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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손창섭 소설의 주제적 특성 댓글:  조회:2411  추천:0  2009-05-16
한국문학사의 50년대 페이지를 대표적으로 장식하고 있는 손창섭 소설의 주제적 특징은 그의 단편소설들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미해결의 장>, <유실몽>, <잉여인간>등 단편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그의 소설의 주제적 특징은 한마디로 비틀리고 소외된 인간성에 대한 고발을 통하여 정지된 시간, 닫힌 공간의 시대적 질곡을 폭로하고 보다 나은 사회와 인간다운 삶에의 추구를 역설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창섭의 소설에서 소외된 인간성은 더럽고(<사연기>) 어둡고(<비오는 날>) 닫힌(<인간동물원초>) 소설공간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소설공간은 벌써 인간성이 오염되고 위축되고 억압받는 객관적 삶의 조건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공간은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기장처럼 오염물과 변질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던 특정된 사회의 시대적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결국 그의 등장인물들의 특수성에 구체적인 시대적 특징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소설에서 소외된 인간성은 가장부재의 가족 구조를 통하여 구현된다. 가부장제적 절대주의 가족체계에서 가장의 상징적 의미는 윤리 도덕적 질서 그 자체이며 따라서 가족단위의 존엄확보의 제도적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아무런 권위와 통제력이 없는 가장의 <<몰락>>은 그대로 가족구성원의 인간성 소외 내지 윤리적 타락에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부재 내지 <<몰락>>의 확장된 의미가 사회구성원들에게 발전적 미래를 제시해줄 수 없는 폐허 같은 당대 사회현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는 인간소외의 시대적 특징을 가족의 구조적 해체를 통하여 사실주의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해결의 장>의 대장과 장선생, <잉여인간>의 익준과 봉우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인간성의 소외는 또 대비적인물의 설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가장부재의 해체되는 가족질서는 어차피 여성들이 생계를 떠메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은 실존주의적 윤리관과 이상주의적 인생관에 의해 두 부류로 갈린다. 문제는 취미와 재미를 삶의 낙으로 삼는 실존주의적 윤리관의 여성은 경제적으로 <부유>할 수 있으나(<미해결의 장>의 광순, <유실몽>의 누이, <잉여인간>의 봉우 처) 인간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여성은 언제나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수시로 가족파탄의 위기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미해결의 장>의 장선생의 아내, <유실몽>의 춘자) 이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인간적으로 밝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전망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황폐화된 시대상황에 대한 고발이기도 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윤리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삶을 즐길 수 있고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이 생존위기에 시달리는 사회현실이고 보면 주인공은 그 두 부류의 사이에서 정신적 공황에 모대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타락을 한사코 거부하면서도 아무런 대안이나 전망도 없는 주인공들은 그래서 그냥 정지된 시간, 닫힌 공간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맴돌이친다. <<미해결의 장>>의 나, <<유실몽>>의 나, 그리고 <<잉여인간>>의 준익의 모습에서 보게 된다. 그럼에도 정지된 시간, 닫힌 공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출구를 찾는 주인공들의 이런 모습은 아무래도 미래지향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63    주체의 형성과 사회적 억압, 그 존재론적 인식 댓글:  조회:3246  추천:0  2009-05-16
    -이청준 소설 「소문의 벽」을 중심으로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전짓불’, ‘소문의 벽’, 그리고 작가의 숙명 3.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작가 이청준의 문학작품을 대하면 대개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적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하는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욕망과 지배의 사이에서 ‘전짓불’에, ‘소문의 벽’에 부딪치고 있다. 때로는 치열하게 저항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체념적으로 체질화하여 억압되고 결박당한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아니면, 적어도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그냥 쇠창살 속의 생활에 적응시키려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의 기억 속에 감추어진 ‘일기’를 새삼스럽게 들춰내어서(물론 작가의 ‘일기’도 그 속에 들어있겠지만) 세상에 공개해버리는 것이 작가이다. 그래도 독자들은 좋은 것이다. 익명으로 공개되는 만큼 자신은 안전하면서도 일종의 대리적인 ‘심리배설’ 내지 ‘정감조절’은 되는 셈이니깐. 그렇지만 작가한테는 항상 위험과 위협이 뒤따르게 된다. 그만큼 작가는 만인을 대신하여 ‘마음의 금선’을 튕기는 모험가이다. 그냥 상업주의에 물젖은 ‘상품생산자’로서의 계산적인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가 글을 쓰는 목적은 대개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것은 사회 제도적이고 실천 규범적인 도덕, 질서, 법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쟁취하는 ‘해방’이 아니라, 독자들의 정감세계에 호소하고 문화의 자아조절기능에 의한 변이 내지 변화를 통하여 획득하는 ‘해방’이다. 그리고 정감과 이성을 상상력(허구)에 의해 매개하는 것이 문학의 미학원칙이라고 할 때, 설령 오락성을 띠는 문학텍스트라 해도 그것이 즐거움을 통해 억압된 인간들의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결코 이러한 미학원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적인 욕망 내지 동기가 이청준한테서는 누구보다 강렬하게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청준의 문학세계를 두루 돌아보면,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이념이나 구체적인 역사사건을 기표로 하여 주체와 타자, 욕망과 사회라는 영원한 인간문제들에 대한 기의를 향해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사명감에 투철한 작가는 그만큼 고단하고 심지어는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명분이고 숙명이라면, 작가이기를 포기하기 전에는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청준, 그는 황무지에서 날아오르는 영혼의 비상학(飛翔鶴)을 꿈꾸는 작가이다. 그런 그는 언제나 무척 고단했고 지금도 여전히 고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고단한 것과 역비례하여, 그의 소설적 언어의 미로 위로 날아오르는 영혼의 비상학을 응시할 수 있는 독자들은 매우 행복하다.”1)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 「지배와 해방」 등 <언어사회학서설> 연작들이 작가의 창작 동기 내지 욕망을 묻고 있다면, 「소문의 벽」은 그러한 확인 위에 작가의 명분에 따르는 책임과 숙명적인 모험정신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작가가 인간문제를 다루는 ‘전문직’임을 의심치 않았기에 그 ‘전문직’의 ‘직업의식’과 ‘직업윤리’를 분명하게 ‘규범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가적 이념과 성찰을 문학적인 상상력에 의하여 형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현실적인 인식가치를 미학원칙으로 하는 리얼리즘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문재원은 「소문의 벽」을 내적서사와 외적서사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이른바 액자소설 형식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소설에서는 일반적인 액자형식의 구조와는 달리, 작중화자는 내부적인 이야기에 대해 성찰적인 시각과 자기반성적인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내적서사와 외적서사는 역동적인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2)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서사적 구성은 내부적인 이야기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화자의 감성과 이성의 정화를 통하여 알레고리적으로 현재화시킴으로써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전형화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라캉의 네 가지 담론형식을 방법론으로 제시한 엄미옥의 연구가 흥미롭고 의미 깊다. 그는 대타자의 응시로서의 '전짓불'을 주인의 담론으로, 김박사와 안형에 의한 대타자의 지식의 강요를 대학의 담론으로, 대타자에 대한 박준과 ‘나’의 의심을 히스테리 담론으로, 그리고 작가의 글쓰기를 분석자 담론으로 확인함으로써, “이청준의 글쓰기는 욕망의 대상, 은폐된 실재를 향해 현실 속에서 늘 반성하고 회의하면서 문학적 진실, 개인적 진실을 찾아가는 윤리적 행위”가 됨을 증명하고 있다.3) 이 글은 이런 기성 연구의 연장선에서, 「소문의 벽」이 나타내는 주제와 그것을 직조하는 의미담론에 대해 재론해보려 한다. 2. ‘'전짓불'’, ‘소문의 벽’, 그리고 작가의 숙명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은 단지 소설형식의 측면에서만 볼 때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적서사구조는 화자인 ‘나’의 내부시점에서 박준을 두고 ‘나’와 안형, 그리고 김박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보여주고 있고, 내적서사구조는 ‘나’의 외부시점에서 박준이 쓴 세 개의 소설을 단서로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수수께끼가 풀려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소설은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사건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 같다. ‘나’에 의해 만들어진 액틀 안에 박준에 의해 만들어진 액틀이 있고 박준의 액틀 안에 또 세 개의 소설에 의해 세 개의 액틀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은 그 세 개의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하나하나 억압 요인으로 되는 사건에로의 점진적인 접근을 보여주면서 박준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박준이 ‘전짓불’ 공포증에 걸리게 된 원인을 밝혀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수수께끼를 세 개의 소설내용에 대한 논리적인 추리과정을 통해 풀어가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플롯인 듯하다. 「소문의 벽」을 변용 추리소설과 현대소설이 만나는 지점에 놓인 탐색소설로 보는 관점도 이 소설의 ‘수수께끼→논리적 추리과정→수수께끼 풀기’라는 공식이 추리소설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4) 여기서 잠간, 세 개 소설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소설 <괴상한 버릇>의 주인공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한테 꾸중을 듣거나 부끄럽거나 난처한 일이 있기만 하면 광 속 같은 데로 들어가 숨는다. 그런 버릇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하였다. 결혼을 하고 나니 오히려 생활이나 주변이 전보다도 훨씬 복잡해지고 낭패스런 일도 많아져서 그 가사의 잠을 자는 일이 더욱 빈번해지고 더욱 길어져 갔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막 가사의 잠에 들 때 아내가 정말 한번 죽어 보기라도 하지하는 무심한 말이 그만 효험을 보고 만다. 두 번째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에서 주인공 ‘그’가 다니는 회사에는 사장 차 운전수들이 얼마 안 가서 그 사장 차 운전수 자리뿐 아니라 종당에는 회사에서마저 쫓겨나는 이상한 관례가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운전수들이 회사를 쫓겨 나갔지만, 한 번도 그 이유가 밝혀진 일이 없고, 다만 몰라도 좋을 일을 알아 버린 것이 죄라는 뒷소리뿐이다. 그런데 그 내키지 않은 일이 소설의 주인공인 ‘그’에게서 발생한다. ‘그’는 어느 날 사장을 어떤 곳에 모셔갔고 결국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되는, 실수 아닌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사장의 당부대로 순종을 맹세했음에도 종당에는 신경과민 증세가 생기고, 주의력 결핍 때문에 운전수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회사를 쫓겨나고 만다. 세 번째 소설 <G와 심문관>에서 주인공 ‘G'는 어느 날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좌석버스를 탔는데, 환상 속에서 어떤 음모의 피의자로 체포당하여 정체불명의 심문관으로부터 취조를 받는다. 그러나 심문관은 음모사건과는 관계없이 그의 생애에서 기억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식 없이 진술할 것을 강요한다. 진술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G’의 과거고백은 온통 ‘전짓불’과 관계된 일들뿐이다. 6·25전란 때에 ‘전짓불’의 공포가 생긴 이래 그의 과거의 기억은 온통 ‘전짓불’투성이였다. 대학시절, 군영생활, 가정생활, 교우 관계 모두가 그랬다. 심문관은 진술을 중단하고 심판을 내렸는데 말할 것도 없이 유죄였다. ‘전짓불’만 이야기하는 ‘G’의 진술은 자신에 관한 정직한 진술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진술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술 태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유죄 심증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짓불’과 자기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G’가 받고 있는 형벌이라고 한다. 소설에서는 ‘나’의 하숙집에 느닷없이 나타나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자처하는 박준이가 사실은 소설가 박준일임을 알게 되고, 또 바로 그의 소설이 문학담당인 안형의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는 데로부터 ‘나’의 박준의 공포증에 대한 수수께끼풀이 탐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소설은 그냥 어릴 때부터의 괴상한 버릇이라고 하였으니 공포증의 원인을 알 수 없다. 두 번째 소설도 현대판 ‘임금님의 귀’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박준의 공포증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혀낼만한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소설에 와서야 그의 공포증은  6·25전란 때 생긴 정체불명의 ‘전짓불’에 대한 공포로부터 생긴 것이고 그것이 작가로서의 진술공포증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심문관>이라는, 추상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에로의 점진적인 추리를 통하여 ‘나’는 마침내 박준의 진술공포증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야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인 추리의 결과는, 이 소설의 주제가 6·25전란의 소재, 1970년대의 창작연대라는 설정에 의하여 특정시대에 대한 정치적 반발에 있는 듯이 보이게 한다. 과연 그렇다면 이 소설의 생명도 특정시대의 정치참여소설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액자소설형식을 갖춘 듯한 「소문의 벽」의 구조를 다시 곰곰이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소설의 구조가 이른바 규범적인 액자소설의 형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다른 점이 이 소설의 서사담론의 특징임을 보아낼 수 있다. 이 소설의 내적구조에서 ‘나’는 외부적 관찰자의 신분으로 박준의 세 소설을 찾아 그의 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이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갈등과 정신적인 자각증상을 앓는다. 그리고 외적구조에서는 플롯의 전개를 이끌어가면서, 내부적 행위자의 위치에서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이다. 이와 같은 텍스트의 이중구조는 외적구조가 주로 내적이야기들을 연결시키는 역할만 하는 일반적인 액자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김동인의 「배따라기」나, 훨씬 고전으로 올라가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 소설의 구조는 중층구조 또는 이중플롯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인 ‘나’가 다만 사건진술에서 사슬고리를 연결하는 역할만 하는 ‘서술자’가 아니라,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이라는 확인이야말로 소설의 주제를 포착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에서는 이른바 일반적인 액자소설과는 달리 두 개의 플롯을 교차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는데, ‘나’를 주인공으로 확인할 때, 내적구조가 호응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이 되고, 반대로 외적구조가 동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이 되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동기적인 사건은 작중인물이 신변적인 변화 내지 성격적인 발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는 계기로서의 사건을 말한다. 이 소설에서 동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은 ‘나’와 안형, ‘나’와 김박사의 갈등으로 구성된 외적구조에서 전개된다. 이 외적구조의 서사담론에서 플롯의 발전을 동기화하는 그런 신변적인 변화 내지 성격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박준이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화자인 ‘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와 발전의 결과가 나의 사표로 이어고 있는 것이다. 박준의 경우, 그의 현재 행위는 어떤 신변적인 변화나 성격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수수께끼풀이는 이미 진술공포증에 걸리고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과거에 대한 추적에 다름 아니다. 즉 그의 현재는 과거의 결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수수께끼풀이는 탐정소설의 연역추리과정과 다르지 않다. 물론 탐정추리소설에서는 이러한 연역추리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발전과 인물의 성격변화는 기본플롯을 구성한다. 탐정추리소설에서 논리적인 추리 내지 해석을 담당한 탐정은 해설자의 역할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문의 벽」의 화자인 ‘나’는 그러한 해설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박준의 수수께끼에 대한 풀이는 애초에 ‘나’와 안형과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나’는 안형과의 문학관 차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박준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편집장인 ‘나’와 문학담당 편집인 안형, 그리고 작가 박준이라는 인물구도는 합리적인 대응관계를 성립한다. 그리고 이런 ‘삼각관계’에서 보면, 박준과 그의 작품을 두고 편집장인 ‘나’와 문학담당 편집인 안형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 기본 플롯을 이루고 있음이 투명하게 보인다고 할 것이다. 플롯의 발전과 함께, 과거적인 결과물인 박준에 대한 수수께끼풀이 과정에서 마침내 사표에까지 이르는 것이 바로 화자인 ‘나’인 것이다. 말하자면 소설의 시작도 그랬지만, ‘나’의 신변 변화나 성격 발전의 발단은 광인행세를 하면서 불쑥 나타난 박준이 ‘나’의 편집장 일과 무관하지 않은 소설가 박준일이고, 그의 소설이 문학담당 편집인 안형의 서랍 속에 세월 모르고 잠자고 있다는 사실이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박준의 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은 결국 안형과의 갈등, 김박사와의 갈등 속에서 겪고 있는 ‘나’의 심리적 방황과 정신적인 고민이 자각과 각성에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박준의 과거들이 ‘나’의 발견을 통하여 다시 박준의 성격발전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찰을 통하여 ‘나’의 신변에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는 동기가 될 때, 박준과 그의 세 개의 소설이야기는 이러한 갈등과 변화에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호응적인 사건임에 다름 아니다. 단지 박준의 공포증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는 시각에서 보면, 사건의 발전은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심문관>이라는, 모호하게 추상적인 것에서 투명하게 현실적인 것에로의 점진적인 추리과정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은 자칫 우리의 사유를 특정시대에 대한 비판이라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이 작품을 한정시킬 수 있고, 역시 통속적인 추리소설의 오명을 쓰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나’가 소설의 주인공이고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라고 확인하면, ‘나’와 안형의 갈등이 중심적인, 동기적인 사건이 되고 그 발단의 초점은 안형의 서랍에 갇힌 박준의 소설 <괴상한 버릇>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와 안형은 <괴상한 버릇>에 대한 문학 관념과 태도에서 이미 갈등을 빚고 있다는 말이 되며, 바꾸어 말하면 ‘나’나 안형 모두 이 작품의 진가에 대해 이해하고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안형의 말 못하는, 이른바 사회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말썽, 그의 특정한 문학관념이나 태도, <괴상한 버릇>이 괴상한 버릇이 생기게 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압박 요인들을 말해줬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가 이 작품의 알레고리적인 수법의 의미를 그 나름대로 잘 알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중의 두 작품은 결국 이를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결국 안형은 그러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권력적인 폭력이라는 상징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 소설을 발표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징성은 소설 <괴상한 버릇>의 알레고리적인 기법에서 확인되기 전에 벌써 안형의 특정한 문학관념과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고, 또한 박준이라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안형이 지배이데올로기와 권력 앞에 문학적인 양심을 지킬 수 없었거나 문학작품의 주제를 언제나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용속한 사회정치학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괴상한 버릇>이 그러한 버릇이 생기게 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압박 요인들을 말해주지 못했다는 주장이 그의 특정 문학관념을 말해준다면, 그것이 연재중단 된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의 작가 박준이 쓴 것이기에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은 이기적인 계산에 의해 변질된 그의 문학적 양심을 말해준다. 아무튼 <임금님의 귀>에 해당하는, 연재중단 된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과 <괴상한 버릇>의 작가가 동일한 작가라는 사실이 이러한 정치적인 문학관념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안형의 신경을 자극했음이 분명하다. 즉 정체불명의 심문관이 ‘G’에 대한 심문에서 진술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가 문제라는 식으로, 안형도 <괴상한 버릇>이 어떤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나타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말썽 있는 인터뷰와 연재중단 된 소설의 작가 박준이 쓴 작품이라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또 그러한 선입견이 그로 하여금 <괴상한 버릇>의 알레고리적인 의미가 독자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가거나 ‘시대양심’을 배반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한 것이다. 편집인 그로서는 ‘공연한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소설을 서랍에 감금시켜버리는 것이 그냥 당연한 처사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괴상한 버릇>의 알레고리적인 상징성을 실존적인 주체의 형성에 가해지는 사회적인 억압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특정시대담론을 넘어서서 주체와 타자, 인간과 사회라는 보다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인간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본 후, 아직 다른 두 소설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벌써 이와 같이 안형과는 전혀 다른 보편적인 상징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박준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 더욱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박준의 공포증에 대한 ‘나’의 ‘수수께끼풀이’ 과정은, 결국 ‘나’와 안형의 의식 대결에서 ‘나’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실증적인 논거를 찾아 나선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나’와 안형과의 갈등이 박준의 소설 <괴상한 버릇>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 <벌거벗은 사장님>, <G와 심문관>의 발견, 발굴과정은 ‘나’가 주장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상징의미를 논증하는 귀납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귀납과정을 통해 확인되는 <괴상한 버릇>의 의미담론은 특정 시대, 특정 사회의 맥락 위에, 다시 이념적인 성찰의 여과를 통해 초월적으로 지각하는, 사회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나’에 의해 확인되는 박준이라는 작가의 의식층위의 비약에 따르면, 세 개 소설의 순서는 <G와 심문관>→ <벌거벗은 사장님>→ <괴상한 버릇>으로 재배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을 도출해내는 작가의 상상력에도 부합되는 결론이다. 그런데 만약 <괴상한 버릇>이 과연 박준의 진술공포증을 밑그림으로 하였고, 박준이 진술공포증에 걸리게 된 원인이 6.25전란의 상처 때문이라면, 이 소설은 안형의 말처럼 그러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억압 요인을 말해주지 않음으로 하여 실패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6.25전란의 상처는, <괴상한 버릇>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인공포증 해석에는 하나의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사례로 될 수도 있겠지만, 박준의 진술공포증의 원인으로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박준은 6.25전란의 상처로 진술공포증에 걸려 작가로서의 진술행위인 창작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작한 소설이 문학 담당 편집에 의한 발표중단, ‘서랍 속의 감금’, 인터뷰 기자에 의한 언론의 억압 등에 부딪치면서 진술공포증후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진술욕망은 어릴 때에 받은 6.25의 상처가 무의식 속에 응어리져 생긴 진술공포증에 의해 스스로 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가시화된 후에 사회로부터의 억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러한 사회적 억압에 의해 그는 마침내 진술공포증에 걸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6.25의 ‘전짓불’이 준 상처가 박준의 진술공포증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체불명의 ‘전짓불’이 박준이로 하여금 6.25에 겪은 ‘전짓불’에 의한 상처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거의 상처가 오늘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불행이 과거의 상처를 되살아나게 하는 경우이다. 그렇게 되살아나는 상처는 오늘의 불행에 대하여 그냥 오늘의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인간문제에로 인식의 비약을 가져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적인 비약이 6.25의 ‘전짓불’을 정체불명의 ‘전짓불’로 추상화시킬 때, 이 소설에서의 ‘전짓불’은 박준이 6.25때 겪은 구체적 상처의 잔존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때 그것은 이미 기의가 확장되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존재자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회억압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실제작가 이청준에 의해 소설 속의 작가 박준이 현실에서 그러한 ‘전짓불’에 부딪치고 있다면, 박준에 의해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도 일상생활에서 늘 그러한 정체불명의 ‘전짓불’에 부딪치고 있다. 대학시절, 군영생활, 가정생활, 교우관계 모두에 걸쳐 온통 ‘전짓불’투성이인 것이다. 그런데 추상화, 상징화 된 이러한 정체불명의 ‘전짓불’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억압 요인으로 작용하려면 그러한 ‘전짓불’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작가의 상상력은 막연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문의 벽」에서 그러한 정체불명의 '전짓불'을 반사하는 반사체는 바로 ‘소문의 벽’이다. 박준의 진술욕망은 번번이 이러한 ‘소문의 벽’에 부딪쳤고, 그것은 마침내 진술공포증을 유발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괴상한 버릇>이 발표될 수 없는 원인, <벌거벗은 사장님>이 발표중단 되는 이유, <G와 심문관>을 꾸러미 채로 동생한테 맡겨둘 수밖에 없는 억압 요인은, 일찍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박준의 말 속에 예언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역시 ‘소문의 벽’이었다. 여기에서 ‘소문의 벽’은, 엄미옥이 앞의 연구에서 제시한 라캉의 네 가지 사회적 연대의 담론방식 중 대학의 담론을 차용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담론은 주인담론이 안정화된 상태에서 계속 확장되고 정교화 되는 과정, 완성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여기서 행위자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다. 반면 그 행위의 대상은 아직 체계밖에 남아있는 잔여, 잉여지대이다.5) 그러니깐 대학의 담론은,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행위자가 주인의 담론을 담당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의한 주인의 담론이 그 폭력성을 은폐하고 상징계에 들어갈 때, 이러한 전문적인 행위자들이 지식과 기술의 제도화 된 장치를 이용하여 그것을 대리 수행하는 것이다. 「소문의 벽」의 문학담당 편집 안형, 신경병원 원장 김박사, 신문사 기자 등이 이러한 행위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제도적인 장치에 의한 전문적인 위치에 선택된 것만큼이나 주인의 담론을 정당화하고 사회화시키고 있다. 이들이 쌓아가는 ‘소문의 벽’에 의해 주인의 담론은 ‘체계밖에 남아있는 잔여, 잉여지대’에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괴상한 버릇>은 주인의 담론이 지식과 기술에 의해 제도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소문의 벽’을 통하여 주체의 형성을 억압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해서 무리하진 않을 것이다. 괴상한 버릇이 생긴 것에 대해 꼭 구체적인 압박요인을 밝힐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압박요인들이 흔히 ‘소문의 벽’에 가리어서 그 정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 마침내 사표를 쓰게 된 것도 결코 특정한 권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소문의 벽’을 쌓고 있는 안형이나 김박사, 그리고 R사 기자와 같은 인물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특히 문학 담당 편집인 안형에 의하여 ‘소문의 벽’은 작가 박준의 소설을 서랍 속에 가두어 넣고 그더러 진술공포증에 시달리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직접적으로는 편집장인 ‘나’의 권리마저 무력하게 하고 이른바 시대적인 문학적 양심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들이 쌓은 이른바 ‘소문의 벽’에 부딪친다는 것은 특수한 개인과의 모순과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제도화 된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들을 대행자로 하는 지식담론과의 충돌이지만, 그 지식담론이 폭력성을 띠게 되는 것은 그것을 제도화하는 권력의 폭력성이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나 권력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전짓불’을 외면하고 ‘소문의 벽’은 해석되지 않는다. 지식담론이 주인담론을 대리 수행하듯이 ‘소문의 벽’이 언제나 ‘전짓불’을 반사하는 것이라면, 그 ‘소문의 벽’은 아무래도 ‘전짓불’이 비춰야만 반사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반사체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전짓불’이라는 광원이 없이는 반사체로서의 ‘소문의 벽’도 사회에서나 소설에서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문의 벽’에 대한 해석은 작품의 의미를 내재적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짓불’의 복사 면에로 끊임없이 의미를 확장해가는 작업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문의 벽’이 보편적인 사회적 억압의 상징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우선 ‘전짓불’이 보편적 의미에서의 제도나 권력의 폭력성을 상징할 때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문의 벽」에서의 ‘전짓불’이 6.25나 창작연대라는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을 때 ‘소문의 벽’도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상징의미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소문의 벽’에 반사되어 사회적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은 정체불명의 ‘전짓불’이다. 정체불명의 ‘전짓불’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반사체인 ‘소문의 벽’에 의해 굴절되었기 때문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자일지라도 그들에게 비추는 ‘전짓불’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준과 화자인 ‘나’, 그리고 실제작가 이청준은 정직한 진술을 하려는 욕망에서 복수로 묶인 자유의지의 ‘주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을 비추는 ‘전짓불’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진술의 욕망을 억압하는 ‘전짓불’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의미에서만 동일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확장에 의하여 ‘소문의 벽’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주인담론만을 의미하지 않고, 주체와 타자, 욕망과 사회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과의 충돌은 훨씬 보편적이고 시대초월적인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의 갈등과 고민과 선택은 특정시대를 초월하여, 존재론적으로 존재자와 사회적인 억압이라는 보편적인 인간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소문의 벽’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적인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특정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와 권력에 의한 폭력일 수 있지만, 존재론적인 존재자를 억압하는 것은 사회의 영원한 부산물인 ‘소문의 벽’인 것이다. 그리고 ‘소문의 벽’이 사회의 영원한 부산물이라면, 작가는 숙명적으로 ‘소문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작가인 박준과 화자인 ‘나’의 히스테리담론을 통한 내포작가의 분석담론은, 실제작가 이청준의 작가의 숙명에 대한 자각과 리얼리즘적인 창작이념으로서의 정직한 진술에의 욕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3. 나오는 말 이청준은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작가와 글쓰기에 대해 다루고 있거니와, 「소문의 벽」에서도 그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전짓불’이 제도적인 억압이나 권력적인 폭력이라면, ‘소문의 벽’은 그것을 익명화하고 지식·기술화하는 사회적인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욕망도 다만 특정시대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는 ‘소문의 벽’을 쌓는 사회적인 폭력과의 대결 속에서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숙명적으로 ‘전짓불’을 마주하고 ‘소문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라고 할 때, 인간의 존재론적인 모순은 근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욕망과 사회와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요, 파시즘이요 하는 것은 다만 특정시대에 의한 갈등의 특수표현일 따름이다. 오히려 존재자와 사회적인 ‘소문의 벽’과의 갈등은 영원한 것이다. 인간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든 어쩔 수 없이 틀 속에 갇힌 존재이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면 또 새로운 틀에 갇힌다기보다는, 기존의 틀을 깨드리기 위해 새로운 틀을 만든다. 그래도 그것을 원점의 회귀가 아니라 나선형의 발전이라고 본다면, 인간은 그런대로 자유와 해방을 향해 발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때로는 직접 ‘전짓불’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소문의 벽’을 허무는 것이 진정 작가의 숙명이라면, 작가 이청준은 글쓰기를 특정한 시대를 초월하여 현실의 존재론적인 인식가치를 확인하려는 문학의 리얼리즘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청준, 「소문의 벽」, 󰡔눈길 外󰡕(한국소설문학대계 53), 동아출판사, 1995. 문재원, 「이청준의 <소문의 벽> 연구」, 󰡔국어국문학󰡕(33), 1996. 엄미옥, 「󰡔소문의 벽󰡕 연구-라깡의 네 가지 담론을 중심으로」, 󰡔시학과 언어학󰡕, 2002. 우찬제, 「‘틈’의 고뇌와 종합에의 의지」, 󰡔눈길 外󰡕(한국소설문학대계53), 동아출판사, 1995. 이윤옥, 󰡔다시 태어나는 말-이청준 소설 읽기󰡕, 문이당, 2005. 임성래·이정옥, 「변용 추리소설의 소설적 의의-󰡔최후의 증인󰡕과 「소문의 벽」의 비교를 중심                 으로」, 󰡔대중서사연구󰡕(14), 2005,
62    절대적인 억압환경과 인물의 풍속화 댓글:  조회:3001  추천:0  2009-05-16
-󰡔삼대󰡕의 갈등구조를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염상섭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사의 정리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방대한 작업이 된다. 이것은 염상섭 자신이 잘 읽히는 작가에 앞서 가치판단과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는 연구대상적인 작가라는 것이 연구가들에게 기본 요청사항으로 제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염상섭 연구는 실로 눈부신 정도로 발전하였다. 1920년 <창조> 6호에 실린 김동인의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서 비롯된 염상섭 연구는 이후 발표된 비평과 연구 논문이 1997년 말 현재 무려 527편이고, 단행본이 8권이나 된다. 이 같은 연구 업적은 염상섭과 그 문학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1).  염상섭 연구가 196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어 1974년에 김종균에 의해 570면에 달하는 󰡔염상섭 연구󰡕가 최초로 출간되어 그 문학의 총체적 실체를 역사적 실증적으로 기록하였고 1987년에 김윤식에 의해 945면에 달하는 제2의 󰡔염상섭 연구󰡕가 출간되어 염상섭 연구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며 1991년에 541면에 달하는 이보영의 역저 󰡔난세의 문학-염상섭󰡕이 출간됨으로써 염상섭 연구는 새 국면을 맞게 되어 염상섭의 문제적 장편소설을 정치 소설적 시각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의 형상화로 파악함으로써 염상섭에 대한 가치 중립적 판단과 함께 염상섭 연구가 변증법적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97년 염상섭 탄생 100주년과 서거 35주기를 기념하여 출간된 염상섭 연구서 2권이 모두 염상섭 문학의 재조명, 재인식으로 되어 있다2).  그만큼 오늘에 와서 문제를 제기하는 논문에서는 지난 연구성과를 일일이 재확인하기보다는 다만 지난날의 연구 중에서 반성할 만한 논법을 불러내어 재조명, 재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논법 중에서도 개인적인 연구에 국한된 것은 1997년에 이르러 연구 논문이 이미 527편에 달하고 있다는 놀라운 성과에 질리어 그냥 최근의 문학사적인 정리에서 내놓은 논법을 두고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해 보는 것으로 기성 연구에 대한 재조명, 재인식의 중심부에 감히 다가서 보려고 시도한다. 그러고 보니 그것이 오히려 이도 안 난 놈이 콩밥 먹으려는 망동일지는 모르겠지만 연구에 인생을 투자하려는 문학도라면 한번 가져볼 만한 바람직한 자세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용기를 돋우어 본다.  김용식, 김우종 외 34인의 공동 집필로 된 󰡔한국현대문학사󰡕(개정증보판 <현대문학> 2002, 이하 <문학사>라 함)의 1920년대 소설부분에 전문수는 <근대소설의 정착과 인식지평의 분화기>>라는 글에서 염상섭의 작품을 두고 “그는 자기 개성에 맞는 소설적 현상을 찾아 사진 찍듯 전달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제 빈곤이라는 지적은 안일한 소시민적 의식에서 온 것이라 본다. 객관세계와는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세계 속에서 자기와 자기 가족만이 사는 개인주의적 삶에 사진기를 갖다댄 것이다.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 삶인 것이다.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세전>(<시대일보> 1924)이나 <삼대>(<조선일보> 1931)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김동인과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라는 면에서 같은 계보가 되고 만다.”3)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특정환경 내지 작가의 창작동기와 수법에 대한 문학 본체론적 진단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시각에서 작가를 시대의 선구자 또는 세계관의 대변자쯤으로 추대하고 당시로서는 이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를테면 당시 현 제도를 문제삼고 개조하고 뒤엎으려는 전형인물을 오늘의 현시점에서 강요하는 것 같다.  전문수는 염상섭과 김동인을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라는 면에서 같은 계보가 되고 만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의 상술한 관점은 <감자>를 비롯한 김동인의 창작세계를 진단하는데는 그리 무리가 되지 않는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인의 많은 작품들을 보면 사실 어떤 시대적 배경에 대한 파악이 없이도 그냥 한 개인주의적 삶 그 자체로 읽혀진다. <감자>나 <배따라기>같은 작품은 자연주의나 탐미주의 창작기법의 성공사례로 표본이 될지라도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적인 신변체험으로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염상섭의 작품의 경우, 더도 말고 전문수가 언급한 <만세전>과 <삼대>는 오히려 작가의 역사적 인식 내지 시대의식이 소설의 담론구조를 손상 줄 정도로 전지적 화자의 월권행위가 범람하여 등장인물의 개성 있는 대화, 독백을 퇴색하게 하고 지어는 등장인물의 행위까지 인형처럼 줄다리기하여 문학성을 저하시키는 기법상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작가가 관찰하고 포착한 시대인식 내지 의식을 확실하게 사람들한테 전달하려는 성급한 심리가 아니면 그가 말하려는 바를 독자들이 알아주지 못할 가봐 과잉해석을 하는 노파심일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래도 작가의 기법상의 미달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어떠한지는 이제 「삼대」의 갈등구조와 인물형상을 통하여 확인해 볼 것이다. 2. 갈등구조로 보여주는 시대의식  제1장에서 작자는 중산층 출신의 부자집 손주인 덕기와, <맑스 보이>인 김병화를 보여줌으로써 30년대의 풍속도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4).  김윤식이 판단한바와 같이 작품은 그 시작에서부터 시대적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는 성장세대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덕기와 병화를 등장시키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서로 다른 현실 대응자세를 신분, 성격적으로 충돌시키고 있다. 여기서 벌써 「삼대」가 다만 사회를 외면한 개인주의적 가족사적 소설이 아니라 변천하는 시대, 실지로는 식민지화가 고착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신변체험의 시점에서 전개될 것이라는 판단은 내려지는 것이다.  이에 앞서 작품의 서두에서 “봉건잔재를 의식내용으로 갖추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려는 제1세대 조의관”5)을 등장시키고 그의 입을 통하여 손자 덕기와 그 친구 병화에 대한 인상착의가 내려지면서 세대적 윤리적 갈등과 시대적 이념적 갈등을 좌표로 하는 이중구성의 플롯을 암시해주고 있다.  즉 “「삼대」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축을 구성의 골격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간의 대립과 연속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 축이고, 다른 하나는 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여러 인물들간의 대립과 화해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 축이다. 이와 같은 플롯은 <<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이러한 이중구성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었다고 보겠다”6).  물론 이러한 지적은 소설 구조적인 한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냈다고는 하겠으나 시대적 인식에 따르는 작가의 주도동기를 파악하지 못하였기에 다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라는 구조일반 내지 창작기법에 머무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작품의 내용 내지 모티프를 외면한 이런 결론으로서는 이중구조의 플롯의 종축과 횡축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혀주지 못한다.  이중구조의 플롯이 시대의식에 예리하고 역사적 사고에 투철한 작가의 정신적 산물이라고 확인하면 종축은 횡축의 역사적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며 역시 인물형상의 심리갈등 내지 성격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삼대에 걸친 인물의 설정과 그들간의 갈등이 다만 세대간이라는 혈연적인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는 판단에서 확인될 것이다.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세대간의 갈등이란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태도나 현실 인식의 차원은 소설의 배경적 의미 이상의 민족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소설 전체의 의미를 확대하도록 강요하게 된다7).  말하자면 조부 김의관은 유교사상 체계의 보수주의자이고 부재지주의 형상이면서 결국은 식민지화와 함께 이미 뿌리뽑혀 역사에 사라져 가는 구한말의 시대적 상징이라고 할 것이고 부친 조상훈은 3.1운동의 실패라는 정치적 좌절로 정신을 거세당하고 시대의 개화사상으로 뿌리 내릴 수 없는 <수입품>인 기독교에 위선적으로 금욕적인 정신기탁을 한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상징이라고 할 것이고 손자 조 덕기는 제도적으로 고착되어 가는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의 존재단위로 지닌 치부층의 소유양식이 뿌리가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불가피하게 그 소유양식은 깨어질 수밖에 없”8)고 문화정치로부터 극단적인 강압정치로 경직되어 가는 일제의 강경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의식의 발육이 부진하는 시대에 싹트는 근대의식의 맹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징적 의미가 과연 작품의 흐름에서 흘러나온다고 확인할 때 우리는 그냥 삼대의 갈등을 혈육적 세대의 내부적 갈등으로 한계 지울 수는 없겠다.  한 가족의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다만 혈육적 세대간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서 당시의 역사적 굴절모습과 사회적 변천 내지 시대적 굴욕 또는 절망의 현실대응에 이어질 때 그것은 횡축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적 인간들의 의식의 갈등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역사, 사회적 환경으로 펼쳐지는 것이고 역시 그러한 시대적 이념적 갈등을 변증법적 차원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조명해 주는 시대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기 <문학사>의 논법에 따르면 작가는 “객관세계와는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 한 것”이고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 삶인 것”이며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세전>이나 <삼대>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의관이 당시의 지주계급이나 중산층의 몰락을 보여주고 조상훈이 정치적으로 미래지향이 막힌 전락된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상징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만한 역사적, 사회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그 몰락과 전락이 다만 스스로의 개인주의적 행위결과로 돌려지고 있다는 지적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지적 자체가 벌써 그 비평적 시각을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전체주의적인 가치판단 혹은 리얼리즘 문학을 상대로 하는 연구가 쉽게 빠지는 주관, 이성적인 진보개념 내지 이상적 전망의 방법론에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일깨워주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 역사가 우리에게 준 아픔이 얼마나 뼈저리고 상처가 얼마나 깊던 간에, 그런 외래의 파괴적 폭력에 의한 집단억압에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굴욕적이고 절망적이었던 간에 역사는 역사로, 현실은 현실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그에 따른 원형적 구성으로 작품의 기본골격을 세워나가는 자세가 오히려 리얼리티에 철저한 것이고 극복해야 할 특정한 시대의 특수한 삶에 대한 역사철학적인 시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시대적 인식에서 확인해 보면 당시 지주계급, 중산층의 몰락과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전락은 역사, 시대적인, 그리고 문화, 의식적인 것의 보편적 발전에 의한 필연적인 내적 결과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정책이라는 외세의 폭력에 의해 주체적 기준이나 선택이 박탈당한 타살적 몰락과 전락인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종축은 횡축의 역사적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며 역시 인물형상의 심리갈등 내지 성격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조의관에 의한 지주계급, 중산층의 역사적, 시대적 몰락을 작품의 기본구조로 자리매김하였다면 어떤 시대상황이고 어떤 극단적 현실이든 간에 몰락해 가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나 자살적인 대항이 운명적으로 작품에 드러나야 할 것이다.  또 만약 조상훈에 의한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역사, 과도기적 희생을 작품의 주선으로 잡았다면 좀더 등장인물의 인텔리의 유형적 기본성격과 극단적 대항운동의 실패로 겪는 심리갈등 내지 주관적 가치기준의 변질과정을 객관세계와 시대의식과 관계를 맺어주면서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작가가 노린 점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덕기를 새로 싹트는 근대의식의 맹아의 상징이라고 확인하면 조의관이나 조상훈은 이 맹아가 싹트는 토지나 밑거름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작품에서 보면 조의관은 작품에 등장하면서 벌써 성장, 확대되는 재산의 소유자거나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사회와 갈등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몰락과 죽음을 앞두고 금고와 사당으로 혈연적인 윤리질서를 보존해가려고 그 나름의 윤리관념을 조덕기한테 심어주고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 가는 낙조 같은 인물이다. 조상훈도 역시 정치적 실패 뒤에 억압적 환경에 대한 저주와 과도기적 희생세대가 운명적으로 자초하는 주관적 가치기준의 변질과정은 이미 과거의 기록에 남긴 대로 등장하면서 위선적 이중생활에서 점차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타락하는 인물이다.  보는바와 같이 조의관이나 조상훈은 그들 자체의 성격발전과 역사적 운명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덕기라는 근대의식의 맹아가 싹트는 객관적 환경 내지 시대의 특정상황을 민족사적 배경으로 받침 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들 두 인물이 일제 식민주의 국권강탈과 극단적 강압정치의 필연적인 산물이고 이들로 형성된 종축이 횡축의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이 되고 역시 인물형상의 심리갈등 내지 성격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될 때 민족자본의 재생산이 제도적 보장을 잃고(조의관의 경우) 시대에 대한 타협과 환경과의 화합이 도덕적 타락을 조장(조상훈의 경우)하는 결과는 벌써 근대의식의 맹아로 싹터 오르는 조덕기의 운명과 전망에 대한 기대지평을 무겁게 누른다. 3. 인물의 풍속화와 내면의 저항  <문학사>에서 판결한, 작가는 “객관세계와는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 한 것”이고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 삶인 것”이며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세전>이나 <삼대>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는 등등의 논법은 문학작품은 <있을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보편성은 형상화된 특수성을 통해 반영될 수 있다는 리얼리즘 이론을 극단화된 전형창조론에서 파악하고 리얼리티보다는 역사법칙의 진보개념을 앞세운 혐의를 받게 한다.  “리얼리즘 소설은 보편성은 현실의 개별자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화인 특수성을 통해서 재현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히 역사, 사회의 총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근대 역사의 시간개념에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근대 소설의 시간체험의 역할을 루카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에 이르러 선험적 고향(원리)이 사라진 훼손된 세계에서 소설은 본질을 찾아야 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재로 삼게 됨으로써 시간은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시간은 현대적 의미에 반기를 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저항이 된다. 소설에서 의미와 삶은 서로 분리되어 본질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으로 분리됨으로써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고 만다(G. Lukacs-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9)  루카치의 주장에 따르면 훼손된 세계에서는 본질적 의미와 시간적 삶이 분리되어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고 만다”  주체적 자아가 훼손된 세계, 내적 발전을 박탈당하고 외세에 억압받는 특정한 현실에서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이 시간적 삶을 통한 본질적 의미에로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적 억압과 강박적 문화이식 내지 정치적 파괴가 일상적으로 개개인의 자아에 선택 없이 강요될 때 시간적 삶의 일상성 자체가 사회환경과 시대배경 속에서는 특정환경 특정시대의 특수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악의 몸에 붙은 발과 손이 저지르는 악행을 짐짓 보지 못하고 지낸다 하더라도 한민족이라는 일개인은 어쩔 수 없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와 상황이 바로 작가 염 상섭이 살던 지점이었다”10).  이처럼 자아와 진보개념이 극단적 탄압에 의해 훼손된 세계에서의 당위적인 전망이란 당시의 혁명가나 오늘의 후대들이 시간극복의 시점에서 가져보는 희망사항일 뿐 당시의 현실 자체가 그러한 전망의 당위성을 시간적으로 갖고있지는 못한다.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이성의 각성을 부르짖는 이론적인 전형창조론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지만 전형성과 선진성 내지 진보적 이념을 직결시키는 주장 자체가 비판되어야 한다.  “전형으로서의 인물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을 자신의 피 속에 육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이념 자체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발자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형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두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보다는 전형을 만들 수 있는 정열. 수난이, 다시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제가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확산해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다.”11)  <삼대>가 자아와 진보개념이 극단적 탄압에 의해 훼손되던 시대를 시공간으로 하고 있다는 전제를 강조할 때 시간적 삶의 일상성에서 전개되는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삶의 모습은 그대로 그 시대 삶의 현장에 대한 풍속도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현실사회의 제도적 사회구조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나아가 시대적 문제의식과 심리적 갈등에 고민하기를 회피하지 않을 때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특정시대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참주제도 리얼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작가의 명석한 현실인식과 날카로운 시대포착은 등장인물들의 풍속화로 특정시대의 문제의식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는 데서 잘 보여주면서도 특히 소설 구상적 측면에서 보면 주인공설정에서 작가적인 고심과 의도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은 것은 작가가 이십대초반이고 일본유학생인 조덕기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 연령, 신분적인 개연성에서 아직 어리고 학생이라는 사회적 미숙성과 맹아상태의 근대의식을 그 내부구조에서 통일시키고 있다고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근사한 문제의식을 다룬 한 작가의 작품인 <만세전>과 <삼대>의 주인공을 동일한 위치로 환원시킬 때 인식의 기대지평이 같을 수 있다는 가능성 범주로 확인하면 더욱 명백해 질 것이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이십대 초반이고 일본유학생이다. 일본유학생이라는 근대의식의 상징성과 학생이라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미숙성의 일체화는 그냥 한 개인의 시각적 한계나 인식의 주관성을 넘어서서 당시의 일제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집단발육의 부전으로 인한 근대의식의 맹아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에 미안함이 없는 판단일 것이다.  동경에서 서울까지의 여로에서 썩어서 구더기 끼는 무덤으로 전락한 조선의 실상을 흩어지는 안개 속에서처럼 점점 뚜렷이 각인을 받고 내적 영혼의 저항에 주관적 기준 점을 잡을 수 있었던 <만세전>의 주인공이 <삼대>에 이르러서 그 현실 속에 몸담으면서 보다 신변 체험적으로 일제 식민주의 국권강탈과 극단적 강압정치로 하여 민족자본의 재생산이 제도적 보장을 잃고(조의관의 경우) 시대에 대한 타협과 환경과의 화합이 도덕적 타락을 조장(조상훈의 경우)하는 결과 앞에 곤혹을 느끼게 된다.  같은 신분, 같은 연령의 두 주인공이 서로 다른 심리갈등 내지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그들의 현실접근에의 시점차이, 거리차이 때문일 뿐 의식의 본질적, 질적 비약은 아니었다.  <만세전>의 주인공이 현실에 대해 관조적이고 현실인식이 우발적 사건이나 우연적인 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삼대>의 주인공 조덕기는 직접 현실에 몸담고 현장인간들과의 충돌과 몸짓 속에서 신변체험을 하고 내면적 갈등을 겪으면서 의식의 주관적 기준선택에 방황하는 것이다. <만세전>이 시점에서 관조적이고 의식에서 피상적인 약점을 <삼대>에 와서 치료하는 듯 하다. 그럼에도 두 작품사이에 의식의 질적 향상이 부재한 것은 식민통치의 제도적 고착이 점점 본격화되어가면서 집단발육이 부전했던 시기라는 민족사적 배경에서 확인하면 별로 나무랄 것이 못된다고 할 것이다.  세대적 윤리적 갈등과 시대적 이념적 갈등의 교차점에서 갈등과 선택에 모질음을 쓰는 덕기가 일제 식민주의 국권강탈과 극단적 강압정치로 말미암아 민족의 주체적 발전이 박탈당하고 자아실현 내지 인간완성이 사회성장과 동일한 위치에로 환원될 수 없었던 삶의 현실에서 도의적인 동정주의자로서나마 유용한 인간이 되려하는 것도 극한시대의 아픈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한 것, 그 속에 덕기의 인생이 놓여 있다. 이 불확실한 마음이란 덕기가 놓인 상황과 등가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삼대>의 참주제가 새삼 선명해진다.”12) 맺는 말  이상에서 살핀바 작가 염상섭은 장편소설 <삼대>에서 자아와 진보개념이 극단적 탄압에 의해 훼손되던 시대를 시공간으로 하여 시간적 삶이라는 일상성 자체가 극복의지로 표현되고 있음을 인물의 풍속화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서술시점, 시각에서 작가의 주관적 흔적이 드러나고 대화의 담론구조에서도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설교적인 등 문제점들이 소설의 성공에 크게 영향 끼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으나 여기서는 그냥 앞에서 제기된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61    현진건 소설의 리얼리즘 정신 댓글:  조회:2945  추천:0  2009-05-16
  1. 들어가는 말 2. 리얼리즘정신과 현진건 소설의 3단계 발전   3.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근대문학을 갑오개혁 이후에서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학, 즉 신소설, 신체시의 산생과 함께 서구 근대 문예사조들을 수입하던 시기의 문학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문학의 흐름은 초기에 사조와 기법의 범람이 무질서하게 일어나다가 차츰 정리되고 리얼리즘이 주조를 이루게 되었다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의 특정 현실에서 출발하여 세계문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근대문학 형성기의 한국은 근대사회에로 주체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고 열강들의 힘 나아가서는 일제 식민통치에 의한 강박실행으로 하여 근대사상의 민족적 주체가 온전하게 형성될 수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조도 또한 근대사상의 민족적 주체의 형성과정과 함께 범람과 굴절과 정리의 적응단계를 거치게 된 것이었다. 격세지변의 시대에 주체성마저 상실한 민족의 문학현장도 지극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음,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일어난 세계 근대문학은 주로 현실에 접근하여 인간의 문제를 사회와의 연관 속에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아의 각성을 다루었다. 이러한 주류적인 문학경향은 낭만주의 이후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문학으로 물꼬를 틀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특히 제일차세계대전을 전 후로 유럽은 정신사적으로 심한 아픔을 겪으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혼란기를 맞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술적 감수성에 있어 19세기가 실현했던 리얼리즘적 종합의 능력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소멸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리얼리즘이 지배했던 시대 이후는 <비(非)리얼리즘 문학의 시대>라고 확정지을 수 있다.”1) 이 비 리얼리즘문학이란 리얼리즘문학에 반대하는 단일 문학사조가 아니라 리얼리즘과 대립되는 모든 부류의 문학경향 내지 사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조의 범람은 근대의식을 배우는 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를 비롯한 한국지식인들에 의해 그대로 한국문단에 범람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사회현실과 근대사상의 민족적 주체성 확립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 현실에 접근하고 사회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리얼리즘정신이 작가사상의 기본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는 1919년의 3․1운동을 문화배경으로 할 때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정신적 곤혹․방황과 함께 더욱 사회를 직시하게 된 결과였다. 이는 또 작가의 시대적 고민의 사회적 원인을 근원적으로 파헤치는 작업과 직결되어 많은 작가들의 옹호를 받게 된 것이다. 리얼리즘이 미성숙에서 성숙에로 발전하는 과정은 바로 객관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성찰하는 작가적 사상의 성숙과정이었으며 구체적인 형상을 통하여 일반적인 사회본질을 제시한다는 리얼리즘의 참 정신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김동인의 「약한자의 슬픔」등은 심리묘사나 성격창조에서 소박하게나마 리얼리즘의 특성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김동인의 경우 많이는 소설형식 그 자체의 미학적 추구에만 집착한 나머지 결국 문학을 위한 문학에로 떨어져 사회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무력하게 그리고 고립적으로 묘사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염상섭은 초기작품인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벌써 리얼리즘 문학에로 한 걸음 다가서면서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민과 아픔을 통하여 사회의 암흑면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도 결국은 현실묘사에서 기계적인 수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인식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약점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인물의 개성적인 창조와 매개된 사회현실의 본질적 제시에 문학의 진가를 두고 있었던 염상섭은 「만세전」에 와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당대 식민지사회 상황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제시하면서 주인공의 발전적인 성격을 창조하는데도 성숙한 작가적 역량을 보임으로써 리얼리즘문학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국 근대리얼리즘문학의 성장과정을 작가적 성숙과정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투명하게 보여준 작가는 아무래도 빙허 현진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진건의 「빈처」,「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등 초기 작품에서는 주인공 내지 작가의 사상적 방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직 습작의 단계에 있었던 작가의 미성숙과 갈라놓을 수 없을 뿐더러 역시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연관되는 것이고 나아가 창작기법으로 수용된 리얼리즘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빈곤하고도 무난하지 않은 것이었다. 근대의식의 세계적인 물결을 따라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시민사회지향의 민족주의는 외세의 식민통치에 의하여 민족적 주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신구대립의 역사적 과업을 짊어진 채로 우선 민족생존의 운명 앞에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특히 1919년의 3․1독립운동이 일제탄압에 의해 실패하면서 민족계몽운동과 함께 애국주의자였던 지식인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 사상적 방황과 인생의 곤혹으로 몸부림쳤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들은 리얼리즘의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으면서도 이러한 시대적인 진통 속에서 그 아픔을 근원적으로 진맥하고 인생을 총체적으로 철학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의 20대 초반이었던 사상적 미숙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또 「희생화」와 같이 신구관념 교체기의 진보적 이념을 포장 없이 드러낸 습작품에서 멀리 지나오지 않은 시기에 발표한 작품으로서의 한계성도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의 경우에도 예술적 진실과 사회적 현실의 유기적인 통일을 시도하고 있는 작가의 기량과 역량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잠재적 역량은 마침내 「운수좋은 날」에서 주관적인 시각과 순수 개인적 삶에서부터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과 사회적 현실에로의 확장된 의식성향을 보이게 되었고 「고향」에 오면 마침내 성숙한 리얼리즘정신을 발산하게 된다. 이는 “조선 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에 문학정신을 수립한 작가가 마침내 리얼리즘의 진수를 득도한 결과였다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리얼리즘정신과 현진건 소설의 3단계 발전 빙허 현진건은 1920년 <개벽>지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비록 신구관념 교체기의 진보적 이념을 문학적 장치가 어설픈 대로 별로 포장 없이 드러낸 습작품이긴 하였으나 그만큼 갓 이십대(1900년 생)에 들어선 현진건의 미래지향적인 삶의 출발을 알리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의 작가적 생애의 출발점이라는 데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겠고 다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신구관념 교체기에 진보적 이념을 추구하고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작가적 자세를 정립하는 계기였다는 데서 의미 매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해 걸러서 발표된 「빈처」, 「술 권하는 사회」를 통해 충분히 실증되고 있다. 1) 첫 번째 단계: 리얼리즘의 지향-「빈처」 「술 권하는 사회」 혹자는 “「빈처」는 「희생화」의 연장선 위에 놓여진 작품으로, 그 소재가 새로울 것도 없으며 더 뛰어난 비판정신이나 투철한 역사의식의 발현도 없다. 다만 그의 사실주의적 기법의 발전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사회 변동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긴 하지만 그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 민족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할 문제에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2)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오히려 「빈처」는 바로 작가가 「희생화」의 이념적이고 도식적인 계몽소설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리얼리즘지향의 징표였다고 확인할 수 있다. 위의 평자가 「빈처」와 「희생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재단하는 것은 “그 소재가 새로울 것도 없으며”에서부터 벌써 지극히 독선적이고 주관적인 결론에 빠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희생화」는 다만 신구관념 교체기에 이념적 진보를 추구하는 미완성 청년의 가치지향을 작가이념 그대로 전달하고 있으나 「빈처」는 이러한 추상적인 가치추구에서 벗어나 암흑하고 불안한 시대상황에서 정신적 방황과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지식인 청년의 심리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작품은 그러한 심리적 갈등을 사회현실과의 매개 속에서 근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회인식이 변질된 시대에서 사회에 선택될 수 없었던 개인의 심리적 방황과 고민이라는 상황은 벌써 “현상적 현실에 대한 탐구는 현실과 맺는 관계의 확실성을 되찾는 수단이 된다.”3)는 리얼리즘의 한 원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을 따라 사건관찰의 시각을 확인해 보면 이 작품은 작가지망생인 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존경하면서도 주변인간들이 발산하는 속물적 유혹에 대해 본성적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내와 나의 갈등(기실은 그런 아내를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아내와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라 아내의 모순된 심리에 대한 관찰을 통한 ‘나’ 자신의 심리갈등에 시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작품은 속물적인 인생을 살지 않으려 하면서도 정신적 성장의 길이 막힌 암흑한 사회현실에서 방황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젊은 지식인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당대 사회현실을 외면한 채 속물적으로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을 멸시하면서도 그 자신의 무능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정신적 성장이나 인격완성을 할 수 없었던 시대여건이 희미하게나마 주인공의 심리자세를 통해 알려진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유능한 인간’들의 속물적인 타락과 아내와 같이 자기를 인정하고 또 자기가 기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지 속에서 스스로 갈등하고, 그러면서도 인격완성을 사회현실에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고 주관적으로만 고집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신구관념 교체기에 반역사적인 봉건윤리 관념의 상징물인 중매결혼이 작가들의 비판대상이 되었고 현진건 자신이 「희생화」에서 신사상을 주장하였으면서도 「빈처」 등 작품의 주인공들이 도리어 그 봉건적인 가정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그대로 의식과 생존이 분열되는 당대사회의 삶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대개 유학을 많이 하였고 적지 않게는 바로 가부장제적 봉건윤리 관념의 소산인 봉건가정을 탈출하여 유학의 길을 갔었으니 그런 행위 자체가 근대사상의 동경이요 봉건윤리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럼에도 「빈처」의 주인공은 유학에서 돌아온 후 사회를 향한 정신적인 가치추구는 전혀 실현가망조차 보이지 않고 다만 주관적으로 정신가치를 고집하면서 유일하게 자기를 존경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봉건가정의 아내한테서 자기의 가치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사회발전의 근대사상을 추구하는 ‘나’와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지는 봉건사상에 염색된 아내의 원상회복과 정신적 행복은 아무런 미래제시나 대안도 없는 ‘나’의 정신적 가치추구로 하여 역설적이고 불행의 씨앗이 묻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한 젊은 지식인의 개인적인 삶을 다루면서도 그의 정신적 방황과 고민이 그냥 허영이나 무능에 의한 개인적인 것에 있지 않고 정신적 가치가 추락하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는 도저히 정신적 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 당대 사회현실을 폭로하고 있다는 데서 리얼리즘의 추구가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콘텍스트적인 의미담론에서는 주인공과 사회를 모순의 한 쌍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로 그 서사구조에서는 당대사회의 특정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주인공의 실패의 과정이 현실적으로 사회를 폭로할 수 있는 어떤 사건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 한계 때문에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은 추상적이고 실패의 원인도 자신의 무능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작가 현진건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극복은 그의 작품을 한 걸음 리얼리즘에 다가서게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때로부터 작가 현진건은 벌써 자기가 이미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도 항상 진지한 문학적 검토를 하였던 듯싶다. 그리고 그러한 검토의 잣대로 리얼리즘을 선택하였던 듯싶다. 바로 그러한 작가적 자세가 그를 나중에 리얼리즘의 완전한 등반에 성공하게 하였을 것이다. 「술 권하는 사회」는 작가가 「빈처」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썼지 않았나 생각되는 작품이다. 그것도 “구체적인 전체인 창작 안에서 전체로서의 인간을 사회의 부분으로서 묘사한다.”4)는 리얼리즘의 한 원리에 접근하여 구체적인 개인을 사회와 결합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비록 인물과 구성은 「빈처」와 많이 닮아있지만 서술시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우선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사회에 대한 작가의 아니꼬운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고민하는 근본 원인이 ‘술 권하는 사회’에 있다는 것을 제목에서부터 확인한 작품은 부조리한 사회가 나를 술 마시게 한다는 주인공의 울분을 통하여 좀 더 직접적으로 사회에 시각을 돌리고 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은 무슨 화증이나 ‘하이칼라’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슨 회를 하나 꾸려놓고도 처음은 민족을 위하느니, 사회를 위하느니 하면서 목숨마저 서슴없이 바칠듯하던 인간들이 이틀도 되지 않아 명예와 지위를 위해 싸우고 찢어발기는 당대 조선사회의 몰락과 지성인들의 속물적인 타락 앞에서 취한 자학이었다. 정신적 가치추구를 하면서도 이와 같은 전체적인 몰락상 앞에서 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 주인공은 소극적인 자학으로 세상을 등지려고 하지만 아무튼 그것은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저주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이 작품의 주인공은 「빈처」의 주인공보다 정신적인 가치지향에서 사회구원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에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고민할 뿐더러 무지로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삶조차 역사를 역행한 과거를 살고 있는 아내를 더는 참아줄 수 없어 마침내 집을 탈출한다. 이러한 결말은 정신적 가치추구를 하던 주인공한테는 부조리한 사회가 출구가 없는 닫힌 공간일뿐더러 역사의 잔재로 남은 봉건가정도 그의 영구한 안식처는 아님을 시사해준다. 이 작품에서는 아내 스스로도 남편과의 긴 대화에서는 늘 보이지 않는 어떤 장벽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빈처」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실패하면서도 전혀 지적교신이 있을 수 없는 아내한테서나마 정신적 위안을 받으려는 허위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반하여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은 보다 사회공익 내지 사회구원의 사업에서 정신적 가치추구를 하였던 지성인답게 아내의 무지와 몰이해에 마침내 집을 탈출하고 마는 것이었다. 사회 지성인들의 속물적 타락과 구제불능의 사회몰락 앞에 술로 자학하던 주인공이었다면 그런 심리배설에 가까운 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또한 자학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근대의 여명을 맞았으면서도 식민과 봉건이라는 두 개의 질곡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을 가두고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물구덩이 같은 사회를 술로 망각하려 하고 다시 집을 탈출하는 것으로 무지와 외면하려 하는 주인공은 신구관념 교체기를 살면서도 결국 식민지 억압에 의한 정신적 가치의 상실로 방황하고 고민하던 당대 지식인의 전형적 형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결말은 「빈처」에서 보여준, 사회발전의 근대사상을 추구하는 ‘나’와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지는 봉건사상에 염색된 아내의 원상회복과 정신적 행복은 결국 아무런 미래제시나 대안도 없는 ‘나’의 정신적 가치 추구로 하여 역설적이고 희화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도 비록 주인공의 울분 토로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동료나 주변 지식인들의 속물적인 이기심을 질타하고는 있지만 현실사회 상황 내지 시대특성에 대한 객관적인 제시가 없고 주인공의 삶의 사회적 갈등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런 대로 문제의 제시는 좀 더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술 권하는 사회」가 「빈처」의 한계를 극복하고 좀 더 사회적 시각에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매개되는 사회적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삶의 구체적 양상을 사회적 부분으로 전형화하지 못하고 있다. “리얼리즘은, 그것이 현실을 지향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한, 새로운 총체성을 구상하는 노력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5) 이러한 한계를 느끼고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현실을 보여주고 그 사회현장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구체적 삶의 양상을 통해 구체성과 보편성의 유기적 통일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 바로 「운수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번째 단계: 사회현실을 매개하는 구체화-「운수좋은 날」 뒤에 발표되는 소설이 앞에 발표된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는 단계적인 발전과 변화의 모습은 작가 현진건이 리얼리즘의 진수를 밝혀내고 그것을 자기의 창작주장으로 확고하게 자리 매김 해 가는 성숙과정을 실천적으로 투명하게 보여준다. 「운수좋은 날」에서는 앞의 소설들이 보여준, 사회를 관찰하는 시각적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찐하게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작가 현진건은 앞의 소설들이 사회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있어서 작가적 시각의  한계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던 것 같다. 초기작품에서의 작가적 시각의 한계는 1919년의 3․1독립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그 역사적 의의만 깊은 채 비운의 장막에 가리어지고 민족계몽운동의 주자들이었던 지식인들이 방향을 상실하고 정신적 공황을 앓고 있던 모습 그 대로의 발로였다고 할 것이다. 이는 작가 현진건 자신이 그런 방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만큼 그의 창작은 지식인의 고민을 고립적으로 새김질하는 근시안을 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창작을 통한 문학적 성찰은 현진건으로 하여금 작가적 사상의 성숙과 리얼리즘정신에 대한 핵심적 파악으로 하여 창작시야와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지식인의 울타리 속에서도 주로 자기 자신의 신변체험과 고민과 아픔에 시선을 빼앗겼던 현진건은 마침내 머리를 들어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작가적 안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안목으로 작가는 당대사회의 본질적인 부조리는 단지 지식인들의 고민과 방향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에 앞서 인간의 생존자체가 근원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삶의 권리마저 박탈하는 당대사회, 그것은 빛을 차단한 닫힌 공간으로서 물론 지식인의 정신적 가치추구를 변질시키는 오물구덩이이기도 하였다. 작가는 바로 그 사회현장에서 원초적인 삶의 욕구에 몸부림치는 인간을 찾아내는 것이 당대현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리얼리즘정신이라고 확인하였을 것이다. 사회현실을 바라보는 이러한 작가적 시각의 변화 내지 확장은 자연히 사회적 삶의 현장을 작품 주인공의 활동무대로 설정하게 되고 그와 같이 넓어진 공간과 객관적 관찰을 위해 전지적 화자의 시각으로 주인공을 추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리얼리즘문학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진 상황을 예술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른바 자유로운 창조나, 현실을 완전히 등지는 것은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것이다.”6) 「빈처」나 「술 권하는 사회」의 플롯이 주로 사회에서 퇴장한 후에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공간이 이루어지는 집-가정을 무대로 하고 ‘나’와 아내의 대화로 구성되고 있다면 「운수좋은 날」은 주인공 김첨지의 인력거의 바퀴자국이 찍히고 있는 열린 사회현장-서울 동소문 안을 무대로 하여 최하층 인간들에게 삶의 최저 여건마저 주어지지 않은 절망적인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다. 앞의 두 작품이 주인공과 아내의 눈 사이 거리에 시각이 제한되고 그들의 대화로 모든 사회적 요소들이 간접화 추상화되었다면 「운수좋은 날」에서는 단편의 특성에 맞게 주인공의 현실적인 삶의 일상에서 가장 전형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그 사건을 예술적으로 꾸며줄 수 있는 부수적이면서도 극적인 세부들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눈이 올듯하던 날에 방정맞게 얼다가 만 비가 내린다는 서두는 날씨마저 여상하지 않음을 제시하여 이런 「운수좋은 날」의 불길함을 벌써 아이러니컬하게 색칠하고 있다. 이처럼 제목과 서두에서부터 대립 항을 설정하면서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작품은 행운과 불안을 동시에 감수하는 김첨지의 복잡한 심리적 변화, 표리가 틀린 반상의 행위, 속되고 거친 말투 등 치밀한 묘사를 통하여 기법에서부터 리얼리즘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주인공 김첨지의 형상이 당대 사회현실의 원색적 삶의 양상을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때 작품은 현실사회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리얼리즘정신에 충실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20년대 한국 하층민들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상황을 알아보면 투명하게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통해 식민지 지배당국이 춘궁민 혹은 세궁민으로 지목한 농촌빈민은 대체로 전체 농촌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연간 약 15만 명 정도가 농촌을 떠난 것으로 통계되었다.(중략) 192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화전민, 이 시기에 처음으로 생겨나는 도시지역의 토막민(土幕民)과 전국 각 지방 토목공사장의 날품팔이 노동자 등은 모두 이들 농촌빈민 출신의 자기소유가 없는 노동자적 존재들이었다.”7) “식민지시기 농촌빈민의 이농(離農)현상은 도시지역에서의 노동시장 형성에 의한 노동력 흡인의 결과가 아니라 농촌 내부에서 생산수단을 잃고 노동자적 처지에 빠진 농민들의 실업, 빈민화, 파산에 의한 이른바 밀어내기식의 이농이었다.”8) 말하자면 이 시기 농민들의 대량적인 도시진출은 결코 정상적인 근대자본주의 발전이나 도시 기계산업의 성장으로 인한 노동력 흡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농촌의 토지수용 내지 약탈, 지주세력의 강화에 의한 소작조건의 악화와 소작료의 고율화, 마름의 중간수탈 등을 통한 가혹한 착취에 생존의 기본조건마저 상실한 빈민층의 확산의 결과였다. 그것은 오히려 도시와 그 주변에 토막민이라는 새로운 빈민계층을 형성하면서 가뜩이나 도시산업화의 미숙성, 후진성 때문에 일자리를 얻기 힘들었던 도시민의 생활에도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날이 갈수록 도시지역도 빈민층의 수가 증대해가고 그 처지가 갈수록 어렵고 처참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원색적인 삶의 양상이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원인을 안고 있는 주인공 김첨지의 삶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면 주인공 김첨지는 과연 당대사회에 확산되어 가고 있던 빈민층의 전형적 형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작품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특정한 사회현실과 연계시키고 있는데서 리얼리즘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의 묵시적인 시각에서만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특정한 사회현실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당대가 하층민들이 살아가기에 어렵고 그리하여 과연 많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삶을 살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결론을 앞세운 작가적인 시각을 감각적으로나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만큼 작가는 아직 작품의 서사를 통하여 그 특정한 사회현실의 총체적 또는 본질적 근원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고 지어는 상술한 시대적 배경 내지 상황도 주인공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투명하게 확인할만한 구조적 짜임이나 기술적 장치로 설정되어 있지 않고 있다. 이는 작가 현진건이 문학창작에서 리얼리즘의 핵심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음에도 아직 그 진수를 완전히는 터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즉 작가 현진건은 소설주인공의 개인적인 삶을 당대사회현실과 연계시켜 묘사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이해에는 도달하고 있으나 그 당대사회현실을 현상적 내지 사실적으로 파악하였을 뿐 그것을 총체적인 관찰과 이성적인 성찰을 통해 본질적으로 밝혀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등 초기단계의 작품에서 사회현실에 대한 반영으로 리얼리즘의 요소를 내비치면서도 시각적인 한계를 드러냈다면 「운수좋은 날」 등 제2단계의 작품에서는 그런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현실에로의 확장을 보여주면서도 아직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이성적 성찰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진건의 창작단계를 그 뒤로 제3단계까지 밝힐 수 있음은 창작에서의 작가의 진지한 성찰과 리얼리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3단계에서 앞 단계의 시각적 한계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총체적 파악, 이성적 성찰, 객관적 제시를 하지 못하였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작가의 성숙된 역량과 리얼리즘의 완숙함을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 바로 단편소설 「고향」이다. 3) 세 번째 단계: 사회현실의 이성적 성찰-「고향」 「운수좋은 날」에서 작가는 당대사회현실을 주인공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당대사회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성찰하지 못하였다면 「고향」에서는 바로 그 당대 사회현실의 발생근원을 파내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형적 주인공이 상징하는 무리에 속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근원 내지 사회적 뿌리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었다. 농촌에서의 토지수탈과 소작조건의 악화 및 소작료의 고율화로 생겨나는 빈민층의 확산과 그들의 도시진출의 결과가 도시사회의 절망적인 삶의 현실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회현상의 기저에는 바로 일제 식민지 토지정책 나아가서는 전체적인 식민지통치정책의 음모가 바탕으로 깔려있는 것이었다. 우선 전체적인 식민지통치정책에서 보면 “조선에서의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 농촌중간층의 성장을 억제하고 농촌사회를 일본인 및 조선인 대지주와 그 소작인으로 양분하여 농촌에서의 민족부르조아적 계층의 성장을 저지함으로써 그 식민지 지배를 영구히 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9) 다음 식민지 농업정책에서 보면 “<토지조사사업>, 수리조합사업, 일본농민의 조선에의 식민 등이 일본인의 조선에서의 토지소유 및 지주화를 조장하는 정책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조선의 중소지주층․자작농층․자소작농층 등의 농촌중간층을 소작농으로 몰락시키는 정책이었던 것이다.”10) 농촌의 토지수탈 및 그로 인한 빈민화현상이 일제의 농업정책 나아가서는 식민지통치정책에 직결되는 필연적인 결과라면 그것은 다만 당대사회의 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바로 국가 내지 민족 전체의 운명에 씌워지는 멍에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는 이성적인 성찰을 통하여 마침내 당대사회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운수좋은 날」의 주인공 김첨지의 삶의 양상을 일제 식민통치의 사회현실에서 민족적 억압 내지 수탈이라는 본질적인 원인에 의한 보편적 운명으로 확인하지 못한 한계를  느낀 것만 같다. 즉 당대 사회현실에서 가능했던 하나의 구체적인 사실로만 읽혀지는 주인공의 형상적 한계가 바로 인물의 구체적인 운명을 당대 사회의 객관적 삶의 양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고향」에서는 떠돌이 주인공의 시대적 운명을 그가 속한 국가 내지 민족의 운명과 연결시키고 있다. 주인공의 떠돌이 삶은 그 계기부터 일제 농업수탈정책의 선봉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주인공의 떠돌이가 그 한 개인의 운명이나 선택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당한 핍박이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수탈은 그대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정책을 수행하는 일부였던 만큼 주인공의 고향에 대한 그들의 수탈은 곧 한반도에 대한 일제식민지수탈의 한 축도임에 다름 아닐 것이었다. 이처럼 사건의 계기에서부터 주인공의 떠돌이 운명은 당대사회의 객관적 삶의 조건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즉 그것은 일제의 토지수탈에 의해 고향에서 삶의 뿌리를 뽑히고 정처 없이 살길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던 당대사회 농촌 빈민층의 삶의 객관적 양상이었다. 대구 근교의 평화로운 농촌의 농민이었다는 표현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른바 토지수용의 약탈성을 대비적으로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구성으로 보아 주인공의 삶의 아픔이나 식민지통치정책에 의해 수탈당하는 민족의 비운을 현재형 사건 속에서 전개시키고 있지 않다. 작품은 ‘나’가 찻간에서 만난 떠돌이한테서 그가 떠돌이를 할 수밖에 없게 된 동기와 편력을 이야기 듣는 형식으로 엮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아무런 사건이나 갈등도 없이 단순하게 한 떠돌이의 이야기를 통해 당대사회현실의 부조리 내지 일제식민주의자의 침략적 야성을 폭로하는데 그쳤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작품의 주인공 ‘나’가 단지 떠돌이 주인공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역할만을 하고 있지 않음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이 작품의 ‘나’는 김동인의 작품 「배따라기」에서의 ‘나’처럼 다만 이야기를 이어주는 접속어의 역할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나’가 처음에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떠돌이를 우습게보고 외면하던 데로부터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이야기를 듣게 되고 대화를 하게 되고 나중에 그와 어우러지게 되는 감정적 기승전결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 변화에 대응되는 것이 떠돌이의 마술사와 같은 신분상징의 복장변화이다. ‘나’의 감정과 떠돌이의 ‘복장’이 민족이라는 동질적인 내함에서 융합되는 그 시점에서 마침내 ‘나’는 ‘조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복장변화는 얼핏 보아서 작가의 의미담론을 위한 인위적인 장치인 것 같다. 그러나 주인공이 더 이상 윤락할 수 없는 하층민-떠돌이라는 신분으로 하여 그것은 당대의 삶의 조건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상대에 따라 신분 변화를 나타내는 복장요술은 시대를 변혁할 아무런 힘도 없는 하층민의 변질된 반항의식의 표출형식일 수 있다. 소설이 따라지 인생을 취급하고 특히 리얼리즘이 구체적인 인물을 통하여 보편적인 사회본질을 밝혀낼 때 권위적인 상층인과 따라지 인생의 하층민 사이의 모순은 흔히 풍자와 희화화로써 전개된다. “리얼리즘 예술은 원리적으로 ‘해학의 반문화(反文化)’에 속하게 되며, 모든 권위 위주의 이상을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대비시킴으로써 비판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이 엄밀한 방법인 경우에 풍자적인 웃음과 해학은 반어(反語)가 되며, 거짓된 이상을 파괴하는 계몽적인 노력을 향한 반어의 진지함과 지속력은 역시 반어로부터 나오는 웃음이 뒷받침하게 된다.”11) 「빈처」나 「술 권하는 사회」의 주인공인 지식인과 「운수좋은 날」의 주인공인 하층민이 하나의 작품에서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가설적인 판단은 배제하고라도 아무튼 첫 단계의 소설에서 당대사회현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정신적 방황과 고민에 몸부림치던 지식인이 일제식민지 토지수탈정책으로 하여 고향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된 조선농민의 모습에서 당대 조선사회의 본질적 모순과 그에 의해 주어지는 조선인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조선의 얼굴’을 발견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향」은 단지 떠돌이의 이야기를 통해 당대 식민지 사회현실의 암흑상을 폭로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런 객관적 현실을 마침내 식민지 지식인의 눈을 통해 총체적으로 확인하고 각성한다는데 정서적 흐름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3단계의 「고향」에 이르러 작가 현진건은 사회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작가적 성숙과 리얼리즘의 완숙함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3. 나오는 말 근대화자체가 외세에 의해 강행되었던 근대한국에 있어서 문학사조 역시 사회정신사의 발전에 앞서 근대적인 문예기법으로 수입되어졌다. 그만큼 사조의 범람과 혼란이 불가피하였고 점차 사회현실을 대상으로 한 문학창작의 임상실험을 통하여 리얼리즘이 주조를 이루면서 정리되어갔었다. 근대화를 실현한 서양의 근대사회와는 달리 근대한국은 일제식민통치하에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은 만큼 정신사적 속성을 띠고 있는 문학사조도 민족의 운명과 긴밀히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성찰하는 리얼리즘이 자연히 주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사조의 범람과 혼란 속에서 리얼리즘이 주조를 이루어 미성숙에서 성숙에로 발전하는 과정은 바로 객관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성찰하는 작가적 사상의 성숙과정이었으며 현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한다는 리얼리즘의 참 정신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리얼리즘의 발전을 작가적 성숙과 함께 단계적으로 보여준 가장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빙허 현진건이다. 현진건은 초기단계의 작품에서 인간의 구체적 삶을 사회현실과 결합시키는 리얼리즘의 요소를 내비치면서도 시각적인 한계를 드러냈고 제2단계의 작품에서는 그런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현실에로의 확장을 보여주면서도 아직 객관적 현실에 대한 총체적 파악과 이성적 성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3단계에 와서 그는 앞 단계의 그러한 작가적 미숙성을 극복하고 리얼리즘정신의 핵심에 접근함으로써 마침내 사회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작가적 성숙과 리얼리즘의 완숙함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강만길,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창작사 1987. 김열규/신동욱 편,『현진건연구』, 새문사, 1989. 김중하, 「현진건 문학에의 비판적 접근」, 김열규/신동욱 편, 󰡔현진건연구󰡕, 새문사, 1989. 서종택/정덕준, 『한국현대소설연구』, 새문사, 1990. 스테판 코올, 󰡔리얼리즘의 歷史와 理論󰡕, 여균동 편역, 한밭출판사.
