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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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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위안부>와 조선(조선,한국,중국조선족)민족남자 댓글:  조회:1882  추천:41  2014-07-31
와 조선(조선,한국,중국조선족)민족남자   최근 언론에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이다. 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조선민족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조선민족사내들을 말한다. 나도 조선사내지만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과 조선민족에게만 가 있고, 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중국조선족들이 사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슬쩍 살펴보면 왜(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고 본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왜(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민족에게 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2013년12월16일                 ㅡ한국경기도안성에서 ㅡ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8월3일저녁 한국야당인민주당및유지인사들이 서울중심인청계광장에서 현정권질책 시민초불집회를 가졌다. 무더위로 숨막히는 속에서도 3만여명 시민, 유명인사(일부 새누리당일원까지 참여)가 참여 하였다.(낡은 핸드폰으로 찍어 사진화질이 좋지 않다)
7    자식기르기 ?! 댓글:  조회:3073  추천:23  2012-04-27
  자식기르기 ?!   전날 저녁 10시경에 처형이 안해핸드폰으로 전화왔다. 근 반시간의 이야기 주 거리는 30살 된 아들이 몇해사귄 처녀가 있는데 집 사주지 않으면 결혼안한단다. 그래 남편이 한국에서 얼마 번 돈으로 首付하고 아파트한채를 샀는데 아직 완공 못되여 결혼도 못하고 있다며 자식도 쓸떼없으니 네남편 잘 섬기고 따뜻이 대해 주라며 장관설 늘여 놓는다. 우리가 결혼하여 근 30년, 주동적으로 편지、전화한적 없고 혹 우리가 전화하여도 무뚝뚝이 몇마디 안짝에 통화끊어 버리던 처형으로 부터 처음있는 일이다. 이늦은 밤에 장거리전화로 긴 시간 얘기하는걸 보면 외동아들로 곱게 키운자식한테서  크게 상처 받은것 갔다. 잠자리에 든 우리는 잠 못들고 처형의 얘기로부터 말거리를 찾아 이야길 펼쳤다. 연변화룡에 있는 나 친구의 아들도 학교를 나와서 광주에서 근무하는데 6년사귀 처녀가 32살된 총각집에서 결혼하려 해도 집 사주기전에는 결혼안한다 하여 친구는 집에 조금있던 돈에 12만원 꿔서 집사서  작년가을에 겨우 결혼하였다. 친구는 집사서 아들결혼해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십몇만 돈 꿨어 집 사 아들결혼시키고 이제 늟으니 축에 들어선 자기네가 자식에게 빚을 넘겨주지 말아야 햐겠는데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와중에 올설 연변텔레비존방송국음력설문예야회프로에서 본 리동훈、오선옥등이 출영한 소품가 화제로 오르며 자식들을 장가시집보내기 위하여 많은 우리민족부부들이 한국등 낯설고 땅설은 외국으로 돈벌이가서 가증 고생에 病、伤、死하며 가족이 흐트러 지고 친인들이 갈라져 서로 그림움의 격통을 겪는 화제로 얘기를 이었다. 그러면서 왜 지금의 부모들은 신심의 고통을 겪으면서 돈벌어 자식들 집사주고 시집,장가보내는것을 자연스런 의무로 생각하고 집에서 강아지나 기르면서 지내는 자식들은 부모들이 그러기를 웅당 받아야 할 일로 인정하는지에 화제 모를 두엇다. 올 설을 이틀 앞두고 우연한 사고로 나는 병원에 2틀 주원 하였었다. 한 호실에 4환자가 들었는데 두사람은 퇴직한 분들로 보양치료고  다른 한 침대에는 50세에 가까운 부부가 열이 올라 링게를 맞고 있는 아들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찌나 부모들을 닥달하는지 머리에 쓰개낄 정도었다. 침대를 올려달라 내려라  물 마이겠다. 뜨겁다, 차다. 조금있다 화장실에 가겠다. 다리  떨려 걸지 못 하겠다. 침대에서 보겠다 등불빛이 강하다. 등불꺼라, 안된다, 카텐막 쳐라 …… 아주 부모들을 똥줄 사게 굴었다. 얼마후 엄마는 그 꼴 사나워 돌아갔고 아버지가 혼자 남아 그시중을 보았다. 덩지 큰 아들은 약소한 아바지를 장밤 앉을새도 없이 굴었고 아버지는 별로 군소리없이 받아 주었으며 그렇게 날을 새였고 아이는 링게를 다 맞았다. 그 아버지는 지친몸으로 이이를 부축하며 집으로 갔다. 그들이 가자 맞은켠 두 침대 사람들이 그두 아들, 아버지를 놓고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얘기중에 전에 중앙외교부에 근무했다는 분의 안로인이 한 이야기가 많히 귀를 파고들었다. 자기네 이웃에 몸에 당뇨병,  肾쇄약 고혛압등 여러가지 질병으로 앓는 한 친구가 있었다. 병원에 다녀봤는데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자 후로는 병원엘 덜 다니고 약 적게 먹으며 부부간은 항상 아침은 박에 나가 早点을 사먹고는 한시간거리의 공공버스타고 香山에 가 등산하고 내려와서는 동우들같이 정심을  植物园  부근에 있는 조용한 음식점에서AA制로 매인당 15원좌우의 소비로 여렷이서 재미있게 예기 나누며 식사한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부부가 함께 시장가 채소사서 저녁해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몇해 견지하며 등산하고 쾌활하게 지냈언지 몸의 병들은 없어지고 신체는 튼튼하다고 한다.  부부의 월급을  합치면 6천원되는데 일부는 고정금으로 저촉하고 그외 많은 부분은 자신들이 만년의 생활을 충족히 하는데 쓰고 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집사고 아이를 학교보내는데 돈이 딸려 엄마보고 도와달라고 하니 로친은; 우리가 너를 이만큼 키워줬으면 됐다. 우리들이 너를 기르느라고 고생많히 하고 몸에 병도 났는데 인제 얼마남지 않은 늙으막 생을 우리마음대로 기꺼이 살려 하는데 안되겠느냐. 보아라. 우리가 가쁜이 사니 몸의 병도 없어지지 않았니? 우리가 병투성이로 맨날 침상에 누웠있으면 너의 생활은 어떻겠니? 엉만진창이 되지않겠니? ! 우리가 이만큼 너를 자래웠으니 네 생활은 네 절로 장악하여 하는게 좋지 않겠니, 라고 권고 하였다. 딸은 처음은 엄마를 너무하다며 아니 꼽게 생각하였지만 후에 곰공히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자기절로 절제있게  돈을 쓰면서 생활을 조리있게 하여 아이도 대학에 보내고 집도 샀다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가 어떻게 세상을 살며 생활 하는가를 잘 가르쳐주었기에 자신들이 오늘같이 떳떳이 사회에 자립하여 살수있게 되였다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해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에; 제 자식키워바야 부모마음 안다는 말이 있다. 말 못하는 동물들도 새끼가 성장하면 절로 살라고 가족무리서 내 쫓는다. 그런데 고급동물로써의 인류가 더 유연하게 자식을 감싸는 것이 총명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 서양인들은 자식이 만 18세만 되면 자립하게 하고 한집에서 생활해도 생활비를 바치게 한다고 한다. 날로 새로새로 변해가는 고속발전의 현대사회에 우리의 생활리념도 그에 발맞춰어 따라 가아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부모들마음이야 다 제자식 남부렵지 않게 호강스레 키우려 하지. 그런데 이렇게 자식키우면 틀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두 두자식 키웠는데 옳게 키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는 키우지 않았다. 젊은시절에 보았던  일본영화 가 머리에 떠오른다. 진실로 엮은 이야기 인데 5,6살에 의외사고로 두팔을 잃은 외동딸이 건실하게 자라 앞으로 부모들이 없는 세상에서라도 자기절로 자립생활을 할수있게 하기 위하여 얌순한 어머니는 독실한 어머니로 변하여 나어리고 페약한 딸의 눈물어린 애원과도움을  묵과하고 잔인하다 할 만큼 딸을 풍랑이 많은 생활자립의 터전에로 내 몬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못된 엄마, 독한 엄마라고 울붓짓던 딸도 결국에는 엄마의 내심깊은 마음을 읽고 악착하게 곤난을 막받아나가며 잔페된 몸의 불편과 생활의 종종 난관을 극복하고 성장하여 생활을 자립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발로 글쓰는 훌륭한 서예가로 성공인들의 무대에 떳떳이 멋있게 데뷰한다. 연연한 녀인들이 이러함에 대장부라고 웨치는 현대 젊은이들 ,그런 자식 키우기를 달갑게 받아 들이는 지금 부모들 …… 옛전부터 남자를 사내라고 하고 꼴꼴한 남자를 사내대장부라 한다. 그러면 현재 부모들께 의탁하여 결혼, 성가하려는 자시들과 그런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행세는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 !  
