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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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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실수와 죄와 그리고 가난 댓글:  조회:1647  추천:0  2009-05-16
어느때인가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별명을 가지면서부터 갑자기 모든것이 좁아진듯싶다. 거리거리는 차들로 꽉 미여지고 고층건물들이 높다란 담장마냥 길 량옆을 덮칠듯이 막아서서 워낙 좁다랗던 길이 그냥 개미길처럼 좁혀졌다. 연기와 기름과 오염과 알콜이 머리우를 폭탄처럼 뒤덮어 인간들이 청신한 자연의 공기로 한껏 배속의 오물을 세탁할수 있는 공간도 훨씬 좁혀졌다. 어디로 가나 숨만 콱콱 막힌다. 불야성을 이루며 명멸하는 네온등아래 야성과 본성과 그리고 그래서 풍겨나는 타락과 륜락의 악취가 카라OK, 나이트클럽, 술집, 무도장 등등과 함께 우리의 시각과 마음과 그리고 인생을 좁혀온다. 문명의 도래와 함께 문명의 사생아인 <<문명악>>도 청신한 대기속의 병균처럼 요사스럽게 우리의 삶의 광장을 배회한다. 인성과 인격과 륜리와 도덕과 리성과 철학과 그리고 가치판단에서 사람들은 도착증에 걸려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군체동물로서 서로가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면서도 서로지간에 화해의 접점을 모색하지 못한채 그냥 대화의 대상을 잃고 있으며 군체속에서 홀로의 고독보다 더 참혹한 배타의 고독을 씹어삼킨다. 나중에 인간의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깃들어있는 관용마저 자기보존의 중압아래 수증기처럼 증발되여버리고 의심과 시기와 그리고 질투로 바깥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풍문마저 견디어내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앞에서 자기본위로 지나치게 계산적인 판단에 착오적인 시비나 충돌을 몰아오기도 한다. 실수와 죄와 그리고 죄악은 때로는 꼭같은 결과를 낳을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결과더라도 그것들은 과연 서로가 본질적인 함의가 다르고 동기나 목적도 다르다. 과학에서의 실수, 생사고비에서의 순간적인 실수따위는 그대로 만구할수 없는 참극을 빚어낼수도 있다. 인성을 상실하고 부모를 학대하며 폭행까지 서슴치 아니하는 자식의 생명을 되찾아간 부모의 행위는 그 비장함에 동정이 가더라도 역시 벌을 받을만한, 도의에 벗어난 악행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실수가 아닌 죄이다. 그러나 살인했거나 강간했거나 강탈한것은 틀림없이 중죄가 될만한, 대중의 질서속에서는 용서를 받을수 없는 죄악이다. 죄나 죄악은 다 생활의 일상적인 질서속에서는 용인할수 없는 범죄요 어차피 질서를 지키는 법의 단속을 받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실수는 불문곡직하고 그대로 법을 적용할수는 없다. 엄격한 조작규정을 위반했거나 집단적인 규칙을 무시한것과 같은 경우에는 법이 적용될수도 있을것이다. 어떤 규정이나 규칙은 벌써 그 자체가 질서확립을 위한 법적담보로 되는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활상에서 너무나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실수하는수가 있다. 그래서 비평도 있고 반성도 있으며 가르침도 있고 뉘우침도 있는것이다. 인간은 원래가 벌써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것을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하고 승화할수 있는 그런 불완전한 미완성의 존재이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생명연습은 없더라도 생활실습은 있어야 하는것이고 역시 서로가 리해하고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문명악의 회오리바람속에서 의심병만 잔뜩 심해져서 날따라 대화의 대상마저 잃어가고 있으며 사랑과 우정에서조차 계산과 감각과 추측을 앞세운다. 좁아진 길, 좁아진 공간속에 마음마저 좁아져서 비좁은 길에서 차들이 서로 양도하지 않아 부딪치듯 서로가 어쭙지 않게 말매를 맞는다. 그냥 타산적이거나 계산적인 마음이 남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것이다. 인제 우리는 말의 과잉속에서 또 서로가 믿고 화목한, 어여쁜 삶의 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좁혀>>지듯이 그냥 내 마음 하나만을 담아들고 살아가야만 하는가. 세계가 지구촌이라면 세계화라는것도 결국은 <<우물안의 개구리>>가 하늘보기임에 다름아닌것 같다. 삶의 공간을 넓히고 자기가 발딛고선 현장을 초월하려는것이 인간의 상승적인 힘 내지 리상이라면 인제는 우주의식을 키워야 하는가보다. 우리의 마음에 우주를 담아야 한다. 따사로운 태양과 아름다운 달과 그리고 무수한 별들을 너그럽게 품어주는 우주의 관용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삶의 일상성에서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잘못을 저지를수 있는 존재라고 보면 벌써 계절에 따라 면역을 잘 해야 하듯이 그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에 주의해야 하며 역시 환자를 동정하고 살뜰히 보살피듯이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를 좀더 너그럽고 체온이 섞인 말로 타이를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를 자기본위로 지나치게 타산적이거나계산적으로 판단하면 그로부터 죄악을 낳는수도 있다. 실수는 관용으로 치료하고 죄와 죄악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냥 사랑과 우정의 마음을 키워가노라면 언젠가는 너의 실수도 타인의 관용을 받게 될것이다.
23    법 질서 그리고 가난 댓글:  조회:1726  추천:0  2009-05-16
서한의 선제년간에 발해일대에는 련년으로 재황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도둑이 벌떼처럼 성했다. 발해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선제는 여러 대신들을 보고 현능한 신하를 발해태수로 추천하라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의론끝에 마침내는 칠십고령에 이른 공수를 발해태수로 천거했다. 선제는 공수가 키가 작고 용모도 볼데가 없는데다가 나이조차 많은것을 보고 저으기 실망하면서 짐짓 공수한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발해를 다스리려고 하는고?>> 그러자 공수가 대답했다. <<발해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지금 년년으로 재황이 들어서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나이다. 그런데 당지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안무하지 못하니 도적이 또한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나이다. 임금께서는 저를 보내시여 그 기아민들을 징벌하도록 하시겠나이까? 아니면 안무하도록 하시겠나이까?>> 선제는 공수의 냉철하고 빈틈없는 대답에 근심이 씻은듯이 가셔져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현능한 사람을 선용함은 바로 그곳 백성들을 안무하기 위해서이노라.>> 그러자 공수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저를 그곳에 내려가 일을 보도록 윤허해 주사이다.>> 이리하여 공수는 그 즉시로 발해군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당지 관리들은 새로운 태수가 부임되여 온다는 말을 듣고 많은 군사를 판견하여 연도에서 영접했다. 그러나 공수는 도리여 군사를 모두 돌려보내고는 한편 소속 각 현에 서신을 띄워 도적나포를 맡은 관리들을 죄다 파면시켜버렸다. 그리고 무릇 호미를 들고 밭을 다루는 사람은 모두 량민이니 누구든 그들을 시끄럽게 굴지 못한다고 했다. 발해군내의 백성들은 이 말을 듣자 더없이 위안을 받았고 로략질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모두 병기들을 던지고 뿔뿔이 흩어져 밭을 다루는 농기구를 손에 잡았다. 며칠도 안되여 발해는 평온을 다시 찾았다. 이 력사의 한 대목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 옮겨놓고 의미매김을 해보면 어떨가? 사실 삶의 현실을 살고있는 우리의 신변체험을 떠올려봐도 모든 병이 감기로부터 시작될수 있듯이 모든 사회병근도 가난에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리향의식과 망향의식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한국나들이에서 많은 물의 내지 비리가 몸에 이가 끼듯이 비일비재한것도 종국적으로는 빈부의 차이, 다시 말하면 가난이 근원이다. 농촌의 황페화상태나 농촌처녀들의 도시진출도 결국은 가난이 원인이다. 몇달씩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거나 제도적장치 내지 구제책도 없이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이 어느곳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는것도 역시 가난이 도화선이다. 어느 한 현소재지에서는 도둑이 주인이 집을 잠간 비워놓은 틈을 타서 금방 다 된 전기밥가마의 밥을 홀랑 쏟아가고 밥가마는 그대로 놓아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제발 굶어죽는 사람을 구해주십사 하는것이라고 유머를 조미하는 익살에 어설픈 웃음이나마 지을수 있다. 법과 질서는 불가분리의 사회적장치이다. 질서는 법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지만 또 법에 의해 파괴되는수도 있다. 물론 법 그 자체가 질서를 파괴하는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법이란것이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지키고 사람이 집행하는것이고보면 누가 그 법을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집행하는가에 가부가 결정될수밖에 없다. 다시 상기 력사이야기에서 공수의 안무책을 풀이해보자. 공수의 판단: 재황으로 가난에 허덕이는 발해의 백성을 안무해주는것이 질서파괴의 뿌리를 뽑아버리는것이요, 지방의 안정을 가져오는 근본이다. 발해백성들의 심리수요: 련속적인 자연재해는 원초적인 생활보장마저 흔들리게 한데다가 탐관오리의 수탈은 반역의 심리마저 조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적으로 되게 하였다. 공수의 책략: 백성을 안무하고 반역한자를 관용하고 탐관오리를 처치하여 질서파괴의 근본뿌리를 뽑아버리는것이다. 공수가 발해로 내려가면서 새로운 법을 가지고 간것은 아니다. 다만 법을 권력의 보호산으로 리용하거나 략탈의 악수단으로 전락시킨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법을 질서확립의 합리한 수단 내지 제도적 장치로 바로잡은것이다. 백성은 법을 지키는 무리요 권력자는 법을 집행하는 무리이다. 그러니깐 지키는 무리가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파괴되는것도 사실이지만 집행하는 무리가 잘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파괴될것은 당연하고 자칫하면 나라조차 망할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한자 지혜로우면 만사람이 덕을 입고 악한자 지혜로우면 만사람이 해를 입는다고 했다. 지키는것과 집행하는것이 결국은 피동과 주동의 관계라고 보면 아무튼 지키는자는 지키면 되지만 집행하는자는 집행에 앞서 벌써 지키기를 잘해야 할것이다. 발해백성들이 련속적인 재황으로 굶주림에 허덕일 때에조차 수탈과 억압을 멈추지 않은 탐관오리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어찌 법을 집행할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강도가 도적을 잡는격이요 나는 략탈해도 되고 너는 반항해서는 안된다는 강도리론이다. 지키는자는 집행하는자가 지킬 때 그 집행을 거역할수 없다. 지키는자와 집행하는자가 다 같이 지키는 법,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회질서확립, 말하자면 사회군체 모두가 리해관계를 같이 할수 있는 바람직한 질서를 정립하는 만민옹호의 법일것이다. 지키는자와 집행하는자는 순종하는자와 이끄는자임에 다름아니다. 순종하는자는 이끄는자가 현명하지 못하거나 악인이면 한사코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반역조차 꾀할것이다. 겉둥치기로 환자를 진찰하고 약이나 팔아먹는 의사는 명의가 될수 없다. 환자는 두번 다시는 그를 찾지 않을것이다. 물건의 품질과 시세를 모르는 상인은 결코 훌륭한 사업가가 될수 없다. 종당에는 패가망신하는 운명일것이다. 집행하는자, 이끄는자는 지키는자, 순종하는자에게 어차피 혜택을 주어야 하며 그들의 의식주수요, 인격존중수요, 심리적수요, 물질적수요를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이잡이에 이골이 난 아Q처럼 우리 세대까지도 온 육체를 그대로 이의 온상으로 제공한, 째지게 가난한 력사가 있었다. 가난은 이뿐만 아니라 모든 심리적, 물질적 잡것의 온상이 된다. 이제 우리 후대들은 이란놈이 어떻게 생겨먹은것인지조차 모른다. 그저 간혹 옛날에는 너무도 가난해서 몸에 이가 득실거렸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기 몸을 살펴보면서 매우 신기해하는 얼굴이다. 그 천진하면서도 밝은 얼굴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질서를 설계해낸다. 가난을 력사에만 적어놓고 사회군체 모두가 리해관계를 함께 하는 질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가. 다만 <<권력의 세계는 무법의 세계>>라는 특권적인 <<명언>>이 력사에만 기재되기를 바랄뿐이다.
