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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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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랄곳 없는 외지인 댓글:  조회:1069  추천:19  2016-11-07
        바랄곳 없는 외지인            ㅡ 한 영웅의 수난사   2016년 8월24일, 15년년말부터 일 없어 속타던 김만진은 밤중에 친구를 불러 북경조양구왕징남호중원 에 가서 술마이며 마음속고통을 털어 놓았다. 1995년설밑에 만진이가5살나던해, 아바지가 고향서 산에가 땔나무를 하다 목뼈등서너곳을 몹시 다쳐 186일간 목아래는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다. 강익한성격의 아버지는 모진공통을 이기고 악전분투하여 근1년만에 겨우일어나 걸어 다닐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그후유증으로 근육위축이생겼고  체력로동을 못하게 되였을뿐만아니라 앉아서도 7,8분 목을 돌리지 않고 있으면 쓰러지려 한다. 장춘길림성제1인민병원에 가 검진결과 3,4년후는 전신근육수축으로 들어누우며 실명이 될거라 하고 남경의유명한 골과병원의 전문의는 검사를 마치고는 치료도 거절하며 집에 돌아가 잘먹고 살아가라 한다. 아버지병치료로 그들은 살던 작은 벽돌집도 팔았다. 그들은 할수없이 할아버지집에 얺혀 살게 되였고 어머니가 도시에 들어가 남의집의가정부로 일하며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여 갔다. 그렇게 곤난하게 살며 초중에 진학한 만진이는 항상 어떻게하면 가정생활에 도움이 될가 고민하였고 그로 공부는 뒤전에 두었다. 항상 몸도 좋지않은 어머니가 혼자 힘겹게 일하며 돈버는게 불쌍하고 안쓰럽게 마음에 걸려 던 김만진이는 15살나던 2005년늦은 여름에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나이에 짐 싸들고 돈벌어 가정에 보탬하려고 북경으로 떠났다. 친척의 알선으로 2튼날부터 해정구 5도구에서 한국인이 꾸리는 작은 실내골프장에서 복무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천성이 활발하고 씨원씨원하며 거기에 엉치까지가벼워 열심히 뛰여다녀 사장님과 골프치러 오는 손님들로부터 아낌없는 호평과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북경들어와 짐풀어 여때까지 열심히 일하며 살아오던 그에게 근년의 전사회적경제난으로 많은 골프장들도 문닫게 되였고 그가 몸담아 일하던 련습장도 손님하객으로 페하게 되여 김만진도 실업하게 되였다. 근일년간 직업소개소, 취업전다지, 사이트등에 다니고 이력서도 보냈지만 학력없고 기술재간도 없는 그에게는 일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300여일의 뛰여다닌과 기달림은 혈기왕성한 젊음나이의 김만진에게는 큰 시달림이였고 아주 견디기 힘든 나날이였다. 와중에 사고로 근육위축으로 고통받으며 고생하는 아버지는 원체 137근되던체중이 이젠 96근이 되게 수축하여 뼈만 앙상하게 되였고 병증으로 조금만 걸어다녀도 무릅,다리특히골반과목이 불이 날듯 아파 힘겨워한다. 거기에 목부위의 근육위축으로 시신경이 압박받아 백내장,특히는 록내장이 심히 발병하여 실명할가는성이 높아 수술하라는 병원의사님의 진단에도 돈없어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얘기나누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진 만진이는 이튼날, 25일 새벽 1시반경에 식사마치고 친구와같이 식당을 나왔다. 김만진이가 문곁에 세워두었던 전동모터를 돌리는데 문곁에서 술마이던 20대한족젊은애들이 만진을 보면서: 现在骑电动车地 都是些穷鬼。란 비꼬는 소리를 내뱉는다 만진이 가 움직임을 멈추고 찔러보자 3애들은 눈길을 돌렸다. 둬발작 걸은 만진이는 생각해도 속이내려안가 친구보고 저애들이 나를 욕한다 며 돌아섰다  바로 그때 3애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김만진은 다가 온 그들을 보고 문책했고 쌍방이 오가는 말이 곱지않아 몇마디 안가 서로 맞붙어 싸움이 벌어졌다. 혼자서 3사람을 대하느라  힘이 부친 김만진은 전동차의 座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张昊를 쳤고 그애들은 달려들어 만진의 손에서 座垫을 빼앗아 만진이를 내려쳐 김만지도  쓰러졌다. 그렇게 싸움은 1분도 채 안걸려 끝났다. 만진친구는 말리는것처럼 하면서 拉偏战을 조금씩하였다. 싸움소리에 달려나와 현장을 목격한 식당의2한족복무원애들도 싸움은 크지 않았고 1분도 못 되여 끝났다 한다. 한족애들이 报警하고 맞은 张昊는 자기아버지까지 불러왔다. 보니 3애는 당지 南湖中园에 사는 이였다. 현장에서 직선으로 300메터안되고 돌아 온돼도 500메터도 안되는 거리를 경찰들은 25분이 넘도록 안 나타났다. 중에 친구가 몇번이고 만진이를 끌고 달아나려고 해도 만진이는; 나는 잘 못이 없는데 왜 달아나겠느냐? 경찰이 오면 리론해 볼것이다며 눌러 있었다. 报警하여 근 30분만에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대강 상황을 차문하고 그들(张昊父까지)을 구급차로 跨区海淀区清河999救护中心으로 실고가 진단검사하였다. 검사결과 张昊가 코왼쪽싹뼈가 손상이 가고 오른쪽손 엄지3번째뼈가 금이 갖다. 검사후 담당의사는; 没什么大碍。不用住院  不用吃药 回家养几天就好的. 라고 얘기했다. 김만진이는 검진하지 않았다. 소식접하고 김만진의 여자친구는 먼곳을 택시타고 달려왔다. 오전10반경 경찰들은 만진친구와짱호,짱호아버지를 경찰차로 남호파출소로 실어갔고(여기에 의혹 ㅡ왜 지정자인김만진이를 데려 안가고 간접인인 그친구인가?!)오후 2시경 2경찰은 짱호를 데리고 구급센터에 돌아와 김만진과 여자친구를 파출소로 실어갔다. 3시넘어 경찰들은 다시 짱호와김만진이를 안으로 录口供하러 들어갔다. 그후로는 만진이는 못 나왔다. 파출소에서 짱호는 만진친구를 보고 자기삼촌이 경찰이라 한다. 오후 5시에 짱호의 法医鉴定书가 나왔다.  6시경에 경찰들은 구급쎈터로가 나머지 두애를 실어와 8시에 录口供하고 9시넘어 나왔다. 밤 10시에 한경찰이 나와 여때 자리에 앉아있는 김만진의 여자친구를 보고 만진이는 잡혀 갔다. 집에 돌아가 돈 준비하란 말 두고는 안으로 들어 갔다. 후 张昊는 김만진여자친구보고 치료비,배상비를 달라하여 2천원 받아갔다. 27일 소식을 접한 김만진아버지는 급히 북경으로 달려왔다. 차에서 내려 만진의여자친구와싸움에 참여했던 만진친구를 만나 사건의 시말을 알아보고 만진여자친구와같이 사건접수남호파출소로 찾아가 당당경찰을 찾아 사건상황을 문의하려 했다. 그런데 경찰이 아주 언짢게 눈을 흘기며; 네아들이 법을 어겨 잡아 看守所넣었다고 말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식의 신심이 념려된 김만진아버지는 그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아들여자친구와같이 看守所로 달려 갔다. 도중에 전화로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看押期间는 누구도 면접볼수 없다하여 돌아섰다. 3흘후 김만진아버지는 다시 파출소로 찾아가 소장을 만나려 하니 만날수 없다하여 사건담당경찰을 찾아; 아이는 무슨죄명으로 잡아나? 왜서 그렇게 빨리 상해검진서가 나오고? 왜서 아이를 파출소로 데려와 문찰한다고는 그렇게 빨리 7시간도 못되여 잡아갔느냐? 왜서 아이를 잡아갈때 가속에도 알리지 않고 가속의 련락주소와전화도 남기지 않았느냐? 물으니 경찰은 제대로 답하지도 않고 瞪着眼睛蛮横的说;不负就上告吧。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후 김만진아버지는 법률를 아는 친구를 찾아 알아보고 전문형사안건을 접수하는 변호사를 만나 문의하니; 큰 일은 아니다. 고작 아이들의 싸움이 아니냐. 크게 다치거나 터진것도 아닌데. 며칠지나 나올것이다. 그런데 반날도 못걸려 상해검진서가 나오고 (정상적으로 5~7간) 7시간도 안돼 사람을 잡아 갔는가?! 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대방이 검찰원을 대신하여 래일 조양구검찰원에 가 협상하라더라는 소리에 놀라며; 아닌데, 지금은 아직 협상기간이 아니고 예심계단인데. 하면서 검찰원에서 통지한건가고 반문한다. 그렇다는 답복에 그는 아주 의아해 한다. 기간 대방애들은 연방 김만진여자친구를 찾아 돈달라, 협상하자며 말을 걸어 7천원어치를 받아갔다. 9월6일오후 1시반 김만진아버지와그여자친구가 조양구간수소로가 만진에게 옷과돈을 넣어준후 예심경찰에게; 만진이는 무슨죄로 구류됬는가? 물으니 그는 컴퓨터로 검색하더니寻衅滋事로 구류돼다. 사건이 중한가는 물음에; 엄중하지 않을거다. 중상안도 아닌데 혹 예심이 끝나면 나올수 있을거다 한다. 곧 검찰원으로 협상하러 간다는 소리에 경찰은 의아해하며; 모를일이다. 蹊跷,지금은 응당 예심계단이여서 안되는데. 안건은 먼저 정찰,다음 예심, 3계단이 판결인데 판결기간에만 협상할수있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蹊跷중얼거린다. 그들이 검찰원에 도착하여 调解室에 들어가니 앞에는 검찰복을 입은 검찰원이 서있고 좌측에는 20대젊은이 2사람과40대 여성이 앉아 있었다. 검찰원은 그들에게 대방을 소개한후 김만진아버지를 바라보며; 오늘은 협상의 마지막날이다. 오늘 협상서를 체결 못하면 5시에 나는 서류를 원장님께올려야 한다. 그러면 안건이 가중해지고 배상금이 높아가 너네에게 불리하다 액세스를 박아 말한다 만진아버지는 그소리를 응하지 않고; 당신이 오늘협상을 주최하는가 물으니 그는 옳다한다. 그럼 당신이 검찰원을 대표하여 이번협상을 주최하는가 바투들이대니 그는 멈칙하더니 얼굴이 벌개지며 조금있다. 며 급히 서기원을 데리고 나갔다. 검찰원이 나간후 얘기를 시작하는데 코뼈가상한张昊가 자기는 코가심해상해20만원을 요구하려했는데 들을라니 당신네가정이 곤난하여 현재8만원을 받겠다. 두번째애는자기도 몇곳근육이 상해7만원요구한다. 그러면서 제3자를 대시하여 말한다며 제3자도 여러곳상하여 치료비 1만원에 정신손상비 해당수를 요구한단다. 코웃음이 났다. 만진아버지가; 니 짱호가 그건 비밀이여서 안된다 한다. 고 만진아버지가 결연히 말하자 짱호는 엄마와 눈길을 마주치더니 3사람이 모두 핸드폰을 꺼내들며; 여기에 사진이 있다. 며 핸드폰을 내민다. 만진아버지가; 사진을 보지않겠다. 원본을 보겠다 하니 짱호가 집에 있는데 친구보고 얼른차로 갖다 달라하겠다며 일어나 전화치려 한다. 하니 짱호가 아까 있던 검찰원에게 전화걸어 몇마디 하고는 만진아버지에게 건네주며 전화를 받아보라 한다. 전화를 받으니 검찰원이 상해검진서는 비밀에 속해서 볼수없다 해; 내가 볼수있는 권한이 있는거 아니야?! 큰소리로 물으니 검찰원은 낮은소리로 할수없이; 검진서는 많은 서류봉투속에 묻혀있어 찾기 힘들다. 하여
11    부민관의 폭파 댓글:  조회:1717  추천:19  2014-12-24
        부민관의 폭파           ㅡ汉子 유만수 1945년7월24일 밤 9시지나 패망에 다 달은 일제의 잔인적인 수탈과 가혹한 탄압이 극에 달하며 그에 재조선친일파 거두박춘금을 위수로 하는 자들이 모여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이른바 "아세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리던 서울의 중심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당)에서 요란한 폭발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폭발로 1명이 폭사하고 여러 명이 상하였다. 이 소리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천하에 알리고 조선민족독립항일투쟁사에 빛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 빛나는 의거를 거행한 주인공들은 한국경기도안성시 출신인 유만수(柳万秀,1923-1975)선생이 조직하고 임시의장으로 활동한 대한애국청년단성원 조문기, 강윤기선생 3사람이 시행한 것이다. 유만수선생은 1923년안성시금광면개산리 유원이(柳远移)선생의 4남1여중 3남으로 태 여나 안성소학교(현재안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한영중학교를 다녔다.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교장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면서 공부했다. 교장의 심부름을 중 교장선생으로부터 조선독립의 필연성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독립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신장이 180cm 장신인 유만수선생은 독립운동하기 위해 유도도 배웠고 만주로 가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21세인 4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에 들어가 조선인노동자들을 멸시하는 책자를 발행하며 민족차별을 자행하는 회사에 맞서 1000여명 조선인노동자들이 참여한 3일간의 파업농성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회사에서 강제수용생활을 하던 중 탈출해 나와 일본내의 조선인노동자 단체들에서 활동하며 강제로 징용 온 조선인들을 빼내서 고향에 보내주는 일을 하다 본격적으로 동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1945년3월 유만수선생은 일본에서 함께 활동했던 조문기,강윤국,권주,우동학,박호영등과 함께 서울관수동 자신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하고 임시의장으로 되였으며 친일파거두들을 처단하고 중국으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러던 중 친일파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여 많은 조선남아들을 모집해 전방에 내보 내여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세아민족의 전쟁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를 무산시켜 많은 조선남아들이 일본침략자들의 대포 밥으로 되여 회생되는 것을 막고 친일파들을 처단하기로 거사를 계획했다. 폭탄을 만들기 위해 유만수선생은 당시 수색에 있던 변전소 이전 작업공사장에 잠입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 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 내여 그것을 일본운동화 밑창 속에 이겨 넣어 매일 조금씩 빼돌렸다. 손재주 좋은 유만수선생은 빼돌린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폭탄을 만들고 실오리만큼 심지를 만들어 실험도 했다. 거사일인 7월24일 밤,유만수선생과 조문기,강윤국선생은 행사장에 무사히 들어갔다. 당시부민관에서는 조선총독, 조선 군 사령관, 왕자오밍(汪兆銘])의 괴뢰중국 대표 정위안간(丁元幹), 만주 국 대표 탕춘톈(唐春田),일본대표다카야마,도라오(高山虎雄) 등이 연사로 참가해 미국·영국을 규탄하는 일종의 선전 극을 벌이였고 9시 무렵 박춘금이 단상에 오를 차례가 되자, 유만수와 조문기 등은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인 뒤 계단 옆과 복도, 화장실에 장치해 놓고 안전하게 빠져 나왔다. 정절을 향해 치닫던 친일파들의 충성서약 행사장은 천둥 벼락같은 폭발이 연이어 터지는 속에 아수라장으로 되여 파산 되였다. 이 거사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는지 일제는 발표하지 않았다. 일제 총독부는 주모자를 잡기 위해 당시 쌀 한 섬에 100엔이었던 시절 5만 엔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친일파 박춘금은 별도로 2만 엔의 현상금 더 걸었으나 끝내 거사를 실행한 독립투사들은 잡지 못했다. 부 민관의거는 광복 후 1945년11월 당시 자유신문의 보도로 그제야 세상에 알려졌다. 광복 후에도 유만수 선생은 거사를 입밖에 내지 않고 독립유공자 신청도 하지 않았으며 이승만,박 정회정권하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동아 일보 1964년 기사에 의하면 유만수선생은 손재주로 판자촌이었던 이문동에 작은 철공소를 경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고 강윤국선생은 행상으로 ,조문기선생은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했다.*조문기선생은 후에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부민관의거를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ㅡ2014, 11.19
10    <위안부>와 조선(조선,한국,중국조선족)민족남자 댓글:  조회:1881  추천:41  2014-07-31
와 조선(조선,한국,중국조선족)민족남자   최근 언론에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이다. 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조선민족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조선민족사내들을 말한다. 나도 조선사내지만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과 조선민족에게만 가 있고, 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중국조선족들이 사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슬쩍 살펴보면 왜(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고 본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왜(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민족에게 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2013년12월16일                 ㅡ한국경기도안성에서 ㅡ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8월3일저녁 한국야당인민주당및유지인사들이 서울중심인청계광장에서 현정권질책 시민초불집회를 가졌다. 무더위로 숨막히는 속에서도 3만여명 시민, 유명인사(일부 새누리당일원까지 참여)가 참여 하였다.(낡은 핸드폰으로 찍어 사진화질이 좋지 않다)
8    자식기르기 ?! 댓글:  조회:3073  추천:23  2012-04-27
  자식기르기 ?!   전날 저녁 10시경에 처형이 안해핸드폰으로 전화왔다. 근 반시간의 이야기 주 거리는 30살 된 아들이 몇해사귄 처녀가 있는데 집 사주지 않으면 결혼안한단다. 그래 남편이 한국에서 얼마 번 돈으로 首付하고 아파트한채를 샀는데 아직 완공 못되여 결혼도 못하고 있다며 자식도 쓸떼없으니 네남편 잘 섬기고 따뜻이 대해 주라며 장관설 늘여 놓는다. 우리가 결혼하여 근 30년, 주동적으로 편지、전화한적 없고 혹 우리가 전화하여도 무뚝뚝이 몇마디 안짝에 통화끊어 버리던 처형으로 부터 처음있는 일이다. 이늦은 밤에 장거리전화로 긴 시간 얘기하는걸 보면 외동아들로 곱게 키운자식한테서  크게 상처 받은것 갔다. 잠자리에 든 우리는 잠 못들고 처형의 얘기로부터 말거리를 찾아 이야길 펼쳤다. 연변화룡에 있는 나 친구의 아들도 학교를 나와서 광주에서 근무하는데 6년사귀 처녀가 32살된 총각집에서 결혼하려 해도 집 사주기전에는 결혼안한다 하여 친구는 집에 조금있던 돈에 12만원 꿔서 집사서  작년가을에 겨우 결혼하였다. 친구는 집사서 아들결혼해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십몇만 돈 꿨어 집 사 아들결혼시키고 이제 늟으니 축에 들어선 자기네가 자식에게 빚을 넘겨주지 말아야 햐겠는데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와중에 올설 연변텔레비존방송국음력설문예야회프로에서 본 리동훈、오선옥등이 출영한 소품가 화제로 오르며 자식들을 장가시집보내기 위하여 많은 우리민족부부들이 한국등 낯설고 땅설은 외국으로 돈벌이가서 가증 고생에 病、伤、死하며 가족이 흐트러 지고 친인들이 갈라져 서로 그림움의 격통을 겪는 화제로 얘기를 이었다. 그러면서 왜 지금의 부모들은 신심의 고통을 겪으면서 돈벌어 자식들 집사주고 시집,장가보내는것을 자연스런 의무로 생각하고 집에서 강아지나 기르면서 지내는 자식들은 부모들이 그러기를 웅당 받아야 할 일로 인정하는지에 화제 모를 두엇다. 올 설을 이틀 앞두고 우연한 사고로 나는 병원에 2틀 주원 하였었다. 한 호실에 4환자가 들었는데 두사람은 퇴직한 분들로 보양치료고  다른 한 침대에는 50세에 가까운 부부가 열이 올라 링게를 맞고 있는 아들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찌나 부모들을 닥달하는지 머리에 쓰개낄 정도었다. 침대를 올려달라 내려라  물 마이겠다. 뜨겁다, 차다. 조금있다 화장실에 가겠다. 다리  떨려 걸지 못 하겠다. 침대에서 보겠다 등불빛이 강하다. 등불꺼라, 안된다, 카텐막 쳐라 …… 아주 부모들을 똥줄 사게 굴었다. 얼마후 엄마는 그 꼴 사나워 돌아갔고 아버지가 혼자 남아 그시중을 보았다. 덩지 큰 아들은 약소한 아바지를 장밤 앉을새도 없이 굴었고 아버지는 별로 군소리없이 받아 주었으며 그렇게 날을 새였고 아이는 링게를 다 맞았다. 그 아버지는 지친몸으로 이이를 부축하며 집으로 갔다. 그들이 가자 맞은켠 두 침대 사람들이 그두 아들, 아버지를 놓고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얘기중에 전에 중앙외교부에 근무했다는 분의 안로인이 한 이야기가 많히 귀를 파고들었다. 자기네 이웃에 몸에 당뇨병,  肾쇄약 고혛압등 여러가지 질병으로 앓는 한 친구가 있었다. 병원에 다녀봤는데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자 후로는 병원엘 덜 다니고 약 적게 먹으며 부부간은 항상 아침은 박에 나가 早点을 사먹고는 한시간거리의 공공버스타고 香山에 가 등산하고 내려와서는 동우들같이 정심을  植物园  부근에 있는 조용한 음식점에서AA制로 매인당 15원좌우의 소비로 여렷이서 재미있게 예기 나누며 식사한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부부가 함께 시장가 채소사서 저녁해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몇해 견지하며 등산하고 쾌활하게 지냈언지 몸의 병들은 없어지고 신체는 튼튼하다고 한다.  부부의 월급을  합치면 6천원되는데 일부는 고정금으로 저촉하고 그외 많은 부분은 자신들이 만년의 생활을 충족히 하는데 쓰고 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집사고 아이를 학교보내는데 돈이 딸려 엄마보고 도와달라고 하니 로친은; 우리가 너를 이만큼 키워줬으면 됐다. 우리들이 너를 기르느라고 고생많히 하고 몸에 병도 났는데 인제 얼마남지 않은 늙으막 생을 우리마음대로 기꺼이 살려 하는데 안되겠느냐. 보아라. 우리가 가쁜이 사니 몸의 병도 없어지지 않았니? 우리가 병투성이로 맨날 침상에 누웠있으면 너의 생활은 어떻겠니? 엉만진창이 되지않겠니? ! 우리가 이만큼 너를 자래웠으니 네 생활은 네 절로 장악하여 하는게 좋지 않겠니, 라고 권고 하였다. 딸은 처음은 엄마를 너무하다며 아니 꼽게 생각하였지만 후에 곰공히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자기절로 절제있게  돈을 쓰면서 생활을 조리있게 하여 아이도 대학에 보내고 집도 샀다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가 어떻게 세상을 살며 생활 하는가를 잘 가르쳐주었기에 자신들이 오늘같이 떳떳이 사회에 자립하여 살수있게 되였다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해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에; 제 자식키워바야 부모마음 안다는 말이 있다. 말 못하는 동물들도 새끼가 성장하면 절로 살라고 가족무리서 내 쫓는다. 그런데 고급동물로써의 인류가 더 유연하게 자식을 감싸는 것이 총명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 서양인들은 자식이 만 18세만 되면 자립하게 하고 한집에서 생활해도 생활비를 바치게 한다고 한다. 날로 새로새로 변해가는 고속발전의 현대사회에 우리의 생활리념도 그에 발맞춰어 따라 가아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부모들마음이야 다 제자식 남부렵지 않게 호강스레 키우려 하지. 그런데 이렇게 자식키우면 틀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두 두자식 키웠는데 옳게 키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는 키우지 않았다. 젊은시절에 보았던  일본영화 가 머리에 떠오른다. 진실로 엮은 이야기 인데 5,6살에 의외사고로 두팔을 잃은 외동딸이 건실하게 자라 앞으로 부모들이 없는 세상에서라도 자기절로 자립생활을 할수있게 하기 위하여 얌순한 어머니는 독실한 어머니로 변하여 나어리고 페약한 딸의 눈물어린 애원과도움을  묵과하고 잔인하다 할 만큼 딸을 풍랑이 많은 생활자립의 터전에로 내 몬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못된 엄마, 독한 엄마라고 울붓짓던 딸도 결국에는 엄마의 내심깊은 마음을 읽고 악착하게 곤난을 막받아나가며 잔페된 몸의 불편과 생활의 종종 난관을 극복하고 성장하여 생활을 자립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발로 글쓰는 훌륭한 서예가로 성공인들의 무대에 떳떳이 멋있게 데뷰한다. 연연한 녀인들이 이러함에 대장부라고 웨치는 현대 젊은이들 ,그런 자식 키우기를 달갑게 받아 들이는 지금 부모들 …… 옛전부터 남자를 사내라고 하고 꼴꼴한 남자를 사내대장부라 한다. 그러면 현재 부모들께 의탁하여 결혼, 성가하려는 자시들과 그런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행세는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 !  
