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속의 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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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가슬기분에 취해서... 댓글:  조회:1851  추천:2  2011-09-08
9월달에 들어서니 슬슬 가슬기분이 짙어오고 있는데... 어제저녁엔 시원하게 불어오는 호수바람을 쏘이면서... 저멀리 빨강불이 반짝대는 뢰봉탑과 성황각을 바라보며... 서호가에 혼자앉아 깡통맥주를 홀짝댔는데... 그 기부이 참으로 유별낫다 아이가.... 오라재믄 추석도 다가오는데... 고향 친인들 산소에 못가는걸 안타깝게 생각하며... 뭘 바라고 타향에서 이렇게 사노... 잠간 인생타령도 불러봣다 아이가... 몇년전에 조선말만 짹짹대며 항주에 왔던 딸애가 지금은 조선말이 아닌 항주말로 솰솰대니... 은근이 정내미 뚝뚝 떨어질가 하다가도... 울 부부간끼리 뭐라고 조선말로 쑥덕대는건... 귀신같이 묘하게 다 알아듣고 능글스럽게 지껄여 온다 아이가...참ㅎㅎ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추석날 둥근달도 몇번이고 뜨고지고 대갈통에 돋아난 머리카락도 한오리 두오리 하애만 지는데 애새끼도 허리통을 지나서 이제는 어깨겨름 해오건만... 타향살이에 찌들은 얼굴엔 주름살만 늘어나누만....음~~~~~~~~~~~  
14    탈북자 댓글:  조회:2850  추천:3  2011-08-16
 썩오랜전에 가까운 친척애 하나가 압록강상류 어느 작으마한 변방초소에서 변방무장경찰로 2년간 군복무를 한적이 있었다.다 알다싶이 중국의 신병들은 겨울철에 군에 입대해서 한 삼개월간 신병훈련을 받고 정식배정을 받은후 쫄따구병사로 근무하게 된다.   친척애가 배정받은 변방초소는 바로 압록강기슭에 자리잡은 작으마한 초소였는데 평소에는 조선쪽에서 넘어오는 밀수목재 혹은 밀수잣같은것을 검사 몰수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탈북자들을 조선에 돌려보내는 일거리가 가끔씩 차레지기 시작하였는데…그 해 봄따라 추가로 특수한 일거리가 생겼다.   겨울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압록강이 봄이되여 풀리기 시작였는데…상류에서부터 임자없는 시신들이 한개두개씩 떠내려오기에 신분을 확인해서 조선국민인줄을 알고 국제인도주의정신에 따라 좋은 나무로 관을 만들어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   하루이틀 시간이 흘러서 떠내려오는 시신수량은 점점 많아만 지고 아직 이마에 피도 안마른 젊은 애숭이 군인들이 거의 매일같이 강가에서 그시신들을 건져내고 수습하는 일들에 바삐 돌아치는데(공교롭게도 그동네 위치상 강물이 중국쪽으로 굽이져서 흐르다 보니 상류에서 내려오는 시신 대부분이 중국쪽 강가로 밀려 나오게 되였으니)…   그러던 어느 하루, 강변을 순라하던 병사가 얼굴이 지지벌개서 난리를 치며 모두를 끌고 좀 웃쪽 상류에 가보니…눈앞의 정경이 가관이였다. 조선군인들이 조선쪽 강변에 밀려난 시신들을 나무막대기로 강중심에 밀어낸다고 난리 부리고 있으니…   그후의 결과는 뻔한것이다…중국군인들도 건들건들 막대기로 시신들을 강중심으로 밀어내면 그뿐인걸…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으로 부풀은 봄날에… 조선의 추운 겨울을 피해 압록강을 건느다 꽁꽁 얼어붙엇던 시신들은 새봄을 맞으면서도 오갈데없이 압록강을 따라 정처없이 어디론가 밀려가야 하나?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며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갔던 황장엽은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었을 하고 있을가?   일개 작으마한 공장의 출장원으로 출장길에서 어느 아낙네의 쌀주머니를 빼았는 안전원과 생갱이를 벌리다가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 조선족 늙은이의 손을 잡고 어렵사리 북경까지 찾아 왔건만…상해 어느 교회목사의 전화번호가 적인 종이장 한개와 상해행 기차표를 달랑 손에 쥐어주며 등을 미는 한국외교관을 떠나서 왜롭게 홀로 상해기차역광장에서 일주간 헤매돌았던 젊은 북한친구는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13    귀곡자와 반경 댓글:  조회:2690  추천:1  2011-08-16
 鬼谷子   귀곡자(鬼谷子)는 왕후(王詡) 혹은 왕선(王禪)이라 불리는 전국시대의 사상가이다. 그는 당시 초나라 땅인 청계(淸溪)에 위치한 귀곡지방에 은거하여 스스로를 귀곡선생이라 하며 『귀곡자』란 저서를 썼다고 한다. 출생연도 등을 알 수는 없으나, 대략B.C 3세기 경의 인물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종횡가(縱橫家)의 비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제자 중에 가장 걸출한 인물로는 전국시대에 진(秦)나라와 대항하는6국의 합종책(合從策)을 이루어 냈던 소진(蘇秦)과, 이와 반대로6국을 진나라와 결합시키는 연횡책(聯橫策)을 주도한 장의(張儀)를 들 수가 있다(戰國策 참조). 또한 『손자병법』을 쓴 군사전략가 손빈(孫臏)과 방연(龐涓)도 그의 제자였다는 설(孫龐演義 참조)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무형의 모략을 감추고 조용히(無爲) 있는 것 같으나, 항상 싸우지 않고 비용도 들지 않는 싸움(戰於不爭不費)을 강조한 사람들이며, 결과적으로 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지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던 사람들인데. 『귀곡자』 속에 이미 이런 생각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귀곡자』의 주요 내용은 주로 유세가(有說家)들이 많이 이용하였을 구체적인 대화의 기법이고, 이 유세를 궁극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다각도로 다루고 있다. 즉 무엇보다도 천하의 대세를 보고 누가 유리한지를 먼저 판단하여 유세의 대상을 선정해야 한다는 것(1.패합)과, 상대방의 반응을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2.반응), 유세를 해야 할 군주의 주위에 정이 통하는 사람을 미리 만들어 두어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만약 일이 실패해도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는 것(3.내건), 유세 중에 이견과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미리 알아 그 틈새를 미리 봉하는 방법(4.저희), 때로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척 하면서 협박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5.비겸), 한번 거스른 것을 바꾸어 다시 천하의 대세에 추종하는 방법(6.오합), 천하의 정세와 제후들의 실제 정세를 알아내는 법(7.췌편, 8.모편), 유세 시에 사용해야 할 말의 구체적 종류와 그 특징(9.권편), 이 유세가 받아들여져 구체적으로 천하를 다스릴 모략의 종류와 그 성질(10.모편), 바야흐로 결단을 내려야 할 경우와 그 결단의 어려움(11.결편), 드디어 천하를 제패한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12.부언)등을 다루고 있다. 이외에도13-전환(轉丸)과14-겁란(刦亂)이 있었다고 하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귀곡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성인(聖人)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음(陰)과 양(陽)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이 책의 뒤에 붙은 본경음부 일곱 편과(本經陰符七篇) , 중경(中經) 에는 이런 음양에 대한 것이 제법 이론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귀곡자 본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없는 관계로 이 책 모두가 후인의 위서라고 매도되기도 하나, 뒤의 글들이 『귀곡자』 본문과 어휘가 확연히 틀리는 바람에, 적어도 그 글들은 후세 도교 쪽의 저작이 아닌가 하는 것이 옮긴이의 추론이다. 기본적으로 『귀곡자』에 씌어진 것은 천하에 유세하여 천하를 안정시키는 방법으로서, 세상사는 이런 무형(無形)의 방법(道)들을 미리 알아, 미리 판단하고, 미리 결단하는 성인만이 성공시킬 수 있으나, 남들은 그들이 성공한 이유를 모르므로 아무 일도 안하고(無爲)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런 도(道)와 무형(無形), 무위(無爲)라는 용어로 보아 귀곡자의 사상이 도교사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본문에서도 오직 인의예지(仁義禮智)만을 말하는 유가들을 비꼬면서, "다만 중정(中正)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귀곡자』의 이런 도가(道家)적 성격으로 인해 이 책은 후일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ࡐ잡가ࡑ로 분류되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학계에도 그대로 이어져 아직까지 제대로 된 한글 번역본 한 권도 없는 지경이 된 것은 커다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것을 제외하고는 체계적인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옮긴이가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하게 된 계기는 학민사 김학민 사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중국어 간자체 번역서를 텍스트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책과 후일 다시 접하게 된 다른 중국 간자체 번역서들도 상당한 부분이 오역이거나 의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 일일이 원문과 대조하면서 번역을 진행하게 되었고, 각 편의 짧은 해설도 옮긴이가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처음에 참조하려고 했던 중국 간자체 번역서에도 오역이 너무 많았고, 또 한글 번역본도 전혀 없었으므로 이 책의 번역은 전적으로 옮긴이의 책임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잘못된 부분은 완전히 옮긴이의 책임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의 귀곡자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2007년5월 박 용 훈   옮긴이 서문 제1편 귀곡자 鬼谷子 1. 패합 2. 반응 3. 내건 4. 저희 5. 비겸 6. 오합 7. 췌편 8. 모편 9. 권편 10. 모편 11. 결편 12. 부언 제2편 본경음부 本經陰符 1. 성신 2. 양지 3. 실의 4. 분위 5. 산세 6. 전원 7. 손태 제3편 지구 持樞 지구 제4편 중경 中經 중경   귀곡자》(鬼谷子)   설명1   귀곡자는 책 이름이기도 하면서 그 저자이기도 하다. 맹자(孟子)의 《맹자》, 장자(莊子)의 《장자》, 순자(荀子)의 《순자》와 같다. 귀곡자는 선진(先秦) 시대 사상가가 거개 그렇듯이 이렇다 할 만한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름이 아주 요상하며, 귀신 냄새 물씬 풍긴다. 귀곡(鬼谷)이란 글자 그대로는 귀신들이 사는 산의 계곡이란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영천(潁川)과 양성(陽城) 지방에 소재한 鬼谷이란 곳에 은둔했기에 귀곡자라 불렀다고 한다. 귀곡자가 본명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를 일컬어7국이 천하 패권을 겨루던 전국시대에 권모술수의 외교책을 우자(優者)의 도(道)라고 주장한 종횡가(縱橫家)로 꼽기도 한다. 전국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유세가의 양대 산맥, 즉, 합종연횡책으로 유명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그의 제자였다고 하니, 그의 사상적 경향 또한 어떠했을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소진과 장의는 활동연대가 맹자-장자와 겹치는 까닭에 이런 전승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출생 시기는 아마도 기원전400년을 넘어갈 것이다. 그의 귀곡자는 오랫동안 위서(僞書)의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명2 姓은 王이요 名은 詡라 하며 春秋시대 사람이다. 항상 雲夢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修道했으며, 청계(淸溪)의 귀곡(鬼谷)이란 곳에 은거했다 해서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 부른다.   종횡가(縱橫家)의 비조(鼻祖)로 통하며 蘇秦과 張儀는 그의 가장 걸출한 제자들이라는 기술이 《전국책(戰國策)》에 보인다. 그 외에도 병가의 대가인 손빈(孫臏)과 용연(龐涓) 또한 그의 제자였다는 주장이 《孫龐演義》에 보인다.   