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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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룡정정신 (김희관) 댓글:  조회:3610  추천:40  2011-03-23
  룡정정신   김희관 원 연변문화국 국장     3월 13일,  필자는 “룡정3.13반일운동 92돐 기념대회”에 초대되여 다시한번 “룡정정신”의 세례를 받았다.   1919년 3월13일, 연변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족동포들은 룡정의 서전대야에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목청껏 웨치면서 일본령사관으로 향하여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반일시위 도중 시위대는 주둔군과 경찰의 총탄을 맞아 17명의 희생자와 몇십명의 부장자를 냈다. 3.13렬사들의 선혈은 헛되지 않았다. “룡정3.13반일운동”은 연변인민들이 총을 들고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기폭제가 되여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항일련군 등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룡정3.13기념사업회 회장 최근갑옹은 회원들을 이끌고 3.13기념사업을 시작하는데는 수많은 애로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최근갑회장은 “선렬들의 빛나는 력사를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하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피타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와 동시에 중국조선족력사를 연구하는 력사학자들과 지성인들의 부단한 노력도 큰 힘을 실어주었다. 중공연변주위와 주정부의 령도하에 《연변조선족사》 편찬을 제안하고 주도한 전 연변정치협상회의 부주석 김영만옹은 “19세기 60년대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으로 천이하였는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중국조선족으로 거듭났다. 하기에 룡정3.13 반일운동은 당연히 우리의 력사이다”라고 단언했다.  오늘날 중공연변주위,  길림성 당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상급령도의 배려하에 룡정3.13반일운동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조선족사》와 《중국연변조선족력사화책》에 빛나는 한페지로 되였다.   룡정은 중국조선족의 성지이다. 룡정에 있는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龙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우물은 우리가 옛날부터 이땅의 주인이였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령사관 옛터는 일제가 중국대지에 침략의 마수를 뻗히기 시작한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궤나리보짐을 내리놓은 그날부터 일제와 불구대천의 적수가 되여 생사결판으로 싸워야 했다. 룡정3.13반일운동은 바로 그러한 피어린 투쟁의 서막이였다.   룡정은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문화예술의 발상지이다. 룡정에는 우리의 첫 근대 학교인 서전서숙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민족교육의 첫발을 내디디였다. 민족교육은 걸출한 공산주의자이며 화가이신 한락연선생과 같은 훌륭한 청년들을 키워냈다. 룡정에는 일송정이 있어서 많은 유지청년들이 그곳에서 우국우민의 꿈을 키웠다. 룡정에는 명동학교가 있어서 시인 윤동주,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 라운규를 배출했다.   중공룡정시위 선전부 김길남부장의 기념연설에 의하면 21세기에 룡정은 새로운 자태로 태여나기 위해 현재 중국조선족민속문화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있다고 한다.  유서깊은 명동촌을 사회주의 새 농촌 시범촌으로 개발하는것이 그 일환이다. 10여년전 필자는 명동촌에서 전통부락과 막새기와에 관한 민속답사를 진행하였다. 동시에 연변TV방송국의 후배들과 함께 윤동주시인의 누이동생 윤할머님 내외분을 모시고 TV다큐 “기와에 깃든 령혼”을 제작하여 좋은 영상효과를 보았다. 전통부락을 잘 복원하는것 역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중요한 사업인만큼 명동촌이 참신하고 풍요로운 전통민속촌으로 거듭났으면 참 좋겠다.   금년에 한락연연구에 관한 고위급 포럼을 개최함과 아울러 한락연기념관과 한락연공원 개발을 다그친다고 한다. 참 지당하고 반가운 소식이다. 1982년 필자가  장춘에서 길림성사회과학원의 총서에 실린 로일대혁명가전기 한편을 읽었다. 그 인물전기의 주인공이 바로 룡정출신의 조선족 로혁명가이며 화가이신 한락연선생이였다. 필자는 너무나 놀랍고 자랑스러워서 그 전기를 밤도와 번역하여 《연변문예》잡지에 실었다. 그때부터 한락연선생의 전기적인 인생이 우리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락연기념관과 한락원공원이 하루속히 락성되기를 학수기대한다.   민족교육과 민족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고귀한 정신이 빛나는 법이다. 92년전 3.13반일운동 당시 룡정의 청년학생들과 인민대중은 경의로운 “룡정정신”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룡정정신”은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일정신이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총을 들고 싸우는 혁명정신이였다. 지금에 와서 “룡정정신”은 개혁개방이라는 조류속에서 룡정을 중국조선족의 문화교육과 민속문화의 성지로 개발하는 과학적인 창조정신이 아니겠는가.  
14    서안 연안 (김희관) 댓글:  조회:3953  추천:33  2011-03-18
풍향계 서안   연안 -김희관 전 주문화국국장   금년 국경절연휴를 맞아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서안–연안 관광코스를 부부동반으로 돌아보았다.   서안은 력사상 진, 한, 수, 당 등 13조대의 73명의 황제가 무덤을 남긴 5천년 중국력사의 축소판이며 성당시대의 장안이다.   지금은 명나라 때 쌓은 성곽을 복원해서 서안의 번화한 중심가를 구성했고 종루와 북루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거리는 아주 가관이다. 하지만 이렇게 력사상 유명한 도시가 <세계문화유산도시>에 급제하려고 여러번  <과거>를 보았는데 세계유네스코에서 내린 결론은 <성곽은 좋은데 성곽안에는 옛모습이 기본상 없음니 락제> 란다. 옛장안에 이렇게 고대건물이 없은 원인은 력사상 조대가 바뀔 때마다 새황제는 새궁궐을 지었고 또한 전란의 파괴도 끝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즘 서안시는 국내외 학자와 건축설계사들을 뫼시고 <현대장안>을 구상하고 있는데 초보적인 결론은 2054년까지 성곽안을 현대화한 <당황성>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서안시는 성곽안의 40여만인구를 20만으로 줄이고 현대화건축을 당나라시대의 고대건축으로 대치하는 것이 상책이란다. 그러자면 건축대역사가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흙 한삽을 떠도 <진나라 벽돌에 한나라 기와가 따라 나온다>는 문물의 보고에서 얼마나 많은 고대문물을 파내야 할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해야 서안은 현대판 <당황성>장안으로 거듭나서 세계로 나아갈수 있다.   서안 동북쪽에 위치한 진시황릉은 인공위성으로 요측을 거쳐 대략의 위치와 거대한 규모는 알고 있지만 지금의 기술수준으로는 도무지 파헤칠수가 없기에 백년후 후세들에게 맏겼다고 한다.   세계 여덟번째 기적이라고 하는 병마용 제1호 관람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아->하고 말문이 막혔다. 길이 잠든 진시황을 보위하느라 병마용 6천여개가 정연히 줄지어 땅속에서 2천여년을 말없이 숨어있었다. 그 병마용들은 실제 거구의 사나이 크기에 각자의 표정은 모두 달랐다.  1974년 당지 농민들이 가물방지우물을 여기저기 파면서 병마용파편을 발견하기 시작하여 병마용들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병마용진영이 그곳에만 해도 네곳이나 되니까 앞으로 진시황릉 주변을 모두 파헤치면 병마용이 얼마나 될찌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진시황이 시작한 만리장성까지 합치면 그것은 진정 옛날부터 이어온 중국의 저력이라 할것이다.   서안에서 연안으로 가는 도중 꼭 들려야 하는 명소중 하나는 황하의 호구폭포이다. 몇년전 CCTV에서 어느 모험가가 오토바이로 호구폭포를 날아넘는 장면을 보았던 바로 그곳이다. 우리는 그렇게 쾅-쾅 무서운 굉음을 내면서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호구포로를 녹화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대는 보았느냐 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황하수를…> 라는  당나라 시인 리백의 <장진주>시구를 목청껏 읊었다. 