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wrs 블로그홈 | 로그인
문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인물

전체 [ 23 ]

23    독지가로서의 30년-돈을 벌줄도 알고 쓸줄도 안다 댓글:  조회:1922  추천:0  2016-08-29
독지가로서의 30년-돈을 벌줄도 알고 쓸줄도 안다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 23] 연길 보건의학미용병원 조미화원장의 베푸는 삶    보건의학미용원의 후대사랑은 오늘도 이어지고있다.   보건의학미용병원의 조미화원장은 지난 8월 25일, 70여명 직원들과 함께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제188회)’프로 제작진을 찾아 3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했다. 지난해 이맘때에도 보건의학미용병원에서는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 제작진에 3만원을 전달한바 있다.   조미화원장은 이처럼 돈을 벌줄도 알고 쓸줄도 아는 지적인 기업인이며 조선족녀성의 강의함, 아름다움과 단아함, 근면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녀성이다.   그는 기업인이기전에 독지가이다   보건미용원 조미화원장, 그는 기업인이기전에 독지가였다. 돈을 벌줄도 알고 쓸줄도 아는 기업인이다.   조미화원장은 병원을 설립한 30년간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한시도 늦춘적이 없다. 빈곤부축 등 공익사업을 위해 지금까지 쾌척한 금액이 무려 백만원을 웃돈다. 사천문천지진, 옥수지진과 연변수재지역에도 통 큰 후원을 했다. 특히 2010년 홍수피해가 극심한 안도현 만보소학교 재건에 23만원을 쾌척했고 그 학교 학생들에게 6000원가치의 교복을 마련해주었다. 이외에도 특곤가정의 학생들에게 성금을, 3명의 석사연구생들에게 2만원을, 연변녀성교육발전기금회에 2만원,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최고경영자 학습반에 2만원을, 현대지혜가장교육공정가동식에 2만원을…그가 병원을 설립해서 지끔까지 공익사업에 알게 모르게 후원한 차수가 부지기수다.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제188회)’프로 제작현장을 찾은 연변보건미용병원의 직원들. 이처럼 조미화원장은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철학적인 리념이 앞선 기업인이다.   보건의학미용의학병원의 “애심기금회”도 문천지진이 발생한후 설립하고 매달 직원들이 자원적으로 애심활동에 동참하도록 했으며, 다 같이 참여하는 기부문화를 선도하고있다.   “이는 저를 포함한 보건미용원 전체 직원들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가졍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경제난으로 학업을 중도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이 모여 내물이 되고 그 내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우리의 작은 사랑이 모여 어려운 이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여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업홍보비용을 줄일지언정 후대사랑에는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조미화원장, 병원확장으로 자금이 부족한 실정이지만 조미화원장의 후대사랑은 식을줄 몰랐다.   조미화원장은 회사내의 어려운 가정에 대해서도 적극 도와주고있다.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이 웃을수 있고 고객이 만족해야 회사가 활성화될수 있다며 우선 보건의 가족챙기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조미화원장이였기에 그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10년 ~20년을 함께 성장해온 이가 있는가 하면  잔뼈를 굳혀 새롭게 창업한 직원들도 있다. 이는 보건의학미용병원의 후대사랑과 갈라놓을수 없다.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일류의 성형병원으로 성장할터   무슨 일이나 뚝 소리나게 일을 하는 조미화원장, 그는 병원을 설립한 30년래  기업운영에 게을리 하지 않았을뿐더러 자아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각별히 노력해왔다.   30년간의 결실은 바로 천미보건의학미용원, 북경연세의료성형미용병원, 보건의학문제성피부진료센터 등을 개원한것이다. 뿐만아니라 한국, 일본, 미국, 프랑스 등 여러 국제의료미용기구와 자매병원을 맺고 그 령역을 넓혀가고있다.   현재 보건의학미용병원은 연변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성형미용전업인재들이 집결된 곳이며 국제적인 첨단 설비를 인입, 성형외과, 피부과, 레이저과, 의료문신과, 중의과, 구강과, 마취과, 체험과, 다이어트, 모발이식 등 치료를 일체화한  종합의료성형미용병원으로 거듭났다.   30년래 조미화원장은 병원의 경제수익 창출은 물론 근 만명의 미용학원생들을 양성해 그들의 취업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정부의 취업난을 해소하는데 일조했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국내외의 관광객들이 연변에 몰리고있습니다. 한국으로 성형하러 가는 고객의 발길이 연길로 향하도록 최고의 설비를 갖춘 종합병원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성형병원으로 거듭날것입니다.”   조미화원장은 요즘 병원확장건설로 드바삐 보내고있다. 원 애득백화청사를 임대하여 국내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최고의 설비와 의료진을 자랑하는, 국내 1류의 성형외과로 거듭날 멋진 설계도를 그려가고있다.   규모확장도 중요하지만 고객만족도 1위인 기업 성장이 급선무   “규모확장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도 고객만족도 1위를 위해 꾸준히 달려가는게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건의학미용이 30년간 성장을 거듭할수 있었던것은 조미화원장에게 인간중심의 경영리념과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모든것을 고객을 위한다는 서비스정신이 있기때문이다.   “병원의 간호사와 상담실장의 만족도는 병원 이미지와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로써 바쁜 일상에 쫓기고있는 요즘 소비자들에게 있어서는 빠른 상담과 친절하고 세심한 응대가 고객의 만족도를 크게 높이고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보건미용원에서는 수술 및 진료를 앞두고 다소 긴장하고있는 고객들에게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낄수 있도록 1:1 맞춤형으로 고객만족 최적화에 노력하고있다.   그렇다면 보건의학미용병원은 여타 성형외과와 뭐가 다를가? 이에 조미화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에게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하나 둘 갖고있지만 그 콤플렉스의 교정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전체적인 균형미를 이루도록, 고객도 몰랐던 문제점들을 해결해는것이 전문병원만이 할수 있는 노하우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이같은 차별화가 있기때문에 30년간 거듭성장할수 있었으며 선후로 “10대 성신단위”, “의료선진단위”, “소비자가 신뢰하는 미용성형기구” 등 50여차의 영예칭호를 받을수 있었다.  이처럼 앞선 의식을 가지고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조미화원장은 기업인으로서의 30년, 독지가로서의 30년을 보냈고 향후 30년을 바라고 더 멋진 설계도를 그려가고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야
22    감사한 마음 앞서니 돌아오는것 역시 사랑이였다-한춘향 댓글:  조회:1514  추천:1  2016-02-14
감사한 마음 앞서니 돌아오는것 역시 사랑이였다 2016년 02월 03일 11시 49분    글쓴이:문려    조회:893    추천:0 인물이름 : 한춘향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 20] 한국스포츠브랜드매장 한춘향사장의 삶의 에너지      “아직 인생을 론하기에는 너무 애숭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많은 아픔을 겪었고 흘러간 시간들을 뒤돌아보는 과정에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였습니다. 인생은 짧고 굵게 가는것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가야 한다는것, 베풀면 돌아오는것 역시 사랑이라는걸.” 한국스포츠브랜드매장을 운영하고있는 한춘향사장(39세)은 이러한 긍정적인 마음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삶의 가치를 창조해가기에 노력해왔다.   기업운영은 삶의 전부가 아니야 인생에서 중요한것은 삶을 살았다는것 그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는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는 한춘향 사장이야말로 삶의 긍정적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한춘향사장의 어릴적 꿈은 부자로 되는것이였다. 20살 꽃나이에 접어들자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구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어머니께서 아글타글 모은 단돈 3천원을 종자돈으로 시장경제의 거센 파도에 몸을 맡겼다. 그는 그동안 보따리장사도 해봤고 화장품 도매도 하면서 돈을 벌수 있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해보았다. 손발이 얼어터지고 끼니를 건느는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였지만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지고를 하며 기차나 배를 오르내릴 때가 제일 힘들다고 한다. 조금만 소홀히 하면 보따리 하나쯤 없어지는것이 십상이였다. 보따리 하나를 잊어버리면 그동안 노력해온 보람이 하루아침에 나무아미타불이 되니말이다.   월드옥타 연길지회 유대진 명예회장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여받은 한춘향사장(우)    “우아하고 산뜻한 옷차림으로 매장에 서면 모두들 부러워 하지요. 하지만 이는 단순 겉면에 드러난 순간의 화려함에 불구합니다.” 부를 창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온갖 풍랑을 헤쳐가면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만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지…그 끝을 가늠키 어려웠다. 한춘향사장은 이렇게 악착스럽게 모은 돈으로 2004년 10월 휠라(FILA)전문점 운영을 시작으로 노스페이스 연변총대리, 노스페이스,케이스위스상설할인매장 오픈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줄곧 등산용품 스포츠전매점을 운영해왔다.   올해는 노스페이스 연변총대리를 맡은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10년 동안 고수해왔던 진지인 노스페이스 등산용품 매장을 접고 새롭게 한국스포츠브랜드매장을 오픈했고 올해 1월에는 한국 최고의 브랜드인 비너스스타킹회사 중국총대리로 나섰다. 그한테는 시장을 내다보는 예리한 안광이 있었고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도 있었다. “사실 10년간 운영해오던 노스페이스 연변총대리사업을 접는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포기도 일종의 기회라 생각합니다. ” 한국이나 국내의 등산용품에 대한 시장의 수요량이 줄어들었고 단체주문이 대세를 이루던 시대가 지나갔다. 이를 감안한 한춘향 사장은 브랜드운동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한국의 유명한 브랜드운동복을 주문하여 낮은 가격, 대량 판매에 열을 올렸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그는 줄곧 앞만 보고 내달았다. “돈이 차곡차곡 쌓여지는 재미에 몸이 망가지는줄도 몰랐습니다. 육체적인 아픔은 그나마 참을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습니다. 한차례의 큰 아픔을 겪고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연변과기대 AMP총동문회 림룡춘회장이 한춘향사장에게 특별공로상을 수여하고있다. 한춘향사장은 부를 추구하던데로부터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데로 삶의 활주로를 바꾸어갔다. 그는 돈보다도 건강이 최고의 자산이고 사람이 최대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는 10년간의 장사인생을 뒤돌아보는 과정에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였다. 인생은 짧고 굵게 가는것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가야 한다는것, 길게 가자면 건강해야 되고 건강한 삶을 살자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것이다.   “올해는 가게를 운영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객에게 베푸는 차원에서 브랜드운동복 대폭 세일행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퍼주는 장사야 말로 남는 장사가 아닐가요?” 한춘향사장은 기업운영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직원, 고객을 대하니 가게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성장이 빠르다고 말한다. “직원을 내 가족이라 생각합니다. 직원의 어려움이 곧 나의 어려움이지요.” 한춘향사장은 가게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직원이라고 말한다.그래서 직원한테 어려움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해결에 나서군 했다. 그러했기에 매장의 직원들은 5년~10년씩 한자리를 지키고있다.   베푸는 삶에서 행복을 줏는다 한춘향사장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고 말한다. 하루를 사는것도 고맙고 10년간 함께 해준 직원들도 고맙고 한가족 단란히 모여앉아 오손도손 밥먹는것도 고마운 일이라고 말한다.     “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주위의 사람을 대하니깐 돌아오는것 역시 사랑이였습니다. 저는 사랑을 베풀었다기보다는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것 같습니다.” 한춘향사장은 현재 행복에 겨워있다. 새롭게 이룬 가족이 너무나 단란하다. 가족이 행복해야 나가서 업체를 잘 꾸려나갈수 있고 사회를 보듬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된다. 현재 한춘향사장은 자신만이 아닌 남편과 함께 뜻깊은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가고 있다. 정규적으로 판매수익의 일부를 떼내여 불우한 이웃들을 보듬어주고 있다. 물질적인 도움과 정신적인 도움을 병행하고있다. 이를테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사랑의 성금과 격려의 메시지를, 양로원에는 위문금을, 신흥가도의 독거로인에게는 자주 찾아뵙고 생필품을 마련해준다거나 말벗이 되여주는것들이다.   매번 한사장이 남편과 함께 신흥가의 독거할머니를 찾아뵐 때면 할머니는 팥죽을 쑤어놓거나 김치를 새로 담그어놓고 기다린단다.   “부모의 반쪽사랑을 받은 저는 할머니한테서 부족한 사랑을 느낍니다. 어찌 사랑을 페풀었다고만 하겠습니까? 팥죽 한그릇에 저는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입니다.” 한춘향 사장은 자신한테는 삼륜차 모는 친구도 있고 목공, 전공도 있으며 사회의 이름있는 친구도 있다고 한다.이는 그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친구 사귀기를 즐긴데서 온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자 많은 사람들이 한춘향사장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남편과 자녀와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이웃을 돕는 과정에서 행복의 싹이 움터가고 있습니다.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직원들에게 좀 더 잘하라는 격려의 박수는 무궁한 에너지가 되여 저한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손에 손을 잡고 망망한 인생바다를 질주하면서 광풍도 폭우도 이겨내고 따스한 해살도 화사하게 받으면서 아름다운 삶,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렵니다.” “연길 3.8붉은기수”인 한춘향사장은 조선족사회의 여러단체, 이를테면 연변과학기술대학 AMP총동문회(4기 회장), 연변조선족기업가협회(부비서장), 연변대학 직업녀성평생교육센터(애심회 비서장), 연길무역협회(감사) 등 민간단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잡지 2016년 1호
21    근육으로 그림을 그리는 조선족 보디빌더-김관우 댓글:  조회:1601  추천:0  2016-01-20
