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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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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대혁명기시의 공적 댓글:  조회:5773  추천:2  2012-09-02
   중국의 조선족이 대량 중국동북 각지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력사는 백 50여면이라고 볼수있다. 20세기초에 이르러 그 수가 2백만에 달했다. 우리민족 선인들은 신근한 로동으로 동토대인 동북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벼농사에 성공함으로써 동북의 생산력을 크게 추진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침략전쟁을 위한 대량의 물질적 자원을 비축하기 위해 조선반도로부터 대량의 조선농민을 중국동북이거나 화북 발해 연해지역으로 강제로 집단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거나 광산개발, 도로수건, 철도부설을 비롯한 고된 로동을 시켰다. 1910년, 일제가 전반 조선반도를 침점하자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지사들은 중국으로 와서 반일투쟁과 혁명의 길을 찾았다. 이들은 중국내 광범한 조선주민들을 단합시켜 불효불굴의 의지로 반일투쟁을 진행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이들은 또 중국공산당을 따라 장개석 독재정부를 전복하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창립하기 위해 영용히 싸웠다. 조선지사들이 중국경내에서 광범한 조선민족 주민들을 이끌고 중국혁명에서 중국인민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공산당을 따라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간 빛나는 력사는 대체로 세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있다. 하나는 중국 대혁명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전쟁시기이며 또 해방전쟁시기이다.   대혁명시기의 공적    1910년 일본제국주의는 이른바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을 침탈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저락되였다. 이로부터 조선의 수많은 유지인사들은 국가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간고하고도 장기적인 반일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중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혁명을 길을 탐구하면서 헌신적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에 와서 중국의 반제반봉건의 위대한 투쟁에 참여하였고 수억 중국인민과 함께 진리를 찾고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중국혁명의 승리는 곧 조선혁명의 승리를 가져올수있고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는 필연코 일본제국주의의 멸망을 가져오고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올것이라고 믿었던것이다.   독립운동가 신정(1879~1922)   1910년 신정(1879~1922)이 중국 상해로 왔다. 그는 “민생보”를 운영하면서 송교인, 진기미, 황흥을 비롯한 중국동맹회 중요인물들을 알게 되였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손중산의 삼민주의 사상을 접수하게 되였다. 1912년에 신정은 “동제사”를 만들어 광범한 조선지사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송교인, 호한민, 교중개, 진과부를 비롯한 중국 동맹회 중요인사들의 힘을 빌어 대량의 조선청년들을 보정군관학교, 호북강무당, 운남륙군강무당 등 군사학교에 보내 현대화한 군사지식을 배우도록 하였다. 1916년에 운남륙군강무학당 제12기 기병과에 입학한 조선인으로는 배달무, 김정, 김세준(김자렬), 최진이 있었다. 이들은 가장 일찍 중국군사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받은 조선인이였다. 조선 3.1운동이 있은후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상해에 모여들었고 상해에서 한국림시정부를 세웠다. 신정은 림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 대리를 비롯한 직무를 맡았고 손중산과의 련계를 강화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 호국군정부는 한국 림시정부를 승인하였고 1921년 3일에 정식 외교관계를 설립하였다. 그후 신정은 한국림시정부의 무능함과 돌이킬수없는 분렬사태에 극도로 되는 실망을 가지고 1922년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였다. 이때 중국광동의 진형명도 반란을 일으켜 손중산의 혁명도 큰 위기를 겪고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처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제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신정은 이중 타격을 받고 극도로 되는 실망속에서 병으로 쓰러지고말았다. 그는 아예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하던끝에 1922년 9월 5일 상해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사후 상해 만국공원에 안장되였다. 상해 만국공원의 만국공동묘소(이곳에 묻힌 조선의 독립지사들의 유해는 후에 한국에 봉환되였다)   3.1운동후 조선인민의 반일투쟁형식은 주로 한국림시정부와 중국동북의 여러 조선민족 무장에게서 체현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닌 조선의 애국청년들은 가산을 팔아 중국에 건너와서 조선인 집거지에 학교를 세우고 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1920년 가을, 동북의 여러갈래 반일유격대들이 한데 모여 청산리에서 일본군 근 천명을 소멸하는 청산리 대첩을 이룩해냈다. 한편 상해림시정부의 항쟁주장은 줄곧 같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강대국의 이른바 위임통치에 환상을 걸고 외교구국을 주장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일본과의 타협까지 주장하였다. 주장이 달랐고 림시정부 내부의 파벌도 분립해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싸웠다. 대부분 지사들이 리승만을 림시정부의 초대주석으로 추대하였지만 그는 멀리 미국에 있으면서 줄곧 상해에 와서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수많은 반일지사들과 애국지사들이 큰 실망과 방황속에서 허덕일때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로씨야 10월혁명이 폭발해 봉건제국을 뒤엎고 참신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하였던것이다. 이로써 공산주의 사상이 신속히 중국대지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 리동휘(1873~1935)   1919년 9월에 조선공산주의자 리동휘(1873~1935)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상해 한국림시정부의 활동에 참가하였다. 조선의 의병운동이 실패한후 리동휘는 로씨야 원동지구로 가서 1915년에 아시아지구 첫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었다.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림시정부는 새로운 활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0년 리동휘는 려운형과 함께 상해 공산주의소조를 세웠고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재조직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동북간도(연변)지구에 사람을 보내 공산주의소조를 세웠고 중국의 공산중의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로어에 정통한 안병찬을 시켜 공산국제의 대표 위진스키를 데리고 중국 공산주의자 리대소, 진독수를 만나게 하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창립하게 했다. 광주 황포도의 군관학교 기념관   무한 군관학교 옛터   무한 구관학교 광주 중산대학   대혁명시기 손중산은 “로씨야와 손잡고 공산당과 손잡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광동성은 중국혁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대량의 조선청년들도 광동성에 찾아왔다. 조선의렬단의 단원 강세우, 김성숙(김규광), 장지락(김산), 리영준, 최원, 서의준, 리활(이륙사) 그리고 조선 지식청년 마준, 김동주, 김원식 등이 중산대학에 와서 혁명리론을 학습하였다. 이때 의렬단 단장 김원봉은 단원들을 데리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총명책”을 보면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교관과 학원을 찾아볼수있다. 제3기에 리빈, 차정신(김지일), 장성철, 리일태 등 4명이 있었고 제4기에는 강평국, 류원욱, 박효삼, 박건웅, 최림(김원봉), 양검, 전의창, 리우각, 권준, 리집중, 왕자량, 윤의진, 최영택, 김종, 리종원, 로일룡, 리기환, 오세진, 전홍묵, 백홍, 로세방, 박익제, 문선재, 로건 등 무려 24명이나 있었다. 제5기는 김호원, 안유재, 장흥, 장익 등 4명이다. 황포군교 건교초기 쏘련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강섭무가 포병훈련교관을 맡았다. 그리고 상해림시정부가 보낸 김철남이 제3교도단 소좌 부퇀장을 맡았고 조선인 손두환이 교장 판공실 부관을 맡았으며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조선인 리계동이 부관을 맡았고 리검운(리철호)은 조교를 맡았다.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조선인 양림은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 고문단의 조선인 양달부(량도부)가 포병교관으로 있었다. 제3기를 졸업한 리빈이 정치대대 구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제5기에는 양림이 중좌 교관으로 있었고 오성륜, 채원개, 최추해, 안응근, 오명, 리일태 등 조선인 교직원이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에 입학한 조선청년은 백여명이 되지만 4.12반혁명정변이 일어났기에 대부분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하였기에 학생명책에는 김호원을 비롯한 4명밖에 없다. 황포군교의 조선인 교관과 학원은 대부분 “류, 양”반란을 평정하는 투쟁과 국민혁명군의 동정에 참가해 공훈을 세웠다. 특히 중좌 교관 양림과 소좌 구대장 최용건은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첫 무장대오인 엽정독립퇀의 군관을 맡았다. 양림은 독립퇀 제3영 영장을 맡았고 최용건은 전부 조선청년으로 편성된 특무련 련장으로 있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공동연히 반혁명정변을 발동해 총부리를 공산당에게 돌렸다. 이로써 국공분렬이 초래되고 “로씨야와 손잡고 공산당과 손잡는다”는 손중산의 주장과 일치하게 제국주의와 본건주의를 반대한다던 대혁명은 최종 실패하고말았다. 대혁명이 위기에 처해있을때 중국공산당은 단연히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발동함으로써 간고한 무장항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국민혁명군에는 2백여명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는데 엽정부대의 길림성 룡정사람인 박인과 흑룡강성 녕안의 김철강이 남창공원의 수관음청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맹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흑룡강성 녕안의 방월성은 결사대에 참가해 천주교회당의 완고한 적을 소멸하였다. 하룡부대의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를 비롯한 조선인 장병들은 고루와 적 지휘부를 공격하는 치렬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김원봉과 조선의렬단 단원들은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서 싸웠다. 남창봉기가 실패한후 엽정을 비롯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광주에 모여 공주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대혁명시기 광동에 모여온 대량의 조선청년들이 모두 이번 봉기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교관과 학원들 그리고 중산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광주봉기에서 중층 령도직을 맡았다. 1927년 12월 11일 아침, 봉기 총지휘인 엽정이 직접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을 거느리고 사하진과 연당의 주둔군을 공격하였다. 교도단 제2영 5련의 150명 장병은 모두 조선청년이였다. 련장은 조선인 박영(박근성)이였다. 이들은 30여명 적을 소멸하고 5백여명 적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사하진 전투를 신속히 끝냈다. 중산대학의 김산(장지락)은 황포군관학교 포병교관인 량도부와 함께 봉기군을 거느리고 연당의 적 포병진지로 달려갔다. 쏘련 고문단의 일원이며 황포군관학교 포병교관인 양도부는 장발규 부대에서 위망이 아주 높았다. 그는 연당에 도착하자 김산의 통역을 통해 적 포병진지의 병사들을 설득하였는데 2천여명이 무기를 놓고 투항하였다. 봉기가 시작된후 황포군관학교의 최용건도 특무영 제2련의 조선인 장병들을 거느리고 행동하였다. 그는 동북교구에서 지주무장을 격퇴한후 사하진에서 와서 교도단 2영 5련의 조선인 장병들과 함께 사하진을 수비하였다. 12월 13일, 적이 도처에서 반격해왔다. 조선인 장병들은 제때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봉기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간고하게 적과 싸웠다. 교도단 2영 5련 150명 조선인 장병들은 련장 박영의 지휘하에서 적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광주의 “중조인민 혈의정”의 기념비에는 이들의 영웅적 사적이 영원히 새겨져있다. 쏘련에서 군사학교를 다닌 다른 한 조선인 교관 리용은 로동자 무력을 거느리고 적 공안국을 점령하는 싸움을 지휘하였다. 그들은 기관총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적 장갑차 한대를 폭파하고 공안국을 점련하였고 적 천여명을 포로하였다. 12월 12일 광주 공안국 부근광장에서 쏘베트정부 수립대회가 진행되였다. 조선인 량도부, 김산, 김규광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김규광은 정부 16명 위원의 한명으로 선출되여 숙반위원회 위원을 맡났다. 그리고 김산은 로동자부력부에서 일을 보았다. 12일 적의 반격은 더 막강하였다. 전투는 령남, 장제, 사면 등지에서 치렬하게 진행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제3기를 졸업한 조선인 교관 리빈과 량도부는 함께 사면에 대포를 걸고 적을 지원하러온 제국주의 군함을 포격하였다. 성세호대했던 대혁명은 끝내 실패하고말았다. 조선혁명가 장지락(김산)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박영(박근식) 광주 광주봉기 렬사릉원의 중조혈의정 중조혈의정의 비문   중국공산당의 무력항쟁은 도시로부터 광범한 농촌으로 이전하였으며 농촌에서 홍군을 조직하고 토지혁명을 진행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세우고 확고한 혁명근거지를 개척하였다. 많은 조선곤산주의자들도 쏘베트구역에 도착해 토지혁명에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양림과 무정이다. 양림 무정 양림(1898~1936), 원명은 김훈이고 자는 지원이다. 혁명하면서 그는 또 양주평, 양녕, 삐스티 등 멸명을 사용하였다. 3.1운동이 있은후 그는 일경의 눈을 피해 둥국동북에 와서 통화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그는 동북의 여러 조선인 반일유격부대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근 천명을 소멸하였다. 그후 양림은 상해림시정부의 소개로 운남륙군강무학당 제16기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황포군관학교에 가서 교관으로 있었다. 이때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국민혁명군의 몇아의 동정전투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 군사학교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졸업후 귀국해 동북의 동만특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1932년 가을 그는 주은래의 부름을 받고 쏘베트구역 서금에 가서 중앙정부 로동및 전쟁위원회 참모장을 맡았다. 서금에서 그는 또 강서군구 회창, 순오, 안원 군분구 사령원, 홍군 제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홍군 제1군단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 무장부 참모장 등직을 맡았으며 쏘베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거되였다. 1934년 그는 중앙홍군대학 군사총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무정(1905~1952)의 원명은 김무정이다. 큰 뜻을 품고 일제를 극도로 미워한 그는 애국청년운동에 참가해 일경의 추적을 받았다. 1924년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하북성 보정에서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정은 장가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군교 졸업후 북벌전쟁과 상해 로동자 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6월에 상해 당조직은 무정을 쏘베트근거지에 파견하였다. 그는 등대원의 소개로 팽덕회의 홍군 제5군에 참가하였다. 무정의 뛰여난 포병기술은 팽덕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그는 신속히 패방으로부터 련장,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홍군에서 홍군 포병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그후 무정은 쏘베트구역 홍군특과학교 제2임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중앙홍군이 장정을 할때 양림은 중앙직속 홍색간부퇀 참모장을 맡았고 무정은 중앙직속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를 맡았다. 양림과 무정은 모두 승리적으로 연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양림은 1936년 홍군이 동정할때 황하도하작전을 지휘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김규광은 상해에서 조선 각당파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김산은 북령에서 중공북평시 당위 선전부 부장을 맡고 학생운동을 령도하면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천진에서는 조선공산주의자 리철부가 하북성 당위 선전부 부장을 맡고 지하투쟁을 하였다. 김규광(운암 김성숙) 류자명 리철무(한위건)    
80    아름다운 연변 댓글:  조회:3941  추천:1  2012-09-02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집거지로서 중국조선족의 상징이기도하다. 연변은 나서 자란 고향이라서 더욱 그립지만, 우리방송 애청자들 또한 대부분 연변에 계시기 때문에 연변에 자주 가게 된다. 이번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경축하는 마음에서 또 연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저 최근 몇년간 연변을 다녀오면서 찍은 사진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정겨운 초가삼간은 사라졌지만 대신 덩실한 기와집이 우리의 주요한 주거지로 되였다. 모아산 기슭의 만무과원과 유유히 흐르는 해랑강도 아름답다.  
