)이 병행하고 시비가 동반한다. 하지만 결국 문화위기가 초극되고 새 지평이 열린다. 중국의 문화사와 세계 문화사 경우 대부분 그러하였다. 남영전은 인간의 원초적인 진,선,미를 살려 잃었던 정신 고향을 되찾고 인류의 정신 위기를 극복 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남영전은 인간의 화해와 융함, 사랑의 선언문인 토템시를 추켜들고 나온다.토템에 대한 깊은 연구와 토텝시 창작에서 거둔휘황한 성취가 마침내 중국문단에서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성의 산물이며 지극히 객관적이고 그 것이 순리에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주로 아래와 같은 사실로 충분한 이유를 획득하게 된다. 첫째: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어떤 관계망이나 인맥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타는 노력과 그에 따른 성취로 하여 얻어진 것이다. 본문의 첫 부분에서 남영전이 거둔 문학성취를 자상히 소개했으므로 더 반복하지 않는다. 둘째: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많은 학자, 평론가 , 시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남영전의 글을 평한 국내외의 학자,평론가들의 글이 160여 편을 웃돈다. 중국의 당대 문학사에서 소수민족시인은 물론  한족시인까지 포함하여 이렇게 한 시인이 많은 평가를 받은 사례는 극히 적다.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므로 골자를 골라 일부 소개한다.  1).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 아닐가!  근근히 24수의 시가 수록된 한권의 시집이  중,한,영 혹은 중한 혹은 한중 대역본으로 연속 3차나 출간 되었으니말이다. 18)2).남영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관시인이다. 그는 민족정신의 신념과 개체생명의 신앙, 거기다 넓고도 깊은 인류의식을 기둥으로 하여 견인불발하게 끊임없이 전진한다. 그는 오늘 중국시단의 앞장에서 걷고 있으며 세계시단을 향해 걸어가고있다.19) 3).어떤 사람은 이렇게 본 민족의 토템을 시화하고 계렬화 한 것을 일컬어 세계 시가상에서 전대미문이며 아주 기이한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20) 4). 시가 역사에서 보면 신화를 시에 인입하여 명시를 창작하여다. 롱싸(龙莎),가드(歌得),엽지(叶芝) 등은 신화를 시에 인입하여 명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니 민족 민족토템숭배를 시로 쓰고 그 것을 계렬화 한 것으로는 남영전이 시 역사에서 첫 자리를 치지한다.21) 5).토템시는 다만 그윽한 정서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한  외침을 통해 시인의 진정한 감정과 세ㅔ계의식을 표달한다.(22)6). 42수의 토템계렬시들은 오색이 찬연하고 강렬한 신비감과 유혹력이 충만한 화랑(花廊)이다. 우리를 역사의 어제로 되돌아가 고인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고인들의 혈맥과 문화를 보게 하며 민족의 문화원천과 영혼의 외침을 찾게 하며 이로써 새로운 시대에 참신한 문화성격을 구축한다.23) 7). 남영전은 피계몽자와 계몽자의 이중 신분을 갖고 있다. 남영전이 구축한 토템의 심태에는 전형적인 지식분자의 특징이 있다. 그는 알종의 공통한 시의 원소로 보편주의의 시학정신을 희망하고 있다.24)8).남영전은 소수민족 시인읭 대표이다.그는 다원문화의 어경(语境) 중에서 시창작으로 충만한 활력을 하면서 시에 대한 책임감을 안고 새로운 미학 공간과  문화 공헌을 하고 있다.25)9).시인은 현실 생존 환경에 대한 관심을 유기적으로 토템 계렬시에 융합시켜 민족 문화에 대한 지식분자의 경이(敬异)와 양지(良知)를 체현시켜다. 공업어경(工业语境)에 대한 남영전의 질의와 인류의 생존위기에 대한 걱정과 근심은 의심할바 없이 상당한 계시성 의의를 갖는다.26)10).남영전은 제일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준비 있고 목표 있게 그리고 끈질기게 토템시를 창작한 사람이고 토템시를 탐색한 사람이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중국의 시단을 심미정도(审美正道)에로 오라고 부르는 초혼이다. 27)11). 