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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소사전] - 랑만주의란?...
2016년 12월 14일 18시 50분  조회:3993  추천:0  작성자: 죽림
 
낭만주의 (예술)  [浪漫主義, Romanticism]
출처: 브리태니커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서구 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룬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개요
 
고전주의 일반과 18세기말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던 질서·냉정·조화·균형·이상화·합리성 등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했다.

 
 
 
 
 
문학
 
진정한 의미의 낭만주의가 싹트기 전인 18세기 중엽부터 몇 가지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전 낭만주의(Pre-Romanticism)라고 부른다.

 
 
영국 문학에서 낭만주의는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서정민요집 Lyrical Ballads〉을 출판한 1790년대에 시작되었다. 워즈워스가 〈서정민요집〉 제2판(1800)에 붙인 서문에서 시를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충일"(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로 정의한 것이 영국 낭만주의 시운동의 선언이 되었다.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3번째로 중요한 시인은 윌리엄 블레이크이다. 한편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첫번째 단계는 내용과 문어체 모두에 걸쳐 일어난 혁신과 신비적인 것, 잠재의식,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탐닉이 그 특징이다.

 
 
1805년경부터 1830년대까지 지속된 낭만주의의 2번째 단계에는 고유의 민담, 민요풍의 발라드와 시, 민속춤과 음악, 심지어 그때까지 무시되어온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모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적 민족주의가 되살아나고 민족의 기원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 특징이다 (→ 민속예술). 역사에 대한 평가가 되살아나자 역사소설의 창시자인 월터 스콧 경은 이를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글로 옮겨, 역사소설을 개척했다. 이즈음에 영국의 낭만주의 는 존 키츠와 바이런 경 및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 영국문학)

 
 
1820년대에 이르자 낭만주의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문학에 널리 퍼졌다. 이 후기(2번째) 단계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접근방식은 보편성을 잃고, 나라마다 역사적 유물과 문화유산을 연구하거나 비범한 인물들의 정열과 투쟁을 조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 이전에 활동한 대부분의 주요작가들을 들 수 있다.

 
 
한국문학에 있어서 낭만주의가 대두된 것은 1920년대초에 쓰여진 시에서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전통적 도덕과 인습에 거세게 반발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흔히 1920년대 낭만주의를 병적·감상적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인지 〈백조〉를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홍사용·박종화·나도향·이상화 등이 이에 속했다. 박영희의 〈환영(幻影)의 황금탑〉(백조, 1922.1)·〈월광(月光)으로 짠 병실〉(백조, 1923.9), 박종화의 〈사(死)의 예찬〉(백조, 1923.9),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백조, 1923.9) 등은 현실의 모든 번민과 집착의 저편에 서서 죽음에의 초대를 노래했다.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 1923.9)에서는 세상을 공포와 비애만이 가득찬 곳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1920년대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행위는 낭만적 정열이라기보다는 낭만적 허무로 끝나며, 그것은 감상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고 일정한 감정의 절망적 몸짓을 관습화하는 이러한 감상의 바탕에는 건강한 도덕성이 있을 수 없으므로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은 김소월 등 몇몇을 외에는 그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20년대 초기에 감상 및 퇴폐적 성격을 띠었던 낭만주의 문학은 사실주의 또는 프로 문학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각예술
 
1760, 1770년대에 제임스 배리와 헨리 퓨젤리, 존 해밀턴 모티머 및 존 플랙스맨 등 영국과 로마에 있던 많은 영국 화가들은 종래의 구상예술이 다루었던 고대의 역사와 신화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종래의 엄격한 제작방법과는 합치되지 않는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 회화). 이 화가들은 기괴하거나 비장하거나 지나칠 만큼 영웅적인 주제를 선호했고, 긴장된 선을 이용한 드로잉과 음영의 대담한 대조로 대상의 윤곽을 뚜렷이 나타냈다. 영국 초기 낭만주의의 주요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나름대로 힘차고 독특한 환상적 형상을 창출해냈다.