2015년 10월 28일 03시 15분    글쓴이:문려    조회:4646    추천:0 인물이름 : 김관우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 19] 김관우보디빌더 동북3성보디빌딩선수권대회서  우승(80kg급) 차지   보디빌딩이 갈수록 선호하는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고있는 가운데 조선족 김관우보디빌더(26세)가 지난 10월 18일 장춘에서 있은 동북3성보디빌딩선수권대회(80kg급) 서 우승을 따내 보디빌더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가 근육으로 몸에 그림을 그림을 그릴수 있었던 것은 그의 피타는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으며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때문이다.   화가의 꿈을 접고 보디빌더로 되기까지 김관우는 연변보디빌딩선수권대회에서 련속 3년 우승(全场冠军)을 차지했고 길림성보디빌딩선수권대회에서도 75kg급 준우승을 따낸바 있다. 이런 그도 한때는 가정과 사회의 애꾸러기였고 골치거리였다. “어릴쩍 꿈은 화가였습니다. 헌데 지금은 보디빌딩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것입니다.” 김관우의 어릴 적 꿈은 화가로 되는것. 취미로는 운동과 책읽기를 무척 즐겼다고 한다.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자라주어 부모님들은 항상 어깨가 으쓱했단다. 그러던 그가 고중에 입학하면서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외모단장에 신경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며 돈을 물쓰듯 했다. 서울추계예술학원을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해서는 매일 친구들과 어울리며 노래방이며, 나이트클럽을 전전했다. 점점 우울해지고 타락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한숨은 늘어만갔다. 원래 운동에 취미가 있는 김관우인지라 술을 마시고는 스트레스를 풀겸 헬스장을 다니군 했다.   동북3성보디빌딩선수권대회서  우승(80kg급) 을 따낸 김관우(좌 3)   “너무 이쁘게 자란것 같습니다. 낯선 환경과 어려운 공부에 저는 항복하고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포기도 일종 기회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몸매가 좋아 보디빌딩할 체격이라는 트레이어의 말에 김관우는 술담배를 끊기로 작심했다. 이런 김관우를 두고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술을 끊으면 밥을 끊겠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술을 끊으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의 말에 오기가 생겼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싶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김관우는 화가의 꿈을 접고 보디빌더가 되리라 작심했다. 몸을 단련해서 1년만인 2013년 연변보디빌딩선수권대회에서 전반경기 최우승을 따냈다. 신심이 생긴 그는 련속 3년간 연변보디빌딩선수권대회에서 최우승의 보좌를 차지했고 올해 10월에 있은 동북3성보디빌딩선수권대회에서 80kg급 우승을 따내는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다.   끈질긴 노력이 잘 다듬어진 몸매 만든다 사람들이 운동을 하면서 얻기 원하는것은 건강뿐만아니라 조각상같이 잘 다듬어진 몸매이다. 선명한 근육라인을 만들려면 두가지 조건이 필요, 근육을 만들고 지방층을 걷어내는것이다.  “움직임이 있어야 머무름이 달콤한법입니다. 끈질긴 노력이 없이는 잘 다듬어진 몸매를 얻을수 없습니다.” 보디빌더라고 다 똑같이 먹는것은 아니다. 채식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육류, 어류,과일, 남새 등 종합적으로 먹는 이들도 있다. 그는 선명한 근육라인을 한결같이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기획적인 식단으로 몸관리를 해왔다. 여기에는 엄마 최수연의 숨은 노력이 안받침되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하루 4~5끼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닭가슴살을 사와도 최고로, 남생나 과일을 사와도 이리보고저리보면서 돈을 좀 더 주고라고 제일 좋은것으로 선택했다. 한달 아들식비에 드는 비용만해도 만원에 가까와온단다. 근육을 되살리기 위해 보디빌더들은 닭가슴살을 주식으로 한다. “닭가슴살만봐도 속이 메슥메슥해납니다. 이런 저를 두고 어머니는 닭가슴살로 다양한 료리를 해주지만 그냥 닭가슴살만 먹는다는게 생각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였습니다.” 음식점을 지나쳐도 구수한 음식냄새에 먹고싶은 충동이 굴뚝같지만 참고 또 참아왔다. 매 한차례의 시합을 위해 반년전부터 몸관리를 해야 한단다. 이 과정에서 경기를 앞둔 7일이 제일 어려운 고비라고 한다. 시합 7일을 앞두고 염분이 들어간 일체 음식을 먹을수 없단다. 그래서 매일 슴슴한 닭가슴살과 씨름해야 했으며 경기 2틀 앞두고는 몸의 수분을 빼야 하므로 깡마른 밥에 슴슴한 닭가슴살로 끼니를 에때워야 했다. 정 목이 마르면 물로 입가심하고 뱉어버린다. ‘사실 보디빌더들에게 있어서 시합전 7일이 최악이라 할수 있지요. 몸이 탈수상태라 지탱하기 어려울정도입니다. 하지만 시합을 위해 모든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니…어지간한 정신세계로는 버티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포기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죽고싶은 생각도 한두번 가진게 아니란다. 그러다가도 시합에서 그동안의 로고가 인정될 때면 또다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몸관리를 해온 그였다. ‘지금이라도 보디빌딩을 포기했으면 합니다. 힘들게 몸관리를 하고 먹고싶은것도 먹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습니다.”어머니의 진솔한 고백이다. 보디빌딩을 시작해서부터 술담배와 멀리했을뿐만아니라 친구들의 모임도 될수록이면 멀리했다. 가끔씩 모임에 참가하더라도 자신이 먹을 음식은 항상 챙겨가군 했다. ‘친구들과 흐드러지게 술을 마시고싶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싶습니다. 하지만 세계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고싶고 액션배우가 되고싶은 욕막이 이를 억제시켜 오늘의 몸매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화가의 꿈을 접었지만 근육으로 몸에 그림을 그려갈겁니다.” 매일 헬스장에서 몸단련을 위해 3시간 소요해야 했고  매일 같은 음식만 먹어야 하는 그 괴로움 어찌 한마디로 형언할수 있으랴. 보디빌더에게 가장 궁금한것은 무얼 먹고 저런 근육을 만드는가 하는것이다. 음식에는 비율과 조합이 몸을 만드는데 있어서 커다란 역향을 주지만 이보다도 끈질긴 노력이 아름다운 몸매를 만들지 않나싶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20    한복의 단아함과 강의한 기품 디자인해 댓글:  조회:1257  추천:0  2015-04-29
한복의 단아함과 강의한 기품 디자인해 2015년 04월 14일 09시 41분    글쓴이:문려    조회:1557    추천:0 인물이름 : 한선순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8] 연길 ‘그리나한복점’ 한선순사장의 한복 사랑     연길 ‘그리나한복점’ 한선순사장   지난 12월 13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펼쳐진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직업녀성연구반 설립 15주년 기념행사에는 남다른 패션쇼가 열렸다. 40대~60대 녀성기업인들이 한복패션쇼를 통해 조선족녀성의 단아한 멋과 강의한 기품을 뽐냈다. 그날 패션쇼에는 전통과 현대가 아우르는 여러가지 한복이 등장했는데 그중60대 녀성리더가 입은 한복이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원단에 우리 글이 새겨져있는 개량한복이였다. 이 한복은 연길 ‘그리나한복점’의 한선순사장이 선보인것이란다. ‘그리나한복점’은 한국의 한복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그리나’의 중국총대리점이다. ‘그리나’는 4대째 한복의 전통을 이어온 한복 명가로서 예쁘고 멋스러운 한복을 짓는데 남다른 노하우를 지니고있다. 한선순(50세)사장, 그녀가 한복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80년대 중반부터 연길시 서시장에 한복가게를 차리면서부터란다. 연길 서시장 288호 매장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직업녀성연구반 설립 15주년 기념행사에서 열린 한복패션쇼.   그리나한복점에 들어서면 어린이 돌잔치옷이며 어른들 한복이 벽 한면을 독차지했고 맞은켠에는 3000여가지의 원단이 눈부실정도로 아름다운 색채를 발산했다. 그리나매장에 차곡차곡 놓여있는 원단들은 한국에서 직수입한것이며 한복은 직수입도 하고 현지인에게 어울리게 재단하기도 한다. 한선순사장은 전문적으로 한복을 만드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바느질솜씨를 어깨너머로 익혔다. 거기에 뛰여난 손재주와 예리한 착상이 안받침해주고 본사로부터 한복에 관련된 정보를 수시로 접할수 있어 한선순사장이 만든 한복은 원단이나 디자인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몸에 꼭 맞으면서도 고운 선이 그대로 드러나 아름다운 자태를 한층 커버해준다는 평을 듣군 한다. 그렇다, 우리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 특히 녀성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고있다. “한복은 평면으로 재단하는데 립체적인 성격이 부각됩니다. 그 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크기에 여유가 있어서 어떠한 체형의 사람에게도 풍성하게 잘 맞습니다. 융통성이 있지요.” 한복을 디자인하는 사람도 한복만큼이나 배포가 있고 여유가 있어야 했다. 자신은 정말 열심히 고객의 얼굴형에 맞추어 색상을 고르고 몸매에 어울리게 디자인했기에 입으면 꼭 맞을거라는 자신감을 갖고 한뜸한뜸 지었는데 고객이 자신이 선택한 색상이 아니라며 ‘생떼’를 쓸 때마다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는 한사장, ‘고객은 왕이다’ 고객의 요구에 맞게 옷을 짓는 것은 재단사의 몫이므로 인내를 갖고 고객이 원하는 원단으로 다시 한복을 지었다는 한사장, 고객이 만족해하며 또다른 고객을 불러올 때면 이게 바로 노력의 대가이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최선을 다한 결과임을 새삼스레 느끼군 했다는 한사장이다. 한사장은 무대복장을 많이 디자인하다보니 개량에 이골이 튼 사람이다. 그리나한복이 지금까지 가무단의 크고작은 공연이나 설명절때 있게 되는 공연에 원단값도 되나마나하는 가격으로 지어준 한복만해도 수백벌에 달했다. 무대한복이라 얼굴형에 맞추어야 하고 무대품위에도 어울려야 하기때문에 품도 더 들지만 우리 한복을 널리 알린다는 자부심 하나로 한뜸한뜸 정성들여 출연자들의 요구에 꼭 맞는 한복을 지어내군 했다. 그리나 한복을 입고 2015 연길TV음력설야회에 나선 사회자들 “누군가가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라고 말한적 있습니다. 이전에는 돈을 벌기 위하여 한복점을 차렸다면 지금은 민족의 위상을 높이고 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떨치는 뜻깊은 사업으로 여기고 넘버원만 고집하고있습다. ‘그리나한복’은 민족의 전통과 얼을 담은 더욱 높은 차원의 예술품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할것입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서시장 반쪽매대로부터 그리나한복점을 차리기까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줄곧 한자리에서 30년을 버틸수 잇었던것은 한복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기때문이며 “민족이 존재하는 한 한복점은 존재한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지당함을 페부로 느꼈기때문이란다. 단골손님이 2세대, 3세대 대를 이어 한복 맞추러 올 때마다 한복의 소중함과 그 내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였단다. “한복이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 가족행사때나 한번쯤 입어보는 례복으로 되는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게다가 맞춤보다 대여를 원하는 사람이 늘고있어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옷, 늘 입는 옷으로 그 자리를 잃어가는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한복만큼이나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개성을 잘 나타내는 복장이 또 어디 있을가. 한복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여유로우면서도 강의한 멋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녀성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로는 부모님과 남편을 하늘같이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의 훌륭한 본보기로 되면서 바깥일 가정일,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으면서 사회와 가정에 혼신을 몰붓고있다. 타민족 녀성들보다 마음씨가 부드럽고 몸자태가 깔끔하며 세상을 놀래우는 인내와 강의함이 그 어느 나라 녀성들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단아함을 뽐내면서도 늘씬한 각선미를 보여주는 한복, 한민족의 력사와 함께 발전되어 온 우리의 자존심이다. 이런 한복을 30여년 간 곱게 차려입고 매일과 같이 고객을 접대하는 한선순사장, 고객에게 가장 이쁜 한복을 지어주기 위해 다각도로 구상하고 디자인해온 한선순상장이야말로 우리 녀성들의 단아함, 강의함을 보여주는 시대에 걸맞는 디자이너라 생각한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9    미래지향적인 삶-연변에 와인문화 전파할터(김성남) 댓글:  조회:1227  추천:0  2015-04-29
미래지향적인 삶-연변에 와인문화 전파할터 2015년 04월 09일 09시 58분    글쓴이:문려    조회:1120    추천:0 인물이름 : 김성남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7] 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 김성남사장 창업 아이템 “하늘이 큰 인물을 만들 때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지방과 골수를 괴롭히고 기아에 허덕이게 하며 온 몸을 못살게 군다”는 맹자의 말과 같이 피타는 노력이 없이는 꿈이 이루어질수 없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훌륭한 리더로 성장한다. 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 김성남대표 역시 어려움을 딛고 밑바닥부터 시작해 오늘의 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를 일떠세운 손색없는 경제인리더이자 연길시인대대표이다.   훌륭한 리더의 탄생 1999년 연길 북대에 대천노래방 오픈을 시작으로 지금은 서시장부근과 애단로에 대천노래광장을 일떠세웠으며 와인무역과 함께 연길시 발전에 비올라와인바를 오픈, 연변의 와인문화 전파에 앞장서고있다. 연길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는 김성남사장이 안해 최순희와 함께 2003년에 일떠세운 민영기업이다. “노래방을 갖 오픈했을 때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당시 노래방에는 술취한 고객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때론 몸싸움도 서슴치 않았지요.” 고객들의 문명정도가 발바닥을 치고있고 김성남 역시 경영에는 초보인지라 돌발사건 대처법이 서툴었다. 힘들고 지치고 마음이 아팠다. 포기하려는 생각을 안해본것은 아니다. 문 닫을 때는 닫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지 않겠는가. 김사장은 노래방에 통큰 투자를 했다. 새롭게 인터리어를 하고 노래방 기계며 전등을 등을 새롭게 사들이는 등 기존의 노래방과 차별화된 시설, 경쟁력을 앞세워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장구책은 아니였다. 짧은 몇달사이에 규모가 엄청난 신설업소가 하나둘씩 나타났던것이다. “대천도 뭔가 변화를 보여야 했습니다.” 대천의 김사장에게는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앞서가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했기에 언제나 여타 업소에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직원관리에서도 누구보다도 엄격했다. 그는 ‘당근과 채찍”의 교훈을 직원관리에 적용했던것이다. 즉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종업원이 업소의 얼굴임을 강조했다. 지난2월 10일에 있은 연길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 춘절맞이 행사에서 경리인 리모씨 등 4명은 푸짐한 성과상여금을 받고 감개무량해 했다.   이들 모두 대천노래방에서 근무한 경력이 5년이상이고 성과가 뛰여난 직원들이다. 이들은 김사장 부부의 아낌없는 관심이 있었기때문이라며 경영에 초보인 저들에게 업무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주었고 자아관리를 할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주었기에 오늘까지 쭈~욱 한자리를 지킬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흥업소인것만큼 밖의 유혹도 만만치 않아 휘청일 때마다 언제나 상사로서가 아닌 인생선배로서 타이르군 했다는 김성남대표, 회사 경영이 힘들더라도 직원들의 로임을 체불한다거나 상금을 낮추는 일이 없이 직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군 했다. 필자가 대천에 찾아갔을 때 마침 한 직원이 ‘내집 마련’을 위해 대출 보증서를 써달라고 찾아왔다. 두말없이 서류에 싸인해주는 김사장, 선불금은 준비되였냐며 형님처럼, 부모처럼 챙겨주는 보스를 두고 따르지 않을 직원이 어디 있으랴.   연변에 와인문화 전파할터 많은 사람들이 노래연습장을 즐겨 찾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혹은 어울림이 필요할 때마다 이곳은 대중들의 안락한 쉼터이며 휴식의 한때를 즐길수 있는 곳이다. 노래방은 계층이나 신분을 가리지도 않고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며 남녀노소의 시민적 오락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시민들의 자질도 많이 향상되였습니다. 고객의 다수가 40대 이하이지만 모두들 문명하게 술을 마십니다. 이젠 노래방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회포를 나누는 자리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더는 전처럼 돌발사태를 만회하느라 사장이 나서서 목청을 돋굴 일도 없습니다.” 