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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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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400선 ㄴ
2015년 02월 13일 16시 48분  조회:2446  추천:1  작성자: 죽림
 

51.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李相和)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 70호, 1926.6)

 

 

52. 병적 계절(炳的季節)

 

                    - 이상화(李相和)

 

기러기 제비가 서로 엇갈림이 보기에 이리도 설은가.

귀뚜리 떨어진 나뭇잎을 부여잡고 긴 밤을 새네.

가을은 애달픈 목숨이 나누어질까 울 시절인가 보다.

 

가없는 생각 짬 모를 꿈이 그만 하나 둘 잦아지려는가.

홀아비같이 헤매는 바람떼가 한 배 가득 구비치네.

가을은 구슬픈 마음이 앓다 못해 날뛸 시절인가 보다.

 

하늘을 보아라 야윈 구름이 떠돌아다니네.

땅 위를 보아라 젊은 조선이 떠돌아다니네.

({조선지광} 61호, 1926.11)

 

 

53. 네거리의 순이(順伊)

                 

                                     - 임 화(林 和)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조선지광} 82호, 1929.1)

 

 

54. 우리 오빠와 화로

                     

                                           - 임 화(林 和)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 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웨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 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 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 피오닐 : 러시아 말로 영어의 pioneer에 해당됨. '개척자, 선구자' 라는 뜻과 함께 '공산소년단원'(9세~14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조선지광} 83호, 1929.2)

55. 한 잔 포도주를

                    

                                         - 임 화(林 和)

 

찬란한 새 시대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향(芳香) 우에

화염같이 붉은 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은

뼛속까지 취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승리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를 후회하지 않는다

승패란 자고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로하지 않는 것이다

적*에 대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결별에 임하여 무엇 때문에

한 그릇 냉수로 흥분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코 위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는 붉고 애인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의 단란과 고요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가는 슬픔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잔 냉수로 머리를 식힌 채

화려했던 희망과 꿈이 묻히는

무덤을 찾느니보단

아! 내일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해설지라도

꽃과 애인과 승리와 패배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로 찬미할 수 있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벗들아! 축복의 붉은 술잔울 들자

 

* 적: 원 발표문에는 '그녀(彼女)'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시집 {찬가}(1947)의 발표를 따랐다. (청색지} 창간호, 1938.6)

56.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金海剛)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조선일보}, 1927.5.10)

 

 

57. 새 날의 기원

                      - 김해강(金海剛)

1.

새해라, 첫 아침

동녘 한울엔 붉은 햇살이 뻗혀오르나이다

무릎꿇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한껏 떨리옵니다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사이다

새로운 힘이 뛰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날

가장 경건한 아침이 열려지이다

 

2.

해마다 첫새벽이 오면 비옵는 마음

이해라 다름이 잇사오리까마는

팔짚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더욱 두근거리옵니다.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적은 일이옵든 큰일이옵든

하고 많은 가운데 한 가지일지라도

이 해에만은 뜻대로 일우어짐이 있어주소서

 

3.

새해를 맞이하옵는 마음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오오 새 날이여!

이 땅에 열리소서. 힘차게 열리소서.

이 땅에 빛나소서. 아름다이 빛나소서.

 

-계유원단(癸酉元旦)에

({동아일보}, 33.1.8)

 

 

58. 밤 차

 

                     - 박팔양(朴八陽)

 

추방되는 백성의 고달픈 백(魄)을 실고

밤차는 헐레벌덕어리며 달어난다

도망군이 짐싸가지고 솔밭길을 빠지듯

야반(夜半) 국경의 들길을 달리는 이 괴물이여!

 

차창밖 하늘은 내 답답한 마음을 닮었느냐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하고나

유랑(流浪)의 짐 우에 고개 비스듬히 눕히고 생각한다

오오 고향의 아름답든 꿈이 어디로 갔느냐

 

비닭이*집 비닭이장같이 오붓하든 내 동리

그것은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차바퀴 소리 해조(諧調)*마치 들리는 중에

희미하게 벌려지는 괴로운 꿈자리여!

 

북방 고원의 밤바람이 차창을 흔든다

(사람들은 모다 피곤히 잠들었는데)

이 적막한 방문자여! 문 두드리지 마라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울고 있다

 

그러나 기관차는 야음(夜音)을 뚫고 나가면서

'돌진! 돌진! 돌진!' 소리를 질른다

아아 털끝만치라도 의롭게 할 일 있느냐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가 있느냐

 

피로한 백성의 몸 우에

무겁게 나려 덥힌 이 지리한 밤아

언제나 새이랴나 언제나 걷히랴나

아아 언제나 이 괴로움에서 깨워 일으키랴느냐

 

* 비닭이 : 비둘기.

* 해조 : 아름다운 가락.

