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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태초의 아침
2018년 08월 23일 00시 13분  조회:4055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태초의 아침'은 우리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간,
흔히 말하는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아닙니다.
계절을 뛰어넘어 최초의 시간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푸른 빛 사이에서 핀 빨간 꽃의 의지도 느껴지는데요.

시는 읽는 사람의 현재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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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태초의 아침

 

태초(太初)의 아츰

봄날 아츰도 아니고

여름가을겨울

그런날 아츰도 아닌 아츰에

 

-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은 어린 꽃과 함께

 

이 시는 사랑과 죽음은 태초의 아침 전날 밤에 마련된 것이다는 내용이다.

 

화자는 세상이 창조된 태초(太初)의 아츰은 봄날’ ‘여름가을겨울의 계절이 생기기 전의 아침이며 그날 아침은 햇빛이 푸르른 아침이라고 생각한다그 아침에 하와를 의미하는 아름답고 어린 꽃-간 꽃이 피어났, ‘은 어린 꽃를 사랑하여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불륜을 저지른 존재이며이로 인해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은 어린 꽃인 하와로 인해서 생긴 것이나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날 밤에 창조주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고 바이블의 창세기 설화를 해석을 하였다.

 

태초(太初)의 아츰은 하늘과 땅이 생겨난 맨 처음’ 맞이 하는 아침이다이 아침은 우리가 알고 있는 봄날 아츰도 아니고여름가을겨울의 아츰도 아닌 아츰으로 우리는 모르는 아침이다.

 

-간 꽃이 피어났네햇빛이 푸른데는 도치된 문자이다화자가 생각는 태초(太初)의 아츰은 햇빛이 푸르게 빛나는 맑은 아침이다. ‘푸른데의 ‘-는 사전에 하게할 자리에 쓰여과거 어느 때에 직접 경험하여 알게 된 사실을 현재의 말하는 장면에 그대로 옮겨 와서 말함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이다그러나 ‘-는 ‘-’ 앞에 붙은 어간의 의미와 배치되는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 생겼다는 느낌을 풍긴다이 일이 -간 꽃이 피어났네이다. ‘-은 빨간을 강조하는 말이며, ‘푸른과 색이 대비되어 정열아름다움유혹의 느낌을 주는 색이다. ‘푸른이 주는 차분함맑음이성과 대비된다. ‘은 관습적 상징으로 여자를 의미한다.

 

그 전()날 밤에그 전()날 밤에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 사랑은 뱀과 함께()은 어린 꽃과 함께는 연이 도치되었다. ‘사랑은 뱀과 함께()은 어린 꽃과 함께에서 은 바이블 창세기에 에 기록된 설화에 나오는 뱀이다이 설화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고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는데 뱀이 하와에게 신이 먹지 말라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 하고 하와가 짝인 아담에게 이를 먹게 해서 신에게 죄를 짓게 했고 그 결과 죽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화자는 이 하와에게 신이 먹지 말라한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한 행위를 하와를 사랑하여 유혹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의 사랑의 대상은 -간 꽃인 매우 아름답고 정열적이며 유혹적인 하와이다. ‘하와는 짝이 있었으므로 지금의 윤리로 보면 의 사랑은 불륜의 사랑이다. ‘()’은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성분으로 중독(中毒)되면 죽음에 이른다그러므로 죽음을 의미한다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온 의 은 불륜으로 생긴 것이다그러나 화자는 인간의 죽음이 온전히 에게서만 온 것으로 보지 않고 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 짝을 신에게 거역하게 한 하와에게서도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 꽃은 하와를 말하는데 여기서 어린은 하와의 정신적 성숙도를 말하는 것이다아직 하와는 어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불륜인지 모르는 존재였다그렇기에 뱀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죽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전()날 밤에그 전()날 밤에모든 것이 마련되었네는 화자가 바이블을 해석하는 관점을 나타낸다신의 명령을 어기게 만든 뱀과의 불륜의 사랑을 한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이 과 하와에서 온 것이라 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그 근원을 탐구하면 태초(太初)의 아츰이 오기 전인 그 전()날 밤에’ 이미 신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이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기독교는 을 신에 대항하는 적대 세력인 사탄으로 보고 인류가 영생하지 못하고 신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주장한다그런데 화자는 이 모든 죄와 죽음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마련된 신의 계획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를 쓴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이라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시인 윤동주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였고 기독교의 모티브를 차용하여 시를 썼으나 기독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이라 하는 항간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전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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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1인칭’ 과 ‘너머’ 의 시인