7    재 북경조선족로인단체생활 현황 댓글:  조회:4086  추천:20  2011-12-12
         재북경 조선족로인단체생활 현황 사회와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향상되고 수명도 길어지면서 로인수도 급증하고 있다. 하여 로인문제는 세계적으로 홀시 할수 없는 문제로 대두하고 우리 민족사회에서도 회피할수 없는 화제로 되였다. 지금 로인들은 퇴직하여서도 건강하며 퇴직하면 손군들보고 집 지키던 이전 로인들의 생활개념을 벗어나서 만년생활을 건강하고 유쾌하며 뜻있게 보내려는 한단계 향상된 로년생활 취향을 보이고 있다.   지금 로인들이 인생의 짧지 않은 만년생활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유쾌하면서도 뜻있게 보낼수 있겠는가? 여기에 지금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북경조선족로인들이 종은 시범을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수도북경)이러저런 좋지 않은 면도 보여주고 있다.                             ㄱ)  거주현황; 지금 북경에는 한국인,조선족집거구인 조양구望京을 중심으로 1000여명(불완정한 추산)조선족로인들이 산재하여 살고 있다. 그중 90%이상은 타지에서 들어온 분들이다.   1) 원 북경에 거주하는 조선족로인들 산재; 원 북경시에 거주(북경호적)하는 조선족들이 출근단위의 분포에 따라 산재함. 주로 화평리(민족사무위원회 산하계통), 중관촌(과학원,민족학원), 그리고 방송국,항천부등부문에 다니는 조선족들도 같지않은 지역에 분포하여 거주함.(이부분 로인들은 건국초기부터 나라와조직의 수요에 의하여 수도 북경에 들어와 중요한 부문에서 공작하던 우리민족의 우수한 분들로서 나라와 우리민족의 정화이다.) 2) 개혁개방후 특히 중,한수교후 근년래 북경에 한국인,조선족들 입주가 급증하며 북경한국인,조선족 중심 집거구인 왕징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약 8,9만명(불완정한 추산)조선족이 살고 있고 亚运村,安家楼,潘家园,화평리, 해정구의 오도구,중광촌, 순이,통현(일부 조선족들이 집사서 거주함)에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널려 살고 있다. 이리하여 재북경조선족로인들도 북경시 시교를 포함하여 산재하여 생활하고 있다.(이부분 로인들이 북경조선족로인수 절반이상을 차지 함) 북경조선족로인들의 분류; 1, 1) 중앙,정부기관이나 학원,연구단체,군및북경내 기업에 출근하다 정년퇴직한 분들. 2) 동북3성이나 전국각지에서 퇴직한 후 베이징에 오고 개혁개방이후 베이징에 진출하여 사업하다가 여기에 남음 분들. 3) 자식들이 북경에서 사업하거나, 근무하니깐 자식 따라 북경에 들어와 손군들을 보살피고 자식들 생활 뒤바라질하며 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분들.  4) 고향에서 일자리 없고 돈 나올 데도 없어 일상 생활유지와 더 늙을 막 운신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북경에 돈 벌려 들어온 도시나 농촌의 빈곤층 로인들 2,로인회;  로년의 고독과 도시생활의 단적함에서 헤여 나와 재미있고 유      쾌한 단체조직활동참여 속에서 삶의 쾌락을 향수하고 신심의 건강을 찾으며 동년배들과의 모임속에서 인생만년의 쓸쓸함을 달랜다. 함께 잊혀지지 않는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정든 고향 그리고, 아작거렷던 동년시절을 회억한다. 고와웃음속에 보내온 지난날들을 나누며 작은 가정울타리 속에서 느낄수 없었던 감미로움을 감수한다. 또 그속에서 인생황혼의 허전함을 잊고 마음의 기탁을 찾기도 한다.       로인조직에 다니는 로인들중70%이상은 녀성분들이다.      *알게 모르게 회미해져가는 민족문화 전파에 영향 준다.   3,교회; 교회에 다니는 로인들 대부분은 근로자계층이나 농촌에서 온 로인들,   4,자유인;(1) 자기식대로 자유자재로 만년을 보내는 분들          (2)생활환경이 따라서지 못한 가정로인, 집에서 손군들 보고, 또 생활이 곤난하여 로인조직에 다닐 비용이 딸려 못 다니는 로인들. 5,취직자; 생활보탬과 앞으로 더 늙으막의 운신 못할 때 준비저축을 위하여 품팔이 하며 허줄한 땅집이나 지하에서 생활하며 사는 분들, ㄴ)   재북경조선족로인조직;(순서는 필자의 취재순에 따라 라렬 하였음)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 성립; 2001년 11월 3일 회장; 초기; 김두남(녀)  년령; 68세,  학력; 중전  전단위;항천부기관근무 (*2008년10월26일  별세) 현재;김상규, 원 료녕인민예술학교 교장, 성립초기 회원수; 첫모임. 14명  두번째 모임, 30명 성황기 회원수; 근 200명 현재; 66명 남; 18명   녀; 48명 년세 많은 분; 83세   년세 작은 분; 54세 형식; 주 합창, 겸,노래, 표연창,무용등  회비; 없음 인원; 정부부문,국가최첨단 과학분류,연구단체,군에서 책임자, 전무가로 있었던 분으로부터 도시 근로자 계층,농촌촌민 활동장소; 고정장소가 없음, 처음엔 아파트단지,공원,식당등에서 모임하고  09년초까지 南3环方庄곁에 있는 福惠居烤鸭店 한족음식점(장사 잘 안됨)에서 매주 토요일 마다 모여 정심 밥 한끼 사먹는 조건으로 장소를 빌러 모임 가지고 큰 모임은 민족출판사 3층 회의실에서 하였음, 현재 화평리교통단지 활동실 사용 활동; 매주 토요일마다 한번 모임 북경 조선족로인 동락회 성립; 2006년 9월29일     첫임회장;, 리수자(녀) 년세; 65세(현 명예회장)      두번째회장; 지광훈  년세; 68세     현재회장;김금택 성립초기 회원수; 38명     현재; 62명 남; 10명   녀; 52명 년세많은 분; 73세    년세작은 분; 53세 인원;; 정부나 국영기업에서 령도로 있던 분으로부터 농촌에서 온 분도 있음   *교회에 다니는 분도 있음 형식; 종합성적 단체, 노래,무용,장구등, 앞으로 복장모델팀 조직 장소; 장소 없어 아파트지하, 단지광장, 공원, 식당등에서 활동하다 구성호텔최성철사장의 성원으로 조양구京顺路东辛店부근에 위치한 구성호텔2층 회의실사용, 현재 남호중원 1구 단지활동실사용 활동;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두번 회비;50원/년 *한달 생일인 회원들은 협회에서 집중하여 하루에 회원전체가 모여 생일 축하 하여준다. 북경조선족양광(阳光)로인협회; 성립; 2004년 9월 회장; 정수덕(郑寿得) 년세; 75세 학력; 할얼빈상업학원  전단위; 방직공장 주관회계, 공장장 담임 초기회원; 15명        현재; 35명 남; 8명                녀 ; 27명 년세많은 분; 79세    년세작은 분; 60세 인원; 대부분 동북에서 온 도시 출근 족. 장소; 88,고향집, 등식당 4곳을 전전하다. 현재 회원가족의 성원이 경영하 는 왕징湖光中街에 위치한 워커힐호텔 2층에 자리 잡았음.(장기적인 못됨) 회비; 매인당 50원/년 북경왕징조선족로인회 성립; 2006년 10월(05년에 성립된 악대의 기초상에서 로인회성립) 회장; 백봉석  년령; 62세  고향; 료녕성반진시,  초기인원; 10명       현재; 42명 남;  7명    녀;  35명  년세 많은 분; 73세    년세 작은 분; 50세 인원; 대부분 동북농촌에서 북경에 들어 온 로인들 장소; 왕징서원 3구 307동 지하 (백봉석회장동생 자영 발 맛사지 임대 방) *활동 종목; 노래, 무용, 건강지식학습  활동; 매주 토요일마다. 한번 모임. 회비;매인 50원/년  *왕징로인회는 대부분 문화층이 낮은 분들이어서 음악, 무용 방면의 선생이 없다. 그러나 선생님을 별도로 찾지 않고 이 방면에 장끼 있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맡아 가지고 회원들에게 배워주고 배우며 화목하게 보낸다. 장애인이나 무식자라도 협회에 참가 할수 있고 회원들과함께 공동히 학습하고 유쾌히 만년을 보낼수 있다. *회원생일은 회원전체가 부담없이 부조를 안 갖고 본인집 연회에 참가하여 축하함 북경시 순의구馨港庄园조선족로인협회(순의구로령위령도를 받는다) 성립; 2005년 3월 8일(원 순의구 조선족로인독보조, *문구 위주) 회장; 안봉식   년령; 68세   전단위; 흑룡강성목단강시 동녕현진정부근무 초기회원; 17명       현재회원; 25명 남;   13명           녀; 12명 년세 많은 분; 76세   년세 작은 분; 57세 인원; 전국각지에서 북경순의에 와 사업하거나 자식따라 온 분들          회비; 매인 100원/년 장소; 馨港장원단지내 약 30평되는 무료사용활동장소와 장기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자체의 문구장(자체로 건설한 것임) 있음 *순위구로령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북경조선족저녁노을무용단 성립; 2000년12월 회장; 제1임; 문명, 년령; 73세 제2임; 김청 현재회장; 리청  년령; 68세  학령; 중앙민족학원중문부  전단위; 중공중앙대외련락부 아세아주 2국 초기인원; 60명  현재; 70 여명  평상; 40 여명 활동에 참가 북경시호구회원과외지인(농촌인포함)평균절반 *여성위주, 특별공연시 남성로인 초청 년세 많은 분; 83세 년세; 작은분; 55세 평균년령; 65세 장소;중관촌단지(中关村社区)복무중심활동실; 년 사용비; 2000원 활동; 매주 목요일마다 한번 회비;  200원/년 북경중관촌조선족로인무용대 성립; 2001년 봄 초기대장; 김선녀  년세; 68세   2임대장; 리정회   년세; 66세 현재대장; 장인수(녀)  년세; 62세   학력;고중 고향; 흑룡강오상시 년세많은 분;75세         년세작은분;56세 초기대원; 17명    현재대원; 24명 북경호적; 4명   남성분 없음; 장소; 중관촌단지(中关村社区)복무중심 3층 활동실, 년 사용비용 2천원 회비; 매인 200원/년 북경화평리진달래조선족로인무용대 성립; 2001년8월, 2006년 3월 정식으로 북경화평리진달래조선족로인무용대로 개명 회장;윤영자 년세; 69세 학력;대전,장춘광학정밀기계학원 전단위;중국기량과학연구원 초기회원; 8명  현재; 19명   남; 7명    녀; 12명 년세높은분; 74세  년세작은분; 54세 먼곳에서 활동에 다니는 분; 하북성 연교燕郊, 천진시 장소; 화평가원단지和平家园社区(무료)와 交通社区(년사용비 1천2백원)에 활동장소 두곳 회비;10원/월 교통단지장소 사용시 경비 활동;매주 두번. 북경조선족로인아침노을 무용대; 대장; 황명월  년세; 67세 학력; 대전  전단위;북경중의학대학회계  초기회원; 선생님을 청하여 부채춤 배울 때는 약30 명, 그중 소분대로 성립할때는 15명 좌우, 현재회원 16명  *주 녀성위주 남; 고정적인 분 없고 연출종목 필요시(사무놀이 같을 때)초청참가 년세많은분; 67세       작은분; 54세   인원; 북경호적 소수   외지인; 다수 무용선생; 중앙민족가무단의 허명월선생, 동방가무단의 박인자선생 회비; 매인 200원/년 장소; 없음, 처음은北沙滩농업기계과학연구소의 낡은 땅집에서 활동하다 회수.  현재 장소없어 활동 정지상태 북경왕징조선족아리랑예술단 2006년9월 회장; 허명애 년령; 66세  학령; 조선함흥공업대학고분자계 전단위; 감숙성전수시田水市风洞연구소 초기회원;12명  현재; 12명 조선족로인들의 자즌 류동성으로 정규적인 인원 확보 곤난 년세많은분; 66세  작은 분; 54세 일상 녀성분만 참여, 특별공연시 남성로인들 초청하여 참가 함 회비; 일체비용 회장부담 활동; 매주 2번 휘황했던 시기; 2007년 중국총공회연출 경연시 물동이 춤으로 1등상 수상 장소; 없음. 전에 식당을 사용하였음. 북경시 로년활동센터(위치왕징)로 몇번 찾아갔다 거절당했음,현재 림시 회장개인 주택에서 활동함 북경望京花园3区老年门球协会조선족로인문구대 북경왕징화원3구 주민위원회산하 로년문구협회 소속 * 한족은 월요일오전과금요일오전만 치고 그외 시간은 조선족 사용(장소의 운영비용은 조선족 전 부담) 성립; 2006년 총회장; 冯旭东 한족; 북경인 제1임대장; 김일룡,김영호,김영유 현임대장; 장상철 년령; 59세    학력; 중전  전단위; 연길시정부근무  회원; 22명 남; 19명   녀; 3명 년세많은 분; 68세    년세작은 분; 52세 회비; 전 20원/년  현재 30원/년 장소; 북경조양구왕징화원3구단지내 위치(고정적인 장소) * 북경순의구馨港庄园조선족로년문구대와 자주 우호적으로 래왕하고 경기하면서 기술 증진을 한다. 일년에 몇번씩 회원들이 함께 려행도 다니고 회식도 하며 회원간에 정분을 두텁게 하며 만년을 유쾌히 보낸다. 북경조선족중,로년탁구동호회 성립; 2008년4월초 회장;강태호  고향;길림성통화 입경전 교원근무 회원; 32명    남; 22명   녀; 10명 년세작은분; 45세   년세많은분; 74세 회비; 없음  장소; 규정된 장소와기재없음, 원 왕징남호동원 아파트단지내 탁구장에서 활동하다 한족들의 배척으로 쫓겨 왕징서원3구 아파트 단지광장 운동구역에서 한족들과함께 활동함 총 12팀 조직(이밖에 작은 규모로 정식적인 명칭도 없고 정규적인 활동일 도 없이 모임 가지는 조직도 몇팀 있음) 참가인원; 425명      그중;  남 104명   녀; 321명  년세많은 분; 84세    년세작은 분; 45세                                                               ㄷ) 활동장소; 장소문제는 북경조선족로인조직활동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이다.   북경시 한족로인들은 각 단지마다 로인활동중심이 있으며 정부로부터 자금도 부여하여 잘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재북경에 거주하는 (한족빼고) 소수민족로인들중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하는 조선족로인(북경호적인분도 있음)들은 통일적 조직과활동장소도 없다. 전에는 정부에서 도 좋고 민족사무위원회계통, 민족출판사, 민족문화궁,민족대학,등부문에서 조선족로인(당시는 북경시호적인 로인들만 있어 인원수가 적었음)들을 활동도 조직하게 하고 장소도 마련하여 주었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들도 다른 민족 못지 않게 도시로 진출하고 입경하여 북경의 조선족인수도 늘고 로인수도 따라 많아 졌다. 그러나 경제효익 시대에 진입하면서 조선족로인들은 경비출처도 없으니 자연히 장소도 없게 되였다.                    장소가 없으니 제일 큰 애로다. 이번 활동은 어느 식당에 가서 자리되면 정심 한때 사 먹고 그곳에서 반나절 자리를 빌려 활동하고 다음활동은 노래방(노래방은 보통 낮에는 영업안 함)에 가서 반날 모임 갖고 한다.  동북3성을 비롯하여 조선족이 거주하는 각 지역마다에는 로인회,독보조등로인조직이 있고 문화관과 같은 활동장소도 있는데 10여만(불완정한 추산)명에 천명되는 조선족로인들이 살고 있는 북경만은 확실한 통일단체도 없고 정식적인 활동장소도 없다.  로인조직에서 규모 큰 활동을 조직하려면 방송국, 출판사, 번역국,민족대학 같은 조선족일군이 많은 단위들에서 주체하여 비용도 대고 후원도 받아 조직하고 큰 모임은 항상 민족출판사 3층 연회청을 빌려 련합으로 혹은 단독으로 많이 활동했다. 그외 북경 교외를 포함하여 각 지역에 널려있는 조직들은 한달에 한,두번씩 영업이 잘 안 되는 식당이나 노래방,광장,야외 같을 곳들을 전전하며 간고하게 모임을 하고 한다.이것도 장기적이 못되고 여기저기 좇기워 다닌다. 심지어 단기간 비여 있는 지하나 개인주택에서 일시 활동을 진행하는 조직도 있다.   장소문제는 어디까지 경제 문제이다. 출근족로인들은 퇴직금 나오는 걸로 생활하고 손군들 잔돈을 주고 이래저래 쓰면 얼마 없고 농촌에서 자식따라 들어온 로인들은 자식들의 많지 않은 봉금에서 조금씩 얻어 쓰는 처지에 어디 활동에 참가하여 내놓을 돈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장소문제는 난감한문제이다. 장소있는 단체; 북경화평리조선족로인진달래무용대, 1주일 한번 사용할수 있는 화평리단지 주민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약 40평되는 무료활동장소 있음, 북경조선족저녁노을무용단, 중관촌단지복무중심에 2000원/년               내고 1주일에 한번 사용할수 있는 약 60평되는 활동장소 있음           북경중관촌조선족로인무용대, 중관촌단지복무중심에 2000원/년내고 일주일에 한번 사용할수 있는 약 60평되는 활동장소 있음   합쳐서 단일 단체로 장소를 마련한다. 현재 여건이 안 되여 단 시일내에 재 북경조선족로인 통일단체를 창립한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의 발전방향이라 본다.  그러면 정부의 지지나 민족유지인사들의 후원을 얻기 쉽다. 경비도 절약하고 참여 분들의 부담도 덜 것이며 민족대화합의 화기로움과 정체성을 나타낸다. 그러면 민족사회에서 도 환영할거고 후대들도 반길 것이며 후세에 좋은 본과시범을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 오늘은 이단체, 래일은 그 협회, 모레는 저 동호회. (사람이 많아 단일체로 활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이렇게 륜번으로 돌아가며 활동하고 큰 모임이 있을 땐 련홥으로 한팀을 무어 출범하면 맞설 팀이 없을 것이고, 사회에 우리민족의 우수함을 력력히 과시 하고 타민족들에게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련대성을 충분히 보여 줄수 있다.  그렇지 않고 여러 단체별로 정부부문이나 기업, 단체의 지지,후원을 바라면 어느쪽을 돕고 어느쪽을 후원 안 하겠는가?                                       ㄹ) 긍정적인면;로인들이 자원적으로 단체를 묶고 조직활동을 하는 것은 만년의 생활을 다채롭고 뜻 깊게 하는 활동이고 고적한 도회지생활에서 인생만년의 생활을 이채롭게 하는 무대이다,  로인들에게는 조직모임이 만년의 생활에서 뜻있는 인생만년의 윤활제이고 감미로운 마음기탁 장이며 마음 쏠리는 곳이다. 또 기대하는 날이다,  항상 가정이란 작은 울타리안에서 손군들이나 보고 집 지키며 자식들 생활 뒤배나 하며 고적하고 단조로운 나날을 보내다 활동날이 되여 그립던 동년배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기쁨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날을 기달리고 년로하신 몸으로 친히 맛나는 음식을 장만하여 갖고 와서 함께 나눠 드시며 얘기 나누고 정분을 나누며 인생을 향수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이다. 만나면 반가와 따뜻이 손잡고, 얼싸안고 서로 눈굽을 찍는다. 그간의 그리움을 이슬먹은 눈길로 촘촘히 찍어보고 축축한 목소리로 서로 문안하는 것이다. 모임날 로인님들의 만남의 자리를 목격하는 장은 눈굽이 젖어나게 하는 자리이다. 그렇게 삶과정분을 소중히 여기고 생을 열애하는 우리 로인님들인 것이다. 때문에 조직의 일에 물심 량력 아끼지 않고 발벗고 나서 참여하며 그속에서 생의 재미와 즐거움을 감수하고 인생황혼의 쓸쓸함을 달래려고 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하는 짧은 반나절의 모임이지만 모여서 노래하고 춤 추고 점심에는 단란히 모여 앉아 술과맛나는 음식을 나누며 생활에서의 흥미있던 얘기와 힘겨웠던 일들을 나눠 풀며 함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옛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귀막당기는 옛곡에 맞춰 벗적 땀나게 춤추고 나면 그간 힘겨웠고 불쾌했던 일들이 하늘밖으로 날려가는 것이다. 연후 동료들과 건강히 지내여 다음번 모임에 다시 만나자 아쉽게 손 저어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 료녕인민예술학교 교장을 담임하다 퇴직하고 2006년도에 북경에 입경하여 사업하던 중 아는 전 동료의 소개로 합창단에 참가하여 음악선생으로 활약하는 김상규(현재 합창단단장)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로인님들은 인품이 좋고 서로 감싸고 단결하며 화애롭다. 한번씩 모이면 친구같고 친척 같고 한 가족 같다. 모임 할 때마다 자원적으로 이번 모임에 이분이 찰떡 쳐 오지 않으면 다음번엔 저분이 소떡 해 오고 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있는 모임 끝난 후 헤여 질 때면 모두 아쉬워 손잡고 놓지 않는다. 여기에 화평리 모아파트단지 주민위원회서기(한족)의 말을 올려본다; 조선족로인들은 참 훌륭합니다. 삶을 열애하고 인생만년을 문명하고 뜻 깊게 보내고 있습니다. 자원적으로 문명한 군중단체를 무어 조리있고 화애롭게 조직활동을 합니다. 공식적인 경연무대에 올라 우수한 성적도 따오고 세계적인 행사인 북경올림픽 경축활동연출행사축제에도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따내여 나라와민족을 위하여 영예를 빛냅니다.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하고 공익연출로 복장등면에서 조직에서 활동경비가 딸려 하면 본인들이 선뜻 자금을 내놓습니다. 