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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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을 보내고
2009년 06월 23일 06시 59분  조회:2539  추천:48  작성자: 안병렬
 


         어버이 계시올 땐 가깝게 보이다가

         어버이 가신 후론 우러러 보이더니

         이제는 뵈올 수 없어 이 가슴이 녹는다.


         한 가지에 나왔어도 한 집에 살았어도

         가는 날은 다르고 가는 곳도 모르고

         눈물도 메말랐는가 허허로이 보냈다. 

         

         가난에 쫓기우며  분노에 치를 떨며

         설움을 삼키시며 운명이라 체념하며

         그리도 서글픈 인생 어찌 차마 가셨소?


         꺾으면 꺾이어도 굽히지는 못하고

         죽이면 죽더라도 굴복은 못하더니

         죽음엔 어이 그리도 순진하게 따랐소?


         평안히 가옵소서 맘 놓고 가옵소서

         아들 딸 오남매에 손자 손녀 십여 명에

         이생에 못다 이룬 한 저들이사 이루리.


         고온 님 가신지가 두 달이 되건마는

         아직도 고향집에 그대로 계시온데

         어쩌다 정다운 음성 들을 길이 없는가?


         아득한 고향산천 형님 계셔 미덥더니

         이제는 누굴 믿고 집안일 맡기려나?

         갈수록 그리운 마음 밀물처럼 스민다.


         이렇게 가실 줄 일찍이 알았더면

         이곳에 모시고서 여행이나 같이 할 걸

         이 동생 따가운 마음 형님이야 알겠소?

         

         총각 때 잃은 사랑 평생을 앓으시고

         그 아픔이 안타까워 저도 따라 아프더니

         그 인연 깨트린 동생 사죄하며 웁니다.

        

         살아 생전 다정히 마주앉지 못하다가

         보내고 후회하며 눈물 뿌려 아파하니

         이리도 어리석은 줄 나도 정말 몰랐네.                   09. 4. 12.

             형님을 보내고

              

                ---- 정녕 그 삶은 운명이던가? ---



  형님 가신 지가 오늘로써 꼭 두 달이 된다.

  연세 80에 가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샘이요 게다가 집에서, 그리고 병원에서 합하여 두어 달 오가며 치료 받으시다 와석종신 하시고 슬하의 자손들 다 제대로 자란지라 크게 안타까워 할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호상이다. 그래 그러려니 하고 덤덤히 보내어 드렸다. 또한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신 용사라 나라에서 호국원에 모셔주시니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고 보내어 드렸다. 게다가 교회장으로 모시니 그 절차가 종래 집안에서 하던 의식보다 한결 간편하고 가벼웠다. 도 교인들이 진심으로 도와주니 고마웠다. 원래 형님은 한때 교회를 잘 다니셔서 어느 해는 집사의 직분까지도 받으셨는데 그 후 무슨 일로 안 다니시더니 이번에 병상에 누워서는 다시 하나님을 찾으신 것이다. 이에는 교회 목사님의 꾸준한 심방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이렇게 형님은 모든 걸 다 잘 마감하고 가셨고 또 우리는 보내 드렸다.

  그런데 그렇게 “가시나 보다.” 하고 덤덤히 잘 보내어 드렸는데 이제금 새삼스러이 그립고 아쉬움에 이 가슴이 이리도 아파 옴은 어쩐 일인지 나도 모르겠다. 정녕 가시는 당일엔 담담하였는데도 요즘에 와서 왜 이리도 쓰리고 아파오고 그리워 몸부림을 치게 되는지 나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혼자 사무실에서 밤늦도록 울기도 하였고 오늘은 또 망연히 그리며 한숨을 쉬고 있다.

  정말 정말 보고 싶다.

  한번 만이라도 더 “형님” 하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계시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다. 가슴이 저린다.

  어줍지 못한 내 글이지만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밤을 새워가며 읽으시던 형님, 그 형님이 안 계시니 누구 참으로 반기며 아끼며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을까? 참으로 아쉽다. 참으로 원통하다. 보고파 보고파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다.