호구폭포는 참으로 황하의 성격을 단번에 감상할수 있는 명소였다. 인민음악가 서성해가 호구폭포가에서 <황하대합창>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전설은 천만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튿날 새벽 관광뻐스편으로 몇시간 달려간 곳은 한번 꼭 가보고 싶었던 혁명의 성지 연안이였다. 섬북의 황토고원 오지에 위치한 연안은 1935년 2만5천리 장정 끝에 3만여명의 홍군이 도착하면서부터 중국혁명의 붉은근거지가 되였다. 봉황산에 우뚝솟은 보탑은 수나라 때 지은것이여서 세월의 세례를 받아 이제는 서쪽으로 좀 기울었다. 양가령에서는 중공 제7차 당대회가 열었고 <황하대합창>과 <백모녀>를 처음 공연했다는  중앙대례당과 연안문예좌담회을 가졌던 중공중앙판공청 회의실 그리고 모택동, 주덕, 주은래, 류소기 등 혁명가들이 살았던 토막굴집을 둘러보면서 느낀 감상이라면 한마디로 <그들은 정말로 풍류인물들이였구나,,,>   우리는 관광뻐스편으로 1천2백키로를 달리면서 당나라 때는 양귀비가 미역을 감았고 서안사변 때는 장개석이 잡히기도 했던 청화지를 유람했다.놀라운것은 당시 장개석의 전용비행사가 조선인혁명가였다는 것이다.  중화의 시조로 읽컸는 황제령도 둘러보았다. 그동안 우리는 5천년 전통문화의 일각을 엿볼수 있었고 혁명의 성지를 답사할수 있었다,   어찌그뿐이랴. 서안에서 우리는 항일전쟁시기 주은래의 지시를 받고 서북장관공서 리제심주석의 고참신분으로 당을 위해 헌신한 연변 룡정 출신의  혁명가이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저명한 화가 한락연의 명복을 빌었다. 연안에서는 홍군의 제1대 포병사령 무정장군과  <중국인민해방군>군가와  <연안송>의 작곡가인 정률성을 그렸고 또한 미국 녀류작가 님. 웰즈가 쓴 인물전기 <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억울한 령혼앞에 머리을 숙였다. 그외에도 저명한 작가 김학철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족 혁명가들이 연안과 태행산에서 청춘의 선혈로 황토고원을 물들이며 민족해방의 그날을 위해 헌신했었다. 하기에 모택동주석은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의 선혈도 슴배여 있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여행길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연변TV방송국장 역임) <연변일보> 2005년10월14일
13    신유목민 (김희관) 댓글:  조회:3826  추천:31  2011-03-11
풍향계   신유목민                                                      -김희관 주문화국장 역임   지난 7월 나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신유목민>이라는 신조어 하나를 배웠다. 그 뜻인즉 고대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찾아 달렸다면 후에는 말에서 내려 정착생활을 하기위해 토지를 찾아 부단히 이주를 했으며 근대사회에 와서는 도시와 공장을 찾아서 걸음을 채촉했었다. 지금의 젊은세대들은 <신유목민>이 되여 한손에는 핸드폰 한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정보를 쫒아 국내외로 질주한다는 것이다. 그날 대회에서 특강을 청취한 50여개나라에서 온 참석자들은 <신유목민>이라는 신조어를 모두 찬성하는 반응이였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3.1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시다가 일본군경들에게 쫒기여 가족을 이끌고 평안북도 정주에서 환인현으로 이주하면서 우리는 중국조선족이 되였다. 우리들은 가정마다 모두 눈물젖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온 비슷한 이민사가 있다.   지금 200만 중국조선족은 개혁개방과 정보화시대를 맞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느라고 한창이다. 국내를 보면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지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많은 동포들이 관내로 이주하여 북경,천진지구, 청도,위해,연대지구, 상해,항주,소주지구 , 심천,주해지구 등  여러곳에 조선족들의 꽃동네 새동네를 마련해 가고 있다.   어찌 그뿐이랴. 이번 국제대회의 자료에 의하면 금년 5월까지 한국에서 유학, 로무, 취직, 결혼(중국국적)한 조선족은 15만4천여명이라고 한다. 그외 일본, 미국, 영국, 캐나다, 브라질, 남아공 등 몇십개 나라에 나가서 유학, 로무, 취직, 결혼생활을 하는 조선족동포들까지 다 포함한다면 아마 약 30만명좌우의 조선족동포들이 세계각국에서 생활하고 있는것으로 추산된다. 얼마전 국내 어느 신문에 <연변 세자매 아프리카에서 창업>이라는 기사는 필자를 눈물이 핑 돌게 했다. 참으로 우리의 동포들은 세계의 조류를 따르는 자랑스러운 <신유목민>들이다.   필자는 <신유목민>들이 점점 늘어나는 형세에서 웃어도 보지만 우울해질 때도 없지않다. 어떤 친구들은 연변의 조선족사회가 붕괴되 간다고 근심한다. 그래도 나는 <붕괴>라는 관점에는 합류하지 않기로 작심했다. 자고로 고향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락엽은 뿌리를 찾는다고 했거늘 우리의 동포들이 국내와 세계각국에서 <신유목민>으로 살아가도 고향생각은 늘쌍하면서 언젠가는 돌아올 생각을 한다고 믿는다. 호주 시드니의 해변가에서 만난 연변동포가 눈물이 글썽해서 <고향에 빨리 가고 싶다>고 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향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었을 해야하는가? 지성인들은 여러차례 세미나와 글에서 각양각색의 대책을 내놓았다. 필자는 연변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전자공학, 생명공학, 환경공학 등 첨단과학기술을 골간으로 하는 여러가지 일자리를 마련하고 전통문화의 대집성인 민속촌을 비롯한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고 아늑한 생활환경을 점차 조성해나간다면 세계를 질주하던 고향출신의 <신유목민>들이 점차 말고삐를 돌리게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북아의 금삼각으로 불리우는 연변이 러시아, 조선,한국, 일본 등 나라들과 함께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으로 경제를 부흥하는 <노비자>시대가 도래하면 더욱 좋을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신유목민>들에게 부탁이 있다. 타향에서 살아도 같은 보름달을 보고 살아가는것이니 고향의 산천과 전통문화를 잊지말고 문화전통을 발양하여 민족문화를 이어가는데 힘써달라고. <금의환향>할 때에는 자식들을 많이 거느리고 올것이며 아가들이 우리말과 글 그리고 풍속습관을 잘 알게 해주기를 바란다. 괜히 할머님 앞에 와서 절을 할줄모르고 그저 <할로!> 한마디 외치다간 할머니가 <이눔!>하면서 경을 칠라.   물론 그러한 일이 없으려면 국내외의 그 어디에서 살아가던지간에 <신유목민>가정들에서는 아무리 바쁘게 살아간다고 해도 자녀들에게 백의민족의 씨앗을 심어주어 후대들이 우리민족의 혼을 이어받아 민족의 전통, 언어, 문화, 풍속습관과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하게 이끌어 주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백의동포의 후예로서 손색이 없을것은 물론이요, 백의민족의 문화와 외국의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남들보다 부자가 되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신유목민>들이여, 세계를 힘차게 달려라.    2005년9월16일
12    력사를 캐는 심마니 (김희관) 댓글:  조회:3654  추천:34  2011-03-10
풍향계   력사를 캐는 심마니 김 희 관 (전 연변TV방송국장)        옛날부터 산삼을 캐는 사람을 심마니라고 한다.       필자는 력사학자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우리민족의 력사를 발굴하여 TV대하력사다큐멘타리 <연변아리랑>과  < 혈흔>을 제작한 서봉학프로듀서에게 <력사를 캐는 심마니>라는 별호를 달아주고 싶다 .      올 가을 연변TV-1채널에서 방송된  TV대하력사다큐멘타리 <혈흔>(18집)은 해방전 우리나라 관내 여러 성, 시에서 항일과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한 우리민족 선렬들의 피자욱 어린 력사를 발굴하고 영상화하여 시청자들에게 방송한  하나의 대작이다.       <우리민족선렬들의 피어린 력사는 황하수처럼 흘러갔지만 그들의 위대한업적을  몰라주면 한평생  미안하지 않겠는가 ? >  <혈흔>제작인의 소박한 제작동기이다 .     <혈흔>제작진은 2002년 3월부터 금년 6월까지 산해관이남의 12개성, 시의 50여개 도시와 혁명근거지를 찾아다니면서 간난신고 끝에 많고많은 우리민족 선렬들의  피어린 혁명투쟁 업적을 발굴해냈다.  이렇게 발굴해낸 보귀한 력사자료에  대하여 력사학자들은 관내 우리민족선렬들의 력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방면에서 중대한 발견과 진전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연변아리랑>(40집, 1999년방송)과  <혈흔>의 성공은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님과 연변력사연구소 권립소장님 등 여러 저명한 력사학자들의 전적인 지지성원과 구체적인 지도와 갈라놓을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력사학자들과  <력사를 캐는 심마니>의  협력의 본보기이다.   <연변아리랑>과  <혈흔>은 선렬들과 시청자들의 뜨거운 눈물의 만남이였다.  시청자들은 우리민족의 력사를 영상으로 시청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시청자들은 편지를 제작진에 보내오거나 전화를 걸어와 축하를 하고 많은것을 배웠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훌륭한 력사가 있는것에 대해 자호감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혁명선렬들의 유가족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제작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력사와 영상의 만남은 고이 잠들었던 선렬들을 살아숨쉬게  하였다. <연변아리랑>과 <혈흔>은  꽃피는 봄이 오면 사라지는 광야의 눈보라가 처럼 잊혀진 우리민족의 항일과 민족해방사를 생동한 영상으로 회생시켜 시청자 가정의  안방을 찾았을 때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혁명전통교양이였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중국력사상 가장 위대한 애국주의력사학자였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위해 그야말로 <만권의 책을 읽었고 만리길을 걸었다>.  그는 한무제를 따라 많은 지방을 답사하였고 또한 한무제의 명을 받고  운남, 사천, 귀주 등지에 파견되여 당지의 천문지리, 력사민속을 고찰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기원전 104년부터 <사기>를 쓰기 시작하여 10여년이라는 세월의 고생끝에  중국력사상 황제로부터 한무제시대에 이르는 약 3000년의 중국력사를  <사기>에 담았다. 그러고 보면 사마천도 <력사를 캐는 심마니>였다.     <민족사>는 우리민족의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지금 우리가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에 두고온 력사는 아직 다 정리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력사는 아직  발굴과정에 있다.  <민족사>는 여러방면의 력사들로 구성되여있다. 례하면 중국조선족의 이민사, 혁명투쟁사, 민족자치사, 문화예술사, 경제발전사, 대외교류사, 민속생활사 등 이다.  몇십년래  력사계에서는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하다한 저서와 논물을 발표했다.  그러한 성취가 있었기에 분명한것은 오성붉은기에는 우리민족선렬들의 선혈이 숨배여 있으며 우리는 중화민족의 떳떳한 일원이며 연변은 우리가 피와 땀으로 가꾼 대지라는 것이다.     력사는 거울이다. 우리는 <민족사>라는 거울앞에 자주 비추어 보아야 할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빛나는 력사를 가르쳐주어 그들이 그 어디에서 살아가더라도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전통, 언어, 문화, 풍속습관과 공동한 심리소질을 확보하면서 대대손손 선진민족으로 살아가게 해야할것이다.   20세기50년대 말기부터 당중앙의 배려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지도하에 착수한 <조선족간사>는 10년동란기를 거쳐 80년대 중기에 와서야 출판되였다.  앞으로  필자의 한가지 간절한 소망이라면 력사학자들과  <력사를 캐는 심마니>들이 일심 협력하여 <중국조선족통사>를 하루 빨리 출판하는것이다.                                                    2005년12월5일
11    문화강산 댓글:  조회:3383  추천:40  2011-03-09
문화강산 -김희관  (원 연변문화국 국장) “문화강산”을 가꾸고싶은 심정으로 필을 들었다. 자고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21세기 첫10년 세월이 흘러가고있는 지금 우리의 강산을 두루 밟아 보면 먹고 살기 바쁘던 세월은 다 흘러가고 이제는 음식문화, 복식문화, 주택문화, 건강문화. 영상문화 등 눈앞이 현란할 정도로 많은 문화를 “먹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여가고있다. 새로운  조류속에서 우리는 당연히 <문화강산>을 가꿔 나가야 할것이다.   <문화강산>을 가꾸려면 우선 대중문화의식을 키워야한다. 30여년의 개혁개방속에 우리의 의식주와 생활환경 등 물질문명 면에서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신문명과 문화수양 면에서는 아직  따라오지 못하고있다. 앞으로는 사람마다 한백년 살아 가야 하는데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중문화의식을 심어주는데는 가정교양과 신문TV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한 사회교양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강산>을 가꾸려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창의력은 무한한 상상력과   새로운 기술을 부단히 접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것이다. 문화는 시대의 맥박이고 색채이다. 하기에 문화의 생명력은 시대의 맥박과 색채를 부단히 디자인하고 연출해내는 창의성에 있다.   최근에는 3D 영화<아바타>가 흑백영화에서 칼라영화를 거쳐 디지탈영화에까지 진화한 영화를 또 한차례 <혁명>해서 3차원 립체영상로 승화시켜 세계 영화시장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지난 5월19일에는  국제육상대회가  실시간  3DTV를 통하여 생중계 방송되면서 역시 흑백TV, 칼라TV, 디지탈TV에서 또 한걸음 더 나갔다. 요즘 세계 대도시들에서는 아이패드를 주문하고 구입하느라고 야단법석이다. 이러한 최신 문화현상들은 창의력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소프트파워> 를 키워주는 비방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3D영화 <아바타> 감독 제임스 캐머린은 원래 기계공을 하면서 물리학을 배웠고 자동차운전기사를 하면서 치과의사들의 자금을 모아 영화감독을 배웠다. 그 과정에 그는 자신의 물리학지식과 영화예술을 부단히 접목시켜 왔다. 그 유명한 영화<타이타닉>도 그의 성공작이다. 그는 바다에 실제 타이타닉 크루즈와 같은 크기의 세트를 세우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연출해 전세계를 감동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번에는 6년 동안 광학, 디지털과 상상력이 넘치는 스토리 등 영화예술을 접목시키며 3D영화<아바타>을 성공적으로 제작했다. 영화<아바타>는 전세계에서 28억딸라라는 수익을 올리는 기적을 낳았다. 얼마전 그는 <상상력과 기술이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한다>라는 특강에서 <3D는 모든 형태의 콘텐츠에 가치를 더한다>고 단언했다.    영화<아바타>에 대해 국내 권위적인 감독 장예모는 < 영화<아바타>는 영화력사상 절세의 대작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아직 아득하게 뒤떨어져있다. 중국의 영화가 발전하려면 창의적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예술을 알고 현대정보화기술을 숙지한 복합적이고 외향적인 인재를 양성해내야 한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문화는 유서깊고 두터워서 많은 콘텐츠를 세계에 보여줄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속에서 진수를 찾아내여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형상화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 우리가 무형문화재의 발굴과 정리에 큰 힘을 쏟아붓고있는데 이러한 작업도 긍국적으로는 창의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본다.   지난 세월 우리도 수많은 훌륭한 문화예술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아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다. 앞으로 우리가 새시대에 발맞추어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정보기술(IT)과 문화기술(CT)를 잘 활용한다면 문화예술적 품위와 경제효익이 높은 영화, TV드라마, 다큐멘타리, 뮤지컬, 애니메이션, 테마파크, 캐릭터 등을 국내외에 출품할수 있다고 확신한다. 문화예술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하고 그들의 창작할동을 적극 지원해야 할것이다. 특히 시대의 요구에 부흥하고 개척정신이 있으며 기획과 경영에 능란한 인재를 많이 키워내야 할것이다.   <문화강산>을 잘 가꾸려면 국제적인 문화예술교류사업을 활발히 전개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인 문화시장을 겨냥하여 문화산업을 육성하고 창의적인 문화예술 산품을 개발하여 우리만의 문화예술브랜드로 문화교류와 문화무역을 추진해야 할것이다. 또한 외국의 문화예술그룹들이 우리를 찾아와 교류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광범한 대중이 세계의 문화예술을 앞마당에서 직접 체험하게 해야 할것이다. 최근 신화넷 홈페이지에서는 <지금은 세계적범위에서 문화”전쟁”이 진행중이다>라는 <환구>잡지의 문장을 소개한바 있다. 이 문장은 세계는 이미 문화전쟁의 시대에 돌입했다. <문화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나라는 아직은 없다는고 전재하면서 그 원인과 성과 그리고 우리가 배워할 과제를 제시하고있다.   문화는 민족의 유전자가 피여나는 터전이다. 하기에 문화을 잃으면 민족도 없다. 필자는 <아리랑>,<진달래>,<장백산> 등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이 국내외에서 찬사를 받는 문화예술경전으로 다시 태여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터전이 수려하고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살거리가 많은 <문화강산>으로 탈바꿈하게 될것이고 그러면 국내외벗들이 구름처럼 몰려올것이다.   2010-6-8    