남영전은 토템문화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연구의 범위를 민족사, 인류문화사, 심미예술사의 더둑 광대한 층면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는 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고 문화의 개념이라고인정한다.(28)셋째: 남영전의 문화현상의 형성에 열기를 가해준 두 차례 세미나2003년6월 22일 중남민족대학교에서「남영전토템시와 토템문화재구축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 중남민족대학교,무한대학교, 등5개 대학의 30여 명의 학자, 교수,평론가들이 모여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해 전면적인 분석을 하고 객관적인 가치판단을 하였다. 회의에서 일부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남영전의 토템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2006년 3월 28일  북경사범대학에서「남영전시가창작세미나」가 열렸다. 북경대학교 교수이며 저명한 평론가인 사면(谢免)을 비롯하여 북경지구의 학자, 평론가, 시인 40여 명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외 [시간],[민족문학],[중국문화보] 등에서 10여 명의 기자들이 참석하여다. 저명한 평론가 오사경(吴 思敬)이 세미나를 사회하고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지지아카가 축전을 보내왔다. 그는 축전에서 남영전은 소수 민족 시인의 대표이며 새로운 미학 공헌과 문화 공헌을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중국당대 문학사에서 한 소수민족 시인에 대해 규모가 큰 두 차례의 학술 세미나를 조직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서 중국문단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넷째: 남영전의 토템시에 심취되어 2005년에 중국에서 기이한 문화현상이 생겼다. 남영전의 토템시와 서법,미술이 악수하였던 것이다. 중국서부문예통감위원회(中國西部文藝統監委員會),사천대학 문학과인류학 연구소,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사천사범대학 현대미술학원, 성도시 서법가 협회, 사천성 정부선전처의 연합주최로「남영전토템시명가서화연합작품초청전람회」(南永前土騰名家書畵聯合作品招請展覽會)가 열렸다. 전국 각지의 저명한 서법가, 미술가들이 남영전의 토템시를 미학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중 태반이 넘는 작품들이 잡지 <미술계>, <성성>(星星),《서부관광특간> 에 실렸다. 그리고 선택된 작품들을 모아 [주강문예출판사]에서 <시서화의 시대공진>(诗书画的时代共振 )이라는 이름으로 화책을 출간했다.   이 특이한 문화 현상에 대하여 서남민족대학교 의 허회영(许会英) 교수가 <시가 전파의 수단을 확대하고 서화예술품위를 제고하자> 라는 평론을 썼고 사천사범대학교  문학원 부 원장 당소림(汤少林)이 <시와 서화의 토템: 당대 시가의 한 차례 만구운동> 이라는 글을 썼다. 모르긴 하지만 시와 서법과 그림이 혼연일체가 되어 책으로 나온 것이 아직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이 특이하고 신선한 문화현상은 시 문학의 한 현상으로 될 뿐 아니라 서법과 회화에서도 독특한 현상으로 된다. 다섯째: 남영전의 토템시와 중국의 고대상형문자가 포옹하여 남영전 문화현상이 더 확대되었다. 조선족의 저명한 촬영가이며 조선족의 유일한 전각가(篆刻家)인 신승우(申承祐)가 남영전의 토템시에서 감동과 계발을 받고 전체(篆體:중국의 고대갑골문의 한 종류,중국의 고대 여섯가지 상형문자 중의 하나)로 남영전의 토템시를 가지고 인장(印章)을 조각하여「남영전토템시자구인」(南永前土騰字句印)이라는특수한 책을 펴냈다. 여섯째: 중국당대 문학사의 인정을 받고 있다. 중국조선족 시인들 중 중국문학사에서 다루는 시인은 고작 한 두 명인줄로 알고 있다. 오개진(吳開晉)의 『당대신시론』에서 남영전의 시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남영전은  교모한 수법으로 소박한 민족신화를 승화시켜 감동적인 시경(詩境)과 선경(仙境)을 만들고 있다. 