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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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그늘에 말려본 인생철학 댓글:  조회:3517  추천:0  2017-01-29
                                          그늘에 말려본 인생철학                                                          최 균 선       겨울에는 불이 사랑,여름에는 그늘이 사랑, 그늘이 없으면 차일을 쳐서 서느러 움을 잡아두고 양산을 펼쳐 움직이는 그늘도 만든다. 그늘! 나무그늘, 담장그늘, 건물그늘…전선대 그늘마저 찾고싶을 때가 있다. 그늘은 따가움을 가려주지만 어둡지  않고 실바람이라도 불러들일듯싶어 좋다.     찜통더위에 그늘 찾아 앉으면 시간도 잠시 잊혀지고 제 이름도 잊혀지고 할일도 잊혀지고 가야 할 곳도 잊혀진다. 그늘아래 생활의 짐과 불안과 잡다한 번민을 잠간 부리워놓고 잊었거나 잃어버린것을 떠올리며 가벼운 한숨을 쉴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누군가 휴식할 휴(休)자는나무와 같이 있는 것(人+木, )이 쉬는것라고 풀이했다.     그늘아래 쉴때 여름도 달아나지 않고 휴식한만큼 아픈 마음도 아물어진다면 만시름을 그늘에 널어놓고 매미의 울음소리로 졸음을 불러다 꿈한자락 보듬었으면 좋겠다. 깨여나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여 지층깊은 곳에 물맛도 보고 짙푸르게 록음이 우거지게 하여 더위먹은 사람들을 불러들였으며 좋겠다.     나무가지 흔드는 바람따라 시간은 그네뛰고 나는 오늘도 그늘을 찾아 피로와 권태와 담배연기에 지쳐버렸는데 돌이키니 인생길 열심히 걸었다는것이 요만큼밖에는 못오고 주저앉으니 이제 더 바랄것 없을같다. 스스로를 편하게 다 풀어놓고 빈술병을 풀숲에 세워둔채 그늘아래에서 하품하니 상념마저 휘청거린다. 생명의 얼레도 거의다 풀어져 석양처럼 불타지도 못할바에는 그늘을 찾아 잡념에 부채질이나 할가?      그늘은 볕이나 불빛이 가려진 곳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삶의 마당에도 있다. 시름겨우면 얼굴에도 그늘지고 수심에 잠기면 마음에도 그늘이 진다. 마음이 어두워져서 얼굴에 그늘이 비끼는지 얼굴에 그늘이 지여서 마음이 어두워지는지? 그러나 그것은 별 대수가 아니다. 어찌하여 그런 그늘이 짙어가는가가 문제이다.     부정축재자들의 얼굴에 그늘이 가실새가 없는것은 언젠가 들통이 날가봐서이고 민초들은 생계문제로 마음에, 얼굴에 그늘이 지고 복받은자도 무언가 안심되지 않아 그늘이 드리우고…잠시 비낀 구름그늘이라면 좀 좋으련만 민초들에겐 고생이 장고 생이듯이 마음속에 늘 그늘이 짙기마련인데 가질것 다가지고 누릴것 다누리는 복된 사람들의 마음의 하늘에는 행복의 꽃구름만 시름없이 둥실 떠있을가.     반복무상의 경계선에 선 인생은 이래저래 시름겨운 그늘속에서 영위될수밖에 없다. 작은 웅덩이라도 기어이 채워놓고서야 다시 앞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우리네 인생마당에도 그늘은 처처에 드리워있다. 그늘을 모르고는 못살 우리네 인생이런가? 부모의 슬하를 어버이의 그늘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력한 뒤심도 그늘이라 이름한다. 하지만 마음에 그늘지고 안지는것은 마음을 지어먹는대로 되지 않는다.     무릇 뒤심은 운명를 걸기도 하는 가장 수요되는 그늘이다. 취직도 승진도 누군가의 그늘이 드리워진다면 일취월장한다. 금강산 그늘이 관동 8백리라 권세가 크면 클수록 덕을 볼 그늘도 크다, 그래서 큰일이 생기면《어쨋든 사람을 찾야하지!》하는것이 삼십륙계에서 상책이자 만전지책으로 되여있다.     땀을 들일 그늘이야 있으면 좋지만 인맥으로 얽힌 세상이라 날아가는 새도 떨굴 권세가를 등에 업으면 검은고양이가 흰고양이로 될수도 있으니 누군들 그런 그늘을 마다하랴, 그러나 그런 그늘밑은 아무나 기여들수 있는게 아니다. 집그늘은 언제나 뒤뜨락에 있듯이 무릇 모든 뒤심은 뒤문을 열어야 업을수 있다. 뒤문을 여는 일이란 제집 뒤문을 여는 일은 아니지만 뒤심은 무소불능(无所不能)이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탐탁하고 바람직한 그늘은 권력의 그늘이라는 설명이 되겠다.     그늘은 음덕(阴德)이 아니다.《잡보장경》제8권 (인터넷판)에 이런 구절이 있다.《…왕은 해와 같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춰주어야 하고 달과 같이 모든것에 맑고 시원한것을 주어야 하며 부모와 같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야 하고 또 하늘과 같이 일체를 덮어주어야 하며 땅과 같이 만물을 싣고 길러야 하고 또 불과 같이 만민을 위해 나쁘고 근심되는것을 태워야 하며 물과 같이 사방을 윤택하게 해야 하고 또 과거의 전륜성왕처럼 열가지 선한 도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고,     동서고금에 해빛같고 해볕같은 마음으로 치세안민한 군주가 있었다면 참으로 불세출의 성군인데 나는 무식해서 누구누구인지 모르고《성은이 망극하사》 달빛같고 별빛같은 마음으로 정사를 살핀 관리가 있었다면 참으로 현인군자라 할것이로되 몇몇이나 되던지 기억나지 않고 다만 권세의 그늘은 어둡다는것만 알고있을뿐이다.     권력 한자락 잡고나서 오를수록 더 오르고 싶어하는것은 과연 백성들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이 질세라 더 충족한 양광을 하사하기 위해서일가? 백성들의 머리우에 군림하여 그늘을 넓히며 일세영달을 도모하지 않으면 다행일것이다. 그늘을 던져주고 그늘아래 기여드는것이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크다는 교환법칙이 아닌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분복에 없는 그늘은 경이원지하고 차별도 없고 린색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내주는 나무그늘이건만 찾아들 경황도 없이 치수공사장에서 구슬땀 흘리는 일군들을 바라보며 저도모르게 부채질을 멈춘다. 그늘이 대지의 뉴앙스라면 인생현장에 그늘은 해석할길 없다.     그늘은 찾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것인가? 피가 아흔아홉동이나 괴였을 나이에 해바라기 해를 따라 돌듯이 그늘따라 돌며 장훈을 부르고“붉은문건학습”에 여념없는 사람들의 내속은 어떤지 몰라도 여유롭고 멋스러워 보인다. 저들중에는 일하는 손은 언제나《더러운 손》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하지만 생활은 목욕탕에 밥을 말아놓은 격이면서도 저렇게 호기를 부리는지 누가 알랴,     여름에 그늘이 좋지만 락엽지는 쌀쌀한 가을에도 그늘이 좋을리 없다. 천도는 밝음으로 음양을 나누고 춘하추동으로 사시를 정하고 남극과 북극으로 천축을 정했는데 인간사회의 음양은 누가 정한것인가? 따스함이 가장 수요되는 사람들에게 겨울해는 린색하고 그늘이 가장 수요되는 사람들이 그늘에 앉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인생현장이니 말이다. 그래서 인생마당은 얼룩덜룩이다.     해는 지구를 골고루 비춘다. 하지만 엎어놓은 장독안은 비추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해의 잘못이 아니다. 해도 걸리적거리는 구름이 미울것이고 아낌없이 쏟아주는 자기의 빛이 가는 길에 모든 장애물들을 가증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해는 공정하다. 그러나 《바라건대는 겨울에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따사로움을 더 해주고 수달피옷을 입은 귀부인들에게는 추위의 매서움을 느끼게 하소서.》하고 기원할뿐이다.                                   2007년 7월 15 일          ㅡ         2014년  
791    회한의 메아리 댓글:  조회:3688  추천:0  2017-01-23
                                            회한의 메아리                                                    최 균 선       또 한고개를 넘어섰다, 고래희라는 인생의 막바지도 코앞에 다가온다. 세월령감은 랭혹하다. 한갑자 돌고나서 더욱 시한부적인 삶을 살고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머리카락은 검은빛을 거의 잃어가고 눈도 점점 흐려지고 있음에 실망한다. 시간은 공간의 삶을 비유와 상징과 은유로 함축한다.     시간속에 공간인가? 공간속에 세월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스로 계절병을 앓는다. 계절이란 곧 철이 바뀜을 뜻하고 철이란 곧 생명선의 굽이를 뜻한다. 생명의 계절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계절이기도 하다.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도 못산다는 속담은 운명의 해빙기를 맞아 성공한 사람들만이 여유롭게 외울수 있는 말이다.     흘러간 세월의 언덕위에는 무수한 추억들이 서성거린다. 잡다한 추억들이 굼닌다는것은 희로애락의 명암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경험이 기억을 붙잡고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회색추억만 끌고 서성대는 상념은 허무맹랑하다. 누구에게는 은혜를 입었고 누구에게서는 모욕당했고 그 누구에게는 배반당했고 억지를 부린일도 큰 실수를 한것도… 가장 아팠던 일, 가장 미웠던 사람, 너무 황당해서 크게 웃었던 일, 등등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나간 추억에 매달린 헛개비들이다.     천지간에 문도 없고 담장도 없으니 오고감이 스스럼없어야 했건만 창해일속같은 인생을 하늘과 땅에 부끄럼없고 후회가 없이 산다는것이 어려워서 세월은 반성할 사이도 주지 않고 속눈섭 사이로 흘러갔으니 내삶의 자취야말로 후회스럽기만하다. 가시밭길에 찢기고 닳아서 누더기같이 된 내 삶의 양상, 인생무상 회한의 세월이여! 남은것은 명암이 엇갈려 분명치 않은 허무만이로구나.     사람은 자기 인생극을 쓴다는데 풀이슬같은 인생이여서 세월의 물결이 자취없고 뜬구름아래 진면목이 드러나는데 지금도 애써 무엇을 이루려하니 우습도다. 푸른 산, 흰구름은 절로 한가롭고 파도는 밤낮 바다기슭의 바위만 들부시며 공연히 격정을 뽐내는구나. 이제 로옹이 다 되여 마음과 기운을 풀어버리고 앉았으니 내 마음이 비로소 바다같이 넓게 열리는도다.     뿌린대로 거둔 인생의 계절을 맞아 그 결실에 실망하고있다. 이미 흉작이 된것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엄청나게 사랑했던 그사람도, 가증했던 그 사람도 고인이 되여 별 볼일이 없게 되고…그렇다. 지금은 무엇도 새로 뿌릴수 없는 계절이다. 모든것이 쇠락을 달고 다가왔다. 이제는 거둔 그대로 적으면 작은 되로 헤아리며 쭉정이면 쭉정이대로 마음의 골방에서 말리워야 할것이다. 그런데도 쭉정이를 바라볼 때는 자존심이 상한다. 자존심때문에, 회한때문에, 아쉬움때문에 인생의 막바지에서 가슴 앓이를 하게 된다.     이미 다 지나가버렸다는것은 곧 과거를 잊는 자포자기이고 자존심이 찢기는듯한 아픔인줄 안다. 아무리 깊은 상처가 남아있어도 어쩔수 없는 오늘의 자기 모습, 이갈리도록 미워도 어쩔수 없이 잊어야 하는 과거, 어떠한 사정이 있어도 그런것들을 무시해야만 하는, 아니 무시해 버릴수밖에 없는 현재의 나의 모습이 결국 과거의 모든것을 짓밟아 버리도록 충동질하는것일가?     자기의 과거를 무시한다는 말속에는 자신이 품었던 꿈, 희망, 인격력량 등을 모두 무시해버리는 결과일진대 과거의 시간만을 짓밟는것만 아니라 당시에 가졌던 자존심마저 밟아버린 결과가 되고만다. 꽃이 죽어야 열매가 맺힌다지만 내 생명의 계절엔 어울리지 않는 사항이다. 남은것은 막무가내한 유감과 회한의 메아리이다. 그 메아리마저 곧 한오리 연기속에 사라져버릴것이다     돈보다 중요한것이 량심이요 진실이며 명에나 권세보다 더 중요한것이 인격과 실속이라 믿었더랬다. 가난한 사회주의에 살면서 황금을 비웃었고 권세의 몽둥이에 피터지면서도 자존심이나 존재의 리유를 확신했다. 오직 운명대로 정직하게 열심히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왔지만 결과 가는 곳마다 밑바닥에서 기여야 했다.     졸업장이 없어 옮겨앉은 직장마다에서 소외의 대상이였고 직함평정때마다 자격이 미달이란다. 그래서 결국은 리용물이 아니면 도구가 되는것이 내삶의 궤적이 되였고 내 모습이였다. 스스로 자존을 죽이고 물없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들이래도 경이원지 하면서 선망하며 살아야만 했던것이 내 삶의 준칙이였다.     부정을 보고도 참아야 했고 비리를 알고도 눈감아야 했다. 분명 나의 잘못이 없는데도 덮어써야만 살수 있은 자신을 살펴볼 때 이미 자존은 죽어있었다. 바보처럼 살면서 분하고 억울했지만 죽어주어야만 했다. 그런 자신은 스스로 실망할만큼 비참하였다. 슬픈 일이다. 나의 탓이 아닌데도 항상 내탓인것처럼 참았던 내가 안쓰럽다. 태여날 때 운명이 나를 비참하게 하였건만 나의 잘못인것만 같았다. 일자무식 부친이 손발이 터도록 일하고 일한 덕분에 밥술이나 푸짐히 뜨며 살수 있었는데 그것이 업보가 되고 내가 그러한 아버지의 막내로 태어난것이 어찌 내탓이라 하리요.       설상가상으로 만네살 때 그런 아버지나마 세상을 떠나니 우리 오남매는 된서리에 쪽지가 떨어진 쭈그렁 애호박신세가 되였다. 그것이 어찌 내탓이고 출생이 문제여서 상급학교로 진학못한게 어찌 내탓이며 아버지 성품대로 정직하게 살아온것이 어찌 내 잘못이라 하리요? 그렇다, 정직하게 참되게 올곧게 산것은 결코 내탓이 아니다.     내가 자기에게 무책임하게 잘못 살았다면 내탓이 될수도 있는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이 살려고 애써온 나이기에 결코 내탓이 아니다. 그때의 사회풍조가 우습게 뒤틀렸을뿐이다. 그런데도 반평생을 죄지은 사람처럼 살면서 왜 내잘못처럼 당해야만 하였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머님은 어린시절부터 굴욕스러운 삶을 살수밖에 없도록 하셨고 운명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셨다. 마음속에 팔자가 새겨졌기에 그 어려운 성장기간에 내내 굶주리면서도 남의 집 오이밭에 한번 손을 디밀줄 몰랐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실수하고도 가슴이 뛰던 나였다. 그렇게 착하게 참되게 살면 운명은 미소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도 후반생이 되여서야 요행 잃어버린 존재의 리유와 인격을 찾을수 있었다. 내가 만약 보다 일찍 교단에 올랐다면 내 생명의 빛과 열을 더 한껏 발산할수도 있었을것이고 지각한 붓쟁이로 요모양요꼴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자신을 저울질하면서 내자신이 그저 서글프다.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는 삶을 살아왔는데도 회한에 가슴이 터지고 자존심이 땅에 곤두박질치며 개탄을 찍는다.     그 모두가 내탓이 아닌 운명의 작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생후유증이 지지리 나를 울리였다. 나처럼 불우했는데도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실패한 인생을 붙안고 가슴을 쓸어내리는가? 그렇게 말하면 바로 내탓이 된다. 그러나 타고 난 기질대로 살고 량심에 구김없이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일하고 학문의 꽁무니에 매달리면서 살았다. 그렇게 보면 내탓은 아니다. 그렇다. 인생의 막바지 림시일터에서도 학벌차이의 실락감을 받아안지만 그것이 어찌 내탓이리오. 돌밑에서 용케도 뻗어나온 풀줄기같은 내 목숨이 억울할뿐이다.     그래서 꽃이 죽고 열매가 맺힌다는 인과철학에 도무지 익숙할수 없는지도 모른다. 슬픔에 절었던 불우한 내삶, 이렇게 되지 않고 다르게도 될수 있었으리라는 회한의 메아리가 내심령의 골짜기에서 저절로 울려나오는지 모른다. 그렇다. 자신의 내부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강자이다. 언제부터인지 잠자기전에 자신을 해부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누구인가. 닥치는대로 읽은 그 많은 책들은 어디있으며 들었던 수많은 말들은 모두 어디에 날려가버렸는가. 부딪치고 짓찢기여 인젠 무디여버린 자존심도 체념으로 무너져내렸다.     만약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씻어내는 습관이 언녕 있었더라면 주어진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길수 있었을것이고 인생의 괴까다로운 의미도 나름대로 해석할수 있는 지자가 되였을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안목을 갖춘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분명하며 곧 삶의 의미도 깨닫는 이심전심의 마음도 아울러 갖추었을것이 분명하거만 나는 아니였다. 슬프게도 나는 아직도 지성을 갖지 못하였다.     적지 않은 배움과 개똥밭에 참외같이 살아온 쓰거운 경험도 없지는 않고 젊음의 허기증과 욕망에 매달려 버둑질한 모대김도 있었지만 인생을 거의 살도록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거니와 그런 까닭으로 인생을 막무가내한것으로 대해왔던것이다. 그러니 생활의 그 깊은 심연과 비밀을 내가 어찌 가늠할수 있겠는가.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만 살지만 괴로우면서도 그것을 얼마나 끈지게 이겨나가느냐 하는것을 실증하기 위해 생명의 연장선을 그어왔는지도 모른다. 짙게 물들였던 소망도 퇴색해버린 벽보처럼 황혼의 바줄에 걸려 조석으로 부는 바람에 날리고 지난날의 순간적인 영광도 뒤돌아보면 한낱 허망한 꿈이나 다름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이제 남은 일은 어두운 눈으로 석양의 잔광을 바라보며 삶의 어슬녘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속에 허둥대것뿐인데 가슴의 골짜기에 울리느니 회한의 메아리…                                                                                      2009년 2월 3 일                   7기
790    (진언수상록 46) 학자의 량지와 인간성 댓글:  조회:3656  추천:0  2017-01-14