22    우물을 뛰쳐나오는 개구리들 댓글:  조회:1704  추천:0  2009-05-16
어느 일요일날, 동창생 몇몇이 북경 동물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전에 손을 씻는데 사람들이 손을 들이밀기만 하면 수도꼭지에서 저절로 물이 흘러나왔다. 한 친구가 신기하게 생각하며 두손을 들이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 친구가 재차 손을 들이댔으나 역시 수도꼭지는 벙어리가 된듯 싶었다. 이때 누군가 웃으면서 너는 촌놈이여서 봉사하지 않는거라고 악의없는 놀림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수도꼭지에서 물이 세차게 뿜어나왔다. 삽시에 그 친구는 얼굴에 물벼락을 맞고 옷까지 화락하게 젖어버렸다. 그가 어망결에 발로 딛게 만든 수문을 밟았던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반갑게 만나면 그때의 일을 악의없이 놀려주는걸 잊지 않는다. 오늘 그것이 인생의 철학적 사색마저 불러일으키는것이 흥미롭다. 사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닫힌 공간에서 풀려나와 사회의 요청으로 시대에 선택된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그런 신변체험이 한두가지가 아닐것이다. 감회깊은것은 그런 신변체험에 대해 철학적사색을 할수 있다는것, 풀어말하면 닫힌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사회의 요청으로 시대에 선택되였다는 다행스러움과 인생을 승화시키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했다는 자부감이다. 닫힌 공간이라고 하면 삶의 질변이나 승화가 있을수 없거나 거의 없는 공간일것이다.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순 소비적인 인생에 지치고 변질되는 그런 공간일것이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뛰쳐나와 안도의 숨을 몰아쉴 때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는 <<지구촌의 개구리>>라는 속담을 현실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의 도전속에서 개체의 사회화는 문화적인 신변정리와 함께 일생의 과업으로 제기되고 있는것이다. 산업화, 상업화로 특징된 도시적 삶의 질서가 사회발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적자생존의 경쟁의식이 원시적인 자연경제에 안주하여 그런대로 불안한 평온을 유지하여오던 농촌에 여지없는 충격파를 주었다. 생산성문화의 퇴화 내지 답보, 생활문화의 고갈 내지 빈혈증으로 질병을 앓고있는 변질된 삶의 현장에서 <<탈가도주>>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 황페화되여가는 농촌현실은 이미 사회적 관심을 모으는 과제로 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12억에 9억이 농민이였던 농경사회가 갑자기 산업화, 상업화를 특징으로 하는 도시사회로 탈태환골하였다는 사회의 질적변화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사회의 이런 질적변화로 하여 농촌의 많은 잉여로력이 도시로 흘러드는것이 주되는 흐름이기도 하다. 농업생산문화의 발전은 최대한의 기계화실현과 로력의 최적화를 요청하기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발전의 필연성을 말할뿐이지 아직 농업생산문화의 현실변화를 의미하지는 못한다. 그에 반하여 자기는 화려하고 안락한 문화생활에 몸담그고 있는 재정로임팀들이 농민들의 질고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눈을 감거나 아예 외면하면서도 짐짓 농민들의 운명을 관심하고 황페화되는 농촌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체 하는 트림질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원시적인 자연경제에 안주하여 변질된 삶을 살아가다가 그대로 그냥 인생도태를 당하기보다는 낯선 곳이래도 현대절주에 몸담그고 령으로부터 시작하는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사그러져가는 문화생활과 앞서가지 못하는 교육시설 내지 조치는 굶어죽어도 자식만은 공부시키던 전통적 미덕조차 고갈의 낭떠러지에 밀어냈으니 그들에게 인생의 질변과 상승이란 도대체 무엇일가. 하물며 짐승은 골로 오르고 인간은 버덕으로 내린다 하지 않았던가. 농촌의 이와 같은 실태에 많은 지성인들이 불안과 우려, 심지어 가속화될수 있는 민족동화에 위기감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민족의 집거가 <<동화연장법>>의 기본의 하나라고 할수 있겠다. 민족의 집단거주는 그 민족의 언어, 풍습, 인정세태 등을 망라한 문화권을 그대로 잘 보존해 줄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지역의 40대 심지어는 50대까지도 벌써 민족의 대오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있다. 우리가 중국특색이 있는 조선족문화를 운운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민족의 집단문화를 떠나서는 아무런 시대적가치도 없다. 한 민족이 현실적으로 이미 집단문화 내지 문화권을 상실하였다면 그 민족의 문화란 사실상 벌써 생명력 내지 재생력조차 상실한 전통문화의 잔재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집단거주가 민족동화의 기본적인 연장법이래도 우리는 그 집거지가 오늘의 현대절주 내지 삶의 현장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이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자연생장적이고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정신의 움직임이 없이 그냥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자연적이고 순 소비적인 인생에 지치고 변질되는, 그런 닫힌 공간이라면 그 민족은 동화에 앞서 벌써 도태당하고마는 운명일수밖에 없다.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속에서 한 민족이 생존하려면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에 도전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문화권형성과 동보로 문화적신변정리에 따르는 삶의 질적 상승 내지 끈질긴 생명력과 자활력을 꾀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기어이 기성도시인도 어제는 도시진출을 했었다는걸 꼬집을 필요가 있을가. 그 이상의 상승이 있을수 없거나 심지어는 삶의 변질까지를 어쩔수 없는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자체가 벌써 전진적인 삶의 자세요 끈질긴 생명력이다. 거기에 또 도시문화속에 민족의식의 뿌리를 박고 키워가려는 정신적 움직임까지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목적추구를 넘어서 벌써 민족의 근원적인 목적추구와 직결되는 비장한 움직임이 아닐수 없다. 생명력이 넘치는 삶의 광장을 마련해야 한다.
21    홀로서기 댓글:  조회:1650  추천:0  2009-05-16
아빠엄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타던 아이가 마침내 손을 놓고 아장아장 걸음을 내디딜 때 부모는 감탄과 격동을 금하지 못한다. 지팡이를 짚고 걷던 사람이 흔연히 지팡이를 뿌리치고 우쭐우쭐 걸음을 뗄 때 그 충격은 자못 큰것이다. 홀로서기를 자립함으로 풀이할수 있다면 그것도 바람직한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누구의 힘에 기대거나 누구의 지배에 움직이는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가 나를 지배하고 미궁같은 사회에 몸담그었어도 인생을 옳게 살아가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하는것을 일컬어 홀로서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생을 살아가는 밝은 자세라 할수 있겠다. 카멜레은처럼 보호색을 쓰고 자기의 리해에 지나치게 계산적인 우정은 상업이지 참우정은 못된다. 상업이래도 실은 협잡에 더 가까운것이다. 또 리용가치를 계산하거나 적어도 어떤 빚이나 혜택때문에 강박관념 내지 고마움에서 우정을 맺었다면 아직 뜻과 마음이 통하기에는 불의 시련이 남아있을수 있다. 역시 종교적인 하나님을 믿는것도 계산적인 사람에게는 죄를 사면한다거나 축복을 내린다는것을 전제적 약속으로 하는 교역인듯싶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본위로 하는 인격지배가 아니라 타력에 강요당하는 강박관념일수 있는것이다. 자각증상도 없이 사회 기성도덕이나 리념에 강요당한다거나 종교적인 하나님을 의식하기에 앞서 그냥 그대로 내 가슴에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하나님>>을 모시는것이 훨씬 주체적이고 바람직한것이다. 그러나 백사람이 <<이 세상에 누구도 믿을게 없다. 대방이 곧 지옥이다.>>라고 하는데는 우선 그 백사람이 문제이다. 그 자신이 벌써 대방이나 누구의 지옥임을 시인하고있으니 말이다. 하긴 속담에도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으나 궤변적으로 자기까지 숨기고 그림자를 내세우는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나의 속은 모른다>>고 억지할수는 없지않은가. 그리고 사실 인간은 만남으로 사회를 구축하고있는것이니 그냥 모이는 장소에서 그림자처럼 만나야 하는 사람의 눈치까지를 살핀다는것은 그 자신이 문제가 되는것이고, 또 자기 자신만을 껌처럼 질근질근 씹어대는 인생은 벌써 절망에 앞서가는 순 소비인생 그것뿐이다. 공적인 인격은 믿음의 다리요, 믿음은 우정의 바탕이다. 국가적인, 민족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인격은 서로간에 믿음을 주게 되고 또 그런 인격적인 믿음은 뜻과 마음을 통하는 우정을 키워준다. 자기의 마음의 창문을 꽁꽁 닫아버린 사람한테 남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있을수 없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한테 믿음이 있을수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 우정이 있을수 없다. 그냥 의심과 경계와 배타심을 앞세워 우정을 버릴지언정 친구를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인민내부모순>>에도 <<피값은 피로 갚는다>>는 투쟁철학을 람용한다. 전하는 말은 눈덩이 굴리듯하는데 그냥 스쳐지나는 바람결에 귀동만 열심이다. 짐작이 생사람 잡는것인데 자기의 총명과 판단력에 절대적인 권위를 세워준다. 도덕이니, 질서니, 법이니 하는것이 서로의 평화를 위한것이라고보면 인격이란것도 내가 다듬는것이지만 역시 사회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것인데 그냥 자아긍정에 남의 흉만 본다. 만약 이런것마저 홀로서기라고 할수 있다면 그것은 적자생존이요, 우승렬패요 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인간사회에 도입하여 사막같이 인정이 메말라가는 현실에서 인정의 오아시스를 찾는 갈망의 시대적심리가 낳은 기형아임에 다름아니다.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상품경제가 지구촌을 휩쓰는 정보화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소외가 자살적으로 감행되고 인정에 굶주린 비렁뱅이가 급증하고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결코 인간록지와 샘과 화원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도덕과 법과 질서말고도 인간의 본성적인 사랑심은 그냥 뿌리깊은 사랑나무를 무성하게 키우고 있다. 천륜의 부모자식사랑, 형제자매사랑, 부부사랑의 나무가 푸른 숲을 이루고 뜻과 마음의 틈에서 솟는 우정의 샘이 아늑한 호수를 펼치고 리해와 문명이 낳은 평화의 꽃들이 아름다운 화원을 수놓는다. 백사람이 나한테는 사랑과 우정과 평화의 마음이 있다고 확인할수만 있다면 그 백사람이 바로 사랑의 숲이요, 우정의 호수요, 평화의 화원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이어달리기는 그 자신의 정신적인 자세가 계주봉이 될수 있다. 백사람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할때 벌써 그 자신을 부정하는것이요, 나부터 마음에 정신적독방을 꾸며갈 때 그 자신이 바로 사랑의 나무요, 우정의 샘이요, 평화의 꽃이다. 길어지는 이야기지만 문뜩 련상되는것이여서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아버지를 따라 목욕하러 갔던 아이가 물에서 피여오르는 뜨거운 김에 겁을 먹고 물에 들어서기를 주저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먼저 물에 들어서면서 뜨겁지 않다고 했다. 조심스레 한발을 물에 들여놓던 아이가 얼른 발을 들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한사람도 없다>>고 했단다. 아직 인내력과 적응력이 완숙하지 못한것이 아이의 판단을 빗나가게 한것이지 과연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것은 아닐것이다. 자신의 상황으로 객관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랑과 우정과 평화를 위한 정신적인 독방을 마련하는것이야말로 예쁜 인정사회를 구축해가는 바람직한 홀로서기이다.