종횡가가 숭상하는 핵심이 권모책략(權謀策略)과 언담변론(言談辯論)의 기교인 바, 이것이 필연적으로 仁義道德을 숭상하는 유가 학파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유가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뒤에는 귀곡자를 존숭한 이는 무척이나 적은 반면에 그것을 비난한 자는 매우 많았다. 기실 외교전술의 得益 여부는 국가의 安危와 흥망성쇠를 좌우하기 마련. 나아가 외교담판과 경쟁 策略이 성공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경제의 성패와도 직결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신으로 일하는 자는 항상 언담 기교를 익혀야 하며, 이것이 그 개인의 처세에도 밀접할 수밖에 없다. 蘇秦이 세촌짜리 혀로써 합종육국(合縱六國)하여 배육국(配六國)하기를 상인(相印)하듯이 함으로써 통령육국(統領六國)함으로써 공동으로 秦에 대응하고자 한 책략도 그 방편이었다. 그런 반면 張儀 또한 그의 謀略과 遊說 기교로써 장차 육국합종(六國合縱)을 토붕와해(土蹦瓦解)케 함으로써 秦國을 지킨 공로 또한 빛나는 책략이었다. 소위 “智用於衆人之所不能知, 而能用於衆人之所不能”이라는 말은 무형(無形)에서 남몰래 모략을 발휘함으로써 싸우지 않거나 큰 비용을 쓰지 않고도 이긴다는 것이 《귀곡자》의 정수라 할 것이다. 《孫子兵法》이 총체적 전략에 편중했다면 《귀곡자》는 구체적 기교에 주력함으로써 양자는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할 수 있다.   현전본 《귀곡자》는 도합 14篇이라 그 중 제13과14편은 이미 망실되었다. 《귀곡자》 판본으로는 매양 참조하는 게 도장본(道藏本)이며 그 외에 가경(嘉慶) 10년 강도진씨(江都秦氏) 刊本도 요긴하게 이용된다.     설명3 귀곡자는 고대중국 전국시대의 저명한 인물로“諸子百家” 중 한 명이다. 縱橫家의 비조로 통하며 교육가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原名은 王詡이며 鬼谷이라 自號했다. 민간에서는 그를 왕선노조(王善老祖)라고 추숭한다. 귀곡이라는 이름은 그의 출생지, 혹은 은거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鬼’라는 말은 ‘歸’와 통하고 그런 까닭에 ‘歸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귀곡자가 종횡가 비조에 비유되는 까닭은 그의 수하에 蘇秦과 張儀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戰國策》에 보인다. 孫臏과 龐涓도 그의 제자였다는 설은 《孫龐演義》에 있다.   귀곡자에게는 정치가의 육도삼략(六韜三略)이 있고, 또 외교가적인 縱橫之術에 능했으며 아울러 陰陽家의 풍모도 많으며 예언가의 기질도 농후하게 발견되니, 세간에서 칭하기를 기재(奇才), 혹은 전재(全才)라고 한다. 그의 저서 《鬼谷子》는 《捭闔策》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에서‘자치통감’이 통치자나 관료들의 공식 교과서였다면‘반경(反經)’은 비밀리에 곁에 두고 이용하는 일종의 비공식 참고서였다. ‘반경’을 쓴 당나라 사람 조유에 대해 중국 역사는“병법에 박학하고 경세에 능했으며 은근히 지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의 저술은“장점과 단점을 요령 있게 서술했으며 실제적인 쓰임새를 아주 중시했다”고 호평을 받았다. 조유의‘반경’을 완역한 장순용씨는“책략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아 종횡무진으로 엮었다”고 말한다. 즉 요순시대로부터 당나라 역사까지 폭넓게 조감하며 권모술수가 얽히는 정치의 변화를 읽고, 인재를 식별해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두 가지 측면에 역점을 두고 쓴 책이다. 이 점에서 위나라 사람 유소가 쓴‘인물지’와 유사하나, 특정인에 대한 품평에 그치지 않고 인재 식별과 활용의 진수를 뽑아 정리했다는 점에서‘반경’이 한 수 위다. 그렇다면 왜 ‘반경’인가. 중국 역사를 정면에서 다룬‘자치통감’과 달리‘반경’은 중국의 정치·외교·군사 등의 책략을 반면(反麵)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반면의 교훈’은 이 책13장‘반경’ 편에 잘 나타나 있다. 조유는 역대 중국 황제들이 나라를 다스려온 기본개념인 인(仁), 의(義), 예(禮), 악(樂), 명(名), 법(法), 형(刑), 상(賞) 등8가지를 뒤집는다. 예를 들어 법령이 많고 명확할수록 범법자는 오히려 늘어나는 법. 가의라는 사람은“법령이 출범하기만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법률의 허점을 연구한다”며“도가1척(尺)이 높으면 마(魔)는1장(丈)이 높다”고 했다. 상도 남발하면 역효과가 난다. 강태공은“공로가 있을 때 상을 내려야지, 툭하면 상을 주는 것은 불평불만을 유발한다. 그 결과 만족하지 않으면 원한이 자라나게 되고 이것이 오래가면 도리어 원수가 된다”고 경고했다. ‘반면의 교훈’이란 이처럼 예상치 못한 역작용까지도 헤아리는 눈을 가르친다. 조유는‘반면의 교훈’을 정리하면서“어떤 법률이나 사상, 체제, 주의, 법규든 그 자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사람에 의해 운용되는데, 잘 운용되면 존재하고 잘 운용되지 못하면 없어진다”고 했다. 즉 같은 권모술수라도 군자가 정의로운 일에 쓰는 것과 소인이 나쁜 일에 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아는 것이 왕의 길이고, 일을 아는 것이 신하의 길이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반경’은 통치자가 어떻게 인재를 발탁하고 활용할 것인지를 강조한 책이다. 순자는“남을 다스리는 자는 사람들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삼으며,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재능만으로 능력을 삼는다”고 했다. 즉 세상을 다스릴 지도자란“자기가 갖추지 못한 것을 마치 갖춘 것인 양 사용하는 자”여야 한다. ‘반경’이 실제적인 쓰임새가 많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도덕적 원칙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옥으로 만든 배와 노는 강을 건너는 기능이 없는 것이요, 금과 옥으로 만든 활과 활줄은 화살을 쏠 기능이 없다”는 옛말을 예로 들며 고고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온건하고 고아하지만 다스리는 재능이 없는 사람은 인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위무지가 한나라 왕에게 진평을 추천하자 주위에서“그는 형수와 사통한 데다 뇌물을 받은 적이 있다”며 반대했다. 이를 들은 왕이 위무지를 책망하자 위무지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재능이고 폐하가 들으신 것은 품행입니다.” ‘반경’은 나아가 재능에 근거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직권을 수여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원칙임을 강조했다. 즉 사람을 쓸 때는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감출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순자는“말도 잘하고 일도 잘하면 나라의 보배, 말할 줄은 모르나 일할 줄 알면 국가의 인재, 말할 줄은 알지만 일할 줄 모르면 나라의 도구, 듣기 좋게 말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조악하다면 반역”이라고 했다. 각자 그릇의 크기를 헤아려 쓸모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역할이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을 한꺼번에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반경’은 베갯머리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는 책이다. 당장 한 조직을 이끌게 된 사람이라면5장‘지인(知人·사람을 아는 법)’을 펼쳐라. 사람을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기법들이 정리돼 있다. 나아가 최고의 자리를 꿈꾸는 야심가라면17장‘패도(覇圖)’를 놓칠 수 없다.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을 일으켜 천하를 얻는 지혜가 담겨 있다.  
12    코끼리와 중국 댓글:  조회:1558  추천:0  2011-08-16
 코끼리와 중국   얼마전 전문 한중경제문제를 연구하는 어느 지인의 부탁을 받고 중국의 화동리공대학 공상경제학원 석사연구생 채녕위와 길림대학 상학원 부원장 심송동이 함께 쓴 논문[중국경제발전전략에 대한 약간의 연구]을 간단하게 번역정리 하면서 나 절로도 재밋는 새로운것을 발견 하였다고 생각된다.   중국삼들이 노는 斗獸棋(짐승들의 싸움 게임)에서 큰 게발을 받고 그것으로부터 세계경제와 중국경제의 관계를 유발해낼수 있는 그들의 영감에 탄복한다.   두사람이서 노는 두수기 게임---함정 하류 동물구멍(굴) 평원 산지로 이루어진 기판우에서 고양이가 쥐를 잡고 개가 고양이를 물고 늑대가 개와 싸우고 표범이 늑대를 잡고 호랑이가 표범을 삼키고 사자가 호랑이를 쫓고 코끼리가 사자를 승복시키며 다시 쥐가 코끼리의 코구멍 혹은 귀구멍으로 들어가 코끼리를 죽인다(이것은 근근히 전설일 뿐이고 과학적이지 않다).각측은 모두 부동한 동물로 食物链를 이룬다.또 두사람만 참여하기에 한개의 산에 두마리 호랑이를 둘수 없다.때문에 서로서로가 상극이고 최종적으로 잔혹한 결투를 거쳐 한명의 승자를 내온다.   자연계도 그러하듯이 경제계도 그러하다.만약 우리가 세계각국을 하나하나 그것에 맞추어 본다면…작금의 최강국 미국은 의심할바 없는[백수지왕] 사자로서 세계경제의 영수로 혼자서 천하를 제패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태리는[산중지왕] 호랑이와 같이 지역경제의 한부분을 찾이해서 산중 호랑이로 군림하고 상대적으로[아세아 네마리 작은 룡]은 근근히 지구촌 중의 한무리의 늑대에 불과 하고 많은 제3세계 나라들은 고양이나 쥐로 될수밖에 없다.중국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아[중국특색]이라 일컬는데 문화가 유구하고 여러민족이 융합되여 다른 다나들이 없는 우세와 특색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맹목적으로 사자와 호랑이를 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늑대들과 어울릴수도 없으며 더우기 고양이나 쥐로는 될수도 없다.   나폴레옹은 중국을[한마리의 깊은잠에 빠진 동방의 사자]라고 비유했다.현재 그 사자는 이미 깨여났다.그러나 경제발전 전략으로 놓고 볼때 중국은 세계경제에서 반드시 한마리 코끼리의 역활을 해야하는 위치에 놓여야 한다.그것은 꼭 코끼리가 사자나 호랑이를 항복시킨대서만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는 이미 다른 나라들에서 그 위치를 찾이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으면 상술 두수기게임에서 나타나듯이 이 지구상에서 최종적으로 오직 한마리의 사자만 존재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수기는 일종 지혜를 키우는 게임이며 그 룰이 간다하고 재미있다.간단하고 재미중에는 심오한 생태학원리---적자생존의[생태위]현상이 내포되여 있다.   세상만물은 모두 그[통일성]이 있으며 일체 사물의 발전은 모두 그 필연적인 규률이 있다.생태학의 이론은 국가경제발전에도 적용할수 있는데 그것은 국가와 국가 국가와 사회 국가와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생태위의 핵심은 적자생존이다.   소위 적자생존은 주위환경에 적응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존발전공간을 보유할수 있는것을 가리킨다.예를 들면 아프리카 대초원의 초식동물중에서 기린은 목이 길기에 주로 높은 나무의 윗부분의 잎을 먹으며 줄무늬말은 상대적으로 키가 작기에 낮은 관목이 그들이 우선선선택하는 것이고 코끼리는 풀뿌리와 나무껍질 뿐만 아니라 어떨 때는 긴 코를 이용해서 나무 중간 부위의 새순을 따서 생활을 개선하기도 한다.바로 자신의 생존공간을 찾았고 또 그 공간에서 비교적 우세를 찾이하기에 코끼리는 부단히 번식해서 크게 발전 하였다.   현실 사회에서 국가경제의 핵심---기업도 이런 규률을 준수하여야 한다.미국 상업계에서 유행하는 한마디:[만약 당신이 적수를 이기지 못하면 그들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라].실천이 증명하듯이 현대경쟁은 더는[니가 죽고 내가 사는] 그런식이 아니고 더 높은 수준의 경쟁과 합작이다.현대기업이 추구하는 것은 근근한 단편적인 승리가 아니라 윈윈 혹은 공동의 승리이다.   우리는 다시 사자와 호랑이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이빨로 횡적비교를 해보자.중국은 농업대국이다 아직도 하늘에 의탁해서 밥을 먹는 피동국면을 타파하지 못했다.3분의2의 노동력이 평균1.5무 경작지에 묶여 있다.우리 나라의 공업의 총체적인 기술장비는 낙후하다.전국 공업 조사자료에 근거하면1180종 기업의 생산설비가 국제수준의26.1%밖에 찾이하지 못하며 기계제품중90년대 국제선진수준에 도달된것이5%도 안된다.반면 단위당 에네지 소모는 세계평균수평의3.8배에 달한다.중국제조의 다수산업과 기업은 아직도 비교우세에 의탁하고 경쟁우세가 박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는 경제건설은 비농업이 아닌 농업에서 먼저, 중공업이 아닌 경공업에서 먼저의[동아세아의 길]을 선택한것이다.중국경제가 코끼리모식을 선택한것은 명지한 선택이 아니라 할수 없다.   중국이 자신을 코끼리에 비유한다면 한국은 자신을 무엇에 비유할지 궁금하다.
