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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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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4회 북경 군사통일주비회의 댓글:  조회:4883  추천:70  2007-06-10
북경 해전구에 자리 잡고있는 동물원은 북경의 중요한 유원지의 하나이다. 매일과 같이 수천명의 관광자들이 이곳에 와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동물원 서북쪽에는 지금까지 보존되여 있는 옛 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삼패자화원(三贝子花园)이 바로 북경 군사통일회의를 소집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작은 호수를 사이두고 2층 양옥이 남아있는데 규모가 제법 컸다. 이 건물이 바로 삼패자 화원의 주 건물인 창관루(畅观楼)이다. 흰 대리석 기둥과 2층 베란다를 보아도 건물의 비범함을 짐작할수있었다. 정원에는 여러 가지 화초가 만발하였고 가담가담 금빛 기와에 붉은 벽으로 된 옛 집들이 있어 더욱 화려하고 고풍적으로 보였다. 북경 관광지남(指南)에 의하면 이곳은 만생원(万牲园)이라고 하였는데 현지인들이 삼패자화원이라고 불렀다.      패자(贝子)는 만청 작위이다. 만족어로 고산패자(固山贝子)의 약칭인데 타고난 귀족이라는 뜻이다. 청나라의 작위를 본다면 친왕(亲王),군왕(郡王)의 아들을 패륵(贝勒)으로 봉하는 경우가 많은데 패륵의 아들을 패자로 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패자란 패륵의 세 번째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기재에 의하면 광서(光绪) 32년인 1906년 청나라 대신들인 재택(载泽) 등이 외국에 나갔다가 코끼리, 사자 등 기이한 동물들을 가져다 이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초 동물원이 이루어졌고 이름도 만생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삼패자 화원은 북경에 오는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되었고 화원의 창관루는 한때 청조의 자희태후까지 머물던 곳으로 대뜸 북경의 명루로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인 혁명자들이 1921년 4월 군사통일주비회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권립) 1919년 5.4운동이 발발했다. 5.4운동때의 큰 별인 리대소 선생의 신변에는 김일하 등 한패의 우리민족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리대소 선생의 신변에서 맑스주의를 배우고 지하활동에도 종사했다. 그때로부터 특히 1920년에 연변에 대한 일제의 경신년 토벌이 있은후에 보다 많은 우리 민족반일인사들이 북경에 모였고 또 신채호 선생의 대동단결의 호소에 발 맞추어 대단결, 대통일을 주장하는 반일인사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박용만 선생이다. 박용만 선생은 구라파와 아메리카 렬강들의 힘에 의거해 민족해방을 얻자는 소극적인 외교론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전민족적인 무장주의를 주장했고 대통일을 주장했다. 1921년 4월 27일 북경에서 군사통일준비위원회를 열게 되었다.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9인이 주최하에 국내 국민회(国民会), 하와이의 독립단(独立团),북간도국민회(北间岛国民会),서간도군정서(西间岛军政署),국내 로동회(劳动会), 국내 통일회(统一会), 로씨야 연해주의 국민의회(国民议会)의 찬동을 얻고 중국 동북지역의 군사적 통일을 합의하였고 무장 항쟁을 주장하였다. 회의는 중국 동북에서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며 국경지역에서 일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또한 박용만의 제의로 대회는 상해 림시정부 불신임안을 채택하고 광범위한 민족련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3.1운동이후 일제 통치하에 시달리고있는 조선의 독립에 관련해 여러 가지 그릇된 투쟁 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내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통일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이른바 자치론자들이 나타났다. 한편 리승만을 위수로한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면서 강대국에 의한 독립을 꾀하는 외교로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경 군사통일회의 주요 창도자의 한사람이며 독립운동 지도자의 한사람인 단재 신채호가 리승만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고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을 제기하였다.   아(我)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향하여 리승만,정한경 등 대미위임통치 청원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노라.„이렇게 시작되는 단재 신채호의 <성토문>에는 김원봉, 김창숙, 오성륜, 최용덕을 비롯한 50여명이 서명하였다. 북경 군사통일주비회의, 상해림시정부의 시책을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출범한 이 회의는 중국관내 조선족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로써 더욱 많은 반일투사들이 강대국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민족의 단결과 무장투쟁을 거쳐 일제를 타도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여 불절(不绝)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剥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는 단재(丹斋) 신채호(申采浩1880--1936년)가 1922년, 의렬단 단장 김원봉의 부탁으로 기초한 의렬단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의 일부이다.      