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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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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금전만능, 향락주의, 참 사랑 댓글:  조회:1643  추천:0  2009-05-16
-단편소설<<나쁜녀자>>를 읽고 로.윌크쎈은 스코틀랜드의 작가이며 방송원이며 연설가이다. 그의 저작은 많은 나라들에서 발표되였다. 지금 그의 단편소설은 영국, 미국, 화란, 벨지끄, 프랑스, 독일 및 기타 일부 나라들의 잡지에 실리고있다. 그의 단편소설 <<나쁜녀자>>는 안해와 남편의 정부, 남편과 정부와의 대화로 엮어진 소설이다. 편폭이 크지 않고 사건교대가 대화에 기대고있지만 인물의 모순갈등이 고조에 이르러 피할길없이 부딪치게 된 설전(언쟁)을 펴보임으로써 인물들의 성격, 수양, 도덕풍모 등을 생동하고도 함축성있게 보여주고있다. 세상만사가 돈에 복종하는 금전만능의 사회에서 돈의 힘에 의하여 비탈려진 애정, 사내대장부의 위세나 풍모도 돈의 유혹에 기운을 잃고마는 현실, 비천한 출신속에 감겨있는 참사랑, 이것이 우리의 청각에 울려오는 이 소설의 메아리이다. 노르마와 라리프의 결합은 그 애초부터가 애정의 열매가 아니였다. 노르마의 경우에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금전만능의 신념으로 제보다 젊고 유능한 사나이를 고른데 불과하고 라리프의 경우는 향락적인 생활에 인생을 절이려는 자기의 향락주의를 성공한데 불과하였다. 하기에 그들 부부간의 관계는 사랑에 대한 충성으로 매여져있는것이 아니라 부자가 빈자를 지배하는 다시말하면 경제적폭리에 따른 인격에 대한 돈의 지배로 유지되고있었다. 그러나 정부인 메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비천한 출신속에 깊고 숭고한 사랑을 담고있는 그는 아무런 외적요소의 보탬도 없는 순수한 사랑 그 자체에 충성한다. 오히려 자기의 참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사랑에 붙어오는 외적부담(<<사랑하기만 한다면...외팔이 누이동생, 혹은 위궤양, 혹은 가짜이발, 무엇이든 좋아요.>>하고 메라는 말했다)도 달갑게 받아안으려 한다. 바로 그러했기에 그녀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충성을 리용하여 그녀의 사랑을 편취하고 그녀를 노리개로, 갱년기가 지난 안해에게서 받을수 없는 본능적만족을 충족시킬수 있는 성도구로 간주해온 정부 라리프를 결코 용서할수 없었던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사기군은 라리프이다. 그는 향락적생활을 위하여 노르마한테 장가들었으나 그녀가 자기보다 나이 많기에 일찍 본능억제란 부부생활의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그래서 그가 선택한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 본능억제를 풀어줄수 있는 <<성도구>>였다. 갱년기에 이른 노르마로선 이것쯤은 허용할수 있었던 모양이다. 젊고 유능한 남편이 본능억제에서 해탈되는것은 되려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훌륭한 보양제였기때문이다. 물질욕이 강한 남편이 자기의 금전유혹을 벗어날수 없음을 확인한 까닭에 이런 엉뚱한 자비를 베푼것이다. 그래서 메라의 방세까지 대주었다. 그러나 <<방탕녀>>로 안 메라가 숭고한 애정과 사랑에 대한 충성으로 그들의 부부관계를 위협하자 그녀는 또 자기의 신념인 금전만능으로 메라를 위협한다. 그녀의 목적은 메라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남편의 정부로 되게 하고 그래서 젊고 유능한 남편을 영원히 자기의 사랑의 <<노예>>, 아니 사실은 금전의 노예로 되게 하려는것이였다. 금전과 사랑의 충돌, 이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현실적의의이다. 특히 소설이 세 인물의 대화로써 이같은 거창한 주제를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는데 그 예술적매력이 짙게 담겨져있다.
43    전통의식, 당대의식 및 민족의식의 관계 댓글:  조회:1670  추천:0  2009-05-16
자기가 발딛고 선 사회와 문화의 성격을 올바르게 리해하고 접수하여 후세에 력사로 기증할 현재를 사회발전의 흐름에 맞게 꾸미려는것은 모든 학문, 적어도 사회과학의 거창한 주제이며 기본과제이다. 그만큼 지금 전 사회적으로 온양되고 다듬어지고있는 관념갱신과 당대의식의 탐구도 무게있는 력사적 의의와 현실적 의의를 담고있다. 과연 이런 사명감을 념두에 둘 때 우리 문단의 모지름도 만삭의 임신부가 겪지 않으면 안될 산전진통임이 틀림없다. 비록 한족문단에 비하여 지루한 침묵의 연장선을 그어왔었지만 오히려 그로 하여 엄숙성과 과학성에 담보를 얻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담보가 차라리 남의 흉내만 내지 말고 한족문단에 대해 찬히 살펴보고 제나름의 사변적 연구를 할 때에만 가능할텐데 우리 문단의 현실태를 두루 살펴보면 남이 부른 구호를 뒤늦게나마 따라 부르는 페단이 퍽 활기를 띠고있는것이 민망스럽다. 자기의 두뇌를 움직일새도 없이 남의 뒤를 따라 덩달아 웨치는 그런 <<구호웨침식>>으로는 도저히 우리 문단의 미래를 불밝힐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족문단의 지나간 페지를 다시 번져보면 민족의 렬근성을 찾던 나머지 민족의식으로는 안된다느니, 서방으로부터 당대의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느니 하는식의 주장들이 적지 않은 페지를 차지하였었다. 또 지금도 민족의식과 당대의식을 병렬 혹은 대립시키면서 민족의식이냐 아니면 당대의식이냐 하는 극단적인 선택에 네니 내니 하고 얼굴을 붉히고있다. 유감스러운것은 오랜 침묵을 지키던 우리 문단도 대개는 이러루한 주장들로 은근히 끓고있는 그것이다. 풀어말하면 이런 주장들과 견해들의 그 제기법에 한해서는 전혀 아무런 의심도 던짐이 없이 다만 어느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질문에 전투적태세를 취하고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어느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질문에 앞서 이런 제기법부터 과학적이 되느냐 하는데 질문을 던져야 할것이다. 첫째, 만약 민족의식과 당대의식을 병렬 혹은 대립의 위치에 갈라세운다면 벌써 민족의식은 당대의식이 아니라는 상식적인 결론이 내려지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당대의식이란 그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벌써 현대인의 사고범주에서 산생되는 의식을 말함은 지극히 자명한 일인데 이에 따르면 우리의 민족의식은 현대인의 사고범주밖에 놓여야 한다는 황당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둘째, 민족의식에는 조상세대가 유구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다듬어놓은 전통의식과 현대인인 우리가 다듬고있는 의식이 포함됨도 의심할바 없는것인데 전통의식과 구별되여야 할 후자를 구경 무슨 의식이라고 하는가 하는 웃음거리 비슷한 질문도 필요하게 된다. 셋째, 전통의식이나 당대의식이나 모두 시간적차원이라는 동질적근원을 갖고있다. 그런데 그들이 전통의식을 포섭한 민족의식을 당대의식과 병렬 내지 대립시킴으로 하여 전통의식과 당대의식은 각기 다른 두개의 의식에 주소를 붙이게 된다. 그렇다면 전통의식은 민족의식을 시간적차원에서 쪼갠 종개념이라 할 때 당대의식은 어떤 의식을 시간적차원에서 쪼갠 종개념인가 하는 질문이 던져짐을 막을수 없다. 네째, 민족의식이란 결국 민족의 미래를 도안하는 주체의식이다. 어떤 민족이든지간에 오직 민족의 미래를 도안하면서 끈질기게 민족의 자활력을 키우는데 은근한 야심을 품고있다면 그 민족에겐 틀림없이 유일 체계적인 민족중심의 자주의식이 기본 물줄기를 이룰것이다. 이런 민족은 외래의 의식도 그대로 받아넘기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체의식을 튼튼히 굳힌 배경하에서 가치판단에 의한 취사선택을 하여 주체적으로 리용하는것이다. 이것은 결코 이질적인 마구바꿈이 아니라 역시 자기 전통에 대한 발전적이고 계승적인 개편 또는 재편이며 현대적 민족의식의 창조인것이다. 사실 매개 민족의식은 그 사회적배경에서부터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워낙 동근일원(同根一元)적인 것이 아닌데 어떻게 외래의것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 민족이 자기 민족의식의 체계밖에 이른바 없어선 안된다는 다른 의식의 체계를 세워 병진시킨다는것은 더구나 상상할수 없는 일이다. 민족의 확대된 시점에서 세계를 정시할 때 전통에 대한 검토이든 새 질서에 의한 창조이든 외래요소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든 모두 결국은 성장을 기탁한 민족의 미래에 선물할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는것이다. 즉 당대의식이란 결국 민족의식의 현대적표현이며 미래의 전통이라는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것 같다. 사실 우리가 관념을 갱신한다느니 당대의식을 키운다느니 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현실사회를 대변하고 삶의 현실에 대응되는 의식체계를 세우려는것이다. 역시 민족의식의 현대적주소를 찾으려는것이다. 때문에 당대의식을 키우고 관념을 갱신한다는것은 개척을 모르는 고루한 사고방식이나 진부한 관념을 개변하는것이지 결코 전통을 외면하는것이 아니며 민족의식과는 더구나 저촉될수 없는것이다. 만약 당대의식이 민족의식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제기법이 그런대로 성립된다면 현대적 민족의식으로서의 당대의식은 곧 미래의 전통이 아닐수 없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삶의 내용을 담은 당대의식을 키우려면 모름지기 민족전통에 발을 붙이고 조상세대와 피줄을 끊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자기의 정신적 기틀로 되는 문화전통이 없다면 그 민족은 벌써 령혼을 잃은 육체나 다름없이 분해되고말 운명일것이며 자기의 얼굴을 가지지 못하고 외래의 유혹에 저마끔 열사람이 열한개의 반응을 보여주는 민족은 사실 벌써 민족으로서의 참된 함의를 잃고만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식이 력사의 범주에 속하는것이지 결코 력사가 의식의 범주에 속하는것이 아니다. 풀어말하면 력사의 흐름에 따라 의식은 부단한 선택과 다듬음이 있게 되는것이다. 바로 우리의 전통이 유구한 력사의 흐름에도 흩어지지 않고 우리 세대까지 전해질수 있은것은 시대에 따르는 갱신과 변질이 끊임없이 시도되여 왔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에 들어와서 많은 전통들이 시대의 요청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조상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따르는 갱신과 변질을 꾀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세대의 잘못인것이다. 오늘을 예견못한 조상세대에 죄를 씌운다는것은 과분한 처사이다. 오히려 우리가 조상들이 용케 물려준 전통을 미래에 전해지도록 현대적주소를 찾아주고 잘 가꾸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벗기 어려운 죄가 아닐수 없다. 확실히 우리는 흔히 전통을 다만 발생시간적차원에서 대상하였기에 미래지향적인 안목에서 전통에 대한 재창조를 기도하는것이 아니라 회고적인 자세로 마치 썩은 감자와 성한 감자를 고르듯이 기성되 형태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에 그만 주저앉고있다. 이런 틀린 자세는 전통연구를 골동품을 만지는것과 같은 취미에 빠지게 하는바 미래를 위하여 과거의 맥박을 찾는것이 아니라 단순한 말타고 꽃구경식의 감상에 머무르게 한다. 우리의 문단을 살펴보면 이는 아주 뚜렷한 흠집으로 나타나고있다. 이른바 민족특성을 나타낸다는것이 현대성을 몰린대로 <<전통적>>인 복장, 풍속, 성격, 기질, 륜리도덕 등만을 민족적인것으로 잘못 확신하면서 조금이라도 옛날의 것과 어긋나는것이면 곧 민족특성에 맞지 않는다고 도장찍는다. 즉 삶의 내용은 새로운 광장에서 변했음에도 여전히 조상세대의 전통을 물려받은 그대로 주장하는것이다. 이것이 의식면에서는 민족의식을 다만 전통의식으로만 생각하게 하는 페단을 초래하였다. 하기에 이른바 당대의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루한 전통을 배격하는것과 민족의식을 비난하는것을 혼동시하고있는것이다. 이 모든것은 그네들이 전통문화의 본질적특성에 대한 몰리해에서 기인된것이다. 전통문화의 본질적특성은 바로 부단한 발전연변성 또는 계승성과 상대적인 응고성 또는 력사적관성이다. 이는 문화는 인류로동의 창조물이라는것과 근원적인 인과관계를 맺고있다. 즉 문화는 인류의 로동성장의 반영물로서 거기엔 어차피 부단히 자기를 확장시키고 완성시켜 최종적으로 자연상태에서 완전히 탈피하려는 인류의 향상심과 함께 또 자기가 마련한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면서 자기가 발딛고 선 자연환경, 사회환경의 현실상황에 미덥게 적응되려는 점착력이 두개의 힘이 되여 모순운동을 형성하고있다. 바로 이와 같은 공제성과 가변성으로 하여 전통문화의 공제계통은 자아공제계통과 자아조절계통으로 이루어진다. 하여 전통문화는 력사의 흐름속에서 결코 무작정 본원적 혹은 발생적인 형태 그대로 후새대에 강요되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광장에서 여로모로 자활능력과 존재적가치를 검험받게 된다. 이때 전통문화는 자아공제계통을 통하여 극력 이미 굳혀온 생활방식, 법률, 도덕규범 등으로 사람들을 단속하는 한편 자아조절계통을 통하여 새로운 력사시대의 요구에 만족을 주기 위하여 내적인 조절과 변질을 꾀한다. 그런데 인류문화가 저급단계에서 고급단계에로 발전함에 따라 특히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세계가 좁아지면서 전 지구촌을 단위로 하는 현대화 문화의 가능성이 날로 현실화됨에 따라 민족의 전통문화는 자기의 자아공제계통을 엄격히 단속하고 약화시키는 한편 자아조절계통을 훨씬 강화함으로써 수용, 융합, 다듬기 등 창조적기능을 활발히 키워 민족의 확대된 시점에서 외래의 선진적문화도 적극 섭취하면서 기성된것에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현대적주소를 찾아주는것이다. 현대적주소를 찾았다는것은 론의할나위조차 없이 그것이 새로운 내용으로 현대사회를 대변하며 삶의 현실에 대응된다는것을 뜻하는것이다. 또 인간의 삶의 흐름을 봐도 그럴수밖에 없다. 인간력사는 결코 이어달리기처럼 한세대 한세대의 계선이 선명한 련계로 되여있는것이 아니라 3대 혹은 4대가 일정한 자연환경과 시대배경하에서 함께 삶을 엮어간다. 하기에 자신은 그 시대에 살지 않았더라도 그 시대를 넘어와서 그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전세대가 혈연의 끈이 되여 결코 그더러 과거로부터 완전히는 독립해서 존재하게 하지 않는것이다. 이렇게 후세대는 어차피 전세대에 의하여 마련된 환경, 즉 전통의 제약속에서 살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삶의 공간이 달라졌음에도 삶의 내용은 여전히 그대로라면 거기에 벌써 동시대로부터의 락후가 찾아드는것이다. 하기에 시대적요청으로부터 후세대는 어차피 전통의 변질을 꾀하게 되며 전세대도 시간적, 공간적 이질감으로부터 결국 전통을 반성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이로부터 전통에 대한 현대적의미매김이 가능하게 된다. 이때 도저히 현대적주소를 찾아줄수 없는것은 자연도태될수밖에 없는것이고 새롭게 창조된것, 외래적인것 등이 그 공간을 보충해주면서 미래에 새로운 환경을 마련한다. 력사는 이렇게 세대세대로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흐른다. 보다싶이 민족의식은 전통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설명되여야 하며 민족의 미래를 도안하는 의식의 총체로 확인되여야 한다. 풀어말하면 민족의식이란것도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생활원리에 대한 발견과 실천을 통하여 사회의 본질적파악에 병행되는 의식의 부단한 창조과정인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현대적 삶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산생되는것이 바로 당대의식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당대의식을 민족의식과 병렬 혹은 대립시키고있기때문에 흔히는 전통에 없거나 때지난것을 민족의식에 없는것으로 잘못 인정하여 그것을 이른바 민족의식의 밖에서 찾고있는것이다. 이처럼 전통을 민족의식으로 확대하여 리해하는것은 기실 민족의식은 조상세대들이 창조하여 물려준것이 전부이고 우리는 그것을 보충, 창조할 가능성이 없다는것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전통도 력사의 흐름에 띄워놓고 살펴보면 결코 한날한시에 창조된것이 아니고 전세대의 전통에 후세대의 창조와 다듬음이 끊임없는 가운데서 가지를 쳐왔다는것을 당연하게 발견할수 있으며 그로부터 우리도 전통에 대한 보충과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것은 물론 력사가 벌써 그만한 한토막을 다름아닌 우리한테 부탁하고있다는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이와같이 민족의식의 내용의 전부가 전통뿐이 아니라고 할 때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에서의 민족의식은 구경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민족의식의 현대성을 빼놓고는 전혀 대답이 완전할리 만무하다. 또 민족의식의 현대성을 말하자면 당대의식을 몰리고는 도저히 설명이 되여지지 않는다. 즉 우리가 발딛고 선 삶의 마당을 참으로 미더웁게 꾸며가자면 반드시 그 삶의 내용을 대변하는 당대의식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쉽게 풀어말한다면 내가 사는데는 에누리없이 내 나름의 사고방식이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조상의것도 내것으로 만들고 남(외래)의것도 내것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 사실 당대의식이란 개념이 언제부터 제기되였느냐 하는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한다면 시대적요구로서의 관념갱신, 당대의식의 정립은 인류문명사를 발전시켜온 원동력임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 어느 민족의 어느 시대의 문화적발전이든지 모두 자기의 원래의것을 반성하고 외래의것을 수용하며 새로운것을 창조하는 이 세가지 경로를 밟지 않은것이 없음을 력사는 증명하고있다. 이는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객관법칙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통도 이런 경로를 거쳐왔음이 틀림없고 거기엔 결코 고유한것만이 아닌 외래적요소가 포함되여 있음도 확연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의 민족적전통으로 확고히 굳혀질수 있었음은 바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어떤 변화나 변질을 겪었든지간에 그것이 하나의 핵, 즉 민족의 주체성에 의해 유기적으로 통일되였기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대의식을 민족의식과 병렬 혹은 대립시킨 나머지 당대의식을 단면적으로 서양의식의 탈바꿈으로 잘못 알고있다. 민족의식의 밖에서만 찾자고 하니 그럴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이런 착오를 진리로 알고있는 사람들은 서양의 철학, 서양의 사상, 서양의 그 무엇에 그대로 당대성의 탈을 씌워가지고는 이를 수용하는것이 곧 당대의식이요, 관념갱신이라고 우겨대고있다. 그들한테서는 당대의식과 서양의식이 동의어로 되고있다. 하여 그들은 당대의식을 수립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표준을 서양의식을 접수하는가 안하는가 하는것으로 삼고있다. 우리 문단을 살펴보아도 작가들이 관념을 갱신했는가, 당대의식을 수립했는가를 진단할 때 흔히는 모더니즘문학을 대표로 하는 서양의것을 접수하는가 안하는가, 지어는 한 작가의 <<의식의 흐름>>소설이 서양의 <<의식의 흐름>>소설파의것과 일맥상통한가 안한가 하는것을 놓고 아니어니하고 시비할 정도의 페단까지 나타나고있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짜라고 비난하고 이른바 서양의것을 접수하지 않고 사실주의문학을 견지하면 보수적이요, 시대의 락오자요 하는 질책까지 들이댄다. 왜서 이처럼 극단적인 주장들이 문단에서 춤을 출수 있는가. 여기엔 얼핏 보기에 그럴만한 리유가 주어지는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 국정으로부터 살펴보면 자연과학의 새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고속도의 세계적절주와 발걸음을 함께 하려면 도저히 서양을 외면할수 없으며 서양에 수용적 자세를 취하지 않을수 없음은 너무나도 자명한 현상태이기때문이다. 서양이 현대적물질문명의 창조와 함께 그 근거로 되는 동등수준의 관념을 세운데 반하여 우리는 물질문명의 근대적 행군과 함께 어느정도로는 그 원인으로 되는 의식의 세기적변질에 모대기고있는것이다. 그만큼 서양의 충격은 세계의 접근에 따르는 충격으로서 결코 일시적인것이 아니라 지속적인것이며 요청적인것이 아니라 강압적인것이며 우연적것이 아니라 필연적인것이다. 허약한 경제를 살찌우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적성숙이 앞서 요청되는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간에 수용이란것은 결코 서양의식을 그대로 당대의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맞물림을 이루지 않는다. 오늘 서양의 발전과 우리의 락후라는 이 특정된 현상태에서 당대의식을 세우려면 틀림없이 문화발전의 세개의 도경-반성, 수용, 창조가운데서 수용이 뚜렷한 요청으로 나서고있을뿐이지 결코 이것으로 민족적인것을 대체할수는 없는것이다. 그것이 어느만큼 중요성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비중을 점하든지간에 에누리없이 우리를 위해 다듬어진다는데 목적성이 있는것이다. 가령 우리가 전통의 내용과 특점을 분석함도 없이 죄다 고루한것으로 도장찍어 내동댕이친다면 또 서양의식에 대해 근본적의미조직에 대한 깊은 리해와 파악도 없이 그 허울도 벗기지 않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특히는 새로운 문화의 형성을 우리 민족의 주체적발전이란 시각에서 파악하고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변화의 물결에 자기의 운명을 내맡기고 밖에서 밀려오는 도전에 스스로의 힘을 분산한다면 우리는 긍정코 얻은것이 잃은것을 보상할수 없는 비극을 표현하게 될것이다. 맹목적인 수용태세 자체가 벌써 문화의 창조를 저애한다. 맹목적인 수용은 옮겨옴이지 창조가 아닌것이다. 자기의 몸에 맞게 치장할줄 모르고 남의 흉내에만 바쁜 인간, 그와같이 정신적기틀을 뿌리뽑힌 사람의 삶의 비극이 너무나도 처참하다면 민족성을 상실한 민족의 운명은 또 어떨가?!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지한다고 한다. 특히 변혁의 기운이 세차게 감도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명석한 두뇌를 가져야 한다. 인젠 근본적생각을 정리하고 정처없는 방황을 결산할 때다. 적어도 우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높이 웨치듯이 문화의 발전과 창조에서의 민족의 주체성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오늘에 들어와서도 세계사라는것이 틀림없이 각기 다른 민족들에 의해 그 페지를 적어가고있다는것을 념두에 두고보면 민족문화의 문제는 바로 세계사의 문제외의 다른것이 아니기때문이다. 비록 세계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축소되고 민족들지간의 동질성이 뚜렷이 성장되고 지어는 융합의 대문에 들어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매개 민족의 필연적인 성장의 결과로 되자면 틀림없이 매개 민족의 주체적인 노력을 전제로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전통의 계승, 발전문제는 여전히 우리가 지향하고있는 현대화작업의 구심점 내지 정신적기반임이 틀림없는것이다. 그런데 계승은 반성을 전제로 할 때 바람직한것이고 발전은 창조를 외면할 때 앞길이 막힌다. 이때 반성과 창조의 요청을 받는것이 곧 수용이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 떳떳이 서서 부단히 확대재생산되는 문화의 원동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흐트림없는 자세로 자기식의 길을 개척하여야 한다. 오직 우리의 문화적특질을 현대적의미에서 재확인하고 부단히 새로운 시대의 감각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에 외래의것을 리해, 평가하고 수용함으로써만 비로소 민족의 밝은 미래가 미덥게 기탁되는것이다.