남영전의 시는 원고(遠古) 의 신화를 발굴하고 시화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풍부한 창조성적인 현대의식을 만들고 있다…원고의 예술정령(精靈)을 부활시킬 뿐 아니라 작자의 현대사유와 가치판단을 융합시킨다. ” 29)『중국당대문학사』에서는 남영전시의 가장 큰 성취가 토템시의 연구와 창작에 있다고 쓰고 있다. “남영전은 민족시인으로서 자기 민족의 토템숭배물을 시화하고 계렬화하였는데 이는 세계시가 역사에서는 전대미문의 일이다. 남영전의 시가창작의 성공은 중국국내 뿐 아니라 세계에로 알려지고 있으며 세계시가 예술의 보귀한 정신재부로 되고 있다.” 30) 이외에 양려는 중국의 당대 소수민족의 4명시인으로 이족 지지마카, 바이족 률원소적, 장족 반과 ,조선족 남영전을 꼽고 있으며 포풍은 중국의 당대 3명의 대표적 민족시인으로 바이족 률원소적과 장족 이단파이랑 ,조선족 남영전을 꼽고 있다.일곱째: 몇 년이 안 되는 사이에 중국평단에서 전문 남영전의 문학을 다룬 평론집6권, 해설집 한 권이 출간되었다. 예하면 <원시토템과 민족문화>(추건군), <남영전토템시학>(마명규), <남영전토템시연구>(장순부), 등등. 이런 현상  역시 중국문단에서는 보기 드믄 일이라 하겠다                           ※       ※         ※         ※                이상으로  남영전은 확실히 문화현상을 일으킬만한  시인이며 따라서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은 긍정적이고 객관적이고 필연성을 동반하며 현실의 순리에  따르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물론 지금  남영전의 토템미학관과 토템시에 대하여 이의(異意)와 반론(反論)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화현상을 포함한 모든 사회현상은 찬반론(贊反論)을 동반하며  그 와중에 문화의 위기가 극복되고 문화의 새 지평이 열린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 남영전의 토템미학관과 토템시의 진가(眞假)가 더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토템의 미학사상은 투철하고 심오한 반면에 토템시의 창작에서는 일부 허점, 주제의 반복과 기교의 반복이라는 약점이 두루 보인다. 남영전이 금후 극복할 난관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3억이 사는 대국에서 한 조선족 시인이 거창한 문화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은 너무나 기꺼운 일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남영전과 같은 민족시인이 있다는 것으로 하여 자랑과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주해: 1.양려(楊麗),「당대소수민족4인창작편론」『원시토템과민족문화』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1호 2. 오개진(吳開晉), 「특수한 년대의 특수한 노래」 『남영전의 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읽고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8월3. 양자침(楊子忱) 「시와 시인 -남영전의 신작『꽃이 없는 이 봄날에』를 읽고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8월 4.사면 (謝免) 북경대학 교수,「남영전의 시가추구」『토템시탐론』2007년 4월 시대문예출판사  5.양자침(楊子忱),시와 시인 『꽃이 없는이 봄날에』를 평함, 시대문예출판사2003년 8월  6.동상  7.포풍(鮑風),「생명의 시작과 문화근성의 여정」『서남민족학원학보』2003년1호)  8. 사면(謝免)「남영전의 시가추구」,『남영전토템시탐론』 2003년 시대문예출판사  9. 남영전 「세계융합에 대한 외침」『원융』2004년 시대문예출판사 10. 강악(江岳),『민족문학연구』》2003년 1호 11. 추건군(鄒建軍) 『원시토템과 민족문화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2월 12. 사지민(謝志民), 「 남영전 토템시의 가치취향」『원시토템과 민족문화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2월 13.양자침(楊子忱)「역사의 조각 시인의 궐기」『원시토템과 민족문화』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14.