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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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3 댓글:  조회:2439  추천:0  2013-05-21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3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머리말   1976년 가을, 연변조선족의 문화예술은 이라는 엄동설한을 끝내 이겨냈다. 그러나10년의 엄동설한이 꽁꽁 얼구어 놓은 민족문화예술의 터전은 황페해졌고 인재는 흟어지고 시설은 낙후하고 창작은 침체상태에서 허한 숨을 몰아쉬고 무대는 텅 비여있었다.   1978년4월, 조남기동지가 중공길림성위 서기 왕은무동지의  위탁을 받고 3번째로 연변으로 오시여 중공연변주위 서기에 부임하면서 연변의 모든 사업은 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력사를 펼쳐가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1978년6월20일, 중공길림성위의 비준을 받고 연변에서는 를 열어 에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서거하신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동지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1984년5월, 중공중앙 총서기 호요방동지께서 조선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연변을 시찰하실 때 특별히 주덕해동지에 대한 명예회복상황과 효과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들으시고 가족들을 보살핀상황을 자세히 물으셨다. 호요방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호요방동지는 길림성위와 연변주위의 령도동지들에게 주덕해동지의 기념비를 세울것을 건의함과 아울러 라는 제사를 써주시였다.   1978년 7월,  길림성위의 배려하에 원 중공연변주위 서기처 서기 김문보동지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는 일찍 1948년 할빈에서 부터 주덕해동지의 비서를 시작으로 줄곧 주덕해 동지의 신변에서 충실히 근무해왔다. 기간에 이 연변에 파견한 검은무리들의 박해속에서도 라는 일념하에 끝까지 반항하다가 최후에는 죽음으로 항거 했다. 그는 60년대 연변의 문화예술, 신문방송출판, 과학기술, 위생체육분야를 령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후로부터 연변의 문화예술계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간에 비판과 멸시, 억울과 박대를 받은 모든 작가,예술가,문화인들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고 그들의 문화예술사업의 권리를 회복해 주고 그들의 작품들을 재인정해 주었다.   우리의 문화예술사업은 이러한 시대배경속에서 황야에 새파란 새움이 트듯이 새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조선족문예의  새봄   1982년9월3일, 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중공연변주위 서기 조남기동지는 문화예술분야에 고 지시하셨다.   1980년부터 중공연변주위와 자치주정부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기념 준비사업으로 연변예술극장, 연길시체육장, 연변도서관, 연변박물관 등 문화시설을 건설하는 등 웅대한 계회을 세우고 실천에 들어갔다. 당시 주,시직속단체의  간부들은 모두 연변예술극장 등 건설현장의 터전닫기작업 등 의무로동에 참가하였다. 그 때 모두들 고 기뻐했다. 이러한 건축공사과정에 조남기서기께서는 낮에는 사무에 바쁘시기에 시간을 짜낼수 없어서 경상적으로 밤중에 시공현장을 일일히 찾아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독려해 주셨다.   1980년 봄부터 각 문화예술단체들에서는 자치주 창립 30돐 경축을 위해 여러가지 문화예술행사들을 분주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변가무단에서는 명절맞이 새프로를 창작하고 연습하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연변박물관에서는 전람과 전람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연변도서관은 소장한 도서들을 새청사에 진렬할 준비를 다그쳤다. 