문학가이며 력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조선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학문에 뛰어난 그는 일찍부터 리동휘, 신정과 더불어 충청남도 세 수재로 불리웠다.  1898년 그는 서울 성균관으로 들어가 박사로 되었으며 6년간의 고심한 연구를 거쳐 조선 근대의 저명한 학자로 된다.  (권립) 신채호 선생은 20여세에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였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반일사상 계몽운동에 뛰여 들었다. 1910년 사월에 청도회의에 참가한후 해삼위에 가서 신문을 꾸리면서 반일계몽운동을 하다가 1915년에 북경에 도착한후에 13년동안 무서운 빈곤과 굶주림을 이겨내면서 반일사상 계몽운동을 했다. 1905년부터 신채호는 선후하여 <황성일보>, <대한매일신보>의 론설기자로 활약하면서 민족주의를 선양하였다. 국내에서 독립협회, 신민회 등 진보조직에 몸을 담고 계몽운동을 적극 추진하던 그는 1910년 4월 중국 청도에 온다. 청도에서 그는 신민회가 조직한 청도회의에 참가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방과 더불어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청도회의의 결의에 따라 중국 동북에 독립군 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힘썼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로씨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상해의 신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국에 오게 된다. 그는 신정의 동제사에 몸을 담고 신정을 도와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신채호의 발상으로 시작한 박달학원에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정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신채호는 동북의 윤세용,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료녕성 환인현으로 간다. 이번 행차에 그는 환인현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였고 백두산에도 올랐다. 유적지 답사와 민족사 자료 수집활동은 그가 후에 조선민족의 력사를 재검토하고 서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력사관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동북에서 신채호는 또 대종교의 교주인 라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고 동창학교(东昌学校)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다. 그후 단재 신채호는 리상설, 신정, 박은식, 류동렬, 조성환, 리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韩革命党)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 후 북경에서 력사연구와 문학창작에 몰두한다. (권립) 단재 신채호는 북경에서 있는 기간 <동방(东方)> 잡지를 꾸려서 전문 일제의 침략 죄행을 폭로하였고 또 많은 반일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주의 력사관에 날카롭게 맞서서 우리 민족의 독립 력사관을 피력했으며 조선사 총론을 비롯해 많은 력사 저작을 남겨 우리 민족 해방투쟁에 력사학적 뒷받침을 제공해 주었다. 독립 운동가로서의 신채호는 또한 조선 민족 각 반일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면서 대동단결을 위해 민족 유일당 조직 촉진회까지 건립하게 된다. 1915년 북경에 도착한 신채호는 숭문문(崇文门)밖 보타암(普陀庵)에 거주하면서 북경 도서관을 다니며 <조선사>의 집필을 구상하였고 또 북경의 권위 신문들인 <중화보>, <중화시보(中华时报)>에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당시 <중화시보>의 가장 열정적인 투고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무렵 그는 또한 북경대학의 리석증(李石曾), 채원배(蔡元培)를 비롯한 중국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 신문화운동의 주요 인물들이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홍명희와 깊은 교분을 맺게 된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년)가 바로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의 저자이다. 당시 남양군도에서 3년간 방황하던 조명희는 북경에 온후 신채호의 숙소를 자주 다니면서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1916년 봄, 신채호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한다. 작품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 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소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15년부터 근 13년간 주로 북경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북경에는 신채호 선생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기재된 지점만 하여도 보타암, 금십방(锦什坊), 석등암(石灯庵), 관음사(观音寺), 초두호동(炒豆胡同) 등이 있다. 답사팀이 신채호 선생의 유가족인 리덕남 녀사를 만난 것은 2003년 10월 16일, 보타암에서 였다. 10월에 들어서면서 북경의 날씨는 한결 맑았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의 안내에 따라 신채호 선생이 북경에서 가장 먼저 머물렀던 곳인 보타암에서 리덕남 녀사를 만난 것은 오전 10시 경이였다. 회색 양복을 단정히 입고 옅은 갈색 안경을 건 리덕남 녀사는 60에 가까운 나이였다. 리덕남 녀사가 바로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朴慈惠) 녀사 사이에서 낳은 장남 신수범(申秀凡)의 부인이다. 신채호 선생의 손자인 신상원(申尚原), 손녀 신지원(申智媛)의 어머니로서 리덕남 녀사는 현재 신채호 연구와 기념활동을 위해 열심히 사업하고있다. 