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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의 폭파
ㅡ汉子 유만수
1945년7월24일 밤 9시지나 패망에 다 달은 일제의 잔인적인 수탈과 가혹한 탄압이 극에 달하며 그에 재조선친일파 거두박춘금을 위수로 하는 자들이 모여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이른바 "아세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리던 서울의 중심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당)에서 요란한 폭발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폭발로 1명이 폭사하고 여러 명이 상하였다.
이 소리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천하에 알리고 조선민족독립항일투쟁사에 빛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 빛나는 의거를 거행한 주인공들은 한국경기도안성시 출신인 유만수(柳万秀,1923-1975)선생이 조직하고 임시의장으로 활동한 대한애국청년단성원 조문기, 강윤기선생 3사람이 시행한 것이다.
유만수선생은 1923년안성시금광면개산리 유원이(柳远移)선생의 4남1여중 3남으로 태 여나 안성소학교(현재안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한영중학교를 다녔다.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교장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면서 공부했다. 교장의 심부름을 중 교장선생으로부터 조선독립의 필연성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독립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신장이 180cm 장신인 유만수선생은 독립운동하기 위해 유도도 배웠고 만주로 가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21세인 4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에 들어가 조선인노동자들을 멸시하는 책자를 발행하며 민족차별을 자행하는 회사에 맞서 1000여명 조선인노동자들이 참여한 3일간의 파업농성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회사에서 강제수용생활을 하던 중 탈출해 나와 일본내의 조선인노동자 단체들에서 활동하며 강제로 징용 온 조선인들을 빼내서 고향에 보내주는 일을 하다 본격적으로 동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1945년3월 유만수선생은 일본에서 함께 활동했던 조문기,강윤국,권주,우동학,박호영등과 함께 서울관수동 자신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하고 임시의장으로 되였으며 친일파거두들을 처단하고 중국으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러던 중 친일파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여 많은 조선남아들을 모집해 전방에 내보 내여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세아민족의 전쟁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를 무산시켜 많은 조선남아들이 일본침략자들의 대포 밥으로 되여 회생되는 것을 막고 친일파들을 처단하기로 거사를 계획했다.
폭탄을 만들기 위해 유만수선생은 당시 수색에 있던 변전소 이전 작업공사장에 잠입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 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 내여 그것을 일본운동화 밑창 속에 이겨 넣어 매일 조금씩 빼돌렸다.
손재주 좋은 유만수선생은 빼돌린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폭탄을 만들고 실오리만큼 심지를 만들어 실험도 했다.
거사일인 7월24일 밤,유만수선생과 조문기,강윤국선생은 행사장에 무사히 들어갔다.
당시부민관에서는 조선총독, 조선 군 사령관, 왕자오밍(汪兆銘])의 괴뢰중국 대표 정위안간(丁元幹), 만주 국 대표 탕춘톈(唐春田),일본대표다카야마,도라오(高山虎雄) 등이 연사로 참가해 미국·영국을 규탄하는 일종의 선전 극을 벌이였고 9시 무렵 박춘금이 단상에 오를 차례가 되자, 유만수와 조문기 등은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인 뒤 계단 옆과 복도, 화장실에 장치해 놓고 안전하게 빠져 나왔다.
정절을 향해 치닫던 친일파들의 충성서약 행사장은 천둥 벼락같은 폭발이 연이어 터지는 속에 아수라장으로 되여 파산 되였다.
이 거사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는지 일제는 발표하지 않았다. 일제 총독부는 주모자를 잡기 위해 당시 쌀 한 섬에 100엔이었던 시절 5만 엔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친일파 박춘금은 별도로 2만 엔의 현상금 더 걸었으나 끝내 거사를 실행한 독립투사들은 잡지 못했다.
부 민관의거는 광복 후 1945년11월 당시 자유신문의 보도로 그제야 세상에 알려졌다.
<내세우고 이름을 얻자고 한일 아니다.> 광복 후에도 유만수 선생은 거사를 입밖에 내지 않고 독립유공자 신청도 하지 않았으며 이승만,박 정회정권하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동아 일보 1964년 기사에 의하면 유만수선생은 손재주로 판자촌이었던 이문동에 작은 철공소를 경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고 강윤국선생은 행상으로 ,조문기선생은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했다.*조문기선생은 후에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부민관의거를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ㅡ20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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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 为什么,在<백옹>先生的别的文章上写留言写不上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