연변연극단에서는 장춘영화촬영소와 손잡고 영화을 창작하고 촬영준비를 다그쳤다. 연변영화발행공사에서는 도시와 영화방영사업과 농촌영화방영대의 복구를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향진은 영화관이 기본상 회복되고 촌마다 방영대가 정기적으로 순회방영하는 질서를 다시 잡았다.   조남기서기의 지시하에 중공연변주위 선전부에서는 중앙기록영화촬영소와 합작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맞이 대형기록영화 을 촬영하였다. 필자는 당시 중공연변주위 문화신문과에서 근무중이여서 당연히 기록영화의 연변측 감독을 맡아 배우와 스탭들의 모든 사항을 돌봐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길시체육장 시공현장이 정리됨과 동시에 연길시에서는 시민들과 중소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형 매스껨과 가무행렬을 준비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1982년 9월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대회가 마침내 새로지은 연길시체육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길림성정부의 축하속에, 전국에서 찾아오신 역사상 연변에서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로일대 대표들의 축하속에  9.3경축대회는 기쁨과 환희의 도가니속에서 괭장히 치러졌다. 그날 중소학교 학생들은 산뜻한 교복을, 조선족시민들은 정말 오래간만에 화려한 한복을, 군부대 열병식 장병들은 새 군복장을, 주,시당정기관과 사업단위의 간부들은 조남기서기의 지시하에 사상 처음으로 모두 양복을 입었다. 그러데 대부분 간부들이 평생에 처음 입는 양복이라 넥타이를 맬줄을 몰라서 많은  웃음거리를 남겼다. 당시 필자는 그날 기념행사에서 전국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기자들을 가이드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몇일전부터 넥타이 매는 연습을하면서 많이 웃었다. 그러한 웃음도 으로 기록해 두자.   9월5일, 오후부터 개막한 가 고조에 올랐다. 조선족민속씨름경기에서 최후 우승자가 탄생하자 조남기서기는 를 연변황소 잔등에 태우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면서 축하해 주셨다. 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행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였다. 호랑나비떼 처럼 날아든 사진기자들이 풍년을 맞아 분주히 뛰여다는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자치주창립30돐 경축기간에 연변예술극장에서는 연변가무단의 정채로운 가무공연이 이라는 찬사속에 성황리에 공연되였으며 연변박물관의 전람과 전람도 수많은 관중들의 관심속에 펼쳐졌다. 연변도서관은 명절을 계기로 새청사에서 독자들을 맞이하면서 즐거움에 겨워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연변연극단과 장춘영화촬영소 합작으로 제작된 예술영화 과 중공연변주위와 중앙기록영화촬영소에서 합작으로 제자된 기록영화 이 상영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룡정현, 화룡현, 도문시,훈춘현,왕청현,안도현 등지의 조선족문공단, 문화관들에서도 자치주 창립 30돐을 경축하기 위해 모두 동원되여 새로운 가무프로를 창작,공연하고 가두와 농촌을 찾아 군중문화활돌을 벌렸으며 영화를 방영했다.   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활동은 이라는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새봄을 맞은 연변의 문화예술을 검열하는 대축제였다. 