79    “한락연 기념관” 축성 세미나 룡정서 개최 댓글:  조회:5806  추천:29  2010-09-16
“한락연 기념관” 축성 세미나 룡정서 개최      우리민족의 자랑인 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 기념관” 축성기획 세미나가 얼마전 한락연 선생의 고향인 길림성 룡정시에서 진행되였다. 룡정시 당위원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는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와 한락연의 차녀 한건립, 아들 한건행이 출석했고 또 연변조선족자치주 관련부문 책임자들과 룡정시 당위원회와 정부 주요 책임자들이 참가했다. 룡정시 당위원회 윤성룡 서기가 “한락연 기념관” 축성기획을 설명하면서 룡정시는 우리민족의 우수한 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 선생의 고향일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문화중심이고 혁명중심지이기 때문에 수많은 문화력사유적을 가지고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룡정시는 앞으로 “한락연 기념관”을 비롯해 중국조선족의 력사문화 중심기지로 건설한다는 거창한 전망기획을 제기하였다. 이어 회의참가자들은 “한락연 기념관” 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화중심지인 룡정시를 중국조선족의 문화력사 중심기지로 건설해야한다고 지적하였다. 한락연 선생의 아들 한건행씨는 “아버지 세대의 혁명유지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룡정시 당위원회와 정부가 “한락연 기념관”을 축성한다는데 대해 아주 감사히 생각한다고 표했다. 그리고 각계의 힘을 빌어 “한락연 연구회”를 결성함으로써 앞으로 한락연 선생의 력사사적을 계속 연구하고 “한락연 기념관” 축성에 이바지할것을 호소했다.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는 총화발언에서 중국조선족 혁명가이며 예술가이며 사회활동가인 한락연 동지의 고향은 룡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룡정시는 혁명시기 참전인수가 가장 많고 혁명렬사가 가장 많으며 동북 3성 혁명대오 가운데 조선족 당원수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또한 룡정은 혁명간부와 혁명 지식인들을 가장 많이 양성해낸 고장이라고 하면서 룡정시가 한락연 기념관을 세우려는것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한락연 연구회를 설립하는것을 지지한다면서 전문 기금회를 설치해 한락연 동지의 혁명적 업적과 예술생애를 잘 연구하고 크게 선전함으로써 로세대 혁명가들의 혁명정신을 계속 발양해 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리덕수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한락연 선생의 유가족 그리고 각계 대표들은 림시로 만들어놓은 한락연 기념관을 참관하고 룡정시 해란강과 륙도하 합수목에 축건한 락연공원의 정자를 둘러보았다.  
78    영원한 기념비(2)--해방전쟁시기 조선민족의 투쟁사 답사 댓글:  조회:5537  추천:74  2009-11-03
2. 쏘련군과 함께 귀국한 항일련군       동북에 진출한 쏘련군에는 특수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일전쟁시기 동북대지를 휩쓸며 간고하고도 치렬한 전투를 진행해온 항일련군 장병들이였다. 항일명장 허형식(许亨植)과 리홍광(李红光)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겨레 항일지사들이 동북대지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쳐 싸웠다. 동북의 심산밀림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싸운 이들의 항일의거는 일제 식민통치하에 있던 수천만 동북인민에게 특히는 동북에 정착한 조선인에게 있어서 희망의 등불이였다. 쏘련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1945년 7월에 항일련군 간부들은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를 재구성했다. 바이족인 주보중(周保中)이 서기를 맡았고 위원에는 리조린(李兆麟), 풍종운(冯仲云), 왕효명(王效明), 왕일지(王一知) 등을 비롯해 조선인 강신태(姜信泰)와 김광협(金光侠)도 망라되였다. 항일련군중의 조선지사들은 대부분 조선사업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으로 나갔지만 중국공산당의 동북위원회에 강신태와 김광협을 비롯한 조선인을 포함시킨것은 이들이 동북에서 싸웠던 경력이 있어 동북상황에 대해 익숙한것과 중국동북에 조선농민이 많이 거주하고있는 현실을 고려한 사안으로 추정된다. 한편 주보중은 1945년 9월에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온 중공중앙 동북국 서기인 팽진(彭真)을 만나 당조직관계를 회복하였으며 그가 령도하는 동북위원회의 조직관계와 자료, 당비를 전부 팽진에게 맡겼다. 주보중 등은 쏘련군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리용해 쏘련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으며 각지에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군대를 모집하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였다. 분공에 따라 주보중은 장춘에, 리조린은 할빈에, 풍종운은 심양에 가서 사업했고 조선인 강신태는 연길에,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들은 쏘련군을 도와 사회치안을 유지하고 당조직을 회복했으며 무장을 확대하였다. 10월에 이르기까지 동북항일련군은 4만여명으로 확대되였으며 일본이 패망한데 비추어 부대명칭을 동북인민자위군(东北人民自卫军)으로했다. 항일련군 출신인 한족간부 왕효명(王效明)은 길림시에서 쏘련군 길림시 위술(卫戍)사령부 부사령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길림시 지하공산당원인 리유민(李维民)을 만나 당조직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우선 량환준(梁焕俊)이 조직한 길림시 조선인해방동맹을 쟁취하고 량환준을 비롯한 조선인간부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에 길림시에서 길림 전성 보안총대를 설립하고 수천명 청년들을 규합시켰다. 길림시와 부근 조선족마을의 청년들도 보안총대에 참가해 한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동북위원회 위원인 강신태[원명 강건(姜健)]는 최명석(崔明锡), 박락권(朴洛权), 김만익(金万益), 강위룡(姜渭龙), 김명수(金明洙), 려영준(吕英俊) 등 22명 동북위원회 연변사업위원회 간부들을 거느리고 9월 18일, 연길 군용비행장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쏘련군의 공격으로 일제가 항복했지만 사실 동북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대량의 일본군 잔여세력이 구석구석 도사리고있었고 무장을 든 수많은 마적떼가 도처에서 백성을 괴롭히고있었다. 게다가 연길, 룡정 거리에는 “국민당 길림성 연변판사처”, “국민당 연길현 당부”라는 간판이 나 붙었고 국민당이 끌어모은 별동대, 보안대, 자위군, 치안유지회가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강신태는 우선 지희겸(池喜谦), 강동주(姜东柱), 박동운(朴东云)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조직한 군중조직을 통합시키고 이들을 쟁취함으로써 군중을 발동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에 연길시에서는 600명 조선족대표가 4만여명 회원을 대표하여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대회를 열고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총동맹”을 설립하고 강동주를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조직은 연변사업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면서 10월에는 지희겸이 위원장을 맡은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칭되여 폭넓게 군중사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시기 최무(崔武), 최문국(崔文国)을 비롯한 개명인사들이 창간한 조선문판의 “한민일보(韩民日报)”가 있었다. 신문은 11월에 “연변민보(延边民报)”로 개칭하고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되였다. 강동주가 주필을 맡은 이 신문은 첫기부터 모택동의 글 “련합정부를 론함(论联合政府)”을 련재하였다.     쏘련군 복장을 입었지만 조선말을 하는 동북위원회의 이 특수한 군인들은 우선 조선족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되였다. 더우기 동북땅에서 만악의 일제와 싸웠던 항일련군 출신이라는것을 안 조선족 청장년들은 다투어 무기를 들고 이들을 따라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신태는 김만익을 대장으로하는 연길경비대를 조직하여 훈련시켰다. 그리고 최광(최명석 崔名锡), 박락권, 최시영(崔时英)등을 왕청, 룡정, 화룡, 훈춘에 보내 정권건설과 당조직 확건, 무장대 조직사업을 진행하게 했다. 그리고 전윤필(全允弼), 박근식(朴根植), 엄군섭(严君燮)이 거느린 룡정별동대와 리주설, 김수억(金寿忆) 등 조선족 농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화룡 평강구 장인강자위대(长仁江自卫队)를 접수해 재편성하고 5개 퇀의 확군계획을 세웠으며 조충렬(赵忠烈)이 거느린 로투구별동대를 연변경비 2퇀 4련으로 편성했다. 그리하여 김만익은 연길에서, 박락권은 룡정에서, 박근식은 화룡에서, 남창수(南昌洙)는 조양천에서, 최광은 왕청에서 각기 조선족 무장을 조직했다. 길림성 연길에서 만난 원 독립6사 문서로 있었던 리복룡(李福龙) 로인은 조충렬 렬사가 당시 부대를 조직하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저의 상급인 조충렬 렬사는 연변에서 무장대오를 조직한 조직자의 한분입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청년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연변에서 민주동맹 대회를 할때 그는 로투구(老头沟)지구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회의에서 항일련군 출신인 강신태의 보고를 듣고 무장대오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로투구에 돌아온후 청년동맹 성원들과 함께 지주집 무장과 당시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탈취하여 170여명의 무장을 조직했습니다. 후에 이들은 명월구의 부대와 합쳐 경비퇀을 편성했으며 조충렬 렬사는 지도원직을 맡았습니다. 지도원은 반드시 공산당원이여야했습니다. 조충렬 렬사는 당시 가장 먼저 입당한 분입니다. 연안에서 온 손장상(孙长祥)이 그의 소개인이라고합니다. 그는 1947년 3월 7일, 길림부근의 사간방(四间房)이라는 곳에서 싸울때 전우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연길에서 만난 조충렬 렬사의 차녀 조순복(赵顺福)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8.15광복후 저의 아버지께서는 로투구 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그이는 당지의 혁명선각자들인 박남언, 임윤식 등과 함께 별동대를 조직하였고 별동대 대장을 맡았습니다. 대오는 170명이였는데 로투구의 탄광과 아마공장, 천보산의 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무장했습니다. 어머니의 회억에 따르면 제가 태여나서 얼마안되여 어머니는 저를 업고 아버지를 찾아 부대에 갔다고합니다. 부대가 휴식하고있다하니 아버지에게 나를 보여주려했던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지금 부대는 휴식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찾아오면 지도원인 내가 어떻게 남을 이끌겠는가?’고 나무람했다고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서러움을 참고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종일 전사들의 빨래를 해주고 떠났다고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혁명을 위해 가족도 돌보지 않았으며 목숨까지, 모든것을 바쳤습니다. ” 로투구뿐만 아니라 연길, 룡정, 화룡, 훈춘, 왕청을 비롯한 연변각지에 모두 조선족청년들로 무어진 크고작은 무장조직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길림성 화룡시 신광촌에서 살던 윤룡철(尹龙哲) 로인은 박근식[注:박근식에 대해 전문적인 자료는 극히 적다. 김산의 회억한 글 “아리랑의 노래”나 해륙풍 쏘베트근거지의 자료들을 통해 그의 약력을 조금 알아볼수있다. 박근식은 일찍 형님 박영을 따라 로씨야에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며 또 중국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에 다니기도했다. 졸업후 광주의 조선인혁명가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여 싸우다가 해륙풍에 철수하였으며 해륙풍에서 다시 국민당의 토벌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상해를 거쳐 동북으로 갔다. 광주봉기에서 형님 박영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동북에서 조직을 찾지 못한 박근식은 한동안 고향인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되였다. 광복후 부대를 조직해 공산당을 따라 싸웠으며 당적 회복문제로 한동안 애를 먹었다는 설도 있다. 그후 그는 조선으로 나갔다.] 이 거느린 화룡부대에 참가했었다. 지금 82세 고령인 윤룡철 로인은 당시 박근식 부대가 조직되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소개한데 의하면 일찍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혁명에 참가해 광주봉기를 겪었던 박근식은 룡정의 동흥중학교(东兴中学校)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곧 청년들을 규합해 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쏘련의 중국어방송을 통해 쏘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했다는것을 알고 미리부터 유지인사들을 규합해 환영대회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9일에 3.1소학교(지금의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에서 만명군중이 모인 환영집회가 있게 되였다. 지금도 당시 환영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커다란 동북해방기념비가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켠에 세워져있다. 집회가 있은후 박근식은 청년동맹을 통해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8월 26일에 벌써 룡정별동대를 편성하게 되였다. 별동대는 9월에 그 규모가 이미 600명에 달해 룡정경비대로 재편성되였다. 룡정경비대는 후에 화룡부대와 합병해 연변경비3퇀으로 편성되고 박근식이 퇀장을 맡았다. 이 부대는 후에 동북민주련군 10종대 30사에 합류했다. 윤룡철 로인은 “풍부한 혁명경력이 있는 박근식은 자애롭고도 의지가 강한 분이였다.”고한다.     1945년 10월, 화룡 서성에서 참군한 김병욱(金炳旭) 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남의 집 살이”를 하던 그는 먹고 잘데가 없어 고민하던끝에 부대를 찾아가니 “박반장”이 창고지기부터 시작하라고했다. 그때 무장대오라고하지만 변변한 의복이나 무기가 없었고 대원들은 베옷을 입거나 일본군 바지를 입었고 혁띠도 없어 새끼줄로 허리를 동이군 했다. 그리고 무기라고는 일본군이 남기고간 낡은 보총이였고 어떤 대원은 그것도 없어 날창 하나를 차거나 수류탄 몇개를 가지고있었을뿐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사기가 높았고 뜨거운 열기로 전투에 참가했다. 길림군구 사령부와 정치부에서 편찬한 <중국인민해방군 길림성군구군사>수정고를 보면 1945년 9월 당시 길림군구는 길림과 합강(合江) 두개성과 송강성(松江省)의 주하이동지구를 포함한 길합군구(吉合军区)로 되여있다. 주보중이 길합군구 당위원회 서기, 군구사령원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는 장춘지역의 부대를 통솔했고 길림경비사령인 왕효명이 교하, 돈화를 포함한 길림지역 부대를 책임졌으며 연변지역은 강신태 사령원이 경비 1퇀, 2퇀, 3퇀을 지휘했다. 한달 남짓한 사이에 박락권을 퇀장으로 하는 연변경비 1퇀이 연길에서 조직되고, 최광을 퇀장으로하는 연변경비 2퇀이 왕청에서 조직되였으며, 박근식을 퇀장으로하는 연변경비 3퇀이 화룡에서 조직되였다. 뿐만 아니라 훈춘, 안도, 돈화 등지에도 지방 보안부대가 조직되여 연변지역 조선족 경비부대 총병력은 7천 5백여명에 달했다. 망국의 한을 지닌 동북의 조선족청년들은 명망높은 항일련군 간부들의 호소에 응해 무장조직에 적극 참가했던 것이다.     길림성 연길시 고려촌 광영원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김병욱 로인은 당시 박락권 부대에 편성되였었다. 