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조의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ㅡ이창배 교수
다음에 인용하는 김소월의 걸작으로 애송되는 [초혼]의 경우도 감격적 어조가 두드러진 시이다. [초혼]이란 말 은 사람이 죽었을 때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난 후에 장례식을 치르는 관례에서 비롯된 말이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시인은 죽은 애인을 못 잊어 비탄에 잠겨 절규한다.
죽은 이가 과연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 절규를 통해 슬퍼서 몸부림치는 시인의 비애의 감정이 처절하게 호소해온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않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나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이해가 가지만 원숙한 시인은 그 감정에 매달려 몸부림치지 않고 내적인 감정을 외적인 장면이나 사물로 객관화한다.
이 점에서 같은 시인의 작품이지만 [진달래꽃]은 훨씬 잘 쓴 시라 하겠다.
[진달래꽃]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겠지만 사랑하는 애인과의 이별 장면이 제시된 것은 틀림없다.
이 장면을 통하여 전통적인 한국 여인에 대한 시인의 감정이 정확히 구상화된 점에서 이 시의 작품성이 높이 평가된다.
이 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음 장으로 미루고 [초혼]에 제시된 것과 같은 애인의 죽음에 대한 비애의 감정이 感傷에 흐르지 않고 구상화되자면 시가 어떻게 씌어져야 하는가를 유사한 주제를 다룬 또 다른 한 편의 시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무치게 그리운 여인이여, 당신은 어떻게 내게 말을 하는가요.
지금의 당신은 이전의 당신이 아니라고,
나에게 전부였던 그 당신이 변했던 시절, 그때가 아닌
우리 사이가 아름다웠던 처음 그때와 같다고 말하는군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정말로 당신인가요. 그렇다면 봅시다.
내가 집 근처에 다가들면 늘 기다리고
서 있던 당신의 모습, 그래요, 그때 내가 보았던
그 상쾌한 하늘색 가운까지도 똑같은 당신의 모습을.
아니면, 이 목소리는 축축한 초원을 가로질러 무심히
이쪽으로 불어오는 미풍에 불과한가요.
당신의 목소리는 이제 파리한 불가해한 것으로 변하여
이 근처 어디서고 다시는 안 들리는군요.
그래서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낙엽은 여기저기 떨어집니다.
바람은 북쪽에서 가시덤불 사이로 가냘프게 스며들고,
여인의 부르는 목소리.
이 시를 보면 하디에게는 죽은 부인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 그녀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남편을 멀리 집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다정한 아내였음을 또한 알 수 있다.
그 아내가 죽으니 이제 생시의 원망과 그리움이 한 데 뒤섞여 못 견디게 보고 싶어 한다. 환각으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에 이끌려 비틀거리며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시인의 외로운 심정이 이 짤막한 한 편의 "극"을 통해서 잘 전달된다.
이 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감정을 인물과 장면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감정의 절제를 기하여 낭만적 한탄과 초월에서 벗어나 감정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극적 수법이다. 엘리엇은 잘 씌여진 시는 아무리 짧은 한 편의 서정시라도 극적이지 않은 시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의 초보자들이 개척해야 할 부분이 그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테니슨의 시보다 예이츠와 하디의 시가 잘 쓴 시이고, [초혼]보다 [진달래꽃]이 잘 쓴 시라고 평할 수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서정주의 [부활]이란 시도 김소월의 시, 하디의 시와 같은 주제를 다른 시로서 시인의 감정이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내 너를 찾아왔다. 수야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니.
수야, 이것이 몇 만 시간만이냐.
그날 꽃상여 山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촛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江들은 또 몇 천 리, 한 번 가선 소식없던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서도 열아홉 살 쯤 스무 살 쯤 되는 애들 -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 속에 들어앉아
수야! 수야! 수야! 너 이젠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군나.
이 시에 등장하는 "수야"라는 아이가 실명인지 가명인지는 가릴 필요가 없고, 아마 "열아홉 살 쯤 스무 살 쯤" 나이에 죽은 여자아이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이 아이가 죽은 뒤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어서 그 모습이 늘 눈에 밟혀 종로 바닥을 걸으면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그 애가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명랑하고 맑은 모습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수야에 대한 사무치게 그리운 심정이 부활의 사상으로 바뀌면서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도, 애절한 감정의 표출도 없이 장면과 이미지만으로 잘 전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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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박성우(1971∼ )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첫사랑’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온다. 처음인 데다 다시는 없을 일이니 아련하고 소중하다. 첫사랑만 그럴까. 첫 만남, 첫아기, 첫 직장. 이렇게 처음과 함께하는 많은 단어들은 떨리는 설렘을 전해준다.
첫눈이 내렸다. 많은 ‘첫’ 번째 일들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데, 첫눈이라는 말은 매년 쓸 수 있다. 첫사랑은 매년 돌아오지 않지만, 대신 첫눈은 매년 다시 내린다. 물론 올해의 첫눈은 작년의 첫눈과 다르다. 그래도 첫눈이라는 말을 매년 되풀이할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마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깨끗하고, 선하며, 반갑고, 신비하다. 덕분에 우리는 매년 첫눈 오는 날에 깨끗하고, 선하고, 반갑고 신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박성우 시인의 ‘첫눈’은 이 느낌을 고요하게 간직하고 있다. 특히나 첫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첫눈이, 요정이나 사람처럼 강물에게 가서 조용히 두드린다. 그리고 가만히 녹아들었다. 첫눈이, 말없는 팽나무를 찾아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가만히 팽나무에 스며들었다. 눈송이가 사라지는 순간이 이렇게나 섬세하다.
시인은 눈 뭉치를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 강물과 팽나무와 눈이 내리던 밤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시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 그의 마음 안에서 눈이 내렸고 강물이 흘렀고 팽나무가 자랐다. 그러니 눈을 넣어 둔 곳은 냉장고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일 것이다.
올해 우리의 첫눈은 끝났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언제든 첫눈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찰바당찰바당’거리는 강물에 있고, ‘팔랑팔랑’대는 팽나무 가지 사이에 있다. 조금 억지를 부려보자. 첫눈이 닿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선하며 반갑고 신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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