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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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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불멸의 발자취—련재를 마치면서 댓글:  조회:3679  추천:2  2016-02-19
중국 관내지역은 20세기 전반기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이 중국의 거창한 력사사변들속에서 진리를 찾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던 력사의 현장이다. 조선 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은 신해혁명으로부터 북벌전쟁, 토지혁명,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의 거세찬 물결속에서 만악의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중국의 군민과 어깨곁고 싸웠으며 중국 혁명과 항일전쟁승리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남겼다. 중국백성을 구하다 희생된 조선의용군 무명렬사 묘소를 지켜선 중국 백성들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중국혁명의 승리는 곧 조선혁명의 승리로 이어질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중국의 신해혁명과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국민당이 혁명을 배반하자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을 견지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과 무정, 리철부, 김산, 주문빈 등이 그 대표인물이다. 한편 김원봉과 윤세주, 김규광, 박건웅, 류자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신정, 신채호, 김구를 대표로 한 독립지사들도 중국 관내에서 각자의 민족독립과 구국의 길을 찾으면서 일제와 싸워왔다. 이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다른 주장을 가지고 중국의 현대사를 함께 하면서 조선민족 반일투쟁사의 한페지를 엮어놓았다.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된후 일찍부터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가들은 의렬단을 중심으로 조선혁명가들의 대단합을 초보적으로 형성하고 1938년에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까지 국민당 통치구에서 싸우다가 그 주력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집결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태항산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여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까지 항쟁을 견지하였다. 죽음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온 이들의 항쟁의 발자취는 중국대륙의 방방곡곡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중국 관내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 답사는 장기간의 계획과 준비를 거쳐 2003년 가을부터 시작되였다. 일찍부터 중국 동북의 조선인 반일투쟁사를 다룬 ≪민족의 숨결≫, ≪눈보라 만리≫를 비롯한 본 방송국의 대형프로그람이 청취자들의 환영을 많이 받아왔기때문에 방송국 지도부에서는 중국 관내지역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 답사로 우리 민족의 반일투쟁을 다룬 대형프로그람을 계속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국내 조선족사학계에서는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조선 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줄곧 끈질긴 연구를 진행해왔고 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민족 력사와 전통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여러 민족 인민과 더불어 살아가고있는 중국 200만 조선족이 자신를 알고 자신의 전통을 알며 자신의 우수성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서 출발한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투쟁사는 많이 연구되였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투쟁사에 대한 연구는 분산적으로 진행되였으며 구체적인 정리작업도 따라가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했던 부분적인 혁명가들의 인물전이 약간 소개되였을뿐이다. 이러한 유감을 떨쳐버리고저 한것도 중국 관내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 답사의 주요목적의 하나였다. 답사는 2003년 가을에 시작되여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2005년에 마무리되였다. 관련 내용은 방송프로그람으로 제작되여 중앙인민방송국의 ≪오늘의 화제≫프로에 ≪불멸의 발자취≫라는 제목으로 2004년 하반기부터 주마다 1회씩 방송되였고 연변텔레비죤방송에도 대형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여 올해 9월에 17회로 집중방송되였다. 그리고 중국 관내 조선인반일투쟁유적지에 대한 전반 답사과정을 민족출판사에 의해 드디여 책으로 출판하게 되였다. 더우기 중국인민항일전쟁과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6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방송과 더불어 책의 출판이 이루어져 더없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답사팀은 2003년 9월부터 북경, 천진 지역과 상해, 남경 지역 그리고 광주로부터 무한까지, 중경에서 의창까지, 태항산으로부터 연안까지의 긴 답사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북경, 천진, 상해, 중경, 하북, 하남, 산서, 섬서, 광동, 강서, 호북, 절강, 강소를 비롯한 10여개 성과 직할시를 다니면서 선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왔다.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60주년 헌례작품인 ≪불멸의 발자취≫프로 답사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사와 중앙인민방송국 지도부의 깊은 중시를 받았다. 중앙인민방송국 지도부에서는 답사를 위해 인력, 물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방송운영 경비를 내여 력사고문과 중앙인민방송국 기자 그리고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기자로 무어진 답사팀을 구성하여 답사를 시작하였다. 답사는 중앙인민방송국 각 지방의 기자소와 각지의 선전부, 방송사, 당사연구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심량면으로 답사팀을 도와준 이들이 없었다면 답사가 한결 더 어려웠을것이다. 
83    제83회 서안과 락양 답사 댓글:  조회:3881  추천:1  2016-02-15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기 전인 1936년 12월 12일, 중국의 전면항일전의 시작을 직접 촉발한 중대한 사건이 서안에서 발생하였다. 중국국민당의 동북군 장령 장학량과 서북군 장령 양호성은 서안 교외의 화청지(華淸池)에서 무력으로 장개석을 억류함으로써 중외를 진감한 서안사변을 일으켰던것이다. 20세기 30년대 초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발동하여 중국은 심각한 민족위기를 겪게 되였다. 전국적으로 항일구국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있을 때 장개석은 되려 이른바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6년 12월 4일 그는 직접 서안에 와서 홍군을 공격하도록 장학량과 양호성을 독촉하였다. 내전을 반대하는 장학량과 양호성은 장개석에게 수차 간하였지만 수락을 받지 못하자 드디어 병간(兵諫)을 시도하였다. 12월 12일 그들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화청지를 포위하고 장개석을 연금하였다. 화청지의 장개석을 체포하는 행동에는 조선혁명가 서휘도 참가하였다.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장학량의 동북군 학병련에서 근무하면서 지하투쟁을 진행하고있었다. 그는 기타 병사들과 함께 홀몸으로 도주하려던 장개석을 체포하였다. 장개석을 연금한 장학량과 양호성은 시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 대표를 서안에 초청해 구국대계를 토의할것을 제의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주은래를 비롯한 대표단을 서안에 보냈다. 수차의 담판을 거쳐 장개석은 할수없이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 함께 공동으로 항일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서안의 장학량공관 전경 장학량공관의 동루   서안시 건국로(建國路) 69번지에는 서안사변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서안사변의 주인공이였던 장학량의 옛집을 보수하여 만들었다. 장학량공관(張學良公館)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왼편에는 단층 줄집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3층으로 된 서양식 건물 3채가 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만든 서양식 건물은 각기 동루(東樓), 서루(西樓), 중루(中樓)로 불리우고있다. 서루는 장학량이 서안에서 사무를 보고 거주하는 곳이다. 1935년 동북군을 거느리고 섬북의 홍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학량은 무한으로부터 서안에 와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 사변을 해결하기 위한 장학량과 양호성 그리고 국민당 당국과 공산당 3자사이의 평화담판이 바로 서루 2층 사무실에서 진행되였다. 동루는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머물렀던 곳이다. 장학량의 초청전보를 접한 공산당에서는 즉각 주은래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서안에 파견하였다. 장학량은 공산당 대표단의 안전을 돌보고 수시로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 이들을 가까이에 있는 동루에 배치하였다. 동루와 장학량이 거처하는 서루는 가운데 중루를 사이두고 있다. 중루는 군부대 사무실로 사용되였고 비서와 경위일군들이 있었다. 장학량 공관의 낮은 단층집은 전시실로 사용되고있었다. 공관을 나서면서 장학량과 양호성의 비극적 운명을 생각하게 되였다. 서안사변후 장학량은 장개석과 함께 서안을 떠나 남경에 갔다. 그때로부터 장학량은 반세기 넘도록 줄곧 장개석에게 연금되여 자유를 잃고 생활하였다. 그는 영영 중국의 력사무대에서 물러나게 되였으며 태평양의 호놀룰루에서 만년을 보내다 세상을 뜨게 되였다. 양호성은 더욱 비극적이였다. 그는 국민당 정보일군들에 의해 비밀리에 암살되고 말았다. 개인의 생사를 제쳐두고 진행한 장학량과 양호성의 과단한 조치가 있었기때문에 중국력사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드디어 전민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이룩되게 되였다. 서안사변과 국공합작은 다년간 중국내에서 격렬한 내부 분쟁에만 전념하던 조선혁명가들에게도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지사들이 좌우 합작을 주장하면서 전 조선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드디어 조선의용군의 창립을 이끌어내게 되였다. 답사팀은 서안에서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였기때문에 몇곳을 보고나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기차 시간을 알아보니 오후 2시에 락양으로 가는 기차편이 있었다. 오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우리는 서안의 명소 대안탑을 보기로 하였다. 시 중심에서 약 4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대자은사(大慈恩寺)라는 유명한 사원이 있다. 사원의 대안탑은 고도 서안의 상징인 불교명탑(佛敎名塔)이다. 탑은 기원 652년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인도에서 가져온 657부의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축조한 불경 수장 탑이다. 처음에는 60킬로메터의 5층탑으로 축조하였지만 후에 여러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탑은 더욱 높게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64킬로메터 높이에 7층으로 되여있다. 이곳은 서안을 찾는 관광자들이 꼭 찾아보는 관광명소로서 사원 앞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광장에는 철로 된 현장법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사원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장경각(藏經閣)을 지나니 대안탑이 한눈에 안겨왔다. 현장법사가 직접 설계한 정방형 모양의 이 탑에는 층마다 사리(舍利)가 있다고 한다. 탑을 대안탑이라고 한데는 재미나는 전설이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자은사의 스님들은 모두 삼정식(三淨食)을 하였다고 한다. 삼정식이란 기러기, 노루, 송아지 고기만 먹는것이다. 그런데 오래도록 이 세 가지 고기를 먹지 못한 스님들이 하루는 하늘의 기러기 떼를 보았다. 한 스님이 하늘의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부처님께서 우리 모두가 굶고있는것을 헤아려 기러기 고기를 보내 온것이 아닌가?》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늘의 기러기 한 마리가 그 스님의 품에 뚝 떨어져 죽고 말았다. 놀란 스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뿐이였다. 이때 다른 한 스님이 이는 분명 부처님의 화신일것이라고 하면서 기러기를 정중히 안장하고 탑을 만들어 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탑을 기러기 안(雁)자를 따서 안탑이라고 했는데 현장법사의 불경 수장탑을 높이 생각해 대안탑이라고 불렀다한다. 탑 뒤에는 또 정교하게 축조된 목제 건물인 현장삼장원(玄奘三藏院)이 있었다. 원에는 거폭의 목조와 한백옥 조각이 있었는데 모두가 현장법사의 공적을 소개하는 내용이였다. 이곳에는 현장법사의 두개골 사리가 수장되였다고 한다.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대자은사와 대안탑은 서안 력사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일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문화의 리정표로서 오늘도 수많은 관광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역 만리에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온 현장법사의 굳은 의지와 불후의 공적은 천추에 길이 빛나고 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피땀을 흘리며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항쟁해온 우리 혁명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업적도 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져야 할것이다. 현장삼장원 서안의 대자은사 일경 대자은사의 탑림 대안탑   서안에서 오후 2시 기차를 타고 하남성 락양에 도착한것은 10월 30일 새벽이였다. 락양에서도 오래 체류할 계획이 없기때문에 호텔을 잡지 않고 역시 기차역에 짐을 맡기고 저명한 황하 나루터인 맹진으로 향했다. 락양시 북쪽으로 1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니 황하가 나타났고 거대한 황하대교가 놓여있었다. 이곳이 바로 옛 맹진 나루터였다. 맹진은 황하의 중류와 하류를 나누는 분계점이기도 하다. 이곳으로부터 황하는 강폭이 훨씬 넓어지고 물도 비교적 맑았다.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흐르는 황하처럼 누런 흙물이 아니였다. 수천년전부터 맹진은 황하의 중요한 나루터로 유명했다. 중국 노예사회시기 주무왕이 맹진에서 800제후를 회합하여 상(商)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기로 맹약(盟約)하였던 곳이다. 그후 주무왕은 제후들과 함께 5만 정예군사를 이끌고 목야(牧野)에서 상주왕의 70만 대군을 격파하고 드디어 상나라 폭정을 전복했다.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대는 바로 이 맹진 나루터를 거쳐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면 맹주(孟州)에 이른다. 이곳에서 산서성 남부에 진입하면 곧 태항산에 이르게 되고 쉽게 팔로군 본부가 위치한 마전에 갈 수 있다. 그리하여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모두 락양에 모여 맹진을 통해 황하를 건널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1938년 10월 포화가 울부짖는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였지만 드디어 무한 함락을 맞게 되였다. 무한이 함락되자 의용대는 미래 전투방향을 두고 지도사상면의 혼잡을 겪게 되였다. 의용대 출신인 문정일 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당시 일부 사람들은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남부로 가서 국민당과 손잡고 싸우자고 하였다.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나중에는 각기 자기 주장대로 북상할 사람은 북상하고 남하할 사람은 남하하였다한다. 무한 함락직후 리유민의 인솔하에 허정숙, 리근산, 리달, 김철 등이 무한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가장 먼저 연안으로 갔다. 그 뒤를 이어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공량우을 비롯한 10여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갔다. 최창익은 화북을 지나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이들은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국민당 각 전구로 흩어져 싸웠다. 대본부는 김원봉의 인솔하에 국민당을 따라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박효삼의 인솔하에 호남성의 제9전구에서 활동하였고 제2구대는 리익성의 인솔하에 호북성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새로 편성된 제3구대는 하남의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민당 각 부대에 흩어져 활동하였기때문에 통일적인 행동과 령도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1939년부터 1940년 사이 국민당 각 전구에 흩어졌던 의용대 대원들도 여럿이 뜻을 같이하여 북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각 구대는 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리익성이 거느린 제2지대와 부분적인 1지대, 3지대 대원들은 락양에 모였고 락양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일부는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본부와 1지대, 3지대 주력이 박효삼과 윤세주의 인솔하에 중경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락양에 모였다. 김학무, 왕자인, 리익성, 김세광, 리춘암, 양민산, 최채를 비롯해 무려 80여명이 도강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박효삼은 제1전구의 사령인 위립황(衛立煌)을 찾아 교섭하였다. 위립황 역시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였지만 그때는 환남사변 직후였기때문에 의용대의 팔로군 지역 진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는 부분적으로 수차에 나누어 황하를 건넜다. 이들은 맹진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근거지로 들어갔다. 황하의 맹진나루(지금은 큰 다리가 나루배를 대체했음) 동북진출을 압두고 모인 조선의용군 주요 간부들 락양에서 적후공작을 할때의 문정일   황하 기슭의 맹진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이따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멀리 황하대교를 지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화북대지와 중원을 이어주는 길목에 놓인 맹진 나루터는 옛날의 번창함이 사라지고 지금은 인적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맹진을 떠나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적들과 싸우려는 만강의 정열을 지니고 황하를 건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윤세주가 작사한 《최후의 혈전》을 부르며 팔로군을 찾아갔던것이다. (불멸의 발자취 련재 전부 끝)
82    제82회 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옛터 댓글:  조회:3359  추천:0  2016-02-09
항일전쟁시기 섬북 연안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투쟁 지휘중심이였고 중국혁명의 성지였다. 중국의 수많은 혁명자들이 이곳에 모여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한편 중국의 새로운 혁명을 위해 기능을 련마하였다.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연안에 모여 중국혁명에 투신하였고 기능을 련마하면서 미래 조국건설을 준비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또 여러 항일근거지로 파견되여 사업과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중국항일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연안의 보탑산과 연하수에 조선족 음악가 정률성이 남겨놓은 노래가 남아있고 라가평에 수백명 조선청년들이 모여 학습하고 훈련하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남아있다. 이는 중국항일전쟁에 대한 조선혁명자들의 기여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오늘까지 사람들을 부르고있다. 연안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한 후 답사팀은 10월 28일 저녁 10시 30분 기차로 연안을 떠나 섬서성 소재지 서안에 갔다. 서안과 락양 등지의 부분적 사적지들을 답사해야했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섬서성 소재지 서안에 도착한것은 10월 29일 새벽 5시였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서안 기차역은 사람들로 붐볐고 희미한 불빛사이로 여러 장사군들이 손님들을 붙잡고 뭐라고 열심히 흥정하는것이 보였다. 우리는 역을 나와 곧바로 짐 맡기는 데로 갔다. 택시 기사들이 달려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열심히 물었다. 우리는 그들을 제치고 보관소에 짐을 맡기면서 주인에게 장안현(長安縣) 두곡진(杜曲鎭)으로 가는 방법을 문의하였고 택시 가격을 물어보았다. 주인은 그곳을 자상히 알려주었을뿐만 아니라 만약 자기를 믿어주면 자기가 택시를 찾아 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가격을 흥정하고 주인이 찾아주는 택시를 타고 서안시 남부 교외에 자리잡은 두곡진으로 향했다. 차는 불 밝은 서안시를 빠져나와 교외로 달렸다. 우리나라 7대 고도의 하나인 서안은 유명한 력사문화 도시이다. 서주(西周)로부터 시작해 12개 봉건왕조가 이곳에 수도를 정했기때문에 수많은 명승고적과 문화재가 있다. 봉건왕국으로 전국통일을 완수한 진시황의 릉원과 유명한 병마용(兵馬俑)이 서안 교외에 있고 한나라 때의 유명한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시작되였으며 당조(唐朝)의 불교문화를 설명해주는 대안탑(大雁塔)도 이곳에 있다. 중국 서북의 교통, 문화 중심도시인 서안시는 항일전쟁시기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일본침략군의 서북진출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동시에 각종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중경에 있던 한국 림시정부에서도 광복군 부대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우리가 찾아가는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는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가 있다.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리범석의 거처 옛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리범석의 거처 옛터 날이 희붐이 밝기 시작하여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도착하였다. 길 량켠에 민가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길을 사이 두고 중학교와 마주한 량식 창고 하나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이다. 커다란 마당 주변에 단층 줄 집이 3면으로 늘어서 있었다. 벽은 모두 흰 회칠을 하였지만 낡은 건물 모습은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창립된 한국광복군은 각 전구에 대원을 투입하여 활발한 항일무장선전을 전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 김약산이 광복군 부총사령으로 임명되고 김약산의 령도한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였다. 그리고 원 광복군 각 지대는 제2지대로 개편되였다. 광복군 참모장이였던 리범석은 이때 제2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여 서안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는 바로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위치한 이 량식창고에 설치했다. 서안은 화북과 린접해 있기때문에 화북전선으로 진출하기 편리한 곳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였다. 이곳에 지대부를 설치한 리범석은 산서성과 하남성에서 류랑하고있는 조선청년들을 쟁취함으로써 대오를 확대해 나갔다. 리범석은 1943년 세차에 거쳐 대원들을 적 강점구로 파견하였다. 대원들은 적정을 탐지하고 적후의 조선청년들을 쟁취하는 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한 일제에게 체포되여 많은 희생을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국민당 부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5월, 리범석은 미국 정보일군의 도움으로 두곡진에서 이른바 《한미합작반(韓美合作班)》을 세웠다. 합작반은 제2지대 성원과 리범석이 중경에서 거느리고 온 대원 그리고 보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조선병사들을 집중하여 조직되였다. 그들은 주로 미군 교관에게서 첩보, 정보일군으로 훈련받았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대원들은 각지에 파견되여 정보활동에 종사했으며 일부는 상해에서 공습목표를 무전으로 미군항공대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리범석은 한미합작반 성원을 광복군 정예부대로 재편성하고 이들을 거느리고 1946년 봄에 조선남부로 나갔다. 지대부가 있던 량식창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두곡진 도계보(桃溪堡) 64번지는 리범석이 거주했던 집터이다. 지금 그곳에는 단층 벽돌집 한 채가 있었다. 집주인은 로봉주(盧鳳柱)였는데 부모들에게서 리범석에 관련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고 한다. 그의 회억에 의하면 리범석 지대장은 개를 무척 즐겼는데 그의 애완견이 죽자 관을 해 묻었다고 했다. 철기 리범석 철기(鐵騎) 리범석(1900-1972)은 서울사람으로서 1915년에 이미 려운형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를 거쳐 운남에 간 그는 운남강무학당 기병과를 졸업하고 중국 동북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동북에서 리범석은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고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1934년 리범석은 관내로 들어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있었고 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참모장으로 되였다. 항일전쟁시기 리범석은 서안에서 국민당과 적극 협조하면서 줄곧 광복군 제2지대를 지휘하였다. 8시가 가까워 날이 훤히 밝자 우리는 두곡진을 떠나 다시 서안으로 갔다. 거리에는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붐볐다. 길가의 해묵은 오동나무는 황금색으로 단풍들어 고도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있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간편한 아침 식사를 하고 팔로군 서안 판사처로 찾아갔다. 서안시 북신가(北新街)의 칠현장(七賢莊)은 번화한 시중심에 위치한 조용한 정원이다. 검은 칠을 한 널 대문이나 줄지은 단층 건물은 너무나도 간소하여 평범한 농가와 흡사하였다. 다만 정문어귀에 공화국 원수 엽검영이 쓴 《팔로군 서안 판사처 기념관》이라는 몇 글자가 눈에 안겨 올 뿐이였다. 기념관 입구에는 섬서 주재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사무처, 섬서 주재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라고 쓴 옛 간판이 량쪽에 걸려있었다. 기념관은 정원과 여러 기념전시청으로 구성되여있었다. 1936년 봄 중국공산당은 칠현장의 한 곳을 빌려 비밀 련락소를 설치하였다. 이때로부터 1946년 팔로군 판사처가 서안에서 철수할때까지 10년간 칠현장은 항일통일전선을 수호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판사처는 팔로군에서 수요하는 물자를 구입해 보냈고 섬감녕 변구에 물적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국민당 통치구의 애국청년들과 국제인사들을 연안에 보냈다.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서안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공산당을 찾고 혁명 성지 연안으로 갈수있었다. 연안으로 들어간 조선혁명가들은 모두 이곳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독립동맹은 중경의 조선혁명자들과 련락을 취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이곳을 거쳐다녔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81    제81회 연안에서 맞이한 승리 댓글:  조회:6270  추천:0  2015-12-14
1945년 후반기에 들어서서 세계 반파쑈전선은 대 승리를 눈앞에 두고있었다. 막강한 동맹군 함대는 태평양섬으로부터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독일파쑈를 전승한 쏘련홍군도 중국동북으로의 파병을 준비하고있었다. 고립무원의 경지에 빠진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도 련속되는 타격을 받고있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8일에는 쏘련군이 대일선전을 하고 중국 동북으로 대거 출병하였다. 사면초가에 몰린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안에 있던 조선혁명가들은 방송을 통해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연설을 청취하였다. 최룡수 교수(왼쪽 첫사람)연안의 라가평마을에서 조선혁명군정대학 상황을 소개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가 열렸던 중앙대강당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전경(력사사진)   (최룡수 교수) “이 마을에 조선군정학교에 근 300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항산에서 3개월 걸어서 이곳에 왔고 또 바로 이곳에서 8.15광복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방송을 듣고 광복을 알고 홰불을 들고 대단히 경축했답니다.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부르고 아리랑을 부르며 밤을 새면서 경축했습니다.”   일본천황의 항복연설이 전파를 타고 세계에 울려퍼졌다. 항일전쟁의 승리는 너무나도 급작스레 전달되였다. 8년 피어린 항쟁을 해왔던 중국 전역에 기쁨의 환성이 터졌고 폭죽소리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홰불을 들고 거리에 떨쳐 나와 환성을 질렀다. 이날 연안성은 환호와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조선혁명자들은 조선의용군 행진곡과 아리랑을 부르며 즐거운 밤을 지새웠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쓰러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내였던가! 연안의 중국 군민들과 함께 즐거운 환성을 터치는 우리 조선혁명가들의 마음은 더욱 격동되였던 것이다. 망국의 수치를 안고 수십년간 일제의 철제밑에서 허덕이던 천백만 조선인민들이 드디어 허리를 펴고 살수있게 되었다. 자유를 찾은 기쁨과 환성속에서 그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렬처절했던 전투의 나날들을 회억하면서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전우들을 추모하였으며 이제 곧 진행하게 될 조선으로의 진격을 생각하였다. 해방 받은 조국과 인민이 독립과 해방을 위해 피흘려 싸운 씩씩한 전사들을 성대히 환영할것을 생각하니 모두가 가슴이 벅차기만 했던것이다.   (권립 교수) “1945년 8월 11일에 주덕은 조선의용군이 동북으로 진군하여 일제를 소멸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9월 3일에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교의 3백여명 학원들은 팔로군과 더불어 조선의용군과 더불어 연안을 떠나 동북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1945년 8월에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2천여명으로 확대됐습니다. 주덕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떠난후 12월초에 심양에 도착했을때는 3천여명으로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1일, 연안의 팔로군 주덕 총사령이 제6호 작전명령을 내렸다. 《중국과 조선 경내로 출병해 작전하는 쏘련군에 배합하여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화북 현지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는 즉각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하여 일제와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해방의 과업을 완수하라. 총사령 주덕. 1945년 8월 11일 12시.》   이 명령에 따라 각지로부터 연안과 태항산으로 이동하던 조선의용군 각 부대는 발길을 돌려 동북으로 진출하게 되였고 연안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도 동북진출을 준비하게 되었다. 중국 관내에서 가장 먼저 동북으로 진출한 부대는 주연이 이끄는 기동의 조선의용군 선견대 100여명이였다. 하북성 동부에서 장기간 항일 유격전을 전개해오던 이들은 일본의 항복소식을 접하고 즉각 동북으로 진격하게 되었던것이다. 하북은 동북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이 가장 먼저 행동하게 되었던것이다. 이들은 팔로군 기열료 부대를 따라 9월 중순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부대는 도중에서 하북지역에 산재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을 접수하여 그 수가 4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리 심양에 와 있던 신한청(愼韓靑)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세하여 조선의용군 선견종대(先遣縱隊)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 지대장은 신한청이 맡고 정치부 주임은 주연이 맡았다. 조선으로 진격하려는 열망을 안고있던 이 조선인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신의주까지 들어갔으나 쏘련군의 거부를 받아 다시 심양에 모였다. 한편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은 연안에서 각가지 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또 군력을 정비한 다음 1945년 9월부터 동북으로 향발하였다. 이들은 하북성 장가구에서 태항산으로부터 오는 부분적 대원까지 합쳐 400여명에 달했다. 부대는 중국 동북의 금주에서 태항산의 주력인 조선의용군 간부대대(幹部大隊) 300여명과 합친후 심양으로 진격하였다. 1945년 11월 초순, 심양시 근교에서 1000여명의 조선의용군이 모인 군인대회가 열렸다. 조선의용군 사령인 무정은 소수의 로혁명가들만이 조선으로 들어가고 의용군은 전투편대로 나뉘여 동북 각지 조선인 집거구로 들어가 계속 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대를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로 편성하였다. 한편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을 주석으로, 한빈과 최창익을 부주석으로 결정하고 동맹집행위원의 명의로 당면 정치주장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편협한 정당과 계급이 독점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것을 절대 반대할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동북 진출을 이룩한후 무정, 김두봉, 최창익, 한빈을 비롯한 소수 혁명가들이 조선 국내로 들어갔고 박일우, 박효삼, 왕신호(김웅), 리익성, 주덕해, 리상조 등은 조선의용군 각 지대를 이끌고 계속 동북에서 싸웠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조선인 집거구에서 많은 조선청년들을 혁명에로 이끌었으며 부대를 확대해 나갔다. 당시 중국 동북항일련군에는 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 부대는 중국공산당 부대와 함께 동북해방과 중국 전역해방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합방되면서 나라를 잃은 조선인민은 수십년간의 간고한 투쟁을 거쳐 드디어 일제의 패망을 보게 되였다. 중국 관내에서 피어린 항쟁을 하던 조선혁명가들은 연안의 라가평이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일제 패망의 희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항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즐기던 조선혁명가들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우리는 라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를 떠났다. 라가평 마을을 나오면서 마을입구의 한 가옥에 《조선소채(朝鮮小菜)》를 판다는 작은 간판을 볼수있었다. 조선 짠지를 판다는 뜻이다. 《혹시 이곳에 아직까지 조선족이 살고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으로 급히 찾아보았다. 집 마당에는 작은 밀 차 한 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김치며 짠지 따위가 가득 하였다. 주인은 40대 녀인이였는데 만나고 보니 조선족이 아니였다. 반신아(潘新娥)라고 부르는 이 녀인은 신강의 조선족에게서 무침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면서 3년전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입구에 조선혁명군정학교 비석이 있었기때문에 조선 짠지도 잘 팔릴것 같아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괜찮게 된다고 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족에 대해 생소하지 않았고 조선 짠지도 잘 사간다고 하였다. 라가평을 떠나는 우리의 마음에 아쉼움이 없지 않았다.   라가평에서 조선족 짠지를 파는 한족녀인 연안답사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고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   최룡수 교수는, 일본 포로를 감화시켜 반제투쟁에로 이끌던 연안의 일본 로동학교 옛터는 잘 보수되고 개방되고있지만 우리 민족의 군정학교 옛터는 관리가 따라 가지 못한다고 애탄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줄곧 현지정부의 중시를 받지 못하다가 항일전쟁 승리 50주년을 기념하던 1995년에야 고작 비석 하나를 만들었던것이다. 학교 교사 옛터나 의용군 대원들의 활동지가 분명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있는것이 안타깝지 않을수 없었다.