42    인간의 본능과 인간성 댓글:  조회:1592  추천:0  2009-05-16
-단편소설 <<새벽새는 울고있다>>에서 본다 <<새벽새는 울고있다>>. 그것은 이 새벽에 목을 매달고 지옥의 대문안으로 성큼 들어가버린 궁재씨를 슬퍼하여 우는것일가. 물론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죽음이란것이 언제나 소름이 끼치는것이고 어두운 색갈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다니엘 띄포가 <<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로 되던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파멸의 원인으로 될수 있다>>고 했듯이 죽음이란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과 불행일수 있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과 해탈일수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궁재씨의 죽음은 어떤 색갈의 것일가. 그것을 알기 위해 궁재씨의 생활종적을 추적해본다. 우선 궁재씨는 련속 두 안해를 잃은 외토리이다. 사랑하는 짝을 잃는것이 죽음 다음으로 가는 고통이라고 하는데 특히 남성에게 있어서는 사랑을 잃는것이 생명을 동시에 쫓아내는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하물며 궁재씨는 련속 두 안해를 잃었음에랴. 어찌보면 이것이 가난과 함께 궁재씨를 타락의 심연에 떠밀어 넣은 원인일수 있는것이다. 중년상처에 대들보가 휜다고 하지 않는가! 밤늦게 돌아가도 <<몸열기로 이불속을 따뜻이 덥혀놓고 기다려줄 녀편녀도 없는>> 너무나 차가운 기운에 묻혀있는 오두막집에 꽉 들어찬것은 가난이란 재산뿐이여서 <<내집이구나 하는 따뜻함과 위안>>이란 도저히 가질수가 없다. 녀자의 손길이 닿지 못한 집에 생기가 돌수 없었고 모든 생활이 계산적일수 없었다. 다음 궁재씨는 너무도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두 안해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숱해 걸머진 빚때문에 너무 주눅이 들고 가난구덩이에 빠진>>것이다. 옷은 입은지 몇십년이나 되는지 <<제법 이를 기르기가 맞춤하>>였고 해마다 쌀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치솔질도 소금물로 하는 형편이다. 남들은 화학비료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그는 남의 흉내를 내기도 힘든 처지였고 자기에게 소없고 수레없어 남의걸 삯내여 쓰는 형편이였다. 큰아들은 그 또래에서 혼자 <<왕바신>>을 신는 신세였고 고중진학시험에서 성적은 괜찮았으나 뒤를 대줄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다. 외손자마저 에미한테 업혀 외할아버지집에 설쇠러 왔다가 급성페염에 걸렸으나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고만다. 모든것이 가난때문이다. 실로 가난이 죄였다. 게다가 그한테는 서로 위안하고 의지할 안해마저 없다. 궁재씨는 이런 가난과 고통과 불행에서 해탈되고 잊어버리는 처방을 술에서 찾으려 했다. 코를 찌르는 싱긋한 술냄새에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며 괴로운 세월을 죽였다. 인젠 <<밥 안먹고는 살아도 술 안먹고는 못살>>지경이다. 그만큼 그는 일년내내 외상술을 마시지만 그 외상술값만은 달마다 어김없이 물군하는것이였다. 하루에 적어서 한근, 한달이면 30원의 돈이였다. 쌀돈에 망하는걸 모르는바 아니지만 오히려 인젠 술없인 못사는 형편이 되고만것이다. 궁재씨가 그 지루한 세월을 죽여주는 다른 한 처방은 화투놀이다. 일년에 할수 없어 짓는 농사외엔 하는 일 없이 화투판에 붙박힌다. 점심을 넘겨도 배고픈줄 모를 정도로 화투귀신이 돼버렸다. 물론 꿈속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명월이년>>과 즐기는 장면도 구을려본다. 정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궁재씨의 비극은 이로써 시작된다. 최종적으로 술과 놀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멋없이 자기의 일생을 무덤을 파는 과정으로 만드는 자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게으름병이 생기게 되기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환경을 이길수 없는 운명이 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운명이란것이 과연 있는것이라고 해도 한 인간의 운명의 극치는 의지와 리성의 노력에 의해 밝혀진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리성은 이른바 어쩔수 없다는 역경도 물리치는 수가 있는데 운명이란 전혀 돌려세울수 없는것이기때문이다. 객관적 필연성만 탓하면서 불행속에서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대신 자기 육체를 멋없이 소비하고 자기 정신을 의의없이 마취시켜버리는것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숙명론이 아닐수 없다. 때론 큰 재난이 사나운 짐승처럼 물어뜯으려고 무섭게 달려들어도 삶의 의욕으로 완강하게 맞선다면 혹 기가 죽어 달아나버리는 수도 있지만 때론 타락과 게으름으로 하여 사소한 일이 어쩔수 없는 큰 재난을 가져올수도 있는것이다. 이런 도리가 어리무던한 궁재씨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고차원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문제는 작품에서 궁재씨의 비극적 결말이 두 세대의 대항적 충돌로써 초래되였다는데서 그런대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시대적 인식을 위한 현실적 비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궁재씨의 경우 삶의 의의보다는 삶의 의미, 즉 인간본능으로서의 생존욕구가 더 강하게 내비친다면 영호나 영철의 경우에는 삶의 의미보다는 삶의 의의, 즉 인간성으로서의 가치추구가 더 짙게 내비치는것이기때문이다. <<자기생활에서 장래와 현재에 아무런 의의를 찾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인간성을 상실한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리기영) 궁재씨의 타락은 그만의 파멸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후세대까지를 재난에 빠뜨릴수 있는것이다. 라태는 원래 7대악의 하나로서 자기의 일생뿐만아니라 후대까지 재난에 빠뜨리게 되는 생활의 가장 큰 죄악이다. 그는 노력과 분발, 지어는 발악적으로 가난을 털어버리려고 한것이 아니라 새 빚으로 낡은 빚을 메꾸어버리는것으로 세월을 멋없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둘째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가고 큰아들은 <<왕바신>>신세를 벗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술값만 떨구지 않는다. 그래서 두 아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와 대항해 나섰다. 한창 젊음이 파랗게 자라나는 나이인데다 문명의 세례를 보다 생활적으로 접수한 그들이 도저히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아버지의 삶을 본뜰수는 없는것이였다. 그런데 아직 학생이고 공부에 포부를 기탁하고있는 둘째는 단연히 집을 뛰쳐나가지만 이미 농촌일에 몸을 잠근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제나름의 방식으로 대항해나선다. 바로 자기 삼촌한테 억지당한적 있고 또 <<본가집에 왔다가 아이를 죽인 죄로 시집에서 쫓기워 와있는>> 이붓 동갑누이를 억지 강요하여 데리고 살려하는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창졸하게 사회관념도덕을 전달하는데 그치거나 극단적인 흑백론리로 영호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재단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영호의 행위는 결코 그 행위자체에 의미가 매겨지는것이 아니라 바로 강한 삶의 욕구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그 시점의 상태를 확대시키고있다는데 자리매김을 주고있기때문이다. 일찍 가난은 영호를 실련의 <<선수권소유자>>로 되게 하였다. <<왕바신 신세>>, <<시계 한번 못차보구...>>. 워낙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란것이 다만 정신적인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외형적인것 이를테면 먹고입는것이나 기타의 물질적인 것과도 관계된다. 바로 영호의 자존심은 가난때문에 여지없이 꺾이웠던것이였다. 그 많은 꿈이 좌절되고 수정되여버리는 사이에 영호도 관념도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찢어지는 마음의 쪼각들을 인내와 침묵으로 주어맞추면서 도덕의 가죽으로 만든 방패로 자기의 들뛰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남과 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의 욕망과 최저한의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마저 실현할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발악적인 비명을 지르고야 만것이다. 단순히 가난때문만이 아니다. 아들한테 신 한컬레, 아니 치솔약 한통도 안사주면서 일년에 삼백륙십여원이란 술값만은 눅거리 쌀돈을 가져와서라도 물어대는 아버지 궁재씨의 타락때문이였다. 정에도 한도가 있는것이고 례에도 한도가 있는것이다. 현실성을 배제한 마음만의 정이나 례는 가식밖에 남을것이 없다. 영호와 궁재씨의 관계는 인젠 다만 가부장제적 봉건례의도덕의 사슬에 매여 유지되고있을뿐 전혀 화해의 접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마저 궁재씨가 자기의 인생은 마비되여가지고도 도덕적방패를 들고 그를 죽음에로 협박(피를 보면서도 부삽을 들고 그한테 달려든다)할 때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되였다. 이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대로 하지 다른건 전혀 돌보지 않는다. <<니 능력있어 다른 놈들은 다 련애하는데 나는 못한다. 니는 <보토리>질해라. 나는 안한다. 내하구 살자는 녀자가 없으니까 봉녀하구 잔다. 어째? 니덕에 우리 둘다 거지다. 거지끼리 사는데 어째?...>> 이것이 영호가 궁재씨를 구박하면서 악에 받쳐 웨쳐댄 말이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도 자기의 리익에 복종시킨다. 어찌보면 실련의 <<선수권소유자>>인 영호와 한번 당한적 있고 또 시집에서 쫓기워 온 봉녀가 결합되는것이 훨씬 계산적이고 경제적이며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일의 해결에서 언제나 그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자가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일것은 당연한 리치이기때문이다. 다리부러진 노루 한굴에 모인다고나 할지, 혹은 영호의 말대로 <<거지끼리 산다>>고 할지. 하여간 둘다 자기의 처지에 맞는다는 리해를 가질수 있는 경우인것이다. 사실 궁재씨의 경우에도 그처럼 길길이 뛴것이 자기 동생이 조카딸을 강간하던 때와는 다른 뜻에서일것이다. 즉 그것은 강간으로 인정되여서보다 어쨌든 이붓 오랍누이로 한집에서 함께 자란 사이라는데서 충격받는 전통적인 륜리관념의 관성때문이였을것이다. 하기에 영호가 결코 일시적인 본능욕구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의 욕구내지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까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의 힘에 눌려 자기의 도덕적 방패를 던져버리고 만것이다. 그는 아들의 행위를 리해하고 량해하고있는것이다. 그는 자기의 허무한 삶에 대한 뼈저린 참회와 함께 그들 둘의 장래를 기도한다. 비록 그의 생명으로 보면 그의 참회는 때늦은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느때나 참회가 있는 죽음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홀대했던 삶의 참뜻이라던가 철저한 인생반성을 흔히는 그런 죽음의 마당에서 깨닫는수가 있기때문이다. 잃은 물건은 되찾을수 있어도 잃은 시간은 되돌아올수 없는바 이미 허무한 세월속에서 인생의 진이 다 빠지고 삶의 터전을 놓쳐버린 궁재씨는 이 시각 죽음의 수단으로써 자식들한테 속죄하는 충실감을 맛보고있는것이다. 영호의 지나친 행위에 도덕의 말매를 안겨야 할지는 모르나 그러나 궁재씨 자신으로 말하면 문명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던 릉욕의 한 세대를 조용히 잠재우는 비장한 행위를 한것인지도 모른다. 아, 그래서 <<새벽새는 울고있다>>!
41    변질된 밥사발의 질서 댓글:  조회:1583  추천:0  2009-05-16
--<<혼사날의 별곡>>에서 본다 원래 가정에서의 밥사발의 질서는 너무나 단순하고도 엄격하였다. 할아버지까지 함께 있다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 안해, 아이 하는 순서로 배렬하면 되는것이다. 그것은 그때는 밥사발의 질서를 세우는데 오직 혈연적인 세대관계란 조건 하나밖에 없었기때문이다. 그만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 순서를 알수 있는 가장 <<천진>>한 륜리적 질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사회에서뿐만아니라 가정에서까지도 그 밥사발의 질서가 깨여지고 새로이 복잡하고 미묘하며 황당하기 짝없는 밥사발의 질서가 원래의 자리순서를 망그러뜨리고 인간가치를 변질시키고있다. 그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날로 팽창되고있는 상품시대와 함께 밥사발의 질서를 제약하는 조건이 상업인간이란 새로운 개념의 뚜렷한 확립과 함께 변질되고있는것이다. 상업인간을 우리 나름대로 통속하게 인생이나 인간관계를 상업화하는 인간이라고 리해한다면 그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권력과 돈일것이다. 권력의 위력이란 대단한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천만사람을 지배할수 있는 힘이다. 그만큼 그것은 사회의 허위와 아첨을 낳는다. 푸짐한 술상에서 권력의 대소와는 상관없이 륜리적인 년령순서대로 술을 부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조차 도리여 얼마나 권력의 중압에 지긋하게 눌리웠으면 그렇게 평범한 행동을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했겠는가 하는 련민이 앞서는것도 이때문일것이다. 혼사날에 촌뜨기 친가편보다 뜨르르한 시내간부인 외가편을 상빈으로 보내는것이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것을 그 집의 가풍이 더럽다고만 보기에는 이 사회가 벌써 그만큼 비뚤어져있다. 돈의 위력도 대단하다. 비렁뱅이가 가난뱅이를 구제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 사회에는 억만이 아니라 단 몇장의 지페때문에 자그마한 꿈마저 산산히 깨여지고 사회적 인간가치가 여지없이 떨어져버리는 수가 푸술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모시는 전제조건을 신체가 튼튼하고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금전주의로 내세우는 경우도 억이 막히는대로 현실에서 식은죽 먹듯 찾아볼수 있다. 그러고보면 삼촌되는 사나이가 조카딸의 혼사날에마저 가문의 좌상대우는 커녕 상빈으로도 가지 못하는 홀대를 받는것이 그 가문의 가풍탓이라기에 앞서 그 자신이 가난한 탓이라고 하는것이 퍽 당연해보인다. 가치표준이 변질된 <<진실>>이다. 그런데 이제 <<정채>>롭고 볼만한것이 밥사발의 륜리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가치표준을 변질시키는 쌍둥이-권력과 돈의 맞겨룸이다. 두 힘의 맞겨룸, 그것은 마치 범과 사자의 대결처럼 생사판가리이다. 그러면 구경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일가? 얼핏보면 <<돈>>이 승자이다. 가난때문에 좌상대우도 못받고 그래서 분김에 잔치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던 사나이가 조카의 잔치에 석탄 한 자동차와 고급세탁기를 잔치<<부조>>로 내치자 온집의 사람들은 혼이 다 날아날 지경으로 경탄을 금치못했고 <<대통령>>이란 최고권력도 <<손쉽게>> 획득한다. 과연 돈이 날개다. 그 돈이 <<대통령>>이란 권력까지 사버렸으니 그가 승자임은 당연한것이다. 하긴 어떤 물건이나 다 살수 있는것이 돈이고 상급에겐 비굴한 아첨을 보내고 하급에겐 상대방의 인격이나 재능보다는 안면과 지갑의 크기에 더 관심하는 즉 위세나 풍모가 더 큰 권력이나 돈앞에서 기운을 잃고마는것이 권력이고 보면 그 승패는 벌써 결정된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만 않다. 그들은 둘다 패자였다. 남몰래 슬그머니 잔치집에서 사라져버린 두 사나이-권력의 덕택으로 외가편이지만 언제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여 최혜를 받던 자기가 그 권력이 돈앞에서 기운을 잃어 한낱 <<검둥이>>의 홀대까지 받게 되였음을 통탄하며 뻐스에 오르는 <<공회주석>>, 돈으로 마침내는 권세부리던 자를 내리누르고 <<대통령>>의 보좌에까지 올라앉았으나 돌아갈 차비마저 없어 걸어가면서 허무와 비통에 눈물뿌리는 <<사나이>>, 그들은 왜 패자였을가? 그것은 영원히 령혼하고는 같이 살아있을 인간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변질된 가치, 풀어말하면 벽의 그림자처럼 있다가는 없고 하는 권력이나 돈과 같은 외부적 힘에 의해 자기를 실현하려 했기때문이다. 일단 그 외부적 힘이 눈석임같이 녹아버리자 기탁점을 잃은 그들의 정신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만것이다. 실로 불쌍하고 의미짙은 배우들이다. 하긴 우리 모두가 사회란 무대우에 나선 배우들인것 같다. 그래선지 그들한테서 어쩌면 자기의 그림자도 찾아본듯싶어 가슴이 알짝지근해난다. 허욕을 허위로 웃고 허위로 우는 배우, 아, 그것이 진정 인간의 참모습은 아닐텐데...
40    문학정신과 문화반성 댓글:  조회:1646  추천:0  2009-05-16
1. 력사적착오, 문화적반성-<<<볼쉐위크>의 이미지>> 문학이 인간경험을 다룬다고 하는데 인간경험에서 력사적 경험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삶의 현장과 멀어진 과거형으로서 일종 전통성 내지 습관성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런 전통성 내지 습관성에 힘입어 과거의 현재적 존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것이며 그만큼 력사의 질곡조차도 아직 력사와 현재가 반성적 의미에서의 구조적 단절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경우 현실의 련쇄반응을 통해 새로운 력사의 질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것이다. 력사의 체험적 아픔을 문명의 발전적 차원에서 재인식하는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정세봉은 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장백산>> 1991년 2호)에서 력사의 한 세대를 오늘의 의식의 현장에 옮겨놓고 한 참다운 인간이 어떻게 외곡된 력사에 조종되여 자아가 변형되고 지어는 거세되여버렸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체험적 인생의 재조명과 반성을 꾀하고 있으며 력사의 질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묻고있다. 주인공 윤태철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하고자 몸부림쳤던 그 시대 인간들의 상징으로 되고있을뿐더러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려고 무작정한 순응주의적반응을 보인 과거형 인간의 상징으로도 되고있다. 일상성의 생활조차 정치적 오염으로 하여 숨막혔던 그 당시의 력사적 상처 내지 비극은 우선 개인적 차실이기전에 벌써 사회적, 집단적 차실이였다. 다시말하면 차실자체가 객관적으로 불가항력적일 때 리성은 오히려 한 개인만이 아닌 그 시대자체가 상실하고 있다는 비평이 성립되는것이다. 적대적 투쟁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나 아직 적대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신생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진영의 겹겹한 포위속에 있다는 현실적 의식과 판단은 우리 당으로 하여금 계급투쟁확대화를 범하게 하였다. 타도된 적대세력이 저들의 세계적 세력에 힘입어 잃어버린 <<천당>>을 되찾으려 한다는것은 리치에 맞는 판단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판단은 쉽게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는 과잉판단을 인출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사회의 련좌법이 꺼리낌없이 살판쳐 일상성의 생활조차 인정이 메마르고 지어는 피로 얼룩지고말았다. 이에 순응적으로 착취와 피착취, 압박과 피압박, 통치와 피통치의 체험적 인간인 윤태철이가 인식적, 행위적으로 이런 계급투쟁확대화를 긍정, 채납할수 있고 인정에 매이지 않고 기치선명하게 투쟁의 선두에 설 수 있으며 지어는 생명이 다 하도록 이데올로기에 충성, 복종할 수 있는 것은 그런대로 그의 인생의 목적에 의하여 당위성까지를 확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윤태철의 인생의 목적에 대한 정리를 잘 한다면 쉽게 그의 비극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것이다. 첫째, 윤태철은 지주의 압박과 착취를 받은 계급대항의 사회에서 생활하였다. 그만큼 그가 혁명에 참가한 초기의 목적은 바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받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였다. 그것은 계급적 대항, 즉 직접 지주계급과 맞겨룸하는 혁명이였던만큼 지주계급은 그의 직접적인 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는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세월에 지주, 부농분자와 가장 철저하게 맞서서 <<독재>>를 진행할 수 있었을뿐더러 지어는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고 그들의 자식과도 철저히 <<계급계선>>을 나누어야 철저한 <<혁명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어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력사에 투철한 현실인식은 천륜의 문제에조차 철저한 <<혁명성>>을 강요함으로써 아들 윤준호와 순정이의 애정비극을 초래하는 것이다. 천륜의 문제는 분명 정치이전의 문제, 사상이전의 문제이다. 더우기 윤준호와 순정이 사이에는 윤태철과 허수빈 사이와 같은 그런 직접적인, 체험적인 계급갈등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한고향에서 오손도손 함께 자란 향토적 정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극단으로 대결했던 아버지세대에 비해 자식의 세대는 이미 그 대결의식이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는 착취와 피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계급적 존재와 갈등이 객관적으로 해제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사이에는 사랑까지도 스스럼없이 묵인 내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윤태철한테는 접수될 수가 없었다. 반동의 자식과 혁명자의 자식이 결합된다는 것은 철저한 <<혁명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의 본적지를 념두에 두면 이것은 그 당위성이 승인되는 력사적 인식이다. 어찌보면 부자와 빈자라는 력사적 문벌의식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시대에 정치적 계급의식으로 자리바꿈한 것이리라. 여기에서 윤태철은 기성된 력사인식에 집착하는 과거형인간이라면 윤준호는 싹트는 현실의식에 눈뜨는 미래형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준호를 구태여 현재형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미래형인간이라고 하게 되는 것은 그의 반역정신이 과연 론리사유적인 현실의식에 립각한 것이 아니라 기성된 력사세대와 체험론적으로 력사적 인식차이를 갖고있는 세대의 현실감각적인 감정발로에 다름아니기때문이다. 이것이 오히려 시대적 합리성을 보여주는 인물형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실인식은 체험론적으로 력사적 인식차이를 갖고 있는 두세대사이에서 틈서리가 생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론리체계적인 충돌로 인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일상성에서 현실감각적으로 생성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윤준호의 형상은 새로운 력사적 인식을 가진 인간의 생성을 암시하고 있을따름이다. 그만큼 사회는 아직 완숙한 현재형인간을 배출하기에는 시기상조한 것이였다. 둘째, 윤태철의 소박한 혁명성과 력사적 인식과 함께 그의 락후한 농민출신의 신분적 제한성이 인과적으로 금그어준 현실파악과 문화적 자아실현의 한계성을 홀시할 수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그의 삶의 인격을 정립시켜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으로 될 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은 그를 경험-유전형의 인간으로 키워왔기에 론리-사유형의 인간과는 너무나 아름찬 거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필연코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기 자세에 대한 조절 내지 규범에서 모호성과 전통성 및 의뢰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이런 비자각적인 문화바탕으로서는 우리 당의 사상리론체계에 대해 령혼적으로 올바르게 해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에 그는 다만 우리 당은 인민을 이끌어 통치계급을 뒤엎고 인민을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한 위대한 당이라는 극히 소박하고 거의 상식에 가까운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상급의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는 심리적 자세를 갖춘것이다. 하기에 사실상 그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그 자신의 자치적 노력보다는 관념적인 것을 모방하고 색맹이 되도록 정치에 훈련된 의뢰적인 것이였으며 그의 인생적 자세조차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다만 시키니 한다는 심리로 삶을 조직한 순응주의적인 것이였다. 이처럼 그의 력사적인 현실참여가 표면적으로는 희극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벌써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이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에도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의 구축을 위해 혁명한다는 균형잃은 자세가 허영 내지 맹종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허영과 맹종이 개인적인 충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시대의 력사적 면모의 한 양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데 사회력사적 문제성은 심각히 제기되는 것이다. 우리는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린 벽두에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다시 자기의 생활능력을 실험코자 애쓰는 윤태철의 창백한 모지름에서 사회와 인간의 균형잃은 갈등을 재확인하게 된다. 비록 시대가 어느정도로 력사의 한 물결에 휩쓸렸던 개인들에게 심각한 사고와 자아발견적인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음에도 윤태철은 우리 당이 자기의 오유를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리여 자기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산당하고 만다. 다만 <<<볼쉐위크>적 오기>>로써 <<자신에 대한 력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안으리라 했고 아들놈 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렇게 가냘프던 정신조차 허물어져버린 윤태철에게 남은 것은 행위 외엔 아무것도 없다. 행위자 목적이요, 행위자 동기요, 행위자 인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다만 <<흘러간 력사에 대한 울분>>과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쉐위크>적 오기>>때문에 허수빈네를 도와주는 것을 <<삶의 내용>>으로까지 여겨 <<그가 새롭게 걸아나갈 인생의 길인것처럼>> 느끼는 것이였다. 인젠 자기 몸을 주체하기도 바쁜 로인이면서도 그 육체를 허물어서라도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기어코 훌륭한 배역을 담당해보려는 거기에 정신적 공허와 창백함이 드러나고 있으며 자아희생적으로 자기의 약점을 표현하는 비극성이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생리적 년령은 이미 인생의 황혼빛을 띄고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정신적 공간때문에 쇠약한 육체만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기에 그의 인과적인 희생이 확정되여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와 사회구성원간의 균형잃은 갈등이라는 시점에서 소설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으며 또 이런 주제적 포착은 문화반성적 의미에서 시사해주는바가 많은 것이다. 2. 우물안의 개구리, 닫힌 공간-<<새벽새는 울고있다>>, <<어제도 오늘, 오늘도 래일>> 오직 주어진 울타리안에서 자급자족에 만족하거나 지어는 초근목피로 육체적인 생명만을 연장하는 원시적인 삶에 불편함이 없이 안주할 때 가엾게나마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이 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옹근 지구덩이가 인젠 인류에게 주어진 울타리로, 지구촌으로 좁혀진에 따라 그런 닫힌 공간과 원시적인 삶은 우승렬패의 치명적인 충격에 존재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였으며 상승적 경쟁력이 외면된 원시적인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승화를 저애하는 게으름과 무지에 동조하게 되였다. 조광명의 소설 <<새벽새는 울고있다>>(<<문학과 예술>> 1991년 3호) 에서의 궁재씨의 죽음은 바로 상술한 바와 같은 의미확대를 훌륭히 형상하였다는데서 문화적 반성의 무게를 크게 한다. 궁재씨는 가난과 고통과 불행에 너무도 어색해진 인간이다. 그런데 그는 노력과 분발 아니면 발악적으로라도 가난을 털어버리려고 한것이 아니라 새빚으로 낡은 빚을 메꾸어버리면서 술과 화투로 세월을 멋없이 죽여준다. 둘째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하고 큰아들은 아직 <<왕바신>>신세도 벗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술값만은 떨구지 않는다. 