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최성림 기자 피금련= 아름다운 흥개호반, 밀산시내에서 약 20여리 떨어진 곳에 수채화마냥 아름다운 농촌마을이 있다. 민족특색이 다분한 마을입구의 철대문, 시원히 뻗어나간 포장도로와 량켠의 영구성 배수로, 길게 늘어선 사철푸른 가문비나무와 고효태양에너지 가로등, 우아하고 격조높이 일떠선 아빠트단지와 레저광장, 그리고 화기애애한 마을분위기와 주위 타민족들과의 조화로운 관계유지, 말 그대로 인간과 자연, 전통과 현대, 경제와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차원의 도시화 전원형 집중촌, 이 마을이 바로 성급 새 농촌건설 5성급 시범촌이며 2009년 전성 10대 조화촌중 유일한 조선족촌인 밀산시 련주산진 해방촌이다.
2012년, 이 촌의 경제 총 수입은 2500여만원을 돌파했으며 촌 집체자금은 80여만원에 달했고 인구당 순수입은 1만 6500원을 넘겼다. 경제발전 다원화, 기초시설 표준화, 마을정결 도시화, 민주관리 제도화, 촌민문화 다양화의 발전의 길에서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 촌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소문난 시급 '특별빈곤촌'이였다. 해방촌이 상전벽해라는 말처럼 환골탈태해 오늘의 이름난 부유촌으로, 도시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무릉도원'으로 변신하기까지 배후에는 장장 20여년간 고향건설에 몸과 마음을 바친 한 평범한 로당지부서기의 고상한 당성과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그가 바로 해방촌을 '재해방'시킨 유수연 (66세) 촌당지부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이다.
기회를 잡고 주인이 되자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건립되였다고해서 명명한 해방촌은 지난 세기 80년대초에 벌써 각종 빚이 60여만원이나 되였기에 시급 '특별빈곤촌'으로 지목되였고 엄청난 빚더미로 적지 않은 촌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떠났다.
1999년, 당시의 밀산시 련주산향 정부에서는 해방촌의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고저 향에서 다년간 사법조리로 일하던 유수연씨를 해방촌의 당지부서기로 파견했다. 그는 일찍 80년대초부터 10년간이나 고향인 해방촌에서 당지부서기사업을 한적이 있었다. 1999년 그가 재취임할때 마을은 도시진출 및 해외로무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기에 생기를 잃고 나날이 황페해가고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30여만원이라는 빚이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빈곤탈피를 사업의 첫자리에 놓은 그는 해당부문을 찾아다니며 해방촌에서 개간한 땅의 소유권문제부터 명확히 하였다. 그런뒤 600여무의 원경지를 30년간 린근촌들에 장기도급을 주었고 촌기동지면적을 늘여 공공수익을 높였으며 학생래원 고갈로 문을 닫아버린 중소학교도 장기임대 주었다. 일련의 조치를 통해 그는 몇년 안되는 사이에 촌민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빚더미를 깨끗이 청산해 버렸으며 처음으로 10만원이란 류동자금까지 마련하였다.
또한 해당부문을 찾아다니며 거의 무상으로 상수도를 설치해 전 시적으로 제일 먼저 촌민들의 식수문제를 해결했고 대부금을 쟁취해 40여개의 기계 우물을 파 농사의 관개문제를 해결했다.
당의 3농정책과 새 농촌건설의 고조에 발맞춰 그는 '격변의 시기 촌의 출로는 어디에?'라는 문제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정부의 정책을 학습한 다음 시대정신에 맞춰 천방백계로 기회를 포착하고 추진전략과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현실에 립각해 구체적인 발전전망 계획과 항목을 내오고 정부 각 해당부문에 보고서를 신청했으며 정부의 지지와 혜택을 쟁취했다.
새 농촌건설의 첫 걸음으로 그는 촌민들속에서 당원형상을 수립하는데 모를 박았다. 그는 촌민간부대오를 정화하고 개혁하여 청렴하고 능률적이며 자질이 높고 촌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신형의 간부대오를 일떠세웠다. 한편 촌간부들의 사상을 통일시키고 전체 당원과 촌민대표들의 마음을 통일시켰으며 간부대오를 이끌고 경상적으로 가가호호를 순회방문하면서 촌민들의 문제반영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그의 솔선하에 촌민들은 신심을 가지고 마을의 '재해방'--새 농촌건설에 뛰여들었다.