자연재해리재민돕기 같은 모금활동에도 적극참여하며 사회와 조직의 수요라면 적극지지, 성원 합니다.    우리 단지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산하 부서가속들이 모여 사는 단지로 한족을 포함하여 몽고족,위글족,좡족등 9개 소수민족이 공동히 생활하는 단지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사회와단지내의 유익한 공익활동이나 연출수요로 경제래원이 없는 주민위원회에서 제한된 경비 부족으로 개인들의 협찬을 바라면 조선족로인들처럼 선뜻 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민위원회일군들이 페품을 거두어 팔거나 갖은 방법을 대여 해결해야 합니다.   필자가 9월초 북경4중 국제부로 일보러 차 타고 가는 도중 옆에 앉은 안경낀 62세 党씨 한족로인과 얘기 나누던 중 내가 조선족이라니 그분이 하는 말이; 조선족은 우수한 민족이다. 내가 사는 东河沿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조선족로인들처럼 문명하고 재미있게 만년을 보내는 민족은 못 봤다. 내가 몇번 일이 있어 왕징에 갔는데 왕징체육광장이나 남호중원 {백마강}음식점옆 광장에서 조선족로인들이 민족옷을 입고 모여서 영화 {{영웅아들딸}}에서 王芳이 메고 춤추던 북을 메고 남녀로인들이 유쾌히 춤추는 것을 보았다. 또 조양공원에서 조선족로인들이 많은 사람들앞에서 고운 민족복장을 입고 활기에 넘쳐 마음껏 노래하며 너울너울 춤추는 것도 보았다. 참 보기 좋더라! 그런데 한족들을 보라, 단지,가도마다에 棋牌실이 있다.말이 棋牌실이지, 실은 도박장이다. 심지어 북경중심지고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북 2환로 지단地坛공원쪽에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인행도에 몇십명남녀로소가 몇십상 죽 펴고 앉아서 마작놀고 있다. 강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도 계속한다, 꼴 부견이다. 수도의 의미지도 흐리고 국제도시의 형상에도 먹칠한다. 가정화목에도 영향 끼친다. 집일 제대로 안하고 돈 잃으니깐! 또 그렇게 하루종일 한 자세로 장시간 앉아 있으면 경추나척추병에 걸리기 슆고 돈 따겠다고 항상 머리가 긴장상태에 있어 중풍도 걸리기 슆다. 그런 사람들의 시간도 아깝다. 그런 시간이 있으면 책이나 보고 뜻있는 일이나 하겠다.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특히 금싸락 같은 만년의 시간은! 조선족들은 참 훌륭한 민족이다.  하며 조선족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부정적인면; 조직간의 조합이 미적하고 단합이 원만치 못하다.   a,단체사이에 분규가 있으며 소통이 적은 것으로 본다. 이것이 단체성을 이루고 원활한 조합을 이루는데 불리한 면이라 생각한다.  b,서로 우리조직이 합법단체요? 우리협회가 더 좋소? 하며 내부사람간에 갈등이나 조직사이에 모순이 있으면 서로 량해 하거나 너르게 생각 못하고 말 싸고 다니며 정체성 윤합이나 단결에 좋지 않은 언행을 취한다.ㅡ 말이 많은 민족본성의 유전성이라 할까?!  어떤 부문이나 기업인들이 한 조직을 후원해주면 왜 그 쪽은 봐주고 우리는 안 해주는가 말 쳐들고 다닌다. 저녘노을 전임 문명회장의 말;  c,전에 정부부문, 회사의 령도층에 있었거나 또 모종기능(예술등)쪽에 장끼있는 분들은 도시근로층이나 농촌에서 온 분들을 차별시 대하는 형상도 있어 이런 층에서 온 로인들은 한 조직에 가입하였다 퇴출하거나 다른 단체로 가지 않으면 아예 로인조직활동에 참가 안 거나 교회로 간다.이런 속에 조직간의 단결에 불리한 말들이 퍼진다.      전에 단위나 기업에서 관리층에 있었던 일부인들은 로인조직에 들면 창시인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선발된 책임자가 아니더라도 령도자가 되려고 조직단결에 불리한 언행을 행하며 사람간조직간 단합에 불리한 인소를 조성한다.    조직을 자기 한 개인의 재산으로 여기며 지역의 통제자(山寨王)행세를 하려 한다. 08년에 별세한 합창단 김두남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원래 어떤 사업단위, 직위에 있었던지 퇴직하여 사회에 나오면 그것은 이미 지난 력사입니다. 지난날을 갖고 어떤 민간단체에 진입하여 행사하려면 그것은 틀린 짓이고 단체 단결에도 불 유익합니다. 특히 퇴직하여 사회에 나와 내 마지막 생을 사는 만년생활인데 무엇이 두렵고 겁나겠습니까? 어떤 단체에 자유로이 가입하여 내 마음껏 놀고 장끼를 부리며 사는 것이 그생의 마지막삶의 진정 알짜고 사는 멋입니다. 전엔 돈 때문에 직장에서 령도나 윗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살았는데 늘그막에 어쩌다 로인단체들어서 무엇이 두려울것이 있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던지 참가하지 않으면 되지요.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 속에는 말이 많고 단체분렬이 잦다. d, 여러 단체로 갈라졌기 대문에 재력과 인력,기재(악기,운동기구등)등이 분산되여 조직간의 단결 단합에 불리하며 로인들이 다니기에도 불편하고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 확보에도 영향 미친다.      e,단일체가 형성 못 되였기 때문에 정부차원이나 민족지성인들의 경제적지지나 성원을 받기 힘들다.  *어떤 조직은 정규성과전업성을 추구하여 장끼가 없는 로인들은 조직활동에 참가하기 싶어도 가입 못하거나 부득이 따돌리게 된다.  *노래와춤, 예술면에 장끼가 없고 운동을 즐기는 남성로인들은 장소,기재등원인으로 로인활동 조직권에 가입되기에 제한되여 있다.           *! 많은 로인들이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이 여러단체로 갈라져 있는데 대하여 곤혹하고 가슴 아파하며 각 조직들이 한 단체로 무어 져 북경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로인들이 단란히 한자리에 모여 재미있게 활동하면서 보내기를 극히 바란다.                               ㅁ) 현사회에서 로인문제는 회피할수 없는 사회형상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로인들이 마음놓고 활동할 장소가 있고 하면 로인들이 만년을 유쾌하고 즐겁게 건강히 보낼 수 있어 사회와가정에서 로인들에 대한 부담도 덜수 있다.  *로인단체 활동의 주요취지는; 첫째 로인님들이 만년의 공허감을 메우고 쾌할하게 놀면서 건강을 도모하며 만년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지금 사회의 로인생활은 지난날의 로인들의 처지와 많이 다르다. 퇴직했거나 자식들이 성장했어도 건강한 상태다. 사람간에 이웃간에 장벽을 치고 사는 도시의 박한 세태와 가정이란 작은 울타리 안에 갖히여 생활하는 로인들은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동년배 친우들과 함께 지난날과동년을 회억하고 고향을 그리며 함께 보낼수 있는 모임은 그렇게 흡인력 있고 마음쏠리는 곳이다.)  둘째는 놀면서 {회미해져가는 조선족문화를 살리며 놀자!} 는 것이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 활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취지라 본다. 로인들이 우리 노래 부르고 춤추며 활동하는 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민족문화전파에도 영향 미친다. 현재 중국조선족의 문명한 민족문화는 죽어 가고 있는 실태다. 이것은 필자 한 개인의 관점이 아니다.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에 다니시는 1940년대 혁명에 참가한 80세 고령의 전경련로군인은 필자의 손을 잡고 민족과로인들을 위하여 훌륭한 일 한다고 그렇게 치하 하시며 꼭 조선족로인들의 활발한 생활모습을 잘 써서 우리 로인들의 문명한 로년생활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민족로인들이 장소,환경,자금,등 애로를 극복하면서 넓은 북경땅 여기저기 그 멀리에서 모여와 모임 가지는 것은 단순히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놀자는 것뿐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 가족생활의 단조롭고 고독한 생활 울타리에서 벗어나 그간 그리웠던 전우나 지기, 조직성원들을 만나 유쾌하게 놀면서 문명하게 만년을 보내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껏 춤추고 노래하고 나면 마음이 쾌활하면서 신심이 건강하다. 로인들이 건강하면 사회와가정, 자식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다음으로 또 건강하고 질 있게 만년을 보내 것은 화애로운 사회건설에 도 도움이 되고 특히 죽어가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문명한 문화를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시면서 때문에 여름의 땡볕이나 겨울의 추위에도 로인들이 광장이나 공원,가두에 다니며 민족복장을 입고 조선족노래와춤을 추며, 늙은이들에게 힘 부치는 민족가무를 몇 달씩 준비하여 공식적인 무대,텔레비죤방송에도 선보여 무게 있는 성적도 따온다고 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힘써 달라고 심심 당부하시는 것이 였다.(단순 필자를 치하하는 얘기라 샐각안고 많은 민족지인들이 여기에 중시를 돌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ㅡ북경에서 조선족로인조직들이 성립되여 지금까지 북경조선족로인합창단, 북경조선족저녁노을무용단, 북경화평리진달래조선족무용대, 북경아리랑로인협회등 조직들의 조선족로인들은 진지하고 열심히 련습하며 로년활동에 적극참가하여 전국성적인 로년콩클활동과 2008북경올림픽경축공연,북경텔레비죤문예프로등 공연활동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여 국가유관부문과 북경시정부, 북경시민위에서 발급한 우수상과 긍전적인 찬양을 받았다. 북경조선족로인들 속에는 정치,군사,경제,문화,기술등방면에서 나라에 공헌한 우수한 분들이 많으며 그들은 또 우리민족의 우수한 인재이고 알짜인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민족의 우수한 문화가 사라져가는데 가슴 아파하며 그것을 살리기에 심혈을 쏟고 있다.  그것은 모임은 미룰수 없는 민족문화발전에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를 잘 알고 소지한 현재 우리로인들이 우수한 우리민족문화계승,발전의 중임을 떠메고 경상적이고 활발한 모임속에서 문명한민족문화를 향수 하고 만년을 뜻잎게 보내면서 동시에 활동을 통하여 날로 색이 바래져가는 우리문화터전을 가꾸고 지켜 발양하여 민족문화전파에서 중요한 중추,뉴대 작용을 하는 것이다.  합창단에 다니시는 항천부 제일 연구원1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셨던 75세의 동서운로인도;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어떤 땐 전번 모임에서 보았던 사람이 오늘 모임에 오면 중풍 맞았다거나 사망 되였다 합니다. 우리에게 고정적인 작으마한 활동장소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눈치안보고(토요일마다 한족식당에서 점심한끼 사먹고 반나절 활동함) 노래하고 싶은 사람은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사람은 춤추며 운동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운동하면서 유쾌히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있겠는데……그리고 이제 우리까지 우리민족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중국에서 문명하다고 이름있는 조선족의 우수한 문화는 끝장입니다. 지금 우리아들, 며느리들은 집에서도 조선말 하지 않고 조선족의 례의범절도 잘 모르며 휴일이나 명절이면 밖에 나가 친구들끼리 마작놀지 않으면 현대노래나, 서양노래 부르고 사교춤이나 춥니다. 손군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이러니 우수한 우리조선족문화가 단층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임 가지며 노는 것을 단순히 우리본인들을 위해서라 생각하면 틀립니다.  *많은 로인들의 공통점은; 1,현재 중국조선족의 전통문화는 죽어가고 있다.      현대 조선족 젊은이들은 민족력사, 문화,례의를 모르고 민족예술,음악을 즐기지 않고 흠상 못하며 심지어 조선민족의 전통가요인 아리랑도 모르는 젊음이 들도 있다. 2,그들은 사회, 직장이나 가정에서 까지 민족어를 쓰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중국조선민족문명문화 전교(传交)전환점에 있는 우리 로인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중국조선족문명,문화계승 발전에 단층이 (이미 그 증상이 보이고 있다.) 생긴다. 그러면 현재 우리로인들이 민족과 선조들에게 미안하고 죄짓는 것이다. 3,때문에 중국조선족민족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살리자면 우리  로인들이 력사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하여 자신들의 행위로 후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며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자손들에게 문명한 민족문화를 물려주고 대가 끊기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만 마음놓고 눈 감을 수 있고 찬란한 문명문화를 창시하신 선조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며 민족앞에 죄짓지 않는다. 08년 년말 북경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체한 携手奥运系列体育活动精彩瞬间颁奖会에서 민족사무위원회牛颂부주임으로부터 북경조선족저녁을무용단을 대표하여 年度{{特别贡献奖}}을 수여 받은 저녁노을무용단 리청회장님은 필자를 보고 당시 분위기 감수를 말함에 있어 상장수여 감에 대하여서는 이야기치 않고 중관촌모중학교에서 한족민족체육항목교육을 본학교 체육학과내용에 편입하였다는 데 대하여 애기하면서 우리민족도 조선족 전통체육항목을 학교교육일정에 투입하였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 우리민족문화단층에 근심을 표하는 것이 였다. 여기에 북경조선족양광阳光로인회 정수덕회장님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의 모임이 우리 로인들이 만년을 유쾌히 보내자는 목적도 있지만 또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활동모습을 우리후대들에게 보여 주며 영향 줌으로써 우리조선족의 문명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하는데 디딤돌 역할을 놀도록 하여야 한다.}} * 그러자면 민족사회나 우리후손들이 로인들이 마음놓고 자주활동할平台를 형성,조직하고 창조하여 주어야 한다. &!) *합창단김두남(별세)회장님; 어떻게 재북경조선족로인들이 단란히 한자리에 모였으면 좋겠다. *합창단 로혁명군인; 젊어서 나라와사회,가정위해 분투하고 고생 많이 한 우리 로인들이 늙으막에 마음놓고 유쾌히 활동할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동락회 전 지광훈회장; 재북경조선족로인들이 단합되고 마음놓고 한자리에 모여 활동할 장소를 마련해 달라고 사회에 호소한다. *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머리에 피뜩 송강, 정철선생의 {훈민가} 중의 한 단락이 떠올라 이{명구}로 헤저분한 나의 글의 결말을 장식해 보려 한다. ㅡ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늙기도 서럽거늘 짐 조차 지실까?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울가 근4달간의 취재로 이 글을 마무리 짓고 필을 놓으면서 우리 로인님들 만년에 건강하시고 유쾌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9년 5월 18일ㅡ09,5,2                         김인철   ㅡ2009년도에 접어들면서 북경조선족로인조직들에 많은 파동이 생겼다.   ㅡㅡ2011년 12월 9일 재수정
6    고향사(思)정 (2) 댓글:  조회:2964  추천:5  2011-11-23
고향사(思)정   (2)      동네사람들과의 얘기속에 다른 한가지의 말거리가 사람이 죽어 메내갈 사람이 없다는 예기가 또한 마음쓰리게 들려왔다. 동네에 사람이 없으니 생각잖던 일들이 퇴여나는 거다..   전엔 동네에 상사가 나면 온 마을조선족들이 모여 와 본집에서는 근심걱정없이 손도 안돼고 장사를 치뤘다..   우리고향에서 장사를 치는데 보통; 향도계(조선족治丧委员会)에 7명, 상여나갈 때 선두에 2명, 집채(상여)를 메는데(청,좡년) 8명, 메는사람 바꿔줄 사람 3、5패에 3、40명에 뒤일 보는사람 10여명으로 70여명 일군들이 있어야 장사를 치룰수 있었다.    그런데 동네 청,좡년들이 다 빠져나간 오늘에 왔어 상사가 나면 난감하다..    에 올려 모셔 내갔느데 이제 우리죽으면  2抬大轿도 없으니 서러워 죽어 도 눈 못 감겠다..> 이는 몇해만에 만난 건너집 70넘은 동네할머니가 나와  손잡고 얘기하던중에 한 가슴저미는 말이다..   지난헤에 ㅎ씨 한집에서는 사람이 너무 없어 집채(상여)를 달구지에 실어 묘지로 나갔다 한다.    태여나 평생 가정과 자식들을 위하여 헌신하여 온 로인님들, 이세상을 떠나 아득한 저세상으로 고독히 혼자 가는 길인데 근심갖고 한 품고 가야하는 그걸음 참 안됐다..   버젓한 산골농촌마을,  콩크리트거리엔 행인이 없고, 벽돌집이 주인이 없어 찌부러져 가며, 쫇은 버덕의 산골농촌마을에 구전한 운동기구를 갖춘 넗직한 쉼터광장엔 일년가도록 사람발길이 다이지 않고 . 산골농촌에서 금싸락같은 부침땅들이 줄어들고 묵어 황무지로 변해가는 풍경.   ㅡ언제면 다시 개짓고 닭울고, 아이들 뛰놀고ㅡㅡ  2011년11월 22일 북경  김인철
5    고향사(思)정 (1) 댓글:  조회:1968  추천:1  2011-11-21
                                           고향사(思)정                           (1)   11월 2일 어머니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안해와함께 아들며느리(금방 결혼)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갔다.  이렇게 고향으로 가는 길은 별로의 심정이 였다.   산과곡이 첩첩히 들어선 고향벌에 들어서니 늦가을의 눠런 벌판이 쓸쓸하게 눈앞에 안겨왔다.    마을들은 정부의 혜택으로 거리들을 콩크리트로 빼고 일부 집(주 큰길옆)들은 붉은 유리기와를 올리고 횐벽으로 장식하여 보기 좋와다.    거기에  비해 마을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오후 1시경인데 들에서는 5,6사람이 논밭에서 힘겹게 늦은 탈곡하는것이 보이고, 마을은 인적기 없었으며 보기좋게 뻗은  콩크리트길엔 행인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들과동네사람들과의 얘기속에 마을에 사람이 없어 살멋이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우리지방에서 도 조선족이 많히 집거하여 사는 3부락중 하나 인 큰마을(85년도 인구조사시 1507 명조선족)로 마을호수가 1000 여호에 인구가 4천여명 되는 편벽한 산골치고는 큰 동네 데 조선족뿐아니라 인젠 한족들도  많히 외지로 나가여 동네는 절반(학교다니는 애들도 대부분 현성같은 곳으로 가 마을에서 아이들이 울고,불고 뛰놀는 것도 보기 힘들다. ) 인구가 줄어 아주 족족하다 한다.   그속에 농사일 하기 힘드다는 얘기가 많았다. 동네에 일손이 모자라 농사일 하기 힘드다는 것이다. 젊은 청,장년들(남,녀ㅡ60세아래 사람들 동네에서 보기 드믄)이 밖에 나가고 없어 60넘은늙은이들과 정황이 딸려 밖에 못 나가는 사람들만 남아 힘겹게 농사짓고 있다.    봄 파종은 그럭저럭 몇일 늦춰 손되는 대로 심어 만 넣으면 별일 없는데 가을걷이는 그렇지 않다. 동북지구 대부분지방은 무상기가 짧아 서리가 일찍 내리고 어떤해는 예상밖으로 눈까지 일찍 내려 다 된 곡식들을 눈속에 파묻히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속에 농사일에서 주력작용을 하던 남,녀 청장년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어 힘없는 사람들만 남았으니 그 정경은 상상만 하여도 알만하다.    항상 친척,친우들 ,2,30여명이 한패씩 합셈해  탈곡하는데 가을엔 먼저 한전걷이를 하고 다음에 수전가을 시작한다. 보통 콩 탈고도 벼가을,탈곡과 함께 한다. 밤잠 도 못자고 숨돌리새 도 없이 돌아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주량인 벼탈곡은 항상 뒤로 미루게 되고 다 여물고 마른 벼알은 비를 맞히지 않으면 눈밑에 밀어 넣기 일쑤다.   03년 가을 변덕스레 일찍 눈내려 벼탈곡을 비,눈 맞으며 하여 많은 집들에서 젖은 벼를 말리지도 못하고 두지에 넣어 두었는데 봄에 나가 겨울에 얼었던 벼알들이 녹으며 두지 안에서 썩어 반수넘은 집들에서 썩은 벼를 마대들이로 버렸다. 장씨(36세)집에서는 근 일년낟알 11포대(한포대 약1백4,5십근)벼를 버렸다. 현재 이런일이  고향에서 비일비재로 발생하고 있다.                            가슴앞은 일이다. 농우들이 새벽에 일터로 나가고 저녁에 달 지고 들어오며 밤새고 땀 흘리며 힘겹게 지은 낟알들을 버리려니 얼마나 가슴아프겠는가? (여기에 대한 나의 기사를 길림신문 03년 8월16일부 제일면에 실었다. )   그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히 빠져나간 현재, 마을의 상황은 더 못하다.      2011년 11월 19일    북경에서  김인철     