그의 회억에 따르면 박락권은 쏘련군 복장에 말을 타고 다녔으며 일찍 동북에서 일제와 싸운 항일련군 출신으로서 조선사람들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박락권 퇀장은 키가 크고 씩씩한 사람이라고하면서 그는 늘 말을 타고 연설하고 연설이 끝나서야 말에서 내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군 했다고한다.       일제패망후 흑룡강성의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 쏘련군이 군사관제를 실시하는 상황에서 할빈시는 각종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장소로 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리조린 장군은 할빈에 도착하자 당조직 회복과 확군 사업을 틀어쥐었다. 당시 할빈시와 부근 각현에는 많은 조선족이 살고있었다. 다년간 일제가 민족리간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에 현지 한족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에게도 불만이 컸다. 연길에서 만난 김정순(金贞顺) 로인은 일찍 흑룡강성 오상현에서 교원사업하다가 조선독립동맹에 참가했고 또 조선의용군 3지대 교도대 녀성중대에 참가한 분이다. 82세 고령인 김정순 로인의 소개에 따르면 당시 흑룡강 조선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오기도 두려워했다. “일본놈들이 일본사람은 1등 국민, 조선사람은 2등 국민, 한족과 기타 민족은 3등 국민이라고 획분하였기에 많은 한족사람들이 조선사람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고 미워했습니다. 일본놈들이 투항한후 우리는 집밖으로도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조린 장군이 할빈에 와서 ‘조선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땀을 흘리며 싸웠다’고 하면서 ‘조선사람 하나도 다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빈에서 리조린은 신속히 조선독립동맹의 책임자 김택명(金泽明, 일명 리상조 李相朝)과 련계를 가졌다. 할빈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사업했던 사학자 서명훈(徐明勋)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김택명은 1943년에 조선의용군의 파견을 받고 흑룡강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파언(巴彦)현에서 독립동맹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43년 10월에는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한후 그는 리조린 장군과 손을 잡고 할빈보안총대의 조선독립대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할빈의 조선족 주민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면서 계속 확대, 발전되였다. 한편 목단강지역에서는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온 김광협이 활발한 활동을 진행해 고려경찰대를 조직했다. 고려경찰대의 50여명 조선족 청년들은 일본군이 버리고간 낡은 보총을 메고 허리에 수류탄 몇개씩 차고 목단강시 공화가, 공민가, 평안가를 순라하면서 조선족을 보호하고 사회치안을 유지했다. 목단강시 고려경찰대 대장에 정창호(郑昌浩)이고 부대장에 조운세(赵云世)였다. 고려경찰대가 조직되였던 자리는 목단강시 북방공구공장이였고 후에는 1.21공장으로 바뀌였다고 기록되여있지만 지금은 전부 개발구로 변해 명확히 찾아볼수 없었다.     김광협은 쏘련군의 목단강시 위수사령부 부사령과 공산당의 목단강군구 정위라는 이중 신분을 가지고 조선족무장을 적극 확대해 나갔으며 목단강지역 조선족마을로부터 1,500여명 청년을 모아 조선족부대인 14퇀 3영과 15퇀 3영, 군구경위련을 편성했다. 이들은 한족부대인 14퇀 2영과 37퇀의 반란음모를 분쇄하고 현지 민주정부를 보호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밖에 제2퇀 3영도 조선족 청년으로 구성되였는데 퇀장은 김동규였다. 서명훈 선생의 다년간 연구를 종합해 보면 당시 목단강지역 조선족부대는 다음과 같다.   牡丹江军区    司令员  李荆璞 (汉族)  政委 金光侠                                     警卫连  连长 赵明善              十四团  三营  营  长 柳昌权 教 导 员  李青松 副营长 郑昌浩 副教导员  赵云世 十五团  三营  营  长 郑求益 教导员 赵石满 保安团  二营  营  长 金长权 教导员 姜云鹤                         副营长 郑  友 警卫团     团  长 王景坤(汉族)政  委 吴**(汉族) 副团长 金奉国        副政委 金镇浩 二营 营  长 金奉奎  副营长 张应天 四  团  四营 营  长 朴学甫  副教导员 张东植   김광협이 정위를 맡은 목단강군구에는 조선족부대가 많았다. 목단강시에서 조직한 고려경찰대가 군구 14퇀 3영으로 편성되였다. 영장 류창권, 교도원 리청송. 목단강시교와 부근 각현의 조선청년들이 모여 15퇀 3영으로 편성되였다. 영장에 정구익, 교도원에 조석만. 목단강시 수비임무를 맡은 보안퇀 2영 영장은 김장권, 교도원 강운학, 부영장 정우. 녕안 와룡향, 강남향, 란강향 등 여러 향의 조선족자위대로 편성된 경위퇀 퇀장은 한족인 왕경곤이고 정위 역시 오씨성을 가진 한족이며 부퇀장 김봉국과 부정위 김진호는 조선족이다. 이 부대 2영은 전부 조선족으로서 영장에 김봉규, 부영장에 장응천이다. 녕안현 동경성의 여러 조선마을 조선족치안대 350여명이 모여 4퇀 4영이 편성되였는데 영장은 박학보이고 부교도원은 장동식이였다. 목단강군구뿐만 아니라 북만의 합강군구(合江军区)에도 유명한 조선족부대인 “동철부대”가 있었다. 합강군구 1퇀 2영에 편입된 이 부대 영장은 한족인 류곤(刘坤)이였고 교도원 김동철(金东哲),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이하 600여명 장병은 모두가 조선족이였다. 이밖에도 허태동(许泰东)이 조직한 목릉현조선독립영을 비롯해 빈현(宾县), 오상(五常), 상지(尚志), 연수(延寿), 파언, 수화(绥化), 수릉(绥棱), 덕도(德都) 등 많은 현에 모두 200여명 규모의 조선족 독립대대가 있었고 동흥(东兴), 의란(依兰), 계서(鸡西), 해림(海林), 동녕(东宁) 등 현에 100여명 규모의 조선족중대가 있었다.    “8.15”광복후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진출한 항일련군 지도간부들은 중국공산당 중앙과의 련계를 회복하고 당조직을 발전시켰으며 각곳에서 공산당의 부대를 조직했다. 동북각지의 조선족은 조선독립동맹을 통해 공산당의 정치주장을 지지하면서 공산당부대에 적극 참가하여 흑룡강성 할빈지역, 목단강지역, 가목사지역, 길림성의 길림지역, 연변지역에 대량의 조선족 독립대대, 경찰대, 경비퇀, 보안퇀이 나타났다. 이들은 토비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사회치안을 유지했으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할 준비를 했던것이다.사진설명:1. 주보중, 김광협, 강신태2. 조충렬 렬사 유상3. 조충렬 렬사 묘소4. 룡정별동대5. 당시 화룡에서 입대한 윤룡철 로인6. 길림군구사의 45년 부대편성표7. 박락권 8. 박락권부대에 참가했던 김병욱 로인
77    영원한 기념비(1)--해방전쟁시기 조선민족의 투쟁사 답사 댓글:  조회:5127  추천:32  2009-10-26
“8.15”광복의 의미   1945년에 들어서서 아마 조금이라도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침략군의 패망을 얼마든지 판단할수있었을것이다. 당시 중국내에는 근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살고있었다. 이들은 동북뿐만 아니라 관내 화북, 화동지역에서 벼농사에 종사하였고 또한 무한, 중경,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에도 일부 조선인 시민이 살고있었다. 수십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망국노”의 신세로 살아오던 그들은 일본의 패망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쏘련군의 땅크가 막 들어왔고 일본놈들이 무기를 놓았습니다. 해방을 받은 우리는 밖으로 뛰여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함께 거리에 떨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쏘련군을 환영했습니다.” “프랑카드를 들고 쏘련군을 환영하였는데 코가 크고 키가 큰 쏘련군이 땅크를 앞세우고 줄을 서서 들어오는데 저 앞고개에서 이쪽 골짜기까지 쭉 늘어섰습니다.” 아마 어린시절 우리는 당시의 이러한 정경을 친히 목격하였거나 로인분들로부터 많이 전해 들었을것이다. 지금도 70,80세 로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군한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이라고 즐거워하던 그때에도 사람들은 저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몰랐을것이다. 구경 누가 이 땅의 주인이며 어떠한 정당이 어떠한 정부를 세울것이며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갈것인지? 당시 아무도 이를 명확히 몰랐다. 특히 중국내 조선인들은 자기의 운명이 어찌될지 더욱 몰랐으며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고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였다는 순간의 기쁨에 잠겨있었을뿐이다. 세계 반파쑈전쟁이 최후단계에 진입하던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 얄따시에서 열린 “얄따회의”에서는 쏘련군의 동북출병이 결정되였다. 쏘련은 출병조건으로 동북의 대련과 려순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했고 중장철도(中长铁路)와 외몽골의 현상유지라는 조건을 제기했다. 쏘련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타협으로 이 조건은 수락되였다. 한편 태평양전장에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소모한 미국은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이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닥쳐왔다. 시기를 놓칠세라 쏘련군은 8월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9일 령시부터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150만 쏘련군이 일거에 국경방어선을 돌파해서 한주도 안되는 사이에 동북 전역을 석권하자 8월 15일 점심, 일본 히로히또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사람들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자유와 해방을 경축했다. 하지만, 평화는 그처럼 쉽게 실현되지 않았고 더우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남이 베풀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였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세인의 시선이 부유한 중국 동북에 집중되였다. 쏘련과 미국이라는 당시 세계 량대세력이 동북을 눈박아 보았고 중국내의 국공량당이 동북을 주시하고있었다. 대흥안령, 소흥안령, 장백산맥으로 둘러있는 드넓은 동북평원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광산자원을 가지고있었지만 위도가 높은 동토대가 많았기에 량곡생산이 제한을 받았고 옛날에는 벼농사를 상상도 못했으며 광산개발도 잘 되지 않았다. 인류가 19세기에 들어 서서야 동북개척이 본격화되였다. 특히 조선인이 대거 동북에 이주함에 따라 동북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농민들은 저온지대인 중국동북에서 드디어 벼농사를 성공시켰으며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답으로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동북의 농업발전의 터전이 마련되였으며 동북은 유명한 곡창으로 변했다. 일찍부터 동북에 눈독을 들인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통해 동북을 강점하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큰 저항이 없이 130여만 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800만 인구를 가진 동북을 내버리고말았다.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 말대황제인 부의(溥仪)를 괴뢰황제로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세웠으며 조선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농민을 동북에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고 동북을 중국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철도부설과 광산개발을 진행했다. 일제가 패망할때 동북의 선탄생산량은 전국의 49%를 점했고 강철생산량은 전국의 90%이상을 차지했으며 14,000킬로메터의 철도선과 10만킬로메터의 도로가 있게 되였다. 당시 동북은 중국의 가장 큰 공업기지였으며 가장 큰 곡창이였다. 부유한 동북을 차지하기 위해 장개석은 웅식휘(熊式辉)를 동북행원(东北行辕) 주임으로 임명하여 쏘련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인계받으려했고 두률명(杜聿明)을 동북보안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쏘련과 적극 담판하면서 각종 권력을 인계받는 동시에 동북의 일본군 잔여세력과 괴뢰만주국 군인, 경찰 그리고 무장토비 20여만명을 규합했으며 먄마에서 훈련받은 신1군과 신6군을 포함한 정예부대 25만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국민당 주력군이 모두 중국 서남부에 집결되여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은 미국함대의 도움으로 국민당 정예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동북의 한간, 괴뢰군, 지주무장, 특무, 관료 그리고 마적과 류랑배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유지회(维持会)를 설치하였고 무장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공산당의 중앙주석인 모택동은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설립해야한다는 정치주장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금후의 투쟁은 어떤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 투쟁이다. 무산계급이 령도하는 인민대중의 신민주주의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아니면 대지주, 대자산계급이 독재하는 반식민지, 반봉건적 국가를 세울것인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투쟁일것이다. 지금 이 투쟁은 항전승리의 열매를 탈취하려는 장개석과 그 탈취를 반대하는 우리와의 투쟁으로 나타나고있다.” 항일전쟁승리의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공산당은 3만 간부와 10여만 팔로군, 신사군을 동북에 긴급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동북을 차지할것인가? 세계 반파쑈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1945년 하반기, 풍요로운 동북은 국공량당이 힘을 겨루는 주요한 쟁탈지로 되였고 또한 쏘련과 미국 량대 세력까지 눈독을 들이는 초점지역으로 변했다. 그리고 전반 중국인민앞에는 두가지 운명이 놓여지게 되였다. 장개석을 위수로한 국민당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려했고 공산당은 력사적 조류에 순응하고 민주주의적인 련합정부 설립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하려했던것이다.     동북에 온 공산당 간부들은 각지에 공산당조직을 설립함과 동시에 광범한 인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군중조직인 동북인민민주대동맹(东北人民民主大同盟)을 조직, 령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민당의 이른바 유지회와 투쟁하였다. 그리고 동북경내 조선족 집거지들에도 모두 조선인민주대동맹 조직이 설립되였고 산하에 농민, 청년, 녀성분맹이 설치되여 활발할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중된 길림성 연변의 민주대동맹 우리글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东北人民民主大同盟宣言    第二次世界大战은 联合国인 中苏英美의 英雄的战斗에 의하여 东西两方의 파시스트 侵略者德国 및 日本을 粉碎하였음으로 우리는 荣光의 胜利를 获得하고 世界는 东亚의 平和를 实现하였다. 우리 东北地方이 日本의 强盗的侵略을 遭遇한以来 中国人民은 历史上再见할수없는 血성의 杀害 및 凄惨奴役을 받아 피와 눈물속에서 被辱被害의 十四年이란 긴 黑暗时代를 지내왔다. 胜利의 苏联红军이 东北에 出师하여 日구를 驱逐하고 东亚人民의 가索를 解脱하여 中国国家의 土地를 光复하였다. 우리에게 自由와 幸福의 生活을 가져다준 伟大한 红军에게 우리人民은 衷心으로 感谢한다. 