20    거짓말 이설 댓글:  조회:1968  추천:0  2009-05-16
아들애는 인제 겨우 다섯살이다. 자연인으로 태여나 어른들을 <<흉내>>내면서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그 애의 가슴엔 아직은 파란 잔디뿐이다. 인제 그 잔디밭을 파헤치고 무엇을 심게 될가 하는데는 어쩔수 없이 그 애의 흉내의 대상물이 되여버린 우리 어른들의 형상이 보기가 될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애 앞에서 일거일동을 애써 아름답게 꾸미려고 모지름을 쓴다. 마치도 흰종이에는 어떤 색갈이나 다 옮을수 있듯이 고운 말, 미운 말, 옳은 행동, 그른 행동이 죄다 그애한테 <<전염>>될수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지나친 조심성이 더 부자연스러운 때가 많았다. 몸에 배지 못한 공식화된 규범을 지키노라니 자연 그 배역이 서툴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런데다 아들애는 나이를 한살 더 먹더니 호기심에 찬 질문도 많아졌고 성인사회에 대한 불신임도 훨씬 커진듯싶었다. 그애의 엉뚱한 질문이나 간단한 추리, 판단에 문뜩문뜩 놀라움을 금치못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고 그래서 례사롭게 지나쳤던 사회현상에 새삼스럽게 철학적사색까지를 굴리여보는수도 종종 있었다. 얼마전의 어느 휴식일이였다. 금방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가 산책하고 돌아오는데 아들애가 떠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거짓말 했습니다.>> <<응, 무슨 거짓말을 했게?>> 나는 안해를 핀잔주려는듯 쳐다보았다. <<아까 아버지 친구가 왔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화룡갔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거짓말쟁입니다.>> 나는 대뜸 얼굴에 노기를 띄우며 안해를 쏘아보았다. 안해는 얼굴을 붉히며 아들애를 흘겨보더니 바삐 변명을 하였다. <<마작놀러 가자고 찾아왔더군요. 오늘 글쓸것들이 많아 하루종일 바쁠것 같다기에 둘러붙인거예요...>> 한순간 할말을 찾지 못했다. 안해와 아들애가 다 접수 할수 있는 표정을 골라잡지 못하여 그런대로 멍청한 상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들애가 또 떠들었다. <<그런데 어째 나를 보고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까?>> 하긴 어른들로부터 귀에 아프게 도적질하면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다...하는 식의 훈시를 밥먹듯해왔으니 어느덧 그런것들이 그애가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좌우명으로 자리매김했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른이 그 좌우명과 빗나간 행위를 저지른것이다. <<너 아버지가 공부하는게 좋니? 마작노는게 좋니?>> <<공부하는게 좋습니다.>> 그러던 아들애는 갑자기 신대륙이나 발견한듯이 눈을 반짝 빛내며 <<아, 그런건 좋은 거짓말입니다. 예?>> 하는것이였다. <<엉?>> 너무도 엉뚱한 추리에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마침내 안해와 함께 웃어버렸다. 좋은 거짓말, 참 유치하면서도 멋스러운 말이다. 거짓말에도 좋고 나쁨의 구별은 있다는 말이 된다. 구태여 단어의 합리성을 추상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는가. <<어머니를 찾아 삼만리>>(영화)에서 오빠는 동냥한 음식을 어린 녀동생한테 주면서 자기는 배고프지 않으니 어린 네가 많이 먹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걸탐스레 먹어대는 녀동생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꼴깍 삼킨다. 희생적 거짓말이라고 할가. 아무튼 자기를 희생하는 도덕과 인정에 젖은 거짓말이다. 거리에서 관계가 그닥 투명하지 못하고 지어는 알륵까지 있는 두 사람이 만나 얼굴에 웃음을 피우며 알은체한다. 등등... 이런건 뭐라고 명명할가? 생각키우는대로 먼저 문화적 거짓말이라고 하여보자.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라고 남남에 아니 지어는 혈육지간에도 생각이 착착 맞물려지는것은 아닌데 그대로 내내 얼굴을 붉히고 지어는 드잡이따위를 한다면 인정이란 무엇이고 질서란 또 무엇인가. 그러니 작은 알륵을 숨기고 큰 화목을 도모하며 례의와 문화인격을 수립하려는 <<틀>>에 맞추는 거짓말이겠다. 그러고보면 원시인격이란것이 보다 진실하면서도 대항적이거나 배타적인것이라면 문화인격이란것은 보다 허위적인것이기는 하면서도 평화적이고 도덕적인것이 아닐가. 그런데 상술한 이 두가지 거짓말을 말고도 또 한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남을 해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그런 악의 소산으로서의 거짓말은 철저히 배제된다는것을 밝혀둔다. 하긴 제목부터가 거짓말 이설이니깐 밝힘이 오히려 지나친 로파심이기도 한것같다.) 한 대학본과 졸업생이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나와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려고 어느 향정부에 배치되였다. 몇년간 꾸준히 일한 보람으로 사업에서 떳떳이 한몫을 떠멜수 있게 되였고 선거표도 표결전에 벌써 불보듯 빤해졌다. 그런데 어찌해도 향장관을 통과할수가 없었다. 이튼날, 그는 전화로 향장을 찾아 자기는 현장인 아무개인데 자기의 먼 조카벌되는 아무개가 일 잘하는가고 물었다. 그후에 그는 영광스럽게도(?) 부향장으로 제발되였으며 사업에서 큰 성과를 따낼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따질 필요없다. 사회적비리를 풍자하여 확대가공한것일수도 있다. 도리대로 하면 이것은 없어야 할 거짓말이다. 그러나 생활현실에서는 없을수 없는 필연성까지를 내함하고 있다는것이 비극적으로 받아안게 되는 결론이다. 그것은 악의 범람 내지 삶의 무질서가 제도적으로 또는 사회의지적으로 극복 내지 구속되지 않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극복할수 없기때문이다. 더우기 권력은 한사람이 만사람을 다스리는것이요, 또 층층이 구슬처럼 꿰여져있는것이기에 덕을 선행하면 만사람이 복을 입게 되고 악을 선행하면 만사람이 해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또 권력에 매달린자들은 촉매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쾌속반응을 나타낸다. 특히 권력자체가 어떤 일에서 직접 촉매제로 나설 때 그 일은 에누리없이 성공을 미리 축하할수조차 있는것이다. 그러고보면 거짓말의 대상물이 부패 내지 악이라면 그 거짓말자체가 진실과 진리의 가면 내지 수단으로 될수도 있지 않을가? 도덕에 어긋난 악의 소산으로 된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타매하고 뿌리뽑을수 있는 처방을 떼야 지당할것이지만 부패와 악을 대상물로 한 거짓말은 그것을 합리하게 받아들일바는 아닐지라도 처방만은 틀림없이 부패 내지 악을 제거하는 처방을 떼야 하는것이다. 이때는 병의 뿌리가 거짓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악에 있기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때에 거짓말을 제거하는 처방만 뗀다면 그것은 칼로 부추베기거나 도리여 악을 조장하는 결과외엔 아무것도 될수 없는것이다. 악을 대상물로 한 거짓말은 그 악을 제거할 때라야만 그 필연성이 소실될것임이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에 <<신을 신고 발바닥긁기>>란 속담을 추천하고싶다.
19    겨울은 신변정리의 계절 댓글:  조회:1713  추천:0  2009-05-16
왜 이럴가, 립춘이 들이닥친줄도 모르고 아직은 뼈를 저미는 추위가 저쪽에 호랑이처럼 도사리고 있으리라 믿어 솜옷밑에 끼여입을 털실옷을 그런대로 옷장속에 대기시키고있는데 일력을 넘기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이쿠, 이게 뭐야, 벌써 2월이라니. 이게 웬 일일까? 작년까지만도 이맘때면 아무리 감각이 무딘 사람이래도 눈에 눈물이 찔끔 나도록 고추추위에 몸을 움츠렸고 푼푼히 쌓인 눈을 치느라고, 눈사람을 만드느라고, 눈덩이를 뿌리느라고 법석대지 않았던가. 또 그 한때만이라도 나무가지에 새하얀 눈꽃이 피고 인공화된 도시의 모습이 하얗고 깨끗한 눈옷속에 감추어진 황홀한 설경이 제법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할수 있도록 석유와 연기와 알콜에 찌든 도시민들을 유혹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때가 먼 옛날의 기억처럼 훌쩍 멀어져가버린다. 계절의 변화를 다만 하늘에서나 읽을수 있던 우리가 이제 그것마저 박탈당하고마는것인가. 순간 이름못할 긴장과 불안과 위기가 가슴을 쓸쓸하게 엄습한다. 내가 기성된 체험내용과 반응방식에만 안주한탓일가. 혹은 콩크리트화되여가고있는 도시열기에 하늘마저 콩크리트화되여 변화무쌍한 조화의 성미를 잃어버린것일가. 새삼스럽게 신변을 둘러보니 모든것이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변화없는 고리타분한 생활절주에 정신마비증환자가 하나둘 늘어만 간다. 자아를 속뽑힌 흐트러진 몸체들이 좌절의 체험과 희망의 체험조차 희미한속에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여 돌아간다. 석유와 연기와 알콜에 찌들고 방종과 허탈과 무위를 삶의 일상성으로 받아들여 도시는 명실공히 소비도시로 전락해간다. 전국에 명성을 떨친 술소비 내지 택시소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탈바꿈하는 옷소비 내지 미용소비, 한강에 돌던진격으로 투자만 있고 창조나 발전이 없는 무역소비 내지 산업소비, 목적성도 없이 만나니깐 앉고 앉으니깐 마시고 마시니깐 소리한다는식의 거래소비, 그리하여 인생마저 비창조적이고 비생산적인 무위도식으로 하루하루를 소비해간다. 다시금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나는 내가 그속에 주체성없이 끼여서 허동대고 있음을 발견하고 전률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여기에 와 있었을가. 이찌하여 침묵과 도피라는 형태의 죽음을 택하고 여름조차 사계절 온실속에 묶어두는 인공의 섭리에 만족한 웃음을 짓고 무지러져가는 계절의 변화에 감각마저 상실하고만것인가. 억지로 몰락해가는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향수 내지 체험에 도취되였을뿐이라고 자기변명에 몸부림쳐보았으나 지성인으로서는 지나치게 사회의 문화적기여에 린색하였다는 죄의식을 떨쳐버릴수는 없었다. 아, 그래도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인격이 돈과 권세에 직결되는 세속속에서 인심조차 세멘트바닥에 눌린 도시민의 곤혹을 신변체험으로 절감하였다. 그런 감각에 나는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자각할수가 있다. 그것이 백약보다는 나으리라. 하늘은 아직 콩크리트로 닫히지 않았다. 다만 구름이 뒤덮혔을 뿐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의연히 겨울이 오는 자연의 섭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끌어내고 보다 예쁜 삶의 공간을 체득하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도 하지만 그 공간을 가꾸며 넓히기란 벌써 희생조차 요청하는 더욱 어렵고 그래서 또 아름다운 창조적인 생산이다. 겨울은 워낙 자기의 신변정리와 한해를 총결산하는 계절이다.
18    의태현상 댓글:  조회:1950  추천:0  2009-05-16
아폴리네르의 소설 <<오노레 쉬불락의 소멸>>은 카프카의 <<변형기>>처럼 인간의 의태현상을 쓴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노레 쉬불락은 스물다섯되던 때에 한 유부녀와 치명적인 애정도가니에 빠진다. 그러다가 며칠동안 출장중이라는 남편의 기만술에 속아 유부녀와 둘은 알몸의 그대로 남편의 총구멍앞에 서게 된다. 오노레 쉬불락은 극도의 공포속에서 그저 꺼져버렸으면 하는 소원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벽에 등을 붙이며 자기의 몸이 그대로 벽과 더불어 함께 되기만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실현되였다. 그는 갑자기 벽지의 색갈이 되여버렸고 사지는 의지의 힘으로 엄청나게 늘어나서 납작하게 되였으며 결국 그의 몸은 그대로 벽과 한덩어리가 되여버린것이다. 그를 죽이려고 한참 날뛰던 남편은 그 분노를 안해에게 전환시켜 그녀의 머리에 여섯발이나 쏘아 무참하게 죽이고만다. 그리고는 절망에 울어대며 사라져버린다. 남편이 가버리자 오노레 쉬불락은 본능적으로 정상적인 모양으로 되돌아가며 본래의 색갈이 된다. 그후로부터 그는 의태의 령역에 속하는 이 요행스러운 능력을 지니게 된다. 중국 고전명작중에도 <<료재지의>>와 같은 귀신이야기가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고 이채로우며 의태현상을 고도로 집중체현한 소설은 그래도 <<서유기>>일것이다. 손행자는 72반의 둔갑술을 가지고있으며 헤아릴수 없이 많은 요귀들이 변신술을 부릴뿐더러 하늘에는 호풍환우하며 형태나 색채를 마음대로 바꿀수 있는 부처님과 신선들이 있다. 물론 소설로서의 오노레 쉬불락의 의태현상이다. 서유기의 둔갑술은 사실의 차원에서는 기막힌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의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경험내지 체험에 가까운 인상을 남기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것은 소설이 거짓말에 의탁하면서도 진실과 현실에 도달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때문일것이다. 오노레 쉬불락의 입을 빌면 자연은 자기의 아이들중에서 위험에 빠져있는 자들, 그리고도 너무나 약하여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기를 둘러싸고있는것들과 함께 합쳐버릴수 있는 재주를 나누어 주었다. 나비는 꽃을 닮고 어떤 종류의 벌레는 나무잎과 흡사하고, 카멜레온은 주위의 상태에 따라 몸을 잘 감출수 있는 빛갈을 바꾸기도 하는 등이다. 의태현상이란 사실 형태와 색채를 변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의지의 본능은 두가지로서 하나는 극도의 공포와 피해의식이요, 다른 하나는 욕구불만일것이다. 생활의 일상에서 우리는 카멜레온식의 인간을 성실하지 못하고 도덕적이 못되는 위선적인 인간으로 몰아붙이며 사기군이나 협잡군과 등호를 쳐버린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은 자기의 승진을 위해 남을 모함하고 상전에 아부하는 벼슬광환자, 자기가 진리의 화신인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리성을 강요하면서 자기는 호의호식에 빠져버린 방탕아, 국가의식이요, 집체주의요 하는 아름찬 구호를 웨쳐대면서 자기는 뒤주속의 쥐처럼 나라의 재물을 좀먹는자들의 가장 교활한 수단으로 의태법이 활용되고있는 탓일게다. 그러나 사실 의태현상이 자연이 베풀어준 재주라 한다면 의태현상 자체가 그대로 비난받을것은 아니다. 생활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흔히 본래의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때가 자주 있게 된다. 그것은 사실자체가 그대로 사회적 긍정이나 도덕적 정당성을 보증한다고는 할수 없기때문이며 지어는 정당한 사실만 있는것이 아니고 부당한 사실도 있기때문이다. 제사집에 가서 슬퍼해주고 혼사집에 가서 기뻐해주는것이 문화인의 선의적인 위선이라고 할수 있다. 무더운 삼복철에도 장소 맞춰 옷을 입는 체면을 우리는 원시인으로 퇴보하기전에는 도저히 버릴수가 없다. 점심이나 저녁식사때에 내려오는 이러저러한 검사단을 우리는 웃으며 환영할수밖에 없다. 무슨 의연이요, 부조요 하는 항목이 갈수록 많아지지만 아니내면 모르되 낼바에는 웃으면서 당연한것처럼 태연자약하는것이 리로울뿐이다. 암행어사처럼 돌연습격하는것이 황제의 행차처럼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내려가는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 풀을 다쳐 뱀을 놀래우는것이 목적의식적인것이 아니라면 현명한 관원들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는 의태법을 배워야 한다. 악인이 의태법에 능하면 만사람이 해를 입을것이요, 선한자들이 의태법에 능하면 사회가 화목한 대가정처럼 하냥 밝음이 깃들것이다. 오늘도 나는 길을 가다가 풋면목이라도 있는 이를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알은체 할것이다. 그보다 더 가까운 이를 만나면 오래오래 손을 잡고 살틋한 정을 나타낼것이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모든 사람들과 깍듯이 인사를 할것이다. 찬물에 밥을 말아 김치를 먹으면서 한때를 맛있게 배불리 잘 먹었다고 안해에게 감사의 말을 한마디쯤 해주는것을 잊지 않을것이다.