직업에 귀천을 만드느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왜곡된 시선이 아닐가 생각된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대천을 알아주고 대천의 경영리념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저도 모르게 사명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연변에 옳바른 음주문화를 전파할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결국 건강도 챙기고 문화자질도 향상할수 있는 와인문화 전파에 도전하게 되였지요.” 김사장이 던진 도전장이 바로 연길 발전에 오픈한 비올라 와인바였다. 지난 2012년 12월 12일, 연길 발전에 비올라와인바를 오픈했다. 이 와인바는 김성남, 최순희 부부가 향후 20~30년을 전망한 인생설계도이다. 해마다 수익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도 연변에 와인문화를 전파하겠다는 일념으로 오늘까지 버텨왔다. “와인바를 꾸려 단시일내에 리익을 챙길수 없음을 알면서도 연변에 와인문화를 전파하고 좋은 음주습관을 양성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와인바를 오픈했습니다.” 노래방에서 얻은 수익의 일부가  와인바에 고스란히 흘러들어갔지만 그렇다고 꿈을 접을 김사장이 아니였다.   김사장은 미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뉴질랜드를 오가며 서방의 음주문화에 대해 료해했고 특히 프랑스와 호주를 돌아다니며 와인의 제조과정, 시음, 감별 등 일련의 지식을 익히군 했다. 와인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우선 와인바를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게 통 큰 투자를 했다. 무거운 색상으로 고급적인 품위를 자랑했고 벽난로와 고급의자며 통나무로 만든 탁자며 모두가 압도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고습스러운 장소에서 부담없이 와인잔을 기울일수 있다면 인생은 한결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비올라와인바는 와인을 즐기거나 와인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 그리고 와인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의 장소라 할수 있다. 비올라에서는 초보자들을 위해 매주 한차례의 시음회와 함께 무료특강을 진행한다. 번마다 색다른 와인 4가지를 놓고 와인 감별법, 시음, 와인잔 쥐는 방법으로부터 와인 마시는 방법에 이르는 전반 상식을 가르치군 한다. 뿐만아니라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임을 갖고 파티문화를 리드해가고있다. “한차례의 모임을 갖고나면 주위의 반응이 이외로 뜨거웠습니다. 좀 더 색다른 방법으로 좀 더 의미 있는 모임으로 승화시키자는 것이였습니다.” 와인문화전파와 함께 기부문화도 함께 전파한다는 것이다. 와인의 가지수만큼 인생도 가지가지 스토리를 엮어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힘들었던 일, 기쁘거나 슬픈 일, 실패의 쓴맛, 성공의 희열, 이 모두가 와인의 안주가 되고 인생의 안주가 되면서 또다른 멋진 세상을 만들어간다. “와인소비량이 높은 나라일수록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낮습니다. 와인바를 통해 연변에 와인문화를 전파하고 건강한 음주문화를 보급할수 있다면 이보다 더 의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변의 유흥가의 판도를 바꾸어가고있고 연변에 와인문화 전파에 앞장서고있는 김성남사장, 연길의 공기오염문제, 학생들 등교시간 때 차량(공공뻐스)증가 등 사회문제까지 관심을 보이는 김성남사장을 두고 사람들은 손색없는 경제인리더이자 연길시인대대표라고 엄지를 내민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8    광주신일물류회사 유태국사장 고향-연변홍보에 나섰다 댓글:  조회:1320  추천:0  2015-04-29
광주신일물류회사 유태국사장 고향-연변홍보에 나섰다 2015년 04월 02일 10시 12분    글쓴이:문려    조회:3004    추천:0 인물이름 : 유태국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6] 타지역서도 연변의 토산물, 연변 특색음식 맛볼수 있어      광주신일물류회사 유태국사장 연변의 특산물을 전국 각지에서 손쉽게 구할수 있고 연변의 특색 음식을 타 지역에서도 마음껏 먹을수 있게 되였다. 광주신일물류회사 유태국사장이  연길에 연변신일전자상무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연변토산물 홍보에 나섰다. 연변태생인 유태국사장은 1999년, 광주 모 한국기업에서 다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2001년 자체로 민박집을 운영했고 그 뒤 2003년부터 광주신일물류회사를 설립, 이우, 위해에 분회사를 두고 국내는 물론 미국, 한국, 일본 등 국외까지 물류업무를 확장해가면서 트럭 23대, 컨테이너 150대를 소유한 막강한 물류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고향이든 타향이든 사업하는데는 별다를바 없지만 날이 갈수록 고향이 그립고 고향 친구가 그립고 고향음식이 그립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향음식을 손쉽게 먹을수 있을가 고민끝에 2014년 5월, 유태국사장은 연길에 연변신일전자상무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연변의 토산물과 연변의 특색음식을 만방에 알리고있다. 토산물 운송은 괜찮은데 특색음식은 어떻게 배송하고 신선도는 어떻게  유지할가? 이에 유태국사장은  “택배로 음식을 배송하자면 변질할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닭곰이나 순대 같은 음식은 당일에 배송되여야 하며 랭동상태로 운송되여야 합니다.” 이를 감안해 유태국사장은 연변의 특색음식을 구입하는 즉시 진공포장해 랭동시킨후 랭동차량을 리용해 당일에 전국각지의 지정된 전매점에 운송한다. 례를 들면 광주의 고객이 닭곰을 주문했을 경우 광주의 전매점에서 배달이 가능하며 이우의 고객이 주문했을 경우 이우에 있는 전매점에서 배달한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본 지역에서 배달하는 시스템을 가동했다. 연변신일전자상무유한회사에서 현재 취급하는 상품으로는 막걸리, 고사리, 미꾸라지, 연변입쌀, 꿀, 버섯, 옥수수, 순대 등 1000여가지에 달한다. 돼지고기(돈육) 한가지를 선택하기 위해 7~8개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품질이 뛰여나고 맛이 일품이며 가격이 싼것으로 선택하는 자상함과 철저함도 있지 않았다. “연변의 토산물, 특색음식이 이곳에 모두 모여 전국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전국 통일가격인것만큼 어느 곳에서 주문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연변의 토산물판매업체가나 특색음식업 경영업체에서는 자사의 제품을 전국에 널리 홍보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연변신일전자상무유한회사(138-4331-1212. www.koryofood.net )를 찾아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홍보해드리겠습니다. 현재 저희 회사에서는 고객님들이 더 많은 제품을 손쉽게 구입하수 있도록   http://shop116701595taobao.com 사이트를 제작하고있습니다.” 3~5년내에 전국은 물론 한국 곳곳에 대리점을 두어 언제든지 연변의 특산, 특색음식을 맛볼수 있게 하는게 꿈이라는 유태국사장, 그는 현재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연변을, 연변의 제품을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에 널리 홍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7    우리가 먹고있는 농산물은 과연 안전할가?(최한) 댓글:  조회:1133  추천:0  2015-04-29
우리가 먹고있는 농산물은 과연 안전할가? 2015년 03월 30일 10시 26분    글쓴이:문려    조회:1669    추천:0 인물이름 : 최한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5] 최한사장 이레무공해농작물농민전업합작사 설립, 유기농업 전파 요즘 불고기집에서 종종 볼수 있는 풍경이다. 일반 상추는 무료로 드리지만 유기농 상추는 돈주고 사야 한다. 상당수의 고객들, 무료 상추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한접시에 20여원씩 하는 유기농상추를 주문한다. 건강이 최고 자산이라 생각하기때문이다.   이런 유기농먹거리만 고집하는 이가 있어 우리의 밥상은 더욱 풍요로와지고있다.. 이레무공해농작물농민전업합작사 최한사장은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손수 재배한 유기농 농작물로 이레보쌈집을 운영하고있다. 이레보쌈을 한번 먹게 되면 단골이 된다. 그만큼 믿음이 가기에  음식업계의 명물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연변 주내는 물론 장춘, 길림, 청도에까지 가맹점을 두고있으며 고정직원만해도 100여명에 달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법에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법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최한사장은  이레무공해농작물농민전업합작사를 설립하고 유기농업 전파에 앞장서고있다.   이레는 이래서 산다-땅 살리고 사람 살리는 기업   유기농업이란 농약, 제초제, 비료, 가축사료 등에 합성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물이나 자연광물, 미생물을 리용하는 농업이다. 최한사장이 고집하는 유기농업은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자연순환농업이다. “모든 식물의 건강은 뿌리에 있고 뿌리의 건강은 땅에 있습니다. 땅을 살려야 사람이 살수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음식을 먹게 되면 자연 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 최한사장의 가치관이 엿보인다. 돈의 가치를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량심적으로 농사를 짓고 량심적으로 기업을 꾸려나가고있음을 알수 있다. 즉 규모 확장이 목적이 아닌 기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귀히 여기고 즐기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유기농업은 단시일내에 돈을 벌수 있는 업종이 아닙니다. 사람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없이는 유기농 농산물을 생산할수 없습니다.” 이레에서는 농작물을 재배하기전에 먼저 밭을 2년간 묵혀둔다. 그리고 그 땅에 자체로 발효시킨 유기비료를 사용한다. 유기질은 땅의 수분류실을 방지하고 보비력을 높여 땅이 생명력을 갖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레에서는 EM기술 즉 미생물과 유산균, 나토균, 토착균, 광합성세균 등 유용한 미생물을 배양하여 고온소독을 거친 흙과 혼합한후 단지속에 넣고 묘목을 심는다. 이레에서는 벼겨, 두병, 골분 등 여러가지를 혼합하여 발효비료를 만들고있다.   “묘목은 미생물이 가득한 좋은 환경에서 자라기때문에 건실하게 자랄수 있으며 이 묘목을 밭에 낸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발효비료를 뿌리기때문에 다른 미생물이 감히 침입을 못합니다. 이렇게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남새는 맛과 영양소가 골고루 갖춰졌기에 맛있고 잘 썩지 않습니다.”. 이레농장에서는 남새뿐만아니라 사과재배도 독특하다. 이레사과밭은 여타 사과밭과는 달리 잡초가 무성하다. 최사장에 따르면 화학비료 과다 사용으로 사과나무에 여분의 영양을 주기 때문에 병의 발병원인이 된다. 비료를 주면 사과열매는 쉽게 키울수 있지만 뿌리는 땅속깊이 뿌리를 뻗지 못한다. 화학비료를 친 농작물은 온실의 화초와 같지만 풀속에서 자란 사과나무는 여타 풀과의 경쟁속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때문에 활동량이 많고 뿌리를 땅속깊이 내린다. 풀은 베여내되 거둬내지 않는다. 농약 대신 풀을 베여주면 평당 1키로그람의 풀비료를 공급하는셈이 된단다. 이레에서는 풀을 베여내던데로부터 아예 그대로 방치해두기도 한한다. 이렇게 자란 사과는 크기가 조금 작은 편이지만 당분이 높아 사과를 반으로 잘라도 색이 변하지 않고 쪼들쪼들 말라간단다.   우리가 먹고있는 농산물은 과연 안전할가?   우리가 먹고있는 농산물은 과연 유기농일가? 100%로 확신할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가? 현재 시중에 유기농쌀, 유기농남새가 팔리고있지만 진짜 유기농인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들은적 있다. 유기농기지라고 버젓이 적혀있지만 농민들은 감산할가 우려돼 남의 눈을 피해가면서 새벽녘에 밭에 나가 화학비료를 주군 한단다. “우리 농장에서는 농경지를 임대맡고 그 밭의 주인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게 하며 그들에게 로임을 지불하는 방식을 고집하고있습니다.” 최한사장도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종자선택으로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전반 과정을 장악하고 관리할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최한사장은 해마다 3천여원을 허비하면서 생산된 농산물을 기술감독국에 의뢰해 중금속잔류(농약잔류액) 여부를 분석하게 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기술감독국에 의뢰했는데 농약잔류액은 국가기준에 비해 10배, 심지어 100배 낮은것으로 밝혀졌다. 이 수치는 매년 줄어들고있으며 나중에는  아예 검측이 불가능할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왜 이런 잔류액이 검출될가? “농약함량이 검출되는것은 전에 뿌렸던 농약잔류액이 아직까지 남았있기때문입니다. 사실 한번 농약을 치면 수십년간 그 농약잔류가 남아있습니다. 이같은 농약잔류를 없애기 위해  EM기술을 리용, 이 기술을 리용하여 배양한 미생물은 잔류농약을 분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필자는 지난 3월 19일 이레유기농기자를 찾아가 유기농비료생산과정과 야채성장과정을 살펴보았으며 야채를 뜯어다 먹어도 보고 일정한 시간 상온에 놓고 변질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유기농기지 일각   평소 우리가 먹는 비료덩이의 야채는 싯을 때 쉽게 부서지고 싯어놓은 야채는 하루 이틀이 지나면 썩지만 이레 유기농기지에서 뜯어온 야채는 물에 싯어도 잘 파손되지 않알뿐더러 잘 썩지 않았다. 특히 금방 뜯어온 야채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두었는데 1주일이 지났어도 신선도를 잃지 않았다. “유기농야채에는 질소함량이 극히 적어 공중에서 쉽게 반응하지 않기때문에 썩지 않습니다. 유기농 야채는 말라 비틀어질수는 있어도 잘 썩지 않는게 특징이지요” 최사장에 따르면 유기농농산물은 육안으로 감별하기 어렵단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유기농이다. 특히 어린이들이 유기농에 대한 반응이 민감하다고 하다. 유기농쌀로 죽을 쑨다거나 유기농육류로 료리를 해도 어린이들이 그 맛을 먼저 느낀다고 한다.   차별화된 기업문화 1등기업 만든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적 있다. 한 기업의 문화는 경제적성과와 직결되는 경쟁력 있는 자산이라고. 성공을 원한다면 기업문화를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한다. 직원 리직률이 높거나 고객만족도가 낮거나 A급 인재들이 끊임없이 퇴사하는 기업에는 문화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 잘 돌아간다고 해도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면 미래가 아득하게 느껴지기마련이다. 이레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독서모임을 가진다. 자발적인 모임이며 회사 내외에서 자원적으로 참가하는데 20∼30명 정도가 모인다. 독서회는 직원들사이의 소통의 장, 학습의 장이 되면서 소리없이 직원들을 변화시키면서 문화자질을 향상함에 있어서 한몫 톡톡히 한다. 이레의 직원교육은 전문가초청특강, 지점장순회특강, 외지파견학습, 직원자률학습 등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독서경영을 선택한것은 독서를 통한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기업을 살릴수 있다고 믿기때문입니다.” 리더의 행동은 기업문화를 결정한다 이레에서는 직원들에게 독서를 강요하지 않는다. 책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책을 읽기때문에 직원들도 자연히 따라할뿐이다.  “사업은 장사가 아니라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회사는 직원들과 가치를 함께 창조하고 함께 향수하는 과정에서 성장해야 하며 직원들은 회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보다 육택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이레는 직원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는 터밭일뿐입니다.”   이레무공해농작물농민전업합작사가 해야 할 일   유기농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의 인식이 유기농을 살린다. 유기농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고저 이레에서는 지난 2015년 2월 13일,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자”는 주제를 가지고 해나눔자연농가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연변주농업연구소, 연변농업과학원, 연변조선족전통음식연구소, 룡정시공소합작사련합사 등 주내 농업분야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기업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유기농업을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했고 많은 참석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참가자들은 “현재 유기농에 대한 고객들의 믿음이 공백이나 다름이 없고 가짜 유기농이 시장에 버젓이 나타나고있다. 이런 시점에서 소비자들에게 믿음을 주는것이 급선무이다. 이러자면 생산 전반 과정과 류통과정을 공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이레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가? 첫째,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여 더 많은 이들이 유기농업을 알고 유기농업에 뛰여들게 한다. 둘째,유기농기지를 대외에 개방한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실감하게 한다.  (자문전화:131-7908-1400, 김경리) 발효비료를 만드는 과정으로부터 묘를 자래우고 키우고 야채를 판매하는 전반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유기농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깊이한다. 셋째, 영양가가 높고 맛이 일품이며 적당한 가격의 돈육생산을 추진한다. 백돼지는 흙돼지보다 빨리 자란다. 좋은 돼지종사를 선택하여 활동량이 많고 유기농사료를 먹인다면 흙돼지 못지 않은 질 좋은 돈육을 생산할수 있어 생산자도 수익을 창출할수 있고 소비자도 많은 돈을 소비하지 않아도 좋은 돼지고기를 맛볼수 있다.  최한 사장은 “나 혼자가 아닌 다같이 잘사는 방법을 모색하렵니다. 정직하게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판매함으로써 소비자는 안전한 먹거리를 싼 가격으로 살수 있고 생산자는 생태순환농업으로 수익을 증대할수 있는 시스템을 설립하고 이를 전주, 나아가 전국에 보급하는 것이 이레무공해농작물농민전업합작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6    선치심 후치병 댓글:  조회:1131  추천:0  2015-04-29