6    재 북경조선족로인단체생활 현황 댓글:  조회:4086  추천:20  2011-12-12
         재북경 조선족로인단체생활 현황 사회와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향상되고 수명도 길어지면서 로인수도 급증하고 있다. 하여 로인문제는 세계적으로 홀시 할수 없는 문제로 대두하고 우리 민족사회에서도 회피할수 없는 화제로 되였다. 지금 로인들은 퇴직하여서도 건강하며 퇴직하면 손군들보고 집 지키던 이전 로인들의 생활개념을 벗어나서 만년생활을 건강하고 유쾌하며 뜻있게 보내려는 한단계 향상된 로년생활 취향을 보이고 있다.   지금 로인들이 인생의 짧지 않은 만년생활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유쾌하면서도 뜻있게 보낼수 있겠는가? 여기에 지금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북경조선족로인들이 종은 시범을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수도북경)이러저런 좋지 않은 면도 보여주고 있다.                             ㄱ)  거주현황; 지금 북경에는 한국인,조선족집거구인 조양구望京을 중심으로 1000여명(불완정한 추산)조선족로인들이 산재하여 살고 있다. 그중 90%이상은 타지에서 들어온 분들이다.   1) 원 북경에 거주하는 조선족로인들 산재; 원 북경시에 거주(북경호적)하는 조선족들이 출근단위의 분포에 따라 산재함. 주로 화평리(민족사무위원회 산하계통), 중관촌(과학원,민족학원), 그리고 방송국,항천부등부문에 다니는 조선족들도 같지않은 지역에 분포하여 거주함.(이부분 로인들은 건국초기부터 나라와조직의 수요에 의하여 수도 북경에 들어와 중요한 부문에서 공작하던 우리민족의 우수한 분들로서 나라와 우리민족의 정화이다.) 2) 개혁개방후 특히 중,한수교후 근년래 북경에 한국인,조선족들 입주가 급증하며 북경한국인,조선족 중심 집거구인 왕징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약 8,9만명(불완정한 추산)조선족이 살고 있고 亚运村,安家楼,潘家园,화평리, 해정구의 오도구,중광촌, 순이,통현(일부 조선족들이 집사서 거주함)에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널려 살고 있다. 이리하여 재북경조선족로인들도 북경시 시교를 포함하여 산재하여 생활하고 있다.(이부분 로인들이 북경조선족로인수 절반이상을 차지 함) 북경조선족로인들의 분류; 1, 1) 중앙,정부기관이나 학원,연구단체,군및북경내 기업에 출근하다 정년퇴직한 분들. 2) 동북3성이나 전국각지에서 퇴직한 후 베이징에 오고 개혁개방이후 베이징에 진출하여 사업하다가 여기에 남음 분들. 3) 자식들이 북경에서 사업하거나, 근무하니깐 자식 따라 북경에 들어와 손군들을 보살피고 자식들 생활 뒤바라질하며 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분들.  4) 고향에서 일자리 없고 돈 나올 데도 없어 일상 생활유지와 더 늙을 막 운신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북경에 돈 벌려 들어온 도시나 농촌의 빈곤층 로인들 2,로인회;  로년의 고독과 도시생활의 단적함에서 헤여 나와 재미있고 유      쾌한 단체조직활동참여 속에서 삶의 쾌락을 향수하고 신심의 건강을 찾으며 동년배들과의 모임속에서 인생만년의 쓸쓸함을 달랜다. 함께 잊혀지지 않는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정든 고향 그리고, 아작거렷던 동년시절을 회억한다. 고와웃음속에 보내온 지난날들을 나누며 작은 가정울타리 속에서 느낄수 없었던 감미로움을 감수한다. 또 그속에서 인생황혼의 허전함을 잊고 마음의 기탁을 찾기도 한다.       로인조직에 다니는 로인들중70%이상은 녀성분들이다.      *알게 모르게 회미해져가는 민족문화 전파에 영향 준다.   3,교회; 교회에 다니는 로인들 대부분은 근로자계층이나 농촌에서 온 로인들,   4,자유인;(1) 자기식대로 자유자재로 만년을 보내는 분들          (2)생활환경이 따라서지 못한 가정로인, 집에서 손군들 보고, 또 생활이 곤난하여 로인조직에 다닐 비용이 딸려 못 다니는 로인들. 5,취직자; 생활보탬과 앞으로 더 늙으막의 운신 못할 때 준비저축을 위하여 품팔이 하며 허줄한 땅집이나 지하에서 생활하며 사는 분들, ㄴ)   재북경조선족로인조직;(순서는 필자의 취재순에 따라 라렬 하였음)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 성립; 2001년 11월 3일 회장; 초기; 김두남(녀)  년령; 68세,  학력; 중전  전단위;항천부기관근무 (*2008년10월26일  별세) 현재;김상규, 원 료녕인민예술학교 교장, 성립초기 회원수; 첫모임. 14명  두번째 모임, 30명 성황기 회원수; 근 200명 현재; 66명 남; 18명   녀; 48명 년세 많은 분; 83세   년세 작은 분; 54세 형식; 주 합창, 겸,노래, 표연창,무용등  회비; 없음 인원; 정부부문,국가최첨단 과학분류,연구단체,군에서 책임자, 전무가로 있었던 분으로부터 도시 근로자 계층,농촌촌민 활동장소; 고정장소가 없음, 처음엔 아파트단지,공원,식당등에서 모임하고  09년초까지 南3环方庄곁에 있는 福惠居烤鸭店 한족음식점(장사 잘 안됨)에서 매주 토요일 마다 모여 정심 밥 한끼 사먹는 조건으로 장소를 빌러 모임 가지고 큰 모임은 민족출판사 3층 회의실에서 하였음, 현재 화평리교통단지 활동실 사용 활동; 매주 토요일마다 한번 모임 북경 조선족로인 동락회 성립; 2006년 9월29일     첫임회장;, 리수자(녀) 년세; 65세(현 명예회장)      두번째회장; 지광훈  년세; 68세     현재회장;김금택 성립초기 회원수; 38명     현재; 62명 남; 10명   녀; 52명 년세많은 분; 73세    년세작은 분; 53세 인원;; 정부나 국영기업에서 령도로 있던 분으로부터 농촌에서 온 분도 있음   *교회에 다니는 분도 있음 형식; 종합성적 단체, 노래,무용,장구등, 앞으로 복장모델팀 조직 장소; 장소 없어 아파트지하, 단지광장, 공원, 식당등에서 활동하다 구성호텔최성철사장의 성원으로 조양구京顺路东辛店부근에 위치한 구성호텔2층 회의실사용, 현재 남호중원 1구 단지활동실사용 활동;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두번 회비;50원/년 *한달 생일인 회원들은 협회에서 집중하여 하루에 회원전체가 모여 생일 축하 하여준다. 북경조선족양광(阳光)로인협회; 성립; 2004년 9월 회장; 정수덕(郑寿得) 년세; 75세 학력; 할얼빈상업학원  전단위; 방직공장 주관회계, 공장장 담임 초기회원; 15명        현재; 35명 남; 8명                녀 ; 27명 년세많은 분; 79세    년세작은 분; 60세 인원; 대부분 동북에서 온 도시 출근 족. 장소; 88,고향집, 등식당 4곳을 전전하다. 현재 회원가족의 성원이 경영하 는 왕징湖光中街에 위치한 워커힐호텔 2층에 자리 잡았음.(장기적인 못됨) 회비; 매인당 50원/년 북경왕징조선족로인회 성립; 2006년 10월(05년에 성립된 악대의 기초상에서 로인회성립) 회장; 백봉석  년령; 62세  고향; 료녕성반진시,  초기인원; 10명       현재; 42명 남;  7명    녀;  35명  년세 많은 분; 73세    년세 작은 분; 50세 인원; 대부분 동북농촌에서 북경에 들어 온 로인들 장소; 왕징서원 3구 307동 지하 (백봉석회장동생 자영 발 맛사지 임대 방) *활동 종목; 노래, 무용, 건강지식학습  활동; 매주 토요일마다. 한번 모임. 회비;매인 50원/년  *왕징로인회는 대부분 문화층이 낮은 분들이어서 음악, 무용 방면의 선생이 없다. 그러나 선생님을 별도로 찾지 않고 이 방면에 장끼 있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맡아 가지고 회원들에게 배워주고 배우며 화목하게 보낸다. 장애인이나 무식자라도 협회에 참가 할수 있고 회원들과함께 공동히 학습하고 유쾌히 만년을 보낼수 있다. *회원생일은 회원전체가 부담없이 부조를 안 갖고 본인집 연회에 참가하여 축하함 북경시 순의구馨港庄园조선족로인협회(순의구로령위령도를 받는다) 성립; 2005년 3월 8일(원 순의구 조선족로인독보조, *문구 위주) 회장; 안봉식   년령; 68세   전단위; 흑룡강성목단강시 동녕현진정부근무 초기회원; 17명       현재회원; 25명 남;   13명           녀; 12명 년세 많은 분; 76세   년세 작은 분; 57세 인원; 전국각지에서 북경순의에 와 사업하거나 자식따라 온 분들          회비; 매인 100원/년 장소; 馨港장원단지내 약 30평되는 무료사용활동장소와 장기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자체의 문구장(자체로 건설한 것임) 있음 *순위구로령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북경조선족저녁노을무용단 성립; 2000년12월 회장; 제1임; 문명, 년령; 73세 제2임; 김청 현재회장; 리청  년령; 68세  학령; 중앙민족학원중문부  전단위; 중공중앙대외련락부 아세아주 2국 초기인원; 60명  현재; 70 여명  평상; 40 여명 활동에 참가 북경시호구회원과외지인(농촌인포함)평균절반 *여성위주, 특별공연시 남성로인 초청 년세 많은 분; 83세 년세; 작은분; 55세 평균년령; 65세 장소;중관촌단지(中关村社区)복무중심활동실; 년 사용비; 2000원 활동; 매주 목요일마다 한번 회비;  200원/년 북경중관촌조선족로인무용대 성립; 2001년 봄 초기대장; 김선녀  년세; 68세   2임대장; 리정회   년세; 66세 현재대장; 장인수(녀)  년세; 62세   학력;고중 고향; 흑룡강오상시 년세많은 분;75세         년세작은분;56세 초기대원; 17명    현재대원; 24명 북경호적; 4명   남성분 없음; 장소; 중관촌단지(中关村社区)복무중심 3층 활동실, 년 사용비용 2천원 회비; 매인 200원/년 북경화평리진달래조선족로인무용대 성립; 2001년8월, 2006년 3월 정식으로 북경화평리진달래조선족로인무용대로 개명 회장;윤영자 년세; 69세 학력;대전,장춘광학정밀기계학원 전단위;중국기량과학연구원 초기회원; 8명  현재; 19명   남; 7명    녀; 12명 년세높은분; 74세  년세작은분; 54세 먼곳에서 활동에 다니는 분; 하북성 연교燕郊, 천진시 장소; 화평가원단지和平家园社区(무료)와 交通社区(년사용비 1천2백원)에 활동장소 두곳 회비;10원/월 교통단지장소 사용시 경비 활동;매주 두번. 