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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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    문인의 오기와 골기 댓글:  조회:3931  추천:5  2016-07-18
                                    문인의 오기와 골기            중국고대문인들은 거개 오기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문인의 오기는 왕왕 문인의 필명처럼 어디에 없는곳이 없다. 오기는 특히 중국문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어디에 문인이 있으면 어디에 오기가 있었다. 그러나 오기가 있는 문인은 많았지만 골기가 있는 천고의 문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대의 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마천, 사령운, 리백, 류우석, 한유,조설근…현당대에 와서 량계초, 로신, 욱달부, 성방오, 모순… 등은 오기도 있었거니와 골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확실히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문인들이고 그만큼 문학성취도 높았다.        문인에게 어이하여 오기가 생기는걸가? 그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우선은 문인들의 학식이 탁월하였기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확실히 지식은 곧 힘이였다. 현대에는 박학다재한 전종서를 로신에 견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자신은 오기에서 전형이 되고있다        문인의 오기의 온상은 역시 사회이다. 이런 오기는 지식을 숭배하는 심리의 부산품이다. 지식은 지혜를 담는 그릇이다. 백성들은 자고로 지식인을 우러보았다. 그들은 정신상 물질상에서 백성들보다 우월하였는데 오기는 그 우월감에서 생긴것이다.        다음 인격의 고저에서 문인의 오기가 생긴다. 굴원이 “세상은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아있고 모두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여있네”라는 시구에는 자신은 고결하다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은 인격력량의 오기도 담겨있다. 그런 자아긍정은 다른 인격력량과 부딪쳤을 때 필연적으로 교오하게 되고 남을 깔보게 된다.         이런 오기는 많은 경우 남다른 량심과 정의를 낳는 모체로 되기도 한다. 인격력량상에서의 오기는 지고무상한 오기이다. 그러나 력사가 보여주다싶이 이런 오기는 침중한 대가를 지불하기도 하였다. 생전에는 그리 혁혁하지 못하였지만 죽은다음 차차 이름을 떨친 천고의 문인들도 있다. 이를테면 오두미에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도연명은 그 도고한 문인의 골기로해서 천고에 이름을 남길수 있었다.          력대의 중국문인들이 추구한것은 진정한 군자의 경계에 이르는것이였다. 따라서 군자와 소인, 군자와 시정배의 대치는 바로 오기와 비루함, 오기와 용속함의 대치였는바 중국문인들이 기리는 방향이고 귀감이였다. 담사동, 왕국유, 로사 등 문인들의 오기는 내재적오기로서 진정 인격력량이 발산하는 오기였다.        오기에도 오기 나름으로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문인의 오기에는 말투, 행위, 문장 등에서 현시된다. 오기는 일종 추상적개념으로서 어떻게 보냐느에는 그야말로 어진자 어진자를 알아보고 지혜로운자가 지혜로운자를 알아본다는 말처럼 부동한 표준이 있고 부동한 각도에서 평가하게 된다.        오기에도 실속있는 진정한 오기가 있고 자아팽창에서 오는 객기를 부리는격의 가짜오기가 있다. 오기는 본질상에서 우월감이다. 그 자신이 일단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곧 오기가 생긴다. 자고로 체면을 중히여기는 중국사람들이기에 문인들 에게는 더구나 허영심이 강렬하다. 가짜오기를 피운 문인들은 자기의 취약성과 무지를 덮어 감추기 위해 오기를 부렸는데 그것은 오기가 아니라 일종 객기이다.        이를테면 로신의 소설에 공을기같은 문인이 중국문인들속에 기지부수인데 내심의 허무를 달래려고 늘 지호자야따위를 입에걸고 다녔는데 허영심의 충실한 노복이였다. 조비가《전론. 론문》에서 문인상경은 자고로 그러하였다고 썼는데 이런 문인상경의 페습의 근원이 바로 허영심에서 기인된 가짜오기에 있는것이다.        력대의 걸출한 문인들속에는 확실히 실속있는 진짜 오기를 부릴만한 문인들이 있었다. 례하여《찬눈길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숙여 유자의 소가 되련다》고 한 로신이야말로 진정 오기를 부릴만한 인격자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 오기를 부리는가 하는 문제는 개체생명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사회성을 띠게 된다. 례컨대 홍천세계를 마주하여 오기를 부렸다면 그것은 오기만이 아니라 벌써 다른 문제이다. 고대사상가 장자가 그러했고 취옹으로 미친체하고 시끄러운 속세를 도피한 시인 원적이나 울바자밑에서 국화꽃을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 본 도연명은 후세사람들이 흠모하고 숭상한 오기있는 문인들이다.        반대로 스스로 종남산의 지름길을 찾는체 표방한 충명한 문인들도 적지 않다. 오기는 결코 천하를 벼짚개ㅡ추구《(以天下为刍狗)》로 여기는 그런 심리상태가 아니라 도가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않는 그런 독특한 방식이였다.        유명한 화가 서비홍은《사람은 오기가 있어서는 안되지만 오골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오골(傲骨)은 다분히 문인의 내재적정신품격, 담량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부귀했다해서 음란하지 않고 위세에 굴복하지 않으며 빈한해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품격이다. 맹자가 말한 대장부란 바로 오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것이다.        자신심이 과잉되면 자만으로 넘어간다. 진정한 오기의 전통을 계승하고있는 문인들은 도의를 소중히 여기고 자아의 존엄을 아끼며 자유를 추구하고 공명공리를 멸시하였는바 오기의 체현이라 할수 있다. 그와 반대로 문인의 오기에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도 많다.      문인의 오기는 자칫 문인상경의 악습을 양성할수 있고 류파가 아닌 종파, 패당을 지어서 몇마리 미꾸라지가 온개천을 흐리듯이 문단을 소라스럽게 만들수 있다. 오기를 부리며 설토하는 학술이 진리라해도 벌써 그 값이 곤두박질하기 마련이다. 말은 귀로 들을뿐만아니라 마음으로, 정감으로 듣기도 하기때문이다.         옛날 문인들은 문벌로 오기를 부렸다면 현대문인들은 학벌과 직위로 오기를 부리기 좋아한다. 오늘 날 우리 문단에는 이런 패당을 지어 오기를 부리는 문인들이 없는가 한번 진맥해 볼 필요가 있다. 문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모종 리해일면을 가질수 있는지 모르지만 문단밖에 백성은 그런 서생의 오기를 쓴외보듯 한다.        자고로 문인일반의 오기는 주로 외재적오기였는바 장자나 로신처럼 내적오기와는 인연이 없는것이였다. 이런 오만은 바로 문인의 통병인 비교에서 온것이다. 례컨대《시론》《소설론》,《수필론》등 여러권의 저작을 낸 학자, 교수가 그럴듯한 시 한수, 소설 한편이나 수필 한편을 써내지 못하는 경우가 드믈지 않다.        그러나 별로 먹물도 많이 먹지 못했고 문학리론지식도 많지 않은 고중생이 애정시집을 련속 펴내여 세인을 놀래우는 경우도 있고 보통로동자가 명소설을 써내여 대번에 문단의 새별로 떠오를수도 있는법이다. 이런 문학현상을 두고 전자와 후자가 서로 배짱치기로 비교를 하지 않는것이 상호 몸에 리롭다.         그렇지 않고 전자가 후자에게 “너 무슨 대학을 나왔길래? 서방의 문학리론서나 몇권 읽고 소설을 쓰냐? 문학을 알기나 하고 문학을 한답시고 하느냐? 저런 사람들이 문학을 하니 문학의 위상이 안떨어 질수 있는가?”라고 오기를 부리면 후자도 할말이 없는것이 아니다.        후자가 “그래 학벌이 없다칩시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많은 창작원리, 창작기교, 창작방법같은 책들을 묶어냈지만 어째 비슷한 문학작품 한편도 써내지 못하는가? 당신의 학식은 한푼의 가치도 없는 가짜지식이 아닌지 누가 안담?”라고 반격해올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비교는 서로 삼가하는게 명지하다. 비교하더라도 객관적이고 랭정하게 다른 사람의 장점과 자기의 단점을 비겨본다면 교수, 학자도 자기의 리론이 서방의 리론을 먼저 읽고 옮긴것이거나 계발을 받고 더 전개한것이라도 실제상 지도적인 권위성은 얼마되지 않는 리론에서 리론으로 그치는 리론이라는것을 반성하게 될것이다.         그러지 않고 서로 안면을 보고 이름을 보아가며 어떤“돌파”이니 “국내외에 중대한 학술공백을 메웠다느니”하는 식으로 하늘만큼 추어올리는 학술이나 별로 문학가치도 없고 사상의의도 없는 작품을 놓고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식으로 새기법의 시험작이니 하면서 포장해주고 새로운 서방문학개념으로 깎아맞추고 당대문학정품이니  한다면 자연히 허장성세에 가까운 오기를 길러줄수밖에 없다. 작가들도 그렇다. 내가 쓴 소설은 만천하에 자랑거리지만 남의 소설은 무턱대고 눈이 감기느니 유치하다느니 하면서 오기를 피운다면 얻는것보다 잃는것이 더 많을것이다. 한국영화《상도》에 장사는 리익을 남기는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것이라는 대화가 있는데 문학도 명예를 남기는것이 아니라 독자를 남기는 일이 아닐가싶다.         여기까지 끄적이다보니 의로운 사나이 김종서의 시조가 생각난다.                       장백산에 기를 곶고 두만강에 말싯기니                      서근 저 선븨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덧타 능연각상에 뉘얼골을 그릴고,      문인으로서 무인의 그런 충천하는 골기는 아니라도 쓰잘것없는 유생의 오기보다 지식분자의 골기를 가지도록 자세를 다듬어보자.                                    2007 년 9 월 15 일           
751    시어의 운률미 댓글:  조회:4940  추천:3  2016-07-13
                                           시어의 운률미                                                      최 균 선       시ㅡ 시적대화의 특질을 다음같은 다섯가지로 개괄하고있다.     첫째, 느낌을 론리적언어로 설명할수 없기에 시에서 비유적어법으로 표술하거나 동화(同化) 또는 투사(投射)적인 어법을 택하는것이다. 둘째로, 이런 어법때문에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외연적이라기보다 내포적으로 쓰이는게 특질이다. 셋째로, 유기적이고 구조적이고 함축적이라는것이다. 넷째로, 간결한 양식을 취한다. 왜냐하면 시란 순간적정서의 발로라는데서 규정되기때문이다. 마지막 특질이지만 시가 시로서의 매력을 가지게 하는 음악성이다. 춤추는 글인 시의 음악성이 시의 매력이다.     서정시에 해당하는 리릭(Lyric) 이란 용어는 원래 리레(Lyre)라는 악기에서 온것으로서 노래로 불려지기 위한 쟝르임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특성이 유전되여 산문화된 현대시도 음악적인 성격을 띠도록 류의하게 된것이다. 아래에 박목월의 시 “산도화”에서 우리 말 시의 음악성ㅡ운률미를 흔상해보자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玉)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이 시는 전통적인 수법으로 기승전결의 형식에 맞추어 2행씩 4련으로 구성하였는데 각 련을 3보격으로 짜놓았을뿐만아니라 각 련마다 음악적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알심들여 특수한 음운들을 선택하고 있음이 감미롭게 느껴진다.     첫련의 경우, “산은/구강산//보라빛/석산” 인 각 음보의 의미상 초점은 “산(A)-산 (A)-빛갈(B)-산(A) ”이며 이들의 종성은 진동성이 큰 유성자음과 진동이 일어나지 않는 무성자음을 교차적으로 조직하여 유성(A) -(A)-무성(B) –유성(A)식으로 배렬하여 운률미를 고도로 살리고있다. 뿐만아니라 전개에 해당하는 셋째련을 제외하고는 밝고 작은 양성모음을 택하여 나무잎이나 풀잎들이 가볍게 소근대는듯한 인상을 주면서 산, 구강산, 석산, 산도화, 송이, 사슴,씻는다 등 단어들을 간헐적으로 제시하여 봄날의 산속풍경같은 뉴앙스를 형성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서 더없이 감칠맛을 돋군다.     줄글에서 이와같이 단락이나 문장의 길이를 비슷하게 나누는 관례는 드물다. 그리고 시에서라도 이처럼 음운을 고려하여 조직하는 례는 김소월, 박목월, 한용운 등 지난세기 우리 민족의 훌륭한 시인들의 붓끝에서만 찾아볼수 있다. 이는 독자들의 읽기, 시간을 고려하고 정서적색채를 한껏 느끼도록 하기 위한 창조적작업이였다.     하지만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이런 리듬적속성은 점점 배제되여 산문화적쩨마와 문체가 류행되고있다. 이와같은 형식미의 변화는 과연 현대독자들의 감각이 리듬이 지니고있는 주술적, 자동적속성을 은연중 거부하고있기때문인가? 현대독자들이 시인이 제시하는대로 시형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각성의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시를 자률적으로 수용하여 재조합하려는 경향때문인가? 그래서인지 현대파시는 쩨마만 서정적이면 형식이나 기법에서는 산문과 다를배 없는것을 흔히 볼수 있다.     쉘리의 주장처럼 시인은 비록 비리성적인 상상력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 상상력을 통하여 일상세계의 뒤면에 숨어있는 절대관념의 세계와 직접 접촉할수 있다는 가능성과 사색과정을 제공하여야 바람직하다. 쉘리는 시란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이미지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플라톤이 중시했던 리얼리트를 의미하였다.     한편 쉬끌로브스끼, 야꼽슨 등 형식주의자들도 시적언어란 일상어에“조직적폭력”을 가한 특수한 언어라고 주장하면서도 소리의 층차, 모음조화, 자음다발(多发), 압운, 운률, 률격 등을 외면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류의할 필요가 있다. 시에서 매력적인 시적기능은 파생적언어조합이다. 그만큼 서정적자아의 개방이라해도 지시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는 독자에게 미감을 주지 못한다고 단언해도 어페가 없을것이다.     언어는 의미와 음성을 자의적으로 결합시킨 기호이다. 사물의 구체적모습과 의미를 제거해버리고 추상화하여 음성기호로 바꾼게 주지시의 언어이다. 음운의 의미나 사물의 모습을 환원시킴에서 음운과 의미의 관계는 반드시 일치한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상관관계가 있다. 여기서 시의 운률미의 존재리유가 서는것이다. 양성모음은 밝고 명랑하고 깜찍한 느낌을 주며 음성모음은 어둡고 거칠며 큰 느낌을 준다는 우리 말의 특성을 무시하는것은 모든 시의 특성상에서 불가하다는 설명이 된다.     주정시이든 주지시이든간에 시작품은 “음소→음절→단어→문장→단락”의 층차로 짜여진 의미와 감각적구조물이라 말하고있다. 하여 시에서 내포적어법은 주체와 객체가 상호침투하면서 문맥적의미가 형성되도록 표현해야 한다. 현대파관점에서는 결국 “친숙함”과 “낯설음”의 대비와 차이에서 내포성이 증가된다고 여긴다. 즉 사물성을 상실한 현대언어를 가지고 시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려고 낱말들의 질감과 배경을 왕창 비틀고 감추면서 이미지를 낯설게 하려고 애쓴다.     례컨대 “길”을 “도로”라고 하면 낯선것은 아니지만 조금 달라보일수 있다. 길이란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진 자연적개념이고 “도로-고속도로” 와같이 현대적개념이기에 인공적이라는 현대문명의 냄새를 풍기는 경우와 같다. 이처럼 현대시에서 창조된 이미지는 구체적사물에서 얻어지는 직접적인 표상이 아니라 언어라는 간접적자극을 통하여 얻어지는 감각현상이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되고 일정한 지향성을 표백하면서 단순한 감각차원에 머무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과 감각을 창조하려는데 몰입하고있다. 이점에서 현대시의 장점이 긍정적이 된다.     하지만 독자의 시각에서는 사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언어적인 표상에 대한 리해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언어(시)를 통해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고 인생의 또 다른 정경을 흔상하면서 시인이 의도화하는 관념이나 정서에 도달해야 하는데 시인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가 독자리해와 융화되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언어의 퇴적으로 된다면 그 시는 원초적으로 가치성을 상실하게 된다.     언어와 시인의 심상, 또는 사물간의 단절이나 불균형문제는 랑만주의 시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시를 선호하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보편성도 부정하고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모습에 안주하게 되였다. 될수록이면 생경한것을 추구하다보니 자신에게조차 낯선것들을 설명적인 방법으로 전달할 의무는 아예 버린것이다. 환언한다면 시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제시하는 의미를 깨득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제시적인 언어를 포기하고 언어로 모호한 그림을 그리려 한다.     옛날 랑만주의시인들은 시예술이란 이미지를 창조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양식이며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것을 구체적으로 바꾸는 기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학자가 발견한 낯선세계를 누구나 다 알수 있는 세계로 바꾼게 시라는 워즈워즈의 주장이나 “이미지가 없이는 예술은 없다”고 이미지절대론을 주장한 로씨야의 뽀떼브나 이미지는 아무리 알기 힘든 대상도 순간적으로 선명하게 파악할수 있도록 두뇌작용을 절약하게 만든다는 스펜서의 견해들은 아주 교훈적이다.     시란 정서 또는 정서작용을 통하여 떠오른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상상력은 주관적이고 가변적이고 심리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르게 전달하려면 가시성을 완전해 배제할수 없다. 아래의 시를 음미해보자.           할일도 없이 물끄러미 앉아서           읽다버린 노자(老子)를 다시 읽는다.           연(정-필자)직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挺直以为器,当其无,有器之用)           흙을 이겨 항아리를 만들지만           항아리의 쓰임새는 텅 빈 곳에 있다             텅 빈 곳에 있다           빈 곳에 있다           곳에 있다           에 있다           있다           다 (중략)             앙금같이 갈앉은 토요일 창밖엔 무거운 먹구름이 차일을 치고           한 라유체와 백 두철쭉이 혼례를 치루는 강의실 벽을 향해           철벽을 향해           페경기의 노자(老子)가 물끄러미 앉아 있다             다           있다           아 있다           앉아 있다           미 앉아 있다           러미 앉아 있다           끄러미 앉아 있다           물끄러미 앉아 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 하려는것은 단지 대학가의 상황만이 아니다. 흙을 이겨 항아리를 만들지만 그 쓰임새는 오히려 텅 빈곳에 있다는 존재론적역설 역시 화자가 이야기하려는 화제가운데 하나일뿐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모호한 충동을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한다. 여기서 이미지가 시인의 정서를 육화하는 기능을 지녔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서 은유를 비롯하여 음절수를 줄이거나 증가하여 삼각형으로 배치한것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모두 무의미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것이다.     이처럼 시를 감상함에서 독자가 자률적으로 해석권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현대시에 담으려하지만 자칫 이미지를 등한시하는 관념시처럼 리해불능의 벽에 부딪혀 전전긍하게 할수 있다. 모더니즘은 언필칭 전통에 대한 반역, 파괴성인데 읊어서 정서가 출렁거리게 하는 시를 쓰려면 시적운률미를 등진 언어유희로는 실현불가이다.                                                                  2013년 10월 1일
750    명지와 량지 댓글:  조회:3702  추천:3  2016-07-06