먼저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고 후에 병을 치료한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15일 14시33분    조회:11408 인물이름 : 송강숙 [조글로 명의 탐방] 연변조의병원 송강숙 부주임의사    “선치심, 후치병이라고 먼저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고 다음 환자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연변조의병원의 송강숙부주임의사(이하 송의사)가 늘 하는 말이다. 의사라면 먼저 인격자가 되여야 한다는게 그의 신조이다. 그는 단순히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리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환자의 상황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환자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선뜻 나서서 도와주는 따뜻하고 명랑한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송의사의 진찰실은 늘 북적이는 장마당을 련상케 한다.   연변조의병원 2층 5호실은 여타 진찰실과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였다. 진찰실앞에는 수십명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주춤하는 시간에 이렇게 많은 환자가 몰리다니...” “오다가 친구를 만나 잠간 얘기를 나눈 사이에 이렇게…” “병원 출근시간보다 30분 앞당겨왔는데 벌써 5~6명이 와서 기다리고있으니…” 모두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안타까움을 련발했다. 송의사는 하루에 70~80명 환자들의 병을 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늘 지쳐있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선 환자의 마음이 즐거워야 합니다. 의사가 찡그린 얼굴로 환자를 대한다면 환자는 더욱 고통을 느끼게 되여 혹 떼러 갔다가 되려 혹 붙여오는 격이 되지요.” 환자들은 송의사의 웃는 얼굴만 봐도 병이 반은 치료된것 같다고 늘 말한다.     5호실은 왜 환자들로 북적일가?  올해 64세인 김복희씨에 따르면 그는 여러가지 질병으로 흑룡강, 북경 등 병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돈만 엄청 많이 소비했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송의사를 알게 되였고 송의사의 치료를 받고 완쾌된 상태라 했다. “몸이 거쁜해지니깐 얼굴피부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한테 새생명을 준 송의사한테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 김복희환자 외에도 많은 환자들이 송의사의 치료를 받고 완쾌되였거나 호전반응을 보이고있는 상황이다. 40대의 김련화씨는 심마진(두드러기의 일종)으로 3년동안 고생했다. 전국 각지의 전문의들을 찾아다녔지만 심마진은 사람을 놀리듯 며칠 낫는척 하다가 몸이 좀 춥거나 땀을 많이 흘리고나면 즉각 심마진이 돋군했다. 밑굽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듯 돈을 쏟아부엇지만 심마진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그런데 송의사가 조제해준 약 3첩을 먹고 완쾌되였단다. 물건을 손에 쥐면 뚝 떨구던 김씨환자도 1개 (침구, 중약)의 치료과정을 거쳐 완쾌되였으며 과체중이였던 도문의 최씨는 송의사의 치료를 받고 체중이 20킬로그람이나 줄었다. 지금은 한결 거뿐해졌다면서 고마워한다.   “처음 병원에 입사했을 때 친구들을 불러들여 병을 봐주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찾아왔던 친구들이 병이 낫자 엄지를 내두르며 주위의 사람들을 소개해주었습니다” 5호실의 환자들은 모두 입소문을 통해 찾아온 환자들이다. 그의 환자들은 연길시 외에도 도문, 화룡, 룡정은 물론 장춘 등 지역에서 온 환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송의사는 어떻게 의학의 오묘를 터득했을가? 송강숙의 외할아버지는 한의사였다. 어릴적부터 어깨너머로 침구료법을 익혔지만 의사가 되고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앓음자랑을 하던 친구들이 외할아버지가 놔준 침 몇대를 맞고 아무일 없듯 걸어나가는것을 보고 ‘의술’을 배워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정말 신기하다. 나도 저런 재주를 가졌으면….” 중학교에 다닐 때 외할아버지한테서 인체에 분포된 14개 경맥, 전통혈위중에서 대종을 이루는 경혈, 림상경험으로 미뤄 치료효과가 있는 비방혈 등에 대해 익혔다. 고중을 졸업한후 송강숙은 장춘중의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의학의 오묘함에 빠져들게 되였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컬탐스테 의학서적들을 뒤적였고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교수들한테 묻군 하였다. 4년 중의학과 약학 공부가 끝났지만 그는 아직도 허기진것 같아 북경중의학원에서 연수차로 입적, 또한번의 4년이란 의학공부를 했다. 교수진들은 송강숙의 열정에 탐복했고 대견해했다. 중국 부인과의 유명한 교수 곽지강, 심뇌혈관계통의 권위 곽위금 등은 자신의 모든 의수를 송강숙에게 전수하였다. 이렇게 되여 송강숙은 외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옛비방과 대학에서 익힌 중의지식 그리고 전문가들에게 전수받은 서의 지식으로 자신의 활무대를 펼쳤던것이다.  “그동안 배운 지식을 고향인민들을 위해 복무하고싶었습니다.” 2007년 북경에서 의학공부를 마친 송강숙은 무작정 고향길에 올랐다. 그때 나이 30대, 나이와는 너무도 걸맞지 않은 로숙함을 드러냈다.   환자들은 왜 송의사를 명의로 추대할가? 어느 한 교수는 명의란 정성스럽게 설명해주는 의사라고 정의를 내렸다. 송의사가 바로 그런 명의이다. 그는 진맥하고 처방을 내리는데 급급한게 아니라 발병원인, 현재상태, 치료방법인 식이료법, 침구료법, 약물치료 등 전반 과정을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쉽게 설명해주기에 환자들은 내심 믿고 따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5호실은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였다. 새로운 환자가 차례를 기다리면 먼저 온 환자들이 “송의사를 잘 찾아왔다”며 반겨준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냐며 주고받는 사이 환자들간의 친숙함이 생기고 또 환자와 의사간의 화합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송의사는 늘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건품도 잘못 쓰면 독이 됩니다.” 그는 환자들은 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무턱대고 보건품을 사다먹는다며 보건품도 잘못 복용하면 오히려 인체에 해로우니 각별히 류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면 가족이 아픈것처럼 마음이 아파 치료해주고싶다고 말한다. 마음이 따듯한 의사, 웃음을 잃지 않는 의사,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소상히 설명해주는 의사가 바로 명의인것이다.  조글로미디어 (www.zoglo.net ) 문인숙기자 원문보기  
15    '고려원’설립 5주년-차별화가 답이다 댓글:  조회:1103  추천:0  2015-03-25
‘고려원’설립 5주년-차별화가 답이다 2014년 06월 11일 10시 08분    글쓴이:문려    조회:1802    추천:2 인물이름 : 림룡춘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1]   연길 고려원식당 림룡춘사장의 리더십    “천만사람이 서쪽 달을 좇을 때에 홀로 동쪽 매화를 찾는 사람이랄가. 실패해도 좋고 성공해도 좋지요.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밀고나가지만 모든 것은 차별화를 전제로 하지요.” 연길 고려원식당의 림룡춘사장은 6월 10일 고려원 설립 5주년 기념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2009년 6월 10일, 림룡춘사장은 연길애득백화의 총경리직을 가볍게 접고 ‘고려원식당’을 오픈, 2013년에는 단고기집(香肉馆,보신탕)을 오픈하는 쾌거를 불렀다. 이 같은 결실을 맺을수 있는것은 차별화로 기업이미지를 향상시켰기때문이다.   차별화1-서비스경영전략으로 고객 유치 모임의 장소를 선택하는 기준이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지만 핵심적인것은 바로 서비이다. 서비스 향상을 위해 고려원에서는 가무를 겸비한 평양예술인들을 채용했던것이다. 림룡춘사장은 평양인 채용관련 “현지인들은 류동이 심하다. 특히 조선족직원을 채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직원들에게 일정한 교육을 시키고 좀 차원이 향상되였다싶으면 출국하거나 하해한다. 이런 시점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평양인들을 채용하는것이 최상의 선택이였다”고 말했다. 음식업서비스에 있어서 고객들의 기대는 맛있는 음식과 청결함이 기본이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점이라고 해서 서비스가 다 좋은것은 아니며 청결하다고 해서 음식맛이 다 좋은것도 아니다. 서비스에 대한 부분은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고객이 원하는 바와 기대에 맞을 때만이 그 가치가 높아진다. 현재 고려원에서는 고중,• 대학입학 “축하연”을 펼치는 고객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선사하고있다. 가격 우대는 물론 학생들에게 평양문화를 접할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있어 먹는 즐거움에 보는 즐거움을 더하고있다. 림사장은 “직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는 청결함을 더 돋보이게 하며 음식의 맛을 더욱 달콤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며 “친절한 음식점에 가면 다시 찾고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고객의 입을 통해 음식점이 자연스럽게 홍보된다” 고 덧붙였다.   차별화2-고객에게 믿음을 주기에 앞서 직원들의 마음을 얻는것 “고객에게 믿음을 주기보다는 직원들의 마음을 얻는것이 더 중요합니다. 직원들의 마음도 헤아릴줄 모르면서 어떻게 고객의 마음을 읽을수 있겠습니까?” 림사장은 고객보다도 직원들의 마음을 얻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직원들이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봉사를 해야만이 고객들이 다시 음식점을 찾고싶어하고 찾는 고객이 많으면 직원들의 돈지갑도 두툼해질수 있기 때문이다. 림사장은 우선 직원들에게 능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해준다. 일정한 능력을 소지한 직원들을 선출해 CEO과정을 수료하게 했고 졸업후 각 부문의 경리로 임명, 자신의 주관능동성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도록 직원들에게 활무대를 마련해주었다. 직원들은 큰 일보다는 사소한 일에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또는 큰 감동을 받는다.  이 점을 감안한 림사장은 직원들의 생일을 체크해두었다가 하나하나 챙겨주는 자상함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직원이 입사하게 되면 그 직원이 먹고살수 있게끔 보살펴준다. 정신적인 부담이 적어야 맡은바 일을 제대로 완수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제일 어려운 직원들을 선발해 달마다 생활비를 200원씩 후원하는 프로그램도 설치했다. 이외에도 직원간 사소한 의견분기가 있을 경우 담당부서의 책임자가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직접 나서서 도리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공정한 심판’을 내리군 한다. 또한 상호 교류의 장을 다양하게 만들어가고있다.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연길시 고려원식당(사장 림룡춘)의 30여명 종업원들은 연길 환경미화에 나선다.점심영업을 마친 이들은 림룡춘사장의 인솔하에 휴식을 마다하고 연길 모아산에서 쓰레기를 주었다. 피곤기가 력력했지만 이들은 열심히 줏고 또 주었다. 이외에도 운동대회를 한다든가 스키장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행사를 조직해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한편 소통을 통해 더욱 단합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직원들의 마음을 읽을줄 아는 이런 보스를 두고 직원들은 믿고 따르지 않을수 없다고 한다.   차별화3-불경기일수록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야 ‘요즘 같은 불경기에 현상태를 유지만 해도 대단한 걸로 생각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과감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움직이는것만큼 리스크도 따르고 기회도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고급음식점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요즘, 고려원은 보신탕을 주메뉴로 하는 단고기집(조선에서는 개고기를 단고기라 부른다. 푹 삶은 개고기는 단맛이 난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을 오픈했다. 친지나 지인들은 모두 규모 확장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차별화를 주장하는 림사장의 주장을 누구도 꺽지 못했다. 림룡춘사장은 단고기집 오픈관련  “규모를 확장하면 그만큼 리스크가 따릅니다. 도전하지 안으면 발전할수 없고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입니다.”며 “다른 보신탕집과의 차별화를 보여주고 우리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단고기집(香肉馆)이라 명했다” 고 그 리유를 설명했다. 고려원의 단고기는 전통적인 방법과 고려원만의 특색을 살렸기에 담백하면서도 구수하고 어딘가 깊은 맛이 있어 보신탕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사람들도 한번 맛보면 단골이 되군 한다 고려원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사전에 예약을 해야만 했다. 이런 실정에 비춰 규모를 확장하게 되였고 또 고객이 부담없는 가격으로 가볍게 드나들수 있으며 건강을 챙길수 있는 메뉴를 선택하다보니 평양의 단고기국물을 주메뉴로 선택했다고 림사장은 말한다. 고려원에서는 규모를 확장했을뿐만 아니라 음식메뉴도 새록새록 개발했다. 직원들의 친절봉사를 위해 고급 강사를 청해다 수강하게 했다.   차별화4-나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참여하는 독특한 기부문화 선도 “후원은 나 혼자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오래도록 견지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참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더 밝아지리라 생각하기때문입니다.” 고려원에서는 “사랑으로 가는 길” 제2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7차례나 후원했고 해마다 가두의 백여명의 로인들에게 로인절(8.15)을 쇠여드린다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7명의 학생들과 1명의 고려원 직원에게 매달 200여원씩 후원하는 등 불우한 이웃에 대한 고려원의 사랑은 식을줄 몰랐다. 이 자금은 모두 ‘10원 애심회’를 통해 마련한것이다. 그렇다면 림용춘사장은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어떻게 한두해도 아닌10여년동안이나 애심회를 이끌수 있었을가?  ‘애심회’는2003년 림시장이 연길 애득백화의 총경리로 있을 때 설립했다. “애심회 설립초기에는 불우한 이웃 돕기도 중요하겠지만 회사 홍보가 1순위이였습니다. 하지만 행사를 조직하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들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정말 주위의 손길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울뿐만아니라 또 1차성적인 도음으로는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할수 없음을 깨닫게 되였습니다.” 림사장에 따르면 애심회 설립초기 백여명의 직원들가운데서 20~30명만이 애심활동에 참가했단다. “다 같이 참여한다”는 애심회 설립목적에 이를수 없음을 감안한 림룡춘사장은 직원 채용시에도 입사조건의 하나로 매달 성금 10원씩 후원하는것을 전제로 했다. “애심회는 발기가 중요한게 아니라 장시간 견지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다 같이 참여하다보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수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 많아져 이 사회는 더욱 밝아지리라 생각하기때문입니다.” 림용춘사장은 직원들뿐만아니라 가족 5명의 몫 즉 부모님과 안해, 아들의 몫까지 합쳐 매달 50원씩 기부했다. 다 같이 참여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어린 아들에게도 심어주기 위해서란다. 고려원에서 모은 성금은 가두의 독거로인들을 위해 씌였고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씌였다. 해마다 로인절이면 가두의 백여명 로인들에게 푸짐한 음식상을 차려주었으며 7명의 학생들과 고려원의 직원 1명에게는 달마다 생활비 200원씩 후원해주고있다. 지금까지 림사장을 비롯한 고려원 전체 직원들의 애심을 받은 학생은 35명인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림사장은 장애인돕기, 수재지역 돕기 등에도 앞장을 섰다. 이처럼 기부든 경영이든 차별화를 주장했기에 오늘의 고려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림룡춘사장, 그는 현재 연길시 정협위원, 연변과학기술대학 AMP총동문회 상무부회장으로 활약하고있으며 2012년부터 련속 2년간 연길시정협의 우수위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4    요가를 통해 가족화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날터-전향란 댓글:  조회:1099  추천:0  2015-03-25