◇ 윤동주의 생애를 다시 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타계하였다.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문학사에서 윤동주처럼 이른바 요절 문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상(1910∼1937), 김유정(1908∼1937), 박인환(1926∼1956), 기형도(1960∼1989) 등이다. 모두 30년을 채 못 살았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한결같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비추는 당대의 별이자, 지금도 애독되는 고전적 텍스트들이다. 그런데 이들과 윤동주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윤동주는 마지막 생애 1년 7개월가량을 경찰서와 감옥에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피검되어 12월 6일 검사국으로 송국되었고, 1944년 2월 22일 송몽규와 함께 기소되었고,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고, 그 후 후쿠오카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면서 죽어갔다. 그러니 그의 27년 1개월 남짓한 생애에서 1년 7개월의 공백이 생긴다. 계산하면 그가 자유롭게 세상을 호흡한 시간은 25년 6개월 15일 정도인 셈이다. 

그런데 윤동주가 교토에서 살았던 동안의 기록들 역시 망실되어 지금 찾을 수 없다. 당시 도쿄(東京)에 있던 당숙 윤영춘이 서둘러 교토에 와 윤동주를 취조실에서 면회했을 때 윤동주가 자신이 쓴 조선어 글을 모두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술회한 것으로 미뤄,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동안에도 많은 글을 썼을 것이다. 윤영춘도 그 원고량이 상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가 우리에게 남긴 지상 최후의 기록은, 도쿄의 릿쿄(立敎)대를 다니던 1942년 6월 즈음에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편지와 동봉하여 보낸 시편들이다. 릿쿄대 편지지에 깨끗하게 정서한 그 작품들은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어진 시’ ‘봄’이다. 앞의 네 편에는 창작 일자가 남아 있고, 마지막 ‘봄’에만 날짜가 빠져 있다. ‘사랑스런 추억’과 ‘흐르는 거리’는 각각 5월 13일과 5월 12일의 창작 일자를 달고 있으니까 윤동주가 꼭 창작 순서대로 정서를 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봄’은 대략 ‘흰 그림자’를 쓴 4월 14일부터 ‘쉽게 씌어진 시’를 쓴 6월 3일까지 어름에 쓰였을 것이다. 늦게 잡아도 ‘봄’이라는 시상에 어울리려면 6월 안에는 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남긴 120여 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은 모두 1942년 6월 이전의 작품이 된다. 어림잡아 윤동주의 ‘기록자로서의 생애’는 24년 5개월 남짓이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윤동주의 발화는, 모두 20대 초반에 이뤄진 것들이다.

이는 앞에서 거론한 이상, 김유정, 박인환, 기형도 등의 대표작이 대부분 20대 후반에 쓰였다는 점과 유의미한 대조를 이룬다. 이상의 ‘날개’나 ‘권태’ ‘실화’ 등은 그의 말년에 쓰였고, 김유정의 ‘동백꽃’ 등도 마찬가지다. 박인환의 걸작 ‘세월이 가면’도 유작으로 쓰인 것이고, 기형도도 대부분 20대 후반에 절창들을 연쇄적으로 써나갔다. 그런데 윤동주는 20대 초반에 그의 모든 작품을 쓴 것이다. 이 점은 강조되어 마땅한데, 그만큼 윤동주가 과조숙한 사람이었으며, 또 그에게 20대 후반이 허락되었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을 남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윤동주는 진짜 ‘청년 시인’이 아닐 수 없다.


 
 

◇‘일인칭’의 시인 윤동주

하지만 이러한 요절 자체가 윤동주에 대한 비상한 매혹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시를 다수 남긴 훌륭한 근대 시인이고, 어쩌면 한국문학사 전체를 조회해 보더라도 그 함량과 파생력에서 단연 일급에 속한다. 그렇다면 윤동주 시가 가지는 진짜 브랜드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부끄럼’을 키워드로 하는 성찰의 언어와 ‘저항’을 키워드로 하는 민족주의적 독법이 오래전부터 매개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윤동주는 다른 시인에게서는 찾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그만의 독자적인 특장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한편으로는 ‘나’를 고백한 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너머’를 상상한 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토로하고 고백한 일종의 ‘자기 폭로’로서의 예술을 보여준 윤동주의 특성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서정시의 원리이니 새삼 크게 강조할 것도 못 된다. 하지만 윤동주가 시를 공부하고 노트에 써두고 또 자필 시고를 묶을 때의 한국 시의 맥락과 성취를 전제해 보면, 그 방향과 성취는 자못 돌올하다. 

