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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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댓글:  조회:4412  추천:83  2008-03-25
  헌신정신이 낳은 빛나는 업적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 의무일군들에 대한 이야기   박문희   동무들이 노력에 박차를 가하면서 본세기말까지 우리 나라 에서의 문둥병의 기본적소멸을 위해 힘쓰기를 바랍니다.                                                                                    -----조자양       문둥병!   지지리 2,500여년이란 긴긴 세월 자자히 악명을 남겼던 문둥병은 인젠 그 위풍을 아주 꺾고 각일각 최후소멸기에 들어서고있다.   우리 성을 보면 1952년부터 환자 도합 1,071명을 발견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그 대부분이 완치되고 지금 남아 치료받고있는 환자가 근근 28명뿐이다.   지난 1월 31일,중국의 첫 문둥절에 즈음하여 룡정현 투도구진에서 소집된 우리 성 경축모임에서 1990년 전에 우리 성에서는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수 있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사진설명] 사업하고있는 원장 진오영. 35년래 연변피부병예방퇴치원은 최초의 7명 일군에 수술칼 몇 자루밖에 없던 작은 병원으로부터 80명 종업원에 비교적 구전한 의료시설을 갖춘 큰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문둥병 소멸!   문둥병소멸사에서 이는 두말할 것 없이 큰 경사이다. 이 거창한 사업에서 세운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과 방역일군들의 위훈을 세상 사람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 1 ) 1952년 12월 15일, 연길현 투도구역에 갓 내린 웬 젊은이가 울부짖는 서북풍과 씨름하며 골안으로 통한 오솔길을 부지런히 걷고있었다. 성정부의 결정에 따라 이곳 산골안에 세워진 문둥병환자료양소로 걸음을 재우치고 있는 것이였다. 그가 바로 지금 이 병원의 원장으로 사업하고있는 진오영이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무살이였다.   며칠전 전근령을 받아쥔 그는 흠칫 놀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갓 성립 위생학교를 마치고 성인민병원에 배치된 지 몇 달 안되는 자기한테 말만 들어도 질겁을 할 문동병과 씨름하라는 전근령이 떨어질 줄은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두려움이 앞설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문둥이를 보지는 못했어도 항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둥병에만 걸리면 눈, 귀, 코며 팔이며 다리며 다 썩어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옛날에는 문둥이를 발견만 하면 불태워 죽였다고 하지 않는가!   가느냐, 마느냐? 진오영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사상투쟁은 치렬했다.   나중에 이 나젊은 공청단원은 마침내 자기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했다.   “비겁쟁이! 너의 몇몇 동창생들을 봐라, 그들은 조선전쟁터에 나가 목숨마저 바치고 있다. 헌데 너는?”   가야 한다. 당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론이였다. 구태현 농촌에서 자라나 당의 덕분에 의학공부를 한 그는 당의 명령을 거역하고 싶잖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너 그리로 갔다가 문둥병에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일생을 망칠려구 그러느냐, 응? 성병원에 남지 못하겠거든 이 에미와 함께 집에서 농사나 짓자. 거기론 못 간다!”   “어머니, 전 꼭 주의할 거예요. 시름 놓으세요!”   눈굽을 자꾸 찍는 어머니를 장밤 설복하고 결연히 이 길을 떠나온 그였다.   그가 배낭을 끌러놓은 이곳은 전등도 못 들어온 곳인데 밤이면 승냥이 따위가 자주 출몰하였었다. 여기서 그는 첫패의 환자 셋을 맞았다. 그들은 모두 중환자들이여서 얼굴이 무섭게 변형된 데다가 몸의 여러 부위가 심하게 썩고 있었다.   환자를 접한 진오영은 온 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이게 어디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당금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싶었다.   그러나 첫패의 일군 7명중 의사란 오로지 그 한사람 뿐! 황차 환자를 치료하는것은 의사의 천직인데 고통에 모대기는 환자를 내버리고 어찌 뺑소니를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음을 모질게 도슬러먹었다. 격리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천이 어께까지 내리드리운 모자를 쓰고 고무수갑을 끼고 두툼한 마스크를 끼고 방풍안경까지 썼다. 흡사 반세균전차림새였다. 그때엔 아직 문둥병 치료약이 나오지 않았는지라 치료라야 림시 구급이나 하는 정도였다. 구급을 끝내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있던, 전문 그의 방역을 맡은 방역원이 분사기로 그의 일신에 소독약을 들씌우군 했다.   환자들과 자주 접촉하는 가운데서 진오영은 차츰 그들의 기막힌 신세를 알게 되었다.   낡은 사회에서 문둥병환자들은 생존권리마저 박탈당했었다. 부모형제처자--친인들마저 무고한 환자를 집에서 쫓아내는 판이니 그들더러 어찌 살아나가란 말인가!   류춘성이란 환자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 발각되여 사회의 무자비한 버림을 받을가봐 병으로 오그라붙은 손가락을 식칼로 찍어버리고 피눈물 겨운 류랑생활을 시작했다. 낮이면 거리를 떠돌며 문전걸식하였고 밤이면 뉘집 풀더미속에 기여들어가 새우잠을 잤다. 영원한 안락처를 찾아 송화강에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그를 강기슭에 끌어냈었다. 정부에서 그를 찾아내여 이 병원에 보내오자 그는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공산당과 인민정부에 감지덕지했다.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감정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그는 문둥병환자들을 친인처럼 대해주면서 자기의 모든 정열을 깡그리 그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리론학습과 의료실천을 거쳐 그는 문둥병이 이전에 듣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병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2 )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상급에서는 리극근, 박성관 등 의무일군들을 륙속 병원에 파견해왔다. 그들 가운데는 자각적인 용사들도 적지 않았다.   연변의학원 61년도 졸업생 최일범은 “죽기를 겁낸다면 병사가 되어 무엇하며 환자를 겁낸다면 의사가 되어 무엇하랴”--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결연히 자기의 지망에“문둥병원”이라고 똑똑히 써넣었다.   의료일군들이 환자를 회진하고있다. 다년래 그들은 근 800명 문둥병환자들의 병을 떼여 우리 성에서의 문둥병소멸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현재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는 모두 28명인데 그중 17명은 자기 집에서 치료를 접수하고있다. 의료일군들은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약을 문전 송달해 주고 신체검사도 해주고있다.   이를 안 친척들과 벗들은 그의 심정을 도시 리해하지를 못했다.   “넌 대학생이자 당당한 반주석인데 왜 갈 곳 없어 그런델 가?너 오유나 범한 게 아니냐?”   “거기 가면 너두 문둥병 환자가 된다. 가지 말라!”   “......”   하지만 그는 의연히 자기의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이불짐을 싸가지고 이 병원에 왔다. 