요가를 통해 가족화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날터 2014년 10월 14일 11시 20분    글쓴이:문려    조회:2793    추천:0 인물이름 : 전향란 연길시 향란요가구락부 전향란원장의 소박한 꿈   “춤을 통해 건장을 찾고 함께 꿈을 실현해가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생활공간, 문화공간으로 거급날것입니다.” 연길시 향란요가구락부의 전향란원장은 구락부 설립 10주년( 2004년 10월 1일 오픈)맞으며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연길공원 맞은켠 정보산업원빌딩 7층에 자리잡고있는 향란요가구락부에 들어서면 구락부의 명칭과 함께 벽에 걸려있는2000여개의 키(열쇠)가 한눈에 안겨온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회원수를 어림직할수 있을것 같다. 이곳은10대로부터 70대의 부동한 년령층들이 즐겨찾는 헬스장이자 생의 에너지 충전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향란원장이10년동안 구락부를 운영할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며 요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선사하고픈것은 무엇일가?   무용수가 요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8년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한 전향란씨는 북경동방가무단과 연변가무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했다. 문화부 대상을 받은 무용《장백의 정》에서 주역을 맡을 정도로 그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연변의 대표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당시 국가주석이신 강택민총서기의 접견을 받는 행운까지 지니게 되였다. 하늘의 풍운조화를 예측할수 없듯이 그렇게 잘나가던 그에게도 불행이 닥쳐올줄이야. 2000년, 상해에서 공연중 부주의로 넘어지면서 전향란씨는 허리를 크게 다치게 됐다. 그때 그 사고로 전향란씨는 그토록 애착을 느끼던 가무단배우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허송세월을 보낼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과감히 창업에 뛰여들었다. 첫 창업이랍시고 성보무역청사 1층 외진 곳에 선물용품매장을 차렸는데 상업운이 좋다고나할가. 처음부터 장사가 잘되였다. 첫달에 2만원의 수입을 올렸고 수입이 늘자 통크게 매장 하나를 더 차리기도 했다. 그동안 장사를 하면서도 다친 허리때문에 병원출입이 잦았고 마사지도 받았으나 별로 큰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중2001년, 한국 관광을 다녀오면서 요가테프 하나를 사가지고 와서 홀로 짬짬이 연습했다. 헌데 기적이 나타날줄이야. 일년간 연습하니 아픈 허리통증이 가뭇없이 사라졌고 더는 약병을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되였다. 친구들도 신기해하며 자꾸 요가를 가르쳐달다고 했다. "요가를 통한 대 발견! 바로 이것이다! 내 전업에도 맞고 나처럼 통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건강을 되찾아주자!" 전향란씨는 잘나가는 영업을 가볍게 접고2003년, 상해요가학원에서 일년동안 요가를 배웠으며 2004년 10월 연길 천하광장에 향란요가구락부를 오픈했다. 10년간의 운영비결이 있다면 “노하우라기보다는 열심히 뛰여다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가족의 건강을 챙겨준다는 일념으로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뿐입니다.” 전향란 원장은 요가구락부 운영에 대해 이렇게 한마디로 설명했다. 향란요가는 오픈 당시 연길에서 요가로는 첫집이여서 생소하면서도 신비감을 주었다. 전향란원장은 요가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면서 전문지식을 쌓아갔고 수시로 한국에 가서 강습을 받군 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무용에 조예가 깊은 무용수들을 모집해 상해, 북경 등 요가학원에서 강습받게 했다. 향란요가구락부는 건강을 찾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회원수가 급성장했다. 성보빌딩 9층 600평방되는 자리에 요가구락부를 하나 더 증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다년간의 거듭되는 발전을 통해 전향란원장은 요가에 대한 많은 전문지식을 장악하였으며 2010년 세계스포츠벨리협회로부터 강사증을 수료하였고 대한요가협회로부터 지도자자격증을 받기도 했다. 날로 늘어나는 요가회원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고저 2010년 향란요가구락부를 1200평방메터는 공원맞은켠 정보산업빌딩 7층으로 자리를 옮기고 요가뿐만 아니라 조선족춤, 발레, 현대무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회원들의 건강을 지켜주고있다. 전향란원장은 요가구락부를 오픈해서부터 지금까지 큰 어려움이 없이 요가구락부를 운영해왔단다. 입소문을 타고 요가구락부를 찾는 고객이 늘었고 회원들은 나들이 옷 준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요가구락부에서 입을 옷 장만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무용복만 10여벌씩 되는 회원들도 있으니…땀을 흘리면서 요가를 하고 춤을 추니 스트레스를 날려보낼 수 있고 회원들과의 교류를 통해 외로움을 달랠수 있으며 1석3조의 효과를 보고있다.   10년 운영과정에서 제일 잘한 일과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배운 전업을 버리지 않고 무용애호가들에게 무용과 요가를 전수할수 있다는것만으로도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구락부에서는 해마다 회원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재간을 선보이는 시간을 갖군 합니다. 이번 10주년을 맞으면서도 연길국제컨베션예술센터에서 회보공연을 펼쳤는데 전업인 못지 않는 실력을 보였습니다. 이번 공연에 ‘어머니댄스’가 무대에 오르지 못해 참 아쉬웠습니다.”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육체적인 건광과 정신적인 건강을 찾기 위해 요가구락부를 찾는이가 갈수록 늘고있다. 전향란 원장에 따르면 땀을 흘리면서 요가를 하다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을수 있다고 한다. 요가는 건강하게 살을 배는 운동이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호흡기 강화에도 좋으며 평소 잘 활용하지 않는 근육을 활용하게 하고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운동이기에 남려로소 누구나 즐길수 있다고 한다. 전향란원장은 “회원수의 10%가 한족인데 이들은 이곳에서 조선족무용을 배우고있습니다. 한족들도 조선족무용을 배우고있는데 하물며 조선족임에야…어디를 가든 조선족이라고 자부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만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춤을 알 익혀야 합니다.”며 조선족의 이미지 향상에 게을리 하지 않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조글로미디어 문야기자  
13    완벽함과 정품 추구... 최고의 가치 창조-박연하(창원부동사) 댓글:  조회:1133  추천:0  2015-03-25
완벽함과 정품 추구... 최고의 가치 창조 2015년 01월 12일 09시 21분    글쓴이:문려    조회:1622    추천:2 인물이름 : 박연하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2] 연변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 박연하대표의 창업스토리     부동산업계에서 활보하는 녀걸       “완벽함과 정품만을 추구하며 고객에게 최고의 가치를 창조한다.” 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대표 박연하)는 이같은 경영취지로 짧은  8년 동안 연변주의 굴지 민영기업으로 급부상했다. 부동산개발을 주업으로, 건축, 인테리어, 물업 등을 일체화한 창업부동산은 친환경주거지인 “친산련원(亲山恋苑)”을 선보이면서 믿음, 신용을 한층 쌓아갔고 뛰어난 착상으로 “창원서성(创愿西城)” 일떠세우는 등 부단히 변화를 거듭하면서 세인의 각광을 받는 유망업체로 굵은 선을 그어가고있다.   모지름으로 태여난 "창원" 모든 성공한 기업들의 창업사와 마찬가지로 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가 걸어온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의 대표 박연하, 그는 부동산업계에서 보기드문 녀성리더이자 ‘늦깍이’부동산개발업자이다. 회계전업을 전공한 그는 연길시 오금회사에서 부총경리로 활약하면서 청춘을 보냈다. 그러다가 2000년도, 회사가 파산되자 박연하는 하루아침에 허허벌판에 버려지는 신세로 전락되였다.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낼 박연하가 아니였다. 나약함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던 박연하,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능력을 검증해보고싶었다. 고민끝에 내린 선택이 바로 건축업이였다. 예산에 능했고 녀성으로서의 섬세함과 랭철한 판단력,  남성 못지 않은 강한 성격이 안받침되였고 게다가 직원들을 관리해본 능란한 경험까지 있어 어렵고 험난한 부동산업이라 할지라도 능히 감당해낼수 있을거라 굳게 믿어왔다. “물건값은 깎아도 직원들의 로임은 1전도 깎지 않는다.” 이것이 박연하대표의 신조이다. 박연하대표는 남정들을 이끌어야 했고 돈을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인부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주었으며 건축에 문제가 생길가 념려되어 직접 현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고운옷, 깨끗한 옷 별로 입어본적 없었다고 한다. 5년간의 건축경험을 바탕으로 2006년, 그는 창원부동산개발회사를 설립, 부동산개발을 위주로 건축, 장식, 물업(아파트관리)을 일체화한 종합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고만을 고집 부동산개발업은 건축업보다 더욱 어렵고 리스크가 따르는 업종이였다. 입찰경쟁이 치렬한건 물론 철거민들을 설득시키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철거민들을 설득하드라 집집마다 발이 닿도록 찾아다녀야 했다. 어떤 철거민들은 한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속셈에서 “죽어도 이 집에서 한발자국도 떠날수 없다”며 생떼를 쓰는 통에 입싸움, 몸싸움도 피할수 없었단다. 부동산 개발권을 따놓으면 또 건축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사람의 안전한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부동산업은 일호의 허점도 있어서는 안되다.” 박연하대표는 부동산업은 고도의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연하대표는 ‘최고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로 연변 주거문화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시작부터 모지름을 썼다. 다년간 설계하고, 새로운 기술과 설비를 도입, 조선족주거문화를 창도하기 위해 모아산국가급삼림공원인  자연환경보호구역입구에 건축면적이 6만평방메터에 달하는 별장식 아파트단지- 친산련원(亲山恋苑)을 신축했다. 모아산의 정기를 받을수 있는 청정지역이라 공기오염이 적은것이 특징이였다. 이곳은 원래 연변교통대자동차훈련학교자리였다. 빈곤층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개발지역, 이처럼 타인들이 묵과해버린 땅에 친환경주거지를 만들었던것이다. 건축에 필요한 콘크리트며 철강, 전선줄, 문 등 모든 재질을 최고급으로 사용했지만 린색하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저가로 자재들을 사들이군 했다. 이를테면 출입문은 국내의 브랜드 제품 ‘성월신(星月神)’을, 창문은 한국 브랜드제품인LG제품, 창문 부품과 손잡이는 독일수입제품을 사용했다. 친환경주거지로 자리매김한 친산련원은 “봉황”을 불러들이는 “오동숲”이 되여 아름답고 살기좋은 거주지로 자리매김했다. 이같이 최고만을 고집하면서 해마다 한개 또 한개의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 신축한 창원서성은 친산련원을 업그레이드한 ‘작품’으로 역시 시민들이 선호하는 주거지임에 손색이 없다. “회사경영에서 동업종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며 자신의 특색으로 생존해야 한다." 박연하대표에게는 이같은 불문율이 된 산업신조가 있었고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앞서가는 의식이 있었기에 남들이 방치하는 모아산입구나 연길시서부지역을 선택할수 있었다.   리더의 평가기준 1위는 드높은 책임감 그한테는 현대경영인이 갖추어야 할 경영마인드가 따로 있었다. 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에서는 주식제를 도입해 주주들의 리익을 극대화 했고 직원들에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해주었으며 고객들에게는 적은 돈을 쓰면서도 제일 좋은 주거지에서 생활할수 있게 했다. “직원은 고객을 책임져야 하고 사장은 직원과 고객을 책임져야 하며 회사는 사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에 딸린 식구는  인부들을 포함해 400여명에 달한다. 해마다 천만원을 웃도는 세금을 내야 했고 재해지역에 만여원씩 후원하다보면 자금이 딸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벽돌, 강재들을 사들이자고 해도 선불금을 내야 하는 실정이여서 일단 자금이 끊기기만 하면 시공을 중단할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도 세금을 납부하지 않거나 인부들의 로임을 체불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직원들의 능력을 발휘하자면 직원들이 살아갈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직원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과 시켜서 하는일 그 차이가 매우 크지요.” 한해동안 공정을 벌여도 수익창출이 눈에 띄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도 박연하대표는 직원(인부포함)에게 복리를 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성과가 뛰어난 직원들한테는 집 한채씩 포상하는 통큰 씀씀이도 보이면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직원들을 격려했다. “연길시 38홍기수”, “연길시 10대 녀걸”, “연길시 우수녀성” 등 칭호를 받은 박연하대표의 뛰여난 경영마인드로 하여 연변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는 2007년에 연변 주건설국과 주부동산협회로부터 “연변우수성신부동산기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고 그해 연길에서 펼쳐진 " 제1회 중국 최고주거지기획절"에서 ‘최고주거지”상을 획득했으며 2009년, ‘친산련원’이 “물업관리선진구역”으로 되였다. 이처럼 창원부동산개발유한회사는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주거문화를 창도하고 새로운 경영마인드로 리익을 창출하는 혁신형 기업으로 성장하고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2    인적자원 활용이 성공의 지름길-박은희 댓글:  조회:1071  추천:0  2015-03-25
