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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영원한 기념비》
28일 중국공산당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길료성 당위원회와 정부, 군구는 길림시로부터 돈화를 거쳐 연길로 철수하게 되였다. 따라서 장춘과 길림시 부근 각현의 공산당 조직과 부대도 각기 철수하게 되였다.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한후 동북해방구의 상황은 극히 곤난하였다. 해방구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을뿐만 아니라 각기 분할되여있었다. 막대한 희생을 낸 민주련군은 극도로 피로했고 전투력도 크게 약화되였다. 게다가 아군이 편성한 지방부대에는 총을 가지고 국민당쪽으로 전향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현상까지 나타났고 잠복했던 특무들의 사촉하에 각지의 토비들도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당중앙에서는 “큰길을 내주고 량옆을 차지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내놓았다.
할빈에 도착한 동북국 기관과 민주련군 총부는 연길을 중심으로하는 동만과 치치할을 중심으로하는 서만을 통제하고 통화를 거쳐 남만지역과 련계를 확보하기로하였다.
돈화의 길림성 당위와 정부가 있었던 옛터 비석(장춘, 길림이 강점되자 길림성 당위와 정부는 돈화를 거쳐 연길에 철수)
장춘이 다시 국민당의 손에 들어간후 국공량당의 담판도 한단락 마무리 짓게 되였고 쌍방은 송화강을 사이두고 6월 7일부터 15일간 휴전한다고 선포했다. 점령한 지역이 많아지자 국민당군은 각곳을 수비해야했기 때문에 병력을 분산해야했고 계속 송화강이북으로 전면공격을 발동할 여력이 없었던것이다.
승리의 자세로 장춘을 시찰한 장개석은 지도를 살펴보더니 불현듯 길림시 동부 교하와 서란사이에 위치한 랍법(拉法)을 발견했다. 그는 동만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이곳에도 부대를 파견해 주둔할것을 명령했다.
뭇산에 둘러있는 좁은 평지에 위치한 랍법은 말그대로 북만과 동만을 이어놓는 중요한 길목이였고 장춘, 길림지역으로부터 로야령 산지를 넘어 연변쪽으로 진출할수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국민당 고위장교들은 이곳에 부대를 주둔하면 후방과 멀리 떨어졌기에 쉽게 북만과 동만 민주련군의 협공을 받게 된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어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개석의 명령을 거역할수없게 되자 료요상은 할수없이 71군 263퇀을 신참(新站)에, 264퇀을 랍법에 주둔시킬수밖에 없었다.
장춘, 길림으로부터 철수하던 조선족 부대인 길동경비 2려 5퇀은 적을 유인하면서 서서히 철퇴하였고 길동경비 2려 4퇀은 교하 동북방향에서 위호령을 등지고 신참, 랍법 철길을 향해 매복하고있었으며 장춘쟁탈전에 참가했던 조선퇀도 부근에서 적을 견제하면서 싸웠다. 신참, 랍법에 들어온 고립된 적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동북민주련군 주력인 1종대 1사와 2사가 동원되였다.
6월 7일 길동경비부대는 1사와 2사에 배합하여 공격전에 투입되였다. 아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적을 각기 포위하여 소멸하였다. 경비 2려 5퇀은 신참역을 점령하고 주력부대와 함께 적 263퇀을 전멸하고 퇀장 위요동(韦耀东)을 격살하였다. 그리고 로획한 중무기를 민주련군 1종대에 넘기고 포로들을 돈화에 수송했다.
신참, 랍법이 수복됨에 따라 랍법으로부터 할빈, 랍법으로부터 연변으로 통하는 도로와 철도선이 확보되여 동만과 북만이 다시 이어지게 되였다.