                                                          명지와 량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외국의 한 출판상이 책을 찍어냈는데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한권도 팔리지 않았다. 궁리궁리하던 상인은 책을 가지고 총통을 찾아갔다. 일이 바쁜 데 상인이 물고늘어지는지라 “이 책은 괜찮다고 할수 있습니다.”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상인은 대뜸 대서특필로 광고를 냈다. “요즘 총통선생께서도 괜찮다고 평가한 책이 출판되였습니다.” 그러자 책은 삽시간에 다 팔려나갔다. 이에 단맛을 본 상인은 두번째 출판한 책도 총통한데 들고가서 평판해달라고 하였다.     한번 당한적이 있는 총통은 화난듯이 “이 책은 그닥지 않은것같군요.”라고 퉁명스레 내뱉고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상인은 크게 기뻐서 “총통이 혹평한 책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광고를 내보냈다. 두말할것없이 책은 또 베스트셀러로 되였다.     상인이 세번째로 책을 가지고 갔을 때 두차례 교훈이 있는지라 아무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상은 또 그럴듯하게 불어쳤다. “요즘 총통마저 평판하기 어려워 하는 책이 출판되였습니다.” 역시 세번째 책도 불티나게 팔렸다.     행운스럽게도 명인들의 광환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도 명인효응에 모든것을 기탁하는 의뢰심을 안고 명인을 우러러본다. 마치 명인이 없으면 지구가 돌아가지 못할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있는지도 모른다. 약을 사먹어도 명인들을 바라보고 물건을 사도 명인의 선호와 선택을 기준으로 한다. 어느 명인이 어느 식당의 무슨 음식이 일미라 고 엄지손가락을 내들면 내 입맛은 생각지 않고 군침부터 흘린다.     요즘 명인, 명배우들이 거짓광고를 낸것이 들통나서 크게 물의를 빚고있다. 하여 북경시소비자협회에서는 세번째로 명인, 명배우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는데 “자신이 상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절대적인 용어로써 효과가 좋다고 선전하여 소비 자들을 오도하였으며 절대화된 과대선전으로 함정을 파고있다.”고 경종을 울려주었다.     소위 명인들의 비릿한 교역을 까밝히자면 기수부지이다. 강곤이 몇해전에 와짝 고아댄던 “뇌백금(脑白金)”에 속히워 돈주머니를 부리운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을것이다. 한때 천하명인 조충상이 간염약 “억간왕”을 어물넙적 홍보하여 말썽을 일으킨 사실도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명인들의 언행을 미신하는것은 그저 가련한 정도가 아닌 유치한 사유이다. 광고하는 명인과 해당 산품은 아무런 직접적련관성이 없다는것을 보면 알수 있지 않을가? 모든 명인들이 다 한가랭이 안에서 논다고 말하면 안되지만 너무나 많은 명인들이 량지를 구중천에 날려버리고 공방형이 밀어주는대로 못하는 말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다.     그들이 관심하는것은 산품의 진가도 소비자의 리익도 아니다. 오직 광고비, 천문수치의 광고비일뿐이다. 하긴 한번의 광고비가 보통로동자의 필생의 수입보다 몇십배 더 많으니 어찌 량심을 팔고 돈을 챙기지 않으랴싶지만 명인인데 입은 팔지라도 량지를 팔아서야 되겠는가?     명인은 결코 성자가 아니다. 보통사람처럼 쭈크리고 신진대사를 하고 아프면 신음하고 맛없는 음식에 얼굴을 찡그린다.     명인이란 무엇이며 어찌하여 명인효응이 억만창생을 멍석말듯이 하는걸가? 오늘 우리 시대에 뜨고있는 명인이란 글자 그대로 그가 전공하는 부문에서 남다른 실적을 쌓아서 지명도가 높아진 사람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며 인간성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명인들이 사람들의 심목속에서 우상이 되고 한번 호소하면 만백성이 호응할듯한 선동력을 과시하는 까닭은 무엇일가? 현시대 명인효응은 자기 전업에서보다 잡다한 상품광고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있다. 명인, 명배우들은 자기가 광고하는 상품이 진가야 여하튼 너무나 당당하게 대중소비심리오 선택을 인도하는 소비“령수”의 각색을 어엿하게 담당하고있다.     국민들은 보편적으로 자기를 믿지 않고 령수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사유모식을 가지고있기에 전문가와 학자들보다 명인, 명배우들을 더 숭배하는것이다. 아마도 이런 관념이 형성된것은 명인효응의 관성일것이다. 전파학각도에 말하면 명인은 가치안내자로 되여 공감을 일으킨다. 그의 호소력과 영향력이 명인을 “의견령수”로 부상시킨것이다.     많은 상가에서 명인효응에 리성사유마저 잃는다. “공부자술”이 나오더니 “뢰봉식당”이 생기고 “굴원표술”, “굴원표농약, “굴원표돼지사료”까지 나와서 국인을 경탄케 했다. 심지어 주택판매대표로 림측서를 내세운 광고주도 있었다. 명인효응에 미치다보 니 “모택동고가볶음채(毛泽东红烧肉)”라는 광고마저 나와서 국인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법률법규의 건전함도 선행되여야 하거니와 명인들도 사람이 되여지는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광고비를 벌더라도 국민의 기대치에서 너무 엇나가지 말고 명실상부한 우상이 되여야 바람직할것이다. 수많은 명인, 명배우들이 잃어버린 량심과 량지를 다시 찾을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디 자중하고 근신하기를 기대해본다.                          2007년 4월 11일
749    학문의 곤혹 댓글:  조회:4064  추천:1  2016-07-06
                                                    학문의 곤혹       베이컨의 수필《학문》은 긴긴 세월의 장하를 헤쳐왔어도 시종 색이 바래지 않은 명문장이다. 글속에 매한마디를 음미할때마다 감명깊어 심사숙고를 자아내지만 시대 가 낳은 문화괴태라고 할가? 학문가치관의 변이가 심히 곤혹을 안겨준다.    ㅡ학문은 즐거움과 장식과 능력을 위하는데 도움이 된다. 즐거움을 위하는데서의 학문의 효용은 혼자 한가히 있을 때 나타나고 장식을 나타내는데서의 학문의 효용은 담화를 할 때 나타나고…     백번도 더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현시대 인문환경에서는 학문의 가치관이 비틀어져있다. 독서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향수는 지금 사람들의 생활모식과 절주, 흥취범위와 가치추구와는 깊은 인연이 없다.      지금 사람들이 소일하는곳은 술자리, 마작방, 안마원이나 노래방, 찜질방, 도박장 등등이다. 청년학생들은 PC방에서 채팅하지 않으면 유희청에서 게임으로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들은《소년시절의 독서는 문틈으로 달을 엿보는것과 같고 중년시절의 독서는 방안에서 달을 바라보는것과 같으며 로년의 독서는 대에 올라 달을 희롱하는것과 같으니라.》는 청조때 장조의 금언을 우습게 본다.    소학교코흘리개들도 사이버세계에 들어가 정보고속공로를 종횡무진하는 인터넷시 대에 누가 고리삭은 옛선비들처럼 상투를 들보에 달아매고 곰팡내 나는 글줄사이를 헤매며 즐긴다던가? 이런판에 독서를 권장한다면 코웃음칠것이다. 그만큼 문학은 황 혼기에 들어섰고 독서욕은 인문정신의 골짜기로 떨어졌다는것을 말해준다. 아는것이 힘이다. 지식이 없는 두뇌는 기름이없는 등잔과 같다는 등 금과옥조를 진리로 생각 하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일가?     독서는 두뇌를 장식한다는 말도 진리이지만 물욕이 횡행하고 한탕주의가 생활의 주선률이 되여진 현실앞에서는 랭소를 받는다. 학문이 없어도 관계학만 잘 터득하면 무재무덕한자도 한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자기 인생을 멋지게 영위하는 세상이다. 산해진미에 기름진 배를 내밀면 온갖 즐거움이 스스로 찾아들어 하늘에 별을 볼새도 없는데 소일할 일이 걱정일가?     ㅡ학문에 대하여 약삭바른 사람은 경멸하고 단순한 사람은 숭배하고 현명한 사람은 리용한다. 학문의 용도는…사람의 지혜에 속하는 문제인것이다. 두말할것없이 학문은 지혜와 재능을 낳는다. 그경우 당신이 학문을 닦음에서 량지(良知)를 구하는가 학문을 닦은후 량지를 잃었는가를 보아야 할것이다. 사서삼경과 춘추를 통달했으나 인성은 오히려 훼멸된 문인나부랭이가 얼마였던가? 력래로 많은 경우 독서의 목적은 일신영달의 지름길을 찾는데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독서자는 학문이라는 벽돌로 청운의 사다리를 두드려왔고 지금도 두드리고 있는것이다.     ㅡ독서는 충실한 사람을 만들고…문필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역시 절창이다. 독서는 확실히 두뇌를 충실하게 한다. 그런데 우스운것은 독서에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한 범진이나 공을기같은 궁한 선비들을 낳은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일컬어 식자우환이라 하는가? 경은 좋은데 입비뚤이 중이 념불한것인가?     문필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옳다!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효용이 많이도 달라졌다. 글은 마음의 소리로서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고 하지만 10년황페화시기 리론권위라던 강생이나 흑백을 전도했던 요문원같은 류망문인들은 문필의 정확성에 똥칠을 했던것이니…우리 민족들속에도《내선일체》요《황국신민》이요 당나발불며 조선청년들을 일제의 대포밥으로 내몰던 리광수류의 어용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ㅡ력사는 사람을 현명하게 한다. 이 말은 베이컨의 글에서 가장 유명하고 핵심적 인 론단이다. 그런데 창조된 력사를 말하는가? 붓대로 쓴것을 말하는가? 대학자 호적선생은 력사란 임의로 분장시킬수 있는 처녀애와 같다고 했다. 하다면 우리가 읽었던 력사의 분장사는 누구들인가? 력사는 늘 인간과 롱담한다. 력사의 화책에서 신격화 된것은 왕왕 사람이였고 인격화된것은 흔히 귀신이였다. 철학자 헤겔선생이 일찍《인류가 력사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인류는 력사에서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 다》고 한 말은 결코 유모아가 아니다.    ㅡ시는 사람을 재치있게 만든다, 옛날엔 확실히 그랬다. 시는 인간지혜의 정화요 가장 아름다운 언어의 집합이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오히려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뿌쉬낀이나 쉬빠쵸브, 하이네, 조기천의 명시들은 현대파시인들의 놀림거리로 되여진판이다. 읽을수록 알쏭달쏭해야 하고 수수께끼를 풀듯이 사색하고 시인개인의 감각을 음미하는것이 매력이라고 하더라만 분명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고 있는것이다.     베이컨은 철리는 사람을 심각해지게 하고 도덕은 사람을 고상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책에서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력래의 도덕가들로 말하면 자기가 해낼수 없는 일일수록 남들더러 지키라고 설교하고 자기에게 결핍한 도덕일 수록 다른 사람들더러 갖추라고 요구하는 엉터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른바 위군자 라는 말이 생긴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베이컨의 론리학이나 수사학이 시비를 잘가리게 한다고 했지만 현시대 실제 해석은 다를수밖에 없다. 한것은 지금은 금전과 권력이 시비를 제일 잘가르는 권위자 이기때문이다. 돈이 귀신을 석마를 돌리게 하는지 딱히 보지는 못했지만 해당학문이 없어도 내항들을 잘만 부려먹는 인생마당이였다. 중국의 력대 개국황제들속에 진정 학문가, 도덕가가 누구던가?     학문으로 정신적결함을 치료할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현실은 정신빈곤자, 정신불구자일수록 학문의 가치와 효용에 불문이고 우습게 보기까지하니 말이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사를 보면 인류정신의 온갖 상처는 모두 학문의 덕으로 더구나 심각해지고 있다. 당신은 보아내지 못했는가? 학문을 돈독히 닦은 집정자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비극이 그렇지 않은가?     학문이 발전하여 인격이 된다는 금언도 지금 보편적진리가 되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고 우습게 뒤틀려버렸다. 학문이 사람의 천품을 완성시킨다고 하지만 너무 많은 사건들이, 너무 많은 인물들이 이를 반증하고있다.     선량하고 리지적인 베이컨선생은 식별능력이 없고 차이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스콜라철학자들을 연구하는게 좋다고 권장하였지만 우리 여기서는 스콜라철 학이 시장을 찾지 못해서인지 인재와 용재. 기재와 둔재를 분별하지 못하고 친분 관계를 보거나 찔러주는 붉은봉투의 무게에 따라 등용하는것이 거의 정계의 풍조로 되여있고 민생에는 오히려 판단능력이 잠을 자고있는 형편이다.     천금을 주고도 못살 금과옥조를 곰곰히 새기면서 나름대로 떠오른 풋생각을 횡설수설 지껄이고보니 많이 득죄하고있다는 느낌이 들어 등곬이 서느럽긴한데 다만 학생들에게《지식이 없으면 인생이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느낄때에라야만 학  문의 진정한 가치와 위력을 알게 될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구구히 변명하면 구설수를 면할지 모르겠다.                                       2006년 9월 15일   
748    (진언수상록 40)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는데… 댓글:  조회:4669  추천:0  2016-07-04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는데…                                                                진 언     우리 말 속담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는 나쁜일은 말리고 좋은일은 권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승자도 패자도 없고 쌍방에 백해무익한 싸움은 말리는것이 당연한 리치이다. 반면에 흥정은 붙이라고했다. 흥정은 경제거래, 매매 에서 가격협상을 좋도록 조화시키는것만 이르는것이 아니라 흥정이란 좋은 일이므로 권장해서 되도록 많이 이루어지게 하라는 뜻이고 서로 마음을 합쳐 화해로운 생활 문화권을 가꾸어가자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어에도 “けんかはやめさせ取引は斡旋せよと言った”라고 한것을 보면 동양문화권내에서는 만사는 좋도록 인도하고 권장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공생관념이 형성된듯싶다. 사꾸라꽃을 흔상하며 뉘의 뒤통수를 칠 궁리를 하고 구십도경례를 하면서 군도를 만지는 일본인들의 량면성과 어울리지는 않지만도, 이처럼 흥정을 붙이는곳에 화해로운 분위기가 감돌기마련이지만 매양 흥정을 붙이기도 쉽지 않다.     로자가 “사람들이 아름다운것이 아름답다는것을 알수 있는것은 추한것이 있기때문이고 착한것이 착하다는것을 알수 있는것은 착하지 않은것이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것과 없는것은 서로 생기게 하고 어려운것과 쉬운것은 서로 성립하게 하며 긴것과 짧은것은 서로 비교할수 있게 하고 높은것과 낮은것은 서로 기대고있다” 고했다. 서로 리득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인간들에게 조화를 설파하고 있는것이다.     철없던 그 시절에도 보통 돌아가며 싸움붙이는 악취미를 가진 못돼먹은 애들이 드문히 있었는데 “싸움거간군”이였다. 보통 마을에 새로 이사왔거나 반급에 새로 전 학생이 오면 이런저런 모순을 조작하여 싸움부터 붙여놓고 닭싸움을 구경하듯 즐기군 하였더랬다. 그야말로 때리는 시에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을 련상시키는 씨종자를 못받을 놈팽이들이였다.     신뢰를 저당잡힌 현시대에는 더구나 사람들 사이에는 갖잖은 일로 감정충돌을 격화시키며 살벌한 분위기에 오가는 말투도 거칠어지다가 주먹질이 나오고 흉기까지 휘두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이비한것은 말리지는 못할망정 붙는불에 키질하며 구경에 재미나하는 세속인심이다. 싸움을 붙이는데 첫수순으로 리간질이다. 그래서 두사람(국가도)사이에 화해, 단합이 이루어질듯싶어도 천방백계로 훼방놓는데 그야말 로 싸움은 붙이고 흥정에서 사기치는 천하에 잡놈들이라 할것이다.     억조창생이 사는 지구촌에서 개인적으로 누구누구인가는 밝히기 어려우나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력사시점에서 말하면 국가적으로 간악한 일제와 미국을 첫손에 꼽아야 할것이다. 왜냐? 1905년7월27일 당시 미국육군성장관인 윌리엄 태프트가 일본도꾜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하고 악명높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졌는데 그것이 일제의 조선반도 식민통치, 분단의 근본적인 빌미로 되여진 대역부도한 악행이였다.     밀약은 세가지 음모적인 내용을 담고있다. 1)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의도도 갖고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점, 2) 일본측의 일본- 영국-미국 “비공식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없이 “조약적의 무” 를 확답하는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3) 조선(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로일전쟁의 론리적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여기엔 일본이 조선을 침략에서 내세운 괴리 즉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론리 즉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식의 음흉한 목적이 체현되여있었다. 그번 회담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기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이였다.     이 비밀협약은 그후의 두가지 쟁점을 담고있었다. 첫째, 이 밀약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주고받기 흥정”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량국고위관료간 의견교환수준인가 아니면 량국간 장래의 야망을 상호보증하는 협정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쟁론이야 어떻게 비틀리든간에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사이에 약소국을 나누어먹기 외교적흥정의 대상으로 삼은것이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씨는 조선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적에게 주먹한번 제대로 휘두를줄 모르는 국가”라고 조소했다. 루즈벨트는 내부개혁에 실패한 조선은 미국의 동맹국이 될 자격이 없을뿐만아니라 주변강대국들 사이의 또 다른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것이 차라리 낫다고 나발불었다던가, 그 나발분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단다.     한마디로 불난김에 도둑질하것과 다를게 없는 악행인것이다. 일본이 무조건투항 한후 전패국 일본을 귀빈으로 모신 미국이다. 결국 가재는 게편인것이다. 한국의 어느 학자의 언설에 따르면 “첫째, 도망가는 일본놈들을 그냥 방치하고 둘째, 간부급 일본놈들을 배까지 마련해서 보호까지 해주면서 곱도록히 귀국시킨것, 셋째, 도망가는 일본놈들의 최후의 만행도 그대로 방치했다는것이다. 일설로 (미군의 서울입성을 환영하기 위해서 나온 시민들을 일본놈들이 학살하는데 미군은 모른척했다고 한다.)  넷째, 그후 일본출신의 인물들을 정부고위간부로 등용한것이다.”     그래서 치명의 원자탄세례를 받고도 일본은 미국을 사랑하고 추종하는것이다. 어느 나라를 침략했건, 어떤 비인간적만행을 저질렀던 묵과하면서 오직 미국에 충성하면 된다는 오만과 편견의 무리들이였다. 당시 속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었기에 제기된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분투한 김구선생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노릇을 잘할수 있는 리승만을 추켜세웠던것이다. 그후의 남반부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피비린 사변들은 미국이 뒤에서 롱간질하였다는것을 한국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도처에서 리간질로 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불을 질러놓고 불이야!하고 어부지리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란과의 대리전에 앞잡이로 내세운 싸담이였건만 영원한 벗이 없고 영원한 적이 없다는 론리대로 마침내 목을 매달아죽이고 자신들이 알심들여 주물럭거려 만들어놓은 빈 라덴이 자기들에게 총부리를 돌리게되니 하늘끝까지 쫓아가서 사살해버리고 믿고 따르겠노라고 무릎을 꿇은 카다피마저 총으로 사살해버리고 생각나는대로 리익을 챙기는 나라가 미국이다.     나를 따르면 흥하고 나를 거슬리면 망한다는 강권론리로 중동의 싸탄으로 군림한 이스라엘 유태인들의 천인공노하는 만행도 눈감아주고 흑백을 전도하여 종교싸움, 민족싸움을 붙여놓고 붙는 불에 부채질하며 악어의 눈물을 짓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래 아닌가? 자유와 민주와 인권의 탈을쓰고 성조기를 높이 날리며 도처에서 정의의 사도, “구세주”인양 행세하는 깡패국이 미국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 입을 모으듯이 세계, 이 지구촌의 진짜 악의 축은 미국인것이다. 그러니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속담에 담긴 동양식 도덕규범은 그들에게는 코웃음거리일것이다. 자기들의 과거의 “충견” 빈라덴이 촌철의 방어무기도 없는데도 가족들이 보는앞에서 심장에 재확인의 총탄을 쏘아박고… 그리고 그 장면을 비디오로 시청할 때, 또 한번 “문명국가”의 면사포를 벗어던지고 악착한 진면모를 드러낸것이고 천하무적의 악의축이라는것을 백일천하에 홀딱 드러낸것이다, 싸움만 있는데 흥정이 다 무슨 네뚜리냐며 저주를 기도하면서…                                                                     2013년 7월 27일