                                                 학자의 량지와 인간성                                                            진 언         미국의 경제발전과정에서 노예제도와 철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새롭게 조명했다는 로버트 W. 포겔이 지난 11일 86 살로 죽었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남이야 장송곡을 부르거나 말거나…요는 그가 노벨상을 수상자로 인정된 자이지만 “노예제가 매우 효률적인 제도였으며 주인들도 노예를 재산으로 여겨 최소한 가축들만큼은 돌봤다”는 주장으로부터 드러난 학자로서의 량지와 인간성의 저급성이다.     그는 당시 남부노예들의 처지는 북부의 로동자들보다 일반적으로 나았다며 자신의 론리를 뒷받침 하였는데 얼핏보기엔 인도주의적인듯한 착각을 준다. “최소한 가축만큼은 돌봤다”는 말이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이 얼마나 지독한 편견이고 오만인가? 미국의 학자라서 그럴법도 한 말이지만 이건 스스로 문명의 탈을 쓴 인간이기를 그만두었다는 선언이다. 학자군에 이런 인간말종이 있었고 노벨상까지 받았다니 노벨상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가?!     그의 제자가 포겔이 다룬 주제들은 모두 론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하였는데 흑인들의 노예로동이 백인들의 경제효익에서는 긍정적일수밖에 없는것은 상식이하이니 생 략하고,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구라파식민주의자들은 이미 북미대륙에 반인류적인 흑인노예제도를 건립하였고 흑인노예들을 인간이하로 학대하며 고역에 내몰았다.     노예주들의 제정한 법률에 노예는 세세대대로 노예의 운명을 벗어날수 없었다. 백인들의 눈에는 흑인노예들이 일종 부동산에 불과하였는바 생활상에서 흑노들은 소위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결혼할수 없었으며 흑노들의 처자들은 주인이 마음대로 유린할수 있는 수욕의 도구였다. 주인은 제멋대로 흑인노예가정을 짓밟을수 있었고 팔 아치우거나 례물로 내줄수 있었다.     그런데도 소위 학자로서 오로지 흑인노예들의 골수까지 빨아낸 압박착취에 의하여 이룩된 경제성장만 보았을뿐 인간으로서의 흑인은 안중에도 없었던것이다. 학자이든 무엇이든 우선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학자는 학자가 아니라 경제계산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경제학자이던들 전세계를 감동시킨 미국작가 알레스 헤이리의 소설《뿌리》가 있다는 말도 못들었으며 해리엇 비처 스토의“톰아저씨 오두막”이라는 소설이 있다는것도 몰랐는가? 만약 이 두책을 펼쳐보지도 못했다면 그는 학자이기전에 벌써 지식인이 아니며 기껏해야 유명무실한 식자에 불과하다.     로버트씨는 미국사실주의 작가이자 노예제반대자인 헤리엇 비처 스토 (1811년 -1896년)《톰아저씨의 오두막》은 1852년에 발표되였는데 소설은 착하디 착하고 순하디순한 톰의 불행한 운명을 묘사하여 미국남부의 노예제도의 하늘에 사무친 죄악을 만천하에 성토했다. 소설은 발표되지 재빨리 미국전역의 상하에 거대한 영향을 일으켰으며 광대한 로동계급과 좌익자산계그분자들과 일체 량지가 있고 정직한 미국인들이 한결같이 작자의 정의적인 립장을 지지성원하였다. 이처럼 성세호대한 혁명적여론의 위력은 노예제페지운동의 발전을 크게 추동하였으며 “노예도망법” 실시를 제지하기도 하였다. 한부의 소설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를 혁명의 불심지가 된것이다.     한편 소설은 노예제의 비참성과 노예들의 참혹한 생활을 구체적으로 생동하게 묘사하여 노예제반대론자와 찬성론자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게 한 명작이다. 반대 론자들은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소재가 되였고 찬성론자들에게는 "편견으로 가득찬 책" 이였던것이다. 폭력에 반대하다가 악마같은 노예주 레글리에게 구타당한 톰이 "비록 나의 몸은 당신에게 팔려왔지만 내령혼만은 하느님의것입니다." 라고 한 선언은 이 작품의 성격과 주제로서 마땅히 학자의 량지로 읽어야 했다.     다른 많은 학자들이 포겔의 주장이 부정확한 수치에 근거하고 있을뿐아니라 노예들에게 가해진 심리적인 악영향은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듯이 그는 단지 수치로 본 미 국의 백인경제리익만 알았지 그것을 창조하여준 수천만의 흑인노예들의 생명평등권은 당초 안중에도 없었다는것을 느낄 때 연변사투리로 인간성은 완죤 저짝이다.     대저 무슨 학자이든 우선 인간적량심이 있어야 하고 학자로서의 량지가 구비되 여야 하며 나아가서 “사회의 량심”이 되여야 한다. 일전 전국인대대표 홍가주(洪可 柱)가 두가지 회의에서 몇몇 국내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준렬하게 비평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특수지위의 권전(圈钱),마술같은 치부(致富),축재속도가 어떤 롱단기업을 초과하는데 권력과 비대칭정보로 치부하기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학자는 “지식이 곧 재부”라는 시대에 국가와 사회에서의 중요성을 현시하게 되였으며 더우기 학자는 “사회의 량심”이라고 불리운다. 학자들의 도덕에 의문을 가지게 된것은 그들중 적잖은 사람들이 각종 기업들에 독립적인 동사장으로, 자문고문으로 있으면서 높은 보수를 받고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돈을 받고 시비를 가르는 마당에서 “실언”하거나 “되는대로 말하여” 해당 리익집단의 대변자로 전락되였기때문이다.     나무를 보고 수풀을 보았다고 말할수 없듯이 전문가, 학자들의 작용을 전반 부정해서는 안되지만 일부 학자들이 제멋대로 하기에 확실히 그들 자신의 공신력이 떨어지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일부학자들속에 금전을 위하여 대변하는 행위가 걷잡을 수없이 범람하고 있어 학자들에 대한 사회신임과 영예에 위기를 자초하고있다.     한개 사회에서 민중은 가히 우매할수 있으며 매체는 가히 실어증에 걸릴수 있으나 유독 학계만은 혼탁할수 없으며 량심을 가리우고 “증명도구(证明工具)”로 충당되는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들이 받는 경제대우의 고저를 잠시 불문하고 사회상에서 받는 존중정도가 미끄럼질하고 있다는것은 비애가 아닐수 없다. 여북하면 민간에서 “전문가 (专家)”를 “전가(砖家)”、“전가(专假)”라고 하겠는가? 전문가대오중에 미꾸라지들이 온 개천을 흐리는 바람에 정체적으로 공신력을 잃은것이다.     지금 “가짜대가”들이 너무많다. 조금 성취를 쌓고 침소봉대하여 학자, 전문가, 대가의 월계관을 얻어쓴다.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도 가짜같다. 2008년, 절강대학의 약학부교수의 론문표절사건은 국내외를 시끌벅적하게 하였다. 한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볼수 있고 한송이 꽃에서 지옥을 볼수 있다. 작금에 대학, 학술계에서 연구성과조작, 론문표절 현상이 극심한데 류비추리가 과연 억지일가?     진정한 지식분자는 사상으로 생활해야 하지만 사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학자로서의 최대의 비애는 독립성을 상실하는것이고 그로 인한 인격력량의 기형은 담장위에 갈대로 될수밖에 없다. 한편 학자가 량지를 상실한다면 인간으로서 최대의 비애로서 참인간이기를 그만두어야 할것이다. 화란의 철학가 스피노자는“진리를 위해 죽는것은 쉽지 않으나 진리를 위해 산다는것은 더욱 어렵다”고 하였다.    학자가 아니라도 인간이면 량심은 가져야 한다. “량심은 선(善)을 행하려는 자신에 대한 의무의식(칸트)”이고 “배우지 않아도 선악을 분별하는 선천적인 도덕적 판단 능력인 “량지량능(良知良能)ㅡ맹자)”이다. 량지란 추상적개념이지만 누군가 량심은 고기로 만들어졌다고 했으니 산육체라면 량심도 생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고로 학술은 인류의 선량하고 정직한 품격의 대명사격이다. 그런 학술이 오래 두면 곰태기가 끼는 달걀처럼 변질해서야 되겠으며 권력처럼 부패균을 번식시켜서야 되겠는가?  학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진정 인격자로서의 학자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는 알수 있기에 그래서 질타하는바이다.                                                             2013년 6월 12일
789    인생마당에 부치는 편지 댓글:  조회:3385  추천:0  2017-01-13
                                                       인생마당에 부치는 편지                                                                     최 균 선       인생이란 무엇인가? 흔히 인생려정이라 한다. 그러나 준비도 없고 련습도 없이 세월따라 걸으면서 시골아낙네가 부랴부랴 보리방아찧어 저녁밥짓듯이 그때그때 채 비하는 숨가쁜 길이다. 가로등아래 뒤짐지고 슬슬걷는 산책길이 아니다. 걸으면서 한편 꽃도꺾는 그런 여유로움은 주어지지않는다. 거부기걸음을 할수도 없고 토끼처럼 단숨에 내달리고 한잠 느러지게 잘수도 없다.     초행길이라 우왕좌왕, 산다는것이 무엇인가도 걸으면서 배울수 있을뿐이다. 때따라 홀로 궂은비도 맞는 광야의 길이다, 그래서 저마다 감수능력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고 가치취향에 따라 걸음새가 다르게 된다. 어디선가 행복이 기다리기나 하듯 이 허위허위 오르는 고개길, 가고가서 나중에 좌절의 언덕일수도 있지만 그냥 가야만 하는 인생길, 지쳤다고 중도에서 생명의 횃불을 내던질수는 없다.     인생을 극장이라고도 한다. 인생극은 단막극일수도 있고 장막극일수도 있으나 극정은 내키는대로 끌고가는것이 아니다. 미리 련습이라도 할수 있다면 때맞춰 등장 하고 퇴장하며 자기다운 형상을 부각할수도 있으련만 아무도 명배우가 될수 없다. 다만 연기가 아무리 어수선하더라도 막간극에 광대만은 바람직하지않다.     인생은 그림을 그리는것과 같다고도 한다. 그러나 멋진풍속화를 그리기엔 인생 현장이 너무 살벌하고 삭막하다. 아무튼 처음엔 백지이기에 무엇을 그리는가는 각자 나름이지만아무리 열심히 그린다해도 인생그림에 력래로 명화가란 없었다. 그러나 천사를 그리지는 못할지라도 부디 “악마”는 그리지 말아야 한다.     인생을 학교라고도 한다. 인생학교에는 우수생이 극히 적다. 지정된 계몽스승도 없고“박사도사”도 따로 없기때문이다. 인생학교에서 더하기식만 배웠으면 좋겠지만 참된 인격은 덜기식을 배우면서 형성된다. 인생학교에는 행복을 강의하는 선생보다 불행을 해석하는 선생이 훌륭하다. 행복의 의미는 불행속에서 해석되기때문이다.     인생은 유희이라고도 하지만 결코 심심풀이로 노는 유희는 아니다. 분망하면 유희가 짧을것이고 심드렁하면 지리멸렬할것이다. 다행히 인생유희에 가능성이란게 남아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지레 락심할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꼭 이루어질것같은 소망을 안고사는 인생은 의미로울것이요 더 바라지 않아도 될만큼 한가득 가진 사람의 인생은 권태로워 하품이 나올것이다.     생명은 연소에 있다. 때때로 만취하고 밸이 탈리도록 웃어대고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쳐보지 못하는 인생은 침침한 사해와 같다. 휴식없는 욕망과 허영과 정욕으로 삶을 꾸며가지만 인생의 필수품은 지향이며 추구와 사랑이다. 가령 인생이 꿀떡같다 면 한입에 삼킬것인가? 좋아도 싫어도 야금야금 먹어야 하는 겨자떡같은 인생이다.     인생은 물이 새는 한척의 쪽배같기도 해서 부지런히 노를 젓지않으면 자칫 격랑에 침몰될수도 있다. 게다가 욕망은 넘치게 실었지만 부리우는것은 늘 보잘것없는게 인생의 쪽배이다. 인생을 일장춘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열심만이 꿈을 불러온다. 같은꿈이라도 누구는 꿈을 현실로 수놓고 누구는 현실을 꿈으로 엮을수 있다. 이미 걸어온 길이 꿈길같았다면 이제 걸어가야 할 길도 꿈길같을것이다.     인생의 아침엔 도취되고 한낮은 권태롭고 황혼녘엔 후회가 깃들게 된다. 20대엔 열정으로. 30대엔 의지로 살고 40대엔 판단력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길에도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소모하는 4계절의 운행법칙이 있다. 돌아보면 구슬땀 흘린 자국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걸어온 길이라 소중한 법이다.     늘 단술만 마실수는 없다. 안일함이 자적일수도 있지만 격정은 파란만장한 생활 속에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똑같은 내용이 거듭되는것은 아니다. 남이 못하는 일 을 해보고 먹지 못할것을 먹어봐야 인생고를 맛보았다고 말할수 있다. 번뇌하고 고통에 모대긴다는것은 삶에 자각한 표징이다. 인생에 환멸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일테지만 서로간에 인생대화는 잘 안된다.     참을수 없는 불행은 인성에 대한 환멸감이다. 세상은 랭혹하지만 정감을 가지고 해석하기에 의미롭다. 빛나게 살지 못한 일생이라도 나중에 주해를 달수있다면 그게 바로 값진일생이다. 경험은 절대적이 아니다. 많은 강을 건넜다해서 다음 건너갈 강물도 쉽게건널수 있다고 장담할수 없다. 더불어가는 인생길이지만 혼자의 취향과 의력 의 편달속에서만 자아가 실현된다. 인생의 골목길은 종래로 뒤공론하는 자들과 말밥 에 오른 자들로 시끌벅적했다. 남의 기분에 장단맞추지말라.     인생길은 첫걸음부터 불안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욕구라면 제2천성은 방종이다. 인생이 희비극으로 엮어질수밖에 없는것은 인간의 원시정감이 너무 개화된 탓이다. 인간은 뭐든 자기뜻대로 할수 없게 된데서 방종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한 인간의 의식에 병들었다면 비루먹은 당나귀에 비해 나을것이없다. 범부 속자로 살지언정 용렬한 “귀인”은 되지 말라는 말이 그래서 교훈적인것이다.     산다는것은 어쨌든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다.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목숨이 경각에 이른 괴로움에 비길수는 없다. 열심히 사는만큼 어떤 의미가 새겨질것이다. 어두운 밤, 남의 참외밭에서 익은참외를 고르려고 왼심을 쓰듯이 한다면 무미의한 인생도 짜릿해질것이다. 인생길은 자족의 코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않다.     약자에게는 강자들속에서 살아남는 수단인 유연성이 다행일지 모른다. 누구를 압제하지도 누구에게 굴욕당하지도 않을 때 사회에 조화가 영주한다는것을 진실로 아는자는 오직 약자들속에 있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해소될수 없는 영원한 불평등의 결 과이다. 따스한 가슴을 열고 남을 받아들이지는 못할지언정 남을 해치는 늑대만은 되 지 말자. 림종의 착한 유언으로 한생의 유감을 미봉할수는 없다. 어떻게 살아야 바 람직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너무 사악하지 않다면 급제생이라 할수 있다.     인간의 판단력에 랭철함보다는 즉흥이 더많다. 인생사를 리성으로 풀어갈수는 없으되 따스한 마음으로 책을읽고 찬눈길로 세상을 투시하라. 인생가치는 스스로 실 현하는것임을 깊이 알게 될것이다. 속이고 속히우는 인생마당이지만 자신에게만은 절대 성실해야 한다. 자신에 충실하지 못한자는 결코 남을 성실하게 대할수 없다.     바람직한 인생자세는 자기식으로 열심히 걷는것이다. 구슬땀이 흐르는 로고속에 기쁨을 캐며 사는게 인생이다. 일하는 기쁨이 따로 있다는것을 많은사람들이 알지 못 한채 죽는다. 일하는자에겐 로동이 본성이지만 놀고먹는 자들에게는 참을수 없는 질곡이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로동이 구워낸다는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사는 자재적일수 없기에 세상은 하고싶은 일만 할수 있도록 너그럽지않다. 어떠한 연회상에든 구미에 맞지않는 료리가 있는법이다, 내할일이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변명이 해석이 될지는 몰라도 정당한 리유는 아니다. 고난은 인생길에 험난한 협곡이다. 모든것에 끝이있는 법이라는 말을 믿으라! 비상한 고난이 비상한 의지를 련마시킨다. 그것을 이겨나간다는것이 곧 살줄안다는것을 실증한다. 참고 견딜줄 알라. 무거운 짐을지고 빨리 걸으면서도 투정질을 모르는 나귀의 미 덕을 본받으라. 인내심은 역경의 적설을 녹인다. 참는다는것과 견뎌낸다는것은 의미 의 차이만이 아니라 태도문제이다. 기회도 기다림도 선택이다. 진정 강한자는 끈질 김으로 기다림을 보듬을줄 안다. 기다림은 곧 인생의 중간역, 청춘은 과정일뿐 결과 가 아니다.                                                                               2008년 9 월 20                                   2016년 8월 25일부  
788    (황혼잡감 1) “어허, 그래무 못쓴당께!” 댓글:  조회:4543  추천:1  2017-01-08
                                “어허, 그래무 못쓴당께!”                                                                                   진 언         “적반하장”이란 사자성구가 “도적이 매를 들고 나선다(북한속담이라고 딱지를 붙였지만 엎어놓으나 번져놓으나…”는 말이 더 우리 말답거니와 아래에 서술할 사건, 사실에는 “똥싼놈 성낸다”는 말을 변형시켜 “똥싼놈이 워덜렁(와달랑) 한다”는 농촌말투가 더 질감이 난다. 하지만 제일 합당한 표현은 못된다, 언어도단이랄가? 아니면 언어의 빈곤증이랄가?     차설, 지난해 12월 28일 한국 부산시동구의 일본령사관앞에 위안부소녀상을 강제철거하면서 공권력을 람용하여 시민들을 강제련행하고 구청직원들이 어린학생들을 끌어내리며 무리한 진압을 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낸바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격인가, 일전, 미국에 달라붙느라 진주만에 가서 정치쇼를 하고나서 한국에는 사죄할 용의가 "털끝만큼도 없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아베 신조가 부산시에 소녀상설치를 두고 "한일합의 역행은 건설적이지 않다”고 씨부렁거렸다니 그냥 적반 하장인겨?     도적들은 손발이 척척 잘도 맞아돌아간다. 일본정부가 부산에 설치된 위안부소녀상에 대해 "도저히 허용할수 있는것이 아니다"라고 반발하며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서 반발이라는 표현이 어색한것은 제쳐놓고 공공연히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정부야말로 똥싼놈 와달랑하는게 아닌고?     일본정부가 6일 부산의 위안부소녀상 설치를 리유로 나가미네 야스마사 (長嶺安政) 주한일본대사와 모리모토 야스히로(森本康敬) 부산총령사를 일시귀국 조치하겠다고 밝혔는데 아베총리의 잇따른 외교실패 등으로 실망한 우익보수층을 결속해 국내 지지기반을 다지려는 의도라거니 보수층결집을 위한 노림수라느니 셈평좋게 해석하고 있더라만 님의 사돈이야 가거나말거나, 왜냐? 바로 한국을 우습게 보아온 본성을 드러낸것이 요긴하기때문이다. 결코 “아니면 말구”식의 추단이 아니다.     일본은 자위대의 무력사용행보 강화를 통해 군국주의화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는 셈평좋은 분석에 코웃음치듯 아베는 헌법개정에 대한 의욕도 숨기지 않고있다. 헌법 9조(일본이 전쟁과 무력행사를 포기하며 육해공군과 여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를 개정해 전쟁가능한 국가로의 변신을 기도하고 있는 위험천만한 지극상황이다.     지난해 12월29일,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이 야스쿠니신사를 찾은데서도 일본의 엉큼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이 "한국이 중요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교섭하는데에는 꽤 성가신 국가다" 라고 떠벌렸고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간사장 대행도 "매우 유감이다. 국가와 국가와의 약속을 한국이 지켜야 한다"고 말했는데 상대국을 우습게 본다는 실증이 아닌가? 도적이 매를 들었는데 마냥 분석타령을 한다는것은 좀 그렇구 그러니는 말이다.     만악의 과거사에 모르쇠를 대며 위안부 강제동원도 없다며 직접 사과한적이 없는 아베, "일본은 우리의 의무를 실행해 10억엔을 이미 거출했다(일본이 한국에 잘못해서 내는 배상금이 아니라 불쌍해서 주는'거출금'이라고 을 조롱하고있다)"며 "그 다음으로 한국이 제대로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력설하는 아베, 력사적 가해자 원흉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판인데 위안부합의에서 소녀상문제에 관련해 “적절 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돼있지 어디에도 철거한다는 얘기는 없다”고 해명하지만 역시 뒤북을 치는격이요 사후청심환 내드는격이라 할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인데 매를 든 도적놈을 앞에 두고 슬슬 부채를 흔들며 “어험 고약한지고, 쌍노므시키, 그러면 못쓴당께!”하고 점잖은 량반호령질이나 할끼가?                                                                                   2017년 1월 6일                                          