인적자원 활용이 성공의 지름길 2015년 03월 10일 12시 44분    글쓴이:문려    조회:3295    추천:0 인물이름 : 박은희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3] 연길 오두막집 박은희사장의 창업스토리    “인적자원 활용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의 힘을 빈다면 이 세상에 못해낼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니오두막막걸리집(이하 오두막집) 박은희사장의 남다른 창업신조이다. 오두막집은 2013년 박은희사장이 친구 오수화, 심경자 2명과 함께 일떠세운 친근함이 묻어나는 음식점이다. 구두쟁이 셋이면 제갈량보다 낫다는 말, 이들 3총사를 두고 한 말 같다. 오두막집은 연변의 각 현시는 물론 상해, 북경 등 대도시에까지 영향력을 넓혀가고있다. 현재 16개 도시에 22개의 분점을 세웠고 6개의 분점이 개업준비중이다. 짧디짧은 2년사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분점을 둘수 있는지 박은희사장을 통해 그 비결을 알아봤다.     미녀 3총사-좌로부터 박은희사장, 심경자사장, 오수화사장   위생학교를 졸업하고 10년간 의료업계에 종사했던 박은희사장은 새롭게 도전장을 던져 자신의 능력을 다시금 검증해보고싶었다. 그는 연길에 약방 오픈을 시작으로 창업이란 ‘망망대해’에서 신나게 노를 저어갔다. 약방경영과 함께 김밥집도 꾸렸고 그러다가 2013년 6월 친구 2명과 함께 연길국제무역청사 뒤골목에 오두막집을 오픈, 그 뒤로 근 2년사이 22개의 분점을 차리는 쾌거를 부르게 되였던것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할것입니다.” 박은희사장을 비롯한 미녀 3총사가 처음 오픈한 오두막집은 근근히 90평방메터밖에 안되는 작은 음식점이였다. 이 작은 음식점이 22개의 풍성한 ‘곁가지’를 뻗었고 가지마다 잎사귀가 뾰족뾰족 돋아나고있다. 현제 규모가 가장 큰 오두막집은 300평방메터에 달한것으로 알려졌다. “저는 전반 기획을, 오수화사장은 주방관리를, 심경자사장은 서빙관리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각자 맡은바 직책을 다했기에 오늘의 오두막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두막집이 고인기를 누리게 된것은 다름아닌 박은희사장을 비롯한 미녀 3총사의 지혜의 결과물이다. 오두막집은 인테리어부터 남달랐다.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만든 밥상이며 대자연의 원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만든 복층이며 모두가 친근감이 있어 외로움을 달래는 젊은 친구들이 이곳에서 휴식의 한때를 만끽할수 있다.     "이리 오너라!~"를 련발하는 오두막 단골손님   오두막에서만 볼수 있는 독특한 그릇에 시선이 꽂힌다. 기와형태, 삽형태, 고기모양의 그릇들은 모두가 주문제작한것들이여서 신선감을 더해준다. 또한 오두막에 가면 왕이 된 기분이여서 저도 모르게 메뉴판을 들고 “이리 오너라~”를 웨치게 된다. 항상 고객을 왕으로 모신다는 음식점의 서비스정신이 圣旨메뉴판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오두막에서만 맛볼수 있는 ‘친구막걸리(연변에서 유일하게 QS 획득한 막걸리), 맥주에 일정한 비률로 섞어 마시면 맛도 좋고 배도 부르지 않아 둘이 마시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정도란다. 막힌듯 열린듯하게 인테리어 한 한개 공간에서 서로 눈도장 찍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눌수 있어 이 순간만큼은 외로움을 모르는 가장 행복한 자신을 발견할수 있게 된다. 적은 돈을 소비하면서도 눈과 입, 마음을 힐링할수 있는 문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나는 오두막집. “비결이 따로 없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의 도움으로, 한개 업체가 아닌 여러 업체와 윈윈하면서 공동발전을 꾀했을뿐입니다” 오두막 오픈시에도 두 친구와 협력했고 연길에서 인터리어기술이 남다른 대미건축인테리어유한회사 등 업체와 손잡고 한개 또 한개의 분점을 장식해나갔다. 어떻게 하면 고객들한테 더 편리를 줄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미도 추구하면서 오두막집이란 이름에 걸맞게 연출할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군 했다.     오두막 정경   “비록 가끔씩 생각이 일치하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립장에서 또한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의견을 통일시키군 했습니다.” 박은희사장의 꿈은 현실적이면서도 성공가능한 꿈이였다. 작디작은 체구에 어떻게 이렇게 큰 꿈를 담을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대화과정에서 또한번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현재 연길 동쪽켠에 300평방메터에 달하는 2층집을 임대, 1층은 음식점경영과 함께 새로 개발한 메뉴를 각 분점에 전수하는 활동공간으로, 2층은 업체 관리, 업체 홍보를 전담하는 기획팀이 이곳에서 여러가지 업무를 볼수 있게끔 해 빈틈없는 관리를 진행할예정이란다. 지금까지 오두막에서는 크고작은 명절에 고객답례이벤트를 조직했으며 직원들의 능력발휘, 응집력 강화를 위해 장기자랑, 봄놀이, 송년회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선진 개인과, 선진 분점을 표창했으며 주식제를 실시하여 직원들의 능력발휘를 극대화 했다. “현재 분점과 가맹점이 늘고있는 추세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픈한 음식점은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고객이 즐겨찾는 음식점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찾고싶은 음식점으로 거듭날것이며 5년사이에 전국 각지에 오두막 간판을 걸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노력에 노력을 경주할것입니다.” 박은희사장은 오두막집의 밝은 래일을 내다봤다. 비록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항상 락관적으로 생각하고 어려움을 이겨낼수 있는 또다른 방법을 모색해내군 했다. 가게를 잘못 임대해 하루아침에 투자 전액을 날린적도 있지만 그대신 신이 나한테 아이를 선물했기에 더 큰 선물을 받은것이라며 자체로 마음을 다스릴줄 아는 넉넉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박은희사장에게는 넘지 못할 산이 따로 없었다. 넘어지면 그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며 그 가게 주변에 또 다른 음식점을 오픈하는 남다른 끈기와 도전 정신이 있었다. 그러했기에 ‘오두막집’은 오늘까지 건재함을 자랑할수 있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1    중고차딜러-지영춘 댓글:  조회:1114  추천:0  2015-03-25
중고차딜러 "성실경영 토대로 조선족차보유량 확보 시급" 2015년 03월 23일 08시 11분    글쓴이:문려    조회:473    추천:0 인물이름 : 지영춘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4] 연길 차천지중고차판매유한회사 지영춘사장 일가견     봄이 다가오자 차시장이 활기를 띠기시작했다. 차를 바꾸어야 하는데 비싼 새 차를 사야할지 중고차를 사야할지 고민이다. 가격을 생각하면 중고차가 훨씬 경제적이지만 종종 들려오는 중고차 사기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중고차 구매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소비자들에게 정확한 정보와 실질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연길 차천지중고차판매유한회사(이하 차천지 HP:138-9439-7787) 지영춘사장을 통해 중고차 구입시 주의점 등에 대해 알아봤다.   문: 연길 중고차시장의 현황을 분석한다면 답: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연길에만 중고차를 판매업체가 100여집이 된다. 그중 95%가 한족이 경영하고있고 조선족이 경영하는 업체는 겨우 대여섯집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차량 소유비률은 조선족이 한족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차를 판매하는 조선족들에게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현재 중고차에 대한 믿음이 적은 것은 주행거리 조작, 사고내역 조작 등 사기행각을 일삼는 중고차업체들이 존재하기때문이다. 이런 사기행각으로 소비자들은 당연 중고차 구매에 불안해할수밖에 없고 중고차에 대한 믿음이 옅을수밖에 없다. 또한 개인과 개인이 상대하기때문에 여러 면에서 상호 보장받을수 없다. 중고차시장을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중고차매매관련 법률제정이 구체화 되여야 하며 업체에서는 코앞의 리익보다는 장원한 안목을 가지고 고객에게 믿음을 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문: 중고차를 사면 더 경제적인데 잘못 살가봐 고민이다. 중고차 구매시 주의점이라면? 답: 차를 사는 사람이나 판매하는 사람이나 모두 차에 대한 애착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차를 아끼게 되고 차를 아끼는 자체가 바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중고차라고 해서 다 나쁜것은 아니다. 현재 생활수준이 날로 향상됨에 따라 또 해마다 새로운 차종이 속속 속출됨에 따라 차를 바꾸는 주기도 매우 짧아졌다. 좀 더 낳은 차를 몰고픈 생각에서 1년도 안돼 차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차들은 사실 새것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구매했다가 판매하기때문에 새차보다 2~3만원은 싸게 살수 있다. 중고차를 살 때에는 다음과 같은 면에 주의를 돌리면 사기당하는 일은 피할수 있다. 고객들은 우선 제출된 “중고차 이력정보” 이를테면 사고이력, 침수, 전손, 도난, 소유자변경 이력 등 정보가 구전하고 정확한지를 확인해야 할뿐만 아니라 압류, 저당, 구조변경 등에 대해서도 확인해야 한다. 업체에서도 차 구매시 차량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해야 하며 입수한 정보에 따라 꾸밈이 없이 고객이 리해할수 있게끔 차량에 대해 설명하여 불신의 이미지를 바꾸도록 해야 한다.   문:그렇다면 차천지의 경영원칙은? 답: 2006년부터 지금까지 쭈~욱 차와 씨름해왔다. 처음에는 경제여건이 좋지 않아 매장도 없이 차를 사다가 마진을 적게 남기더라고 실속있게 장사했다. 하나둘씩 단골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번듯하게 매장을 차려놓고 수십대의 차량을 매매하고있다. 회사의 경영방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장사해왔다. 첫째,사고차량을 구입하지 않고 판매하지 않는다. 간혹 잘못 구입하고 판매했을 경우 다른 차량으로 바꾸어준다. 둘째, 차량을 판매한후의 A/S를 보장해준다. 셋째, 중고차 매물의 상태를 진단하고 수리가 필요한 부분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완벽하게 정비된 상태로 출고하여 소비자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문: 한족업체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고차시장에서 조선족업체가 살아남으려면? 답: 팔고 사는것은 자유이지만 상호간의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조선족이 운영하는 업체에 차를 맡기고 그 곳에서 차를 구입한다면 더 믿음이 가지 않을가. 판매업체에서는 판매에 앞서 고객에게 믿음을 주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한 여러 매스컴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조선족 차보유량을 확보해야 하며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의 힘을 모아 차량 구입, 판매, 차수리, 차부품 판매 등을 일체화한 종합업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10    [인물 강영자] 퍼주는 장사가 결국 남는 장사다 댓글:  조회:1306  추천:0  2014-04-17
퍼주는 장사가 결국 남는 장사다 2014년 03월 19일 02시 41분    글쓴이:문려    조회:1315    추천:0 인물이름 : 강영자 연길시 삼구식품류통업체 강영자사장의 창업스토리   “퍼주는 장사가 결국 남는 장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퍼주는것만큼 배로 돌아오니깐요. 물건이든 인정이든…”  이는 연길시 삼꽃거리 264-1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연길시 삼구식품류통업체(이하 삼구식품)의 강영자사장(50세)의 의미심장한 말이다. 청도삼구식품유한회(공)사의 제품을 연변에서 독점판매하고있는 삼구식품에서는 설립초기(2011년 8월에 오픈) 김치를 하루 200근을 판매하던데로부터 지금은 1톤을 느끈히 소화해낼수 있는 류통업체로 부상했다. 이는 강영자사장에게 꾸준한 노력과 뛰여난 마케팅전략이 있었기때문이다.   삼구와의 인연 “2006년 청도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청도삼구식품유한회(공)사 박광수사장이 만든 삼구배추김치를 맛보게 되였는데 ‘첫입에 반했다고나 할가’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 강사장은 여직 맛본 김치중에서 삼구김치가 김치움에서 갓 꺼낸 옛 김치맛이라며 그때의 그 맛을 잊을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식품제조업체인 청도삼구식품유한회사는 어떤 회사일가?  2006년 3월에 설립된 이 회사는 건축면적이 5000평방메터에 150명의 직원을 둔 일정한 규모를 갖춘 회사이다. “삼구(三口)”는 건강을 지켜주는 입, 질병을 막아주는 입, 행복의 미소를 담은 입”이라는 뜻으로 정성으로 만들어 고객에게 건강과 행복을 선물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회사에서는 김치류, 반찬류, 젓갈류, 콩발효류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년간 7000톤을 생산하여 국내는 물론 일본, 호주, 한국 등 나라에 수출하고있다. 7년간 5만톤의 김치를 수출하면서 수입국의 까다로운 검역, 검사에서 기생출알, 중금속, 화학감미료, 인공색소, 화학첨가제, 이물질이 단 한번도 검출된적이 없는 무사고기록을 세운 안전하고 믿음이 가는 식품제조업체이다. 회사가 믿음이 가고 제품이 인기가 상승세를 그어갔고 또 청도삼구식품유한회사의 박광수사장과는 친분이 있는지라 연길 지사에 입사키로 햇다.  때는 바로 2009년이였다. 강사장은 맡은바 업무에 열중했다. 그과정에서 실력을 하나하나 닦아나갔다. 그런 와중에 2011년, 연길이 아닌 연변에로 판로를 넓혀갔으면 하는 욕구가 앞서 삼구김치의 총대리로 나서기로 작심했다.  그는 다시금 시장조사에 나섰다. 우선 김치를 사다가 주위의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맛을 평가하게 했으며 연길에서 판매하고있는 김치는 물론 한국에 가서도 김치를 닥치는대로 맛보군 했다. 결론은 단 하나 ‘삼구’식품을 류통하는것.   끈질긴 노력과 뛰여난 마케팅전략 2011년 8월 강사장은 연길에 삼구식품을 도매,소매하는 삼구식품경영부를 오픈, 3년내 ‘하루 1톤 류통’이라는 목표를 1년 앞당겨 실현하는 쾌거를 불렀다. 이 같은 성과를 거두게 된것은 강사장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때문이며 뛰여난 마케팅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립초기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시장에서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배송차량, 배송일군 등 지출을 따져볼 때 하루에 1톤이 류통되여야 마진이 남는  장사다. 헌테 설립초기 하루에 200근밖에 류통시키지 못했으니 애간장이 타들어갈수밖에. 이대로 나가면  회사는 문 닫기 일보직전이라 생각한 강사장은 진달래광장 부근의 미식거리며 새벽시장을 뛰여다녔다. 하루 15시간씩 뛰여다니다보니 판매량은 얼마간 증가되였지만 1톤에 이르자면 아직도 거리가 멀었다. 전략을 바꾸어보자. 한국식품을 살수 있는 고객이라면 여타 김치보다 가격이 좀 비싼 삼구김치도 소비가 가능하지 않을가. “시장판매를 위주로 하던데로부터 소비가 높은 한국마트를 공략했습니다. 또 생각처럼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마트에서는 더는 팔수 없다며 ‘패스’를 내흔들었던것이다. 원인인즉 이틀도 못가 김치가 2차 발효돼 시큼해졌기 때문에 더는 팔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강사장은 우선 마트에 김치보관에 적합한 랭장고를 사주기로 했다. 그는 마트마다 다니면서 온도를 0~1도로 조절해주는 한편 삼구기치의 특점,  인츰 시쿨어지는 원인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강사장에 따르면 삼구김치는 염도가 낮고 방부제를 넣지 않아 빨리 숙성되는 특점이 있다. 0~1도의 온도에서만이 5~6일간 원맛을 유지할수 있단다. 랭장고를 15개 사서 한국마트에 설치했을 즈음, 김치에 대한 고객의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트에서는 랭장고를 사주지 않아도 되니 김치만 제때에 제공해달라는것이였다. “퍼주는 장사가 곧 남는 장사임을 실감하게 되였습니다.” 강사장은 마진을 적게 남기더라도 많이 류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삼구에서는 김치를 마트에 넘겨주고 마트에서는 음식점에다 제공해주는 일련의 판매망을 구축했다. 다시말하면 음식점에서 직접 삼구의 김치를 배송받거나 부근의 마트에서 배송받는 가격이 일치했다. 연길삼구식품류통업체에서는 연변 주내는 물론 장춘, 할빈 등 지역으로 판매망을 넓혀가고있다.   열심히 벌어서 멋지게 살고싶다 “이기고 지는것은 선택이 아니라 노력의 열매입니다” 강사장은 그동안 열심히 뛰여온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백화에서 수요하는 물량이 늘어가고있어 현재의 창고로는 역부족이란다. 그래서 더 큰 창고를 지을가도 계획중이고 또 도시의 ‘김치움’을 만들어 고객 대신 관리해주는 새로운 모식도 내오고있단다. “나이는 들고 시대는 변화하고있습니다. 시대의 락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많이 배워야 합니다.” 강사장은 기업인들의 모임에 참여해 기업인들의 성공담을 열심히 듣는가 하면 한국연세대국가전략가과정에 다니면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장악하기도 했다. “열심히 벌어서 멋지게 사는게 꿈입니다.”  강사장은 돈을 많이 벌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을 장기적으로 도우면서 좀 더 값진 삶을 살고싶다고 했다. 그의 소박하면서도 당찬 꿈이 하루 빨리 실현되길 기대해본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9    “한가지 기술 장악하면 평생직업 찾은 셈” 댓글:  조회:1530  추천:0  2013-08-23
