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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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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50회 남경에서의 김원봉의 활동 댓글:  조회:4739  추천:87  2008-01-28
  1930년대 남경은 중국 관내 조선인 혁명자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가 남경에 와서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도 남경으로 본부를 옮겼다. 김원봉은 대일전선통일을 이룩해내고 각파 혁명가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건하였으며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훈련시키면서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였다. 중국 내 수많은 조선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이 김원봉과 김구의 호소에 따라 남경에 규합되였고 새로운 투쟁력량을 형성해 나갔다. 상해, 해염, 가흥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남경으로 떠난 것은 2003년 9월 25일이였다. 장강 하류평원 중부에 위치한 남경시는 력사적으로 금릉(金陵), 건업(建业)으로 불리우다가 14세기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남경으로 불리게 되였다. 기원전 472년 월왕(越王) 구천(勾践)이 와신상담(卧薪尝胆)하여 오(吴)나라를 멸망시킨후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도시가 생기게 되였다. 그후 력대 봉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고 근대에 와서는 국민정부가 이곳에 수도를 정했다. 중국의 가장 큰 하천 부두를 가지고있는 남경은 장강 수로를 통해 중부와 서부의 무한, 중경에 이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상해를 거쳐 바다로 진출할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륙로 교통이 발달하여 강소성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으로 되고있다. 남경은 자금산(紫金山), 현무호(玄武湖), 진회하(秦淮河)를 비롯해 산과 호수, 강을 가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송나라때의 유적이 있는 현무호, 전형적인 강남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진회하 그리고 자금산에 위치한 중국 근대의 혁명선구자 손중산의 릉원인 중산릉(中山陵)은 많은 관광자들이 선호하는 명소이다. 9월 26일 오전 답사팀은 남경시 지명판공실에 찾아가 옛 지명과 지금의 지명을 대조해 보고나서 의렬단 본부 옛터인 호가화원(胡家花园)으로 향했다. 남경에서의 조선인은 대체적으로 진회하 이북의 도시 남부인 지금의 남경시 백하구(白下区)에서 거주하고 활동하였다. 백하구의 집경로(集庆路)와 명양로(鸣羊街) 부근에는 남경의 유명한 원림인 우원(愚园)이 있다. 우원은 명나라때 중산왕(中山王)의 놀이터였는데 청나라시기에 와서 호(胡)씨 집안이 이곳에 원림을 만들면서 생겨났다.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땅을 파서 늪을 만들었으며 각가지 진귀한 화초를 심고 정교한 루각을 수십채 지어 이곳은 유명한 원림으로 변했다. 우원은 청나라말기에 공원으로 개방되여 더욱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호씨 집안이 만든 화원이였기때문에 현지인들은 우원을 그냥 호가화원이라고 불렀다. 1932년 남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백하로(白下路) 명양가에 위치한 호가화원 부근의 가옥에 거처를 정하고 의렬단 주요 간부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원봉(1898-1958)은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府北面) 감천리(甘川里)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호는 약산(若山)이고 선후로 최림(崔林), 진국빈(陈国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국권을 상실한 조선이 일제의 유린을 받고있는 참상을 목격해온 김원봉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을 큰 뜻을 품었다. 1916년 그는 중국에 건너와 선후로 천진 덕화학당(德华学堂)과 남경의 금릉대학(金陵大学)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후 김원봉은 무장항일의 뜻을 품고 중국 동북에 세운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한편 뜻이 맞는 지사들을 규합시켜 11월 9일 길림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조선의렬단을 창단하였다. 김원봉과 윤세주(尹世冑), 량건호(梁健浩), 한봉근(韩凤根), 한봉인(韩凤仁), 김옥(金玉), 강세우(姜世宇), 리성우(李成宇), 서상락(徐相洛), 권준, 신철휴(申哲休), 곽재기(郭在骥), 량동선(梁东宣) 등 13명이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로 의렬단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의렬단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무너뜨릴데 관한 행동방침을 확정하였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렬단 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단재 신채호의 반 림시정부 성토문을 적극 지지하면서 무력항쟁을 주창하였고 또 <조선혁명선언>을 의렬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면서 의렬단을 확대하였다. 20세기 20년대 의렬단은 선후로 부산,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도꾜 니주바시(二重桥) 폭탄의거, 상해 황포탄 의거를 비롯한 의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고 동방 피압박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1926년 김원봉은 최림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광주에 갔다. 단순한 의렬투쟁 보다는 대중운동을 이끌고 자체의 군대를 조직해야함을 깊이 인식한 그는 의렬단 단원들을 이끌고 황포군관학교 4기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는 한편 중국의 반제반봉건 투쟁에 참가하였다. 1927년 국공분렬후 김원봉은 하룡부대에 입대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상해를 거쳐 북평으로 갔다. 북평에서 그는 공산주의 리론가들인 한위건(韩伪健), 안광찬(安光瓚)을 만나 공산주의와 대중운동을 학습하였으며 레닌주의 학교를 세우고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을 이끌었다. 1932년 김원봉은 더욱 많은 혁명자들을 규합하고 중국 내 모든 반일지사들을 단합하여 대일통일전선(对日统一战线)을 형성하기 위해 남경으로 왔다. 남경에서 그는 진국빈(陈国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동학이였던 국민정부 고위관원인 황소미(黄绍美), 관린정(关麟征)과 련락을 달고 또 중국항일 구국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东北义勇军後援会)”, “동북난민후원회(东北难民後援会)”의 지원을 받았다. 황소미는 아시아문화협회를 주도하였고 관린정은 국민군 제25군 군장이며 진포로(津浦路) 경비 사령관이였다. 특히 동기생인 삼민주의력행사(三民主义力行社) 서기인 등걸(藤杰)의 도움이 컸다. 김원봉은 등걸을 통해 대일작전에 관한 의렬단의 다음과 같은 계획을 장개석에게 전했다. 첫째, 일본과 만주 요인을 암살하고 중요 기구를 파괴한다. 둘째, 재만 반일단체와 손잡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다. 셋째, 조선, 만주의 로동자와 농민계층에 심입해 혁명군 조직을 준비한다. 넷째, 지페를 위조하여 만주의 경제를 교란한다. 다섯째, 테로활동을 실행하고 물자를 확보한다. 장개석은 의렬단 지원 사항은 삼민주의력행사에서 맡아보도록 하고 매달 3,000원을 활동경비로 제공할 것을 지시하였다. 의렬단 본부 옛터인 남경시 호가화원은 지금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다년간 정돈하지 않았던 탓으로 쓰레기가 쌓이고 늪은 오염되여 악취를 풍겼다. 화원부근에 이따금 헐망한 가옥들이 보였다.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옛날에는 그럴듯한 집이 였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번지수가 없고 또한 비슷한 건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삼민주의력행사의 도움으로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은 김원봉은 1932년 10월 20일 남경 교외의 탕산(汤山) 선사묘(善祠庙)라는 사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이때 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을 탕산에 세웠는데 훈련반은 6개 대로 나뉘였다. 그 가운데서 6대가 조선청년들이 수용되였는데 곧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보안을 위해 교외에 학교자리를 정했고 대외로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6대로 지칭하였다. 탕산은 남경시 동부 교외에 위치하였다. 9월 26일 오후 답사팀이 남경시 탕산진에 가 보았지만 지금 학교 옛터에는 나무와 잡초만 무성할뿐 아무것도 없었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는 주변을 철사로 둘러막은 선사묘라는 사찰이 있었다. 사찰은 세 개 건물로 되었는데 가운데 건물에는 신상(神像)이 모셔졌고 곁의 큰방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작은 방은 교관실로 사용되였다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사묘 종적은 찾을길 없고 빈 옛터만 남아있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1932년 10월 개교되여 1933년 4월까지 제1기생 26명을 이곳에서 졸업시켰다. 학교운영은 김원봉과 의렬단 지도부가 담당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리집중(李集中), 신악(申岳), 김중(金鐘), 로을룡(卢乙龙), 박건웅, 권준을 비롯해 왕현지(王现之 리영준), 한일래(韩一来), 리철호(李哲浩)가 군사, 정치, 총무를 맡은 교관으로 있었다. 김세일(金世日), 윤세주, 리륙사(李陆史)를 비롯한 26명 학원이 제1기로 졸업하였다. 김세일과 윤세주는 후에 조선의용군의 주요간부로 항일전장에서 활약하였고 리륙사를 비롯한 많은 학원들은 각지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1933년 9월 학교는 강소성 강녕진(江宁鎭)에 옮겨 제2기를 운영하였다. 지금의 남경시 교부영(教敷营)에 자리를 정했다고하지만 명확하게 확인할수없었다. 1934년 4월 까지 리원대(李元大), 문명철(文明哲), 리정순(李正淳), 관건(关键), 윤공흠(尹公钦)을 비롯한 55명 학원이 졸업하였다. 1935년 4월 김원봉은 남경 교외의 상방진(上坊鎭) 황룡산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를 교육시켰다. 1기와 2기를 졸업시켰던 탕산과 강녕진의 학교위치가 일제 밀정에게 탐지되였기 때문에 제3기는 남경에서 멀리 떨어진 상방진의 편벽한 산속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27일 오전 답사팀 일행은 상방진 황룡산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제3기 학원들이 거처를 잡았던 옛 절인 천녕사(天宁寺)가 지금도 남아있었다. 남경의 우화대(雨花臺)를 거쳐 남부로 30킬로메터 정도가면 상방향(上坊乡)이 나타난다. 당시의 상방진은 지금의 상방향으로 변했고 황룡산도 장산(长山)이라고 한다. 상방향에서 얼마간 더 가면 산중 우묵진 곳에 이르렀다. 산은 가파롭지 않았지만 비교적 편벽하여 나무와 대숲이 어거져 있었다. 우리는 탕산림장(汤山林场) 장산(长山) 작업터, 천녕사 작업대라는 글이 어렴풋이 새겨져있는 돌비석 두 개를 발견하였고 평지쪽에 있는 낡은 절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공지를 둘러싸고 세면에 단층 건물이 있었는데 정면 건물에 천녕사라는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곳이 바로 당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 학원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였던 황룡산 천녕사였다. 왕통(王通), 한대성(韩大成), 호유백(胡维白)을 비롯한 36명 학원이 반년후인 1935년 10월 졸업하였다. 제3기는 양민산, 윤세주, 리춘암(李春巖) 등이 정치교관으로, 김세일, 리상지(李相之), 신악이 군사교관으로 있었고 김두봉(金枓奉)이 조선의 력사, 지리를 강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서 김원봉은 국민당 삼민주의력행사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조선청년들을 양성하기에 힘썼다. 학원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면서 엄격한 정치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김원봉은 김구가 락양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자 그곳에도 조선청년들을 파견하였고 남경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도 분산적으로 조선청년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넓히는 동시에 민족의 반일력량을 키워나갔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김원봉은 남경에 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양성했을뿐만 아니라 남경에 모인 여러 당파들과의 련대를 강화하고 전민족의 대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힘썼다. 1932년 10월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의렬단, 광복단(光复团)을 비롯한 단체들이 상해에 모여 대일전선통일동맹(对日战线统一同盟)을 결성하였다. 김원봉은 또한 1935년 7월 4일 5개 당파단체들을 규합시켜 조선민족혁명당(朝鲜民族革命党)을 창당하였다. 남경 금릉대학 강당에서 소집된 창당대회에서 일제에 항격하여 독립을 이룩하고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원칙을 토대로 당강과 정책을 확정하였고 676명 당원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新韩独立党), 대한독립당, 조선의렬단 5개 단체의 해체를 선포하고 조선민족혁명당에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내 조선인 반일투쟁의 가장 큰 당으로 되었다. 김규식이 당 주석을 맡고 김원봉이 총비서로 선거되였다. 1937년 일제가 남경을 공격하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 본부를 거느리고 남경을 철수하여 무한으로 갔다. 무한에서 그는 여러 혁명군사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재규합하여 중국항일전쟁시기 중요한 역할을 일으킨 조선의용대의 창립을 이룩해 냈다. 천녕사 유적지를 보고나서 답사팀은 귀로에 올랐다. 설레이는 대나무숲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씩씩 조선청년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꽃피는 고국은 빛 잃고 물이 용솟음치듯 대중은 들끓는다. 억압받고 빼앗긴 우리 삶의 길 들끓는 것만으로 되찰을수 있으랴. 갈 길 방황하는 동포들이여 오라 이곳 배움의 마당으로. 조선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여 가슴의 핏줄기 들끓는 우리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다 눈물 머금고 결의 굳게 모두 일어서라. 한을 푸는 성스러운 싸움에 필승의 의기 이곳에 용솟음친다.”  
60    제49회 절강성 가흥의 피난처 옛터 댓글:  조회:4307  추천:76  2008-01-27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동북을 강점하였다. 부유한 동북대지는 일제가 더욱 큰 야망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지로 전락되였고 수천만 동북사람들이 일제의 압박과 략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은 수억 중국인민의 강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진보인사들은 일제와 싸울 것을 호소하면서 일제와 타협하는 국민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국민정부는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두려워 계속 공개적인 항일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제 침략자들에게 일격을 가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중국 관민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힘을 알게 되었고 조선독립을 위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반일투쟁을 동조하고 적극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김구와 부분적 림시정부 요원들이 중국 진보인사의 도움을 받아 가장 먼저 피난한 곳은 절강성 가흥시였다. 1932년 5월, 홍구공원 폭탄사건이후 김구와 안공근은 중국의 진보인사 저보성의 배치에 따라 엄항섭의 호송을 받으며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가흥으로 갔다. 저보성은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절강성 주석, 상해 항일구원회 회장, 상해법학원 원장을 력임했던 인물이였고 가흥의 부호였다. 저보성은 김구를 가흥 남호(南湖)기슭의 매만가(梅湾街)에 피신시켰다. 해염현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후 우리는 절강성 북부의 유명한 도시 가흥시로 향했다. 강남의 시골풍경을 만끽하면서 가흥시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가흥은 력사가 유구하고 물산이 풍부한 강남의 명소이다. 이곳은 산이 없었다. 가로세로 뻗은 수로가 평지의 무수한 하천과 호수를 이어주고 있는 물의 고장이였다. 가흥은 또한 명인이 많이 나는 고장이기도 하다. 근대 위대한 애국주의자 심균유(沈钧儒), 현대문학거장 모순(茅盾), 저명한 시인 서지마(徐志摩)가 이곳 태생이고 오늘의 무협소설 대가 김용(金庸)도 이곳 사람이다. 가흥의 관광명소로는 남호(南湖)가 으뜸이다. 600여무의 면적을 가진 호수 중심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다. 섬에는 연우루(烟雨楼)를 비롯한 옛 원림식 건축물들이 있어 호수의 문화적인 정취를 보태주고있다. 중국 송(宋)나라 이후로 가흥의 남호는 항주의 서호(西湖), 소흥(绍兴)의 동호(东湖)와 더불어 절강의 3개 유명한 호수로 불리우고 있다. 가흥시 남호 풍경구에 위치한 매만가는 시중심의 상업구역과 이어져 있었다. 륙지로는 가흥시 남부와 옛 시구역으로 갈 수 있었고 수로로는 남호를 거쳐 운하로 통했다. 이곳에는 중국민주동맹(民盟) 창시인인 심균유(沈钧儒) 선생의 옛집,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93학사 창시인인 저보성 선생의 옛집 유적이 있고 근대 녀혁명가 추근(秋瑾)이 혁명활동을 위해 세웠던 남호학당(南湖学堂)이 있다. 매만가에 도착해 76번지를 찾아가니 물가에 지은 작은 2층 건물 보였다. 검은 기와에 흰 벽의 건물이였는데 건물 정면은 널로 만든 겉벽에 싸여있었다. 뒤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창이 없는 검은색 널문이 굳게 닫혀있고 그 곁에 한자로 “대한민국 김구선생 피난처”라고 밝혀있었다. 이곳이 바로 1932년부터 1936년사이 김구가 피신하여 기타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던 곳이다. 당시 가흥에 도착한 김구는 우선 호수가의 수륜사창(秀纶丝厂)이라는 비단공장에 몸을 숨겼다가 매만가 76번지인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건물은 저보성의 양자인 진동생(陈桐生)의 집으로서 민국초기에 축조된 2층 3진(三进) 구조였다. 거실 창가에 앉으면 남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주동생은 부근의 농장을 운영하였는데 일이 끝나면 늘 이곳에 들려 김구와 한담을 하군 하였다한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옛 건물을 한창 보수하는 중이였다. 몇몇 로동자가 열심히 일하고있었다. 안내일군이 우리에게 건물의 구조를 자상히 설명해주었다.   (안내원) “뒤의 이 집이 김구 선생이 살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이쪽을 헐고 한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잘 보수하려합니다. 건물은 현대적인 서양식 건물인데 집 밑으로 물이 흐릅니다. 김구 어머니와 아들은 김구 선생이 이곳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김구 선생은 거의 모든 일을 중지하고 있었습니다. 주애보라는 녀성과 함께 선상생활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괜찮은 건물입니다. 이곳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밖을 내다보는 구멍입니다.”   건물에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비밀계단이 있었다. 강남은 대부분 숨겨놓은 벽 궤가 있었지만 이 집은 궤가 아니라 비밀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2층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김구는 이곳으로부터 밖의 상황을 살폈다고 한다. 상황이 위급하면 비밀 통로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직접 강으로 피신할 수 있다고 한다. 김구는 1936년 2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남경으로 갔다. 그 사이 김구는 해염으로 피신하여 반년간 있었고 또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흥의 주애보(朱爱宝)라는 뱃사공 녀성과 함께 선상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홀몸으로 다니면 더욱 위험하다는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褚凤章)의 권유를 받아들여 주애보와 함께 있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구는 주애보와 함께 늘 운하와 호수에 배를 띄워 몸을 피하군 하였다. 60여년이 지난 뒤 <가흥일보(嘉兴日报)>의 기자이며 절강성 녀류 소설가인 하연생(夏輦生)이 김구와 주애보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소설 <선월(船月)>를 발표하였다. 소설은 후에 한국문판으로 출판되여 한국 정부상까지 받았다. 하연생은 또 장편소설 <호보류망(虎步流亡)>과 <회귀천당(回归天堂)> 두 작품을 출판하였다. 한류삼부곡(韩流三部曲)으로 불리우는 이 세 작품은 김구와 윤봉길의 문학적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한 가흥에 피신한 김구는 이 시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 전면적으로 회고하고 깊이 있게 반성함으로써 미래 투쟁방향을 확정하였다. 그는 오직 전민족의 통합만이 일제를 전승하고 민족독립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통일전선을 이룩해야하고 수중에 잘 훈련된 군대가 있어야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안내원) “이쪽은 김구 선생이 손님을 만나고 식사하던 곳입니다. 아래층입니다. 이 집은 밖에서 보면 작아보이지만 안은 이렇게 큽니다. 물론 밖에서는 층집인줄 모릅니다. 이것이 문인데 김구선생이 와서 이 문에 칠을 했습니다. 이쪽에 보이는 것이 운하입니다.”   매만가 76번지의 김구선생 피난처는 한창 보수중이였다. 가흥시 정부에서는 이곳 옛 건물을 잘 보수하고 집 주변을 잘 정돈하여 강남의 관광명소로 개발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매만가 76번지의 김구선생 피난처에서 200m정도 떨어진 곳에는 리동녕(李东宁)을 비롯한 한국 림시정부 요원들이 피신하였던 유적지가 있다. 주소는 가흥시 남문(南门) 일휘교(日晖桥) 17번지이다. 도보로 몇분간 걸으면 앞에 높은 담에 둘러싸인 커다란 2층 건물이 나타난다. 청나라 말기에 축조된 건물 앞에는 정원과 높은 담이 있었다. 담에는 검은 널문이 있었다. 녹 쓴 쇠고리가 달린 문에는 일휘교 17번지라는 작은 주소표가 붙어 있었고 문 곁에는 “한국림시정부요원주처(韩国临时政府要员住处)”라는 기념석판이 있었다. 가흥시 정부에서 2001년에 만든 기념석판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운데 좁은 공지를 둘러싸고 3면에 빼곡이 들어앉은 2층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한창 보수중이여서 건물의 원 모습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대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살수있을 만큼 방도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수있었다.   (안내원) “이곳은 한국 림시정부 요원들의 피난지입니다. 림시정부 요원에는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이 포함됩니다. 이들도 이곳에서 2년여 있었습니다. 후에 이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였습니다. 1999년부터 이곳 원 주민들을 철수시켜 원 건물모습을 회복하고있습니다. 이곳에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보내준 사진전시를 하는데 지금은 보수 작업을 하기 때문에 잠시 전시를 하지 않고있습니다. 아마 2004년에 가야 전부 보수하여 개방할 것 같습니다. 아래층은 림시정부 요원들이 식사하고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고 위층은 휴식하던 곳입니다. 당시 상해에 있던 림시정부는 각지로 흩어졌는데 일부가 이곳에 오고 많은 사람들은 항주에 갔습니다. 김구 선생은 안전을 위해 이곳에 거주하지 않고 부근의 매만가에 거주했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살펴보았다. 1932년 5월 중순 한국 림시정부 요원인 리동녕, 김의한(金毅汉), 박찬익과 그 일가가 저보성의 배치에 따라 상해를 떠나 가흥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이 집을 세내여 거처로 정했다. 며칠후 엄항섭이 김구와 안공근을 호송해 상해로부터 가흥에 도착하였다. 엄항섭과 안공근도 이 집에 거주하면서 비밀리에 김구와 련락하였다. 그후 조선국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한 김구의 모친 곽락원(郭樂园) 녀사가 두 손자 김인(金仁)과 김신(金信)을 데리고 찾아와 역시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이들은 남녀로소 한곳에 모여 살았기에 방대한 대가족을 련상 시켰다. 현지인들은 줄곧 이들을 광동에서 온 대가정으로 생각하였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말투가 부드러운 광동방언이 우리말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구가 가흥에 도착한후 이곳은 림정의 비밀거점으로도 사용되였다. 몇몇 림시정부 요원들만이 김구가 부근에 피신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김구도 역시 이들을 통해 기타 독립운동가들과의 련계를 확보할수있었다.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할 때 상해에 있던 대부분 림시정부 일군들은 사처로 흩어졌고 일부는 절강성 항주로 이동하였다. 항주에도 림시정부 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지만 그곳까지 답사할 여유가 없어 다소 유감이였다. 1933년 5월 김구와 안공근, 엄항섭은 가흥으로부터 남경에 가 장개석을 만나 재정면의 지원을 허락 받았다. 중국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김구는 다음 보조로 림시정부 조직체계를 강화하고 미래 반일투쟁 방향을 확정함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항주에 모인 림시정부 주요인사들과의 분쟁이 나타나 여러 가지 애로를 겪게 되었다. 크게 실망한 김구와 리동녕은 항주에 머물지 않고 계속 가흥에서 생활하면서 비밀리에 림시정부 내부 통합을 주도하였다. 장개석을 만난 후 김구는 중국 측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中央陆军军官学校) 락양분교(洛阳分校)에 설치한 한인특별반(韩人特别班)을 운영하였다.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 그는 동북에서 활동하던 리청천(李青天)과 손잡고 중국 동북과 조선 국내로부터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1934년 2월 락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이 정식 개교하였는데 당시 92명 청년들이 모였다. 김구가 고문자격으로 전반운영을 책임지고 리청천이 총교관(总教官)을 맡았으며 리범석(李范奭)이 학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오광선(吴光鲜), 조경한(赵擎韩), 윤경천(尹敬天), 한헌(韩宪)이 교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특별반 운영에서 김구와 리청천이 서로 학생들을 자기쪽으로 규합시키려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심화되는 모순을 해결할수 없게 되자 김구는 자기쪽 25명 입교생을 남경으로 소환하기도 하였다. 락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은 일년 뒤 62명을 졸업시켰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측이 중국측에 강경한 외교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페쇄되고 말았다. 가흥에 피신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은 이시기 또한 림시정부 재정비에 성공하였다. 1935년 11월 림시정부 의정원 비상회의가 드디어 가흥의 남호에서 소집되였다. 리동녕, 조완구, 김구, 조성환, 리시영, 송병조, 차리석을 비롯한 16명 의정원이 모인 자리에서 김구와 리동녕, 조완구가 국무위원으로 보충 선거되고 제13기 림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가흥의 매만가의 김구선생 피난처와 림시정부 요원거처 유적지를 답사하고 가흥의 명소 남호에 도착했을때는 늦여름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있을 때였다. 수려한 남호의 동남안에는 복구해 만든 유람선 한 척이 조용히 떠 있었다. 길이가 16m이고 너비가 3m인 유람선 중앙에는 탁상과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은 바로 이 유람선에서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다. 가흥에서의 답사를 마치면서 1935년 한국림시정부 비상회의 역시 가흥 남호의 한 유람선에서 소집되였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 대회에서 김구는 사실상 한국림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 민족주의 진영의 수반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59    제48회 김구피난처와 재청별장 댓글:  조회:5577  추천:54  2008-01-27
