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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능과 인간성
2009년 05월 16일 14시 28분  조회:1594  추천:0  작성자: 방룡남

-단편소설 <<새벽새는 울고있다>>에서 본다


<<새벽새는 울고있다>>. 그것은 이 새벽에 목을 매달고 지옥의 대문안으로 성큼 들어가버린 궁재씨를 슬퍼하여 우는것일가.
물론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죽음이란것이 언제나 소름이 끼치는것이고 어두운 색갈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다니엘 띄포가 <<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로 되던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파멸의 원인으로 될수 있다>>고 했듯이 죽음이란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과 불행일수 있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과 해탈일수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궁재씨의 죽음은 어떤 색갈의 것일가. 그것을 알기 위해 궁재씨의 생활종적을 추적해본다.
우선 궁재씨는 련속 두 안해를 잃은 외토리이다. 사랑하는 짝을 잃는것이 죽음 다음으로 가는 고통이라고 하는데 특히 남성에게 있어서는 사랑을 잃는것이 생명을 동시에 쫓아내는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하물며 궁재씨는 련속 두 안해를 잃었음에랴. 어찌보면 이것이 가난과 함께 궁재씨를 타락의 심연에 떠밀어 넣은 원인일수 있는것이다. 중년상처에 대들보가 휜다고 하지 않는가! 밤늦게 돌아가도 <<몸열기로 이불속을 따뜻이 덥혀놓고 기다려줄 녀편녀도 없는>> 너무나 차가운 기운에 묻혀있는 오두막집에 꽉 들어찬것은 가난이란 재산뿐이여서 <<내집이구나 하는 따뜻함과 위안>>이란 도저히 가질수가 없다. 녀자의 손길이 닿지 못한 집에 생기가 돌수 없었고 모든 생활이 계산적일수 없었다.
다음 궁재씨는 너무도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두 안해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숱해 걸머진 빚때문에 너무 주눅이 들고 가난구덩이에 빠진>>것이다. 옷은 입은지 몇십년이나 되는지 <<제법 이를 기르기가 맞춤하>>였고 해마다 쌀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치솔질도 소금물로 하는 형편이다. 남들은 화학비료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그는 남의 흉내를 내기도 힘든 처지였고 자기에게 소없고 수레없어 남의걸 삯내여 쓰는 형편이였다. 큰아들은 그 또래에서 혼자 <<왕바신>>을 신는 신세였고 고중진학시험에서 성적은 괜찮았으나 뒤를 대줄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다. 외손자마저 에미한테 업혀 외할아버지집에 설쇠러 왔다가 급성페염에 걸렸으나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고만다. 모든것이 가난때문이다.
실로 가난이 죄였다. 게다가 그한테는 서로 위안하고 의지할 안해마저 없다.
궁재씨는 이런 가난과 고통과 불행에서 해탈되고 잊어버리는 처방을 술에서 찾으려 했다. 코를 찌르는 싱긋한 술냄새에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며 괴로운 세월을 죽였다. 인젠 <<밥 안먹고는 살아도 술 안먹고는 못살>>지경이다. 그만큼 그는 일년내내 외상술을 마시지만 그 외상술값만은 달마다 어김없이 물군하는것이였다. 하루에 적어서 한근, 한달이면 30원의 돈이였다. 쌀돈에 망하는걸 모르는바 아니지만 오히려 인젠 술없인 못사는 형편이 되고만것이다.
궁재씨가 그 지루한 세월을 죽여주는 다른 한 처방은 화투놀이다. 일년에 할수 없어 짓는 농사외엔 하는 일 없이 화투판에 붙박힌다. 점심을 넘겨도 배고픈줄 모를 정도로 화투귀신이 돼버렸다. 물론 꿈속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명월이년>>과 즐기는 장면도 구을려본다. 정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궁재씨의 비극은 이로써 시작된다.
최종적으로 술과 놀음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멋없이 자기의 일생을 무덤을 파는 과정으로 만드는 자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게으름병이 생기게 되기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환경을 이길수 없는 운명이 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운명이란것이 과연 있는것이라고 해도 한 인간의 운명의 극치는 의지와 리성의 노력에 의해 밝혀진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리성은 이른바 어쩔수 없다는 역경도 물리치는 수가 있는데 운명이란 전혀 돌려세울수 없는것이기때문이다. 객관적 필연성만 탓하면서 불행속에서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대신 자기 육체를 멋없이 소비하고 자기 정신을 의의없이 마취시켜버리는것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숙명론이 아닐수 없다. 때론 큰 재난이 사나운 짐승처럼 물어뜯으려고 무섭게 달려들어도 삶의 의욕으로 완강하게 맞선다면 혹 기가 죽어 달아나버리는 수도 있지만 때론 타락과 게으름으로 하여 사소한 일이 어쩔수 없는 큰 재난을 가져올수도 있는것이다.