747    (진언수상록 39) 불편한 진실앞에서 댓글:  조회:4402  추천:1  2016-07-03
                                                                        불편한 진실앞에서                                                                                       진 언       《불편한 진실》이란 2006년 미국에서 제작된 데이비스 구겐하임 감독의 다큐멘 터리 영화제목이다. 느낌이 각각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 말에 공감이 아니갈수 없을것이다. 그만큼 누구나 영화얘기가 아닌 현실생활에서 불 편한 진실을 읽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속에서 소신껏 살면서 현명하게 처사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가짜, 저질, 불량식품의 버젓한 류통, 채농들의 제먹을 남새 따로 내다팔 남새가 따로인 얄팍한 심사, 비등하는 물가, 부동산거품, 의료비, 약값의 고고행진, 교육의 불평등, 학술부패, 대학생들의 취업난, 사회분배의 극심한 불공평으로 인한 부익부빈익빈의 사이비한 괴리 등 너무 공공연한 불편한 진실속에서 사는 우리들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들이 활개치는데도 그냥 간과하여야 하는 불편한 심리이지만 내가 련루되 지 않으면 된다는 의식이 집체무의식을 경화시키고있다.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불편한 진실에서 인간관계에서의 불편한 진실도 심각하다. 사업터에서 상급과의 관계, 동료들의 관계, 한아빠트에서 이웃들과의 관계, 길에서 불행에 처한 사람도 선뜻 도와주지 못하는 모순심리 등 불편한 진실이 한두가지가 아 니다. 입둔이들마다 인정세계가 점점 사막화되고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그런 개탄하는 진실에서 흔히 자기는 쏙 빼먹는다. 그래서 어쩌면 인심들이 저모양인가? 하면서도 자기부터 돌아보려하지 않는게 보통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리성은 이미 완전히 미쳐버렸다. 광란하는 비리성으로 하여 무시무시해진 현실이 주는 끝없는 공포감이 어쩌면 우리 모두를 마비시켜버렸는지 모른다. 지구촌 곳곳에서 잔혹한 죽음과 선지피냄새가 림리하게 하는 악마는 어느 놈인가? 그러나 악의 화신들을 성토하고 단죄하는 정의의 사도는 이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오직 리익을 기준으로 자족하는것뿐이다     리기와 탐욕에 미쳐난 현시대, 참으로 인간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도처에서 살판치는 폭력과 파괴는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뼈속깊이 증오할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한다. 힘의 론리로 지배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묵인되고있는 처참한 학살의 현장을 상상하면 공연히 피해의식에 몸서리쳐진다. 인간은 허위와 기만의 면사포를 꿰뚫어보며 자신들이 연출하는 비극을 두고 개탄한다.     힘의 론리가 사람들에게 공포와 절망을 안겨준다는 의미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와 폭력에 희생당하는 객체로 아수라장을 이룬 인간세계를 구원할 방도가 있는가? 피비린 살륙속에 평화의 열매가 무르익는다는 말인가? 폭력이 인간에게 강요해온 수많은 파괴속에서 그것을 이겨낼 힘은 인간의 량지와 선량과 리성이라고 설교하기엔 너무나 창백무력하다. 그래서 자기 리익만 따지며 시비를 비틀어놓기만 한다.    불편한 시선을 가져서 불편한 진실이 투시될가? 아니면 불편한 진실이 존재하기에 자연히 불편한 눈길을 곤두세우게 되는가? 이는 간단하면서도 난제이다. 거시적, 미시적으로 생태환경파괴, 생물종의 감소와 멸종,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간의 생존 조건의 악화, 동시다발적인 가뭄과 홍수, 해일, 폭풍 등 예측불가의 재난, 식수난, 기괴한 질병전파, 등 이미 우리가 알고있는 수많은 불길한 상황은 전인류적인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진실을 뉴스로 보면서 나는 행복하며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우리는 초보적인 불편한 진실이 깡마른 보리밥처럼 껄끄럽지만 그대로 삼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 불편한 진실에 습관되여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빤히 보이는 비정, 비리여도 못본체하거나 함구가 최선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꼬치꼬치 따지고드는 사람을 곱지않게 본다. 그러나 이러이러하다고 직설할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선각자들이 정의를 신장하고 진실을 지향하여 납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몇송이 꽃이 피였다고해서 봄동산을 단장할수는 없다.     온갖 규제를 제정했음에도 그것이 평등하게 지켜지지 않는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진실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터지기전에 응당 자성해야 할 사람들이 알아서 서둘러야 한다는게 불편한 진실의 근원에 대한 론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고기는 제 중태에 넣는것이 정당화되는 등 곤혹스럽게 하는 잘못된 “기성품”들이 불편한 진실을 너무 많이 조성하고 있는것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서양명언은 절대진리인듯 공인되고있다. 침묵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침묵의 좋은 점을 증명하는 론거들을 훌륭하게 찾아내고있다. 이를테면 세계상에서 매력적인것은 모두 침묵속에 존재한다는것, 천년로송도 말이 없고 만리장성도 침묵으로 뻗어있고 금자탑도 입을 다물고있고 백두봉도 억천년 침묵으로 하늘을 떠받고 싸하라사막도 침묵속에 먼 옛이야기를 잠재우고 고흐(梵高) 의《해바라기(向日葵)》도 침묵하고 로단의《사상자(思想者》도 말이없다는것,침묵은 일종 인정세태이고 일종 존엄이며 일종 력사라는것…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침묵이 녹쓴 페철이 될수도 있다. 침묵도 언행의 다른 일종이다. 침묵이 타락하면 무성언어로 거짓된 합창에 한목소리 보태는것과 다를배없고 침묵이 명철보신의 수단일때는 사악에 동조하는 범죄가 된다. 언행에서 진짜 금은 진상의 표백이다. 이 시점에서 달변이 아닌 열변이 금이 된다.     비겁한 침묵은 진상을 덮어감추는 일종 기량이다. “침묵”하는자는 덮어감추려는 자를 덮어감싸는것이며 외곡하는자를 감싸주는 외곡이다. 쓰딸린시대의 시인 예브도 씬꼬는 “침묵 역시 일종 거짓말이다”라고 하였다. 침묵한자가 천당에 올라갔을 때 후회한다면 가능하게 침묵한것에 대한 후회일수 있다. 한발 물러서서 말하면 침묵하는자는 외곡하는 자보다는 조금 량지가 있다고 하면 조금 자위가 될런지 모르지만,     당신이 참말을 하여 다치고싶지 않으면 침묵을 선택할수 있다. 이때 함구는 거짓말을 하는것보다 더 바람직하다. 침묵은 개인의 소극적자유를 무언으로 지키는것일수 도 있고 진실과 허위의 문턱에서 우왕좌왕하는 난감함일수도 있으며 허위를 가리는 면사포일수도 있고 무언의 동조,암묵일수도 있고 무언의 항의일수도 있다. 가장 망태기인 침묵은 비리에 입다물고 있는것으로서 비리에 동조하는 도덕적범죄이다.     이를테면 말하지 않으면 안되고 더구나 진심을 말해서는 안될 때 예술화하여 두루뭉실, 애매모호하게 말하거나 듣는 사람이 닭살이 돋도록 아첨하는 말을 개여올리거나 아니면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외우거나 귀신을 만나면 귀신소리를 하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말을 하거나 이쪽도 저쪽도 상하지 않게 어리벙벙 둘러댈수 있다. 그러나 진실한 자아를 잃고 속으로 수치를 감내해야 하고 쓰디쓴 눈물을 삼켜야 할것이다.     실말을 하는데에는 지혜가 수요될뿐만아니라 용기가 수요된다. 이른바 문혁시기 거짓말하는 정도와 수준은 유사이래 없었지만 사람마다 참말을 하기 원하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많은 절간에는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이 많다는것을 사람들은 너무 잘안다. 금덩이에 검은물감이 들지않듯이 석탄은 씻어도 씻어도 희여질수 없다. 참말은 열흘이 지나도 아니 팔리고 거짓말은 하루에도 석짐이나 팔리는 오늘의 인정세태에 불편한 진실을 두고 납함을 못하는 자신부터 해부해 보지만 그냥 참괴할뿐이다.                                                        2013년 6월 7일 (정리)     
746    (진언수상록 38)인간은 이률배반의 집합인가 댓글:  조회:5461  추천:3  2016-06-23
                                            인간은 이률배반의 집합인가                                                               진 언         주지하다싶이 이률배반(二律背反)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개의 명제가 한 행동이나 사건속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주장되는 일을 가리킨다. 이률배반이라면 얼핏 초  나라 사람의 창과 방패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우화의 핵심은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라는것이고 제2주제는 무슨 일에서나 너무 과장하지 말고 실사구시하라는것이 다. 한편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라고 개괄할수도 있겠다. 인생을 살다보면 무시로 이률배반의 현상에 맞다들리게 되고 스스로도 호미난방 이 되기 일쑤이다. 사람을 믿어야 한다면서도 의심을 전부 털어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많은 면에서 모자라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남들앞에서는 늘 잘난체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겹문을 만들어두고 아이들에게는 성실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훈계하지만 자신은 사회마당에서는 뛰여난 꾀돌이가 되려고 애쓴다.     알맞춤 내리는 비는 오곡에, 초목에는 기름같지만 사람은 땅이 질척거린다고 싫 어하고 휘영청 밝은 달은 련인들에겐 정서의 매개물이 되지만 밤도적들은 작동에 불편하다고 불만일것이다. 자연상태의 시골이 좋다고 말하지만 번화한 도시를 지향한다. 참을 인(忍)자를 좌우명으로 삼으면서도 무시로 화를 내고 화풀이 하고는 통쾌하게 느끼는게 인간상정이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스웠던 일을 잊지 않고 얼굴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고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무척 분망한 사람인체해야 하고 고독이 좋다고 말하지만 소외되는것이 질색이여서 떠들썩한 곳을 찾아다닌다.     오라하면 가기싫고 가라하면 서운해지는 마음, 희망때문에 산다면서 늘 불안에 떨고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어디엔가 소속되지 못하면 자기 위치가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변화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안정된 현재에 만족하고 절약을 뇌리속에 새기고도 고소비욕을 절제하지 못한다. 약속도 리득을 따지며 핑게 를 찾기 례상사이고 남이 상을 받을 때 손은 박수치지만 마음에는 주름이 잡힌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누구나 “위대한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너그러운체 하면서도 까다롭게 득실을 캐게 되고 받을때는 감사해하면서도 갚을 때는 그저 내주는것같이 느끼고 만족한다 말하면서도 속에는 이런저런 불평이 떠날줄 모른다. 너하나만 사랑한다면서도 미모의 녀자를 보면 대비가 생기고…흔들리면서도 굳건하게 걸으려 애쓰고 부모에게서 받은 그 은정을 효성으로 갚으려면 오히려 당찮은 부담인듯 느끼는 마음이 전혀 없지 않고 입으로는 “예예”하고 순종하는듯 불복종을 내드는 마음이고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면서도 손은 내밀게 되는 우리네 인간의 마음…     남이 잘되도록 축복하라면서도 정말 잘되면 사촌이 기와집짓는데 배아파하는격이 되여지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에는 어두운 면과 거슬리는 일만 띄우고 쉬운 일인데 힘들다고 불평이고 힘든 일이건만 전혀 힘든줄 모르게 되고 샘물은 퍼낼수록 맑고 용용 솟는것을 보면서도 내마음의 샘물은 아전인수하고 손해보는것이 득이라는 도리는 외우지만 손해보면 하늘이 낮다고 펄펄 뛰고 요행은 달에나 걸려있다는 명언을 기억하면서도 늘 요행을 바란다. 나는 좋은 말만 듣기 좋아하고 남에게 좋은 말을 하기엔 마냥 린색해진다.     아첨은 비굴의 표시인줄 알지만 아첨이 좋을 때가 많다. 욕심이 고통을 부르는 나팔이지만 누구나 더 요란하게 불고싶어하고 고집은 일종 주견이 되면서도 치우치면 심리장애가 되고 고생끝에 락이라지만 락을 위해 고생하려는 사람이 없다. 꿈은 리상 이지만 허황한 기대의 상징어로도 되고 칼장난을 잘하는 사람은 제칼에 상하기도 하고 아무리 높이 뛰여봤자 땅에 떨어지는데 그냥 높이 뛰려한다.     인간은 지혜를 터득하자 동시에 거짓을 터득하였다. 입둔이 사람마다 말은 참말 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좀해서는 실말을 하지 않는다. 성실은 최고의 미덕이라면 서도 약자, 무위무능자를 상징하게 되였다. 발끝으로 오래 서있을수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흔히 발뒤축을 들고서라도 남보다 키가 커보이려한다. 평지돌출의 높은 벼슬자리는 위태하다면서 바라오르기에 신들린듯 극성이다.     탐관오리에 절치부심하면서도 천문수자의 거금에 경탄하고 롱단현상을 두고 발을 구르고 삿대질하며 욕하면서도 자신은 로임대우가 좋은 일터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로심초사하고 부정기풍은 말세의 풍조라고 풍자하면서도 자신에게 일이 생기면 누구를 찾을가 하는 궁리가 내달아온다. 사회비리와 비정함에 분 노하지만 불공 평함에 정의감이 치솟는것이라기보다 자신이 이런 불공평속에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다고 속을 앓는다. 누구나 불공평을 소멸해야 한다고 웨치면서도 자신은 불공평한 환경속에, 유리한 위치에 서있기를 갈망하는 등등…     돈이 만악의 근원이라면서 돈때문에 울고불고 죽자살자한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은 있지만 동정심, 애심은 부자가 되는 길에 걸림돌이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면 인의와 인애를 아예 털어버리고 일확천금의 길을 떠나야 할것이다. 태양은 눈부시고 고마운 행성이지만 너무 오래바라보면 눈이 멀수 있다. 황금이 이 세상의 최고지배자라지만 너무 따르다보면 황금의 노복이 되여 자신마저 잃어버린다.     동물은 서로 물어뜯고 인류는 결약을 맺았지만 결약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수 있는것이 량심인데 자기에게 량심이 적게 차례졌다고 불평을 부리는 사람이 없고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여야 할 행복이 가장 불공평하게 분배되여 있고 행복이 넘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기실 가난한자가 부자들보다 간간히 시름을 풀어놓고 웃는다는 사실을 근심많은 부자는 모른다.     세상에 널린게 친구같지만 친구다운 친구를 찾기가 어렵다. “손을 뻗쳐 구름을 막아도 비는 여전히 내리는”따위의 벗은 흔하다. 녀자란 나쁜물이라면서 그 “나쁜” 물속에서 매일 개발헤염치기 좋아한다. 방종한 정부의 정담은 꿀보다 더달고 입술은 해면보다 더 부드럽지만 일단 가시돋히면 치명적으로 찔러댈수 있다. 남자는 돈을 벌기위해 천애지각에 떠돌고 녀자는 소비하기 위해 상점돌이에 해지는줄 모른다.     인생은 짧지만 불행한 인생은 지루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부자라지만 불만족은 언제나 앞장서 달리고 고기를 낚는 멋은 좋지만 진종일 한자리에 얽매여있게 되고 친구는 제2재산이라지만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될수 있는 세상이다. 돈이란 개도 아니 먹는것이라고 욕하지만 그 하찮은것에 목숨을 걸고 돈밖에 남은것이 없다면 가장 비참한 가난뱅이라지만 돈밖에 모르는 “가난한”사람이 되려고 죽을판살판 한다.     자유는 인류 모두의 수호신이고 자유의 본의는 자아의 분방함이고 자유의 반면은 다른 사람을 질주하게 하는것이건만 자유준마의 고삐는 남의 손에 쥐여있다. “자유란 다른 사람에게 구속당하는것을 방지하는 담보ㅡ(아크돈)”이나 아무도 담보해주지 않는다. 기실 감금당한 사람만이 자유롭지 못한것이 아니라 감금하고 감시하는 직업자들도 자승자박처럼 자기의 자유도 부자유에 묶여있다.      창과 방패를 팔던 초나라사람을 비웃는 현대문명인들이야말로 곤혹스럽다 하리라. 인간심태에서의 이률배반은 모순의 집합체인 인간의 이미지라 그런대로 보아주고 한눈감고 한눈 뜨는식으로 스쳐지날수 있지만 사회적이률배반은 심각한 문제이다. 철 학에서는 사람이 목적이고 국가는 도구라고 해석하지만 재래로 국가는 목적이였고 초민백성은 오히려 수단이였을뿐이다. 하긴 이런들저런들 어찌할수 있겠냐?                                                               2012년 3월 22일
745    고향의 산에서 댓글:  조회:4325  추천:0  2016-06-15
