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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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디아스포라
2012년 12월 30일 21시 26분  조회:11203  추천:6  작성자: 정인갑
“디아스포라”는 한 민족 집단이 본토를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민족이산의 의미이다. 1세기 때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수많은 유대인이 세계로 흩어진 것이 방대한 디아스포라의 예이겠다.

2,000여 년간 우리 겨레의 디아스포라를 대충 짐작해 보면 아래와 같다.

a, 기원전 108년 한(漢)이 고조선을 멸망하였을 때 많은 우리겨레가 중국내륙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b, 660년 백제가 망할 때 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상층귀족, 심지어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였다. c,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 20만 명의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중 일부는 말갈족과 함께 발해국을 세웠었다.

d, 임진왜란(1592~) 때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e,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 청국으로 잡혀간 우리겨레가 60여 만이다. f, 한일합방이후 중국, 일본 등으로 확산된 우리겨레가 200만이 넘는다. g, 1960년대부터 한국인의 해외이민이 활발해졌고, 1990년대 이후는 글로벌화하며 많은 한국인이 해외로 진출하였으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앞으로 진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 것으로 짐작된다.

2,000여 년간에 형성된 우리 겨레 디아스포라의 후손을 통계하면 2,000만 명도 넘을 것이다. 이들의 역사는 우리 겨레의 민족사(국사와는 구별됨)의 소홀히 할 수 없는 조성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이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으며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다행히 일본과 중국에서 외교관 활동을 한 유주열(柳洲烈 전 나고야 및 베이징 총영사)선생이 진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재일본 조선인 후예 박무덕(朴茂德)이 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돼 간 조선인 중 기술자들은 전쟁 후 쇄환되어오지 못했다. 특히 일본의 남쪽 가고시마(鹿兒島) 근처로 납치 이주된 전라도 남원 陶工들이 그의 예이다. 당시 가고시마 영주는 도공들이 조선의 백자를 만들 수 있도록 최대의 배려를 하였다. 조선의 이름, 집, 음식, 복식, 사당 등을 보존토록 하여주었다. 기술 유출을 우려하여 외부와 격리, 고립시키고 마을 내 조선인끼리만 통혼토록 하였다. 수백 년간 철저히 관리한 결과 가고시마의 사츠마(薩摩) 도자기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명치유신이 지방 영주(大名)제를 폐지되고 중앙집권제를 실행하자 상기 조선인 도공촌이 해체되었다. 도공의 자녀들도 도공직을 세습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일본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조선도공 박수성(朴壽勝)은 성(姓)을 일본士族(양반) 성 도고(東鄕)라 고치고 5살(1887생) 난 아들 朴茂德을 東鄕茂德(도고시게노리)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도고시게노리는 東京帝國大學 독문과를 졸업하고 31살에(1913) 중국 奉天(沈陽)총영사관의 영사관보로, 1919년에 주독대사관에 부임하였다. 당시는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외식민지도 빼앗기고 전쟁 배상금지불을 위해 나라의 존위가 위태로운 때었다. 독일에서의 이러한 체험은 후에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에 활용되었다. 1945년 그는 外相의 신분으로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천황에게 건의한 사람이었다.

무덕은 베를린에서 근무하며 40세의 나이에 독일여인의 배우자를 얻었다. 그녀의 남편은 건축가 게오르그(Georg de Lalande)이다. 그는 당시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청도(靑島)에서 일하다가 1901년 일본 고베에서 활약하며 많은 건축 작품을 남겼다. 과거 경복궁 일부를 헐어 지었던 조선총독부건물도 그가 설계한 것이다. 총독부는 게오르그가 폐질환으로 41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일본인 조수에 의해 후에 완성됐다.

1926년 박무덕 부부는 딸과 함께 워싱톤의 미국대사관에서 3년간 근무하고, 베를린의 독일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전임되었으며 3년 후 제네바의 군축기구 일본대표부의 사무국장을 거쳐 구미국장의 보임을 받아 외무성으로 귀임하였다(1933), 무덕은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주독일대사, 주소련대사를 거쳐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해에 외상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종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두 번째로 외상을 맡는다. 일본의 패전후 극동재판소의 재판을 거쳐 전범으로 1950년 7월 도쿄 스가모 감옥에서 황달로 옥사하였다.

두 번째의 외상 재임 중 자신의 비서관 도고후미히코(東鄕文彦)를 도고 姓을 이어 받을 데릴사위로 삼는다. 도고후미히코는 나중에 주미대사와 외무차관이 된다.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외무성에 입부, 유럽-아시아국장이 되고 주화란 대사를 역임한 현재 교토 산업대의 도고가즈히코(東鄕和彦)교수다.

일본 사츠마 도자기의 창시자 조선인 도공 朴平意의 후손이 3대를 이어 일본의 고위 외교관으로 활약한 명문집안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겨레 디아스포라의 빛나는 한 페이지다.

이상은 유주열(현재 한일 협력위원회 사무총장)선생의 강연(10.26)을 요약한 것이다. 유주열선생은 학자 형 외교관으로서 그가 근무하고 활약하는 지역(일본, 중국 등)에서 우리 겨레를 잊지 않고 겨레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많은 글을 집필 책으로도 발간하였다.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성공사례이기도 한 박무덕의 사실을 소설화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하며, 또한 해외에 정착했거나 진출 현지에서 성공한 우리 겨레 100명의 사적을 수집, 정리할 욕망도 있다고 한다. 정말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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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고구려이주민
날자:2013-01-03 07:39:02
1960년대출판한 중국역사책에서 5만 7만 적어도 12만세대를 중국내륙지역으로 이주시킨것으로 적혀있었다는 기억입니다.그당시 1세대는 평균 5명식구로 계산되므로 적어도 6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내륙엔 1/3,본지방에 남은 인구 1/3,한반도로 이주한 수가 1/3로 추산합니다.
1   작성자 : 호들깝
날자:2012-12-31 20:52:04
원래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현재는 한 민족 집단이 본토를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민족이산의 의미로도 쓰인다.

디아스포라 개념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본토를 떠난 집단이 종교적규범이든 생활관습이든 유지가 되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DNA 유전관계나 성씨의 계승관계가 아닌)
고조선이든 고구려든 백제든 임진왜란이든 병자호란이든 그 당시 겨레들이 반도를 떠난후 완전 현지에 동화되여 집단을 형성하면서 생활관습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종교는 원래 민족종교라는 것이 없었으니깐) 때문에 이것을 디아스포라라고 말할수 없다.

우리 민족 또는 우리 겨레의 디아스포라라 함은 18세기 이후 즉 이씨조선 말기 또는 일한합방이후 중국,소련(러시아),일본,미국 등 나라에 건나간 사람들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고조선,고구려,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끌려간 반도출신들의 행방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로서 밝혀내야 겠지만 이것을 디아스포라로 접근하는 것은 좀 황당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해당나라의 국민이 또는 민족일원이 고구려,백제,고려,조선의 후예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혈통적인 의미일뿐이다. 이는 중국에서 반도로 건너간 수많은 성씨 후예들이 족보상으로 조상이 중국대륙에서 건너갔음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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