787    (시) 내 마음의 천평 댓글:  조회:3265  추천:0  2017-01-03
                                    내  마음의 천평                                            최 균 선                                 시대의 발걸음 뒤우뚱ㅡ                               하다가도 바로잡아질수 있더라.                               력사의 무대는 떠들썩ㅡ                               하다가도 잠잠해질수도 있더라.                                 그러나 오, 벗들이여                               미래와 사랑을 실은                               내 마음의 천평은                               예이제 기울어질수 없구나.                                 황금의 마술봉 귀신을 울리고                               사심이 흑심을 꼬드겨                               참된 생활이 비틀어질 때                               《살줄》아는이여 갈라면 가라                                 영예의 계관 거꾸로 걸리고                               아름다운 계몽의 꿈은 저기ㅡ                               흩날리는 지페의 조소속에 얼룩진다만                               내 마음의 눈은 흐릴수 없노라.                                 회한도 깊거늘                               교훈이야 어이 없으랴!                               동경은 언제나 아름답거니                               마음의 천평 녹쓸줄 몰라                                 공덕이여, 봄싹처럼 무럭무럭 돋으라                               비끝엔 칠색무지개 비끼리니                               인생의 첫봉화ㅡ 밝음은 여기,                               교단에서부터 시작되리라!                                          《중국조선어문》                              
786    취미의 어문교수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4702  추천:0  2017-01-03
                                                취미의 어문교수에 대한 단상                                                                 최 균 선        과학성, 예술성이 보다 완미하게 체현된 매혹적이고 취미짙은 어문교수는 모든 어문교원의 리상적추구일것이다. 헌데 실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에 이르기 어렵고 학 생들속에는 의연히 재미없는 어문시간이라는 평가가 내려져있다.     어떻게 하면 학생의 학습심리개발에사 흥취격발을 돌파구로 취미의 어문교수를 진행할것인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소로부터 출발하여 문제의 해결책을 탐색해보자.         1. 지식요소     무릇 모든 교수는 과학지식을 전수하는데 목적이 있다. 교수의 발전도 지식에 의거하지 않을수 없는바 지혜란 곧 지식의 천이로서 지식요소는 교수성공의 전제이자 취미교수의 물질적의거로 된다. 하지만 모든 지식전수의 활동ㅡ교수일반이 다 매력적이고 취미적인 지적활동은 아닌것이다.     학생들의 학습흥취를 격발시키는 관건은 어떤 지식을 전수하는가에 있다. 새로운 과학사유의 견지에서 말하면 어문교수중의 모든 지식수출이 학생들에게 가치있고 매력적이라 말할수 있다. 교원이 정성들여 준비한 교수내용에서도 흥미롭게 받아들여지는것을 유효지식이다. 유효지식이란 새정보, 새관점, 학생이 아직 모르고있는것, 배운 후에 소득이 있고 감수가 깊은 내용을 말한다. 그냥 듣던 소리, 들어도 알둥말둥하고 잘 접수되지 안는것 등을《정확하나 무효》한 지식이라고 명명하고있는데 교수내용이 풍부하다고 해서 유효한것이 아니라는것이다. 교수내용의 정확성과 적당한 분량은 교 수에서 필수적인 조건의 하나로서 실제상 교수활동의 매력 및 교수효과는 유효지식의 전수량 내지는 습득량에서 결정된다.     지금《유효법칙》이라는 새로운 교육문제가 제기되고있는데 실용적이고 실혜적인 지식을 전수해야만 학생들이 교수활동에 즐겨 동조하고 탄복하게 되며 수업에 취미성 이 짙어가게 된다.     우선 수업시작부터 신기하고 선명하게 느껴지도록 새로운 학습내요을 예시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교수과정에서도 교재내용의 시간적, 지리적차이에서 오는 소외감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재미있는 실례들기, 정경창조를 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권태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사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교재내용의 자주적 이고 창조적발휘문제가 제기된다.     우리의 조선어문교수는 중소학교를 불문하고 거개 분석교수가 통례인데 흔상과도 중시할 필요가 있다. 흔상과란 문학작품의 줄거리분석을 위주로 한 단어, 문장련습을 고립적으로 진행하지 않는 과형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야기성이 강한 소설, 력사이야 기 등을 랑독해주거나 소리도 있고 색채도 있는 정서적인 설화로 그들을 문학예술의 경지에 깊이 끌어들이고 정감도취속에서 어문학습에 대한 흥취를 격발하고 시야를 넓 혀주며 지식도 섭취하게 하는것이다. 그에 따라 인물성격, 이야기짜임새 등을 분석 개괄하는 평론식토론도 벌리여 연구성취미도 붙이게 해야 한다.      설명문같은데서도 자연현상 등에 대한 과학적해석과 일상생활에서의 해석비교, 론설문같은데서의 교재내용과 사회현실과의 비교 등 자극적방법으로 심리의 통각효 과와 인식충돌에 의거하여 학습동기에 추진기를 달아줄수 있다.       2. 심리요소     교수활동은 교원의 총동원된 심신에서 발휘되는 열량총화의 체현으로서 고층차적 창조성로동에 속한다. 따라서 교수활동은 교원의 인식, 정감, 의지와 개성 등 정체적인 심리활동이 되는바 취미의 어문교수는 자기 전부의 심혈로 진행하게 된다.     우선 교원은 교재의 내용을 자기의 심리품성으로 내화시켜 교원자신이 교재로 되여야 한다. 즉 교원은 학생들의 직각인식대상이 되여져야 리상적이라는 말이다. 례하면 정감적이고 감화력이 있는 설화, 랑독기교 등이다. 다음 사생의 융합문제이다. 수 업과정에 학생의 학습심태를 비쳐주는 흥취라는 이 창문에 뚜렷이 비끼는 그들의 미 묘하고 섬세한 정서를 시종 동적상태에서 관찰하면서 자기의 교수사로대로 이끌어나 가야 한다. 교수원리에서 격려성공능을 잘 운용하여 정보교류, 감정교류의 활성화에 지레대로 삼아야 한다.     교수활동전 학습주체에는 이런저런 심리정서가 있기 마련인바 학생의 학습흥취격 발을 념두에 두지 않고 처음부터 자습능력을 배양하려 하거나 시종 엄숙한 자태로 지식전수에만 전념한다면 학습자으 심리동력은 잘 발동될수 없다. 수업전 말하기도 효과적인 방법이며 시조, 명시, 명언, 격언 등을 베끼게 하거나 시조, 단시 읊기 등도 학생들의 심리정서에 량호한 전환점이 될수 있으며 장원한 관점으로 보아 아주 유효한 제시이다.     우리는 흔히 학생들의 다층차적인 학습심리에 대한 착안보다 단방면적인 교수방법, 혹은 학습태도에서만 문제를 찾았는데 학생의 지력발전과 더불어 정감개발ㅡ학생 심리의 내인에 주의를 돌려야만 어문교수의 개혁을 발전시키고 심화시킬수 있다.     물론 흥취는 학습수요의 뒤에 놓인다. 그러나 우리 사범생들의 경우, 그들에게 진학압력이 없기에 경쟁의식, 위기의식 등이 미약한바 60점 만세가 기본경향이다. 이런 학습심리는 검험결과보다 유효한 지식의 습득, 그 지식의 활용도 즉 기능전화에 더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장차 남을 가르칠 사람들이기에 해당교원의 일관적교 수모식, 교수풍격, 교수예술 및 기교등이 시종 산 좌표로 인상될수 있다.     그러므로 교원은 지식을 전수하는 동시에 자기의 교수사로로 학생사로를 인도하 고 자기의 정감으로 학생의 정감을 격발시키며 자기의 의지로 학생의 학습의지를 조 절하면서 사생간에 흉금을 터놓고 담론해야 학생들이 미묘한 작품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이때에야 어문교수가 사생이 함께 객관세계를 인식하는 일반적과정이 아니 라 지식창조의 과정이 될수 있다. 이리하여 어문교수가 교원이 자기의 마음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동화시키고 자기의 령혼으로 학생들의 령혼을 주조하며 자기의 인격으로 학생들의 인격을 부각해야 학생들에게 유익한 매 한차례 인생공부가 될수 있다.       3. 방범요소     교수내용 다음에 중요한것은 교수방법이다. 교수방법상에서 재래식강의법외에도 발견법, 토론식 등 여러가지 교수모식, 방법이 연구되고 실천으로 검증되여 유익한 게시를 주고있다. 어찌하든 어문교원은 다양한 교수방법의 창조적인입, 변형과 조합, 부단한 개진과정에 현대학생들의 학습흥취, 인지특성에 걸맞는 비봉페적인 교수모식, 교수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이를테면 강독교수에서 현념을 설치하여 곤혹중에서 해득시키는 방법을 쓴다면 먼저 단어, 구절에서 지식성의문을 주고 다시 결구상의 질문을 예상하고 마지막으로 표현형식, 언어구사특점 등을 탐구하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감지로부터 문제를 발 견하도록 고무하고 읽은후 지혜의 불꽃이 튕기게 할수 있다.     열독과정에서도 인식적마찰을 조성하여 학생이 자기의 무지와 둔감성을 부끄럽게 느끼고 분발하도록 꼬집을 필요가 있다. 특히 거듭읽기를 싫어하는 학생심리를 감안 하여 먼저 작품의 핵을 찾게 하고 거기서 작자의 습작의도를 엿보게 한다든가 소설문 체에서는 인간적냄새가 다분한데 그 정으로 하여 사건이 생기고 사건속에서 정이 드 러난다는  도리를 알게 한다면 책읽은 재미를 새삼스레 느끼게 할수도 있다.     아무튼 학습주체으 현대성에 착안하여 정보시대에 적응하는 보다 절주가 빠르고 보다 실혜적인 교수로 되여야 취미의 어문교수로 될수 있다고 본다.       4. 언어요소     무릇 어떠한 교수이든 언어를 떠날수 없다. 교원의 교수언어는 교원의 지식정도, 심리품성과 개성이 체현되면서 교수활동과정에 관통되는 가장 돌출한 요소이다.     심리학에서 증명되다싶이 교수언어의 투명성, 생동성, 형상성, 예술성, 감화력은 학생학습효익과 정비례된다. 특히 조선어문교원의 언어는 힘이 되고 예술이 되여 학 생정감격발에 도화선이 되여야 한다. 따라서 어문교원의 언어표달방식과 질은 학생의 지력활동방식, 정감개발의 효률을 제약하므로 어문교원의 언어는 가능껏 정감적이 되 여야 학생의 정감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수 있다.     론리정연하면서도 정서적이고 심각한 과학성을 띠면서도 유모아적인 교수언어는 유쾌한 학습분위기를 조성하는 첫째조건이고 학생의 사유가 구속없이 나래치게 하고 지혜가 보다 넓게 개척되게 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물론 교수언어외에도 의식신호계통 즉 비언어요소들이 손짓, 눈짓,몸동작, 표정, 어조, 속도, 강약 등 제요소를 능란하 게 응용할수 있도록 자기를 수련해야 한다.     교원의 목소리는 정서적으로 다분한 기대감, 안정감, 친절감, 유모아감이 있어야 하며 자기의 개성특징과 풍격이 구비되여야 한다. 이러자면 역시 교원의 심리바탕, 심리자세가 앞세워져야 한다. 감화력이 있어야만 교수활동진행중에 학생인식의 방향 을 조절하고 인식을 심화시키고 강화하며 고동해주는 등 적극적작용을 일으킬수 있다. 정보의 총효과에서 7%문자, 38%의 음조, 55%의 얼굴표정이라는 이 수자를 명기하고 자기의 교단형상과 교수풍격을 수립하여야 한다.         학교를 단순히 지식전수의 전문장소로만 간주하는것은 비현대적이다. 자고로 글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키운다는것이 우리의 교육종지로 되여왔던것이다. 학교란 현대적의미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모여서 진실한 삶의 의미를 터득하며 날로 격심해지는 자유경쟁의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충실한 인생을 준비하는 장소라고 말할수 있다. 유효지식의 종합성을 목적으로 교재내용들 사이의 횡적비교도 해야 하 지만 력사, 인문지리, 사회와의 횡적연구도 강구되여야 하며 가능한껏 교재지식을 원 심력으로 다방면적이고 광의적이며 흥미로운 사회지식들을 조미료로 침투시켜야 한 다.     분석에서 분석으로 마치는 어문교수라면 학생들이 따분해하지 않을수 없다. 필자 는 가능한껏 어문교수의 과학적예술화, 취미화를 모색해왔으며 인격수련의 학과목으로 간주하고 이에 합당한 교수방식, 교수모식을 인입하기에 애써왔다.                                                      1999년 3월 《중국조선어문》3기
785    (교육칼럼) 자질교육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509  추천:0  2017-01-02
                                                              자질교육에 대한 생각                                                                                                     최 균 선        발전하는 사회, 비약하는 시대와 더불어 우리의 교육은 공리적응시교육으로부터 전방위적 자질교육에로의 전환을 촉구하게 되였는바 천만지당한 시책이라 하겠다. 하지만 자질교육의 진정한 내함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실천적으로 구현되여야 하는가? 자질제고를 재이는 눈금자는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 하는 일련의 문제들은 의연히 커다란 갈구리에 걸린채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자질이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자질이란 바로 배우는 학생들 개개의 기성지식의 축적, 나아가서는 능력이 아니겠냐고 단마디명창으로 해답 할수 있고 혹자는 자질이란 곧 배움에 대한 학생의 소화능력이라고 쉽게 해석할수도 있다.     사전류에서는 교육면에서의 자질을 타고난 해부생리적특수성의 총체능력심리발전의 전제라고 밝히고있다. 상술한 해석들에 다 도리가 있으나 완전하지 못하다. 이른바 자질이란 일생동안 주ㅡ욱 이어져있고 부단히 준비해가는것, 다가올 학문을 배워낼수 있는 능력이라고 리해하는것이 보다 전면적일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자질교육이란 지식만능, 점수통수가 아니라 장차 각자가 삶의 마당에서 자아를 보다 빛나게 완성해갈수 있도록 온갖 준비를 시키는 지적인것이라 말할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전통관념에서 론하는 자질제고란 곧 학교공부를 념두에 두고 한것으로서 공부란 학교에서만 하는것으로 인정하고있다. 그에 따른 자질제고도 학교에서 배운것이 점수로 통계되여 판정되고 있다하여 학교교육은 훈육(训育)의 틀에서 벗어 나지 못한채 의연히 서책지식의 중점, 점수쟁탈전의《살벌》한 분위속에서 진행되여 진다.     이런 교육관념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 교원들이기에 무한한 동경의 세계에서 환상의 금빛나래를 퍼덕이는 어린 생명들을 해종일 콩크리트벽안에 가둬놓고 피로전술을 써왔던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중소학교학생들은《쫓기며 사는 세대》라는 한마디로 개괄할수 있다. 지금은 학부형들마저 이 면에서 변수로 작용하면서 깨뜨릴수 없는 력학관계를 이루어 가지고 자질교육의 전환에 장애를 놀고있으며 자기 아이들을 그냥 응시교육의 철창속에, 점수선의 울타리에 잡아두고있다. 하여 탐욕스러운 부모들의 기대와 요구, 강요와 핍박하에 어린이들은 자기들의 특유의 삶의 권리가 침범당하고 빨리빨리 어른이 되도록 재촉받고있다.     우리 어른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개성적으로 자랄수 있도록 교육풍토를 마련해주어 아이들이 자발적인 독특한 삶의 문화를 꽃피워가 도록 왼심을 쓰는것이건만 이것이 잘 안되여가고있다.     우리의 학교들이 좀 더 인간적인, 그리고 다양한 삶의 의미를 터득하는 즐거운 곳이 되여지고 보다 다양성이 허용되는 개성적인격발전의 요람이 되여져야만 자질교육도 공리공담이 되지 않을수 있다. 하긴 그래서《유쾌교육》이 시도되고 일정한 성과도 쌓았지만 근본바탕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역시 그 미운 심험점수에 있다. 즉 자질제고를 가늠하는 재래식눈금자에 혁신이 없이는 안된다는 말이다. 옛전고를 빈다면《관문을 빠져나가기 어려운데 말을 타든 꽃가마에 앉든 다를게 무어냐》하는 말인데 사실 애써 경영한 자질교육을 측정한대야 서면시험(단지 시험지우에 제시교제의 기성지식에서 뽑아낸 제한된 문제, 학생들이 암기한대로 써넣는 답안만으로 확정된 기준)에만 의거한다면, 그리고 점수에 의해 학생자질의 우렬이 판정되고 이 점수제고에 근거하여 교운의 사업실적의 우렬이 판정된다면 소위 자질교육이라는것도 결국은 점수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중소학교교육단계에 공부하는 학과에 전면발전의 각도에서 여러개 과목이 설정되였지만 이 모든 과목을 시험지우에 드러내놓고 평가한다면 역시 높은 점수에《저능아》는 계속 존재할것이다. 