보타암은 북경시 숭문구(崇文区) 동변문(东便门)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사찰 건물이 없고 우물가에 3메터 남짓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리덕남 녀사와 답사팀이 비석을 둘러싸고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신채호 선생과 관련되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비문은 다만 이곳이 옛날 보타암이 있던 곳이라는 것만을 증명해주고 있다. 덧없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현지인들은 옛날 이곳에 암자가 하나 있었다는 아득한 기억만 더듬는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단재 신채호가 활동했던 곳이였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관련 사학자들의 발길도 잘 닿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빛나는 력사와 선각자들의 발자취는 덧없는 세월속에 망각 되여 침묵만 지키고 있다. 다만 가을 바람에 설레이는 해 묵은 버느나무만이 긴 가지를 흐느적거리며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3    제3회 초기 공산주의자 리동휘의 활동 댓글:  조회:4248  추천:46  2007-06-10
  제1차 세계 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고 있던 20세기 초, 인류사상 가장 큰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1917년 부패한 짜리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 첫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0월혁명 승리는 각국 무산계급 투쟁을 고무하여 주었고 세계 피압박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허덕이던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였다.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례없이 고조되였다. 각국의 비폭력적 해방운동은 세계 렬강의 비정한 외면과 제국주의, 봉건주의의 피비린 탄압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부 의사들은 폭탄 투척을 감행하고 일부 의사들은 일제 괴수와 추종자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한 의렬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에 환상을 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고 더욱 많은 선각자들은 중국 동북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무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시기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아시아 각국에 맑스주의 리론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진보적 인사들도 공산주의 리론을 접하고 또 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재(诚斋) 리동휘(李东辉1873--1935년)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조선말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륙군 참령(参领)으로 지냈던 리동휘는 개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고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리동녕(李东宁),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많은 학교들을 세우며 조선의 계몽운동을 적극 전개하던 그는 1912년 중국 동북에 망명하여 간민회에 가담하였고 1915년에는 로씨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아시아지역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권립) 1919년 상해에는 688명(조선인 총수) 우리민족 선각자들이 맹활동하고있었다. 그들은 제각지 철혈단, 구국모험단, 애국부인회요 수많은 단체들을 결성하여 반일투쟁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해 9월 조기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했다. 1919년 9월,동방의 빠리로 불리 우는 국제도시인 상해에 도착한 성재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한편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그는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과 손잡고 공산주의 소조를 건립하고 1921년 1월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된다. 그리고 려운형과 김립(金立), 안병찬(安秉瓒)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 되였다. 그들은 상해에 <유신인쇄공장>을 세우고 맑스주의 저작을 번역 출판하고 직접 진보적인 잡지도 꾸리면서 맑스 레닌주의를 적극 전파하였다. 한편 리동휘는 김하규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변에 첫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룡정의 대성중학교, 광흥중학교, 은진중학교 학생들속에 건립되였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로농혁명의 길, 로씨야 혁명의 길을 선전함으로써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협애한 민족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사상에 제한되여있던 구춘선을 대표로 한 국민회의 많은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1300여명 조선족들이 조기 공산주의 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이 사이 리동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공산당 제2차 대표대회에 출석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 자금면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상해 림시정부 수립후 군무총장을 맡았던 리동휘는 1920년 국무총리로 나섰지만 좌우익간의 치열한 대립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쏘련에서 보내온 지원금 40만불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겨 리동휘를 위수로한 고려공산당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동북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을 계속 지도하던 성재 리동휘는 그후 쏘련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1935년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新韩村) 저택에서 서거하였다. (권립) 리동휘 선생이 상해에서 악전고투하고있을 때 다른 한 공산주의자 안병진 선생이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상해에 도착했다.