60    텍스트 읽기와 해석의 정치 댓글:  조회:2976  추천:0  2009-05-16
   -이태준의 「농군」에 대한 김철의 비판을 중심으로         목        차  1. 문제 제기  2. 식민인과 식민지인-민족 단위의 위계질서  3. 김철과 고모리 요이치-‘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  4. 맺는 말 1. 문제 제기 한국 근대문학사는 문학 주체의 정신적인 자각에 앞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이라는 외세의 강압에 의해 굴절되고, 또 분단의 이념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에 의해 토막 났다. 그만큼 한국 근대문학은 외형적으로는 볼품없는 오작 내지 서구근대문학에 대한 서툰 모방작들의 더미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에 대해 식민사관의 멍에에서 벗어나 탈식민주의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이 본격화됨으로써, 앙상하고 가냘픈 나무보다는 식민지 바위틈에 뿌리내린 왕성한 생명력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또한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문학의 정체성 찾기와, 세계화를 대비한 범민족적인 문학사 정립작업에 의해 지하로 스며들어 흐르던 물줄기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적 흐름이 서서히 윤곽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연구대상의 한 중심에 작가 이태준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는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작가이고, 역시 이기영, 한설야, 박태원 등과 함께 월북한 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고 문학사 내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태준과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문학과 분단문학을 연구하는 방법론 및 인식론과 바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로 이태준과 그의 작품에 대한 기성연구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방대하다. 어쩌면 근·현대문학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한번쯤 이태준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을 줄 정도여서,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을 모두 찾아 읽기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 100편도 넘어 되는 학위논문들과 몇 백편에 달하는 논저들 중에서 선택적으로 읽더라도 벌써 이태준과 그의 작품에 대해 다층적이고 전 방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강진호는 이제 이태준의 문학적 특성은 거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한다.2) 그러나 이태준의 단편소설 「농군」을 둘러싸고 진행된 그간의 논쟁들을 보면 결코 이태준의 문학적 특성이 이의 없이 낱낱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물론 문학연구도 다른 학술연구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합일되는 결론이란 있을 수 없고, 어쩌면 영원히 의문부호를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농군」을 중심으로 한 연구들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속에서 드러낸 문제들은 가급적이면 보다 진지하고 학술적인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태준의 「농군」은 발표 당시부터 매우 이례적인 성향의 작품으로 주목받아왔다3)는 점에서, 이태준 문학세계의 특성을 전체적으로 밝히는 하나의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고, 또 그것이 식민지문학의 성격 규명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문학에 대한 문학사적인 정리 작업과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군」에 대한 기성연구 중, 긍정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는 연구자는 이정숙과 장영우를 들 수 있고,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는 연구자는 민충환과 김철을 들 수 있다. 민충환은 제국주의 압력이 가중하던 1930년대 후반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이고도 투쟁적인 내용의 「농군」이 어떻게 검열을 통과하여 발표될 수 있었느냐를 문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제재인 萬寶山事件의 진상과 作品內容을 對比시켜 본 결과 「農軍」은 尙虛의 作意와는 무관하게 日帝의 정치적 야욕에 부합 또는 협조한 親日的 결과를 낳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투철한 歷史意識이 결여된 어설픈 행위는 꼭두각시 놀음에 이용되는 불행을 自招할 수 있다는 한 敎訓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4) 그는 작품의 제재와 내용의 상이함을 지적하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사회성이 매우 강렬한 「농군」이 당시에 발표될 수 있었던 음험한 정체의 윤곽이 대충 드러났다고 본다.”5)고 확신하면서도 그러한 내용이 일제에 이용당한 것은 작가의 작의와는 무관하다고 믿는다. 작가의 작의와는 무관하다면서 일제의 정치적 야욕에 협조하였다는 주장은 도둑맞은 사람더러 도둑놈을 협조하였다는 말과 다른바 없다. 그러나 기실 그는 논문 중에, 역사적 진실과 예술적 진실의 상이성을 인정하면서도 “「농군」의 경우는 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흉계가 깊이 개재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6)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작품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지적하고, 작가의 작의는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제재와 내용의 상이성에서 친일적인 것을 밝혀내는 그의 논리는 그야말로 혼란스럽고 자가당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정숙은 이태준의 「농군」과 안수길의  「벼」를 대비하면서, 이들 작품이 ‘실향의식’과 ‘고향회기욕망’ 사이에서 응집, 승화되고 내포화된 민족의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7) 그는 논문에서 직접 민충환의 글을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이 바로 민충환의 글보다 한 해 뒤에, 그리고 같은 학술지에 발표되었다는 점에 의해서도 벌써 다분히 논쟁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충환에 비해 김철의 연구초점은 보다 작가와 텍스트 내지 콘텍스트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작가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내적 논쟁에 속하는 것이며, 식민지문학의 성격규명을 위한 본질적인 확인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문학본체론적인 연구에서 「농군」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는 대표적인 연구자는 김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골동(骨董)의 완상(玩賞) 따위에나 탐닉하는 경박한 모더니스트로부터 민족의 현실을 꿰뚫는 리얼리스트 작가로 변신한 이태준. 그리고 그 변신의 생생한 물증인 「농군」. 한국근대문학사의 통상적이고도 통속적인 이해는 오래 동안 이 구도를 유지해 왔다.8) 간단히 말해, 이태준의 「농군」은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제부터 밝히려고 하는 바, 「농군」은 작가의 ‘심각한 내적 변모’와 ‘모색’의 결과가 아니라, ‘만주경영’이라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다시 말해 당대의 ‘국책(國策)’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소설이며, 그러한 사정을 떠나 소설 자체로 보아도 지극히 무성의 하고 불성실한 작품이다.9) 「농군」은 당대에 한창 유행하는 관습적 이념을 생각 없이 좇은 태작일 뿐, 식민지적 삶의 모순과 이중성을 드러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 작품에 부여되어 온 과도한 평가들과 오독(誤讀)은, 다시 한번 식민지적 무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만주국은 아직, 있다.10) 이것은 김철의 논문 「몰락하는 신생(新生): ‘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誤讀)」의 시작과 마무리에서 「농군」에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논자의 비판적 사로(思路)는 “만보산 사건은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 집단적 가학-피학심리(sado-masochism)의 폭발적 노출의 한 사례이며 「농군」 역시 그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하나의 논점으로 하고, 다른 하나의 논점은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실체야말로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장소였다. 「농군」은 물론 그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이다.11) 장영우는 민충환의 글이 “후속 연구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던” 것이, 김철에 의해 “새삼 논란이 불거졌다”면서 논쟁의 초점을 직접 김철에게 집중하고 있다.12) 그는 만보산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추적하고,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을 재확인함으로써 “「농군」과 만보산사건의 관련 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추론이 만보산사건의 경위나 작품의 세절에 대한 시비로 초점이 흩어지다 보니,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확인이 행위주체의 성격규명과 직결되고, 따라서 모든 역사적 사건 내지 의식의 발생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강조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기성연구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본고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성격을 재확인함과 아울러 이를 논거로 식민담론에 대한 김철의 연구자세 내지 심리지형을 곧바로 진맥해보려 한다. 2. 식민인과 식민지인-민족 단위의 위계질서 김철의 첫 번째 논점은 소재와 작품, 즉 만보산사건과 「농군」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예술성은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인식에 의해 나타난다고 확인하면, 그의 논점은 결국 사건적인 요소와 사물적인 요소(인물과 배경)의 변증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관계의 해명을 통하여 만주 조선인이주민의 신분확인을 하는데 모든 근거와 논리를 동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그가 이러한 변증관계를 만주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과 동격의 주체로 확인하기 위해 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아예 전제적으로, 먼저 만주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으로 ‘격상’시키고 만보산사건은 그것을 논증하기 위한 논거쯤의 사례로 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만보산사건을 논거의 사례로 들면서도 그것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고, 그가 주목한 것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만보산사건이란, 1931년 7월에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장춘 근교의 만보산 부근에서 조선인이주민들이 논을 풀기 위해 판 수로를 두고 밭농사를 하는 중국인들과 생긴 충돌사건이다. 󰡔조선일보󰡕의 오보와 함께 국내에서 화교에 대한 박해 사건으로 번져갔고, 일본은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김철은 만보산사건과 국내의 화교 박해 사태에 대한 박영석의 연구저서 󰡔만보산사건 연구󰡕(아세아문화사, 1978)에서 많은 것을 인용하면서도, 일제의 음모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는 “이 사태를 둘러싼 몇 가지 의문들, 예컨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일제 당국의 교묘한 음모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13)고 하면서도, 각주를 달아 의문을 제기하고, 이 사건이 만주사변의 한 계기로 되었음을 많은 연구서가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 사건이 없었어도 만주사변은 벌어졌을 것임은 물론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또 “만보산사건은 당시의 만주 일원에서 흔하게 벌어지던 사소한 분쟁이었고, 그것이 국내에 허위과장 보도됨으로써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를 빚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고 ‘의논’한다.14) 물론 일제의 음모론이나 만주사변의 계기론 같은 것은 좀 더 실증적인 연구를 요청하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김철이 그러한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모습도 없이 회의를 하면서 급급히 만보산사건을 흔하게 벌어지는 사소한 분쟁으로 인정하고, 화교 박해사태를 오보에 의한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급급한 결론이 곧 바로 “만보산 사건은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 집단적 가학-피학심리(sado-masochism)의 폭발적 노출의 한 사례이며 「농군」 역시 그 맥락 속에 있다.”는 논점과 맞닿아 있다는데 저의가 보이는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외세의 음모나 시대적인 돌발사건으로부터 만보산사건이나 화교박해사태를 차단시킴으로써 행위주체의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 집단적 가학-피학심리”를 문책하려는데 있었던 것 같다. ‘흔하게 벌어지던 사소한 분쟁’이니 외세의 책동에 의한 충돌이 아니라, 행위주체 민족의 습관적인 도전성의 노출 때문일 것이다. 또 화교박해사태를 허위보도로 촉발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고서도 “제국주의 피지배 집단의 정신분열적 가학성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례였다.”15)고 질타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만보산사건 혹은 넓게는 만주 이민을 오로지 자민족중심주의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사실 자체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라는 점을 떠나서도, 제국주의의 질서와 논리를 강화하고 재산생하는 긴요한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도 크게 조심할 일이다.16) 그러면 그는 어떻게 “자민족중심주의의 관점”에서 해탈하여 이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가. 애초에 그의 논점은 “식민지 민족주의가 보이는 기묘한 이중성”을 까밝히려는데 초점을 맞추는 듯 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타자이면서도 또 다른 ‘야만’의 타자를 발견하려는 것이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일 것이었다. 만주에서의 조선인의 위치란 무엇인가? 항일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피지배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제국의 힘을 뒤에 업고 타자의 삶을 위협해 들어가는 존재가 만주에서의 보통 조선인이 처한 현실이다. 이 기묘한 현실로부터 복잡한 의식의 분열, 메꾸기 힘든 틈새가 생겨난다. 그 분열이나 틈새가 어덯게 나타나고 무엇을 만들어내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17) 그러나 ‘자민족중심주의’가 “제국주의의 질서와 논리를 강화하고 재산생하는 긴요한 바탕이 된다는 점”에 “크게 조심”한 그는,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에서도 가학심리를 깊이 연구하던 나머지 점차 ‘제국주의자의 시선’과 등식을 만들어갔다. 만주 이주 조선인을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고 확인할 때,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그러한 신분과 의식의 이중성 때문에 언제나 중국관헌과 일본경찰(또는 일본관동군), 만주국과 일본영사관(또는 일본관동군)이라는 대립되는 정치세력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 그런데 김철은 “일본제국주의자”의 시선에는 “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인이 가질 법한 복잡성과 분열적 상황이 개입되지 않는다.”18)고 확인하면서도, 식민지인으로서의 조선인의 의식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그냥 식민주의 일본인의 시각으로 증언하고 있다. 말하자면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에서 식민지배에의 공모와 가학대상의 발견이라는 식민지인의 무의식을 아예 식민인의 식민주의 의식과 등호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농군」에서 만보산의 기억은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재현된다.”19)고 확인한다. 그는 고모리 요이치가 일본 메이지 국가의 홋카이도 개척사와 관련해 식민주의자들이 “아이누 사람들을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외국인’이 아니라며 감싸 안았고, 또한 ‘샤모(和人, 일본인)’와 차별화하기 위해 ‘구토인(舊土人)’이라는 배제의 칭호를 부여했다.”20)고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주의 농민들을 ‘토민’으로 호칭하는 「농군」의 시선이,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문명의 전도사로 위치지운 일본 근대국가의 식민주의를 그대로 복습하고 있는 것임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1)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 시점에 오면 조선인의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은 사라지고, ‘일본국적 조선인’이나 ‘제국주의자의 시선’만 남는다. “만주에서의 조선 농민 부락과 그들의 경작은 단순히 농업생산 활동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이주민을 포함하여 일본인 농업 이민의 활동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하였다”22)는 확인은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 농업이민과 아무런 구별도 짓지 않는다. 그의 논리를 따르면, 오히려 일본인 농업이민 속에 조선인 이주민이 당연히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철이 만보산사건이나 화교박해사태에 대해 일제의 음모론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 점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한 조선인 이주민이라면 구태여 일제의 음모론을 확인한대서 사건의 성질이 달라질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일제가 사전에 모의했든, 사후에 정략적으로 이용했든 그들의 ‘첨병’인 조선인 이주민의 가학자의 성격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조선인 이주민의 이중신분을 확인할 때 문제는 그 반대일 수 있다. 그가 “조선 농민들의 수로(水路) 공사는 어느 모로 보나, 중국 농민들의 재산권과 생존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이며 폭력”이었으면서도 “조선 농민들이 이러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본 공권력의 보호 아래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23)이라고 한 것도,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인과 동일시하면서 일본인과 중국인은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라는 이항대립의 구도 속에서 ‘일본국적 조선인’으로 해석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만약 그가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적 이중성을 인정하고, 식민지 시대 위계질서가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결코 식민인과 식민지인 사이에 분별없이 등호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인은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성을 거세당하면서 강력하고 폭압적인 식민지배에 의하여 절망적인 피학심리가 형성되며, 그와 함께 절망에서 벗어나고 자기를 구원하려는 몸부림 속에 식민지배에의 공모와 가학대상의 발견에  식민지 무의식이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의 분열 내지 이중성은 복잡한 것으로서 단순한 이분법으로 해석한다면 자칫 극단적인 결론만 내리고 만다. 「농군」에서 조선인 이주민들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이해계산만 앞세우고 ‘토민’들의 사정을 무시했대도, 그것은 결코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문명의 전도사로 위치지운 일본 근대국가의 식민주의를 그대로 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기 삼십 호 조선농민은 가지고 온 물자는 이 황무지와 봇통에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에 이 황무지에 물을 대고, 모를 꽂지 못하는 날은 죽는 날일 수밖에 없다”24) 는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남부여대로 쪽박 차고 만주를 찾아오는 조선이주민의 초라한 모습은 결코 일본인이민의 목적의식과는 먼 심리적 거리를 두고 있다. 그들이 일본인 농업이민과 구별되는 것은, 우선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긴 식민지인으로서 살길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중국 당국이 중국으로의 “귀화”를 촉구하는 국적문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인 이주민은 일본인과 동일시되고 있지 않았으며 중국 당국이 일제의 대륙침략을 견제하기 위한 쟁취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그런 만큼 강박적으로라도 중국에 귀화시키려는 중국 당국의 정책에 의해 조선인 이주민은 여러 가지로 심한 박해를 받았고, 국적문제와 직결되어 조선인 이주민을 위협하는 것이 거주권과 토지개간권이었다. 국적 문제·거주권 문제·토지상조권 내지 개간권 문제는, 일제의 대륙침략을 견제하려는 중국 당국의 배일사상과 대륙침략의 일환으로 만주를 점령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확장정책의 대항적 사항으로서, 만주국 건국 전까지의 사회문제였다. 따라서 제목 아래에 삽입한, “이 소설의 배경 만주는 그전 장작림의 정권 시대임을 말해 둔다.”는 작가의 말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있었던 토지분쟁 사건임을 밝힌다는 의미로 읽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의 만주이주 역사가 일제 침략과 식민지 확장정치에 의해 그 성질이 변질해간 사실을 확인할 때, 이것은 결코 구시대의 학정(虐政)에 대비해 오늘의 평화를 노래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인 만주 이주역사는 쇄국시대·묵허시대·환영시대를 거쳐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인의 신분이 변질되면서 탄압시대로 들어선 것이었다.25) 즉 이 탄압시대는 일제의 대륙침략정책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전의 이주역사를 감안할 때, 이와 같은 탄압시대를 굳이 밝히는 작가의 저의는, 조선인 이주민이 식민지인으로 전락하고 일제가 대륙침략을 노골화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살리려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김철은 작가의 이 말을 들어, 소설 「농군」을 기행문 「이민부락견문기」의 밝음을 더해주는 ‘어둠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농군」을 통해 과거의 어둠을 심하게 과장함으로써 ‘현재’의 평화와 성취를 크게 하려는 것으로서, 첫머리에 작자가 굳이 그런 시대배경을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26) 그는 작가가 「농군」에서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만보산사건을 기억하게 되는 생활적, 인식적 바탕을 그의 선행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이민부락견문기」에서 곧 잘 잡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행문은 「농군」의 밑그림 같은 것이면서 「농군」의 창작 과정과 작가 의식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자료”27)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가 여기에서부터 벌써, 앞뒤를 자른 나무토막처럼 문맥이 단절된 절록과 비틀린 해석과 과잉반응적인 감정 개입으로 텍스트를 색칠하고 가미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선 “첫 번째 단락을 이끄는 것은, 차창으로 내다보는 대륙의 ‘거대한 공간’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흥분”28)이라고 하면서, “당시 만주행 열차의 이름이 ’‘노조미(のぞみ=희망)’였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상기하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29)이라고, 기행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은 열차의 이름을 어떤 증거물처럼 들춰내었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튼 거대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앉아 차창 너머로 ‘토민들’의 농가를 바라보는 이태준의 시선은 문명인의 그것”이라고 결론에 급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기행문에서 다만 “봉천奉天행”이라고 쓰고 있을 뿐 열차의 이름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열차의 이름이 주는 어떤 낭만이나 희망의 이미지가 작가한테 전달하는 감정의 색조를 읽어낼 만한 대목을 우리는 찾지 못한다. 그런데 텍스트나 작가의 서술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노조미(희망)”란 이름의 열차를 탄 것 자체가 작가의 어떤 의식을 말해준다는 식의 판단은 지나친 강박이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철은 이어 “인신매매단의 행렬과 당대 최고의 서양식 호화 호텔, 거대한 박물관과 빈민구호기관, ‘잠깐 모인 손님 속에 노인(露人), 만인(滿人), 독인(獨人), 희랍인’들이 섞이는 국제 도시 신경 밤거리의 이국적 풍경이 스치듯이 묘사되는 이 기행문을 일관하는 것은 이 여정을 ‘독한 낭만’으로 감각하는 이태준의 에그조티즘이다. 이 시선으로 1938년 당대의 현실을 투시하는 안목을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무리일 것이다.”30)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도리어, 이주민들의 누추하고 피로한 몰골, 국적 없는 가엾은 백계처녀들, 조선의 풀, 고향의 진달래를 그리는 이주민의 향수, “고토를 그리는 유일한 앨범”인 바가지, “언제 어떤 정리를 당할지 추측할 수 없는” 불안, “내 고향 금수강산”에 돌아가면서 “황막한 벌판에 남는 저들을 한 번 더 돌아볼 염치가 없어”하는 작가, “멧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그 유구함이 바다보다도 오히려 호젓한” 장면들을 만나 가슴이 처연하기만 했다. 김철은 또 “장자워프 마을에 도착하여 농민과 대화를 나누는 단락의 소제목은 「배는 부른 마을」이다. ‘인전 뱃속은 아무걸루든지 채웁니다만...’이라는 농민의 말에서 따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기행문은 만주 개척의 성공 사례를 보고하는 것이고, 「농군」 역시 그 연장에 있는 것이다.”31)라고 진맥하고 있다. “배가 부른 마을”도 아니고 다행으로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배는 부른 마을」, 또 그걸 한 번 더 강조하는 듯한 “인전 뱃속은 아무걸루든지 채웁니다만...”하는 시원치 않은 농민의 말이 “만주 개척의 성공사례를 보고”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배는 부른 마을」이라 해놓고 마지막 소제목을 「산불고수불려(山不高水不麗)」라고 한 이 소절은, 오히려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희망이 스러져 가고 학교가 만주국에 인수되고 “언제 어떤 정리를 당할지 추측할 수 없는”불안에 떨고, “황막한 벌판”에 “멧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그 유구함이 바다보다도 호젓한” 정적뿐인 이주민의 처연한 삶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작가는 분명 “채표彩票의 꿈”을 두고 “그거나 빠지면 우리도 다시 한번 고향 산천에 가 살아 볼까요! 그렇지 못하면 밤낮 이 꼴이다가 호인들 밭머리에 묻히고 말죠!”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또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32) 라고 ‘희망’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한, 공허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은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낸다. “만주국에서 발행하는 ‘채표’(복권의 일종-인용자)에 당첨되는 것이 농민들의 유일한 생활의 낙이요 꿈이다. 그런대로 평화롭고 넉넉한 일상이다. 그것을 돌아보는 이태준의 시선 역시 그의 이 여정이 줄곧 그러했듯이, 평화롭고 한가하다. 국경지대나 마찬가지인 지역의 특성상 ‘언제 어떤 정리를 당할지 추측할 수 없는’ 불안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전체의 정조를 흔들 정도는 되지 않는다. 기행문의 결말은 이민부락을 감싸고 있는 이 평화와 여유의 분위기를 대단히 상징적으로 전달한다.”33) 그는 또 아이들이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를 하는 장면을 두고,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가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혼용되는 이 장면이 ‘오족협화’ 슬로건의 구현을 드러내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언어의 순서가 만주국에서의 각 민족의 현실적 서열을 따르고 있음은 작가의 의도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공들인 문학적 수사는 「이민부락견문기」의 최종적인 목적이 평화롭고 질서 잡힌 ‘현재’의 만주를 보여주는 데 있음을 드러낸다.”34)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평화롭고 질서 잡힌 ‘현재’의 만주”를 어떻게 보아냈는지 참으로 신비스럽기만 하다. “언어의 순서가 만주국에서의 각 민족의 현실적 서열을 따르고 있음”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오족협화’ 슬로건의 구현을 드러내고 있음을 짐작”한 그의 세밀한 연구에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당시 사회 현실적으로 아이들한테 불려지던 습관을 그대로 표현한 작가의 사실주의태도를 달리 왜곡한 혐의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작가는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가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혼용되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결국 “나중에 알고 보니 ‘처우웬바’는 담배를 피우자는 만주말이었다.”는 강조문구로 매듭짓고 있다. 유독 “처우웬바”라는 “만주말(실은 중국말-인용자)”을 풀이하면서 강조하는 데는, “애초엔 이민부락들이 연합해 가지고 설립 유지한” 학교가 “인전 만주국서 인수해 가지고 그들의 방침 하에서 경영되는 것이니까 불원不遠하여 교과서나 교원에 변동이 생길 것”이라는, 앞에서 쳐놓은 복선에 조응하는 것이라고 보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작가의 어떤 문학텍스트에 대한 분석에서, 선행 텍스트를 통한 상호 텍스트성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바람직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은 작가의 창작이념 내지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데 중요하며, 분석 텍스트의 밑그림 내지 내면화된 의미담론을 밝히는데 유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선행 텍스트에 대한 판독에서부터 오독의 혐의가 보인다면, 분석 텍스트에 대한 진맥은 잘못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김철과 고모리 요이치-‘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 이제부터 시작할 김철의 작업은, “만주라는 공간, ‘만주국’이라는 실체야말로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장소였다. 「농군」은 물론 그 맥락 속에 있다.”는 다른 하나의 논점을 논증하는 일이였다. 앞의 논술을 매듭지으면서 그는, “이제 이 논문의 두 번째 과제, 즉 3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 ‘만주’와 ‘만주 이민’이 지니는 의미, 그리고 그것과 식민지 문학과의 관계를 논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35)고 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만주 이민’을 ‘일본국적 조선인’으로 확인하고, 작가의 시선을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낙인찍은 바대로, 그의 논증은 결코 식민지 조선인의 ‘식민지적 민족주의의 이중성’을 변별하는 작업이 아니라, ‘일본국적 조선인’의 ‘식민주의적 의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이때에 ‘식민지적 무의식’을 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식민지인의 의식의 이중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는 「문명」을 의식한 「반개」가 「야만」을 발견하려는 심리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36) 왜냐하면 그의 사로(思路)를 따라가 보면, 그가 극구 조선인의 일본국적을 찜하는 저의는, 한사코 작가 내지 작중인물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시선’을 포착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식민지인이었던 조선인의 대 만주국 시각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만주를 포함하는 대제국의 비전”을 꿈꾸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찾고 있는 것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인용한 거의 모든 자료는 일본인들이 남긴 것들이고, 그런 글들이 식민지 조선인의 의식을 증언하는 그의 입장을 대변하여 직접적으로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넓군요, 만주는. 나비모양 같아요. 그렇죠? 아버지” (중략) “아, 그렇구나. 나비가 일본을 향해 날고 있는 모습이네.” (중략) “하하하. 과연. 멋진 큰 나비가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을 향해 훨훨 날아오고 있구나. 좋구나.”37) 이처럼, 그는 이번 작업의 서두를 나가요 요시로의 글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나가요 요시로(長與善郞)의 󰡔만주견학(滿洲の見學󰡕은 만주를 향해 펼쳐졌던 그 숱한 상상과 모험의 이야기들의 한 작은 사례”라고 한다.38) “이렇듯 만주를 ‘풍요의 뿔’(cornucopia)로 기호화 하는 것은 만주 사변 이후 일본 언론 매체의 관습적 레토릭이 되었다.39)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이러한 논거들이 단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상상과 모험”을 논증하려는데 동원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주는 거대한 합작 프로젝트였고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대산업이었다.”40) “식민지 조선 사회가 이 신생에의 열정 및 총동원 시스템의 자장 바깥에 있을 수는 없었다.”41) 결국 그가 논증하려는 것은, “조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42)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논증은, 조선인 이주민은 “일본국적의 조선인”,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 “제국의 힘을 뒤에 업고 타자의 삶을 위협해 들어가는 존재”라는 관점 위에 세워져 있다. 이는 작가나 「농군」의 시선을 확인하기 전에 벌써, ‘조선인 이주민’이라는 역사적 개념을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문명의 전도사로 위치지운 일본”과 동격의 위계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일본이 경험한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은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독립국가로서의 일본이 세계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에서 느끼는 ‘식민지적 무의식’이며, 「문명」한 열강과 「미개」한 아이누를 매개하는 「반개」로서 수없이 「미개」를 발견함으로써 「문명」에 다가서려고 하는 「식민주의적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홋카이도가 일본국에 귀속되자 다시 새로운 「미개」를 찾는 작업이 대만을 식민지화 하고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고 만주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일본이 자각적인 ‘자기 식민지화’43) 과정을 거쳐 제국주의에로 발돋움하는 ‘산고(産苦)’였다. 그러나 조선인은 이미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이었고, 조선인 이주민은 고향마저 잃고 부평초 같이 뿌리 뽑힌 신세였다. 쪽박 차고 남부여대로 살길을 찾아 떠났던 그들을 “홋카이도를 식민지화”하던 개척사의 일본인과 등치시킨다는 것은, 식민지인의 너무도 많은 사연들을 역사의 뒤안길에 매장시켜버리는 것이다. 또 가령 그들의 구성원들 중에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갈등을 겪은 이들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식민지인의 민족주의 이중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인 분열현상일 뿐이지, 결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이 “홋카이도를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국가 내지 민족적인 차원의 이념일 수는 없었다. “일본국적 조선인”이라는 시각에서는 일제가 일본인 이민정책의 부진으로 조선인 이민을 제국주의 지배의 방어벽으로 “대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그런 강제이주에 몰린 조선인 이주민들의 생존욕구 내지 민족주의 저항과 항일세력에의 공조관계는 그냥 외면되거나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비적이나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핑계로, 무고한 조선인 이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사르고 집단마을을 축성하여 고통과 굶주림에 허덕이게 한 역사 사실들은 결코 간과해도 좋을 사소한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철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조선인 이민은 일본 국적의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지적된 농업 이민의 일반적 성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44)고 결론내림으로써, 조선인이자 일본인이라는 황당한 ‘일선동일’론에 이르고 말았다. 엄격히 말해서, 일제의 식민주의 이민정책 구도 안에 조선이민이 들어있었다는 정치적 사항과, 그런 상황에 처한 조선인 이민의 식민지적 민족주의 이중성이라는 역사적 사항은 이질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변별하여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김철은 왜 식민지로 전락되었던 우리의 역사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이는 주체적으로 ‘탈식민주의’ 현실을 살고 있는 연구자로서의 그의 연구입장 내지 자세에 따르는 식민지적 기억상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이니, “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인이 가질 법한 복잡성과 분열적 상황”이니 하는 문제 제기에서는 그의 냉철한 역사철학적인 사고가 안받침 되어 있는 듯도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모리 요이치가 말하는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혼탁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었다가, 결국 ‘식민주의적 의식’의 탁류에 떠밀려가면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반성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기억을 통한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의 기묘한 재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피해보상이라면 과거의 아픔과 박해를 많이 밝히는 것이 좋겠지만, 민족적인 역사의 정통성을 찾는 데는 ‘야만’의 타자를 발견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연구자한테는 학자적 위상의 견지에서 그게 더 큰 바램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은 일본이 제국주의를 향해 발돋움하면서 경험했던 국가이념적인 모순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 김철은 다만 객관적인 비판의 입장을 취할 수 있을 뿐, 결코 주체적인 반성의 위치에는 설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래도, “일찍이 식민지 지배자였던 ‘대일본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본국’에 귀속한 사람으로서”45) 말하고 있는 고모리 요이치와 같은 입장일 수 없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개척사’를 전제로 하는 ‘식민주의적 의식’에 관해서라면, 고모리 요이치는 내부관찰자이고 김철은 외부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주체적인 반성과 객관적인 비판의 입장차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반성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일 뿐이다. 따라서 식민지인의 후손이라는 그의 신분에 의해, 제국주의적인 식민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은 식민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고모리 요이치의 󰡔포스트콜로니얼󰡕을 조선인의 만주 이주역사에 여과 없이 대입시킬 때, 김철은 이미 범주 혼동과 함께 신분도착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김철은 이태준이 「농군」에서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만보산사건을 보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에 앞서 그의 만보산사건의 실질에 대한 분석과 조선인 이주민의 성격에 대한 규명은, 벌써 작품과 관계없이 고모리 요이치의 논리를 따라 ‘가해자’로서 ‘야만’의 ‘타자’를 발견하려 했던 ‘일본국적 조선인’의 ‘식민주의적 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이러한 도치된 비판은, 그 자신이 ‘식민지적 무의식’에서 해탈하려는 기억의 정치학-식민지적 기억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 말 문학텍스트, 특히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문학텍스트에 대한 의미담론에서 시대 역사적, 또는 사회 환경적 배경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러한 배경들이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가치를 확인하는 문학작품에서 인물의 사회적 속성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구체적인 존재자로 인식할 때, 같은 사회적인 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통념적인 시대정신이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획일적인 구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인 것처럼 인간의 심리지형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관계는 철학의 기본원리를 구성하면서 역시 문학의 미학원칙을 결정하는 것이다. 역사란 유적이 된 공간, 과거가 된 시간에 대한 사실적인 추적만이 아니다. 역사는 지난 날 인류가 경험했던 일들을 반추 내지 음미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행위주체의 기억과 해석의 정치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현재성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효용적 가치를 찾는 행위주체(연구주체)는, 결코 오늘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텍스트에 대한 분석담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어를 질료로 하는 문학텍스트는 출판됨과 함께 기표에 의해 닫혀있게 되는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실제작가, 내포작가, 화자 등에 의해 의미담론이 다차원적으로 열려있다. 문학텍스트의 이러한 다차원적인 의미담론은 연구주체가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따라 구체적인 심상지리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학텍스트의 분석담론에서는 연구주체의 사회문화적인 심리지형과 생산적인 연구자세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논리를 전제로 하여 이태준의 「농군」에 대한 김철의 연구자세 내지 심리지형을 살펴보았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선의의 상찬이나 미화도 꼼꼼한 작품읽기를 외면하고서는 순식간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교훈”46)을 잊어서는 안 된다면, 그에 앞서 흑백만을 가리는 심판관이 되어 작가를 역사의 심판대에 섣불리 올리는 경거망동을 삼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바람직한 연구자세일 것이다. 주제어: 텍스트 읽기, 해석의 정치, 식민지적 무의식, 식민주의적 의식,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 식민지적 기억상실, 기억의 정치학. (한림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외국인 등록증번호: 600502-5280173) <참고자료> 1. 기본자료 김  철, 「몰락하는 신생(新生): ‘만주’의 꿈과 󰡔농군󰡕의 오독(誤讀)」, 󰡔상허학보󰡕(9집),        깊은샘, 2002. 이태준, 「농군」, 󰡔근대대표작가 소설선집󰡕, 문예춘추, 1988. 이태준, 「만주기행」, 이태준, 󰡔무서록󰡕, 깊은샘, 1999. 2. 논문(논저) 강진호, 「현대소설사와 이태준의 위상」, 󰡔상허학보󰡕(13집), 2004. 민충환, 「尙虛 李泰俊論(2)-「農軍」을 中心으로」, 󰡔어문연구󰡕(57집), 1988. 이정숙, 「日帝下의 失鄕小說과 고향의 의미-만주 개척 이주민들의 고난상,         <農軍>과 <벼>의 대비를 통해서」, 󰡔어문연구󰡕(64집), 1989. 이훈구, 󰡔滿洲와 朝鮮人󰡕(限定版), 成進文化, 1979. 장영우, 「<농군>과 만보산사건」, 󰡔현대소설연구󰡕(31집), 2006. 고모리 요이치, 󰡔포스트콜로니얼󰡕, 송태욱 옮김, 삼인, 2002.
59    생명원리로 승화되는 시대인식 댓글:  조회:2663  추천:0  2009-05-16
-백석의 시를 읽고       1. 새롭게 시와 친해지면서   백석의 시를 마주하면서 전혀 특이하고 지극히 개성적인 시풍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선 짙은 평북방언에 질려 워낙 시의 감상력이 무딘 탓으로 마음에 번거로움만 앞서면서 도무지 시가 읊어지지 않았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 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이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族」(전문)    그런데 거듭거듭 음미할수록 마치 어둔 곳에 차츰 눈이 밝아지는 듯, 그 어려운 방언의 표상적인 장벽을 넘으면서 일종의 토속적인 생활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되고 신기한 방언들이 언술을 통하여 시적 운율을 조성하면서 고향의 서정을 토로한다. 이와 함께 또 거의 시마다에 등장시키고 있는 식물(음식물)과 동물들은 비유, 원형상징, 변용 등을 거쳐 가장 원초적인 존재방식과 가장 원색적인 생명모습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결국 백석의 시는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는 식민지 시인의 인생보고서답게 이미지즘적 모더니즘을 극복하고 시적 상상력을 살아가는 이야기, 특히 가장 민족 풍토적인 전통적 삶에 뿌리를 내리고 이야기적 텍스트 속에 가장 원초적인 삶과 가장 원색적인 생명모습을 담아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해 내었다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역행>>적 행위 속의 민족성 확인 “白石詩의 全作品을 놓고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어와 시양식상의 특질이다.”1) 우선 시어의 특징은 별로 대비할 만한 대상 없이 거의 독창이고 독행적인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시작품을 통해 구사되고 있는 방언들이 시의 천당에 스스럼없이, 지어는 “뻔뻔스럽게” 좌석하고 정착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가령 김소월의 경우도 평북 정주방언을 시어로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제된 문학용어를 체질적인 것으로 하면서 어투에 지방적인 정서를 가미하는 형식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백석의 경우에는 텍스트구성과 이미지 창조의 언술행위의 기본구성요소가 벌써 “평북지방의 고유한 명사나 또는 그 지방 특유의 감각어들이다.”2) 그러면서도 어투에서는 한결같이 표준어를 지켜가고 있다. 바로 표준어에 의한 현대문학의 틀 속에서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려는 여기에서 우리는 백석의 방언구사가 지극히 의도적이고 현실대응적임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 창작에서의 이와 같은 일관된 개성추구는 달리 해석할 수 없겠거니와 그 시대에 모더니즘적 경향의 시와 더불어 리얼리즘의 흐름 및 초현실주의 시들이 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자신은 장학생의 신분으로 일본 동경유학을 했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와 󰡔여성󰡕지 편집 및 영생여고보 교원 등 문화적인 사업에 몸담고 있었다는 경력마저 이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듯 하다. 아무튼 그가 시인으로 자리 매김하던 시기가 바로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암흑한 나날을 보내던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초였다는 역사적 현장을 감안할 때 고집스럽게 방언을 구사한 <<역행>>적 행위는 지극히 민족성을 고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단 주류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문화인 신분에서도 타락한 듯한 현세도피적인 “방언수집”은 내면적으로는 민족성이 고스란히 지켜지고 응집되어 있는 전통적인 삶의 현장을 재현시키려는데 숨은 시도가 있었다고 진맥되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을 소재로 하고 현대문명을 해부하는 데에는 방언이 아예 필요 없다. 그건 칼 차고 삿갓 쓰는 격이다. 반대로 현대적 언어로 토속적인 풍물이나 전통적 삶을 시로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도피적인 소극적인 자세이거나 민족을 외면하고 전원목가적인 안일한 삶을 추구하는 생존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석의 시에서 방언과 토속적인 풍물과 전통적인 삶은 전일적인 유기체를 이루면서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시적 이미지로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촌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둑둑히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고방」(전문) 시집의 첫 시라서 그냥 살펴보니깐 부성내지 남성-할아버지 삼촌 나와 사촌 등 파리 떼 같은 손자아이들은 할머니 어머니 등 기타의 혈연들이 부재한 경우임에도 축소된 완전한 가족부락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말짱 남성주인공들이 등장한 것도 특이한 것이거니와 그럼에도 가족성원의 결손이라거나 어떤 가난과 재난으로 인한 아픔 같은 것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과 함께 오붓하게 종족번식의 자연섭리대로 살아가는 원초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삶의 현장을 그대로 열어 보인 것이다. 그토록 평화롭고 화목하고 따스한 삶이다. 근대의식이 일제의 식민주의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식되던 당시까지 만도 우리의 민족의식은 봉건윤리도덕에 의한 가부장제적 가치질서였고 따라서 부성은 곧 나라나 민족성의 상징이 될 수도 있을 것이요, 부성의 몰락 내지 부재는 나라를 잃은 식민지 조선의 애달픈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백석의 시를“女性偏向․非合理性․反近代主義가 파시즘이라는 남성(英雄)숭배사상, 일제의 근대주의에 대결하는 방식으로 이해”3)하는 것은 자칫 백석의 시를 시대를 지각하지 못한 비논리지향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가부장제적 봉건윤리도덕의 가치질서가 파괴되고 부성의 몰락 내지 부재가 일제의 근대주의를 표방한 식민지정책에 연유한 나라상실을 상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모성의 초월적 기능을 숭배하게 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식민지시대 피지배민족의 역행심리를 수동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 하고 단일화 하고 비 논리화 하는 폐단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뒤에 나오는 백석의 시들에서 이 시처럼 남성 주체로 되면서 그처럼 정서가 온화하고 평화적이고 따스한 삶의 현장을 펼쳐 보이는 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이 주체로 되는 시들에서도 결국은 부성의 부재로 오는 두려움이나 가부장제적 가족주의 윤리를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山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 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밑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山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무가 고개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어 다람쥐처럼 밝아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워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우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워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병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무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메추라기를 잡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혀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아도 먹을 물이다                                                     「古夜」(전문) 전체 시는 사실 하나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지만 첫 연에서는 우선 부성의 부재로 오는 두려움을 그리고 있다. “산비탈 외따른 집”이나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는 것이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배가 타관 가서 오지 않”은 탓, 즉 부성이 부재한 사실이 마음에 던지는 공포감이다. 첫 연에서 부성의 부재로 인한 두려움을 말하면서 그 뒤 전체 시에서는 하나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는 시인의 “앙큼한 시도”는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마저 항상 “부성”의 부재로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고 있는 식민지인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인 듯싶다.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궁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침을 뱉고 넘어가면 골 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집에는 언제나 센개 같은 게사니가 벅작궁 고아내고 말 같은 개들이 떠들썩 짖어대고 그리고 소거름 내음새 구수한 속에 엇송아지 히물쩍 너들씨는데 집에는 아배에 삼촌에 오마니에 오마니가 있어서 젖먹이를 마을 청눙 그늘 삿갓을 씌워 한종일내 뉘어두고 김을 매러 다녔고 아이들이 큰마누래에 작은마누래에 제구실을 할 때면 종아지물본도 모르고 행길에 아이 송장이 거적때기에 말려나가면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였고 그리고 끼때에는 부뚜막에 바가지를 아이들 수대로 주룬히 늘어놓고 밥 한 덩이 질게 한 술 들여트려서는 먹였다는 소리를 언제나 두고두고 하는데 일가들이 모두 범같이 무서워하는 이 노큰마니는 구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를 방구석에 들매나무 회초리를 단으로 쪄다 두고 따리고 싸리갱이에 갓진창을 매어놓고 따리는데 내가 엄매 등에 업혀가서 상사말같이 항약에 야기를 쓰면 한창 피는 함박꽃을 밑가지째 꺾어주고 종대에 달린 제물배도 가지째 쪄주고 그리고 그 애끼는 게사니알도 두 손에 쥐어주곤 하는데 우리 엄매가 나를 가니는 때 이 노큰마니는 어느 밤 크나큰 범이 한 마리 우리 선산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을 우리 엄매가 서울서 시집을 온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노큰마니의 당조카의 맏손자로 난 것을 대견하니 알뜰하니 기꺼이 여기는 것이었다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전문) 어느 한 논자는 백석시에서 “이러한 女性偏向은 시집 이후에도 계속되어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님」(󰡔文章󰡕, 1939.3)에서 절정을 이룬다. 일가들이 범같이 무서워하는 이 노큰마니(증조할머니)는 그 손길 아래 수 많은 손자 증손자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야말로 위대한 母性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4)고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래도 이 시에서 그런 결론을 얻어내기가 힘들다. 전체 6개의 연으로 구성된 시는 앞의 5개의 연이 끝매듭이 “는데”로 되어 열거를 이루면서 마지막 연에 와서 “것 이었다”로 매듭짓고 있다. 특히 3, 4연과 5연이 대구법으로 되어있어서 결국 6연은 그 인과관계를 푸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를 방구석에 들매나무 회초리를 단으로 쪄다 두고 따리고 싸리갱이에 갓진창을 매어놓고 따리”면서 나한테는 “한창 피는 함박꽃을 밑가지째 꺾어주고 종대에 달린 제물배도 가지째 쪄주고 그리고 그 애끼는 게사니알도 두 손에 쥐어주곤 하는”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이 노큰마니의 당조카의 맏손자로 난 것을 대견하니 알뜰하니 기꺼이 여기”기 때문이었다. 역시 노큰마니의 “권력”은 역으로 부성의 부재를 암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맏손자로 난 것을 대견하니 알뜰하니 기꺼이 여기는” 가부장제적 가족주의 윤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 이야기적 텍스트에 담긴 생명미학 시에서 어떤 이념적인 것을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화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중간층으로서 이념적인 것을 원리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특정 집단지간의 정신적 대결로 충돌하는 이념을 뛰어넘어 보다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생명원리를 밝혀내는 것이 예술의 본체론적 추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원초적인 삶과 가장 원색적인 생명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인간탐구이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에서 방언과 토속적인 풍물과 전통적인 삶은 이야기적 텍스트를 통하여 전일적인 유기체를 이루면서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시적 이미지로 떠올리고 있으며 나아가서 정신, 의지 내지 이념적인 것마저 이야기 속에서 삶의 의미 내지 생명의 가치로 환원시켜 확장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한다. 흔히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지나친 격동이나 흥분이 없이 차분하게 흥미롭거나 신기하거나 인상적이거나 충격적인 사물, 사람, 사건을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사물, 사람, 사건이 시에서 이미지 창조의 상관물 또는 이미지 창조의 정서적이고 경험적인 유대로 되려면 역사와 시대와 사회의 본질적인 속성과 연대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런 작업을 백석은 식물(음식물을 포함), 동물을 통한 평화와 생명에의 동경, 동식물의 원형상징 또는 문화상징을 통한 생명원리(삶의 윤리) 내지 현실감각에의 접근, 동물의 원색적인 생명본능과 모습으로부터 인간사회를 증언하는 등으로 점진하고 있는 것이다. 1) 인간을 시적 주체로 하면서 식물(음식물), 동물을 대상물이나 생활현장의 한 모습으로 인간의 삶과 동일 층위에서 다룸으로써 평화로운 삶과 자연 회귀적인 원초적 생명의식을 보여준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여우난골族」(일부) 간밤엔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가즈랑집」(일부) 이런 시구들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자연의 생물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다루어짐으로써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생명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과 같은 경우로 명절이나 민속에 놓이는 풍성한 음식물들이 나오는 시구들에서도 풍성하고 다양한 음식물을 통하여 친자연적인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달빛도 거지도 도적개도 모두 즐겁다 풍구재도 얼룩소도 쇠드랑볕도 모두 즐겁다 도적괭이 새끼락이 나고 살찐 쪽제비 트는 기지개 길고 홰냥닭은 알을 낳고 소리치고 강아지는 겨를 먹고 오줌 싸고 개들은 게모이고 쌈짓거리하고 놓여난 도야지 둥구 재벼오고 송아지 잘도 놀고 까치 보해 짖고 신영길 말이 울고 가고 장돌림 당나귀도 울고 가고 대들보 우에 베틀도 채일도 토리개도 모두들 편안하니 구석구석 후치도 보십도 소시랑도 모두들 편안하니                                               「연자간」(전문) 이 시에서는 달빛, 거지, 도적개, 베틀과 같이 생명 없는 것에까지 생명을 부어넣으면서 원초적이고 평화로운 삶과 친자연적인 존재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도 시적 주체는 인간이다. 거지라는 단어 외에 인간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시적 초점은 어디까지나 삶을 즐겁게 바라보는 인간의 심상과 정서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2) 동식물의 원형상징 또는 문화상징을 통해 생명원리 내지 삶의 윤리를 밝힘으로써 현실감각에의 접근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수박씨 호박씨를 입에 넣는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이 깃들인 것이다. 태산의 구름도 黃河의 물도 옛임군의 땅과 나무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뵈이는 것이다                          「수박씨, 호박씨」(일부) 여기서 수박씨, 호박씨는 앞의 시에서처럼 삶의 한 대상물이나 생활현장의 한 배경으로 인간의 삶과 동일 층위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문화상징물로 되어 인간의 삶 자체의 모습을 좀더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역사와 의식과 인정을 돌이켜 본다. 시 「杜甫나 李白같이」에서도 중국의 대보름 음식인 “元宵”와 우리의 “떡국”을 떠올리면서 이국 타향에서의 시적 주인공의 쓸쓸한 심정을 토로한다. 이국 타향에서 정월 보름날에 “때 묻은 입던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아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면서 떠올리는 것이 떡국이다.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떡국을 떠올림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제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전문) 이 시에서의 모닥불은 원형상징이다.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모닥불(불),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해주는 모닥불(불), 모여서 이야기가 오고가는 모닥불은 타오르는 생명력이요, 평화로운 삶이요, 사연 많은 역사이다. 3) 동물의 원초적인 생명본능과 원색적인 생존모습으로부터 인간을 반성하거나 비인간화된 인간사회를 증언하기도 한다.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보다 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首陽山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七十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山나물을 추었다                              「절간의 소 이야기」(전문)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藥이 있는 줄을 안다”는 소의 신령함 앞에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갈팡질팡하는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처연히 떠오른다. 칠십이 넘은 노장은 “수양산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마침내 이를 터득하였던가. 그러고 보면 현실도피와 염세적인 냄새도 나는 것 같지만 정신, 의지 내지 이념적인 것마저 이야기 속에서 삶의 의미 내지 생명의 가치로 환원시켜 가장 원초적인 삶과 가장 원색적인 생명모습에서 확장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고 확인하면 이는 인간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탐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修羅」(전문) 거미가 “나”로 대표되는 인간과 같은 층위에서 동일시되고 새끼를 찾는 어미거미, 어미를 찾는 새끼거미의 슬픈 모습이 인간과 사회현실에 투사적으로 접근하면서 동식물을 통해 창조하는 이미지의 속성이 보다 뚜렷하게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시인이 가장 원초적인 삶과 가장 원색적인 생명모습을 통해 원리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 시대와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 등이 이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4. 시를 덮으면서 백석의 시집을 여러 번 번져가고 번져오면서 상술한 바와 같이 다듬어지지 못한 인식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 아직 시에 대해 낯설다기보다는 시를 잘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수준에서 이런 이미지포착을 할 수 있은 것은 오히려 백석의 시가 그만큼 시적 언어와 시적 상관물과 사회, 시대적인 인식이 유기적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백석의 시에서 방언과 토속적인 풍물과 전통적인 삶은 전일적인 유기체를 이루면서 민족성이라는 절박한 시대적 개념을 시적 이미지로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장학생의 신분으로 일본 동경유학을 했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와 󰡔여성󰡕지 편집 및 영생여고보 교원 등 문화적인 사업에 몸담고 있었던 백석이다. 그런 그가 모더니즘적 경향의 시와 더불어 리얼리즘의 흐름 및 초현실주의 시들이 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에 <<역행>>적으로 고집스럽게도 방언을 구사하고 사회현실과 떨어진 오지의 원초적인 삶을 시적 대상으로 잡은 “개성추구”를 어떻게  진맥할 것인가. 그가 시인으로 자리 매김하던 시기가 바로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암흑한 나날을 보내던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초였다는 역사적 현장을 감안할 때 고집스럽게 방언을 구사한 <<역행>>적 행위는 아무래도 민족성을 고수하고 시대적 인식을 생명원리로 승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단 주류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문화인 신분에서도 타락한 듯한 현세도피적인 “방언수집”은 내면적으로는 민족성이 고스란히 지켜지고 응집되어 있는 전통적인 삶의 현장을 재현시키려는데 숨은 시도가 있었다고 진맥되기 때문이다.