허련화(许连花) [토템과민족문화」『민족문학연구』2003년 1호15.유보창(劉保昌),「토템과민족문화」『민족문학연구』2003년 16.김관웅(金官雄) 「남영전씨의 토템시를 평함」『문학과예술』2007년 617.유보창(劉保昌),「토템과민족문화」『민족문학연구』2003년18.양자침(楊子忱) <24수의 시로  세상을 들썽하다> 장춘일보 1998.4.1519.률원소적(栗原小狄) :바이족, 서부 예술전파 연구소 소장 20.이홍연  평론가, 하남대학 교수21.곽지우 평론가 길림성 작가협회 이론연구실 주임22.장립군 여녕대학 강사, 문학 박사23.장동오 중국시가협회 비서장, 시평가 24.유효취 북경사범대학 석사연구생25.지지마카,이족 , 청해성 부 성장  시인 26.사면(榭免)「남영전의시가탐구」『남영전토템시탐론』,시대문예출판사2004년 4월)27.률원소적(栗原小狄) .「남영전은 신화가 아니다」장강일보 ,1998년 4월15일.28.사면(榭免)「남영전의시가탐구」『남영전토템시탐론』,시대문예출판사2004년 4월)29. 오개진(吳開晉),<당대신시론> [산동문예출판사]1999년  30.[중국당대문학사] 特。萨音巴雅尔 편저, [민족출판사]1999년내용제시: 오늘 중국에서 남영전문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은 남영전의 문화현상을 고찰하고 검증하려는 취지에서 씌어 진다. 제 1부분에서는 남영전의 인생궤적을 추적하면서 문학성취와 사업성취를  개괄하였고 제 2부분에서는 남영전의 사실주의 시들을 살펴보았고 제3부분에서는 토템미학사상을 특수한 연대의 특수한 노래로 엮은 《꽃이 없는 봄날에》를 투시하여 보았고 제 4부분에서는 남영전의 토템시에 투사된 토템미학관과 토템사상을 거시적으로 밝혀보았고 제5부분에서는 토템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남영전의 토템사기 결국 인류의 생명시라는 것을 제시하였으며  제6부분 에서는 여러 가지 신빙싱 있는 자료를 가지고 중국에서의 남영전의 문화현상이 객관성을 띠고 있고 필연적이고 순리(順理)에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1    심련수 후기 시 고찰 댓글:  조회:1353  추천:58  2009-08-17
심련수 후기 시 고찰김룡운 본고에서는 주로 심련수의 후기 시문학에서 보이는 종결어, 한자어, 시의 구조 등에 대해서만 론의의 대상에 넣었다. 1. 종결어로부터 본 시어고찰심련수의 시는 종결어의 선택과 사용에서 여느 시인들과는 구별되는 남다른 특색을 보인다. 초기 시에는 설명과 권유와 간청 쪽에 힘을 실은 녀성적인 톤 “왔대요, 한다옵데, 주려무나” 등과 같은 종결토들이 우세라면 후기 시에 와서는 “들으라, 맞노라, 보라, 부르라, 하라” 등과 같은 명령형, 호령형, 확고성, 예언성 등과 같은 시어들이 우세를 차지한다. 짐작컨대 이런것들은 그의 시관의 변화에 따른것이 아닐가고  생각한다. 물론 초기 시에도 이와 같은 시어들이 없는것은 아니로되 후기 시에 와서 더욱 빈번해지고 의도적이라는데서 론의의 대상이 된다.“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식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데 있어 사용하는 시적언어임을 알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렬을 몸에 익힌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련수 시에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식적 시관을 통해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것은 매우 흥미있는 관조일것이다.” (리세훈)이런 지적은 아주 정확하다. 헌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례는 제시하지 않고있다. 하여 이 부분에서는 될수록 정확한 판단과 맞물리는 례문을 제시하고자 했다.  심련수 시에 선택 사용되는 특이한 종결어는 굵은 남성톤으로 울리여 암담한 세상에 대한 강렬한 스트레스, 진리에 대한 절절한 갈구,사악에 대한 절규,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 군국주의에 대한 완강한 저항정신, 낡은것의 멸망과 새것의 탄생 등을 강조하는데서  유력한 구실을 한다. 陸地의 태ㅅ가을 깨물어 뜯는마즈막 發惡을 그대여 보는가….