이번 历史的一九四五年八月十四日에 中苏两国间에는 意义至大한 中苏友好同盟条约이 缔结되여 两国间의 永久한 友谊가 巩固하여졌으니 日구의 再起를 共同防御하며 东亚经济를 共同建设하며 东亚文化를 共同重建하자. 延边一带의 数万中韩住民을 包括한 空前의 劳农青总同맹은 伟大한 红军이 우리에게 준 自由와 幸福을 굳게 하기 为하여 东北人民民主大同맹으로 改造되였다. 그러면 우리의 主张은 무엇이냐. 우리는 彻底히 日구의 残滓分子를 消灭한后 全国绝大多数人民을 基础로한 统一战线的인 一个의 民主联盟的国家制度의 建立을 主张한다. 우리는 이 国家制度를 新民主主义的国家制度라 称한다. 이것은 人口가 最大한 中国으로써 要求하는 适合한 国家制度다. 우리가 新民主主义의 政治를 主张하는것은 外来의 民族压迫을 驱逐하고 国内의 封建主义的 및 파시스트的 压迫을 废止함에 在하고 此种制度를 废止한后 다시 旧民主主义制度를 建立하지말고 一切民主阶级이 联合된 统一战线的政治制度를 建立함에 在한다. 우리의 主张은 孙中山先生의 主张과 完全히 一致하다. 孙中山先生은 그가 著作한 国民党 第一次代表大会宣言에 “近世各国의 所谓民权制度는 往往 资本阶级이 专有하여 平民을 压迫하는 工具로써 造成되였었는데 国民党의 民权主义는 一般이 平民의 共有가 되고 少数人이 私有할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孙先生의 伟大한 政治的指示다. 中国人民 및 其他一切民主分子는 반드시 이 指示에 服从하여 이를 坚实히 决行하여야할것이며 또 이 指示에 违背하고 反对하는 者에게는 何人이나 何集团이나 一切坚决한 斗争을 하여 이 完全하고 正确한 新民主主义的三民主义 정治原则을 保护하고 发扬하여야할것이다. 本同盟은 各党派各社会团体 및 宗教团体及男女를 不分하니 本同盟의 纲领과 规约을 承认하고 新民主主义를 为하여 奋斗하려는 사람들은 均一히 个人的으로나 团体的으로나 入盟할수있다. 各界의 同胞여 新民主主义를 为하여 斗争하자, 勇往直前하여 入盟하자.                                                   一九四五年十月                            中华民国东北人民民主大同盟 延边执行委员会   연변집행위원회가 발표한 동북인민민주대동맹 선언문을 보면 연변지역에는 이미 로동자, 농민, 청년동맹을 비롯한 조직이 있었고 이들을 규합해 다시 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조한다는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조선인을 포함한 동북인민민주대동맹은 자산계급이 독재하고 일반인을 압박하는 낡은 제도를 페지하고 모든 민주계급이 련합된 통일전선적인 정치제도를 건립할것을 주장하고있다. 이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련합정부 수립주장과 일치하다고할수있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혼잡한 동북상황에서 모택동의 민주주의 련합정부를 수립할데 관한 주장을 광범한 대중들에게 적극 선전하였으며 중국인민과 중국내 조선민족이 직면한 두가지 운명을 더욱 명확히 밝혀주고있다. 중국공산당연변위원회는 1945년 11월에 발표한 “中韩民众에게 告함”이라는 글에서 “现下中国全体形势를 考察하면 两个前途가 存在하고잇다! 独裁的统治를 继续하고 民主改革을 不许하고 중국을 苦痛이 重叠한  非独立, 不自由, 非统一, 不富强한 陈旧状态에 退步식히려는것이니, 이것은 日本侵路者로부터 解放된 中国을 黑暗의 中国으로 退步식히자는것이다. 或者는 一切의 困难을 克服하고 全国人民을 团结하고 独裁的统治를 废止하고 民主改革을 实行하고 民主力量을 巩固扩大하고 日寇의 残余를 彻底히 肃清하고 间谍을 惩罚하야 中国의 前途로하여금 独立, 自由, 民主, 统一, 富强의 新国家가 되게 하려는것이다. 中国의 四亿五千万人口中数百万产业工人, 数千万手工工人, 三亿六千万农民阶级, 其他广大한 小资产阶级, 自由资产阶级, 开明绅士, 其他爱国分子는, 다 第二의 前途를 要求한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이를 위해 24년간을 싸워왔다고 밝혔다. 글은 전국범위에서 민주개혁을 실행하려면 관료자산계급을 대변하는 국민당의 반인민적인 전제정권을 페지하고 민주적인 련합정부를 건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민족의 단결을 파괴하고 중국인민의 민주개혁을 저애하는 국민당 전제정권을 반대하고 민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독립과 자유, 민주, 통일, 부강의 새중국을 건설하는 길로 나갈것을 호소했다.   당시 동북경내에는 216만 조선인이 정착해 살고있었지만 “8.15”광복이 되면서 수많은 인파가 조선반도로 밀려감으로써 중국내 조선인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년간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가꾸어놓은 터전을 버리기 싫은 대다수 농민들은 자리를 뜨려하지 않았고 자기의 터전을 지키고 잘 가꾸려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제주구와 괴뢰만주국 잔여세력을 모아 유지회를 조직하고 민족리간정책을 실행하면서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의 독재를 대변하는 국민당 보다는 조선인까지 포함한 전인민적인 신민주주의 련합정권을 수립한다는 동북인민민주대동맹과 중국공산당의 정치주장이 더 마음에 와 닿았을것이며 진정 평등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해방을 위해 싸울 결의를 다지게 되였을것이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동북에 정착해 벼농사에 종사해왔던 이들은 이때로부터 중국인민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간주하고 자기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중국에서의 립지를 마련하기 위해 피어린 항쟁을 시작했으며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에 마멸할수없는 기여를 하게 되였던 것이다. “8.15”광복은 중국인민뿐만아니라 중국내 조선인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새로운 항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였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사람마다 평등한 사회는 누가 베풀어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총가목을 잡고 독재정권과 싸워야만이 이루어질수있었던것이다. 이는 중국인민의 운명이고 중국내에 남은 조선인민의 운명이기도 했다.   “8.15”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 중국내 이주해 살아오던 조선이민들이 중화민족의 일원인 중국조선족이 된 이 거창한 력사를 밝혀내고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공적을 알리기 위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처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방송센터는 공동제작을 기획하고 답사진을 구성하여 자유와 해방을 위해 중국의 거창한 력사대하속에서 자주적으로 자기의 립지를 다져놓은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재조명하고저 2007년부터 본격적인 답사길에 올랐다.     원 동북민주련군 1종대 포병이였던 김인섭(金仁燮)로인은 길림성 화룡시병원에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답사팀을 만나주었다. 침상에 누운 김인섭 로인은 “20대 청년들이 무리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 사람들이 오늘의 행복이 어떻게 왔는가를 정말 알아 달라는겁니다. 내가 목숨이 아까운것 보담두 우리나라가 어떻게 건설되였는가를 알아달라는겁니다.”라는 마지막 소원을 남겼다. 시간은 좀처럼 기다려주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정처없이 흐르는것이 또한 력사이다. 60여년전의 그 벅찬 력사를 찾는 우리의 답사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로인분들의 베개가에 귀를 대고 마지막 숨결을 느끼면서 그 격정의 나날들을 알아야했고 력사의 현장을 검증해야했다.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의 거울로 비춰보지 않으면 자기를 알수없고 오늘을 사는 자세를 바르게 가질수없다. 력사를 망각하는것은 배신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사진설명: 1. “모택동의 평가”정순주 장군의 서예 2. 동북인민민주대동맹 선언문[리송덕 제공] 3. 중한민중에게 고함[리송덕 제공] 4. 10부작 TV다큐 5. 10부작TV다큐 6. 렬사들을 추모하여 [연길렬사릉원]          
76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기록② 댓글:  조회:4834  추천:66  2008-12-07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기록②         1.       화수림자 렬사기념비   2.       화수림자전투 전적지 비석   3.       해룡보안중대가 조직되던 상황을 소개하는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리병길 로인   4.       림강렬사릉원에 모셔진 조선족렬사 김봉산 묘비   5.       리홍광지대 병원으로 사용되였던 림강의 대호병원 (변혜옥, 리홍광지대 륙군중학교 학원)    
75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기록① 댓글:  조회:4082  추천:70  2008-12-07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기록①        1.       심양의 렬사릉원에서 단서를 찾는 로인분들   2.       철령시 166사 기념비 앞에 선 철령의 리홍광지대 로전사들   3.       장춘의 괴뢰만주국 중앙은행자리 (제1차 장춘쟁탈전에서 조선족퇀은 기타 부대와 함께 최후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첫 장춘해방을 이룩해냈다. )   4.       장춘의 변철호 로인의 해방전쟁시기 남만 민주련맹사업을 할때의 사진   5.       김응삼 로인이 남긴 장춘쟁탈전후 기념사진   6.       길림에서 재회한 10종대 로전사분들    
74    대형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두번째 단계 취재진행 댓글:  조회:4085  추천:71  2008-12-07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 기획한 대형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 두번째 단계 취재답사가 지난 7월과 8월에 끝났다. “영원한 기념비”는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방송하는 대형 방송다큐로서 위대한 중국인민해방전쟁에서 중국조선족인민이 공산당을 옹호하고 정권을 건설하며 토지개혁을 진행하고 적극 참군하여 국민당과 영용히 싸운 빛나는 력사를 다루게 된다. 두번째 단계취재답사는 북경에서 조선족장군분들인 조남기 상장, 리영태 중장, 정순주 소장을 인터뷰하는것으로 시작하여 동북의 심양, 장춘, 길림, 반석, 화전, 매하구, 통하 등지를 다녔고 중조국경인 림강까지 수천킬로메터를 달렸다. 이 사이 제1차 장춘해방전투 전적지, 림강보위전 전적지, 장춘길림구간의 대치전 전적지를 답사하였고 현지 조선족 로전사들을 만나 인터뷰 하였다. 답사취재팀은 중국인민방송국 기자와 “미인송”회사 제작진, 프로그램 TV연출인 김광현씨로 구성되였다.   사진설명: 1.       조남기 상장 (광복초기 길림시부근 차로하에서 백여명 조선청년을 조직해 마을을 지켰고 팔로군이 오자 청년들을 이끌고 부대에 참가했을뿐만 아니라 입쌀 25만근을 모아 팔로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방전쟁시기 조남기 상장은 동북군정대학을 나오고 연변에서 행정사업을 하면서 전선지원 사업에 힘썼다.)   2.       답사진을 만난 리영태 중장 (리영태 중장은 해방전쟁시기 군의로 사업하다가 초창기의 공군학교에 입학하여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3.       원 40군 정위 정순주 소장 (해방전쟁시기 정순주 소장은 동북민주련군 3종대에서 통신병으로 있었다.)   4.       심양의 리홍광지대 로전사들 (심양 오가황소학교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기념비앞에서 조선의용군 군가를 열창하고있다. 오가황 군인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의 동북활동이 확정되여 중국 조선민족 동북해방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5.       심양 원 164사 사단지휘부 자리에서 (리홍광지대는 후에 동북민주련군 166사로 편성되여 남먼저 심양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심양을 해방한후 이 부대는 심양의 료녕호텔자리에 사단지휘부를 설치했다. 사단지휘부 앞에서 리홍광지대 퇀급간부였던 최강 로인과 선전대의 서양화 로인)   6.       리홍광지대 기관총수였던 최창수 로인   7.       조선의용군의 확군과정을 설명하는 최강 로인
73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취재제작 연구토론회 진행 댓글:  조회:3790  추천:128  2008-05-22
“모택동동지는 일찍 중화인민공화국의 찬란한 오성붉은기에는 조선혁명렬사들의 선혈이 묻어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 취재제작 연구토론회에 출석한 원 전국기자협회 서기처 서기였던 리현덕씨는 모택동을 비롯한 력대 중앙지도자들이 조선족의 력사적 공적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했다. 5월 17일 오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취재제작 연구세미나를 소집했다. 원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 상장과 원 공군부사령원 리영태 중장, 일찍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로전사 대표, 사학자 그리고 사회각계 인사 50여명이 연구세미나에 참가했다.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 헌례작품이다. 작품은 조선어부에서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공적을 다룬 대형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완수한후 추진하고있는 또 하나의 대형 프로그램이다. 조선족은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력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중국혁명과 건설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마멸할수없는 기여를 했다. 해방전쟁시기, 광범한 조선족 농민들은 자기가 가꾼 토지를 지키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무기를 들었고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피어린 항쟁을 진행해왔다. 불완전한 통계를 보더라도 6만여명 조선족 청년들이 참군했고 10여만 농민이 전선지원 담가대로 전쟁터에 나갔다. 이들은 료심전역, 평진전약, 도강전역, 해남도전역에 참가했고 강서, 광서, 호남서부에서 토비숙청을 진행하였다. 광활한 동북의 흑토에서 해남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족 전사들은 자기의 붉은 피로써 공화국 국기를 물들였다. 인구비례로 볼때 20명 조선족 가운데 한명이 참군한셈이다. 시장경제가 심화되면서 일부 사람들의 가치관과 도덕표준도 점차 변해가고있으며 배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창되고있다. 때문에 새로운 정세하에서 혁명전통교육과 인생관교육을 어떻게 진행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체가 직면한 중대한 과제의 하나이다. 만약 해방전쟁시기의 조선족의 영광스러운 력사를 잘 정리한다면 아주 생동하고도 진실한 혁명전통교양의 교과서로 될수있을것이다. 이 부분의 력사를 정리하는것은 또한 구조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일찍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분들은 대부분 80세 고령인 상황이고 게다가 많은 분들은 이미 세상을 하직한 상황이다. 때문에 이제라도 이를 찾아 정리하지 않는다면 소중한 우리의 력사자료들이 영영 매몰될수도 있다.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일찍부터 이를 기획하고 지난해 3월부터 심양, 장춘, 연변등지에서 부분적 로전사들이 참가한 좌담회를 가졌다. 그리고 지난해 10월부터 취재팀은 연변, 매하구, 장춘, 심양 등지를 다니며 40여명 로전사와 사학자들을 취재함으로써 첫단계 취재임무를 완수하였다.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는 중앙인민방송국 민족센터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화선전사에서 공동으로 주최하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와 연변인민방송국, 중국조선민족사학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한다.
72    “영원한 기념비”첫단계 취재기록⑤ 댓글:  조회:3725  추천:108  2008-04-20
      사실 우리주변에는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로전사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다. 물론 대부분 80세 고령이신 분들이다. 오늘의 복된 삶은 이분들의 피땀으로 이룩된것임을 잊지 말고 늘 이분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관심을 아끼지 말기를 바란다.