                                                       고향의 산에서                                                                 최 균 선                                                 나는 내 운명을 안고 살았네.                                               자국자국 한과 눈물로 찍어온                                               가시밭길 서러운 내 인생을                                               이제 다시 가라면 나는 못가네                                               굽이굽이 서러워서 나는 못가네                                               모진 비바람에 찌들린 내 인생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내 인생을                                               사랑하는 내 혈육들은 알아주리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던 소년시절에 나는 그렇게 고향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이면 못잊을것 고향이던가? 나의  태줄이 묻히고 잔뼈를 굳혀준 일송정은 긴긴 세월 매양 꿈속에서 올라보는 축축한 그리움이였다. 무르익기도전에 구겨져버린 눈물젖은 내 동년의 꿈이 구겨진채로 그렇게 내버려진 탓이던가?     덧없는 세월에 휘말려가버린 내 인생, 이제 갈길 바쁜 나그네가 되여 허위단심 고향산에 오르니 가슴가득 감구지회가 넘치는데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구나,아, 인생이란 바로 이 산행길과 같은것이 아닐가? 내 오늘 금의환향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열심히 걸어왔다는 그것만으로도 눈물겨웁다. 비록 하잘것없이 엮어진 인생극이지만 끈덕지게 살아왔다는것 자체가 의미로운 삶이 아닌가?     해묵은 강산에 찾아온 새봄, 5월의 동화가 아기자기하게 엮어지는 고향산은 왜 이리도 가슴 클클하게 하는지. 가는 봄은 울음이요 오는 봄은 기쁨이라 지지리도 몹쓸 겨울이 태쳐놓고 간 어수선한 자리에 봄아가씨 따스한 입김으로 진달래꽃 수집은 꿈을 깨워놓고 아지랑이를 불러내느라 이 산 저 산에서 나울거린다.     창공에서 들까부는 노고지리가 내 마음을 꼬드기며 아득히 흘러가버린 동년의 파란 언덕에 나를 세워준다. 나는 한소리 웨쳐본다. 못잊을 고향의 산아, 내가 다시 왔노라. 너는 높이만큼 뿌리도 깊어 세상을 겉으로만 보지 말고 속깊은 소망을 키우며 살라고 가르쳐준 내 마음의 성산이였다.     너는 나무들이 잎을 더디게 피운다고 풀벌레들이 늦게 눈뜬다고 조바심치지 않았지? 안개가 휘휘 제몸을 감싸 멋진 모습을 가리워도 불평이 한번 없었고 모진 설한풍 바위를 떵떵 얼구어도 가슴 깊은 곳 푸른 꿈 흐트러뜨린적 한번 없었지.     그 모질던 세월에 고향사람들은 우리 일가를 개쫓듯 내쫓았지만 산아, 너는 변함줄이 없었더냐? 40년, 긴-긴 세월의 허리에 끈끈한 그리움을 감아올리며 마음속에 새겨보던 일송정, 네기슭에 오르기까지 내 얼마나 멀고 먼길을 에돌아 왔던가,     돌이켜보면 운명의 고개에 거꾸러지지 않을 욕심만으로 고향에 심어두고 떠난 그 한을 약처럼 먹으며 살아온 내 삶이다. 파란만장한 내 인생길은 남들처럼 한편 걸으면서 한편 꽃을 따며 걸은 행복한 길이 아니였다. 선택권이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내게는 그런 여유로움이 없었다. 애초에 잘못 태여난 목숨때문에 반평생을 따라 붙은 사회기시와 수모와 서러움…빼앗긴 배움의 길과 버릴수 없었던 희망과 운명과의 도전,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갈망…그 모든 부대낌속에서 이를 악물고 몸부림쳐야만 하였던 나이다.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왔을까 아득하기도 하다. 삶의 벼랑가에서 몇번이고 죽음의 골짜기로 도망쳐버릴 생각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 자멸의 의지가 나로 하여금 독한 삶의 오기를 다지도록 채찍질하기도 했다.     소똥에 넘어져 개똥에 코를 깨더라도 어떻게든 가는데까지 그냥 가보자고 신들메 다시다시 조였고 세상만사 거미줄처럼 얽히고서린 인생마당 구석구석을 끝까지 살펴보자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며 오늘이 고달파도 래일을 바라고 욕구의 지팽이에 행운을 걸었다. 산정에 불타던 진달래 꽃불속에 딩굴던 그제날이 선연히 안겨오는듯 진달래꽃 꺾어 꽃집을 짓고 메뿌리를 캐여 밥을 짓는다며 능금볼 태우던 소꿉각시 귀동녀랑도 이 산을 잊지 않고있는지…《야호─야아아─》하고 웨쳐보고는 랑랑한 메아리에 귀기울이고 섰던 짜개바지 친구들의 모습이 짜꾸 추억의 한자락을 말아올린다.     쪼르르 물매듭진 아침이슬에 잠방이 적시며 숨이 턱에닿아 산에 오르다가도 싱싱 한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바다같은 푸름속에 풍덩 뛰여들어 헤염이라도 쳐보고싶던 철없던 시절이 봄물이 오르는 산버들가지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꿈자락이 정처없이 떠돌던 쪽빛하늘아래 봄볕처럼 쏟아지는 추억이 흐드러지고 산의 묵은 가슴을 어루쓰다듬는 진초록 산바람은 어서 산정에 오르라고 내 옷자락을 잡아끈다. 바람처럼은 사라지지 않았던 그 아프고 고달픈 내 인생의 새벽길이 시작된 산길을 따라 나는 늙어버린 걸음을 옮긴다.    오구구 칼벼랑에 뛰여올라 구름이라도 잡을듯 두팔을 뻗치고 만세를 부르던 칼벼랑아, 내 묵은 기억속에  너는 장검처럼 산등성에 놓여있었지!너를 딛고 발도움하며 만리벽공에 날아오르고싶어 퍼덕이던 서러운 넋의 날개짓을 너는 알았더냐? 하늘처럼 맑은 나의 작은 가슴에 한을 던져주었던 고향마을 룡강촌, 이제 늙어진 내 마음에는 고향마을의 옛친구들도 저 멀리 서있다.     이젠 이끼 푸른 바위우에 넋을 놓고 앉아 오롱이조롱이 오남매의 목숨이 모대기던 오막살이 고향집 하마 보일듯싶어 마을을 굽어보며 먼 하늘가에 별을 스쳐가는 산바람에 무거운 상념을 싣고싶을뿐이다.     그렇다. 이제 내가 할 일이라면 인생의 종착역에서 마음 비우고 힘겨웠던 인생려정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냥 그렇게 걷기만 하다가 마지막 주막까지 지나쳐버린 나그네의 애석함이 딩굴기전에 심술궂은 운명이 지지리 못나게 엮어놓은 이왕지사를 적어가야겠지, 오늘 고향산의 정상에 올라있지만 인생의 높은 봉에 오르지 못한 나이다. 하늘이 준 제명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도 막 저무는 때 그렇듯 기구하던 비탈과 가시밭길 넘어오니 어치새 저만치 인생의 막바지가 보이거늘 내 이제 무엇을 더 바라며 욕심을 부리랴!     불쌍한 나의 아버지와 그 후대들의 눈물어린 인생궤적을 따라 나와 같은 운명을 타고나서 오랜세월 버림받고 살아온 하많은 불행한 넋들이 이제 숨통을 죄일 일도 없는 새 세상에서 서리고 얽히였던 그 불행과 고통을 다시다시 새김질하고싶다.                                                                                2001년 5 월 6 일
744    고요함에 부쳐 댓글:  조회:3905  추천:0  2016-06-15
                                               고요함에 부쳐                                                       최 균 선       당신은 고요속에 자신마저 잃고 오래 취해본적이 있는가? 없다면 한번쯤은 일상의 번거로움을 벗어놓고 자기만의 고요함을 찾아보시라    고요함은 일종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다. 두메산골 밤하늘에서 조용히 구름속을 헤염치는 초순달이라든가 풀벌레 우는 소리와 산새의 여린 날개짓 소리와 딱따구리가 벌레를 쫏는 소리만이 생명이 존재하고있음을 알리는듯한 깊은 숲속이나 잔잔한 물결이 기슭을 치는 바다가의 안침진 곳이나 푸른빛이 아득한 초원을 스치는 미풍이나 모두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고요함의 극치이다.     그래서 “사막에 외로운 연기 곧추 피여오르고 서산에 지는 해 장하에 잠기는” 경관이 옛시인을 사로잡은것이 아니랴. 고요함은 말그대로 요원함과 청정함과 이어지고 사색의 요람으로 통한다. 거기에서 바로 천연적인 독립성을 계몽해주는 훌륭한 선생이 묵묵히 기다린다.     물론 질풍노도 역시 자연경관의 일종이다. 그러나 장쾌한 그 속에는 불안과 파괴가 앞서 달리고있다. 공리주의가 댄스를 추고 사람마다 쾌락에 심혼이 들떠있는 감각지상주의시대에 고요함을 거론하면 이빠진 늙은이가 고뿔을 앓는 소리로 들을 사람도 많을줄 안다.     겨울해는 식었다고 원망하면서도 한껏 쪼이려 하고 한여름의 해는 너무 이글거린다고 탓하면서 그늘로 가리려 하는데 우리 인간들의 감각이다. 너무 떠들썩하면 소음으로 느끼고 너무 고요하면 적막감을 느끼는게 인간심사다. 그래서 고요함은 누군가의 꿈이 아니면 일종의 심리경지가 되는것이다.     번창한 도시에서 떠들썩함은 발길닿는 곳마다에서 찾을수 있지만 고요를 찾기는 실로 용이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낚시질을 하면 싫도록 고요함에 짐길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는 호젓한 낚시터를 찾기도 어렵다. 고기보다 낚시군이 더많은 형편이 다. 그리고 탁류속에 요행 살아남은 미꾸라지따위를 낚아내는 일도 치사한 일이고 돈주고 양어장고기를 낚으며 즐거워하기도 싱거운 노릇이다.     인류는 도시를 세우면서 자연과 등지고 고요함과 영원히 고별하였다. 청정은 천연적으로 대자연과 련계되여있기때문이다. 도시는 우리에게 고도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창조해주었지만 대신 우리에게서 고요함과 정결을 회수해걌다. 꽃은 있되 창 턱에 놓인 애처로운 꽃이요 나무는 있되 먼지를 들쓰고 후줄근해진 가로수뿐이다. 인 간은 자연을 도시에 옮겨오고있지만 모두가 인조품이다. 마치도 아빠트벽에 붙은 공기조절기가 바람을 내보내주지만 대자연속의 청풍은 아닌것처럼 말이다.     격변하는 시대!더없이 다사분주한 이 인생현장에서 오히려 고요한 곳이야말로 복지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사치한 추구일가? 그러나 청정함을 찾아갈 곳이 없다. 인위적인 고요를 저절로 창출해 낼수밖에 없다. 서재의 탁상등을 끄고 두터운 카텐을 꼭 치고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자기 심방에 들어간다. 고요는 오직 자기 마음의 골방에 있을뿐이다. 그속에서 나는 어떠한 인생씨나리오도 엮어갈수 있다.     고요함속에는 자기 봉페와 자의적인 소외와 적막과 고독만이 웅크리고있는것이 아니다. 고요함속에는 분방하는 열정, 뜨거운 동정, 끈덕진 우정, 다하지 못한 사랑 그리고 온갖 따스한 상념들과 아픈 추억들이 조용히 숨쉬고있으며 고요함은 꼼지락거리는 감성과 깨여난 리지, 명지한 판단과 오기를 내여준다.    그 고요함속에서 나는 생명의 급류에도 뛰여들어보고 소용돌이속에서 자맥질도 하며 격정으 파도에 실려 높이 솟구쳤다가도 참회의 깊은 골짜기에 곤두박히기도 한다. 고요함속에서만 자기 마음의 구석구석을 밟아보고 엿볼수 있으며 연후에 자기다운 모습을 자아의 거울앞에 내세울수 있다.     고요는 번거로운 세속과 인습에 절고 구겨진 내 마음을 조용히 다림질하게 하고 방황하는 마음을 고요으 항국에 불러들인다. 그러고나면 나의 라태와 해이와 방종이 다시 동결되고 보잘것없는 교오가 녹아버려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해석해 보게 되며 혼돈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가늠하게 된다.     로자가 귀원(归元)에서 이르되 “우리가 외계와 통하는 감각을 차단하고 거치장스러운 리지의 문을 닫아버리면 평생에 도가 끊기지 않을것이요, 이와 반대로 감각지능을 열어놓고 일을 번거롭게 하면 한몸을 구제받지 못하리라.”하였다.    그렇다. 고요만이 줄수 있는 그 차분한 경고속에서 헝클어진 정서와 쪼각난 사색들을 내심하게 조합하고 인생의 다른 진미를 조용히 혼자 맛보군 하는것도 살아가는 하나의 자세이리라. 철모르는 소년소녀들은 원숭이처럼 뛰여다니기 좋아해서 고요함의 경지를 알리없고 청년시대는 준마와 같아서 앞으로 내달리다가 채찍을 맞기십상 이다. 인생의 중년은 수레에 메워진 황소와 같아서 고요히 누워 새김질하려 해도 그럴 여건이 안된다.    잡다한 인생마당을 등지고 여유롭게 고요함을 즐기게 되였다면 성숙의 언덕에 올라앉았다는것을 의미한다. 그 언덕의 고요함속에서 당신은 동년의 순진함을 주을수 있을것이고 덤벙이며 걷던 젊은시절의 꿈길을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다시 걸어볼수도 있을것이며 석양이 비낀 인생의 막바지에서 잔광의 성스러움을 음미하며서 자기의 삶을 차분히 새김질해볼수 있을것이다.     생명철학은 운동에 있다. 허나 정서와 상대되는 범주이다. 다동증과 조동증(躁动症)은 다 철부지아이들과 경박한자와 향락주의자들의 전매품이다. 현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소음을 만들어내고 눈을 자극하는 오색령롱한 불빛으로 성결한 별빛의 고요를 대신한다.     우리는 소택지에 빠진 다음에야 정토를 찾고 그리워한다. 그런데 향락과 자극을 찾아 광분하는 이 시대에 정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정토는 없다. 오직 자기 마음속에 정토가 있을뿐이다. 그러나 고요하면서도 깨끗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가두는 번뇌와 속박의 담장이 될것이다.     고요함을 즐기는 사람은 심령의 록지에 들어선것과 같다. 오직 고요함만이 창조를 잉태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궁형의 고통과 치욕을 잠재운 고요속에서 씌여졌고 괴테의《파우스트》도 60 년의 기나긴 고요와 적망이 낳은것이다. 눈부신 인류문명의 그 모든 들창은 농가의 새벽들창이 서광의 정적속에 열리듯 청정, 고요함속에서 열리였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또 다른 온갖 풍부한 내용은 고요속에 있다고 할수도 있으리라. 떠들썩함속에 생명의 분방함과 열정이 끓을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엔 영원히 파하지 않는 잔치란 없는법이다. 오직 자기 마음의 골짜기에 잡아두고있는 고요함만이 그 자신의 생명의 다하는 순간까지 깃들어있을것이다. 스스로 깨뜨려버린 꿈일지라도 그 꿈은 아름다움으로 굳어져있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2004년 10월 28일
743    (진언씨수상록 37<2>) 긍정사유의 저변 댓글:  조회:5131  추천:0  2016-06-05
                                                               긍정사유의 저변                                                                          진 언       사람이 한시각도 사유하고 숙고하지 않으면 그는 식물인과 다름없다. 사유란 세상을 꿰뚫어보는 마음의 눈이다. 세상은 부단히 변화한다. 이런 변화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유가 세상보는 눈이 되여야 한다. 생각하며 살것인가 남의 생각을 따라 살것인가. 늘쌍 사유하고 숙고한것은 무엇이든지 점차 마음의 경향이 된다.     사유는 유전자 풀(Pool)과 같다고 한다. 생물은 새로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미리 보유하고있던 유전자 풀을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 사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상황에 부딪쳐 그런 사유의 풀이 있기에 가지가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며 살아갈수 있다. 그런데 사유는 급변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사상해방, 관념갱신같은것이라고나 할가, 그것은 생물의 종의 진화가 돌연변이를 리용해서 진행되는것과 같다. 사유의 진화도 돌연변이를 통해 질적변화를 가속화된것이다.     흔히 말하는 정사유란 곧 바른 생각이다. 좋지 않은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을 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긍정적인 사유이다. 불교의《잡아함》에 “해뜨기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正見)이 나타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正思惟) 내지 정정(正定)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이 해탈한다.”고 설파하고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견으로부터 바른 생각이 나오고 그로부터 바른 선정과 해탈이 나온다는 도리이다.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정사유는“생각해야할것(可念)”과“생각하지 말아야할것(不可念)”에 대해 옳바로 판단하고 실천하는것이라고 말한다. 생각하지 말아야 할것이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출리(出离)”의 마음가짐을 가지는것을 말하고 성내지 않고 분노를 잘 다스리는 “무에(無恚)”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어리석음을 잘 다스리는 “무치(無癡)”의 마음가짐을 가지는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통 긍정적으로 사유하라는 말을 잘 한다. 그런데 다른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말고 동조해야 내가 안전할수 있다는 처세술이 곧 긍정적인 사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은 자기가 보는만큼 넓어있고 생각하는만큼 의미가 있게 된다. 그저 보고들어서 알기보다 더 요긴한 문제는 단순히 정보로써 맹신하는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이) 옳고 누가(무엇) 그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것이다.     니체는 쓰고있다. “비록 온통 밝지는 않다하더라도 드디어 수평선은 다시 자유롭게 나타났던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우리의 배는 다시 모험을 떠날것이다. 위험을 무릅쓸것이다. 인식을 사랑하는 자의 모든 무모성이 다시 허용된다. 바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리고있다. 아마도 이와같은 자유의 바다가 아직까지 없었으리라.” 니체가 말하다싶이 사유의 바다, 사상의 바다에는 풍랑이 사납다. 온건파가 아닌 생각이 세상을 주도한다. 용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만든다.”      니체는 이렇게 긍정적사유를 호소하면서도 “도덕에 대한 복종은 노예적이며 허영이며 리기적이며 체념이며 음울한 광기이며 사상을 버리는것이며 절망적인 행위이다.”라고 부정하기도 하였다. “매서운 눈초리로 천부의 손가락질을 대하고 머리숙여 유자의 소가 되련다”는 로신은 당시 세상을 많이는 부정적으로 보면서“…참담한 인생에 두려움없이 직면하여 림리한 선혈을 두려움없이 정시”하라고 호소하였다.        로신처럼 용기없이는 진실을 밝힐수 없고 불리익을 감수하지 않으면 진실을 말할수 없는 인생현장이다. 그만큼 긍정적사유이든 부정적사유이든 환경에 달린다.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들이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나 메시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대상으로부터 신속하고 용이하게 그 이미지나 메시지를 감지하게 되고 또한 재빨리 감응하는 성향이 있다. 례하여 예쁜꽃들이나 그 향기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혐오의 감정이 발동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 꽃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나 향기의 강한 호소력과 이미지와 메시지에 의해 우리 마음에 내재한 섬세한 미적감성이 신속히 반응하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꽃들이 만개한 봄날이라 하더라도 만일 황사가 진하게 끼였다든가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거나 바람이 불게 될 경우엔 그러한 주위에서 일어나는 부조화나 불협화음이나 가해요인들에 의해 꽃들이 손상되고 추락되거나 희석되며 큰 안목으로 바라볼 때 미의 질감이 현저하게 탕감되고만다. 이는 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깎아 내리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뿐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해 꽃이 필요로 하는 튼실한 열매를 맺는일이 어려워진다고 볼수도 있는것이다.     세상은 제눈으로 본대로 생겨먹은것이 아니다. 오로지 허상의 벽을 뚫고 깊이 투시해야만 진실한 세상속이 감지된다. 한눈 뜨고 한눈 감고 귀막고 입을 봉하는것이 현명해진 인문환경에서 자유분방한 사유는 늘 무형의 벽에 부딪친다. 그래서 사유가 허망 헤매는것이다. 옛글에 “대저 겨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천지사방의 위치가 바뀌고 모기나 등에가 살을 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인의는 참혹하여 끝내 분하게 만듦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힘이 매우 크다.”고 이르고있다.     사유의 돌변은 “이단사설”을 낳기도 하는데 돌변이 없다면 사유의 진화도 없다. 사유의 돌변이 없다면 마치 리조말기 선비들의 사유층차에 머물고만다. 그때, 세계는 벌써 급속히 변화되고 동탕하고 있었지만 선비들을 지배했던 세계관은 언녕 “페경기” 에 이르렀다. 유가사상에 목을 맨 그들에게는 세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사유의 돌연변이가 없었다. 그결과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고 가슴을 칠수밖에 없었다.     대개 사람들은 득의할 때 왕왕 관방에서 승인하는 시점에서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다가 역경에 처했을 때에야 비로소 각도를 바꾸어 세계를 보려하거나 심지어 반면으로 보려한다. 다른 한 각도로 적대방을 볼 때 편견과 아집을 깨뜨릴수 있으며 더 확실하게 인생의 본질을 투시할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자기의 두려움은 저 섬뜩한 대방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마냥 부정하려고만 든다.     부정, 거부심리라는 이 불가피한 음영은 자기들의 사고를 질식시키고 있는줄을 모른다. 그래서 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살리며 콩이야 팥이야 하다가 추측이 헛다리를 짚은후면 손자밥떠먹고 천장을 쳐다보는식으로 체면에 철판을 씌운다. 결국 사유가 화석이 되는것이다. 사유의 화석화근원이 무엇인가? 그네들은 마냥 적대방을 깎아내리워야 자신이 강해지는듯한 착각을 가지고 자아를 만족시키려드는데 세상에 그처럼 불쌍한 넋들이 없다고 풀이하고있다.     원래 긍정적사유의 심리바탕은 자신심이다. 자신심은 긍정판단에서 가장 유력한 동력이다. 적대방이의것은 좋아도 아니기만 바라며 “흥”소리를 앞세우는것은 그저 부정사유가 아니라 저능아의 사유이다. 여론으로 밥을 벌어먹고사는 사유화석자들이 특정대상을 사팔뜨기눈으로 보는것은 자신심의 부재를 말해준다. 부정적시각으로 보는것을 비판적사유방식이라고 인식하는데 기실 비판성사유란 론리방법을 기초로 한 일상적사유의 실제와 심리경향의 발전과 결합한 일계렬의 비판성사유기교이다.     비판성사유는 사유과정, 통찰과 분석과 평가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긍정적 판단으로 진행되여 유형,무형의 사유반응과정을 얻기 위해 과학적근거로 하여금 일상 상식과 일치하도록 시도한다. 이 시점에서 비판적사유를 한다해서 죄다 긍정적으로 생각할줄 모르는것은 사유관성의 편향이라 할것이다. 아무튼 긍정사유가 그 사람을 지배해야 할것이다.                                                                                     2014년 6월 5일 (단풍잎14기)
742    인생은 미완성작 댓글:  조회:3868  추천:0  2016-06-02