한창 젊음이 파랗게 자라는 나이인데다가 문명의 세례를 생활적으로 접수한 그들이 도저히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아버지의 중독된 삶을 본뜰수는 없는것이였다. 둘째는 집을 뛰쳐나가고 큰아들 영호는 마침내 아버지와 대항해 나선다. 일찍 가난은 영호를 실련의 <<선수권소유자>>로 되게 하였다. <<왕바신신세>> <<시계한번 못차보구...>>, 워낙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란것이 다만 정신적인것만이 아니다. 바로 영호의 자존심은 가난때문에 여지없이 꺾이웠던것이였다. 단순히 가난때문만이 아니다. 아들한테 신 한컬레, 아니 치솔약 한통도 안사주면서 일년에 360여원이란 술값만은 눅거리 쌀돈을 가져와서라도 물어대는 아버지 궁재씨의 타락때문이였다. 그 많은 꿈이 좌절되고 수정되여버리는 사이에 영호도 관념도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찢어진 마음의 쪼각들을 인내와 침묵으로 주어맞추면서 도덕의 방패로 자기의 들뛰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남과 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의 욕망과 최저한의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마저 실현할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비명을 지르고야 만것이다. 정에도 한이 있는것이고 례에도 한이 있는것이다. 현실성을 배제한 마음만의 저이나 례는 가식밖에 남을것이 없다. 이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대로 할뿐이다. 바로 자기 삼촌한테 억지당한적 있고 또 <<본가집에 왔다가 아이를 죽인죄로 시집에서 쫓기워와 있는>> 죽은 계모의 딸을 억지강요하여 데리고 살려하는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궁재씨가 자기의 인생은 마비되여가지고도 도덕적 방패를 들어 막으려하고 지어는 죽음에로 협박할 때 화해의 접점이란 전혀 존재할수 없게 된다. <<니 능력있어 다른 놈들은 다 련애하는데 나는 못한다. 니는 <보토리>질해라. 나는 않한다. 내하구 살자는 녀자가 없으니까 봉녀하고 잔다. 어째? 니덕에 우리 둘다 거지다. 거지끼리 사는데 에째?...>> 이것이 영호가 궁재씨를 구박하면서 악에 받쳐 외쳐댄 말이다. 인간은 동물적본능도 자기의 리익에 복종시킨다. 어찌보면 실련의 <<선구권소유자>>인 연호가 한번 당한적이 이써고 또 시집에서 쫓겨난 봉녀와 결합하는 것이 훨씬 계산적이고 경재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행각했음직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창졸하게 사회관념도덕을 전달하는데 그치거나 극단적인 흑백론리로 영호의 행위만 뽑아 도덕적재단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영호의 행위는 결코 그 행위자체에 의미가 매겨지는것이 아니라 바로 강한 삶의 욕구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그 지점의 상태를 확대시키고있다는데 자리매김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행위의 의식심층에는 억압당한 삶에의 갈구가 눈물져있다. 성은 륜리이고 더덕이기 전에 생명이라는 원색적인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는것이아. 하기에 궁재씨는 영호가 결코 일시적인 본능욕구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의 욕구내지 종족보존의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까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눌려 자기의 도덕적방패를 던져버리고만것이다. 그는 자기의 허무한 삶에 대한 ㅃ저린 참회와 함깨 그들 둘의 장래를 기도한다. 찌들어버린 육체, 창백한 령혼, 술에 절은 인생, 이 모든것이 그한테 필연적인 죽음의 가능서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의 현장에서 부활의 의미를 읽에 된다. 말하자면 종족보존의 체계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연장이므로 아버지의 무의미한 소비인생의 종말은 곧 아들의 강렬한 창조적인생의 모지름을 통해 새롭게 바람직하게 부활하리란는것을 묵시하는것이다. 이처럼 그의 죽음이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력사적교체라는 의미매김에 감동된다. 궁재씨는 문명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던 릉욕의 인생을 조용히 잠재우는 비장한 행위를 한것이다. 그이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의 좌표와 현주소가 확인되고있다. 장혜영의 소설 <<어제도 오늘, 오늘도 래일>>(<<흑룡강신문>>1992년 4월 25일)은 황페하지 않은 농촌에서 황페화의 길을 걷는 농민들의 현실을 해부하고있다. 민수는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미래가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소비적인생에 지치고 변질해가고있다. 도거리농사가 농민들에게 아름차게 한가한 시간을 가져다주었지만 민수랑한테는 그 한가한 시간을 죽여주는 일이 훨씬 지겨운것이였다. 농사지어 밥먹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였고 1년 365일에서 절반도 넘는 시간을 타산없고 할일없어 쩔쩔매였다. 너무도 단순하고 쉽게 사는 인생이였다. 기실 쉽게 산다는것이 허무한 삶을 의미한것이다. 자기를 승화시키고 참된 인생을 고양시키는 정신적독방이 없고 따라서 조금의 문화적투자도 없이 단지 생명연장의 생물과정내지 자연과정으로만 머물러있을 때 얼마만큼이나 인간성의 참된 모습을 찾아볼수 있겠는가. 더우기 현사회는 그 문명발전의 주기성으로 하여 개체의 사회화를 일생의 과업으로 제기하고있으므로 우리는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문화적인 신변정리에 게으를수 없게 되였다. 생산성문화의 퇴화내지 답고, 생활문화의 고갈내지 빈혈증으로 질병을 앓고있는 민수의 형상은 교체시대의 시자로에서 갈팡질팡하는 사회구성원의 앓는 모습이기도 하다는것으로 주제적확장은 가능한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예술적측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새벽새는 울고있다>>가 비극적인 모순갈등으로 주제를 날카롭게 날세우고있는데 반하여 이 소설은 아무런 자극적인 사건이나 비극적인 결말도 없이 퍽 시시껄렁해보일 정도의 일상성의 생활로 꾸며지고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 일상성의 생활현장에서조차 문화반성적의미를 조명해낼수 있다는 작가적안목에 힘입어 그 심미적가치가 그런대로 무겁다. 이처럼 예술성보다 생활현장감을 강조하는 형식의 거칠음에는 모름지기 생활에 더 살바투 접근하려는 의도적추구가 안받침되여있을것이다. 그만큼 반성문학은 인간을 그린다는 인식보다는 인간을 해보한다는 휴머니즘에 더 집착하는것 같기도 하다. 3. 산업시대의 뿌리뽑힌 인간들-<<빈곤>> 격변기에 있어서 문제의식을 사회의 기본적인 사유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사회의 돌변적인 변화, 발전은 기성인들의 체험론적인 경혐내지 전통적인 사유형식의 준확성이나 지어는 존재적가치를 여지없이 충격하였다. 매기 사회성원마다가 전통적인 기성인식과 존재적인 현실인식, 그리고 리상적인 미래인식 사이에서 선택의 아픔에 모지름쓰며 신음하고있다. 긺일의 소설 <<빈곤>>(<<장백산>> 1992년 2호)은 바로 이처럼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사회로 과도하는 격변기에 기성가치규준의 변질과 함께 뿌리뽑힌 인간들이 허물어지든가 변질해가는 비평적인 형상을 통하여 변종하는 사회에서의 인간상실의식을 꼬집어 일깨우고있다. 돈있는자의 정신적빈곤, 글읽는자의 물질적빈곤, 극덧이 사회객관내지 일반으로 설명되여야 할 경우 치원이나 김일의 형상은 자기의 <<비극적운명>>으로 그런 사회적빈곤을 폭로하고 호소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냘프고 자살적인것이다. 틀림없이 비극이란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한 미의 훼손이다. 그런데 치원이의 경우 그는 그런 불가항력적힘의 강타를 받기에 앞서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빈곤으로 하여 스스로 정신질환을 앓고만다. <<상점에서 나와 가게방뒤벽에 대고 오줌을 쏴쐬 내갈기>>고 <<한달 로임을 봉투채 밀어넣는>> 행위는 결코 <<금전만능의 인격론>>이란 현대문명과는 전혀 무관환 미개병이다. 사실 그의 모대김과 신음소리는 사회적빈곤에 해한 대항적인 비명인것이 아니라 물가의 모래탑처럼 너무너무 쉽게 씻겨져내리는 그 자신의 허탈한 령혼을 두고 부르는 영탄곡이다. 김일의 경우 얼핏보면 그는 글읽는자로서 물질적빈곤에 모대기고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준 단색테레비죤까지 팔아먹고>> <<그 돈으로 사흘마작>>을 논 김일, <<그제 하두 심심하니 친구들끼리 좀 놀구 또 뚜드려먹구 소일하>>는 김일의 형상은 물지적빈곤내지 사회적빈곤을 호소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정신이 먼저 시들어버린것이다. 그러고보면 돈있는자 치원이의 정신적빈곤, 글읽는자 김일의 물질적빈곤이란것은 일종의 가면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두 정신질환자가 같지 않은 가면을 쓰고 같은 극을 표현한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것이다. 물론 그들이 고통내지 넉두리의 근원은 그런대로 사회에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사회학적 진단을 하면 경제발전기에 과연 여러가지 페단과 부식작용이 훨씬 맹렬한것이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의 발병률이 많은것과 같은 도리일것이다. 특히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사회로 넘어들어오면서 사회에는 인격론에에서조차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절대적인 긍정을 보내는 현대문명병이 류행성감기처럼 성행하고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매개 사람들의 신체소질과 항역능력을 간과할수 없다. 특히 특정한 환경이 아니라 일반적인 환경에서 누구나 다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고험을 통해 승패의 두 부류가 있을 때 우리의 가치판단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것인가. 사회적빈곤 즉 돈있는자의 정신적빈곤과 글읽는자의 물질적빈곤은 류행성감기균으로서 수시로 사람들을 질병에로 몰아가고있다. 이는 객간적현실이다. 그다음 제기되는것이 개체의 <<철학적빈곤>>이다. <<철학적빈곤자>>는 오뉴월 고뿔도 쉽게 걸리고마는것이다.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겨나갈수 있는 충격앞에서 그 자체의 취약성때문에 허리꺾고말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얼마만큼의 비극성을 눈물머금고 읽을 수 있을까. 자기의 라태, 무지, 무능을 덮어놓고 일방적으로 억울한체, 슬픈체, 고독한체, 지어는 인류의 위기감같은것까지도 느낀체 하는 어리광대같은 연기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하는 사회의 모진 진통을 절감할수 있는것이다. 4. 사치한 도덕과 계산적인 리기주의-<<슬픈계률>> 도덕과 질서가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은 해답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기성된 도덕과 질서가 게속 사회구축의 구조적 요소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계산적인 리기주의의 사치한 도독적 방패로 변질하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현실적을 던져진 부진이냐 발전이냐 하는 선택의 질문이다. 례컨대 부담거리로 여겨 홀로난 부모를 시집 혹은 장가를 보내거나 반대로 재산을 넘겨보고 극력 시집 혹은 장가를 가지 못하게 하는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과연 어느만큼의 치유력을 갖고있는것인가 등등>> 허련순의 소설 <<슬픈 계률>>(<<천지>> 1992년 4호)은 이른바 자기는 사회의 <<정신당원>>이고 정상인이라는 월등감을 스스로 가지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어딘가 좀 부속품이 모자란 사람을 악마처럼 억지로 인간대렬에서 밀어내려하는 김씨댁 등의 형상을 통하여 자기들은 오장륙부가 하나도 세탁되지 않아가지고 남을 험담하는데는 열을 올리는 인간추악상과 계산적인 리기주의에 복무하며 인간성을 외면하고있는 기존도덕적인 성륜리의 허위성을 고발하고있다. <<그녀>>로 등장하는 녀주인공은 <<처녀때 너무 못생겨서 청혼하는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서른살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한 홀애비와 결혼했으나 아들 하나 남기고 죽어버리는 결핵병환자였었다. 후에 남의 소개로 아이 셋짜리 남자한테 시집갔으나 남편아이들이 어찌나 이악스럽게 나오는지 자기 자식이 주눅이 들어 기를 못펴는것이 가슴에 걸려 일년만에 리혼을 하고 나와버렸다. 그뒤 떠돌이 세방살이로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신계촌에 홀로 사는 홀애비가 좀 부실하기는 하나 일은 제대로 하고 집 하나를 쓰고 산다는 말을 듣고 자처하여 김부실댁으로 들어왔다. <<남자에 대해선 애초부터 큰 기대같은걸 픔어보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사랑이고 뭐고 단지 피곤한 몸을 담을수 있는 처지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들애 하나만 눈치밥 안먹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생존본능의 가장 원색적인 추구인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원색적인 추구마저 이른바 주위의 <<정상인>>들에 의해 여지엾이 허물어진다. 부실이한테 시집온 근거로 같은 부실이 취급을 당하고 정상적인 성의 욕구마저 망측한것으로 비난받으며 지어는 <<온갖 랭대와 멸시도 넉넉하게 받아당하는것>>마저 <<그녀>>가 <<부실하기때문에 치욕을 못느끼는거야>>라고 놀림을 받는다. 그야말로 살아도 밉고 죽어도 밉다는식의 철저한 버림을 당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버림은 첫째, 자기 몸에도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건 흉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에서 조성되고 둘째, 김씨댁과 같이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인간들의 너무도 계산적인 리기주의에서 조성되는것이다.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시동생을 하루새에 <<그녀>>한테 빼았겼다는것이 김씨댁의 분노를 불러일으킨것이다. 그들이 새살림을 꾸렸음에도 김씨댁은 아에 두 사람 다 손아귀에 넣고 부려먹으려 한다. <<그래서 머리쓴것이 경제권을 틀어쥐는 방법이였다. 농사수입이고 남새판 돈이고 모두 바쳐야 하고 돈을 쓸 때는 맡아내가고 밥쌀을 한주일에 한번씩 내가야 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못난것, 부실한것이라는 근거로 생활자립권마저 박탈하고 그들을 노예내지 지어는 말할줄 아는 로동도구로 취급해버리는것이였다. 김씨댁이 자기의 이런 행위를 정당하게 위장하는 수단이 바로 자기몸에도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건 흉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를 리용하여 <<그녀>>와 시동생을 아주 자립할수 없는 천치로 확인시켜버리는것이였다. 인간의 상정으로 말하면 시동생이고 동서이기에 김씨댁은 그들을 몰렴치한 인간들의 비난과 타격에서 구해내고 감싸주어야 할 가장 자격적인 보호자인것이다. 그런데 공짜로 부려먹을수 있다는 계산적인 리기주의는 그녀로 하여금 악의 수단마저 서슴치 않게 하였던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또 과연 어는만큼의 치유력을 갖는것일가. 외적으로 못생긴 <<그녀>>와 내적으로 좀 부실한 김부실의 본능에의 추구와 그것을 비난하고 헐뜯고 제약하고 압제하는 김씨댁을 비롯한 주변인간들의 소행은 실상 생활의 바탕과 인간성을 멀리 떠나버린 관념도덕의 허위적인 위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벗겨버리고있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내지 인간성까지를 위협하는 사실에 천착하는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일것이다. 그만큼 휴머니즘에 철저한 문학일수록 인간경험에 해한 반성적의미가 깊을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라도향의 <<벙어리 삼룡>>에서의 천치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녀>>나 <<김부실>>은 결코 바보와 무지의 개념으로서의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서의 천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성실로서의 환상적차원에서의 천치이다. 이때의 천치는 인간을 타락과 허위에서 구제하는 천사의 얼굴 바로 그것이다. 약자에의 학대, 형식으로만 제약된 도덕이 그앞에서 여지없이 몰골을 드러내고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인간의 버림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아온것은 아들을 위해서였다는 여기에서 우리는 본능에 다름 아닌 가장 원색적인 모성애를 눈물겹게 확인하는것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 되여가지고 잡초처럼 살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여기에 어머니로서 인간버림을 자기만의 수단으로 한정시키기 위해 절망적인 치욕의 목숨이나마 이어간다는 론리가 성립되는것이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진지한 인간탐구이다. 말하자면 소설 <<슬픈 계률>>을 과념적인 도덕이나 륜리 이전에 인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다. 이상에서 문화반성적의미라는 좁혀진 구역에 립각하여 문학정신의 한 기질적측면인 비평정신을 진단확인해보았다. <<문학은 인간탐구이다>>라는 명제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과 인간성의 밝힘은 문학의 첫째가는 작업으로 되는것이다. 그만큼 문학가의 선도적역할과 희생적모험은 불가피면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문학은 구체적으로 인간경험을 다루는것이고 인간경험은 거듭나는 침적을 통하여 거의 구조적내지 제도적으로 규제력을 갖고있으므로 거기에 반성적의미까지를 매길 때 자칫하면 사회반역의 십자가조차 멜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문학가는 인생투자에 바람직한 정보내지 가치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있다. 문학이 인간경험을 다루는것은 바로 인간을 원색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39    인간성의 고발 댓글:  조회:1429  추천:0  2009-05-16
-허봉남의 중편소설<<피와 불>>에서 본다 소설이란 허구를 리용하는것이고 그래서 소설창작에서 인물, 사건, 환경에 대한 합리한 허구가 시도됨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허구로 읽은 소설이 현실감각이 짙게 느껴질 때 우리는 소설의 작품적성공을 긍정함과 동시에 예술적진실과 사회적현실사이에서 필연적인 련계를 찾고 사회현실에 대한 반성에 은근히 신경을 모으게 된다. 허봉남의 중편소설 <<피와 불>>(<<아리랑>> 제38기)은 바로 현실감갈이 짙은 에술적진실로 우리로 하여금 사색적으로 사회현실과 인간자신을 반성하게 하고있다. <<피와 불>>은 인간의 본성을 캐고 인간성의 본질을 찾는 인간탐구의 문학정신에 철저히 립각하여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속성 즉 감성, 오성(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 및 리성에 대한 적라라한 해부와 시대적투시를 주저없이 들이대고 인간의 정신적생태평형의 파괴를 사회적, 시대적 및 문화력사적으로 고발하고있다. 이 소설의 실험목적이 인간성의 본래의 모양을 밝히고 그 인간성이 어떻게 사회 혹은 시대적 제약과 염색을 받고있는가를 돌출히 하는데 있다는것을 확인하면서 작자가 그 실험을 가장 악렬한 환경에서 진행하고있는데 퍽 주목이 돌려진다. 바꿔말하면 작자는 인간성이 (최대가능성으로 사회제약에서 탈피하여) 그 본래의 모양을 드러낼수 있는 전형환경을 실험공간으로 설정하고 와중에 삶에 대한 갈구를 공동한 욕망으로 삼고 자연과의 박투속에서 죽음에 반항하는 세 인물을 실험대상으로 등장시킨것이다. 세 인물은 신분이 각기 다르고 산속에 들어온 동기도 서로 다르다. 림장기술원 심대식은 육모지를 돌아보던중 수림언저리에 피여오르는 불길을 발견하고 달려온것이고 림장사무원 현우현은 자기의 안해를 가로챈 <<원쑤>> 심대식을 불길속에 처박아넣으려고 달려온것이며 림장 제3작업소 소장 정만룡은 남에게 알릴수 없는 일로 산불에 갇히게 된것이다. 동기가 어떻든 그들 셋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는 산불에 갇혀 죽음의 신한테서 벗어나려 판가리하는 똑같은 처지였다. 인생의 쪽배가 침몰의 위기에 처한 이 시각, 그들은 <<그 어떤 개인의 타산이나 원도 없이 공동한 욕망 즉 삶에 대한 갈구>>로 환난지기가 되지 않을수 없었다. 짐승들조차 서로 다른 존재에 관심을 돌릴 여가가 없는 순간이였었다. 불만 피하면 된다는 한가지 본능에 지배되여 사람곁을 스쳐지나는 한무리의 쥐, 사람이 있는 곳이 안전하다고 여긴듯 그들곁에 와서 멈춰선 몇마리 재빛토끼, 지어는 새끼를 죽인 보복으로 사납게 달려들던 승냥이마저 흘끔거리면서 그들쪽에서 멀지않은 곳에 멈춰섰다. 자연의 도전에 모든 생령들이 <<피해의식>>을 절감한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연의 평화가 다시 찾아들면 승냥이는 역시 사나와질것이고 쥐는 역시 도적질에 나설것이며 토끼는 역시 두려움을 안고 피해다녀야 할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바로 여기에 작자의 <<엉큼한 시도>>가 있는것이다. 토끼와 같은 심대식, 승냥이나 쥐와 같은 현우현, 정만룡 어쩔수 없이 이런 대비판단이 뇌리를 친다. 사실 인간은 자연의 도전앞에서도 일단 잠시적이나마 평화가 찾아들기만 하면 원래의 심리공간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사유>>를 계속 굴리게 된다. 보복의식에 떠밀리워 산불을 보고도 도리여 불속에 찾아든 현우현은 때때로 심대식에 대한 보복으로 치를 떨고 출세욕을 버리지 않고 재화속에서도 정만룡소장한테 아첨하기를 잊지 않는다. 제집을 살려내고 퀴퀴한 뒤를 덮어버리려고 불속에 든 정만룡은 심대식이나 현우현을 자기가 살아나가기 위한 도구나 노예로 간주할뿐이다. 이런 인간들과 함께 있는 심대식이기에 <<자기 처지가 세사람중에서도 제일 고단한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의 머리속의 현우현은 <<정만룡의 앞에서는 도시 등심뼈가 있는것 같지 않으나 말랑한 안해나 아래사람에게는 도리보다 우격다짐을 앞세우는>> 사람이였으며 정만룡은 <<뜨락또르를 동원하여 제집을 구하는데 쓰>>고 <<떠벌려 공금을 탕진하>>며 <<권세를 부릴줄 아는 사나이>>였다. 그러고보면 자연의 도전앞에서 짐승은 제 본성을 잃었지만 인간은 도히려 순수한 인간성을 발로한셈이다. 바꿔말하면 재난에서 벗어나면 짐승은 제 본성을 되찾을것이나 인간은 순수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것이다. 이것이 사회를 사는 인간의 비극이다. 워낙 정만룡이나 현우현은 렬화속에서 정신적인 구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살아나가려는 그 자체가 그들한테 권세에 대한 미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확언하면 사회적인 권세욕이 이미 그들의 인간성을 제약하고 염색해버렸던것이다. 사실은 과연 그러하다. 재난에서 벗어난 현우현은 <<정만룡을 여론계에 소개하는데 큰 힘을 들>>였고 정만룡은 제집을 림시로 림장사무실로 내놓아 대번에 실화문학의 주인공으로 된다. 그러나 <<자기들은 살기 위해서 버둥질쳤노라>>고 실속대로 말한 심대식은 <<작풍이 나쁜데다 다른 사람을 헐뜯기까지 한다는 평판을 듣>>고 <<직함평의에서까지 밀려>>났다. 정만룡과 현우현의 합심무함에 든셈이다. 자연의 평화는 비탈린 현실을 재현시킨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와 같이 <<대식이는 문득 자기가 지금도 불길속을 걷고있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불길속을 헤쳐나가는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다. 상업적인 관심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속에서 인간성이란 전혀 존재할수 없는것이며 이러 인간들이 인간성을 지켜사는 사람들 주위에 재난의 불길을 지펴놓고있는것이다. <<피와 불>>에 등장하는 앞의 세 인물외에 도선향도 얼비친다. 도선향은 직접 작품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원쑤>>치부하는 심대식과 현우현의 사유공간을 빌어 간접적으로 비치는 영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것은 작품의 도선향은 정정당당하게 재가하는 과부도 아니고 매매혼인이나 소개혼인으로 하여 감정마비증에 걸린 녀인도 아닌 그 자신이 빚은 자작극에 사랑의 고배를 마시는 녀인이라는것이다. 과부재가도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많은데 그 자신이 두 남자한테 추파를 던져 비극을 초래한것이니 관념적인 평가는 당연히 도선향을 더러운년, 심대식은 량심없는자, 현우현은 괄시당한 사내일것이다. 이것이 야단이다. 사회상 정치적으로는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된다지만 도덕적으로 허물이 나면 영원히 지울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문화행위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향수할수 있지만 녀성들은 대부분 문화행위에서 향유자도 주체자도 아닌 언제나 소비적인 희생물로 전락된다. 실로 형식적인 도덕주의가 끼치는 해를 입는것은 보통 녀성이다. 왜냐하면 문화력사에서 륜리도덕적으로 유독 녀성들에게만 정조라는 <<월계관>>을 씌워주었기때문이다. 물론 작풍이 문란한 경우를 대변하려는것은 아니지만. 이성간의 사랑은 사회에 대한 리해, 감정세계의 미성숙 등등으로 착오적 선택이 있을수 있고 또 사회현실로부터 볼 때 문화력사적인 관성과 사회 제관계의 제약으로 인한 착오적(노예적, 수동적) 선택도 있을수 있다. 그런데 문화력사적인 도덕관념에서 유독 녀성만은 그 어떤 착오적선택도 영구히 지켜나가야 고상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행실로 인정된다. 이는 남성사회가 녀성들에게 강요한 <<진리>>이다. 바로 이와같이 남성사회의 삐여진 도덕관념과 도선향의 연약한 감정을 리용하여 현우현은 가장 비루한 수단인 처녀성을 돌파하는것으로 그녀를 손아귀에 잡아넣었던것이다. 현우현에게 있어서 도선향에 대한 추구는 미모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점유인바 그것은 사욕과 성욕이지 결코 순결한 애정은 아니다. 명예가 더럽혀질가봐 착오적인 선택을 눈물로 고집하면서 싫은 음식 삼키듯이 병적인 가정을 그런대로 영위해나가던 그녀가 즉시적반항을 보여주지 못했던 과거를 저주하면서 뒤늦게나마 관념도덕의 노예적멍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질치게 된것은 바로 가치균등의 순결한 애정에 동화하려는 심리적지향때문이였다. 관념도덕의 노예로 그냥 착오적인 한점 공간을 차지한다는것은 자아갱신의 흐르는 삶이 아니라 송장을 붙안고 통곡하는 굳어버린 삶이 된다는것을 깨달은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인과 노예라는 억울한 차이를 무너뜨리고 애정의 새로운 가치질서를 세우려는 애모쁜 반항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름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차례지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삶이 희미하게나마 약속되자 마음의 재더미에서 다시 켜졌던 희망의 등불을 꺼버리고 가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비극 하나를 미연에 해소시킨셈이다. 왜냐하면 외곡되고 비틀린 현실은 그녀를 심대식이와 함께 문화력사의 관성으로 관념도덕의 <<단두대>>에 올려세우는것이기때문이다. 인간성은 여기 성애의 화원에서도 소외되고있다. 이와같이 <<피와 불>>은 자연의 도전앞에서의 인간들의 조화, 생령들의 조화, 자연의 평화속에서의 인간들의 불합을 통하여 사회적인 제약과 염색으로 퇴화되고 매몰된 참된 인간성에 대해 안타깝게 부르짖고있으며 인간들의 비리적인 반목과 투기적인 생활태도를 질타하고있다. 소설을 덮으면서 작자의 예술적성공을 다시 긍정하게 됨과 동시에 인물의 내심세계에 대한 적중한 색출이 잘 되지 못하고 도선향의 심리적성격에 대한 함축의 론리적타당성이 결핍하며 언어 특히 대화가 작자자신의 유모아적기질에 대비해서도 벌써 너무나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매개 인물의 개성적특성이 잘 나타나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38    력사적 착오 문화적 반성 댓글:  조회:1779  추천:0  2009-05-16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평론 몇편과 함께 오랜 침묵속에 얼굴을 파묻고있던 작가 정세봉이 갑자기 큼직한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 끝없는 파문을 일으켜놓았다. 무려 팔구만자에 달하는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 문단에 커다란 충격파를 주었던것이다. 뒤골목에서 시야비야하거나 현대화도구에 목소리를 담는것도 인간이란 원래부터 새로운것에 대해 명확한 태도보다 먼저 수군수군 의론하기를 즐긴다는 전제하에서는 나쁠것이 없지만 그래도 사명이니 임무이니 의무이니 하는 책임감을 지니고 간행물을 통해 력사니 현실이니 인생이니 미적감수니 이미지니 하고 얼굴을 붉히며 <<티각태각>>하는이들이 퍽 대견스럽고 보배롭다. <<배우>>는 <<관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관중>>이 없는 <<배우>>란 연기의 영원한 실패자이다. <<이미지>>가 발표된지 인제 4개월밖에 안되는 사이에 5편의 무게있는 평론들이 여러 간물을 통해 발표되였다. 그중 <<문학과 예술>>지에 발표된 두편은 대담히 쟁명에 응하여 나선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대범함에 힘입어 주제넘게 바로 그들의 평론을 상대로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고 시비를 걸고든다. 이 두 평론은 아주 공교롭게도 하나는 절대격, 또 하나는 토를 달았다는 부동한 형식의 동일한 제목으로 되여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서로 아주 접근된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아주 현격한 이질성도 있다. 평론 <<력사 현실 인생>>의 경우 평론가는 전반 글에 거쳐 <<당원으로서, 인간으로서, 강자로서 자기의 량심과 직분을 잊지 않았으며 자기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힘차게 연소시키려고 노력>>한 <<한 숨쉬는 인간의 진실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분석하고있으면서도 나중엔 <<이미지>>는 력사의 반성과 현실의 파악을 시도한 작품이란 <<어떤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실리주의적인 관점으로 분석해보면 쌍디아고나 윤태철의 거동은 아무런 실제적인 가치도 없는것이다. 오직 미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야만이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낼수 있는것이다>>라고 결론짓고있다. 분석과 결론의 이률배반에 빠진것 같다. 사실 평론가 자신이 글의 서두를 <<인간들의 정신활동은 이미 력사로 되여버린 어제날의 매듭에서 언제나 떠날수 없다>>고 떼고있을뿐만아니라 계속하여 <<력사는 가능하게 생활의 표면현상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현실생활의 밑바닥에서는 계속 암류로 흐르고있다. 