  세인들을 경악시킨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사건은 조선반일투쟁의 힘을 과시하였고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다. 사건이 방생한후 상해의 일본당국은 사건 배후를 들춰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때 김구는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을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서 획책한것이라고 밝혔다. 일제는 6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수배하였다. 당시 3원이면 일반인이 한달을 족히 살수있었으니 60만원은 엄청난 금액이 아닐수 없었다. 그리하여 애국단을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진행해오던 김구와 림시정부는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 유지인사들의 도움으로 상해 이남의 절강성 해염(海盐), 가흥(嘉兴), 항주(杭州) 등지를 전전하면서 험난한 피난길에 들어섰다. 상해에서 절강성 해염현가지는 118킬로메터 거리였다. 9월 24일 상해에서의 답사를 마무리한후 답사팀 일행은 김구가 반년간 피신해 있었던 해염현 남북호(南北湖)의 유적지인 재청(载青) 별장을 찾아갔다. 절강성 해염현은 전당강(钱塘江)이 바다로 흘러들어 형성된 항주만(杭州湾) 북안에 위치했다. 현의 인구는 27만명이고 지역면적은 500여 평방킬로메터이다. 물이 많고 벼가 잘 되며 비단이 유명한 이곳은 예로부터 부유한 고장이였다. 더욱이 지명에서 알수있듯이 이 고장은 바다 소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옛날에는 소금 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해염현 남부의 전당강 기슭에는 강남의 명승인 남북호가 있다. 세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남부가 항주만과 이어진 호수 가운데는 긴 언제가 있다. 언제는 호수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호수이름을 남북호라고 합쳐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찾는 재청별장이 바로 남북호 기슭의 금우산(金牛山)을 등진 언덕에 자리하고있었다. 현성에서 서남부로 얼마간 가면 남북호가 보였고 주변에 낮은 산이 보였다. 그러나 재청별장은 비교적 외딴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한동안 찾아가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옛 건물들이 있었고 좁은 길목에 도로표식 하나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표식에는 <명인문화처(名人文化处)>, <김구피난처(金九避难处)>등 부근의 명소들이 적혀있었다. 그곳으로 조금 더 나가니 대나무와 각가지 나무숲에 에워싸인 가옥이 나타났다. 낮은 문 곁에는 검은 기념석판이 박혀있었다. 거기에는 푸른 글발로 <재청별서(载青别墅)>라고 씌여있었고 1997년 해염현 인민정부에서 이곳을 현급 문화보호단위로 확정했음을 밝히고있었다. 재청별장은 두 부분으로 되었다. 한쪽은 김구선생 전시청이 있고 다른 한쪽은 별장의 주요 건물들이 있었다. 재청(载青)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별장은 1916년에 축조된 남북호의 첫 근대적인 건물이다. 남향으로 된 별장은 정실 3개에 주방하나, 객실 하나가 있었다. 김구 전시관은 별장의 해 빛 밝은 정실에 정해져있었다.   (김구피난처 해설원) “김구피난처 전시관은 2001년 5월에 보수하여 정식 개방했습니다. 96년에 김구선생의 차남 김신 선생이 찾아와 옛집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고있습니다. 전시관의 사진들은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직접 전시관을 설계하고 제작해 주었습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김구의 반신 동상이 모셔져있었고 동상 뒤에는 좌우 량쪽으로 “독립정신(独立精神)”과 “량심건국(良心建国)”이라고 쓴 김구의 서예작품이 걸려있었다. 기념관은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 김구선생과 림시정부의 사적을 설명해주는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1932년 6월 가흥(嘉兴)에서 한 달간 피신하였던 김구는 그곳 상황이 어렵게 되자 중국의 유지인사 저보성(褚辅成)의 도움으로 해염의 재청별장에 와서 피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설원) “당시 저보성 선생이 김구를 이곳에 피신시켰습니다. 저보성은 국민당의 원로이고 이곳의 대 부자였습니다. 그분이 김구를 도와 상해에서 가흥에 갔고 다시 재청별장에 오게 했습니다. 저보성의 며느리인 주가예라는 녀인이 김구선생을 모셔왔습니다. 주가예는 사상이 비교적 개방된 중국녀성이였습니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주가예에 대해 서술한 기록이 있습니다.”   재청별장의 주인은 주찬경(朱赞卿)이였다. 그의 질녀 주가예(朱佳蘂)는 가흥의 명인이며 중국국민당 원로인 저보성의 맏며느리였다. 주가예는 시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를 직접 호위해 해염의 재청별장에 피신시켰다. 한국 림시정부를 이끌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험난한 항쟁을 해온 백범(白凡) 김구는 우리민족 중국 관내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구(1876-1949)는 1876년 조선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云坊) 기동(基洞)에서 태어났다. 1893년 그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려는 일념으로 동학(东学)당에 참가하여 해주성 공격전에 참가하였다. 해주성 공격전에서 실패를 본 김구는 신천군(信川郡)에 사는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가 몸을 숨겼는데 안태훈 진사의 아들이 바로 안중근 의사였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김구는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1896년 2월 김구는 안악군(安岳郡)에서 일본군 중위 한 명을 찔러 죽였다. 그는 담벽에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원쑤를 갚기 위해 일본군인을 죽였노라 쓰고 자기 성명과 주소까지 밝혀놓고 자리를 떴다. 5월 11일 그는 집에서 체포되여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탈옥했다. 1908년 김구는 지사들과 함께 신민회(新民会)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련루되여 투옥되였다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석방되였다. 1910년 량기탁의 집에서 소집된 신민회 간부회의에 참가한 김구는 리동녕, 안창호, 리시영, 안태국 등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중국 동북에 독립 전초기지를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량기탁과 김구는 이를 위한 모금을 책임졌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가 신민회를 대거 검거할 때 김구는 세 번째로 체포되여 17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4년간 옥고를 치르던 김구는 1915년에야 감형되여 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후 상해로 망명한 김구는 리동녕을 만나 림시정부의 경무국장(警务局长)에 취임하여 한국 림시정부의 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거듭되는 혼잡을 겪은 후 1926년 12월 림시정부 국무령(国务领)에 취임하여 림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분 그리고 자금난으로 하여 림시정부는 계속 시련을 겪게 되었다.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구는 1928년 리동녕, 리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韩国独立党)을 창당하고 민족 진영의 단합을 모색하였다. 1930년 재차 국무령에 선거된 김구는 이듬해 한인애국단(韩人爱国团)을 조직하였다. 애국단은 무력행동으로 일제에 대항하고 세인들의 항쟁을 고무시키기로 하였다. 1932년 1월 애국단에 가입한 리봉창(李奉昌)이 일본 도꾜에 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裕仁)를 저격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관병식에 참석하려던 히로히도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지만 목표를 명중하지 못하고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 리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여 그해 10월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그뒤 4월 29일 김구는 윤봉길 의사를 파견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요원들을 폭사시키는 쾌거를 이룩해 냈다. 윤봉길 의거후 김구는 절강성 가흥에 피신하게 되었다. 1931년 9.18사변이 있은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실력자였던 진과부(陈果夫)는 조선지사들을 통해 동북의 일제를 타격하려고 계획하였고 중국 국민당 당원이며 한국 독립당인 박찬익(朴赞翊)과 접근하였다. 그러다가 홍구공원 폭탄 사건이 있게 되자 진과부는 김구를 가흥에 피신시킬 것을 지시하였고 그 일을 동북의용군 후원회 회장이였던 저보성에게 맡겼다. 뿐만 아니라 진과부는 장개석과 김구의 면담을 촉성시켰다. 1933년 5월 김구는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 엄항섭(严恒燮), 박찬익과 함께 남경 중앙륙군군관학교에 가서 국민정부의 총통(总统) 장개석을 만나 본격적인 지원을 얻게 되었다. 그는 중국측의 도움으로 림시정부를 이끌어 나갈 경비를 마련하게 되었고 또 락양군관학교에 특별반을 설립해 조선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1월 김구는 가흥에서 림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기구를 강화하면서 국무위원으로 피선 되였다. 그리고 리동녕, 차리석(车利锡)과 함께 한국국민당(韩国国民党)을 창당하고 자기의 기반을 닦았다. 1940년 가흥, 장사(长沙), 류주, 광주, 기강 등지를 전전하다가 중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경에서 김구는 림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고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으로 되었으며 림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중경 한국림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계속 민족진영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관리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지금 볼 수 있는 재청별장은 옛터에 복원해 지은 건물이다. 원 건물은 1960년대 창고로 사용되다가 처마가 내려앉아 무너졌다. 1996년 건물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그후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또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전시관을 설계, 제작해 주어 2001년 5월 김구 전시관이 개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별장의 침실, 객실, 서재, 주방은 모두 간소하였지만 정교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 숲이 낮아지면 창으로 아름다운 남북호 전경을 볼수있었다. 해염의 재청별장에서 반년간 체류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는 흩어진 림시정부 요원들과 련락을 취했고 측근들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도 적극 모색하였다. 그러나 해염현은 너무나도 편벽한 시골이였기 때문에 피신하기는 적성이였지만 활동하기에는 애로가 많았다. 게다가 현지 경찰들이 이때 김구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구는 흩어진 림시정부를 재정비하고 비밀리에 계속 반일지사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해염을 떠나 가흥으로 갔다.  
58    제47회 상해 림시정부 옛터 댓글:  조회:4812  추천:66  2008-01-27
  20세기 20년대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수립된 한국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많은 조선 독립지사들과 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각자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 의렬단 이들은 각자의 정치주장에 따라 구국의 길과 반일투쟁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 시기 중국력사의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립 되였다.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중국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상해 복단대학 한국연구소의 석원화 교수는 상해시절 조선혁명자들과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해 설명하였다.   (석원화) “조선 공산주의자들도 상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원래는 조선공산당이 있었는데 상해에는 고려공산당이라고 했습니다. 독립적인 조직이였습니다. 1929년 이후 고려공산당도 국제공산당의 지부였고 중국공산당도 국제공산당의 지부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국제공산당에서는 한나라에한개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리하여 30년대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 당위원회 산하의 한 개 지부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중국 쏘베트 운동을 지원한다든가 잡지를 내고 한국 교민들을 조직해 중국 홍군을 위해 의연금과 의연 물품을 내게 하였습니다.”   상해의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은 림시정부의 요원으로 있었던 리동휘와 려운형에 의해 주도 되였다. 국제공산당에 의해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法南区) 한인지부로 된후 조봉암, 홍남표(洪南杓), 한용(韩鎔), 김원식(金元植) 등이 지부성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중화쏘베트정부를 적극 지원하였고 간행물을 만들어 반일투쟁을 적극 선전하였으며 국내에 대표를 파견해 조선국내 공산중의 운동을 이끌었다. 상해의 림시정부 유적지를 보고 나서 답사팀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유적지를 찾아갔다. 림시정부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였다. 마당로와 흥업로가 만나는 곳으로부터 100메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던 건물이 나타났다. 주소는 로만구 흥업로 76번지이다. 원래는 망지로(望志路) 106번지였는데 그 사이 번지수가 바뀌였다. 역시 석고문식 층집이였는데 2층으로 되어있었다. 푸른 색과 붉은 색의 벽돌을 섞어 지은 건물 정문은 검은 널대문이였다. 거기에는 동으로 만든 커다란 문고리가 달려있었다. 문 오른쪽에는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개최지 기념관이라고 씌여있었고 왼쪽에는 상해력사박물관이라고 씌여있었다. 문위 벽에는 수덕리(树德里)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있었는데 수덕리는 1920년대 이곳 주소였다. 1925년에 축조된 이 건물은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한 리한준(李汉俊)의 형 리서성(李书城)의 저택이였다. 1921년 7월 23일 건물 1층의 18평방메터 되는 작은 방에 모여 13명 대표들이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의 창립을 이룩해 냈던 것이다. 방에 들어서니 정방형 모양의 식탁이 보였다. 식탁 주변에는 12개 작은 나무걸상이 둘러있었고 식탁에는 꽃병과 다기가 놓여져 있었다. 너무나도 간소하고 작은 회의실이였지만 장중하고 숙엄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 기념관에는 별도의 전시실이 없이 회의장 벽에 모택동, 동필무(董必武)를 비롯한 13명 대표의 사진이 걸려있었을 뿐이였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독립운동과 혁명에 적극적인 동조를 준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최룡수 교수)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는 동방 식민지, 반식민주 국가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조선에서는 3.1운동이 폭발했고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중국 5.4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대소와 진독수는 조선의 3.1운동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진독수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의 3.1운동은 위대하고 비장한 운동이며 무력으로가 아닌 민의로서 력사의 새 기원을 개척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3.1운동과 5.4운동에 참가한 혁명투사들은 서로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20세기 중조 인민의 혁명적 친선관계의 새로운 페지를 장식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5.4운동의 적극적인 성과라고 본다면 한국 림시정부도 3.1운동의 성과라고 할수있습니다. 조직의 성격과 형식은 다르지만 다같이 레닌의 커다란 지지와 관심을 받았습니다. 창립초기에 중국공산당은 상해 림정을 적극 지원했고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조선독립운동과 중국혁명사업이 다 세계 무산계급의 구성부분으로 되기 때문이며 조선공산주의자인 리동휘 등이 림시정부의 주요직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후에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당원으로 조선인 한락연, 김훈, 장지락 등 동지들은 한때는 한국 림시정부의 활동에도 참가하였습니다…1928년후에 제3국제의 결정에 따라 상해에서 활약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 강소성 지부를 창설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수덕리의 원 건물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지 기념관은 1952년 개관하였다. 50여년래 무려 천여만명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1997년 6월 중공중앙 선전부에서는 이곳을 전국 애국주의 교양 시범기지로 확정했다. 로만구의 한국 림시정부 유적지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개최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만국공동묘지를 찾아 떠났다.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지사들이 만국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상해시 정안사로(静安寺路)에 위치한 만국공동묘지는 지금 송경령 릉원으로 개칭되였고 정안사로도 송원로(宋园路) 개칭되였다. 로만구의 회해중로를 빠져나와 회해서로를 지나 송원로 21번지에 도착하니 거대한 릉원이 나타났다. 중국의 혁명선구자 손중산의 부인이며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였던 송경령 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부터 이곳을 송경령 릉원이라고 했다. 부지면적인 12헥타르에 달하는 릉원은 록음이 우거지고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아름다운 원림으로 되여있다. 릉원 중앙에는 송경령 묘소와 기념관이 있고 묘소 동서 량쪽으로 외국인 묘지와 명인 묘지가 지금도 보존되여있다. 외국인 묘원(墓园)에 이르니 타원형 비석 하나가 있었다. 거기에는 외국인 묘원이라고 밝혀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옛날 만국공동묘지 자리이다. 외국인 묘원은 드넓은 잔디밭에 자리잡고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헤치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가 나타난다. 답사팀 일행은 묘지에 밝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림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냈던 박은식(朴殷植), 림시정부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을 지냈던 신정,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력임하였던 로백린(卢伯麟), 인성학교 교장이였던 김태연(金泰渊), 림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 그리고 김구의 부인 최준례 녀사를 비롯해 수십명 민족독립 지사들과 일반 조선인 유해가 안치되여있었다. 1993년 박은식, 신정, 로백린을 비롯한 지사들의 유해는 한국으로 봉환해 갔기 때문에 지금은 묘비만 남아있다. 1859년 황해도 황주(黄州)에서 태여난 박은식은 일찍부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선후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였고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홍명희 등과 더불어 <동제사>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박은식은 상해에서 독립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박달학원을 세워 조선청년들을 교육하였고 민족사학 저작인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그는 한국 림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고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1924년 박은식은 림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고 대통령 대리를 겸했다. 1925년 리승만 대통령의 탄핵 면직 사건이 있은뒤 그는 림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림시정부는 내외로 극심한 곤경을 겪고있었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전민족의 대단결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조직력을 강화하기에 힘썼다. 이해 그는 제2차 헌법개정을 거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체제로 바꾸었다. 년로함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로심초사하던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상해에서 병으로 영면하였다. 로백린은 1873년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태여났다. 무예와 한문에 능한 그는 일찍 일본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 있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그는 안창호, 량기탁, 리동휘,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국 동북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립할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는 또 고향인 송화에서 뜻이 있는 청장년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로백린은 즉시 상해로 달려가 한국 림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미래 전쟁에서 막강한 군력을 키우려면 기술이 뛰여난 비행사가 많이 수요된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1920년 림시정부 군무부 총장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가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미국의 조선인들이 복격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 양성소는 선후로 수십면 조선인 비행사를 양성해냈다. 1921년 로백린은 다시 상해로 와서 무관학교 출신인 청년들을 규합해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적극 준비하였다. 이듬해 그는 리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1923년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여 림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국무총리에 임명되였고 군무총장을 겸직하면서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6년 1월 22일 상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인성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김태연은 1891년 황해도 장연(长渊)에서 태여났다. 그는 1919년 5월 상해에서 려운형과 함께 상해한인거류민단(上海韩人居留民团)을 조직하고 상해지역 조선인들을 단합하여 림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해 그는 또 려운형과 함께 대한적십자회(大韩赤十字会)를 조직하고 손정도(孙贞道) 등과 함께 교육회(教育会)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상해 한국 림시정부에서 김태연은 황해도 의원으로 사업하였다. 1921년 11월 그는 인성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여 중국 상해의 조선인 교육에 진력하다가 병사하였다. 어느덧 저녁녘이 되어 황폰빛이 비쳐들기 시작하였다. 만국공동묘지에서 수많은 지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이 잠든 지사들의 넋을 욕보일까 두려워 일행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풀과 락엽을 쓸어내며 더듬어 갔다. 신규식, 박은식, 로백린, 김인전(金仁全), 김태연, 안태국(安泰国), 김립…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였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싸워왔던 지사들, 망국의 한을 지니고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이들은 이곳에 조용히 잠든 것이다. 석양이 만국공동묘지를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투사들의 넋이 깃든 비석들도 황혼의 금빛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57    제46회 상해의 사적지 답사 댓글:  조회:3850  추천:59  2008-01-27
1932년 4월 29일 상해 황포강반에 울렸던 멸적의 폭음소리는 아득히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진 커다란 그 충격은 아직까지도 가셔지지 않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로신공원의 기념정자인 매정을 찾아와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제침략자들에게 정의적인 일격을 가한 윤봉길 의사의 업적과 헌신적인 정신에 경탄을 표하면서 숙연히 머리를 숙인다. 일본 침략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던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 일제의 야수적인 폭압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하여주었던 윤봉길 의사의 장쾌한 거사는 조선반일투쟁사에서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질뿐만 아니라 중국인민의 항쟁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아울러 조선민족은 불굴의 민족이고 견강한 민족임을 세계에 과시해주었다. 중국 국민정부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인 독립운동을 알게 되었고 그 힘을 알게 되었으며 물심량면으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상해 로신공원 매원의 기념정자는 1994년에 축조되고 2002년 12월 29일부터 대외로 개방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홍구공원, 지금의 로신공원에서 남쪽으로 15분쯤 걸어가면 상해의 유명한 문화명인 거리인 다륜로(多伦路)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쟁쟁한 현대 문학거장들인 로신, 모순(茅盾), 곽말약(郭沫若), 엽성도(叶圣陶) 뿐만 아니라 정령(丁玲), 유석(柔石)을 비롯한 중국좌익작가련맹(中国左翼作家联盟)의 주요인사들이 문학창작활동을 하면서 족적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1930년 3월 2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문화단체인 중국좌익작가련맹이 바로 이 거리에서 창립대회를 소집하였다.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있던 조선인 혁명가이며 리론가이며 문필가인 김규광(김성숙)도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찍 북경에서 <혁명>잡지를 꾸렸고 후에는 조선민족통일전선 활동과 조선의용대 창설을 적극 주도하면서 <민족전선>과 <조선의용대통신>을 주필하기도 하였다. 고풍적인 거리를 가노라면 량켠에 대부분 2,3층 되는 작은 건물들이 줄지어있다. 윗층은 주민들의 거주용으로 사용되고 1층은 도자기, 서예작품, 문방구 같은 것을 파는 매점으로 되어있었다. 다륜로 201농(弄) 2번지에 이르면 3층으로 된 서양식 작은 건물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좌익작가련맹 유적지이다. 유적지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있었다. 기념관 간판이 있는 문을 들어가면 정원이 나타나고 정원을 거쳐 건물에 들어서는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학교 교실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은 흑판 하나가 정면에 붙어있고 그 앞에는 검은 교탁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기다란 나무걸상이 한 줄에 4개씩 두 줄 놓여있었다. 벽에는 좌익작가련맹의 주요인물들인 로신, 심단선(沈端先), 전행촌(钱杏村), 전한(田汉), 정백기(郑伯奇), 홍령비(洪灵菲)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들은 모두 좌익작가련합회의 상무위원이였다. 중국좌익작가련맹의 기수였던 대문호 로신은 조선유지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었고 조선의 독립투쟁과 혁명활동을 많이 동정하고 지지해주었다. 상해시절 로신은 많은 조선청년들을 만나 동방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지하고 문학창작에 진력할 것을 이야기했다. 당시 동아일보 상해 특파기자로 있던 신언준선생이 로신을 방문하고 로신방문기를 썼다. 방문기는 중국 신문화운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참고자료로 되고 있다. 20세기 30년대 중국 사상문화전선의 전투적인 기치로서 중국혁명사와 현대문학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긴 좌익작가련맹이 이토록 간소한 곳에서 열렸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힘들고 엄연했던 당시의 환경을 느낄수있었다. 상해에서의 조선인 혁명활동과 독립운동은 두 줄기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림시정부 수립과 그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림시정부외 기타 혁명단체의 활동이다. 상해답사에서 만났던 상해 복단대학 한국연구센터의 석원화(石源华) 교수는 30년대 상해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상황에 대하여 비교적 전면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석원화)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다음 한국 교민들이 가장 많이 간 곳이 중국 동북입니다. 그 다음으로 상해에 비교적 많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상해는 한국에서 바다 길로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낡은 중국의 상해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조계지가 있었습니다. 조계지는 중국정부에서 독립되여 그 관할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각국 정치 망명자들, 혁명자들이 상해에 모여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한국을 놓고 볼 때 많은 교민들 특히는 비교적 중요한 직업 혁명가들이 상해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맑스주의를 신앙하든지 무정부주의를 신앙하든지 혹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신앙하든지 조선봉건왕조의 복벽을 주장하는 사람이든지 부동한 신앙과 주장을 가진 많은 정치인들이 모여왔다. 상해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표징은 1919년 4월 3.1운동이후 상해에 수립된 한국 림시정부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지는 1919년 림시정부 자리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적지는 지금 찾을수 없습니다…”   동방의 최대높이의 동방명주(东方明珠) 방송탑이 하늘높이 솟아있고 거대한 금융무역 빌딩이 위용을 자랑하는 상해 포동(浦东)지구는 급속한 중국 경제장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황포강을 사이 두고 포동의 대안은 서양식 옛 건물이 즐비한 금융중심지인 외탄(外滩)이다. 3.1운동이 있은 후 상해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림시정부의 출범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려운형(吕运亨), 현순(玄楯), 선우혁(鲜于赫)을 비롯한 지사들은 상해에 림시 사무소를 정하고 림시정부 설립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11일 설립된 상해 한국 림시정부의 첫 지점이 보창로(宝昌路)에 생기게 되었다. 지금 상해에는 보창로가 없다. 보창로는 후에 하비로(霞飞路)로 바뀌였다가 지금에는 회해중로(淮海中路)로 고쳤다. 기재에 따라 원 보창로 321번지나 329번지에 따라 회해중로에 가서 찾아보았다. 다행히 번지수는 바뀌지 않아 림시정부 옛터는 대체적으로 확인할수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대형 백화점이 들어 앉아있었다. 2003년 9월 23일 답사팀은 상해의 한국 림시정부 유적지를 찾아갔다. 급격히 변화되는 외부환경과 내부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하여 림시정부는 많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그 사무지점도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다. 1919년 10월 상해의 일본인 세력은 림시정부가 폭탄 제조를 비롯한 폭력활동을 주도한다는 구실로 림시정부를 프랑스 조계지에서 축출할 것을 조계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뒤 1922년 김익상, 오성륜의 유명한 다나까 저격사건이 있은후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림시정부는 영미 조계지로 옮겼다. 지금 상해에 남아있는 림시정부 유적지는 림시정부가 상해를 떠나게 되는 1932년까지 마지막으로 머물고 사무를 보던 곳으로서 보경리(宝庆里) 4번지에 위치했다. 보경리 4번지는 지금의 상해시 로만구(盧湾区) 마당로 306농 4번지이다. 회해중로에서 작은 골목길인 마당로(马当路)를 따라 300메터쯤 걸어가면 마당로와 흥업로(兴业路)가 만나는 십자길에서 조금 더 가면 보경리 4번지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상해 전형적인 석고문(石库门)식 건물의 3층 가옥 한 채가 있다. 검은 칠을 한 널문에는 동으로 된 문고리가 두 개 있었고 거기에는 마당로 306농 4번지라는 주소가 밝혀진 하늘색 패쪽이 붙어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건물벽에 대한민국림시정부 옛터라고 밝혀져 있었고 작은 비석 하나가 있었다. 유적지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 있었고 많은 소중한 사진과 비디오 영상자료로 림시정부의 력사를 관광자들에게 자상히 소개해주고있었다. 3.1운동의 결실인 한국 림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성립되였다. 당시 로씨야, 상해, 서울 등지에 6개 림시정부가 각기 설립되였는데 국민의 념원에 따라 상해의 림시정부에 통합되였다. 상해 림시정부는 <림시헌법>을 비롯한 법규를 제정하고 외교, 재정, 군사, 교육면의 노력을 기울렸다. 초기에는 국무총리제를 실시하고 리승만을 국무총리로 선거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리동휘, 법무총장에 리시영, 재무총장에 최재형(崔在亨), 교통총장에 문창범(文昌范)을 둠으로써 정부의 체제를 갖추어 출범하였다. 그후 다시 대통령제, 국무령제, 국무위원제를 실시하다가 상해를 떠나 중경에 간후로 국무주석제를 실시하였다. 리승만이 계속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림시정부는 처음부터 혼잡을 거듭하였다. 리동휘, 신정, 박은식, 리상룡(李相龙), 홍진(洪震), 김구(金九)등이 선후로 림시정부를 이끌어나가는 견인차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내부 각 파벌의 분쟁은 끊임없었던 탓으로 자체의 영향력과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림시정부는 상해에서 13년간 머물러있었다. 중국에서의 림시정부 활동은 세 개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정부에서 조선국내에 관원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조선 각지에서 일본총독의 임명한 관리와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조직이 방대하고 목표가 컸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여 실패하고말았다. 두 번째 단계는 폭력적 암살행동을 개시하였다. 림시정부에서 애국지사나 의사들을 파견하여 일제 기관, 공장을 파괴하고 일본침략군 두목을 사살하게 하였다. 이단계의 가장 큰 성과는 리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습격행동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이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일제의 수색이 심했기 때문에 림시정부는 상해에 발을 붙일수 없어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림시정부는 세 번째 단계의 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 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체의 군력을 키우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상해에 림시정부가 있게 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자들과 지사들이 상해에 모여왔다. 그리고 림시정부와 같지 않은 정견을 가진 사람들도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20세기 20, 30년대 상해는 조선혁명과 독립운동의 중요한 장소로 되었다. 상해에 모여온 조선지사들은 중국 현대력사의 전과정에 관여하였다. 5.4운동, 5.30운동, 북벌전쟁, 광주봉기, 중화쏘베트활동, 항일전쟁 중국의 중요한 력사 사변에 모두 활약적인 조선인의 그림자를 보게 되었으며 이들은 중국혁명과 아울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여 굴함없이 싸웠던 것이다. 보경리 4번지 림시정부 청사는 지금은 잘 보수되였지만 당시에는 작은 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사람씩만 겨우 올라갈 수 있는 나무 계단, 침대 세 개 밖에 놓을수 없는 침실 그리고 작은 회의실과 검소한 주방은 모두 독립지사들의 어려운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림시정부 유적지를 떠나면서 한국인 관광자를 만나 답사팀의 조향란 기자가 취재했다.   (한국 관광자) “우리의 독립지사들이 이렇게 많이 고생했다는 것을 느끼고 또 중국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중국과 한국이 더 가까워져서 세계적인 국가 되는 것을 기원합니다.”   중국의 최대도시 상해시의 옛 골목길에 자리한 한국 림시정부 유적지는 중한 수교이후로 많은 한국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최근 10년사이만 하여도 련인수로 60여만명 관광자가 이곳을 찾아왔고 한국 로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대통령 세분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유적지를 떠나면서 답사팀은 국제화로 나아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상해의 림시정부 유적지가 협력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훌륭한 역할을 계속 잘 발휘하기를 희망하였다.  