58    일제치하에서의 현실극복의지 댓글:  조회:3028  추천:0  2009-05-16
-염삼섭의 『만세전』에서 읽는다 1. 연구사검토와 문제 제기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횡보 염상섭은 사실주의 소설문학을 확립한 최초의 작가라는 번지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한 연구는 1920년 『창조』 6호에 실린 김동인의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서 비롯되어 196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더니 1997년에 와서는 발표된 비평과 논문이 527편에 달하고 단행본만 해도 8권이나 되었다.1) 이는 작가 염상섭과 그의 작품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한 위치에 놓여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리얼리즘과 사회문제성을 주요 궤도로 하여 고찰되면서 그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많은 한계점들도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묘사의 과잉이나 좀더 개성 있는 형상창조를 하지 못한 것 같은 기법상의 제 문제들은 아쉬움으로 지적해도 마땅하나 그의 작품을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라고 비평하면서 “『만세전』이나 『삼대』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김동인과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라는 면에서 같은 계보가 되고 만다”2)는 문학사적인 결론에까지 이르면 이는 사실 창작수준의 평가에 머물지 않고 작가의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문패를 떼여버리는 거나 다름없는 판결이다. 특히 그 판결이 2002년도에 출판된 개정증보판 『현대한국문학사』(이하 『문학사』)에서 내린 것이라고 보면 일개인의 연구서처럼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심각성조차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판결이 공정한지는 구체적 작품을 통해서만 옳게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염상섭 문학세계가 과연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고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인지를 상기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만세전』이나 『삼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우선 『삼대』보다 훨씬 일찍 창작된 『만세전』을 들어 기초작업으로 삼으려 한다. 2. 닫힌 의식에서 열린 의식에로의 추구―제목, 서두의 개정 『만세전』의 판본이 네 가지나 존재한다니 그 판본 연구도 상당한 흥미와 함께 가치 있는 작업이 되겠으나 판본 비교연구 자체가 하나의 연구항목이 되는 만큼 여기서는 본고의 문제의 제기와 관련해서 제목, 서두의 개정이 가지는 인식적 차이 내지 주제적 성향차이에 대해서만 밝혀보려 한다.  우선 작품의 제목이 『묘지』에서 『만세전』으로 개칭되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묘지는 생명의 정지, 육체의 부화를 뜻하는바 이것이 상징적 의미로 될 때 그것은 곧 발전이 막힌 사회, 와해되는 집단을 상징할 것이고 도저히 구제 불가능한, 또는 치료 불가능한 어떤 종말의 상징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묘지가 당시 조선 사회 현실을 가리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묘지』란 제목으로부터 우리는 금방 작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닫힌 의식 내지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꼬집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의 이른바 ‘원점회귀’는 표면화된 그대로 현실 도피적이고 식민통치에 대한 궁극적인 굴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 ‘원점회귀’는 내면적인 의식구조로 보면 이미 변질된 ‘회귀’이다.  우리는 ‘원점회귀’를 행위의 평면적인 순환현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기표를 형성하는 기의의 차이로, 즉 처음의 동경과 두 번째의 동경이라는 달리 매겨지는 의미에서 주인공 행위의 이질성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처음 선택한 동경은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대결에서 확인한 근대화 그 자체였다면 두 번째 선택한 동경은 바로 제도적 장치로서의 식민지화와 시대적 요청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모순된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요물이었다. 이중구조인 만큼 선택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고 형상분석에 따라 작품의 명암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근대의식이 조선에 대량으로 이식되어 들어오는 때 봉건가치관의 억압으로 강제결혼을 한 주인공은 봉건의식에 대한 반항심리와 함께 근대의식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일본은 아직 사회에 미숙하고 봉건의식에 반기를 든 주인공에게 있어서는 그냥 근대성 그 자체였다. 자기가 거부하는 봉건의식과 지향하는 근대의식이라는 양자택일의 단순사유였기에 이미 결혼까지 한 가정적 삶을 주저 없이 뿌리치고 근대접근의 길인 일본행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만 부패한 봉건에의 반동이고 진보적인 근대에의 지향이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차별을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니나 그것은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 문명한 자와 미개한 자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쯤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조차도 그냥 문명한 근대인이 미개한 봉건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이는 일본행 동기 자체가 봉건의식에서의 탈출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칠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 관념을 굳게 의식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3)  봉건적 가부장제와 윤리 도덕적 가치관에 반항하여 근대문명을 찾아간 미성숙의 주인공한테는 망국의 수치와 식민지인의 굴욕이 아직 현실적인 신변체험으로 각인 되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그 이전에는 아직 사회 기성세대가 아니고 학생이라는 것과 또 그의 가정이 그더러 유학을 하도록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가진 중류층이라는 것, 말하자면 그의 신분과 가정토대하고도 관계할 것이다.  주인공의 의식에 질적 비약이 일어나게 된 것은 소설의 기본 줄기를 이루는 동경에서부터 서울에로의 일시적 회귀였다. 이 일시적 회귀의 여로에서 사회에 미성숙한 “책상 도련님”이었던 주인공은 그 자신이 직접 여러 현장에서 부닥뜨린 압박하는 무리와 억압당하는 무리라는 민족적인 차별, 직접 목격한 식민지화의 참경들을 통하여 망국의 치욕과 식민지인의 굴욕을 분하고 경악함 속에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워낙 아내의 죽음을 맞아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의미는 봉건가치관과 가부장제적 가족제도의 산물을 총결산하고 그것과 철저하게 결렬하려는 장엄한 행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는 여로에서 당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은 그더러 개인의 삶을 넘어서서 현실인식에 눈뜨게 하였고 근대와 봉건이란 노출된 대결 뒤에 숨은 국권강탈과 식민지전락이라는 나라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정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럼에도 결국 주인공은 어서 빨리 이 묘지를 벗어나려 하며 동경으로 돌아가려 한다. 식민지 치하에서 썩어가고 몰락해 가는 나라와 민족을 두고 식민주의 발원지로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묘지』라는 제목으로 작품의 주제를 시사할 경우 어찌하면 주인공이 애초에 일본 동경에 갈 때는 근대의식에로의 지향 때문이었고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의 회귀는 벌써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외면한대로 발전적인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벗고 파괴적인 식민주의 악마라는 원형을 드러낸 일본에 굴욕적인 화합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또 발전적 근대성의 상징이면서도 파괴적인 식민주의라는 가치 대립적인 이중성을 띤 일제의 ‘근대화’표명의 국권강탈 앞에 그 대상존재인 조선민족 내지 조선이라는 나라는 식민통치에 대한 내면적 반항심리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에 멀리 낙오했다는 미개함 때문에 썩어 가는 구더기나 죽음의 묘지로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암시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혐의는 작품의 제목이 『묘지』에서 『만세전』으로 개정되는 그것만으로도 벌써 해소되는 것이고 따라서 식민주의의 강압정치에 제도적으로 고착되는 식민지화의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썩어 가는 구더기나 죽음의 묘지라고 확인한 것은 『책상 도련님』으로서의 미성숙한 주인공의 분노와 경악함의 심리적 과잉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우선 이런 질식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도피가 아니고 악마의 일본에 굴욕적인 화합이 아니다. “대기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 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4)에서 우선 벗어나려는 욕망의 결단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민족을 몰락하게 하는 파쇼적 식민통치는 반대해야 하지만 근대화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또 필연적인 시대 요청으로 나선다. 그런데 일본은 바로 제도적 장치로서의 식민지화와 시대적 요청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모순된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요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낙오한 봉건의식에서 자생력을 잃고 도태될 운명에 처한 민족의 미래지향적인 선택은 무엇보다 먼저 근대의식의 수립일 것이다. 이는 역사와 시대에 도태되게 하는 봉건의식에서의 탈피가 근대의식의 수립에 힘입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선결조건 역시 근대의식의 수립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각성이 있을 때 주인공의 서울에서 동경에로의 회귀는 파괴적 식민주의 악마에로의 굴욕적인 화합이 아니라 발전적 근대성에로의 새로운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나가는 자각과 발분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5)  『만세전』을 폭풍전야, 혁명전야, 광명전야, 또는 어둠의 저쪽은 광명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작품은 봉건의식에 타락하고 식민주의에 멸망하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근대의식의 각성을 가져와야 한다는 역사적 시대적 당위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노출된 대결 뒤에 숨은 국권강탈과 식민지전락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노출시키고 일본의 발전적인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벗기고 파괴적인 식민주의 악마라는 원형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서두의 개정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일본은 참전국이라 하여도 이번 전쟁 덕에 단단히 한밑천 잡아서, 소위 나리긴(成金), 나리긴 하고 졸부가 된 터이라, 전쟁이 끝났다고 별로 어깻바람이 날 일도 없지마는, 그래도 또 한몫 보겠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판이다6)  이같이 전주곡식으로 시작되는 서두는 벌써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에 근대문명의 천사로 둔갑한 일본이 파괴적인 식민주의, 확장주의로 광분하는 악의 손임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리라는 것을 미리 암시해주는 것이다.  과연 작가는 제목과 서두의 개정에서 현실인식, 시대의식 내지 문제의식에 천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개정 자체가 창작 기법상의 미비한 점을 현실시각에서 진단하고 보완하려는 수축작업인 만큼 원작의 기술적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고 또 작가의 의도적인 주제노출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겠지만 그만큼은 작품이 결코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반봉건의식의 성장과 민족의식의 각성―플롯의 이중구조  사실적 허구유형의 소설창작에서 플롯의 유형은 모든 창작기법의 선택 내지 전개양상의 선차적 전제조건이 된다. 서두, 서술형식, 서술시점 또는 서술시각, 인물 지어는 어조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플롯의 유형에 의해 선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작품의 구조 내지 골격을 이루는 플롯의 유형선택은 문학작품의 형식 자체만이 아닌,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한 유기체의 형성모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플롯의 유형 내지 짜임구조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은 그 작품의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기초적 내지 기본적인 작품해석방법의 한 가지이다. 흔히 무엇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려 했다는 작품분석방식이 공식으로 된다.  그러나 단선 플롯에서는 이 공식이 퍽 쉽게 적용될 수 있으나 복선 플롯에서는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 복선이라면 물론 구조상 둘 이상의 줄거리를 갖고있는 플롯형식을 말할 것인 데 작가의 총체적 설계에 따르는 줄거리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진맥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의미 매김이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한 줄거리 또는 여러 줄거리는 다른 한 줄거리가 전개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배경이나 입체적인 수식이 될 수도 있으나 보다 적극적으로 기본줄거리에 작용하면서 작품의 의미 매김에 참여할 수도 있다.  『만세전』의 플롯형식은 보건대 단선줄거리로 직선적 전진형 플롯유형인 듯 하다. 이것은 여로형 소설이라는 판단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작품은 주인공이 아내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급보를 받고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그 여로에서 겪는 사건을 기본 줄거리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으로는 근대문명을 동경하던 한 조선의 인텔리가 한차례의 귀국여로에서 신변 체험적으로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사실을 통하여 일본의 발전적인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벗기고 파괴적인 식민주의 악마라는 원형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의 전부라면 봉건혼인이라는 규정적인 의미설정을 하지 않고 그냥 주인공이 아내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급보를 받고 귀로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 나와 아내의 관계야 어떻든 귀로에서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것들에 대한 나의 신변체험은 크게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아내의 죽음은 다만 주인공이 귀국하는 계기작용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봉건가치관의 부산물을 철저히 청산하고 봉건의식에서 일탈하여 근대의식에로 전심하려는 주인공의 심리지향의 한 계기가 되었다가 결과적으로는,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심리갈등에 앓음을 하던 주인공이 일제 식민주의정책의 수탈로 피폐해지고 몰락해 가는 조선의 현실로부터 봉건의식에 의한 근대의식의 거절이 식민지화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는 민족사적 시대인식에 각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역시 의식의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인 것이다.  봉건적 가부장제도와 윤리가치관에 대한 반항으로 결연히 동경 행을 한 주인공이 아내의 죽음을 두고 귀국하려 하는 심리동기는 봉건도덕과 가부장제도가 강요한 부산물을 깨끗이 청산하고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이 시점까지 “책상 도련님”으로서의 주인공의 심리갈등은 그냥 봉건의식과 근대의식의 갈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로의 모든 것들을 통해 자기가 동경하는 근대가 순수한 근대가 아니라 근대의 가면을 쓴 파괴적인 식민지임을 알았을 때 봉건의식 내지 봉건가치관은 다만 근대에 대한 낙오이고 반동만이 아닌 국권상실, 민족전락, 국토식민지화의 원인, 근원임을 알게 되고 근대문명의 상징이었던 일본이 사실은 파괴적 식민주의 원형임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식의 각성이 여기까지 오면 주인공의 봉건의식에의 반항은 다만 근대의식의 각성뿐이 아니라 역시 식민주의에 대한 극복인 것이고 따라서 동경으로의 회귀는 그 극복의지의 새로운 출발일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봉건의식에 대한 반항과 근대의식의 접근으로부터 봉건의식의 극복과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및 근대의식의 지향에로 나아가는,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의 질적 비약은 상기 이중구조의 플롯에 의해서 훌륭하게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즉 주인공이 귀국여로에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사실로 구성되는 시간상 직선적인 전진형 플롯과 가부장적 봉건혼인을 두고 겪는 주인공의 심리갈등으로 구성되는 공간상 수평적인 회고형 플롯의 구조적 얽힘이 의식의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을 보여는 것이다.  『만세전』이 과연 이러한 이중구조의 플롯 구성에서부터 이와 같은 의식의 질적 비약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결코 『만세전』을 두고 “객관세계와는 관계없는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고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이며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주인공의 민족사적 상징의미―주체적 근대의식의 맹아  사실적 허구유형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러저러하게 객관적 세계와 관계하여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이고 사건충돌과 심리갈등 속에서 시대의식의 흐름의 한 양상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원적인 이념주의에 의해 이론적으로 극단화된 전형창조론은 거부한다 하더라도 사회를 현장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할 것 같으면 벌써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충돌 내지 조화 속에서 현실 반역적이든 미래지향적이든 아니면 가치 중립적이든 그 시대의 의식을 기준 점으로 하여 그 자신의 신앙과 이념과 문화수양에 따라 선택하게 되는 유형적인 삶의 특성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주인공 내지 등장인물의 인상착의나 신분규정은 크게 작게 어떤 의미전달의 기호가 될 수 있다.  『만세전』이 부패한 봉건의식이 민족의식의 시대적 낙오를 초래하고 마침내 근대의식을 표방하는 일제에 의하여 국권을 상실하고 국토가 식민지화되고 개개의 자아마저 파괴당하던 민족사의 참담한 시대를 현실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전제할 때 이십대 초반의 일본유학생이라는 주인공의 신분규정은 피동적으로 근대문화이식을 강요당하고 식민지화의 극단적 강압정책으로 민족의 집단발육이 부전하고 주체적 근대의식이 아직 맹아상태에 처해있던 민족사의 시대상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봉건의식의 시대적 부패성과 근대의식의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진보한 시민사회가 제도적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시민의식이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으로 주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당시의 조선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투시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근대를 외면한 무지와 몽매 속에서 뿌리뽑힌 봉건의식을 고집하여 근대사회에 역행적으로 타락하던 낙오의 민족을 두고 아직 사회적 문화적 인간으로서는 미성숙한 이십대초반의 어린 학생은 몰지각이란 근사한 의미범주로 하여 상징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애초에 선택된 주인공의 근대의식의 접근은 봉건가치관에 대한 부정과 그 부산물인 강박결혼에 대한 반항으로서 어찌 보면 봉건속박의 현실일탈 내지 현장 도피행위로 행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봉건의식에 의한 민족의 부진과 식민지화에 대한 근원적인 각성과는 전혀 무관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신분규정이 민족의 근대의식의 맹아상태를 상징한다는 확인은 주인공이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탈피하려는 개인적 선택에서 출발했던 근대의식의 접근이 나중에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에 이르는 질적 비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 식민주의 강압정책과 민족의 집단발육의 부전으로 말미암은 민족적 근대의식의 맹아상태는 주인공이 아직 어리고 학생이라는 사회적 미숙성과의 일체화를 통하여 내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동경에서 서울까지 오는 여로에서 신변체험으로 부닥뜨리고 보고들은 견문을 통하여 구더기 끼는 무덤으로 전락한 조선의 실상을 흩어지는 안개 속의 실체처럼 뚜렷이 각인을 받고 일제의 파괴적 식민주의 만행에 내적으로는 영혼의 저항을 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어쩔 수 없어 마음을 앓는다.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의 각성은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직 맹아상태일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종로에서 뺨을 맞고 행랑 뒷골에서 눈을 흘기다가 자기의 약한 것을 분개하여 보기도 하고, 혼자 변명하기도 하여 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겁겁증이 나서 몸부림을 하는 일종의 발작적 상태는 자기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어 앉은 『결박된 자기』를 해방하려는 요구가 맹렬하면 맹렬할수록 그 발작의 정도가 한층 더하였다. 말하자면 유형 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이 분명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자기의 약점에 대한 불만과 연민과 변명이었다.7)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 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8)  여기서 “결박된 자기”는 곧 일제의 국권강탈과 식민주의 노화정치로 말미암아 주체적 발전을 박탈당한 조선민족을 상징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고 “유형 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은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이고 내면의 영혼으로부터 싹터 오르고 있는 근대의식의 맹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결코 제도화되어 가는 식민주의 강압정치로 말미암아 민족의 내적 발전을 박탈당하고 주체적 자아가 훼손된 세계에서 역사와 시대를 초월한 당위적 전망이나 이상적 전형인물을 창조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초현실적인 전형창조론은 극복되어야만 하고 사실주의 소설창작에서의 역사 법칙적인 진보개념과 시간적으로 극복된 오늘의 시각에서 강요하는 이념 자체는 갈라보아야 할 것이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염상섭의 『만세전』의 의식구조를 『묘지』에서 『만세전』에 이르는 의식차이와 이중구조의 플롯이 짜내고 있는 의미구조 및 주인공의 민족사적 상징의미 등을 통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조명해보았다.  작가는 “일본이라는 악의 몸에 붙은 발과 손이 저지르는 악행” 속에서 싹터 오르는 근대의식의 맹아를 주인공의 민족사적 상징의미와 플롯의 이중구조 속에서 열린 의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즉 주인공이 봉건의식의 속박에서 탈피하려는 개인적 선택에서 출발했던 근대의식의 접근이 나중에 낙오와 진보라는 전체주의 시대인식에서 민족의 억압과 멸망이라는 현실적인 생존인식에로의 각성에 이르는 질적 비약이 있는 한 작품은 어디까지나 열린 의식에로의 지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주인공의 서울에서 동경에로의 회귀는 파괴적 식민주의 악마에로의 굴욕적인 화합이 아니라 봉건의식과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발전적 근대성에로의 새로운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7    <님>의 확장성과 안정성 댓글:  조회:2496  추천:0  2009-05-16
만해 한용운은 선사이고 독립투사이면서 또 시인이기도 하다는 종교철학적 또는 사회정치적 안목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을 불교의 철학 내지 교리로 뜻풀이하거나 사회정치적 이념 내지 민족정신으로 찬양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물론 만해의 인간과 사상을 연구하다보면 궁극적으로는 그런 결론에 도달할 당위성도 있는 것이겠으나,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만큼 만해의 탁월한 시적 재능은 그 거창한 사상성이나 정치성에 가리워질 수 있다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 혹자는 그의 시를 조국애와 독립의식이 투철하다는 주장으로 애국주의시, 항일저항시로 확인하고(특히 혁명적사실주의를 주창하던 중국에서는 그렇게 가르쳤다.) 혹자는 그런 이데올로기나 협애한 인간적 삶의 추구에서 벗어나 불교적 철학에 의한 인간한계의 극복에 도달한 철리적 시로 추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나 존재물이든 그 고유의 본질적 속성을 갖지 못하면 그건 벌써 존재적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시가 우선 시로 읽히려면 시의 본체론적 특성이라 할 상상력과 그 상상력이 입은 옷이라 할 이미지창조에서 시적 감동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창조된 이미지가 복합적이고 다의적이어서 끝없이 열린 확장공간으로 미끌어져 갈수 있을 때 우리는 시인의 탁월한 상상력과 시의 찬란한 매력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님의 침묵󰡕은 침묵하고 있는 님이어서 읽는 사람의 마음이나 인생자세에 따라 판단하기 나름이고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그의 거의 모든 시작품들에서 나타나고 반복되는 <님>은 사실 불교적 철학의 깨닳음이 마침내 시적 상상력의 비상을 통해 확장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획득한 시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님>이 확장성을 띤 이미지라는 것은 그것이 많은 연구자들의 시각과 관점이 다른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연구사검토만으로도 충분히 해석이 될 것이다.  물론 이는 <님>이란 기표가 조국, 고향, 애인 등 다양한 기의들로 묶여질 수 있다는, 이를테면 어휘에 대한 상징적 의미해석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님의 침묵󰡕에 담은 시편들에서 <님>은 확실한 실상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고 다만 인간의 정감세계와 정신적 경험을 유대로 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한 시적 상관물의 무한한 변용에 의해 이지미화되고 있다는 텍스트 담론 분석에 충실할 때 우리는 부분적이고 지류적인 허상에 안목잡히지 않고 보다 포괄적이고 전체적이고 다의적인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의의 무한한 미끄러짐을 따라 언어유희적인 말꼬리잇기를 하다보면 확장성이 역(물극필반)으로 막힌 골목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님>이 안정성을 띤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에서와 같이 기의의 끊임없는 미끄러짐과 함께 의미확장이 가능하지만, 실제 시편들에서는 “두 주인공이 놓인 환경을 現實的 細部가 배제된 抽象이 아니라 생생한 具象 속에 마련하고 있”1)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정감세계와 정신적 경험을 유대로 하면서도 그 형이상학적 내용을 구상(具象)적인 시적 상관물의 변용을 통해 고집스럽게 반복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이미지의 안정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철학적인 상상력이 인간의 정감세계와 정신적 경험을 유대로 하여 시적 상상력을 촉발하였다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내용을 다시 구상(具象)적인 시적 상관물을 통한 이미지창조 내지 독특한 상징적 의미매김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유로운 상상속에서도 상징적 또는 비유적 의미구조에서 상대적으로 형태적인 안정성을 굳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상대적인 형태적 안정성이란 곧 믿음, 희망, 사랑일 것이다. <믿음>이 있어 이별에서조차 만남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님>은 <남>이 되어버린다. 믿음과 희망과 존경과 사랑의 대상물로서의 <님>이라면 이때의 <남>은 그냥 타인이 아니라 <서로의 감옥>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독특한 상징적 의미들을 좀더 시와 함께 읽어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시적 상관물들이 즉물적 형태 내지 의미에서 벗어나 이미지창조에서 비물질적 가치 또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였을 때라야 시는 시로서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한용운의 시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005. 10. 22
56    안수길 소설의 서사구조 연구 댓글:  조회:3799  추천:0  2009-05-16
-만주이주민소설을 중심으로                               목   차 1. 서론                                                                  1.1 문제 제기                                                            1.2 연구사 검토                                                          1.3 연구 목적과 연구 방법                                               2. 재만 조선인 사회와 안수길의 현실 인식                        2.1 역사의 만주와 현실의 만주국                                         2.2 정착 의지와 북향정신                                                3. 만주이주민소설의 서사구조 특성                                3.1 입체인물-식민 시대의 인물 풍속화                                    3.2 화자의 중립성-현실 극복의지의 확인                                  3.3 이념의 예술적 표현-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조화                       3.3.1 내부인물의 갈등 구조-식민 사회의 축도                           3.3.2 단절 구조의 예술적 조형화-이주민 사회의 지평 제시               3.3.3 이중 갈등구조-억압 현실의 서사화                                4. 결론                                                                 5. 참고문헌                                                                                                                       1. 서론 1.1 문제 제기 한국의 근대문학은 일제의 식민 정치와 악연을 맺은 상태에서 발아하게 된다. 민족문학의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위기를 운명적으로 받고 비운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세계 근대 역사의 태동과 병행하여 발생한 것이 아닌, 식민지 민족문학이라는 특수성을 안고 있다. 문학 종사자들이 역사 철학적인 인식 하에 세계 근대 문명 사조를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식민통치라는 민족 억압형식을 통한 것이어서 문학사조마저 굴절되어 투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 근대문학의 구축은 탈식민지 국가독립사상 내지 민족의 주체의식과 직․간접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근대문학은 식민정치와의 조우 속에서 식민지 민족주의 의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식민지배에 저항하며 억압을 시시각각으로 감내해 왔다. 이처럼 민족의 식민지 역사의 비운 속에서 식민통치의 민족동화정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문학은 그 역사적 고찰에서 식민담론을 간과할 수 없었다. 식민지인 전체를 동화대상으로 하는 식민시대에 저항과 공모, 역행과 순응의 논리는 식민지인의 생존 논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많은 식민지 작가들의 문학창작이 식민통치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이었다. 독자들을 교양하는 함양훈도를 목적으로 하기도 하는 문학이기에, 그 함양훈도의 성격을 밝혀내는 것은 역사의식의 올바른 정립과 문학정신의 정직한 계승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역사 현실 속에서 창작된 문학을 바라보는 견해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통념적인 판단을 하기도 하고 식민 피해의식에 의해 과잉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텍스트에 대한 본체론적 해부보다는 형이상의 주장이나 논리를 잣대로 텍스트를 재단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시대주제, 작품매체 등 시대적 성격이 뚜렷한 요소들을 식민지인의 대응논리에서 정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친일여부와 직결시키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작품매체에 대한 절대론이 그 한 예이다. “작품매체는 작품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다.”1)는 말은 언뜻 듣기에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벌써 작품매체의 성격에 반대하는 작품의 저항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작품의 성격을 달리 규명할 필요 없이 작품매체의 성격만 규명하면 자연히 작가 내지 작품의 성격은 판단된다는 논리이다. 작가는 작품매체의 부속물이거나 협력자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된다.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배 하에서는 작품매체의 성격과 작품의 성격이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모습이 오히려 지배와 저항의 구도를 형성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라를 잃고 민족이 몰락하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작가나 작품을 작품매체의 성격에 의해 판단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반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이는 식민지배 하에서의 작품매체라는 판단에서 식민지 작가의 식민지배에로의 공모의식만을 일방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국권마저 상실한 민족에게 그 민족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낼 수 있는 매체란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민족의 언어를 지키고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며 민족성에 호소하려는 식민지 작가의 애끓는 노력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특정시대, 즉 국권상실과 민족말살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작품매체의 성격에 직결되는 해석은 오히려 민족의 열등성 내지 패배주의를 확인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매체에 대한 성격 확인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식민지배의 문화정책이 어느 정도 침투되어 있고 검열제도는 어떤 방식을 취했으며 우리의 대응방식은 어떠하였는가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라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매체를 통한 식민지배는 일제식민통치의 한 부분임에 다름 아니고, 그만큼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운 독립투사들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수립을 도모한 교육자들과 마찬가지로 검열에 대응한 작가들의 작품창작 역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행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식민지배 하에서는 작품매체의 성격이 작가의 창작행위를 규제하겠지만, 그것은 식민지 작가의 공모와 저항, 순응과 역행의 착종 관계를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발표지의 성격과 작가의 극복의지라는 이항대립이 성립된다. 그런 대립이 가능하다거나 역사적으로 기성사실이라면 발표지의 성격 규명은 작가나 작품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극복의지와 그 한계를 확인하는 전제 조건이 될 뿐이다. 결국 발표지의 성격 규명은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담론의 한 분석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시국정책, 시대에 대한 주의․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그런 정책, 주제나 그와 관련된 언어들이 작품에 등장하면 무작정 친일로 몰아붙이는 건 아무래도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반응이거나 절대적 억압의 현장을 살지 않은 사람들의 안이한 사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역시 문학 본체론적인 사유 방식에서 볼 때 작품에 투입된 소재를 문학텍스트의 서사요소로 재확인하고 유기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의미 담론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표층적인 의미에만 집착하는 소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매체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시국정책, 시대 주제는 절대적 억압시대를 상대한 작가의 임기응변이거나 심층저항수단 혹은 부득이한 포장장치이었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식민통치시대를 거쳐 온 한국 근대문학에 대한 조명은 식민담론분석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문학텍스트에 대한 본체론적 사고로부터 출발하고 억압시대 극복의 대응논리로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게 된다. 이러한 특정한 식민지 억압시대에 한국문학의 가지 또는 지류로 생성된 만주조선인문학도 당연 이와 같은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근대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만주조선인문학 연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조응 현상이랄 수밖에 없다. 많은 연구가 현경준, 안수길 등의 만주이주민소설들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주요하게는 그들의 작품 대부분이 만주국 국책홍보지인 󰡔만선일보󰡕를 통하여 발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잣대로 보아 “왕도 낙토”, “오족협화”, “유축농업”과 같은 만주국 국책에 순응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작품은 접촉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발표매체인 󰡔만선일보󰡕의 성격을 들어 작품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작품매체의 성격에 반대하는 작품의 저항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매체의 성격이 작가 작품에 끼치는 영향 내지 제한은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배 하에서 민족의 목소리를 합법적으로 낼 수 있는 매체란 벌써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작품매체와 작가 작품이 ‘결합’된 배후에 암장된 규제와 대응, 지배와 저항의 구도를 밝혀내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구도 속에서 구체적인 작품매체의 규제 방식과 지배 역도를 분석하는 것은 역사적인 현실상황을 밝히고 이런 상황이 식민지인 작가한테 어느 정도의 대응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고 어떤 방식의 저항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를 파악할 때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주 역시 일제치하의 식민지이고 󰡔만선일보󰡕는 식민지배 하의 작품매체이라는 성격 때문에, 그리고 이민 작가는 곧 식민지인 작가이고 그들은 결국 식민지배 하의 작품매체를 발표지로 하고 있었다는 사정 때문에 단순하게 작품매체의 성격으로 작품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런 경우 자칫 작가 내지 작품의 저항의식이나 언설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단지 식민지인의 식민지배에로의 공모성이나 타협만을 확대하여 과잉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이 멸망위기에 처한 식민지 현실에서 식민주의자의 통치이념으로 식민지인의 의식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식민사관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이러한 극단적인 식민 피해 의식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서 만주 조선인에 대해 “만주에서의 조선인 위치란 무엇인가? 항일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피지배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제국의 힘을 뒤에 업고 타자의 삶을 위협해 들어가는 존재가 만주에서의 보통 조선인이 처한 현실이다”2)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기도 한다. 열강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주국을 독립국가로 표방하고 민족이 더불어 공존하는 오족협화정책을 구상해낸 일제가 안으로 강력하게 작품매체의 검열제도나 조선인 집단부락의 건설 같은 식민지 지배정책을 병행시킨 자체가 조선인의 반일정서나 저항의식 내지 민족의식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항일투쟁에 나서는 것만이 저항이라 한다면 일본어를 사용하고 창씨개명을 한 반도의 조선인은 모두가 친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극한의 시대 환경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민족의식을 키워왔던가 하는 주체적인 역사관으로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과 대응자세를 조명해 보는 것이 바람직한 분석 틀이 될 것이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식민시기에 만주 조선인들은 형식적으로나마 ‘합법적인 민족’으로 인정되는 공간에서 민족 공동체의식을 살리고자 했다. 새로운 고향을 개척하고 민족교육을 통해 후대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한 것 자체가 현실 극복의지 내지 민족의 강한 재생력을 보여준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를 형상화한 작품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일제의 동화정책에 의해 민족의 존재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우리말로 당당하게 쓰인 만주조선인문학은 그대로 식민주의 민족동화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민족문학의 지평을 확대․심화”시켜 “‘대륙’이라는 특이한 세계를 통하여 위기시대의 민족문제를 형상화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 이주한인의 억압되고 분열된 ‘삶의 현장’을 증언하여 문학사의 단절기를 극복하려한”3) 것이었다고 규정 할 수 있다면, 만주조선인문학은 일제 말 암흑기의 한국문학 연구에서 당당하게 한몫을 맡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긍정적인 진맥은 한국문학사의 맥을 잇는 작업일 것이고 한국문학으로 체현되는 한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생력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만주조선인문학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시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도 조선인’이 ‘중국 조선족’의 선대인 내지 조상이라면 ‘중국조선족문학’은 결국 ‘만주조선인문학’이 발전, 성장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라는 체제적 변화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연유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만주조선인문학’이 ‘해방 전 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이란 분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긍정적인 진맥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을 투명하게 밝히고 그 발전맥락과 체질적 변화과정을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올바르게 조명할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역시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규명과 발전방향의 제시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이 만주조선인문학의 연구중심에 작가 안수길과 그의 작품들이 놓여 있다. 󰡔북향󰡕, 󰡔싹트는 대지󰡕, 󰡔북원󰡕, 재만 각 민족 작품집, 󰡔북향보󰡕에 이르는 주요 창작성과를 보면 만주조선인문학에서의 안수길의 위치는 대뜸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대한 자리매김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질규명에 주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안수길만큼 ‘만주’라는 특수한 삶의 현장을 통하여, 또한 이주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그 변모를 통하여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문화 정립 과정을 투시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작품을 쓴 작가는 더러 있지만 안수길은 의도적으로 만주 이주민의 개척사를 다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초기 소설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창작이념이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한 식민지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북향정신’에 이어지면서 단순한 만주체험소설이나 망명문학이 아닌 정착지향의 향토문학으로 정립,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수길은 재만 시기 문학창작에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역사, 즉 이주-개척-수난의 삶의 모습과 열악한 환경이나 억압 속에서도 민족공동체로 살아남으려는 강한 극복의지와 부조의 뼈가 묻힌 땅에 기어이 뿌리 내리려는 유구한 역사의식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 만큼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와 시대를 조명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작가의 자세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현실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결과로 안수길을 사실주의 작가로 인정한 최경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한 견해이다. “안수길의 소설세계는 ‘작가’와 ‘작품’의 두 상관성에 의해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증언되고 있는 특징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가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존재양식을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수길의 이러한 작가적 역량과 문학성취 및 만주조선인문학의 형성과 성장을 위해 기울인 적극적인 노력은 아직까지도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의 근대문학 연구에서 제기되는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안수길이 간도시절에 창작한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안수길의 작품에 대해 친일딱지를 붙이는 연구자는 물론, 긍정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는 선행 연구자들도 대개는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과 그 국책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안수길 작품의 제한성과 친일성향을 찾아내고 ‘선의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기본 모습이었다. 발을 깎아 신에 맞추는 격으로 편협한 정치적 잣대로 문학텍스트의 내용담론을 이데올로기화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화는 문학 본체론적 연구인 문학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유기적 결합에 대한 텍스트 담론분석은 외면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현실 인식이나 이념 성찰은 작가의 신변배경이나 사상고백의 자료로 흔히 대체되고 텍스트의 이야기 담론분석은 피상적으로 고립적이고 기표적인 소재주의에 빠져버렸다. 또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고 내용 자체를 하나의 완정하고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예술형식을 외면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내용확인에 멈춤으로써 서사구조의 미학적 특성을 매몰하거나 심지어는 텍스트의 심층 논리구조를 오판하였다. 문학텍스트에서 의미담론이 어떻게 서사구조에 심층적으로 녹아 들어있는지 혹은 서사구조가 어떤 의미담론에 의해 미학적으로 직조되었는지 하는 시각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초점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만큼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서 연구될 수 없는 문학 본체론적 연구의 기본범주라고 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성 연구들에 대한 재고와 함께 만주조선인문학의 참 모습을 그 문학텍스트 속에서 구체적으로 조명해보려는 시점에서 출발하며, 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초점을 맞추고 그 텍스트의 심층적 의미담론과 미학적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에 집중하려 한다. 1.2 연구사 검토 만주조선인문학은 오랜 세월 동안 암장된 문화재로 남아 우리 문학사 연구에서 외면당하거나 망각되어 왔다. 남․북한의 문학 연구에서도 그랬거니와 중국조선족 문학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한의 경우는 오랜 냉전 속에서 공간 접근이 불가능했던 사정도 원인이겠지만, 만주조선인문학을 고작 만주를 배경으로 한 확장된 공간에서의 조선인의 식민 체험을 증언한 몇몇 작품이라는 한정된 시각에서 고찰하는데 멈추고 말았다. 북한이나 중국조선족의 경우는 식민지 시대 진보적 문학이라는 가치기준을 내세워 이른바 항일투쟁문학이나 반일문학에 연구초점을 맞추어왔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여러 학자와 비평가들이 만주이주민소설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중심으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펼쳤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중국 조선족 문인, 학자, 비평가들도 조선족문학의 사적 고찰이라는 시각에서 해방 전 문학에 관심을 갖고 만주조선인문학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그 접근방법에 따라 주로 작가의 사상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작가론과 작품의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주제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론의 경우, 연구자들이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 체험이라거나, 일제의 대륙 침략의 산물인 괴뢰만주국이 시대배경이라는 식민담론에 시각이 가려 대개 식민피해의식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연구는 식민지 시대 문학으로서의 친일과 반일, 일제 식민 통치 하의 괴뢰만주국의 국책에 대한 순응과 저항이라는 식민담론에 초점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친일, 국책순응이라거나 적어도 친일성향, 국책순응의 요소를 운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윤식은 “만주국 건국의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는 일이 만주개척이민사를 이해함에 중요한 요소”라는 식민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사실을 떠나면 만주문학은 물론이지만 안수길 문학의 특질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만주국 건국 이전의 개척자와 이후의 침략자라는 ‘변질’된 성격을 잣대로 일본영사관의 비호를 받는 조선인 이주민은 중국인 원주민을 위협하는 가해자 집단이고 따라서 그런 조선인 이주민을 그린 안수길의 「벼」는 친일문학이라고 확인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만 「벼」에 대한 성격 확인에 멈추지 않고 「벼」에 만주국문학으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상징의미를 매김으로써 이를 안수길의 이념 변질과 작품성향의 전향을 알리는 징표로 단정하고 있다.5) 신희교는 작품매체를 작품의 성격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결국 작가의 개성 내지 사상도 작품매체가 대변하는 시국 협력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안수길에 대하여 이른바 시대와 접촉하는 시국적 이야기를 다룬 작가의 세계관과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작가의 세계관이 상이한듯하다는 다소 애매한 이율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는 안수길의 단편소설 「목축기」를 일제의 이민정책에 순응하여 씌어진 작품이라고 인정하고 이효석의 「아자미의 장」, 정인택의 「뒤돌아보지 않으리」와 함께 어용소설의 코드에 분류해 넣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적 개성을 상실한 이러한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란 친일성향, 천황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과 시국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6) 조구호는 창작에 임한 안수길의 자세를 문제 삼으면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이 겪어야 했던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타개하려고 노력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작가의 사상적 변질을 비판하면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이 조선인 이주민의 생활을 발굴하여 민족의 수난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토성」 이전의 「새벽」에서만 해당된다고 인정한다. 작품의 창작 연대가 늦을수록 조선인 이주민의 생활상은 국책 순응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안수길의 초기 소설들은 일제의 식민지 입식정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친일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그리고 있어 민족문학으로 떳떳이 자리 매김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결론에 이르고 있는 전제가 “작품연구에 앞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작가의 전기를 살펴보니”로 시작되고 있어 문학텍스트 읽기에 앞서 벌써 문학 외적인 선입견이 서지 않았나 생각된다.7) 상기 연구자들은 만주국이 사실상의 일제식민지라는 국체 확인과 󰡔만선일보󰡕가 만주국 국책홍보매체라는 발표지의 성격 확인에 바로 직결시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 다수를 시국물(時局物), 국책순응작품 또는 친일작품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위의 연구자들에 반해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비롯하여,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오양호, 민현기, 최경호 등은 작가의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을 식민지인의 대응논리로써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문학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문학 본체론적 연구에 천착하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소재주의적인 내용 파악으로 근거 빈약한 변호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역시 친일성향이나 체제순응적인 요소를 조심스럽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의한 문학텍스트 자체의 미학적 특성은 그냥 외면해버리고 있다. 오양호는 만주조선인문학 유산을 한국문학사의 공백기를 논의하는 자리에 상정해서 마땅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 작품의 평가를 통념적인 식민담론분석을 통해 내림으로써 역시 피상적인 소재를 잡고 그 사상성에서 한계점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텍스트분석에서 인물의 갈등을 절대적인 대항의 갈등 구도로 파악하려 하였기에 이른바 긍정적인 인물을 전형으로 조명하여 선지자, 선각자, 지도자로서의 불투명성을 지적하고 그것을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점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현실 인식이 투철하고 투쟁 이념이 확고한 시대 초월의 주인공이 아니라, 암울한 삶의 현실에 부대끼면서 시대적 운명과 현실 극복이라는 생존 대응의 아픔을 감내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을 설정한 작가의 리얼리즘정신을 확인하면 그대로 사실무근의 공론이 되고 만다.8) 민현기는 “안수길 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작품에 강렬히 반영된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작품 외적인 시대 및 사회 현상과 거의 일치하는 작중 상황의 리얼한 제시 역시 식민지의 황폐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의 반영”이라고 변호하면서도 한편, 같은 서사요소에서 다시 작품의 한계를 찾아내어 지적하고 있다. 현실 반영론에 입각하여 억압의 시대에 대한 리얼한 묘사 자체가 식민지 현실에 대한 고발이라고 인정하지만, 결국 개별적인 사건 모사에 멈추고 마는 자연주의와 코드를 달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벼」 「토성」 「목축기」 「북향보」 등에 등장하는 식민지 정책을 결함으로 지적하면서 다만 작가의 시대 영합의 징후가 아니라 강요된 사항이나 검열 회피를 위한 방편쯤으로 용서하는 관용을 베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한계점에 대한 관용이 아니라 우선 문학텍스트에 대한 오독에서 기인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식민지 정책이 작품에 등장하였다 하여 그냥 소재 파악으로 친일성향이라고 낙인찍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재가 문학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 속에서 어떤 사건요소로 투입되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9) 최경호 역시 안수길을 일컬어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 이주한인의 억압되고 분열된 ‘삶의 현장’을 증언하여 문학사의 단절기를 극복하려한 작가”,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는 존재와 인간의 존재양식을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세계를 보여준 작가”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혼돈 속에서 자가당착의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도 안수길의 작품을 만주국 건국 전과 후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시대적 변화에 따른 안수길의 이념적 성찰을 고찰하려는 장치로써가 아니라 건국 전의 리얼리즘 문학세계와 건국 후의 변질된 정책순응문학을 대별하려는 잣대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잣대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작품평가를 벗어나서 통념적인 원리로써 당대의 모든 작품에 적용되기도 한다. 최경호도 안수길 소설은 억압당하고 있는 이주 한민족을 위안할 수 있다는 공리성을 제외하면 쓰지 말았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특히 안수길을 비롯한 재만 작가들이 쓴 만주국 건국 후 소설은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한국어로 창작하고 발표하였다는 점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문학 외적으로만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10) 보다시피 작가론의 시각에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접근하는 연구자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주장을 내고 있지만,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논점의 동일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즉, 이 시기의 작품을 두고 그것이 식민지 정책에 직결된 동조이었든 아니면 억압의 시대에 의한 피치 못할 순응이었든 정책수용의 혐의에 대한 공인이다. 그러니까 범법행위에 비유하면 범죄의 혐의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이 아니고 다만 양형을 위해 어떤 성질의 범죄인지를 확인하는, 이를테면 ‘고의’와 ‘과실’의 차이랄 수 있을 뿐이다. 중국 조선족 문학계의 연구도 이와 시각을 크게 달리 하지 않고 있다. 특히 2004년에 출판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제6권)은 “해방 전 중국조선족문학에서 친일문학과 친일성향이 드러난 작품을 수록”11)하고 있는데 단편소설 5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2편 등 소설 8편이 실린 가운데 안수길의 작품을 「새마을」, 「목축기」, 「토성」, 「북향보」 등 4편이나 리스트에 올리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안수길이 서 있을  때, 이와 같은 결론은 그대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부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또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 조선족문학의 원형질이라고 할 때, 이는 중국조선족 문학의 문학사적인 정체성 연구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의 작가론을 비롯한 이런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첫째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시원이 일제의 대륙 침략의 시기와 맞먹는다는 판단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규명에서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단정적인 판단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는 만주조선인문학이 바탕으로 하는 민족문학의 정체성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만주란 특수한 공간을 다만 작품의 시대배경으로 한정하여 식민지인의 이주지역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작가, 작품, 나아가서는 작중 인물로 확인되는 이주민의 현실인식에 대해 식민담론으로 분석하는데 열중하게 하였다. 결과는 유구한 이주역사와 함께 형성된 삶의 공간이라는 역사의식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총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만주조선인문학이라는 특수한 문학범주가 가지는 성격 특성과 역사적인 존재 의미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역사 회고적인 시대인식으로 통념적인 식민담론에 머물고 만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이 나타내는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연구사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만주조선인문학이 본질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주제론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만주조선인문학이라는 특수한 문학범주에 대한 성격 규명과 직결되는 작업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우선 만주를 단순히 작품의 시대배경으로 한정하지 않고 만주조선인문학이 산생하게 되는 토대, 만주조선인문학의 주제를 양산하는 원천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만주의 의미가 곧 만주조선인문학의 존재가치와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의 의미는 구체적인 문학작품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외면할 때 만주는 일제 식민 통치 하의 괴뢰만주국이라는 현실적 의미만 남게 되고 그런 시대배경에서 산출된 만주조선인문학 자체가 친일과 반일, 순응과 역행이라는 식민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주제론은 만주란 특수한 곳이 만주국의 이러한 시대적인 현실 의미를 초월하여 만주 조선인 이주민과 역사적인 친화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른바 친일성향이나 국책순응의 혐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친화력에 의해 정착의지의 한 방편으로 해명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덕준은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의 성격을 우선 조선인의 이주․정착사라고 규명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문학텍스트에 접근함으로써 역사의식에 토대한 현실인식으로 안수길 작품 속에 내재하는 길항 관계를 밝혀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역사의식으로부터 출발한 이러한 현실인식은, 안수길의 ‘어떻게 살 것인가’도 결국 조선인 사회의 정착의지를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함으로써 안수길의 작가적 이념의 역사 지평을 본래의 모습대로 밝힐 수 있었다.12) 김광민은 만주 공간의 특수성이 안수길 문학이 탄생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그의 문학의 주제로 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만주를 다만 안수길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판단했던 기성 연구들의 가벼운 결론을 넘어서서 그것을 인물 행위의 동기와 사건의 계기 자체에 편입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와 계기의 토대가 공간에 대한 애착에 두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역시 다양한 경험을 통한 특성화된 공간이라는 역사의식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반적으로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만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이상적이고 민족적인 공간으로서의 만주를 발견”하고 있다.13) 도애경은 이주민을 다룬 작품이 대부분인 간도 문학에서 공간 문제는 대단히 독특하고 의미심장함을 강조한다. 조국이 아닌 낯선 공간임에도 그것이 단지 소재나 배경에 머물지 않고 주제를 이끌어내고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주도적으로 발생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낯선 공간을 익숙하고 친밀한 곳으로 장소화하는 인물들의 이해와 의미화를 우리 민족의 만주이주 역사와 밀착시켜 밝힌다. 나아가서 만주국은 일제 괴뢰정권이었으면서도 중국, 일본, 조선인, 재만 조선인이라는 부동한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함을 지적하고 재만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만주국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담긴 생존의 공간이었음을 확인한다.14) 정현숙은 안수길의 만주조선인소설의 문학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만주는 단순한 지정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이라는 이중의 억압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터전이고 정치적 공간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안수길의 작품 속에 내재하는, 만주국 정책을 수용하는 담론과 민족의 자립적 정착을 확보하려는 발화가 양립되는 길항관계를 밝혀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특히 이주민의 정착의지가 선조들의 도혼(稻魂)을 핵심으로 하는 ‘북향정신’에 의한 현실 극복의지임을 확인함으로써, ‘협화정신’을 강조하는 현실에서 민족 단위의 생존 내지 정착의 가능성과 그 의미를 역사의식에 토대한 주체적인 민족 공동체의식에서 파악하고 있다.15) 이러한 주제론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총체적인 성격 특성과 존재 의미를 식민담론보다 훨씬 넓은, 포괄적인 역사범주에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주제론도 결국 내용적 측면에 많이 집착하다보니 문학텍스트에 대한 문학 본체론적 연구를 외면하거나 홀시 하고 있다. 결과 작품의 의미담론을 서사구조와의 조화 속에서 확인하지 못하거나 유기적인 서사구조 속에 구슬처럼 꿰어진 서사요소를 소재주의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문학작품의 미학적 특성을 본래의 모습에서 밝히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의미담론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서사구조는 단순한 문학형식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서사구조에 녹아들어 있는 의미담론을 고립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론에 문예미학의 원리가 손상 받게 된다. 주제론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이라는 문학 본체론적 연구방법으로 문학텍스트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연구방향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방법도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 특성을 총체적으로 확인하고 그 존재 의미를 밝히는 것을 선행 작업으로 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은 이제 이러한 연구시점에서 1910년대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중국조선족 문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이주․정착사의 재구’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재만 조선인과 중국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조선족 문학의 원형질임을 밝힘으로써 중국조선족 문학의 문학사적 체계를 발생학적 차원에서 이주 및 정착문학으로 범주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만주조선인문학으로부터 시작된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문학사적인 발생, 발전, 성장의 총체적 흐름에서 파악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은 남, 북한 문학과 더불어 중국조선족 문학의 민족 문학사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범 민족문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화를 이루어냄으로써 민족문학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16) 상기의 연구사검토에서 우리는 몇 가지 깨치지 않으면 안 될 논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논제들은 만주조선인문학 내지 안수길의 창작세계에 대한 성격 확인을 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런 논제에 대한 재고와 이해는 안수길을 대표로 하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명하여 한국문학사에서의 주소를 확실하게 밝히고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을 민족의 주체적인 생명미학에서 찾으려는 바람직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논제는 첫째, 만주와 조선인의 역사적 관계이다. 만주는 안수길 작품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무대로서의 공간이기 전에 역사적 연원으로 조선인들의 삶의 한 공간이기도 한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확인은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생존욕구와 함께 정착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조상의 피땀과 ‘무덤’이 늘어나면서 그 산천에 대한 애정과 향토적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역사인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가뭄에 줄었다가도 장마에 다시 불어나는 강물처럼 집단무의식으로 인간의 사유와 행위방식을 규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이나 성격을, 이러한 유구한 역사의식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조명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식민지배에 의한 결과로 판단하다보면 조선인 이주민의 식민지인으로서의 의식의 분열 내지 이중성에서 식민지배에로의 공모 내지 또 다른 ‘야만인’을 발견하려는 가학심리 일면만을 일방적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전체적인 심리구조로 확인하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침략자에의 공모자임에 다름 아니고 조선인의 이주와 만주 발견은 ‘야만인’을 발견하려는 가학심리의 소산이고 “조선인 이민을 포함하여 일본인 농업이민의 활동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하였다”17)는 판단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판단에 토대하여 안수길의 작품에서 친일경향이나 국책 순응의 오점들을 들춰내기는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다. 둘째, 일제의 만주 침략과 조선인 이주민의 의식(신분을 포함)의 이중성 문제이다. 여기서는 식민지로서의 조선과 만주국, 식민지인으로서의 반도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만주나 조선이나 다 일제의 식민지라는 개념 일반에 표상적인 결론을 앞세워 식민지라는 동일한 기표 내에서 구체적인 대상물에 의한 기의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반도의 정책과 현실적 상황을 근거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과 성격을 재단하고 규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반도에서는 일본어로 창작된 친일문학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현실을 들어 만주조선인문학의 성질을 반도문학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기어이 친일경향이나 국책순응 문학으로 꼬집으려 하는 것이다. 셋째, 텍스트 읽기와 배경 찾기에서 제기되는 감정 개입이나 이론의 분별없는 이입, 또는 피상적이고 고립적인 소재주의의 문제이다. 어떤 시대 배경이나 작가의 전기, 역사적 사실 내지 시대적 의식, 심지어는 작품에 투입된 소재조차 그것이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주제를 포착하는데 근거로 가능한 것은 역시 텍스트 자체의 구조적 암시에서 말미암은 것이라야 할 것이다. 주인공의 성격발전과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점을 논증하기 위한 주관적이고 의도적인 인용이나, 텍스트를 떠난 관념적이거나 이념적인 판단에 감정을 개입시켜 식민피해의식의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이야 말로 작품에 대한 오독(誤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피상적인 소재주의에 빠져 이야기꺼리로서의 자료적인 소재와 서사구조의 구성요소로서의 장면적인 사건을 혼돈하면 보다 암시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담론에 의한 서사구조의 미학적 특성을 간과하는 실착을 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제들을 재고하고 정리하지 않고서는 한국 근대문학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만주조선인문학을 바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살과 동화의 위기 속에 질식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암흑기 바위틈을 비집고 가냘프게나마 우리 문학사의 맥을 이어가던, 굴절된 우리 문학의 원색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은 좀 더 긍정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연구에서 이 지점에 각별히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3 연구 목적과 연구 방법 본 논문은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학적 원형질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안수길의 초기소설들을 연구대상으로 잡는다. 그러나 중국조선족문학을 염두에 둔 이러한 연구가 결국 원류를 한반도 문화전통과 문학흐름에 두고 있는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로 확인하려는 시도인 만큼 민족문학의 확장작업의 일환으로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기성 연구들도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시선이 많이 집중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안수길의 소설이 만주조선인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연구사 검토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그 찬반을 아울러서 대개는 안수길 소설의 친일성향에 대한 확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안수길의 작품을 두고 그것이 식민정치나 시국정책에 직결된 동조이었든 아니면 절대적 강요에 의한 순응이었든 정책수용의 혐의에 대한 공인이다. 부정하는 논자들은 물론, 긍정하는 논자들조차 그의 소설이 친일성향이 아니면 적어도 국책순응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런대로’ 라는 관용의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혐의에 대한 긍부정의 논쟁이 아니고, 어떤 성질의 수용인지를 확인하는, 이를테면 ‘고의’와 ‘과실’의 차이를 논증하고 있을 뿐이다.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안수길이 서 있을 때 이와 같은 결론은 그대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부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라고 확인할 때 이와 같은 결론은 역시 중국조선족문학의 문학사적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연구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규명에 직결되는 작업이며 역시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 발전 성장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문학사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기성 연구들을 재검토하면서 형이상의 시대논리에 의한 정치 사회학적 비평보다는 좀 더 문학 본체론적으로 문학텍스트에 접근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목적에서 본 논문은 문학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유기적인 통합이라는 텍스트의 사회학적 분석방법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재조명해 보려 한다. 이는 문학작품의 미학적 특성을 텍스트의 담론분석을 통해 심층 확인함으로써 형이상의 시대논리에 의한 선입견을 잠재우고 언어기표적인 표층의미에 눈이 가릴 수 있는 소재주의를 극복해 보려는 작업이다. 결국 이러한 작업을 통해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의 미학적 특성을 그 본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로서의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바르게 규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일제 말 암흑기 한국문학의 적극적 성장을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안수길은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속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부터 창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첫 작품집 󰡔북원󰡕에 집대성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1944년 연길 예문당에서 출판된 이 작품집에는 「牧畜記」(강덕 10년)18), 「圓覺村」(강덕 8년), 「土城」(강덕 9년), 「한여름밤」(강덕 8년), 「바람」(강덕 10년), 「富億女」(강덕 4년), 「車中에서」(강덕 7년), 「함지쟁이영감」(강덕 3년), 「四號室」(강덕 7년), 「벼」(강덕 8년), 「새벽」(강덕 2년), 「새마을(續새벽)」(강덕 9년) 등 중․단편 12편이 실려 있다. 본 논문은 이들 작품 중에서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바 “在滿朝鮮人의 生活을 建國以前에 遡及하여서부터 起筆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斷片的으로 發掘記錄한것으로” “順序를 쪼처읽을때, 거기에自然히 時代的連結도 지어질 수 있는 것”19)이라는 「새벽」 「새마을」 「벼」 「원각촌」 「토성」 「목축기」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려 한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과 시대적 대응자세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밝혀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조상의 뼈를 묻은 이주민들이 민족 공동체의식에 의해 새로운 고향건설을 지향하는, 이른바 ‘북향정신’이 산생되기까지의 처절한 삶의 모습과 치열한 몸부림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리얼리즘의 기법을 문예 미학적으로 해석해볼 것이다. 기본 연구방법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점과 논제들에 대한 분석과 해결이 안수길의 소설세계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열쇠라는 데 착안하여 텍스트와 콘텍스트 상호 층위에서 먼저 텍스트 생산의 역사 사회적 조건을 역사․사회학적 분석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조명할 것이다. 이를테면 만주와 재만 조선인 이주민의 관계를 유구한 이민개척사와 그에 따라 형성된 역사의식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조명,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조선인 이주민의 역사의식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식민지배에 의한 강제이주민의 현실 인식 사이에 어떤 연결과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밝혀볼 것이다. 따라서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인으로 전락한 재만 조선인 이주민의 복잡한 신분과 착종된 의식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며, 이런 변질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가를 역사적으로 증언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의 대륙 침략을 견제하려는 중국 당국의 배일사상과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만주를 점령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확장 정책의 대결 사이에 끼여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이중으로 심한 박해를 받았던 이주민의 처참한 삶을 고발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조명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로 전락한 ‘간도’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할 것을 강요받게 된”20) 안수길 소설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의식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식을 정착의지로 키워갔는가를 살펴보는데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식민지로서의 조선과 만주국, 식민지인으로서의 반도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정치․사회학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본질적으로는 만주나 조선이나 일제의 식민지라는 개념을 넘어서, 독립국가인 괴뢰 만주국과 철저한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 있던 조선의 통치 질서 간의 차이를 살펴보려 한다. 그리하여 ‘국민’과 식민지인, ‘오족협화’와 민족동화정책 등, 차별적인 정치 환경에 의하여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 이주민, 조선 반도의 문학과 만주조선인문학의 생존 양상과 존재가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할 것이다. 단순히 표면적인 결론을 앞세워 식민지라는 동일한 기표 내에서 구체적인 대상물에 의한 기의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반도의 동화정책, 식민지배의 현실적 상황 및 일본어로 창작된 친일문학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현실을 근거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 내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재단하고 규명하려는 오류를 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분석은, 신분적으로 복잡할 수밖에 없었던 안수길 소설의 주인공 내지 등장인물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또한 반도를 눈금으로 만주조선인문학의 성질을 반도문학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기어이 친일경향이나 국책순응 문학으로 단정 지으려는 견해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안수길의 작품세계를 위시한 만주조선인문학의 시대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분석은 마침내 텍스트를 떠난 관념적이거나 이념적인 판단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식민피해의식의 과잉반응을 극복시킬 것이다. 이러한 논거를 바탕으로 무엇보다 텍스트 읽기에 주목하여 소설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대해 사회비평원리로 분석하고 성찰할 것이다. 소설텍스트 구조에 관심을 집중하는 “텍스트의 사회학”으로서의 사회비평21)자세는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적 판단에 급급하여 작품이 창조해낸 미적 대상을 외면 내지 무시하는 편향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화자-해설자, 주인공-행위자의 복합적인 의미 층위를 인물설정, 시점선택, 플롯의 전개 등을 통해 확인하고, 인물들의 성격과 사건의 전개양상에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을 포착하도록 할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이 그 예술적 생명력을 과시하면서 만주조선인문학과 함께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 되고 나아가 한국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데 당당하게 한몫을 하고 있음을 증언할 것이다.     2. 재만 조선인 사회와 안수길의 현실 인식 간도를 포함한 만주가 만주조선인문학의 발생, 성장의 문화적 토양이고 공간이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만주조선인문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만주국의 건국과 함께 바야흐로 대륙 침략을 획책하던 시기와 맞먹는다. 이에 앞서 간도를 포함한 만주와 조선인의 관계는 다만 일제 식민지배에 의한 결과가 아니고,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일제의 이민정책에 의한 피해의식에 앞서 신개지개척이라는 개척의식이 이주민 의식의 역사적인 원류라는 걸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적 관계를 외면할 때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이나 성격을 일제의 침략정책과 식민지배에 의한 결과물로만 판단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전체적인 심리구조와 역사의식은, 만주는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땅이고 피와 땀이 스며든 삶의 현장이고 뼈가 묻힌 곳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찍 만주개척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인 이주민이기에 나중에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지 확장정책의 희생물로 강제 이주했거나 본의 아니게 이용된 경우에도 주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땅을 찾아, 살길을 찾아 이민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착에의 노력은 조상이 피와 땀을 쏟고 뼈를 묻은 곳에 발을 딛고 서려는 비장한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주체적 성격을 긍정하여 한국문학사의 맥을 정직하게 이어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 중국 조선족의 삶의 원형질과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근원이 되어 역사성과 함께 현실적 의의가 큰 것이다. 2.1 역사의 만주와 현실의 만주국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뒤, 강희제는 만주인의 관내로의 대거 이동을 기회로 타민족이 침투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른바 청조의 발상지이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만주를 봉금시키기 위해 유조변장(柳條邊牆)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북쪽과 남쪽은 완전히 열려져 있어서 조선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인삼을 채취하거나 모피를 얻으려고 월경하여 압록강 북쪽으로 잠입하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탈과 관청의 가렴주구를 못 이겨 호구지책으로 만주로 넘어가 미개척지대에 괭이를 박고 잔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정치․경제․사회 등의 원인으로 만주로의 조선인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조선과 청(靑)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두 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정책을 세웠으나 “조선의 북변(北邊)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은 그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북변으로 이주해 가서도 관(官)의 가렴주구에 시달려 생계를 보장받지 못했던 조선 주민들로서는 살기 위한 지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2) 월강하는 자들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고 청(靑)으로부터는 위압적인 항의를 받게 되자 조선 현종 때는 월강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극형에도 불구하고 월강하는 자가 더욱 늘어만 갔다.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살길이 막힌 궁민(窮民)들이 대거 월강함으로써 조정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청국이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알고 1883년(고종 20년)에 토문강 이북과 이서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조선인들을 내쫓으려 하자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과 두만강의 변민들은 기록과 구비(口碑)로 내려오던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고 종성(鍾城)부사 이정래(李正來)한테 돈화현에 조회하여 국경을 바로잡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그 후 분규를 거듭했던 간도문제의 발단이었다. 국경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현안으로 있는 가운데 청국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머리를 땋고 청복을 입고 지세를 납부할 것을 강요하였고 조선인들은 한사코 이를 거절하였다. 조선 조정도 간도지방에 대한 대응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경문제가 결국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와 대륙 침략정책에 의해 계산적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이상에서 대략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학정과 재해와 가난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이른바 ‘신개지개척’에 나선 것이 조선조 말 이주민의 원류였다.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06년 2월에 일본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외교권 상실과 함께 간접지배를 통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정치가 시작되었고, 1910년 8월에 이른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어 총독정치가 행해지면서 일제의 직접적인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3) 이때로부터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성격에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경제적 원인이든, 정치적 원인이든, 아니면 사회적 원인이든 외세의 침략과 억압에 의한 고향상실이란 식민피해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초기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일제에 대한 저항요소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한일합방(1910)과 3.1일 운동이 일어난 해(1919)에 만주로의 이주가 격증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1910년에서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만주는 사실상 독립단체나 독립군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는 사실이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까지가 중국이 조선인 이주를 정책적으로 견제하고 그 전에 이주한 조선인에 대해 제한, 탄압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1910년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되던 해이고 1931년 만주사변 전까지는 만주지역이 의연히 중국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중국 관헌의 시각에서는 일제 식민지배 하의 조선인은 더는 정치적 색깔을 띠지 않았던 그 전의 빈궁한 조선이민만이 아니었다. 특히 일제의 대륙 침략야심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만주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됨에 따라 조선인 이민이 일제의 만주침략의 직․간접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많은 시련과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산 사람은 죽지도 살지도 못할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와 관헌의 판단을 입증하듯이 일제는 1932년 괴뢰 만주국을 건립하자 만주를 대륙 침략의 든든한 발판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 일본화의 근간으로 50만의 일본인을 이주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후에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전선의 병력 확충과 일본 국내 노동력 결핍 등으로 하여 이 일본인 식민계획은 조선인 농업이민으로 대용하는 조선인 식민계획으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조선인 농업이민 식민계획에 따른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경우라도 그 대부분은 일제 식민계획의 직접적인 동조자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식민계획에 앞서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로 인한 농촌의 과잉인구, 조선식민지에 대한 일본인 식민정책과 그로 인한 조선인의 실향 및 전쟁 때문에 갈수록 늘어만 가는 기아수출(飢餓輸出)이 근본 원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77%의 소작농 및 자작 겸 소작농은 말하자면 과잉인구였다. 원칙적으로는 농촌을 떠나 노동자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한국에서는 농촌의 과잉인구를 흡수할 근대산업의 발전이 늦었기 때문에 이들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었다.”24) “과잉인구가 국내로부터 넘쳐 나오는 부분인 이른바 해외유민(海外流民)이 있었다. 이민(移民)이란 말은 약간 고상하고 차라리 유민이라 함이 적당할 것 같다. 