9.3경축활동을 도리켜 보면 1952년 9월3일, 연길시 서광장(연길시 복무청사 자리)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대회가 있었고 1962년 9월3일, 연길시인민공원 운동장에서 자치주창립 10돐 경축대회가 열려서 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가 친히 씨름장사에게 연변황소의 고삐를 넘겨주시고 운동장의 관중들과 함께 춤을 추시였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주덕해주장님이 그립다.   그러나 이라는 엄동설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1972년의 자치주 창립 20돐 경축행사는 말살되고 말았다. 이라는 흑풍이 몰아치면서 우리는 민족의 명절마저 잃게 된것이다. 1982년 9월3일에 치러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행사는 중국조선족이 중화민족대가정의 일원으로 떳떳히 살아있음을, 유구한 조선족문화와 예술이 아름답고 저력이 있음을 ,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앞으로 번영할것이라는 신념을 세상에 과시했다.     조선족문예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을 맞으면서 특히는 자치주 창립 30주년 기념 문예창작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주위선전부, 주문화국, 주문련, 주작가협회 등 기관과 단체들에서는 문예창작인재의 결핍과 문예작품의 을 절실히 느끼였다. 하여 주위선전부에서는 주내문예대오와 창작활동에 대한 조사를 여러차례 진행한 기초상에서 중공연변주위와 주정부에 를 올렸다. 당시 중공연변주위 조남기 서기는 상기 에 지대한 관심을 돌리시고 주위선전부에 즉시 착수하여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시였다.   1982년 초봄부터 필자는 주위와 선전부의 지시를 받고 우선 길림성위 선전부에 달려가서
2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2 댓글:  조회:3885  추천:1  2013-05-14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2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잡지 2011년 제4기 ----   조선족문화예술의 열매   건국이후 연변의 광대한 조선족문학예술가들은 시종일관하게 당의 문예의 방향과  방침을 견지하면서 군중속에 심입하고 생활에 심입하여 부단히 시대의 정신을 따르고 짙은 민족특색을 자랑하는 문예작품을 창작해내여 중국조선족특색이 있는 문예를 번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탄탄한기초를 닦았다.   문학창작은 새로운 천지를 개척해 나갔다. 1954년1월 연변문련 기관지인 가 창간되고 등 10집의 시가집이 발표되면서 시단은 활기를 띄였다. 임효원의 리욱의 등 시편이 시단의 주목을 끌었다. 1955년 11월 시인 김철의 서정시 이 에 발표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동년 11월 에 발표된 시인 김성휘의 서정시 가 발표됐다. 이러한 시편들은 짙은 민족풍격과 향토기질로 하여 광대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소설창작에서는 100여편의 단편소설과 10여부의 중편 장편소설이 발표되였다. 건국초기 토지개혁후 자라난 선진적인 농민형상을 제재로 한 단편소설       (김창걸 작)이 발표되면서 육속 (김순기 작) 등 많은 단편소설이 발표되였다. 해란강반을 배경하여 9.18사변전후 연변인민들의 항일무장투쟁의 피어린 력사를 반영한 장편소설(김학철 작)는 건국이래 중국조선족문학계의 첫 장편소설이였다. 잇따라 해방전쟁시기 연변인민들의 혁명투쟁을 반영한 장편소설 (리근전 작) 봉건혼인의 부패와 죄악을 폭로한 력사소설 (김용식 작)이 발표되였다. 이러한 소설들은 우리민족 소설창작사상의 적인 효과를 낳았다.   건국이후 희극문학과 민간문학방면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건국초기 창작된 주요한 작품들로는 농업합작화정책을 구가한 장막극, 단만극 등이 있다. 그중는 그시기의 대표작으로서 광대한 관중들이 열렬한 반응을 일으켜 농업합작화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추동작용을 놀았다. 1950년대 중기에 접어들어 연변에서는 농업합작화와 사회주의개조의 고조가 형성되였다. 