56    제45회 윤봉길의사를 기념하는 매원 댓글:  조회:8580  추천:58  2007-12-31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피압박 인민을 이끌고 토지혁명을 진행하고 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파와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홍군은 2만 5천리 장정을 거쳐 섬북으로 진출하였으며 지하전선의 우수한 공산당원들도 당조직을 확보하면서 반제애국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조선의 우수한 혁명자들은 중국 정세에 비추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망국의 한을 지니고 중국 상해에 망명한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상해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험난한 투쟁을 계속해 왔다. 비록 중국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있었지만 자체로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새로운 투쟁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있었다.   (권립 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우리민족의 혁명대오에는 리철부나 김산처럼 공산주의 기치밑에서 당의 지하사업에 종사한 분들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윤봉길처럼 반일민족주의 기치하에 우리 민족의 헌신적인 정신을 잘 체현한 분도 많았습니다.”   매헌(梅轩)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08년 조선 충청남도 례산(礼山)에서 태여났다.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学校)에 입학하였지만 일제의 노예교육이 싫어서 1919년 스스로 학교를 중퇴하였다. 3.1 독립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어린 그의 마음속에도 애국사상이 불타올랐다. 그는 전통적인 민족교육을 받기 위해 사설(私设) 서당인 오치서숙(乌致书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학을 배우면서 그는 국내 진보적인 잡지와 신문을 열심히 읽으면서 선전적인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농민들의 운명에 남다른 애착심을 가진 그는 농민들을 위해 독서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에 고심하였다. 1929년 윤봉길은 월진회(月进会)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고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농촌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억압, 탄압하에서 농촌운동을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대장부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노라”라는 명언을 남기고 떠났다.   (권립 교수) “1930년 갓 스물세살에 난 윤봉길 의사는 일제와의 결사적인 투쟁을 굳게 맹세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고생을 하면서 일제에게 치명타를 안길 기회를 노리고있었습니다.”   중국 각지를 전전하던 윤봉길은 1932년 봄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홍구공원 부근에서 야채장사를 하다가 림시정부 국무위원이며 상해 한인교포(韩人侨胞) 단장으로 있던 김구를 만났다. 당시 김구는 침체상태에 처한 림시정부와 독립운동에 활력을 부여하기 위해 의렬투쟁을 주도하고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상해에 진입한 일본군이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을 맞으며 성대한 천장절(天长节) 의식과 상해 점령 승전축하식을 가지기로 했던 것이다. 이날 행사는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园)에서 진행하게 되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입장권만을 가지고 행사를 관람하라는 보도가 상해 매일신문에 실렸다. 김구와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군 수뇌를 사살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침략군은 중국 동북을 강점한데 이어 상해에 대한 대거 침공을 개시하였다. 격전은 상해 교외의 갑북(闸北)에서 진행되였다. 국민혁명군 애국 장령인 장광내(蒋光鼐)와 채정개(蔡廷锴)는 19로군을 거느리고 막강한 적들과 완강히 싸웠다. 치렬한 혈전은 33일간 지속되였고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침략군은 세 번이나 통수를 교체하였다. 국민정주의 타협정책으로 하여 19로군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항전은 중국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을 저지시켰다. 상해를 강점한 일본침략자들은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경축행사를 진행하였다.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义则) 대장, 해군 함대사령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谦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쯔(重光葵), 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贞次), 주중 총령사 무라이(村井仓松), 민단간부 도모노(友野盛)을 비롯해 상해에 있던 일제 군정요인들이 모조리 행사에 출석하였다. 홍구공원의 의거를 위해 김구와 윤봉길은 주밀한 계획을 짰다. 행사 며칠전부터 윤봉길은 홍구공원 식장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는 어느 곳이 주석대이고 어느곳이 검열대이며 어느곳이 경계선이며 어느곳이 관중들이 설 자리인가를 세밀하게 파악하였다.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가 조직한 애국단(爱国团)의 신분으로 맹세하였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诚)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언을 남기고 최후를 준비하였다. 4월 29일 김구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새 손목시계와 김구의 낡은 시계를 바꾸고 몸에 지녔던 돈을 전부 김구에게 넘겨주고 홍구공원으로 떠났다.   (권립 교수)  “4월 29일 오전 상해 홍구공원에는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폭탄을 들고 홍구공원에 들어섰다. 검열대에는 일본의 군정 요인들이 서있었습니다.”   오전 7시 50분에 즈음해 윤봉길은 공원안에 들어가 미리 보아두었던 유리한 지점에 서서 폭탄을 던질 시간을 기다렸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검열대를 중심으로 일본 관민이 둘러서있었다. 검열대 좌우로는 일본 륙군, 해군 방대가 호위해 섰고 그뒤로 몇메터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있었다. 일반인은 그 뒤에 서게 되었다. 11시 20분에 공식행사가 시작되였다. 대회 식순이 있은 후 축하하러 온 외국인이 다 떠나고 일본인만 남아서 검열을 진행하려하고있었다. 11시 40분이였다. 이 시각을 기다리던 윤봉길은 드디어 폭탄 덮개를 열고 앞으로 나갔다. 그는 앞사람을 헤치고 2메터 나아가 주석대로 폭탄을 던쳤다. 폭탄은 노무라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쯔의 면전에 명중하여 폭발하였다. 굉음과 함께 폭탄연기가 사라졌다. 일본군 사령 시라가와 대장은 몸에 많은 파편을 맞고 신음하다 5월 24일 숨졌다. 제9사단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해군총사령인 제3함대 사령인 노무라는 실명하고말았다. 뿐만 아니라 주중공사 시게미쯔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인 카와바다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검열대에 있던 총령사 무라이와 민단간부 도모노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일제의 경축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태연하게 서서 폭탄 투척이 가져다준 전과를 흐뭇하게 검증하고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여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혹형을 받았다.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는 윤봉길을 사형에 언도하였다. 이해 11월 18일 윤봉길은 오사까의 형무소로 압송되였다가 12월 19일 오사까 교외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적탄을 맞고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권립 교수) “윤봉길 의사는 그해 12월 19일에 만 스물네살의 아까운 나이로, 그러나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빛나는 한생을 마쳤습니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이 터진지 어언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과 조선인민은 민족의 지사 윤봉길을 잊지 않고있다. 지금도 상해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매원이 있어 중국과 조선인민들이 참관하고 기념하고있다. 2003년 9월 22일 답사 팀 일행은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을 찾아 상해 로신공원으로 갔다. 로신공원은 상해시 동북쪽의 사천북로(四川北路) 2288번지에 위치했다. 이 로신공원이 바로 당시의 홍구공원(虹口公园)이다. 1956년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작가인 로신을 기념하기 위해 로신의 골회를 이곳에 이장하고 그 곁에 로신기념관을 만들면서 로신공원으로 변했다. 공원에는 윤봉길을 기념해 만든 매원(梅园)이 있다. 공원 호수가에 자리잡은 매원 입구에는 돌 두 개로 만든 비석이 있었다. 작은 돌에는 한자로 “윤봉길 의거 현장. 1932.4.29”이라고 씌여있고 큰돌에는 중문과 조선문으로 된 “윤봉길 의사 업적 소개”글이 새겨져 있었다. 매원에 들어서니 검은 기와에 나무로 축조한 2층 정자가 있었고 처마에는 “매정(梅亭)”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있었다. 28평방메터 정도인 일층에는 <매헌(梅轩)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회> 전시장으로 되어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사적을 사진으로 알기 쉽게 전시한 곳이다. 정면에는 윤봉길 의사의 독사진이 전시되여있었다.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겼으며 한손은 의자 손받이에 놓고 다른 한손은 무릎에 올려놓은 전신 사진이였다. 두눈은 부드러운 빛을 띄였지만 한 일자로 꾹 다문 입술은 강인함을 보여주고있었다. 그리고 꿋꿋이 편 허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우려는 그의 드팀없는 의지와 투지를 나타내는 듯 싶었다. 전시실에는 거사 준비과정으로부터 의거전의 선서장면, 의거전 김구와 바꿔 찬 회중시계, 의거에 사용했던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형 폭탄, 선서문 그리고 의거현장을 돌아본후 이날의 감회를 시로 적은 <신공원에서 답청하며>라는 시고, 사형직전의 모습…그의 위대한 의거가 모두 사진으로 전시되여있었다. 사형직전 일본헌병들이 윤봉길 의사의 눈을 가리고 십자모양의 나무형틀에 묶는 모습과 처형직후 일본헌병이 쏜 총탄이 윤봉길 의사의 이마 한 가운데를 관통한 처참한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을 보며 오랜 세월이 흐른후에도 결코 우리민족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민족의 영웅 윤봉길 의사의 장렬한 최후로하여 눈시울이 뜨거워남을 어쩔수 없었다. 특히 의사의 안해 배용순의 사진과 두 아들 종과 담의 귀여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기꺼이 떠났던 열혈 사나이의 대의정신에 숙연한 마음 금할길 없었다.  
55    제44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④ 댓글:  조회:8655  추천:63  2007-12-31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서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중앙쏘베트구역은 적들에게 강점되고 당중앙과 홍군은 수배에 달하는 적의 포위를 뚫고 간고한 장정을 진행하고있었다. 국민당 통치구의 당조직도 적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고 많이 파괴되였다. 게다가 당내 극단적인 좌적사상으로하여 더욱 큰 곤경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곤난 앞에서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믿었으며 굳은 의지로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간 체력을 회복한 김산은 다시 북평시 당조직을 찾아왔다. 당조직에서 잘 믿어주지 않자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참으며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장가구에 있던 조아평이 김산의 서한을 받고 북경에 찾아왔다. 혁명에 몸담은 이들 련인은 북평시 삼안정호동(三眼井胡同) 26번지에 간소하나마 행복한 살림을 차렸다. 이들 혁명부부가 살았던 삼안정호동은 지금의 북경시 동성구 경산동가(景山东街) 89번으로 되어있다. 좁은 골목길과 단층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아 번지수를 확인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낡은 단층집 문에 붙어있는 89번지라는 주소를 확인하였다. 옛터에는 새로운 건물이 일어섰지만 세월이 하도 많이 흘렀기 때문에 역시 찌그러진 낡은 집이였다. 이곳에서 김산은 《정치경제지리》, 《제3차 문화위기》를 비롯한 저서를 편찬해냈다.     북경시 경산동가 삼안정호동, 김산과 조아평 부부는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권립 교수)“1935년 9월에 김산은 석가장으로 갔습니다. 그는 철도로동자들속에 들어가 일어학습반을 꾸린다는 이름을 내걸고 국민당의 백색테로를 반대하고 착취자들에게 대항할데 관한 혁명 교양사업을 벌이고 당조직을 건립하고 당원을 발전시켰습니다.” 1935년 가을, 김산은 북평시 당조직관계를 회복할수 없게 되자 석가장으로 향했다. 그는 류한평(刘汉平)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 송광아(宋匡我)를 도와 《상보(商报)》를 꾸리면서 항일선전활동에 종사하였고 또 중국인 친구 집에서 일본어훈련반을 꾸리면서 맑스주의를 선전하였다. 김산은 또 주효성(朱效成), 주가화(周家华)를 비롯한 공산당원과 련계를 갖고 평한(平汉)철도 부륜학교(扶轮学校)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당지부는 왕서량(王书良), 강서화(康瑞华), 도희진(陶希晋), 주련(朱璉), 곽수동(郭树栋), 륙청렴(陆清廉), 전진(田珍)을 비롯한 7명 당원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해방후 전국인대 법률위원회 고문, 중앙조사부 부부장, 석가장시 시장, 국가감찰부 전원, 운남성 부성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요직을 맡았다. 김산은 늘 석가장 철도로동자들과 접촉하면서 공회 정치훈련반에서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안해 조아평과 함께 적극적인사업을 진행하여 평한철도 부륜학교 당지부를 토대로 하북성 당위원회 직속으로 중국공산당 석가장 사업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권립 교수) “북경에서 12.9학생운동이 터지자 석가장에서는 김산동지가 조직한 지하당조직이 핵심적 역할을 일으켜서 수천명 로동자, 학생, 지식인들이 떨쳐나섰습니다.”  김산과 당지부는 석가장의 학생, 로동자들을 동원해 북평 학생들의 “12.9”애국운동을 성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생과 로동자들의 호소를 받들고 거리에 떨쳐나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성세호대한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가 끝난후 김산은 지부회의를 열고 적시적으로 경험을 총화하고 금후의 투쟁방향을 명확히 하였다. 이때 조아평도 석가장에 와서 김산과 함께 생활하고 투쟁하였다. “12.9”성원행사가 끝난후 김산은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자들의 부름을 받고 상해로 갔다.     석가장에서의 김산활동을 회억한 라청의 글(자료사진)   김산이 석가장에서 당원들을 발전시킨 상황에 대한 라청의 회억자료   상해에서 김산은 광주봉기를 함께 겪었던 전우들인 김규광, 박건웅 등과 재회하였다. 그들은 서로 투쟁경력을 이야기하였고 금후의 투쟁방략을 토의하였다. 이때 승리적으로 2만 5천리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였다. “8.1”선언이라고 하는 공산당의 이 정신에 따라 조선혁명가들도 통일전선조직을 만들어야했다. 그리하여 김산은 김규광, 박건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할 준비에 들어갔으며 중조 항일단체의 공동항일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4월, 김산은 상해로부터 남경에 갔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인 라청(罗青)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아름다운 현무호(玄武湖)를 구경하면서 유지인사들과 투쟁방략을 적극 담론하였다. 그는 이시기 남경의 《5월문예사》에서 활약하던 조선청년 정률성을 만나 보기도 하였다. 김산의 친밀한 전우 박건웅이 정률성의 누이와 혼인하였던것이다. 상해, 남경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김산은 이해 여름 상해에서 창립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였고 조아평과 함께 상해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얼마 함께 있지 못하였다. 김산은 조선혁명가들의 파견을 받고 중국공산당 중앙을 찾아 연안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라청과 정률성이 포구에서 김산을 전송해 주었다. (권립 교수)“우리민족의 탁월한 지하일군인 김산은 6년동안 당조직의 승인을받지 못하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끝내 중공중앙 북방국의 도움으로 1936년 가을에 연안에 도착했고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습니다.” 중국공산당 북방국의 소개신을 소지한 김산은 1936년 10월 서안 팔로군 판사처를 거쳐 섬북의 보안(保安)에 도착하였고 12월부터 와요보에 있는 홍군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연안에서 김산은 비교적 오랜 시간을 보냈다. 1937년 1월 그는 홍군대학을 따라 연안에 와서 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4월 12일부터 19일까지 기간 그는 서북청년 구국회 제1차 대표대회에 참석해 연설하였다. 회의기간 그는 장학량의 동북군 교도대에 있었던 중국공산당 지하당원이며 조선혁명가인 서휘를 만나 보았다. 4월 20일 김산과 조아평의 아들이 하북성 안국현 농촌에서 태여났다. 안해의 서한을 받은 김산은 격동된 심정을 금할수없었다. 그는 답장에서, 아들이 크면 꼭 그에게 백의동포의 후손임을 알려주고 군대에 보내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6월 중순 김산은 연안에서 미국의 녀기자 헬렌(님.웨일즈)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인 에드가.스노를 따라 첩첩한 봉쇄를 뚫고 연안에 도착했던 것이다. 스노는 모택동을 만나 여러차례 취재를 하고 유명한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헬렌은 도서관을 전전하면서 열심히 외국문 도서를 빌려가는 김산에게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외국문에 숙달하고 높은 문화수준을 갖춘 김산은 연안에서 특별한 인물이 아닐수 없었다. 그녀는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김산에게 접근하였으며 드디어 김산의 파란만장한 전투적 생애를 듣게 되었다. 이 시기 김산은 더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있었다. 1937년 중국의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되였지만 전선에 나가 총을 들고 적과 싸우지 못하는 몸이 한스러웠다. 그렇다고 당조직 활동을 하려하여도 누구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억울함을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당시 섬감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을 의심대상으로 짚고있었다. 1938년 10월 8일, 중앙정보부와 사회부 부장을 맡은 강생(康生)은 김산을 일본특무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을 풀만한 단서도 없었다. 강생은 드디어 보안처의 보고에 동의하고 일제기관의 정보일군으로 김산을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김산은 비밀리에 처형되고 말았다.     섬북 연안의 토굴집들   섬북에 있을때의 김산의 모습   1941년 미국에 돌아간 헬렌은 님.웨일즈라는 필명으로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저서 《아리랑의 노래》 영문판을 뉴욕에서 출판하였다. 1946년 한국에서 이를 《아리랑》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1953년에는 일본문판이 나왔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조선혁명자 김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혁명자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는 성인이 된 후에야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산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아평은 줄곧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김산이 활동했던 북경시 홍루사적지를 찾은 고영광씨는 자기가 아버지에 대해 알게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어머니는 8살 때 나에게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 문화대혁명시기 자기가 조선족인줄 알았습니다. 그전에 내가 태여난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편지 한장 보내왔습니다. 문화대혁명시기 파묻어두었는데 후에 다시 찾을수 없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내가 태여 난 것을 알고 내가 참군하여 백의민족의 해방을 위해 분투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증의 민족도 조선족으로 고쳤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절대 변절자가 아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로동지들을 찾아 료해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앙조직부에 편지 두통을 썼습니다. 조직에서는 다시 조사를 하고 45년만에 아버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습니다. 그사이 스노 부인(헬렌)을 알게 되었고 그가 부쳐온 책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희생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이는 력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노 부인의 책은 아버지에 대해 전면적으로 잘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듣고 하여 지금은 아버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특히 조선족 연구일군들이 이면에서 많은 연구를 하고 지지를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983년 1월 중앙조직부에서는 “김산에 대한 그릇된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당적을 회복할데 관한 결정”을 지었다. 결정은 김산동지가 피살된 것은 특정된 력사조건하에서 발생한 한차례 억울한 사건으로서 시정하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김산동지는 당에 충성하고 우리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와의 인터뷰장면   김산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데 관한 당의 결정문서(사진자료)   《아리랑의 노래》 일본문판   자신의 전반 투쟁생애를 총화하면서 김산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 버렸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수백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데는 실패했지만 력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수가 없다. 그는 력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력사라고 하는 운동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면 전진할것인가 아니면 후퇴할것인가, 싸울것인가 아니면 굴복할것인가, 가치를 창조할것인가 아니면 파괴할것인가, 강해질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것인가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  
54    제43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③ 댓글:  조회:7906  추천:39  2007-12-31
1929년 봄부터 1931년 말까지 2년여 시간 북경에서 지하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있던 김산은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선후로 두 차례 밀정에게 체포되여 갖은 혹형을 당했고 석방된후에는 또 당조직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갖은 시련 앞에서 그는 굴하지 않고 항쟁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지하투쟁을 계속하여 당조직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권립 교수) “1930년에 김산은 국민당 밀정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그는 적들의 잔인한 혹형 앞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1931년 11월 20일 김산은 북평 서성구(西城区)에서 체포되였다. 당시 김산은 동성(东城) 숭축사(崇祝寺) 납복호동(纳福胡同) 4번지에 위치한 천흥공반점(天兴公饭店)이라는 호텔 뒤뜰에서 류청화라는 이름으로 투숙하고있었다. 그는 비밀회의에 참가하러 갔다가 이를 탐지하고 미리 매복해 있던 밀정들에게 체포되였던 것이다.     일제 옥중에서의 김산   일제경찰들이 밝혀낸 김산의 신원   중국 경찰당국에서는 김산의 신분과 조직관계를 밝히려고 했지만 김산은 조선의 신문기자라고만 하였을 뿐 아무것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찰들은 그를 일본 천진령사관에 넘겼다. 왜놈들은 그의 입과 코로 가는 관을 넣고 머리카락을 끌어당겨서 머리를 낮게 만들었다. 사람을 질식시키는 이른바 ‘물료법’이였다. 뿐만 아니라 게다짝을 가지고 살이 터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정강이를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40일간 김산은 여섯차례 물료법을 받으며 갖은 비인간적인 혹형을 이겨내야했다. 그의 코와 페부에는 출혈이 계속되였고 몸은 허약해 질때로 허약해졌다. 그후 김산은 대련, 단동을 거쳐 천여명 정치범들을 수용하고있는 신의주 감옥으로 이송되였다. 그곳에는 대부분 동북에서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지사들이 수감되여있었다. 그리고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수천명 조선의 우수한 투사들이 그곳에서 이미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7일후 김산은 법정에서 판결을 받았다. 아무런 근거를 잡지 못한 놈들은 “중국사회에 대한 위험을 조성하는 자는 3년간 중국에서의 체류를 금지한다”는 조목에 따라 판결하였다. 그리하여 가혹한 고문에 페결핵을 가지게 된 김산은 병든 몸으로 고향에서 휴식하게 되었다. 조선국내에서의 조선인민의 궁핍한 생활은 더욱 심했고 일제의 통치는 더욱 가심하였다. 땅 잃은 농민과 일자리를 잃은 로동자들, 일제의 수탈에 맥을 버린 상인들, 방향 없이 일제의 노예교육을 받아야하는 학생들 ...조선국내의 상황은 김산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그 아픔은 일제 혹형으로 인한 육체적인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였고 극한을 넘은 아픔은 최대의 의지를 불러일으켰고 최대의 정신력을 불러일으켰다. 김산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계속 혁명자들을 찾아 싸워야 했던 것이다.  (권립 교수) “김산은 심한 페결핵에 시달리면서도 북경의 당 사업을 근심하여 북경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체포되였던 김산이 왜 살아서 돌아왔는가에 대해 조직에서는 의심을 가졌고 그에게 어떤 임무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1932년초 김산은 만기 석방된후 다시 조선을 떠나 북경에 왔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데 대해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안해 제숙용도 다시 찾지 못했다. 동지들의 불신임으로하여 김산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러웠지만 계속 사업을 견지하였다. 중국 경찰당국도 김산이 다시 중국에 왔다는 보고를 받고 수색에 나섰다. 김산은 할수없이 해전구 선연교(善缘桥) 12번지에 위치한 조선지사 김기창(金基昌)의 집에 몸을 피하군 하였다. 경찰들의 색출이 심해지자 그는 북평 오이독서회(鏖尔读书会)의 소개로 하북성 보정에 있는 직예(直隸) 제2사범학교에 초빙되였다.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의 한사람인 리대소가 설립한 이 학교는 지금의 보정사범학교이다.     하북성 보정사범학교   김산의 사적을 설명해주는 동금의 로인(좌로 네번째, 원 보정사범학교 교장)   2003년 10월 23일 태항산 조선의용대 답사를 떠나는 길에 답사 팀은 보정사범학교를 찾아보았다. 이 학교 교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동금의(董金义) 로인이 기자들을 만나 주었다. 74세의 고령이였지만 기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에 나온 동금의 로인은 김산에 관련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 당조직의 관심하에 북경으로부터 독서회의 소개로 장명을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장북성, 장한삼이였는데 조선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력사를 가르치고 교과서를 만들어 진보적인 력사관을 전수했습니다. 그런데 북경의 국민당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였습니다. 당시 이 학교의 진보적인 교장이였던 장등소가 학생들과 함께 장명을 고양에 이전시켰습니다. 그 학교에도 공산당 조직이 있었습니다.” 