북경조선족로인아침노을 무용대; 대장; 황명월  년세; 67세 학력; 대전  전단위;북경중의학대학회계  초기회원; 선생님을 청하여 부채춤 배울 때는 약30 명, 그중 소분대로 성립할때는 15명 좌우, 현재회원 16명  *주 녀성위주 남; 고정적인 분 없고 연출종목 필요시(사무놀이 같을 때)초청참가 년세많은분; 67세       작은분; 54세   인원; 북경호적 소수   외지인; 다수 무용선생; 중앙민족가무단의 허명월선생, 동방가무단의 박인자선생 회비; 매인 200원/년 장소; 없음, 처음은北沙滩농업기계과학연구소의 낡은 땅집에서 활동하다 회수.  현재 장소없어 활동 정지상태 북경왕징조선족아리랑예술단 2006년9월 회장; 허명애 년령; 66세  학령; 조선함흥공업대학고분자계 전단위; 감숙성전수시田水市风洞연구소 초기회원;12명  현재; 12명 조선족로인들의 자즌 류동성으로 정규적인 인원 확보 곤난 년세많은분; 66세  작은 분; 54세 일상 녀성분만 참여, 특별공연시 남성로인들 초청하여 참가 함 회비; 일체비용 회장부담 활동; 매주 2번 휘황했던 시기; 2007년 중국총공회연출 경연시 물동이 춤으로 1등상 수상 장소; 없음. 전에 식당을 사용하였음. 북경시 로년활동센터(위치왕징)로 몇번 찾아갔다 거절당했음,현재 림시 회장개인 주택에서 활동함 북경望京花园3区老年门球协会조선족로인문구대 북경왕징화원3구 주민위원회산하 로년문구협회 소속 * 한족은 월요일오전과금요일오전만 치고 그외 시간은 조선족 사용(장소의 운영비용은 조선족 전 부담) 성립; 2006년 총회장; 冯旭东 한족; 북경인 제1임대장; 김일룡,김영호,김영유 현임대장; 장상철 년령; 59세    학력; 중전  전단위; 연길시정부근무  회원; 22명 남; 19명   녀; 3명 년세많은 분; 68세    년세작은 분; 52세 회비; 전 20원/년  현재 30원/년 장소; 북경조양구왕징화원3구단지내 위치(고정적인 장소) * 북경순의구馨港庄园조선족로년문구대와 자주 우호적으로 래왕하고 경기하면서 기술 증진을 한다. 일년에 몇번씩 회원들이 함께 려행도 다니고 회식도 하며 회원간에 정분을 두텁게 하며 만년을 유쾌히 보낸다. 북경조선족중,로년탁구동호회 성립; 2008년4월초 회장;강태호  고향;길림성통화 입경전 교원근무 회원; 32명    남; 22명   녀; 10명 년세작은분; 45세   년세많은분; 74세 회비; 없음  장소; 규정된 장소와기재없음, 원 왕징남호동원 아파트단지내 탁구장에서 활동하다 한족들의 배척으로 쫓겨 왕징서원3구 아파트 단지광장 운동구역에서 한족들과함께 활동함 총 12팀 조직(이밖에 작은 규모로 정식적인 명칭도 없고 정규적인 활동일 도 없이 모임 가지는 조직도 몇팀 있음) 참가인원; 425명      그중;  남 104명   녀; 321명  년세많은 분; 84세    년세작은 분; 45세                                                               ㄷ) 활동장소; 장소문제는 북경조선족로인조직활동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이다.   북경시 한족로인들은 각 단지마다 로인활동중심이 있으며 정부로부터 자금도 부여하여 잘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재북경에 거주하는 (한족빼고) 소수민족로인들중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하는 조선족로인(북경호적인분도 있음)들은 통일적 조직과활동장소도 없다. 전에는 정부에서 도 좋고 민족사무위원회계통, 민족출판사, 민족문화궁,민족대학,등부문에서 조선족로인(당시는 북경시호적인 로인들만 있어 인원수가 적었음)들을 활동도 조직하게 하고 장소도 마련하여 주었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들도 다른 민족 못지 않게 도시로 진출하고 입경하여 북경의 조선족인수도 늘고 로인수도 따라 많아 졌다. 그러나 경제효익 시대에 진입하면서 조선족로인들은 경비출처도 없으니 자연히 장소도 없게 되였다.                    장소가 없으니 제일 큰 애로다. 이번 활동은 어느 식당에 가서 자리되면 정심 한때 사 먹고 그곳에서 반나절 자리를 빌려 활동하고 다음활동은 노래방(노래방은 보통 낮에는 영업안 함)에 가서 반날 모임 갖고 한다.  동북3성을 비롯하여 조선족이 거주하는 각 지역마다에는 로인회,독보조등로인조직이 있고 문화관과 같은 활동장소도 있는데 10여만(불완정한 추산)명에 천명되는 조선족로인들이 살고 있는 북경만은 확실한 통일단체도 없고 정식적인 활동장소도 없다.  로인조직에서 규모 큰 활동을 조직하려면 방송국, 출판사, 번역국,민족대학 같은 조선족일군이 많은 단위들에서 주체하여 비용도 대고 후원도 받아 조직하고 큰 모임은 항상 민족출판사 3층 연회청을 빌려 련합으로 혹은 단독으로 많이 활동했다. 그외 북경 교외를 포함하여 각 지역에 널려있는 조직들은 한달에 한,두번씩 영업이 잘 안 되는 식당이나 노래방,광장,야외 같을 곳들을 전전하며 간고하게 모임을 하고 한다.이것도 장기적이 못되고 여기저기 좇기워 다닌다. 심지어 단기간 비여 있는 지하나 개인주택에서 일시 활동을 진행하는 조직도 있다.   장소문제는 어디까지 경제 문제이다. 출근족로인들은 퇴직금 나오는 걸로 생활하고 손군들 잔돈을 주고 이래저래 쓰면 얼마 없고 농촌에서 자식따라 들어온 로인들은 자식들의 많지 않은 봉금에서 조금씩 얻어 쓰는 처지에 어디 활동에 참가하여 내놓을 돈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장소문제는 난감한문제이다. 장소있는 단체; 북경화평리조선족로인진달래무용대, 1주일 한번 사용할수 있는 화평리단지 주민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약 40평되는 무료활동장소 있음, 북경조선족저녁노을무용단, 중관촌단지복무중심에 2000원/년               내고 1주일에 한번 사용할수 있는 약 60평되는 활동장소 있음           북경중관촌조선족로인무용대, 중관촌단지복무중심에 2000원/년내고 일주일에 한번 사용할수 있는 약 60평되는 활동장소 있음   합쳐서 단일 단체로 장소를 마련한다. 현재 여건이 안 되여 단 시일내에 재 북경조선족로인 통일단체를 창립한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의 발전방향이라 본다.  그러면 정부의 지지나 민족유지인사들의 후원을 얻기 쉽다. 경비도 절약하고 참여 분들의 부담도 덜 것이며 민족대화합의 화기로움과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러면 민족사회에서 도 환영할거고 후대들도 반길 것이며 후세에 좋은 본과시범을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 오늘은 이단체, 래일은 그 협회, 모레는 저 동호회. (사람이 많아 단일체로 활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이렇게 륜번으로 돌아가며 활동하고 큰 모임이 있을 땐 련홥으로 한팀을 무어 출범하면 맞설 팀이 없을 것이고, 사회에 우리민족의 우수함을 력력히 과시 하고 타민족들에게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련대성을 충분히 보여 줄수 있다.  그렇지 않고 여러 단체별로 정부부문이나 기업, 단체의 지지,후원을 바라면 어느쪽을 돕고 어느쪽을 후원 안 하겠는가?                                       ㄹ) 긍정적인면;로인들이 자원적으로 단체를 묶고 조직활동을 하는 것은 만년의 생활을 다채롭고 뜻 깊게 하는 활동이고 고적한 도회지생활에서 인생만년의 생활을 이채롭게 하는 무대이다,  로인들에게는 조직모임이 만년의 생활에서 뜻있는 인생만년의 윤활제이고 감미로운 마음기탁 장이며 마음 쏠리는 곳이다. 또 기대하는 날이다,  항상 가정이란 작은 울타리안에서 손군들이나 보고 집 지키며 자식들 생활 뒤배나 하며 고적하고 단조로운 나날을 보내다 활동날이 되여 그립던 동년배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기쁨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날을 기달리고 년로하신 몸으로 친히 맛나는 음식을 장만하여 갖고 와서 함께 나눠 드시며 얘기 나누고 정분을 나누며 인생을 향수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이다. 만나면 반가와 따뜻이 손잡고, 얼싸안고 서로 눈굽을 찍는다. 그간의 그리움을 이슬먹은 눈길로 촘촘히 찍어보고 축축한 목소리로 서로 문안하는 것이다. 모임날 로인님들의 만남의 자리를 목격하는 장은 눈굽이 젖어나게 하는 자리이다. 그렇게 삶과정분을 소중히 여기고 생을 열애하는 우리 로인님들인 것이다. 때문에 조직의 일에 물심 량력 아끼지 않고 발벗고 나서 참여하며 그속에서 생의 재미와 즐거움을 감수하고 인생황혼의 쓸쓸함을 달래려고 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하는 짧은 반나절의 모임이지만 모여서 노래하고 춤 추고 점심에는 단란히 모여 앉아 술과맛나는 음식을 나누며 생활에서의 흥미있던 얘기와 힘겨웠던 일들을 나눠 풀며 함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옛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귀막당기는 옛곡에 맞춰 벗적 땀나게 춤추고 나면 그간 힘겨웠고 불쾌했던 일들이 하늘밖으로 날려가는 것이다. 연후 동료들과 건강히 지내여 다음번 모임에 다시 만나자 아쉽게 손 저어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 료녕인민예술학교 교장을 담임하다 퇴직하고 2006년도에 북경에 입경하여 사업하던 중 아는 전 동료의 소개로 합창단에 참가하여 음악선생으로 활약하는 김상규(현재 합창단단장)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로인님들은 인품이 좋고 서로 감싸고 단결하며 화애롭다. 한번씩 모이면 친구같고 친척 같고 한 가족 같다. 