17    절름발 댓글:  조회:1668  추천:0  2009-05-16
지금에 와서 과부가 재가하는것은 별로 시비거리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부들이 독수공방의 서러움과 인성억압의 고통속에서 자유를 찾기까지에는 그로서의 력사과정을 거쳐왔다. 그것은 거의 륜리제도적으로 고착되여버린 관념도덕(특히 우리 민족은 렬녀관의 단속을 엄히 받아왔다)의 변질내지 교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획득한 결과이다. 지금 로인들이 재가 혹은 재장가가는것은 의연히 큰 시비거리로 되고있다. 그것은 여러 사회적요소가 있지만 그래도 근원적으로는 아직 관념도덕 내지 기성도덕이 이런 경우에 다는 변질되지 않았기때문이다. 관념이란것은 인간경험의 집합체인만큼 거의 제도적힘으로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를 약속하는것이다. 신생사물은 낡은 관념이 타파되거나 양보하기전에는 그래서 파란곡절을 겪는것이고 지어는 요절되기까지 하는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틀림없이 그 당시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발견이였음에도 불고하고 이단으로 몰리워 그 자신은 화형까지 당하고만것은 역시 극단적인 종교정치의 완고성때문이였다. 아무튼 새로운 사물은 새로운 접수력을 요청한다는 도리를 우리는 신변체험적으로도 깊이 느끼고있는터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공식에는 개혁과 경제개혁이 등식으로 표시되고있는것이 보편적이다. 이는 설명도 필요없이 류개념과 종개념을 동등시하는 착오에 떨어지는것이 투명한데 여기서 아직 관용의 태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개혁(경제개혁)이라고 하여 경제적인 활동자체만을 신성하고 급선무적인것이라고 여기는것은 사실 기계를 돌리는데 손만 필요하고 머리는 필요없다거나 뽈을 차는데 발만 필요하고 머리는 필요없다는식의 아주 천진하고 유치한 생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비록 경제개혁에서 정신적인것이 <<간접적>>일지라도 결코 보조적이기만 한것이 아닐 정도로 개혁의 승패조차 좌우지할수 있다. 뼈저린 교훈을 무드기 남겨놓은 지나간 몇십년을 민망스럽게 돌이켜보면 결코 최종적과오는 경제가 락후한때문이 아니라 락후한 경제를 승인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사실 인류문명발전사의 매 단계를 살펴보아도 사회는 새로운 과학에 의한 의식의 변질, 의식의 새로운 수준에 의한 과학의 비약, 이런 호상 교차적인 순환공식에 의하여 발전하였음이 틀림없다. 물질이냐, 정신이냐 하는 관념적 또는 결론적 철학의 범주에서 뛰쳐나와 사회발전의 실천적측면에서 판단할 때 우리는 결코 어느것이 중요하고 어느것이 차요하다는 그런 선입견이 앞서는 편애적인 긍부정을 할수 없다. 그것은 마치도 눈이 중요하냐, 귀가 중요하냐, 또는 손이 중요하냐, 발이 중요하냐 하는 시비와 같이 전혀 무의미한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 큰 땅덩어리가 백년 넘어 타족의 발밑에서 몸부림쳤던 과거의 교훈도 최종적으로는 의식의 락후라는데 도장찍힌다. 일본의 메이지유신후의 밝은 전도와 청정부때의 유신변법실패후의 암담한 현실의 대비는 결코 순순히 경제적락후 또는 과학의 락후라는데서 근원을 찾기에는 아직 뿌리가 남는것이다. 그 경제적락후 또는 과학의 락후라는것은 어찌하여 생기게 되였느냐 하는 물음이 아직 해답을 기다리고있으니 말이다. 서양의 문명이 그처럼 놀라운 속도로 줄달음치게 된것도 중세기 그리스도교적 통일문화의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탄압에서 해탈되게 한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란 정신적해방운동이 있은 후의 일이였다. 극단적권위의 종교정치하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아무리 과학적발견이였다 하더라도 어쩔수 없이 이단으로 몰리우는수가 당연한것이다. 이와 같이 능히 떨어버릴수 있는 고통에서, 낡은 도덕에서 관념에 의해 벗어날수 없을 때 정신적인 <<개혁>>이 유일한 비방이 아닐수 없다. 황소가 지구를 끈다는 소농의식을 가지고 원시적신화생활이 고달픈 현대절주의 문명생활보다는 훨씬 안온하고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관념을 갱신하지 않고도 로동력을 제고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며 로동적극성을 만부하로 불러일으킬수 있다고 믿는자는 채찍질할줄밖에 모르는자이다. 서로 다른 접수력은 서로의 행위를 제약한다. 제딴엔 아무리 경제적이고 과학적이고 계산적이고 타산적인것일지라도 접수자의 접수력과 맞물림을 이루지 못할 때 소귀에 경읽기가 되고말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물질문명이냐, 정신문명이냐 하고 극단적인 판단에 골머리를 앓는자는 틀림없이 개혁의 절름발이다. 혹시 두다리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바이올린을 멋들어지게 켰는가 하는 실례를 신문을 꺼내들고 증명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과 구태여 입씨름할 필요는 전혀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이런 실증이 결코 신체장애자들에게 삶의 신심과 굳은 의력을 키워주기 위한것외의것으론 될수 없기때문이다. 만일 성한 사람더러 그들을 본받아 두팔을 두고도 두발로 바이올린을 켜라고 한다면 머리가 돌지 않았나 하는 관심부터 앞설것이다. 부단한 탐색과 선택속에서 삶의 선률을 엮어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식수준의 여하가 력사발전의 흐름을 결정하는 근본요소로 된다. 그만큼 천만갈래의 선택앞에서 가장 발전적이고 믿음 짙은것을 골라잡는데는 동등수준의 인식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진귀한것일망정 모르는자에겐 한낱 평범한 돌멩이나 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이 그런자들에게 믿음을 준다면 내내 얻는것이란 돌멩이나 풀뿐일것이다.
16    지식과 지능 댓글:  조회:1687  추천:0  2009-05-16
소학 5년, 중학 5년에 대학 4년이면 모두 14년에 나는데 거기다가 말과 셈을 베운 철없는 7년까지 합하면 작히 인생의 세등분한 한몫은 학문닦기에 고스란히 바친셈이니 그만하면 참된 삶에 굳건한 노력을 몰부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그런데 노력과 결과가 언제나 자매처럼 다정하게 어깨를 겯는건 아니다. 물론 피타는 노력끝에 마침내 성공의 령마루에 오른 사람이 많고 그래서 이 세상에 <<공든탑이 무너지랴>>,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는 속담이 나오게 된것이 아닌가고도 생각되지만 그러나 또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속담도 있으니 그 반대의 실례도 퍼그나 많은것 역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굶어죽어도 자식만은 공부시킨다>>는 전통미덕을 대바르게 지켜가는 부모의 따뜻한 배려와 혜택을 받아 근심에 걱정이 없이 마음껏 배우고서도 게을러 수확이 적고 둔해서 머리트임이 없는자야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저주할순 없고 그저 게으른 자기를 후회하고 둔한 자기를 개탄할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모든 과목을 우수하게 끝마치고 사회에 자신있게 진출하였으나 기울이는 노력과 갈망하는 목적과는 어긋나게 그저 차례진 일이나 쑬쑬하게 해나가거나 지어는 도태까지 당하는 그런 <<학생팀>>이 적지 않다. 그 원인을 그들 주관에만 몰밀어버리기에는 아직 그들의 학적부가 억울함을 하소연하고있다. 전통적인 교육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것을 가장 높은 목표로 삼고있지만 사회의 진보는 이미 우리더러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실제문제를 풀이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능형 인재를 배양하는데 있다는것을 내다보게 한다. 이 관점으로 다시 사회를 조명해보면 확실히 중국의 전통적교육은 기나긴 봉건사회로부터 줄곧 책을 중시하고 실제를 홀시하며 주입하는것을 중시하고 계발하는것을 홀시하며 기억하는것 또는 외우는것을 중시하고 사고하는것을 홀시하며 지식을 중시하고 능력을 홀시하는 교수관념과 체계를 키워왔다. 그런데 지금은 점잖은 선비들이 수염을 내리쓸며 달을 바라보며 풍월을 짓고 술을 마주해 권주가를 부르며 하찮게 유식이나 자랑하는 <<태평성대>>가 아니다. 온 사회가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왁왁 들끓고 고도로 되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낳으려고 모진 진통에 악악 몸부림을 치고있다. 이와같이 십년이 아니라 일년이 다르게 변모하는 오늘날에 와서 지식에로의 주기가 날로 긴축됨에 따라 그와같이 여유작작하게 지식을 루적하고 느릿느릿 소화하여 천천히 응용하는 객관적조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우기 사회와는 전혀 담을 쌓고 지식과 지식의 대비로 너와 나의 학문이나 수준을 가늠하는 어리광대놀음은 더는 사회의 용납과 사람들의 흠모를 자아낼수 없다는것이 지식과 능력의 대비속에 통쾌하게 투명해졌다. 그러니깐 인제 교육의 진정한 힘은 근근히 지식을 루적케 함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계발하여 지식으로 실제문제를 풀이하고 지혜와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시대의 진통을 덜어주고 인류에 행복을 창조해주게 하는것이다. 매듭지어말하면 배운 지식과 발휘하는 능력이 유기적인 련계를 갖게 하고 혈연적인 자매로 되게 하는것이다. 실제를 위해 능력을 발휘할수 없는 지식은 참지식이 아니다. 옛날 배우기를 더없이 즐기는 주평만이라는 사람이 어디 한번 남모르는 재간을 배우리라 다짐하고 하늘을 무찌를듯한 포부에 가산까지 몽땅 털어 천냥 황금을 장만한후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지리익이란 사람을 찾아가 룡잡는 기술을 배웠다. 옹근 삼년동안 배우고 돌아온 그는 제멋에 겨워 사람들에게 손짓발짓해가면서 룡머리는 어떻게 누르고 룡꼬리는 어떻게 디디며 룡모가지에 어떻게 칼을 박는가를 신나게 설명하였다. 사람들이 폭소하면서 <<그런데 그 룡이란놈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고 묻자 그는 단꿈에서 깨여나 경황실색하였다. 목적도 없이 아무 쓸모도 없는 기술을 배운 주평만이 측은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보다도 그런 쓸모없는 지식을 배워준 지리익이 더 밉살스럽고 괘씸하지 않은가! 인조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생기가 없고 향기도 없다. 따사로운 해빛과 풍요한 대지의 자양분을 한껏 섭취한 백화가 만발해야만 사회는 생기를 띠고 생명이 약동할수 있다. 지식은 지식을 위한 지식이 되지 말고 능력을 위한 토대로 되여야 한다.