보정사범학교에서 김산은 장명(张明)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당 대표의 신분으로 사업하면서 당 조직을 도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자체로 력사와 지리 교재를 편성해 강의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잘 들었고 그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였다. 6월초의 어느날 중국경찰들이 학교를 포위하였다. 그들은 일본 경찰을 앞세우고 김산을 체포하려했다. 학생들은 소식을 듣고 대문을 꾹 닫았다. 진보적인 교장인 장등소(张腾霄)도 학교에 조선인 교원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한편으로 학생을 시켜 김산을 병원에 숨겨 놓았다. 이때 김산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계속 학교에 남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장등소 교장과 학생들과 작별하고 고양현(高阳县) 북신장(北辛庄)에 피신하였다. 그는 현지 사범반에서 농민들에게 력사와 정치, 철학을 가르쳤고 현지 농민대중들에게 혁명사상을 전수하였다. (권립 교수) “김산은 1932년에 보정에 가서 자각적으로 당의 립장에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3백여명의 농민대오까지 조직하여 국민당의 백색테로에 대처하고 체포된 동지들을 구원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대중운동을 적극 전개함과 동시에 김산은 맑스주의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1932년 그는 선후로 《웨드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 《무신론》등 저서들을 번역, 출판하였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의 저택에서 우리는 김산의 이러한 유작들을 보게 되었다. 《웨드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은 장북성이라는 필명으로 출판되였고 《무신론》은 일본학자의 저서를 중문으로 번역한것이였다. 그리고 김산이 친필로 쓴 한문장시 《한해동지를 그리며(吊韩海同志)》 원본과 1930년 12월 5일 옥중에서 쓴 친필 자술서 복사본을 볼수있었다. 자술서는 자기가 조선독립혁명에 참가한 경위와 체포 당시 거주지를 밝히고 고향에서 부쳐오는 돈과 신문사에서 보낸 원고료로 생활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과는 관련이 없이 조선혁명가로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나뉜 혁명진영에 대해 애탄하는 내용을 적고있었다. 자술서를 보면 김산은 줄곧 중국 국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본경찰에 넘겨졌고 또 일본의 법에 따라 판결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하여 기타 체포된 중국공산당원들과는 달리 그는 국민당 반동파들에게 살해되지 않을수있었다. 이를 알지 못한 당시 북평의 중국공산당 조직에서는 김산의 석방을 오해하고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김산의 역저 《웨드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   김산의 옥중 자술서   김산의 장시 《한해동지를 그리며》   김산은 혁명가이고 문필가이며 또한 시인이였다. 그의 장시 《한해동지를 그리며》는 무산계급 혁명의 격정으로 차 넘치고있다. 하북 고양현에서 김산은 대중운동에 대해 검토를 진행하였다. 당시 당내 좌적 맹동주의가 우세를 차지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화북국에서는 무장폭동을 준비할 것을 김산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김산은 폭동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리유로 폭동계획을 반대하였다. 만일 폭동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많은 희생을 내야할것이고 당조직도 폭로되기 때문이였다. 1932년 8월에 김산은 계속 하북성 당위원회의 무장폭동계획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무장폭동 계획은 재검토 되지 않았다. 김산은 하는수 없이 성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고양에서 폭동을 준비하였다. 8월 20일 하북성 고양, 여현(蠡县) 농민무장 폭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막강한 적의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농민들을 보는 김산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무모한 지도력으로 인한 희생이 얼마나 막대한가를 그는 심심히 느끼게 되었다. 그는 북평으로 달려가 자기의 견해를 조직에 제기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정확한 의견을 접수하려 하지 않았고 도리여 사람들의 반감을 야기시켰다. 당조직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김산은 허약한 몸과 빈궁으로 커다란 절망에 빠져있었다. 이때 누구나 그를 찾아주지 않았지만 조아평(赵亚平)이라는 젊은 녀학생만이 과일과 책을 사들고 자주 그를 보러 왔다. 김산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용히 체력을 회복하고 마음을 안전시키면서 다시 혁명을 시작하였다. 1933년 5월 1일 아침, 국민당 람의사(蓝衣社) 특무들이 김산이 하숙하는 방에 뛰여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당시 김산은 서성구 2룡로(二龙路) 서철장호동(西铁匠胡同) 15번지의 하숙방에 거취하고있었다. 답사팀이 북경시 중심거리인 장안가(长安街) 남부에 위치한 이곳을 찾았을 때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건설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최룡수 고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33년 4월 26일 아침, 남의사 특무들이 김산이 하숙하는 방에 뛰어들어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당시 김산은 서성 서철장 호동 15호에 위치한 하숙방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서성구 이룡로 40번지(西城二龙路40号)입니다. 놈들은 그곳에 대기했다가 김산을 찾아온 조아평까지 체포하였습니다. 호송차에서 김산과 조아평은 두려움 모르며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공사장 곁에는 서철장 호동 21번지로 된 옛 건물 하나가 있었는데 가도판사처로 사용되고있었다. 현지인들과 물어보았지만 당시 서철장호동 15번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로 공사장 부근이라고만 할뿐이다. 놈들은 김산을 체포한후 하숙방에 그냥 대기하고있다가 김산을 찾아온 조아평까지 체포하였다. 호송차에서 김산과 조아평은 두려운 기색은 조금도 없이 서로 격려하였다. 김산은 이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김상은 또다시 천진 일본령사관으로 넘겨졌다.     천진의 일본령사관옛건물(지금은 천진시 소년아동 도사관)   본령 옛건물 내부(일본 군경들의 구두발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천진시 안산도(鞍山道) 59번지에는 지금도 옛 일본령사관 건물이 남아있다. 2층 붉은 벽돌로 된 옛 건물은 지금은 천진시 소년아동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김산은 더욱 악독한 취조를 받았다. 놈들은 중국공산당원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대답하는 김산을 군화발로 정강이를 걷어찼으며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고 또 량쪽 귀를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 김산은 강의한 의지력과 지혜로 적들과 싸웠다.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한 놈들은 3년간 중국으로 가지 못한다는 명령을 어긴 것으로 김산에게 징역 1개월과 벌금 20원을 안겼다. 김산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 2원씩 벌금을 갚기 위해 노역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산은 다시 대련, 봉천을 거쳐 조선에 이송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놈들의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풀려나게 되었다. (권립 교수) “1934년 1월에 그는 북경에 돌아왔습니다. 이때 조직에서는 그를 더욱 의심했고 아무런 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산은 의연히 자각적으로 당의 사업을 밀고 나갔습니다.”     지하당사업을 조직하던시절의 김산   1934년 1월, 김산은 체력을 얼마간 회복하고 다시 중국에 왔다. 그는 북경 해전구의 김기창의 집에 기거하면서 다시 혁명사업을 전개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함께 체포되였던 조아평의 행방을 찾았다. 그가 천진 일본령사관에 구금되였을 때 보석출옥한 조아평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련인의 소식을 고대하면서 새로운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의 마음은 또다시 들끓게 되었다. 그는 격동되는 심정을 애써 참으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련인 조아평과 함께 체포되였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불렀던 그 노래였다. “흰 새 두 마리가 두터운 구름 속을 날아가네 저 아래 세상이 닭알만하게 보이네. 그 자유롭던 나래가 지금은 우리 속에 갇혔구나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53    제42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② 댓글:  조회:7663  추천:50  2007-12-31
            1927년 9월 9일 팽배가 농민봉기를 일으켜 창설한 해륙풍 쏘베트지구는 광동성 해풍과 륙풍 두 현을 포함하고 있다. 해륙풍 사람들은 교도단에 15명 조선혁명가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동지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광주봉기 부대는 로농홍군 제4사로 개편하고 사장은 엽용이 맡았다. 정치와 군사경험이 풍부한 조선혁명가들도 각자 자기의 임무를 맡고 쏘베트 정부 사업에 참가하였다.   (권립 교수) “1928년 초 해륙풍 쏘베트 구역에 도착한 김산은 해륙풍 당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쏘베트구역 보위전투가 시작되자 손에 총을 잡고 싸웠습니다. 그후 8월에야 당의 지시를 받고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구사일생으로 향항을 거쳐 1929년 봄에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1928년 1월 21일 해륙풍에 중국공산당 동강특위(东江特委) 당학교가 설립되였다. 김산은 학교 당위원회 위원으로 교수계획 제정에 참여하였다. 학교에서는 레닌주의 리론, 쏘베트건설, 제3국제와 세계혁명, 중국공산당 당사, 군사상식, 선전기술 등 교수내용을 설치하였다.   동강당학교 명단에는 네명의 조선혁명가 이름이 명확히 밝혀져있다   장북성은 김산이 이시기 사용했던 가명이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학교의 로동운동사와 공산국제 및 공산국제 활동사를 강의했으며 선전사업을 주로 하였다. 다른 조선혁명가 오성륜은 군사지휘부의 성원으로 있으면서 당학교의 군사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이시기 김산은 또 혁명재판위원회 사업을 맡아보면서 7명으로 구성된 혁명법정의 일원으로 일했다. 이해 5월 적들은 다시 10만 대군을 모아 해륙풍 쏘베트 근거지를 공격해왔다. 거듭되는 전투와 실패속에서 전우들은 모두 헤쳐졌다. 구사일생으로 혜래(惠来)에 도착한 김산은 폭포밑 동굴속에 숨어있는 팽배와 정지운(郑志云)을 만났다. 김산은 팽배의 지시에 따라 향항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삼엄한 적의 경계를 피해 산두에 간후 일본화물선 타가야마 마루호를 리용해 향항으로 가게 되었다. 김산은 향항에서 인삼장사를 하고있는 박씨의 도움으로 다시 상해에 가게 되었고 상해에서 김성숙, 오성륜 그리고 박진혁제를 비롯한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조선혁명자들을 만났다. 1929년 봄 김산은 전우들과 작별하고 상해를 떠나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시 당위원회 조직사를 펼치면 김산은 1929년 5월부터 류청화(刘清华)라는 이름으로 주국공산당 북평시 당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사업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북경에서 김산은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전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을 령도하였다. 그는 북평녀자사범대학 당지부 활동을 지도하였고 연경대학, 공과대학(工科大学)의 당 사업을 지도하였다. 1930년 4월 중순 북평시 당위원회에서는 5.1국제로동절 경축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북평시 당위원회의 지도성원인 김산은 선후로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비밀리에 당원회의를 소집하면서 대회준비에 몰두하였다. 여러 대학에서는 학생시위를 하고 대회연설을 하며 선전과 표어를 만들었다. 김산이 자취를 남긴 20세기 30년대 북경대학은 지금의 북경시 5.4대가 29번지에 위치해있다. 2003년 9월 19일 답사팀은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 선생을 만나 함께 김산의 유적을 찾아 다녔다. 원 국가경제위원회 기술국 부국장으로 사업했던 고영광 선생은 매우 검소하고 성격이 강의한 사람이였다. 걸음이 날렵하고 말쑤가 적은 그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늘 산책을 하며 또한 수영을 무척 즐긴다고 했다. 정열에 찬 두 눈과 검붉은 피부색을 가진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혁명자 김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북경대학 옛터에는 당시 학교청사로 사용되였던 4층 건물이 남아있다. 붉은 벽돌과 붉은 나무로 된 창틀, 문틀로 하여 전반 건물이 붉은 색을 띠여 사람들은 홍루(红楼)라고 부른다. 1898년 이곳에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이 있었고 1912년 북경대학으로 고쳤다. 홍루는 1916년에 축조된 공(工) 자형 건물이다. 5.4운동시기 리대소와 진독수가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모택동도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국의 공산주의를 전파하던 요람으로 간주된다. 김산은 북경의 학생운동을 령도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는 북경 대학생들의 5.1절 기념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이곳에서 학생대표를 만나 비밀회의를 하였다. 지금의 북경대학은 1952년에 해전구로 옮겼다. 답사팀 력사고문인 최룡수 교수는 홍루를 소개해 주었다.   (최룡수 교수) “여기는 옛날 북경대학입니다. 중국 신문화운동의 중심지입니다. 5.4운동시기 리대소, 진독수가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조선류학생과 혁명자들이 많습니다. 조선혁명가 량명, 리륙사 등이 그 대표인물입니다. 이곳은 1930년도 김산이 북경대학 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활동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는 학생간부들과 함께 5.1절 기념활동 준비했습니다. 학생대표를 만나 회의를 했지요.”   1930년 4월 20일 5.1절 기념대회 준비회의가 북평청년기독교회 강당에서 열렸다. 김산은 북경대학 학생대표뿐만 아니라 기타 대학의 학생대표들을 모아 준비회의를 소집하였다. 홍루에서 남쪽으로 얼마간 걸으면 동단북대가(东单北大街)에 이른다. 그곳에는 중국풍과 융합된 서양식 기독교회 건물이 있었다. 기독교 청년들이 많이 활동하던 이곳이 바로 북평청년기독교회 옛터이다. 1930년 조선인 기독교 신도들도 이곳에 자주 모였다고 한다. 김산은 이곳에서 기념대회 준비회의를 열었다. 그는 밀정과 경찰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보안사업을 포치하고 회의를 순조롭게 마쳤다. 이튿날 회의에는 김산의 련인이였던 제숙용(齐淑容)이 참가하였는데 경찰들의 습격을 받았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둔 엽전과 석회가루를 뿌리며 경찰에 대항하였고 경찰들이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에 대부분 빠져나갔다.  (최룡수 교수) “이곳은 북경시 청년기독교옛터입니다. 1930년에 전문 레배당을 조선족이 많이 리용했지요. 이때 김산이 북경 조직부장할 때 여러대학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4월 20일에 5.1절 경축준비회의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김산은 모든 문을 닫고 구체적인 보위사업을 지시했습니다. 이튿날 그는 다음 회의에는 직접 참가했지 않았지만 그의 연인 제숙용이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찰들에게 발각되였지요. 그들은 미리 준비한 엽전, 석회가루를 경찰들에게 뿌려 경찰들이 눈을 뜨지 못할 때 여러저기로 도망하였습니다. 제숙용을 비롯해 50여명이 체포되였습니다. 이곳은 또 조선인들이 3.1운동 기념활동을 가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당조직사에 나오는 류청화는 김산의 가명이다 북경대학 홍루앞에서(가운데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   북경의 옛 청년기독교건물 김산의 련인이였던 제숙용   5.1절 기념행사가 있은후 김산은 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에 파견되였다. 1930년의 동북은 그야말로 암흑의 세상이였다. 장작림의 봉건군벌이 통치하고있지만 도처에 비적이 살벌하였고 일본 주둔군이 거리를 횡행하고있었다. 동북에 이주한 많은 조선이민은 각가지 억압과 수탈을 받으며 생활고에 허덕이고있었다. 김산은 심양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대표를 만나 중국공산당과 조선공당 사이의 련계를 건립할 문제를 토의하였다.   (권립 교수) “북경시위 조직부장으로 당선된 김산은 중공 북방국으로부터 중공과 조공과의 관계처리문제, 조공당원의 중공가입문제를 도와주라는 특수임무를 맡았습니다. 김산은 길림지구 안동지구의 조공조직을 시찰했고 길림지구에서는 엠알파 회의에 참가한적이 있습니다. 엠알파 조공은 김산 등의 방조하에 해산을 선포하고 개벌적으로 중공에 가입했습니다.”   김산은 다시 길림으로 갔다. 그는 조선혁명청년동맹 대표의 신분으로 길림에서 소집된 중국 한인청년동맹(韩人青年同盟) 제2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길림성 각지 조선공산당 대표들이 모인 대회에서는 농민투쟁 로선을 확정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선인 농부들을 이끌어 중국 농민과 함께 중국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농민투쟁을 진행하기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선인, 중국인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김산의 주장은 80여명 대표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그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여주었다. 개인적인 분쟁만 하던 사람들은 협조와 단합을 강조하게 되었고 명확한 행동방침이 있게 되었다. 그후 김산은 또 만주 조선농민동맹 제3차 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단동으로 가서 조직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7명밖에 없던 단동 당지부는 20명 당원을 가진 지하당조직으로 확대되였다. 동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김산은 함께 투쟁하던 중국의 녀혁명가와 사랑을 맺게 되었다. 김산이 회억록에서 류령(刘铃)이라고 밝힌 그녀의 실명은 제숙용이였다. 제숙용은 리대소가 발전시킨 진보적인 혁명가로서 당시 북평 여자사범학교에서 지하당 활동을 하고있었다. 김산은 한차례 비밀회으에서 그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두 혁명가는 서로 의자하면서 사랑을 나누었고 북해공원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손을 맞잡고 북해공원을 거닐었다. 2003년 9월 15일, 홍루를 찾아가기전 전날 답사팀은 향산의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향산공원 부근에 김산이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다. 북경시 향산 남영자(南营子) 53번지, 기개에는 서산양황기(西山镶黄旗) 남영 13번지로 기록되여있지만 건물은 지금의 향산 남영 11번지로 변해 있었다. 최룡수 교수는 이곳 유적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최룡수 교수) “이곳은 향산공원 밑에 있는 향황기 남영 13번입니다. 김산이 북경의 당 조직부장을 할때 제숙용과 함께 이곳에서 강습소를 꾸렸습니다. 김산은 공산당 기초지식과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강의했습니다.”   1930년 봄, 중공 북평시 당위원회에서는 이곳에 당원 강습소를 세웠다. 김산과 련인 제숙용은 함께 강습반에서 당 기초지식과 맑스주의 리론을 강의하였다. 강습반은 조진중(赵震中), 양홍포(杨洪浦), 류정재(刘静斋), 방성오(方星五) 등 많은 우수한 중국인 공산당원을 양성해 냈다.   (최룡수 교수) “김산이 북평시 조직부장을 했단 것은 당사자료에 나옵니다. 1980년도 김산이 꾸린 강습반에 참가했던 조진중을 만났는데 조진중에게서 남영자라는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십여차 찾아와 향산판사처에 가서 전문가에게 문의하고 뒷골목의 백세 로인을 만나 남영자 13번이 원래는 청나라 병영이고 후에는 소학교가 있었던 자리임을 확인하게 되였습니다. 저 아래에 학교가 있었는데 수차 전문가와 로인분들을 찾아 확인되였지요. 확정한 시간은 2002년입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당원학습반 자리를 설명해주는 최룡수 교수 당원학습반 사적지 주소번호 김산이 쓴 소설 《기이한 무기》 당원 강습반 유적지는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발견하였다. 1980년 강습반을 다녔던 조진중 로인을 알게 된 최룡수 교수는 그에게서 학교 주소와 당시 김산과 제숙용이 강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후 향산부근에서 수십차례 확인을 거쳐 드디어 남영자 13번지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해 김산은 북경에서 염광(炎光)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를 잡지 제1권 4기에 발표하였다. 소설은 사실주의적으로 조선의렬단원 온성륜의 투쟁과 리봉창의 의거를 부각한 작품이다. 제1차 국내혁명이 실패한 후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고 방황하였지만 김산은 드팀없는 신념으로 계속 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실패의 상흔을 안고 단연히 북경에서 위험한 지하투쟁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원 강습소를 세우고 학생운동을 령도하였으며 당조직을 확대시키는 등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속 간고한 투쟁을 견지해야 했고 뜻하지 않게 드닥칠 더욱 큰 위험을 감당해 나가야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을 당할지 누구도 모르지만 일본침략자들과 싸우고 봉건주의와 싸우며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을 항쟁에로 이끄는 투쟁은 멈출수 없었다. 동강당학교 명단에는 네명의 조선혁명가 이름이 명확히 밝혀져있다 장북성은 김산이 이시기 사용했던 가명이다
52    제41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① 댓글:  조회:11398  추천:85  2007-12-31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기 겹겹한 적의 봉쇄를 뚫고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온 두 미국 기자 부부가 있었다. 의 저자 에드가 스노와 그의 부인 헬렌이였다. 헬렌의 유명한 저서 이 출판됨에 따라 비운의 조선혁명가 한사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니 그가 바로 김산이다. 1936년 삼엄한 경계선을 넘어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들어온 스노 부부는 비밀리에 초대되여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하여 스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을 쓰게 되었고 헬렌은 조선혁명가 김산을 만나 님웨일즈라는 필명으로 그후 을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영문판이 출판되자 곧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로 번역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력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수있다는 자신을 얻는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되는 피억압자뿐이다....” 이는 김산이 책에서 적고있는 마음의 고백이였다. 위험천만한 백색 테로하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항쟁을 끝까지 밀고 나갔던 김산,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피압박자들의 승리를 확신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 동녘출판사에서 출판한 님웨일즈의 《아리랑》   《아리랑》의 저자 님웨일드(본명은 헬렌)   섬북에 있을때의 조선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 김산의 원명은 장지락(張志樂)이다. 그는 1905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平安北道) 룡천군(龍川郡) 하장동(河張洞)의 한 자작농 가정의 셋째로 태여났다. 그는 일찍 장명(張明), 한산(寒山), 장북성(張北星), 장지학(張志鶴) 등 여러 가지 변성명을 하고 혁명과 지하투쟁에 참가하였다. 어린 시절 김산은 둘째형의 도움으로 기독교회에서 꾸리는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그는 많은 평양시민들과 함께 3.1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또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탄압을 목격하였다. 하느님만 믿는 기독교 교의로는 투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없다고 판단한 김산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으며 불타는 구지욕으로 진리를 터득하려하였다.   (권립 교수) “3.1운동이 터진 해에 장명은 우리 민족의 해방운동을 진심으로 지지해준다는 로씨야에로 간다고 할빈까지 갔다가 로씨야 국내전쟁으로하여 가지 못하고 그해 겨울에 상해에 가서 독립신문의 교정을 보면서 리동휘, 김립과 같은 조기 공산주의자를 접촉하게 되었고 공산주의를 신앙하게 되였습니다.”]   1919년 여름, 김산은 일본에 가서 도꾜 제국대학에서 고학하였다. 그는 매일 신문을 배달하고 인력거를 끄는 것으로 학비를 마련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맑스주의를 접촉하게 되었고 드디어 쏘련 모스크바에 가서 구국의 길을 찾으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구두방을 운영하여 돈을 번 둘째형의 도움으로 중국 할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려하였다. 그러나 당시 쏘련 국내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가 없었다. 김산은 다시 할빈을 떠나 동북의 조선독립군을 찾아갔다. 료녕성 삼원포에 도착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운영하는 신형의 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와 전술, 무기, 력사를 배웠다. 1920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한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김산은 시골에만 파묻혀 있을수 없다고 판단하여 상해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협회가 있어 을 출간하였는데 김산은 신문사에 취직하였다. 그뒤 림시정부에 실망을 느낀 김산은 의학으로 백성들을 구할 념원을 안고 북경협화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북경에서 김산은 공산주의 리론을 학습함과 더불어 많은 진보적 인사들을 만났으며 실천적 혁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 상해에서 출간한 독립신문 취재팀이 김산의 행적을 따라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한 것은 2003년 9월 15일부터였다. 취재팀은 력사고문인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와 함께 향산공원에 가서 김산의 활동지들을 찾아 보았다.   (최룡수 교수) “향산공원은 중국혁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입니다. 1920년대 리대소가 있을 때 조선혁명자 김일학, 김상지 등 7명을 파견해 여기서 비밀활동을 했고 1930년대 김산은 향산기슭의 한 마을에서 당원 훈련반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때 졸업생중 조진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진중은 항일전쟁시기 평서지구 현위서기로 있었고 그때 박일우는 현장에 있었다. 문화혁명시기 하북성 인민대표 상임위원회 부주임까지 하여 차관급까지 함했던 인물입니다. 그도 김산의 가르침을 받아 혁명에 나서게 된것입니다. 1932년 최용철이라는 조선인이 향산자유원의 보안대 대장을 하면서 항일사업하였는데 후에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사하였습니다. 리철부의 한족부인 장수암이 1920년도 중공 지하당의 당지부 서기로 있었고 김산의 부인도 여기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저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앵두구가 있는데 12.9운동 학생운동 골간을 훈련시키던 곳입니다.”   일찍 중국공산주의 동맹의 창시인인 시존통(施存通)을 알게 된 김산은 1923년 중국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당시 북경에는 8백여명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중 약 3백명이 류학생들이였다. 김산은 동료들과 더불어 간행물을 발간하였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들인 리대소, 구추백 등과 사귀면서 맑스주의리론을 학습하였다. 리대소는 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김산도 장북성이란 이름으로 맑스주의 리론저서들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잡지는 공산주의를 동정하는 사람들과 무정부주의자, 좌익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북경의 조기 공산주의 선전간행물로 되었다. 그 창간호는 8백부 인쇄되여 만주, 조선, 시베리아, 미국, 희랍 등 각지 조선인들에게 배포되였다. 이시기 김산은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실천적 혁명가인 김산은 만강의 열정을 안고 당시 중국혁명의 요람이였던 광주로 갔다.     북경 협화병원 학원부   조선혁명가들이 많이 집중되였던 광주 황포군관학교 옛터   광주봉기 렬사기념탑   광주봉기에 관련한 김산의 회억자료 취재진이 김산의 행적을 따라 광주에 도착한 것은 2004년 2월 7일 밤이였다. 어둠에 싸인 공항에는 보슬비가 내렸고 열대에 가까운 남방이라지만 역시 추웠다. 광주의 2월은 가장 추운때라고 한다. 번화한 거리에 이따금씩 조선음식점 간판이 보였다. 개혁개방에 따라 광주에도 많은 조선족들이 모여 산다는 표징이기도하다. 그리고 광주의 일부 사람들은 엄청난 공장과 회사를 가지고있고 많은 부를 창조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근 80년전인 20년대, 혁명의 열의를 안고 투쟁에 뛰여든 우리의 주인공 김산은 오늘의 광주에 어떤 자취를 남겨 놓았을까? 우리는 강한 호기심에 휩싸여있었다. 김산은 광주에서 의렬단 단장 김약산, 공산주의 리론가 김규광 등과 더불어 중국공산당 조선인지부의 령도성원으로 활동했고 광주의 모든 조선혁명가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조선혁명청년연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김산은 대회에서 조직위원으로 선출되고 1927년에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였다. 김산은 또한 김성숙과 함께 조선혁명청년련맹의 기관신문지인 을 출간하였으며 김규광이 주필을 맡고 김산이 부주필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산대학에서 경제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권립 교수) “1926년 광주에는 8백여명이나 되는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활동하고있었습니다. 김산은 그들을 묶어세우기 위해 조선혁명청년련맹을 조직했고 6명밖에 안되는 우리민족 중공당원들로 KK라는 지하당조직을 건립하여 청년련맹을 이끌었습니다. 김산은 중산대학 법과에 입학하여 법률과 철학도 배우고 영어, 독일어, 로어까지 배웠습니다.”   김산은 김규광, 박진, 오성륜 등과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적극 참가하였다. 김산이 에서 회억한데 의하면 그는 주로 모스크바 홍군대학 포병과를 졸업한 양달부와 함께 사하전투에 참가하였고 쏘베트정부 설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봉기지휘부에서는 김산을 엽정의 수행통역으로 임명하였지만 양달부가 한어를 잘 하지 못했기에 그의 통역도 겸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하전역에서 30여명 적을 격살하고 2천여명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린후 군벌 리제심의 12사 지휘부 공격임무를 맡았다. 양달부는 포를 조준하여 첫방에 리제심 저택 지붕을 까부셨고 두 번째에 적 지휘부 근처를 포격하였으며 세 번째에 정확하게 적 지휘부 청사 2층을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10일 저녁까지 광주시의 주요거점을 전부 점령하게 되였다. 12월 11일 새벽 광주쏘베트정부가 광주시공안국에서 설립되였다. 김산과 최용건을 비롯한 7,8명 조선혁명가들도 설립대회에 참가하였다. 김성숙은 쏘베트정부에서 반혁명을 진압하는 사업을 맡았고 김산은 로동대중에게 무기를 내주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쏘베트림시정부의 수립을 경축하는 시민들의 환호소리가 멈춰지기도 전에 적의 포성이 다시 울렸다. 재정비를 거친 적들은 광주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치렬한 전투에서 봉기 지도자인 장태뢰도 전사하였다. 2백여명 조선혁명자들도 적들과의 싸움에서 희생되였다. 13일 김산이 주석을 맡은 조선청년연맹 회의가 중산대학에서 열렸다. 그들은 봉기실패후의 출로를 연구한후 일부 혁명자들을 남겨 지하투쟁을 견지하게 하고 일부는 부대와 함께 철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사품치는 주강의 물결은 혁명자들의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비 내리는 거리를 빠져 생존자들은 계속 새로운 항쟁을 떠났다. 김산은 교도단을 따라 더없는 영광과 아픔을 안겨준 광주를 떠났다. 그는 군관교도단 전사들과 함께 대과령, 번우진, 화현을 거쳐 해륙풍 근거지로 향했다. 1928년 1월 9일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김산과 군관교도단은 팽배가 이끄는 해륙풍농민근거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광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광동에 모여든 수많은 반동군벌들은 병력을 집중하여 다시 해륙풍으로 추격해왔다. 김산과 해륙풍 근거지의 군민들은 새로운 전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더욱 치렬한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51    제40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리철부② 댓글:  조회:7542  추천:44  2007-12-20