80    제80회 조선혁명가들의 연안 대 집합 댓글:  조회:4184  추천:1  2015-10-21
1944년에 들어서서 일본제국주의는 더욱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잃었고 동맹군은 막강한 공격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하나 수복하고있었다. 한편 일본과의 축심동맹을 맺었던 독일도 유럽전선에서 궁지에 몰려있었다. 동맹군과 쏘련홍군은 동서량측으로 독일을 협공하였고 독일 파쑈의 패망은 눈앞의 일로 다가서고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침략자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있었다. 이해 4월 일본침략군은 중국에서 대규모의 공격작전인 예상계전역을 벌였다. 일본침략군은 중국대륙의 중부지역을 거의 전부 석권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술적으로 남북 교통선을 관통하는 전과를 가져왔지만 전략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전선이 더없이 확장됨에 따라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전쟁물자도 많이 부족하였다.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계속 후방을 교란하고 교통선을 차단하면서 적들을 타격하고있었다. 이시기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대 집합장소였던 섬북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점차 하나의 전투적 보루를 형성해 나갔다. 미래 조국해방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조선혁명가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군사훈련을 진행하였으며 혁명사상을 키웠다. 독일파쑈들의 멸망에 이어 일본파쑈들의 패망도 오라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권립 교수) “1943년 중공중앙은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박일우, 박효삼, 주덕해 등 로동지들을 조직하여 조선혁명군정대학 창건 준비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중공중앙의 지도하에 학교의 지점문제, 학생래원문제, 교사건축문제, 학교기구 인사배치문제를 둘러싸고 방안을 짜고 행동에 옮겨야했습니다.”   중국의 혁명성지인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해 미래 조국해방에 진력하기 위해 조선혁명가들은 학교창설에 나섰다. 그들은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간부들을 학원으로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각지로부터 조선 열혈청년들이 연안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용군 대원이였던 리화림이 회억한데 의하면 의용군과 독립동맹은 1944년에 와서 각지의 조선의용군 대원들을 비교적 안전한 연안에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정치학습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의 해방을 이룩하려면 자체의 부대가 있어야 하고 더욱 많은 간부가 필요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1944년 1월말 태항산의 의용대 대원들과 학원 근 200명이 연안으로 향발하였다. 그들은 박효삼의 인솔하에 2천여리를 행군하여 1944년 4월 7일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연안에 있던 조선혁명가들과 합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설립을 이룩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의용군 기동지대의 리대성이 30여명 대원을 거느리고 첩첩한 봉쇄를 뚫고 4개월간 행군하여 1945년 2월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여러 항일근거지에서 온 조선의용군 대원, 쏘련과 동북에서 연안에 온 주덕해, 주춘길, 방호산 그리고 최창익, 정률성, 리유민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 섬감녕 분맹 맹원들이 합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조선혁명력량을 재정비하게 되였다. 포연탄우속에서 청춘을 불태우던 우리민족 청년들은 곧 설립하게 될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기쁨과 희명을 안고 일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자력갱생한다는 혁명정신을 발양하여 스스로 학교건물을 짓고 토굴집을 팠다.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소개비 조선혁명군정학교 김두봉 교장이 거쳐했던 토굴집으로 추정하는 곳 연안의 토굴집   (권립 교수)“ '물레를 돌리며 손님을 접대하는 주덕총사령을 따라 배우자.' 이것이 그때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들은 벽돌 기와 굽기를 조직하였습니다. 로신예술학원의 벽돌공장을 빌어 벽돌을 굽고 기와를 구웠습니다. 그들은 토굴집 건축조를 무었습니다. 먼저 야장간을 꾸려서 곡괭이나 삽을 만들고 토굴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7,8명으로 구성된 한 개 조가 하루에 토굴집 하나를 파내기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 개조를 무어 결사대의 정신으로 토굴집을 팠습니다. 그들은 또 황무지개간대를 조직하여 연안에서 70리나 떨어진 산중에 들어가 수백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44년 8월에 이르러 이곳에는 수백명 조선청년들이 모였다. 300여명이 앉을수 있는 식당과 강당이 있게 되었고 15개 토굴집이 생겨났다. 중국군민들과 함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을 발양한 조선혁명가들은 자체로 학교 터를 정했고 벽돌을 구워 교사를 지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부지런한 조선혁명가들의 두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4년 10월 1일 드디여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이 성대한 개학식을 가지게 되었다. 팔로군 총사령인 주덕이 직접 개학식에 참가해 축하연설을 하였다. 처음 200여명 학원을 가진 이 학교에서는 군사과와 정치과를 배우는 한편 각가지 혁명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권립 교수)“조선용사들의 놀라운 건설속도는 연안 각계를 놀래웠습니다. 더욱이 이해 가을이 되자 조선용사들의 땀의 열매가 연안 각계 인사들과 연안인민의 찬탄을 자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화를 따서 실을 뽑고 실을 뽑아 천을 짜고 통일적인 군복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들은 두손으로 가꾼 채소로 로신예술학원을 지원했고 해방일보사를 지원했다. 엿공장을 만들었고 주덕해는 이를 최채를 통해 태원에서 팔았습니다. 이것으로 약과 건전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는 280여명 학원이 있었다.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의 편의를 위해 학원들은 4개 구대로 나누었다. 제1구대는 조렬광과 방호산이 책임지고 학원은 33명이였다. 왕자인이 구대장을 맡은 제2구대는 54명 대원을 가졌고 전우와 홍순관(洪順官)이 책임진 제3구대는 23명, 김극(金克)과 윤공흠이 책임진 제4구대는 29명 대원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에는 김두봉이였고 박일우는 부교장 겸 서기를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은 부교장 겸 대장을 맡았고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는 주춘길, 허정숙, 정률성이 있었다. 그리고 259려단에서 사업하던 조선혁명가 주덕해는 이시기 조선혁명군정학교 총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원들로는 허정숙, 한빈, 최창익 등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김두봉(1889-1961)의 호는 백연이다. 그는 1889년 경상남도 동래군(東來郡) 기장면(機張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태여났다. 17세에 서울에서 중앙고보(中央高普)의 전신인 기호학교(畿湖學校)와 배재학교(培才學校)에서 공부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후 배일사상과 애국사상에 들끓던 그는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였다가 체포되였다. 1913년 배재학교를 중퇴하고 최남선(崔南善)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가했고 또 조완구와 함께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이시기 그는 또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현대조선어 학습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1919년 김두봉은 한위건(리철부)과 함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4월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그는 신채호가 주필을 맡은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의 편집으로 일했고 후에는 김규식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였다. 1920년에 김두봉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상해에서 김두봉은 인성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조선어연구를 멈추지 않고 《정해조선어사전(精解朝鮮語辭典)》을 펴내기도 하였다. 1928년 12월, 고려공산당이 해체된후 그는 홍남표, 조완구와 함께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를 조직하였고 1935년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중앙 상무위원으로 되였다. 그는 조선의용대 창립시 주요간부로 활약하였고 1939년 조선혁명당과 함께 중경에 갔다. 1942년 4월, 김두봉은 중경으로부터 연안으로 갔다. 그해 그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추대되였고 후에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되였다. 혁명의 성지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되여 조선혁명가들이 집중되였을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통제하고있던 각지 항일근거지에도 조선혁명군정학교 분교가 설립되여 부근의 조선혁명가들을 규합시키고 훈련과 교양을 진행하였다. 태항산의 조선혁명가들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연안으로 떠난후에도 산서성 섭현 남장촌의 조선혁명군정학교는 계속 남아있었다. 무정과 조선의용군 주요간부들은 화북의 조선청년 모집과 교양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초에 이르러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수는 다시 293명에 달했다. 교장을 맡았던 무정은 하북성 섭현 남장에 있던 학교 학원들을 두 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무정이 대장을 맡고 한경과 리익성이 중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학교에는 93정의 소총과 3정의 경기관총외에 많은 수류탄과 지뢰를 가지고있었다. 1944년 10월 1일 산동에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가 설립되였다. 교장은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을 책임진 리명이 맡았는데 학원은 근 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시기 신사군 통제하의 화중에도 1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에 집중하여 교육을 받았다. 화중의 조선인 책임자는 왕신호(王信虎 원명 김웅)였다. 그리하여 항일전쟁 승리를 앞두고 중국 관내 조선혁명자들은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집결되고 재편성되였다. 이는 항일전쟁 승리후 중국 동북으로의 진출과 조선으로의 진격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간부양성과 군력 보강을 적극 시도한 노력이였던것이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모였던 조선혁명자들은 이곳에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79    제79회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댓글:  조회:4175  추천:0  2015-09-18
섬서성 연안시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가면 연하기슭의 천주교회당과 수십개 돌로 만든 토굴집이 보인다. 교아구(橋兒溝)라고 하는 이곳이 바로 전국 중점문화재 보호단위인 로신예술학원 옛터이다. 항일전쟁시기 가렬처절한 포화를 뚫고 연안에 모인 혁명청년들을 규합시키고 이들 가운데서 미래 중국을 이끌어나갈 훌륭한 예술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로신예술학원을 특별히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민족이 키운 천재적인 예술가인 정률성도 대부분 시간을 이 학원에 몸을 담보 하나하나의 불후의 명작을 창작해 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포화의 시련을 받고있는 중국인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고 수많은 애국청년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교아구 천주교회당 연안 로신예술학원 기숙사들 연안 로신예술학교 밤자습하고있는 학생들   답사팀이 연안에 도착한 이튿날인 2003년 10월 28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하였다. 양가령의 중앙강당과 남관가에 위차한 동방각민족 반파쑈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사적지를 보고나서 정률성이 다닌 로신예술학원과 유명한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찾아갔다. 연안시 교아구에 도착하니 우선 정원에 우뚝 솟은 천주교회당이 눈앞에 띄였다. 1934년에 축조된 이 서양식 건물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중앙당학교 강당으로 사용되였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는 로신예술학원 강당으로 사용되였다. 당시 이곳에서 여러차례 대회와 음악회가 있었다. 특히 1938년 9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중국공산당 제6기 6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여 더욱 주목된다. 대회에서 모택동은 항일전쟁 새 단계론을 발표하였다. 천주교회당 곁에 커다란 운동장과 돌로 만든 수십개 토굴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로신예술학원 교실이였다. 지금도 학생들이 공부하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툼한 솜옷을 입은 학원들은 난로를 피워놓고 조용히 앉아서 열심히 책을 보고있었다. 문학과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연안의 로신예술학원은 1938년 4월 10일에 설립되였다. 초기에는 봉황산에 자리를 잡았다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교아구에 있었다. 섬북공학과 로신예술학원 1기를 졸업한 조선혁명가 정률성은 졸업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한동안 사업하다가 1939년 12월에 다시 로신예술학원에 조동되여 음악학부에서 성악을 가르쳤다. 그때로부터 정률성은 태항산 항일전선으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교아구 로신예술학원에서 교원사업을 하면서 많은 노래를 창작하였다.   (권립 교수) “정률성은 먼저 섬북공학에서 공부하다가 1938년 5월 연안 로신예술학원이 서자 거기에서 공부하면서 유명한 불멸의 가곡 연안송을 창작하였습니다. 1939년 1월에 연안항일대학에서 입당하고 이 대학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불후의 팔로군 대합창 8개 부분을 창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군가로 되었습니다.”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시인 공목(公木)과 협조하여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창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팔로군행진곡(八路軍進行曲)》은 경쾌하고도 기백이 넘치는 선률로 팔로군의 영웅적 형상을 잘 부각하여 광범한 군민들이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공화국 창건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였다. 이시기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 녀학생대 대장으로 있던 정설송(丁雪松)을 알게 되고 그와 사랑하게 되였다. 1940년,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했던 조선혁명가 무정의 담보로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을 하게 되였다. 1942년 정률성은 연안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의 연설을 직접 청취하였다. 그후 그는 더욱 훌륭한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 항일전쟁 최전선으로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해 8월 그는 무정과 함께 태항산으로 갔다. 태항산에 간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을 맡으면서 조선의용군 전사들과 함께 적극적인 무장선전활동과 대생산운동을 진행하였다. 한편 음악창작을 늦추지 않고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가로 된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이 시기에 창작해 냈다. 1944년 4월 정률성은 명령에 따라 다시 연안에 왔다가 연안에서 항일전쟁 승리를 맞이하였다. 해방후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서 작곡사업에 전념하던 정률성은 1976년 12월 7일 뇌일혈(腦溢血)로 세상 떴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연안송》, 《팔로군 대합창》(이 가운데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개명하고 공화국 군가로 확정), 《조선인민군행진곡》,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이 있다. 연안시 중심에서 2, 3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면 연하기슭의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연안시 보탑구 교구진(橋溝鎭) 라가평촌(羅家坪村)이다. 라가평마을 전경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의 기념비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의 소개글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의 옛집들(학교 교실로 사용되였던 건물로 추정)   로신예술학원을 보고난 답사팀은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 라가평촌으로 갔다. 라가평촌 마을 입구에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우리가 찾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바로 이 마을에 있었던것이다. 관리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비석 아래에는 벽돌무지가 있었고 자전거 수리하는 사람이 거기에 낡은 자전거 바퀴 같은것을 걸어놓고 있었다. 우리는 촬영을 해야한다면서 자전거 수리하는 사람을 밀쳐 버렸다. 비석의 소개를 보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2년 11월, 화북 태항산구에서 설립되였다. 1944년 1월에 학교기관은 태항산구를 떠나 3개월의 행군을 거쳐 4월 7일 연안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천구촌(川口村)에 머물렀다가 9월에 이곳 새로 지은 학교 교사(校舍)에 옮겼다. 학교는 12월 10일 준공되였다. 1945년 2월 5일, 성대한 개교식이 있었다. 주덕, 림백거, 오옥장, 서특립(徐特立)이 개교식에 출석해 축하를 표했다. 학교 교장은 백연(白淵) 김두봉이고 부교장은 박일우였다. 학교는 간부양성과 조선민족의 해방을 취지로 하였다. 맑스주의철학과 정치경제학, 군사학, 일본문제, 조선문제를 비롯한 과목을 설치하였다. 박일우는 초청에 의해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에 렬석하였고 5월 21일 전체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하순 학교기관은 연안을 떠나 조선북부로 옮겨갔다. 지금 옛터에는 돌로 된 토굴집 4개와 부분적인 흙 요동이 남아있다. 비석은 1996년 7월 1일 연안지구문물관리위원회(延安地區文物管理委員會)에서 세웠다고 밝혀져 있었다. 라가평촌 입구로부터 비탈진 흙길을 따라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작은 골짜기에 오붓하게 모여 사는 마을이였다. 산비탈에는 아직도 토굴집이 많았지만 대부분 새로 지은 단층집이였고 간혹 2, 3층으로 된 새 벽돌집도 보였다. 비탈길을 따라 한동안 가노라니 학교 옛 건물이 나타났다. 벽돌로 만든 아치형 요동입구 6개가 있는 집이였다. 문앞에 쓰레기 무지가 있고 대부분 토굴집은 인가가 살고있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정학교 주 교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교사 옛터로부터 조금 더 올라가면 바로 산밑에 이른다. 산 한가운데는 흙 요동 몇 개가 보였는데 지금도 인가가 살고있었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설명한데 의하면 이곳은 교장 김두봉과 서기 박일우가 생활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최룡수 교수) “여기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입니다. 1944년에 완공한 라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입니다. 이 바로 이 마을에 저쪽에도 있고 우에도 군정학교 동굴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앞에 보이는 시냇물은 학교에서 쓰는 물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은 운동장입니다. 이 마을에 조선군정학교에 근 300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항산에서 3개월 걸어서 이곳에 왔고 또 바로 이곳에서 8.15광복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방송을 듣고 광복을 알고 홰불을 들고 대단히 경축했답니다.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부르고 아리랑을 부르며 밤을 새면서 경축했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문정일 로인이 한번 왔다갔다고 들었습니다. 문화대혁명 전이겠습니다. 그후 나는 95년에 항일전쟁승리 50주년 할때 이 마을에 와 보았습니다. 그때는 마을 입구에 군정학교 비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로인분도 만났는데 당시 일을 기억하고있었습니다. 맨 꼭대기에 가본 동굴엔 김두봉 대장과 박일우 서기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 고증은 못했습니다.”   산밑으로는 한줄기의 맑은 샘이 솟아 나고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물통을 가지고 와서 그 물을 긷고있었다. 일찍 조선의용군들이 이곳에서 생활할 때도 샘이 있어 늘 이 물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산밑으로 솟아나는 맑은 물, 그 물을 마시며 학습하고 생활했던 조선혁명가들을 그려보았다. 사실 조선혁명군정학교를 만들때는 이미 항일전쟁 승리를 앞둔 시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곧 패망할것이라고 확신하고있었다. 1910년 나라를 잃고 중국대지를 전전하면서 끝없는 항쟁을 진행해왔던 조선혁명가들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미래 조국건설을 그려보면서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사업했던것이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대 집합장소였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맞이하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싸우던 조선혁명가들이 조직적으로 연안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주요간부들을 비롯하여 드넓은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일제와 싸운던 조선혁명가들이 연안에 모여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재정비를 거치게 되었다.
