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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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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24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1) 댓글:  조회:3984  추천:51  2007-08-20
  8.1 남창봉기가 일어난후 중국공산당에서는 무한에서 비밀리에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위기를 해결할 대책을 연구하였다. 구추백(瞿秋白), 리유한(李维汉), 모택동을 비롯한 부분적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들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의 우경기회주의(右倾机会主义) 착오를 엄숙히 비판하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 문제를 토의하였다. 모택동은 대회에서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남창봉기에 이어 추수봉기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8월 7일 소집된 이 대회를 <8.7회의>라고 한다. 회의가 있은 후 모택동은 호남, 호북, 강서, 광동의 광범한 농민들을 이끌고 추수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단연 호남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남창봉기이후 9월에 추수봉기가 일어났으며 모택동은 농민군을 거느리고 호남과 강서의 린접지인 라소산맥(罗霄山脉)에 정강산(井冈山)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농촌무장혁명투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권립교수)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대숙청을 시작하였고 18일에는 광주와 황포에서도 대숙청이 시작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광주는 암흑세력이 살판치는 세계로, 대도살장으로 되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국민당 우파에게 반격을 가하고 전국인민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서는 1927년 11월 26일 광주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남창봉기 이후 대혁명시기 혁명중심지였던 광주에는 수많은 혁명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중국 대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조선지사들도 광주에 모여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방대한 로동자 조직있었고 부근 해풍(海丰)과 륙풍(陆丰)현에는 농민들이 잘 조직되여 있었다. 비록 국민당의 탄압을 받아 공회조직과 각지 농민조직이 많이 파괴되고 무장해제 당했지만 이들은 당조직의 령도하에 다시 비밀리에 집결되고 갖은 방법으로 무기를 장만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창봉기 실패 후 부분적인 혁명자들이 광주에 잠입했고 국민당 정규부대를 따라 광주에 와서 수시로 폭동을 준비하고있는 장병들도 적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국민정부가 북상한 후 광주는 국민당 여러 군벌들이 집결해 서로 견제하는 국면이 나타나 수시로 군벌혼전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봉기를 조직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여 있었다.   (권립교수)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에서는 장태뢰를 총지휘로, 엽정을 군사지휘로 임명하고 봉기를 준비하였습니다. 12월 11일 새벽 3만여명 혁명군인과 로동자, 농민들이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에는 3백여명 우리민족 혁명가들이 총을 잡고 전투에 참가했고 그중 2백여명은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1927년 12월 11일 광동군벌 주력이 광서군벌을 소멸하기 위해 광주를 떠난 틈을 타서 장태뢰(张太雷), 엽정, 운대영, 엽검영(叶剑英), 양은(杨殷), 주문옹(周文雍), 섭영진(聂荣臻)등의 령도하에 광주봉기를 일으켰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인 혁명자들은 주로 제4군 군관교도단(军官教导团)과 황포군관학교에 집중되여있었다. 남창봉기 부대를 추격하여 광동에 도착한 국민당 장발규(张发奎)의 제4군은 광서군벌을 축출하고 광주를 통제하였다. 이에 불복한 리제심(李济深)은 광서군벌을 끌어모아 광주 부근에서 장발규 부대와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북벌전쟁시기 주력부대로 활약하였던 장발규 부대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이 있었고 또 공산당의 영향력이 자못 컸다. 줄곧 부대 내 공산당원들을 견제하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했던 장발규는 리제심 부대와 싸우기 위해 다시 무기를 공산당 부대에 내주었다. 그리하여 엽검영(叶剑英)이 거느린 제4군 교도단(教导团)은 다시 무장을 갖추게 되였다.    교도단 제2영 5련은 150여명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순 조선인 부대였다. 이들 대부분은 원 무한군사정치학교의 특별반 학생들로서 련장은 박영(朴英)이였고 당 책임자는 김규광이였다. 그리고 무한 토지당(土地堂)전투에 참가하였던 박영의 두 동생인 박근만, 박근수 형제, 의렬단 단원 박건웅(朴健雄)을 비롯한 우수한 포사격수들도 이 부대에 포함되였다.     교도단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은 조선혁명가 최용건(崔镛健)이다.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은 최용건의 주변에 단합되여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편성하였다.   (권립교수) 최용건 동지가 거느린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이 바로 조선족부대였습니다. 150여명이였습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 판공실 부관으로 있던 조선족 혁명가 리계동(李启东)과 구대장으로 있던 리빈(李彬)도 큰 힘을 보태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봉기에 참가한 광주경위탄에도 당에서 파견한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김형평과 손문적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황포군관학교뿐만 아니라 중산대학에서 혁명리론을 학습하고있던 수십명 조선인 혁명가들도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장지강, 김세영, 류우상을 비롯한 조선인 혁명가들은 여러차례 비밀회의를 열고 봉기준비를 진행하였고 혁명가 김산도 이들 조직사업과 선전사업을 맡았다. 이들은 선전대의 신분으로 혁명에 참가하였고 봉기에서 무기운반과 부상자 운반을 적극 도왔다.     혁명자들은 혁명을 배반하고 혁명자들을 마구 살해하는 국민당 반동파들에 대한 지대한 배신감과 적대감을 안고 전투에 뛰여 들었다. 조선인 혁명자들도 꼭 같은 심정이였다.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전쟁에서 조선혁명가들은 두려움 모르고 싸웠고 뛰어난 통솔력으로 유명하였다. 국민혁명군 장군들은 모두가 조선인을 자기 부대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혁명군에서 조선인 혁명가들은 두려움 없이 싸워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 북벌전쟁이 승리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그들의 가슴은 더욱 벅차있었다. 화북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조선인 혁명가들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뻤고 무한한 환희와 열광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의 꿈은 성공을 빤히 눈앞에 둔 승리의 문턱에서 산산히 깨여지고 말았다. 게다가 도처에서 살벌한 도살이 시작 되였다. 많은 조선인 혁명자들도 살해되고 체포되였던 것이다.     혁명을 배반한 적들을 소멸하고 로농대중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했다. 그러자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희생을 내더라도 싸워야 했다. 오직 혁명의 붉은 피를 흘려야 만이 암흑을 몰아내고 야수적인 반동파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함으로써 아시아의 해방을 이룩할수 있었다.        1927년 12월 10일 밤, 광주시의 조그마한 려관방에서 20여명 조선인들이 비밀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이제 곧 시작될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생각하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유명한 의렬단 단원인 오성륜이 새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에게 총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조국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들은 이번 대중투쟁을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과 련계시켜 생각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오성륜과 김산, 그리고 로씨야에서 온 대포전문가 양달부(杨达夫)는 봉기의 첫 본부로 사용하게 될 교도단 사령부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사령부에 도착하였을 때 2천여명 교도단 사관생들이 모여 있었고 얼마 안되여 봉기 지휘자들인 장태뢰와 엽정, 운대영 등이 도착하였다. 엽정은 남창봉기가 실패한 후 한동안 향항에 피신하였다가 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에 왔던 것이다.    근 백명에 달하는 조선인들도 한데 모여 반갑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면서 봉기 시각을 기다렸다.    봉기시각이 다가오자 장태뢰와 엽정이 선후로 연설을 하고 혁명위원회 명단과 각 부대 지휘자를 공포하였고 각 부대의 임무를 하달하였다.   (권립교수) 봉기지휘부에서는 조선족 혁명가들을 중히 여기고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였습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의 우수한 포병전문가 양달부를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하고 중산대학교 법과를 다닌 김산을 엽정의 비서 겸 교도단의 통역관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리용은 엽용의 군사고문으로 임명하고 광주공안국을 공격할 임무를 맡겼습니다.      봉기 모든 활동부문에서 조선인은 요직에 배치되였다.    양달부는 봉기 총지휘자인 엽정의 군사참모로 임명되였다. 그는 봉기 5인 군사 책임자중의 한 사람이였다. 김산은 엽정의 비서 겸 교도단의 번역관으로 임명되고 리용(李镛)은 신임 교도단 단장 엽용(叶镛)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으며 리빈(李彬)은 포병 지휘관으로 임명되여 북로경계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박영은 교도단 제2영 5련 련장으로, 김규광은 5련 당조직 책임자로 임명되고 최용건은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장으로 임명되였다. 오성륜, 박진(朴振), 박건웅은 소분대 대장으로서 각기 임무를 맡고 행동하게 되였다.    조선인 혁명가들은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모스크바에서 훌륭한 정치,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봉기 지휘부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봉기 지휘부는 교도단을 홍군으로 개칭하고 망치와 낫이 새겨진 붉은기를 계양하게 하였다. 봉기에 참가할 부대는 교도단 정규부대와 로동자, 농민  적위대(赤卫队)였다. 그러나 적들은 봉기군 보다 훨씬 더 많은 정규부대를 가지고있었다. 광주시 백운산(白云山)기슭의 사하진(沙河镇)과 연당(燕塘)에 적 정규군이 주둔하고있었고 관음산(观音山) 요지에도 적이 주둔하고있었다. 그리고 주강이남에는 군벌 리복림(李福林)이 거느린 막강한 주력부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봉기를 승리에로 이끌자면 목표 명확하게 적의 본거지를 불의에 습격하여야 했다. 그리고 선전공작을 잘해 더욱 많은 적들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더욱 많은 로동자, 농민들을 봉기군에 참가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밤은 더욱 깊어만 갔고 정적이 깃들었다.    홍군부대 장병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교도단 사령부로 수많은 트럭과 자동차가 달려왔다. 차에는 많은 공장 로동자들이 타고있었다. 로동자들은 사령부에서 무기를 받아가지고 홍군부대와 합세하였다.    11일 새벽 세시가 다가오자 봉기 총지휘인 엽정이 공격명령을 내렸다.    봉기군은 몇갈래로 나뉘여 각자의 목표를 향해 신속히 진격하였다.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였다. 사진설명: 광주봉기렬사릉원
23    제23회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2) 댓글:  조회:4399  추천:51  2007-08-03
1927년 8월 1일, 중외를 진감한 남창봉기가 시작되였다. 3만여명 혁명군인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국민당 반동파를 반대하는 첫 총성을 울렸다. 2백여명 조선 혈열청년들도 이 위대한 전투에 참가해 피흘리며 싸웠다. 이때로부터 암흑기의 중국인민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혁명의 불씨는 중국대지 방방곡곡에서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급촉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봉기지휘부인 강서대려사에 대기하고있던 주은래가 수화기를 들었다. 하룡의 전화였다. 하룡은 봉기군내의 한 병사가 사사로이 적 지휘부로 갔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시각 변절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봉기계획이 루설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때 장 밤을 적 장교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차렸던 주덕에게서 소식이 전해왔다. 적 장교들의 반응을 보아서는 봉기계획이 루설 된 낌새가 보인다고 하였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던 주은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봉기를 두시간 앞당겨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즉각 각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8월 1일 새벽 두시, 남창의 혁명군인들이 국민당 반동파들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 장병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진격하였다.      하룡부대가 장강로(章江路) 입구에 위치한 적 주배덕의 본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다. 주배덕의 본부에는 한 개 경비단이 수비하고있었다. 사전에 변절자의 밀고를 받았기 때문에 적들은 본부로 통하는 길목에 수비진을 쳐놓았다.   공격부대가 돌진해 왔을 때 적들은 고루(鼓楼)의 옛 성루에 의지해 완강히 사수하고있었다. 하룡과 류백승(刘伯承)은 적과 정면으로 대적하는 한편 일부 부대를 나누어 주변의 높은 성루에 올라 우로부터 고루의 적들을 제압하게 하였다. 전사들은 사다리를 놓고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12메터나 되는 성루로 올랐다. 이 공격부대에는 조선족 전사 강석필(姜锡弼), 김래준(金来俊), 홍범기 등이 있었다. 강석필은 동북 훈춘유격대에서 싸우던 독립군 투사였다.   (권립교수) 강서성 구강으로부터 남창에 온 하룡장군의 제20군에도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 조선족 혁명가들이 있었지요. 그들은이 적 제5방면군을 맹공격할 때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맹사격을 들이댔습니다. 12메터 높이나 되는 옛성루를 점령해야만 적을 진압할수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강석필과 홍범기등은 전우들과 함께 포연탄우를 무릎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끝내 옛성루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화력으로 적의 기세를 누르고 부대의 공격을 엄호함으로써 적의 지휘부를 짓부실수있게 했습니다.     조선족 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앞장서 싸웠다. 강석필과 홍범기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루를 점령하였으며 기타 병사들은 높은 층집의 지붕에 올라갔다. 봉기군 전사들이 사면에서 적 지휘부를 포위하고 우로부터 집중사격을 하자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로 되었다. 세시간 남짓이 저항하던 적들은 드디어 투항하고 주배덕은 도주해 버렸다.   하룡부대의 조선족 전사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이 두려움 없이 싸워 점령했던 적 지휘부는 남창시 장강로(章江路) 67번지에 위치해있었다. 지금의 남창시 장강로 67번지에는 강서성 가무극원(歌舞剧院) 종업원 사택이 있었다. 검푸른 벽돌로 축조된 3층 낡은 층집이 몇채 있었지만 모두 후에 건설된 건물이였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소개한데 의하면 지휘부 길목을 지켰다는 고루도 언녕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눈앞의 전적지를 보면서 머리에 치렬했던 그때 전투장면과 두려움 없이 싸웠던 조선족 전사들을 생각해 보았다. 자랑찬 그들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기념되지 못하고있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장강로를 떠나 다른 한 전적지 송백항(松柏巷)으로 가 보았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 찾아보니 뾰족한 삼각모양으로 된 천주교교회당 건물이 나타났다. 교회당인 것 만큼 주소로 될만한 번지수가 명확히 밝혀있지 않았는데 주변의 가옥의 번지수를 보아 송백항 01-11번이였다.   교회당 건물은 가운데가 4층정도 높았고 량쪽 날개부분 건물이 2층 정도였다. 가운데 아치형 문이 있었고 문 위로 원으로 된 창이 세 개 있었다. 가운데 창이 컸고 량켠의 창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연분홍 칠을 한 교회당 건물은 해빛아래 유난히 빛났다. 남창봉기에서 가장 치렬했던 전투가 바로 이 교회당 주변에서 진행되였던 것이다. 지금 보이는 이 교회당은 옛 건물을 보수한것이였다. 조선족 투사 방월성(方月星)이 용감히 싸웠던 송백항 전적지에는 그래도 교회당이라는 표적이 남아 있어 다행으로 느껴졌다.       봉기군이 적 지휘부를 공략하자 적들은 혼란속에 빠졌다.   엽정부대는 두길로 나누어 송백항부근의 적과 공원(贡院)의 적을 공격하였다.     송백항부근의 전투는 매우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공격임무를 맡은 엽정부대 71단 전사들은 탄우를 무릅쓰고 돌진하였다. 제6군 57단의 적들은 천주교회당에 화력거점을 만들고 왕강히 사수하였다. 적들은 중형무기를 집중하여 봉기군의 공격을 제압하였다. 빗발치는 적탄으로 봉기군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후속부대가 당도하여 천주교회당을 포위했지만 적의 화력이 막강하여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었다. 계속 대치하고만 있을수 없었다. 이때 봉기군 전사들이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몇몇 전사들이 나섰다. 조선족 혁명가 방월성도 가슴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결사대는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계속 돌진하는 희생정신으로 전진하였다.   (권립교수) 적 제6군 57퇀을 소멸하는 전투는 너무도 치렬하였습니다. 적들은 송백향의 견고한 건물인 천주교회당을 거점으로 수많은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을 집중하여 미친듯이 사격하였습니다. 결사대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였지요. 방월성이 결사대에 참가했습니다. 결사대는 비발치는 총탄을 무릎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피로써 적진을 까부셨습니다.     봉기군 결사대가 혈로를 뚫고 전진하자 기타 전사들도 공격나팔소리와 함께 돌진하였다.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된 적들은 다투어 총을 놓고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송백항 천주교회당 공격전도 봉기군의 승리로 끝났다.     엽정부대의 72단은 공원부근에서 적들과 접전하였다. 공원(贡院)은 옛날 향시(乡试)를 보던 곳이다. 옛날 서생들은 3년에 한번씩 공원에 와서 향시를 보고 향시에 합격되면 다시 과거를 보러 떠났던 것이다. 남창의 공원은 지금 두 곳에 있었는데 하나는 진현문(进贤门)부근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팔일공원(八一公园)에 있었다. 팔일공원은 남창공원이라고도 한다. 남창봉기 전적지는 팔일공원의 수관음청(水观音厅)이였다. 옛날 팔일공원 호수가에 수관음청을 짓고 거기에서 향시를 보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공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수관음청은 흰벽과 붉은 나무, 푸른 기와로 축조된 정교한 2층 건물이였다. 여러 가지 고목이 둘러싸인 건물이 맑은 호수에 비껴 한결 아름다워 보였다. 엽정부대의 조선족 장병들인 박인, 김철강 등이 봉기군과 함께 이곳에서 적들을 소멸하였던 것이다.   (권립교수) 무창에서 기선을 타고 남창으로 온 엽정장군의 제11군 24사에는 개산툰에서 간 박인, 녕안의 방월성, 김철강 등 조선족 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농민군의 배합밑에서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섬멸하는 전투에 뛰여들었습니다. 조선족용사들은 형제민족 전우들과 함께 남창공원안에 둥지를 틀고있던 적 24퇀에 불벼락을 안겨 적들은 총 한방 쏘지 못하고 투항하였습니다.     엽정부대 72단이 공원에 주둔하고있는 적 23단과 24단을 공격하였다. 적들은 급급히 응전해 나섰지만 이미 선수를 놓친 뒤라 봉기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봉기군의 맹공격에 많은 적들이 소멸되거나 투항하였으며 24단 적들은 북쪽 호수가로 도주하였다. 이때 앞에서 부분적 봉기군이 농민군과 함께 적들을 저격하였다. 앞뒤로 공격을 받은 적들은 화력이 비교적 약한 72단 지휘부로 달려들었다. 당시 지휘부에는 학생군인 수십명이 있었을 뿐이였다. 그러나 학생군인들도 두려움 없이 적들을 저격하였다. 학생군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봉기군은 더욱 용감히 싸워 끝내 적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침해가 갸웃이 얼굴을 내밀고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 때 남창시의 총성은 뜸해 지기 시작하였다. 4시간 남짓한 격전을 거쳐 봉기군은 순조롭게 만여명 적들을 소멸하고 남창을 통제하게 되었다. 국민당을 반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첫 무장투쟁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이날 아침 9시 남창시의 점포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개업을 시작하였고 거리에는 시민들이 하나둘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봉기군 총지휘부를 지날 때 모두 두손을 들고 환성을 질렀다. 또 많은 시민들이 소고기, 수박 같은 위문품을 들고와서 봉기군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이날 <남창국민일보(南昌国民日报)>에 전적위원회에서 기초한 <중앙위원선언(中央委员宣言)> 전문을 계재하고 진보적인 국민당 좌파인사들과 함께 성대한 련석회의를 소집하였다. 이튿날에는 5만여명 군중들이 참가한 경축대회를 열고 봉기승리를 경축하였다.     남창봉기의 승리는 국민당 반동파들을 크게 경악시켰다. 장개석을 두목으로 한 반동군벌들은 남경, 광동의 군대를 끌어 모아 봉기군을 소멸하려고 시도하였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를 차지한 적들이 사면으로 포위해 오자 봉기군은 원 계획대로 남창에서 철수하여 광동으로 진격하였다. 봉기군 전적위원회는 3만여명 부대를 재정비한 후 남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전적위원회는 광동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한후 다시 북벌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작전로선과 계획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봉기군은 수배에 달하는 적들의 추격과 저격, 포위공격하에서 막대한 희생을 냈다. 주력부대로 흩어졌고 혁명의지가 박약한자들은 혁명대오를 떠났다. 거듭되는 타격을 받았지만 견정불이(坚定不移)한 공산주의자들은 투쟁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주덕과 진의(陈毅)는 부분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단연히 북상하여 다시 강서경내에 들어왔다. 그들은 정강산에서 모택동의 추수봉기 부대와 승리적으로 회합하였다. 그때로부터 모택동과 주덕은 중국로농홍군 제4군을 건립하고 유격전술을 창도해 냄으로써 농촌혁명근거지 창설의 새길을 열어놓았다.   광동에서 흩어졌던 수많은 혁명자들도 해륙풍으로 가서 농민운동에 참가하거나 다시 광주에 모여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22    제22회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1)-- 댓글:  조회:4095  추천:57  2007-08-03
국민당이 손중산의 삼민주의 혁명사상을 배반하고 총칼을 중국공산당에게 돌림에 따라 중국의 제1차 국내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당은 도처에서 공산당을 살해하고 로농대중의 반제반봉건 투쟁을 탄압하였다.   중화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였다. 백성들은 끊임없는 전란을 겪게 되었고 더욱 많은 군벌들이 세력확장을 위해 갖은 수단을 써가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였다. 그러나 혁명의 불씨는 영원히 꺼버릴수 없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과업과 피압박인민의 해방투쟁과업을 짊어지고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동방피압박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싸우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쟁의 길에 나섰다.   (권립교수)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에 주은래, 하룡, 엽정, 주덕 등의 지휘밑에 우리 당의 영향권내의 3만여명 전투원들이 남창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국공합작을 배반하고 로농대중을 대학살한 국민당 반동파에 대한 첫 반격이였습니다. 북벌전쟁에 참가했던 우리민족 혁명가들중의 200여명이 이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1927년 7월, 왕정위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와 합류함으로써 국민당내의 통일을 실현하고저 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무시해 버렸다. 7월 17일, 드디어 왕정위의 무한정부 군사위원회는 장개석을 토벌하기 위한 동정을 결정하였다. 무한정부의 통제를 받던 각 부대는 장강을 따라 강서 경내에 들어왔고 장개석도 부대를 포진하였다.   7월 하순, 주은래를 대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은 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있는 군대를 동원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남창경내에는 엽정이 거느린 11군 24사의 만 2천여명 전사들이 구강에 주둔하고있었고 하룡이 거느린 20군 만 2천여명 장병들도 구강에 도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창에는 주덕이 지휘하는 군관교육단(军官教育团)이 있었고 제4군 25사의 공산당원 주사제(周士弟)가 거느린 천 5백여명 장병들이 남창부근의 마회령(马回岭)에 주둔하고있었다.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당이 장악하고있는 이 부대를 동원해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답사팀이 영웅의 도시 남창시를 찾은 것은 2004년 2월 14일이였다. 강서성 소재지인 남창시는 2천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고도(古都)이다. 한(汉)나라 초기에 도시가 형성되였고 옛날에는 예장(豫章)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후에는 남방창성(南方昌盛)이라는 뜻으로 도시이름을 남창이라고 했다. 남창시는 장강 지류인 감강(赣江)을 따라 장강수로와 이어져있고 륙지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경구철도가 이곳을 지남으로 장강이남의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창봉기 기념관은 남창시 중산로(中山路) 세마지(洗马池)에 위치해있었는데 번지수는 중산로 48번이였다. 기념관에 도착하니 회색 4층 건물이 나타났다. 벽돌과 콩크리트를 혼합해 만든 중서결부의 회(回)자형 건물이였다. 건물 앞에는 남창봉기의 주요 지도자들인 주은래, 주덕, 엽정, 하룡, 류백승의 동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붉은기가 펼쳐져 있었다.     기념관 부관장 조가천(曹佳倩) 녀사가 기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조가천 녀사의 안내하에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관 건물은 책에서나 영화에서 많이 보아온 20년대 강서대려사(江西大旅社)건물이였다. 1922년에 축조된 이 건물은 당시 남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였다. 봉기를 앞두고 하룡이 호텔을 세 맡아 봉기 총지휘부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주은래를 비롯한 남창봉기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거취하면서 봉기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지금 건물에는 모두 남창봉기 유물과 사진 전시실로 사용되고있었다.   조가천 녀사는 당시 남창봉기에 관련해 이야기하였다.    (조가천 연구원) 이쪽은 남창봉기를 령도한 5명 지도자의 동상입니다. 가운데 주은래이고 그 곁에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입니다. 지금 보는 이 청사는 봉기 총지휘부로 사용되였습니다. 강서대려사는 1924년에 축조된 건물로서 1층에 전적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8월 1일 새벽 2시 봉기군 2만여명이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적 총지휘부를 공격하는 전투, 남창공원을 점령하는 전투, 수관음청 전투가 비교적 치렬하게 진행되였는데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이러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4시간 전투를 거쳐 봉기군이 남창을 점령하였습니다. 남창봉기후 주덕이 거느린 부대는 정강산에서 모택동부대와 회합하여 중국로농홍군 4방면군을 편성하였습니다. 남창봉기는 국민당 반동파에 대해 첫 총성을 울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8월 1일은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로 계속 기념하고있습니다.     남창봉기는 주로 공산당이 장악하고있었던 혁명군 정규부대에 의지해 이룩한 봉기이다. 무창수비를 맡았던 엽정부대는 장개석 남경정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구강에 이르렀다. 엽정이 거느린 11군 24사에는 길림성 룡정의 개산툰진 출신인 박인, 흑룡강 녕안의 방월성과 김철강을 비롯한 조선족 혁명가들이 있었다.   7월말 엽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남창에 주둔하였다.     2월 14일은 서양인의 련인절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련인절을 쇠는 것이 성행했기 때문에 남창의 거리는 판촉활동으로 소란스러웠다. 거리에서는 생화를 들고 다니는 젊은 련인들의 밝은 모습을 쉽게 찾아 볼수있었다.   남창에 들어온 엽정은 백화주(百花洲) 동호(东湖)곁에 위치한 심원중학(心远中学)에 11군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백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남창 심원중학교는 지금 남창시 제2중학교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당시 엽정의 사령부 옛터를 지금까지 보존하고있었다. 새로 축조된 학교 주청사와 운동장을 지나니 해묵은 나무 두 대가 우거진 사이로 낡은 벽돌건물이 보였다. 가까이에 가보니 2층으로 된 건물이였는데 건물 정면에는 <엽정 지휘부 옛터(叶挺指挥部旧址)>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엽정은 2층에 지휘부와 전화통신실을 설치하고 아래층에 경위원을 들게 하였다. 엽정은 이곳에서 남창봉기의 천주교회당(天主教会堂)전투, 공원(贡院)전투, 신영방(新营房)전투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엽정부대가 구강을 거쳐 남창에 진입하였을 때 제2단계 북벌에 참가해 혁혁한 공헌을 세웠던 하룡부대도 구강을 거쳐 남창에 왔다. 독립 15사단으로 북벌전에 참가한 하룡부대는 수차의 전투에서 승전하고 20군으로 확대되였던 것이다. 이 부대에는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를 비롯한 수십명 조선족 장병들이 있었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도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 의렬단 단원이였던 류자명(柳子明)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민당의 탄압이 컸기 때문에 조선혁명가들도 피해를 보았다. 제6군 포병영 영장이였던 리검운은 소속부대에 체포되였고 부영장인 권준과 부관인 안동만(安东晚)은 각기 호남성과 남경으로 피신했다. 시국이 이처럼 살벌해 지자 김원봉은 무창을 떠나 구강으로 갔고 거기에서 하룡부대에 편입되였던 것이다.   7월 25일, 왕정위와 장발규가 려산(庐山)회의를 소집하고 하룡을 불렀지만 그는 응하지 않고 남창의 중화성공회(中华圣公会)에 20군 지휘부를 설치하고 공산당과 함께 남창봉기를 준비하였다.   하룡의 20군 지휘부 옛터는 자고로(子固路) 165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원내에는 두 개 청사가 있었는데 모두 벽돌, 기와로 된 건물이였다. 당시 하룡은 한 건물을 20군 군부사무실로 쓰고 다른 한 건물에서 류백승(刘伯承), 운대영(恽代英)과 함께 거취하면서 사무를 보았다. 원래 중화성공회 굉도당(宏道堂)의 건물이였던 하룡지휘부 옛터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 있었다.     엽정부대와 하룡부대가 남창에 입성함에 따라 공산당이 장악한 부대가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두 부대와 주덕이 거느린 군관교육단의 부분적인 장병 그리고 남창부근의 회마령에 주둔한 주사제의 부대까지 합치면 총수가 3만 8천여명에 달했다.   이때 강서경내는 국민당 제5로군(第五路军) 총지휘인 주배덕(朱培德)이 수비를 맡고있었다. 주배덕은 남경정부와 무한정부 사이에 끼여 시국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있었다. 그는 주력부대인 3군을 길안(吉安)에 주둔시키고 9군을 동향(东乡), 진현(进贤) 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남창시와 근교에는 제5로군 총지휘부와 경비단(警备团) 그리고 부분적인 부대만 있었다. 적의 총수는 약 만명 정도였다.    7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사업을 책임진 주은래가 남창에 도착하였다. 그는 주덕의 집에 머물면서 앞써 도착한 리립삼, 운대영, 팽배(彭湃) 등과 만났다. 그들은 강서대려사에 모여 중국공산당 전적위원회(前敌委员会)를 설립하고 봉기문제를 자상히 토의하였다. 주은래가 전적위원회 서리를 맡고 하룡을 남창봉기 총지휘로, 엽정을 전적총지휘로, 류백승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회의에서는 7월 30일에 봉기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봉기 준비가 바야흐로 성숙되여가고 있을 때 장국도가 중앙의 대표신분으로 봉기에 간섭해 나섰다. 29일 그는 두차례 전보를 보내 심중하게 폭동해야한다고 부탁하였다. 7월 30일 장국도는 구강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급급히 남창에 왔다. 그는 봉기를 앞두고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대회에서 장국도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극력 봉기를 늦추어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은래, 운대영, 팽배, 담평산을 비롯한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이 단호히 장국도의 건의를 부결하였다. 대회에서 주은래는 전적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작전명령을 작성하였다. 명령은 남창의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8월 1일 새벽 4시부터 성내외에 주둔한 적들을 공격한다고 하였다.   7월 31일 밤,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고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강서대려사만은 불빛이 휘황하였다. 봉기 총지휘부에서 사람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봉기시각을 시다렸다.   수만명 봉기장병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만단의 준비를 끝내고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어둠이 뒤덮인 중국의 암흑을 깨칠 그 시각은 한초한초 다가오고 있었다.   