4    한국주부들과 조선족가정부들간의 대돌 댓글:  조회:7344  추천:114  2011-09-27
이 화제는 내가 05년도에 경제생활잡지사에 선보여 입사하고 두달넘어 취재하여 계열문으로 잡지에 나가서 북경조선족사회와 한국인 사회에 작으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잡지에 글이 나간후 북경에서 한국인집에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여성들(혹은 한족여성들)로부터 이따금 전화도 오고, 거리에서 만나면 붙잡고 자기네가 당한 불공편에 대하여 토로하여 건네 오는데 오늘도 한국인집들과 조선족가정부들 사이에 계속 마찰, 대돌이 있어 다시 화제로 끌어 올려 본다. . 당시까지 중국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대부분 정부, 단체, 대기업주재인으로, 혹은 중,소기업자들이 였고, 유학생이였다. (당시, 재북경한국인 10여만명, 불완전추산) 그런데 현재는 가지가색,여러부류의 한국인들이 입경하여 재북경 한국인수가 15만명(불완전한 추산;북경한인회에 등록된수 8만여명)좌우가 된다고 한다. 이들속에는 고급교육을 받고 상층환경에서 생활해온 사람에 초등교육에 저하층에서 살아온 사람도 많다. 현재,재북경한국인호수는 약 5천여호(단솔인, 유학생등)이고, 한국집들에 다니는 가정가정부 4천여명 된다. 한국인집과 중국조선족아주머니들은 같지 않은 사회제도, 환경에서 태여나 생활했고 받은 교육 또한 차이점이 많아 접촉상에서 많히 부딕치고 실갱일 하며 해를 지우고 있다.  북경 왕징의 상징으로 되여있는 왕징체육광장 09년 정월보름이지나 조양구大望京땅집에 거주하는 길림성통화에서 온 ㅊ씨아주머니(40 여세)가 하루저녁 우리집에 찾아 와 이런 하소연하며 신문에 내여 사회상으로 평정해달라며 얘기해 왔다. 그가 望京国风北京106호아파트 을단원6층에 집 잡은 모한국기업에 다니는50세 데는 한국인 ㅇ씨 아저씨집에 근 2년 근무하였는데 아저씨가 어찌 나 까다롭고, 좀채긴지 힡들게 일하였다 한다. 평일도 그렇고, 일요일은 휴식일인데 도 이따금 전화와서, 이튼날에 출장가니 옷 씻어 달라, 넷타이 다리미질 해 달라, 친구들이 오니 반찬해 달라며 낮이든, 밤이던 시도 때도 없이 부른다, 아이둘이 학교다니는 형편에 돈이 많이 수요됨으로 참고 그렀저럭 견디며 일해 왔다, 그런데 올 음력설에 한국에 들어갔다. 정월 17일, 21일만에 온다 하여 ㅊ씨아주머니가 17일(음력)낮에 집안청소하고 채소를 장만해놓고 왔는데 저녁5시 넘어 ㅇ씨아저씨가 아니꼬운 목소리로 아주머니에게 랭장고(先生말대로 그간 집안전원 전부 꺼버렸음)에 넣어 두었던 송편과김치를 어찌하여는가 며 전화왔다. 아주머니가 오늘 청소하며 보니 떡과김치에 콤팽이 껴 버렸다 하니 먹을수 있는것을 버렸다며 좋지않게 전화를 끊더 란다. 그런데 6시넘어 또 전화와 물어 아주머니기 딱딱하게 사실을 말했는데 8시에 또 전화오며 이렇쿵 저러쿵 하며 트집을 걸어, 결이 날때로 난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어 버리고 그 길로 자전거 타고 밤길을 달려 그 집으로 찾아가 집문앞 복도쓰레기칸 쓰레기통에 버린 곰팽이낀 떡과김치를 찾아 들고 들어가 ㅇ씨에게 보이며; 여기 있다. 먹겠으면 먹으라. 인제 진절머리나 이 집일 안 하겠으니 결산해 달라며 결나 목소리 높여 말했다. 그때야 자기가 사실 모르고 잘 못했으니 계속 일해 달라, 급여 올려 줄 테니; 하느걸 뿌리치고 나왔다고 한다. 결산 할 때 도 이전에 부주의로 와이샤쯔를 다림이질하다 슬쩍 다려 놓은 걸 트집잡아 그돈 떼더 란 것이다. 박씨,48세,길림성 三源浦사람, 북경조양구草场地땅집에 거주, 대서양신청근무. 땡볕에 주인집과 둘이 같이 시장 같다 물건 잔뜩 사들고 왔어 다 덥지유, 그런데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서 수박꺼내 까서 혼자 앉아 첩첩 다 먹어유, “아줌마, 수박먹어요.” 뭐, 말 한마디 한다구요? 뭐, 먹지 못해 그러는 게 아니구유, 그런건 우리두 사먹을 정도야 되지유, 그런데 말 한마디 없이 저 혼자 첩첩 다 먹을 때는 기분이 상해요, 찰떡같은 것두 이렇게 전화하면  한 상자씩 배달해오지 않아유? 그것도 혼자 앉아 첩첩 먹고는 “아줌마,이거 남은거 냉장고에 얹어 놓아요”한대유. 그거 하나 먹어 보라는 소리 한다구유? 먹지 못해 그러는게 아니라 구유. 그래 일손이 잘돼 얼마나 잘데 겠유? 많은 보모들이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조양구남호중원지하에 거주하는 신분을 밝혀려 하지 않은 박씨 가정부 내가 먼저번에 하다 너무 하인 취급했어 뛰쳐 나온 집이요, 어찌나 하인 취급해서 안 하고 짐 꾸려가지고 나오는데 아이 핸드폰이 없다며 난리 예요, 나를 못 나가게 막으면서 내 가방을 뒤지려는거요. 한심해서, 그래서 나도 화가 나서 가방을 쏟아 보였어요. 그리고 태태를 끌고 온데 찾았어요. 홀시 머리속에 전날 저녁 아이가 쏘파에 누워 텔레비를 보던 생각이 나 쏘파등받이를 들어보니 그짬에 있는 거예요, 그걸 아이보는 앞에서 태태눈앞에 바짝 들이대 보이며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짓이요. 아무 턱 없이 사람을 무함해도 되는가요? 한국에서 고급교육 이렇게 받았어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하느님이 이렇게 하라 가르치던가요. 이제 만나면 침도 안받는다”며 그걸 쏘파에 뿌려 던지고 나왔어요, 김씨,42세 흑룡강성목단강시, 왕징신청4구 413동지하거주, 내가 신청4구 415동15층 3호에 다닐때 일이예요. 40밑에 이른 부부간에 남자, 여자아이 하나씩인 집이였는데요, 집을 됭 되게 안 걷웠어요. 월요일 아침에 그 집에 들어가면 객실부터 가관이예요, 아이놀음감에 옷, 책장들이 쫙 널려 있고 주방에 들어 가면 싱크대에 그릇들이 무더기로 싸여 있고 그아래 바닥까지 쟁기들이 무져 있어유. 이틀동안 놀고, 먹은걸 그대로 처박아 놓고 내와 걷우기를 기달리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밸 나지요. 아무리 보모를 둔 집이라고, 우리같으면 보기 싫어서도 겉웠을 거예요, (대면 해준 많은 아주머니들이 많은 한국집에서 보통이런다고 한다. 특히 한족보모들이 다니는 집) 그래도 우리 직업이 이것인데 참고 그냥 하지요. 더, 말 못할거는 태태가 월경이 올 때마다 뻘겋게 피가 묻은 그걸(팬티) 옷을 까득 여놓은 세탁기에 집어 넣는 거예요. 당장 화가 곤두라서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게 서요. 다른 옷 들까지 물 들지요. 그러면 그걸 씻는라고 시간잡고, 신경나서 죽을 지경이 지요.   하루는 아침에 출근하여 세탁하려고 보니 또 그 뻘건 걸 안에다 던져 넣은 거예요, 그전에 이러지 말고 싸서 한쪽에 놓으면 내가 단독으로 씻는다고 서너번 말해는데 계속 그러는 거예요. 당장. 밸이 곤두라서 자고 있는 거실문을 뚜드려 안 하겠으니 결산 해 달라고 소리쳤어요. 그러니 부처간이 잠옷 바람에 나와서; 말도 없이 그만두니 돈 못 주겠다는 거요. 화가 날때로 나 그걸 비자루자루에 뀌여 들고 창문을 열어 져껴 놓고 소리쳤어요. 당장 결산 해 안주면 이집에서 이렇게 논다고 아래에 대고 공포한다.(415동 아래에 한국인들이 제일 많히 드나드는 평가시장이 있다.) 그러니깐 빤즈만 입은 先生이 입 딱벌리고 있는 태태를 보며 빨리 돈 주라고 하는 거예요. 문씨, 51세 길림성 집안현 사람, 왕징신청 423동지하거주, 夏都盈座근무 나 전에 대서양 신청210동에 자면서 일 할때 집인데, 왕징신청 4구 419동에서 괜찬은 음식점(ㅅㄷㄷ)을 꾸렸지요. 사는 집은 3칸짜리 큰 집인데 그 집에 있을 때 지옥이 였어요. 지금 생각만해도 으쓱해요. 량반이 괜찬은 식당꾸린다니 사람들도 괜찬겠다 여겼는데 말이여, 아침 5섯시면 일어나 학교에 가는 아이들 밥해 먹이고 도시락싸서 셔틀뻐스까지 바래다 주고는 와서 곧방 어른들 반찬 하고 그렇게 시작하면 3칸짜리 큰집이라 밤 10시넘어까지 쉬지 못하고 돌아 쳐야 해요. 낮에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밤이면 더욱 힘들어요, 내가 잠 자는 칸은 언덕짝만한 칸인데 한사람짜리 침대를 놓으니 엉치를 돌구기도 힘들죠, 그기에 침대밑에 물건을 까득 쓸어 넣었지, 벽구석에 청소기등 물건들을 무져 놓았지. 숨도 나지않게 캅캅해요, 거기에 창문하나 없는 창고로 쓰는 방이 였어 숨 쉬기도 힘들어요, 낮에 힘겹게 일하고 밤에는 푹 잠자려 해도 못 자고 되척겨야 해요, 그더운 여름이면 어느때까지  못자지요. 그때 참말 고생했지 …… 그건 그렇고, 근본 자유란게 없어요. 들어 올때 금방 신분증을 압수하고 밖에 음식감이나, 물건사러 나가도 태태가 따라 나갔다 끌고 들어 왔어요.  한번은 고향에서 조카애가 북경으로 일자리를 찾아와 신청4구 423동반지하에 집 잡아는데 깔개가 없다하여 내게 있는걸 갔다 주려니깐 태태가 따라 나와요. 깔개를 주고 오랜만에 만난 조카하고 고향사정이랑 얘기 하는데 태태가 시간이 없다며 가자고 재촉하는 거예요. 참, 기막혀서,  이 얘길 누구하고 도 꺼내지 않았어요. 오늘 선생보고 하는 것은 혹 한국사람들 이글 보고 우리조선족을 이렇게 대하지 말아 달라는 데서 하는 애기예요. 하두 우리가 돈이 딸려 이런 고생, 천대 받으면서 일하지. 보모들이 거주하는 좁은 공간 지하방집 김씨,49세, 길림성통화사람, 왕징서원 3구 329동지하 거주, 화정세가 근무 전에 대서양야터란다에 다닐때 집이요, 세살짜리애하고,금방 난애가 있어 나는 전문애들만 보고 四川에서 온 젊은 한족여자두고 청소하고 옷씻게 하였요. 태태가 되게 한족애를 천대했어요. 옆에 사람도 무안하게 하였죠, 하루는 그애가 한쪽으로 옷씻느라 쏘파밑을 미처 안 닦아서요, 그러니 태태가 아기 옷도 손빨래 안하고, 쏘파밑도 닥지 않아다며 아이를 후딱손 쇠우며 마구 욕하는 거예요. 그러니 애가 너무 섧어서 눈물흘리며, 돌아서 우는거예요. 그래 곁에서 젖먹이를 안고 보고 있다 너무 하여 말했지요, 그러지 말라고, 오늘 하도 바쁘니까 안닦아 지 안나, 아기옷도 더운물에 헹구어 세탁기에 넣어고, 쏘파밑은 어제 한번 닦아지 않나, 무슨 큰일이라도 저질러 그리 고우는가, 그애도 하도 나처럼 집이 곤난하니깐 이렇게 물시 당하면서 일하지 ,사람이란 어느때 어찌될지 모른다, 우리말에 한번 올리막이 있으면 한번 내리막이 있다지 않는가. 저여자 아이가 이담에 크서 큰 사람되여 잘 살면 저여자는 오늘에 얘기를 할것이다. 그러니 사람이란 항상 좋은 마음갖고 사는 것이 좋으니라ㅡ그날에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잘나갔어요. 마지막에 태태가 눈물까지 흘리며 우리들 손잡아 주었요. 정말이예요. 장씨,47세, 길림성안도현사람.利择西园지하에 거주, 화정세가,보성원에 근무. 08년도 대서양다닐때 집인데, 34살 사모님인데 처음에는 나를 잘 안대하여 줬어요, 올림픽끝나고 친정어머니가 놀러 왔어요, 하루는 아침 밥상치우다 부주의로 접시 하나를 깨였어요. 그러니 사모님이 또 그러는 거예요. 한참, 곁에서 보고 있던 친정어머니가 사모님을 불러 거실로 들어 갔어요. 조금후 내가 바닥을 닦는데 삐족이 열린 거실문으로 친정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요; 너네가 어렸을적에 우리도 얼마나 힘겹게 살아니. 그때 나도 저렇게 남에 집에 가정부로 다니며 갖은 천대 다 받았다. 그때 속으로 참 좋지 않더라, 개구리가 올챙이를 업수이 여긴다고, 그런면 사람이 못쓰니라, 저사람이 접시를 깬것도 고의적으로 그런것이 아니지 않니,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아줌마는 속으로 더욱 미안해 할거고, 속으로 죄스러워 할것다, 그 소리 들으면서 눈물나게 속이 짜르르 했어요.   얘기해준 95%이상의 아주머니들이 한국인집에서 가정부를 일만하는 도구로 만 생각말고 사람 취급하여 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서로 엎음갚음이라 주인집에서 아주머니들을  잘 대해 주면, 사람이란 감정적 동물이라 아주머니들도 량심적으로 일 잘 해 준다고 한다. 한씨,47세,길림성 연길사람,왕징신청거주.대서양신청 근무 그럼, 그사람들두 우리를 부려만 먹지 말구, 한 민족으로, 생각해 보았다유. 한계레로 말이유? 처음 그 사람들이 낯설고 땅섫고 말도 안 통하는 중국땅에 와서 寸步难行인데 같은 민족에 같은 습성이고 또 더욱히는 중국어까지 아는 우리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생활해 나가는가 말이유? 우리도 여인으로 가정이 있구, 집에 우리를 아끼는 나그네들두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생각해 봤대유. 그걸 생각해서 우리는 출근하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유, 같은 여인으로 저네들이 다른 여인의 벌겋게 생리묻은 팬티랑 씻어 보래유?! 씻을수 있나? 김씨,45세 길림성백산시2도강구사람, 조양구大山子거주 우리도 알아요,그러니깐 남의 자식도 제 새끼처럼 봐주고 모든걸 아끼고 음식감도 낭비없이 하지요, 돈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사모님이 밖에 나가면서 더우면 에이콘을 켜구 있으래도 정 덥기전에는 안 켜지요. 그렇게 돈 마구 쓰면 나에게 좋은 점이 있어요. 일전이래두 주인집에 아껴주면 나쁜점은 없지요. 보모들의 로무시장으로 되여있는 왕징신청 4구 광장쉼터 리씨(40여세)흑룡강성 해림사람. 현재 顺义에서 식당경영 내가 왕징신청3구 부부가 모두 한국학교에서 선생하고 있는 집에 보모로 갔는데 다른 집들에선 보모를 어른이나 아이들나 모두 “아줌마”라 부르는데 선생님집에서는 달라요, 나를 자기네 부모님들과 같은 연세라며 “이모”라 불러요, 처음 그소리를 듣고 눈물날번 했어요, 다른 집들에서는 어른,아이 할것없이 “아줌마”,”아줌마”하는데.ㅡ말 한마다디에 천금왔다간다 고 그렇게 호칭하니깐, 마음 안 뜨거울수 있나요? 그러니깐 고마움과 함께 잘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앞서요. 선생님은 내가 밖에 나가거나 들어 올 때는 꼭 문밖까지 바래주고, 맞아 주며 깍듯이 인사해요. 참, 잘 대해줬어요.   취재걸음에 왕징신청 4구에서 소개소를 꾸리는 50대 되는 조선족아주머니를 만나 보았다. 아주머니 말이 한국주부들 대부분 까다롭고, 그기에 회사에서 청소부나, 때거리 보모를 찾는 사장들과 단손으로 사는 아저씨들도 伺候하기 힘들다고 한다.  일을 제대로 못하오, 밥도 맛있게 못하오 ,음식이 짜오, 싱겁소, 나이많소, 별라별 잔소리 다하여 여러사람 봐꿔 보내도 안되여 마지막엔 한족을 보냈더니 소개소에 사람이 없나하여 인젠 전화와도 대응하지 않는다며 이런 사람들은 한국에서 못 살다 어쩌다 중국에 와서 좋은 집에 들고 보모도 두고하니 택을 짠뜩 높이 걸고 다니며 하늘에 라도 바라 오른듯 그 행새를 부려 보느라고 그런다 며 지금은 많은 한국집에서는 조선족보다 급여를 낮게 주는 한족여성들을 쓰고 있는데 가서 얼마씩 하다가는  대부분 나온다 한다. 어찌나 사람을 천대하고 이래라 저래라 쓸개 끼게 잔소리 하고 밥싸들고 오래서는 상에서 도 못먹게 한다며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대부분 시간당으로 일 하는데 보모들은 모두 제시간에 도착하여 일 시작하고 항상 지정 시간지나(혹 한시간내지,시간반이나,두시간넘어 나온다.) 나오는 때가 많은데 어쩌다 시간전에 일 끝나면 태태들이 지키고 앉았다. 요것해라, 조것해라며 일 찾아 시킨다, 정 할일이 없으면 신발 밭치개 아니면 금방 모욕시킨 강아지 모욕시켜라, 심지어 청소기까지 씻어 닦으라 한다며 한국인들의 쓸개짐에 혀를 찬다.   02년도에 중국에 들어왔어 북경조양구 左家庄国际友谊花园에 집 잡은 삼성전자주재원으로 근무하던 나하고 가깝게 지내는 ㅎ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중국에 들어온 많은 한국사람들은 한국에서는 보통 집도 없이 근근히 살아가던 족들이 였는데 일쪽 중국에 들어오니 물가가 엉청낮고 눈이 모자라게 풍부하여 집도 크고 좋은 걸로 찾아들고 한국에서 꿈도 못 꾸던 가정부도 두고 호강부리니깐 택수가 높아져 귀족행세 부리며 가정부들을 박대하고 있다며 해리밝은 말 하여 주었다. 조선족주인집과 한국인집을 어느쪽 선호하는 가의 물음에 98%의 아주머니들은 조선족주인집을 꼽았다. 여기에 길림성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온 림씨(49세,보모일 10년, 현재 시간당으로 6집 다님, 매주 하루건너 3집씩), 왕징서원3구 309동 지하에 거주. 당연, 조선족주인집은 아주 좋와요. 정말이래요. 다른 아줌마들하고 물어 보세요. 정말 이지요. 밥도 한상에서 먹지, 일이 바쁠때는 태태들도 한손 도와 해 주지요. 다른건 제쳐놓고 사람부르는 것부터 값쳐서 안 부르지요 조선족집들에서는 자기와 나이 비슷하면 언니, 동생하고, 자기엄마벌 나이면 이모라 부르지요. 한국집에서는 어른, 아이 할것없이 다 아줌마라 불러요, 발자욱 금방 떼는 애들까지도 아줌마 이래라, 저래라 하지요, 아침에 들어가나, 일 맞치고 나오나 택 높아 본둥,만둥하지요. 일이 바빠 미쳐 돌아 못치면 성내고 입센 소리까지 나와요. 길림성 류하현전성에서 온 나 친구는 아이들한테 맞기 까지해요, 어떤’ 땐 태태가 곁에서 보고도 가만 두어요. 보모들이 다니는 한국인집 싱크대에 가득쌓인 그릇들 길림성반석현에서 온 류씨(47세, 보모일 9년)북경조양구 왕징 남호동원 219동 지하에 거주, 华鼎과宝星园에 근무, 다른건 몰라도 마음편해 좋지요. 어디메 한국집처럼 늘쌍 마음 조마조마 하겠어요. 또 한가지는 어른들의 사리마다(팬티)안씻는게 좋지요, 한국집들에서는 태태(주부)들이 경도(월경)가 왔어 벌겋게 묻은 그걸 씻을 때 많치 스른것(싫은 것)이 없어요. 양쪽을 다 겸험해본 아주머니들은  모두 조선족주인집을 선호하고 있다. 조선족주인집에 가면 사람대접을 해주고 마음편해 일해도 힘겨운 줄 모른다고 한다. 전에는 급여가 낮아는데, 지금은 조선족들집에서도 급여를 높게 주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 풍기, 문화적차이를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인들은 서양(특히는 미국)개방문화와 본위주의 생활개념으로 생활을 꾸미여 조선족아주머니들 대하고, 조선족아주머니들은 중국사회주의 제도의 和谐리념으로 한국주부들과 접근하다나니 서로 쟁의가 생기고 의가 맞지 않아 대돌이 생긴다. 언제면, 한국인들과조선족가정부들간에 원활한 공감대가 이루어 지곘는지?   2011년 9월 27일    
3    추석이 되니 댓글:  조회:3240  추천:109  2011-09-11