78    제78회 연안의 사적지 댓글:  조회:4351  추천:1  2015-08-05
섬서성 북부의 중요도시 연안시는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을 마친 홍군부대를 재편성하고 연안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개척해 나갔다. 중국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된후 연안은 각지 항일근거지를 령도하는 중국항일전쟁의 중요한 지휘중심의 하나로 되었다. 연안의 당중앙의 령도하에 여러 항일근거지의 군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배후에서 투쟁을 견지하였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근거지의 인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적의 수송선을 공격하며 근거지를 확대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혁명성지를 찾은 조선혁명가들도 이 위대한 항쟁에 동참했고 연안에서 그리고 여러 항일근거지에서 두려움 없이 싸워왔다. 연안시 서북쪽으로 3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가령(楊家嶺)은 1938년 11월 20일부터 1947년 3월까지 중공중앙 소재지였다. 1935년 10월 모택동이 거느린 홍군 제1방면군과 중공중앙은 승리적으로 장정을 마치고 섬북의 오기진(吳起鎭 오늘의 吳旗縣)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기타 홍군부대도 선후로 섬북에 도착함으로써 2년간 지속된 홍군의 장정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섬북에서 중공중앙은 홍군을 재정비함과 동시에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할 전략적 준비를 다그쳤다. 1935년 12월 섬북에 도착한 중공중앙은 자장현(子長縣) 와요보진(瓦窯堡鎭)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정세와 당의 과업에 관한 중앙의 결정》을 채택하고 국내전쟁을 민족전쟁과 결부시켜 대일작전을 위해 홍군을 크게 확대할 군사방침을 확정하였다. 대회의 방침에 따라 1936년 2월 모택동은 먼저 섬북에 도착한 홍군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동정을 진행하였다.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1937년 8월에 중공중앙은 락천현(洛川縣) 풍가촌(馮家村)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정세와 당의 과업에 관한 결정》과 《항일구국 10대 강령(抗日救國十大綱領)》을 채택하였다. 1937년 1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중공중앙은 보탑산과 이웃한 봉황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그후 적의 폭격을 피해 연안 시교의 양가령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공중앙과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고 중앙기관과 부서들도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다.   양가령, 모택동 거주지 옛집 당중앙 소재지 옛건물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개최지 강당   양가령 사적지는 지금 관광자들에게 개방되여있다. 넓은 정원에는 2층으로 된 건물이 보였는데 건물에는 중앙대례당(中央大禮堂)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곳에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중앙대례당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산언덕에 오르면 동향으로 된 아담한 움집이 보인다. 세 개 요동으로 된 이 토굴집이 바로 모택동이 거처하던 곳이다. 가운데 방은 사무실이고 왼편의 방은 침실이였는데 두방은 서로 통했다. 그리고 다른 한 방은 사무일군의 거처로 사용되였다. 방에는 간소한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낡은 책장이 있었다. 모택동은 바로 이처럼 검소한 곳에서 항일전쟁의 승리와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냈던것이다. 양가령에서 모택동은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를 소집하였다. 1942년 5월 당중앙에서는 문예사업일군들을 모아 연안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모택동이 좌담회에서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을 발표하였다. 좌담회는 당의 사상을 바로 잡고 문예의 계급성을 거론하였으며 무산계급 문예관(文藝觀)을 수립하였다. 얼마후 모택동의 연설은 당풍, 학풍, 문풍을 바로잡는 성세호대한 정풍운동으로 확대되였고 연안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통제하고있는 해방구와 항일근거지로 신속히 확대되였다. 간부에 대한 엄밀한 심사에서 부분적인 억울한 사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조선혁명가 김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양가령에서 모택동과 당중앙은 생산자구운동(生産自救運動)을 전개하였다. 대규모적인 생산운동으로 하여 당중앙과 팔로군은 극심한 곤란을 극복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는 튼튼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였던것이다. 산언덕에 자리잡은 양가령 모택동의 옛집을 보고 다시 중앙대례당을 찾아보았다. 문을 들어서니 습기가 안겨오는 커다란 대청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 걸상들이 줄줄이 늘어선 대청 바른편에는 강당이 설치되여있었다. 정면무대는 《모택동의 기치 밑에 승리적으로 전진하자》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그 아래에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라는 프랑카드가 걸려있었다.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는 중국혁명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회였다. 1945년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연안 양가령 중앙강당에서 소집된 이 대회는 모택동사상을 전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였다. 맑스레닌주의 리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을 통일한다는 사상이 바로 모택동 사상이다. 대회는 대중을 발동하여 인민의 력량을 장대하며 공산당의 령도하에 일본침략자를 타도하고 전국인민을 해방하며 신민주주의 중국을 건립한다는 정치로선을 제정하였다.   (최룡수 교수) “위대한 중국인민해방사업을 이끄는 제7차 대표대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참석한 박일우 동지는 대회 연설에서 지난 력사를 회억하면서 백색지구에는 리철부 동지가 희생했고 쏘베트지역에서는 양림동지가 희생되였구 항일전쟁시기는 주문빈 동지가 희생되였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공산당 계열에서 조선족으로 가장 유명한 분은 바로 이 세분 리철부, 양림, 주문빈을 꼽을수 있습니다.”   조선혁명가 박일우(朴一禹)도 이 대회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지난 력사를 회억하면서 국민당 통치구에서 투쟁했던 리철부동지가 희생되고 쏘베트지역에서는 양림동지가 희생되였으며 항일전쟁시기에는 주문빈동지가 희생되였다고 하면서 이 세사람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한 가장 유명한 조선혁명가라고 말했다. 박일우(1904―?)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중국 동북으로 이주하였고 길림성 룡정에서 공부하였다. 룡정에서 교원으로 지내던 그는 중국 관내에 들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항일전쟁초기에는 진찰기변구 계현(薊縣), 평서현(平西縣) 현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기관 일군들이 몸소 축조한 중앙강당 건물은 1942년에 준공되였다. 건물은 대청과 무도청, 휴계실 3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중앙강당 뒤편에는 3층으로 된 중앙판공청 건물이 있었다. 1층은 회의실과 작전연구실로 사용되였고 2층은 사무일군 집무실이였으며 3층은 정치국회의실이였다. 강당에 서있노라니 항일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신민주주의 새로운 중국의 창건을 기대하면서 벅찬 가슴으로 대회에 출석했던 수많은 대표들의 진지한 모습이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았다. 거기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혁명가들도 있었다.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중국 대지에서 피흘려 싸운 전우들을 그리면서 그들은 조국을 찾고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려는 새로운 열의로 불타있었을것이다. 1937년 9월 연안에 섬감녕 변구(邊區) 정부가 설립되였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장정을 끝낸 후 섬서성 북부지역과 감숙, 녕하를 포괄한 섬감녕 지구를 통제하고 튼튼한 본거지를 만들어나갔다. 섬감녕지구는 서북으로 쏘련과 통할 수 있는 반면 남에는 황토고원이 있고 동쪽으로는 황하가 있기때문에 국민당 군대나 일본군을 방어하기 쉬운 등 지리적인 우세를 가지고있다.   동방 반파쑈 대회가 열렸던 연안 참의회 강당건물앞에서 최룡수 교수(좌)와 인터뷰  동방 각민족 반파쑈 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참의회 강당   연안에 도착한후 당중앙에서는 섬감녕 변구정부를 수립하고 연안에 참의원 대례당(大禮堂)을 축조하고 중요한 대회의 소집지로 하였다. 그리고 참의회(參議會) 소재지로 사용하였다. 강당건물은 1941년 10월에 축조되였는데 보수된 건물은 지금도 연안시 남관가(南關街)에 남아있다. 연안시 남관가에 위치한 대회개최지 연안대례당은 지금 재 보수를 진행하고있었다. 강당 건물은 1947년 해방전쟁시기 국민당에 의해 엄중히 파괴되였지만 1949년에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있다. 남향으로 된 강당은 1,200여명을 용납할 수 있다. (최룡수 교수) “1941년 10월 26일 연안에서 열린 동방 반파쑈대회가 여기서 열렸습니다. 한국 림시정부의 김구, 조선의용대 무정이 주석단 명단에 올랐습니다. 무정이 대회 페막사를 했습니다. 대회당건물은 보시다싶이 지금 수건중에 있습니다.”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참가했던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표대회(東方各民族反法西斯代表大會)가 바로 이 강당에서 소집되였다. 1941년 9월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연안의 각 민족 대표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서는 동방 여러 민족이 반파쑈 대동맹을 결성할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동방 각 민족 반파쑈 대표대회가 갖 축조된 섬감녕변구 참의회 강당에서 소집하게 되였다. 무정을 비롯해 연안에 체류하고있던 조선혁명가들은 윁남, 필리핀, 타이, 인도, 일본, 몽골, 회족, 장족 등 각국, 각민족 대표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대회소집을 창도한 단체의 하나였고 조선의용대는 대회에 축전을 보냈다. 대회는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지미뜨로브, 깐디, 장개석, 모택동, 주덕과 더불어 한국림시정부의 김구를 대회 명예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이 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되였다. 대회에서는 반파쑈 대동맹을 결성하고 37명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이였던 무정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고 후에는 집행위원회 13명 상무위원의 하나로 선거되였다. 무정은 28일에 대회 보고를 하였다. 그는 대회보고에서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민의 혁명투쟁을 이야기하면서 반일투쟁의 중요한 전략적 지위에 있는 조선은 조선인민의 조선으로 될것이라고 하였다. 30일 대회 페막사도 무정이 하였다. 대회에서는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동맹이 결성되였다. 동맹 본부는 연안에 두고 각지에 분맹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대회는 동방 각민족의 항일의용군종대(抗日義勇軍縱隊)를 조직하고 화북전선에 나가 항일투쟁에 참가할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동방 민족학원을 만들어 간부양성에 진력하기로 하였다. 주덕, 오옥장, 림백거, 채창, 파소화(巴素華), 무정, 초삼(肖三), 리연록(李延祿)이 동맹의 지도성원으로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방 여러민족 반일력량을 전부 동원하여 결성된 동방 각민족 반파시스트 대동맹은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특히 중국에서 싸우고있는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에게 있어서 대동맹은 정치면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77    제77회 연안에 모인 조선혁명가들 댓글:  조회:5426  추천:0  2015-02-10
조선민족이 키운 천재적인 음악가 정률성은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 마음껏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혁명의 격정으로 들끓는 연안의 학습과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큰 충격을 주었다. 연안은 일제의 강점구와 국민당 통치구에서는 전혀 볼수 없었던 새로운 기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1939년 봄, 정률성은 연안의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로신예술학원이 설립되자 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는 늘 학우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노을 비낀 보탑산을 바라보면서 혁명과 예술을 담론하군 하였다. 망치를 들고 가는 로동자, 낫을 들고 가는 농민들, 무기를 들고 씩씩한 대렬로 행진하는 팔로군 전사들의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학우인 막야(莫耶)에게 가사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며칠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격정에 넘치는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해 냈다.   보탑산 산봉우에 노을 불타고 연하수 물결우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고 산과 산 금성철벽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승리의 노래 울리누나!   노래는 나래 돋힌 듯 신속히 퍼져 섬감녕 변구 인민들이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연안송》은 중국 8년 항일전쟁에서 정식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래 돋힌 듯 연안으로부터 해방구로, 국민당 통치구로 전해졌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까지 퍼졌다. 노래에 감화된 더욱 많은 열혈 청년들이 수천리 길을 마다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노래는 중국항일전쟁시기에 창작된 불후의 명작중 하나로 되였다.   보탑산의 보탑   조선족 혁명가이며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인 정률성   (권립 교수) “팔로군에는 우리민족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세부류의 혁명가들로 구성됐는데 한부류는 2만 5천리 장정을 거쳐 연안에 온 로홍군지휘원과 전투원들이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양림, 무정, 최정무 등입니다.”   1930년대 중반, 섬북에 모인 조선인 혁명가들은 많지 않았다. 중앙홍군을 따라 섬북에 온 대표적인 조선혁명가로는 양림과 무정이다. 이때 홍군부대는 재편성을 거쳐 양림은 간부단 참모장으로부터 새로 편성된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고 무정은 홍군총부 작전과 과장으로 사업하였다. 1937년을 전후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대표로 장명(김산)이 연안에 도착하였고 적통치구공작회의 대표로 리철부가 연안에 왔다. 그리고 장학량의 동북군 학병련(學兵連)에 있던 지하당원 서휘(徐輝), 광동 중산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조직하던 진광화가 연안에 있었으며 국민당 통치구로부터 연안에 찾아온 혁명청년 정률성도 가장 일찍 연안에 도착한 조선혁명가의 한사람이였다. 홍군 장령이였던 양림과 무정은 홍군의 동정전역에 참가하였다. 황하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양림은 황하기슭의 적을 숙청하던중 장렬히 희생되였다. 홍군동정이후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상승하였다. 당중앙에서는 홍군과 간부들을 새로운 정세변화에 신속히 적응시키기 위해 홍군대학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1일 림표를 교장으로 하고 모택동을 정위로 하며 라서경을 교육장으로 한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이 와요보에서 개교되였다. 장문천, 주은래, 모택동, 엽검영, 라영환(羅榮桓)을 비롯한 당과 홍군의 지도자들이 직접 교수를 맡았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홍군대학 제1기 1과(科)에서 학습하였다. 홍군대학은 3개과로 나누었는데 1과는 고급간부과로서 홍군부대의 사급 이상 간부들이 학원으로 들어왔다. 1과의 36명 학원은 8년 이상의 혁명경력이 있고 전투에서 세번이상 부상을 입은 공헌자들로 선정되였다. 개교 한달후인 7월에 홍군대학은 적의 습격을 피해 보안현(保安縣 지금의 연안시 지단현志丹縣)으로 옮겼다. 보안현에 옮긴후 교명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中國人民抗日軍政大學)으로 고치고 지금의 연안시 이도가(二道街)에 자리잡았다. 학교 원 건물은 언녕 사라졌고 1964년에 그 자리에 학교 전시관을 만들었으나 전시관건물도 문화대혁명기간 페쇄되였다가 지금은 백화상점의 창고로 사용되고있었다.   (권립 교수) “두번째 부류는 쏘련에서 연안으로 온 로간부들입니다. 주덕해와 주춘길 등 열명입니다. 이들은 1939년 모스크바를 떠나 하바롭스크를 거쳐 신강의 우룸치, 란주, 서안을 거쳐 연안에 도착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전국각지에서 연안에 모여든 청년혁명가들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적 점령구에서 온 정률성이나 정면전장에서 온 리유민, 김영숙 등입니다.”        주덕해 주덕해는 1930년 2월에 길림성 룡정시 지신진 성지촌에서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에 기입한 로 공산당원이였다. 그는 7년동안 지하투쟁을 견지하다고 1936년 6월에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가서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 군사지식을 배웠고 2년의 학습을 마친후 연안에 왔다. 주덕해는 연안에서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의 지도원 사업을 맡았다. 그는 부대와 함께 국민당 군대와의 전투에도 참가했고 대생산운동에도 뛰여들었다. 1943년후 주덕해는 당중앙의 결정에 따라 연안 조선혁명군정대학 조직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권립 교수) “정면전장에서 온 우리민족 혁명지사 대부분은 대학 특히는 각 군사학교에서 온 분들이였습니다. 례하면 북경의 문정일동지, 연변의 김학철, 황재연 그들은 모두 남경중앙군사학교에서 연안에 왔습니다. 그들의 일부분은 팔로군 각사에 배치되여 일제의 침략군과 싸웠습니다. 태항산근거지의 류백승사장과 등소평정위가 거느린 129사에도 조선족간부들이 있었습니다. 129사의 사부에 리유민, 정치부에 송기창 위생부에 김영숙이 있었습니다.”   리유민은 상해동제대학을 나왔고 로당원이며 상해에서 지하당사업에 종사한적이 있다. 조직의 명령에 따라 팔로군 129사에 편입된 리유민은 서향전 부사장을 도와 일본군 포로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였다. 중국항일전쟁이 대치단계에 들어서면서 팔로군은 많은 일본군을 포로하였다. 1940년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만 하여도 백여명 일본군 병사들을 포로하였다. 일본어를 할수있었던 리유민은 일본군 포로들을 설득하였다. 일본군 포로들은 팔로군에서 리유민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을 통해 일차적인 교육을 받은뒤 연안에 모였다. 이들은 연안에서 계속 일본반전조직의 교양을 받았다. 1941년 1월에 화북조선청년 련합회가 창립될자 리유민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는 주로 화북지구 조선인에 대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조선의용대 사업을 도왔다. 그후 조선독립동맹이 건립될 때 리유민은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이후 최창익을 위수로한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남 먼저 연안으로 왔다. 이들은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하반기에서 1939년 상반기 기간에 항일군정대학에 등교한 조선학생은 30여명에 달하였다. 1938년 제4기에는 화가인 장진광과 리명 등이 있었고 1939년 제5기에는 한청(韓靑), 리상조, 로민, 김영숙(金榮淑), 김웅(金雄), 서휘, 윤공흠, 리극, 리근산(李根山), 리유민, 한경(韓景), 한락산(韓樂山), 허금산(許金山), 홍림, 리철중(李鐵重)등이 있었다. 그후 1940년 동북간부훈련반에는 주덕해, 방호산(方虎山), 김창덕(金昌德), 리권무, 장복(張福), 전우(全宇), 주춘운(朱春雲), 리림(李林), 진반수(陳班秀) 등이 있었다. 1939년 7월 10일에 항일군정대학은 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졸업한 학생들은 속속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진입해 투쟁하였다. 항일전쟁 승리를 앞두고 항일군정대학 본교는 다시 섬북에 옮겼다가 항일전쟁 승리후 동북으로 진출해 동북군정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학교는 북경으로 옮겨 중국인민해방군 군정대학으로 되였다.   답사팀은 보탑산을 보고 나서 바른편의 청량산에 올라가보았다. 산기슭에는 낡은 주민 가옥들이 있었고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였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차를 타고 청량산 뒤로부터 산에 올랐다. 산정에는 태화산도관(太和山道觀)이 있었다. 도관은 당나라 초기에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도교성지의 하나이다. 도관의 중심 건물인 진무전(眞武殿) 주변에 비석과 크고 작은 절이 있었고 절에는 산신과 재물 신, 성인들을 각기 모셔놓고 있었다. 지금도 한해에 10만 이상의 관광자와 신도들이 이곳을 찾아온다고한다. 산에서 연안을 한눈에 굽어볼수있었다. 바른편에 보탑산이 우뚯 솟아있고 그 아래로 굽이굽이 흐르는 연하가 있었다.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가로세로 널찍한 도로가 뻗어있고 아담한 주민 아빠트가 즐비했으며 이따금 높은 빌딩도 보였다. 섬북 연안, 항일전쟁시기 이곳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던 혁명의 성지였고 수많은 혁명투사들을 양성한 혁명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 군민들과 어울려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하였으며 수요에 따라 무기를 들고 전선으로 나갔던 것이다.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혁명가들의 사적지는 지금까지도 남아 우리를 부르고있었다.
76    제76회 혁명성지 연안 댓글:  조회:5195  추천:1  2015-01-13
황하를 건너자 우리의 몸은 산서성을 떠나 이미 섬서성 경내에 와 있었다. 강 기슭 넓은 모래톱에서 우리는 멀리 벼랑가를 에돌아 황하에 흘러드는 무정하를 보았다. 강은 크지 않았지만 물살이 급했다. 바로 그곳에서 홍군선견대가 도하훈련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씩씩한 홍군전사들이 멸적의 기세로 총칼을 굳게 잡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들려올뿐이였다.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은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에 위치한 작은 산간 마을이였다. 나루터에서 둔덕을 따라 마을에 올라오니 20여 세대가 오붓하게 살고있었다. 농가 마당에는 대추를 말리고 있었고 이따금 집을 나서던 사람들이 호기심 많은 눈길로 우리들을 지켜보군 하였다. 석루현 하가와촌에서 련락을 주었기때문에 마을 촌주임이 나루터에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추(鄒)씨 성을 가진 한 농가에서 물을 얻어 마시면서 잠시 쉬였다. 촌주임은 차는 준비했지만 네 사람이 탈수 없을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현성에서 온 승용차 한 대가 있는데 현성으로 가려다가 기자들이 온다기에 함께 가려고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외간이 승용차를 몰기때문에 세 사람 밖에 더 싣지 못한다고 하였다. 답사팀 일행은 넷이여서 곤난하게 되었다. 마을에는 청간현 소재지로 가는 려객 뻐스 한 대가 있다지만 저녁에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에야 도착한다고하였다. 장밤 뻐스에 시달려야하거니와 옹근 하루시간을 랑비할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엔 반드시 연안에 들어서야 했다. 우리가 호기로 확정하였던 《서정》계획은 황하를 건넌후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했던것이다. 여럿이 론의끝에 승용차에 그냥 비집고 가기로 하였다. 촌주임이 밖으로 나가더니 이윽고 승용차 한 대가 왔다. 상해에서 독일의 제조기술을 류치해 제조한 산타나(Santana)승용차였다. 차체가 비교적 널찍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네 사람이 모두 뒷좌석에 비집고 앉기로 하였다. 오후 3시쯤 차는 하구촌을 빠져나와 청간현 소재지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곳 지형은 황하 동안의 려량산구 보다는 험하지 않았다. 역시 울퉁불퉁한 흙 길에 크고 작은 구덩이도 많았지만 가파르지는 않았다. 셋이 앉는 뒷좌석에 대 남자 넷이 비집고 앉다보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길이 엉망이여서 차가 몹시 흔들렸기때문에 더욱 불편하였다. 젊은 차 주인은 부인과 함께 하구촌 마을의 부모님을 보고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대로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편함을 잊으려 애썼다. 두시간 정도 달려서 앞에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터치면서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저려나는 팔다리를 쭉 펴고 저마다 담배 한 대씩 피웠다. 담배를 끊었던 최룡수 교수마저도 담배를 한대 붙이면서 젊은 사람과 함께 다니니 혈기가 솟는다고 하였다. 그는 지금처럼 “혁명적 락관주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극복 못할 곤난이 없다며 우리의 “서정”도 홍군의 동정 정신을 따라배우는것이라고 말했다. 하루나루 나룻배에서 바라본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 섬북의 민가들 담배쉼을 하고있는 취재팀(오른쪽으로부터 최룡수 교수, 서봉학 주임, 김성룡 기자, 박군 기자) 섬북에 도착한 로농홍군(동정을 앞두고 활영한 력사사진)   우리는 다시 차에 비집고 앉아 현성으로 달렸다. 한시간 정도 달려 현 소재지에 들어서니 날이 어둡기 시작하였다. 청간현 소재지에서 택시를 바꾸어 타고 우리는 편히 연안으로 가게 되였다. 연안은 현 소재지에서 92킬로메터 떨어져 있었다. 차는 평탄한 아스팔트길과 고속도로를 달렸기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다. 석루현으로부터 하가와촌, 다시 하구촌으로부터 청간현까지 오던 일을 생각하면 그냥 “신선 놀음”이나 다름없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우리는 저도 모르게 피곤한 눈을 붙이고 잠들어 버렸다. 긴 려행을 마치고 불빛 휘황한 연안시에 들어선것은 저녁 8시였다. 우리는 전력대주점(電力大酒店)에 자리를 정하고 밤거리에 나가 저녁식사를 하였다.  10월 28일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나 우리는 유명한 보탑산(寶塔山)에 가 보았다. 섬서 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한 연안은 고대에는 부시(膚施)라고 불렀다. 연하(延河)와 남천하(南川河)가 이곳에서 합치고 보탑산, 봉황산(鳳凰山), 청량산(淸凉山)이 둘러있어 연안은 예로부터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였다. 연안이라는 지명은 기원 607년 수조가 이곳에 연안군(延安郡)을 설치하면서 가진 이름이다. 1400여년간 섬북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군사 중심이였던 연안은 중화민족의 발상지의 하나이다. 연안은 또한 중국혁명의 성지이다. 장정을 마친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은 이곳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해냈다. 지금 연안에는 32만 인구가 살고 있다. 즐비한 고층건물과 널찍한 거리는 도시의 현대적인 분위기를 짙게 보여준다. 최근년간 연안시는 혁명유적지들을 보수하고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혁명관광을 적극 확보하고 있다. 특정된 시기에 혁명 전통교양을 받으며 성장했던 중국인들은 지금 생활이 유족해지자 어려서부터 동경하였던 혁명관광을 많이 선호하면서 연안관광을 최선으로 꼽고있다. 길에 나서니 멀리 보탑산과 바른편의 청량산이 보였다. 많은 중국인의 무한한 동경을 자아냈던 보탑산은 연안의 상징이다. 사진이나 영화, 텔레비죤 방송에서 연안이라면 늘 산언덕에 높이 솟은 보탑산과 그 앞을 흐르는 연하가 나오군 하였던것이다. 산에는 적성루(摘星樓)와 가령서원(嘉嶺書院), 봉화대(烽火臺), 마애석각(摩崖石刻)을 비롯한 고적이 있다. 산의 원명은 가령산(嘉嶺山)이였는데 보탑이 있기때문에 보탑산이라고도 한다. 당조시기에 벌써 보탑이 축조되였지만 수차 파괴를 받아 지금 볼 수 있는 탑은 명조시기 복원한 건물이다. 높이가 44m인 팔각 보탑은 모두 9층으로 되였다. 루각식 벽돌 건물이기때문에 탑안의 나무 계단을 따라 탑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탑 우에서 창으로 내다보면 연안시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항일전쟁시기 전국 각지의 수많은 열혈 청년들이 혁명의 성지 연안을 동경하였다. 그들은 연하 기슭에 우뚝 솟은 보탑산과 보탑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혁명의 길에 나섰고 갖은 어려움을 이기며 연안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조선혁명가이며 저명한 음악가인 정률성도 그 속의 한 사람이였다.   정률성(1918-1976)은 1918년 8월 13일, 조선 전라남도 광주시 양림동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명은 부은(富恩)이였다. 천성으로 맑은 목청과 예민한 청각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무척 즐겼다. 음악 선률에 많이 민감하였던 그는 음악으로 성공할 큰 뜻을 품고 사립 신흥중학교를 다닐 때 률성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던 정률성의 맏형 정효룡(鄭孝龍)과 둘째 형 정충룡(鄭忠龙)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투쟁을 계속하였다. 정효룡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중에서 일제의 갖은 혹형을 받다가 1934년에 병사하였다. 국민혁명군 중좌 참모였던 정충룡은 중국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대혁명시기에 희생되였다. 그리고 그의 셋째형인 정의은(鄭義恩)도 의렬단 단원이였다. 이처럼 형들로부터 애국사상과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률성은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왔다.    (권립교수) “정률성은 1933년에 남경에 가서 김약산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다니면서 지하활동도 하고 피아노도 배웟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음악가 신성해를 알게 되였습니다.”   1933년 중국에 온 정률성은 상해를 거쳐 남경에 가서 의렬단이 국민당정부의 도움을 받아 운영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그는 남경, 상해에서 음악을 배웠고 1935년에 남경의 진보적 문화단체인 《5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참가하여 리사로 활동하였다. 문예사 고문이며 간행물 《격류(激流)》의 주필이였던 라청(羅靑)은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이다. 그는 조선혁명가 김규광, 박건웅, 김산, 정률성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라청의 회억에 의하면 그때 정률성은 김규광, 박건웅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과 사귀게 되였고 김규광의 부인인 두군혜는 그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이시기 정률성의 누이 정봉은(鄭奉恩)은 조선혁명가 박건웅과 결혼하였다. 로숙한 이들 혁명가들의 영향으로 정률성은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고 반일투쟁 리론을 알게 되였다. 1937년 정률성은 라청을 찾아갔다가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 선성해(冼星海)를 알게 되였다. 연안시기 유명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으로 명성을 떨친 선성해는 음악적 천부를 가진 정률성을 무척 좋아하였고 두 사람은 깊이 있게 예술을 담론하였고 혁명을 이야기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정률성은 상해에서 대공전지복무단(大公戰地服務團) 선전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항일구국 선전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부상병들을 위문하였다. 상해가 함락된 후 그는 다시 남경에 왔다. 그는 항일의 제일선에 나가 싸울 결의를 다지고 연안에 가려고 했다.    (권립교수) “1937년 지하당조직에서는 정률성을 연안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섬북공학에서 공부하다가 1938년 로신예술학원이 서자 그곳에서 공부하는 한편 불멸의 연안송을 창작했습니다.”  중국로농홍군 4개 방면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서 회사 연안의 청량산 연안의 보탑산  1937년 겨울 정률성은 남경, 상해지역의 진보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연안에 오게 되였다. 항일구국 운동의 지도자였던 중국인 리공박(李公仆)과 두군혜는 그를 지하당 조직에 소개하였고 려비를 마련해 주었다. 정률성은 소개신을 가지고 서안 팔로군 판사처의 림백거를 찾아가 연안으로 오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함께 첩첩한 적의 봉쇄를 뚫고 도보로 혁명의 성지 연안에 와서 섬북공학(陝北公學) 제1기 7대에 배치 받아 공부하였다. 섬북공학 예술훈련반(藝術訓練班)에 몸을 담은 정률성은 늘 대중 가창활동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고 또 천여명 대중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일요일이면 그는 거리나 밭에 나가 사람들에게 노래를 연주해 주군하였다.