이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만주와 시베리아였다.”25) 이러한 사정으로 일제의 이민정책으로 인한 조선인 이주민의 양적 증대도 역시 땅을 잃고 고향에서 쫓긴 유민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일제의 이민정책으로 인해 만주 이주가 “합법적인 출경”으로 쉬워졌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적으로 보면 일제의 식민계획의 구도라 보겠지만, 조선인 이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식민정책을 이용한 삶의 추구 내지 선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유민들의 만주 이주 후의 삶의 자세와 의식구조는 식민지 이주민으로서의 이중성을 띠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부조 이주민의 역사의식과 맥을 같이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중국 정부, 관헌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인에 대한 신분확인을 다르게 하면서,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대해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주권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조선 이주민은 살길을 찾아온 유민이라고 해도 일제는 치외법권을 행사하여 만주의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력 확장을 하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대해 중국이 취한 태도는 처음부터 무단적이고 탄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태도는 자국의 실정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었다. 청조가 ‘만주는 청조의 발상지이니 오직 청조의 명예를 위해 보전되어야 하기에 한인(漢人)과 조선인(朝鮮人)과 같은 다른 종족(種族)은 들어오지 못한다’면서 봉금령을 실시하던 때가 이른바 쇄국시대(鎖國時代)이다. 이는 후기 한인과 조선인들의 이주에 신개지개척(新開地開拓)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청조와 조선 조정이 통치력과 국력이 약화되면서 한인과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막을 수 없었던 때가 이른바 묵허시대(黙許時代)이다. 대략 1890년으로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가 환영시대(歡迎時代)에 속한다. “이時代에 잇서서 中國官憲은經濟的利益을 獲得할만한莫大한處女地域을開發키爲하야 漢人朝鮮人의移住를歡迎하엿고 特히地方政府는 朝鮮人이米作을잘한다는理由로 그移住를獎勵하엿으며 滿洲에서 그처럼有利한作物을增殖하기爲하야 朝鮮移民에게는 먼저移住할만한優先權을주었다.”26) 그러나 일제가 1907년 8월에 간도 조선인 이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간도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 특히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서 조선인의 신분확인이 달라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인 만주 이주를 제한하거나 견제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탄압시대(彈壓時代)라 한다. 탄압시대는 1927년을 전후로 또 제한시대와 배척시대로 나눌 수 있다. 제한시대의 제한정책은 초기에 효력이 적고 중국 관헌들의 방임 등의 이유로 철저히 실행되지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1925년 6월 11일 봉천정부의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三矢宮松 간에 체결된 협약으로 조선인제한법강제실행법이 유효하게 되었다. 이 협약은 원래 만주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제재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즉 중국 측에서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축출하고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 인도할 것을 협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의 입장은 조선인을 이른바 치외법권으로부터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배척시대, 즉 1927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관헌이 조선인 이주민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고 가혹하게 취급하게 된 것은 동북에 대한 행정관리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만주에로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고 주권을 수호하려는 당위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의 억압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진 이주민이면서 또 일제의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게 된 재만 조선인 이주민은 그 특이하고 복잡한 신분으로 인해 오히려 일제의 침략을 견제하려는 중국 측과 만주를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대결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중국 관헌은 조선인에게서 소작권, 거주권, 이주허가증을 박탈하고 불법징수를 하였으며 아동교육을 방해하고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또 일제대로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낸다는 구실 밑에 조선인 이주민과 이주민부락에 대해 잔혹한 탄압과 살인을 감행하였다. 홍범도부대가 봉오동전투에서, 김좌진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준 후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일대의 한인촌락들을 대거 습격하였다. “이 때 불에 탄 가옥이 4천 800호, 학살당한 한국인이 3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을 ‘경신년참변(庚申年慘變)’이라고 한다.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피해는 3․1운동이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학살을 웃도는 것이었다.”27) 일제의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유로 중국 관헌으로부터 난폭하고 잔인한 박해를 받았는데, 이주민이면서도 조선의 식민지배에 대한 위험요소라는 이유로 결국은 또 일본 군경의 탄압을 받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처지는 참으로 처참한 것이었다. 이처럼 두 적대세력 사이에 아무런 정치적 보장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가 가장 절박한 생존문제였으며 복잡한 신분과 함께 의식의 분열 내지 이중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에 이어 1932년의 만주국 건국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로 하여금 실제적 지배자인 일제와 형식적 수행자인 중국인 사이에서 새로이 복잡하고 미묘한 신분을 얻게 하였다. 물론 이때에도 조선인 이주민은 만주족, 몽고족, 러시아족과는 달리 외래지배자인 일본인계에 조선인을 밀어붙이는 중국인들의 편견에 의해서는 항상 적대시의 대상이었으며, 이들 조선인 이주민을 대륙 침략의 ‘이용물’로 내몰면서도 조선 식민통치의 위험요소, 특히는 항일 세력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관동군에 의해서는 항상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독립한 만주국이라는 형상 수립을 위해 내세운 ‘왕도낙토’, ‘오족협화’의 ‘건국정신’은 세상에 만주국 내의 여러 민족들의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였기에 제도적 차원에서는 ‘국법’을 준수하는 이주민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 만주국에 대한 성격분석에 있어서는 일제의 괴뢰정권 내지 사실상의 식민지라는 데 집착함으로써 식민지배, 식민정책 하의 인간행위, 인간의식이라는 통념적인 식민담론분석을 모든 연구의 기본 틀로 삼았다. 물론 식민지화된 만주는 하나의 역사적 현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다. 식민지로서의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과 동질성을 띠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현실이지만 괴뢰나마 “독립”한 국가였다는 사실에 의한 차이 내지 이질성을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이 내지 이질성이 확인되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나 의식에 대한 분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식민지였으나 괴뢰정권의 형식으로나마 “독립”한 국가라는 의미 때문에 우선 배후의 실제적 지배자였던 일본인의 의식도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만주국은 중국 대륙의 실익을 다투고 있는 세계열강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득불 선택한 눈치보기식 식민체제였던 만큼 표면적인 독립국가 체제와 함께 정치 제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국가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뢰 만주국을 승인할 것인가의 여부는 일본과 열강이 만몽을 쟁탈하는 투쟁이기도 하였다. 19세기말 이래 일본은 열강과 쟁탈 가운데에서 남만주에서의 식민지 권익을 획득하였으나 이제는 전 만몽에 대한 패권을 쟁탈하게 된 것이다. 열강은 남만에서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였지만 일본이 전 만몽에서 패권을 확립하는 데에는 반대하여 일본과 만몽을 쟁탈하였다.”28) 이처럼 열강의 직접적인 이익이 관계되기 때문에 일제는 만주의 식민지화를 조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외무성은 일본이 멋대로 세워놓은 괴뢰 정권을 동북인이 전개한 독립 운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괴뢰정권 수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29)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만주사변의 해결방법으로 만주에 지방자치정부를 세우고 국제관리를 하는 방침을 내놓았을 때(이것 역시 중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저들 열강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입장이었다.) 상해주재 일본공사 重光葵는 반공반소정책을 들어 일제의 만몽침략에 구실을 달아주려고 하였다. 당시에 반공반소정책은 열강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까지를 포함한 공동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만주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결국 만주가 일본의 식민지임을 승인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만주에서의 열강들의 권익이 없어지기 때문에 열강들은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었다. 한편 중국 남경정부도 일본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는 무저항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만주국의 승인만은 강하게 거절하였다. 이와 같은 열강의 반대와 남경정부의 불승인으로 일제는 「이 시기 중국 본토로부터 분명하게 이탈하기 위해서는 명실공히 독립국가라고 할 필요가 있다」(󰡔現代史資料․滿洲事變󰡕, 第七卷, 東京, みすず書房, 1977. 189쪽-인용자 재인용)30)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력 확장에 팽창한 제국주의시대에 다른 열강들의 실익에 직접적인 손실을 준다면 식민지 확보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제국주의시기 세계열강들의 권익수호의 역학적 힘은 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일제는 만주국 건국이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으면서도 그 후 1945년 8월 종전이 될 때까지 만주국의 독립국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계속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열강의 입을 막고 열강의 반식민지였던 만주를 일본의 독점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이 선택한 것이 독립국이라는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이른바 “駐滿大使制”였다. 즉 국가외교를 표방하는 영사관제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만주국의 독립성을 인정받으려 하였던 것이다. 반도에선 식민지 폭압정치가 공공연할 수 있었으나 “독립국가”인 만주국에서는 대내외의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한 만주국인 만큼 세계열강의 눈을 속이고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와 정책 면에서 안팎이 전혀 다른 양면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독립 국가이고 대내적으로는 식민지라는 특수한 성격에 의해 요청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오족협화는 이러한 양면정치에 의한 만주국의 “민족정책”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일제의 통제와 지배하의 오족협화란 식민 지배민족과 식민지 피지배민족을 동일 층위에 놓고 세상의 눈을 속이려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도 낙토’ ‘민족 화합’이란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를 그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한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이고, 또한 일제의 만주 통치를 공고히 하는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민족 단위의 갈등과 투쟁은 사라진다.”31) 국가적으로 확립되고 외교적으로 수립했던, 이른바 여러 민족의 화합 정신으로 꾸려가는 ‘왕도 낙토’라는 이미지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와 문화적 형식을 통해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여러 민족의 문자로 된 신문, 잡지나 도서들이 발행될 수 있었다는 사정은 유형적인 문화시설 내지 실체들이 문화제도적인 측면에서 존재 공간을 제한적으로나마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내선일체(內鮮一體)로 민족동화까지 강요하던 식민지 조선의 경우와는 사정을 많이 달리하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본질은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민족 말살 정책이었던 만큼 사상․언론의 탄압과 통제에서 한 걸음 나아가 창씨개명과 언어말살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만주에는 한글 신문인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있었고 1937년 10월 21일에 그것이 통합, 󰡔만선일보󰡕로 되어 다른 민족어의 신문과 병존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떠올리면 오족협화의 국책은 유형적인 문화 시설 내지 실체의 차원에서도 민족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도에서 출판물을 통한 언어 침략 내지 민족 말살정책으로 한민족을 철저히 동화시키려 한 일제의 ‘노력’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 민족의 끈끈한 생명력과 바위틈을 뚫고서라도 기어이 솟아나려는 강한 자생력을 반증한다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또 만주에서의 표면적인 민족협화 정책과 유형적인 문화시설 내지 실체들의 합법적인 존재는 우리 민족의 민족성 추구에 본의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국내에서 일제가 철저한 동화정책을 실시할 때 만주국에서는 재만 조선인을 안으로는 은근히 일본인계에 넣어 독립적인 민족의 존재를 무시하려 하면서도 만주국의 ‘민족’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 문자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을 오족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주문인협회에 일인, 만인, 백계 러시아인은 있어도 조선인은 없었고 조선인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만주문단은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하였다. 이는 중국인들이 일본의 침략에 ‘공모’한 조선인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거나 혹은 일제의 ‘보호’를 받는(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출병 명목을 위한 농락물의 취급을 받는) 조선인을 섣불리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국권을 상실한 조선인 이주민은 반도의 조선인과 함께 조만간 동화되리라는 일본인의 계산으로 하여 비상설적인 모임이나 통계에서는 조선인을 따로 대우하지 않고 그냥 일본인계에 귀속시켜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인 작가는 만주인 작가의 작품들을 번역해 저의 잡지에 싣기도 하고 개인 작품집(물론 일역한 걸)도 내주기도 했으나 우리 작가와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우리 측에서도 구태여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32) 그러나 이러한 무관심이나 무시는 차라리 조선인 작가들이 소외된 중에 나름대로의 창작에 정진하고 민족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것은 또한 내선일체로 동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조선반도에서는 일본어 사용을 상용화하고 문학은 아예 전쟁문학, 시국문학으로 일색화하였던 데 반해 만주국에서는 오족협화의 국책에 의해 민족과 언어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다만 작품에 대해, 즉 작품의 소재나 사상에 대해서만 검열한 것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만주조선인문학이 많이 다루었던 조선인 이주민의 개척사, 수난사, 정착사가 일제의 만주침략과 식민지배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만주국 내에서 민족 지간의 갈등과 모순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것은 열강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만주를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와 전선 공급기지로 자리 매김하려는 일본 군국주의 전쟁 책략에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정권이고 식민지이면서도 조선반도와는 달리 특수한 존재이었기에, 국가적 독립성이나 국책적인 오족협화의 표면적인 작용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조선인문학은 짓밟힘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민들레처럼 끈질기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2.2 정착 의지와 북향정신 한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을 별도로 연구하여 그 작가의 창작성향이나 작품의 주제를 확인한다는 것은 자칫 문학 본체론적 특성을 외면하고 인식의 관념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작품매체의 성격으로 작품을 진단하는 경우만큼이나 오진할 수 있는 소지가 될 수도 있다. 작품을 떠나서는 작가도 일상을 살아가는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따라서 사회적 발언은 행위에 대한 과장된 포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에서의 인물형상과 그 형상의 행위 가능성에 의해 형식화되는 플롯은 때때로 작가의 시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이 곧 구체적인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한 작품에 대한 해석 내지 텍스트 분석에서 작가의 장외 주장이 절대적인 잣대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역시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과 전혀 무관한 객관적 존재는 아닐 것이다. 다만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 자체를 그냥 그대로 작품을 가늠하는 잣대로 확인하는 인식의 관념론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세계관이나 심리적 대응자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경 작품에서도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에 의한 경향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완성된 작품에서의 작가의 이념적 성찰의 성숙함을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에 대한 반증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때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을 포함한 신변자료는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배경자료만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작품의 전제적 조건 내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소지(素地)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작가의 장외 주장을 잣대로 하는 것과는 달리 완성된 작품의 결과로서 작가의 의식성향을 재확인하고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신변자료와 의식이나 이념은 개별적 작가의 창작 성향 내지 창작 자세에 따라 효과가 발생한다. 안수길의 경우, 이주민 사회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초기 소설세계를 의도적으로 이주, 개척, 정착이라는 주제로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자는 작가의 시대적 집념이나 역사의식 내지 현실 인식과 같은 것을 창작동기와 밀착시켜 밝혀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기에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을 소재로 창작한 작가들이 안수길 외에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대개는 그런 소재를 파편적으로 다룬데 지나지 않는다. 안수길처럼 그 삶의 현실에 몸을 담고 현장작가로서의 치열한 생존의식과 정착의지로부터 출발한 작가는 드물다. ‘북향정신’은 그의 이 시기 창작을 총 결산한 이념 성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지를 보여주는 “북향정신”은 이제 중국 조선족 지역사회의 영원한 주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정신적 창조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연구자의 과잉반응이나 확대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현실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거듭 확인하지만 ‘북향정신’은 안수길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역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투철한 인식에서 정제한 시대 초월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상들이 개척하고 피땀을 흘리고 뼈를 묻은 땅이라는 애정이 안수길에 의해 식민지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으로 개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와서 그것은 우리의 조상과 수많은 선대인들이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목숨을 바쳤다는 당당한 주인의식에서 ‘조선족 자치의 지역사회 정립’이라는 ‘제도적 이념’으로 승화되어 현실적 의의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향정신”이 과연 조선족 지역사회 형성과 발전,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현재형 내지 현주소를 가지고 중국 조선족 문화와 사회를 조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안수길의 작가적 역량과 투철한 역사의식,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학과 민족공동체 확립에 대한 기여를 크게 기리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 안수길은 간도시절의 소설 창작에서 이주민 사회를 하나의 창작무대로 선택하기에 앞서 그것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체험하고 역사 철학적인 사고와 시대적 인식에 고민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과 판단이 선택적으로 정리되고 체질화되면서 작가의 창작동기를 유발하고 창작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작가 안수길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큰 고민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작가의 시대적 성찰로서의 현실 인식이 궁극적으로는 세계관 내지 인생관에서 어떤 역사 철학적 의식에 바탕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근원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사회 실천적이고 현실대응적인 문제에 대한 사고라면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사회 본질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물음에 대한 해명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공중누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총체적인 역사의식과 투철한 시대인식에 토대한 시대적 성찰만이 “그것은 무엇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총체적이고 변증법적인 사유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역사 철학적 인식이 없었다면 안수길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현실 극복의지를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으로 정제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가들의 고찰방식 역시 원칙적으로 역사철학적이다. 그들이 비록 역사철학적 열망을 갖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그들 시기의 특수한 문제성을 캐내려고 추구하는 한 그들의 시각은 역사철학적이다.”33) 안수길 스스로도 이점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문학의 대상이 인간이고, 소설은 그 인간을 생활면에서 구체적으로 허구(虛構),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관심은 전연 인간에 있고, 그 생활에 있고, 그것의 표현에 대한 부심(腐心)에 있을 밖에 없는 일이다. 표현의 부면(部面)이 작품에 있어서의 예술이고 인간과 그 생활의 부면이 내용이 되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이 되는 인간 자체도 「그것이 무엇이냐」와 「어떻게 살 것인가」로 가려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방패의 양면같은 것이어서 그 한쪽만으로 작품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인데, 가령 전자에 치중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의 구명은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시사(示唆)를 그 작품에서 받을 수 있고 후자의 경우도 작가가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임하지 않을 때 그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한 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34) 따라서 작가의 ‘체질론’은 어떤 경우에도 이 중의 어느 한 측면에 대한 고립적인 주장이나 추구일수는 없다. 다만 창작동기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이다’는 모티프와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다’는 모티프로 크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그것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것의 미래를 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무엇인가’는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가 되는 것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이념 내지 지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안수길의 ‘체질론’ 내지 창작정신은 그의 삶의 경력이나 인격 형성과정과 무관할 수 없다. 안수길은 삶을 체험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인생을 고민하기 전인 학생시절에 작가의 꿈을 키우면서 서책을 통한 인격 형성과정을 거쳤었다. 그 중에서 그의 일생을 두고 좌우명이 된 것이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 사람만을 시인(是認)할 수 있다”는 구절이었다. 내가 「팡세」를 읽었을 때는 앞에 쓴 대로 20대의 전반이었고 그 무렵은 일정시대(日政時代)다. 그리고 그 무렵에 나는 굉장한 정열을 가지고 세계명작을 읽고 있던 소설가 지망자였다. 거기에 가정 형편과 좋지 못한 건강 때문에 학업도 중단하지 않아서는 안 되었던, 이를테면 불우한 시기였었다.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말이 그대로 내 마음에 먹혀 들어왔다. 불우한 문학청년인 나에게 이처럼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말이 있은 것 같지 않다.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 나는 이 말을 입 속에서 푸념처럼 뇌이면서 그 후에 또 겪지 않아서는 안 되었던 중병시기(重病時期)와  해방 전후와 오늘날까지의 격랑(激浪)의 현실을 용하게 헤엄쳐서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5) 물론 그것이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기까지에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의 식민지인의 처참한 삶의 현실, 그런 현실에서 살아나가려는 생존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가 밝힌 것처럼 애초에는 체질적으로 허약했던 그가 육체적 아픔을 극복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좌우명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수길은 1932년 아버지의 급환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가 용정에서 80여리 떨어진 팔도의 혜성학교에서 교사로 있게 된다. 그는 무리한 생활로 건강상황이 나빠져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향 함흥으로 가서 요양을 한다. 그리고 1940년 간장염으로 다시 한 번 요양을 하고, 1945년 악화된 건강으로 고향에 돌아가 죽을 각오를 하고 귀국한다. 끝내는 1977년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처럼 그는 병마의 시달림 속에서 생명의식을 자각하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구절은 작가 지망생의 탁상좌우명으로부터 이런 육체적 아픔 때문에 신변체험으로 자주 떠올리는 좌우명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격랑(激浪)의 현실을 용하게 헤엄쳐”나온 작가적 생활에서 마침내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재확인하고 사회적 현실 인식을 획득하였을 것이다. 즉 육체적 아픔에 대한 극복의지와 사회적 시련에 대한 극복의지가 정신적인 승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는 작가의 ‘체질론’으로 확인되고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철학적 사유의 바탕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의 성찰을 전제로 결국 ‘그것’에 대한 미래 확인이라면 “신음하면서”는 바로 육체적 아픔을 식민지인의 아픔에 비교하면서 사회 현실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역사 철학적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더듬어 찾는다!”는 그와 같은 “신음하면서”에 대한 본질적인 확인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듬어 찾는다!”는 작가의 이념과 지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정신적인 체질화가 ‘북향정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이주민 사회의 현실에 대한 안수길의 삶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체질이란 물론 자연인으로서의 생리적인 것이 아니고 그 작가의 정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일진대”, “나의 경우는 청소년시절을 만주 지방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인인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간도 용정(龍井)의 부모 옆으로 두만강을 건너가게 된 것은 1924년 봄, 그러니깐 내 나이 열네 살 때였다. 거기서 초등학교 5,6학년 2년 동안 공부하고 고향의 H고보에 입학, 서울․경도(京都)․동경(東京) 등지에서 학업을 닦기는 했으나 방학 때면 제2의 고향인 간도에서 지냈고, 더구나 첫 취직까지가 현지의 우리 말 신문사였고, 해방 직전 35세 때에 귀국하기까지 죽 그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36) 이처럼 한창 감수성이 뛰어난 열혈적인 성장기와 성숙기를 간도에서 살면서 기자생활을 해온 안수길이었던 만큼 입수된 생활소재나 객관적 관철에 그치고 마는 작가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개개의 소재발굴의 차원을 넘어 삶의 현장에 몸담고 신변체험으로 사회를 인식하고 확인할 때 보다 총체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사유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의 작품집 「북원(北原)에 수록되어 있는 「새벽」 「벼」 「목축기(牧畜記)」등등, 해방 전 재만시절의 소작 거의 전부가 동만주 지방에 살고 있는 우리 농민들의 생활을 발굴해, 「어떻게 살아 왔느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본 것이고, 그 무렵의 장편 「북향보(北鄕譜)」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 쓴 최초의 긴 이야기였다.”37) 사실 작가 안수길은 간도시절의 소설 창작에서 남달리 개개의 소재발굴보다는 이주, 개척, 정착이라는 이주민 사회의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발전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발전적이라는 의미는 안수길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 즉 만주 이주민 사회의 형성을 식민지 시대의 현상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역사의 한 단계로서 확인하였기에 이주민 사회의 형성, 정립, 발전에 대해 당위성을 찾아보려고 고민하였던 것이다. 안수길에게 있어 만주는 작품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무대로서의 공간이기 전에 벌써 역사적 연원으로 하여 조상 세대들이 삶의 한 공간으로 확인했던 곳이었다. 안수길은 이러한 역사의식의 확인이 당대를 살아가는 이주 조선인들로 하여금 의식 속에 현실 극복의 생존욕구와 함께 민족 공동체적인 정착의지를 심어주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조상의 피땀과 ‘무덤’이 늘어나면서 그 산천에 대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애정과 향토적 정서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을 정제해낼 수 있었다. 즉 정착의 가능성 문제가 아니라 당위적인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어떻게 정착하느냐를 고민하는 작가의 현실 인식의 결정체가 바로 ‘북향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안수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갖고 있다. 하여 이들의 만주에로의 이주, 개척, 정착은 조상 세대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고 훨씬 복잡한 상황이 얽혀져 있다. 역사의식에서 출발하는 민족 공동체적인 정착의지와는 달리 조선인 이주민은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의식적으로 동조하든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용되든 중국의 주권에 직․간접적으로 위협을 주게 되므로 중국 관헌들의 탄압과 박해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관헌의 대 조선인 이주민의 대응은 본질적으로는 일제의 대륙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일제의 대륙 침략의 움직임에 따라 중국 관헌들이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정책을 달리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또 일제대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해 식민지인으로서의 단속과 억압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한편 대륙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보호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국권마저 상실하고 두 적대 세력 사이에 무방비 상태로 무기력한 실향인의 모습을 드러낸 조선인 이주민은 일제 대륙 침략의 끄나풀이나 첨병이라는 누명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중국 관헌의 무차별적이고 치명적인 과잉탄압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일제의 힘에 기대보려는 본능적인 생명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인 조선인 이주민의 의식의 이중성도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 시대의 현실 인식에 입각한 안수길은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이상향을 건설할 수는 없었다. 역사의식에만 근거한 이상향을 건설하기에는 복잡하고 비타협적인 현실이 작가의 선택에 침묵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조선인 이주민의 복잡한 신분확인에 따른 시대적 제약에 눈이 가리어서 역사의식의 필연적인 흐름으로 예약되어진 미래를 잘라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조상의 피땀으로 비옥해지고 그들의 뼈가 묻혀 있는 산천은 결코 낯선 이국땅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역사의식과 시대현실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작가의 현실인식이었다. 여기서 안수길 소설의 성격적 특징을 사회 비판적인 문제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극복의지 내지 인격 성장을 다루는 리얼리즘 소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소설이 다만 형이하의 인간조건에 대한 현실 비판이라면 진정한 리얼리즘 소설은 그런 현실을 살아가고 극복해가는 인간의 몸부림 내지 자각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의 모순을 기본 갈등구조로 하고 이주 조선인의 정착 내지 지역 공동체의 결성을 실천해가는 주인공들의 현실 극복(나중에 ‘북향정신’으로 정립되었지만)의 비극적 양상을 조명해보게 될 것이다.     3. 만주이주민소설의 서사구조 특성 사회 현실이나 발표매체의 성격에 대하여 작가의 대응 내지 저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의 사상도 문학작품에서는 결국 언어를 질료로 하는,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완결된 구성을 통해서만 문학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오직 예술적으로 완성된 문학 텍스트 속에서만이 작가의 이념이나 신변 정보가 미학사상으로 승화하여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은 오직 문학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탐구를 통해서만이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현실을 넘어 인간의 삶의 본질을 파헤치는 문학의 본체론적 의미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작가 안수길의 현실인식에 대한 사상담론이나 억압의 특정 시대에 대한 식민담론을 잣대로 삼아 그의 작품을 판단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소설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문학작품과 작가와의 협화음 내지 불협화음을 들어볼 것이다. 이러한 담론방식과 분석방법은 문학 텍스트를 분석의 표본으로 삼는 만큼, 이론적으로는 문학 텍스트의 질료인 언어를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면서 텍스트 구성에 접근하는 피에르 지마의 󰡔문학의 사회비평론󰡕에 주로 기대고자 한다. 그러면서 루카치, 슈람케를 비롯한 다른 문학이론 대가들의 영향력 있는 이론들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피에르 지마는 우선 문학 텍스트가 언어활동 층위에서 어떻게 사회적․역사적인 문제들에 반응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텍스트의 사회학은 보완적인 두 개의 이론소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즉, 사회적 가치가 결코 언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어휘적, 의미적, 통사적 단위들이 집단의 이해관계를 분명히 진술하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투쟁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38) ‘단어’들의 사회적 성격이 집단적인 이해관계와 사회의 시대적인 갈등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시대적 산물로서의 단어의 사회학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은 언어활동인 문학 텍스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분석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출발의 기본 영역일 뿐이다. 텍스트구조 전체의 유기적인 구성을 파악하려면 필연코 텍스트 서사구조에 유기적으로 녹아 들어있는 의미담론에까지 확장해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텍스트의 의미적 토대가 텍스트의 서술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39)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의미론의 차원에 이르면 우리는 좀 더 확실하게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플롯의 분석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게 되고 화자-해설자, 주인공-행위자의 복합구조에 대한 심층 해부를 통해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의 모순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3.1 입체인물-식민 시대의 인물 풍속화 루카치의 주장을 따라 더듬어보면 소설은 역사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존재했던 내재적 유토피아가 미학적 범주에서 밀려나고 인간 내부의 간극과 심연이 첨예해지면서 만들어진 문학형식이다. 그러니까 소설에서의 주인공의 삶의 자세나 목적 추구는 인간 내부의 간극과 심연이 메울 수 없이 첨예해지면서 고향을 상실한 영혼이 삶의 총체성을 찾아나서는 심리적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 상황이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는 모든 간극과 심연은 형상화 속에 흡수되어져야만 하며, 구성이라는 수단에 의해 감추어질 수도 없거니와 또 감추어져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소설에 있어서 형식을 규정하는 기본적 의도(Gesinnung)는 소설 주인공의 심리로서 객관화 된다. 즉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찾는 자인 것이다. 찾는다는 단순한 사실은, 목표나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직접적으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40) 물론 작가는 현실을 살고 있는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작가의 미학이념을 작가 특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관계를 설정한다. 이는 소설의 주인공의 행위는 다만 현실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평범한 인간의 일차원적인 행위기록이 아니라 작가가  문학 실천을 통해 인간의 삶이나 인생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 본질을 밝혀보는 미학이념의 형상적 구현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총체적인 형상성 등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역사 시대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준다는 문학 본체론적 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현실적인 인간관계의 질서에 맞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나 작중 인물의 행동이나 발언이 역사 시대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인식 가능하고 실천 가능하지 않을 때 독자들은 허구가 아닌 생경하고 벌거벗은 개념에 맛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자유의지에 의한 허구적인 상상물이면서도 또한 역사 시대적 인간관계의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피와 살이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수길의 창작집 󰡔북원󰡕에 수록된 소설의 사회 역사적 배경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의 정책이 심화되어 땅으로부터 뿌리 뽑힌 과잉인구가 늘어나면서 궁민들이 역사적 연원에서 이미 살길로 알려져 있었던 만주로 이주하던 시기(「새벽」, 「새마을」)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의 야심이 점차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일제의 치외법권의 보호 하에 있는 조선인 이주민들이 대륙 침략의 위험요소라는 이유로 중국 관헌으로부터 난폭하고 잔인한 박해를 받던 시기(「벼」)를 거친다. 마침내는 이른바 독립된 만주국의 허명 하에 점차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만주 땅에서, 이미 부조의 뼈를 묻은 이주민 후세들이 다시 역사의식에 기대인 정착의지와 민족 공동체 건설을 꿈꾸던 시기(「원각촌」, 「목축기」)에까지 이른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과 창작동기로부터 안수길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과정에 겪은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는 풍속화적인 입체인물들이다. 즉 작가 안수길은 일제 식민지 치하 내지 대륙 침략이라는 현실 인식에 투철하면서도 그 극복의지를 연연이 맥을 잇고 있는 역사의식의 승계 가능성에서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체인물의 설정은 초현실적인 원형 상징의 전형인물 구상이 불가능했던 사회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20년 6월 홍범도부대의 봉오동전투, 동년 10월 김좌진부대의 청산리전투에서 대첩을 올렸던 독립운동의 불길도 일제의 대토벌에 식어버리고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남에 따라 마침내 그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대를 반성하고 진보를 추구하고 초능력의 힘을 나타내면서 민중을 불러일으키는 전형적인 인물은 현실적으로 존재 불가능할 뿐더러 창작적으로도 허구 불가능한 사항이었다. 절대적 억압의 시대, 특히 국권마저 상실하고 민족이 동화되는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지인의 정지된 시간의 삶은 풍속적이고, 닫힌 공간의 저항은 내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의 정책과 수단에 의해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아 중국 관헌의 탄압 대상이 되었던 조선인 이주민은 복잡한 신분에 의해 강요된 선택의 갈림길에서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안수길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의 모순을 소설의 갈등 구도로 설정하고 사건과 현실 인식의 변화에 따라 양상을 달리할 수도 있는 입체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한 소설의 입체인물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면서도 사회의 시대적인 요청에 반응하여 특정 시대의 존재 양상을 보여주고 역사적인 변화 구도를 암시한다. 그러나 작가의 각성한 이념의 성찰이 결여할 때 이런 인물은 자칫 시대적 인식과는 무관한 별개의 개인일 뿐이다. 안수길은 투철한 역사의식과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있다. 안수길의 「새벽」으로부터 시작되는 간도시절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입체인물들이고 이주 동기나 이유가 각각으로 복잡한 이주민들이지만 모두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시대적 현실과 끈끈히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시대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새벽」은 한 이주민 가족이 이주생활에서 겪은 피눈물의 수난사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고향마저 잃은 식민지인은 그 어디를 가든 억압세력의 착취와 수탈과 박해와 탄압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특정 시대의 암흑상을 고발하고 있다. 만주는 일찍 조상들이 삶의 길을 열어 개척하던 피난처였다는 역사적 연원으로 하여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정든 고향에서마저 쫓기다시피 한 식민지인에게는 의연히 동경의 대상이 되어 유혹적이었다. “오랑캐영을 채못미처 동쪽으로 산골작으로 쪼차 드러가면 한십리쯤하여 두만강의 조고마한 지류가 흐르고있다. 이내물과 산이닥치는곳 만주면서도 훤한 벌판이아닌, 삼면이 산으로 둘려싸이고 두만강쪽이 겨우티인곳에 안윽이 자리잡은 마을이 M골이였다.”41) 그러나 이러한 동경은 어린 ‘나’의 마음에 새겨진 아름다운 고향과 대조되어 실향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고향은 함경남도 H읍S포구였다. 포구에는 동구스름한 섬이 셋이 조롱조롱 놓여 있어 경치도 좋고 물결이 잔잔하여 여름이면 미역감기 좋고 겨울이면 명태 잘잡히기로 유명한 곳이였다. 나는 무슨 까닭에 좋은 고향을 뒤로두고 이런 시산한곳으로 찾어오는지 그까닭을 도무지 알수없었다. 그저 아저씨가 멧해 전부터 간도에 와 있고 아버지는 그 아저씨를 믿고 이곳으로 오는 것임을 알었을 따름이였다.”42) 작가는 구구이 이들의 이주가 어떤 원인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린 ‘나’의 시각을 통한 선입견 없는 자연풍경의 대비 속에서 시대적 아픔을 가슴에 안고 그렇게 아름답고 정든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식민지인의 참담한 모습을 얼마든지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주민의 수난의 여정을 예시하는 듯 하는 이러한 대비적인 자연묘사는 그야말로 화자-해설자, 주인공-행위자의 복합구조, 즉 의미담론과 서사담론의 이중구조를 객관적 질서에 따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작가의 뛰어난 리얼리즘적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채로 자연의 대비에서 확인되는 평범한 주인공의 이민행위는, 어린 ‘나’의 눈에 찍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행성으로 하여 이민생활을 동경과 실망이 어린 갈등과 사건으로 점철하게 될 것임을 짐작해 보게 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나’의 어린 눈에 보인 그런 역행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 벌써 평범한(또는 개인적인) 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은 시대적 운명이 놓여있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현실 체험적인 입체인물인 주인공은 이주민생활에서 신변체험으로 부딪치게 되는 사건과 변화되는 현실 속에서 시대적 삶의 변화양상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새벽」의 주인공은 당시 만주 이주민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지팡살이로부터 이주민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이미 특정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인간관계와 시대적 현실과 무관한 삶을 살지 않게 된다. 지팡(地方=農場), 지팡주(地方主)와 지팡살이라는 단어는 만주 이주민 사회의 형성과 함께 태어난 신조어이다. 그만큼 이 단어들의 사회적 성격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생활 내지 삶의 현실과의 본질적인 연관 속에서만이 밝혀질 수 있는 것이고 조선인 이주민의 보편적 삶의 양상을 통해서만이 역사성과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단어들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신변체험적인 삶과 실제적으로 끈끈하게 밀착되어 있을 때 주인공의 성격은 사회 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지팡살이, 그것은 이제 스스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벗어나기 힘든 빚의 올가미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지팡살이는 또 벗어날 수 없는 빚이라는 올가미와 함께 인질이라는 악습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도록 순환적인 삶의 궤적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돈은 누이를 볼모로 쓴 것이였다. 박치만뿐 아니라 대개의 지팡주는 빗을 주는데 사람도 볼모잡었다. 사람도가 아니라 사람이면 더욱 좋다하였다. 가진 것이라고 돈 값에 가는 것이 없는 주민한테 무엇을 담보로 돈을 줄 것인가? 젊은 처녀나 젊 은안악은 그것이 가장 확실한 담보가 되지않을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중략) 주민들은 이 이방(異邦)의 괴습(怪習)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법이 어데 있나 하고들 모다 무슨 부정한 일을 하는 것같이 마음이 께름칙하였으나 그렇지않으면 돈을 돌려주지 않는데는 할 수가없었다. 설마 남의 처자를 빼아슬라구 이렇게 생각하였으나 그결과는 이따금 사실로 낱아나는 경우도 있었다.”43) 누이를 볼모로 하여 오년 안에 갚기로 하고 박치만한테서 빚을 낸 주인공이 삼년이 지나도록 늘어가는 빚에 이따금 나타나는 결과가 두려워 마침내 목숨 걸고 시작한 것이 소금밀수였다. “설마 남의 처자를 빼아슬라구”하던 생각이 빗나가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주인공은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사회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의 소금 밀수는 붙들면 총살이라는 현실임에도 목숨을 걸고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빚의 올가미를 씌우는 지팡살이와 그 악성순환으로 행해지는 인질이라는 치명적인 악습에 비장하게 맞서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갈등 구도는 주인공과 사회의 직접적 충돌에 있지 않다. 이는 붙들리면 총살당할 수도 있는 소금밀수사건이 박치만의 농간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만약 소설이 주인공과 사회의 직접적 충돌로 기본 갈등을 설정하였더라면 개념화된 도식적 인물을 통해 특정 시대에 대한 추상적인 역사 해석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벽」은 이 사건을 소설의 인물관계 속에서 삶의 구체적인 양상으로 전개시키고, 그 사건과 관련한 인간들의 심리와 행위를 통하여 특정 시대의 인간관계와 갈등을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소금밀수를 기본 갈동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주인공과 박치만의 갈등을 그려내면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소금밀수가 주인공을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지팡주 행세를 하고 있는 박치만이 애초에 지팡살이하는 주인공한테 던졌던 헤어 나올 수 없는 올가미를 주인공이 생각밖에도 목숨을 내건 소금밀수로 해제하게 된다는 사실에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소금밀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소금밀수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그것이 박치만이 던진 올가미를 해제해버리는 수단이라는데 비극의 불씨가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 소금밀수 사건은 주인공의 누이를 탐낸 박치만이 통치세력과 결탁하여 주인공을 올가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일 뿐이었다. 결국 소설의 기본갈등은 지팡, 지팡살이, 지팡주, 고리대, 인질이란 단어들로 구성되는 주인공과 박치만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심층 파악은 구체적인 사건의 소재적인 의미를 넘어서 사회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밝혀내는 작가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리얼리즘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인물묘사가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그 사건보다는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관계와 태도에 관심이 놓이며 바로 사건에 대한 그러한 관계나 태도를 통하여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고 특정 사회를 사는 인간의 성격과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다. 「새벽」은 주인공이 부딪치는 사건과 현실의 체험을 만주 조선인 이주민 생활의 본질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팡’, ‘지팡살이’, ‘지팡주’, ‘고리대’, ‘인질’이란 단어와 밀접히 연관시킴으로써 평범한 입체인물의 개인적 이주행위를 역사 시대적인 현실과 이어주고 있다. 이로써 소설의 인물은 특정 행위의 출발이 개인적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역사 시대적 환경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행동의 보편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물의 이주 동기 문제와 관련하여 선행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인물로는 「벼」에 나오는 박첨지를 들 수 있다. “이주민들의 이주 동기를 민족 비극의 근원”이 아닌 한 개인의 도덕적인 타락으로 돌림으로써 심각한 역사문제를 간과하였고, 이는 작가의 현실 인식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립운동이나 정치적 망명은 아닐지라도 가난으로 고향을 떠난 것까지는 역사문제로 봐줄 수 있지만 한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돌리는 것은 전혀 못 봐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타향으로 가는 데도 마치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별로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들떠있는 기분 묘사로 이어져 작가의 현실의식의 미숙함을 드러낸다.”44)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이 작품에서 근면한 농부인 박첨지가 딸의 죽음을 슬퍼하던 끝에 큰 타격을 받아 타락하고 한 여인에 빠져 가산마저 탕진할 수 있을지를 의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가 애지중지하고 시집보낼 준비까지 하던 딸을 동네에 퍼진 장질부사로 잃고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동네의 친구들이 그의 슬픔을 위로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 한 것도 의리에 통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향옥이라는 여인한테 빠지게 되고 마침내 타락하게 된 것만은 그 스스로의 병적 심리 때문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딸을 잃고 슬퍼하던 중 친구들의 알선으로 향옥이란 술집여자를 만나게 된 계기나 사건 서술을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이유는 없다. 사람의 실수나 후회는 결국 자신의 인격 완성과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으나, 사건 발생은 늘 우연적이거나 순간적일 수 있고 심지어는 억압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때 거길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하는 원망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타락의 현실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가능성의 확인과 함께 그런 타락이 가져온 결과에 관심을 가지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첨지는 고향에서 한우슴꺼리가 되어버린 것은 물론이였으나 그것보다도 그래도 머슴을 두고잇든 처지가 도리여 남의 머슴사리를 하지 안어서는 안될 형편이되자 향옥이와의 정에도 틈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홍덕호에게 편지를 자주 낸 것은 이때엿으며 홍덕호의 부름을 밧고 닷자곳자로 떠난 것도 이때문이였다.”45) 도덕적 타락은 “남의 머슴사리를 하지안어서는 안될 형편”이 된 원인일 뿐 만주 이주 행위를 선택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 동기는 역시 그런 도덕적 타락으로 가산을 탕진함으로써 “남의 머슴사리를 하지안어서는 안될 형편”이 된 가난이었다. 후회와 함께 다시 가난을 털고 잘 살아보려는 의욕에 떠올린 것이 “한살 젊었을때의 무궤도하였든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기왕 인연을맺었든 만주에서 재출발하여 돌을깨물면서라도 돈푼을쥐고 금의환향하자는 결심”46)을 다지며 만주로 간 친구이자 사돈인 홍덕호였다. 조상들에 의한 개척역사가 있고 선행한 사람들의 “성공담”으로 하여 만주는 의연히 궁민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비록 홍덕호나 박첨지같이 개인 사정으로 만주 이주를 행한 사람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 기본적인 이주 원인은 역시 가난이었다. 즉 고향의 궁색한 살림은 이향의 근본 원인이고 동기였다. 전체적인 가난은 그것 자체가 벌써 시대적인 것이다. 홍덕호나 박치만의 개인적 이유나 사정이야 어떻든지 바로 이런 전체적인 가난, 다시 말하면 역사적 시대적인 억압현실이 만주 이주 행위의 주류였기에 홍덕호나 박치만마저 그들 개개의 출발과는 상관없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시대적 발전 변화에 따라 변화 양상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작가는 이처럼 개인의 특정 행위마저 결코 역사적․시대적 환경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입체인물들로 하여금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시대적인 보편적 행위양식과 질서를 획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벼」에서 작가는 고향에서의 전체적인 빈궁양상을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시대적 원인은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삶의 모습임을, 그들이 만주에 와서 사실적으로 겪게 되는 삶의 모습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중적 신분 자체가 이를 표명하고 있다. 고향을 상실한 식민지인이면서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이주민이라는 신분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신분으로 하여 그들은 중국과 일본의 관계 변화에 따라 이중적 억압과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만주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유토피아’였던가. 작가는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두 축으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유토피아’의 시대적 실상을 파헤치려 하였다. 즉 작가는 개척할 수 있는 땅이라는 역사의식과 일제의 대륙 침략 야망이라는 변화된 시대 상황의 충돌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삶의 질과 변화의 양상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투철한 현실 인식으로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개인의 특정 행위나 동기와는 관계없이 만주는 조상들의 개척역사에 의해 더 나은 곳을 지향하는 이향민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이면서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이주민이라는 새로운 신분확인은 이민지 당국에 더는 순수한 이민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들에 대한 정책은 이들 이민들과는 관계없이 일본과의 대립관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벼」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 정부가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시하던 이른바 탄압시대에 놓여 있다. 중국 정부는 1890년으로부터 1910년에 이르는 이른바 환영시대(歡迎時代)에 순수한 한국 이민들에 대해 이주 우선권마저 주었었다. 그것은 당시 만주에는 경제이익이 막대할 처녀지가 많았는데, 조선인들이 수익성이 높은 벼농사를 잘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07년 8월에 간도 조선인 이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간도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 특히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서 조선인의 신분이 달라졌다. 그러자 중국 관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인 만주 이주를 제한하거나 견제하게 되고 이미 이주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해서도 잔혹한 탄압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탄압시대(彈壓時代)라고 하는데 탄압시대는 전기 제한시대(1910년에서 1926년까지)와 후기 배척시대(1927년부터 1931년 만주사변 전까지)로 나뉜다. 이 제한시대와 배척시대가 「벼」에서 각각 전장과 후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 제한시대 초기까지는 의연히 제한정책이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중국 관헌들은 그때까지 조선인 만주 이주는 무해할 뿐더러 경제이익까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관헌들의 방임 등으로 제한정책이 철저히 실행되지 못하다가, 1925년 6월 11일 봉천 정부의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三矢宮松 간에 체결된 협약으로 조선인제한법강제실행법이 유효하게 되었다. 이 협약에서의 일본의 목적은 조선인 민족독립 세력을 타격하려는데 있었으나 중국의 입장은 조선인을 이른바 치외법권으로부터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정한 시대배경에서 복잡한 신분으로 두 적대 세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조선인 이주민은 개개의 특정 행위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시대적 환경과 제약 속에서 민족 공동체의식과 본능적이고 원색적인 생명욕구의 갈등에 모대기면서 현실 극복의지를 키워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벼」에서 전장의 제한시대와 후장의 배척시대를 살면서 현실에 대응해가는 소설 속 인물들은 삶의 현실 속에서 변화되어가는 역사적 시대적 인물군상이다. 입체인물은 특징상 역사적 사건과  현실적 체험에 따라 변화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사건의 전개 뒤에 오게 되는 사회적 변화 양상은 이러한 인물의 성격 변화와 심리 자세에서 징조로 나타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건과 현실의 체험에 따라 변형이 가능한 미완의 진행형 인물인 입체인물은 사회의 변화나 시대의 발전 양상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이다. 「벼」의 홍덕호, 박치만, 찬수와 같은 주인공들의 이주 동기가 우연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그런 개인적 동기는 삶의 현장에서의 간접적인 인물묘사와 사건 위주의 서사방식에 의하여 개인의 삶의 조명보다는 개인이 겪는 사건을 통한 현실의 조명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의 심리적 동기 여부와는 상관없이, 외부세계의 힘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삶을 사는 주체 상실의 억압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시대적 모순은 통치세력과 이주민간의 모순이지 개개 이주민의 특정 행위에 따른 차별이 아니다. 어떤 동기의 이주민이든 일단 이주행렬의 일원이 된 그 순간부터 그 운명은 이주사와 끈끈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타력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이주조차 시대적인 힘의 중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적 자아가 훼손된 특정 시대의 특수 상황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찬수의 이주 동기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선각자 형상까지 문제로 삼는 데는 오히려 연구자의 담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담론방식이 용속하게도 작품의 주제에 대해 이념적으로 집착하고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관계로 확인하려는 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념 대결의 구도로 소설의 인간관계를 해석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방식은 소설의 의미담론구조를 외면한 채로 찬수를 각성하고 자각한 선각자로 확인하려고만 하기에 그의 이주 동기부터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찬수 역시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해 변화해가는 입체인물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원래부터 각성하고 자각한 선각자는 아니며 그의 이주 동기 역시 시대를 인식하고 억압 사회를 개변하려는 선구자의 비장한 행위는 아니었다. 동경유학을 하고 공립 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찬수는 신지식에 남 먼저 접촉한 선지자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의 그의 이상은 아이들한테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을 열심히 배워주는 것뿐이었다. 주로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닥치는 대로 자기가 아는 것을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찬수의 행위는 배워주는 자로서 배우는 자한테 가지는 지도자적 자각과 열정이었을 뿐 시대적 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이념적으로 각성한 선구자의 투쟁신념의 실천은 아니었다. 그가 반년을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전직까지 잃은 것도 이러한 신념의 실천적 결과가 아니라 동맹휴학의 주모자가 그의 집에 드나드는 ‘끄룹’이었든 관계로 배후의 책동을 하였을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회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선구자로서의 투쟁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 그가 본의 아니게 변을 당했기에 오히려 “일시적인 실수라고 할까 이러한 과거에 대한 완전한 결별을 꾀하기”조차 하는 것이었다. 이념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확고한 심념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 뜻밖의 봉변을 당했을 때 망연자실하거나 방향을 잃고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가 정신적 곤혹 속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피주의에 지배된 것도 거의 본능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연원으로 궁민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만주는 아직 찬수에게는 신변체험에 의하여 감각되지 않은 관념의 이상향이었다. 그리고 도피주의에 빠진 그에게 “툭티였을만주, 땅은 물론 공기마자환할만주”는 그의 정신의 질식을 타개하는 피난처였다. 혈육들이 십여 년간 이룩해놓은 제2응봉리, 부모, 부형친구 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맘대로 뛰놀고 맘대로 부르짖고 부조와 형제들과 함께 먹고 일하자”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고향을 등진 이주민들의 고난의 역사,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염색되는 만주의 실상은 그한테는 아직 차단된 정보였다. 그것은 이제 역사적 사건 및 신변체험과 함께 그의 정신적 곤혹과 방황을 초래하고 인생의 방향 선택을 요청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찬수의 만주행은 그 스스로 실수라고 인정하여 겪고 있는 정신적 질식에서 해탈하려는 도피행각에 지나지 않았다. 또 홍덕호 등이 후세의 교육을 근심하여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인재를 찾게 되었을 때에도 박치만을 통해 찬수에게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하였을 뿐 그를 지도자로 지목하여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수를 애초에 선각자, 선구자, 지도자의 성격으로 확인하는 연구 시점은 작중 인물 지간의 모순 갈등을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단순화하는 용속한 사회 정치학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찬수의 변화 양상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 몸을 담그면서 점차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 사이에 갈등을 겪고 마침내 개별적 특정 행위가 아닌, 시대 극복의 아픔과 선택에 몸부림치는 당대인의 본질적인 성격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찬수가 만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반성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책상 위에서 이루어진 시적인 환상과 즐기려했던 관념적인 유희가 현실과 엄청나게 큰 낙차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차가 클수록 아픔도 크고 충격 또한 큰 법이다. 현실을 두고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하고 각성한다는 것은 그의 앞날의 시련을 예시한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제한정책이 소현장과 같은 철저한 배일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민족주의자에 의해 강력하게 실천되면서 찬수와 마을 사람들은 탄압과 강제 추방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학교의 설립을 허락하지 않고 이미 세운 교실마저 폐쇄하려는 소현장의 본의는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세력의 대륙 확장의 연장선으로 인정하고 국내로부터 아주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만큼 탄압은 가혹하고 조선인 이주민은 생사의 판가름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전혀 다른 구제책이 없었다. 본능적인 생존욕구는 찬수로 하여금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라도 죽음의 고비를 넘기려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하게 하였다. 그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으로서는 역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본능적인 행위라고 할 것이다.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생존의식일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찬수라는 인물이 결코 시대인식에 철저히 각성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선구자나 영웅인물이 아니라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하여 변화하는 진행형의 인물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역사의식과 시대 현실의 갈등을 보여주고 복잡한 신분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 몸부림과 자각증상을 풍속화적으로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있어서 주인공의 신분이 사건과 환경 및 다른 인물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사회적 성격을 확인받을 때라야만 그의 행위는 역사적 시대적 특성을 지니고 객관적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원각촌」의 원보형상은 이런 인식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우선 원각촌의 구성원이 아니라 산판떠돌이이다. 따라서 이런 떠돌이가 ‘원각촌’과 어떻게 관계를 발생하는가 하는 것은 소설의 플롯의 합리성과 사건 전개의 객관적 진실성을 담보하는 기본 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만주개척이민사가 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때 원보는 이미 땅을 떠난 이민이다. 이민역사로 보면 땅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현상은 결코 만주개척이민사의 서막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원보는 이미 정착에 실의한 이주민 선각자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의에는 벌써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 어려움과 고통이 깔려 있다. 이런 어려움이나 고통은 그의 아내 금녀의 아버지가 만주인의 지팡살이를 살고 딸을 지팡주에게 백원 빚에 볼모로 잡혔다는 서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고 필요한 이외에 말이라고 없이 억세게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불신의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원보는 개인적 의미 또는 고정관념에 의한 떠돌이라는 성격보다는 특정한 역사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확인하는 것이 서사의 구조 상 바람직하다. 다음 원보의 아내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산판 떠돌이 원보의 재산이래야 통틀어 쾌마우재와 솥과 보퉁이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보존과 원색적인 종족보존의 차원에서 보면 아내는 원보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고 자기의 생명과 함께 하려는 삶의 그 무엇이다. 우선 가정을 지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금녀의 구출은 원보가 은근히 안정되고 행복한 정착생활에 대해 동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 원보가 지팡살이에서 생겨난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인질에서 금녀를 구해낸 것은 그런 비극적 현실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해낸 금녀를 생명을 걸고 지키려는 것은 그의 정착에 실의한 떠돌이 행위 속에는 오히려 현실 극복의지와 함께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끈질긴 정신적 지향의 강한 정착의식이 받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금녀는 원보의 정착지향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면서 또한 이제 그의 떠돌이인생의 사회적 원인을 반증하게 되는 부표(浮漂)라고 할 것이다. 하기에 소설에서는 금녀의 부정을 다루면서도 전혀 윤리도덕적인 시각에서 전개하지 않으며 원보도 아내가 부정해서가 아니라 사나이들이 나쁘다 하는 것이었다. 남성으로 상징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어린 아내를 간수하는 일”은 그 어디에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식민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국 어디도 정착할 수 없는 남의 땅이었던 식민지 사회에 대한 폭로인 것이다. 이미 그래서 들을 떠났다. 그러나 산판도 항상 위험하다. 그래서 유혈의 싸움도 간곳마다 있었고 생명이 위태한 경우도 한두 차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작품에서 도덕성을 검증할 본능적인 부정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아내는 그의 재산의 전부, 나아가 그의 생명의 일부분이었다. 이런 생명의 일부분인 아내를 마침내 ‘얼되놈' 한익상한테 빼앗기게 된다는 것은 당시의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부딪치게 되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필연적인 운명을 제시하는 듯싶다. 원보가 원각촌에 찾아든 것은 법당과 학교를 지을 나무를 벌목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아내를 산사람들 틈에 놓아두는 것이 위태한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작년 겨울까지 함께 산판에 있던 친구 춘삼이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함께 원각촌에 가서 농사를 짓자고 했을 때도 그는 거절하였었다. 그러던 그가 산판에서 청년과 유혈적인 결투를 하고 하루 동안 고민하던 끝에 벌목일이 있는 원각촌을 선택하고 짐을 꾸린 것이었다. 이는 그의 성격의 일관성에 어울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춘삼이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었고 그보다는 그의 성미에 맞는 벌목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아내의 주변에 대한 의혹에 날카로운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고 있는 그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나버릴 심리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와 한익상의 충돌은 우연한 것 같으나 사실은 지극히 운명적이고 특정한 시대적 의미와 객관적 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의지를 뿌리 뽑힌 원보가 항상 신변에 대해서 불신과 의혹의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고 유혈적인 결투에 생명까지 내거는 성격이라면 원각촌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는 원각촌의 ‘홋주인' 한익상은 눈앞의 이익이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챙기려 드는 ‘악종’이었다. 수화상극의 극단적 성격의 대결이 예상되는 대목이면서 결국은 원보가 지팡주한테 볼모로 잡혔던 금녀를 구해서 안전한 곳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다시금 ‘얼되놈'의 마수에서 구해내는 비장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건의 갈등구조를 암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지팡주의 볼모로부터 구해낸 금녀가 다시금 ‘얼되놈'의 마수에 걸리는 사건의 순환성은 곧 특정 시대의 역사적 현실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우선 한익상의 세력권 안에 들어온 원보는 그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한익상의 위협과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지방정권뿐만 아니라 마적과도 줄을 달고 있는 한익상은 원각촌 사람들이 저주하면서도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처럼 원각촌 구성원들의 머리위에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한 한익상이었기에 고립무원의 원보를 전혀 안중에 둘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익상으로 말하면 이것이 그의 목숨까지 잃게 하는 오만한 판단이었다. 그의 권세의 중압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는 원각촌의 구성원들과는 달리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원보는 자기의 삶의 일부분이 침해를 당하는 걸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익상이 당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억압세력의 형상이라면 그를 제거하고 다시 떠돌이를 시작하는 원보는 그러한 억압의 현실과 억압세력의 핍박으로 땅에서 뿌리 뽑힐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정착의지를 잃은 원보가 이른바 이상촌을 건설하는 원각촌에 와서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억압세력과 충돌한다는 서사구조는 결국 원각촌은 이상촌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억압세력의 존재는 원각촌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갈등구조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그만큼 개인으로서의 한익상의 죽음은 구조적 모순의 억압세력인 ‘홋주인’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억압세력이 존재하는 한 원보와 같은 뿌리 뽑힌 실향민은 영원히 평화로운 안식처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보의 형상은 전체적인 배경과 분위기와 함께 특정한 비극적 삶의 현실에서 악착스럽게 일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조선인 이주민의 끈질긴 생존의식과 심리지향적인 정착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기대어 조선인 이주민의 만주 정착의지를 강렬하게 내보이면서도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인이고 실향한 이주민이라는 현실 인식에 투철하여 비장한 현실 극복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는 “조선인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정신적인 안식처이며, 이것은 동족간의 반목과 갈등이 없는 조선인 사회 건설이라는 메시지”47)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원각촌」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억압세력이었던 ‘얼되놈'의 존재를 통하여 이상촌 건설에 대한 이념적 성찰을 하고 “동족간의 반목과 갈등이 없는 조선인 사회 건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목축기」는 주인공 찬호를 통하여 그러한 “메시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목축기」를 「원각촌」에 대한 직접적인 반성위에서 시도된, 이상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의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목축기」는 ‘얼되놈'이 존재하는 「원각촌」의 부정을 통하여 구상한 작가의 이념적인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그러한 단순비교는 「목축기」를 이념적인 이상주의 작품으로 잘못 확인하게 될 수 있다. 그런 잘못된 확인으로 하여 이른바 이상적인 목장을 건설하는 찬호는 시대순응적인 인물로 낙인찍히고 「목축기」는 국책문학 내지 친일문학으로까지 비판받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의 모순을 기본 갈등 구조로 하고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지 내지 지역공동체의 결성을 실천해가는 주인공들의 현실 극복의지를 특정 시대의 변화 양상과 주요 모순 갈등을 통하여 보여주려는 것이 작가의 리얼리즘적 창작 자세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언제나 역사 철학적인 이념 성찰에서는 정착 내지 제2 고향 건설을 모티프로 하면서도 특정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에서는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하여 변화하는 사회 갈등과 그에 대한 주인공의 극복의지를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주려 하였던 것이다. 미리 결론을 언급하면, 「목축기」는 「원각촌」에서의 ‘얼되놈'을 극복하였기에 이상촌을 건설할 수 있다는 작가의 이념 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모순과 사회 갈등을 통한 정착의 어려움과 현실 극복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주국 건국을 북방민족들의 독립투쟁의 결과물인 것처럼 꾸미고 만주국의 ‘독립국가’ 지위를 인정받으려고 한 일제는 세계열강들의 간섭을 막기 위해 치외법권 철폐, 만철부속지에 대한 행정권 이양이라는 외교적 연극을 연출하면서 대사제를 통해 안팎이 전혀 다른 사실적인 식민지화를 다그쳤다. 그리고 만주를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전초기지로 다져가려고 했던 일제는 이른바 오족협화라는 만주국의 ‘민족정책’을 실시하여 실제로는 식민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지간에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모순 갈등을 덮어 감추려 하였다. 즉 대사제로 식민지 통치를 위장하고 만주국 내의 여러 민족의 화합을 떠들어 식민지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과 갈등을 무마함으로써 만주 통치를 평화적 분위기 속에서 다그치려 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실 동일 위계선상에서 평등을 추구할 수 없었던 식민지인에 대한 식민 지배자의 지배와 수탈의 계산적인 책략이었다. 궁극적으로 민족 단위의 이익과 민족 공동체의식과 관계해서는 수탈과 억압의 힘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목축기」는 바로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의지와 식민지 통치에 의한 억압의 현실을 갈등구조로 설정하고 만주 땅에 기어이 조선인 이주민의 제2고향을 건설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민족 단위로 지배와 피지배의 불평등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식민지 사회에서 불가피적으로 겪게 되는 식민지 실향민의 운명적인 수난을 안타깝게 고소하고 있다. 유축농업이 당시 만주국의 정책으로 장려되는 것이라 하여 그것의 선택을 무턱대고 국책순응 나아가서 친일로 낙인찍을 수는 없다. 원주민들이 모르는 벼농사를 통해 만주 정착을 꾀하던 초기 이주민들의 정착의지나 변화된 시대상황에 따라 유축농업을 공동체 형성과 정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모두 다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의지를 특정시대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실현하려는 현실 극복의 방책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작가 안수길은 항상 입체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변화되는 시대 상황에 대응하는 주인공에 대한 동정과 비판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비정사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주변의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맞대결하는 투사가 아닌 입체인물은 사건 진행과 현실 체험 속에서 자체의 극복과 현실의 극복이라는 갈등을 동시에 겪으면서 시대의 변화 양상과 인간의 성장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체의 극복 속에는 작가의 사회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자체의 극복은 시대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하는 주체성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지극히 풍자적이다. 이때 주인공에 대한 풍자는 사회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찬호도 이런 인물이다. 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지를 대변하고 실천해가는 인물이면서도 결코 시대적으로 각성하고 현실 인식이 투철한 선구자형의 지도자는 아니다. 신분적으로 찬호는 정신적 계몽에 나설만한 교육도 못 받았고 그럴만한 경력도 쌓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벌써 일제의 단순 기술인력 양성 정책에 의해 생겨난 시대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그의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책의 혜택으로 배운 기술을 민족 공동체 건설에 바치려하고 있다는데 있었다. 이처럼 시대 현실을 투철하게 꿰뚫어보지 못하는 정신적 미숙함과 정착의지의 구현인 ‘와우산목장’ 건설이라는 실천적 행위사이에는 오직 투사적인 정신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시대적 갈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자-해설자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신미숙자의 천진하면서도 가냘픈 극복의 몸부림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이다. 애들을 위한 점에서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그가 결국 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고 교원생활에 실패하였다. 전문출신의 교원은 2~3 명밖에 없었다면서 그는 실제로 전문학교 출신과는 상관없이 한갓 대용 교원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건국후 성(省)의교육방침이 근로(勤勞)의방향으로 기우려질때, 거기에 순응키 위하여 학교당국에 간택받은것이 그였었다”48)는데 결국 이와 같이 돌려 앉히기를 당한 것은 교육방침에 대한 학교 당국의 대응자세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귀농사상이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그가 “교수방법과 더불어 그 공로에 자연 존경을 가지”게 되는 그런 교육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교육자가 아닌 그한테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이념 성찰에 의해 현실을 극복하려는 각성의 대응 논리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호소하던 그가 스스로 ‘귀농’하게 된 것도 농촌계몽을 위한 자각적인 실천운동이라기보다는 교육자로서의 실격에 의한 전문출신의 합리한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배운 지식을 만주 조선인 이주민을 위해 공헌하려는 그의 민족 공동체의식은 순수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백오십만동포의 팔할을 점령한 농촌은배운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것이다. 자기가 배운 전문지식으로 목축장을 꾸려 동포들을 위해 이상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가 종자돼지를 여드레 동안의 긴 기차 여행으로 고초를 겪으면서 멀리 두만강을 건너 조국에서 가져오는 장면도 이런 민족 공동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축농업의 국가정책을 이용하여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그의 실천 행위는 궁극적으로 식민지 통치 사회라는 만주국의 정체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로 하여 암초에 부딪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작품에서 그것은 ‘로우숭(老宋)’이 범의 피해를 당하는 이야기로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플롯의 논의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3.2 화자의 중립성-현실 극복의지의 확인 “허구적 세계는 작가의 의식 내용이 다른 중재 과정 없이 곧 바로 모방되어 독자 앞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자라고 하는 가변 렌즈를 통하여 독자의 의식 속으로 투사된다.”49) 허구 세계는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에 의해 창조된다. 소설이 허구에 의해 꾸며진다고 할 때 그것은 객관적인 사건기록이나 역사적인 인물전기와는 달리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 즉 객관적 사회와 현실적 인간관계에 대한 이념 성찰을 통한 이상적인 인물창조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인물은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일상적인 인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소설의 인물은 일상적인 인간모습의 모방이 아니라 일상적인 인물이 보기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념적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념적 창조물이라고 해서 결코 작가의 이념 성찰의 직접적인 표현일 수는 없고 삶의 현장에서 행동하는 인물이여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는 인물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 속에서만 행동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를 외면하고서는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또 소설의 인물이 일상적인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하거나 심지어는 어떤 사건에 아무런 개성도 없이 속물적으로 휘말려 있다면 독자는 그 소설을 보고 아무런 긴장이나 대립을 통한 재발견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란 결코 기성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가 동질성의 원리에 의해 새로운 합의를 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와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를 유기적으로 조절 결합하는 서사방식으로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을 들 수 있다. 이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가치판단을 억제하고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와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가 플롯이라는 소설의 갈등구조에서 합리적인 표현형식을 얻는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안수길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사를 주제로 하면서 민족의 공동체의식과 생존의식을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토대하여 정착의 극복의지인 ‘북향정신’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작품 창작에서 이와 같은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에 의해 시종 이데올로기적인 가치판단이나 이념적인 이상주의를 멀리하고 있다. 사실주의 대가다운 창작 자세라고 할 것이다. 「새벽」 「새마을」 「벼」에서는 물론 「원각촌」 「목축기」에 와서도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의 극복의지를 화자에게 임무 지우면서도 등장인물의 실천과 완성 가능성을 사건 발전과 시대적 변화 속에서 관찰하는 중립성을 지키게 하고 있다. 역사 철학적인 사유에 토대하여 초현실적인 의식을 지향하는 작가의 자유의지를 대변하면서도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해 변화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을 내세우는 화자-해설자의 이러한 중립성은 작가의 총체적인 의식성향을 반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작품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연주의적인 비속화를 경계 단속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화자의 중립성은 주요하게 화자의 신분(인칭), 위치(시점), 평가(어조)에 의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가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서 인물과 사건에 대한 화자의 직․간접적인 감정표출이 달라질 것이고 화자가 어떤 위치에서 인물과 사건을 관찰하는가에 따라 인물의 생동성과 사건의 신빙성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화자가 인물과 사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에 따라서 작가의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이 굴절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안수길의 󰡔북원󰡕에 수록된 소설들을 보면 작가는 투철한 역사의식과 냉철한 현실 인식으로 이념적 추구와 현실적 극복을 갈등구조로 하면서도 화자의 신분, 위치, 평가에서 다양한 서사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화자의 중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과 감정토로를 억제시키고 인물의 시대적 특성과 행위의 역사적 진실성을 보장하고 있다. 