11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1927-1949) 댓글:  조회:2008  추천:2  2011-08-16
중국공산당의조선족정책의기원에대하여(1927-1949) 이진영 (연세대사회과학연구소연구원) I. 들어가는글 중국에있는한국교포(이하, 통칭하여조선족이라칭함)에관한연구는1986년이후, 특히한중수교를전후하여폭발적으로증가하였다. 논의의많은부분이, 조선족의이주역사, 조선족에대한중국정부의정책에관한사적전개, 그리고현재조선족의상황에관한인구학적인글들이주류를이루어왔다. 조선족에대한중국정부의정책에서도중국정부의민족정책이라는테두리에서조선족문제를접근하였으나조선족정책의기원에관하여서는연구가많이이루어지지않은실정이다. 이러한연구부진의주요이유는자료접근의제약성, 조-중관계와의연결, 그리고조선족문제를보는시각차이에서기인한다고본다. 자료접근의제약성에관해서는우리가중언할필요가없을정도로공통적으로거론되는문제라고할수있다. 중국에서, 1949년이전의자료는역사자료로분리되어, 1949년이후의당대자료와구분되어취급되고있는데, 상대적으로습득이용이한역사자료도, 중국정부의당안관정책에의해제한을받고있는실정이다. 특히, '민감한사안'으로분류되는소수민족문제는관방자료의구득조차도힘든상황이라할수있다. 두번째로중요한제한은, 조선족정책의기원이가지는국제성에근거한다. 이제는익히알려진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북한으로통칭)의정권기원이중국의조선족내지만주조선인문제와연결되어있기때문이다. 북한정부의제한적자료공개와중국정부의북한에대한'배려'라는차원에서, 북한정권창건시기와조-중공산당의연합에관한문건공개가제한되었고, 후술할족속문제가가지는시민권등의문제가사안의복잡성을증대시켰기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족문제를보는시각의차이가존재한다는것이다. 중국정부의민족정책을공산주의에기초한중국의구역자치정책으로보는시각과, 중국정부의정책이가지는역사적연속성에초점을맞추는시각에  따라조선족정책의기원이달라진다하겠다. 전자의경우, 1949년중국정부의성립과동시에중화인민공화국의범위안에서민족정책의전개에초점을맞춘다고할수있고, 후자의경우는그기원을중국공산당정권성립이전의조선공산주의자와의관계까지올리기때문이다. 후자의경우는그국제적성격과함께, 조선인에대해해방전중국공산당이취했던입장이, 해방후연속적이었는가하는점에서기본적인논쟁이있을수있다하겠다. 이논문에서는후자의입장인역사적연속성에기초하여, 중국공산당의조선족정책에개한기원을살펴보는데목적이있다. 그이유는중국정부의소수민족에대한정책이공산주의이데올로기보다는중화민족주의에기초한국가민족주의에기반을두고있기때문이다. 국가민족주의및중국소수민족정책에관해서는, 이진영, 중국소수민족정책의이론적기초에관한연구(1999) 참조. 또한국가민족주의는영토적통일성과민족적통합성을그주요요소로하는데, 그것이조선족에대한정책에서도예외가아니기때문이다. 이러한역사적연속성에관한강조는중국공산당의조선족에대한정책이이미해방전시작되었으며, 해방전의중국공산당의조선족에관한입장이해방후에도국가민족주의의틀내에서크게벗어나지않고유지되었기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의초기조선족에관한정책은다음의네가지요소로부터살펴볼수있다. 첫째, 1931년만주사변이전의국민당및만주군벌의정책에대한반대로서의공산당의조선족에관한정책은선언적의미에서이루어졌는데, 주요쟁점은민족자결과토지소유권에관한문제라할수있다. 둘째, 만주조선인의족성(ethnicity)에관한문제인데, 공산당국제의결정에따른중국공산당가입과, 민생단사건, 그리고항일연군의결성에서나타나는민족문제라고할수있다. 셋째, 만주지역의해방에따른공산당중앙과만주공산당의권력배분에관계된조선족지역의중공중앙의권력접수와조선족정책의중앙차원에서의결정에관계된문제라할수있다. 마지막으로는, 중공의대륙승리에따른, 중화인민공화국의성립과조선족지역의민족지구설정과관계된정체논쟁과조국론의문제라고할수있다. II. 본론 1. 만주사변전중공의조선족정책 1) 당시조선족정책의특징 만주사변(1931) 전중공의조선족정책은몇가지특징을가지고있다. 지역적, 선언적, 공산주의이론에기초하고있다는것이다. 지역적성격이라는것은, 비록중국공산당이산해관이남의대륙에서는당중앙을기초로활동하고있었다할지라도, 만주지역에서는중앙당의영향이상대적으로미미했다는것이다. 중공의만주총국이세워진1927년은이미조선공산주의가만주에서활발히활동하고있을때였다(권립, 9). 또한, 성립한만주지위도주로요녕성에서활동하여, 조선족과의연계는활발하였다고볼수없다. 이런지역적성격은,  중국공산당중앙자체도초기의형성과정을거치고있었고, 만주의정치적인구조가대륙과다른점에서기인한다고하겠다.  특히, 만주사변으로일본이만주의치안을장악하고, 중공중앙은대장정과(1934) 그에따른연안시대의개막으로, 만주의공산주의자와의연계는상대적으로더욱미약하여졌고, 여기서중공중앙은상징적인권위만을지니고있었다고할수있는것이다. 이런상징성은중공의조선족에대한정책이선언적인차원에머물게하는결과를가져왔다고할수있다. 봉천군벌의만주장악과국민당의형식적권한, 그리고일본의만주진출에따라, 실제적정치장악력이부족한차원에서, 중공의상징적인선언은당연하다고할수있다. 상징적인선언이지만, 당시중공의조선족에대한입장은레닌의민족자결원칙에따른정책을표방하고, 그것을조선족지역에적용하려했다는것이다. 2) 만주총국의선언적정책 중공은만주에서의조선인문제의중요성을인식하고있었다.  제1차일본영사관회의(1923)의결정에따른일본의만주조선인처리방침이통제와이용으로정리되면서, 일본은만주에의진출을본격화하였고, 여기에만주조선인문제는뜨거운감자로봉천군벌과일본사이의외교적협상에서주요한위치를차지하고있었던것이다. 일본의만주진출에대항하여, 실제적권한을가진(de facto) 봉천정부와상징적권한을가진(de jure) 국민당정부는조선인에대한강제귀화정책을추진하고있었고, 이에대해생존에위협을느낀만주조선인들은여러경로로부당성을알리고있었기때문이다. 중요문제는조선인의만주거주권, 토지경작권, 토지및동산소유권, 국적취득에관한조항의완화, 민족문화의보존등이었다. 중공만주총국이1927년10월27일성립되었을때, 중공은만주에거주하는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러시아인에대한동등한대우를선언했으며, 1928년7월9일의선언에서는만주에거주하는조선인을포함한모든인민은중국혁명의중요한요소로규정하고, 민족자결의권리가있다고규정하였다. 이에기초하여, 조선인은산동, 하북, 하남성에서(만주로) 이주한중국인과마찬가지로, 토지소유권이있다고주장하였다(권립: 6) 중공은여기에서더나아가, 만주의조선인농부는중국농부와마찬가지로지주계급과외국침략자에게이중으로고통받는존재로, 그들은해방을위하여, 중국인민과마찬가지로공동의적과공동의투쟁목표를가지고있으며, 공동의행동을요구받고있다고하면서, 조선인농부는토지소유권이있고, 더불어, 만주에혁명정부를세울권리도있다고주장하였다. (김동화: 41). 비록, 중공이이러한선언을실행할실제적힘은없었지만, 이때의조선인문제가가지는폭발성때문에, 이선언은초기조선족에대한중공의입장을보는데중요하다하겠다. 또한, 중공은조선인문제가가지는만주에서의중요성과자신들의한계를자각하고, 관내의조선공산주의자들을연락관으로파견하여, 만주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연계를추진하려고하였다. 이것은, 독립적분산적으로이루어진조선공산주의자와중국공산주의자의만주에서의투쟁을중국공산당의관할아래에서통합하려는시도로, 민족정책에서의중요성이있다고할수있다. 한예로, 중공은1929년9월5일조선공산당만주총국에최명을보내, 양국공산주의자들의만남과분쟁조정에관한협의를제안하며, 추후연락관을더파견하는데협의를하였는데, 이런국제주의노력은조선공산주의자들사이에서논쟁과불만을야기하였다(봉화: 461-468) 그렇다면, 이런중공만주총국의조선족정책을중공중앙의정책과동일시하고, 또한이것이계속해방후에도연속되었다고볼수있는가? 그것은후술할중공에의조선공산주의자들의가입과민생단사건에나타난중국공산당의족성(ethnicity)에관한입장이사실상해방후에도계속되고있다는판단때문이다. 2. 중공의민족통합에관한입장과민생단사건(1929.11-1935.8) 중공의선언적인조선족에대한입장은, 공산주의국제의일국일당원칙의조선공산주의자에게적용하면서실제적성격을드러낸다고할수있는데, 이것은민생단사건이라는형태로표출된다. 여기에서중요한것은, 중국공산당이처음으로만주조선인을소수민족으로분류한것으로, 이것은중국민족정책에서중요한의의를지닌다하겠다. 1) 일국일당원칙과족성 1929년11월공산당국제는한빈(조선인)과리춘샨(한족)을보내일국일당원칙을중공만주총국에전달하게된다. 만주총국은1930년이를승인하면서, 조선인의민족혁명운동은중국혁명의일부분이며, 조선공산당원은중국공산당에(개인자격으로) 재가입하여야하고, 중공은(만주에서) 중공의단일한지도력내에서조선민족혁명운동을지원해야한다고선언을하였다(김동화: 122-123). 이에따라,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해체되게되었으며,  일본에대항한조선독립을목표로한조선공산주의자들은공산당국제의명령과민족의독립이라는문제에서고심하게된다. 사실상, 이는공산당의국제주의와민족주의의갈등이며, 충성의목표를설정하는데있어중요성이있다하겠다. 또한이는공산주의자개인의조국관과민족관에관계된일이기도하다. 당신은어느나라사람인가하는비꼬는질문에트로츠키는나는첫째, 사회주의자이며, 둘째, 러시아인이고, 셋째, 유태인이라고하였다. 이런족성에대한고심이조선공산주의자들을휩쓸고있을때, 중공만주총국은5월에두개의선언을하게된다. 여기에서, 중공은조선인은중국인과조선인을민족감정으로분열시키려는지배계급에대항하여, 중조인민의공동전선을구축하여, 국민당이나, 제국주의적세력을분쇄하고, 노농과병사의소비에트를건설하여야한다고역설하였다. (김승철: 18). 또한, 중공동만지위를조선족지역에새로건립하고, 5월투쟁이라는폭동을통해, 지도력을확립하려고시도를하게된다. 물론이폭동은민족적문제를사상시키고, 중공에의통합을촉진시키려는의도에서나온것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가입이저조하자, 중공은그들의노선을따르고중공에충성서약을한조선공산주의자에한해서중공가입을허락하고, 가입된공산주의자들을중심으로동만지위를운영하게된다. 그러므로, 사실상, 해묵은조선공산주의자들의분파투쟁과함께, 중공에의가입은조선공산주의자들사이에서노선갈등을초래하게하고이것이후에민생단사건의단초가된다고할수있다. 조직화사업을통한중공의지배력을확보하려는중공의노력은, 분열조장과통제를통해진전을이루었으며, 1930년11월중공은초보적수준에서조선공산주의자의중공당가입이완결되었고, 남은일은당내의분리주의적인잔여분자들을소탕하는것이며, 당내에있는민족적분열이라는선입관자체를불식시키는것이라고천명하게된다. 결국이것은, 가입한조선공산주의자에대해서도민족적특색을용납하지않겠다는뜻이며, 중공노선에복종하지않는자들은분열주의자로매도됨을의미한다. 즉, 민족성에대한논의는공산주의국제주의의이름하에봉쇄되며, 중국의민족성은문제가없는이중성을가지고있다할것이다. 이러한모순적이중성은, 중국의해방이후에도계속되는공산당의원칙이기도하다. 만주중국공산당은지도력확립후, 조직확대에착수하게되는데, 이는폭발적인당원증가로설명할수있다. 100명이던만주중공당은2000으로증가하게되고(김승철: 19), 공산당지부도12개에서85개로증가한다. 여기에85%의당원은조선족이었다.(권립: 126) 이시기에, 만주의조선인은중공에의해소수민족으로분류되기시작한다. 이것은중국인내부의조선족의개념이지만, 해방후에발달한이론에비하면아직기초적인단계에머물러있고, 명확하게정의된것은아니다. 