10    천년송 댓글:  조회:3338  추천:21  2011-03-09
천년송 -김희관(원 연변문화국 국장)                                지난해 10월 31일 아침, 어제 저녁부터 내리던 함박눈이 아침까지 계속 내리면서 온누리가 새햐안 세상으로 변했다. 늦가을에 첫눈이 이렇게 많이 내린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나는 카메라배낭을 지고 등산화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고 연길시 소하룡 동산으로 천년송을 찾아 달려갔다.   천년송은 밤새 내린 함박눈을 한송이도 헛되이 하지 않고 모두 내려받아 커다란 눈갓을 쓰고 우뚝 서 계셨다. 아무도 없는 이 동산, 산아래 마을도 강 건너 성자산도, 저 멀리 연길시가지도 모두 눈안개속에 사라진 이 동산에 이렇게 조용히 우뚝 서있는 천년송을 보는 순간, 아, 당신은 과연 산신령이외다… 하고 저절로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래서 숙연히 합장을 하고 천년송주위를 천천히 도보하면서 속으로 중얼댔다.   천년송이시여, 당신께서 천년을 장수하셨다고 나라에서 명찰을 달아주셨네요. 당신은 산신령이 되시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당신의 년륜이면 춘향과 이도령이 백년가약을 맺던 그 단오날을 기억하실것이고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에게 절을 올리고  임당수로 떠나던 그날을 기억하실것이고 흥부네가 부자되고 놀부네가 망신을 하던 그날도 기억이 생생하겠네요. 당신은 진짜 세상을 굽어보는 산신령이외다…   천년송의 수령은 년륜으로 기록된다. 나무는 원래 목질부와 인피부 사이에 형성층이 팽창하면서 나무가지가 굵어져 자라나는데 그것이 한해를 지나면 년륜으로 기록이 된다. 가물거나 척박한 해이면 년륜문양이 가늘고 수분과 영양분이 충족한 해이면 년륜문양이 좀 넓게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러니 나무의 년륜을 보면 지난 세월의 흉풍작을 짐작할수 있다.   우리에게도 년륜이 있다. 우리가 중국조선민족으로 살아온 년륜이 이제는 150여년이 됐다는 얘기이다.  초창기의 년륜을 들여다보면 조상들이 <월강곡>을 부르면서  이 땅으로 이사와 화전농사을 지으면서 정착을 하던 고난의 세월이였다. 그래도 뒤이어 서전서숙 명동학교에서 낭낭한 한글 읽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드디여 청년학생들이 일송정에 모여 일제의 탄압에 맞서는 <3.13반일시위>의 용기를 키웠다. 이러한 년륜은 청산리항일대첩, 항일련군, 조선의용군, 동북민주련군 , 해방군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년륜을 쌓아 우리는 비로소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였다. 건국전 우리의 력사는 참으로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는 찬사에 손색이 없는 년륜을 쌓아왔다.   건국이래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하면서부터 우리는 <교육과 문화가 발달한 민족>, <가무의 고향>,  <근로하고 지혜로운 민족>이라는 참으로 오색찬란한 년륜을 새겨왔다.   개혁개방 30여년의 년륜을 돌리켜보면 우리는 새로운것을 배웠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였고 새로운 문제에도 봉착했다.   앞으로 우리의 력사적 사명이라면 천년송처럼 년륜을 장원하게 그려가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민족의 년륜을 그려갈수 있는 좋은 붓대들이 있다. 례하면 민족자치, 선도구경제개발전망, 민족교육과 문화진흥사업, 정보화와 신지식개발사업, 참신한 인재양성 등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이 과학적발전관에 따라 실천에 옮겨진다면 앞날은 찬란할것이다. 물론 겨레들이 화목하고 민족단결을 도모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것도 필수적인것이다.   지금 우리는 연변과 전국 각지에서 나아가서는 세계 각국에서 살아가고있다. 이제는 우리의 집집마다 국내외에서 류학하거나 사업을 하는 식구가 있어 매일 인터넷을 떠날수 없고 화상채팅이 반갑기만 한 세월이 됐다. 그러니 고향을 떠나 국내외에서 살아가는 겨레들이 별처럼 다이야몬드처럼 살아가는데 대해 필자는 경의로운 마음을 금할수 없다. 그러면서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을 위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리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가 겨레의 생태문화를 더욱 잘 개발하여 고향의 년륜을 곱게곱게 새겨가노라면 <강남 갔던 제비가 날아오듯이>  더 훌륭한 인재, 더 참신한 과학기술, 더 많은 자본이 서서히 고향을 찾아올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다 같이 우리의 년륜을 새겨가는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천년송처럼 년륜을 새겨가노라면 겨레들의 <천년아리랑>소리가 울려퍼질것이다. 2010-5-11
9    프로필 댓글:  조회:2634  추천:49  2011-03-09
김희관  金熙宽 1943년 3월20일생 흑룡강성 상지현 모아산 출생   칼럼니스트   연변대학 농학원 졸업 북대황 853농장 농예사 연변일보사 기자 주위선전부 신문문화과 과장 연변주정부 문화국 국장 연변TV방송국 국장 연변국제PR협회 상임부회장 연변 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 고문   1984년<연변의 여름>예술축제 총기획 및 총감독 1985년 미국방문공연 연변예술학교예술단 단장   연변TV <뉴스><다큐><드라마><음력설야회> <가요무대> 등 총기획 총감독 TV대하다큐멘타리<피와 땀으로 가꾼 대지(연변역사100년)> 총기획 연변TV<문화광장> 연변라디오<아리랑의 향기> 등 다수 프로 총기획 연변TV 주덕해탄생100주년 대하다큐멘타리 <주덕해> 고문   2000년—2001년<청산리대첩기념비> 건설공정현장 총감독   <중국 연변조선족100년 력사화책> 주필 <당대 중국조선족 화책> 주필 <당대 중국조선족 인물록> 주필 등   여행 등산 포토 록색농업에 심취   E-mail : kxk1943@hotmail.com
8    아기울음소리 (김희관) 댓글:  조회:3402  추천:31  2011-02-23
아기울음소리    -김희관 아기울음소리를 듣기싶다. 오래동안 아기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설명절에 아빠트 어느집에서 흘러나오는 아기울음소리를 들으니 아름다운 동요를 듣는 기분이다. 작년에 길림성 인구및계획생육조사단이 우리 주에서 조사를 한 결과 조선족인구가 마이나스성장을 하는 상황이 엄중하다고 했다. 우리의 민속사를 살펴보면 자고로 조상들은 “기자신앙(祈子信仰)”을 첫째로 중히 여겼다. “기자신앙”이란,  자식이 없는 집안에서 자식, 특히는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행하는 신앙을 말한다. “기자신앙”은 기자행위로 이어졌는바 크게는 사찰이나 성황당 아니면 명산옥천을 찾아 비는것,  장닭과 잔대, 밤 등을 삶아 먹는것,  몸에 기자부(祈子斧)나 장도를 지니는것 등이다. 고중시절 필자의 한 동창생은 3대 독자였다. 그는 할머님께서 천도끼를  벼린 덕분에 겨우 태여났다고 하면서 그 “천도끼”를 가보로 간직하고있었다.   천도끼는 “기자부(祈子斧)”의 일종인데 엄지손가락보다 좀 작은 크기의 무쇠도끼 3개였다. 아들 셋을 상징하는 천도끼 3개는 청실홍실로 꿰매여 정교한 나무함에 고이 담겨있었다. 동창생은 할머님의 옛말을 이렇게 전했다. 시어머니가 앞으로 후손들이 독자신세를 면하게 하기 위해 며느리에게 아들 여럿을 낳아주기를 바라는 지극정성을 담아 천도끼를 벼렸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천도끼를 벼르기 위해서는 천신만고를 치러야 한다. 매일 이른새벽 시어머니는 샘터에 나가서 남들 먼저 곱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어 올린다음 정한수를 떠놓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향하여 큰절을 올린다. 그후 그는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면서 바늘을 동냥하기 시작하는데 바늘은 반드시 한집에서 “복바늘과 화바늘” 두개씩 동냥해야 하고 그 집이 멀어지면 화바늘은 내가나 심산에 버리고 복바늘만 집에 가져다 복바늘함에 고히 보관한다. 이러한 복바늘은 며느리를 들이기 100일전에 반드시 천개 이상을 모아야 하며 또한 잔치날 한순전에 이름난 야장을 찾아가 천개의 복바늘을 내놓고 사연을 고한후 천도끼를 벼러달라고 부탁을 한다. 