                                                      인생은 미완성작           흔히들 인생을 길에 비기여 인생려정이니 인생행로이니 하지만 또 다른 시점에서는 한권의 책, 미완성일수밖에 없는 실화에 비길수 있지 않을가싶다.     그러나 느낌과 생각대로 엮어지는 인생실록이 아니다. 각자가 써내려가는 인생실화에서 매 하루의 생활이 한단락으로 될것이다. 회억록이나 자서전은 기억의 지팽이를 짚고 추억의 비탈길을 오르면서 적어내려가지만 인생실화는 어디까지나 현재형으로만 오늘을 서술할수 있을뿐 복선을 깔고 허구할수도 없다.     래일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르고있다. 그 래일이란 수자가 없는 저축통장에 불과하고 날자가 없는 빈계약서에 불과하기때문이다. 오늘이 과거로 되고 래일이 오늘로 되여지는 나날, 하루라는 그 한단락, 그 한페지에 적혀지는 생명의 흔적만이 소중하다. 인생은 길지 않으므로 간략한 서술이란 있을수 없다. 인생실화는 무수한 수정을 념두에 두고 초고지에 쓸수도 없으며 한글자도 고칠수 없다. 인생은 연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그대로 실전이며 그나마도 일차성이다.     혹자는 인생실화란 한권의 쓸모없는 책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아무리 잘 쓴다해도 종당엔 한장한장씩 떨어져나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릴것이기때문이다. 혹시 그 한장이나 일부분을 주은 사람이 있다해도 책을 쓴이의 마음을 알아낼수 없기때문이기도하다. 그 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것만이 아니라 책을 주어서 읽은 사람마저 종당엔 가버린다. 그러나 쓰기를 포기할수 없다. 포기한다는것은 곧 자기 생을 스스로 끊어버리는것과 같으니 말이다.     인생의 한페지ㅡ하루의 생명운동을 잘 쓴다는것은 어렵다. 흔히 편안으로 자기 인생을 수식하려들지만 도를 넘은 편안은 무료함을 선물할뿐이며 그 무료함은 할일이 없다것만이 아닌 일종의 참을수 없는 시달림이라는것을 느낄 때 그의 인생실화에 공백이 생길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할일없는 나날을 보내는것 이기때문이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냥 불만하고 불평부리며 자포자기할수 없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사람을 경시하지 않는다. 절승경개의 산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에 우리들이 다가가는것이 아니겠는가? 현시대는 행동하는 인간, 분발하는 인간, 자기 관리에 근엄한 인간만이 살아남게 되여있다.     인간은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예술품이며 교묘하게 꾸며진 조물주의 걸작이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도 결국은 조물주의 손에서 녹아난다. 이 모든것이 생명은 근근히 한권의 아무 쓸데없는 책, 실패한 책이 될수밖에 없는 운명을 결정한다. 물론 당신은 이 사실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역시 속절없다.     사람은 비극작가의 태도로 쓸모없는 책, 실패한 책을 쓰고있다. 하느님의 앞에서 천지와 무한대한 시공간을 종이로 삼아 끝없는 고난과 재난성적인 필묵으로 인간이 빚어내는 세계비극을 쓰고있다. 이 책은 제목이 없고 서명이 없다. 이 책의 독자는 오직 운명의 신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사라진다는것을 명백히 알고있다. 그러나 나는 의연히 날마다 아득바득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에 온 이상 하루하루 존재하면서 생각대로 살아간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나의 존재를 과시할것이며 한마당의 생명에 미안하지 않게 할것인가?     나는 알고있다. 언젠가는 무궁한 세월의 바다에서 버림을 받는다는것을, 그러나 나는 생각하며 분투하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지 않으면 나의 생명이 억울해 할것이고 나의 정신과 심령이 헛되이 소모될것이다. 한번가면 다시 돌아올길 없는 심연속에 묻혀버린다는것을 알고있기에 더구나 버둑거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의연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며 생각의 준마를 달린다. 그러지 않으면 열정으로 충만된 넋이 안녕할수 있겠는가? 나는 알고있다. 생명은 쓸데없는 책이라는것을, 그러나 나는 고집스레 그냥 써내려간다. 나는 이 세계속에 한분자이고 세계는 곧 나이기때문이다.     오늘은 어제의 래일이다. 오늘을 잃으면 곧 래일도 잃고 어제도  잃는다. 오늘이 기분나거나 의기저상하거나 더없이 쾌락하거나 슬프거나 다른 사람이 분담할수 없다. 그것은 오직 나만의 오늘이나 다른 사람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현재가 중요하다. 한사람에게 주어진 오늘은 많지 않다. 한사람의 수명을 여든살로 계산해도 3만개도 채안된다. 오늘은 술잔에 잠기고 래일은 목용탕에서 퍼지고 모레는 치마폭을 따라 돌고…그리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날이 다가설때에야 흘러간 하루하루를 되새기며 허무의 술잔에 후회를 넣어마실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흥분된 마음으로 자기의 재부를 계산하지만 자기의 오늘을 잘 계산하지 않는다. 하여 잃어버린 돈몇십원은 아쉬워 밤잠을 설치지만 스스로 멋없이 흘려버린 오늘에 대해서 진정 애석해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무도 당신의 오늘을 훔쳐가지 않고 아무도 당신의 오늘을 강탈해가지 않는다. 당신 스스로 기꺼이 오늘을 버릴수 있을뿐이다.     매 하루는 지극히 평범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열정의 벽돌로 잘 굽혀질 때 래일의 탑은 한층한층 높아질것이고 자기만의 생명탑으로 솟는다. 그러나 아무도 인생탑을 마무리짓지 못한다. 어제가 아무리 눈부시여도 이미 흘러가버린것으로서 이 하루가 세개의 어제를 담당한다고 하는것이다. 어제, 오늘, 래일을 하나의 천평우에 놓을 때 오늘이 가장 무게를 누를것이다. 오늘이란 두글자는 간단하지만 당신의 일생을 쓰기엔 족하다. 매 하루를 오늘로 여기면 그 한페지가 잘 씌여질것이다.     무엇이나 가볍게 포기하지 말라. 태양은 매일 동녁하늘을 물들이며 솟아오른다. 추운 겨울에나 삼복염천에나 흐린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어김없이 이 지구촌에 온다. 당신이 아무리 상쾌하거나 아무리 슬프거나 매일 오는 오늘은 우주의 법칙이고 섭리의 발걸음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이 하루로 압축된 인생행로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이지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싫증내지 않고 충실하게 가꾼다면 비록 미완성작이나마 그 한페지에는 감탄표를 찍을수 있다.      인생로선은 포물선이다. 저곡으로부터 고조에 이르러 다시 천천히 저곡에 이른다. 그 사이에서 기회를 잡는것은 인생의 이채로운 경계이다. 기구한 인생길에 얼마나 많은 파란곡절이 있는지 모른다. 어떤 어려움은 당신이 피하여 갈수 있지만 반드시 마주향하여 갈수밖에 없다. 돌아갈 길은 없다. 그때 개변할수 없는 현실은 당신의 심리상태는 개변할수 있지만 분식해서 쓸수는 없다.     두사람이 감옥의 철창밖을 내다보고있다 하자. 한사람은 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보고 한사람은 진흙탕을 내다볼것이다. 당신이 가히 개변할수 있는것과 당신이 접수하고싶지 않아도 접수하는것은 인생에서 일종 경계이다. 인생은 한잔의 술과도 같다. 술잔에 술이 찰찰 넘치면 흐르고 그것을 마셔버리여 빈잔이 되면 다시 가득 부어야 한다. 얻고 잃는 과정에서 평형을 잘 잡는것은 인생의 일종 심리상태이다. 인생일사에서 여의치 않은 일이 십중팔구라고 하는데 스스로 얼마만큼 여의치 않음을 안다면 어찌 그것을 마주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번다하고 잡다한 생활속에서 작디작은 일이 그냥 우리들의 신경을 긁어댈수 있다. 마음가짐에 따라 부동한 풍경을 볼수 있다. 가마를 가시고 사발을 씻는 소리의 연주속에 생활은 한권의 재미있는 책이 되는 감을 느낄수 있다. 시고 달고 쓰고 매운 맛은 영원한 선률이다. 눈물로 두눈을 깨끗이 씻어낸 사람만이 비로소 눈앞에 생활풍경을 똑똑히 볼수 있다. 아픔속에서 모대기다가 초탈하였을 때 마음의 평온을 가질수 있다. 놀라움에 소스라치지도 않고 담담한 심정으로 생활속에 희노애락을 대한다면 그것은 생활의 일종 승화이다. 실패로부터 성공에로 나가고 다시 실패을 나락에 떨어지는 선회속에서 흡취한 경험과 교훈을 일종 인생경력이라 한다. 매개인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인생궤적이 있다. 실패와 성공은 일념차이다. 배부르게 먹고살기 위해 불볕아래 땀흘리는 건축장의 민공들을 바라보면 자기가 행복하다는것을 느낄수 있다.     산다는것은 바로 희망을 의미한다. 그 희망이 실오리같아도 희망은 희망인것이다. 희망을 달콤한 기대라고 한다. 상념은 따스하고 향기로운 마음이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해보고서야 자기의 가치를 가늠하는것은 생활의 강자의 자세가 아니다. 인생은 자기것이고 꿈도 자기것이다. 자신심은 아무도 박탈할수 없는 권리이다. 총명은 당신의 선택이고 충실함은 당신의 간판이다.     인생길에서 귀중한것은 이미 얻은것이나 잃은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가지고있는것이다. 재물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재물때문에 슬퍼하지도 말라. 가지고있던것도 종당엔 잃기마련이다. 잃은것을 두고 가슴을 앓기보다 그것을 아끼는것을 배우라.     달은 둥글었다 이즈러지고 꽃은 만개하였다 잎이 진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일뿐 아무 리유도 없다. 완전완미함에 도달하려는 념원은 갸륵하지만 그것은 하늘의 척도로서 우리가 미칠바가 아니다. 완전완미한 인생이 없기에 인생은 미완성작이 되는것이요 전반생은 멋모르고 써내려간것이라면 후반생은 반성하며 써내려갈수 있다.     별빛이 흐르고 어둠이 바뀌면 새날이다. 세월은 류수같고 인생은 막무가내하게 떠내리는 쪽배와 같다. 흐르는 순간마다의 풍경을 쓰자. 그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미완성작의 전부의 내용이 될것이다.                           2007 년 8 월 14 일  
741    (진언수상록 37 <1>)등급관념의 비희극성 댓글:  조회:4479  추천:0  2016-05-24
                                        등급관념의 비희극성                                                        진 언     등급관념은 계급사회의 총아이다. 중국사람들의 등급관념은 5천년의 봉건력사가 물려준 유물로서 아직도 국인들의 심목속에 뿌리가 깊다. 인간사회에 계층갈등은 어떻게 시작되였을가? 일찍 춘추전국시기부터 국왕이 타는 마차는 말이 몇필이여야 하 고 사대부들의 마차는 몇필이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가마도 여덟사람이 메는것 과 네사람이 메는것, 두사람이 메는것이 있었는데 수자로 신분을 나눴다.     흔해빠진 오색에서도 일컬어 황색은 황가전용 색채로 규정되였고 룡은 황제전 용의 상표로 고착되여져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색갈의 옷을 착용하는것이 금지되였다.     부동한 등급을 과시하기 위해 단어사용도 매우 강구하였다. 이를테면 황제는 자칭 “짐”으로서 천하에 유아독존이였기에 다같은 죽음도 일컬어 “붕어했다”고 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에도 무슨 급은 몇급호텔에 들수 있고 어떤 전용차를 탈수 있다고 제정하였다. 상급이 하급을 만나면 “접견”이고 동급끼리면 “회견”이라 하고 하급이 상급을 만나면 “배견‘拜见’”이라 한다던가, 상하간에 오가는 공문서도 “상행문‘上行文’, 하행문 ‘下行文’,평등문‘平等文’”이라 하고 주석단에 좌석배치에도 등급이 체현되고 연회도 남향좌한 “총통석”이 있는 등 상하좌우, 동서남북에서 서렬제가 엄연히 체현된다. 이것은 완고한 관료주의 후유증이 아닌가?     계층갈등의 근원은 경제상에 정의의 부재이고 사회의 부도덕성과 관계되여있다. 맑스식으로 표현하면 지배계층은 모든 정치권력, 사회지위, 그리고 리념까지도 독점하고 힘에 의해 자신들의 계급리익을 극대화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바로 이것이 계급갈등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였고 지금도 자랑스럽게 답습되고있다.       로씨야혁명으로 비로소 인간평등, 모두가 참인간이 되는 세상을 표방하게 되였 지만 실천적으로 지향하다가 중도이페되였다. 물론 력사는 자신이 가야할 길이 이미 그어져있다. 사회와 인간이 절대적자유, 평화, 평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서는 인간화가 되지 못한것으로서 그것은 사상적인 루각에 희망사항으로 적혀있을뿐이다.     모비행장에서《공제구역통행증》을 가진 “특수인물”이 친구를 데리고 무검사통과 하려다가 제지당하였다. 그러자 핸드폰으로 누구에겐가《비행기가 제시간에 뜨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했는데 얼마나 신통력이 대단했던지 과연 한 시간나마 지체되였다. 그제야 구겨진 체면을 살렸다고 생각했는지 그만하라고 “지시” 해서야 “계엄령”이 해제되고 비행기가 리륙하였단다. 이렇듯 영욕관이 거꾸로 된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평등하게 사람을 대하고 본분을 지키려는《무능력자》들을 멸시하며 뭇별들속에 달이나 된듯 양양자득해 한다.     이 부류의 사람들의 입에서 쩍하면 “내가 누군지 알아? ”라는 자기 과시의 언동이 잘 튕겨나온다? 2010年10月16일 저녁. 리계명이란자가 하북대학교정내로 미친듯 자동차를 몰고 질주하다가 두녀학생을 쳐놓아 한 학생이 당장에서 죽고 한 학생은 중상당하였다. 하지만 그자는 자동차를 세우지도 않고 대문으로 도망치려 하다가 학 생들과 학교보위일군들이 막아서는바람에 할수없이 차에서 내렸는데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적반하장으로 “내차를 봐 긁히우지 않았나, 당신이 나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가? 내아버지가 리강(李刚)이야!능력이 있으면 고발해보라구,”라고 기고만장해 하였다. 이 사건은 전국민의 지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그리하여 “내아버지가 리강이야” 하는 말은 “관2대”를 풍자하는 대명사로 류행되였다.     “나”가 누구인가? 우선 사람, 다같은 물종일뿐이다. 물론, 돈, 권세가 부가물로 붙겠지만 그 돈이 그 자신이 아니고 권력이 그의 인격력량은 아닌것이다. 이런 영욕관이야말로 가치관념이 얼마나 비틀어졌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괴리는 뿌리깊고 기관이면서도 유치하고 가관이면서도 가소롭다고 해야 할것이다.     사회는 문명시대를 지향하여 달리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각화되는 등급관념의 “초한계선”은 빈부차이를 축소하는데 장벽이 되고 이런 장벽이 높아있을수록 이른바 화해사회건설은 공리공담이 될수 있다. 공민들이 사람의 인격은 평등하다는 기성도리를 상식으로 알게 되기까지는 아마도 세월의 고개를 무수히 넘어야 할듯싶다.     석수쟁이 눈껌쩍이부터 배운다고 무슨 관직의 끄트머리에 앉으면 곧 “재세”부터 피우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는데 벌써부터 등급관념을 체현시키려는 작동일게다. 그러나 소위 “틀”을 내려할수록 그 “틀”이 일그러지는것을 곁에서는 슬프게 바라보지 않을수 없다.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던가. 아니면 나귀가 말을 쫓아 달리다가 다리가 부러진다던가? 어쨋거나 거기서 거기인것을…     그런데 구미여러나라들에서의 등급관념은 중국사람들의 사상의식, 등급관념과는 너무나 틀려있다. 미국은 매주 한번씩 백악관을 개방하여 국민들이 참관하게 하고 국가의 정치중심과 접촉하면서 집정자들의 하루의 사업일정을 료해할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단다. 더구나 놀라운것은 총통님이 참관인들과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우리로 말하면 “서왕모”의 반도원에 초청받아 천도복숭아를 얻어먹는만큼 희한하고 경악할 일이 아닐수 없다. 그들의 그런 거동이야말로 어떤 계시를 주고있지 않는가?!     미국의 정부부문은 민중을 위해 복무하는것을 취지로 내세우고 민생을 료해하고 적시적인 대책을 세운다고 한다. 이것은 공포된 사실이다. 이런 민주평등의식을 가진 위정자가 있다는것은 미국공민의 행운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오래전에 이런 위정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한 국가의 정상이 보여준데 심각한 의미가 있다.     상기한 비행장광대극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루즈벨트의 일화가 있다. 1943년, 루즈벨트총통이 영국수상 처칠을 만나 구라파대륙을 진공할 계획을 세우려고 영국으로 향했다. 그번 42시간의 비행은 두다리가 마비된 루즈벨트로서는 준엄한 도전이였다. 당시 루즈벨트의 비행사는 “그는 아무런 특별요구도 제기하지않았고 우리가 몇개 좌석을 련결하여 간이침대를 만들어주었지만 앉아있기를 더 좋아했고 줄곧 깨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누울자리가 없으니 특별대우를 받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것이다.”라고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해 하였다.     루즈벨트의 행위는 인간적인 도덕수양과 유관된것일뿐 그가 처한 사회문화환경과 별로 관계가 없었다. 그는 시종 다른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것이 존경을 받을수 있는 행위방식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런 심리기초는 곧 사람과 사람은 마땅히 평등해야 한다는 뿌리깊은 사회의식이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문화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있다. 이는 우리들 특유의 가치판단이다. 그래서 2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연히 특수화는 당연하며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고 지위를 나타내야 체면을 세우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자의 도덕경 24장에《발돋움하여 서는 자는 서있을수가 없고 량다리를 벌리고서는 자는 걸을수가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자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잘했다고 하는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잘난체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은 도(道)에 있어서는 먹다남은 음식이요 쓸모없는 행동과 같으므로 누구나 이를 미워한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자는 행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있다. 그러나 제노라하는 자들은 이런 금언이 있는지도 모를수 있다.                                                         2011년 10월 15일 
740    인생의 고개고개에 댓글:  조회:4200  추천:1  2016-05-21