 

  조용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지난 늦가을 11월 말쯤이던가? 형님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니 간암말기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전화를 이곳 중국 연변에서 조카들로부터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크게 놀라워하지를 않았다. “올 것이 오는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왜냐하면 지난 추석에 고향에 다녀온 막내로부터 “큰 아버님의 건강이 크게 좋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은 터요 또 우리 아버님 어머님이 다 간으로 말망마아 돌아가셨기에 우리도 언젠가 간으로 죽지 않을까 하는 믿음(?) 같은 게 있었던 까닭에서다, 또 지난 겨울 뵈었을 때 ”이제 내가 빚을 다 갚았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마음에 끼이던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빚이란 질 수도 있고 갚을 수도 있는 건데 또 형님이 지신 그 빚이란 게 살림이 쪼들려 진 빚이 아니요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무리하게 산 논 때문에 진 빚이라 크게 걱정할 성질의 것도 아닌데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진지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시는 게 나로서는 좀 심각하게 들렸던 것이다. 이게 무슨 불길한 조짐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평소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그 날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서둘러 귀국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급한 것 같지는 않으니 천천히 오시라는 형수의 말을 듣고는 조금 안심하며 제발 겨울 방학 때까지만 계셔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방학에 가서 뵈오니 많이 수척하시기는 하여도 아직 가실 날은 멀었다고 판단되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참 요사스러운 게 사람의 마음이라 막상 그렇게 생각보다 오래 투병하고 계시니 또 전혀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왕 회춘은 못하시는데 가실 바엔 그만 이 방학 동안에 가시면 아내와 내가 갔다 왔다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편하겠다.“는 아주 약은, 그러나 아주 불충한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형님은 아직도 방학 중인 2월 12일 따뜻한 날씨에 가셨다. 이 비보를 그날 서울 여행 중에 들었다. 순간 ”그래 그만 가셨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보다  ”때 잘 맞추어 가셨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이 든 것이다. 형님이 돌아가셨는데 감사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갔다 왔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아 생각하여도 참으로 못된,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못된 동생은 그래 덤덤히 그렇게 형님을 보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달이 거의 지난 요즘에 들어서 새삼스레 이리도 그립고 보고 싶음은 또 어인 일인지 정말 내 마음 나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서럽게 살아온 형님의 그 아픔이 되살아나서인가? 혹은 형님을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이 떠오른 탓인가?  


  생각하면 정말 형님은 서러운 삶을 사셨다.

  태어나 어린 시절은 행복했었다. 천석군 부자의 작은 집 장남으로 또한 천석에 가까운 부자집 무남독녀의 아들로 태어나 친가와 외가, 두 집안에서 갖은 사랑을 다 받으며 자랐다.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해방과 더불어 중학교엘 갔다. 당시 중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동네에서도 두어 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대구로 유학을 갔다. 대구공업중학교로 간 것이다. 당시 경주에서 대구로 유학 간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요즘 미국 유학에 버금갈 만큼의 용기와 또 투자가 필요하였다. 또 당시 대구공업중학교는 신생 대한민국의 공학도가 선망하던 학교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도 거기 다녔다.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5학년 때 터진 6,25는 형님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그 해 여름, 정확히 8월 15일, 형님은 학도병으로 입대하신 것이다. 세상 일이란 그리고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묘하여서 그 해 여름 그 전쟁이 터지자 일선으로 바로 달려가 적과 맞닥뜨려 싸운 형님은 그 전쟁으로 인생을 완전히 망치었고 사태를 관망하다 천천히 후방의 육군사관학교로 간 전두환씨는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국의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형님은 그 전선을 따라 원산에까지 진격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 시 부상을 당하셨다. 다리에 따발총을 맞은 것이다. 부산 육군병원에 입원하신 형님은 인생의 전환을 계획하였다. 이왕 군대에서 썩어야 할 몸이라면 장교라도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교가 되고자 육군사관학교나 아니면 간부후보생 학교에라도 가려고 지망하였던 것이다. 큰 결단이었다. 당시 형님의 학벌로서는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발이 평족이라 조금 걸리긴 하였으나 돈 몇 푼 쓰면 될 일이었다. 그래 아버님과 상의하였더니 뜻밖에도 아버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2, 3개월 길어야 2년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가 되어 일선으로 가는데 소대장은 최전방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죽다는 것이다. 그러면 졸병으로 가도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형님이 우기어도 아버님은 듣지 않으시고 그만큼 싸웠으면 되었지 다시 또 일선에, 그 죽음의 자리로는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어이 형님을 후방으로 빼돌리셨다. 후방도 최후방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헌병으로 보낸 것이다. 그 바람에 농촌에 마지막 남았던 논 밭 몇 마지기도 끝내 다 날아가고 말았다. 본래 이재(理財)에 어두우셨던 아버님은 그 전에 이미 많은 재산을 날리셨는데 - 이를 남들은 다 주색잡기에 썼다고 험담한다. - 그래도 아직 그렇게 다 날리시지는 않았는데 형님 살리느라 마지막의 논이며 밭들도 다 날리셨던 것이다. 그때 나도 이미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조금은 기억하지만 당시 우리 집에는 어중이 떠중이 군인 장교들과 그 졸개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다들 형님을 후방으로 빼돌려주겠다고 덤빈 브로커들이었다. 아버님은 그들을 칙사 대접하며 아들 후방으로 보내달라고 매어달린 것이다. 그까짓 농촌의 논 밭 몇 마지기쯤이야 금방이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만약에 그때 형님 뜻대로 장교가 되었더라면 형님의 인생은 반드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님 말씀처럼 총알받이로 전사하였던지 아니면 군대에서 상당히 고위관이 되어 휴전 후 군인 세상에서 제법 괜찮았을 것이다. 어쨌든 인생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또 그랬더라면 우선 그 가난의 고통도 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님의 말씀처럼 다 운명이었던가? 후방으로 빠져 목숨은 건졌지만 가난에서 오는 많은 어려움이 형님의 앞길, 또  우리의 앞길에 놓였던 것이다. 집안의 가난도 모른 채 형님은 후방에서 잘 지내다 휴전을 맞고 얼마 지나 제대를 하여 나오셨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이 형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앞서 또 하나 형님의 운명이 바꾸일 사건이 군대 시절에 있었다.