래일이면 가족이 단란히 모이여 기쁘게 月饼을 먹으며 밝은 둥근달 바라보고 그간의 회포풀며 즐겁게 보내는 추석명절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산소에 가 일년내 자라난 잡초들을 벌초하고 저세상에 계시는 어른신님들과 시공테넬속에 술잔을 나누며 옛담을 나누고 그리는 명절이다. 나는 어렸을적부터 청명과추석에 기회가 되면 아버지를 따라 사촌형제들과 같이 봄에는 할아버지, 큰아버지 산소에가 겨울동기로 가라앉은 묘지에  흙을 올리고, 가을철 추석에는 일년내 무성히도 자란 잡초들을 벌초하여 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선지 왜 가토하고, 벌초하는지 모르고 부친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니였다. 가을에는 산중에 다른 사람들이 심어 놓은 과원에서 참외,수박들을 얻어먹고 나무에 바라올라 머루,다래등 야생과일들을 따 먹는 재미에 더욱 따라 다녔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어른들이 선조들의 령전에 술 부으며 외우는 소리, 일이 끝나고 린근 산소에 온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앉아 고인의 생전과 그 지난생활상들을 얘기하며 한 순간을 보내는 그자리가 얼마나 뜻있는 자린지 알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할머니는 부친이 어렸을때 일찍 돌아 가셨다.)사랑을 그리 받지 못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동네는 물론 린근에서도 이르는 유식한 분이시였다. 우리아버지가 항렬에서 둘째이시기에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집에 계시였다. 큰아버지가 나 소학교2학년때 병으로 돌아가시여 부친이 할아버지를 모시려 하여도 큰아들집에서 삶을 마쳐야 한다면서 별세 할때까지 큰어머니가 모셨으며 내가 소학교6학년(당시 학교사정으로 우리반은 전체가 한 학년 더 다녔다.) 다니던 가을철에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였다.  손군들중에서도 할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애지하는것 같았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면 머리맡 작은 접시에 놓여있는 몇알안되는 사탕도 다른 사람모르게 쥐여 주었고 5학년학기말 전현적 통일시험에 공사적 학급별에서 2등을 하자 내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도 기뻐하시였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사랑도 얼마받지 못했다.(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여나 얼마안되여 별세하였다.) 외할머니를 처음본적은 초중1학년 여름방학이였는데 어머니가 수속받고 조선에 친척방문으로 외할머니집에 가게 되였는데 부친은 공사에서 파견하여 현성에서 전국적으로 처음 꾸리는 첫기 농촌맨발의사학습반에 가시여 내가 젖먹이 어린동생을 보살피며 모친을 배동하여 현성 마준켠에 자리잡은 조선 헤산시로 가겠되였다. 그때 그길이 외할머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은 걸음이였다. 다 자란외손자를 처음 보시는 외할머니는 품에 그러앉고 쓰다듬으머 그리도 우셨다. 그리고 그리 부유하지 않은 살림에 삼촌어머니의 눈을 피해가며 마른 명태를 방추로 두둘겨 구워서 주셨고 뭘 더 먹이고 주려고 허둥대였다. 그때 처음 먹어보는 명태맛이 그리도 좋았던지 아니면 외할머니의 사랑의 손맛이 익혀지지 않았던지 나는 지금도 마른 명태를 그리 좋와한다. 장가들어 다른사람들은 장모사랑을 받는 다지만 나는 말수적은 장모의 사랑은 얼마받지 못하여서도 인정깊은 장인의 사랑을 많히 받았다. 피지못한 살림이지만 어쩌다 내가 가면 장인은 몇마리 안되는 씨암탉도 잡고 장에 나가 작으만치 돼지고기도 끊어 오며 고간에 직접들어 가시여 얼마안되는 입쌀도 떠들여 오고(벼가 나지 않은 고장) 하였다. 어린처남,처제를 시켜 술도 따오게 하였다. 그리고 술도 그리하시지 않으면서도 저녁상에 앉으시면 사위하고 술잔나눠며 얘기도 참 잘하시였다. 군인출신인 장인은 성격이 곧고 바르며 그른행위에 대하여서는 그가 누구든 거저 보내는 일이 없었다. 장인,장모 세상뜨신후 둘째인 우리가 산소를 돌보고 하였는데 내가 북경에 온 후로는 마을에 마음씨고운분에게 산소건사를 맡기였다.  집 산소는 현성에 있는 두동생하고 사촌동생들이 다닌다. 작년 추석에는 멀리 현성에 있는 두동생이 마침 사연이 안돼 내려오지 못하여 80세에 가까운 부친께서 힘겹게(마을에서 3리길) 산소를 다녀 오셨는데 그일이 항상 마음에 걸려 전번에 동생들에게 전화하니 올해는 내려갈수 있다하니 안심된다.  이래도 마음한쪽이 여전히 쓸쓸하다.  고향마을의 썰렁한 풍기와 같이ㅡ그속에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여도 언제한번 친지、자손들의 소리 못듣고, 손길 못닫는  고향황산들에 묻힌 우리선조님들의 황량한 령墓지의 쓸쓸한 풍경이 가슴쓰리게 저미여 온다. 혹 이렇게 되는게 현대 사회의 리치고 당연한 일인지…?! 발 빠른 사회의 절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사람들의 생활리념이 변하여 그런것인지? 아니면 고래문명문화에 드안한 마음에서 오는 풍기지? 그렇지 않으면 ……  89년도에 나와안해가 친천방문으로 조선 혜산시로 간적있다. 입경하여 4일만에 바로 단오였는데 삼촌어머니가 아침일찍 일어나시여 찌지고 볶으며 바삐 보내 시더니 아침먹은후 삼촌이 산소에 가자며 정복하고 아이들을 민족복장으로 단정히 입혀 앞세우고 우리를 데리고 외할아버지,외할머니산소로 향했다. 삼촌어머니는 깨끗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묵짓한 제상음식을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뒤를 따랐다. 시내안이라 묘지가 있는 산에 까지는 멀었다. 산기슭에 이르니 명절복장을 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단정한 옷차림한 가장들, 말쑥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묵짓한 대야를 머리에 인 여성들로 묘지로 통한 거리와산길에는 알록달록 사람천지로 가관이 였다. 그때; 아 ! 이것이 우리민족이 조상들로부터 이어 받은 문명한 경상(敬重先祖)문화이고 경지이구나 하는 감탄이 고국에 가서 느낀 제일 큰 감회였다. 한데 지금 우리 모두들 고향산천마다 에 모신 선조님들의 산소는 아마 많히 임자없는 묘지로 변하여 잡초가 무성지게 황량하고 쓸쓸할것이다. 09년 가을에 고향에 갔다 조상님들산소와 장인,장모산소를 돌아 보았는데 그때 인상이 지금도 앞에 선하다. 조상님들, 장인、장모산소 근처, 차타고 다니는 공로옆 산기슬과 마을근처에 있는 묘지들은 내가 고향에 있을 때 까지도 사람들손길이 다아 정결하던것이 인제는 언제 사람손이 돌아는지 모르게 황페하였다. 그기에 그렇듯하게 콩크리트길을 깔고 거리를 환히 쭉쭉 빼낸 마을엔 인적기 적어 썰렁하고 또 주인이 없어 볼품없게 허망해진 벽돌집과 찌들어 가는 초가집들은 협화음을 울리며 더 가슴쓰리게 하였다. 바로 여기에 올  추석에도 가지못하는 사연에 마음 무겁고 죄지은 감에 고개숙여 진다. 나를 비롯해, 모두 바쁘다는 리유, 시간이 안된다는 핑게를 붙이지만, 정말 그런가 ? ! 이 세상에 돈 보다 더 귀중한것이 있으니; ? !             2011년 9월11일 밤 9시22분             북경에서  김인철  
2    추석을 맞으며 댓글:  조회:2376  추천:21  2011-09-01
8 月闪过,9 月已到。 中秋来临,倍思(佳)人。 当今世上,真(秀)难寻。 寻觅路上,伤痕凹凸。 遥望残月,何时圆月。 달빛밝은 추석을 앞두고 어제밤에 머리에 팔베고 침상에 누웠다.불현간 마음속에 뜨는 문구를 옮긴것이다.
1    “鲜族”称呼,终结篇?!! 댓글:  조회:6108  추천:521  2011-08-03
      “鲜族”称呼 ㅡ 终结篇?!! ㅡ“선족”칭호 이대로는 안된다ㅡ종결편 유서   나는 2009년 10월12일저녁 중앙텔레비죤방송에서 조선족칭호를 잘못 잉용한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로써 일을 벌려 중앙정부에 반영하여 끈질긴 노력끝에2010년1월5일 중앙텔레비죤영화채널에서 우리에게 사과하고 그뒤 절차의 절목협상이 되지않아 4월15일 일을 파하고 마무리 지었다.  연후 중앙텔레비죤방송에서는 계속 “선족”단어가 나오고 정부 매체、사이트에서도 모두“선족”칭호를 사용하고 심지어 조선족을 비방, 모욕하는 문장, 언사들이 제멋대로 뜨는데 대하여 중앙정부유관부서, 나라령도자들한테 반영하며 씨엉한지 가 일년반이 되여 가고있다. 그런데 일의 진전은 없고 매체, 출간들에서 조선족에 불존한 글들이 련이어 나타나고 있다. 이 일로 2010년8월9일 처음으로 국무원인민래방접대처로 같다 등기 못하고 돌아온후 11월5일 여러방법 다쓰고 할짓 다 해도 안되자 다시 한번 국무원접대처로 갖다 받은 대접이 《去,联合国反映去!》란 어이맞힌 공작원의 조소적인 답변이 였다.   거기에 더욱 결나 꼭 일을 결말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접어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민족각계의 만나야 할 분들을 다 만나 뵙고 전화련계 문의도 했으며 나라의 유관정책과 법규로 다스려 볼 작정으로 북경에서 법률부문에 일하는 조선족분들도 반 다 만나 보았다... 한 조선족변호사를 만나 이문제는 엄숙하고 민간한 문제로서 한두사람이 뛰여다닐 일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각계조선족지명인사들이 모여 착실히 토의하여 결재를 내리려 한 일도 무산되였다. 연변주전국인민대표대회주요책임분에게도 등기서한으로 자료들을 보내면서 그분의 지도와 그분이 전국인대조선족대표들을 련계하여 전국인대상무위원회에 공식서한을 발송하여 문제를 반영, 해결할수 있기를 바랐다.--- 유관조선족단체나 주도부문에서 공식서한으로 중앙에 문제를 반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일이 제대로 정중하고 빨리 될것으로 알고 ... ...   그후로는 다시는 조선족분들 찾지 않고 련계하지 않았다. 와중에 한 친지로부터 어떤부문에서 胡耀邦탄생기념행사를 가지는데 중앙의 몇명령도들도 참석한다 가보지 않겠는가며 련계전화를 알려왔다. 혹시 중앙령도를 만나 반영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여 그 전화로 통화했더니 받는 사람이 차근히 자기가 령도들하고 문의하여 다시 전화주겠다며 이튼후에 전화온게 령도들하고 얘기해봤는데 자리가 없어 안된다며 미안하다고 하였다.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을 한족변호사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아주 놀라하며 이런 일들이 다 있나며  “이는형법에 위반되는 짓이고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나쁜 자들이 안정한 사회질서를  파괴하려는 짓이다.”고 규탄하며 상소하면 꼭 승소한다는데 맡는것은 불편하다고 하였다. 겨우 한 조선족변호사(련계는 특수한 경로로)가 가르켜준 상소문 框架에 맞춰 나절로 기소서를 작성하였다. 변호사와 상의한 대로 문제점의 전체를 기소하기는 그렇고 먼저 投石问路하는 격으로 이속에서 중추역활 작용을 하는 百度网과凤凰网을 기소하기로 하고 기소서와유관자료들을 갖고2010년11 월 23일아침 일찍 中关村南大街甲에 위치한 해전구 제1초급법원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10시가 되여 가고 있었다. 길손들에 물어 법원에 가니 입구에서 몸에 갖춘 위험성물품들은 모두 꺼내 놓게 하고  몸도 다 수색하고 나서 안으로 들여 놓았다.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법원놀음 할 일들이 그렇게 많은지ㅡ 안내자의 지시대로 순서번호를 뽑아 들고 기달렸다. 내 차례가 되여 접대처에 다가가 钢化玻璃창을 사이두고 그밑에 난 조금마한 구멍으로 번호지,신분증,기소서와자료들을  들이 밀었다. 자료들을 들이미는 순간 머리속에는; 내가 법원놀음을 하다니 하는 생각이 불현듯 퇴여 오르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를  맞은 법관은 정복을 한 웃음기라고는 없는26,7세 되여 보이는 처녀같았다. 처음에는 그닥잖은 티로 문서를 둬장되지다 얼굴에 준엄한 기색이 돌며 얼굴들고 나를 열처리한 유리창 넘어로 넘겨다 보았다. 그래 나도 얇은 웃음기찬 얼굴로 맞받아 건너 보았다. 그녀는 인츰 눈길을 내리 깔며 한장,한장 자세히 보며 손으로 내가 붉은줄 친 부분들을 다독였다. 그러다 마지막 서너페지는 보지 않고 자료들을 정리하며 그제사 웃음기한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보며; 미안해요, 이일은 엄숙한 일이라서 내가 접수결론내리기는  어려우니 조금만 기달려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직일원장에게 문의하고 올게요. 미안해요!  조금만 기달려주세요.ㅡ하며  자료들을 갖고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머리를 기지할수 있는 의자께로 물러나 앉았다. 시계를 보니 11 시가 넘어 있었다.  한참 후 그녀가 잰 걸음으로 내 곁에 오더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한 접수창앞에 갔다. 그녀가 나를 의자에 앉으라며 안에 앉아있는 40대 넘어 보이는 중년녀인을 직일원장이라하고는 원장곁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직일원장은 내가 받친 자료들을 보고 있었다. 처녀법관이 그녀귀에 대고 뭐어라 하자 그때야 직일원장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더니 책상에서 내 신분증을 들고 보고는 내려 놓으며 돌연히; 이런 일 가지고 기소하려는가? 이런건 접수못한다며 이러쿵 저러쿵 벌컥 화 내며 소리치는 것이였다. 아마 내 신분증을 보니 어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산골에서 온 촌놈이고 신체를 보니 왜소한게 몇마디 소리치며 후닥손 메기면 주눅이 들어 물러 가겠지 생각했던 모양이다. 금방 놀란 나는 와닥닥 일어나며; 너 이거 무슨 소리야!   왜, 화내며 소리치는 거냐, 왜, 우리조선족이 너네 한족들한테기시당해 상소하려는데 네가 왜 이렇게 짜증내여 화내는거냐? 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직일원장은 아까보다는 소리를 낮춰지만 계속 화내며 말하는 것이다; 이런 안건은 립안하기 힘들고 상소했자 승소 못하 길래 상소할 필요가 없다며 말하는 것이였다. 결이 날때로 난 나는 창문앞의 석판을 주먹으로 치며; 너 나라의 법률을 집행한다는 수도북경법원원장이 이런 근무태도냐? 너 직업교육을 어떻게 받았고 아래 사람들에게 도 이렇게 교육하냐? 너이거 작은 일이라고 치냐, 그런데 왜1994년6달 7일에                                           国家民委、中共中央宣传部、中共中央统战部、文化部、广播电影电视部、新闻出版署、国务院宗教局에서는 련합으로关于严禁在新闻出版和文艺作品中出现损害民族团结内容的通知란 문건을 발부하고2008년 8월달에 국무원에서는《民族问题是极其严肃的问题》란 문건을 발표했냐?! 이것이 민족기시가 아닌가? 민족기시가 작은 문제냐? 네가 이렇게 화내는 것도 우리조선족에 대한 민족기시의 표현이 아닌가? 한족이 우리조선족에 기시당해 상소하면 네가 이럴수 있느냐? 며 소리높이 딱딱들이 대여 따졌다. 때는 정심시간이 림박했는지라 홀에는 몇 사람이 없어는데 모두 눈이 둥그라니 나를 바라보고 젊은 처녀법관은 멍하니 내 입만 건너다 보았다. 그제사 직일원장이 주눅이 든 소리로 얼굴에 약간 웃음을 발으며; 내가 금방 앞 사람한테서 화 받은것이 식지 않아 말소리가 높아 진것 같은데 량해해달라, 미안하다.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안건은 주체가 그리 명확하지 않아 립안하기 쉽지않고 립안하더래도 령도들하고 토의하여 접수하며 시간도 오래 걸릴것이니, 내가 이제 百度网에 전화쳐서 당금 이런 글들을 삭제하라 하는것이 어떻냐, 며 물어 왔다. 어물어물 슬쩍넘기고 흔적을 지우려는 심사였다. 그 말기에 내가 제꺽; 전화치지 말라. 절대 전화치지 말라, 너 네가 접수 안해주면 내가 공증해갖고 중급법원으로 갈것이고 그래도 안되면 최고인민법원까지 가서라도 끝을 볼것이다. 일단 百度网에서 이런 글들이 사라지면 네 작간이줄로 알겠으니 그리알라! 쐐기를 박고는 그곳을 나왔다. 며칠후 자료들을 재 정리하여 가지고 그변호사께 물어  공증비를 싸게(안해가 한국집에 다니며 일하여2천원 남게 버는 돈으로 생활해 가는 살림에 몇천원의 돈을 일시에 낸다는 것은 알찼다.) 받을수 있다는 丰台区首佳公证处로 가 변호사가 소개한 yl공증원을 찾았다 .40대 좌우의 잠잠한 얼굴의 yl공증원은 미소 지으며 맞아 주었다. 변호사가 먼저 말이 있은것 같았다. 내가 건네준 자료들을 살펴보고 놀라며 이것이 진짜인가? 언제 입수한것인가 물으더니 내가 언제 몇시, 몇분에 사이트에서 다운한것이라고 하니 직접 그사이트에 올라 몇편 검색하고 사이트에서 빠지며 라 며 지금 아마 이런글을  쓰는势潮가 류행되는 것 같다며 이런 일은 정부에서 제때에 제지하지 않으면 사건이 터질수 있다면서 공증에 대해서는 립안할 주제를 확립하길 곤난할것 같다면서 밀막았다. 그렇게 빵 맞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10시 되여 가고 있었다. 밖에서는 아침부터 불기 시작한 먼지바람이 지랄나게 되게 몰아 불고 있었다. 한참 먼지바람을 헤치고 분주히 오고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다 꼭 일을 해내야 한다는 마음을 살리며 핸드폰을 꺼내들고 아는 조선족변호사한테 전화(전화는 단독쓰는 전화)쳤다. 변호사는 东直门부근에 괜찮은 공증처가 있다며 확실한 주소는 모르고 전화번호만 알려주었다. 그래 차타고 떠나면서 그 전화로 전화치니东直门부근에 위치해 있으니 지하철타고 东直门에 와서 다시 전화를 하라며 통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 바삐 바삐 차들을 갈아타며 东直门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빠져나와  급차게 전화하니 朝阳门内서남쪽中国银行大厦 근처에 있으니 돌아 지하철타고朝阳门으로 오라 한다. 미칠것! 시계를 보니 금방 11시반이 되여 가고 있었다. 그래 길손에 물어 공공뻐스타고 바삐 공증처로 달려가 北京市方园公证处간판을 건 문앞에 가니 中午11时30分至下午1时30分休息란  게시판이 잠겨 진 문안에 걸려 있었다. 시계를 보니 11시39분이였다. 기차고 꼴지 었다. 그래도 온바하고는 기달린다고 부근을 돌아 작은 음식점에 찾아 들어가 8원짜리 덥밥을 한분 청해 먹고 나와 먼지바람의 세레를 받으며 한시반을 기달리여 골목을 누볐다. 한시반에 공증처앞으로 가니 벌써 사람들이 줄지어 기달리고 있었다. 줄서 차레로 들어가 순서표를 뽑아 들고 기달렸다. 옆의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흘려 들으니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한 공증처고 이름있는 공증처의 하나라고 한다. 차레가 되여 카운터에 다가가니 웃음기 없는 정복한 처녀애가 신분증을 출시하라 하였다. 그래 지갑을 여니 환나게도 신분증을 안갖고 왔다. 정말 미칠지경이였다! 처녀애는 신분증이 없으면 접수할수 없다며 대신 어떤자료를 공증하려 하는가며 물어 왔다. 어떤자료들이다 하니 자료도 보지 않고 그건 힘들거라고 하며 뒤사람을 불렀다. 그렇게 밀려 모쓸 바람이 휘몰아치는 밖으로 나온 나는 마음이 허탈하여 입을 다시니 입안에서는 모래가 씹이고 먼지 냄새가 코로 페부에 까지 스며들었다... ... 공증일도 이렇게 끝났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그날저녁, 자리에 누운 나는 다른날보다 마음이 더욱 무겁고 캅캅하였으며 몸도 땅에 잦아들게 나른하였다. 일을 시작한이래 내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마음또한 1월5일 빼놓고 가벼운날 며칠 없었다. 그 미열로 가족들도 괴롭히고 지치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에게 미안하였다... ... 안해의 말대로 남들이 안하고 피하는 일, 누구도 알아 못 주는 일을 내가 무엇이 길래 이렇게 발벗고 나서고 제 돈파며 힘겹게 뛰여 다닌지... ... !! 그후로 며칠휴식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짬짬히 사이트에 올라 새로운 자료들을 점검하고 유관자료들을 수집,재정리 하였다. 그러면서 결정내린게; 1)계속 다른 사람들에 영향가지 않게 나혼자 밀고 나간다. 2)최후의 행각을 취할때가 된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회망버리지 않고 끝으로 북경시 중급법원과최고인민법원까지 뛰여 본다. 3)그래도 안되면 비정상적激进행동을 취한다. 결론을 내린 그후로는 마음 가벼워 지고 잠도 어떤땐 수면제 없이 조금잘수 있었다. 그리하여 12월 초순에 마지막 한번이라 고향에 돌아가서 부친의 생신일도 잘 축하해드리고 떠나올땐 부모님들께 심심히 큰절 올리며 며 속으로 불초죄를 빌었다. 원단엔 아들들과도 같이 즐겁게 보냈다. 설은 혹 마지막으로 안해와 지내는 설이라 안해을 도와 집안청소, 장보기, 음식장만에도 함께 하여 주었다. 오란만에 안해에게 웃음을 날리며... ... 그동안 자료정리를 끝내고 기소서도 새로 만들고 법원에서 접수하던 안 하던 정법부문과 정부에 알리기가 선차적인 목적으로 규격에 맞든 안맞든 3장 기소장을 만들었다. 1, 국가 민족사무위원를 기소한다; 조선족이 엄중하게 정부주요매체에 의하여 기시, 비방, 모욕당한 사실을 제때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여러가지 형식과 경로로 반영 하였는데 나라의 소수민족사무를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바로 제지, 관활못하여 조선족존엄에 큰손상 끼치였기 때문에 회피할수 없는 책임이 있다. 