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안병진이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온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들인 리대소와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창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안병진은 그후 일제 옥중에서 십년간 고생하다가 출옥한 후 조선의용대의 충직한 지하일군으로 계속 투쟁하였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있은 후 두 나라 혁명가들 가운데서는 공산주의 학습 열조가 일어났다. 쏘련 10월 혁명승리에 크게 고무된 공산주의자들은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면서 로농대중에 의지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고있었다. 중국내에 들어온 조선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함과 동시에 중국의 진보적인 인사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중한호조사(中韩互助社)>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중한호조사는 1921년 1월 한구에서 설립되였다. 다년간 한구에서 조선인들을 적극 도와주던 중국의 유명한 대 변호사 시양이 조선인 리우민(李佑民)과 합작하여 <중한국민호조사>를 설립하였다. 이해 3월 호남성 장사에서 <장사중한호조사>가 건립되였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의 한사람인 하숙형(何淑衡)이 장사중한호조사의 선전부 주임을 맡았고 모택동이 통신부 주임을 맡았다. 한편 광동에서는 <중한협회>가 설립 되였는데 손중산의 아들 손과(孙科)가 나서서 조선인들과 함께 <중한협회> 기관지인 <광명>을 꾸리면서 조선 혁명자들을 도와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호조사 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1922년 8월 상해에 <중한호조총사>가 창립 되었다. 전국 각지의 중한 호조사를 통해 두 나라 혁명자들과 두나라 인민의 단결이 이루어 졌으며 동방 피압박 민족의 대 단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규식, 리동휘를 비롯한 조선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구국의 길을 적극 탐색하고있을 때 중국의 정치중심지인 북평에도 많은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 왔다. 리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자들이 북평에 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북경에서의 반일투쟁 유적지 답사는 2003년 9월 15일 시작하였다. 이날 아침 10시, 취재팀은 북경 서산의 향산공원에 모였다. 북경의 향산은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이다. 북경시와 20키로메터 상거한 향산은 1186년 금나라 황제가 이곳에 사원을 축조하면서 인적이 닿기 시작하였다. 금대에 만든 사원 대영안사(大永安寺)가 있는데 현지인들은 감로사(甘露寺)라고도 한다. 그후 사원은 부단히 확건되면서 청나라 건륭 10년인 1745년에 와서는 정의원(静宜园)으로 명명되였다. 향산공원에서 취재팀의 력사고문인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북경에서의 조선인 혁명자들의 행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북경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옛날 전문으로 많이 들어왔다고 본다. 북경에는 좌익 인물들이 많았다. 북경은 총적으로 이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 등 이런 사람들이 좌익이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자만이 림시정부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시영도 반대하였다. 또 향산은 리대소, 진독수와 관련 되는 사람, 25년 좌우 북경 여러 대학에 조선 학생들이 많았다. 무정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대부분 북경에 유가족이 많다. 향산 기슭에서는 공산주의 활동이 적극 진행되었다. 특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이며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인 리대소가 조선 혁명가들에 대한 동조가 많았다.    북경 서산 기슭에는 중국의 위대한 공산주의자 리대소 릉원이 있었다. 아담한 정원에는 고목이 우거지고 흰 대리석 건물과 비석이 푸른 잔디와 꽃밭 사이에 유난히 아름답게 안겨 왔다. (최룡수) 중국 공산당의 창시인으로서 조선혁명에 대단히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5.4운동의 지도자의 한분이였던 그는 조선의 3.1운동을 적극 평가하고 북경에 오는 조선 젊은이들의 혁명사업을 도와주었고 20년 상반기에 조선 젊은이들을 만나 혁명 사업을 도와 주었고 또 이 시기 김일학, 김상지 등 조선청년들을 향산 자유원에 보내 혁명사업을 하게 하였다. 김산과 김성숙이 꾸리는 <혁명>잡지에도 글을 발표하였다.    