때문에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는 현실생활에서의 모순을 제출하면서도 거기에다가 력사의 종적인 궤적을 립체적으로 교차시킨다. 이리하여 력사와 현실의 모순충돌속에서의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발로를 묘사한다.>>고 쓰고있다. 평론가 자신이 력사란 골동품이 아니며 력사란 오직 문화창조에 노력하는 인간에게만 유의미한것이며 문학은 바로 그러한 창조적인 문화행위라는것을 밝히고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차피 창조적문화행위란 각도에서 문학작품의 창작, 교환, 분배, 소비와 관계해서 그 문화적가치를 계산해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것은 문학작품이 그 한 공간에서 력사의 모든것, 사회의 모든것 또는 인간 모두를 등장시킬수 없는것만큼 선택적으로 취사함으로써 일반성에로의 확대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는 특성으로 보아도 성립될수 있는것이다. 즉 다시말하면 우리는 도식적이거나 관념적인 류형 내지 전형을 반대하지만 개성적 인간이 어떤 시대적공간이나 문화적인 환경에서 부득불 류형적인 자아로 되여 그 시대의 한 문화류형의 상징으로 된다는것을 부인할수 없으며 그만큼 우리는 작품의 주인공에 대해서 그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는 동시에 그 주인공이 시대적으로 갖고있는 문화적의미에서도 아주 큰 흥미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력사, 현실, 인생의 시각에서 보아도 틀림없는것이다. 왜냐하면 력사의 현실을 미래지향적인 기본방향에서 재검토하는것은 인생을 련습할수 없는 우리로서는 현실을 보다 합리하게 꾸밀수 있는 바람직한 수단이기때문이다. 선인들의 경험교훈이 우리의 인생투자를 조금이라도 줄여준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할수가 있는것이며 선인들에게 감사할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오늘의 삶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력사를 다만 골동품으로만 삼을 때 우리는 자칫하면 그 틀림을 이어받을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또 과거의 현재성, 즉 력사의 계승성과 인간자체의 의식의 제한성으로 하여 사회발전의 굴절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수 없다는 상황에서 력사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문화반성은 의연히 필요한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사명을 훌륭히 완성하고있다. 문학은 직설적인 론리와 사변적인 분석으로 이런 사명을 완수하는것이 아니라 상기 평론가가 결말에서 쓴바와 같이 <<문학은 변화다단한 생활속에서 인간들의 감정이 생기게 된 가장 합리한 예술적근거를 만들어낸다. 이럼으로써 소리없이 현실생활에 의하여 단절된 거의 력사적인 련계를 잊어버린 의식심층의 심령활동을 재현하면서 과거, 현실, 미래를 의식의 심층에서 한곳에 단단히 이어놓는것이다.>> 그럼 <<이미지>>의 주인공 윤태철은 어떤 형상이며 그의 공헌과 오유는 어떤 문화적의미를 띠고있는가. 평론 <<력사 현실 인생>>이나 <<력사와 현실 그리고 인생>>에서 모두 윤태철은 <<외형상에서 강자의 기질을 가졌을뿐만아니라 정치상에서도 강자이다>>, <<쟁쟁한 쇠소리가 나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였으며 또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인정하고있다. 나중에 평론가 일언은 윤태철이 <<허수빈일가에 독재를 실시하고 그의 일가로 하여금 장기간 수난을 겪게 하고 아들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순정이를 죽음에로 몰아간 오유도 그렇고 더우기는 <당의 말을 앵무새처럼 받아외우고 당의 지시대로 로보트처럼 움직여온>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되여 구룡대대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준 오류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불가피면적인것이며 련습할수 없는 인생길에서 필연적인 오유였던것이다.>> <<윤태철의 오유는 력사적으로 빚어낸 오유이며 광범한 인민의 량해를 받을수 있는 오유이며 그가 인민을 위해 기여한 공헌과 융합된 오유이다.>>라고 결론짓고있다. 그런데 이처럼 최대의 량해를 주고서는 인차 소설의 결함을 지적할 때에는 또 <<윤태철의 반성은 정치적시각에서는 철저하지만 도덕적, 문화적, 심리적, 당성 측면에서의 반성은 아주 없거나 매우 얕다.>> 고 질책하면서 인격심리요소, 봉건적인 가장제적작풍, 사회변태적도덕 등 면으로부터 윤태철을 철저히 부정해버리고있으며 나중엔 상급의 지시를 앵무새처럼 외우고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것은 당의 실사구시라는 우량한 작풍과 언제나 실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상로선 혹은 인식로선을 떠난 결과이며 언제나 자기의 눈앞의 기성리익을 지키려는 소생산자의 편견이 장난친 결과이며 성실성의 결핍, 독립인격의 부족때문이라고 지적하고있다. 한 대상에 왜서 이토록 엄청나게 이질적인 가치판단이 내려지게 되는가? <<쟁쟁한 쇠소리가 나는 당원>>과 <<성실성이 결핍하고 독립인격이 부족한 당원>>, <<훌륭한 아버지>>와 <<봉건적인 가장제적작풍이 장난치고 사회의 변태적인 도덕이 장난치는 아버지>>, 아무리 <<공헌과 오유가 융합된 인간>>이라 해도 이와같이 불과 물처럼 전혀 상극인 이질적성격을 한몸에 지닐수야 없지 않는가! 필자는 이런 페단이 생기게 된 주되는 원인은 평론가가 주인공의 구체적인 문화심리와 그것을 토대한 인격과 가치추구에 대해 깊이 해부할 대신 급급히 력사에 대한 총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근거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론리적인 결론에 떨어졌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식의 공식을 도출해낸데 불과했던것이다. 이렇게 되면 력사는 문학소재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윤태철이든 김태철이든, 또는 그들이 공헌을 했든 오유를 범했든 죄다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에 맞춰넣으면 그만이기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문학감상을 할 때 확대된 시점-- 즉 한시대의 문화환경 내지 문화형태라는 보다 넓은 시점에서 주인공의 형상가치를 따져보아야 하지만 결코 주인공 자신의 인격적체험과 문화본위를 떠나서는 도저히 진실을 파악할수 없는것이다. 우리가 만약 윤태철에 대한 신변정리를 잘 한다면 쉽게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에 앞서 벌써 그때 그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을 도출해낼수 있는것이다. 첫째, 윤태철이 혁명에 참가한 초기의 목적은 바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받아 가난에서 해방되려는것이였다. 그것은 계급적대항, 즉 직접 지주계급과 맞겨룸하는 혁명이였는바 그만큼 지주계급은 그의 직접적인 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림성이 평론 <<<볼쉐위크의 이미지>의 이미지>>(<<연변일보>> 1991년 7월 4일 제3면)에서 지적하다싶이 윤태철은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그 세월에도 <성분유일론>이 아니고 <분자>와 자식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정책적으로 그렇듯 명확히 규정해왔건만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고 나라를 전복시킬 위험이 그래도 성분이 나쁜 그 사람들한테 있다고 여기면서 철저히 <계급계선>을 나누고 <독재>를 강화해야 철저한 <혁명성>을 지켜나갈수 있다고 생각한것이다. 둘째, 그때의 사회력사적환경 역시 윤태철의 상술한바와 같은 심리적자세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었다. 당시에 비록 계급적대항의 제도가 뒤엎어졌지만 피통치자의 위치에 있던 계급이 통치자의 위치에 오르고 통치자의 위치에 있던 계급이 피통치자의 위치로 전락되였다는 자체, 혹은 적어도 원 통치계급의 <<분자>>와 현실적으로 만나고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적 아니면 감각, 인식적으로 계급적대항성의 마당을 형성하였을것이다. 바로 우리 당이 그 자신이 령도한 위대한 혁명의 승리로 하여 사회주의제도가 건립되고 그와 함께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계급존재의 사회적의미가 시대의 변화속에서 부정되고있음에도 계속 투쟁을 기본고리로 하여 계급투쟁확대화를 초래하게 된것도 상기한 사회력사적원인때문이였다. 더구나 직접 계급적대항의 사회를 체험해온 윤태철이고보면 특히 <<계급성분>>문제에서 그처럼 강경할수가 있는것이며 당의 계급투쟁확대화도 쉽게 옳은것으로 받아들일수가 있었던것이며 지어는 자각적으로, 철저하게 <<혁명>>할수 있었던것이다. 셋째, 윤태철의 소박한 혁명성과 사회력사적환경과 함께 그의 락후한 농민출신의 신분적제한성이 인과적으로 금 그어준 현실파악과 문화적자아실현의 한계성을 홀시할수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그의 삶의 인격을 정립시켜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으로 될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은 그를 경험-유전형의 인간으로 키워왔기에 론리-사유형의 인간과는 너무나 아름찬 거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필연코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기 자세에 대한 조절 내지 규범에서 모호성과 전통성 및 의뢰성을 나타내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특히 이런 비자각적인 문화바탕으로서는 우리 당의 사상리론체계에 대해 령혼적으로 옳바르게 해득할수 없는것이다. 하기에 그는 다만 우리 당은 인민을 이끌어 계급적대항의 사회를 뒤엎고 인민을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한 위대한 당이라는 극히 소박하고 거의 상식에 가까운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상급의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는 심리적자세를 갖춘것이였다. 하기에 사실상 그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그 자신의 자치적노력보다는 관념적인것을 모방한 의뢰적인것이였으며 그의 인생적자세조차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다만 시키니 한다는 심리로 삶을 조직한 순응주의적인것이였다. 이것은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린 벽두에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다시 자기의 생활능력을 실험코자 애쓰는 윤태철의 창백한 모지름에서 재확인하게 된다. 비록 시대가 어느 정도로 력사의 한 물결에 휩쓸렸던 개인들에게 심각한 력사적사고와 반성 및 자아발견적인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고있음에도 윤태철은 우리 당이 자기의 오유를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리여 자기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산당하고만다. 다만 <<<볼쉐위크>적 오기>>로써 <<자신에 대한 력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안으리라 했고 아들놈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렇게 가냘프던 정신조차 허물어져버린 윤태철에게 남은것은 행위외엔 아무것도 없다. 행위자 목적이요 행위자 동기요 행위자 인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다만 <<흘러간 력사에 대한 울분>>과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쉐위크>적 오기>>때문에 허수빈네를 도와주는것을 <<삶의 내용>>으로까지 여겨 <<그가 새롭게 걸어나갈 인생의 길인것처럼>> 느끼는것이였다. 인젠 자기몸을 주체하기도 바쁜 로인이면서도 그 육체를 허물어서라도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기어코 훌륭한 배역을 담당해보려는 거기에 정신적공허와 창백함이 드러나고있으며 자아희생적으로 자기의 약점을 표현하는 비극성이 조명되고있는것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생리적년령은 이미 인생의 황혼빛을 띄고있으면서도 비여있는 정신적공간때문에 쇠약한 육체만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기에 그의 인과적인 희생이 확인되여 있는것이다. 오늘 우리 당이 경제건설을 중심위치에 놓음과 함께 당원들의 리론수양과 문화자질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있는 자체가 이런 력사적교훈과 시대적요청을 웅변적으로 전달하고있는것이다. 필자가 <<<볼쉐위크>의 이미지>>에서 받은 계시도 바로 이런것이였다. 상술한 분석으로부터 필자는 <<윤태철의 철저한 반성>>을 강요하는 평론가 일언의 주장에 수긍되지 않는다. 사실 평론가가 지적한 결함 자체가 바로 윤태철형상의 특징으로 되고있는것이며 그것에 대한 몰자각으로 하여 그 자신이 의연히 차디찬 정신적방랑을 하고있으면서 <<무엇인가 억울한것만 같았고 그러한 평가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는데 기어이 그더러 직접 철저히 반성하라고 하는것은 생활적으로나 론리적으로나 도저히 합리성을 찾을수 없다. 그렇게 되자면 이 소설의 전반 이야기성에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그렇지 않을 경우 작가가 에누리없이 개념화, 도식화에 깊이 빠지고말것이다. 우리가 평론에서 력사의 소용돌이속에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인물을 분석, 비평하는것은 그때를 그는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다는것을 부정하려는것이 아니라 어제의 오늘, 오늘의 력사라는 련속성에 립각하여 경험적인 삶에서 현실적인 삶을 확인하려는것이다. 즉 현재적합리성에 목적한 나무람일따름이다. 다음으로 <<정치색채가 아주 농후한 이 소설에서 윤준호의 정치태도같은것은 거의 무시되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짓이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지적에도 도저히 수긍이 가질 않는다. 우선 이 소설이 <<정치색채가 아주 농후하>>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필자도 림성의 견해와 같이 이 작품은 <<40여년에 걸친 우리의 력사에 대한 반성을 안겨주는 의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력사의 흐름속에서 우리 매개인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사색적제시가 다 크다고 생각>>되며 력사적착오에 대한 문화적반성에 력점이 놓이고있다고 확신하기때문이다. 윤태철의 아들 윤준호와 지주아들 허수빈의 딸 허순정의 사랑의 훼멸이 소설의 갈등과 슈제트발전의 계기로 되고있으며 윤태철 자신의 심리적모순, 정신적곤혹, 량심적회심이 전반 작품을 관통하고있다. 그다음 <<윤준호의 정치태도같은것은 거의 무시되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짓이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견해에도 반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는 왜서 윤준호의 정치태도가 꼭 표현되여야 하는가? 왜서 그는 꼭 말과 짓에서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수 없다. 작품에서 보면 사랑의 억압과 훼멸은 윤준호로 놓고말하면 개인의 삶의 전체에 절망적인 비극의 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삶의 절망까지를 느낀 뼈에 새겨진 상처, 그 상처가 주는 참을수 없는 아픔, 되돌아가 그 아픔때문에 잊을수 없는 사랑인데 기어이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것은 인간상정에도 어긋나는것이다. 더구나 씨앗까지 뿌려 미구에 열매를 보게 되였던 황홀한 사랑이고보면 꿈에조차 잊을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윤태철과 윤준호의 갈등이 그 내용적확장이 몇십년의 력사에까지 미치든지 아니면 전반 사회에까지 관계되든지간에 우선 그것은 가정내부의 부자갈등, 지어는 어떤 사람을 <<새사람>>으로 맞아들이는가 하는 갈등의 형식으로 표현되고있는만큼 윤준호가 꼭 아버지한테 나는 력사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오, 현실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오 하고 태도표시해야 할 생활적흐름의 합리성을 찾아볼수 없다. 특히 그 사랑을 억압하고 훼멸시킨 장본인이 아버지일 때 가부장제적독단에 훨씬 더 분개하게 되는것이며 갈등의 초점이 그것에 모여지기 마련인것이다. 그가 당소조장을 질책한것도 진짜 충고도 있고 야유, 조소도 있지만 기실은 아버지에 대한 울분을 터뜨린것이다. <<시어머니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는 격이다. 사실 작가 자신도 결코 작품에서 정치관념상에서의 세대적갈등을 반영하려는것이 아니라 사랑마저 정치적우박의 피해를 받지 않을수 없었던 인정이 메마른 특정된 사회상을 부각하려는것이다. 인물형상분석에서 작품의 얽음새에 따르는 매개 인물의 자세로부터 그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야지 저 인물의 성격에는 이런것이 있는데 이 인물의 성격에는 이런것이 없다는식으로 허물한다면 오히려 개성있는 성격을 부각할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사람은 이럴 때 이러는것이다 하는식의 주장은 도식화, 개념화로서 그렇게 되면 작가는 생활적인 인간을 부각하는것이 아니라 론리적인 인간을 제조하게 될것이다. 사실 생활현실에서 보면 이 사람은 이러해야 하는데 이렇지 못한것이 이 사람의 성격의 거치른 면이 되고 저 사람은 저러해야 하는데 저렇지 않은것이 저 사람의 성격의 개성적인 면이 되는것이다. 이상에서 나어린 글쓰기 열성자로서 두분 평론가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설익은 관점을 가지고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는 행위를 개시했다. 학술적으로 다각적풀이가 가능한 시대인만큼 개성적으로 일가지언을 주장함은 중요하지만 남을 이설이라고 억누르는것은 언어도단일것이다. 그만큼 자기의 관점만을 책임지고싶다.
37    사회적 착오 자아의 탈출 댓글:  조회:1425  추천:0  2009-05-16
에텐동산을 떠나기전의 아담과 이브는 자연인으로서 거의 동물적인 생존욕구로부터 일하고 먹고자고하였다. 그러나 악마의 지배자인 사탄이 그들을 꼬드겨 지혜의 금과를 따먹게 한후로부터 인간의 원죄는 시작된다.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난 어린애는 아직 자연인으로서 동물적인 생존욕망에서 먹고자고한다. 그러난 어린애는 점차 자라는 과정에 문화인으로 성장하면서 혹은 훌륭하게 혹은 나쁘게 혹은 밝게 혹은 어둡게 인생의 일기를 적어간다. 적어도 인간의 원죄란것도 결코 생명본체에 원초적으로 내함되여있는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원죄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람을 고급동물이라고도 하고 또 사회동물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으로도 사람의 속성은 드러나는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란 바로 사회속에서만 독립할수 있는 동물이라는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사회는 일정한 형태의 사람들을 제조해내는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회로애락과 선과 악은 모두 사회적생장물이다. 리화숙의 <<인생실습>>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 문제를 떠올리고 <<나>>와 그 주위의 인간군에 대한 형상적묘사를 통하여 그네들이 삶을 펼쳐놓은 사회를 재조명하고있다. <<나>>는 원래 머리를 수굿이 하고 일만 하는 <<누른한 소>>였다. <<신문사에 배치받은 그날부터 국제시사부에서 번역만 하다보니 인간관계테두리가 딸년의 팔목걸이만큼도 안되였다.>> 그래도 <<나>>는 <<나>>대로 누구에게도 원망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나>>의 진실성과 솔직성이 얼마나 허망했고 또 막연하게 믿어왔던 법칙이 얼마나 령활한것이였던가를 <<내>>심장이 아프도록 절실하게 감수했다. 람용되는 권력, 미꾸라지는 살고 <<누른한 소>>가 채찍받는 불공평한 세월, <<나>>는 다년간 80여원의 로임에 네식구가 목을 달아매고있지만 배치돼온지 3년도 안되고 글재간은 손톱여물만치도 없는 관계학우등자에겐 주임자리를 주고 새 아빠트를 배당해주는 원통한 현실, <<실로 너무도 밑지는 인생이고 너무도 억울한 신세였다.>> 오직 권력과 아첨만으로 할수 있는 일을 <<나>>는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 죄도 바로 한가지 생각에만 골몰하는데서 일으켜지는것이다. 이와 같은 기형적인 사회현실이 청춘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권력으로 사람을 압제하고 희롱한다면 <<나>>는 <<부정기풍사냥군>>이 되여 너의 기염을 꺾어놓아 사나운 사자를 온순한 양으로 만들고말테라는것이다. <<내>>가 처음 이런 못된짓을 시작한것은 전적으로 <<내>>가 당한 억울함과 고통에 대해 복수하고싶은데서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그것이 원인이 되여 3%로임조절에서 보살핌을 받고 또 신문사 보도주임의 요직에까지 바라오르게 되자 <<나>>는 <<승리의 희열>>에 도취되여 영원한 악의 미궁에 빠져들어갔다. 비밀현장을 쥐고는 농촌사람을 도시사람으로 변신시키고 앓는 놈을 군대에 내보냈고 통신원을 기자로도 만들어보았다. 그 수고비로 들어오는 돈은 슬쩍 눈감고 아닌보살했다. 하여 수입은 가관으로 불어갔고 승직도 번개식속도였다. 워낙 인간은 일단 악에 마음잡히면 야수보다 침략성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성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사회거나 사회환경이 키워준 생장물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또 모종의 생존의식 내지 생명의식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남처럼 살아보겠다는것이 소박한 생존의식이라면 남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것에는 벌써 어느정도 화약냄새조차 풍기는것이고 악마의 그림자가 비껴있는것이다. <<살아있어도 소리칠수 없는 사람>>인 <<내>>가 소리치며 살려면 <<나>>한테 소리치는 권세자를 <<소리칠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던까닭에 그처럼 교활하고도 루추한 방법을 착안해냈던것이다. 물론 목적의 정당성을 내걸고 수단의 악을 미화할수는 없는것이다. 악의 수단을 쓰게 된것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였다는 변명은 악에도 좋고나쁨이 있다는 언어도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면 악의 정체도 모호해지고마는데 바로 <<나>>와 같은 권력지향의 인간들은 그런 모호한 정체의 악을 리용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는것이다. 인간의 삶은 과정이 곧 목적이라야 한다. 풀어말하면 참된 삶은 참된 삶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룩될수 있다는것이다. 참된 삶에 악의 과정 내지 악의 수단이 필요하다는것, 그것은 도저히 맞물릴수 없는 론리이다. 그럼에도 삶의 현장에선 왜 이런 론리가 성립되는듯싶은 실례들을 찾아볼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본체의 자연적이고 본성적인 민주, 평화와 평등이 파괴되고 인권이 권력의 억압과 유린을 당하고있는 구속의 현실을 새삼스럽게 체험할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원시적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살고있는 미개한 민족들로부터 아무런 인위적인 요구나 구속이나 착취도 없이 환경의 요구에 따른 자기식의 생활을 하는 원시적인 민주와 평화 내지 생의 만족을 엿볼수 있다. 또한 력사를 뒤져보면 인류는 기원전 4천년 내지 3천년에 이르러 자신이 생리적으로 수요하는것을 훨씬 초과하는 필수품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면서부터 빼앗고 훔치고 착취하는 등 후천적인 침략본성이 자라나게 되였고 원래는 그 부속물인 노예, 군대, 정부, 전쟁, 등급 등이 잇따라 산생되였던것이다. 따라서 동물적인, 자연적인 민주는 소실되고만것이다. 물론 이런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민주가 인류의 리상으로 될수는 없다. 인류의 조상이 금과를 따먹은후로 무궁무진한 지혜를 갖게 된 인간은 부단한 창조로써 하느님이 가르쳐준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것이다. 바로 인류가 풍부한 물질적토대우에서 생리적수요를 초월한 절대적인 향수를 누릴수 있는 새로운 민주와 평화를 제조하는 과정에 력사는 굴곡적인것이다. 그러나 될수 잇는한 인류는 이 과정의 곧음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시험하고 자기를 다듬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로 진실과 순결이 <<나>>에게 참다운 삶과 그에 정비례되는 생활환경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데 비극적인 운명이 있다. 여기엔 구체적으로 말하면 권력담당세력의 청렴성이 제기되는것이지만 총괄적으로 보면 우리가 꾸며온 력사를 총결산해본 사회정치문화적의미가 담겨져있는것이다. 권력담당자에 대한 해부로부터 착수해보면 자기의 능력을 초과하는,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 상급에겐 비굴한 아첨을 보내고 하급에겐 상대방의 인격이나 재능보다는 안면과 지갑의 크기에 더 관심하는 권력람용자들, 위세나 풍모가 더 큰 권력이나 돈 앞에서 기운을 잃고마는 위선자들, 명철보신하면서 사리사욕만 채우는 무능한 권세자들을 우리의 생활권내에서도 얼마든지 볼수 있다. 권력담당자란 한사람이 만사람을 지배하는자이다. 그만큼 청렴한 몸에 지혜가 깃들면 만사람이 복을 받게 되고 추악한 몸뚱이에 놀라운 재능이 깃들면 만사람이 해를 입게 되는것이다. 이런 얼굴을 우리는 김사장의 형상에서 보고있다. 자신은 아주 청렴하고 사원들의 리익을 위해 힘다하는듯이 자처하면서 <내>>가 <<어쩌다 한번 식료품공장의 보도기사 한편을 써주고 과자상자 한개를 받은것을 갖고 뭐 위성이나 발견한것처럼 떠들어대면서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자기는 도리여 기자들한테 사진기를 사주고는 상점측으로부터 과자 한상자가 아니라 과자상자에 넣은 5천원이란 거액의 감사료를 받아먹었던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수굿하고 일만 하는 나>>에겐 그냥 손해만 주고 <<배치받은지 3년도 안되고 글재간은 손톱여물만치도 없는 관계학우등자>>에겐 주임자리를 주고 새아빠트를 배당해주었던것이다. 새로 부임된 양사장도 그랬다. 다만 김사장보다 더 교활하고 음특할뿐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는 <<손톱눈만한 부정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거의 오만할만큼 도고했다. 안해나 자식까지도 그의 사업열정과 자아의 관철에 얼마 소용되지 않는것 같았다.>> 허나 그 <<평화로움은 오히려 정상적이 아니>>였다. <<지나친 그 평화속에 부글부글하는 분렬의 암류가 잠재>>되여 있었던것이다. 굴레벗은 말처럼 날치는 <<나>>를 손아귀에 잡아쥐기 위해선 <<미인계>>조차 꺼리지 않는 위선적이고 음험한 자였다.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순결속에서 이런 권력담당자들의 인위적이고 추악한 권력중압에 지지리 눌리워 한탄과 원망과 저주와 실망의 십자가를 메고 인위적이고 불필요한 인생고행을 겪고있는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마비된 상태에서 기계사람이 돼버리고 혹자는 가망없는 소경의 헛막대질로 분노와 항의를 거듭하고 혹자는 <<나>>처럼 어둠이 깃든 자아에서의 허위적이고 절망적인 탈출을 시도하는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든지 결과는 모두 허황하고 비참한것이다. 마비된 사람은 자살적으로 리상과 전도를 동댕이친 사람이고 헛막대질하는 사람은 스스로 혹을 더 다는것뿐이며 <<나>>처럼 자아에서 탈출한 자는 사회와 도덕의 비바람을 막아낼수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진단과 처방은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꾸며온 력사를 재결산해보고 사회정치문화적의미를 다시 매겨보는것이다. 왜냐하면 복합적으로 결정되는 사회현상을 단일한 인과관계로 급급히 설명해버리는것 자체가 칼로 부추베듯 문제의 화근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뿐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와 같은 권력담당자들의 부패상은 결코 개개인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조장된 인간도덕문제인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타락의 요람을 마련해준 사회적착오의 반영인것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할순 없지만 간추려보면 그들이 타락하고 게으름을 피울수 있는 원인은 첫째로 사회발전(적어도 한 집단의 발전) 과 그들의 승강이 엄격한 련관을 갖지 않고있기때문이고 둘째로 경제적리해관계(경제적책벌도 포함)가 그들의 공과 죄와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고있기때문이며 셋째로 민주(선거와 해임을 포함)가 그들의 승강과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고있기때문이다. 든없고서는 게으름을 피울수 없다. 여기서의 <<돈>>을 <<마음의 여유>>라고 한다면 사회발전과 경제적리해관계와 민주의 중압이 가해질 때 게으름을 피울수 있겠는가?! 바로 <<나>>와 같은 진실하고 순결한 인간들이 권력담당자와의 씨름에서 도저히 이길수 없는것도 다만 그 권력때문에 아니라 그런 권력의 공고성을 담보해주는 사회적고질때문이다. 집단의식의 미명하에 명령과 복종을 원칙으로 하여 절대적인 조건반사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창조적인 인간은 비극배역을 맡을수밖에 없는것이다. 상술한 리해를 앞세우고 <<인생실습>>을 곰곰히 씹어보는것이 문학을 통해 삶과 현실을 읽어내는 옳은 방법이라고 믿어진다. 그렇지 않고 다만 김사장이나 양사장이나 <<나>>를 한꼬챙이에 꿰여가지고 비렬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사건적인 타매에 급급해한다면 그저 사회의 도덕결론을 전달하는데 그치고만다. <<나>>가 권력의 중압에 못이겨 나중엔 그처럼 비렬한 수단을 썼음에도 읽은이의 동정과 지어는 환심까지 사게 된것은 <<나>>가 복종에 중독되든 분노하고 반항하든 자아에서 허위적으로 탈출하든 모두 진정한 자아를 찾을수 없고 최종적승리를 안아올수 없으며 도덕의 질책에서 벗어날수 없다는것, 또 그만큼 <<나>>가 개인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는 도저히 이길수 없는 사회적착오와 씨름하는 필패의 씨름군 즉 절대적인 비극운명의 주인공이기때문이다. <<인생실습>>은 일인칭수법을 리용하여 <<나>>가 권력의 중압에 못이겨 자아에서의 허위적인 탈출을 시도하면서 일어난 일련의 내면갈등--긍정과 부정, 량심적질책과 사회적변호, 도덕적반성과 사회비판 등을 현실감각이 짙게 보여주고 삶의 현장감을 뚜렷이 느끼게 함으로써 읽는이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참여의식에 몸달구게 한다.
