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길림신문”서 펼지는 응모 작품 “아름다운 추억”이 독자들의 눈맛을 챙긴다. 그런데 필자는 “아름다운 추억”을 읽고 나면 번마다 타들과는 달리 “가슴 아픈 추억”이 떠 오르며 종종 밤잠을 설치군 한다.
“저 도깝들을 맡깁니다!
” 필자는 1947년 음력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현 도문시)에서 태여났다. 당년에 아버지가 병으로 농사일을 못하다 보니 30대의 어머니가 네 자식을 살피며 농사를 전담 하다보니 집생활이 궁핍하기로 말이 아니였단다. 오죽하면 누님들이 여름에 어머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지금까지도 외우겠는가..
그렇게 세대주로 지내던 어머니가 1948년에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마을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가을 탈곡을 끝내고 급병(촉한?)에 걸려 일주일을 지탱하다가 12살짜리 이하 3녀 1남을 남겨 놓고 32살 나이에 하늘나라에 갔다.
림종전에 어머니는 혀가 움직이지 않아서 겨우 이 세 마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으셨단다.
ㅡ 물남(곡수)서 시아버지가 이 둘째 며느리를 빨리 오라고 부른다(그때 시아버지는 언녕 사망 했다)
ㅡ 형님(필자의 백모)에게 저 도깝들을 마끼꾸마, 얼마나 고생 하겠습두…
ㅡ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습꾸마!(그날 동네 청년의 참군 환송으로 큰 누님이 필자를 데리고 갔음)
세상에 둘도 없는 백모님
그런데 업친데 덮친격으로 어머니가 사망한후 8년 만에 아버지까지 사고로 세상을 떠날 줄이야!
둘째 누이까지 결혼하자 우리 3남매는(동부이모인 남동생까지) 큰집에 얹혀 살게 되였는데 그때 큰집식구가 우리까지12명이 였다. 우리 나라가 제일 곤난한 시기였던1960년에 나는 수남소학교를 졸업하고 석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는 돈 때문에 학교 숙사에 들어가지 못 하고 매일 왕복 50리를 걸어서 통학하였다. 그때 몇 원짜리 사발시계가 없다 보니 매일 백모님(최어복, 1911 ㅡ 1987)이 이른 새벽에 뜨는 샛별과 수탉울음의 홰수를 시계와 자명종으로 삼고 새벽조반을 해놓고 필자를 깨웠다. 게다가 60년대 초 나라가 3년 재난으로 량식이 없어 백모님은 매일 삶은 호박과 풀뿌리 등 대식품(代食品)으로 점심밥을 마련할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백모님은 생산대의 양돈장에서 몇년간 돼지사양원으로 설명절도 없이 고생는 필자한테 몸 보신을 해 주느라고 1969년 봄에 40근짜리 황둥개를 잡아서 개엿을 만들어 일곱식구중 필자만을 따로 대접하였의니 말이다.
이 밖에도 백보님은 필자 부모들의 제사도 30년을 명심하여 잊지 않고 지냈고 1975년에 필자가 결혼하여 분가하게 되자 “너에게 너의 아버지의 환갑제사부터 시름을 놓고 맡긴다”고 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백모님은 치매로 집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형편에도 필자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였다
1987년 9월 어느 날, 필자는 백모님을 찾아 뵙고 나서 떠나려는데 백모님이 겨우겨우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더니 밖에까지 따라 나와 채석돌에 돼지사료로 쌓여 있는 늙은 오이무지에서 좋아 보이는 오이를 골라 손으로 싹싹 비비더니 “기활아 오이를 더 먹고 가라”는 마감인사로 근로하고 자상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백모님의 정치흉금
백모님은 낫을 앞에 놓고 “ㄱ”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다. 무식하기로 지난 60년대에 마을에서 전기를 가설하였을 때 백모님은 전등불을 불어서 끄느라고 애썼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번도 생산대 회의에 참가하지도 않는 백모님의 정치적 흉금이 집식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화혁명 때(1968년 8월) 백부님이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하루저녁 투쟁대회에서 타살되였다. 망나니 살인배들은 흉악하기로 이미 입관한 백부님의 시체를 “조선특무에게 관채를 못쓴다”며 시체를 꺼내 가마니에 싸서 묻도록 강행했다. 그때 백모님은 억울해도 소리내여 목놓아 울수도 없었고 그저 마음속에 억울한 원한을 깊이 품었다. 그후 백부님이 타살된지 얼마 안 되여 중국에서 “윁남전선지원”활동을 벌렸는데 어느 날 저녁에 백모님이 집식구들을 모아 놓고 윁남전선에 지원하라며 량표를 30근이나 내놓았다. 그때는 전 국민들이 나라에서 정한 ”3정량(3定量)” 표준으로 량식을 공급받는 때라 량표는 곧 쌀이였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글쎄 집에 신문방송도 없었고 생산대 회의에 한번 참가하지 않는 문맹인 백모님이 어떻게 알고 집식구들도 모르게 한량 두량 모았던 그 많은 량표를 윁남전선을 지원하라며 주동적으로 내놓았으니 실로 모를 일이다 이 밖에도 1975년에 필자가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와 백모님께 농학원에서 입당을 했다니 “네 입당이 대학졸업장보다 더 반갑다”며 그렇게도 기뻐할 줄이야!
실로 억울하게 남편을 읽은 백모님의 정치흉금이 바다보다 넒었다.
하늘나라 백모님게 지금까지도 후회 됩니다!
1976년 봄이다.
도문시에서 시민들의 음료수를 해결하고저 봉오동저수지를 건설을 결정짓고 봉오동대대(촌)를 파가이주를 하게 되였다. 그때 필자는 홍광향 축목수의소 소장직에 있으며 홍광향정부의 파견으로 봉오동 파가이주민 배치사업을 책임지게 되였다. 그때 이주민배치사업을 마무리를 하고 나니 대대부(촌부)에 걸려있던 벽시계가 임자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시계를 단위에 걸려고 갖고 오다가 아무튼 무슨 일로 하여 달라자 큰집에 맡겨놓고 이 후에 가져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큰집에서 처음 “땡 땡” 울리며 시간을 알리는 벽시계를 걸게 되였다. 그후 몇 달이 지난 후에 필자는 그 벽시계가 생각되여 가져 왔는데 그날 백모님이 너무나도 아쉬워서였던지 “그걸 가져가니?”고 물었는데 필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예”하고 대답만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백모님이 그 벽시계를 큰 재산으로 그렇게 아끼였겠는데 가져간다고 하니 얼마나 아쉬웠으면 “그걸 가져 가는가?”고 물었겠는가!.
필자는 그 벽시계만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하늘나라에 계시는 백모님이 떠오르며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으로 후회되고 죄송하기로 형언할수가 없다.
속담에 “사랑은 내리 사랑이지 올리 사랑은 없다”고 했는데 이는 정녕 필자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오늘 필자가 남들의 “아름다운 추억” 에 상대로 “가슴아픈 추억”을 함은 늦게나마 하늘나라에 계시는 백모님게 죄송한 마음을 표함과 함께 후세들에게 백모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가슴아픈 추억을 문자로 남겨 후손만대에 전하기 위함이다.
후세들에[게 당부한다. “너희들이 남한테 베푼 것은 다 잊고 남에게서 가진 것만을 기억하라”
백모님의 조카사랑은 천, 만, 억…. 이라고 수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오늘 필자는 하늘나라에 계시는 백모님게 그때 그사랑을 추억함과 동시에 필자의 철없던 그 때를 반성하며 백모님의 명목을 빌고 또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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