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che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김성룡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41 ]

41    제30회 상해 한인지부 댓글:  조회:4171  추천:37  2007-12-11
  20세기 20년대 말, 중국은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었다. 공산당을 제치고 중국 정계를 독주하던 국민당은 심각한 파벌투쟁을 겪으면서 중국을 다시 전쟁속으로 이끌어갔다. 장개석은 국민당내의 실력자인 왕정위, 호한민(胡汉民)과 치렬한 파쟁을 진행하는 한편 새롭게 나타난 계서, 서북, 섬서 군벌들과의 치렬한 혼전을 치렀다. 장개석이 동북 장학량의 힘을 빌어 당생지(唐生智), 리종인, 풍옥상, 염석산의 공격을 막아낸 전쟁을 중국력사에서는 중원대전(中原大战)이라고 한다. 1930년까지 지속된 중원대전에 쌍방은 백여만 병력을 투입하였고 30만명에 달하는 사상을 빚어냈다. 전투에 능한 풍옥상의 서북군은 전장에서 수차 장개석 부대를 타격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장개석은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또 강소, 절강 지역의 매판자산계급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막강한 군력과 재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리간, 매수하는 방법으로 적진을 와해시켰고 동북의 장학량을 자기쪽에 끌어들여 혼전의 승권을 잡게 되었다. 국민당 파벌투쟁과 군벌혼전으로 중국 전역의 천백만 인민들이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이때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통하여 전국의 혁명투쟁 정세는 다소 호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피어린 투쟁속에서 탄생한 중국 로농홍군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농촌토지혁명을 전개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은 상악감(湘鄂赢) 근거지, 악예환(鄂豫皖) 근거지, 상악서(湘鄂西) 근거지, 해륙풍(海陆豊) 근거지, 악동(鄂洞) 근거지를 비롯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해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또한 중국의 주요 도시에 공산당 비밀조직을 건립하고 로동자, 학생, 상인들을 발동해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권립 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국민당 반동파의 백섹테로에 무장으로 항쟁할데 관한 우리당의 방침에 따라 많은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남창봉기, 광주봉기, 해륙풍보위전투에 참가하고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혁명사업에 종사하고있던 많은 우리민족 혁명자들이 상해에로 모였습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은 다시 상해에 모였다. 이들은 계속 민족독립의 방략을 연구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상해에서의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경에 시작 되였다. 혁명 선각자인 신규식이 조선사회당(朝鲜社会党)을 조직하고 당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1917년 9월에 개최된 세계사회당 대회에 요구하였다. 이듬해 려운형(吕运亨), 조동우(赵东祐) 등이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한 신한청년당(新韩青年党)을 조직하였다. 1919년에는 조선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쏘련으로부터 상해에 왔다. 그는 려운형 등과 함께 1920년 고려공산당(高丽共产党)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도 파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국민당 반동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수차 고려공산당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하였다. 외부적인 탄압과 내부적인 모순이 극대화되여 고려공산당도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감안한 국제공산당에서는 일국일당(一国一党) 원칙을 제기하였다. 이른바 일국일당제란 한나라에는 꼭 한 개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집단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려운형, 안연흠(安然钦), 김원식(金元植), 현창건(玄昌健), 홍남표(洪南杓) 등이 상해의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다. 이들은 1927년 9월에 중국인 3명을 포함해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法南区) 한인지부(韩人支部)로 되었다. 한인지부는 상해지부라고도 한다.   (권립 교수) 1927년 9월에 선 중국공산당 한인지부가 있었고 특수한 역할을 일으키고있었습니다. 한인지부의 명칭은 상해 법남구 한인지부였습니다. 지부는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중공에 가입하는 첫 시작이였습니다. 이때 여운형, 조봉암, 홍남표, 무정을 핵심으로 건립된 이 조선단체에는 청년동맹, 반제동맹, 호조회, 녀성구락부 등 많은 유력한 우리민족 외곽단체들을 갖고있었습니다. 이 한인지부는 우리민족해방투쟁에 있어서 핵심적역할을 훌륭히 일으킬수있었습니다. 상해의 한인지부는 그 자체가 상해에 있었기에 중공 특과의 소재지인 상해, 당 6기 3중, 4중 전원회의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자체가 중국조선족의 첫 중공조직이였기에 특수한 역할을 일으키게 되였던 것입니다.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의 주요 책임자들로는 선후로 려운형, 홍남표, 량명(梁明), 조봉암(曹奉巖), 구연흠(具然钦), 김단야(金丹冶) 등이 있었다. 상해지부는 처음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인 포석루(蒲石楼) 128번지에 위치한 려운형의 집을 활동장소로 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에는 프랑스 조계지 뢰미로(雷米路) 30번지로 옮겼다. 상해지부는 1929년 10월, 류호 한국독립운동가동맹(留沪韩国独立运动家同盟), 1930년 2월 상해한인청년동맹(上海韩人青年同盟), 1931년 12월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韩人反帝同盟), 중국혁명 호제회(互济会) 상해 한인분회(韩人分会)를 비롯한 외곽단체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31년 12월, 강소성 당위원회 법남구(法南区)위원회 한인지부의 홍남표와 조봉암, 장태준(张泰俊)에 의해 상해 한인 반제동맹이 설립 되였다. 그들은 조계지의 명원(鸣垣) 소학교에서 설립대회를 가지고 강령, 규칙,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조직은 상해 반제련합회에 가담하여 중국인민과 함께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하였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쏘련과 중국 쏘베트 지역을 옹호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살포하였다. 상해 한인 반제동맹은 이듬해 홍남표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세력이 많이 약화 되였다. 그러나 다수 공산주의자들은 계속 혁명을 견지하면서 강습반, 독서회 등 형식으로 반제사상과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또 기관지 <반제전선(反帝战线)>을 출간하였다. 그후 1933년, 중국의 반제대동맹이 해체되면서 한인 반제동맹은 상해 한인 독서회로 개칭하였다. 독서회는 매주 한두번씩 집회를 가지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혁명 호제회 상해 한인분회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조봉암이 1931년 2월에 설립하였다. 호제회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혁명자들의 단합을 추진하고 혁명대중들을 직접 도우면서 기관지 <혁명지우(革命之友)>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상해지부와 그 외곽단체들은 당시 상해에 있던 중국공산당 림시 중앙정치국(临时中央政治局)의 정신과 요구, 포치를 조선혁명가와 조선주민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조직하고 홍군을 지원하는 각종 의연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권립 교수) 상해지부에서는 중공의 지시에 따라 1930년 전후로 동북의 혁명을 돕기 위해 홍남표 동지, 김시명 동지를 동북에 파견하였습니다. 홍남표는 아성에 가서 중공 아성현 위원회를 세우고 적지 않은 우리민족 혁명자들을 당에 받아들였습니다. 례하면 1931년 9.18사변 전후로 상해지부에서는 동북조선족의 반일무장투쟁을 지휘하기 위해 많은 우리민족 군사인재들을 동북에 파견하였습니다. 화룡현 군사부장으로 있던 방상범 동지, 화룡현 약수동 쏘베트의 창시자인 신춘 동지, 동북항일련군 제3련의 전신인 주하유격대의 창시자의 한분인 리계동 동지, 녕안현위와 5군의 창시자의 한분인 번경유 동지, 이 많은 혁명가들을 동북에 파견하여 동북의 우리민족 반일무장투쟁을 도왔습니다.   상해지부는 조선이주민들이 비교적 많이 집중된 동북의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선후로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동북에 파견하였다. 광주봉기를 겪은 후 상해에 모였던 박근만, 박근수 형제도 동북으로 파견되였고 오성륜도 동북에 가서 동북항일련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이때 공산주의자였던 김규광은 상해에 남아 예리한 필봉으로 공산주의 리론을 선전하였으며 공산주의리론 연구를 깊이 하였다. 행동을 중시하는 다른 한 공산주의자 김산은 북평의 지하당 조직을 일떠 세우기 위해 단연 북평으로 떠났다. 한편 상해지부는 또 우수한 조선혁명가들을 홍군에 파견하였다. 중국혁명에 열망하는 조선청년들은 상해지부의 파견을 받거나 자원적으로 홍군 중앙쏘베트 지역으로 들어갔다.   (권립 교수) 20세기 30년대 초에 상해지부에서는 또 중앙쏘베트를 지원하기 위해 무정, 최정무, 장운선, 한용을 비롯한 조선족혁명가들을 모택동이나 주덕이 령도하는 중앙근거지에 파견하였습니다.   상해지부를 거쳐 홍군의 중앙쏘베트지역으로 간 조선혁명가들은 무려 30여명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서 무정(武亭), 최정무(崔政武), 장운선, 한용(韩容-‘金변’) 등이 비교적 유명하였다. 상해지부는 1933년 봄, 중국공산당 림시중앙정치국이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옮겨 갈 때까지 우리민족의 해방과 중국공산당의 발전에 특수한 기여를 하였다. 상해지부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였고 당의 로선을 조선민족에게 선전하였다. 그리고 중국 동북에서의 당 조직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고 쏘베트지역 홍군의 발전, 장대에 적극 동조하였다. 외부적인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에 상해지부는 1934년부터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치렬한 혼전을 거듭하고 중국혁명이 저조기로부터 다시 활기를 보이기 시작하던 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까지 존속된 상해지부는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상해지부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혁명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40    제29회 해륙풍에서의 항쟁— 댓글:  조회:4058  추천:36  2007-12-11
장개석과 왕정위가 선후로 혁명을 배반한 후 중국혁명은 저조기에 들어갔다. 중국공산당은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일으켜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진정한 혁명자들은 다시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들은 농촌에서 광범한 농민대중에 의지해 토지혁명을 전개하고 농촌혁명근거지를 창설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도시폭동으로 혁명정권을 탈취한다는 투쟁 전략이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해방하고 전국의 승리를 이룩한다는 전략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드넓은 농촌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대 지주의 땅을 몰수하여 땅 없는 농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광범한 농민들을 각성시키고 농민들을 무장시켜 적과 싸웠다. 중국 최초의 농민정권은 광동성 해륙풍에 수립 되였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농민운동가 팽배(澎拜)는 대혁명시기 광동의 해풍현과 륙풍현에서 활발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비밀적인 농회를 조직하고 농민자위군(自卫军)과 교양소를 세워 많은 군사간부들을 양성하였다. 1927년까지 해풍현에만 하여도 4천여명 공산당 당원이 있었고 300여개촌에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1927년 4월 15일, 광주에서 반혁명정변이 일어나자 해륙풍에서 로농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수천명 로동자 농민들이 치렬한 격전을 벌여 해풍성을 공략하고 인민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강대한 적들이 포위해 오자 봉기군은 농촌으로 퇴각하였다. 1927년 9월 해륙풍 인민들은 제2차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해풍, 륙풍, 혜양(惠阳), 자금(紫金) 부근에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다. 그후 남창봉기에 참가했던 천 여명 부대가 도착하여 홍군 제2사를 편성하였다. 여기에는 조선혁명가 김철강, 홍범기 등이 있었다. 홍군 제2사와 해륙풍 로농혁명군은 10월 30일 세 번째로 봉기를 일으켜 륙풍과 해풍 현성을 공략하고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쏘베트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의 첫 쏘베트 정권이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 후 12월 19일, 봉기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교도단도 해륙풍에 도착하였다. 이 가운데는 김산,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를 비롯한 십여명의 조선혁명자들도 포함되여 있었다.   (권립 교수) 1927년 12월 13일, 광주봉기의 천 2백여명은 광주를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김산, 오성륜, 양달부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화현에 도착하여 중국로농홍군 제4사로 개편되였습니다. 19일에는 해륙풍 쏘베트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화현(花县)에서 교도단 엽용을 사장으로 하고 조선인 오성륜을 창모장으로 하는 홍군 제4사를 건립하였다. 해륙풍 쏘베트지역은 조선혁명가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부근 농민들은 새로운 쏘베트 사회를 구경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네 마을에 돌아가서 무장투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이곳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언젠가는 조국에 돌아가 이러한 운동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 해륙풍 인민들은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피흘려 싸운 조선혁명가들에게 경탄을 표했다. 해륙풍에 도착한 이튿날 해륙풍 인민들은 대규모의 <조선인 동지 환영회(朝鲜人同志欢迎会)>를 열고 조선혁명자들을 환영하였다. 쏘베트 정부에서 오성륜은 군 사령부의 참모부의 일원으로 농민자위군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풍부한 투쟁경험과 군사기술로 농민들에게 군사지식을 배워주었다. 김산도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는 로동운동사와 꼼뮨력사를 강의하면서 선전공작을 지도하였다. 강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사상과 군사기술을 겸비한 훌륭한 간부로 양성되였다. 기타 조선혁명가들은 홍군부대에 편입되여 전투훈련을 하였다. 1928년에 들어서서 광동의 적들이 해륙풍 쏘베트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리복림, 여한모(余汉谋), 리제심의 10만에 달하는 적군이 해륙풍을 포위하고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모두 자기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누구든 앞장서서 공격하려하지 않았다. 당시 해륙풍에는 엽용이 거느린 홍군 제4사의 2천여명, 홍군 제2사의 천여명 그리고 로농혁명군과 농민적위대를 비롯해 만여명 무장대오가 있었다.   (권립 교수) 1927년 말에 2천여명 적들이 적석촌을 공격해왔습니다. 홍군 제4사는 피어린 반격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조선혁명가들은 해륙풍에서 첫 전투를 맞이하였다. 2천여명 적들이 서부로부터 적석촌(赤石村)을 공격하였다. 촌의 농민자위군과 농민들이 총칼을 들고 적들과 싸웠다. 녀자들과 어린이까지도 산에 올라가 붉은기를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농민군은 두려움 없이 적들과 용감히 싸웠다. 이때 교도단의 3백여명 전사들이 도착하였다. 조선혁명자들은 기타 홍군전사들과 함께 산등성이에서 전투상황을 살펴보았다. 적이 허점이 나타나자 3백명 전사들은 맹호처럼 공격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적들은 5백여명 사상자를 냈지만 홍군은 세명이 전사했을 뿐이다. 적석촌에서 참패를 본 적들은 새로운 전술을 썼다. 여한모는 3천여명 부대를 거느리고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면 공격해 왔다. 교활한 적들은 우세한 병력으로 공평촌(公平村)을 습격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부근의 농민적위대가 모여왔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공평촌 군중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적의 습격을 받았다. 김산은 산으로 철퇴한 후 기타 농민군과 함께 적들을 반격하였다. 그러나 간단한 장총과 칼을 든 농민군은 적들의 기관총 소사에 많은 희생을 내였다. 공평촌 전투에서 수많은 희생을 낸 농민군은 매롱(梅陇)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권립 교수) 그러나 2월부터 정세는 달라졌어요. 홍군과 쏘베트지역 농민들은 련속 악전고투했지만 해륙풍 대부분 지역을 잃어버렸고 4월말부터 5월초까지 오봉령일대에서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28년 3월 적들은 전반 해륙풍지역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매롱에서 봉기군은 재차 정비를 거친 후 해풍과 륙풍 현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적들은 대포와 기관총으로 저격하였다. 홍군은 수많은 희생을 내고 또다시 퇴각하였다. 현성과 주요한 촌마을이 적들에게 강점되자 홍군부대는 식량난까지 겪게 되었다. 부분적인 부상자들을 농민가정에 피신시키고 주력부대는 계속 퇴각하였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이때 퇴각하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우리가 도망친 산은 대단히 가파르고 위험해서 평상시에는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곳이였다. 오성륜과 손(孙)이라는 두명의 조선인 친구가 나와 함께 갔는데 나는 일행의 맨 앞에서 올라갔다. 당시 나는 건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성륜은 몸이 뚱뚱했고 더욱이 기후에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불쌍하리만치 많은 땀을 흘렸다. ....그날 밤에는 산 맞은편에 있는 폐사(废寺)에서 쉬었다. 일행은 10명이었는데 모두가 먹을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쌀을 숨겨둔 장소를 찾아내려는 희망을 품고 돌마다 들춰보았다. 오성륜과 나는 전래의 농부가를 부르면서 서로 교대로 돌을 하나하나 들춰보았다. 마침내 구멍 파인 돌 밑에서 조그마한 쌀독을 찾아내었다. 겨우 밥을 할 낡고 깨진 쇠솥을 하나 찾아냈지만 물이 새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쌀로 가루를 내여 솥에 넣고 쪄서 떡을 만들었다. 우리는 떡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릴수가 없어서 반쯤 익자 꺼내어 동료들을 불렀다. 숨을 곳을 마련하거나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모두 빨리 떡을 준비해야만 합니다.’밤새도록 우리는 쌀을 찧어 떡을 만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먹을 것 찾는 데는 귀신인 오성륜이 운 나쁜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 쏘아 잡았다. 광동인들이 즐겨 먹는 검붉은 개였다. 이 진미를 어떻게 료리해야 좋을까? 오랜 토론 끝에 땅에 구덩이를 파고 개를 그 속에 집어넣은 다음 그 위로 불을 때기로 하였다. 우리는 불 옆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 조선의 민요 아리랑,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고 모두 울었다. 중국사람들은 이 노래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코 잊을수 없을것이라고 말했다.” 김산과 오성륜, 그리고 손꼬마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숲 속에서 잠들었다. 잠들기전 손꼬마는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낮은 소리로 동요를 불렀다. 이튿날 죽음을 각오한 이들은 각자 주소와 가족에게 준 서한을 교환하였다. 김산은 가족에게 보내는 서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운 조선땅이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며칠후 그들은 백사(白沙)에 도착하였다. 홍군 제4사의 엽용은 희생되였고 부대는 4백명밖에 남지 않았다. 5월 3일, 홍군은 해풍현을 공격하는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로 하였다. 홍군전사는 4백명이였고 기타 수백명의 유격대원들이 조직 되였다. 부대는 두 길로 나누어 오복령(五福岭)과 현성을 공격하였다. 오성륜과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은 부대를 따라 현성의 학교를 기습하였다. 오성륜이 8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감쪽같이 적의 보초를 제거하고 백여명 적들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무기와 탄약을 로획하고 감옥의 200여명 혁명자들을 구출해 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오복령 공격부대는 전투를 시작하지 못하고있었다. 오성륜은 할수없이 현성을 나와 적의 주력이 도사리고있는 오복령으로 갔다. 두 개 부대가 합쳐 적들을 공격하였다.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지만 적들은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날 밝을 때까지 사수하였다. 날이 밝자 적들은 공격부대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반격을 가했다. 우세한 적들이 포위 공격해 오자 홍군부대는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흩어졌다.   (권립 교수) 오성륜이 거느린 부대에는 손씨라는 꼬마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봉령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학질에 걸려 한발자국도 옮기기 힘들었던 김산과 오성륜은 꼬마전사를 업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마을에는 병원도 의사도 없었어요. 꼬마전사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이 결전에서 오성륜의 조카도 희생되고 김철강과 홍범기도 희생되였습니다.   남창봉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조선혁명자 김철강과 홍범기도 오복령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오성륜과 함께 있던 손꼬마도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다. 오성륜과 김산은 손꼬마를 끌고 서로 부축이면서 철수하였다. 그들은 검유령(剑游岭)에 있는 비밀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병원으로 사용되던 초가집은 조금 전에 적들에게 타버렸다. 안에 있던 30명 부상자들은 산채로 불에 타 죽었다. 그 가운데는 오성륜의 조카도 있었다. 손꼬마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희생되였다.   (권립 교수)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전사들은 2백여리를 달려 매양에 모였다가 분산탈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김산과 오성륜 등은 두달동안 상상하기 어려운 난관을 무찌르며 이산에서 저산으로, 싸우며 행군하고 행군하며 싸우며 끝내 당조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당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투쟁에 뛰여 들었습니다.   적들을 피해 잠복하던 중 김산과 오성륜도 흩어졌다. 김산은 조그마한 나무뱃를 타고 산두에 갔다. 산두에서 그는 향항으로 가는 일본화물선을 타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향항에서 인삼장수의 도움을 받은 김산은 중국의 국제도시 상해에 도착하였다. 당시 김규광도 상해에 있었다. 얼마후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도 상해에서 이들과 재회하였다. 굴할줄 모르는 조선혁명가들은 상해에서 당조직을 찾았고 계속 혁명을 견지하였다.    