75    제75회 양림의 희생지 댓글:  조회:5243  추천:0  2014-11-20
삭막한 황토고원의 하구나루는 수천년간 수없이 많은 길손들을 건네주었다. 언제부터 마을이 생기고 나루가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명줄이나 다름없이 중요하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삭막한 고원에서 억척스레 살아가고있는 이 고장 사람들은 하구나루를 통해 서로 이어져있었던 것이다. 전자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까지도 하구나루는 예나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다. 성깔 사나운 황하를 건너 길손들은 오늘도 나룻배를 타고 오가면서 교류하고있었다. 답사팀은 누런 흙물이 사품치며 흐르는 황하기슭에 서서 하구촌으로부터 오는 나룻배를 기다렸다. 대안에서 발동기를 단 나룻배 한 척이 건너왔다. 우리는 이곳까지 열심히 안내해준 석루현 사업일군들과 작별하고 배에 몸을 실었다.   조선혁명가 양림 황토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황하   황하는 중국의 두 번째로 큰 하천이다. 중화문명이 황하기슭에서 탄생했기때문에 황하는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운다. 황하의 물은 말 그대로 누런 흙물이여서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10여분 뒤 대안에 도착했다. 대안은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이였다. 나루가 있는 대안은 터가 비교적 널찍했다. 하구마을은 그닥 높지 않은 산기슭에 오붓하게 있었다. 하구촌 남쪽으로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가 황하에 흘러들고있었다. 무정하는 남부의 큰 벼랑가를 굽이돌아 흘렀기때문에 벼랑과 하구촌 마을에 막혀 대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권립교수) “동정하려면 우선 황하를 건너가서 염석산이 산서성 황하동쪽에 구축한 또치까 방어진지부터 까부셔야 했습니다. 중앙군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양림의 부대에 맡겼습니다. 양림은 농민으로 가장하고 황하강변에 나가서 우선 도강지점을 확정하고 상세한 작전방안을 세웠습니다.” 하구나루터는 수십리 상류에 위치한 신관(辛關)나루터와 함께 예로부터 주요한 나루터였다. 1936년 2월, 홍군 만 2천명 동정부대가 황하기슭에 도착하였다. 홍군 제15군단은 하류의 하구 나루터로 도강할 준비를 하였고 제1군단은 상류의 신관 나루터로 도하할 태세를 취했다. 이해는 윤달이 들어 2월에 황하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크고 작은 얼음덩이가 물결에 흘러내려 도하에 어려움을 조성해 주었다. 양림은 제15군단 선견대를 거느리고 하구촌에 도착하였다. 75사 참모장인 양림은 사급(師級) 간부였지만 선견대인 75사 223퇀 제1영을 거느리고 이번 도하돌파임무를 맡았다. 그때 홍군은 상급 지휘자가 직접 부대에 내려와 전투를 지휘하는것이 관례였다. 양림은 하구촌 남쪽의 무정하에서 배를 마련하고 도하 훈련에 들어갔다. 큰 벼랑이 막혔기때문에 대안의 적은 홍군부대의 행동을 알지 못했다. 양림은 크고 작은 목선 5개를 확보하였는데 큰배에는 80명이 탈수있었고 작은 배에는 20여명이 탈수있었다. 한편 양림은 농민 차림을 하고 황하 기슭에서 적의 수비 상황을 자상히 정찰하였다. 염석산은 황하 천험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천리 황하를 빈틈없이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예로부터 군사요새이고 유명한 황하 나루터였던 하구를 수비하기 위해 놈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갖춘 100여명 적을 일선에 배치하였고 하가와촌 부근에 수시로 지원할 수 있는 한 개 영의 병력을 포진했다. 적은 또한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산정에 크고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양림은 선견대에서 수영에 능한 40명 돌격대 대원을 선발하였다. 밤을 타서 40명 돌격대원을 먼저 도하시켜 적의 보루를 기습하기로 하였던것이다. 2월 20일 밤, 도하작전이 시작되였다. 돌격대 용사들은 팔에 흰 천을 두르고 등에도 흰 천을 댐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아군이 쉽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권립교수) “1936년 2월 22일 밤, 양림은 선봉영을 거느리고 도하작전에 나섰습니다. 황하를 채 건너가지 못하고 우리의 배들이 적에게 발견되였다. 선봉영은 양림의 지휘하에 기관총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기관총 화력에 대처하면서 끝내 황하를 건넜고 하가와 서북에 등륙하였습니다.”   1936년 2월 22일 밤, 어둠이 깃들자 드디어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양림은 돌격대원들을 앞세우고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돌격대가 탄 배는 대안과 수십메터 거리를 둔 곳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황하기슭을 순라하던 적이 홍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산정의 적 보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토하였다. 양림은 전사들을 조직해 기관총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고 선견대 전원에게 강행도하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 전사들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한편 앞장선 돌격대원들은 신속히 황하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적 보루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보루를 까부셨다. 두려움 모르는 홍군전사들은 적 수비진을 헤치고 순조롭게 강을 건너 하가와촌을 점령하였다. 후속으로 더욱 많은 홍군 부대가 강을 건너왔고 홍군 전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부근의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선견대와 함께 도하한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하가와촌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길목의 적 보루를 제거하고 하가와촌을 수비하는 적 한 개 련을 소멸하였다. 부대는 계속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도하작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경위원과 함께 전장을 점검하면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군에게 제거된 적 보루에 숨어있던 적 병사 한놈이 총을 쏘았다. 적탄은 양림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선견대 영장과 경위원이 달려와 그를 구호하였다. 전사들은 그를 부근의 요동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권립교수) “그들은 상륙하자 포연탄우를 헤가르며 덮쳐드는 적을 물리침으로서 대부대의 도강을 엄호하게 되었습니다. 밤 열시 선봉영 전사들이 적의 종심으로 돌격해들어가고 있을 때 죄악의 적탄이 양림의 복부를 꿰뚫었습니다. 양림은 쓰러졌습니다.”   공화국 상장인 주사제는 회억록에서 홍군의 동정과 동정에서의 양림에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양림의 오랜 전우인 주사제는 당시 홍군 제15군단 참모장으로 전반 동정작전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주사제의 회억에 따르면 양림이 불행히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주사제는 급히 전선으로 달려갔다. 21일 오후 하가와촌에 이른 그는 마을에서 병치료하고있는 양림을 찾아보았다. 양림은 얼굴에 피기가 없었지만 주사제를 보자 전투상황부터 다잡아 물었다. 주사제는 지금 홍군 75사는 의첩진을 공격하고있고 78사와 군단부도 의첩진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튿날이면 석루현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도 이미 황하를 건너 전투를 지휘한다고 알려주었다. 양림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전선에 나가 싸우라고 주사제를 억지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양림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적시적인 치료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그는 38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하구 나루터에서 다시 황하 대안을 되돌아보았다. 드넓은 황하가 거침없이 흐르고 천길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 한 가운데 있는 이름 없는 하가와촌, 그 편벽한 마을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가 양림을 생각하니 마음은 격동되기만 하였다. 청산리 전투와 국민혁명군의 동정, 북벌전쟁, 2만 5천리 장정, 홍군의 동정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훌륭한 군사지휘자로 중국 력사무대에서 활약했던 양림은 끝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러보지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었던것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자식을 잃은 그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항쟁한 그였지만 희생된 후 묘소 하나도 명확히 남기지 못하였다. 두터운 황토가 깔린 무연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그의 뼈가 묻혔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정하게 흐르고 흐르는 강물뿐이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황토뿐이다. 그러나 양림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한 청산리 골짜기에 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홍군대학의 조련장에 그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사강 천험인 교평 나루터에 그의 영웅적 위훈이 남아있고 황하 하구 나루터에 그의 혁혁한 전과가 남아있다. 그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중국혁명의 승리와 결부시켜 전반 약소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피어린 항쟁을 계속 해왔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걸출한 군사가로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그의 빛나는 항쟁의지와 헌신적인 국제주의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며 우리의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될것이다.
74    제74회 하구나루 하가와촌 댓글:  조회:4777  추천:1  2014-10-09
1936년에 있었던 홍군의 동정은 이미 근 70년 세월이 지난 옛일로 되었다. 하지만 두터운 황토와 수천년 흘러흐르는 황하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사람들도 아득한 옛일을 더듬으면서 당시의 치렬했던 전투상황을 이야기하고 홍군 선견대의 도하작전을 지휘한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있다. 치렬한 전투가 있었던 산서성 전산향 하가와촌 전적지를 찾아가는 우리의 마음도 기대감으로 벅차있었다. 그곳에는 황하동안의 적군 보루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홍군이 리용하였던 하구나루터에도 지금 그냥 나룻배가 있어 길손을 건네주고있다. 홍군출신인 임협혜로인과 당사연구원 전보왕로인을 만나고 나서 우리는 석루현을 떠나 전산향 하가와촌으로 출발하였다. 시간은 9시 30분이였다. 찦차 두대가 답사팀 일행과 선전부 일군들을 나누어 싣고 떠났다.   황토고원의 깊은 협곡 험난한 산길 석루현 전산향인민정부 앞에서   현 소재지를 벗어나 차는 좁은 협곡을 따라 달려 얼마후 려량산을 지났다. 석루현은 려량산 서남부와 황토고원 동남변두리에 위치했다. 두시간 달려 의첩진(義牒鎭) 경내를 지나니 메마른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려량산을 벗어나 이미 황토고원에 들어섰던것이다. 하늘밑까지 가없이 펼쳐진 누런 황토를 보는 우리의 마음은 한결 벅찼다. 대자연의 위대함에 숨마저 가빠남을 느꼈다. 수 천년을 비바람에 씻기고 할퀴여 고원은 깊은 골짜기와 황막한 둔덕으로 얽혀있었던것이다. 대자연의 위엄과 지존의 힘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산등성에는 마른 잡초가 바람에 흔들리고 골짜기나 볕이 좋은 산기슭에 이따금 민가들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산에 굴을 파고 만든 요동에서 살았다. 차는 흙먼지를 일구며 좁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따라 내처 달렸다. 길이라고 하지만 수레 길보다도 더 나빴다. 가파르고 굽이가 많았을 뿐만아니라 빗물이 고여서 생긴 웅뎅이가 많았다. 더욱이 산에서 굴러 내린 크고 작은 흙덩이를 피해가야 했다. 차는 가끔 벼랑 우를 달리기도 하였다. 량쪽이 모두 천길 낭떨어지여서 차창 밖으로는 밑도 없는 벼랑만 보일뿐 길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차는 외나무다리 우를 달리는것 같기도 하고 하늘을 달리는것 같기도 하였다. 참으로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운전기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12시가 넘어서 우리는 전산향정부에 도착하였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향정부에는 넓은 마당과 지붕이 평평한 단층 건물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온 몸이 쑤셔났다. 차체가 몹시 흔들렸기때문에 사지가 모두 아파 났던것이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일행은 려행감수를 이야기했다. 이때 텁텁한 사나이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이곳까지 오려면 현지 기사가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전산향인민정부 향장(鄕長)이였는데 성이 곽(郭)씨였다. 곽향장은 먼길을 오느라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은 길이 험하기때문에 타지방 운전기사들의 운전솜씨를 가지고는 여기까지 올수 없다고 장담하였다. 험한 길을 직접 달려온 우리는 일제히 운전기사에게 경탄의 눈길을 보냈다. 이날 점심 우리는 곽향장의 초대를 받았다. 그는 석루현 정부의 련락을 받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우리는 간단한 나무식탁에 모여앉았다. 일상가정에서 볶아먹는 료리 두개와 커다란 나무통에 하얀 밀가루 국수를 가득 담아내왔다. 우리는 제마끔 사발에 국수를 담고 양념장을 떠서 짜장면을 만들어 먹었다. 이곳 사람들의 소박함은 검소한 음식에서도 알아볼수있었다. 곽향장은 이곳 사람들은 요동에서 사는데 습관이 되였다한다. 요동은 겨울에 따스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때문에 새로 벽돌집을 지을 돈이 있어도 사람들은 벽돌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갈 길이 급했기때문에 우리는 전산향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하가와촌으로 향했다. 험난한 려행은 계속되였다. 차는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하가와촌에 이르렀다. 수백명 인구가 살고있는 작은 산간 마을이였다. 석루현에서 하가와촌까지 불과 100여리 길이였지만 우리는 4시간의 간고한 려행끝에 겨우 도착했던것이다. 하가와촌의 진준주(陳俊珠)서기가 산언덕까지 마중 나왔다. 안내일군들이 높은 산언덕을 가리키면서 거기에 염석산부대가 만들어놓았던 보루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기에 우리는 산언덕에 올라갔다. 언덕에서 바라보니 시야가 탁 트였다. 멀리 누런 황하가 굽이쳐 흐르고있었다. 희뿌연 하늘과 멀리 지평선으로 황토고원이 아득히 펼쳐져있었고 발밑으로는 작은 하가와촌 마을이 보였고 굽이쳐 흐르는 황하가 보였다. 우리는 마치 하늘공중에 서서 세상을 굽어보는한 느낌을 받았다. 소개에 따르면 하가와촌 동남쪽 언덕에 돌무덤이 있었는데 옛날 적의 보루였다고한다. 자상히 보면 이쪽에 보루가 하나있고 저쪽에 또 작은 보루가 있어 모두 합쳐 5개가 있었다. 기재에 의하면 한 개 영의 염석산 부대가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적은 하가와촌의 주요 나루터를 방어하기 위해 여기에 주요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으로는 하가와촌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고 또 황하쪽으로 나루터를 통제할수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1935년 12월 25일에 정치국 회의를 열고 동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 4일 회의는 모택동이 직접 사회를 하고 황하 도하준비를 포치했으며 하구나루터 돌파작전을 제15군단 75사에 맡겼다. 현지인들이 소개하는 적 보루의 흔적은 지금 잡초가 무성한 산언덕에 작은 돌담을 형성해 놓고있었다. 허물어진 보루의 기초돌에 흙이 쌓여서 형성된 유적이였다. 이곳에 적은 서로 련결된 보루 5개를 축조하였는데 병력은 수십명 정도였다고 한다. 적의 보루 유적에서 내려다보니 황하기슭 하가와촌 마을과 마을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산길이 한눈에 보였다. 적은 이곳에서 황하 나루터와 하가와 마을을 통제하려했던것이 분명하였다.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다음 조선혁명가 양림은 경위원을 데리고 공격부대가 제거한 적 보루를 점검하던중 적탄을 맞았던 것이다. 홍군전사들이 까부신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점검하고있을 때 한쪽 구석에 숨어있던 적병사가 총을 쏘았던 것이다. 적 보루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산언덕을 내려 우리는 하가와촌에 들어섰다. 하가와촌은 대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가을철이라 빨간 대추가 많이 열려있었고 또 나무 아래에도 많은 대추알들이 널려있었다. 이 고장의 대추는 3000년 전부터 유명해 중국 대추의 발원지라고 한다. 수조와 당조 시기에는 이곳 대추가 공물(貢物)로 황궁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해 따라 때맞지 않게 대추 채집을 앞두고 비가 왔기때문에 많은 손실을 보았다. 빗물에 젖으면 대추는 금방 썩게 되고 땅에 떨어져 버렸던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대추나무 아래에 빨간 대추알들이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고있었다. 진준주 서기는 올해 대추농사가 잘 되지 못해 마을 농민들의 수입이 또 많이 줄어들것이라고 하면서 긴 한숨을 내 쉬였다. 땅에 널린 대추알과 수심에 찬 농민들의 모습을 보는 우리의 마음도 아파났다. 마을에서 우리는 84세인 고귀영(高貴英) 로인을 찾아갔다. 비교적 너른 마당을 가진 한 토굴집에서 살고있었다. 마당에는 대추를 말리고있었고 또 한켠에는 커다란 호박을 무져놓고있었다. 토굴집에 들어서니 광선이 충족하지 못해 앞이 어두웠다. 방안쪽으로 로인 한분이 앉아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고귀영 로인이였다. 로인은 홍군이 동정하던 1936년 2월에 하가와촌에 시집왔다고 하였다.  고귀영로인은 당시 16살이였는데 하가와촌으로 시집온지 얼마 안되였다고 한다. 그날 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은 마음을 조이고 감히 문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한다. 그리고 전투에서 많은 백비군(국민당군)이 죽고 홍군이 승리했다고 한다. 당시 신혼을 보내고있던 고귀영로인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무르익히고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던 총소리를 듣고 자신의 운명을 념려하면서 불안의 장밤을 보냈다고 한다. 새삶의 희망과 불안을 안고 긴긴 장밤을 뜬눈으로 보낸 고귀영로인에게 있어서 도하작전이 있었던 그날은 근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가와촌을 나와 답사팀은 하구나루터로 향했다. 차는 벼랑길을 에돌아 황하기슭의 모래톱을 달렸다. 이윽고 대안의 산간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였다. 마을은 작은 산언덕에 위치했고 그 앞으로 누런 황하가 사품치며 흐르고 있었다. 강폭은 1,000여메터에 달했다.   하가와촌 어구 산언덕에 있는 보루자리 황토고원에서 바라본 황하 대추나무가 많은 하가와촌 하가와촌의 민가(전형적인 토굴집) 황하를 사이두고 하가와촌과 마주한 하구촌(섬서성)   산서성 전산향의 하가와촌과 섬서성 청간현의 하구촌은 황하를 사이두고 마주한 두 산간마을이다. 하가와촌이 위치한 황하 동안은 천길 벼랑이였지만 하구촌쪽은 비교적 낮은 산 언덕이였다. 하구나루터, 바로 이곳에서 홍군도하작전이 진행되였던 것이다. 나룻배를 기다리면서 강기슭에 서 있노라니 당시 전투정경이 머리에 떠올랐다. 홍군 75사 223퇀 제1영의 용감한 전사들이 선발대로 조직되여 저 멀리 대안으로부터 공격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고있었다. 사급 간부였던 양림창모장이 직접 도하작전을 지휘한다하였기에 전사들은 사기가 더 높았을것이다. 그들은 홍군장정시 금사강 나루터를 탈취하고 통안진을 습격하는 전투 지휘자인 양림참모장을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한편 홍군전사들은 양림의 지휘하에 당시 하구촌 곁으로 흐르는 무정하에서 엄격한 도하훈련을 진행했었다. 그들은 황하의 물살과 도하에 수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였고 선견대가 탈 나무배도 대기시켜 놓았던것이다. 만단의 준비를 마친 용사들은 공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있었다. 시계는 찰칵찰칵 출발의 시간으로 달려갔다. 깊은 밤장막이 드리워 주변은 먹물을 부은 듯 캄캄하였다. 오로지 바람소리와 물소리만 들릴뿐이였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숙엄한 표정으로 공격의 시간을 기다렸다.