화룡현 현장으로 있던 그의 장인이 일자리를 구해주겠으니 그더러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먹은 마음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토개간부의 후대로 자라난 리금덕은 연변위생학교 의사반 단지부서기였다.1964년 여름 졸업분배가 시작되자 그는 학교 당조직에 선뜻이 신청서를 내고 감옥보다도 더 무섭다는 이곳으로 의젓이 찾아왔다.   1965년 8월, 연변위생학교 호사반 공부를 마친 김금자는 문둥병원에 올 것을 탄원해 나섰다. 18세 나어린 처녀의 거동은 전교를 진동했다. 왜 안 그러랴. 당시 의학전업 졸업생들에게는 분배되여 가기를 제일 꺼리는 곳이 세곳 있었는데 그곳인즉 정신병원, 결핵병원, 문둥병원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문둥병원은 더욱 못갈 곳으로 치부되고있었다. 하여 적지 않은 학생들은 꽃다운 처녀의 앞날을 위해 애석해했다.   이 병원에 온후 그는 한때 마음이 뒤흔들려 남몰래 눈물도 흘렸었다. 일손을 잡아 한달만에 훈춘에 있는 집으로 갔다가 집식구들의 살틀한 말 한마디 못 듣고 포위공격만 받았다. 언니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아예 집으로 들여놓지조차 않았다. 아, 그때 애어린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던가!   ......   그들은 모두다 사회의 무서운 압력을 이겨나온 강자들이였다.   사회의 각종압력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의 문둥병의료일군들은 얼마나 웨치고싶어 했던가! “문둥병환자들에게 인도주이를 베풀라! 전 사회가 문둥병 환자들을 동정하라! 문둥병의료일군들을 존중하라!”고.   현대의학실천은 문둥병은 예방할 수도 퇴치할 수도 있어 두려울 것 없다는 것을 충분한 사실로 똑똑히 증명하였다. 문둥병은 불치지증이 아니다. 치료를 거친 문둥병환자는 문둥병전염능력을 상실한다. 98%이상의 건강한 사람들은 다 문둥병에 대한 자연면역능력을 갖고있다. 2%에 속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병에 쉽사리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해방 이래 전국적으로 약 50만명의 문둥병환자들이 발견되였는데 치료를 거쳐 이미 대부분이 나았다. 초기 환자는 치료를 거쳐 후유증마저 남기지 않을수 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은 많은 환자들은 병을 뗀 후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아 무사히 기르고있다. 전국의 수많은 문둥병예방퇴치일군 가운데 수십년래 문둥병에 전염된 사람이 하나도 나지지 않았다......   사실이 이처럼 명백하였지만 낡은 사회가 남겨놓은 편견은 여전히 그처럼 완고히 사회상에서 살아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둥병환자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그들을 기시하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둥병환자들에 대한 공포와 기시를 억울하게도 문둥병의 소멸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일군들에게까지 전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편견이란 문둥병자체보다도 더 질기고 무서운 것이였다.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은 이 모든 것을 웅숭깊은 가슴속에 깊숙이 파묻어두고 묵묵히 묵묵히 환자들에 대한 인도주의 직책을 드팀없이 수행해나가고있다.   ( 3 )   자기의 병이 문둥병이라는 것을 아는 환자들은 대체로 문둥병원을 찾는 실례가 매우 드물었다. 현대의학에 대한 털끝만치의 료해도 없는 그들은 병원에 대해서는 공포감을 가지면서 자신을 한사코 류리방황, 가정파산, 종신페질의 구렁텅이에로 밀어넣고있었다.   그들을 재난속에서 구원하려면, 그들로 인한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통제하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부분의 환자들을 찾아내여 치료해야만 하였다.   1973년도부터 이 병원에서는 전 성 범위내에서 문둥병 보편조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간고한 사업이였다. 19만 평방키로메터 땅덩어리우의 2,000여만 인구속에서 수효가 극히 적고 고도로 분산된 문둥병환자들을 모조리 찾아낸다는 것은 실로 수풀속에서 바늘 찾듯, 백사장에서 깨알 줏듯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극근, 박성관, 최일범, 리금덕 등 수십명 예방퇴치 일군들은 기와 패를 나누어 각 지구에 내려가 당지 방역기구의 배합밑에 골간 강습반을 꾸리고 군중을 발동하면서 넓은 평야구릉으로부터 깊은 심산궁곡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참빗질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당총지서기이며 당시 병원예방퇴치과에서 주임사업을 하고있던 리금덕은 구태현 농촌에서 “참빗질”하던 중 영성탄광구역의 한 구차한 집에서 문둥병 후기환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환자는 스물셋에 나는 젊은 청년이였는데 그는 쬐꼬만 뙤창 하나를 낸 네댓 평방메터짜리 차겁고 어둑침침한 고방에 쓸쓸히 갇혀있었다. 알아보니 그의 부모들은 전등도, 까래도 없는 감방같은 고방에 병든 아들을 5년 동안이나 가두어 왔었다!   왜 병원에 보내지 않는가고 물으니 그의 부모들은 공포에 떨며 “약도 안 드는 죽을병인데 거저 집에서 편히 죽게 놔 두시우!”하고 애걸하는 것이였다.   환자도 덴겁한 눈을 해가지고“병원엔 안 가겠어요. 죽어도 제집에서 편히 죽겠어요!”하고 연신 빌었다.   분명, 그는 세상과 격리된 이 음침한 고방에서 남몰래 조용히 죽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분명, 그들은 문둥병을 불치의 병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문둥병원을 환자를 참혹히 학대하는 감옥보다도 더 무서운 곳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이 정경은 문둥병환자를 한사람도 빠짐없이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리금덕의 결심을 더욱더 굳혀주었다.   [사진설명]이 병원에는 지금 치료를 받고있는 환자 11명, 병은 나았지만 갈 곳이 없어 계속 남아있는 환자 70명이 있다. 그들은 모두다 의료호리일군들의 살틀한 보살핌은 받고있다. 사진은 환자의 머리를 빗겨주는 호사 유채금과 호사장 김금자(오른쪽).   그는 로고를 무릅쓰고 원정을 시작했다. 하루에 사오십리길 걷는 것 쯤은 문앞마당 지나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선전을 하고 군중을 발동했다. 선전효과를 높이고자 늘 환자네 집에서 먹고자고 했다. 여름엔 길가의 초저녁 모기무리에 얼굴을 뜯기기가 일쑤였고 겨울엔 초라한 농가집 랭돌방에서 외투 쓰고 쪽잠자기가 일쑤였다. 환자가 조사일군이 온다는 낌새를 채고 도망질을 칠 때면 한 벌 할 걸음을 세번 네번 해야 했다. 제공받은 정보가 틀려서 수십리 걸음이 허탕으로 돌아갈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드팀없는 목표는 아흔아홉번 허탕치는 건 별문제여도 환자 한사람을 놓쳐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였다.   이처럼 천신만고를 다하면서 이 병원의 일군들은 전 성 47개현, 시에서 도합 500여명의 문둥병 환자를 찾아냈다. 500명! 극히 평범한 이 수자에는 그들이 우리 성 에서의 문둥병의 전파만연을 방지하기 위해 엮은 비범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 4 )   환자수가 급격히 불어감에 따라 의사, 호사들의 사업량도 크게 늘어났다.   급한 환자가 들이닥칠 때면 진오영과 그의 동료들은 늘 격리복도 입지 못한채 환자구급에 서두르군 했다.   수술환자가 수혈이 수요되면 그들은 서슴없이 자기들의 피를 뽑아 환자에게 바쳤다. 새로운 약종을 찾아 문둥병 치료효과를 높이고자 진오영, 최일범 등 동지들은 주야분전하여 , , 등 주사액을 만들어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은 만들어낸 약들을 우선 자기들의 몸에 실험해보군 했다. 어느 한차례의 시험에서 진오영은 중독되여 몇 달 동안 입원치료까지 받았었다.   어느 날 의사 박성관이 급보를 받고 천방지축 병실로 뛰여가 보니 환자 황옥란이 후두수종으로 호흡이 막혀 거의 죽어가고있었다. 후두수술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당금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유예할 겨를도 없었었다. 그는 주저없이 수술칼을 집어들었다. 목을 어이고 기관지를 쨌다. 불현듯 막힌 구멍이 터지면서 그의 얼굴에 피가래를 쫙 들씌워 놓았다. 처음 하는 수술을 무사히 끝낸 뒤에도 그는 도저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 환자 곁을 꼬박 일주일간 떠나지 않았다.   