39    제28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5) 댓글:  조회:3655  추천:38  2007-08-20
   광주 답사를 마무리하던 2월 11일, 마지막 코스로 중산대학에 가 보았다. 2,30년대 수많은 조선인 혁명자들이 중산대학에서 리론학습을 하면서 혁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광주답사를 통해 알아본데 의하면 지금의 중산대학과 20년대의 중산대학 위치는 판이하게 달랐다. 원 중산대학은 주강 이북의 시 중심부근에 위치하였다. 문명로에 위치한 로신기념관이 원 중산대학 강당자리였다면 중산대학은 그 부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중산대학은 시 중심지를 벗어나 주강 이남인 신항서로(新港西路)와 령남로(岭南路) 부근으로 옮겼다. 이곳은 20년대 령남대학(岭南大学)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령남대학도 중산대학에 합병되여 령남학원(岭南学院)으로 남아있을뿐이였다.       광주봉기는 3일만인 12월 13일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아무런 후원도 없는 상황에서 령남대학 부근에서 17일까지 5일간 전투를 견지한 봉기군 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에는 60여명 조선용사들이 있었다.   (권립교수) 다른 한곳은 령남대학 부근의 한 진지였습니다. 200여명의 봉기군이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고 몇배나 되는 적에 의해 포위되였습니다. 그중에는 박영동지가 거느린 조선족 소분대 60여명이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엽검영 교도단 2영 5련의 조선족 전사들이였습니다.      광주봉기 첫날이였던 12월 11일 저녁, 주강 이남으로 도주한 적 두목들을 추격하고 그곳의 리복림(李福林)부대를 제거하기 위해 봉기군은 돌격대를 조직하였다. 리복림 부대는 비록 토지출신의 오합지졸이여서 전투력이 강하지 않았지만 그 수는 수천명에 달했다. 봉기 지휘부에서는 전투경험이 결핍한 로동자  적위대만으로는 이 임무를 완수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규군 가운데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소분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쓸만한 정규군 부대가 워낙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예부대를 편성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군사기술이 뛰여난 교도단의 조선인 장병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제2영 5련의 박영이 조선인 전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로동자 적위대와 함께 도강 돌격대를 편성하였다.    12일 박영은 돌격대 2백여명을 거느리고 주강 이남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령남대학 부근에서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였다. 돌격대는 유리한 진지를 점령하고 우세한 적의 공격을 수차 물리쳤다.    13일이 되자 수많은 적의 정규군이 도착하였다. 전투력이 강한 적 설악(薛岳)의 부대가 도착하여 리복림 부대와 함께 공격해 왔다. 게다가 일본, 프랑스,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함포가 주강을 차단하였다. 뒤에는 사품치는 주강이 가로막히고 적들은 삼면으로 포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돌격대원들은 박영의 지휘하에 침착하게 적들과 싸웠다. 강이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들은 지휘부와의 련결이 끊어졌고 철수명령도 받지 못했다.      (권립교수) 그들은 굶주림을 참으며 닷새동안이나 혈전했습니다. 이리하여 2백여명 중에 120여명이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그중에는 교도단의 우수한 장령으로 있던 박영 동지가 있습니다.      두명의 전사가 박영의 명령을 받고 지휘부와 련락하기 위해 포위를 빠져나오고 한 전사가 요행 사경을 벗어난 외 조선용사들은 령남전투에서 전부 희생되였다. 그들은 생사의 시련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17일까지 전투를 견지했던 것이다.      령남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박영의 원명은 박근성이다. 일찍부터 혁명에 참가한 그는 동북에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후에는 로씨야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그는 광동에 있는 친구 리용의 서한을 받고 안해와 두 동생인 박근만, 박근수와 함께 광동에 왔다.    광동에서 이들 형제는 황포군관학교에 적을 두고 조선인 혁명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북벌전쟁에 참가해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국공분렬이 시작된 후 박영은 무한에서 엽검영이 조직한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에 참가하였다. 남창봉기가 실패한 후 혁명의지가 박약한 자들은 선후로 혁명대오를 떠났지만 이들 형제는 끝까지 투쟁을 견지하였다.    교도단을 따라 다시 광동에 온 이들은 핵심전투원으로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박영은 봉기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백운산, 관음산, 령남전투를 비롯해 광주봉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러차례 크고작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민족의 우수한 아들인 박영은 령남전투에서 도강 돌격대를 거느리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1927년 12월 13일, 광주봉기의 정세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조선 혁명자들은 중산대학에 모여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김산이 이날 조선쳥년련맹 회의 의장을 맡았고 양달부와 오성륜, 김규광을 비롯해 12명 주요한 조선인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광주봉기에 참가한 경험을 총화하고 봉기가 실패하면 누가 광동에 남고 누가 떠나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봉기에 많은 조선인이 참가했기 때문에 적들도 조선사람들만 보면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 조선인은 부대를 따라 철수하기로 하였다. 봉기군은 72렬사 기념탑이 있는 황화강에 모여 이동하기로 하였다.    양달부, 김산,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를 비롯해 대부분 조선인 혁명가들이 교도단 주력부대를 따라 해륙풍으로 철수하였다.       (권립교수) 적들은 광주시내로 쳐들어왔습니다. 적들은 이렇게 웨쳤습니다. ‘단발머리 녀인 다 죽여라, 붉은 옷 입은자 다 죽여라, 조선사람처럼 생긴자 다 죽여라’ 놈들의 이런 백색테로속에서 도합 5천 7백여명이나 되는 혁명자들과 광주시민들이 살해되였습니다. 광주는 피에 젖었습니다. 광주봉기는 실패하였습니다.     광주봉기에 많은 조선인이 참가했다는 것을 간파한 적들은 조선사람이라고 여겨지면 마구 살해하였다. 양복차림을 하고 중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면 그냥 조선인으로 판단하고 죽였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 김규광은 부대를 따라 철수하지 않고 련인이였던 두군혜의 집에 몸을 숨길수 있었다. 두군혜는 회억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있다.    “봉기가 실패한 후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황혼녘에 규광동지가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얼굴에 먼지투성이였고 많이 초췌했지만 아주 침착하였습니다. 그는 공안국으로부터 철수한후 길을 에돌아 왔던 것이지요. 그의 말에 의하면 포위된 많은 동지들은 적의 기관총 소사에 비참히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분적 동지들은 시구역을 빠져나가 각기 해륙풍과 향항으로 피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산대학 기숙사에 아직도 일부 동지들이 있으니 그들을 급히 전이시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옷도 먹을 것도 돈도 없다고 했습니다…중산대학에 남은 동지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어머니와 의논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도 좋은 방법이 없었지요. 어머니는 집에서 오빠의 옷을 뒤져내고 또 밤도와 중국 옷 한 벌을 지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평소 양복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중국 옷을 입혀야 무사히 빠져나갈수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또 돈 10원을 만들어 중산대학의 로씨야로 기숙사에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아종(阿钟)이라는 학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솔찍하고 믿을만한 사람이였기 때문에 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거리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아종은 얼마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좀처럼 거리의 시신곁을 지날 수 없다고 하였지요. 할수 없이 규광동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를 엄호해주기 위해 나도 따라 나섰습니다. 다행히 적들에게는 아직 모든 거리를 경계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규광 동지와 함께 서관의 주민구를 벗어나 서과원쪽으로 달렸습니다. 거리에는 시신들이 더욱더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붉은 피가 흐르고있었습니다. 우리가 중산대학 로씨야로에 위치한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의 동지들을 무사히 철수시켰습니다. 이틀후 나와 규광동지도 함께 향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국민당 반동파들의 대학살이 시작되자 국제제난회(国际济难会)라는 비밀조직이 있어 혁명자들을 적극 도왔다. 국제적인 조직인 제난회는 제3국제에 소속되여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6기생인 조선인 김창만(金昌满)도 광주 제난회의 성원이였다. 그는 제난회의 기타 성원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혁명자들을 숨겨주고 그들을 도와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 살해된 혁명자들의 시신을 처리하게 하였고 유가족들을 부조해주었다.         답사팀이 광주에서 만났던 저명한 사학자 려현형 교수가 광주봉기의 의의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광주시 당사연구실의 황수생 연구원은 광주봉기 력사에서는 려현형 교수가 권위라고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려현형 교수는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자 박영에 대한 전문적인 인물전을 쓰기도 하였다.   (려현형교수) 광주봉기는 로동자, 농민, 병사가 함께 일으킨 봉깁니다. 남창봉기는 군대에 의지한 봉기였고 추수봉기는 농민이 위주로 되었습니다. 로농홍군이라는 명칭도 광주봉기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주봉기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3개 봉기의 하나입니다. 중화쏘베트 문헌에서도 이를 명확히 제기하고있습니다.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 이처럼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빠리 꼼뮨과도 다릅니다. 당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광주봉기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봉기에는 조선, 쏘련, 윁남의 혁명자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윁남과 다릅니다. 윁남 혁명자들은 로동자들과 함께 봉기에 참가하고 봉기 실패 후 20여명이 체포되였지만 국외의 구조를 거쳐 모두 풀려났습니다. 희생자가 없거든요. 그러나 조선혁명가들은 광주봉기에서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조선인은 련대를 무어 사하에서 싸워 백여명이 희생되였습니다. 조선혁명가들은 줄곧 봉기 주력부대인 교도단에서 싸웠고 또 황포군관학교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 중산대학에도 많았지만 모두 비밀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렬사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려현형 교수를 작별하고 답사 길에 나서면서 머리 속에 가셔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국외 일부 학자들이 광주봉기에서 수많은 조선 혁명자들이 희생된 것은 무의미한 희생이라고 평가한 론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 혁명자들의 희생이 그처럼 무의미했던 것일까?    3.1운동후 조선혁명자들은 중국의 동북과 상해지역, 로씨야 극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많이 전개하였다. 20년대 의렬단을 비롯한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로씨야로부터, 동북으로부터, 상해로부터 그리고 조선국내로부터 속속 광동에 모여 온 것은 손중산이 창도한 반제반봉건의 위대한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조선독립과 해방을 전반 동방피압박민족 인민들의 해방과 련계 시켰고 동방피압박민족의 해방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올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 없이 중국인민의 반제투쟁에 참가하였고 봉건군벌을 타격하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장개석과 왕정위 두 집단으로 분렬되였고 권력쟁탈에서 제국주의자들의 막강한 후원을 받기 위해 드디어 로농대중의 리익을 대표한 중국공산당에게 총을 돌렸다. 조선의 진정한 혁명자들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새로운 군벌세력으로 대두한 국민당을 믿을 수 없었다. 또 외교적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굴종하는 국민당 반동파들을 절대 믿을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혁명자들은 광범한 로동자, 농민의 힘에 의지해 반제반봉건 투쟁을 끝까지 진행하려는 중국공산당만이 전반 동방 피압박인민의 해방사업을 대변해 주고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서슴없이 이 위대한 항쟁에 나섰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혁명자들의 희생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희생은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인민의 항쟁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전반 동방피압박민족의 거세찬 함성을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성세호대한 광주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백여명 조선인들을 포함해 수많은 혁명자들이 희생되였다. 국민당 반동파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검색하고 살해했으며 조선인 혁명가들속에서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속출하여 체포, 살해하려했다.   적들의 피비린 탄압속에서 많은 혁명자들은 대도시로, 농촌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항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도시에서 당조직을 찾고 계속 지하투쟁을 전개했으며 농촌에서 농민들을 발동해 농촌혁명 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우리의 조선인 혁명자들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에 패배의 상흔을 안고 계속 투쟁하였다. 일부는 상해로 갔고 일부는 무한으로 갔으며 또 일부는 다시 동북으로 갔다.    또 많은 사람들은 홍군부대를 따라 혁명근거지 창설에 참가하였다.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3대 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고 반제반봉건의 중국혁명을 끝까지 진행할 항쟁의 의지를 세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조선혁명자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고 봉건주의 억압에 허덕이는 동방피압박민족의 해방은 무력항쟁으로만이 성공할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 어느 강대국에 의지할것이 아니라 천백만 로농대중의 힘에 의지하여야만이 해방의 그날을 맞이할수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중국 전역에서 혁명활동이 계속 진행되고있었다.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고 강서, 호남, 호북, 광동, 광서, 섬북 도처에 농촌혁명근거지가 나타났다. 하나 하나 모여진 작은 불꽃이 광야의 불길로 타오를 그날은 멀지 않았다. 사진설명: 중조혈의정 비석의 비문
38    제27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4) 댓글:  조회:3658  추천:57  2007-08-20
   광주봉기 첫날 쏘베트정부의 수립을 보았지만 봉기군은 국부적인 승리를 이룩했을 뿐이다. 광주에 주둔하고있던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반동군벌들을 도와 공격해 왔다. 광주시 외곽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되었다.    12월 12일 점심, 쏘베트 정부에서는 원 계획대로 쏘베트 정권을 옹호하는 대형 군중집회를 조직하고 쏘베트 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광주의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 만여명이 서과원(西瓜园)에 모여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권립교수) 이날 점심 광주 서과원에서 광주 쏘베트정부 옹호대회가 열렸습니다. 장태뢰 동지를 대리주석으로 한 광주쏘베트정부에도 조선족 용사들이 참가했습니다. 쏘베트 정부 숙반위원회에는 조선족 혁명가 김성숙이 있었고 로동무장부에는 김산이 있었습니다.      당시 김규광의 련인이였던 두군혜(杜君慧) 녀사는 이번 군중집회에 대해 이렇게 회억하였다.    “봉기 이튿날 광주시 서과원 광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어요. 조선 동지들이 소속된 련대가 광장의 호위를 책임졌기 때문에 규광과 7,8명 조선동지들이 대표로 대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속에는 최용건도 있었습니다.”     서과원은 광주시 번화한 월수구(越水区) 인민남로(人民南路)에 위치하였다. 지금은 광주일보사(广州日报社) 청사가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만여명이 모일 수 있는 거대한 공지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광주시 당사판공실의 황수생(黄穗生) 연구원이 당시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이곳이 서과원입니다. 광주봉기가 승리한 후 쏘베트 옹호대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쏘베트정부 숙반위원회의 사업을 맡았던 김규광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위급했기 때문에 대회가 끝나지도 전에 사람들은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서과원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로동자 대표들이 여러가지 회기(会旗)를 들고 가장 앞에 앉았고 광주 주변의 농촌에서 온 수백명 농민 대표들도 전신무장을 한 대로 한쪽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전투는 긴장하였지만 교도단, 경위단, 적위대의 군인대표들도 와 있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녀성, 상인, 점원, 학생대표들도 있었다. 회장 정면에는 붉은 바탕에 검은 글로 “광동공농병대표대회(广东工农兵代表大会)”라고 씌여있었고 주석대 정면에는 맑스와 레닌 상이 걸려있었다. 전신무장한 장태뢰가 주석단에 나서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장태뢰는 혁명정세를 보고하고 쏘베트정부 시정강령을 하나하나 이야기하였다. “모든 정권은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대회에 귀속된다. 반동군벌을 타도하고 로동인민의 권리를 수호한다. 모든 토지를 국유로 한다. 쏘련과 련합하고 모든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한다.”    시정강령 조목이 선포될때마다 장내는 환호소리로 진동하였다. 흥분된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구호를 웨쳤고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그러나 주변의 총소리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렸다. 대회는 앞당겨 끝마치게 되었고 쏘베트 정부 일군들과 대표들은 각기 자기의 위치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지휘부로 가던 도중 장태뢰가 적들의 저격을 받아 불행히 희생되였다. 광주봉기의 최고지도자였던 장태뢰의 희생소식은 한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알리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봉기자들은 계속 드높은 기세로 적들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때 상서롭지 못하게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과원 집회가 끝난 후 김산은 지휘부에서 총 없는 로동자들에게 총을 내주었다. 많은 지원자들이 무기를 얻기 위해 정부로 몰려왔고 로동자들은 기꺼이 봉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주강 이남으로 도주한 장발규는 다시 주변의 부대를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12일까지 이미 반동군대 세 개 사단이 광주에 도착하였다. 적들은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사면으로 광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권립교수) 봉기 이튿날 광주의 정세는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당 우파들은 영국, 미국,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봉기군을 역습하기 시작했습니다. 12일 밤, 봉기군에서는 혁명의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 혁명의 실력을 다소나마 보존하기 위해 해륙풍 쏘베트 구역으로 철퇴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적아간에 서로 교차되여 있었기에 적지 않은 부대는 철퇴명령을 받을수 없었고 받았다고 해도 철퇴할수 없는 부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적 4군 지휘부와 12사단 지휘부가 있었던 장제,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였던 관음산, 백운산 기슭의 사하진 부근으로 적들이 공격해 왔다. 적의 주력부대는 백운산쪽으로 공격했다. 엽정과 엽검영, 진갱(陈赓)을 비롯한 우수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봉기군을 이끌고 적들과 육박전을 벌였다. 전사들은 탄약이 떨어지면 돌을 던지며 싸웠고 돌까지 없으면 빈주먹으로 적들과 싸워 수차례 적들을 물리쳤다.    장제와 사하진 부근으로도 우세한 적들이 공격해 왔다. 도처에서 봉기자들은 적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고 봉기군 지휘체계도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중요한 진지가 무너지고 싸움은 크고 작은 거리에서 시가전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더는 무모한 싸움을 계속 할수없었다. 수배에 달하는 적들이 포위공격해 오고 있었다. 위기의 시각, 엽정은 혁명의 씨앗을 남기기 위해 과단하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공화국 원수 섭영진(聂荣臻)은 회억록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겼다.   “12일 황혼녘에 나는 엽정동지와 함께 재정청 청문대에서 각곳 전투상황을 살펴보았다. 적들이 관음산에서 내려오고있었는데 우리에게는 매우 불리하였다. 우리는 더 지탱하는 것은 무모한 희생을 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퇴각하기로 결심하였다....나는 공안국에서 운대영과 진욱(陈郁)을 비롯한 성 위원회 동지들을 보았다. 적들이 이미 관음산으로부터 성내로 공격해오니 빨리 철퇴하라고 알려주었다. 이때 한 무리 적들이 공원앞까지 쳐들어왔다. 나는 한 조선동지와 함께 그곳에서 적들과 싸웠다. 그 조선동지는 기관총수였고 싸움에서 아주 용감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그곳을 빠져 나오게 되었다.”   답사팀이 광주에서 만난 려현형(黎显衡) 로인도 무명 조선인 기관총수의 이야기를 하였다. 려현형 로인은 원 광주시 문화국 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지만 지금도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있었다.   (려현형교수) 인민공원부근에서도 싸움이 치렬하게 진행되였는데 그때 조선인 한 사람이 기관총으로 적을 물리쳤습니다. 싸움은 아주 치렬하게 진행되였습니다.      광주시 인민공원은 월수공원 이남의 길상로(吉祥路)에 위치해 있었다. 월수공원이 이전의 관음산이고 당시 인민공원은 그냥 공원이라고만 하였다. 공원문앞에서 기관총으로 적과 단신으로 싸운 조선용사는 이름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용사가 목숨을 내걸고 엄호해주었던 섭영진은 해방 후 공화국 원수로 되었다.      12일 저녁 무렵, 광주봉기 주력부대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동부 전선을 수비하고있던 조선인 부대도 후위를 맡고 주력부대를 엄호하였다. 교도단 2영과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전사들이 사하진에서 저격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3일 아침부터 더욱 많은 적들이 광주로 공격해왔다.   적군 리한혼(李汉魂) 부대가 광주동부의 기차역을 점령하고 곧 사하진쪽으로 쳐들어왔다. 수배에 달하는 적들 앞에서 사하진 수비부대는 완강히 진지를 고수하였다.   (권립교수)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의 우리민족 용사들 백 50여명과 교도단 2영 5련의 부분적 조선족 용사들은 사하에서 6,7배에 달하는 적들에게 포위되였습니다. 13일 저녁부터 피비린 전투가 계속 되었습니다. 육박전이 벌어졌습니다. 반날동안 피어린 싸움에서 거의 전부의 우리민족 용사들이 광주쏘베트 정부를 수호하기 위하여 백색테로에 항거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수비군은 탄약이 떨어져서야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주력부대의 엄호를 맡고 사하진에서 싸웠던 조선인 용사 백 50여명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희생되였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곳에서 최후까지 싸움을 견지했던 사람들은 전부 전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 용사들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 없이 싸웠던 것이다.      광주시 광주봉기 렬사릉원(烈士陵园)에 가면 이들을 기념하기 위한 중조혈의정(中朝血谊亭)이 있다. 렬사릉원의 호수를 지나면 정교한 2층 정자가 보인다. 정자 처마밑에는 붉은 바탕에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谊亭)>이라는 금빛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거대한 비석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 친선은 만고에 길이 빛난다고 한 공화국 원수 엽검영(叶剑英)의 칠필제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씌여 있었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의 로동계급과 혁명적 병사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성세호대한 광주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적 병사들속에는 조선청년 백 50여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전우들과 함께 의로운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어깨 겪고 싸웠다. 마지막 사하전역에서 그들은 진지를 고수하던 중 대부분 장렬히 희생됨으로써 무산계급의 위대한 국제주의 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적 영웅의 기백을 보여주었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할 것이다!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 친선은 만고에 길이 빛날 것이다! ”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는 2004년 2월 8일, 답사팀은 광주시 중산 3로(中山三路) 홍화강(红花岗)에 위치한 광주봉기 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광주봉기가 실패한 후 시 중심으로 쳐들어 온 적들은 12월 13일 오후 광주쏘베트정부까지 점령하고 도처에서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분산적으로 항격하는 로동자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무참히 살해 되였다. 14일부터 19일까지 5천 7백여명을 공개 처형했다. 광주는 3일만에 다시 인간지옥으로 변해 버렸고 사품치는 주강은 렬사들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봉기 희생자들과 적들에게 체포된 후 살해된 렬사들이 대부분 광주시 홍화강에 묻혔다.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주봉기 30주년이 되는 1957년 이곳에 거대한 릉원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릉원은 릉과 공원 두부분으로 되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그 정면에 기념조각상이 있었다. 무쇠와 같은 억센 손이 총가목을 굳게 잡고있는 조각이였다. 봉기기념비 바른편에는 원형으로 된 커다란 묘지가 있었다. 수많은 선렬들이 여기에 묻혔다한다. 묘지에는 광주꼼뮨렬사묘(广州公社烈士墓)라고 밝혀있었다.    렬사릉 광장에는 보슬비를 무릅쓰고 건강 단련을 하는 몇몇 로인이 있었다. 광주시 공안부문에서 사업하다 퇴직하였다는 로인을 비롯해 답사팀은 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릉원부근에서 살고있습니다. 중조 혈의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혈의정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보고 많은 조선사람들이 광주봉기에서 희생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그대로 중국고 조선 두나라 인민의 친선은 매우 두텁습니다. 피와 생명으로 이룩된 친선이라고 할수있습니다.”      렬사릉을 지나면 록음이 우거진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에는 크지 않은 호수도 있었고 중조혈의정, 혈제헌원정(血祭轩辕亭), 중쏘혈의정이 있었다.  릉원의 사업일군들도 자기가 아는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사하전역에서 많은 조선사람들이 희생되였습니다. 지난해 광주교역회가 진행될 때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을 찾아와 혈의정을 보고갔습니다. 이곳은 광주시의 애국주의 교양기지로서 해마다 많은 학생들이 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념행사도 합니다. 광주시민들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박멸하고 사람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두려움 없이 싸웠던 선렬들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다.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함께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이룩하리라는 소박한 념원을 안고 소중한 생명을 바쳐 싸운 조선용사들을. 추운 겨울이 지나면 새 봄이 온다. 어둠이 사라지면 새 날은 꼭 밝아올 것이다. 고요히 잠든 우리민족 투사들의 넋은 밝은 등불이 되어 영원히 우리를 고무해주고 있다. 꿋꿋이 살아야 한다고, 폭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유와 해방을 찾는 민족의 항쟁은 영원하다고 우리를 고무해주고 있다. 사진설명: 1 중조혈의정  2 혈의정의 비석    