73    제73회 홍군동정기념관 (하편) 댓글:  조회:4261  추천:0  2014-09-22
산서성의 오지에 자리잡은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에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이 전시되여있다. 그리고 현지의 당사 연구일군들이 당시 홍군의 동정과 도강 작전을 지휘한 양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양림의 묘소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일이다. 중국혁명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홍군동정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가 양림, 그는 희생된후 현지인과 홍군전사들에 의해 매장되였지만 지금 그 구체적인 위치를 알고있는 사람은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석루현 당사연구원 리명생과 류원(오른쪽 첫번째와 두번째)   홍군동정기념관에서 석루현 당사연구판공실 리명생(李明生)연구원과 류원(劉源)연구원이 우리에게 홍군동정과 양림에 관련해 이야기 해주었다. (리명생) “당사에서 홍군의 동정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있습니다. 홍군의 동정은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중국혁명사에서 큰 전환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동정을 통해 홍군은 크게 장대되였고 항일통일전선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황하의 하구나루터는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요새입니다. 편벽한 곳이기 때문에 도하작전후 쉽게 발을 붙이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때는 2월이였습니다. 황하에는 크고 작은 얼음이 흘러내렸습니다. 홍군의 도하장비를 본다면 현지인들이 만든 나무배였는데 큰 배에는 80명이 탈수있었고 작은 배는 20여명이 탈수있었습니다. 홍군 주력부대는 세 개 나루터를 리용해 도강했습니다. 양림이 소속된 15군단은 하류의 하구나루터로 도강했는데 전투가 가장 치렬하게 진행되였습니다.” (류원) “홍군은 2월 20일밤에 도하했습니다. 섭영진의 손목시계를 표준으로 작전을 개시했는데 밤사이에 도강을 끝냈습니다. 75사 223퇀 제1영이 선견대로 확정되였습니다. 양림은 수영을 잘하는 40명 용사들을 뽑아 5개의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필사적(양림)은 당시 사 참모장이였는데 제1영에 와서 40명 용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상급 기관의 지도자가 일선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필사적은 선두부대로 가장 먼저 황하를 도하하고 또 선두부대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필사적은 치렬한 접전에서 희생된 것이 아니라 전투가 끝나 전장을 둘러볼 때 또치까안 숨어있던 적의 총에 맞아 희생되였습니다. 필사적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함이 유감입니다.” 석루현의 리명생연구원과 류원연구원은 동정 전투경과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가 있었지만 양림의 생애나 기타 투쟁경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다만 양림이 지휘한 도하작전 경과에 대해서 자상히 알고있을뿐이였다. 그들은 양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와 자료가 있으면 기념관에 제공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홍군동정기념관을 참관한후 답사팀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에 모여 답사코스를 검토하였다. 석루현 선전부 일군과 태원의 리세박주임이 함께 현지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석루현에서 우리는 양림이 희생된 곳과 황하 도하작전 전적지를 답사해야 했다. 그곳은 석루현 전산향(前山鄕) 하가와촌(賀家窪村)에 있었다. 계획대로 한다면 하가와촌을 보고나서 곧추 섬북 연안으로 가야했다. 우리가 계획을 설명하자 선전부 일군들이 모두 난색을 표했다. 우선 하가와촌까지 가려면 100여킬로메터의 험한 산길을 가야했고 다음으로는 다리가 없기때문에 황하를 건너기 어렵다는것이다. 그리고 황하를 건넌 다음 나루터로부터 섬서성 청간현(淸澗縣)까지 역시 수백리 험한 산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차만 있으면 어떤 길이라도 다 갈수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가와에는 하구 나루터가 있으니 나룻배로 강을 건널수 있고 거기에서 다시 청간현을 거쳐 연안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단순하였다. 하가와촌까지 산길은 석루현으로 올 때보다 더욱 험하기때문에 승용차로는 도저히 갈수 없다고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전에 차가 망가져 버린다는것이다. 게다가 석루현 선전부 일군들은 하가와까지는 안내할수 있지만 섬서성 경내로 갈수 없기때문에 더 안내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강을 건넌 다음 하구촌(河口村)에서 청간현으로 가는 차를 구할수 있을는지도 문제되였다. 현지 상황을 듣고 나서 이번엔 우리가 입을 딱 벌리고 난색을 표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다고 답사를 그만 둘수도 없는 일이였다. 이때 리세박주임이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하가와촌까지는 석루현에서 차를 내여 안내하도록 하고 다시 석루현에 와서 좋은 길로 연안에 갈 방법을 생각하자는것이다. 선전부에서는 산길을 달릴수 있는 짚차(jeep) 한 대밖에 구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리세박주임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석루현에 다시 와서 연안으로 가는 방도를 찾아보았지만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만한 방법은 없었다. 곤난을 극복하고 원 계획대로 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였다. 다만 년로한 최룡수교수의 건강이 걱정되여 최교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뜻밖에 최교수도 하가와촌에서 연안으로 직접 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홍군은 일찍 적과 싸우면서 두 발로 동정을 했는데 차까지 있는 우리가 무엇때문에 연안까지 못가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찍 홍군이 동으로 황하를 건너 동정했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서정》한다며 호기를 보였다. 년세가 많은 분이 이렇게 나서자 모두가 동감을 표했다. 나는 선전부 일군과 함께 실행 가능성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황하는 나루배로 건너기로 하고 황하대안의 하구촌과 련락을 취해 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에게 청간현으로 가는 차도 미리 준비하도록 부탁해 줄것을 청했다. 우리가 원 계획을 고집하니 선전부 일군들도 들어줄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구촌과 련락을 달아 놓고 차를 준비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위대한 서정”계획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길이였는가는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밤늦게까지 검토를 마치고 자리에 들었다. 산간지대이기때문에 석루현의 가을은 추웠다. 의복을 더 껴입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10월 27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 선전부에서 배치한 찦차 한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우리는 임석평부현장을 찾아가 그의 부친인 임협혜(任俠惠) 로인을 만나보았다. 임협혜로인은 일찍 홍군의 동정에 직접 참가한 경력을 가진 분이였다. 86세 고령인 로인은 풍을 약간 맞아 손을 떨고있었고 청각도 좋지 못했지만 머리는 명석하였다. 우리는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질문을 할수 있었다. 로인은 홍군부대가 황하를 건너 석루현에 오자 홍군부대에 입대하였다 한다. 그는 부대를 따라 진격할 때 부대의 고위 간부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삐스티에 대해 알게 되였다고 한다. 로인은 하가와촌에서 희생된 홍군 장령이 삐스티라고 하면서 그는 조선사람이라고 하였다. 임협혜로인에게서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그는 삐스티가 희생된후 홍군은 황하를 건너 그의 시신을 섬북근거지로 가져다 이장하였다 한다. 우리가 양림의 묘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거듭 물었지만 로인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희생자들은 보다 안전한 섬북근거지로 옮겨가 장례를 치렀다고 할뿐이다. 석루현을 떠나면서 우리는 또 전보왕(田補旺)이라는 로인을 만나보았다. 전보왕로인은 당사연구일군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분이였다. 그는 양림의 시신을 멀리 수송하지 못하고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無定河) 기슭에 안장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치렬한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있었기때문에 멀리 수송할수 없어 부근 근거지의 안전한 마을에 안장했다는것이다.     석루현 로홍군 임협혜로인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오른쪽)와 로홍군 입협혜 로인   석루현 당사연구실 원 주임 전보왕(오른쪽 세번째)   양림의 시신은 하가와촌에 안장했다가 동정을 마친 홍군이 철수할 때 다시 황하대안의 하구촌에 이장하였다. 양림의 전우였던 주사제상장의 회억록을 많이 연구하였던 전보왕로인은 주사제는 양림을 혼자 적후에 둘수 없다고 하면서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인 하구촌에 이장하였다고 했다. 해방후 주사제상장은 양림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이 고장을 찾아왔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기때문에 그 묘자리를 찾지 못했다 한다. 참 유감스러운 일이였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알길이 없었다. 중국공산당내 조선인으로서는 최고급 간부였고 또 훌륭한 군사 전문가였던 양림, 학계에서는 지금도 그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묘소를 찾아 기념비라도 세워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우리의 심정은 마냥 서글펐다. 
72    제72회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 (상편) 댓글:  조회:5876  추천:1  2014-07-14
조선민족의 자랑찬 아들이며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고위 군사간부였던 양림은 1935년 10월에 홍군 주력부대와 함께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홍군간부퇀 참모장으로 장정에 참가한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그는 홍색간부퇀 전사들을 거느리고 금사강의 천험을 돌파하였고 직접 돌격대를 거느리고 적의 요새인 통안주를 점령하였다. 홍군의 위대한 2만 5천리 장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양림은 섬북에 도착한후 새로운 임무를 맡고 홍군의 동정전투에 참가하였던것이다. 답사팀이 5시간의 긴긴 로정을 거쳐 석루현 소재지에 도착한 것은 2003년 10월 26일 오후였다. 석루현의 홍군동정기념관 홍군동정기념관 정면 기념관앞 꼬마나팔수 동상   석루지구는 옛날 굴지(屈地)라고 했다. 편벽하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신석기시대에 벌써 이곳에 인류가 자취를 남겼다. 노예사회인 상조(商朝)와 춘추시기, 이곳에 비교적 큰 도시가 형성되였고 수나라이후부터 석루현으로 불리웠다. 현지 당사일군들은 이곳이 강태공(姜太公)이 출생한 곳이라고 했다. 《강태공의 낚시》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긴 강태공이 바로 중국력사에 나오는 유명한 군사가, 정치가로서 주무왕을 도와 상주왕(商紂王)의 폭정을 뒤엎은 자아(子牙) 강상(姜尙)이다. 기재에는 출생지가 동해 해빈(海濱)이라고 하지만 수천년전의 일이기때문에 강상의 출생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석루현이 강상의 출생지라는 여러가지 근거도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증거도 유력하지 못하다. 다만 이곳은 상조로부터 주조로 바뀌는 중국력사 격변기의 주요무대였다는것만은 출토된 문화재와 여러 기재로부터 증명되고있다. 석루현 소재지로 굴산하(屈産河)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있었다. 강은 이곳으로부터 50킬로메터떨어져있는 황하에 흘러든다고 한다. 부근 산중에 굴담천(屈潭泉)이라는 유명한 샘이 있어 현성의 수원을 보충하고있다. 그리고 석루현은 음료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수도물을 쓰지만 향과 촌에서는 아직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쓴다. 빈곤현인 석루현은 인구 당 한해 수입이 인민페로 1,000원도 안된다 한다. 현 소재지라고하지만 거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고 난전이 질서 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액세사리와 야채를 팔고 사고하였다. 그러나 흙먼지가 많아 모든것이 어지러워 보였다. 우리는 현정부 부근의 현빈관(縣賓館)에 짐을 풀고 부근 음식점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을 리용해 홍군동정기념관에 가보기로 하였다.   (권립교수) “1935년 10월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 양림동지는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넉달이 지나 홍군은 항일최전선에 나가 화북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동정할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동정하려면 우선 황하를 건너가서 염석산이 산서성 황하동쪽에 구축한 또치까 방어진지부터 까부셔야했습니다. 중앙군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양림의 부대에 맡겼습니다.”   1935년 12월, 홍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후 중공중앙은 와요보에서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금후의 작전방침을 연구, 포치하였다. 당시 국민당군은 세면으로 섬북을 포위하고있었다. 남부와 서부는 장학량의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이 있었고 염선산이 동부 산서에 둥지를 틀고있었다. 그리고 진성이 거느린 장개석의 직계부대 3개 군이 락양부근에 포진하고 수시로 섬북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있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성에서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광범한 인민들에게 항일구국 강령을 전파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홍군은 항일사상을 가진 장학량과 양호성 부대와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하면서 협조적으로 지냈기때문에 남부와 서부를 공격할 리유가 없었다. 그리고 락양쪽으로 장개석의 직계부대를 공격하면 기회를 빌어 섬북지역에 더욱 많은 직계부대를 파견할 구실을 장개석에게 주게 된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산서에 둥지를 틀고있는 염석산을 공격하는것이 홍군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이였다. 중화문화의 발상지인 황하는 내몽골 경내에서 큰 굽이를 돌아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섬서성과 산서성을 량분한다. 황하 동안은 염석산의 천하였다. 북벌전쟁시기부터 염석산은 산서를 자기의 사유지로 간주하고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산서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북벌전쟁후 장개석, 풍옥상과 수차 큰 충돌을 일으켰다. 중원대전이 있은후 염석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굴복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있어 장개석도 산서성을 호락호락 넘보지 못하고있는 상황이였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소식을 접한 염석산은 홍군을 막기 위해 황하와 황하기슭 려량산의 지세를 리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10만 병력을 모아 수비진을 쳤다. 1936년 2월,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황하기슭에 도착하였다. 이때 황하의 얼음은 벌써 녹기 시작하여 크고작은 얼음쪼각이 물에 떠내리고있었다. 그리하여 배를 리용해 도하하려는 홍군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던 조선혁명가 양림은 직접 도하 선견대를 거느리고 하구(河口) 나루터에서 황하를 건넜다. 황하를 건너 계속 적과 싸우던 양림은 복부에 적탄을 맞고 황하 기슭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던것이다. 2월 20일, 도하를 시작한 홍군 제1군단과 제15군단은 적의 수비진을 헤치고 신속히 진격하여 23일에는 석루현을 포위하였다. 이틀간의 전투를 거쳐 홍군은 석루현을 점령하고 많은 적을 소멸하였으며 1,200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3월 하순 홍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려량산 내지로 진격하였다. 염석산의 잔여부대를 소멸한 홍군은 지주와 토호를 타도하고 빈곤한 백성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면서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1936년 4월, 장개석은 직계부대를 산서에 파견해 남부로 공격하였고 태원의 염석산도 주력부대를 파견해 북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이 시기 장학량과 양호성, 염석산은 모두 대표를 파견해 중국공산당 대표와 비밀리에 접촉하고있었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항일 민족통일전선 주장은 장학량과 양호성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항일에 뜻을 둔 그들은 섬북을 전력으로 공격하려하지 않았다. 염석산도 홍군의 동정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산서 경내에 들어온 장개석 직계부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홍군이 철수하면 장개석 직계부대를 산서에서 축출할수있다고 생각한 그는 홍군과 타협하려하였다. 이를 감안한 모택동은 홍군에게 포로된 염석산부대 곽등영(郭登瀛)퇀장을 직접 만나보았다. 그는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하자》는 내용의 비밀서한을 곽등영에게 주면서 염석산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5월 5일까지 다시 황하를 건너 섬북으로 개선하였다. 75일간 지속된 홍군의 동정은 비록 예기한 목적을 전부 실현하지 못했지만 정치와 군사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홍군은 국민당군 7개 퇀을 소멸하고 4,000여명을 포로했으며 실전에서 홍군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산서 수비에 급급한 염석산이 섬북으로 진출한 부대를 철수했기때문에 섬북근거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수 있었다. 홍군은 동정에서 8,000여명의 병사를 새로 흡수하고 30여만원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홍군과 근거지의 력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선서성 20여개 현에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의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고 일부 항일유격대와 유격구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후 려량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밑걸음으로 되였다. 하북성 석루현의 사학자들의 노력과 현정부의 유력한 지지로 홍군동정기념관이 축조되였다. 석루현 소재지가 위치한 곳에서 굴산하 하곡(河谷)을 지나면 산비탈에 축조된 하얀 신식 건물이 보인다. 흰 벽과 록색 기와로 된 그 건물이 바로 새로 지은 홍군동정기념관이다. 가릴것 없이 황토를 드러낸 산은 거칠고 조잡하게 느껴졌다. 기념관 주변에 푸른 솔을 심었지만 전반 산의 황막한 분위기를 지울수 없었다. 건물 기와를 록색으로 한것도 리해가 되였다. 나무가 적은 산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보태주려는 의도였을것이다. 홍군동정기념관은 1936년 모택동이 홍군 제1방면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로 진격한 력사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축조된 성급 기념관이다. 건축면적은 11,000평방메터, 주건물의 면적은 1,100평방메터였다. 전시청과 기념비 두 부분으로 나뉘여진 기념관 건물은 조형이 우아했고 전시청 뒤에는 화단과 기념비가 있었다. 돛 모양으로 된, 높이 솟은 하얀 대리석 기념비는 멀리서 바라보면 만경창파를 헤치며 달리는 돛배 같았다. 기념비 높이는 19.36메터 인데 홍군동정 시간인 1936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임석평부현장을 비롯한 석루현 사업일군들과 함께 흙 길을 따라 하곡을 건너 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정면에는 공격의 나팔을 부는 꼬마 홍군전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기념관에 들어서니 커다란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에는 붉은 깃발과 홍군 동정의 노래 악보가 있었으며 동정에 나선 홍군 부대의 조직 편성표가 있었다. 해설원이 첫 전시청으로부터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홍군동정의 노래 악보 홍군 15군단 편성표, 75사 참모장으로 필사제가 바로 양림이다 기념관의 양림 약력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중앙홍군 전시청에는 75건의 유물과 70여부의 문서자료, 190여장의 력사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었다. 그중에는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한 전문소개도 있었는데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양림 사진과 약력이 있었다. 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여있었다. 《삐스티 소전. 삐스티(1898-1936)는 양녕, 양림이라고도 하며 조선인이다. 1919년 중국에 망명했고 길림 주하(珠河 지금의 흑룡강성 상지현 尙志縣)에 있었다. 1921년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하고 졸업한뒤 황포군관학교 구대장으로 있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해 11월에 엽정 독립퇀의 제3영 영장으로 임명되였다.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9.18사변후 중공만주성 군위서기를 맡았다. 1932년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사업하다가 장정할 때 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있었다. 섬북 쏘베트구역에 도착하여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다. 1936년 2월 21일 동정 도하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나이가 38세였다.》 전시청에는 또 홍군 동정부대 편제를 도표로 작성되여있었다. 홍군 제15군단 군단장은 서해동(徐海東)이였고 산하에 81사, 75사, 78사를 두었다. 15군단의 주력인 75사 사장은 장소동(張紹東)이고 참모장은 삐스티였다. 제15군단은 장국도의 제4방면군 부분적 부대를 토대로 신병을 확충해 편성한 부대였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부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또 신병을 훈련시켜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해야했다. 이때 모택동과 주은래는 믿음직하고 신병훈련 경험이 풍부한 양림을 이 부대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줄곧 주은래의 신뢰를 받아온 양림은 군관학교 출신일뿐만 아니라 홍군대학 총교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고 서금의 중앙쏘베트지역에서도 많은 훌륭한 간부를 양성해 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15군단의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석루현 임석평 부현장(오른쪽) 석루현 당사연구일군들(가운데와 오른쪽) 석루현에 홍군동정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적극 진력해왔고 또 이면의 연구를 했던 임석평 부현장도 조선혁명가 양림에 대해 높이 평가해주었다. (임석평) “1936년 홍군이 동정할 때 홍군 15군단의 75사 참모장으로 있던 필사적은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홍군의 선견부대를 거느리고 황하 천험을 돌파하여 산서 경내로 진격해왔습니다. 홍군은 동정에서 5천만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았고 8천명 산서성 자녀들이 홍군에 참가해 홍군부대가 크게 확대되였습니다. 때문에 동정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력사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집니다. 조선인 양림은 홍군 도하작전을 완수한후 장렬히 희생되여 나젊은 생명을 바쳤습니다. 중국인민은, 현지 인민은 그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기념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웅 양림을 전시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제자를 써주었습니다. 조선인 양림은 중국혁명에 아주 큰 기여를 했습니다.”