극작가들은 이러한 형세에 발맞추어 당의 중심사업에 배합하여 농업합작화시기 농촌의 새면모와 광대한 농민들의 정신면모를 제재로 하는 여러부의 단만극을 창작하였다. 단막극  과 전쟁이 가져다 준 사회적비극을 묘사한 단만극, 가정을 제재로 한 , 공인계급과 선진적인 로동자을 반영한 단막극 등이 발표되였다. 또한 1930년대 연변조선족의 항일무장투쟁을 제재로 한 장막극(황봉룡 박영일 등 작)은 사상과 예술방면에서 거둔 성과는 그 시대 조선족희극문학의 고봉에 올랐다.   1956년 연변민간문예연구회가 성립되여 민간문학수집, 정리, 출판사업을 벌려 제1권,제2권을 출판했고 민간이야기집 (정길운 수집정리), 등을 출판했다.   그 시기 연변의 민족음악 무용분야에서는 백화가 만발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건국과 자치주의 성립은 광대한 음악가, 무용가들의 창작 격정을 불러일으켜 민족음악과 무용예술의 아름다운 봄날을 맞아 민족음악, 무용 창작의 풍년을 맞이했다.   음악분야에서는 서정가곡, 통속가요, 혁명가요, 아동가요이 있을뿐만아니라 대형음악 례하면 관현악협주곡, 교향대합창 등 작품도 있어 국내외에 명성을 떨쳤다. 대중가곡분야에서는 우선 군중이 즐겨부르는 애정가곡 례하면 (리홍규  작사 정진옥 작곡), 등 가곡은 후날 정치운동중에서 격조가 저속한 가곡으로 인정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 시기 향토인정을 담은 (김철 작사 정창권 작곡), (초산 작사 도산 작곡), (임효원 작사 동희철 작곡), (임효원 작사 정진옥 작곡), (김동호 작사 김덕균 작곡) 등 가곡이 발표되였다. 그중에서 가곡은 1950년대 농촌건설에 헌신한 광대한 지식청녕들이 가장 즐려부르는 가곡이였다.   그 시기 여러수의 송가도 창작되였는데 례하면 (장동운 작사 동희철 작곡),(리행복 작사 정진옥 작곡), ,(장작성 작사 김화섭 작곡),(한윤호 작사 김봉호 작곡) 등이다. 1960년대 발표된 한윤호 작사 김봉호 작곡인 가곡는 연변의 아름다운 산천경개에 대한 찬미를 통해 억만인민들의 모주석에 대한 경의의 심정을 잘 그려내여 전국에서 널리 불려졌다.   그 시기 높은 수준의 예술가곡도 창작되여 민족음악을 더욱 빛냈다. 그 대표작들로는 (채택룡 작사 허세록 작곡), (김태희 작자 박우 작곡), (김경석 작사 동희철 작곡), (리황훈 작사 안국민 작곡), (최정연 작사 정진옥 작곡), (김태희 작사 박우 작곡), (김경석 작곡 동희철 작곡), (장동운 작사 최삼명 작곡), (장동운 작사 정진옥 작곡) 등 이다. 그중에서 는 조선족 예술가요사상의 경전으로 인정받았다.   관현악대합창분야에서도 새로운 성과를 보았는바 등 작품들은 그시기 창작된 대표작들이다. 그중에서 대합창교향곡(김철 작사 정진옥 작곡)은 북경에서 공연을 하여 북경음악계를 뒤흔들었다. 또한 쏘련 모스크바 제6차세계청년련환절에서 은메달을 받는 영광을 지녔다. 는 장춘음악절에서 처음 선을 보이면서 광대한 관중들의 뜨거운 반을 일으켜 국내의 일류이며 세계적수준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건국후 아동가곡창작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51년에 첫 출판된 에는 등이 실렸다. 1954년 출판된 과 에는 차악 아동가요 등이 실려 광대한 소년아동들이 즐려불렀다. 1957년에는 이 발표되고 1960년초에는   와 소년합창곡 등 민족음악풍격이 짙은 작품들이 실렸다. 그중 (김례삼 작사 허세록 작곡)은 조선족아동들이 즐려부를뿐만아니라 국외에도 소개되였다. 동요(조룡남 작사 김덕균 작곡)은 50년대부터 지금까지 아동들속에서 널리 불러지고 있어 중국조선족아동가요중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국초기 조선족의 무용예술은 아직 완정한 예술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기에 비교적 단조로웠다. 후날 전업적인 민족예술단체가 점차 발전하면서 민족무용예술인잭 자라나면서 무용예술창작방면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1951년 조선족무용예술가 조득현선생은 해방후 조선족의 현실생활을 제재로 무극를 창작하였으며 륙속 무극 등을 창작해냈고 력사제재를 바탕으로 무용 을 창작했다. 그중에서 무극는 중국무용예술사상 현실생활을 제재로 창작된 첫 무극이라는 영예을 받았으며 조선족무용예술창작의 튼튼한 기초를 닦는데 일조했다.   1950년대 후반기 각현,시에 문공단이 선후로 세워지면서 무용예술창작과 공연의 시공이 부단히 넓어지게 되여 조선족무용예술의 발전에 생동하고 활발한 국면을 이룩하였다. 