37    제26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3) 댓글:  조회:3374  추천:54  2007-08-20
    광주봉기 첫날 가장 치렬한 전투는 적의 공안국을 점령하는 전투였다. 혁명적 광주시민들에게 있어서 광주시 유신로(维新路)에 위치한 공안국(公安局)은 반동군벌의 소굴이였고 적의 완고한 보루였다. 그러므로 이곳을 신속히 점령해야만이 혁명적 군민들을 고무할수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교도단의 부분적 부대는 엽용(叶镛)의 인솔하에 로동자 적위대와 함께 공안국을 공격하였다. 조선인 혁명가 리영(李瑛)이 참모의 신분으로 엽용을 도와 공격전을 지휘하였다.    리영의 원명은 리용(李镛)이다. 그는 <헤그밀사>의 한 사람이였던 리준의 장남으로서 일찍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그후 쏘련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쏘련 군사고문의 신분으로 광주에 와 있었다. 리용은 한때 국민혁명군 산두시 포병영 영장을 맡기도 하였다.   (권립교수) 다른 한편 조선족 군사고문 리용은 엽용과 함께 적의 완고한 보루인 공안국을 들이쳤습니다. 봉기군은 적의 장갑차를 짓부시고 2천여명의 혁명자들을 구출해 냈는데 그중에는 조선족이 6명이나 있었습니다.      공안국 공격전은 로동자 적위대 주력이 맡았다. 부대는 두길로 나뉘여 공안국을 포위하였다.   적 공안국 국장인 주휘일(朱晖日)은 급급히 보안대(保安队), 경위단(警卫团)을 불러 사수하려 했지만 경위단도 이미 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는 황급히 남은 부대를 이끌고 요충지를 사수하는 한편 기회를 보아 도주하려 하였다.    사면으로 공격해 오던 로동자 적위대는 혜애로(惠爱路)에서 적의 장갑차와 부딛쳤다. 적들은 장갑차를 리용해 많은 봉기자들을 살상하였다.    위급한 시각 엽검영이 교도단 전사들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조선인 혁명가 리용은 기관총 화력을 조직해 효과적으로 적의 화력을 통제하였고 몇몇 용사들은 폭약을 들고 장갑차에 덮쳤다.    두려움 없이 싸운 봉기군 용사들은 장갑차를 까부시고 공안국으로 돌진하였다. 치렬한 육박전에서 많은 적들이 소멸되고 주휘일은 일반인 옷을 바꿔 입고 도주해 버렸다. 30여분의 전투에서 봉기군은 천여명을 포로하고 공안국을 점령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봉기자들은 공안국의 감옥 문을 부시고 적들에게 감금되였던 2천여명 혁명자들을 구해냈다. 그속에는 조선인 혁명자 6명도 포함되여 있었다.       2004년 2월 9일 오전 답사팀은 광주봉기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광주시 기의로(起义路) 200번지에 위치하고있었다. 기의로는 원 유신로였고 기념관 주 건물이 바로 적 공안국 건물이였다. 봉기군은 당시 국민당 광동성회(广东省会) 공안국으로 사용되였던 이곳을 점령한후 이곳에 로농홍군 총지휘부를 설치하고 또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기념관에 도착해 보니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월요일이면 모두 출근하여 근무를 볼줄 알았는데 기념관에서는 공휴일에 시민들에게 기념관을 개방하기 위해 정상 근무를 하고 월요일에 휴식한다는것이였다. 당직을 서는 사람을 찾아 온 의사를 이야기하고 기념관을 볼수있었다.    철문을 들어서니 노란색 회칠을 한 2층 건물이 나타났고 건물 앞에는 흰 대리석 동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광주봉기의 지도자들인 장태뢰, 팽배, 주문옹의 동상이였다. 정원에는 해묵은 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주건물 량측에 역시 2층 건물이 붙어있었는데 남루(南楼)와 북루(北楼)라고 했다. 당직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이 주건물이 바로 쏘베트정부 집무실로 사용되던 건물이였고 3층으로 된 남루는 경위련이 주둔하고있었다. 북루는 홍군총지휘인 엽정의 사무실로 사용되였다 한다.      기념관 총면적은 5,990평방메터였는데 가운데 청사는 장태뢰 사무실, 쏘베트정부 회의실, 쏘베트위원 사무실, 구호실로 복원되여 있었다. 일본침략군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되였던 남루는 잘 수건되여 지금 광주봉기 진렬실로 사용되고 북루는 광주시 공안국에 소속되여있었다.      사하진과 연당의 적을 숙청한 양달부와 김산이 지휘부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경이였다. 적 공안국은 이미 점령되였고 혁명위원회 사령부가 이곳에서 일을 보고있었다. 엽정에게 상황을 회보한후 양달부와 김산은 사하진으로부터 오는 포로들을 기다렸다.    천여명 포로들이 공안국 정원에 도착하자 양달부는 김산의 통역을 거쳐 포로들에게 연설하였다. 연설을 마친 그는 믿을만한 병사 2백여명을 뽑아 그들에게 총과 탄약을 주어 봉기에 참가하게 하였다. 양달부는 이 부대를 이끌고 공방전이 치렬하게 진행되고있는 적 12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문덕로(文德路--20세기 2,3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광주시의 유명한 골동품 거리였다. 골동품 전문점이 많았고 난전도 많았다.)로 달려갔다.    적들은 길목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해 놓고 미친 듯이 소사하고있었다. 봉기군은 도저히 머리를 들수 없었고 진퇴량난의 경지에 빠지게 되었다. 위급한 시기 이곳에 도착한 양달부는 상황을 파악하고 일진의 전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지휘부로 달려가 대포를 끌어왔다.    날은 이미 밝았다. 적이 사수하고있는 주요 건물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적 12사단 사령부 건물 앞에 국민당 군벌 리제심(李济深)의 저택이 있었다. 양달부가 대포를 걸고 목표를 조준하였다. 첫 포탄이 리제심 저택 우층에 명중되여 터졌다. 장애물이 제거되고 적 12사단 사령부가 정면에 나타났다. 두 번째 포탄은 사령부 건물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양달부가 쏜 세 번째 포탄은 정확히 사령부 2층 건물을 강타하였다. 이때 봉기군 전사들은 환성을 올리며 돌진하였다. 그러나 다른 부대의 전사들이 화염병을 적 사령부에 던졌기 때문에 주변에는 화광이 충천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불길을 뚫고 들어갈수 없었다.    12월 11일 오전까지 적 12사단 지휘부, 장발규의 4군 지휘부, 관음산 부근을 제외하고는 광주시 중심이 모두 봉기군에 의해 통제되였다. 도처에 붉은기가 휘날렸고 로동자, 병사, 학생들이 동원되여 다투어 봉기군을 도왔다.    중산대학의 혁명적 학생들도 학교에서 경찰들의 무기를 빼앗고 반혁명 학생들을 제압하였다. 그 가운데는 장지장(张志章), 김세영, 류우상을 비롯한 조선학생들도 있었다.   (권립교수) 중산대학의 수십명 우리동포 학생들은 봉기가 시작되자 학교 경위대의 총을 빼앗아가지고 국민당 우파분자 네명을 처단하고 봉기군 선전대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무기 운반과 부상병 수송, 선전삐라 살포 등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중산대학 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삐라를 살포하였고 거리연설을 진행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봉기의 의의를 알게 하였다.      봉기군 각 부대에 파견되였던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들은 이때 유신로에 위치한 공안국에 모여 쏘베트정부 설립을 준비하였다. 많은 혁명적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공안국에 모여왔다.   (권립교수) 공안국을 점령하자 공안국 정면에는 광주쏘베트 정부라는 간판이 내걸리고 붉은기가 휘날렸습니다.      공안국이 봉기군의 손에 들어오자 봉기군은 이곳에 봉기군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날이 밝자 봉기군 각부대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들이 비밀리에 총지휘부로 모여왔다. 공안국은 인차 새롭게 단장되였다. 벽에는 맑스와 레닌의 초상이 걸렸고 십여개 책상을 한데 모아 대회 주석단이 만들어졌다. 주석단 주변에는 많은 등나무 걸상을 배렬해 놓았다. 공안국 대문에는 “광주쏘베트정부”라는 주문옹(周文雍)의 친필 액자가 걸려있었다.     9시쯤 되니 3만여명의 대중집회가 열렸다.    양달부, 김산, 김규광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도 집회에 참가하였다. 사람들은 국제가를 부르면서 쏘베트정주 수립를 기다렸다. 집회에서 광주 로동자농민 민주정부를 설립하고 16명 위원을 선출하였다. 소조정(苏兆征)이 정부 주석으로 선거되였지만 그는 농민군을 동원하기 위해 동강(东江)으로 갔기 때문에 장태뢰가 주석대리를 맡았다.    집회에서는 몇가지 결의를 지었다. 광주쏘베트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세계 인민들에게 알리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반동파들을 숙청하고 해륙풍쏘베트정권과 련락을 취하며 로농홍군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광주 쏘베트정부 수립은 광범한 로동자, 농민, 병사, 학생들의 열렬한 옹호를 받았다. 거리에는 붉은기가 휘날렸고 곳곳마다 프랑카드가 걸려있었다. 광주거리는 혁명가곡을 부르는 노래소리로 넘쳐났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음산 남부 번화가인 장제(长堤)부근의 전투는 계속 치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양달부는 소분대를 거느리고 적 4군 사령부로 달려갔다. 장발규의 4군 사령부는 광주시 주강이북의 장제에 위치하고있었다. 이때 조선인 혁명가 리빈도 북부경계 임무를 완수하고 장제 부근에서 싸우고있었다.    로농홍군은 더욱 효과적으로 적을 대치하기 위해 관음산에 대포를 걸어놓았다. 양달부와 리빈을 비롯한 몇몇 우수한 조선인 포술 전문가들이 모여 적 사령부를 포격하려 하였다. 양달부가 직접 포를 조준하였다. 그는 지형에 익숙한 로동자 적위대 대원이 가르치는 곳을 정확히 측량하고 발포하였다. 포탄은 사령부 부근에서 터졌지만 적들은 계속 사수하였다. 전투는 대치단계에 들어갔다.       이날 밤 지휘부에서는 작전회의가 소집되였다. 엽정은 12일 새벽부터 주강 북안의 적의 거점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공격을 시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공격부대를 조직하여 주강 이남의 적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2월 12일, 날이 밝기 시작하자 광주의 정세는 위급해 지기 시작하였다. 장발규, 진공박, 황기상을 비롯한 국민당군 두목들은 주강 남안의 리복림을 사촉하여 봉기군을 진압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주둔하고있던 영국, 일본 제국주의 함대도 조계지의 교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봉기에 간섭해 나섰다. 이날 아침 사면(沙面)의 주강에 정박하고있던 제국주의 군함이 봉기군을 향해 포를 쏘았다. 부근에서 작전하고있던 리빈을 비롯한 조선인 장병들은 더욱 큰 적개심으로 불탔다. 일본 포함 두 척이 함부로 발포하면서 부대를 상륙시키고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장병들은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인민을 마음대로 수탈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자 모두 혈안이 되었다. 리빈은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포를 끌어 왔다. 그는 직접 적함을 조준하고 발포하였다. 포탄은 정확히 명중되여 일본군함 ?야마모도(山本)‚호에 치명타를 안겼다. 중상을 입은 일본 포함은 검은 연기를 길게 토하며 도주해 버렸다.     봉기군은 계속 제국주의 포함과 격전을 벌였다. 양달부와 기타 조선인 장병들도 달려와 참전하였다. 조선인 포술전문가들은 정확히 포 세방을 쏘았다. 백발백중이였다. 적 포함 연통 세개가 박살나 허공에 날렸다. 질겁한 적 포함은 기를 내리드리우고 급급히 자리를 떴다.  조선인 투사 리빈이 일본포함을 포격한 사면은 주강이 두갈래로 나뉘는 백아담(白鹅潭)의 한 섬이였다. 섬 북쪽 광주시의 비교적 번화한 곳이고 옛날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조계지였다. 월수산에서 남으로 오다가 연강로(沿江路)를 따라 가노라면 즐비한 서양식 건물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곳은 술집도 많았다. 다정한 모습으로 거리를 다니는 련인들도 많이 볼수있었다. 이전에나 지금에나 광주의 가장 번화하다고 하는 장제를 지나면 강에 커다란 섬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사면섬이다.    돌을 던져도 그냥 닿을만한 거리였다. 강에는 류람선 몇척이 정박해 있는 것이 멀리 보였다. 밤이 되면 관광객들은 류람선을 타고 주강에서 광주시의 황홀한 야경을 감상한다는 것이다. 번화한 거리, 답사팀은 그속에서 조선혁명가들이 싸웠던 전적지를 찾아 헤매였다. 무거운 심정을 안고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거리의 번화함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득히 먼 그때 그 이야기, 그것도 한 이방인의 이야기를 누군들 기억해 주겠는가? 사람들은 그냥 거리를 다녔고 아늑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련인과 함께 다정히 앉아있을뿐이였다. 우리가 찾고있는 전적지, 25세의 피끓는 한 조선인이 두려움 없이 싸운 전적지는 그냥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보다는 자유와 독립을 빼앗아간 원쑤에 대한 지대한 분노를 억제할길 없어 용감히 맞써 적과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은 그냥 우리 마음속 기념비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진설명:  봉기당시 적공안국 자리   
36    제25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2) 댓글:  조회:3957  추천:47  2007-08-20
    1927년 12월 11일 새벽 3시 30분, 교도단 병영 밖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교도단의 혁명적 전사들은 15명 완고파 군관들을 총살했던 것이다.     이어 봉기시작을 알리는 폿소리가 세 번 울렸다. 중외를 진감한 광주봉기가 시작되였다.    광주의 혁명적 병사, 로동자, 농민군이 신속이 일떠나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진격하였다. 붉은 댕기를 목에 두르고 마치와 낫이 그려진 붉은기를 추켜든 만여명 봉기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특수임무를 맡은 조선투사 오성륜, 박영과 박근만, 박근수, 박건웅 등은 여러 소분대를 거느리고 적의 사령부를 기습하였다. 그러나 총폿소리를 듣고 눈치 챈 장발규와 진공박(陈公博), 황기상(黄其翔)을 비롯한 적 두목들은 잠옷 바람으로 령남대학(岭南大学)으로 빠져나가 그곳에서 주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봉기군 주력부대는 엽정의 인솔하에 백운산기슭의 사하진(沙河镇)과 연당(燕塘)에 주둔하고있는 적 병영을 공격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달부와 김산이 엽정과 함께 사하진 전투에 참가하였고 조선혁명가 김규광이 거느린 교도단 제2영 5련의 조선용사들도 봉기군 주력으로 사하진 전투에 참가하였다.   (권립교수) 교도단 2영 5련의 조선족 전사들은 포병련 1대와 함께 도합 200여명으로 양달부와 김산의 령도하에 2,000여명의 적이 도사리고있는 사하진을 새벽에 기습하였습니다. 얼마나 사납게 덮쳐들었는지 10분 격전한 끝에 일부 적들을 소멸하고 6백여명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기의해 넘어왔습니다.     광주시 중심으로 통하는 교통요지에 위치한 사하진에는 장발규의 주력부대 12사 36단이 주둔하고있었고 근처 연당에는 적 포병부대가 주둔하고있었다.   양달부가 거느린 부대는 적을 포위하고 있다가 당황한 적들이 무질서하게 달려나오자 일제히 사격하였다. 30여명이 사살되자 적들은 퇴각하여 꼼짝 못하고 있었다. 날이 밝지 않았기 때문에 적들은 봉기군이 얼마나 되는 줄도 몰랐고 부패한 군벌인 장발규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때 적 지휘관이 나타나 싸우지 말 것을 제의하였다. 그 지휘관은 양달부가 잘 아는 사람이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적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6백여명 적들을 포로하였다.    적 정규부대가 가장 많이 집중해있던 사하진과 연당의 적을 순조롭게 소멸하자 엽정은 지휘부로 가고 나머지 일들은 양달부에게 맡겼다.    양달부는 광주봉기에서 총지휘를 맡은 엽정의 참모로서 많은 공헌을 세운 조선인 혁명가이다. 양달부의 통역을 맡고 줄곧 그와 함께 싸웠던 혁명가 김산이  <아리랑>에서 회억한데 의하면 양달부는 포술(炮术)전문가이다.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양달부는 당시 훌륭한 지하공산당 조직자였을뿐만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였다. 포술전문가로서 그의 위망은 매우 높았다. 장발규를 비롯해 많은 국민당군 장교들이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북벌전쟁시기 그는 하남성에서 싸웠다. 그는 포로한 봉계군벌의 포병들을 북벌군의 포병부대로 재편성하고 그 부대 지휘를 책임지기도 하였다.     양달부는 중국말을 잘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산이 통역을 하면서 그와 함께 행동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사하진 전투에서 봉기군은 2천여명을 포로하고 여러 가지 대포와 많은 탄약을 로획하였다. 포로는 지휘부로 압송해야했고 로획한 무기로 가져가야 했다. 양달부와 김산은 50명 전사들을 남겨 포로들을 압송해 가게 하였다. 양달부는 포로들의 눈빛에서 그들이 반항하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대포는 분해하여 지휘부로 날라가게 하였다.    뒤처리를 마무리한후 양달부와 김산은 작은 자동차를 타고 전투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지휘부로 갔다.   사하진을 점령한 봉기군 주력부대는 다시 사하진 동부에 위치한 연당으로 달려갔다. 그쪽에서도 혁명적인 장병들이 유력하게 내응했기때문에 주둔군 대부분이 봉기군쪽으로 넘어왔다.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피흘려 싸웠던 광주봉기의 여러 전적지들을 답사한 것은 2004년 2월초였다.    광주봉기에서 수많은 전투가 진행되였고 또 크고 작은 전투에 모두 조선혁명가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모든 전적지들을 찾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근 80년의 력사가 지났기 때문에 많은 전적지들은 현대화 도시로 변해버렸고 지명까지도 모두 변해 버렸기 때문에 답사작업은 더욱 힘들었다.    지형으로 보아 광주시는 북쪽이 높은 산지이고 남부가 낮은 평지이다. 북쪽에는 백운산이 있고 서북쪽에는 관음산이 남부로 뻗어 나와 있다. 백운산과 관음산은 삼면으로 광주시 중심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운산 기슭과 관음산은 모두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수있다. 지금은 도시가 많이 확장되여 백운산은 광주시 풍경구로 되었고 관음산도 월수공원(越水公园)으로 변해 버렸다. 시 중심도 관음산 동서로 확장되였다. 그러나 백운산 기슭을 따라 여러 지명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사하진과 연당 전적지 지점을 확인할수있었다.      답사팀은 지명책을 따라 황하강 렬사릉원 이북 백운산 기슭으로 갔다. 광주봉기의 주요 전적지였던 사하진이라는 명확한 지명은 지금 없다. 현지인들은 광주시 수음로(树荫路)부근이 옛날 사하진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마 광주시가 확장되기전 사하진은 도시 근교의 한 개 진(镇)이였기 때문에 사하진이라고 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음로 부근의 사하호텔, 사하 장식회사, 사하시장을 비롯한 현판들을 보아 분명 이 주변이 사하진이라고 판단할수있었다. 광주봉기 당시 이곳에 적의 포병부대 병영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연당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산을 등지고 광주시를 제압할 수 있는 유리한 곳이였고 또한 동부로부터 광주시에 들어오는 길목이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자못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주봉기 당시 총지휘자 엽정이 직접 사하진 공격전을 지휘하였고 조선인 혁명자 양달부와 김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교도단 제2영 5련의 백여명 우리민족 용사들도 주력부대에 편입되여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광주봉기가 시작되였다는 소식이 황포군관학교에 전해지자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은 중국공산당 당조직의 령도하에 신속히 행동하였다. 그들은 학교의 우파 학생들을 쫓아내고 배를 리용해 황포를 떠나 광부봉기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 련장인 최용건은 조선동지들을 회합하여 앞장서서 돌진하였다.   최용건은 황포군관학교 5기의 구대장(区队长)으로 있었으며 소좌 부대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하게 싸워 많은 혁명자들을 주변에 단합시켰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남아 계속 투쟁하였고 학교내 조선인 혁명가들을 조직해 광주봉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권립교수)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2련의 우리민족 용사들은 수구령의 민단을 소멸해 버리고 계속 사하로 진입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교도단 부분적 전우들과 함께 군사요지인 사하진을 고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최용건이 부대를 이끌고 광주 동북 교외에 도착했을 때 수구령(瘦狗岭)을 지키고있던 지주 민단(民团)이 저항해 나섰다. 최용건이 거느린 조선인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다. 전투는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최용건은 부대를 이끌고 비발치는 탄우를 무릅쓰고 좌측의 고지를 점령하였다. 부대는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민단에게 불벼락을 안겼으며 적들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해 버렸다.    적을 물리친후 최용건은 부대를 이끌고 사하진에 와서 교도단의 부대와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교도단 2영 5련의 부분적 조선용사들과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조선용사들이 사하진을 사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사하진과 연당의 적을 순조롭게 소멸함으로써 백운산 기슭에 주둔하던 적들은 대부분 제거되였다. 그러나 광주시의 다른 한 고지인 관음산(观音山)에도 적지 않은 적들이 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교도단의 다른 두갈래 부대는 관음산과 남부 주강기슭의 장제(长堤)로 향했다. 이때 광주시 경위단(警卫团)의 혁명적 장병들은 단장 량병추(梁秉枢)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공산당원인 량병추는 경위단의 조선인 김형평과 손문적을 비롯한 많은 공산당원들을 이끌고 국민당 완고분자들을 처단하고 봉기군에 참가하였다.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조선인 혁명가 김빈현과 민승재도 경위단의 장교였다. 이들은 모두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군인이였다. 경위단의 포병대 대장이였던 민승재는 일찍부터 경위단의 병사들을 단합시켰다. 그리하여 봉기가 시작되자 그는 경위단의 한 개 련대를 설복시켜 봉기군에 가담하게 하였고 김빈현과 함께 이 부대를 이끌고 관음산 전투에 뛰여들었다.   (권립교수) 광주경위퇀의 조선족 공산당원 김형평과 손문적은 좌파 전우들과 함께 퇀 참모장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처단하고 퇀내의 포병대 대장이였던 조선족 혁명가 민성재와 함께 단독 한 개 련을 편성하여 봉기군에 참가하였습니다.      관음산의 장발규 부대는 끝까지 항격했다. 치렬한 전투에서 량병추가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경위단의 조선인 용사들은 두려움 없이 싸웠다. 치렬한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있을 때 교도단의 전사들이 달려와 관음산 전투도 승리로 끝났다.    관음산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북부전선을 책임진 조선인 혁명가 리빈(李彬 1902--1927)도 봉기군을 이끌고 적들과 싸웠다. 황포군관학교 제3기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제4기 정치과 학생대대 구대장(区队长)을 맡았던 리빈은 뛰여난 포술 전문가였다. 그는 여러 가지 군사기능을 장악하였고 포술에 뛰여나 혁명군의 동정(东征)과 북벌전쟁에 참가해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다. 광주봉기에서 그는 북부의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할 임무를 맡고 전사들과 함께 영용히 싸웠다.   (권립교수) 북부전선을 책임진 조선족 명포수 리빈은 북부교외의 비행장을 습격하고 적의 비행기 열대를 태워버리고 병기공장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당의 파견을 받고 병기공장에 들어간 리씨 조선족 혁명가는 이미 이 공장의 완고분자들을 체포했고 병기공장을 지키던 두 개 중대도 이미 봉기군에 편입되여있었습니다.      리빈은 우선 소분대를 거느리고 광주시 비행장을 습격하였다. 거기에는 비행기 10대가 있었지만 쓸만한 것은 5대뿐이였다. 그러나 비행기를 몰 수 있는 조종사를 찾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비행기들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병기공장으로 달려갔다.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병기공장에는 리씨 성을 가진 조선인 하급사관 한명이 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그는 비밀리에 완고파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주둔군을 모두 봉기군에 참가시켰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병기공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부경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리빈은 다시 광주시 남부 주강기슭의 적들을 경계할 임무를 맡고 장제(长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적 제4군 사령부를 공격하고있는 전투가 치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사진설명:  사하진 전적지  
35    제24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1) 댓글:  조회:4107  추천:51  2007-08-20
  8.1 남창봉기가 일어난후 중국공산당에서는 무한에서 비밀리에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위기를 해결할 대책을 연구하였다. 구추백(瞿秋白), 리유한(李维汉), 모택동을 비롯한 부분적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들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의 우경기회주의(右倾机会主义) 착오를 엄숙히 비판하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 문제를 토의하였다. 모택동은 대회에서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남창봉기에 이어 추수봉기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8월 7일 소집된 이 대회를 <8.7회의>라고 한다. 회의가 있은 후 모택동은 호남, 호북, 강서, 광동의 광범한 농민들을 이끌고 추수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단연 호남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남창봉기이후 9월에 추수봉기가 일어났으며 모택동은 농민군을 거느리고 호남과 강서의 린접지인 라소산맥(罗霄山脉)에 정강산(井冈山)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농촌무장혁명투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권립교수)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대숙청을 시작하였고 18일에는 광주와 황포에서도 대숙청이 시작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광주는 암흑세력이 살판치는 세계로, 대도살장으로 되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국민당 우파에게 반격을 가하고 전국인민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서는 1927년 11월 26일 광주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남창봉기 이후 대혁명시기 혁명중심지였던 광주에는 수많은 혁명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중국 대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조선지사들도 광주에 모여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방대한 로동자 조직있었고 부근 해풍(海丰)과 륙풍(陆丰)현에는 농민들이 잘 조직되여 있었다. 비록 국민당의 탄압을 받아 공회조직과 각지 농민조직이 많이 파괴되고 무장해제 당했지만 이들은 당조직의 령도하에 다시 비밀리에 집결되고 갖은 방법으로 무기를 장만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창봉기 실패 후 부분적인 혁명자들이 광주에 잠입했고 국민당 정규부대를 따라 광주에 와서 수시로 폭동을 준비하고있는 장병들도 적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국민정부가 북상한 후 광주는 국민당 여러 군벌들이 집결해 서로 견제하는 국면이 나타나 수시로 군벌혼전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봉기를 조직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여 있었다.   (권립교수)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서는 장태뢰를 총지휘로, 엽정을 군사지휘로 임명하고 봉기를 준비하였습니다. 12월 11일 새벽 3만여명 혁명군인과 로동자, 농민들이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에는 3백여명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총을 잡고 전투에 참가했고 그중 2백여명은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1927년 12월 11일 광동군벌 주력이 광서군벌을 소멸하기 위해 광주를 떠난 틈을 타서 장태뢰(张太雷), 엽정, 운대영, 엽검영(叶剑英), 양은(杨殷), 주문옹(周文雍), 섭영진(聂荣臻)등의 령도하에 광주봉기를 일으켰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자들은 주로 제4군 군관교도단(军官教导团)과 황포군관학교에 집중되여있었다. 남창봉기 부대를 추격하여 광동에 도착한 국민당 장발규(张发奎)의 제4군은 광서군벌을 축출하고 광주를 통제하였다. 이에 불복한 리제심(李济深)은 광서군벌을 끌어모아 광주 부근에서 장발규 부대와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북벌전쟁시기 주력부대로 활약하였던 장발규 부대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이 있었고 또 공산당의 영향력이 자못 컸다. 줄곧 부대 내 공산당원들을 견제하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했던 장발규는 리제심 부대와 싸우기 위해 다시 무기를 공산당 부대에 내주었다. 그리하여 엽검영(叶剑英)이 거느린 제4군 교도단(教导团)은 다시 무장을 갖추게 되였다.    교도단 제2영 5련은 150여명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순 조선인 부대였다. 이들 대부분은 원 무한군사정치학교의 특별반 학생들로서 련장은 박영(朴英)이였고 당 책임자는 김규광이였다. 그리고 무한 토지당(土地堂)전투에 참가하였던 박영의 두 동생인 박근만, 박근수 형제, 의렬단 단원 박건웅(朴健雄)을 비롯한 우수한 포사격수들도 이 부대에 포함되였다.     교도단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은 조선혁명가 최용건(崔镛健)이다.