3.1운동이후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있는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지만 리승만은 계속 미국에 남아 활동하면서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주의 제창에 맞추어 위임통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더욱이 1920년 일본군이 조선독립군 탄압을 구실로 중국 동북에 출병하여 조선 독립군과 독립 단체들이 붕괴되거나 분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본군과 동북의 봉건군벌 장작림이 결탁하여 많은 조선인을 학살하고있을 때 림시정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이 필요되였다. 1921년 2월 초, 박은식(朴殷植),원세훈(元世勋),金昌淑(김창숙) 등 14인이 <我同胞에게 告함>이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선언은, 전국민의 의사에 따라 통일되고 안정된 정국을 만들고 단결된 힘으로 독립운동의 발전방향을 확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이해 4월 박용만(朴容万), 신숙(申肃), 신채호 등의 조직하에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의(军师统一筹备会议)가 소집된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의 억압과 수탈에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해 혁명자들은 무장투쟁의 길을 확정하게 되었으며 대단결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사진설명: 1 리동휘 2 옛 북경역
2    제2회 무창봉기에 참가한 독립운동 지도자 신정 댓글:  조회:4451  추천:70  2007-06-10
(권립)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던 시기이다. 청나라 말기이후에 북양군벌통치의 어두운 현실에서 거세찬 불길이 타오르던 그런 시기이다. 신해혁명이며 5.4운동과 같은 대격변을 거치면서 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길을 탐색하던 시기이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 민족해방의 길은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걸어야 하느냐? 우리민족의 선각자, 지성인들은 중국의 국제도시인 상해에서, 중국의 정치도시인 북경에서, 중국의 당시 혁명의 중심지인 광주에서 민족해방의 길을 탐색하게 됐다. 아시아 동방의 국제도시 상해, 지금도 황포강 기슭의 외탄(外滩)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취재팀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2003년 9월 22일이였다. 상해의 가장 유명한 상업거리 남경로에서 쇼핑을 하고 난 관광객들은 황포강반에서 다리 쉼도 하고 시원한 강바람을 쏘이기도 한다. 서양식 옛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앞으로 누런 황포강 물결이 출렁이고 수시로 커다란 화물선이 강에서 오고간다. 강가 유보도에 서서 출렁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사색은 어느덧 백년 전으로 달려간다. 아시아 대지에 검은 구름이 뒤덮인 1911년 봄, 중국의 국제도시 상해에 굴강한 조선 사나이 한 명이 도착한다. 한쪽 눈은 날카롭게 늘 흘겨보고 있었고 월리암식 수염이 강직하게 치켜 있는 30대 초반의 사나이였다. 그는 상해에 도착하자 진보적인 신문인 <민생보(民生报)>를 통해 송교인(宋教仁), 진기미(陈其美), 황흥(黄兴), 서천복(徐天复) 등 동맹회의 중견인물들과 사귀게 되었으며 이름을 신정(申柽)으로 고쳤다. 예관 신정이 바로 조선의 저명한 혁명가 신규식이다. 1879년 1월 13일, 조선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태여난 신규식의 자는 공집(公执)이고 호는 예관(睨观)이다. 어려서부터 문무가 겸비한 그는 륙군무관학교를 졸업한후 1902년 륙군보병 참위로 임명된다. 그러나 보국의 뜻을 지닌 신정의 뜻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국운은 날로 쇄락 되어가고 있었다. 조선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대와 청년들을 규합해 일제와 싸우려던 신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죽음으로 보국할 생각으로 독약을 복용한 신정은 가족들의 구원으로 살아남았지만 눈 신경을 다쳐 오른쪽 눈이 바르게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으로 모든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신정은 망국의 울분과 구국의 길을 찾아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최초의 조선족 투사이며 박달학원(博达学院)을 세우고 동제사(同济社)를 결성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혁명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데 거대한 기여를 한 신정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독특한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권립) 상해로 온 신정은 손중산선생의 동맹회에 참가했고 무창봉기에 참가했다. 그는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노라 등 시를 써서 손중산 선생을 노래하고 손중산선생이 창도한 공화제도를 노래했다.신정은 남사에 참가하고 동제사를 세워서 우리 백의동포의 대단결을 모색해 왔다. 1912년 신정은 동제사를 발기, 결성하였다. 동제사란 중국 성구 동주공제(同舟共济)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생사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동제사는 중국혁명에 의지한 조선독립 목표를 세운 비밀조직이였다. 동제사는 북평, 천진, 만주, 연해주, 구미, 일본 등지에 지사를 두었고 본부는 상해에 설립했다. 최초 회원은 3백여명에 달하였는데 본부 리사장은 신정, 총재는 박은식이 담당하였다. 신정을 위수로 한 동제사에는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赵素昂), 문일평(文一平), 신건식(申建植), 조성환(曹成焕)을 비롯한 쟁쟁한 거물급 조선지사들이 활약 하였다. 신정은 동제사의 영향력을 넓히고 더욱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동제사의 협력단체 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를 조직하였다. 