71    “영원한 기념비”첫단계 취재기록④ 댓글:  조회:3562  추천:118  20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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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영원한 기념비”첫단계 취재기록③ 댓글:  조회:3390  추천:89  20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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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영원한 기념비”첫단계 취재기록② 댓글:  조회:3430  추천:93  20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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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영원한 기념비”첫단계 취재기록① 댓글:  조회:3309  추천:85  2008-04-20
67    대형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 첫단계취재 진행 댓글:  조회:3356  추천:67  2008-04-20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 기획한 대형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 첫단계 취재가 4월초에 원만히 끝났다. “영원한 기념비”는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방송하는 대형 방송다큐로서 위대한 중국인민해방전쟁에서 중국조선족인민이 공산당을 옹호하고 정권을 건설하며 토지개혁을 진행하고 적극 참군하여 국민당과 영용히 싸운 빛나는 력사를 다루게 된다. 해방전쟁시기 동북항일련군의 조선족간부와 관내에서 온 조선의용군의 영향하에 동북의 광범한 조선족인민은 민주정권을 건설하고 토지개혁을 진행했으며 반란을 평정하고 토비를 숙청함으로써 동만, 남만, 북만근거지를 공고히하고 보호하는데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6만 3천여명 조선족 청년들이 동북민주련군 1종대, 3종대, 6종대, 7종대, 12종대를 비롯한 주력부대에 참군하여 사평전투, 림강보위전, 세차례 강남진격전, 흑산저격전, 평진전역, 대서남해방, 해남도해방을 비롯한 제전역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독립 4사, 독립 6사, 동만독립사를 비롯한 2선 부대에 참가하여 간고하고 치렬한 대치전, 장춘포위전을 치르면서 불후의 공적을 쌓았다. 해방전쟁시기 110만 동북의 조선족인민 가운데 6만 3천여명 청년이 참군하였고 공화국 창립을 위해 3천 5백 50명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대형 방송다큐 “영원한 기념비”의 첫단계 취재는 3월 20일에 시작되였다. 중앙인민방송국과 연변인민방송국 기자 그리고 TV연출인 김광현으로 구성된 취재팀은 연변의 사학자 리송덕 선생과 함께 15일간의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팀은 연변 8개 현시, 길림성 랍법, 길림, 서란, 반석, 장춘등지를 다니면서 해방전쟁시기의 전투영웅과 로력모범인물 23명을 만나 인터뷰하였으며 삼도만토비숙청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옛터, 연길렬사릉원, 연변박물관, 신참랍법전적지, 전오가자고점자 전적지, 화피창렬사릉원을 찾아보았고 화피창렬사릉원에서 진행된 청명행사에 참가하였다.     흑룡강지역, 길림장춘지역, 료녕지역의 취재와 관내답사는 다음단계 취재로 련속 진행될 계획이며 “영원한 기념비”방송은 래년 적합한 시기에 라디오와 TV로 방송할 예정이다. 우리민족의 력사를 관심하는 광범한 네티즌도 계속 주목해 주시기를 바란다.  
66    제55회 중경의 한국림시정부 유적지— 댓글:  조회:5000  추천:70  2008-04-11
항일전쟁시기 중경은 국민정부의 전시 수도였다. 1937년 말 남경이 함락되자 국민정부는 무한을 거쳐 중경으로 옮겼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산과 물이 많은 서북의 천험을 리용해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려했던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후 중경은 동맹국 원동지휘중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경은 화북대지와 화동지역 적후(敌後) 항일지휘중심인 연안과 더불어 중국 전민항쟁의 주요한 지휘체계를 형성하였다. 중국 관내 조선독립운동의 주요 력량이였던 김구와 림시정부,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 그리고 기타 당파들도 이시기 중경에 집결하였다. 무한 함락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는 국민당의 요원들과 함께 류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전시 수도인 중경으로 갔다. 한편 상해와 남경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김구와 림시정부를 찾아 중경으로 향했다. 림시정부 요원과 그 가족, 남녀로소 백여명이 험난한 피난길에 나섰다. 그들은 천신만고로 계림, 류주를 거쳐 사천성 기강에 이르렀고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다시 중경에 거처를 잡게 되었다. 항일전쟁이 승리할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이 이곳에서 항쟁을 견지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폭격에 희생되였거나 병사하기도 하였다. 북경에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서봉학 주임을 만나 중경답사를 시작한 것은 2004년 11월 18일이였다. 아침 8시 35분 북경공항을 출발하여 2시간 반 후 중경시 강북(江北)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은 생각보다 퍽 간소했고 려객도 많지 않았다. 공항을 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잡고 괜찮은 호텔로 안내하라고 부탁하였다. 중국 서남부의 중요한 력사문화 도시인 중경은 가릉강(嘉陵江)과 장강의 합수목에 위치했다. 기원 581년 수조(隋朝)는 이곳에 유주(渝州)를 설치했기때문에 약칭으로 중경을 유(渝)라고도 한다. 1189년 남송(南宋)의 조돈(赵惇)이 이곳 왕으로 책봉 받았다. 얼마뒤 다시 황위를 계승한 조돈은 희사가 겹쳤다는 의미에서 자기의 원 저택을 중경부(重庆府)로 명했다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중경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1997년 중경시는 북경,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의 네 번째 중앙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중경은 산간도시이지만 철도,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하천운수도 비교적 편리하다. 장강 상류인 중경으로부터 장강을 통해 무한, 남경, 상해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 중경시 유중구(渝中区) 광장빈관(广场宾馆)에 입주한 답사팀은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중경의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광장빈관 부근에서 택시를 잡고 중경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찾아가려 했지만 택시 기사들마다 그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유중구 칠성강(七星岗) 련화지(莲花池) 38번이라고 거듭 이야기했지만 웬 영문인지 모른다거나 갈수 없다고 하였다. 택시를 여러개 잡아봤지만 대답은 비슷하였다. 우리는 할수없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팔로군 중경판사처 유적지로 가자고했다. 그러니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몰았다. 증가암(曾家巖) 50번지에 위치한 팔로군 중경 판사처 유적지는 우리가 투숙한 빈관에서 10분도 안되는 거리였다. 해빛 밝은 언덕에 넓은 공지가 나타났고 공지에는 주은래 동상이 있었다. 동상 뒤편으로 2층으로 된 벽돌기와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팔로군 중경 판사처 유적지였다. 1938년 겨울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무한으로부터 중경에 옮겨와 이곳에 자리를 정했다. 주은래는 이곳을 임대해 들고 대외로 《주공관(周公馆)》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중국공산당 남방국(南方局) 지도기관과 중경 주재 팔로군 판사처의 사무를 보았다. 비록 국공합작이라고 하지만 국민당은 늘 밀정을 배치해 이곳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를 지향하고 적극적으로 항일하려는 각계 인사들은 늘 이곳에 찾아와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중경에 있던 조선혁명가들도 반일전선에 나가기 위해 이곳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비밀리에 팔로군 판사처 일군들과 접촉하면서 팔로군이 통제하는 항일근거지로 갈 의향을 표했고 또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주요지도자들의 적극적인 건의를 접수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으로 북상한 것도 팔로군 중경 판사처의 협조와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추측된다. 중경 팔로군 판사처 유적지를 보고나서 사업일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유중구 련화지의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에 대해 문의하였다. 전문일군인지라 대뜸 안다고 하면서 그냥 번지수를 대서는 찾아가기 힘드니 상해일백(上海一百)이라는 백화상점으로 가자면 기사들이 다 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해청사(渝海大厦)를 찾고 그 곁으로 가면 기념관이 보인다고 자상히 알려주었다. 다시 택시를 잡고 상해일백이라고 하니 기사는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한동안 가니 번화가에 커다란 백화상점이 나타났는데 상해일백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니 유해청사도 보였다. 청사 곁에는 한국식 표기법으로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진열관》이라고 쓴 커다란 알림표시가 보였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지르며 차에서 내려 진렬관으로 갔다. 유해청사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낮은 평지에 주차장이 있었고 주차장 바른편 언덕에 위치한 림시정부 진렬관 건물이 보였다. 검 푸른색 칠을 한 담이 둘러있는 속에 벽돌기와 건물들이 있었다. 널문으로 된 정문 우에는 우리식 표기법으로 《대한민국림시정부》라고 씌여있었다. 진렬관 입구에서 기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념관 가경해(贾庆海) 관장이 나와 맞아주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가경해 관장은 더욱 반가워하면서 직접 우리를 기념관으로 안내하고 해설해 주는 것이였다. 반백이 넘은 가경해 관장은 소박하고 진지하며 열정적인 사람이였다. 진렬관 정문을 들어서니 둔덕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고 계단 주변에 서로 이어진 2층, 3층 건물이 둘러있었다. 계단은 깨끗하게 청소되여 있었고 량쪽에 열대 화초를 심은 화분을 배렬해 놓아 건물에 생기를 보태주었다. 계단 왼편 건물은 옛 건물을 보수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있었다. 전시관에는 중경의 사적지 소개, 림시정부 이동로선과 활동 소개, 광복군 조직체계 소개, 관련 인물 소개를 비롯한 풍부한 내용이 포함되여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관련 내용을 열심히 소개해 주었다. 1938년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가심해지자 국민당의 정면 전장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도시들이 함락되였다. 당시 호남성 장사에 있던 한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와 정부 요원들은 부득이 광동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광동도 위태해지자 광서성 류주로 옮겨갔다. 전란속에서 림시정부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김구는 중경에 가서 국민정부와 련락을 취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국민정부는 현지정부에 명령해 류주에 있는 림시정부 요원과 그 가족을 중경 부근의 기강에 이동시켰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으로 입주하기 전까지 일년 남짓한 동안 기강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강에서 각 당파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지만 큰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강에는 7당 대회 옛터, 김구 거처 유적지, 리청천을 비롯한 림시의정원 요원 거처 유적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기강에서 병사하거나 과로사한 조선인 묘소가 남아있다. 간고하고도 어려운 전란속에서 김구주석의 장남 김인을 포함해 조선지사 80여명이 중경지역에서 병사했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항일전쟁시기 대부분 시간을 중경에서 보냈다. 중경에서 림시정부를 재조직하고 한국광복군을 창립함으로써 반일투쟁과 미래 건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중경이 일본군의 끊임없는 폭격을 받았기 때문에 림시정부 사무청사는 여러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는 양류가(杨柳街)에 자리 잡았다가 석판가(石板街)로 옮겼으며 다시 오사야항(吴师爷巷)으로 이주했다가 1945년 1월 유중구 칠성강 련화지 38번지에 위치한 지금의 진렬관 자리에 옮겨 11월 귀국할 때까지 사무를 보았다. 진렬관을 나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가경해 관장은 진렬관 오른쪽 두 번째 건물은 원 모습 그대로 되어있다고 했다. 건물에는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 리시영, 림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申翼熙)가 사용하던 방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귀국행로에 나선 독립지사들은 바로 이 청사의 돌계단에 모여 기념사진을 남겼던 것이다. 중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운명을 함께 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자체의 군력을 키우기도 전에 해방을 맞게 되었으며 급촉한 걸음으로 귀로에 올랐던 것이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련화지 38번지에 위치한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1995년에 개방하였고 2000년 9월 17일 광복군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면서 보수하고 전시내용을 확대하였다.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떠나면서 래일 기강으로 함께 갈 것을 가경해 관장과 약속하였다. 가경해 관장은 기강에 볼일이 있다면서 기꺼이 안내해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해질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원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중경시 중산4로(中山四路)에 위치한 계원(桂园)은 1945년 국공담판을 위해 중경에 온 모택동이 거주함으로써 유명해 졌고 지금도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련화지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역시 여의치 않았다. 중경의 거리는 100m의 평탄하고 곧은 길이 없을 정도다. 굽은 길이 아니면 비탈진 길이여서 중국이 “자전거 왕국”이라는 불리우지만 중경에서는 자전거를 볼 수 없다. 비탈길이 많기 때문에 자전거를 탈수없기 때문이다. 계원에 이르니 2층으로 된 벽돌건물이 나타났고 아래층에 아치형 입구가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나타났고 2층으로 된 정교한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계원의 주 건물로서 모택동이 머물렀던 곳이다. 1945년 8월 항일전쟁 승리후의 국가대사를 토의하기 위해 장개석은 3차에 거쳐 전보로 모택동을 중경에 초청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고위장교이고 정치부 부장을 맡았던 장치중은 연안까지 가서 모택동을 영접해 왔다. 그리하여 중경담판이 시작되였다. 모택동의 안전을 돌보기 위해 장치중은 자기의 개인 사택인 계원을 내주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밤에는 교외의 홍암촌(红巖村) 팔로군 판사처에서 취침하고 낮에는 계원에서 사무를 보았다. 그리고 계원의 회의실에서는 주은래가 국민당과 치렬한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0일 드디어 담판이 이루어지고 국공 량당은 평화를 위한 《쌍십협정(双十协定)》을 체결하였다. 모택동은 계원에서 중경의 각계 인사들을 만나보았고 중경 림시정부 요원들을 접견하였다. 모택동 비서의 일정기록에서 9월 3일 모택동이 한국 림시정부 요원을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 림시정부의 관련 자료들이 많이 분실되였기때문에 모택동이 구경 어떤 요원들을 만났고 또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길이 없다. 그러나 다만 접견이 있었다는 것으로도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중시정도를 알 수 있었다. 북경에서 살고있는 김규광의 아들 두건씨는 중경에 있을 때 어머니와 함께 팔로군 판사처에 간 적이 있다고 회억하였다. 그는 당시 주은래가 팔로군 판사처에서 중경의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고 증언하였다. 김규광의 안해 두군혜 녀사와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 녀사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냈기때문에 두군혜는 연회에 아들을 데리고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도 그만큼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중시하고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이 사용했던 사무실과 객실, 그리고 국공담판이 치렬하게 진행되였던 회의실은 모두 원 모습대로 정리되여 있었다.