36    [해란강아 말하라]의 역사적 진실성 댓글:  조회:1668  추천:0  2009-05-16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김학철)는 연변 연길현 해란구 버드나무골을 주요무대로 하여 연변인민들의 항일투쟁력사의 비장하고 거세찬 흐름중의 한물결, 즉 혁명의식이 싹트고 성숙되던 시기였던 1931년-1932년의 력사를 예술적으로 재현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9.18>>사변, 추수투쟁, 춘황투쟁 및 항일무장투쟁의 력사를 돌이켜보게 한다. 소설은 이런 력사사변들을 통하여 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 및 필승의 진리를 밝히고있다. 력사적진실감은 이 작품의 흡인력을 짙게 한 가장 중요한 예술적특징이다. 작자는 생활감정에 필을 푹 묻혀가지고 력사적현실을 보다 미더웁게 예술적진실과 불가분리적으로 통일시키려 애쓰면서 형식적으로만 추구되고 정형된 도식과 정치적으로만 강요되고 굳어진 관념상의 지나친 리상화에서 벗어났기에 생활정취가 짙고 력사감과 진실감이 물씬하며 당시 생활에 동반되였던 흙냄새와 초연냄새가 사실주의적으로 짙게 풍긴다. 주지하다싶이 력사사건을 제재로 한 작품에서 력사적진실감은 무엇보다 먼저 그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된다. 력사의 페지에 따라 고통은 고통으로, 웃음은 웃음으로 직시해야만 독자들의 력사적상상력을 촉발시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것이다. 력사적현실을 외면한채 순수 관념상에서 추구되는 리상화는 벌써 허위로 되고만다. 그러나 예술의 진실은 생활을 그대로 복사하는데서 담보되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려과시킨후의 <<현실생활>>로써만 긍정된다. 이것은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모순을 유기적인 통일로 전환시킴에 의거해야만 력사소설의 성공이 완성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럼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에서 어떻게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을 유기적으로 통일시켰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작품에서 진실성은 인물형상의 성격창조에 앞서 주제와 제재면에서 벌써 짙은 력사적진실감으로 밝게 체현되고있다. 주제면에서 보면 소설은 일련의 력사적사변들을 통하여 민주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 및 필승의 진리를 밝히고있으면서도 작자는 이런 주제의식을 이미 승리한 혁명력사에 대한 관념적리상화로써 표현한것이 아니라 작자의 기억속에 생생히 자리잡고있는 경험세계, 즉 민주혁명력사시기의 사회생활과 인민들의 피로써 얼룩진 투쟁을 력사의식의 현실적체험속에서 예술화하여 실감있게 보여주고있다. 다음 제재면에서 보면 소설은 연길현 해란구 버드나무골을 주요활무대로 하여 연변인민들의 항일투쟁력사중에서 혁명의식이 싹트고 무장투쟁의 첫 봉화가 타오르던 때인 1931년-1932년의 력사를 반영하고있다. 작자는 여기에서 지나친 랑만을 추구한것이 아니라 흘러간 력사를 제재로 한다는 특수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술적진실과 력사적현실과의 내재적통일을 완성하기에 애썼다. <<동만 전역이 그러하듯이 32년 늦은 봄에서 겨울에 걸치여 해란강일대의 농민들도 역시 암담한 검정구름의 그늘아래서 세월을 보내였다.>> 일제는 <<9.18>>사변후 저들의 식민지화음모와 파쑈적통치로 하여 야기된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일정서와 반항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인민들의 애국의식과 반항투쟁은 반동의 선불맞은 고조기를 휘몰아온것이다. 일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하루속히 실현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의 손길이 아직 인민들속에 확고한 신심과 신념을 키워주기전에 그 싹을 베여버리려 시도하였다. 1932년 한해에만도 일제는 연변에서 4천여명의 무고한 군중을 학살하였다. 1932년 부터 1933년사이에 일제는 연길현 해란구에 대하여 선후로 94차의 <<토벌>>을 발동하고 천칠백여명의 혁명자와 백성들을 살해하여 피로 물든 <<해란강대참안>>을 빚어냈다. (<<조선족간사>> 100~101페지) 작자는 소설에서 이런 력사적현실의 어려움과 참혹성을 관념속에서 분해시켜 리상화로 염색해버린것이 아니라 력사적사변을 원형 그대로 예술적진실과 유기적으로 통일시키려고 애쓰면서 사건본질속에서 비장한 주제의식을 발굴해내고있다. 작자는 이런 비장한 주제의식을 제재다룸에서 선과 악, 정의적인것과 비정의적인것에 대한 작자 자신의 선명한 인민적태도로 체현시키고있을뿐만아니라 보다 개성화된 인물성격창조에 믿음을 주어 부동한 계급성, 부동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의 부동한 인식적대화를 통하여 그것을 힘있게 완성해나가고있다. 인물형상창조에서 작자는 우선 밝은 성격의 창조와 그들의 건전한 정서적발전에 예술적공간을 넓게 주고있는바 이런 밝은 넋들의 힘찬 움직임은 작품에서 재현된 비극적인 력사사건으로 하여금 주제를 위한 로파심에 찬 과잉해석이 없이도 비극속에 새로운 전환요소를 다분히 내함하도록 함으로써 전반 작품의 정서적흐름을 비애적으로가 아니라 비장하고 전투적인 분위기로 차넘치게 하고있다. 또한 바로 이런 인물형상군들의 적극적인 투쟁자세와 질적으로 밝은 삶의 추구로 하여 비록 소설이 사건적비극으로 막을 내리우고있지만 그러나 독자들이 가슴뿌듯이 체험하게 되는것은 전혀 혁명에 대한 실패의식이나 정서적어두움인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과 희망이며 주인공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다. 이것은 작품의 력사적진실감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주인공의식과 독자의식을 미학적인 정서흐름에서 맞물림을 이루어주었기때문이다. 소설에서 림장검의 형상은 비교적 성공적이다. 소설은 그의 성격발전에 알맞는 무대를 꾸며주고 력사적현실의 진감속에서 그의 개성적기질에 맞게 량적성장에 따르는 질적변화를 실감짙게 밝혀주고있다. 인간의 사랑을 일찍 잃은 고통우에 강한 반항의식을 키워온 그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강한 의지형의 인간이다. 무슨 일이나 마음적으로 긍정되여진 일이면 자기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가능성을 꼬물꼬물 계산함이 없이 맹호같은 폭발력으로 후닥닥 해치우고만다. 그만큼 성공에 믿음이 깊고 실패에 교훈이 크다. 때문에 매 한가지의 체험적사건에서 그의 의식은 폭발적이고 비약적인 전변을 가져온다. 그러나 아직 혁명에 대해 실천적으로 깊이 체험하지 못하고 특히 관념적사유에까진 성숙되지 못했을 때 그의 의식의 전변은 언제나 리성적이고 관념적인것이 아니라 그의 약삭빠르고 총명한 본성적성격에 토대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감성적이고 감각적인것이였다. 때문에 반항의식이 달구지사건으로 폭발점에 이르러 박승화네 집을 뛰쳐나온 그는 <<나두 사람이다>>라는 심리적반응에 흥분되고 인간가치에 대한 순박한 자각의식에 삶의 자세를 바꾸면서도 박승화와의 갈등을 다만 개인적인 모순으로만 여기고 이를 계급적의식의 이질성에서 초래되는 본질적인 대립으로는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갓 혁명에 몸잠그었을 때도 각성된 의식의 자각적인 분투보다는 의연히 자기의 신변생활에 대한 강렬한 불만정서에 사로잡혀 자각적인 의식의 락관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자발적인 본성적성격의 락관에 퍽 흥분되여있다. 혁명자들과의 접촉, 혁명에 대한 실천적체험, 일제의 <<간섭>>으로 인한 신변생활의 공간적확대, 박승화의 로골적인 반공활동, 이런것들로 하여 장검이의 환상적인 꿈은 산산히 부서지며 눈앞에서 펄럭이던 붉은기폭도 훨씬 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에 대한 환멸의식이 아니라 혁명의 간고성과 장기성에 대한 동통이 심한 자각증상이였으며 보다 리지적인 의식의 눈트임과 함께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면서 내면에 아프게, 그러나 미더웁게 흘러가는 심리적반응이였다. 이와같은 의식의 질적전환에 대한 내적모습의 조명은 후에 장검이가 혁명투쟁속에서 나타낸 강한 의지형의 행위에 성격발전의 론리적합리성을 안받침해준다. 또 이와 같은 불밝은 성격발전으로 하여 장검이의 죽음은 혁명의 실패감과 정서적어두움을 비껴주는것이 아니라 그가 자각한바의 혁명의 간고성 장기성을 가슴저리게 실감적으로 보여주는것이다. 이밖에 버드나무골 농협의 지부책임자 한영수, 농협위원 왕남산, 대소사불문하고 언제나 적극적인 참여의식으로 할말은 허리부러지게 하고 투쟁에서 대중일반속에 코기러기처럼 앞장서는 박화춘, 사랑을 토대로 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조와 지지로부터 점차 혁명의 도리에 대해 소박하고도 생활적인 리해를 가져오면서 개인적인 목적추구를 계급의 근원적인 목적추구와 련결시키는 허련하, 영리하고 오돌찬 한영옥, 총명하고 지혜롭고 용감한 삐오넬 성길이 등의 인물형상들을 통해 의식의 이질감, 성격의 다양성으로 저마끔의 뚜렷한 개성과 심리적반응차이 및 그에 따르는 행동적반응차이를 보이면서 또 계급의 동질성속에서 밝은 투쟁세력의 복합적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작품의 주체의식을 예술적으로 감각되게 하고있다. 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은 또 대상적의미에서 원쑤의 교활성, 잔인성과 강대성을 동반한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벌써 혁명의 간고성, 장기성을 부정하는것이며 선렬들의 피어린 투쟁을 부정하는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적의미에서 어느 한쪽을 과장할 때 모름지기 다른 한쪽도 과장되고말기때문이다. 이것으로써 작품에서 부정인물형상의 진실성은 긍정인물형상의 진실성과 상호경쟁적작용으로 거의 대등한 예술적가치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대체할수 있을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박승화의 형상이 퍽 성공적이다. 버드나무골의 툰장인 그는 천성적인 음험한 교활성과 유산자의 극단적인 리기주의가 골수 가득 흐르는자이다. 리기주의는 그의 인생관, 세계관이였고 교활성은 그의 생존수단이였다. 나라를 버릴지언정 내것을 잃을순 없다는 이런 인생목적은 그의 교활성에 어떤 수단으로든지 내게 유리하게만 되면 된다는 지시등을 켜주어 가장 지독한 음험성과 잔인성까지를 서슴치 않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교활한마큼 기후에 민감한 그는 환경의 변화에 자기를 곧잘 적응되게 할수 있었다. 소작농들이 자기를 응당한 주인으로 바라보고 아직 새로운 의식과는 낯설어할 때 그는 자기를 선량한 구세주로 분장하고 너그러운 인품과 위엄있는 권력으로 그들을 얽어매고 등쳐 간빼먹는 수단으로 그들을 착취하면서도 극력 자기의 삶의 질에 도금칠을 하였다. 그러다가 소작농들의 불만의식이 쌓여 나중엔 반항의식을 두드려 깨우고 그에게 점점 깊은 적의를 품게 되자 그의 교활성은 위선적인데로부터 음험한데로 탈바꿈을 하고 마침내는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진폭이 큰 력사적사변의 강렬한 진감속에서 보다 음흉하고 잔인한것으로 로골화된다. 이처럼 그의 성격은 객관적충격앞에서 그 자신의 성격적특성에 맞게 주관적선택을 하면서 성숙된다. 이밖에 술과 녀색, 금전과 명예에 오금을 꺾어 빈고농출신을 배반하고 박승화의 충실한 졸개로 충당되여 악한짓을 락으로 삼는 승냥이마냥 잔인한 최원갑, 개를 추겨 사람을 물어뜯게 하고 독약을 풀어 혁명자의 일가를 몰살한 대지주 호가, 계림촌의 부농 리범도, 리범식형제 등의 형상들도 그 각자의 개성적특징을 나탄내면서 반동의 잔인성, 극악성을 여실히 드러내고있다. 이처럼 잔인하고 교활한 적들을 대상으로 한 혁명투쟁이였기에 막대한 피의 대가를 내지 않을수 없었고 많은 력사의 페지를 번지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해란강아 말하라>>는 이와같이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통일속에서 긍정인물의 밝은 성격 및 정서적발전과 부정인물의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 및 정서적발전의 불꽃튀는 겨룸을 통하여 혁명투쟁의 간고성, 장기성과 필승의 진리를 실감적으로 밝혀주고있다. 끝으로 의식의 대립적전환을 가져온 김달삼이의 형상과 의식의 질적전변을 보여주지 않은 정적인물인 류인호의 형상도 주제의식을 밝힘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 성격들의 력사적진실감으로써 전반 작품의 진실성을 한몫 담당하고있다는것을 홀시할수 없다. 달삼이는 워낙 버드나무골의 농협선전간사이며 사립학교 교장이였다. 비록 한영수의 영향으로 혁명에 몸담은터이지만 그의 마음 구석구석에는 소지식인의 연약성과 배부른자의 리기심이 장난치고있었다. 이것들은 가볍게나마 받아들인 혁명의식과 상호경쟁적인 힘이 되여 수시로 의식의 심리적맞겨룸을 일으켰다. 그것의 힘의 크기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오르내리였다. 아직 반동의 세력이 그닥 강하지 못할 때 그의 혁명의식은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그의 행위를 지배할수 있었다. 그러나 반동의 세력이 사나와지고 자기의 생명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자 그의 마음은 대뜸 추워났고 내몸을 위하여야 겠다는 일념이 일체를 좌우지하였다. 하여 박승화의 위협공갈과 유혹앞에서 끝내 공허한 삶의 의식에 몸부림치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유지해오던 옳은 가치균형을 깨여뜨리고 부정적힘에 절대적행위권을 주고만다. 마침내 그는 변절자로 되여 유격대행동계획을 밀고하며 자기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련락원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광열적인 삶의 욕망은 적의 류탄에 맞아 끊어지고만다. 소설에서 달삼이의 형상은 폭넓은 심리갈등을 통해 연약성과 리기심의 자극적인 발전을 심리본질에 맞게 펴보임으로써 비교적 완정한 성격을 완성하고있다. 소설은 이와같은 달삼이의 형상을 통해 배반행위가 혁명에 얼마나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주면서 다른 한 각도에서 혁명투쟁의 간고성과 장기성을 밝히고있다. 류인호의 형상은 또 다른 한 각도에서 주제의식을 실감케 한다. 소설에서 성격과 의식의 질적전환을 꼬물만치도 가져오지 못한 정적인물로 묘사된 그는 보수적이고 리기적이며 노예근성이 짙은 인간이다. 그는 대중투쟁에서 언제나 현실도피적립장을 취하고 습관된 소작농생활에 오히려 믿음을 주면서 설익은 인생을 그대로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심리본질의 부패가 아니라 굳은 의식과 새로운 의식의 모순에서 초래된 락후였다. 사실 훨씬 수량 많은 군중일반은 몇마디 선동이나 행위를 통해 비약적으로 의식의 관념적전변을 가져올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들은 순결한 가치에 동화하려는 적극적자세를 갖추고있으면서도 문화의 제한성과 관습을 굳게 지키는 맹목적인 삶의 신조가 가장 돌출한 원인이 되여 자기의 생활과 의식에 새롭게 뛰여드는 모든것에 대해 경계하면서 청각만을 믿고 쉽게 새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의식이 서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한테 퍽 효과적인 자극은 감각되는 객관적충격이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충격도 그들로 하여금 새것의 신선함을 실감케하는것일 때라야만 그것을 자기의 삶의 질적추구로 긍정하게 되는것이고 그렇지 않고 객관적충격이 그들로 하여금 새것의 가능성에 어려움이나 묘연한감을 느끼게 할 때 그들은 곧 주저하고 동요하며 그것에 한사코 몸잠그려하지 않는다. 소설은 류인호의 형상을 통하여 이런 대중적심리를 반영하면서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켜 투쟁세력을 키우는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려운것인가를 밝히고있다. 총적으로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는 주제, 제재 및 인물형상에서 력사적현실에 퍽 접근하면서 짙은 력사감과 진실감으로 흡인력을 높이고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결함도 없지 않다. 특히 이 글에서 론의된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유기적통일을 완성하는 문제에도 뚜렷한 흠집이 웅크리고앉아 작품의 예술성에 손색을 끼치고있는것이 퍽 아쉽다. 작자는 이야기엮음에 지나치게 열중한탓이였던지 성격창조에서 인물형상에 예술적의복을 못다 입힌채로 막을 내리우고말았다. 말하자면 사건발전과 결과에 따르는 인물성격발전의 내재적완정성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소설에서 비교적 성공된 형상이라 할만한 장검이의 형상마저 정신적인 성숙보다는 행동의 용감한 반복을 굵게 보이면서 성격발전의 근원적탐색은 고작 겉을 더듬었을따름이다. 그리고 추수투쟁, 춘황투쟁에 궐기한 버드나무골사람들을 보면 마치 외부적충격력, 이를테면 <<9.18>>사변과 다른마을 사람들의 투쟁에 감염되여 순전히 자발적인 반항에 떨쳐나선듯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한영수를 비롯한 혁명자들과 열성자들이 농민들과 직접적으로 살바투 접촉하지 못하고있기때문이다. 다같은 소작농이란 이 점에서만도 그들은 생활에서 어차피 만나지 않을수 없을텐데 혁명자들은 혁명자들끼리만 생활하고 활동하기에 군중을 상대로 격세감이 없지 않다. 야학만 보더라도 황아장수의 입을 통해 버드나무골학교가 공산당에 장악되여 있다고 밝혀지었음에도 <<겨울>>이란 옹근 한장을 통해 대중의식을 각성시키는 활약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있다. 이런것들은 작자가 력사적현실과 예술적진실의 유기적통일을 완성하려고 애썼지만서도 끝내 채 완성하지 못하고 예술적종합처리에서 남긴 흠집이라고 보아진다. 그러나 소설은 어쨌든 력사적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태도와 개성짙은 인물형상군의 창조로 하여 예술의 천평을 무게있게 누른다.
35    서로 마음의 <3.8선>을 지워라 댓글:  조회:1608  추천:0  2009-05-16
짐승은 먹이를 놓고 싸우고 인간은 마음때문에 싸운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인의 발뒤굼치를 따르면서 서로 사이좋게 비비고 핥아주던 개들이 하나의 뼉다귀때문에 으르렁거리면서 피를 보지 않고는 물러서지 않을듯이 싸운다.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이면서 역시 동물과는 구별되는것이 바로 생각, 즉 사유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범처럼 용맹하지 못하고 사자처럼 포악하지 못하고 소처럼 힘이 세지 못하고 원숭이처럼 날렵하지 못하고 날아다니는 새처럼 빠르지 못한 인간이 만물의 령장으로 이 세상에 군림하여 그 모든 천지만물을 주재할수 있는것이 바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마음을 독유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 바로 그 생각하는 마음때문에 그 어느 동물보다도 더 쉽게, 지어는 본의 아니게 서로가 반목하고 헐뜯고 싸우고 판가리한다. 물론 인간도 먹고 입는것과 같은 물질적인 욕구때문에 서로가 반목하고 질투하고 지어는 판가리를 하는것이 피상적으로는 동물의 싸움과 다를바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궁극적인 동력은 역시 인간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마음의 자세인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그림을 그리듯이 투명하게 들여다 볼수 있는것이 아니다. 오직하면 인간 자신이 경험으로 확인한 속담에도 열길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였겠는가. 그만큼 우리는 인간에 대한 판단에서 어떤 류형, 어떤 경우, 어떤 차원에 따라 획일적인 결론을 내릴수 없다. 다 같은 목사라지만 이분은 확실히 하나님의 독실한 신도로서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모시나 저 사람은 지극히 계산적인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인간을 희롱하고 있는것이다. 한국에는 사장님도 많더니 무리로 중국에 쓸어들어 미담과 함께 많은 시비거리를 만들고 있다. 어떤 분은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서까지 중국의 조선족지역사회의 발전과 민족문화의 정립을 위하여 여러모로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있으나 어떤 사람은 백두산이다, 윤동주생가다 하면서 유람차로 신선놀음을 와서는 마치 중국 동포들을 도우려고 온것처럼 한바탕 사장의 호기를 부리고 실속없는 약속을 락서처럼 란발하고는 선량하고 유치한 중국 동포들의 푸짐한 대접에 룡트림을 하면서도 짐짓 조선족들의 랑비벽에 가슴 아픈듯 제쪽에서 핀잔까지 주고는 꼬리를 사려버리고 어떤 놈은 가난하고 무지한 중국 동포들의 황금몽을 장사거리고 알고 본국의 국법조차 무시하고 위장결혼, 가짜초청에 쁘로까로 나서서 엄청난 리익을 챙기고 지어는 사기군으로 전락되기를 서슴치 않고있다. 하여간 다 같은 사장님이래도 좋은 분, 사귈만한 사람과 미운 놈은 있는것이다. 다 같이 한입처럼 고국, 고국 하고 한국을 친절하게 부르는 중국 조선족이지만 역시 그 마음자세는 같지 않다. 반세기를 넘어오면서 친혈육마저 생리별을 해야만 했던 리념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인제 세계 선진국으로 부상하는 고국과 고국의 유지들의 동포애에 기대여 우리의 조선족지역사회와 민족문화를 미래지향적으로 튼튼히 다져갈수 있다는 긍지로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는 공익사업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장결혼, 초청장위조, 밀입국 등 불법수단으로 고국에 들어가서는 고국의 법과 질서를 외면하고 사기와 매음과 도박으로 자신을 망치는 사람도 있다. 한국사람 죽일놈이요, 중국동포 나쁜놈이요 하고 획일적인 흑백론리로 어느 일방을 타매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법과 질서가 있는것이고 법으로 다스리고 제도적인 질서로 약속하는것부터 벌써 이 한무리나 저 한무리의 인간들속에는 모두 좋은 분도 있고 사귈만한 사람도 있고 미운 놈도 있음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죄가 있어 법이 있음을 반증하는것이다.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요, 같은 신분, 같은 차원, 같은 형상을 한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그 나름이라는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자세가 서로 다르기때문이다. 그렇게 정분이 짙던 친구지간에 트럼프 놀다 말다툼에 손찌검이 나는것처럼 놀음이 고름이 되는것도 역시 사람의 마음의 넓이가 다르기때문이다. 생각하는 동물, 마음을 굴리는 동물, 사유로 판단하는 령적인 동물이기때문에 인간은 항상 마음을 깨끗이 세탁하여 서로가 오갈수 있는 열린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여야 너나가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꾸밀수 있다. 그러나 리념적인 갈등이나 정치학적 인생관의 차이에서 오는 대결은 그렇게 봄이 되여 눈이 녹듯이 쉽사리 풀릴수 있는건 아니다. 다른 동물들과 본직적으로 확연히 구별되여 인간에게만 있을수 있는 대결, 그것은 물질적인 충돌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만 있는 정신의 대결이요 그것도 집단의식의 대결이다. 극단적인 정신적 대결이 인간들에게 주는 파괴력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한반도를 보라. 전설에 의하면 산천을 주재하는 바다룡왕이 인간들중에서도 마음이 티없이 깨끗한 신성한 생민에게만 준다는 제일금강을 우리 민족한테 주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때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제일 슬기롭고 용감하고 마음이 깨끗했으리라. 그런데 그후로 바다룡왕이 이제 더 마음이 깨끗한 인간들이 있으면 그때 주리라던 남은 일곱개의 금강을 더는 인간세상에 내주지 않은건 무엇때문이였을가. 우리 민족 말고는 이 세상에 더는 마음이 깨끗한 민족이 없었기때문이였을가. 그 복받은 민족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출연하였고 지금까지도 금강산과 설악산을 보루로 그 사이에 남북의 한 민족 서로가, 아니 한 피줄을 타고난 친 혈육마저 넘나들수 없는 <<3.8선>>이라는 긴 장벽을 쌓아놓았다. 얼마나 많은 리산가족들이 한탄과 설음과 저주의 마음으로 인간이 만들어놓은 <<3.8선>>을 자유로이 날아넘는 새들을 부러워 하였던가. 만물의 령장이 되느니 차라리 창공을 마음대로 비행하는 하나의 새가 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민족이 비운, 물론 따져보면 그것은 계급각성에 따른 리념대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렬강들의 정치대결의 희생품임에 틀림없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격이다. 그러나 아무튼 베를린 담벽이 허물어진 이후로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민족분단의 상징물인것만은 사실이다. 혹시 바다룡왕이 그래서 남은 일곱금강을 더는 인간세상에 내려주지 않은것은 아닐가. 믿는 도끼에 발등 깼다고 생각해서. 아마도 그래서 바다룡왕이 토해낸 한숨이 안개되여 금강산과 설악산에 서리서리 감도는것이리라. 인제 강성했던 하나의 해동국, 복받은 하나의 민족임을 자랑해야 한다. 동족을 적대시하고 세계를 외면했던 금강산과 설악산의 <<빗장>>을 벗기고 문을 활짝 열어 온 세상에 그 아름다움을 자랑해야 한다. 민족의 비운을 가셔버리고 룡왕의 뜻이 다시 동그랗게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민족의 대영합일것이며 또 그래야만 과연 슬기로운 우리 민족이 민족혈연의 통일문화를 다시 지향함을 의미할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제도와 의식의 대립과 정치학적 이질성에 의한 대결에서 한걸음 물러나 하나의 민족과 문화라는 공동분모에 의하여 다시 혈맥을 이어가는, 열린 마음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것이다. 이는 리념과 제도에 의한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과 문화라는 동질성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민족대영합의 바탕을 마련하는 미래지향적인 작업이요, 평화통일의 실천적 일환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세계적인 리념대결이 공존공생의 평화원칙으로 순화되면서 우리 민족의 정감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반세기 넘어 생리별의 아픔을 앓으면서 하나의 민족이 만남이 없는 두줄기의 레루처럼 한 곳을 병행하면서도 서로가 거리를 두고 이질적인 의식구조로 모습을 달리해온 분단력사를 떠올리면 민족의 현실과 극복의 의지라는 열린 인식에서 출발하여 리념적 대결과 제도적 분립과 정치학적 인식의 갈등에서 한걸음 물러나 열린 마음공간을 마련하고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는것이 역시 평화통일을 위한 기초공정이라 할것이다. 만물의 령장으로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인간들 서로간에 열린 마음공간이 있어야 평화로울수 있다. 역시 종이장도 맞들어야 가볍고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나는 법이라 분단의 아픔을 앓고있는 우리 민족은 서로 마음의 <<3.8선>>을 허물고 민족혈연으로 이어지는 열린 마음공간을 마련하여야 통일의 서광을 맞아올수 있다.