이런 도리가 어리무던한 궁재씨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고차원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문제는 작품에서 궁재씨의 비극적 결말이 두 세대의 대항적 충돌로써 초래되였다는데서 그런대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시대적 인식을 위한 현실적 비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궁재씨의 경우 삶의 의의보다는 삶의 의미, 즉 인간본능으로서의 생존욕구가 더 강하게 내비친다면 영호나 영철의 경우에는 삶의 의미보다는 삶의 의의, 즉 인간성으로서의 가치추구가 더 짙게 내비치는것이기때문이다. <<자기생활에서 장래와 현재에 아무런 의의를 찾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인간성을 상실한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리기영)
궁재씨의 타락은 그만의 파멸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후세대까지를 재난에 빠뜨릴수 있는것이다. 라태는 원래 7대악의 하나로서 자기의 일생뿐만아니라 후대까지 재난에 빠뜨리게 되는 생활의 가장 큰 죄악이다. 그는 노력과 분발, 지어는 발악적으로 가난을 털어버리려고 한것이 아니라 새 빚으로 낡은 빚을 메꾸어버리는것으로 세월을 멋없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둘째는 돈이 없어 학교에 못가고 큰아들은 <<왕바신>>신세를 벗지 못했지만 일년내내 술값만 떨구지 않는다. 그래서 두 아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와 대항해 나섰다. 한창 젊음이 파랗게 자라나는 나이인데다 문명의 세례를 보다 생활적으로 접수한 그들이 도저히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아버지의 삶을 본뜰수는 없는것이였다. 그런데 아직 학생이고 공부에 포부를 기탁하고있는 둘째는 단연히 집을 뛰쳐나가지만 이미 농촌일에 몸을 잠근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제나름의 방식으로 대항해나선다. 바로 자기 삼촌한테 억지당한적 있고 또 <<본가집에 왔다가 아이를 죽인 죄로 시집에서 쫓기워 와있는>> 이붓 동갑누이를 억지 강요하여 데리고 살려하는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창졸하게 사회관념도덕을 전달하는데 그치거나 극단적인 흑백론리로 영호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 재단을 할수 없다. 왜냐하면 영호의 행위는 결코 그 행위자체에 의미가 매겨지는것이 아니라 바로 강한 삶의 욕구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그 시점의 상태를 확대시키고있다는데 자리매김을 주고있기때문이다.
일찍 가난은 영호를 실련의 <<선수권소유자>>로 되게 하였다. <<왕바신 신세>>, <<시계 한번 못차보구...>>. 워낙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란것이 다만 정신적인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외형적인것 이를테면 먹고입는것이나 기타의 물질적인 것과도 관계된다. 바로 영호의 자존심은 가난때문에 여지없이 꺾이웠던것이였다. 그 많은 꿈이 좌절되고 수정되여버리는 사이에 영호도 관념도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찢어지는 마음의 쪼각들을 인내와 침묵으로 주어맞추면서 도덕의 가죽으로 만든 방패로 자기의 들뛰는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남과 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생의 욕망과 최저한의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마저 실현할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발악적인 비명을 지르고야 만것이다. 단순히 가난때문만이 아니다. 아들한테 신 한컬레, 아니 치솔약 한통도 안사주면서 일년에 삼백륙십여원이란 술값만은 눅거리 쌀돈을 가져와서라도 물어대는 아버지 궁재씨의 타락때문이였다. 정에도 한도가 있는것이고 례에도 한도가 있는것이다. 현실성을 배제한 마음만의 정이나 례는 가식밖에 남을것이 없다. 영호와 궁재씨의 관계는 인젠 다만 가부장제적 봉건례의도덕의 사슬에 매여 유지되고있을뿐 전혀 화해의 접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마저 궁재씨가 자기의 인생은 마비되여가지고도 도덕적방패를 들고 그를 죽음에로 협박(피를 보면서도 부삽을 들고 그한테 달려든다)할 때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되였다. 이제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의지대로 하지 다른건 전혀 돌보지 않는다.
<<니 능력있어 다른 놈들은 다 련애하는데 나는 못한다. 니는 <보토리>질해라. 나는 안한다. 내하구 살자는 녀자가 없으니까 봉녀하구 잔다. 어째? 니덕에 우리 둘다 거지다. 거지끼리 사는데 어째?...>>
이것이 영호가 궁재씨를 구박하면서 악에 받쳐 웨쳐댄 말이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도 자기의 리익에 복종시킨다. 어찌보면 실련의 <<선수권소유자>>인 영호와 한번 당한적 있고 또 시집에서 쫓기워 온 봉녀가 결합되는것이 훨씬 계산적이고 경제적이며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일의 해결에서 언제나 그 리해관계를 같이 하는 자가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일것은 당연한 리치이기때문이다. 다리부러진 노루 한굴에 모인다고나 할지, 혹은 영호의 말대로 <<거지끼리 산다>>고 할지. 하여간 둘다 자기의 처지에 맞는다는 리해를 가질수 있는 경우인것이다.
사실 궁재씨의 경우에도 그처럼 길길이 뛴것이 자기 동생이 조카딸을 강간하던 때와는 다른 뜻에서일것이다. 즉 그것은 강간으로 인정되여서보다 어쨌든 이붓 오랍누이로 한집에서 함께 자란 사이라는데서 충격받는 전통적인 륜리관념의 관성때문이였을것이다. 하기에 영호가 결코 일시적인 본능욕구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의 욕구내지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까지를 추구한다는 사실의 힘에 눌려 자기의 도덕적 방패를 던져버리고 만것이다. 그는 아들의 행위를 리해하고 량해하고있는것이다. 그는 자기의 허무한 삶에 대한 뼈저린 참회와 함께 그들 둘의 장래를 기도한다.
비록 그의 생명으로 보면 그의 참회는 때늦은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느때나 참회가 있는 죽음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홀대했던 삶의 참뜻이라던가 철저한 인생반성을 흔히는 그런 죽음의 마당에서 깨닫는수가 있기때문이다. 잃은 물건은 되찾을수 있어도 잃은 시간은 되돌아올수 없는바 이미 허무한 세월속에서 인생의 진이 다 빠지고 삶의 터전을 놓쳐버린 궁재씨는 이 시각 죽음의 수단으로써 자식들한테 속죄하는 충실감을 맛보고있는것이다.
영호의 지나친 행위에 도덕의 말매를 안겨야 할지는 모르나 그러나 궁재씨 자신으로 말하면 문명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졌던 릉욕의 한 세대를 조용히 잠재우는 비장한 행위를 한것인지도 모른다.
아, 그래서 <<새벽새는 울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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