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은 최용건의 주변에 단합되여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편성하였다.   (권립교수) 최용건 동지가 거느린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이 바로 조선족부대였습니다. 150여명이였습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 판공실 부관으로 있던 조선족 혁명가 리계동(李启东)과 구대장으로 있던 리빈(李彬)도 큰 힘을 보태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봉기에 참가한 광주경위탄에도 당에서 파견한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김형평과 손문적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황포군관학교뿐만 아니라 중산대학에서 혁명리론을 학습하고있던 수십명 조선인 혁명가들도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장지강, 김세영, 류우상을 비롯한 조선인 혁명가들은 여러차례 비밀회의를 열고 봉기준비를 진행하였고 혁명가 김산도 이들 조직사업과 선전사업을 맡았다. 이들은 선전대의 신분으로 혁명에 참가하였고 봉기에서 무기운반과 부상자 운반을 적극 도왔다.     혁명자들은 혁명을 배반하고 혁명자들을 마구 살해하는 국민당 반동파들에 대한 지대한 배신감과 적대감을 안고 전투에 뛰여 들었다. 조선인 혁명자들도 꼭 같은 심정이였다.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전쟁에서 조선혁명가들은 두려움 모르고 싸웠고 뛰어난 통솔력으로 유명하였다. 국민혁명군 장군들은 모두가 조선인을 자기 부대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혁명군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은 두려움 없이 싸워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 북벌전쟁이 승리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그들의 가슴은 더욱 벅차있었다. 화북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조선인 혁명가들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뻤고 무한한 환희와 열광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의 꿈은 성공을 빤히 눈앞에 둔 승리의 문턱에서 산산히 깨여지고 말았다. 게다가 도처에서 살벌한 도살이 시작 되였다. 많은 조선인 혁명자들도 살해되고 체포되였던 것이다.     혁명을 배반한 적들을 소멸하고 로농대중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했다. 그러자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희생을 내더라도 싸워야 했다. 오직 혁명의 붉은 피를 흘려야 만이 암흑을 몰아내고 야수적인 반동파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함으로써 아시아의 해방을 이룩할수 있었다.        1927년 12월 10일 밤, 광주시의 조그마한 려관방에서 20여명 조선인들이 비밀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이제 곧 시작될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생각하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유명한 의렬단 단원인 오성륜이 새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에게 총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조국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들은 이번 대중투쟁을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과 련계시켜 생각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오성륜과 김산, 그리고 로씨야에서 온 대포전문가 양달부(杨达夫)는 봉기의 첫 본부로 사용하게 될 교도단 사령부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사령부에 도착하였을 때 2천여명 교도단 사관생들이 모여 있었고 얼마 안되여 봉기 지휘자들인 장태뢰와 엽정, 운대영 등이 도착하였다. 엽정은 남창봉기가 실패한 후 한동안 향항에 피신하였다가 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에 왔던 것이다.    근 백명에 달하는 조선인들도 한데 모여 반갑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면서 봉기 시각을 기다렸다.    봉기시각이 다가오자 장태뢰와 엽정이 선후로 연설을 하고 혁명위원회 명단과 각 부대 지휘자를 공포하였고 각 부대의 임무를 하달하였다.   (권립교수) 봉기지휘부에서는 조선족 혁명가들을 중히 여기고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였습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의 우수한 포병전문가 양달부를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하고 중산대학교 법과를 다닌 김산을 엽정의 비서 겸 교도단의 통역관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리용은 엽용의 군사고문으로 임명하고 광주공안국을 공격할 임무를 맡겼습니다.      봉기 모든 활동부문에서 조선인은 요직에 배치되였다.    양달부는 봉기 총지휘자인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되였다. 그는 봉기 5인 군사 책임자중의 한 사람이였다. 김산은 엽정의 비서 겸 교도단의 번역관으로 임명되고 리용(李镛)은 신임 교도단 단장 엽용(叶镛)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으며 리빈(李彬)은 포병 지휘관으로 임명되여 북로경계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박영은 교도단 제2영 5련 련장으로, 김규광은 5련 당조직 책임자로 임명되고 최용건은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장으로 임명되였다. 오성륜, 박진(朴振), 박건웅은 소분대 대장으로서 각기 임무를 맡고 행동하게 되였다.    조선인 혁명가들은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모스크바에서 훌륭한 정치,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봉기 지휘부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봉기 지휘부는 교도단을 홍군으로 개칭하고 망치와 낫이 새겨진 붉은기를 계양하게 하였다. 봉기에 참가할 부대는 교도단 정규부대와 로동자, 농민  적위대(赤卫队)였다. 그러나 적들은 봉기군 보다 훨씬 더 많은 정규부대를 가지고있었다. 광주시 백운산(白云山)기슭의 사하진(沙河镇)과 연당(燕塘)에 적 정규군이 주둔하고있었고 관음산(观音山) 요지에도 적이 주둔하고있었다. 그리고 주강이남에는 군벌 리복림(李福林)이 거느린 막강한 주력부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봉기를 승리에로 이끌자면 목표 명확하게 적의 본거지를 불의에 습격하여야 했다. 그리고 선전공작을 잘해 더욱 많은 적들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더욱 많은 로동자, 농민들을 봉기군에 참가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밤은 더욱 깊어만 갔고 정적이 깃들었다.    홍군부대 장병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교도단 사령부로 수많은 트럭과 자동차가 달려왔다. 차에는 많은 공장 로동자들이 타고있었다. 로동자들은 사령부에서 무기를 받아가지고 홍군부대와 합세하였다.    11일 새벽 세시가 다가오자 봉기 총지휘인 엽정이 공격명령을 내렸다.    봉기군은 몇갈래로 나뉘여 각자의 목표를 향해 신속히 진격하였다.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였다. 사진설명: 광주봉기렬사릉원
34    제23회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2) 댓글:  조회:4534  추천:51  2007-08-03
1927년 8월 1일, 중외를 진감한 남창봉기가 시작되였다. 3만여명 혁명군인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국민당 반동파를 반대하는 첫 총성을 울렸다. 2백여명 조선 혈열청년들도 이 위대한 전투에 참가해 피흘리며 싸웠다. 이때로부터 암흑기의 중국인민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혁명의 불씨는 중국대지 방방곡곡에서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급촉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봉기지휘부인 강서대려사에 대기하고있던 주은래가 수화기를 들었다. 하룡의 전화였다. 하룡은 봉기군내의 한 병사가 사사로이 적 지휘부로 갔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시각 변절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봉기계획이 루설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때 장 밤을 적 장교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차렸던 주덕에게서 소식이 전해왔다. 적 장교들의 반응을 보아서는 봉기계획이 루설 된 낌새가 보인다고 하였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던 주은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봉기를 두시간 앞당겨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즉각 각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8월 1일 새벽 두시, 남창의 혁명군인들이 국민당 반동파들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 장병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진격하였다.      하룡부대가 장강로(章江路) 입구에 위치한 적 주배덕의 본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다. 주배덕의 본부에는 한 개 경비단이 수비하고있었다. 사전에 변절자의 밀고를 받았기 때문에 적들은 본부로 통하는 길목에 수비진을 쳐놓았다.   공격부대가 돌진해 왔을 때 적들은 고루(鼓楼)의 옛 성루에 의지해 완강히 사수하고있었다. 하룡과 류백승(刘伯承)은 적과 정면으로 대적하는 한편 일부 부대를 나누어 주변의 높은 성루에 올라 우로부터 고루의 적들을 제압하게 하였다. 전사들은 사다리를 놓고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12메터나 되는 성루로 올랐다. 이 공격부대에는 조선족 전사 강석필(姜锡弼), 김래준(金来俊), 홍범기 등이 있었다. 강석필은 동북 훈춘유격대에서 싸우던 독립군 투사였다.   (권립교수) 강서성 구강으로부터 남창에 온 하룡장군의 제20군에도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 조선족 혁명가들이 있었지요. 그들은이 적 제5방면군을 맹공격할 때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맹사격을 들이댔습니다. 12메터 높이나 되는 옛성루를 점령해야만 적을 진압할수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강석필과 홍범기등은 전우들과 함께 포연탄우를 무릎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끝내 옛성루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화력으로 적의 기세를 누르고 부대의 공격을 엄호함으로써 적의 지휘부를 짓부실수있게 했습니다.     조선족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앞장서 싸웠다. 강석필과 홍범기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루를 점령하였으며 기타 병사들은 높은 층집의 지붕에 올라갔다. 봉기군 전사들이 사면에서 적 지휘부를 포위하고 우로부터 집중사격을 하자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로 되었다. 세시간 남짓이 저항하던 적들은 드디어 투항하고 주배덕은 도주해 버렸다.   하룡부대의 조선족 전사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이 두려움 없이 싸워 점령했던 적 지휘부는 남창시 장강로(章江路) 67번지에 위치해있었다. 지금의 남창시 장강로 67번지에는 강서성 가무극원(歌舞剧院) 종업원 사택이 있었다. 검푸른 벽돌로 축조된 3층 낡은 층집이 몇채 있었지만 모두 후에 건설된 건물이였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소개한데 의하면 지휘부 길목을 지켰다는 고루도 언녕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눈앞의 전적지를 보면서 머리에 치렬했던 그때 전투장면과 두려움 없이 싸웠던 조선족 전사들을 생각해 보았다. 자랑찬 그들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기념되지 못하고있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장강로를 떠나 다른 한 전적지 송백항(松柏巷)으로 가 보았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 찾아보니 뾰족한 삼각모양으로 된 천주교교회당 건물이 나타났다. 교회당인 것 만큼 주소로 될만한 번지수가 명확히 밝혀있지 않았는데 주변의 가옥의 번지수를 보아 송백항 01-11번이였다.   교회당 건물은 가운데가 4층정도 높았고 량쪽 날개부분 건물이 2층 정도였다. 가운데 아치형 문이 있었고 문 위로 원으로 된 창이 세 개 있었다. 가운데 창이 컸고 량켠의 창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연분홍 칠을 한 교회당 건물은 해빛아래 유난히 빛났다. 남창봉기에서 가장 치렬했던 전투가 바로 이 교회당 주변에서 진행되였던 것이다. 지금 보이는 이 교회당은 옛 건물을 보수한것이였다. 조선족 투사 방월성(方月星)이 용감히 싸웠던 송백항 전적지에는 그래도 교회당이라는 표적이 남아 있어 다행으로 느껴졌다.       봉기군이 적 지휘부를 공략하자 적들은 혼란속에 빠졌다.   엽정부대는 두길로 나누어 송백항부근의 적과 공원(贡院)의 적을 공격하였다.     송백항부근의 전투는 매우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공격임무를 맡은 엽정부대 71단 전사들은 탄우를 무릅쓰고 돌진하였다. 제6군 57단의 적들은 천주교회당에 화력거점을 만들고 왕강히 사수하였다. 적들은 중형무기를 집중하여 봉기군의 공격을 제압하였다. 빗발치는 적탄으로 봉기군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후속부대가 당도하여 천주교회당을 포위했지만 적의 화력이 막강하여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었다. 계속 대치하고만 있을수 없었다. 이때 봉기군 전사들이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몇몇 전사들이 나섰다. 조선족 혁명가 방월성도 가슴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결사대는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계속 돌진하는 희생정신으로 전진하였다.   (권립교수) 적 제6군 57퇀을 소멸하는 전투는 너무도 치렬하였습니다. 적들은 송백향의 견고한 건물인 천주교회당을 거점으로 수많은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을 집중하여 미친듯이 사격하였습니다. 결사대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였지요. 방월성이 결사대에 참가했습니다. 결사대는 비발치는 총탄을 무릎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피로써 적진을 까부셨습니다.     봉기군 결사대가 혈로를 뚫고 전진하자 기타 전사들도 공격나팔소리와 함께 돌진하였다.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된 적들은 다투어 총을 놓고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송백항 천주교회당 공격전도 봉기군의 승리로 끝났다.     엽정부대의 72단은 공원부근에서 적들과 접전하였다. 공원(贡院)은 옛날 향시(乡试)를 보던 곳이다. 옛날 서생들은 3년에 한번씩 공원에 와서 향시를 보고 향시에 합격되면 다시 과거를 보러 떠났던 것이다. 남창의 공원은 지금 두 곳에 있었는데 하나는 진현문(进贤门)부근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팔일공원(八一公园)에 있었다. 팔일공원은 남창공원이라고도 한다. 남창봉기 전적지는 팔일공원의 수관음청(水观音厅)이였다. 옛날 팔일공원 호수가에 수관음청을 짓고 거기에서 향시를 보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공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수관음청은 흰벽과 붉은 나무, 푸른 기와로 축조된 정교한 2층 건물이였다. 여러 가지 고목이 둘러싸인 건물이 맑은 호수에 비껴 한결 아름다워 보였다. 엽정부대의 조선족 장병들인 박인, 김철강 등이 봉기군과 함께 이곳에서 적들을 소멸하였던 것이다.   (권립교수) 무창에서 기선을 타고 남창으로 온 엽정장군의 제11군 24사에는 개산툰에서 간 박인, 녕안의 방월성, 김철강 등 조선족 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농민군의 배합밑에서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섬멸하는 전투에 뛰여들었습니다. 조선족용사들은 형제민족 전우들과 함께 남창공원안에 둥지를 틀고있던 적 24퇀에 불벼락을 안겨 적들은 총 한방 쏘지 못하고 투항하였습니다.     엽정부대 72단이 공원에 주둔하고있는 적 23단과 24단을 공격하였다. 적들은 급급히 응전해 나섰지만 이미 선수를 놓친 뒤라 봉기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봉기군의 맹공격에 많은 적들이 소멸되거나 투항하였으며 24단 적들은 북쪽 호수가로 도주하였다. 이때 앞에서 부분적 봉기군이 농민군과 함께 적들을 저격하였다. 앞뒤로 공격을 받은 적들은 화력이 비교적 약한 72단 지휘부로 달려들었다. 당시 지휘부에는 학생군인 수십명이 있었을 뿐이였다. 그러나 학생군인들도 두려움 없이 적들을 저격하였다. 학생군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봉기군은 더욱 용감히 싸워 끝내 적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침해가 갸웃이 얼굴을 내밀고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 때 남창시의 총성은 뜸해 지기 시작하였다. 4시간 남짓한 격전을 거쳐 봉기군은 순조롭게 만여명 적들을 소멸하고 남창을 통제하게 되었다. 국민당을 반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첫 무장투쟁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이날 아침 9시 남창시의 점포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개업을 시작하였고 거리에는 시민들이 하나둘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봉기군 총지휘부를 지날 때 모두 두손을 들고 환성을 질렀다. 또 많은 시민들이 소고기, 수박 같은 위문품을 들고와서 봉기군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이날 <남창국민일보(南昌国民日报)>에 전적위원회에서 기초한 <중앙위원선언(中央委员宣言)> 전문을 계재하고 진보적인 국민당 좌파인사들과 함께 성대한 련석회의를 소집하였다. 이튿날에는 5만여명 군중들이 참가한 경축대회를 열고 봉기승리를 경축하였다.     남창봉기의 승리는 국민당 반동파들을 크게 경악시켰다. 장개석을 두목으로 한 반동군벌들은 남경, 광동의 군대를 끌어 모아 봉기군을 소멸하려고 시도하였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를 차지한 적들이 사면으로 포위해 오자 봉기군은 원 계획대로 남창에서 철수하여 광동으로 진격하였다. 봉기군 전적위원회는 3만여명 부대를 재정비한 후 남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전적위원회는 광동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한후 다시 북벌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작전로선과 계획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봉기군은 수배에 달하는 적들의 추격과 저격, 포위공격하에서 막대한 희생을 냈다. 주력부대로 흩어졌고 혁명의지가 박약한자들은 혁명대오를 떠났다. 거듭되는 타격을 받았지만 견정불이(坚定不移)한 공산주의자들은 투쟁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주덕과 진의(陈毅)는 부분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단연히 북상하여 다시 강서경내에 들어왔다. 그들은 정강산에서 모택동의 추수봉기 부대와 승리적으로 회합하였다. 그때로부터 모택동과 주덕은 중국로농홍군 제4군을 건립하고 유격전술을 창도해 냄으로써 농촌혁명근거지 창설의 새길을 열어놓았다.   광동에서 흩어졌던 수많은 혁명자들도 해륙풍으로 가서 농민운동에 참가하거나 다시 광주에 모여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33    제22회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1)-- 댓글:  조회:4218  추천:57  2007-08-03
국민당이 손중산의 삼민주의 혁명사상을 배반하고 총칼을 중국공산당에게 돌림에 따라 중국의 제1차 국내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당은 도처에서 공산당을 살해하고 로농대중의 반제반봉건 투쟁을 탄압하였다.   중화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였다. 백성들은 끊임없는 전란을 겪게 되었고 더욱 많은 군벌들이 세력확장을 위해 갖은 수단을 써가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였다. 그러나 혁명의 불씨는 영원히 꺼버릴수 없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과업과 피압박인민의 해방투쟁과업을 짊어지고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동방피압박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싸우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쟁의 길에 나섰다.   (권립교수)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에 주은래, 하룡, 엽정, 주덕 등의 지휘밑에 우리 당의 영향권내의 3만여명 전투원들이 남창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국공합작을 배반하고 로농대중을 대학살한 국민당 반동파에 대한 첫 반격이였습니다. 북벌전쟁에 참가했던 우리민족 혁명가들중의 200여명이 이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1927년 7월, 왕정위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와 합류함으로써 국민당내의 통일을 실현하고저 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무시해 버렸다. 7월 17일, 드디어 왕정위의 무한정부 군사위원회는 장개석을 토벌하기 위한 동정을 결정하였다. 무한정부의 통제를 받던 각 부대는 장강을 따라 강서 경내에 들어왔고 장개석도 부대를 포진하였다.   7월 하순, 주은래를 대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은 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있는 군대를 동원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남창경내에는 엽정이 거느린 11군 24사의 만 2천여명 전사들이 구강에 주둔하고있었고 하룡이 거느린 20군 만 2천여명 장병들도 구강에 도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창에는 주덕이 지휘하는 군관교육단(军官教育团)이 있었고 제4군 25사의 공산당원 주사제(周士弟)가 거느린 천 5백여명 장병들이 남창부근의 마회령(马回岭)에 주둔하고있었다.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당이 장악하고있는 이 부대를 동원해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답사팀이 영웅의 도시 남창시를 찾은 것은 2004년 2월 14일이였다. 강서성 소재지인 남창시는 2천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고도(古都)이다. 한(汉)나라 초기에 도시가 형성되였고 옛날에는 예장(豫章)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후에는 남방창성(南方昌盛)이라는 뜻으로 도시이름을 남창이라고 했다. 남창시는 장강 지류인 감강(赣江)을 따라 장강수로와 이어져있고 륙지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경구철도가 이곳을 지남으로 장강이남의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창봉기 기념관은 남창시 중산로(中山路) 세마지(洗马池)에 위치해있었는데 번지수는 중산로 48번이였다. 기념관에 도착하니 회색 4층 건물이 나타났다. 벽돌과 콩크리트를 혼합해 만든 중서결부의 회(回)자형 건물이였다. 건물 앞에는 남창봉기의 주요 지도자들인 주은래, 주덕, 엽정, 하룡, 류백승의 동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붉은기가 펼쳐져 있었다.     기념관 부관장 조가천(曹佳倩) 녀사가 기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조가천 녀사의 안내하에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관 건물은 책에서나 영화에서 많이 보아온 20년대 강서대려사(江西大旅社)건물이였다. 1922년에 축조된 이 건물은 당시 남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였다. 봉기를 앞두고 하룡이 호텔을 세 맡아 봉기 총지휘부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주은래를 비롯한 남창봉기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거취하면서 봉기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지금 건물에는 모두 남창봉기 유물과 사진 전시실로 사용되고있었다.   조가천 녀사는 당시 남창봉기에 관련해 이야기하였다.    (조가천 연구원) 이쪽은 남창봉기를 령도한 5명 지도자의 동상입니다. 가운데 주은래이고 그 곁에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입니다. 지금 보는 이 청사는 봉기 총지휘부로 사용되였습니다. 강서대려사는 1924년에 축조된 건물로서 1층에 전적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8월 1일 새벽 2시 봉기군 2만여명이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적 총지휘부를 공격하는 전투, 남창공원을 점령하는 전투, 수관음청 전투가 비교적 치렬하게 진행되였는데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이러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4시간 전투를 거쳐 봉기군이 남창을 점령하였습니다. 남창봉기후 주덕이 거느린 부대는 정강산에서 모택동부대와 회합하여 중국로농홍군 4방면군을 편성하였습니다. 남창봉기는 국민당 반동파에 대해 첫 총성을 울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8월 1일은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로 계속 기념하고있습니다.     남창봉기는 주로 공산당이 장악하고있었던 혁명군 정규부대에 의지해 이룩한 봉기이다. 무창수비를 맡았던 엽정부대는 장개석 남경정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구강에 이르렀다. 엽정이 거느린 11군 24사에는 길림성 룡정의 개산툰진 출신인 박인, 흑룡강 녕안의 방월성과 김철강을 비롯한 조선족 혁명가들이 있었다.   7월말 엽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남창에 주둔하였다.     2월 14일은 서양인의 련인절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련인절을 쇠는 것이 성행했기 때문에 남창의 거리는 판촉활동으로 소란스러웠다. 거리에서는 생화를 들고 다니는 젊은 련인들의 밝은 모습을 쉽게 찾아 볼수있었다.   남창에 들어온 엽정은 백화주(百花洲) 동호(东湖)곁에 위치한 심원중학(心远中学)에 11군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백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남창 심원중학교는 지금 남창시 제2중학교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당시 엽정의 사령부 옛터를 지금까지 보존하고있었다. 새로 축조된 학교 주청사와 운동장을 지나니 해묵은 나무 두 대가 우거진 사이로 낡은 벽돌건물이 보였다. 가까이에 가보니 2층으로 된 건물이였는데 건물 정면에는 <엽정 지휘부 옛터(叶挺指挥部旧址)>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엽정은 2층에 지휘부와 전화통신실을 설치하고 아래층에 경위원을 들게 하였다. 엽정은 이곳에서 남창봉기의 천주교회당(天主教会堂)전투, 공원(贡院)전투, 신영방(新营房)전투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엽정부대가 구강을 거쳐 남창에 진입하였을 때 제2단계 북벌에 참가해 혁혁한 공헌을 세웠던 하룡부대도 구강을 거쳐 남창에 왔다. 독립 15사단으로 북벌전에 참가한 하룡부대는 수차의 전투에서 승전하고 20군으로 확대되였던 것이다. 이 부대에는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를 비롯한 수십명 조선족 장병들이 있었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도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 의렬단 단원이였던 류자명(柳子明)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민당의 탄압이 컸기 때문에 조선혁명가들도 피해를 보았다. 제6군 포병영 영장이였던 리검운은 소속부대에 체포되였고 부영장인 권준과 부관인 안동만(安东晚)은 각기 호남성과 남경으로 피신했다. 시국이 이처럼 살벌해 지자 김원봉은 무창을 떠나 구강으로 갔고 거기에서 하룡부대에 편입되였던 것이다.   7월 25일, 왕정위와 장발규가 려산(庐山)회의를 소집하고 하룡을 불렀지만 그는 응하지 않고 남창의 중화성공회(中华圣公会)에 20군 지휘부를 설치하고 공산당과 함께 남창봉기를 준비하였다.   하룡의 20군 지휘부 옛터는 자고로(子固路) 165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원내에는 두 개 청사가 있었는데 모두 벽돌, 기와로 된 건물이였다. 당시 하룡은 한 건물을 20군 군부사무실로 쓰고 다른 한 건물에서 류백승(刘伯承), 운대영(恽代英)과 함께 거취하면서 사무를 보았다. 원래 중화성공회 굉도당(宏道堂)의 건물이였던 하룡지휘부 옛터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 있었다.     엽정부대와 하룡부대가 남창에 입성함에 따라 공산당이 장악한 부대가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두 부대와 주덕이 거느린 군관교육단의 부분적인 장병 그리고 남창부근의 회마령에 주둔한 주사제의 부대까지 합치면 총수가 3만 8천여명에 달했다.   이때 강서경내는 국민당 제5로군(第五路军) 총지휘인 주배덕(朱培德)이 수비를 맡고있었다. 주배덕은 남경정부와 무한정부 사이에 끼여 시국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있었다. 그는 주력부대인 3군을 길안(吉安)에 주둔시키고 9군을 동향(东乡), 진현(进贤) 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남창시와 근교에는 제5로군 총지휘부와 경비단(警备团) 그리고 부분적인 부대만 있었다. 적의 총수는 약 만명 정도였다.    7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사업을 책임진 주은래가 남창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덕의 집에 머물면서 앞써 도착한 리립삼, 운대영, 팽배(彭湃) 등과 만났다. 그들은 강서대려사에 모여 중국공산당 전적위원회(前敌委员会)를 설립하고 봉기문제를 자상히 토의하였다. 주은래가 전적위원회 서리를 맡고 하룡을 남창봉기 총지휘로, 엽정을 전적총지휘로, 류백승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회의에서는 7월 30일에 봉기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봉기 준비가 바야흐로 성숙되여가고 있을 때 장국도가 중앙의 대표신분으로 봉기에 간섭해 나섰다. 29일 그는 두차례 전보를 보내 심중하게 폭동해야한다고 부탁하였다. 7월 30일 장국도는 구강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급급히 남창에 왔다. 그는 봉기를 앞두고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대회에서 장국도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극력 봉기를 늦추어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은래, 운대영, 팽배, 담평산을 비롯한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이 단호히 장국도의 건의를 부결하였다. 대회에서 주은래는 전적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작전명령을 작성하였다. 명령은 남창의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8월 1일 새벽 4시부터 성내외에 주둔한 적들을 공격한다고 하였다.   7월 31일 밤,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고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강서대려사만은 불빛이 휘황하였다. 봉기 총지휘부에서 사람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봉기시각을 시다렸다.   수만명 봉기장병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만단의 준비를 끝내고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어둠이 뒤덮인 중국의 암흑을 깨칠 그 시각은 한초한초 다가오고 있었다.   