중략…北으로 北으로 進軍하는 에쓰키모를 누구의 힘으로 抑留할소냐…중략微溫의 殘存을 삼키려 함을 도대체 참으로 알고 있는가(“人類의 노래”일부)이 시는 높은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웨치는 선각자의 훈계처럼 들린다. “보는가”, “할소냐”, “있는가”는 몰라서 묻는 단순한 물음이 아나라 긍정으로서의 역설적인 강한 울림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地球星이 宇宙間에 있을 때까지는 /우리의 心熱을 輸血할수 있다/ 人類의 歷史를 살릴수 있다”(人類의 노래)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그리고 자기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 자신하기에 감히 호령조로 훈계할수 있는것이다. 가령 우의 시에서 “보는가”를 “보이십니까”로, “할소냐”를 “할수 있는가요”로 “알고있는가”를 “알고있습니까”로 바꾼다면 엄숙하고 팽팽하던 시 분위기가 많은 정도로 느슨해지고 시 기운이 약해지는 감을 느낄수 있다. 그러므로 우에 례든 시들에서 사용된 종결토들은 무조건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가장 큰 구실을 하는 필요불가결의 시어들이다. 심련수 시인은 후기 시에 이르러 종결어의 선택과 사용에서 오직 그만의 특기를 발휘함으로써 남성적인 톤을 만들고 호방성과 거창성도 획득한다.2.) 한자로부터 본 시어고찰엄창섭도 심련수 시에 한자어가 많은것도 특징중의 하나라고 지적한바 있거니와 사실 심련수 시에 한자어가 많이 등장한다. 하긴 당시에 한자어를 즐겨 쓴 시인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였으며 심련수도 그런 시인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일례로 당시 장춘에서 발간되던 《滿鮮日報》의 경우를 살펴보면 한자어를 특별히 즐겨 쓴 시인들로 송철리, 함형수, 김북원, 천청송, 송석영, 리수성. 장인석, 최재철 등을 꼽을수 있다. 그중 일부를 살펴보기로 하자.沈默송철리나는 沈默의 여울에서 暝想의 송사리를 낙는고독의 漁翁이외다     ….하략…《滿鮮日報》1940년 1월 20일氣焰S.S.Y(송석영의 영어 이름 략자)株式의 利益配當을 꾀하는 씨나리즘에 秋波를 던지는賣春婦 되느니보다….하략《滿鮮日報》1940년 4월 19일 白卵의 水仙花리수영(본명 리욱)大理石의 球根은 黃昏의 祈禱보다도 神秘로운 思索이였다……중략裸體의 眼室에는 눈물도 업고  距離도 업섯다《滿鮮日報》1940년 3월 13일우의 시인들은 모두 심련수보다 년장이다. 이런 시인들이 무슨 연고로 한자어를 즐겨 썼는지 딱히 알길이 없다. 만주라는 특수한 지역환경 때문이였는지, 예로부터 내려오던 “한자우위론”의 영향때문였는지, 한자도 역시 우리 글이라고 생각한건지, 아니면 어릴적에 서당교육을 받은 연고인지, 혹은 개인의 특별한 기호였는지 알수가 없다. 그러나 심련수에 한해서만은 한자 집착의 까닭을 근사하게 추리해낼 수 있을것 같다. 우선 한자가 많이 들어간 심련수의 시 한수를 보기로 하자.거울 없는 화장실….상략…化粧에 젊으려는 耽美의 女人들이經莫의 視線을 모세운다.때 땀에 절은 낯 罪惡에 잡힌 심지意識하고 저지른 탓의 罪狀-하략소화 17년 6월 15일 심련수의 한자 애용의 까닭을 몇가지로 추론해 본다.첫째: 심련수는 6세에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에 간후 얼마 안되여 한인촌에 있는 한인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인학교의 교사들도 모두가 항일지사였으며 한문에도 박식한 분들이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심련수가 한인학교에서 항일교육을 받고 애국심을 키웠고 겸하여 한자도 배웠으리라는 추측은 크게 엇나가지는 않을것이다.둘째: 1931년 쏘련으로부터 중국 녕안현 신안진에 이주하여서부터 1935년 룡정에 오기전까지 심련수는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공부한것이 아니라 김수산을 개인 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심련수 시인의 동생 심호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수산은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서기장이였고 항일지사였으며 한문에도 박식했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조선에 나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을 선생으로 모신 심련수였으니 애국심과 함께 한자를 배웠을 가능성도 아주 풍부하다.