({조선지광}, 1927.9)

 

 

59. 데 모

 

                     - 박팔양(朴八陽)

 

납덩어리같이 무겁고 괴로웁든 우리들의 마음이

오늘은 엇지하야 이같이 가볍고도 유쾌하냐

5월의 한울 그 밑에서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가

무슨 까닭에 참으로 무슨 까닭에

가슴 울렁거리도록 이같이 즐거웁게 들리느냐

 

시가(市街)가 좁다고 먼지 휘날리며 달리든

×××× 자동차와 마차

그것이 오늘의 ×××× 무엇이란 말이냐

보아라 거리와 거리에 모혀슨 우리 ××××

평소에 묵묵히 일하든 친구들의 오늘을!

 

가로(街路)에도 우리들의 데모

옥내(屋內)에는 경이(驚異)에 빗나는 저들 ×××

보혀주자 저 영리하고도 앞 못보는 백성들에게

미래를 춤추는 이 군중의 무도(舞蹈)를!

 

×××××× 노래와 환호와 박수다

보조. 보조. 보조를 맞치라

………… ………… …………

5월의 향기로운 공기를 통하야

오오 울리라 우리들의 교향악을

({조선지광}, 1928.7)

 

 

60. 너무도 슬픈 사실-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 박팔양(朴八陽)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비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다

화려한 꽃들이 하나도 피기도 전에

찬 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 있는

봄의 선구자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셨으리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야 이 나라에 태어난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속에 그리면서

찬 바람 오고 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고 

({학생}, 1930.4)

 

 

61.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 박세영(朴世永)

 

장마물에 파진 골짜기,

토막토막 떨어진 길을, 나는 홀로 걸어서

병풍같이 둘린 높은 산 아래로 갑니다.

해 질 낭*이 멀었건만,

벌서 회색의 장막이 둘러집니다.

 

나의 가는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멀리 산아래 말에선 연기만 피어 오를 때,

나는 저 마천령*을 넘어야 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 산을 넘다니,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리라도 돌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터진 북쪽을 바라보나,

길은 기어이 산 위로 뻗어 올라 갔습니다.

 

나는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산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이,

나의 마음은 떨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빠삐론* 사람처럼,

칼을 빼어 든 무녀(巫女)처럼,

산에 절할줄도 몰랐습니다.

 

나는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겼습니다.

불긋불긋 이따금 고갯길 토막이 뵈는 듯 마는 듯,

이몸이 어디로 가질지도 모르는, 사로잡힌 마음이여,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갑옷을 입은 전사(戰士)와 같이,

성난 이리와 같이,

고개길을 쿵쿵 울리고 올라갑니다.

거울 같은 산기슭의 호수는 나의 마음을 비처 보는 듯,

올라가면 오를수록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습니다.

 

나는 마천령 위에서 나의 오르던 길을 바라봅니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W자, I자, N자,

이리하여 나는 승리의 길, WIN자를 그리며 왔습니다.

 

모든 산은 엎디고,

왼 세상이 눈 아래서 발버둥칠 때,

지금의 나의 마음은 나를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되었습니다.

이 장쾌함이여,

이 위대함이여,

나는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 마천령 : 함경남도 단천(端川)과 함경북도 성진(成津) 사이의 고개. 해발 725m.

* 해 질 낭 : 해 질 양, 해가 지려 하는 것.

* 빠삐론 : 바빌론

({학등}, 1936.3)

 

 

62. 산제비

                     

                                        - 박세영(朴世永)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구나.

 

창(槍)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때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아 깃을 가다듬을 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너희는 맘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 것이요,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멧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때

너희는 별에 날아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렁거릴 때,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천리조(千里鳥)일 것이다.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날아라 너희들은 날아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날아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낭만}, 1936.11)

 

 

63. 시대병 환자(時代炳患者)

 

                   - 박세영(朴世永)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單葉機)*같이 날른다.

소란한 도시는 떠는 듯 무장을 하였다.

 

청년단원들이 나팔을 불고 지나 가고

트럭이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납작한 보루같이 그 병원의 집 위론 고사포(高射砲) 둘이 솟았다.

금방에 나르던 솔개미가 사라지니

연기가 무럭무럭 콩크리트의 굴둑은 길기도 하다.

 

내 눈이 미쳤나 보면 볼수록 늘어가는 고사포,

공장마다 솟는 굴둑,

이리하여 도시는 완연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독까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

시대병 환자다.

그러나 나를 환자라고 보는 이가 없다.

보아주는 이조차 없다.

 

* 단엽기 : 몸체 양편에 한 개 씩의 날개가 달려 있는 비행기.

({풍림}, 1936.12)

 

 

64. 성씨보(姓氏譜)-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 오장환(吳章煥)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룰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 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구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조선일보}, 1936.10.10)

 

 

65. 성벽(城壁)

 

                       - 오장환(吳章煥)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保守)는 진보(進步)를 허락치 않어 뜨거운 물 끼언고 고추가루 뿌리든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턱어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시인부락}, 1936.11)

 

 

66. 모 촌(暮村)

 

                     - 오장환(吳章煥)

 

 초라한 지붕 썩어 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 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싱싱하던 넝쿨이 사그라 붙던 밤, 지붕 밑 양주(兩主)*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히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 들고 초라한 지붕, 썩어 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 양주(兩主) : 바깥 주인과 안 주인, 즉 부부를 뜻함.