먼저 윤동주가 깊이 사숙하고 모방하고 또 비껴갔던 정지용의 경우, 그는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나’를 전면에 내세우는 고백 시편보다는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사물 시편을 많이 썼고, 아니면 주체를 지우면서 신성이나 풍경 속에 몰입하는 신앙 시편과 후기 ‘백록담’ 시편을 썼다. 

윤동주는 그에게서 시어의 혁신, 이미지의 참신함, 조선어의 예술성 구현 등을 정성껏 배웠지만, 시 안에서 차분하게 일인칭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점에서는 스승의 시로부터의 역주행을 택했다. 사실 윤동주의 화자는 그대로 청년 윤동주의 발화와 가장 가까운 근사치이다. 이 점은 앞 시대의 소월이나 만해가 주로 배역 시편을 썼다거나, 임화나 이상이 실험적인 다양한 화법의 시를 썼다거나, 김기림이나 김광균 등이 묘사 시편을 썼다거나 하는 사실로부터 훌쩍 벗어난 윤동주만의 문학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에게는 시인과 화자 또는 내포적 화자와 현상적 화자 같은 개념이 미분화한 채, 시인 자신의 진솔한 고백에 시적 발화가 통합되어 있다. 물론 이는 백석의 후기 시편들과 구조적 동류항을 이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윤동주 시만의 ‘자기 폭로’ 방법을 독자들이 좋아했던 데 있다. 윤동주는 끊임없는 부끄럼과 고통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시 안에서 “괴로워했다”라고 쓰면 그것은 그대로 윤동주 자신의 괴로움이 되고,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라고 말하면 연애 한 번 안 해본 사람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우리 근대 독자들은 서정시의 이러한 고백을 마음 열고 엿들으면서, 자기와의 동화와 투사를 감동 깊게 수행해간 것이다. 

이때 시의 화자 ‘나’는 시의 독자 ‘나’와 순간적으로 통합되면서 일체감을 낳는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사랑스런 추억’)라는 예언을 들으면서는 그 예언이 이뤄지지 않은 그의 불행한 생애를 불멸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나오는 ‘나’는 그대로 ‘청년 윤동주’였고, 우리는 그가 고백하는 ‘나’를 만나 “최초의 악수”(‘쉽게 씌어진 시’)를 한 셈이다. 윤동주가 우리에게 이렇게 보편성과 항구성을 띤 채 새롭게 읽히는 것은, 그가 그 당시에 매우 새롭게 채택한 일인칭 고백으로서의 시법에 원인이 있고, 그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흔치 않은 진정성을 보여준 데 더 큰 까닭이 있는 것이다.



◇‘너머’의 시인 윤동주

이렇게 ‘나’를 고백한 시 외에도, 윤동주에게는 그만이 가진 매우 중요한 지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을 우리는 ‘너머’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윤동주는 현상적인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들여다보면서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곳을 넘겨다본 시인이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또 다른 고향”을 찾아 떠난다. 그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 고향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전제한 발화이다. 또한 그는 참회록을 써놓고도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쓰고자 한다. 날카로운 첨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또 다른 십자가를 상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인류의 괴로움을 지고 괴로워했던 그리스도의 희생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다. 그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기꺼이 희생의 불가피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또 다른’ 속성의 확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태초의 아침’을 넘어 ‘또 태초의 아침’을 노래하는 것 역시 차원이 전혀 다른 아침을 통해 신성과 세속이 벌이는 갈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려는 의욕을 담고 있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자화상’에는 세 명의 ‘사나이’가 나온다. 가을밤에 논가 외딴 우물에 가서 윤동주는 ‘한 사나이’를 들여다본다.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 도로 가 들여다본 것은 ‘그대로 있는 사나이’다. 다시 그가 미워져 돌아가다 생각하니 이제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 이제는 그 사나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그 우물 속에는 천체들의 이동과 함께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미움-연민-미움-그리움’의 감정 회로를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 성숙한 시선을 통한 자기 긍정에 이르는 이 감동적인 흐름 역시 ‘사나이’와 ‘또 다른 사나이’ 사이의 시간과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집 마지막 작품인 ‘별 헤는 밤’에서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 위에 자랑처럼 무성한 풀 역시 시인이 욕망하는 ‘또 다른 이름’의 형상일 것이다. 그렇게 윤동주는 현상 ‘너머’, 지금 ‘너머’, 이곳 ‘너머’를 오래도록 상상한 시인이다.