32    제21회 하승교와 토지당 전적지 댓글:  조회:4307  추천:52  2007-08-03
      장개석이 피비린 <4.12>반혁명 정변을 일으킨후 성세호대하던 중국 혁명진영은 분렬되기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남경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고 왕정위를 대표로한 무한정부는 계속 국공합작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의 반역행위를 성토하였다. 한편 북경에는 장작림의 북양군벌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력사에서는 세 정부가 병존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혁명자들은 반제반봉건 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새로 나타난 군벌세력과 투쟁하여야 했던 것이다.    1927년 4월 19일, 무한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은 무창 남호(南湖)에서 북벌선언을 발표하고 두 번째 단계의 북벌을 시작하였다. 왕정위는 장개석을 토벌하자는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의 동정주장을 제치고 쏘련 고문 보로딘의 의견을 받아 북벌을 결심했다.    무한정부 북벌군 주력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을 포함한 장발규(张发奎)의 제4군과 제11군 그리고 하룡(贺龙)이 거느린 독립 15사단이 포함되였다. 많은 공산당원들과 조선인 장병들이 두려움 없이 싸웠기 때문에 북벌군은 강대한 적을 물리치고 승승장구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풍옥상 부대가 북벌군을 도왔고 산서의 염석산(阎锡山) 부대도 적극 호응해 나섰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하남전성을 석권하고 6월 2일 하남성 개봉(开封)을 점령하였다. 한편 장개석도 북벌을 시작해 이날 중원의 전략요충지인 서주(徐州)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쟁과 외란에 시달리던 무한정부는 더욱 큰 위기를 겪게 되었고 드디어 왕정위도 혁명을 배반하고 장개석과 합류하는 길로 나아갔다.    국민군이 제2단계 북벌을 시작한 후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1927년 4월 27일부터 무창고등사범학교(武昌高等师范学校) 제1부속소학교(第一附属小学校) 강당에서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진독수(陈独秀), 채화삼(蔡和森), 장국도(张国焘), 담평산(谭平山), 구추백(瞿秋白), 모택동(毛泽东)을 비롯한 80여명 핵심당원들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이때에 와서 전국 공산당원수는 1925년의 994명으로부터 5만 7천 9백여명에 달했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의 타협로선을 비판하였고 혁명투쟁에서 무산계급이 지도권을 장악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당면한 무장투쟁과 토지혁명에 관련한 관건문제에서 명확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국민당 대표로 대회에 출석해 연설까지 했던 왕정위는 자기를 소자산계급으로 규명하고 겨우 단결의 대상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은 공산당의 작법에 실망을 느끼고 드디어 공산당에 대해 칼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무한정부가 통제하고있는 호북, 호남, 강서 등지에서는 성세호대한 로동자, 농민운동이 계속되고있었다. 게다가 무한정부는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북양군벌과의 치렬한 격전이 계속 되었고 동쪽에서는 장개석이 무한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고있었으며 남쪽과 서쪽에는 장개석에게 매수된 광동군벌과 사천군벌이 수시로 무한을 노리고있었다.    무한정부가 북벌을 시작할 때 의창(宜昌)수비를 맡았던 하두인(夏斗寅)이 북벌군이 무한을 떠난 기회를 빌어 사천군벌 양삼(杨森)과 결탁하여 무한으로 공격해 왔다. 하두인은 토지문제를 둘러싼 계급 모순을 극대화하여 공산당과 농민운동을 타매하면서 국공합작을 주장하는 무한정부를 반대하였다. 반란군은 신속히 정사교(汀泗桥)를 점령하고 월한철도(粤汉铁路)를 차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란군은 한구의 주둔군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공산당을 반대하기로 계획했다. (권립교수) 150여명 조선족 혁명가들은 무한으로 급전이하여 무한군정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5월 17일 호남군벌 하두인과 양삼이 결탁하여 무한을 대거 진공하였는데 이때 무한군정학교의 4,000여명 학원들은 중앙독립사로 편성되여 엽정장군의 지휘하에 무한보위전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무한을 수비하는 혁명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구(汉口) 수비를 맡은 제8군 군장 리품선(李品仙)은 로동자 규찰대의 지휘권을 찬탈하여 했으며 장강을 봉쇄하고 무한 3진의 래왕을 두절시켰다. 위기일발의 시각 공산당은 무창(武昌)의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동원해 토벌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군대를 모집해 토벌을 평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무창수비사령을 맡은 엽정부대와 중앙군사정치학교 4천여명 학원들을 동원해 편성한 중앙독립사(中央独立师)를 전투에 내세웠다. 엽정부대에는 북벌에 참가했던 백 50여명 조선장병들로 무어진 정규부대가 있었고 중앙독립사에도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많은 조선혁명가들과 학원들이 있었다.    혁명군은 엽정의 지휘하에 무한남부 지방(纸坊)부근에 수비진을 쳤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반란군을 물리친후 엽정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토지당(土地堂)부근에서 적 주력을 포위하였다. 반란군이 우세한 병력을 믿고 다시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전투가 더욱 치렬해지자 중앙독립사가 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독립사는 적의 반격을 막아낼수 없었다. 엽정은 정규군 한 개 영을 보내 독립사를 지원하게 하는 한편 사수할 것을 엄명하였다. 이에 큰 고무를 받은 혁명군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완강하게 싸웠다. 쏘련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고 또 줄곧 엽정을 따가 북벌전쟁을 치러온 박영(박근성朴根星), 박근만(朴根万), 박근수(朴根秀) 세 형제는 다른 조선인 사병들과 함께 영용히 싸웠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진하는 혁명군 앞에서 적들은 드디어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혁명군은 앞다투어 돌진해 적들을 소멸하고 토지당을 점령하였다. 3백여명 반란군 패잔병들이 도주하였을뿐 주력이 이곳에서 전부 소멸되였다.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선혁명가 박근만, 박근수 형제는 6월 5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권립교수) 조선족혁명가 박영, 박근만, 박근수는 무한 토지묘 근처에서 반란군을 물리쳤지요. 조선용사들은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고 무한보위전에서 대공을 세웠습니다. 박근만과 박근수 형제는 용감하고 지혜롭게 잘 싸워 소문이 났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도했습니다.   하승교(贺胜桥)에서 무한으로 돌아오던 중 답사팀은 토지당 전적지를 찾아보았다. 귀청을 째는 듯한 총, 폿소리가 멎었고 용감하게 돌진하던 조선혁명가들의 함살(喊杀)소리도 멎은 지 오래다. 전적지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두 밭으로 변해 버렸다.    부근에 조금 높은 둔덕이 있었고 거기에 옛날 작은 사당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할 뿐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었다. 다만 길가에 작은 도로표식 하나가 있어 거기에 새겨진 “토지당(土地堂)”이란 석자를 보고 토지당 전적지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하두인의 반란군은 전호를 파고 수비진을 쳤으며 혁명군은 넓은 평지로부터는 적을 포위하고 두려움 없이 싸워 적을 소멸했던 것이다. 자랑찬 우리민족 선렬들이 이 유명한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웠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것이다.    토지당 전투의 승리로 무한정부는 하두인과 양삼의 반란을 평정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무한정부 주석인 왕정위를 비롯한 국민당은 계속 반란군을 비호하면서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농민운동을 견제하였다. 그리하여 5월 21일 장사에서 군벌 허극상(许克祥)이 마일사변(马日事变)을 일으켰다. 그는 백여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하고 호남성 총공회와 농회를 봉쇄하였다. 강서에 웅거해있던 주배덕(朱培德)도 경내의 공산당과 로동자, 농민운동 지도자들을 견제하고있었다.   1927년 7월 15일, 왕정위는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한국민당중앙 상무위원회 제20차 회의를 소집하고 여러 가지 구실로 공산당과 분리할데 관한 결의를 지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공산당과 로동자, 농민 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하였다. 왕정위는 “천명을 잘못 죽일지언정 한사람도 놓지지 말라(宁可狂杀千个, 不使一人漏网)”는 구호를 내세우고 많은 공산당원들을 학살하였다. 이로써 국공합작은 철저히 파렬되고 중국혁명은 또다시 피 못에 잠기게 되었다. (권립교수) 7월 15일에 왕정위가 대학살을 진행하여 북벌전쟁은 실패하고말았습니다. 4,000여명이나 되던 중앙독립사는 천여명밖에 남지 않았고 150여명의 조선용사들은 견정불이하게 엽검영동지의 지휘하에 군관교도퇀에 참가하여 제2영 5련에 편성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국내혁명전쟁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이 실패의 시련을 맞이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7월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무한정부에서 탈퇴한다고 선포하였다. 7월 12일 중국공산당은 진독수의 우경(右倾) 투항주의로선을 극복하고 새로운 림시중앙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장국도, 주은래, 리유한(李维汉), 장태뢰(张太雷), 리립삼(李立三)이 상무위원회 성원으로 되었다.    왕정위가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한후 중국 공산당내에서 무력항쟁의 주장이 더욱 고조되였다. 주은래, 장태뢰, 모택동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피비린 탄압에 무력으로 항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로동자, 농민봉기를 준비하였다.    1927년 장개석, 왕정위가 선후로 혁명을 배반함으로써 중국력사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1927--1937)에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는 중국의 광범한 피압박 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장개석을 대표로 하는 국민당의 반동통치에 맞써 무력항쟁을 전개한 시기이다.    중국공산당은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단합시키고 동방 피압박민족 혁명가들과 함께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일으키고 자체의 무장인 홍군을 창건하고 각지에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였다. 중국의 광범한 피압박 인민들은 공산당과 홍군을 따라 국민당 반동군벌들과 제국주의를 반대해 두려움 없이 싸웠다.    중국에 망명해온 조선혁명자들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많은 조선의 우수한 혁명가들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농촌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하였고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하였으며 적이 통치하는 도시 지하전선에서 두려움 없이 적들과 싸웠다. 그들은 시련과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피압박민족의 대단결과 항쟁은 필연코 반동파와 제국주의자들을 전승하고 자유와 독립을 찾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민족의 우수한 혁명자들은 이와 같은 굳은 신념을 안고 중국인민들과 함께 어깨 겪고 싸웠고 중화대지에 불굴의 발자욱을 력력히 남겼다.  
31    제20회 중국인민의 반제투쟁에 참가 댓글:  조회:4233  추천:46  2007-07-30
   북벌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중국력사는 수많은 사변들이 나타난 1927년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7년초의 중국남방대지는 전란이 계속되였고 호남, 호북에서는 농민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무한과 구강에서는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고 상해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무장봉기가 일어나 북벌군의 공격을 적극 도와 나섰다. 전반 중국 대지가 혁명의 열조에 휩싸였고 국벌정부의 억압과 제국주의의 수탈에 허리를 펴지 못하던 억만 중국인민이 다투어 혁명에 나섰다.     북벌군이 북벌을 시작해 불과 1년도 안되는 사이에 혁명력량은 주강류역으로부터 장강류역으로 신속히 발전하였다. 수십만 무한인민들은 거리에 떨쳐나와 북벌군을 환영하였다.   왕정위를 주석으로 한 국민혁명정부는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왔고 따라서 무한은 혁명중심으로 되었다. 황포군관학교도 이때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려 8천여명 청년들이 학습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되였다. 광주에서 황포군교에 입학하였던 수많은 조선청년들도 무창에 왔고 전국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청년들과 혁명자들도 선후하여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창수비사령을 맡은 엽정부대에는 엽정을 따라 북벌전쟁을 해온 조선인 부대가 있었다.   무한에 모인 조선혁명자들과 조선청년들은 의렬단을 중심으로 류악혁명청년회를 조직해 혁명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무한인민들은 국민정부의 천도(迁都)와 북벌승리를 경축하는 성대한 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반제반봉건 선전을 진행하였고 강연회를 가졌다. 1월 3일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 선전대가 강한관(江汉关)부근에서 수만명의 군중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가졌다. 이때 부근에 주둔했던 영국 해병들이 간섭해 나섰다. 그들은 16정의 기관총을 걸어놓고 하늘에 총을 쏘면서 군중들을 위협하였다. 집회에 모인 로동자와 학생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 병사들은 총창을 들고 무고한 군중들에게 덮쳐들었다. 충돌에서 중국 로동자 한명이 숨지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했다. 이에 격분한 더욱 많은 군중들이 영국 조계지로 돌진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후 국민당 정부는 영국당국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고 영국 해병대의 철수와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한편 격분한 무한인민들은 항의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전면적인 파업을 시작하였다.   무한 중남재경대학의 원계성 교수는 당시 무한의 조선인들도 동방피압박민족 인민들과 함께 이번 투쟁에 참가했다고 증언하였다.   (원계성) 한국 주민들이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는 고조시기 영국과 일본, 프랑스 조계지의 인디아 고용인들이 윁남과 조선인들을 련합하여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 조직을 만들어 무한인민들을 지원하여 영국 조계지 회수를 도와주었고 시위도 하였습니다. 그 영향이 컸습니다.    1월 6일 구강에서도 영국 해병이 무고한 인민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각지 수십만 군중들은 계속 제국주의의 폭행에 항의하였고 국민정부는 적극적인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2월과 3월 선후하여 한구와 구강의 영국 조계지 회수에 관련한 협의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제국주의자들은 아편전쟁이후 처음으로 단합된 중국인민앞에 머리를 숙이고 조계지에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한의 반제반봉건 투쟁의 승리는 전국인민들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농민들이 일떠나 대지주, 자산계급과 투쟁하였고 군벌통치와 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웠다. 이러한 투쟁물결속에 조선혁명자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남경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자들은 1927년 2월에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를 조직하였다. 일찍부터 이곳에서 활동하던 의렬단원 류자명(柳子明)을 중심으로 신공제(莘公济), 김규식 그리고 무한혁명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안동만(安东晚)을 비롯해 중국인, 윁남인, 인디아인들을 모아 련합회를 조직하였다. 김규식이 회장으로 추대되고 안동만이 한국부 상무(常务)로 활동하였다. 련합회는 또 기관지 <동방민족(东方民族)>을 조선문, 중문, 영문으로 출간함으로써 민족독립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호소하였다.      1927년 3월, 장개석이 직계부대를 동원해 남경, 상해지역으로 진격해 왔다.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세력이 웅거해있는 국제도시였고 공상업 중심지였다. 장개석은 상해를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경제명맥을 쥐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지해 자기의 지반을 굳히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일찍부터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수십만 로동자들을 단합시켜 수시로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하고 있었다.   마관조약(马关条约)이 체결된후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여러 중심도시에 공장을 세우고 중국 로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특히 일본은 상해에 가장 많은 공장을 세웠고 로동자들에 대해서도 가장 가혹하였다. 1925년 2월, 상해 일본인 방직공장 로동자들이 공장측에서 로동자들을 구타하고 공장에서 쫓아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분개한 로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하였고 일본공장주는 일본군경들을 시켜 공장 로동자 대표이고 공산당원인 고정홍(顾正红)을 살해하였다. 일본인이 고정홍을 살해한 소식이 전해지자 더욱 많은 로동자들과 학생들이 항의해 나섰다. 그리하여 5월 30일 중외를 진감한 5.30참안이 빚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상해에서의 이번 중국인 반일반제국주의 투쟁에 조선인 열혈청년들도 참가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서재현(徐载贤)이다.     서재현(1906.11.15--)은 황해도 장연(长渊)사람으로서 1924년 2월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 산하의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学校)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교내 소년회(少年会)를 책임지고 ?나라를 찾는데는 돈이냐 피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5년 동제대학(同济大学)에서 공부하던 서재현은 상해대학학생련합회의 호소에 따라 일제를 반대하는 동맹휴고, 대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해 동제대학과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조선인 학생이 가장 많았다. 그는 두 대학의 25명 조선학생들과 함께 중국학생들의 성세호대한 반제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재현은 조선인 최병락(崔炳洛), 김규선(金圭善) 등과 함께 5월 30일 11시경부터 상해역전에서 중국인 학생들과 회합하였다. 시위 대오는 절강로(浙江路)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조계지를 회수하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쳤다.   오후 2시 시위대오가 남경로(南京路)에 이르렀을 때 조계지 영국 경찰들이 학생들을 향해 총격하여 수십명의 사상이 빚어졌다.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은 더욱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6월 1일부터 5일까지 많은 학생들이 가두연설을 하고 전단배포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의 죄악을 널리 선전하였다. 한편 더욱큰 희생을 피면하기 위해 공산당에서는 조직적으로 로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조직하게 되었고 국민당정부와 북경의 군벌정부는 제국주의자들과 담판했지만 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후 서재현은 30년대까지 계속 상해에서 활동하였고 1944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으로 사업하기도 하였다.     5.30참안이 있은 후 전국 각지에서도 선후하여 로동자 파업과 학생시위가 진행되여 반제반봉건 투쟁을 한껏 고조시켰다. 중국공산당은 창건된 그날부터 로동운동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특히 당의 본거지인 상해에서의 로동자 조직은 공산당의 령도하에 전례없이 단결되였다. 1927년 북벌군이 상해로 진격해 오자 공산당은 상해 로동자들을 령도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데다가 조직이 잘되지 못했고 또한 사전에 봉기 소식이 루설되는 등 원인으로 두차레 무장봉기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27년 3월 공산당은 상해 로동자들을 이끌고 세 번째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상해에 있던 공산당 중앙의 주요성원들이 모두 봉기 령도에 참가하였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인 주은래가 직접 해군부대의 장병훈련과 로동자 무장을 조직하였다. 3월 21일 상해의 로동자들이 전부 파업에 들어갔고 로동자 규찰대가 무장하였다. 로동자 규찰대와 군부대의 혁명적 장병들은 무기를 들고 경찰서와 병영, 군부대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제3차 상해로동자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여 하루사이에 시구역 전부를 점령하였고 시교의 반동군벌부대는 접전하기전에 북벌군 정규군이 공격해 오자 모두 철수해버렸다. 그리하여 상해는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규찰대에 의해 통제되였다. 한편 장개석의 1군 주력사단이 상해 근교에 주둔하였고 남경은 2군과 6군이 점령하고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장개석은 상해의 매판자산계급과 제국주의자들과 타협하면서 상해의 경제명맥을 틀어쥐었고 계속 무한정부와 대항하려 시도하였다. 당, 정, 군 실권을 한몸에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은 장개석은 상해를 확실히 장악하여야했고 왕정위와의 권력쟁탈을 계속하려면 더욱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이 있어야 되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드디어 손중산의 반제반봉건투쟁 리념을 뒤엎고 철저히 혁명을 배반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 깡패들을 사촉하여 로동자 규찰대와 충돌하게 하였으며 소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정규군을 풀어 로동자들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3일 상해 총공회는 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20만 로동자들과 학생들이 대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대오가 보산로(宝山路)에 도착했을 때 장개석 군대는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보산로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널렸고 붉은 피가 짙게 물들었다. 이어 보로딘, 진독수, 담평산, 오옥장, 모택동을 비롯한 197명 공산당 요인을 구금할 명령을 내렸다.   광주의 리제심(李济深)도 4월 15일 공산당을 도살할데 관한 명령을 내렸다.   <4.12>반혁명 정변이 일어난 후 각지의 중국공산당은 지하투쟁으로 들어갔으며 일부는 무한으로 집결하였다. 각지의 진보적인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공산당의 중앙지도자들은 계속 국민당내 좌파에 희망을 품고 국민당과 타협했기때문에 혁명성과를 잃어 버렸다. 주은래를 비롯한 부분적인 공산당 중앙위원들은 무력항쟁을 주장했지만 당시 공산당의 중앙서기 진독수는 국민당 좌파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전국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었고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리웠다. 새롭게 나타난 장개석 반혁명 군벌정권에 대해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적당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도 큰 실망을 안고 방황하였고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아 무한으로 떠났다.  