그리하여 그책임을 지어야 한다. 2,中央电视台,新华网,人民网,中华网,中国网,新浪网,环球网,谷歌网,中国yahoo网, 中国msn网,163网을 기소한다; 이상 피고들이 정부의 유관정책, 법규를 무시하고 조선족에게 무단적 기시를 실시하여 조선족명예와존엄에 엄중히 손상주어 그 책임을 담당하여야 한다. 3,百度网,凤凰网사이트를 기소한다; 이두사이트에서는 이번 조선족기시건에서 중추역활의 작용을 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이 더욱 엄중함으로 옳바르고 정중하게 사죄하고 조선족에 끼친 영향을 착실히 책임지고 미봉하여야 한다.   2011년2월23일 아침 일찍먹고 사이트에서 검색한 丰台区方庄路10号에 위치한 北京市第二中级人民法院(왕징에서 가까운 곳이라 우선 그 쪽을 선택)갔다. 순차적으로 위험품검사, 몸 수색하고 신분증들고 홀에 들어서니 젊은 법관이 그래도 웃으며 순서표를 뽑아 주고 저쪽창으로 가보라 안내 하였주었다. 그 쪽으로 가니 중년의 정복한 사나이가 아무기색도 없이 어떤일로 왔나 물어 민족기시에 대한 일로 기소하려 왔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법관은 그런 안건은 자기네가 관활안하고 제1중급법원에서 접수한다며 그쪽으로 가보라 한다. 일이 또 꼬이였다. 어느쪽에 위치해 있고, 어떻게 가야하냐 물으니 아까 그 안내원한테 물어 보라며 얼굴을 돌린다. 급히 그 안내원한테가니 위치를 적은 쪽지를 넘겨주며 어떻게 차타고 가라고 알려 준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 또 급히 뛰여 다니며 차 갈아타고 石景山区石景山路에 위치한北京市第1中级人民法院에 도착하니 11시반이 넘었었다. 혹시나 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보안이 점심휴식시간이였어 사무를 안본다 한다. 몇시에 문여나 물으니 오후 한시반이 란다. 후 한숨이 절로 나갔다. 이때 문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정복을 한 중년사나이가 어떤 일을 기소하려는가 물어 왔다. 바라보니 가슴에 국회를 달고 있어; 중앙매체가 소수민족기시에  대한 기소장이라 하니 자기가 먼저 기소할수 있느지,없는지 보고 할수 없는 일이면 괜히 오후에 까지 기달려 당신의 시간을 그저 보낼수 없지 않느냐 하여 그것 좋을것 같아서 자료들을 보였다. 한참 보던 그의 기색이 변하며 자료를 덮고 나보며; 이것은 엄숙한 문제였어 내가 우리원장에게 보이고 결재를 알려 줄게 여기서 좀 기달리라며 자료들을 갖고 안으로 들어 갔다. 한참 후 나온 그는 나보고 이안건은 중앙정책과 긴밀이 련관되는 일이라서 자기네 중급법원에서는 판법할권리가 없다면서 자료를 건네 주었다. 그럼 어떤부문에서 결재를 내릴수 있느냐의 나의 물음에 최고인민법원만이 결재를 할수 있다고 하였다. 또 한번 벽에 막혀 돌아선 마음은 그리 무겁지가 않았다. 원래 이렇게 될거라는 상상이 있었음으로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될것이라는 속산이 맞선것이라 마음쓸쓸히 허기진 마음과배를 달래며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몸을 맡겼다. 이제 최고인민법원으로 가도 결과는 이럴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 매김되였다. 이러는중에 해마다 있는 两会가 시작되였고 新华网과 人民网에서 两会기간 하고 이란 창을 꾸렸다. 어쩌다 직접 국가령도들하고 대화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것으로 여겨 기뻐 이란 아이디로 등록하고 먼저 북경의 조선족로인들이 활동장소 없이 고생하며 활동하는 일를 반영하는 글을 써 올렸더니 금방 올랐다. 그래 힘 얻고, 회망가지고 호금도주석, 우방국위원장, 온가보총리에게 일을 반영하는 글을 올렸다; 您好; 打搅您繁忙地工作了。 我是生活在北京的朝鲜族国民。 在您和党中央的正确领导指引下,中央提倡构建和谐社会的进程在全国人们的齐心努力下稳健发展,大多数的全国人民在此温馨的氛围里健康、快乐的生活着。这些都是您和党中央倡导和领导的英明决策的结果。 可在这和谐氛围的大势中也有不和谐地因素蠢蠢欲动。 很多中央政府的媒体登载、转载,违背国家禁止发表地歧视少数民族的文章。一些不坏好意的汉族学者,学生,平民(包括中央政府的工作人员及政法部们的执法者)在媒体上和民间,大从公共场所普遍使用对我朝鲜民族侮辱性的贬称和无端地用贬低,歧视,诽谤,侮辱,辱骂的文章及言论,严重损伤,我朝鲜民族的感情和尊严。 说我们朝鲜族在抗战时期只做日本侵略者的走狗和大量屠杀中国人,挑起了抗战前的《万宝山事件》,甚至朝鲜族制造了《9,18事件》,有的文章还扬言要抹杀我们朝鲜族的语言,同化我朝鲜民族,甚至让朝鲜族滚出中国的狂言。 我们认为他们的这种行为是;破坏民族团结,搞乱国家的安定,分裂国家的极其挑衅,攻击性地反和平、反社会谬论。(在这些文章的后面有些有正义感的汉族人士和不少少数民族的有识之士对于这种搞民族分化、破坏国家安定、民族团结的行径发表反驳和谴责之声。) 让其继续放纵必定给国家和社会带来严重的社会动荡。 更气愤、愤慨地是对此我们的反映中央政府的有关部门和领导以及国家政法部门人员的反应和态度。 近一年来我们通过各种渠道给中央领导和有关部门多次反映过此事,但始终没有消息。也到有关政府接待处反映过,但都碰上冷冰冰的麻木不仁地脸面和回答。 去年11月5日上午我到国务院人民来访接待处反映的结果是;一句,“去,联合国反映去!”的 工作人员的冷冰冰地嘲笑答复。去年年底到海淀区某法院依据国家有关法规递交起诉书,遭遇地是;当日值班厅长的不耐烦的发火。 这好使孩子在外面被人受欺负回到家给父母诉委屈得到一记耳光地感受。收到的冲击和激愤更大!!! 中国是领土之广阔,民族从多地国家。特别要注意正确使用他民族的名称和各民族间地团结,尊重他民族的尊严及风俗习惯。 前苏联、东欧和世界各地的好多国家、地区,因民族间的不和和冲突,战火纷飞、国家分裂、亲人分离、互相残杀地情形,我们是有目共睹,令人心痛和痛惜的事情!!!也是我们的前车之鉴和值得我们深思和担忧地。 现在我们国家也不少少数民族地区屡次因政府工作人员的不当言论和处置,以及有些不负责任人人的言行因素频频发生民族冲突的事情。 这种事情多、积怨大,终久会导致大的民族流血冲突,乃至闹分裂现象。 就这次我们朝鲜族为了申诉、找回,被中央、政府媒体实施地对我朝鲜民族尊严地损伤,侮辱的事情来说,从中央政府的工作人员、到媒体、以及国家政法部门的执法者,面对我们的申诉、反映,都是旁落无人、冷嘲热讽、麻木不仁冷冰冰的面孔! 就此,我们很伤火!也很伤感情和愤慨!! 希望党中央和中央政府主正!依法法办发表;歧视、诽谤、搞扰乱地反社会分子,严肃追究登载、转载这些违法扰乱国家安定、破坏民族团结文章的媒体地责任,问罪对我们的反映无动于衷、麻木不仁、冷嘲热讽的政府工作人员职责。还我朝鲜民族被中央媒体及大汉族主义思想潮流带给地损伤、侮辱地民族尊严。 希望我们社会不要出现“歌声高处,怨声高”的 局面。 我们净心关注中央的决策! 此致   敬礼 打扰您繁忙地工作了 2011年3月4日 朝鲜族同胞敬上 그런데 이글은 뜨지 않았다. 혹 안전부나 공안인원이 IP주소로 문죄하러 오지 않으면 잡으러 올것이라는 생각에 집에서 조용히 기달렸다. 그런데 며칠기달려도 조용하였다. 그후로는 즘즘히 보내며 최후행각의 준비를 하였다. 먼저 남호종합시장에 가서 길이1.5메터에 넓이 0.38메터되는 힌천(글을 써도 피지않은)을 사고 9원주고 칼날 길이가 길고 끝이 빼족한 과일칼을 하나 샀으며 마트에 가서 글체가 굵게 쓰여지는 사무용 검은 필을 두개사고 5원주고 작은 국기도 하나 샀다. 안해가 출근후에 집에서 힌천에 《政府媒体实施对朝鲜族的歧视行径,对此反映中央无动未动,国务院工作员嘲笑说;去,联合国反映》란 표어를 써 프란카드를 만드고, 작년 1월5일 영화채널에서 좌담회후 선물로 준 달력 뒤면에 《反对民族歧视,还朝鲜族尊严》란 굵다락게 쓴 간판을 만들었다.        이런 행각 준비하는 나의 모습이 웃읍고 쓴 웃음이 귀가로 흘렀다. 나라에서는 모범으로 치지않을 거고 민족에서도 영웅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문둥병병환자 피할듯 멀리 할것이다(안해의말)ㅡ 혹, 가정에 난을 가져올수 있는 화약통을 나절로 준비한다는 생각이 돌며 눈에 찔끔 눈물이 돌았다. 나같은 남편을 만나서 여때 고생해온 안해가 수갑차고 감방으로 끌려가고 남부럽게 자라지 못한 아들들이 불명한 자들에 맞아 피못에 쓰러지는 모습이 눈앞에 영화필림처럼 펼쳐간다. 있을수 없는 일이 아니다. 지금 중국사회에서 정의를 지켜 정부에 관원들과 큰세력을 고소했다 죽고, 실종되고, 가족이 망하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 머리속에 조선영화에서 의사가 의거후 일본순경들이 그집에 들이 닥쳐 그 가족을 흑타하는 모습이 머리속에 떠오르며 그당시 의사의 안해와 자식들이 남편과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속에 떠올랐다 ... ... 그러고는 일을 벌릴 위치를 확정하였다.  이전에 다니며 봐둬던 자리를 사이트로 점검하고 초보로,建国门外,天安门,국무원사무처인府右街(중앙령동들이 9시에 경찰보안차들의 호송하에 출근한다.ㅡ이곳에서 일을 벌리시 경우 직접국무원과선전부에 금방 전달될수 있는데 행인과차량들이 적은 이곳은 일단 일이 터져면 수시로대기하고있는 경찰, 무장경찰, 특경들이 량쪽을 차단하면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밖에서는 절대 모른다.  ), 国家民族事务委员会,故宫北门 (중앙사무처와가까움)등5,6곳을 지정하고 이튼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눈 살펴보았다. 결과 建国门外는 외국인들이 많히 들락날락 하여 일이 벌어지면 국제영향이 클것으로 좋지않고 故宫北门은 사람들이 작고 편벽하여 파동이 작을 것으로 회생이 물거품으로 될것같아 포기하였다. 그래서 일이 벌여지면 빨리 중앙에 알려질수 있는 천안문과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최종확인고 3월11일 정심 11시반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앞 대회대표들이 정심휴식시간에 나오는 시각에 일을 벌리기로 결정 했다. 그간 안해한테 암시적으로 내가 나다니다 혹시 의외로 사고 쳐 죽을수 있는데ㅡ섭해 하지말고 건강히 잘살라! 남한테 경제적으로 진 빚은 없으며 집에 은행저금은 얼마고 해마다 아이들보험금 지납일을 어기지 말고 제때에 넣어주어야 한다는것과 일단 내가 잘못 되더라도 될수있으면 화장말고 집뒤 북산에 묻어 달라 은근히 말해 뒀다. 길에 오르기전 친지들도 만나 보고 식사도 같이 하였다. 평상시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 그러면서 남한테 약속어긴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양광로인회 활동장소로 코리안잡지에 실린 로인회글이 실린 잡지를 들고 갔더니 문이 잠겨 있어 정수덕회장께 전화하려고 통신부를 펼치니 회장의 전화번호가 등록되여 있지 않아 련계못하여 전하지 못하고, 조문판에2008년년말에 나오기로 한  북경조선족로인회(주 아리랑로인회 소개) 활동소개편이 여러가지 일로 뒤로 미루어져 아직 출간 안되여 조문실 리옥화주임에게 전화쳐 문의 했더니 이러저런 사연으로 편집은 다 해 놓고 아직 못 출간 되였다 한다. 참, 아쉬운 일이다. 남한테 다른 빚은 진 일은 없는데 길 떠나면서  이 두약속 어기고 가야하니 마음이 어쩐지 영 괘운치 않다... ... 3월10일 안해가 한국집에 일이 있어서 집에서 휴식하였다. 근면한 안해가 집안을 거두다 침대밑에서 내가 감춰둔 물건들을 발견하고 한참 잠잠하던것이 발칵 용 쓰며 기장돌이 하기 시작하였다. 여때 잠잠히 지켜보며 말 없던것이 시동도 없이 팍 터지였다. 나도 지금껏 외롭게 뛰여다니며 받았던 스트레스, 울분과괴로움이 말할곳 없고 토할데가  없어 마음속깊이 막혀있던 것이 왈칵 터지며 같이 닥치는 대로 죄 뿌렸다. 핸드폰이 날려가고 밥솔이 바닥에 딩굴고  텔레비죤이 바닥에 박살나 버렸으며 보온병이 벽에 날려 터져 더운물이 안해에게 덮씌웠졌다. 둘다 미쳐 돌아쳤다. 합숙하는 한족처녀애가 놀라 그러지 말라 소리치면서도 무서워 집안으로는 들어 못왔다. 그래놓고 떠거운 물을 듸집어 쓴 안해를 그대로 두고 나는 문차고 밖으로 나왔다. 아들들이 출근 안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어데있나 전화오고 받지 않으니 련거퍼 메시지를 날렸다. 아예 빠떼리를 뽑아 버렸다. 자식들도 놀랐을것이다. 집안이 어쩌다 이렇게 되고 다정하던 부모들이 왜서 이지경으로 싸워는지?! 그날저녁 혼자서 술을 얼마나 마이였는지 모른다. 밤이 깊어 겨우 몸을 지탱하며 집문을 떼고 들어서니 아들둘이 제 엄마하고 퀜히 나의 얼굴을 쳐다보는것이 였다. “별일 없으니 너회들 집에 가.” 조용히 말하고 는 침대에 쓰러졌다. 흐리터분한속에 안해의 목소리가 귀가로 흘렀다. “별일 없을거다, 근심말고 돌아 들 가거라.” 새벽에 목이 말라 일어나니 안해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없었다. 하루동안 밥 안먹었다. 저녁녘에야 들어 온 안해는 친구집에 처음으로 밖에 나가 잤다, 이제는 한국집 일도 모두 그만 두었다며 말하고는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후로는 안해와는 련며칠 랭전상태에 들어갔다. 안해와 싸운 이튼날 점심에 两会기간 新华网과人民网에서 꾸리는 向总理提希望, 给国家领导人留言란에; 오늘 3월11일 정심 11시 30분경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앞에서 중국정부매체의 민족기시와 정부의 랭담한 무책임에 자살로 항의하려는 사건이 여의치 못했던 일로 파하였다.고 올리고 나의 거주지,련계 전화까지 다 발켜 발송하였다. 생각에는 이번엔 국가 안전부와 경찰들이 금방들이 닥쳐 나를 잡아 갈것이라 여기였다. 나를 잡아 가더라도 좋다. 능히 중앙과 대화하고 반영할수만 있으면 되는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달렸다. 내가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기였기에 쉽게 찾아 올것이다. 그런데 며칠기달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안해는 진짜 한국집일들을 다 밀어 버렸는지 아무데도 나 안가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때시걱은 제때에 차려서 올려 놓으며 “밥들라” 그 한마디만은 하였다. 항상 그랬다. 내가 불쾌해 하거나 싸웠어도 때시것만은 제때에 꼭 차려주었다. 그런데 진정 한국집일들은 그만둔것 같고 날마다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 있는것이 내가 어디로 가는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며칠지났다. 무 반응이고 조용하였다. 그래 생각한것이 정상적경로로 다시 한번 더 뛰여 마지막으로 최고인민법원까지 간다고 3기소문을 정리하여 사이트에서 점검한 천안문광장력사박문관동쪽正义路에 위치한 最高人民法院으로 3월18일 갔다. 그런데 대문앞의 무장경찰이 이곳에서는 립안접수 안 한다며 프린트한 글쪽지를 건네주며 前门쪽에 가 71路선을 타고 双庙东站 朝阳区小红门乡红寺村40号에 위치한 最高人民法院来访接待处로 가보라 한다. 그래前门쪽으로 나가며 보니 이젠两会가 끝난는 데도 전번에 자리를 보느라 왔을 때보다 경찰들이 더 많고 무장경찰과특경들이 줄지어 분주히 오갔다. 천안문관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입구마다 무장경찰이 지키고 공작원들이 모든 유람객들의 유효신분증을 밣히고 가방을 비롯한 모든 물품들을 세세히 검사며 몸을 쌑쌑히 수색하였다. 웃음이 나왔다. ㅡ여기이 지나갑니다.ㅡ 속으로 웨치며 입귀에 웃음을 날리며 버젓이 천안문광장을 지나 前门에 갔다. 쪽지를 들고 그곳으로 가니 문앞法警이 신분증과 판결서를 제출하라 한다. 몸을 둘처보니 신경나게도 또 신분증을 안 갖고 나왔다. 무뚝뚝한 法警과몇마디 씨루다 그만 돌아섰다. 그다음주 월요일아침 일찍 떠나 다시 双庙에 갔다. 울며불며 하는 사람들속을 비집고 문앞까지 가니 法警이 신분증부터 검사하였다. 판결서를 내놓으라 하여 없다고 하니 판결서가 없으면 아무리 큰안건이라도 접수안한다며 무뚝뚝히 말한다. 그래 내가 초급법원과 중급법원까지 다녀오며 여기까지 온 경과를 차근히 말해도 안된다며 화내며 물러서라 한다.그리하여 나도 성나 달려붙자 책임자인듯한  法警이 나오며; 당신 심정도 알고 일의 엄중성도 알게는데 程序가 이러니 어찌할수 없다며 량해해달라 하여 에라! 끝이다. 며 돌아섰다. 이렇게 정상적인 경로로 해결해 보려는 회망은 철저히 막히 였다. 예견했던 대로 였다. 진짜 올것이 왔다는 것에 마음이 잦아들며 喜多郎의 졸졸 흐르는 시내물을 떠오르게 하는 음률이 귀전에 울렸다. 다시 안해 모르게 슬슬 준비작업을 하며 안해와도 살갑게 보냈다. ㅡ나한테 시집와서 27년간 하루도 손놀새 없이 고생 많았는데 참 미안하구려! 못난 남편을 욕해다오, 원래는 남 부럽잖은 행복을 안겨 준다는게 어찌 일이 이렇게 되네, 부디 복 받기를 참으로 기원하니ㅡ!  아들들아 엄마를 받들어 모셔라 ... ... 3워 23일과24일 일루의 회망걸고 人大常务委员会接待办公室, 人民日报张延农社长办公室, 中央纪委驻人民日报督查组,新华社办公厅등부문에 30여통 전화를 치며 어쩜일이 통하고 대화델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노력해 보았는데 안되였다. 대부분은 미통이고 다행이 中央纪委驻人民日报督察组사무실하고 통화되여 사실을 얘기하니 자기네는 인민일보사지도자들이 규률위반 감독职能부문이지 그런일 관계안한다며 통화를 끊었다. 24오전 어쩌다张延农社长办公室하고 통화되였는데 사장은 회의가 있어 나가고 없다고 하는 여성하고 사실을 얘기하니 그런일이 있냐며 어떻게 들어가면 볼수 있나 하여 人民网首页搜索处에 鲜族를 입렵하고 검색하면鲜族칭호로 된 몇십편의 글들이 나오고 거기에 조선글로 된 鲜族는 조선족의 贬称이라는 글의 목록이 있고 그 글을 인민망에서는 屏蔽하였다. 하니 조금 후 자기가 들어가 보았는데 그런글들이 없다하여; 내가 현재 人民网에 올라 그창들을 펼쳐 보고 있다하니 자기는 안 보이고 손님이 와 그만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24일 오후 겨우 新华社党组和总社的办事机构이고 총사의 사무를 총괄하며 督查落实和信息反馈等工作을 주 임무로하는 新华社办公厅高欣주임(여.전화;63072019)하고 전화통되였는데 사근하게 그런일이 있으면 전화로 얘기하지 말고 서한으로 재료들을 보내면 자기네가 집적 나서 상부에 반영하겠다고 하여 고맙게 생각되여 감사하다고 말하며 통신주소와 우편번호를 물으니 겉봉에 新华通讯社라 쓰고 부치면 된다고 하여 그래도 주소와우편번호는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의 물음에 그저 新华通讯社라고 쓰면 되니 그렇게 써보내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최후 회망도 거품으로 되였다. 일을 벌리시 만약 특경들이 접근할 경우를 생각해서 차모는 친구에게서 포도주병에 휴발유 한병을 구해놨다. 포도주병은 목지가 짤룩하여 불 달면 열량이 새 나올새 없이 즉시 폭발할수 있다. 때는 两会가 끝난지라 3월25일 다시 한번 자전거 타고 다니며 장소를 살피고 예전대로 첫점, 민족사무위원회앞이고(천안문광장은 외국인들이 있어 국제영향고려) 안대면 천안문앞 동쪽으로 터를 정하고 3월 28일에 일을 벌리기로 했다. 사실경과를 줄여서 만든 삐라를 7백부 찍어 두었다. 금요일저녁 안해는 그래도 먹구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집들에 말하니 계속오라 한다 (안해는 그렇게 인품과일손씨가 주인집들에서 인정해준다.)며 월요일부터는 다시 일하러 나간다고 한다. 내가 이젠 일을 그만 둔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동포여러분; 나도 이길을 가기는 싫은거여! 살뜰한 안해와 가정을 버리고 이 길을 택하기는 싫은거여! 바보같이!본시 바보지! 안해의 말처럼; 나라에서는 불법자로, 사회에서는 불량자로, 민족에서는 하찮은 일 가지고 제절로 사 하는짓이라고 인정할짓을!!! 그런데 말이다. 우리민족의 칭호가 “선족”아니고, ”몽둥”이가 아니며 “얼귀즈”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민족이 만들고, 사건을 조작한것이 아니며 는 청일색의 조선인이 비저낸 일이 아니기 때문에,ㅡ이것들은 한족들에게 조선족에 대한 무한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심어 줄것이며 그것이 앞으로 우리후손들에 루가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네들이 다른 민족은 말 못하고 우리민족만은 문자를 없애고, 동화하며 중국이 인간이 많은이 조선족은 한국으로 가라고 하는것은 반사회언론이고 그것도 중앙정부매체에 그런 단어,문장이 사용되고 오르며 그런 반영에 중앙정부에서는 덤덤히 침묵만 지키고 그렇지 않으면 하라 것은 우리민족에 대한 경멸이고 멸시기 때문에 ... ... 동포여러분;  건강하시고 우리 후손들이 이땅떵어리에서 당당히 살아갈수 있게 진영을 굳건히 하시고 존엄을 지켜주십시오, 여보, 원래는 원래는 내가 당신보다 단 하루라도 더 살아 당신의 후사를 남들이 손 안 대게 깔끔히 처리하고 뒤 따라 간다고 약속하였는데 내가 내가 일이 이렇게 되여 약속어기고 먼저 가네! 