1960년대의 무용대표작들로는 항일혁명전통교육을 목적으로한 3인무(남일권 안무), 광대한 농민들의 사회주의건설의 적극성을 묘사한 4인무(김룡준 안무 마문호 개편), 광활한 천지에 뿌리내리고 열심히 농촌을 건설하는 지식청년들의 불꽃튀는 생활을 반영한 쌍무(박하성 안무), 5인무 (홍수천 안무), (리록순 안무), 무용조곡(조득현 안무),  독무(조득현 안무), (최옥주 최성국 윤청자 안무), (남일권 안무 최옥주 개편), 군무(화룡문공단) 등이다. 그중 4인무이 1964년 전국업여무용콩클에서 광대한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으며 군무이 우수절목상을 받았다.   그 시기 민족무용영역에서 조선족무용가들은 민족무용유산을 발굴하고 제고하는데 심혈을 아끼지 않았다. 1951년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무용가 조득현선생은 민간의 를 성공적으로 정리하고 제고하여 조선족농민들의 풍년의 기쁨을 잘 표연한 를 창작하였다. 는 그 예술적 내함을 부단히 늘리면서 장수프로로 자리매김하여 길림성과 국가의 우수상을 여러번 받았다.   은 조선족소녀들의 순박하고 부지런하며 수줍고 착한 소녀들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표연한 군무이다. 이 무용은 1954년 연길현 조향천업여문예표연대가 처음 무대에 올린 무용이였는데 연변가무단 안무가 리인숙의 재창작을 거쳐 1956년 국경절헌레무대에 올려 우수프로상을 받았다.   은 1951년 민간예인 양창윤이 재래춤을 개편한것인데 1954년 연변가무단의 안무 최금성이 재창작해 더욱 우아하고 예술적인 무용으로 되였다. 은 1955년 폴란드 와르샤와에서 열린 제5차 세계청년련환절에서 금상을 받았다.   은 1950년대 초 룡정일대에서 유행되고 있었는데 1954년 량상호가 독무로 재창작을 하여 연변가무단 무대에 올렸는데 자치주 우수상을 받으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민간의 민속무용과 전통무용을 수집, 정리하여 예술적으로 향상시킨 무용은 등 20여종이다. 그러한 민속무용과 전통무용을 기초로 하여 창작된 대표작 는 조선족무용예술을 새로운 단계에로 끌어올렸다.   미술영역에서는 석희만화백의 유화작품이 제2차전국미술전에 춤품되였고 지승원화백의 련환화가 제3차전국미술전에 입선했으며 임천화백의 유화, 전동식화백의 유화, 리동구 한주익 합작품 유화이 제5차전국미술전에 입선했다.   촬영예술영역에서는 강찬혁의 예술사진 는 처음으로 장백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잘 표연하였으며 뉴스시리즈사진 은 연변인민들이 잊을수 없는 력사적인 순간들을 잘 기록하였다. 김홍국의 예술사진는1963년 전국촬영전에 전시되였고 네덜란드에도 출품되였다.   연변조선족의 민족예술교육사업도 시대의 발전에 발맞추어 진행되였다. 1951년3월 연변사범학교에서는 예능사범반을 꾸려 음악반,무용반,미술반 도합 90여명을 양성하였다. 동년 8월 연변대학에서 미술반을 설치하여 20여명 학생들을 초생하여 저명한 화가 석희만선생 등 선생들이 미술학도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해 북경 중앙희극학원에서 꾸리는 에 박용원 리인순 등 조선족 무용배우들이 최승희에게서 배움으로서 후날에 조선민족전통무용의 맥을 이을수 있었다. 1957년 10월5일 중국조선족의 첫 민족예술중등전문하교인 연변예술학교가 성립되여 음악, 무용, 미술 등 세개 전문학과를 열어 민족예술인재양성의 요람이 꿈을 이루게 됐다.   1957년4월에 를 성립하는것을 시작으로 연변의 문물사업도 서막을 올렸는바 처음부터 문물조사와 증집사업을 활발히 벌려 많은 혁명문물을 수집하였고 또한 고대문물을 발굴하였다. 이 기초상에서 1959년 9월 국경10주년을 맞이하여 을 열어 관람자들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60년 4월, 문물사업일군들은 여러가지 곤난을 극복하면서 항일련군 2군 군장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의 혁명문물 70여건은 수집하였다. 이러한 문물은 이미 국가1급문물로 인정받아 수장하고 있다. 그해 4월부터 문물전업일군들은 각현시의 문물일군들은 함께 전주범위내에서 비교적 큰규모의 제1차문물보편조사를 진행하였다. 결과 고대유적과 묘장지 63곳, 근현대유적 67곳을 발견했으며 고대문물 216건, 혁명문물255건을 수집하였을 뿐만아니라 전주의 문물분포개황을 파악할수 있었다. 1961년1월 자치주정부에서는 전주문물보편조사결과에 근거하여 제1차 주급문물 중점보호단위 45곳을 반포하엿다. 