셋째: 심련수는 1935년에 룡정에 온후 곧바로 동흥소학에 입학한것이 아니고 대략 반년동안 룡정시내 엿방거리 부근에 있는 사인서숙에서 공부하였다. 사인서숙이라면 한자를 배웠을 소지가 충분하다 하겠다.넷째: 심련수가 한어를 배우기 위해 만인(당시 만주국에서 살고있는 중국인들을 습관상 통털어 만인이라고 불렀다)과 사귀였다는 일기 두편이 남아있어 심련수가 한자를 많이 장악할수 있었다는데 대해  유력한 증거를 제공하고있다.1월 1일(1939년)…상략 앞동네 傳錫德이라는 滿人에게 滿語 배우러 갓다. 그는 吉林 어느 中學을 卒業하였다. 날마다 하려 한다. 저녁에 無情을 보았다. … 영어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오래 할만 할는지이상의 사실은 심련수가 리광수의 “無情”을 즐겨 읽었다는 정보와 함께 심련수가 한자를 많이 장악할수 있었다는데 대한 충분한 증거로도 된다. 그러나 우에 렬거한 사실들이 심련수가 왜서 하필이면 시에 한자를 많이 도입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충분한 리유로 되지는 않는다. 어린 나이라 “한자우위론”관념의 부추김을 받았을는지도 모르고 시체멋으로 그리 했을지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부언할것은 한자사용이 시의 우렬을 가늠하는데 큰 관계가 없다는것이다. 그것은 다만 외관상의 기호적 특징으로만 될뿐이다.3. 심련수 후기 시의 구조심련수의 초기 시들은 전형적인 시조풍과 민족적 리얼리즘을 위주로 하면서 뜨거운 애국심과 실향인의 연연한 방황의식, 조국산천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넘친다. 후기에 와서는 초기의 그러한 시 의식을 어지간히 깔고있으면서도 시가 더 무겁고 날카로와지고 남성적인 톤으로 호방성과 거창성을 획득하며 시를 짜는 방식도 단순한 서정과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모더니즘쪽으로 경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시적 비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바 일본류학에서 습득한 서구문학사조와 전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나 리승훈의 지적처럼 심련수는 모더니즘을 고집한것도 아니고 모더니즘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대체로 그의 경우엔 전통적인 서정시, 민족적인 리얼리즘, 모더니즘이 혼재한다. 필자는 이러한 “혼재설”에 동감이다. 심련수 후기 시의 형식 위주의 구조를 고찰함에 있어서 모더니즘 풍격, 리얼리즘 풍격, 민족적 서정풍격 등 세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심련수 후기 시의 모더니즘풍격후기 시에 이르러 심련수의 시는 모더니즘과 전통적인 민족풍격, 리얼리즘풍격이 동보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실험적인 모더니즘이 우세인것처럼 보인다. 하긴 초기 시에 모더니즘적인 행동이 전혀 없은것은 아니다. 심련수 초기 시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그리하여 강릉 경포대 심련수 시비에 새겨진 “눈보라”에서 이미 시인은 알게 모르게 모더니즘과 만난다. 시인은 사나운 눈보라가 요동치는 막막한 지평선에 서서 얼었으되 죽지 않고 전진하는 광명의 화신 조그마한 “해ㅅ덩이\"의 이미지를 주조한다.  “추락한 명상”은 심련수가 리얼리즘으로부터 모더니즘에로 나아가는 비약의 첫걸음으로 된다, 추락한 명상            절벽 외로운 정끗없이 푸른 바다가홀로 앉은 마음이 飛泡에 젖는다….중략억만년 묵고 절어潮楓에 검은 살이성상보다 거룩하다추락의 찰나그러나 명상은 지속한다. 앞이 부서진 靜溢속에서고이 지키는 습성끝없이 언제나 가지련다-소화 17년 9월 6일    심련수의 초기 시와는 사뭇 다른 모더니즘적인 풍격이다. 시인은 겨벼운 단순 감정토로가 아닌 다져진 무거은 리성으로 “명상”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명상”은 “외로운 정”의 이미지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비포에 억만년 절은 “바위”의 이미지로 변하고 나중엔 그것들이 합쳐져 “성상”의 이미지로 일어선다. 시인은 식민지시대의 오랜 고민과 고통끝에 마침내 암흑한 시대에 도전한다. 