 
 
그뒤의 세대에서는 J.M.W. 터너와 존 컨스터블의 작품을 통해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라는 중요한 양식이 등장했다. 이 화가들은 경외심을 자아내고 웅장함을 느끼게 하는 역동적인 자연계를 묘사하기 위해 빛·공기·색채의 순간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프랑스 초기 낭만주의의 주요화가는 앙투안 그로 남작과 테오도르 제리코였다. 그로 남작은 당시의 나폴레옹 전쟁을 주제로 전투의 극적 장면들을 그렸고, 제리코는 〈메두사의 뗏목 Raft of Medusa〉과 정신병자들의 초상화에서 개인의 영웅적 행위와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1820년경의 낭만주의 운동을 사실상 선도했다. 가장 위대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는 외젠 들라크루아였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붓놀림, 화려하고 감각적인 색채의 구사, 역동적인 구도, 북아프리카 아랍인의 생활에서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이고 대담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무시무시할 만큼 조용하고 황량한 풍경화를 그림으로써 신비롭고 종교적인 외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건축에서의 낭만주의는 주로 옛날 건축양식의 모방과 '폴리'라고 칭하는 기괴한 건축물을 통해 표현되었다.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가진 영국과 독일의 건축가들은 중세 고딕 건축물에 매력을 느꼈고, 이렇게 되살아난 고딕 양식에 대한 관심은 결국 고딕 복고양식을 낳았다.

 
 
 
 
 
 
 
음악
 
낭만주의 음악은 독창성, 개성,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 실험정신이 가미된 자유로운 형식이 두드러진다 (→ 서양음악사).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프란츠 슈베르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교량이었으며 그들의 기법은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양식이었지만, 강렬한 개인적 감정과 표제적 요소는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리트[歌曲], 야상곡(夜想曲), 간주곡, 카프리치오[奇想曲], 전주곡 및 마주르카 같은 새로운 음악형식이 등장함에 따라 음악의 극적인 표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낭만주의적 정신은 시와 전설 및 민간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고, 문학과 음악을 표제음악이나 서곡,부수음악 같은 형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낭만주의 음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낭만주의 초기의 주요 작곡가는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프란츠 리스트였다. 이들은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최대한으로 확대하고, 반음계를 온전히 이용하기 위해 화성의 수를 늘렸으며, 악기와 사람의 소리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 악기편성법). 낭만주의 음악의 중기 단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는 안토닌 드브르자크, 에드바르트 그리그, 표트르 일리히 차이코프스키이다. 음악을 통해 민족의 독특한 정서를 표현하려는 낭만주의의 노력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드보르자크,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러시아,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작품으로 시작된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와 빈첸초 벨리니, 조아키노 로시니 같은 작곡가들이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를 수준 높게 끌어올린 사람은 주세페 베르디였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낭만주의 음악의 마지막 단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활동한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드워드 엘가, 얀 시벨리우스 등이 있다.
 
 
 
 
 
사실주의 (예술)  [寫實主義, realism, 리얼리즘]
출처: 브리태니커
 
 
자연이나 현실생활을 정확하고 자세하며 꾸밈 없이 묘사하는 예술적 경향.
 
 
 
 
 