 
이 점은 재차 강조되어 마땅한데, 사실 이처럼 ‘또 다른’ 차원으로의 존재 전환에 대한 갈망과 희원은 우리 시사에서 매우 드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이원론적 사유라고 해도 좋고, 형이상학적 전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러한 입체적인 ‘치명적 도약’(옥타비오 파스)을 이뤄낸 시인으로서, 이는 소월이나 백석이나 김수영조차 가지지 못했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 비약과 전환의 욕망은 앞으로 더욱 세심하게 논구되어야 할 윤동주 득의의 브랜드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윤동주가 요절 때문에 작품 외적으로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 ‘저항시인’이라는 민족주의적 독법에 따라 시대적 후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 근대 시사에서 퍽 드문 영역인 ‘나’를 고백한 시, ‘너머’를 상상한 시로 남은 고전적 텍스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화일보 9월 12일자 25면 6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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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윤동주와 기독교
 

◇윤동주와 기독교 

마르틴 루터에 의한 근대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았다고 연일 매스컴에서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이란, 로마 가톨릭의 역사적 과오와 한계를 비판하면서 시작된 ‘저항 종교’로서의 프로테스탄트가 새로운 근대를 열면서 중세의 인적, 제도적 질서를 허문 사건이다. 우리가 윤동주를 생각할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발생론적 원천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를 둘러싸고 그가 수용한 지적, 정서적, 영적 경험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윤동주의 시가 북간도 기독교와 여러모로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그간 윤동주 연구에서 누차 강조되어온 터였다. 특별히 복음주의적 전통이 깊이 착근된 서북 기독교와는 달리, 민족주의를 사상적으로 받아들인 채 전개된 북간도 기독교는 그의 사유와 경험 체계에 매우 중요한 개성과 전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따라서 북간도 기독교는 윤동주로 하여금 수난과 영광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영적 선지자들의 계보를 잇는 종교적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끔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를 기독교라는 원리나 역사의 선명한 번안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의 복합적인 내면과 언어와 전망은 기독교라는 원근법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워낙 강한 원심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검출되는 종교적 상상력이란 내적 성찰과 완성을 향하여 저류(底流)에서 흐르는 힘이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그러한 지향이 잘 담겨 있는데, 그 점에서 이 시집은 식민지 시대에 쓰인 가장 중요한 종교적 상상력의 보고이기도 하다. 



◇윤동주의 종교적 작품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윤동주가 직접 자선하여 실은 종교적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이다. 이미 창작 노트에 훨씬 많은 작품을 써놓은 터에 그 가운데서 윤동주가 열여덟 편만을 뽑았다는 것은, 이 시집 원고가 1941년 11월 시점에서 윤동주 시의 정점이었음을 잘 알려준다. 그 점에서 이 시집 원고에 종교적 작품이 여섯 편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높은 비중이 아닐 수 없다. 시집에 실은 순서대로 보면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등이 그 목록을 차지한다. 먼저 ‘태초의 아침’에서 윤동주는 신의 창조 사역이 완전무결한 질서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모순으로 둘러싸인 세계로 나아갔다는 개성적 인식을 드러낸다. 가령 그는 ‘사랑’과 ‘뱀’, ‘독(毒)’과 ‘어린 꽃’이 갈등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를 노래한다. 이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를 동반하면서 선명하게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되어갈 세계를 예견하게끔 해준다. 이어지는 작품 ‘또 태초의 아침’ 역시 창조의 과정에서 계시와 함께 낙원 상실이 함께 왔음을, 그리고 원죄와 부끄럼과 노동과 해산이라는 인간적 고통의 목록들이 연이어 역사 안으로 개입해왔음을 증언한다.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라는 마지막 행의 다짐은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함의하기도 하지만, 갈등의 시대에 자신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희생적 이미지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새벽이 올 때까지’는 이러한 창조와 희생의 이미지가 종말론적으로 반추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종말론이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들에 관한 예언 혹은 묵시적 가르침을 함의한다. 이는 신의 뜻에 의한 역사의 완성을 전제로 하는데, 이를 통해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새벽이 되어 울려올 “나팔소리”는 죽음과 삶의 반영체인 ‘잠’과 ‘젖’을 하나로 묶어주면서, 결국 ‘죽어가다’와 ‘살아가다’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이 운명적 비관론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심은 ‘무서운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되는데, 이 작품에서 윤동주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그것을 일종의 윤리적 의지로 탈바꿈시키려는 사명감을 함께 보여준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은 어쩌면 ‘사랑’과 ‘뱀’이 함께 창조된 그날 아침의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그다음에 실린 ‘십자가’는 윤동주 종교 시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윤동주는 희생과 속죄양 의식을 동시에 노래한다. 사실 ‘십자가’는 기독교 전통의 표상이자 고난의 상징이다. 시인은 첨탑 위의 십자가가 비록 구원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그것이 너무 높고 다다르기 힘든 대상임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그래서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면서 서성일 뿐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여기서 ‘또 다른 십자가’를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얻어간다. 그것은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했던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높고 날카로운 천상의 십자가가 그리스도가 기꺼이 졌던 지상의 십자가로 몸을 바꾸는 순간이다. 이때 우리 시사의 한 절창이 이어진다. 그것은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이는 앞으로 시인 자신이 겪어야 할 수난과 희생의 장면을 뚜렷하게 암시하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불어’는 그러한 종교적 갈등을 벗고 십자가를 내면화한 채 나아가는 출사표와 같이 다가온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라는 구절에서의 ‘반석’과 ‘언덕’은 단연 신약성서의 키워드이다. 그것은 가혹한 수난과 굳건한 기초라는 함의를 한꺼번에 띠면서 윤동주가 비록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고백할지라도 앞으로 시대와 신앙을 결속하면서 움직여갈 것임을 암시해준다. 이처럼 시집에 실린 여섯 편의 작품은 ‘창조-모순-갈등-희생-종말-십자가-반석’의 서사를 완성하면서 그가 원숙한 신앙적 단계를 경험하고 반추하고 또 귀납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여섯 편은 내용적으로도 하나같이 중요하지만, 실린 순서도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새로운 종교성을 향하여 