15    변질된 의식은 버려야 한다 댓글:  조회:1528  추천:0  2009-05-16
길이란것이 어떻게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는가? 이 물음에 함의가 투명하고 값있는 대답을 주려면 성큼 앞서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인간발전력사의 상징으로 된다는것을 까밟혀놓는것이 필요할것이다. 우리가 가장 고약한 도적놈으로 알고있는 쥐는 생존본능에 의해 가을철엔 밭고랑사이에 길을 내고 긴긴 봄, 여름, 겨울 이 세 계절엔 고작 량식창고나 부엌간으로 길을 낸다. 그러나 길은 인간과 관계할 때 재빨리 그 무의미성이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자기의 가슴우에 력력히 찍어놓고있는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서 길을 내는것이 아니라 보다 더 아름답고 리상적인 세계에로 통하기 위하여 길을 더듬고있기때문이다. 바로 이와같이 길에 대한 인간의 지향적인 탐색으로 하여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유익하고 무익한 길들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바로 또 그러한 지향적인 탐구로 하여 갈곳은 저긴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헛되지 않은 헛된 걸음(성공을 약속한 실패이므로) 을 걸었는가를 그 길들은 말해주고있는것이다. 우리 인간은 길의 운명에 처참할 정도로 급속한 진보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인제는 결코 자기의 행동적체험만으로 길을 탐색하는것이 아니라 보다 총명한 지혜로 길을 탐색하게 되였다. 그 지혜의 상징인즉 과학이다. 지남침이 생겨난것도 인젠 놀랍고 신비로울 때가 아니다. 하늘에 낸 길은 사람들에게 무한히 가능한 직선운동을 가리켜주어 더는 저 앞에 있는 샘을 찾아 열두굽이를 돌아 헤매게 하지 않는다. 바다에 낸 길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땅이란 결코 내가 딛고선 밑에만 있는것이 아니며 바다란것이 결코 끝간데 없이 망망하기만 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익한 길이 아직도 완전히는 자취를 감춘것이 아니다. 뿐더러 그것은 력사의 흔적으로 남은것이 아니라 아직도 무수한 발자국을 찍고있다. 그것은 아직도 산너머에 벌판이 있음에도 산을 옮겨 길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황소가 지구를 끈다고 미신하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조상숭배가 극한을 이룬 결과라 해야 하지 않을가. 자기의 태줄이 묻힌 고향땅에서 원시적일망정 외계의 소음이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것이 생소한 현대적흐름속에서 버둥거리기만 낫다고 생각하는것이다. 그로부터 자아위안이란 곧바로 비행기보다 기차가 안전하고 기차보다 자동차가 안전하며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안전하고 자전거보다 11호차(두다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것이다. 돈이 없어 자전거를 사지 못하면서도 신체단련과 안전을 위해 사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아뭏든 어떻게 하나 돈을 벌어 차를 사겠다고 분발심을 가지지 못하는데는 적어도 현상태에 만족하는 정신적고질이 장난치기때문일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조상이 물려준 <<퇴물림>>에 있나 없나를 표준 세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여 그런 사람들은 지남침도 없던 그런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경험하여온 그런 애처롭고 가련한 탐색으로 망망한 원시림에서 자기가 나아갈 길을 찾아헤매고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그런 속에서도 숙명적인 행운으로 요행 무의미한 고행에서 빠져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나와 선자리에는 현대인이 살던 흔적밖에 남지 않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현대인이 달리는 속도, 그것은 결코 자연이 마련해준 생리적구조인 두다리로 닫는 속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드레팔십리걸음을 하는 황소의 걸음은 더구나 아니다. 사람들이 고향땅에만 묻혀 사는 사람을 일컬어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하던 속담도 인젠 오라지 않아 그 공간적함의가 훨씬 넓어질것인즉, 그때면 지구에만 묻혀 사는 사람을 일러서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할것이다. 사람들은 벌써 지구로부터 달에로 려행할수 있는 공중길을 닦아놓고있지 않는가. 우리로부터 몇억광년이나 떨어져있는 별에 대한 한결 현실적인 관찰을 할수 있는것도 사실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이런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의 도전속에서 현대화의 길을 닦고있다. 우리와 세계속도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근대와 전근대사이랄만치 세기적격차를 두고있다. 그런데 그 차이자체가 벌써 하나의 엄청난 비극적요소로 되고있는데 가날픈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은 우주속을 헤염치면서 마음에 드는 별을 따려할 때 그들은 황소로 지구를 끌어보려 한다. 원시적신화와 현대적리상의 대비라고 하는것이 적중할것이다. 정든 길이 편하고 가깝다는 말도 있다마는 그것은 결코 전제없이 무분별하게 믿을수 있는 만병통치의 약은 아닐것이다. 가령 산을 뚫고 턴널을 놓고 골을 질러 다리를 놓아 곧게 뻗은 아스팔트를 두고도 오불꼬불한 산길을 걷는다면 걸어본다는 전제가 없을 때 그런 사람은 적어도 머리가 돈것이 아니겠는가. 조상들이 경험한바를 다듬어놓은것이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전통임에는 에누리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삶을 펼쳐가던 그 당시의 최대의 지혜의 산물이라 할때 오늘의 삶의 광장에서 우리 현대인의 지혜의 극점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있음도 틀림없다. 부모슬하에서 자식이 성장함은 본능에 가까운 상식일테지만 인간은 동물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풀어보면 자식은 결코 절대적으로 부모를 모방하기만 하는것이 아니다. 어제의 리상이 오늘의 현실로 되면서 부단히 그 삶의 내용을 달리하는것이 인간사회라고 보면 오히려 바야흐로 현실로 되는 리상을 위해 일생을 소모해온 전세대가 그 리상을 현실로 맞이하고 새로운 보다 높은 리상을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후세대앞에 자기를 반성하고 새롭게 삶의 내용을 꾸며가는것이 월씬 전진적인 삶의 자세일것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전통에 대해 취해야 할 옳은 자세란 조상세대가 그때의 삶의 현실에서 최대의 지혜를 동원하여 력사를 앞으로 굴려온 그 보배로운 삶의 자세를 물려받는것이지 결코 그들의 일거일동을 답습하는것일수 없음이 투명하다. 력사의 흐름은 세기의 쌓임속에서 가속적이다. 그것은 력사의 운수도구가 부단히 혁신되기때문이다. 그 본질적 함의는 바로 인간지혜의 무궁한 발굴에 따른 과학의 끊임없는 창조력이다. 토끼와 거부기의 달리기시합에서 토끼가 진것은 그 자신의 자만때문이지 결코 거부기가 토끼보다 빨라서가 아니다. 그나마 우주비행선은 결코 토끼처럼 자만하여 황소가 따라오도록 하늘공중에 발을 멈추고 잠을 자지는 않을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고질이다. 원시적생활에 마음의 뿌리를 심고 원시적신화의 창조에 만족한 웃음을 짓는 변질되고 곰팽이 낀 농경의식은 전혀 먹을 수 없이 변질된 고기를 아깝다고 집구석에 그냥 놓아두어 악취를 한집 가득 풍기게 하는것과 꼭 같은 경우이다. 숨가쁜 세계의 달음질에 아침은 잠간이고 저녁도 순간이다. 억지로나마 소궁둥이에 채찍을 안겨 해넘기전에 갈곳에 닿을 수 있던 요행은 더는 바라볼수 없게 되였다. 아니, 그것은 렬강들의 총포앞에서 칼을 휘두르던 그때에 벌써 산산쪼각이 나지 않았던가! 닭알로 바위를 깠다면 신화라 해도 믿음을 줄수 없다. 하물며 소수레에 앉아 달나라로 갈 꿈을 꿔서야 되겠는가! 변질된 의식은 버려야 한다!
14    채취능력과 선광능력 댓글:  조회:1515  추천:0  2009-05-16
인간은 흔히 어떤 사실, 사물, 사태, 사정, 사상, 사유, 사람 내지 사회에 대해 선입견으로 긍정 또는 부정해버리는 오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무턱대고 자기를 개여올리는 아첨쟁이를 충신으로 잘못 믿었다가 발밑이 와그르르 허물어져버리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위하여 그릇된것을 지적해주는 충신을 야심가로 잘못 진단하고 여지없이 꼭두눌러버리는 인간도 있다. 어떤 기업인들은 나라의 경제진흥을 자기들이 짊어지고 있다면서 선비님들을 기생충은 아니래도 식객은 틀림없다고 비웃는다. 그런가하면 일부 인테리들은 보다 발전한 문명은 그래도 자기들이 창조하는것이고 경제인이란 사실 인간본능의 한 욕구를 위해 발버둥치는 저급차원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풍자한다. 어떤이들은 소위 절대적진리를 사회현실 내지 구체생활적으로 강요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개성과 인간성을 묵살해버리는가 하면 또 어떤이들은 이른바 절대적자유 혹은 인간성을 부르짖다 못해 퇴페적이고 부진한 허무주의인생관에 삶을 절이면서 무병신음에 령혼을 썩여간다. 서방문화는 자본주의문화이기에 부패하고 썩어빠진것으로서 배격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지금껏 절대적방어관념을 앞세우고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인류문명발전의 고차원을 상징하는 우수한 문화이기에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맹목적인 숭배에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도 있다. 극단성이 빚어내는 악과이다. 절대적인 긍정과 부정, 옳다와 그르다, 배척과 수용, 진압과 범람, 찬양과 비판은 흔히 주관적인 선입관으로 열가지 특성에서 한가지 특성을 잡아 그 열가지를 일색화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게 하는것이다. 어떤 사물, 사상, 사유, 사람에 대해 우선 넓은 수용력과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다음 가져야 하는것이 진가를 가르는 선광능력이다. 그것은 어떤 사물, 사상, 사유, 사람이든 과연 절대적으로 긍정할수 있다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절대적으로 부정할수 있다는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수 없기때문이다. 광물을 캐내는데는 우선 채취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선택하여 채취해낸 광물이라도 그 자체가 최종가치를 가질수 없다. 그래서 요청되는것이 캐여낸 광물중에서 가치가 적거나 없는것들을 골라내는 선광능력이다. 그러나 우선 채취이고 그다음이 선광이다. 광산에서 직접 철을 뽑아낼수는 없다. 그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달라는격이다. 우선 채취해낸 다음 다시 선광작업을 거쳐 용광로에서 제련해내야 하는것이다. 또 달리 비할것 같으면 우리가 수확하려는것은 통통 영근 벼이삭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논밭에서 쭉정이나 피를 골라내며 가을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그런대로 와락와락 거둬들여야 한다. 그다음 마침내 낟알을 털어서 바람에 날려 영근 낟알과 쭉정이나 피따위를 가려내야 하는것이다. 문화수용도 이와 다를수 없다. 우선 관용의 자세로 모든 문화유산, 문화적재부들을 욕심스레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다음 우리의 제도적장치 즉 선광력에 의해 알맹이와 쭉정이를 쭉 갈라놓아야 하는것이다. 사실 인류문화의 본질적인 창조력이 민중이라고 확인하고보면 원래 문화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쉽게 제도적장벽과 국경을 뛰여넘을수 있는것이다. 특히 대중문화의 경우 역시 문화적토양의 현격한 차이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백성들에게는 벌써 훨씬 동질적인 삶의 광장이 마련되여있기때문에 짙은 공감대가 이루어져있는것이다. 그런데다 지금 또 세계가 제도적차이와 리념적차이가 있음에도 한걸음 시장경제질서로 규범화되고있으니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더 커질수 있을가. <<구데기 무서워 장못담글가>>하는 유명짜한 우리 민족의 속담이 있다. 신사차림하듯이 멋진 수식어로만 사용하는 겉치레에서 벗어나 심각한 인생철리로 다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장맛을 보려면 여하튼 장을 담그어야 한다. 장에 잠재한, 구데기 낄수 있는 균을 어떻게 왁찐하는가 하는것은 그다음으로 요청되는 일이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후 우리는 문화적으로 훨씬 성숙되였고 문을 닫아걸었을 때보다는 오히려 면역력이 뚜렷이 강해졌다. 문을 열어놓았기때문에 파리가 날아들어와 리질에 걸렸다고 아우성치는 자를 대신해 우리가 다시 문을 닫아걸수는 없다. 모든것이 격리된 공간에서는 성숙이요, 면역력이요 하는것을 운운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열고닫는것이 문이고보면 우리는 신을 신고 발바닥긁는 격으로 객관적법칙 혹은 사물의 기능을 어기고서는 정상적인 생활, 정상적인 성장을 꾀할수가 없는것이다. 절대적인 방어관념에 지나친 과민증을 앓으면서 닫아건 방안에 들어박혀 밖의 공기와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는자는 적어도 자기 능력을 부정하는자, 풀어말하면 진가를 가려내는 선광능렬을 잃은자거나 병균을 이겨낼수 없는 면역력결핍자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이런 사람은 문화수용자세가 문제이기전에 벌써 그 자신의 문화적토대와 삶의 자세가 문제인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한테 우수한 선과능력과 튼튼한 면역력이 있는한 그리고 우리 사회에 문화발전을 담보할수 있는 믿음직한 제도적장치가 마련되여 있는한 우리는 대담하게 문을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선광능려이 없는자, 면역력이 약한자는 그 자신이 벌써 적자생존, 우승렬패의 법칙에 의해 도태될 인간이며 사실 문을 닫아걸어도 조만간에 병들어 시들어버릴 인간임에 틀림없다. 지나친 방어관념을 앞세우지 말고 우리의 선광능력으로 들어오는 족족 진가를 가르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벌려야 한다. 아뭏튼 더 많은 광물을 캐낸다면 더 많은 가치를 얻어낼수 있음은 너무도 투명한 리치가 아니겠는가.