하지만, 이에근거하여중공이선언을한다는의미는, 중국의만주에대한영토적통일성과함께조선족을포함한소수민족의족속을중국에귀속시키는사상적의미가있다고하겠다. 중공은이후조선족에게민족자결의권리를(소수민족의일원으로) 부여하며, 이권리는만주로부터분리하여한소수민족공화국을설립할수있는권리를포함한다고할수있다. 이선언은비록중국의소수민족이라고는하나, 소련처럼민족공화국을인정한다는조치로그중요성이있다고할수있다. 후에이선언은민족정책을둘러싸고, 조선족과중공과의대립의불씨로작용한다. 2) 민생단사건과족성 조직확대후중공당은조선족및공산주의자들에대한화해의조치를잠시보이게된다. 중공당은조선족의혁명활동을지원하고, 일본으로부터독립시키는것이중공당의기본적임무의하나라고선언한다. 그일환으로동만지구당은조선인혁명활동을지원하고후에그들이조선공산당을재조직화할수있도록공산당국제에건의를하겠다고발표한다. 이러한것은, 중공당의조직개편이있었으나, 여전히조선공산주의자들의행동이중공당에친밀하지못함을보여주는한예로보여진다. 조선공산주의자의일부는여전히조선의독립해방을최고의목표로삼고활동하고있었고, 이것은중공당의입장과는상치되는것이다. 이에중공당은대대적인숙청을하게되는데그것이1932년부터시작된민생단사건이다. 민생단사건의원인은아직도명확하지않다. 그러나, 그결과는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는심대한것이었다. 민생단으로낙인찍힌자는조사받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하고하였다. 매처음, 이사건은소문에불과했으나, 후에당내에친일민생단분자가있다는소문과함께회오리바람처럼조선공산주의자들을휩싸이게한다. 모든이들이의심을받았고, 상황은문화혁명과비슷하다고할수있다. 43명의간부를포함해431명의조선인공산주의자(약25%)가일본군이아닌중공당에의해죽임을당하였다. 50%에해당하는1000여명이조사를받았고, 그중561명이구금되거나당적을박탈당했다. 민생단사건의본질은당내조선인과중국인간의지도력을둘러싼투쟁이었지만, 민족문제를가지고중국공산당원들이이용하였다고볼수있다. 1931년만주사변후, 일본이빠르게중부만주를점령하자, 친일조선인단체들은조선인에게자치를확대한정책을일본이가지고있다고선전하였다. 물론, 이것은하나의선전에불과하였으나, 문제는일부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공당의선언대로, 조선소비에트창설, 조선인자치, 간도지역독립같은주제를동시에주장하고있었다는데있다. 중공당은이를친일적인것으로해석하고, 특히왕밍의노선이민족해방투쟁보다는계급투쟁을강조했기때문에, 이노선의영향을받은중공당은조선인들의주장을반당적이고당을분열시키는행동으로인식하였던것이다. 이결과, 중공당은조선족의민족자결권은만주에서일본의패퇴후에나가능하며, 조선족프롤레타리아의운명은만주의다른민족의운명과연결되어있고, 오직중국프롤레타리아가해방을성취한이후에야조선족도해방될수있고, 동만의조선인만해방된다는것은있을수없다고하였다이것은, 결국만주에서의중공당의족속적성격을명확히한것으로중국의영토적통일에관한불양보와함께, 중공당의지도적원칙을다시확립하였다고할수있다. 또한선언적의미에서도, 중국혁명우선론을갈파함으로서, 그리고, 민족자결권을유보함으로써, 후에민족구역자치라는중공당의입장의단초가보인다고하겠다. 최근, 중공당은민생단사건의재조사를결정하였는데, 아직까지도이에관한문건은공개가안된상태이다. 단지, 우리는다른한당사자인북한의김일성의회고록을통해문제의심각성을알수있을뿐이다. 김일성은그의회고록에서, 70여장에걸쳐이사건을언급하는데, 그의주장에의하면, 2000명이상의조선공산주의자가중공당에의해희생되었고이것은항일전쟁희생자보다많다고주장한다. 사실, 민생단사건은민족주의적인조선족간부나당원을숙청하고, 한족의우위를설정하려는것으로해방후반우파투쟁이나문혁에서동일하게나타나고있다. 이것은민족의식이강한조선족사이에서, 소수인한족의지도권을확립하고, 조선족의족성을약화시키려는일관된중공당의지향때문이기도하다. 민생단사건의결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은심대한타격을입고, 일본의소탕작전으로만주의공산주의운동역시타격을받아, 1940년대에들어서는사실상만주에서, 공산주의운동은종언을고했다고할수있다.   즉, 이두사건에서보듯이족성의문제는중국공산당의조직원리에서가장중요한논리이며, 지도력확립이라는목표를가지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계속적으로배제해오는과정이라고할수있다. 그러므로, 혼합적성격의당이라할지라도지도원칙은중국민족의요구에맞게확립되어있고, 다른민족은부수적역할을하는것으로설정되어있는것이며, 족성의원칙을가지고그들을중앙에서계속배제하는것이라고할수있다. 3. 중공중앙과만주공산당: 중앙의지방지배와지도력확립 족성과함께중요한요소는중공당의중앙과지방의지도력에관한부분이라할수있다. 이는, 1945년해방이후, 중공당중앙이만주의공산당을접수하는과정이며, 여기에서, 중공중앙파견자들이조선족문제를어떻게인식하였나하는것이다. 1) 항일연군결성과한족지도력 민생단사건의결과, 중공당은1935년8월1일서신을통해각족인민의대동단결과항일을호소하고있다. 이는공산당국제의반파쇼통일전선의일환이기도하였으나, 또한가중되는일본의중국본토침입과국공간의합작에따른, 조선족의지원이필요하였기때문이기도하다. 1935년11월중공당중앙은웨이쩡민을보내4개항의조선족에관한정책을전달하고이것은결국동북항일연군의형태로가시화하게된다. 중공당중앙은한족, 조선족, 만주족, 몽고족의연합을구성하여, 일본제국주의를물리치자는구호와함께조-중단결을강조하고, 중공당은간도에조선족민족자치지구를만주국멸망후에건립하는것을약속하며, 조-중연합군은한국의독립을위해서도싸워야하고, 만주공산당은민생단사건의과오를인정해야하며, 마지막으로당내에한분파조직을만들어, 후에조선민족혁명당을결성케한다는것이다. 물론이런중공중앙의방침은만주의주요역량인조선인의지지를얻고자하는것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중요한점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이항일연군내에서지도력을확보하고자도전하지않았다는것이다. 조중연합의항일연군의조직표및지도자명단은또한, 조선민족혁명당역시성립되지않았다. 2) 중공중앙의만주당장악: 새로운민족간부등장 또하나의중요한변화는, 1945년일본이패망하면서그전까지사실상독립적으로움직였던만주의공산당조직에중공중앙이직접개입하여지도권을확립한다는것이다. 이것은, 조선족정책에있어서도일체의주체의변화이며, 사실상의중국공산당의정책을고찰할수있는단초가된다. 또한이것은, 중국공산당의조직화의과정을통해, 중공당이얼마나중앙집권적인통일적원칙에서움직이는가하는것을알수있다. 소련군대가1945년8월10일만주에들어오면서, 동만지역에위치한조선인지구들은일찍해방이되는데, 일주일안에연길에소련군이입성한다. 중요한점은이때크게세부류의공산주의자들이존재하게되는데, 그것은지하에있던그지역공산주의자들, 소련군과함께온동북항일연군의88여단세력, 그리고, 후에중앙당에서파견한33인조가그것이다. 정치적장악을위해중공중앙은기술적으로조선족지역을통제하고결국중공중앙파견인들이중국공산당지위를만들게된다. 이것은일국일당원칙의적용을위한중국공산당의조선공산주의자들의흡수와마찬가지로, 중앙에서, 만주지역의공산주의자를(한족, 조선족에관계없이) 접수하여재조직화하는것을의미하고, 결국은중앙이상징성을가지고지방을통제한것이라고할수있다. 첫번째부류인지역공산주의자들은일본이항일연군을구축할때연계가끊긴자들로, 소군입성전에자위민병대를만들어치안확보에나섰었고, 곧소군과함께온88여단세력에흡수되게된다. 88여단세력은동북항일연군의쏘련경내로의이동에따라하바로프스크밀영에있었던동북항일연군의지도부로, 소군을도와일본군에대한정찰활동등을주로수행하고있었다. 이들이소군의만주입성전에이를통보받고, 만주의각지역으로소군과함께진주하여만주지역공산당을재건하고쏘련점령군의업무를돕게된다. 이때, 김일성을위시한조선인세력은기본적으로북한지역으로가게되고, 그중작은일부가연변과목단강지역, 즉동만지역의조선족거주지로향하게된다. 이들조선족지역으로파견된조선족공산주의자들의지휘계통은물론양면적으로김일성중심의조선공산주의자라인과주보중이라는중국공산주의자라인이명확하게구분되지않은채파견되게된다. 1945년9월5일강신태가연변에도착하여군사령부와경찰행정조직을만든다. 그는10월20일중공당연변위원회로확대개편하고위성조직으로대중조직들을결성한다. 이때, 이들이내세운강령은일반적선언으로조중양인민의단결이나민주적개혁, 이제잔재숙청등이었다. 전혀다른공산주의자들은중공당중앙을통해파견되었다. 중공의만주총국이재조직화되면서, 길림성위원회아래에연길연변지위가설치되게된다. (재조직화사업은중국의다른지역에서도발견된다. 복건성에서도토착복건인공산주의자에대해중공중앙은새로이복건성위원회를설치하여그들을흡수통합하려고했으며, 복건의토착공산주의자들은중앙의이조치에강력하게반발했고, 그갈등은지금도남아있다고한다. 복건에서현지조사를진행했던Feuchtwang 박사와의1999년3월8일대담에서. 하지만이곳은계통을밟아중공중앙이파견했다고한다.) 이를위해중공중앙은33인의중국인으로구성된소위33인연안간부를연변으로보내게되는데, 이들은만주총국과길림성위원회라는계통을밟아온것이아니라, 연안에서직접파견된사람들인것이다. 이것은, 중공중앙이조선족문제를보는태도를의미하는것으로, 중공중앙의조선족지역장악의지를나타낸것이라고할수있다. 이들33인조는중공중앙의합법적권위를배경으로, 강신태의연변위원회를해소하고, 연변지위를만들게된다.  또한그중13인이외곽대중기구를역시해소하고그장에앉게된다. 정부에해당하는연변전원공서도만들어지는데, 관수안팅(Guan Xuanting)이그장으로동쿤이(Dong Kunyi)가부책임자가된다. 중요한것은무장력인인민해방군연변사단이만들어지는데, 강신태를사령관으로임명하기는하나, 정치위원을용원타오(Yong Wentao)가담당함으로써사실상중국인이장악하게된다. 그러나, 가장중요한인물은베일에가려있던연변지위서기, 여우준시유(You Junxiu)의존재였다. 그는후술할조국론논쟁등에서, 연변및, 중국공산당의조선족정책에대한실질적책임자였다. 중공중앙의연변장악은먼저공작위원회를설치한후, 연변이나만주와전혀연고가없는인물들을연변에파견하게되는데, 공식적으로는용원타오가지도자로무장무력부분을장악하고, 여우준시유가보이지않는실세로당조직화를하게되는것이다. 이런과정을통해, 중공중앙은강신태를비롯한조선족의조직을붕괴시키고, 나아가서는조우바오쭝의88여단세력마저무력화시키게된다. 즉,  만주와는사실상상징적관계에있던중겅당중앙이해방전에이미동만지역에는근거지를설정하게되는것이다. 이런, 당재조직화는조선족정책에서도큰변화를보이게되는데, 그것은친연안성향의새로운조선족지도층의등장과조선족의참군운동과토지개혁을통한개조와동원이다. 4. 조국관과민족지구논쟁: 사실상의민족정책시원 1) 민족간부의등장 만주와연고가없는중공중앙에서파견한33인조가먼저착수한것은기존의조선공산주의자들을대체하는새로운공산주의자들을양성하여조선족대중과의연계를확보하는문제였다. 이것은치안안정뿐아니라, 중국공산당의정책의침투를위해서도꼭필요한일이라할수있다. 기존의만주에기반을두었던세력들을무력화시키고있었기때문에이것은무척시급한일이었다. 그들이택한것은관내의조선의용군이었다. 당시조선의용군은소련군이통제하고있던북한에들어가려고관내에서이동중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을지원하는소련은이들의입국을허락하지않고, 단지무장해제하고개인자격으로입국하는것만인정하였다. 이것은또한조선의용군이팔로군과신사군의일부로활동했기때문에일어난일이기도하다. 입국이저지된조선의용군은만주각지로분산하여활동하게되는데, 1지대는동변도로(남만주), 3지대는북만주로(하르빈, 목단강), 5지대는동만으로(연변), 7지대는연변을제외한길림성의조선지역으로가게된다. 