그런가 하면 윤동주가 시집 원고를 마련한 후에 쓴 ‘간’이라는 작품은, 윤동주 시의 일반적 주제인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라는 문제를 설화를 빌려 파고들어 간 결실이다. 작품 안에는 두 개의 설화 곧 프로메테우스와 귀토 설화가 뒤섞여 있다. 이 둘은 간이라는 공통 소재를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토끼의 설화는 현실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꿈꾸지만 자신이 바라던 이상 세계는 갈등의 현세이며 지상이 소중한 낙원임을 깨닫는 인간의 자각을 담은 이야기이다. 토끼는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고 있으며 그 둘레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킨다. 이때 시인은 코카서스의 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묵묵히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로 상상을 이어간다. 여기서 간은 인간의 실존적 본질로서 매일 쪼아 먹히면서도 새로 돋아나는 인간적 고통의 핵심이 된다. 토끼와 독수리는 인간의 양면 혹은 두 개의 자아를 표상한다. 곧 독수리는 화자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쪼아내며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내부의 예리한 의식이다. 곧 이것은 현실적 자아를 반성하는 도덕적 결백성의 반성적 자아이다. 화자는 이 고통을 통해 반성적 의식이 살질 것을 기대하며, 용궁의 유혹을 벗어나 보겠다는 덧없는 환상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는 어떤 초월적 희망에 대한 환상도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자기 응시의 긴장을 항구적으로 택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결연한 의지로 맞서는 비극적 인간 곧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으로서, ‘십자가’의 속죄양 의식과도 적극적으로 상통한다. 결국 이 작품은 윤동주 시에서 가장 의지적이고 적극적인 자아상이 등장하는 시편이다. 설화를 상상적으로 변용하여 시인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이상적 자아의 모습을 설화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종교적 상상력은 설화적 차용의 모티브뿐만 아니라, 견인과 의지라는 표상을 역설적으로 제시해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처럼 윤동주에게 새로운 종교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단초가 되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융합적인 활달한 상상력은 그의 생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떠났고, 다섯 편의 도쿄(東京) 시편을 남겼을 뿐이다. 


▲  윤동주가 1942년 유학했던 일본 도쿄의 릿쿄대.

◇가혹한 현실을 견디게끔 해준 견인의 바탕 

윤동주는 생애 내내 학생이었고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 가운데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 연희전문은 물론, 일본의 릿쿄(立敎)대학과 도시샤(同志社)대학도 모두 개신교 계열의 미션스쿨이었다. 윤동주가 근대적 의미의 종교개혁이나 이스라엘 수난사로서의 성경 내러티브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또 그것을 자신의 의식 전면에 장착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윤동주에게 종교란 자신을 성찰하고 완성해가는 중요한 원천이자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슬픔과 연민, 죽음과 부활의 연쇄적 서사는 어떤 의미로든 그에게 “나한테 주어진 길”을 상상하게끔 했을 것이며, 성경 안에 자욱하게 펼쳐진 어둑한 묵시록이나 종말론은 모두 가혹한 현실을 견디게끔 해준 견인의 바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는 제재 차원의 배경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은총과 갈등을 함께 가능하게 한 광장이자 감옥으로서의 종교를 경험하고 상상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종교란, 경험적 구체성과 함께 한국 기독교 시의 역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갈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장관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는 그를 척박한 근대 종교사에서 가장 우뚝한 시인으로 서게끔 해주는 핵심적 질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김현승, 박목월, 박두진 등의 종교 시편들과 함께 궁구되어야 할, 우리 근대시 역사 전체에서의 윤동주 득의의 성취일 것이다. (문화일보 10월 10일자 25면 7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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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윤동주를 위하여 -끝- 
 