의사 최일범은 대동란 기간에도 시종 일터를 고수하면서 문둥병 치료와 연구사업에 전심하였다. 70년대 중기부터 그는 문둥병 의약정보들을 애써 수집하면서 선후로 , 등 약들을 치료에 도입하고 수년간씩 림상관찰을 진행하여 치료효률을 크게 높이였다. 8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위생조직에서 련합화학치료방법을 제창하자 그는 또 동료들과 함께 환자들에게 을 8개월간 들이댔는데 역시 리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환자들에 대한 호리사업도 간거했다. 김금자, 유채금, 방분옥 등 호사들은 각종 수술후의 처치작업을 정성껏 하는 외 일상적인 생활호리까지 착실히 하면서 환자들을 빈틈없이 보살폈다.   한번은 왕청에서 종류형 문둥병환자를 보내왔다. 집에서 쫓겨나 거지질을 했던 이 녀성환자를 보니 썩은 삼검불 같은 머리엔 이가 우글거렸고 옷을 벗기니 이가 막 덩이져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금자는 동정의 눈물을 머금고 그 환자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머리도 손수 깎아주고 이도 말끔히 잡아주었다. 사람대접을 생전 처음 받아보는 그 환자는 거저 감격의 눈물만 하염없이 쏟을 뿐이였다.   한번은 온 몸이 진창이 된 중병환자가 들어왔다. 금자는 매일 환자에게 약을 갈아주고 몸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는 것마저 잊지 않았다. 이렇게 꼬박 석달 동안 환자를 호리해주었다. 림종시에 환자는 눈귀를 적시며 가느다란 소리로, 그러나 분명 이렇게 말하였다.   “전 죽어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겠어요!”   ......   아, 진오영을 비롯한 우리의 문둥병예방퇴치일군들의 헌신적 처사에서 문둥병환자들이 받아않은 감동은 실로 아름차리만치 컸다!   * * * * * *   지난 35년간 성위, 성정부와 연변주위, 주정부에서는 줄곧 이 병원에 관심을 돌려왔다.   당과 정부에서는 문둥병 예방퇴치사업에서 대공을 세운 위훈자들에게 응분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병원은 여러 차례 성, 주의 선진단위로 표창 받았고 이 병원의 수십명 일군들도 각급 선진개인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중 원장 진오영, 진찰부 주임 최일범 등은 전국모범의 영광을 안아왔다.   진오영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1990년 전에 문둥병을 기본상 소멸할 신심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병원에서는 이미 변화된 형세에 좇아서 우리의 사업중심을 문둥병에 대한 예방퇴치로부터 피부병에 대한 예방퇴치에로 옮길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세계적 수수께끼로 되고있는 에이즈병에 대해서도 연구하려 합니다. 문둥병을 대처할 때와 같은 헌신정신으로 말입니다!”   헌신정신! 천신만고로 사업의 승리를 바꾸어온 이들은 헌신정신의 함의를 가장 잘 안다. 그들이 인류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위하여 새로운 전투구상을 무르익힐 때 그 리면에 안받침되여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헌신정신이리라!   [길림신문] 1988.3.1   ​
6    불치병의 영원한 도전자 -- 남정 댓글:  조회:4142  추천:75  2007-10-03
불치병의 영원한 도전자 -- 남정 [ 길림신문 박문희 기자] ]  2006-08-19 남정(南征)프로필 현직: 장춘중의약대학 제1부속병원 주임의사, 박사생도사, 중의연구소 소장. 겸직: 중화중의약학회 리사 및 내과분회 상무위원, 소갈병전문위원회 부주임위원, 국가신약 심사위원, 길림성중의학회 부리사장, 장춘시중의학회 리사장, 중의로년병전문위원회 주임위원, 길림성정부 자문고문. 길림성 과기청, 교육청과 위생청 과기선진개인,  장춘시민족단결모범. 길림영재. 길림성명중의, 장춘시명의. 국무원특별수당금 향수.  신약발명가,  난치병전문가, 의학저술가로 의학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60여세의 중년사나이, 민간에 《난치병을 떼려거든 장춘중의약대학의 남정의사를 찾아가라》는 말이 퍼질  정도로 명성 짜한 남정. 중의학교수, 중의과학연구와 림상진료에 종사해온 40년간 남정은 중풍, 간염, 당뇨병, 심장병 등 현대의학이 채 정복하지 못한 령역에서 나름대로의 중의학적방법론으로 공략전을 벌이면서 중의중약을 고양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타는  열망으로 웅지 펼치며 남정은 1942년 1월,  길림성 룡정시의 한 평범한 철도로동자 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여났다. 부모가 모두  장기간 외지 사업에 투신하였던 까닭에 남정은 두살 먹던 해부터 줄곧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끝에서 자랐다.  소년 남정은 총명한데다 승벽심이 강해 소학교 때는 한학년 월급을 했고 초중 졸업때는 전현 1등의  성적으로 고중에 붙었다. 당시 온 연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명중의 리자준은 할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는데 두 로인은 시간만 나면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군 했다.  남정은 그  로중의 할아버지를 몹시 따랐다.  손목을 쥐여보면  환자들의 병을 척척  알아내는것이 신기하기만 했던것이다. 로중의의아들 리석렬  역시 명중의였는데 남정은 방학만 되면 아버지벌 되는  리석렬에게 매일 붙어있다 싶이 했다. 리자준 로중의와  그의 아들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남정은 어릴적에 벌써 중의에 대한 동경심이 움트기 시작했고  17세 때는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꿈의  전당 장춘중의약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  중의필수의 한어공부를 별반 하지 못했던 애젊은 남정은  학생시절 중의학을 확실하게 전공하겠다는 열망을 불태우며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으로 천서나 갑골문 읽기와 다를바 없는 난해한 고한어를 송곳처럼 파고들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교수들인 임계학, 류관군, 류백령 등 교수들을 직접 찾아 직접적인 가르침도  받는다. 내로라 하는  한족 학생들까지 제치고  최우수의 성적으로 학교에 남은 남정은 부속병원에서 림상실천을 하면서선배들에게서 배운것의 효과를 일일이 검증하여 그들의 귀중한 지식을 아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노력을멈추지 않는다. 웅지의 날개를 펼치려 할 즈음 느닷없이  대동란이 덮쳤다. 열혈남아 남정은 날개가 꺾였지만 꿈만은 접지 않았다. 남들이 허송세월을 할 때도 얻기 힘든 의학서적과 중의고서를 백방으로 구해다 구구절절 따져가며 탐독했고 맨발의사수첩마저 빠뜨리지 않고 연구했다.   천리고토에서 《개암꽃》 발견 공은 쌓은데로  간다고 동란이 끝난 뒤 남정은 중풍치료에서 재빨리  두각을 내밀기 시작한다.   1980년 그는 국가의  공략과제인《중풍고위증의 예방 및 치료》의 분과책임자로 발탁된다. 연변사람들은 술을 좋아해 중풍발생률과 사망률이 높았다. 중풍치료의 묘방을 찾겠다고 언녕부터  별러온 남정은 분과책임자로 발탁되자 바로 고향  연변으로 직행했다. 룡정, 화룡 등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지역을 누비며 중풍발생정황을 료해하는 한편 민간처방과  료법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한국동양의학회에서 전문 남정을 초청, 남정의 특강을 청취했다. 특강이 끝난 뒤 세계동양의학회 회장이며 한국한의학회 명예회장인 배원식(93세, 가운데 분) 등 한국  한의계 원로와 함께 중한 중의학교류문제를 담론하다.(2005년) 로인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한담식 조사를  벌이던중 어느 분인가 개암꽃이 민간에서 간병치료에 쓰이고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개암꽃이 간염에 좋다?   분명 중요한 단서였다. 남정은 그 길로 연변도서관에 찾아가 문헌조사에 착수했다.  《길림중초약지》와 《연변약지》를 뒤져보았더니 화룡  일대의 사람들이 간경화복수에 《진화(榛花,개암꽃)》를 내복외용(內服外用)해본 결과 일정한 치료효과를 보았다는 내용이스치듯 두어줄 기재되여 있었다. 이 초약이 민간에서는 오랜 시일에 거쳐 사용돼 왔을 터이지만 그 많은 중의들의 공식약방에는  진화란 약재가 오른적이 없었다.  