  1935년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중국을 가일층 침략하기 위해 화북 각성으로 하여금 남경 중앙정부를 리탈하게 하는 이른바 “화북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무력으로 남경정부에 압력을 주어 <하매협정(何梅协定)>을 비롯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화북의 통치자들을 회유하여 저들의 괴뢰로 삶았다. 이해 11월 11일 일제는 <화북의 고도로 되는 자치안>을 접수할 것을 화북의 최고 실력자인 송철원(宋哲元)과 남경정부에 강요하였다. 12월 18일 줄곧 일제와 타협하면서 국권을 팔아먹던 국민당 정부는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화북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하북, 차할 정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것을 력사에서 화북사변이라고 한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고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조작한 화북사변은 무능한 국민당 통치자들에게 접수되였지만 천백만 중국인민의 단호한 반대를 받았다. 날로 엄중해지고있는 민족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에서는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하게 항일하자”는 구호를 제기하고 전국인민의 항일구국 운동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1935년 12월 9일 북평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성세호대한 애국운동이 전개되였다. 3천여명 애국 학생들이 신화문 앞에 모여 대규모의 시위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른바 하북, 차할 정무위원회의 설립을 반대하고 화북자치를 반대하며 화북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였다. 12월 12일 상해, 남경, 무한, 광주에서도 애국 학생들의 시위가 진행되였다. 북평 12.9운동 소식이 천진에 전해지자 리철부와 천진의 광범한 애국학생들은 12월 18일 항일구국 대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리철부는 여러 학교들과 련락을 가지고 선전물을 인쇄해 놓았으며 시위대오의 전진 로선을 확정하였다. 12월 18일 오전 천진시 법상학원(法商学院)에 모인 애국 학생들은 리철부를 따라 일본 주둔군이 둥지를 틀고있는 해광사(海光寺)로 출발하였다. 시위자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선전물을 대중들에게 살포하면서 전진하였다. 다년간 리철부에 대한 연구를 해왔던 원 중앙인민방송국 김형직 교수는 천진 학생운동 과정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김형직 교수) “처음에 불과 백명밖에 안되였습니다. 그들은 구호를 부르면서 거리에 나섰습니다. 일본군대가 천진에 들어와 일본땅크가 천진의 거리를 창궐하게 다닐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학생들이 과감이 거리에나와 시위를 벌였던것입니다. 그들이 금강문, 해광사를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뛰쳐나왔고 시민들이 합류해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만여명 시위대오가 성세호대하게 거리를 메우며 나갔습니다.”   시위대오는 고루와 패루를 지나 곧바로 해광사의 일본군 병영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격 자세로 시위자들을 위협하였다. 이때 리철부가 앞장에 서서 기타 학생들과 팔을 겪고 구호를 웨치면서 계속 전진하였다. 혼비백산한 놈들은 감히 사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날 점심 12시 시위자들은 남개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수만명이 참가한 항일구국 대회를 열었다. 리철부의 조직력에 의해 천진의 12월 18일 애국적인 반일구국 운동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2004년 1월 8일, 답사팀은 리철부가 령도한 애국학생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천진의 거리를 걸었다. 금강교를 지나 번화한 옛 금융거리인 천진시 권업장(劝业场)에 이르렀다. 돌로 축조한 옛 건물이 많은 거리였는데 30년대 천진시의 유명한 금융가였다.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해광사는 사당자리인 것이 아니라 천진시의 한 지명이였다. 지금 해광사 부근에는 종련사(宗莲寺)라는 절 하나가 있었다. 고풍적인 고루와 패루를 지나 해광사에 도착하였다. 해광사는 천진시의 번화가이고 중심가였다. 당시 애국 학생들이 전진한 로선을 따라 걷노라니 저도 모르게 힘이 솟구쳤다. 맨 주먹에 피 끓는 가슴을 내밀고 간악한 일제의 총구를 향해 침착하게 전진했던 조선투사 리철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 모르는 이들의 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각성되였고 드디어 전민이 일제를 반대하는 기세 드높은 항일투쟁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앙당사 판공실의 황소동 비서장이 소개한데 의하면 당시 천진시의 지하당 사업은 아주 어려웠다. 당내에 좌적인 모험주의 로선이 성행했기 때문에 조직체계가 혼란했고 또 많이 파괴되였다. 게다가 일제특무와 국민당 통치자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당원들이 체포되였다. 거듭 파괴된 지하당조직은 아무런 조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쟁경험이 풍부한 리철부와 같은 유력한 조직자가 없었다면 12.9애국운동을 지원하는 천진의 12월 18일 애국운동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권립 교수) “1935년 1월 준의회의후 왕명의 좌경로선이 시정됐습니다. 그리고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중앙 북방국 서기직을 맡았습니다. 류소기는 왕명의 좌경로선을 반대하고 혁명의 력량을 축적하면서 당의 지하사업을 견지한 리철부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리철부는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로 임명하였습니다.”   당조직의 두터운 신뢰는 리철부에게 더욱 큰 힘을 주었다. 그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천진시 당조직을 다시 회복시켰다. 그리고 천진, 북경, 석가장 각지에 지하당을 재조직하였다. 리철부는 젊은 당 간부를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렸다. 안해 장수암에게는 조카딸 장결청(张洁清)과 조카 장문송(张文松)이 있었다. 그들은 늘 리철부의 집에 놀러왔고 자녀를 두지 않았던 리철부와 장수암 부부는 이들을 극진히 사랑해 주면서 혁명의 도리를 이야기 해 주었다. 리철부는 공산주의 리론저서들을 설명해 주었고 지하투쟁의 경험을 이야기 해 주었다. 장결청과 장문송은 리철부의 가르침에 따라 좌익문화단체와 항일구국 단체에서 활약하였고 선후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의 훌륭한 간부로 양성되였다. 훗날 장결청은 팽진의 부인으로 되었고 장문송은 공화국 창건후 교육부 부부장을 지냈다. 1936년 봄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당중앙 북방국 대표로 사업하게 되었다. 그는 와요보 회의정신에 따라 좌경 오유를 시정하기 시작하였고 또 직접 리철부와 면담하였다. 그는 리철부의 조직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리철부를 다시 천진시 당위원회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7년 5월 당중앙에서는 연안에서 제7차 전국 대표회의와 백색구역 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백색구역 대표로 리철부가 연안에 가게 되었다. 그는 류소기, 팽진과 함께 안해 장수암과 작별하고 연안으로 떠났다. 황소동 비서장이 소개한데 의하면 장수암도 같이 연안에 가게 되었지만 당시 투쟁경험이 미숙한 요의림에게 천진과 하북의 당조직 사업을 전부 맡 길수 없어 장수암은 그냥 천진에 남았다. 연안에서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를 준비하고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당내에서는 백구사업에 관련한 론쟁이 진행되였다. 원 북방국 서기를 맡았던 고원화가 계속 좌적인 로선을 고집하면서 류소기와 리철부의 사업방법을 비난하였다. 사람들은 다시 이른바 철부로선을 거론하면서 첨예하게 투쟁하였다. 이때 당중앙에서 최종 결의를 지었다. 모택동은 직접 결의를 짓고 철부동지가 반영한 의견서는 기본적으로 정확하고 철부 동지는 훌륭한 동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류소기 동지는 백구의 대표이고 철부동지는 백구의 맑스주의자라고 하였다. 백구공작회의가 끝난후 당중앙에서는 리철부를 연안에 남겨 서북국 사업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연안에서 리철부는 건강이 악화되여 몸져눕게 되었다. 장기간의 지하투쟁에서 몸과 마음이 피로할대로 피로해진데다가 페결핵에 장질부사까지 겹쳐 그는 1937년 7월 10일 연안 휴양소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리철부의 병이 위중할 때 조직에서는 천진에 있는 장수암에게 통지했지만 교통상황이 불편했던 탓으로 장수암은 리철부가 서거한지 3일째 되는 날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들 혁명부부는 끝내 마지막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장수암은 연안에서 중앙에 편지를 써 “철부로선”을 철저히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진운, 리부춘을 비롯한 당의 책임자들이 중앙의 결의를 장수암에게 알려주었고 모택동이 직접 결정하여 이젠 철부로선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장수암은 크게 통곡하였다. 리철부가 서거한후 당중앙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가지고 그의 유체를 청량산(清凉山)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묘소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비에는 <조선공산당의 창시인의 한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며 하북성위 서기인 리철부 동지 묘지>라고 썼다. 답사팀을 만난 당사판공실 황소동 비서장은 리철부를 연구한 경험을 총화하면서 리철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리철부 동지를 연구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는 충직한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 전사였다고 봅니다. 장수암의 회억에서도 장수암이 무엇 때문에 리철부 동지를 그처럼 존경하고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철부동지가 중국에 온후 장수암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철부 동지는 ‘세계혁명의 성공은 단순히 쏘련혁명의 승리로만 될 수 없다. 반드시 중국혁명의 성공이 있어야한다. 만약 중국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혁명만 성공한다하더라도 동아시아의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중국에 와서 중국혁명에 참가하려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단락을 읽고 나는 크게 감동되였습니다. 리철부 동지는 참으로 국제주의 전사의 흉금이라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혁명가 리철부는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동방 여러 민족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피압박 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빛나는 한생을 바쳤다. 장원(长远)한 시각과 높은 식견을 가진 리철부는 일찍부터 조선혁명과 중국혁명, 세계혁명을 련계시키고 목표 명확하게 일제와 싸우면서 굴함없이 항쟁해온 국제주의 투사였다. 그의 빛나는 한생은 중국인민뿐만 아니라 전반 조선민족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50    제39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리철부① 댓글:  조회:7828  추천:60  2007-12-20
     1927년 7월 1일 남창봉기로부터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에 이르기까지 이 10년을 중국력사에서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라고 한다.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피압박 인민들의 해방사업을 위해 외세에 굴종하면서 정의적인 인민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국민당 반동파와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이다. 남창봉기, 광주봉기, 추수봉기를 거쳐 공산당은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으며 자체의 무장인 홍군을 창건하였다. 장개석을 두목으로하는 국민당 반동파는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일본침략자들 앞에서는 양도와 굴종을 계속하고 백만대군을 몰아 공산당과 홍군을 소멸하려는 적극적인 내전을 발동하였다. 당중앙은 북상 항일하기 위해 피어린 장정을 하여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이 시기 조선혁명가들의 투쟁도 중국력사의 거세찬 물결속에 합류되여 독립과 주권을 위하여,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수많은 조선족 투사들이 남창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하였고 당중앙과 홍군을 따라 장정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한편 국민당 반동파들이 통치하는 백색구역에서도 많은 조선족 혁명자들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굴함없이 지하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피압박 인민들을 단결하여 그들을 항쟁에로 이끌었으며 국민당 반동파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써 싸울 준비를 하였으니 백색구역의 가장 대표적인 조선혁명가로는 리철부와 김산을 꼽을 수 있다.   (권립 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우리 당과 홍군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토지혁명을 진행하며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할 때 우리 당의 지하전선에는 눈부신 조선족의 두 큰 별이 있었습니다. 리철부와 김산이였습니다.”   모택동은 일찍 리철부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화북의 공산당원들은 림시중앙의 모험주의에 대해 일찍 예리한 반대의견을 내놓았으니 그 대표는 리철부 동지이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부류는 호언장담하면서 함부로 일을 처리하고 목적없이 행동하며 실제를 떠나 생각하는데 이는 주관주의적인 억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실사구시하며 공담을 하지 않고 시간, 지점, 조건을 가려 행동하는데 이는 유물 변증법적인 혁명관의 표현이다. 류소기와 리철부 동지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두 번째 부류의 대표 인물들이다. ” 조선공산당 조기 당원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인 리철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일찍 하북성 당위원회 선전부장과 조직부장, 하북성 당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 당위원회 서기로 활동하던 지하전선의 조선족 투사였다. 리철부의 원명은 한위건이며 1901년 조선함경남도(朝鲜咸镜南道) 홍원군(洪原郡)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조선 경성의 오성중학(五星中学)을 다니면서 반일애국사상을 키웠으며 투쟁의 앞장에 서기 시작하였다. 1917년 중학을 졸업하고 경성 의학전과학교에 입학한 그는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어 조선인민의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주익(朱翌), 깅기덕(康基德)등과 함께 전국학생독립운동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학생들의 집회를 지도하였다. 그는 대오의 앞장에 서서 <3.1독립선언>을 선독했으며 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 만세를 피 터지게 웨치면서 일본군경과 용감히 박투하였다. 조선청년 학생 독립운동의 지도성원이고 주요책임자였던 그는 일제의 수배령을 받았다. 그해 4월 그는 조선을 떠나 쏘련을 거쳐서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권립 교수) “1919년 18세였던 리철부는 3.1운동때 학생령수로 일제의 체포대상이 됐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상해로 왔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외교론이 우리민족 해방운동을 기로에로 이끌고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또 우리 민족내부의 지방주의, 당파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을 방해하고있다는 것을 간파하고나서 다시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리론을 연구, 학습하고 공산주의 리론만이 전민족을 단결할수있고 민족해방투쟁을 끝까지 진행할수있다고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일본류학을 마친 리철부는 조선 “동아일보” 기자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내 공산주의자들과 련락을 가지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러나 1928년 조선공산당 제3차 체포사건이 발생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리철부는 다시 중국 상해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8년 재차 상해에 도착한 리철부는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가지고 이해 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에서는 그에게 화북지역의 당사업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시기 그는 선후로 북평 반제대동맹(反帝大同盟) 당단서기(党团书记), 하북성 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사업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자 일제는 동북 3성을 삼키고 열하(热河), 내몽골, 기동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국민당은 매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중국공산당과 항일하려는 대중들을 탄압하기에 급급하였다. 적들의 백색 테로하에서 평진지역의 당 지하조직이 많이 파괴되였고 놈들은 도처에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다부산즈를 입고 도수높은 안경을 건 리철부는 학구적인 모습으로 적의 눈을 피해가면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리철부라는 이름도 이시기부터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답사팀이 북경에서 만난 중앙당사연구판공실의 황소동(黄小同) 비서장은 이시기 리철부의 활동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분이다. 그는, 리철부는 반제대동맹 좌익인사들의 좌담회에 참가했다가 중국의 녀성 혁명가 장수암(张秀巖)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1932년 천진 반제대동맹 책임자였던 리철부는 북평의 반제대동맹 좌익인사 좌담회에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국민당 통치구역에서의 당 사업 로선을 둘러싸고 치렬한 론쟁이 진행되였다. 그때 리론수준이 강하고 원칙을 지키며 실사구시적인 리철부의 사업태도와 언변은 장수암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권립 교수) “1933년 리철부는 중공 하북성위 선전부장을 맡았습니다. 이때 왕명의 좌경로선의 본질을 철저히 간파한 그는 성위에 의견서를 바쳤습니다. 의견서에서 그는 현유의 당의 지도자들에 의해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수없으므로 하루속히 7차당대회를 열고 우리 당을 만구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은 왕명의 좌경 로선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 리철부의 의견서를 받은 하북성 당위원회는 이 문제를 중앙에 제기하였고 중앙에서는 리철부를 우경 취소주의라는 무거운 모자를 씌우고 그를 철직 시켰다. 이해 리철부는 북평에서 회의를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으로 이송되였다. 소식을 접한후 당 조직과 조선혁명가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그를 보석 출옥시켰다. 출옥후 리철부는 천진에 거처를 잡았다. 당 조직에서는 그의 신변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여 장수암을 파견해 그를 돌보게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녀당원인 장수암은 북평 향산 자유원에서 사업하였고 후에는 천진 남개중학교의 교원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천진시 문화총동맹의 당단서기를 맡고 진보적인 문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북평 공안국의 총감인 장벽(张璧)은 장수암의 오빠였다. 그는 일찍 진보적인 애국장령 채악(蔡锷)을 따라 혁명에 참가했다. 장수암은 오빠의 관계를 리용하여 많은 지하당원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신분이 폭로된후 장수암은 북평에서 행동자유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진으로 오게 되었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리철부와 함께 투쟁하게 되었다. 답사팀이 당년 리철부의 거처를 찾기 위해 천진에 간 것은 2004년 1월 8일이였다. 리철부와 장수암은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부부로 가장하고 영국 조계지인 소백루(小白楼) 부근에 거처를 잡고 공산당 지하 련락소를 만들어 사업을 진행했다는 기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낡은 집들이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찾기 힘들었다. 기재에는 소백루 부근의 주가호동(朱家胡同)의 한 재봉가게에 거처를 정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지명마저 변하여 주가호동을 찾을수 없어 당혹감을 느꼈다. 괴수리(槐树里)의 소백루 부근은 리철부가 처음 천진에 왔을 때 오현농(吴砚农)의 집에 거처하던 곳이고 부근에 또한 리철부와 장수암이 함께 거처하던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점들이 늘어서고 옛 건물은 서양음식점과 음악청 건물만이 남아 당시 영국 조계의 번창함을 단면으로 보여주고있을 뿐이다. 이 두 건물을 제외하고는 주변 단층집들은 전부 허물어 새로운 건물을 짓고있었다. 천진시 괴수리의 소백루, 이곳에서 리철부와 장수암은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드디어 행복한 혁명부부로 되었던 것이다. 리철부는 조그마한 방의 등갓도 없는 전등 밑에서 한 손으로 부채질하며 한 손으로 붓을 날려 부지런히 저서들을 펴냈다. 그는 왕명의 좌경 기회주의로선으로하여 당조직이 거듭 파괴되고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많은 사색을 거듭하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혁명 실천에 비추어 <당내 문제에 관한 몇가지 의견>, <당면 조직정돈에 관한 몇가지 의견>, <관료주의에 관한 엄중성>, <좌경 기회주의 반동성>, <당내투쟁과 자아비평> 등 10편의 글을 썼다. 왕명과 박고 등이 통치적 지위를 차지했던 당중앙은 리철부의 정확한 주장을 “투항주의”, “철부로선”으로 규명하고 하북성 당위원회에서 당내 투쟁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리철부를 당에서 축출하였다. 억울한 루명을 쓴 리철부는 당적까지 취소되자 커다란 실망에 빠졌다. 이때 장수암이 그를 크게 고무해 주었다. 리철부는 “광명을 내다보고 요귀를 쫓는다”는 좌우명을 벽에 써 붙이고 자기를 격려하였다. 그는 다시 선전활동과 조직활동에 나섰다.   (권립 교수) “리철부는 굴하지 않고 당의 지하활동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는 천진 각계층 구국회, 중화민족 해방자유회 등 지하조직을 내오고 반일 반봉건 투쟁을 계속하고 옥중 동지들을 구원하는 지하사업을 계속하였습니다.”   진리를 견지하는 리철부의 의지는 강의했고 드팀없었다. 그는 당중앙에서 언젠가는 자기의 정확한 주장을 접수하리라 굳게 믿었고 항전에 나선 천백만 대중들이 꼭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국민당 반동파와 일본 밀정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렬악한 환경속에서 그리고 당조직의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리철부는 계속 항쟁을 견지하였다.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중국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화북을 넘보고있었다. 1935년 차할성으로 진격한 일제는 한간 은여경(殷汝耕)을 사촉해 이른바 “기동방공자치정부(冀东防共自治政府)”를 세웠다. 정부는 전적으로 일제의 조종하에 있는 괴뢰정부였다. 일제는 또 국민정부에 이른바 “화북정권특수화(华北政权特殊化)”할데 관한 요구를 제기하였다. 중화민족이 새로운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때 섬북에 도착한 당중앙과 홍군은 8.1선언을 발표해 일떠나 일제에 항격하고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였다. 중국공산당의 8.1선언을 받들고 북평의 애국학생들이 12월 9일 성세호대한 항일애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6천여명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내전을 중지하며 국민당의 타협정책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웨쳤다. 이날 애국학생들의 행동은 군경들의 탄압을 받았다. 백여명이 부상입고 30여명이 체포되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는 애국학생들은 이튿날 더 큰 규모의 시위활동을 준비하였으며 그들의 애국행동은 전국 각지 인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천진에 있던 리철부와 장수암은 천진의 애국학생들을 동원하여 북평의 12.9운동을 적극 성원할 준비를 하였다. 더욱 큰 투쟁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던 것이다.  