  형님의 첫사랑 이야기이다. 이는 전적으로 형님 개인의 로맨스지만 이 로맨스는 형님의 일생에 엄청난 파도를 일으켰고 그 파도는 거의 이 동생으로 말미암아 벌어졌기에 이를 밝히는 것이다.

  제대하기 1년쯤 전이던가? 형님은 경기도 안성에서 헌병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날더러 놀러오라고 하여 한번 가본 적이 있다. 그때 형님은 그곳의 처녀와 사귀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휴전 후라 느슨한 때이고 또 계급도 어느 정도 높아져 외출도 자유로웠던지 거의 그 집에 가서 죽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형님께서는 나에게 그 처녀를 보이고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잘 말씀 드리라고 나를 초청하였던 모양인데 나는 너무도 뜻밖의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처녀를 보니 덕이 있게 보이는 탐스런 얼굴이고 고등학교까지 나와서는 처녀의 몸으로 미장원을 차려 꾸려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미용사가 상당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일은 이상하게 번져나갔다. 이게 형님의 말씀대로 운명이란 건지 모르지만 참 묘하게도 뒤틀려 나간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처녀 집에 가서 하룬가 이틀을 지내다 그만 병이 났었다. 부득이 일 주일을 넘게 그 집에 있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만 것이다. 그 집에는 처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이렇게 셋이 사는데 처녀와  남동생의 성이 다른 것이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이 처녀를 데리고 개가를 한 것이었다. 요즘에야 자연스럽게 흔히 있는 일인데 당시 어린 나로서는 영 언짢았던 것이다. 이런 개가 자체를 아주 불결한 일로 알았던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물론 외가 집안에서도 이런 일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일찍 홀로 되셔도 다 수절하며 사는 게 도리인 줄로만 안 것이다. 또 그렇게 사시는 분들이 내 주위에는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형님이 이런 불결한 집의 처녀에게 장가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귀가하자마자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며 빨리 끊도록 해야 한다고 고자질을 한 것이다. 나는 정말 형님과 우리 집의 순결을 위해 한 짓이었다. 그래 부모님들은 부랴부랴 며느리감을 고르고 날짜를 잡아 결혼을 시키려 하셨다. 자칫 그 처녀와의 사이에 아이라도 생기면 더 큰 일이라 여기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형님은 결혼 날짜에 오시지를 않았다. 집에서는 물론 신부 집에서 더 야단이 났다. 나중에는 신부를 그대로 시집으로 보내겠다고 일방통보까지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형님은 그 첫 사랑을 접고 부모님께 순종하여 억지로 결혼을 하셨다. 부모님은 한 시름을 놓으셨다. 그리고 그 어린 날의 불장난이야 곧 꺼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형님 가슴의 그 불은 영 꺼지지를 않았다. 형수님이 형님께 그렇게 순종하고 잘하시는데도 안 되는 것이다. 아마 이성으로는 감당을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형님은 평생을 그 첫사랑을 못 잊고 그 상처를 안고 사시었다. 그래서 한 잔 자시면 :내 일생은 병렬이가 망쳤다.“고 하시고 또 말짱한 정신에서는 운명이라고 자위를 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죄송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나의 경솔을 뉘우치곤 하였다. 하지만 어쩌랴? 다 지나간 일, 정말 운명인 걸.