21    제21회 하승교와 토지당 전적지 댓글:  조회:4162  추천:52  2007-08-03
      장개석이 피비린 <4.12>반혁명 정변을 일으킨후 성세호대하던 중국 혁명진영은 분렬되기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남경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고 왕정위를 대표로한 무한정부는 계속 국공합작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의 반역행위를 성토하였다. 한편 북경에는 장작림의 북양군벌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력사에서는 세 정부가 병존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혁명자들은 반제반봉건 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새로 나타난 군벌세력과 투쟁하여야 했던 것이다.    1927년 4월 19일, 무한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은 무창 남호(南湖)에서 북벌선언을 발표하고 두 번째 단계의 북벌을 시작하였다. 왕정위는 장개석을 토벌하자는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의 동정주장을 제치고 쏘련 고문 보로딘의 의견을 받아 북벌을 결심했다.    무한정부 북벌군 주력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을 포함한 장발규(张发奎)의 제4군과 제11군 그리고 하룡(贺龙)이 거느린 독립 15사단이 포함되였다. 많은 공산당원들과 조선인 장병들이 두려움 없이 싸웠기 때문에 북벌군은 강대한 적을 물리치고 승승장구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풍옥상 부대가 북벌군을 도왔고 산서의 염석산(阎锡山) 부대도 적극 호응해 나섰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하남전성을 석권하고 6월 2일 하남성 개봉(开封)을 점령하였다. 한편 장개석도 북벌을 시작해 이날 중원의 전략요충지인 서주(徐州)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쟁과 외란에 시달리던 무한정부는 더욱 큰 위기를 겪게 되었고 드디어 왕정위도 혁명을 배반하고 장개석과 합류하는 길로 나아갔다.    국민군이 제2단계 북벌을 시작한 후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1927년 4월 27일부터 무창고등사범학교(武昌高等师范学校) 제1부속소학교(第一附属小学校) 강당에서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진독수(陈独秀), 채화삼(蔡和森), 장국도(张国焘), 담평산(谭平山), 구추백(瞿秋白), 모택동(毛泽东)을 비롯한 80여명 핵심당원들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이때에 와서 전국 공산당원수는 1925년의 994명으로부터 5만 7천 9백여명에 달했다.    대회에서는 진독수의 타협로선을 비판하였고 혁명투쟁에서 무산계급이 지도권을 장악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당면한 무장투쟁과 토지혁명에 관련한 관건문제에서 명확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국민당 대표로 대회에 출석해 연설까지 했던 왕정위는 자기를 소자산계급으로 규명하고 겨우 단결의 대상으로밖에 인정하지 않은 공산당의 작법에 실망을 느끼고 드디어 공산당에 대해 칼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무한정부가 통제하고있는 호북, 호남, 강서 등지에서는 성세호대한 로동자, 농민운동이 계속되고있었다. 게다가 무한정부는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북양군벌과의 치렬한 격전이 계속 되었고 동쪽에서는 장개석이 무한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고있었으며 남쪽과 서쪽에는 장개석에게 매수된 광동군벌과 사천군벌이 수시로 무한을 노리고있었다.    무한정부가 북벌을 시작할 때 의창(宜昌)수비를 맡았던 하두인(夏斗寅)이 북벌군이 무한을 떠난 기회를 빌어 사천군벌 양삼(杨森)과 결탁하여 무한으로 공격해 왔다. 하두인은 토지문제를 둘러싼 계급 모순을 극대화하여 공산당과 농민운동을 타매하면서 국공합작을 주장하는 무한정부를 반대하였다. 반란군은 신속히 정사교(汀泗桥)를 점령하고 월한철도(粤汉铁路)를 차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란군은 한구의 주둔군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공산당을 반대하기로 계획했다. (권립교수) 150여명 조선족 혁명가들은 무한으로 급전이하여 무한군정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5월 17일 호남군벌 하두인과 양삼이 결탁하여 무한을 대거 진공하였는데 이때 무한군정학교의 4,000여명 학원들은 중앙독립사로 편성되여 엽정장군의 지휘하에 무한보위전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무한을 수비하는 혁명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구(汉口) 수비를 맡은 제8군 군장 리품선(李品仙)은 로동자 규찰대의 지휘권을 찬탈하여 했으며 장강을 봉쇄하고 무한 3진의 래왕을 두절시켰다. 위기일발의 시각 공산당은 무창(武昌)의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동원해 토벌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군대를 모집해 토벌을 평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무창수비사령을 맡은 엽정부대와 중앙군사정치학교 4천여명 학원들을 동원해 편성한 중앙독립사(中央独立师)를 전투에 내세웠다. 엽정부대에는 북벌에 참가했던 백 50여명 조선장병들로 무어진 정규부대가 있었고 중앙독립사에도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많은 조선혁명가들과 학원들이 있었다.    혁명군은 엽정의 지휘하에 무한남부 지방(纸坊)부근에 수비진을 쳤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반란군을 물리친후 엽정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토지당(土地堂)부근에서 적 주력을 포위하였다. 반란군이 우세한 병력을 믿고 다시 반격하기 시작하였다. 전투가 더욱 치렬해지자 중앙독립사가 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독립사는 적의 반격을 막아낼수 없었다. 엽정은 정규군 한 개 영을 보내 독립사를 지원하게 하는 한편 사수할 것을 엄명하였다. 이에 큰 고무를 받은 혁명군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완강하게 싸웠다. 쏘련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고 또 줄곧 엽정을 따가 북벌전쟁을 치러온 박영(박근성朴根星), 박근만(朴根万), 박근수(朴根秀) 세 형제는 다른 조선인 사병들과 함께 영용히 싸웠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진하는 혁명군 앞에서 적들은 드디어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혁명군은 앞다투어 돌진해 적들을 소멸하고 토지당을 점령하였다. 3백여명 반란군 패잔병들이 도주하였을뿐 주력이 이곳에서 전부 소멸되였다.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조선혁명가 박근만, 박근수 형제는 6월 5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권립교수) 조선족혁명가 박영, 박근만, 박근수는 무한 토지묘 근처에서 반란군을 물리쳤지요. 조선용사들은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고 무한보위전에서 대공을 세웠습니다. 박근만과 박근수 형제는 용감하고 지혜롭게 잘 싸워 소문이 났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도했습니다.   하승교(贺胜桥)에서 무한으로 돌아오던 중 답사팀은 토지당 전적지를 찾아보았다. 귀청을 째는 듯한 총, 폿소리가 멎었고 용감하게 돌진하던 조선혁명가들의 함살(喊杀)소리도 멎은 지 오래다. 전적지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두 밭으로 변해 버렸다.    부근에 조금 높은 둔덕이 있었고 거기에 옛날 작은 사당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할 뿐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었다. 다만 길가에 작은 도로표식 하나가 있어 거기에 새겨진 “토지당(土地堂)”이란 석자를 보고 토지당 전적지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하두인의 반란군은 전호를 파고 수비진을 쳤으며 혁명군은 넓은 평지로부터는 적을 포위하고 두려움 없이 싸워 적을 소멸했던 것이다. 자랑찬 우리민족 선렬들이 이 유명한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웠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것이다.    토지당 전투의 승리로 무한정부는 하두인과 양삼의 반란을 평정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무한정부 주석인 왕정위를 비롯한 국민당은 계속 반란군을 비호하면서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농민운동을 견제하였다. 그리하여 5월 21일 장사에서 군벌 허극상(许克祥)이 마일사변(马日事变)을 일으켰다. 그는 백여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하고 호남성 총공회와 농회를 봉쇄하였다. 강서에 웅거해있던 주배덕(朱培德)도 경내의 공산당과 로동자, 농민운동 지도자들을 견제하고있었다.   1927년 7월 15일, 왕정위는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한국민당중앙 상무위원회 제20차 회의를 소집하고 여러 가지 구실로 공산당과 분리할데 관한 결의를 지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공산당과 로동자, 농민 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하였다. 왕정위는 “천명을 잘못 죽일지언정 한사람도 놓지지 말라(宁可狂杀千个, 不使一人漏网)”는 구호를 내세우고 많은 공산당원들을 학살하였다. 이로써 국공합작은 철저히 파렬되고 중국혁명은 또다시 피 못에 잠기게 되었다. (권립교수) 7월 15일에 왕정위가 대학살을 진행하여 북벌전쟁은 실패하고말았습니다. 4,000여명이나 되던 중앙독립사는 천여명밖에 남지 않았고 150여명의 조선용사들은 견정불이하게 엽검영동지의 지휘하에 군관교도퇀에 참가하여 제2영 5련에 편성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국내혁명전쟁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이 실패의 시련을 맞이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7월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무한정부에서 탈퇴한다고 선포하였다. 7월 12일 중국공산당은 진독수의 우경(右倾) 투항주의로선을 극복하고 새로운 림시중앙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장국도, 주은래, 리유한(李维汉), 장태뢰(张太雷), 리립삼(李立三)이 상무위원회 성원으로 되었다.    왕정위가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한후 중국 공산당내에서 무력항쟁의 주장이 더욱 고조되였다. 주은래, 장태뢰, 모택동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피비린 탄압에 무력으로 항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로동자, 농민봉기를 준비하였다.    1927년 장개석, 왕정위가 선후로 혁명을 배반함으로써 중국력사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1927--1937)에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는 중국의 광범한 피압박 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장개석을 대표로 하는 국민당의 반동통치에 맞써 무력항쟁을 전개한 시기이다.    중국공산당은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단합시키고 동방 피압박민족 혁명가들과 함께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일으키고 자체의 무장인 홍군을 창건하고 각지에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였다. 중국의 광범한 피압박 인민들은 공산당과 홍군을 따라 국민당 반동군벌들과 제국주의를 반대해 두려움 없이 싸웠다.    중국에 망명해온 조선혁명자들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많은 조선의 우수한 혁명가들이 중국공산당을 따라 농촌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하였고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하였으며 적이 통치하는 도시 지하전선에서 두려움 없이 적들과 싸웠다. 그들은 시련과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피압박민족의 대단결과 항쟁은 필연코 반동파와 제국주의자들을 전승하고 자유와 독립을 찾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민족의 우수한 혁명자들은 이와 같은 굳은 신념을 안고 중국인민들과 함께 어깨 겪고 싸웠고 중화대지에 불굴의 발자욱을 력력히 남겼다.  
20    제20회 중국인민의 반제투쟁에 참가 댓글:  조회:4106  추천:46  2007-07-30
   북벌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중국력사는 수많은 사변들이 나타난 1927년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7년초의 중국남방대지는 전란이 계속되였고 호남, 호북에서는 농민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무한과 구강에서는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고 상해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무장봉기가 일어나 북벌군의 공격을 적극 도와 나섰다. 전반 중국 대지가 혁명의 열조에 휩싸였고 국벌정부의 억압과 제국주의의 수탈에 허리를 펴지 못하던 억만 중국인민이 다투어 혁명에 나섰다.     북벌군이 북벌을 시작해 불과 1년도 안되는 사이에 혁명력량은 주강류역으로부터 장강류역으로 신속히 발전하였다. 수십만 무한인민들은 거리에 떨쳐나와 북벌군을 환영하였다.   왕정위를 주석으로 한 국민혁명정부는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왔고 따라서 무한은 혁명중심으로 되었다. 황포군관학교도 이때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려 8천여명 청년들이 학습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되였다. 광주에서 황포군교에 입학하였던 수많은 조선청년들도 무창에 왔고 전국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청년들과 혁명자들도 선후하여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창수비사령을 맡은 엽정부대에는 엽정을 따라 북벌전쟁을 해온 조선인 부대가 있었다.   무한에 모인 조선혁명자들과 조선청년들은 의렬단을 중심으로 류악혁명청년회를 조직해 혁명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무한인민들은 국민정부의 천도(迁都)와 북벌승리를 경축하는 성대한 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반제반봉건 선전을 진행하였고 강연회를 가졌다. 1월 3일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 선전대가 강한관(江汉关)부근에서 수만명의 군중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가졌다. 이때 부근에 주둔했던 영국 해병들이 간섭해 나섰다. 그들은 16정의 기관총을 걸어놓고 하늘에 총을 쏘면서 군중들을 위협하였다. 집회에 모인 로동자와 학생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 병사들은 총창을 들고 무고한 군중들에게 덮쳐들었다. 충돌에서 중국 로동자 한명이 숨지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했다. 이에 격분한 더욱 많은 군중들이 영국 조계지로 돌진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후 국민당 정부는 영국당국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고 영국 해병대의 철수와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한편 격분한 무한인민들은 항의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전면적인 파업을 시작하였다.   무한 중남재경대학의 원계성 교수는 당시 무한의 조선인들도 동방피압박민족 인민들과 함께 이번 투쟁에 참가했다고 증언하였다.   (원계성) 한국 주민들이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는 고조시기 영국과 일본, 프랑스 조계지의 인디아 고용인들이 윁남과 조선인들을 련합하여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 조직을 만들어 무한인민들을 지원하여 영국 조계지 회수를 도와주었고 시위도 하였습니다. 그 영향이 컸습니다.    1월 6일 구강에서도 영국 해병이 무고한 인민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각지 수십만 군중들은 계속 제국주의의 폭행에 항의하였고 국민정부는 적극적인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2월과 3월 선후하여 한구와 구강의 영국 조계지 회수에 관련한 협의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제국주의자들은 아편전쟁이후 처음으로 단합된 중국인민앞에 머리를 숙이고 조계지에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한의 반제반봉건 투쟁의 승리는 전국인민들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농민들이 일떠나 대지주, 자산계급과 투쟁하였고 군벌통치와 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웠다. 이러한 투쟁물결속에 조선혁명자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남경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자들은 1927년 2월에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를 조직하였다. 일찍부터 이곳에서 활동하던 의렬단원 류자명(柳子明)을 중심으로 신공제(莘公济), 김규식 그리고 무한혁명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안동만(安东晚)을 비롯해 중국인, 윁남인, 인디아인들을 모아 련합회를 조직하였다. 김규식이 회장으로 추대되고 안동만이 한국부 상무(常务)로 활동하였다. 련합회는 또 기관지 <동방민족(东方民族)>을 조선문, 중문, 영문으로 출간함으로써 민족독립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호소하였다.      1927년 3월, 장개석이 직계부대를 동원해 남경, 상해지역으로 진격해 왔다.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세력이 웅거해있는 국제도시였고 공상업 중심지였다. 장개석은 상해를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경제명맥을 쥐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지해 자기의 지반을 굳히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일찍부터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수십만 로동자들을 단합시켜 수시로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하고 있었다.   마관조약(马关条约)이 체결된후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여러 중심도시에 공장을 세우고 중국 로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특히 일본은 상해에 가장 많은 공장을 세웠고 로동자들에 대해서도 가장 가혹하였다. 1925년 2월, 상해 일본인 방직공장 로동자들이 공장측에서 로동자들을 구타하고 공장에서 쫓아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분개한 로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하였고 일본공장주는 일본군경들을 시켜 공장 로동자 대표이고 공산당원인 고정홍(顾正红)을 살해하였다. 일본인이 고정홍을 살해한 소식이 전해지자 더욱 많은 로동자들과 학생들이 항의해 나섰다. 그리하여 5월 30일 중외를 진감한 5.30참안이 빚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상해에서의 이번 중국인 반일반제국주의 투쟁에 조선인 열혈청년들도 참가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서재현(徐载贤)이다.     서재현(1906.11.15--)은 황해도 장연(长渊)사람으로서 1924년 2월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 산하의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学校)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교내 소년회(少年会)를 책임지고 ?나라를 찾는데는 돈이냐 피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5년 동제대학(同济大学)에서 공부하던 서재현은 상해대학학생련합회의 호소에 따라 일제를 반대하는 동맹휴고, 대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해 동제대학과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조선인 학생이 가장 많았다. 그는 두 대학의 25명 조선학생들과 함께 중국학생들의 성세호대한 반제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재현은 조선인 최병락(崔炳洛), 김규선(金圭善) 등과 함께 5월 30일 11시경부터 상해역전에서 중국인 학생들과 회합하였다. 시위 대오는 절강로(浙江路)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조계지를 회수하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쳤다.   오후 2시 시위대오가 남경로(南京路)에 이르렀을 때 조계지 영국 경찰들이 학생들을 향해 총격하여 수십명의 사상이 빚어졌다.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은 더욱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6월 1일부터 5일까지 많은 학생들이 가두연설을 하고 전단배포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의 죄악을 널리 선전하였다. 한편 더욱큰 희생을 피면하기 위해 공산당에서는 조직적으로 로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조직하게 되었고 국민당정부와 북경의 군벌정부는 제국주의자들과 담판했지만 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후 서재현은 30년대까지 계속 상해에서 활동하였고 1944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으로 사업하기도 하였다.     5.30참안이 있은 후 전국 각지에서도 선후하여 로동자 파업과 학생시위가 진행되여 반제반봉건 투쟁을 한껏 고조시켰다. 중국공산당은 창건된 그날부터 로동운동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특히 당의 본거지인 상해에서의 로동자 조직은 공산당의 령도하에 전례없이 단결되였다. 1927년 북벌군이 상해로 진격해 오자 공산당은 상해 로동자들을 령도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데다가 조직이 잘되지 못했고 또한 사전에 봉기 소식이 루설되는 등 원인으로 두차레 무장봉기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27년 3월 공산당은 상해 로동자들을 이끌고 세 번째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상해에 있던 공산당 중앙의 주요성원들이 모두 봉기 령도에 참가하였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인 주은래가 직접 해군부대의 장병훈련과 로동자 무장을 조직하였다. 3월 21일 상해의 로동자들이 전부 파업에 들어갔고 로동자 규찰대가 무장하였다. 로동자 규찰대와 군부대의 혁명적 장병들은 무기를 들고 경찰서와 병영, 군부대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제3차 상해로동자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여 하루사이에 시구역 전부를 점령하였고 시교의 반동군벌부대는 접전하기전에 북벌군 정규군이 공격해 오자 모두 철수해버렸다. 그리하여 상해는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동자 규찰대에 의해 통제되였다. 한편 장개석의 1군 주력사단이 상해 근교에 주둔하였고 남경은 2군과 6군이 점령하고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장개석은 상해의 매판자산계급과 제국주의자들과 타협하면서 상해의 경제명맥을 틀어쥐었고 계속 무한정부와 대항하려 시도하였다. 당, 정, 군 실권을 한몸에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은 장개석은 상해를 확실히 장악하여야했고 왕정위와의 권력쟁탈을 계속하려면 더욱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이 있어야 되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드디어 손중산의 반제반봉건투쟁 리념을 뒤엎고 철저히 혁명을 배반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 깡패들을 사촉하여 로동자 규찰대와 충돌하게 하였으며 소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정규군을 풀어 로동자들의 무기를 압수하였다. 13일 상해 총공회는 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20만 로동자들과 학생들이 대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대오가 보산로(宝山路)에 도착했을 때 장개석 군대는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보산로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널렸고 붉은 피가 짙게 물들었다. 이어 보로딘, 진독수, 담평산, 오옥장, 모택동을 비롯한 197명 공산당 요인을 구금할 명령을 내렸다.   광주의 리제심(李济深)도 4월 15일 공산당을 도살할데 관한 명령을 내렸다.   <4.12>반혁명 정변이 일어난 후 각지의 중국공산당은 지하투쟁으로 들어갔으며 일부는 무한으로 집결하였다. 각지의 진보적인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공산당의 중앙지도자들은 계속 국민당내 좌파에 희망을 품고 국민당과 타협했기때문에 혁명성과를 잃어 버렸다. 주은래를 비롯한 부분적인 공산당 중앙위원들은 무력항쟁을 주장했지만 당시 공산당의 중앙서기 진독수는 국민당 좌파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전국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었고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리웠다. 새롭게 나타난 장개석 반혁명 군벌정권에 대해 사람들은 분개하면서도 적당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도 큰 실망을 안고 방황하였고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아 무한으로 떠났다.  