모임 할 때마다 자원적으로 이번 모임에 이분이 찰떡 쳐 오지 않으면 다음번엔 저분이 소떡 해 오고 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있는 모임 끝난 후 헤여 질 때면 모두 아쉬워 손잡고 놓지 않는다. 여기에 화평리 모아파트단지 주민위원회서기(한족)의 말을 올려본다; 조선족로인들은 참 훌륭합니다. 삶을 열애하고 인생만년을 문명하고 뜻 깊게 보내고 있습니다. 자원적으로 문명한 군중단체를 무어 조리있고 화애롭게 조직활동을 합니다. 공식적인 경연무대에 올라 우수한 성적도 따오고 세계적인 행사인 북경올림픽 경축활동연출행사축제에도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따내여 나라와민족을 위하여 영예를 빛냅니다.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하고 공익연출로 복장등면에서 조직에서 활동경비가 딸려 하면 본인들이 선뜻 자금을 내놓습니다. 자연재해리재민돕기 같은 모금활동에도 적극참여하며 사회와 조직의 수요라면 적극지지, 성원 합니다.    우리 단지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산하 부서가속들이 모여 사는 단지로 한족을 포함하여 몽고족,위글족,좡족등 9개 소수민족이 공동히 생활하는 단지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사회와단지내의 유익한 공익활동이나 연출수요로 경제래원이 없는 주민위원회에서 제한된 경비 부족으로 개인들의 협찬을 바라면 조선족로인들처럼 선뜻 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민위원회일군들이 페품을 거두어 팔거나 갖은 방법을 대여 해결해야 합니다.   필자가 9월초 북경4중 국제부로 일보러 차 타고 가는 도중 옆에 앉은 안경낀 62세 党씨 한족로인과 얘기 나누던 중 내가 조선족이라니 그분이 하는 말이; 조선족은 우수한 민족이다. 내가 사는 东河沿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조선족로인들처럼 문명하고 재미있게 만년을 보내는 민족은 못 봤다. 내가 몇번 일이 있어 왕징에 갔는데 왕징체육광장이나 남호중원 {백마강}음식점옆 광장에서 조선족로인들이 민족옷을 입고 모여서 영화 {{영웅아들딸}}에서 王芳이 메고 춤추던 북을 메고 남녀로인들이 유쾌히 춤추는 것을 보았다. 또 조양공원에서 조선족로인들이 많은 사람들앞에서 고운 민족복장을 입고 활기에 넘쳐 마음껏 노래하며 너울너울 춤추는 것도 보았다. 참 보기 좋더라! 그런데 한족들을 보라, 단지,가도마다에 棋牌실이 있다.말이 棋牌실이지, 실은 도박장이다. 심지어 북경중심지고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북 2환로 지단地坛공원쪽에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인행도에 몇십명남녀로소가 몇십상 죽 펴고 앉아서 마작놀고 있다. 강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도 계속한다, 꼴 부견이다. 수도의 의미지도 흐리고 국제도시의 형상에도 먹칠한다. 가정화목에도 영향 끼친다. 집일 제대로 안하고 돈 잃으니깐! 또 그렇게 하루종일 한 자세로 장시간 앉아 있으면 경추나척추병에 걸리기 슆고 돈 따겠다고 항상 머리가 긴장상태에 있어 중풍도 걸리기 슆다. 그런 사람들의 시간도 아깝다. 그런 시간이 있으면 책이나 보고 뜻있는 일이나 하겠다.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특히 금싸락 같은 만년의 시간은! 조선족들은 참 훌륭한 민족이다.  하며 조선족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부정적인면; 조직간의 조합이 미적하고 단합이 원만치 못하다.   a,단체사이에 분규가 있으며 소통이 적은 것으로 본다. 이것이 단체성을 이루고 원활한 조합을 이루는데 불리한 면이라 생각한다.  b,서로 우리조직이 합법단체요? 우리협회가 더 좋소? 하며 내부사람간에 갈등이나 조직사이에 모순이 있으면 서로 량해 하거나 너르게 생각 못하고 말 싸고 다니며 정체성 윤합이나 단결에 좋지 않은 언행을 취한다.ㅡ 말이 많은 민족본성의 유전성이라 할까?!  어떤 부문이나 기업인들이 한 조직을 후원해주면 왜 그 쪽은 봐주고 우리는 안 해주는가 말 쳐들고 다닌다. 저녘노을 전임 문명회장의 말;  c,전에 정부부문, 회사의 령도층에 있었거나 또 모종기능(예술등)쪽에 장끼있는 분들은 도시근로층이나 농촌에서 온 분들을 차별시 대하는 형상도 있어 이런 층에서 온 로인들은 한 조직에 가입하였다 퇴출하거나 다른 단체로 가지 않으면 아예 로인조직활동에 참가 안 거나 교회로 간다.이런 속에 조직간의 단결에 불리한 말들이 퍼진다.      전에 단위나 기업에서 관리층에 있었던 일부인들은 로인조직에 들면 창시인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선발된 책임자가 아니더라도 령도자가 되려고 조직단결에 불리한 언행을 행하며 사람간조직간 단합에 불리한 인소를 조성한다.    조직을 자기 한 개인의 재산으로 여기며 지역의 통제자(山寨王)행세를 하려 한다. 08년에 별세한 합창단 김두남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원래 어떤 사업단위, 직위에 있었던지 퇴직하여 사회에 나오면 그것은 이미 지난 력사입니다. 지난날을 갖고 어떤 민간단체에 진입하여 행사하려면 그것은 틀린 짓이고 단체 단결에도 불 유익합니다. 특히 퇴직하여 사회에 나와 내 마지막 생을 사는 만년생활인데 무엇이 두렵고 겁나겠습니까? 어떤 단체에 자유로이 가입하여 내 마음껏 놀고 장끼를 부리며 사는 것이 그생의 마지막삶의 진정 알짜고 사는 멋입니다. 전엔 돈 때문에 직장에서 령도나 윗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살았는데 늘그막에 어쩌다 로인단체들어서 무엇이 두려울것이 있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던지 참가하지 않으면 되지요.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 속에는 말이 많고 단체분렬이 잦다. d, 여러 단체로 갈라졌기 대문에 재력과 인력,기재(악기,운동기구등)등이 분산되여 조직간의 단결 단합에 불리하며 로인들이 다니기에도 불편하고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 확보에도 영향 미친다.      e,단일체가 형성 못 되였기 때문에 정부차원이나 민족지성인들의 경제적지지나 성원을 받기 힘들다.  *어떤 조직은 정규성과전업성을 추구하여 장끼가 없는 로인들은 조직활동에 참가하기 싶어도 가입 못하거나 부득이 따돌리게 된다.  *노래와춤, 예술면에 장끼가 없고 운동을 즐기는 남성로인들은 장소,기재등원인으로 로인활동 조직권에 가입되기에 제한되여 있다.           *! 많은 로인들이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이 여러단체로 갈라져 있는데 대하여 곤혹하고 가슴 아파하며 각 조직들이 한 단체로 무어 져 북경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로인들이 단란히 한자리에 모여 재미있게 활동하면서 보내기를 극히 바란다.                               ㅁ) 현사회에서 로인문제는 회피할수 없는 사회형상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로인들이 마음놓고 활동할 장소가 있고 하면 로인들이 만년을 유쾌하고 즐겁게 건강히 보낼 수 있어 사회와가정에서 로인들에 대한 부담도 덜수 있다.  *로인단체 활동의 주요취지는; 첫째 로인님들이 만년의 공허감을 메우고 쾌할하게 놀면서 건강을 도모하며 만년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지금 사회의 로인생활은 지난날의 로인들의 처지와 많이 다르다. 퇴직했거나 자식들이 성장했어도 건강한 상태다. 사람간에 이웃간에 장벽을 치고 사는 도시의 박한 세태와 가정이란 작은 울타리 안에 갖히여 생활하는 로인들은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동년배 친우들과 함께 지난날과동년을 회억하고 고향을 그리며 함께 보낼수 있는 모임은 그렇게 흡인력 있고 마음쏠리는 곳이다.)  둘째는 놀면서 {회미해져가는 조선족문화를 살리며 놀자!} 는 것이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 활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취지라 본다. 로인들이 우리 노래 부르고 춤추며 활동하는 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민족문화전파에도 영향 미친다. 현재 중국조선족의 문명한 민족문화는 죽어 가고 있는 실태다. 이것은 필자 한 개인의 관점이 아니다.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에 다니시는 1940년대 혁명에 참가한 80세 고령의 전경련로군인은 필자의 손을 잡고 민족과로인들을 위하여 훌륭한 일 한다고 그렇게 치하 하시며 꼭 조선족로인들의 활발한 생활모습을 잘 써서 우리 로인들의 문명한 로년생활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민족로인들이 장소,환경,자금,등 애로를 극복하면서 넓은 북경땅 여기저기 그 멀리에서 모여와 모임 가지는 것은 단순히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놀자는 것뿐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 가족생활의 단조롭고 고독한 생활 울타리에서 벗어나 그간 그리웠던 전우나 지기, 조직성원들을 만나 유쾌하게 놀면서 문명하게 만년을 보내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껏 춤추고 노래하고 나면 마음이 쾌활하면서 신심이 건강하다. 