  이 첫사랑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제대를 하신 형님의 앞길에는 너무도 엄청난 고난이 놓여 있었다. 집에 와보니 우선 먹을 게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거니와 아버님이 가산을 다 탕진하신 것이다. 고향이라 하지만 벼 한 포기 꽂을 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한 몸이요 또 부모가 계신 데다가 어린 동생 하나도 그때는 있었다. 또 머지않아 당신의 아들도 태어났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릴 막중한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 큰 책임에 동정의 손길은 거의 없었다. 큰집 작은 집은 그런대로 잘 사셨지만 아버님이 허랑방탕하여 가산을 날렸다고 믿으시는 그들로서는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설사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가난에 그 가족을 어이 다 감당하랴? 결국 형님은 가난에서 오는 고통을 혼자서 짊어지고 고생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보다 그 수모를 견디기가 더 어려웠으리라.                    .

  그럼에도 형님은 참으로 강인하셨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 굶주림 가운데서도 당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민주당에 입당을 하셨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살아 계실 때의 일이다. 그 어른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 하셨다. 그러나 그 어른이 어이없게 유세차 호남으로 가시다 돌아가시고서도 끝내 그 야당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한때는 경찰 경위로 특채하여 주겠다는 유혹도 물리치고 당신의 신념에 사셨다. 그 당시 그 신념을 지킨다는 일은 오늘날엔 상상을 초월하는 핍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형님은 그 가난과 그 핍박을 견디며 정의에 사셨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는 4,19

  형님도 때를 만나셨다. 그 혈기로 면장에 출마하셨다. 새로운 세상이니 나를 알아주리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정하였다. 다들 혈연을 따라 가는 표였다. 그 고배는 자신을 참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야당하며 싸웠던고 하는 회의가 들었으리라. 한 동안 낙담하다 제 정신 차리고서 이젠 먹고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나섰다. 비록 선거에는 실패하였어도 그래도 민주당의 세상이라 이곳 저곳 부탁할 곳은 있었다. 일이 잘 되어 경주 시청에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곧 출근을 하려고 하는 찰나 5,16이 터졌다. 만사휴이. 이게 정말 운명인가? 다시 농촌에서 지개를 져야만 하였다. 아마 형님의 일생에서 가장 참담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전에도 물론 더 가난하였으나 그래도 그때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자기 긍정이 있었는데 이제 완전히 모든 게 포기된 상태였던 것이다. 오로지 부모 모시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에만 매달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가난에도 가장 무서운 가난은 희망이 보이지 않은 가난인데 그때 형님은 그런 가난을 짊어지신 것이다. 게다가 지난 날 야당을 했다는 사실은 전과자의 이력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일이 있었다. 새마을 사업이 벌어진 것이다. 형님은 이 일에 전력투구하셨다. 마을의 이장이란 직책을 맡아 이 사업에 전력을 바친 것이다. 상당한 성과와 인정을 받아 얼마 후 생긴 단위 농협에 참사라는 귀한 자리를 맡게 되었다. 형님은 또 이 일에 당신의 정력을 다 쏟으셨다. 처음에는 겨우 차비나 받던 데서 차차 봉급도 꽤 받게 되고 자리도 튼튼하여졌다. 좀 안정된 생활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과거 민주당의 열성분자라는 딱지는 좀체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성실함으로 이를 극복하여 나갔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또 형님을 가만두지 않았다. 전두환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뒤였다. 형님은 그날도 출근을 하여 사무를 보려는데 돋보기안경이 없었다. 평소엔 끼지 않다가 책을 읽거나 사무를 볼 때는 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경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를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이 새로 사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주머니에 그 돈이 없었다. 지갑을 또 집에 두고 온 것이다. 할 수 없이 사무를 보는 아가씨에게 3만원을 꾸어 돋보기를 샀다. 그리고 그날은 그만 그 돈을 갚는 걸 잊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게 운명인가? 그 이튿날 아침, 새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가 민심을 일신한다는 명분으로 보낸 암행 감사반이 그 조합을 덮친 것이다. 열 곳이 넘는 그 많은 조합 가운데 유독 그 조합에 왜 왔는지 확실히는 모르나 평소 야당 기질을 가진 형님을 못 마땅해 여긴 그 누구의 사주로 온 것이라 여겨진다. 형님은 누구일 거라는 말씀도 하셨으나 여기서 그 말은 삼간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아무리 찾아도 결점이나 하자가 안 보였는데 그만 현금 3만원이 착오가 생긴 것이다. 왜 이러냐는 질문에 이 순진한 아가씨는 곧이곧대로 참사가 빌려갔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결국 3만원의 공금유용. 요즘 돈으로 아무리 비싸게 계산하여도 6, 7만원이 될까 말까 하는 적은 액수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꼬투리를 잠아 사람 하나를 잘라버리는 실적을 올려야 하는 그들로서는 이를 한 건 하였다고 보고하고 상부에서는 그대로 접수하여 퇴직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일은 형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쫓겨난 것도 억울하지만 그 불명예가 너무도 가슴 아팠던 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남들은 무슨 큰 범죄라도 저지른 줄 알기에 사람 만나기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위로하는 말도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진 것이다. 사람 대하기가 싫어진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정신적 큰 질환을 앓게 되어 일 년 넘게 고생하셨다. 그때 정말 나도 괴로웠다. 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다만 당시 대학에 다니던 조카를 위해 등록금 몇 번을 주었을 뿐이었다. 참으로 나도 괴로웠다. “저 형님을 어떻게 할 거냐?” 하는 아픔이었다. 그 억울한 형님을 위하여 변명을 할 길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였다. 하도 답답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각하 - 당시는 대통령을 그렇게 불렀다.-

