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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5월, 주은래총리는 박규찬을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그의 령도재능에 대한 충분한 긍정이고 금후 대학사업에서 더욱 큰 공헌을 할것을 바라는 신임과 기대였다. 박규찬은 연변대학의 교학사업과 연구사업에 모든 심혈을 기울인 교육자였다.
박규찬은 조선민족대학교육과 중국소수민족대학교육의 원로급 교육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박규찬의 교육리념은 중국 민족대학교육의 연구와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연변대학 전임교장 박문일은 《조선족 저명한 교육가 박규찬을 회억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박규찬교장의 교육리념을 아래와 같은 5가지로 개괄했다.
첫째, 당의 교육방침과 민족정책을 지도사상으로 한다.
둘째, 인재배양에서 학생의 혁신정신을 배양하는것을 대학교육의 주요한 임무로 한다.
셋째, 대학교육의 개방성을 대학운영의 주요한 경로로 한다.
넷째, 지방건설에 이바지한다.
다섯째, 민족성을 대학운영에서의 주선으로 한다.
박문일교장은 민족성을 주선으로 하는 박규찬교장의 연변대학 운영리념을 강조하면서 그 공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박규찬교장의 교육리념은 연변대학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조선족 교육문화사업에 아주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연변대학을 중국에서 조선어와 조선력사연구의 중심으로 부상시켰고 조선족의 기초교육을 발전시켜 조선족인민의 평균문화수준을 제고하는데 직접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족정풍운동에서 학교의 민족성은 한차례 큰 타격을 당했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박규찬교장은 투쟁을 받았고 그의 민족성을 주선으로 하는 교육리념은 반동적인것으로 몰렸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연변대학의 모든 문제와 죄행의 근본뿌리를 민족으로 간주하고 발광적으로 민족대학을 때려부셨다. 연변대학의 지도권을 틀어쥔 로동자선전대는 민족대학으로서의 교수사업의 민족특점, 민족간부배치, 학생수에서의 민족비례 등을 반동적 민족주의로 싸잡아 비판한 동시에 민족대학의 민족성을 철저히 개변시키기 위하여 구체적 개조조치를 취했다.
농촌에 내려보내라는 지시가 하달된 기회를 리용하여 조선족교원들을 대량 농촌으로 보내는 한편 농촌에 내려간 다른 대학의 한족교원들을 데려다가 그 자리를 메웠다. 조선족과 한족학생의 민족비례도 과거의 8:2로부터 3:7로 거꾸로 되였다. 료녕성과 흑룡강성 지역의 조선족학생모집을 취소하고 조선언어문학학부에서도 한족과 기타 민족의 학생을 모집하도록 했다. 교수용어도 한어로 하였고 민족대학의 특색을 체현하는 과목은 반동적인 민족주의, 민족분렬로 규정하고 민족학교를 보통학교로 전변시켰다.
마치 발을 깍아서 신발에 맞추고 머리체통을 줄여서 모자에 맞추는 격이였다. 원래 연변대학의 령혼은 중화민족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조선족의 력사와 전통문화 교육을 골격으로 이루어진것이였다. 그것은 중화민족 령혼의 불가분리의 일부분이며 중화민족령혼의 불가분리의 일부분이였다.
1980년 연변대학 개학식에서 연설하는 박규찬교장
1978년 3월31일, 박규찬은 상급부문으로부터 연변대학 교장으로 임명되여 학교의 행정을 총관하게 되였다.
《4인무리》가 타도된후 박규찬교장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민족대학의 속성과 임무를 하루빨리 회복하는것이였다. 이는 학교 모든 사업의 출발점이였다. 박규찬 교장은 학교당위서기 리희일과 상의하고 각종 경로를 통해 연변주, 길림성, 교육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문제를 반영하고 지지를 요구하였다.
1979년 11월9일, 박규찬교장이 교육부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보낸 연변대학의 속성, 임무, 규모 등 규정에 대한 청시보고에는 연변대학은 조선족을 위주로 하고 문, 리, 공 등 관계학과를 가진 종합성민족대학이라고 명확히 천명하였는데 연변대학의 속성임무도 얼마안돼 원상회복되였다.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가 다시 학생모집범위로 확정되고 조선족과 한족학생의 민족비례도 3:7에서 7:3으로 다시 회복되였다. 이와 함께 민족대학 특색을 반영하는 학과목들도 다시 설치되였다.
《문화대혁명》후 5년도 안되는 교장임기내에 박규찬교장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상처를 아물리고 민족대학의 원형을 되살렸으며 새로운 시기 연변대학의 발전방향과 기본모식을 구축하였을뿐만아니라 튼튼한 학교운영기지를 창조하여 연변대학의 번영과 발전에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1982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부주임이 연변대학시찰시 영접하는 박규찬교장(오른쪽 세번째)
《문화대혁명》 10년동안에 받은 정신적 및 육체적인 박해로 하여 신체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박규찬교장은 암병으로 몸져누웠지만 조선족교육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놓지 않았다. 《연변조선족교육사》와 《중국조선족교육사》편찬사업이 끝나는 동시에 박규찬교장은 또 《중국조선족교육사료집》 편찬을 발기하였다. 박규찬교장은 권녕하, 한진옥, 천홍범, 강영덕, 허창선 등 교육자들과 편찬위원회를 결성하고 암투병중에도 20여일 동안이나 동북3성 각지와 내몽골, 북경 등지를 순방했다.
박규찬교장은 림종을 앞두고도 사료집편찬을 꼭 완수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에《중국조선족교육사료집》은 박규찬교장의 유언대로 원만히 편찬을 마쳤고 출판되여 세상빛을 보게 되였다.
1994년 1월28일, 조선민족의 걸출한 교육가이며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기여를 평생 아끼지않은 연변대학 제2임 박규찬교장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박규찬 략력
1918년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출생
1941년 위만주국 신경법정대학 졸업,룡정동흥중학교 룡정인민학원에서 교편, 일제패망후 룡정련합중학교 교도주임,교장력임.
1949년부터 연변대학 비서처 처장, 교육처 처장, 교무장,부교장력임.
1978년~1982년 연변대학 교장 력임.
1987년 리직휴양.
1994년 1월 28일 별세.
참고문헌:
《연변대학산책》 류연산 저 민족출판사 2009.10
《연변대학교사》연변대학출판사 2004.8
《历史的记忆》연변대학출판사 2004.8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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