개요
 
사실주의는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理想化)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는 여러 문화의 다양한 예술적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미술에서는, 검투사와 노파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사실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바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들, 호세 데 리베라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및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같은 스페인의 화가들, 프랑스의 르냉 형제 등을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의 작품은 그 접근 방식이 사실주의적이다.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 헨리 필딩 및 토바이어스 스몰릿 등의 작품도 사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하나의 미학적 계획으로서 의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였다. 1850~80년에 나온 프랑스 소설과 그림에서는 사실주의가 주류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26년 〈메르퀴르 프랑세 뒤 디즈뇌비엠 시에클 Mercure français du XIX e siècle〉지(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예술적 업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현실생활이 제공하는 모델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바탕을 두는 예술가 원칙을 나타내기 위해 이 낱말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작품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그들은 중하류층의 서민들과 평범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꾸밈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관습 및 도덕관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동시대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 즉 심적인 태도, 물리적 배경, 물질적 조건 등을 재현하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했다. 사실주의는 19세기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지적인 발전에 자극을 받았다. 즉 주로 평범한 사람을 예술 작품의 주제로 삼는 독일의 반낭만주의 운동,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는 전문적 언론의 등장,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진술의 발달 등이었다. 이런 모든 발전은 동시대의 삶과 사회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사실주의 미학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한 최초의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Studio〉(1854~55,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거절당하자, 그는 특별히 지은 가설 천막에 '사실주의, G.쿠르베'라는 이름을 달고 이 작품과 함께 여러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이상화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고, 평범하고 동시대적인 것에 예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그는 일상생활상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앞서 1850~51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던 〈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1849, 루브르 박물관)과 〈돌 깨는 사람들 Stone Breakers〉(1849, 이탈리아 밀라노, 개인 소장)은 검소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꾸밈 없이 사실대로 묘사하여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쿠르베가 농부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대담하고 거칠게 제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미술계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제와 표현 양식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닦아놓은 터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장 프랑수아 밀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 지방의 특징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프랑스 바르비종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었지만 자연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측면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측면을 강조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처럼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들 The Winnower〉(1848) 같은 작품에서 농부들을 위엄있고 장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때까지 중요한 인물들을 묘사할 때만 사용했던 모습을 보잘것없는 서민에게도 적용한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주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로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풍자화한 전형적인 도시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노동계층의 남녀, 비열한 변호사, 사악한 정치가 들을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 그 역시 쿠르베처럼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풍자 화가의 명분을 정치적 목적에 직접 활용했다. 도미에는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과 추악함을 힘찬 윤곽선, 대담하게 강조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 거의 조각 같은 형태 처리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판했다. 미술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프랑스 이외에 19세기 미국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윈슬로 호머의 바다를 주제로 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그림들, 토머스 에이킨스의 초상화와 뱃놀이 광경 등은 당시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며 정확하게 관찰한 그림들이다.

 
 
사실주의란 20세기 미술의 뚜렷한 흐름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 대해 좀더 정직하고 예리하며 대상을 이상화시키지 않는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욕망과, 이 미술을 사회·정치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 8인회'(The Eight)라 불리는 미국 화가들은 도시생활의 어두운 면을 신문 기자처럼 신랄하게 묘사한 풍경화를 그렸고, 한편 독일의 미술운동인 '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의 냉소적인 사고방식과 환멸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또한사회사실주의라 부르는 대공황기의 미술 운동도 그당시 미국 사회의 불공평과 해악을 가혹하고 노골적인 사실주의로 묘사했다. 1930년대초부터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삶을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주의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함'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선전의 필요성과 일치해야 했고,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했다. 이런 그림에 묘사된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영웅적인 적극성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부족하다.

 
 
인상주의 (예술)  [印象主義, Impressionism]
출처: 브리태니커
 
(프)impressionnisme.
 
19세기말과 20세기초 주로 프랑스에서 전개된 예술운동.
 
 
 
 
 
개요
 
회화에서 시작되어 음악에까지 확산되었다.