촌당지부서기는 곧 촌지도부의 코기러기이며 한개 촌의 '령혼'이자 '외교관'이다. 더욱 넓은 시야와 사유로 민족특색의 새 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그는 2008년과 2012년 두 차례나 한국에 가서 '새마을 운동'현황과 성과를 직접 체험했으며 리론을 실제와 결부시켰다. 동시에 정부차원의 지지와 지원을 쟁취하기 위해 신발이 다슬도록 상급 관계부문에 찾아다녔다. '우는 아이에게 젖준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이 '불청객'의 성의와 열정에 감동된 진, 시 등 상급당위와 정부의 령도들도 발벗고 도와나섰다. 특히 기초시설건설에서 정부는 재력이 닿는만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근 4년래 그의 노력하에 해방촌은 선후하여 정부의 소수민족발전기금 225 만원을 쟁취하여 촌의 정체적면모를 개변시키는데 돌렸다. 20만원을 투자하여 촌의 주요 출입구에 민속풍정대문을 건설했고 92만원을 투자하여 시멘트포장도로 7.2리를 수건하였으며 60만원을 투자하여 6600여미터의 영구성 배수로를 수건하였다. 25만원을 들여 마을중심거리에 고효태양에너지 가로등 40여점을 가설하였으며 쓰레기장 두곳을 만들었다.
또한 20여만원을 투자하여 350평방미터의 회의실, 오락실, 식당까지 갖춘 다공능 로년협회 활동실을 수건하였으며 마당에 정교로운 정자 2채를 세웠고 각종 운동기재도 구전히 갖추어놓았을 뿐만아니라 표준 문구운동장도 다섯개나 만들어 보다 많은 로인들이 동시에 운동에 참가할수 있게 하였다. 30여만원을 투자해 33호의 아빠트에 입주하지 못한 촌민들에게 실내화장실과 태양에너저 목욕시설을 가설해주었다.그외 36만원을 투자하여 주택단지 부근에 면적이 3000평방미터나 되는 레저광장을 수건하고 고효태양에너지가로등 16점을 더 설치해 촌민들이 도시주민 못지 않은 밝고 다채로운 밤문화생활을 향수할수 있게 하였으며 마을의 록화미화에서 8300연장미터의 식수를 완성했고 1200그루의 가문비나무를 가로수로 옮겼으며 가담가담 야생꽃나무들을 심어 대자연의 정취와 특색을 진하게 했다.
이로써 촌민들의 생활생존환경은 근본상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아울러 경제발전을 위해 든든한 생태기반과 량호한 인문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집중과 규모가 없으면 출로가 없다
기초시설건설을 확대하는 동시에 그는 앞서가는 생각으로 새농촌건설에서 집중과 규모가 없으면 출로가 없다는것을 인식했다. 그는 대담한 산업화사유로 촌경제발전의 주공방향을 창신형농업을 발전시키고 창신형농촌마을을 건립하는데 돌리였다.
창신형농업발전의 중요 도경으로 한면으로 기계화농업의 걸림돌로 되고있는 분산된 토지를 집중하여 전통농업으로부터 현대농업에로의 전변을 준비하는것이며 다른 한면으로 로무수출 산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는것이며 더 나아가서 농업산업화 구조를 합리하게 조절하고 부동한 류형의 산업항목을 발굴, 개발하는것이다.