로인들이 건강하면 사회와가정, 자식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다음으로 또 건강하고 질 있게 만년을 보내 것은 화애로운 사회건설에 도 도움이 되고 특히 죽어가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문명한 문화를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시면서 때문에 여름의 땡볕이나 겨울의 추위에도 로인들이 광장이나 공원,가두에 다니며 민족복장을 입고 조선족노래와춤을 추며, 늙은이들에게 힘 부치는 민족가무를 몇 달씩 준비하여 공식적인 무대,텔레비죤방송에도 선보여 무게 있는 성적도 따온다고 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힘써 달라고 심심 당부하시는 것이 였다.(단순 필자를 치하하는 얘기라 샐각안고 많은 민족지인들이 여기에 중시를 돌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ㅡ북경에서 조선족로인조직들이 성립되여 지금까지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 북경조선족저녁노을무용단, 북경화평리진달래조선족무용대, 북경아리랑로인협회등 조직들의 조선족로인들은 진지하고 열심히 련습하며 로년활동에 적극참가하여 전국성적인 로년콩클활동과 2008북경올림픽경축공연,북경텔레비죤문예프로등 공연활동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여 국가유관부문과 북경시정부, 북경시민위에서 발급한 우수상과 긍전적인 찬양을 받았다. 북경조선족로인들 속에는 정치,군사,경제,문화,기술등방면에서 나라에 공헌한 우수한 분들이 많으며 그들은 또 우리민족의 우수한 인재이고 알짜인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민족의 우수한 문화가 사라져가는데 가슴 아파하며 그것을 살리기에 심혈을 쏟고 있다.  그것은 모임은 미룰수 없는 민족문화발전에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를 잘 알고 소지한 현재 우리로인들이 우수한 우리민족문화계승,발전의 중임을 떠메고 경상적이고 활발한 모임속에서 문명한민족문화를 향수 하고 만년을 뜻잎게 보내면서 동시에 활동을 통하여 날로 색이 바래져가는 우리문화터전을 가꾸고 지켜 발양하여 민족문화전파에서 중요한 중추,뉴대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합창단에 다니시는 항천부 제일 연구원1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셨던 75세의 동서운로인도;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어떤 땐 전번 모임에서 보았던 사람이 오늘 모임에 오면 중풍 맞았다거나 사망 되였다 합니다. 우리에게 고정적인 작으마한 활동장소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눈치안보고(토요일마다 한족식당에서 점심한끼 사먹고 반나절 활동함) 노래하고 싶은 사람은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사람은 춤추며 운동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운동하면서 유쾌히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있겠는데……그리고 이제 우리까지 우리민족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중국에서 문명하다고 이름있는 조선족의 우수한 문화는 끝장입니다. 지금 우리아들, 며느리들은 집에서도 조선말 하지 않고 조선족의 례의범절도 잘 모르며 휴일이나 명절이면 밖에 나가 친구들끼리 마작놀지 않으면 현대노래나, 서양노래 부르고 사교춤이나 춥니다. 손군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이러니 우수한 우리조선족문화가 단층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임 가지며 노는 것을 단순히 우리본인들을 위해서라 생각하면 틀립니다.  *많은 로인들의 공통점은; 1,현재 중국조선족의 전통문화는 죽어가고 있다.      현대 조선족 젊은이들은 민족력사, 문화,례의를 모르고 민족예술,음악을 즐기지 않고 흠상 못하며 심지어 조선민족의 전통가요인 아리랑도 모르는 젊음이 들도 있다. 2,그들은 사회, 직장이나 가정에서 까지 민족어를 쓰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중국조선민족문명문화 전교(传交)전환점에 있는 우리 로인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중국조선족문명,문화계승 발전에 단층이 (이미 그 증상이 보이고 있다.) 생긴다. 그러면 현재 우리로인들이 민족과 선조들에게 미안하고 죄짓는 것이다. 3,때문에 중국조선족민족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살리자면 우리  로인들이 력사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하여 자신들의 행위로 후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며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자손들에게 문명한 민족문화를 물려주고 대가 끊기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만 마음놓고 눈 감을 수 있고 찬란한 문명문화를 창시하신 선조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며 민족앞에 죄짓지 않는다. 08년 년말 북경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체한 携手奥运系列体育活动精彩瞬间颁奖会에서 민족사무위원회牛颂부주임으로부터 북경조선족저녁을무용단을 대표하여 年度{{特别贡献奖}}을 수여 받은 저녁노을무용단 리청회장님은 필자를 보고 당시 분위기 감수를 말함에 있어 상장수여 감에 대하여서는 이야기치 않고 중관촌모중학교에서 한족민족체육항목교육을 본학교 체육학과내용에 편입하였다는 데 대하여 애기하면서 우리민족도 조선족 전통체육항목을 학교교육일정에 투입하였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우리민족문화단층에 근심을 표하는 것이 였다. 여기에 북경조선족양광阳光로인회 정수덕회장님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의 모임이 우리 로인들이 만년을 유쾌히 보내자는 목적도 있지만 또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활동모습을 우리후대들에게 보여 주며 영향 줌으로써 우리조선족의 문명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하는데 디딤돌 역할을 놀도록 하여야 한다.}} * 그러자면 민족사회나 우리후손들이 로인들이 마음놓고 자주활동할平台를 형성,조직하고 창조하여 주어야 한다. &!) *합창단김두남(별세)회장님; 어떻게 재북경조선족로인들이 단란히 한자리에 모였으면 좋겠다. *합창단 로혁명군인; 젊어서 나라와사회,가정위해 분투하고 고생 많이 한 우리 로인들이 늙으막에 마음놓고 유쾌히 활동할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동락회 전 지광훈회장; 재북경조선족로인들이 단합되고 마음놓고 한자리에 모여 활동할 장소를 마련해 달라고 사회에 호소한다. *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머리에 피뜩 송강, 정철선생의 {훈민가} 중의 한 단락이 떠올라 이{명구}로 헤저분한 나의 글의 결말을 장식해 보려 한다. ㅡ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늙기도 서럽거늘 짐 조차 지실까?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울가 근4달간의 취재로 이 글을 마무리 짓고 필을 놓으면서 우리 로인님들 만년에 건강하시고 유쾌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9년 5월 18일ㅡ09,5,2                         김인철   ㅡ2009년도에 접어들면서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에 많은 파동이 생겼다.   ㅡㅡ2011년 12월 9일 재수정
5    고향사(思)정 (2) 댓글:  조회:2964  추천:5  2011-11-23
고향사(思)정   (2)      동네사람들과의 얘기속에 다른 한가지의 말거리가 사람이 죽어 메내갈 사람이 없다는 예기가 또한 마음쓰리게 들려왔다. 동네에 사람이 없으니 생각잖던 일들이 퇴여나는 거다..   전엔 동네에 상사가 나면 온 마을조선족들이 모여 와 본집에서는 근심걱정없이 손도 안돼고 장사를 치뤘다..   우리고향에서 장사를 치는데 보통; 향도계(조선족治丧委员会)에 7명, 상여나갈 때 선두에 2명, 집채(상여)를 메는데(청,좡년) 8명, 메는사람 바꿔줄 사람 3、5패에 3、40명에 뒤일 보는사람 10여명으로 70여명 일군들이 있어야 장사를 치룰수 있었다.    그런데 동네 청,좡년들이 다 빠져나간 오늘에 왔어 상사가 나면 난감하다..    에 올려 모셔 내갔느데 이제 우리죽으면  2抬大轿도 없으니 서러워 죽어 도 눈 못 감겠다..> 이는 몇해만에 만난 건너집 70넘은 동네할머니가 나와  손잡고 얘기하던중에 한 가슴저미는 말이다..   지난헤에 ㅎ씨 한집에서는 사람이 너무 없어 집채(상여)를 달구지에 실어 묘지로 나갔다 한다.    태여나 평생 가정과 자식들을 위하여 헌신하여 온 로인님들, 이세상을 떠나 아득한 저세상으로 고독히 혼자 가는 길인데 근심갖고 한 품고 가야하는 그걸음 참 안됐다..   버젓한 산골농촌마을,  콩크리트거리엔 행인이 없고, 벽돌집이 주인이 없어 찌부러져 가며, 쫇은 버덕의 산골농촌마을에 구전한 운동기구를 갖춘 넗직한 쉼터광장엔 일년가도록 사람발길이 다이지 않고 . 산골농촌에서 금싸락같은 부침땅들이 줄어들고 묵어 황무지로 변해가는 풍경.   ㅡ언제면 다시 개짓고 닭울고, 아이들 뛰놀고ㅡㅡ  2011년11월 22일 북경  김인철
4    고향사(思)정 (1) 댓글:  조회:1968  추천:1  2011-11-21