19    제19회 무한에서의 조선인 혁명활동 댓글:  조회:4724  추천:77  2007-07-30
   192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벌전쟁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두려움 모르는 북벌군 장병들은 파죽지세로 호남, 강서 전선을 휩쓸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이 일떠나 북벌군을 도와 나섰다. 그리하여 이해 년말까지 북벌군은 수배나 더 많은 군벌부대를 전승하고 광서, 광동으로부터 호남, 호북, 강서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중국혁명에 몸담고 싸웠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은 북벌전쟁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유망한 청년들을 더욱 많이 단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의렬단 단장 김원봉은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휘하에 집결시키기에 노력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자 그는 기타 의렬단 간부들과 함께 황포군교 무한분교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무한에 거주하고있던 조선교민들속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찾았으며 무한의 여러 혁명단체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 군내에 있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왔다.   무한의 중남재경대학(中南财经大学) 원계성(袁继成) 교수는 당시 무한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해주었다.  (원계성)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일찍 무한에 정치과를 설치하려할 때 한쪽으로는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전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에서 전국을 상대로 학생들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무한에 조선혁명청년회가 있었는데 청년회를 주도로 각지에서 많은 우수한 한국 청년들이 무한에 오게 되었습니다. 후에 무한군교, 무한분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온 중앙군관학교 무한분교에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무한에는 일찍부터 소수 조선교민들이 중약과 인삼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다. 20년대에 들어와 조선교민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혁명자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군관으로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조선청년과 학생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들과 군관들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혁명청년회(留鄂革命青年会)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조선혁명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포함되였다. 이 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义杓), 리검운(李检云), 오세진(吴世振), 리우각(李愚悫), 로세방(劳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事政治学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陈公木), 진갑수(陈甲秀), 사검인(史剑仁), 안동만(安东晚), 류광세(刘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学)과 남호학병단(南湖学兵团),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네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 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1925년부터 26년까지 중국 국공합작이 고조를 이루고 북벌군의 승전에 따라 중국혁명은 사람들을 크게 고무시켜 주었다. 특히 중국에 망명되여 온 조선혁명자들과 수많은 조선청년들은 이에 감화되여 중국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확정지어갔다.   김원봉을 단장으로하는 의렬단은 이시기 조직세를 확장시켰을뿐만 아니라 비교적 성숙된 운동리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관헌의 자료를 분석할 때 의렬단은 대체로 1926년 20개조의 강령을 제정하여 단의 리념적 지표를 더욱 구체화, 명료화, 체계화시키면서 발전적 면모를 보였다.   의렬단의 강령을 보면 첫째, 조선민족 생존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근본적으로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자유독립을 완성한다고 하였고 둘째,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세력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립함이라 하였으며 셋째,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剥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의 경제조직을 건립한다고 하였다.   의렬단의 이와 같은 주장은 20년대초의 투쟁강령이였던 의 계승과 발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 타도는 당시 모든 조선혁명가들의 공동의 리념이였다. 그리고 이시기 의렬단은 공산주의의 영향하에 계급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대중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각지에 공회조직과 농회조직을 설치함으로써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들을 혁명에로 이끌고있었다. 하여 조선혁명자들은 이때에 와서 국민당과 북벌군이 승승장구로 전진할수있은 가장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대중운동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한편 이시기에 와서 조선독립운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유일당촉성운동이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여 일정한 성과를 보기도 하였다.   일찍 상해림시정부가 수립될 때 려운형과 리회영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으로서 당 조직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수립이 급급했던 탓으로 이 문제가 중시를 불러일으키기 못했다.   1923년 6월 독립운동의 분렬과 림시정부내 파벌투쟁이 심각한 상황에서 김규식, 신숙(申肃), 리청천(李青天) 등은 로씨야 극동의 리동휘, 한명세(韩明世)와 회합하여 “민족운동의 통일적 혁명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작성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대동단결론이 제기되였고 이들의 영향하에 1926년 10월 16일에 대독립당(大独立党)조직 북경 촉성회(促成会)가 결성되였다. 북경촉성회는 조성환(■成焕), 장건상, 강구우(姜九禹)를 비롯해 40여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뒤 1927년 3월 21일에는 상해촉성회가 창립되고 150명 회원을 확보하였다.   당시 김성숙, 오성륜, 장지락(张之乐--김산)을 비롯해 광주에 약 3백명에 달하는 조선혁명자들이 있었는데 이?/textarea> var config = new Object(); // create new config object config.width = "100%"; config.height = "200px"; config.bodyStyle = 'background-color: #FFFFFF; font-family: "굴림"; font-size: 10pt; line-height:150%;margin: 10 10 10 10 '; config.debug = 0; config.toolbar = [ ['fontname'], ['fontsize'], ['bold','italic','underline','separator'], ['justifyleft','justifycenter','justifyright','separator'], ['OrderedList','UnOrderedList','Outdent','Indent','separator'], ['forecolor','backcolor','separator'], ['HorizontalRule','Createlink','InsertImage','htmlmode'], ]; config.fontnames = { "굴림": "굴림, 굴림체", "돋움": "돋움, 돋움체", "바탕": "바탕, 바탕체", "궁서": "궁서, 궁서체" }; config.fontsizes = { "1": "1", "2": "2", "3": "3", "4": "4", "5": "5", "6": "6", "7": "7" }; config.fontstyles = [ // make sure classNames are defined in the page the content is being display as well in or they won't work! { name: "headline", className: "headline", classStyle: "font-family: arial black, arial; font-size: 28px; letter-spacing: -2px;" }, { name: "arial red", className: "headline2", classStyle: "font-family: arial black, arial; font-size: 12px; letter-spacing: -2px; color:red" }, { name: "verdana blue", className: "headline4", classStyle: "font-family: verdana; font-size: 18px; letter-spacing: -2px; color:blue" } ]; //////////////////////////////////////////////////////////// // userColor 추가 by k2 //////////////////////////////////////////////////////////// editor_generate('content',config,'#FFFFFF'); 관련링크   첨부파일 삭제
18    제18회 김준섭렬사의 유적을 찾아 댓글:  조회:4328  추천:33  2007-07-30
  1926년 11월 남창공격전이 승리한 후 북벌군은 군벌 손전방의 주력을 소멸하고 강서 경내를 전부 점령하였다. 손전방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절강, 강소쪽으로 도주하였고 북벌군은 강서에서 병력을 정비하면서 연해지역 출병계획을 세우고있었다.   남창을 점령한 북벌군은 남창에서 성대한 추도회를 가지고 전사한 6군 기관총부대의 조선인 교관 김준섭을 추모하였고 격앙된 심정으로 더욱 큰 승리를 이룩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북벌군 희생자들을 남창 근교에 매장하고 커다란 기념비를 세워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북벌전쟁에서의 조선족 혁명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하던 답사팀이 남창에서 김준섭 렬사의 유적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04년 2월 14일이였다. 기재에 의하면 북벌전쟁 승리후 전사자들의 시신은 남창 교외의 청운보(青云谱)에 이장되였고 그곳에 북벌전쟁 렬사기념비까지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사학자들도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있고 거기에는 김준섭 렬사의 이름도 밝혀져 있다고 알려주었다.   남창에서 “청운보”라면 비교적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력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곳을 잘 알고있었다. 안내를 맡은 중앙인민방송국 강서 주재기자 장소룡(张小龙)을 따라 답사팀은 청운보로 떠났다.     청운보는 남창시 남쪽 교외에 위치해있었는데 시 중심하고는 10여 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지금의 남창시 청운보는 고대 유명한 화가인 팔대산인(八大山人) 주탑(朱耷)기념관으로 사용되고있는 도원(道院)이 있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청조시기 유명한 화가인 주탑(朱耷)은 도사로 되어 2,5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이 도원에 장기간 은거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서 정명도교(净明道教)의 발원지인 청운포와 청나라 화가 팔대산인 기념관으로 이곳은 남창시 관광명소의 하나로 되고있다.      작은 호수가에 아담한 정원이 있었고 잎이 무성한 고목과 푸른 대나무 숲 사이로 여러 가지 고대 건물들이 보였다. 정원을 다니며 아무리 살펴보아도 북벌전쟁과 관련된 흔적은 찾아볼수 없었다. 안내를 맡은 장기자와 물어보았지만 역시 모른다고했다. 남창에 대해선 손금보듯 잘 아는 장기자도 모른다니 뭔가 잘못 된 것임이 분명하였다. 현지인들과 물어보아도 그런 기념비를 모른다고하였다.   전화를 통해 북경과 연변의 력사고문들과 련락하여 문의하였다. 분명 그곳에서 렬사기념비를 보았다는 기재가 있다는 것이다. 년세가 많은 분들의 기억에 따르면 기념비는 팔대산인 기념관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튿날 답사팀은 청운보에서의 아쉬움을 안고 남창시 팔일대가(八一大道) 북쪽에 위치한 강서혁명렬사기념당(江西革命烈士纪念堂)에 가보았다. 3층 건물인 기념당 앞에는 홍군전사의 동상이 있었다. 기념당에서 김준섭 렬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김준섭 렬사에 대한 전문소개가 있었고 그가 쓰던 회중시계를 비롯한 유물들도 전시되여있었다. 그리고 김준섭 렬사가 희생된 락화역 옛 사진이 있었다. 거기에는 “락화역전, 1926년 11월 김준섭은 적들과 격전하던중 역전에서 총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김준섭 렬사를 위한 북벌군의 추도회 사진도 있었다. 수많은 북벌군 전사들이 장엄히 서있는 가운데 렬사의 시신이 누워있는 커다란 관이 있었고 관앞에는 꽃다발이 있었다. 그뒤 프랑카드에는 김준섭 렬사를 추모한다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기념관에 김준섭 렬사에 대한 약력이 적혀있었지만 상세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조선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사람으로서 중국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 전사”라고 김준섭 렬사를 평가하고있었다.   기념당 연구일군들과 북벌렬사 기념비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러자 우리가 청운보에서 기념비를 볼수없었던 답이 나왔다. 분명 청운보에 북벌 렬사기념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시기를 거치면서 극좌적인 사상의 영향으로하여 기념비를 폭파해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창시 진현문외(进贤门外)에 위치한 피장구(皮匠沟)에는 <조선 김준섭 동지 지묘(朝鲜金俊燮同志之墓)>라고 쓴 작은 기념비와 묘지가 있었다고 하나 역시 문화혁명때 파괴되였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였다. 책의 기재에는 한자가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현문, 피장구가 어딘지 알수없었지만 기념당 일군의 말에서 그곳을 분명히 알수있었다.    비록 많은 공산당원과 조선 혁명자들이 북벌전쟁에 참가했지만 필경 국민당이 주도한것으로 인식되였기때문에 문화대혁명시기 극좌적인 사상의 지배하에 사람들은 북벌전쟁력사를 객관적으로 알지 못했던것이다. 더욱이 많은 조선족 로혁명가들은 문화대혁명시기 조선특무로 욕을 보았고 많은 력사 유적들도 파괴되였던것이다. 참으로 죄악의 동란기였다.   우리가 김준섭 렬사에 관련해 취재한다는것을 안 기념당 연구일군들은 더욱 많은 자료가 있으면 기념당에 보충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개혁개방을 맞으며 그들의 연구 시각도 다양해지고 넓어지고있는것이다. 그들은 보다 개방적인 사유로 국내외의 광범위한 사료를 골고루 연구해야만이 북벌전쟁력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수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청운보 북벌렬사기념비와 진현문외 피장구의 김준섭 렬사묘가 파괴된데 대해 답사팀은 커다란 유감과 아픔을 느끼고있었다. 그런대로 남창 렬사기념당에서 아직도 김준섭 렬사를 기념하고있고 또 더욱 많은 자료가 있으면 보충해 달라는 연구일군들의 부탁에서 다소 위안을 느끼기도 하였다.     답사팀은 장기자를 따라 제2차 남창공격전의 유명한 전적지였던 락화(乐化)역으로 갔다. 락화진은 남창시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이전에는 경한(京汉)철도가 락화역을 지났다한다. 경한철도는 지금 경구철도의 한부분이다.     차를 타고 30여분 달려 남창시 신건현(新建县) 락화진(乐化镇)에 도착하였다. 울퉁불퉁한 흙길에 헐망한 가옥들이 나타났다. 쓰레기 관리와 오수처리가 안되여 진은 지저분해 보였고 매우 락후했다. 주민구를 지나 남으로 가니 철길이 보였다. 부근에는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를 깊이 파놓은 흙무덤이 있었고 동쪽으로 작은 2층 건물로 된 기차역이 보였다. 바로 락화역이였다.   현지인들과 물어보니 옛 락화역 건물은 이미 허물고 그 자리에 기숙사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기차역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 곁에 흙무덤과 깊은 웅덩이 자리가 바로 옛 락화역 자리였던이다. 소중한 문화재가 이처럼 쉽게 제거되어 버린것이다. 가까스로 참아왔던 유감과 아픔이 금방 분노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때 며칠째 우리를 안내하던 장기자도 분노하는것이였다. 문화재가 이처럼 많이 파괴되고있는것을 안 장기자 역시 남창사람으로서 마음의 가책을 받은것이다. 장기자는 꼭 문화부문과 관련 부문에 이 문제를 반영하여 문화재 보호에 진력하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안되면 성 당위원회와 성정부에 직접 찾아가 문제를 반영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새로 지은 기차역 건물은 그 곁에 있었다. 역에서 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장 류사기(刘斯杞)가 소개한데 의하면 락화역은 구강차무단(九江车务段)에 소속되여 있고 낡은 역은 1994년까지 사용되다가 지금의 건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는 매일 198쌍의 렬사가 지난다고 하였다. 락화역에 서서 주변의 민가와 멀리 푸른 산을 내다보면서 격동된 심정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따금 역을 지나는 렬차의 굉음에 따라 사색은 아득한 옛날로 달렸다.     1926년 1차 남창공격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준섭 렬사는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부대의 후위에 서서 간고한 엄호작전을 수행하였다. 다행히 북벌군작전부에서 감강에 미리 다리를 놓았기때문에 주력부대는 쉽게 다리를 통해 감강을 건너 철수할수있었다. 치렬한 전투에서 김준섭 렬사는 탄약이 떨어질때까지 싸우다가 대오의 뒤를 밟아 홀몸으로 퇴각하였다.   무사히 포위를 뚫고 나온 북벌군은 부대를 정비한 다음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11월초 북벌군은 제2차 남창공격전을 개시하였다. 남창시 교외의 주요 화력거점인 락화역을 점령하기 위해 김준섭은 기관총부대를 거느리고 락화역으로 돌진하였다. 그는 세정의 기관총을 지휘하여 역전의 적군 보루에서 퍼붓는 적의 화력을 진압하면서 공격의 길을 헤쳐놓았다. 11월 19일 오후, 화력망을 조직하기 위해 비발치는 탄우속을 달리던 김준섭 렬사는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전우들이 달려와 그를 구원하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찬 영웅, 김준섭 렬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북벌군 장병들은 우수한 조선인 기관총 교관 김준섭의 두려움 모르는 희생정신에 감화되였다. 그들은 교관의 원쑤를 갚자고 웨치면서 재차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락화역을 탈환하였다. 김준섭 렬사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락화역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때까지 싸웠던것이다. 파죽지세로 봉건군벌들을 무찌르고 수억 중국인민들을 크게 고무해 주었던 북벌전쟁에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김준섭 렬사처럼 두려움 없이 싸우면서 피를 흘렸고 생명을 바쳤다. 그들은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그날이 꼭 오리라 굳게 믿고 싸웠던것이다.  