섭해 말고 슬퍼말고말고 건강히 굳건히 살아가게! 당금 보게될 우리손군들을 내 앞까지의 사랑을 주면서 말이야! 하 하 하 웃으며 말이야! 그래야 건강해져 자식들에게도 부담이 안되지! 밤에 잘대 꼭 이불을 잘 여미고 자오요! 우리 약속대로 다음세상에서도 계속 부부가 되자고! 내가 기달리게! 다음세상에서는 내가 헛짓은 안고 돈 많히 벌어 남부럽잖게 당신을 행복하게 할게! 약속하요! 잘, 살고, 안녕!! 여보!!! 1!! 동포여러분; 如果,我在战斗中牺牲,请,把我埋在故乡的北山上 保重 기원; 2011년 3월 27일                    못난인간; 김인철 소천이 웃음ㅡㅡ을 날리며 길에 오름니다.....................................................................................................         결말   28일새벽,5시 45분에 안해는 또 일찍 일어나 한국집으로 아침밥 하러 나갔다.   슬그머니 뒤따라 나가 총망히 자전거 타고 떠나가는 그 뒤모습을 서글피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와 바삐 준비를 다그쳤다. 세수하고 수염깍고(모욕은 전날저녁에 하였다.) 전날오후에 마트에서 사놓았던 우유한통을 그대로 마이고 안에는 깨끗한 옷으로 겉은 정복을 하고 그안가슴에다 불달면 즉시 붙어 터질수 있게 만든 휴발유를 넣은 포도주병을 동여 착용하고 밖에다는 넗직한 겉옷을 입었다. 그리고 수시로 꺼낼수 쉽게 밖아 옷 주머니에 칼과 라이타를 넣었다. 그리고; 여보, 나 먼길을 떠나가니 기달리지 말고, 찾지를 마오, 잘있소! 글쪽지를 안해에게 남겼다. 집안을 쓸어보는 마음이 슬퍼다. 그러다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전날저녁에 착실히 준비하여 둔 물품들을 갖고 나왔다. 몸에 내 신분을 나타낼수 있는 일체물품(돈 일전도 없이)은 안갖고 휴대폰도 지니지 않고 자전거에 올라 타고 이태리 민요을  높이 부르며 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시 행동을 검토해 보았다. ㅡㅡ1, 먼저 민족사무위원회앞에서 준비하였다 일군들이 출근할때를 기달려 매체들에 통보하고 프랑카들을 들고 시위한다. 형편이 그르면 빨른속도로 太平桥路로 해서 몇골목빠져나와 천안문에 접근하며 삐라를 뿌린다.(쉽지 않을 것이다.) 2,둘째, 눈치봐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안될것 같으면 소리없이 천안문앞동쪽으로 옮긴다.(그러면서 입수한 매체들에 통보한다.) 그쪽에 인류가 많고 상대적으로 경비가 뜨음하며 경찰과특경들이 접근하려해도 좌우량쪽으로만 가능하지 앞뒤쪽은 힘들다. 그러면 나의 경계의 시야범위를 쫍히고 신경덜고 편히 움직일수 있다.   삐라를 뿌리며 매체들에서 달려오기를 벝이며 경찰에 중앙령도들과의 대화를 요청한다. 경찰들이 바싹 달라붙으면 뒤로물러서 견지하다 안될땐 라이타를 꺼내 휴발유병에 불 달 준비로 경찰들의 접근을 저지한다. 그래도 곤난할땐 칼을 뽑는 동시에 주머니에서 국기를 꺼내들고 웨치며 칼로 배를 찌른다. 그칼을 뽑아 피를 국기에 뭍치고 다시 칼로 가슴을 찌른다ㅡㅡ 처음엔 길에는 사람과차량들이 많치 않았다. 3环근처에 도착하니 월요일 출근 고봉이라 사람과차량들이 많아 지면서 길이 막히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붐비는 차량과사람들을 뚷고 민족사무위원회문앞까지 가니 모두 출근 다 하였는지 문앞에 민족사무위원회란 판을 단 대형뻐스만 문옆에 서있고 滑门은 꼭 닫겨 있었다. 조금 늦은겄 같다. 속이 꼴리며 신경났다. 대문좌측옆 직일실 같은 앞에 신강위글족 힌모자를 눌러 쓴 위글족 두로인이 공작인원같은 젊은이하고 무슨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곁에 다가가 자전거를 길 옆에 세워놓고 그들에게로 돌아섰다. 젊은이가 글쪽지를 두로인에게 넘겨 주며 여기서는 지금 사무를 안보니 이곳으로 가보라 한다. 두로인이 막연해 하니 젊은이가 그들의 등을 떠 밀며 빨리 그쪽으로 가보라 한다.  로인들이 자리뜨고 젊은이가 집안으로 돌아 들어가려 할때 다가서며; 이곳이 국가민족사무위원회가 옳은가? 물으니 젊으니가 돌아서며 무뚝뚝이; 옳다. 그런데 현재 여기서는 사무를 보지 않는다며 의아히 나를 아래우로 뜯어 보고 자전거에 동여맨 각목들을 살펴 본다. 어디에서 보는가 내가 결나 물으니; 현재 이곳은 장식중이였어 림시 XXXX곳에서 사무를 본다며 일이 있으면 저로인들을 따라 가라며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두위글족로인한테 눈길 주는 것이다. 신경이 곤두선 내가 알아 못듣고 눈살살려 되 물으니; 젊은이는; 현재 여기서는 어떤 사무도 보지 않으니 저로인들을 따라 가라며 집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妈了个巴子”,쉬틀려 결이 날때로 난 내가 자전거 다리를 풀고 장안거리쪽으로 떠나는데 등뒤에서;你有什么事啊!하는 소리가 난다. 뒤도 돌아 안 보며; 民族歧视问题하며 자전거에 올라타려는데 무엇이 걸리는듯 발이 떨어지어 뒤돌아 보니 그젊은이가 내뒤에 붙어 서있다. 干哈?!하며 내가 언짠게 물으니; 有什么事 下来 好好说好吗                  웃으며 말한다. 너는 누구냐의 물음에 그는 계속 웃는 얼굴을 띄우며; 我是民委办公厅的,现留守在这里的工作人员하며 你有什么事啊? 한다.   政府和媒体对我民族的歧视问题라 하니 당신은 어느민족인가 한다. 내가 아니꼽게 찔려 보다 朝鲜族 하며 급히 돌아 떠나려는데 뒤에서 你是金先生吧 하며 그가 물어 온다. 깜짝놀란(속으로 내 행동이 폭로되였나 속이 띄음하였다.) 내가 움쯜 돌아보며 네가 어떻게 아는가? 의아히 물으니 당신이 작년에 중앙텔레비죤방송에서 선족칭호 오용일을 반영했지 않은가? 그일을 우리가 广电总局에 보고 하고 방송국에 통보하여 사과하게 했다며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네 하고 얘기 하면 잘 해결된다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끈다. 하여튼 이날 일은 잘 생각떠오르지 않다. 제정신이 아니였언지! 어떻든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 갔고, 그와 대화하게 댔다. 안 될때는 방법을 취하기로 하며... ...머리속에 뜨는 흐리터분한 사색을 더듬으면; 그는 민족사무는 자기네가 다 관활하며 엄중한 문제는 자기네가 직접 중앙유관부서와 령도에 통보하여 해결된다며 작년 중앙텔레비죤에서 칭호사건도 자기네가 广电总局에 반영하여 해결되지 않아는가며 성근히 자리를 권한다. 어떤 큰 일이라도 자기네가 접수하면 빠르고 정상적인 경로로 정확히 유관부서에 반영되여 해결된다고 한다. 여기 시간은 늦은것 같고 천안문 쪽 시간은 아직 일찍하여 내색 안고 먼저 하회를 들어 보자는 심산으로 그의 얘기를 들어 보았다. 항상 웃으며 얘기하는 张씨인 그는 령도들의 경위원으로 있다 이곳에 배치되여 일하게 됐다며 자기는 중국혁명에 많히 공헌한 우수한 조선족들을 존중한다며 특히 리영태장군을 더욱 우러러 존중한다 한다. 리영태장군은  항미원조에서 미국비행기를 3대 떨러 뜨린 대영웅이라 한다. 그러면서 어떤일로 그러는가? 중앙텔레비의 칭호 일은 끊났지 않느가며 물어왔다. 그일은 끝났고 어떤어떤일이다 대략 말하니 자료들이 있는가 물어 내가 갖고 들어갔던 자료를 보였다. 소리없이 보던 그는 이런 나쁜자식들 하며 얼굴을 찦으리며 정식등록 해야 되겠다 며 내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 내가 안갖고 왔다고 하니 원래는 신분증이 있어야 접수하는데 오늘은 특수 정황이라 접수한다 며 등록하였다. 문제가 엄중하니 자기네가 인츰 상급부문에 통보해야 되겠다며 이일은 중앙에서 중시할것이라 하며 자초지종을 상세히 물어왔다. 믿어도 될것같아 밖에 나가 준비했던 삐라등물건들을 들여 와 책상우에 펼쳐 놓았다. 칼도 뽑아 놓았다. 그러나 휴발유병만은 꺼내놓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입 벌여지게 놀란 그는 한참은 말 못하며 있다 우리 격한 행동은 삼가하고 좋게 차근차근 얘기 하자며 내가 얘기하는 사실의 경과를 들으면서 등록지에 기록하는 얼굴에 웃음을 잊지 않았다. 얘기중인데 옆칸으로 50대넘은 사나이가 들어왔다. 책상우에 놓여있는 문건들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장공작원(그때까지 이곳이 어떤부서이고 그는 무슨 직무인지 몰랐다.)은 일어서며 들어온 분은 자기네 处长이고 이분은 작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칭호를 사용하여 문제를 반영한 김선생이라며 나를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계속 선족칭호가 나오고 新华网,人民网을 비롯한 많은 사이트에서도 칭호들이 사용되고 조선족을 비하,모욕하는 문장들이 올라 여러부문에 아무리 반영하여도 안되여 오늘 민족사무위원회로 찾아 왔다고 얘기했다. 오늘도 일이 안되면 김선생이 극단행동을 취하려 준비하고 왔다고 보충해 말한다. 그때에야 웃음을 지으며 처장은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해오고 그런 행동은 절대 취하지 말아야 한다며 민족사무를 총괄하는 자기네가 제때에 정확히 해결하니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자며 일어선 나를 자리에 권하면서 자기는 双口씨라며 환영한다 한다. 몸이 편치않아 금방 병원에 갔다 온다며 장공작원이 내준 자리에 앉는다. 자료들을 보며 내게 중앙텔레비죤의 칭호일은 끝났지 않았는가며 일의 시말을 물어온다. 내가 다시 일의 시말을 중복해 얘기하고 吕처장은 한편으로 드르며 자료들을 보았다. 그날은 그들이 이사건은 중대한 일이니 자기네가 꼭 책임지고 처리,해결하니 절대 격한 행동은 삼가하고 집에 돌아가 마음눕잡히고 휴식하며 다음날에 수집한 자료들을 모두 가져오라 하여 힌종이에 쓴 이란 글판은 남기고 돌아왔다. 게림하게 돌아오는 마음은 어떻다 표현할 글발이 떠오르지 않은다..... ...... 밤새, 잠 못자며 오늘에 내가 행동접은 것 맞는지, 그들이 진정 책임지고 철저히 해결해줄수 있는지 뒤척이 였다. 이튼날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을 포함하여,新华网,人民网,中国网,中华网,新浪网등 12개언론,사이트에서수집,다운한글들과 당과정부의 유관민족정책,법류문서들을 갖고 민족사무위원회로 갖다. 이날은 장공작원은 보이지 않고 吕처장이 나를 접대했다. 내가 내놓은 자료들을 보고 그중 화면과 문자자료에서 모두 여려차례 “선족” 칭호를 사용한걸 보고 “중앙텔레비죤에서 말이 아니구만,”하며 나보고 웃는다. 그말에 “작년 1월5일 우리에게 사과한후로도 “선족”칭호가 계속 나와 내가 반영하니 자기네는 관활못한다며 짜쯩내며 전화끊고 이젠 받지도 않는다고” 말하자 “중국 언론계에서 老大라 그렇겠지!” 하며 웃는다. 내가 갖고온 유관정책법규를 보고는 “이것이 유력한 증명이다.”며 이일은 꼭 잘 해결될수 있을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인민망의 칭호 목록자료를 들어보이며; 여기 빈칸들에 조선족이 칭호는 멸칭이다 썼다는데 왜 글들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물어 3월24일 인민일보张延农社长사무실로 전화쳐 반영하니 그쪽에서 자기네 컴퓨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내 컴퓨터로 다운하여 中文复印社에 가서 프린트한건데 그네들의 컴퓨터가 중문시스템이였어 조선글은 나타안나고 그렇게 빈칸만 생겼다. 믿지 않으면 당신들이 인민망사이트에 올라 검색하면 알수있다. 말하니 알았다며 이만한 자료,증거만으로도 일를 충분히 해결할수 있다며 이제 청구서(请求书)만 제출하면 되니 래일 청구서를 작성하여 가져오라 한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접수하여 결론나오는 기한이 보통 60일인데 이일은 엄숙한 큰문제라 빠르게 해결될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날의 대화에서吕처장의 태도와 말순은 어제와 좀 다른데가 있었다. 큰 문제는 회피하고 밀어치려는 뜻... 자기를 찾아오는 조선족들도 자신을 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아 자기가 대신 시정해 준다고 자주 말하는 것이다. 避重就轻   그날오후에 집에 돌아와 나절로 청구서를 작성하였다. 请求书 1,请各网站(包括中央电视台)依照国家有关政策法规立即停止侵害朝鲜民族名誉权和尊严的行为。 2, 请各网站(包括中央电视台)依照国家有关政策法规消除影响、恢复朝鲜族的名誉;立即删除侵害朝鲜民族尊严的信息。      3,请各网站(包括中央电视台)依照国家有关政策法规诚恳请以我为代表的朝鲜族有识之士在郑重地场合给朝鲜族赔礼道歉。并在其网站和主要节目、主要版面显著位置登载道歉信息。 4,请求促成法院立案审理裁决,以示中央政策和法律的严肃性。 5,中央电视台知错仍犯,我认为这是藐视我朝鲜民族的行为,请中央电视台认真检讨。   *希望中央电视台最近在适当节目中,在收视率高的时间段里就这次事件做专题节目; 1)告示全国国民;民族尊严,民族问题是极其严肃的。党中央和中央政府是很重视民族问题的,也重视少数民族反映地问题的。借此,很好地体现党中央提倡地和谐社会的氛围。 2)告慰;名誉、尊严受到严重伤害的朝鲜族。并以此,也给其他少数民族安心信息。 3)告示全国国民;少数民族的名誉和尊严是不可侵犯地,并以此契机警示制造、挑起事端,搞民族激化地扰乱分子和起到中介作用地媒介。   从2009年10月12日事发开始,对朝鲜族的反映,中央电视台的傲慢到政府有关部门的怠慢,国务院接待处工作员的对朝鲜族的歧视、蔑视,海淀某法院厅长的不耐烦发火。统战部接待处工作员的蛮横 ... … 我们以平静心情正常渠道解决问题的想法彻底破灭了。我们想这事不是小事,一个民族的尊严是不可忽视、戏弄地,更不可侵犯地。这是关系到国家的安定和社会的和平地。 恳请中央政府,国家民族事务委员会 尊严被政府媒介受到严重损伤地朝鲜族主正,维护国家的安定、社会的稳定。 此致   敬礼 2011年3月30日星期三 朝鲜族同胞敬上 그런데 저녁에 일찍 퇴근한 안해가 프린트해온 청구서를 보고 내가 컴퓨터로 자료들을 정리하는 걸 보더니 두말없이 컴퓨터를 들어 땅에 메쳤다. 또 둘이서 한바탕 해 재꼈다. 왜 이렇게 되는지 생각하며 장방 뜬눈으로 날을 샌 이튼날 아침도 먹지 않고 민족산무위원회로 떠났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吕처장은 놀라며; 这么啦?!하며 물어왔다. 눈과 얼굴색이 좋지 않았던것이다. 별일아니라고 말하며 청구서와 모학원국제부(한 조선글글잡지사에 가서 사실을 얘기하며 프린트 몇장하자니 바쁘다며 핑게를 대며 않해 주었다.)에가서 프린트한 人民网首页에서 로 검색한 목록을 보였다. 내가 제출한 청구서를 보며 吕처장은 얼굴을 찡그리였다. 나는 알은체 않고 어디에 받쳐야 할지 몰라 台头는 쓰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건 괜찬다고 하여 그말에 내가 반영한 사실이 없는일이 아니고 내가 이러는것이 반국가, 반사회행동이 아니지 하고 물으니 그는 절대 아니라며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人民网목록에 찍힌 조선글로 된 칭호유래에 관한 목록을 보며 제대로 찍혀 다며 나보고 인민일보사에 찾아가 말하고 자기가 신화사등 부문들을 찾아보는게 어떤냐고 물어 내가 좋지 않게; 내가 이많치 확실한 근거와 자료,유관당과정부의정책,법규를 제공하였으면 응당 국가의 민족사무를 총괄하는 당신네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지 않게는가? 빡 들이대 물으며; 어제 또 나 한개인, 한가정의 일이 아닌일로 안해와 싸우고 그가 컴퓨터까지 깨버렸다. 내가 처음에는 그저 손상받은 조선족의 존엄을 찾기 위하여 뛰여 다녔는데 현재 중앙의 반응과 정부일군들의 이일에 대한 태도에 요즘 많히 생각해보니 이것이 단순히 조선족의 존엄을 찾고 수호는 문제가 아니다, 한공증원이 말한것처럼 현재 중국에는 확실히 민족기시현상이 니타나고 있으며 조선족을 경멸하는 증상도 있다. 그렇지 않는가? 만약 서장의 좡족이나, 신강의 위글족, 회족들이 이런일 반영하면 중앙정부에서 이럴수 있겠는가?! 내가 첫날에 말했듯이 사이트에 올른 조선족을 비방, 모욕하는 글들을 보라, 그런 문장을 쓴 작자들이 그런 민족기시의 사상,경향이 있을 뿐만아니라 그영향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시겨 불안의 불씨를 뿌리고 있다. 그로써 전민에 민족기시의 사향을 심어주고 한족들에게 우리조선족의 명예,존엄에 먹칠하며 조선족에 대한 깊은 원한을 심어준다. 이러다는 나라에 큰 민족분화가 생기고 큰 파동이 생길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도 금방 말했지 않은가, 내가 이러는 일은 반나라, 반사회에 행동이 아니고 남들이 꺼려하는 애국행동이라고, 그런데 누가 알아주고 지지하여 주는가, 얼마나 힘들고, 고독하고 압력이 큰지 아는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년남짓한 동안 십여통의 수면제를 먹으며 잠들수 있었겠는가, 정 좋던 안해와도 여러번 싸움하면서 말이다. 어제 안해가 컴퓨터를 깨버린것까지 하면 내 혼자일도 아닌 일로 내 한개인의 만여원 돈을 썼다. 그러니 일이 여기까지 왔으면 응당 당신네가 전부 알아서 해야하지 않겠냐ㅡ며 흥분하니 빈속이 메스꺼워나서 돌아섰다. 내 얼굴색이 말이 아니였던지 吕처장은 바로 일어서며; 내 알아서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푹 휴식하라며 당신안해의 전화번호가 얼마인가며 자기가 전화쳐 설복, 위안하겠다고 하는것을 우리가정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깐 많히 수고해 달라며 문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몇발작 못걸고 와하고 나무등거리에 맨 물을 토해버렸다. 따라나온 吕처장이 다가오려는 것을 말리며 일어서서 입을 닦고 吕처장을 보고; 이번 일에 조선족령도들이 참여하는 것을 삼가해 달라 부탁하고 좋은 소식 기달린다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며칠기달려도 소식없어 4월15일 아침 일찍먹고 거처에서 왕복 50리 좌우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또 자전거 타고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사무실에 손님이 있어 들어 안가고 밖에서 기달렸다. 얼마후 손님들이 간 다음 노크하고 들어가니 혼자 있는 장공작원이 반갑게 맞으며; 给你好消息,您反映的事, 我们已反映到中央了,中央很重视,已惊动了中央六部委和北京市委刘琪书记하며 소식알려 준다. 정말 좋은 소식이였다. 오랜만에 환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또 이상하여; 이일은 북경시위하고 무슨관계가 있길래 북경시위에서 까지 介入하는가 의문하니 上述部门都是驻京单位吗,며 말해온다. 하여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감사하다. 수고 많히 했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족령도들이 이번 일에 참여하는것을 삼가해 달라며 그들은 모종인소로 철저히 우리조선족의 리익을 대표하여 이번 일을 확실하게 볼수 없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바래려 밖으로 따라나온 장공작원을 보며; 일이 제대로 잘 끊나면 잘 감사를 드리겠다. 말하니 장공작원은 웃으며; 不用,送一副敬旗就行啊,하길래; 心中早有数, 辛苦了! 再见! 하며 손저어 인사하고 자전거에 올라 경쾌히 회바람날리며 페달을 밟아 집으로 돌아 왔다. 한달넘어도 감감무소식이였어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45일인 5월11일 또 자전거타고 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사무실에는 吕처장만 있었다. 그는 지금 小金가 일을 맡아 보고 있고 민족대학의 조선족어떤학술단체에서 칭호멸칭에 대한 확실한 증거자료를 정리하는 중이라 한다. 민족대학 조선족학술단체라 짚이는 데가 있었고 속으로는ㅡ그단체에서 모르는척, 처음으로 이일을 접수하는척 격분하며 공식서한을 띄우며 같이 거세게 항의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나오고 함께 단합하여 중앙에 반영해주길 그렇게 바랬다. 그러면 중앙,정부에서 도 즉시 중시를 가지고 처리하며 일도 쉽게 끝을 보리라 생각하였다.ㅡ꿈속의 떡이였다. 小金가 宣传司의 김성화인가고 물으니 아니 政法司의 小金子라고 하며 어제 사무위원회의 班车에서 小金를 만나 물어보니 오라지 않아 일이 바로 될것이라 한다 더라고 한다. 그말에 왜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계속 맡아 하는가? 전번 4월15일에 와서 장공작원 말이 일이 중앙六部委하고 북경시위까지 반영되였다고 하던데 하고 물으니, 그건 그가 모르고 한 소리라고 한다.  이들이 하나는 唱白脸하고 하나는唱红脸하며 일을 얼버무리려 하는 것 같다. 일이 또 꼬이는 듯 하여 그의 정확한 직책은 무어고 이곳의 준확한 명칭은 무언가고 물었다. 