하지만, 이들중상당수가만주에서태어났다고하나, 활동면에서는만주와연고가깊지를못하다고할수있다. 민족간부로중공당과조선족대중을연결한집단은이들조선의용군으로, 이후조선족사회의지도층을형성하게된다. 이때, 중공당의추천으로등장한인물이주덕해로후에초대연변조선족자치주주장을역임하였다. 2) 토지개혁과참군운동: 충성심과새조국 조선족민족간부를새롭게충원한중공당이한일은조선족지역에서의사회주의적개조와인민해방군에의참군독려였다. 사회주의적개조는토지개혁의형태로이루어지는데, 대다수가빈한한농민인조선족의지지를이끌어내는역할을하게된다. 당시, 만주의형세는도시와한족밀집지구인요녕성은국민당이, 농촌과변경소수민족지구는공산당과토비가장악하고있었다. 당시공산당은10만의병력과2000명의한족간부를만주에파견했는데(승리:1), 그들은요녕성의변방에주로머물고있는상태였다. 1946년6월국민당은만주에서공산당토벌을시작하게되는데, 이때공산군5만여명과주요당기구가조선족밀집지역인동만으로피신하게된다. 동만지역을장악한중공당은그들의조선족에대한통제를강화하게되는데, 그것은토지개혁과참군운동인것이다. 토지개혁이중공당의조선족농민에게준선물이자혜택이라면, 참군은새로운정권에대한의무이자충성의표시로인식되었다. 그러므로중공당은이두가지조치를통해, 효과적으로조선족을동원하고, 사회주의와민족통합이라는목표를향해조선족을이용할수있었던것이다. 토지개혁은군벌시대와만주국시대를거치는동안줄곧제기해왔던조선족의토지소유권에관한논란을잠재운것이라할수있다.1946년7월부터시작한토지개혁은48년4월에종결하게되는데, 소수민족지구로서는사실상처음으로, 이후조선족에대한중국정부의정책이다른소수민족과다르게되는한원인이되기도한다. 무상몰수무상분배형태로이루어진토지개혁을통해154,243가구의718,886명의연변거주자중(이중조선족은81.9%) 116,681가구가4.5에서7.05무의토지를분배받게된다. 소작인으로그리고토지소유가제한되고때로는금지되었던대다수가농민인조선족에게토지개혁은중공당에대한충성심을급속히확산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이에, 중공당은우리의새농토를보위하기위해인민해방군에자원하자는구호를내걸고조선족지역에서참군운동을벌이게된다. 65,000명의조선족이참군하게되는데(연변, 34,855, 요녕, 8,753, 흑룡강, 12,644등), 120,000명이민병대에지원한것까지합치면(승리: 4000) 당시백십만으로추산되는조선족인구중5%가전선에나가게된것이며, 10%가넘는인구가군관계일을했음을알수있다.  이는성인남자의비례로볼때, 동원된정도가심각한수준이라고할수있다. 참군은개인적차원뿐아니라집단으로도이루어졌는데(황용국: 586-590) 조선의용군의경우가이에해당한다(최해남: 21-23). 이들은, 만주지역뿐아니라해남도전역까지동원되면서, 1950년까지인민해방군내에서활동하게된다.(승리: 263-398) 토지개혁을통한중공당의행정제도에편입과, 참군을통한국방의무의완수는당연히국적및족성에관한문제를내포하고있다. 특히, 1948년남북양측에독립된정권이건설되면서, 조선족의국적문제는중공당에게도중요한문제였다. 전술한여우준시유는이시기조선족문제를총괄한위치에있었는데, 그는연변에오기전조선족문제에대해서는문외한이었음을고백하고있다. 1945년33인조와함께왔을때, 그는조선족은중국의한소수민족으로규정한다고선언하였고, 조선족의역사적특수성때문에이중국적허용을중공중앙에요청하였다. 이것은통과되어, 조선족은북한을방문하는데제한이없었다. 그러나, 북한정권의건설과중공의대륙승리가보이면서, 여우준시유는만주의조선인을두부분으로나누는데, 그것은조선족과조교의구별이었다. 연변에중국공민으로등록된자는조선족으로분류되며, 등록을하지않았거나, 1945년이후적절한중국공산당의허가를취득하지않고입국한사람은북한국적으로분류하여조교라고칭하게되었다. 이중, 호주가중국에살고, 가족이북한에있는자로서집이나토지를중국에서소유한자도중국공민권을취득할수있다고하였다. 이후, 북한방문을원하는조선족은중국정부의허가를취득해야했으며, 중국인과동일한권리의무를행사할수있다고하였다. 하지만이런조치는한국전쟁으로조선족이동원되면서실제적시행은광범위하게이루어지지않았다. 다른지역과는달리연변의사회주의적개조는일찍이루어졌고, 그러기에특수성이있다할지라도, 중국정부의조선족에대한정책은1949년이후가아니라그전으로소급해야한다고생각한다. 이런연변의특이성은족성과국적문제와더불어, 연변의지위와조선족의조국논쟁으로터져나왔다. 3) 1949년민족정책논쟁 사실상1948년12월부터열린연변의장래에대한토론회는조선족문제가가지는중요기본적주제를토론한자리라고할수있다. 또한, 이논쟁은중국공산당에의해조직화되었고, 1945년12월이후3년에걸친중공당의조선족에대한경험을정리하고, 미래의조선족문제를처리하는중국공산당의입장을표명한것이어서, 중요한의의가있는회의였다. 이논쟁이열리게된이유는중공이중국을석권하는것이확실해지고, 토지개혁시기조선족의지위에관한문제가항상제기되었으며, 조선족을참군을통한동원이어느정도는완전히이루어져서, 조선족에대한행정력을확보한상태고, 그래서신생북한과의외사문제에도확실한입장을정해야하는중국정부의입장이반영된것이라할수있다. 이논쟁에는세부류의공산주의자들이참가하게되는데, 소련에서교육받은부류, 항일연군계열, 그리고중공당의지원을받는공산주의자들이그들이다. 이미, 여우준시유가회의를위한기본적가이드라인을정해놓고한회의지만, 저우바오쭝의사회하에열린회의는무척열렬했다한다. 크게두주제가논의되었는데그것은조선족의조국관과연변의정치구조였다. 첫번째조국관은북한이성립하여독립국가의목표는이루었으나, 참군을통하여형성된충성심의방향성에관한것이었다. 중국인들을포함한몇몇은조선족을외국인으로분류하여중국거주권의박탈을주장하는상황이었으므로, 조선족의법적권리는중요문제였다. 회의석상에서다중조국관의개념이대두되기도했으나, 중공당의기본적가이드라인에따라중공당의제안이채택되게된다. 다중조국관이란, 공산주의는국제주의이므로소련도조국이고, 조선족은중국에거주하고참군하므로중국도조국이며, 원래조선반도(한반도)에서이주하였으므로북한도조국이라는것이다. 이에대해중공당의입장은조국관과공민권은밀접히연결되므로, 한인간은오직하나의조국과하나의공민권만이가능하며, 조선족은중국인과같은수준의권리의무를향유함으로, 비록그들이조선의(한국의) 사람들과같은민족일지라도그들은마땅히중국공민이고중국이조국이라는것이다(강창록: 210-211). 이러한중국정부의확고한방침은이후기본적원칙이자현재에도유지되고잇는것이며, 이런기준하에서조선족정책이집행된다하겠다. 연변의정치적구조에관한논의는더욱심각하게토론되었다. 중공당의지원을받는주덕해를위시한동북행정위원회의신민족간부들은중국정부의안인구역자치를주장하였고, 이것은중국간부들의전폭적지지를받았다. (강창록: 160-161). 쏘련의영향을받은임민호같은자들은민족자치공화국을주장했는데(한준광: 481-502), 별호응이없었다. 마지막으로중요한제안은항일연군계열에서나왔다. 그들은연변은중국으로부터독립할권리가있고, 그렇지않으면, 조선족이다수거주하는해림, 영안, 동녕등의지역과함께북한에귀속되어야한다고주장하였다. 당시연변전원공서채임자였던임춘추가이를주장했는데, 그는항일전쟁기간중중공당은계속민족자결권을조선족에게주고, 간도를할양할수있다고하였으므로이약속을지켜야한다고주장한것이다. 물론, 중공당이조직화하고, 형식상조선족의견해를청취한것이므로, 원안대로구역자치가채택되었다. 하지만  이논쟁의중요성은간과할수없는것이다. 첫째로, 중국정부의원칙이라할수있는영토적통일은여기에서도, 공산당이주장하는민족자결이나약속보다도앞서있다는것이다. 여러차례중공당은조선족의자결권을주장했지만이것은하나의선전에불과하고, 족성에기반을둔영토적통일성이강조되고있는것이다. 둘째로, 이논쟁의결과는조선족지역에서의지도계층변화를확실하게만들었다할수있다. 항일연군계열은제이선으로물러나게되는데지도자인조우바오쭝마저도운남성으로보내져서, 만주지역과의연계가끊어지게된다. 조선족의경우는김일성을위시한기본적인지도부가이미북한으로갔지만, 이논쟁후에임춘추를포함한많은사람들이북한으로가게된다. 남은사람들도상징적인자리에있게되는데, 여영준이그예이다. 이에대하여, 주덕해를위시한새로운중공배양의민족간부가등장하게되고이들이민족업무를담당하게된다. 마지막으로이논쟁은중공당의권력이연변에서완전히공고해졌음을나타낸다고할수있다. 친중공적인조선족으로조선족지역을장악한중공은민족간부를대량으로양성하기시작하면서연변을비롯한조선족지역에서지배력을공고히하는것이다. 이토론후에취해진중국정부의기술적인정책은분열정책인데, 좃 족이집단거주하고있는목단강지역을흑룡강성으로편입시키고, 중국인이집단거주하고있는돈화현을조선족자치구(후에주로격하)에포함시킨것이다. 이것은물론조선족의족성을둔화시키려는조치로, 특히목단강지역의조선족은형식적인구역자치마저도보장받지못했다할수있다. III. 결론 중국조선족에대한중국정부의민족정책의시원은중국공산당이성립하고, 만주지역으로활동범위를넓히면서조선인공산주의자들과접촉하고, 조선인문제에눈을뜨면서발생하였다고할수있다. 특히, 그당시조선인문제가가지는국제정치적인미묘성에서, 중국공산당은, 사실상중국민족주의의한형태인영토적통일성을추구하게되고, 그것이만주에서의중국공산당의지도력확립의형태로나타난다고할수있다. 이런중국공산당의기본정향은공산당국제의일국일당원칙을동만지구에적용하면서, 민족적성격을띠게되고, 조선인들에게도족성에대해선택하도록강요하게된다. 이런강요에의한분규가민생단사건으로나타나고, 조선족의민족주의는중국인의민족주의에패배하게된다. 특히이시기중국공산당의조선공산주의자및조선족에관한정책은선언적의미에서민족자결이나공산주의적인면을강조하지만, 실제적인면에서는민족주의적인성격을함유하고있는것이다. 이때주요주제인조선족의족성과조선인거주구역즉간도의처리문제는중국공산당의초기정책에서계속되는주제였다. 이에대해, 선언적의미에서때로는조선족의자결권을용인한다고하였지만실제적으로는점진적으로조선족지역에서지도권을확립해나가고, 결국은중국의목표라할수있는영토적통일성과민족적통합을향해나아가게된다. 이것은, 일본의패망후중공중앙이연변의항일연군계의당을장악해나가는과정과토지개혁, 참군운동이라는조선족동원을거쳐, 친중적조선족간부의양성등을통해, 조선족을장악하고, 결국은1949년논쟁에서보듯이, 그들의뜻을완전히관철하는데서도나타난다. 결국이논쟁을전후하여, 중국의조선인은중국인의일부인조선족으로족성을사실상변경하게되며, 이에기초하여중국정부의민족정책이이루어지게된다. 참고문헌 Primary Sources Chunggong Hangukkyomin yongu charyojib (Compilation of Studies for the Korean Overseas in China). Unesco in Korea (ed.) (1986)(Seoul: Unesco). Chunggong Yonbyondang chojik hwaldong yondaeki, 1928.2.-19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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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Yanji: Yanbian Chaoxianzu Zizhizhou Danganguan) Zhonggong Yanbiantiwei Yanbiazhuanshu zhongyao wenjian huibian(Collection of Important Documents of the Commission of Yanbian unde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Yanbian Branch), Volume 2, 1949.6 -1952.8,Yanbian Chaoxian Zizhizhou Danganguan (ed.) (1986)(Yanji: Yanbian Chaoxianzhou Danganguan,).  