1962년과 1963년에는 주위의 는 지시에 따라 연변박물관주비처 일군들은 연변대학 력사학부,연변고중,훈춘시인민정부 문화과 등 단위에서 고대문물과 혁명문물, 민족과 민속문물, 적위죄증문물 등 도합 1,825건을  넘겨받아 수장하였다. 1963년 연변박물관주비처는 200평방메터도 않되는 전시실에서 을 진행하여 5월부터 8월까지 2만여명의 관람자를 맞이했다.   연변의 도서관사업은 1948년4월에 연변도서관이 성립하면서부터 시작되였는데 1955년에 길림성정부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도서관으로 명명받아 연변의 제1공공도서관으로 되였다. 하여 연변도서관은 중국조선족중심도서관역활을 하게되였다.   영화는 관중들이 아주 즐기는 대중예술이다. 건국전에는 영화를 못본 사람이 많아서 을 한번 보는것이 꿈이였다. 1952년부터는 조선족관중들이 영화를 잘 알아보게 하기 위하여 영화관에는 동성연사를 두었다. 1953년부터 우리주에도 중국영화경리공사 길림성판차처 연변영화발행소가 성립되여 주내 각지의 영화발행사업을 총괄하였다. 1965년말의 통계에 의하면 전주의 년평균 매인당 영화관람은 14.5차였고 그중 농촌은 9.6차여서 전성과 전국의 평균수치를 훨씬 초월하였다.     건국이후 17년동안 조선족문학예술은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 세월은 결코 순풍에 돛단배처럼 평화롭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많은 곡절을 겪었다. 1957년 하반년에 시작된 이 확대화되면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우파분자로 몰리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였고 그후에는 이른바 지방민족주의 민족정풍이 뒤따랐고 1959년에는 소위 당내 반우경투쟁이 계속되였으며 잇따라 문예계의 소위 를 비판하는 운동이 벌어졋다. 그러한 풍파속에서 우리의 문화예술사업은 풍전등화처럼 크게 흔들리게 되였다.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 부터 시작된 정치운동은 끝내 1966년 봄부터 10년간 지속된 이라는 대동란을 초래하였다. 대동란은 하루아침에 조선족문화예술이 로 전락되고 유명한 문화예술인들이 잡귀신으로 몰리는것을 시작으로 앞날이 심상치않음을 예고했다.  그런과정에 1969년 7월에 있은 소위 에 대한 비판소동은 우리의 민족문화예술을 매국적이고 투항주의적이며 수정주의적인 잡동산이라고 헐뜯으면서 민족문화예술의 전통과 유산을 말살하고 아예 민족문화예술의 씨를 말리려했다. 그 악과로는 우리가 억지로 같은것을 목청이 쉬게 불러야 했고 무대는 온통 살기등등한 절목이 점령하였다. 10년의 동란세월에 우리의 문화예술인들은 인권이 짖밟히고 탄압받고 옥살이를 하고 심지어 자살을 하는 전대미문의 대재난을 겪었다.   10년동란으로 하여 해방후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민족문화예술의 공든탑은 다 무너지고 민족문화예술의 꽃밭은 쑥대밭이 되여버렸다.   참고서적: 등.  
1    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1 댓글:  조회:3263  추천:2  2012-11-07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머리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앞두고 연변조선족문화 60년을 도리켜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여러 저작과 문헌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또한 필자가 문화와 TV방송분야에 봉사하면서 경험한 옛일들을 회억해 보았다. 그 와중에 떠오르는 소감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너무나 벅차다. 다만 민족이 살아 있어서 문화가 살아 있고 문화가 살아 있어서 민족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절실히 든다.   문화예술은 민족얼의 요람이요, 민족감정과 정서의 다이야몬드이다. 필자는 우리가 정치,경제,사회를 발전시키는 종착역은 문화예술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나이테도 이제는 60년이 다 되여 환갑을 맞게 된다. 