65    제54회 정면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댓글:  조회:6471  추천:72  2008-04-11
     로구교 사변을 통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발동한 일본침략군은 1938년 6월까지 일년 시간을 들여 중국 장강 이북의 광활한 령토를 통제하였다. 태원부근에서 진행된 흔구전역, 서주를 중심으로 한 서주회전을 통해 일제는 장강이북의 전략요새들을 점령하고 북에서 남으로 무한을 포위하였다. 뱃길로 상해에 도착한 다른 한갈래 일본군은 송호회전을 거쳐 상해, 남경을 강점한후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해왔다. 그리하여 무한은 세면으로 막강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국공합작과 전민의 항전에 크게 고무된 중국 군민들은 피와 살로 침략자들의 비행기와 땅크에 대항하며 싸웠다. 인력과 자원의 제한을 받은 일제는 속전속결을 원했다. 수개월간의 공격을 통해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그들은 십여개 사단의 수십만 정규군을 동원해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국민당은 110만 군대를 모아 이에 항격하였다. 일본침략군은 6월에 안경을 공략하고 7월에는 호구, 구강을 침점하였다. 려산과 파양호의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부분적 국민당군은 적시적으로 반격을 조직해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침략군은 계속 지원병을 보내 더욱 강한 공격을 조직한 반면 국민당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주력부대를 후방으로 빼돌렸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부분적인 승리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잡지 못하고 계속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에 이르러 무한 남부방어선이 무너졌고 장강이북 수비도 여의치 못했다. 1938년 10월 24일, 장개석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전면 철수를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25일과 27일 무한 3진이 전부 함락되였다. 무한 외곽전투의 포화속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비록 정규군에서 적들과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활발한 대적선전공작을 진행했으며 무한에 정신적인 폭탄을 남겨놓았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는 무한을 제일 마지막으로 철퇴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될 때 무한은 일제의 포위공격을 받고있었습니다. 일제의 화약냄새가 무한으로 스며들고있었습니다. 무한에 있던 국민당의 당정기관들이 다투어 중경으로 철퇴하고 무한의 주민들이 뒤질세라 피난을 떠났다. 공장마다 상점마다 언녕 문을 다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대포소리속에서 태여난 조선의용대는 포소리나 화약냄새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을바람이 부는 쓸쓸한 무한거리를 다니며 일본글로 반일구호를 썼습니다. 넓은 아스팔트길에 높은 굴뚝에 커다란 담벽에 높은 수탑과 전선대에 일본글로 구호를 썼습니다.”   10월 24일, 조선의용대 지휘원과 장병들이 땀을 흘리며 선전구호를 쓰고있을 때 국민당 정치부 제3청의 청장이였던 곽말약이 철수를 앞두고 무한거리를 시찰하였다. 두려움 모르고 마지막까지 싸우고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곽말약은 후에 자기가 본 이 감명깊은 광경을 저서 <홍파곡>에 적어놓았다. 조선의용대의 드높은 항일열정과 두려움 모르는 전투정신에 감동된 곽말약은 직접 주은래를 찾아가 보고하였다. 정치부 부주임으로 있던 주은래는 이날 저녁 곽말약의 보고를 듣고 직접 조선의용대를 찾아갔다. 그는 대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더욱 큰 투쟁을 위해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 용사들은 그 길로 부두를 향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일제가 무한시내로 승냥이마냥 덮쳐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조선의용대의 투쟁사는 두단계로 나누어 볼수있습니다. 첫단계는 성립되여서부터 2년동안, 이 기간은 전선으로란 구호밑에 정면전장에서 싸운 2년입니다. 넓디넓은 싸움터에서 지대별로 흩어져서 싸운 2년이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 다음의 4년 10개월입니다. 이 기간은 적후로란 구호밑에 중국공산당의 령도하는 화북의 적후근거지에서 싸운 시기이고 하나로 뭉쳐서 싸운 시기입니다.”   4개월 남짓이 진행된 무한회전은 중국 항일전쟁에서 최대규모의 전역이였다. 하남, 안휘, 강서, 호남, 호북을 비롯한 광활한 지역이 혈전의 전장으로 되었고 수십만 중국 장병들이 피와 살로 침략자들의 비행기와 땅크를 비롯한 선진적인 장비와 맞써 싸웠다. 그러나 국민당의 편면적인 항전로선과 소극적 방어전략으로 하여 중국은 광활한 토지를 잃고 막대한 손실을 빚어냈다. 더욱이 국민당내 파벌이 군립하고 부분적인 장교들이 부패무능하고 죽음을 두려워 소극적으로 전투를 피했기 때문에 더욱 막대한 손실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년 남짓한 공격전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중국의 100여만 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령토를 강점하였다. 중국군민의 항전은 일본침략자들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무한회전에 전례없던 40만 병력을 동원한 일본침략자들은 비록 무한을 강점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근 20만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아시아를 제패하려던 일제는 무한회전을 겪으면서 드디어 인력과 자원 결핍이라는 이 현실적 문제를 정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역을 더 치러낼 인력과 물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항일전쟁은 전략적인 수비 단계로부터 점차 대치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구교사변으로부터 무한회전에 이르기까지 16개월간의 전쟁을 통해 중국항일전쟁은 두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하나는 국민당이 연해지역의 전략적 물력과 인력을 중경으로 중심으로 한 서북 대후방으로 적시적으로 철수하였다. 다른 하나는 일제 강점지역에 광범위한 항일유격근거지가 나타났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화북과 화중지역에서 활발한 투쟁을 진행하고있었고 부분적인 국민당 부대도 적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항일전쟁을 확고하고도 지구적인 대치단계에 들어가도록 한 조건이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의 정면전장에서의 투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한으로 떠난 조선의용대는 각 전장으로 흩어지게 됐습니다. 본부는 제4전구로 즉 광서 계림으로 이동하고 제1구대는 제9전구로 호남성 평강현 일대로 옮기고 제2구대는 호북성 호하구일대로 갔습니다. 후근부와 가족들은 중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져있었지만 일년이 지나서는 대오가 근 배로 늘어나 155명으로 됐습니다. 그리하여 재 본부를 총부로 고치고 제1구대를 제1지대로 제2구대를 제2지대로 고치고 또 제3지대를 증설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대장 김원봉의 인솔하에 중국 중앙군을 따라 이동하였다. 대장에 김원봉, 기밀주임에 신영삼(申榮三), 총무조장에 리집중(李集中), 정치조장에 김규광이였고 부대원에 리형래(李瀅來), 주세민(周世敏), 리춘암(李春岩), 석성재(石成才), 김인철(金仁哲), 한지성(韓志成), 윤세주, 진일평(陳一平), 김석락(金錫洛) 등 도합 13명이였다. 이들은 국민당 제4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광서성 계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제4전구 국민당 부대는 그후 광서가 일제에게 함락되자 중경으로 패주하였고 의용대 총대부는 1940년 초에 중경으로 갔다. 조선의용대 제1구대 43명은 구대장 박효삼의 인솔하에 제구전구에서 싸웠다. 부구대장에 김세일(金世日), 정치지도원에 왕통(王通)이고 제1분대장에 최경수(崔敬洙), 대부에 장중광(張重光)이고 제2분대장에 조렬광(趙烈光), 대부에 리해명(李海鳴)이였으며 제3분대장에 섭홍덕(葉鴻德), 대부에 리지강(李志剛)이였다. 제1구대는 전원이 조선민족혁명당 당원들로서 주로 호남성에서 활동하였다. 호남성 장사에 사령부를 정한 제9전구에는 국민당의 최 정예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일본침략군이 무한을 강점한후 수차 장사를 공격하였다. 장객석은 초도항전을 주장하면서 장사를 불태워 일본군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1구대 대원들은 화재로 인한 리재민 구출과 도시 복구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장사에서 벽신문을 만들고 <우리의 살길>이라는 순간잡지도 펴내면서 선동사업을 강화해 나갔다. 1939년말부터 1구대 대원들은 국민당 제9전구 각 부대로 흩어져 배속되였다가 광서로 옮기고 다시 부분적으로 중경으로 갔다. 그들은 광서 류주(柳州) 부근의 곤륜산회전(昆崙山會戰), 상북회전(湘北會戰), 장사회전(長沙會戰)에 참가해 대적선전을 적극 진행하였다. 1구대 대원들은 적 진지에 접근하여 함화(喊話)하는 방식으로 비정의적인 싸움을 하지 말 것을 일본군 병사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표어와 벽보 선전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1구대 대원들은 또 남로공작대(南路工作隊)에 배속되여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적 진지에 접근하여 함화하거나 노래하는 방식으로 적의 전의를 약화시켰다. 조선의용대 제2구대 41명은 구대장 리익성의 인솔하에 국민당 제1전구와 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부구대장에 진원중(陳元仲), 정치지도원에 김학무(金學武)였고 제1분대장은 리세영(李世榮), 대부에 장중진(張重鎭)였으며 제2분대장은 강진세(姜振世), 대부에 호철명(胡哲明)이였고 제3분대장은 리영신(李永新), 대부에 한득지(韓得志)였다. 이들은 조선청년전위동맹 맹원 및 기타 단체의 소속원이였다. 제2구대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인 김학무를 따라 무한에서 표어와 벽보를 통한 항일선전활동을 하다가 가장 마지막에야 철수하였다. 곽말약이 목격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바로 제2구대 대원들이였다. 김학무는 부분적인 대원들을 거느리고 하남성 락양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고 리익성은 나머지 대원들을 거느리고 호북성 로하구에 사령부를 둔 국민당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2월 호북성 수현(隨縣)에서 싸우던 2구대 대원들은 적 참호에 다가가 높은 나무위에 일본어 표어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거기에는 “일본의 형제들이여!우리의 공동의 적은 바로 일본군벌이다”, “일본 병사 형제들이여. 무엇하러 머나먼 타국에 와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 하는가?”, “어서 총부리를 그대네 상관에게 돌리라”는 내용의 글을 써놓았다. 그들은 또 적진에 접근해 일본말 연설하거나 반전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1939년말에 이르러 의용대 대원이 많아지자 제1구대의 부분적 대원과 새로 확보한 대원 그리고 일본군에서 귀순한 청년들까지 포함해 제3구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제1구대와 함께 국민당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또 일부는 새로 설립한 국민당 제3전구에 배속되여 연해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의용대는 재 편성을 거쳐 구대를 지대로 고쳤다. 제1지대 대장에 박효삼, 정치지도원에 왕통이였는데 도합 78명이였다. 제2지대는 리익성이 대장을 맡고 림평(林平)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는데 도합 75명이였다. 제3지대는 김세일이 대장을 맡고 양민산(楊民山)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제3지대는 도합 63명으로 통계된다.   (권립 교수) “일본말로 방송하여 적을 와해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동시에 제1, 2, 3 지대는 각기 당지 사령부를 도와서 적정을 수집하고 대적 사업일군 도합 6만여명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50여만부의 반일삐라를 쓰고 인쇄했습니다. 전지선전대를 조직하여 대적선전사업을 하고 유격선전대를 조직하여 적후에 들어가서 무장투쟁을 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는 2년 남짓한 동안 6개 전구의 13개성을 전전하면서 적투적 자취를 남겼다. 일제침략군과 싸우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활발히 선전활동을 진행하는 의용대 대원들의 모습을 찾아 볼수있었다. 그들은 총칼로 이룩할수 없는 거대한 전과를 올렸다. 조선의용대는 선전대였고 정찰대였으며 또한 전투부대였다.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대원들은 적 460여명을 격살하였고 적의 차량 121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각 전구에 파견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그 자질과 능력이 높이 평가되였고 소규모 부대였지만 정치적 의의가 컸고 선면의 효과가 좋았다. 더욱이 두려움 모르는 투쟁정신은 중국 군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64    제53회 조선의용대의 창건지 답사 댓글:  조회:3833  추천:79  2008-04-11
    국공분렬과 국민당내 군벌혼전을 거치면서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혁명가들은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룩되고 1937년 전면적인 중국 항일전이 개시되자 다시 무한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1938년 하반기 상해, 남경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자 상해, 남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 조선혁명자들이 무한에 왔다. 이들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면서 조선 각 혁명단체와 당파의 대단결을 이룩해 나갔다.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 할것없이 무한에 모여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김원봉을 위수로 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과 조선혁명자련맹(朝鮮革命者聯盟)이 대표적인 당파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선혁명자 김규광과 박건웅(朴建雄), 김산(장지락)을 주축으로 1936년에 창립되였다. 일찍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이들은 안전하게 광주를 탈출한후 장시기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상해가 함락된후 무한으로 왔던 것이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도 이때 한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50여명 조선 열혈청년들이 최창익(崔昌益 일명 리건우 李健宇)을 단장으로 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각종 군중집회에 참가하고 거리에서 연설하였으며 또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 항일전쟁을 선전하였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은 조선민족혁명당내의 열성자들이였다. 남경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김학무(金學武), 리상조(李相朝), 장지민(張志民)을 비롯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왕지연(王志延 일명 한빈 韓斌)과 함께 전시복무단을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으로 개칭하고 계속 활동을 견지하였다. 조선의용대 출신이였던 고 문정일(文正一)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이때는 무한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처한 때라 우리는 김학무를 단장으로 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인 <중화민족해방선봉대(中華民族解放先鋒隊)>와 함께 한구에서 항일선동사업을 하였는데 반일연설도 하고 연극도 했다. 나는 허정숙(許貞淑--최창익 부인) 등과 함께 걸상을 가지고 거리와 부두로 나아가 걸상에 올라서서 반일선동연설을 했다. 연설할 때 우리는 조선의 혁명청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조선이 망국한 뼈저린 아픈 력사를 이야기하고 항일하지 않으면 중국도 조선처럼 망국하게 되므로 중국과 조선이 단합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고 삐라를 살포하였다.》 1938년 10월, 무한 외곽에서 중국군과 일본침략군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고있었다. 수시로 떨어지는 적의 폭격과 포격을 무릅쓰고 이들 조선혁명자들은 한구에서 조선의용대를 성립하였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포함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각 단체와 당파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조선민족전선련맹)을 이룩하고 조선의용대를 창립해냈던 것이다.   (권립 교수) “당시 무한에는 김약산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족전선련맹 산하에 우리민족 청년 181명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중앙군사학교와 기타 군사학교 출신이였습니다.”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의 창립지를 찾기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무한 답사에서 첫 과제가 이곳을 찾는 일이기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문의해 보았지만 대답은 애매하기만 하였다. 우리에게는 한구 홍삼로(虹槮路) 8번지라는 옛 주소만을 가지고있을뿐이였다. 그리하여 지명판공실(地名辦公室)에 찾아가 홍삼로의 지금 명칭을 확인해 보아야 했다. 그러나 지명 판공실을 찾는 일도 바다에서 바늘 건지기나 마찬가지였다. 알려준 주소에 따라 겨우 찾아갔더니 문지기 이곳에서 이사갔다는 것이다. 민정국 산하인 지명 판공실은 지금 일원로(一元路)에서 사무를 본다는 것이다. 다시 수많은 길을 에돌아서 겨우 찾아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올라가서 사무실 문을 두드리니 40대 사나이가 맞아주었다. 책임자를 찾는다고 하니 자기가 책임자라고 하면서 용건을 물었다. 소개신과 기자증을 보이고 책에 수록된 지명을 주면서 지금 어느 곳인가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그분은 두말없이 철로 된 궤를 열더니 책 몇 권을 꺼내 열심히 찾아보는 것이였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한지 오래되는데 이런 지명은 처음 들어본다고 하였다. 혼자서 찾기 힘들 것 같아 우리도 다른 책을 펼쳐들고 함께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어떻게 되어 이런 이름이 나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책임자는 무한시민정국 지명처(地名處)의 조우생(曹雨生) 처장이였다. 조처장도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기도 옛날 입대하였을 때 연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연변사람들을 만나 매우 반가운데 도와주지 못했다고 하였다. 우리도 연변에 익숙한 사람을 만났으니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기분으로 즐거웠다. 반갑게 다시 인사를 나누자 조처장은 우리에게 지명 책까지 주면서 후에 다른 단서가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책의 기재한 주소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책에는 조선의용대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에서 성립대회를 소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박물관의 주관장과 무한혁명정부 유적지의 서관장이 알려준 대로 려황피로(黎黃陂路) 10번지를 찾아야 했다. 그곳에 기독교청년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안내하던 기사가 혼잡을 빚어냈다. 분명 려황피로라고 했는데 황피로(黃陂路)에 갔던 것이다. 그곳은 옛날 영국, 프랑스 조계지 자리여서 옛건물들이 많았다. 아무리 수소문 해 보아도 알수 없었다. 여러 거리를 헤매던 중 우연히 기독교녀성청년회(基督敎女性靑年會)라는 간판을 보았다. 아무튼 들어가 물어보기로 하였다. 녀성 두명이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기독교청년회는 려황피로에 있고 이곳은 황피로라고 알려주었다. 황피로가 아니고 려황피로가 맞는가고 다시 확인하려고 물었다. 그러자 분명하다고 퉁명스럽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말을 믿지 않는다고 나무리는 눈치까지 보였다. 고맙다고 그곳을 나왔다. 부근의 담배가게에서 한담하는 주민들을 찾아가 려황피로는 어떻게 가는 가고 물었다. 로인 한분이 길을 가르키면서 조금 더 나가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그냥 믿음이 서지 않았다. 황피로에서 조금 더 나가니 길가에 려황피로라는 남색 도로표식이 보였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터쳤다. 이번엔 10번지만 찾으면 되었다. 거리를 따라 도보로 한참 걸으니 담으로 둘러싸인 큰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구조를 보아 분명 우리가 찾는 기독교 청년회인 것 같았다. 서양식 4층 건물이였다. 창문마다 남색 갓을 달아 광선을 얼마간 가리고있는 것이 인상적이였다. 우리가 막 촬영을 하고있는데 한 사업일군이 다가왔다. 