송교인, 호한민(胡汉民), 료중개(廖仲凯), 추로(邹鲁), 대계도(戴季陶), 진과부(陈果夫) 등 중국 거물급 인물들이 신아동제사에 가입하게 됨으로써 그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였다. 한편 신정은 1913년 12월 7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개설하였다. 우수한 민족독립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이 학교에서는 박은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등이 교학을 담당하였다. 학원은 3기에 걸쳐 조선인 졸업생 백여명을 양성하였다. 신정은 중국내 진보인사들과의 친분관계를 통해 많은 조선청년들을 보정군관학교, 천진군수학교, 남경해군학교, 호북강무당, 운남륙군강무당에 보내 무장투쟁을 위한 힘을 키웠다. 그 대표적 인물은 리범석 장군이다. 그는 신정과 당계요(唐继尧)의 주선으로 운남륙군강무당에서 군사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20년대 더욱 많은 조선인 애국청년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광주 중산대학이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은 것도 신정과 동제사의 역할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신정은 려운형, 선우혁, 한진교, 김철, 현순 등과 토의하여 1919년 3월 하순 프랑스 조계지 보창로에 조선독립 림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정부조직사업에 착수하였다. 4월 10일 제1회 림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였고 13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수립되였다. 신정은 11월 상해림시정부 법무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상해림시정부는 처음부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림시정부 대통령도 없고 국무총리도 떠나 버린 상황이 빚어졌다. 1921년 5월 신정은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고 또 외무총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손중산 대통령이 이끄는 중국 호법정부와 적극 협조하여 외교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해 11월 3일 신정은 손중산 대통령의 접견을 받아 외교관계를 정식 설립하게 된다. 손중산과 호법정부는 상해림시정부를 정식 승인하였고 여러 군사학교에 조선청년들을 수용, 양성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차후 북벌전쟁이 완성되면 조선민족 국권회복운동을 전력으로 원조해 줄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림시정부의 외교적 대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인 성과와 전 민족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상해 림시정부는 로선과 경영면의 내분으로 고뇌에 시달리고있었다.1922년 신정은 국무총리를 사퇴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림시정부와 조선독립운동전선의 분렬상태에 비관한 나머지 마침내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때 광동군벌 진형명이 반란하여 손중산의 혁명 역시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손중산은 광동을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권립) 손중산은 그를 로동지라 부르며 높은 평가를 했다. 물론 신정은 손중산이 가리킨 길에서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한 분이다. 때문에 손중산 선생과 더불어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됐다. 1922년 광동군벌 진형명이 영국제국주의와 결탁해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다. 손중산은 광주를 떠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신정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중국의 불행이 어찌도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중산선생이 고심히 경영해온 혁명사업이 이제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이는 중국의 불행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큰 불행이다.(中国之不幸, 抑如何是之甚? 中山先生苦心经营之事业,全成泡影.此不仅是中国之大不幸, 亦韩国之大不幸.)” 중국 신해혁명과 같은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신정은 끝내 지대한 절망속에 빠지고 말았다. 신정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하던 중 이해 8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민족과 운명을 걱정하던 예관 신정은 지대한 절망을 안고 세상을 하직하였던 것이다.                    공화국 새날이 밝아오고     [共和新日月]                   낡은 세상 새로이 바뀌노니  [重辟旧乾坤]                   사해의 만민이 기뻐하며     [四海群生乐]                   손중산 우러러 높이 모시네  [中山万世尊]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여>라는 제목으로 된 이 한시는 신정이 신해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낸 중국의 혁명가 손중산을 축하해 지은 시이다. 반일투사이며 민주주의혁명의 선행자이며 저명한 시인, 작가, 교육가인 신정선생은 44세를 일기로 상해 애인리 57번지에 있는 그의 거소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령구는 상해 만국공동묘지에 모셨다. 만국공동묘지는 지금의 송경령 공묘(公墓)로 이름을 바뀌였다. 20세기 상해에서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 투사들이 이곳에 모셔졌던 것이다. 취재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저녁녘이였다. 푸른 잔디밭에 정방형 흰 비석들이 촘촘히 누워있었다. 황혼빛이 비쳐드는 묘지에서 수많은 렬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이 잠든 투사들의 넋을 욕보일까  두려워 일행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풀과 락엽을 쓸어내며 더듬어 갔다. 신규식, 박은식, 로백린, 김인전, 안태국, 김립...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였다. 조국을 찾겠노라 드넓은 중국대지를 누비며 싸워왔던 투사들, 망국의 한을 지니고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그들은 이곳에 조용히 잠들었다. 석양이 만국공동묘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투사들의 혼이 깃든 비석들도 황혼의 금빛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사진설명: 1 신정(신규식) 2 상해 만국공동묘지 