단정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삶과 시가 일치했던 시인  
韓 현대문학사 독특한 성취 

자기고백과 성찰 기록한 시  
먼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 아닌  
지금 우리의 망각에 대한 각성 

윤동주 탄생 100주년 맞아  
‘영원한 청춘’의 시인 재평가  
세월 가로지른 감동으로 부활
 

◇현대문학사에서의 윤동주 = 그동안 우리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를 따라, 윤동주를 찾아, 많은 길을 가로지르고 또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윤동주를, 길지 않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남다른 가치와 개성으로 숨 쉬고 있는 시인으로 기억하게 됐다. 그가 남긴 오롯한 시편들은 원초적으로 시와 삶의 분리 불가능성 속에서 발원하여 우리의 가장 깊은 실존의 심부에 와 닿는다. 어쩌면 그의 삶 못지않게 그의 죽음 역시 그 극적 성격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를 불멸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상황과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 감동으로 살아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른 나이에 운명한 사람의 불가피한 미완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라도, 윤동주의 단정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시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탈환시키는 항구적 보고(寶庫)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윤동주의 시는 자전적 성격이 강하고, 그의 시에 나타나는 화자는 윤동주 개인과 거의 일치한다. 그의 시가 비록 연륜을 쌓은 원숙함과는 다른 청년기의 속성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형성 중에 있는 청년의 이상과 그 아픔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빛나는 장면으로 어느새 몸을 바꾼다. 그래서 그가 노래한 ‘부끄럼’과 ‘성찰’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것이 되고, 그 실존적 치열함은 부끄럼 자체가 부끄럼의 대상이 되는 끝없는 극화의 성격을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의 연희전문학교 입학은 일종의 성년식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늙은 의사의 진단’(‘병원’)을 받았고, 일본의 릿쿄대학에서는 ‘늙은 교수의 강의’(‘쉽게 씌어진 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근대 학문이나 합리성의 체계에 자신의 실존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피로’와 ‘침전(沈澱)’을 택하였다. 이 또한 ‘자기 인식의 위기’(Identity crisis)를 스스로를 발견하는 계기로 삼은 그의 투명한 눈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윤동주의 삶과 시의 궤적은 자기 성찰보다는 자기 도취나 현시로 종종 기울어가는 현대인의 영혼을 깨우고 세상에 맞설 항체를 제공하는 자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윤동주만이 누리는 매우 중요한 권역이 아닐 수 없다. 

◇고백과 성찰의 기록 = 상식적으로 말해 시의 표면에 등장하는 화자는 실제 자연인인 ‘시인’과 같지 않다. 소월 시의 여성 화자라든가 정지용 초기 시에 나타나는 유년 화자 등이 그 시인과 같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시에는 시가 구현하려고 하는 주제 또는 내용에 따라 그에 걸맞은 일종의 ‘퍼스나(Persona)’가 방법적으로 설정된 것뿐이다. 그런데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시인 자체가 직접 화자가 돼버리는 속성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의 시의 특성은 강한 ‘자기 고백성’에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시를 하나의 발표 양식으로 생각하거나 전문적인 독자를 의식하고 창작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제일의적 독자가 돼 시를 썼기 때문에 나타난 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들은 그러한 고백과 성찰의 기록이다. 윤동주의 이러한 자기 성찰의 힘은, 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원죄 의식, 낙원 상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계시),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럼, 고통스럽지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함(‘또 태초의 아침’)에 대한 지속적인 윤리적 준거로 작용한다. 그 윤리적 준거가 윤동주에게 ‘자기 희생’의 이미지라는 ‘자기 성찰’의 변용된 에너지를 선사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시가 그동안 ‘저항시’라는 문맥으로 통용돼온 것에 대한 강력한 조정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투명하고도 진정성 있는 자기 탐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윤동주를 민족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기획과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기원의 기억 상실’을 극복하는 자료로 기억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의미한다.  