                                           고향사(思)정                           (1)   11월 2일 어머니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안해와함께 아들며느리(금방 결혼)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갔다.  이렇게 고향으로 가는 길은 별로의 심정이 였다.   산과곡이 첩첩히 들어선 고향벌에 들어서니 늦가을의 눠런 벌판이 쓸쓸하게 눈앞에 안겨왔다.    마을들은 정부의 혜택으로 거리들을 콩크리트로 빼고 일부 집(주 큰길옆)들은 붉은 유리기와를 올리고 횐벽으로 장식하여 보기 좋와다.    거기에  비해 마을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오후 1시경인데 들에서는 5,6사람이 논밭에서 힘겹게 늦은 탈곡하는것이 보이고, 마을은 인적기 없었으며 보기좋게 뻗은  콩크리트길엔 행인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들과동네사람들과의 얘기속에 마을에 사람이 없어 살멋이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우리지방에서 도 조선족이 많히 집거하여 사는 3부락중 하나 인 큰마을(85년도 인구조사시 1507 명조선족)로 마을호수가 1000 여호에 인구가 4천여명 되는 편벽한 산골치고는 큰 동네 데 조선족뿐아니라 인젠 한족들도  많히 외지로 나가여 동네는 절반(학교다니는 애들도 대부분 현성같은 곳으로 가 마을에서 아이들이 울고,불고 뛰놀는 것도 보기 힘들다. ) 인구가 줄어 아주 족족하다 한다.   그속에 농사일 하기 힘드다는 얘기가 많았다. 동네에 일손이 모자라 농사일 하기 힘드다는 것이다. 젊은 청,장년들(남,녀ㅡ60세아래 사람들 동네에서 보기 드믄)이 밖에 나가고 없어 60넘은늙은이들과 정황이 딸려 밖에 못 나가는 사람들만 남아 힘겹게 농사짓고 있다.    봄 파종은 그럭저럭 몇일 늦춰 손되는 대로 심어 만 넣으면 별일 없는데 가을걷이는 그렇지 않다. 동북지구 대부분지방은 무상기가 짧아 서리가 일찍 내리고 어떤해는 예상밖으로 눈까지 일찍 내려 다 된 곡식들을 눈속에 파묻히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속에 농사일에서 주력작용을 하던 남,녀 청장년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어 힘없는 사람들만 남았으니 그 정경은 상상만 하여도 알만하다.    항상 친척,친우들 ,2,30여명이 한패씩 합셈해  탈곡하는데 가을엔 먼저 한전걷이를 하고 다음에 수전가을 시작한다. 보통 콩 탈고도 벼가을,탈곡과 함께 한다. 밤잠 도 못자고 숨돌리새 도 없이 돌아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주량인 벼탈곡은 항상 뒤로 미루게 되고 다 여물고 마른 벼알은 비를 맞히지 않으면 눈밑에 밀어 넣기 일쑤다.   03년 가을 변덕스레 일찍 눈내려 벼탈곡을 비,눈 맞으며 하여 많은 집들에서 젖은 벼를 말리지도 못하고 두지에 넣어 두었는데 봄에 나가 겨울에 얼었던 벼알들이 녹으며 두지 안에서 썩어 반수넘은 집들에서 썩은 벼를 마대들이로 버렸다. 장씨(36세)집에서는 근 일년낟알 11포대(한포대 약1백4,5십근)벼를 버렸다. 현재 이런일이  고향에서 비일비재로 발생하고 있다.                            가슴앞은 일이다. 농우들이 새벽에 일터로 나가고 저녁에 달 지고 들어오며 밤새고 땀 흘리며 힘겹게 지은 낟알들을 버리려니 얼마나 가슴아프겠는가? (여기에 대한 나의 기사를 길림신문 03년 8월16일부 제일면에 실었다. )   그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히 빠져나간 현재, 마을의 상황은 더 못하다.      2011년 11월 19일    북경에서  김인철     
3    한국주부들과 조선족가정부들간의 대돌 댓글:  조회:7344  추천:114  2011-09-27
이 화제는 내가 05년도에 경제생활잡지사에 선보여 입사하고 두달넘어 취재하여 계열문으로 잡지에 나가서 북경조선족사회와 한국인 사회에 작으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잡지에 글이 나간후 북경에서 한국인집에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여성들(혹은 한족여성들)로부터 이따금 전화도 오고, 거리에서 만나면 붙잡고 자기네가 당한 불공편에 대하여 토로하여 건네 오는데 오늘도 한국인집들과 조선족가정부들 사이에 계속 마찰, 대돌이 있어 다시 화제로 끌어 올려 본다. . 당시까지 중국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대부분 정부, 단체, 대기업주재인으로, 혹은 중,소기업자들이 였고, 유학생이였다. (당시, 재북경한국인 10여만명, 불완전추산) 그런데 현재는 가지가색,여러부류의 한국인들이 입경하여 재북경 한국인수가 15만명(불완전한 추산;북경한인회에 등록된수 8만여명)좌우가 된다고 한다. 이들속에는 고급교육을 받고 상층환경에서 생활해온 사람에 초등교육에 저하층에서 살아온 사람도 많다. 현재,재북경한국인호수는 약 5천여호(단솔인, 유학생등)이고, 한국집들에 다니는 가정가정부 4천여명 된다. 한국인집과 중국조선족아주머니들은 같지 않은 사회제도, 환경에서 태여나 생활했고 받은 교육 또한 차이점이 많아 접촉상에서 많히 부딕치고 실갱일 하며 해를 지우고 있다.  북경 왕징의 상징으로 되여있는 왕징체육광장 09년 정월보름이지나 조양구大望京땅집에 거주하는 길림성통화에서 온 ㅊ씨아주머니(40 여세)가 하루저녁 우리집에 찾아 와 이런 하소연하며 신문에 내여 사회상으로 평정해달라며 얘기해 왔다. 그가 望京国风北京106호아파트 을단원6층에 집 잡은 모한국기업에 다니는50세 데는 한국인 ㅇ씨 아저씨집에 근 2년 근무하였는데 아저씨가 어찌 나 까다롭고, 좀채긴지 힡들게 일하였다 한다. 평일도 그렇고, 일요일은 휴식일인데 도 이따금 전화와서, 이튼날에 출장가니 옷 씻어 달라, 넷타이 다리미질 해 달라, 친구들이 오니 반찬해 달라며 낮이든, 밤이던 시도 때도 없이 부른다, 아이둘이 학교다니는 형편에 돈이 많이 수요됨으로 참고 그렀저럭 견디며 일해 왔다, 그런데 올 음력설에 한국에 들어갔다. 정월 17일, 21일만에 온다 하여 ㅊ씨아주머니가 17일(음력)낮에 집안청소하고 채소를 장만해놓고 왔는데 저녁5시 넘어 ㅇ씨아저씨가 아니꼬운 목소리로 아주머니에게 랭장고(先生말대로 그간 집안전원 전부 꺼버렸음)에 넣어 두었던 송편과김치를 어찌하여는가 며 전화왔다. 아주머니가 오늘 청소하며 보니 떡과김치에 콤팽이 껴 버렸다 하니 먹을수 있는것을 버렸다며 좋지않게 전화를 끊더 란다. 그런데 6시넘어 또 전화와 물어 아주머니기 딱딱하게 사실을 말했는데 8시에 또 전화오며 이렇쿵 저러쿵 하며 트집을 걸어, 결이 날때로 난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어 버리고 그 길로 자전거 타고 밤길을 달려 그 집으로 찾아가 집문앞 복도쓰레기칸 쓰레기통에 버린 곰팽이낀 떡과김치를 찾아 들고 들어가 ㅇ씨에게 보이며; 여기 있다. 먹겠으면 먹으라. 인제 진절머리나 이 집일 안 하겠으니 결산해 달라며 결나 목소리 높여 말했다. 그때야 자기가 사실 모르고 잘 못했으니 계속 일해 달라, 급여 올려 줄 테니; 하느걸 뿌리치고 나왔다고 한다. 결산 할 때 도 이전에 부주의로 와이샤쯔를 다림이질하다 슬쩍 다려 놓은 걸 트집잡아 그돈 떼더 란 것이다. 박씨,48세,길림성 三源浦사람, 북경조양구草场地땅집에 거주, 대서양신청근무. 땡볕에 주인집과 둘이 같이 시장 같다 물건 잔뜩 사들고 왔어 다 덥지유, 그런데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서 수박꺼내 까서 혼자 앉아 첩첩 다 먹어유, “아줌마, 수박먹어요.” 뭐, 말 한마디 한다구요? 뭐, 먹지 못해 그러는 게 아니구유, 그런건 우리두 사먹을 정도야 되지유, 그런데 말 한마디 없이 저 혼자 첩첩 다 먹을 때는 기분이 상해요, 찰떡같은 것두 이렇게 전화하면  한 상자씩 배달해오지 않아유? 그것도 혼자 앉아 첩첩 먹고는 “아줌마,이거 남은거 냉장고에 얹어 놓아요”한대유. 그거 하나 먹어 보라는 소리 한다구유? 먹지 못해 그러는게 아니라 구유. 그래 일손이 잘돼 얼마나 잘데 겠유? 많은 보모들이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조양구남호중원지하에 거주하는 신분을 밝혀려 하지 않은 박씨 가정부 내가 먼저번에 하다 너무 하인 취급했어 뛰쳐 나온 집이요, 어찌나 하인 취급해서 안 하고 짐 꾸려가지고 나오는데 아이 핸드폰이 없다며 난리 예요, 나를 못 나가게 막으면서 내 가방을 뒤지려는거요. 한심해서, 그래서 나도 화가 나서 가방을 쏟아 보였어요. 그리고 태태를 끌고 온데 찾았어요. 홀시 머리속에 전날 저녁 아이가 쏘파에 누워 텔레비를 보던 생각이 나 쏘파등받이를 들어보니 그짬에 있는 거예요, 그걸 아이보는 앞에서 태태눈앞에 바짝 들이대 보이며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짓이요. 아무 턱 없이 사람을 무함해도 되는가요? 한국에서 고급교육 이렇게 받았어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하느님이 이렇게 하라 가르치던가요. 이제 만나면 침도 안받는다”며 그걸 쏘파에 뿌려 던지고 나왔어요, 김씨,42세 흑룡강성목단강시, 왕징신청4구 413동지하거주, 내가 신청4구 415동15층 3호에 다닐때 일이예요. 40밑에 이른 부부간에 남자, 여자아이 하나씩인 집이였는데요, 집을 됭 되게 안 걷웠어요. 월요일 아침에 그 집에 들어가면 객실부터 가관이예요, 아이놀음감에 옷, 책장들이 쫙 널려 있고 주방에 들어 가면 싱크대에 그릇들이 무더기로 싸여 있고 그아래 바닥까지 쟁기들이 무져 있어유. 이틀동안 놀고, 먹은걸 그대로 처박아 놓고 내와 걷우기를 기달리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밸 나지요. 아무리 보모를 둔 집이라고, 우리같으면 보기 싫어서도 겉웠을 거예요, (대면 해준 많은 아주머니들이 많은 한국집에서 보통이런다고 한다. 특히 한족보모들이 다니는 집) 그래도 우리 직업이 이것인데 참고 그냥 하지요. 더, 말 못할거는 태태가 월경이 올 때마다 뻘겋게 피가 묻은 그걸(팬티) 옷을 까득 여놓은 세탁기에 집어 넣는 거예요. 