신참,랍법 전투가 있었던 랍법 정거장
랍법전투 기념비
돈화에서 만난 사학자 양명곡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46년 5월 28일 길림성 당위원회와 정부는 길림으로부터 돈화에 옮겨왔습니다. 당시는 국민당군이 이미 길림시를 점령한 상황이였습니다. 8월 17일 성당위원회와 성정부는 연길로 옮겨갔습니다. 돈화에 있는 기간 두가지 큰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신참, 랍법 작전계획을 제정하고 작전명령을 내렸으며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룩했고 국민당군을 로야령 서부로 몰아냈습니다. 두번째 큰 일은 돈화에서 돈화회의를 소집하고 ‘토지개혁과 군중을 전면 동원한다’는 중앙의 7.7지시를 관철함으로써 동만의 형세를 안정시키고 동만해방구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이번 돈화회의와 동만해방구를 보위하는 전반 작전과 사건중에서 한족과 조선족 두 민족은 잘 단합해 공동으로 지역안정을 유지하고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한편 길림시 동부의 로야령(老爷岭)을 점령한 국민당군이 계속 동만근거지로 공격해오는것을 막기 위해 동만의 군민이 동원되여 할바령에 방어공사를 수축했다. 장춘쟁탈전에서 명성을 떨쳤던 조선퇀인 길동경비 1려 1퇀은 교하일선에 포진했고 길동경비 1려 3퇀은 할바령(哈尔巴岭)에 포진하여 반영구성 방어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할바령 솔숲, 지금도 전호가 패였던 흔적을 찾아볼수있었다
할바령 수축공사에 참가한 리동원 렬사 학생시절 모습
할바령수축공사에 참가한 오룡진 렬사
답사팀을 안내해 할바령 방어공사 전적지를 찾은 연변의 사학자 리송덕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연변의 동대문을 굳게 지키기 위한 방어조치를 취했습니다. 국민당은 석달이면 두만강까지 공격해 들어 올것이라고했고 우리 동북민주련군 사령부에서는 국민당군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연변의 군민이 동원되여 할바령 수축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공사를 진행할때 연변의 군민이 10만이 동원되였고 군대가 3천명, 두개 퇀이 동원되였습니다. 공사 총길이는 30리입니다. 그때 직접 이 전호를 판 전투영웅 신일권동지를 모시고 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바로 여기에 가다가 많은 또치까들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전호를 팠는데 철로 뗏목 레루장을 가져다 놓으면서 주요한 대목에다, 이렇게 했는데 석달동안 했습니다. 이렇게 동만의 대문을 지키는 이 할바령 수축공사는 석달만에 기본상 완수됐습니다. 그러나 우리군의 새로운 작전에 밀려 국민당군은 줄곧 연변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할바령수축공사의 그때의 정황입니다.”
할바령수축공사에는 동만의 조선족부대 300여명과 많은 농민이 동원되였다. 정면 10킬로메터, 종심 20킬로메터인 이 방어공사로하여 동만근거지는 더욱 확고해졌으며 국민당군은 끝내 이곳으로 공격해 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방어공사를 수축하는 일터에서 길동부대 9련의 “황소”로 불리우는 김중호, 7련의 “힘장사” 구자준(具兹俊)이 로동영웅으로 평선되고 7련의 정동학, 장창록도 로동모범으로 표창받았다. 그리고 리동원(李东元), 정청송(郑青松), 오룡진(吴龙珍) 등이 공을 세웠다.
1946년 하반기 동만의 해방구는 연길, 왕청, 훈춘, 안도, 교하, 돈화, 서란, 유수, 오상 등 9개 현과 구태, 영길, 덕혜, 화전을 비롯한 불완정한 현이 포함되여있고 인구는 210만이였다. 이 가운데 연변지역이 80%를 차지하고있고 인구총수의 40%가 조선족이였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길림성정부와 길림군구는 연변을 가장 확고한 근거지로하는 한편 길북(吉北)을 안정시켜 할빈을 보장하고 길남(吉南)의 투쟁을 견지함으로써 남만과의 련계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연길을 중심으로한 길동을 뒷심으로하고 돈화와 교하에 버티고서서 서란, 유수쪽으로 한 주먹을 휘두르고 반석과 화전방향으로 다른 한 주먹을 내 지른다는 전략 구상이였다.
반석과 화전을 중심으로하는 길남지역은 대부분 국민당군에게 강점되고 사실상 송화강이동의 횡도자와 화수림자, 홍석라자를 비롯한 3개 구밖에 없었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화전보안퇀의 조선족 장병들은 퇀장 양상곤과 부퇀장 송무선의 인솔하에 강동 3개 구를 지키면서 적과 간고한 유격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왕효명이 거느린 24려의 70퇀과 72퇀도 이 부근에서 활동했다.