34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라 댓글:  조회:1765  추천:1  2009-05-16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빛과 하늘과 땅과 물과 낮과 밤을, 그리고 생물과 짐승과 새들을 그 종류대로 내여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진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여 천지만물 모든것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지키게 하면서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브가 간교한 뱀의 꾀임에 들어 끝내는 그 선악의 실과를 따먹고 나중에 아담도 먹게하여 갑자기 눈이 밝아져 마침내 선악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였다 한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낯도 피해버려 노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고 선악을 알게 된 그들이 이제 또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할까 저어되여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그들이 드나들수 있는 생명나무의 길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범과할수 있는 인간의 육체를 백이십년으로 한계했다고 한다. 만약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을 함께 한, 그래서 언제든지 범과할수 있는 인생이 무한이였다면 인간은 더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것이고 아무런 속죄의식도 가지지 않았을것이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여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자리를 잡음으로 하여 이 세상 인간이 있는 곳에 언제나 선과 악이 쌍둥이처럼 뒤따르게 되고 사람은 마음에 생각할때, 계획할때, 계산할때, 판단할때 언제나 스스로 선과 악의 선택에 몸살을 앓게 된것 같다. 또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인간은 옷으로 몸을 가리우던데로부터 선과 악의 대결속에서 점차 언어와 행위로 마음조차 가리우게 된것 같다. 그런데 부끄러움때문에 가리우는것을 알게 된 인간이 마음에 자리한 악을 가리울때 그 사람은 그가 몸 담고있는 사회와 주변의 인간들에게 시한폭탄과도 같은 큰 파괴력으로 잠재하게 될것이다. 종교의 신자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죄악에서 구제해주는 령혼의 구세주를 상징한다고 확인할때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가 선을 선택하고 령혼을 세탁하는 심상(心象), 곧 마음에 세우는 우상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저주하면서 모든 생명을 홍수로 밀어버리면서도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했던 노아를 살려준것을 보면 마음에 선을 선택하고 령혼을 세탁하는 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곧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자이리라. 령안으로만 볼수 있다는 옥상과 같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았다는 신도가 생활일상에서 지극히 리기적이고 계산적일때 그가 과연 어느만큼이나 하나님을 믿을가 회의하면서 정녕 마음의 악을 스스로 징벌하지 않고 다만 교리에 몸을 감추고 객관적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는 어떤 강박관념이나 리해타산에 지나치게 민감한것이라고 넘겨짚게 된다. 오직 육체와 함께 하는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자만이 악을 단속하고 선을 내세워 스스로 원초적인 욕심에 자갈을 물리고 외부적인 유혹이 불러일으키는 과잉반응을 억제할수 있는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러나 한길 사람속은 몰라도 한치 자기 마음속을 모른다고 할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집단리념 내지 정치학적 인생관에 삶의 전부를 내맡기는 사람은 인간성을 거세당한 로보트같은 존재일뿐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 다만 타력이나 객관적인 장치에 순종하는 자는 사실 마음 한 구석에 타인이나 객관을, 결국에는 자기를 속일수 있는 계산장치를 버리지 않고 있는, 그래서 겉과 속이 수박처럼 다른, 역시 그래서 누구보다 더 간교하고 사악한 인간일수 있다. 권력에 아부하는것은 권력에 기대여 타인을 누르거나 그 자신의 권력욕을 만족시키려는 계산일수 있고 어떤 집단리념이나 신앙의 절대적인 추종자인듯이 자처하는것은 정치학적 인생관에서 출발하여 선택한, 지나치게 현실순응적인 대응방식일수 있으나 역시 양머리 걸고 개고기를 파는 식으로 지나치게 계산적인 마음의 <<치부>>를 감추려는 요사한 미용술일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바로 로보트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범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내 마음에 선이 설수 있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한 자만이 노아의 방주에 오를수 있을것이요, 신앙이나 인생관이나 도덕적 행위에서 실천적 리성에 의하여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자률적인 인간성을 완성해갈수 있을것이다. 인간의 선이나 인간성을 살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나 도덕규범이 때로는 도리여 인간의 선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인간성을 억압할수도 있는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이다.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는 먼저 선불금을 내야 입원이 될수 있다. 그런데 먼저 입원을 시키고 나중에 입원비를 가져와야 할 딱한 급성환자나 뜻밖의 사고를 당한 환자도 있다. 그러나 먼저 입원을 시키면 나중에 치료비를 질질 끌어대는 환자에 질겁한 병원측은 천편일률로 제도를 고집하려 한다. 이런 경우가 있으나 저런 경우도 있으니 과연 제도를 내세우는것도 당연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자식교육에서 아이더러 하루 일정을 사전에 부모한테 이야기할것을 요구하나 때로는 아이들한테도 계획외 활동이나 사정이 생길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조차 부모는 속으로는 묵인하면서도 아이한테는 어떤 경우라도 사전에 부모한테 알리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번 두번 먼저 일을 보고 나중에 청가맡다보면 그저 그렇다 싶어 담이 커져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수 있기때문이다. 아직 식별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리유만 충족하게 세우면 먼저 알리나 후에 알리나 별문제더라고 확인한 나머지 사실을 꾸며 부모를 얼려넘기는 거짓말까지 배워내게 되는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틈서리를 주지 않기 위하여 부모는 절대적인 원칙으로 아이를 교육하는것이다.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하는 까닭일가. 그래서 암세포를 떼낸다는것이 그만 주변의 산 세포까지를 베여내는것과 같으리라. 특히 악의 제거를 위하여 악의 수단이 필요할 때 그 악의 제거와 함께 선마저 악의 수단에 상처를 입게 되는것이다. 바로 악의 수단을 요청할때 악의 제거를 위하여서는 선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는 당연성을 내세우기때이다. 쥐를 치려다 쌀독을 깨는 경우, 그래도 그 동기만은 정당한것이다. 그러니 타력에 의한 강박관념이나 내 마음밖에 존재하는 <<하나님>>은 도저히 하나의 육체에 선과 함께 공존하는 악을 완전히는 베여버릴수 없는것이다. 오직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나님>>은 내 육체를 타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시시각각으로 내 령혼에 침투하여 기회를 노려 머리를 쳐들려는 악을 눌러버리고 선이 굳세게 일어설수 있도록 뒤를 받쳐줄것이다. 선과 악이 한 육체에 자리를 잡고있다지만 열심히 령혼을 세탁하여 그 마음의 지옥에 악을 가둬넣고 선이 령혼과 육체를 집정할때 그래도 그는 한 선인이 될수 있다. 죽음을 앞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를 뉘우치고 인정에 목이 메는것은 인간들 서로가 악의 마음까지 동원하면서 쟁탈하던 모든 영욕이 육체와 함께 하는것임을 깨달은 때문이리라. 그런데 죽은 자의 덕성을 칭송하는 산 사람의 마음도 과연 죽음을 앞에 두고 새삼스럽게 그 모든 영욕이 육체와 함께 사라지는것임을 깨달은 때문일가. 산 사람의 육체에는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자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를 완승할수 없는 불행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한다. 그냥 선한 마음뿐이라면 그 마음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나 알수 없는게 인간의 마음이라지만 하나의 육체에 동거하여 생사를 함께 하는 선과 악만은 그 육체에 담긴 마음의 건강상황을 알것임은 분명하다. 마음에 길을 물어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그 마음의 건강상황이 모든 인생판단과 현실선택의 정확여부를 결정할것임은 당연한것이다. 인간대 인간은 서로의 감옥이라고 하는것은 물론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함을 어쩔수 없이 승인하는 말이겠으나, 그러나 그런 말을 시러베장단 치듯 일상용어로 스스럼없이 쓰면서 친구나 형제나 지어는 부부사이를 가볍게 스친 마찰에마저 적용하려는 사람들을 볼작시면 그것은 역시 내 마음에 비추어 타인의 마음을 꼬집는것이요, 그러면서도 짐짓 자기는 관조자의 립장에 서서 이웃의 싸움에 두쪽이 다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듯 공정한체 하는 사이비신사의 처세철학임에 다름아니다. 내 마음의 건강을 지켜주어 악을 전승하고 선을 주장하게 하는것은 오직 내 마음속에 모신 <<하나님>>뿐이다. 그 <<하나님>>은 나의 육체와 마음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언제 어디서나 시시각각으로 나의 마음에 길을 가리켜 줄것이다. 계산적이고 리기적인 장사군의 속궁리로 죄를 사면받거나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는 자는 썪은 바줄을 타고 하늘을 오르려는 호랑이와 같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냥 아무런 구구계산이 없이 정신건강에 인생의 전체적인 의미를 자리매김해줄 때 그는 과연 한 선인이다.
33    망각의 미학 댓글:  조회:1784  추천:0  2009-05-16
 몇년전에 대학의 동창생 서영빈씨가 수필<<실수의 미학>>을 써서 수상한적이 있다. 그때 그의 수필을 읽고 마음으로 크게 동감했었다. 인간이 한 자연인으로 태여나 부모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면서 한 사회인으로,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번식과 생존이라는 본능적인 동물성에서 삶과 존재라는 리성적인 인간성에로의 변질과정이다. 그 과정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잘못 들어 에돌아 가고 얼마나 많은 실수로 발목을 접지르거나 타인의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타인의 관용하는 마음에 기댈수 없거나 구원을 요청할수 없는 인간은 고독한 인간이고 사회와 무리에 외면당하고 버리워진 인간일것이다. 이는 대개 자기중심적인 리해타산과 지극히 보수적인 인간자세를 취하는 인간들이 받게 되는 대접이다. 그 자신이 남을 너그럽게 읽어주지 못하고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용서해주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때문에 받게 되는 보응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민족과 나라의 운명까지 결정하는 극한의 대항, 이를테면 전쟁과 같은 퇴로가 없는 생사의 선택에서는 악에 맞서는 악의 수단이 필수부가결(必需不可缺)할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관용과 너그러움과 참을 인자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 이는 강도가 로략질을 해서는 되고 당하는 자는 반항해서는 안된다는 강도리론임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값은 피로 값는다>>는 <<명언>>을 너무나 선택없이 우리의 일상에 활용하고 있다. 친구사이에, 이웃사이에, 지어는 형제사이에마저 조그마한 알륵을 가지고 한 하늘을 이고 살수없는 철천지 원쑤처럼 이를 사려물고 어떤 갚음에 악의 수단까지 서슴치않는다. 우리의 일상에 많은 알륵은 어떤 실수나 오해에서 기인된다. 그럼에도 그것이 풀리지 못하고 그냥 서로가 반목하고 시기하고 마침내 <<피값은 피로 값는다>>는 악의 수단까지 동원하게 되는것은 벌써 내 마음에 관용과 너그러움이 없기때문이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마음자세를 정리하는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어떤데 네가 어떻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에 타인의 잘못을 확인하려 든다. 무작정 네가 잘못했으니 빌어야 용서한다는 일방적인 자기본위주의 앞에서 누군들 마음이 개운할수 있고 너그러운 관용을 보일수 있겠는가! 아직은 사회문화적인 문명이 미숙한 사회나 민족일수록 인간들지간의 관용과 너그러움이 결여하고 풍속이나 도덕적 규범에 의한 책벌이 악렬하고 지어는 대항정서와 악의 수단이 범람하는것이다. 소학교시절에 읽은 책이고 또 워낙 책가위가 떨어져나가고 갈피들이 보풀이 일대로 인 책이여서 제목은 떠올리수 없는데 하여간 량산의 이족부락사회를 쓴 책이였다고기억된다. 이쪽 부락의 처녀가 저쪽 부락의 총각한테 시집갔는데 결혼식날에 식장에서 누가 방귀를 뀌는바람에 처녀가 부끄러움을 못이겨 자살하고 만다. 그것이 두 부락이 <<피값은 피로 값는다>>는 동족상잔의 피바다를 만드는 발원이 된다. 두 부락은 서로가 친가로부터 원쑤가 되여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른다. 승부를 가를수 없이 상잔에 상잔을,살생에 살생을 거듭하다가 나중에 그래도 담판으로 화해를 가져온다. 아직 문명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다만 풍속과 절대적인 도덕률에 의해 인간을 약속하고 규제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라도 용서할수 없는 죄악으로 락인받을수밖에 없는것이다. 사회적으로 극단적인 집단리념과 정치학적 인생관이 한 개인의 삶을 절대적으로 간섭하던 때 우리도 흑백리론과 단순한 가치판단에 숨가삐 살아왔었다. 어떤 집단리념에 충실하고 정치적각성에 인간성이 외면당할때 우리의 눈에 보이는것은 다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일과 나쁜 일, 옳은것과 그른것, 원칙적인것과 무원칙한것, 찬성할것과 반대할것, 긍정할것과 부정할것 등 극단적인 판단일뿐이다. 이성지간의 애정, 결혼은 지극히 천륜적인것인데 얼마전까지도 늙은이들의 재혼은 망발에 가까운 망칙한 짓거리로 비난받았고 마음과 마음의 결실인 결혼에 사랑이 부재하고 성격을 비롯한 여러가지가 상충하는 상황에서 결혼이 오히려 인생선택의 실수일수 있고 리혼은 각자의 인생을 존중하고 인격을 세워주는 해탈일수 있음에도 사회는 덮어놓고 그 도덕성을 문책하고 신변의 인간들은 기어이 어느 일방의 잘못을 확인하려 든다. 붐비는 차안에서 발등을 밟는것과 같은 실수는 너만이 아닌 나도 늘 범할수 있는 실수임에도 마치도 고의적인 침해를 받은것처럼 눈을 부라리거나 지어는 드잡이까지 하려 든다.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 내 마음도 편안할수 있다. 타인의 실수를 용서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놀려주면>> 어느땐가는 나의 실수가 타인의 웃음속에 용서받을수 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줄 알고 너그럽게 용서할줄 알려면 우선 자기의 마음을 비울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망각의 미학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본다. 군체동물인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노라면 어떤 실수거나 오해거나 무의식적인 언행에 의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수 있고 지어는 한때의 알륵때문에 고의적인 침해를 받을수도 있다. 세월의 빛이 바래짐에 따라 이런 마음의 상처나 알륵을 기억의 쪽대문에서 끄집어내여 망각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몇년전에 이사짐을 싸면서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다가 소학교 일학년부터 대학까지 쭉 써오던 일기책을 끄집어내게 되였다. 이것저것 펼쳐보노라니 문득 마치도 이미 팽개쳐버렸던 낡은 장부를 다시 들춰보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가 내 마음에 어떤 빚을 졌던가,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가, 누가 어떤 실수를 했던가, 누가 어떤 망신을 했던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헐뜯었던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해쳤던가...이십년, 삼십년을 두고 전혀 기억에 잊혀졌던 일들이 남의 비밀을 훔쳐본듯이 새삼스럽게 마음의 빈자리에 내려앉았다. 공연히 마음이 불쾌하고 번거로워졌다. 제발로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오물구덩이에 뛰여든것 같은 그런 기분이였다. 서로 만나면 반갑고 형제처럼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동창들과 친구들을 두고 기어이 내가 허물을 찾고 있는것만 같았다. 내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야 어찌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물론 일기라는것이 빚문서처럼 어느때든 진 빚을 받아내기 위해 기록하는것이 아니고 또 그때 그때 있었던 일을 적으면서 자기의 마음자세를 바로잡는 작업을 하는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세월의 쪽배에 실려 기억속을 멀리 떠나가버렸던 일들을 먼 후날 다시 새삼스럽게 기억의 우물속에서 떠올릴수 있다는것만으로도 마음이 석연치가 못했다. 꺼꾸로 되는 이야기지만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 먼 후날 다시 고향을 찾았을때 모진 생활고에 찌든 고향친구들과 생기없이 시들어가는 고향모습을 보고는 그냥 마음속에 아름다운 고향모습을 간직하기보다 못했다고 아프고 쓸쓸한 심정을 토파할때 추억도 역시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필요할뿐이다. 바로 그 추억속에 내 마음을 쓸쓸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모든 일들을 망각하려는 추구가 있는것이다. 소학교시절, 중학교시절, 대학교시절...이미 오늘과 아득히 멀어진 지난시절의 추억을 더듬을때 우리는 그냥 어떤 그리움과 아름다움과 애틋한 정을 담아올린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와 멀어진 일과 인간에 대해서는 충분히 너그러움과 관용과 용서로 마음의 여유와 인간애를 되찾을수 있는것이다. 산 사람이 죽은 자의 덕성을 기리는것은 산 사람의 인격론리로 자리매김하고있다. 인제 그런 인격론리를 산 사람사이에서 펼쳐야 한다.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를 사랑해주고 서로를 너그럽게 관용하는 인간애를 키워가야 한다. 지구촌의 인구가 몇십억은 되는데 내가 알고지내는 사람은 요만큼밖에 안된다는 안타까움에 그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인정속에서나마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찾는것이 자기를 위해서도 바람직할것이다. 잔치집에 가서 기뻐해주고 제사집에 가서 슬퍼해주려 해도 나와의 인연이 없으면 문밖이다. 산속의 고독보다는 무리속의 고독이 더 큰 고독이다. <<함께 하는 세상>>에 서로가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 즐기려면 열린 정신공간을 마련하고 투명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여러권의 일기책을 몽땅 처분해버린것은 나의 극단적인 행위 내지 순간적인 충동일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아무튼 나는 그때로부터 어떤 무거운 짐을 부리운듯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무위의 경지에서 모든 영욕을 버리려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하고 참된 인생수련에 고심할수 있었다. 득달이 아니라 고심이다. 인생을 마감하면서도 득달은 못하겠지만 고심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유족하다. 사람은 그래도 잊으며 살아야 한다. 마음에 맺혔던것, 타인에게 가졌던 한을 세월의 빛바램속에서 기억의 저 뒤안길에 던져버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인간애를 키워갈때 망각의 아름다움을 만끾하게 될것이다. 실수가 생겼을때, 오해가 생겼을때, 알륵이 생겼을때 망각을 위한 악수를 나누라.
32    동물의 성으로 본 인간의 본성 댓글:  조회:1951  추천:0  2009-05-16
         동물의 성생활에 대해 관찰한 연구결과를 보면 령장목의 으뜸으로 치는 인간의 본래의 모습-동물적인 인간의 본성도 엿볼수 있더라. 그중에도 인간과 같은 영장목에 속하는 성성이과에서 고릴라가 가장 인간과 닮아있다고 하는데 그것들의 가족구성과 성의 추구를 보면 저것이 인간의 태초의 모습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릴라사회는 철저하게 <<일부다처>>의 가족으로 구성되였는데 <<가장>>은 성에서조차 절대적인 지배권과 소유권을 가진다고 한다. 다 성장한 가족성원들은 <<가장>>의 성행위를 보면서 자위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금번에 외면당했던 암컷은 다음번에는 <<가장>>의 사랑을 받을수 있으나 수컷은 완전히 성의 소외자가 되여 자위행위로 애타는 가슴을 달래고 마침내는 독립생활에 나선다고 한다. 가족에서 당한 성억제때문인듯 독립생활에 나서는 첫 행위가 짝을 얻는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릴라사회에서 중매결혼이란 있을수 없는 일이고 직접 <<처녀>>와 련애하거나 랍치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짓이 다른 가족에서 <<엄마>>의 젖먹이를 빼앗아 <<엄마>>를 유인하는것이라고 한다. 젖먹이를 찾는데 가족성원들은 나서지 않고 <<엄마>>만이 하늘끝까지라도 찾아간다고 한다. 결국 젖먹이는 죽음을 당하고 <<엄마>>는 총각의 아내가 되고만다고 한다. 젖먹이를 죽이는것으로 <<엄마>>의 미련을 철저히 없애고 새로운 욕망만을 남게하는 극단적인 악의 수단이라 할것이다. 조물주가 생명을 만들때 생명보존의 법칙을 성의 결합으로 만든것이 잘못일것이다. 고릴라가 죽은 아기에 대해 단념하고 다시 성적결합으로 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명보존내지 종족번식도 성을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조물주의 희롱이 아닐수 없다. 프로이드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성으로 풀이한것은 동물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볼때 지극히 원색적인 파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문명이 인간들의 삶에 아름다운 옷을 입힌 오늘에도 의식주는 역시 삶의 기본적이고도 우선가는 욕구이다. 그러나 생명이 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인간 역시 고릴라처럼 성의 욕구가 가장 기본적이고 본원적인 욕구일수밖에 없다. 죽음의 동굴속에서 두 남녀가 재생의 등불이 꺼져버린 상황에서조차 성의 희열을 만끽하였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지만 다만 오늘에 와서 성이 더는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삶의 윤활제와 같은 역할도 하기때문에 그것에 본능적인 행위자체보다는 더 심각한 사회적인 인식적의미가 매겨졌을뿐이다.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성악이니 성선이니 하고 시야비야하는것은 어찌보면 순소비적인 입씨름에 지나지않을것이다. 관념적인 립장에서 자기의 정당성을 립증하려는 목적만으로 이런 시비를 한다면 그냥 동물의 본성을 관찰하는것만으로도 결론을 얻을수 있을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비가 사회적인 화제로 떠오를수 있는것은 인간은 오랜 세월을 진화해오면서 이미 동물의 세계를 떠나서 그들을 정복하고 주재하는 주인으로 군림하여 광활한 지구마저 하나의 작은 촌락으로 전락시킨 총명과 문명때문이다. 뇌의 고도로 되는 발달은 상품포장처럼 인간을 극히 위선적이게 하였다. 그로하여 인간은 동물의 사회보다 더 교활하여 혹은 동물보다 더 잔인하게 동류상잔하고 혹은 더 지혜롭게 질서를 잡아나간다. 강간, 살인, 폭력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본성이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형태일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직행로에서 급회전하여 사냥물을 찾는 택시나 십자거리에서 신호등을 무시하고 종횡무진하는 차들을 보고는 미개인취급을 하며 욕설이지만 급한 일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도리여 감사한 마음이다. 인간의 사치한 리기심이다. 기차역같은 공공장소에서 정탐처럼 기둥뒤에 숨었다가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던지는 사람을 죄인 잡듯 덜미잡아 벌금을 안기는 관리일군을 교활하다거나 치사하다고 욕하는 사람은 많지만 너나가 공공위생을 지키면 그들도 <<하강(下崗)>>을 면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동물적인 본성을 인간성으로 순화시키는 장치가 바로 도덕과 법과 질서이다. 인간의 상호관계가 언제나 욕망충족에 지배된다면 그것은 동물성에 다름아니다. 인간 특유의 체면과 도덕적구실과 법에 의한 질서확립은 인간이 평화를 찾기위한 수단이고 역시 자아보존을 위해서도 요청되는 장치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단지 류혈싸움만이 아니라 한치의 혀로도 타인을 죽음에로 몰아갈수 있기때문이다. 강간, 살인, 폭력의 피해가 타인의 일로만 생각될수 있겠는가. 때문에 법과 도덕과 질서는 인간 일반에 대한 약속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 관념도덕대로만 살수 없고 법의 질서조차 그냥 변할수밖에 없는것은 그것이 결코 확실한 가치기준이 아니라 다만 불특정인간들이 지켜야 할 게임법칙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이른바 객관적이고 시대적인 집단의지로 어떤 가치를 강요한다는것은 다만 피해의식 내지 강박관념만을 절감시킬뿐이다. 축구에서의 황패, 홍패벌칙은 대항적경기에서 폭력적피해를 방지하고 게임을 게임으로 끝내기 위해서 필요한것이다. 그저 그럴뿐이다. 그런 게임법칙이 없으면 도저히 게임을 할수가 없고 폭력적피해를 내가 입을수 있다는 판단에서 선수들은 그 게임법칙을 합리하게 받아들이는것이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기성틀을 마스기 위하여 새로운 틀을 만드는것이다. 법, 도덕, 질서의 변화 즉 기성틀 마스기는 그 기성적인것의 시대적 한계성에 기인하는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런 기성적인 틀이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지켜지고 그리하여 그 기성적인것들의 고루함이 사회적인 보편화제로 되였을때 틀마스기는 불가피한것이고 사회비판층의 승리는 비로소 새로운 틀을 구축할수 있는것이다. 한밤중에 교통경찰이 자리를 비운때에도 신호등에 따라 움직이는 차들이 많아지고있는것을 보면서 교통규칙위반으로 내는 벌금도 적어졌겠다고 생각했다. 백두산의 쓰레기줏기를 보면서 오래지않아 공공장소에 포장이 고운 쓰레기통만 놓으면 벌금을 노리는 관리원은 <<하강>>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서울에 가면 벌써 공공버스에 차장이 없어도 승차권을 속여먹는 사람은 볼수 없는것이 우리의 어두운 삶의 현장을 반성하게 하는 현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목각남편>>을 모시면서도 재가하지 못하는 오청화는 없고 남녀칠세부동석을 도덕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없다. 기성의 틀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틀이 자리잡는 과정은 인간이 자아완성과 인간성해방을 실천해가는 과정이다.