“한가지 기술 장악하면 평생직업 찾은 셈” 2013년 08월 14일 02시 14분    글쓴이:문려    조회:843    추천:0 인물이름 : 김영희 연변민족복장학교 김영희교장 인터뷰   연변민족복장학교 김영희교장.   "한가지 기술을 장악하게 되면 평생직업을 찾은것과 다를바 없다" 이는 연변민족복장학교의 김영희교장이 한 의미심장한 말이다. 연변에서 지정한 연변로무송출분야의 복장양성기지인 연변민족복장학교(교장 김영희)에서는 20여간 1만여명의 복장기술인재를 양성하여 미국 싸이판, 한국, 일본,필리핀 등 나라에 파송함으로써 연변녀성들의 취업과 해외진출에 도움을 주고있다. 그렇다면 연변민족복장학교에서 양성된 인재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해외에 파송되고 귀국후 그들은 또 어떤 삶을 살아가고있는지 김영희교장을 통해 알아봤다.   연변민족복장학교에 대한 소개 부탁드린다면 연변민족복장학교는 연변민족복장유한회사의 산하에 있는 학교이다. 1989년부터 연길시민족복장공장에 복장기술일군양성기지를 꾸렸다. 당시 사이판(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들에서 많은 복장공들을 요구했으나 우리 연변녀성들의 복장기술이 그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연변녀성들의 해외진출에 편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복장기술양성기지를 설립, 사회적인 평판 또한 괜찮았으며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컸다고 한다. 2004년 연변민족복공장이 연변로무송출복장양성기지로  지정되면서 대량의 로무인재들을 송출했고 한편 연변민족복장학교로 명명했다. 2009년과 2010년 련속 길림성농촌로력기능양성조직 선진단위로 평의되였으며 2010년에는 한국의 복장분야와 손잡고 기술을 교류, 로력을 송출하기도 했다. 양성기지가 설립되여 지금까지 근 20년동안 만여명의 복장기술인재를 양성하여 싸이판, 일본 등지에 파송했다.     어떤 분야의 기술을 전수하며 관련비용은? 연변민족복장학교에서는 로무송출회사의 위탁을 받고 그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친다. 이를테면 일본회사에서 전문 바지를 가공할수 있는 기공이 필요하다고 하면 우리는 그 회사의 요구대로 학생들에게 전문 바지 가공기술만 전수한다. 수강생들에게는 알 때까지 가르친다. 민족복장학교에서는 주로 바지, 쟈켓, 티셔츠, 치마 등 가공기술을 전수해왔다. 전에는 약간의 수강비용을 받았지만 지금은 전부 무료로 가르친다. 부담이 없고 기술을 배울수 있어 녀성들에게는 더없는 좋은 기회라 생각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나? 교원의 마음이고 부모의 마음이라할가? 비록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 짧지만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타국에서 맡은바 일은 잘하고있는지 항상 마음을 쏟군 한다. 그들이 타국에서 3년간 일하고 돌아와 스승이라고 찾아올 때의 그 기쁨, 그 반가움을 한마디로 형용키 어렵다. 그러다보니 자연 그들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현재 복장학교에서 업무를 보고있는 직원들도 모두 우리 복장학교에서 배출해낸 학생들이다. 타국에서 보고듣고 느낀것이 많고 경험이 많아 신입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선배의 립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사생간의 호흡이 척척 맞아 배움에 보탬이 된다.     “한가지 기술 익히면 평생직업 찾은 셈”이라고 한 리유는? 2006년 연변민족복장학교에서 기술을 전수받고 싸이판으로 로무를 갔던 왕종애씨(한족)가 싸이판에서 벌어온 돈으로 연길공원에 꽃가게를 꾸렸고 착실하게 경영해 몇년사이 아빠트도 마련했고 자가용도 마련했다. 오늘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던 학생이 바로 그 학생이다. 그 학생처럼 기술을 배우고 싸이판 로무일군으로 파송되였다가 귀국후 창업하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기술-로무-기술-로무형으로 다시 기술을 배워 로무의 길에 오른 학생들도 있다. 현재 많은 학생들이 대학본과를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고있다. 하지만 한가지 전업기술을 장악한 학생들은 그 분야의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쉽다. 현재 전문인재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직업교육을 중요시하고있으며 직업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여러모로 혜택을 주고있다. 만약 대학본과를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면 한가지 전문기술을 익히는것도 바람직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본과졸업증서에 기술자격증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여서 일자리는 물론 후한 로임까지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모집과 기술전수과정에서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술전수는 전과 다를바없다. 모두 로무회사의 위탁을 받고 관련 기술을 전수한다. 비용과 상관없이 기술을 익힐 때까지 무료로 가르친다. 전에는 조선족학생들을 모집하여  싸이판이나 한국으로 파송했지만 지금은 다수가 한족학생들이다. 싸이판에 있던 한국 기업들이 문을 닫으면서 조선족의 해외파송이 다소 어렵게 되였다. 한족들 대부분은 일본에 파송되는데 최근 엔 가격의 하락, 일본 지진 등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본에 가려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런 시점에서 정부나 여러 매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로무를 갔던 학생들의 입을 통해 학생을 모집하고있다. 현재 이런 방법으로는 학생모집이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으로 로무파송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고 더 많은 인재들을 육성, 파송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8    “선치심, 후치병" 댓글:  조회:1770  추천:0  2013-07-29
[조글로 명의 탐방] 연변조의병원 송강숙 부주임의사    “선치심, 후치병이라고 먼저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고 다음 환자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연변조의병원의 송강숙부주임의사(이하 송의사)가 늘 하는 말이다. 의사라면 먼저 인격자가 되여야 한다는게 그의 신조이다. 그는 단순히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리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환자의 상황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환자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선뜻 나서서 도와주는 따뜻하고 명랑한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송의사의 진찰실은 늘 북적이는 장마당을 련상케 한다.   연변조의병원 2층 5호실은 여타 진찰실과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였다. 진찰실앞에는 수십명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주춤하는 시간에 이렇게 많은 환자가 몰리다니...” “오다가 친구를 만나 잠간 얘기를 나눈 사이에 이렇게…” “병원 출근시간보다 30분 앞당겨왔는데 벌써 5~6명이 와서 기다리고있으니…” 모두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안타까움을 련발했다. 송의사는 하루에 70~80명 환자들의 병을 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늘 지쳐있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선 환자의 마음이 즐거워야 합니다. 의사가 찡그린 얼굴로 환자를 대한다면 환자는 더욱 고통을 느끼게 되여 혹 떼러 갔다가 되려 혹 붙여오는 격이 되지요.” 환자들은 송의사의 웃는 얼굴만 봐도 병이 반은 치료된것 같다고 늘 말한다.     5호실은 왜 환자들로 북적일가?  올해 64세인 김복희씨에 따르면 그는 여러가지 질병으로 흑룡강, 북경 등 병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돈만 엄청 많이 소비했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송의사를 알게 되였고 송의사의 치료를 받고 완쾌된 상태라 했다. “몸이 거쁜해지니깐 얼굴피부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한테 새생명을 준 송의사한테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 김복희환자 외에도 많은 환자들이 송의사의 치료를 받고 완쾌되였거나 호전반응을 보이고있는 상황이다. 40대의 김련화씨는 심마진(두드러기의 일종)으로 3년동안 고생했다. 전국 각지의 전문의들을 찾아다녔지만 심마진은 사람을 놀리듯 며칠 낫는척 하다가 몸이 좀 춥거나 땀을 많이 흘리고나면 즉각 심마진이 돋군했다. 밑굽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듯 돈을 쏟아부엇지만 심마진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그런데 송의사가 조제해준 약 3첩을 먹고 완쾌되였단다. 물건을 손에 쥐면 뚝 떨구던 김씨환자도 1개 (침구, 중약)의 치료과정을 거쳐 완쾌되였으며 과체중이였던 도문의 최씨는 송의사의 치료를 받고 체중이 20킬로그람이나 줄었다. 지금은 한결 거뿐해졌다면서 고마워한다.   “처음 병원에 입사했을 때 친구들을 불러들여 병을 봐주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찾아왔던 친구들이 병이 낫자 엄지를 내두르며 주위의 사람들을 소개해주었습니다” 5호실의 환자들은 모두 입소문을 통해 찾아온 환자들이다. 그의 환자들은 연길시 외에도 도문, 화룡, 룡정은 물론 장춘 등 지역에서 온 환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송의사는 어떻게 의학의 오묘를 터득했을가? 송강숙의 외할아버지는 한의사였다. 어릴적부터 어깨너머로 침구료법을 익혔지만 의사가 되고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앓음자랑을 하던 친구들이 외할아버지가 놔준 침 몇대를 맞고 아무일 없듯 걸어나가는것을 보고 ‘의술’을 배워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정말 신기하다. 나도 저런 재주를 가졌으면….” 중학교에 다닐 때 외할아버지한테서 인체에 분포된 14개 경맥, 전통혈위중에서 대종을 이루는 경혈, 림상경험으로 미뤄 치료효과가 있는 비방혈 등에 대해 익혔다. 고중을 졸업한후 송강숙은 장춘중의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의학의 오묘함에 빠져들게 되였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컬탐스테 의학서적들을 뒤적였고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교수들한테 묻군 하였다. 4년 중의학과 약학 공부가 끝났지만 그는 아직도 허기진것 같아 북경중의학원에서 연수차로 입적, 또한번의 4년이란 의학공부를 했다. 교수진들은 송강숙의 열정에 탐복했고 대견해했다. 중국 부인과의 유명한 교수 곽지강, 심뇌혈관계통의 권위 곽위금 등은 자신의 모든 의수를 송강숙에게 전수하였다. 이렇게 되여 송강숙은 외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옛비방과 대학에서 익힌 중의지식 그리고 전문가들에게 전수받은 서의 지식으로 자신의 활무대를 펼쳤던것이다.  “그동안 배운 지식을 고향인민들을 위해 복무하고싶었습니다.” 2007년 북경에서 의학공부를 마친 송강숙은 무작정 고향길에 올랐다. 그때 나이 30대, 나이와는 너무도 걸맞지 않은 로숙함을 드러냈다.   환자들은 왜 송의사를 명의로 추대할가? 어느 한 교수는 명의란 정성스럽게 설명해주는 의사라고 정의를 내렸다. 송의사가 바로 그런 명의이다. 그는 진맥하고 처방을 내리는데 급급한게 아니라 발병원인, 현재상태, 치료방법인 식이료법, 침구료법, 약물치료 등 전반 과정을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쉽게 설명해주기에 환자들은 내심 믿고 따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5호실은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였다. 새로운 환자가 차례를 기다리면 먼저 온 환자들이 “송의사를 잘 찾아왔다”며 반겨준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냐며 주고받는 사이 환자들간의 친숙함이 생기고 또 환자와 의사간의 화합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송의사는 늘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건품도 잘못 쓰면 독이 됩니다.” 그는 환자들은 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무턱대고 보건품을 사다먹는다며 보건품도 잘못 복용하면 오히려 인체에 해로우니 각별히 류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면 가족이 아픈것처럼 마음이 아파 치료해주고싶다고 말한다. 마음이 따듯한 의사, 웃음을 잃지 않는 의사,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소상히 설명해주는 의사가 바로 명의인것이다.  조글로미디어 (www.zoglo.net ) 문인숙기자 원문보기
7    “북경아가씨” 창작자 정원수 댓글:  조회:1537  추천:0  2013-04-11
2011년 12월 12일 04시 12분    글쓴이:문려    조회:5498    추천:0 인물이름 : 정원수 12월 11일 오전, 2012년 연변TV 양력설특집 촬영차로 연변을 찾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정원수씨를 만났다. 엔티테인먼트 소속 명휘씨(가수)도 동행했다.   정원수 그는 누구인가   정원수씨는 노래 “북경아가씨”, “로무현 추모곡”’등 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1960년, 한국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정유조와 김갑이 사이에서 차남이자 막내아들로 태여나서 20세때 부산으로 진출하여 대학과 음악을 병행, 1979년 그룹 "원수와 파이브스타"의 1st 기타 겸 리더싱어로 활략하다가 1979년 서울로 상경하여 작곡가, 메니저, 음반제작자, MC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맹활약하고있다.     '환갑연'에서 노래를 부르고있는 정원수씨.   “북경아가씨” 창작 계기   정원수씨는 1993년, 처음으로 연길에 오게 됐고 그때로부터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돼 중국에서 커피점을 오픈, 2004년 개인사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동안 친숙하게 지냈던 이웃들을 떠나는 리별의 아픔을 그대로 이 노래에 담았다. 순간의 발로이다. 이 가사에 담김 함의를 두고 안해분도 시기 아닌 시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한국 최초로 조선족가수 초청공연   정원수씨는 1994년 조선족가수 최건을 초청해 KBS방송 빅쇼에 출연시켰고 1999년에는 가수 김월녀를 한국에 초청해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북경아가씨’를 부르게 했다.1999년부터 그는 중국조선족추석특집 노래자랑, 한중교류협회와 함께 장충체육관, 여의도광장 노래자랑 한마당을 10여차례 조직진행하였다. 한편  2000년 kBS 원단특집에 처음으로 조선족가수사가 등장하도록 주선했으며 조선족 전승길이 작사, 작곡한 노래 ‘못말리는 정’을 처음으로 한국인가수가 부륻도록 했다.  2011년에는 또 연변TV음력설야회 3원방송 서울편을 서울구로구에서 함께 추진하였고 9월 11일에는 추석맞이노래자랑 대잔치를 장충체육장에서 진행하면서 장윤정, 백청강 등 조선족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초대하여 즐거움의 한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또 중국조선족 동포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 "울 엄마"를 작사, 작곡하고 노래하여 동포들의 마음을 울먹이게 했다.   올해 연변양력설맞이 문예야회 ‘환갑년’에 출현하기 위해 그는 지난 7일 연길로 왔다. ‘환갑년’에서 그는 아들역을 맡는것으로 알려졌다.   연변TV 관계자는 “출연료도 제대로 줄수 없는 상황에서 이번 문예야회 참석요청에 더 고려할 나위없이 꼭 참석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약속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고 평가했다.   '환갑연'에서 노래를 부르고있는 가수 명휘씨.   꿈을 향해 도전   정원수씨는 현재 드라마작가로 분주하게 보낸다. 그가 기획한 "다문화가족"이라는 시트콤- 야심작이 곧 한국 텔레비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현재 한국에는 다문화거리, 연변거리가 생겼고 ‘동포나라’가 생겻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은 다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다. 특히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의 인식차이, 문화차이를 좁히기 위해 드마마의 주연을 조선족으로 선정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중한합작드라마를 제작하는것이 꿈이라고 했다. 또 래년 로인절에는 연변의 어른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열고싶다는 소원도 전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 박군걸 기자  