화전보안퇀 주요간부들
반석현대대에 참가했던 반석의 로전사 리만룡(외쪽), 박현선(오른쪽)
눈덮인 길림시 대툰(당시 조선족마을이였음)
1946년 5월 25일 반석현대대 전사들은 반석현 당위원회와 현정부를 호위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반석현대대 400여명 전사는 4개 련으로 구성되였는데 1련이 한족전사들이고 기타 2련, 3련, 4련은 모두 조선족 전사들로 편성되였다. 당시 4련은 리홍광지대에 재편성되고 기타 세개 련이 간부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있었다. 국민당군이 도처에서 우세를 점하고 공격해오게 되자 현대대 1련이 국민당군에 넘어가려했다. 소식을 접한 현위서기 뢰명옥(雷鸣玉)은 즉각 2련과 3련 전사들을 거느리고 1련 주둔지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혁명하려면 남아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기를 놓고 떠나 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1련의 반수이상이 끝내 대오를 떠나 버리고말았다. 뢰명옥 서기는 남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송화강이남 적구를 전전하면서 간고한 투쟁을 계속 견지하였다.
길림시 당사연구실에서 사업했던 사학자 진지(陈智)는 일찍 뢰명옥 서기와 함께 사업했던 곽명광을 취재한적이 있다면서 반석현 대대의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그가 소개한데 의하면 반석현대대는 후에 독립지대로 편성되여 강동에서 토비숙청을 했으며 아군 주력부대와 배합해 싸웠다. 그리고 길림시 당사연구실의 사학자 장영생(张永生)의 소개에 의하면 길림유격대와 화남유격대를 합병해 편성된 화남유격대대(桦南游击大队)도 강동에서 활동했으며 화남유격대대의 중대장 박길희(朴吉熙)와 지도원 서상철(徐尚哲)이 거느린 2중대는 전부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다고한다. 이들은 강동에서 싸우는 아군 부대와 배합해 싸웠고 현지에서 지주무장과 토비를 숙청했으며 적 정찰병을 포로하면서 투쟁을 견지하였다고한다.
서란과 유수를 중심으로한 길북지역은 장춘쟁탈전에 참가했던 조리회의 부대가 투쟁을 견지하고있었다. 장춘, 길림지역의 청장년들도 구성된 이 부대는 적을 견제하면서 길북 근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한편 적 점령구에서도 조선족인민은 공산당과 유격대를 따라 지하투쟁을 견지했다.
길림시 강북대툰(江北大屯)은 조선족마을이였다. 일찍부터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진보인사 최중현(崔仲铉)과 장인덕(张仁德)은 마을에서 야학을 꾸리는 형식으로 130명 젊은 청년을 조직해 모두 조선의용군에 참가시켰다. 후에 국민당군이 길림으로 들어오자 최중현, 장인덕, 권중철(权重哲), 리동근(李东根), 김병선(金炳先), 리대만(李大万), 리명준(李明俊) 등 7명 조선족당원으로 조직된 길림강동특별지부는 적후에서 계속 지하투쟁을 견지했다. 그들은 적정을 료해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족청년을 동원해 해방구에 보내는 등 사업을 진행했다. 길림시 당사연구실의 사학자 류동명 선생이 소개한데 의하면 길림강동특별지부에서는 길림시 강북과 강동에 설치한 국민당군의 63개 화점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 아군 영북현 보안퇀에 보내주었고 적 주둔군 번호와 방어상황을 알려주었다고한다. 이들의 뛰여난 정보사업은 아군의 무장투쟁과 이후 길림시 해방에 아주 유리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영길, 교하지역에 유격전을 하는 길교유격대대(吉蛟游击大队)가 있었는데 중대장 윤해근(尹海根)이 거느린 길교유격대대 2중대는 전부 조선족 전사들이였다고 한다. 이 부대는 적후에서 적 첩보원을 응징하고 토비들을 숙청했으며 전투에서 부단히 장대되여 길림군구 독립 6퇀으로 되였다고 한다.
우세한 국민당군이 대도시를 강점하고 해방구로 공격해 오고있는 가장 위급했던 시기 장춘, 길림지역 조선족 군민들은 이와 같이 자각적으로 공산당을 따라 싸웠으며 공산당 간부들을 보위하고 유격투쟁을 견지하였을뿐만아니라 지하투쟁 임무를 훌륭히 완수함으로써 특출한 기여를 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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