吕처장은 이곳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반공청信访接待处이고 쑈장은 이곳의 일반 공작원이라 한다. 돌연히 마음의 힘이 쭉 빠지며 물러 앉을것 같다. 나의 신경변화를 모르고 려처장은; 정상적으로 반영된 일은 보통60일을 한 기한으로 하여 결과가 나오는데 이일은 특수하여 좀 빨르게 결재가 될것이라며 마음놓고 집에 가서 기달리라며 나의 등을 밀며 다른일이 있는지 바쁘기색을 띄운다. 밖으로 나와 따라나온 려처장을 보며; 지금이라도 조선족령도들이 이번일에 참여하는 것을 삼가해 달라, 다시 한번 나의 주장을 밣히고 전번에 당신도 말했지 않은가, 동족의 한령도가 자리에 있을때는 꼼짝않고 아무런 말 없다가 퇴직하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라고ㅡ하고는 자전거에 올라 집으로 향하였다. 돌연간 마음의 지탱과 몸의 힘이 싹 빠져 이날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왔다. 二环雍和宫 다리밑 십자로를 빠져 나오는데 앞의 신호등 파란불이 노란불로 변하는 것이 피뜩눈에 띄였다. 그래 급히 페달을 밟아 가속하여 나가는데 맞은켠에서 거먼오띠찦차가 죄우전하며 쌩하여 마주오는 것이였다. 길복판에 도착한 내가 그놈이 좀 속도를 죽이면 건너가려 했는데 속도를 죽이지 않고 더욱 쌩하게 맞받아 왔다. 너무 바빠 급히 자전거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 뒤로 돌아서는데 공공뻐스가 내 옷자락과자전거핸들을 잡은 팔을 쓰쳐 쑥 지나간다. 哥们儿, 这么骑车啊!운전수가 차창으로 건너다 소리쳤다. 금방 식은땀이 등뒤와이마에 죽 배였다. 그자리에 물 앉고 싶었다. 겨우 지탱하며 자전거를 밀고 인행도에 나와 주저앉았다... ...(나를 암살하려는 짓인가? ) 그날 아주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근처까지와서 백마강음식점 부근에 도착했을 때 음식점에 들어가 속이 후하게 개고기국이라도 한그릇 먹고 싶었다. 주저한참 서있다 에라! 집에 가자며 마음다지고 집에 돌아와 명태대가리에 술둬잔마이고 마른만투에 정수기물로 허기진배와 마음을 달래고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5월20일 오전10시50에 인민망에는 선족칭호를 입력하고 검색하면 안뜬다 계속 서너번 검색하면 힘겹게 페지를 열고(이전엔 인츰들어 갔음, 5월12일오후부터 힘들었음)新华网은 완전히 안되였다. 5월23일 인민망新华网계속 나타남.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자료를 접수하여 결론내린다는60일이 지난64일인 5월30일 아침일찍 일어나 차타고 또 민족사무위원회로 결과를 알아보러 갔다. 8시42분에 사무위원회 문앞에 도착하여 9시를 기달려 9시부터 9시30분 넘어까지 문별을 눌러도 안에서는 감감무소식이 였다. 9시반이지나 처음보는 어떤50넘은 사나이가 문열고 출입하며 걸레를 쥐고 출입문을 닦고 있었다. 곁에 다가가; 당신은 민족사무위원회공작인원인가 물으니 옳다, 그런데 이부문일군은 아니고 여기 사람들이 출장가서 임시 대신 일본다고 하며 일이 있는가 며 물어 그렇다 하니 그럼 안으로 들어가 애기하자며 안으로 청하며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 권한다. 그러면서 무슨일로 왔는가며 물을 따라준다. 내가 먼저 그의 직무를 물으니, 자기는 성이이고 이곳에서 6년 일하다 09년에 다른 부서로 이동하여 갔다면서 이곳의 일군들이 외지로 출장가서 자기가 원래 이부서에서 일했던 사람이라 교제도없이 오늘부터 일주일은 자기가 여기서 그들을 대신하여 일 본다고 한다. 그리하여 내가 여차여차 일이라 얘기하니 그런일은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지말고 信息产业部로 찾아가 반영해야 한다 한다. 그말에 내가 갈야할 데는 다가보았다. 그래 할수없어 마지막으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찾아왔다.  민족사무위원회 직능은  나라의 민족사무를 총괄하는 부서가 아닌가 그러니 응당 이런 일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맡아 해결하여 줘야지 않겠는가 되물으니 말이없는지 그럼 자료를 갖고 왔나 하여 민족사무위원회에 반영한지 이미 64일되여 오늘 일이 어떻게 되여는가 알아보러 왔다고 말하니 그럼 자기가 등록지를 찾아 알아 보겠다며 2층으로 올랐갔다. 등록지를 갖고 내려와 기록을 보던 그는 놀라며; 당신이 칼을 가지고 오고 삐라를 만들고 이건 격한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절대 삼가하여야 한다. 며 나를 살펴 본다. 내가 안그렇게 됐는가?! 하며 내가 여때 뛰여온 경과를 추려서 말하며 서장의 쫭족이나, 싱강의 위글족, 서부의 회족들이 이런일에 부닥치여 반영하면 민족사무위원회와 중앙정부에는 이렇게 태만하고 무시하게 처리할수 있겠는가?  2009년 2월달 잡지 李麦가 쓴에 대한 묘족들의 반영을 중앙정부에서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며 바투들이 대 물으니 그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이러는 중에 70좌우된 신강위글족 로인셋(남1, 녀2)이 문 열고 들어왔다. 공작원이 자리권하자 그들은 우리가 얘기중인데도 우리앞 책상우에 붉은색글체로 제목을 단 중문의 공식서한을 올려놓았다. 피끗보니 지방에서 자기네를 따돌린다는 반영문인것 같았다. 그와(뽀)말해야 쓸떼 없고 하여 일어서 나왔다. 나오는 나를 보며 공작원은 다음주에 그들이 오니 그들보고 나에게 전화하여 일의 진정을 알려 주겠다 하는것을 필요없다 내절로 와서 물어보겠다며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나 왔다. 단오 국가휴정일이 지나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74일인 6월7일 또 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땀 흘리며 나를 맞은 吕처장은 출장갔다 금방 돌아와 지금 참관단을 배동하여 천안문에 갔다 일이 있어 잠깐 왔다면서 6월13일다음주 월요일에 진행상황을 전화로 알려 주겠다하여 별소리 없이 돌아왔다. 오늘(6월14일 민위에서 일을 접수한지 78일) 오전 8번째로 또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일찍 떠나 8시반에 도착하니 출근안했서 인행도애 앉아 지하철에서 받은 신문을 보는데 신강위글족 남,여로인이 허술한 짐을 들고 사무실앞에 와 기달린다. 9시가 조금지나 그들이 문을 노크하고 먼저 들어갔다. 장공작원이 그들을 문열어 주었다. 인츰 끝나겠거니 하고 열시가 되도로 기달리는데 전번에 만났던 뽀공작원이 지나다 나를 알아보고 어떻게 되였는가 물어 아직 소식없고 오늘 알아보려 왔는데 안에 손님이 있어 기달리는 중이라 하니 문앞에 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고 나서 기달리지 말고 들어가보라 하며 자기가 금방 吕처장하고 전화통하였는데 吕처장은 전번에 출장같다 와 참관단을 거느리고 다니느라 감기와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라 한다. 실증났던김에 노크하고 들어가니 담화 중이 였다. 장공작원이 반갑게 맞으며 저쪽에 앉아 조금 기달리라 하였다. 신강喀什에서 왔다는 60세좌우의 로인과 30여세 딸이 였다. 딸이 강간당해는데 지방에서 제대로 처리하여 주지않아 어제 북경으로 국가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아 왔단다. 신강에는 공산당은 없고 국민당만 있다는 로인은 장공작원이 아무리 설명하고 해석하여도 외고집이고 너무 안먹어 장공작원이 자기는 이만큼 해석해도 안되니 나를 가리키며 우리둘이 할얘기가 있으니 밖에 나가 기달리라고 해도 안되여 우리는 부득히 밖에 나와 일의 상황을 얘기했다. 장공원은 일은 상급에 반영되였는데 아직 결론이 내려 안왔다면서 더 기달려 보라고 한다. 당신이 반영한 일은 누구도 생각못했던 좋은 일이고 이일로 혹 새로운 정책이 나올수 있다고 한다. 그러는데 바로 吕처장이 장공원께로 전화와 신강위글족부녀의 처리상황을 묻는다. 장공작원은 어떻다 회보끝나고 김선생이 왔다고 하니 나를 받으라 하여 내가 받았다. 기침하며 하는말이 자기가 어제 쑈진하고 전화로 물어보았는데 아직 중앙민족대학조선학연구센터에서 일을 끝맺지 못하여 결론이 안났다며 쑈진이 나에게 전화치겠다는 것을 자기가 일이 끝난다음에 전화치라고 말렸다며 얘기한다. 기침을 너무 하여 우리는 긴말않고 통화를 끊었다. 더 있어자 별얘기 없어 돌아서며 장공작원보고 我的等待不是无限期的 액세스를 박아말하며 자리를 떴다.   내가 친구하고 고향압록강변을 거닐고 있는데 웬 낯선 50대 사나이가 앞을 막으며 나보고 你是,金仁哲吗?물어 옳다 대답하니 자기는 국가안전부에서 왔으며 나라에서 체포령이 내렸다며 자기를 따라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장부책같은 책자를 번지며 여기에 서명하라 한다. 친구가 급히 앞을 막아서며 나보고 빨리 뛰라 한다. 내가; 뭘, 뛰게 있냐? 며 필을 쥐면서 이일을 민족사무위원회 양징주임이 아는가? 물으니 사나이는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호금도 주석은? 하고 내가 따져물으니 사나이는 다 모른다며 我,想一想!하더니 조금후 책장을 뜨더 버리며; 好吧! 你跑吧한다. 내가 무엇때문에 뛰야 하는가? 나는 나쁜일도 아니하고 제민족의 우롱당한 존엄을 수호하자는 것이고,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인데!ㅡ하며 높은 소리로 말하자 친구는 무작정 내팔을 끌고 뒤돌아 뛰는것이다. “跑的,越远越好!” 뒤에서 사나이의 웨침소리가 흘러가는 바람소리를 뚫고 귀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친구에게 끌려 뒤집에 뛰여 들어가니 집이 비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러는게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한사코 말리는 친구를 뿌리 치고 밖으로 나와 바라보니 집대문앞에 낯선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붙잡는 친구의 손을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동창들이 길옆에 모여서서 계속 앞으로 나가면 죽는다 피하라고 손짓하며 소리친다. 그러는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발길을 다그치니; 그앞에는 너를 암살하려는 작탄이 있다.ㅡ며 동창들이 조급하여 발을 굴으며 웨친다. 에라! 시작할적에 이런 결과 있을 줄 알았다.며 발을 떼는데 앞에 가느다란 철사줄이 가로 노여있는것이 눈에 보였다. 손으로 살짝들고 지나려니 안되여 둬발작 물러섰다 힘내여 몸을 솟구쳐 뛰니 아싸! 하게 건너갔다. 계속 앞으로 전진하는데 앞에 가로세로 보일락말락한 철사줄들이 눈에 띄였다. 동학들과 친구가; 더 나가면 진짜 죽는다. 이번것은 위력이 크고 령민한 작탄이라고 하며 손흔들며 긴장히 웨치고 녀동창들은 눈굽을 손등으로 찍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판인데, 전진이다. 온 힘다내 눈감고 백미리 속도로 내달려 철사줄들을 걷어 차고 나갔다. 작탄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화포가 하늘에 터지고 동창들과 친구들의 함성이 하늘을 진동한다. 더는 지탱못하고 그자리에 나른히 쓰러졌다. 친구와 동창들의 부름소리에 눈을 뜨니 회미한 집안이 였다. 일어나 곁을 보니 안해가 쪼골뜨리고 자고 있었다. 그렇게 자는 안해가 안스레 보였다. 곁에 이불로 살며시 덮어주었다.   6월21일오전 9번째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 갔다. 吕처장이 나를 맞았다. 오늘까지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86일이니 기정한 날자 60일보다 26일이나 더 지났는데 오늘 나에게 확실한 진행상황을 알려달라 딱딱하게 말하니 웃으면서; 어제 월요일아침에 출근하여 곧 바로  政法司小金子에게 전화쳐 물어보았는데 민족대학조선족학술단체에서 인젠 증실자료준비를 끝맞치고 민족대학 민족학연구부문과함께 중앙선전부등 유관부서에 제출할 이에 대처할 새로운 정책출시 준비사업 착수중이라 한다. 단시일내에 결과가 있겠으니 조급해 말고 기달리라 며 김선생이 나라를 위하고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좋은일을 하는데 우리도 자주 차문하여 결과가 나오는 즉시로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하여 더 말치않고 돌아 섰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일을 접수한지 92일인 6월27일월요일 10번째로 이른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서 早点사먹고 사무위원회로 갔다. 太平桥에 위치한 민위에 도착하니 8시가 금방 넘었다. 맞은켠 인행도옆 바자에 앉아 시간을 기달리였다. 8덟시반에 사무위원회 셔틀뻐스가 대문에 와 대이자 위원회 일군들이 줄줄이 내려 사무청으로 들어갔다. 9시15분에 信访处의 장공작원이 자전거 타고 출근하여 접대실로 들어가고 9시34분에 吕처장이 차몰고 출근하였다. 조금 기달려 9시57분에 접대실에 다가가 두번노크하니 吕처장이 문열고 맞았다. 그일때문에 왔는가 물어; 민위에서 일을 접수한지 오늘까지92일인데 오늘 나에게 어떤답안을 주겠는가 물으니ㅡ자기도 자주 알아보고 재촉한다. 전번주말에 政法处小金子에게 전화쳐 물어보니 이번주 금요일이면 결과가 나오게 된다고 한다. 바빠하는 눈치를 보이는것을 묵과하고 웃음과분노표정을 섞어가며 체면도 보지않고 딱딱들이대고 그러다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말하며; 당신들이 혹 한족들의 慢慢地의 일처리 습성과 大事化小,小事化了의 풍습으로 일을 얼버무리려 하지 않는가며 쓸쩍 옆을 찔렀다. 吕처장은 바삐 아니라며 변명하였다.  얘기중에 吕처장이 둘레를 치며 남의 추동에 놀지말라 얘기하여 그의 눈을 직시하며; 당신이 보건대 내가 그런사람으로 보이는가?!  쓴웃음을 지으니, 웃으며 김선생을 말하는 얘기가 아니다.며 말투를 돌린다. 10시50분까지 얘기나눈 吕처장은 이번 금요일에 결과나온 즉시로 전화로 알려주겠으니깐 이젠 힘들게 찾아 오지 말라하여, 좋은결과겠는가 물으니 결정코 좋은 결과라는 약속을 받고 돌아 나왔다. 4일간 지루하게 기달려 금요일 오전 9시반부텨 핸드폰을 켜고 민족사무위원회에 전화치며 탐문하려 하였다. 오후 3시반까지 9홃번쳤는데 신호는가는데 걸리지 않았다. 또한번 부품회망을 포기하고 마음을 풀려 탁구치려 나갔다. 땀 줄줄흘리며 열심히 뽈치는데 옆에서 老金你的电话하여 다가가며 들으니 常用전화가 아니고 전용전화소리여서 바삐달려가 벨을 누르니 吕처장의 웃음기어린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金先生,您好!告诉您好消息,刚刚接到的通知,您所反映的包括中央电视台和人民网,新华社等媒体称朝鲜族《鲜族》的称呼和登载诽谤,侮辱朝鲜族文章的情况已被中央民族大学朝鲜文学术会确认有错,并跟中央民族大学民族政策研究所共同研究提出提案上交中央宣传部准备提出对此事件的新政策하며 통지서문을 요약 읽어준다. 눈물이 나도록 기쁜소식이였다. 일을 벌려 근2년 뒤도록 모진신고끝에 듣는 울고 싶고 높이높이 웨치고 싶은 기쁜 소식이였다. 인생에 이보다 더 기쁜소식 또 어디있으랴?! 련발,谢谢!辛苦了를 란발하니 吕처장은; 아니,우리는 직무내 일을 한것뿐이고 당신이 민족과 나라의 평화,안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며 수고 많히 했다 한다. 내가 당장 택시타고 문건을 가지려 가겠다하니 그렇것 없고 자기도 5시면 퇴근하니 다음주월요일에 왔어 보고 상세한것 얘기하자 하며 통화를 맞쳤다. 시계를 보니 4시02분이였다. 옆에서; 老金,什么好事,这么兴奋那?하며 물어; 没事 하며 옆으로 나와 안해에게 기쁜소식 알렸다. 핸드폰수확기에서 안해의 촉촉한 목소리가 전파를 통해 귀전에 울려왔다. 저녁에 안해가하여 백마강음식점에가 내가 좋와하는 개고기탕 한그릇에 맥주한병 했다. 7월3일 일요일 오랜만에 몇사람 조선족령도하고 언론계분들에게 전화하여 일을 알리며 어떻게 할지 문의 하였다. ... ... ... ... ... ... 7월4일월요일 아침일찍 일어나 식은밥 먹고 정복하고 넷타이매고 구두싣고 민족사무위원회로 지하철타고 떠났다. 8시에 도착하여 报亭에서 신문한분을 사서보며 9시를 기달렸다. 9시정각에 민위사무실문을 노크하니 吕처장이 웃으며 반겨맞았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공사로 인해 민족사무위원회 청사 전체가 전기끈기여 휴가하는데 김선생일때문에 특별히 오늘나와 오전까지 전기안끈게 하고 사무본다고 하며 자리를 권한다. 그러면서 나의 앞에 민족사무위원회 붉은도장이 찍힌 문건을 내놓으며 먼저 보라한다. 문서의 전문은 아래에 본체를 복사하여 올린다.     金仁哲先生; 您好。     您来反映的关于有些媒体和互联网上不正确使用朝鲜族称谓、甚至带有侮辱性称呼的情况,我办已于3月28日把材料转给我委政策法规司处理。经政策法规司认真研究,并向有关研究朝鲜族称谓的专家咨询了解,并请示委领导同意后,已于近日以我委办公厅名义向中央负责宣传工作的部门去函,要求规范有关新闻媒体和相关部门正确使用朝鲜族族称。今后,我委还会与相关部门沟通,进一步加强对贯彻落实民族政策法规的监督检查工作,维护少数民族合法权益。   特此告知。                                           国家民委信访处                                       二0一一年七月一日 (본체를 올리려 했는데 내가 컴퓨터에 익숙지 않아 못올리고 본문 그대로 타자해 올린다.) 내가 본후 吕처장은 역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붉은도장이 찍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6원29일 작성하여 중앙선전부에 제출한 相关红头文件(간단히 내용을 피력하면 현재 중앙텔레비죤을 포함한, 매체,사이트들에서 조선족칭호를 멸칭인,등 단어들을 사용하고, 조선족을 비방,모욕하는 문장들이 올라 조선족들이 반영하여 오니 중앙선전부등유관부서에서 중시를 돌리고 매체들에서 다시는 이런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제지,단속처치를 바란다, 는 내용이다.)를 보이며 중앙선전부의 처리,결재를 기달리는 중이라며 중앙선전부에서도 중시하고 빠른 시일내에 상응한 문건,정책이 시달될것이라 한다.  내가 3월29일 두번째로 민위에 모든 자료를 갖고 왔으때 당신이 나보고 청구서请求书를 작성하여 제출하라 하여 이튼날에 당신에게 받쳤는데 내가 제기한 5가지请求는? 언제면 그런 단어들과문장들이 정부언론에서 사라질것이가? 그런글을 쓴 작자와 올려준 매개媒介, 책임자들의 정책,법률위반책임의 추구는? 그로써 조선족명와존엄에 준 손상의 사과는등의 나의 물음에 여기에 대하여서는 자기는 대답할수 없다 말하며 조선족존엄에 끼친 손상에 대하여서는; 먼저 그만두고 이제 다시 그럴때는 엄격히 처분, 사죄해야 한다 한다. 그러면서 김선생이 모든 곤난과 큰압력을 극복하며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고 나라의 평화와안정을 위하여 수고 많히 했으며 일이 김선생의 执着의 노력으로 비교적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니 마음놀고 좋은 소식기달리며 집에 돌아가 힘들고 괴롭게한 가정성원들 한테 자기의 위안을 전해 달라 말하였다. 돌아서 나오는 나의 손을 잡고 吕처장은 중앙선전부에서 문건이 하달되는 대로 나에게 알려주겠다며 문밖까지 나와 바래며 약속하였다. 이렇게 근2년동안 나 개인의 만여원 돈을 쓰고 가속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 나의 경기 겨룸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3월28일 일을 접수하여 99일만에 일단 한 막을 내렸다. 달콤한지! 쓴지,!! 시쿰한지!!1 감이 없다.   내가 일을 버무려 만들어 이렇게 접는게 옳은지? 동포사회에서 진맥해주기 바란다.   2011년07월4일 월요일 정오12시17분 지칠대로 지친 김인철이 수도 북경에서   l  려처장은; 자기를 찾아오는 조선족들도 자신을 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아 제가 시정해 준다고 자주 말한다.  뜻 ... ... ... l  일이 여기까지 일으러 희망컨대 우리의 신문,잡지,방송등 언론에서 많히, 자주 우리민족에 대한 지식과력사를 동포사회에 선전하고 특히는 우리학교(유치원부터)들에서 우리아이들에게 우리민족칭호,력사,문화를 전수하여 떨어져가는 조선족위상과 희미해져가는 우리문화되살리기에 전력해 주었으면 좋겠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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