보기에도 희한치 않은 개암꽃에 어느 의학자도 눈을 팔지 않았던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귀중한  잠재적 약용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할수 있는 혜안과 그것의 예비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없다면 손안에 주어넣은 보석도 무심히 버릴수 있는것이다.  화룡현위를 찾아 6개 소학교의 학생을 동원, 2000여킬로그람의 《진화》를 채집했다. 한 킬로그람에 23전씩 약 500원을 주고《진화》를 사왔는데 돌아와 해볕에 말리니 700킬로그람이 되였다. 이 약재는 신약개발에 중요한 원재료로 되였다.  《진화》를 리용한 급성 및 만성 독성에 대한 약리실험과 공예 및 제형에 대한 점진적인 동물약학실험을 통해 이 약재가 간을 양하고 만성 B형간염의 양성을 음성으로 전환시킬수 있을뿐만 아니라 혈당도 낮출수 있음을  확인했다.  중초약재사에 있어서의 자못  중대한 발견이였다. 《진화》는 결국  남정의 일생을  동반하며 《복방진화서간캡슐》,  《소갈안캡슐》 등 국가신약의 발명에 주역으로 등장한다.   난치병과 씨름하며 신약을 개발 1988년 6월,초청교수로 일본 도꾜의 도호대학에서 과학연구를 하고있던 남정에게로 메이지대학 동향회주석인 나까다선생이 찾아왔다. 일본 전역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를 다 보였지만 효험을 보지 못한 이 뇨독증 환자는 중국에서 온  남정이 난치병치료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최후 일말의 희망을 안고 찾아온것이다. 병세를 깐깐히묻고난 남정은 즉시 청열해독,  방향화습 및 보신장양 등 료법을 병용한 변증치료를 들이댔다. 한달 후 검사해 보니 뇨소질,  이산화탄소 접합력, 이노신 등 제반지표가 전부 정상으로 회복되여 있었다. 두달도 채 안돼 환자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이 일은 일본 의학계를 들썽해 놓았다.  보도매체들은 뒤질세라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실어 중의학의 신기한 효력을 높이 찬양했다. 국내의 많은 중증환자들도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다. 2004년 북경의 한 유명병원에서 치료받던 52 세의 뇨독증말기환자가 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게 되자 장춘에 와 남정을 찾았는데 2년간의 치료끝에 뇨단백, 뇨혈과 뇨소질이 깨끗이 사라지고 간기능과 신장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여 얼마전부터는 회사에 정상출근을 시작했다. 인류건강의 대적 불치병, 난치병, 의난병은 남정의 종신 공략목표였다. 중풍, 심장병, 간장질환, 소갈병과 같이 서양의학도 근치묘방을 찾지 못한 난치병에 대한 남정의 공방전은 30여년간 간단없이 지속돼 왔다. 중의명으로 《소갈병》이라 불리는 당뇨병은 당대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세계 3대 고질병의 하나로서 그 사망률은 암과 심뇌혈관병에 이어 세번째로 높다. 당뇨병환자는 1985년부터  국내외적으로 급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례컨대 지난 세기  80년대  발병률은 0.68%에 불과했는데 90년대 들어 발병률은 3.21%로 4배도 넘게 늘어났다.  60세 이상의 년령층은  더욱 엄중해서 발병률이  4~6%에  달했다. 그중 이미 당뇨병에 걸렸음에도 그런줄 모르고있는 사람이 26%였다.  당뇨병을 4년이상 앓고 혈당이 15.6mmol/L 이상 되는 환자는 합병증이  오기 십상이였는데 그 사망률은 46%로 근 절반이나 되였다. 당뇨병합병증의 원흉은 당격화종말산물(AGEs)이라는 화학물질인데 미국,  영국 등 나라와 국내의 권위들은 장기적인 연구를 거쳐 이미 AGEs는 분해할수 없다는 결론까지 내린 상태였다. 서의들은  중의중약으로는 당뇨병, 신병, 단백뇨의 근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서의에 의한 치료효과 역시 리상적이 못됐는데 오히려 부작용이 크고  합병증발생률이 높았다. 20여년전부터 소갈병에 대한 림상치료실험과 약리병리연구를  병행해온 남정은 서의권위자들의 단언에 커다란 의문부를  달고 소갈병(消渴病)연구를 계속했다.  의학고전까지 깊이 파고 들면서 이 이른바의 불치병치료약방을 찾아 어려운 항행을  했다. 그러던 중 송나라때의《성제총록》에서《지황생강전환》이란 약방을 발견하고 거기에 혈당을 낮추는《진화》를 넣어 새로운 당뇨병치료약 《소갈안(消渴安)》을 발명해 내며 이어 한술 더 떠 당뇨병신병치료 신약인 《소갈안》2호도 개발해낸다. 이 두가지 약방으로 당뇨병, 당뇨병합병증과 당뇨병신병에 대해 4000여례의 변증치료를 진행했는데 고무적이게도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였다. 1997년 7월, 제1회전국중의소갈병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론문에서  남정은 간장을 돕고 혈당을 낮추는 《진화》의 약리작용에 대해 분석하고 나서 《AGEs는 분해할수 있다》는 파격적인 견해를 제기했다. 그의 론문은 전문가들속에서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회의가 끝날 무렵 미국, 일본과 한국의 대표들은 다투어 자기들 나라에 가서 강의를 해달라고 남정을 요청했다. 박사, 석사생들과 함께 난치병퇴치에 대한 남정의 집념은 소갈병에서만 표현된게 아니였다. 중풍료법에 대해서도 림상치료에 결부시켜 고전문헌연구를 계속하던 중 청나라 왕청임(王淸任)의  《의림개착》에서 계발을 받고 원 약방에 사향을 넣어 리상적치료효과를 본 경험을 토대로 반복적인 연구와 실험을 거친 끝에 선후로 《사향항전환(麝香抗栓丸)》과  《사향항전캡슐》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며 나아가 세계 2대 류행병의 하나인 B형간염치료에 대한 연구실험도 효률적으로 진행하여 치료효과가 서약비교팀보다 퍽 월등한 《진화간녕(榛花肝寧)》과 《복방진화서간캡슐(腹方榛花舒肝膠囊)》을 련이어 개발해 낸다. 이처럼 남정은 《사향항전캡슐》,《복방진화서간캡슐》, 《소갈안캡슐》, 《서신령캡슐》, 《양위녕캡슐》등 5종 국가급 신약을 비롯해 당뇨병심병, 당뇨병뇌병, 당뇨병간병, 당뇨병안병, 당뇨병족병(足病) 등을 치료하는 《준자호》,《건자호》약물 도합 20여종을 개발해내여 해마다 나라를 위해 리윤 2000만원 이상을 창출했다. 한가지 신약이 시장에 나오자면 연구시간만 15년 이상 걸린다. 많은 신약 연구들이 사소하게 생각해 루락시킨 작은 연구과정때문에 마지막 단계에서 약으로 완성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다면 남정이 개발한 20여종의 신약에는 얼마만한 로고가 깃들어 있을것인가?   교수와 과학연구 열매 호함져 남정은 교수사업에서도 자신의 튼실한 림상실천경험과 과학연구성과를 토대로 본과생, 박사 석사 연구생을 책임감 있게 지도해 왔다. 1979년부터《중의내과학》과《신약의 연구개발》이 두개 전공학과의 강의를 책임져 온 남정은 1985년부터 석사연구생  지도를 맡아 지금까지 이미 외국 류학생 3명을 망라한 20여명 연구생을 키워냈다. 길림성에서 맨 첫 사람(조선족으로는 전국에서 첫 사람)으로 중의박사생도사로 된 그는 현재 박사생 9명과 석사생 30여명을 거느리고 당뇨병의 원리와 예방퇴치에 대한 전문연구도 하고있다. 남정의 저서와 론문 편찬집필성과도  심히 풍성하다. 국내에서《당뇨병신병연구》,《당뇨병중서의종합진료》등 저서 20여부 (그중 국가급 우수도서상 1 부) 를 출판하고 10여부 저서의 책임편집을 맡았으며 성급이상 잡지에 론문 100여편을 발표,그중 8편은 국가급 우수론문상을, 8편은 성급우수론문상을 받았다. 한국에서 출판한 저서도 묵직하다. 400년전의 《동의보감》 한글번역본 (감수), 총 7권에 300만자에 달하는 《중의학총서》(주필)와 700만자에 달하는 《한.중.영 중의사전》(주필)을 펴냈는데 그중 내용이 방대한 《한.중. 영 중의사전》은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서태평양아세아도서》 금상을 수상했다. 그외 구쏘련, 미국,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등 나라에 가 초청교수 신분으로 강의를 하거나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여 10여편의 론문을 발표, 중의중약을 세계에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   *  남정은 《최근들어 중의학은 서양의학으로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병에서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잇따르고있다》면서 《중약을 보약쯤으로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라고  토파한다. 현재 심화중인 당뇨신장병, 심장병,간장병,  뇌질환, 눈병과 말초신경염 등 질환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림상치료와 과학실험을 드팀없이 앞세우면서 환자를 고통속에서 구조하고 중화의학을 만방에 빛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다.  