‘기원의 기억 상실’이란, 기억과 망각의 장(場)을 통해 바로 그 기원이 은폐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자연화한 기억은 성과 계급과 인종의 차별적 위계화를 지워감으로써 개인을 동질화한 집단으로 호명하는 기제를 말한다. 그것은 그래서 우리 민족의 식민 경험을 그야말로 ‘원경(遠景)’으로 처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윤동주는 ‘식민’과 ‘언어’에 대한 망각에 대해 저항하는, 기억의 정치학을 아름답게 보여줄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내면의 저항이라는 실존적 언어 행위가 극명하게 윤동주 시의 본래적 성격으로 조명돼갈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저항(抵抗)’은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모든 행동과 사유를 포괄한다. 거기에는 어떤 부정한 폭력에 대한 반작용이 그 본질적 속성으로 담겨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는 오도된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힘으로서 일종의 정당방위적 속성을 띠게 된다. 물론 이는 협의의 저항이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삼는 실천적 움직임을 말하는 데 대한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광의의 저항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윤동주의 생애와 시는, 가장 협의의 저항으로 그동안 유통되고 재생산된 측면이 있는 셈이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집단적 기억으로 소통돼온 것은, 윤동주를 그런 표상으로 기억함으로써 그와는 전혀 다른 욕망으로 움직여온 어떤 이들의 행태들에 대한 망각을 동반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윤동주를 제자리의 기억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윤동주라는 창(窓)을 통해, 식민지 시대 제국에 동화하려 했던 욕망들을 모두 은폐하려는 또 다른 욕망들과 힘겹게 싸워가야 한다. 

◇윤동주는 누구인가 = 내게는 귀중본이 얼마 있다. 오래전 출간된 초판본 시집이나 잡지 창간호 같은 것들, 귀중한 분들로부터 친필 사인을 직접 얹어 받은 책들, 그리고 각별하고도 유일한 기억이 얹혀 있는 책들이 그 목록을 차지한다. 서서히 낡아가는 종이의 속성 때문에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읽어내기조차 어렵게 된 이 책들은, 한사코 교환가치에 의해 값이 매겨지지 않는 자신만의 유일한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물론 정음사 판 초간본은 아니다. 1955년 2월 16일 그러니까 그의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펴낸 중간본이다. 초간본에 선명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이 빠졌고, 그 대신 동생 윤일주의 글 ‘선백(先伯)의 생애’와 정병욱이 쓴 후기가 말미에 붙어 있다. 오랜 세월을 훌쩍 넘어 종이들이 나풀대기까지 하는, 고서(古書)에 가까운 이 책을 나는 무슨 불멸의 기억처럼, 내 문학의 깊은 수원(水源)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윤동주는 나의 문학적 욕망 안에 거의 첫사랑의 흔적처럼 숨 쉬고 있는 시인이다. 대학 1학년 수업 한 장면에 나는 윤동주에 관한 발표를 했다. 그때 나는 무슨 고해성사처럼, 문청(文靑)으로서의 과장된 자기 다짐 같은 것을 윤동주와 관련하여 어색하게 엮어나갔던 것 같다. 그때 교수님은 발표자가 윤동주와 비슷한 성정을 가진 것 같다고 무슨 ‘화인(火印)’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부끄러웠고 용기 충천했었다. 그런데 졸업식 때, 한 동기가 “이제는 윤동주에서 벗어나야지?”라는 충격적인 말을 건넸다. 그렇게 내가 그에게 함몰됐던가?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대학원 과정 내내 윤동주를 찾지 않았다. 내 시선은 정지용으로, 백석으로, 임화로, 김수영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녔다. 윤동주 시가 가지고 있는 순결하고도 선명한 메시지를 피해, 이념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훨씬 복합성을 띠었던 근대시의 전범들을 읽고 외우고 공부하고 그들에 관한 글을 부지런히 썼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의 나이를 훌쩍 넘어, 나는 윤동주라는 불멸의 젊음이 가지는 기억으로 귀환했다. 여기 연재한 글은 모두 그러한 귀환의 흔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탄생 100주년을 넘어 = 또한 우리는 그동안 윤동주를 이렇게 아름다운 표상으로 남게 해준 이들의 공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윤동주의 시집을 보관하여 세상에 알린 정병욱 선생, 오빠의 친필 시작 노트를 소중하게 옆에 끼고 월남하여 일반에게 알려준 누이동생 윤혜원 여사, 형님을 증언하고 시집을 묶어낸 남동생 윤일주 선생, 불행하게 죽어간 조카를 마지막에 만나고 또 여러 기억의 문맥에서 윤동주를 섬세하게 살려낸 오촌당숙 윤영춘 선생, 그리고 아무런 증언도 없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지만 윤동주의 유고를 간직했다가 해방 후에 단아한 시집으로 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 선생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이분들은 모두 윤동주에게 우호적인 기억을 남겼다. 특별히 자기 정보를 산문을 통해 노출한 적이 거의 없는 윤동주를, 우리는 이분들의 공력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두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분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 불멸의 청년 시인에게서 그가 느꼈던 ‘부끄럼’과는 또 다른 ‘부끄럼’을 느끼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윤동주는 언제나 우리에게 ‘부끄럼’을 끊임없이 복습시키는 항구적 원인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자만이 남을 부끄럽게 하니까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불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결정(結晶)인 아름다운 시편들을 남기고 그렇게 세월을 가로질러 ‘또 다른 고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시대와 상황을 넘어 크나큰 감동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시기적 분기점을 지나 그에 대한 실증적, 역사적, 미학적 해명과 담론적 축적을 더욱 정밀하고 세련되게 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의 실존적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소중한 지면을 주신 문화일보와, 이 글들을 따라와 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올린다.  