잔치날 저녁 아들과 며느리가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시어머니가 소반에 천도끼함을 들고 신방에 들어가 며느리의 허리에 청실홍실을 드린 천도끼를 처매여주면서 적어도 아들 셋은 낳아달라고 덕담을 한다. 며느리가 시어머님께 고히 절을 올리고 바랜후 신랑은 신부에게 비슷한 덕담을 하면서 천도끼를 풀어내여 신부의 베개밑에 고히 넣어준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어도 동창생은 결국 독자로 태여났다. 후날 그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필자가 농촌에 취재를 다닐 때 야장을 만나면 천도끼에 대해 물어봤는데 한 야장은 옛날에 할아버지가 수레바퀴철을 찍어내서 “천도끼”를 벼리는것을 본적은 있다면서 복바늘을 모으는것은 정성이고 바늘로는 천도끼를 벼릴수 없다고 했다.지금 세계의 여러 나라와 민족들이 저출산, 로령화라는 사회적난제에 직면해있다. 우리도 저출산,  고령화가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지 몇해 된다. 저출산은 대체로 독신자들이 늘어나거나 만혼을 하면서 생육을 거부하거나 혹은 직장일이 너무 바빠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 초래된다. 더욱 중요한것은 경제적 부담과 어려움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부부가 국내외에서 얼마동안씩 떨어져 살고있다. 또한 우리에게 예비엄마들이 부족한 점도 심각한 문제이다. 한가지 홀시할수 없는것은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가공식품의 악영향 등 원인으로 하여 청년부부들의 생육건강에 엄중한 부작용이 있다는것이다. 하기에 저출산, 고령화를 극복하기 위한 맞춤형복지를 대폭 늘일 필요성이 절박하다. 지난 2월 15일자 “연변일보”에 “주내 54개 향진 중심유치원 건설”이라는 뉴스를 보면서 다소 위안을 받았다.1952년 5월, 주덕해서기의 “부녀들을 가정울타리에서 해방시켜 사회에 진출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육원과 유치원을 창설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주부련회 김찬해주임은 쏘련의 선진적인 보육경험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연변보육원과 6.1유치원을 창설했다. 주덕해주장은 조선의용군 제3지대시절 부하였던 주당위 선전부 간부 김정순을 연변보육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연변보육원과 6.1유치원의 선진경험은 전국부련회계통에서 찬사가 자자했다.  그때 연변보육원에서 자란 애기들이 지금은 벌써 60세가 넘었고  6.1유치원 제1기 졸업생중에는 연변대학의 전임 당위서기 김희정, 동북아연구원 전임 원장 박승헌도 있다. 김정순원장님도 이제는 86세 할머님이신데 즐거운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  그때는 “모성영웅”을 장려하는 사회풍조여서 “칠선녀의 아버지”, “열두남매의 어머니”가 영광스러웠다. 우리가 인구 마이너스성장에 관한 뉴스를 보기 시작한지 벌써 몇년이 된다. 이렇게 백년후이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되는건가?  참으로 기우의 심정이다. 필자는 조선족 엄마들이 아기를 둘은 물론이고 둘이상 낳아도 근심없이 키울수 있게 배려해주었으면 하는 간곡한 심정이다.  앞으로 아기울음소리가 동요대합창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7    연길다리(김희관) 댓글:  조회:7222  추천:59  2010-12-25
연길다리김희관 원 연변주문화국 국장12월1일 <연길다리>가 100년만에 <연길대교>로 다시 태여났다. 개통 첫날이라 구경군들이 하도 많아서 시민들의 <연길다리>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대교>가 아직은 미완성이라 앞으로 부속시설과 주변 공원조성, 봇물가두기 등 공사를 완공하면 디자인이 괜찮은 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에 새로 건설된 <연길대교>는 손자벌이다. 일찍이 1909년 2월 연변변무공정국의 감독하에 처음으로 부르하퉁하에 목조다리를 놓았는데 그다리를 <연평다리>라고 불렀다. 그 때는 하북에 주민들이 많았기에 습관적으로 그냥 <하남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1934년 <연평다리>는 아쉽게도 큰홍수에 떠내려갔다. 그래서 림시방편으로 걸쳐놓은 나무다리가 하남다리 역할을 했다.1934년부터 일위통치자들은 군사전략의 수요에 따라 철근콩크리트구조로 된 연길다리와 공원다리를  설계하고 건설하기 시작했다. 1936년6월에 완공된 <강평다리>는 다시 <연길다리>로 바꿔 불렀다. 1957년에는 <연길다리> 서북쪽 기둥이 홍수에 내려앚는 사고가 발생해 한동안은 불편했다. 1986년 <연길다리>는 폭을 넓이는 보수공사을 했다. 올해 초부터 시공한 <연길다리>는 사상 최대규모의 <연길대교>로 재건됐다.<연길다리>는 유서깊은 다리이다. <연길다리>는 묵묵히 누워서 연길의 력사를 100년동안이나 치켜봤다. 청나라말기의 연길, 손문시대의 연길, 일제시대의 연길 그리고 해방후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길과 연길사람들의 변천사를 모두 지켜봤다. 만약에 백년전부터 연길다리에 CCTV가 설치되였더라면 그 보다 더 좋은 영상력사자료는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하남다리의 몇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50년 4월하순의 하루 필자는 양마차를 타고 연길다리를 건너 연길에 입성하였다.  그때는 아버지가 중공연변지위 서기 겸 전원이신 주덕해동지의 비서로 계셔서 어머님이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 흑룡강성 상지에서 연길로 이사오게 되였다. 우리가 연길역에 내려 지위에서 마중나온 양마차를 타고 하남다리를 건너는데 여덟살나이의 필자는 <아, 이렇게 큰 다리…>하고 입을 못 다물었다. 상지 하동에서는 불과 50여메터되는 보동다리를 건너다가 이렇게 긴 다리를 양마차를 타고 건너게 되니 더없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날의 놀라움과 기쁨은 평생을 잊을수 없다.지난 세월 매일 아침이면 수많은 로동자들이 자전거 짐받이에 도시락을 끼우도 하남다리를 건너 여러 공장으로 출근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였다. 그때 그들은 우리의 믿음직한 산업대군이였다. 어느해인가, 하루는 수많은 당나귀들이 새하얀 주둥이를 가쭌하게 이어대고 집채같은 보일러시설을 끌고 연길다리를 건네는 보습이 너무나 기특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단결은 힘>이라는 그런 장면이였다. 그때 카메라가 있었더라면 좋은 사진작품을 남겼을것이다.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잊을수 없는 장면은 1982년 6월, 경애하는 주은래총리께서 하남다리를 오가시면서 우리의 삶은 보살펴주시던 나날이다…지난 30년 세월, 필자는 세상의 많은 유명한 다리를 건너면서 즐겼다. 국내의 장강대교와 황포대교는 물론이고 미국 센프랜시스코의 금문교(골든 게이트브릿지), 뉴욕 맨하탄의 부루클린브릿지, 홍콩의 청마대교,조선평양의 대동강다리, 한국의 한강다리, 인천대교, 도꾜만의 레인보우브릿지,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함께 유명한 하버브릿지 등이다. 지금은 바다에 몇십키로메터의 다리가 건설되여 섬들을 이어가는 세월이라 다리의 공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다리는 도시교통의 요충지이다. 여러갈래에서 몰려온 사람과 차량들이 다리로 빨려드는 광경은 도시의 일상풍경이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사람과 차량들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즐겁게 건널 수 있어야 한다. 아직은 화석연료시대여서 차량들은 매연을 내뿜으면서 뻔질나게 질주하지만 인행도를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는 아직은 고역이다.  앞으로 전기차시대가 온다다고 하니 한동안을 내심하게 기다려야 하겠다. 다리는 도시문명의 중요한 상징이다. 국내외의 도시들을 돌아보면 다리가 있는 도시에는 강물이나 바다물이 있어 공기가 맑고 습윤하며 활기가 넘친다. 도시는 문명한 시민, 풍부한 물자원, 아름다운 도시 디자인, 활발한 시장경제 그리고 다채로운 민속풍경과 문화예술로 하여 유명해지는것이다. 그러한 도시들에는 유명한 다리와 관련되는 수많은 스토리가 생겨나고 전해진다. 그러한 스토리들은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로 승화되여 보석같은 문화예술진품으로 남는다. 미국 할리우드의 경전적 영화 <화테루브릿지(魂断蓝桥)>는 영국 런던의 화테루다리를 배경으로 세계대전이 연인들에게 가져다준 비극을 비장하게 그려냈다.<연길다리>가 이제는 <연길대교>로 다시 태여났다. 연길이 그만큼 번영해졌다는  상징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국내외 귀빈들이 <연길대교>를 건너 우리를 찾아오기를 바라며 국내외에서 살고있는 <연길사람>들이 고향나들이 자주 하기를 바란다. 또한 누군가 <연길다리>라는 홈페이지를 열어 <연길다리>가 사이버다리가 되여 월드네트워크를 구성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100년동안 <연길대교>에서 좋은 드라마 스토리가 엮어지기를 기대한다.