6    김태홍 "미술가라면 작품으로 말하라" 댓글:  조회:1812  추천:0  2013-02-26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국가1급무대미술설계사 김태홍화백의 작품세계   연변의 두번째 한락연 민족의 전통을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 생활은 모든 작품의 원천   김태홍화백 략력 1943년 흑룡강성 녕안 출생 1967년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설계학과 졸업 1967년~현재 중앙발레무극단 무대미술설계사 1984년 일본대학예술부희극연구소 특별연구원 1995년~2005년 중국문화부 문화상 평심위원   무극 《춘향전》은 중국문화부 제1기문화대상, 무대미술 금상(1991년), 무극 《초생달 오경》은 중국문화부 제2기문화대상, 무대미술 금상(1995년) 가무극《장백의 정》은 문화부 최고상인 5개일 프로젝트상. 중국문화부 제5기문화대상(2001년), 무극《노래하노라 장백산》은 제4기 전국소수민족문예콩클극목상 금상, 최우수무대미술상(2012년)  등 수상.   지난 9월 29일부터 10월 9일까지 연변박물관에서 열리기로 했던 중국조선족 저명한 화가이며 중앙발레무극단 국가1급 무대미술설계사인 김태홍화백의 “무대미술설계도ㆍ유화ㆍ소묘 작품전”이  10월 14일로 연기 됐다. 이는 전시된 작품들이 공명을 일으켰기때문이다. “백성들이 작품을 알아볼 때 제일 행복하다. 작품의 생명력은 흠상자에게 동감적인 추억과 심상의 즐거움을 줄 때만이 가치가 정립되기때문이다.” 김태홍화백은 전시소감을 이렇게 한마디로 개괄했다. 해방후 처음으로 연변행정지도를 그렸다는 아버지(김철)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김태홍화백은 열세살 어린 나이에 북경미술학원 부속중학교에서 설계를 배웠고 그후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설계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까지 줄곧 중앙발레무극단 무대미술설계사로 종사해왔다. 그의 인생은 그림과 싸워온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 일본류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연변가무단의 무극 《춘향전》무대미술설계를 시작으로 무용서사시 《장백의 정》, 대형가무《노래하노라, 장백산》등 가무예술 경전작들의 무대미술설계를 모두 성취함으로써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과들은 모두 나라에서 수여하는 금상, 대상을 받아안았다. 김태홍화백은 “무극《춘향전》의 배경그림을 가리키며 말꼭지를 풀었다. “일본에서 류학중일 때 안무가 최옥주선생이 저를 찾아와 을 안무로 표현하겠다며 무대미술설계를 부탁했다. 문학경전을 문화화하고 예술화하겠다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춘향전》의 배경바탕은 조선민족의 문화적바탕을 소개하려는데 력점을 두었다. 즉 돌담, 병풍, 탈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의 풍속, 아름다운 풍경, 산뜻한 색조, 건축특점 반영했다. 고향편, 연변편, 국가편, 서장편, 신강편 등으로 나누어 전시된 300여점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모두 민족의 특징을 승화해 표현했다고 볼수 있다. 즉 연변편에서 《장백의 정》의 배경화《뿌리》는 연변을 노래하는 한편의 무용시로 천년, 만년을 두고 장백산에 굳건히 뿌리 내린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상징하며 신강편에서《에르카르 축제》와 같은 작품들은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생활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는 위글족인민들의 생활면모를 여실히 반영했다. 20여년간 김화백의 무대미술창작과정을 지켜봤다는 주윤돈 미술설계사는 “무대설계는 고된 작업이다. 큰 나무장대기에 붓을 고정시키고 수십메터에 달하는 천우에서 김매듯 걸어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위대하다고 할가. 아무튼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주위에서는 김화백과 그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가? 연변주문화국 전임 국장이였던 김희관선생은 “김화백은 연변의 두번째 한락연이다.” 며 전국 방방곡곡의 풍경과 문화를 소재로 창작된 무대미술설계도를 보면 화폭은 크지 않지만 그 내함이 심오하다는것을 금방 느낄수 있다고 말했다. 참관자들은“중화 여러 민족과 본 민족의 혼과 맥이 살아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의 작품마다에는 그 민족의 애정, 그 시대 문화와 정신세계가 어려있다”고 평가했다. 전시회 개막소식을 보고 찾아갔다는 한 네티즌은 “작품들은 너무 인상적이여서 매일 전시장으로 가다싶이 했다. 너무나 많은 나의 추억의 문짝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나의 걸음은 멈춰졌고 부모형제와의 지난날 친구들과의 동년이 살아숨쉬군 하였다.”며 살아지는 나의 추억을 뒤살려주었다고 꼬리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화백은 “생활은 모든 작품의 원천입니다. 우선 생활에서 감돔을 받고 그 감동을 승화시켜 작품으로 표현해야 한다.”며 “때론 각 지역에 내려가 1년 넘게 지역인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그속에서 소재를 얻군 한다”고 말했다. 김화백이 자주하는 말 “미술가라면 작품으로 말하라”, “매일 그리면 손이 익는다.”이다. 그는 미술은 시대정신의 표상이고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의식과 행위가 미술작품에 반영되여 완성된다고 말한다. 고향의 부름에는 한치의 주저도 없다는 김화백,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맞이 대형광장무《연변찬가》의 배경미술 총설계를 위해 지난해 6월부터 부인과 함게 고향에 와 지금까지 눌러앉아 고향을 그리고 또 그렸다. 김태홍화백은 이번 전시일정을 마치고 18일 북경으로 돌아가서도 계속해 전시회를 펼칠 예정이며 신강에서도 전시회를 열 계획이란다.   문인숙기자
5    전춘식 "오늘의 아동문학을 말한다" 댓글:  조회:1419  추천:0  2013-01-28
인물이름 : 전춘식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64)   아동문학가 전춘식작가의 일가견     요즘 연변인민방송청소년프로와 《아동문학》잡지,《아동세계》잡지 등 방송과 잡지에서 아동문학가 전춘식작가의 글을 시리즈로 펴내고있다. 30여년간 아동소설, 동시, 동화 등 작품을 600여편 발표하면서 줄곧 아동문학창작에 몰두해온 전춘식작가의 작품을 두고 평론계에서는 “형상창조에서 다른 아동소설가들보다 한삽 더 깊이 파면서 인물의 심층세계발굴에 심혈을 몰부어 우리 아동소설의 창작에 보기 드물 정도로 심리소설에 접근하고있고 소설문체의 혁신에도 일조를 타고있다”고 평했다. 전춘식작가를 통해 오늘의 아동문학에 대해 알아본다.   요즘 시리즈로 나가는 작품들로는? 연변인민방송청소년프로에 《5학년 3반 아이들》이란 성장드라마가 조선족자치주 60주년 헌례작품으로 선정돼 시리즈로 방송중이다. 극본에 채선, 주춘복 연출로 된 이 드라마는 매주 목요일 방송된다. 15만자에 달하는 장편동화 《세나》등 작품이《아동문학》, 《아동세계》 등 잡지에 시리즈로 나가고있다. 《5학년 3반 아이들》은 오늘날 조선족 어린이들이 겪고있는 애환, 특수한 력사배경하에서 겪고있는 아픔, 기쁨, 모순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나》는 재래식 동화의 틀을 벗어나 인간과 인형의 대화를 통해 사회의 비리를 폭로했다. 재래식 동화의 틀을 벗어났다고 한것은 다리를 상해 등교못한 아이가 인형 4개를 빚었고 그 인형이 집에 불이 나면서 빨갛게 구워져 재더미속에서 오쭐오쭐 일어난다. 화제의 원인인즉 비리를 감추기 위해 목격자인 아버지의 입을 막으려고 이 집에 불을 질렀고…이 작품에서 보다싶이 단순 동물이나 식물의 대화가 아닌 인간과 인형의 대화를 통해 사회의 현실을 반영했다.   상술한 작품의 소재는? 독서하는 과정에서 계발을 받기도 하고 또 아이들의 생활속,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이삭주이를 하기도 하며 아이들의 글에서 아이의 심리세계를 터득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할수 없는 뛰여난 상상력을 갖고있다. 즉 아이들에게는 미궁의 세계가 펼쳐져있는데 아이들의 이런 미궁속을 들여다 보노라면 아이들의 생각에 가끔씩 놀랄 때가 있다.   아동문학작품 평심의 기준은? 여태껏 너무 반성의 글만 제창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 자체는 부족한게 없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은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다고 쓰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내가 이렇게 부족한점이 많았구나”하면서 자신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난주에 열린 지용제 제1회 백일장 시상식에서 한 아이의 당당한 모습에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당시 아이 3명이 수상을 하게 됐는데 2명은 친구가 축하의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었지만 한명에게는 누구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관중석에서는 꽃다발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볼 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글쎄 그 아이가 자기절로 옆에 있던 꽃다발을 목에 걸고 당당하게 주석대에 오르는게 아닌가. 아이의 순간행동에 모두들 진심어린 힘찬 박수를 보냈다. 이 아이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현시대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도 해야겠지만 이렇게 자신감이 있는 아이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 때문에 글을 쓰거나 글을 가르칠 때 반성보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이끌어야 하며 평심들도 이전의 낡은 틀을 벗어나 아이 자상화 그대로 읽을수 있는 소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아동문학에서 존해하는 문제점이라면?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작품 특히 소설에서 무엇을 노려야 하는가? 작가(어른)의 나름대로 글을 쓸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진실한 모습을 그려내면서 아이들을 위해 변호하고 아이들을 위해 아파하고 아이들을 위해 글을 써야 하며 아이들의 단순세계를 독파하고 아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는게 당면의 과제라 생각한다. 또한 문학창작과 작품에서 쟝르를 비기고 서렬을 정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심령세계를 겨누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도록 부추겨야 하며 아이는 아이답게 그려내야지 너무 고상하게 묘사하면 글은 발표되겠지만 그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또한 아동문학 창작을 한다 하여 작자의 문학세계가 단순하다고 평가해서도 안되며 작가들의 시각과 사로를 바꾸어 정품을 좀 더 많이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문인숙기자   전춘식 략력   1952년 룡정 출생          연변대학 자습대학 졸업 연변작가협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부주임, 지용제 제1회 백일장, 1979년 동시 《양어장의 누나》로 문단 데뷔, 아동소설 《숲속의 하이얀 귀틀집》등 90편, 동시 《장보러 가는 날》등 240여수, 수필 《방아소리》등 70여편, 동화 《짝짝귀로 된 카카》등 50여편, 콩트, 잡필, 론문 등 100여편 발표, 동화소설집, 동시집, 아동소설집, 이야기그림책 등 십여권 출판. 서정시 《할아버지》(외5수) 연변문예잡지 대상 수상, 아동소설 《행복》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성교육학원 민교부 주최 대상을, 장편기행문《사꾸라는 다른 하나의 세계였다》 연변녀성잡지사 특등상 등 십여차 수상.
4    최향화 "문필을 겸비한 아나운서가 되는게 꿈" 댓글:  조회:2419  추천:0  2013-01-23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84)   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예술단의 최향화양을 만나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헌례영화《해란강반의 벼꽃향기》에서 주인공 김향화역을, 텔레비죤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우리 집》에서 박순옥의 어린시절을 연기한 아역배우 최은혜의 배음을 맡은 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예술단의 최향화양을 만났다. 청순하고 아련한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남달리 시원시원해 대화가 이외로 무르익어만갔다. 그는 “문필을 겸비한 아나운서가 되는게 꿈”이라며 이 꿈을 향해 열심히 뛸것이라 했다.   연변1중진학을 포기 예술학교 선택 어려서부터 남들앞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텔레비죤속 아나운서의 말투를 본따 하면서 학교의 방송원으로 활약해 사생들의 사랑을 받았던 최향화, 그는 아나운서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다. 초중을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1중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고중진학을 포기하고 연변예술학교에 진학하는 담대함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예술보다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업을 찾아 평범한 인생을 살라는것이였습니다.” 부모님들한테 더는 실망을 안겨줄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책이 닳도록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러는 딸을 두고 부모님들은 딸의 장래가 걱정되였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이 바로 시작이다 최향화는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행운스럽게도 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예술단에 입사했다. 자심감이 충만되였다. 헌데 막상 성우라는 직업에 맞띄우고보니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지금까지 배운지식으로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실정,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열심히 배웠길래 잘할수 있을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시작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성우의 길은 험한 가시밭길과도 같았다. 무턱대고 따라해서도 안된다. 자기 생각대로 해서도 안된다. 반드시 영화나 드라마의 분위기에 맞게 우리 말의 강약에 알맞은 절주를 찾아낼 때만이 예기했던 효과를 나타낼수 있었다. 그래서 서방흥 등 선배님한테서 하나하나 열심히 가르침을 받았고 매일 방송이 끝나면 잘된점과 미흡점을 가려내며 다음 방송을 기약했다.   “나”는 행운아 “연변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예술단에 입사한것도 행운인데 영화《해란강반의 벼꽃향기》출연, 그것도 주역을 맡게 되였으니 행운아가 아니고서야…” 그는 자신이 참 운이 좋은 편이지만 운만 믿고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길 기다리지는 앓을것이라고 했다. 《해란강반의 벼꽃향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연변주당위, 주정부, 연변 라지오영화텔레비죤방송국에서 공동 제작한 연변의 첫 독자투자 영화이다. 이번 영화가 최향화에게 있어서 처녀작이였다. 그래서 마음이 더 설레였고 애착이 더 갔다고 한다. 최향화는 또 텔레비죤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우리 집》에서 박순옥의 어린시절을 연기한 아역배우 최은혜의 배음을 맡기도 했다. “최은혜는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배음을 하면서 그 영화에 푹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애의 이미지에 맞게 또 이쁘게 소리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술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는 배우로 활약했고 어린 최은혜의 배음을 맡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것을 배웠고 또 많은것을 느꼈다고 한다.   촬영과정에 있은 에피소드 《해란강반의 벼꽃향기》를 촬영하면서 비록 연기는 쉬웠지만 한족말로 대화를 하게 되여 힘들었고 장고춤을 잘 추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도 했단다.  “논밭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촬영할 때 저는 낫날을 안으로 향하게 하고 엎어질듯 걸어서 주위 분들이 한바탕 크게 웃은적 있습니다.” 낫을 바로 잡을줄 몰라 웃음을 남긴 천진한 소녀였지만 맡은바 역을 원만히 완성하기 위해 수십번씩 연습을 거듭했다는 최향화, 그는 선배들의 관심과 배려를 느낄줄 알고 게다가 솔직해 주위의 관심을 독차지한것 같다는 주위의 평이다. “작은 떼떼가 많이 배려해주었습니다. 매일 음식을 사들고와서 나눠주고 코믹연기를 해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역과 배음에서 어느 역할이 더 자신에게 걸맞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물음에 그는 “하나는 목소리로 연기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참여하는것이여서 모두 색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음은 무언가를 하고나면 시원한 감이 없어 마음이 개운치 않습니다.”며 배우를 우선으로 꼽았다.   문필을 겸비한 아나운서가 꿈 “연기에는 그다지 자신감은 없었지만 한번 하고나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비록 첫작품에서 많은 미흡함을 보였지만 이런 기회가 또 차려진다면 더 멋진 모습으로 다가갈수 있을것같습니다.” 무슨 일이나 어떤 연기나 “최향화가 하면 제격인데”하는 소리를 듣고싶다고 그는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즉 무슨 일을 시켜도 느끈히 해낼수 있는 차세대 유용한 방송인이 되는게 꿈이란다. 배우와 아나운서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아나운서를 선택하겠다는 최향화, 그의 꿈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기자 문인숙       최향화 략력   1987년 연길 출생 현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연수중 2007년 한국 “춘향”선발대회서 해외춘향상 2008년 연변대학 “사회자 선발대회” 1등상 2009년 연변 “송이절”홍보대사 2010년 “상해엑스포” 연변홍보대사 2011년 연변 “춘절야회” 사회자 2012년《해란강반의 벼꽃향기》주인공 2012년 연변 직속기관 “10대 매력녀성”으로.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