자질교육을 론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학생의 옹근 인생행로에 영향줄것인가? 글을 가르침에서 곧 사람을 키운다는 이 숭고한 사명의 내함을 어떻게 진정 외연에로 확장시킬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어야 할것이다.     만약 교원이 교재의 기성지식을 전달하고 시험점수를 매기는 단순한 지식주입자라면, 그리고 자유경쟁시대 학교교육부터 학생들을 경쟁속에 몰아넣는것이 모두의 본의가 아니고 그 어떤 불가항력적인 속박에서온것이라 해서 속수무책으로 방임해둔다면 스승이란 허울뿐이고 그저 로보트식배역만 남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자질교육은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나간에 교재지식의 완벽한 전수와 피동적접수로써만 완성될수 없다는것, 교재지식권내에서만 체현되는 교원의 단면적교수활동만으로는 이 사회, 이 시대가 수요하는 인재를 길러낼수 없다는것을 누구나 모르지 는 않는다. 그러나 시험지에 1~2점차이가 한 학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때가 비일비재이니 교육의 이률배반현상이라고나 할지, 아무튼 인격을 측정하는 점수를 인간이 고안해냈건만 우리 자신의 세계에 어마어마한 위세로 군림하고있다는것은 슬픈 자아풍자라고 할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것이, 인류문명의 고급단계에서 사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교육에 운명을 기탁해서부터 철저히 점수의 노예로 자라고있고 이는《노예제의 행운가》출세하는 판이니 말이다.     청년기에 겪어야 할 그《흑색 7월(지금은 6월)》을 위하여 소학교때부터 줄곧 펄펄 뛰는 자유적생명들을 줄쳐 앉혀놓고 지식접수기로, 문제풀이 계산기로 굳혀놓고 있다는것이 애들로 놓고 말하면 얼마나 불공평한가를 그래 우리가 모른단 말인가? 지력, 인격발전에 유익한 활동도. 독서도 다 이《공부지장》에 귀속시키는 현대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응당 차례져야 할 자유와 권리를 아무 꺼리낌없이 압살해버리면서 교과서속에서, 숙제더미속에서 어린생명체의《광합작용》의 시간마저 고갈되게 한다.     기나긴 인생항로에서 배워나가는 실효적이고 귀중한 그 모든것이 일일이 점수로만 환산되지 않는다는것을 에디슨, 아인슈타인 등 많은 인류거인들이 증명해주었건만 우리의 학교교육은 어느때까지 점수로만 계산되여야 하는지 묘연하다.     교육이 현사회의 투영, 미래사회의 신념, 그것의 준비단계에서의 최고가치임을 깨우칠 때가 되였다. 황차 우리 나라 교육의 종지가 건전한 인격발전,도덕품성교양을 기본정신으로 하고있는 한 우리 교육이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정신적바탕이 더욱 훌륭해지고 나아가서 사회의 생성과 유지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면 우리가 민족교육을 통해 길러내야 할 높은 자질의 인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선 연박한 과학문화지식의 소유자가 되여야 함은 두말할것없다. 따라서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 맡은 일을 성심껏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 굳건한 의지를 세우고 신념에 차있는 품위있고 운치있는 사람, 독립자주정신이 갖추어져 뼈대있으면서도 아량이 있고 관용성, 포옹력이 있는 사람, 감정을 느낄줄 알고 느낀것을 적절히 표현할줄 아는 등 높은 자질의 인격자여야 할것이다. 이것을 완성해나갈 때 우리는 자질교육에 헌신했노라고 떳떳이 말할수 있지 않을가?     물고기를 주어 살수 있게 하는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도를 가르쳐주는 유태인들의 교육리념을 왜 우리는 실천으로 새겨가지 못할가? ㅡ안타까운 일이다.                                                                                            1995년 4월 
784    (교육칼럼) 소학생글짓기지도에서의 심리위생에 대하여 댓글:  조회:4391  추천:0  2017-01-02
                     소학생글짓기지도에서의 심리위생에 대하여                                         최 균 선         조선어문교수개혁의 심화발전과 더불어 소학생글짓기훈련도 여러가지 요소, 여러가지 방식, 여러가지 층차로 활성화되면서 상승선을 긋고있는데 이는 매우 기꺼운 일이다.     이를테면 봉페적인데로부터 개방에로, 교내생활로부터 자유명제작문에로, 금지구역으로부터 관찰, 사유의 개활지대로 나아가면서 내용면에서의 넓이 깊이, 형식면에서의 다양성이 충분히 체현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라면 일종의 일면화, 절대화하는 습작심리가 형성되여 학생글짓기 심리위생에 유해한 그늘을 씌우고있는것이다. 특히 최근의 경연성글짓기에서 상을 받은 작문을 보면서 소학생작문에서의 진실성과 허구문제를 글감찾기에서 정면적으로 이끌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참답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진실성이냐? 허구이냐?         소학생글짓기훈련에서는 언어사용기능을 발전시키는것이 기본임무이다. 그러나 유일한 임무는 아니다. 소학생의 글짓기능력은 여러가지 요소가 다층차적으로 구성된 능력이다. 이에는 언어요소외에도 지식요소 및 감정요소가 포괄되여있다.     목전 소학생작문이 개방성을 띠면서 사회생활과 긴밀히 결합되고있는데 진실한 인물, 진실한 사실을 써야 하는가? 아니면 가히 허구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여 우리의 재사고, 재검토를 촉구하고있다.     소학생은 어디까지나 진실하게 쓰는것을 제창하고 견지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수많은 명망높은 교육전문가들이 긍정하고있다. 소학생글짓기훈련의 목적, 성질, 요구로부터 보아도 그렇다. 오직 진실하게 표달하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어릴 때부터 정확하고 선명하며 생동하게 객관사물을 반영하는 훌륭한 문풍을 수립시킬수 있다. 물론 진실하게 쓴다는것은 사물의 본래의 면모대로 사진찍듯이 써야 하고 이미 장악한 글감에 대해 선택, 가공, 개괄하는것을 거부하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짓기를 지도함에 있어서 상상, 허구에 대해 옳게 인식해야 한다. 고리끼는 이에 대해 가르치고있다.《모든 대문학은 허구를 리용하였고 또 리용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허구를 제한하고있는 대단히 좋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는것이다.》그러나 여기서 소학생에 대해 말한다면 별개의 문제이다.     소학교단계에서 허구의 가부에 대하여 론의도 많고 견해도 각이하며 주장도 각양각색이다.     이는 같지 않은 글짓기지도사상을 반영하는바 학생의 문풍을 결정하며 따라서 글짓기지도 방향과 원칙성, 작문의 질과도 관계된다. 그러므로 소학생들의 작문에서는 (련상, 상상이 있는 글을 쓰는것을 포함하여) 어디까지나 실제 있은 일을 쓰는것을 기초로 해야 한다.     첫째로 소학생글짓기는 성인의 습작도 아니며 더구나 작가의 창작이 아니기때문이다. 인물, 사건을 쓰는 자유명제작문이라도 꼭 특정된 환경속의 인물과 사거늘 쓰도록 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소학교단계는 기초를 닦는 단계로서 습작능력도 착실하게 기초를 닦는데 모를 박고 진실하게 쓰는것부터 글짓는 걸음발을 익혀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자기의 관찰, 감수에 근거하여 잘 아는 인물, 직접 겪은 사건을 쓰도록 지도해야  학생들의 심리장애를 제거하고 그들의 의지와 자주성을 체현시키면서 전면적이고 협조적인 심신발전을 가져올수 있다.     셋째로 글짓기훈련은 어린이들의 심령을 아름답게 련마시키는 미적교양수단의 하나이기때문이다. 소학생들의 심리특점은 천진하고 유치하므로 진실하고 구체적이며 형상적인것에 쉽게 감화된다. 층집을 짓자면 기초를 잘 닦아야 하는것처럼 어릴 때부터 진실하고 아름다운 형상에 감화되고 그것을 표달하도록 지도하여야 사상교양목적 을 달성할수 있는것이다.     생활은 문학의 원천이라고들 한다. 소학생작문에서도 생활은 원천이고 글은 그 흐름이라 할수 있다. 그렇다면 이 원류를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갈것인가, 이는 결코 처음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습작지도실천에서 반드시 유효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초미의 문제이다.     글짓기지도에서 급선무는 학생들의 생활을 충실히 하는것이다. 생활이 충실한 길로 나가에 하려면 사상훈련을 강화하고 정감을 키우기에 힘을 들여야 한다.       사상훈련이란 곧 학생들로 자기 관찰력과 사유력으로 생활을 체험하고 인식하고 분석, 판단하게 하여 경험을 쌓게 하는것이다. 이 과정의 지도에서 진실성을 앞세워야 사물의 발전과 변화, 사물지간의 련계성을 잘 알게 할수 있으며 여기로부터 저기로, 표면으로부터 리면에로 파고들게 하여 현상으로부터 본질을 파악하게 할수 있다.     생활에 대한 성실한 묘사는 건전한 글짓기의 필수조건이라는것을 시종 명기해야 한다.     정감을 키운다는것은 관찰과정에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지니고 들어가야 진지하게 감수할수 있다는것을 알게 하는것이다. 감정이 없으면 온 거리에 글감이 있다해도 쓰려는 글감이 눈에 띄이지 않을것이다. 사실 각자는 자기의 감정선에 따라 부동한 감수를 받게 된다.     목전 글짓기지도과, 여러가지 콩클에서 사물의 진실한 반영도를 도외시하고 소위《돌파작》,《문제작》이 나오기를 촉구하면서 변상적인 사유의 틀을 만들고있다. 사실 그런 작문들이 학생자신의 진실한 감수의 발로이며 실제수준을 보여줄수 있는가는 수수께끼이다.     베껴내고 꾸며내고 성인의 대변인이 되는 등 학생들의 바르지 못한 문풍은 글짓기지도를 하는이들의 지도사상에서 기인되는바 깊이 성찰할바이다. 우리는 진실성의 단비로 우리의 순결하고 성실한 꽃싹들을 틔우고 호함지게 꽃피워주어야 한다.         2. 정면적인것과 반면적인것,     개방작문, 특히는 경연성으 학생작문에서 독특한 발견, 대담한 언어구사 등을 념두에 사회를 건드리고 부정면을 폭로한것, 그리고 사회참여의식이 짙은 글을 돌파작, 성과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보편적추향으로 되고있는데 이것은 찬성할바가 아니다.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 개혁의식의 지도하에 보수적인것을 타파하고 학생들의 사유공간을 넓혀주며 학생작문이 대자연을 대상으로, 사회를 대상하게 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학생자신이 글감을 찾고 제목을 정하도록 충분한 자주권을 주어야 노상 교원이 내주는 제목에 매여 한숨을 쉬고 돌아앉으며《쌀이 없어서 밥을 짓지 못하는》고뇌를 해결할수 있으며 또 이로부터 생기는 바르지 못한 문풍을 방지할수 있기때문이다.     작문이란 전리적이고 립체적이며 복잡다단한 생활의 종합적반영이다. 한편의 작문에는 작자의 경험, 지식, 능력, 사상 즉 전부의 소질과 수준이 표현된다. 그러므로 사회를 인식하고 생활을 반영함에 있어서 주로 밝고 아름다운 인물, 사건을 글감으로 하여 쓰도록 지도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사회생활을 관찰, 분석, 판별할 때 티없이 깨끗한 그들의 심령속에 사회의 밝고 아름다운것이 주선률이 되여 화음을 이루도록 해 야 한다는것이다.     이제 겨우 어섯눈을 뜬 소학생들로 말하면 사회참여의식은 너무나 시기상조이다. 자연법칙이 이를 규정하고있다. 우리는 언제나 새일대들에게 아름다운 심령의 꽃을 심어주어야 할 종국적인 신성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것이다. 사실 아동들의 주위세계 – 조국대지에서 사는 그들의 생활으 주선률도 명랑하고 건전하며 향상적이다. 그러기에 생활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하고 어릴 때부터 고상한 심미정취를 갖게 하여 조국을 사랑하고 생활 등 모든 아름다운것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창조하도록 이끄는것은 그 무엇보다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있다.     어린이들의 심리특점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또한 생소하다.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찬 눈길로 이 눈부시게 현란한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고있다. 그들의 눈동자에 비쳐지는 기이한 요지경같은 이 세계ㅡ그렇듯 미만하면서도 거친《광야》에 굴레벗은 사유의《망아지》들을 되는대로 풀어놓는다할 때 그들이 꼭 순결한 단이슬과 향기로운 꽃즙으로만 자기를 키운다고 장담할수 있겠 는가?     소학생작문은 생활을 떠날수 없다. 생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지식과 사상의 최초의 발원지이며 영원히 마를줄 모르는 정감의 샘터이다. 따라서 학생작문은 그들의 내심의 종합적반영이 되며 가정생활, 주위의 생활, 도덕생활, 문화생활 등 다방면의 영향과 제약을 받지 않을수 없다. 하기에 글짓기지도에서 그들의 생활습관, 륜리관념 등 심리발굴과 흐름도 면밀히 주시하고 이끌어주고 소통시켜주어야 한다.     우리가 제창하는 자유작문에는 두가지 함의가 있다. 첫째로 광의적의미의 자유로서 학생들이 생활을 관찰,체험하고 글감을 축적하여 쓰게 할 때 망망한 대해에서 고기 뛰놀듯하고 만리창공에서 자유의《붕새》가 자유로이 나래치게 하는것이다. 둘째로 협의적의미의 자유인데 문체, 형식, 편폭, 제재의 자유로운 선택으로서 글을 지을 때 아무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쓰는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글짓기지도의 독립성도 상대적인것으로서 시대, 사회, 생활의 제약을 받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대, 사회, 생활은 글짓기지도에서 가장 큰 창고로 된다.     경연성의 작문, 콩클작문에서 반면적인 글감으로부터 참신성, 시대성, 돌파성 등을 기대하고 그 면에로 인도하는 불가사의한 작문지도사상은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학생작문에도 문학예술작품처럼 인식적, 교양적, 미학적 가치가 있는것만은 주지하는바이다. 그러나 소학생작문은 어디까지나 서면표달훈련으로서 습작범주에 속한다. 결코 현실생활이 제기한 문제를 해답해야 되는 엄숙한 과업이 앞에 놓인것도 아니며 또 제기될수도 없는 일이다.     소학생글짓기를 진정으로 제고시키려면 그들 자신이 주위세계를 깊이있게 인식하도록 인도하면서 아름다운것, 착한것, 고상한것을 참조로 추악한것, 저속한것을 더 똑똑히 알게 하며 그속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절대 병없는 신음소리가 나오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진실한 사상감정을 체현하는 작문은 심미관점의 옳바른 수립과 불가분리적이기때문이다. 깊이 알면 사랑함도 절실해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유적글짓기훈련에서 사유의 광활성, 창조성을 발전시키는것을 고무격려하면서 그것을 전제로 건전한 심미정감을 키우기에 알심을 들여 사상교양을 끝까지 관통시켜 야 한다. 재언명하거니와 글짓기는 학생들이 미를 표달하느 재능을 키우는 수단의 하나이기때문이다.     심미능력을 키움에서 먼저 미에 대한 감별능력을 키워주는 이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은 주지하는바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감별능력은 주요하게 학생의 심미정취, 심미 관점과 관계되므로 이 면에 주의를 돌려 글짓기를 통하여 더 명확해지고 더 공고해지 고 더 높아지게 해야 한다.    《진정 아름다운것은 생활이다.》그러나 생활자체가 곧 아름다운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체르늬쉡쓰끼는 가르치고있다.     한수의 동시, 한편의 아동작문이 사회를 깨우치고 새세계를 낳을수는 없지만 인 생의 첫봉화 밝음을 깨우쳐 한 사람의 인격을 훌륭하게 키워준다는 장원한 관점으로 부터 글짓기지도를 알심들여 하는이들이여! 자기의 무겁고도 성스러운 짐을 다시 한번 추스르면서 자기가 선 위치를 가늠해보고 지도자의 몸가짐을 또 한번 바로잡자.                                                         동북조선민족출판사  1989년《교수연구자료 8》호
783    작문평정과 평어쓰기 댓글:  조회:6833  추천:0  2016-12-27