6    순진한 사랑 (김희관) 댓글:  조회:4227  추천:49  2010-11-24
순진한 사랑김희관 전 연변주문화국 국장영화 “산사나무아래(山楂树之恋)”는 올해 영화감독 장예모(张艺谋)가 출품한 야심작이다. 9월16일부터 전국에서 상영되기 시작해 반응이 뜨거웠고 10월초에는 부산영화제에 개막식 상영편으로 추천되여 관중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장예모감독은 이 영화의 남녀주연배우를 데리고 참석해  “부산영화제는 아세아 최고 영화제”라고 극찬했다.영화 “산사나무아래”는 애미(艾米)의 소설 “산사나무아래(山楂树之恋)”를 각색한 영화작품이다. 장예모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한 초심은  “력사상 가장 순진한 사랑” 을 그려내는것이라고 했다.“문화혁대혁명”이라는 암울한 시기, 현성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정추라는 녀학생이 혁명전통교재를 쓰기 위해 해방전 혁명렬사들이 산사나무아래서 장렬히 희생됐다는 농촌마을에 하향한다. 정추는 생산대장의 집에 투숙하면서 로싼(老三)이라는 지질대 청년을 알게 된다. 로싼은 정추의 습작과정에 잉크가 새는 만년필이며 희미한 전등불까지 신경써주면서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다. 정추가 학교에 돌아온후 뜬소문에 로싼은 성도회지 고급간부의 자식이며 애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로싼의  “애인”설은 뜬소문이였고 오히려 미적인 향수를 추구하던 로싼의 어머니가 세수를 깨끗히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리고 고운옷까지 입고 자살을 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얼마후 학교 선생인 정추의 어머니가 정추와 로싼이 사랑의 늪에 빠진것을 발견하고 호된  “심문”을 한다. 엄마가 정추와 로싼을 다  “심문”해 봐도 남은것은 남자랑 손만 잡아도 임신하는줄 아는, 키스 한번 못해본  “순진한 사랑”뿐이다. 그때는 출신이 서로 다른 청춘남녀의 “순진한 사랑”마저 용납못하는 세월이라 “우파”인 남편은 두말할것 없고 자신도  “로동개조” 중인 어머니는 가슴이 더 아파한다.얼마후 지질탐사를 하던 로싼이 혈병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로싼은 정추의 장래를 위해 자기를 영원히 감추기로 작심하고 조용히 정추의 곁을 떠나 성도회지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인다. 어느날 정추가 교학을 하는데 성도회지에서 짚차를 보내여 정추를 큰병원으로 안내한다. 군부대 수장인 로싼의 아버지가 정추에게 로싼을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사실 정추와 로싼은 몇번  “순진한 사랑”의 스토리를 엮어왔지만 정추가 로싼을 어떻게 호칭할지에 대해서는 약속한적이 없었다. 하기에 정추는 로싼이 운명하는 시각에 그저 하염없이  “나 정추예요!” 를 련발한다. 로싼은 마지막 뜨거운 눈물을 남기고 영원히 떠나간다. 필자는  “순진한 사랑”을 믿는다. 그 동란의 세월, 필자는 북대황 한복판에 있는 옌워도에서 몇년간 농사를 지었다. 어느날 우리 련대에서는 북경에서 온 국민당 장군의 아들과 당지 빈농의 딸이  “순진한 사랑” 을 꽃피우는  “사건”이 터졌다. 모두들 말렸다.  “너희들은 참 좋은 청년들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부부가 되여 살아간다면  너희들뿐만아니라 너희 자식들까지 한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갈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순진한 사랑”은 그칠줄 몰랐다. 몇년전 강소성 무석에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바로 그들 부부였다.  “그 시절에 많이 관심해 줘서 감사해유… 우리 행복하게 살고 있어유!” 이 영화에 끌린 또 한가지  리유는 영화의 주제곡이 소련가요 “산사나무”여서 반가웠다. 가요 “산사나무”는 지난세기 50년대부터 중학생들이 즐겨부르던  “카츄사”,  “오솔길”,  “축배”,“귀환병”,“모스크바교외의 밤”   등 소련가요중의 한곡이다. 그러나 암울한 동란의 시대에는 금지곡으로 되였다. 지난 80년대 “문예의 새봄”을 맞으면서 한때는 가수들이 소련가요를 많이 불렀는데 요즘은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미국이나 외국의 가요가 많이 흥행하고 있어 참말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드카를 마시다가 불시에 위스키를 마시는 기분이다. 이번에 영화에서 가요 “산사나무” 를 들을 때는 옛날을 추억하는 기분이다.영화는 예술이다. 예술은 문화의 꽃이다. 오직 두텁고 비옥한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 예술은 곱게 피여날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예술에서 아주 “평범” 해 보인다. 시나리오는 소설에서 개작되였고 스토리의 구성도 그렇게 놀라운것이 없을 정도로 평범해 보인다. 영화의 몽타쥬 기법도 특별한것이 거의 없이 엮어내려가는 양상이다. 더우기 중간중간 자막으로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는것은 마치도 챠프린의 무성영화를 보는듯 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록영화같은 풍격이라 할가. 바로 그속에  “순진한 예술”이 있었다. 또한 전국의 7천여명 청순남녀중에서 뽑았다는 정추역을 맡은 녀배우는 영화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고중3학년 녀학생인데 대학고시를 포기하고 이 영화에 뛰여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순진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5    련애편지 (김희관) 댓글:  조회:4232  추천:45  2010-10-16
련애편지 김희관 <련애편지>라고 제목을 써놓고 씩 웃었다. 너무 촌스러운 제목이여서다. 사실 <련애편지>란 낱말은 이제는 소설에서나 찾아봐야 하는 유산이 되였다. 옛날 학창시절 한 동창생이 고민끝에 큰 결심을 내리고 용기를 내여 짝사랑하는 녀학생에게  <련애편지> 한통을 부쳤는데 며칠후 답장이 두곳에서나 왔다. 편지를 우편국에 달려가 부치는 그날 마침 엄마에게도 잘 있다면서 <돈을 좀… > 하고 편지를 같이 부쳤는데 그만 편지장을 바꿔 봉하는바람에 엄마에게는 천기를 들키고 그 녀학생에게는 돈을 좀 달라는 호소문이 된 격이였으니 야단이 난것이다. 소통은커녕 큰 화를 불렀기때문이다.21세기 젊은이들은 자유분방하게 데이트를 통해 애정표현을 하거나 아니면 채팅이나 문자메세지로 얼마든지 저희들의 애정을 표현하니까 구태여 또박또박 <련애편지>를 써서 우편국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다. 오늘 새삼스럽게 <련애편지>라는 유산을 들고 나온것은 우리 시대의 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사실 <련애편지>는 사랑하는 련인들끼리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더없이 좋은 소통수단이다. 오늘 필자는 유산이 된 <련애편지>의 의미를 저변까지 넓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례하면 부모형제, 사랑하는 련인, 친구와 동창생 그리고 동업자들에게 띄워보내는 <사랑의 메세지>로 삼는것이 어떻겠는가를 제안한다.며칠전 한국법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지날 7월 현재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인구가 38만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미국, 일본, 카나다, 유럽, 호주, 남미, 중동 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겨레들을 주먹구구해보면 아마  50여만명이 해외에 진출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러니 200만 중국조선족인구의  4분의 1이 해외에 진출했다는 얘기이다.국내에서는 많은 동포들이 연변을 비롯한 동북3성의 전통적인 집거지를 떠나 북경, 상해, 산동반도, 심수 등 지역에 진출해 새로운 집거지를 창설했으니 국내동포들의 분포판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동포들이 이렇게 국내외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위해서나 가정의 안녕, 친구간의 우정 그리고 사업상의 윈윈전략을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원활한 소통이 매우 필수적이다.소통은 의사소통을 말하는것인데 다른 말로는 커뮤니케이션 혹은 휴먼네트워크라고 할수 있다. 의사소통이란 다른 사람과 믿음과 정보를 서로 나누는것이다. 의사소통은 상호간에 언어로 전달되는 정보뿐만아니라 눈빛, 몸짓, 손짓, 자세, 침묵까지도 포함한다. 지금은 속달우편, 택배, 전화, 핸드폰, 인터넷 등이 있어서 의사소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사실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는 의사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의사소통이 잘되면 부부사이, 부모형제, 련인들이 천해지각에 떨어져 살아도 감정세계에 골이 생기지 않고 오해도 초래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이웃사촌>들은 이웃에 살면서 의사소통이 잘되니까 사촌 맞잡이로 사이가 좋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면서 의사소통을 잘 안되면 친혈육끼리라도 멀어지기마련이다. 그래서 정은 줄수록 두터워진다고 한다.의사소통에는 하향소통이라는 <내리사랑>이 우선되여야 할것이다. 어른이 자손과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동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것이다. 직장에서는 상의하달이라는 의사소통으로 상관이 하급에게 명령계통에 따른 지시적 의사소통이 중심을 이루고있다. 특정 업무를 지시하고 조직, 절차 및 실행에 대한 정보를 주며, 부하의 업무성과에 대해 언급하며  조직목표를 주입시키는데 목적을 둔다. 이런 방식에서는 게시, 기관지, 작업지시서, 연설 등의 매체를 리용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소통에는 비록 엄격한 조직적요소가 있지만 역시  하급에 대한 상급의 믿음과 기대가 안받침되여야 할것이다.다음은 횡적인 의사소통이다. 부부사이, 형제자매사이, 동창생사이, 직장동료사이에서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류하고 공유하면서 함께 성취하는것이야말로 횡적인 의사소통의 진수라 하겠다.상향적인 의사소통도 중요하다. 이러한 의사소통에는 민주적이고 화합의 기분이 보장되여야 가능한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말을 잘 들어주고 선배가 후배의 정서를 잘 헤아리고 상급이 하급의 창조성과 상상력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기분과 환경이 조성되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래야 하급과 상급의 의사소통이 잘되여 모든것이 형통할것이 아니겠는가.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는 오늘, 사랑하는 겨레들에게 <련애편지>를 많이 보내주는 신사숙녀들은 찬양을 받을것이다.