무한기독교청년회 주임 손효병(孫曉兵)이였다.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자 손주임은 잘못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30년대 이 건물은 미국 해병들의 구락부(俱樂部)였고 기독교청년회는 후에 이곳에 이사왔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1938년 이곳이 분명 기독교청년회 자리였다는 기재가 있다고 하면서 그럼 려황피로 10번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손주임은, 이곳은 분명 일본이 무한을 점령하기 전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해군구락부라고 하면서 이전에도 한국인이 이곳에 찾아왔었는데 이런 오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거리를 따라 조금 더 나가면 큰 청사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이 옛날 기독교청년회가 있던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도 마음을 진정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럴법도 하였다. 인사를 하고 거리를 따라 한 50여메터 걸어가니 큰 백화점 하나가 보였다. 백화점 한쪽 벽에는 건물유적을 설명하는 검은 안내문이 새겨져 있었다. 《기독교청년회한구회소구지(基督敎靑年會漢口會所舊址)》라고 씌여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된 옛 건물은 3층이였고 1916년에 착공하여 1919년에 락성되였다한다. 카나다의 상인 반미(潘美)가 돈을 냈기때문에 건물 명칭을 《반미당(潘美堂)》이라고 하였고 건물은 1944년 미군이 일본군을 폭격하던 중 파괴되였다고 씌여있었다. 주소는 한구 중산대도(中山大道) 1090번이였다.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돌에 새겨진 이 안내문에 의해 풀려졌다. 안내문 마지막에 건물은 옛 모습대로 복원되였다고 밝혀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백화점은 5층 현대건물이였다. 그러니 복원된 건물도 파괴되여 지금 이 석판 안내문만 남아있는게 분명하였다. 30년대 기독교청년회 옛터, 바로 이곳에서 자랑찬 우리민족 의용대가 창립되였고 이들은 중국항일전쟁에 참가하여 항쟁의 발자욱을 중국 전역에 아로새겨 놓았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의용대 창설지를 확인하였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도 미국 해군구락부옛터를 먼저 찾아온 것도 우리의 기재에도 문제가 있음을 설명한다. 답사하면서 몸소 찾아보는 것만이 가장 분명한 것이다. 조선의용대 창설지에 대한 잘못된 서술을 바로잡고 새롭게 연구를 할수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성취감도 들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의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시작되였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재차 합작하여 공동으로 일본침략자들에 대항하였다. 국공합작을 토대로 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은 관내 각지의 제 조선인 반일단체에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며 크나큰 고무와 추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분산과 갈등, 그리고 파쟁을 계속하던 조선 반일운동단체들도 조선민족의 대동단결을 열망하게 되었다. 1937년 11월 12일,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비롯한 단체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통일적인 《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김원봉, 김학무, 김규광, 류자명을 리사로 선출하고 석정(石正 윤세주 尹世冑), 한일성(韓一成), 왕지연(王志延), 박차정(朴次貞), 신악(申岳)을 간사로 하였다. 12월초 련맹의 대부분 성원들이 한구에 모여 창립선언을 정식 발표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 외각전투의 포성속에서 관내 조선민족의 첫 번째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 창건의식이 한구 기독교청년회에서 성대히 진행 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대표이며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으로 있던 주은래가 창립의식에 참석하여 동방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관련해 연설하였고 정치부 제3청 청장인 곽말약(郭沫若)도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國民政府)군사위원회 정치부 산하의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指導委員會)의 지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중국측 대표 4명에 조선측 대표 4명이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한 진국빈(陳國斌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대표 류자명이 조선인 위원으로 지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의용대 창건시 대원이 도합 120여명이였고 김원봉이 의용대 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두 개 구대(區隊)로 나누어 편성하였는데 박효삼(朴孝三)이 제1구대 구대장으로 임명되고 왕통(王通)이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제2구대는 구대장에 리익성(李益星), 정치지도원에 김학무가 임명되였다. 1939년 대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나자 제3구대를 새로 편성하고 한지성(韓志成)을 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10월 13일, 무한청년회관에서 의용대 창립 경축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 의용대 대원들이 가무를 공연하였고 《3.8》녀성가창단, 한구시 후원선전대대, 한구시 청년항전협회, 아동보육원, 아동구제협회, 동자군 등 6개 단체에서 내놓은 종목이 공연되였다. 의용대의 활동 초기, 성과가 가장 크고 또 가장 특색 있는 반일투쟁 방식은 적군에 대한 정치공세였다. 의용대는 창건된후 즉각 무한 보위전 외각전선에 나가 선전활동과 부상자 구조, 전투지원에 진력하였다. 무한 함락의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당 당, 정, 군 요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전이하기에 급급했지만 의용대는 2주야를 걸쳐 한구를 거대한 정신적 보루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며 거리 담벽과 아스팔트 길바닥까지 콜타르로 큰 표어를 써 놓았다. 그들은 일본글로 《일본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리라!》,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향락을 누린다!》라는 내용을 써 놓았다. 일본침략군이 무한 시내를 전부 점령하기 두시간 전까지 의용대 대원들은 줄곧 반일표어를 쓰고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으로 있던 곽말약은 자기의 저서 《홍파곡(紅波曲)》(인민문학출판사 1979년)에서 이렇게 적고있다.《이런 구호들은 내가 전날 만든 글귀인데 오늘 벌써 담벽과 물 땅크 그리고 거리바닥에 나 붙었다. 그것은 조선의용대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들은 철수하기 며칠전에 동원되여 이 사업을 맡았던 것이다....후에 포로들의 진술을 통하여 안 일이지만 적들은 무한시를 점령한후 그 표어들 때문에 큰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적들은 옹근 사흘이 걸려서야 그 표어를 지울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 써놓은 표어는 지울수 있어도 머릿속에 박힌 것은 지울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탄 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때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댓씩 한조가 되어 콜타르나 뼁끼를 들고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시간을 다그치며 일하고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제일 큰 감격을 주었고 또 나를 제일 부끄럽게 한 광경이였다는 것을 나는 승인하여야 하겠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의용대의 친구들이고 중국사람은 확실히 한사람도 없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 문을 아는 인재는 적지 않을 것이다. 일본 류학생만 하여도 최저로 수십만명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한이 위험을 앞둔 이 시각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 뿐이였다.》
63    제52회 무한에서 만난 원계성 교수 댓글:  조회:4755  추천:65  2008-04-11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은 본격화되였다. 로구교 사변을 통해 하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선후로 산서성 태원과 화북의 요충인 서주를 공격하였다. 1937년 9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115사는 림표, 섭영진의 인솔하에 평형관(平型关)에서 일본군 이다가끼 사단의 천여명 적들을 섬멸하는 승전을 올렸다. 평형관 섬멸전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된후 이룩한 첫 승리로서 전국인민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시켜 주었다. 1938년 4월 정면전장에서 리종인(李宗仁)이 서주 부근의 국민당군을 지휘하여 대아장부근에서 만 천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반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일본침략군은 화북을 점령하고 뱃길로 공격하여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고 중부도시 무한을 위협하였다.   (권립 교수) “일제는 1938년 3월까지 화북을 거의 다 강점하고 화중지구의 상해, 남경까지 불바다로 만들고 남경에서 30만 민중을 학살한 남경참안을 빚어냈습니다. 1938년 7월부터 일제는 25개 사단으로 무한을 포위했다. 공격전이 개시되였습니다. 장개석의 부대는 뒤걸음만 쳤습니다. 중화민족이 가장 위험한 시기에 처한 이때 무한에 모였던 우리민족 청년들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2004년 2월 7일부터 광주, 서금, 남창, 구강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구강에서 무한으로 출발한 것은 10일만인 2월 17일 오전이였다. 장강을 사이두고 구강시 바른편은 호북성 소지진(小池鎭)이였다. 버스는 구강시를 빠져나와 거창한 구강장강대교(九江長江大橋)를 건너 호북 경내로 들어갔다. 무한까지 4시간 거리였는데 길 량쪽은 산이 없고 모두 무연한 평지였다. 호북성 소재지인 무한은 예로부터 무한 삼진으로 불리웠다. 무창, 한구(漢口), 한양(漢陽) 세 진의 통칭인 것이다. 만리 장강이 무창과 한구, 한양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漢水)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과 한수에 다리가 놓여져 무한 3진이 한 도시로 되었다.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 중부의 중요한 수륙 교통과 문화 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때문에 많은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로 간주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 이후 중국의 혁명중심지는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졌다.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와 혁명투쟁에 참가하였다. 20세기 20년대초에 무한에는 벌써 중한호조사가 있어 조선 이주민들과 중국혁명지사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민이 조계지를 회수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국혁명이 고조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이곳에 모여왔다. 의렬단은 단장 김원봉을 따라 본거를 무한에 정하고 조직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37년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혁명자들은 다시 무한에 모였다. 그들은 중국의 국공합작 정세에 비추어 여러 당파들의 대 단결을 주장하였고 표면적으로나마 통합을 이루렀다. 그 산물이 바로 무한에서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립이였다. 우리는 무창에서 중앙인민방송국 무한 기자소의 소개로 신의대주점(新宜大酒店)에 투숙하였다. 호텔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때문에 먼저 호북성 당사판공실(黨史辦公室)에 찾아가 관련 단서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성정부는 무창의 홍산로(洪山路)에 있었다. 기자증을 보이고 당사 판공실의 관련일군들을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온 영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바란다고 하자 관련 일군들이 여러 가지 관련 자료를 내놓았다. 차를 마시며 열심히 자료를 뒤져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참고될만한 것이 없었다. 연구일군들과 문의해 보아도 조선의용대에 관하여 잘 모르고있었다. 책에서 본 생각은 나지만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련 자료들을 뒤질 사이에 연구원은 전화로 이곳저곳 문의하였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는 미안하다면서 무한 박물관에 가서 문의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사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지만 조선인 반일투쟁사에 대해서는 사실 중국 연구원들의 연구가 너무나도 빈약하였다. 광주의 황수생 연구원의 말처럼, 지금 연구일군들은 연구과제를 선택할 때 언제나 쉽게 전문가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또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분을 택하기때문에 조선반일투사들과 관련된 연구과제는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 이 과제로 직함이나 학위를 따기 힘들고 연구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중국 관련 연구분야에서 우리 반일투쟁사가 많이 홀시 되고 있는데 대해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이 더 커졌다. 중국내 조선인 반일투사들의 력사와 종적은 우리가 답사하고 찾아야하고 연구해야하였다. 방송기자인 우리는 비록 전문 연구일군이 아니지만 조선민족 투쟁사를 배우고 이를 널리 선전할 용의가 있다. 중국 조선족에게 알려주어야 할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우리민족에게 객관적이고 보다 정확한 력사를 알려주어야 하며 또 중국내 기타 민족에게도 우리민족의 자랑 찬 력사를 널리 선전해야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전화약속으로 중남재경대학(中南財經大學)의 원계성(袁繼成) 교수를 찾아간 것은 2월 18일 저녁이였다. 중남 재정경제 대학은 우리가 투숙한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학교 교원 사택을 찾아가 전화를 하니 원계성 교수가 만면에 웃음을 담고 마중 나왔다. 원교수 저택은 생각보다 헐망하였다. 아파트는 오래된 건물이였고 방도 세 개였지만 부인이 안 계시는지 지저분하였다. 그러나 교수는 소탈하게 웃으면서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교수는 중화민국사와 국민혁명정부 무한시기, 항일전쟁 시기의 무한력사에 대한 연구가 깊은 분이였다. 그는 다년간 서류국, 각종 문헌, 신문자료들을 찾으며 연구를 깊이 했다. 그는 중경시기 국민당 자료들을 가득 필기한 노트와 자기의 론문을 꺼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원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조선혁명자들이 무한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중국의 세 개 력사사건에 개입하였다. 하나는 한구 주민들이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는 사건이였다. 시민들의 반제운동이 한껏 고조를 이루었을 때 영국, 일본, 프랑스 조계지의 인디아 고용인들이 윁남, 조선인들과 련합하여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혁명가 권준이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의 조선인 대표로 출석해 대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는 기재도 있다.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에 참가한 조선인들은 영국 조계지 회수를 적극 도와주었고 한구 시민들의 시위에 동참하였다. 원교수는 그때 조선인들의 영향은 비교적 컸다고 평가하였다. 다른 하나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를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조직을 묶고 중국 대혁명에 적극 참가하였다. 학교측에서는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전이시키고 무한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조선인 청년회에서 전국 각지에 널리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6기로 입학하였다. 또한 리제심이 광주에서 공산당을 탄압하자 광주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왔다. 김원봉이 거느린 의렬단 요원들도 이 시기 무한에 와서 활동하였다. 원교수는 이때 조선혁명가 최용건도 무한에 왔다고 하지만 분명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후 중국군 장교로 있던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많은 조선청년과 학생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의렬단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들과 군관들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한국혁명청년회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義杓), 리검운(李劍雲), 오세진(吳世振), 리우각(李愚慤), 로세방(勞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軍事政治學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陳公木), 진갑수(陳甲秀), 사검인(史劍仁), 안동만(安東晩), 류광세(劉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學)과 남호학병단(南湖學兵團),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4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한국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 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그후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청년회 간부진과 회원들은 다시 무한에 모여 조선의용대 성립의 기간 력량으로 되였다. 세 번째로는 항일전쟁시기 무한 함락을 앞두고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다시 무한에 모여 조선의용대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중국 동북, 상해, 남경이 모두 선후로 일본침략군에게 강점되였다. 당시 국민당은 중경에 정부를 옮겼다지만 많은 기관과 사회단체들은 무한에 체류하고있었고 외국 사절들도 무한에 있었다. 남경이 함락된후 국민당의 거물급 인물들인 장개석, 왕정위, 공상희(孔祥熙), 풍옥상이 무한에 있었고 공산당 대표로 왕명(王明),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등이 무한에 있었다. 조선교민들은 모두 무한을 보위하는 항전에 적극 참가하였다. 원계성 교수는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0월 무한이 함락되기까지는 국공합작이 가장 좋은 시기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중국정세에 비추어 조선혁명자들의 좌우익 단합도 이 시기 비교적 성과가 컸다고 주장하였다. 그 표징으로 조선의용대의 성립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 무한에는 조선청년 전시봉사단이 있었다. 봉사단의 조선청년들은 병사들을 위문하고 난민들을 구조해 주었다. 1938년 4월 10일, 한구에서 조선민족통일전선을 묶고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이라는 반월간을 출판하였다. 조선민족전선운동이라는 기구도 있었다. 간행물 주필은 김규광과 류자명(柳子明)이였다. 잡지는 중국의 항일을 적극 지원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노역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인민과 함께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일본침략군이 곧바로 무한을 강점하게 될 무렵, 조선청년들은 무한에서 단연히 조선의용대를 성립하여 무한 보위전에 투신하려 하였다. 원계성 교수는 또, 조선의용대 성립일에 관련해 자기의 주장을 내놓았다. 연구를 거쳐 10월 10일에 성립되였고 신문에 피로된 것이 10월 13일이라고 하였다. 이날 원계성 교수에게서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확인하게 되어 성취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한에도 이처럼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를 잘 알고있는 교수가 있어 기뻤다. 원교수를 작별하고 호텔로 돌아오고 저녁에는 무한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장강에 정박한 륜선들과 장강대교, 강기슭의 유보도, 각이한 옛 청사들이 모두 네온 빛 속에서 한결 황홀해 보였다.