지금은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다시한번 정중히 뒤돌아 볼 때가 되였다. 우리 겨례의 얼이 다이나믹하게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에 대해 반성을 하고 앞으로 적어도 천년은 함께 잘 살아가자고 약속이라도 하고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해방을 맞은 연변조선족문화예술   1945년 8월18일, 연길이 일제의 통치하에서 해방되면서 연변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은 민중의 기쁨은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역동적인 문예활동으로 피여나기 시작했다. 9월, 연길에서는 가 창립되여 문예활동이 조직적으로 시작되였다. 10월15일, 이 연길에서 창립되였고 11월 7일부터는 러시아10월혁명기념일을 맞아 연극, 바라이데를 공연하기 시작하여 순회공연까지 하였다. 그 때로부터 쓰딸린극장은 매일 연극,가무와 영화상영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해방을 맞은 민중의 기쁨이 농촌에서는 촌마다 연극을 놀고 남녀로소가 못청껏 노래를 부르는 열광적인 대중문예의 축제로 이어졌다. 우리민족 연극계의 태두이신 허동활선생은 자신의 연극인생 60돐을 맞아 에 실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해방을 맞은 우리민족의 문화예술은 중화대지에서 으로 발돋음하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민족문화예술의 기반을 다지던 세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시자이신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동지는 1949년 봄 연변에 부임되여 오시자마자 연변대학과 연변가무단을 창립하시고  우리민족의 교육,문화예술사업의 개척과 발전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하시였다. 지난 4월초 주덕해동지 탄신 100주년을 맞아 우리는 그의 공덕을 기리고 앞으로 우리의 자치주를 더욱 번영발전시킬것을 다졌다.   건국이후 연변의 문화예술계는 당의 민족정책과 문화예술방침의 지도하에 민족문화예술의 기반을 닦기위해 여러방면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50년1월, 중공연변지위 선전부장 최채동지의 창의하에 연변문예연구회가 성립되였고 그 기초상에서 1953년7월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문련)을 창립하였다. 문련기관지조문판월간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사진 등 성과작들을 실기 시작했다.   1956년8월, 국내 소수민족지구의 첫 작가협회인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창립되면서 기관지  월간잡지(원 )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959년3월, 연변문련은 산하에 음악가협회, 무용가협회, 희극가협회, 미술가협회, 촬영가협회, 민간문학가협회를 성립했다. 얼마후 구연가협회,서예가협회를 성립했다. 1959년부터 1961년기간에 연변의 각현시에서도 문련을 성립하여 문예대오를 이끌기 시작했다.   연변조선족의 전업예술표연단체들을 일찍히 첫발을 내디디여 거족의 발전을 가져왔다. 연변가무단은 국내에서 가장 일찍히 성립된 가무예술표연단체이다. 연변가무단의 전신은 1945년12월에 건립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전대였다. 초기에는 길동보안군정치부 문예공작대였고 길동군분구정치부 선전대, 연변문공단으로 되였다. 1949년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 문공단이 전신인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문공단이 할빈에서 연길에 나와 연변문공단과 합류했다. 그후 연변문공단은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민족사무처 문공단, 연변문예공작단, 연변조선족자치구가무단을 거쳐 1956년4월에 연변가무단으로 자리 잡았다.   1956년1월 연변가무단의 연극대는 연길현문공대와 합병하여 연변연극단으로 재건됐다. 1956년6월부터 1961년기간에 연길현,화룡현,안도현,왕청현,훈춘현에 전업문예단체12개(한족문예단체포함)가 성립되였는데 연직원대오가 800여명에 달했다.   