시인은 그러한 결단이 긴 시간의 사고를 겪었음을 암시하고자 “억만년 묵고 절은 ”바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대에 대한 자신의 반항과 도전이 막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알기에 “앞이 부서진 靜溢”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어떤 타격이 있어도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을것이라는것을 다지기에 “고이 지키는 습성 끝없이 언제나 지키련다”고 피력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서술적 처리로서 시의 모더니즘성격에 일정한 손상을 주는것 같다.“次 그음밤 홀로 깨여”는 자동기술법으로 초현실주의를 실험한 시로 보인다,次 그음밤 혼저 깨여……상략…싸늘한 방으로 되찾아드니화로엔 불조차 꺼진지 오래고재우에 누가 와서 부저가락으로 일지 못할 글씨를 쓰고 갔고나책상에 펴놓았던 “악의 꽃”은99페지부터 144페지를 어느 시인이 훔쳐 먹었는지이발로 물어뜻은 흔적이 남고쳐버렸네……하략이 시는 초현실주의의 실험이라는데서 주목할만 하다. 그러나 미끈한 시로 되기에는 거리가 있다. 어지간히 란삽하고 조잡한 느낌이 든다. 시인의 창작 의도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것은 기존 언어질서를 파괴하고있다는 점이다. 추측이지만, 가능하게 시인은 언어파괴의 행위로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를 대체하고 혼란한 세계질서를 조소했을수도 있다. 심련수의 후기 시에서 “宇宙의 노래”와 “世紀의 노래”는 대표작으로 볼수 있는 시다. 시의의 무게와 시공의 방대성에서 심련수의 소유의 시들이 비길바 못되며 따라서 심련수 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되는 호방성과 거창성 획득에서도 가장 큰 구실을 한다. 위성의 軌道를 침범한 흑성륜리를 자랑하던 철칙의 過失顚覆과 脫線에 발이 상해동그란 週期를 연착한다 몹시도 대담하던 假說의 학자가신을 冒瀆했다는 혐의를 입고죽음의 도살장에 버티고 서서毒杯의 법정을 노려본다. 기막힌 사연에 천왕성이 울어 은하의 범람에 눈물이 질제뭇별이 또다시 부셔져서나머지 운행을 계속한다“宇宙의 노래” 소화 17년 7월 5일  간략하게 풀이하면 “흑성”은 인류에게 재난을 주는 모든 사악의 무리, “죽음의 도살장”은 전 지구적인 참혹한 재난의 현장, “가설의 학자”는 정의의 투사, “천왕성”은 재난에서 허덕이는 인류들이라고 볼수 있겠다. 시인은 우주의 고통과 투쟁의 참혹성을 고발할 뿐만아니라 찬란한 미래도 예시하여 시를 밝게 만든다.보아라, 조그마한 이 별에도이제 창조의 베품이 나리리니두 팔을 걷고 일어서는 날건투의 神旨가 내릴게다 우주의 울타리에 홰치는 닭뭇별에 비끼는 려명을 찾아건너편에 떠오는 火星의 벗에게우주의 새 진리를 이야기한다“宇宙의 노래” 소화 17년 7월 5일  “창조의 베품”, “건투의 神旨’, “울타리에 홰치는 닭”, “화성의 벗” 등 시어들은 암흑을 헤치고 다가올 미래를 제시하고있다. 이런 시어들은 또 광명이라는 동일 이미지로 겹쳐지면서 전편 시를 밝게 건강하게 떠 받들고있다. 윤동주의 시가 “나”라는 작은 스케일에서 가슴에 닿는 가시적 언어로 비장미를 얻고있다면 심련수의 시는 “인류”, “우주”라는 방대한 스케일에서 추상적인 언어로 장엄미를 얻고있다. 여기서 심련수의 시는 호방성과 거창성은 얻고있으나 반대로 그 추상성때문에 오히려 시가 친절하게 페부에 와 닿는데에서는 일정한 영향을 주는것 같다. (2). 심련수 후기 시의 리얼리즘풍격심련수의 후기 시에 사실주의 시편들도 적지 않다. 시 ‘벙어리”는 심련수의 성격기질-괄괄하고 시원하고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사나이의 기질을 투박한 시어로 직언한 작품이다.벙어리스스로 제손으로 칼을 들어싸늘한 가슴팩이를 푹 찌르라주먹같은 냉덩이가 쑥 빠지게빛 잃은 죽은 피가 빠지게私情없이 敢行하라그러면 병 낫고 말도 하리다-17년 1월 8일 시인은 자기의 생각을 추호의 감춤도 없이 세차게 쏟아내라고 웨친다. “벙어리”를 한을 속으로 삼키며 사는 식민지 시대의 광범한 민중들이라고 보면 이 시는 반역을 꾀하고 부추키고 선동하는 “반역시”로도 읽을수 있다. 심련수에게 칼로 자기 가슴도 서슴없이 찌를수 있는 사내다운 용기가 있었기에 “우주의 노래”나 “세기의 노래”같은 호방하고 거창한 풍격의 시를 창작할수 있었다고 생각한다.(3). 심련수 후기 시의 민족적 서정풍격심련수의 후기 시에 민족적 서정풍격도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심련수 시의 민족적 서정풍격은 우리 민족에게 고유한 시조체와 민요체가 합쳐서 만들어진다.