                                               작문평정과 평어쓰기                                                          최 균 선       학생작문을 평정하고 평어를 쓰는 종지가 학생글짓기능력과 수준제고에 있을진대 평어의 내용,형식도 어디까지나 학생글짓기에 지남이 되고 인도가 되여야 한다.     작문교원은 평어쓰기를 학문적으로 대하고 유효로동을 하기에 힘써야 한다. 아래 에 작문평정과정에서 직업내용과 평어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1. 매 한차례 글짓기지도의 총화는 매 한차례 글짓기에 대한 하나하나의 평정과 전방위적으로 하는 평정으로 나뉘여진다. 매편의 작문을 평정하는 방법에는 서면형식이 주요한것인바 이에도 총평과 협서평이 있다.     협서평이란 말그대로 글줄을 따라가면서 여백에댜 평어를 써주는것인데 글짓기에서 지도성으로는 협서평이 더 실혜적이고 실용적이 된다.     교원은 협서평을 하든 총평을 하든 지도사상부터 바르게 가질것이 요청된다.     1) 평어의 종지는 지도성에 두어야 한다. 잘된곳은 어떤 면에서 잘되였다고 지적해주고 틀렸거나 서투른 곳은 그 원인을 꼭 짚어 알게 해야 그 학생이 우점을 발양 하고 부족점을 재빨리 고치는데 유조하다.     2) 평어에는 계발성이 주도로 되여야 한다. 즉 문제점을 밝히는데만 그치지 말고 수정방안을 중점적으로 제기해주어 학생자신이 머리쓰게 하고 손을 놀려 고치도록 계 발해야 한다.     3) 이거저것 두루 지적하지 말고 한고리가 풀리면 여러고리가 잇달아 풀리도록 중점이 명확하고 관건적인 곳을 지적하여야 평정결과에 실효성이 있게 된다.     4) 지도교원이 우선 가져야 할 심리자세는 표양을 앞세워 학생들로 하여금 고무격려의 추동하에 글짓기정서가 확 펴이게 하고 사유가 활성화되도록 량호한 심리전제를 잡아주는것이다.       2. 작품평어내용에 다음과 같은것들이 포괄되여야 할것이다.    1) 쓰려는 글의 중점이 선명한가?    2) 제목과 내용이 통일되여있는가?    3) 작자의 주장, 견해, 평가가 정당한가?    4) 구성이 잘 째이고 단락, 층차가 분명한가?    5) 묘사, 서술이 잘 결합되고 론리성에 문제가 없는가?    6) 문맥이 순통하며 어휘발굴이 잘되고 창조성이 보이는가?    7) 맞춤법, 띄여쓰기가 옳게 되였는가?    8) 문장부호가 바르게, 적절하게 사용되였는가?    9) 글속에서 비낀 작자의 심리자세가 바람직한가?   10) 원고지격식에 맞게 쓰고 글씨가 단정한가?     이외 여러가지 구체적요구들이 있을수 있으나 략한다.     상술한 평정내용들이 매편의 형식을 잘 장악하고 전면적으로 체현될수는 없으므로 소기의 목적에 근거하여 평정이 중점적으로 진행되여야 한다.       3. 작문지도교원은 평의의 형식을 잘 장악하고 목표성있게 응용해야 한다. 작문 평의형식은 다양하다.    1) 해부식평의: 대표성을 띤 작문을골라 학생들과 함께 글감의 가치성, 결구의 우결함, 언어표현의 능란성여부 등 문제를 하나하나 해부하고 평의하여 저마다의 작 문수정에 참조계로 되게 하는것이다.    2) 대비식평의: 교재에서 배운 본보기글과 학생글의 대비, 학생들의 글과 글의 대비ㅡ부동한 층차, 부동한 개성의 글을 대비하여 창조성인소를 찾아내고 공통한 문 제점을 찾아내는 평의방법이다.    3) 전제식평의: 경향성적인 문제, 보편적인존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제를 확정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평의하는것이다.      4. 평어쓰기    작문교원은 평어를 쓰기에 앞서 글짓기지도를 거쳐 곧 그 사람을 키운다는 이 전제를 잊지 말고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때론 콕 찌르듯이 따끔하게 , 때론 타매하듯 날카롭게 지적해주기도 해야 한다.    1) 공고성평어: 학생이 지은 글가운데 교재, 과외독서에서 닦은 창작기능, 기교와 해당된 부분을 점찍어 학생자신의 기능, 기교로 굳혀지도록 할 필요가 있을 때 이 형식을 쓸수 있다.    례를 들어 한 학생의 작문에 상세한 서술과 간략서술이 잘 체현되였거나 묘사가 재치있게 되였다거나 묘사가 재치있게 되였다거나 언어가 풍부하고 운치있다거나 과도가 멋지게 되였다거나 수사법사용이 잘 되였거나 하였다면 이를 충분을 잘 말해주어 자기의 장점, 내지는 풍격으로 되게 해야 한다.     2) 격려성평어: 한 학생의 작문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교정에 척 들어서면 나의 마음은 저도모르게 화단의 아름다운 꽃들에 사로잡힌다. 보라, 아름다운 저 미인초며 아름다운 모란이며 아름다운 국화, 그리고 한여름 재글거리는 해볕아래 아름다움을 한껏 무르익혀가는 해당화… ”     보다싶이 이 학생은 형용어에 신경을 쓰고있다. 그런데 각이한 특징과 자태를 가진 여러가지 꽃들에 “아름답다”는, 크기만 하고 특징적이 못되는 모자만 씌워주고 감각이 좋아있다. 어휘의 결핍성이 꼭 지적되여야 한다. 만약 그후 작문에서 한 단어의 중복이 피면되고 생동한 비유, 딱 맞는 형용사들이 사용되였다면 마음 풋풋이 칭찬해 주어야 한다. “…전번 작문에서 단어중복이 너무 많아 따분하였는데 이번 글에는 언어의 풍부성이 기쁘게 안겨옵니다. 어떤 구절은 아주 생동하여 감칠맛이 납니다. 아마도 과외서적의 덕택을 보았겠지요. 글짓기공부는 먼저 언어공부로부터 시작되니깐요, 계속적인 창의성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평어를 쓴다면 그 학생의 글짓기열성과 창의성에 크게 충격을 줄것은 의심할바 없다.     3) 협상성평어: 한 학생의 글이 주제가 돌출하고 글감이 생신하며 구성 등 면에서 괜찮다 할 때, 혹은 그와 정반대일 때 긍정, 혹은 부정을 간단히 하지 말고 전자는 보다 높은 요구에서, 후자는 글의 주인인 학생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각도에 협의적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례하여 글감고르기능력을 높이기 위한 명제작문을 쓰게 했는데 워낙 글짓기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학생이 그번에는 글감의 신선도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되였다면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찔러주어야 한다.     “××학생, 학생의 글짓기수준이 원래 높았는데 이번 작문은 우선 글감선택에서 자기에 대한 요구를 낮추었다는것이 엿보입니다. 새로운 탐색이 없다면 억울한가요?”     4) 계발성평어; 여러번 지적해도 그냥 엄중한 결함이 지속될 때 직방배기로 툭 찍어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고 완곡하게 써서 학생자신이 얼굴이 뜨거워지게 하고 독립사고와 분석능력을 제고하도록 하는것이다.     례를 들어 “들끓는 거리”라는 작문에서 한 학생이 서두에서 너무 질질 끌었다면 이렇게 계발할수 있다. “제목의 중점단어로부터 자기 글을 다시 검토해보시오. 글을 쓰게 된 동기 비슷한 서두라해도 중심에 들어가기까지 너무 늑장부렸습니다…”     5) 비판성평어: 어떤 학생의 작문에 고질적인 결함이 재현되였다면 정면으로 지적해주어야 한다.     례문, “봄날의 교정”     “…학교운동장 서북쪽에 있는 화단에는 벽돌장 몇개가 빠져나와 여기저기 나딩굴고 있고 바람에 종이쪼각들이 흩날리고있다. 꽃밭의 왼켠에 있는 잔디밭에는 어데서 날려온 꽃씨가 각가지 꽃들을 피워놓아 오랙령롱하다. 비가 밤새 내려 물웅덩이에 널쪼각이 쪽배처럼 떠다니고있다. 그러나 교정의 봄은 무르녹고 있으며 그윽한 정서를 자아낸다…”     “학생은 너무 성의없이 글짓기를 하였습니다. 착안점이 종잡을수 없고 사유의 론리성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이같이 결함을 날카롭게 비판해주어 글짓기자세를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       5. 작문평의에서의 교원의 심리정서.     매 한차례 작문에서 교원이 수십백편의 작문을 제한된 시간내에 보게 되는데 흔히 여러가지 인소로 하여 평정에 공정성, 합리성이 보장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작문평정시 교원의 정서파동이 평어쓰기, 채점에 심각한 영향을 일으킨다는것을 시종 자각하고 고도의 자률성 확보가 앞장세워져야 한다.     이률배반이라고까지는 말할수 없지만 정서가 좋으면 자연히 교원의 접수심리가 관용에서 기울고 수정의견도 근신하게 제기될것이며 평정에 공정성이 담보될수 있다. 반대로 모종 원인으로 정서가 불온정하면 자칫 외삼촌산소에 벌초하기식으로 되기 십상이다.     다음, 교원의 편애에 락차가 심할 경우 자신이 즐기고 싫어하는 문체 혹은 구사풍격에 따라 채점의 분동이 잘못놓이기 마련이다. 또 학생에 대한 선입견, 인상주의도 작문에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걸림돌이 되기가 십상이다.     그리고 작문지도교원의 심리부담은 평정과정에 해의성, 무책임성을 인기시킬수 있다. 도식적인 평어 몇마디로 학생작문을 처리하는것은 그 작문에 대한 홀대라기보 다 그 학생에 대한 홀대가 되고 무책임이 되여진다. 작문교원은 부지런한 농사군의 마음으로 글밭을 가꾸면서 비료도 주고 김도 잡아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고무격려의 단비도 뿌려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글밭에 알찬 열매가 주렁지도로고 정성을 다하자.                                       《중국조선어문》에    
782    시대변화에 따르는 수필의 품격 댓글:  조회:4023  추천:0  2016-12-23
            시대변화에 따르는 수필의 품격                                                  최 균 선          작금의 많은 수필들은 삶의 숨은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모지름보다 세인들 에게 익숙한 일상에서 자아도취를 발굴하는데 자족하고 있는 모습이다. 설사 능란한 문필로 재치있게 피루어져 문학성이 돋보이는 수필일지라도 작자의 창작좌표가 또렷 이 찍혀지지 못하고 마냥 혼자의 감동에 젖어서 인간적, 철학적사색이 배제된 개체 경험을 표술하는데 자족하고 있기때문이 아닐가싶다.     작자는 독자들에게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 개인적인 감구지회를 담은, 내용이 잘 염글지 못한 수필을 쓰는것으로 자아실현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수필을 너무나 편면 적으로 가볍게 생각하는것이다. 고백의 수필이라해도 그냥 주관성에 매료되지 말고 타성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몽테뉴처럼 “삶의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독창적인 안목과 사색의 발굴에 매진해야 창조적인 수필이라 할수 있다.     수필은 시종일관 자기의 느낌, 기분, 정서를 표현하는 글이라는 공식에 매달린다면 신변잡기에서 벗어날수 없다. 변화다단한 현시대에 살면서 이젠 수필이 붓가는대로라는 막연한 관념을 갱신해야 시대의 호흡에 맞출수 있을것이다. 초기엔 다른 쟝르와 구별하기 위해 비유적형태로 표현했지만 이젠 인간정신기사로서 인생과 현실을 직시하는 작가적시각의 예리함과 철학사색이 점철되는 자기 변화가 요청된다.     달리 말하자면 수필의 개성적, 관조적, 인간적이라는 굳어진 관념에 대하여 깊은 통찰이 요청된다는 견해이다. 시대변화에 부응되는 시대적인 정서와 표백이 필연적이 아닐수 없다. 수필은 문학성은 물론 철리도 동시에 포함되여야 할것이다. 문학성은 글의 예술적인 요소라 할것이고 철리적요인은 수필속에 나타나는 사상, 작자의 인품, 글자체의 품격이 따르는 사상내용적요소라 할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허구가 아닌 진실된 정서에서 쓴 글이면서도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솔직하게 정신적 인 개척을 시사하는 글이여야 바람직하다.        수필은 무엇을 제재로 하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지만 그 특징이 우선 비유적여야 문학성이 가미되는바 사실을 시시콜콜 서술하기보다는 은근슬쩍 빗대여 기술되여야 생산적이라는것이다. 다음 리치, 생활론리,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발전론리에 따라 사물을 해석하고 시비를 밝히면서 자기 의견을 해설하는것이 되여야 감화 력이 고유하게 된다. 수필은 자기표백의 글이지만 독자에게 작가의 경험을 소개하면 서 모종의 교훈성을 은근슬쩍 담아야 보다 큰 공명대를 이루게 된다고 믿는다.     피천득선생의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라는 말은 수필의 개념을 수사학적 표술로서 “청자연적”은 수필의 우아함을 비유한것, 청자와같이 아름다운 빛을 엿볼수 있게 하라는 주장이고 차분하게 필요한만큼 안으로 지니는 연적의 속성을 추구한것이라고 해석하면 왜지밭인가? 그리고 “난”과 “학”,“날렵한 여인”은 품위와 품격을 최대한 독자의 미적감수에 일치시키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것이라 리해한다면 무리일가?     한폭의 잘 그린 수채화를 보는듯 회화적인 묘사로 의미부여, 주의, 주장을 배제함으로써 도교적인 경지를 펼치여 분위기와 정서에 초점을 맞춘 보여주기의 수필이라도 주제의식이 깊지 않고 “그래서 그다음 어쨌다는것인가?”에 대한 의미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의미로운 수필이 못된다. 훈훈한 인정이라든가 자기 가정의 행복한 모습이라든가 각종 교제와 교감 등이 주제일수도 있지만 자랑에 그치면 랑패이다.     개살구를 씹으면 시쿤침이 절로나오듯 그저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 수필이란 창작관념은 미래지향적이 못된다. 작자와 독자사이의 뉴대는 시대의 이런저런 양상, 얼 룩덜룩한 사회에 대한 공분, 다 파악할수 없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제시에서 얻은 깨달음 등으로 구축된다. 즉 소재선택과 주제발굴 및 심화문제이다.     려행하면서 감탄속에 본 자연의 걸작인 명승도 나의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게 느껴졌더라도 잘 려과된 감정이라야 모두가 아름답다고 동감하며 잘 발효된 사색이라야 그속에 사적인 정감도 모두의 정감벽을 울릴수 있다. 이는 자연과 사회, 인생, 인간에 대한 자기나름의 재해석문제이다. 고요히 흐르는 대하의 물속에 격류가 있음을 시사하는 식의 암시는 수필의 깊이와 여운을 제공한다.     나자신의 조우를 쓰면서 인간공통의 운명적 요소들을 꿰뚫어보아야 주제의식이 강렬하고 핍진하여 깊은 울림을 줄수 있다. 대수로울것 없는 일상의 풍경과 개인의 체험에도 근원적인것을 이끌어내 보편적주제를 발굴해야 읽고나서도 같은 사색을 하게 할것이다. 수필이 자기 일상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면 문학작품으로서의 공성을 잃을수밖에 없다. 그 사실은 읽는 사람으로서는 무의미할것이기때문이다.     작가로서의 실존적자각,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 작가적인 사색이 없다면, 엄혹한 시대상황 등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정서와 과거의 기억에 함몰되면 공성은 근저로부터 류실되고만다. 자기고백이라도 삶에 대한 의미화나 성찰이 부재한다거나 사회성이나 시의성, 력사인식 등을 배제하고 삶에 대한 해석이 뒤따르지 않는 자연례찬, 남들에게 감동을 요청하는듯한 자아감각, 신변의 그렇고 그런일을 적은 생활글, 나와 가족에 대한 자랑섞인 감개무량,자랑아닌, 자기만의 감명깊은 이야기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수필의 사상적경지를 좁히고 말뿐이다.     수필문학의 변혁을 도모한다고 하여 자신과 관계없는 허구적인 내용을 두서없는 의식의 흐름식으로 기술하면서 읽는 사람의 사유를 억지로 유도, 혹은 비약시킨다면 피곤하게 할수 있다. 수필은 본디 성격적으로 차분하고 다소 느긋하게 한걸음 물러서 인생을 바라보는 면도 없지않으나 천편일률적일수는 없다. 수필도 시나 소설처럼 치렬함, 실험성, 본격성, 전문성, 개성, 참신성을 추구해 나가게 되여있다. 오늘날 무한경쟁, 무한변화의 현실에서 어찌 숲속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아릿다운 녀인의 모습만을 그릴수있으며 도고한 학의 자태만을 흔상하게 할수 있겠는가?     수필은 그냥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물론 수필의 형식상 자유스러움을 말하는 부분이 있지만 내키는대로 쓴 글, 아무렇지 않게 써도 되는 글쯤으로 인식하고 접어든다면 곁길로 빠질수밖에 없다. 하긴 수많은 인생수련과 습작을 통해 고도의 구성과 표현기법과 질서를 획득하여 물흐르듯, 붓가는대로 막힘없이 써내는 경지에 이른 달필작가도 있겠지만 보편적이 아닌데서 문제가 제기된다.    수필은 짧은 글이기때문에 오히려 치밀성, 함축성, 철리적사색을 요하는 글이 아니면 안된다. 수필이라해서 덮어놓고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작자에게 창의성과 자유성이 많이 부여되고 있다는것은 별개이다. 형식과 구성이 있으되 엄격한 형식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할수 있다는것은 오히려 장점이 될수도 있고 무형의 속박이 될수도 있다.     피천득선생의“청자연적”은 기능과 깨달음으로 인간이 도달할수 있는 최고경지에서 피워올린 꽃으로 생각한것이겠지만 역시 개인의 추구, 내지는 창작개성으로 보아야 할진대 모든 사람이“청자연적”을 추종할 필요가 없고 또 그런 수필만을 쓸수도 없다. 인간의 삶의 현장처럼 수필도 “질그릇”, “유리그릇”이 될수도 있고 노래하는 꾀꼴새의 지저귐만이 아니라 딱따구리가 해충을 콕콕 쪼아대는 되알진 소리일수도 있다. 회고보다 진행형의 현실에 대한 감수를 써야 시대적이 아닐가 자문해 본다.                                                        2015년 1월 12일
781    비평의 미학 댓글:  조회:4242  추천:0  2016-12-10
                                             비평의 미학                                                       진 언     비평이란 지력, 지성의 싸움의 수단으로서 이 싸움이 있기때문에 인간들이라는 물종이 보다 문명해지고 있는것이다. 무엇에나 만족해 있는 사람이 가장 큰적이라는 말이 있다. 비리한 일을 보고 비평하고싶은 생각이 떠오르면 정의를 신장하려는 마음 이 죽지않았다는것을 의미하며 만약 마음이 죽었다면 “내”가 죽은후 홍수가 지건 말건 알게 뭐냐?하는 혈기가 없고 무정한 미이라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이 없는 사회는 가라앉은 사회이며 희망조차 없는 사회이다. 진정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며 비평의 륜리학도 생생하게 살아있을것이다. 근 간에 평론계에 “비평의 결석”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고있는데 비평이 현장에 있어야 하는데 부재한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례컨대 현재 문화계와 학술계에 비평다운 비 평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는 현상을 례로 들수 있겠다.     중국에도 전국민적으로 비평(비판)의식이 전례없이 왕성한 때가 있었다.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다는 그럴듯한 구호를 고창했지만 기실 인격타격이였다. 그러나 다른 타자에 대한 인격모욕과 박해는 되돌아와 자신에 대한 모욕이였고 자아훼멸 이였다. 로신선생이 욕설과 비방은 전투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그때는 욕설과 탄압이 상용무기였고 능사였다. 인간은 서로 존중해야 하지만 비평은 필연적으로 충돌의 불꽃을 튕기는 법이여서인가?     사람은 성현이 아니기에 완전무결한 사상과 주장이란 있을수 없고 글도 마찬가지 다. 관습적으로 비평이라면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해야 하는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공식화된 추리와 빈도리를 늘여놓는것인줄 안다. 말하자면 비평의 대상을 그때 그 사물로 한정해야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몽둥이질하는것은 폭력이다. 무릇 인간 의 기본권리에 대한 무시, 개체의 존엄과 리익을 짓밟는 행위는 모두 범죄이고 법치 정신과 생명에 대한 배반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서책상에 리론일뿐이였다.     지성인들은 모두 비평의 검투사들로서 썩은것을 도려내는 날카롭고 예리한 비평 의 칼날로 우리들이 관심하는 일들을 해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신선생은 중화문화 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판자로서 그가 무자비한 비판의 무기를 든것은 당시 중국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만약 로신선생도 함축하고 애매모호하게 에두르는 우아함에 매달렸다면 역시 우아한 그 모든 문필가들처럼 망각의 락엽속에 묻혀 버린지 오랬을것이다. 비평은 언제나 달콤한 죠콜렛트가 아니기때문이다.     리론상에서 말한다면 건강한 사회에서는 로신의 투창과 비수가 수요되지 않는바 따라서 건강한 사회에는 로신같은 위대한 비판자를 배출할수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오직 기형적인 사회만이 위대한 비판자를 배태한다. 이 시점에서 비판자의 위대함의 정도는 사회의 기형정도와 정비례된다고 할수 있으며 비판자의 수량도 역시 사회적 기형의 정도와 정비례된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딱지투성이 머리는 빗을 꺼린다. 