10    한인공산주의자 댓글:  조회:1506  추천:0  2011-08-16
8.15를 기념하여 어느 한국교수의 논문 한단락을 옮겨 봅니다. 한인공산주의자---1920.30년대중심   1918년4월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과 1921년5월 고려공산당의 창립으로부터 시작한 식민지 조선전위당의 역사는 국내에서 1924년10월 고려공산동맹과 1925년4월 조선공산당의 창림을 열기에 이르렀다.일찍이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이 행동이어야 한다"는 견해와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요구를 들고 나왔던 국제노동자운동의 역사는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적 해방이 사회혁명의 전제요 이 역시 곧 세계혁명의 달성을 위한것으로 표독되었다.(역사연구소편 P69)   1926년 10월 북경촉성회가 결성된후 이의 영향을 받아 1927년 3월 이후에 상해 광동 무한 남경 등에 촉성회가 성립되였다.결합을 위한 움직임을 북경촉진회가 1927년 9월에 중국관내에서 성립된 각지 촉진회의 연합회결성을 상해로 교섭해 옴으로써 비롯되였다.그리고 각지에 교섭하여 1927년 11월 9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진연합회를 개최하였다.연합회의 성립에 중국본토지역의 독립운동계가 총괄하여 참가했다.거기에는 상해.북경.남경.광동.무한 등 각지역의 대표만이 아니라 홍진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계열과 박건명 배천택 등의 북경중심세력 그리고 사회주의세력 가운데 이토크추크파 화요회파 계열과 상해파 서울청년회파 등 각 계열의 독립운동자들이 통합하기에 이르렀다.(김희곤 P253-)   이처럼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운동계를 통일하여 결집된 힘으로 민족운동에 나서자는 목적을 갖었으나 좌파세력은 전민족인 정치투쟁으로서의 전환이라는데 목적이 있다.이 두가지의 상황이 서로 일치하는데서 민족협동전선조직의 원칙이 성립되고 이에 의해 "노동군상을 기반으로 혁명역량을 총집중하여 계급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당 결성운동은 벽에 부딕치게 되였다.그러한 전기는 1928년에 들면서 한국공산주의자들이 상해로 대거 집결하게 된것과 또는 {한위건}이 한국에서 상해로 망며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1927년12월 광주에서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봉기이래 한국인공산당원이 상해로 피해오게 됨에 따라 이들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였다.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결집된 공산주의청년들이 여기에 대거 가세하여 민족주의 세력에 압박을 가하면서 자구 공산계 청년회원을 가진 촉진회를 유인하여 임시정부 및 기타 여러 단체를 통일하여 공산제하의 대단체를 건설하려고 행동하게 되였다.(주,김희곤,253) 여기에 의렬단의 상해진출도 가해졌다.이에 따라 1928년 중반에는 촉진회와 이의 전위적 청년단체인 중국본부 한국청년동맹은 좌.주세력의 결합이란 외적상태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양분되는 형태를 띠게 되였다.   또한 광주사건에 따른 탄압과 북벌을 피해 한국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상해로 밀려들어 옴에따라 좌우의 연합전선은 그 균형이 무너졌다.이에 덧붙여 1928년12월에 ㅁㅁㅁ조직에서 12월 테레를 결정함으로서 붕괴되기 시작했다.(김희곤,263-) 만주에서의 독립당촉진회운동은 조직방법론의 불일치로 인하여 분열되었다.상해에서도 이와같은 조직방법론의 차이와 ㅁㅁㅁ조직의 12월 테레에 의해 1929년10월26에 상해촉진회를 해산시키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주)   중국공산당과 한인관계   유효동맹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지원아래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때문에 먼저 상해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언제부터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상해지역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시기는 물론 1920년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하지만 상해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한인지부가 조직된 시기에 대해서는 엇갈린 몇가지의 자료와 주장이 있다.(김희곤.287_)그 가운데 구연홍과 조봉암에 대한 일제경찰의 취조결과에 1927년9월에 한인지부가 결성되였다고 했으니(주) 이것이 옳을듯하다.1930년 무렵에 상해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공산주의자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도형화하면 다음과 같다.(주)   상해지역 한인공산주의자운동은 중국공산당에 그대로 직속된것과 중공당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공당 한인지부와 달리 다소의 독자성을 띠고 있을 두가지의 경우로 나누어진다.   중국공산당에 직접 소속된 전자의 경우는 또 다시 두가지로 구분된다.하나는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에 속한 한인지부였다.   중국측의 자료애는 당시 "상해에 있는 약 30명 내지 40명의 한인공산당원은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당연히 중국공산당 조직에 속해 있어야 하는것이나 한인과 중국인은 언어.풍속 등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한인지부를 설립하고 법남구위원회의 영도아래에 두기로 하였다고(김희곤,298)기록되여있다.   상해지역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속했던 또 하나의 계열은 중국공산당 민족워원회였다.(주,298) 이 위원회 아래에서 한인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부터 반제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는데 그 운동이 바로 민족위원회 산하에서 이루어졌다.   상해지역 한인공산주의자의 활동 유호동행의 활동은 상해지역에 집중되었는데(주) 그것은 동맹 및 전위조직 자체의 사업과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통한 반제운동으로 대별된다.유호동맹자체의 활동을 보면 우선 상해지역의 한인독립운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노력했던것을 들 수 있다.유호동맹은 결성된 직후인 1929년 11월3일에 한국내에서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12월말에 이에 대한 원조와 선정을 위해 상해지역 한인독립운동단체가 모두 참가하는 연합체를 결성하고자 주장하였다.   좌.우파세력이 1930년1월에 상해 프랑스조계 배근로에 있던 최창식집에서 모임을 가졌다.(주) 최는 좌.우파를 연결하여 고리역할을 해낼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그는 1920년대발까지 줄곧 임시정부나 민단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공산주의노선을 걷고 있었다.     1930년대초에 상해지역에서 한인공산주의자들이 가담한 조직에는 반제동맹 외에도 중국혁명호제난회한인분회와 소비에트 ㅁㅁ회가 잇었다.전자는 중국제난회의 후신인데 중국제난회는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자에 대해 정신적 물질적 정치적 및 법률적으로 원조하는 조직이였다.그런데 광동정부가 북벌을 단행할때 중국국민당과 제휴하여 공공연하게 북벌군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중국국민당에서 공산당원을 배척하자 유효동맹 성립직후인 1929년 12웡에 중국혁명호제회로 개칭하고 중국공산당의 지원아래 혁명동정자의 대동단결 혁명대중에 대한 직접행동 반혁명자제거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주)그리고 후자인 ㅁㅁ회는 1931년 6월에 러시아의 문화를 소개할 목적으로 창립된 좌파단체였다.(주)   (김희곤,P.303-) 유효동맹은 1920년대 후반에 중국본토지역에서 전개된 민족협동 전선운동을 결열시키고 이탈한 좌파세력의 결집체였다.   유효동맹이 가진 역사적인 의의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유효동맹이 1929년 10월부터 1931년 12월까지 비롯 2년 남짓한 짧은 기간동안 존립했지만 전위조직을 거느리고 상해지역 한인공산주의운동을 이끌어가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2] 유효동맹은 12월 __에 의한 한인의 독자적인 공산주의운동이 제한되여 잇는 상황아래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로선을 추구하려 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실제로는 그 뜻을 제대로 관철할수 없었다는 한계를 보이긴 했지만 한.중년대를 바탕으로 투쟁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위치를 가져보려 했던 노력자체는 긍적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3] 유효동맹은 1930년대초 상해지역에서 전개된 투쟁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유효동맹이 가지는 한계는 비교적 뚜렸하게 드러난다.왜냐하면 [1] 국제노선에 의해 민족협력전선을 파기하고 결성 [2] 비교적 독자적인 노선을 표방 그러나 실제행동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간섭의 테두리 속에 있었음 [3] 한인공산주의자들의 궁극적인 활동목표가 조선공산당의 재건이었을 것이지만 이마저도 중공당의 지도와 영향아래에서 추진됨으로써 독자적인 추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힘들다.   이것은 1930년대초의 좌파세력이 국제주의에 함몰되여 극히 좌편향했다는 평을 면하기 어렵게 해주고 있다.그러한 성향이 활동노선에서 비롯된 문제이도 하지만 아울러 다른 국가에서 전개된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비롯한 한계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9    【风雅钱塘系列】王旭烽:走读西湖——西湖是一座书院 댓글:  조회:1493  추천:0  2011-08-15