                                          인생의 고개고개에       흥망성쇠의 원리에 따라서 한 사람의 생명을 한그루의 나무에 비할수 있다. 움트기전 땅속에서의 꿈은 잉태기이고 포유기는 묘목이라 할수 있고 20약관까지는 애목이며 중년은 거목이요 로년기는 고목봉춘의 색바랜 꿈에 매달리는 고목이라 할수 있다. 이 모든것은 년륜으로 해석된다.     도리대로 말하면 한 사람에게는 오직 한가지 나이만 있게 되였다. 그러나 사회인으로서는 년령이 부동한 각도에서 표현된다. 우선 일력년령인데 자연년령이다. 이 년령은 출생하여 숨을 마감할때까지의 옹근 생명과정을 뜻한다. 옛글에 인명재천이라 이 년령은 염라왕을 내놓고는 아무도 좌지우지 못하는 절대적인 생명려정이다.     다음 생리년령으로서 신체년령이라고도 한다. 일력년령은 같을지라도 생리년령은 다를수 있다. 어떤 사람은《청산을 두루 밟았어도 사람은 늙지 않았다》는 말처럼 나이보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있고 어떤 사람은 늙기도전에 쇠해지는 경우가 있다. 의학가들은 인체기관의 이런 로쇠정도에 근거해 생리년령을 규정짓는다.     세번째는 심리년령인데 꽃은 늙어도 뿌리는 늙지 않고 사람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은 이에서 비롯된것이다. 나이테는 겹겹이지만 생활에 대하여 충만 된 열정을 지니고 열심히 살아가는데서 표현된다. 늙은 말은 구유앞에 엎드려있어도  뜻은 천리에 있다는 전고도 이를 두고 생겨난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에 앞서 심리가 먼저 쇠퇴하여 사유가 보수적이고 경화되여 자랑이 아닌 늙은티를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년령과 지성이 꼭 정비례되는것은 아니지만 이 시점에서 년령의 본질은 지성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외 사업년령이라는 말이 있는데 교령(教龄)이나 공령(工龄)이니 하는 등등의것이다. 자연년령과 개인리력서에 년령이 다를수 있고 년령과 사업년령이 정비례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뜻을 이루어 큰 그릇으로 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루속에 콩나물처럼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버리거나 빼놓은 낫자루가 된다.     어떤 사람은 불혹의 고개에 올라서면《이제 하늘을 뚫겠소. 자식들에게나 희망을 걸고 살아야제》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자식들의 인생에 얹으려 한다. 그야말로 한창 타오르는 초불을 불어끄는것과 같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집요하고 의지가 굳어 늙도록 생명운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생강은 늙을수록 매워진다는 말은 인생을 석양 처럼 사람들에게 걸맞는다.      소년기를 벗어나 청춘기에 들어서면 인생의 고개길에 오른다. 청춘은 생명의 봄, 인생의 전성기이다. 혈기와 자신심은 자본이고 용기는 통행증으로서《오관참장(五 关斬将》하며 매진할수 있다. 그러나 청춘의 고개길은 실패의 원인을 반죽하는 길이다. 청춘이면서 로련할수 없기에 실패는 예고된것으로서 로련하다는것은 별로 젊은이의 장점이 못된다.     청춘기는 인생의 한단계이지 지속상태가 아니다. 공연히 분주한 하루는 턱없이 짧고 이률배반적으로 일년은 지지리 길다. 청춘의 귀에는 일력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어떻게 늙어야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세월따라 자기도 늙어가고 나중에 죽게 되는 생명의 행진곡을 우습게 여긴다. 늙어서 짓씹는 참회는 인생의 총화이기나 하지만 푸른 참회는 실수에 대한 보상일뿐이다.     이 시기에 겸하여 세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첫고개는 환상의 고개로서 결혼하여 몇년간은 비몽사몽간에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내며  웃고울며 넘는《눈물고개》이다. 둘째고개는 타협의 고개로서 신혼의 꿀맛도 추억의 페지로 넘어가고 서로 타협하는 마음으로 위험한 권태기를 넘는《진땀나는 고개》이다. 셋째고개는 투쟁의 고개로서 결혼후 10년동안 진정 상대방을 알고나서 피차 자신과 투쟁하며 상대를 포용하는 현기증나는《비몽의 고개》이다.     희망에 불타던 인생의 태양은 중천에서 작열한다. 눈이 부신다. 분투의 열매가 무르익는 중년기는 청년기의 마지막 역이자 로년기로 향하는 시발점이다. 그러나 무감동의 시기이며 불혹의 나이답게 개탄이 있을뿐 감동은 없다. 구비구비 고개길에 분노의 화산도 없다. 별다른 기대심리도 없이 운명과 약속을 맺는다. 격정은 잠들기 시작하고 애수가 눈을 뜬다.     이 시기에도 네번째, 다섯번째 고개를 넘게 된다. 근 20년을 함께 살면서 자타의 장단점을 현실로 접수하고 서로 보조를 맞추며 돌고도는《헛바퀴고개》와 함 께 살면서 정신상 별거나 리혼한것처럼 자기의 삶을 체념하는《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돌아설수도 없고 에둘러 갈수도 없다. 그러나 서양의 어느 철학가는 남자가 40대에서 50대에 이르면 거개 스토아철학자나 호색가라로 된다고 말했다.     불혹지년이란 말은 근신이 지팽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청춘기에는 과잉된 신심이 고질이였다면 중년기엔 과잉된 의심이 고질이 된다. 일체를 안다고 자신하던 때가 언제냐? 일체를 의심한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것 없다. 멀지않아 일체를 믿게 되는 로년기의 입구에 들어설것이다. 사람이 나이 50이면 쉬쉬해진다는 옛날 할아버지들의 말은 틀린말이 아니라는것을 느끼며 허구프게 웃을것이다.     인생길에 일곱고개에서 여섯번째고개는 통일의 고개로서 과거에 있었던 모든것을 서로 털어놓고 새로운 헌신과 책임을 가지고 대방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며 사는《내리막고개》이다.      지천명의 고개에 올라서서 어정거리는새에 어느덧 년륜은 한갑자를 돌아서  황혼을 재촉하는 고개턱에 로목으로 세워준다. 세월이 얼굴에 새긴 년륜을 보듬으며 인생이 허무함에 한숨을 얹는다. 얼굴보다 마음에 더 많은 주름살들이 심어진다. 남자들은 느낌으로 늙고 녀자들은 눈으로 늙는다. 주름살은 남자들에게서는 경륜의 상징이 되여지고 녀자들의 얼굴에서는 로쇠의 표지로 된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만년이다. 아무도 로옹들만큼 생활을 열애하지 못할것이다. 그래서 일상대화의 내용은 건강과 장수와 약광고이다. 로년이란 자체가 벌써 일종의 질병이라는것을 숫제 외면하면서 말이다. 늙어도 생활을 열애하는것은 현명하지만 너무 생명에 집착하는것은 무모하다.     로년기에서 인생비극의 제5막이 시작된다. 비록 에필로그에 가까워졌으나 결말은 어찌될지 알지 못한다. 로옹의 가장 기특한 장점은 성실이다. 젊은시절엔 그토록 성실해지려고 해도 아니되였지만 성실하지 않자고 해도 성실해지는 단계이다. 이 시기에 일곱번째 자유의 고개를 넘게 된다. 결혼해서 30년이 지나면 완숙해진 단계로서 마음먹고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 눈치로 리해하며 석양의 잔광이나마 행복을 불태우는 이른바의《천당고개》이다.     그러나 무료한 하루는 지리멸렬하고 일년은 순간으로 짧아진다. 늙으면 남는것이 경험이라고 말한다. 비록 경험필기책은 두툼하지만《지낭(智囊)》은 아니다. 백발이란 나이를 먹었다는 표지일뿐 지혜의 대명사는 아닌것이다. 늙어지면 운명이란 근근히 자기가 쓴 우둔한 력사에 지나지 않건만 인생이 보귀하다는것을 열심히 론증하려 든다. 인생을 반추하지 않는 늙은이는 바보라던가, 하지만 워낙 좋은 열정도 세월의 언덕에서는 지나친것으로, 로망으로 여기는 인습이다. 그러지 않아도 자기의 나이테에 얽매여 매사에 주저주저하는게 로옹들의 보편적인 심사이다.     젊은시절의 어리석음을 하나하나 헤아려본다는것은 두번 살아가는것이라고 말들 한다. 후회로 점철된 로년의 고개에서는 구부정한 자세로 먼먼 길에 찍어온 발자국을 굽어보며 열심히 해석하지만 주착이란 딱지가 붙기십상이다. 그래서 로년에는 인생의 총화를 만년필로 쓰지 않고 묵념으로 쓴다고 하는것이다.     고개너머 또 고개, 인생고개는 몇굽이냐? 스무고개, 서른고개, 마흔고개, 세월에 밀려넘은 고개, 비도 맞고 눈도 맞고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한갑자 륙십고개에 이르렀네! 웃으며 한고개, 울며 또 한고개, 애환도 많은 회한의 고개길이여, 굽이마다 아쉬움을 새겨놓고 그냥 휘적휘적 걸어야 했던 한숨의 고개길이여!     인생이란 비바람 사나운 고개의 길이요 한고개 어렵게 넘으면 기다린듯 다가서는 험난한 고개이라 한고개 넘어섰다고 쉬여갈거냐? 굽이굽이 유감은 락엽으로 흩날리고 돌고도는 굽이길이라 멀미도 날듯싶고 한굽이 돌고 뒤돌아보며 한숨을 말아피우는 인생의 아리랑고개를 어허!아리랑이나 부르며 넘어를 간다.                                 2008 년 3 월 2  일          
739    (교육칼럼) 학문과 인간 댓글:  조회:4830  추천:0  2016-05-13
                                          학문과 인간                                                           진 언        지금은 지식경제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최대관심사는 학문이다. 하다면 학문이란 무어냐? 사전식으로 해석하면 지식을 배워서 익힘이다. 더 윤색한다면 배우고 익히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체계화된 지식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학문이란 사전식의 해석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학문의 출발지라는 고대희랍에서는 자연(동물, 식물, 광물, 우주,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철학이 곧 학문의 출발점이였다. 자연철학은 자연의 기원과 존재 및 그 운행원리(변화, 운동, 소멸)에 대해 연구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을 사랑하여 학습하는 행위를 일컫는 뜻이였다.     어떤 사람이 한 현자에게 물었다. “학문이란 무엇이옵니까?” 현자가 단마디 명창으로 답하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 한마디에 인간, 인생의 전부의 내함이 들어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최대관심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것이였다. 선인들은 학문의 목표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환언한다면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라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로 얻은 지식은 동물지, 식물지, 광물지, 자연지, 존재론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여 전해내려왔다.     학문은 학자들이 초석을 다지는것만이 아니라 학문은 인생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방식은 철학과 종교 및 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철학은 절대정신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리성을 통하여 객관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론리성과 객관성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철학은 후일 서양에서 자연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였다.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진리를 탐구하는것인데 실험과학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종교의 도움이 요청되였는지 모르지만 종교의 주된 관심은 우주의 기원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두 명제이다. 사상은 주관적인 추론이나 감성인 직관으로 리해하려고 하는 세계관이라 할수 있다. 이처럼 진리를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은 세가지 형태로 즉 사상은 감성과 주관으로, 철학은 리성에 의해 론리적으로 그리고 종교는 믿음으로 접근하였던것이다.    시대발전에 따라 학문이 심오해졌는지,학문이 지극히 풍부해져서 시대가 비약적 으로 발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인류의 학문의 휘황한 성과인 현대기술은 인간성의 위기를 자초하고말았다. 현대인은 기술만능주의, 공리주의, 실용주의 노예로 전락되였다. 인간이 만든 대량살상무기야말로 옥석구분할 자멸을 준비한것이 아닌가?     중세유럽의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아퀴나스는“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우리 자신을 극복할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수 없다고 하였다.”고 단언하였는데 현대에 와서도 그말이 들어맞지 않는가? 인성은 죽고 오로지 리득만이 살아서 펄펄 날뛰니 말이다.     물론 학문을 닦기란 배고픈 고행을 자초하는것이 아니며 인간존엄이나 품덕만으로 이룩하는것은 아니지만 학문의 절대적인 측면은 인격을 쌓고 지식을 쌓고 사회 경험의 초석을 쌓는것으로 알고있다. 학문의 한측면은 선과 악인데 선은 진실을 알려주고 그릇된것을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하며 악은 그릇된것을 사실인양 진실을 외곡한다. 학문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인간이 학문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버린것이다.       배움이란 자의식과 무의식으로 지식과 지혜를 터득한다. 무의식은 자의식을 통해 드러나고 자의식은 자의식대로 배웠던것을 실생활에서 응용하게 된다. 학문이 가져다 준 선물은 훌륭한 인격과 완성된 자아이므로 인생의 참된 길을 알려주는 지시등이자 굽이굽이 인생려정에 리정표라 할것이다. 학문이란 상대적인 측면에선 나를 아는것과 세상을 아는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아는것. 절대적인 측면에서 인격을 쌓는것에서 진일보로 무의식속의 자아를 자의식으로 끄집어내여 인격을 완성시킨다.     학문의 진리와 인생학문은 책에만 있지 않다. 오직 류의만 한다면 방방곡곡에 학문이 있다. 우리가 있는 지구에도 있으며 우주에도 있다. 무릇 보이는것이 모두 학문이다. 공간은 기하처럼 거리의 원근과 각도의 대소, 면적의 넓음과 좁음을 알게 하고 시간은 곧 별종의 심리학으로서 어제에 대한 미련과 오늘의 집착, 래일의 지향을 계시한다. 이처럼 인생학교는 교과서에서 배울수 없는 수많은 학문을 제공한다.     대자연도 미학에 속한다. 산은 장중한 그만큼 자체의 규칙이 있고 물은 령활성과 자유를 고유하고있다. 사회란 곧 인간학으로서 진,선,미를 가르쳐주고 허위와 악과 추한것을 보여준다. 문학은 천상의 학문으로서 가히 환상의 날개를 펼쳐 우주공간을 주름잡을수 있다. 력사학은 지상의 학문으로서 반드시 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철학은 지하의 학문으로서 밑창까지 파헤치는 학문이다.     학문은 유식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학문의 소유자가 될수 있으 며 학문의 진리를 자의식중에 깨닫지 못하더라도 내면의 세계인 무의식중에서 깨닫고 어느 순간 그것이 자의식속에서 표출된다. 그래서 학문은 세상 곳곳에 있다고 한다. 가장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은 집에도 있고 일터에도 있고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다. 그래서 가장 터득하기 어려운 학문이란 인간학인것이다.     하다면 왜 수많은 돈을 팔고 청춘의 정력을 소진하면서 학교에서만 학문을 닦으려 하는가?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출세하여 쉽게 실리를 챙기기 위한 각고의 분투인가? 각자 개인적인 동기와 목적이 있겠지만 자신의 감성적, 지성적인 성장을 통하여 문화인다운 인간으로 사회에 등장하여 자신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에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한것이라면 의로운 일이다.     일체는 과거로 될수 있지만 오직 진리만은 영존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본따서 일체는 과거로 될수 있지만 학문은 영구적이다. 위인지학 (为人之学)'이란 말이 있는데 지(知),덕(德),행(行)의 심덕이 없고 밖으로 허식을 부려 남에게 알리는데 힘쓰고 이름과 명예만을 추구하는것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조중기의 학자이며 교육자인 퇴계 리황은 "학문하는데는 고귀하고 현묘한 생각을 지닐것이 아니라, 마땅히 본분 명리에 의하여 아주 가깝고 평범하며 명백한 공부를 하여 연구와 체험을 오래 쌓으면 날이 갈수록 고심(高深)하고 원대하여 끝이 없는 곳을 볼수 있을것이고 그리해야만 옳게 얻을것이다." 라고 가르치고있다.     공자도“아는것은 안다하고 모르는것은 모른다고 하는것이 아는것이니라. (知之为知之,不知为不知,是知也)”하였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只知其一, 不知其 二)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많이 안다고 할 때 오히려 편견과 아집으로 눈귀가 막히고 반대로 무지하다는것을 인정하면 눈귀가 더 밝아지고 진정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는것이요 배움에서 허심을 앞세워 많이 묻는자가 많이 안다고 하는것이다.     학문은 형체가 없지만 령혼의 량식이다. 지식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일진대 참으로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것이다. 죽을때까지 배워도 다 못배운다는 말을 변수인 지식량으로 가늠하기보다는 인간학적으로 다 배워낼수 없다고 생각하는것이 보다 더 전방위적이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모르는것이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인간과 인생일사를 다 알수 없듯이 학문인즉 인간학이므로 무궁무진한것이다.                                                                           2015년 9월 1일 (정리)
738    도깨비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4440  추천:0  2016-05-12
                                                      도깨비를 알아보다                                                                                                  진 언       “도깨비”를 사전에서 풀이하되 민간전설에서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있다는 잡된 귀신의 하나. 신통술을 가지고있어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을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옛문서에 흔히 “돗가비”로 표기되는데 세종때 발간된것으로 추정되는 ‘석보상절(釋譜詳節)'에 처음 등장한다. 한 도깨비연구 전문가의 설명에 의하면 도깨비는 “돗”과 “애비”의 합성어로서, 돗은 불과 씨라는 뜻으로서 풍요를 상징한다. 그리고 애비는 성인 남자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에 걸맞게 도깨비는 우람진 남성의 모습을 하고있다.     도깨비는 도채비, 독각귀(獨脚鬼), 독갑이(狐魅) 허주(虛主), 허체(虛體), 망량 (魍魎), 영감 (제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전라도에서는 도채비, 도체비, 도치기라고 하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도까비, 토재비, 토째비, 톡깨비, 홀개비, 홀깨비, 도깨기, 도째비, 터깨비 등으로 부른다. 도깨비는 동굴, 폐가,옛성터,큰고목 등에서 살 며 밤에 나와 활동한다고 한다     종종 잡다한 요괴들을 "오도깨비"라고 싸잡아서 부른다. 본래 반신적존재로 추앙 받던 도깨비의 숭배가 퇴색하면서 온갖 해괴한 개념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추측된다. 중세에는 도깨비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형요괴를 뜻하게 되였다. 이에서 파생되여 도깨비라는 단어는 리해할수 없는 현상에 대한 형용사로 쓰이였다. "도깨비 같다"는 말은 주로 행동이나 말투가 해괴하거나, 비범하면서도 수상쩍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도깨비가 도구에 대한 형용사로 쓰이면, 기괴하고 희한한 사물이라는 뜻이 된다.     도깨비는 귀신과 통하기도 하다. 귀신은 사람의 원한이 사무쳐 만들어진 생물이여서 악행을 일삼고 은혜를 모르며 해를 끼친다고 전해지고있다. 이를테면 매화귀신, 절구대귀신, 물레방아귀신…걔중에 서도 얼굴이 밋밋하게 눈도, 코도, 입도 없고 뒤돌아볼수록 커진다는 달걀귀신이 무서웠고 하얀소복차림의 처녀귀신얘기애 가슴을 어루쓸었을것이다.    그런데 귀신부류에 속하는듯이 보이면서도 아닌듯이 보이는 도깨비들이라는것이 있으니 머리에 뿔난것은 유각(有角) 도깨비라 하고 뿔이 없는것은 무각(无角) 도깨비라 하니 한자로 표현하자면 이매망량(魑魅魍魎)이라 하는데 이런 도깨비 저런 도깨비 온갖 도깨비라는 통칭이기도 하다.     옛날을 살아온 사람들은 도깨비이야기를 꽤나 많이 들었을것이다. 나도 쓰다가 버린 참빗이나 비자루, 거울 등 소지품이 변신하여 도깨비가 된다는 말을 딱 곧이듣고 신경이 팽팽해졌다. 전래동화에 도깨비들은 해를 끼치기보다는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갚기전까지는 절대로 악행을 하지 않으며 놀래우는 등 장난질을 좋아하는 족속으로 전해졌다. 전통관념속에 도깨비는 일종의 정령으로서 오래된 물건이나 고목 등에 령혼이 생겨나 변신한 모습이라고 할가? 재미있는 도깨비 이야기 하나있다.     옛날 한 농부가 메일 밤마다 도깨비가 좋아한다는 메밀묵을 쑤어서 대분밖에 놓아두었는데 그 때마다 도깨비가 먹어주었다. 그리기를 여러달, 농부와 도깨비는 드디어 친구가 되였다는데…어느날 밤 농부와 도깨비가 마주앉아 대화를 하던중 농부가  "도깨비님은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무서운가? " 하고 묻자 도깨비가 대답했다. "우리 도깨비들은 붉은 말의 피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 그런데 자네는 무엇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가?" 이에 농부는 " 사람들은 돈이 제일 무섭다오"라고 대답했다.     하루는 농부가 도깨비 말이 정말일가 하고 시험삼아 말의 피를 대문에 칠하고 기다렸는데 도깨비가 놀러왔다가 붉은 피를 보고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하는 말이 "저놈의 농부가 나를 죽이려고 말의 피를 칠했구나. 나쁜눔, 아따 너도 한번 혼 좀 나봐라" 하면서 사람들이 무서워한다는 돈(옛날 엽전)을 얻어다가 마당안에 던졌다. 이 때 농부가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돈을 자꾸 뿌리면 어쩌냐? 도깨비야, 좀 그만 던지라니까" 라고 엄살을 피웠다. 도깨비는 농부가 정말 무서워서 그러는줄 알고 신이나서 엽전꾸러미를 집안에 던지는 바람에 일조일석에 갑부가 되였단다.     옛날엔 귀신(魂), 도깨비가 득실거렸는지 재미나고 가슴이 죄여드는 설화가 많이 류전되였으나 근래에는 도깨비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아마 시골마을에까지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귀신과 함께 없어졌을것이다. 그러다가 “도깨비세상”인줄 모르는가고 말하는 기인을 보았다.     20여년전 일이다. 당시 학교에서 교원주택을 짓게 되였는데 원교원사택의 터에다 짓기에 4만원이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고무줄집인지 며칠건너 2만원을 더 내야 하오, 5천원을 더내야 하오 하다보니 나중에 8만원도 더 넘게 되였다. 그래서 교원들속에서 불평들이 분분했는데 집을 분배할 때 보니 우무룩한데가 너무 많았다.     남들은 그러려니 하고 명철보신하고 있는데 원래 역지못한 나인지라 참다못해 하루는 교장을 맞대놓고 부르튼 소리를 했더니 “헝, 지금 도깨비 세상인줄 모르는가?” 라고 말하여 어안이 벙벙했는데 차차 지내보니 그 “명언”처럼 대명천지에 문명개화한 도깨비들이 득시글거려 경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설에 리매도깨비들은 뿔이 난 유각도깨비들이여서 무슨 못된 짓들을 했는지 모르지만 현사회에 “인도깨비”들은 권세를 등대고 리익이 되고 좋은 일은 퉁퉁디 제몫으로 챙기는게 관례로 되였다. 현대판 리매도깨비들은 법규도 무시하고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팔듯이 높이앉아 끝없이 사욕을 채우려 들면서도 입으로는 미사려구를 늘여놓으며 군자연하는 “도깨비”들이다.       유각도깨비들은 뿔이 없는 무각망량无角(魍魎) 도깨비들과 작당하여 신의 위력에 버금가는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데는 말려낼길이 없다. 도깨비들 가운데 남자도깨비를 유각(有角)도깨비라 하고 녀자도깨비를 무각(无角) 도깨비라고도 하는데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이런“도깨비”들이 수없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것을 오래 살다보니 깨닫게 되였다.     옛날엔  엉덩이에 뿔난 도깨비가 없었다는데 지금은 엉덩이에 뿔난 도깨비가 부지기수다. 하기사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며 “금나와라 뚝딱” 하면 지페도 자동차들이로 들어오고 “미색아, 이리 온!”하면 명주바지에 닥싸리처럼 묻어와서 질탕거릴수 있으니 래일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당장은 감각천하라 그 아니 성수날것인가?     권전교역(权钱交易)이 시대풍조가 되였는지라 오로지“썅챈칸(向钱看)” 하 며 용용매진하는데는 그야말로 혀가 굳어질 지경이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도깨비 방망이로 뚝 딱해서 만들어낸 가짜약으로 무고한 목숨들로 돈다발을 챙기는 도깨비들, 눅거리 관광이라고 유혹한후 사전에 파놓은 함정들에 관광객들을 밀어넣고 운무산속에서 꽃구경을 시키듯하는 몹쓸 려행사들의 도깨비짓들에 멋모른 관광객들이 눈을 펀히 뜨고 홀리우는 등등,     설화속에 도깨비들은 장난치는데 그쳤다지만 문명도깨비들은 전문 사람을 해치고 탐욕에 혈안인데 아수라가 본다면 혀를 빼물것이다. 아수라는 원래 육도 (六道) 팔부 중(八部衆)의 하나로 싸움을 일삼는 나쁜귀신으로서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요귀 인데 현대도깨비들보다는 그래도 취할점이 있으렸다. 설화속에 도깨비들은 씨종자도 남기지 못하고 절멸되였지만 기실 현대인들 각자 마음속에 “도깨비”가 들어서 벼라별 짓을 하도록 꼬드기고있다.                                                              2015년 11월 15일