「새벽」 「새마을」은 일인칭 수법을 통하여 작가의 직접적인 감정 개입을 아예 차단하고 작중 인물인 화자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서사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신변체험적인 것 같은 공감각이 일어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일인칭 화자가 내부시점에서 중심 사건의 직접적인 역할자일 때 그의 사건 판단 내지 평가는 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 있다. 이때 그런 주인공의 주관 판단과 감정 표출에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데, 감정 억제를 못할 경우 자칫 행위적 화자를 통한 작가이념의 과잉 노출에 역사적 진실성을 손상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 안수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순진하고 분식할 줄 모르는 소년을 선택함으로써 화자를 통한 작가 이념의 과잉 노출을 차단하고 있다. 일인칭 화자가 현장체험의 생동성을 보여주면서도 이처럼 순진하고 분식할 줄 모르는 소년이기에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현장 증언의 신빙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설령 소년화자가 현장인물로서 내부시점을 갖고 때때로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주관 판단과 감정표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어른의 너그러움으로 관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소년은 사건 진행과 함께 행동하고 사유한다 하더라도 미성숙의 진행형 인간인 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처참하든 얼골! 절망에 다다른 얼골!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이러나지않고 될대로 되라는듯이 다리를 뻐더버리고 어린애가 트집부리는것같이 앉엇섰다. 큰일이 당장 이러나는것만 같었다. 나는 어머니와같이 소금을 처리할 생각은없이 너무도 겁에질리어 아버지무릎에엎듸어 울었다.”50) 「새벽」의 ‘나’는 집사대가 곧 들이닥칠 위기일발의 시각에 이제 그의 가정에 떨어질 그 액운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투명하게는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아버지의 “그처참하든 얼골! 절망에 다다른 얼골!”에서 본능적으로 큰일이 당장 일어나는 것만 같다고 느끼고 두려움에 울었을 뿐이었다. ‘나’는 뒤늦게 집에 돌아온 누이를 주먹으로 등을 쥐어박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고 악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집을 비운 어머니를 욕하는 아버지나 밖에 나가 있는 누이를 욕하는 어머니의 절박한 그런 심정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봉변을 당할 때 자기는 곁에 있었는데 누이는 부재했다는, 그래서 혼자 두려웠던 분풀이를 할 대상이라는 그저 그 정도였을 뿐이었다. “누이는 어쩔바를 모르면서 나를 달래였다. 누이는 그때 열여섯이였다. 나는 울다가 자버린 기억이 난다.”51) 마치도 투정질을 하던 심술 사나운 동생이 누이의 달램을 받고 조용히 잠이 들어버리는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다. 온 가정의 운명을 뒤엎어 놓게 될 불행한 사건이 이처럼 철부지 어린아이가 울다가 잠들어버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면으로 일단락을 짓게 됨으로써 그 어디에서도 작가나 화자가 주정토로를 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결코 감정에 인색하고 냉혈적인 작가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가정의 운명을 뒤바꿀 불행한 사건과 천진한 소년의 평화로운 모습의 대조 속에서 비극적 흥분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느끼고 격동하게 되는 정감 과정을 작가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었다. 「새마을」의 ‘나’는 「새벽」의 ‘나’이면서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작가가 “속새벽”이라고 일컬은 것만큼 「새마을」의 ‘나’는 사건의 연속성과 함께 틀림없이 「새벽」에서 「새마을」로 이사 온 ‘나’이다. 그러나 서술시점에서 보면 「새벽」의 ‘나’는 거의 외부시점에서만 한 중심 사건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관찰자일 뿐이라면 「새마을」의 ‘나’는 외부시점에서는 한 중심 사건을 목격 체험하는 관찰자이면서 내부시점에서는 또 다른 한 중심 사건을 진행해 가는 주인공이다. 다시 말하면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외부시점에서 관찰하는 서술적 화자이지만 병덕이를 통해, 그리고 삼손이를 통해 열심히 공부하는 ‘나’는 내부시점에서 행동하는 행위적 화자이다. 하기에 「새마을」의 나는 다만 어른들의 사회를 관망적인 태도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마을’이라는 그 특정한 성인 사회를 자신의 희망에 연관시켜 일종의 성찰적인 시각으로 투시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대한 민망, 아버지에게 대한 미안, 내 처지의 불우에 대한 여러가지 감정으로 가슴이 메인 나는 아버지의 달초가 내리는 사이 그저우는 것으로 가슴의 울적을 풀었을 뿐이였다.”52) 병덕이가 준 책에 정신이 팔려 어머니의 약을 다 태워버리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으면서 ‘나’는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역시 자기의 불우한 운명에 대해서도 서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병덕이를 부러워하면서 그래도 그가 가져다 준 교과서를 매일 외울 때의 하루가 의의 있고 즐거웠다. 그리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면서 자기의 불우한 처지를 돌이켜보는 ‘나’의 눈에 비치는 ‘새마을’이라는 성인사회는 그토록 초라하고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은 해란강(海蘭江)에 인접하여 있는 용정의 한구역이였다. 여기는 우리 같이 촌에서 이사나오는 사람, 조선서 처음, 빈주먹으로 들어오는 사람, 그 외 그날그날의 품파리로 연명해나가는 이를 터이면 빈민들로 대부분이 점령되여 있는 곳이였다. 오층대통이, 상업(商業) 문화(文化)의 각방면으로 용정의 조선사람이 이룩하여논 번화한 거리인데 반하여 이곳은 서민의거주구역으로 용정의 뒷골목이라고 할까. 집들이 그랬고 드나드는 사람의옷들이 그랬고 골목이 그랬고, 모도가 서민구역에 상응하는 분위기와 광경을 짜내는 것이였다.”53) 이와 같은 초라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어린 ‘나’의 행복과 희망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욕망과 희망은 어머니 약을 태우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책을 찢기고 삼손이 있는 야학을 다닌다고 집을 쫓겨나서 더욱 강렬한 삶의 신념으로 굳어져 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부시점에서 행동하는 행위적 화자는 이미 관찰자의 위치에서 사건을 해설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를 신변체험하는 중심인물의 위치에서 사건에 참여하는 만큼 어느 정도 자기의 주장이나 태도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불가피적으로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작가가 순진하고 분식할 줄 모르는 어린 소년을 행위적 화자로 설정하였기에 중립성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특정 시대 사회 모습은 다만 공부하고 싶은 소년의 간절한 구지의욕과 살아가는 초라한 삶의 현실을 대조하면서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서는 특정 시대의 삶의 풍속도를 볼 수 있으면서도 순진하고 미성숙한 소년화자한테서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성숙된 사회 비판을 요청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벽」이나 「새마을」에서 순진하고 분식을 모르는 소년화자를 해설자 내지 행위자로 내세웠다고 해서 사회에 대한 이념적 성찰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른바 화자의 중립성이란 것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이 뚜렷하지 못한 작가 이념의 한계성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화자의 중립성은 작가의 이념적 성찰과 역사적 현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사실주의 창작방법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을 구체적인 행위 질서 속에서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이나 「새마을」에서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이 소년화자라는 표상적인 포장을 벗겨내야만 드러난다는데 오히려 작품의 예술성이 숨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소년화자는 결국 이십년 후의 성숙한 청년의 기억장치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청년이 잊지 못하는 기억의 내용(소재선택)과 그 기억들에 대한 배열(플롯) 등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에서 작품의 심층적 의미담론을 확인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뒤에서 논할 몫이다. 「벼」 「원각촌」 「목축기」에서의 화자의 중립성은 전지적 화자가 외부시점에서는 분석적인 서사방식보다는 특정 시대 사회배경이나 인간관계를 사실적으로 제시하는 기록적인 서사방식을 취하고 내부시점에서는 사건 발전과 신변체험에 따르는 작중 인물의 변화양상을 분식 없이 추적하는 장면관찰의 서사방식을 취함으로써 지켜지고 있다. 「벼」에서 만주인 지주 방치원이 조선인 이주민을 환영한 것은 그가 조선에서 자수성가한 경력이 있어 조선말을 알고 조선인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역시 수전이 한전보다 이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그한테 수 십 만평의 황무지가 있었으나 원주민은 그런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인 이주민에게 있어서는 3년 무상대여라는 그렇게 후한 조건이 일확천금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당시의 중국 정부도 대체로 “인구가 희박하고 개간지역이 엄청나게 많은 만주”에서 조선 백성의 힘을 빌어서 수전을 풀어 황무지를 개간하는 “국력증강책”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주민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이주증(移住證)을 발급함으로서 월경(越境)하는 백성을 환영”하였던 것이다.54) 그러므로 이때의 갈등은 조선인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 있었다. 원주민은 이미 개간한 땅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사실상 수전을 모르기에 한전에 적당하지 않은 습지며 낮은 곳을 개간한다는 이주민들이 결국은 저들의 기경지를 점하고 근저로부터 그들의 생활을 위협할 것이라는 위구심에 적의를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불행하게 익수의 생명의 대가를 내기는 하였지만 수 십 만평의 황무지를 그냥 묵인대로 둘 수 없었던 방치원의 적극적인 화해와 이주민을 환영하던 중국 정부의 ‘국력증강책’으로 하여 그런대로 해소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인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은 백성 지간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오해에서 생긴 민간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타력으로나마 풀릴 수 있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동삼성(東三省)에 청천백일기가 나부”끼고 “삼민주의에의거한 힘센정치”가 펴지면서 배일사상으로 무장한 소현장과 같은 “국책에 충실하고 의식적인 정치를 행하”는 지방 관리에 의하여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제한, 배척 정책이 급진적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단순한 민간적 차원의 오해나 갈등이 아니라 국가 정책과 지방 관리에 의한 이와 같은 제한, 배척 내지 탄압은 국권을 상실하고 고향마저 잃어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조선인 이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민족 단위의 생존위기 앞에서 찬수는 학교를 짓지 못하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일본영사관의 힘을 빌어서라도 우선 죽음의 고비를 넘기려고 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격이었다. 결코 일제의 대륙 정책에 동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식민 지배를 받는 식민지인으로서 권력의 탄압에 생명 보호의 구원책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힘의 부름이었다. 그렇더라도 찬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념적으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초현실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만 나름대로 조선인 이주민들을 이끌고 ‘지혜롭게’ 당면한 위기를 넘기고 어떻게 하나 살아남으려는 생존의지와 민족 공동체의식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물론 거기에는 특정 시대에 대한 불투명한 인식과 함께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으로서의 이중성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 시대에 대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성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시대적 극복과 함께 자기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가 부각시키고 있는 찬수의 성격은 전형적인 지도자의 형상이 아니라 사건 진행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해가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뒤에서 분석되겠지만 소설의 중심 사건이 결코 찬수의 선택에 따라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텍스트의 서사구조로써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원각촌」은 “반도불교계의 선지식으로 유명한 해룡선사"가 만주에서도 조선인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에 토지를 사서 원각교의 이상촌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 제재부터 사회를 외면하는 듯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소설의 서두에서부터 원각촌은 벌써 사회와 차단되고 바깥세상과 등을 지고 돌아앉은 외딴 세상이다. 사회와 차단된 외딴 세상이고 보면 시초부터 화자의 사회적 발언은 억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보면, 화자는 반도 불교계의 선지식으로 유명한 해룡선사에 의해 사회와 동떨어진 외딴 곳에 속세와 무관한 원각교의 이상촌이 건설되는 과정에 ‘악종’인 한익상이 갖은 악행을 다 하여 이상촌 건설을 저애하다가 떠돌이 원보와 갈등이 생기면서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는 선악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바깥세상과 차단된 이곳은 워낙 자연환경부터 도화원 같은 이상촌을 건설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거기에 바깥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후한 조건으로 하여 원보가 찾아올 무렵 원각촌에는 벌써 사십여 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국(民國)에 입적하지 않은 사람은 토지를 살 수 없었으므로 해룡선사는 부득이 만주 태생이고 적도 가지고 있고 이곳 청산동에서 오래 살아온 한익상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익상은 이상촌의 ‘홋주인'(單主人)이 된 것이었다. ‘홋주인'이 된 한익상은 사들인 토지에 대한 반분의 소유권을 차지하게 되면서도 우선 2만원이 될지 하는 토지를 3만원이란 엄청난 가격으로 매매시켜 이익을 챙겼다. 이상촌에 대한 그의 검은 손은 여기서부터 뻗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토지 관리 겸 원각사 주지로 원각촌에 남은 화담법사에 의해 발각되고 질책을 받게 되자 앙심을 품고 공공연하게 원각촌민을 못살게 굴었다. 원각촌 동구에 큰 집을 짓고 사는 그는 원각촌과 바깥세상이 갈리는 문턱을 지키고 앉은 수호신이 아니라 악마였다. 그가 한번 얼씬하기만 하여도 무슨 벼락이든 하나씩은 떨어졌다. 희망을 품고 찾아온 촌민들에게 한익상은 ‘악종’이었고 그가 있는 한 그들은 안온하게 살 수가 없었다. 이런 ‘악종’과 떠돌이 원보의 만남은 아무래도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못된 짓으로 촌민들을 못살게 굴면서도 안하무인이던 한익상의 세력권 안에 들어선 원보는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보는 한익상의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 돌아서면 악담을 하는 촌민들과는 달랐다. 촌민들은 땅에 의해 한익상한테 매운 몸이었기에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생트집을 잡기 전에 미리 “닭마리나 음식같은것을 갖어다 받히고 그의 성미를 눅이는수단으로 겨우 미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상 신변위험에 날카로운 눈길을 하고 있는 원보는 어떤 적수라도 언제든지 대항할 수 있는 처지였다. 떠돌이를 하면서 신변에 위험이 있을 때마다 싸우고는 떠나던 그였던지라 한익상은 결코 남달리 대항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원보가 청년과의 유혈 격투를 겪은 후 그곳 산판을 떠나는 행동은 결코 그의 상투적인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벌목 일손을 구한다는 ‘구직광고’에 원각촌으로 들어온 것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필경은 희망이 있는 이상촌이라는 표상과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안주해 살아가는 친구의 삶이 원각촌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할 수 있다. 진정 원각촌이 해룡선사가 구상한대로의 원각교 ‘이상촌’이라면 원보에게 정착의념을 불러일으키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원보의 심리지향의 정착의지를 확인하면 이른바 이상촌을 무대로 한 떠돌이와 ‘홋주인’의 대결은 선악 대결의 표층의미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층적 의미담론에서 보면 그들의 갈등은 원각촌의 이상촌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튼 소설의 표층적인 갈등구조는 ‘악종’ 한익상과 반항적인 떠돌이 원보의 대결이라는 선악 구도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층적인 선악 구도에서 화자는 선과 악에 대한 감정 노출은 서슴없이 하면서도 사회적 이념 성찰에 대한 직접적인 표출은 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목축기」는 주인공 찬호가 두만강을 건너 멀리 조선의 충청도 논산종묘장에 가서 씨돝 칠십두를 사오는 장면을 통하여 민족 공동체의식을 보여주고 ‘와우산목장’ 건설을 통하여 조선인 이주민들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소설은 전문출신으로서의 그가 본업에 실천적으로 종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이념 성찰의 이행이라기보다는 교원생활에서의 실패 때문이었다는 설정으로 의미담론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앞서 분석했지만 찬호 역시 사건 발전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 양상을 보이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이다. 그는 현실 극복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특정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이 불투명한 자기 극복의 한계성도 지니고 있다. 그의 귀농사상은 “백오십만동포의 팔활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 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현실로부터 출발한 소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현실 극복과 정착 가능성의 객관적 근거를 이른바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과 같은 당시 만주의 화려한 발전시책을 깊은 이성적 성찰이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만주에는 아침이왔다.”는 이상주의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과 같은 정책은 겉으로 보기에 ‘독립국가’를 표방하는 만주국이 모든 민족을 함께 성장하게 하는 정치적 담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포장된 식민지였던 만주국이 식민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근본적인 모순을 덮으려는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이상주의는 궁극적으로 민족 단위의 이익과 성장의 층위에서는 식민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에 있게 되는 양립할 수 없는 갈등과 충돌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에서의 실패가 본업에로 돌아간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지만 “백오십만동포의 팔활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 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찬호의 소박한 귀농사상이 실천적 동기가 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목장 건설을 통하여 전문출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는 의욕과 함께 교원 출신 주주들의 부탁대로 “노후에 와우산과 벗하여 주경야독할 수 있도록 이상적 부락”을 만들려고 한 것도 틀림없다. 원인이나 의욕이나 동기 모두가 만주국 국책과는 직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의 객관적 조건이나 실현 가능성을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만주에는 아침이 왔다”는 것과 같이, 현실 인식에 모호한 이상주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실천행위에는 비극성이 암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반 사건서술에서 화자는 줄곧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을 지키면서 직접적인 이념 분석이나 해석은 회피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이념 성찰은 텍스트 담론방식에 대한 좀 더 깊은 구조적 분석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안수길의 간도소설에서 화자의 중립성은 「차중에서」와 같이 철저하게 비극적인 작품에서도 거의 냉혈적으로 유지된다. 「차중에서」는 일인칭 화자(화자에 대해선 뒤에서 재확인)가 기차에서 목격한 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냉정하고도 담담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으며 신변체험자로서 아무런 정감 표현이나 이성 판단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다만 간도가 좋다기에 돈 벌러 왔다가 몸을 상하고 병까지 들어 할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유랑민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찍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고향에서 더는 살 수 없어 살기 좋다는 간도에 들어왔던 최하층 식민지인의 처참한 삶의 한 모습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만주에서도 방황하면서 안온한 정착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최하층 조선인 이주민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인칭 화자는 거지의 역한 체취에 구역질을 느끼고 그를 백치(白痴)이상도 아니고 거지 이상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십전짜리 두 잎을 주어 쫓아 보낸다. 그러다가 문득 신문 학예면에 소품을 쓰기로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그 거지를 주인공으로 글을 구상하게 된다. 기차에서 구걸하는 병든 거지의 비참한 모습을 될수록 심각하게 나타내고 그런 거지를 동정커녕 자리를 피하거나 심지어는 구박까지 하는 손님들의 냉정한 언동을 통하여 잔혹한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는 시종 냉담한 태도로 거지를 관찰하면서도 기껏 거지를 쫓아버리기 위해 십전짜리 두 잎을 준 자긍심에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거지를 보고 벌레를 떨어버리듯이 자리를 피하고 심지어 구박까지 하는 인간의 잔인한 이기심을 폭로할 구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오십보백보로 그의 눈에도 거지는 백치 이상도, 거지 이상도 아니었었다. 사실 이러한 일인칭 주인공의 내부시점은 만주에 왔다가 정착을 하지 못하고 유랑생활에 병든 거지가 되어 구걸하는 이주민의 비참한 모습조차도 등장인물의 현실적 체험으로는 전혀 충격적이 아닌, 그래서 오히려 시대적 무관심이란 증후군으로 체념상태에 빠지는 식민지인의 변질된 삶을 폭로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화자의 중립성은, 시대를 인식하고 성찰하고 각성해야 할 지식인이 이처럼 체념적인 무관심에 특정 시대의 민족적 삶의 비극을 냉혈적으로 대하는 그런 속물적인 태도를 폭로하는 작가의 비판적 자세에 의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의 비판적 자세는 일인칭 화자의 심리적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다음에서 논할 몫이다. 3.3 이념의 예술적 표현-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조화 앞에서 분석한 텍스트 서사담론에서 많은 의문을 안고 넘어온 우리는 작가의 이념 성찰에 대해 보다 확실한 결론을 얻기 위하여 작가의 의미담론과 함께 서사구조에 대해 좀 더 깊은 해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작품의 서사구조가 어떻게 의미담론과 서사담론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근본적으로 통일시키는가를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입체인물의 성격이나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에 대하여 다만 그 자체를 고립적으로 분석할 경우 자칫 사회에 대한 작가의 총체적인 이념 성찰 즉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토대한 의미담론을 도외시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작중 인물이나 사건을 장면에 따라 액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비속사회학적으로 작품의 예술성을 비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서술시점과 서술방식을 그 소재의 본질과는 독립적으로 연구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임의적이고 다소 경솔하다고 할 수 있는 분류에 도달할 뿐이다. 그 이유는 작가와 독자, 어떤 특정 시점의 의미와 기능에 의해 미리 형성된 역사지평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서술을 통해 표현된 서술시점은 작가가 그를 둘러싼 현실 내부로 침투하고자 마련한 동일한 위치로 환원되어야 한다.”55) 작가의 창작은 우선 이념적이다. 작가는 역사 철학적인 관념에서 어떤 사상적 충동을 느꼈든지 아니면 어떤 사회적 현상 내지 현실에서 시대적 충격을 받았든지 아무튼 반짝하는 이념의 불꽃에 창작의욕이 생길 수 있다. 이념의 불꽃이 지핀 그런 창작의욕은 사상적 충동이나 시대적 충격에 대해 상상적인 주관세계를 구상하게 한다. 그런데 그런 상상적인 주관세계의 구상 과정은 의미담론의 예술적 표현 즉 서사구조에 대한 설계를 기반으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의미담론이 서사구조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된 서사구조는 더는 의미담론과 이원론적으로 독립한 형식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이념적 성찰은 나무에 핀 꽃처럼 문학 텍스트에서 직관적으로 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의 모든 것에 공급되는 자양분처럼 서사구조에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의미담론 속에 녹아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대한 통합적인 담론분석에서만이 작가의 이념 성찰의 결정체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대화나 사건을 고립적으로 한 토막 잘라내어 작가의 이념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흔히 문학의 본체론적 특성을 외면한대로 문학 텍스트에 대해 독선적일 수 있다. 안수길의 간도시절의 소설에 있어서 사건 발전과 신변체험에 따라 변모 양상을 나타내는 입체인물의 설정 자체가 인물의 행위 반경을 풍속적인 삶의 현장에 국한시킨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이념 성찰의 불철저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입각하여 정착의지와 극복의지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려는 작가의 리얼리즘 정신을 보여준다. 당대 조선인 이주민들은 역사의식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만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정착의지였지만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이라는 변질된 이중신분으로 두 국가의 정치적 대결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됨으로써 현실 인식에서는 가장 원색적인 생존 대응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특정의 시대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의식에 의한 민족의 정착의지를 이념적으로 재확인하면서도 현실 인식에서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식과 가장 원색적인 생존 대응방식에서 정착지향의 현실 극복의지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은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미담론이 녹아들어 있는 서사구조를 통하여 완곡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3.3.1 내부인물의 갈등구조-식민사회의 축도 문학텍스트의 인물의 대립구도에서 대립되는 대상은 서로 그냥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삶의 현실과의 보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연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그의 시대적 특성을 확인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에 참여한 등장인물의 주관적 행위가 얼마만큼 사회적 성격을 띠고 사회 현실의 총체적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절대적으로 그 시대의 객관적인 위계질서에 의한 신분확인을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텍스트가 식민지 시대의 사회적 본질을 밝히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또 개인 사정의 이주민이라고 해서 특정 사회 현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개인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소설에 등장한 인물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 신분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떤 사회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회 현실에 대한 발언은 최소한 어떤 위계질서에 몸담고 있거나 그에 동조한 사람이 할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튼 이것은 위계질서에서의 신분확인에 따라 그 사회의 총체적 특징이 나타난다는 말과는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다. 특정 시대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다만 용속한 정치 사회학적 시각으로 객관적인 위계질서만을 따진다면 결코 사회 현실에 대한 본질적 파악이 아니라 단순히 무의미한 소재 확장만 하게 될 수도 있다. 「새벽」이나 「원각촌」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면서 이주민 구성원 지간의 대립을 기본 갈등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인 이주민과 본토 지주의 마름인 ‘얼되놈'을 대립되는 대상으로 하는 이런 내부인물의 갈등구조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하여 역사와 현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불투명한 작가적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 정세에 대한 묘사와 이주민들의 간도 이주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파악이 결여되어 있다.(중략) 이런 문제점은 이주민들의 비극의 원인을 동족인 지주 농간에 주된 원인을 설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비록 박치만 같은 반민족적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이러한 한 개인, 그것도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에게 한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켜 놓을 수 있다.”56) 우선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에게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한정하였기에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켜놓았다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 현실의 본질적 파악을 다만 사회적 위계질서의 층위와 직결시키는 단순논리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박치만을 동족의 지주이고 그것도 한 개인일 뿐이라고 확인하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담론을 떠난 피상적인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판단은 텍스트 서사구조를 외면한 채로 다만 박치만이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이라는 표상적이고 통념적인 신분확인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 서사구조에서 보면 그가 그런 신분이 나타낼 수 있는 본질적인 사회적 성격 내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데 시대의 총체적 상황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텍스트가 언어활동 층위에서 어떻게 사회적, 역사적 문제들에 반응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57)하는 것은 바로 텍스트 사회학의 출발점이다. 문학은 언어예술인만큼 작가는 인간사회의 모든 것을 언어를 통하여 반영한다. 그러나 필경은 예술이므로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그냥 단순하게 의미전달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는 것은 단지 실제 있었던 사실에 대비한 개념이 아니라 작가의 이념 성찰에 대한 언어적 포장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그 포장이 정교하고 낯설고 다의적일 수록 성공적인 것이다. 때문에 문학 텍스트에서는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대한 통합적 분석을 통해서만이 기표에 의해 닫힌 언어의 한정된 의미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작가의 이념에 접근할 수 있다. “먼저, 문학 텍스트를 작가와 그 사회집단이 살았던 특수한 사회언어학적 상황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의 소설, 드라마 또는 시의 구조를 위해서 다른 어떤 것보다 몇 가지 사회어와 담론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사회어들과 담론들의 텍스트 상호적인 흡수가 어떻게 하나의 특수한 문학적 구조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58) 「새벽」의 박치만이나 「원각촌」의 한익상은 우선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라는 특별한 사회 분류가 낳은 ‘얼되놈'이란 신조어에 의해 한 개인을 넘어선다. 그리고 ‘얼되놈’은 이주민과 동시대성을 가지는 같은 의미코드의 사회어에 속한다. 신조어의 역사적 사회적 기원에 대해 확인하고 의미를 매기는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은 바로 그 시대의 특성에 대한 예리한 포착과 갈라볼 수 없다. ‘얼되놈'이란 단어는 그를 별명으로 아는 이주민들한테는 그냥 지주의 마름에 상당한 위치로 인정되어버릴 수 있지만(그래서 그냥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전통 개념화 하지만) 작가에게는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만주국의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서 나타난 특수한 현상으로 포착되었던 것이다. “특별한 분류(계통)에서 나온 대립과 차이들이 한 사회어의 의미코드를 구성”59)하는바 조선인 이주민과 ‘얼되놈'은 바로 일제 통치하 괴뢰 만주국 조선인 이주민 사회라는 특별한 역사 시대적 환경에서 공생의 대립적 언어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얼되놈'은 이주민 사회 통치세력과 억압세력의 어휘목록에서 의미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선택을 통하여 결국 그 집단을 암시하는 환유로 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사회구조적인 분류로 말하면 ‘얼되놈'은 결국 통치세력과 억압세력의 기생물에 지나지 않고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형성하는 이주민의 절대적인 대립 항은 아니다.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 모순은 지팡주와의 모순이다. 그러므로 ‘얼되놈'과의 모순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와의 갈등이 얼마나 사회적 시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가는 그의 외부적 힘에의 의존도와 관계된다. 안수길은 이러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특성에 의한 본질적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박치만과의 모순이 이런 구조적 특성에 의한 본질적 모순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얼되놈'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지팡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지팡, 지팡주, 지팡살이는 당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형태를 반영하는 신조어이다. 하기에 지팡, 지팡주, 지팡살이와 관련된 대립은 바로 당대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역사적 현실과 기본갈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새벽」의 주인공의 만주 이주민 생활은 당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삶의 기본 형태인 지팡살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지팡살이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직접적으로 박치만과 연관되고 있다. 부재지주의 마름인 박치만은 이미 ‘얼되놈'이라는 기표적인 의미를 넘어 실질적으로는 지팡주나 다름없는 새로운 신분을 획득하고 있었다. 지팡살이의 억압형태인 볼모잡기, 고리대 등은 모두 박치만에 의해 행해지고 그는 집사대나 경찰서와 지방 관청에도 직접적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사회 권력이나 억압세력의 힘에 의존하여 지팡살이하는 이주민들한테 볼모잡기나 고리대를 놓는 등 지팡주의 권세를 고스란히 그대로 누리고 있는 박치만은 더는 마름으로서의 ‘얼되놈'이 아니다. 따라서 그와의 모순 갈등은 이미 조선인 이주민 내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시점에서는 「원각촌」의 ‘얼되놈'인 한익상도 마찬가지이다. 원각촌민의 삶은 지팡살이에서 해탈되었으나 당시 특정 시대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인 사회 현실이었던 입적이라는 강요된 생존방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 특정 시대의 생존방식에 의하여 산생된 것이 ‘홋주인’이란 신조어이다. ‘홋주인'이란 당시 민국(民國)에 입적을 하지 않은 이주민은 토지를 살 수 없었기에 이미 입적을 한 사람을 내세워 그의 명의로 토지를 사고 집조(執照=土地文券)를 냈을 때의 그 사람을 말한다. ‘홋주인'이란 신조어의 출현은, 한편으로는 조선인 이주민의 대부분이 강렬한 민족의식에서 어려운 삶을 살더라도 조선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현실 극복의지와 저항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팡주의 마름에 지나지 않았던 ‘얼되놈'이 사실상의 지주가 되어 경찰, 관리 심지어는 마적과 직접적으로 끈끈이 줄을 잇고 조선인 이주민을 못살게 굴었던 특정 시대 사회적 역사적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익상과 원각촌민의 갈등은 이미 조선인 이주민의 내부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시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 강요된 생존방식이었던 입적정책의 산물인 ‘홋주인'으로서 직접적으로 당시 사회 갈등의 일익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얼되놈'과의 갈등이 근근이 조선인 이주민 구성원 간의 내부 갈등에 국한된 것이라면 대립 항의 극복에 의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대립 항의 일방이 구성원으로서의 의미가 변질되어 직접 사회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는 대립 항으로 되었을 때 단지 그 개인에 대한 극복은 오히려 사회적 역사적 사건의 순환성을 제시해줄 따름이다. 한익상의 죽음은 결코 원각촌에 평화를 찾아준 상징으로 될 수 없다. 그것은 시대적 모순이나 억압에 반항하는 개척민의 투쟁정신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개척이민사 초기 조선인 이주민에게 강요된 생존방식이었던 입적정책, 구조적 모순이었던 ‘홋주인'제도의 해소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의 한익상은 죽었으나 특정 사회 구조적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고 경찰, 관리, 군대 심지어는 마적의 억압과 위협은 고스란히 원각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히려 해룡선사를 대표로 하는 원각교의 이상촌 건설이라는 의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심지어는 극복 불가능한 당대 사회의 시대적 모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원보의 사회적 갈등에의 관여성은 이른바 이상촌으로 건설되는 원각촌이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원인을 두고 있는 한 떠돌이의 정착 가능성을 마련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 즉 식민지 괴뢰국가에서의 이주민 정착이라는 담론형식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결국 떠돌이 원보와 ‘얼되놈' 한익상의 대립은 행위자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뿌리 뽑힌 이주민과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인 억압세력과의 근본적인 대립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미 한 개인이나 내부인물의 대립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회적 근본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다. 「원각촌」은 바깥세상을 등진 심산 속에 원각교의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허구적인 사실과 그런 이상촌도 결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억압세력, 통치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현실과의 갈등구조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갈등구조는 당시 특정 사회의 역사적 현실과 본질적 모순에 대한 작가의 투철한 인식에 토대한 의미담론으로부터 정형(定型)된 것이다. 따라서 특정 시대의 사회 현상으로서의 신조어는 작가의 이와 같은 의미담론에 의하여 서사구조에서 전체적인 역사지평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현상적인 현실의 사실들을 독특하게 예술적으로 선택하고 배열함으로써 비로소 리얼리즘은 이루어지며 또 작품 안에서 인식론적으로 불필요한 사실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예술의 내용은 외부 현실의 전경보다는 더 제한되고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더 본질적이고 의미 있게 된다.”60) 하나의 작품에서 그 사회의 총체적 모습이나 시대 상황을 소재의 측면에서 있는 그대로 다 밝혀야 한다는 주장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 통치 하의 괴뢰 만주국의 식민지 이주민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일제가 등장하고 만주국 관헌이 등장하고 본토의 지주가 등장하고 육군이 등장하고 마적무리가 등장하고 그런 다음에야 이주민 ‘얼되놈’이 등장해야 한다고 누가 주장할 것인가. 오히려 일제에서 마적까지가 ‘얼되놈’ 앞에 붙는 수식어로 될 수 있다면 ‘얼되놈’이야말로 일제 통치 하 괴뢰 만주국에서의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특징을 축도화해서 드러내는 본질적이고 의미 있는 예술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작품에서 ‘얼되놈’들은 지배 권력이나 억압세력과 끈끈히 줄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만약 갈등구조가 단순하게 ‘얼되놈’과 이주민의 모순이나 부차적 사건으로 설정되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익상이나 박치만과의 갈등은 민족적인 내부갈등이라기보다는 내부인물의 갈등구조라는 표상적인 형식을 통해 사실상은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서의 억압세력과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민 정책의 장기적인 체질화로 이미 변질된 민족 구성원과 주인공의 갈등은 어쩌면 ‘성숙’된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 지배에의 공모세력 역시 정착의지의 실천에 주요한 극복대상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작가 안수길이 그의 소설세계에서 변질된 이주민 구성원을 갈등의 대립 항으로 설정한 것은 이주민 사회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판단의 통사적 의미는 ‘얼되놈’이 오늘의 이주민 사회에서도 본질적인 구조적 모순을 나타내는 대립 항으로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얼되놈’(의미론적으로)은 이주민이라는 특별한 집단에 의해 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은 이주민 사회라는 코드에서는 이주민의 영원한 대립 항일 수 있는 것이다. 3.3.2 단절 구조의 예술적 조형화-이주민 사회의 지평 제시 무엇을 표현하는가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소설에서 더 본질적인 물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표현하는가는 그냥 의미담론 분석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그러한 의미담론을 서사구조를 통하여 어떻게 미학적으로 예술화하는가 하는 문학 본체론적 사고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떤 사건의 이야기 흐름을 줄거리라고 한다면 그 사건이 해설자의 주관적인 심리 동기 내지 의미담론에 따라 엮어지는 서사담론을 플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읽기에서 이러한 의미담론에 대한 투명한 이해가 없이 다만 표상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는 수동적인 판단은 자칫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과소평가하거나 작품에 대한 비속사회학적인 평가로 플롯의 독자적인 예술적 효과를 외면하는 오독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론적(비판적) 담론은 그 자체의 의미적, 서술적 메카니즘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의 분류(코드)와 거기서 나오는 행위자 모델에 대해서 성찰한다. 이론적 담론, 그 자체의 언어적 활동에 대해 그리고 활동이 명확히 나타내는 사회적(집단적) 이해관계들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 특수성과 우연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성찰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자세의 도움으로 이 이론적 담론이 다른 사회어와 다른 담론에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61) 문학 텍스트에서 해설자의 의미담론은 시종 일관성을 유지하려 하면서 자체의 ‘분류(코드)’를 행위자가 삶의 현실 상황에서 경험하는 형식을 전제로 하는 서사구조를 통하여 성찰한다. 「목축기」에서 플롯의 전체구성을 해설자의 의미담론으로 보면 하강하는 플롯으로 확인해야 하지만 실제 서사담론에서 볼 때 플롯구성은 상승하는 플롯과 하강하는 플롯으로 되어있다. 멀리 조국에서부터 종자돼지를 가져오는 찬호의 적극적 행위로 나타나는 플롯은 상승하는 플롯이라고 하겠지만 로우숭(老宋)을 통하여 이끌어내고 있는 플롯은 하강하는 플롯으로 되어있다. 물론 로우숭의 이야기 자체를 고립적으로 해석하면 주인공의 각성을 보여주는 하강하는 플롯이라고 하기에는 로우숭의 성격창조가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이렇게 찬호와 로우숭을 각각의 행위 주체로 보는 시각에 오히려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런 판단 시점에서라면 단편소설의 용량에서 찬호를 행위 주체로 한 플롯과 로우숭을 행위 주체로 한 플롯의 설정은 절대적으로 단절 구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중심인물을 목표의 목장 건설까지 주도적 행위자로 내세우다가 갑자기 내동댕이치고 동물화 된 로우숭을 등장시켜 새로운 플롯구성을 하는 작가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지 확인될 수 없다. 이는 텍스트의 의미담론의 일관성이 서사담론의 내재적 일치성을 담보해준다는 원리를 떠나 피상적인 이야기 흐름을 따라 사건줄거리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단절적인 서사구조가 어떤 일관적인 의미담론에 의해 의도적으로 설정되고 있다면 거기에 바로 작가의 서술적 메커니즘의 창조력이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텍스트의 일치는 두 개의 변수에 근거한 담론적 수행인 것이다. 그 두 변수는 바로 여러 가지로 해석을 가능케 하는 텍스트와 그만큼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현실이다.”62) 여기에서 우선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다시 토론, 확인해 봐야 할 필요성이 요청된다. 하나의 작품에서 인물 개개인이나 사건 하나하나에서 매력을 느끼거나 어떤 심리적 감응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총체적인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작품의 진가를 밝히기 어렵다. 또 그런 총체적인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정확하게 확인해야만 작품의 구조적 특성을 작가의 의도적이고 독창적인 예술기법으로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 즉 해설자의 의미담론은 한마디로 찬호의 이데올로기적인 확신이나 이상적인 추구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잃고 고향마저 멀리 등진 식민지 이주민으로서의 재만 조선인 이주민들이 민족의 공동체의식과 생존의식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기어이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끈질긴 생명력과 정착의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이는 역시 작가의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식민지 치하에서 주권을 잃고 고향마저 멀리 떠나온 식민지 이주민의 운명을 두고 등장인물들더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대안 없는 인생숙제를 풀어가게 하는 안수길의 역사 철학적 인식은 결코 이념적 대결이나 이상향의 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기어이 뿌리내리려는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생력에 대한 믿음과 현실 극복의 비장한 삶의 자세 그 자체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실 극복과 자기극복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의 설정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압의 특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을 극복하고 대응해가는 인간군상의 현실 인식과 실천적 자세를 반성해보려는 작가의 사실주의적 창작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진 상황을 예술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른바 자유로운 창조나, 현실을 완전히 등지는 것은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것이다.”63)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찬호는 현실 극복과 정착의지를 실천해가는 인물이면서도 현실을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시대적으로 각성한 선지적인 지도자는 아니다. 농업과 전문출신인 그가 교원생활에서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은 특정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이 투명하지 못하고 민족이 당하고 있는 역사적 질곡의 본질을 이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는 민족의식이 있고 신념과 의지가 있는 신변의 사람들(학생들까지 포함한)에게 돌림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성(省)의 근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육방침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여 농업과 전문출신을 초빙한 학교당국이 결국 그런 인재를 대용교원으로 돌려쓰는 것도 당대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이 학교의 교장을 비롯하여 간부교원은, “학교창립때부터의 근속자거나 경영상 파란이 많은 운명과 함께 험한 길을 같이 한 공로자들”이거나 “간도 개척의 초창기에 들어온 지식층들이라 거의가 남에게 감격을 줄 수 있는 웅변가들이었다.”는 신분 확인은 시대 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보다 근본적으로 현실 극복의지를 실천해가는 당대의 삶의 현장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족 단위에서 형성되어 있는 그러한 현장 분위기는 찬호의 귀농사상을 만주국 국책순응으로 비난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간도 개척의 초창기에 들어온 지식층들”에 의해 민족의식을 키운 학생들이라는 신원을 의식하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찬호가 교원생활에 실패하게 된 것은 사상이 발랄하고 사회 반역의식이 강한 학생들이 “속시원한 웅변이라곤 없이 묵묵히 광이와 호미로서 흙을 파는 면에서만 접촉하는 찬호에게 존경이나 흠앙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대를 본질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민족의 근원적인 비극을 현실적으로 알지 못하는 그의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유치한 발언이 주변인들과의 이념적 괴리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만주에도 새아침이 왔다”는 주인공의 말을 주인공이 아닌 학생들의 흉내를 통해 표현하는 서사형식은 이런 의미담론에 의해 풍자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업과 전문출신의 찬호가 “훌륭한 교수 방법”도 없어 교육에 실패하자 마침내 자신의 전문지식을 민족 공동체의 정착의지에 실천적으로 공헌하려는 소박한 이념마저 그대로 부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찬호는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과 같은 만주국 국책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계산적인 책략임을 정치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다만 그런 ‘평화로운 현실’에서 민족 공동체의 정착의지를 실천 내지 실현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한 것이었다.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이 일제가 저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장하고 겉포장으로 ‘독립’된 만주국의 평화적인 발전을 통하여 저들의 대륙 침략정책의 전초기지를 다져가려는 계략에서 출발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민족 단위로 동일한 위계선상에서 평등을 추구할 수 없었던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지 피지배민족 이주민의 민족이익과 민족이념은 궁극적으로는 수탈과 억압의 힘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식에서 출발하여 정착의지를 현실 극복의지로 확인하는 작가 안수길은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의 만주국 시책에 조선인 이주민의 민족생존의 대응논리로서 북향정신, 목장(조선인 이주민 사회)건설, 농민도(農民道)라는 민족 공동체의식을 대입하고 있다. 작가의 의미담론은 식민 지배의 절대적 억압사회를 극복하려는 민족 단위의 실천적 탐색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안수길은 그러한 실천적 탐색의 의미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찬호와 같이 사건 발전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해가는 입체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작가는 주인공이 자기 극복과 현실 극복의 갈등을 동시에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특정 시대 사회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담론에서 찬호와 로우숭은 하나의 형상으로 겹쳐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찬호에서 로우숭에로 단절된 구조는 연속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로우숭의 상징적 의미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한 반항이고 항거”이고 “설사 그것이 비극으로 종말을 고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해 저항과 복수를 하려는 결의”64)라고 확인하면 역시 각성의 하강플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라는 고사 성어를 떠올리면 호환(虎患)의 상징적 의미는 한결 더 투명해 질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열악한 창작 환경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을 예술의 기량으로 재치 있게 포장해 내는 안수길의 작가적 역량을 볼 수 있다. 찬호가 자기의 신분에 맞게 아이들을 농촌으로 호소하고 그 자신이 마침내 목축장 건설에 헌신하는 것과 오직 동물에만 애정을 느끼는 로우숭의 모습은 두 개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로우숭의 형상이 찬호 성격의 극화된 과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 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전업기술에 의해 이상적인 목장을 건설하려는 찬호와 사회와 담을 쌓고 인간을 외면한 자연화 동물화 된 로우숭은 동기적인 사건과 결과적인 사건을 이끌어내는 동질성을 띤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짐승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목축업을 잘해 보려는 열정과 욕망으로 하여 찬호와 로우숭은 하나의 행위자가 될 수 있는데 의미담론 분석을 할 때 로우숭의 호환은 찬호의 특정 시대 현실에 대한 불투명한 인식의 결과(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슬기로운 의미담론의 해설자는 현실 사회와 연관되어 있는 찬호를 통하여 비판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을 자연화 동물화 된 로우숭을 통해 무난히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식에 토대한 민족 공동체의식과 현실 극복의지를 주제로 삼는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실천하는 찬호는 그러나 아무런 대안도 갖고 있지 않다. 그만큼 이제 목축장의 전망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서 찬호한테 이제 더 현실적으로 가능한 어떠한 실천적 작업도 제시할 수 없었던 해설자는 독자들이 과장된 서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징수법으로 로우숭과 범의 대결이라는 자연주의적인 생명의식을 도입한다. 그것은 가장 치열한 원색적인 생명 본능을 통하여 어떤 어려움을 예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어떤 어려움에도 기어이 뚫고 나가려는 이념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사회로 돌아온 로우숭을 그냥 동물화하고 있음으로써 로우숭, 호랑이, 자연은 그 동질성으로 하여 사회에 대한 환원으로서의 상징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로우숭의 인간적 사회적 환원과 함께 호랑이의 피해는 사회 학정과 동질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 허위적인 만주국 국책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목장을 건설하려던 주인공의 모호한 시대인식이 불가피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결과라고도 할 것이다. 결국 서사구조적으로는 찬호를 행위자로 하는 플롯을 상향적인 플롯으로 함으로써 해설자의 의미담론이 미래지향적임을 보여주면서도 로우숭을 행위자로 하는 플롯은 하향적인 플롯으로 설정하여 주인공이 부딪치게 될 험난한 앞날을 예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회의 외적 현실과 주체의 내적 현실의 대립 통일의 변증원리에 따라 작가의 성찰과 형이상의 이념을 작품에서 플롯을 통하여 다시 객관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리얼리즘소설의 기본 원리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차중에서」는 「목축기」에서의 전 후 사건의 단절구조와는 달리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사건(열차의 여로)을 갑자기 절단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서사구조를 의미담론과의 내재적 연결 속에서 분석하지 못할 경우 그냥 일인칭 화자인 ‘나’의 시선과 관찰에 따라 표상적인 주제 확인에 머물 수 있다. 일인칭 화자인 ‘나’가 작품 구상을 하면서 거지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고 인간의 잔혹한 이기심을 폭로하려 한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의 눈에는 민족의 비극의 근원을 밝히지 못하고 지식인의 우월감을 노출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의미담론 분석을 통해 서사구조의 의미론적 구성을 재확인해보면 우리는 훨씬 심오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결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나’의 거지에 대한 동정이나 관심은 현실적인 시대인식이나 이성적인 각성에서가 아니라 근근이 소설 구상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거지의 대화를 통해서 그것이 일찍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의해 고향에서 쫓기듯 한 식민지인이 간도가 좋다는 일제의 허위 선전에 돈 벌러 왔다가 결국 몸을 상하고 유리방황을 하던 비참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간도가 좋다고 해서 돈 벌러 왔다가 몸만 상하고 노비마저 없어 기차에 뛰어들어 죽으려다가도 기어이 찾아가는 여해진(汝海津)이라는 고향, 엄마밖에 없다는 고향, 거지의 입에서 염불 외듯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고향 모티프는 틀림없이 식민지 시대 실향민의 이미지에 대한 강조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인 ‘나’는 전혀 아무런 시대적 인식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거지에 대한 동정심마저 없이 그를 백치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거지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침내는 십전짜리 두 잎에 쫓아버린다. 이러한 ‘나’가 그 거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였을 때 거지의 형상은 다만 동정의 대상일 뿐 아무런 시대적 특징도 부여되지 않는다. 주변 인간들의 잔혹한 이기심을 비난하는 ‘나’의 양심도 가련할 정도로 십전짜리 두 잎을 주었다는 자긍심에 매달려있을 뿐이다. 이처럼 거지를 백치로 취급하는 ‘나’는 자기가 구상하는 작품의 비극성에 스스로 흥분하여 자신의 의념세계에서 거지를 가장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속물적인 심리 행위는 기차가 임시 정거하는 순간 자기의 생각이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착각을 하고 기차에서 뛰어내리게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거지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었다. 자기의 기발한 구상이 현실에 대한 위대한 예언이었다는 놀라운 발견 때문이었다. 결국 소설은 ‘나’의 이러한 냉담한 내부시점을 통하여, 시대에 선지적일 지식인마저 식민지 사회에 정신적으로 체질화되고 시대적 무관심이란 증후군으로 체념 상태에 빠져 민족의 근원적인 삶의 비극조차 외면하거나 냉혈적으로 대하는 변질된 삶의 현실을 폭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담론은 서사구조의 의미론적 요소를 좀 더 깊이 밝혀보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결말 부분에서 전지적 화자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나’의 기차여행이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그냥 절단되어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소절의 마지막 문장이 “八도하역(八道河驛)어구에서 생긴일이다.”로 끝나고 있는데 소설은 벌써 세 번째 소절에서 “기차가 정거한것은 신호패가 떠러지지않었기 때문이였다.”는 단 한 구절로 결말을 끌어내고 있다. ‘나’는 “상三봉에 급한 볼일이 생기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여해진 고향으로 가는 거지와는 적어도 개산둔까지는 같이 동행하게 될 것이었다. 어쩌면 개산둔에서 국경을 같이 넘게 되면서 노자가 없이 국경을 넘으려는 거지의 모습에서 또 어떤 구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지가 무료승차권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개산둔에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팔도하역에서 화자는 그냥 이야기를 중동무이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식민지인의 비참한 유랑 모습을 통한 식민지 사회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서 식민지 사회에 체질적으로 적응된, 사실상으로는 변질된 식민지 지식인의 속물화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담론에서 설정한 작가의 주도동기가 바로 ‘붉은 신호패’이다. 두 번째 소절에서는 단지 ‘나’가 ‘붉은 신호패’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떠나자 다시 기차에 올라타는 서술로 되어있다. 여기서는 ‘붉은 신호패’가 기차가 떠나게 되는 조건으로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말에서는 그 조건이 바로 기차가 서게 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복선과 조응의 원리로 확인할 때 우리는 결말을 통하여, 앞에서 그처럼 비열할 정도로 지나친 관심을 갖고 기차 바퀴까지 살펴보면서 거지의 죽음을 확인하는 ‘나’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듯 ‘덜컥’하고 ‘붉은 신호패’가 떨어지는 소리를 그냥 기계의 소리로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조건이자 원인이 되는 ‘붉은 신호패’는 곧 기차가 정거한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의 부질없는 생각과 속물적인 행위에 대한 부정과 조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의 결말에 와서 우리는 작중 인물이면서 일인칭 화자인 ‘나’의 생각과 행위를 줄곧 외부시점에서 관찰해온, “올림포스 산정에서” “개별 장면의 연관관계를 조망하는 거대한 파노라마 시선”65)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이념 성찰의 사명을 지닌 전지적 화자이다. 결국 “기차가 정거한것은 신호패가 떠러지지않었기 때문이였다.”는, 원인 강조적인 단 한 구절로 끝난 결말은 ‘나’의 행위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전지적 화자가 어처구니없는 ‘나’의 속물적인 행위와 변질된 삶에 의한 식민 망각 증후를 조소하는 비판적인 결론임에 다름 아니다. 3.3.3 이중 갈등구조-억압된 현실의 서사화 문학 텍스트의 서사적 기틀인 플롯은 서로 상대적으로 분리되고 떨어져 있는 객관적 삶과 주관적 이념을 시간의 역사적 속성에 의해 특정된 삶의 현장에서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의 총체로 묶어준다. 말하자면 플롯은 개별적인 삶을 총체적인 시대인식의 토대 위에서 역사적으로 재확인한 작가의 성찰과 이념을 다시 객관적으로 형식화하는 기본 수단이다. 따라서 플롯에 대한 구조분석은 작가의 의미담론에 접근하는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 해석 방법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중 갈등구조로 구성된 플롯 유형에 있어서는 작가의 의미담론에로의 접근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플롯 내지 그에 의한 갈등들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확인하는 가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텍스트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갈등이 기본 갈등의 배경이나 입체적인 수식이 될 수 있다. 혹은 기본 갈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작용하면서 작중 인물의 성격 형성과 발전의 시대적 현실적 계기로 되기도 한다. 부차적인 갈등이 기본 갈등의 시대적 현실적 계기로 작용할 때 이런 부차적인 갈등은 작가의 의미담론을 형성하는 역사적인 현실 인식을 대변한다고 할 것이다. 「새마을」을 단지 밝은 분위기로 파악하거나 심지어 만주국에 대한 찬미로까지 혐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차적인 갈등을 아예 도외시하고 일인칭 소년화자인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향학열에 함께 흥분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소설에서 일인칭 화자인 ‘나’의 관찰시점은 부동한 갈등구조에 따라 외부시점과 내부시점으로 갈라진다. 즉 어른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년화자의 시점은 외부시점이고 향학열에 불타는 소년주인공의 시점은 내부시점인 것이다. 내부시점은 지극히 주관적인데 반하여 외부시점은 차분하게 객관적이다. 그러나 주관은 객관에 대한 반응이다. 객관적 현실이 주관적 반응의 계기 동기 원인 근거 등등이 됨은 물론이다. 관찰자의 외부시점에 의한 객관적 묘사는 일차적 현재성이라는 시간의 역사적 원칙에 따라 시대적 특징을 포착하는 작가의 현실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새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대한 외부시점의 객관적 관찰은 역사적 삶의 현실을 현장감 짙게 그대로 보여주려는 작가의 리얼리즘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삶의 근거는 무시간적이지도 신비하지도 않으며, 시간의 경과에 종속되어 있다. 또한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시간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66) 새마을은 기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이었다. 촌에서 이사 나온 사람, 빈주먹으로 조선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거의 모두가 고정적인 일자리도 없이 품팔이로 그날그날을 연명해간다.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 역시 아무런 미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의 체념적인 삶은 국권을 상실하고 고향을 멀리 떠나온 이주민의 비참한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부시점의 객관적 관찰이 배경적 의미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의 내부시점에 의한 주관적인 반응에 계기와 원인으로 될 때 주인공의 향학열은 이상적이고 희망적인 것이기 전에 벌써 현실 극복의지와 직결되는 것이다. 실제로 주인공의 미래는 밝은 것이 아니다. 병덕이처럼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아버지가 고정적인 직업이 없는데다 앓는 어머니의 약을 이어대야 하는 어려운 살림 형편이라 어린나이에 가게를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다만 글 동냥과 야학이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향학열은 오히려 어려운 생활환경에서도 기어이 다른 애들처럼 공부를 하고 싶다는 현실 반항에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으로 공부할 수 없는 현실, 가난과 무지와 병마와 타락으로 어둡기만 한 현실이 오히려 ‘나’의 향학열을 더욱 불타게 하는 객관적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몸부림이 처절하면 할수록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과 반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인칭 소년화자가 주인공이 된 내부시점의 갈등은 열악한 생활환경의 어린 소년이 다른 아이들처럼 배우고 싶어 하던 단순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 삼손이를 통하여 배워야 되고 알아야 된다는 미래지향적인 의지의 확립으로 점차 승화된다. 이에 반해 일인칭 소년화자가 관찰자가 된 외부시점은 갈등이랄 수 없이 시종여일하게 수평적 서술흐름을 유지하면서 새마을이라는 사실상의 빈민굴 이주민들의 뿌리 뽑힌 삶의 모습을 분식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역사적 속성에 의해 그 개개의 우연성이나 자율성을 벗어나 특정 시대 풍속화로 시대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필연성과 연속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제 식민통치 하의 만주 조선인 이주민이라는 특정된 삶으로 하여 “이들이 겪은 「새벽」에서의 비극은 ‘새마을’에서도 언제나 현재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67) “리얼리즘은 대상의 진부한 모사라는 극단으로 떨어지지도 않으며, 리얼리즘의 창조적인 면이 현실로부터 멀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중용적인 위치 정립과 그를 통해 특정한 인식적 가치가 정해짐으로써 리얼리즘은 자연주의적인 원리 및 낭만주의자의 주관적인 세계 설정과 구별된다.”68) 새마을의 변화 없는 풍속화적인 삶이 특정 시대의 민족사적 현실로 확인되면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나’의 향학열 내지 삼손을 통한 신지식에로의 지향은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는 절대적 억압의 시대와 변질된 삶에 대한 현실 극복의지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시대적 명암의 어두운 면이 되는 이러한 현실 배경은 작가의 의미담론에서 이념 성찰의 비판적 시대상임에 다름 아니다. 「벼」의 경우는 「새마을」과는 달리 이중갈등구조가 보다 직접적으로 얽히어 동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과 호응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이 원인과 결과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새마을」에서 동기적인 사건은 호응적인 사건에 대해 주인공의 성격 발전의 가능한 계기가 될 뿐이지만 「벼」에서의 동기적인 사건은 호응적인 사건의 필연적인 발생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호응적인 사건의 발전 양상은 동기적인 사건의 변화 발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벼」에서 동기적인 사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중일 두 적대국의 정치적 대결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와 관헌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탄압은 바로 이러한 동기적인 사건에 의한 호응적인 사건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동기적인 사건이 호응적인 사건의 직접적 원인임에도 소설의 서사구조는 호응적인 사건을 중심 사건요소로 다루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서사구조의 특성에 작가의 의미담론이 형식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동기적인 사건을 텍스트의 기본갈등구조로 설정할 경우 작품은 중일 두 적대국의 정치적 대결로 하여 그들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조선인 이주민들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얼마나 가혹하게 원색적인 생존위기에 몰리고 있는가를 폭로하게 될 것이다. 즉 특정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은 호응적인 사건을 기본 갈등구조로 설정하면서 동기적인 사건을 배경 제시, 에피소드 삽입, 복선 깔기 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는 벌써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마저 멀리 떠나온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이 중일 두 적대 세력의 격전장에 과녁처럼 무방비로 노출된 현실을 확인한 작가가 절대적 억압시대에서의 민족의 생존위기와 그 극복방식에 천착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결국 텍스트의 의미담론은 특정 시대 민족적 비극의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는 이미 그것을 확인하고 그런 원인에 의한 생존위기를 삶의 현장에서 극복해야만 한다는 시대적 현실 인식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담론을 이제 텍스트 서사구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벼」는 전장 후장으로 나뉘어 전장에서는 매봉둔 토착민들과 조선인 이주민들의 갈등, 후장에서는 중국 지방 정부 및 관헌들과 조선인 이주민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기본 갈등구조로만 보면 이 소설은 그냥 단선적인 직선형 플롯으로 짜이어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만주 이주, 개척, 정착의 어려움 내지 수난사를 삶의 현장 체험으로 다룬 듯하다. 즉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이 생명의 대가를 치르면서 토착민들과의 오해와 갈등을 해소해나가고 지방 정부와 관헌들의 극단적인 배척과 탄압에 생명의 원초적인 생존논리로 대응해나가면서까지 정착을 위한 극복의지를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점에서 텍스트의 의미담론을 확인하면 작가의 시대적 현실 인식의 불투명함을 지적하거나 심지어는 식민지인의 민족주의 이중성에서 식민 지배 권력에의 공모성향을 들먹여 친일성향을 운운하기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작가는 작품에서 소현장의 배일사상이 무고한 조선인 이주민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과잉대응으로 나왔기 때문에 조선인 이주민들이 부득이 일본의 힘을 빌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중국 관헌의 극단적인 배척과 탄압이 친일을 조장했다는 작가의 변호가 민족의식으로는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사구조는 단선적인 직선형 플롯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선 소현장의 정치적 목표는 시종여일하게 일본인한테 조준되어 있다. 따라서 텍스트 서사구조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의미담론은 에피소드 식으로 처리된 동기적인 사건에 갈등의 근원적인 발생 원인과 변화의 근거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본 갈등의 변수는 중국과 일본과의 정치 대결의 변화 수위와 그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 정책의 단계적 변화인 것이다. 배일사상으로 무장한 소현장이 부임하면서 힘쓴 것이 현직 관리에 대한 인물고사와 정비였고 그런 후에 바로 본격적으로 달려 붙은 것이 현 내에 사는 일본사람에 대한 조사였다. 급진적일 정도로 배일에 박차를 가하는 소현장은 나까모도를 좋은 사람, 친중파라고 하는 부하의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중점적인 조사대상으로 찍었다. 현장으로 부임한 그의 정치적 목표를 뚜렷이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소현장은 나까모도를 불러서 직접 사람이 된 품도 살펴보고 속도 떠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에 손을 떼지 않고 어느 날 밤 삼경에 갑자기 자신이 지휘한 순경대를 이끌고 친히 나까모도의 상점과 학교 등을 습격하여 샅샅이 가택수색까지 한다. 가택수색에서마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소현장은 사람을 내세워 나까모도에게 사과하고 짐짓 친밀한척 표면을 꾸몄으나 더욱 그한테 날카로운 눈을 떼지 않았다. 대륙 침략의 야망으로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제의 동향에 특별히 예민한 경각심을 품고 있는 소현장 같은 정치인에게 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친중파(親中派)”, “고마운 사람”의 형상을 수립하는 일본인 나까모도가 겉볼안으로 그렇게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찬수가 소현장의 강제 축출 명령에 구제책으로 나까모도를 찾았을 때 그는 중국 정권의 배일 정책을 운운하면서 일본영사관에 사실을 알리겠노라고 한다. 나까모도의 신분은 마지막까지 베일에 가리어진 대로 투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 대목에서 중국의 배일 정책을 놓고 특정 시대의 정치적 안목을 갖고 있는 그의 시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소현장은 매봉둔에 이백여 호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더욱이 그들이 학교를 짓는 재료를 나까모도한테서 가져간다는 것을 알고 큰일이 나는 것 같이 서두르는 것이었다. 조선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면 일본영사관이 들어선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소현장한테 있어서 그 조선인들이 하필이면 자기가 붉은 점을 찍고 있는 일본인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배일사상에 의한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소현장으로 하여금 시종일관하게 매봉둔 사건을 정략적으로 다루게 한다. 소현장은 단계적으로 수단을 취해서 어떻게 하나 조선인 이주민들을 “국외로내보내든지 그것이 정 안되면 현외(縣外)에 까지라도 내어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조선인 이주민들은 한사코 죽어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저히 물러설 길이 없었던 것이다. 생명을 대가로 겨우 토착민들과의 오해를 해소하고 마침내 정착 실현에 가슴이 부풀던 조선인 이주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논을 그렇게 선선히 내놓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미 생명의 대가를 치른 그들한테는 논이 바로 생명이나 다름없었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저항에 소현장은 보다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 홍덕호가 불리어 갔다가 말 등에 얹힌 대로 겨우 숨이 붙어 돌아왔다. 학교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격분한 조선인 이주민들이 토착민들의 모략인줄로만 알고 천방지축 토착민부락을 향해 방축을 오를 때 군대는 마침내 총을 쏜다. 소현장이 총을 쏘아 조선인 이주민들을 저지하는 행동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을 바라는 그의 정략적인 대일 투쟁의 입지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조선인 이주민과의 갈등이 언제든지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이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 견제 목표를 어디까지나 일제에 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현장더러 극한적 수단에서 행동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 바로 피땀으로 개척한 논을 목숨으로 지키려는 조선인 이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이었다. 소현장은 여기서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다간 필연코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확인하면 찬수의 판단과 행위는 이런 완강한 저항 중에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못하고 정치의식과 현실 인식이 모호한 지식인의 알량한 처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짓는 것이 순서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영사관과 연락이 없은 것은 여기에 그럴듯한 지도자가 없은 까닭이었다.”고 판단하는 찬수는 결코 “그럴듯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소현장이 극단적 결과가 정치적인 문제를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면 찬수의 판단은 자칫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이 식민 지배에로의 공모라는 덫에 빠질 위험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실제로 소설에서 찬수는 결코 지도자형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작가의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의 반도에서의 사건으로부터 만주행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성격 창조를 보면 작가는 결코 그를 이념 각성의 선각자로, 매봉둔에 군림하는 지도자로 부각하고 있지 않다. 찬수의 만주행은 그 스스로가 실수라고 인정하여 겪고 있는 정신적 질식에서 해탈하려는 도피 행각에 다름 아니었다. 홍덕호 등도 애초에 후세의 교육을 근심하여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박치만을 통해 찬수에게 다만 아이들을 가르칠 인재 추천을 부탁하였을 뿐이었다. 찬수는 비록 만주에 와서 형의 죽음과 초기 개척민들의 피눈물 나는 개척사를 통하여 자기의 하잘 것 없는 관념 유희를 반성하기도 하지만 매봉둔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개척민들의 생존의식을 특정시대 민족의식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힘을 빌어서라도 여기서 버티려는 그의 얄팍한 타산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진 이주민들이 더는 물러설 길이 없다는 치열한 생존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결사적인 저항과는 원색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의 친일적인 성향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 조선인 이주민들의 이러한 결사적인 저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저항이 소현장의 강압수단으로 하여금 대일 투쟁의 정략적인 극한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소현장의 단계적인 강압수단과 그에 맞선 조선인 이주민들의 결사적인 저항의 결과는 현실적으로 정치적 문제의 발생을 막아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결말에서 보듯이 결국 찬수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사건의 발전 양상은, 죽음을 각오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완강한 저항과 대일 투쟁의 정략적 판단에 주춤한 소현장의 태도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즉 나까모도한테 갔었던 사람들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찬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원주민 부락을 향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발걸음을 저지하면서도 결국 하늘을 향해 놓은 총소리는 소현장과 조선인 이주민들과의 갈등이 조선인 이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의하여, 그리고 대일 정략의 구도에 따라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설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투철한 작가가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이주, 개척, 정착의 수난사를 현장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원초적인 생명의식과 특정 시대의 생존 논리로써 억압 시대의 극복의지와 민족 공동체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본 논문은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들을 그 연구대상으로 잡았다.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원이라고 확인할 때 안수길과 그의 작품은 바로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결론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 확인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길은 만주 이민역사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식민지 억압 시대에 대한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의도적으로 만주 이주민의 개척사를 다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초기 소설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를 하나의 창작 공간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그 공간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살면서 역사 철학적인 사고와 시대적 인식에 고민하였다.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이 모순되고 배척되는 상황 속에서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하여 절대적 억압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작가 안수길의 현실 인식이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형이상의 이념 성찰에 날카로우면서도 형이하의 억압적인 인간 조건을 비약하지 않고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하여 작품화 했다. 그만큼 안수길의 소설은 억압된 현실을 살아가면서 현실 극복과 자아 극복에 몸부림치면서 자각 증상에 진통하는 주인공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작가 정신은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한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에 이어지면서, 단지 만주체험소설이나 망명문학이 아닌, 정착 지향의 향토문학으로 정립,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만주조선인문학과 함께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많은 기성연구들은 대개 식민 피해의식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만주조선인문학의 시대적 배경이 식민담론을 떠날 수 없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역사 청산에 과잉반응을 나타내면서 문학 텍스트에 대한 문학 본체론적 분석을 외면한 채 단지 사상 검증이나 정치적 심판에 급급했다. 발표매체의 성격을 작품 평가의 절대적인 잣대로 삼거나 소재주의에 빠져 작품의 장면이나 대화 또는 언어를 문자풀이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 등이 그러하다. 발표매체의 성격 규명은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담론의 한 분석방법으로서만 바람직하고 소재는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적 분석을 통하여 서사요소로서의 의미를 확인받아야 한다. 결국 문학비평과 연구는 문학 텍스트를 예술작품이라는 본래의 모습대로 해석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런 취지에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해보았다. 제1장에서는 만주조선인문학에서의 안수길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의 작품연구가 중국 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 및 일제 말 암흑기 한국문학의 정직한 계승과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밝혔다. 발표매체의 성격과 작가의 극복의지, 그리고 식민정치, 시국정책, 시대주제 등과 작품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또 기성연구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텍스트 분석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을 세 가지로 종합해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연구방법은 텍스트사회학에 기대어 의미담론과 서사구조를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연구범위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규명 및 그 사적 발전과 관계하여 안수길의 단편소설집 󰡔북원󰡕 중에서도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다룬 작품에 한정하였다. 제2장에서는 1장에서 제기된 문제를 논제로 하여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시대성을 부여하고 연구에 인식론적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 배경과 시대 환경 및 작가의 현실 인식에 대하여 나름대로 재조명을 시도하였다. 역사 배경과 시대 환경에서는 주로 유구한 이민사로 이어져온 만주와 일제의 괴뢰정권으로서의 만주국을 대비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정착의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을 확인하고 일제의 식민체계에 의해 복잡해진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과 착종된 의식을 해부해보았다. 텍스트 의미담론의 이론소가 될 작가의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대해서는 작가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과 그의 작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체질론’을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짚어보았다. 제3장에서는 본 논문에 선정된 작품들에 대해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층위에서 통합적으로 분석하였다. 우선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작품에서 가장 기본적인 분석 단위가 되는 언어의 사회학적 의미에 대한 확인을 시작으로 인물, 갈등, 화자, 시점 등에 대해 분석하였다. 여기서는 작가, 화자, 주인공이라는 3차원의 의식 주체를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형성 정립의 3대요소로 확인하면서 소설의 인물, 사건 및 화자에 대해 텍스트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리하여 가급적 텍스트 서사구조의 요소들에 대해 기표에 의한 표층 확인이나 고립적인 개념풀이를 하는데 그치고 마는 소재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플롯의 분석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함으로써 안수길 만주이주민소설의 서사구조 특성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해보려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마침내 안수길의 소설들에서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의 모순을 기본 갈등구조로 하고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 내지 지역공동체의 결성을 실천해가는 주인공들의 현실 극복과 자기 극복의 비극적 양상을 조명해낼 수 있었다.     5. 참고문헌 가) 기본자료 안수길. 󰡔명아주 한포기󰡕. 문운창작사, 1977.         󰡔북원󰡕. 예문당, 1944.        「북향보」.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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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허무에의 극복의지와 공격적인 풍자정신 댓글:  조회:2593  추천:0  2009-05-16