71    제71회 좌권현을 떠나 석루현으로 댓글:  조회:4914  추천:0  2014-05-23
항일전쟁시기 자랑찬 우리 조선혁명가들이 조선청년련합회를 창립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하였던 오늘의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 아직도 옛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거대한 태항산기슭의 홍복사 옛터와 작은 언덕에 이름없는 조선의용군 무명렬사의 묘소....마을은 그지없이 적막하기만 하였다.   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옛집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예나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골목길 너른 마당에 모여 삼삼오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조선혁명가와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바로 이 마을 선량한 사람들과 군민의 정을 나누면서 고락을 함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상무촌의 홍복사 옛터와 조선의용대 무명렬사 묘지를 답사하고 다시 마을을 빠져 나오다가 마을 중심에 《로신예술학교옛터(魯迅藝術學校舊址)》라는 낡고 간판 하나가 흙벽에 붙어있는것을 우연하게 발견하였다.   너무 낡아 글을 알아보기도 힘든 간판이였지만 유명한 로신예술학교가 이곳에 있었다는것을 발견하여 여간 기쁘지 않았다. 팔로군이 세운 로신예술학교는 수많은 예술인재를 양성한 곳으로서 조선혁명가이며 음악가인 정률성이 다녔던 학교이다.   로신예술학교는 1938년에 연안에서 창설되였다. 예술인이며 또한 전사였던 학원들은 수요에 따라 전선에 나가기도 하였는데 많은 학원들이 팔로군이 개척한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오게 되였다. 그들은 상무촌에 주둔하면서 소규모의 로신예술학교, 위생학교를 만들어 계속 학습하고 싸웠던것이다. 연안에 있는 로신예술학교에서 공부하던 정률성도 수요에 따라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와서 한동안 활동한적이 있다. 그러니 아마 정률성도 상무촌의 로신예술학교에서 활동했을것으로 생각되였다.   간판이 붙은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을 가진 비교적 괜찮은 벽돌, 기와 건물이 나타났다. 지금은 민가로 사용되고있는듯 정원에는 만발한 화초와 커다란 옥수수 타래가 걸려있었다.   호기심 많은 동욕진 어린이들이 촬영장면을 지켜보고있다   동욕진의 로신예술학원 옛터(일부 학원들이 단련을 목적으로 이곳 태항산 근거지에 와서 한동안 활동하였음)   마을어구에서 한담하는 마을 녀성들   좌권현 동욕진 진정부대문     우리는 마을을 빠져나와 다른 답사지인 마전으로 떠났다.   좌권현 마전진은 현소재지에서 45킬로메터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차는 계속 남으로 달려 태항산 대협곡을 빠져나왔다. 앞에는 넓은 평지가 나타났고 멀리 민가들이 보였다. 마전에 도착한것이다.   태항산 산줄기가 담처럼 둘러있어 마전의 기온은 다른 곳 보다 조금 높았다. 일조가 좋은데다가 청장하가 수원으로 되여 이곳에서는 논농사까지 하고있었다. 마전은 《태항산의 작은 강남》으로 불리우고 있다. 수려한 마전의 풍경에 도취되여 있는데 차는 벌써 팔로군 총부 기념관 앞에 멈춰섰다. 흰 담으로 둘러싸인 기념관에 들어서니 아늑한 정원이 있었고 량쪽으로 벽돌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총부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유적지에는 20여개 방이 있었는데 각기 팔로군총부기념관, 팽덕회장군 및 좌권장군 기념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그리고 총부 각 부서 집무실과 경위실이 있었다. 기념관과 전시실에는 항일전쟁시기의 많은 사진과 유물이 있었다.   팔로군 총부 기념관은 마전진 최남단에 위치했다. 그 옆에는 등소평이 살던 옛집이 있었고 마을 중심에 중국공산당 북방국 옛터가 있었다. 마전진 동북쪽으로 멀리 산봉우리들이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좌권장군이 희생되였다는 십자령이라고 한다.   팔로군 전방 총사령부와 중공중앙 북방국은 5년간 마전에 있었다. 주덕, 팽덕회, 좌권, 류백승, 등소평, 서향전, 섭영진, 진의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 당과 군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고 태항산의 항일투쟁을 령도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작은 연안》이라고도 했다.   저녁녘에 우리는 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차는 다시 207국도를 따라 북상하여 태항산 대협곡을 지나 좌권현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오전 9시에 우리는 좌권현을 출발하여 산서성 소재지 태원으로 떠났다.   소강남으로 불리우는 태항산의 마전진 전경   마전의 팔로군 본부 기념관   기념관 정원   기념관 일각   기념관실내(팽덕회 부사령원의 침실)   작전지도   기념관 외벽     좌권현에서 태원까지는 2시간 남짓이 가야했다. 좌권현 선전부에서 승용차를 내여 우리를 태원까지 보내주었다.   태원은 분하(汾河) 기슭의 분지에 위치하였다. 산서성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 중심인 태원시는 수천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일찍 춘추시기에는 진양(晉陽)이라고 불렀으며 조나라 도읍지였다.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나서 태원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방송국부터 찾아갔다. 중앙인민방송국 태원기자소의 리세박(李世璞)주임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59세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이는 분이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방송국 부근에 호텔을 정했다. 식사를 마치니 오후 3시가 되였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반중건중한 시간이였다.   리세박주임은 오후에 회의가 있다며 나갔고 최룡수교수는 피로했기때문에 호텔방에서 휴식하였다. 우리는 그냥 앉아 있을수 없어 남은 시간에 관광이나 하려고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태원의 명승인 진사(晉祠)를 보기로 했다. 택시를 잡고 거리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시 중심에서 25킬로메터 가면 진사라고 하였다.   진사는 태원시 서남부 현옹산(懸甕山) 기슭에 축조된 사원과 원림이 결부된 고대건축이다. 진사의 유래는 아득히 먼 기원전 주나라시기에서 기인된다. 기원전 11세기 주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제후(諸侯)를 봉했는데 주무왕(周武王)의 차남 숙우(叔虞)가 당(唐)나라 땅을 분여 받았다. 바로 지금의 산서성 지역이다. 당나라에 온 숙우는 진수(晉水)를 리용해 농토수리에 전념하면서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때로부터 700여년간 이 지역에는 재앙이 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유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릴수 있었다 한다. 북위(北魏)시기에 와서 누군가 숙우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당숙우사(唐叔虞祠)》라 하였다. 그후 이곳을 흐르는 진수에서 《진》자를 따서 《진왕사(晉王祠)》로 고쳐 불렀는데 사람들은 그냥 진사라는 약칭을 쓰고있다.   진사에 도착하니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고 광장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줄지어 있었다.   진사에는 전당과 정자, 루각, 고목이 많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고목이 숲을 이룬 사이로 정교하게 축조된 옛 루각과 전당이 나타났다. 진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성모전(聖母殿)이다. 성모전은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인 송(宋)나라 시기 축조된 커다란 전당이였다. 전부 나무로 축조된 전당 건물앞에는 8개 나무 기둥이 있었는데 기둥마다에 나무로 조각한 룡이 있었다. 나무기둥을 맴돌며 치솟아 오르는 룡의 형상은 아주 생동하였다. 그리고 성모전에는 33개 인물조각상이 있었다. 흙으로 빚은 성모(聖母)와 시녀 군상은 인물의 형태가 각이(各異)하고 표정이 다양하여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이들 군상을 보노라니 녀인들의 명랑한 웃음소리와 다정한 속삭임, 은은한 탄식 소리를 금시 듣는것만 같았다.   성모전 앞에는 금인대(金人臺)가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갑옷차림의 철제 조각상 네 개가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힘찬 팔뚝을 쳐들고 여러자세로 서있는 이 네 철제 조각상을 《금인(金人)》이라고 하였다. 위풍당당한 4개 금인은 성모전의 부르럽고 온화한 녀인들의 조각상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였다. 4개 금인 가운데서 서남쪽의 금인이 1097년 송나라 때 만들어진것으로 력사가 가장 유구하였다.   진사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았다. 맑은 호수물과 정교한 정자, 아름드리 고목, 다양한 화초들은 마냥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태원의 명소, 짐사 입구   저녁 식사후 기자소의 리세박주임과 함께 석루현(石樓縣)의 임석평(任石平)부현장과 태원시 당사연구실의 거문휘(巨文輝)처장을 만났다. 우리는 석루현에 가서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지를 답사할 뜻을 이야기했다. 임석평부현장은 래일 석루현에 돌아가니 함께 가자고 열정적으로 요청하였다. 그리고 석루현에 홍군동정기념관(紅軍東征紀念館)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저녁 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이튿날 만나기로 하고 헤여졌다.   2003년 10월 26일에 우리는 석루현으로 떠났다. 조선혁명가 양림의 싸웠던 전적지를 찾고 홍군의 동정기념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태원 기자소의 리세박주임도 승용차를 가지고 함께 떠났다. 리세박주임과 임석평부현장이 각기 태원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는걸 기다리다 보니 오전 10시가 되여서야 출발하게 되였다.   우리는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태원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따라 곧추 서쪽으로 달렸다.   석루현은 려량산의 서부 황하 동안에 위치하였다. 4개 진 10개 향에 근 10만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석루현은 황토고원의 한 부분으로서 지세는 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다.   동부는 려량산맥의 한 줄기인 통천산(通天山)이 남북으로 뻗어있다. 해발 2000m에 달하는 통천산의 주봉은 괴석이 층집처럼 쌓여 석루라는 이름을 가졌다한다. 석루현 서부는 구릉지대이다. 두텁게 덮인 황토는 빗물에 씻겨 이곳에 수많은 골짜기를 형성해놓았다.   한시간 정도 달리니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임석평부현장은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면 안되기때문에 지름길로 가자는것이였다. 계속 고속도로를 달려 류림(柳林)에 간 다음 그곳에서 남하하면 석루현에 갈수있지만 길을 너무 에돈다고 했다. 그렇게 가면 길은 괜찮지만 저녁에야 도착할것이라고 하였다. 도로상황을 모르는 우리는 그냥 따르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석루로 가는 길이 그처럼 엉망일 줄은 좀 더 가서야 알게 되였다.   이윽고 차는 흙 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도처에 두터운 황토가 쌓여있었는데 차가 지나면 먼지가 연기처럼 일어 하늘을 가린다. 게다가 이따금 길에 널린 커다란 흙덩이가 승용차 밑바닥에 긁혀 요란한 소음을 내기도 하였다.   한적한 곳이기때문에 석루현으로 가는 차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 오거나 지나쳐 버리는 차만 있으면 아주 위험하였다. 길에 다른 차가 있으면 그 차가 일으키는 먼지가 뒤덮여 지척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때문에 먼지에 가려 차가 어느 나무에 가 부딪칠지 어느 바위와 충돌할지 모를 일이다. 다행이라면 임석평부현장의 기사는 이 길을 다닌 경험이 풍부한것 같았다. 그냥 감각으로 앞의 차를 지나치거나 마주오는 차를 피해 달렸는데 기사의 운전솜씨에 저도 몰래 감탄이 나왔다.   산을 몇개 넘으니 구릉지대가 나타났고 산의 나무도 점점 적어졌다. 이따금 산간마을이 보였는데 길가나 골짜기의 평지에 집 몇채가 있었을뿐 대부분 마을사람들은 산에 굴을 파고 만든 토굴집에서 살았다.   5시간의 긴긴 려행을 거쳐 이날 오후 우리는 2만여명의 인구가 살고있는 석루현 현성에 도착하였다.   중국의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기 직전에 2만 5천리 장정을 마친 홍군은 황하를 건너 동정을 진행하였으며 산서성 서부인 석루현을 공략하고 항일구국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동정의 선견대를 거느리고 황하도강작전을 성공시킨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이 석루현의 홍군동정기념관에 있었던것이다.
70    제70회 동욕진 상무촌의 사적지 댓글:  조회:4851  추천:0  2014-04-14
1941년 조선혁명가들은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국민당 통치구로부터 북상한 조선의용대 주력을 중심으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지도하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하여 적후 항일투쟁을 진행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팔로군의 작전을 도와주었고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또한 자체의 영향력과 힘을 키워나갔다.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서 창립대회를 소집한 조선청년련합회는 각지에 청년련합회 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7월 8일, 조선청년련합회 연안지회(延安支會)가 설립되였다. 회장은 음악가 정률성이 맡았는데 연안지회 회원은 20여명이였다. 이날 지회 설립대회에 참가한 무정은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주의적인 조선공화국을 건립할것을 호소하고 조선민족의 반일통일전선 구축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연안에 조선혁명 간부들을 양성할수 있는 조선간부학교 건립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후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도 나타났다. 1941년 6월, 국민당 구역의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함으로써 팔로군 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자는 147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조선청년련합회에 받아들여 의용대로 재편성함이 필요하였다. 당시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인 무정은 연안에 있었기때문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 회장을 맡았던 진광화와 부회장 윤세주가 대원들에 대한 사상지도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7.7》사변기념일인 7월 7일에 결성되였다.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고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화북지대 본부는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되였다.   (권립교수) “1941년 7월에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근거지에 오자 련합회에서는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하고 본부를 산서성 료현 즉 좌권현에 두었습니다. 지대방에 박효삼, 부지대장에 리익성, 정치위원에 진광화였습니다”   화북지대 본부 류수대(留守隊) 대장은 려운길(呂運吉)이였고 대원들로는 최창익, 왕지연, 장진광, 최손(崔孫), 마춘식(馬春植), 리치민(李治民), 양민산, 리달, 리대성, 리철준(李哲俊), 호일화(胡一華), 주연, 박성호(朴成浩), 장지복(張志福)등이였다. 기타 대원 다섯명이 더 있는데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리고 류수대 녀성대원으로는 한명숙(韓明淑), 문정원(文正元), 장수연(張秀延), 권혁이 있었다.   상무촌의 홍복사 옛 사원   홍복사 사원비석 로신예술학원 옛터(상무촌 마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1대는 대장 리익성, 정치지도원 진한중의 령솔하에 안양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제1대 제1분대 분대장은 하진동(河振東), 제2분대 분대장은 리지강(李志剛)이였고 대원은 최지남(崔指南)을 비롯한 18명이였다. 제2대는 대장 김세광, 정치지도원 풍중부(馮仲夫)의 령솔하에 찬황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제2대 제1분대 분대장은 조렬광이였고 제2분대 분대장은 손일봉이였으며 대원은 김강(金剛) 등 19명이였다. 제3대는 대장 왕자인, 지도원 박무였고 순덕(順德)에서 활동하였다. 제3대 제1분대 분대장은 한경(韓慶)이고 제2분대 분대장은 관건이였으며 대원은 장평산(張平山)을 비롯해 11명이였다.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제가 강점한 적후에도 간부들을 파견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하게 하였다. 강홍구(姜弘九), 리경산(李景山)을 상해에, 김해암(金海巖)을 한구에 파견하였으며 김위(金煒), 김창만, 조련(趙連), 심청택(沈淸澤), 진동붕(陳東朋), 김무, 림평을 북평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최계원(崔啓源), 봉오식(奉五植), 리철(李哲), 김파륜(金巴倫)을 석문(石門)에 파견하였고 주화(朱華)를 청도에 파견하였다. 뿐만아니라 국민당군 20사에 호유백을 파견하고 국민정부 림시수부 중경에 주진룡(朱震龍)을 보냈다. 재편성을 거친 화북지대는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의 지도밑에 무장선전, 간부양성, 적후조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화북지대 각대는 구역을 나누어 하북 평한철도 구역으로 진출해 무장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중국민중에게 항일사상을 전수하면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 보루나 초소에 접근하여 함화하기도하였으며 일본군 병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제국주의자의 희생물로 되지 말것을 권고하였다. 또 도처에 선전표어를 붙이고 삐라를 살포했으며 도로, 철도를 파괴하고 전선(電線)을 절단하는 등 파괴활동을 진행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화북지대는 유명한 선옹채전투, 호가장전투, 형대전투, 5월 반소탕 혈전을 겪었다. 그리고 북경, 천진, 상해, 청도, 무한, 중경 각지에 파견된 대원들도 각지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면서 조직세를 확대시켜 나갔다.   (권립교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적후 근거지에 온 첫 일년간 주로 세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적후 무장공작대를 조직하여 북경, 상해, 무한, 청도 등 전국각지에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우리민족 상황을 료해하며 의용대 입대사항을 처리하고 적후선전사업을 했습니다. 둘째는 조선의용대 간부학교를 세우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교장에 무정이고 부교장에 진광화였습니다. 세번째는 화북지대를 세 개분대로 나누어 우리 당의 령도하에 태항군구 산하에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화북지대는 첫 일년간 팔로군에 배합하여 40여차의 대일작전에 참가했습니다.”   1941년 8월 15일,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 신입대원들을 교양하기 위해 동욕진 상무촌에서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였다. 이 시기 적후로부터 온 30여명 조선청년들이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고 국민당 구역으로부터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에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147명 조선청년들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모이게 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지대장 박효삼이 교장을 맡고 최창익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최창익, 김학무, 한빈, 윤세주, 진광화, 박무 등이 교원으로 있었다. 훈련반 훈련내용은 정치와 군사 그리고 과외활동이였다. 정치는 조선문제와 정치상식과를 설치하여 공부하였다. 윤세주가 조선문제를 강의하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혁명동력과 혁명의 전도문제를 언급해 설명하였다. 최창익이 맡은 정치상식과는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교재를 사용하였다. 주로 사회발전사, 국제문제, 정당문제가 언급되였다. 시사강의는 김학무가 맡았는데 매주 시사를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훈련반에서는 또 군사과목을 설치하였다. 주로 전선에서 활동할수 있는 기본상식과 초보적인 군사지식을 배워주었다. 상무촌에서 개설된 간부훈련반은 중국 관내 조선혁명자들이 자체로 개설한 군사, 정치학교였다. 훈련반은 그후 조선독립동맹이 창립됨에 따라 화북조선청년학교로 확대되였다. 뿐만아니라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山東分校)가 설립 되였다. 하북성 섭현 남장에서 답사하였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바로 이 간부훈련반의 계속이다.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확대된후 본부는 하북성 남장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더 큰 규모의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던것이다. 군 경력이 풍부한 박효삼, 정치선전사업에 능한 윤세주, 김학무, 연안에서 활동한 최창익 등이 교원으로 있었기때문에 학원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기능을 련마할수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정치사상과 지도리념이 학원들에게 전수되였고 팔로군식 교육과 훈련이 전수되였다. 상무촌의 홍복사 유적지는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켰고 또 많은 유감을 남겨주었다. 축구장만큼 큰 공지는 잡초가 무성하였고 이따금 부서진 유리기와가 보였다. 그것은 홍복사 옛절이 불타버린 후 남겨진 흔적이였다. 조선혁명가들은 여기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재편성하고 간부훈련반을 개설했으며 팔로군과 함께 적극적인 사업을 전개했던것이다. 홍복사 옛터를 답사하고있을 때 형효수연구원이 마을의 75세 고령인 조은경로인을 모셔왔다. 로인은 마을 뒷산의 무명 조선의용군 렬사묘지를 60여년 묵묵히 지켜온 분이였다. 항일전쟁시기 10대 소년이였던 조은경로인은 늘 의용대 대원들과 함께 지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셋째 삼촌집에서 살았다. 당시 그의 셋째 삼촌집에는 조선의용대 간부 두명이 투숙하고있었다. 1941년 12월, 일제가 마을을 습격하였다. 마을에 있던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신속히 마을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기관총으로 적을 막고싸웠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대피한 다음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엄호가 있었기때문에 상무촌은 리금주(李金柱)라는 농민 한명이 숨지는 피해만 받았을뿐이다. 그러나 이번 토벌에서 유격대의 엄호를 받지 못한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농민이 적에게 살해 되였다. 조은경로인은 조선의용군은 마을사람을 구해준 은인이고 또 늘 빈곤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면서 그들의 은혜를 잊을수 없다고 하였다. 로인은 마을 뒷산에 조선의용군 렬사의 묘소가 있다고 하면서 렬사 이름은 모르겠지만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전우를 묻어놓은것만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이후에도 로인은 늘 묘소를 찾아가 확인하였다면서 묘소의 분명한 위치를 확인해 주었다. 상무촌 마을사람들은 최근 돈을 모아 의용군전사 묘소를 보수하고 기념비까지 세웠다.   상무촌의 조선의용군 무명렬사묘소를 지켜온 조은경 로인 우리는 조은경로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갔다. 현지인들은 그 산을 《토지뇌(土地
69    제69회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지 댓글:  조회:4887  추천:0  2014-04-08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과 무장선전을 진행하던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은 선후로 두차의 치렬한 전투를 치렀다. 1941년의 호가장전투와 1942년 5월의 반포위토벌 전투이다. 이 두차의 전투에서 모두 조선의용군의 영웅적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의 피는 중국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소박하고 근면한 태항산의 인민은 중국군민과 어깨겪고 싸운 조선의 혁명선렬들을 잊지 않고 있다. 조선 혁명선렬들의 두려움 모르는 항쟁정신과 국제주의정신은 중국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하북성 섭현 석문촌 련화산기슭의 렬사릉원을 나와서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섭현의 고마운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선전부 일군과 리사화로인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에 많은 내용들을 짧은 시간내에 완수할수있었던것이다. 우리의 차는 계속 달려 산서 경내로 들어갔고 섭현의 고마운 분들은 우리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바래주었다.   10여분 뒤 우리는 하북성 섭현 경내를 벗어나 산서성 좌권현 경내에 들어섰다. 우리는 좌권현 마전진(麻田鎭) 운두저촌(雲頭底村)의 조선의용대 주둔지옛터로 찾아갔다. 맹진나루터로 황하를 건넌 조선의용대 주력은 태항산으로 진격했으며 좌권현에서 재정비를 거쳐 유력한 항일무장대오로 성장했던 것이다. 207국도를 따라 넓은 들을 지나니 멀리 병풍같이 둘러선 산이 보였다. 산기슭에는 숲이 우거진 작은 마을이 있었고 마을 앞으로 맑은 청장하가 흐르고있었다. 길가는 농민들은 그 마을이 바로 운두저촌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잡초가 무성한 들을 지나 청장하에 놓인 쇠사슬과 나무판으로 만든 다리를 거쳐 마을에 들어갔다. 운두저촌은 300여 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진 비교적 가난한 마을이였다. 마을 동북쪽에는 해묵은 홰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흰 담으로 둘러싸인 3합원(三合院) 구조의 옛집 한채가 있었다. 그리고 건물에는 《조선의용군구지(朝鮮義勇軍舊址)》라고 밝힌 작은 간판이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조선의용대 주둔지 옛터였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과 량켠에 낡은 단층집이 있었으며 아직까지 주민이 살고있었다. 정면 건물의 기와나 기둥을 보아서 옛 절이라는것을 알수있었다. 현지인들은 이곳은 옛날 피향묘(皮香廟)라는 사당이였다고 하였다. 봄 깃든 운두저촌(2008) 운두저촌 마을길 운두저촌의 조선의용군 주둔지 옛터 옛터의 낡은 건물은 후에 수선을 거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운두저촌 입구의 문루에 새겨진 조선글 구호 조선글 표어가 지금도 선명하다 마을어구 문루   항일전쟁시기 김학무가 거느린 조선의용대는 1941년부터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지휘부는 사당에 설치했고 기타 대원들은 마을 민가에 산재해 거주하였다. 현지인들은 당시 조선의용대가 80여명에 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1942년 이후 항일전쟁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근거지의 팔로군 전사들의 식량배정은 하루 한근이였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한근 두냥을 배정 받았으며 대원들은 그 두냥을 절약하여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다고한다.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진입한 조선의용대는 대적선전과 정보수집, 포로교양, 간부양성사업을 진행하였고 때로는 전투에 참가하거나 생산운동을 진행하였다. 운두저촌에는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바람벽에 써놓은 표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운두저촌 서남단의 마을 입구에는 작은 문루(門樓)가 있다. 현지인들은 남각(南閣)이라고 했다. 밑부분은 큰돌로 쌓아 만든 아치형 문이고 웃부분은 벽돌과 기와로 지은 작은 루각이였다. 루각에는 토지신(土地神)이나 재물신(財物神) 소상(塑像)이 있었다. 태항산 지역 대부분 마을 입구에 모두 이와 같은 문루가 있다. 마을사람들의 출입이 모두 무사하기를 비는 이 지역 민속이였다. 운두저촌 문루의 바람벽에는 항일전쟁시기 이곳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써놓은 표어가 지금도 남아 있다. 남쪽 벽에는 《왜놈의 상관(上官)을 총으로 쏴죽이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라고 씌여있고 북쪽 벽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전지원병(前志願兵)》이라고 씌여있다. 우리 글로 씌여진 표어들은 많은 시간속에서 퇴색되여 잘 알아볼수 없었지만 지금 새롭게 새겨놓아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문루 처마밑에는 《조선의용군옛터》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좌권현 정부가 이곳을 현급 문화재 보호지로 정하고 잘 보수했던것이다. 조선의용대의 항일 사적지를 보호하려는 현지 정부의 노력을 알수 있었다. 60여년의 비바람속에 그냥 남아있는 표어들, 이를 아끼고 보존한 현지인들에게 절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해서 우리는 운두저촌을 떠나 좌권현으로 출발하였다. 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려 태항산 대협곡을 지났다. 길가에는 키 높은 백양나무가 줄지어 있었고 량옆으로 태항산의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스쳐지났다. 우리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다양한 산봉우리들을 쳐다보면서 감탄을 련발했다. 산의 웅장함과 기이함에 저도 몰래 탄성이 터져 나왔던것이다. 답사팀의 촬영기자는 차를 멈춰 세우고 그 아름다운 산들을 렌즈에 담자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차는 계속 달렸다. 태항산 대협곡은 이튿날 팔로군 총부나 동욕진 상무촌(上武村)을 답사할 때 다시 와야했기때문이였다. 날이 어두워져서 우리는 좌권현 소재지에 들어섰다. 산서성 중부에 위치한 좌권현은 5개 진, 10개 향에 16만 인구를 가지고있다. 현성은 춘추시기 료양읍(僚陽邑)이라 했고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상당군(上黨郡)에 귀속되였다. 동한시기 이곳은 료양(遼陽)으로 불리웠으며 항일전쟁시기 좌권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좌권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좌권현은 민요와 《소화희(小花戱)》가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민요를 곧잘 불렀으며 또 창작하기도 하였다. 《소화희》는 춤 형식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좌권현의 독특한 무극(舞劇)으로서 명성이 높다. 현정부 뒤편에 괜찮은 초대소가 있어 찾아갔는데 현에서 대형 회의를 소집하고 손님을 모두 이곳에 배치했기때문에 빈방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근에서 호텔을 찾아 투숙하였다. 이곳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했지만 조건은 그렇지 못했다. 좌권현은 빈곤현이였다. 정부청사를 중심으로 괜찮은 건물 몇 개가 있을 뿐 대부분 낡은 주민집들이였다. 거리에는 행인이 별로 없었고 다만 희미한 가로등만이 어렴풋이 길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거리엔 택시가 하나도 없어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 성을 구경하러 나왔지만 택시가 없어 어디든지 갈수 없었던것이다. 10월 24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최룡수교수와 함께 좌권현 정부를 찾아갔다. 전에 현장과 서기를 만난적이 있었기때문에 직접 찾아갔지만 공교롭게도 두사람 모두 일보러 나가고 없었다. 할수없이 선전부에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선전부에서는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선전부의 소개로 우리는 좌권현의 《수재》로 불리우는 형효수(邢曉壽) 연구원을 알게 되였다.   태항산 언던에 보이는 관제묘(무신 관우를 기리는 절당) 태항산의 기이한 산봉들 좌권현 정부 청사(원 료양현) 좌권현의 형효수 당사 연구원 형효수연구원은 당사연구실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한후 좌권현정부에서 출간하는 《금일좌권(今日左權)》신문 주필로 사업하고있었다. 60세가 넘은 형효수연구원은 태항산에서의 조선의용군에 관련한 저서를 집필하고있었다. 우리는 조선의용군에 관련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뿐만아니라 그에게서 조선의용군 무명렬사 묘지를 60년간 지켜온 조은경(趙恩慶)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효수연구원은 동욕진으로 가면 조은경로인을 만날수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날 오후, 선전부에서 차를 마련해 우리는 형효수연구원의 안내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차는 207국도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전날 자세히 보지 못했던 태항산 대협곡을 다시 보게 되였다. 차는 대협곡의 중심인 신가교(申家峧)에서 멈춰섰다. 주변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우뚝 솟아있었고 벼랑에는 굴을 파고 만든 제단이 있었으며 제단에는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충의신(忠義神) 관공(關公)상이 있었다. 형효수연구원은 제단의 바른편 산 너머에는 북조시기 축조하기 시작한 고환운동(高歡雲洞)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일찍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류수(劉秀)가 총애한 금팽(芩彭)장군이 이곳에 병영을 세웠다 한다. 동한 개국공신인 금팽장군은 류수의 명을 받고 이곳 험한 지세를 리용해 병영을 세우고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웠다. 지금 병영의 흔적은 찾을길 없고 고환운동이라는 동굴 하나가 있을 뿐이다. 고환(高歡)은 북위(北魏)시기 승상을 지내면서 국권을 틀어쥐었던 인물이다. 그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고 하여 고환운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은 위나라 황제를 퇴위시키고 북제(北齊)를 세웠다. 그는 고환을 신무제(神武帝)로 추앙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은 바로 태항산의 이처럼 험악한 지형을 리용하여 일본침략자들을 유력하게 타격했던것이다. 차는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태항산은 돌로 된 산이라기보다는 찰흙이 굳게 다져 이루어진 산이라고 할수 있다. 그만큼 삐죽삐죽 모난 괴석이나 바위는 많지 않았다. 두터운 황토가 수천년이란 긴긴 세월 속에 돌 보다 더 굳게 다져져 형태가 독특한 산봉우리와 벼랑을 형성했던것이다. 선녀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신녀봉, 거부기와 토끼의 모습을 닮은 귀토봉(龜兎峰)이 있었다. 귀토봉은 마주한 두 산봉우리가 하나는 거북과 같고 하나는 토끼와 흡사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 산봉우리는 거부기와 토끼의 경주를 련상시켰다. 한시간 지나서 우리는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 이르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을 설명해주는 형효수 연구원(왼쪽) 조선의용군 주둔지 옛터 한국에서 세운 순국선렬 전적비   상무촌은 작은 산간마을이였다.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촌 정부를 찾아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촌 정부는 큰 마당을 가진 단층 집이였다. 동욕진 왕세수(王世秀)서기 겸 진장이 통지를 받고 거헌충(巨獻忠) 촌주임과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마을에 낡은 흙집들이 많은것을 보아 이곳 주민들의 빈한한 생활을 짐작할수있었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에돌아 마을 뒷산에 도착하니 커다란 비석이 나타났다. 검은 대리석 비석에는 《순국선렬전적비(殉國先烈戰績碑)》라고 새겨져있었는데 비석은 흰 대리석으로 된 큰 거북의 등에 세워져있었다. 비석은 현지 정부가 2003년에 한국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세웠다한다. 비석 뒤에는 축구장만큼 넓은 평지가 있었으며 아담한 단층집 한채가 있었다. 집 주변에는 나무들이 무성했으며 뒤로는 웅장한 산이 멀리 보였다. 이곳이 바로 상무촌 홍복사(洪福寺) 옛터였는데 조선의용대는 1940년 8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거헌충촌주임은 홍복사는 큰 사원이였지만 후에 일제가 불살라 버려 지금은 작은 단층집 하나만 남았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작은 흑판하나가 있었으며 그 옆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비석에는 홍복사는 당나라 정관(貞觀)년간에 축조되였고 명나라시기 다시 보수를 거쳤다고 밝혀있었다. 그리고 항일전쟁시기에는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가 있었으며 조선의용군과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총부 요원들이 거주하였다고 적혀있었다. 1938년 10월말 무한이 함락되자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서성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호남성 제9전구로, 제2구대는 호북성 제5전구로 이동하였다. 이때 최창익은 리익성이 거느린 제2구대와 함께 호북에서 활동하다가 황하를 건너 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성지 연안으로 갔다. 당시 30여명 조선청년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1940년초에 전방으로 나갔으며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진출하였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동욕진 상무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결성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이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창립대회에는 중공중앙을 대표한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참가했다. 그는 조선청년련합회의 성립을 축하하고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지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 그는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전승할 때까지 싸울것을 조선혁명가들에게 희망하였다. 당시 각지에서 모여온 21명 대표들이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팔로군 포병퇀 제1임 퇀장으로 있던 무정을 련합회 회장으로 선출하고 진동남 항일근거지 선전극단의 단장으로 있던 진광화를 부회장으로, 리유민을 조직부장으로, 장진광을 선전부장으로, 한득지(韓得志)를 경제부장으로 선거하였다. 최창익은 련합회 위원을 맡았다. 조선혁명가들은 열렬한 토론을 거쳐 계급과 당파, 종교를 불문하고 전 민족이 하나로 단결된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화북망명청년의 단합과 항일무장대오를 결성하며 전반 조선민족해방전쟁의 발동과 중국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고 일제구축과 조국광복 대업을 완성한다는 등 내용의 련합회 강령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때 무정은 팔로군 포병퇀의 사무가 많았기때문에 진광화가 실제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지도사업을 맡았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의 팔로군 지구로의 이동을 추진하였다. 련합회의 회원인 리극(李克), 로민, 왕극강(王克强) 3인은 국민당지구인 락양과 중경으로 파견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항일을 시도하였고 드디어 조선의용군 창설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결성을 보게 되였다.