(문화일보 11월 21일자 25면 9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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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말이 없다가도 이따금 한마디씩 하면 뜻밖의 소리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는 친구 유영의 증언처럼, 말수 적은 동주가 글을 남기지 않은 두 번의 침묵기가 있었다.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9, 10월경 몇 편 쓰고 9개월쯤 지나고, 2학년 1939년 9월에 ‘자화상’, ‘투루게네프의 언덕’ 등을 쓴다. 다시 긴 침묵으로 들어가 1940년 12월까지 1년 2, 3개월의 침묵 기간을 지낸다.

침묵을 끝내고 ‘팔복’ ‘위로’ ‘병원’을 쓴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팔복’)라는 말은 끝없는 절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이다. ‘팔복’은 냉소적인 풍자 혹은 절망시일까. 오히려 “슬퍼하는 자(와 함께하는 이)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에 적극적으로 긍정한 시다. 

‘팔복’과 같은 시기인 1940년 12월에 쓴 ‘병원’을 보면 더 명확하다. ‘나도 모를 병’을 의사도 모른다 한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식민지 공간의 은유일 수 있다. 3연 끝 문장을 보면 병원에서 영원히 슬플 행복을 살며시 언급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팔복’과 ‘병원’에 나오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다. 침묵기 이후 동주는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서울 종로구 누상동 하숙집에서 겪는다. 

연희전문 입학하고 3년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고 2학년 때 1939년에는 신촌, 북아현동과 서소문에서 하숙했고, 3학년 때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4학년 때인 1941년 5월 초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온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기숙사 식사가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산문 ‘종시’에는 생활을 더 알기 위해 성문 안으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는 말이 나온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가다 전신주에 붙은 ‘하숙 있음’이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 씨 바로 그분이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집 주인은 소설가 김송으로 윤동주보다 여덟 살 위였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감옥 체험을 다룬 데뷔작 ‘지옥’을 공연하려다가 중단당한, 당연히 피해야 할 기피 인물이건만 두 사람은 오히려 김송의 집을 하숙집으로 정한다. 


  •  

성악가인 부인의 노래를 가끔 들을 수 있는 ‘오붓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누렸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며 계곡물에 아무렇게나 세수하기도 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돌다리 기린교가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 그 근방일 것이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하며 경성(서울) 생활을 즐겼다. 

1941년 5월 그믐부터 9월, 불과 3개월만 지낸 이 집에서 동주는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가다’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 등 9편의 시를 쓴다. 효자동 종점에서, 전차와 기차에서 동주는 식민지 경성 사람들의 내면을 본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寢臺)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새벽이 올 때까지’(1941년 5월)

  

‘다들 죽어가는’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표현은 6개월 전 이런 모양새로 나왔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옷을 입고, 잠을 자며 쉬고, 서로 젖을 먹으며 힘을 내잔다.  

윤동주는 스스로 죽어가는 존재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고,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또 다른 고향’)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1941년 5월 31일)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다. 다만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이라는 문장은 11월경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쓰여 있다. 동주는 왜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라는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로 만들려고 일제는 모든 쇠붙이를 쓸어갔다. 1941년 10월경부터 조선 교회의 노회 보고서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교회 종(鐘)을 떼어 바치는 보고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감리교단연맹은 1941년 10월 21일 이사회를 열고 제4항 ‘각 교회 소유의 철문과 철책 등을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아침예배 후 ‘영미응징승전기원’을 하고, 애국헌금도 하기로 결의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50전을 바치기도 했다. 당연히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끔찍한 상황이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 이후 극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동주는 알고 있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가는 존재들, 병들거나 굶주려 죽어가거나, 징용되어 죽어가거나, 사라져가는 한글, 모든 슬픈 존재들이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치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주체가 된다. 그들과 슬퍼하는 것, 곁으로 가는 것이 삶이며 신앙이라는 깨달음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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