5    한국인을 감동시킨 화교 한성호박사 댓글:  조회:5019  추천:63  2007-09-29
한국인을 감동시킨 화교 한성호박사 [길림신문 박문희 기자] 2006-03-09              한성호박사가 이룩한 업적은 국외인사들로부터 극히 높은 찬양을 받았으며            그는 대단한 중국인으로, 중국의 기인으로 불리였다.                                      一한성호박사 업적비 비문에서   한국 화교계에 한국 제13기 대통령 노태우로부터 《아주 대단한 중국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분이 있다. 이 분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사진액틀에는 호금도, 리붕, 주용기, 리서환 등 중국의 중앙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대통령 그리고 총리와 여러 정당의 총재들과 함께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장개석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현대인물지》에도 올라있다. 이분이 과연 누굴가? 한국 력대 대통령의 어의(御醫)로 불리는 애국화교 한성호(79세)박사이다. 현재 대한민국 신동화한의원 원장, 《한화천지》잡지사 회장, 한국유교협회 고문, 한중우호협회 고문, 한국 화교달마불교 회장, 한국 수석인 (壽石人)총련합회 수석부회장, 중국전국화교련합총회 고문 등 10여가지 사회직을 일신에 떠메고 애국위업의 수행에 혼신을 쏟고있는 한박사, 그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악몽처럼 불행했던 과거 한성호박사의 본적은 산동성 게현(莒縣))이다.1909년 그의 부모와 몇몇 삼촌은 게현 북부의 한 작은 마을로부터 길림성 장백현의 압록강반에 피난해와 자리를 잡았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사금광을 발견하고 사금을 일어 큰돈을 벌기 시작, 십수년후에는 당지에서 소문난 부자로 되였다. 한성호는 1927년 8월 28일 생으로 원명은 한조선(韓早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2살에 소학교를 마친 뒤 바로 림강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6살에는 또 길림국립사범대 시험에 합격하여 장백현 력사상 최초의 대학생으로 되였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본경찰에 까닭없이 잡혀가 얻어터지고 갇히웠던 관계로 그는 왜놈들이라 하면 이를 갈았다. 1945년 대학 3학년을 다닐 때 일본경찰에 끌려가 깊은 산속에서 모진 고역을 치르며 하마트면 왜놈의 총칼에 찔려 죽을번한 일도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투항을 하자 일본이 관할하던 길림사대도 문을 닫아 갓 3학년을 마친 한조선은 귀향하여 중학교 어문을 가르쳤다. 1947년 동북에서는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나누는 토지개혁운동을 벌였는데 한조선은 국민당특무, 반혁명폭동의 조직자로 잘못 락인이 찍혀 사형판결을 받았고 그의 셋째, 다섯째, 일곱째 삼촌은 맞아죽었으며 어머니는 한을 품고 자살했다. 아버지와 형님도 행방불명이 되였다. 그는 처형되기전 공안국에 있던 동창생의 구원으로 산속으로 도망치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다친채로 심산속에서 50여일간 전전하며 말못할 역경을 다 치렀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도망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민당에 환멸을 느껴 정치를 포기 서울에서 그는 한국주재 대만대사관의 시험에 응해 교무(僑務)비서로 발탁됐다. 서울에 온 한성호는 국민당에 가입하며 아울러 국민당 중통(中統)특무조직에도 참가한다. 조선전쟁기간에 공을 세워 선후로 장개석과 장경국의 단독접견을 받았으며 아울러 표창도 받았다. 26세에 벌써 추천을 받아 《 양명산혁명실천연구원》에 들어가 학습을 하게 되며 거기서 장개석의 강연을 직접 듣는 기회도 갖게 된다. 리상, 재능과 사업심이 있는 20여세의 열혈청년으로 국민당의 중점 양성대상이 된데다 장씨부자의 단독접견까지 받았으니 그의 미래엔 희망이 충만되여 있는 셈이였다. 그도 당연히 국민당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엔 남아의 호연정기가 굳게 자리잡고있었으니 탐오부패에 푹 젖은 대만 외교관원들의 현실과 한국 화교조직들 내부의 조국과 중화민족의 얼굴에 먹칠하는 갖가지 추악상들을 목격한 그는 민족대의를 위해 용감히 떨쳐나서서 그들과 투쟁하지 않을수 없었다. 교무비서를 하면서 서울안 차이나타운에서 화교조직들이 아편관, 도박장, 기생집을 경영하며 중국인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것을 본 한성호는 《대사관 총령사》 숙몽공에게 교풍(僑風)촉진위원회를 설립할것을 즉시 건의했고 동의를 받은후 즉시 백여명의 행동조를 무어 기생집,도박장을 들부시고 화교사회내의 악세력들에 용감히 도전했다. 물론 이에 매국장사군들의 미움깨도 많이 사고 처처에서 무서운 보복도 당했지만 그는 추호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편관이나 도박장을 들부신 한성호의 행동은 그나저나 대만 대사관의 통일행동으로 되였던 까닭에 일정한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기자신분 을 빌어 대만외교관의 부정부패행위를 사정없이 파헤치고 까발리는데 대해서는 대만대사관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무시로 타격과 보복을 감행했다. 특히 서울의 13명 화교수령들이 대만과 한국정보기구에 한성호를 《국민당내부에 기여들어온 공산당특무》라고 련명보고를 올려 무함하면서 그를 처리할것을 요구하였을 때 그는 관료기구내의 험악상과 국민당 관원의 부패상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화교사무에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정치를 포기하고 교육에 종사키로 작심, 분연히 서울을 떠나 군산시에서 한 화교학교의 교장을 맡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에 한성호는 또 바다처럼 깊은 중의리론에 매혹되여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의 총명재질과 지독하게 끈질긴 성격은 의학전공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서울에 있을 때 벌써 경희대에서 한의(즉 중의)를 전공했었던 그는 송곳처럼 중의학리론을 파고 들어 마침내 미국 캘리포니아주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았고 드디여 한국 전역에 소문 놓는 어의(御醫)로까지 된것이다.   한국 전역을 들썽케 한 중의 1960년 한성호는 군산시를 고별하고 광주에 가 중의진료소를 꾸렸다. 한성호는 중의약제로 한 페결핵 말기환자를 치료해 병을 떼는데 성공했다. 하여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는데 그의 문전은 매일 병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군 했다. 1970년 친구의 협조요청으로 서울에 돌아와 신문을 꾸린 한성호는 대만대사관의 모해로 가산을 탕진하고 곤경에 빠졌다. 이때 한 한국인 친구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와 그를 한국의 중국연구소한방의학학술연구원 원장, 서울특별시재향군 인회 지정 한의원 원장 등 직에 초빙하여 그의 생활고를 풀어주었을 뿐더러 그가 중의학연구에 종사하는데 량호한 일터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후 그의 의술이 갈수록 고명해지자 한국의 박정희, 김종필 등 대통령, 총리를 비롯해 군,정 고위급 요인들이 병보러 자주 드나들었고 그중 노태우,김영삼 등 많 은 인사들도 친구로 사귀게 되였다. 그가 친구를 항시 진심으로 대하면서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고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기때문에 한국벗들은 그를 한결같이 존중했다. 이 기간 경제발전과 더불어 한국의 생활리념에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병을 치유하고 체질을 증강시키는 중의의 목적을 나날이 높아지는 백성들의 생활수준에 접목시키기고자 한성호는 식품료법연구에 몰입하여 중의리론으로 맛나는 음식과 병치료에 효과적인 중의약방을 과학적으로 결합시킨 식품료법을 부단히 더듬어냈으며 3년동안 연구에 잠심한 결실로 1974년에 이르러 120여만자에 달하는 의학전문저서를 탈고했다. 《식물편》,《동물편》,《미용편》,《조미료편》,《식품치료편》등으로 나뉘는 이 대하의학서의 이름은 《식품비방》이라고 달았다. 책이 방금 탈고되자 이를 발견한 옛친구인 《조선일보》 주필 선우훈은 이 책의 가치를 대뜸 보아내고 즉시 신문에 련재하기로 결정했다. 1974년 5월 23일 《조선일보》에 한성호의 《식품비방(食品秘方)》 첫기가 실렸다. 상상외로 독자들의 반향은 대단히 강렬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신문의 발행량은 놀라운 직상승을 기록했는데 불과 며칠도 안되는 사이에 신문은 70여만부로부터 120만부로 치달아올랐다. 《식품비방》련재는 1년 반동안 지속되여 한국 신문간행물 련재의 기록을 쇄신했다. 《식품비방》은 당연히 책으로도 출판됐는데 당시 인구 4000여만명밖에 안되는 한국에서 이 책은 한해동안에 50만책이나 팔려나갔다. 그가 출연한 TV강좌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관중을 끌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또 한국 한의학자들과 합작하여 13권에 달하는 《한방의료대전집》도 펴냈다. 중국의학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빛내는데 그가 한 기여는 거대하다.   