당장 화가 곤두라서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게 서요. 다른 옷 들까지 물 들지요. 그러면 그걸 씻는라고 시간잡고, 신경나서 죽을 지경이 지요.   하루는 아침에 출근하여 세탁하려고 보니 또 그 뻘건 걸 안에다 던져 넣은 거예요, 그전에 이러지 말고 싸서 한쪽에 놓으면 내가 단독으로 씻는다고 서너번 말해는데 계속 그러는 거예요. 당장. 밸이 곤두라서 자고 있는 거실문을 뚜드려 안 하겠으니 결산 해 달라고 소리쳤어요. 그러니 부처간이 잠옷 바람에 나와서; 말도 없이 그만두니 돈 못 주겠다는 거요. 화가 날때로 나 그걸 비자루자루에 뀌여 들고 창문을 열어 져껴 놓고 소리쳤어요. 당장 결산 해 안주면 이집에서 이렇게 논다고 아래에 대고 공포한다.(415동 아래에 한국인들이 제일 많히 드나드는 평가시장이 있다.) 그러니깐 빤즈만 입은 先生이 입 딱벌리고 있는 태태를 보며 빨리 돈 주라고 하는 거예요. 문씨, 51세 길림성 집안현 사람, 왕징신청 423동지하거주, 夏都盈座근무 나 전에 대서양 신청210동에 자면서 일 할때 집인데, 왕징신청 4구 419동에서 괜찬은 음식점(ㅅㄷㄷ)을 꾸렸지요. 사는 집은 3칸짜리 큰 집인데 그 집에 있을 때 지옥이 였어요. 지금 생각만해도 으쓱해요. 량반이 괜찬은 식당꾸린다니 사람들도 괜찬겠다 여겼는데 말이여, 아침 5섯시면 일어나 학교에 가는 아이들 밥해 먹이고 도시락싸서 셔틀뻐스까지 바래다 주고는 와서 곧방 어른들 반찬 하고 그렇게 시작하면 3칸짜리 큰집이라 밤 10시넘어까지 쉬지 못하고 돌아 쳐야 해요. 낮에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밤이면 더욱 힘들어요, 내가 잠 자는 칸은 언덕짝만한 칸인데 한사람짜리 침대를 놓으니 엉치를 돌구기도 힘들죠, 그기에 침대밑에 물건을 까득 쓸어 넣었지, 벽구석에 청소기등 물건들을 무져 놓았지. 숨도 나지않게 캅캅해요, 거기에 창문하나 없는 창고로 쓰는 방이 였어 숨 쉬기도 힘들어요, 낮에 힘겹게 일하고 밤에는 푹 잠자려 해도 못 자고 되척겨야 해요, 그더운 여름이면 어느때까지  못자지요. 그때 참말 고생했지 …… 그건 그렇고, 근본 자유란게 없어요. 들어 올때 금방 신분증을 압수하고 밖에 음식감이나, 물건사러 나가도 태태가 따라 나갔다 끌고 들어 왔어요.  한번은 고향에서 조카애가 북경으로 일자리를 찾아와 신청4구 423동반지하에 집 잡아는데 깔개가 없다하여 내게 있는걸 갔다 주려니깐 태태가 따라 나와요. 깔개를 주고 오랜만에 만난 조카하고 고향사정이랑 얘기 하는데 태태가 시간이 없다며 가자고 재촉하는 거예요. 참, 기막혀서,  이 얘길 누구하고 도 꺼내지 않았어요. 오늘 선생보고 하는 것은 혹 한국사람들 이글 보고 우리조선족을 이렇게 대하지 말아 달라는 데서 하는 애기예요. 하두 우리가 돈이 딸려 이런 고생, 천대 받으면서 일하지. 보모들이 거주하는 좁은 공간 지하방집 김씨,49세, 길림성통화사람, 왕징서원 3구 329동지하 거주, 화정세가 근무 전에 대서양야터란다에 다닐때 집이요, 세살짜리애하고,금방 난애가 있어 나는 전문애들만 보고 四川에서 온 젊은 한족여자두고 청소하고 옷씻게 하였요. 태태가 되게 한족애를 천대했어요. 옆에 사람도 무안하게 하였죠, 하루는 그애가 한쪽으로 옷씻느라 쏘파밑을 미처 안 닦아서요, 그러니 태태가 아기 옷도 손빨래 안하고, 쏘파밑도 닥지 않아다며 아이를 후딱손 쇠우며 마구 욕하는 거예요. 그러니 애가 너무 섧어서 눈물흘리며, 돌아서 우는거예요. 그래 곁에서 젖먹이를 안고 보고 있다 너무 하여 말했지요, 그러지 말라고, 오늘 하도 바쁘니까 안닦아 지 안나, 아기옷도 더운물에 헹구어 세탁기에 넣어고, 쏘파밑은 어제 한번 닦아지 않나, 무슨 큰일이라도 저질러 그리 고우는가, 그애도 하도 나처럼 집이 곤난하니깐 이렇게 물시 당하면서 일하지 ,사람이란 어느때 어찌될지 모른다, 우리말에 한번 올리막이 있으면 한번 내리막이 있다지 않는가. 저여자 아이가 이담에 크서 큰 사람되여 잘 살면 저여자는 오늘에 얘기를 할것이다. 그러니 사람이란 항상 좋은 마음갖고 사는 것이 좋으니라ㅡ그날에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잘나갔어요. 마지막에 태태가 눈물까지 흘리며 우리들 손잡아 주었요. 정말이예요. 장씨,47세, 길림성안도현사람.利择西园지하에 거주, 화정세가,보성원에 근무. 08년도 대서양다닐때 집인데, 34살 사모님인데 처음에는 나를 잘 안대하여 줬어요, 올림픽끝나고 친정어머니가 놀러 왔어요, 하루는 아침 밥상치우다 부주의로 접시 하나를 깨였어요. 그러니 사모님이 또 그러는 거예요. 한참, 곁에서 보고 있던 친정어머니가 사모님을 불러 거실로 들어 갔어요. 조금후 내가 바닥을 닦는데 삐족이 열린 거실문으로 친정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요; 너네가 어렸을적에 우리도 얼마나 힘겹게 살아니. 그때 나도 저렇게 남에 집에 가정부로 다니며 갖은 천대 다 받았다. 그때 속으로 참 좋지 않더라, 개구리가 올챙이를 업수이 여긴다고, 그런면 사람이 못쓰니라, 저사람이 접시를 깬것도 고의적으로 그런것이 아니지 않니,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아줌마는 속으로 더욱 미안해 할거고, 속으로 죄스러워 할것다, 그 소리 들으면서 눈물나게 속이 짜르르 했어요.   얘기해준 95%이상의 아주머니들이 한국인집에서 가정부를 일만하는 도구로 만 생각말고 사람 취급하여 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서로 엎음갚음이라 주인집에서 아주머니들을  잘 대해 주면, 사람이란 감정적 동물이라 아주머니들도 량심적으로 일 잘 해 준다고 한다. 한씨,47세,길림성 연길사람,왕징신청거주.대서양신청 근무 그럼, 그사람들두 우리를 부려만 먹지 말구, 한 민족으로, 생각해 보았다유. 한계레로 말이유? 처음 그 사람들이 낯설고 땅섫고 말도 안 통하는 중국땅에 와서 寸步难行인데 같은 민족에 같은 습성이고 또 더욱히는 중국어까지 아는 우리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생활해 나가는가 말이유? 우리도 여인으로 가정이 있구, 집에 우리를 아끼는 나그네들두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생각해 봤대유. 그걸 생각해서 우리는 출근하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유, 같은 여인으로 저네들이 다른 여인의 벌겋게 생리묻은 팬티랑 씻어 보래유?! 씻을수 있나? 김씨,45세 길림성백산시2도강구사람, 조양구大山子거주 우리도 알아요,그러니깐 남의 자식도 제 새끼처럼 봐주고 모든걸 아끼고 음식감도 낭비없이 하지요, 돈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사모님이 밖에 나가면서 더우면 에이콘을 켜구 있으래도 정 덥기전에는 안 켜지요. 그렇게 돈 마구 쓰면 나에게 좋은 점이 있어요. 일전이래두 주인집에 아껴주면 나쁜점은 없지요. 보모들의 로무시장으로 되여있는 왕징신청 4구 광장쉼터 리씨(40여세)흑룡강성 해림사람. 현재 顺义에서 식당경영 내가 왕징신청3구 부부가 모두 한국학교에서 선생하고 있는 집에 보모로 갔는데 다른 집들에선 보모를 어른이나 아이들나 모두 “아줌마”라 부르는데 선생님집에서는 달라요, 나를 자기네 부모님들과 같은 연세라며 “이모”라 불러요, 처음 그소리를 듣고 눈물날번 했어요, 다른 집들에서는 어른,아이 할것없이 “아줌마”,”아줌마”하는데.ㅡ말 한마다디에 천금왔다간다 고 그렇게 호칭하니깐, 마음 안 뜨거울수 있나요? 그러니깐 고마움과 함께 잘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앞서요. 선생님은 내가 밖에 나가거나 들어 올 때는 꼭 문밖까지 바래주고, 맞아 주며 깍듯이 인사해요. 참, 잘 대해줬어요.   취재걸음에 왕징신청 4구에서 소개소를 꾸리는 50대 되는 조선족아주머니를 만나 보았다. 아주머니 말이 한국주부들 대부분 까다롭고, 그기에 회사에서 청소부나, 때거리 보모를 찾는 사장들과 단손으로 사는 아저씨들도 伺候하기 힘들다고 한다.  일을 제대로 못하오, 밥도 맛있게 못하오 ,음식이 짜오, 싱겁소, 나이많소, 별라별 잔소리 다하여 여러사람 봐꿔 보내도 안되여 마지막엔 한족을 보냈더니 소개소에 사람이 없나하여 인젠 전화와도 대응하지 않는다며 이런 사람들은 한국에서 못 살다 어쩌다 중국에 와서 좋은 집에 들고 보모도 두고하니 택을 짠뜩 높이 걸고 다니며 하늘에 라도 바라 오른듯 그 행새를 부려 보느라고 그런다 며 지금은 많은 한국집에서는 조선족보다 급여를 낮게 주는 한족여성들을 쓰고 있는데 가서 얼마씩 하다가는  대부분 나온다 한다. 어찌나 사람을 천대하고 이래라 저래라 쓸개 끼게 잔소리 하고 밥싸들고 오래서는 상에서 도 못먹게 한다며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대부분 시간당으로 일 하는데 보모들은 모두 제시간에 도착하여 일 시작하고 항상 지정 시간지나(혹 한시간내지,시간반이나,두시간넘어 나온다.) 나오는 때가 많은데 어쩌다 시간전에 일 끝나면 태태들이 지키고 앉았다. 요것해라, 조것해라며 일 찾아 시킨다, 정 할일이 없으면 신발 밭치개 아니면 금방 모욕시킨 강아지 모욕시켜라, 심지어 청소기까지 씻어 닦으라 한다며 한국인들의 쓸개짐에 혀를 찬다.   02년도에 중국에 들어왔어 북경조양구 左家庄国际友谊花园에 집 잡은 삼성전자주재원으로 근무하던 나하고 가깝게 지내는 ㅎ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중국에 들어온 많은 한국사람들은 한국에서는 보통 집도 없이 근근히 살아가던 족들이 였는데 일쪽 중국에 들어오니 물가가 엉청낮고 눈이 모자라게 풍부하여 집도 크고 좋은 걸로 찾아들고 한국에서 꿈도 못 꾸던 가정부도 두고 호강부리니깐 택수가 높아져 귀족행세 부리며 가정부들을 박대하고 있다며 해리밝은 말 하여 주었다. 조선족주인집과 한국인집을 어느쪽 선호하는 가의 물음에 98%의 아주머니들은 조선족주인집을 꼽았다. 여기에 길림성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온 림씨(49세,보모일 10년, 현재 시간당으로 6집 다님, 매주 하루건너 3집씩), 왕징서원3구 309동 지하에 거주. 당연, 조선족주인집은 아주 좋와요. 정말이래요. 다른 아줌마들하고 물어 보세요. 정말 이지요. 