1    제1회 관내 조선족 반일투쟁의 특점 댓글:  조회:4006  추천:69  2007-06-10
2003년 3월 20일,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조선족인민의 훌륭한 아들인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 동지의 추도식이 북경시 팔보산 혁명렬사릉원의 고별청에서 열렸다. 추도식장에는 당과 국가의 주요 지도자들, 국가 해당부문에서 보낸 화환이 놓여져 있었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주임을 비롯한 지도자들, 문정일 동지의 유가족과 친우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조객들이 비통한 심정을 안고 문정일 동지와 영결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포화가 울부짖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와 적후를 넘나들면서 피어린 항쟁을 해온 로혁명가 문정일 동지를 영결하는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가렬처절했던 전쟁년대의 수많은 렬사들이 떠 올랐다. 신해혁명, 북벌전쟁, 광주봉기, 정강산 투쟁, 2만 5천리 장정 그리고 삼엄한 적후에서의 지하투쟁, 태항산 항일투쟁을 비롯한 중국력사의 중요한 사변에는 모두 우리 조선족 렬사들의 피어린 자국이 남아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 그 어디에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진리를 위해 싸운 조선족 선렬들의 력력한 발자욱이 남아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미 백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계는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섰으며 기계문명을 넘어서 정보문명사회로 본격 발전하고있는 오늘이다. 평화와 발전, 화해의 분위기가 주되는 오늘 세계이다. 그러나 세계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국가와 민족과 종교로 인한 국부적인 분쟁과 쟁탈은 의연히 존재하고있고 국부적인 전쟁까지도 가셔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랭전시기의 사유가 의연히 존속되면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점에서 <격정의 세월>, 우리민족 항쟁의 력사를 다시 돌이켜보고 불멸의 발자취를 답사하는데는 자못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를 거울로 삶고 그 속에서 경험을 총화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은 인류의 지혜이고 인류발전의 소중한 재부이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아직까지 민족의 숨결, 선렬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어 우리를 부르고 있다. 똑같은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안고 싸워왔지만 그 결과는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판이하게 달랐던가?  우리는 구경 무엇을 바라고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미래는 구경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날로 새로워지고 발전하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평화와 발전, 대화와 민족화해라는 새로운 시점으로 우리의 력사를 재조명하고 그 진실을 밝히며 진리를 위해 항쟁해 온 선렬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민족자강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것이 답사를 시작하는 우리의 바램이였다.  관내에서의 조선족 반일투쟁사는 또한 그 자체의 특수성을 안고 있다. 원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우리민족의 관내지구에서의 혁명투쟁은 뚜렷한 특점이 있다. 우리민족 민간의 대중적인 혁명운동, 군중운동 보다도 주로는 직업혁명가들의 혁명투쟁이였고 직업혁명가들로 이루어진 혁명단체들의 혁명투쟁이였다. 이를테면 양림 동지, 중국공산당 하북성당위원회 서기 리철부 동지, 북경시당위원회 조직부장 김산, 당산시 공작위원회 서기 주문빈, 김약연 선생 등 혁명가들이 있었다. 수많은 혁명단체들, 조선민족 혁명당, 청년 전위동맹 등. 두 번째는 그들이 직업혁명가이고 자질이 매우 높았다. 20세기 40년대 중국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마이선생은 조선혁명가들은 군사정치면에서 모두가 강유력한 간부들이며 탁월한 군사지휘원이며 모범적인 정치사업가들이라고 높이 평가. 믿음직한 자료에 의하면 관내에서 싸운 조선의용대 성원의 90%는 황포군관학교나 기타 군정대학의 학생들이다. 이들중에는 중산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도 있었다. 세 번째 특점은 자질이 보다 높고 그들의 중국혁명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관내지구에서 싸웠기에 그 영향력이 컸다. 남만, 동만유격대, 료하유격대를 비롯한 일곱갈래의 반일유격대는 동북에서 자체의 지위와 의의를 갖고 있다. 관내지구에서의 우리 혁명가들이 참가한 혁명투쟁, 이를테면 북벌전쟁, 남창봉기, 광주봉기, 이만오천리 장정 이것들은 전국의 혁명투쟁에 직접 영향을 준 그런 차원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일으킨 그런 차원에서 진행되였다. 