1. 연구사 회고와 문제 제기 “여타 한국 근대작가 누구와 견주더라도 그 당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채만식만큼 그 작품세계가 다양한 방법론에 의해 평가받은 작가도 드물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자문학이 그 주된 창작방법으로 되고 있다는 데에는 큰 이의가 없는 듯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풍자문학의 특질을 어떻게 규정하고 문학사적인 주소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에 있어서는 평가가 크게 이질적이다.  채만식이 현역작가로 작품창작을 하던 당대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30여년 간에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로 카프에 의한 조직론적 이데올로기비평으로부터 시작되어 임화의 세태소설 논의를 지나 그 적극적인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풍자 자체를 억압시대에 있어서 작가의 소극적인 대응방식으로 폄하한 해방 후의 백철에 이르고 다시 1960년대에 천이두에 의하여 채만식의 풍자문학을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다루면서도 여전히 문학의 정도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간접적 측면적 접근의 방법으로 보는 확장양태를 보이고 있다.(백철,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 백양당, 1949.7과 천이두, 「현실과 소설-한국단편소설론(3)」, 『창작과비평』, 1966년 가을호를 참조)  “1960년대까지의 공소함에 비춰 볼 때 197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채만식 문학에 대한 천착은 그야말로 비약적인 양적․질적 확장을 이루어왔다. 이 시기의 채만식 문학 연구는 거시적․미시적 차원의 다종다양한 접근 방법을 보여왔는데” 첫째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채만식에 대한 전기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고, 둘째는 리얼리즘론 차원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 세계관 및 그 내적 형식에 주목한 연구를 들 수 있고, 셋째는 작품에 나타난 언어와 문체 및 서사구조에 주목한 연구논문들을 들 수 있으며, 넷째는  비교문학적 연구를 포함한 텍스트 상호관련성에 관한 연구 갈래를 들 수 있다.2)  여기서 보면 아무튼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채만식 문학에 대한 연구가 작가론에서 문학사적 자리매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담론의 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담론에서도 역시 채만식 문학의 풍자성 자체에 대한 본질론적 규명과 허무에의 극복의지를 밝혀내는 것은 작가의 문학관 내지 세계관을 빚짐이 없이 돌려주고 참담한 식민지 억압의 현실에서도 빛을 찾아 몸부림치던 진보적인 엘리트정신을 발굴해내는 역사철학적인 작업으로 될 것이다. 2. 창작기법을 넘어서는 시대극복의 방법론-풍자정신  풍자문학이 채만식 소설창작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무엇보다도 풍자문학에 대한 본질론적 규명은 그 작가의 문학사적 자리매김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풍자가 문학창작 기법의 정도(正道)가 될 수 없고 현실에 대한 간접적이고 측면적인 접근으로만 한계가 지어질 때 아무리 채만식 풍자문학에 대한 평가가 최고점으로 솟아오른다고 해도 문학일반에 대한 검토 속에서는 벌써 다음 자리에 물러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다. 과연 그런 경우라면 어떻고 어떠한 부류의 문학이 정도인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아무튼 채만식의 풍자문학은 다만 그 풍자문학 자체의 평가만으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먼저 풍자 일반에 대한 본질론적 규명에 앞서 채만식 풍자문학에 대한 이런 선입견이 두 가지에 근원을 두고있다는 지적으로 지루한 분석을 압축하려 한다. 왜냐하면 앞의 연구사에 대해 자세히 검토를 해보면 그런 논쟁을 곳곳에서 펼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근원이란 하나는 채만식이 현역작가로 있던 당대에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이 조직론적인 차원에서 출발하여 문학창작에서도 “문학적 이념 이전에 정치적 이념”3)을 선별기준으로 내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에 걸쳐서 정교화된 리얼리즘 이론의 수용과 좌파 시각의 문학사 연구의 영향을 받은 결과 채만식 문학은 그 의의만큼이나 한계가 부각되는 양상을 노정했다.”4)는 것이다.  전자는 문학창작에서 작가의 세계관과 계급적 이념의 관계를 혼동한 결과이고 후자는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전체주의적인 가치판단 혹은 리얼리즘 문학을 상대로 하는 연구가 쉽게 빠지는 주관, 이성적인 진보개념 내지 이상적 전망의 방법론에 맞춘 역사망각의 시간극복이라고 일깨워주지 않을 수 없다.  “풍자는, 인간의 악덕이나 우행의 교정책으로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옹호된다.”5)  “산문이나 운문이거나 간에 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주제를 조소로써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전체의 구성원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풍자’의 형식상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6)  “영어로 된 훌륭한 풍자는 중세기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쓰여져 왔다.”7)  보는 바와 같이 풍자는 접수미학의 시점에서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옹호되고 그럼으로써 문학의 한 장르로서 당당하게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쓰여”지는 장르사적 발전을 해온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문학장르 내지 문학사조를 포함해서까지 문학사의 흐름을 사회․역사철학적인 발전과 무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기본전제를 작가 및 작품 평가의 척도로 삼을 때 장르선택의 문제는 벌써 창작기법의 범위를 넘어 작가의 시대 대응적인 방법론으로 검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 대응의 방법론으로 검토 가능함을 우리는 풍자 대상의 본질과 시대적․제도적 요청에 대한 진단을 통해서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반증이 성립되지 않을 때 그것은 다만 작가의 창작기법선택임에 다름 아니고 따라서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이라는 리얼리즘 정신에 의해 작가의 세계관 및 역사관에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고대 로마 풍자문학의 두 유형을 대표하는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가 각각 낙관주의적 풍자와 비관주의적 풍자문학 작품을 쓴 이래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서구 풍자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두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이 두 유형의 풍자문학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으로서 치유 가능한 것으로 보는가 또는 치유 불가능한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질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보는가에 의해 대별되는 것들이다. 이는 곧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여부와 연관된 문제로서 풍자 작가 자신의 인간관 및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 등이 반영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채만식의 풍자문학에 나타난 그의 관점은 비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채만식 자신의 기질에도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내적인 긍정적 보편성을 찾아내기 힘든 시대로서의 식민지 체제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현실 부정의 수단으로서의 풍자문학을 자신의 주된 창작 방법으로 채택한 채만식의 작가적 운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8)  정홍섭이 채만식의 풍자문학을 “비관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라고 결론하는 것은 역시 문학장르 내지 문학사조를 포함해서까지 문학사의 흐름을 사회․역사철학적인 발전과 무관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기본전제를 척도로 작가 및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풍자이론 일반에 근거하여 풍자문학이라면 어차피 낭만주의적이 아니면 비관주의적이라는 양단이론에 기탁한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채만식의 풍자문학을 이미 창작기법의 범주를 넘어 “자기 내적인 긍정적 보편성을 찾아내기 힘든 시대로서의 식민지 체제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현실 부정의 수단으로의 풍자문학을 자신의 주된 창작 방법으로 채택한 채만식의 작가적 운명이었다”고 확인함으로써 그의 풍자문학을 시대적 대응의 방법론의 차원에로 환원시켜 바로잡아놓은 것이다.  방민호도 “일제 하 조선의 문학인들에 있어 식민지적 현실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문학적으로 의식되고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고 하면서 “근대문학의 독자적 발전이라는 명제를 두고 고민”9)한 당대작가들을 두둔해 나서고 있다.  “사실 1936년부터 38년 말까지의 3년 동안은, 채만식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맹렬한 활동기였다.  이 시기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은, 프로문예 작가들에게는 이데올로기의 탈피를 서두르게 하였고, 대부분의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의 관심을 도시와 문명 또는 농촌과 자연으로 확대시켜 삶의 양상을 다양하게 제시하도록 하였다.”10)  1934년 2월부터 시작되는 제2차 사상범 검거를 비롯하여 정치적 탄압에 의한 식민지 강압정책이 강화되면서 일제는 <황국신민서사>의 강제 암기, 신사의 강제 참배, 일본어를 국어로 책용, 지원병제도의 실시와 창씨개명 등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가속화하려고 망발하였다.  이같이 부분적으로부터 전체적으로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는 때 “채만식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풍자 양식은 ‘근대(성)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유력한 공격 수단임과 동시에 자기 부정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다.”11)  상기한 극한의 시대배경과 그런 배경에서도 채만식의 창작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였고 풍자문학이 주된 창작방법이었다는 사실은 채만식의 작가적 의식이 부정적 시대와 그에 호응하는 인간에 대한 공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진맥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것을 조소의 풍자정신에 기탁한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풍자문학에서 가장 대표성을 띠고있다고 할 수 있는 장편소설 『태평천하』는 위에서 그의 풍자문학의 성질을 시대 대응의 방법론으로 확인함으로써 그 독특한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태평천하』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인물 구성 면에서 독특한 점을 보이는데, 『濁流』와 대비할 경우는 물론 유례없이 부정적인 인물들로만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종학 역시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저자 각주)12)  이는 작품의 인물설정을 통해 당시 사회의 시대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가속화와 함께 민족의식이 거세되고 동물적인 생존을 위해 반민족적․반사회적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주인공 윤직원 영감을 주축으로 하는 부정인물들은 개인이나 한 가족의 타락을 넘어서서 민족성과 인간성을 잃어가던 당대 한국의 식민지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윤직원 영감이 식민통치에 의한 한국의 기형적인 근대발전과 자멸해 가는 식민지인의 몰락상을 가장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는 전형인물로 되는 것은 그 인물의 개인적 부정행위에 앞서 우선 그 자신이 시대의 발전에 도태될 저물어 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선 윤직원 영감의 계급적 신분이나 역사적 재산관계부터가 매우 우연하게 ‘하사’받은 것이다.  얼굴이 말[馬面]처럼 길대서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듣던 윤 직원 영감의 선친 윤용규는 본이 시골 토반(土班)이더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전이더냐 하면 실상은 아전질도 제법 해먹지 못했습니다.  아전질을 못해먹은 것이 시방 와서는 되레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그때 당년에야 흔한 도서원(都書員)이나마 한자리 얻어 하고 싶은 생각이 꿀안 같았어도, 도시에 그만한 밑천이며 문필이며가 없었더랍니다. ...  그런데, 그런게 다 운수라고 하는 건지 어느 해 연분인가는 난데없는 돈 2백 냥이 생겼더랍니다. 시골 돈 2백 냥이면 서울 돈으로 2천 냥이요, 그때만 해도 웬만한 새끼부자 하나가 왔다갔다할 큰돈입니다.13)  전혀 무식하고 째지게 가난하였던 윤 직원의 선친 윤용규가 운수 좋게 난데없는 돈 2백 냥이 생겨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윤용규는 “칼로 벤 듯 노름방 발을 끊고, 그 돈 2백 냥을 들여 논을 산다, 대푼변 돈놀이를 한다, 곱장리를 놓는다 해가면서 일조에 착실한 살림꾼”14)이 되었다. 돈이 생명의 전부가 된 것이다.  윤 직원 영감은 선친으로부터 “3천 석거리”의 재산을 물려받은 부자이나 역시 무식하였고 “과시 승어부(勝於父)”라 할 정도로 치산에 밝았다. 그런 윤 직원 영감에게는 “돈을 모으는 데 무얼 어떻게 해서 모았다는 거”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한테는 돈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시금석이었다. 더구나 부친이 재산 때문에 목숨을 잃었기에 그한테는 동학당같은 무리는 화적패 내지 부랑당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재산축적을 위해 여러 편리한 제도를 만들어주는 식민주의자가 은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튼 윤 직원 영감은 그처럼 육친의 피로써 물들인 재산더미 위에 올라앉아 옛날 그다지도 수난 많던 시절과는 딴판이요, 도무지 태평한 이 시절을 생각하면, 안심되고 만족한 웃음이 절로 솟아날 때가 많았습니다.15)  사실 이에 앞서 그의 재산축적이 조선이 식민지화되던 초기 어두웠던 시절에 “체계변”이며 “장리변”의 이문과 “또 공문서(空文書)가 수두룩해서 가산 늘리기가 좋았던”데 원인하고 있으니 이는 벌써 일제 식민지수탈정책과 구조의 결과물임에 다름 아니다. “식민지 기생지주와 매판자본가들”, “일제는 이들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반봉건적 경제구조(지주와 소작인)를 강화하고, 또한 이들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16)  이와 같이 윤 직원 영감의 재산관계를 식민지역사와 함께 정리하고 그의 계급적 신분을 식민지수탈구조와 관련시켜보면 친일행위에 앞서 우선 신분적으로 식민지의 기생지주, 친일지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동학당 같은 무리를 화적패나 부랑당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들이 부친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은 무리이기 때문이고 사회주의나 사회주의자를 증오하는 것은 무슨 주의의 선택도 아니고 다만 그들이 자기를 지켜주는 일본을 반대하고 ‘태평천하’를 위협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주면 꼬리를 젖는 동물성에로 철저하게 퇴화된 것이다.  작품 전체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부정인물들도 각기 자기의 신변상황에 따라 현실을 외면한 채 불구가 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극복을 위한 아무런 생산적인 노력도 없이 식민지수탈구조에 자기의 무기력함과 동물적인 생존욕구만을 그대로 노출한 채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는 순 소비적 인간들이다.  “풍자의 대상이 된 작중 인물들의 공통점은 민족적 이상에 역행하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민족적․반사회적 행동으로 일관하는 지주 겸 고리대금업자, 목적 없이 살아가는 타락한 부유층의 자제,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르고 동물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채만식은 한 세대 속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무려 다섯 세대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는 여러 세대의 가치관을 동시에 대비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차이와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17)  이주형이 ‘세대’ 모티프에 천착한 것은 텍스트의 외부구조에 눈가림을 당하지 않고 작품의 저변에 깔려있는 작가의 내면적인 창작원리를 밝혀내려는 좋은 시도였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여러 세대의 가치관을 동시에 대비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차이와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보다는 작가 채만식이 당대 암담한 식민지통치의 가속화와 민족성과 인간성이 말살된 동물 본능적인 존재군상을 보면서 얻은, 민족수난의 극복이 여러 세대를 걸치지 않을 수 없다는 역사철학의 예술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투명한 해석이 될 것이다.  “‘세대’ 모티프의 문제는 역사철학의 문제이다. 즉 채만식의 ‘세대’ 모티프에는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한 행정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던 당대 조선이 과연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18)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과연 이 작품에서 어떻게 역사철학적으로 접근되고 있는가 하는 진단은 작품의 주제와 창작원리의 명암을 확인하는 기본 핵이 될 것이다. 3. 허무에의 극복과 성찰된 이념  『태평천하』는 부정적인 인물들로 작품의 전체구성을 이루고 그 부정적인 인물의 세대적 흐름을 윤용규→윤 직원→윤창식→윤종수→윤경손의 다섯 세대에 꿰어놓고 있다. 긍정인물은 아예 현실에서 외출시키고 현장에 있는 인물은 완벽하게 타락과 몰락하는 모습들이니 자칫 작품이 허무주의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카프 해체(1935. 5. 28),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공표(1936. 12. 12), 중일전쟁(1937. 7. 7), 조선사상보국연맹조직(1938)으로 이어지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로 인해 일체의 사상운동이 금지(전망으로서의 사회주의 이념 상실)되었고, 여기서 작가의 ‘되다가 찌부러진 찌스러기주의자(소부르주아 의식)’l로서의 한계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한 이 작품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이 작품이 중도에 쓰다가 만 인상을 주고, 허무주의적 색채마저 주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19) 『태평천하』가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했다는 이러한 결론은 작가의 인간관 내지 세계관을 계급적 이데올로기로 양극화하고 문학창작에서의 이념의 미학적 역할을 계급목적론으로 단순화하는 폐단이다.  문학, 특히는 리얼리즘문학은 현실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재구성을 걸친 현실의 본질적인 반영이라고 할 때 이때 현실의 진실한 재현은 이념을 매개로 또는 제작원리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창작에서 이념에 의해 현실이 재구성된다면 이념은 또 현실의 본질에 의해 성찰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찰되는 이념은 작가의 인간관 내지 세계관의 제약은 받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확인하는 이성적인 진보개념 내지 이상적 전망임에 다름 아니다. 이념이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전체주의적인 가치판단 내지 계급목적론으로 정의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리표현일 때 문학은 문학이기에 앞서 철학저서나 계급투쟁지침서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부분에 마치 폭탄처럼 갑자기 ‘배달’된, 일본에서 종학이가 피검된 사건을 작품의 허무주의 혐의를 벗길 수 있는 ‘실증자료’로 포착하는 것은 작가가 작품의 저변에 잠재적 생산성으로 깔아놓은 역사철학적인 발전이념에 접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문흥술은 이런 포착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일제 강점기에 경찰서장이라는 위치와는 극단의 자리에 있는 사회주의 선택은 작가 채만식의 동반자적 성격에 다름 아니다. 곧 몰락 중산계층인 작가의 소부르주아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매개항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드러남이라 볼 수 있다.”20)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계급목적론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런 판단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몰락 중산층인 작가의 소부르주아의식”을 꼬집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작품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미완성으로 표현되어 “실상 이 작품이 중도에 쓰다만 인상을 주고, 허무주의적 색채마저 주는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탈은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한 이 작품”이라고 확인한데서 생긴 것이다. 이런 논지를 따를 경우 그 시정방안은 아무래도 종학이를 작품의 플롯을 형성하는 기본인물로 설정하고 윤 직원 영감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인물들과의 갈등 속에서 일제식민지수탈정책에 맞서 대결하다가 피검되는 과정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태평천하』에는 일제 식민주의의 강압정치가 황민화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절정에 오르면서 국가의 상실과 민족의 몰락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여 있던 “당대 조선이 과연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확인하면 종학의 피검은 “사회주의 사상을 역사의 방향성으로 선택한”것이 아니라 바로 일제 식민주의가 종내는 극복되고 전복될 수 있다는 이성적 진보개념의 역사철학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윤창식→윤종수→윤경손에 걸쳐 삼대에 이르는 타락과 멸망은 윤 직원 영감한테는 큰 타격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한테 기생하여 살아가는 기생충을 떨어버리는  것만큼 해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윤종학의 피검은 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는 것이었다. 윤종학의 상징적 의미는 자기를 지켜주는 일본을 반대하고 ‘태평천하’를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일제 식민주의와 생리적으로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친일 기생지주는 식민주의자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대에 있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가장 철저한 대적이었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를 이성적 진보개념과 이상적 전망의 대응물로 내세운 것은 일제 식민주의가 종내는 극복되고 전복될 수 있다는 역사철학적인 접근을 위한 대리표현일 수 있다는 분석용어를 사용하여야 작가의 창작원리를 투명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식민주의 강압정치에 의한 국가의 상실과 민족의 몰락이라는 현실을 부정인물들의 동물적인 퇴화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작품의 전체적인 풍자적 구조에서 결말부분에 폭발한 종학의 피검 사건에 대한 ‘배달’은 적극적인 의미가 매겨질 것이다. 맺는 말  상기한 논술에서 보면 『태평천하』를 비롯한 채만식의 풍자문학은 식민주의 강압정치에 의한 국가의 상실과 민족의 몰락이라는 특정한 역사환경에서의 현실대응의 창작방법론이었으며 공격적인 풍자정신과 역사철학적인 접근방법이 허무에의 극복의지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창작이 성찰된 이념에 의해 현실을 재구성하고 또 작품에서 재구성된 현실의 재현이 다시 이성적인 진보이념을 나타낼 때 그것은 작가의 인간관과 세계관의 제약을 받더라도 계급목적론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역시 이념은 역사철학적인 방향성을 나타내는 진보개념이나 전망의 방법론이지 계급목적론의 이데올로기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의 본질에 충실할 때라야만 채만식의 풍자문학이 가지는 특정시대의 방법론적 특성을 옳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54    암흑기의 바위틈에 돋아나는 가냘픈 굴절의 민족문학 댓글:  조회:2876  추천:0  2009-05-16
-정인택의 소설들에서 읽어낸다 1. 들어가는 말 한국 근대문학은 일제의 식민정치와 불행한 인연을 맺으면서 아슬아슬하게 걸음마를 뗐다. 그만큼 한국 근대문학은 식민정치와의 조우 속에서 탈식민주의의 민족정신을 고양하면서도 억압과 탄압과 죽음의 위협을 시시각각으로 감내해 왔다. 문학이 한 국가 내에서도 그 제도적 투명도에 따라 겪는 시련이 틀리겠으나 특히 국가 주권과 민족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생사가 달려있을 때 문화의 선구로서 문학은 중점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사적으로 우리 나라 문학을 통관해 볼 때, 전통적 생명을 거의 잃고 최악의 경우에서 질식 직전에 처했던 시대가 일제말 소위 암흑기가 아니었나 한다. 일본 軍國主義가 거국적으로 침략전에 광분할 때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가 그 와중에서 평탄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했다. 더구나 韓日合邦 후 계속 핍박을 받아오던 우리 문학인지라 전통적 고유문학의 여맥을 이어갈 기력은 다하여 4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군국주의의 총칼로의 압박, 거기다가 이에 아부하는 친일 군상의 발호로 전통문화는 빈사상태에 이르렀고, 문학계는 그야말로 암흑세계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1) 이 시기 문학을 문학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데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다. 하나는 일제의 황민화정책의 본격화로 인한 시국순응의 친일문학이 반도 전체를 압도적으로 휩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문학용어의 비민족어사용 즉, 일본어사용이다. 여기서 논리전개는 잠시 접고 문학창작 내지 문학일반 뿐만 아니라 국권찬탈과 민족동화를 목적으로 하여 일상생활의 상용언어마저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하고 여러 가지 극단조치까지 들이댄 당시의 선택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문학용어문제는 특정시대의 특정현상이었다고 배려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연구자세라고 하겠다. 요는 그렇게 창작된 문학작품들이 우리의 문화, 풍속, 인정, 정감 등을 담고 있나 없나 하는 것이다. 일제 탄압정책 하에서, 그것도 국권상실과 민족몰락이라는 암흑기의 극한 상황에서의 우리 문학을 두고 그런 순진한 유토피아를 망상하면서 조금만 친일적(그것이 위장된 것일 수도 있고 강요당한 장치일 수도 있는데) 요소만 있으면 그대로 친일문학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래서 작가 내지 문학사에 빚지는 것일 수 있다. 그런 확인을 거친 작품이 이제 친일문학인가 아닌가를 다시 검증 받아야 할 것이다. 문학용어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작품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 처절한 현실극복의식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매몰되어 가는 우리 문학사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주는 눈물겨운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일제말 암흑시기 민족의 언어마저 상실되던 극한 상황에서, 군국주의의 시국정책에 의한 문화정치의 강압 하에서 피식민 주체의식을 주장 내지 입증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집단 내지 민족의 죽음을 아프게 체험했던 경험을 발굴해 내는 작업은 그래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그런 시점으로 정인택의 작품을 거론하게 된 것은 이른바 ‘신체제’ 이후 중견작가로서 식민주의에 협력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는 지적과 함께 친일문학으로 욕보고 있는 그의 일부 작품들이 아무래도 연구자들의 오독과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판단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이에 대한 재검토를 통하여 그 본래의 정확한 주소를 확인하는 것은 한 작가 작품에 대한 공정한 대우와도 관계하겠지만 그에 앞서 벌써 암흑기 바위틈을 비집고 가냘프게나마 문학사적 맥을 이으려고 싹트던, 굴절된 우리 문학의 원색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위장된 전쟁찬미와 효를 통한 평화의 갈망―「돌아보지 않으리」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강요한 황민화, 창씨개명, 언어말살정책 등이 어느 정도 제도적으로 고착되고 드디어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까지 전시상태에 처한 상황에서 광적인 전쟁문학 내지 전쟁찬미의 문학은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그냥 국책문학의 대표적 주제로 되었다. 죽음으로 천황에 보답하고 국가를 위해 영광을 빛낸다는 군국주의 사상을 국민사상으로 뿌리내리게 하려는 전쟁찬미의 문학은 그리하여 전형적인 친일문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작품의 전형으로 정인택의 「돌아보지 않으리」(『國民文學』, 1943, 10.)를 손꼽고 있다. “광적인 전쟁찬미는 당시 軍 報道部에서 제일 바람직하게 생각한 제1급의 작품에 해당한다. 이런 작품의 전형적인 것이 鄭人澤의 <돌아보지 않으리>였다. 표제부터가 출전하면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詩句의 일부다. 즉, 나라(일본)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인 것이다. 당시 중견작가였던 그가 이유는 여하간에 이런 작품을 써야 했다는 사실은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2) “이 작품의 표제나 내용에 있어서 일본정신, 즉 군국주의를 찬양한 표본적인 작품이었다.”3) 광적인 전쟁찬미의 문학, 그것도 “군국주의를 찬양한 표본적인 작품”이니깐 친일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말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비평의 시각은 주인공이 “전지에서 보낸 편지에는 위문품과 千人針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내용과 공을 세우지 못해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것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라는 것과 “편지를 陣中報告 형식으로 써보낸 그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다짐하고 있다.”4)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 편지의 특성상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전한다는 의미에서 어찌하면 “공을 세우지 못해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것”을 누누이 내비친 듯도 하지만, 그러나 “편지를 진중보고 형식”으로 써보낸 점에서 보면 입대하여 “일년하고도 삼 개월”이 되도록 “전지에 온 것은 이름 뿐, 공을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무엇 하나 나라를 위해 쓸모가 없는 자신”5)이라는 사실이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편지는 사실적으로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다만 자신이 공을 세우고 나라 위해 죽음을 당하면 어머니더러 어떻게 해주셔요 하는 가정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주셔요 하는 가정에는 그렇게 하시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을 전제함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조국, 사랑, 평화 등을 상징하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작가의 내면적 추구와 작품의 저변에 깔린 창작원리를 읽지 않으면 이 작품의 진의를 밝혀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형상은 조국, 사랑,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은 문학작품의 원형창조에 속하는 것으로서 논리전개가 필요 없을 것이다. 주인공은 “전지에 온 것은 이름 뿐, 공을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무엇 하나 나라를 위해 쓸모가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 어머니 앞에서나마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이라고 하면서도 그것보다는 “어떻든 간에 혼자서 쓸쓸히 빈집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를 일 년 동안이나 위로하지 못했다는 것은 대단히 불효를 한 것”이고 “무거운 죄”6)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은 또 죽음을 마주한 아들을 두고 “지기 싫어하시는 성벽이 있는” 어머니께서 “이제까지의 잘못된 관습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씩씩한 군국의 어머니가 되어”7)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그렇지 못한 어머니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죽음, 당신이 제일 힘적게 의지하고 지팡이로 생각하고 바라는 장남인 내가 죽는다는 것, 어머니는 그것을 정말 진심으로 마음속으로 바랄 수  있습니까?8) 내가 나라를 떠날 때에 “어머니 이제 동경 구경을 시켜 드릴께요. 벚꽃이 한참 피어 있는 동경 구경을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니깐 어머니는 껄껄 웃고 있는 나의 얼굴을 아무말없이 멍하니 쳐다보고 계셨지요. 그 말의 의미는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9) 주인공의 어머니는 “나라를 위해서 죽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이 주인공은 “안타깝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잘못된 관습을 벗어”나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씩씩한 군국의 어머니가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와 내지의 어머니를 비교함으로써 주인공과 주인공 어머니의 신분확인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싸움터에 나가 영광스럽게 죽는 것, 그것은 보람있는 나라에 생을 누린 남자로서는 무엇보다도 자랑스런 일이요, 또한 바라는 바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머니에 있어서 결코 슬픔 일이 아닙니다. 탄식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그 이상 없는 명예요,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지(內地, 일본 본토)에서는 전사한 유가족의 집을 찾아갔을 때, “이번에 큰공을 세우고 명예의 전사를 하셨다니 정말 축하합니다” 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10) 충과 효의 일반적인 이치를 역설하면서도 내지 어머니를 통한 주인공과 주인공 어머니의 신분적 차이를 확인하는 작가의 “엉큼한 속생각”을 우리는 무심하게 흘려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씩씩한 군국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내지”인한테는 충효의 발현일 수 있으나 식민지인에게는 억압적으로 강요당하는 강박관념일 수밖에 없다.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전지에 온 이름뿐인 주인공이 어머니에 대한 불효에 무거운 죄를 느끼면서도 충효를 운운하면서 어머니의 잘못된 관습을 지적하는 풍유적인 서술은 문학에 대한 식민독재가 극단화 된 시대상황에서는 절묘한 예술적 처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이제 징병제를 맞아 미친 듯이 기뻐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징병제 만세를 부르고 현제 만세를 부르는 것 또한 비명에 가까운 허탈증세일 것이다. 식민지 청년들마저 전쟁의 대포 밥으로 내모는 징병제 만세를 부르고 그런 “위대한 마음을 내려주신” 천황폐하의 만세를 부르고 징병제에 의한 희생물이 될 현제의 만세를 부르는 주인공의 심정은 과연 격동인가. 히스테리인가. 어머니와의 서신에서 내지인과의 신분적 차이와 그로 인한 이질적 심리를 드러낸 주인공이 오히려 징병제를 맞아 “정신없이 기뻐하는 모습”은 크나큰 정신적 압력 끝에 마침내는 미쳐나고야 마는 그런 광적 증상임에 다름 아니다.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 부르짖었다고 너는 생각하니, 현아 “반도 징병제 실시 만세”라고 외쳤다. 여러 사람들이 소리를 합쳐서 말이야. 형은 드디어 참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주위에 아랑곳없이 엉엉 울었단다. 부끄럽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11)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고는 듣는 사람의 상상 밖으로 “반도 징병제 실시 만세”를 외쳤다는 표현은 식민지인의 강박관념과 억울한 운명에 대한 처절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심정은 또 충성에 대한 과장된 심리반응으로 나타난다. 축하한다. 이말 밖에는 갑자기 더할 말이 없다. 전적으로 나(너?-인용자)는 행운아다. 타고난 복이 대단한 놈이야,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네가 스무살이 되면 영광스런 부름을 받는거다. 황공하옵게도 천황이 팔다리로 생각하는 반도출신의 너에게 황송하게도 위대한 마음을 내려 주신 거다. 한번 죽음으로써 이 군은(君恩)에 보답하지 않고서는 저승이 두려워진다. 현아 힘을 내라. 악마의 방패가 되어 형의 시체를 뛰어넘어 싸워다오. 광대무변한 성은(聖恩)에 보답하는 길은 그것 하나, 다만 그것뿐이다.12) “한번 죽음으로써 이 군은(君恩)에 보답하지 않고서는 저승이 두려워진다.”, 즉 저승이 두려워질 정도로 선택 없이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강요되는 죽음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賢은 친일적이고, 일본화한 표본적인 인물이었다. 그 농촌의 번영을 위해 대학에 갈 것을 포기하고 高等農林學校에에 진학했다가 지원병으로 입대한 사람이다. 그는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 이 민족의 앞날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주의 학생이 많았던 고등농림학교생으로 인물을 설정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민족의식이 농후한 高農學生을 광적인 친일파로 만들어 젊은 학생들의 사상을 근원적으로 뒤흔들어 놓으려는 작자의 악랄한 수법이 아니었나 한다.13) 이러한 급급한 결론은 연구자의 선입견이 객관성을 잃게 하여 주관적인 해독으로 작가의 입장을 친일 쪽으로 몰아 부친 것이 아닌가 한다. “민족주의 학생이 많았던 고등농림학교생”이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 이 민족의 앞날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주인공이었기에 이미 전지에 담은 몸이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에 무거운 죄의식을 느끼고 내지(일본 본토)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의 신분적 이질성을 절실하게 느낌으로써 지원병제를 징병제로 몰아가는 시국에 “정신없이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술한 내면구조의 합리성이 확인될 때 우리는 오히려 작가의 그 교묘한 위장술에 탄복조차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녀와의 애정문제 뒤에 숨겨진 민족의식―「껍질」14)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그때로부터 일본은 영토의 확장과 함께 한국인에 대한 정신적인 황민화에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이런 황민화정책은 동아공영권 실현을 위한 내선일체라는 퍽 듣기 좋은 주장을 내세우던 데로부터 끝끝내는 일본을 표방하는 국체명징(國體明徵)을 공공연히 강조하면서 고압적인 동화정책을 펼쳐나가기에 이르렀다. 이는 황국신민서사요, 신사참배요, 창씨개명이요, 국어사용(일본어사용)이요 하면서 황민화정책이 실질적인 발전단계를 걸쳐 최종적인 세뇌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결과이기도 하려니와 특히는 태평양전쟁이후의 전시상황으로부터 조선을 병참기지로부터 내지와 상부한 인력, 재력 지원의 후방기지로 일체(一體)화하려는 조급한 정서의 발로였다. 이른바 이와 같은 시국정신을 철저히 실행하기 위하여 일제는 전쟁의 인력동원에 한국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지원병제, 징병제를 실시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는 침략전에 모든 초점을 집중하여 문학에조차 정책적 요구를 강요하였다. “문학작품의 시국화는 당시 문인에게 가해진 굴레였다. 1941년경까지 순수작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발표하는 데 많은 부담이 되었고, 군의 감시를 받으며 잡지의 발행인의 고뇌는 심각한 것이었다. 편집후기의 논설문 속에는 직접적으로 고통을 호소한 것이 非一非再했다.”15) 군국주의의 시책을 강화하는 적극적인 조치로 문학도 문인협회와 같은 친일적인 문인단체의 결성에 더불어 시국정책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고 문인들은 시국물 생산에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국적인 문화정책으로 말미암아 “1942년경부터는 이성을 잃은 채 전쟁을 찬미하고 일본정신을 부르짖는 논설․소설․시 등이 쏟아져 나왔고, 그 정도가 광적일 정도로 격렬했다.”16) 군 보도부나 총독부 도서과가 직접 검열에 나서서 작가의 사족을 얽어매는 바람에 문학은 군국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시녀로 철저히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전쟁찬미와는 다른 소재를 다룰 수 있은 것이 일녀(日女)와의 연애이야기였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황민화시책에 일조하는 시국물로 허용된 것이다. 그러니 역시 시국적인 문화정책에 의한 주제확정이라고 할 것이다. “<<國民文學>> 창간호에 발표된 <아자미의 障>은 前述한 성격의 작품으로서 대표적인 것이다. 비중 있는 중견작가 李孝石의 作이요, 더구나 창간호에 발표되었다는 점 등, 당시 소설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17) 연구자는 작가가 “여기서 조선남자와 일본여자와의 通婚을 통해 내선일체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제시”25)하였다고 하면서도 “이 작품에서 각별히 흥미를 끄는 것은 작자가 朝日通婚을 통한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선인 우위에서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은 신문기자와 여급이라는 신분설정부터가 그러하며 동거생활을 하는 동안 현이 아자미에 동화되기보다는 아자미가 현의 취향에 더 적극적으로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6)고 작가를 변호해 나선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러한 변호는 설득력이 없는 것이고 달걀 속에서 뼈를 찾아내는 부질없는 짓거리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부정적인 판단은 논리의 자가당착에 빠진 이 연구자의 스스로에 의해서 내려지고 있기도 하다. “현과 아자미가 서로 일치되어 가는 과정은 식습관이나 고유의 의복 등, 주로 풍속적인 면을 통해 형상화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늘’과 ‘한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자미는 처음에 마늘 냄새를 무척 싫어하지만 마늘을 끊지 못하는 현을 차츰 이해하고 그의 취향에 익숙해지기로 맘먹는다. 또, 아자미는 기모노나 양장보다도 한복이 몸매를 잘 드러내주기 때문에 가장 좋다고 예찬한다. 이에 대해 현도 한복차림의 아자미를 놓고 같은 핏줄의 한 사람임을 절감한다. 결국 이 작품의 작가가 생각하는 내선일체란 식생활이나 옷차림을 바꾸는 따위의 단순하고 소박한 차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국 여성의 관대한 아량과 적극적인 이해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18) 여기에서 보다시피 아자미가 현의 취향을 따라주는 것은 “지배국 여성의 관대한 아량과 적극적인 이해에 의해 주도”되어 근근히 “식생활이나 옷차림을 바꾸는 따위의 단순하고 소박한 차원”의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관대한 아량”을 보일 수 있는 지엽적인 것이나 문제는 주인공 현이 이미 황민화에 철저히 세뇌가 된 인간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현은 식민지의 지식인이지만 식민지 조국에 대한 인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자신이 다니던 신문사가 문을 닫는 마당에도 그것은 오직 아자미와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만 파악될 뿐이다.”19) 더욱이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과 부친사이에는 아무런 심리적 갈등도 없는 충돌만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이 이미 “조국에 대한 인식”을 버리고 민족의 아픔에서 ‘해탈’되어 식민지인으로 전락되고 황민화에 철저하게 세뇌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민족성과 조국을 상징할 수도 있는 부친과의 충돌에서 주인공은 아무런 심리적 갈등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분노와 대결에 몸 달아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을 두고 “前述한 성격의 작품으로서 대표적인 것이다. 비중 있는 중견작가 李孝石의 作이요, 더구나 창간호에 발표되었다는 점 등, 당시 소설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20)고 결론을 내리면 이는 틀림없이 친일문학의 한 대표적인 유형에 대한 확인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작품 중에서도 우리는 일녀와의 애정문제 뒤에 숨겨진 민족의식을 발견하게 되는 작품을 찾아낼 수 있다. 과연 그런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유형의 작품이 친일문학의 대표적인 유형만이 아님을 실증해주게 될 것이다. 『일제말 암흑기 문학연구』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정인택의 소설 「껍질」역시 일녀와의 통혼을 다루고 있으나 실제 갈등구조를 보면 주인공과 부친의 심리적 갈등이 주선을 이루면서 작품의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 그만큼 소설은 벌써 단지 시국에 부응하여 일녀와의 통혼을 주제로 내선일체나 동화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이 겪는 시대적 아픔을 은근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식민주의와 협력-일제말 전시기 일본어소설 선집1』에 수록된걸 보면 이효석의 「아자미의 障」과는 또 다른 오독(誤讀)에 의해 잘못 해석되거나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판단에 작품의 진의를 올바르게 확인 받지 못하고 매몰되지 않나 생각된다. 일녀와의 통혼을 다루었으니 당시 일제의 시국정책에 부응한 소설이라고 낙인찍기에는 소설의 주인공이 앓고 있는 시대적 아픔은 너무도 심각하고 깊은 것이고 주인공과 부친의 심리적 갈등은 단순한 사건적 충돌만이 아닌 상징의미가 짙게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효석의 「아자미의 障」에서 주인공한테 아버지는 다만 장애물일 뿐이고 주인공이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아무런 심리적 갈등도 없는 분노와 경멸이었다. 마치 내선일체의 시국에 일녀와의 통혼은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인 듯 싶다. 그러나 「껍질」에서 일녀와의 통혼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주인공과 아버지의 갈등은 시대성과 민족성을 읽어낼 만한 ‘중대한 문제’였다. 근대의식이 일제의 식민주의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식되던 당시에 우리의 민족의식은 봉건윤리도덕에 의한 가부장제적 가치질서이었다. 따라서 부성은 곧 나라나 민족성의 상징이 될 수도 있을 것이요, 부성의 몰락 내지 부재는 식민지 조선의 애달픈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성의 이런 상징적 의미 때문에 일녀와의 통혼을 한 주인공 또한 황민화와 내선일체로 동화되어가던 우리 민족의 현장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은 아버지와 주인공은 하나의 민족의 두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근대의식과 일제 식민정치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민족성의 ‘껍질’이 아버지라면 일본에 동화되어 가는 민족의 현장모습이 바로 주인공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주인공이 겪는 불효자의 반성은 우리 민족 스스로가 감내하고 있던 동화에의 거부와 민족성 고수의 몸부림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주인공은 시종일관하게 아버지와의 모순갈등 속에서도 불효에 대한 반성에 마음이 앞서고 지어는 그런 자기는 ‘대역죄인’이라고까지 마음속으로 외친다. “...당신이 가도 소용이 없을 거야.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그게 효도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니...”21) 결국 아버지한테 말려들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의자에서 일어나 반항이라도 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자신이 한심해졌다. 아버지도 벌써 60을 넘었으니 해마다 쇠약해져 언제 쓰러질지도 모르는 여생이다. 결국 나중 생각이 이겨 불쌍한 아내의 모습 대신 늙은 아버지의 손발이 눈에 아른거렸다. 난 정말 불효자다, 속은 거라고 해도 괜찮지 않은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22) 잠깐이었지만 속았다, 당했다, 등등의 생각에 이런 비상수단을 쓰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라고 의심도 하지 않은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아 혁주는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들 숙 없었다. 그 잠깐사이에 저렇게......벙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늙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혁주는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23) 어두컴컴한 등불 밑에서 일부러 정면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던 혁주는 은색으로 빛나는 백발과, 가느다랗게 떨리는 힘줄 투성이의 마른 손, 눈물이 가득한 퀑한 눈, 지도처럼 잘게 패인 주름 등이 모두 자신의 불효 때문인 것만 같아 어떤 말이라도 따르겠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24) 이처럼 작품 전편에 시종일관되는 주인공의 불효에 대한 반성은 마침내 자신을 ‘대역죄인’이라고까지 자책하게 한다. 자신이 집에서 멀어지는 만큼 아버지의 생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나는 아버지를 죽인 대역죄인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25) 불효를 반성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을 ‘대역죄인’이라고까지 마음속으로 외칠 때 그 갈등의 내면적 의미는 확장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다만 추론이 아니라 작품에서 묘사를 통하여 발전되고 있다. 학주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눈물 너머 어슴푸레한 어둠 속의 하얀 덩어리를 바라보다가, 당황하여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닦았다.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인 다음 침착한 걸음걸이로, 그러나 돌격하는 심정으로 성큼성큼 가족들 앞으로 나아갔다. 응접할 겨를도 없이 인사말을 쏟아 붓는 가족들과 친척들, 마을 사람들을 대하고 학주는 처음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는, 꾸밈없는 소박함으로 젖어 가는 자신이 오히려 기특했다. 바로 전까지 머리를 가득 채웠던 불쾌감과 반감을 잊고 여유롭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26) 끝없는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데 해가 저문 것 같은 암담한 기분이었다. 아버지를 죽일 것인가, 시즈에를 살릴 것인가? 단지 이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중대한 문제였지만......그러나 결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심연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만큼 잡다한 시사가, 제시가, 의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맹목적으로 자신이 믿고있는 길을 갈 뿐이었다.27) “하얀 덩어리”를 바라보면서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자기와 아버지의 갈등은 “생각만으로는,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주인공 스스로 “맹목적으로 자신이 믿고있는 길을 갈 뿐”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화되어 가는 민족의 현장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근대의식과 식민정치란 쌍둥이에 의해 여지없이 떨어져나가면서도 한사코 고수하려는 민족성의 ‘껍질’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각은 역시 지극히 민족적이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의 딱딱한 껍질에 부딪쳐 튕겨 나갈 사람이 여기 또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껍질을 깨부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버지는 그 껍질을 등에 진 채로 그 무게에 눌려 부셔질 것이다. 대역죄인이 눈앞에 또 하나 있었다.28) 언어마저 잃어가던 일제 말 암흑기에 민족성의 ‘껍질’은 떨어져나가고 현장인은 대역죄인이 되어버리는 민족비운의 참담한 한 폐이지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4. 모범국민 위에 군림하는 남편의 정체―「청량리 교외」29) “일제말기 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황민화’의 당위성 강조에 있다. 이 시기의 친일문학은 따라서 ‘內鮮一體의 政策文學’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선일체’의 문학, ‘國體明徵’의 일본적 국가관을 체득시키는 문학, ‘국민사기의 진흥’을 고무 찬양하는 문학, 그리고 ‘국책에 협력’하는 문학을 지향했다.”30) 이러한 시국적인 문화정책이 문학창작에 직접 손을 뻗쳐 광적인 전쟁찬미, 일녀와의 통혼, 모범국민형상 등 극히 제한된 주제에로 창작영역을 좁혀갔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이른바 국책문학의 색채를 지닌 듯 하면서도 어딘가는 민족의식을 자각한 작가의 창작원리가 굴절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다. 『국민문학』 창간호에 실린 정인택의 소설 「청량리 교외」는 당시의 시국적인 문화정책에 따르면 모범국민모델을 형상화한 작품인 듯 하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별로 그런 색채가 뚜렷이 도드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부분에 와서 여주인공이 애국반 반장이 되어 “부지런히 집회에 나가기도 하고, 호별로 방문을 하기도 하고, ‘국민총력’과 ‘정보’ 등의 잡지를 열심히 읽기 시작”31)하면서 “정말 보람있는 일”을 한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때로부터 소설은 시국에 동참하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국을 설명하기도 하고 국민방공의 필요성을 가르치기도 하고 실제로 지도를 하기도 하고......한 집 한 집 이를 되풀이하며 몇 십 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내의 표현대로 ‘녹초’가 되는 것이었다.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돌아와도 다음날 아침의 아내는 놀랄 정도로 기운이 펄펄 났다. “요즘 굉장하네” 내가 야유를 하면, “정말 보람있는 일이거든요.” 라고 말하면서 피곤에도 굴복하지 않는 아내였다.32) 그러나 총 3절로 나뉘어진 소설에서 2절에서만 아내의 반장형상이 묘사될 뿐 1절에서는 인문학원과 아이들이 묘사되고 3절에서는 갑돌이와 인문학원이 다시 기본 화제에 오른다. 우선 1절에서는 “인문학원의 처량한 모습”과 거기에 다니는 아이들과 친숙해지는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청량사 기슭의 완만한 경사 중간의 파밭에 둘러싸인 조그만 분지에 페옥처럼 인문학원의 처량한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항상 초라하게 서 있어 창고로 생각할 정도로 쓸쓸한 모양새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에는 창고치고는 마당이 너무 넓다고 생각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전혀 손보지 않은 마당은 산길처럼 자갈 투성이었다. 교사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비가 새는 모양으로 제대로 유리가 끼워져 있는 것은 교원실 뿐이고 나무판자는 여기저기 뜯어지고 벽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으며 녹이 슨 양철 지붕에는 당장이라도 잡초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교원실 옆에 높이 매달려 있는 종이 이런 모습과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그 곳이 이 부근에 유일한 초등교육기관인 인문학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한심하고 씁쓰레한 기분을 금할 수 없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인문학원은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우수에 잠기게 했다.33) 순식간에 조용해진 우물가에서 아내는 허리를 구부리고, 나는 선 채로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이 따뜻한 순간이었다.34)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우리 집 마당은 점점 인문학원의 일부처럼 되어 갔다.35) 어두침침한 교실에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도 열심히 교과서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웠다. 나는 당황하여 발길을 돌리면서 아이들의 행복을 필사적으로 빌고 싶은 생각뿐이었다.36) 1절의 이러한 묘사가 결코 소설의 사건발전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앞세우면 벌써 주인공들의 성격발전은 인문학원의 운명과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을 것임을 복선으로 암시해주는 것이다. 2절에 와서 집중적으로 아내가 애국반 반장이 되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3절에 와서 다시 갑돌이네와 인문학원에로 화제가 돌아오는 전체적 구조로 보면 작가의 창작원리는 아무래도 모범국민형상창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인문학원 아이들과 친해지고 갑돌이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지만 아직 그곳 주민들로부터는 “좋게 말해서 경원, 나쁘게 말해서 이단시” 당하던 여주인공이 그들과 친숙해지고 특히 갑돌이 어머니와 가까이하게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해 인문학원을 수축하고 회생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바로 애국반 반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들이 그들과 더욱 친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아내가 청량리 애국반 제X구 제X반 반장이 된 것이었다”37) 청량리 사람들과 자주 접하다보니 그 사람들도 우리 집에 찾아오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그 중에서도 거리 상으로 우리 집과 가깝기도 한 갑돌이네와 가장 친해져서 집안의 조그만 일도 감추지 않고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대개는 아내가 갑돌이 어머니의 상담역이었지만...38) “여보, 저 인문학원 어떻게 안 될까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갑돌이 어머니 이야기, 당신도 들었지요?” “들었어.” “이 부근 사람들 모두 저렇게 공부하고 싶어하는데 지금의 인문학원으로는 너무 불쌍하잖아요.” “......” “저 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대요. 그래서 졸업을 해도 뭐가 없대요. 가난한 사람들뿐이지만 저대로 두면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가만히 있자 아내도 잠시 입을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지혜를 좀 빌려주세요.”39) 보다시피 2절에서 벌써 여주인공은 애국반 반장으로 그 곳 주민들과 자주 접촉하는 중, 특히 갑돌이네와 친하면서 인문학원을 수축 회생시킬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까지 주인공의 성격을 발전시켜 나가는 주요 모티프가 인문학원 건설일진대 기어이 모범국민형상창조로 소설의 친일경향을 꼬집는 것은 식민피해의식의 과잉반응이 아닌가 싶다. 송민호는 “이 작품은 기성다운 작자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묘사가 수준급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또 “戰時下 국민으로서의 모범적인 모델이 설득력있게 제시된 것이다.”40)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유진오의 당시의 작품평을 인용하여 작품을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은 愛國班의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하여 차츰 시국에 대해 눈뜨게 되는 가정부인을 그린 작품으로 솜씨 좋게 매듭지은 것은 퍽 호감이 갔지만 남편 되는 사람의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남을 깔보는 태도가 마음에 거슬린다. 그는 마치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서 자기 아내의 거동을 쭉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무슨 자격이 있어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독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작가는 무슨 주제를 선택해도 파고드는 힘이 부족한 듯하다.(유진오, 「국민문학이라는 것은」, 󰡔국민문학󰡕, 1942. 11-재인용)41) 이 평론은 그 자체가 벌써 친일성향이 아주 짙다. 시국정책에 따라 인물을 평가하면서 작품의 우열을 가름하고 있는 것이다. 여주인공을 모범국민형상으로 확인하면서 그러한 “자기 아내의 거동을 쭉 지켜보고 있는” 남편의 자격까지 질문하고 있다. 그 가정토대로 보아서 남편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고 세대주로서 당당하게 가정의 움직임을 리드해 가는 ‘모범남편’임에 틀림없는데 문제는 모범국민형상을 창조하면서 주인공더러 보다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지 못한 것이 못마땅하고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서 자기 아내의 거동을 쭉 지켜보고 있는” 남편의 “남을 깔보는 태도가 마음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결국은 “愛國班의 여러 가지 행사를 통하여 시국에 대해 눈뜨게 되는” 모범국민형상에 손상을 준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범국민형상창조는 시국정책에 강요당한 위장일 뿐이고, 정체 모를 남편은 벌써 당시 시국정책에 의한 형상모델 유형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실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서 자기 아내의 거동을 쭉 지켜보고 있는” 남편은 작품의 인물들을 주재하는 작가의 심리전달을 적지 아니 담당하고 있는 듯 하다. 서두에서 벌써 남편인 ‘나’는 “거름 냄새에도 익숙해”지고 “이 교외의 악취에서조차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 번잡한 풍경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42) 아무리 해도 시국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러면서 또 애국반 반장을 하는 아내를 격려는 하면서도 애써 인문학원의 수축 회생에 마음을 돌리도록 의식적으로 리드해간다. 바빠서, 아니 그보다는 여름방학으로 아이들이 장난이 없어지자 갑돌이나 인문학원의 문제는 아내의 뇌리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내의 노력은 언젠가 반드시 그 문제로 옮겨질 거라 생각하며 나는 끈기 있게 대가 되길 기다렸다. 나는 나대로 각오도 있고 자신도 있었지만 아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아내의 손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게 하고 싶었다.43) 그러다가 아내가 인문학원 운동장에 방공호를 파려고 계획하는 것을 보고는 “방공호보다 더 중요한 걸 있고 있는 거 아냐?”고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한심하군.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당신이 모범적인 애국반 반장이라는 것은 인정해.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돼. 적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일에는 앞과 뒤가 있어. 아니 옆도 있어. 수도 없이 많단 말야.”44) 이 시점에 와서 남편은 아내의 “애국반 반장”까지를 들먹거리며 가난한 아이들을 잊고 인문학원 수축과 회생을 잊고 있는 걸 질책한다. 전쟁찬미니, 내선일체니, 모범국민이니 하는 전시체제하에서 남편의 이와 같은 형상은 지극히 반상적이지 않을 수 없고 그 “태도가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남을 깔보는 태도”가 바로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는 작가의 “엉큼한 묘기”가 아닌가 싶다. 5. 맺는 말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발아하고 성장한 한국 근대문학은 태어나면서부터 식민억압과 민족동화의 위기 속에 질식의 고통으로 몸부림쳤었다. 그러다가 일제말 암흑기에 가장 몸서리치는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된다. 황국신민서사, 신사참배, 창씨개명, 국어사용(일본어), 지원병제, 징병제 등을 하나 하나 실행하여 한반도는 내선일체(內鮮一體), 국체명징(國體明徵)의 황민화정책에 이제 민족성은 상실되고 일본인에 의해 한민족이 멸망되는 동화적인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운운하기에 이르렀다. 생활일상용어조차 일본어사용을 강요당하던 시기에 문학용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전시체제하에 문화정책이 군국주의로 기조를 이루면서 문학도 조직적인 친일단체에 의해 조정되고 국책문학으로 통제되어갔다. 『국민문학』이 유일한 발표지였었다는 사정은 민족문학의 가냘픈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일어로 창작되고 친일문학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시기에 과연 우리 문학사에 주소를 남길 만한 작품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텍스트가 생성하는 생산적 의미보다는 객관적으로 강요되거나 표면구조에 의해 나타나는 기표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객관세계 내지 환경에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고 문학의 특성상 교묘하게 위장되는 내면적인 기의를 불행하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식민지배통치의 시국정책을 다룬 텍스트에 한해서는 더 많은 예리한 심층분석이 요청되는 것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호응하고 천황을 위해 죽으려는 인물, 일녀와의 통혼을 통하여 내선일체, 동조동근과 황민화를 반영하는 인물, 시국정책을 적극 실천하면서 모범국민형상을 보여주는 인물, 이런 것들이 당시 이른바 국민문학에 억압적으로 강요된 ‘시대형상’이였으나 문학작품에서 그런 형상창조가 썩 잘 되어있지 않거나 그 표면화된 그림의 내면에 보다 예술적으로 숨겨진 의미가 담겨져 있다면 이런 텍스트에 대한 ‘오독’은 가능성에 앞서 벌써 텍스트생산성에 의해 요청되는 것이다. 이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병 증세에 대해 여러 가지로 진단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아직은 깊은 연구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조금은 당돌한 것인 줄 알면서도 우선 작품감상을 통한 느낌으로부터 출발해보자는 소박한 마음에서 정인택의 소설을 읽고 얻은 소감을 적어둔 것임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여기에서 거론된 정인택의 작품들은 앞선 연구자들의 오독과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판단으로 하여 적어도 그 진의가 잘못 확인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에 대한 재검토는 한 작가 작품의 본래의 주소를 찾아주는 작업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에 앞서 벌써 암흑기 바위틈을 비집고 가냘프게나마 우리 문학사적 맥을 이으려고 싹트던, 굴절된 우리 문학의 원색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믿어본다.
53    󰡔북향보󰡕의 의미담론 연구 댓글:  조회:2532  추천:0  2009-05-16
                                               <목    차> 1. 서언  2. 역사의식과 현실 극복의지-‘북향정신’  3. ‘북향’의 지향 모델-자주적 민족경제공동체 이주민지역사회  4. 현실극복의 대립 항-통치세력과 공모세력  5. 결어 1. 서 언 일제강점기 말, 일제는 이른바 ‘황민화’라는 식민지 동화정책을 강압적으로 펼친다. 창씨개명과 국어(일어) 사용 강요는 그 구체적인 시책의 한 예라 하겠는데, 그 결과 󰡔문장󰡕 󰡔인문평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강제 폐간되고, 친일 문예지 󰡔국민문학󰡕(1941)이 창간된다. 이에 따라 이 시기 한국문학은 암흑기에 접어들어 문학사적 공백을 드러내게 된다.1) 그러나 한편, 민족어 사용 금지 등의 강압적 동화정책으로 한국문학이 그 독자적 성격을 상실하고 일본문학의 한 ‘지역문학’으로 하위개념화 되는 과정에 놓여 있던 데 반해, 신경(지금의 장춘)․용정 등 중국 간도 지역에서는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재만 조선인 문단이 형성되어 우리 글로 창작 발표하는 문학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재만 조선인문학이 그것이다.2) 이 시기 재만 조선인문학은 만주국의 ‘오족 협화’ 정책에 대한 동조와 저항, 순응과 역행의 착종 관계를 보이고 있고, 이 때문에 ‘국책문학’ ‘친일문학’이라는 비판과 외면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재만 조선인 문학이 지니는 문학사적 의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언어 동화와 민족말살 정책으로 문학사적 공백을 드러낸 시기에, 간도라는 이국의 공간에서 우리글로 창작 발표하는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민족의 간도 이주․정착 과정을 핍진하게 담아낸 문학작품 그 자체가 한국문학의 공간적 확장을 의미하며, 나아가 암흑기 한국문학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소중한 자산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학텍스트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수용자에게 항상 열려 있는 미적 대상이지 언표에 닫혀 있는 결과물이 아니다. 언어는 문학텍스트의 질료로서 서사담론의 구조화와 의미담론의 내재화를 위한 매체일 뿐이다. 단순한 문법적 의미에서의 어휘 해석이나 문장 분석은 미적 대상으로서의 문학텍스트의 본체론적 의미를 망각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텍스트의 단어나 문장은 문학담론 분석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예컨대, 재만 조선인문학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왕도낙토’ ‘민족협화’라는 단어를 문학텍스트의 담론분석과 격리해서는 어떤 의미도 도출해낼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물․사건, 발화나 배경에 대해 텍스트의 유기적인 구조 속에서 서사요소로서의 의미를 확인하지 않을 때 문학비평은 자칫 용속한 소재주의에 빠져버릴 수 있다. 재만 조선인문학에 대한 연구 또한 예외가 아니라 하겠는데, 안수길과 그의 작품에 대한 논의는 특히 그러하다.3) 안수길은 만주를 답사나 취재 차원의 편력에 의해 창작의 소재나 배경으로 삼고 파편적으로 다룬 작가들과는 달리, 이곳이 조선인이 정착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역사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정착의 당위성을 근거로,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온 이주 조선인의 당면한 삶의 문제는 유랑을 청산하고 정착하는 것이라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새벽」과 「새마을」 「원각촌」 「목축기」 등 일련의 작품에서 조선인이주민의 이주․개척․정착의 노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안수길은 이들 작품에서, 재만(在滿)의 현실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역사의식과 식민지 이주민이라는 범주로 묶어 해답을 얻으려 하는데, 󰡔북향보󰡕는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북향보󰡕4)는 재만 시기 안수길의 유일한 장편소설로서, 그의 역사철학적 사유의 결정체라 할 ‘북향정신’이 집중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북향보󰡕는 선행되어온 창작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성숙된 ‘북향정신’을 역사철학적 개념으로 정제해냈을 뿐더러,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이주민의 삶의 현장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감 ,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북향보󰡕의 의미담론을 속뜻 그대로 읽어내는 것은 ‘북향정신’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작업이 될 것이며, ‘북향정신’의 올바른 해석은 결국 안수길의 재만 시기 작품의 의미담론에 밀착 접근하고, 나아가 전체적인 재만 조선인문학의 존립 근거와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재만 시기 안수길과 그의 문학에 대한 논의 대부분은 저항과 공모,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분법적 식민담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러한 논리로 재단할 경우, 재만 시기 안수길과 그의 문학은 친일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는 용속한 소재주의에 빠져 안수길은 물론 재만 조선인문학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양해야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북향보󰡕의 주제적인 측면에 각별히 유념하여 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는 여러 의미요소들을 문학텍스트의 서사담론에 대한 심층 분석과 함께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2. 역사의식과 현실 극복의지-‘북향정신’ 일제강점기 말 암흑기의 한국문학이라는 역사범주에서 고찰할 때, 재만 조선인문학은 지리적으로는 반도문학과 같은 코드에서 대륙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내선일체 동화정책’ 하의 일본어 창작과 같은 코드에서 ‘민족협화 허위정책’ 하의 한국어창작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재만 조선인문학은 일제감정기 말 암흑기 한국문학의 범주에서 다루어야만 역사적․시대적 자리매김이 올바로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동민은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 재만 조선인문학을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5) 하지만, 그는 재만 조선인문학을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확인하면서도 그것을 이른바 개척소설이라는 분류코드에 줄을 세움으로써 문학 주제에 대한 혼선을 빚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개척소설이란 공간적으로 우선 만주 미개지나 산업촌과 같이 개척지라는 배경에 한정되어 있고, 일제에 의해 주도되는 개척과 생산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따라서 개척소설은 일제 주도하의 개척과 개척민이라는 이야기구조를 갖게 되며, 이 점에서 농민소설과 엄밀히 구분된다. 개척소설이 일제 주도의 개척 현실을 다루면서도 친일문학일 수 없는 것은, 일제 주도하의 개척 현실의 고난과 궁핍상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안으로는 반일의식을 지키면서 겉으로는 식민체제에 영합하는 양면적(兩面的)인 구조는 바로 개척소설이 취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양상”6)이기 때문에 서사구조상 표면적으로는 동조적인 자세이고 저항의지는 내면적이고 암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재 범위와 서사 특징으로 개척소설을 범주화할 경우,  개척소설은 오히려 식민담론의 틀 속에 갇힐 수밖에 없고, 친일의 혐의와 식민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재만 조선인문학은 만주를 우리 민족의 삶의 공간으로 확인하는데서 존재 의미와 시대적 성격을 부여받은 문학이다. 만주를 단순한 문학 창작의 배경이 아닌 민족적 삶의 공간으로 확인하는 것은 재만 조선인문학의 문학적 범주 내지 성격적 규명과 직결되는 작업이다. 바꿔 말하여, 안수길은 식민지인이기에 앞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주민이라는 시각에서 재만 조선인의 이주․개척․정착을 다룸으로써 만주를 이주행위주체의 이민사로 역사화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안수길의 만주이민소설의 성격을 조선인의 이주․정착사라고 규명하고, 역사의식에 토대한 현실인식으로 안수길 작품 속에 내재하는 길항 관계를 밝혀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7) 만주를 우리 민족의 삶의 공간으로 확인하는 데는 침략자의 시각을 떠나 민족적 역사의식과 현실인식 두 시점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역사의식에서 보면, 만주는 안수길 작품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무대 혹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기 전에 인물의 행위의 동기와 사건의 계기 자체에 편입된다. 이러한 동기와 계기는 공간에 대한 애착에 토대하는 바, 이러한 애착은 바로 민족의 다양한 경험을 통한 특성화라는 공간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8) 이러한 역사적 확인은 이주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생존 욕구와 함께 정착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조상의 ‘피땀’과 ‘무덤’이 늘어나면서 그 산천에 대한 애정과 향토적 정서를 불러일으킨다.9) 재만 조선인문학은 일제의 대륙 침략 및 식민지 괴뢰국가인 만주국 건국과 그 시기를 거의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인의 만주에 대한 인식과 이주는 훨씬 전사에 속하며, 이와 같은 역사의식과 이주역사는 일제강점기 식민지이주민의 정착의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재만 조선인이주민은 일제에 적극 동조하고 주동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러한 역사의식과 ‘공간에 대한 애착’, 또는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상황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재만 조선인문학의 범주와 성격에 발생학적으로 역사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재만 조선인문학의 이러한 존재 의미와 시대적 성격은 식민지 현실을 넘어서는 창작 행위를 가능케 하였고, 따라서 문학작품에 식민담론보다 더 넓은 역사․시대적인 민족의 의미를 담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음으로 현실인식에서 보면, 식민지로서의 조선과 만주국, 식민지인으로서의 반도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이주민의 이질성에서 비롯된다. 조국이 아닌 낯선 공간을 익숙하고 친밀한 곳으로 쉽게 장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만주 이주역사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만주국은 일제 괴뢰정권이었으면서 중국인․일본인․조선인․재만 조선인이라는 서로 다른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조건 또한 무관하지 않다. 재만 조선인의 입장에서 ‘만주’는 만주국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담긴 생존의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10) 말하자면, 만주는 단순한 지정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이라는 이중의 억압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터전이고 정치적 공간이었던 것이다.11)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은 작가를 비롯한 문화인들에 의해 사상적으로 승화되었을 뿐, 당시 재만 조선인의 실제 ‘각성’과 ‘자각’으로까지 심화되지는 못한다. 당시 재만 조선인은 소문의 ‘2등 국민’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하위범주에 속했고, “실제로 용이한 민족 박해의 대상이며, 떠돌이 비적들의 일차 먹이 감에다, 만주국 정부에 의해서는 ‘위험한 공산분자’로 감시 받은 사람들”이었다. “‘선인’은 당시 사악한 뉴스의 수식어였었다.”12) 조선인, 특히 조선인 도시민 다수는 귀속의식이 결여된 사실상의 ‘국외자’로서, 타민족의 눈에는 귀찮고 하찮은 존재로 비쳐졌고, 만주국의 ‘천덕꾸러기’로서 ‘한계적 위치’에 놓여있었다. “조선인 도시민을 일본인이나 중국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조선인 자신도 진정한 ‘2등 국(공)민’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도시민의 이러한 모습과 만주국 내에서 조선인의 범죄율이 다른 민족에 비해 가장 높았다는 사실은 당시 재만 조선인의 ‘2등 국(공)민’으로서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13) 이러한 당대의 사회현실에 비추어볼 때, 󰡔북향보󰡕는 만주국 건국으로 생활이 향상된 이주민들의 아름다운 ‘제2고향 건설’이라는 이상주의를 발상으로 한 작품이 아니며,14) 현실의 암흑면을 역발상으로 하여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돌아갈 조국이나 고향마저 없는 뿌리 뽑힌 망국의 이주민들은  절망하고 타락하여 유랑하거나, 대륙에서의 정착을 지향해야 하는 선택적 기로에 놓여 있었고, 떠돌아다니며 ‘천덕꾸러기’ 노릇을 하는 이주민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안수길은 󰡔북향보󰡕에서, 이처럼 만주 땅에 귀속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조선인이주민들에게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의 당위성을 느끼게 하고, 어떻게든 공동체로 살아남는 것 자체가 민족 보존의 자생력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북향보󰡕는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 지향의 현실극복 의지를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심층 서사구조를 보면 ‘북향정신’에 입각한 농민도(실제로는 농민도에 입각한 ‘북향정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농민도는 稻魂, 즉 벼를 상징으로 조선농민의 땅에 뿌리내리려는 정신이고, 따라서 그것에 입각한 ‘북향정신’이란 정착 지향의 현실극복 의지에 다름 아니다.)를 사상 핵심으로 한 ‘북향도장’과 ‘북향목장’을 건설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충돌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북향정신’을 핵심사상으로 하는 ‘북향도장’이 정착 지향의 이주민지역사회를 상징한다면, ‘북향목장’은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민족의 이야기를 내면화한 심층구조는 주주들에 의한 목장, 도장 건설과 주주들의 증자에 의해 목장을 구하려는 노력, '정학도'의 딸 애라에 의해 목장을 살려내는 이야기들로 핵사건의 고리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북향보󰡕에 대한 연구들은 작품의 표층구조와 심층구조의 변증관계를 투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표층구조에 초점을 집중한 연구는 이 작품의 친일 성향을 날카롭게 비판한다.15) 긍정적 시각으로 접근한 연구들도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국책적인 표현’들에 대해 어쩔 수 없었던 시대상황에 의한 ‘허점’이라고 해명, 그것을 이 작품의 약점으로 지적한다.16) 이러한 논의는 결과적으로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 절하시킨다. 이 작품은 이중 서사구조로 의미담론을 내면화하고, ‘국책적인 표현’들로 겉포장을 함으로써 당시 재만 조선인들이 처해 있던 시대상황을 배경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국책적인 표현’들이 작품 내면적인 의미담론이나 심층 서사구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친일 성향과는 별개로, 적어도 작품 검열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을 텍스트 자체의 전체적인 의미담론과 서사구조를 살펴볼 때, 그 진의는 만주국 국책의 허위성에 맞서는 조선인이주민의 민족 단위의 처절한 생존의식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즉, ‘국책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 단위의 지역사회를 건설해야 하고, 국가나 국책에 의뢰해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외고집’은 만주국에 대한 불신과 국책의 허위성에 대한 폭로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처럼 사건 요소나 인물 요소와 ‘배경적인 요소’ 사이의 모순․괴리는 그 자체로 시대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서사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서사담론은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의 당위성을 확인하면서도 제도․정책적인 혜택을 민족의 밝은 미래와 직결시킬 수 없었던 암담한 현실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향보󰡕는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었던 재만 조선인들이 처한 현실, 일제의 탄압과 타민족의 적대적 천대 속에서 유랑해야 했던 참담한 현실을 역발상으로 한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진술은 그 언표적인 의미 전달을 넘어서 시대적 현실과 사회적 배경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가의 심리적인 자세와 ‘북향정신’이라는 이념적 주장을 정확히 포착할 때 비로소 그 내면화된 의미담론을 올바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서사구조에 대한 심층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북향보󰡕에 대한 기왕의 논의에서 비판적 지적을 받아온 몇 개 장면을 분석해 보자. 그 하나는 일본인 사도미가 당시 “조선사람의결점이라고 일반적으로 정평이되여잇는” 것들을 ‘취중진담’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다.17) 이 작품은 지배자로서의 우월감을 갖고 있는 일인의 입을 통해 이를 전달, 그러한 견해가 타자에 의해 절대화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와 같은 비정한 행위를 목격한 현장에서의 발설이 아니라, 그러한 부박한 행위를 혐오하는 조선인 선각자(‘찬구')와의 대화를 통해 표출된다는 담론구조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사도미’가 술 탓인지 '찬구'를 믿는 까닭에선지 평소 조선인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화자의 비아냥거림 등과 묵시적인 대결 구도를 이루고 있는 ‘찬구의 형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미는 찬구가 잠잠히 앉아있는 것이 그의말이 아니꼬와서 그리는것인줄짐작햇슴인지 ‘내가 이러케 함부로 지껄이다가는 고상한테 뺨 맞겠네’ 하고 너스레를 떨엇다.”(p. 572)든지, “책선이라구 점잔은 명사를 부치니..., 뺨때리는 것보다 더하구려.” 하면서 “사도미는 번적 잔을 들고 '찬구'더러도 들라구 눈짓손짓을 하엿다.”(p. 572)는 화자의 진술은, '찬구'의 복잡한 심리와 비틀리는 장면 분위기를 은근슬쩍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구조는 '사도미'와 헤어진 '찬구'가 길을 가면서 “목장, 박병익, 사도미, 관리와이러한인물과 관념”(p. 575)을 떠올리고, ‘박병익’이 목장을 맡겠다고 하고, ‘사도미’가 관리 한 자리 주겠다고 하고, 난생 술도 대취했으니 오늘이 진짜 생일이라고 자조(自嘲)하다가 하마터면 마차에 치일번하는 장면묘사를 통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찬구'의 서럽고, 분하고, 억울하고, 허탈하기까지 한 착잡한 마음이 성격 발전의 복선으로 깔리는 장면인 것이다. 이러한 착종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곧 '찬구'의 성격 발전의 흐름이고, 󰡔북향보󰡕 플롯 형성의 연결고리이다. '찬구'는 타자의 눈에 민족의 결점으로 과장된 이른바 조선인의 고질이 삶의 뿌리를 뽑힌 식민지 이주민의 심리적 방황의 결과임을 확인하고,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 지향의 현실 극복의지로 치유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북향정신’에 의한 ‘북향도장’과 ‘북향목장’의 건설이다. 요컨대, 이 장면은 삶의 뿌리를 뽑힌 재만 조선인을 박해하고 천대하고 선입견으로 대하던 시대상황에 대한 고발로서, 재만 조선인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그러한 결점과 비정한 행위들은 우리 민족의 원죄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서사담론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생활 습관의 개선과 학교를 공원처럼 가꾸어 이주민촌락의 표본으로 보여주자는 대목이다. 이것을 “이 시기 조선 농민들은 아무런 갈등도 없는 평화로운 ‘제 이의 고향’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농사지으면서 살고 있다.”18)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라거나, 이러한 고향 건설은 만주국의 왕도낙토․민족협화의 이념을 내면화하고 “일본 국가를 긍정하는 행위”로서 “이 때의 ‘제 이의 고향’은 완전히 만주국과 동일시된다.”19)는 비판은 작품 오독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소재주의적 오류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사적 사건들은 관계의 논리뿐만 아니라 서열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건들은 다른 것들보다 중요하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연쇄적 흐름을 이루거나 우발성의 틀을 결정짓는 것은 단지 주요한 사건들뿐이다.”20) 문학텍스트는 핵사건들이 관계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면서 갈등과 충돌을 형성하고, 그러한 갈등과 충돌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플롯을 전개하고 발전시킨다. 이때 주변사건은 핵사건에 대한 해석․보충․충족․흥미․제시 등을 통하여 텍스트의 미학적 완성에 기여하지만, 결코 작품의 주제나 플롯의 전개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작품의 주제를 형성하고 완성하는 것은 핵사건일 뿐, 주변사건이 아닌 것이다. 주변사건은 거시적인 서사구조 속에서 핵사건과의 직간접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서사요소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만큼 주변사건은 대체 가능한 서사요소이지만, 핵사건은 텍스트의 서사구조 자체의 변형이 없이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바꿔 말하자면, 핵사건을 외면한 채 주변사건을 고립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분석하여 주제에 직결시킬 경우, 소재주의적 오류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다. 21) 플롯 구성을 보면, 󰡔북향보󰡕의 핵사건은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북향목장’)를 결성하여 조선인 이주민지역사회(‘북향도장’)를 건설한다는 민족의 내부이야기이다. 즉, 작품의 주제의식은 정착 지향의 현실 극복의지인 ‘북향정신’인 것이다. ‘주주’ ‘증자’ ‘독지가’ 또는 ‘기금의 기업적 조달’ 운운은 ‘왕도낙토․민족협화’라는 만주국 국책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그러한 기만적인 사회적 조건과 강요된 삶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기어이 민족 단위의 자생력으로 지역사회를 건설하려는 민족공동체의식에 대한 언표적 기호화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룩하겠다는 행위를 어떤 시각에서도 만주국 국책에 대한 옹호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핵사건을 전제로 할 때, 생활 습관의 개선, 환경 미화, 학교의 공원화, 즐거운 농사 모습 등은 ‘북향도장’이라 명명된 이주민지역사회가 현실로 다가올 때의 실현 가능한 모습임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환경 변화와 생활의 풍속화는 국가와 국책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북향목장’의 생사와 인과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향보󰡕는 ‘북향도장’이 상징하는 이주민지역사회의 건설이 곧 재만 조선인사회가 지향해야 할 지평임을 내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 무너진대도 갈 곳이 업는 농민”(조선인이주민)들에게 ‘북향목장’은 유일한 삶의 대안이요, 희망이다. 그러나 목장의 번영과 도장의 밝은 미래가 약속되지 않는 한, 일상적인 생활의 변화는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일시적인 유혹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북향목장’이 자연재해로 증산은커녕 빚만 지고 파산의 위기에 직면하자, ‘박병익’ 같은 주주들은 목장을 팔아버릴 생각만 하고, 삯을 받지 못한 목장 인부들은 목장을 떠나며, 월급을 받지 못한 교원들은 다른 자리를 강구하는 눈치를 보인다. 여기서 ‘북향목장’의 존폐 위기를 플롯 전개의 핵사건으로 설정한 작가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정착의 당위성과 궁극적인 실현 가능성의 암시라는 주제의식이 그것으로, 이러한 핵사건에서 발생되는 모순․충돌․갈등의 성격이 작품의 주제를 형성, 모든 주변사건들의 의미를 자리매김해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이 조선인이주민의 삶의 현실에 대한 역발상으로 씌어졌다는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도장의 즐거운 생활모습과 아름다운 생활환경의 묘사는 ‘북향정신’에 의한 ‘북향목장’과 ‘북향도장’ 건설의 희망사항을 현재형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재만 조선인의 현실극복 의지의 형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북향’의 지향 모델-자주적 민족경제공동체 이주민지역사회 󰡔북향보󰡕의 주제의식이 ‘제2 고향’ 건설이라면, 그 ‘제2 고향’ 실체를 밝혀보는 일은 이 작품의 의미담론, 나아가 재만 조선인의 정착 지향과 현실 극복의지인 ‘북향정신’의 진의를 정확히 읽어내는 열쇠가 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북향보󰡕는 재만 조선인의 정착 지향의지를 담은 ‘북향정신’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 이주민지역사회를 건설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목장’ 건설은 ‘유축농업’이라는 만주국 국책과는 무관하며, 시국을 감안한 편리한 표층 장치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라면 내포독자나 수용자에 의해 무엇으로도 대체 가능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목장이라는 건설 대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즐거운 ‘모내기’ 장면을 제목까지 달아 풍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도혼(稻魂) 즉 ‘벼를 사랑하는 마음’을 농민도 내지 ‘북향정신’의 핵심사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북향목장’은 ‘북향’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정착 지향의 이주민지역사회 모델 ‘북향도장’의 토대가 되는 민족경제공동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장’이 작가에 의해 경제 실체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 ‘유축농업’이라는 만주국 국책을 이주민지역사회 건설을 위해 주체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현실 대응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텍스트의 거시적인 서사구조, 즉 플롯의 전개양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플롯은 시종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 건설이라는 모티프를 그물코로 하여 짜여 있고, 이러한 모티프는 ‘주주’ ‘증자’ ‘독지가’ 등의 기표를 통하여 민족 내부의 이야기를 엮고 있다. ‘왕도낙토, 민족협화’를 노래하고 ‘유축농업’의 국책에 순응한 목장 건설이라면, 이러한 민족 내부의 이야기는 있을 수 없거나 있어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북향목장’은 이주민지역사회가 아니라 만주국 국가 건설의 한 단면을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목장 건설이 ‘유축농업’의 국책의 구현이라면, 국가의 지원이 아니라 주주․증자․독지가에 의의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작위적인 것으로 전락, 우연적 사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만주국 사회에서의 재만 조선인은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의 신분이며, 국가 정책에 의해 ‘북향’을 건설할 수 있는 처지 또한 아니다. 따라서 󰡔북향보󰡕는 ‘유축농업’ 중심의 만주국 건설이라는 사회 현실을 표층구조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내면구조에서는 민족의 내부이야기를 엮어감으로써 제도․정책적인 혜택에 민족의 미래를 기탁할 수 없었던 식민지이주민의 비극적 삶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내보이는 재만 조선인의 간고한 삶은 그들이 당면한 사회 현실을 비판적 폭로의 지점을 넘어서, 정착의 어려움과 그 극복의지를 민족 단위의 생존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인 재만 조선인에게 있어서는 국가적 개념보다는 민족의 공동체의식이 조직화된 자아보존의 법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인식은 ‘정학도’를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 나아가서는 ‘북향정신’의 기조를 이룬다. 이 작품에서, '정학도'는 조선인이주민의 지역사회로서 ‘북향도장’을 구상한다. 국가와 고향을 상실한 식민지 이주민이 만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고향 즉 ‘북향’ 건설이고, 이는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에 의거해야만 한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주주’에 의한 ‘북향목장’을 설계한다. 재만 조선인의 사회적 신분을 감안할 때, ‘정학도’가 구상하고 있는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라는 것이 용이하게 결성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국가 또는 국책과 민족의 운명을 직결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의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이라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거나, 심지어는 고립무원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집까지 파는 ‘이기철’의 희생적인 봉헌, 목장 구성원들과 '정학도' 문하생들의 헌금, 그리고 ‘애라’의 도움으로 ‘북향목장’이 직면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서사구조 또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제약의 핍진한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애라’가 익명으로 보내온 뜻밖의 성금이 ‘북향목장’을 회생시킨다는 ‘우연적’ 사건 설정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핵사건에 의한 선형적인 플롯 전개에서 외부인에 불과하던 ‘애라’에 의하여 ‘우연하게’ 핵사건의 매듭이 풀리는 전근대적인 서사담론 방식은 작가적 역량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애라’의 성금 행위는 아버지 '정학도'의 뜻을 이으려는 신념이나 ‘북향목장’ 건설에 자신을 헌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생명과도 같은 ‘북향목장’이 눈앞에서 끝장나는 것을 감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북향목장’이나 마가둔 촌, 만주에 아무 미련도 없으면서 다만 “아버지 남기신 사업을 살리는 데 딸로서의 도리를 다햇”(p. 742)을 뿐이다. 그러나 ‘애라’가 보여준 ‘도리’는, 비록 어떤 독지가의 무연고한 행위보다도 현실성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북향목장’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앞날을 예시하는 징표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정학도'가 ‘북향도장’을 구상할 때 이미 “일시적 감격으로 내오노는 독지가의 정재(淨財)만으로 어찌 영구한 사업을 해나갈 수 잇슬까.”(p. 467)고 우려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서사담론은 국가적 개념과 민족적 개념을 동일시하고 지역사회 건설을 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연결할 수 없었던 재만 조선인이주민이 처한 시대상황을 여실하게 보여주는데, 이러한 서사구조는 ‘북향도장’(즉 이주민지역사회)은 ‘북향목장’(즉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밑받침하고 있다. 요컨대, 󰡔북향보󰡕의 밝은 표층구조, ‘북향목장’의 위기 극복의지는 정착 지향의 역사적 당위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정착의 당위성을 내세운 위기, 그것은 미래가 기탁된 ‘북향’을 위해 감내하는 현실에 대한 각성이고, 이념에 대한 자각이며 희생에 대한 각오라 할 것이다.   4. 현실극복의 대립 항-통치세력과 공모세력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성장을 동일층위에서 이룰 수 없고, 위계질서가 민족 단위로 서열화되는 식민지사회에서 식민지인의 현실 극복의 근본적인 대립 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식민통치세력이다. 물론 식민통치세력도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식민지인에 대한 여러 가지 유화정책을 펼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탈과 억압을 위한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인들이 민족 단위의 이익이나 민족공동체의식에 성장과 각성을 보이게 되면, 수탈과 억압적인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인은 국민이 아니라 식민지 확장의 ‘생산력’에 지나지 않으며, 그만큼 식민지인의 생존과 삶의 향상은 국가 발전과 직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북향보󰡕는 식민지시대의 이러한 대립관계를 내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식민지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인 갈등으로 설정할 수 없는 억압적 현실상황에서, 식민지 사회 배경과 식민지 민족의 내부이야기라는 서사담론을 통해 식민통치세력과 식민지인의 관계를 대립 항으로 내세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북향보󰡕의 서사담론은 만주국 국책과 사회 배경이라는 언표적인 표층구조와 민족 내부이야기라는 핵사건의 심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층구조는 ‘북향정신’이라는 주제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 작품의 작의, 즉 식민사회 현실에 대한 암묵적 비판과 함께 정착하여 민족 단위의 지역공동체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민족적 생존의식과 자생력에의 호소가 깔려 있다. 이 지점에서 안수길의 시대 비판적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도미’의 횡설수설 대목도 식민통치 민족의 오만과 사회적 편견 등을 암묵적으로 비판하려는 작의와 무관하지 않다. ‘사도미’에게 이러한 역할을 맡긴 것은 식민 통치세력을 식민지인의 대립 항으로 인식한 안수길의 현실인식에 그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이다. ‘북향정신’을 불온사상으로 의심하고 감시하는 경찰을 등장시킨 장면 또한 같은 문맥으로 읽을 수 있다. 󰡔북향보󰡕에서, 식민 통치세력을 식민지인의 대립 항으로 인식한 ‘정학도’는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 건설을 구상하고, ‘북향정신’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발전과 동일 방향에서 하위개념화 될 수 없다는 데 그 비극성이 있다. 물론 국책에 순응하면 이 비극성은 사라지겠지만, 그것은 식민정책에의 공모임에 다름 아니고, 민족의 주체성 또한 상실하게 된다. ‘북향목장’이 존폐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도 ‘정학도’ 등이 주주에 의한 극복을 도모하고, 그것이 무산되자 그들은 “눈물겨운 정성으로 모인 정재(淨財)”(p. 700)로 목장을 회생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향보󰡕에서 “건설되는 ‘고향’은 ‘오족협화’와 ‘왕도낙토’가 구현되는 명랑한 공간 즉 만주국 건설과 그것에의 이바지이다”22)는 지적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북향보󰡕는 식민통치세력을 식민지인의 대립 항으로 내세워 일제 식민지배하의 만주국과 식민지이주민인 재만 조선인 간의 합의될 수 없는 사회모순을 내보인다고 하겠는데, 이는 작중인물의 갈등, 특히 변질된 내부 구성원의 갈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른바 ‘양복 선인(鮮人)’으로 불리는 ‘박병익’은 그 전형적인 인물이다. ‘박병익’은 「새벽」의 ‘박치만’이나 「원각촌」의 ‘한익상’과는 그 형상이 다르다. 「새벽」의 ‘박치만’은 조선인이주민이지만, “사회 권력이나 억압세력의 힘에 의존하여 지팡살이 하는 이주민들한테 볼모잡기나 고리대를 놓는 등 지팡주의 권세를 고스란히 그대로 누리고 있”는 부재지주의 마름으로 더 이상 “마름으로서의 ‘얼되놈’이 아니”다.23) 그는 식민통치세력의 분류코드에서 이미 식민지이주민의 구성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박치만’과 조선인이주민 사회와의 갈등은 재만 조선인사회의 내부갈등을 넘어서고 있다. 「원각촌」의 ‘한익상’도 그러하다. 그는 이주민 사회에 강요된 생존방식이었던 입적정책의 산물인 ‘홋주인’으로서 직접적으로 당시 사회 갈등의 일익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24) 이와는 달리, ‘박병익’은 식민통치세력과 직접적인 공모관계에 있지 않으며, 식민통치세력의 분류코드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상징인물이 아니다. 그는 형상 그대로 타락하고 변질한 인물이지만, 여전히 민족의 구성원인 것이다. 따라서 ‘북향목장’을 건설해나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박병익’의 갈등은,  「새벽」의 ‘박치만’이나 「원각촌」의 ‘한익상’의 그것과는 달리, 식민통치세력과 식민지인의 대립과 여기서 야기되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이주민들에게 이주민지역사회 건설,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 건설은 생존방식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상실이라는 식민지적인 현실상황을 극복하는 생존 논리이며, 그 실천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내부 구성원간의 갈등은 식민지사회의 완고성에 기인하는 결과적 현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북향보󰡕의 이러한 내부인물의 갈등구조는 식민지사회의 민족적 억압을 드러내기 위한 서사적 장치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변질된 민족 내부 구성원도 주요한 극복 대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식민지사회의 위계적 질서에 체질적으로 적응, 식민지인의 대립각에 서서 식민지인의 주체적인 민족공동체 건설을 저애하는 세력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박병익’ 같은 인물이 그러한데, 그는 개인의 영욕만을 추구하면서 식민지사회와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비록 식민 통치세력과 직접 결탁하거나 공모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이득을 챙기는 데 급급하여 ‘북향목장’을 팔아버리려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주주들과 함께 부정세력을 형성, ‘북향목강’의 걸림돌이 되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이 지성인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다시 말하여, 안수길은 이 작품에서, 식민 통치세력이나 조선인이주민 신분을 포기한 공모 세력은 물론, 민족공동체 건설에 방관적인 세력 또한 재만 조선인사회가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북향보󰡕는 국가 성장과 민족 생존이 괴리되는 일제의 식민지 만주국에서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에 토대한 이주민지역사회 건설만이 조선인이주민의 유일한 생존 대안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것을 위한 실천운동에서 변질된 구성원도 극복 대상임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5. 결 어 󰡔북향보󰡕는 새로운 땅 만주에 새로운 고향을 건설하여 후세에 대물림하자는 정착이념이 ‘북향정신’으로 체현된 소설이다. 이러한 이념은 자기가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확실한 역사의식과 식민지 이주민의 삶에 대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즉, 조상의 피땀이 스며있고 뼈가 묻혀 있는 공간이 ‘제2의 고향’이라는 역사의식과,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진 식민지 이주민에게는 정착생활이 민족공동체의 생존논리와 직결된다는 현실인식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념적인 결정체가 바로 ‘북향정신’이다. 그럼에도 󰡔북향보󰡕는 결코 ‘북향목장’이나 ‘북향도장’의 밝은 내일과 희망을 값싸게 이상주의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아니다. 소설은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에 토대하여 정착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도 그러한 주체적인 정착의지와 실천이 식민통치세력과 여러 부정세력에 억눌려 힘든 항행을 할 수밖에 없음을 여러 가지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북향보󰡕는 ‘북향정신’을 고양하면서도 식민지시대 이주민사회의 구조적인 기본모순을 직시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주제어: 재만 조선인문학, 역사의식, 북향정신, 민족공동체의식, 식민담론, 텍스트 담론. <참고문헌> 1. 자료 안수길, 「북향보」,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6집)󰡕, 중국조선민족문화예술출판사, 2004. 안수길, 󰡔명아주 한포기󰡕, 문예창작사, 1977. 2. 논저 김광민, 「안수길 소설 연구」, 한림대 대학원(석사), 2003. 김동민, 󰡔한국문학사의 탐구󰡕, 푸른사상, 2003. 김윤식, 󰡔안수길 연구󰡕, 정음사, 1986. 김종호, 「1940년초기 만주 유민소설에 나타난 ‘정착’의 의미」, 󰡔국어교육연구󰡕(25),국어교육학회, 1993.  도애경, 「해방전 간도체험소설의 공간수용 양상 연구」, 한림대 대학원(박사), 2004. 민족문학연구소,  󰡔일제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 역락, 2007. 민현기, 󰡔한국 근대소설과 민족 현실󰡕, 문학과지성사, 1989. 방용남, 「안수길 소설의 서사구조 연구」, 한림대 대학원(석사), 2007. 송민호, 󰡔일제말 암흑기 문학연구󰡕, 새문사, 1991. 신희교, 󰡔일제 말기 소설 연구󰡕, 국학자료원, 1996. 오양호, 「<북향보> 연구」, 󰡔어문학󰡕(46)(한국어문학회, 1985),       , 󰡔일제강점기 만주 조선인 문학 연구󰡕, 문예출판사, 1996.       , 󰡔한국문학과 간도󰡕, 문예출판사, 1989. 윤휘탁, 「<滿洲國>의 ‘2等 國(公)民’, 그 實像과 虛像」, 󰡔역사학보󰡕,역사학회, 2001. 이금선, 「안수길 소설에 나타난 ‘고향’과 ‘국가’의 의미」, 연세대 대학원(석사), 2003. 장춘식, 󰡔해방 전 조선족이민소설 연구󰡕, 북경 민족출판사, 2004. 정덕준(외),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 푸른사상, 2006. 정덕준, 「안수길 소설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 15집,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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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북향’, 정착의 심리지향이 찾은 이주민의 고향 댓글:  조회:2419  추천:0  2009-05-16