4    유대인의 지혜 (김희관) 댓글:  조회:3407  추천:71  2010-09-16
유대인의 지혜김희관 원 연변문화국 국장맑스, 데이비드 리카도,아인슈타인,프라이드,키신저,올브라이트, 스필버그,피카소, 채플린 등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유명한 유대인 100인 리스트를 들여다 보면 유대인들은 인류사회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것을 금방 알수 있다.2009년10월의 통계에 의하면 력사상 유대인 노벨상 수상자가 180명을 넘었다. 하여 세계인구의 0.19% (2007년 전세계 유대인인구 약 1,800만명)밖에 않되는 유대인의 노벨상 수상자가 22.3%를 점했고 그중 경제학 노벨상 수상자가 무려 42%을 점하는 기적을 낳고 있다. 뉴욕은 유대인 자본의 본산지이며 유대인의 금융이 미국과 세계의 금융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허구가 아니다. 9.11테러에 붕괴된 뉴욕 세계무역센터는 바로 유대인 자본의 본산지 상징이였다. 하기에 옛날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지금은 모든 길이 뉴욕으로 통한다. 유대인들은 제2차세계대전이후부터 근 2천년전에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되찾고 두차례나 국적법을 반포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맞이하고 있다.유대인은 어찌하여 이렇게 능란할가 ? 유대인들은 사람마다 남다른 지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이런 옛말을 듣는다고 한다.   < 얘야, 집이 불에 다 타버리면 너는 무었을 가지고 살아갈거니 ?> 만약 아이가 돈 아니면 진주보석따위를 챙겨서 살아가겠다고 대답한다면 빵점을 맞는다. 엄마는 아이에게 < 얘야, 지혜를 살리면서 살아 가거라!> 라고 타이른다. 유대인의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것일가?  탈무드는 바로 유대인들의 유구하고 거대한 지혜의 보고이며 교육체계이다. 탈무드는 1만 2천 페이지의 방대한 경전이다 .기원전 5백 년부터 기원후 5백 년까지의 구전을 10년동안 2천명의 학자들이 편찬한 것이다 탈무드는 유대인 5천년의 지혜이며 모든 정신의 샘터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경전은 순수한 학자들에 의해 문화, 도덕, 종교적 전통을 전승해 왔다. 그러면 탈무드란 무엇일까? 탈무드를 책이라고만 말할수는 없다. 탈무드는 위대한 문헌이며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의 모자이크다. 또한 탈무드는 엄연한 문학이다. 탈무드는 법전은 아니지만 법을 설명하고 있고 력사책이 아니지만 력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인명사전도 아니면서 여러 인물에 대해 설명을 했다. 또한 인생이 갖는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5천 년래 유대인 지혜의 보고이다. 이스라엘 제3대왕 솔로몬은 역사상 <지혜의 왕>으로 불려왔다.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탈무드에 대한 교양을 한다. 또한 학교에서 리성적인 교육을 받는다. 유대인들은 사회교양에도 무척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교육의 핵심적인 요소는 무었인가? 그것은 바로 <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지혜와 리더십에 대한 교육이다. 목전 국내에는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한명도 없다. 몇년전 CCTV에서는 뜨거운 토론을 거쳐 중국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하려면 아직도 20여년이 걸려야 할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2005년3월29일 저명한 과학자 전학삼선생은 생전의 마지막 담화에서 국내 대학들은 아직도 창의정신과 상상력을 가진 학생들을 배양하지 못하고 있어 원초적인 발명창조를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2010년8월4일 저명한 교육가이며 국가 교육부 대학교육사 사장을 지낸 류도옥선생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청소년들은 컴퓨터기술은 세계에서 일등인데 상상력은 세계에서 꼴지이고 창조력은 마지막으로부터 5등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8월30일 중국뉴스넷에는 국가 문화부 부장의 문장이 실렸는데 요점은 <중국문화는 경전명작이 결핍하고 도사라고 뫼실만한 문화권위가 없으며 저속하고 거짓과 너절함 게다가 천박한 졸작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2010년4월19일 신화넷에서  <중국사람은 왜 참말을 하기 싫어하는가?>라는 기사를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사상해방>의 길이 아직은 아득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니 우리의 청소년들은 무었을 배우겠는가?  잡아준 고기는 잘 받아 먹어도 고기를 잡는 방법은 배우지 못하기에 원초적인 발명창조와는 거의 담을 쌓고 있다. 현대문명에서 우리가 원초적으로 발명창조해낸것은 거의 없다. 창의정신과 상상력이 부족해 현대문명에 기여못하는 민족은 국내외의 치렬한 경쟁속에서 밀리기 일수다. 세계는 지금 창의정신과 상상력이 넘치는 <디지털영웅>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리고 있다.7월중순, 겨레의 미래를 념려하시는 원로 지도자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앞으로 젊은이들은 유대인처럼 과학기술과 경제,금융을 잘 배워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것이다.> 
3    저녁노을 (김희관) 댓글:  조회:3330  추천:48  2010-08-17
저녁노을김희관 전 연변주문화국 국장북대하에서 교학을 할 때 필자는 바다가에서 노을을 촬영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일주일 일기예보를 챙겨서 어느날 새벽에는 구름이 없어 아침노을이 붉을것이고 어느날 저녁에는 노을이 붉게 타겠는가를 예측한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도 바다 수평선에서 붉게 타오르는 아침해를 카메라에 담아냈고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사라지는 멋진 저녁해도 찍었다. 어느날 강의 끝에 학생들에게 무심코 바다노을 사진 몇장을 파워포인트화면으로 비춰보였다. 그 순간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서 "“아, 아침노을…"” 하면서 감탄한다. 스무살 대학생들이라 아주 감성적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선생님,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어떻게 다른가요?"”라고 묻는다. 그때 나는 글쎄 하면서 정확한 답을 못 줬다. 며칠후 바다가에서 어부에게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어떻게 다른가고 물었다.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아침노을은 붉고 참신한데 저녁노을은 후덥지근하고 피곤해보인다." ” 어부의 말이 옳았다. 새벽 3시에 바다가에 나가 바다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노라면 먼저 동녁에 피여나는 찬란한 아침노을을 보게 되는데 붉고 참신해서 장엄한 기분에 숙연해진다. 이윽고 쟁반 같은 아침해님이 수평선에서 붉은 얼굴을 서서히 떠올린다. 그때면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눌러대면서 " “해님, 오늘도 오셨네요, 천만년을 이렇게 오시네유…"”라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저녁노을을 촬영할 때는 웬지 저녁해님이 많이 피곤해보여서 측은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아마 우리의 인생도 그런가보다. 아침노을은 분명히 청춘의 빛이고 저녁노을은 당연히 노인의 빛이다. 옛날 중학시절에는 "“아침 8 ~9시 해와 같은 세대"”라고 치켜세우는바람에 신나서 열심히 뛰였는데 이제는 "“저녁노을 세대"”라고 하니 억울해도 할수 없다. "“저녁노을 세대"”는 건강이 제일이다. 건강에는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이 있다. 정신건강과 신체건강은 어느것이 먼저라고 딱히 말하기 어럽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신체건강 조건에서는 정신건강이 앞서야 할것이다. "“저녁노을 세대"”의 정신건강에서 첫재는 정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情-—마음 심에 푸를 청)은 푸르른 마음이다. 푸르른것은 광합작용을 하면 재생한다. 누구나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있겠지만 그래도 고운 정을 많이 키워야 할것이다. 정은 사랑의 원천이다. 정이 많으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자연을 사랑하게 되고 생활을 사랑하게 된다. 또한 욕심을 버리게 되고 남에게 관용을 베풀면서 봉사하게 되고 가족은 물론이요 이웃과 조화롭게 살아갈수 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새 지식을 배우고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새로운 문제를 사색하는 습관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매사에 너무 흥분하거나 너무 비관하지 말아야 할것이며 더우기 기우의 심리를 버려야 할것이다. 아주 중요한 한가지는 제2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는 직업처럼 간주하는 건전한 취미생활이 있어서 그것을 위해 열심히 배우고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참된 인생이 이어져야 할것이다. 이 모든것을 즐거운 마음, 배우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으로 엮어나갈 때 우리의 여생은 보람이 있을것이다. "“건강 100세"”시대가 펼쳐지면서 사람마다 의식주행, 관혼상제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 필자는 우리 인생에는 아마 평생동안 먹어야 할 식량이 어머님께서 주시던 밥그릇처럼 정해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년퇴직부터는 제2인생이라고 하니까 이제는 아마 평생 먹고 살아야 할 식량이 절반가량 남아있을것이다. 그러니 매일 적당히 적게 먹으면 건강에도 좋고 오래 먹을수 있을것 같다. 동시에 여러가지 건강한 식습관을 배우고 신체건강에 해로운 낡은 습관을 고쳐나가야 할것이다. 필자는 매일 파워워킹(힘차게 걷기운동)을 할 때 "“이렇게 매일 건강을 다진다면 인생의 지평선에 늦게 도착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신바람난다. "“로인절"”을 맞아 바다가에서 찍은 저녁노을 사진을 다시 보니 하늘은 붉게 물들었는데 저녁해님 자신은 오히려 오렌지색이다. 아마 자신의 붉은 에너지를 죄다 하늘에 뿌려줘서 그럴것이다. 어느 시인의 시구가 생각난다. "“내 몸의 끓는 피로 저녁노을을 붉게 물들이리라…"