17    제17회 무창과 남창공격전 댓글:  조회:4364  추천:43  2007-07-30
  호북성 소재지인 무한은 예로부터 무창, 한구, 한양 3진(三镇)에 대한 통칭이였다. 만리 장강이 무창과 한구, 한양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汉水)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과 한수에 다리가 놓여져 무한 3진이 한 도시로 되었다.   만리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 중부의 중요한 수륙 교통과 문화 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였던 것이다.     1926년 9월, 북벌군 주력부대는 한양, 한구를 점령한후 무창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하였다. 오패부가 남겨놓은 3만명 잔여부대는 견고한 성벽에 의재해 완강히 사수하였다.   한달 남짓한 치렬한 공격전을 거쳐 <무창봉기> 기념일인 10월 10일, 영웅적인 엽정 독립퇀이 기타 부대의 협력하에 무창을 공략하였다. 1927년 1월 18일 호 <동아일보>가 보도한데 의하면 모스크바 군관학교를 졸업한 4명의 조선인 군관도 지휘부의 요원으로 무창공격전에 참가하였다.   북벌군은 무한 3진을 전부 점령한후 엽정을 무창 수비사령으로 임명하고 주력부대는 강서 전장으로 나갔다.   북벌군의 다른 목표인 군벌 손전방을 공격하는 전투는 9월부터 강서 경내에서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북벌군 2군과 6군 그리고 1군의 한 개 사단이 강서 전역에서 손전방 부대를 공격하였다. 9월 19일 정잠(程潜)이 거느린 6군은 남창의 로동자, 학생, 성 경비부대의 내응을 받아 신속히 남창을 점령하였다.     국민혁명군 6군에는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检云), 부영장 권준(权■), 부관에 안동만(安东满)을 비롯한 조선인 군사간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초급장교로 북벌군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권준은 의렬단 단원으로서 국공합작의 초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혁명가이다.   권준(1895.5.2--1959.10.27)의 호는 백인(百忍)이고 권중환(权重焕), 강병수(姜炳秀)를 비롯한 많은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상주(尚州)에서 태여난 그는 1917년 광복회(光复会)에 참가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동북에 망명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권준은 본부를 북경에 옮긴 김원봉의 의렬단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는 군자금 조달과 폭탄제조 등 임무를 맡아 조선국내 폭탄 투척 의거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후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광주로 옮겨 짐에 따라 기타 의렬단원들과 함께 중국 광주로 갔다. 1924년 중국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는 국민당 제1차 대표대회가 소집되자 그는 조선혁명가의 신분으로 대회를 방청하기도 하였으며 얼마후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6군 포병영 부영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북벌전쟁이후 권준은 무한에서 동방 피압박 민족 련합회(东方被压迫民族联合会)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1932년 권준은 남경에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党)에 가입하였고 1934년에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는 혁명투쟁을 계속하면서 독립운동 간부들을 양성하였고 항일전쟁시기 중경에서 림시정부 요원으로 있었다.       구강(九江)에 사령부를 정하고있던 손전방은 남창이 공략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 그는 급히 10만 병사를 끌어 모아 남창을 탈환하려 시도하였다. 이때 북벌군은 남창을 점령했지만 각 부대가 정비를 끝내지 못한 상황이고 또한 통일된 지령을 받지 못하고있었다.   북벌군이 남창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기회를 빌어 손전방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다. 적들이 사면팔방으로 공격해 오자 장개석의 직계부대인 1군의 왕백령(王伯龄) 사단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함으로써 북벌군 수비진에 구멍이 생겼다. 비록 북벌군 6군과 2군의 기타 장병들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적의 공격을 막을수 없었다.     2군의 조선혁명자 강파(姜波)는 포병영 련장이였다. 남창의 정가교(郑家桥) 사수를 맡은 그는 기관총을 걸어놓고 적들과 싸웠다. 치렬한 전투에서 전우들이 희생되고 단신으로 남은 그는 퇴각하지 않고 계속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기관총으로 적들에게 무리 죽음을 안기던 그는 적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남창성이 다시 손전방의 손에 넘어간 소식을 접한 북벌군 총사령 장개석은 급히 강서 전장에 달려와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장개석은 여러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정면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남창의 적은 손전방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에 전투력이 강했다. 적은 밤을 타서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부대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혼란속에 빠졌고 제1차 남창공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6년 11월, 호남, 호북 전장에서 승리한 북벌군 4군과 7군 주력부대가 강서에 도착하였다. 북벌군은 제1차 남창공격전의 실패의 교훈을 섭취하고 주밀한 공격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각 부대는 무전기를 배포하여 통일적인 지휘에 복종하게 하였다.   장개석은 리종인의 7군과 정잠의 6군, 주배덕의 3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강서를 공격하게 하였고 자기의 직계부대 1군은 총예비대로 보류하였다.   리종인은 7군과 4군 부분적 부대를 이끌고 강서 북부로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신속히 덕안(德安)을 공략함으로써 구강과 남창사이의 련계를 차단하고 구강을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주배덕의 부대는 남창 남부의 적을 숙청하였고 정잠의 6군도 남창 부근의 적을 숙청하는 한편 리종인 부대의 구강 공격전을 돕기도 하였다.   북벌군은 11월 5일 손전방의 사령부 소재지인 구강을 공격하였다.   강서성 최북단에 위치한 구강은 장강 남쪽 기슭의 항구도시이다. 구강은 강서성의 주요한 하천인 감강(赣江)이 파양호(鄱阳湖)를 통해 장강에 흘러드는 합수목에 위치했다. 그리고 중국의 명산 려산(庐山)을 등졌기 때문에 구강은 더욱 유명해 졌다. 장강 중류의 주요한 항구도시이며 남북 철도 대동맥인 경구선(京九线) 중부의 중요한 도시인 구강시는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리종인 부대와 정잠의 6군 부분적 부대가 구강 공격전에 참여하였다. 6군의 조선족 혁명가 리검운(李检云)은 포병 련장으로 출전하였다가 구강 포대에서 손전방군을 격파함으로써 영장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북벌군은 손쉽게 구강을 점령하고 예봉을 남창으로 돌렸다.     11월 6일, 북벌군은 북, 남, 서 삼면으로 남창을 포위하고 제2차 남창공격전을 시작하였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8일 남창이 함락되였고 3만여명 적들이 포로되였다. 남창이 공략되자 장개석은 포로들을 전부 자기의 직계부대에 편입시키고 남창에 북벌군 대본영(大本营)을 설치하였다. 남창전투에서 군벌 손전방의 주력이 전부 소멸되였고 손전방은 남경으로 도주해 버렸다.   제2차 남창공격전에서 자랑찬 우리민족의 영웅적 투사인 김준섭이 희생되였다. 북벌전쟁의 선봉대로 엽정부대의 정사교, 하승교 전투를 엄호하였고 남창 공격전에서 앞장서서 달리던 김준섭은 남창 교외의 락화(乐化)역 전투에서 희생되였던 것이다.    김준섭(金俊燮 ?--1926)은 일명 강화일이라고도 한다.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明川郡 梧桐里)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 쏘련 군관학교 기관총 전문학과를 졸업하였고 광동에 와서 중국 대혁명에 뛰여 들었다. 1926년 2월 쏘련으로부터 중국 광동성에 온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전문적인 군사지식으로서 국민혁명군을 위해 복무하였다.   김준섭은 광동성 혜주(惠州)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6군 55단의 기관총련 소좌교관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혜주에 기관총 훈련반을 꾸렸는데 김준섭은 훈련반의 교관으로 초빙되였다. 당시 6군에는 김준섭과 같이 전문 기관총 기술을 배운 인재가 없었던 것이다. 훈련반 학원들은 6군 각 부대의 련장, 패장급 장교들이였다. 중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 김준섭은 한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수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인내력을 가지고 강의했으며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의 뜻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밤이면 부지런히 고장난 기관총을 수리해 주었다. 그리하여 김준섭은 부대 장병들과 훈련반 학원들의 애대를 받았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김준섭은 6군을 따라 호남, 호북 전장으로 이동하였다. 4군, 7군 주력부대가 공격을 도맡았고 6군, 3군은 주력부대를 협조하는 한편 강서의 손전방 부대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9월 북벌군이 정사교, 하승교에서 치렬한 접전을 치를 때 김준섭은 기관총 부대를 거느리고 엽정 선견부대의 공격을 협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후 김준섭은 6군을 따라 강서 전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는 남창 공격전, 남창 방위전에 참가하여 영용히 싸웠고 11월 제2차 남창공격전시 락화역 전투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16    제16회 하승교 전적지 답사 댓글:  조회:4396  추천:45  2007-07-30
   조선인투사들이 많이 참가한 엽정독립퇀의 유력한 공격으로 정사교(汀泗桥) 천험이 돌파되였다. 북벌군은 여세를 몰아 정사교 부근의 함녕(咸宁)성을 공략하고 하승교로 진격하였다. 이때 정사교 천험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한 오패부(吴佩孚)는 급급히 지원부대를 거느리고 하승교(贺胜桥)에 도착하였다.   월한(粤汉)철도의 다른 한 천험인 하승교는 황당호(黄塘湖)와 량자호(梁子湖) 사이의 좁은 지역이다. 때는 우기여서 호수물이 범람하여 두 호수사이의 륙지면적이 더욱 좁아졌다. 오패부는 이곳에 정예부대 2만여명에 대포 60여 문, 중형 기관총 백여정을 배치하고 세 겹의 수비진을 쳐 놓았다. 정사교에서 북벌군의 우회공격으로 받아 실패한 교훈을 섭취한 오패부는 10여리에 달하는 수비벽을 만들었고 언덕마다 요새를 만들어 서로 화력보완이 되게 하였다.     1926년 7월 29일부터 북벌군 주력부대인 4군과 7군은 엽정독립퇀을 선봉으로 정면공격을 개시하였다. 장기간 부패한 봉건군벌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당지 농민들은 앞다투어 북벌군을 도와 나섰다. 그들은 북벌군 장병들을 위문했을뿐만 아니라 길안내를 자진해 나섰다. 치렬한 공방전이 하승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였다.      2004년 2월 19일, 무한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 하면서 답사팀은 북벌전쟁의 저명한 옛 전적지였던 하승교로 향하였다. 무한시 남부로 40-50킬로메터 달리면 강하(江夏)구에 이르게 된다. 무한시에 속하는 강하구는 중국고전소설 삼국지(三国志)에도 많이 나오는 지명이다. 그만큼 이곳은 유서 깊은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차는 고속도로를 따라 남행하다가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굽어지니 강하구에 도착하였다. 강하구 당사판공실의 가희수(柯希树) 로인과 련락을 가진다음 그분을 찾아 구정부로 갔다. 구정부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초라했다. 뒷 울안에 당사판공실이 있었는데 작은 2층 줄집이였다. 2층의 한쪽 구석에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은 마치 어느 농촌 소학교 청사와 같았다. 일층에 칸칸이 현판이 붙어있었고 2층도 그러했다. 헐망한 널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사판공실 주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때 한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던 로인 한분이 자기가 가희수라고 하면서 인사하였다. 70세에 가까운 분이였지만 몸은 건강해 보였고 퍽 인자해 보이는 로인이였다.    가희수 로인은 원 강하구 당사판공실 주임으로 사업했었는데 지금은 퇴직해 집에서 만년을 보낸다고 했다. 우리가 북벌전쟁에 관련한 전적지들을 답사하러 왔다고 하자 그분은 쾌히 승낙하면서 안내를 나서겠다고 하였다. 강하에서 차를 타고 평탄한 평원지대를 지나 하승교진에 이르렀다. 하승교진은 함녕시(咸宁市) 최북단으로서 무한시 강하구와 린접해 있었다. 2만여 인구가 사는 작은 진이였다.   하승교 기차역에서 200-300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니 검은 철교가 보였다. 가희수 로인은 이곳이 바로 옛 하승교 전적지라고 알려주었다. 당시만 하여도 철교 밑으로 흐르는 물이 자못 깊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겨우 개울물 정도였다. 낮은 단층 민가들과 가끔씩 황둥개를 앞세우고 마을어귀를 다니는 평온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이곳이 수만 대군이 치렬한 접전을 치렀던 하승교 전적지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개울을 건너 철길밑 돌계단을 따라 7, 8메터 되는 철교에 올라서니 시야가 탁 트였다. 량켠으로 멀리 산언덕이 보였고 철길을 따라 아득히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군사지형에 대한 연구는 없지만 철교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언덕까지 수만명 군대를 포진해 수비진을 친다면 참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수있을 것 같았다. 이따금 렬차가 굉음을 울리며 이곳을 지났다. 중국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 대동맥인 경광선(京广线)이 이곳을 통하고있었던 것이다.     당시 오패부는 렬차에 사령부를 정하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가담한 엽정부대는 선봉을 맡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병들은 두려움 모르고 적의 진지로 돌진하였다. 엽정부대는 도림포(桃林铺)와 인두산(印斗山)진지를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을 냈고 2진과 3진에 있던 적들은 공격부대를 삼면으로 포위해 왔다. 이때 엽정부대는 경계를 맡은 철갑차대 기관총련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전투에 투입되였다. 다른 후원을 찾기 힘든 상황이였다.   부대는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졌다. 이때 엽정은 단연히 계속 공격할 결심을 내리고 기관총련과 기타 부대를 집중해 인두산 진지를 공격하였다. 빗발치는 탄우를 무릅쓰고 전사들은 두려움 모르고 돌진했다. 어떤 전사들은 총에 맞은 줄도 모르고 전진하다 쓰러졌다. 엽정과 독립퇀의 참모장 주사제(周士弟)는 일부 적들이 기발을 메고 산밑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적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판단한 그들은 공격나팔을 불게 하였다. 독립퇀 전사들은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총칼을 꼬나들고 적진에 뛰여들어 백병전을 벌였다. 질겁한 놈들은 진지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오패부는 퇴각하는 부대를 막기 위해 “칼잡이” 부대를 내세웠다. 웃통을 벗고 시퍼런 칼을 든 “칼잡이” 부대가 퇴각하는 장병들의 목을 사정없이 쳤다. 하지만 퇴각부대를 막을수 없었다. 더욱이 맹호처럼 돌진해오는 북벌군을 막을 수 없었다. 근 천명에 달하는 적이 하승교 철교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하승교를 탈취하고 철길을 따라 공격해왔다. 당황해난 오패부는 황급히 기차를 타고 무한으로 도주하였다.         하승교 철교에 서 있노라니 어느덧 치렬한 전장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은곳으로부터 포성이 울려오고 함살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치렬한 하승교 전투에서 엽정부대만 하여도 3백여명의 희생을 내였다.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조선청년들이 포함되여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이국타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철교밑 수수한 들꽃과 개울물을 굽어보노라니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중국근대력사에서 중요한 한페지를 차지하는 북벌전쟁, 그것도 가장 치렬했던 하승교 전투에서 우리의 자랑찬 조선 열혈청년들이 싸웠다는 것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다소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가희수 로인의 안내를 받으면 찾아 답사팀은 하승교 북벌렬사릉원(北伐烈士陵园)을 찾아갔다. 하승교 전적지로부터 도보로 십여분 가서 촘촘히 들어선 민가 사이로 뻗은 좁은 골목길로 걸어가니 한메터 남짓한 높이의 돌담과 철문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북벌렬사릉원이였다.   릉원 입구에 <하승교북벌진망렬사릉원(贺胜桥北伐阵亡烈士陵园)> 소개가 흰 대리석에 검은 글로 새겨져 있었다. 글은 하승교전투를 간단히 소개하고나서 릉원을 만들게 된 경위를 밝혀놓았다. 하승교 전투가 있은후 국민혁명군과 현지 농민들은 희생된 렬사들을 이곳에 매장해 놓았던 것이다. 1929년 10월, 국민정부는 이곳에 묘지와 정자를 만들고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그뒤 1982년과 1996년, 2003년 세차례 거쳐 무한시정부에서 릉원을 보수하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1992년에 릉원을 호북성 성급 문화재로 확정했다고 새겨 놓았다.   릉원에 들어서면 커다란 무덤이 보인다. 거기에는 <국민혁명군 제4군 북벌 진망렬사지묘(国民革命军第四军北伐阵亡烈士之墓)>라고 씌여있었다. 많은 희생자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채 이곳에 함께 매장되였던 것이다. 묘지 뒤편으로 6각형 기념 정자가 있었는데 돌로 축조되여있었다. 그뒤에 6메터 남짓한 높이의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국민혁명군 제4군 북벌진망렬사 기념비>라고 쓴 당시 국민정부 주석이며 립법원 원장이였던 호한민(胡汉民)의 제자가 새겨져있었다.   7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묘지와 정자, 기념비는 매우 낡아있었다. 또한 관리일군이 없었기 때문에 릉원은 매우 헐망하고 황페하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구석구석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부근 농민들은 릉원 한쪽켠에 야채를 심기도 하였다.   가렬처절한 하승교전역의 휘황한 승리와 오늘 황페해진 북벌렬사 릉원을 대조하노라니 마음은 아프기 그지없었다. 160여명 조선혁명자들이 엽정독립퇀에 있었기 때문에 하승교 전투에서도 많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릉원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하나도 밝혀져 있지 않기에 때문에 아무것도 알수없었다. 북벌전쟁에 관한 문화재 보호와 력사연구가 이정도이니 우리가 중국력사의 대하속에 한줄기 강풍으로 싸워왔던 조선혁명자들의 자취를 찾기 힘들지 않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사교, 하승교 전투승리에 이어 북벌군은 신속히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1926년 9월 5일 북벌군은 무창(武昌)성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구(汉口)의 수비군이 봉기함에 따라 한구와 한양(汉阳)은 쉽게 함락했다. 제4군은 그뒤 한달 남짓한 동안 무창을 공격하기 위해 힘썼다.   오패부의 주력을 섬멸한후 북벌군 주력은 강서 전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오패부의 패망을 관망하고만 있던 손전방도 이른바 “중립”의 허울을 벗어던졌다. 오패부 다음으로 자기가 북벌군의 공격목표로 될것이라고 판정한 손정방은 절강, 복건, 강소, 안휘, 강서의 군대를 끌어 모아 북벌군을 막으려 시도하였다.   9월 6일 북벌군은 무한공격과 함께 2군, 3군, 6군을 강서에 진입시켜 손전방을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선후로 감주(赣州), 평향(萍乡), 의춘(宜春) 등지를 공략하였다. 무한을 공격하는 4군 엽정부대에 리용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기타 부대에도 조선인 장병들이 많았다. 제2군에는 포병련장 강파(姜波)와 기관총대 련장 리동화(李东华)가 있었고 제6군에는 기관총 교관 김준섭외에도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剑云,李检云), 부영장 권준(权■), 부관 안동만(安东晚)이 있었다. 이들은 남창공격전, 무창공격전, 남경, 구강, 선창 공격전에서 모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더욱 많은 조선족 전사들이 이들과 함께 피흘리며 싸웠다.  
15    제15회 북벌에 참가한 리용 댓글:  조회:4018  추천:61  2007-07-18
   1925년 광주국민정부가 수립된후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북양군벌 통치를 타도하며 중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수억 중국인민의 공동한 념원으로 되었다. 한편 국공합작후 두차례 동정과 군벌반란을 진압함으로써 혁명기반이 더욱 굳어졌고 북벌할 조건이 성숙되여갔다.   국민당은 손중산의 서거로 좌파, 우파로 갈려 벌써 권력쟁탈의 기미를 보이고있었지만 손중산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을 할 것을 요구하는 의지가 우세를 차지하였다. 국민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고있던 공산당은 1926년 4월 중앙특별집행위원회 림시회의를 소집하고 신속히 북벌을 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민정부의 쏘련고문이였던 보로딘(鲍罗廷)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국민당내 진보인사들을 단합하여 광주국민정부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드디어 광주국민정부는 1926년 6월 5일, 북벌출사표를 내고 전국동원령을 내렸고 7월에는 <북벌선언> 발표와 더불어 각 혁명군은 선후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중국 중부지역인 호남, 호북, 하남, 하북에는 오패부(吴佩孚)가 20만 군대를 거느리고있었고 동북과 경진(京津)지역에 웅거한 장작림(张作霖)은 35만 부대를 가지고있었으며 장강 하류의 강소, 절강, 안휘, 북건, 강서를 비롯한 동남부지역을 제패하고있던 손전방(孙传芳)도 20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국민혁명군 10만 정규군이 세갈래로 나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리제심(李济深)의 4군, 리종인(李宗仁)의 7군, 당생지(唐生智)의 8군으로 구성된 제1로군은 중부지역의 오패부를 상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담연개의 2군, 주배덕(朱培德)의 3군, 정잠(程潜)의 6군으로 편성된 제2로군은 강서의 손전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직계부대인 하응흠(何应钦)의 1군을 동남부에 배치하였다. 한편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풍옥상(冯玉祥)이 서북군을 거느리고 장작림을 공격함으로써 북벌군을 유력하게 도왔다. 북벌초기 도합 8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북벌군에 참가하여 싸웠다. 그 대표적 인물은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산두포병련의 련장으로 있던 리용과 광주에 있던 박영이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재학생들은 중국인 재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생군에 편입되였다. 10월에 졸업식을 가진 4기생들은 곧 사관으로 임명받아 광주시 수비와 일선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의렬단의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교관으로, 박효삼(朴孝三)과 강평국(姜平国)은 입오생부 교관으로, 리기환(李箕焕)은 관리부 요원으로 학교에 남아있었다. 그들은 후속 입교생들속에서 더욱 많은 의렬단 단원들을 모집할 의도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200여명 조선청년들은 제4군 장발규(张发奎)부대와 엽정(叶挺) 독립퇀에 가담하였고 기타 2군, 3군, 6군을 비롯한 혁명군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중국 동북과 쏘련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고 훌륭한 군사지식을 습득한 조선혁명자들도 이시기 북벌전에 참가하였다.   씨베리아 고려의용군 사령관을 력임했던 리용(李镛)은 국민혁명군 동로군 총지휘부의 포병대 교관직을 맡고 참전하였고 동북의 조선독립군부대 지휘관이었던 김홍일(金弘壹)도 동로군 총지휘부의 참모가 되었다. 1927년 1월 18일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모스크바 사관학교 출신인 쏘련군 조선인 장교 15명도 홍의표(洪义杓)의 인솔하에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였으며 그중 네명은 무창(武昌) 공략전에서 지휘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리용(1888.4.7--1954.8.18)은 <헤그밀사>의 한사람이였고 유명한 애국자였던 리준(李准)의 장남이다. 명문가족에서 태여난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룡정으로 온 후 동성 장흥동에서 살았다. 1907년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델란드 헤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의 고종황제는 헤그대회에 밀사를 파견하려 했다. 그리하여 리상설과 리준, 리위종은 헤그로 가서 <을사조약>은 일본의 무력으로 강제 체결된것임을 설명하고 기타 제국주의 렬강의 동조를 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헤그대회는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리유로 이들의 대회참석과 발언마저 거부하였다. 밀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데다 망국을 눈앞에 둔 리준은 다른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연히 몸에 불을 부치고 분신자결하였다. 아버지 리준이 헤그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리용은, “너의 몸은 반드시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 독립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여러파벌로 나뉘여 언쟁에만 여념없는 독립군에 실망한 그는 중국 관내에 들어가 항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그는 상해 림시정부에 몸을 담고있다가 공산주의자 리동휘의 주선으로 1918년 5월 다시 중국 동북에 왔다가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경신년토벌 때 그는 부대를 따라 로씨야로 후퇴하여 쏘련홍군에 참가하였다. 쏘련에서 그는 조선혁명가들을 이끌고 쏘련홍군의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웠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26년 중국혁명이 고조되자 쏘련 군사학교 포병과에서 전공하던 리용은 쏘련홍군 고문단 일원으로 광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뛰여난 군사지휘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후 산두시(汕头市) 혁명군 포병영 영장을 맡게 된다. 이때 리용은 로씨야에 있는 전우 박영에게 편지를 보내 광주에 와서 혁명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편지를 받은 박영은 동생과 부인을 데리고 광주에 와서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였다. 이들은 모두 용약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장개석을 총사령으로하고 리제심을 총참모장으로, 등연달(邓演达)을 총정치부 주임으로, 쏘련인 까룬(加伦)을 군사고문으로 한 국민혁명군은 병력을 집중해 각 군벌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전술을 짰다. 우선 력량을 집중해 오패부를 타격하고 풍옥산 부대와 장작림의 싸움을 관망하고만 있는 손전방을 잠시 놓아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1로군이 북벌의 주력으로 되었고 호남, 호북 전선이 주요전장으로 되었다.   1926년 7월 상순, 싸움에 능한 지휘원들인 장발규, 엽정, 채정개(蔡廷铠), 리종인의 지휘하에 여러 북벌군 부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7월 10일부터 예릉(醴陵), 주주(株洲), 상담(湘潭)을 련이어 격파하고 호남성의 중심도시인 장사(长沙)를 공략하였다. 8월에는 평강(平江), 악양(岳阳) 등지를 점령하고 호북경내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호북경내에서 벌어지자 크게 놀란 오패부는 본거지인 무한을 사수하기 위해 주력군을 무한 남부에 포진하였다. 정사교(汀泗桥)와 하승교(贺胜桥)는 무한으로 통하는 중요한 문호였다.     제1로군은 서로군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부대에는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많았기에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이 일찍부터 부근에서 로농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기 때문에 북벌군은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북벌군 선견대로 선정된 엽정부대에는 160명으로 된 조선인 련대(连队)도 있었다. 조선인 사관들은 뛰어난 통솔력과 정치공작 능력으로 중국 군정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벌군은 4군 두 개 사단과 엽정독립단을 정사교 정면공격에 내세우고 7군과 8군의 부분적 부대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무한에서 광동으로 통하는 월한철도(粤汉铁路)가 지나는 정사교와 하승교를 사수하기 위해 오패부는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렬차에 사령부를 정하고 “칼잡이”부대를 조직해 퇴각하는 자들의 목을 치게 하였다.   8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였다. 북벌군 수만명과 2만 수비군이 정사교에서 접전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진지는 빼앗기고 다시 빼앗으면서 거듭되는 반복을 거쳤고 시체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팽팽한 대치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철군(铁军)>으로 소문난 엽정부대는 우회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6군의 기관총부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기관총련의 교관을 맡은 조선인 군관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의 기세를 제압했다. 기관총부대의 준확한 명중률과 집중사격으로 적 진지의 적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였으며 천여명 적을 격살하고 천 4백여명을 포로하였다.   29일에는 당지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북벌군은 드디어 정사교 천험을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무한의 마지막 문호인 하승교로 진격하였다. 전투에서 뛰여난 지휘력과 전투력을 과시한 김준섭은 군공을 세워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14    제14회 혁명부부 양림과 리추악 댓글:  조회:4142  추천:39  2007-07-18
  진리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중국에 모여온 조선혁명자들은 방황하였고 또 언쟁과 암투를 계속하고있었다. 독립과 자유를 찾는다는 공동의 리상을 안고있었지만 서로 다른 리념으로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력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수있다는 신념을 가진 양림은 드팀없이 근대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 10월 하순,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청산리대첩을 이룩한 후 독립군 주력은 우세한 적의 예봉을 피해 흑룡강쪽으로 철수하였다. 독립군을 엄호할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부분적인 청년들과 함께 상해에 왔다. 당시 상해에는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모여있었고 림시정부도 있었다. 양림은 이시기 <북로 아군 실전기(北路我军实战记)>를 저술함으로써 청산리, 봉오동 전투경과를 총화하고 글을 <독립신문>에 련재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애써 덮어감추려 했던 청산리전투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청산리대첩은 조선인민과 피압박인민의 항일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21년 4월, 양림은 운남에 군사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곤명으로 떠났다. 그는 광주, 향항, 윁남을 거쳐 도보로 천여리 길을 걸어 운남성 곤명에 도착했다. 운남강무당(云南讲武堂)은 중국의 저명한 혁명가 채악(蔡锷) 장군이 설립한 신식 륙군군관학교였다. 1909년에 설립 되여 1928년까지 도합 19기를 거쳐 4천여명 우수한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다. 비록 조선인이였지만 입학성적이 너무나도 뛰여났기 때문에 학교측에서는 그를 화교신분으로 입학시켜 주고 조선인 신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학교에는 일본인 교관이 있었고 그때만 하여도 중국은 공개적으로 일본과 맞써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제16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침식을 잊어가며 군사리론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지휘 기능을 습득하였다.   곤명시 취호공원(翠湖公园) 부근에 위치한 운남강무학당 유적지는 지금도 주건물이 남아있다. 성 농전관(农展馆)과 성 도서관 부근에 강무학당 유적지로 중국 전통적인 주마전각루식(走马转角楼式) 정방형의 2층 건물이 남아있다. 동서남북 네 개 부분으로 나뉘여진 건물의 길이는 120메터이고 너비가 10메터였다. 남루와 북루는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남부 가운데 두드러진 부분이 있는데 이곳은 학생들을 검열하는 열조루(阅操楼)였다. 그리고 동루는 사무를 보는 곳이고 서루는 교실로 사용되였다.   운남 강무학당의 사생들은 신해혁명과 호국(护国)운동을 비롯해 손중산의 혁명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일부 우수한 졸업생들은 중국혁명에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학교 3기 병(丙)반에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된 주덕이 있었고 15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인 엽검영(叶剑英)이 있었으며 17기에는 동북항일련군 지도자 주보중(周保中)이 있었다.   17기인 주보중이 회억한데 의하면 양림은 학당의 가장 우수한 학원이였다. 양림은 매일 아침 무거운 벽돌을 지고 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력을 단련했던 것이다. 양림과 함께 공부한 양병령(杨炳岭)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하루는 일본인 교관이 학원들에게 총검술 시범을 보여주었다. 기본 강의를 마친 교관은 누구든지 자기와 겨루어 볼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다. 심지어 5분이라도 견지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다.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있던 양림은 거들먹 거리는 일본인 교관을 보고 더는 참을수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응전해 나섰다. 학원과 교관의 치렬한 겨룸이였다. 기타 학원들은 손에 땀을 쥐고 양림을 걱정하였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지만 겨룸은 겨속되였고 정신을 가다듬은 양림은 공격을 시작하였다. 힘차게 찔러 오는 창 끝에 일본인 교관은 더럭 겁이 질렸다. 학원들 앞에서 양림에게 패한다면 교관으로서의 얼굴이 없게 된다. 일본인 교관은 인차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겨룸을 끝냈다. “참, 장하오, 대단하구만.”  양림이 오만한 일본인 교관의 기염을 꺾어놓자 학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1924년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 강무당을 졸업하고 학교의 교관으로 남아달라는 학교측의 청구를 마다하고 단연히 광주로 떠났다. 이시기 손중산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자기의 군사지식을 혁명에 이바지할 결의를 안고 당시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주로 갔던 것이다.   광주에서 그는 <민족해방대동맹>에 참가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중국공산당을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신앙하게 되었다. 이시기 양림은 사랑하는 련인 리추악(李秋岳)과 만나게 되었다. 혁명과 사랑에 불타있던 리추악은 애인인 양림을 찾아 천리, 만리 광주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걸출한 녀혁명가 리추악(1901--1936)의 원명은 김금주(金锦珠)이다. 1901년 그는 조선 평안남도(平安南道) 중락군(中乐郡)의 한 상인가정에서 태여났다. 상인이였지만 애국사상에 지닌 그의 아버지는 일본침략자들을 한없이 미워하면서 애국지사들의 독립행동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리추악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선진적인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맑스, 레닌주의 서적을 탐구하였다. 3.1운동시기 그는 평양 군중집회에 참가했고 시위대오의 선두에서 선동공작을 하였다. 독립활동을 전개하면서 그는 당시 평양 학생운동의 기수(旗手)였던 양림을 알게 되었고 점차 서로 사랑을 맺게 되었다.      3.1운동후 일제의 피비린 탄압을 피해 양림은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리추악은 계속 평양에 남아서 4년간 반일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감지한 경찰측은 리추악에 대한 체포령을 냈다. 그리하여 1924년 가을, 리추악은 동지들의 엄호를 받으며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그는 조직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오게 되었고 오래동안 헤여졌던 양림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양림은 주은래의 추천을 받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사랑하는 두 련인은 드디어 행복한 혁명가정을 만들었다. 양림은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결부시켜 중국혁명의 승리로 조선혁명을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혁명 대오속에서 장기간 분투할 준비를 하였다. 리추악은 이에 적극 동조하여 부지런히 한어를 배웠고 새로운 중국 이름 리추악을 가지게 되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양림은 학생들과 함께 늘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인식하게 되었고 주동적으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권립교수)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집훈처 교관으로 되었습니다. 그때 손문주의학회와 청년련합회와의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그는 청년렵합회의 립장에 섰습니다. 1925년 1월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대 제4대 대장으로 임명되였고 공산당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청년군인련합회(中国青年军人联合会)에 참가하였다. 그해 2월 그는 학생대(学生队)를 거느리고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1차 동정에 참가하였고 6월에는 다시 광주에 돌아와 양희민과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시기 배우고 련마한 군사지식을 실전으로 충분히 발휘하여 지혜롭고 용감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시기 그는 황포군관학교 기술교관으로 승직하였으며 중국공산당과 함께 교내 우파와 투쟁하여 공산당의 신임과 관심을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1925년 6월 양림은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얼마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리추악도 혁명군 선전대로 1차 동정에 참가하였고 이해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추악은 중국공산당에 가장 일찍 가입한 조선녀성이였다. 당의 배려하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고 학습하였다. 1925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엽정독립퇀이 광주시 조경에서 설립될때 그는 주은래의 배치에 따라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사업하였다. 이시기 그는 이름을 양녕(杨宁)으로 고쳤다. 그는 제3영 영장 겸 공산당 소조 조장을 겸임하였다. 제3영은 3개 련에 5백여명 전사드로 무어졌는데 그중 한개련 150여명이 모두 조선청년들이였다. 국공합작이 이룩된후 혁명정세가 날로 고조되고있을 때 국민당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은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장개석은 이른바 <중산함사건(中山舰事件)>과 <정리당무안(整理党务案)>을 조작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명령을 받고 중산함을 몰고 광주에 들어온 중산함 함장인 리지룡(李之龙)을 체포하고 공산당이 반란을 준비한다고 떠벌렸다. 이 사건을 통해 장개석은 해군을 장악하고 공산당의 권력을 박탈하려 했던것이다. 그뒤 <정리당무안>을 작성하여 다른 당의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할수 없다는 등 조건을 내세워 공산당의 권력을 가일층 박탈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당수였던 진독수(陈独秀)가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거듭 타협하고 양도하였기 때문에 장개석의 음모는 하나하나 성사되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당의 요직에 있던 공산당원들이 사직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국민당의 선전부장으로 있던 모택동, 중앙비서처 서기로 있던 류백승, 조직부장으로 있던 담평산, 농민부장으로 있던 림백거가 모두 사직하였다. 이때 양림은 당의 배치에 따라 계속 황포군관학교에서 주임교관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에게 열심히 군사기능을 가르치는 한편 정확한 혁명사상을 전수하기에 힘썼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드디어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였다. 그는 군대를 풀어 도처에서 공산당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인재를 보호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양림을 쏘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안해 리추악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양림은 로씨야에서 삐스티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에 들어가 군사과학을 배웠다. 기추악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3년간 정치리론을 학습하였다. 두 혁명부부는 로씨야에서 정치, 군사가 모두 뛰여난 우수한 혁명인재로 되기 위해 부지런히 학습하였다.    