-안수길의 ‘체질론’과 ‘북향정신’을 중심으로                                                                                                                                                                              1. 서론 2. 작가의 리얼리즘적 창작이념-‘체질론’ 3.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북향정신’ 4. ‘체질론’과 ‘북향정신’의 역사철학적인 변증관계 5. 결론     1. 서론 한국문학에 있어서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를 일제 말 암흑기라고 한다면, 이 시기의 한국 문학은 흔히 그 친일성이 절대화되어 공백기라는 이름으로 선별 없이 폐기처분해버리는 성향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다가 오양호가 재만 조선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이래, 그 연구 작업이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재만 조선인문학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적인 한국문학의 재정립에로 의미가 확장됨으로써, 일제 말 암흑기 한국문학의 본래의 모습을 다시 찾는 민족문학사적인 성업의 일환으로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재만 조선인문학 연구는 첫째, 이 시기 한국문학에 대해 피해과잉반응적인 식민담론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둘째, 이러한 전체적인 비평시각에서 재만 조선인문학의 성격과 주제의식에 대해 올바로 진맥하지 못한 탓으로 많은 쟁점들을 성과와 함께 안고 넘어왔다. 재만 조선인문학은 우선 대륙이라는 새로운 삶의 공간에서 민족의식을 토대로 하여 뿌리내린 한민족문학의 내용적 확장이다. 그 다음은 대륙에 정착한 조선인이주민들이 정주국의 국민이라는 변질된 신분에서 자기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키워낸 문학-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공통분모로 하여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한 갈래로 되면서도 역시 한민족문학의 한 갈래로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확인은 세계가 다문화시대에 들어서고 있는 현 시점에서 특정한 하나의 문학이 다민족국가에서는 소수민족문학으로, 단일민족국가에서는 확장된 문화공간에서의 민족문학으로 될 수 있다는 열린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글과 관련해서는 재만 조선인이주민문학이 우선 한민족문학의 내용적 확장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재만 조선인이주민문학을 우리 전통문화의 승계와 민족의 주체성에서 확인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도는 선행연구에서 김동민1)과 같이 재만 조선인문학을 한권의 책으로 다룬 경우에조차 그 문학적 성격규명을 민족문학의 분류코드에서 확인하지 못하고 소재적인 분류코드에 잘못 편입시키고 있는 상황에 대비해서이다. 그는 재만 조선인소설을 일제 주도하의 개척과 개척민이라는 이야기구조를 갖는 개척소설로 규정함으로써 결국 재만 조선인문학을 특정한 소재를 다룬 문학으로 확인하였다. 그 소재부터 벌써 일제 주도하의 개척사업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관된 만큼 연구자는 결국 식민담론의 틀 속에 갇혀 친일성향에 대한 부정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눈을 피해간다는 개척소설의 특질”에 의해, 서사구조상 표면적으로는 동조적인 자세이고 저항의지는 내면적이고 암시적이라는 변호는 너무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이제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2)에 이르러 재만 조선인문학의 총체적 특성을 민족적 정체성에서 확인하고 발생학적 차원에서 이주 및 정착의 문학으로 범주화하고 있다. 이는 재만 조선인문학이 특정한 소재를 다룬 문학이기 전에 벌써 역사의 필연적인 산물로서 내용이 확장된 민족문학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도 구체적인 작품평가에서는 소재주의적인 접근으로 하여 자가당착의 식민담론에 페이지를 소비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의미담론과 서사담론의 유기적인 통일이라는 문학 본체론적인 비평방법에 대한 역량부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재만 조선인문학의 연구에서 안수길과 그의 작품은 언제나 집중조명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3) 그 이유는 「새벽」에서 󰡔북향보󰡕에 이르는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은 그대로 조선인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수길은 「새벽」, 「새마을」, 「원각촌」, 「목축기」 등 일련의 초기 작품을 통하여 조선인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노정을 보여주면서 작가의 ‘체질론’으로서의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철학적 물음을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식민지 이주민이라는 역사범주로 묶어 해답을 얻으려 하였다. 즉,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식민지 이주민이라는 역사범주는 이미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확인을 넘어선 것이다. 작가의 ‘체질론’이 ‘어떻게 살 것인가’일 때 안수길의 소설이 추구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대상의 본질적인 확인위에서 이루어지는 당위적인 행동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작계보의 결정판이 󰡔북향보󰡕이다. 단편소설들에서 이주, 개척, 정착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면 장편소설 󰡔북향보󰡕는 정착의 당위성을 넘어서서 어떻게 정착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단편소설들에서는 ‘북향정신’이 주로 원색적인 생존의식에 의한 정착의념으로 나타난다면 󰡔북향보󰡕에서는 ‘북향정신’이 마침내 민족공동체의식에 의한 민족의 주체의식으로 개념화된다. ‘체질론’과 ‘북향정신’의 변증관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안수길의 조선인이주민소설의 의미담론에 밀착 접근하는 한 분석담론이 되고, 나아가서는 재만 조선인문학의 발생적 근거와 문학사적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2. 작가의 리얼리즘적 창작이념-‘체질론’ 안수길은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기의 창작 ‘체질’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안수길은 결코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철학의 본질적인 물음을 외면하거나 지나치지는 않았다. 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창작의 ‘체질론’으로 내세웠을 때는 이미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철학의 본질적인 물음을 밑감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수길의 ‘체질론’의 철학적 바탕이 되는 그의 일생의 좌우명을 떠올리면 그러한 밑감은 한결 선명해진다. 작가지망생이던 안수길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 사람만을 시인(是認)할 수 있다”는 구절에서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탁상좌우명을 만들어냈다. 그 후 육체적인 아픔과 식민지 현실에서의 정신적인 고민 속에서 작가적 생활을 통하여 마침내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재확인하였다. 내가 「팡세」를 읽었을 때는 앞에 쓴 대로 20대의 전반이었고 그 무렵은 일정시대(日政時代)다. 그리고 그 무렵에 나는 굉장한 정열을 가지고 세계명작을 읽고 있던 소설가 지망자였다. 거기에 가정 형편과 좋지 못한 건강 때문에 학업도 중단하지 않아서는 안 되었던, 이를테면 불우한 시기였었다.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말이 그대로 내 마음에 먹혀 들어왔다. 불우한 문학청년인 나에게 이처럼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말이 있은 것 같지 않다.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 나는 이 말을 입 속에서 푸념처럼 뇌이면서 그 후에 또 겪지 않아서는 안 되었던 중병시기(重病時期)와  해방 전후와 오늘날까지의 격랑(激浪)의 현실을 용하게 헤엄쳐서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4) 육체적 아픔과 정신적 고민의 극복의지가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철학을 밑감으로 하였을 때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체질론’으로 할 수밖에 없다. ‘신음하면서’는 바로 육체적 아픔을 식민지인의 아픔에 비하면서 사회 현실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역사 철학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냐’를 사유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더듬어 찾는다!’는 그와 같은 본질적인 확인을 밑감으로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듬어 찾는다!’는 작가의 창작이념과 현실극복의지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체질론’은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밑감으로 하여 발산되는 색깔이나 돋아나는 무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초기 이주민소설 「새벽」은 한 이주민 가족이 간도에서 지팡살이하면서 겪게 되는 피눈물의 수난사를 쓰고 있다. 당시 만주 이주민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지팡살이로부터 이주민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은 이미 특정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인간관계와 기본모순 속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지팡(地方=農場), 지팡주(地方主), 지팡살이라는 단어는 조선인이주민들이 만주에 와서 만주 지주들의 땅을 소작 맡으면서 생겨난 신조어이다. 그만큼 이 단어들의 사회역사적 성격 내지 의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과 만주의 지주와의 관계 속에서만 본질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 즉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나온 조선인이주민들이 만주에서 또 토착지주의 억압과 착취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선행연구들에서는, 소설의 기본갈등을 민족구성원인 지팡살이 주인공과 ‘얼되놈’ 박치만과의 사이에 설정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였거나 시대의 본질적 모순을 인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 정세에 대한 묘사와 이주민들의 간도 이주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파악이 결여되어 있다.(중략) 이런 문제점은 이주민들의 비극의 원인을 동족인 지주 농간에 주된 원인을 설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비록 박치만 같은 반민족적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이러한 한 개인, 그것도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에게 한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켜 놓을 수 있다.5) 신분적으로 말하면 마름인 ‘얼되놈’은 통치세력이나 억압세력의 분류코드에 속하지만, 토착지주의 기생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이 될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얼되놈’은 이주민의 절대적인 대립항이 아니므로 그와의 모순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박치만을 동족의 구성원이고 특수한 한 개인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텍스트 서사담론을 외면한 피상적인 판단이다. 이런 판단은 다만 소재주의적으로 박치만이 토착지주의 마름인 ‘얼되놈'일 뿐이라는 표상적인 신분확인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 서사구조에 의한 의미담론을 보면 박치만은 토착지주의 단순한 대리인이 아닌, 이주민 지팡살이의 절대적인 대립항으로 설정되어 있다. “문학텍스트가 언어활동 층위에서 어떻게 사회적, 역사적 문제들에 반응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6)하는 것은 바로 텍스트 사회학의 출발점이다. 박치만과 주인공의 갈등이 조선인이주민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재지주의 대리인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지팡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분확장으로 하여, 주인공이 지팡살이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직접적으로 박치만과 부딪쳐 일어나고 있다. 지팡살이의 특징적인 억압형태인 볼모잡기, 고리대 등도 모두 박치만의 직접적인 의도로 행해진 것이다. 그는 또 집사대나 경찰서와 같은 지배세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회 권력이나 억압세력의 힘에 의존하여 지팡살이하는 이주민들한테 볼모잡기나 고리대를 놓는 등 지팡주의 권세를 고스란히 행사하고 있는 박치만은 이제 더는 단순한 ‘얼되놈'이 아니다. 따라서 그와의 모순 갈등도 더는 이주민 구성원지간의 갈등이 아니며, 특정시대와 관계없는 단순한 개인적인 갈등은 더구나 아니다. 이러한 담론분석을 따르면 「원각촌」의 ‘얼되놈'인 한익상도 신분확장에 의하여 같은 갈등구조를 형성한다. ‘원각촌’이라고 하는 ‘이상촌’을 건설하는 원각촌민들은 지팡살이에서 해탈되어 ‘자기 땅’을 다루고 있는 듯 했으나 실은 조선인이주민들에게 강요되었던 ‘입적’이라는 생존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강요된 생존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신조어가 바로 ‘홋주인’이다. 당시 민국(民國)에 입적하지 않은 사람은 토지를 살 수 없었는데, 이주민들은 이미 입적을 한 사람을 내세워 그의 명의로 땅을 샀다. 이렇게 토지문서에 적힌 입적한 사람을 ‘홋주인’이라고 하였다. ‘홋주인'이 그냥 명의만 빌려주었을 때는 이주민의 구성원의 성격이 변질되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일단 그가 사실상의 지주가 되어 경찰, 관리 심지어는 마적과 직접적으로 끈끈이 줄을 잇고 조선인 이주민을 못살게 굴 때 그는 이미 이주민의 구성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원각촌」의 한익상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이처럼 박치만이나 한익상의 변질된 신분을 확인할 때, 소설의 갈등구조는 결국 이주민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소설은 식민지 이주민이라는 주인공과 통치세력으로 신분이 변질된 박치만이나 한익상의 갈등을 기본 플롯으로 설정함으로써, 식민지이주민의 역사적인 비극적 운명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새벽」과 「원각촌」은 이주민과 변질된 구성원의 갈등을 통하여 식민지 이주민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변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기 분석에서 보면 작가 안수길은 자기의 ‘체질론’을 인식론과 방법론의 통일위에 구축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미래지향적인 방법론은 항상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안수길의 고백에서도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의 대상이 인간이고, 소설은 그 인간을 생활면에서 구체적으로 허구(虛構),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관심은 전연 인간에 있고, 그 생활에 있고, 그것의 표현에 대한 부심(腐心)에 있을 밖에 없는 일이다. 표현의 부면(部面)이 작품에 있어서의 예술이고 인간과 그 생활의 부면이 내용이 되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이 되는 인간 자체도 「그것이 무엇이냐」와 「어떻게 살 것인가」로 가려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방패의 양면같은 것이어서 그 한쪽만으로 작품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인데, 가령 전자에 치중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의 구명은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시사(示唆)를 그 작품에서 받을 수 있고 후자의 경우도 작가가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임하지 않을 때 그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한 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7) 「새벽」이나 「원각촌」에서는 민족구성원간의 갈등이라는 표층구조와는 달리 신분확장이라는 치밀한 서사전략에 의하여 이주민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심층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본질적인 사회현실에 접근하는 이와 같은 리얼리즘정신은 바로 작가 안수길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체질론’에 앞서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확인을 밑감으로 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안수길은 재만 조선인이주민소설에 있어서 자기의 ‘체질론’을 언제나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식민지 조선인이주민을 특정 시대의 역사범주로 대상화하는 역사철학적 인식위에 세웠던 것이다. 인물, 배경 등 사물적인 서사요소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역사철학적 인식이 없었다면, 안수길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역사철학적 방법론의 해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위에서 그는 식민지 이주민의 역사의식에 토대한 현실극복의지인 정착지향의 “북향정신”을 정제해낼 수 있었다. 3.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북향정신’ ‘체질론’과 함께 안수길의 재만 조선인이주민소설의 창작과정에서 발아되고 정제된 ‘북향정신’에 대한 의미 확인은 재만 조선인문학의 성격 규명과 직결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주국을 삶의 공간으로 하여 ‘고향’과 ‘국가’라는 개념사이에서 시시비비를 몰아오고 있는 ‘북향정신’은 그 의미해석에 따라 친일사상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고8)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인이주민의 현실극복의지로 긍정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9) 따라서 ‘북향정신’에 대한 정의는 안수길의 재만 조선인이주민소설, 나아가서는 전반 재만 조선인문학의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로도 될 수 있다. 개괄하면, ‘북향정신’의 정신적 실질은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이고, 그 실천적 내용은 민족의식을 토대로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지역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확인하다 시피 안수길의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체질론’은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본질적인 인식론을 외면한 반쪽의 철학관이 아니었다. 그의 전체적인 역사철학적인 사유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철학적 인식론에 토대한 역사적 방법연구였다. 이것이 창작의 목적론에서는 대상물에 대한 본질적인 판단을 밑감으로 한 미래지향적인 추구였던 것이다. ‘북향정신’의 정착지향성이 조선인의 만주에 대한 역사의식에서 발원한다면, 그것의 현실극복의지는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이라는 신분확인에 의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공간 확인의 역사의식과 대상 확인의 현실인식의 변증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북향정신’인 셈이다. 결국 ‘북향정신’도 삶의 공간과 행위주체의 신분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본질적인 확인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확인이 없으면, 정착지향과 현실극복이라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을 도출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을 정시하면서 역사의식에 토대하여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인 ‘북향정신’을 정제해낸 안수길의 소설을 비롯한 재만 조선인이주민문학은, 식민담론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러한 식민담론을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훨씬 많은 민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안수길의 󰡔북원󰡕에 실린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조선인이주민소설에서는 ‘북향정신’이 아직 사전적인 정의가 확립되지 못하고 다만 원색적인 생존욕구에 의한 정착의념으로 나타난다. 「새벽」 「새마을」에서는 이주민의 비극적 삶과 정착의 어려움을 다루고 있다면, 「벼」 「원각촌」 「목축기」에서는 정착의 당위성을 확인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정착지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북향보󰡕에 이르러서 마침내 이념적으로 정제된 ‘북향정신’이 작가의 창작이념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식에 의한 주체적인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를 의미담론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안수길의 창작은 이처럼 초기부터 목적론적으로 정착이념을 내세워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체질론’의 해답을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 정착이념이 작가의 조선인이주민소설의 기본 모티프가 된 것은 이주민사회의 신변체험을 통한 작가의 현실인식과 만주라는 삶의 공간에 대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체질이란 자연인으로서의 생리적인 것이 아니고 그 작가의 정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일진대,(중략) 나의 경우는 청소년시절을 만주 지방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인인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간도 용정(龍井)의 부모 옆으로 두만강을 건너가게 된 것은 1924년 봄, 그러니깐 내 나이 열네 살 때였다. 거기서 초등학교 5,6학년 2년 동안 공부하고 고향의 H고보에 입학, 서울․경도(京都)․동경(東京) 등지에서 학업을 닦기는 했으나 방학 때면 제2의 고향인 간도에서 지냈고, 더구나 첫 취직까지가 현지의 우리 말 신문사였고, 해방 직전 35세 때에 귀국하기까지 죽 그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10) 만주는 안수길 작품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무대나 시대적 배경이기에 앞서 인물의 행위의 동기와 사건의 계기 자체에 편입된다. 이러한 동기와 계기는 공간에 대한 애착에 토대하는바, 이러한 애착은 바로 민족의 다양한 경험을 통한 특성화라는 공간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11) 조선인의 만주로의 이주는 결코 식민지 시대에 와서야 발생된 현상이 아니므로 조선인이주민사회의 형성도 식민담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식민지 시대의 이주민 문제를 역사적 단절이 아닌 전체적인 이주역사의 한 단계로서 확인하여야 한다. 그럴 때 만주 조선인이주민의 역사적 성격이 올바르게 규명될 수 있고 조선인이주민 사회의 형성, 정립, 발전의 역사적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식민담론은 만주 조선인이주민 역사의 전반 단계에서 식민지라는 특정 시대가 제공한 하나의 극복과제일 뿐이다. 만주는 역사적 연원으로 하여 일찍 조상 세대들이 삶의 한 공간 또는 현실극복의 대안으로 확인했던 곳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확인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인이주민들의 의식 속에도 원색적인 생존욕구와 함께 현실극복의 정착의지를 심어주었다. 역사의식에 의한 이러한 정착지향은 조상의 피땀과 ‘무덤’이 늘어남에 따라 그 산천에 대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애정과 향토적 정서를 더욱 깊어지게 하였다.12) 역사의식에 토대한 이러한 정착의 당위성을 확인한 안수길은 간도시절의 소설 창작에서 남달리 이주, 개척, 정착이라는 이주민 사회의 삶의 양상을 역사적 흐름 속에서 총체적으로, 발전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작품집 「북원(北原)에 수록되어 있는 「새벽」 「벼」 「목축기(牧畜記)」등등, 해방 전 재만시절의 소작 거의 전부가 동만주 지방에 살고 있는 우리 농민들의 생활을 발굴해, 「어떻게 살아 왔느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본 것이고, 그 무렵의 장편 「북향보(北鄕譜)」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 쓴 최초의 긴 이야기였다.13)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지향을 현실인식에 토대한 극복의지로 정제해낸 것이 바로 ‘북향정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북향정신’이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도 현실인식에 토대한 ‘극복의지’를 확인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라는 ‘북향정신’의 실질은 앞에 길게 늘어놓은 꾸밈말을 삭제하면 그대로 ‘현실극복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안수길의 ‘체질론’이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철학적 인식론에 토대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실천적 방법론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면, ‘북향정신’의 실질도 ‘정착지향’이라는 역사적 인식론에 토대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현실극복의지’라는 현실적 방법론에 착안점이 놓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꼭 ‘현실극복의지’일가. 이것은 그가 처한 시대가 식민지 시대라는 특수성에 의해 과거 역사와 다른 시대담론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극복의지’라는 실질은 사회현실에 대한 반성, 비판,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실극복의지’를 실천하는 행위주체가 현실사회의 소외자이거나 사회주체의 대립항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안수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이중신분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만주 정착에는 조상 세대와는 달리 훨씬 복잡한 상황이 얽혀져 있다. 이미 일제의 식민지인으로 윤락한 조선인이주민에 대한 중국 관헌의 대응 내지 억압은 본질적으로 말해 일제의 대륙침략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제의 대륙침략 야망이 노골화됨에 따라 조선인이주민에 대한 중국 관헌의 배척과 탄압도 가혹해졌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인의 만주 이주 내지 정착의 문제는,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도 일제의 대륙침략에 저항하는 중국인들과의 갈등 속에서 식민담론을 하나의 극복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북향정신’의 실질을 ‘현실극복의지’로 정의하는 것도 작가가 이와 같은 조선인이주민의 이중적인 특수신분을 확인한 결과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이중신분의 갈등 속에서 순응과 극복의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벼」에서 찬수가 일본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어 소현장의 탄압을 제지하려는 대목은 찬수의 이중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작가의 친일성향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이주민과 소현장의 대결에서 이주민의 강력한 대항에 부딪친 소현장이 일제의 개입을 막기 위해 공중에 헛총을 놓아 사건을 정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작품에서 찬수는 결코 이주민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내지 선각자의 형상이 아니다. 작가가 부각시키고 있는 찬수의 성격은 사건 진행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해가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특정 시대에 대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성이나 친일성향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 지식인의 시대적 극복과 함께 자기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힘을 빌어서라도 생존권을 지키려는 찬수의 알량한 계산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마저 떠난 이주민들이 원초적인 생존욕구로부터 출발한 결사적인 저항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친일적인 성향을 잠재울 수 있은 것 역시 조선인 이주민들의 이러한 결사적인 저항이었다. 결국 소설은 조선인이주민들의 정착의 어려움을 보여주면서도, 바로 조선인이주민의 특수한 신분으로 하여 원초적인 생존의식과 역사적인 민족의식 사이에서 겪는 식민지인의 민족주의 이중성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목축기」 역시 찬호의 선각자적인 형상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성숙 내지 이상적인 미래를 밝혀주는 작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찬호 역시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를 실천해가는 인물이면서도 사회현실을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시대에 각성한 지도자가 아니라, 현실극복과 자기극복을 동시에 해야 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설정은, 식민지 시대라는 절대적 억압의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식민지 이주민의 현실인식과 극복의지의 실천적 자세를 반성해보는 작가의 리얼리즘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안수길의 역사철학적 인식은 조선인이주민의 특수신분을 두고,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본질적인 역사인식을 밑감으로 하여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찬호가 농업과 전문출신이란 것도 그렇고, 학교당국이 성(省)의 근로교육방침에 순응하여 할 수 없이 그를 초빙하였지만 결국 대용교원으로 돌려 앉힌다는 것도 그렇고, 학생들이 그의 흉내를 내면서 ‘귀농선생’이라고 놀려대는 것도 그렇고, 그가 교원생활에서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이 사상이 발랄하고 사회 반역의식이 강한 학생들이 “속시원한 웅변이라곤 없이 묵묵히 광이와 호미로서 흙을 파는 면에서만 접촉하는 찬호에게 존경이나 흠앙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서사전략의 의미담론은 주인공이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로 목장건설이라는 실천적 작업에 몸을 던지면서도 현실인식이 투명하지 못하고 민족의 역사적 질곡의 본질을 이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기극복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담론에 의해, “만주에도 새아침이 왔다”는 주인공의 말을 학생들의 흉내를 통해 간접대화로 표현하는 서사형식의 풍자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찬호는 민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이라는 만주국 국책이 바로 포장된 일제의 식민정책임을 정치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것이 만주국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계산된 책략일 때, 식민지인의 민족이익과 민족이념은 궁극적으로는 억압의 힘에 눌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찬호는 결국 이른바 그런 ‘평화로운 현실’에서 민족의 정착의지를 목장건설을 통하여 실현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한 것이다. 로우숭이 범한테 물린 사건은 이러한 찬호의 아름다운 착각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동물화 하였던 로웅숭을 다시 사회로 환원시켰을 때 호랑이와 자연도 동시에 사회에 대한 상징의미를 획득한다. 즉 자연은 목장과 함께 인간사회의 축소판이 되고 호랑이의 피해는 사회 학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찬호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사회적인 근본모순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역시 만주국 국책의 허위성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정착의지를 실천하려던 주인공이 불가피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을 예시한 것이다. 보다시피, 작가 안수길은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로 식민지배의 절대적 억압사회를 극복해가려는 민족 단위의 실천적 탐색을 작품의 의미담론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찬호와 같이 현실극복과 자기극복의 갈등을 동시에 겪으면서 사건 발전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해가는 입체인물을 통하여 특정 시대 사회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 와서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지향과 현실인식에 의한 극복의지는 변증법적 통일체로 범주화되면서 󰡔북향보󰡕에서는 마침내 ‘북향정신’이라는 역사적 개념으로 규범화되는 것이다. 4. ‘체질론’과 ‘북향정신’의 역사철학적인 변증관계 안수길이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인식론과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방법론의 변증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도 창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체질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특정시대를 살아온 그의 인생경력과 관계된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작가지망생이던 안수길은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탁상좌우명을 육체적인 아픔과 시대적인 고통 속에서 삶의 현실과 연결시킴으로써 그 철학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식민지라는 절대적 억압의 특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자기 민족의 특수한 신분에 대한 확인과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이 멸망하는 위기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과연 민족 단위의 생사존망을 묻는 본질적인 물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안수길은 감수성이 뛰어난 성장기와 열혈적인 성숙기를 만주에서 조선인이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오래 동안 기자생활을 해왔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그의 ‘체질론’이란, 사실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인 조선인들이 만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이면서 땅에서마저 뿌리 뽑힌 부평초 같은 이주민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하여, 조선인이주민의 생존의 위기의식은 기어이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정착의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체질론’이, 식민지 이주민의 삶의 현실에 매개되면서 실천적 내용을 담은 역사개념으로 정제된 것이 바로 ‘북향정신’인 것이다. 말하자면 ‘체질론’은 ‘북향정신’의 철학적 바탕이 되는 것이고 ‘북향정신’은 ‘체질론’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체질론’이 반쪽 철학관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철학적인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듯이 ‘북향정신’도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역사적인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북향정신’이 개념적으로 등장하면서 그 정신적 실질과 실천적 내용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북향보󰡕이다.14) 󰡔북향보󰡕에서는 초기 단편소설들에서 정착지향을 보이면서도 단지 정착의 어려움이나 막연한 극복의지를 보여주고 있던 작가의 인식적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확실하게 삶의 공간에 대한 역사적 확인과 함께 조선인이주민의 삶의 특수성으로부터  현실극복의지를 도출해내고 있다. 이 작품의 내면적인 서사구조를 보면, ‘북향정신’을 사상적 핵으로 한 ‘북향도장’과 ‘북향목장’을 건설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을 기본 플롯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북향정신’을 사상적 핵으로 할 때, ‘북향도장’은 정착지향의 이주민지역사회를, ‘북향목장’은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담론은, 심층적인 서사구조가 시종 민족 구성원의 이야기 내지 갈등을 기본 플롯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주주’, ‘증자’, ‘독지가’, ‘기금의 기업적 조달’을 이주민지역사회를 건설하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민족적 단위로 위계질서가 되어 있는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지 이주민들이 민족의 자생력으로 이주민지역사회를 건설하려는 현실극복의지를 언표적으로 기호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바, ‘북향목장’ 건설은 결코 ‘왕도낙토’, ‘민족협화’나 ‘유축농업’이라는 식민지국 괴뢰정치 내지 국책에 동조하고 순응한 목장건설이라고 할 수 없다. 식민지 이주민의 지역사회는 민족경제공동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민족단위로 된 식민지사회 위계질서에서는 식민지 지배민족의 이익과 식민지 지배민족의 이익 간에는 도저히 합의될 수 없는 계산이 나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목장건설이 ‘유축농업’의 만주국 국책에 동조하고 순응한 것이라면,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과 경제적인 뒷받침에 의해 얼마든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주주, 증자, 독지가에 의해 위기를 모면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오히려 신빙성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처럼 󰡔북향보󰡕는, ‘유축농업’의 만주국 건설이라는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표층구조를 이루면서도 그 내면적인 서사구조는 민족의 내부이야기로 엮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내적구조와 외적구조의 변증관계는, 식민지통치 하에서 민족의 미래를 국가적인 정책과 혜택에 기탁할 수 없었던 식민지이주민의 비극적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목장건설’과 ‘유축농업’, ‘환경미화’와 ‘민족협화’를 직결시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텍스트의 담론분석에서 언어의 사회기호학적인 상징의미나 화용적인 기능을 외면한 채, 소재주의나 언어 기표적인 확인에만 멈춘다면, 서사전략에 의한 의미담론의 내화라는 문예미학의 특성을 간과하게 된다. 안수길은 그의 작품에서 역사적인 인간조건에 대한 비판에 머물지 않고 그 본질에 대한 확인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 참담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몸부림 내지 자각증상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리얼리즘정신의 소산이라고 할 것이다. 안수길의 작가사상의 철학적 토대인 ‘체질론’은 ‘북향보’에서 마침내 역사적 인식론인 ‘북향정신’을 정제해 냄으로써,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인 재만 조선인들의 고향-‘북향’을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 5. 결론 재만 조선인이주민문학은 우선 한민족문학의 내용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재만 조선인이주민문학을 우리 전통문화의 승계와 민족의 주체성에서 확인하려는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안수길의 ‘체질론’은 결코 반쪽의 철학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철학적인 인식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그의 인생좌우명에 원천을 둔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사고임에 다름 아니다. ‘신음’함은 현실과 주체의 괴리에서 오는 앓음이며 ‘더듬어 찾음’은 현실극복 내지 초월의지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가 창작과정에서 역사의식 및 현실인식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정제된 역사철학적인 개념이 바로 ‘북향정신’이다. ‘북향정신’은 ‘그것이 무엇이냐’에 답하여 정착지향의 이념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답하여 현실극복의지가 된다. 즉 그 정신적 실질은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지향의 현실극복의지인 것이다. ‘체질론’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놓이듯 ‘북향정신’도 궁극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놓인다. ‘체질론’과의 이와 같은 역사철학적인 변증관계에 의해 ‘북향정신’은 결국 주체적인 민족경제공동체를 토대로 한 조선인 이주민지역사회를 건설하는 실천적 원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우리는 그의 문학텍스트에 대한 담론분석, 특히 󰡔북향보󰡕에 대한 담론분석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정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주제어: 체질론, 북향정신, 정착지향, 현실극복의지, 민족공동체의식, 민족경제공동체, 이주민지역사회.     <참고문헌> 안수길. 󰡔북원󰡕. 예문당, 1944. 안수길.「북향보」,『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6).         중국조선민족문화예술출판사, 2004. 안수길. 󰡔명아주 한포기󰡕. 문운창작사, 1977. 김광민. 「안수길 소설 연구」. 한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김동민. 󰡔한국문학사의 탐구󰡕. 푸른사상, 2003. 박은숙. 「안수길 소설연구」. 성균관대학 박사학위논문, 2002.       , 「북향정신, 그 허와 실」, 󰡔한국어문학연구(46)󰡕(한국어문          학연구학회, 2006). 방용남. 「안수길 소설의 서사구조 연구」. 한림대학교 석사학위논           문, 2007. 오양호. 󰡔(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 연구󰡕. 문예출판사, 1996. 이금선, 「안수길 소설에 나타난 ‘고향’과 ‘국가’의 의미」, 연세대학          석사학위논문, 2003. 이훈구. 󰡔만주와 조선인󰡕. 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 1932. 정덕준 외.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 푸른사상, 2006. 정현숙. 「안수길의 󰡔북향보󰡕론」. 󰡔한국언어문학󰡕(54집). 한국언어          문학회, 2005. 최경호. 󰡔안수길 연구 : 실향시대의 민족문학󰡕. 형설, 1994. 스테판 코올. 󰡔리얼리즘의 歷史와 理論󰡕. 여균동 편역. 한발출판           사, 1982. 위르겐 슈람케.『현대소설의 이론』. 원당희․박병화 역, 문예출판           사, 1995. 피에르 지마. 󰡔문학의 사회비평론󰡕. 정수철 옮김. 태학사, 1996. <국문초록> 이른바 일제 암흑기문학은 공백기라는 저주의 이름을 달고 일괄적으로 폐기처분되었다가, 지금은 많은 연구가들에 의하여 진흙탕 속에 묻힌 옥을 닦아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한 작업 중에서 재만 조선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볍지 않다. 안수길을 비롯한 재만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은, 반도에서는 일본어창작만 허용되던 시기에 우리말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만도 의미가 깊지만, 식민지 이주민의 삶의 애환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연구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재만 조선인문학은 암흑기 반도의 민족문학과 마찬가지로 친일담론의 흑백이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시기 반도의 문학이 내선일체, 동조동근, 황국신민화, 일본어창작이라는 시대적인 강요에 부응한 혐의를 받고 있다면, 재만 조선인문학은 왕도낙토, 민족협화, 유축농업이라는 만주국 국책에 동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정 문학의 존재의미와 성격을 규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재만 조선인문학의 연구에서는 안수길과 그의 작품이 언제나 집중조명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그의 만주이주민소설은 그대로 조선인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수길의 ‘북향정신’에 대한 연구와 그 의미에 대한 확인은 재만 조선인문학의 성격 규명과 직결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향’과 ‘국가’라는 개념사이에서 시시비비를 몰아오고 있는 ‘북향정신’은 만주조선인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소재로 다루는 재만 조선인문학의 주제의식을 파악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향정신’이 구경 어떤 정신인가의 진단에 따라서 안수길의 조선인이주민소설은 재만 조선인문학과 함께 한국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이주민문학으로 번지를 획득하거나 아니면 일제의 대륙침략을 추종하는 친일성향의 문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는 이 지점에 주목하여 ‘북향정신’의 실질을 밝혀보려고 한다. 주제어: 체질론, 북향정신, 정착지향, 현실극복의지, 민족공동체의식, 민족경제공동체, 이주민지역사회.
51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이다 댓글:  조회:2474  추천:0  2009-05-16
진달래가 피면 봄이 본격적으로 승리의 함성을 올린다고 하지만 동북의 동장군은 완고하기 짝이 없다. 5월의 해빛이 따스한 손길로 대지를 부드럽게 만져주고있지만 산과 들엔 아직 겨울의 찬기가 싹 빠지지 못했다. 이른 아침이면 산기슭을 따라 감돌던 물김이 나무잎사귀나 풀잎들에 봄의 은구슬을 빚으려는듯 싸늘한 이슬방울들을 대롱대롱 달아매놓고 집집의 처마기슭이 가랑비를 맞은듯이 축축히 젖어버리도록 물안개가 대지공간을 유유히 감돈다. 동녘이 훤해와서야 해살이 애기풀을 마구 키스하면서 제노란듯이 쪽잠에 든 이슬을 흔들어 깨운다. 때는 바로 1979년 5월중순의 어느날 아침이다. 도회지사람들은 아침을 치른지 이슥해도 아직 일찍하다며 손발을 비비고있을 때 그리 크지않은 키에 퍽 다부지게 생긴 중년사나이 하나가 오솔길옆에서 도전적으로 이슬을 담뿍 담아들고 흐늘대는 잡풀들을 와락와락 떨쳐버리며 산발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바지가랭이는 어느덧 물에 푹 잠그었다가 나온듯 화락하게 젖어있었다. 신을 신었다고는 하지만 긁이나 뾰족돌을 방비하기 위해서 필요할뿐이지 바지가랭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가 양말을 푹 적시여 신안은 벌써 끈적끈적하였다. 감도는 안개속에 푹 빠진 산은 오만상을 찌프리고있어 범접하기가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문어발처럼 내리뻗친 산발을 하나를 타고 올랐다가 다른 하나를 타고내리면서 산마루까지 올라갔다가는 또 다른 산마루의 산발을 타고 오르내리자면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대체 이 사나이는 누굴가, 왜서 봄의 이른아침부터 찬이슬을 헤치며 산발을 주름잡고있는걸가? 그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며 그때 당시 룡정현대외무역국의 부국장이였던 김석륜이다. 그는 지금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보배로 칠수도 없는 도라지따위의 산나물을 <<정탐>>하고있는것이였다... 1 룡정시(당시엔 현이였음)대외무역국은 1979년도에 성립되였다. 성립초기엔 1976년도에 세운 룡정현공급판매합작사의 대외무역조에서 사업하던 김석륜(조장), 정증봉, 최성률 등 세사람으로 구성되였다. 금방 <<가정>>을 꾸릴 때만 하여도 그들은 처참할 정도로 적수공권이였다. 원래 쓰던 판공실 한칸을 빌려쓰고있었는데 낡아빠진 책걸상에 자그마한 서류궤가 전부의 <<가장집물>>이였다. 말그대로 말짱 령으로부터 시작하는 가난뱅이 신세였다. 성립초기 이 대외무역국의 사업성질은 사실상 성대외무역국의 룡정판사처격의 작용을 하는데 불과하였다. 성대외무역국에서는 로임과 약간의 활동비용만 줄뿐이지만 그들의 수입은 몽땅 성의 명목으로 넘어가는판이였다. 일년내내 땀흘려 임무를 완수 또는 초과완수한다고 했댔자 고작 차례지는것은 얼마안되는 로임뿐이였다. 얼마나 불공평한 대우인가. 너무나 혜택없는 노릇이였고 보람없는 일이였다. 김석륜의 마음은 세차게 갈기질하였다. 현대외무역국을 성립할 때 그는 자기로서의 아름찬 타산이 있었댔다. 현공급판매합작사의 대외무역조에서 몇년간 조장사업을 해온 그는 한번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보람찬 일을 해내려고 하였던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너무나 의뢰생활에 중독되여 국가의 혜택을 노력없이 눅거리로 받으려고만 했다. 자조자급의 훈련이 너무나도 결핍했던것이다. 왜서 자기의 두손으로 창조할수 있는 재부를 게으름으로 외면해버린단 말인가! 쉽게 산다는것은 기실 허무한 삶을 의미한다. 보람없이 슬슬 무의미한 세월이나 죽여가면서 국가월급이나 제때 타먹는 기계적인 직업인이 되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여 세월의 갈피갈피에 고통과 희열을 끼워넣으면서 노력, 분투, 창업의 땀을 흘리는 성실한 기업시민이 되는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성대외무역국에서 주는 임무를 적대적으로 완수하는 전제하에서 좀 자체경영도 하기로 하고 성대외무역국에 제기하였다. 그런데 성에서는 그들이 자체경영을 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수입도 계속 몽땅 상납하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여러번 시비했으나 강에 돌을 던지는격이였다. 김석륜은 끈질기게 성대외무역국과 계속 입씨름을 하는 한편 이듬해에는 직접 자체경영을 밀고나갔다. 지루하고 번쇄한 시비만을 비생산적으로 되풀이할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성대외무역국에서 맡기는 임무만 해도 그들 다서사람(이땐 이미 다섯사람으로 불었났음)으로서는 퍽 아름찬것인데 자체경영까지 한다는것은 그렇게 식은죽먹기가 아니였다. <<우리는 지금 가난하고 말끔한 가정이요. 우리절로 이 가난의 때를 벗자면 사람마다 간고하게 창업하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고락을 함께 나누는 의리가 있어야 하오. 일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거요.>> 김석륜은 늘 종업원들에게 이것을 강조하였으며 그 자신이 언제나 모범적인 실천자였다. 그 어떤 일이든 다랄붙기만 하면 그들사이엔 국장이 다르고 희계가 다르고 수매원이 다른 그런 계선이 없었다. 모두가 탐사원이자 조직원이고 기술원이자 수매원이였다. 고사리철이 되면 저마다 맡은 구역의 산을 답사하고 농민들한테 기술을 전수해야 했으며 또 농민들이 고사리를 캐오면 뿌리를 끊고 잎이 핀것을 가려내고 등수를 매긴다음 끓인 소금물에 절이는 등 가공을 직접하면서 농민들을 세세하게 지도해야 하였다. 그저 농민들한테 맡겼다간 기술이 숙련되지 못하기에 등수를 잘 가리지 못할수도 있었고 또 어떤 농민들은 사실 제일처럼 그렇게 알뜰하게 하지 않는것이였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같지 않은 등수가 뒤섞이거나 깨끗하게 정선하지 않아 불합격품이 될수 있는것이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심하게 한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깨끗하게 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농민들을 직접 지도하여 정선했다고는 하지만 거두어온후 다시 검사해보면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것이 많았다. 그럴때면 미처 다른 사람들을 동원할새가 없어 그들 몇사람이 밤늦게까지 눈을 쥐여뜯으며 다시 처리하여야 하였다. 날이 새면 언제 눈을 붙일새가 없이 또 그것을 실어보내야 하는것이였다. 8-9월의 송이버섯철이면 더 바삐 돌아쳐야 했다. 야들야들한 생송이버섯은 모래가 잘 달라붙기에 하나하나 솔로 털어내야 한다. 그런데 농민들은 그 많은 송이버섯을 그렇게 하나하나 솔로 빗질할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는수 없이 그런대로 등수만 갈라서는 돌아와서 다시 하나하나 정선해야 하는것이였다. 다른 산나물도 마찬가지로 모두 수매요구가 있기때문에 그들은 산나물철이 되면 한시도 서성거릴새없이 바삐 돌아쳐야 했다. 그들에겐 잠자리도 고정된 곳이 따로 없었다. 오늘은 삼합에서, 래일은 지신에서, 모레는 명동에서... 어떤 땐 옷을 입은채로 새우잠을 잤으며 48시간을 하루로 보낸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삼합 북흥강역이 산나물이 많이 나는 중심지역이므로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살길을 찾아 보따리짐을 지고 넘어왔던 오랑캐령을 얼마나 넘나들었는지도 헤아릴수 없었다... 1982년 2월에 고배상과 윤만길이 광주로 가서 몇가지 일을 처리하게 되였다. 단위의 경제형편을 잘 알고있는 그들은 려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석차표를 끊었다. 꼬박 사흘밤을 걸상에 꼿꼿이 앉아 끄덕끄덕 <<기도>>를 드리며 가고나서 광주역에 내렸을 땐 온몸의 힘줄을 쏙 뽑아낸듯했고 그저 아무데서나 한잠 실컷 자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들은 먼저 주숙할 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괜찮은 려관들이 있었지만 려관비가 너무 비쌌다. 서류가방을 든 많은 <<공무인원>>들이 국가돈을 쓰고 국가일을 하는데야 하고 배포유해서 그런 호텔을 드나들었지만 일전이래도 아껴쓰는데 습관되다싶이한 그들에겐 1원이 10원으로 여겨졌기에 아예 좋은 려관들은 바라보는것조차 단념하고 지나쳐버리였다. 마침내 그들은 삼사십명이 함께 투숙할수 있는 통칸방이 있는 초라한 려관에 짐을 풀었다. 점심때가 되자 그들은 만두를 사다가 가지고간 고추장, 짠지따위에다 대충 먹고는 벌렁 자리에 누웠다. 맨 널바닥에 짚방석을 깐 잠자리였지만 눈두덩이에 피곤이 무겁게 축 드리운 그들한테는 제법 푹신한 멋이 있어 눕자마자 깊은 잠에 골아떨어지고말았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온몸이 오싹오싹 해났다. 난방시설이 없는 남방의 2월은 낮게 드리우는 찬김에 이불마저 축축할 지경이였다. 그런것에는 아랑곳없이 이튼날부터 그들은 사처로 달아다니며 갖고간 일처리에 다랄붙었다. 보름이 지났다. 가지고간 고추장, 짠지들이 모두 거덜이 났다. 그들은 편이국수나 빵으로 끼니를 에웠으며 부대를 찾아가서 사업증을 보이고 사정해서 가마를 구해다가 드문드문 죽은 고기를 사서 끓여먹었다. 광주사람들은 모두 산고기를 사먹기에 죽은고기는 퍽 헐값이였다. 두달을 막 잡아서 갔던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려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때 무엇이든 돈이 될만한것을 구입해 가지고 가려 했다. 비록 그들은 떠날 확정적인 구입임무는 맡지 않았지만 이것은 지도부에서 제창하는 창업신이였고 또 그들이 가는곳마다에서 행동에 옮기는 고상한 기풍이였다. 허나 인제 려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얼 해간단말인가? <<듣자니 우리 고장에서는 고무장판이 한창 인기를 모은다더구만>> <<그런데 우리한텐 인제 려비도 얼마 안남았는데요.>> <<글쎄...>>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난처한 얼굴로 마주 쳐다보았다. <<우리 한번 외상으로 사정해볼가?>> <<우리같은 생면부지한테 외상으로 주기나 하겠습니까?>> <<한번 부닥뜨려 보지. 창피당할셈치고. 뭐 우리가 여기서 살겠나.>> <<글쎄요, 그래보지요. 밑져야 본전일텐데.>> 이튿날 그들은 어느 한 고무장판공급판매부를 찾아갔다. 그들은 제잡담 사업증과 단위소개신을 내보이면서 찾아온 경위를 말하고 제발제발 사정하였다. 헛일삼아 찾아간 그들인지라 별로 큰 기대같은건 걸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도 수월할변이라구야. 하늘이 도왔던가, 그들이 하도나 진지하고 성근하게 청을 들어 그랬던지 아니면 그곳 책임일군이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여서 그랬던지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던것이다. <<하지만 돈은 돌아가서 인츰 부쳐야 합니다.>> <<그러지요, 그건 에누리없으니 념려하지 마십시오.>>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감사를 드린 그들은 어찌나 기뻤던지 두달이 거의 차는 객지생활에서 몰킨 고달픔이 순간적으로 말끔히 가셔지는듯싶었다. 그들은 그곳의 은행돈자리를 적은다음 사업증과 소개신을 <<저당>>하고 고무장판 팔천메터를 구입하여 연변에 부쳤다. 그리고는 그들도 그날로 돌아오는 기차를 잡아탔다. 이번길에 그들은 고무장판을 팔아 만여원을 수입하였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성대외무역국의 긍정적인 시선을 끌어왔다. 1982년, 성대외무역구에서는 마침내 룡정현대외무역국의 자립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체경영을 하는것을 허락하였다. 2 그해에 김석륜이 국장 겸 경리로 되였다. (이때에 와서 그들은 대내적으로는 의연히 대외무역국이라고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대외경제무역공사라고 하였다.) 기막힌 가난을 굳센 자립의지로 풀어버린 그는 한바탕 더욱 통이 크게 해제낌으로써 일상성의 공간을 초월하여 치부의 문을 두드려 열려고 윽별렀다. 이때는 바로 전 사회적으로 개혁, 개방의 물결이 높아가고있던때라 생활의 일상성속에 묻혀버리는것을 달가와하지 않던 그로 말하면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격이 되였다. 게다가 환난을 함께 겪어오면서 일심동체로 뭉쳐진 직원들의 드높은 상승심이 정신적인 집합력이 되여 뒤받침해주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그들은 해마다 2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1983년도에 그들은 세칸짜리 판공실을 새로 마련하였다. 이듬해에는 그 집을 팔고 성과 주에서 지원을 받아 건평이 600평방메터인 창고와 450평방메터에 달하는 지금의 판공청사를 지었다. 그런데 워낙 인간에게 있어서 삶을 참답게 산다는것 자체가 아픔을 당하는것이였다. 1985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외무역경제공사는 아무런 명성도 없어 누구도 오려하지 않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룡정현에 대외무역공사가 어느 골목에 있다는것을 아는이조차 많지 못했었다. 그런데 1985년도에 그들이 변경무역을 시작하면서부터 대외경제무역공사는 <<총각>>들한테 외면당한 <<처녀>>로부터 일약 열렬히 흠모하고 사랑하고 추구하는 대상자로 주목되였다. 삽시에 많은 <<중매군>>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들었다. 사회상에 류행되고있는 인간관계의 충격파가 드세게 그들을 충격하였다. 김석륜은 실무상의 애로가 아닌 인위적인 도전에 골머리를 앓게 되였다. 워낙 도리보다 세속을 중요시하는 인정세태인지라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수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이런 <<중매군>>들은 거개가 사회명성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 천갈래만갈래로 련줄이 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러기에 자칫하다간 순소비적인 시비에 빠져 사업을 망쳐먹을수 있는것이였다. 인간은 본래 자기의 운명을 자기절로 조종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 인간의 운명의 실타래를 마음대로 감았다 풀었다 할수 있는 무서운 힘이 사회에는 확실히 존재하고있는것이다. 그때문에 참답게 산다는것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것이며 때로는 목적과 결과의 배반을 초래하여 소나무처럼 억센 사나이도 졸지에 물거품이 되여버리는수가 있는것이다. 그는 몽매와 문명, 인정과 사업, 질투와 분발, 봉건의식과 현대의식의 치명적인 대결이 안겨주는 뼈저린 진통을 온몸으로 절감하였다. 소비의식으로 삶의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채 익지않은 과일도 마구 따먹으려고만 생각한다. 그래 우리가 그런 인간들을 먹여살리자고 이때까지 애면글면 피땀을 흘려왔단말인가?!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더없는 서러움이 처량한 가을비처럼 부실부실 내리면서 알알이 외로움이 매달렸다. 그 외로움을 툭툭 털어줄 사람은 누구도 없는듯싶었다. 도리여 그들을 용납하지 않은것이 죄이기나 한것처럼 여기는것이였다. 어떤 권세인들은 은근히 자기의 권력과 그들의 사업을 련관시켜 암시를 주었고 어떤 못난이들은 자기들이 의탁하고있는 <<구세주>>를 왕패로 내들고 진공해왔다. 그들을 너무 매몰차게 내몰아도 안되고 그렇다고 오는대로 무작정 받아줄수도 없는것이였다. 아, 때와 장소에 알맞는 감정을 표현하면서 산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있는자는 십중팔구는 무사한 습관에 길들여사는 게으른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할일없이 밥얻어먹는것이 제일 리상적인 목적이다. 그들은 그 누가 선구적공적을 쌓아놓으면 떡심좋게 그 우에다 자기의 리상적인 생활을 설계하는 파렴치한 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받는다면 우리가 수립한 보귀한 창업정신이 개척을 모르는 게으름뱅이의식에 희석되여버리고말것이다. 게으른 질투, 포부없는 야욕은 인재를 라태와 무위도식에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적이니깐. 결코 그렇게 할수 없다. 그는 생기발랄하던 <<함선>>이 인정관계의 넝쿨에 걸려 무참히 침몰당하는것을 얼마든지 보아왔던것이다. 하기에 그는 대외경제무역공사라는 이 <<함선>>의 키가 자기한테 쥐여져있다는 아름찬 력사의 무게를 새삼스레 느꼈다. 그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워낙 평범한 생활에 조용히 몸담그려 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모든것이 결코 자기의 뜻대로만 되리라고 천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것이다. 그에게는 어려운 시기를 밝은 미래를 당겨오는 계기로 삼는다는 신조가 있었다. 오직 드팀없는 신념으로 자기가 확신한 목적을 향해 맹렬히 전진할 때 또 그것이 순수 개인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한 집단 나아가서는 사회의 근원적인 목적추구와 본질적으로 직결되는것일 때 어느때는 꼭 자기에 대한 몰리해가 발전적으로 해소될것이라고 믿어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또 어떤 사람이 소개한 사람이든 오직 하나의 선택표준을 내세웠다. 그것은 곧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맡겨주는 모든 일을 막힘없이 떠멀수 있는 사람이라야 등용한다는것이다. 한편 그는 이런 번쇄하고 비생산적인 시비의 소용돌이속에 자기를 내버린것이 아니라 입방아찧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입이 부르트도록 시비를 하든말든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빈틈없이 밀고나갔다. 3 1985년도부터 시작된 변경무역은 그 무역액이 시초의 몇십만원으로부터 몇백만원, 지금은 최고 2천만원까지에 도달하였다. 무역액이 커갈수록 무역의 성공여부는 집체와 국가의 경제손익에 뚜렷한 도표를 그려주었다. 그런데 몇년래 적지않은 현, 시의 대외무역단위들에서 순차와 역차의 평형을 잡지 못하고 교역물의 상대적가격차와 시장수요를 계산적으로 정확하게 추산하지 못한 탓으로 실제상 많은 경제손실을 빚어냈다. 계약상으로는 얼마만큼의 무역을 했소 하고 소문을 크게 냈지만 적지 않게는 순차가 너무 빈번하여 텅텅 빈 장부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형편이였고 은행의 리자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여 리자만 잔뜩 불어났다. 무역령역의 이런 실태를 알고있고 그 자신 또 여러번 고배를 마셔본 김석륜은 원칙적으로 최대가능한 정황에서 직접교환을 주장하였다. 자기의 물건을 현지에서 상대방에게 확인시키고 자기도 상대방의 물건을 직접 확인한후 날자를 확정하여 량측이 동시에 물건을 교환하는것이였다. 이렇게 하니 순차를 줄일수 있었을뿐만아니라 돌아올 때 빈차가 뛰는 량비도 없앨수 있었고 물건이 적치되는 현상도 방지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차를 띄워 물건을 실어갔다가 올 때에 요구한 물건을 실어오려 하였는데 상대방에서는 물건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후일 꼭 자기네가 직접 실어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몹시 불만스러웠지만 할수 없는 일이라 우스개를 하고말았다. <<보낼 물건이 마련되지 못했으면 돌이라도 두차 실어주십시오.>> 이 몇년래 그들이 최대의 노력으로 신용을 지켰기에 상대방에서도 백방으로 그들한테 신용을 지키려 애썼다. 변경무역이 시작되자 연변내 여러 무역단위들사이에는 치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경쟁의식은 국가성장의 필연적인요청으로 나서게 된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쟁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상업이라는 본질적인 규정성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에게 유리하기만 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떤 수단이든지 가리지 않는 페단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1987년도에 조선측에서는 운동복천을 대량으로 요구하였다. 이 정보를 남먼저 손에 쥔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는 인차 그들과 협의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많은 대외 무역단위들에서 낌새를 채고 늦어도 죽물이나마 마실수 있다고 여겼던지 주린 배를 안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김석륜은 제꺽 거기에서 손을 떼고 나앉았다. 한가지를 성숙시킬 때 그는 벌써 다른 한가지를 은근히 무르익히고있었던것이였다. 그는 조선에서 흰광목천을 대량적으로 요구한다는것을 알고 그들과 계약을 맺은후 이미 주백화공사와 흰광목천합동을 해놓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 기밀을 낚아챈 어느 한 대외무역단위에서 그들 몰래 백화공사를 구슬려서 룡정대외무역공사보다 12전씩 더 주기로 하고 중간에서 슬적 채버렸다. 그리고는 조선측에 룡정대외무역공사엔 그런 현물이 없는데 자기들한테 얼마든지 있다고 하였다. 하여 조선측에서는 실물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한 룡정대외무역공사를 신용이 없다고 하면서 멀어젖히고 그들과 계약을 맺어버렸다. 그러자 공사의 직원들과 일부 지도자들도 분해서 펄펄 뛰였다. 너무나 비도덕적이다. 자기의 경제리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것조차 꺼리지 않다니! 이건 한 인간으로 말하면 너무도 억울한 인격모욕이다. 직원들은 그들과 한바탕 해내고 상대방에 그들의 허울을 발가놓으며 지어는 그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주더라도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한테 중간랑패를 보아선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석륜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우리가 하는것은 사회주의상업이요. 사회주의상업은 정당한 경쟁을 허용할뿐이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헐뜯거나 암살적으로 남을 해치는것은 모두 비렬한 짓이요. 남이 그따위로 한다고 해서 자기도 그런 구렁창에 빠진다는것은 더없이 미련한 짓이요. 그리고 이제 그들을 까밝힌다고 해서 우리에게 결코 리로운점이 크게 없을뿐더러 오히려 전체적인 형상을 더럽힐뿐이요.>> 승벽심이 강하기로 전혀 남한테 굽어들줄 모르는 그는 요만한 일로 옴니암니 다투느라고 아까운 시간만 덧없이 죽어버릴수 없었다. 그는 종래로 맺고끊는 성미였고 앉아있을줄 모르는 불같은 사람이였다. 그는 진짜 경쟁의식은 상승적심리를 바탕으로 하는것이지 남을 해치는 질투심리를 바탕으로 한것이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그따위 남의 경제성장을 질투하고 해치는 이른바의 <<경쟁의식>>으로는 사회나 국가성장의 설명이 한점도 가능할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것에 초점을 맞추는것이 아니라 흔히는 남이 이미 이룩해놓은것을 <<훔치>>거나 <<략탈>>하는것이기때문이며 곰이 옥수수따는격으로 사회나 국가로 놓고말하면 결국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것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게다가 흔히 잃은것이 더 귀중하고 발전적인것이다. <<우리는 시장동태에 좀더 밝아야 하오. 백방으로 남보다 앞서 정보를 장악하고 소뿔을 단김에 빼야 하는것이요.>> 이듬해에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는 조선과 목재수입자동차수출계약을 맺었다. 조선에서 목재무역을 하자면 목재운반용차가 대량적으로 수요된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김석륜은 사람을 사처로 띄워 115, 141형 해방표자동차를 <<수집>>하였다. 아직 남들이 미처 정신차리기전에 그들은 <<수집>>할수 있는 해방표자동차는 거의 다 끌어왔는데 산동, 하남 등지까지 뛰여다녔다. 그런데 조선과 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141형 해방표자동차 한대에 값을 2만 9천원을 매겼댔는데 그 사이에 국내에서 한대의 값이 3만 4~5천원으로 껑충 뛰여올랐다. 한대에서만도 6~7천원씩 믿지는 셈이였다. 다른 물건과 바꿔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그래서 김석륜은 꼭 목재라야 바꾼다고 고집하였다. 상대방에서는 워낙 목재를 위주로 하면서 일부는 다른 물건을 끼우려고 했던것인데 할수 없이 그의 드틸수 없는 요구에 응하였다. 그들은 지난해 한해에만 해방표자동차를 도합 202대나 수출하였으며 목재 3만립방메터나 수입하였다. 시장동태에 대한 파악의 투명도는 그들에게 치부의 길을 넓혀주었을뿐더러 경제적손실도 미연에 방지할수 있게 하였다. 송이버섯은 그들이 다년래 해오던 득점수가 높은 <<장사거리>>였다. 주로 일본에서 많이 요구했는데 생생한것은 톤당 18만원까지 올라갔고 (1986년도엔 최고로 20만원까지 올랐었다)절인것도 12만원씩 하였었다. 일본사람들은 송이버섯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했는데 연변의것이 질이 더 좋다고 인정하면서 될수 있으면 연변의 생생한 송이버섯을 많이 사가려하였다. 그런데 연변엔 송이버섯이 그렇게 많지 못하므로 대부분은 운남 등지에서 수매해오는것이였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점차 송이버섯에 대한 흥취를 잃게 되자 송이버섯값이 대폭 떨어지게 되였다. 1988년도엔 절인 송이버섯은 톤당 4만원도 받을수 없는 형편이 되였다. 이런 시장동태를 미리 장악하고 또 연변의 송이버섯수매량이 많지 못한것을 계산적으로 따진 그들은 1988년부터 송이버섯무역을 아예 딱 끊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정황을 모르고있던 일부단위들에서는 이왕의 좋던 경기에 기억을 걸고 이해에도 맹목적으로 운남으로부터 톤당 10만원좌우씩 주고 대량의 절인 송이버섯을 들여왔다. 결국 물건을 가져가려는 주인이 나타나 주질 않아 지금 룡정시에만도 237톤에 달하는 송이버섯이 창고에서 기약없는 발송을 기다리고있다. 4 <<우리가 하는 일은 사회주의상업이다>>. 이것은 김석륜의 사업좌우명이다. 이것이 또 그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모습을 그려낼수 있는 정신적색갈이다. 1986년도에 룡정화학공업공장에서는 푸르풀알콜생산에 원료로 쓰이는 옥수수이삭속대가 딸려 쩔쩔 매였다. 농촌에서 도거리를 실시한후로 옥수수이삭속대가 그렇게 많이 집중된곳이 없었고 또 농민들은 그까짓 몇푼안되는 돈을 위해 옥수수이삭속대를 수레에 싣고 공장까지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외지에서는 맞돈이래야 주겠다는것이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김석륜은 지도부성원들을 모여놓고 토론하였다. <<옥수수이삭속대는 조선에서 얼마든지 들여올수 있소.>> 그러자 한 지도일군이 말했다. <<그걸 무역해서야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신고스레했대야 우리한텐 크게 떨어질게 없질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아오. 헌데 지금 화학공업공장에선 확실히 곤난에 봉착했소. 옥수수이삭속대 래원이 끊어지는 날이면 공장이 막대한 경제손실을 보게 되오. 우리가 하는것은 사회주의상없이지 개인상인이 아니란 말이요. 지방공업을 부축이는것도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이요.>> <<옳소, 지방공업이 망해빠지는것을 보고도 가만 있는다면 우리는 더 큰 리익을 보았다 해도 속이 편안하지 못할것이요.>> 언제나 그를 받들어주고 지지해주는 남두형이 이번에도 선참 그를 두둔해나섰다. 그러자 다른 지도부성원들도 동감을 표시했고 나중에 그 지도일군도 동의를 표시하였다. 다년래 이 지도부는 누구한테 도리가 있으면 견결히 지지하고 가결이 없으면 사정없이 쟁론하는 기풍을 수립해왔다. 그리고 일단 결정된 일이면 누구 하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없이 일심동체로 결정을 집행해나갔다. 이해에 그들은 조선으로부터 옥수수이삭속대 2천톤을 수입하여 룡정화학공장에 원료로 제공해주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그들은 1988년에 공장측에서 원료공급을 자체로 해결할수 있게 될 때까지 련속 3년간 별로 리득이 없는 무역을 해주었다. 룡정기계수리공장에서 생산하는 바이스제품은 이미 국제수준에 도달하여 국제시장에 대량적으로 진출하고있지만 국내 생철값이 너무 비싸서 원료공급이 큰 문제였다. 이런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김석륜은 또 공사지도부성원들과 토의하고 1987년부터 룡정기계수리공장에 바이스생산원료로 청진제강소로부터 해마다 600~700톤의 생철과 반제품을 수입해주었다. 1986년에 40만원, 1987년에도 40만원을 시재정에 상납한 그들은 1988년도에 원래는 50만원만 상납하면 되였다. 그런데 하루는 한창진시장이 몸소 대외경제무역공사로 찾아왔다. <<김경리, 시정부에서는 지금 로간부활동실문제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시재정에 상납하는 돈을 상납하지 않고 거기다 좀더 보태서 2년동안에 로간부활동실을 지어줄수 없겠는가고 상론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남동무, 당신생각엔 어떻소?>> 김석륜은 그만한 승산은 있었다는듯이 아무런 주저도 없이 대답해버리고는 그제야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남두형한테 웃으며 물었다. <<대답은 제가 이미 해놓구선 나더러 반대하라는건가?>> 남두형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이제 로간부활동실이 당신들의 이름으로 버젓이 일떠서는 날이면 당신들도 룡정시 인민들앞에 큰 면목이 서게 될것입니다.>> 한창진시장은 소탈하게 웃으며 그들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그래서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는 1988년도에 70만원, 1989년도에 70만원 해서 도합 140만원을 투자하여 2년내로 로간부활동실을 지어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건축시공이 시작되여 얼마후에 한창진시장이 또 느닷없이 그들을 찾았다. <<경제때문에 집을 2년씩이나 짓는다면 집도 못쓰게 되고 또 경제적으로도 도리여 손실을 보게 됩니다. 이미 할바엔 1년내에 후닥닥 해치우는것이 좋지 않습니까?>> <<하하하, 시장어른도 한술한술 뜬느 전법을 쓰시는군요. 그럼 어떻게 한다, 우리에겐 아직 그럴만한 여유자금이 없는데. 아니, 그렇게 하지요. 리자돈을 내서라도 금년내로 완공하지요.>> 김석륜은 한시장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려고 역시 쾌히 응낙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은행으로부터 먼저 리자돈을 내여 그해에 한꺼번에 146만원을 투자함으로써 당해에 건평이 2천평방메터에 달하고 주체부분이 5층으로 된 로간부활동실을 덩실하게 세워주었다... 경제적계산으로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이런 일들을 놓고 대외에서뿐만아니라 공사내의 일부 사람들도 이러저러하게 의론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지금세월에 돈을 벌어 남을 공짜로 먹이는 사람이 몇이나 되기에 그러는가 하는것이였다. <<인간에겐 덕성이 있어야 하오. 덕성이야말로 그상한 인간과 자사자리한 인간을 차별놓는 시금석이요.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한 후회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더 많은 법이요.>> 김석륜은 사회주의상업이 지방공업을 위하는것은 응당한 것이며 로인(로간부)들을 위하는것은 결코 게으른 소비자들을 위하는것과는 다르다고 인정하였다. 로인과 어린이들은 영원히 전 사회의 봉사대상이라고 생각하였다. 5 사회성장을 부축여주고 국가진흥에 기여함을 기업발전의 첫째로 되는 목적으로 삼고있는 김석륜이였지만 종업들에게 치부의 혜택을 안겨주려는것도 미룰수 없는 책임으로 알고있었다. 자력으로 가난을 밀어내고 치부의 대문을 두드려 여는 사람들의 신통하게 맞물려지는 경험이 대개가 그러하듯이 이 몇년래 그들은 간고하게 창업하고 <<린색하게>> 소비를 계산하였으며 경영확대에 자본을 축적하였다. 사실 그들은 국가에 장려금세만 바치면 한해에만도 종업원들마다 엄청난 장려금을 탈수 있었다. 그러나 김석륜은 그렇게 하는것은 한치보기의 하루살이식생존방식으로서 개인이나 집체나 다 성장적으로는 아무런 혜택도 없이 비생산적인 순소비만 잔뜩 늘굴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적지 않은 조선족이 사는 농촌들에서 바로 이런 하루살이식생존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가을수확을 두고 돌아오는 해를 계산해보는것이 아니라 명년은 명년이라는 계산을 그어놓고 양력설이요, 음력설이요, 보름이요 하는 명절들을 쭉 줄세워 온 동네가 돌개술문화로 일년내내 번것을 탕진해버린다. 그래서 돌아오는 해면 또 빈 털털이로 생산대부금을 맡는것이다. 이렇게 하고서는 연자를 돌리는 나귀신세를 종내 벗어날수 없다. 창업을 하고 치부를 하자면 우선 있으며 나눠먹자는 원시적인 분배의식을 뽑아버려야 한다. 돈이라는건 써버리면 그만이다. 그건 전혀 성장이 알리지 않는 소비이고 광주리에 물담기이다. 그러나 또 한몫씩 담당한 그들에게 전혀 아무런 혜택도 없다면 그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킬수 없다. 가치창조가 자아향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누군들 그렇게 몸을 내번져 땀을 흘리려 하겠는가. 과연 그럴 경우면 차라리 국가적 담보가 든든한 곳에 가서 울급 제때에 타는 쟁정로임팀에 몸을 담는것이 훨씬 안전하고 멋스럽다고 할것이다. 어떻게 하면 종업원들에게 주는 혜택이 개인, 집체, 사회(국가)를 동시에 상징할수 있게 할가. 이것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계산으로부터 김석륜은 종업원아빠트를 건설할 타산을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이 몇년래 그의 <<부하>>들은 신심으로 가득찬 신념을 안고 하나같이 그의 두리에 뭉쳐 고락을 함께 하면서 만부하작업을 하였다. 자기한테 배당된 일은 그 어떤 핑게의 리유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완수하였다. 사실 그들도 남들과 같은 가정을 가지고 살기에 춘하추동 가정적으로 풀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하였다. 배급, 석탄, 가을채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들은 필수적인 생활문제로 가정마다에 제기되는것이다. 그런데 년시년말로 출장이 잦다보니 그 볼기를 그들 가족에서 맞아야 하였다. 김석륜 자신도 포함하여 그들이 공사의 일로 하여 가족에 첨가시킨 부담을 공상에 대한 간접적인 공헌으로 계산하면 결코 간과할수 없는 수자일것이였다. 만약 종업아빠트를 짓는다면 많은 가정적문제를 집단적 힘으로 쉽게 풀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되면 종업원들은 집근심없이 일심정력으로 맡은 일에 몸을 내번질수 있을것이다. 말하자면 산재식생활을 청산하고 튼튼한 안식처를 마련해주는것도 결국은 그들에게 최대의 활력을 심어주고 전체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안정과 성장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또 그들의 자존과 성취의 기쁨도 거짓없이 스며있는것이다. 사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튼튼히 확보하고자 하는 이러한 꿈은 인생살이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소박한 꿈이면서도 또 흔히는 저의 힘으로는 이루기 힘든 꿈이 아닌가! 1988년 5월에 룡정고중 정문 길맞은켠 기지에서 종업원아빠트건설공사가 착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또 김석륜과 대외경제무역공사에 운명적인 풍운을 몰아올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1989년 9월에 종업원아빠트가 기본적으로 완공할 무렵에 시당위와 시인민정부에 고발이 들어갔다. 시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집체돈으로 개인집을 <<호화롭게>> 지었다는것이였다. 10월에 시당위에서 조직한 련합조사조가 대외경제무역공사에 진출하였다. 장춘에 회의참석차로 갔다가 금방 돌아온 김석륜은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어정쩡하게 <<피고석>>에 앉은 <<피고>>로 변신하였다. <<누가 이 집을 짓는걸 결정했습니까?>> <<접니다.>> <<당신한테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한개 기업소의 경리가 그래 자기 기업소 종업원들의 복리를 결정할 권리조차 없다는겁니까?>> <<당신은 집체자금으로 그렇게 호화로운 집을 짓는것이 정책에 어긋난다는것을 모릅니까?>> <<무엇이 호화롭다는겁니까? 당신들도 국무원에서 내놓은 <쑈캉(小康)수준>이란 무엇인지 알고있겠지요? 등소평동지도 먼저 부유해지고 후에 부유해지며 공동히 부유해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집체자금으로 주택을 짓는것을 통제한다는것도 국가재정이나 생산자금같은것을 마구 람용하는걸 두고 말하지 우리같이 종업원들의 장려금이나 초과수입금으로 종업원주택을 해결해주는걸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지금 국가재정으로부터 로임담보를 받고있는 단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면적이 국가에서 규정한 표준을 초과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지금 한창 렴정건설을 하고 간고하게 창업할것을 제창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이 집을 지을 때 국가에서 상품집을 어떤 규격으로 지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작고 현대생활구조에 맞지 않게 짓는걸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집을 설계할 때 우리의 요구는 건평이 천팔백평방메터이고 4층이였는데 실제 지은것이 이천오백평방메터에 5층으로 되였습니다. 이건 순전히 시도시건설규획의 요구와 건축공사의 상품집판매표준에 의해 설계된것이지 결코 우리의 본의는 아니였습니다. 두번째로 렴정건설이라는것이 부패를 반대하고 공금을 람용하는것을 반대하는것이지 결코 할수 있고 해야 할 복리사업마저 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은 아닐것입니다. 그러고 만약 우리 자신이 번 돈이라 해도 어느 개개인 지도자들의 집을 짓거나 한다면 또 문제로 서겠지만 전체 종업원들의 복리를 해결하는거야 무슨 잘못이 됩니까?>> 치렬한 설전은 오래도록 진행되였다. <<피고석>>에 앉은 김석륜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돌하고 도전적이여서 전혀 <<죄의식>>을 느낄수 없었고 오히려 개척을 모르는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력사의 비극과 씨름하는 창조적이고 개척적인 인간의 드팀없는 지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사조는 떠나면서 최종결론이 있기전에는 그 집에 들지 못한다는 봉인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후 시당위규률검사위원회에서는 그들을 내부 통보비판을 하고 김석륜더러 검토서를 쓰라고 하였다. <<연변일보>>에도 보도가 실렸다. <<정말 엉터리군, 우린 그래도 돈을 벌면 먼저 사회와 국가를 생각했소. 지방공업을 부축여주고 백사십륙만원이나 투자하여 로간부활동실도 지어주었소. 이제 또 백오십만원이나 투자하여 교육을 부축여주기로 했는데 그래 우리는 자기가 피땀으로 번 돈으로 요만한 혜택조차 볼수 없단말이요? 좋소, 그럼 우리도 인젠 공헌이고 뭐고 싹 걷어치우기오.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이나 하면 그만이지.>> 여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1989년 새해를 맞으며 한창진시장이 그들한테 위문을 왔다. <<김경리, 나는 시인민정부를 대표하여 당신들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며 우리 시를 위해 큰 공헌을 한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사실 우리 힘으로서는 언제가야 로간부활동실을 지을지 막연합니다.>> <<그거야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시정부의 재정곤난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가만 있는다면 우리도 마음에 걸리지요.>> 김석륜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상론할 일이 있습니다.>> 한창진시장은 퍽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난 당신이 꼭 <호의>를 품고 오지 않았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김석륜은 소탈하게 웃으면서 우스개를 하였다. 그러자 한창진시장도 웃으면서 말했다. <<등쳐먹을바에야 끝까지 해야지. 저 김경리도 알겠지만 1983년도에 국가에서는 거액의 투자를 하여 룡정고중에 새 청사를 지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때 새 청사 락성식에서 이 학교 교장선생이 시정부 지도자한테 실험문제를 제기했댔는데 그때의 지도자가 해결해주겠다고 대답하였댔습니다. 그런데 그후로 시정부의 지도자가 몇기 바뀌도록 해결해주지 못해 오늘 내가 그 보따리를 걸머쥐게 되였습니다. 이 학교 교장선생이 이 일로 몇십번도 더 나를 귀찮게 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또 김경리의 등을 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 좋은 청사에 실험이 없으면 백마에 안장없는격이지요. 우리가 토론해봅시다.>> 이리하여 지도부의 토론을 거쳐 룡정고중 실험실건설에 백만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한족고중인 제3중학교에 또 오십만원을 주기로 했던것이다.... 김석륜의 가슴은 불도가니처럼 끓어번졌다. 겉으로 정의와 진리를 외우면서 속으론 시기와 질투를 품고있는자는 언제든 남이 잘되는걸 배아파 보고만 있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사람들은 자기의 무능을 탓할 대신 천방백계로 사회여론과 일부 선광능력이 결핍한 지도자들을 꼬드겨 남의 일을 망가뜨리려 하는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에겐 또 좋은것보다도 나쁜것을 더 쉬이 믿어버리는 악습이 있고 흙속의 진주보다 옥에 티를 더 쉬이 발견하는 변태적인 심리습관이 있다. 하여 인간의 판단력은 얼마나 처참하게 또 자주 사실의 진상과 삐여져나가는지 모른다. 그사이 사회에는 대외경제무역공사에서 정책을 어기고 집을 지었다느니 김석륜이 착오를 범하여 대외경제무역위원회 주임에서 떨어졌다느니 하는 발없는 말들이 입을 통해 재빨리 류통되였다.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였다. 그가 주임에서 해임된것은 대외경제무역위원회를 정부기관의 행정단위로 하고 대외경제무역공사는 순수 기업소로 하여 정식으로 갈랐기에 대외경제무역위원회 주임을 내놓고 대외경제무역공사 경리를 맡은것이였다. 과연 덕행은 고의로 홍보하지 않으면 그만이 가장 절감하지만 추문은 어쩐지 류통성이 강해서 삽시간에 사방 몇십리에 강한 울림을 일으키는것이였다. 워낙 인간이란 그렇게 타인을 헐뜯는데는 적극적으로 잘 발동되는 본질을 갖고있는듯하다. 그래서 요언이란것도 뿌리없는 나무여서 종내는 시들어버리고 마는것이지만 그전까지는 과연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면서 요언의 대상을 여지없이 짓뭉개놓는것이다. 그러고보면 한 인간의 성장과 요절은 결국 그 자신만이 책임질수 없을만큼 자연, 사회, 인간 등 다방면의 비살같은 충격과 타격 그리고 부축임을 받으면서 결정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김석륜은 필경은 삶의 일상성에서 초탈하여 창조적 행위에 몸을 내번진 개척형의 인간이였다. 끈질긴 실험정신과 강한 돌파의식이 이런 사람들의 사유주체이다. 그는 직접 주당위 리덕수서기를 찾아가서 사실의 시말을 낱낱이 회보하였다. 회보를 다 들은 리덕수서기는 즉시 룡정시당위에 몇가지 지시를 주었다. 그 내용은 대개 이 몇년래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는 지방과 사회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는것, 집은 이미 지은것인데 대외경제무역공사를 내놓고는 자기돈으로 살수 있는 단위가 없다는것, 면적초과부분은 개인이 안아야 한다는것 드이였다. 이로써 그처럼 회오바람마냥 기승부리던 집풍파가 대뜸 가라앉아버렸다. 그러나 김석륜의 가슴은 좀체로 평온을 찾을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의 어떤 지도일군들은 흙속에서 진주를 찾으려 하는것이 아니라 옥에서 티를 발견하려고만 애쓰는가. 6 룡정대외경제무역공사는 낡은 책상걸상에 자그마한 서류궤 하나로 <<가정>>을 꾸려서부터 어언간 십년의 <<가정사>>를 써왔다. 그들이 걸어온 십년은 실로 자립의지로 간고하게 창업한 십년이였으며 진짜 자기것으로 산 삶의 흔적을 력력히 찍어온 십년이였다. 거기엔 아직 이 글에서 소개하지 못한 많은 사연들이 적혀있다. 1986년 8월 31일 륙도하물이 불어서 륙도하 제방이 밀려가고 립암교가 뭉턱 끊어지자 종업원들이 총동원되여 삼합에서 거둔 송이버섯을 어깨로 메여서 강을 건넌 이야기(생생한 송이버섯은 정선, 포장하여 2~3일내로 일본에 도착되게 해야 한다), 30명 종업원 모두를 대학과 중등이상의 문화수준을 갖추게 한 이야기, 체육경기마저 무엇이나 하면 끝을 보는 상승심을 키우는 훈련장으로 삼게 한 이야기... 그 어느 이야기속에도 이 <<가정>>을 꾸리고 키워온 김석륜경리의 <<세대주>>다운 영상이 은근히 비껴있는것이였다. <<가정>>의 성원들에 대해 그토록 엄격한 그였지만 또 언제나 선구적 실천자였기에 그들의 존경과 애대를 몹시 받고있는것이였다... * * * 피땀으로 써내려온 십년사를 되번져보노라니 김석륜의 머리에는 무사한 습관에 길들여 평범한 삶을 살던 직업인때엔 전혀 피해왔던 생각의 골목들이 한줄한줄 뻗어나갔다. -라태, 질투, 게으름과 비속한 인정만 론하는 <<무식관중>>이 많은것이 삶의 일상성을 초월하여 분투하는 사람에게는 최대의 위험이다. -형식적인 도덕주의는 국가성장과 인민소질제고의 가장 큰 장애로 되고있다. <<좁쌀 한줌이라도 나눠먹는다>>는 도덕의 허울을 쓰고 게으름뱅이의식과 극단적평균주의가 정신적질곡으로 되고있다. -우리의 권력담당자들은 좀더 선광능력(캐낸 광물중에서 가치가 적거나 없는것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모험가>>(개척자)들이 실착했거나 요언과 야유의 과잉속에서 헐떡거릴 때 권력으로 보호해줄줄 알아야 한다. -개인적인 차원(내지 가정적인 차원), 집체적인 차원 및 사회적인 차원(내지 국가적인 차원)을 동시에 느끼는 바로 거기에서 거대한 힘이 분출하는것이며 또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전완미한 경제집단의 립체적조직결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김석륜이 지금 가장 관심하고있는것은 어떻게 하며 종업원들이 좀더 혜택을 보고 집체가 더욱 부유해지며 사회나 국가에 더욱 큰 공헌을 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창업의 길이 험난한것이지만 치부의 길도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것을 잘 알고있다. 남보다 앞서 치부의 문을 두드려 열고 리상적인 삶의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 <<현지답사>>를 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아픔과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인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창문가에 서서 기승부리는 동장군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띄우고있다. 아, 계절의 시작은 과연 봄이 아니라 겨울이다. 춥고 매운 계절, 정이 없이 모든걸 얼구어죽이는 계절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푸르싱싱한 새 생명을 싹틔우는 봄아씨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비난을 달갑게 받아안으면서 모든 잡동사니들을 동봉해버리는것이 아니겠는가!