밥도 한상에서 먹지, 일이 바쁠때는 태태들도 한손 도와 해 주지요. 다른건 제쳐놓고 사람부르는 것부터 값쳐서 안 부르지요 조선족집들에서는 자기와 나이 비슷하면 언니, 동생하고, 자기엄마벌 나이면 이모라 부르지요. 한국집에서는 어른, 아이 할것없이 다 아줌마라 불러요, 발자욱 금방 떼는 애들까지도 아줌마 이래라, 저래라 하지요, 아침에 들어가나, 일 맞치고 나오나 택 높아 본둥,만둥하지요. 일이 바빠 미쳐 돌아 못치면 성내고 입센 소리까지 나와요. 길림성 류하현전성에서 온 나 친구는 아이들한테 맞기 까지해요, 어떤’ 땐 태태가 곁에서 보고도 가만 두어요. 보모들이 다니는 한국인집 싱크대에 가득쌓인 그릇들 길림성반석현에서 온 류씨(47세, 보모일 9년)북경조양구 왕징 남호동원 219동 지하에 거주, 华鼎과宝星园에 근무, 다른건 몰라도 마음편해 좋지요. 어디메 한국집처럼 늘쌍 마음 조마조마 하겠어요. 또 한가지는 어른들의 사리마다(팬티)안씻는게 좋지요, 한국집들에서는 태태(주부)들이 경도(월경)가 왔어 벌겋게 묻은 그걸 씻을 때 많치 스른것(싫은 것)이 없어요. 양쪽을 다 겸험해본 아주머니들은  모두 조선족주인집을 선호하고 있다. 조선족주인집에 가면 사람대접을 해주고 마음편해 일해도 힘겨운 줄 모른다고 한다. 전에는 급여가 낮아는데, 지금은 조선족들집에서도 급여를 높게 주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 풍기, 문화적차이를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인들은 서양(특히는 미국)개방문화와 본위주의 생활개념으로 생활을 꾸미여 조선족아주머니들 대하고, 조선족아주머니들은 중국사회주의 제도의 和谐리념으로 한국주부들과 접근하다나니 서로 쟁의가 생기고 의가 맞지 않아 대돌이 생긴다. 언제면, 한국인들과조선족가정부들간에 원활한 공감대가 이루어 지곘는지?   2011년 9월 27일    
2    추석이 되니 댓글:  조회:3240  추천:109  2011-09-11
래일이면 가족이 단란히 모이여 기쁘게 月饼을 먹으며 밝은 둥근달 바라보고 그간의 회포풀며 즐겁게 보내는 추석명절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산소에 가 일년내 자라난 잡초들을 벌초하고 저세상에 계시는 어른신님들과 시공테넬속에 술잔을 나누며 옛담을 나누고 그리는 명절이다. 나는 어렸을적부터 청명과추석에 기회가 되면 아버지를 따라 사촌형제들과 같이 봄에는 할아버지, 큰아버지 산소에가 겨울동기로 가라앉은 묘지에  흙을 올리고, 가을철 추석에는 일년내 무성히도 자란 잡초들을 벌초하여 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선지 왜 가토하고, 벌초하는지 모르고 부친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니였다. 가을에는 산중에 다른 사람들이 심어 놓은 과원에서 참외,수박들을 얻어먹고 나무에 바라올라 머루,다래등 야생과일들을 따 먹는 재미에 더욱 따라 다녔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어른들이 선조들의 령전에 술 부으며 외우는 소리, 일이 끝나고 린근 산소에 온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앉아 고인의 생전과 그 지난생활상들을 얘기하며 한 순간을 보내는 그자리가 얼마나 뜻있는 자린지 알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할머니는 부친이 어렸을때 일찍 돌아 가셨다.)사랑을 그리 받지 못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동네는 물론 린근에서도 이르는 유식한 분이시였다. 우리아버지가 항렬에서 둘째이시기에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집에 계시였다. 큰아버지가 나 소학교2학년때 병으로 돌아가시여 부친이 할아버지를 모시려 하여도 큰아들집에서 삶을 마쳐야 한다면서 별세 할때까지 큰어머니가 모셨으며 내가 소학교6학년(당시 학교사정으로 우리반은 전체가 한 학년 더 다녔다.) 다니던 가을철에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였다.  손군들중에서도 할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애지하는것 같았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면 머리맡 작은 접시에 놓여있는 몇알안되는 사탕도 다른 사람모르게 쥐여 주었고 5학년학기말 전현적 통일시험에 공사적 학급별에서 2등을 하자 내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도 기뻐하시였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사랑도 얼마받지 못했다.(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여나 얼마안되여 별세하였다.) 외할머니를 처음본적은 초중1학년 여름방학이였는데 어머니가 수속받고 조선에 친척방문으로 외할머니집에 가게 되였는데 부친은 공사에서 파견하여 현성에서 전국적으로 처음 꾸리는 첫기 농촌맨발의사학습반에 가시여 내가 젖먹이 어린동생을 보살피며 모친을 배동하여 현성 마준켠에 자리잡은 조선 헤산시로 가겠되였다. 그때 그길이 외할머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은 걸음이였다. 다 자란외손자를 처음 보시는 외할머니는 품에 그러앉고 쓰다듬으머 그리도 우셨다. 그리고 그리 부유하지 않은 살림에 삼촌어머니의 눈을 피해가며 마른 명태를 방추로 두둘겨 구워서 주셨고 뭘 더 먹이고 주려고 허둥대였다. 그때 처음 먹어보는 명태맛이 그리도 좋았던지 아니면 외할머니의 사랑의 손맛이 익혀지지 않았던지 나는 지금도 마른 명태를 그리 좋와한다. 장가들어 다른사람들은 장모사랑을 받는 다지만 나는 말수적은 장모의 사랑은 얼마받지 못하여서도 인정깊은 장인의 사랑을 많히 받았다. 피지못한 살림이지만 어쩌다 내가 가면 장인은 몇마리 안되는 씨암탉도 잡고 장에 나가 작으만치 돼지고기도 끊어 오며 고간에 직접들어 가시여 얼마안되는 입쌀도 떠들여 오고(벼가 나지 않은 고장) 하였다. 어린처남,처제를 시켜 술도 따오게 하였다. 그리고 술도 그리하시지 않으면서도 저녁상에 앉으시면 사위하고 술잔나눠며 얘기도 참 잘하시였다. 군인출신인 장인은 성격이 곧고 바르며 그른행위에 대하여서는 그가 누구든 거저 보내는 일이 없었다. 장인,장모 세상뜨신후 둘째인 우리가 산소를 돌보고 하였는데 내가 북경에 온 후로는 마을에 마음씨고운분에게 산소건사를 맡기였다.  집 산소는 현성에 있는 두동생하고 사촌동생들이 다닌다. 작년 추석에는 멀리 현성에 있는 두동생이 마침 사연이 안돼 내려오지 못하여 80세에 가까운 부친께서 힘겹게(마을에서 3리길) 산소를 다녀 오셨는데 그일이 항상 마음에 걸려 전번에 동생들에게 전화하니 올해는 내려갈수 있다하니 안심된다.  이래도 마음한쪽이 여전히 쓸쓸하다.  고향마을의 썰렁한 풍기와 같이ㅡ그속에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여도 언제한번 친지、자손들의 소리 못듣고, 손길 못닫는  고향황산들에 묻힌 우리선조님들의 황량한 령墓지의 쓸쓸한 풍경이 가슴쓰리게 저미여 온다. 혹 이렇게 되는게 현대 사회의 리치고 당연한 일인지…?! 발 빠른 사회의 절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사람들의 생활리념이 변하여 그런것인지? 아니면 고래문명문화에 드안한 마음에서 오는 풍기지? 그렇지 않으면 ……  89년도에 나와안해가 친천방문으로 조선 혜산시로 간적있다. 입경하여 4일만에 바로 단오였는데 삼촌어머니가 아침일찍 일어나시여 찌지고 볶으며 바삐 보내 시더니 아침먹은후 삼촌이 산소에 가자며 정복하고 아이들을 민족복장으로 단정히 입혀 앞세우고 우리를 데리고 외할아버지,외할머니산소로 향했다. 삼촌어머니는 깨끗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묵짓한 제상음식을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뒤를 따랐다. 시내안이라 묘지가 있는 산에 까지는 멀었다. 산기슭에 이르니 명절복장을 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단정한 옷차림한 가장들, 말쑥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묵짓한 대야를 머리에 인 여성들로 묘지로 통한 거리와산길에는 알록달록 사람천지로 가관이 였다. 그때; 아 ! 이것이 우리민족이 조상들로부터 이어 받은 문명한 경상(敬重先祖)문화이고 경지이구나 하는 감탄이 고국에 가서 느낀 제일 큰 감회였다. 한데 지금 우리 모두들 고향산천마다 에 모신 선조님들의 산소는 아마 많히 임자없는 묘지로 변하여 잡초가 무성지게 황량하고 쓸쓸할것이다. 09년 가을에 고향에 갔다 조상님들산소와 장인,장모산소를 돌아 보았는데 그때 인상이 지금도 앞에 선하다. 조상님들, 장인、장모산소 근처, 차타고 다니는 공로옆 산기슬과 마을근처에 있는 묘지들은 내가 고향에 있을 때 까지도 사람들손길이 다아 정결하던것이 인제는 언제 사람손이 돌아는지 모르게 황페하였다. 그기에 그렇듯하게 콩크리트길을 깔고 거리를 환히 쭉쭉 빼낸 마을엔 인적기 적어 썰렁하고 또 주인이 없어 볼품없게 허망해진 벽돌집과 찌들어 가는 초가집들은 협화음을 울리며 더 가슴쓰리게 하였다. 바로 여기에 올  추석에도 가지못하는 사연에 마음 무겁고 죄지은 감에 고개숙여 진다. 나를 비롯해, 모두 바쁘다는 리유, 시간이 안된다는 핑게를 붙이지만, 정말 그런가 ? ! 이 세상에 돈 보다 더 귀중한것이 있으니; ? !             2011년 9월11일 밤 9시22분             북경에서  김인철  
1    추석을 맞으며 댓글:  조회:2376  추천:21  2011-09-01
8 月闪过,9 月已到。 中秋来临,倍思(佳)人。 当今世上,真(秀)难寻。 寻觅路上,伤痕凹凸。 遥望残月,何时圆月。 달빛밝은 추석을 앞두고 어제밤에 머리에 팔베고 침상에 누웠다.불현간 마음속에 뜨는 문구를 옮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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