13    제13회 국민혁명군의 동정과 양림 댓글:  조회:3930  추천:49  2007-07-16
  국공합작이 이루어짐에 따라 중국혁명의 고조가 나타났지만 이시기 중국은 거듭되는 혼란을 겪고있었다. 도처에 크고작은 군벌들이 나타나 자기의 지반을 확대하고 세력을 확충하기에 열벌하였다.   광동의 혁명정세에 당황해난 제국주의와 지주, 매판 자산계급은 봉건 군벌들을 매수하여 광동정부를 공격하게 하였고 비법 상인단체를 부축여 무장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광동의 불안정 국면을 수습하고 더욱 큰 혁명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손중산과 국민당은 혁명군 확건에 진력하였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4기까지 도합 4천 9백여명이 졸업했다. 국민당은 이들을 토대로 각지에서 병사들을 모집해 국민당 군대를 확건하기 시작했는데 1924년 10월까지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한 교도단(教导团)이 창건되였다. 교도단은 불법상인들의 총기 9천여자루를 몰수해 무장하였고 쏘련으로부터 중무기를 구입하였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광동과 광서의 여러 불법민간 단체와 군벌, 반란군을 진압하는 작전에서 황포군관학교 사생들은 지대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의 군대도 부단히 확건되여 십여만 정규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광동을 중심으로 국민혁명이 고조되고있을 때 중국 북방에서는 두 개 군벌간의 큰 혼전이 진행되였다. 장작림(张作霖)의 봉계(奉系)군벌과 조곤(曹锟)의 직계(直系)군벌이 북방통제권을 위해 치렬한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두 군벌이 혼전을 거듭하고있을 때 서북에 웅거해있던 풍옥상(冯玉祥)이 봉계군벌을 도와줌으로써 직계군벌이 대패하고 조곤이 감금되였다. 1924년 겨울, 직봉대전의 승리를 이룩한 장작림, 풍옥상, 단기서(段祺瑞)는 손중산에게 전보를 보내 함께 국가대사를 의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손중산은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손중산이 북경으로 떠난 틈을 타 진형명(陈炯明)이 7만명에 달하는 군사를 끌어모아 광주로 공격해 왔다. 국민정부는 대원수부 철갑차대와 황포군관학교 두 개 교도단, 허숭지(许崇智)의 월군(粤军)을 주력으로 진형명을 진압하는 제1차 동정을 시작하였다.   1925년 3월, 황포군관학교 학생대대를 선봉으로 한 동정군 주력은 혜동(惠东)으로 진격하였다. 동정군의 선봉을 맡은 두 개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에는 많은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이 포함 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혁명가들도 있었다.  (권립교수) 광동혁명정부가 제1차 동정을 할때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 제4대대 대장신분으로 2백여명 학원을 거느리고 동정에 참가하였습니다. 해풍과 륙풍, 면호일대에서 진형명의 부대와 접전해 크나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광동혁명정부의 동정에 참가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림(杨林)과 리빈(李彬)을 꼽을수 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학생대대의 교관이였던 양림은 학원들을 이끌고 동정군의 선봉으로 나섰으며 황포군교 3기 졸업생이며 4기 학생대대 구대장이였던 리빈도 교도단에 합류해 진형명 반란군과 싸웠다. 그리고 양림의 련인이였던 리추악(李秋岳)도 이시기 광주에서 정치부 동정선전총대에서 사업하면서 선동공작에 적극 참가하였다.   동정군은 선후로 해풍(海丰), 게양(揭阳), 조안(潮安)을 공략하였지만 좌익을 맡은 양희민(杨希闵)의 운남 군과 류진환(刘震寰)의 광서 군이 소극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동정군 주력의 배후가 적에게 로출되였다.    동정군의 위급한 상황을 만구하기 위해 주은래와 쏘련 군사고문은 장개석을 도와 주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교도단의 천여명 전사들은 만여명에 적들을 항격하였다. 교도단이 적의 주력과 치렬한 접전을 진행하고있을 때 동정군의 주력이 적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동정군은 면호(棉湖) 부근에서 진형명의 주력군을 소멸함으로써 일차 동정(东征)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해 냈다.   1925년 3월 12일 북상한 손중산이 북경에서 병으로 서거한 후 국민당의 실권은 왕정위와 장개석의 손에 장악되였다. 광주 국민정부가 혼잡을 거듭하고있을 때 제국주의와 광서군벌의 지원을 받은 진형명은 다시 군대를 끌어모아 광주로 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국민정부는 1925년 9월 28일 제2차 동정을 시작하였다. 장개석이 동정군 총지휘를 맡았고 주은래가 동정군 총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이때 국민혁명군은 재편성을 거쳐 전투력이 강하고 비교적 정규화된 5개 군으로 조직되였다. 동정군은 광주를 위협하는 양희민운남군과 류진환의 광서군을 진압하여 후환을 제거한 후 다시 진형명이 둥지를 틀고있는 동강(东江)지역의 문호인 혜주(惠州)를 공격하였다. 쏘련에서 지원한 비행기와 야전포까지 동원된 전투에서 혁명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혜주를 성공적으로 공략하였다.      동정군의 공산당원들의 적극적인 정치선전과 성항(省港)파업 로동자와 농민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혁명군 각 부대는 파죽지세로 진형명의 잔여부대를 광동에서 몰아냈다.   양희민과 류진환의 반란을 진압하고 두 차례 동정을 진행하는 전투에서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되였다. 광주시 장주도 평강(平冈)에는 <동정진망렬사묘(东征阵亡烈士墓)>가 있다. 황포군관학교로 가는 장주도 나루터에 위치한 렬사묘 정문은 거대한 기념아치로 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아치형 문을 지나 들어가니 가파른 언덕에 여러 가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니 푸른 잔디밭과 해묵은 용(榕)나무가 우거진 정원에는 학생군묘(群墓), 소장묘(少将墓), 진렬관(陈列馆)이 있었다. 답사팀은 진렬관에서 조선혁명가들의 이름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유감스럽게 희생자들의 적관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양희민, 류진환 진압에서 희생된 최영(崔瑛)렬사와 오준걸(吴俊杰)렬사의 이름을 보아서는 조선민족인 듯 해 보였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3기 인명책에서도 이들 이름을 찾을수 없어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 황포군관학교에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고 이들은 또한 교도단과 함께 공정군의 선봉으로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동정진망렬사묘>에도 분명 조선청년 희생자들의 고혼이 묻혀있을 것이다.   광동에서 혁명하는 가운데서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을 주로하는 혁명군대가 있어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혁명군대를 만들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독립단(独立团) 건립에 힘썼다. 이시기 국민당도 군대개편에 열중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4군 제12사 산하에 세 개 대대가 있었다. 그중 34대대를 개편하게 되었는데 공산당은 이 대대를 군부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는 독립단으로 만들었다. 엽정(叶挺)이 단장을 맡았다.   독립단은 대원수부(大元帅府)의 철갑차대 전원과 황포군관학교의 부분적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주도로 하여 광동, 광서, 호남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1924년 손중산의 동의를 거쳐 조직된 대원수부 철갑차대는 주은래의 지도하에 황포군관학교 1기 졸업생인 주사제(周士弟)를 비롯한 공산당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였다. 그리하여 이 부대는 줄곧 중국 공산당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아왔다.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적지 않은 공산당원들을 독립단에 보냈다. 이들은 독립단의 영장, 련장, 패장으로 배치되였다.   1925년 11월 광동성 조경(肇庆)에서 약 2천명 병력을 가진 독립단이 조직되였다. 엽정을 비롯해 각급 지휘원은 대부분 공산당원이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주은래의 파견을 받은 조선혁명가 양림이 이 부대의 제3영 영장을 맡았다.   공화국창건후 인민해방군 상장(上将) 계급을 가진 주사제는 <주사제회억록>에서 양림에 대해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양녕(杨宁)은 또한 삐스티(毕士悌)라고 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에서 제3기 학생대 제4대대 대장을 맡고있었다. 1926년 5월 독립단이 광동에서 북벌을 시작할 때 당에서는 그를 다른 곳에 가서 사업하도록 배치하였다.”   주사제가 회억하는 양녕이 바로 조선혁명가 양림이다.   양림(1898--1936)은 1898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김훈(金勋)이였고 사업 수요로 양주평, 양녕, 삐스티, 주동무, 양림 등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3.1운동에 참가한 양림은 아버지가 일제 놈들에게 살해되자 1919년 늦가을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갔다. 그는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新兴武官学校)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웠다.   1920년 5월,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림은 왕청현(汪清县) 서대파(西大坡) 반일무관학교에서 사업하였다.    양림이 중국 동북에서 반일활동에 참가하고 적극적으로 군사지식을 배울 때 일제는 중국 동북에 있는 반일 유격대를 주시하게 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침략자들은 훈춘에서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동북에 출병하였다. 놈들은 마적떼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상인과 경찰국을 습격하게 하고는 이를 구실로 출병했던 것이다. 당시 동북을 차지하고있던 봉계군벌 두목 장작림은 일본과 타협하면서 일본의 출병에 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일본침략자들은 연변지역에 들어와 반일 유격대를 추적하면서 조선족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신년 참변>이다.   동북에서 힘을 키우고있던 조선인 반일 유격대들은 이때 서로 단결하여 일제침략군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김좌진을 비롯한 동북지역 반일유격부대가 길림성 연변지역에 집중되였던 것이다. 양림은 유격대를 따라 화룡현(和龙县) 청산리 백운평(白云坪)에 매복해 있었다. 반일유격대가 이미 준비하고있는 줄을 모르고 이곳저곳 방화하면서 추적해 오던 일본침략자들은 청산리에서 유격대의 매복에 들었다. 양림은 한 개 중대의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반일유격대의 청산리대첩을 이룩하여 전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가 있은 후 일제는 더욱 많은 군대를 끌어모아 토벌해 왔다. 게다가 유격대 내부에서도 여러파벌로 갈라져 언쟁이 계속되였다. 반일 유격대는 드디어 우세한 적들에게 밀려 로씨야 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단순히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다. 조직력을 더욱 강화하고 더욱 우세한 병력을 키워야 했다. 유격투쟁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총화하면서 양림은 중국 관내로 향했다. 그는 더욱 선진적인 군사기능을 배우고 민족해방의 진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12    제12회 조선혁명가 김규광 댓글:  조회:3992  추천:67  2007-07-16
  20세기 20년대말 광주에 모여든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을 리론적으로, 조직적으로 묶어세우고 이들을 성세호대한 중국혁명과 더불어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이끌어간 사람이 바로 유명한 조선혁명가 김규광(金奎光)이다.   당시 북경에서 공부하는 한편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김규광은 1925년경에 광주로 갔다. 그는 광주에서 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고 김원봉, 김산 등과 함께 류월동지회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독립당을 창건하였다. 그는 중국혁명에 동조하는 한편 공산주의 리론을 전파하면서 광주의 조선인 혁명가들을 단합시켰던것이다.    답사팀이 북경시 목서지북리(木樨地北里)에 위치한 김규광의 셋째아들인 두련(杜链)의 집을 찾았을 때는 2003년 10월 19일이였다. 그의 차남 두건(杜键)도 함께 우리를 맞이하였다. 김규광은 중국에서 두군혜(杜君慧)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던 것이다.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한 장자인 두겸(杜钳)은 광동악단(广东乐团)의 지휘(指挥)로 광주에 있었고 미술학원을 졸업한 차남 두건은 미술가였으며 항천(航天)대학을 졸업한 셋째 아들 두련은 중국첨단기술분야에서 사업하고 있다.   김규광의 차남 두건과 셋째 아들 두련이 우리에게 아버지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건) 아버지의 상황은 우리들도 잘 모르고 여러 전문가들에게서 얻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1898년에 출생하여 3.1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중국에 손중산을 비롯한 혁명자들이 있고 로씨야 10월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철학도 많이 공부하셨습니다. 3.1운동때 아버지는 체포되여 옥고를 치르다고 금강산에 가서 승려로 계셨습니다.    운암(云岩) 김성숙(金星淑1898--1969)으로 널리 알려진 혁명가 김규광은 1898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 철산군(铁山郡) 서림면(西林面)강암동(江岩洞)의 한 빈곤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가정이 빈곤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왔고 1910년 철산 독립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학교에서 공부하기를 거부하고 마을 선비들에게서 한학(汉学)을 배웠다. 1916년에 그는 독립군에 참가하려는 목적으로 중국 동북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구금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16년 금강산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 조선의 명산 금강산 한가운데 있는 유명한 유점사(榆■寺)에서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현대철학도 연구하면서 1919년까지 머물러 있었다.    3.1운동때 김규광은 손병희(孙秉熙)와 만해(■海) 한룡운(韩龙云)의 지도를 받으며 반일독립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승복차림으로 3.1운동의 진두에 섰던 김규광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그는 계속 선전활동을 진행했으며 이 시기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혁명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1922년 김규광은 다른 젊은 승려들과 함께 비교적 쉽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북경에서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 등 내용을 포함한 <황야(荒野)>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시기 그는 10살 년하인 김산을 만나 함께 활동하였고 또 북경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였다. <혁명>잡지는 초창기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사람인 리대소는 늘 이 잡지를 열독하고 글을 발표했으며 가끔씩 비판과 충고도 주었다. 잡지의 편집을 맡았던 김산은 <아리랑>에서 김충창이라는 가명으로 잡지와 김규광에 대해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이 잡지는 공산당 동조자, 좌익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한테서 지지를 받았다. 이 잡지는 32페지짜리로, 창간호는 800부를 찍었는데 6개월내에 3천명의 고정 독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잡지는 국내, 만주, 씨베리아, 호놀룰루, 캘리포니아, 유럽에 있는 조선학생들에게 발송되였고, 1926년까지 계속 발간되였다. 김충창은 이 잡지의 주필이었으며, 이 잡지를 위해 수많은 주옥같은 론문을 썼다.‚      이 시기 김규광은 북경 민국대학(民国大学)에서 공부하였다. 2003년 12월 23일 답사팀이 원 민국대학 유적지인 북경 제2실험(实验)소학교를 찾아보았다. 북경시 선무문내(宣武门内) 신문화가(新文化街)에 위치한 옛 극근군왕부(克勤郡王府) 자리였다. 흰 돌담에 붉은 문을 가진 건물은 문앞에 커다란 돌사자 두 개가 있어 더욱 위엄있어 보였다. 붉은 널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있었고 옛 층집이 삼면으로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교실로 리용되고있었다.   극근군왕부는 1917년부터 학교로 사용되였다. 처음에는 민국학원으로 있었고 1923년에 민국대학으로 되었다. 중국의 대문호인 파금(巴金)도 행적을 남겼던 민국대학에서 김규광은 정치과와 경제학 공부를 하는 한편 혁명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는 <혁명>잡지를 꾸리는 한편 창일당(创一党)활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1925년 겨울, 중국혁명이 한껏 고조되고있는 광주로 갔다. 그는 중산대학 법학을 전공하면서 계속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청년들이 가장 많았던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조선학생들은 서로 래왕하면서 자주 련락을 가졌다. 1916년 봄, 김규광은 손두환, 김원봉, 전동식, 장지락 등과 함께 류월한인회를 기초로 조선혁명청년련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을 발행하였다. 김규광과 김산은 이 기관지의 주필과 부주필을 맡았다.   1927년 5월 김규광은 여러 혁명가들과 함께 민족유일당조직인 광동촉성회를 성립하였는데 회원이 무려 170명에 달했다. 회원 다수가 조선청년련맹과 의렬단 성원들이였다. 김규광은 또한 의렬단을 중심으로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독립당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이시기 김규광은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고있는 두군혜(杜君慧)와 사랑에 빠졌다. 해방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대표대회 대표, 중화전국민주 부녀련합회 대표, 중공중앙 제8기 당대표로 사업했던 중국 녀성운동가이며 교육가였던 두군혜는 1904년 광주의 소자산계급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녀는 1924년 첫기로 중산대학 녀학생으로 되었고 저명한 중국 녀혁명가 진철군(陈铁军)과 한 학급, 한 책상에서 공부하였다.   대학에서 선진문화를 접수하고 혁명사상을 접하게 되었던 그는 혁명경력이 풍부하고 혁명리론으로 무장된 김규광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혁명을 담론하면서 조용한 학교 정원과 아늑한 광주 72렬사공원을 거닐었다. (두건) 외할아버지는 수화보험사의 직원이여서 광주에서 괜찮게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중산대학의 첫기 녀대학생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진철군 렬사는 어머니와 한 책상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중산대학 첫기에는 녀 대학생 7명 뿐이였습니다. 하여 청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선혁명가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의 집에 와서 생무우가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씻어 생걸 그대로 잡수셨습니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생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많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습니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매우 활달한 분이였습니다. 외할머니는 늘 어머니를 두둔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의 학업을 지지한것도 외할머니의 설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뚜르게 네브의 소설 <전야>를 어머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접한 어머니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란 사상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점차 혁명을 지향하게 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조선혁명가 김규광과 중국 진보적 녀성인 두군혜가 사랑을 맺게 되었고 슬하에 선후로 세 아들을 두게 되었다. 녀성 운동가인 두군혜는 온갖 정성을 다해 조선혁명가인 김규광을 도왔으며 조선혁명을 동조하였다.   두군혜는 김산을 동생처럼 관심해 주었고 녀동생 두군서(杜君恕)를 다른 조선혁명가 오성륜에게 소개하였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로어 교관으로 있었던 오성륜은 김규광, 김산 등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내였던 것이다.    