연변에서 조선족문화관사업도 일찍히 시작되였다. 1949년5월부터 1951년기간에 연길, 도문, 룡정, 화룡, 안도, 훈춘, 왕청 등지에 문화관이 성립되여 조선족대중문화사업의 선줄군이 되였다. 특히 1960년7월 연변군중예술관이 성립되여 등 군중문화예술보도간물을 출판하고 여러가지 대중문화보급사업을 벌리면서 전주 조선족문화관의 중심추가 되여 전주 조선족군중들의 문화예술사업을 더욱 조직직이고 전업적으로 지도하고 이끌수 있었다. 또한 1956년 6월 연변총공회에서 연변로동자문화궁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연변각지의 도시와 향진의 업여문화구락부 3,700여개소가 운영되여 대중적인 문화예술활동이 활기에 넘쳤다.   민족문화예술이 꽃피기 시작한 시절   연변가무단은20세기 50년대초부터 민족예술의 꽃을 피우면서 국내외에서 그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건국1주년 당시 연변문공단은 국무원의 초청으로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택동주덕 주은래총리 등 당과 국가 령도자들을 모시고 독창 , 무용 등 정채로운 절목을 공연하여 발수갈채를 받았다. 모택동주석은 연변가무단과 형제민족민족예술단의 공연을 보고나서 흥에겨워 이라는 저명한 시편을 쓰시였다. 또한 연변문공단 단장이 모택동주석에게 두루마기를 입혀드리고 벼루 등 기념품을 드리는 등 축하행사도 있어서 더욱 흥겨웠다. 그때부터 우리의 민족예술은 국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연변가무단의 대합창, 관현악협주곡과 녀성고음독창은 일찍부터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1956년8월 북경에서 열린 에서 대합창 가 절찬을 받았다. 1957년 쏘련 모스크에서 열린 제6차세계청년련환절 예술콩클에서 방초선의 녀고음독창 , 대합창 (녹음작품)이 은상을 수여받았다. 그때로부터 우리의 민족예술은 세계무대에 데뷔했다.   1957년 연변가무단은 북경에서 열린 에서 과 를 표연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모택동주석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60년 주은래총리께서 을 보시고 < 은 창작기교가 아주 높고 민족색채가 짙은 성공한 무용작품이다.>라고 평가하셨다. 후날에 연변가무단의 와 은 영화로 제작되여 전국에서 방영되였다.   연변가무단에서는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선후로 70여명의 무용배우들을 전국 12개 형제민족예술단에 보내여   등 38개의 형제민족들의 춤을 배웠다. 그동안 연변가무단과 각현시문공단들이 다른 성시의 무대에서 정채로운 공연을 하여 여러민족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변가무단은 성립이래 대중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새로운 가무프로를 부단히 창작해 도시의 무대에 올릴뿐만아니라 농촌과 공장을 찾아 많은 공연을 하였다.  또한 1965년까지 북경에서 초청공연을 5차례나 했다. 또한 건국1주년, 건국10주년 경축연출에 참가함과 아울러 외국원수들과 우호인사들을 위해 특별공연을 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당과 국가 유관부문의 지대한 중시와 관심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변가무단은 국내외에서 연변을 으로 홍보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연변연극단은 건단이후 1966년까지 10년동안에 연극예술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여러차례 로 인정받았다. 그들은 연변각지와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지를 찾아다면서 60여부 연극을 2,100차례나 공연하여 153만 2천여명의 관중들이 그들의 정채로운 연극을 보면서 희노애락을 같이 했다. 그중에는 고전명작 등 4부와 번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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