({시인부락}, 1936.11)

 

 

 

67. 황혼(黃昏)

 

                      - 오장환(吳章煥)

 

 직업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모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워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알로 깔리어 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기-ㄴ 그림자는 군집의 대하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히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흐터저버리고. 나는 공복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띠엄띠엄 서 있는 포도( 道)우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마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삿*.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어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鶴)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墮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 저자 :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가게. 큰 길거리에서 반찬거리를 사고 파는 장(場).

* 전서구 : 소식을 전하는 비들기.

* 고삿 : 마을의 좁은 골목. 고샅이 표준말.

* 아베 : 아버지.

(시집 {성벽}, 1937)

 

68. 소야(小夜)의 노래

 

                      - 오장환(吳章煥)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自由)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里程表)*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더러운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墓)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正月) 기울어 낙엽송(落葉松)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山)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로 나려 비애(悲哀)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刑囚)* 발은 무겁다.

* 이정표 : 육로(陸路)의 이정을 기록한 일람표. 정리표(程里表).

* 도형 : 조선 시대의 오형(五刑)의 하나. 곤장 10대와 복역 반 년을 한 등급으로 하여, 5등급까지 있었음. ({사해 공론}, 1938.10)

69. 고향 앞에서

 

                      - 오장환(吳章煥)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잣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 상고(商賈) : 장수.

({인문평론}, 1940.4)

 

 

70. 북(北)쪽

 

                   - 이용악(李庸岳)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시집 {분수령}, 1937)

 

 

 

71. 풀버렛소리 가득차 있었다

 

                   - 이용악(李庸岳)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아므을만(灣) : 흑룡강 하류의 아무르 지역.

* 니코리스크 : 시베리아 하구의 항구 도시 니콜라에프스크를 가리킴.

(시집 {분수령}, 1937)

 

 

72. 낡은 집

 

                     - 이용악(李庸岳)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무곡(貿穀) : 장사하려고 많은 곡식을 사들임.

* 둥글소 : 황소.

* 싸리말 : 싸리비. 함경도에선 아이들이 이것을 말 삼아 타고 놂.

* 짓두광주리 : 바느질고리의 함경도 방언.

* 저릎등 : 겨릅등의 함경도 방언. 긴 삼대를 태워 불을 밝히는 장치.

*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승(住持僧). 옛날에는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이 갓주지 이야기를 했다고 함.

*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를 베고 남은 밑둥.

(시집 {낡은 집}, 1938)

 

 

73.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 이용악(李庸岳)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 강원도치 : 강원도 사람.

(시집 {낡은 집}, 1938)

 

 

74. 오랑캐꽃

 

                   - 이용악(李庸岳)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는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경도 방언.

({인문평론}, 1939.10)

 

 

75.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李庸岳)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호개 : 호가(胡歌), 호인(胡人)들의 노랫소리

* 눈포래 : 눈보라.

* 불술기 : 불수레, 즉 태양

({시학}, 1940.8)

 

 

76. 황혼(黃昏)

 

                       -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5월의 병상(病床)에서

({신조선}, 1935.12)

 

 

77. 연보(年譜)

 

                          - 이육사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던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간(肝)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시학} 창간호, 1939.4)

 

 

 

78.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먼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자오선}, 1937.12)

 

 

79.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맹아리 : 꽃망울의 경상북도 방언. (시집 {육사 시집}, 1946)

 

 

80.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내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라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문장} 23호, 1941.4)

 

 

81.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찿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7호, 1939.8)

 

 

82. 절정(絶頂)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 12호, 1940.1)

 

 

83. 교목(喬木)

 

                       -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인문평론}, 1940.7)

 

 

84. 광야(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집 {육사 시집}, 1946)

 

 

85. 초 한대

 

                                        - 윤동주(尹東柱)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6. 오줌싸개 지도

 

                                       - 윤동주(尹東柱)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7.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 윤동주(尹東柱)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8.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尹東柱)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9. 병원(病院)

 

                                          - 윤동주(尹東柱)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0. 십자가(十字架)

 

                                       - 윤동주(尹東柱)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1. 길

 

                                          - 윤동주(尹東柱)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2. 또 다른 고향(故鄕)

 

                                         - 윤동주(尹東柱)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3. 별 헤는 밤

 

                                         - 윤동주(尹東柱)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

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

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4. 서시(序詩)

 

                                             - 윤동주(尹東柱)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5. 간(肝)

 

                                          - 윤동주(尹東柱)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6.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尹東柱)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7. 쉽게 씌어진 시(詩)

 

                                       - 윤동주(尹東柱)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8. 그 날이 오면

 

                                            - 심 훈(沈 薰)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인경 : 밤에 통행 금지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큰 종.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99. 만가(輓歌)

 

                                         - 심 훈(沈 薰)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수의(壽衣)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 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 이하 6행 삭제 )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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