이런 자랑찬 력사는 우리 민족 해방사에서 전반 중화민족해방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제국주의 렬강은 중국에 대한 침략과 략탈, 식민지화의 발걸음을 재우쳤고 부패한 만청정부는 거듭 제국주의자들에게 굴욕적인 타협을 진행하면서 령토와 국권을 팔아먹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도 근대화한 군국주의 강국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드디어 제국주의 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서방 제국주의와 신형의 일본 군국주의는 저들의 침략적 야욕을 전반 아시아에 돌렸다. 부패한 만청정부의 타협과 굴욕으로 하여 중국은 흑룡강 이북의 수많은 령토를 상실했을뿐만 아니라 향항, 오문을 내주고 많은 주요 도시들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제국주의자들은 함포를 내세우고 피비린 탄압과 수탈을 감행하였고 곳곳에 조계지를 세우고 수억 중국인민들을 수탈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로전쟁을 통해 로씨야를 물리치고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식민지 통치를 가심화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시아 각국은 의연히 봉건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부패한 봉건제도로 하여 각국 국내에는 여러 가지 모순으로 가득하였고 부패한 통치자들은 국내로는 인민들에게 가혹한 착취와 피비린 탄압을 계속하면서 대외로는 제국주의에게 타협하면서 국권을 상실하고 하루하루의 안일만 영위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이중의 압박하에 허덕이던 전반 아시아 인민들은 반제반봉건이라는 공동의 력사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는 손중산이 령도하는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무창봉기의 승리는 수천년 존속해오던 부패한 봉건제도를 뒤엎고 자산계급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손중산이 령도한 자산계급 혁명은 부패한 만청정부를 뒤엎고 자산계급 혁명의 승리를 선호하였지만 그 혁명은 철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만청정부가 무너지면서 각지 군권을 잡은 봉건관료들이 거듭되는 복벽을 시도하였고 드디어는 각지 봉건할거세력의 혼전국면이 나타났다. 억만 중국인민은 의연히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이중 수탈에 허덕이고있었다. 아시아 동방에 자리잡은 조선도 역시 국내외로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일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조선에 대한 병탐부터 시작하였던 것이다.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반도에 발을 붙이기 시작한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5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와 군권을 완전히 박탈하였으며 조선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로씨야를 물리치고 1910년 <합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드디어 조선을 완전 독점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인민들의 항쟁의 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의 항쟁은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져나갔다. 조선내 각종 비밀결사 투쟁과 로농대중 그리고 학생투쟁이 계속되였고 중국 조선 국경지대와 동북, 로씨야 씨베리야에서 폭넓은 무장투쟁이 전개되였으며 중국 관내를 본거지로 의렬투쟁과 군사,정당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리고 아메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외교활동과 독립군 지원활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조선인이 살고있는 그 어느 곳에서나 항쟁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권립): 우리 민족 선각자들은 관내지구를 우리 민족 해방투쟁의 싸움터로 활무대로 간주해왔다. 일찍 1910년 4월에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거두들인 신채호, 안창호, 조승환 등은 산동성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동북 모지에 반일기지를 건립할데 대하여 의논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해온 수많은 조선 지사들이 중국혁명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투쟁 전략을 확정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조선이 일제의 완전식민지로 전락되여 모든 국권을 상실한 반면 중국은 자산계급 혁명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는 상황이였다. 다음은 중국과 조선이 모두 반제반봉건의 공동의 력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이 로씨야와의 쟁탈전쟁을 드넓은 중국 만주땅에서 진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로씨야의 기득권을 회수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심이 로골화 된 상황에 일본제국주의는 또한 중국과 조선의 공동의 적이였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중국 관내에서의 조선족 반일투쟁사가 본격 시작된다. 손중산을 따라 신해혁명에 참가한 신정, 북벌전쟁에 참가한 양림, 김준섭,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와 남창봉기에 참가한 수많은 조선족 투사들,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한 양림, 무정, 지하전선에서 투쟁한 리철부와 김산, 조선의용군의 태항산 항일투쟁....수많은 렬사들이 독립과 자유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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