30    제19회 무한에서의 조선인 혁명활동 댓글:  조회:4848  추천:77  2007-07-30
   192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벌전쟁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두려움 모르는 북벌군 장병들은 파죽지세로 호남, 강서 전선을 휩쓸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이 일떠나 북벌군을 도와 나섰다. 그리하여 이해 년말까지 북벌군은 수배나 더 많은 군벌부대를 전승하고 광서, 광동으로부터 호남, 호북, 강서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중국혁명에 몸담고 싸웠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은 북벌전쟁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유망한 청년들을 더욱 많이 단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의렬단 단장 김원봉은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휘하에 집결시키기에 노력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자 그는 기타 의렬단 간부들과 함께 황포군교 무한분교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무한에 거주하고있던 조선교민들속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찾았으며 무한의 여러 혁명단체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 군내에 있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왔다.   무한의 중남재경대학(中南财经大学) 원계성(袁继成) 교수는 당시 무한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해주었다.  (원계성)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일찍 무한에 정치과를 설치하려할 때 한쪽으로는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전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에서 전국을 상대로 학생들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무한에 조선혁명청년회가 있었는데 청년회를 주도로 각지에서 많은 우수한 한국 청년들이 무한에 오게 되었습니다. 후에 무한군교, 무한분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온 중앙군관학교 무한분교에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무한에는 일찍부터 소수 조선교민들이 중약과 인삼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다. 20년대에 들어와 조선교민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혁명자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군관으로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조선청년과 학생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들과 군관들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혁명청년회(留鄂革命青年会)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조선혁명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포함되였다. 이 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义杓), 리검운(李检云), 오세진(吴世振), 리우각(李愚悫), 로세방(劳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事政治学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陈公木), 진갑수(陈甲秀), 사검인(史剑仁), 안동만(安东晚), 류광세(刘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学)과 남호학병단(南湖学兵团),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네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 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1925년부터 26년까지 중국 국공합작이 고조를 이루고 북벌군의 승전에 따라 중국혁명은 사람들을 크게 고무시켜 주었다. 특히 중국에 망명되여 온 조선혁명자들과 수많은 조선청년들은 이에 감화되여 중국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확정지어갔다.   김원봉을 단장으로하는 의렬단은 이시기 조직세를 확장시켰을뿐만 아니라 비교적 성숙된 운동리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관헌의 자료를 분석할 때 의렬단은 대체로 1926년 20개조의 강령을 제정하여 단의 리념적 지표를 더욱 구체화, 명료화, 체계화시키면서 발전적 면모를 보였다.   의렬단의 강령을 보면 첫째, 조선민족 생존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한다고 하였고 둘째,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세력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립함이라 하였으며 셋째,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剥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을 건립한다고 하였다.   의렬단의 이와 같은 주장은 20년대초의 투쟁강령이였던 의 계승과 발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 타도는 당시 모든 조선혁명가들의 공동의 리념이였다. 그리고 이시기 의렬단은 공산주의의 영향하에 계급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대중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각지에 공회조직과 농회조직을 설치함으로써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들을 혁명에로 이끌고있었다. 하여 조선혁명자들은 이때에 와서 국민당과 북벌군이 승승장구로 전진할수있은 가장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대중운동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한편 이시기에 와서 조선독립운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유일당촉성운동이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여 일정한 성과를 보기도 하였다.   일찍 상해림시정부가 수립될 때 려운형과 리회영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으로서 당 조직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수립이 급급했던 탓으로 이 문제가 중시를 불러일으키기 못했다.   1923년 6월 독립운동의 분렬과 림시정부내 파벌투쟁이 심각한 상황에서 김규식, 신숙(申肃), 리청천(李青天) 등은 로씨야 극동의 리동휘, 한명세(韩明世)와 회합하여 “민족운동의 통일적 혁명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작성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대동단결론이 제기되였고 이들의 영향하에 1926년 10월 16일에 대독립당(大独立党)조직 북경 촉성회(促成会)가 결성되였다. 북경촉성회는 조성환(■成焕), 장건상, 강구우(姜九禹)를 비롯해 40여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뒤 1927년 3월 21일에는 상해촉성회가 창립되고 150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당시 김성숙, 오성륜, 장지락(张之乐--김산)을 비롯해 광주에 약 3백명에 달하는 조선혁명자들이 있었는데 이?/textarea> var config = new Object(); // create new config object config.width = "100%"; config.height = "200px"; config.bodyStyle = 'background-color: #FFFFFF; font-family: "굴림"; font-size: 10pt; line-height:150%;margin: 10 10 10 10 '; config.debug = 0; config.toolbar = [ ['fontname'], ['fontsize'], ['bold','italic','underline','separator'], ['justifyleft','justifycenter','justifyright','separator'], ['OrderedList','UnOrderedList','Outdent','Indent','separator'], ['forecolor','backcolor','separator'], ['HorizontalRule','Createlink','InsertImage','htmlmode'], ]; config.fontnames = { "굴림": "굴림, 굴림체", "돋움": "돋움, 돋움체", "바탕": "바탕, 바탕체", "궁서": "궁서, 궁서체" }; config.fontsizes = { "1": "1", "2": "2", "3": "3", "4": "4", "5": "5", "6": "6", "7": "7" }; config.fontstyles = [ // make sure classNames are defined in the page the content is being display as well in or they won't work! { name: "headline", className: "headline", classStyle: "font-family: arial black, arial; font-size: 28px; letter-spacing: -2px;" }, { name: "arial red", className: "headline2", classStyle: "font-family: arial black, arial; font-size: 12px; letter-spacing: -2px; color:red" }, { name: "verdana blue", className: "headline4", classStyle: "font-family: verdana; font-size: 18px; letter-spacing: -2px; color:blue" } ]; //////////////////////////////////////////////////////////// // userColor 추가 by k2 //////////////////////////////////////////////////////////// editor_generate('content',config,'#FFFFFF'); 관련링크   첨부파일 삭제
29    제18회 김준섭렬사의 유적을 찾아 댓글:  조회:4442  추천:33  2007-07-30
  1926년 11월 남창공격전이 승리한 후 북벌군은 군벌 손전방의 주력을 소멸하고 강서 경내를 전부 점령하였다. 손전방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절강, 강소쪽으로 도주하였고 북벌군은 강서에서 병력을 정비하면서 연해지역 출병계획을 세우고있었다.   남창을 점령한 북벌군은 남창에서 성대한 추도회를 가지고 전사한 6군 기관총부대의 조선인 교관 김준섭을 추모하였고 격앙된 심정으로 더욱 큰 승리를 이룩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북벌군 희생자들을 남창 근교에 매장하고 커다란 기념비를 세워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북벌전쟁에서의 조선족 혁명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하던 답사팀이 남창에서 김준섭 렬사의 유적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04년 2월 14일이였다. 기재에 의하면 북벌전쟁 승리후 전사자들의 시신은 남창 교외의 청운보(青云谱)에 이장되였고 그곳에 북벌전쟁 렬사기념비까지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사학자들도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있고 거기에는 김준섭 렬사의 이름도 밝혀져 있다고 알려주었다.   남창에서 “청운보”라면 비교적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력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곳을 잘 알고있었다. 안내를 맡은 중앙인민방송국 강서 주재기자 장소룡(张小龙)을 따라 답사팀은 청운보로 떠났다.     청운보는 남창시 남쪽 교외에 위치해있었는데 시 중심하고는 10여 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지금의 남창시 청운보는 고대 유명한 화가인 팔대산인(八大山人) 주탑(朱耷)기념관으로 사용되고있는 도원(道院)이 있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청조시기 유명한 화가인 주탑(朱耷)은 도사로 되어 2,5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이 도원에 장기간 은거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서 정명도교(净明道教)의 발원지인 청운포와 청나라 화가 팔대산인 기념관으로 이곳은 남창시 관광명소의 하나로 되고있다.      작은 호수가에 아담한 정원이 있었고 잎이 무성한 고목과 푸른 대나무 숲 사이로 여러 가지 고대 건물들이 보였다. 정원을 다니며 아무리 살펴보아도 북벌전쟁과 관련된 흔적은 찾아볼수 없었다. 안내를 맡은 장기자와 물어보았지만 역시 모른다고했다. 남창에 대해선 손금보듯 잘 아는 장기자도 모른다니 뭔가 잘못 된 것임이 분명하였다. 현지인들과 물어보아도 그런 기념비를 모른다고하였다.   전화를 통해 북경과 연변의 력사고문들과 련락하여 문의하였다. 분명 그곳에서 렬사기념비를 보았다는 기재가 있다는 것이다. 년세가 많은 분들의 기억에 따르면 기념비는 팔대산인 기념관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튿날 답사팀은 청운보에서의 아쉬움을 안고 남창시 팔일대가(八一大道) 북쪽에 위치한 강서혁명렬사기념당(江西革命烈士纪念堂)에 가보았다. 3층 건물인 기념당 앞에는 홍군전사의 동상이 있었다. 기념당에서 김준섭 렬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김준섭 렬사에 대한 전문소개가 있었고 그가 쓰던 회중시계를 비롯한 유물들도 전시되여있었다. 그리고 김준섭 렬사가 희생된 락화역 옛 사진이 있었다. 거기에는 “락화역전, 1926년 11월 김준섭은 적들과 격전하던중 역전에서 총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김준섭 렬사를 위한 북벌군의 추도회 사진도 있었다. 수많은 북벌군 전사들이 장엄히 서있는 가운데 렬사의 시신이 누워있는 커다란 관이 있었고 관앞에는 꽃다발이 있었다. 그뒤 프랑카드에는 김준섭 렬사를 추모한다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기념관에 김준섭 렬사에 대한 약력이 적혀있었지만 상세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조선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사람으로서 중국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 전사”라고 김준섭 렬사를 평가하고있었다.   기념당 연구일군들과 북벌렬사 기념비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러자 우리가 청운보에서 기념비를 볼수없었던 답이 나왔다. 분명 청운보에 북벌 렬사기념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시기를 거치면서 극좌적인 사상의 영향으로하여 기념비를 폭파해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창시 진현문외(进贤门外)에 위치한 피장구(皮匠沟)에는 <조선 김준섭 동지 지묘(朝鲜金俊燮同志之墓)>라고 쓴 작은 기념비와 묘지가 있었다고 하나 역시 문화혁명때 파괴되였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였다. 책의 기재에는 한자가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현문, 피장구가 어딘지 알수없었지만 기념당 일군의 말에서 그곳을 분명히 알수있었다.    비록 많은 공산당원과 조선 혁명자들이 북벌전쟁에 참가했지만 필경 국민당이 주도한것으로 인식되였기때문에 문화대혁명시기 극좌적인 사상의 지배하에 사람들은 북벌전쟁력사를 객관적으로 알지 못했던것이다. 더욱이 많은 조선족 로혁명가들은 문화대혁명시기 조선특무로 욕을 보았고 많은 력사 유적들도 파괴되였던것이다. 참으로 죄악의 동란기였다.   우리가 김준섭 렬사에 관련해 취재한다는것을 안 기념당 연구일군들은 더욱 많은 자료가 있으면 기념당에 보충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개혁개방을 맞으며 그들의 연구 시각도 다양해지고 넓어지고있는것이다. 그들은 보다 개방적인 사유로 국내외의 광범위한 사료를 골고루 연구해야만이 북벌전쟁력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수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청운보 북벌렬사기념비와 진현문외 피장구의 김준섭 렬사묘가 파괴된데 대해 답사팀은 커다란 유감과 아픔을 느끼고있었다. 그런대로 남창 렬사기념당에서 아직도 김준섭 렬사를 기념하고있고 또 더욱 많은 자료가 있으면 보충해 달라는 연구일군들의 부탁에서 다소 위안을 느끼기도 하였다.     답사팀은 장기자를 따라 제2차 남창공격전의 유명한 전적지였던 락화(乐化)역으로 갔다. 락화진은 남창시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이전에는 경한(京汉)철도가 락화역을 지났다한다. 경한철도는 지금 경구철도의 한부분이다.     차를 타고 30여분 달려 남창시 신건현(新建县) 락화진(乐化镇)에 도착하였다. 울퉁불퉁한 흙길에 헐망한 가옥들이 나타났다. 쓰레기 관리와 오수처리가 안되여 진은 지저분해 보였고 매우 락후했다. 주민구를 지나 남으로 가니 철길이 보였다. 부근에는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를 깊이 파놓은 흙무덤이 있었고 동쪽으로 작은 2층 건물로 된 기차역이 보였다. 바로 락화역이였다.   현지인들과 물어보니 옛 락화역 건물은 이미 허물고 그 자리에 기숙사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기차역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 곁에 흙무덤과 깊은 웅덩이 자리가 바로 옛 락화역 자리였던이다. 소중한 문화재가 이처럼 쉽게 제거되어 버린것이다. 가까스로 참아왔던 유감과 아픔이 금방 분노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때 며칠째 우리를 안내하던 장기자도 분노하는것이였다. 문화재가 이처럼 많이 파괴되고있는것을 안 장기자 역시 남창사람으로서 마음의 가책을 받은것이다. 장기자는 꼭 문화부문과 관련 부문에 이 문제를 반영하여 문화재 보호에 진력하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안되면 성 당위원회와 성정부에 직접 찾아가 문제를 반영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새로 지은 기차역 건물은 그 곁에 있었다. 역에서 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장 류사기(刘斯杞)가 소개한데 의하면 락화역은 구강차무단(九江车务段)에 소속되여 있고 낡은 역은 1994년까지 사용되다가 지금의 건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는 매일 198쌍의 렬사가 지난다고 하였다. 락화역에 서서 주변의 민가와 멀리 푸른 산을 내다보면서 격동된 심정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따금 역을 지나는 렬차의 굉음에 따라 사색은 아득한 옛날로 달렸다.     1926년 1차 남창공격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준섭 렬사는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부대의 후위에 서서 간고한 엄호작전을 수행하였다. 다행히 북벌군작전부에서 감강에 미리 다리를 놓았기때문에 주력부대는 쉽게 다리를 통해 감강을 건너 철수할수있었다. 치렬한 전투에서 김준섭 렬사는 탄약이 떨어질때까지 싸우다가 대오의 뒤를 밟아 홀몸으로 퇴각하였다.   무사히 포위를 뚫고 나온 북벌군은 부대를 정비한 다음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11월초 북벌군은 제2차 남창공격전을 개시하였다. 남창시 교외의 주요 화력거점인 락화역을 점령하기 위해 김준섭은 기관총부대를 거느리고 락화역으로 돌진하였다. 그는 세정의 기관총을 지휘하여 역전의 적군 보루에서 퍼붓는 적의 화력을 진압하면서 공격의 길을 헤쳐놓았다. 11월 19일 오후, 화력망을 조직하기 위해 비발치는 탄우속을 달리던 김준섭 렬사는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전우들이 달려와 그를 구원하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찬 영웅, 김준섭 렬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북벌군 장병들은 우수한 조선인 기관총 교관 김준섭의 두려움 모르는 희생정신에 감화되였다. 그들은 교관의 원쑤를 갚자고 웨치면서 재차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락화역을 탈환하였다. 김준섭 렬사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락화역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때까지 싸웠던것이다. 파죽지세로 봉건군벌들을 무찌르고 수억 중국인민들을 크게 고무해 주었던 북벌전쟁에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김준섭 렬사처럼 두려움 없이 싸우면서 피를 흘렸고 생명을 바쳤다. 그들은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그날이 꼭 오리라 굳게 믿고 싸웠던것이다.  
28    제17회 무창과 남창공격전 댓글:  조회:4508  추천:43  2007-07-30
  호북성 소재지인 무한은 예로부터 무창, 한구, 한양 3진(三镇)에 대한 통칭이였다. 만리 장강이 무창과 한구, 한양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汉水)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과 한수에 다리가 놓여져 무한 3진이 한 도시로 되었다.   만리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 중부의 중요한 수륙 교통과 문화 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였던 것이다.     1926년 9월, 북벌군 주력부대는 한양, 한구를 점령한후 무창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하였다. 오패부가 남겨놓은 3만명 잔여부대는 견고한 성벽에 의재해 완강히 사수하였다.   한달 남짓한 치렬한 공격전을 거쳐 <무창봉기> 기념일인 10월 10일, 영웅적인 엽정 독립퇀이 기타 부대의 협력하에 무창을 공략하였다. 1927년 1월 18일 호 <동아일보>가 보도한데 의하면 모스크바 군관학교를 졸업한 4명의 조선인 군관도 지휘부의 요원으로 무창공격전에 참가하였다.   북벌군은 무한 3진을 전부 점령한후 엽정을 무창 수비사령으로 임명하고 주력부대는 강서 전장으로 나갔다.   북벌군의 다른 목표인 군벌 손전방을 공격하는 전투는 9월부터 강서 경내에서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북벌군 2군과 6군 그리고 1군의 한 개 사단이 강서 전역에서 손전방 부대를 공격하였다. 9월 19일 정잠(程潜)이 거느린 6군은 남창의 로동자, 학생, 성 경비부대의 내응을 받아 신속히 남창을 점령하였다.     국민혁명군 6군에는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检云), 부영장 권준(权■), 부관에 안동만(安东满)을 비롯한 조선인 군사간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초급장교로 북벌군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권준은 의렬단 단원으로서 국공합작의 초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혁명가이다.   권준(1895.5.2--1959.10.27)의 호는 백인(百忍)이고 권중환(权重焕), 강병수(姜炳秀)를 비롯한 많은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상주(尚州)에서 태여난 그는 1917년 광복회(光复会)에 참가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동북에 망명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권준은 본부를 북경에 옮긴 김원봉의 의렬단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는 군자금 조달과 폭탄제조 등 임무를 맡아 조선국내 폭탄 투척 의거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후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광주로 옮겨 짐에 따라 기타 의렬단원들과 함께 중국 광주로 갔다. 1924년 중국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는 국민당 제1차 대표대회가 소집되자 그는 조선혁명가의 신분으로 대회를 방청하기도 하였으며 얼마후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6군 포병영 부영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북벌전쟁이후 권준은 무한에서 동방 피압박 민족 련합회(东方被压迫民族联合会)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1932년 권준은 남경에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党)에 가입하였고 1934년에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는 혁명투쟁을 계속하면서 독립운동 간부들을 양성하였고 항일전쟁시기 중경에서 림시정부 요원으로 있었다.       구강(九江)에 사령부를 정하고있던 손전방은 남창이 공략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 그는 급히 10만 병사를 끌어 모아 남창을 탈환하려 시도하였다. 이때 북벌군은 남창을 점령했지만 각 부대가 정비를 끝내지 못한 상황이고 또한 통일된 지령을 받지 못하고있었다.   북벌군이 남창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기회를 빌어 손전방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다. 적들이 사면팔방으로 공격해 오자 장개석의 직계부대인 1군의 왕백령(王伯龄) 사단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함으로써 북벌군 수비진에 구멍이 생겼다. 비록 북벌군 6군과 2군의 기타 장병들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적의 공격을 막을수 없었다.     2군의 조선혁명자 강파(姜波)는 포병영 련장이였다. 남창의 정가교(郑家桥) 사수를 맡은 그는 기관총을 걸어놓고 적들과 싸웠다. 치렬한 전투에서 전우들이 희생되고 단신으로 남은 그는 퇴각하지 않고 계속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기관총으로 적들에게 무리 죽음을 안기던 그는 적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남창성이 다시 손전방의 손에 넘어간 소식을 접한 북벌군 총사령 장개석은 급히 강서 전장에 달려와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장개석은 여러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정면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남창의 적은 손전방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에 전투력이 강했다. 적은 밤을 타서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부대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혼란속에 빠졌고 제1차 남창공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6년 11월, 호남, 호북 전장에서 승리한 북벌군 4군과 7군 주력부대가 강서에 도착하였다. 북벌군은 제1차 남창공격전의 실패의 교훈을 섭취하고 주밀한 공격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각 부대는 무전기를 배포하여 통일적인 지휘에 복종하게 하였다.   장개석은 리종인의 7군과 정잠의 6군, 주배덕의 3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강서를 공격하게 하였고 자기의 직계부대 1군은 총예비대로 보류하였다.   리종인은 7군과 4군 부분적 부대를 이끌고 강서 북부로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신속히 덕안(德安)을 공략함으로써 구강과 남창사이의 련계를 차단하고 구강을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주배덕의 부대는 남창 남부의 적을 숙청하였고 정잠의 6군도 남창 부근의 적을 숙청하는 한편 리종인 부대의 구강 공격전을 돕기도 하였다.   북벌군은 11월 5일 손전방의 사령부 소재지인 구강을 공격하였다.   강서성 최북단에 위치한 구강은 장강 남쪽 기슭의 항구도시이다. 구강은 강서성의 주요한 하천인 감강(赣江)이 파양호(鄱阳湖)를 통해 장강에 흘러드는 합수목에 위치했다. 그리고 중국의 명산 려산(庐山)을 등졌기 때문에 구강은 더욱 유명해 졌다. 장강 중류의 주요한 항구도시이며 남북 철도 대동맥인 경구선(京九线) 중부의 중요한 도시인 구강시는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리종인 부대와 정잠의 6군 부분적 부대가 구강 공격전에 참여하였다. 6군의 조선족 혁명가 리검운(李检云)은 포병 련장으로 출전하였다가 구강 포대에서 손전방군을 격파함으로써 영장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북벌군은 손쉽게 구강을 점령하고 예봉을 남창으로 돌렸다.     11월 6일, 북벌군은 북, 남, 서 삼면으로 남창을 포위하고 제2차 남창공격전을 시작하였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8일 남창이 함락되였고 3만여명 적들이 포로되였다. 남창이 공략되자 장개석은 포로들을 전부 자기의 직계부대에 편입시키고 남창에 북벌군 대본영(大本营)을 설치하였다. 남창전투에서 군벌 손전방의 주력이 전부 소멸되였고 손전방은 남경으로 도주해 버렸다.   제2차 남창공격전에서 자랑찬 우리민족의 영웅적 투사인 김준섭이 희생되였다. 북벌전쟁의 선봉대로 엽정부대의 정사교, 하승교 전투를 엄호하였고 남창 공격전에서 앞장서서 달리던 김준섭은 남창 교외의 락화(乐化)역 전투에서 희생되였던 것이다.    김준섭(金俊燮 ?--1926)은 일명 강화일이라고도 한다.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明川郡 梧桐里)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 쏘련 군관학교 기관총 전문학과를 졸업하였고 광동에 와서 중국 대혁명에 뛰여 들었다. 1926년 2월 쏘련으로부터 중국 광동성에 온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전문적인 군사지식으로서 국민혁명군을 위해 복무하였다.   김준섭은 광동성 혜주(惠州)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6군 55단의 기관총련 소좌교관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혜주에 기관총 훈련반을 꾸렸는데 김준섭은 훈련반의 교관으로 초빙되였다. 당시 6군에는 김준섭과 같이 전문 기관총 기술을 배운 인재가 없었던 것이다. 훈련반 학원들은 6군 각 부대의 련장, 패장급 장교들이였다. 중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 김준섭은 한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수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인내력을 가지고 강의했으며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의 뜻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밤이면 부지런히 고장난 기관총을 수리해 주었다. 그리하여 김준섭은 부대 장병들과 훈련반 학원들의 애대를 받았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김준섭은 6군을 따라 호남, 호북 전장으로 이동하였다. 4군, 7군 주력부대가 공격을 도맡았고 6군, 3군은 주력부대를 협조하는 한편 강서의 손전방 부대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9월 북벌군이 정사교, 하승교에서 치렬한 접전을 치를 때 김준섭은 기관총 부대를 거느리고 엽정 선견부대의 공격을 협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후 김준섭은 6군을 따라 강서 전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는 남창 공격전, 남창 방위전에 참가하여 영용히 싸웠고 11월 제2차 남창공격전시 락화역 전투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27    제16회 하승교 전적지 답사 댓글:  조회:4508  추천:45  2007-07-30
   조선인투사들이 많이 참가한 엽정독립퇀의 유력한 공격으로 정사교(汀泗桥) 천험이 돌파되였다. 북벌군은 여세를 몰아 정사교 부근의 함녕(咸宁)성을 공략하고 하승교로 진격하였다. 이때 정사교 천험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한 오패부(吴佩孚)는 급급히 지원부대를 거느리고 하승교(贺胜桥)에 도착하였다.   월한(粤汉)철도의 다른 한 천험인 하승교는 황당호(黄塘湖)와 량자호(梁子湖) 사이의 좁은 지역이다. 때는 우기여서 호수물이 범람하여 두 호수사이의 륙지면적이 더욱 좁아졌다. 오패부는 이곳에 정예부대 2만여명에 대포 60여 문, 중형 기관총 백여정을 배치하고 세 겹의 수비진을 쳐 놓았다. 정사교에서 북벌군의 우회공격으로 받아 실패한 교훈을 섭취한 오패부는 10여리에 달하는 수비벽을 만들었고 언덕마다 요새를 만들어 서로 화력보완이 되게 하였다.     1926년 7월 29일부터 북벌군 주력부대인 4군과 7군은 엽정독립퇀을 선봉으로 정면공격을 개시하였다. 장기간 부패한 봉건군벌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당지 농민들은 앞다투어 북벌군을 도와 나섰다. 그들은 북벌군 장병들을 위문했을뿐만 아니라 길안내를 자진해 나섰다. 치렬한 공방전이 하승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였다.      2004년 2월 19일, 무한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 하면서 답사팀은 북벌전쟁의 저명한 옛 전적지였던 하승교로 향하였다. 무한시 남부로 40-50킬로메터 달리면 강하(江夏)구에 이르게 된다. 무한시에 속하는 강하구는 중국고전소설 삼국지(三国志)에도 많이 나오는 지명이다. 그만큼 이곳은 유서 깊은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차는 고속도로를 따라 남행하다가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굽어지니 강하구에 도착하였다. 강하구 당사판공실의 가희수(柯希树) 로인과 련락을 가진다음 그분을 찾아 구정부로 갔다. 구정부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초라했다. 뒷 울안에 당사판공실이 있었는데 작은 2층 줄집이였다. 2층의 한쪽 구석에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은 마치 어느 농촌 소학교 청사와 같았다. 일층에 칸칸이 현판이 붙어있었고 2층도 그러했다. 헐망한 널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사판공실 주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때 한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던 로인 한분이 자기가 가희수라고 하면서 인사하였다. 70세에 가까운 분이였지만 몸은 건강해 보였고 퍽 인자해 보이는 로인이였다.    가희수 로인은 원 강하구 당사판공실 주임으로 사업했었는데 지금은 퇴직해 집에서 만년을 보낸다고 했다. 우리가 북벌전쟁에 관련한 전적지들을 답사하러 왔다고 하자 그분은 쾌히 승낙하면서 안내를 나서겠다고 하였다. 강하에서 차를 타고 평탄한 평원지대를 지나 하승교진에 이르렀다. 하승교진은 함녕시(咸宁市) 최북단으로서 무한시 강하구와 린접해 있었다. 2만여 인구가 사는 작은 진이였다.   하승교 기차역에서 200-300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니 검은 철교가 보였다. 가희수 로인은 이곳이 바로 옛 하승교 전적지라고 알려주었다. 당시만 하여도 철교 밑으로 흐르는 물이 자못 깊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겨우 개울물 정도였다. 낮은 단층 민가들과 가끔씩 황둥개를 앞세우고 마을어귀를 다니는 평온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이곳이 수만 대군이 치렬한 접전을 치렀던 하승교 전적지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개울을 건너 철길밑 돌계단을 따라 7, 8메터 되는 철교에 올라서니 시야가 탁 트였다. 량켠으로 멀리 산언덕이 보였고 철길을 따라 아득히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군사지형에 대한 연구는 없지만 철교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언덕까지 수만명 군대를 포진해 수비진을 친다면 참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수있을 것 같았다. 이따금 렬차가 굉음을 울리며 이곳을 지났다. 중국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 대동맥인 경광선(京广线)이 이곳을 통하고있었던 것이다.     당시 오패부는 렬차에 사령부를 정하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가담한 엽정부대는 선봉을 맡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병들은 두려움 모르고 적의 진지로 돌진하였다. 엽정부대는 도림포(桃林铺)와 인두산(印斗山)진지를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을 냈고 2진과 3진에 있던 적들은 공격부대를 삼면으로 포위해 왔다. 이때 엽정부대는 경계를 맡은 철갑차대 기관총련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전투에 투입되였다. 다른 후원을 찾기 힘든 상황이였다.   부대는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졌다. 이때 엽정은 단연히 계속 공격할 결심을 내리고 기관총련과 기타 부대를 집중해 인두산 진지를 공격하였다. 빗발치는 탄우를 무릅쓰고 전사들은 두려움 모르고 돌진했다. 어떤 전사들은 총에 맞은 줄도 모르고 전진하다 쓰러졌다. 엽정과 독립퇀의 참모장 주사제(周士弟)는 일부 적들이 기발을 메고 산밑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적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판단한 그들은 공격나팔을 불게 하였다. 독립퇀 전사들은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총칼을 꼬나들고 적진에 뛰여들어 백병전을 벌였다. 질겁한 놈들은 진지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오패부는 퇴각하는 부대를 막기 위해 “칼잡이” 부대를 내세웠다. 웃통을 벗고 시퍼런 칼을 든 “칼잡이” 부대가 퇴각하는 장병들의 목을 사정없이 쳤다. 하지만 퇴각부대를 막을수 없었다. 더욱이 맹호처럼 돌진해오는 북벌군을 막을 수 없었다. 근 천명에 달하는 적이 하승교 철교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하승교를 탈취하고 철길을 따라 공격해왔다. 당황해난 오패부는 황급히 기차를 타고 무한으로 도주하였다.         하승교 철교에 서 있노라니 어느덧 치렬한 전장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은곳으로부터 포성이 울려오고 함살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치렬한 하승교 전투에서 엽정부대만 하여도 3백여명의 희생을 내였다.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조선청년들이 포함되여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이국타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철교밑 수수한 들꽃과 개울물을 굽어보노라니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중국근대력사에서 중요한 한페지를 차지하는 북벌전쟁, 그것도 가장 치렬했던 하승교 전투에서 우리의 자랑찬 조선 열혈청년들이 싸웠다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다소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가희수 로인의 안내를 받으면 찾아 답사팀은 하승교 북벌렬사릉원(北伐烈士陵园)을 찾아갔다. 하승교 전적지로부터 도보로 십여분 가서 촘촘히 들어선 민가 사이로 뻗은 좁은 골목길로 걸어가니 한메터 남짓한 높이의 돌담과 철문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북벌렬사릉원이였다.   릉원 입구에 <하승교북벌진망렬사릉원(贺胜桥北伐阵亡烈士陵园)> 소개가 흰 대리석에 검은 글로 새겨져 있었다. 글은 하승교전투를 간단히 소개하고나서 릉원을 만들게 된 경위를 밝혀놓았다. 하승교 전투가 있은후 국민혁명군과 현지 농민들은 희생된 렬사들을 이곳에 매장해 놓았던 것이다. 1929년 10월, 국민정부는 이곳에 묘지와 정자를 만들고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그뒤 1982년과 1996년, 2003년 세차례 거쳐 무한시정부에서 릉원을 보수하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1992년에 릉원을 호북성 성급 문화재로 확정했다고 새겨 놓았다.   릉원에 들어서면 커다란 무덤이 보인다. 거기에는 <국민혁명군 제4군 북벌 진망렬사지묘(国民革命军第四军北伐阵亡烈士之墓)>라고 씌여있었다. 많은 희생자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채 이곳에 함께 매장되였던 것이다. 묘지 뒤편으로 6각형 기념 정자가 있었는데 돌로 축조되여있었다. 그뒤에 6메터 남짓한 높이의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국민혁명군 제4군 북벌진망렬사 기념비>라고 쓴 당시 국민정부 주석이며 립법원 원장이였던 호한민(胡汉民)의 제자가 새겨져있었다.   7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묘지와 정자, 기념비는 매우 낡아있었다. 또한 관리일군이 없었기 때문에 릉원은 매우 헐망하고 황페하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구석구석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부근 농민들은 릉원 한쪽켠에 야채를 심기도 하였다.   가렬처절한 하승교전역의 휘황한 승리와 오늘 황페해진 북벌렬사 릉원을 대조하노라니 마음은 아프기 그지없었다. 160여명 조선혁명자들이 엽정독립퇀에 있었기 때문에 하승교 전투에서도 많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릉원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하나도 밝혀져 있지 않기에 때문에 아무것도 알수없었다. 북벌전쟁에 관한 문화재 보호와 력사연구가 이정도이니 우리가 중국력사의 대하속에 한줄기 강풍으로 싸워왔던 조선혁명자들의 자취를 찾기 힘들지 않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사교, 하승교 전투승리에 이어 북벌군은 신속히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1926년 9월 5일 북벌군은 무창(武昌)성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구(汉口)의 수비군이 봉기함에 따라 한구와 한양(汉阳)은 쉽게 함락했다. 제4군은 그뒤 한달 남짓한 동안 무창을 공격하기 위해 힘썼다.   오패부의 주력을 섬멸한후 북벌군 주력은 강서 전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오패부의 패망을 관망하고만 있던 손전방도 이른바 “중립”의 허울을 벗어던졌다. 오패부 다음으로 자기가 북벌군의 공격목표로 될것이라고 판정한 손정방은 절강, 복건, 강소, 안휘, 강서의 군대를 끌어 모아 북벌군을 막으려 시도하였다.   9월 6일 북벌군은 무한공격과 함께 2군, 3군, 6군을 강서에 진입시켜 손전방을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선후로 감주(赣州), 평향(萍乡), 의춘(宜春) 등지를 공략하였다. 무한을 공격하는 4군 엽정부대에 리용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기타 부대에도 조선인 장병들이 많았다. 제2군에는 포병련장 강파(姜波)와 기관총대 련장 리동화(李东华)가 있었고 제6군에는 기관총 교관 김준섭외에도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剑云,李检云), 부영장 권준(权■), 부관 안동만(安东晚)이 있었다. 이들은 남창공격전, 무창공격전, 남경, 구강, 선창 공격전에서 모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더욱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이들과 함께 피흘리며 싸웠다.  