13    스스로 절름발이 되지 말라 댓글:  조회:1507  추천:0  2009-05-16
<<지금은 경제, 경제할 때야. 까짓것 사회과학이요, 문학이요 하는 따윌 배워선 뭘해, 학교를 갈려면 리과대학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아무래나 기술을 배우는게 상수야...>> 과연 그 말에 전혀 도리가 없는건 아닌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개혁의 모진 진통속에 신음하고있다. 림산전의 산부의 진통을 덜어주자면 산부인과의사나 산파가 있어야 하듯이 역시 경제개혁의 모진 진통을 하루빨리 진정시키려면 그에 전공한 의사, 산파라 할수 있는 과학, 경제 및 기술인재가 대량적으로 수요될것은 자명한 일이다.미구에 태여나게 될 영아--현대화사회를 생각하면 누군들 기쁘고 격동하지 않으랴! 그런데 다만 물질적재부와 물질적생활에서 창조와 발전을 가져왔다 해서 인생목적의 전부가 완정하게 완수돼간다고 할수 있겠는가. 그에 앞서 벌써 물질문명창조자체가 정신적비약이 없이 이루어질수가 없다. 하나의 시대가 다른 하나의 시대를 탄생시키려면 의식의 갱신과 관념의 구조적 재조합을 전제로할 때라야만 가능하다. 미래에 대한 설계는 언제나 새로운 정신적추구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성장적이고 전진적인것일수 있다. 다시금 력사를 펼쳐보아도 그 첫페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의 발전사는 틀림없이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상호보완의 발전력사였다. 오천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문명대국이 렬강의 총칼에 찔려 릉지처참을 당했던 력사적 교훈은 단지 경제적락후라고 결론하기에는 아직 뿌리가 남아있다. 화약은 일찍 중국인이 발명한 4대발명중의 하나이다. 자기가 발명한 화약에 의해 자기가 망한 거기에는 의식의 변질 내지 정신적락후라는 치명적인 인간적착오가 아프게 묻어있다. 상승력을 잃었거나 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의식주에 만족한 안일과 향락이 전부일수 밖에 없고 그만큼 과거에 대한 집착에 어제, 오늘, 래일이 반복되는 동물적인 본능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정신적각성이나 관념적비약이 없을 때 우리는 과학의 비약적인 돌파를 운운할수 없다. 그리스도교적리념이 생활의 전부의 내용에 지배적으로 작용할 때 과학의 꽃은 필수가 없었고 과학가는 이단으로 몰리워 처참하게 죽어갔다. 어제에 오늘을 이은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은 새것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의식을 낳을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의식이나 인간성마저 박탈당했던 전대미문의 시대가 종말되고 인간의 주체의식이 주장되고 사회의 밝은 미래가 약속되는 오늘 우리에게 급선적으로 나서는것은 어제의 상처를 아물리고 강요된 기계적관념을 청산하여 창조적삶을 위한 참신한 정신적기틀을 마련하는것이다. 래일을 지향하는 정신적각성이 없다면 새것은 금이래도 돌로 보일수밖에 없을것이다. 정신문명은 인간사회의 독점물이고 역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원질적인 특성이다. 정신이 뿌리뽑히면 인간은 그대로 그냥 동물이 되고만다. 문학도 인간정신의 창조물이다. 인간의 정신적생활에서 문학은 홀대할수 없이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문학은 그 산생때로부터 벌써 인간의 쾌락과 함께 정신적생활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간단하면서도 주요한 수단으로 되였다. 그후 인류문명의 간단없는 발전과 함께 문학은 인간의 사상, 감정, 도덕, 습관, 사랑, 우정, 미학관 등 에 작용하고 따라서 인류사회발전에 거대한 역할을 놀게 되였다. 문학은 자신의 특유한 교양적작용을 통하여 사람들더러 정확한 사상, 감정, 도덕을 수립하고 바람직한 인생관을 세우게 함으로써 물질문명건설을 자극하고 힘있게 추동한다. 문학은 사회 전체를 무대로 하여 활약하고 그가 창조한 형상은 바로 사회의 물질문명을 건설하는 인간자신이기때문에 그것이 사람들의 사상, 사업, 리상, 분투심에 직접적인 작용을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우리 민족을 말하면 문학은 그 본체론적인 의미를 훨씬 초월하여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민족교육과 함께 민족의 운명까지를 확인하는 필수불가결한 장치로 된다. 문학을 통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살려갈수 있고 민족의 문화권을 튼튼히 정립해갈수 있으며 건강한 민족정신을 키울수 있다. 물질문명은 순결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서만 인간적인 향기로 채색될수 있다. 정신적으로 뿌리뽑힌 사람에게는 의식주가 예나 지금이나 목적이고 수단일수 없다. 의식주가 목적 그 자체로 되는것은 동물성이지 인간성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인제 더는 생을 위한 본능적인 수단으로만 되지 않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것은 인간의 영원한 리상이다. 예술이 없는 동산에 꽃이 필리 만무하고 꽃이 없는 동산에 나비가 찾아들리 만무하다. 고도로 되는 물질문명과 고도로 되는 정신문명을 건설하는것이 우리의 분투목표이다. 그거야말로 현대화꽃동산이다. 그러니 어느 하나를 홀시하든지 그것은 스스로 절름발이가 되는 아둔한 작법이 아닐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인 각성, 미래지향적인 추구만이 사회의 성장과 발전의 원질적인 동력이다.
12    오늘의 도시인도 도시진출을 했었다 댓글:  조회:1416  추천:0  2009-05-16
먹고입는것이 자연생장물에만 의거해야 했던 원시사회나 그후 퍽 오랜 단계, 지어는 상품경제가 사회생활의 기본을 이루기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런대로 자아도취적이고 저급적인 랑만에 쉽게 몸을 잠글수가 있었다. 생명본능이 최종적인 목적으로 확정된 시대에서는 주린 창자처럼 렴치없는것이 없으리만치 먹는것만 해결되면 만사대길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농가의 창문밑에 쌓이는 쌀가마니의 층층에 상징성을 주는것이였다. 일년농사뒤에 높직이 쌓아놓은 쌀가마니를 보면서 사람들은 무한한 성취감에 도취될수가 있는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오래동안 생산에서 위성을 발사하는 바람이 휘몰아치는통에 현실적으로 통쾌히 실현해보지 못한 <<리상>> 내지 소망 그대로 걸려있었으니 더욱 강렬한 성취욕을 불러일으킬수 있었던것이다. 그럼에도 아쉽게도 호도거리를 선행하여 인제 막 그 <<리상>> 내지 소망을 성취하는 찰나에 시대는 본격적으로 상품경제의 요청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주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지만 시대와 력사와 문명의 발전에 따라 그 차원을 한층한층 높이는것이다. 인제 더는 쌀가마니를 앞에 쌓아놓고 술을 나누고 농악을 잡으며 태평성대를 노래할수 없게 되였다. 낯선 시간 낯선 해빛아래 변함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것이 도리여 인생도태라는 썩은바줄을 잡아타는것으로 되여버린것이다. <<바람은 예전에 다니던 길을 잃었고 달은 새로 비칠 땅을 얻었도다>>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속에서 자칫하면 패자가 된다는 공포적인 생존의식은 그런대로 불안한 평온을 유지하고있던 농촌에도 커다란 돌덩이처럼 던져져 파문을 일으켜놓았다. 자급자족의 농경사회가 소실되고있는 오늘 농촌은 철저한 변형이 피할수 없이 요청되고있는것이다. 상품경제의 완벽한 구조는 틀림없이 전통적농경문화의 구조적몰락을 토대로 하게 된다. 어차피 피할수 없는 이런 력사의 갈림길에서는 오직 두가지의 선택, 즉 새로운 농촌문화질서확립에서 적자생존의 도태과정을 겪거나 아니면 아예 제도화되여가는 시장경제구조속에 뛰여들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것이다. 그런데 다른건 다 밀어놓고라도 우선 우리 나라는 락후한 농업국으로부터 발전한 현대적공업국으로 철저히 탈태환골하는 격세적진통기에 처한데다 12억에 9억이 농민이라는 현실이 자아선택에 앞서 군체적인 도태 내지 선택을 강요해오고있는것이다. 농촌경제가 상품경제로 탈바꿈하면서 그 창조하는 <<상품가치>>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로동력이 달라붙어있는것이 꼭 마치 언젠가는 터지든가 넘쳐흐르게 돼있는 언제와 흡사하다. 즉 로동력과잉이란것이 상품경제와 기계화대두에 따른 치명적화근이다. 이로 하여 도시와 농촌의 전통적인구비례가 점차 바뀌는것이 시대발전이고보면 어차피 오늘의 9억에서 훨씬 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선택에 새로운 신분증을 타야 할것은 확정된 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새로운 선택이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질수 있는 필연의 결과로 될수 없다. 자각적으로 현실에 발맞추는 노력이 없다면 그때에 가서 선택보다 도태가 앞설것은 지금까지의 문명발전의 척도로써도 투명한 결론이 아닐수 없다. 그로부터 보면 도시진출 내지 시장경제진출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인식은 차라리 촌문화질서가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로부터 경쟁적 및 상승적 상품경제로 과도하는 현실의 필연에 대한 일찍부터의 자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어찌보면 그들의 경쟁, 분투 내지 모험이 주관적으로는 자주적인것일수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시대가 반짝거리고있는 신호를 정확히 확인한 것이라고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종속적인 현실대응방식이라고 할수도 있는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문화질서의 확립과 시대상승적힘에 의해 원래 자연으로부터 약속되였던 행복이 파괴되는 운명적비극을 전통적농민은 겪지 않으면 안되겠기때문이다. 그런바하고는 낯선 환경에 적응되기를 앉아기다리는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젊었을 때 아직 모두가 낯선 환경에 순응되지 못한 기회에 젊음을 있는대로 아낌없이 소비해가면서 새로운 시대적 삶의 세례를 받는것이 훨씬 바람직할것이다. 실패나 고배를 맛본다는것은 사실 참된 삶을 살려하기때문이다. 맹동을 침묵시킨답시고 무능으로 실패했거나 정신적빈곤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효시물로 내걸고 도시공포증을 살포하지 말아야 한다. 망망한 인생의 대해에는 언제나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기마련이다. 삶과 죽음이 한 광장에 있듯이 실패와 성공도 따로 떨어져있는것이 아니다. 행운만을 바라는자는 벌써 결론이 확인된 실패자일수밖에 없다. 기다림의 일생, 그것은 살아숨쉬는 송장이 죽은 송장으로 변하는 과정인것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무사한 습관에 길들여 살았던 재정로임팀들도 생존에의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 시대이니만큼 지루하고 번쇄한 시비만을 비생산적 내지 순소비적으로 되풀이할수는 없는것이다. 새로운 삶의 광장에 떳떳이 나서기 위해 힘차게 행동하며 실천해야 한다. 어쨌든 그 이상의 상승이 있을수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보려는 자체가 전진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11    낭만을 광열과 바꾸지 말라 댓글:  조회:1863  추천:0  2009-05-16
변혁의 모진 진통속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래일을 믿고 웃음짓는 고향의 모습, 그 속에서 내 고향의 정다운 얼굴들이 자유를 본다. 얼마나 갈 망하던 자유더냐. 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4층 과학기술관청사의 창문들에서는 밤늦게까지 탐구의 불빛이 내리덮은 밤장막을 헤가르며 오늘과 래일을 이어주려는듯 꺼질줄 모르고 흘러나온다.그 길건너 맞은편에 외형은 수수하나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한 어느 한 직장의 무도청에서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어둠을 실어 저 멀리로 떠나보내는듯 그칠줄 모르고 흘러나온다. 실로 변혁되고 약하는 오늘의 시대를 온몸 뿌듯이 감촉하게 하는 시대의 축도앞에 선듯한 심정이였다. 그런데 어느 한 기회의 <<집돌이>>(취재)에서 나는 감각과 시각과 청각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난것으로 하여 놀라움과 서운함을 금치 못했다.무도청에 들어서니 그 아름답고 경쾌한 음악속에 과학기술관청사를 비방하는 추잡한 잡음이 은은히 동반되여 흐르고있었다. <<책벌레들이 들어찬 벌레통>>--더 달리 부를수 없을 정도로 형상적인 개괄을 했다고 손벽치는 맞장구소리도 장단마냥 음악의 선률에 어울려 귀가에 들려왔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들의 건방진 언사에 대한 반감과 근면하고 이악스러운 <<책벌레>>들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생활을 모르는 책벌레>>들이 가련하고 측은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사업할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레닌도 말한바 있지 않는가, 참 그렇다. 그 머리 하나가 모든것을 다 생각하고 감당해야 할터인데 일년 사시절, 아니 인생의 황혼이 물드는 그때까지 오직 <<골방>>에만 들어박혀있는다면 단순한 생각에도 어쩐지 그것은 기계를 기름도 주지 않고 쉬우지도 않고 내내 돌리는것과 같은 졸렬한 방법인줄로 여겨졌다. 그런데 과학기술관청사에 들어서니 역시 <<무도청>>을 조소하는 용속한 잡빛이 조용한 불빛에 섞여 흐르고있었다. <<네 배야, 내 배야, 도시의 쓰레기들이 안고도는 쓰레기통>>--뒤따른 손벽과 폭소가 조용하던 집안을 무닐듯한다. 물론 그것은 오늘에 래일을 이어 허송세월하고 가정의 불화를 초래하고 사회의 도덕적질서를 어지럽히는 허무하고 맹랑한 <<무도쟁이>>들로부터 결론한 과잉반응이다. 흙을 담은 가마니는 홍수를 막을수 있어도 텅빈 가마니는 개울물에도 밀려간다. 이건 누구의 명언이던가. 명언이 아니고 나의 말이지만 그래도 낮이나 밤이나 앉으나 서나 일하나 휴식하나 그냥 온 뇌리에 <<무도>>장면만을 그려넣는 인간에게는 명언못지 않은 좌우명이 되리라. 밤일을 한다며 시어머니와 남편을 속이고 아이까지 팽개치고 매일매일 새날이 되도록 무도장에 붙박혀있는 며느리, 안해, 한 녀인의 미모에 매혹되여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달에 백여원돈을 밀어넣는다는 <<애정적인 사나이>>, 실로 이러루한 무도장견문이야 수두룩하다. 인성의 고갈, 개성의 억압, 자유의 박탈에서 해방된 인간들이 자유를 편식하고 과식하고있는것 같다. 물론 사회에 보다 밝고 민주적이고 활발한 자유가 주어질 때 그만큼 인간의 창조적 힘은 커지는것이고 사회의 성장도 급속할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질서속에서 이룩되는 자유여야 하지 아무런 약속력도 없고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는 무절제한 <<절대적자유>>라면 오히려 사회건강에 해로울것이고 개체인생의 비극의 씨앗이 될수도 있을것이다. 오직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상승적경쟁력을 가지고있는 사람만이 자유는 무한한 지혜의 원동력으로 될수 있다. 과식은 불식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 한 훈장이 아이들한테 너무도 혹독하게 굴어 아이들의 원한을 사게 되였다. 아이들은 한번 훈장을 혼내우리라 별렀다. 동지팥죽을 먹게 되자 급장이 훈장을 집에다가 모셨다. 그런데 금방 밖에 나서자 또 한 어린이가 자기 집에 훈장을 청했다. 너도나도 청하자 훈장은 인젠 배가 불러 먹을수 없다고 사절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왜 그 애들의 낯만 봐주고 자기들의 성의는 짓밟는가고 항의했다. 훈장은 할수 없이 한집에서 한술씩이래도 뜨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맨 마지막 집을 나서면서 훈장은 올챙이배처럼 탱탱 불어난 배를 붙안고 걸음도 걷지 못했다. 훈장은 하늘을 바라고 <<아, 과식은 불식보다 못하도다>>하고 개탄했다고 한다. 자유를 편식하거나 과식하는 인간들, 사회의 성장과 개체의 발전과는 무관하거나 지어는 해로운 <<자유>>를 선택없이 따먹는 인간들은 질탕한 방종속에서 마음이 썩어가고있다. 하나의 군체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질서속에서 선택된 자유가 있을 뿐 무절제한 절대적인 자유란 있을수 없다. 혹자가 그런 자유를 얻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금과를 따먹은것이다. 과학의 고봉으로 높이 톺아오르는 용감한 <<책벌레>>들이 무도회나 기타 오락활동을 에네르기를 보충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총명한 방법일가. 그리고 무도장에 다니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무도를 목적성없는 쾌락이나 이성에 대한 <<탐닉>>으로만 생각지 말고 진정 사회교제를 넓히고 하루로동의 피로를 푸는 수단으로 삼고 또 래일의 진보를 예언적으로 축원하는 모임으로 되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미래에 대한 동경과 리상이 동반되고 생활의 정취가 짙게 깔린 자유의 락원이 아니겠는가. 자유의 락원으로 가자. 허나 랑만을 광열과 바꾸지 말라.