11    제11회 광동에서의 의렬단투쟁 댓글:  조회:4134  추천:54  2007-07-16
  1920년대말,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조선 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자체의 조직체계를 형성하여 활발한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려월한인동지회, 조선혁명청년련맹, 조선독립당을 비롯하여 공개적인 활동과 비밀적인 활동이 전개됨과 동시에 더욱 많은 혁명자들이 광주에 모여왔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이렇게 회억한다. “광동에 온 가장 우수한 조선인 혁명가의 전형적인 인물은 박진(朴镇) 부부와 그의 두 동생이었다....그들은 북방인 답게 모두 풍채가 좋고 몸이 떡 벌어졌다. 그들은 동토지대에서 불어오는 씨베리아 바람처럼 위력적이고 활기찬 분위기를 실내에 가득 뿌렸다.”   김산이 회억하고있는 박진(朴镇)이 바로 중국에서 박영(朴英1887--1927)으로 알려진 유명한 조선족 혁명가이다.   박영은 1887년 조선함경북도 경흥군(庆兴郡) 아오지(阿吾地)의 한 농민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원명은 박근성(朴根星)이였고 선후로 박응서(朴应瑞), 박영(朴泳), 박진(朴镇)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면서 로씨야로부터 중국 동북, 광주 등 광활한 지역에 력력한 발자욱을 남기며 혁명했었다.   1906년 고향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사포대(私炮队)”가 조직되자 그는 19살 젊은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반일무장투쟁 대렬에 들어섰다. 1908년 박영은 백여명 전사들과 함께 경흥군의 일본수비대 두 거점을 습격하여 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제는 많은 보병대대를 동원하여 토벌해 왔다.   1910년 조선내에서 활동할수없게 된 박영은 일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길림성 화룡현으로 이사왔다. 세계와 담을 쌓고 시골에만 파묻혀 있을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일본 도꾜에 갔다. 그곳에서 중국 신해혁명 승리의 소식을 접한 그는 다시 중국 화룡에 가서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학교를 꾸리고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박영은 화룡에서 1919년 《3.13》반일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해 6월 최명록(崔明录)을 도와 반일무장단체인 독군부(督军府)를 창설하였다. 박영은 독군부 반일대오의 참모장을 맡았다.  1920년 박영은 반일무장대오를 거느리고 여덟차례 두만강을 건너 조선내 온성, 무산을 비롯한 각지 일본경찰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홍범도(洪范图)가 이끄는 독립군과 함께 봉오동(凤梧洞)전투의 대첩을 이룩하였다. 그해 청산리 전투가 있은후 박영은 독립군 주력부대와 함께 로씨야쪽으로 철수하였다.   로씨야에서 박영은 쏘련홍군에 참가하였고 또 쏘련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쏘련홍군부대와 함께 울라지보스또크를 공략하는 7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고 또 여러차례 부상했다.    1924년 그는 중국 광동성 산두(汕头)의 혁명군포병대 대장을 맡고있던 친구 리영(李瑛)의 편지를 받았다. 리영은 편지에서 중국 광동혁명을 소개해 주면서 속히 중국 대혁명에 참가할 것을 바란다고 했다. 이에 큰 고무를 받은 박영은 1926년 말, 가족과 두 동생을 데리고 광주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리영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서 사업하였고 두 동생은 황포군교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광주에서 박영 형제는 조선민족독립당에 가입하여 김산, 김규광 등과 함께 토요일 밤이면 늘 한곳에 모여 밤새도록 혁명을 론하군 하였다. 김산은 ?씨베리아에서 온 선구자들‚인 이 박씨 형제와 매우 친숙해 졌다.   “당신네 네 사람은 모두 너무 행복해 보이는군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싸워왔는데, 이제는 평화로운 생활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내게는 평화가 단지 고통일 뿐이야. 투쟁은 삶이지. 소극성은 죽음이고, 나는 싸우는 것을 더 좋아해.”    박영은 김산의 물음에 늘 이렇게 대답하군 하였다.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이시기 유명한 의렬단 단원이였던 오성륜도 광주에 와서 김산, 김규광, 김약산 등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산은 <아리랑>에서 이렇게 오성륜을 회억하고있다.    “오성륜은 비밀형의 조용한 사나이였으며 고개적인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전생애를 비밀속에서 살았다. 심지어 그와 함께 여러차례 죽음에 직면하였던 나마저도 그의 개인 경력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는 절대로 말을 믿지 않고 오직 행동만을 믿었다. 또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고 오랫동안 사귄 뒤에야 믿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쉽사리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오성륜은 중간 정도의 키에 잘생긴 편이였으나 미남은 아니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드넓은 이마에 짙은 머리카락을 갖고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건강하였으며 미술과 문학을 좋아하였다. 고향마을에서 학교 선생을 한적도 있는 그는 로씨야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아 의렬단에 가입하였다.”   황포탄 의거로 널리 알려진 오성륜은 의렬단 주요 성원이였고 공산주의자 였으며 줄곧 신비의 그늘에 가려진 인물이다. 그의 진실한 행적에 관련해 서는 아직도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 아쉽다.   상해 황포탄에서 다나까 저격이 실패한후 오성륜은 체포되여 일본 령사관 3층 감방에 갇혔다. 그곳에서 기타 일본인 수감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자물쇠를 마스고 도주하였다. 오성륜은 미국인 친구집에 며칠 숨어있다가 독일을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1925년 그는 공산주의 교양을 받았고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1926년 경에 그는 광주에 도착해 황포군관 교관으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나이가 많고 경력도 풍부한 그는 함성(咸声)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리론저서를 쓰기도 하였다.   광주에서 오성륜은 대부분 김산과 한조가 되어 일하였다. 강인한 성격을 가진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는 빌밀리에 지도하였고 김산은 공개적인 지도사업을 맡아 보았던 것이다.   광주 답사에서 빼놓지 못할 유적지가 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자주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던 혜주회관(惠州会馆)이다. 단순한 책의 기재를 가지고 혜주회관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광주에서 가장 일찍 활동하였던 조선인들이 혜주회관에서 류월한인회를 조직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상해림시정부의 신규식의 부탁을 받고 박태하가 광주에서 조직한 힌인회가 바로 류월한인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기재로서는 혜주회관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광주에서 중앙당사연구실의 여러 전문가들과 이야기하던 끝에 <피압박 민족 련합회>를 촉성하기 위한 중요한 행사가 혜주회관에서 진행되였다는 단서가 나왔다. 광동성 당사연구실의 조직 선생은, 단서가 틀리지 않다면 혜주회관이 바로 지금의 중화전국총공회 기념관 건물이라고 알려 주었다.   답사팀이 광주시 월수남로(越秀南路) 93번지를 찾아왔을 때 귤색 2층 양식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에는 검은 현판에 흰 글로 <중화전국총공회(中华全国总工会)>라고 씌여져 있었다. 글은 력사 그대로 번체자로 되어 있었다. 역시 귤색으로 된 낮은 담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아치형 정문은 철문으로 되여 있었다. 철문에는 중화전국총공회 옛터라고 밝혀있었다. 현재 사용하고있는 공식명칭인 것이다.   1925년 5월 1일 국제로동절을 맞으며 이곳에서 제2차 전국로동대회(全国劳动大会)가 소집되고 대회에서 중화전국총공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중국력사에서 이곳은 중화전국총공회 유적지로 널리 알려졌고 원 건물이 혜주회관이였다는 사실은 도리여 아는 사람이 적었다.   사실 혜주회관은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초기에 축조된 유럽식 2층 건물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은 1959년에 중화전국총공회 유적지로 확정하고 수건을 거친 기념관 건물이다.   1924년 손중산에 의해 개조된 국민당은 중앙당부 사무기구를 이곳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국공합작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곳에 발자욱을 남겼다. 특히 국민당의 좌파인 료중개가 이곳에서 피살됨으로 해서 더욱 유명해 졌다.   손중산이 서거한후 국민당은 분렬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주석은 왕정위였지만 실제 사무는 좌파 수령인 료중개가 맡아 보았고 당내 군권을 장악한 실력자는 장개석이였다.   국민당 우파들은 손중산이 서거하자 공산당과 쏘련에 대한 배척 심리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손중산의 신삼민주의를 계승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료중개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였다. 여러차례의 위협, 공갈을 했지만 료중개를 말리수 없게 되자 우파들은 드디어 암살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중앙집행회의가 중앙당부 소재지인 혜주회관에서 소집되였다. 9시 15분, 회의에 참가하러 혜주회관에 도착한 료중개가 승용차에서 내리자 사람들 틈에 미리 매복해 있던 5,6명 흉수들이 나타나 그에게 총격을 가했다.   혜주회관 돌계단에 쓰러진 료중개를 급급히 병원에 호송했지만 총 네발을 맞은 그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혜주회관 철문을 들어서면 건물 앞에 세워놓은 두 화강암 기념비를 보게 된다. 하나는 로농운동 렬사기념비였고 다른 하나는 료중개 선생 기념비였다.   돌계단을 따라 1층에 들어가니 강당과 사무실이 있었는데 지금 강당은 진렬관으로 사용하고있었다. 조선혁명가들은 바로 이 건물 강당에서 기념행사를 자주 가졌던 것이다.   1925년 7월 9일, 의렬단의 강세우를 비롯한 조선 혁명자들과 중국, 윁남, 인디아 등 여러나라 혁명자들이 광주에서 <피압박민족 련합회>를 창립하였고 피압박민족 련합회 조선인 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때는 상해 《5.30참안》이 빚어진 뒤였기 때문에 일본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중국인민의 비분이 극도에 달한 시기였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반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정의적인 요구가 중국인민의 반제투쟁 요구와 일치되였던 것이다.    조선혁명가들은 극력 중국인민을 포함한 여러 피압박민족과 호흡을 같이 하기에 노력하였다. 1926년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초청된 조선인 혁명가 려운형은 대회에서 “중국국민혁명의 전세계적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그는, 제국주의가 타도될 때 약소민족이 모두 해방될것이며 약소민족은 전력을 다하여 중국의 혁명을 도와야 하고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약소민족도 모두 해방된다고 피력하였다.   중국인민들도 일제식민지하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동정하였으며 조선혁명가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1926년 3월 1일, 려월한인회의 전원 36명이 혜주회관에 모였다. 그들은 박문곤의 사회하에 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황포군관학교와 항공국(航空局), 중산대학 동자군(童子军), 청년군인련합회, 성항파업(省港罢工)위원회, 전국총공회를 비롯한 각계 대표들과 료중개의 미망인 하향응(何香凝), 윁남 동지회 회원 13명, 하여 도합 백여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대회 취지를 확정하고 독립선언을 랑독하였다. 각계 대표들도 용약 연설하였다. 하향응은 전세계 피압박 약소민족은 일치협력하여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해야한다고 연설했고 대회 참석자들은 조선혁명과 중국혁명, 세계혁명의 성공을 소리높이 웨쳤다.    기념회가 있은 후 5월 2일, 광주화교협회의 주최로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대회가 혜주회관에서 소집되였다. 대회에는 화교단체 대표외에 조선과 인도, 윁남 세 민족대표도 참석하였다. 대회는 “각 식민지 약소민족과 련합하여 반제운동을 준행(遵行)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공합작과 아울러 아시아 각국 피압박 민족들의 반제국주의 련합전선이 초보적으로 형성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약소민족 혁명가들이 중국혁명에 용약 참가하였으며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은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길에서 공동의 력사 사명을 짊어지고 피어린 항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10    제10회 중산대학과 조선인 혁명가들 댓글:  조회:3580  추천:62  2007-06-10
   국공합작이 이룩된 후 손중산은 군사인재 양성을 주로하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 한편 국립광동대학을 정치전문인재 양성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군사간부만큼 리론가와 조직가로서의 정치간부도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취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광동대학은 당원간부를 양성하는 주요 기관으로 되었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주요 통로로 되었다.    1924년 11월 11일, 손중산은 친히 혁명학교인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하였다. 학교 터는 광주시 문명로(文明路) 215번지에 위치한 광동고등사범학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정했다. 지금은 학교가 전부 남으로 이사하여 남은 것은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던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소집지인 종루뿐이였다. 종루는 현재 로신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5년 3월 12일, 중국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북경에서 간암으로 서거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26년부터 국립광동대학을 정식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는데 지금까지 중산대학으로 불리우고 있다.    20년대 후반기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황포군관학교 입교와 동시에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교직원 사업에 종사하였고 자유와 독립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중산대학은 많은 조선청년들의 배움의 전당으로 되였다. (권립) 중산대학의 전신은 1924년에 선 국립광동대학이다. 1926년 봄에 황포군관학교의 손두환, 김원봉 등은 당국과의 교섭을 거쳐 조선족은 무료로 중산대학에 입학할수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해에 57명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산, 김성숙 등이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일부는 전선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후방에 남아서 계속 지하활동을 진행하였다.    1926년 4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보고인 고경(高警) 134호 서류를 보면 조선혁명자들과 국민당간의 협의내용을 알수있다.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은 이때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汪精卫)의 초청으로 중국국민당 제2차 대표대회에 참석하고저 광주에 오게 된다. 그는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장교 손두환(孙斗焕)을 통해 국민당 내 실력자이며 황포군관학교 교장인 장개석(蒋介石)을 만났다. 손두환은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으로서 량자사이의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만난 자리에서 려운형은 조선 독립운동자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요구했지만 장개석은 끝내 난색을 표했다. 대신 려운형은 혁명간부와 군사기술 전문가의 양성이 필수요건임을 인식하고 조선청년들을 입교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국민정부 관할내의 군관학교, 국립대학, 기타 국립학교에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인은 언제라도 무조건 입학을 허가하고 군교 생도들에게는 서적, 숙소, 식비, 피복을 제공하고 일정액의 봉급을 지급하며 졸업후 24개월 동안은 국민혁명군에 의무 복무해야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의 입학과 동시에 중산대학에 많이 입학할수있게 되었던 것이다.    광주시 중산대학은 현재 신항서로(新港西路)에 위치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키 높이 자란 고목을 가로수로 한 길이 여러갈래로 뻗어있고 푸른 잔디가 펼쳐진 정원과 교수청사들이 있다. 학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손중산의 동상과 중국 근대 력사인물들의 동상들이였다.    광동성 당사연구실의 조직(曹直)선생이 70여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답사팀을 배동해 주었다. (조직) 중산대학의 전신은 손중산이 1924년에 창설한 국립광동대학입니다. 1926년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해 학교 명칭을 중산대학이라고 고쳤습니다.    중산대학 도서관은 한창 수건중이여서 부분적 도서실만 개방하고있었다. 답사팀은 겨우 관리일군들을 설복해 도서관의 장서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중요한 서류들은 모두 짐으로 꿍져있었다. 답사팀은 대학의 초기 교직원 상황을 찾아보았다. 산처럼 쌓아놓은 짐짝속에서 몇권을 찾아 살펴보았지만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서 조선사람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당시 의렬단 간부급 단원이였던 강세우, 김성숙(金星淑), 정유린(郑有■), 장지락(张之乐), 리영준(李英骏), 최원(崔圆), 서의준(徐义骏),리활(李活) 등이 중산대학에 입학하였고 마준(马骏), 김동주(金东洲), 김원식(金元植)을 비롯한 많은 지식청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의하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 본과 또는 예과에서 학습하였다.    광주 중산대학에 모여 함께 공부하게 된 김성숙과 장지락은 일찍 북경 활동시기부터 함께 혁명해온 훌륭한 동지였다. 김성숙이 바로 유명한 공산주의 리론가인 김규광(金奎光)이고 장지락이 바로 혁명가 김산(金山)이다. 에드가.스노의 부인 님.웨일즈가 남긴 유명한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이 북경으로부터 광주에 온 것은 1925년 가을이였다. 이때 대부분 의렬단 단원들도 광주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광주에 모인 많은 조선혁명자들은 서로 분파로 나뉘였고 혁명 경력도 매우 복잡하였다. 로씨야에서 풍부한 투쟁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조선 국내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상해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북경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이때 김산과 김규광은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무장투쟁의 군사단체를 형성하기보다는 우선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단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시기 이미 사상, 조직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된 김산과 김규광은 대중투쟁을 위한 정당수립에 심혈을 기울렸다. 더욱이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혁명자들의 분파를 없애고 유력한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우수한 조선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서 군사, 정치 교육을 받고있을 무렵 광주에는 중국 동북, 로씨야 씨베리야나 모스크바, 조선국내, 일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경력을 가진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중국 국민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그 성과를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으로 련결시켜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불원천리 광주에 모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단순한 친목을 도모하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 조선혁명자들을 단합시켜 이들의 힘을 한곳으로 집결시켜야 했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과 김규광, 김산 세 사람이 핵심이 되어 분파를 제거하고 대중운동을 형성할 준비를 다그쳤다.    우선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의 조선혁명군인회가 결성되였다. 1926년 6월 28일호 동아일보가 광주 조선혁명 군인회에 관련 보도를 실었다. 보도에 의하면 창립시 회원이 백 20명이나 되었다. 군인회는 더욱 확대 발전시켜 조선군단까지 만들 계획을 세운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광주의 조선혁명가들을 단합하기 위한 조직체인 류월(留粤) 한인동지회가 1926년 6월에 창립되었다. 황포군관학교의 손두환이 회장을 맡았다. <아리랑>에서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김원봉, 김규광, 김산의 노력으로 조선인의 모든 집단과 정파를 대표하는 중앙동맹체인 조선혁명청년련맹 창립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였고 3백명 회원을 받았다.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 련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였는데 그 가운데는 련맹 창도자인 김규광과 김원봉이 포함되였다.    1927년 4월 류월동지회는 제2차 림시대회를 소집하고 지도층을 개선하였다. 마준, 정유린, 서의준, 리영준, 채원개, 리활, 김동주, 장지락, 김원식 9명이 신임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이 가운데 리활이 바로 저명한 저항시인 륙사(陆史) 리원록(李源禄1904.4.4--1944.1.16)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련모(恋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阴)을     부지런한 계절(季节)은 피어서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저명한 저항시 <광야(旷野)>를 창작함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갈망했던 시인 리륙사(李陆史)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여났다. 1925년 일본에서의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의렬단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들어가 일제 주요기관들을 파괴하다 체포된 윤세주의 의렬투쟁 사적은 그를 크게 감동시켰던 것이다. 초기 그는 북경에 자주 다니면서 조선정세 보고와 군자금 전달사업을 맡아 보았다. 후에 중국에서의 혁명중심지가 광주로 옮겨짐에 따라 그는 광주의 중산대학 의과에 입학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인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하여 류월동지회인 조선혁명청년련맹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리륙사는 선후로 17차례의 옥고를 치른다. 일제 감방에서 그의 번호가 64번이였기 때문에 호를 륙사로 하였다한다. 굴함없이 일제와 싸우면서 의렬투쟁의 앞장에 섰던 그는 몸이 쇠약해짐에 따라 붓을 무기로 삶았다. 전민족의 수난기였던 그 암흑한 사회에서 주옥같은 시들로 항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싸우던 리륙사는 1944년 1월 북경 일제감옥에서 옥사한다.     조선혁명청년련맹의 창립과 함께 김규광은 활발한 리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련맹의 기관지인 <혁명행동>을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김산은 부주필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김규광은 련맹의 모든 선언을 기초하였는데 그의 론문들은 인차 유명해졌고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련맹 내부는 의연히 여러 파벌들로 나뉘여 지도권 다툼을 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을 위해 더욱 특별한 조직이 필요하였다. 김규광과 김산은 각지 공산당원 80명을 모아 조선인 공산주의 비밀조직을 내왔다.    조선혁명청년련맹은 어디까지나 정당이 아니였다.의렬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선민족독립당이 이시기 형성되였다. 조선민족독립당은 11명 위원을 선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체계가 수립되면서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수있었다. 그들은 중국인들 틈에 끼여 어떤 사람은 고문으로 어떤 사람은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의 강사로, 어떤 사람은 혁명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혁명군대에 들어가 전투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자주 모임을 가졌고 함께 혁명을 론하면서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9    제9회 황포군관학교의 조선혁명가들 댓글:  조회:4763  추천:48  2007-06-10
   광주시 황포구 장주도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사람들은 복원된 교실, 기숙사, 사무실, 식당들을 돌아보면서 감회를 금치 못하였다. 바로 이처럼 간소한 학교에서 20여년간 중국혁명을 주름잡았던 수많은 장성급 인물들이 배출되여 나왔던 것이다.    앞줄 건물 2층에는 총리 사무실과 교장실, 비서실이 있었고 부근에는 학교 각부서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 벽에는 황포군관학교 1기생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편액이 걸려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조선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부터 입교하기 시작하였다.    <중앙륙군 군관학교 제11기 제1총대 동학록(同学录)>에 따르면 1925년 6월부터 1926년까지의 황포군관학교 제3기 동학 성명 적관표(籍贯表)에는 한국 함경북도의 리빈(李彬),조선의 차정신(车廷信),한국의 장성철(张圣哲), 조선 한성(汉城)의 류철선(刘铁仙) 등 네명이 있다. 그리고 <황포동학총명책(黄埔同学总名册)>의 자료를 보면 3기에 리일태(李逸泰)가 더 있다.    외환과 내란을 겪고있던 19세기말 조선왕조는 근대화한 국가창립을 주도하게 된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모두 고종왕을 중심으로 한 군주제 국가를 건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189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적관란에도 조선혁명자들을 조선인 혹은 한국인으로 등록되였던것이다.    이들 네 사람은 일찍부터 광주에서 활동하다보니 가장 일찍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조선학생으로 되었다. 이 가운데서 차정신, 장성철, 류철선은 중국의 조기 항공활동에 참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류월한인회의 박태하와 함께 손중산의 지도로 설립된 항공학교에서 항공기술을 배웠으며 한동안 쏘련에 있는 조선인 조기 항공기술가 김공집(金公缉)과 함께 쏘련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후 세 사람은 황포군관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 3기에 입교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제4기에 조선인 24명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권립) 우리민족 청년들이 황포에 입학할수있게 하기 위해 김원봉은 학교 당국과 교섭하여 우리 동포청년들의 입학절차에 관한 협의를 달성하였다. 먼저 엄격한 심사와 시험을 거쳐 합격이 되면 반년간의 예비교육을 받고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입학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황포 4기에는 24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제5기에는 6명, 후에는 십명 도합 45명의 우리민족 열혈청년들이 입학했다. 1925년 통계에 의하면 황포와 그 산하의 병영에는 60여명 우리민족 청년들이 있었다.    당시 최림(崔林)으로 변성명한 김원봉이 제4기에 입학해서 강평국(姜平国), 류원욱(柳远郁), 박효삼(朴孝三), 박건웅(朴建雄), 양검(杨俭), 전의창(田义昌), 리우각(李愚悫), 권준(权■), 리집중(李集中), 왕자량(王子良), 윤의진(尹义进), 최영택(崔永泽), 김종(金钟), 리종원(李钟元), 로일룡(卢一龙), 리기환(李箕焕), 오세진(吴世振), 전홍묵(全洪默), 백홍(白红), 로세방(劳世芳), 박익제(朴益济), 문선재(文善在), 로건(卢建) 등 도합 24명이 입교했다.    황포 5기에는 백여명 조선청년들이 입교하였는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정변으로하여 자진 퇴교하거나 강제 축출 당해 겨우 4명만 졸업할수있었다. 그리하여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에도 제5기생으로 김호원(金浩元), 안유재(安维才), 장흥(张兴), 장익(张翼) 네 이름만 남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학생신분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교직원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학교초기 쏘련군사학교를 졸업한 강섭무(姜燮武)가 포병훈련 교관 겸 쏘련고문의 통역으로 있었고 상해림시정부에서 온 김철남(金铁男)이 제3교도단(教导第3团)의 소좌(少校) 부단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혁명가 손두환(孙斗焕)이 황포군관학교 교장판공청 부관으로, 운남강무학당(云南讲武学堂)을 졸업한 리계동(李启东)이 부관으로, 리검운(李剑云)이 조교(助教)로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조선족 교직원으로는 양림(杨林)이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고문단과 함께 온 양달부(杨达夫) 일명 량도부(梁道夫)라고도 하는데 그가 포병교관으로 있었으며 3기 졸업생인 리빈(李彬)이 제4기 정치과 구대장(区队长)으로 있었다. 제5기 교직원들로는 중좌(中校) 주임교관에 양림, 황포탄 의거의 주역이였던 오성륜(吴成伦), 채원개(蔡元凯), 최추해(崔秋海), 안응근(安应根), 오명(吴明), 3기 졸업생인 리일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제2보병대대 소좌(小校) 구대장 최추해가 바로 저명한 조선혁명가 최용건이다. 그리고 제6기 교직원으로는 채원개, 4기 졸업생인 박효삼(朴孝三), 공주선(孔周宣) 세 사람이 있었다. 이때 최용건은 이미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을 맡고 교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년간 학계의 연구를 거쳐 1927년까지 황포군관학교 본교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명단이 통계되였다. 