310여호의 농호에 천여명의 인구를 가진 해방촌의 경작지면적은 6500여무에 달하며 인구당 평균 5.8무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다. 당시 로무수출과 도시진출로 인한 로력이전으로 농토들이 사사로이 임대되거나 무질서하게 양도되였기에 토지집중이 매우 힘들었다. 하여 그는 촌민토지정리를 전개하고 촌민좌담회를 열어 촌의 토지는 밖으로 양도하지 못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정은 촌민들의 념원을 충분히 존중하고 합법적권익을 수호해주는 전제하에서 자주경영이 불가능한 촌민은 촌생산합작사에 토지를 맡겨 집체적으로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련주산촌련합체와 합작하여 규모화농사를 진행하였다. 결정은 한차례의 단순한 토지재조합이 아니라 전통모식에서 탈피한 규모화경영에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조치였으며 농민들이 자기땅에서 근본리익을 보장받는 시스템이였다.
새농촌건설은 많은 농민들이 제2, 제3산업에로 전이할것을 요구했다. 그는 민족혈연우세를 살려 로무수출경제를 돌출히 발전시켰으며 인력수출을 강화했다. 현재 촌민 총수의 60%이상에 달하는 로력을 이전시켰는데 그중 한국, 일본 등 국외에 가있는 사람이 230여명, 국내 각 도시에 나가있는 사람이 300여명이 된다. 명실공히 '로무촌'으로 불리우고 있는 해방촌의 현재 일년 로무수출수입은 2100여만원에 달한다.
농업의 다각화경영에서 그는 민족특색이 있는 새로운 산업을 발전, 장대시겼다. 2011년 전성 소수민족발전기금 부축하에 100만원을 투자하여 조선족 김치공장을 세웠다. 한국기술을 채용한 김치는 맛이 좋아 당지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래년에는 촌에서 규모화한 김치공장을 확대하고 외자유치방식으로 련합경영을 할 타산이다. 동시에 교통이 편리한 우세를 리용하여 '전통음식문화거리'를 건설해 음식업종의 발전을 추진하였을 뿐만아니라 량호한 민족문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이외 1만 2000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에 레저, 낚시, 오락, 거주를 일체화한 민속휴가기지, 여러 가지 김치, 고추장, 찰떡, 순대, 엿 등 특색식품을 만드는 록색식품가공기지, 특색묘목 종류들을 재배하는 록색묘목재배기지, 촌에서 장소를 제공해주고 외자 유치를 발전시키는 록색경제발전기지와 록색식품생태기지 등 항목들도 계획운영중에 있다. 지난해와 금년 촌에서는 이 생태기지에 각각 3만봉지의 검정귀버섯을 로천,온실 시험재배 하였다. 비록 특대우박피해 등 원인으로 아직 수익을 보지 못했지만 촌에서는 래년에 재차 35만원을 투자하여 표준세균방과 재배온실을 수건하고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다.
조선족집중촌문제는 새농촌건설에서 마을의 도시화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분산된 거주는 공공봉사를 제공하는 등 면에서 촌민들의 늘어나는 생활수요를 만족 시키기 어려웠으며 게다가 많은 로동력의 이전으로 촌 인구밀도가 하락되고 무단 방치되고 있는 빈집현상이 해마다 늘어나 심각한 환경문제로 대두되였다. 그는 촌민들의 거주환경을 개선하고 주택에너지를 절약하여 토지를 절약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방안중에 최선책은 거주지에 대한 집중이라는것을 느꼈다.
반복적인 연구토론을 거쳐 촌지도부에서는 현유의 자원과 촌민들의 집자를 리용하여 촌의 거주환경을 철저히 개변시킬것을 결정하였다. 3년간 노력을 거쳐 마을중심에는 건축면적이 8600평방미터 되는 8동의 주택단지가 일떠섰으며 이미 130여호 농호 들이 새 아빠트에 입주하여 '도시생활'을 누리고 있다. 별장을 방불케 하는 화원식 아파트였지만 가격은 현성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또 조선족농가의 특점에 따라 김치움도 만들어주고 세대당 한푼의 남새재배지도 나눠주었다. 아름다운 도시접근형 전원주택은 각박한 도시생활에 지친 시민들의 '이주'도 불러왔다.하지만 이 아파트의 '총설계사'인 그 자신은 아직도 단층집에서 살고 있다.
해방촌은 이미 성급 도시화 시범촌과 새농촌건설 5성급 표준촌으로 확정되였다.