26    제15회 북벌에 참가한 리용 댓글:  조회:4138  추천:61  2007-07-18
   1925년 광주국민정부가 수립된후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북양군벌 통치를 타도하며 중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수억 중국인민의 공동한 념원으로 되었다. 한편 국공합작후 두차례 동정과 군벌반란을 진압함으로써 혁명기반이 더욱 굳어졌고 북벌할 조건이 성숙되여갔다.   국민당은 손중산의 서거로 좌파, 우파로 갈려 벌써 권력쟁탈의 기미를 보이고있었지만 손중산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을 할 것을 요구하는 의지가 우세를 차지하였다. 국민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고있던 공산당은 1926년 4월 중앙특별집행위원회 림시회의를 소집하고 신속히 북벌을 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민정부의 쏘련고문이였던 보로딘(鲍罗廷)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국민당내 진보인사들을 단합하여 광주국민정부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드디어 광주국민정부는 1926년 6월 5일, 북벌출사표를 내고 전국동원령을 내렸고 7월에는 <북벌선언> 발표와 더불어 각 혁명군은 선후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중국 중부지역인 호남, 호북, 하남, 하북에는 오패부(吴佩孚)가 20만 군대를 거느리고있었고 동북과 경진(京津)지역에 웅거한 장작림(张作霖)은 35만 부대를 가지고있었으며 장강 하류의 강소, 절강, 안휘, 북건, 강서를 비롯한 동남부지역을 제패하고있던 손전방(孙传芳)도 20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국민혁명군 10만 정규군이 세갈래로 나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리제심(李济深)의 4군, 리종인(李宗仁)의 7군, 당생지(唐生智)의 8군으로 구성된 제1로군은 중부지역의 오패부를 상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담연개의 2군, 주배덕(朱培德)의 3군, 정잠(程潜)의 6군으로 편성된 제2로군은 강서의 손전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직계부대인 하응흠(何应钦)의 1군을 동남부에 배치하였다. 한편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풍옥상(冯玉祥)이 서북군을 거느리고 장작림을 공격함으로써 북벌군을 유력하게 도왔다. 북벌초기 도합 8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북벌군에 참가하여 싸웠다. 그 대표적 인물은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산두포병련의 련장으로 있던 리용과 광주에 있던 박영이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재학생들은 중국인 재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생군에 편입되였다. 10월에 졸업식을 가진 4기생들은 곧 사관으로 임명받아 광주시 수비와 일선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의렬단의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교관으로, 박효삼(朴孝三)과 강평국(姜平国)은 입오생부 교관으로, 리기환(李箕焕)은 관리부 요원으로 학교에 남아있었다. 그들은 후속 입교생들속에서 더욱 많은 의렬단 단원들을 모집할 의도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200여명 조선청년들은 제4군 장발규(张发奎)부대와 엽정(叶挺) 독립퇀에 가담하였고 기타 2군, 3군, 6군을 비롯한 혁명군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중국 동북과 쏘련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고 훌륭한 군사지식을 습득한 조선혁명자들도 이시기 북벌전에 참가하였다.   씨베리아 고려의용군 사령관을 력임했던 리용(李镛)은 국민혁명군 동로군 총지휘부의 포병대 교관직을 맡고 참전하였고 동북의 조선독립군부대 지휘관이었던 김홍일(金弘壹)도 동로군 총지휘부의 참모가 되었다. 1927년 1월 18일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모스크바 사관학교 출신인 쏘련군 조선인 장교 15명도 홍의표(洪义杓)의 인솔하에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였으며 그중 네명은 무창(武昌) 공략전에서 지휘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리용(1888.4.7--1954.8.18)은 <헤그밀사>의 한사람이였고 유명한 애국자였던 리준(李准)의 장남이다. 명문가족에서 태여난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룡정으로 온 후 동성 장흥동에서 살았다. 1907년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델란드 헤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의 고종황제는 헤그대회에 밀사를 파견하려 했다. 그리하여 리상설과 리준, 리위종은 헤그로 가서 <을사조약>은 일본의 무력으로 강제 체결된것임을 설명하고 기타 제국주의 렬강의 동조를 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헤그대회는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리유로 이들의 대회참석과 발언마저 거부하였다. 밀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데다 망국을 눈앞에 둔 리준은 다른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연히 몸에 불을 부치고 분신자결하였다. 아버지 리준이 헤그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리용은, “너의 몸은 반드시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 독립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여러파벌로 나뉘여 언쟁에만 여념없는 독립군에 실망한 그는 중국 관내에 들어가 항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그는 상해 림시정부에 몸을 담고있다가 공산주의자 리동휘의 주선으로 1918년 5월 다시 중국 동북에 왔다가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경신년토벌 때 그는 부대를 따라 로씨야로 후퇴하여 쏘련홍군에 참가하였다. 쏘련에서 그는 조선혁명가들을 이끌고 쏘련홍군의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웠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26년 중국혁명이 고조되자 쏘련 군사학교 포병과에서 전공하던 리용은 쏘련홍군 고문단 일원으로 광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뛰여난 군사지휘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후 산두시(汕头市) 혁명군 포병영 영장을 맡게 된다. 이때 리용은 로씨야에 있는 전우 박영에게 편지를 보내 광주에 와서 혁명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편지를 받은 박영은 동생과 부인을 데리고 광주에 와서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였다. 이들은 모두 용약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장개석을 총사령으로하고 리제심을 총참모장으로, 등연달(邓演达)을 총정치부 주임으로, 쏘련인 까룬(加伦)을 군사고문으로 한 국민혁명군은 병력을 집중해 각 군벌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전술을 짰다. 우선 력량을 집중해 오패부를 타격하고 풍옥산 부대와 장작림의 싸움을 관망하고만 있는 손전방을 잠시 놓아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1로군이 북벌의 주력으로 되었고 호남, 호북 전선이 주요전장으로 되었다.   1926년 7월 상순, 싸움에 능한 지휘원들인 장발규, 엽정, 채정개(蔡廷铠), 리종인의 지휘하에 여러 북벌군 부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7월 10일부터 예릉(醴陵), 주주(株洲), 상담(湘潭)을 련이어 격파하고 호남성의 중심도시인 장사(长沙)를 공략하였다. 8월에는 평강(平江), 악양(岳阳) 등지를 점령하고 호북경내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호북경내에서 벌어지자 크게 놀란 오패부는 본거지인 무한을 사수하기 위해 주력군을 무한 남부에 포진하였다. 정사교(汀泗桥)와 하승교(贺胜桥)는 무한으로 통하는 중요한 문호였다.     제1로군은 서로군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부대에는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많았기에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이 일찍부터 부근에서 로농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기 때문에 북벌군은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북벌군 선견대로 선정된 엽정부대에는 160명으로 된 조선인 련대(连队)도 있었다. 조선인 사관들은 뛰어난 통솔력과 정치공작 능력으로 중국 군정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벌군은 4군 두 개 사단과 엽정독립단을 정사교 정면공격에 내세우고 7군과 8군의 부분적 부대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무한에서 광동으로 통하는 월한철도(粤汉铁路)가 지나는 정사교와 하승교를 사수하기 위해 오패부는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렬차에 사령부를 정하고 “칼잡이”부대를 조직해 퇴각하는 자들의 목을 치게 하였다.   8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였다. 북벌군 수만명과 2만 수비군이 정사교에서 접전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진지는 빼앗기고 다시 빼앗으면서 거듭되는 반복을 거쳤고 시체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팽팽한 대치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철군(铁军)>으로 소문난 엽정부대는 우회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6군의 기관총부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기관총련의 교관을 맡은 조선인 군관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의 기세를 제압했다. 기관총부대의 준확한 명중률과 집중사격으로 적 진지의 적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였으며 천여명 적을 격살하고 천 4백여명을 포로하였다.   29일에는 당지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북벌군은 드디어 정사교 천험을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무한의 마지막 문호인 하승교로 진격하였다. 전투에서 뛰여난 지휘력과 전투력을 과시한 김준섭은 군공을 세워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25    제14회 혁명부부 양림과 리추악 댓글:  조회:4297  추천:39  2007-07-18
  진리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중국에 모여온 조선혁명자들은 방황하였고 또 언쟁과 암투를 계속하고있었다. 독립과 자유를 찾는다는 공동의 리상을 안고있었지만 서로 다른 리념으로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력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수있다는 신념을 가진 양림은 드팀없이 근대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 10월 하순,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청산리대첩을 이룩한 후 독립군 주력은 우세한 적의 예봉을 피해 흑룡강쪽으로 철수하였다. 독립군을 엄호할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부분적인 청년들과 함께 상해에 왔다. 당시 상해에는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모여있었고 림시정부도 있었다. 양림은 이시기 <북로 아군 실전기(北路我军实战记)>를 저술함으로써 청산리, 봉오동 전투경과를 총화하고 글을 <독립신문>에 련재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애써 덮어감추려 했던 청산리전투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청산리대첩은 조선인민과 피압박인민의 항일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21년 4월, 양림은 운남에 군사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곤명으로 떠났다. 그는 광주, 향항, 윁남을 거쳐 도보로 천여리 길을 걸어 운남성 곤명에 도착했다. 운남강무당(云南讲武堂)은 중국의 저명한 혁명가 채악(蔡锷) 장군이 설립한 신식 륙군군관학교였다. 1909년에 설립 되여 1928년까지 도합 19기를 거쳐 4천여명 우수한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다. 비록 조선인이였지만 입학성적이 너무나도 뛰여났기 때문에 학교측에서는 그를 화교신분으로 입학시켜 주고 조선인 신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학교에는 일본인 교관이 있었고 그때만 하여도 중국은 공개적으로 일본과 맞써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제16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침식을 잊어가며 군사리론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지휘 기능을 습득하였다.   곤명시 취호공원(翠湖公园) 부근에 위치한 운남강무학당 유적지는 지금도 주건물이 남아있다. 성 농전관(农展馆)과 성 도서관 부근에 강무학당 유적지로 중국 전통적인 주마전각루식(走马转角楼式) 정방형의 2층 건물이 남아있다. 동서남북 네 개 부분으로 나뉘여진 건물의 길이는 120메터이고 너비가 10메터였다. 남루와 북루는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남부 가운데 두드러진 부분이 있는데 이곳은 학생들을 검열하는 열조루(阅操楼)였다. 그리고 동루는 사무를 보는 곳이고 서루는 교실로 사용되였다.   운남 강무학당의 사생들은 신해혁명과 호국(护国)운동을 비롯해 손중산의 혁명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일부 우수한 졸업생들은 중국혁명에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학교 3기 병(丙)반에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된 주덕이 있었고 15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인 엽검영(叶剑英)이 있었으며 17기에는 동북항일련군 지도자 주보중(周保中)이 있었다.   17기인 주보중이 회억한데 의하면 양림은 학당의 가장 우수한 학원이였다. 양림은 매일 아침 무거운 벽돌을 지고 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력을 단련했던 것이다. 양림과 함께 공부한 양병령(杨炳岭)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하루는 일본인 교관이 학원들에게 총검술 시범을 보여주었다. 기본 강의를 마친 교관은 누구든지 자기와 겨루어 볼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다. 심지어 5분이라도 견지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다.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있던 양림은 거들먹 거리는 일본인 교관을 보고 더는 참을수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응전해 나섰다. 학원과 교관의 치렬한 겨룸이였다. 기타 학원들은 손에 땀을 쥐고 양림을 걱정하였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지만 겨룸은 겨속되였고 정신을 가다듬은 양림은 공격을 시작하였다. 힘차게 찔러 오는 창 끝에 일본인 교관은 더럭 겁이 질렸다. 학원들 앞에서 양림에게 패한다면 교관으로서의 얼굴이 없게 된다. 일본인 교관은 인차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겨룸을 끝냈다. “참, 장하오, 대단하구만.”  양림이 오만한 일본인 교관의 기염을 꺾어놓자 학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1924년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 강무당을 졸업하고 학교의 교관으로 남아달라는 학교측의 청구를 마다하고 단연히 광주로 떠났다. 이시기 손중산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자기의 군사지식을 혁명에 이바지할 결의를 안고 당시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주로 갔던 것이다.   광주에서 그는 <민족해방대동맹>에 참가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중국공산당을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신앙하게 되었다. 이시기 양림은 사랑하는 련인 리추악(李秋岳)과 만나게 되었다. 혁명과 사랑에 불타있던 리추악은 애인인 양림을 찾아 천리, 만리 광주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걸출한 녀혁명가 리추악(1901--1936)의 원명은 김금주(金锦珠)이다. 1901년 그는 조선 평안남도(平安南道) 중락군(中乐郡)의 한 상인가정에서 태여났다. 상인이였지만 애국사상에 지닌 그의 아버지는 일본침략자들을 한없이 미워하면서 애국지사들의 독립행동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리추악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선진적인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맑스, 레닌주의 서적을 탐구하였다. 3.1운동시기 그는 평양 군중집회에 참가했고 시위대오의 선두에서 선동공작을 하였다. 독립활동을 전개하면서 그는 당시 평양 학생운동의 기수(旗手)였던 양림을 알게 되었고 점차 서로 사랑을 맺게 되었다.      3.1운동후 일제의 피비린 탄압을 피해 양림은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리추악은 계속 평양에 남아서 4년간 반일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감지한 경찰측은 리추악에 대한 체포령을 냈다. 그리하여 1924년 가을, 리추악은 동지들의 엄호를 받으며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그는 조직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오게 되었고 오래동안 헤여졌던 양림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양림은 주은래의 추천을 받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사랑하는 두 련인은 드디어 행복한 혁명가정을 만들었다. 양림은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결부시켜 중국혁명의 승리로 조선혁명을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혁명 대오속에서 장기간 분투할 준비를 하였다. 리추악은 이에 적극 동조하여 부지런히 한어를 배웠고 새로운 중국 이름 리추악을 가지게 되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양림은 학생들과 함께 늘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인식하게 되었고 주동적으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권립교수)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집훈처 교관으로 되었습니다. 그때 손문주의학회와 청년련합회와의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그는 청년렵합회의 립장에 섰습니다. 1925년 1월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대 제4대 대장으로 임명되였고 공산당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청년군인련합회(中国青年军人联合会)에 참가하였다. 그해 2월 그는 학생대(学生队)를 거느리고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1차 동정에 참가하였고 6월에는 다시 광주에 돌아와 양희민과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시기 배우고 련마한 군사지식을 실전으로 충분히 발휘하여 지혜롭고 용감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시기 그는 황포군관학교 기술교관으로 승직하였으며 중국공산당과 함께 교내 우파와 투쟁하여 공산당의 신임과 관심을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1925년 6월 양림은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얼마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리추악도 혁명군 선전대로 1차 동정에 참가하였고 이해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추악은 중국공산당에 가장 일찍 가입한 조선녀성이였다. 당의 배려하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고 학습하였다. 1925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엽정독립퇀이 광주시 조경에서 설립될때 그는 주은래의 배치에 따라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사업하였다. 이시기 그는 이름을 양녕(杨宁)으로 고쳤다. 그는 제3영 영장 겸 공산당 소조 조장을 겸임하였다. 제3영은 3개 련에 5백여명 전사드로 무어졌는데 그중 한개련 150여명이 모두 조선청년들이였다. 국공합작이 이룩된후 혁명정세가 날로 고조되고있을 때 국민당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은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장개석은 이른바 <중산함사건(中山舰事件)>과 <정리당무안(整理党务案)>을 조작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명령을 받고 중산함을 몰고 광주에 들어온 중산함 함장인 리지룡(李之龙)을 체포하고 공산당이 반란을 준비한다고 떠벌렸다. 이 사건을 통해 장개석은 해군을 장악하고 공산당의 권력을 박탈하려 했던것이다. 그뒤 <정리당무안>을 작성하여 다른 당의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할수 없다는 등 조건을 내세워 공산당의 권력을 가일층 박탈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당수였던 진독수(陈独秀)가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거듭 타협하고 양도하였기 때문에 장개석의 음모는 하나하나 성사되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당의 요직에 있던 공산당원들이 사직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국민당의 선전부장으로 있던 모택동, 중앙비서처 서기로 있던 류백승, 조직부장으로 있던 담평산, 농민부장으로 있던 림백거가 모두 사직하였다. 이때 양림은 당의 배치에 따라 계속 황포군관학교에서 주임교관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에게 열심히 군사기능을 가르치는 한편 정확한 혁명사상을 전수하기에 힘썼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드디어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였다. 그는 군대를 풀어 도처에서 공산당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인재를 보호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양림을 쏘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안해 리추악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양림은 로씨야에서 삐스티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에 들어가 군사과학을 배웠다. 기추악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3년간 정치리론을 학습하였다. 두 혁명부부는 로씨야에서 정치, 군사가 모두 뛰여난 우수한 혁명인재로 되기 위해 부지런히 학습하였다.    