49    제38회 강서성 구강의 성자특별훈련반 옛터 댓글:  조회:7364  추천:45  2007-12-20
     위대한 2만 5천리 장정을 승리적으로 마친 홍군은 섬북에서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며 항일의 제일선에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중국 동북과 대만을 삼키고 화북을 호시탐탐하는 일제의 야수적인 만행에 대항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 불길이 피여 올랐다.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가들은 본격적인 항일전을 위한 간부양성에 심혈을 기울렸고 우수한 군사인재 양성에 정력을 기울렸다. 답사팀이 1930년대초 위대한 중국 로농홍군의 활동무대였고 중화쏘베트 소재지였던 서금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서금을 떠난 것은 2004년 2월 13일이였다. 서금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남창에 가서 15일 까지 남창봉기 사적지와 김준섭 렬사에 관련한 답사를 마쳤다. 이제 남은 일이라면 연변의 력사학자 박창욱 교수가 알려준 단서에 따라 강서성 구강시 성자(星子)에 있었다는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옛터를 찾아보는 일이였다. 중앙방송국 남창 주재 기자인 장소룡씨는 성자라는 곳은 남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강시교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남창에서 구강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창에서 구강까지 장거리 버스로 3시간 남짓하면 도착한다고 하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우리를 화끈하게 안내해주고 접대한 장소룡 기자와 작별하였다. 일도 일이겠지만 남창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특히 일과출(一鍋出)이라는 독특한 음식이 별미여서 지금도 생각하면 입맛이 돋는다. 그것은 남창에 도착한 첫날 남창봉기 기념관을 보고 난 뒤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장소룡 기자는 우리를 남창의 한 전통 음식점으로 안내하였다. 사치하지는 않았지만 민족특색이 짙은 음식점이였는데 불 가마 3개가 있었다. 일과출이란 가마에서 모든 음식이 나온다는 뜻이다. 매운 국물을 끓이는 가마 3개에 육류와 야채를 오래도록 삶아 먹는 음식이다. 오래 삶을수록 더 맛이 좋다한다. 자리에 앉고 음식을 주문하려니 주인이 매운 정도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약간 매운 것이 있고 가운데로 매운 것이 있고 또 아주 매운 것이 있다고 한다. 장소룡 기자는 가운데 매운 것으로 하자 했지만 내가 찐한 것으로 해야 인상도 깊고 진미를 느낄수있다고 하면서 가장 매운 것으로 하자 하였다. 장소룡 기자는 매운 것이 괜찮다면 좋다고 하면서 가장 매운 것으로 시켰다. 한 가마에는 육류를, 한 가마에는 야채와 버섯 등속을 다른 한 가마에는 물고기 등속을 넣어 삶았다. 음식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아주 매운것이다. 입술과 혀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감각을 잃을 정도로 매웠다. 같은 매운 음식이지만 요즘 중국에 많이 류행 되는 사천의 불가마와는 두 가지가 달랐다. 하나는 끓이는 방법이다. 사천 불가마는 끓는 국물에 음식을 적시적으로 익혀먹는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래도록 삶아 맛이 푹 들게 해 먹는다. 다른 하나는 사천 불가마는 고추와 기타 조미료로 매운 맛을 돋구지만 여기서는 순 고추로 매운 맛을 낸다. 좋은 음식에 구미가 동해 술도 마시고 밥도 많이 챙겨먹었다. 장소룡 기자는 술을 잘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맥주를 권했다. 후에 이야기 된 것이지만 장소룡 기자도 가장 매운 것으로는 처음이였다고 한다. 남창의 독특한 음식 일과출과 장소룡 기자의 따뜻한 인정을 생각하는 사이 차는 감강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이따금 산들이 나타났고 아담한 농촌 가옥들이 나타났다. 버스는 서금에서 올때의 장거리 버스보다 더 깨끗하였고 차에서 비디오도 볼수있었다. 특히 침대좌석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한 앉는 좌석이여서 편히 구강으로 갈수있었다. 파양호 기슭의 구강시는 예로부터 유명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더욱이 강남의 명산 려산(廬山)을 끼고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고장이다. 북방에서 온 우리는 이번엔 배를 타볼 생각으로 구강에서 배를 타고 무한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철이라 4, 5월 매우(梅雨)기까지는 계속 가물어 배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강시 장거리 버스역에 도착한 다음 핸드폰으로 구강시 방송국 정옥향(鄭玉香) 녀사와 련락하였다. 장소룡 기자가 구강에 가면 정옥향씨를 찾으라고 했던 것이다. 역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여러 사람이 마중 나왔다. 30대 녀인이 와서 말을 묻기에 알아보니 정옥향씨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정옥향씨 뒤로부터 몇사람이 다가왔다. 구강시 방송국 강(江) 국장이 방송국 여러 주임들과 함께 마중 나왔던 것이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강국장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성자에 가서 답사를 하고 저녁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우리는 정옥향씨의 안내를 받으며 성자로 떠났다. 입가에 보조개가 인상적인 정옥향씨는 방송국 보도부 주임을 맡고있었는데 성격이 비교적 내성적이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구강시 려산구(廬山區) 해회진(海會鎭)으로 달렸다. 정주임은, 남창에서 장소룡 기자의 련락을 받고 성자에 있었다는 특별훈련반에 관련해 알아보았다고 하면서 성자군관학교 자리는 지금 해회진에 속해있다고 말했다. 차가 구강시를 벗어날 때 방송국 녀성 한명이 더 올랐다. 구강시 방송국 광고부(廣告部) 채동동(蔡冬冬) 주임이였다. 채주임 역시 30대였지만 정주임 보다 퍽 활달해 보였고 화장도 좀 짙게 한 편이였다. 인사를 하면서부터 그녀는 쉴 사이 없이 그냥 말하면서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는 것 같았다. 동동이란 이름은 분명 방송이름이다. 그러니 채주임은 방송 아나운서 출신인 것 같았다. 그만치 언변이 탄복할 정도로 좋았다. 오랜만에 녀성들과 함께 하니 우리도 기분이 퍽 좋았다. 차는 아름다운 려산 주변을 빙빙 에돌아 해회진에 이르렀다. 해회진 정부에서 안내일군들이 나와 길을 인도하였다. 차는 려산 동남부 기슭으로 행했다. 멀리 려산의 유명한 관광명소의 하나인 오로봉(五老峰)이 보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참으로 몇몇 로인이 다정하게 앉아 있는 듯이 산봉이 하늘에 솟아 있었다. 오로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그 아래에 푸른 언덕이 있고 언덕을 넘어 산기슭에 이르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붉은 벽돌로 만든 줄 집들이 나타났다. 꼭 부대 병영같은 느낌이였다. 산비탈을 따라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조그마한 광장이 있었고 거기에는 어록비가 있었다. 현지인들과 물어보니 이곳은 지난세기 50년대말, 해회 공산주의대학(共産主義大學)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대학 자리가 바로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군관훈련단(軍官訓練團)이 있었던 곳이다. 해회진과 성자현 현성은 십여리 떨어져있었다. 옛날 해회진은 성자현에 속하였지만 지금은 구강시 려산구에 속해있다. 마을 아래 얼마전 산불이 나 불탄 자리가 있었다. 페허의 남은 돌기둥이나 벽돌로부터 오래된 건물이였고 또 비교적 큰 건물이였음을 보아낼수있었다. 현지인들은 이곳에 해방후 공산주의 학교가 있었고 학교는 90년대 구강시로 옮겨갔다고 한다. 책의 기재나 현지인들의 증언에서 분명 이곳이 성자의 특별훈련반 유적지임을 확인할수있었다. 서안사변후 장개석은 려산에서 한동안 휴양하면서 려산 여름철 훈련단을 조직해 간부들 강습시키기로 하였다. 여러 군벌들을 복종시키려면 정치, 군사간부들을 틀어쥐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간부강습이 가장 유력한 방법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당시 오로봉 기슭의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책임졌던 강택(康澤)에게 4천명 학원을 성자현 부근으로 옮기게 하였다. 1937년 7.7사변이 일어난 후 본격적인 항일전쟁을 위해 장개석은 특별훈련을 강화하였다. 이때 조선의렬단 김원봉 단장은 더욱 많은 조선청년단을 훈련시키기 위해 국민당의 진성(陳誠)에게 요청을 구했다. 진성은 강택에게 조선청년들을 중앙군교 특별훈련반에 받아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조선청년들이 성자의 특별훈련반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문정일(文正一) 동지의 회억에 의하면 중앙군관학교 분교인 특별훈련반은 강서성 성자현에 있었다. 문정일 동지는 1938년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제6기 보병과를 졸업하고 그해 10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1937년 9월에 제1기로 50여명 조선청년들이 특별훈련반에 참가하였고 훈련반의 대장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신악(申岳 일명 리동화)이였다. 조선인 특별훈련반의 대장과 교관은 대부분 조선인이 맡았고 군관학교에서는 부분적인 교원을 보내 군사강의를 하였다. 정세가 어려워지자 훈련반은 호북성 강릉(江陵)에 자리를 옮겨 훈련을 계속 진행하였다. 훈련반을 졸업한 대부분 조선청년들은 1938년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고 항일전쟁시기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일제와 혈전을 벌였다. 중국의 명산 려산 기슭의 성자현에서 조선인 특별훈련반 유적지를 답사하고 구강시로 돌아왔다. 푸르른 대나무며 노을 비낀 려산의 오로봉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였다.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타고 씩씩한 조선혁명자들의 우렁찬 구령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고 노을 속에 붉게 불타는 산봉에서 조선혁명자들의 뜨거운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았다.
48    제37회 홍군장정에 참가한 무정 댓글:  조회:4350  추천:49  2007-12-20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위대한 2만 5천리 대 장정에는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다. 그 가운데서 양림을 제외하고도 무정의 뛰여난 활약상이 돋보인다. 장정초기 홍군이 겪었던 가장 처절했던 상강전역을 비롯해 수많은 혈전에 직접 참가하였고 장정후기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이 회합한후 홍군의 분렬활동을 방지하는 면에서 특출한 공헌을 한 조선혁명가가 바로 무정이다.   (권립 교수) 2만 5천리 장정때 무정은 군의 제1종대 제3제대의 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맡고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섬북에 도착하였습니다. 섬북에서 그는 홍군 총부 작전과과정으로 되어 주덕의 신변에서 사업했습니다.   무정은 중앙직속 제1종대(第一縱隊) 제3제대(第三梯隊) 사령원 겸 정위로 중앙지도자들과 함께 장정을 시작하였다. 홍군 포술전문가였던 무정은 포병영, 공병영, 수송대대, 부속병원을 포함한 홍군 기술부대를 총괄하였다. 전투가 가장 치렬한 곳일수록 무정이 거느린 포병부대가 뒤따랐다. 1934년 10월 10일 8만 홍군주력은 강서성 서금, 우도(于都), 장정(長汀), 녕화(寧化)로부터 장정을 시작하였고 당중앙 각부서와 기관도 운석산에서 출발해 장정길에 올랐다. 당시 홍군의 지도사업을 맡았던 박고(博古)와 국제공산당의 군사고문 독일인 리덕(李德)은 계속 그릇된 전략을 고집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중앙기관을 가운데 포치하고 홍군 주력인 1군단, 3군단을 좌우 략익으로 5군단을 후위로 배치하였기에 행동이 매우 굼떴다. 그리고 적들이 미리 포진하고있는 포위망을 뚫고 계속 홍군 2군단과 6군단과의 회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략전술로하여 홍군은 장정초기 막대한 희생을 내고말았다. 1년 남짓이 진행된 제5차 포위토벌에서 성과를 이룩한 장개석은 포위권내의 홍군을 제거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북평, 장가구, 태원, 서안등지를 다니면서 기타 군벌부대를 시찰하였고 자기의 전과를 자랑하였다. 10월 중순 장개석은 홍군이 이미 포위권을 뚫고 대이동을 개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급히 남창에 돌아와 작전을 지휘하였다. 적들은 중앙홍군이 하룡이 거느린 2군단, 6군단과 회합하려는 의도를 파악하고 상강을 중심으로 새로운 포위망을 구축해 놓았다. 11월초 홍군 주력부대는 두겹의 포위를 뚫고 적들에 앞써 상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부대의 행동이 느렸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여 강을 건너야했고 홍군 주력부대는 뒤쫓아온 적들과 피어린 싸움을 전개하게 되였다. 장정에 참가하였던 라원발 로인은 <라원발회억록(羅元發回憶錄)>을 남겼다. 회억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정 시작 후 가장 치렬했던 상강전역(湘江戰役)이 시작되였다. 우리 5사는 팽덕회 군단장의 명령을 받고 주야로 급행군하여 상강 나루터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지휘부에서는 군사위원회 포병영 무정동지가 포병영을 이끌고 화력지원을 줄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당시 라원발은 홍군 제3군단 5사의 단급 간부로 있었다. 그들은 무정이 거느린 포병부대의 유력한 지원을 받아 상강 나루터를 확보하였다. 중앙홍군이 강을 건느자 홍군부대는 다시 추격해오는 적들과 치렬한 저격전을 전개하였다. 무정은 기술부대를 거느리고 상강에 다리를 부설하고 중앙기관 일군들을 수송하였으며 포병부대를 조직해 적들의 추격을 막았다. 장정에 나선 중앙홍군 주력은 림표가 거느린 1군단과 팽덕회가 거느린 3군단이였다. 공격에 능한 1군단은 선봉역할을 많이 하였고 수비에 능한 3군단은 엄호작전을 많이 하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무정은 줄곧 포병부대를 이끌고 팽덕회를 도와 전투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홍군 1군단과 3군단은 신허(新墟)와 각산포(脚山鋪) 부근에서 혈전하였고 5군단은 문시(文市)에서 적들과 싸웠다. 홍군장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저격임무를 수행하였다. 수십만 대군을 풀어 홍군주력부대를 소멸하려던 장개석의 시도는 무산되였다. 그러나 우세한 적들이 사면으로 포위해왔기 때문에 상강전역을 치른후 홍군부대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8만 주력홍군이 4만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상강전역을 치른후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드디어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홍군은 2군단, 6군단과의 회합을 포기하고 신속히 귀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준의회의후 모택동의 정확한 령도하에 홍군은 오강을 건느고 적수하를 네 번 건느면서 적들을 미혹시켰으며 신속히 금사강을 건넜다. 홍군이 귀주성에까지 이동하였을 때 앞에는 설산이 가로막혔다. 부대의 령활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무기는 버려야 하였다. 따라서 포병부대도 다른 부대에 편입되여야했다. 무정은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더욱 막강한 포병부대를 건립할 결의를 다지면서 포병부대를 떠나 제3군단 지휘부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대도하(大渡河)를 건느고 설산은 넘어 사천성의 파서(巴西)에 도착한 중앙홍군은 승리적으로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그러나 홍군내부에서 새로운 위기가 나타났다. 당시 홍군 4방면군은 수적으로 중앙홍군 보다 더 많았다. 홍군 4방면군의 장국도(張國燾)는 중앙홍군을 통제하고 나아가서 당중앙에서의 자기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는 중앙홍군의 주력부대인 제1군단과 제3군당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해 무전암호를 회수하였다. 그리하여 3군단과 주력홍군 1방면군의 련계가 두절되였다. 그때 1방면군은 림표와 섭영진의 인솔하에 아계(俄界)에 가 있었다. 위급한 시각 팽덕회는 새로운 암호를 만들어 1방면군에 보내려 하였다. 그는 이 중요한 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팽덕회의 회억록에서는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군단에서는 무전기를 준비하였고 무전암호도 다시 만들었다....무정동지(조선동지)를 파견하여 지북침(지남침)을 갖고 1군단의 지나간 행적을 찾아 꼭 무전암호를 림표와 섭영진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임무를 맡고 길을 나섰지만 앞이 캄캄하였다. 아계가 어딘지? 망망한 초지에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무정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지남침으로 방향을 확정하고 계속 걸어갔다. 한동안 달리는 풀을 베어 쌓아 놓은 것이 보였다. 풀을 헤쳐보니 희생된 홍군전사의 시신이 있었다. 무정은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희생자에게 경례를 붙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후 그는 초지에 물을 끓이던 낡은 솥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솥을 만져보니 아직 온기가 있었다. 그는 홍군주력부대가 이곳을 떠난지 오라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지칠대로 지쳤지만 무정은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려 드디어 홍군 제1방면군 1군단 사령부를 찾아 무전암호를 림표에게 전했다. 3군단 지휘부에서 속을 태우던 모택동은 무전신호가 오자 즉각 전문을 보냈다. “림표, 섭영진 앞: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으니 제자리에 대기할 것.” 1군단 지휘부에서 자기의 무전암호로 전문이 번역되는 것을 보고서야 무정은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장국도의 분렬음모를 간파한후 모택동은 중앙기관과 제1방면군 주력을 거느리고 승리적으로 섬북으로 진격하였다. 섬북의 홍군과 회합한 중앙홍군은 드디여 2만 5천리 장정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중앙홍군과 함께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새로운 과업을 맡고 계속 투쟁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30여명 조선혁명가들이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하였으나 결국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 사람은 양림과 무정뿐이였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설산, 초지를 지날 때 희생되였던 것이다. 장정도중 홍군은 로획한 국민당의 비행기로 삐라를 살포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비행기 조정사가 바로 조선인이라는 기재도 있다. 강서성 서금의 작은 운석산에서 시작된 2만 5천리 장정은 결국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홍군부대는 그 무엇으로도 전승할 수 없는 강철의 대오임을 세인들에게 알려주었고 무산계급 혁명투쟁은 최후의 승리를 이룩할 것이라는 확신을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심어주었다. 운석산 홍군장정 유적지를 떠나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강철의 대오속에 자랑찬 우리민족의 혁명투사 양림과 무정이 있었다는데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장정에서 희생된 이름모를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드리고싶은 심정이였다.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세계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자들의 넋은 영원할 것이다.  
47    제36회 홍군장정의 첫산 운석산 답사 댓글:  조회:4350  추천:53  2007-12-20
     1933년 중화민족은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1934년 5월 31일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남경정부를 협박하여 이른바 굴욕의 <당고협정(唐沽协定)>을 체결하였다. 드넓은 화북도 동북지역처럼 일제에게 상실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외적의 침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홍군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였다. 그는 남창에 사령부를 앉히고 직접 중앙쏘베트지역에 대한 제5차 토벌을 지휘하였다. 장개석의 이러한 정책은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편 1934년 10월 왕명의 좌경 모험주의의 그릇된 령도로하여 중앙혁명근거지는 막대한 적들의 공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력홍군의 대 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5차 반포위토벌전의 실패로하여 홍군 제1방면군 주력은 장정을 시작하고 부분적인 홍군부대를 남겨 유격전쟁을 견지하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중국로농홍군 주력부대는 장강 남북 쏘베트지역으로부터 대규모의 이동작전을 개시하여 수많은 난관을 뚫고 승리적으로 섬북혁명근거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진감한 위대한 2만 5천리 장정이다. 중국로농홍군의 장정에는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참가하였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혁명가가 양림과 무정이다.   (권립 교수) 중앙쏘베트구역의 조선족 동지들은 2만 5천리 장정이 시작되자 모두 세계를 진감한 이 장정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답사팀은 서금에서 홍군장정의 첫 산으로 불리우는 운석산(云石山)을 답사하였다. 서금에 도착한 첫날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참가한 제1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 개최지 엽평과 조선혁명가 양림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제2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 개최지 사주패 유적지를 답사한 다음 오후 시간을 내여 홍군장정의 운석산 유적지에 가 보았다. 목적지는 서금시 서부 19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운석산은 홍군이 장정을 시작한 첫 출발지로서 사주패를 떠난 모택동, 장문천(張聞天)을 비롯한 당과 정부 지도자가 한동안 사무를 보던 곳이기도 하다. 운석산으로 가는 길 한 구간은 보수중이여서 도로상황은 좋지 않았다. 광동에서 오는 많은 화물차들은 길이 막혀 “거부기 걸음”을 하고있었지만 우리 차는 먼지를 일구며 다른 편으로 달려 쉽게 빠져 나올수있었다. 길을 보수하느라 이곳저곳 파놓았는데 진붉은 토색이 퍽 인상깊었다. 동북의 검은 흑토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안내를 맡은 선전부의 뢰우정씨가 “이곳 홍토는 동북의 흑토 보다 토질이 떨어지고 영양성분도 적다”고 알려주었다. 드넓은 벌을 지나면서 불현듯 홍군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중앙쏘베트지역을 개척해 놓았는지 짐작이 갔다. 지형적인 우세가 있었던 것이다. 서금은 강남의 “중원”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으로는 장강을 건너 화북대지와 이어져 있고 동서로 무이산과 정강산이 있었다. 또 남으로는 광동과 잇닿아 쉽게 광동으로 남하할수있었다. 남북으로 자유로이 진출할 수 있고 동서 산속으로 쉽게 적의 예봉을 피할 수 있는 참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라고 생각되였다. 이러한 지역은 유격전과 운동전을 전개할 수 있는 적성지였다. 홍군은 공격시 감강평원(贛江平原)으로 신속히 공격할 수 있고 적의 력량이 강하면 쉽게 정강산이나 무이산쪽으로 철수할수있다. 또 강과 호수가 많은 구릉지대에 의지해 적들과 유격전을 할수있었던 것이다. 강기슭의 넓은 벌을 지나 조금 더 달리니 조그마한 산들이 나타났고 얼마 안되여 운석산에 이르렀다. 산은 높지 않았고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회색 돌들이 삐죽삐죽 보였다. 이곳 지질구조는 아주 특이하였다. 산은 대체로 돌로 이루어졌는데 돌들은 모두 뾰족뾰족 모가 나 있었다. 1934년, 중앙쏘베트지역은 국민당의 제5차 포위토벌을 극복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되였다. 국민당은 동북을 강점하고 상해를 공격하는 일본침략자들과는 계속 타협하면서도 50만 대군을 풀어 홍군을 토벌하였다. 당시 중국의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쏘련혁명의 성공경험을 공식적으로 답습하는 공산당 중앙지도부의 좌경로선(左傾路線)으로 하여 홍군은 처절한 실패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홍군주력부대는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우세한 적들을 정면으로 대항하여야 하였다. 서금으로 통하는 길목인 광창(廣昌) 보위전에서 홍군은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적들은 사면으로 중앙혁명근거지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적들의 폭격과 공격이 심했기 때문에 중앙쏘베트정부는 계속 사주패에서 사무를 볼수없게 되어 1934년 7월 중앙정치국과 중앙 쏘베트 정부, 중앙군사위원회를 비롯한 핵심 기관이 모두 운석산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3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주력 홍군은 운석산에서 출발하여 장정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운석산에는 운산고사(雲山古寺)라는 옛 절이 있었다. 산밑에서는 괴석과 나무에 가리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불꼬불한 돌계단을 따라 산을 오르면 산정의 평지에 진한 귤색 회칠을 한 절이 보인다. 절은 규모가 퍽 작아 정원과 찌그러진 단층 방들이 있을뿐이다. 운산고사 주변 나무숲에는 돌로 된 걸상, 탁상 등이 있었다. 산에 오르는 가파른 돌길에는 두 개의 석문이 있었다. “한사람이 막아서면 만명도 지날 수 없다”는 듯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산정에는 돌로 만든 여러 개의 수비진지가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적들이 공격해 오기 전에 홍군은 이미 장정을 떠났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권립 교수) 장정이 시작되자 중앙근거지 홍군대학과 기타 세 개 소의 홍군군사학교의 장병들로 홍색간부단을 편성했는데 조선족 혁명가 양림이 이 간부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1934년 10월, 제5차 반포위 토벌전의 실패로 중앙홍군과 중앙령도기관의 지도자들은 운석산으로부터 장정을 시작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중앙직속 홍색간부단(紅色幹部團)의 참모장으로 장정을 출발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만 6천여명 홍군을 중앙쏘베트지역에 남겨 투쟁을 견지하게 하고 제1방면군 5개 군단과 중앙기관 간부, 공장로동자, 일부 민부 도합 8만 6천여명이 장정을 시작하였다. 팽덕회의 홍군 제3군단이 우익을 맡고 림표가 거느린 홍군 제1군단이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5군단이 후위를 맡고 중앙기관은 엽검영을 사령원으로 하는 중앙종대를 편성하였다. 양림의 홍색간부단은 중앙종대에 소속되였다. 중앙기관은 운석산으로부터 출발하였고 기타 홍군주력은 서금, 우도(于都), 장정(长汀), 녕화(宁化)로부터 출발하였다. 장정에 나선 양림은 간부단 참모장으로서 줄곧 당중앙을 따라 행동하였다. 홍군주력부대는 국민당의 세겹의 포위를 뚫고 12월 1일 네 번째 천험인 상강(湘江)을 돌파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적이 미리 포위권을 만들어 놓은 상강을 건너 홍군 제2, 제6군단과 회합하려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을 반대하면서 적 병력이 약한 서부로 진격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의견을 접수되지 않았고 홍군은 흥안(興安), 전주(全州)사이로 상강을 건느게 되었다. 상강에서 홍군은 적들과의 치렬한 혈전을 전개하였고 수만 홍군의 우수한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12월 중순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드디어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홍군은 제2, 6군단과의 회합 계획을 포기하고 적의 병력이 약한 귀주성으로 진격하였다. 1935년 1월 홍군은 준의(遵義)를 점령하고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준의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로부터 모택동은 다시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의 정확한 전략, 전술에 따라 홍군은 겹겹한 적의 포위를 뚫고 승리적으로 진군할수있게 되였다. 귀주성까지 도착하자 홍군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 전투원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당과 홍군의 중견간부들로 이루어진 홍색간부단마저 전투에 투입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양림은 정위 송임궁(宋任窮)과 함께 단장인 진갱(陳賡)을 도와 력차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중견간부들로 이루어진 만큼 간부단의 전투력은 막강하였다. 그들은 늘 관건적인 시각에 관건적인 위치에 나타나 적들에게 치명타를 안기며 홍군의 불리한 국면을 돌려세웠다.   (권립 교수) 준의회의가 끝나자 홍군은 적수를 네 번 건느는 대규모적인 치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양림이 거느린 간부단은 앞장서 이 전투에 뛰여들었습니다. 구성의로앞산 근거지를 쟁탈하는 투쟁을 간부단에서 맡았을때였습니다. 양림은 단장이였던 징갱과 함께 전사들을 거느리고 용맹히 돌진하여 스무개단을 섬멸하고 3천여명을 포로함으로서 훙군장정이래의 첫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계속해서 양림은 운남, 사천, 귀주를 우회하면서 수배, 수십배나 되는 적들과 격전하였습니다.   준의회의후 홍군은 기동령활한 운동전을 펼쳤다. 적수하를 네 번 건너면서 홍군의 이동의도를 음페하고 적의 계획을 파탄시킨후 남쪽으로 오강(乌江)을 건너 적 병력이 적은 귀주성내로 진격하였다. 1935년 4월 29일, 중앙에서는 금사강(金沙江)을 강행 도하하기로 결정하였다.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와 총참모장 류백승(劉伯承)이 직접 간부단에 찾아와 전투임무를 하달하였다. 당중앙 총서기 장문천(張聞天)은 간부단 장병들을 모아놓고 금사강 도강작전의 중요성을 설명하고나서 5월 1일전으로 꼭 나루터를 확보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양림은 직접 한 개 련을 거느리고 간부단의 앞장에 서서 돌진하였다. 부대는 더위를 무릅쓰고 일주야에 180리길을 달려 교평(絞平)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양림은 나루터 부근의 적정을 정찰한후 적은 병력으로 나루터를 기습할 계획을 내놓았다. 홍군전사들은 감쪽같이 보초병을 제거하고 잠에 골아 떨어진 적 60여명을 전부 생포하였다.   (권립 교수) 5.1절 전야 나루터에 도착한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비호처럼 적진에 뛰여들어 나루터에 있던 적들을 생포하고 금사강 나루터를 번개같이 점령했습니다. 5월 1일 날이 밝자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금사강 나루터를 확보하기 위해 적의 중요한 거점인 통안진을 강점하라고 홍색간부단에 명령하였습니다. 양림은 한 개 영을 거느리고 화염삼 고지를 점령하려 떠났습니다. 화염산만 점령하면 통안주의 적들이 금사강 나루터로 올수없기 때문에 양림은 앞장서 결사적으로 돌진해 끝내 화염산 고지를 피로 점령하고 통안주까지 내밀어서 중앙홍군으로 하여금 금사강을 건느도록 담보했습니다.   교평 나루터를 확보한 다음 양림은 명령을 받고 통안진(通安鎭)으로 갔다. 그는 간부단 정찰부대를 거느리고 유리한 지세를 점한후 통안진을 공격하였다. 치렬한 전투를 거쳐 5월 1일 황혼 무렵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6백여명 적을 포로하고 통안진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에서 홍군은 12명 사상자밖에 내지 않았다. 군사위원회에서는 교평 나루터 기습작전과 통안진 공격전에서 공을 세운 간부단을 표창하였다. 금사강을 건넌 홍군은 수십만 적들을 뒷전에 내치고 곧추 서북으로 진격하였다. 홍군은 가는 곳마다 정확한 대중정책과 민족정책을 선전하였기 때문에 소수민족을 포함한 많은 인민들의 지원을 받아 대도하에 도착하였다. 영웅적 홍군전사들은 강철의 의지로 시간과 공간을 줄이면서 주동을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로정교(瀘定橋)를 탈취하고 승리적으로 대도하(大渡河) 천험을 돌파하고 천년설이 쌓인 협금산(夾金山)을 넘어 1935년 6월 무공(懋功)에서 홍군 제4방면군과 승리적으로 회합하였다. 금사강을 건넌 양림은 부대와 함께 도보로 설산과 초지를 지나 1935년 10월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여 새로운 전투를 시작하였다.  