31    가난뱅이와 게으름뱅이 댓글:  조회:1811  추천:0  2009-05-16
    퍽 몇해전에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글이라고 생각되는데 오늘 새삽스럽게도 문득 기억의 쪽문을 열고 나오는 차에 한번쯤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보지 않을수 없게 되는 것이다.동냥으로 살아가는 한 비렁뱅이가 어느 오막살이같은 집에 동냥주머니를 들이대고보니 그 집에서는 입에 거미줄이 칠 지경으로 가난을 밥먹듯하고 있더란다. 배가죽이 뒤잔등에 가 붙도록 주린 창자를 붙안고 앉아있는 그들을 보노라니 너무도 민망하여 비렁뱅이는 돌아서 나오더니 밖에 놓아두었던 쌀자루를 들고 다시 들어가 그들한테 주면서 이걸로 얼마간 주린 배를 말리라고 했단다. 비렁뱅이가 가난뱅이를 구제했다는 아이러니이다. 인생을 좀더 적극적이고 전진적으로 꾸며야 한다고 생각하면 비렁뱅이 삶도 그리 신통치는 않겠으나 재난이나 죽음의 현장에서조차 아무런 방어도 대응반응도 없는 게으른 인생이 가난을 몰아온다고 확인하면 그만큼한 게으름뱅이도 다시 없을것이다. 혹은 초인간적인 재난이 한 인생을 가난의 구렁텅이에 밀어붙이는 비극도 있을수 있으나 죽음의 현장에서 부활의 의미를 적어가는 그런 비극적 인간은 삶의 자세에서는 어디까지나 강자이지 가난뱅이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정신이 뿌리뽑힌 사람이야말로 <<참>> 가난뱅이이다. 게으름이 낳은 가난이야말로 인생몰락의 종착역이다. 그런 인생은 역시 생명조립에 구제불능의 문제가 있는것이다. 친구의 누님은 순대따위 음식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데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음식물을 장만해서는 밀차에 싣고 시장에 나갔다는 저녁이 이슥해서야 귀가한다. 그러면서도 또 가무를 도맡아 해야 한다. 그런데 매형되는 사람은 아주 젊은 늙은이가 돼버렸다. 매일매일을 마실을 다니거나 늙은이들의 장기판에 끼여붙어 옥신각신 얼굴을 붉히기도 하면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줄 모른다. 정말 가난할수록 기와집 짓는다더니 그만큼 셈평이 좋은 인생도 있을가 싶다. 그러나 마음에 톱질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마비된 인생은 산 송장임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하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안해가 그에게 찾아준 현주소는 하나의 무덤이라고 할수밖에 없을것이다. 무덤속에서 살아움직이는 송장, 가난의 때를 벗고 인생부활의 의미가 돋을 그러한 가능성을 안해가 열어놓고있음에도 그 자신은 그 가능성마저 열린채로 방치해두고 다만 어제, 오늘, 내일이 무의미한 반복만을 거듭하는 마비된 인생, 그것은 인생자체가 랑비된 생명의 찌꺼기임에 다름아니다. 극적인것은 그 친구한테 또 쌍둥이 누이동생들이 있는데 역시 음식물장사를 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보배로운것은 그들 쌍둥이는 두집 부부가 모두 꼭 맞물린 치륜처럼 일손이 척척 맞아돌아가는것이다. 삭막한 세속의 풍진속에서도 삶의 자세를 흐트림없이 적극적인 대응반응을 보이면서 생의 강한 실천능력을 키워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과 함께 게으른놈의 가난은 죽어야 끝난다는 명언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번 추석에 아버지산소를 찾아 도문으로 갔다가 기차역 앞거리에서 구두닦기를 하는 조선족처녀를 보고 크게 감동했었다. 체면의식이 남달리 발달한 우리 민족은 빈부귀천에 너무도 과잉반응을 나타낸다. 비민중적이고 비속세적인 고루한 량반의식이 우리의 의식의 주근이 되여버려 굶어도 체면 하나만은 버리지 못하는데 큰 길가에 앉아 체면무릅쓰고 길가는 나그네의 구두를 열심히 닦아주고있는 처녀, 그냥 부드럽고 조용하고 깨끗한것이 우리 조선족녀성의 참모습이라면 그 처녀의 처신을 어떻다 해야 할가. 민족성에 대한 반역? 량반의식에 대한 반발? 시대적 변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의식의 개혁? 아무튼 인생의 아픔을 갈무리하면서 자신의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열심히 인생을 실천해가는 모습은 루추함이 아니라 그냥 대견스럽기만하다. 물론 한 인생에는 현실의 삶과 리상적인 삶이 언제나 쌍둥이처럼 동반한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흔히 실천능력보다 훨씬 크다. 사람들이 쉽게 순금보다 도금에 마음을 빼앗기는것도 바로 지나친 욕심의 작간때문이다. 현실의 삶을 외면한 리상적인 삶이란 그 자체가 벌써 인생의 무덤이다. 그만큼 현실의 삶을 외면하고 인생의 실천능력을 초월한 리상이나 꿈의 종말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에 따라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할수도 있고 인생부활을 상징할수도 있는것이다. 우리의 고전에 <<흥부전>>이 있다. 전통적인 문학해석으로는 악덕의 상징인물인 놀부와 선량함의 상징인물인 흥부의 형상을 통하여 죄는 지은데로 가고 덕은 쌓은데로 간다는 인과보응설을 말한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는 이른바 비천한 일은 하기싫어하면서 토끼가 부딪쳐죽은 나무그루를 지키고앉은 인간들이 많은데 어찌보면 제비다리를 비끄러매주고 벼락부자가 된 흥부를 추종하는 의식이 모름지기 자리매김한것 같다. 언제는 누군가가 돈 많은 한국인을 사경에서 구해주고 보은을 받았다는 말에 왜 나한테는 그런 행운이 내리지 않는가고 하면서 무심한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그냥 우스개 소리를 한다고 받아줄수 없을정도로 너무나 진지하고 안타까운 모습이였다. 또 누구는 2원짜리 유상권 한장으로 승용차를 소득했다는 말에 욕심이 팽창하여 도박심리를 발동했다가 본전만 몽땅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보물을 줏지나 않을가 은근히 가슴을 달구는 못난 인간도 없지 않을것이다. 지나치게 팽창한 욕심이나 현실의 삶을 외면한 <<리상적인 삶>>은 그대로 게으름을 낳는것이고 그 게으름이 가난을 몰아온다. 그런 요행심리는 삶을 보다 전진적이고 실천능력에 맞게 조립하여 현실에 대응하려는 마음을 죽여버리기때문이다. 우리 말에 <<게으른 년이 삼가래 세고 게으른 놈이 밭고랑 센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재난이나 초인간적인 힘의 희롱도 아니고 그냥 달을 따려고 떼질쓰는 천진한 어린이의 짓거리같은 인생자세가 문제라면 그런 가난의 뿌리는 바로 정신적독방이 없는 그것이고 그런 가난뱅이의 별명은 바로 게으름뱅이이다.
30    아이한테는 부모가 거울이다 댓글:  조회:2076  추천:0  2009-05-16
   우리는 흔히 어린이들을 미래의 주인이요, 나라의 동량이라고 한다. 사실 그들의 부모가 된 우리도 부모의 그런 관심 내지 관념에 약속하면서 자랐다. 제자식 룡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천하 부모의 사랑심이겠지만 꼭 그렇게 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어느정도 벌써 사랑을 넘어선 리기적인 강박관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된 우리가 누구나 룡이 되여 자식을 룡으로 키우려 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런 관념에 따르면 룡이 못된 우리와 같은 부모는 자식을 교육할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그예 자식이 해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모로서는 염치없는 과대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성공하지 못한 부모는 과연 자식을 교육할 자격이 없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린이를 교육하면서 교육관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흔히 어린이들의 장래를 설계하면서 흔히는 자기가 이루지 못하였던 바를 성공시켜려 하는데 아예 어린이의 특장, 기질, 기호 내지 지력수준을 외면한대로 그냥 부모들의 설계도에 따라 자식이 성장하기만을 바라고 또 사회적 병페로도 되는바와같이 지식제일, 점수제일을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또는 유일한 내용으로 일괄해버린다. 그 결과는 오히려 어린이들의 건실한 성장을 이끌지 못하고 나중에 부모 자신의 지식수준의 제한으로 자식교육에 실패감을 느끼며 자기 무안에 될대로 되라고 두손 들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은 부모가 자식에 대한 교육은 결코 공부가 전부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것은 자식을 훌륭한 사회성원으로 성장시키는 하나의 수단임에 다름아니다. 우리 부모들한테는 사회나 교육기관에 앞서 더 많은 범위에서 자식에 대한 교육을 틀어쥐여야 하며 또 어쩌면 그것이 어린이가 정상적인 사회인간으로 성장하는데는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연인으로 태여나서 사회, 문화인으로 성장한다. 갓 태여난 영아는 한 생명체에 불과하나 부모슬하에서 점차 사회, 문화인으로 전변된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이 그 자체가 벌써 부모, 다시말하면 가정교육이 어린이의 육체적 성장뿐만아니라 정신적 성장에서 가지는 중요성 내지 절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건강한 정신세계는 직접 어린이의 보기가 되는 것이고 성인사회의 한 축소물이자 어린이가 몸을 담고 생활하는 작은 사회인 가정의 투명도는 그대로 한 어린이의 미래를 결정할수조차 있는 것이다. 가정교육의 관건은 어린이들의 정신건강을 틀어쥐는 것이다. 과학적이고 빈틈없는 정신건강에 대한 교육은 육체건강을 비롯한 모든 교육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이는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 만큼은 어렵고 부모 자신의 꾸준한 노력과 자아수양을 요청하는것이다. 어린이가 태여나면서부터 시종 보기로 되여온 부모의 언행은 모방을 통해 그대로 어린이한테 교육적 효력을 발생한다. 말하자면 자연인으로 태여나 어른들을 <<흉내>>내면서 사회,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그 애의 심령세계에 아직은 파란 잔디뿐인데 인제 그 잔디밭을 파헤치고 무엇이 자라날수 있을가 하는데는 어쩔수 없이 그 애의 흉내의 대상물이 되여버린 우리 어른들의 형상이 거울이 된다는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애 앞에서 일거일동을 애써 아름답게 꾸미려고 모지름을 쓴다. 마치도 흰종이에는 어떤 색갈이나 다 옮을수 있듯이 고운 말, 미운 말, 옳은 행동, 그른 행동이 죄다 그애한테 <<전염>>될수 있기때문이다. 특히 소학을 지나 중학에 진입하면 어린이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뚜렷해지면서 호기심에 찬 질문도 많아지고 성인사회에 대한 불신임도 훨씬 커지는듯 싶다. 그러기에 부모들도 자아수양에 힘쓰면서 매사를 얼렁뚱땅 어른행세를 하지 말고 충분한 리유를 갖고 어린이가 정신적으로 쾌히 접수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 하얀 백지같이 깨끗한 동심에 우리 어른들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는가 아니면 성인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그대로 락서하는가 하는것이 성장하는 어린이들한테는 거의 운명적인것이다. 그만큼 부모는 어린이 교육에서 자기의 언행이 보기가 됨을 늘 자각해야 한다. 사실 성인사회에서도 타인에 대한 설복력은 그 설복자의 인격에 정비례함은 투명한 리치이다. 하물며 바야흐로 성인으로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성인을 거울로 자기를 비추어보려는것은 거의 본능적일 수 있다. 어느땐가는 소학교 학생이 깨여진 창문을 보고 그냥 깨여진 세상을 보았다는 시를 썼다는 어른들의 감탄을 듣고 도리여 마음속에 이 세상 제일 깨끗하고 파아란 동심마저 어른들의 락서로 하여 어지러워 지고 마구 찢겨지는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과연 이 인간세상이 어느만큼은 그냥 타락의 낭떠러지를 굴러내릴런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도교원들의 성인화교육의 결과이든 이 사회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아픔과 어두움과 비리와 부정과 폭력과 물욕을 절감켜했든 아무튼 깨여진 창문을 보고 깨여진 세상을 보았다는 너무도 기발한 착상에 어른들은 한번 깜짝 놀라서 저들의 성인사회나 저들이 어린이들한테 마련해주고 있는 성장환경을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문학의 힘이 정신력에 있을진대 나어린 학생이 그토록 사회의 아픔내지 허황한 세상을 보았다는것은 어쩐지 우리 아동문학이 너무나 성인화교육을 하고있었지 않았나 하는 근심이 어지려운 사회현실 다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음으로 자식의 공부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교육체계가 단일한 응시교육으로부터 다양한 자질교육으로 바뀌움에 따라 부모들의 교육작용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질교육은 어린이의 건강성장의 모든 인소를 내함하기때문에 다만 사회와 학교의 직능에 의해서만은 완성할 수 없기때문이다. 어찌보면 법과 질서로 약속하는 사회와 지식을 전수하는 학교보다는 어린이의 일상을 책임진 가정에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전통적인 교육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것을 가장 높은 목표로 삼고있지만 사회의 진보는 이미 우리더러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실제문제를 풀이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능형 인재를 배양하는데 있다는것을 내다보게 한다. 이 관점으로 다시 사회를 조명해보면 확실히 중국의 전통적교육은 기나긴 봉건사회로부터 줄곧 책을 중시하고 실제를 홀시하며 주입하는것을 중시하고 계발하는것을 홀시하며 기억하는것 또는 외우는것을 중시하고 사고하는것을 홀시하며 지식을 중시하고 능력을 홀시하는 교수관념과 체계를 키워왔다. 그러나 또 지금 아무리 교육체계가 자질교육으로 전변되였다 하더라도 학교의 주목적은 의연히 어린이들의 지력을 개발하고 지식을 키워주는것임은 틀림없다. 년령단에 따라 발굴되여야 할 지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선인이 연구하여 체계화한 지식을 배워내지 못하면 인간선택에 앞서 벌써 시대에 도태되고말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은 역시 공부를 기본으로 하게 된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어린이의 사유공간을 넓혀주고 정신건강을 보장해주는것은 많이는 부모를 핵으로 하는 가정에서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것이다. 이는 부모도 간접적으로 자질교육의 일익을 맡고있음을 말한다. 간접적이라고 함은 사회직능적 의미에서 매겨지는것이지 사실은 어린이를 놓고 대상적으로 결론을 내리면 지극히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책임을 지고있는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의 피줄인 자식에 대해 그 누구보다 보호의식이 강렬한만큼은 자식의 건강한 성장에 미룰수 없는 책임감을 가져야 할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본성적인 부모사랑이거나 맹목적인 과대욕망만으로는 자식교육을 훌륭하게 할수 없다. 물론 백사람이 백가지 성미라고 시대가 다르고 대상이 구체적인만큼 만병통치의 약이 없듯이 꼭 자식교양에 두루 맞춰댈수 있는 교육방법 내지 교육경험이란 있을수 없다. 다만 부모의 지극한 책임감과 꾸준한 자아수양에 의해서만 문제를 옳게 진맥하고 과학적으로 자식을 교육할수 있을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보기이며 거울이다. 깨여진 창문을 보고 깨여진 세상을 보았다는 풍부한 상상력에 앞서 어린이들은 부모로부터 벌써 사회의 한 축도를 보게 되고 삶의 자세를 정립하고 정신적인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것이다.
29    입맛이 변했습니다 댓글:  조회:1935  추천:0  2009-05-16
어느 유치원에서 겨우내 움에 저장해 두고 어린이들에게 먹이던 감자가 진달래 피는 새봄이 찾아와 싹이 움트도록 무드기 남게 되였다. 이때쯤이면 음지에서 시들고 속이 비여가던 가을 저장물들은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봄남새들에 밀리워 쓰레기장에 버려지는것이 건강원리가 음식문화에 자리매김함에 따라 거의 상식화되고 있다. 그런 건강원리를 교육자가 모를리는 없겠지만 이 유치원에서는 세간살이를 어찌나 물이 못나게 하는지, 아니 저장이 계산적이 못되였으니 그게 아니라 아까워 버릴수 없다거나 랑비는 죄악이라는 순수한 절약원칙에 립각하여 생각을 굴리던 끝에 어린이들한테 감자떡을 해 먹이기로 하였다. 귀하면 보배라고 어쩌다 해 먹이는것이니 생활개선인셈이다. 하루종일 팔이 시큰해나도록 감자를 씻고 깎고 썰고 갈고 하느라 허기진 대가로 어른들이 먼저 지져먹는것도 당연한 일이다. 겨가루가 섞인 옥수수떡이래도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족했던 어른들은 크게 입맛이 틀리는 것 없이 감자떡을 맛갈스럽게 먹는다. 그런데 여기에 유치원어린들이 등장하였다. 한 교양원이 학부모가 오지 않아 그냥 남아있는 두 어린이를 데려온것이였다. 래일의 감자떡소비자들한테서 먼저 간식효과를 알아보자는 심사였다. 이런 떡을 처음 보는 애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대롱대롱 매달렸고 입에는 군침이 감돌았다. 그애들에게 떡을 쥐여준 어른들은 결론이 궁금하였다. 마치도 품평가들앞에서 자기의 솜씨를 평가받는 료리사의 조마조마한 심정이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처음 먹어보는것이니 꼭 맛있어 해야 한다는 강박결론을 앞세우고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말았다. 두 아이는 약속이나 한듯이 떡을 도로 놓으면서 안먹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유혹하던 그곳을 떠나면서 저희들끼리 주고받는것이였다. <<감자떡 맛이 없지.>> <<응. 난 별것인가 했어.>> 그애들의 수작을 살피고있던 교양원들은 한동안 억이 막혀 서로를 쳐다보다가 지뢰가 터진듯 일시에 폭소를 터뜨리고말았다. <<애들두.>> 어쩔수 없다는듯 그저 이 한마디뿐이였다. 그들이 하루종일 신고스레 만든 감자떡이 1차, 2차, 3차의 계획을 작성하기도전에 벌써 두 어린이한테 여지없이 소박당하고만것이다. 그 이튼날, 유치원에서는 과단성있게 원래의 생각대로 감자떡을 빚어서 어린이들한테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호기심에 찬 눈길로 손에 쥔 감자떡을 이리저리 번져볼뿐이였다. 교양원이 감자떡이 참 맛있다며 <<시범적>>으로 한입 뚝 떼자 아이들도 반사적으로 한입 뚝 떼물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퉤 하고 뱉어버리자 아이들은 또 반사적으로 잇따라 뱉어버리였다. 그 이상 더는 교양원의 <<상품광고>>가 효력을 내지 못했다. 결국엔 교양원이랑 직원들이 <<생활개선>>을 하고말았다. 물론 2차, 3차의 계획은 포기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애들의 아버지벌이 되는 나한테도 이와 근사하게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1980년의 여름방학에 집에 휴가차로 왔을 때였다. 어머님은 1년사이에 내가 몸이 반쪽이 되였다면서 하루는 보신시킨다고 암탉 한마리를 사다가 곰을 하셨다. 그리고는 다른 식구들이 돌아오기전에 빨리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까지 하면 아홉식솔인 우리집은 생활이 째지게 가난했다. 사실 대학공부를 하고있는 내가 제일 부담거리 소비자였다. 그런 형편에서도 어머님은 큰맘 먹고 며칠분의 생활비를 털어 닭을 사신것이였다. 그런테 그날따라 시교의 농촌에 사는 형수벌되는 아주머니가 <<그전에 내가 좋아하던 옥수수떡>>을 그릇에 이고 5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나를 보러왔다. 그때까지만도 농촌에서 아직 호도거리책임제를 하지 않은 때라 논이 없이 밭만 다루는 곳에서는 여전히 옥수수떡이라도 배불리만 먹을수 있다면 괜찮은셈이였다. 그러니깐 옥수수떡을 가져온것도 최대의 성의가 아닐수 없었다. 생활고를 겪을대로 겪으신 어머님이라 그 마음을 헤아리시였다. 그때 우리집 생활형편도 말이 아니였지만 그냥 가문의 일에 총관이 되다싶이 한 어머님은 그 조카들의 간장돈마저 꼭꼭 챙겨주셨다. 어머님은 그 아주머니가 면구해 할가봐 얼른 닭곰을 치우시고 반갑게 옥수수떡그릇을 받아놓으면서 말씀하셨다. <<이거, 옥수수떡이 참 오래간만이구만.>> 그 아주머니는 좀 게면쩍어하며 말했다. <<경철이삼촌이 그전에 옥수수떡을 하도 반가와하길래.>> 나도 얼른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능청을 부렸다. <<그땐 주먹 두개만큼한것도 서너개씩은 재꼈지요. 인젠 1년나마 못먹어봤습니다.>> 그날 나는 옥수수떡 두개를 먹었는데 처음 한개는 그래도 추억이 고명이 되여 <<맛갈스레>> 먹었지만 두개째는 실토정하면 아주머니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겠기에 울며겨자먹기로 삼켰다. 입맛이 변했다. 겨가 섞인 옥수수가루를 빚어만든 옥수수떡이나마 배불리 먹으면 감사했던 세월에 철없이 식욕만 잔뜩 늘어난 나는 거짓없이 옥수수떡을 좋아했고 한번에 소똥만큼은 큰것을 서너개는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의 식생활에서 그것보다 더 맛이 있는 음식도 없었다. 말리운 그구마쪼각을 삶아먹는것이 어찌나 싫던지. 그것에 비하면 그래도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소똥처럼 둥글넓적하게 손바닥에 구을렸다가 가마굽에 찰싹 붙여 노랗게 굽거나 쉬웠다가 묵은밥을 넣어 버무려서 시루에 찌면 노란것이 그런대로 보면 군침이 돌고 먹어도 별미였다. 그것이 그때는 이밥이 지금 우리의 주식인것 못지 않게 매일 식탁에 오를수 있는 주식이였다. 그나마 배부리 많이 먹을수만 있으면 감사한 마음이였다. 그러니깐 사실은 옥수수떡을 맛있게 먹을수 있은것은 굶는것보다는 낫다는 심리작용이 고명이 되였던것이다. 아이스크림은 고사하고 창자마저 변변히 달랠수 없었던 그때의 생활난이 굳혀준 입맛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형수벌 되는 아주머니가 이밥 자시면서 이쿠스탠(憶苦思甛)하려고 나한테 옥수수떡을 가져온것은 아니였다. 그런데 1년나마 수도 북경에서 이밥이나 새하얀 우질밀가루로 찐 만두를 먹어온 내가 그냥 입맛이 변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언제가 연변대학에서 학생들이 옥수수떡을 먹이는데 항의하여 단식까지 하였다. 음식생활에서 결국 나 한사람만 시치한 수도생활에 물젖어 입맛이 변한것이 아니였다. 사회의 음식문화에 질적 변화가 생겼던것이다. 우리가 어렸을때의 음식생활 내지 음식문화 수준의 한 눈금이였던 옥수수떡이 새하얀 이밥이나 만두앞에서 무색해지고 력사의 전람관에 진렬되게 된것은 우리 사회의 성장과 생활의 향상을 상징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에 와서 우리 아이들은 더구나 입맛이 변했다. 아니, 그애들은 나서부터 벌써 그런 맛을 몰랐고 생활고란걸 몰랐다. 가난의 상징이였던 이를 아이들한테 설명해주면 그애들은 그저 신기한 눈길이고 어쩌면 웃세대를 금방 동물에서 진화한것이나 아닌가고 생각할수도 있다. 가난과 발전의 쓰고 단 맛을 겪어본 부모들이라 그저 자식을 꽃과 같이 키우려고 모지름이다. 인제 우리에게는 자식을 고생없이 행복하게 키울 환경이 마련되였다. 아니, 굶주림에 모대기면서 우리의 두 손으로 열고말았다. 유치원을 나서면 아이스크림, 집에 돌아오면 사탕, 과자, 과일들을 입에 달고있는 아이들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밥 한끼 변변히 먹어보지 못하고 1년 한두번쯤 생활개선으로만 먹을수 있었던 생활체험이 낳은 <<감자떡에 대한 애착>>과 가난이 굳혀준 입맛을 그애들이 <<세습>>할수 있겠는가. 지금도 어떤 음식점에서는 옥수수떡을 음식상에 올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새물이로다>>하는 격으로 옥수수떡은 과연 옥수수떡이로되 거기에는 많은 재료들이 가첨되고 겉에는 또 기름이 찰찰 넘치게 발리워진 별미요, 그것도 역시 주식은 아니고 구미바꿈일뿐이다. 아이들한테 <<우리때는...>>하는 <<추억식교양>>이 별로 나쁠건 없다.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기만 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하는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생활에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해도 너무 무리가 아닐수 없다. 인류의 력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력사이고 열심히 행복을 만들어가는 력사이다. 우리 세대한테는 감자떡이 옥수수떡에 비해 별맛이였다면 아이들한테는 이밥보다 별맛인 음식이 있어야 한다. 어제의 발전이 오늘의 기점이고 오늘의 발전이 래일의 기점인것이 과연 인류발전의 성장과정이다. 옥수수떡을 먹던 어제에 이밥이 음식문화의 향상수준이였다면 오늘에 그것은 음식문화의 기점일따름이다. 음식문화가 서로 다른 시대의 동일한 기점이라는 시점에서 옥수수떡과 이밥은 동질성을 갖는다. 그러니깐 옥수수떡은 결코 그 시대 사람들의 검박한 정신의 상징이기에 앞서 벌써 이밥이 오늘의 음식문화의 기점인과 같은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의 우리가 옥수수떡을 먹던 신세를 고치려고 강한 현실극복의지로 끈질기게 노력했다면 오늘은 이밥만 먹는 신세를 고치려고 세계적 인식을 키워가야 할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시대는 서로 다른 리상이 있기마련이고 어제의 리상은 곧 오늘의 현실이다. 하물며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지구촌의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가고있는데 기어이 조상들이 걸어온 길만 뒤돌아본다면 우리는 래일에 떳떳한 조상으로 부끄럼없이 나설수 없을것이다. 남들이 후대들에게 마련해주는 기점과 꼭 같은 기점을 우리 후대들에게도 마련해주어야 자신의 인생에 긍정적인 종지부를 찍을수 있을것이다. 전통은 성장을 위해서만 영원히 보귀한것이다. 물론 어제 창조한 전통이 없다면 오늘의 성장이 있을수 없다. 그러나 전통을 다만 감상할수 있는 <<골동품>>이나 허물수 없는 <<틀>>로만 간주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을뿐더러 지어는 오늘의 성장을 가로막는 파수군이 되여버릴수도 있을것이다. 우공이 산을 옮긴 끈질긴 노력정신은 과연 게으른자를 계몽하고 창업자를 고무할것이지만 그러나 그 누가 만약 산너머에 벌을 두고 우직스레 그 산을 파옮기려 한다면 그보다 더 아둔한 일이 또 없을것이다. 인류의 회망은 언제나 저 앞에 있는것이다.