24    제13회 국민혁명군의 동정과 양림 댓글:  조회:4079  추천:49  2007-07-16
  국공합작이 이루어짐에 따라 중국혁명의 고조가 나타났지만 이시기 중국은 거듭되는 혼란을 겪고있었다. 도처에 크고작은 군벌들이 나타나 자기의 지반을 확대하고 세력을 확충하기에 열벌하였다.   광동의 혁명정세에 당황해난 제국주의와 지주, 매판 자산계급은 봉건 군벌들을 매수하여 광동정부를 공격하게 하였고 비법 상인단체를 부축여 무장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광동의 불안정 국면을 수습하고 더욱 큰 혁명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손중산과 국민당은 혁명군 확건에 진력하였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4기까지 도합 4천 9백여명이 졸업했다. 국민당은 이들을 토대로 각지에서 병사들을 모집해 국민당 군대를 확건하기 시작했는데 1924년 10월까지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한 교도단(教导团)이 창건되였다. 교도단은 불법상인들의 총기 9천여자루를 몰수해 무장하였고 쏘련으로부터 중무기를 구입하였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광동과 광서의 여러 불법민간 단체와 군벌, 반란군을 진압하는 작전에서 황포군관학교 사생들은 지대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의 군대도 부단히 확건되여 십여만 정규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광동을 중심으로 국민혁명이 고조되고있을 때 중국 북방에서는 두 개 군벌간의 큰 혼전이 진행되였다. 장작림(张作霖)의 봉계(奉系)군벌과 조곤(曹锟)의 직계(直系)군벌이 북방통제권을 위해 치렬한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두 군벌이 혼전을 거듭하고있을 때 서북에 웅거해있던 풍옥상(冯玉祥)이 봉계군벌을 도와줌으로써 직계군벌이 대패하고 조곤이 감금되였다. 1924년 겨울, 직봉대전의 승리를 이룩한 장작림, 풍옥상, 단기서(段祺瑞)는 손중산에게 전보를 보내 함께 국가대사를 의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손중산은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손중산이 북경으로 떠난 틈을 타 진형명(陈炯明)이 7만명에 달하는 군사를 끌어모아 광주로 공격해 왔다. 국민정부는 대원수부 철갑차대와 황포군관학교 두 개 교도단, 허숭지(许崇智)의 월군(粤军)을 주력으로 진형명을 진압하는 제1차 동정을 시작하였다.   1925년 3월, 황포군관학교 학생대대를 선봉으로 한 동정군 주력은 혜동(惠东)으로 진격하였다. 동정군의 선봉을 맡은 두 개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에는 많은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이 포함 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혁명가들도 있었다.  (권립교수) 광동혁명정부가 제1차 동정을 할때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 제4대대 대장신분으로 2백여명 학원을 거느리고 동정에 참가하였습니다. 해풍과 륙풍, 면호일대에서 진형명의 부대와 접전해 크나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광동혁명정부의 동정에 참가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림(杨林)과 리빈(李彬)을 꼽을수 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학생대대의 교관이였던 양림은 학원들을 이끌고 동정군의 선봉으로 나섰으며 황포군교 3기 졸업생이며 4기 학생대대 구대장이였던 리빈도 교도단에 합류해 진형명 반란군과 싸웠다. 그리고 양림의 련인이였던 리추악(李秋岳)도 이시기 광주에서 정치부 동정선전총대에서 사업하면서 선동공작에 적극 참가하였다.   동정군은 선후로 해풍(海丰), 게양(揭阳), 조안(潮安)을 공략하였지만 좌익을 맡은 양희민(杨希闵)의 운남 군과 류진환(刘震寰)의 광서 군이 소극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동정군 주력의 배후가 적에게 로출되였다.    동정군의 위급한 상황을 만구하기 위해 주은래와 쏘련 군사고문은 장개석을 도와 주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교도단의 천여명 전사들은 만여명에 적들을 항격하였다. 교도단이 적의 주력과 치렬한 접전을 진행하고있을 때 동정군의 주력이 적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동정군은 면호(棉湖) 부근에서 진형명의 주력군을 소멸함으로써 일차 동정(东征)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해 냈다.   1925년 3월 12일 북상한 손중산이 북경에서 병으로 서거한 후 국민당의 실권은 왕정위와 장개석의 손에 장악되였다. 광주 국민정부가 혼잡을 거듭하고있을 때 제국주의와 광서군벌의 지원을 받은 진형명은 다시 군대를 끌어모아 광주로 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국민정부는 1925년 9월 28일 제2차 동정을 시작하였다. 장개석이 동정군 총지휘를 맡았고 주은래가 동정군 총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이때 국민혁명군은 재편성을 거쳐 전투력이 강하고 비교적 정규화된 5개 군으로 조직되였다. 동정군은 광주를 위협하는 양희민운남군과 류진환의 광서군을 진압하여 후환을 제거한 후 다시 진형명이 둥지를 틀고있는 동강(东江)지역의 문호인 혜주(惠州)를 공격하였다. 쏘련에서 지원한 비행기와 야전포까지 동원된 전투에서 혁명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혜주를 성공적으로 공략하였다.      동정군의 공산당원들의 적극적인 정치선전과 성항(省港)파업 로동자와 농민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혁명군 각 부대는 파죽지세로 진형명의 잔여부대를 광동에서 몰아냈다.   양희민과 류진환의 반란을 진압하고 두 차례 동정을 진행하는 전투에서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되였다. 광주시 장주도 평강(平冈)에는 <동정진망렬사묘(东征阵亡烈士墓)>가 있다. 황포군관학교로 가는 장주도 나루터에 위치한 렬사묘 정문은 거대한 기념아치로 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아치형 문을 지나 들어가니 가파른 언덕에 여러 가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푸른 잔디밭과 해묵은 용(榕)나무가 우거진 정원에는 학생군묘(群墓), 소장묘(少将墓), 진렬관(陈列馆)이 있었다. 답사팀은 진렬관에서 조선혁명가들의 이름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유감스럽게 희생자들의 적관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양희민, 류진환 진압에서 희생된 최영(崔瑛)렬사와 오준걸(吴俊杰)렬사의 이름을 보아서는 조선민족인 듯 해 보였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3기 인명책에서도 이들 이름을 찾을수 없어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 황포군관학교에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고 이들은 또한 교도단과 함께 공정군의 선봉으로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동정진망렬사묘>에도 분명 조선청년 희생자들의 고혼이 묻혀있을 것이다.   광동에서 혁명하는 가운데서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을 주로하는 혁명군대가 있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혁명군대를 만들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독립단(独立团) 건립에 힘썼다. 이시기 국민당도 군대개편에 열중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4군 제12사 산하에 세 개 대대가 있었다. 그중 34대대를 개편하게 되었는데 공산당은 이 대대를 군부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는 독립단으로 만들었다. 엽정(叶挺)이 단장을 맡았다.   독립단은 대원수부(大元帅府)의 철갑차대 전원과 황포군관학교의 부분적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주도로 하여 광동, 광서, 호남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1924년 손중산의 동의를 거쳐 조직된 대원수부 철갑차대는 주은래의 지도하에 황포군관학교 1기 졸업생인 주사제(周士弟)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였다. 그리하여 이 부대는 줄곧 중국 공산당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아왔다.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적지 않은 공산당원들을 독립단에 보냈다. 이들은 독립단의 영장, 련장, 패장으로 배치되였다.   1925년 11월 광동성 조경(肇庆)에서 약 2천명 병력을 가진 독립단이 조직되였다. 엽정을 비롯해 각급 지휘원은 대부분 공산당원이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주은래의 파견을 받은 조선혁명가 양림이 이 부대의 제3영 영장을 맡았다.   공화국창건후 인민해방군 상장(上将) 계급을 가진 주사제는 <주사제회억록>에서 양림에 대해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양녕(杨宁)은 또한 삐스티(毕士悌)라고 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에서 제3기 학생대 제4대대 대장을 맡고있었다. 1926년 5월 독립단이 광동에서 북벌을 시작할 때 당에서는 그를 다른 곳에 가서 사업하도록 배치하였다.”   주사제가 회억하는 양녕이 바로 조선혁명가 양림이다.   양림(1898--1936)은 1898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김훈(金勋)이였고 사업 수요로 양주평, 양녕, 삐스티, 주동무, 양림 등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3.1운동에 참가한 양림은 아버지가 일제 놈들에게 살해되자 1919년 늦가을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갔다. 그는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新兴武官学校)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웠다.   1920년 5월,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림은 왕청현(汪清县) 서대파(西大坡) 반일무관학교에서 사업하였다.    양림이 중국 동북에서 반일활동에 참가하고 적극적으로 군사지식을 배울 때 일제는 중국 동북에 있는 반일 유격대를 주시하게 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침략자들은 훈춘에서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동북에 출병하였다. 놈들은 마적떼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상인과 경찰국을 습격하게 하고는 이를 구실로 출병했던 것이다. 당시 동북을 차지하고있던 봉계군벌 두목 장작림은 일본과 타협하면서 일본의 출병에 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일본침략자들은 연변지역에 들어와 반일 유격대를 추적하면서 조선족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신년 참변>이다.   동북에서 힘을 키우고있던 조선인 반일 유격대들은 이때 서로 단결하여 일제침략군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김좌진을 비롯한 동북지역 반일유격부대가 길림성 연변지역에 집중되였던 것이다. 양림은 유격대를 따라 화룡현(和龙县) 청산리 백운평(白云坪)에 매복해 있었다. 반일유격대가 이미 준비하고있는 줄을 모르고 이곳저곳 방화하면서 추적해 오던 일본침략자들은 청산리에서 유격대의 매복에 들었다. 양림은 한 개 중대의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반일유격대의 청산리대첩을 이룩하여 전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가 있은 후 일제는 더욱 많은 군대를 끌어모아 토벌해 왔다. 게다가 유격대 내부에서도 여러파벌로 갈라져 언쟁이 계속되였다. 반일 유격대는 드디어 우세한 적들에게 밀려 로씨야 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단순히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조직력을 더욱 강화하고 더욱 우세한 병력을 키워야 했다. 유격투쟁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총화하면서 양림은 중국 관내로 향했다. 그는 더욱 선진적인 군사기능을 배우고 민족해방의 진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23    제12회 조선혁명가 김규광 댓글:  조회:4120  추천:67  2007-07-16
  20세기 20년대말 광주에 모여든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을 리론적으로, 조직적으로 묶어세우고 이들을 성세호대한 중국혁명과 더불어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이끌어간 사람이 바로 유명한 조선혁명가 김규광(金奎光)이다.   당시 북경에서 공부하는 한편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김규광은 1925년경에 광주로 갔다. 그는 광주에서 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고 김원봉, 김산 등과 함께 류월동지회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독립당을 창건하였다. 그는 중국혁명에 동조하는 한편 공산주의 리론을 전파하면서 광주의 조선인 혁명가들을 단합시켰던것이다.    답사팀이 북경시 목서지북리(木樨地北里)에 위치한 김규광의 셋째아들인 두련(杜链)의 집을 찾았을 때는 2003년 10월 19일이였다. 그의 차남 두건(杜键)도 함께 우리를 맞이하였다. 김규광은 중국에서 두군혜(杜君慧)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던 것이다.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한 장자인 두겸(杜钳)은 광동악단(广东乐团)의 지휘(指挥)로 광주에 있었고 미술학원을 졸업한 차남 두건은 미술가였으며 항천(航天)대학을 졸업한 셋째 아들 두련은 중국첨단기술분야에서 사업하고 있다.   김규광의 차남 두건과 셋째 아들 두련이 우리에게 아버지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건) 아버지의 상황은 우리들도 잘 모르고 여러 전문가들에게서 얻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1898년에 출생하여 3.1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중국에 손중산을 비롯한 혁명자들이 있고 로씨야 10월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철학도 많이 공부하셨습니다. 3.1운동때 아버지는 체포되여 옥고를 치르다고 금강산에 가서 승려로 계셨습니다.    운암(云岩) 김성숙(金星淑1898--1969)으로 널리 알려진 혁명가 김규광은 1898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 철산군(铁山郡) 서림면(西林面)강암동(江岩洞)의 한 빈곤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가정이 빈곤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왔고 1910년 철산 독립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학교에서 공부하기를 거부하고 마을 선비들에게서 한학(汉学)을 배웠다. 1916년에 그는 독립군에 참가하려는 목적으로 중국 동북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구금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16년 금강산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 조선의 명산 금강산 한가운데 있는 유명한 유점사(榆■寺)에서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현대철학도 연구하면서 1919년까지 머물러 있었다.    3.1운동때 김규광은 손병희(孙秉熙)와 만해(■海) 한룡운(韩龙云)의 지도를 받으며 반일독립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승복차림으로 3.1운동의 진두에 섰던 김규광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그는 계속 선전활동을 진행했으며 이 시기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혁명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1922년 김규광은 다른 젊은 승려들과 함께 비교적 쉽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북경에서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 등 내용을 포함한 <황야(荒野)>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시기 그는 10살 년하인 김산을 만나 함께 활동하였고 또 북경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였다. <혁명>잡지는 초창기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사람인 리대소는 늘 이 잡지를 열독하고 글을 발표했으며 가끔씩 비판과 충고도 주었다. 잡지의 편집을 맡았던 김산은 <아리랑>에서 김충창이라는 가명으로 잡지와 김규광에 대해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이 잡지는 공산당 동조자, 좌익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한테서 지지를 받았다. 이 잡지는 32페지짜리로, 창간호는 800부를 찍었는데 6개월내에 3천명의 고정 독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잡지는 국내, 만주, 씨베리아, 호놀룰루, 캘리포니아, 유럽에 있는 조선학생들에게 발송되였고, 1926년까지 계속 발간되였다. 김충창은 이 잡지의 주필이었으며, 이 잡지를 위해 수많은 주옥같은 론문을 썼다.‚      이 시기 김규광은 북경 민국대학(民国大学)에서 공부하였다. 2003년 12월 23일 답사팀이 원 민국대학 유적지인 북경 제2실험(实验)소학교를 찾아보았다. 북경시 선무문내(宣武门内) 신문화가(新文化街)에 위치한 옛 극근군왕부(克勤郡王府) 자리였다. 흰 돌담에 붉은 문을 가진 건물은 문앞에 커다란 돌사자 두 개가 있어 더욱 위엄있어 보였다. 붉은 널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있었고 옛 층집이 삼면으로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교실로 리용되고있었다.   극근군왕부는 1917년부터 학교로 사용되였다. 처음에는 민국학원으로 있었고 1923년에 민국대학으로 되었다. 중국의 대문호인 파금(巴金)도 행적을 남겼던 민국대학에서 김규광은 정치과와 경제학 공부를 하는 한편 혁명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는 <혁명>잡지를 꾸리는 한편 창일당(创一党)활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1925년 겨울, 중국혁명이 한껏 고조되고있는 광주로 갔다. 그는 중산대학 법학을 전공하면서 계속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청년들이 가장 많았던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조선학생들은 서로 래왕하면서 자주 련락을 가졌다. 1916년 봄, 김규광은 손두환, 김원봉, 전동식, 장지락 등과 함께 류월한인회를 기초로 조선혁명청년련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을 발행하였다. 김규광과 김산은 이 기관지의 주필과 부주필을 맡았다.   1927년 5월 김규광은 여러 혁명가들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인 광동촉성회를 성립하였는데 회원이 무려 170명에 달했다. 회원 다수가 조선청년련맹과 의렬단 성원들이였다. 김규광은 또한 의렬단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독립당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이시기 김규광은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고있는 두군혜(杜君慧)와 사랑에 빠졌다. 해방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대표대회 대표, 중화전국민주 부녀련합회 대표, 중공중앙 제8기 당대표로 사업했던 중국 녀성운동가이며 교육가였던 두군혜는 1904년 광주의 소자산계급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녀는 1924년 첫기로 중산대학 녀학생으로 되었고 저명한 중국 녀혁명가 진철군(陈铁军)과 한 학급, 한 책상에서 공부하였다.   대학에서 선진문화를 접수하고 혁명사상을 접하게 되었던 그는 혁명경력이 풍부하고 혁명리론으로 무장된 김규광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혁명을 담론하면서 조용한 학교 정원과 아늑한 광주 72렬사공원을 거닐었다. (두건) 외할아버지는 수화보험사의 직원이여서 광주에서 괜찮게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중산대학의 첫기 녀대학생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진철군 렬사는 어머니와 한 책상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중산대학 첫기에는 녀 대학생 7명 뿐이였습니다. 하여 청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선혁명가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의 집에 와서 생무우가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씻어 생걸 그대로 잡수셨습니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생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많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습니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매우 활달한 분이였습니다. 외할머니는 늘 어머니를 두둔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의 학업을 지지한것도 외할머니의 설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뚜르게 네브의 소설 <전야>를 어머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접한 어머니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란 사상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점차 혁명을 지향하게 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조선혁명가 김규광과 중국 진보적 녀성인 두군혜가 사랑을 맺게 되었고 슬하에 선후로 세 아들을 두게 되었다. 녀성 운동가인 두군혜는 온갖 정성을 다해 조선혁명가인 김규광을 도왔으며 조선혁명을 동조하였다.   두군혜는 김산을 동생처럼 관심해 주었고 녀동생 두군서(杜君恕)를 다른 조선혁명가 오성륜에게 소개하였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로어 교관으로 있었던 오성륜은 김규광, 김산 등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내였던 것이다.    
22    제11회 광동에서의 의렬단투쟁 댓글:  조회:4250  추천:54  2007-07-16
  1920년대말,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조선 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자체의 조직체계를 형성하여 활발한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려월한인동지회, 조선혁명청년련맹, 조선독립당을 비롯하여 공개적인 활동과 비밀적인 활동이 전개됨과 동시에 더욱 많은 혁명자들이 광주에 모여왔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이렇게 회억한다. “광동에 온 가장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의 전형적인 인물은 박진(朴镇) 부부와 그의 두 동생이었다....그들은 북방인 답게 모두 풍채가 좋고 몸이 떡 벌어졌다. 그들은 동토지대에서 불어오는 씨베리아 바람처럼 위력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실내에 가득 뿌렸다.”   김산이 회억하고있는 박진(朴镇)이 바로 중국에서 박영(朴英1887--1927)으로 알려진 유명한 조선족 혁명가이다.   박영은 1887년 조선함경북도 경흥군(庆兴郡) 아오지(阿吾地)의 한 농민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원명은 박근성(朴根星)이였고 선후로 박응서(朴应瑞), 박영(朴泳), 박진(朴镇)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면서 로씨야로부터 중국 동북, 광주 등 광활한 지역에 력력한 발자욱을 남기며 혁명했었다.   1906년 고향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사포대(私炮队)”가 조직되자 그는 19살 젊은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반일무장투쟁 대렬에 들어섰다. 1908년 박영은 백여명 전사들과 함께 경흥군의 일본수비대 두 거점을 습격하여 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제는 많은 보병대대를 동원하여 토벌해 왔다.   1910년 조선내에서 활동할수없게 된 박영은 일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사왔다. 세계와 담을 쌓고 시골에만 파묻혀 있을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일본 도꾜에 갔다. 그곳에서 중국 신해혁명 승리의 소식을 접한 그는 다시 중국 화룡에 가서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학교를 꾸리고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박영은 화룡에서 1919년 《3.13》반일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해 6월 최명록(崔明录)을 도와 반일무장단체인 독군부(督军府)를 창설하였다. 박영은 독군부 반일대오의 참모장을 맡았다.  1920년 박영은 반일무장대오를 거느리고 여덟차례 두만강을 건너 조선내 온성, 무산을 비롯한 각지 일본경찰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홍범도(洪范图)가 이끄는 독립군과 함께 봉오동(凤梧洞)전투의 대첩을 이룩하였다. 그해 청산리 전투가 있은후 박영은 독립군 주력부대와 함께 로씨야쪽으로 철수하였다.   로씨야에서 박영은 쏘련홍군에 참가하였고 또 쏘련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쏘련홍군부대와 함께 울라지보스또크를 공략하는 7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고 또 여러차례 부상했다.    1924년 그는 중국 광동성 산두(汕头)의 혁명군포병대 대장을 맡고있던 친구 리영(李瑛)의 편지를 받았다. 리영은 편지에서 중국 광동혁명을 소개해 주면서 속히 중국 대혁명에 참가할 것을 바란다고 했다. 이에 큰 고무를 받은 박영은 1926년 말, 가족과 두 동생을 데리고 광주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리영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서 사업하였고 두 동생은 황포군교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광주에서 박영 형제는 조선민족독립당에 가입하여 김산, 김규광 등과 함께 토요일 밤이면 늘 한곳에 모여 밤새도록 혁명을 론하군 하였다. 김산은 ?씨베리아에서 온 선구자들‚인 이 박씨 형제와 매우 친숙해 졌다.   “당신네 네 사람은 모두 너무 행복해 보이는군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싸워왔는데, 이제는 평화로운 생활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내게는 평화가 단지 고통일 뿐이야. 투쟁은 삶이지. 소극성은 죽음이고, 나는 싸우는 것을 더 좋아해.”    박영은 김산의 물음에 늘 이렇게 대답하군 하였다.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이시기 유명한 의렬단 단원이였던 오성륜도 광주에 와서 김산, 김규광, 김약산 등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이렇게 오성륜을 회억하고있다.    “오성륜은 비밀형의 조용한 사나이였으며 고개적인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전생애를 비밀속에서 살았다. 심지어 그와 함께 여러차례 죽음에 직면하였던 나마저도 그의 개인 경력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는 절대로 말을 믿지 않고 오직 행동만을 믿었다. 또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고 오랫동안 사귄 뒤에야 믿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쉽사리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오성륜은 중간 정도의 키에 잘생긴 편이였으나 미남은 아니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드넓은 이마에 짙은 머리카락을 갖고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건강하였으며 미술과 문학을 좋아하였다. 고향마을에서 학교 선생을 한적도 있는 그는 로씨야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아 의렬단에 가입하였다.”   황포탄 의거로 널리 알려진 오성륜은 의렬단 주요 성원이였고 공산주의자 였으며 줄곧 신비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이다. 그의 진실한 행적에 관련해 서는 아직도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 아쉽다.   상해 황포탄에서 다나까 저격이 실패한후 오성륜은 체포되여 일본 령사관 3층 감방에 갇혔다. 그곳에서 기타 일본인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자물쇠를 마스고 도주하였다. 오성륜은 미국인 친구집에 며칠 숨어있다가 독일을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1925년 그는 공산주의 교양을 받았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1926년 경에 그는 광주에 도착해 황포군관 교관으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나이가 많고 경력도 풍부한 그는 함성(咸声)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리론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광주에서 오성륜은 대부분 김산과 한조가 되어 일하였다. 강인한 성격을 가진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는 빌밀리에 지도하였고 김산은 공개적인 지도사업을 맡아 보았던 것이다.   광주 답사에서 빼놓지 못할 유적지가 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자주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던 혜주회관(惠州会馆)이다. 단순한 책의 기재를 가지고 혜주회관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광주에서 가장 일찍 활동하였던 조선인들이 혜주회관에서 류월한인회를 조직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상해림시정부의 신규식의 부탁을 받고 박태하가 광주에서 조직한 힌인회가 바로 류월한인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기재로서는 혜주회관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광주에서 중앙당사연구실의 여러 전문가들과 이야기하던 끝에 <피압박 민족 련합회>를 촉성하기 위한 중요한 행사가 혜주회관에서 진행되였다는 단서가 나왔다. 광동성 당사연구실의 조직 선생은, 단서가 틀리지 않다면 혜주회관이 바로 지금의 중화전국총공회 기념관 건물이라고 알려 주었다.   답사팀이 광주시 월수남로(越秀南路) 93번지를 찾아왔을 때 귤색 2층 양식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에는 검은 현판에 흰 글로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라고 씌여져 있었다. 글은 력사 그대로 번체자로 되어 있었다. 역시 귤색으로 된 낮은 담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아치형 정문은 철문으로 되여 있었다. 철문에는 중화전국총공회 옛터라고 밝혀있었다. 현재 사용하고있는 공식명칭인 것이다.   1925년 5월 1일 국제로동절을 맞으며 이곳에서 제2차 전국로동대회(全国劳动大会)가 소집되고 대회에서 중화전국총공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중국력사에서 이곳은 중화전국총공회 유적지로 널리 알려졌고 원 건물이 혜주회관이였다는 사실은 도리여 아는 사람이 적었다.   사실 혜주회관은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초기에 축조된 유럽식 2층 건물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은 1959년에 중화전국총공회 유적지로 확정하고 수건을 거친 기념관 건물이다.   1924년 손중산에 의해 개조된 국민당은 중앙당부 사무기구를 이곳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국공합작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곳에 발자욱을 남겼다. 특히 국민당의 좌파인 료중개가 이곳에서 피살됨으로 해서 더욱 유명해 졌다.   손중산이 서거한후 국민당은 분렬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주석은 왕정위였지만 실제 사무는 좌파 수령인 료중개가 맡아 보았고 당내 군권을 장악한 실력자는 장개석이였다.   국민당 우파들은 손중산이 서거하자 공산당과 쏘련에 대한 배척 심리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손중산의 신삼민주의를 계승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료중개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였다. 여러차례의 위협, 공갈을 했지만 료중개를 말리수 없게 되자 우파들은 드디어 암살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중앙집행회의가 중앙당부 소재지인 혜주회관에서 소집되였다. 9시 15분, 회의에 참가하러 혜주회관에 도착한 료중개가 승용차에서 내리자 사람들 틈에 미리 매복해 있던 5,6명 흉수들이 나타나 그에게 총격을 가했다.   혜주회관 돌계단에 쓰러진 료중개를 급급히 병원에 호송했지만 총 네발을 맞은 그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혜주회관 철문을 들어서면 건물 앞에 세워놓은 두 화강암 기념비를 보게 된다. 하나는 로농운동 렬사기념비였고 다른 하나는 료중개 선생 기념비였다.   돌계단을 따라 1층에 들어가니 강당과 사무실이 있었는데 지금 강당은 진렬관으로 사용하고있었다. 조선혁명가들은 바로 이 건물 강당에서 기념행사를 자주 가졌던 것이다.   1925년 7월 9일, 의렬단의 강세우를 비롯한 조선 혁명자들과 중국, 윁남, 인디아 등 여러나라 혁명자들이 광주에서 <피압박민족 련합회>를 창립하였고 피압박민족 련합회 조선인 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때는 상해 《5.30참안》이 빚어진 뒤였기 때문에 일본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중국인민의 비분이 극도에 달한 시기였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반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정의적인 요구가 중국인민의 반제투쟁 요구와 일치되였던 것이다.    조선혁명가들은 극력 중국인민을 포함한 여러 피압박민족과 호흡을 같이 하기에 노력하였다. 1926년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초청된 조선인 혁명가 려운형은 대회에서 “중국국민혁명의 전세계적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그는, 제국주의가 타도될 때 약소민족이 모두 해방될것이며 약소민족은 전력을 다하여 중국의 혁명을 도와야 하고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약소민족도 모두 해방된다고 피력하였다.   중국인민들도 일제식민지하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동정하였으며 조선혁명가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1926년 3월 1일, 려월한인회의 전원 36명이 혜주회관에 모였다. 그들은 박문곤의 사회하에 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황포군관학교와 항공국(航空局), 중산대학 동자군(童子军), 청년군인련합회, 성항파업(省港罢工)위원회, 전국총공회를 비롯한 각계 대표들과 료중개의 미망인 하향응(何香凝), 윁남 동지회 회원 13명, 하여 도합 백여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대회 취지를 확정하고 독립선언을 랑독하였다. 각계 대표들도 용약 연설하였다. 하향응은 전세계 피압박 약소민족은 일치협력하여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한다고 연설했고 대회 참석자들은 조선혁명과 중국혁명, 세계혁명의 성공을 소리높이 웨쳤다.    기념회가 있은 후 5월 2일, 광주화교협회의 주최로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대회가 혜주회관에서 소집되였다. 대회에는 화교단체 대표외에 조선과 인도, 윁남 세 민족대표도 참석하였다. 대회는 “각 식민지 약소민족과 련합하여 반제운동을 준행(遵行)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공합작과 아울러 아시아 각국 피압박 민족들의 반제국주의 련합전선이 초보적으로 형성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약소민족 혁명가들이 중국혁명에 용약 참가하였으며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길에서 공동의 력사 사명을 짊어지고 피어린 항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