다같이 잘 사는 문명촌 건설
촌 집체경제가 장대해지고 촌민들의 생활조건이 크게 제고되자 그는 촌의 정신문명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성급문명촌 건설활동을 힘있게 추진해 나갔다.
유수연지부서기를 조장으로, 촌 두개 위원회 성원 및 각 촌민소조장을 성원으로 령도소조를 내오고 엄격한 책임제도와 심사제도, 평가제도 등 각항 규장제도를 규범화하였으며 촌간부들의 일상행위가 촌민들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큰일은 촌민들이 결정하고 중대한 일은 촌민의견을 접수한 다음 지도부에서 집체결정을 했으며 매 계도마다 사업총결회의를 열고 당무, 촌무, 재무를 공개했다. 조해위원회, 치안보위위원회, 공공위생위원회를 성립하고 촌지도부를 핵심으로, 촌민위원회를 의거로 기타 각 위원회에서 협조하는 촌급조직체계를 형성하여 전반 사업의 전개에 강유력한 조직보장을 제공해 주었다.
동시에 촌민들의 소질제고에 힘써 새농촌건설에 믿음직한 인적보장이 안받침되도록 하였다. 사상도덕건설, 민주법제건설을 틀어쥐는 한편 자금을 아끼지 않고 면적이 8600평방메터에 달하는 민속문화광장, 민속문화주랑, 민속문화전람관을 건설했으며 도서실, 과학문화활동실, 레저광장을 건립하여 대중성문화활동에 환경과 공간을 마련 해주었다.'십성급문명호','문명가정','위생가정' 등 문명가정 평선표창활동을 조직하여 90%이상이 문명호에 도달하게 하였으며 경로효친 사상풍조를 조성해 전국 로령사업위원회로부터 '전국경로모범'영예를 수여받았다.
살기좋은 평안촌건설을 위해 촌의 주요 출입구에 감시카메라를 가설하였으며 80여명 로인협회 '할아버지'들이 마을의 의무청소공, 의무치안원으로 나섰다. 건강한 장수촌 건설을 위해 전체 촌민들이 100% 신형농촌합작의료보험에 참가하였으며 기본적인 공공위생혜택을 향수하고 있다. 다 같이 잘사는 복리촌건설을 위해 저소득소외계층에 대한 복리향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약소군체의 생산생활에 기본보장을 제공해주었다. 조화로운 민속촌건설을 위해 이웃촌민들과의 단결우애, 호조호혜의 량호한 분위기를 형성하였으며 민족단결을 촌사업의 중요한 대사로 삼았다.
오늘의 해방촌은 민족특색의 새 농촌건설에서 과학발전, 조화발전, 지속발전을 지침으로 기초생활 확충, 촌민소득 확충 및 농촌의 다원적기능 확충 등 면에서 '해방'에 '해방'을 거듭하며 '민족특색 새농촌', '산업발전 새농촌', '관광유람 새농촌', '생태환경 새농촌'으로 되여 살고싶고 찾고싶은 '계서지구 소수민족 제1촌'으로 부상했다. 새농촌건설에서의 계단성적인 성과는 '거지가 되여도 돌아오지 않는다”'며 떠났던 촌민들의 귀향을 불러오고 있다.
밀산시 10대충복, 밀산 인민대표, 계서시 로력모범, 당대표, 후대양성선진 등 수두룩한 영예가 백발이 성성한 66세 고령의 로지부서기에게 수여한 사회의 인정이라면 "우리가 거둔 성과는 전체 촌지도부와 촌민 그리고 상급령도들의 공동한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는 로당지부서기의 한마디는 겸손을 넘어선 한 공산당원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인간적매력이아닐수 없다.
장장 20여년간 오로지 가난에 절은 고향을 변신시키려는 일념으로 자기 한몸 던지며 춘하추동 휴식일 따로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유수연로당지부서기, 장시간의 과로와 심신의 압력으로 70고개를 바라보는 이 '할아버지 촌장'의 머리는 어느덧 새하얗게 물들었으며 온몸에는 병밖에 안남았다. 하지만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며 그는 오늘도 고향건설의 앞장에서 황혼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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