10    문명과 <문명악> 댓글:  조회:1881  추천:0  2009-05-16
금방 우리가 딛고선 땅이 흔들리고있다. 강력한 지진파의 충격을 당한듯 고요한 산간도시로 잠에 취해있던 시내가 벌둥지 터진것마냥 벅적 끓어번지고있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모든것이 탈바꿈을 하고있다. 산업문화, 오락문화가 농경문화를 여지없이 충격하였다. 오락문화가 단순한 가정문화를 충격하였다. 천여대의 택시, 거리거리에 번쩍번쩍하는 술집, 커피점, 가라OK, 나이트클럽, 사우나욕탕 그리고 유혹의 밤거리에 다채로운 음식문화의 전경을 펼쳐보이는 밤시장. 모든것이 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생경하고 환상적인것이였다. 그런데 인젠 그 모든것이 우리 생활의 현장에 유혹의 현실로 세워져있는것이다. 그때도 비록 공장에서 직장인으로 일하는 인간들이 이 도시를 메우고있었지만 그런대로 수입과 지출이 자연적 삶의 연장을 위해 고스란히 이어진, 자급자족에 만족하는 전통적농경문화의 특성 그대로였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문화적인 욕망충족을 갈구하는 성향이 발돋움하면서 사람 호상간의 관계에서 상승적경쟁력이 외면된 원시적인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승화를 저애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동조자로 몰리우고말았다. 모두가 산업화, 상업화로 특징된 도시적 삶의 질서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모지름쓰고 찢기며 지어는 피흘리고있다. 차겁고 랭혹하고 인정미가 멀어진 현장에서 우리는 극복의 어려움을 절감하고있다. 인격론에서조차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인간들, 닫는 절주에 이웃이 사촌이라던 속담이 퇴색하고 우승렬패의 생존위기에 타인이 지옥으로 되여버린 사실앞에서 우리는 분명 문명의 뒤안길에서 쏟아져나오는 <<문명악>>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도덕적건강의 보호가 급선적으로 요청되고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다시 인간적향기로 채색할것이 절박히 주시되고있다. 그렇다고 다시 옛 농경문화를 복귀할수는 없다. 어제까지만도 우리는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인간에게만 차례진 혜택인 의식, 지식, 지혜와는 너무나도 무관하게 고정불변적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순소비적인생에 지치고 변질되여왔다. 인간의 의식, 지식, 지혜가 높은 차원에서 발굴되고있음에도 원시적신화를 동경하는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요사스럽게 비행기보다 자동차가 안전하고 자동차보다는 걷는것이 안전하다는 설법의 기저에는 상승력을 잃은 락오자의 궤변철학이 안받침되여 있을것이다. 그렇고보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사회에 대한 긍정적시선을 회복할수 있을가. 가장 바람직한것이 그래도 보다 많은 문화적투자를 하여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문화적신변정리에 게을리하지 않는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삶의 총체성에서 사회를 통찰해보면 비록 문명의 뒤안길에서 휘몰아오는 <<문명악>>이 사람들에게 극복의 어려움을 안겨주고있지만 그러나 향상하려는 정신적독방을 갖고있는 사람에게는 그 현실적아픔이 상승적 내지 전진적 삶의 현장을 마련하기 위한 진통임에 다름아니라는것은 투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승적인 시각에서 볼 때 기존가치질서의 파괴나 변질은 역시 새로운 가치질서의 형성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물론 기존가치질서가 충격을 받고 아직 새로운 가치질서가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제도적으로 고착되지 못했들 때 우리는 이른바 질서의 혼란속에서 인간의 생존위기감 같은것까지도 체험적으로 살깊이느끼는수가 있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 발병률이 많은 자연법칙에 맞물린다. 그러니깐 절실한것은 우리의 문화적투자 내지 삶의 자세이다. 코페르닉세와 같은 선각자들의 인생에는 문명의 창조를 위한 희생적체험이 아프게 묻어있다. 육체적생명만을 연장하는 원시적인 삶이라거나 혹은 어제, 오늘, 래일에 변함없이 그대로 그냥 한점 공간이 되여버린 삶은 흐르는 삶, 나아가는 삶, 상승하는 삶이 아니라 굳어버린 삶, 인생의 의미를 상실한 삶이 된다는것을 말해준다. 언제나 정신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의식, 지식, 지혜에 녹이 쓸지 않게 끊임없이 참된 인생을 추구하고 문화적신변정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문화적질서, 삶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현실을 아프게 그리고 역시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 상승적, 전진적 삶의 현장을 마련하기 위해 문명을 창조하고 건설하는 마당에 이른바 <<문명악>>이 묻어들어오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악을 제거하기 위해 문명까지를 밀어버리거나 외면해버린다는것은 손톱이 길어졌다고 손가락까지 잘라버리는 미련한 짓일수밖에 없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글가>>하는 우리의 속담은 영원한 인생철학이다.
9    과학의 정신=? 댓글:  조회:1819  추천:0  2009-05-16
어느 한 만화가는 <<과학자의 머리>>라는 만화에서 과학자의 머리를 <?>로 그렸다. 참으로 신통하고도 간결하게 과학자의 전부의 함의를 개괄한것이라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만화를 감상하노라니 과학의 정신이란 틀림없이 바로 이런것이구말구 하는 생각에 젖고만다. 과학의 정신, 그것은 틀림없이 회의의 정신이다. 이 회의의 정신의 바탕은 자유로운 사유이다. 오직 자유분방하고 무한공간적인 사유에서만이 자연과 사회의 천태만상이 원래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놓게 된다. 학술에서의 치렬한 론쟁, 그것은 벌써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예고하는것이다. 그런데 학술자신안에서 충분한 리유로 대방을 수긍시키는것이 아니라 그 어떤 외부적인 힘 이를테면 권력이나 권위 등으로 대방에 자갈물릴 때 과학의 꽃은 요절하고만다. 서양의 찬란한 문화도 이런 비극을 극복한 토대우에서 현대문명을 창조한것이였다. 서양의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적 통일문화>>라고 일컬어진다. 이를 풀어보면 서양의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의 리념에 의해서 통일되여있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이때의 그리스도교는 사회생활전체안에 스며들어 모든것을 감독하고 지배하였다. 하여 당시에는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 문화의 각 분야가 모두가 하나하나 그 자신안에 자기의 존재적리유나 고유의 원리를 갖고있은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의 힘에 의하여 지탱되고 그리스도교의 리념에 의해 지배되였다. 하여 교회는 과학의 리론이 자기의 교설에 배치되지 않는한은 일정한 자유를 허용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중세교설의 권위를 침범하는자는 이단이라고 하여 가차없이 처참하게 탄압하였다. 부르노가 강경한 자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여 교설에서 인정하는 <<지구중심설>>을 부정한 대가는 참으로 비참한것이였다. 문제는 바로 교회가 순수한 과학에 자기의 리념을 강요한데 있다. 교회는 절대적권위를 요하던 나머지 모드것에 대하여 분별없이 자기의 리념을 진리로 접수시키려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각 분야는 각기 독립하여 그 하나하나가 그의 존재리유와 고유의 발전법칙과 원리를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무시당하고 오직 교설의 채찍아래 순종할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과학정신의 발아와 확산에 가장 큰 장애로 된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하여 종교개혁과 함께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개성해방, 정신적 개인, 신에서의 해방, 자유의식에 립각한 문화 이것이 르네상스가 추구한바였다. 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전개를 가능케 함으로써 따라서 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자유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비판도 가능하게 되였다. 오늘 우리한테도 바람직한것은 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자유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비판이다. 학술에서 지나치게 통일만을 주장하는것은 리론의 고갈을 초래할 뿐이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모두 과학정신에 의해 발전한다는것을 념두에 두고, 또 과학정신이란 바로 회의의 정신이라고 바꿔볼 때 지나친 통일은 도리여 과학정신에 배치되는것이다. 왜냐하면 학자 또는 과학자의 육체에서 과학정신내지 회의의 정신, 또는<?>를 그의 생명과 함께 쫓아내지 않는한은 절대적인 통일이란 있을수조차 없는 일이기때문이다. 한 학자 또는 과학자로 놓고볼 때 회의의 정신, 또는 <?>를 자기의 머리속에서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곧 그의 과학생명의 종말을 알리는것으로 될수밖에 없다. 하기에 <?>는 과학자의 모든것이며 삶의 내용이다. 사실 복잡한 사회를 하나의 통일된 안목으로 밝혀본다는것은 너무나 아름차고도 불가능한 일이다. 비행기로 산림을 찾았다하여 바늘도 찾을수 있다고 한다면 세살먹은 아이도 입이 째지게 웃을 일이 아닐수 없다. 어떤 사물이든지간에 모두 그 자신안에 자기의 고유의 존재리유와 발전원리를 담고있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학술토론에 대해서 급급히 정치적발언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남아있다. 이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시키던 고루한 전통이 아직 우리의 머리에 남아있기때문이다. 하기에 무슨 일이든지간에 통일된 결과를 보지 못하면 잘못된것인듯싶어서 께름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람들의 인식을 통일시키려 한다. 그런데 과학정신으로는 도저히 통일을 가져올수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정신은 회의의 정신이요, 학술토론의 과학적태도는 자유로운 사유의 전개이지 결코 절대적인 통일인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는 정치적으로 학술의 통일을 꾀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란의 세월에 중국에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또는 부르노와 같은 운명의 사람이 얼마였는지 모른다는것을 기억에 떠올린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것을 재연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특히 현대화의 공정을 벌려놓고 세계적 절주와 발을 맞추려고 과학기술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오늘 우리는 결코 다시 자기의 사유를 얽어놓는 미련한 짓을 할수가 없다. 자기의 사유에서 과학적근거를 찾았을 때 한 과학자는 성공한것이고 하나의 문명도 함께 태여나는것이다.