737    그 손!!! 댓글:  조회:3926  추천:0  2016-05-03
                                                      그  손!!!         7척사나이로서 매니큐어인지 미조(美爪)술인지를 하는 현대멋쟁이 아가씨들처럼 손의 보양에 신경을 썼다면 대단히 머시기한 일이라 하겠지만 한창나이 때 나는 확실히 손때문에 웬간히 왼심을 썼댔다. 지탑에 장알이 박히고 모내기에 손톱눈이 모지라지고 밭김때 풀에 절어들고 논물에 퍼지고 엄동 곡괭이질에 터갈리여 그야말로 솔뿌리같고 북두갈구리 같은 험악한 내손이였다.     처녀애들처럼 모내기때 손가락을 잘라낸 장갑을 낀다는것은 암소를 웃길일이여서 감히 그러지는 못했지만 밭갈이때는 그 없는 돈에 돼지가죽장갑 하나는 꼭 갖추어 끼고 지탑을 잡았다. 그러나 손땀에 절었다가 건풍에 마르면 생소가죽안에서 손이 보호되기커녕 되려 썩살을 굳혀주었다. 그래서 장갑이 마를새 없이 물에 젖혀가지고 끼면 장감이 젖어있을때까지는 손이 편안하였다.     그러나 뿌리깊은 장알은 굳으면 더 굳었지 사그라질줄 몰랐다. 하여 면도칼로 깍아내기까지 하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오줌물에 씻으면 손이 보드라와진다고 해서 저녁에는 제오줌에 손을 씻었다. 논김을 매고나면 손이 조금 고와지는듯 하다가도 호미잡고 제초기 잡고나면 그꼴이였다. 더구나 참기어려운것은 무슨 영양소가 모자랐던지 손톱눈이 꺼져들어가서 엄지손톱 량쪽귀로 피가 슴새는것이였다.     그렇게 밭에서 벌벌 기여다닐 때 내손은 손이 아니라 앞발처럼 생각되였다. 물론 농민이래서 다 내처럼 손이  험악한것은 아니였다. 내가 천생 못생긴 손을 가지고 역사질하면 엄마는《밤낮 일만하다가 돌아간 네애비의 손에 비하면 꽃이네라》하고 꾸짖기도 하였다. 역시 험악한 손은 유전이였던가보다.     내가 평생 부러워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천성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과 희고 부드러운 손이였다. 그 손이 붓대를 쥔 손이든 간부의 손이든 관계없이 부러워했고 그만큼 은밀한 곳을 꺼리듯이 손을 내놓기 꺼리였다. 그럴때마다 옛사람이 손을 두고 팔자를 운운한 글을 보며 몇번이나 개탄했는지 모른다.     같은 인간의 손이라도 류류별별에 형형색색이지만 나는 우둔하고 빈천하고 고생 문고리를 쥐고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타고난 운명대로 지구수리에나 열심히 하면서 살면 될것을 웬 손타령을 하였는가? 한마디로 본분을 지킬줄 모르고 허영심의 작간에 매달렸던것이다. 누군가 사랑과 가난과 기침 세가지를 숨길수 없다고 했는데 나로서는 손을 숨길수 없는것이 제일 안스러웠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어데가나 눈에 번쩍 띄이는 촌바우라는 인상을 주는것이 싫었던것이다.     궂은일 마른일 가릴처지도 못되여 상농군이 되였지만 해볕에 얼굴만은 잘 그을지 않아서 비슷하게 차리고 나서면 남의 눈을 속일만도 했지만 빌어먹을 손이 한번 누구의 손과 맞잡히면 영광스러운 신분이 홀짝 드러났던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지만 나는 그때 확실히 그런 얼간둥이자 흰둥이였다. 룡정시내로 인분실러가거나 벼짚을 팔러갈때는 오츄멜로브처럼 갑속에 든 사람이 되여 자신을 숨기려 하였으니 얼마나 비속하고 유치했던가?     여우 요정이 다른것은 다 변하게 하여도 꼬리만은 감추지 못하듯이 손이 시사하는 신분은 뛸데없는것이다. 내가 농민이면서 농민으로 보이기 싫어했다는 용서못 받을 “자사계급사상본질”이 우무룩하게 잘 감추어졌기에 망정이지 겉에 드러났더면 그러지 않아도 부르기좋은 개똥녀의 처지에서 하루 세끼먹듯 더구나 빈하중농들 앞에 나서서 교육을 받아야 했을것이다.      확실히 늘 드러내고 있는 손도 어떤 측면에서는 감출수 없는것의 일종이다. 나는 차차 자기위안을 배워냈다. (손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을 시사할뿐만아니라 한사람의 품성, 인격가치도 체현한다. 어떤 사람의 손이 제일 위대한가? 로동자, 농민의 손이다!어떤 사람의 손이 제일 깨끗한가? 밭가는 자에게 진리가 있듯이 거무데데한 농부의 거친 손이 도덕적으로 가장 깨끗한 손이다. 희고 보드라운 매끈한 손이 가장 더러운 손이 될수 있다. 검은손 더러운 손이란 말은 손의 모양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그 외형속에 감춰진 속창을 두고 한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아Q식의 정신승리법을 익혀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끼끗한”로총각시절도 번져지고 허수룩하고 게으른 나그네가 되여진후 나는 손에 대해 더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옆구리 곪아터치게 되였는데 손톱눈 곪는것을 헤아릴 경황이 아니여서 될대로 되라고 부는바람, 흘러가는 구름에 내맡긴 내 인생이였으니 자연스레 접수될 일이였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나와 반생을 모질게도 롱담을 하더니 드디어 장마철 구름속에서 어쩌다 빠끔히 얼굴을 내밀기도 하는 해처럼 벙긋 웃어주었다. 나라의 새 시책의 덕분에 후반생에 운이 트이게 되여 숙망의 교단에 오르게 되였고 분필가루에 씻기고 교편에 다슳어서인지 얼마 안되여 손에 장알이 차츰 빠지고 뼈가 연해지더니 어느 새 마디굵어 우악스럽던 손가락들이《매끈해지기》시작했다. 옛말 그른데 없다고 정말 일이 상놈이였다.     분필대나 소모하며 후반생을 살아오면서 내손이 근본을 싹 잊어버리게 되였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는 못했다. 물론 내 못생긴 손이 아니라 인간의 손일반이였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손은 그저 희고 곱고 부드러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반과 관계되는 심오한 학문이 있었다.     4천만년의 진화를 거쳐 가장 완미하고 특색있는 기관의 하나로 된 손이야말로 인류의 지혜와 창조의 실천자이다. 바빌론의 공중화원, 애급의 금자탑, 만리장성, 돈황 막고굴…그리고 현대고기술의 놀라운 성과 등등, 인류가 창조한 모든 기적은 대뇌의 산물이지만 결국은 손의 창조물이고 기적이였다.     인류는 동굴속에서 살때부터 손을 숭배하였다고 한다. 3만 5천 년전의 인류의 조상들에게 있어서 손은 짙은 종교적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제우스의 손은 곧 절대적권력의 상징으로서 력량과 지혜를 상징한다. 고대희랍시기 다섯손가락의 이름은 지금의 이름과 달랐는바 엄지는 력지(力 指ㅡ힘의 손가락)로서 력량과 과단한 결재를 대표했으며 문명의 반영이고 건강과 관련된다고 인식했다. 식지는 방향지 (方向指)로서 지혜와 통하는 문을 대표했으며  중지는 모욕지(侮辱指)로서 경멸과 모욕을 표시하는 손가락으로 되였다. 무명지는 의생지 (医生指)라 했는데 직접 심장과 통하는 동맥이 있다고 인식하였다.     …예로부터 섬세하고 긴 손을 가진 사람은 품성이 자애롭고 자선하기 좋아한다 하였고 살찌고 투박한 손의 임자는 성품이 린색하고 얻는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손을 드리워 무릎을 덮으면 개세의 영웅으로 거듭난다고 했고 손끝이 허리에 이르지 못하면 평생 빈천하다고 하였다. 몸집은 작은데 손이 크면 복이 있다하고 몸집은 큰데 손이 작다면 박명하다고 했다. 손이 가쯘하고 두터우면 유복하다 하였고 손이 엷고 여위면 빈궁하다 하였다.     손이 거칠고 굳다면 비천하고 손이 부드러우면 청빈하고 귀하다 하였다. 손이 섬세하고 길면 총명하고 손가락이 짧고 손톱이 평평하면 우둔하고 천하다고 하였다. 손가락이 유연하고 긴밀하면 저축이 있고 손가락이 굳고 허트러져 있으면 재산이 흩어진다고 했다. 손가락이 봄날의 죽순같으면 청화부귀하고 손가락이 북채같으면 악렬하고 우둔하다고 하였다.     만약 발라놓은 파같으면 벼슬하여 봉록을 타먹을 운수요 손이 엷기를 닭의 발가락사이 지간막같으면 지혜가 없을것이고 우둔하다고 하였다. 손이 굴강하기를 발굽같다면 우둔하고 비천할것이라 하였고 손이 금낭처럼 부드러우면 극히 부할것 이요 손가락사이가 게사니발같다면 극히 빈궁할것이라 하였다. 손바닥이 길고 풍성하 면 귀하고 손바닥이 짧고 추하고 엷으면 천하다고 했다. 손바닥이 말라있으면 빈궁하고 손바닥이 붉기를 피를 뿜는것 같으면 영화부귀를 누릴것이다.     손바닥이 누르기를 불상에 먼지같다면 극빈하고 손바닥이 푸른색이 나면 가난할것이고 흰색이 나면 비천할것이라 하였다. 만약 손바닥복판에 검은 기미가 있으면 지혜가 있고 부유할것이나 손바닥가운데 가로금이 사방에 뻗어있다면 우둔하고 빈궁 할것이라 하였다. 아무튼 관상학에만 오묘한 학문이 있는것이 아니라 손의 모양과 쥐고있는 손금에 관한 학문도 지극히 깊은것 같았다…     손의 용도는 물건을 쥐는데로부터 시작되였고 던지는 용도도 가지게 되였다. 무엇을 그러쥐고 던져버리는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린다. 그러쥐면 주먹이요 펴면 손이고 낱낱으로 펴들면 손가락이다. 그만큼 손의 공능은 다양하고 손의 공과 죄는 인류력사의 공과 죄이기도 한것이다. 패자의 채찍을 높이 들었던 히틀러의 하얀 손이 정복자의 피비린 마수였다면 임신부의 배와 두개골을 빠개놓고 뇌신경을 건드려보며 녕악하게 너털거리던 731부대의 생명기사들의 손은 과연 인간의 손이였던가?     흑인들을 쇠줄로 꿰여 노예선에 끌어올린 구라파 노예장사군들의 손은 야수의 앞발과 무엇이 다를가? 손의 력사는 분명 한 인간의 삶의 력사이기도 하거니와 인간 극장의 희비극을 쓴 력사이기도 하다. 일제에게 3천리강산을 받쳐올린 을사오적들의 손은 더러운 발바리발이기도 했거니와 백의민족의 망국사의 첫페지를 쓴 치욕의 견증자이기도 하다.     한 개체생명의 인생사가 손으로 엮어진다면 인류의 력사도 승자의 손에 의해 거창하게 혹은 피로 물든 악행의 자술로 되여진다. 그만큼 인간의 손은 눈부신 인류 문명을 이룩하였고 인류의 가원을 초토로 만들기도 한다. 손이 위대한가? 위대하다. 손이 악착스러운가? 악착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나는 늘 《아, 그 손!!!》하고 감탄아 닌 개탄을 한다. 물론 제나름인게고…                                   1997 년 4 월 20 일  
736    (수상소감) 지각한 사랑 댓글:  조회:4011  추천:0  2016-05-03
                           지각한 사랑        갈길 바쁜 나그네의 길에 어느덧 날은 저물어 고달픈 인생마차에 락조만 차고넘 치는데 버들숲을 지나 한굽이 돌아들면 또 꽃피는 새마을이 나타날가? 예술은 길고 생명은 짧다. 지각한 사랑을 안고 허위단심 문학도의 긴 려정을 달려왔지만 어디까지 왔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한 내 문학의 현주소이다.     그런데 희출망외로 “연변일보”사 문예편집인 김철호선생께서 나의 졸작 “석양에 태운 상념”이 “해란강문학상”에 입선되였다고 전화를 해주어서 나이에 맞지 않게 부푸는 가슴을 한껏 높이며 그 영예감과 기쁨을 고맙게 받아않았다. 영예 자체는 곧 번져질 과거의 한페지에 남을 순간적인것이지만 인간의 영예욕은 늙을줄 모르고 퇴직할줄 모른다고 해야 하리라.    사실 말이지 나의 설익은 글을 번마다 잘 익은것으로 보아주고 문예란에 실어주어 못내 고맙게 생각하고있던차 이번에 문학상까지 받게 되니 더욱 감격하게 되고 나의 현주소를 조금 더 뚜렷이 적을수 있게 되였다고 느끼면서 나의 졸작을 추천해주신 여러 평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를 드린다.     문학이 숙명이였다고 생각하기는 스스로 무엇한 일이나 혹시 왜 고독한 삶의 광야에서 우왕좌왕해야 하는 문학의 길에 들어섰느냐고 굳이 묻는이가 있다면 내 대답은 역시 애매할수밖에 없다.    사람은 그저 빵으로만 살수 없다. 글쓰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문학이 워낙 척박한 정신가원을 가꾸어가는 가장 좋은 수단이였고 얼추 잡은 붓대는 내 삶의 터밭에 생의 보람을 이랑지어가는 녹쓸지 않는 보습이였다.     누구에겐들 영욕이 없으며 누군들 명예를 등한시하랴만 나는 내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흉중에 넘치는 정한과 사연을 독자들과 나누고싶고 크든 작 든 공명대를 이루어가면서 기구하기만했던 이 한 목숨이 존재하는 리유와 인격가치를 확인하고싶어 신들린것처럼 되는 글, 안되는 글들을 열심히도 써왔다.     고요속에서 천기의 묘함을 보고 한가한속에서 인생길의 어려움을 돌이켜보라는 선인들의 말씀이 있지만 바람새 세찬데 고요히 서있을 나무가 있을가? 그만큼 세상은 시끌벅적하고 인생은 부대끼기 마련이다. 련습없이 뛰여들어 부대끼면서 아프면 아프다하고 비좁으면 비좁다하고 어두우면 어둡다고 소리소리 생명혼을 웨치고실은 나이다.     수필은 아기자기하게 다루는 그런 자상한 성품이 내게는 없다. 화조월석에 그윽한 정서를 좋아는 하지만 제멋에 겨운 감탄에 자족하고싶지는 않다. 화창한 봄날을 우는 꾀꼴생의 간드러진 소리도 좋지만 밤계곡을 빠져나가느라 몸부림치는 청계천의 소란스러운 흐름소리가 내게는 확실해서 더 좋다.     인간은 너무 많은 진실성을 지닐수 없다. 그래서 인생이 괴로우냐, 사람이 고달프냐 하는 회의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다. 슬픔도 넉두리로 표현되면 가벼워지는 슬픔일것이요 슬픔이 침묵속에 싸이면 뼈저리게 새겨지는 슬픔이 될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겐 생명운동의 하나인 신음소리나 찬탄소리나 납합이 필요하게 되는것이고 문학이 수요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은 늘 글에 적힌것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것을 누구나 절감할것이다. 인새마당은 알락달락도 하겠지만 또한 얼룩덜룩하기도 한것이다. 그런데도 보라빛 안 경을 쓰고 황홀경에 잠긴듯 가장한다면 좀 야살스러운 짓거리가 아닐가싶다. 그래도 모두 감동에 박수를 보낼 때 그저 덤덤히 앉아있다면 괜히 멋적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바람따라 제 기분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정확하고 경험은 언제나 신빙성이 적고 판단은 착오를 잉태하고 다가선다. 생각하는 령혼의 사상, 어떤 알찬 의미로 채워지는 문학은 힘겨우면서도 즐거운 인생작업으로서 그 모든것을 포섭할수 있다. 옛글을 본따서 말한다면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글이요 산천과 초목과 새울음소리는 땅의 글이요 시와 수필은 글쓰는 이의 심장의 메아리이다. 그것이 시내물소리처럼 간간히 메아리치는가 폭포처럼 쾅쾅 울리며 메아리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시가 이른바 시로서만 자조해서 안되듯이 수필은 수필에 그치지 말고 인간감정의 음영과 변화다단함을 있는 그대로 비춰보이는 거울이 되여야 바람직하다고 믿는터이 다. 그저 단정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반듯한 거울만으로가 아니라 우습게도 보이고 비뚤어도 보이고 난쟁이가 되여보이기도 하는 웃음거울로도 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문체보다 주관성을 마음껏 담을수 있는 자유수필이라지만 독자들이 애독하는 문체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리유는 그것이 인생과 인간의 내심심처의 밝고 어두움 을 나의 눈과 가슴을 통해서 굴절반사시키려고 시도한다는것이 아닐가싶다.     수필이 자아표현이라지만 그저 신변잡기도 아니고 자기 감정에 대한 재치있는 수식도 아니다. 그리고 있을수 있는 꿈얘기는 더구나 아니다. 누군가 “시는 가장 좋은 단어들이 가장 좋은 순서로 라렬된것”이고 수필은 “단어들이 가장 좋은 순서로 라렬된것”이라는 절창을 내놓았다. 수필이 그저 행복하기만 하고 그저 선량하기만한 마음이 내키는대로 흐르는 기록이 되는것만으로는 자족할 때가 아니라고 본다.     사상에서 속박받고 내심상에서 주저하기만 한다면 그 수필은 자기를 자기의 상아 탑속에 가두는것이 된다. “어느 민족이든 자기들의 시와 미술과 음악과 문학이 쇠퇴 혹은 륭성하는데 비례하여 쇠퇴 혹은 륭성하는 법”이라고 말하면 너무 주제넘은 론리 일가?     아무튼 내 인생은 속절없이 저물어 석양은 혼자 얼굴을 붉히고있지만 문학에로의 내 지향과 뜻만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나는 내 동년배들에 비해 꼭 10년이 뒤처진 글쟁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절박하게 시간의 촉박함과 생명의 유한을 느낀다.     숨가쁜 내 문학의 막차가 이제 몇번이나 더 힘찬 고동을 울릴수 있을가? 다만 이제 남은 길이라도 더 열심히 달리라는 고마운 편달로 생각하며 모든 고마운 사람들에 게 경의를 드린다.                                                                                                      2006년 2월 10일 “해란강문학상” 시상식에서
735    (교육칼럼) 문과도 잘 배우자! 댓글:  조회:4803  추천:0  2016-05-02
                                                  문과도 잘 배우자!                                                                                               진 언       시대는 다원화로 나아가고 있고 인재수요에 대한 사회양상도 다양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리과를 나와야 출로가 있고 할 일이 많다는 관념이 강세를 유지하고있다. 대학지망란을 보더라도 문과류대학에 비하여 리과대학은 선택의 범위가 넓고 직업을 찾기도 쉽다고 여기게 되였다.     그런데 옛날 국유기업천지였을 때는 ×××공정사로 고급대우를 받았지만 지금은 인문환경이 다르다. 사회에 나가 꼭 자기 전업에 맞는 직업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리공과를 다니여 전업기술을 장악하였더라도 많은 경우 다른 업종의 사인기업에 취직하게 경우도 있고 인문지식이 수요되는 정계에 들어갈수도 있다. 그러므로 발전적각도에서, 2분법으로 문제를 보아야 보다 미래지향적이라 할수 있다.     우리 여기와는 달리 외국에서는 중소학교에서 분과를 하지 않으며 심지어 대학의 기초계단에도 문리과를 나누지 않는다. 이 단계를 일컬어“통식(通识)”학습단계라고 하며 대학상급학년에 가서야 분과한다고 한다. 우리 여기서는 고중 2학년이 되면 문과와 리과로 나누었는데 일계렬의 교육문제 즉 전면발전의 취지에 걸맞지 않는다.     발달국들에서의 대학교육이란 사유능력배양을 목표로 하기에 전업과 직업이 대응되는가 않는가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사유훈련만 착실하게 잘 한다면 무슨 일을 해도 다 통한다고 생각하는것이다. 대저 사유능력이 차하다면 무엇을 해도 제대로 해낼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이 점에 대해 우리 나라의 교원들과 학생들이 리해하지 못하기에 한사코 리과에 운명을 거는 관념이 지금도 주류이다.     리공과를 “도구(工具)리성”이고 문과의 사유기초는“인문리성”이라고 명명하고있 다. “도구리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심령밖에 사물을 깨닫게 하는것으로서 자연을 인식하게 하는 리성사유를 개발하는데 목적을 두고있다. 그리하여 옳바른 태도로 세상에 림하고 외계에 마주서고 사실을 투시하도록 인도하려 한다. 이 시점에서 모든 사람들이“도구리성”을 배우고 구비해야 한다는것은 백번도 더 자명해진다.     서방에서는 이런 도구리성교육을 소학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물론 “리공과교육”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도구리성에 대한 기초교육으로서 “과학교육과정”이라고 칭하고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리공과는 초급적인 “도구인격”을 창조하려 하기에 진정한 “과학정신”을 배양해내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있다. 이는 서방의 교육과 대조되는것으로서 다만 기본도구교육이 있을뿐 과학교육의 차원이 미달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근원적으로 시종 교육문제가 제기되고 있는것이다.     다원화의 현시대에 적응할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근근히 도구리성만으로는 판부족이다. 