68    제68회 5월의 혈전 댓글:  조회:5416  추천:0  2014-03-25
웅위한 태항산맥의 한부분인 하북성 섭현 석문촌의 련화산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세인들에게 자랑하고 있다. 하늘높이 치솟은 높은 봉이 련꽃잎처럼 펼쳐졌다하여 련화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이 산 기슭에는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최고급 장령인 좌권과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간부였던 진광화, 윤세주가 묻혔던 묘소가 있다. 태항산, 섭현 석문촌 련화산의 윤세주, 진광화 렬사 묘소 렬사들에게 꽃묶음을 전하려 가는 고 최룡수 교수(중앙당학교) 석문촌 련화산기슭에 지은 조선의용군 렬사기념관 렬사묘소를 찾은 연변과 장춘의 중앙방송 애청자분들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사람들은 이곳을 잊지 않고 있다. 해마다 청명이면 마을사람들과 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렬사들을 기리고 있다. 렬사들의 유골은 해방후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렬사릉원으로 이장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마냥 이곳에 찾아와 렬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했던 5월의 반포위토벌 전투를 회억하군 하였다. 최근년간에는 현지정부에서 조선의용군 기념관까지 세워놓았다. 그리하여 조선투사 진광화와 윤세주를 기리는 수많은 관련학자와 유가족이 자주 이곳을 찾아오기도 한다.   (권립교수) “1942년 6월에 있은 마전포위망 돌파전투는 보다 더 치렬했습니다. 1942년 5월에 일제는 수만명의 병력으로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이른바 5월 대소탕을 진행했습니다.”   1942년 5월 화북의 일본군 주력은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소탕을 전개하였다.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 참패를 본 일본군은 항일근거지를 공격하여 후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중국을 정복하려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할수없다고 판단하였던것이다. 일본군 선두부대는 중국인 옷과 팔로군의 회색군복을 입고 근거지에 진입하였기때문에 백성들도 일본군이 근거지에 접근한것을 미처 모르고있었다. 교활한 적은 선진적인 정보기술로 전화와 전보가 비교적 집중된 팔로군 전방사령부의 위치를 파악했던것이다. 5월 22일, 일본군 41사단 주력이 료현(遼縣 지금의 좌권현)을 포위하였다. 팔로군 전방사령부 사령 팽덕회와 참모장 좌권, 정치부 주임 라서경(羅瑞卿)은 신속히 주력부대를 적의 포위권 밖으로 전이시켰다. 그러나 지휘부는 미처 전이하지 못한 상황에서 포위해 오는 적과 격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팔로군 사령부와 북방국, 당학교, 신화일보사, 조선의용대를 비롯한 기관일군 수천명이 마전(麻田) 부근의 남애포(南艾鋪)에서 수만 일본 정규군의 포위에 들었다. 이때 태항산에 모인 조선의용대 주력은 팔로군 전방사령부와 함께 있었다. 초기 소분대로 나뉘여 화북각지에 파견되였던 조선의용대는 형대전투를 비롯한 수차의 전투를 겪었다. 비록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희생도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은 잘 훈련되고 자질이 높은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을 아끼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일선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고 후방에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이 감쪽같이 팔로군 전방사령부를 포위하자 모두가 전투에 뛰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팽덕회와 좌권은 분산돌파를 계획하고 좌권이 후위를 맡았다. 정치부 산하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라서경주임의 지휘를 받으며 포위돌파를 시도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적이 산기슭으로부터 공격해왔다. 라서경주임은 경위부대를 거느리고 적을 저격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박효삼 대장이 자진하여 전투임무를 요청했다. 팔로군의 전투부대는 경위를 맡은 한 개 패와 조선의용대 백여명뿐이였기 때문에 라서경주임은 할수없이 조선의용대를 전투에 투임시킬 수밖에 없었다. (권립교수)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팔로군 총정치부 주임 라서경동지가 령을 내렸습니다. ‘경위패는 서쪽 고지를 점령하고 비무장대오가 이전하도록 엄호하라, 조선의용대는 동쪽고지를 탈취하고 엄호하라!’ 우리 의용대는 박효삼의 지휘하에 비처럼 쏟아지는 일본군의 총탄을 헤치며 동산을 점령하고 하루종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기관관부와 가족들이 안전하게 이전하게 했습니다.”   사령부 수십명 경위원들이 서쪽 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 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동쪽 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였다. 이들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고 싸울 때 비전투원들은 신속히 포위권을 뚫고 나갔다. 적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이동하고있는 비전투원들을 폭격하였다. 전투에서 부근 십자령(十字嶺)에서 진행된 치렬한 전투에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엄호를 맡고 혈전하던 조선의용대는 밤 장막을 타서 무사히 포위권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일부 대원들이 흩어졌다.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는 일부 녀성대원을 거느리고 화옥산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27일 새벽 산속을 빠져나오던 이들은 적에게 발각 되였다. 윤세주와 진광화, 최채는 녀성대원들을 엄호하기 위해 적을 유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적을 유인하여 산 아래로 달리던 진광화는 벼랑가에 몰렸다. 그는 적탄을 맞고 벼랑으로 떨어져 장렬히 희생되였다. 산허리로 달리던 윤세주도 적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고 산우로 달린 최채는 동굴에 숨어서 무사할수있었다. 적이 떠나간 다음 최채는 비통한 심정을 달래며 진광화와 윤세주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윤세주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희생되였던것이다.   (권립교수) “이번 전투에서 의용대 용사 10여명이 보귀한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67    제67회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옛터 댓글:  조회:5420  추천:0  2014-03-16
국민당의 수십만 반동군대의 포위와 추격을 물리치고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한 홍군은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해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창설해나갔다.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된후 수많은 조선혁명가와 청년들이 팔로군이 개척한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모여왔다. 중국공산당에서는 태항산에 모인 조선혁명가와 조선청년들을 지도하고 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무정을 태항산에 파견하였다.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을 겪은 조선혁명가 무정은 새로운 임무를 맡고 태항산으로 향했다.   섭현 중원촌 전경 중원촌 촌어구에 세워진 루각 팔로군 초대 포병퇀장이며 조선의용군 사령원인 무정이 중원촌에 거처하였던 곳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던 무정은 줄곧 중국공산당 중앙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온 혁명가였고 홍군과 팔로군의 군사전문가였다. 2만 5천리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다시 홍군부대를 따라 력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6년 홍군동정에 참가한 그는 홍군 제1방면군과 함께 황하를 건너 산서 경내에서 싸웠다. 홍군의 동정에서 조선혁명가 양림이 희생되자 당중앙에서는 조선혁명가들을 더욱 잘 보호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위험한 일선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이해 6월 홍군은 동정을 마치고 섬북에서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中國人民抗日紅軍大學)을 설립하였다. 무정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작전부대를 떠나 고위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홍군대학 1과에서 학습하였고 졸업후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담임하였다.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중국로농홍군은 본격적인 항일전쟁의 수요에 따라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와 팔로군 총사령부는 항일투쟁을 더욱 유력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팔로군 포병부대를 창설하기로 하였다. 1937년 말, 팔로군 총사령부의 포병주임으로 임명된 무정은 포병부대 건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7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진서남(晉西南) 전략요새인 림분에 갔다. 그는 그곳의 부대까지 합쳐 근 1,000명에 달하는 전사들로 포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권립교수) “7.7사변후 팔로군 총사령부 주임직을 맡은 무정은 중국인민의 포병건설에 나섰습니다. 1938년 1월에 림분에서 중앙군위 포병퇀 성립대회가 열렸습니다. 중공중앙 북방국의 책임자 양상곤이 축사를 하고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봉이 무정동지를 포병퇀 퇀장으로 임명할데 관한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임명장을 선독했습니다.” 1938년 1월 28일, 림분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창설식이 있었다. 무정이 포병퇀 퇀장으로, 구창성(邱創成)이 정치위원으로, 원광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중앙북방국 책임자인 양상곤(楊尙昆)이 축사를 하였고 국민당 제2전구 사령인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해 축하했다. 포병퇀은 편성되였지만 여러가지 곤난이 많았다. 우선 포병부대가 쓸만한 대포가 얼마 없었고 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몇사람 없었다. 무정은 단기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교관을 맡았다. 그는 전사들에게 사격원리와 포 다루는 요령을 가르쳤다. 이 시기 무정이 직접 훈련해낸 포병간부들은 후날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 고위 지휘자로 되였다. 이해 2월, 태원(太原)이 일제에게 강점되자 림분지역이 적의 공격목표로 되였다. 포병부대를 보호하고 계속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무정은 총부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거느리고 섬북으로 철수하였다. 그들은 섬북 락천(洛川)에 새로운 훈련기지를 정했다. 모택동은 무정을 비롯한 포병부대 지휘자들을 직접 접견하였고 주은래, 주덕, 팽덕회를 비롯한 당과 팔로군 지도자들이 락천기지에 와서 포병퇀을 시찰하였다.   (권립교수) “무정은 포병간부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교관을 맡았습니다. 이때 양성해낸 포병간부들이 새중국의 제1대 포병 지휘관으로 됐습니다. 1938년부터 무정은 포병퇀을 거느리고 대일작전에 나섰습니다. 1939년 2월에는 포병퇀의 절반을 거느리고 태항산 근거지의 팔로군 전방사령부 소재지에 와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다가 1941년부터 당중앙의 명령에 따라 화북지구의 조선족인민을 조직하는 사업에, 화북 조선청년 련합회 조직사업과 조선의용군 지도사업에 나섰습니다.”   1939년 2월, 무정은 포병퇀을 거느리고 다시 황하를 건너 진동남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출격하였다. 이때 서안과 락양 팔로군 판사처를 통해 포병부대에 수요되는 장비가 송달되였고 전사들도 잘 훈련되였기때문에 포병퇀의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였다. 1940년에 팔로군이 백퇀대전을 전개할 때 무정은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전투가 가장 치렬한 곳으로 달려가 유력하게 전투를 지원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팔로군 포병퇀을 창설하고 일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던 무정은 조선의용대를 재정비하고 조선혁명가들을 규합시키기 위해 포병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는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독립동맹 주요사업을 책임지고 그때로부터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과 함께 하게 되었다. 중원촌 마을 북쪽에는 비교적 높은 둔덕이 있다. 돌길을 따라 둔덕에 오르면 찌그러져가는 낡은 절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중원촌 원정보사 옛 절이다. 문에 들어서니 낡은 흙벽에 걸린 《섭현중원촌원정보사문물보호구(文物保護區)》라는 간판이 보였고 작은 마당 앞에는 검은 벽돌 단층집이 있었다. 푸른 기와와 벽돌로 된 건물이였다. 정교한 꽃무늬와 그림으로 장식된 처마나 집앞에 세운 옛 돌비석을 보아서 사원이 분명하였다. 집 벽에는 《태항신화일보구지(太行新華日報舊址)》라는 작은 간판이 있었다. 사원의 신상(神像)은 사원 맞은 편에 새로 지은 흙집에 옮겨져 있었다. 섭현 중원촌의 원정보사 옛터(화북조선혁명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태항 신화일보사가 있었던 곳(원정보사 내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로도 추정되는 원정보사 옛터(항일전쟁시기 신화일보사도 이곳에 있었다)    1942년 11월 1일, 조선독립동맹은 이곳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華北朝鮮靑年革命學校)를 개설하였다. 교장은 무정이였고 교무주임은 김학무였다. 제1기에 20, 30명 학원을 받았는데 학습기간은 5개월이였다. 학교는 비교적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화북 적점령구로부터 조선인들이 탈출해 올 경우를 대비해 그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가입시키는데 있었다.   (귄립교수) “1942년 11월 1일에 태항산근거지에 화북조선청년 학교를 꾸리고 화북각지의 조선족청년들을 흡인했습니다. 이해 일본군이 천진, 북경에 조선인특별훈련반을 꾸려 우리 청년들을 전쟁의 대포밥으로 만들려한 그 음모에 대처하여 꾸린 학교였습니다. 무정을 교장으로 김학무를 교도주임으로 한 이 학교는 1944년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로 고쳐졌습니다.” 당시 화북전역을 석권한 일본침략자들은 더 많은 조선인을 조선국내, 중국 동북으로부터 화북에 강제 이주시켰고 또 천진을 비롯한 각지에 조선징병특별훈련반을 세웠다. 그리하여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많은 조선청년들이 항일근거지로 찾아왔다. 학원들은 중원촌 원정보사에서 공부하였고 부근 공지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1943년에 이르러 학원수가 훨씬 많아지고 조선의용군도 확대되여 본거지를 옮기게 되였다. 이들은 중원촌을 떠나 하남점진 남장촌으로 옮겨갔고 이곳은 신화일보 인쇄공장으로 사용되였던 것이다. 원정보사 옛절이 있는 둔덕에 서 있노라니 중원촌 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이따금 무정사령원이 경위병을 데리고 골목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환각으로 보이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귀전을 스치는 바람결을 타고 씩씩한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구령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바로 이 원정보사의 빈방에 모여 앉아서 무릎에 책을 펼쳐들고 문화지식과 정치를 학습하였고 군사기능을 익혔던 것이다. 이날 점심 다시 현성에 돌아와 빈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후 우리는 짐을 챙겨 가지고 산서성 좌권현으로 출발할 계획이였다. 좌권현은 섭현과 린접해 있었다. 섭현에서 답사해야할 마지막 코스인 석문촌을 지나면 바로 좌권현 경내이기때문에 우리는 석문촌을 답사하고 그 길로 계속 좌권현으로 가려 했다. 리숙영과장이 미리 차를 준비시켜주었다. 그리고 줄곧 우리의 답사를 도와주었던 섭현의 《공자님》 리사화로인도 석문촌까지 계속 안내하였다.   섭현의 고마운 분들과 혜여지면서(우로 세번째 리사화 로인) 렬사릉원 팔로군 참모장 좌권장군 묘소 좌권장군 묘소(조선혁명가 장진광이 설계) 태항산에서 희생된 진광화, 윤세주 렬사 묘소   차는 섭현 현성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달렸다. 맑은 청장하가 굽이굽이 흐르고 한쪽으로는 무연한 산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10여분 달려 우리는 석문촌 련화산(蓮花山) 기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산기슭에 있는 진기(晉冀)렬사릉원으로 향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봉이 멀리 보였고 그 앞에는 낮은 산언덕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산밑 골짜기로 무성한 소나무 숲이 보였다. 우리는 오솔길을 따라 산언덕으로 오르면서 선렬들의 령전에 증정하기 위해 들꽃을 꺾었다. 산기슭 골짜기에 넓은 평지가 있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로 돌비석과 기념탑이 보였는데 좌권장군묘지였다. 해묵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에 돌로 쌓은 커다란 묘지와 하늘높이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탑에는 《좌권장군기념탑》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장방형으로 된 묘지앞에는 《좌권장군》이라고 새겨져있었고 그 우에 가로로 《좌권장군비묘》라는 영문자모가 새겨져있었다. 한자 병음을 새긴것이 아니라 우리 글 발음을 영문으로 적혀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좌권장군묘는 조선청년련합회 선전부장을 맡았던 조선혁명가 장진광이 설계했다. 중국항일전쟁시기에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최고급 장령의 릉원을 조선혁명가가 설계해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의용대에는 얼마나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는가를 짐작할수 있었다. 좌권장군묘에서 작은 골짜기를 지나면 높은 산언덕이 있다. 해빛 밝은 언덕에는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의 묘비가 있다. 좌권장군묘소 보다는 많이 작았지만 돌로 정교하게 만든 이들 묘소도 역시 장진광이 설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1942년 5월 일제의 포위토벌에서 희생된 조선혁명가 진광화, 윤세주는 좌권장군과 함께 이곳에 안장되였던것이다. 답사팀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들꽃을 렬사들의 묘소에 증정하고 묵도를 드렸다. 윤세주 렬사가 작사한 노래 이 귀전에서 울려퍼지는 듯 하였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독립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지들아/
66    제66회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 댓글:  조회:5365  추천:0  2014-03-06
1938년 일본침략자들이 수십만 대군을 몰아 무한을 포위공격할 때 포연이 자욱한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조선혁명가들은 2년 남짓한 동안 국민당 통치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과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전과 부패한 국민당 통치는 조선혁명가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1941년부터 조선의용대 주력을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북상하여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왔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 주력은 팔로군과 함께 어깨겯고 싸우면서 새로운 당을 창립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하북성 섭현 하남점진은 1943년이후 조선혁명가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이에 앞써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는 하북성 섭현 중원향과 태항산 중심부에 위치한 좌권현에서 활동하였다. 섭현 하남점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답사팀은 2003년 10월 23일 오후에는 중원향 중원촌으로 향했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에서 활발한 대적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화북에 있던 많은 조선 이주민들이 조선인 항일부대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수많은 열혈 조선청년들과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병사들은 기회를 타서 조선의용대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신속히 장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직을 재정비할 중요한 회의를 개최하려했다. 그러나 1942년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대한 일제의 몇차례 토벌로 하여 회의는 7월까지 미루어졌다. 적의 5월 포위토벌을 극복한 조선의용대는 섭현 중원향 중원촌에 집결하였다. 팔로군 포병퇀 퇀장으로있던 무정도 포병부대 창설임무를 완수하고 이 시기 새로운 임무를 맡으러 중원촌에 왔다. 이들은 중원촌에서 조선청년련합회(朝鮮靑年聯合會) 제2차회의를 소집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전신인 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섭현 중원향 중원촌의 일각 마을 입구의 문루 중원촌 62번지, 무정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머물렀던 곳 62번지 주민집, 무정이 머물렀다는 가옥 중원향은 섭현 현성에서 4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향 소재지인 중원촌에는 천여명 인구가 살고있는 작은 마을이였다. 섭현에서 산서성 좌권현(左權縣)으로 통하는 도로가 마을 옆을 지났다. 이따금 마을의 고요를 깨치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농민들은 평지에 조이삭을 말리고있었다. 마을은 조그마한 언덕에 자리잡았는데 우리는 마을 한쪽 귀퉁이에 있는 중원촌 62번지로 찾아갔다. 중원촌 62번지는 커다란 4합원 구조의 건물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이 있었고 정면에 흙집 한채가 보였다. 매우 낡은 2층 건물이였는데 한쪽 구석에 아직 주민이 살고있었다. 리사화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중원촌에 온 무정과 조선청년련합회 요원들은 이곳에 거주하였다. 집주인은 양언군(楊彦軍)이라는 30대 젊은이였다. 양언군의 할아버지 양면환(楊面煥)은 이 집에서 무정과 조선의용대 간부들을 주숙시켰다고 한다. 무정은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현지인들과 가까이 하기위해 현지의 마청산(馬靑山)과 관주로(關柱勞)를 경위원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양면환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양면환로인도 무정은 중원촌에서 훌륭한 군견 한 마리를 길렀고 군견을 리용해 편지를 전하기도 하였다고 생전에 회억하였다 한다. 62번지의 낡은 2층 건물은 수십명이 거주할수있었고 또 수십명 정도의 회의도 소집할만해 보였다. 그러나 리사화로인은 1984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의 간부들이 중원촌을 답사할 때도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는지 마을의 다른 유적지인 원정보사(元定寶寺)에서 열렸는지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했다고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열렸다는 사람도 있었고 원정보사에서 열렸다는 사람도 있었다는것이다.