그러나 당시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던 험악한 상황에서 국적과 호적을 고치고 변성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조선혁명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수많은 조선 열혈남아들이 중국 청년들과 함께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했으며 무예를 익히고 군사기술을 련마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군교학생들의 제복, 무기,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개여놓은 군인이불, 정숙한 교실을 돌아보노라니 씩씩한 황포군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았다.      “분투정신은 주의(主义)에서 온다. 사병들의 정신을 발휘하려면 우선 주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혁명적 주의가 있어야만이 우리 혁명이 목표가있게 되고 혁명목표가 있어야만이 우리의 분투정신이 있게 된다.” 손중산 총리의 연설을 가슴에 명기한 학생들은 열심히 혁명사상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기능을 련마하였다. “혁명은 대중의 힘에 의지해야한다. 오로지 대중을 무장하고 무력항쟁해야만이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중국혁명이 승리하면 우리는 장강을 넘어서 북으로, 북으로 진격할 수 있고 드디어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 이와 같은 열망을 안고 조선 청년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학습과 훈련에 뛰여들었다.      이시기 각지 국민혁명군 여러부대도 군관학교나 강무학당을 설립해 우수한 장교들을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렸다. 국민당은 각지 군교의 군사와 정치 교육을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칭하고 각지 군관학교와 강무학당을 황포군관학교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수요에 따라 각지에 황포군관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는데 조주(潮州)분교, 남녕(南宁)분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1926년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하자 무한에 황포군관학교 분교가 설립된다. 그리하여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정치과의 500여명이 무한에 옮겨 오게 되고 무한에서 195명의 녀학생을 받아 군교 녀학생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답사팀이 선색을 따라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찾아갔을 때는 광주 답사를 한 일주일 후였다.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한시 해방로 259번지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호북성 무창실험소학교(武昌实验小学校)로 되어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와 운동장에서 떠들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창실험소학교 새 교학청사 뒤편으로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거대한 단층 건물이였는데 두부분으로 나뉘여있었다. 그 가운데 건물벽에는 흰대리석에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유적지라고 밝혀져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십여메터 높이의 고목이 줄지어서 군인들의 씩씩했던 옛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사실 1927년 이후로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사명은 완수된 셈이다. 그후 무한분교에 대부분 학원들이 집중되였다. 손중산의 서거로 하여 국민당도 분렬되여 황포군관학교 교장의 신분으로 국민당군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이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전면 교체해 버린다. 또한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의 졸업식까지 남경에서 진행하였다. 이로써 대혁명시기의 중국 혁명과 군사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되었던 황포군관학교는 사실상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끝마치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이후로 대부분 학생들은 무한분교나 남경에서 학습하고 졸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을 보면 그뒤 황포군관학교 제6기부터 21기까지 역시 조선인 혁명가들이 있었다. 제6기에 신석우(申硕雨), 최문용(崔文镛), 로식(鲁植) 원명은 김창만(金昌满)이 있었고 기병과(骑兵科)에 김진문(金真文), 김명산(金明山), 김은제(金恩济)가 있었다. 제8기 보병과에 리근호(李根浩)가 있었고 제20기 보병과(步兵科)에 김중진(金重镇), 기병과에 장철부(张哲夫)가 있었으며 제21기 포병대에 조동린(赵东麟)이 있었다. 조동린은 당시 24세로 조선 정주(定州)사람이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다는 설명까지 밝혀져있다.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대부분 건물은 1938년 일본참략자들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여버렸다. 그후 1965년에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1993년에 재차 수건하여 지금은 비교적 완정한 모습을 볼수있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정문을 나와 흰 담을 따라 가노라면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를 나와 한동안 걸으면 황포군관학교 부근의 붉은 벽돌과 흰 세멘트로 축조된 서양식 건물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총리사무청사 유적지로서 당시 손중산이 사무를 보던 곳이였고 하나는 군인구락부(俱乐部) 유적지로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 여러 가지 모임을 가지고 휴식하던 곳이였다. 군인구락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천(露天) 수영장이 있었다. 입구의 흰 대리석 석판에는 수영장에 관련한 설명이 있었다. 1926년 군교 학생들이 두 개 못을 파서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지금 수영장은 사용하지 않고있었지만 부근 주둔부대 전사들이 이곳 공지에서 빨래를 말리고있었다.        총리사무청사와 군인구락부, 수영장 유적지들은 길 오른쪽에 차례로 있었다. 길 외편은 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있었다. 손중산 기념공원이였다.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그 우에는 벽돌로 담을 쌓았고 담 뒤에는 우뚝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흰탑에는 <손총리기념탑(孙总理纪念塔)>이라고 새겨져 있고 탑우에는 손중산 기념동상이 있었다. 왼손으로 허리를 집고 오른 손을 자연스럽게 내 밀고있는 모습이였다.      저녁녘이 되어서 답사팀은 황포군관학교 유적지를 떠났다.     수억 중국인민들에게 국부(国父)로 존경받는 손중산에 의해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 인민들의 중견인물로 될 수많은 혁명, 군사인재를 양성해낸 황포군관학교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배움의 터전에는 훗날 국민당의 항일명장들인 장치중(张治中), 두률명(杜聿明)이 있었고 중국공산당의 염검영(叶剑英), 섭영진(聂荣臻), 림표(林彪), 진의(陈毅), 진갱(陈赓), 서향전(徐向前), 좌권(左权), 주사제(周士弟), 류지단(刘志丹), 라서경(罗瑞卿)을 비롯한 장성급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니고 이국 땅 만리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했던 조선의 지사들은 바로 이들과 함께 혁명과 군사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의 격변속에 반일독립투쟁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8    제8회 황포군관학교 유적지 댓글:  조회:3767  추천:68  2007-06-10
(권립)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1924년 1월부터 1927년 7월까지이다.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북양군벌을 때려 엎기 위한 혁명전쟁을 가리킨다. 1924년 1월에 국내 혁명전쟁을 실시. 이 시기 중국혁명의 중심지는 광주였고 우리민족 혁명자들의 활동중심지도 광주였다. 민족지사들은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 등 학교에서 민족해방의 기량을 닦았고 북벌전쟁에서 몸바쳐 싸웠다.     20세기 2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중국의 주요 모순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국권을 팔아가며 자기 세력 확충에만 여념이 없던 크고작은 봉건군벌과 반제반봉건 사명을 짊어진 모든 진보세력간의 대결이였다.    새로 창건된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 피어린 항쟁을 진행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력사는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1924년에 개최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국공합작을 실현함으로써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광주시 문명로(文明路) 215번지에 위치한 지금의 로신(鲁迅)기념관이 바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곳이다. 2층 건물 가운데 종루가 탑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이 건물은 8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건물은 원래 광동고등사범학당(广东高等师范学堂) 강당이였는데 후에 이곳에 국립광동대학이 설립되였다. 국립광동대학은 손중산이 서거한 후 중산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27년 중국의 대문호인 로신선생이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이곳에서 혁명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건물 한 부분을 로신기념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현재 중산대학은 광주시 남부로 이사해 갔다.      1924년 1월 20일부터 30일까지 이 강당에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된다. 대회장은 종루 밑층의 강당이였다. 국민당 총리신분으로 대회주석을 맡은 손중산은 대회에서 국민당을 재조직하고 삼민주의(三民主义)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쏘련과 련합하고 공산당과 련합하며 농민과 로동자를 부조한다”는 3대 정책을 내놓았다. 공산당원인 리대소, 모태동, 림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등도 대회지도사업에 참여해 대회에서 중국국민당 제1기 중앙집행위원과 후보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대회는 원만히 페막되였고 국민당은 중국 각계급 련맹의 정당으로 개조되였다. 대회에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두 당은 반제반봉건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전국의 새로운 혁명고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로신기념관 정원은 만 7천여평방메터에 달했는데 후에는 중산대학의 운동장으로 사용하였다. 강당과 정원은 대회와 집회를 가지기 적합했기 때문에 공산당과 국민당 지도자들은 늘 이곳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또한 군중집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곳은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 혁명의 대 본영으로 되었고 지금은 전국 중점문화재로 되였다.     3백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종루 밑 강당은 1, 2층을 통털어 만들어 공간이 퍼그나 컸을 뿐만 아니라 광선이 충족하였다. 강당에는 주석대와 관중석이 당시 모양대로 복원되여 있었다. 주석대 정면 벽에는 손중산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량옆에 국민당 당기와 중화민국 국기가 걸려있었다. 관중석은 흰천으로 두른 탁상과 긴 나무걸상들로 정연히 배렬되여있었고 대회에 출석한 대표들의 명함이 걸상 등받이 뒤에 적혀있었다. 명함들을 살펴보니 공산당 대표로 참석했던 모택동의 이름도 있었지만 방청석은 밝혀지지 않아 조선대표로 참가한 의렬단 성원 권준(权竣)의 이름은 찾을 길 없었다. 안내일군들과 문의해보니 분명 방청자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대회에 출석한 외국인이거나 방청자들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것이였다.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있은 후 손중산은 국제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건의에 따라 혁명군사학교 설립사업을 다그쳤다. 그는 황포장주도(黄埔长洲岛)에 학교 터를 정하고 각지에서 학생모집 사업을 전개할 것을 포치하였다.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인사들도 학생모집 사업을 적극 도왔다. 1924년 3월 27일 황포군관학교 입시 시험이 광주에서 진행되였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천 2백여명 수험생들 가운데서 3백 50명 정식 입교생(入校生)과 백 20명 예비 입교생을 선발하였다. 정식 입교생들은 1대, 2대, 3대로 나누어 편입하고 예비생은 제4분대에 편입하였는데 이들을 학생총대(学生总队)라고 하였다.     6월 16일, 학교 개교식이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학교 전칭은 <중국국민당륙군군관학교(中国国民党陆军军官学校)>였지만 광주시 황포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황포군관학교라고 한다. 손중산은 이날 개교식에서, 군관학교의 취지는 혁명군을 건립하여 위기의 중국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황포장주도는 광주시 동쪽 교외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곳을 답사하려면 반나절 시간이 수요되였다. 답사팀이 황포군관학교를 찾아 떠난 것은 2월 10일 오후였다. 광주답사를 시작한지 꼭 사흘째 되는 날이였다. 련일 내리던 보슬비도 멎고 날씨는 한결 맑고 따뜻하였다.     차는 신항동로(新港东路)를 따라 곧추 동남부로 달렸다. 번화한 광주시구역을 벗어나 한시간 쯤 가노라니 시교에 도착하였다. 길도 많이 좁았고 집들도 낮은 건물들이였다. 광주시 황포구(黄埔区)에 속하는 장주도(长洲岛)는 주강(珠江)하류의 큰 섬이다. 시 구역을 벗어나 달리노라니 황포조선소(黄埔造船所)가 보였고 그 옆으로 황포군관학교 옛터를 가르키는 도로표식이 있었다. 조선소 부근에 장주도로 가는 작은 나루터가 있었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 나룻터에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있었다. 나룻배는 2,30분에 한번씩 온다고 했다. 오토바이, 승용차, 빵차, 트럭까지 대기하고있었다. 강폭은 천여메터 되어 보였는데 강기슭에는 낡은 고기잡이 배 몇척과 수백톤급 륜선 두척이 정박하고있었다.     20여분 기다리니 바른편으로부터 배 한척이 건너왔다. 거대한 철선(铁船)이 였는데 배에는 역시 오토바이, 승용차, 트럭들을 가득 싣고있었다. 배가 부두에 닿자 푸른 등을 기다렸다는 듯이 배의 행인과 차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이편의 차들이 배에 올랐다. 나룻배는 도보로 가는 행인의 료금은 받지 않았지만 기동차는 료금을 받았다.      섬에는 주둔군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옛터는 장주도의 하장(下庄)에 있었다.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하장에 이르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황포군관학교 옛터를 안내하는 간판이 길옆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아 갈수 있었다.   흰 담으로 둘러싸인 황포군관학교 정문에는 <륙군 군관 학교(陆军军官学校)>라는 검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청나라 말기 륙군학당(陆军学堂) 건물을 수선해 만든 학교 주 건물은 전형적인 중국식 사진삼로(四进三路)의 2층 건물이였다. 4줄로 배렬 된 2층 건물은 회랑(回廊) 3개로 이어졌는데 회랑과 건물이 한데 붙어 일체를 이루고있었다. 백여평방메터 되는 큰 방과 2,3십 평방메터 되는 작은 방이 수십개 있었는데 각기 학교사무실, 교실, 학생 기숙사, 회의실로 사용했던 것이다. 회랑과 2층건물사이에 정방형의 작은 마당이 6개가 있었다. 거기에는 나무통에 물이 담겨져있었고 또 화분들이 곱게 배렬되여 있었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이중압박에 시달리던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바로 이곳에서 혁명의 기량을 닦으면서 새로운 투쟁을 준비했던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에 모두 주요한 간부들을 파견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파견한 주은래(周恩来)가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섭영진(聂荣臻)과 엽검영(叶剑英)이 교수부 비서, 부주임을 맡았으며 등연달(邓演达), 운대영(恽代英) 등이 정치교관으로 있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조선혁명가이며 공산당원인 삐스디(毕士悌)도 황포군관학교 군사교관으로 있었다. 삐스디가 바로 유명한 조선족 혁명가 양림이다.    국제공산당에서도 많은 기술일군들을 황포에 파견하였다. 손중산은 혁명군 창건에서 쏘련홍군의 건군리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학교 설립시 여러차례 대표단을 쏘련에 보냈고 또 쏘련의 많은 기술일군들을 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에는 보로딘(鲍罗廷)을 비롯한 많은 로씨야인들이 정치, 군사, 보병, 포병, 공병 고문으로 임명되였다. 이와 함께 일찍부터 로씨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혁명가들이 통역신분으로 혹은 입교생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오게 된다.    이시기 중국내에 활동하던 의렬단도 광주에 모여 단장 김원봉의 주선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되고 광주에 있던 기타 조선인 열혈청년들도 만강의 희망을 안고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권립) 국민당 1차대회는 국공합작을 의미, 중국혁명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에 고무된 우리민족 의렬단의 거두인 김원봉선생과 상해, 무한, 북경의 의렬단 성원들이 광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주로 테로적인 수단으로 반일투쟁을 진행해오다가 로씨야와 련합하고 공산당과 련합하며 농민, 로동자를 부축해야한다는 손중산의 삼대정책에 흡인되고 손중산의 신삼민주의에 흡인되여 국공합작의 길에서 민족해방투쟁의 기량을 닦으려 했다. 마침 1924년 6월에 황포군관학교가 개학하고 11월에는 광동대학이 섰다. 1925년 시월에는 중산대학으로 고쳐진다. 이리하여 적지않은 우리민족 혁명지사들이 이 두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이 광주에 도착한 것은 1924년 4월 중순으로 추측된다. 그는 광주에서 쏘련 대표를 기다리는 한편 국민당 원로들인 료중개(廖仲恺)와 담평산(谭平山)을 방문하였다. 료중개는 손중산의 유력한 조수였고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서 국공합작의 전 과정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쏘련과의 교섭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 재정부장에 광동 성장을 겸하고있는 실력자였다. 중국공산당 당원이면서 국민당에 입당한 담평산은 중앙조직부장을 맡고있었다. 이들을 만난 김원봉은 조선혁명투쟁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의렬단 단원들의 국민당군 배속이거나 황포군관학교 입교가 가능해 졌다. 그후 1925년 8월경에 의렬단 간부진과 19명 단원은 광주로 오게 되고 따라서 의렬단 본부도 광주에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김원봉을 포함한 의렬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제국주의세력과 유착한 군벌정권을 타고하고 국민정부의 힘으로 중국통일을 실현해 낼수 있다고 조선혁명가들을 믿었다. 그들은 중국이 통일되면 국민정부의 지원아래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찾을수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7    제7회 광동에서의 투쟁 댓글:  조회:3365  추천:66  2007-06-10
    답사팀이 광주로 떠난 것은 2004년 2월 7일 저녁이였다. 3시간 남짓한 비행을 거쳐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9시 30분이였다. 보슬비가 내리는 광주, 번쩍이는 네온등 불빛은 비속에서도 광주의 번화함을 감추지 못하고 꿈처럼 빛나고 있었다.   중국대혁명시기 혁명의 중심지로서의 광주는 커다란 흡인력을 가지고 수많은 혁명지사들을 광주에 모여들게 하였다. 당시 중국 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광주에서 군벌타격 투쟁을 적극 지도하고있었던 것이다. 조선민족 혁명자들도 새로운 독립의 길을 찾아 광주에 모여든 것은 지난 세기 20년대였다.  (권립) 광주는 손중산선생의 혁명활동 중심지로서 우리민족 혁명자들에게는 크나큰 흡인력을 갖고있었다.1917년 손중산은 광주에서 비상국회를 열고 호법군정부를 세우고 북벌을 선포했다. 제국주의를 한없이 미워하고 군벌을 한없이 미워한 우리민족은 북벌전쟁의 크나큰 흥취를 가지고 지대한 관심을 표했을뿐더러 손중산선생을 찾아 떠났다.     광주에 도착한 이튿날 답사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황화강렬사릉원(黄花岗烈士陵园)이였다. 릉원은 광주시 동북부 백운산(白云山)풍경구 이남의 선렬중로(先烈中路)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황화강공원이라고 한다.    1911년 4월 27일 손중산이 령도하는 동맹회(同盟会)는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팔에 흰천을 동인 결사대 백여명이 황흥(黄兴)의 령도하에 청정부 량광총독서(两广总督署)로 돌입했지만 다른 호응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고말았다. 도처에서 적들이 포위해 오자 봉기자들은 총독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왔다. 봉기가 실패한 후 청정부는 많은 혁명자들을 살해해 그들의 유체를 거리에 내 던졌다. 5월 3일, 동맹회 회원 반달미(潘达微)가 <평민일보(平民日报)>의 기자신분으로 사람들을 조직해 72명 수난자들의 유해를 거두었다. 그들은 피로 얼룩져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이곳에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신해혁명이 승리한후 1912년 사람들은 이곳에 렬사릉원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1919년 화교들의 의연금으로 릉원이 확건되였다.    부지면적이 12만 9천 평방메터이 릉원 정문은 십여메터 높은 석패방(石牌坊)으로 되어있었다. 정문에는 손중산이 친필로 쓴 <호기장존(浩气长存)>이란 금빛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정문에서 돌계단을 따라 3백여메터 가노라면 렬사묘비가 있고 그 뒤에는 기공방(纪功坊)이 있었다. 기공방은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큰 돌 72개를 금자탑 모양으로 쌓고 그 우에 자유녀신상을 조각해 만들었다. 봉건제도를 뒤엎고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에서 72명 렬사들은 두려움없이 싸웠으며 그들의 과감한 혁명정신은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황화강 렬사들의 투쟁은 신해혁명의 도화선이였다. 렬사들의 투쟁에 크게 고무를 받은 중국인민은 손중산을 따라 무창을 중심으로 전국 도처에서 봉기를 일으켜 드디어 부패한 만청정부를 뒤엎었다. 그러나 신해혁명후, 중국은 더욱 큰 혼란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부패한 만청정부는 당시 군권을 잡고있던 원세개(袁世凯)를 내각총리로 임명하고 무너져가는 봉건정권을 만구하려고 하였다. 원세개는 기세 드높은 전국의 혁명정세에 비추어 혁명자로 위장하고 청조 황제를 퇴위시켰다. 그리하여 남경에 설립된 참의원은 원세개를 대총통(大总统)으로 선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야망에 찬 원세개는 혁명성과를 절취한후 즉각 국회를 해산시키고 <중화민국 림시약법(中华民国临时约法)>을 페지했을뿐만 아니라 매국적인 <21개 조약>을 일본과 체결하면서 부단히 자기 세력을 확충하였다. 비밀리에 국권을 팔아 자기 세력을 확충하던 원세개는 드디어 봉건제도를 다시 회복하고 스스로 황위에 등극하게까지 되었다.    그러자 원세개를 토벌하는 투쟁이 시작되였다. 운남 도독 채악(蔡锷)은 운남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귀주, 광서, 광동, 절강 등지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거듭되는 실패로하여 1916년 3월, 원세개는 퇴위를 선포하고 그해 6월 6일 울화증으로 죽는다. 원세개가 죽은 뒤 두목을 잃은 방대한 북양군벌들은 각자 자기 세력을 확충하기에 급급했고 서로 끊임없는 권력쟁탈을 진행함으로써 인민들을 다시 도탄속에 밀어넣었다. 북양군벌 가운데서 세력이 비교적 큰 군벌들로는 직계(直系)군벌 풍국장(冯国璋)과 조곤(曹锟), 환계(皖系)군벌 단기서(段祺瑞), 봉계(奉系)군벌 장작림(张作霖), 진계(晋系)군벌 염석산(阎锡山)이 있었고 운남의 당계요(唐继尧), 광서의 륙영정(陆荣廷)의 세력도 막강하였다. 이들은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권을 팔고 인민을 수탈하면서 저들의 세력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1917년 북평의 중앙정권을 잡은 환계군벌 단기서 역시 손중산의 <림시약법>을 페지하였다. 이에 손중산은 <림시약법>을 보위하고 민주혁명의 성과를 되찾기 위한 호법운동(护法运动)을 호소하고 호법군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남방각지의 군벌들도 서로 자체의 리익관계로 분렬되면서 호법운동도 성공하지 못했다. 호법운동이 실패한후 손중산은 새로운 혁명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듭되는 실패를 겪은 그는 새로운 혁명군대가 있어야 함을 절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혁명을 지도할 더욱 유력한 당조직을 만들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광주시 해방로(解放路)를 따나 북에서 남으로 가노라면 월수공원(越秀公园), 중산기념당(中山纪念堂), 인민공원(人民公园)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였다. 답사 팀이 탄 차가 기념당 정문에 들어섰을 때 손중산선생이 친필로 쓴 <천하위공(天下为公)>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한다는 그 글뜻에서 혁명선구자 손중산선생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수있었다. 기념당은 거대한 극장으로 되어있었다. 록화가 잘 된 기념당 정원 정면에는 거대한 손중산 동상이 있었다.     광동성의 중점 문화재인 중산기념당은 광주시민과 해외 화교들이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해 돈을 모아 축조한 것이다. 기념당은 손중산선생이 일찍 사용했던 총통부 옛터에 축조되였는데 우리나라 유명한 건축설계사 려언직(吕彦直)선생이 설계했고 1929년에 착공하여 1931년에 준공되였다. 중산기념당은 화려한 팔각형 건물로서 외형은 장엄하고 웅위해 보였고 푸른 기와로 된 지붕은 민족특색이 짙어 보였다. 실내는 3,238개 좌석이 배치된 거대한 공연장이였는데 회의장소로도 사용되였다.    해방후 정부에서는 1988년까지 7차례에 거쳐 자금을 투입해 건물을 수건하였다. 그리하여 정원은 6헥타르로 확대되였고 70여년이 넘는 극장건물도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될수 있었다. 지금 이곳은 광주시의 주요 관광지의 하나로 되어 국내외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이시기 중국공산당 중앙은 시국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고 손중산의 혁명을 적극 동조하였다. 1921년 12월, 국제공산당 대표 마린은 리대소의 소개로 계림에서 손중산을 만났다. 그는 국제공산당을 대표하여 더욱 광범위한 로농대중과 단결하고 혁명무장의 핵심으로 될 수있는 군관학교를 설립해야한다는 두가지 건의를 제기하였다. 그후 리대소는 상해에서 여러차레 손중산을 만나 침식을 잊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또 수많은 당원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해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는 중국신민주주의 혁명중심지로 되었고 수많은 조선 혁명자들도 광주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권립) 한편 광주에 있던 우리민족 항일인사들은 1921년 9월 광주거주 한인한고향회를 건립하고 서로 돕고 아끼면서 반일투쟁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광주에 있던 우리민족 반일인사들은 형제민족과 손잡고 광주 중한협회까지 건립했다. 초기에는 70여명, 한달후에는 수백명으로 증가했다. 광주의 많은 군정간부들과 지명인사들이 이에 참가하여 우리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지해 나섰다.    손중산과 호법군정부는 조선민족의 독립을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림시정부의 요인들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신정, 려운형, 려운홍, 박은식 등이 선후로 군정부를 방문하였으며 동맹회 회원이였던 신정은 림시정부의 특사신분으로 호법군정부와 교섭하기도 하였다. 손중산을 만난 신정은 림시정부 승인문제, 조선 청년 교육문제와 관련해 합의를 보고 유력한 지원을 받게 된다. 신정은 또 박태화(朴太和)를 비롯한 십여명 림시정부 관원들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광동성 각계의 도움을 받으면서 박태화를 회장으로 하는 류월한인회(留粤韩人会)를 조직하였다. 류월한인회는 광주의 조선 이주민들을 도와주는 한편 혁명가들을 단합시켰다. 그후 류월한인회가 주도로 되어 중국과 조선 지명인사들이 광동도서관에 모여 <중한협회(中韩协会)>를 건립했다. 손중산이 이끄는 호법정부의 많은 의원들과 관원들이 중한협회에 참가해 두나라 혁명투쟁을 공동히 진행하기로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鲜总督府警务局)의 자료를 보면 20세기 초 광동에는 5백여명 조선 이주민들이 살고있었다. 그 가운데 광주에만 300명이 있었는데 남성 80명에 녀성 220명으로 집계 되여 있었다.    20년대에 들어서서 이주민뿐만 아니라 많은 혁명자들이 광주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25년, 광주에 조선혁명자들이 60여명이 활동하고있었고 1927년에는 급증하여 8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동북에서 군사기능을 배우고 유격전을 전개하던 독립군 400여명이 있었고 로씨야에서 다년간 투쟁해오던 백여명 조선혁명자들이 포함되였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포병, 기관총 기술을 배우고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온 조선인 군사간부 30여명도 포함되여있었다. 이들은 쏘련 고문단과 함께 와서 중국 각계 요인들과 련계를 달아주고 통역을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 조선과 일본에서 건너온 애국자 백여명, 동북공산청년동맹 성원 70여명도 있었다.    도처에서 총과 폭탄으로 일제 요인들을 사살하던 의렬단도 이시기 광주로 옮겨오기 시작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를 주장하던 의렬단은 민중에 의지할 힘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여러차례의 의거가 있었지만 일반인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상황이 나타나자 의렬투쟁도 새로운 방략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 성원들이 조직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광주에 모여왔다.    광주에 모여온 이러한 조선청년들은 거의 다 지식인으로서 애국자일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가들이였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외에 흩어져 분산적으로 활동하고 투쟁해왔기 때문에 투쟁경력이 달랐고 정치견해도 같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으며 관망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중국혁명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독립투쟁의 길을 찾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독립투쟁의 성공을 이끌어낼 공동한 꿈을 지니고있었던 것이다.