28    갑속에 든 사람과 틀 허물기 댓글:  조회:1842  추천:0  2009-05-16
어떤 물체이든지 무릇 모이면 서로를 제약하는 원칙이나 어떤 질서가 형성되게 된다. 일단 그 질서가 파괴되면 천지개벽이 일어나거나 적어도 구조적인 변질이 있게 된다. 인간은 사회를 구축하고 여럿 또는 군체가 함께 그속에서 어울려 사는 이른바 군체동물이다. 군체동물로서의 인간은 어떤 질서로서 서로를 약속하고 서로의 피해에서 물러설수 있는것이다. 자연에로의 회귀, 개성해방과 무한한 자유에로의 갈망이 인간의 궁극적인 희망사항임에도 법과 도덕과 질서가 필요한것도 바로 인간은 군체동물로서 타인을 외면한채 그냥 내멋, 내 생각 그대로 살수는 없기때문이다. 나 하나의 생각이나 행위가 여러 사람과 리해관계를 달리하거나 지어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될 때 그는 결코 군체의 용서를 받을수 없으며 결국은 군체에 의하여 억제당하고말것이다. 홀로의 외로움보다 군체속에서의 고독이 인간 최대의 불행이다.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인간은 그만큼 무한한 욕심이 마음에 옴츠리고 있기에 선택없는 자유는 그만큼 벌써 방종이 앞서 가게 된다. 인간사회에는 타인을 위해서라는 공리주의에 앞서 벌써 서로가 서로의 피해에서 보호받기 위하여 어떤 약속력이 필요한것이다. 풀어말하면 나 자신이 타인의 욕심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벌써 법과 도덕과 질서따위가 요청된다는것이다. 그만큼 법이나 도덕이나 질서는 군체동물로서의 인간이 서로를 제약하고 경계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치이지 절대적인 가치기준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강압성을 띠는것이고 따라서 인정과 사랑과 천륜마저도 외면해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어떤 약속력의 지배를 받는다는것을 개념화하면 인간에게는 틀이란것이 있고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는 그 틀의 주조물일 때라야만 사회의 승인을 받을수 있다는것이다. 틀, 틀은 인간을 자연인으로부터 사회문화인으로 성장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며 인간군체가 평화공존하게 하는 제도적장치이다. 잔치집에 가서 축하의 웃음을 웃어주고 제사집에 가서 슬픈표정을 보여주는것이 선의적인 문화인의 <<틀>>이다. 주인석에서 따스함을 베풀고 손님석에서 겸손함을 나타내는것도 문화인격에 따르는 주객의 <<틀>>이다.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으면 인체미를 보여줄수 있지만 거리바닥에서 알몸을 드러내면 진화가 덜된 미개인간의 표상으로밖에 되지않는다. 이른바 목적의 정당성(?)을 위하여 악의수단도 가리지 않는다면 나중에 인간실패는 그 자신이 당하게 된다. 악의수단은 타인에 대한 피해를 전제로 하기에 틀에 의한 인간약속력의 판결을 받지않을수 없기때문이다. 그럼에도 틀이란것이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역전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쇠고랑이 될수 있다. 인류는 틀의 약속으로 평화공존하지만 역시 틀에 대한 부단한 개진과 파괴속에서 성장하고 리상을 현실화한다. 흘러간 인류사회가 력사라는 틀속에 갇힐수밖에 없는것은 오늘을 살고있는 인간들이 새로운 틀을 설계해낸 까닭이다. 틀이란것이 어떤 가치판단기준이 아니라 인간이란 군체동물이 사회를 어울려 살아가는 약속력인만큼 인간들이 문화의 성장과 함께 어제의 리상이 현실화된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틀을 설계내는것은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다. 사회가 개방적으로 개체의 자유와 성장을 보장해주는 현시점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거나 허례허식의 량반틀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력사를 재현시키는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기분일것이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집구조가 온돌에 이영이라고 해서 문명의 거리에 초가집을 앉힌다면 민속학의 의미가 매겨지지 않는한 우리는 학의 무리에 든 오리를 련상하게 될것이다. 축구규칙에서 문지기가 자기쪽 선수가 차넘겨주는 공을 받아쥐지 못한다고 새로이 틀을 만들었음에도 그 공을 받아쥐였다면 우리는 패너티킥이다 하고 환성을 지를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것이 틀이 있다. 그리고 부단히 그 틀을 깨뜨리고 또 다른 틀속에 갇힌다. 지진, 화산폭발, 홍수범람 등 자연현상도 결국은 틀의 용량을 초과한 결과로 폭발하는것이고 폭발후엔 또 다른 틀을 형성하는것이다. 인간사회도 부단히 틀을 허물고 또 다른 틀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행정이다. 그러나 틀의 변화 내지 변질은 사회발전법칙이나 인류의 발전적인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지 개미가 제방을 허물듯이 어떤 개체의 욕심팽창이나 어떤 집단의 배타적인 리익계산에 의한 파괴로 기인된다면 그 개체가 주소를 잡고있는 군체는 피해를 입게 되고 그 집단이 거래하는 사회는 벌써 퇴보 내지 멸망조차 미리 약속받게 될것이다. 삶의 현실적인 질서로 자리매김하고있는 틀의 약속을 지키면서도 문화성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창조력으로 기성적인 틀을 허물고 새로운 <<리상적인 틀>>(신생사물은 언제나 리상적인 농도가 짙을수밖에 없다)을 구축하는 사람이야말로 창조적인 삶, 성장적인 삶,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수 있다. 이런 삶은 오직 법과 도덕과 질서 등 사회의 <<틀>>에 순응적으로 자기를 매워놓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접수하고 정신건강에 노력하여 마음의 부자가 되고 자신의 정신적독방을 화려하게 꾸며가는 사람에게만 있을수 있다. 너의 마음에 내가 있고 나의 마음에 네가 있는것, 다시말하면 자아와 타아가 협화음을 울릴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것이 인간의 가장 바람직하고 리상적인 요청이다.
27    엘리트정신 댓글:  조회:1879  추천:0  2009-05-16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엘리트가 어쩌구저쩌구 의론이 많이 되고있다. 외래어에 낯설다보니 집에 와서 남몰래 외래어사전을 펼쳐보았다. 설명이 구구하나 아무튼 한마디로 사회에 선택된 인간이라는 뜻으로 전달되였다. 그러니깐 군체적인 의미보다는 한 개체로서의 자리매김이 더 뚜렷한 사람이라는것이다. 경쟁의식이 사회적으로 고조되고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절대적으로 동원되고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과연 <<엘리트론>>의 대두가 시대적인 요청인것 같다. 그만큼 엘리트를 대접하는것이 시대발전 내지 사회성장에 결정적인 수요로 나선다고 할수 있겠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이 여러가지로 제기되고있음을 그냥 외면할수 없다. 문제의 하나는 엘리트란 개념을 그 어떤 메달이나 향수특권으로 착각하고 있다는것이다. 물론 민중앞에 초연한 엘리트는 시대와 사회의 요청을 받고 선택된만큼 그 시대와 사회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고 향수를 누릴수 있는것은 의심할바가 아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한테 효성함은 무모님이 자기를 낳아키우고 한 가정을 책임졌기때문인것처림 시대와 사회에 의해 선택된 엘리트는 그만큼 그 시대와 사회에 대해 벌써 책임과 의무가 앞서고있음을 가슴 무겁게 받아안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지혜롭고 총명한자가 악인이면 만사람이 해를 입을것이요, 선인이면 만사람이 덕을 받을것이다. 그만큼 시대와 사회는 엘리트에 의하여 력사적인 퇴보 내지 비극을 연출할수도 있고 획기적인 급성장 내지 기적을 창조할수도 있는것이다. 이것은 력사를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구구히 사례를 들것도 없이 납득이 가는 해석일것이다. 민중한테는 선택된 인간의 호소력이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 못박혀죽을 때 그를 못박아죽이라고 고함친 사람들속에 그들로부터 소외될수가 없다거나 또는 양몰이군의 채찍질에 한덩어리로 몰려드는 양처럼 항거할수 없다는 맹목적인 순종의식에 지배된자가 얼마였던가! 전체 국민이 우상숭배에 리성을 자리내주었던 시기에 선택된 인간의 호소력이란, 그 호소 자체가 바로 국민의 선택이고 행동이고 운명이였지 않았던가! 인간은 누구나가 <<소아>>와 <<대아>>의 두가지를 가지고있지만 바로 선택된 인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벌써 <<대아>>가 인격과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수밖에 없다. 그도그럴것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으로 선택된 인간이고보면 그만큼 시대와 사회를 대표할수 있는 인격과 가치만이 그 자신을 시대적의미로 자리매김해주고있기때문이다. 다음, 엘리트정신이란 과연 어떤것이냐 하는것이 다른 하나의 문제이다. <<엘리트정신>>이라고 하면 대뜸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선비정신>>을 청빈 즉 가난하고 말끔한 정신이라고 해석해왔다. 력사적으로는 해석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 역시 력사적인 해석에만 그치고 그 변질을 보지 못한것, 그리고 시대적인 조명과 반성이 따르지 못한데서 생긴것이다. 선비정신이란 리조 5백년간에 걸쳐 량반들의 리상적인 지식인 형상으로 자리굳혀온것임을 새삼스레 꼬집을 때 우리는 그것이 바로 리조신분사회에서 지배층을 이루었던 량반들의 도덕적인 규범이였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이에 따라서 선비란 비민중적이고 비속세적이라는 특징이 이루어지게 되여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보는 법이 없다>> 는것이 선비정신의 주근이 되여버렸다. 그리하여 세속적으로 선비는 빈 껍데기만 남았고 선비정신은 사회를 외면한 허식으로 변질하고말았다. 박지원의 소설 <<량반전>>은 력사적반성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자못 크다. 리조시기에 껍데기만 남은 량반들이 나라의 환곡을 파먹는 식객 내지 좀도적으로 탈락해버린데 비해 오늘 국록이나 타먹으면서 일하는자, 돈버는자를 비천하게 보고 다만 학문을 유식함의 상징으로, 권력을 신분적인 특권으로 행사하는 신분층이 륜곽을 드러내고 있다. <<엘리트특권>>을 향수하는 사람들이 식당에서,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무도장에서, 나이트클럽에서, 다방에서 <<엘리트론>>을 <<강의>>하는 단골이 되였다. 현재를 살면서 현실적인 향수를 누릴수 없다는것은 무리겠으나 력사적인 사명감이나 시대적인 책임감따위는 헌신짝처럼 한쪽에 팽개쳐버리고 공금이나 협잡으로 <<노세, 노세>>를 웨쳐대는데는 새삼스럽게 <<엘리트>>들에 대한 신변정리를 요청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물론 허식으로 변질된 선비정신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바람직한것인 못된다. 사회에 선택된 인간으로서 되돌아가 사회에 작용해야 함은 당연한 리치이다. 그만큼 경제성장의 시대에 <<얼어죽어도 화로불은 쪼이지 않는다>>는 고루한 량반사상으로는 도저히 사회성장의 선두는 커녕 장애로 될수도 있는것이다. 자기의 생활은 자신이 열심히 가꾸어나가야 한다. 삶에는 특권이 없다. 인생을 열심히, 참답게 살아가는자만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과 선택에 나설수 있는것이다. 선택된 인간의 선택된 삶이란 시대와 사회에 그리고 민중에 책임을 다하는것뿐이다. 량반신분이 부패와 몰락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때에조차 김만중과 같은 대바른이들은 류배살이도 외면없이 신하된 충정을 다하지 않았던가! 바로 선택된 인간의 책임으로 사회를 고발하였기에 <<사씨남정기>>는 그 시대를 아득히 흘러보낸 오늘에도 그 가치를 확인받고있는것이 아닌가! 자기가 발딛고선 사회의 무탈한 성장을 위하여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고드는 벌레를 쪼아내듯 사회의 병근을 집어내고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해 생산적인 삶을 꾸며가는것,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엘리트정신>>이 아닐가 한다.
26    서울로 가야 과거에 급제한다 댓글:  조회:1868  추천:0  2009-05-16
조선의 18세기 민간소설문학에서 퍽 주목되는것의 하나가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이다. 이 두 설화는 또 모두 전실자식과 이붓어미와의 갈등을 다루고있다는 점에 사회초첨을 같이하고 있다. 물론 속담에 이붓어미가 티를 내는것이 아니라 이붓자식이 티를 낸다고도 하였으니 세상에 저를 낳은 어미가 아니니 어쨌든 친어미처럼 대할수 없다는 선입견을 앞세워 이붓어미의 정성과 모성애를 몰리해하는 이붓자식도 상당수인듯 싶다. 이러하든 저러하든간에 그것은 천륜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인간애를 요청하는 노력적인 관계임은 틀림없다. 급작스럽게 지구촌이란 개념이 현실의미로 투명하게 밝아옴으로 하여 전에 멀리했던 이웃들과 만나는 기회가 밥먹듯 잦아졌다. 그네들은 우리가 정신적인 성장조차 꾀하는 생동한 군체로 삶의 광장을 넓혀가고 있는데 감탄과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 종족기시 내지 차별시에 의해 소외감을 절감하는 그들에게는 순 개인적인 경제성장외에는 민족문화요, 정신이요, 언어요 하는것은 아무런 보장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네들에 비해 정신적성숙과 경제적성장을 동보로 꾀할수 있는 우리가 훨씬 다행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생존권이 많이는 그 경제력에 힘입어야 하는 경쟁적인 세계절주에 대응하여 경제적성장이 선차적인 시대요청으로 나선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그제날에 <<철밥통>>이 깨여지면서 재정로임팀들이 느꼈던 위기감 내지 불안전감과 비슷한 아픔을 앓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국가의 계획적인 조달에 의해 그럭저럭 혜택을 받으며 평균주의사상에 노력을 게을리하던 국민들이 구체적인 대응관념을 세우지도 못한채 상호경쟁적인 힘의 맞겨룸속에 갈팡질팡하게 되였다. 아직 창조적인 독립성과 자활력을 키우지 못하고 부모한테 모든것을 의탁하는 소년적인 천진성과 유치함에서 현실을 외면한채 자체모순에 빠져 근심하고 번민하고 부정하고 분노하고 있다. 현실감각이 없이 단순하고도 유치한 믿음에 의지하여 과거동경에 자각증상이 없는 동통을 겪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오늘의 삶의 현장은 흘러간 세대가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리상임에 다름아니다. 그들의 게으름없는 노력이 없으면 오늘의 현실이 있을수 없다. 그만큼 현세주의적이 아닌, 삶의 현실에 대한 긍정적시선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여 래일을 밝게 하려는 미래지향적인 목적추구와 직결될수 있는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 가마밥을 먹고 한 지붕밑에서 산다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리며 메마르고 무심한 활기를 본의 아니게 동원했다. 인제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총체성을 통찰하여 현실에 대응할수 있는 새로운 정신적 출발점을 찾을 때이다. 그럼 우리 민족의 현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하나의 대가정속에서 국가제도적인 민족자치와 계획적조달의 혜택으로 주체적인 노력이 없이도 <<근심걱정없이>> 살아갈수 있었다. 매일 부모가 계산적으로 주는 소비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난하지만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어느덧 줄것만 바라는 변태적인 심리습관이 자라서 운명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지혜를 잃었고 하나의 운명을 가진 공동체의 건강에 관심은 높으나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엔 게을리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도시문화가 활기를 띠고 상품경제가 시대적요청으로 대두하자 갑자지 마음이 가난해지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하게 되였다. 차에 오르고도 어디로 가는 차인지조차 모르는 격으로 그냥 고루한 소농경제사상과 가부장제적 대가정속에서 주체적 정신을 뿌리뽑힌 무기력한 상태로 락오의 넉두리를 하고 있다. 상품경제가 사회의 주되는 경제행위로 되고 다성분의 소유제가 병존하는 시대에 국가는 절대적인 가부장제적 대가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가정성분이 훨씬 단순하고 책임이 훨씬 직접적인 핵가정으로 세분되였다. 이와같은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시대에 자기의 자활력을 키우지 못하고 그대로 의타사상에 빠져버린다면 큰소 잃고 송아지 흩어지는 격으로 이중랑패를 당하고 말것이다. 새롭게 정신적 출발점을 정하고 바람직한 방향감각을 잡아야 한다. 틀림없이 새로운 정신적 출발점은 현실도피적 립장을 버리고 세계적 절주 내지 국가적 성장에 발을 맞추기 위한 민족의 각성에 정해져야 할것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감각이란 시대의 정상급문명이 대집결된 곳을 민족의 제1번지로 잡는것이라고 풀이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상승하려는 정신이 없는 민족은 이미 령혼이 없는 육체와 같이 분해되고말 운명이다. 성경에도 이르기를 <<령혼이 없는 몸은 죽은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니라>>했다. 시대의 정상급문명과는 떨어지고 소외된 페쇄된 공간에서 상승적인 삶이라거나 민족적인 성장이란 있을수조차 없다. 문명의 중심에 주소를 잡고 신분증을 타지 못한다면 도태는 불가피면적이다. <<서울가야 과거에 급제>>할수 있다. 하나의 운명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는것이 중요하다는 피상적이고 단일적인 사유에서 농촌집거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것은 짚신에 국화그리기임에 다름아니다. 장사군 웃덮기라고 덮은 한층을 벗겨내면 부실한 체질이 그대로 드러나고 만다. 천자문도 못읽고 도장을 새긴다면 기계나 다름없을것이다. 다음으로 요청되는것은 민족의 생존과 성장과 상승의 책임이 훨씬 직접적인 상황에서 민족정신과 민족경제, 지성인과 사업인의 참다운 교제와 믿음직한 악수이다. 거족적인 생명운동에서 문화와 경제의 유능한 두뇌들의 집결은 거의 그대로 유일한 출로임에 의심없다. 사업인의 돈지갑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문화인이나 순 개인적인 명예에만 계산적인 사업인이 선택된 인간의 다수일 때 우리의 실망은 그만큼 클수밖에 없다. 그들의 교제에 빠진것이 바로 육체에 령혼같은 정신이기때문이다. 정신이 뿌리뽑히고야 어찌 민족의 운명교향곡에 대한 참다운 연주를 할수 있겠는가! 시대에 따르는 각성과 건강을 위한 노력이 없다면 호미로 막을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는것을 자각해야 한다.
25    대중화 행동모형 댓글:  조회:1747  추천:0  2009-05-16
척척보일러- 기름공급상황, 표준온도, 급수, 이상경보 모두를 자동으로 척척 공제하는 척척보일러. 척척할아버지- 우주의 비밀, 십만가지는 무엇때문에, 풀기어려운 수수께끼 모두를 척척 알려주는 척척할아버지. 일을 순서대로 막힘없이 잘해나감을 척척이라고 한다. 그것은 달리 첨단적인 기능, 풍부한 지식을 상징하는 말일것이다. 그런데 그 겹친 <<척척>>을 견우직녀처럼 갈라놓으면 한 경우는 태연한 모양을 나타내고 다른 한 경우는 어떤 가상의 모양을 나타낼수 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자세 내지 삶의 방식에서 두루 살펴보면 놀랍게도 <<척>>, <<척>>이 대중화 행동모형으로 되고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르면서 아는척(체): 길을 가다가 어떤이가 알은체 하는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상대를 확인할수 없거나 어렴풋하지만 그냥 같이 알은체 하는것은 상대의 인격과 체면을 보는 문화인격이라 하겠다. 그러나 토끼꼬리만한 상식을 들고 로반앞에 도끼질로 너무 아는척하는것은 바지벗고 춤추는 초라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알면서 모르는척(체): 상대가 여러 사람들앞에서 조그마한 실수를 하였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척 했다가 조용히 귀뜸해주는것도 믿음과 우정을 중히 여기는 소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친구나 벗이 탈선의 심연에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것은 지나친 교활성이거나 극단적 리기주의때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없으면서 있는척(체):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하나밖에 없는 빵을 쥐워주면서도 자기몫도 있는척하는 어머니의 태연함은 그대로 위대한 모성애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해한테 화장품 하나 변변한걸 사주지 못하면서도 길을 가면 택시요, 술을 하면 카라OK요 하면서 밖에 나와서는 그냥 없으면서도 있는척하는것은 참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지나친 허위로 관습화된 정신빈곤자의 소행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있으면서 없는척(체): 넉넉하지 못한 로임에 장작을 쪼개듯 힘겹게 살면서도 패가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친구앞에 생활고가 있으면서 없는척 서슴없이 구제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그 강개한 모습에서 아름다운 인간애와 미더운 우정을 읽을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상품화된 인정상황을 절대화한 나머지 처참하게 허물어져가는 혈육의 삶의 아픔을 그냥 외면한채로 있으면서 없는척 능갈스레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빈손만 펼쳐보이는 사실앞에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를 회의조차 하게 되고 상품화시대에 자기보존의 자률성과 부자의 륜리가 그리는 불신과 배타의 풍속도를 보게 된다. 못보고도 본척(체): 축구장에서 고조되였던 흥분과 열광이 아직 식지 않은 축구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텔레비실황을 본 이가 현장에서 못보고도 본척하면서 기분을 리드해갈 때 어느정도 허영심이 작간한것도 시살이겠지만 그런대로 때와 장소에 맞게 정서를 조절해가는 무해한 삶의 예술이라고 해도 괜찮을것이다. 그러나 남의 흉이라면 못보고도 본척하면서 아예 추리와 판단까지 동원하여 날개를 달고 꼬리를 붙여주는 그런 사람들의 심태를 들어 우리는 요언의 비루함을 알것 같다. 보고도 못본척(체): 새로 인사시킨 자리에서 친구의 실수를 직방 꼬집을수 없어 슬쩍 눈치질을 하는것을 이쪽에서 보고도 못본척하는것은 자기의 대범함을 나타내거나 적어도 상대방을 존중해서일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못본척하거나 지어는 보수를 따지는 사실앞에서 우리는 인정이 메말라가고 돈의 론리가 횡행하는 사막과 같은 현실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이와같이 <<척>>, <<척>>이 우리 삶의 광장에서 하나의 행동 <<모형>>으로 되고있는데 우리는 그 어느 한쪽에서만 진실이나 진리나 가치를 득점할수는 없다. 없으면서 있는척하든 있으면서 없는척하든 그냥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우리는 다소라도 <<척>>, <<척>>에서 화목하게 어울려 살려는 도피의 결백성을 보게 되는것이고, 그것이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이라거나 돈에 의한 인격이화의 소생이라면 우리는 그 <<척>>, <<척>>에서 탐욕과 허위가 관습화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이 앓고있는 질병을 진단할수 있느것이다.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라고 남남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하니 인간에게는 작은 알륵은 숨기고 큰 알륵은 해소하면서 화목과 사랑과 우정과 평화를 도모하려는 <<척>>, <<척>>의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만큼 문화인격이란것은 어느정도 아름다운 <<허위성>>을 띠는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교활성으로 변질되여 자기타산적이고 자기계산적인 극단적 리기주의에로 추락될수 있다. 언제나 한가지만 말하고 다른 한가지는 숨겨두려는 자는 사실 비겁한 자이고, 줘야 할 때 외면하고 받을 때 비굴한 자는 너무나 리기적인 인간이다. 너무 타산적이거나 계산적이면 남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질수 없을뿐더러 그 자신이 벌써 표리부동한 이중인격 내지 인격이화로 굴러떨어지고 마는것이다. 그럼에도 제사집에서는 만들어진 슬픔, 잔치집에서는 장식화된 웃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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