演讲嘉宾:王旭烽, 国家一级作家,浙江省作家协会专职副主席,第五届“茅盾文学奖”获得者。     “风雅钱塘”系列讲座首讲之所以选择我开场,我想理由大约有三:一是几年前浙江卫视启动此栏目时请了一批文史顾问,其中有我,此次系列讲座基本以这批文史顾问为主讲;二是栏目开播后第一个亮相的内容有关西湖初阳台,我作为栏目首请的嘉宾参与拍摄,也以同样的秩序做为首讲者似乎顺理成章;三是近期我的文化随笔《走读西湖》重版发行,正好与此系列讲座的开场内容契合。     西湖已经被诠释的太多了,她还有没有必要再讲,这或许可以成为一个问题。就我个人的观点而言,西湖还有重新阐述的必要。下面我想分三个层面来讲。     首先我想讲一讲西湖究竟是什么?     这个简单的问题仔细一想还并不好回答。所以《走读西湖》的序言第一句就说:西湖是这样的所在,你会因为找不到恰当的词语描述她而陷入幸福的彷徨。     当然,我们大约还是可以从几个不同的角度来描述她的。一个,我们可以说西湖应该是一个地貌、地理的概念,肯定是一个湖泊。她曾经是一个海湾,后来成为一个泻湖,以后慢慢成型。西湖面积唐时曾达10.8平方公里,宋代小了一点,为9.8平方公里,到了清代又小了一点,是7.5平方公里。西湖西进之前的西湖是5.6平方公里,现在大多了,又超过六平方公里了。这些基本概念中,我以为西湖称呼的来历是很重要的,我们一般说西湖因位于杭州城西,唐时开始被称为西湖。但在唐之前西湖其实是曾经有过许多名称的,最后,西湖这名字是白居易给一捶定了音,是他最早在《杭州回舫》和《西湖晚归回望孤山寺赠诸客》中记载了西湖这个以后天下传扬的美名。因此,我认为,有关西湖的一些最基本的常识之中,知道谁为西湖真正命名传扬,也是很重要的。     我想讲的有关西湖的第二个概念很重要:西湖是我们的家园。此时我们和西湖的关系就将超越一般意义上的美。记得有一年我曾经离开杭州一段时间,不知为何,我特别怀念北山街口断桥边转弯的地方,当年那里设有一个马赛克做的垃圾箱,形状好象是一只熊猫。我总是想到那垃圾箱上面覆盖着的深秋的梧桐树叶,以及铺满拐角的那一大片一大片的金黄,这个带有垃圾箱的街角,让我得了强烈的思乡病。友人问我想什么,我说:我想念西湖边的垃圾箱。其实那下面的还有深层的意思,因为西湖是我的家园。我们能够从空气中呼吸她,从皮肤中触及她,这不是一种文学语言。有时,在遥远的北方开会,你会发现你身体难受是因为皮肤在想念故乡,这个时候已经不是灵魂在想念故乡了。一到杭州从飞机场上一下来皮肤立刻就回到故乡了,立刻就湿润了,眼睛、视觉、嗅觉沉静在家园当中。     这里已经说到了杭州与西湖的关系,很简单,没有西湖就没有杭州。举个例子,唐时李泌到杭州来当刺史,发现杭州城因为地貌原因,地下水还是有咸的,杭人因为喝不到纯净水只好住到附近山上,因此李泌开六井,就是在城里适当的地方开了六口大塘,又把西湖水分成六个渠道引进其中,住在山上的百姓们这才下山住到井边。今天解放街与浣沙路拐弯处还有一口象征性的井——相国井。后人感谢李泌,真是个好父母官,就在那井上架亭,唤作井亭。那旁边有一座桥,便因为了那亭称为井亭桥。如今,那井亭是没有了,但井还在,便成了文物;那井亭桥也没有了,地名却留了下来,成为家园的永恒的记忆。     说到家园,想到最近国外某机构给中国城市做的一个调查,结果杭州被命名为中国城市中幸福指数最高的城市。我不知道这个评价的真实性和科学性究竟如何,但我相信一个关于幸福的四要素原理:一是你生活在什么样的地方;二是你居住在什么的居所;三是你从事什么样的工作;四是你和什么样的亲人和朋友度过平凡的日子和节假日。从这个原理出发讲,至少杭州人的一个幸福指数是肯定得到了——我们生活在西湖边。想到西湖,心头一热,块垒渐消,我们可以这样想:无论如何,我们已经有西湖了。     第三个概念,西湖是一个审美的对象,上有天堂、下有苏杭这个说法很早就有了,从南宋开始就有今天人们所知的西湖十景,这个不需要再论证了。     第四个概念:西湖是一派生命的境界。我记得“风雅钱塘”还做过一期“湖上三岛”,我也在其中表达了一个观点:湖上三岛在西湖形成一个“品”字型,构成中国人自古以来想象的理想世界的摹本:蓬莱、方丈、瀛州。这正是李白诗中强烈怀想的世界,他曾经因为理想世界在人间的不可寻觅而高唱过“明朝披发弄扁舟”,他要乘筏去寻找理想的世界,而我们的西湖,就是把诗仙梦想的境界现实化了。“杭”字通航——谁谓河广,一苇杭之。杭这个字也可以解释成方舟。杭州是人性的方舟、西湖是众生的家园,与其说是我对家园的顶礼膜拜式的歌唱,不如说是对她境界的主观的定位。所谓人间天堂,难道不正是这个意思。        正因为西湖有如此境界,方才使古往今来多少英雄对此心向往之。因此张苍水才会在就义前面向西湖一声喝采:好山色。也因此他才会写下“惭将赤手分三席,敢向丹心借一枝”的诗句,希望自己就义后能够和岳飞于谦一样,在西湖分得一席光荣之地。再比如秋瑾,1907年4月份她曾经到杭州进行起义准备,泛舟湖上时就对友人留下遗言,说如果我死了,你就把我葬到西湖边来。数月之后她果然就义,果然后人也就把她葬到了西湖边。我重点讲了,是想说,不要简单地只把西湖理解为一个风花雪月之地。西湖其实是怀有大境界大格局的。     综上所述,我来回答我心目中的西湖是什么:对我而言,西湖就是一座书院,是一个可以让我们终生在此学习,思考,感受,欣赏,赞叹,磨砺,经历的地方,一个在此度过终生而无所憾的地方。     我要讲的第二个大层面其实很简单,对于西湖,我们是什么?我想这也是可以因人而异的。如果你把西湖看成一个审美对象,一个旅游观光之地,那么你自然就是一个游人;如果你是一个杭州人,你把西湖看成你的家园,那么你完全可以骄傲地说你是西湖的子民;如果你与我一样把西湖理解为一座书院,那么,我们便自然是西湖的学子。     第三个层面,如果我们是西湖的学子,我们将如何在这座书院中学习。这便回到我对西湖的一个基本方式——我们在湖上走读。     我在杭州大学历史系就读时,每年暑假夹一本古文,就是这样在白堤上来回走,一边走一边背,对于我而言,走读西湖不是一本书的题目,而是一段青春年华的生命形态。     在湖上走读要有一个态度,一个学习的态度、敬爱的态度、甚至不妨也有点敬畏的态度,不要因为西湖作为一个美人满足了我们的审美需求而不再去探求她的心灵,须知她内在品质的美好会使你取之不尽用之不竭,更会使你叹为观止。我觉得像西湖这么美,同时她的灵魂是那么的丰富,她的内心世界是那么的博大精深,她的内在和外在是如此的和谐,她的心路历程是这么的悠久,外延是这么广大,这样的地方不是很多的。     第二点,我们在湖上走读的时候,我们不仅仅要有情感,还要有理性和感觉。一个是我们要重新积累对西湖的认识,在这方面我们未必就真的做到基本把握。另外一个我特别想说的是我们在审美的时候要开发我们的感官,比如宋嫂鱼羹,在我尝来,就是一道浓郁的乡愁之汤,你品尝它的时候,你就是在品尝西湖,那是需要味觉的。比如深秋的夜晚你到植物园赏桂,你可以不用你的眼睛,你只需听你身后桂花落地的声音,心中默念白居易的诗:桂子月中落,天香云外飘……那时,桂花不是用你的视觉而是用你的听觉来感知的;比如你在傍晚时分到灵隐会晤那飞来峰满山的石头,你呼的吹出一口气去,恍惚间你看到满山的石像衣袂飘飘,呼之欲出,这时,你是用你的感觉在面对的……    下面我们来交流一个技术性的问题,走读西湖的路线图应该如何设计呢?我根据我自己近年来的心得提供一张。不过这还是一张可以交岔的线路图,仅供参考。     一是新西湖路线——就是西湖整修到哪里,我们就走读到哪里。先是南山路,后是杨公堤,再是北山街……这里我们求一个“新”字,所谓新,其实包含着把埋没掉的旧重新挖掘出来,比如杨公堤。我觉得明朝杨孟瑛这个杭州的父母官真是一个挺伟大的人,是需要我们去更多的了解他的。     我们提到杨公堤的时候可把它与白堤、苏堤做一个比较。唐朝白居易来修西湖建白堤的时候,我们今天的白堤其实已经在了,叫白沙堤,就是白居易写诗说的“绿杨阴里白沙堤”的那个堤。那么白居易修的堤在哪里呢,我曾经走访过西湖专家陆鉴三先生,他说据他考证,白堤就是今天断桥下来到六公园的口子上那段沿湖的路。陆先生已经驾鹤仙逝,我在这里特意要提一下,也是对这个曾经居住在西湖边的老人的怀念。 白居易修白堤的时候不需要给皇帝打报告就修了,他修白堤的时候也是为了老百姓的生活,他是作为一个水利工程来修堤的,所以还写了《钱塘湖石记》,如今圣塘路口亭子上,就镌着此文,我路过时,常常望着白居易的名字想:什么是千古文章,这才是千古文章呢。白居易离开杭州时留下过两句诗:“唯留一湖水,救汝度荒年……”,那意思是说,我白居易真的是没有什么东西留给你们了,我只能留下一湖西湖的水,荒年来临的时候西湖会救你们度过的。     到苏东坡的时候,他要修一个堤就不那么容易了,他要给皇帝打报告了,他写了几条理由,其中有一条就是西湖是一个最大的放生池,这样可以保佑皇帝万寿无疆。还有一条是西湖水可以酿酒,没有西湖就不能酿酒了。所以我们知道有一个“曲院风荷”,是一个国家的国营酿酒厂。但是苏东坡修西湖的时候已经没有钱,皇帝也不给他钱,就让他到民间集资,给了他一百个和尚尼姑的“度牒”,就是通行证,宋代的时候,赋税很重,很多人不想当市民了,当时和尚、尼姑可以免税,很多人想通过出家解决交税问题,就愿意出钱买那个度牒。苏东坡把一百个“度牒”卖了,这才集资修了苏堤。     到了明代的时候西湖已经是水流如注,西湖已经十有八九被占有。沿湖边住满了豪富,他们在西湖边种田养菱,杨孟瑛就写了通告,他要治理西湖,并公开说,我知道这样做就得罪了即得利益者,但是如果我不这样做的话,我就对不起杭州的老百姓。当时他是杭州的太守,一定要这样做,结果整整打了五年报告,才被批准,让他修堤,修的过程当中不断有人打小报告,不断告他黑状,最后堤还没有修好他已经被撤职了。但是想想又不行,这个堤还是要他修的,最后让他戴罪立功,让他当杭州的知府,堤修完一个月之后就撤职了。我一直想找有关杨孟瑛修堤以后的下落,却没有找到。杨孟瑛是四川丰都人,我觉得像他这样一个人,后人应该记住他。     新西湖之后,我想我们还是走读孤山。我个人以为,初到杭州者,把孤山初品之后,再散向湖上各处是比较合适的。都说纲举目张,孤山就是西湖的纲。因为在这里我们可以领略到西湖的深度,也可以见识西湖的高度,文澜阁和西泠印社是中国文化的两个重要标志。     西湖毕竟是以水构成本体的,所以湖上的游历也是极为重要的。湖上包括三岛三堤等诸多景致,讲到此我突然想起一个真实的故事,发生在抗日战争时期。当时的日本人打进杭州城后做了一件事情,就是把苏堤和白堤的桃花全部砍掉了,然后全部种上樱花,樱花是日本的国花。抗战胜利之后,杭州市民们又冲到苏堤白堤上砍倒樱花,再全部种上桃花。我觉得这些充满人文色彩的故事正是这样镶嵌在湖光山色之中,构成西湖之美的。     说到山色,杭州的山是一定要去走一走的。不过杭州的山并不高,在进入之前最好有一点儿准备,了解一点往事,知道一些掌故,这样,杭州的山虽不高,你也会越走越深。     关于杭州的山,我想讲一件近年发生的事情。我去年发表过一文,名叫《翩翩蝴蝶梦》,说的是一个名叫陈蝶仙的人。这就要说到1929年的西博会,期间发生一件非常有趣的事情,西湖边出现了一个很大的喷泉,喷的全是香水,原来这就是一个香水广告。那个实业家名叫陈蝶仙,笔名是天虚我生,曾经是上海申报的主笔,是当时的文学流派鸳鸯蝴蝶派的重要人物。但是他还是文人下海一个典型,他做无敌牌牙粉,面霜,香水等,国货打败了日本东洋货。他是一个很爱国的人,抗战的时候死在异乡了,我一直想找他葬在哪里就是找不到。有一年一位老人告诉我,陈蝶仙的墓就在玉泉一带,叫“蝶巢”,我一直想找,就是找不到。去年终于由我这篇文章的责任编辑找到了,就在玉泉附近的“桃源岭”上。     杭州人对杭州的山并不陌生,但也未必什么故事都知道。比如葛岭,大家都知道葛洪在那里炼丹,未必有多少人知道李慧娘在那里闹鬼,这就要说到抱朴道院旁的红梅阁。贾似道的妾在红梅阁眺望湖面,看到两个美少年,赞叹了一声:美哉少年,就被贾似道砍了头。冤魂不散化为厉鬼,来找贾似道复仇。我小时候看过戏,那正是发生在西湖山中的故事啊。     其实还有很多文人韵事与杭州的山有关,陈独秀和他以后结婚的新婚妻子曾在杭州居住,胡适与情人干脆在烟霞洞小住数月,卢隐的蜜月也是在西湖度过的。我曾看过一个资料,说丁玲和胡也频住在葛岭山上,冯雪峰就住在山下。至于湖畔诗社的骨干汪静之先生就不用说了,他几乎一辈子就住在西湖的湖畔山间。     我们到了西湖,还一定要去那些英魂栖息之地。西湖是没有人敢轻薄的地方,因为西湖已经光荣地被英灵们选中,西湖是伟大心灵的最好的栖息地。由此我想到瓦雷里的诗句:多好的酬劳啊,经过了一番沉思,你终得放眼远眺于神明的宁静……     最后,如果还有时间,我们还可以去一些宗教胜地,那里是显示我们西湖智慧的地方,比如说道教的黄龙洞,佛教的净寺,灵隐寺。杭州的基督教也很有意思,毛泽东当年一篇文章题目就叫《别了,司徒雷登》,他就是杭州生人,就住在今天的银泰旁边耶稣堂巷,他后来他当了美国驻中国大使。     千万别忘了,还有孔庙,就是现在的杭州碑林,听说正在修。抗日战争时期一个汉奸把孔庙拆了以后把木头全部做成棺材,我把他写到小说里去了。抗战胜利后把这个人抓起来枪毙了。孔庙在劳动路,离西湖不远,它的故事也很多。     总而言之,我觉得西湖就是这样一个地方,是一部阅读不尽、翻之不尽的书,我们有幸成为这座书院永恒的学子,我们是幸运的。     
8    氣.勢에 대해 횡설수설 댓글:  조회:1832  추천:0  2011-07-25