노태우대통령의 중한수교밀사 1987년 한성호의 친구 노태우가 한국대통령에 부임했다. 노태후는 대통령으로 된후 닷새만에 한성호를 단독 접견하고 대통령밀사의 신분으로 비밀리에 중국정부와 접촉하여 한중수교를 위해 물밑작업을 맡아해줄것을 위탁했다. 하여 근 40년이란 국민당 당령을 가지고있는 한성호는 중한우의와 조국의 장래를 위해 선뜻이 친선밀사로 나서서 비밀리에 중국 정부관원들을 만나 수교를 위한 물밑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대만당국은 가만있을리 없었다. 한국주재 대만 대사관과 일부 대만독립을 지지하는 화교 두목들을 내세워 한성호를 공격하고 보복을 감행하게 했다. 대만 대사관의 한 령사는 공산당에 가문이 망하고도 공산당을 도와 일하다니? 집안의 원쑤를 갚지 않으면 효성을 다하지 않은것이요, 국민당에는 충성심을 잃은것이라면서 문죄하려 들었다. 도발앞에서 한성호는 이렇게 대꾸했다.나는 중화민족을 위해 일하지 어느 당파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효에는 크고 작은 구분이 엄존한다.부모님에 행하는 효는 작은 효이고 민족에 행하는 효야말로 큰 효이다. 내가 중한수교를 위해 일하는것은 민족에 가장 큰 충과 효를 행하는것이다.가정의 비극은 력사가 조성한것이고 전쟁이 조성한것이다. 그래 내가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는것이 죄란 말이냐? 한성호박사의 주선하에 1988년 5월 중순 한국정부는 중국 산동, 료녕과 북경을 방문하도록 대우재단의 김우중회장을 단장으로, 김복동장군, 한성호박사를 고문으로 한 15인 경제방문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량국간 외교방문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그해 8월 산동국제상회의 리유회장이 인솔하는 산동경제방문단이 중국의 첫 정부측대표로 서울을 답방하여 중한수교의 첫걸음을 완성했고 이로써 중한 정식수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1992년 중한수교 전야에 노발대발한 대만당국은 한국주재 중국대사관 관사를 팔아버릴 음모를 꾸몄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성호는 중국대사관의 모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엄정성명을 발표,세계 각지의 애국적 화인 화교들에게 한결같이 단합하여 대만당국의 매국행실을 제지시키고 중국대사관의 재산을 보호하라고 호소했다. 수많은 애국화교들의 노력으로 대만당국의 음모는 파산을 선고했고 가치가 10여억딸라에 달하는 재산은 마침내 허실없이 조국의 품안에 돌아오게 되였다. 1993년 2월 19일 오전 10시, 서울시정 강당에서 한국의 수백명 관원들이 장엄하고도 성대한 의식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위해 중대한 공헌을 한 외국인 한성호박사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중국의 화장실 혁명을 일으킨 로인 2000년 양력설 전야 산동성정부에서 조직한 《태산신천년축전》활동에 참가한 한성호박사는 태산절정에 올라 화장실을 찾았다가 상상도 못할 장면을 목격하고 경악을 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관광구내의 변소란 똥오줌이 넘쳐나 악취를 풍기고 변소내에 간막이가 없어 서로가 치부도 가리지 못하는 기막힌 형국이였던것이다. 민족자존심을 크게 다친 한박사는 분통을 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수만자를 일필휘지하여 유람구의 기막히고 치떨리는 위생상황을 일일이 렬거하고 무책임한 정부 관원들을 통절히 꾸짖었다. 《태산은 중국의 성산이자 세계의 명산이며 중국을 빛내는 국보이기도 하다.헌데 어쩜 아름다운 국보를 이렇게 더럽힐수 있단 말인가?! 가석하기 짝이 없고 분노로 치떨린다.산우에 분변이 사태를 이룸은 산아래 더러운 관료가 있음이요, 금 그릇을 들고 더러운 돈 버니 아름다움과 깨끗함이 어이 있을소냐? 나라의 체면은 어디에 팽개치고 리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냐? 민간기풍우매락후는 부정부패 탓이로다. 나라와 민족의 얼굴에 똥칠을 하니 비관과 분노를 금할길 바이 없다!…》 그는 반월간 잡지《한화천지》2000년 제4기에 글을 발표한 뒤 이 글이 실린 잡지 수권을 산동의 일부 관원들에게 부쳐보내고 하회를 기다렸다. 2000년3월,한성호박사의 《한화천지》잡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란 태안시당위 막진규서기는 바늘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했다.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았을 때의 심정이였다.시위서기로서 그는 자기에게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이 있음을 느꼈다. 한박사의 호된 비판이 천만 지당하다.태산은 조국의 자랑이자 얼굴이다. 조국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된다. 그는 잡지를 놓기 바쁘게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회의를 열어 각방의 의견을 청취했으며 전문가들을 불러 조치를 강구했다. 얼마 후 서울에 있는 한성호박사는 산동 태산시 막진규서기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태산유람구위생에 대한 한박사의 비판에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과 함께 태안시 변소개조 계획이 소개되여있었다. 편지를 접한 한박사는 기쁜 나머지 만감이 교차했다.국민당을 삼사십년간 욕했어도 국민당은 나의 말을 단 한번이라도 귀담아 들었는가?듣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보복과 타격만을 일삼지 않았던가? 그러나 뜻밖에도 일당 독재를 한다고 비난을 받고있는 공산당이 인민의 비판을 허심히 접수하고 꾸짖는자의 애국성의를 존중해주다니, 짜장 감개무량하도다! 2000년5월,태안시에서는 전례없는 변소혁명을 일으켰다. 태산풍경구 및 시 구역의 2216개 변소에 대한 개조작업이 전면 개시됐다. 일개 정부가 변소를 제1호 공사로 삼기는 태안시는 물론 중국력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였다.쉬운 일이 아니였다. 2억5000만원이나 수요되는 건설비용은 중지를 모아 변소를 경매하거나 청부 주는 방법으로 해결했다.모든 변소를 깨끗하고도 보기 좋게 수건하면서도 태산의 자연경개를 파괴하지 않고 귀중한 지하수자원도 오염시키는 일이 없게 하고자 설계부문에서도 머리를 쥐여 짰다. 태안의 변소혁명은 석달간의 분전끝에 승리적으로 완성을 고했다.태안은 깨끗해졌고 더욱 아름다워졌다. 2천여개 변소는 기적처럼 일률로 수세식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세수대, 세면대, 건수기, 통풍기가 구전하고 바닥에는 몽땅 자기타일을 깔았다. 태안의 공중변소혁명은 전국적으로 지대한 반향을 자아내여 중국공동변소개조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반독촉통》의 대기를 첫사람으로 떠메고 리등휘가 대만 총통의 자리에 올라 앉은 후 한성호박사는 예리한 정치적안광으로 대만독립을 굼꾸는 리등휘의 본질을 보아내고 맨 첫 사람으로 대만독립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발단으로 대만독립반대투쟁을 전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해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한수교 후 대만 당국과 한국의 관계는 비록 대사급으로부터 대표부급으로 떨어졌지만 대만대표부의 정부관원은 중국대사관 인원보다 훨신 많았으며 장기간 형성된 관성에 의해 대만대표부는 여전히 화교사회를 통제 관리하고있었다. 대만 당국은 수만명에 달하는 화교를 잃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후원금을 아낌 없이 퍼부었고 화교사회의 다수성원도 얼빤한 정신으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결과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한성호 등 두뇌가 명석한 로화교들 몇몇은 오히려 여러 면으로부터 달려드는 타격과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중국대사관에서도 한국에 《반독촉통(反獨促統)》조직을 세우려고 여러 모로 노력했지만 줄곧 그렇다 할 결과를 보지 못하고있었다. 2002년 새해맞이초대연이 있은 후의 어느 날 대사관의 리빈대사가 한성호박사를 례방, 중한수교에 력사적 기여를 한 한박사에게 이번에는 《반독촉통》조직 결성에 힘을 실어줄것을 희망했다. 한성호박사는 이에 선뜻이 응해나섰다. 《이것은 중화민족의 대사입니다.분렬을 반대하고 통일을 촉진하는것은 우리 모든 중국인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대사님, 시름 놓으십시오. 한달내로 이런 조직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76세 고령인 한성호박사는 불타는 애국충정을 안고 바로 그 이튿날부터 반독립조직 결성을 위한 작업에 몰입했다. 2002년 2월 14일,한박사의 발기하에 애국교민조직 《서울중국교민협회》가 설립됐다.이날 한박사는 특수한 감정을 안고 중화인민공화국 5성붉은기를 손수 회장에 걸었다. 이것은 한국화교사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린 5성붉은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2002년 2월 23일,한국 화교사회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반독촉통》을 취지로 내세운 단체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련합총회》가 역시 한성호박사의 발기하에 고고성을 터쳤다. 한성호박사는 특유의 대지대용(大智大勇)과 비범한 조직력,그리고 불같이 뜨거운 애국지성으로 짧디짧은 10여일 동안에 두개의 큰 화교조직을 설립함으로써 중국의 평화적통일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한것이다.   맺는 말 한박사한테는 세속에 물젖지 않는 오기가 있고 강권에 휘여들지 않는 절개가 있다. 그는 개인의 은혜와 원한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대의를 중히 여기는 열렬한 애국자이다.   인민대회당에서 중공중앙 호금도총서기와 중화전국귀국화교련합회(략칭 전국교련) 림조추주석(오른쪽)의 친절한 접견을 받고있는 애국화교 한성호박사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닷새후인1988년 3월 1일 대통령부에서 노태우부부와 기념사진을 남기다. 1993년 2월 대통령을 대표하여 한성호박사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고있는 한국 서울시 리상배시장(왼쪽).