 
 
 
 
 
회화
 
인상주의 회화는 대략 1867~86년 일련의 공통된 접근방식과 기법을 구사한 일군의 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망라한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빛과 색채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해 가시적 세계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한 점이었다. 주요화가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 폴 세잔, 베르트 모리조, 아르망 기요맹, 프레데리크 바지유 등으로서 이들은 함께 작업하고 서로 영향을 미쳤으며 공식적 인정을 받으려고 줄곧 애쓴 마네를 제외하고 그들은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찍부터 문학적·일화적인 의미를 담은 역사적·신화적 주제를 그릴 것을 강조하는 전통적 아카데미 회화의 가르침에 불만을 느꼈다. 또한 아카데미 회화의 특징인 판에 박힌 공상적 또는 이상적 표현기법도 거부했다. 1860년대말에 이르러 마네의 미술은 장차 인상주의의 지도지침이 될 새로운 미학을 반영했다. 즉 전통적인 주제는 중요성이 떨어지고 예술가가 구사하는 색채와 색조, 질감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네의 회화에서 주제는 평평한 색면(色面)을 솜씨있게 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또 원근법적 깊이를 최소화시켜 관람자가 그림에서 창출되는 환영적인 3차원 공간에 빠져들지 않고 그림표면의 형태와 관계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모네는 외젠 부댕, J. R.용킨트 같은 혁신적인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뛰어난 색감과 물감에 의한 다양한 질감으로 하늘과 바다의 변화무쌍한 순간적 효과를 묘사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또 야외에서 스케치한 것을 작업실에 가져와 유화로 완성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부댕이 그랬던 것처럼 애초부터 야외에 나가 실제의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 방법을 채택했다.

 
 
1860년대말 모네·피사로·르누아르 등은 들과 강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여 특정한 시간에 자연의 빛 속에 나타나는 대상의 색채와 형태를 냉정하게 기록하고자 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풍경화의 색조인 흐릿한 녹색·갈색·회색 등을 버리고 보다 가볍고 밝으며 찬란한 색조로 그렸다. 먼저 그들은 물에 비치는 햇빛의 작용과 잔물결 위로 반사되는 색채를 그리면서 자신들의 눈에 비치는 햇빛과 그림자, 그리고 직사광선과 반사광의 복잡하고 생생한 효과를 재생시키고자 했다. 망막에 기록되는 직접적인 시각적 인상을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은 그림자에 회색과 검정색을 사용하는 것이 부정확하다고 판단하고 대신에 보색을 이용했다. 더욱이 그들은 순수한 조화색이나 보색의 불연속적인 점묘와 가벼운 붓질로 물체를 조형하여 햇빛과 그 반사에 의해서 생기는 색조의 변화와 반짝임을 표현하는 법을 익혔다. 그들의 그림에서 형상은 분명한 윤곽을 잃고 재창조된 야외의 현실상황 속에 명멸하고 요동하면서 비물질화되어갔다. 또한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 구성을 버리고 대신 그림틀 안에 좀더 우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물을 배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같은 새로운 기법을 인상주의자들은 풍경·나무·집뿐 아니라 도회지 거리풍경과 철도역 장면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1874년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대부분 작품을 줄곧 거부해온 프랑스 아카데미의 공식 살롱전과 별개로 독자적인 최초의 전시회를 열었다. 문필가였던 루이 르루아는 같은 해 풍자잡지인 〈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에 기고한 글에서 모네의 그림 〈인상:해돋이 Impression:Sunrise〉(1872,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의 제목을 따서 야유 섞인 의미로 그들을 '인상파'(인상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자 당사자인 화가들은 그 명칭이 시각적 '인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잘 나타내준다고 보고 스스로 그 명칭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이후로 1886년까지 7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졌다. 이 시기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각자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으며, 모두 공통적으로 관습을 벗어나 자유로운 기법과 개성적인 주제표현 및 자연의 성실한 재현을 원리로 삼았다.

 
 
1880년대 중엽에 이르러 인상주의 그룹은 개개 화가들이 각기 독자적인 미학적 관심사와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짧은 존속기간 동안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었는데 폴 세잔, 에드가 드가,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조르주 쇠라 같은 후세대 예술가들에게 기법상의 출발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이후 서양 미술 전체를 기법과 주제에 있어서 전통적인 틀에서 해방시켰다 (→ 후기인상주의) .