누군가 사회문제를 비평하는것을 싫어한다면 그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와 사회에 불만족해야 하는가?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꾀꼴새 노래하고 제비가 춤추는 아주좋은 형세라해도 회의의 눈길들이 있었다. 비록 문필로 문제를 해결할수 없는 노릇이지만 관념상에서는 금이 그어져 있어야 했다.     인류사회인만큼 시종 문제가 생성하기마련이다. 물질적으로 빈궁하였기에 생산의 속도문제가 제기된것이고 작금에 물질이 풍부해지니까 또 분배상에서의 불공평문제가 튀여나온것이다. 권력비리는 없는가? 여론은 진실한가? 사회, 공중도덕은 곤두박질 하지 않는가? 등등은 인류사회의 항구한 열점들이다. 흐름을 멈춘 물은 썩기마련이다. 추구가 불만족에서 기인된다면 추구야말로 사회발전이 동력이 아니겠는가?       비평이란 말이 나오면 맑스의《도언》에 유명한 구절이 생각날것이다.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수 없다.” (《맑스엥겔스선 집》제1권 제9페지 중문판) 맑스의 이 명언에서 체현된 철학사상은 리론과 실천의 관계 이다.“비판의 무기”에서 핵심단어는 무기이고 “무기의 비판”에서 핵심단어는 비판으로서 무기와 비판은 별개이다. 그러나 무릇 비판은 위대한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사람들은 함축하고 우아하게 말하기 좋아하여 남을 비평하기를 삼가하였으며 더욱 직언하기를 꺼리였다. 대방의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는 소위 례의이다. 그러나 인성과 리성을 팽겨치고 오직 투쟁만이 대길이였던 광란의 년대에는 인의례의가 설자리 없었다. 환호는 일종 사랑의 표현이고 비판은 또 다른 일종으서 더욱 심각한 사랑이여야 했지만 정서충동이 시킨 만행만이 있었을뿐이다.     사상문화적인 비평도 그렇다. 비평은 비평하는 사람의 존재의 리유이고 증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폭언이 아니라 리론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비평은 리성인 지력의 전개이지 감성적인 언어폭력이 아니다. 이 모든 사상과 리론을 정립할 수 있는것은 학문이고 이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 비평이다. 비평은 륜리의 채찍이며 이 륜리의 토대우에서만이 모든 학문이 꽃피여 난다. 모든 학문은 하나의 사상론이며 이 사상론은 공유되는것이지 개인의 발설이 아니고 분풀이도 아니다.     사람에 대한 비평의 일반적규률로 말하면 낯선사람, 관심외 사람을 허투루 비평하지 않는다. 그처럼 비평은 관심에서 출발하여 긍정에 이르려는 희망요소가 들어있다. 자신과 차이가 현저한 사람이거나 거리가 먼 사람은 비평하지 못한다. 마치 산간벽지의 초민백성이 황제를 비평할 건덕지도 없고 담량도 없듯이 말이다.     무릇 비평은 비평받는 사람에게 비자재적인 감각을 안겨주기에 무조건 기꺼이 접수하는 군자란 태여나지 않았다. 여기서 비평의 륜리문제가 제기된다. 중국사람들은 자고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좋아하여 쩍하면 어떻게 사람이 되여야 하고 일은 훈계하기 좋아한다. 남을 가르치고 훈계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만 늘 지엄한 스승으로 자처하는것은 참으로 꼴불견이다.     비판은 비난이나 비아냥이 아니다. 비난, 비아냥은 비뚤어진 심성의 로출일뿐이 다. 남의 견해, 감정표현에 비양거리지 말고 정당하게 반론을 쓰던지 쓸 건덕지가 없으면 공감이 없더라도 반감은 가질 필요가 없으리라. 비평함에서 자신이 무소부지하고 무소불능이고 무불통지한듯 훈계하는것은 비평에서 삼가해야 할 상식이다.          비평거리가 일종 “흠집”이긴 하지만 제흠집은 뒤에 밀어놓고 남의 흠집만 잡고 이렇쿵 저렇쿵하는것은 유치한 발상이다. 남의 흠집이 잘 보이는것은 자신의 흠집만큼만 보이기때문이다. 사람이 자가당착에 빠지면 헛소리를 진담인양 내세운다. 사람이 손가락 하나로 남을 가릴킬 때 손가락 세개는 나자신을 가리키고 남은 하나는 하늘을 가리킨다고 한다. 누구를 손가락질하고 싶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늘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세번정도 말이다.     지자의 눈은 비평의 자대가 되고 입이 비평의 메가폰이 되여야 한다. 반대로 지자의 귀는 비평을 듣는 귀가 되고 두뇌는 비평의 발원지로 되여 리성으로 맑아지고 심장은 비평의 열정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지자의 판단은 비평의 동력으로 되여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벼리는 비평의 무기는 서리발쳐야 할것이다. 비평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살속에 있는 피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우리의 체면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것이다.                                                                     2012년 5월 20일
780    락화의 비애 외 (4수) 댓글:  조회:3374  추천:0  2016-12-10
                                      락화의 비애                                                                               최 균 선                             꽃잎지는 소리를 누가 들었는가                               모두들 바람에 꽃이 진다고 하니                                   매정한 바람이 꽃지는 소리 듣나                                                     제멋에 몰래피여 모올래 진 꽃을                               울밑에 울어싸던 귀뚜리보았을가                                   살며시 서럽게 지는 꽃의 그림자                                                     지켜나 보고 화조월석을 말하는가                               꽃이 남몰래 지듯이 묻히여 사는                                   진실의 임자인 사람들을 아는가?                             꽃이 피는소리 꽃이 지는소리는                               천지간에 가득넘쳐 흘러-흐른다                                  꽃처럼 진 꽃다운 생명 한둘인가                                                   꽃은 때도없이 무참히도 지거늘                               슬픔은 때를 가리지 않는법이다                                   인간-세상은 비애가 남아돌거니…                                                                                                   진달래 꽃불                                  영산홍!                                    봄맞이 영춘화요                                두견새 울음끝에 피여                                    진달래라 의로운 꽃                                                               참(真)으로 진정                                    봄은 온다(达来)고                                산허리 찬바람을                                    분홍으로 태우며                                  불붙어 불타듯                                   끓는 그 마음으로                                잔설을 불사르는                                    진달래 꽃불이여                                  뭇꽃들은                                    잎,닢에 받들려서                                피여남을 자랑하며                                    화사함에 취하여도                                  봄이 왔노라고                                   조용히 알리고                                꽃답게 지고나서                                   푸른잎이 무성한                                  영춘화!너는                                   새봄을 위해 싸우다                                가옵신 선구자들의                                    넋으로 꽃피였느냐                                  진달래 고운                                   꽃불로 스러진                                그 향기처럼                                   감동에 젖는 내마음…                                                                             살구는 익어터지고                                시골도 하마래촌 어느빈집에                              참살구나무 혼자도 궁금해서                              조동고개쪽으로 더 가지뻗고                              살구철도 잊었나 혼져옵셔예                                에라, 싹 다 털어뿌릴까보이                              가지 흔들며 푸념질 한-마당                              뿌리박고 한백년 살자하더니                              출국바람에 모두들 신들렸나                                십년세월 묵은기억도 날리고                              불평에 옆구리 터진놈 에-라                              뿌리에 떨어져 원-망 썩이며                              저도 안부가 궁금한가보이네                                                                                      봄이 와야                                                                                              봄은 상기 아니왔나                               봄이 와야 남산바람                               봄날 구름 몰아다가                               봄비 살살 내려주지                                 어매 봄이 몰래왔네                               산에 고운 아지랑이                               뒤산 붉은 진달래꽃                               고운 입술 열었잖아                               봄날 너와 단둘이서                               봄이 웃는 꽃동산에                               봄의 사랑 심어놓고                               봄빛 고운 노래할가                                             시골의 비애                                   두만강 가람가 마을                                     시골도 골깊은 명동                                 흉조가 들었다 부엉                                     새도록 적막을 우네                                                                  바위는 꿈꾸듯 하고                                     록수만 돌돌돌 촐랑                                 처량한 밤소리 싣고                                     불귀의 바다길 바쁨                                   밤바람 구름을 찢어                                     별들은 좋아라 반짝                                 말없는 청산은 답답                                     서로가 서로를 알가                                   시골의 비애를 우는                                     부엉이 피타는 호곡                                 아무도 알은체 안해                                     무주라 空山만 섧다                                                                                      2016년
779    (에세이)에세이와 수필 댓글:  조회:4164  추천:3  2016-11-23
                                                         에세이와 수필                                                                최 균 선     국어사전에서는 수필과 에세이(essay)는 같은 말이라 해석한다. 즉 수필을 영어로 에세이라고 한다는것이다. 한편 수필을 에세이와 미셀러니(경수필)로 나누는데 에세이는 어느정도 지적(知的), 객관적, 사회적, 론리적성격을 지니는 소평론 (따위)이 그것이며 미셀러니는 감성적, 주관적, 개인적, 정서적 특성을 가지는 글로써 좁은 의미의 수필을 말한다는것이다. 이는 사전해석과 상충되기도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수필문단에서 미셀러니가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분류에 이견을 가지는 수필가도 있다. 하긴 수기도 수필같고 칼럼이자 수필이고 수필이자 칼럼이고 에세이가 수기같고 심지어 잘 안된“수필”을 잡문쯤으로 간주하는 몰상식도 있다. 에세이는 론리적기술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때 수필보다 추상적기술이 자유롭다. 따라서 에세이는 수필을 포함한 개념이 되고있으며 에세이 가운데서 문학성(예술성)이 구현된 글이 수필이 된다고 볼수 있다. 여기서 또 칼럼과 에세이의 구별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만 잠시 미루어둔다.     한국수필가 윤오영선생은 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수필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알베르스는 “에세이는 그 자체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되여진 문학”이라고 말했다. 에세이는 지성이나 학문을 기초하여 개인의 정서, 가치, 경험의 실존철학에 기초하여 창조적인 론리성으로 표현하는 개인의 철학 이지 문학은 아니라는 해석이 정설로 되고있다.      그러면 에세이는 수필과 다르다는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가? 동양권의 수필과 서양의 에세이는 그 출발점이 비슷하고 문학성 또한 다르지 않으나 량자를 구분하려는 주장들은 줄곧 제기되고있다. 에세이는 분명 문학이 아니라 서양적인 론리 경험이 바탕으로 되여있다.     에세이는 개인의 잠재력을 표현하기 위하여 평론이라는 개인의 창조와 론리를 목표하여 개인이 경험하는 감각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것은 수필은 에세이보다 격이 낮다는것 즉 우리 수필이 신변잡기에 가까운데 반해 에세이는 소론문적성격을 띠는 객관적요소가 강한 글로써 질적수준이 높기때문일것이다.     에세이는 분명 문학성보다 론리성이 더 두드려져있다. 그만큼 에세이는 지성이나 학문을 기초하여 개인의 정서, 가치, 경험의 실존철학에 기초하여 창조적인 론리성으로 표현하는 개인의 철학이지 문학은 아니라는 해석이 실제적인것 같다. 한국의 어느 수필평론가는 “서양인이 객관적이고 리지적이라면 동양인은 주관적이요 감성적이고 서양은 코스모스적질서요 리성이라면 동양은 카오스(무질서)적 혼돈이요 정이다. 이런 정서와 성정의 차이가 에세이와 수필의 내용을 좌우하였다.” 고 말한다.     한국의 윤오영은 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수필이라고 단언하면서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 (桃), 수필은 곶감 (乾?)에 비유했다. 수필은 왜 그저 감이 아니고 굳이 곶감이 되여야 하는가? 수필은 정서체험을 바탕으로 미적경지를 펼쳐보이려는 창조적행위가 된다.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이라해도 이런 목적과 구현이 없이 쓴 글은 에세이 일수는 있으나 수필은 아니다. 어떤 사회현상, 인간성의 이모저모에 대한 풍자나 비판, 유머, 기지가 들어있다면 에세이라 할것이다.  한편 전자의 예술적 목적과 구현 없이 쓴 글은 수필이라기보다 에세이로 볼수 있다.     순간적인 모종의 깨달음은 인지의 비약 혹은 초월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식, 관점, 태도 등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경험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 긍정과 부정, 경향과 편견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에세이에서 경험과 사고의 론리적인 전개과정에 비판적인 창조를 포함하여 파격적 경험과 감성을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책임성이 수반된다. 에세이는 나를 론증하는것이 아니라 사회성을 론증하기때문이다. 그러기에 에세이는 론리의 수의성을 불허할수밖에 없다.     수필은 론평처럼 사회, 인성문제에서 무엇을 제기하더라도 론증하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여 작가의 주장을 독자에게 설득시키거나 동조를 요구하지 않는다. 수필 에서 작가의 현재관점이란 변화상태에 있는 지식과 경험의 표술일뿐이다. 하기에 작가의 경험이나 철학이라 하더라도 공감하거나 론박당하는 등 책임관계가 설정되지 않으며 설정될수도 없다. 물론 진짜 경험과 사고의 론리적인 전개는 허용하되 그속에 비판적인 창조를 제시를 포함하여 파격적경험과 감성을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작가적책임을 회피할수 없다.      정서와 련상의 합일이 수필의 주제를 찾아주고 구조를 설계해주며 소리있고 색채가 있고 어떤 맛이 공감을 기대하게 하는 수필글로 완성되게 한다. 수필의 사명은 개체들의 각이하고 다종다양한 삶의 양상을 그리고 인간존재를 해명하데에 있다. 이런 정서와 련상의 경지를 작가는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하는것이다. 이것이 곧 인간학적 수필의 의의라고 말할수 있겠다.    수필은 보통 미리미리 창작계획을 세워두고 엮어내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로출되지 않은채 무르익던 어떤 관념, 기분, 정서의 분출이라 할수 있을진대 그에 상응하는 류형을 글로 고착시려는 자발적인 작업이 수필쓰기가 된다. 그만큼 때따라 문득 떠오르는 어떤 감흥을 쓰기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수필은 무시로 튀여나온다. 례하여 시골길을 가다가 길섶의 뙈기밭에서 중년부부가 김매고있는 모습을 묘술하여 시골의 풍속화를 펼쳐보일수 있으나 전후사연은 사절하게 된다. 수필은 느낌이 주되기때문이다. 호듯호듯 튀는 가을볕아래 농가부녀가 고추다래를 엮고 그 엮은것을 나그네가 처마끝에 달아매는 모습을 서술하면서 느낌을 표술하면 부부사랑의 깊이를 음미하게 하고 삶의 가치를 흥량하게 하는 서정수필이 될수 있다. 물론 글감 자체가 곧바로 서정수필이 된다는것은 아니다.     때로는 조금은 현념적이나 로송, 바위에 감정를 이입하면서 나름대로 나무와 바위의 속성을 파헤쳐 나무나 바위를 통한 인간존재의 의미파악에 모를 박은 지적수필의 묘미를 잘 보여줄수도 있다. 이런 사명은 에세이로서는 감당이 안된다. 그대로 파악하지 않는 련상과 상상이 수필작가의 표현욕을 유발할수도 있으므로 고정관념을 전도시킬 발산사유가 요청된다. 이런 정서와 련상의 경지를 작가는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하는것이다. 그러나 기발한 상상력의 결과를 실제인양 하는것은 불허이다.     수필의 사명은 이렇게 삶의 양상을 그리고 인간존재를 해명하는데 있다. 이것이 인간학적수필의 의의라면  의의일것이다. 수필작자는 가는 산에 따라 노래부르면 되고 독자는 무슨 불상을 만나면 무슨 향불을 피워올리는식으로 읽으면 될것이다. 수필은 작자의 삶의 이야기로서 독자는 공감적 정서를 앞세우고 읽는다면 에세이는 리성으로 읽어야  깨득이 더 잘 될것이다.     결론적으로 에세이는 론리성이 글에 피와 살이 되고 수필은 인생, 인간의 정감세계를 조명하는 반사경이라고 리해하고싶다. 객관적인 사회적공성에까지 끌어올느냐 신변잡기적인 감성의 발현이나 자아도취에 머무느냐 하는것은 작자의 심미취향, 가치추구에 따르므로 어떤 모식을 강요할수는 없다.                                                           2014년 5월 27일