4    리명성-중국 경제발전전략연구의 나젊은 전문가 댓글:  조회:4439  추천:91  2007-08-15
17차 당대회 대표, 중앙국가기관걸출청년, 귀국류학생선진 --------------------------------------------------------- 중국의 대외개방, 경제글로벌화, 다국적산업합작 등에서 중요한 성과/ 25만자에 달하는 개혁개방의 성공경험 총화 중국경제발전의 전략적구상 및 그 전망 제시/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 중앙국가기관걸출청년, 귀국류학생선진개인 등 영예 안아                         ------------------------------------------------------- 중국기업련합회 부리사장 리명성(李明星)이 최근 중앙기업계통(북경주재) 당대표회 의에서 17차 당대회 대표에 선거됐다. 16차 당대회 대표인 리명성은 이번 17차 당대회 8명 조선족대표중의 한사람이다.   10여년래 리명성은 중국대외개방형경제발전, 경제글로벌화와 다국적산업합작, 다국적회사의 국제화경영 등 과제를 주로 연구하면서 중요한 성과들을 쌓아올렸다. “중국 경제체제 전환연구”, “기업집단발전의 리론 및 실천 연구” 등 국가 중대항목 연구, “WTO가입후 중국 주요공업무역분야에 가져올 영향 및 대책 연구”, “국가 산업기술 정책요강”의 기초(起草)작업 등 중요사업에 주요성원으로 참가하였으며 “중미과기 련맹년차회의”, “중일경제고급회담”, “중한산업합작위원회”, “2006중국기업고봉회의” 등 정부간 대외교류와 국제합작사업에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과제의 책임자로서 미국스탠퍼 드연구원, 일본가사까와평화재단, 프랑스레온증권그룹, 한국산업연구원 등 유명한 국제기구와 련합으로 “중국투자포럼”, “정부와 다국적회사 원탁회의”, “중외합작기업현황조사연구” 등 고차원의 국제합작항목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사회적효익을 창출했다.   저작도 풍성하다. , , 등 전문저서를 펴내고 등 수십편 의 론문을 국내외 중요 신문간행물에 발표했다. 그중 25만자에 달하는 은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에서도 출판됐는데 체계적인 론리구조와 풍부한 실증데이터로 중국이 체제전환과 경제발전에서 이룩한 성공적경험을 총화하고 21세기 중국경제발전의 전략적구상 및 그 전망을 명확히 제시하여 국내외 전문가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리명성은 국무원과 중앙기관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 “중앙국가기관 걸출청년”, “귀국류학생선진개인” 등 영예칭호도 수여받았다. [인물간력] 리명성, 1965년 2월 길림성 영길현 출생. 1984년 영길현조선족 제1중학교 졸업. 1990년 길림대학 졸업. 1990년부터 일본, 영국에서 경제학(석사, 박사) 전공. 1995년 귀국 후 국가경제무역위원회 처장, 국무원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연구쎈터 국제부 부장, 중국 기업련합회국가련락부 주임 겸 다국적회사연구소 소장 등 직을 력임. 현재 중국기업 련합회 일을 보는 외 중국민족경제대외합작촉진회 부회장,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리사, 중국 사회과학원 특약연구원, 국제관계학원 겸직교수, 중앙TV 재정관찰원 등 직도 겸임하고 있음.   //길림신문    
3    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댓글:  조회:3902  추천:96  2007-05-06
리룡희,“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 탐방   《길림신문》박문희 기자       신임 장춘시 부시장 리룡희씨를 만나기란 실로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와 그의 례절스럽고 열정적인 장용 비서를 통해서 그의 행적을 조금 알수 있을 뿐 만나기가 어려운건 물론 전화를 통한 대화조차 기대하기 쉽잖았다. 취재과정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거의 사무실에 눌러앉아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전 장비서에게 수차례 간곡한 부탁을 해서야 드바쁜 시장실무의 틈새를 찾아 짧은 만남의 기회를 요행 가질수 있었다.   “시장님을 만나 뵙기가 굉장히 어렵네요. 공청단 성위에서 일을 보시다가 장춘시 부시장으로 오시니 사업이 훨씬 바쁘시지요? ”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일도 물론 바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공청단위에서 사업한 13년간 기자들의 취재요청이 무지 많았어도 저는 전부 사절했댔습니다. 소문을 적게 내고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딱 한번 례외가 있는데 16차 당대회 때 이상 분들이 젊은이가 (기자 앞에) 나가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취재를 수락한 적이 있습니다. ”   “아, 그러세요?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 주시니 다행이군요. 부시장으로 오신 후 무슨 일을 맡아 보십니까?”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부문입니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소와 단위가 있는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합니다. 례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상업기업이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입니다. 대표적 결손단위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는데 이 기업은 10년 동안 결손기업의 모자를 써 온 오랜 문제꺼리 단위죠.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 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만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무척 앓았습니다. 저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깊이 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들이 댔습니다. 법원 등 관련부문에도 직접 찾아 가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두달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열었어요. 지금 문제는 점차 풀림새를 보이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 확실한 해결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3월 1일에 도임해서 80일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 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시장관리를 하면서 음식안전을 틀어쥐는 데로부터 해외로 로무자를 파견하고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할 일이 아주 많다. 장바구니공사는 장춘시의 으뜸가는 공사로 현재 식료품안전정보통보 기제를 건립중이다. 음식안전관리를 보면 륙속 비법아가위과자가공점, 비법우유류통점, 비법개고기가공점 등 소탕전을 치렀는데 그중 비법개고기가공점을 들부신 전역은 영향면이 넓고 효과가 좋아 소비자들의 한결같은 옹호를 받았다.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질 않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어요.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는 가운데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져 보니까 3월 초 이래 제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한주일에 불과 두어 시간밖에 안돼요. 그외 시간은 전부 밖에서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돌렸습니다.”   “인터넷검색을 통해 리시장님께서 투자유치대표단을 이끌고 한국 울산시를 방문한 소식을 읽었는데 많은 성과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   “방문은 성공적이였습니다. 박맹우 울산시 시장과 만나 좋은 얘기를 나눴고 또 경제합작계약들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합작항목들이 작동과정에 있기 때문에 언론에는 최대한 압축보도를 했을 뿐입니다. 그 기간에 삼성, LG와 SK 본부도 방문했습니다. 