어제 저녁 한동안 사납게 우뢰울고 번개치고 하던 하늘이 오늘 아침엔 구름한점없이 화창하게 개이며 한여름의 무더위를 확확 뿜어대고 있다. 울창한 수림속에 뭍혀 사는 동네다 보니 어제 동네 한가운데로 면바로 내리친 번개로 동네 수많은 가전제품이 날려가버리고 TV인테넷 케블선 등도 완전 먹통이 되여 버렸다. 저번에 온주에서 발생한 특대사고도 우뢰번개 때문이라고는 하는데… 요근래는 해가 난다 하면 가뭄이요 비가 내린다 하면 폭우에 물피해이고 바람이 인다하면 강풍인데…그 옜날의 風調雨順의 天氣를 근본 찾아 보기가 힘들어 졌다. 매일같이 TV화면 일기예보에 생동하게 보여주듯이 구름이 끼고 눈비가 내리는것이 모두가 북방의 찬 氣운과 남방의 더운 氣운이 힘겨루기 즉 勢력다툼을 하면서 밀치닥닥치닥 거리며 여거저기에 바람도 일구고 눈비도 내리게 한다는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결국 그런 氣싸움이 옜날에는 그나마 유順했는데 요근래에 점점 험惡해 졌다는 뜻으로 해석되겠다. 바둑을 좀 둘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둑판의 氣 와 勢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것이다. 바둑을 둠에 있어서 바둑알 한두개를 먹고 따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氣와 勢의 흐름을 장악하고 命脈을 先手로 잡는것이 승부를 두는 관건이니…. 그리하여 바둑을 둠에도 처음부터 딱 몸을 맞부치고 두눈을 부릅뜨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밀치닥 거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슬슬 차나 한잔 마시며 부채질 건들건들 해가면서 서로간에 안전거리를 두고 슬슬 기와 세를 장악하다가 명맥을 바로 잡아 치면 허허 호탕하게 웃고 판을 접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기와 세를 장악하기 위한 기초로 바둑알로 어떻게 陣을 치는가의 요령을 장악하는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낫 陣을 치고 부수고 하는것에만 재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기도 하다. 내가 언제부터 자장가를 부르듯이 귀곡자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귀곡자도 앞부분에서 실컷 자연의 흐름과 인간세태의 흐름를 어찌 장악하는가를 말하다가 결국 마지막 부분의 本經陰部에서 최종적으로 “盛神 養志 實意 分威 散勢 轉圓 損奐”로 어찌 하면 자신의 氣와 勢를 조절할것인가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요즘 인간들이 자신들의 氣와 勢의 조절을 홀시하고 눈앞의 사리사욕에 물들고 욕심이 하늘을 치솟아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연이 조용하게 养精蓄锐 즉 기를 숨쉬게 할수 있는 기회를 안 만들어 주니, 자연도 겻달아 虛氣만 가득 차서 음양이 맞 붙었다하면 너무나 격렬하게 세력 다툼을 치를수밖에 없고 결국 그 재앙을 인간들이 그대로 다 돌려 받는것이다. 
7    항주 룡정촌에서... 댓글:  조회:2320  추천:0  2007-08-16
건륭황제가 직접 선정 했다는 18그루 차나무밭   어차 돌비석     老龍井 입구   차나무밭       동해용왕의 수염을 볼수 있다며 龍井이라 이름 진 우물
6    석양속의 매가오 룡정차농장 댓글:  조회:2344  추천:0  2007-07-30
중국 녹차의 왕후로 불리는 서호룡정차... 그중에서 매가오룡정차농장은 자체의 독특한 자연지리환경으로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당기고 있다.
5    살며 생각하며... 댓글:  조회:2765  추천:0  2007-07-30
심심할때면 자주 가는 사찰이 하나 있습니다. 공짜로 책자들도 많이 주고 밥 한끼에 1원50전이면 만두 죽 콩물 짠지 맘대루 먹을수 있습니다.몇일전에 또 갔더니 작으마한 책자들을 듬뿍 쌓아 놓구 있던데... 그책자중 재밋는 구절 몇개 번역해봅니다.[1]급한 일은 천천히 말하고큰 일은 잘 생각한 다음 말하며작은 일은 재밋게 말하라별로 확신 없는 일은 조용하게 말하고할수 없는 일은 마음대로 말하지 말며남을 해하는 일은 절대 말하지 말라발생 하지 않은 일은 함부로 말하지 말고다른 사람의 일은 조심해서 말하며자신의 일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지금의 일은 끝낸 다음 다시 말하고앞으로의 일은 그때가서 다시 말하자.[2]도량은 좀 크게성깔은 좀 작게이유는 좀 적게효율은 좀 높게입술은 좀 달게말소리는 좀 낮게......[3]다른 사람이 나를 성나게 해도 나는 성내지 않으니내 마음속엔 이미 생각이 있는걸군자의 그릇은 하늘 땅과 같으니좋은 일 나쁜 일 다 그속에 담그노라소인의 그릇은 작아서 사람을 담그지 못하니언제나 남도 성나게 하고 자신도 성내네세상만물이 다 나름대로이니어찌 모든것이 다 내 마음에 들소냐?미륵보살의 하하 웃음은큰 배속에 하늘 땅을 담았기 때문이라   [4] 太陽光大  태양은 광망이 크고父母恩大  부모는 은덕이 크고君子量大  군자는 도량이 크고小人氣大  소인은 성질이 크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4    도적 이야기 댓글:  조회:2898  추천:2  2007-06-18
  요즘 여러가지로 생각되는것이 많아 [反經]을 뒤적거리며 아래와 같은 구절이 인상적이기에 이곳에 올려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小智栽樹,大盜乘凉작은 지혜는 나무를 심고 큰 도적은 그늘밑에서 서늘함을 즐긴다.庄子가 이르기를---작은 도적이 문을 뜯고 열쇄를 부쉬고 농을 들추고 주머니를 털고 궤를 여는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궤 농 등을 단단히 잠그고 든든하게 묶는다.이런것은 세속적인 소위 총명하고 지혜로운 표현이다.그러나 일단 큰 도적이 오면 농 보험궤등을 전부 들어가는데 이때 큰 도적은 그 농 궤들이 든든히 묶이지 않고 단단히 잠궈지지 않을가 걱정한다.그전에 단단히 잠그고 든든하게 묶은것이 오히려 큰 도적을 위하여 준비한 꼴이 된것이 아닌가?옜날 齊나라는 도시와 마을이 늘어섰고 인구가 많아서 번영성세를 이루었다.시장에는 각종 물산들이 즐비하게 진렬됬고 들에서는 사람과 말들이 즐겁게 뛰놀며 도처에 종묘 성곽 루각들이 세워지고 법규가 잘 지켜져 어느 하나가 성인의 법을 따르지 아니한것이 없었다.어느날 田成子라는 큰 도적이 나타나 齊簡公을 죽이고 제나라를 훔치니 전성자손에 들어 온것은 또 하나 제나라 그 자체가 아니더냐? 뿐만아니라 제나라 몇백년을 거쳐 이룬 정치제도마저 모두 훔쳐 왔노라.때문에 田成子는 비록 도적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지만 그의 보좌는 요 순의 帝座와 같이 든든하고 소국들은 감히 그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하고 대국들도 감히 정벌하지 못하였다.田氏는 齊나라에서 12대를 이어 國君을 전했노라.이로부터 볼 때 전성자는 제나라만 훔친것이 아니라 강태공이 창시한 성명한 정치제도까지 훔쳤으며 이런 권세 법규는 도리여 이 강도를 보호하였노라.聖有聖道, 盜有盜規성인은 성인의 道가 있고 도적은 도적의 規가 있다.강도가 그의 두목한테 “강도질 하는것도 도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두목이 대답하기를 “당연히 있지,천하에서 무슨 일이고 도를 떠날수 있겠느냐? 도적이 되는것도 큰 학문이니라!방안에 무슨 물건이 숨겨져 있는가를 알아맞추는 것을 [聖]이라 하고;훔칠때 맨앞에서 들어가는 것을 [勇]이라 하며;철수할때 뒤를 지키는것을 [義]라 하며;어떤 곳에 가야할지 여부와 어느 때에 가야만 성공할수 있다는것을 판단하는 것을 [智]라고 하며 훔쳐 온 물건을 고르게 분배하는것을 [仁]이라고 한다.仁義智勇聖 이 다섯가지 표준을 갖추지 못하고 큰 도적이 된다는것은 세상에 없는 일이네라.”이로부터 볼때 仁義智勇聖 이런 원칙은 좋은 사람이 성공 할려해도 근거로 삼아야 하고 즉 善人不得聖人之道不立;나쁜 사람이 성공 할려해도 이 원칙을 위반하지 못한다 즉 大盜不得聖人之道不行. 그러나 유감스러운것은 천하에 선한 사람은 적고 선하지 아니한 사람은 많은데… 따라서 성인이 천하에 이익이 되는것은 적고 천하 사람들을 해하는것이 많도라.인간천당에서
3    아름답게 활짝 핀 연꽃들... 댓글:  조회:2279  추천:0  2007-06-18
집앞 가까이에 있는 연꽃늪에 가지각색의 연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2    아침안개속의 서호 댓글:  조회:2236  추천:0  2007-06-13
아침산책 여유시간을 타서...아름다운 천당의 모습들을 눈에...
1    하늘 구중천에서의 명상 댓글:  조회:2443  추천:0  2007-06-13
  연통에서 어느 논객과 인간들의 사유의 장벽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비행기를 타면서 창밖의 구름바다를 흔상하는 재미를 잠간 말하였다.   나이는 한해한해 먹어 가건만 마음은 언제나 童心인걸…   내가 세상을 알기시작하기는 연길시 의란진에서였다.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있는 골짜기속에서 산너머의 세상으로 향한 동경은 그렇게 강렬할수가 없었다.   하여 방학만 되면 뻐스타고 기차타고 외가집으로 가는 여정은 언제나 즐겁고 즐겁기만 하였다.차창으로 언뜻언뜻 뒤로 밀려가는 풍경은 언제봐도 신기하기만 하였고 사이사이 마을들을 지나칠때면 그곳 사람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살아갈건가 무척 의문스러웠다.   그것이 습관으로 되여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꼭 창문옆의 자리를 찾이하고 하염없이 창밖의 구름바다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것을 즐기고 있다.   비행기가 대가리를 건뜻 쳐들고 공중에 오르면서 도시와 산천을 발아래로 아득하게 밀어버리고 파란 하늘아래의 천태만상의 구름층을 밟고 유유히 날아갈때는 진짜 신선이 따로 없다는 기분이다.그러면서 저 여러층의 구름아래 콩알만한 마을마을속에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다.마치 석가모니나 여호와 옥황상제가 된것같은…    이우에 있을적에 즐겨찾았던 사찰들 중 산정에 자리잡은 瑞峰寺란 작으마한 사찰이 있었다.   시내에서 교외뻐스를 타고 시골길을 한창달려 산기슭의 마을까지 도착해서 다시 가파로운 돌계단을 따라 힘겹게 사찰에 이르러 시원한 약수 한모금 꿀꺽 마이고 고개를 돌려 산아래 동네와 올라온 길을 바라보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음미하는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그러나 누구나 손오공처럼 근두운을 타고다니는 재간이 없듯이 언젠가는 다시 땅에 내려가서 좋거나굿거나 생계를 위해 솰라솰라 인해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것이다.   산속의 조용한 암자도 좋건만 인간생활의 고달픔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또 암자의 조용함도 즐길수가 없듯이.. 내내 하늘 구중천에서 허무한 구름바다만 바라보는것도 결코 즐거운 일만이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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