778    (칼럼)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 댓글:  조회:3584  추천:1  2016-11-20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                                                                최 균 선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라는 말을 보면 대뜸 로신의 소설 “공을기”에 풍속화같 은 장면을 떠올리게 될것이다.     “몇번인가 이웃애들이 웃음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몰려와서 공을기를 둘러쌌다. 그러면 그는 아이들에게 회향두를 나누어 주는데 한아이에 한알씩이다. 애들은 콩을 먹고서도 가지 않은채 눈으로 모두 접시를 기웃거린다. 공을기는 당황해서 다섯손가 락을 펴서 접시를 덮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말한다.     “이젠 없다. 얼마남지 않았어!”     허리를 펴면서 슬쩍 콩을 보곤 고개를 흔들고 말한다.     “이젠 없다! 없어!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 그제야 한떼의 아이들은 모두 깔깔대며 헤여져 달아난다…공을기가 한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는 기실 공자가 자한에게 한 말이다. (“君子多乎哉?不多也!”ㅡ《론어. 자한(论语.子罕)》     공을기는 큰 마음을 먹고 산 회향두가 점점 줄어드는것이 애석해서 한 말이지만  욕망의 미달에서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라는 개탄이라 할수 있다. 이 물욕, 점유욕, 권력욕, 명예욕, 색욕, 등 온갖 욕망을 두고 “적을소냐? 너무 많도다” 라고 말할 사 람은 거의 없다. 자족의 문을 닫고 자기안에서 이런저런 생활의 꽃수레를 만들어가는 것도 나름대로의 행복이련만 인간은 욕망의 노예라는 숙명을 타고났다.     이 점에서는 인간이 벌레보다 더 나을것이 없다. 연구에 의하면 바퀴벌레는 평소 필요이상의 음식을 많이 먹지만 그들만의 “생존법”에서 기인된것이다. 바퀴들은 생 애의 반을 굶고도 너끈히 견딜수 있다고 하니 가히 경이로운 생물이라 할것이다. 만약 인간도 그것들처럼 본래부터 생애의 반을 안먹어도 살수 있는 동물이였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무지경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온갖 파렴치와 비인간적 범죄를 저지르고 “많을소냐?많지 않도다”를 고창하며 발버둥치지 않을지 모른다.     동물왕국의 왕이라는 사자도 배가 부르면 곁에 맛난 먹이감인 토끼와 사슴이 어슬렁거려도 욕심내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아흔아홉개 가진놈이 백개를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리기주의(에고이즘)에서 영원히 해탈될수 없다. 그래 서인지는 몰라도 쇼펜하우에르는 인간은 욕망의 복합물이라고 칭하였다.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자신의 수요를 만족시키려는것이 곧 욕망일진대 인류문명의 진보를 추동하였으며 만가지 선의 원천이라고 보고있다. 문제는 무지경의 탐욕이다. 로자가 자기를 찾아온 공자에게 한 말이 아주 교훈적이다.“食於苟簡之田, 立於不貸之圃. 逍遙, 无爲也. 苟簡易養也. 不貸无出也. 古者謂是采眞之遊. 以富爲是者, 不能讓祿. 以顯爲是者, 不能讓名. 親權者, 不能與人柄. 操之則慄, 舍之則悲, ”     “식어구간지전”은 자기 먹을 정도의것만이 생산되는 땅을 가지다이고, “립어불대 지포”는 먹고 남을것이 없는 정도의 채소밭만을 가꾸었다이며 “소요무위야”에서 소 요한다는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이다. “구간”은 자기 먹을것만을 생산한다이고 “이양야” 몸을 보양하기 쉬움을 뜻한다. “부대”는 먹고남는것이 없을 정도란 말이고 “무출야”는 남에게 내놓지도 않음을 뜻한다고 했다. “고자위시채진지유”란 옛날에는 이것을 ‘참됨을 취하는 노닒’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이부위시자” 부를 좋은것으로 아는 사람을 이르고 “불능양록”은 남에게 재산을 사양하지 못하며 “이현위시자”는 출세를 좋은것으로 아는 사람이고“불능양명” 이란 남에게 명예를 양보하지 못하고“친권자”란 권세를 가까이하는 사람을 말하며 “불능 여인병”은 남에게 권력을 맡기지 못한다는 말이며 “조지칙률”은 그것들을 가지고 있자니 두렵다이며 “사지즉비”는 버리자니 슬퍼질것이라는 의미이다.     비록 성현들이지만 필경 2천여년전에 사람들로서 현대인에 비하면 많이 개명하 지 못하였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로자가 한 말은 경제동물로 다 되여진 현대인들의 머리로서는 생각할수도 없는 사상이다. 탐욕자들은 이런 만고의 경세지언을 우습게 여기며 가지지 못한자의 막무가내한 푸념이라 생각할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을 가히 악성탐욕자들이라 이름할수 있다. 악성탐욕은 사악의 대명사로서 문명재난의 제조자들이다. 몇백만원씩 하는 주택을 몇백채씩 차지한 자들에게 묻는다면 필시 “많지 않도다”할것이요 한병에 천원도 넘는 모태주를 만병이상이나 후무려둔 자에게 “그만하면 평생 취할수 있지 않냐?”하고 물어도 필경 “많을 소냐? 많지 않도다”하며 성차하지 않을것이다. 최근 락마한 서녕시 모씨는 서부광업 리사장일 때 월급이 153만원이였다는데 그냥 “많지 않도다”를 짓씹으며 승천하였다가 최근 일패도지 하였으니 그놈의 “많지 않도다”가 야단이 아닌가?     물론 모든 사람들의 내심세계에 욕망과 탐욕이 병존하는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으로 탐욕과 등진 사람이 극히 소수일뿐이다. 배가 부두에 이르면 건져올릴 기회도 없고 차가 역에 도착하면 주어들일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을소냐? 적지 않도다”라고 할대신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를 곱씹으며 자기를 말아먹었다. 정당한 욕망이 탐욕으로 번지여 령혼을 점거하고 종당에는 구렁텅이로 밀어넣는것이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인간의 화는 자족을 모르는데서 오는것이요 탐욕심이 강하면 필시 남을 해치고 남을 해치고나서 결국 제잡이가 된다. 세상에 아무런 욕망도 없는 사람이 있으랴만 가령 있다면 그는 천하에 제일 행복한 사람일것이다. 탐욕심이 강한 사람은 모종면에서 강자라 할수도 있다. 옛글에 고기는 미끼만 보지 낚시는 볼줄 모르며 사람은 리익만 보지 해될줄은 볼줄 모른다고 하였다,     맹자가 량혜왕에게 왕이 리익을 추구하면 그밑에 제후들도 자기 리익만 추구할것이고 더 아래로 내려와 온 국민들이 모두 그렇게 되여 서로 자기 리익을 챙기는 아귀다툼이 벌어질것이라 하였는데 이를 상하교정리 “上下交征利” 라고 했다. 서로 밥그릇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이 벌어질것이란 말이다. 아귀다툼은 바로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라는 심리바탕에서 시작되는것이다.     자족이야말로 쾌락의 원천이요 행복의 기성품이라 할것이다. 자족할줄 아는 자는 늘 즐겁고 수시로 멈출아는자는 평생 수치스러운 일이 없으며 자족할줄아는 사람은 인생이 진미도 안다고 했다. 예나제나 자족은 일종 심리상태이면서도 몸에 익히기 어려운 일종 처세철학이기도 하다. 너무 배부르게 먹으면 농촌말로 “저웁다”고 한다. 역시 너무 넘치도록 가지면 여러모로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지는 도리와 같고같다.     고금중외에 온갖 탐욕속에 매장된 사람들이 얼마였던가? 욕망의 만족은 만족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애는 유한한 인생인데 무한한 재부욕을 추구하는데 온 악 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를 “적을 소냐? 적지 않도 다”라는 절제성적인 심태로 바꿀 때 그는 크게 행복하지 않더라도 일패도지하는 일이 없고 평범하나 불행하지는 않은 삶을 살리라.     행복은 모순의 결과물이다.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를 끝없이 중얼거린다면 마음은 점점 더 검어질것이다. 인생은 경영하지만 계획서대로 진행되는것이 아니며 행복은 느끼는것이지 비교에서 오는것이 아니다. 세사는 금삼척이요 인생운 주일배 (事 世琴三尺,人生酒一杯)이고 인생무상인데 행복인들 절대적이랴. 사람마다 애써 가꾸 는 인생의 상록수는 저마다의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다는것을 체험할것이다.                       2014년 4월 20일               (2016년 송화강 7기에 발표함)
777    탐욕군에게 주는 편지 댓글:  조회:3219  추천:0  2016-11-09
                                                       탐욕군에게 주는 편지                                                                        최 균 선                    탐욕군, 별래무양한가?     인간에게 탐심이 생겨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늙기는커녕 갈수록 왕성해지고 어디에나 있기도 하고 또 어디에 없기도 한 군도 인젠 피곤할줄로 믿는바이네. 군은 인간본성인 욕심의 형인가? 아니면 하내비인가? 세속에 절었더라도 한번쯤은 하늘을 쳐다보고 군에게 매달려 헐헐거리는 인간들에게 한마디 하게나.     인생은 뜬구름, 스쳐가는 한줄기 바람인것을, 어머니 배속에서 이 세상에 나와 얻은게 무엇이며 잃은게 무엇이냐고 한번쯤은 물어보기나 하구려. 사람은 세상에 눈뜨고 밝은 빛줄기를 본것만으로 생명의 만족이 될것이라고, 하기사 인간이란 고급동물은 하고 싶은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것도 많다더라오. 다 가져본들 허망된 욕심뿐인것을 군을 붙안고 울고불고, 죽고살고하니 탐욕군도 민망스럽겠지?     비오는날 산위에 올라가 제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라고 해보소. 밑에는 안개구름 두둥실 떠가고 모든게 내 발아래 있어 목청높게 부르지 않아도 다 보이는것을 애써 찾으려 동서남북 사면팔방을 헤메느냐고 탐욕군,그대로서는 한소리 웨칠만도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중생들아, 나를 버려라, 나를 따르는자는 죽음밖에 없다.”고,     탐욕에 허기져서 얻은것은 배에 기름진 비게덩어리뿐. 무엇을 더 가꿀게 있어서 그토록 안타깝게 군을 잡으려 하는지, 그저 황혼빛이 물들어 오면 2원짜리 소주한병 손에 들고 바람에 실려오는 풀냄새 안주삼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쉬움에 흐르는 눈물을 세상구경시키는 그런 마음을 탐욕군, 자네가 알턱이 있겠는가? .     바람이 스쳐가며 가르치지 않던가? 가만히 있던 마음을 움직여 그 얻은것에 취해 인생 한번 미쳐산다고 오기를 피우며 살아도 좋다가 마는것을 탐욕군, 당신은 죽었다가 꺠여나도 모르지야, 어떻게 살쪄서 사는 인생도 저 바람처럼 눈깜박할 때 인생길 굽이굽이에 해는 저물어 마냥 누구에게 삶마저 도적질맞힌 느낌이라는것을.      탐욕군, 그리 욕심부리지 않고도 살만한게 인생이여늘 살다보면 좋은일 생기고 살다보면 웃을일 생기는데 제손으로 앞당겨 지옥문을 열탁이 있냐? 군에게 사로잡힌 우자들을 깨우시라. 어쩌다 새벽에 일어나거든 어두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라고, 미구에 새날이 희읍스름 밝아오다가 일출동령에 활짝 밝은 대명천지가 펼쳐지고 싱그러운 아침해살이 반겨줄것이니 맨손, 맨발로 뛰쳐나가 먼지가 가셔진 시원한 공기 를 흠뻑 마셔보라고 충고하게나. 그러면 바람이 군에게 무어라 쏙닥거릴걸세.     탐욕군, 자네도 알겠지? 남의 고통을 내 감기만 못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반칙변칙을 반복하며 기를 쓰고 위로만 바라올랐다가 일패도지할 때 울고불고할줄을, 궂은일을 하며 살더라도 내 분수에 맞게 살아가면 마음이 넉넉해서 편안하다는것을, 인생의 불행과 비극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서 시작된다는것을 탐욕자 들은 아는것같지만 기실은 잘 모른다네. 인간의 일곱가지 감정가운데 탐욕ㅡ군보다 빨리 일어나고 늦게 끝나는것은 없지.     탐욕이 모든 인간악의 뿌리라고 하면 군도 펄쩍 뛰겠지? “굶주림은 간사한 일을 꾸며 내지 않고 곤궁은 음란한 일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구. 그런데 탐욕의 흑마에서 내릴줄 모르는 자들은 이미 넘쳐나게 가지고도 과도하다는것을 모른다오. 그래서 “돌로 만든 사람에게는 말하기를 바라지 말고 인색한 사람에게는 인간의 정을 찾지 말라.”는 말이 있게 된것이오. 물론 탐욕군은 영원히 알수 없겠지만도,     탐군도 알고있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참된 복이 부함에만 있지 않다고 단언하였다네. 무엇때문일가? 금덩이가 귀해지고 천해지는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있기때문일세. 사람이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기와나 자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금은보배는 소중한것이기때문에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귀하게 여기기때문에 소중하다는것이오. “마음은 그가있는 곳에 있지 않고 그가 사랑하는것에 있다.” 는 서양속담이 공연히 만들어졌겠는가?     탐욕군, 군이 가는 길은 협착하기만 하겠지? 마치 두 사람이 좁은 굴속에서 서로 만나는것과 같아 상대가 물러나지 않으면 아무도 나갈수 없지. 인간의 심령속에 군림 한 탐욕군은 가장 넉넉하지 못한것이요. 머리좋은 사람보다 약삭바른 사람이 득세 하고 마음착한 사람보다 악착한 사람이 많이 얻으며 사는게 인생의 현주소이지만도 인생이란 그저 그렇고 그런것이라고 가진것없이 불어온 바람, 남기는것 없이 가뭇 사라지는 바람이 제처럼 살라고 귀뜸해줄것이요.     탐욕한자는 재물을 바라보며 스스로 즐거워하다가도 일조에 다 없어지면 재물이 생기기전과 같이 재물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게 된다오. 꿈속에서 배불리 먹는 이는 그냥 꿈을 꾸고 있을때까지 정말 배불리 먹은것이 아님을 깨닫게 할수 없듯이 탐욕군도 지금 손에 넣은 재물이 결국에는 헛된것임을 깨닫게 할수 없지. 곧 죽을 때에 이르러 꿈이 끝나야 그것을 깨달을것이나 때는 이미 늦었다오. 높은 산을 오르려 하면서 스스로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지는 사람은 없을것이네. 그러니 만약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면 이는 높은 산을 올라가려는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는것이겠지. 탐욕군, 군은 무엇을 자랑하는가? 자신의 짐이 큰것을 자랑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짊어진 짐이 무거운것을 행운으로 여기는가?     한정되고 유한한 공간에 호화로운 집을 짓고 내노라하고 사는 부자보다 무한정의 공간에 영원한 마음의 집을 튼튼히 지을줄 아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일게오. 남이야 뒷간에서 낚시질을 하든말든 제 분수에 맞게 살면 무탈한법이요 남의 더운밥이 내 식은밥만 못하고 남의 돈 천냥이 내 돈 한푼만 못한법이거늘,     잘 지어진 집에 비나 바람이 새어들지 않듯이 청렴과 고운심성으로 벽을 만들고 성실과 노력으로 든든한 기둥을 삼고 겸손과 인내로 따뜻한 바닥을 삼고 베품과 나눔으로 창문을 널직하게 내고 지혜와 사랑으로 마음의 지붕을 잘 이은 사람에게는 어떤 유혹도 탐심도 그 마음에 머무르지 못할것이오.     재물은 형체가 있고 마음은 무형이지. 자꾸자꾸 부정축재하면서 탐욕군을 내치려는것은 마치 소금을 먹으면서 갈증을 풀려고 하는것과 같소. 물은 갈증을 풀어줄수 있으나 우물속에 물은 나의 갈증을 풀어줄수 없지. 이와 똑같이 금이 궤짝속에 있다면 그것이 어찌 마음에 스민 금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수 있겠는가? 재물이 마음을 만족하게 할수 없는것은 공기가 배부르게 할수 없는것과 같지 않겠소?    자신이 얻은것으로 만족할줄 아는 이가 큰 부자이며 참으로 부자이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줄 모르는 이는 크게 가난한 사람이며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오. 하 기에 탐욕이 무지경인자는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해도 마음의 부자가 될수 없소. 성 서에 “손에 가진것이 없어도 언제나 부유한듯한 이가 있고 재물을 가득히 가졌으면 서도 언제나 가난한듯한 이가 있다.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주면서도 언제나 풍족한 이가 있고 자신의 재물이 아닌것을 빼앗으면서도 언제나 가난하게 사는 이가 있 다.”라는 말이 있는데 탐욕군의 귀에는 네미덜머리일것이오.     탐욕군에게는 한계가 없겠으나 재물에는 한계가 있소. 따라서 부를 축적하는것으로는 욕망에 이를수 없네. 만약 군이 주인의 재물을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재물을 군의 자족에까지 이르게 할수는 없을것. 그런데 어찌하여 탐욕군은 이 도리를 알은체하지 않는가? 가난이 큰재앙이 아님을 아는 이는 재부가 큰행복이 아님을 안다고 하였소.     탐욕군, 당신은 이 계률을 아는가?                                          2015년 7월 8일                             2016년 6월 24일 (흑룡강신문)