경쟁하면서도 얽혀돌아가고 자기중심주의지만 결국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생마당이기에 반드시 “인문리성”이 구비되여야 한다. “인문리성”이란 한마디로 사람의 내심세계를 연구하고 리해하는 리성이다. 이런 내심계는 자아인지와 료해, 타인에 대한 인지와 료해 이 두개 방면을 포괄하고있다.     저명한 학자이자 교육가인 호적의 교육리념에는 “문리(文理)”의 소통이 핵심이였다. 그는 일찍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 학생들의 수준을 향상시킨다. 조기전문교육은 지식의 폭을 좁아지게 한다. 말하는 기계보다 사고와 리성의 노예를 양성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여 리과에 뜻을 둔 학생들에게 문학과 력사를 배우게 하였다. 하여 당시 인문학전공자들은 자연과학 과목을 이수해야 졸업할수 있었다.     인간은 시종 고립적인 존재일수 없다. 얽히고 서린 인간관계와 복잡다단한 정감문제처리에서 “인문리성”이 주도하게 된다. 인문리성은 도구리성과 달리 객관적표준이 없다. 매 개체, 매개 군체는 각자 특유의 사유와 가치관이 있기에 사회란 모래알을 뿌려놓은것과 같다. 바로 그래서 “문화정합(文化整合)”이 수요된다고 하는것이다. 또 그래서 인간관계학을 가장 배우기 어려운 학문이라고 하는것이다.     인문교육은 본질상에서 사유와 가치관교육이고 과학교육과 도구리성은 본질상에서 역시 사유방식의 교육이기에 전문가들은 아이들의12세 이후의 교육중점은 마땅히 인문과 행위심리교육이라고 력설하고있다. 교육중점을 점차 “인문리성”교육에로 전화시켜 인격, 인성, 심리, 문화와 사유의 과정속에서 커가도록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수리화”와 “과학과”는 기실 “지식”과 “기술”로 가르쳐왔다.     하여 우리의 리공과는 “과학가”를 배양해 내지 못하고 근근히 대량의 “품팔이군”. 로임족들을 양산해는데 만족하고있다고 입을 모으게 되였다. 중국의 교육은 오래전부터 사회운행궤도와 맞물려 진행되지 못한 허점이 있었다. 물론 이것이 요긴한것이 아니다. 요는 교육이라는 공공자원이 일부 사람들이 재부를 쌓는데 수요되는 도구로 충당되였다는 얘기다. 10년, 20년후의 세대들이 자기 후대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하게 된다면 결과는 가히 예견할수 있지 않은가?     오로지 한갈래 사유방식과 한가지 가치관을 전수받을수밖에 없는 문과를 “위문과 (伪文科)” 라고 일컫는다. 진정한 문과는 지혜를 전수하여 사유능력을 제고시키고 안계를 넓혀주어 사회생존과 생활능력과 적응력을 련마하게 하는 학과이다. 달리말하면 진정한 문과는 사회량심과 사회가치체계와 사유방식을 배양하는 학문으로서 인간의 도덕품질을 함양한다. 인문학을 진정 잘 배운 사람은 마땅히 인심, 인성에 대하여 투철하게 료해할수 있어야 하고 역지사지로 자타를 보듬을줄 알아야 한다.     서방의 발달국가들에서 소학교때부터 문학작품을 읽히는것은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되여있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아이들에게 인류와 자연과 자기와 생명에 대하 여 심층적으로 사고하도록 이끌어주면서 사람이 사람으로 될수 있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게 하고 자기생명의 의의와 자아가치에 대하여 깊이 사고하게 한다. 교육은 우선 사람을 만들면서 인생, 사회를 알고 살아갈수 있도록 인도하는것이다.     물론 리공과도 일종의 사유방식의 교육학과임은 두말할것없다. 그러나 리과는 일종 일원화사유모식밖에 허용하지 않으므로 령활성이 결핍하게 되는데 오직 문과만이 다원화사유방식을 장악하게 하는 학과이다. 일원화사유모식은 아름다운것은 아름답고 미운것은 미운것으로서 량자지간에 원칙성적인 구별은 드팀이 없다. 말하자면 1=1은 2일 뿐 하나가 둘로도 나뉠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마치 인상으로 좋은사람, 나쁜사람으로 금을 긋는것과 같다. 살아가는데 융통성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2원화사유모식에서는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은 대립통일속에 공존하며 호상 전화할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믿고있다. 사유모식은 교육받은 정도와 무관하며 지식과 학벌이 꼭 사유와 가치관의 다원화를 가져다주는것은 아니다. 례하면 일자 무식의 농민과 대학교수는 모두 비슷한 일원화사유모식과 어방사한 립장을 고유하고있다. 인생기술이 꼭 학식과 등호로 되지 않는다는것을 현실이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다원화사유모식은 세상엔 미와 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심리에 따른 사유와 판단각도에 따라 판정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유모식을 “만유사유 (万维 思维)”라고 한다. 물론 언어로 표달될 때는 근근히 이원사유만 남게 되고 만유사유는 지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리공과에서 제공할수 없는 가치관과 사유방식을 문과가 전수하고 배양할수 있다. 수자, 공식으로만 풀리는 인생마당이 아니므로  문과도 잘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 지어진다. 다원화시대가 이렇게 요구하고있다.                                                                     2015년 8월 13일
734    (잡문) 남을 못살게 굴기 댓글:  조회:4841  추천:1  2016-04-22
                                   남을 못살게 굴기                                                 진 언     인간개체의 존재리유중에 한가지가 남을 못살게 굴기인지? 인간이 목적, 지향적인 존재여서 남을 못살게 굴면서 자기 존재의 리유를 갖게 된다는것인지? 아무튼 인류력사는 루루천년 남을 못살게 굴었던 무리와 그에 의해 못살게 된 약자들의 력사라고 말해도 과시 틀리지 않을것이다.      국제적으로 남을 못살게 구는것은 정글법칙인가? 동서고금에 남을 못살게 구는데 악명높은 인종은 서구의 백인들이고 그 대표로는 미국이라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력사는 기록하고있다.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90%를 학살하고 세운 나라가 미국이다. 학살의 과정에서 천연두가 묻은 담요를 제공하면서 생화학전의 유례없는 승리(?)를 이룬 미국은 출발에서부터 잘못된 나라였다.     미국의 정신은 자신의 리익이 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이어지고있다. 하와이를 얻기 위하여 미국에게 기대지 않는 원주민의 90%를 학살하면서 “죽은자는 말이 없다” 는 명언을 신봉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렇게 건국된후 저지른 만고의 악행을 죄다 폭로한다는것은 쉽지 않다.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침략전쟁을 벌인 미국은 지구촌의 청부폭력배라 할수 있다.     우선 말한다면 윁남전쟁은 스페인전쟁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량심을 시험한 두차례 전쟁중의 하나이다. 윁남전쟁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윁남전쟁은 단순한 리념적대결이 아니라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독립투쟁과 식민주의, 혁명과 반혁명, 통일과 분렬, 자유와 억압, 황인과 백인, 서양과 아시아, 락후와 현대, 농업과 공업, 원시적소총과 현대식폭격, 선입견, 사랑, 증오, 인권, 종교의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인류의 량심을 비웃듯 대량살상무기와 생화학무기(네이팜탄과 수많은 비치사성 생물무기, 고사용 화학무기)를 동원하며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던 미국의 오기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윁남민중의 반제국주의 자주력량은 불요불굴하였다. 결국 지상병력 54만을 동원하며 문명의 석기시대화를 재현하려던 미국은 1973년에 만신창이 된 불성모양으로 36계 줄행랑을 놓고말았다.     력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토착민들에게 감행한 수탈과 못살게 굴기도 잊지 않고있다. 미국의 세계침략사에서 중남미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남을 못살게 굴기는 극악하였다. 자초에 중남미지역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높은 수준의 문명 (잉카문명 등)을 물려받았으며 1950년대까지만해도 남미지역의 경제상태는 좋았다. 하지만 구미제국주의의 수탈로 몸살앓으면서 그들의 경제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여갔다.     미국은 가난한 자들의 성공을 증오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침탈할수 없는 경제체제에서는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한 어떠한 성공도 인정하지 않는다. 니카라과가 바로 그러하였다. 참혹한 학살은 말할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은 철저히 짓밟혔다. 미국은 자신의 말을 들어서 실패로 이어지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하는 선례를 남기려 하지 않는다. 미국이 진정 도달하려는 목적은 무엇이였던가? 대답은 자명해진다.     례하여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음모가 그렇다. 이라크는 미국의 강도높은 경제봉쇄조치로 인하여 의약품과 식료품조차 수입하기도 힘들었다. 하여 100만명도 넘은 어린이들이 아사하였다. 그리고 유엔을 앞세워 이라크를 완전 무장해제하였고 얼마후 무단적으로 침략하여 다시 민중을 유린하였다. 전쟁을 위해서 모든것을 날조하고 진실을 뒤엎는 미제가 남긴 교훈은 이라크만이 아니다.     미국이 나쁜 나라라고 지정하고 악마화하면서 못살게 군 7개 나라가 있는데 리유는 미국에 반기를 들고 맞짱뜨기때문이다. 미국이 못살게 군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고 괄목할만한 나라로는 남미에서 반미의 선줄군인 꾸바, 반미행동대장이였던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미국이 사주한 콘트라와의 내전을 이겨내고 다시 좌파가 정권을 잡은 니까라과 등 나라들이다. 미국은 너무도 남을 못살게 굴었다. 남을 못살게 굴었기때문에 꼭 보복을 당한다.     이밖에 강대국 미국을 이겨버려 세계력사를 바꿔버린 윁남, 지금도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미국과 대결하고있는 조선, 이라크의 수렁에 빠진 미국을 놀리듯 중동에서의 패자로 된 이란, 오랜 정치경제적 봉쇄로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변함없는 반제국주의적정책을 펴고있는 리비아 등 7개 나라의 반미투쟁은 비장하다. 그들은 자기민족답게,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현재의 아메리카지배와 종속이 아니라 제나라에, 력사에, 상황에 맞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그런데 미국에는 용납못되는것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주민들의 삶이 가장 부유했던 리비아와 이라크, 시리아를 생지옥으로 만들어놓고 “인권옹호”,“주민들을 겨냥한것이 아니다” 라는 삼척동자도 코웃음칠 거짓말로 진실을 외곡한다. 중동을 침략하여 생명들을 살육하고 6000만명 (세계 인구 120명당 1명)이라는 난민을 만들어냈다. 이 생지옥을 빠져나오다 물에 빠져죽고 (최근 10개월 동안 빠져 죽은 숫자 3200여명), 구사일생으로 이국땅에 들어갔으나 각국의 천대와 학대로 죽임을 당하고 혹은 되돌려보냄을 당하는 서러움을 겪는다. 시리아의 난민만 460만이고 13만명은 독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럼에도 서방렬강들은 그 나라 “잘못된”정권을 겨냥한것뿐이라고 포장하는데 대가리를 삶으면 귀까지 익지 않던가? 고래싸움에 등이 터지는것은 새우들뿐이다. 그야말로 인도주의적이고 아이러니한 평화적융합의 걸작이라 해야 하는가?     힘없는 정의는 횡포무도한 부정의의 힘앞에 창백무력하다는것을 력사가 가르쳐주었다. 불의는 오직 정의로만 지킬수 있고 진리도 오직 힘으로만 말할수 있다는것을 잔혹한 현실이 보여주고있다. 힘없는 약소국은 아무리 정의를 웨쳐도 통할수 없고 민족생존권도 지켜낼수 없다. 강자가 호령하면 굴종하고 섬겨바치고 위협하면 물러서다못해 통채로 먹히우는 오늘의 세계에서 진리는 오직 하나, 자체의 강력한 대항마에 있다. 상식도 리성도 팽겨치고 비정의의 강권을 마구 휘두르는 깡패들과는 오직 강단으로 맛서는수밖에 없다. 강자가 남을 못살게 굴려면 천백가지 리유가 있지만 오직 당하기만 하는 약자의 리유는 오직 약하기때문이다.     명기해야 할것은 “벌거지”도 디디면 꿈틀한다는것이다. 세상엔 벌레같은 인생은 있어도 철두철미 벌레가 되려는 민족은 없다. “약소민족”이라 하던들 목을 길게 늘여 뜨리고 “그냥 죄여줍시사”하고 들이댈건가? 남을 물에 빠뜨리자면 자신도 신발이 젖는다. 남이 발목이 잠기면 자신도 허리를 넘어 목까지 잠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말은 절대진리이면서도 일반상식이다.                                                2016년 3월 25일   
733    석양에 태운 상념 댓글:  조회:3727  추천:0  2016-04-15
                  석양에  태운 상념           락조가 비낀 시골의 강언덕에 나홀로 점도록 앉았다. 가을하늘은 씻은듯이 맑고 쌀쌀한 기운이 황혼빛속에서 파르르 떨고있다. 잎새가 지는 백양나무 우둠지에 잠간 걸터앉은 석양은 무척이나 지쳐보인다. 아마도 구만리 하늘길을 쉬지 않고 해종일 달린 탓이리라. 잔광속엔 이미 빛과 열이 거의나 없지만 몽환경같은 색채만은 짙다.     멀리 정처없이 떠가는 구름에 석양이 령혼을 불어넣기라도하듯 황금빛으로 물들여놓아 그지없이 아름답다. 금빛으로 물든 공기도 흐르는듯 순간마다 기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영광과 고귀함과 휘황 함을 상징하는 화려한 금빛, 흥분과 희열과 활발한 기분을 시사하는 등색, 활력과 열정과 희망을 상징하는 붉은색, 고귀함과 우아함을 안겨주는 자색…     그렇듯 다양하고 다채로운 석양빛속에 모든것이 눈부시게 이채를 돋군다. 그러나 그 모든 색조의 바탕색은 누른빛이다. 그런 황금빛은 단풍입처럼 찬빛을 머금고있고 온 대지와 하늘이 그 기이한 색조속에 고요히 숨쉰다.       마침내 해는 서산마루에 맥없이 걸터앉아 한껏 얼굴을 붉히며 마치나 다 늙어버 린 로옹처럼 아쉬운 눈길로 대지를 일별한다. 그 눈빛은 더없이 온화하고 정겹지만 슬프도록 무기력하다. 그러나 최후의 축복을 하사하듯 마지막 잔광을 깡그리 끌어올 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면 금방 솟아오르는 달을 방불케한다. 미구에 담담한 람색 으로 창공을 색칠하면서 장엄하게 조용히 밤세계로 가고있다.     노을빛에 마음 물들인채 고즈넉이 앉았노라면 황혼은 시나브로, 시나브로 상념을 불러온다. 온통 몽롱한 빛속에서 상념은 끝간데없이 흘러가고 지는해와 락엽과 흘러 간 인생을 안고도는 생각은 끈덕지기도 하다. 맑은 호수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잔잔 하게 내 기억의 기슭에 와닿아 생명의 과거와 래일을 보듬어본다.     이 우주속에 천태만상은 서로 통하는데가 있지 않으며 상사한 일면을 시사하지 않는가? 솟아오를 때의 태양은 얼마나 힘차고 장려하며 또 한낮엔 얼마나 휘황한가? 그러나 자기의 빛과 열을 한껏 뿜어낸후에는 예이제 담담해진다. 인간도 생명의 초창기엔 저 태양과 같은 정열의 덩어리로 인생길을 질주한다고 할수 있지 않을가?     사람은 누구나 제나름의 청춘시절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누구나 조락의 섭리를 외면할수 없다. 훌훌 번져버린 그 하루가 쌓이여 달이 되고 달이 포개여져 엇바뀌는 계절이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합류되여 세월의 강을 이루고 달고쓰고 매운것이 배합되여 칠색의 인생만화가 될뿐이다.     현재란 무어냐?누가 현재를 규정할수 있는가?일초만 지나도 곧 과거로 된다. 미래란 무엇이냐?순간에 과거로 되여질 원형 그대로 다가오는듯 싶다가도 얼핏 스 쳐지나는 오늘이다. 누군가 과거에 대한 회억속에 도취되여 있다면 두번 사는것과 같다고 하더라만 아무리 들척지근한 추억이라도 종이에 싸두었던 때묻은 사탕을 녹이는 맛이 아니날가부냐?     가버린 세월을 손짓해 부르면 아픈 추억이 먼저 매달려 가슴 허비는데 왜 고집스레 추억을 붙안고 한숨 태워야 할가?그래도 그냥 집착하니 불치의 로년병이 아니냐? 석양을 바라보는 이 로옹의 속절없는 마음에도 지각한 사랑이 끓고있지만 어느 뉘가 알은체나하랴! 살같이 흘러가는 오늘은 이것저것 마뜩지 않고 래일은 또 얼마남지 않아서 아예 체념해버린채 어제에 매달리는 그 허무함이야말로 처절한것 이다.     흘러가버린 세월의 강기슭에 즐펀히 펼쳐있는 기억의 소택지는 어느 늙은이에게나 다 있으리라. 그리고 본의 아니지만 습관처럼 무시로 빨려들고 있을것이다. 그것에 인생려정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놓고 오늘 여유로운 마음으로 거기에 빠져 보는것이 행운인지 비애인지 나는 알수 없다.     다만 내청춘의 비탈길엔 비바람도 무지 사나웠다는 기억만 생생하다. 지긋지긋한 소택지에서 꿈처럼 벗어났을때는 세월의 강은 멀리도 흘러가버렸다. 가슴을 치며 아쉬워해도 놓쳐버린 파랑새였고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그러나 소잃고도 외양간을 고칠수 있다면 일종의 기회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는 할줄도 몰랐다. 그만큼 내 청춘은 광란의 10년 세월속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자격미달이여서 그 잘난 《반란의 쾌감》도 맛보지도 못하고 무료하게 보냈던것이다.     그 세월에 무료하게 보냈다는것은 정히 할 일이 없었다는것을 의미한다. 손이 발이 되도록 밭갈고 등허리 휘도록  김매고 제초기 밀고…육신은 노그라질 지경이 였지만 그러나 정신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 육체의 피로보다도 정신적인 무료가 얼마나 괴로운일인가는 아무나 체험하는게 아니다.     속세의 번거로움을 잊고 깊은 절의 법당에서 정좌하고 념주를 세는 로승의 념불은 무료함이 아니며 산허리에 나앉아 볼을 타는 호랑이의 울부짖음도 무료가 아니다. 무료함은 개구쟁이 손에 날개를 잘리고 맴도는 잠자리의 몸부림이며 꼭지가 떨어진 뒤웅박이 시들어가는 그 참기어려운 기다림이다. 그리고 찌륵찌륵 전기소리가 시끄럽 던 5급 라지오에서 무슨 말을 가려듣노라 귀를 강구는것이다.     그런 암담한 나날에 존재의 리유가 있었다면 숙명에의 굴종이고 가망없는 기다림이였다. 비록 래일이 내게는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송금통지단 같았고 가망 없는 빈 계약서에 불과했지만 기다려야 하는 외에 다른 리유가 있을수 없었다.     오는듯 싶다가도 곧 스쳐지나는 래일과 곧 굳어져버리는 과거는 동전의 앞뒤면처럼 도안이 다를뿐 그 실질은 같다. 오늘 저문인생의 언덕에서 동전의 량면을 뒤집 어 볼때 하루하루가 조급해지고 가장 요긴하고 가장 실제적이라고 생각되는 까닭도 이에 있지 않을지?     누군가 시간을 수도물에 비유하였다. 물은 흘러나와 하수도로 빠져버리지만 흐르는 그 사이에 쌀씻어 밥짓고 빨래하고 때를 씻으면 물은 결코 헛되이 흐르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물과 같은 이 하루에서만 영원을 잡아쥐고 세기 를 헤아리며 무료함을 찢어버리고 관습을 부시자. 권태를 죽이자.     묵은 옛날 돌아보지 말려면 기억을 무찔러버려라. 이 하루도 잘살지 못하면서도 래일에 턱걸이 하지말아야 하겠다. 암담했던 그 세월이 절망적이였던것은 결국은 마음의 자세문제였지 결코 세월탓은 아니다. 그런 살풍경속에서도 빛나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경험선생은 언제나 지각한다. 그리고 강의내용도 잃어버린것에 대한 총화이지 앞으로의 계시가 아니다. 그래서 실패한 교훈은 뼈저린것이요 다시 찾을길없는 아쉬 움 그 자체일뿐이다. 그저 여기저기 삽질만 하다가 물한방울 보지 못한 우물파기같은 인생만큼 더 싱거운 삶이 있을가? 나야말로 과연 인생의 터밭에 땀만 쏟으며 빈호밀질만 한게 아닌지…     그래도 살아왔고 살아가는 내 목숨이다. 래일은 바로 오늘의 연장선이고 오늘은 과거의 지속일진대 슬픈 어제였든 휘황한 어제였든 나에게도 무언가 쌓아준것이 있다고 자아를 위안해 본다. 그리고 자신을 밀어본다.      그냥 걸어라. 재난의 소택지를 헤쳐나와 밤길을 걸은 사람만이 누구보다 먼저 밝아오는 서광을 맞을수 있다는것을 잊지 않으면 너는 이제 앞에 놓인 어떠한 길이든 걸어갈수 있다. 날은 저믈고 갈길은 멀지 않지만 오늘 많이 걸으라. 몹시 지쳤더라도 그냥 걸으라. 혹 래일 네가 더 걸을수 없을지 누가 알랴!     가장 중요한것은 오늘이다. 원숭이는 옥수수를 딸 때 앞에것이 제일 좋은것은 앞에 있겠거니 하면서 하나 따고는 버리고 또 따고는 버린다. 그러나 나중엔 빈손이 된다. 돌아보아 너저분하게 널린 옥수수이삭들은 이미 버린것이다. 원숭이는 그것을 줏는다는것은 영원히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한것이리라      …석양은 혼자 얼굴 붉히고 내상념은 피빛으로 물든다. 마침내 낮과 밤의 날개가 살며시 나를 덮어버린다. 모든것이 모호해지다가 밤속에 묻혀버린다. 나는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을 절감한다. 시간의 촉박함과 생명의 유한을 느낀다. 이렇게 막연한 시각엔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나와 풀과 나무와 흐르는 저녁구름과 바람은 모두 우주공간속에 무상하다…                                                                 2005 년 7 월 21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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