50    금강과 하나의 해동국 댓글:  조회:2460  추천:0  2009-05-16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금강산이 <<남문빗장>>을 굳게 닫아버리고 이남의 주인들마저 외면해버리더니 이제 그 문을 활짝 열고 온 세상에 그 아름다움을 수줍게 드러내보일것 같다. 민족의 비운을 가셔버리고 룡왕의 뜻이 다시 동그랗게 이루어질듯한 기쁨속에 두해전에 금강산을 탐승하던 정경이 새삼스레 어떤 민족적인 소망과 아픔과 함께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일제의 구두발에 짓밟혀 만신창이 되여 신음하던 한반도는 독립투사들의 선혈로 상처를 씻었으나 마침내는 세계정치세력의 대결의 희생품으로 두동강이 나고말았다. 세계지도우에서 한반도는 38도선이라는 지리학적인 위도선을 남북동포 서로가 넘을 수 없는 38선이라는 사회장벽으로 다시 그려넣었다. 그리하여 서해안쪽은 지리학적인 38도선보다 조금 내려와 그어졌고 동해안쪽은 지리학적인 38도선보다 조금 위로 올라가 그어졌다. 하나의 강원도가 38선에 의해 쪼개지면서 금강산과 설악산마저 한 산맥의 정기를 타고났음에도 전장의 망루마냥 서로를 경계하며 대치하고 서있는듯싶다. 아니 세계렬강들은 그 높은 장벽을 허문대도 넘을 수 없는 무형의 <<38선>>을 그어놓았다. 그런데 그 무형의 <<38선>>이 세계 렬강들의 낙서로 그어졌다해도 평화의 반성시대에 들어선 오늘 우리의 자세는 또 어떠한가. 하나의 반도에서 살면서도 생리별의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리산가족들, 다 같은 금강의 정기를 타고났고 금강산맥을 혈맥으로 금강의 맑은 물이 피로 흐르면서도 서로가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해동국의 후예들, 우리는 지금까지 렬강들이 정치대결로 낙서한 <<38선>>을 민족의 숙명적인 운명선(命運線)처럼 받아들이고 렬강들이 심어놓은 이데올로기적 대결의식과 눈금자로 서로를 가늠하면서 천하에 용서할 수 없고 포옹할 수 없는 원수처럼 대항적인 눈총을 쏘면서 서로를 비난하고 배척하고 강박하고 괴롭히고 탄핵하고 매를 들면서 대결해왔다. 가정적 의미를 매겨보면 꼭 친형제간에 원수치부해온 것이다. 오, 우리는 천륜을 어긴 대역무도(大逆無道)의 악과(惡果)를 빚고있다. 까마귀도 공문저문날 반포할줄 안다는데 하물며 효로 세상을 경탄켜 한 우리 민족이 한 피줄을 타고난 형제가 반목하는 비극을 공연하고 있으니 이 세상 수치가 아닐손가! 그런대로 지금은 금강산의 <<남문빗장>>을 열고 남북이 손을 잡고 금강산을 개발하고 있으니 이제 그 문을 활짝 열고 주인만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세계 제일금강, 아니 유일금강의 아름다운 용태를 자랑하게 되리라. 그러나 아직도 이남의 주인은 금강의 진정한 주인이 아닌 여객일뿐이다. 순위차로 여객선에 올라 무형의 <<38선>>을 에돌아가야만 하는 여객아닌 <<여객>>들의 마음은 얼마나 시리고 아플가. 과연 자연의 극치에 감동하는 희열을 안고 돌아올 수 있을가. 전설에 따르면 산천을 나라마다 나누어주는 바다룡왕의 창고에는 원래 여덟개의 금강이 있었는데 해동국의 사람들은 마음에 티끌하나 없고 무궁무진한 슬기와 용맹을 지니고 있기에 바다룡왕은 열길 깊은곳의 모래알 하나까지 헤일 수 있는 맑은 물과 하늘을 날아오를 듯한 천태만상의 메부리들로 천하 제일경을 이룬 제일 금강을 해동국에 주었다고 한다. 바다룡왕이 남은 일곱 금강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간에 마음이 보석처럼 다듬어진 다음 찾아오면 내주겠노라고 하였으나 금강산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산천의 정기를 타고난 해동국의 후예들이 금강산과 설악산사이에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높은 장벽을 쌓아놓았다. 룡왕님이 준 복을 서로가 나누지 못하게 둘로 갈라진 해동국, 그것이 안스러운지 금강산과 설악산의 봉이봉이마다에는 그냥 바다룡왕이 한숨으로 토해낸 입김이 자오록이 감돌고있다. 하긴 그래서 바다룡왕이 나머지 일곱 금강은 아예 어느 나라에도 주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이제 금강산은 천하에 요행 남은 둘도 없는 제일의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아, 행운이라고나 할가. 비록 금강산과 설악산을 하나의 코스로 이어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한반도의 북단에서 금강산까지, 남단에서 설악산까지 려행하는 자랑을 한 몸에 지닐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뭐니뭐니 해도 금강산 려행은 복 받은 민족의 긍지와 릉욕의 민족적 아픔이 교감하는 력사적 체험으로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진다. 그것은 신선세계에 온 듯한 황홀한 경치와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이달고 쓴 맛이 되는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밝은 마음과 경탄의 심정으로 려행을 할 수 있은 것은 금강산은 과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승이고 이런 산천의 정기를 타고난 <<해동국>>의 후예들은 틀림없이 자기의 무궁무진한 슬기와 깨끗한 마음을 동원하여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금강산의 기상으로부터 확인받을 수 있었기때문이다. * * * 우리 일행 넷이 금강산을 찾은 것은 1996년 6월 중순이였다. 우리가 금강산 휴양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해가 잠자리를 찾아 서쪽산길을 막 넘어선 때였다. 우리는 방에 짐을 내려놓기 바쁘게 베란다로 달려갔다. 아직 잔빛이 하늘을 밝혀주고 있어 저 멀리로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이 금방 금강산의 전설을 쓰고난듯 신비를 실은 부드러운 재빛 안개속에 검푸르게 서있고 그 서쪽으로 하관음봉이 팔을 쫙 뻗친 관음련봉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베란다에 서서 금강산에서의 첫 샤타를 눌렀다. 휴양소터가 있는 온정구역은 금강산탐승의 중심지로 되여 있어 이제 전설적인 금강산탐승은 여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먼 려로에 지치고 허기진 몸들이였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모두가 그냥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의 심정이였다. 밥술을 놓자 누구도 방으로 가려는 생각이 없는듯 약속도 없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휴양소앞을 지나는 포장도로를 건너 숲을 빠져나오니 만상계, 한하계를 거쳐 동쪽으로 흘러가는 온정천이 맑은거울처럼 누워있는데 물속의 모래알마저 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정갈했다. 우리는 신을 벗고 바지가랭이를 걷어부치고 온정천에 발목을 잠궜다. 맑고 시원한 온정천은 장딴지를 적시는 정도로 얕았으나 그대로 금강산의 정기를 실어 우리의 마음을 부풀게 하고 정신을 분발되게 하였다. 우리는 이날 밤, 래일의 명승지탐승에 흥분된 마음을 달래지 못한채 그만 잠을 설때리고 말았다. 방을 같이 한 나와 임선생은 둘 다 애주가들인지라 아예 기분을 잡아 술을 마시며 밤을 밝혔다. <<자, 이선남이 금강산을 찾아 밤새도록이 술을 즐기노라.>> 임선생의 풍치있는 말이였다. <<래일 금강산에 또 이선암이 생기겠네요.>> 내가 슬쩍 받아물었다. 둘은 즐겁게 웃었다. 이튼날 아침, 탐승을 맡은 녀안내원이 우리한테 소개되였다. 장씨성인 녀안내원은 동방 례의지국의 녀성답게 곱게 머리숙여 인사했다. <<그냥 안내원동무라고 불러주셔요. 오늘 하루종일 탐승하느라면 몹시 지칠거예요.>> 부드러우면서도 <<금강산처녀>>답게 상쾌한 목소리였다. <<저희들을 위해 수고하시겠습니다.>> <<좋은 이야기 많이 부탁합니다.>> <<처녀동무, 우리팀에서 이 친구가 유일한 총각이니 많이 보살펴주십시오.>> 임선생이 나를 가리키며 하는 롱담에 녀안내원은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웃더니 활발하게 롱을 받아넘겼다. <<아니, 저가 보건대는 총각이 아닌것 같은데요. 총각이면 더구나 할 수 없구요.>> <<건 왜서요.>>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는데 내가 한마디 했다. <<참, 선생님도 한심합니다. 다 되는 밥에 물붓기가 아닙니까.>> <<건 또 무슨 말인데?>> <<제 보건대 말입니다, 안내원동무도 처녀는 아닌것 같은데요.>> 그러자 녀안내원은 또 입을 가리우며 웃었다. 얼굴표정을 봐서는 알아맞춘듯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이까지 있는 녀자였다. 그런데 금강산의 산수가 좋아서인지 나이보다는 퍽 어린모습이다. <<아하, 젊은 사람들끼리 맞추는 눈길이 다르구만.>> 알아맞춘다는 뜻인지 애매한 말로 탐복하는듯한 걸직한 롱지거리에 모두들 웃었다. 탐승은 이렇게 출발전부터 유쾌한 기분이였다. 탐승길에서 녀안내원이 천하절승 금강산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리한테 들려준 첫 전설이 <<타무왕의 금강산려행>>이였다. 긴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이 세상에 나라가 처음 생겼을 때 먼 남방의 어느 한 바다가 나라의 왕 타무가 신하로부터 멀고도 먼 해동나라 조선에 금강산이라는 천하제일 명승이 있다는 말에 려행길에 올랐다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풍치가 다 펼쳐진 것을 보고 산천을 나누어준 바다룡왕을 찾아가 불공평을 항의하자 룡왕은 <<뜨는 해의 빛이 있어 노을 곱듯이 깍듯한 례의범절만이 맑은 아침과 일맥상통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제일금강은 해동국에 주었으나 아직 일곱개의 금강이 남아있으니 어느 나라 사람이든간에 마음이 보석처럼 다듬어진 다음 찾아오면 기꺼이 내주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세월이 흘러 해와 달이 수억만번 바뀌였어도 금강산은 아직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인간세상에 하나밖에 주지 않은 금강산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요, 그런 천하절경을 받은 우리 민족은 복 받은 민족임을 자부하는 이야기이다. 조물주의 창조력을 집대성한듯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련봉, 필필이 비단을 풀어내리는 폭포, 현란한 진주보석을 담은듯 조약돌이 깔린 맑고 푸른 담소, 그리고 서늘한 바람에 가슴 깊이까지 흘러드는 푸른 숲의 싱그러운 향기는 과연 선경에 들어선듯한 느낌이다. 보석같은 마음이 있어야 가질 수 있다는 천하절승을 자랑하는 민족, 그 산천의 정기를 타고나 무궁무진한 슬기와 용맹을 떨치는 민족이다. 그럼에도 한편 나머지 일곱개 금강을 더는 인간세상에 주지 않은 바다룡왕의 마음은 무엇일가 하는 궁금증도 마음 한구석에 찾아든다. 녀안내원이 계속하여 들려준, 신계사의 종소리와 요지경같이 천변만화하는 금강산의 황홀한 경치에 앞못보던 소경이 빛을 보고 적막강산이던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고 <<꿀먹은 벙어리>>가 마음을 열 수 있게 되였다는 <<극락고개전설>>, 박씨로인이 만냥산삼을 캐여 그 돈으로 밭을 사고 과수원을 마련하여 금강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도왔다는 <<만냥골에 깃든 이야기>>, 금강산도사가 욕심사나운 공지주놈을 망하게 하고 그가 만들어보낸 매가 지금도 금강산으로 들어오는 첫 입구에 있는 낮은 봉우리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는 <<매바위전설>>들은 금강산은 마음이 보석처림 깨끗하고 신선한 생령들만 살고있는 성스러운 곳임을 말해주며 금강산을 찾은 속세의 인간들에게 모든 영욕과 욕심을 버리고 금강의 정기를 받아 보석처림 깨끗한 마음을 가질 것을 예쁘게 일깨워준다. 찾아온 사람마다 금강의 성스러운 기상을 보고 가슴우에 손을 얹게 되는 것이니 동해국 사람들의 수정같이 깨끗한 마음을 헤아려 제일 금강을 보내준 바다룡왕이 더는 인간세상에 금강을 주지 않은 결론에서 어떤 실착감같은 것을 읽을 수 있을듯 싶어 괜히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련주담의 물처럼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금강의 폭포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녀안내원의 금강산전설을 듣노라니 우리는 그냥 선경을 거니는 황홀한 기분이였다. <<저기 저 옹달샘이 망장천옹달샘이래요.>> 녀안내원이 갑자기 손을 들어 깎아지른듯한 바위를 가리키는 바람에 우리의 시선은 그리로 쏠렸다. 바로 앞에 깎아지른듯한 바위가 초병처럼 앞을 막아섰는데 그 바위중턱의 틈사이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새여나와서는 옹달샘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는 먼 옛날 금강산에서 쇠바위라는 총각과 어여쁜 옥분이라는 처녀가 백년가약을 맺고 살다가 어느덧 일흔살이 되여 허리가 굽고 다리힘이 빠져 지팽이를 짚게 되였는데 이 옹달샘을 마시고 다시 청춘이 되여 함께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하는 <<지팽이를 잊어버리게 한 샘>>이라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아, 우리도 젊어져 본다.>> 우리는 네 한모금 내 한모금 맑고 시원한 샘물을 받아마셨다. <<자네같은 젊은이가 마시면 아예 어린애가 되고 말텐데.>> 임선생이 나를 놀려주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동심이 되고싶은 마음인데요.>> 세속의 때를 다 씻어버리지 못할바엔 차라리 다시 깨끗한 동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자네 안해가 알아주지 않을라구.>> <<동심을 찾은바에야 그냥 여기서 살지요, 인간세상에 내려가면 또 오염되고 말겠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옥분이같이 예쁜 처녀도 없는데 그러다가 총각으로 늙으면 어쩔라구.>> <<안내원동무도 한모금 하시지요.>> 나는 임선생의 롱을 슬쩍 피해 능청스럽게 안내원한테 롱을 걸었다. <<그러다가 어린애가 되면 어쩔라구요.>> <<하하, 자네가 그만 김치국부터 마셨구만.>> 임선생은 내가 보기좋게 꼴먹었다고 손가락질 했다. <<아니, 그런데 선생님은 벌써 흰머리가 없어지고 이마의 주름살도 펴졌습니다. 이거 야단났네요. 집에 돌아가면 사모님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네 한마디 내 한마디 우스개를 하면서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옥류동의 입구인 <<금강문>>에 채 가지전에 휴식터가 있어 우리는 여기서 잠간 숨을 돌렸다. <<저 앞에 바라보이는 것이 세존봉인데 웅긋쭝긋한 봉말기마다 기암괴석이 여러가지 모양을 나타내고 있어요. 저기 저 바위가 무슨 모양을 나타내는지 어디 한번 맞춰 보세요.>> 녀안내원이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우리 일행에 물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여러가지로 맞춰보았으나 그냥 맞춰내지 못했다. 이리저리 뜯어보던 내가 어쩌면 토끼같네요 하자 녀안내원이 손벽을 쳤다. <<맞았어요. 하긴 젊은분이 다르시군요.>> <<제가 망원경을 걸었지 않았습니까>> 나는 내가 건 안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머리쪽은 토끼처럼 두 귀가 뻘쭉한데 몸은 거부기처럼 넙죽하여 신통치가 않군요.>> 그런데 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녀안내원은 손벽을 치며 탄복했다. <<정말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여기엔 <처벌받은 토끼>라는 토끼바위전설이 있어요.>> 그러면서 녀안내원은 우리한테 이 바위에 깃든 그럴듯한 전설을 재미나게 들려주었다. 금강산이 천하절승이라는 소문이 하늘 나라에까지 전해져 선녀들이 팔담에 내려 목욕을 하고 옥녀세두분에서 곱게 얼굴을 다듬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성미 급한 토끼가 옥황상제한테 절절한 소원을 터놓아 마침내는 승낙을 받았는데 금강산에 내려온 토끼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그만 보름달이 되기전에 돌아오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어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노한 옥황상제는 예전에 달리기에서도 룡궁의 거부기한테 진 토끼를 거부기몸집에 토끼머리모양을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대개는 이러한 전설이였다. 청산류수마냥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고난 녀안내원은 이렇게 말끝을 맺었다. <<토끼는 옥황상제의 처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달나라에서 고달프게 절구를 찧고있는 것보다는 절승경개 아름다운 금강산을 보는 것이 더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그리하여 세존봉중턱에 꿇어앉아 금강산의 경치에 심취된 토끼는 날이 가자 그냥 그대로 하나의 바위로 굳어지고 말았어요.>> 너무도 그럴듯한 전설에 우리는 손벽을 치며 찬탄했다. <<참 멋지군 그래.>> <<그러고 보니 과연 머리는 토끼처럼 귀가 뻘쭉하고 몸은 거부기처럼 넙죽하구만.>> 옥류담, 련주담, 비봉폭포, 무봉폭포, 구룡폭포, 구룡연, 만물상, 삼선암, 보는 것마다 가관이지만 그중에서도 상팔담은 과연 자연미의 극치였다. 상팔담을 보려면 전망대인 <<구룡대>>에 올라야 하는데 산세가 매우 험하고 가파로왔다. 위태롭거나 길을 내기 어려운 곳들에는 쇠사다리를 고정해놓았으나 어떤 곳은 계단이 많고 가파로와 손잡이를 붙들고 올라가도 다리에 힘이 뻗쳤다. 우리 일행에서 내가 제일 젊은지라 다른 사람보다 앞섰으나 60살을 바라보는 임선생도 등산에는 만만치가 않았다. 묘향산관광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아예 손을 들었으나 임선생만은 나와 함께 비로봉중턱에 걸려있는 이선남폭포까지 올라갔는데 별로 숨도 차하지 않았다. 금강산을 제집 나들듯하는 녀안내원도 전혀 얼굴조차 붉어지지 않고 선녀런듯 가볍게 발을 디뎠으나 뒤에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살피느라고 우리들과 떨어졌다. <<이러다가 좋은 귀동냥을 다 놓쳐버리겠습니다. 우리도 걸음을 좀 늦춥시다.>> <<괜찮아, 오금도 바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언제 이야기를 들을 경황이 다 있겠어. 빨리 올라가서 쉬였다가 차분한 마음으로 듣는게 더 좋지.>> <<참 선생님은 아직 근력이 좋으십니다.>> <<그러게 집에서도 내가 일주일에 사흘방아는 문제없다고 하지 않았어.>> <<글쎄요, 이렇게 힘들 때는 지팽이로도 쓸 수 있겠습니다.>> <<아직은 숨차지 않아.>> 나와 임선생이 구룡대에 올라 한참을 쉬여서야 뒤에서들 숨을 헐떡이며 올라왔다. 전망대에 늘인 사슬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밑에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절벽사이로 골짜기가 깊숙하게 패였는데 그 밑바닥에 구슬같이 맑고 파란 물을 담은 크고 작은 소들이 한줄로 구슬을 꿔여놓은듯 이어져 있었다.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여민 해빛에 상팔담은 그대로 령롱한 구슬이 되여 반짝거렸다. 황홀하고 신비하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팔담 웃쪽의 산허리에서부터 뽀얀 우유빛 안개가 서리더니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상팔담의 신비를 덮으려는듯 엷은 면사포를 펼쳤다. 깊은 골짜기는 순식간에 안개속에 사라져버렸다. 뽀얀 안개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전망대에 서있는 우리는 구중천에 둥둥 떠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안개는 서서히 상팔담의 물구슬이 비단필을 짜는 구룡폭포쪽으로 밀려가고 골짜기는 다시 자기의 신비를 드러냈다. <<야, 과연 장관이로구나.>> <<야, 이렇게 흩어지는 안개속을 뚫고 아득하게 내려다보니 과연 내가 신선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니까>> <<참,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그야말로 선경이로구나.>> <<너무 흥분하지 말고 안전에 주의하세요.>> 녀안내원이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아, 날개라도 있었으면 그냥 저 담소로 날아내리고 싶다니깐.>> 참으로 그랬다. 너무도 특이한 경치는 이거 신선나라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저 황홀하기만 했다. 나의 무딘 필력으로는 묘사한다는 것부터가 오히려 그 아름다움에 손색이 갈듯했다. 세상에 유명한 <<금강산팔선녀>>전설도 바로 여기에서 펼쳐지거늘 인간세상에서 하늘의 선녀가 반해버릴만한 곳을 또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인간과 요원한 곳일 수록 티없이 깨끗하고 풍요롭다. 옥류담, 련주담, 비봉폭포, 무봉폭포, 구룡폭포, 구룡연, 상팔담, 이루다 형용할 수 없는 신비의 절승. 거룩하신 조물주여, 우리 <<해동국>>에 이처럼 세상에 둘도 없는 자연의 극치를 창조해주셔서 두손모아 감사하나이다. 금강산은 하루이틀에 다 돌아볼 수 없는 천하절승이다. 만이천봉우리마다 전설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으니 아마 만이천날을 두고 돌아보아도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잣나무 바위바위를 돌아서니 물물 산산 가는곳마다 신기하구나 릉파루다락에서 글깨나 한다는 량반들의 허황한 빈소리를 듣고 지었다는 김삿갓의 즉흥시는 달리 더 표달할 수 없는 생동한 시어로 금강산의 자연미의 특징을 일괄하였다. 과연 금강산의 나무와 바위와 물과 봉이마다가 신기하기만 하다. 바다룡왕이 인간세상에 하나밖에 주지 않았다는 금강산, 보석같이 티없이 깨끗하고 선녀같이 신선한 생령들만 살 수 있다는 금강산, 그것이 우리의 산이니 우리는 보석처럼 마음이 다듬어진 민족인가. 과연 이 민족이 모든 영욕과 욕심을 버리고 금강의 정기로 보석같이 깨끗한 마음을 가졌다면 바다룡왕이 나머지 일곱 금강을 인간세상에 주지 않은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제일 금강을 준 민족에 대한 유일한 선택과 믿음때문이리라. 그러나 웬 일인지 오늘까지도 나는 그 때 금강산의 녀안내원이 들려주던 옥황상제바위에 깃든 전설 <<감투 빼앗긴 옥황상제>>를 자주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삼복더위에 금강산의 만이천봉우리를 돌아보고난 옥황상제는 금강산의 천백개의 벽계수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구룡연을 보자 하늘의 상제라는 체면도 잊고 벌거벗은 몸으로 소에 뛰여들어 목욕하다가 선녀의 날개옷같은 관을 빼앗기고 벌을 받아 세존봉중턱에 맨머리채로 굳어져버렸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깨우쳐야만 할 것 같다. 례의도덕에 어긋나고 욕심을 부리면 하늘의 옥황상제라도 금강신의 문죄를 받게 된다. 금강의 정기를 타고난 금강의 주인들, 이런 <<주인 의식>>을 한번쯤은 키워보자. 우리는 보석같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을 찾아 인간세상에 하나밖에 주지않았다는 금강산의 주인이다, 우리는 보석같이 티없이 깨끗하고 선녀같이 신성한 생령들만 살 수 있다는 금강산의 주인이다, 우리는 수정같이 맑고 모든 영욕과 욕심을 버리게 하는 금강의 망장천옹달샘에 마음을 헹구어낸 인간세상 유일금강의 신성한 주인이다. 이제 그런 주인의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하고 룡왕을 감동시켜 제일금강을 가졌던 <<해동국>> 선민(善民)의 통합의지와 금강의 맑은 물을 피로 통하는 하나의 륜리를 되살려보자. 인제 세계렬강들의 패권다툼과 이데올로기의 치렬한 부딪침으로 우리의 옷에 묻었던 더러운 피자욱과 우리의 몸에 난 깊은 상처를 성스러운 금강산의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버리고 용맹과 합심과 근면과 창조적인 민족의 정기를 되살려 진정 금강의 주인된 통일민족의 밝은 모습을 온 세상에 자랑해보자. 금강산으로 간다, 금강의 정기를 받는다, 보석처럼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다듬어 과연 제일 금강, 아니 유일 금강의 신성한 생민이 된다. 바다룡왕이 제일 금강을 인간세상에 나누어줄 때는 한반도가 하나의 <<해동국>>이였다.
49    조선족문학의 특수성 댓글:  조회:2524  추천:0  2009-05-16
문화의 특수성으로 본 중국 조선족문학의 력사적 사명   우리 삶의 총체성에서 통찰해보면 우리의 문학은 한국문학과는 문화의 공동분모를 가진 문학임을 확인해주면서도 이질적인 사회와 문화토양에 의한 문화의 변이 내지 새로운 접목에서 초래되는 사회내용적인 분리를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삶의 총체성에서 종합진단할 때 인간의 모든 생명활동 내지 목적추구는 궁극적으로 그가 처한 사회와 문화의 질서속에서 확립되고 펼쳐져야 한다. 그만큼 문화는 인간의 생명활동과 가치창조의 결정적인 한 조건이다. 문학도 결코 그 문화바탕을 떠나서는 옳은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문학이 그 자체의 본체론적 법칙을 가지고 있고 또 전 인류적인 창조력을 공동분모로 하면서도 국가적인 또는 민족적인 단위로 구분되게 되는것도 바로 국가나 민족에 따라 문화발전과정과 그 성질이 다르기때문이다. 어느 구체적인 문학이 지도우에서 그 문화의 현주소를 찾을 수 없다면 그 문학은 과연 뿌리없는 나무처럼 곧 시들어버리고 말것이다. 한국문학과 중국 조선족문학이 확실하게 문화의 공동분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현시점에서 의심할바 없이 교류라는 비교학적 방법이 가능한것도 바로 국가를 단위로 하여 문화의 이질성이 엄연하게 존재하기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문화의 이질성 내지 변이성을 밝혀보는 것은 문학교류의 지도원리를 확인하는 가장 선차적이고도 바람직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전통문화의 력사적인 관성과 계승성을 떠올릴 때 단일민족국가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에 대한 진맥보다는 한국과 문화의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이질적인 사회와 문화토양에서 변이 내지 변질되고 있는 중국 조선족문화를 조명해보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라 하겠다. 그럼 과연 중국 조선족문화의 특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전후로 하여 그 전의 특성과 그 후의 변화 내지 변질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전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런 몇가지로 귀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중국 조선족문화의 이중성이다. 이중성은 또 두가지 측면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문화의 성격으로부터 중국 조선족문화는 중국문화권에 있는 조선족문화라는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하여 중국 조선족문화는 확실하게 근대 조선의 문화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대로 조선문화의 정립과 발전이였다고는 할 수 없다. 문화를 인간의 창조력에 의한 물질과 정신의 발전과정이라고 함축해보면 중국 조선족문화는 어차피 중국의 대문화의 지배하에서 중국 사회의 정치, 경제 등 제 방면의 관념형태를 접수 내지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 조선족문화의 뿌리로 되는 조선문화는 부단한 변이 내지 새로운 접목으로 하여 연변특산의 사과배처럼 새로운 특성을 가진 문화의 나무로 성장하게 되였다. 그것은 또 중국 사회의 정치, 경제 등 제 방면의 직접적인 제약을 표방하는 중국의 소수민족문화의 한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이중성의 다른 하나는 지역적으로 중앙문화와 멀리 떨어진 변두리 소수민족문화라는 것이다. 우선 변두리문화 자체가 벌써 중앙문화의 전파성에 힘입어 발전하는 것인데 소수민족문화는 그 발전이 곧 중앙문화에로의 동화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우기 극단적인 봉페주의를 주장하던 시기에 소수민족문화는 다만 중앙문화에로 통하는 외나무다리외엔 다른 접촉이나 출로란 있을 수가 없었다. 례외없이 조선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중국의 조선족문화도 자기의 바로 옆에 그 문화의 발원지를 두고도 수원이 끊어진 늪처럼 바닥을 드러내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중국 조선족문화의 봉페성이다. 극단적인 봉페주의는 변두리문화나 소수민족문화에 중앙문화를 대표로 하는 중국문화에로 통하는 외나무다리만 놓아주고 문화발전의 주요한 도경 내지 법칙인 외래문화와의 접촉이나 수용을 밀막아버렸다. 그리하여 중국 조선족문화는 외래문화는 물론 그 근간으로 되는 조선문화와도 근 반세기동안이나 담을 쌓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문화의 통치적지위와 방대한 중국문화의 동화력에 중국 조선족문화는 민족문화의 외피만 걸친 앙상한 나무로 말라들고 말았다. 셋째는 계획경제시기 국가조달에 의한 문화의 의뢰성이다.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국가보호적인 또는 국가제도적인 민족자치와 국가의 계획적인 조달에 의하여 그럭저럭 혜택을 받으며 평균주의사상에 주체적인 노력이 없이도 <<근심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매일 부모가 주는 소비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난하면서도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어느덧 줄 것만 바라는 변태적인 심리습관이 자라서 운명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지혜를 잃었고 하나의 운명을 가진 공동체의 건강에 관심은 높으나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엔 게을리하고 말았다. 상기 세가지 측면에서 개혁개방의 이전 즉 80년대이전의 중국 조선족문화의 특성을 살펴보았다면 그 이후로 중국 조선족문화는 그 세가지 측면에서 모두 커다란 변화 내지 변질을 가져왔다. 첫째는 리념적 대립의 약화 내지 소실과 더불어 민족문화의 개성적 발전도 밝아졌다. 중국 조선족문화는 여전히 이중문화의 성격을 띄고 중국문화권내의 하나의 소수민족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극단정치가 물러가면서 보다 독립적이고 개성적으로 자기의 문화권을 확립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되였다. 둘째는 나라가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고 세계의 정상급문명과 세계적감각을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우리의 문화권의 범위와 위치가 뚜렷이 높아지고 외래문화의 접수 내지 수용이 훨씬 직접적일 수 있게 되였다. 더우기 한중수교를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하여 중국 조선족문화권은 변두리문화로부터 일약 중국문화와 한국문화의 교차점에 놓이게 되였고 따라서 어느정도 두 문화의 교량이 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셋째는 상품경제가 사회의 주되는 경제행위로 되고 다성분의 소유제가 병존하는 시대에 국가는 절대적인 가부장제적 대가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가정성분이 훨씬 단순하고 책임이 훨씬 직접적인 핵가정으로 세분되였다. 절대적으로 국가제도적인 보호와 계획적인 조달에 힘입던 민족문화의 기틀이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시대에 미처 자기의 자활력을 키우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태당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에 의한 보장이 부모가 아이들한테 용돈을 나눠주는 정도이고 보면 비록 국가제도적인 보호가 약화되면서 동화의 우려와 위기가 박근하고 있지만 민족의 자활력과 창조적인 주체정신의 정립에 각성과 도전의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요는 우리가 거족적인 생명운동에서 어떻게 문화의 광장에 민족문화의 번화한 거리를 형성하고 부단히 자활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키워가는가에 달려 있다. 상기 중국 조선족문화의 특성에 대한 진맥으로부터 우리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특성 내지 력사적인 사명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문학은 그 자체의 본체론적 특성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그리하여 우리 작가군 전체에 어떤 주제론이나 소재주의를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중국 조선족문학이 토대로 하는 문화가 이중문화이고 피지배적인 문화라는 한계성에 의하여 거족적인 문화보존 내지 민족보존을 앞세운 조직론의 립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민족문학으로서의 시대적인 또는 력사적인 사명감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조선족문학의 군체는 하나의 거대한 민족지성인의 군단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민족문화의 정립과 민족의 미래를 지향하는 생력군이다. 그런만큼 우리의 문학은 민족정신의 훈련장이다. 이것이 중국 조선족문학의 특성이다. 우리의 문학인은 붓끝에 민족의 정열이 타올라야 하며 민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민족사회에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보여주어야 하며 민족의 현실적인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 시대적인 인식도 발전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민족적 공감과 각성도 민족의 력사의식의 증대이며 시대에 따르는 정신의 움직임이다. 오직 자기 중심적인 리해를 넘어 하나의 조직력이나 문학정신을 통하여 민족의 량심과 넋을 대변할 때라야만 우리의 문학은 앞시대와 맥을 이을 수 있으며 하나의 문학사를 형성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세계적 절주라는 보편적인 개념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가 발딛고 선 삶의 현주소를 잊고 현실도피적인 립장에서 이른바 세계적 의식을 수립하려는 망동에 가까운 충동적인 행위는 문화적 토양의 현격한 차이와 빛의 생명력을 잃은, 태양아닌 형광등의 변질된 밝음속에서 민족의 정신적 기틀마저 상실한 창백한 문학세계를 펼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문학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원이 되여야 하며 현실적 삶의 질서에서 우리 민족이 겪고있는 갈등을 보편화된 주제로 하여 우리의 문학속에 우리 민족의 역동화심리와 거족적인 극복의 체험을 아프게 묻어주어야 한다. 역시 자신의 경험세계에 대한 민족적 인식의 회복만이 우리 민족의 문화와 미래를 불 밝힐 수 있다. 우리의 문학은 민족정신의 훈련장이다. 이 훈련장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활력을 키워야 하며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각성과 건강을 회복하여야 한다. 우리 문학의 이와같은 복합적 의미는 역시 우리의 삶의 현주소와 문화의 이중성에 의하여 확인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학교류가 문화의 공동분모를 가진 민족문학의 다양성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48    문학은 민족정신의 훈련장 댓글:  조회:2305  추천:0  2009-05-16
리태수(소설가 룡정시 문화국 창작실) 방룡남(<<문학과 예술>>지 편집)       방: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을 오늘 처음 뵙습니다만 선생님의 작품과는 퍽  << 구면>>인데요.   리: 오시느라 수고 많았겠습니다. 방: 사무실 형편을 볼라니 선생님들도 얹혀사는것 같군요. 여러모로 불편한 점 많으시겠습니다. 리: 네. 나라살림이 유족하지 못하니깐 할수 없는 일이지요. 청빈하고 선량한것이 우리 나라 선비들의 정신인가 봅니다. 하긴 학자는 산속에서 나고 철인은 목동의 오두막에서 난다고 했으니 청빈이 작가들의 재산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방: 돈의 힘이 날로 강해지는 지금에 선생님은 직업선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 안드십니까? 리: 아니요. 저는 수두룩한 직업선에서 달려보았습니다. 교원, 군인, 로동자, 농민, 사무원, 과수재배원 등 다양한 사회배역을 맡았더랬습니다. 충분한 체험후에 선택한것이고보면 숙명으로 받아들이는것이 편할것입니다. 방: 아마 그런 풍부한 신변체험과 생활경력이 선생님을 다산 작가로 되게 하신것 같군요. 리: 다재가 무재라는 말 있잖아요? 이것저것 주무르다나니 어느것 하나 신통한것 없습니다. 방: 겸손한 말씀입니다. 리: 사실 제가 다산이 되게 된것은 그런 경력에 앞서 직업의 종합성때문이라 할수 있습니다. 창작실의 첫째가는 임무는 가사나 극본창착이 아닙니까. 소설창작은 저의 개인직업이나 다름없는거죠. 방: 그러니 선생님의 지향하고는 좀 거리감이 있는 직업이 아닙니까. 리: 저는 가사나 극본을 소설하고는 별개의 창작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선 문학은 모체예술로서 모든 예술의 토대로 됩니다. 문학적기질이나 적어도 높은 문학흠상능력을 갖추지 못한 극작가나 무용안무가는 필연코 멋진 구상을 할수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소설가는 가사나 극을 알아야 치밀한 묘사, 함축 세련된 대화를 쓸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복잡다단한 생활은 백화점에서 상품마다 진렬위치가 정해진것처럼 가사, 극, 소설 등의 소재로 될 객관성을 창작자에게 <<강요>>하는거지요. 방: 과연 그렇지요. 생활에 대한 깊은 체험이나 리해가 없다면, 그리고 사회 일반에 관계하여 신변적으로 체험하고 깊이 탐구하지 못한다면 무게있고 생활에 핍진한 작품을 창작할수 없지요. 지금까지의 창작상황에 대해 좀 말씀해주십시오. 리: 기자선생의 말대로 다산이다보니 이렇다할 성과작은 없어도 이것저것 <<잡동사니>>는 적잖습니다. 단편소설 40여편, 중편성인소설 3편, 중편아동소설 2편이 있고 단행본은 전광화와 합작한 <<세계동물운동회>>를 1984년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체포령이 내린 강도>>를 1986년도에 역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했으며 <<춘삼월>>을 1987년도에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했습니다. 이외 가사 120여수, 장막극 1편, 대형가극 1편, 씨나리오 1편, 텔레비죤소품 3편, 재담, 만담, 소형극 등이 20여편이 있습니다. 방: 참으로 다산작가이십니다만 그중 적지않은 작품들이 성, 주급의 상을 받았더군요. 리: 성급 2등, 3등, 주급 1등을 한것이 13편이고 전번에 <<진달래>>상을 탄것이 한편입니다. 방: 선생님의 작품, 특히 소설작품들을 살펴보면 선생님은 사실주의 창작방법으로 자신의 창작자세를 굳히신것 같더군요. 리: 보수적이고 봉페적이 아니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그 견해에 동의됩니다. 사실 저는 그 어떤 기성된 틀에 속박되는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런대로 창작주장을 말할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수법을 쓰든지간에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쓰면 된다는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쓴다면 수법에서의 종종별별, 형형색색의 창작을 모두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 한 사물에 대해 다각적인 풀이가 가능하고 사람들의 심미의식이 보다 활발해지고 사회에 대한 판단과 참여가 훨씬 개성적인 시대이니깐 더욱 그렇겠지요. 리: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누구도 이설을 누를 결정적인 학설은 내놓지 못하는거지요. 이런때에 자기의 창작자세를 기준하여 다른 사람의 창작자세를 비난하는것은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꽃밭에 만발한 뭇꽃중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꽃만 남기고 다른 꽃은 죄다 꺾어버리는것과 같은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세계적절주와의 보조맞춤이라는 미명하에 문화환경, 민족심미특성 및 사유방식의 이질성을 타산함이 없이 형식의 새로움이라는 고립적인 언어장난에 지나치게 재미를 붙이는 경향을 경계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 작가의 문학선택과 독자의 열독심리 내지 민족의 심미의식의 내재적일치성을 강조하는 말씀이겠지요. 리: 그렇지요. 이런 경향이 우리 문단의 흐름을 형성할 때 저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무절제한 모방은 소극적인 동화에 불과하기때문입니다. 방: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도 민족의 현실상황을 외면한 문학은 그 진실성과 문학사적가치에서 의문받기가 십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의연히 여러민족의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 축성되여가고있으니깐요. 가령 당대의식이란것이 세계적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매개 민족에게 접수 혹은 수용될 때 필연코 민족의식의 조명을 받지 않을수 없는거지요. 리: 바로 그거죠. 그러기에 문학은 민족정신의 훈련장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경 당대의식이란 무엇이냐 하고 바투 들이대면 나로선 확정한 리론적 정의를 내놓을수 없지만 번쩍 순간적으로 뇌리를 치는것이 당대의식이란 결국 상품의식을 그 기본핵으로 하는것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한 장소에서 당대의식에 대해 제 나름의 토배기식해설을 한적 있습니다. 어느 한 마을에 밭머리샘이 하나 있었는데 50년대에는 사원들이 일밭에 가고오면서 갈한 목을 축이는 자연 그대로의 샘물이다가 60년대에는 논을 적셔주는 관개수로 전변되였다가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것의 진짜 가치가 발견되여 약수로 <<승급>>하였습니다. 방: 그러니깐 하나의 샘이 인간의 의식의 각성에 의해 인간본능을 충족시키는 자연적샘으로부터 생산수단으로서의 관개수로 되고 오늘엔 상품화된 약수로 되였다는거죠. 참으로 원시적 생명의식, 농경의식, 상품의식의 질적비약과정을 아주 생동하게 그렸습니다. 리: 그러므로 당대의식이란것은 결국 인간의 생명의식의 질적비약이라 할수 있지요. 방: 살겠다는 본능형의 생명의식으로부터 잘살겠다는 리상형의 생명의식에로의 비약이라는 말씀이지요. 리: 그렇습니다. 하기에 당대의식을 수립한다는것은 꼭 전통의식이나 민족의식을 부정하는것과 맞물림할수 없는것입니다. 물론 당대의식을 수립하자면 진부한 전통관념이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의식은 버려야 하지만 결국은 민족의 떳떳한 자태로 세계에 낯을 보여야 하는것만은 틀림없지요. 그것은 당대의식을 수립못하면 세계대오에서 떨어져 멸망할 위험이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민족의식을 상실한다면 그날부터 벌써 그 민족은 존재조차 하지 않기때문이죠. 방: 참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럼 선생님의 창작자세 주장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십시오. 리: 아까 이미 말씀드린바이지만 저는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쓰고 인간이 승화와 성장을 꾀한다면 어떤 수법으로 쓰든지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자신을 말하면 기본상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에 몸을 기댔다고 할수 있지요. 지나친 편애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문학선택은 자유로운것이지만 력사에 남을것은 그래도 사실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까지도 사실주의적창작방법의 피복률이 으뜸이라는 뜻에서뿐만아니라 인간세태와 현실생활에 대한 자세가 퍽 순응적이라는 뜻에서도 그렇지요. 방: 선생님의 귀중한 시간을 많이 가져서 미안합니다만 선생님의 창작경험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리: 별로 경험이라고 할만한것이 없습니다만 한마디로 저는 글을 쉽게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접수자의 각도에서보다는 창작자의 각도에서 하는 말입니다. 뜻인즉 생활에 익숙하고 인물에 익숙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가의 성숙을 신변체험소설로부터 순수 객관소설로 넘어가는것이라 하는데 딱 맺힌 주장이 못된다고 봅니다. 아무런 체험도 없이 순수 귀동냥, 눈동냥으로 글을 쓰면 얼마나 쓰겠습니까. 풍부한 체험이 있어야만 생동하고도 세련된 글을 쓸수 있는거지요. 물론 작가적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요. 방: 지금 어떤 창작타산을 가지고 계십니까? 리: 공화국창건 40돐에 헌례하려고 장막극과 텔레비죤극을 무르익히고있습니다. 그리고 <<9.3>>을 전후로 <<조각달 둥근달>> 속편으로 소설 <<둥근달 하현달>>을 쓸 타산입니다. 방: 네. 오늘 보귀한 말씀 많이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창작성공을 미리 축원합니다. 리: 고맙습니다. 잡지에 발표한다니 기자선생을 통해 독자들과 선생님들의 조언을 부탁합니다.
47    천치의 의미지 댓글:  조회:2077  추천:0  2009-05-16
 도덕과 질서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은 옷이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처럼 전혀 해답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기성된 도덕과 질서가 계속 사회구축의 구조적요소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계산적인 리기주의의 사치한 도덕적방패로 변질하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현실적으로 던져진 부진이냐 발전이냐 하는 선택의 질문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계률로서의 도덕이 허상과 실상의 사이에 등식이 성립될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은 인간성을 해방하느냐 속박하느냐 하는 인간탐구의 가장 원색적인 문제이다. 허련순의 소설 <<슬픈 계률>>(<<천지>>1992년 4호)은 계산적인 리기주의에 복무하며 인간성을 외면하고있는 기존도덕적인 성륜리의 허위성을 고발하고있다. <<그녀>>로 등장하는 녀주인공은 <<처녀때 너무 못생겨서 청혼하는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서른살에 선택여지도 없이 한 홀애비와 결혼했으나 아들 하나 남기고 죽어버리는 결핵병환자였었다. 후에 남의 소개로 아이 셋을 둔 남자한테 시집갔으나 남편아이들이 어찌나 이악스레 나오는지 자기 자식이 주눅이 들어 기를 못펴는것이 가슴에 걸려 일년만에 리혼을 하고 나와버렸다. 그뒤 떠돌이 세방살이로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신계촌에 홀로 사는 홀애비가 좀 부실하기는 하나 일은 제대로 하고 집 하나를 쓰고 산다는 말을 듣고 자청하여 김부실댁으로 들어왔다. <<남자에 대해선 애초부터 큰 기대같은걸 품어보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사랑이고 뭐고 단지 피곤한 몸을 담을수 있는 처지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들애 하나만 눈치밥 안 먹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생존본능의 가장 원색적인 추구인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원색적인 추구마저 이른바 주위의 <<정상인>>들에 의해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부실이한테 시집온 근거로 같은 부실이 취급을 당하고 정상적 인간성의 욕구마저 망측한것으로 비난받으며 지어는 <<온갖 랭대와 멸시도 넉넉하게 받아당하는것>>도 <<그녀>>가 <<부실하기때문에 치욕을 못느끼는거라>>고 놀림받는다. 사실 이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인간성을 위협당하는 사실에 천착하는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인것이다. 외적으로 부족한 <<그녀>>와 내적으로 좀 부실한 김부실의 생존본능의 추구는 이른바 사회 <<정식성원>>들의 인위적인 비난과 압제로 하여 부서지고마는것이다. 이것은 실상 생활의 바탕과 인간성을 멀리 떠나버린 관념도덕의 허위적인 위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벗겨버리고있는것이다. 자기들은 오장륙부가 하나도 세탁이 되지 않고서도 남을 헐뜯는데는 부쩍 열을 올리고 약한자, 부족한자를 억지로 인간대렬에서 밀어버리려는 인간추악상이 적라라하게 드러나고있다. 못난것, 부실한것이 잘못일수는 없고 악의 근원일수는 더구나 없다. <<잘난것>>, <<똑똑한것>>이 너무 잘난체, 똑똑한체 할 때 비로소 악은 생기는것이다. 특히 일잘하고 돈 잘 버는 시동생을 하루새에 <<그녀>>한테 훌떡 빼앗겼다는것이 김씨댁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때 악은 바로 김씨댁과 같이 리해관계를 함께 하는 인간들의 너무나도 계산적인 리기주의에 비롯하여 산생되는것이였다. 그들이 새살림을 꾸렸음에도 김씨댁은 아예 두 사람 다 손아귀에 넣고 부려먹으려 한다. 그래서 머리 쓴것이 <<경제권을 틀어쥐는 방법>>이였다. <<농사수입이고 남새 판 돈이고 모두 바쳐야 하고 돈을 쓸 때는 맡아내가고 밥쌀을 한주일에 한번씩 내가야 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못난것, 부실한것이라는 근거로 생활자립권마저 박탈하고 그들을 노예로, 지어는 말할줄 아는 로동도구로 취급해버린것이다. 김씨댁이 자기의 이런 행위를 정당하게 위장하는 수단이 바로 자기 몸에는 그냥 더러운 똥집을 달고있으면서 남이 똥누는걸 흉보는 인간들의 몰렴치하고 루추한 심태로서 <<그녀>>와 시동생을 아주 자립할수 없는 천치로 확정해버린것이였다. 인간의 상정으로 말하면 시동생이고 동서이기에 김씨댁은 그들을 몰렴치한 인간들의 비난과 타격에서 구해내고 감싸줘야 할 보호인격이여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공짜로 부려먹을수 있다는 계산적인 리기주의는 그녀로 하여금 악의 수단을 서슴치 않고 행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런 계산적인 리기주의앞에서 기성도덕은 과연 얼마만큼의 치유력을 갖는것일가. 관념도덕은 벌써 계산적인 리기주의자들의 사치한 장식품 내지 지어는 인간성을 속박하는 도덕적방패로 변질하고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라도향의 <<벙어리삼룡이>>에서의 천치의 이미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인간탐구를 위한 인간성의 이미지이다. <<그녀>>나 김부실 역시 바보와 무지의 개념으로서 일상적, 상식적 또는 병리적차원에서의 천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성실의 환상적차원에서의 천치이다. 이때의 천치는 인간을 타락과 허위에서 구제하는 천사의 얼굴이다. 약자에 대한 학대, 형식으로만 제약된 도덕이 그 앞에서 여지없이 몰골을 드러내고있지 않는가! <<그녀>>와 김부실의 생존본능에의 가장 원색적인 추구마저 이른바 주위의 <<정상인>>들에 의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현실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인간탐구가 아니겠는가! 실로 소설<<슬픈 계률>>은 관념적인 도덕이나 륜리를 따지기전에 인간임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인간선언이라 할수 있다.
46    사회적 빈곤이냐, 철학적 빈곤이냐 댓글:  조회:2163  추천:0  2009-05-16
평론을 할라치면 종종 작가의 사상 내지 주장을 포착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시비가 생긴다. 나중에 타협한다는것이 주제의 다각성으로부터 평론가는 얼마든지 다른 초점에서 문제를 잡을수 있다는것이 그런대로 적극적인 태도이고 소극적이래도 평론가는 평론가대로 일가지견을 내놓을수 있다는 태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작품을 놓고 작가의 경향이 어느것인가 하는 판단에 따라 그 작품의 가치가 긍정 내지 부정되는것이니 허투루 대할수 없이 <<인명>>(작품의 운명)에 관계되는 일이겠다. 만병통치의 약이 없는 한 병을 옳게 진단하는것은 병을 치료할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상식적인 요구조건이다. 필자가 김일의 근작 단편소설 <<빈곤>>(<<장백산>>1992년 2호)을 읽으며 봉착한것이 바로 이 점이다. 풀어말하면 작가의 경향 내지 주장을 이렇게 봐도 좋고 저렇게 봐도 좋은 일이 아니라 이렇게 보면 소설이 실패한것이고 저렇게 보면 소설이 성공한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진것이다. 필자가 이 소설에서 쉽게 잡은것이 사회적빈곤과 철학적빈곤이다. 달리 말하면 작가가 사회적빈곤을 썼을수도 있고 인간의 철학적빈곤을 썼을수도 있다는것이다. 작가가 사회적빈곤을 썼을 경우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매력은 퇴색해진다. 돈 있는자의 정신적빈곤, 글 읽는자의 물질적빈곤, 그것이 이 사회 객관 내지 일반으로 설명되는 경우 치원이나 김일의 형상은 자기의 <<비극적운명>>으로 그런 사회적빈곤을 폭로하고 호소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냘프고 자살적이다. 틀림없이 비극이란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한 미의 훼손이다. 그런데 치원이의 경우 그는 그런 불가항력적힘의 강타를 받기에 앞서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빈곤으로 하여 스스로 정신질환을 앓고만다. <<상점에서 나와 가게방 뒤벽에 대고 오줌을 솨솨 내갈기>>고 <<한달 로임을 봉투채 밀어넣>>는 행위는 결코 <<금전만능의 인격론>>이란 현대문명병과는 전혀 무관한 미개병이다. 사실 그의 모대김과 신음소리는 사회적빈곤에 대한 대항적인 비명인것이 아니라 물가의 모래탑처럼 너무너무 쉽게 씻겨내리는 그 자신의 허탈한 령혼을 두고 부르는 영탄곡이다. 김일의 형상은 어떤가. 얼핏보면 그는 글읽는자로서 물질적빈곤에 모대기고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준 단색텔레비죤까지 팔아먹구>> <<그 돈으로 사흘마작>>을 논 김일, <<그저 하두 심심하니 친구들끼리 좀 놀구 또 뚜드려 먹구 소일하>>는 김일의 형상은 물질적빈곤을 호소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정신이 벌써 시들어버린것이다. 그러고보면 돈 있는자 치원의 정신적빈곤, 글 읽는자 김일의 물질적빈곤이란것은 일종의 가면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두 정신질환자가 같지 않은 가면을 쓰고 같은 극을 표현하고있는것이다. 이처럼 령혼이 방황하는 <<철학적빈곤증>>은 사회적빈곤을 폭로한다는 주제를 약화시킴에 반하여 무병신음하고 고독한체하는 인생실패자의 넉두리라는 주제를 뚜렷이 떠올리는것이다. 이런 초점에 렌즈를 맞추면 치원이와 김일의 형상은 또 얼마나 생동하고 신랄한가. 물론 그들의 고통 내지 넉두리의 근원은 그런대로 사회에 있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사회학적진단을 하면 경제발전기에 과연 여러가지 페단과 부식작용이 훨씬 맹렬한것이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의 발병률이 많은것과 같은 도리일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개 사람들의 신체소질과 항역능력을 간과할수 없다. 특히 특정된 환경이 아니라 일반적인 환경에서 누구나 다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고험을 통해 승패의 두 부류가 있을 때 우리의 가치판단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것일가. 사회적빈곤 즉 돈 있는자의 정신적빈곤과 글 읽는자의 물질적빈곤은 류행성감기균으로서 수시로 사람들을 질병에로 몰아가고있다. 그다음 제기되는것이 개체의 <<철학적빈곤>>이다. <<철학적빈곤>>자는 오뉴월고뿔도 쉽게 걸리고마는것이다.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겨나갈수 있는 충격앞에서 그 자신의 취약성때문에 허리꺾이고말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얼마만큼의 비극성을 눈물머금고 읽을수 있을가. 자신의 라태, 무지, 무능을 덮어놓고 일방적으로 억울한체, 슬픈체, 고독한체 지어는 인류의 위기감같은것까지도 느낀체하는 어리광대같은 연기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성장을 위한 사회의 모진 진통을 절감할수 있는것이다. 아무튼 돈 있는 치원이든 글 읽는 김일이든 한바탕 허무맹랑한 광란적인 배설을 거쳐 그래도 나중엔 저들의 <<철학적빈곤>>을 깨달은것이 주제밝힘에도 명랑하지만 그보다 먼저 변화된 사회 내지 사회적빈곤에 도전하는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인생자세도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겠다. <<어느날 아침 꿈속에서 깨여나면...>> <<술 안먹고 마작도 안놀리...>> <<우리는 잃어버린 리상을 찾자.>> 이것이 바로 작가의 호소가 아니겠는가!
45    엉뚱한 수법의 시도 댓글:  조회:2194  추천:0  2009-05-16
-소설 <<생활의 흐름>>을 읽고 소설이란 생활과 같아야 한다. 그럼 생활의 정체는 어떤것인가. 우선 사회적 정치적 력사적 등 제관계적 립장에서 투시해보면 직선적으로 쉽게 얻어지는 해답은 틀림없이 <<슈제트>>가 명확하고 규칙이 엄격하며 약속이 상투적이라는것이다. 때문에 인간개체의 표상적인 생활도 역시 슈제트도 있고 규칙도 있고 약속도 있는것이다. 이런 요소가 갖추어진 인간은 마음이 편하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인간학적 심리학적 또는 주체적인 판단의식의 위치에서 보면 이런 표상적인 생활흐름은 개체심리활동과 생사판가리의 불꽃조차 튕기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체심리활동이 리성의 다듬음을 거쳐 반항의식 혹은 대항의식으로 질변하여 표면화되지 못할 때 그것은 그냥 그대로 잠재의식이란 의식의 원시상태에서 화석화되고만다. 원시상태의 잠재의식은 아직 미의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그대로 루추한 몸뚱아리를 드러내고있는데 그것은 태아나 갓 태여난 영아가 새 생명의 상징이면서도 아름다움은 주지 못하는것과 같은것이다. 소설 <<생활의 흐름>>의 주인공인 <<그>>는 바로 이와같이 사회와 개체의 불합속에서 리지적인 대항과 원시적인 반항에 헐떡거린다. 그 하나하나의 교전속에서 읽는이들은 사회적인 허위와 비리와 부진을 괄목상대하게 된다. <<재해를 입었어도 감산되지 않고 의지가 약해지지 않았다>>는 향당위서기의 상투적인 호언장담, 인위적으로 빚어진 재해임에도 자연재해라고 책임을 인자하고 너그러운 하느님께 슬쩍 밀어버리는 그의 위선적인 령도예술, 진수성찬으로 <<어사>>를 매수하는 농업현장의 교활한 응부술책, 진실한 보도임에도 활자화시키지 못하는 신문사주필, 유모아적인 생활도 엄숙한 정치적자각으로 대하고 류언비어에 의심병을 키워가는 문예부주임, <<죽은 닭이 산 사람보다 낫다>>는 격으로 한구럭의 뢰물에 순순히 조동을 시켜주는 학원당위서기, 제돈 아낀 체면유지로 남이 산 닭에 군침만 흘리고도 높은수양인체 사양하다가 기회를 엿보아 고양이 고기덩이를 훔치듯 닭의 뼈도 안남긴 <<대문학가>>들, 허위적인 보고에 <<문명>>의 계관을 씌워주는 관료기풍,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영화포스터, 성감적이고 현세희롱적인 광란의 춤, 이런것들이 생활의 모퉁이 모퉁이에서 울려나와 하나의 거칠은 불협화음을 형성하고있는것이다. <<그>>는 리지적으로 주필이나 주임과 맞서 겨루어보았지만 주먹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고배만 마신다. 삶의 현장을 정리하기엔 <<그>>의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 그래서 <<그>>는 리성적인 대항보다 무의식적인 심리배설로 삶의 현실을 조롱한다. 거짓회보로 따온 <<문명향>>간판에 대고 오줌총을 쏘고 광고에 얼리워 엉터리 영화를 본 밸풀이로 영화관에서 큰소리로 욕설을 퍼붓고 문화궁에서 공연관람을 하다가 비닐사이다병을 쥐여뿌리며 지어는 시에미역정에 개배때기차는 격으로 안해가 기르는 고양이를 휘둘러 뿌리친다. 이쯤 풀이하고보면 작품의 뜻풀이는 되지만 <<그>>의 형상의 진실성문제가 아직 의문부호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학생이였고 학원의 교원이였으며 신문사 기자인 <<그>>의 신분과 <<그>>의 행위는 너무도 엄청나고 믿을수 없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문명향>>간판에 오줌총을 쏘는 등의 행위는 일정한 수양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개적으로 할수 없는짓거리이다. 이렇고보면 우리는 문법적인 해석공간이나 사실적인 행위규범에서 벗어나 창작수법상에서 작가의 시도를 추적해야만 명확한 답안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보건대 작가는 많은 경우에서 <<그>>의 원시적인 잠재의식과 심리활동을 행동화하여 표현하고있는것이다. 잠재의식이나 심리활동의 측면에서는 <<그>>의 그런 <<행위>>(행위화된 잠재의식 내지 심리활동)가 가능한것이며 또 긍정될수 있는것이다. 거짓말회보와 관료기풍에 대한 분개를 그것의 산물인 <<문명향>>간판을 보자 오줌이나 콱 쏴나라 하는 생각으로 표달할수 있는것이다. 그럼 작가는 무엇때문에 <<그>>의 잠재의식이나 심리활동을 행동화하여 표현하였는가? 제나름의 분석을 해보면 첫째는 그런 극단적인 <<행위>>는 사회적인 허위와 비리와 부진에 대한 비판의식을 더 강하게 나타내고 둘째는 그런 사회적고질의 뿌리깊음과 개인적대응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며 셋째는 리성의 정리를 받지 못한 잠재의식을 그대로 행동화하여 그것의 루추한 몸뚱아리를 드러내보임으로써 리성적인 사유와 진지한 삶의 자세만이 보람찬 인생을 창조한다는것을 보여줄수 있는것이다. 아마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끝마치면서도 로파심에서 <<그>>를 위한 변호를 선후 다시 계속하여 <<그>>가 안해와 함께 지난 생활을 반성해보고 사회적질문으로부터 자아에 대한 질문에로 환원하여 새출발을 다지는것으로 매듭을 지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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