의 동기동창인데 그 덕을 보지는 보지 못할망정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서야 되겠느냐며 긴 호소문도 보내었지만 회답은 없었다.

  그러나 형님은 끝내 일어나셨다. 다행히 정부에서도 몇 년 뒤에는 당시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퇴직금에다 약간의 보상도 해주고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다. 그래 형님도 이젠 다시 씩씩한 농민으로 그리고 인자한 노인으로 되돌아가 열심히 농사를 지으시고 자녀를 기르셨다. 그리고 문중 일에도 관계하시고 열심히 사셨다. 또 슬하의 아이들도 다 제대로 독립하여 잘 살았다. 다만 맏이가 공무원으로 있다가 교통사고로 물러난 이외에는 큰 일이 없어 그냥 그대로 살아 가셨다. 열심히 사신 덕분에 아이들 하나 하나에 단 얼마만이라도 논도 나누어 주게 되셨다. 그러느라 평생을 짊어지셨던 그 지긋지긋한 빚도 다 갚았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마감을 잘 하시고 가신 것이다. 심지어는 당신의 병원 치료비도 그리고 그 후의 장례비마저도 다 감당할 만큼의 여유를 두고 가셨다. 기르시던 소를 처분하여 이 경비를 다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형님은 일생을 잘 마감하시고 가셨음에도 이 동생이 오늘 이렇게 가슴 아픔은 단순히 혈연 때문인가? 아니면 앞에서 말한 그 첫사랑의 인연을 깨트린 죄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그 한 많은 운명 때문인가? 아니면 그 운명이란 엄청난 위력 앞에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깨달아서인가? 하여튼 사무치도록 그립고 아쉽다. 그리고 그 운명이 너무도 서럽고 얄밉다.

  

후기


  이 그립고 아쉬움 가운데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몸을 움찔 떤다. 이다음 내가 죽은 뒤에는 누가 나를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그립고 아쉬워 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단 형제뿐이어서 가슴 아프게 울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조차 그저 그렇게 가셨구나 할 뿐 뭐 그리 아프고 슬프고 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다만 나로 말미암은 연금이 좀 아쉬워 아깝다는 생각은 들 것이다. 그뿐일 것이다. 덕이 없이 산 탓이리라.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 어쩌리? 지는 노을이나마 좀 아름답게 가꾸어 보아야지.


                                                        09. 4. 20.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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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한태익
날자:2009-06-25 06:01:2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형제애가 구구절절 넘치는 글에서 감동받았습니다. 저도 77되시는 형님 한분 계시는데 자주 찾아뵈여야하겟다 생각합니다. 형제는 가면 없다는 생각이 더 갈마듭니다 박사님 항상 건강하세요
1   작성자 : 조선족
날자:2009-06-23 19:44:09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 주옥같은 글들을 잘 보고 잇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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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끈질긴 배달민족의 얼 (안병렬) 2010-10-25 51 3067
14 경주를 다녀보며 (안병렬) 2010-06-14 54 2467
13 돈의 수치와 가치 (안병렬) 2010-03-13 66 2310
12 [추모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애도하며 2009-08-24 79 2696
11 나의 수준 2009-07-12 67 2226
10 형님을 보내고 2009-06-23 48 2539
9 저도 울었습니다 2009-06-19 58 2549
8 狂人들의 대화 (안병렬) 2008-05-06 137 2574
7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배워야지' 2007-05-31 134 3430
6 넉넉한 마음 2006-05-10 102 2880
5 《조선족위기설》단상 2006-05-10 107 2962
4 조선족을 아십니까? 2006-05-10 100 4000
3 아름다운 품앗이 2006-05-10 144 3249
2 이 그늘에 해볕을 2006-05-10 118 2964
1 (시) 연변에서 살리라 2006-05-10 139 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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