2    아리랑축제(김희관) 댓글:  조회:3666  추천:64  2010-07-21
아리랑축제김희관 전 연변문화국장 축제는 대중문화의 한마당이다. 옛날에 광대들이 정월 대보름이나 오월단오 아니면 추석대보름에 동네방네를 찾아다니면서 흥겨운 농악에 꼭두각시까지 놀아주는 마당놀이야말로 현시대 축제의 원조라 하겠다. 필자가 외국에서 보아온 축제들도 그러한 대중문화의 한마당이였다. . 뉴욕에서는 매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축제를 펼친다. 1620년 풍랑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뉴욕일대에 상륙한 영국인들은 이듬해 봄에 인디언인들이 가져다준 옥수수,콩, 보리 씨앗을 심어 풍년을 맞았다. 그 때로부터 인디어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생겨나 지금까지 축제를 벌리고있다. 필자가 뉴욕에 머물 때 마침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볼수 있어서 너무나 흥분했었다.  도꾜 하라쥬끄에서는 일요일이면 모든 기동차는 통행금지를 시키고 청년들이 저들의 악기와  쟁기들을 다 들고나와 “장기표현축제”를 마음껏 즐긴다. 필자의 친구인 NHK일본방송회사 프로듀서는 “이런 축제야말로 젊은이들이 자기의 장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기회이며 우리는 TV방송인재를 물색하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서울에는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축제가 하두 많아서 어느 축제를 말해야 할지 망서리게 된다. 그중에서도 이천에서 열리는 “도자기축제”를 말하고 싶다. 도자기축제에서는 구경군들도 천년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고려청자, 이조백자, 분청자기 등 도자기를 빚고 거기에 자기의 소원과 이름까지 새겨넣고 구워내 영원한 기념품을 남긴다.시드니에는 오페라하우스를 중심으로 시드니축제, 불꽃축제 등 일년 사시절 축제가 끊일날이 없다. 우리가 유람선에 올라 오페라하우스 주변의 푸르른 바다를 유람하면서 느낀 감상이라면 이 도시는 아예 문화와 예술로 쌓아올린 축제의 도시라는것이다. 더 재미있는것은 시드니 시청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님들을 위해 교외에 수많은 미니 게이트볼장 (문구장), 미니 골프장을 마련해놓고는 일주일에 4일 이상 운동에 참가한 할아버지 할머님들에게는 주말에 축제를 열어 축하해드린다. 이러한 축제로 인해 시청에서는 로인들의 의료보험 투자를 어느정도 절약할수 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1984년 여름,  우리는 10년 동란이후 문예부흥의 새봄을 맞은 우리의 문화예술 성과를 과시하고자 “연변의 여름” 예술절을 창설했었다. 그 때 전 주의 20여개 문화예술단체의 문화예술인들이 모두 뛰여들어 창작과 표현 그리고 세미나까지 그렇게 진지하게 몰두했다. 그 때 국가문화부 예술국과 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화사에서 마침 연변고찰을 나왔기에  “연변의 여름” 예술절을 창설하게 된 경유를 설명해드리고 자문을 받았고 그들과 함께 예술절 활동에 참석한 나날이 새삼스럽다 . 아쉬운것은 “연변의 여름” 예술절이라는 민족문화예술의 한마당이 3기를 끝으로 력사에 남았다는것이다.근간에는 중앙으로부터 관영축제를 절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는가 하면 문화예술적내포가 없고 대중의 참여가 없는 축제를 외면하자는 사회여론도 사실이다. 실제 일부 축제는 대중들속에서 우러나오는 문화예술의 향연을 발산하는 한마당이 아니라  행사를 위한 행사에 불과하기에 인기가 없고 대중이 참여할 기회가 없는것은 물론이고 재정랑비도 놀랍다.우리는 아직 축제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앞으로 펼쳐질 모든 축제는 문화예술을 핵심으로 하고 대중을 주체로 하면서 관광을 결부하여야 할것이고 시장경제원리에도 부합되게 기획되여야 할것이다. 그러한 축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정기적인 축제로 성숙해 우리와 함께 동행하게 될것이다. 내친김에 한마디 더 한다면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우리 문화의 유전자를 가장 잘 발산할수 있는  “아리랑축제”을 기획했으면 좋겠다. “아리랑축제”는 우리 겨례 남녀로소가 천명이고 만명이고 정기적으로 산에, 들에 ,강가에 모여 여러 곡조의 아리랑을 목청껏 고창하면서 농악과 춤판을 벌려 우리의 력사를 자랑하고 우리의 삶을 자랑하고 우리의 미래을 동경하는 한마당을 펼치면 어떨가 하고 생각해본다. 운남의 “퍼수이제” 내몽골의 “나다무”도 다 그렇게 자란난것이다.  2007년 여름부터 룡정시 개산툰진의 어곡전에서 벌리는 “농부절”은 짙은 민족민속색채를 보여주어 매우 참신 하다. 올해는 여러 현,시에서 참가하는 농악한마당을 벌린다니 기대된다.. 축제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이지 남에게 보여주자고 꾸미는 행사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의 즐거움에 흥겨워 축제의 한마당을 꾸준히 펼쳐 나간다면 “아리랑축제”는 무르익을것이고 세상의 구경꾼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올것이다. 《연변일보》에 실린 2010 ”연변의 여름”두만강축제 보도를 읽으면서 축제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원한다.
1    신《춘향전》(김희관) 댓글:  조회:4540  추천:138  2007-09-21
신《춘향전》김희관 문화평론가7월초, 연변문화교류원에서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의 지원하에 《제2차조선족중학생전통문화체험캠프》를 열어 연길시13중의 30여명 중학생을 대상으로 전통문화교양을 진행하였다. 필자는 캠프 개막식을 축하하면서 중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춘향전을 읽어본 학생 손 들어보세요.》 결과 두 학생이 우물쭈물하며 손을 들었다. 며칠후 캠프 졸업식에서 필자는 깜짝 놀랐다. 화려한 한복을 입고 무용실에 도열한 중학생들을 보는 순간 아, 춘향이 따로 없구나, 도령님들도 저렇게 멋지구… 졸업식회보공연에서 성춘향과 리도령이 다소곳이 학부모와 선생님들에게 올리는 큰절은 그렇게도 공손하고 춤사위는 청산을 즐기는 나비를 련상하게 했다. 우리는 전통문화가 있는 민족이다. 《춘향전》은 수많은 전통문화예술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대표작으로서 우리 선조들의 정조와 애정관을 가장 잘 담은 고전명작이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춘향전》은 작자와 창작년대는 미상이지만 한글본, 한문본, 한글한문혼용본 등 70여판본이 전해왔다고 하며 짧게는 7000여자, 길게는 무려 10만자나 된다고 한다. 그 제목도 춘향전, 춘향가, 렬녀 춘향 수절기, 광한루기 등 다양하다고 한다. 그리고 남원부사의 아들 성의성이 옛 사랑을 못잊어 자기의 성씨를 옛 련인에게 붙여주어 성춘향을 부각해냈다는 연구성과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얘기다. 《춘향전》은 몇백년간 전해오면서 여러가지 문예형태로 변신하면서 조상들의 끈질긴 문화전통을 보여주었다. 판소리, 창극, 연극, 가극, 무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예술형식으로 부단히 변신하면서 전승해왔다.  지난 50년대 연변연극단의 연극 《춘향전》은 소학생이였던 필자의 눈물도 자아냈었다. 10여년전 연변가무단의 무극 《춘향전》은 북경의 예술무대에 광채를 한껏 뿌렸고 대상도 받았다. 실로 민족문화의 유전자가  대물림하는 기록이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지난 30년대부터 1995년까지 로씨야, 핀란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웽그리아 등 나라들에서는 저명한 로씨야 안무가 포킨이 《춘향전》을 안무해 창작한 발레 《사랑의 시련》을 공연해왔다는 사실이다. 실로 가장 민족적인 명작이 바로 세계적인 명작이라는 명제를 잘 실증해주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화전통은 참으로 훌륭했다. 문제는 어떻게 후대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잘 배워주어 그들이 《전통문화 전승》이라는 세기적사명을 감당하게 하는가 하는것이다.  문화가 쇠망하면 민족이 쇠망한다는 근본적인 도리는 물론, 전통문화는 조상들이 대물림해준 문화유산이며 우리 문화의 뿌리라는 도리를 깨우쳐주어야 한다. 세계경제 일체화시대에  전통문화를 잘 지켜내야  민족혼의 토대를 고수해낼수 있다는 문화관념을 확고히 세우도록 도와주어야 할것이다. 세상얘기를 하다보면 《지금은 춘향이 서울 가는 세월》이라는 말이 가끔 나온다. 여러가지 사회현상과 가족형편을 시사하는 시체말이다. 리도령만이 한성으로 간다는 법은 없다. 문제는  고향에서 맺은 백년가약을 지키고 자식을 사랑하며 고향을 잊지 않고 때가 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날아오듯》고향을 찾아오는것이 기본 레드라인(저지선)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 우리 200만 동포사회가 대를 이어 이 땅에서 번영해나갈것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청소년전통문화교양캠프》활동에 다시한번 박수를 보내면서 《춘향과 도령들》에게 천지샘물을 먹물 삼아 대를 이어 신《춘향전》을 써내려 가라고 권장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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