46    제35회 홍군특과학교 옛터 댓글:  조회:4188  추천:39  2007-12-11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은 홍군부대의 확대와 더불어 수많은 군사인재가 필요하였고 또한 정치적 각오가 높은 간부대오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의 정치와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홍군대학을 창설하였고 풍부한 경험을 가진 홍군 고위지도자들이 학교의 주요직무를 맡게 되었다.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 훌륭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조선혁명자들도 홍군대학의 창설에 참가하였으며 학교 요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1931년 모택동과 주덕은 홍군 제8군 군장인 하장공(何长工)과 홍군 제5군 군장 등평(邓萍)에게 홍군대학 창설 임무를 맡겼다. 모택동은, 인민의 군대인 홍군이 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타격하려면 학교를 창설하고 군부대를 다스리며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자체의 군사인재를 양성해야한다고 지적하였다. 이해 11월 중앙의 결정에 따라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师政治学校)가 서금에 창설되였다. 홍군 각 부대 교도대와 각지 강습반에서 모여온 천 2백여명 간부들이 모여 군사정치학교에서 학습하게 되었다. 1932년 학교명칭을 중국공농홍군학교(中国工农红军学校)로 개칭하고 1933년 가을까지 6기로 만여명 홍군간부들을 양성해냈다. 1933년 10월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홍군학교를 세분하고 확대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농홍군학교는 홍군대학, 홍군 제1보병학교, 홍군 제2보병학교, 특과학교(特科学校)로 나뉘였다. 이듬해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던 유명한 군사전문가인 조선혁명가 양림이 홍군대학의 총교관을 맡았다. 홍군대학의 옛터인 대포촌에서 강서의 시골풍경을 한껏 감상한후 답사팀은 차를 무양향(武阳乡)의 홍군 특과학교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감강의 원류의 면강하(绵江河)를 따라 작은 산들을 지나니 무연한 평지가 펼쳐졌다. 무연한 밭 사이에 가담가담 마을이 있었다. 강서성 서금시 무양진 무양향(武阳鎭武阳乡)에 들어서니 낡은 옛 가옥들이 눈에 띄였고 흑물이 고인 촌길이 나타났다. 그런대로 차는 마을을 지나 한동안 달렸다. 멀리로 커다란 사당이 보였다. 사당 앞에 도착해 보니 추씨종사(邹氏宗祠)였다. 홍군특과학교는 이곳 지주집 사당자리에 설치했다는 기재가 있었기 때문에 추씨종사가 그 유적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안내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추씨종사도 후에 복원한 건물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사당 서북쪽 밭 한 가운데를 가르키면서 원 유적지는 그쪽이라고 알려주었다. 거기에는 무너진 건물의 기초 돌과 파손된 담벽이 있었다. 남은 건물 유적만 보아도 매우 큰 건물임이 틀림없었다.     기초와 허물어지다만 담벽이 얼마간 남은 페허 주변에는 모두 밭이 였고 밭에는 남방의 유명한 유채가 한창 노란 꽃을 피우고있었다. 1933년 10월 중앙홍군대학에서 분리되여 설립한 학교가 홍군특과학교이다. 이때 중앙홍군대학은 홍군대학, 제1보병학교, 제2보병학교, 특과학교, 유격대간부학교를 비롯해 5개 학교로 나뉘여진다. 홍군 군사위원회 직속인 홍군특과학교는 기관총련, 포병련, 공병련을 합병하여 포병기술을 주로 련마하는 학교였다. 조선혁명가 무정(武亭)이 당시 특과학교 제3임 교장으로 있었다. 조선의 전설적인 영웅 무정(1905--1952)의 원명은 김무정(金武亭)이다. 1905년 조선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에서 태여 난 그는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무정은 어려서부터 자체로 돈을 벌어 공부하였다. 14살 때 3.1운동을 목격한 그는 애국사상과 혁명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후 기독교 중학교를 다닐 때 서울의 고려공산당(高丽共产党) 조직의 지도자 려운형(吕运亨 1885-1947)을 알게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무정은 1923년 학교를 중퇴하고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섰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경에 와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2년 무정의 친필 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나는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참가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세 번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에서 갖은 혹형을 받다가 도망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온 후 대혁명에 참가하였고 사업의 실패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하다가 만기 석방되였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홍군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투쟁을 진행해왔다.” 20년대초에 중국에 온 무정은 하북성 보정(保定)에 있는 보정군관학교(保定军官学校)를 졸업하고 군벌부대에 근무하였다. 남구(南口) 전역과 천진 공격전에서 천재적인 군사재능을 발휘한 그는 포병 중좌까지 지냈다. 1925년 무정은 장가구(张家口)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군벌혼전에서 아무런 희망을 보지 못한 무정은 그후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지만 1927년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을 진압할 때 무창(武昌)에서 체포되여 사형에 언도되였다. 당시 장개석의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많았는데 만여명 학생들이 시위를 단행하면서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법정에도 혁명을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정은 무사히 풀려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1929년 무정은 상해 로동자 폭동에 참가하여 무장조직 지휘자로 활약하다가 영국인에게 체포 되였다. 영국법정은 상징적으로 그를 2개월간 감금한후 곧 석방하였다. 무정은 계속 상해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하였다.   (권립 교수) 무정은 1924년에 열아홉살이였는데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고 스무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무정은 북벌전쟁이 실패하자 상해로 와서 상해 한인지부에 가입하고 지부위원으로 당선되였습니다. 중앙쏘베트구역에서 무정은 홍군특과학교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은 당 중앙소재지인 상해에서 쏘베트지역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에는 홍군 제5군 정치위원인 등대원(滕代远)이 참가하였다. 등대원과 무정은 친숙한 사이로 되었다. 그후 무정은 섬북에서 등대원의 녀동생인 등기(腾绮)와 결혼하기도 하였다. 회의가 끝난 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등대원과 함께 호북 양신(阳新)에 있는 팽덕회(彭德怀) 군장의 5군에 참가하였다. 이해 7월 팽덕회의 5군은 동정호 기슭의 악주(岳州)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홍군은 동정호(洞庭湖)에 정박해있던 미국, 영국, 일본 제국주의의 함대의 포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패장으로 있던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반격할 것을 제기하였다. 홍군이 악주를 점령할 때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을 로획한 것이 있었다. 무정은 대포를 걸어놓고 전사들에게 사격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직접 조준하여 포사격을 가했다. 20여발의 포탄 가운데서 10여발이 적함을 명중하자 적함은 물러나고 말았다. 이번 제국주의 포함 포격으로 무정은 홍군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알려졌다. 훗날 공화국 원수로 된 팽덕회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우리가 악주를 점령한후 영국, 미국, 일본의 군함이 성안에 포격을 가했다. 우리는 음페적으로 포를 걸어놓았다. 당시 나와 조선동지인 무정만이 포를 사용할줄 알았다. 적함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격을 가했는데 약 10여발이 적함을 명중하였다. 이때로부터 적들은 감히 포사격을 하지 못했다....악주에서 홍군 전사들은 우리가 쏜 포탄이 적함을 명중하자 모두 환성을 올렸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불렀다.” 천재적인 군사재능과 뛰여난 통솔력을 갖춘 무정은 수차의 전공을 세웠고 선후로 패장, 련장,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팽덕회는 무정의 재능을 아껴 그를 요직에 배치하고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 계속 함께 싸웠다. 이때로부터 무정은 홍군의 포술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1930년 7월, 홍군은 호남 평강(平江)에서 첫 산포련(山炮连)을 조직하였는데 그해말 무정은 산포련의 제3임 련장을 맡았다. 1931년 5월에는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포병단이 강서 피두(陂头)에서 창건되였다. 1임 단장이 실직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한달 후 무정이 홍군 보병단의 제2임 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후 무정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홍군 특과학교 포병과 주임, 특과학교 제2임 교장으로 사업하였다. 홍군 특과학교에서는 실전수요에 따라 “적게 강의하고 많이 조작하며 과당 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少讲多做, 少课堂, 多野外)”는 교수원칙을 제정하였다. 1937년 7월의 통계를 보면 전교에 1876명 학원이 있었다. 1934년 9월 장정을 앞두고 부분적 학원과 사업일군들이 간부단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교도사를 편성하였다. 홍군 특과학교의 설립은 홍군대학이 단일학과로부터 다학과로 발전하는 첫 시도였다. 이 학교의 교장이 조선혁명가 무정이였다는 것은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한적한 농촌이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밭머리에서 페허만 남은 홍군 특과학교 유적지를 보노라니 당시 홍군들의 씩씩한 모습이 떠올랐고 적의 포화를 헤치며 두려움 없이 장정길에 올랐던 영웅들의 비장한 모습이 떠올랐다. 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한지라 특과학교 답사를 마치자 이미 점심이 퍼그나 지난 뒤였다. 점심은 무양진 정부에서 배치하였다. 무양진 진장은 반갑게 우리를 맞으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였다. 30대로 사내인 진장은 언변이 좋았다. 우리는 이곳 마을 사람들이 유적지를 잘 모르고 유적지의 기초 돌을 가져다 논두렁을 쌓는다고 알려주면서 안타까워하였다. 그러자 진장은 유적지 보호와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조치를 취해 잘 보호할 것을 약속하였다. 진정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금으로 돌아왔다. 1930년대 초 중앙쏘베트지역에 창설하였던 홍군대학과 홍군 특과학교는 비록 학교시설이 락후하고 정규화 되지 못했지만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홍군이 강철의 대오로 성장하고 갖은 곤난을 물리치고 승리에서 승리에로 전진할수있은 것은 모두 이시기 양성해낸 정치, 군사 간부들의 유력한 활동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자랑 높은 홍군대학과 홍군 특과학교에 조선인 혁명가 양림과 무정이 지도간부로 있었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더없는 자랑이 아닐수 없다.  
45    제34회 홍군시기의 조선인음악가 최음파 댓글:  조회:4300  추천:70  2007-12-11
  1930년대 상반기, 중국공산당을 따라 홍군의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쏘베트 정부 정치, 군사활동과 생산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선전 사업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조선민족의 특별한 음악적 재질을 과시하여 홍군의 전투와 생활을 노래하고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군중정책을 선전하는 많은 음악을 창작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음파(崔音波)이다. 2004년 2월 12일 답사팀은 서금에서 엽평과 사주패를 보고나서 저녁녘에 서금시 혁명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박물관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안내일군이 여러 곳에 전화를 하여 문의해보고 겨우 박물관 위치를 찾아냈다. 그도그럴것이 정부청사를 옮긴 다음부터 각 부서와 관련 부문들이 전부 여러 곳에 분산되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물관 같은 곳은 평소 찾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현지인들이라도 잘 모르고있었던 것이다. 주소도 명확히 표기되지 않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5층짜리 주민 아파트가 나타났다. 아파트의 4층을 박물관 사무실로 림시 사용하고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을 찾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4층 혁명박물관 책임자를 찾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퇴근 준비를 하고있었다. 더욱이 박물관 관련자료와 전시물들을 지금 공개할수 없다는 소개를 듣고 우리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현재 혁명박물관으로 사용할 자리가 없기 때문에 관련자료와 전시물은 모두 짐으로 꿍져 보관하고있으며 소중한 부분은 가장 안전한 무장부(武装部)에 보관시켰다는 것이다. 훌륭한 자료들을 찾아보려는 의욕으로 불타던 우리에게 있어서 큰 실망이 아닐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홍군시기 특히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조선혁명가들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고있으니 전문가들에게 부탁해 단서로 될만한 자료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2월 13일 아침, 우리는 아침을 먹고 일찍 떠나 혁명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에서는 관련 자료를 찾아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홍군대학과 특과학교의 주소가 밝혀졌다. 옛 사진도 있었고 지금의 정확한 주소까지 밝혀있었다. 그러니 주소에 따라 찾아가면 이 두 학교 유적지를 답사할수있을 것 같았다. 혁명박물관에서 제공한 <중국공산당쏘베트구역사전(中共苏区辞典)>에 양림에 관한 약력이 있었다. 대부분 학자들이 연구해낸 경력이였지만 양림이 중앙쏘베트지역의 월감군분구 사령원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은 강서를 중심으로 호남, 복건, 광동의 부분적 지역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월감군분구라면 강서와 광동지역을 포함하고 양림은 이 지역 홍군부대와 적위대(赤卫队) 훈련을 책임진 사령원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외외풍비(巍巍豊碑)>라는 책에서는 진의(陈毅) 다음으로 “삐스티(毕士悌) 중앙쏘베트지역 중국공농홍군대학(中国工农红军大学) 군사총교관(军师总教官)”으로 소개되여있었다.” 박물관에서 제공한 자료에는 또 홍군대학의 옛 모습을 찍은 소중한 력사 사진도 있었다. 더욱 고마운 것은 홍군대학과 홍군 특과학교 유적지는 찾기 힘들기 때문에 관련일군들이 직접 안내 해주겠다고 하였다. 전날 크게 실망했던 우리의 마음은 다시 더워지기 시작하였고 힘이 솟아났다. 더욱 많은 자료들을 보지 못해 유감이지만 이만한 단서만으로도 이번답사가 헛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서금시 혁명박물관에서 가장 큰 발견은 조선인 작곡가 최음파에 대한 자료였다. 중국공산당쏘베트구역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중앙쏘베트구역의 저명한 가곡가 조선인 최음파가 지은 노래 <사표곡(梭镖曲)>은 격정이 높고 경쾌하며 힘이 있었다.”     오수권(伍修权)을 비롯한 홍군출신의 로인들의 회억에서 홍군시기의 최음파에 대해 얼마간 언급될 뿐이다. 최음파는 20세 젊은 나이에 상해로부터 강서성 정강산 혁명근거지에 가서 홍군에 참가하였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그는 근거지에서 문예공연과 선동공작을 많이 하였다. 당시 홍군에는 음악가가 몇사람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쏘베트지역 군민들은 그를 “조선족 작곡가”, “우리의 바이올린수”라고 불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홍군부대는 초창기부터 정치사상사업과 군중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홍군은 전투부대뿐만 아니라 군중들과 한마음이 되어 정치사상을 적극 선전하는 대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하여도 홍군의 선전사업은 강연하고 삐라를 뿌리며 표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주로하였다. 문예공연은 매우 적었고 음악은 더욱 적었다. 당시 쏘베트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곡에 가사를 만들어 불렀다. 특히 쏘련곡이 많았다. 훌륭한 음악재능을 지니고 바이올린을 곧잘 다룬 최음파는 홍군의 문예선전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몇몇 안되는 음악가들과 함께 홍군을 노래하고 공산당을 노래하며 군민의 정을 노래하는 수많은 노래를 창작함으로써 쏘베트지역 인민의 노래를 풍부히 해 주었다. 1931년 제1차 전국 쏘베트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자 그는 대회를 경축하여 쓴 가사에 곡을 붙였다. <전국 쏘베트 옹호 대표대회(擁護全國蘇維埃代表大會)>라는 이 노래의 가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전국로농대표대회가 열렸네 혁명승리의 신호포 동원되고 무장하여 일떠서니 강철같은 홍군 백만이라네.” 간결한 가사였지만 격정에 넘치는 곡을 붙여 얼마후 노래는 쏘베트지역 군민이 모두 애창하는 노래로 되었다. 그후 로농홍군학교가 설립되자 최음파는 학교 구락부의 일원으로 선전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들은 문화수준이 낮은 학생들의 상황을 파악하여 문화오락행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정치, 군사, 문화지식을 전수하였다. 특히 최음파의 바이올린 연주는 학생들의 절찬을 받았다. 최음파는 구락부 기타 성원들과 함께 매주 두차례 문예야회를 열고 자체로 창작한 연극, 가무, 재담을 공연하였고 이럴 때면 최음파의 바이올린 독주가 마냥 인기프로였다. 학교 교장이였던 엽검영도 여러차례 공연을 보고 구락부 활동에 큰 지지를 주었다. 9.18사변후 장개석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군대를 끌어모아 중앙쏘베트지역을 포위토벌하였다. 북방에서 온 많은 국민당 부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점차 홍군쪽으로 넘어왔다. 1931년 말 강소성에서 국민당 부대가 봉기를 일으키고 봉기대오는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왔다. 봉기한 국민당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모택동은 홍군 선전대를 파견하였다. 최음파는 선전대의 요원으로 봉기부대 장병들에게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선전대의 공연에 감화를 받은 장병들은 장개석을 타도하고 공산당을 따라 혁명할 의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친후 홍군의 첫 극단인 <8.1극단>이 조직되였다. 극단의 주요 성원이였던 최음파는 로농극사 사가(社歌)에 곡을 붙였고 극단을 따라 수많은 공연에 참가하였다. 공연때마다 최음파의 바이올린 독주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최음파는 늘 사람들에게 조선가곡을 들려주었다. 씩씩한 홍군전사이며 음악가인 최음파가 작곡한 적투적인 노래와 아름다운 바이올린 곡조는 중앙쏘베트지역 인민들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최음파는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예술을 투쟁의 무기로 삶고 청춘을 빛낸 조선인 예술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의 생졸년대와 고향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노래들도 지금 전해진 것이 없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음악가라면 연안에서 성장한 인민의 음악가 정률성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을뿐이다. 홍군시절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혁명과 음악창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최음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너무 적어 가슴이 아팠다. 그가 남겨놓은 노래도 어딘가 있을 것 같았지만 자료들이 모두 무장부에 보관되고 또 짐으로 싸 놓았다니 당분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더 많은 전문가들이 이 단서를 가지고 연구하고 자상히 찾아본다면 언젠가는 찾을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공산당 조직사 자료(中共组织史资料)> 제2권에는 홍군시절의 다른 한 조선인 군사 장령의 이름이 나온다. 중국로농홍군 제22군 군장에 진의, 참모장에 장세걸(张世杰) 조선인이라고 밝혀있다. 그러나 조선혁명가 장세걸에 대해서도 더 이상 연구가 없다. 그가 진의부대의 참모장으로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남창봉기후 주덕과 진의를 따라 정강산에 온 것으로 추측된다. 홍군시기 작곡가 최음파와 고위 장령(将领) 장세걸에 대한 더 구체적인 연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박물관에서 최음파와 장세걸에 관련한 단서를 더 찾기 위해 박물관 림시자료실을 보자 하였다. 책임자는 자료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서 극구 반대하였다. 우리가 먼길을 찾아오기가 쉽지 않고 또 관련자료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거듭 사정해서야 열람이 허락 되였다. 박물관의 간소한 림시자료실은 아파트의 1층에 있었다. 그곳에서 홍군이 만든 <홍색중화(红色中华)>와 <홍성보(红星报)>를 찾아보았다. 34년 좌우로 여러 권 뒤져보았지만 조선혁명가들에 관련한 내용은 더 찾지 못했다. 더 많은 시간을 내여 천천히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면 훌륭한 자료를 찾을수 있을 것 같았다. 서금시 혁명박물관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후 안내일군과 함께 홍군대학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조선혁명가 양림이 총교관을 맡아 한동안 홍군대학 학생들을 훈련시켰다는 곳이다. 서금에서 홍군대학 유적지까지는 멀지 않았다. 서금시 사주패진(沙州坝鎭) 대포촌(大布村) 대와(大窝)에 이르니 산 사이로 뻗은 길가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도로 곁에 낡은 단층집들이 늘어선 비교적 빈곤한 마을이였다. 마을 서쪽 산기슭으로는 홍토가 쌓여있는 것이 보였고 그 주변 드넓은 언덕에는 과원이 있었다. 홍토가 보이도록 파 놓은 것은 철도를 부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산기슭 과원에는 키 낮은 귤나무가 가득하였다. 강남의 유명한 귤나무였다. 우리는 산을 향한 과원의 오솔길을 따라 한동안 걸었다. 안내원이 과원 한 복판의 넓은 평지를 가리키면서 이곳이 홍군대학 옛터라고 알려주었다. 그냥 과원의 한 가운데 자리였다. 부근에는 귤나무만 있을뿐 아무런 건물도 없었고 옛터라는 표적이 될만한 것도 없었다. 박물관 안내 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1933년 10월 17일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홍군대학을 설립하였다. 대학 건물은 학원들이 스스로 나무를 베다 지었다. 홍군이 장정을 떠난 후 학교 건물은 너무 헐망해 무너져 버렸다한다. 하장공(何长工)이 일임 교장으로 있었고 1934년 양림이 학교 총교관을 맡았다. 제3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있은 후 모택동과 주은래는 쏘베트정부와 홍군 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중국로농홍군 북상항일선언(中国劳农红军北上抗日宣言)>을 발표하였다. 선언이 발표되자 7월 22일 양림은 홍군중앙통신사를 통해 <홍군북상항일옹호선언(红军北上抗日拥护宣言)>을 발표하였다. 그는 선언에서 오직 쏘베트정부와 홍군만이 전국 중국인민을 령도하고 무장할 수 있는 통수이며 항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였다. 북상항일옹호선언을 발표한후 양림은 중앙홍군대학으로 전근되여 사업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엽정 독립단의 창시인의 한사람이고 또 중앙정부 집행위원인 양림을 홍군대학에 보내는 것은 급별을 너무 낮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림은 이를 개의치 않고 홍군대학 군사간부 양성에 몰두하였다. 홍군 장정을 앞두고 중앙홍군대학과 산하 여러 학교는 간부단(干部团)으로 편성되였다. 양림은 간부단의 참모장으로 장정 길에 올랐던 것이다.
44    제33회 제2차 쏘베트대표대회 개최지 답사 댓글:  조회:4012  추천:44  2007-12-11
1932년 국민당 반동파들은 강서 중앙쏘베트지역에 대한 제4차 포위토벌을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직접 총사령을 겸하고 수십만 군사를 끌어 모아 서금으로 공격해 왔다. 이시기 왕명(王明)을 대표로 한 좌경 모험주의 사상이 공산당 중앙을 통제하고있었다.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 지역에 온 림시 중앙대표도 왕명로선을 고취하면서 홍군이 창도한 정확한 전략, 전술을 배격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인 중국에서 혁명의 승리를 이룩하려면 장기적이고 복잡한 투쟁을 진행해야한다는 객관법칙을 무시하고 대도시를 공격하는 것으로 쉽게 혁명의 승리를 이룩할수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십만 반동군대가 포위 공격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모택동은 점차 중앙쏘베트 당과 홍군의 지도적 지위에서 밀려나 쏘베트 정부 주석직만 보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덕과 주은래는 계속 모택동이 창도한 적의 예봉을 피하고 약한 적들을 각개 섬멸하는 유격전술로 적의 제4차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1933년 2월, 주덕과 주은래가 이끄는 중앙홍군은 황피(黄陂)와 대룡평(大龙坪) 부근에 매복했다가 적 50사 전부를 섬멸하고 52사 사장 리명(李明)을 생포하였다. 3월 1일 홍군주력부대는 계속 적들을 추격하여 59사 사장 진시기(陈时骥)마저 생포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국민당군 총지휘 진성(陈诚)은 6새 사단 십여만명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공격해왔다. 3월 15일 홍군주력부대는 초대강(草臺冈), 동피(东陂) 부근에 매복했다가 적 2개 사단을 포위 섬멸하였다. 세차례 전투를 거쳐 홍군은 장개석 반동군대 3만여명을 포로하고 수많은 무기를 로획함으로써 제4파 반포위토벌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서금에서 제1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개최되였던 엽평촌을 답사한 2004년 2월 12일 오전, 답사팀은 제2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던 사주패(沙州坝)에 가 보았다. 사주패는 서금시 서남쪽 4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대회 개최지였던 강당은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하고있었다. 기념관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나무 숲 사이로 거대한 로씨야식 건물이 보였다. 건물정면은 6개 기둥에 의해 5개 부분으로 나뉘여 졌다. 가운데 정문이고 량옆에 각기 문 하나씩 있었으며 정문과 두 곁문 사이에 창이 있었다. 정문 웃부분에 커다란 붉은 별이 새겨져 있고 량옆에는 노란색으로 칠한 낫과 망치의 표식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2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던 회의장이였고 또 쏘베트정부 강당으로 사용되였던 유적지였다. 강당은 1933년 8월에 착공하여 년말에 준공되였다고 밝혀있었다. 제2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는 1934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사이에 진행되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1933년 10월부터 시작된 국민당의 제5차 포위토벌을 한창 진행되고있었다. 장개석은 동북 3성을 강점한 일본침략자들과 이른바 당고협정(塘沽协定)을 체결하는 한편 50여만 병력으로 홍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강당 문을 들어서니 써늘한 느낌을 주었다. 부지면적이 천 5백 평방메터에 달하는 강당 천정은 십여메터나 되어 공간이 퍽 컸다. 강당에는 무대를 향해 긴 나무 걸상들이 배렬되여있었다. 그러나 강당은 창이 적어서 비교적 어두운 편이였고 무대 옆 흰 벽에는 당시 제2차 대표대회에서 선출한 중앙집행위원회 명단을 밝혀 놓은 액자가 있었다. 자세히 찾아보니 거기에 조선혁명가 삐스티(毕士悌)의 이름도 있었다. 삐스티는 양림의 로씨야식 이름이다. 대회에서는 모택동의 정부사업보고를 청취하고 헌법대강(宪法大纲) 수개안을 채택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바로 이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던 것이다. 국공분렬 후 쏘련으로 갔던 양림은 동북에서 한동안 혁명하다가 주은래의 소환을 받고 중앙 쏘베트혁명 근거지로 오게 되었다. 1930년 봄에 귀국한 그는 상해에서 당 조직을 만났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동북의 유격 부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를 동북에 파견하였다. 양림은 조선의 녀혁명가 리추악과 함께 동북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양림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东满特委)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이주민이 많이 집중된 연변지역을 다니면서 대중운동을 령도하였고 혁명무장조직을 일떠세웠다. 1931년 일본침략자들이 동북을 강점하자 그는 재조직된 만주성 당 위원회의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게 되었다. 각 곳에서 유격대 조직에 진력하던 양림은 1932년 4월 길림성 반석(磐石)지역에서 일어난 기세 드높은 반일 농민봉기를 령도하였다. 그는 봉기자들을 이끌고 50여명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일제의 철길을 파괴하였다. 봉기후 양림은 조선혁명가 리동광(李东光), 리홍광(李红光)이 이끄는 <개잡이대>를 중심으로 반석 로농의용군(劳农义勇军)을 건립하였다. 이 부대는 장시기 동북에서 활약하면서 후에는 동북항일련군(东北抗日联军) 제1군으로 확대되였다. 1932년 가을, 중앙쏘베트지역과 홍군이 계속 확대됨에 따라 우수한 혁명인재가 많이 필요되였다. 양림은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상해 지하당 조직의 도움으로 중앙쏘베트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안해 리추악과 작별하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새로운 사업터로 떠났다. 그후로 양림은 사랑하는 안해이며 혁명동지인 리추악을 다시 보지 못했다. 동북에서 계속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리추악은 승리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적들에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황포군관학교 시절부터 오랜 상급이였던 주은래는 양림을 중앙정부 로동 및 전쟁위원회(劳动与战争委员会)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의 적위대(赤卫队)를 령도하여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 것이 위원회의 주요 과업이였다. 로동 및 전쟁위원회 주임인 주은래가 총책임을 맡았다. 양림은 이시기 쏘련에서부터 사용하던 삐스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어 어음으로 읽으면 “필사적”이라는 뜻도 된다.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그의 굳은 결심이 함축된 이름이다. 중앙 쏘베트지역에서 양림은 선후로 강서군구(江西军区) 회창(会昌), 심오(寻乌), 안원(安远) 군분구 사령원, 홍군 23군 군장으로 있었고 1933년 봄에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배치에 따라 월감군구(粤赢军区) 사령원으로 사업하였다. 이해 6월 그는 홍군주력부대인 제1방면군 1군단 참모장을 담임했고 1934년 1월부터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总动员武装部)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광범한 대중들을 동원하여 일선의 전투를 지원하였고 농민, 학생들을 어엿한 홍군전사로 훈련해 냈다. 그리고 유력한 후방담보를 제공함으로써 홍군 주력부대의 제4차 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적극 도왔다.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주요 책임자들은 조선혁명가인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모택동은 양림의 안해 리추악을 동북에서 중앙쏘베트 지역으로 전근시키라고 지시하기도 했지만 그 후의 상황이 어려워 실현되지 못했다.   (권립 교수) 1934년 1월 21일에 중화쏘베트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열렸다. 홍군총병참부 참모장으로 있던 양림은 대회의 주석단 성원으로 당선되였다. 이 회의에서 양림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됐다.   제2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개최되였던 강당에서 삐스티라는 이름을 찾은 우리는 모두 흥분되였다. 우리민족 혁명가가 이처럼 중요한 대회에서 또 이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였다. 비록 이름은 뒷부분에서 찾을수있었지만 중국 공산당내 주요인물들인 섭영진, 엽검영, 림표, 진의 등과 서렬을 나눌 정도였으니 중국공산당에서의 그의 지위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수있었다. 2천여명을 용납할 수 있는 강당은 회음(回音)이 좋았고 시야가 탁 트였다. 창문보다 문이 많은 것이 특징이였는데 해설원의 설명에 의하면 적의 폭격에 대처하기 위해 쉽게 회의장을 빠져 나갈수있도록 문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강당 건물 뒤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너무 오래된 방공호이고 또 지질구조의 변화를 고려해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 개최지에 방공호까지 파놓고 있었으니 당시 홍군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할수있었다. 국민당의 비행기가 수시로 폭탄을 던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 유적지 곁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원상태로 잘 보존된 사주패 마을이였다. 당시 쏘베트 림시중앙정부 기관이 바로 이 마을 수십채의 가옥에 설치되였다. 집들은 대체로 흑과 기와로 되어 있었다. 강남의 풍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은 모두 흰벽에 검은 기와였고 붉은 글로 <홍군만세!>, <인민들은 홍군을 옹호한다!>는 구호가 씌여진 담벽이 이따금 보였다. 푸른 잔디와 나무 숲 사이에 얼른거리는 가옥들은 유난히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강당과 마을 사이에는 거대한 고목에 가리운 기와집 한 채가 있었다. 모택동이 거주하던 곳이다. 나무는 긴 가지를 펼쳐 마당과 기와집을 모두 덮을 정도였다. 홍군부대 지휘권을 박탈당한 모택동은 이시기 군중사업과 당 작풍 사업에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이를 많은 농민들과 접촉하면서 인민들의 질고를 헤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였다. 쏘베트 중앙정부 주석이였던 모택동은 간부들의 봉건악습을 고쳐주고 부패를 방지하는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군중의 생활을 관심하고 사업 작풍에 주의하자>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고 또 <탐오, 랑비행위를 징벌할데 관한> 제26호 주석령을 내렸다. 그때 쏘베트 2차 대회 강당을 지을 때 공정처의 좌상운(左祥云)이 처장의 직무를 리용해 공금 246원을 탐오하고 도주하다 체포되였다. 중앙정부는 좌상운을 공개 심판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유력한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쏘베트 지역의 군민의 정은 더욱 깊어 졌고 인민들은 공산당 간부와 홍군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인민들은 당의 간부들을 애대하였고 자녀들을 홍군에 보냈다. 모택동은 실천속에서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을 발동한다는 군중로선을 제기하게 되었다. 쏘베트 지역 인민들은 지금도 스스럼없이 농민들과 접촉하고 인민들의 질고를 헤아려주는 모택동을 잊지 않고있다. 사주패 마을 앞에는 작은 늪이 있었고 늪가에는 작은 돌기둥과 쇠사슬로 둘러놓은 우물 하나가 있었다. 우물은 1933년 9월 모택동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함께 팠다고 한다. 1950년 현지인들은 모택동을 기념하기 위해 우물가에 비석을 세우고 ‘물마실 때 우물 판사람 잊지 않고 시시각각 모주석을 그리네’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이 우물을 붉은 우물이라 해서 홍정(红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우물을 마실수있었는데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모택동 주석과 같이 실천을 중시하고 인민의 질고를 헤아려 줄줄 아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을 이끌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낼수있었다. 때문에 양림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은 중국공산당을 믿었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함께 조선인민의 독립이 이룩될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투쟁하였던 것이다.  