6    제6회 의렬단 투쟁과 중국공산당 창건 댓글:  조회:4103  추천:64  2007-06-10
   1919년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반제반봉건 투쟁을 선호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침략과 수탈을 받고있는 조선 지사들의 반일 투쟁은 더욱 치렬하였다. 이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진행된 반일유격투쟁과 곳곳에서 작탄을 터쳐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의렬투쟁이였다.    1919년 11월 10일 중국동북 길림성내에서 의렬단이 창단된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취지로 조직명칭이 의렬단으로 되었고 단원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 국내에서 반일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수많은 의사들이 중국내에 집결되였다. 무력항쟁을 위한 군대양성을 목적으로 한 중국 동북의 신흥무관학교(新兴武官学校)의 학생들이 중추가 되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凤)과 함께 의렬단을 창단하게 된다. 김원봉은 남방에서 파견한 중국인 주황(周况)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가서 주황에게서 폭탄제조기술을 배우는 한편 리종암(李锺岩), 리성우(李成宇), 서상락(徐相洛) 등 8명 단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국내 밀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의 판결을 받고 중국으로 도주한 윤세주(尹世胄)를 비롯한 몇 명이 가담하여 도합 단원 13명이 확보 되였다.   의렬단원들은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의로운 피”를 흘리려 한 열혈 남아들이였다. 일제식민통치자들을 상대로 폭탄이나 총기를 사용해 파괴와 암살을 진행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방법이였다.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렬단 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단재 신채호의 반 림시정부 성토문을 적극 지지하였다. 김원봉은 신채호가 기초한 리승만 성토문의 54인 서명자 중 한명일뿐만 아니라 이들 서명자 가운데서 김재희(金在喜), 송호(宋虎), 오성륜(吴成伦), 최용덕(崔用德), 정인교(郑寅教) 등을 의렬단에 받아들여 참모진을 구성한다. 그뒤 김원봉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의렬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고 모든 타협주의를 반대하면서 오직 폭력적 대중혁명을 주장하였다.    20년대 의렬단은 선후하여 밀양(密阳), 진영(进永) 폭탄반입사건, 부산,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도쿄 니주바시(二重桥) 폭탄의거, 상해 황포탄(黄浦滩) 의거 등 의렬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진행된 의렬투쟁은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동방 피압박 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상해의 황포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배들이 쉼 없이 오고갔다. 황포강을 사이두고 서쪽은 20세기 초엽 상해의 번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많은 옛 건물들이 고스란히 보존 되여 있다. 대부분 회색의 서양식 돌 건물들이다. 강을 사이두고 포동(浦东)지구의 번창한 모습이 오늘의 상해 황포탄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고 있다. 멀리 하늘을 박차고 선 동방지주(东方之珠) 방송 송신탑이 있고 그 주변에 현대식 빌딩이 숲을 이루고있었다.    20세기 20년대 의렬단의 황포탄 의거 유적지가 옛날 세관자리였다. 답사팀은 세관청사 옛 건물을 찾아 외탄을 거닐었다.   (외탄에서 만난 행인) 이곳에서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상해지식청년입니다. 여기가 바로 당년의 회풍은행이고 그 옆이 바로 세관청사입니다. 해방이전과 똑 같습니다. 옆이 푸른 지붕인 건물이 평화판점이고 그 다음은 중국은행 건물입니다.      현지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세관부두와 그 주변은 당시와 다름이 없었다. 열혈투사 오성륜, 김익상(金益相), 리종암이 민족을 위해 단연히 일제 군부 거물급 인물인 다나까를 저격했던 의거의 현장이다. 부두와 세관 건물 모두가 변함이 없었다.   강기슭을 여유롭게 거니는 행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은 진정할수 없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죽기를 맹세하고 스스럼 없이 저격에 나선 민족의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최룡수) 1922년 3월 22일 의열단 대원 김익상, 오성륜, 리종암 세 투사는 바로 여기서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를 저격하는 서건이 발생했다. 미국 여사 한명이 오발로 피살되고 다나까를 쏘지 못했다. 실패후 도망치다가 체포되였다. 오성륭은 감옥에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였다. 그후 여기에 관해서는 혁명가 김산이 <괴상한 무기>라는 소설을 써 발표했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 다나까가 탄 륜선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 닿았다. 침략팽창의 추진자로 소문난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 기이찌(田中义一)는, 동남아시아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던 중 상해 시찰을 위해 상해에 오게 되었다. 다나까는 잔교를 지나 부두에 내려 영접을 나온 고위 관리들과 악수를 나누고있었다. 이때 제1선에 선 오성륜이 놈의 가슴팍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금발의 외국 녀인이 불쑥 나타나 앞을 막았다. 총 세 방이 뜻하지 않게 그 녀인을 맞추고 말았다. 이때 제2선에 있던 김익상이 혼비백산해 승용차쪽으로 뛰여가는 다나까에게 총 두방을 쏘았다. 총알은 그놈의 모자를 꿰뚫었을 뿐 역시 명중되지 않았다. 련속 던진 폭탄마저 불발이였다.     다나까가 차안에 굴러들어가 버리자 제3선에 있던 리종암이 폰탁을 던졌다. 급급히 던진 폭탄이 폭발하기 전 미군 해병이 폭탄을 바다에 차 넣었다. 련속되는 습격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나까는 급급히 현장을 떠났고 호위병들이 습격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틈에 끼여있던 리종암은 쉽게 탈주했으나 구강로(九江路)와 한구로(汉口路)로 달리던 김익상과 오성륜은 끝내 적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해 5월 오성륜은 탈옥하여 계속 항쟁을 하였지만 김익상은 나가사끼 지방재판소로 압송되였다가 1925년 옥사하였다.    의렬단의 충직한 투사였던 김익상은 1921년 9월, 홀몸으로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약을 던지기도 하였다. 폭탄의 위력이 약했던 탓으로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총독부 청사내로 여유있게 잠복해 들어가 폭탄 세 발을 던지고 삼엄한 일본 경찰들의 경계와 추적을 피해 북경으로 무사히 귀환한 김익상은 실로 신화적인 인물이였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은 원쑤 침략자들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다나까 저격에 나섰던 김익상은 끝내 성사하지 못하고 일제 감옥에서 희생되였다.          처절하고 비장했던 의렬투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였다. 다나까 저격의거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 침략자들을 전율시켰으며 민족의 반일의지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외국인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들에게 련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렬단은 투쟁수단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새로운 대중운동의 길을 찾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내 조선인 반일지사들이 여러모로 민족독립과 해방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있을 때 중국에는 새로운 정치력량이 력사무대 등장하였다. 중국 혁명을 주도하고 수억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과업을 짊어진 이 정치력량이 바로 중국공산당이였다.     황포탄에서 다나까 저격지를 답사한 이튿날인 2003년 9월 23일, 답사팀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상해시 흥업로(兴业路) 76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석고문(石库门) 2층건물로 된 기념관 주변은 해 묵은 오동나무들이 둘러있었다. 손바닥만한 오동나무 잎이 설레이는 사이로 보이는 이 평범한 2층 건물에서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낸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던 것이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 기념관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있었다. 기념관은 1952년에 수건되여 지금까지 천만을 넘는 관광자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화국이 창건된후 1950년, 중앙에서는 전국적으로 혁명문화재와 혁명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호할데 관한 통지를 발부했다.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조사와 검증사업을 거쳐 지금의 흥업로 76번지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지점이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상해대표로 참가하였던 리한준(李汉俊) 형제가 살았던 집이였다. 다소 수건과 복구작업을 거쳐 건물은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숙엄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기념관 전체를 감돌고있었다. 450평방메터에 달하는 전시청에는 혁명문화재와 력사문헌 그리고 일부 소중한 력사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물들은 중국공산당 창립의 력사적 배경과 각지 공산주의 소조의 활동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있었다. 1차 대회는 1층의 18평방메터 되는 회의청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청은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였고 가구와 물품들도 모두 원래대로 모방되여 있었다. 탁상우에 놓여진 16개의 찻잔을 보면서 우리의 사색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감동과 격정의 옛날로 달려갔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과 수탈을 감행하여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되였다. 그때로부터 5.4운동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투쟁은 끝없이 진행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 농민봉기나 자산계급이 령도한 신해혁명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새로운 정치력량을 요구하였고 새로운 당을 요구하였다.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은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중국에 전해왔고 1919년 5.4신문화운동은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계급의 결합을 촉성시켜주었다. (권립)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공산주의자 안병진은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왔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공의 창시자로 될 리대소 선생과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공의 건립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20년초 리대소와 진독수는 중국공산당 창건을 위해 적극 준비하고있었다. 이때 조선 혁명가 안병진이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维经斯基)를 안내해 중국에 오게 된다. 그는 북경에서 리대소를 만나고 상해에서 진독수를 만나 중국공산당 창건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후 북경, 호남, 호북, 산동 등지에 공산주의 소조가 나타나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였다.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상해에서 각지 공산주의소조 대표들이 모여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바로 중국공산당 창건대회로서 림시강령을 채택하고 당의 사업기구와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모택동, 하숙형, 동필무, 진담추, 왕진미, 등은명, 리달, 리한준, 장국도, 류인정, 진공박, 주불해와 포혜승 등 13명이 전국 53명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대회에 출석하였다. 국제공산당에서는 마린(马林)과 니꼴스키(尼科尔斯基)를 대표로 대회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회의는 프랑스 조계지 경찰청의 저애를 받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상해 대표 리달의 부인 왕회오(王会悟)의 건의에 따라 가흥(嘉兴)의 남호에서 회의를 계속 하기로 하였다.    24일 답사팀이 가흥의 남호에 도착했을때는 늦여름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있을때였다. 수려한 남호의 동남안에는 복구해 만든 유람선 한척이 조용히 떠있었다. 길이가 16메터이고 너비가 3메터인 유람선의 중앙에는 탁상과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이 유람선이 바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이 마지막 회의를 하였던 곳이다.    1964년 봄, 동필무 동지가 남호에 와서 이 유람선을 보고 당시의 유람선과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련신 감탄하였다 한다. 이 자그마한 유람선에서 중국공산당의 규약과 첫 결의안이 채택되고 중국공산당 중앙국이 조직되였다.    회의를 페막하면서 전체 대표들이 작지만 견정한 목소리로 구호를 웨쳤다. “중국공산당 만세!”‚“제3국제만세!”‚ “공산주의 만세!”    그때로부터 고난에 시달리던 중국 무산대중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오르게 되었다.    
5    제5회 단재 신채호의 북경 유적지들 댓글:  조회:3479  추천:50  2007-06-10
 단재 선생의 며느리 리덕남 녀사와 함께 단재 선생이 북경에서 활동했던 유적지를 찾아 답사한 것은 2003년 10월 16일이였다.    보타암에서 한동안 생활하던 신채호 선생은 후에 선후하여 지금 북경시 백탑사(白塔寺) 이남의 금십방가(锦什坊街) 21호와 초두호동(炒豆胡同)에서 생활하였고 동린각로(佟麟阁路) 서쪽에 위치한 석등암(石灯庵) 부근에도 거주하였다.    석등암 사원은 지금도 어렴풋이 그 모습을 보아낼수있었다. 동린각로를 따라 서쪽으로 한동안 가노라면 5,6층 되는 주민 아파트 몇채가 둘러있는  사이에 많은 단층집들이 촘촘이 있었다. 단층집 가운데 건물은 전통적인 중국식 4합원(四合院) 구조로 되었는데 규모는 매우 컸다. 그리고 꽃무늬를 새겨 놓은 기와라든가 각가지 조각을 한 처마, 담벽을 보아서 이곳이 분명 사원자리임이 틀림없었다. 지금은 여러 주민호들이 촘촘히 비집고 들어와 함께 살기 때문에 사원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현지 가두주임이 기자들을 열심히 맞아주면서 부근에 살고있는 70세 동(董)씨 할머니 한분을 소개해 주었다. 그 로인은 어렸을적에 이곳에서 살았고 60년대는 석등암의 비구니로 있었다고 가두주임이 소개해 주었다.   여기가 석등암 사원이 있던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수십년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사원의 주건물과 담이 조금 남아 있어 찾아볼수있습니다.     동씨 로인의 말에서 분명 이곳이 석등암 옛터라는 것을 알수있었다. 그러나 당시 석등암의 규모나 더 상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당의 비구니로 있었다는 가두주임의 소개가 맞다면 동씨 할머니는 분명 가장 유력한 증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던 탓으로 많이 소심해 졌는지 로인은 분명한 경력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석등암 건물 마저 많이 파괴되여 버린 상황이니 사람의 피해야 더 컸을것이다. 갖은 정신적 세파를 겪었기 때문에 지금도 동씨 로인은 그 한단락의 력사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판단되였다.      북경에서 본격적인 독립활동에 종사하던 신채호는 1919년 상해 림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가게 된다. 그러나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을 스스럼없이 피력하던 신채호는 더는 참을수 없어 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 그런데 문어귀에 몇몇 청년들이 그를 막아 나섰다. 청년들: “안됩니다. 정부조직이 이룩되기까지는 누구도 이 자리를 못 떠납니다.” 신채호: “우리에게 남은 것이 이제 무엇이 있느냐? 대의밖에 더 있느냐? 민족적 대의가 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비켜라!”    청년들: “안됩니다. 제발 여기를 못 떠납니다.”    신채호: “그럼 차라리 나를 죽여라!”    신채호: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리승만은 리완용이나 송병준 보다도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그를 우리의 대표라 할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일은 단재 신채호의 뜻과 반대로 성사되여 갔다. 회의를 박차고 나온 그는 상해 림시정부와 결별하고 림시정부를 반대하는 창조파의 선두에 나선다. 드디어 그는 북경에 돌아와 무장항쟁을 주도하는 군사통일주비회의 소집을 위해 노력하였고 또 1919년 중국 길림에서 창립된 의렬단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드디어 의렬단의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게 된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보여진 절대독립론은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干会)의 로선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단재 신채호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과 폭동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시사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자들 뿐만 아니라 의렬단이나 김구가 이끄는 상해 림시정부까지도 합리하고도 정당한 폭력수단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1920년 후에 신채호 선생은 관음사(观音寺)에 한동안 출가해 있은 경력이 있다. 이날 오후 답사팀은 관음사를 찾아 떠났다. 관음사는 북경시 북신교(北新桥) 부근의 전영강(前永康) 2항(巷)에 있었다는 기재가 있다. 현재 그곳에는 사당은 없고 좁은 골목길에 높은 담을 쌓은 민가들만이 늘어서 있을뿐이다. 부근에 옛날 사당 자리 같은 낡은 건물이 보였지만 지금은 고적(古籍)도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현지인들은 이 건물은 옛날 백림사(柏林寺)의 일부 사당이 남아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당시 단재 신채호는 몹시 빈곤하게 생활하였다. 독립운동 방략과 방법에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었고 민족의 미래에 비관에 잠겨 있었다. 오직 무장항쟁의 길만이 정확하다고 주장해 오던 단재 신채호는 기타 타협론자들과 외교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극심한 생활난까지 겪에 되었던 것이다.     하여 그는 처자들을 떠나 보내고 자신은 관음사에 몸을 담고 승려로 된다. 이 한 단락의 력사를 두고 일부 사람들은 그가 독립운동에 절망하고 한 시기 방황했기 때문에 출가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신채호의 투쟁 행적을 살펴보면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시기 비록 관음사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민족력사와 투쟁리론 저술에 더 없는 성과를 이룩해 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렬단을 비롯해 북경지역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계속 련계를 가지고 또 독립군 자금을 모아 더욱 큰 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했던 것을 보아도 그의 출가는 독립운동에 실망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리한 필봉을 무기로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관음사에 잠시 몸을 담고있었을 뿐이였다.     1920년대말 단재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활약하게 된다. 1926년 그는 재 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련맹에 가입하고 1927년에는 중국, 조선, 일본, 대만 등 여러나라 대표 백 20명이 참가한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의 조선대표로 참가하며 1928년 4월에는 직접 무정부주의 동방련맹 북경회의를 개최한다. 이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활동경비를 모으기 위해 위험한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안해 박자혜와 아들 신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다음 길을 떠났다.  (권립) 1928년에 이르러 선생은 반일자금을 모으러 떠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십년도형에 떨어져 려순감옥에 갇혔다. 그는 일제의 그 어떤 취조와 혹형앞에서도 언제나 떳떳하고 태연자약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이 일제가 없는 자유로동사회를 건설하는것이라고 높이 웨쳤다. 그는 우리 동포들의 해방을 위해 취하는 일체 수단은 모두가 정당한것이라고 일제놈들 앞에서 웨치고 또 웨쳤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모으는 방법이란 외국 위조지페를 만드는 것이였다. 그들은 이로써 폭탄 제조소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중국인 류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위페를 교환하려 했으나 놈들에게 발각되여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고 만다. 일제 옥중에서 적들과 과감히 맞써 싸우던 그는 2년후 10년 징역으로 판결 받고 려순감옥으로 이송된다.  (권립) 감옥에서 그의 몸이 형편없이 쇠약해지자 한 친척이 보석하려 했지만 그 친척이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단연히 거절했다. 그는 1936년 2월에 56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리유로 가석방을 완강히 거부한 단재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뇌익혈로 옥중에서 빛나는 한생을 마쳤다.     북경에서 신채호 선생의 활동지점들을 답사하고난 후 리덕남 녀사는 중국의 성인 공자를 모신 국자감(国子监)이 부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에 가보련다고 했다.     고요한 국자감 공자의 동상을 바라보며 리덕남 녀사는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 같았다. 공자는 중국의 성인으로 이처럼 사람들의 공대를 받고있는데 독립운동의 영웅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야만 했던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고목이 가지를 흔드는 조용한 정원에서 리덕남 녀사는 신채호 선생의 유가족 이야기를 하였다.    광복후 한국 리승만 정권하에서 신채호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금기시 되었고 그의 유가족도 많은 압박과 피해를 받았다. 아들 신수범(1921--1991년)은 갖은 고생을 겪다가 20여세 년하인 리덕남 녀사과 가정을 이루지만 일단 아버지의 일은 비밀에 부치고 살았다. 리덕남 녀사는 남편의 행적이 하도 수상하여 남편이 첩자인줄로 알고 경찰에 고발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신수범은 이런 안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저명 인사들을 찾아 아버지의 사적을 이야기 해 주었고 민족해방에 대한 그의 기여를 설명해 주었다. 그때로부터 리덕남 녀사는 시아버지 신채호의 위대한 업적을 인식하고 남편과 함께 아버지의 유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단지 신채호의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십년간 온갖 고생을 할대로 다하던 신수범씨는 1991년 병으로 사망하고 리덕남 녀사만이 계속 신채호의 기념활동을 위해 힘쓰고 있다. 리덕남 녀사는 “사람은 더 없이 천할수도 있고 더 없이 청정하고 위대할수있다”고 감회 깊은 이야기를 했다.     “내 죽거든 내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죽는 순간까지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던 단재 신채호는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일제 감옥에서 옥사하니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보지 못한 그는 정녕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압박자들과 굴함없이 싸웠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빛나는 삶과 그의 고귀하고 청정한 마음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사진설명: 1 신채호 2 리덕남 녀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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