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의 재정비를 목적으로 한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는 1942년 7월 14일부터 중원촌에서 열렸다. 각지 분회의 대표들까지 모두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결성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되였다. (권립교수) "대회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하였습니다. 국민당이 조선의용대 번호를 취소하자 이곳에서 독립적인 조선의용군을 만들었습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도합 천여명이나 되였습니다. 이들은 중공중앙의 호소를 받들고 대생산운동에 참가한 한편 적후사업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국번(蔡國藩 원명 김호 金浩), 김창만, 왕지연, 리유민, 진한중, 리춘암 등 11명을 독립동맹 본부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고 김두봉을 집행위원회 주임으로 선거하였다.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박효삼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대장을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1944년초 주력이 연안으로 이동할 때까지 줄곧 태항산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화북지대는 조선의용대 대원, 각지에서 온 학생, 소상인, 류랑자, 일본군 통역관 종사자들을 교육 흡수해 근 200여명에 달했다.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각대로 나누어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항일유격구에서 활동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가장 많이 집중되였고 산동이나 섬서, 화중에도 흩어져 활동하였다.   중원촌의 원정보사 옛터,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 소집지  밖에서 본 원정보사 옛 담 진동남지구는 태항산지역 팔로군 전방총사령부와 129사 사령부가 위치한 곳으로서 중국 팔로군의 활동중심지이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조선혁명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집중되여 있었다. 초기에는 진광화와 윤세주가 이곳 조선혁명활동을 이끌었고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동맹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졌다. 진동남지구는 독립동맹의 총부 소재지이고 의용군의 중심지로서 줄곧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1942년 8월,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 13명 대원을 거느리고 진찰기지구로 진출하였다. 이곳은 팔로군 115사가 개척한 항일근거지로서 산서성 동북부의 오대산을 중심으로 산서북부, 차할, 하북 북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이에 앞써 조선혁명가 림평(林平), 채국번, 고생호(高生鎬), 김무가 이곳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이들은 1941년 12월 10일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리익성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진찰기에 온후 군대는 리익성이 책임지고 적후공작은 채국번이 맡았으며 재편성한 조선독립동맹 진찰기 분맹은 공명우가 책임졌다. 진찰기지구는 조선인이 많았던 북경, 천진, 당산, 기동으로 쉽게 진출할수있었고 또 중국 동북이나 조선 국내에 거점을 만들기 편리하였다. 진서북(晉西北)지구는 려량산맥(呂梁山脈)을 중심으로 한 산서성 서북 산지를 말한다. 하룡이 이끄는 팔로군 120사가 이곳 흥현(興縣)에 주둔하면서 섬북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있었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채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최창익, 허정숙, 최영(崔英)이 진서북에서 활동하고있었다. 그러다가 최창익과 허정숙이 떠났다.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1942년 11월 13일에는 김세광, 문명철, 최채, 최영이 흥현에서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을 창립하였다. 분맹 책임자는 김세광이였고 조직위원을 맡았던 문명철은 팔로군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문명철(1914―1943)은 전라남도 사람으로서 중국에 건너와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그는 호남성 북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국민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41년 그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했고 1942년, 조선독립동맹 진서북 분맹 조직위원을 맡았다. 그는 수차 적후를 넘나들면서 적과 싸웠다. 1943년 4월 14일, 백여명 적에게 포위된 문명철은 두명 중국인 전사와 함께 싸우다가 마지막에 수류탄을 터뜨림으로서 적과 함께 죽는 희생을 선택하였다. 연안을 중심으로 한 섬감녕(陝甘寧) 지구에는 일찍부터 조선혁명가들이 많이 모여왔다. 이곳은 태항산 항일근거지 다음으로 조선혁명가들이 가장 많이 집결된곳이다. 항일군정대학과 동북간부훈련반(東北幹部訓練班)에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그리고 팔로군 359려단에는 주덕해(朱德海)와 리권무(李權武)가 있었다. 정률성과 주덕해가 선후로 섬감녕 지구의 조선청년련합회 지회를 책임졌다. 그러다가 1942년 태항산으로부터 김두봉, 한빈, 윤치평(尹治平), 조렬광, 권혁(權赫 일본녀성), 연군(燕軍) 등이 연안에 도착하여 1943년 1월 10일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을 창립하였다. 항일전쟁후 팔로군 115사는 부분적 유격대를 산동에 파견하여 산동 각지에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주혁(朱革)과 로민(魯民)을 산동에 파견해 조선인 쟁취활동을 진행하게 하였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1대 대원들이 산동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주혁이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 주석을 맡았고 리명이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로민은 교동(膠東)분맹을 세워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에 50여명 맹원을 확보하였다. 1943년,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철남에서 조선독립동맹 기열료 분맹이 창립되였다. 일찍부터 기동에서 활동하던 리대성(李大成)이 조직위원을 맡고 진국화(陳國華)가 선전위원을 맡았으며 주연(朱然)이 정치주임을 맡았다. 책임자는 진찰기 분맹의 군 책임자였던 리익성으로 나타나고있다. 한편 산서성 태악산(太岳山) 지역에는 리옥근, 관건, 조소경(趙少卿), 하앙천(河仰天)이 선후로 팔로군 적군공작부(敵軍工作部)에서 활동하였다. 팔로군 통제지역뿐만 아니라 신사군 활동지역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공산당이 령도하는 신사군은 장강 이남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환남사변(晥南事變)을 겪었지만 신사군은 계속 강소, 절강, 안휘를 비롯한 화중지역에서 장대해졌다. 1944년 1월, 홍택호(洪澤湖) 부근에서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과 조선의용군 화중지대가 성립되였다. 독립동맹 본부에서 파견한 리성호(李成鎬), 김윤덕(金潤德), 손달(孫達)이 주요책임자로 되였다.   하북 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가 태항산 조선의용군 군정학교를 다닌 항일간부 김응삼과 강재렬 북편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항일간부 최명세 상해에서 강소북부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항일간부 김현대 동만에서 관내에 가서 조선의용군에 입대한 항일간부 최강 벽에 대적구호를 쓰고있는 조선의용군 전사 태항산에서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창설은 중국 관내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조선독립동맹은 각지에 지하투쟁 일군을 파견하여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단합시켰으며 중국공산당과 적극 협력하여 일제와의 최후승리를 준비해나갔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소재한 연안뿐만 아니라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으며 강남의 신사군에도 간부들을 파견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장병들은 생산운동에 적극 참가하는 동시에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적과 싸웠으며 무장선전, 정보수집, 포로교양을 진행함으로써 조선의용군의 력량을 크게 확대시켜나갔고 또한 중국항일전쟁에 큰 기여를 하였다.      (권립교수) "화북조선청년 련합회는 중공중앙에서 무정동지, 진광화, 리유민 등을 태항산근거지에 파견하여 1941년 1월 10일에 건립한 단체입니다. 회장은 무정이 맡고 조직부장은 리유민이 선출되였습니다."
65    제65회 섭현의 사적지 댓글:  조회:4778  추천:0  2014-02-15
태항산의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2년말에서 1943년 사이에 연안으로 많이 떠났다.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는 새로운 정풍운동이 시작되였고 국내외 정세에 관한 교육이 본격화되여 각지 주요간부들을 소환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고있었다. 조선독립동맹 조직을 강화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려면 많은 간부들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태항산에서 싸우던 대부분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연안으로 떠났다. 태항산에 남은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은 1943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의 투쟁을 재조직해 나갔다. 그는 하북성 섭현의 남장촌과 중원촌을 전전하면서 조선의용군 교육을 강화하고 부대를 확대했다. 그리고 투쟁경험이 풍부한 간부들을 각지 조선인이 집거한 곳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투쟁에로 이끌었다. (권립교수) “무정동지는 “그러다가 1941년부터 당중앙의 명령에 따라 화북지구의 조선인민을 조직하는 사업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조직사업과 조선의용군 지도사업에 나섰습니다.” 무정이 남장에 머물렀던 집 정문 무정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거처했던 곳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이 남장촌에 거처했던곳은 현지의 지주집이였다. 지금의 남장촌 528번지와 529번지에 유적이 남아있다. 답사팀이 흙집과 벽돌집이 섞여 있는 남장촌의 좁고 그늘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담으로 둘러싼 커다란 집 한채가 보였다. 담은 후에 벽돌로 다시 쌓은것으로 보이나 비교적 정교하게 만든 정문에서 우리는 옛 건물모습을 어렴풋이 보아낼수 있었다. 입구에는 하남점진 남장촌 528번지라고 밝혀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었고 마당 세면에 낡은 건물들이 있었다. 맞은 편에는 흙으로 된 단층집이 있었는데 금방 허물어질것만 같았다. 왼편 역시 2층으로 된 낡은 흙집이였다. 그리고 오른쪽에 검푸른 벽돌로 만든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2층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항일전쟁시기 지주가 살던 집이였고 후에 무정과 경위원이 거처를 잡았던 곳이다. 집 옆에 비슷한 벽돌 단층집이 있었다. 역시 검푸른 벽돌로 만들어진 괜찮은 집이였는데 번지수는 529번지였다. 당시 지주 집은 모두 벽돌로 된 좋은 건물이였다. 지금 볼수 있는 흙집들은 마을사람들이 지주 집 넓은 뜨락에 새로 지은 집이다. 비록 새로 지었다하지만 흙으로 지었기때문에 오히려 더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항일전쟁시기 무정사령원이 머물렀던 집은 528번지의 2층으로 된 벽돌집이였고 529번지의 벽돌로 지은 단층집은 의용군 간부들이 머물던 곳이였다. 남장촌에서 우리는 리사화로인의 소개로 무정사령원의 통신원으로 있었던 왕소안(王小安 76세)로인을 만났다. 1943년 당시 16세 어린 나이였던 왕소안로인은 근 3년간 무정의 통신원으로 있었다. 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남장촌에는 조선의용군과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 도합 300여명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웠기때문에 무정은 전사들과 학원들을 거느리고 훈련과 학습을 하는 한편 부근의 산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감자를 심었다. 조선의용군사령부에는 무정과 취사원(炊事員) 한명, 경위원 두명 하여 4사람이 있었다. 무정은 사격술이 대단하였다. 계절에 따라 강가에 나가 물오리를 사냥하였는데 늘 백발백중이였다. 하남점진에는 의용군이 운영하는 대중병원(大衆醫院)이 있었는데 한번은 왕소안이 무정의 편지를 병원의 백은도(白殷道)원장에게 전했다. 백은도원장은 서한을 본 다음 무료로 왕소안의 신체검사를 해주었다. 무정을 비롯해 조선의용군은 모두 조선말을 하였는데 현지인들과만 중국어로 대화하였다한다. 왕소안로인은 다리에 난 상처를 가르키면서 부상당하던 경위를 이야기했다. 한번은 그가 무정사령의 명령에 따라 소금 구하러 형대부근으로 갔었다. 그때 적의 포격을 받았는데 파편에 상처를 입었던것이다. 다행히 동행했던 김부장이 그를 부축하여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였다한다. 왕소안로인은, 무정사령부에 4명 부장이 있었는데 한분은 김씨이고 한분은 양씨라고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당시 성씨에 직함을 붙여 불렀기때문에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1944년 조선독립동맹이 태항산을 떠나 연안으로 간 다음, 나머지 조선의용군은 무정과 함께 야전사령부 정치부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았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조직, 선전, 경영 등 세개 부를 두었는데 리유민(李維民)이 조직부장, 김창만이 선전부장을 맡고 홍림(洪林)이 경영부를 책임졌다. 선전부 산하에 양계가 선전과장을 맡았다. 그러므로 왕소안로인이 회억한대로 무정과 함께 있었다는 김씨, 양씨 성을 가진 간부는 선전부 부장인 김창만, 선전과장인 양계인것으로 추정된다. 왕소안로인 내외분은 남장촌 431번지에 살고있었다. 낡은 단층집이였는데 구들에는 잘 포개여놓은 이불과 나무 궤가 있었고 바닥에 낡은 쏘파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왕소안로인은 조선에서 보내온 화책(畵冊) 두권을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섭현에서 활동할때 무정은 남장촌 마을사람들의 상황을 더욱 잘 료해하기 위해 나이가 어리고 순박한 왕소안을 통신원으로 받아들였던것이다. 1945년 무정은 명령에 따라 요원들을 거느리고 연안으로 갔지만 왕소안은 그냥 고향에 남아있다보니 부대와의 련락을 다시 가지지 못했다. 해방후 왕소안로인은 3년간 군 복무를 하였다는 증명이 없었기때문에 줄곧 평범한 농민으로 지금까지 지냈다. 왕소안로인은 후에 조선에서 화책을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무정의 경위원을 맡았던 남장의 왕소안 로인 남장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옛터에서 왕소안 로인(좌)과 함께 답사팀은 남장촌으로부터 하남점진 하일촌(河一村)으로 갔다. 강 건너에 위치한 하일촌은 남장촌 보다 퍽 작았고 마을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보였다. 1,000여명 인구가 사는 마을 집들은 매우 낡아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생산운동에 나선 조선의용군은 하일촌에서 3.1상점, 대중병원, 사진관, 방직공장을 운영하였다. 1942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침략군은 병력과 물력 부족으로 본격전인 공격전을 개시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적들은 정면전장에서 국민당군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는 한편 팔로군들이 활동하는 항일근거지에 대해서는 포위와 봉쇄 정책을 실시하였다. 게다가 련속되는 가물로하여 태항산근거지에는 기근이 들었다.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생산자구(生産自救)》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43년 무정이 태항산에 온후 조선의용군의 생산활동은 본격화 되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감자나 채소를 심고 목화를 재배했을 뿐만아니라 변구 진남은행(晉南銀行)으로부터 돈 만원을 빌려 병원과 상점, 리발소를 차렸다. 무정의 1945년 사업보고에서는 당시 의용군의 경제운영 상황이 상세히 밝혀지고있다. 하일촌에는 하남점인민법정(河南店人民法庭)이 있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였는데 이곳이 바로 항일전쟁시기 의용군이 운영하던 3.1상점 옛터이다. 3.1상점은 1943년 3월 2,000여원을 내여 세운 상점으로서 쌀, 소금, 비누, 성냥을 팔았다. 점원은 4명이였고 책임자는 신태식(申泰植)이였다.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였는데 부지런히 운영하여 10만원의 월수입을 올렸다. 명절이면 상점에서는 렴가로 항일가족이거나 빈민들에게 물품을 내주었고 또 늘 마을사람들을 도와 좋은 일을 해주었다. 3.1상점 옛터에서 조금 더 나가면 낡은 옛집이 있었다. 괜찮은 부호의 집이 아니면 사당 자리인것 같았다. 정문에는 하남점진 하일촌 112번지라고 밝혀있었다. 리사화로인은 이곳이 의용군이 경영한 대중병원 유적지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112번지 건물과 그 옆의 114번지 건물이 모두 대중병원으로 사용되였던 건물이라고 알려주었다. 대중병원은 1943년 3월 2,000여원을 투자해 세운 병원으로서 내과와 외과, 약제실이 갖추어졌었다. 백퇀대전(百團大戰)때 팔로군에 체포되여 항일근거지에 오게 된 백은도는 교육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참가한뒤 내과의사겸 대중병원의 원장을 지냈다. 부원장이며 외과의사였던 김상현(金尙顯)은 자원적으로 의용군사업에 참가하였다가 병원에 배속되였다. 약제사 김희원(金熙元)은 1942년 12월 림분(臨汾)에 주둔했던 적군으로부터 도주해 온 자원병(自願兵)이였다. 그리고 리화림(李華林)을 비롯한 일부 녀성의무일군도 한동안 병원에 있었는데 모두 조선 사람이였다. 병원은 월수입이 3만여원이였다. 병원 의사들은 의술에 많은 심혈을 쏟았으며 각종 소염제를 만들어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병원은 또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거나 약값만 받았다. 그리고 계절마다 마을사람들에게 천연두 예방주사를 놔주었다. 의용군이 운영한 3.1방직공장은 대중병원 뒤쪽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을뿐이다. 방직공장은 1945년 3월 1일에 착공하였고 책임자는 홍림이였다. 공장에 30여명 로동자가 있었는데 모두 조선인이였다. 리사화로인은, 하일촌 마을 입구에 조선의용군이 세운 사진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버드나무 한그루와 그 옆에 찌그러진 집 한채가 있을뿐이였다. 조선의용군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속에서 생산경영운동을 적극 전개해 자급자족 하였을뿐만아니라 현지 백성들을 도와주면서 힘을 키웠다. 문화지식이 있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단순한 농사뿐만아니라 병원이나 상점, 공장 경영도 곧잘 해냈던것이다. 조선의용군이 꾸린 "3.1상점" 이 있었던 곳 조선의용군이 꾸린 대중병원 건물 대중병원으로 리용되였던 옛 건물 하일촌 마을을 떠나면서 조선의용군의 사적지들을 너무나도 잘 아는 리사화로인에게 감탄이 갔다. 리사화로인은 1984년 5월에 12명으로 구성된 연변조선족자치주 원 조선의용군 간부 전적지 고찰단이 섭현에 왔다고 하면서 그때 그분들과 함께 다니며 기억해 두었다고 설명해주었다. 1984년에 섭현을 방문한 원 조선의용군 간부로는 윤재덕(尹載德), 정길운(鄭吉雲), 최명세(崔明世), 리섭, 고철 등이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이들이 항일전쟁시기 직접 활동했던 옛 사적지를 둘러보고 자상히 설명한것이 지금 섭현 당사연구실 자료로 남아있다. 다음은 하남점진 적안촌(赤岸村)으로 갔다. 팔로군 129사 군부가 있었던 적안촌은 지금 혁명전통 관광을 이르는 《홍색관광(紅色旅遊)》을 적극 개발하고있다. 거액을 투자하여 유적지들을 잘 복원하였기때문에 지금 많은 관광객을 류치하고 있다한다. 적안촌은 하남점진 서북쪽으로 2, 3킬로메터 떨어진 산비탈에 위치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129사 사령부와 중공중앙 북방국 태항분국, 태항구(太行區) 당위원회가 있던 곳이다. 팔로군 129사는 홍군 제4방면군과 부분적인 섬북홍군으로 개편한 부대이다. 류백승이 사장, 서향전이 부사장을 맡았고 1938년에는 등소평(鄧小平)이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1937년 10월 19일, 화북에 진출한 129사 769퇀이 양명보(陽明堡) 비행장을 습격하였다. 한시간 격전을 거쳐 24대의 적기를 불태워버리고 100여명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양명보 습격전은 129사의 첫 항일 대승전이였다. 1938년 2월, 129사 주력부대는 장생구(長生口), 신두령(神頭嶺), 향당포(響堂鋪) 등 3차례 전역을 펼쳐 침략자들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1940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중국은 극심한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국민당군의 정면전쟁의 실패로하여 장개석은 중경을 비롯한 서북 오지에 몰리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중경까지 쳐들어간다고 위협하면서 비밀리에 국민당과 담판을 진행하였다. 인력, 물력 부족으로 장기전을 할수 없었던 일본은 시급히 장개석의 항복을 받아내야 했던것이다. 일제의 막강한 허울에 질겁한 사람이 많았기때문에 전반 중국은 실패와 망국의 비분에 잠겨있었다. 이런 비관정서를 떨쳐버리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은 공격전을 개시하여 전국 인민의 항전의지를 고무하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 팔로군 100여개 퇀이 일제가 통제한 정태선(正太線)을 차단하기 위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백퇀대전이다. 129사는 120사와 협동하여 3개월 남짓한 공격전에서 수만명 적을 소멸하였다. 129사만 하여도 크고 작은 전투 500여차를 겪었으며 7,500여명 적을 소멸함으로써 휘황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129사의 적극적인 항일전과 휘황한 전과는 전민의 항쟁을 한껏 고조시켰고 적후 항일근거지도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였다. 이해 12월 129사는 사령부를 섭현 적안촌에 설치하였다. 적안촌의 팔로군 129사 지휘부 기념비 129사 류백승, 등소평 등 지휘원들의 동상 129사 사단 지휘부 건물 적안촌의 129사단 지휘부로 통하는 돌계단 길 적안촌을 찾은 조선의용군 항일로간부(1984년) 적안촌에 들어서면 붉은 기 모양으로 된 붉은 돌비석을 보게 된다. 비석에는 129사라는 금빛글발이 새겨져 있었고 비석뒤편 광장에는 129사 지휘원들의 동상이 있었다. 가운데 류백승과 등소평이 서고 그 옆에 4명의 사령부 요원이 둘러서있는 모습이였다. 적안촌은 산세를 타고 형성된 마을이다. 부지면적이 1,800여평방메터인 사령부 옛터는 하원(下院), 상원(上院), 후원(后院) 세개 4합원 구조의 집으로 되였다. 하원은 현지인들이 제를 지내던 사원자리였다. 사령부 회의실, 사무실, 경위원 숙사가 이곳에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에 올라서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담과 집들이 있었는데 사령부 옛터의 상원이였다. 가운데 사령부 각 부서 집무실 자리가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류백승과 등소평의 옛 거처가 있었다. 상원은 섭현의 가장 큰 부자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1940년, 연안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리유민을 비롯한 10여명 조선혁명가들이 팔로군 사령부 산하의 적공부(敵工部)에 배치되여 한동안 사업하였다. 그들은 로획한 적의 문서와 정보를 번역하고 적군포로를 심문하였으며 대적선전 계획을 세우는 등 일들을 하였다. 상원 뒤편으로 후원이 있었는데 작전실과 사령부 기타 요원들의 거처였다. 류백승과 등소평은 5년간 이곳에서 항일전쟁을 지휘하였다. 적안촌 마을 서북쪽에는 묘파산(廟坡山)이 있다. 지금 산에는 렬사기념탑과 정자, 장군들의 묘소가 축조되여 장엄한 분위기가 한결 짙었다. 129사 출신인 류백승 원수와 서향전 원수, 리달(李達) 장군을 비롯해 6명 공화국 원수와 장군의 골회가 이 산에 묻혀있다. 1990년 등소평이 칠필로 《장군령(將軍嶺)》이라는 석자를 써주었는데 지금 이 글은 산언덕 담벽에 새겨져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사람들은 묘파산을 장군령이라고 부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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