776    (에세이) 수필에 대한 수필 댓글:  조회:3918  추천:0  2016-11-08
                                                        수필에 대한 수필                                                                최 균 선     보통 수필은 문학의 하위갈래라고 규정하고 변연문학으로 정의한다. 일찍 피샤르 하르트만은 “언어의 의미에 의해서 환기되는 상상직관상(想像直像)이 문예 본래의 형식 또는 표현수단이다' 라고 문학예술의 문학의 일반적인 의미와 특징을 개괄하였는데 이런 정의에 따르면 수필도 상상예술이라고 말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활체험, 감지되는 우주만물을 소재로 자아표출을 기본으로 하기에 사실성이 생명이다. 혹자는 수필은 어떤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지식내용의 전달을 일삼지 않는다고 하는데 물론 수필의 핵심내용일수는 없지만 자기철학, 자기 사상의 표출이 아닌 자아도취에서 인기된 신변잡기라면 잘 다듬은 일기차원에 머물고만다,     “자아의 표출”과 '독백의 양식. 그리고 '성찰'은  공통된 수필의 정의로 되여있는데 소재에 대한, 자기체험에 대한 작자 나름의 해석과 리해를 토로하면서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고백적 자조의 성격을 띨수밖에 없으므로 작가 자신의 나름대로 다른 쟝르보다 개체성경향이 훨씬 더 강할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보편성을 띄여야 문학예술작품으로서의 수필이 되는것이다.     누구라없이 수필창작과정을 보면 먼저 대상(사물)에 대한 존재파악과 가치성을 판단하고 이 존재파악이 가치기준에 적합하면 수필의 소재가 된다. 이 소재에서 어떤 감수를 얻어 정서화되고 철학적인 계발을 얻게 되면 정서가 언어속에 용해되여 수필 이라는 형식의 정감토로로 된다. 따라서 자기표현이라는 특성으로 하여 일인칭서술이 요청되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나를 해부하고 평가하고 금후의 행동반경에 새로운 구도를 짜게 된다. 그래서 수필쓰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것이다.     수필에서의 비평성이란 바로 대상물, 체험의 내용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는 예술적사색을 의미한다. 타인의 행위, 지적, 정신적소산에 대한 품평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게도 된다. 여기에는 해설이나, 해석, 설명을 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문학비평가인 조르쥬 뿔레는 "비평의식은 그 정의상 타자(他者)의 사고(思考)에 기댄다"라고 말 하였는데 “타자의 사고”에는 사회적약속과 인성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있기때문이다. 누구나 진공상태에서 살수 없으므로 사람들속에서 부대껴야 하며 자기 행위에 대한 평가를 타자만이 공정하게 할수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수필도 어떤 가치기준을 가지고 창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것이다.     소설창작은 상상력의 기적에 의거하지만 수필에서는 근원적으로 주관성을 띠고 있기에 련상은 필요하되 상상과 허구는 용납되지 않는다. 수필작품을 통해서 작품 배후에 있는 작가의 인격을 추적하는것은 독자들에게 흥미없다. 수필은 예술정감에 서 시작되여 인간세계, 사회, 인성 등 면에서 나만이 아닌 자타에 대한 성찰에 이 른다. 따라서 그 성찰은 공공적이고 보편화되여야 흔상가치가 있게 된다.     프로이드 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은 억압된 욕구이다. 억압을 당한 욕구는 무의식속으로 숨어버리므로 의식으로는 그 욕구를 감지하지 못한다. 하여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소망할 때는 공상도 곁들므로 그가 원하였던것이 충족되여지는 심리적 만족을 문학작품에서 찾게 된다. 문학작품은 전형성을 창조하지만 인류의 보편적인 심리에 충족감을 주기때문다. 즉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해준다.     상상과 허구의 산물인 소설에서도 소망과 추구의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소설에서 체현될때는 직접적인 표현으로서가 아니다. 작가가 창조, 부각한 인물형상으로 나타나기때문에 작가는 작품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여있다. 그래서 라캉은 "내가 생각 하는 곳에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가 겪은 생활체험, 그에 대한 심미적사색에는 작가가 예술적사색과 형상화를 거치면 작가 자신만의 정신활동이 아니라 공유되는 정신, 정감활동이 되여야 바람직 하다. 그경우 작가의 주관목적은 이미 그 작품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고백하고나서 관조하는 자태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에서 진술한 내용만으로 훌륭한 인품이니 인격적인 결함이니 하는것은 그 자신의것만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의것이 될때에만 그 수필이 어떤 의미리를 지니고 살아난다.     인간의 심리바탕과 지향의 공통성원칙에 의해서 잠재해있는 무의식을 촉동해야 한다. 무의식속에 정서를 깨우치는 과정은 건전한 자아형성의 과정이 된다. 동시에 좌절과 갈등과 고통이라는 숨어있는 아픔을 성찰하는 심리자세에 진입한다.     한편의 수필이 모든 독자에게 공감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독자가 공감하는데는 반드시 작자의 주관의식의 설득력이 아니라 정서적감화력이다. 합리적이고 심미적인 만족이 목적이때문이다. 독자는 수필에서 리론적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마력과 같은 힘에 끌릴뿐이다. 이것은 독자에게 잠재해 있던 심리적공통성이 강하게 작용한것이다. 공감되는 수필에는 독자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인생의 의미있는 정서적 체험요소가 표현되여 있으므로 독자의 마음을 흡인하는것이다.     한편의 수필이 독자에게 안겨줄수 있는것이라면 정서적인 해석과 삶의 새로운 의 미이다. 이와같은 해방감과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자아고백으로서의 수필은 정서적, 심미적적 수단에 독자가 자의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독자가 한편의 수필작품에 호 감을 가지는것은 그 잠재적인 정서체험이 재현되였음을 뜻한다. 이경우 작품은 작가 자신만의 주관체험 차원을 떠나서 독자들의 정서체험으로 전화된다.     정신심리학가 홀랜드는 "문학작품이란 무의식적환상과 그것에 대한 의식적반응 간의 상호작용을 독자의 가슴속에 생기게 만드는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수필 문학에서의 감화력을 전제로 한 말이다. 피천득과 같이 청일색으로 일관되게 청자연 적이고 무의식적환상을 하는것도 비현실적이고 자기만의 정서적감흥에 지우쳐서 시종 일상잡사, 쇄말사를 다루는것도 수필문학의 품위를 낮추는것이라 생각된다.     글을 쓴다는것(문학을 한다는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하여 일상에서 맛볼수 없는 예술적감화력을 엮어내는 작업이다. 싸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세계는 지각작용과 상상력에 의해 크게 량분되는데 지각작용은 현실세계를 지향하는것을 가리키고 상상 력은 현실세계를 뛰여넘어 비현실적세계, 즉 가공적세계를 지향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파하고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로운 창조는 기실 우리의 경험속에 포함된 기존인식과 사물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한다. 작가가 글을 쓰는것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자신만의 길을 열어가는 작업이면서도 독자와 어우러져 함께 가고싶은 숨은 의도를 담는 작업이기도 하다.    작가는 수필로 표출되는 자신의 정감세계에 독자도 정서적으로 반응하기를 바란다. 하여 독자로 하여금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따라 새로움과 감동과 즐거움과 공감을 맛보게 하려는 의도가 선행된다. 수필을 쓴다는것은 나자신의 세 계를 형상화함으로써 타인의 삶의 통로를 창조하는 수단으로 된다. 그러므로 남의 감정세계를 왈가왈부할수 없는것처럼 한편의 수필을 두고 시비를 걸수 없다. 달리 말한다면 읽을 맛이 나서 그냥 읽으면서 소득이 있다면 그로써 족한것이다.                                        2013년 1월 20일
775    (련시조) 만화경세상 댓글:  조회:4164  추천:0  2016-10-27
                                                    만화경세상                                        1. 놀음엔 긴밤 짧고 일할때면 장장하일                                          제좋은 일이라면 열정 절로 불타거니                                          어쩌면 세상만사가 마음먹기 달렸는가                                        2. 인생은 무한경쟁 승패 또한 병가상사                                          일하면 열심하고 놀고플 때 한껏놀고                                          흑백이 전도되는 때 함구하고 눈만 머룽                                        3. 자기를 안다말고 세상속을 봤다말라                                          사람속 알수 없고 인정세태 불가예측                                          참으로 리해불능은 세상안다 하는이들                                        4. 약자는 눈물씻고 강자는 으시대도                                          무적의 강자없고 복수에 약자없다                                          아서라 물극상반에 길흉화복 륜회한다                                        5. 세상이 번거로워 시시비비 끝이없다                                          흑백이 전도되니 백묘흑묘 보기나름                                          불측의 세상만사에 달관하면 현자여라                                        6. 자전거 올라타면 뒤걸음질 불가하듯                                          인생길 떠났으니 울며불며 허위단심                                          가도록 황산이라도 돌아설줄 이시랴                                        7. 세상이 사악함은 악인탓만 아니여라                                           악행에 수수방관 인간사회 망쳤니라                                           말세라 개탄하느냐 자신부터 다듬으세                                        8. 인간의 최고미는 면사포속 신비로움                                          그것이 예술,과학 싹이트는 옥토로다                                          로출이 요란하실제 심미조차 도망가리                                       9. 평범한 진리라도 바보들은 모르듯이                                         리론이 심오한들 몰리해면 불용이지                                           저보오 사이비학자 혼자 찧고 까불리네                                     10. 바보가 따로있나 같고같은 일을 두고                                         끝없이 중복하며 다른 결과 바라는것                                          비상식 상식이 되니 세상사가 오리무중
774    (련시조) 상대성 댓글:  조회:4090  추천:0  2016-10-27
                                            상대성                      1. 차례로 출생해도 황천길엔 순서없고                            등급제 엄엄해도 저승사자 모르쇠라                                한오리 연기될것을 너무 그리 젠체마오                      2. 인생의 초행길엔 부모님에 순응하고                            배움의 만리길엔 스승님에 부응하고                                사회인 되여진연후 풍조따라 휘둘리네                      3. 타인을 흔상함은 일종의 경지이요                            이웃을 후대함은 일종의 흉금이요                                인애로 관심하는건 일종의 품성이요                      4. 때때로 속히우면 견식이 넓어지고                            모해에 빠져든후 능력이 높아지고                                중상에 상처입고서 사는기술 높아진다                      5. 혹자는 장수하고 혹자는 단명하고                            혹자는 다복하고 혹자는 박복하니                                운명을 뉘가 말릴고 순리대로 살고 볼일                      6. 아이가 컸다만은 성숙함과 별개더라                            성장은 경력이요 성숙함은 경험이라                                백발이 지혜 아니니 나이재새 삼가하소                      7. 모방도 창조라면 본따기도 배움이나                            잰내비 흉내뿐이 맹목으로 답습마라                                덩더쿵 남따라하면 얻는것은 자아상실                      8. 벚꽃이 사쿠라면 다이닛본 国花인가                            제주가 원산진데 섬나라서 벅적대네                                 꽃이야 성역없지만 뜻새김은 각각인가                      9. 옛날엔 어려워서 먹는일에 전전긍긍                            지금은 너무많아 영양과다 비만일세                                제도가 문제였던가 시장경제 덕분인가                     10. 불야성 네거리에 네온등이 경관인데                              별총총 시골의 밤 생각하면 변덕일가                                  두어라 청산이 좋아 꿈길에는 늘 가노라                                                            
773    (련시조) 사노라면 댓글:  조회:4452  추천:0  2016-10-27
                                         사노라면                       1. 우연히 태여나서 필연처럼 산다만은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욕심 가당한가                                 그렇구 그런 세상에 절대경이 없음에랴                       2. 청춘은 과정이요 지속기도 순간이다                             중년은 땀흘리며 결실 위한 분투기요                                 로년엔 총화지을 때 주해가 의미롭네                            3. 어정쩡 살고지면 행복신이 찾아들고                            표나게 살려하면 번거로움 단골되리                                인생이 유희이거늘 어찌 그리 정색하냐                       4. 몰라도 알듯싶어 알고싶지 않을때에                             모르진 아니해도 말하곺지 않을때에                                 말해도 쓸데없을 때 함구무언 제일이라                       5. 달변이 웅변가면 말새단지 일등되고                             침묵이 금이라면 벙어리가 현자되리                                 말하라 뚫린 입이니 바른소리 하며 살자                       6. 많은 일 혼자 알고 속으로만 새겨보라                             변화가 다단함을 말해본들 엇디호리                                 스스로 알고 있으면 함구함이 명철보신                                         7. 쾌락은 더불어도 비애만은 각각이요                             웃음은 함께 해도 고통만은 제몫이라                                 더불어 사는 세상도 제인생은 제가 살기                            8. 드러난 연목썩고 모난돌이 정맞으니                             비리가 거슬려도 비정함에 화가 나도                                못본체 못들은체로 불평불만 삼키거라                       9. 인격을 함양함에 으뜸으론 참을인자                             버금은 간파하고 그다음은 달관하기                                 그리고 욕심 비우고 간소하게 살아가기                      10. 최대로 어려운 일 스스로를 알기여니                              남들이 몰라봐도 개의치를 마옵소서                                  시끌한 인생마당에 유유자적 멋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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