시조체: 심련수의 초기 작품중 태반수가 시조며 후기 시에도 시조풍의 시들이 적지 않다. 심련수는 시창작의 초기부터 시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발표작이긴 하지만 심련수가 제일 처음으로 쓴 작품이 시조 “님의 뜻”이다. 심련수의 시조창작은 리은상의 시조를 인연으로 발심이 된다.1940년 3월 27일 심련수는 룡정서점에서 《鷺山詩調集》을 구매했고 이틀사이에 열독을 마쳤다. 열독중 시조에 매료되여 여백에다 5수의 시조를 써 넣었다. 책 제일 마지막 페지에다 “님의 뜻”이라는 시조를 썼다.  님의 뜻-鷺山選生을 慕敬하여 끝首를 끝보며- 읽고서 알앗쇠다 님 마음 알앗쇠다보고서 알앗쇠다 그님 마음 알앗쇠다날마다 소리치며 句마다 외여둘라우-1940년 3월 29일 滿苦舍에서靑松 沈鍊洙(원고에 鍊으로 되여있음) 심련수는 시조가 몸에 배이다싶이 되였기에 일본류학을 하면서 서구모더니즘에 경도되면서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시조의 그림자를 떨어버릴수가 없었던것 같다. 그 떨어버릴수 없었던 인연을 아래의 시가 말해주고있다.銀座의 垂樣버들 춤추는 저녁밀려치는 人波의 律動하는 步調눈을 감고 헤매든 차거운 마음滿員된 電車에서 弔革을 찾엇다“동경삼제”-소화16년 2월3장 6구를 嚴守한 시조는 아니지만 그 흐름은 시조의 감정 흐름이다. 4행으로 된 이 시에서 세번째 행을 삭제하면 기본상 시조구조에 가깝다. 이외에도 “갈매기”, “七夕”, “追憶의 海邊”, “放浪” 등 심련수의 후기 시에 시조풍의 시가 두루 있지만 예는 약한다. 민요체: 심련수 후기 시의 고찰에서 민요체의 시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심련수는 민요체도 아주 사랑했고 애용했다. 김소월의 영향도 어지간히 받은것 같다. 심련수의 어릴적의 노트를 보면 민요체의 시들을 베껴놓은것이 적지 않는데 그중에 김소월의 시들도 있었다. 심련수의 시에 보이는 7.5조의 민요체 시들은 아마도 김소월의 영향을 받은듯 하다. 심련수의 민요체 시들은 기본상 3.3제와 7.5 제 형식을 취하고있다. 시 “夜業”은 일호차착도 없는 아주 깔끔한 3.3체의 민요시다.하늘에 적은 별조을어 새는 밤구름의 틈새에하늘도 보이고-하략…“夜業”소화 16년 10월 17일 辰羽丸에서의도적으로 3.3제의 구조를 만들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깔끔하고 정연한 3.3제를 만들기 위해 글자를 빼거나 가첨하고 있다. “자잖고”는 “자지 않고”의 준말이고 “무건 짐”은 “무거운 짐”의 준말이고 “어이나”는 “어이”에다 “나”를 보탠것이다. 7.5제의 민요풍에서 “외로운 새”가 그 보기로 된다. 외로운 새내 가슴에 깃드린 한마리 새오늘도 이른 새벽 먼동이 틀제 어디론가 외로히 날러 갓기에무엇인가 잃은듯 섭섭하여라-하략…소화 17 년 7월 27일“夜業”이 한글자도 차이가 없는 알쭌한 3.3제의 률시인것처럼 “외로운 새” 역시 첫 련중 “한마리 새”에서만 딱 한 글자가 적을뿐 알쭌한 7.5제 민요다. 모르긴 하겠지만 정형적인 민족풍의 률시를 써보려고 마음 먹은것 같다. 그리고 지나칠수 없는것이 한자를 무척 애용하는 시인임에도 무릇 민요풍의 전통시에서는 한자도 거의 한 글자도 쓰지 않고있다는 점이다.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성을 돌출히 하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것은 자유체 형식의 모더니즘시에도 간헐적으로 민요풍의 냄새를 띤 구절들이 더러 끼여있다는 점이다. 파미르 高原에다 천막을 치고黎牛의 등에서 짐을 풀어라히말리야 氷河에 목을 축이고 靈峰의 天池에서 목욕하자-“世紀의 노래”우의 례문에서 보다싶이 한 글자가 많거나 적을뿐이지 그 틀은 기본상 7.5조의 음률로 되여있다.이상으로 심련수 후기 시의 형식적 특징에 대하여 간단한 고찰을 진행하였다. 모두어보면 첫째, 심련수의 후기 시는 종결어에서 명령형, 호령형, 확고성, 예견성 등 주의식적 의지를 표명하는 “보라, 하라, 부르라, 들으라” 등의 시어를 선택 사용함으로써 굵직한 남성톤과 선구자적 자세를 형성하며 호방성과 거창성을 획득하는데서 유력한 구실을 한다. 둘째, 심련수는 한자를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심련수 시의 외표적 특징의 하나로 된다. 셋째, 심련수의 시는 모더니즘에 치우치면서도 리얼리즘, 전통적 민요형식과 동보하는 이른바 혼재로서의 스케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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