 
 
 
 
 
 
 
 
 
 
 
 
 
한국의 인상주의
 
인상주의의 도입은 고희동 이후 본격적인 서양화의 도입을 시작으로 일본의 인상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1900년대 이후 일본은 도쿄[東京] 미술학교를 중심으로 아카데미즘이 형성되었는데 주로 프랑스의 아카데미즘과 인상파적 요소가 혼합된 양식을 추구했다.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등이 주축이 된 이들은 자파(紫派) 또는 회색파(灰色派)로 불리며 외광파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회화의 주제와 내용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본 아카데미즘의 인상파적 요소는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고희동·김진호·김찬영·나혜석 등에 의해 한국에 도입된 이후 화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회화의 한 양식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1930년대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면서 이러한 인상주의적인 요소가 뒤섞인 관학적인 화풍에서 좀더 본격적인 인상주의적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인성은 〈초하의 빛〉(1933)·〈어느 가을날〉(1934) 등으로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면서 이후 선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관학파적인 흐름에서 벗어난 인상주의적 양식을 구축했으며 오지호와 주경은 인상주의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특히 오지호는 〈순수회화론〉에서 색채를 중심으로 한 회화론을 펼쳐 인상주의의 정착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고 〈사과나무〉(1937)·〈남향집〉(1939) 등에서처럼 본격적인 인상주의라 할 만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밖에 인상주의 화풍이 두드러지는 작가로는 서진달·김용조 등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인상파가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회화 유파로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 대부분은 재현적 회화를 표현하는 기법적 요소로 나타났던 하나의 경향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인상주의 (미술)  [新印象主義, Neo-Impressionism]
출처: 브리태니커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 운동.
 
 
 
 
 
 
이들은 인상주의의 경험론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체계적인 계산과 과학이론을 이용하여 미리 정해진 시각효과를 얻고자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채의 순간적인 효과를 좇아 자연을 임의로 묘사한 것에 반해 신인상주의자들은 과학적인 광학 이론에 따른 색채 구사를 통해 엄격한 형식의 그림들을 그렸다. 신인상주의를 이끈 사람은 이 양식을 창시한 이론가이자 가장 중요한 화가였던 조르주 쇠라와 그의 충실한 동료였던 시냐크였다. 그밖에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는 앙리 에드몽 크로스와 알베르 뒤부아 필레, 막시밀리앙 뤼스, 테오 반 레이셀베르흐가 있고, 인상파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도 잠시 이 운동에 가담했었다. 이들은 1884년에 '독립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를 결성했다.

 
 
분할주의와 점묘파라는 용어는 대조적인 색채의 물감을 화폭에 점점이 찍는 쇠라의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색점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1가지 색채로 어우러지도록 과학적으로 선택되었다. 온통 이런 색점들로만 뒤덮인 화폭은 선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형태를 뚜렷이 나타내며, 묘사된 모든 대상들은 흔들리는 강렬한 빛을 흠뻑 받고 있다. 이 점들의 일정한 크기는 그림의 전체 크기와 조화를 이루도록 치밀하게 계산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대상을 흐릿하고 몽롱하게 묘사한 반면, 신인상파 화가들은 견고하고 분명하게 묘사했고, 주의깊게 짜인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형태를 되도록 단순화 시켰다. 신인상주의의 그림에 나타난 빛의 성질은 인상파의 그림처럼 밝고 찬란했지만, 전체의 효과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채 움직이지 않는 기념비와 같았다. 인상주의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빛을 묘사했지만, 신인상주의는 그 덧없는 빛을 붙잡아 결정체로 만들었다.

 
 
폴 시냐크는 후기 작품에서 그의 시적 감수성과 좀더 어울리는 분할법을 더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쇠라는 색채와 형태의 표현적 특성을 과학적 공식으로 바꾸는 등 그림과 기법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연구하는 이론적인 시도를 계속했다. 1890년대에 이르자 신인상주의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었다. 그러나 신인상주의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및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예술가들이 각각 그 독자적인 화풍과 기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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