8    어른들이여, 우화를 보라 댓글:  조회:2041  추천:0  2009-05-16
부엉이는 온 힘을 다해 동쪽을 향해 날아간다. 얼마나 날았는지 기진맥진한 부엉이는 울창한 수림속 어느 한 나무가지에 털썩 내려앉아 황황거리며 숨을 돌렸다. 때마침 수림속에서 쉬고있던 산비둘기가 부엉이의 씩씩거리는 꼴을 보고 말을 걸었다. <<당신은 이리 급히 어디로 가시나요?>> <<난 동쪽으로 이사해가려하오.>> <<왜 이사하려 하나요?>> <<흥, 몰상식한 서쪽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듣기싫다며 나를 욕하질 않겠소. 그래 내 그들이 싫어서 아예 이사해버리려는 거요.>> <<이사하면 문제가 풀릴것 같아요? 내 보건댄 당신이 자기의 목소리를 고치지 않는다면 동쪽의 사람들도 결국 마찬가지로 당신을 싫어할거예요.>> 산비둘기의 사리밝은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부엉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여 랭가슴만 앓았다. 이것은 우화 <<부엉이가 이사하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화란 사람들에게 그 어떤 진리와 생활의 철리를 설명해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엮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화란것은 공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기침을 떼거나 수염을 쓸면서 자손들이나 어린이들한테 들려주어 그들을 교양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만 여기고있다. 실은 만약 어느 총명하고 글 잘 읽는 어린이가 <<총명한 잇규>>처럼 제구실 못하는 공민권사용자들에게 우화를 들려주어 경종을 울려준다면 그것이 도리여 별미일것 같고 또 어찌보면 우화란것이 워낙 어른들을 위해 꾸며진것만 같다. 사회를 살아가는 기성세대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것부터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것과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직접 사회건설의 한 귀퉁이를 담당하여 <<벽돌>>을 쌓고있는 어른의 잘못을 깨우쳐준다는것은 결국은 사회란 이 청사의 질적보장에 관계되는것이요, 그만큼 그것은 인간의 미래와 직결되기도 한다. 앞에서 들려준 우화의 경우도 그렇다. 그것을 어린이들한테 들려준다면 자기의 결점이나 착오를 깨끗이 시정하는것만이 밝게 성장하는 길이지 부엉이처럼 자기의 그 듣기 싫은 목소리는 고치려하지 않고 못나게 집을 옮기는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어데가나 마찬가지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도리를 깨쳐줄수 있는것도 틀림없다. 그러나 인제 그것을 어른들에게 들려준다면, 그것도 제 잘못은 모르고 남의 일깨움을 되려 공격하는것으로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도리를 깨치고 서로의 마음을 열수 있는 밝은 환경을 마련할수 있을것이다. 어린이는 어른들이 꾸며주는 삶의 현장에서 어른들의 질서를 이어받으면서 사회문화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만큼 어른들은 어린이의 보기가 될수밖에 없다. 바꾸어말하면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푸른꿈을 키워주는것도 어른들이요, 동심에 상처를 주고 락서하는것도 어른들이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꾸며가고있는 사회의 현주소는 어떻고 또 기성세대의 현모습은 어떠하던가. 자아를 찾은 인간들--우리는 철저하리만치 자아를 찾았다. 봉건륜리도덕에 의하여 부모(자식)의 자식(부모), 남편(안해)의 안해(남편), 형님(동생)의 동생(형님), 자(매)의 매(자), 시어머니(며느리)의 며느리(시어머니)...로 아주 자아를 잃어버리고 남의 <<노예>>로 봉사적인 삶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날인가부터 갑자기 자아를 찾고 자유를 획득하였다. 인간의 주체의식인지 개체의식인지 하는 자아중심적인 생명욕구가 보둑을 터친 홍수마냥 강한 <<생명력>>으로 사회를 잠궈버렸다. 인간은 인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여 다시 물질의 노예로 전락했다. <<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사랑의 노예>>, <<향락의 노예>>..., 그러나 어쨌든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노예>>가 아니라는것은 충분하게 자아를 찾은것이요, <<절대적인 자유>>를 얻은셈이다. 서로의 감옥--절대화된 자아와 자유는 인간대 인간을 불신이라는 장벽으로 막아버렸다. 그래서 자아중심적인 홀로서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적기틀이 되여 누구도 믿을수 없다는것이 <<철학적 결론>>이 되였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하는것은 간릉한 아첨이요, 잘못을 일깨워줌은 위험한 도전이다. 모든것을 믿을수 없으니 모든것을 배척하게 되고 자아중심적인 판단에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고 관용의 마음으로 남을 리해하고 접수할수 없다. 인성에서 다시 본능에로--철저한 자아중심적인 삶의 자세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인간사회전체에 그대로 적용시킨다. 전진적이고 상승적인 경쟁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네라는 생사판가리로 동류상잔이다. <<남편죽이기>>, <<안해죽이기>>, <<아이죽이기>>, <<천재죽이기>>...아뭏튼 나한테 걸림돌이 되면 주저없이 제거해버려야 자기보존을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제 누군가 자기의 그림자를 죽였다는 뉴스도 듣게 될것이다. 두려움이 부실부실 가슴에 내린다. 하얀 백지같은 동심세계에 우리 어른들이 그리고있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락서이다. 못난 부엉이처럼 자아중심적인 판단에 자기 령혼을 세탁하려는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이 그냥 마음가는대로 남을 쥐여박고 인생을 찢어발기는, 사냥물을 노리는 포수같은 어른들이 어린이들한테 어떤 삶의 자세를 가르쳐줄수 있을가. 속수무책인고로 다만 여기에서 우화 <<부엉이가 이사하다>>를 공민권사용호들에 선사할 뿐이다. 어른들이여, 우화를 보라.
7    소와 호랑이의 계주 댓글:  조회:1789  추천:0  2009-05-16
<<금닭이 홰를 치니 천하가 밝아온다>> 제6차5개년계획의 시작을 알려 금닭이 홰를 치던 1981년 닭해, 어느덧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을 달려 이제 막 그 마무림을 지은 소해가 계주봉을 제7차5개년계획의 첫시작을 떼게 되는 호랑이해에 넘겨주었다. 날쌔고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호랑이가 대견스럽고 자신만만하게 계주봉을 받아쥐였다. 호랑이가 날래게 첫 스다트를 뗀다. 그결에 세기는 나래를 펼친다. 이 순간 다시 머리를 돌려 금방 계주봉을 넘겨주고 숨을 돌리고 있는 소를 바라보노라니 소에게 미더운 눈길과 아낌없는 찬사가 쏠리게 되는 심정이니 이는 또 무엇때문일가. 결코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아니다. 래일을 향해 새로움을 바라는것, 이것만이 리상의 대문에 들어설수 있는 길이요, 과거를 붙들고 통곡하거나 자만하는자에게는 나귀가 연자를 돌리는 격으로 처참한 맴돌림이 있을뿐이라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소에 대한 미련이 아마도 새로움을 추구하는것 역시 오늘이 우리의 미래였을 때 오늘이였던 어제가 매 순간순간이 그렇게 알매지고 빛발치였기때문이라는데서 오는 소에 대한 편애인것 같다. 편애이면 또 어떤가. 오늘을 딛고서서 래일을 당겨오는 사람에겐 어제가 신심의 믿음이 되고 신념의 바탕이 되여있는것이 분명하다. 그 믿음이 진정 미더운것이고 그 바탕이 진정 튼튼할 때 미래에 대한 새로움의 추구는 비로소 희망의 문턱에 닿게 될것이다. 하기에 호랑이한테까지 달려온 소는 그토록 미더웠다. 미욱할만치 유순하면서도 끈질기고 느린듯하면서도 부지런한 소의 걸음은 사실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가르쳐준것이 아닌가. 소는 수레를 끌고 높은 언덕도 거침없이 오르고 깊은 골짜기도 서슴없이 내려서 얼마만한 짐이래도 가야할 곳까지 기어코 가고야마는 고집스런 견지성과 멍에에 목덜미가 벗겨지도록 수걱수걱 일만하는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제 호랑이가 빨리 달릴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맹수가 목표물을 쫓는 경우가 아니라 진흥과 발전을 예기하는 현대화장정이라고보면 소의 그런 성격이 퍽 보배롭고 미더웁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갈마들면서 호랑이의 날램에 소의 끈질김과 부지런함을 합치면 그거야말로 과연 <<호랑이한테 날개를 달아주는격>>이 아닐가싶다. 될듯한 일이다. 그래서 소가 끈질기고 부지런하지만 좀만 빨라야겠다는 생각에서 계주봉을 빨리 뛰는 호랑이한테 넘겨준것인지도 모른다. 계주봉을 받은 호랑아, 날래게 뛰라. 허나 소처럼 끈질기고 부지런하게. 일사천리로 내달려라, 허나 소처럼 착실하게, 실속있게!
6    명인일화에서 받은 계시 댓글:  조회:2047  추천:0  2009-05-16
 명인들의 일화속에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오지리의 저명한 음악가 요한 스트라우스가 집에 왔다가 어지러워진 옷들을 벗어놓고 새옷들을 갈아입고 나간후 그의 안해 티제는 남편이 벗어놓은 옷견지들을 뒤적이다가 그의 적삼소매끝에 오선보가 가득 씌여져있는것을 발견하고 입으로 흥얼거려보니 곡이 과연 우아하고 듣기 좋았다. 그래서 그는 그 적삼을 꺼내여 한켠에 따로 두었다. 그런데 티제가 일이 있어 잠간 밖에 다녀온사이에 어느 세탁소일군이 그 적삼까지 한데 걷어가버렸다. 안달아난 티제는 차를 몰고 온 시가지의 눈에 띄우는 세탁소를 참빗질했지만 적삼의 행방은 나지지 않았다. 나중에 사맥이 풀린 그가 한 주막집부인의 안내에 으슥한 곳에 자리잡은 한 조그마한 세탁소에 들어서니 면바로 세탁공이 그 적삼을 비누물에 막 담그려고 서둘고있었다. 티제는 그 세탁공한테 와락 달려들어 적삼을 나꿔챘다. 천만다행이였다. 이 <<옷소매곡>>이 바로 세계음악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이름 높은 원무곡 <<아름다운 다뉴브강>>이다. 이 명인일화를 읽어보다가 홀연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크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이 티제처림 그런 훌륭한 <<안해>>로 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것이다. 지식을 토대로 하고 지능을 동력으로 하는 현대화건설은 여러 류형의 인재들을 많이 현대화건설장에 보내줄것을 요구하고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자면 한쪽으로는 인재를 많이 발굴하고 양성해야 하고 한쪽으로는 이미 양성한 인재를 버리지 말고 합리하게 리용해야 한다. 이 짐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가에 개혁시기의 지도일군들의 형상적특징이 체현된다. 지금 이런 두 부류의 못난 지도일군이 있다. 한 부류는 안락과 향수와 권세만 추구하면서 곤난과 시끄러움을 두려워하여 이 두 짐을 아무데나 마구 팽겨쳐버리고 전혀 도외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시대가 준 중임을 떠메고 책임을 다 하느라고는 하나 도대체 어느것이 아껴야 할 <<보배>>이고 어느것이 버려야 할 <<쓰레기>>인지조차 몰라 장님 막대질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다. 틀림없이 전자는 력사에 책임지지 않고 직책을 희롱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시대를 인식하지 못하고 원시적인 노력에 헛막대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거니, 바로 티제에게는 그들이 본받아야 할 두가지 특점이 다 겸비되여 있다. 어떻게든 그 명곡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리라 애끓게 뛰여다닌 티제의 높은 책임감이 첫 부류의 사람들이 배울바라면 아름답고 듣기 좋은 명곡임을 가려낼수 있은 티제의 내항적인 지혜가 둘째부류의 사람들이 본받을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깐 그렇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은 인재를 스트라우스로, 자기를 티제로, 인재의 발명, 창조를 <<아름다운 다뉴브강>>으로 비유해보라. 힘써 노력하여 <<아름다운 다뉴브강>>을 발견하고 구해내라. 티제처럼 다행감을 느낄 때 거기에 희열과 영광이 함께 숨쉰다.
5    배 곯은 성냥갑 댓글:  조회:2009  추천:0  2009-05-16
우리 집에서 성냥의 용처는 내가 담배피울 때와 안해가 불을 지필 때뿐이다. 그런데 성냥 한보이면 열갑인데 거퍼 며칠 못가면 거덜이 나는것이 이상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처음엔 안해가 성냥 그을줄도 몰라서 씀씀이가 헤프다고 생각하고 큰 소문없이 가정에서 살짝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내가 <<절약교육>>을 들이대자 안해는 금방 <<항의>>를 제기하면서 내앞에 배가 촐촐 곯은 성냥갑들을 내놓았다. 말이 궁해진 나는 도리여 안해한테 <<관료주의>>를 부린것을 검토하고 사과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나는 그 길로 상점에 가서 성냥 한보를 사다가 한구들 가득 헤쳐놓고 다시 한놈한놈씩 배를 불려놓기 시작했다. 먹는 놈이 배가 커서인지 제배의것을 몽땅 털리고 나앉은 놈이 저그만치 세갑이나 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냥 소화불량이 되도록 너무 쑤셔넣은것도 아니였다. 퍽 오래전 내가 아직 어려서 손등으로 코를 썩썩 씻으며 신끈에 불을 달아 폭죽을 터치우던 때를 끄당겨보면 그때의 성냥들은 확실히 공장에서 인품 후하게 먹인데서 갑마다 배가 불룩하여 갑 웃면이 밖으로 거북등처럼 부풀어 올랐던걸로 기억된다. 어이쿠, 이거야 너무하지 않은가. 한갑차이래도 속으로 묵새겨버리련만. 중국어 성구에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이 있다. 우리 말로 풀이하면 사물이 극한에 달하면 모름지기 그 반면에로 기울어지게 된다는 뜻일것이다. 물론 생산과 경영에 미립이 튼 그들이 붓이나 휘두르는 나보다 경제원리를 모르는바는 아니겠으나 사실로부터 보면 그래도 그들이 모름지기 경제적 지도원리를 빗나가고 있는법도 했다. 기업소의 생산목적은 물론 자체의 경제수익이겠지만, 그러나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경영원리는 공급과 수요라는 시장원칙을 떠날수 없을것이다. 공급의 립장에서 시장원칙을 운운할 때 경영자, 생산자는 무엇보다 먼저 수요자의 리익을 보호해주어야 한다. 바꿔말하면 소비자관점을 수립하여 소비자들의 리익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경영의 근본적인 지도원리일것이다. 높은 리윤은 시장확보내지 확대에서 짜내야지 소비자들한테서 빨래를 비틀어짜듯이 해서는 안된다. 사실 소비자들의 리익을 보호하는것은 생산자가 그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자로서는 상품경영활동에서 시장보호관점을 지도원리로 할 때만이 소비자의 리익을 보호할수 있고 또 소비자의 리익을 보호할 때만이 공고한 시장을 확보하여 자기의 상품경제활동의 증대와 련속성을 보장받을수 있기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소비자들의 리익을 손상주어 자기의 리윤을 높이려 한다면 결국은 스스로 시장을 허물게 되여 긍정코 들어오는 눈앞의 리익에 악성후과가 인츰 뒤따르게 될것이다. 경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의 만성자살일뿐이다. 보따리장사군처럼 눈앞의 리익만 따지는 한치보기가 되지 말고 줄을 길게 늘여 큰 고기를 낚는 참된 사업인이 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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