43    제32회 제1차 쏘베트대표대회 개최지 답사 댓글:  조회:4258  추천:49  2007-12-11
     강남의 명산 무이산(武夷山) 서쪽 기슭의 풍요한 평지에 위치한 서금은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 혁명의 중심지였고 중국공산당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국민당 반동파들은 수십만 부대를 끌어모아 서금을 중심으로 한 쏘베트지역을 포위 토벌하였다. 중국공산당은 홍군과 광범한 로농대중을 령도하여 적들의 포위토벌을 대항하는 한편 쏘베트지역내에서 활발한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땅 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분여하고 농민들을 압박, 착취하던 악패 지주들이 제거하였다. 쏘베트지역 인민들은 드높은 열성으로 생산에 뛰여 들었고 홍군부대를 도와 적들의 공격을 물리쳤던 것이다. 서금에 도착한 2004년 2월 12일 오전 우리는 서금시 선전부의 도움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우선 제1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유적지로 가보았다. 차는 323번 국도와 326번 국도가 사귀는 곳으로 빠져 쏘베트정부 설립지였던 엽평(叶坪)으로 달렸다. 서금은 강서성 동남부의 주요 도시로서 강서, 복건, 광동 3성을 이어주고 있었다. 고대에는 서금을 양주역(杨州域)이라고 불렀고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을 통일한 다음 구강군(九江郡)에 귀속시켰다. 그후 953년 이곳에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서금은 1994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서금 시구역을 벗어나 동으로 약 3킬로메터 가니 엽평향 엽평촌 마을이 나타났다. 중화쏘베트 제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는 바로 엽평촌 마을에 있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방되여 국내외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고있었다. 유적지는 잘 보수되여 있었다. 정원에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에 고풍적인 건물이 눈에 띄였다. 흰 바람벽에 조그마한 창이 한 줄로 배렬되여있었고 깃을 쳐든 검은 기와는 건물의 위엄을 보태주었다. 현지 대지주가 사당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사씨사당(谢氏祠堂)이라고 하였는데 객가인(客家人)의 전통적인 3진원(三进院) 구조였다. 사당은 2층이였는데 건물은 중심부분의 빈 공간을 둘러싸고 축조되여 있었다. 1931년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 이곳에서 제1차 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대회에서는 쏘베트 림시중앙정부를 수립하고 모택동을 정부주석으로 선거하였다. 쏘베트 림시중앙정부 수립은 모택동과 주덕이 거느린 홍군이 국민당 반동파들의 3차례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친 토대우에서 이룩되였다. 당시 상해의 중국공산당 중앙은 홍군으로하여금 대도시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모택동은 현실을 정시하고 적의 예봉을 피해 약한 적을 각개 섬멸하는 전략전술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홍군 1군단과 3군단은 장사와 남창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복건 서부로 진격하였다. 1930년말부터 1931년 중순까지 홍군 주력부대는 적을 깊이 유인하고 각기 포위, 섬멸하는 령활한 전술로 국민당 반동파들의 세차레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홍군들의 사기는 전례없이 높았고 근거지도 많이 확대되였다. 그리하여 로동자, 농민들을 대표로하는 쏘베트 중앙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였던 것이다. 제1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던 사씨사당 강당 정면 벽에는 붉은기와 모택동, 주덕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강당에는 수십명이 앉을수 있는 나무 걸상이 있었는데 서서 방청하는 사람까지 합쳐 수백명 정도를 용납할수 있었다. 강당 량켠에는 널판자로 막은 작은 칸들이 있었으며 칸마다 천으로 문을 대체하고있었다. 방에는 침대하나와 책상, 걸상 하나씩 놓을수 있는 정도였다. 칸마다 조그마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외교인민위원회, 군사인민위원회, 재정인민위원회, 로동인민위원회이라고 씌여진 명칭을 보아 당시 림시중앙정부 어느 부서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시기 상해 한인지부에서 파견되여 온 조선혁명가 최정무(崔政武)가 조선인 대표로 이 정부수립 대회에 출석해 연설까지 하였다. 최정무(1910--??) 일가는 일찍부터 로씨야 우쑤리스크에 이주하였고 최정무도 그곳에서 태여 났다. 로씨야 10월 혁명이후 자유와 해방을 받은 최정무 일가는 토지를 분여 받았고 최정무는 우쑤리스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청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에게 짓밟히는 조선과 일제수탈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생각하니 자기만 편히 지낼수 없었다. 그리하여 16살 나던 1926년, 최정무는 혁명의 열의를 안고 중국 상해로 왔다. 그는 상해에서 지하당 조직의 파견을 받고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에는 황포군관학교의 기술주임 교관이였던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장개석이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자 최정무는 학교병원에 몸을 숨겨 적들의 탄압을 피했다. 광주봉기가 실패한 후 그는 도보로 상해 당조직을 찾아갔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앙혁명근거지인 서금에 와서 홍군 군사기계 수리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홍군 후방정치부 주임이였던 모택담(毛泽覃)의 지극한 관심을 받았고 그와 매우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모택담은 모택동의 셋째 동생이였다.   (권립 교수) 중화로농쏘베트 제1차 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열렸습니다. 조선족 홍군전사 최정무가 조선족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가했고 대회에서 발언했습니다. 그는 형제민족 대표들과 함께 모택동 동지를 주석으로 하는 중화쏘베트 공화국 중앙정부 성원들을 선거하였습니다.   1931년 11월 7일,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소집되자 최정무는 600여명 대표의 한사람으로 대회에 참가했고 또 발언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었다. 나어린 최정무는 몹시 격동되였고 또 많이 긴장되여 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하였던 말을 죄다 잊어버리고 대회 축사를 하였든지 자기 결심을 발표했든지 기억에도 남지 않는 말을 하였다고 훗날 이야기하였다. 최정무가 연설대에서 내려오자 주석대에 앉았던 모택동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모택동은 최정무의 손을 잡고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자상히 물어보았다 한다. 서금시 엽평향 사씨사당에서 소집된 제1차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는 중화쏘베트 림시중앙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중화쏘베트공화국 헌법대강>을 반포하였다. 대회는 또 여러 가지 법령과 조례를 반포하고 모택동, 주덕, 주은래, 항영, 류소기 등 63명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하였다. 대회가 있은 후 회의가 있었던 사씨사당 강당은 15개 작은 칸으로 나누어 림시정부 각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후 최정무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홍군군정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 후 학교 사무장 사업을 하다가 홍군 1방면군 제22군의 부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1년 4월 국민당의 제2차 포위토벌이 시작될 때 최정무는 련 지도원으로 임명되여 전선에서 적들과 싸웠다. 1933년 적들의 제4차 포위토벌을 물리치는 전투에서 최정무는 적탄에 바른쪽 발목을 맞고 홍군 제3병원으로 호송되였다. 치료를 받아 탄알을 뽑았지만 그는 지팽이를 짚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다시 전선에 나가지 못하였다. 당에서는 그를 병원에 남아 당총지부 서기 겸 지도원으로 사업하게 하였다. 1934년 10월 홍군은 장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병원에는 2백여명 중상자들이 있었다. 최정무는 백여명 의료일군들과 함께 중상자들을 일반인 가정에 숨겨둔 후 대부대를 따라 감주로 떠났다. 백여명이 한데 몰려 움직일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소분대로 나누어 행동하였고 나중에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최정무는 호북의 농민으로 위장하고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자들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는 먼길을 도보로 걸어 1936년 상해에 도착하였지만 려운형 선생과 기타 조선혁명자들을 찾지 못했다. 1937년 <7.7>사변이후 최정무는 무한, 개봉 등지를 다니며 공산당 부대를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섬북으로 가던 길에 국민당군의 강제징병에 끌려가게 되었다. 국민당 부대에서 그는 국민당 통신부대 두목을 설득하여 수십명 통신병을 이끌고 태항산의 팔로군을 찾아갔다. 팔로군을 찾은 최정무는 무정(武亭)이 거느린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는 1931년 11월부터 1933년 4월까지 엽평에서 사무를 보았다. 후에 변절자가 나타나 중앙정부 위치가 적들에게 폭로 되였기 때문에 사주패(沙洲坝)로 자리를 옮겼다. 대회가 개최 되였던 강당 주변의 위층 방에는 당시 쏘베트 주요 지도자들의 거처로 사용 되였다. 강당에 서 있노라니 간소하고도 열렬했던 당시 대회모습을 그려볼수있었다. 더욱이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대회에 참가하였다니 같은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였다. 사씨사당 주변에는 또 단층 집 몇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기념관 전시물들이 진렬되여있었다. 단층과 2층으로 된 집들은 모두 검은 기와에 귤색 회칠을 해 놓아 더욱 정겹게 보였다. 일조가 강한 남방이여서 그런지 집마다 모두 창과 문이 매우 작은 것이 인상적이였다. 정원은 매우 컸다. 푸른 잔디가 깔려있고 거대한 고목이 무성한 정원은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정원 오른쪽으로 조약돌을 깐 유보도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니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홍군 광장이였다. 광장 가운데는 포탄모양으로 만든 십여메터 높이의 붉은 기념탑이 세워져있었다. 홍군선렬기념탑(红军先烈纪念塔)이였다. 기념탑 맞은편에는 조그마한 홍군검열대(红军检閱臺)가 설치 되여 있었는데 당시 주요 지도자들이 홍군들을 광장에 모여 놓고 연설을 하거나 부대 훈련을 검열하기도 하였다. 검열대는 또 공연무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한다. 검열대로부터 기념탑까지 검은 숱을 바른 돌로 “선렬들의 발자취를 따라 (蹋着先烈的足跡)”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당시의 기념탑은 국민당에게 파괴되였고 이 탑은 후에 복원된 것이다.
42    제31회 광주로부터 서금까지 댓글:  조회:4105  추천:45  2007-12-11
  남창봉기와 광주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굴할줄 모르는 중국인민들은 중국 전역에서 혁명활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고 강서, 호남, 호북, 광동, 광서, 섬북 도처에 농촌혁명근거지가 나타났다. 하나 하나 모여진 작은 불꽃이 광야의 거세찬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국공분렬 후 중국공산당은 피 아픈 상흔을 안고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하여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위대한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권립 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우리 당은 농촌혁명근거지를 건설하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며 종국적으로 도시를 탈취할데 관한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혁명로선에 따라 농촌쏘베트구역을 건설하였습니다. 중앙쏘베트구역은 강서성 서금을 중심으로 한 중앙혁명근거지를 가리킵니다.   광동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답사팀은 홍군의 수도였던 강서성 서금(瑞金)으로 가기 위해 광주시 기차역으로 갔다. 길에서 문뜩 김치와 랭면 생각이 나서 저녁은 조선음식점에서 조선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장기사에게 물어보니 기차역 부근에 한국음식점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음식은 엄청 비쌌다. 할수없이 35원 한 그릇하는 랭면을 한사람 하나씩 먹었다. 늘 밥 두 그릇을 먹던 우리는 랭면 하나로는 도저히 안 되였다. 한국식 랭면이여서 맛도 잘 맞지 않았지만 더욱이 량도 적었던 것이다. 우리는 랭면 한 그릇씩 더 시키기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되여 밥을 사서 랭면국에 비벼 들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기차역에서 기사 장씨와 작별했다. 광주답사기간 늘 함께 다닌지라 작별하기가 자못 기분이 이상하였다. 20대 총각인 장씨도 퍼그나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회사 퇴근시간이 훨씬 넘었고 그래서 장씨를 금방 돌려보냈다. 우리가 역으로 들어가려는데 장씨가 막 달려와 기차역에서 조류독감 검사를 하면 꼭 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걱정해 주는 그의 성실하고 열정적인 인품에 코가 찡해 남을 느꼈다. 우리는 역에 들어가 강서성 감주(赢州)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감주까지 가려면 7시간 넘게 기차를 타야 했다. 그리고 감주에서 다시 차를 바꾸어 타고 서금으로 가야했다. 서금에는 기차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감주를 거쳐가야만 했던 것이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새벽 2시경에 기차에서 내릴수 있을 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부터 분주히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니 일찍 잠자는 것이 좋았지만 좀처럼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손중산을 따라 신해혁명을 참가했던 신정, 두려움 없이 적을 저격하였던 의렬단의 의사들,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에 참가해 피흘리며 싸웠던 조선혁명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태껏 력사연구나 답사는 무미건조 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력사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듯 우리에게 다가왔고 늘 그들과 대화하는 듯 하여 좋았다. 그들의 사상과 성격, 인품 그리고 굴함없이 항쟁하는 강의함에 늘 감동을 받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수시로 검토해 보게 되어 좋았다. 답사팀이 탄 기차가 강서성 남부의 주요 도시 감주에 도착한 것은 2004년 2월 12일 새벽 3시 30분이였다. 등불이 희미한 기차역을 나와 보니 여기서 하차하는 려객은 얼마 되지 않았다. 텅 비여 있는 넓은 기차역 광장에는 몇몇 장사군과 택시기사들이 있을뿐이였다. 몇 명 기사들이 몰려와 열심히 자기 차를 타라고 권하였다. 택시기사들과 서금으로 가는 택시 료금을 흥정하였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들도 우리가 낯선 외지인인줄 번연히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처럼 일찍부터 나와있는걸 보아서도 서로 동업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이들을 제치고 따로 택시를 구하려면 꼭두 새벽인터라 어디에서든 택시를 잡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렇다고 지금 시각에 장거리 뻐스를 타러 갈수도 없었다. 남방이라 하지만 새벽녘의 추위는 자못 심했다. 끝내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차는 곧바로 감주를 떠나 서금으로 향했다. 3시간 정도면 도착한다고 하였다.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가로등만 밝게 켜진 감주를 그냥 그렇게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차는 도시를 벗어나 323번 국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서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 얼마 안되여 잠들어 버렸다. 호기심에 가득찼던 촬영 기자도 캄캄한 차창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냥 잠들어 버린 듯 소리 없었다. 날이 훤히 밝을 무렵 점점 더 추워 들었다. 추위에 정신이 조금 들었지만 그냥 자려고 애썼다. 차가 많이 낡았기 때문에 열풍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택시기사가 자기도 추웠던지 열풍기를 켜서 차를 덥혔다. 몸이 따스해지자 다시 잠들어 버렸다. 차가 날이 채 밝지 않은 서금시에 들어서서야 모두들 잠을 깼다. 그만큼 배도 고팠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생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쉽게 찾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서금시 당위원회가 어느 일반인 가정을 찾기보다도 더 어려웠던 것이다. 기사가 현지인들과 열심히 물어 보았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같은 강서성이라지만 서금과 감주 방언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표준말로 대화하려니 그들은 알아들어도 그들이 하는 말은 역시 방언이여서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웠다. 너무 일찍 한 터라 거리에는 행인이라곤 없었다. 일찍 일어나 길을 쓰는 도시 청결 일군과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파는 장사군이 있었을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쪽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저쪽이라 하여 우리는 갈팡질팡 20여분이나 헤맸다. 겨우 믿음직한 사람에게 물어서 찾아가 보았더니 철 대문이 굳게 닫힌 어느 자동차 부품회사였다. 그처럼 큰 시정부가 아무런 간판도 없을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더 알아볼수도 없었다. 기사도 이젠 맥을 버리는 듯 싶었다. 지나는 길에 장춘빈관(长春宾馆)이 보였다. 일단 주숙부터 해 놓고 볼판이였다. 매대에 가 물어보니 카운트 아가씨가 간판이 없던 그 위치가 시정부가 분명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원래 시정부 청사는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광장 곁에 있었는데 최근 시정부를 옮겼다고 하였다. 그런대로 짐을 4층까지 들고 올라가 침대가 셋인 방에 행장을 풀고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아침 너무 일찍 다른 사람에게 페를 끼치기 싫어 7시까지 기다렸다가 서금시 당위원회 선전부와 련락하였다. 선전부의 언론분야를 책임진 뢰우정(赖雨亭)씨와 련락이 되었다. 우리가 이미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장춘빈관에 주숙을 잡았다고 알렸다. 뢰우정씨가 8시에 마중오겠다하니 우리는 아침 먹으러 나갔다. 서금은 비교적 번화해 보였다. 평원지대여서 부지면적이 꽤 컸고 소도시로서는 인구가 근 60만명에 달해 비교적 많은 편이였다. 7,8층 되는 건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도시는 록화가 잘 안되였고 별로 어떻다할 도시 시설도 없었다. 주요한 거리를 내놓고 기타 거리들은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 간이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인은 물고기를 비롯한 료리 3개를 올렸다. 그리고 사발을 내놓으면서 밥은 주방 큰 가마에 있으니 먹을 만치 스스로 떠다 먹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방에 들어가 밥 한 사발 떠다가 료리를 해서 먹었다. 물고기 료리가 먹을만 하고 기타 것은 더 절이 가지 않았다. 밥 먹고 나서 값을 치렀는데 16원이였다. 광주에서 배도 부르지 않던 랭면 한 그릇에 35원을 주던 일을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갔다. 장춘빈관에서 뢰우정씨를 만났다. 서로 인사를 마치자 그는 이곳 빈관이 루추하고 불편하니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강서반점(江西饭店)으로 갔다. 정원도 가진 비교적 훌륭한 호텔이였다. 서금시 당위원회 선전부 류량(刘亮)부장이 로비에서 기다리고있었다. 40대 초반인 류부장은 조금 실팍한 사내였는데 매우 열정적이였다. 방에 자리를 정한 후 류부장이 서금의 발전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서금시는 최근년간 도시건설 투입을 늘이고 부근 혁명유적지들을 보수함으로써 국내외 관광객들을 많이 류치하고 있었다. 외국상인들을 류치할 조건은 아직 역부족이였지만 광동, 복건성과 린접한 우세를 리용하여 경제가 비교적 발달한 광주, 심수, 하문의 상인들을 류치하고 나아가서는 향항, 오문, 대만지역의 상인들을 류치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도시 중심에 위치했던 시정부 청사도 향항, 대만 상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광장곁에 커다란 상업청사를 지었다고 한다. 20세기 20년대 말, 수억 중국인민의 재난은 끝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계속되는 전란과 제국주의, 봉건주의 이중압박에 시달리고있었다. 국민당은 이시기 북벌전쟁을 계속하여 북경, 천진을 점령하였지만 북벌전쟁에서 막강한 실력을 확보한 풍옥상(冯玉祥), 리종인(李宗仁), 염석산(阎锡山)은 장개석의 독재에 불복해 중원대전(中原大战)을 일으켰다. 장개석은 상해지역의 두터운 경제력과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으면서 리간술과 회유책으로 이들을 전승하였다. 이시기 동북으로 패퇴한 군벌 장작림(张作霖)이 일제에게 피살되자 그의 아들 장학량(张学良)이 남경정부에 복종할 것을 표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표면적으로나마 중국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줄곧 일본제국주의자들과 타협하면서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다. 그는 동북으로 출병한 일본침략군에 항격하지 말고 관내로 철수할 것을 장학량에게 명령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일으켜 부유한 중국 동북땅을 점령하였고 수천만 동북인민을 노역하였다. 중국정세에 큰 실망을 느낀 수많은 혁명자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중국공산당이 창설한 농촌혁명근거지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까지 모택동과 주덕(朱德), 팽덕회(彭德怀)를 비롯한 홍군 지도자들은 정강산(井冈山) 혁명근거지를 창설한후 선후로 서금을 중심으로 한 강서성 남부와 복건성 서부 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하였다. 혁명근거지가 확대되고 홍군의 력량이 장대 됨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이 상해로부터 서금에 옮겨왔고 또 서금에 중화쏘베트공화국(中华苏维埃共和国) 림시중앙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때로부터 이 지역은 중앙쏘베트 지역으로 불리웠고 서금은 공산당 붉은 정권의 수도라는 뜻으로 홍도(红都)로 불리우게 되었다. 1930년에 이르러 하룡(贺龙)이 개척한 상악서(湘鄂西)혁명근거지, 서향전(徐向前)이 이끄는 악예환(鄂豫皖) 혁명근거지 그리고 좌우강(左右江), 해륙풍, 섬북(陜北)을 비롯해 10여개 혁명근거지가 창설되였다. 중앙쏘베트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각 혁명근거지에서는 기세 드높은 토지혁명을 진행하였으며 홍군부대를 장대시켰다.   (권립 교수) 중앙쏘베트구역에는 우리민족 혁명갇르이 3십여명, 대표적인물이 바로 무정, 양림, 최정무 등입니다.   우리의 조선인 혁명자들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에 패배의 상흔을 안고 계속 투쟁하였다. 일부는 상해로 갔고 일부는 무한으로 갔으며 또 일부는 다시 동북으로 갔다. 또 많은 사람들은 홍군부대를 따라 혁명근거지 창설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자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고 봉건주의 억압에 허덕이는 동방피압박민족의 해방은 무력항쟁으로만이 성공할수있다고 믿었다. 그 어느 강대국에 의지할것이 아니라 천백만 로농대중의 힘에 의지하여야만이 해방의 그날을 맞이할수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정무, 무정, 양림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중앙쏘베트지역의 수도인 서금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최정무, 무정,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홍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선인 혁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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