62    제51회 중국항전의 최전선에서 싸운 김자렬과 강석훈 댓글:  조회:5026  추천:62  2008-04-11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盧溝橋事變)으로 시작된다. 로구교사변전 비록 동북과 대만, 하북 등지가 일제의 통치와 예속을 받았지만 반동군벌과 국민당의 타협정책으로 하여 전민의 항일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1936년 12월 12일, 국민당의 애국장령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중국은 재차 국공합작의 국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침략군이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대거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 전민의 항일전이 개시되였던것이다. 그러므로 중국력사는 로구교사변으로부터 1945년 일본의 항복까지를 항일전쟁시기로 규명하고있다.   (권립 교수) “항일전쟁시기는 7.7사변부터 45년 8월에 일제가 투항하고 연안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동북을 향해 진군할때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말 그대로 8년간의 항일구국전쟁시기이고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관건적인 력사기입니다. 5천년 문명을 갖고있던 중국이 일제의 예속하에 식민지로 되느냐 아니면 독립을 고수하느냐 하는 력사시기입니다. 이시기에 중공과 전국여러민족인민들의 노력에 의하여 제2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당군대는 정면전장에서 싸우게 되었고 중공의 령도하의 섬북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남방의 홍군은 신편 제4군으로 편성되여 적후 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적후에서 일제와 판가리싸움을 벌였습니다.”   2004년 1월 7일, 답사팀은 중국 항일전쟁의 전면개시를 의미하는 유적지 로구교로 갔다. 북경시 풍대구(豊臺區) 완평성(宛平城)에 위치한 로구교는 시 중심과 20㎞ 거리를 두고있다. 로구교는 완평성밖의 영정하(永定河)에 놓여있다. 답사팀은 번화한 시가지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30분 가량 달려 완평성에 도착하였다. 성루와 성곽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완평성을 지나자 다리 란간에 수많은 돌사자가 줄져있는 로구교가 보였다. 동쪽 다리목에는 로구효월(盧溝曉月)이라는 오랜 비석과 정자가 있었다. 연경(燕京) 8경의 하나로 소문난 이 비석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가 썼다는 로구효월 넉자로 하여 더 유명해졌던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로구교 시가 적혀있었다. 로구효월 비석을 지나 로구교 다리에 올라섰다. 지금은 다리로 사용하지 않고 관광지로 개방하고있었다. 전부 돌과 조각으로 축조된 이 다리는 800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중국 고대 3대 명교(名橋)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 기재에 의하면 1189년부터 축조된 이 다리는 처음에는 광리교(廣利橋)로 부르다가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이 로구하(盧溝河 후에는 영정하)였기때문에 후에 로구교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1개 다리 기둥을 가진 로구교의 길이는 260여m였고 너비는 근 10m에 달했다. 다리는 흰 돌로 만들었고 다리 란간에는 정교한 돌사자를 조각하여 놓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돌사자의 머리, 등, 배, 발 밑에 형태가 각이한 작은 돌사자들이 숨어있는것이 보인다. 크고 작은 돌사자가 너무 많기때문에 현지에는 로구교의 돌사자는 헤아릴수 없다는 속어가 있다. 현재 초보적인 통계에 의하면 돌사자가 도합 498개가 남아있다 한다. 바로 이 아름다운 옛 다리에서 일본침략자들을 저격하는 전투가 시작되였고 국민정부군에 있던 조선인 장교 김자렬(金子烈)과 강석훈(姜錫勳)도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의 초기접전을 치렀던것이다. 1937년, 국민당군 29군 10만 장병이 하북, 차할(察哈爾), 북평, 천진 지역을 수비하고있었다. 당시 북평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은 빈번히 군사연습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인 중국침략의 구실을 찾고있었다. 7월 7일, 일본군은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구실로 완평성내로 들어와 수색하려 하였지만 중국군의 거부를 받았다. 그리하여 쌍방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8일부터 일본군은 완평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일 새벽, 로구교를 사수하던 중국군이 반격을 시작하여 부근의 적들을 물리쳤다. 일본주둔군은 타협의 환상을 버리지 않는 중국 당국과 계속 담판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북평쪽에 집결시키고 대규모의 공격전을 준비하였다. 국민당은 일본에 사죄하고 사건 조작자를 징벌하며 로구교 주변의 정규군을 철수하는 등 일본의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주면서 이른바 《진덕순(秦德純), 송정(松井) 협정》을 체결하였다. 사태확대를 두려워하는 국민당 장교들의 심리를 리용해 주력부대를 끌어 모은 일본침략군은 드디어 협정을 찢어버리고 북평, 천진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29군은 우세한 적들과 영용히 싸우다가 철수하였다. 국민정부군의 유명한 항일명장인 장자충(張自忠)부대에는 조선인 장교 김자렬(金子烈)과 강석훈(姜錫勳)이 있었다. 김자렬은 180사단 소장급 참모장으로 있었고 강석훈은 113려단 228단 상좌급 부관으로 있었다.   (권립 교수) “전국적인 정면항전의 첫 전투가 로구교전투였습니다. 로구교를 지키던 부대가 바로 항일명장 장자충의 제29군 장병들이였습니다. 여기에는 운남강무학당 제12기생이며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나온 김자렬 소장이 있었습니다. 김자렬 장군은 장자충의 명령을 받들고 진공해들어오는 일본군의 큰 타격을 안겼습니다.”   김자렬의 원명은 김정흡이고 호는 동천이며 또 김세준(金世晙)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사람으로서 1913년에 일본으로 가서 도꾜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 리대소를 알게 되였다. 1914년 겨울, 구국의 뜻을 품은 김자렬은 홀몸으로 삭풍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경에 왔다. 그는 중국말을 익힌 후 상해에 갔다가 항주(抗州)의 절강체육전문학교 제3기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선후로 녕파(寧波) 경찰청과 항주시 소방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에 다시 상해에서 조선인보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리범석(李範奭)을 비롯한 지사들과 함께 운남강무학당(雲南講武學堂) 12기 포병과에 입학하여 군사기술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후 김자렬은 상해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였고 또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보았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희망을 국제적 승인과 원조에 기탁하고 혁명군대 양성과 무력투쟁을 중시하지 않는 림시정부에 실망을 느끼고 북상하여 북경, 동북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김자렬은 동북의 독립군과 각 단체들을 통합시킬 뜻을 품고 북경에서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지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주비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들은 동북과 관내 각지의 군사단체의 통합을 주장하고 림시정부 불신임안을 채택하고 국민대표대회 소집을 내놓았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소집이 이룩되였으나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하자 김자렬은 다시 중국 동북을 주무대로 활동하였다. 그사이 그는 로씨야에 가서 조선독립운동 지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 잠입해 폭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4년 북경에서 《앞장》이라는 간행물을 창간하고 반일활동경비를 모금하고있던 김자렬은 리대소를 만나 그의 소개로 중국 서북군 장령 풍옥상이 꾸린 장가구(張家口) 국민군간부학교(國民軍幹部學校)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김자렬은 항일사상이 강한 풍옥상을 따라 서북에서 군벌들과 싸웠고 1927년 봄에 북벌군과 회합하였다. 그후 풍옥상과 함께 장개석을 반대하는 중원대전에 참가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31년, 김자렬은 제29군 38사의 장자충 부대에 편입되여 려단참모장으로 임명되였으며 후에는 180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장자충장군을 따라 항전의 첫 전투인 로구교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대아장(臺兒莊)전투, 서주(徐州)전투에 참가하였고 1940년에는 호북성 조양(棗陽) 남과점(南瓜店)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전투에서 부대 사령관이였던 장자충이 적들에게 포위되여 장렬히 전사하였다. 장자충이 희생된후 김자렬은 일선부대를 떠나 국민당 후근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독립운동을 적극 동조해주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하자 조선으로 나가려 북경에 왔지만 가지 않고 1961년에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권립 교수) “유명한 항일장군 장자충의 부대에는 또 강석훈이라는 연변의 훈춘에서 항일투쟁에 참가한 상좌부관이 있었습니다. 강석훈 상좌는 7.7사변 당시에 전사들을 거느리고 랑방역으로 들이닥친 일제를 요정냈습니다. 1938년에는 산동성의 다섯차례의 전투에 뛰여들어 용맹을 과시했습니다. 제3차 회전에서 그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강석훈은 일제가 투항할때까지 줄곧 최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강석훈은 북경부근의 랑방(廊房) 역에서 장자충 부대의 113려의 228단과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그는 1896년 조선 종성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여났다. 중국 연변의 훈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중국 동북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고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이 시기 그는 조기공산주의자 리동휘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년에 상해에서 손중산의 소개로 풍옥상의 서북군에 가게 되였다. 1937년에 강석훈은 풍옥상의 지시에 따라 29군 113려단의 소좌부관으로 랑방에 주둔하고있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난후 그는 중국측을 대표하여 랑방을 통과하는 일본군인들을 단속하였다. 7월 18일, 수백명 일본군이 천진으로부터 랑방을 거쳐 북평쪽으로 가려하였다. 그는 이를 가로막고 거듭 교섭하다가 끝내 접전을 시작하였다. 강석훈은 228단의 기총련을 거느리고 랑방역 부근에서 사수하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은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승세를 잡았지만 명령에 따라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강석훈은 재정비한 장자충의 제59군을 따라 산동성 림기(臨沂)전역에 참가하였다. 그가 소속된 38사와 김자렬이 참모장으로 있던 180사는 59군의 두개 주력부대였다. 부대는 차엽산(茶葉山)전투, 사자령(沙子嶺)전투에서 영용히 싸웠다. 59군은 림기지역에서 일본침략군의 두 주력의 하나인 이다가끼(板桓征四郞)의 제5사단의 공격을 수차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다가끼의 지원과 협동을 받지 못한 다른 한 일본군 주력인 10사단은 대아장(臺兒莊)부근에서 만여명의 사상을 내면서 거의 전멸되다싶이 하였다. 림기전투와 대아장전투로 이어진 대아장전역의 승리는 중국의 정면전쟁의 첫 대승으로서 일본군의 불가전승이라는 신화를 깨뜨렸다. 그러나 국민당의 피동적인 전략으로 정면전장의 불리한 국면은 돌려세우지 못하였다. 그후 강석훈은 계속 국민당부대를 따라 일제와 싸웠으며 기회가 있으면 공산당부대와 조선의용대를 도와주었다. 1941년, 그는 조선의용대를 도와주다가 국민당 특무들에게 발각되여 옥고도 치렀지만 풍옥상의 담보로 석방되였다. 항일전쟁 승리후 그는 제33집단군의 명령에 따라 하남성 상구(商丘)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전면개시를 의미하는 로구교 유적지를 떠나 완평성에 들어갔다. 완평성은 옛 성루와 성곽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여있었다. 성내에는 지금도 수많은 단층집들이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뻗은 몇갈래 길이 있었다. 완평성 중심에는 1987년에 대외로 개방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 있다. 흰 현대식 건물이였는데 기념관 정원은 잔디와 각가지 화초, 기념조각으로 장식되여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기념관에 들어서니 길이가 18m, 높이가 5m에 달하는 거대한 구리조각이 눈앞에 안겨왔다. 군인, 지식인, 농민, 로동자, 상인, 아동들이 꿋꿋이 선 자세로 침략자들을 항격한다는 내용이였다. 공화국 국가에서 쓴것처럼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축조(用我們的血肉鑄成新的長城)》한다는 내용이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정숙하게 서있는 구리조각 인물들은 관람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있다. 대청 천정에는 8개의 커다란 옛 종이 걸려있었다. 종은 8년 항일전쟁을 의미하고 외래침략자에 항격하는 경종을 계속 울린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5000㎡나 되는 전시청은 종합내용, 일본침략군의 폭행, 인민의 항쟁, 항일선렬 네부분으로 나뉘여 5000여점의 소중한 사진과 문물, 친필유고, 서적들을 전시하고있었다. 8년간 지속된 중국의 항일전쟁은 로구교로부터 전면 시작되였던것이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에는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여하였다. 로구교 전투를 치른 장자충부대에 김자렬과 강석훈이 있었고 기타 부대에도 많은 조선인이 참가하였다. 로구교사변후 1938년에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였다.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함께 전례없는 통합의 모습을 보이고 중국 관내 각 전장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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