현대자동차 본부를 방문했을 땐 명년에 열리는 ‘장춘제 4기국제자동차박람회’에 참가할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금년 6월은 장춘시와 울산시가 자매결연을 한 10주년 기념월간입니다. 이달 하순에 울산시 정부와 의회에서 기업인대표단, 문화교류대표단과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장춘시에 와 기념축제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번 행사 기간에 고신기술개발구의 한 거리를 울산거리로 명명하는 의식과 시내 공공뻐스 한대를 울산뻐스로 명명하는 의식도 가지게 됩니다.”   학습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리룡희 부시장은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요, 학습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자칫 형세에 뒤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언제나 감히 리론학습을 늦출 수 없었다”고 했다.   2002년 그는 중앙당교 중청년 간부 훈련반에 참가했었는데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서와 론술을 참답게 정독하고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란 론문은 전국 핵심간행물인 (理論前沿)에 발표됐다.   리룡희는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학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업여가를 타 대량의 경제학도서를 탐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관련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2001년에는 길림대 경제학박사 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공청단사업을 할 때 기층에 대한 료해를 비교적 투철히 쌓은데다가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비교적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뒤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하여 배역전환(角色轉換)을 완성할수 있었던것이다.   “학습과 실천에는 끝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자기의 소신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사업과 생활에 대한 태도를 물었을 때 그는 “이 면에서 나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은 편 ”이라고 했다.   직위가 높아짐에 따라 그는 렴정문제에 보다 깊은 주의를 돌렸다. 자각적으로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했다. “제1책임자” 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았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활면에서 저는 매우 만족하는 편이고 사업면에서는 반대로 늘 부족감을 느낍니다.”   그의 과외취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제일 좋아하는것이 촬영이라고 했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기회를 리용하여 그는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의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었다. 최근에 그는 사진 500여폭에 7만여자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黑白美國)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짬을 타 외국어공부도 내내 손에서 떼지 않고 있다.   “주요취미가 촬영이지만 전혀 시간적 여유가 없어 지금같애선 퇴직한 후라야 사진기를 들것 같네요. 동북 로공업기지 진흥사업에서 현재의 형국은 동북 3성의 세 도회지 및 대련의 합동작전과 각자 자체우세발휘의 구도입니다. 경제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노는 ‘3두마차’는 적극적인 투자, 내수 진작과 수출 확대입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직접 물류사업과 이어져 있습니다. 제가 맡은 과업도 실상 물류사업인데 제 어깨가 무거워 짐을 느끼는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업상 압력은 받고 있지만 잘 할수 있다는 신심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정한 시간이 됐다. 다음 일이 리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는 후날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로 리시장과 약정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길림신문》 2004년 5월   ======================================================================================= 16차 당대회 대표 -- 리룡희 박문희   【리룡희 략력】     1963년 출생,길림성 매하구시 사람.     1986년 연변농학원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음. 1988년부터 선후로 공청단 연변주위 부장, 훈춘시 량수진 당위 부서기, 공청단 연변주위 부서기, 서기, 복건성 하문시 정부 판공청 주임조리, 연변주 조직부 부부장, 공청단 길림성위 부서기, 서기, 당조서기, 길림성청년련합회 주석을 력임.     2004년 2월 장춘시 정부 부시장으로 조동.     1998년 길림대학 경제학 석사학위 획득.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 미국 일리노이주 등지에서 학습 고찰.     2002년 16차 당대회 대표에 당선.      -----------------------------------------         리룡희는 1986년 사업에 참가한 뒤 부동한 일터에서 간단없이 자기를 련마했다. 공청단성위 부서기로 발탁되자 그는 변화된 사업환경에 재빨리 적응, 주요령도에의 배합에서 직접 주 책임을 지는데로, 몇개 부문을 맡아 관리하던데로부터 전면사업을 주최하는데로의 배역전환을 신속히 완성했다. 아울러 사업주제의 요구에 따라 전 성 공청단의 제반 사업을 효률적으로 설계 조직했다. 구체적인 사업 행정에 그는 “봉사성 발휘”와  “창의력 개발” 이 두가지에 모를 박았다. 청년들의 책임감을 유발시키는 각종 주제교양활동과 2차 창업활동을 고안 전개하였으며 청년취업과 재취업 이벤트도 활발히 벌려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이를테면 도시에서 취업과 재취업 활동을 벌린 3년 동안에 전 성 공청단 조직들에서는 선후로 3500여명 청년들의 자주창업을 도와 주었으며 467명의 재취업전형과 창업 선줄군을 키워 냈으며 3만여명 귀휴청년들을 재취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외 5.6만명 농촌청년들을 도와 취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지도부 내부에서 그는 주변의 일군들을 성심과 관용으로 대하면서 할 말이 있으면 앞에서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책상우에 내놓도록 고무해 주었으며 서로 리해하고 신임하며 협조 배합할것을 창도했다. 공청단 성위에서 사업한 시간이 길고 자격과 경력이 오랜 그지만 지도부 성원들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절차를 중요시했다. 특히 인사문제라든가 경비문제같은 일을 처리할 때면 의식적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청취를 하고 사상을 통일한 전제하에서 집단 결책을 하였다.       공개경쟁을 창도하는 방법으로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를 선발 등용하고  기관내에서  학습교양활동을  전개하며  기층에 직무를  가지고 내려가 단련받게 하는 등 경로를 통해 청년간부를 적극 선발하고 훈련시켰다.       리론학습을 늦추지 않았다. 리론학습은 정치자질을 높이는데 있어서의 관건이라고 리룡희는 말한다. 2002년 학습기한이 1년인 중앙당교 중청년간부 훈련반에 참가했던 그는 이를 계기로 맑스주의 경전저작과 론술을 정독하고 등 6편의 론문을 써냈는데 그중 는 전국 핵심 간행물인 < 理論前沿 >에 발표됐다.     경제지식과 현대기능에 대한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상사업가운데서 기층 조사에 류의, 3년 남짓한 시간내에 전 성 60개 현(시,구)을 거의 다 돌았으며 제1자동차공장, 통화제철소, 길림화학공정공사 등 성내 수많은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돌아보면서 특정쩨마의 조사연구를 진행, 하부의 실정을 대량 장악하고 기층을 도와 걸린 문제들을 적극 풀어주었다. 한편 사업 여가를 타 수많은 경제학 도서를 열독하고  50여만자에 달하는 국내외 경제지식과 경제동정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울러 등 5편의 론문을 써냈다. 그중 는 중앙당교로부터 우수고찰보고로 평정됐다. 경제학리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리룡희는 2001년 길림대 경제학 박사공부에 몰입,  동북아 구역경제를 전문 연구했다. 최근에는 란 쩨마의 론문을 완성했다.     기층에 대한 료해가 비교적 투철한데다 정치리론과 경제리론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리룡희는 장춘시정부에 전근된 후 재빨리 새로운 사업환경에 적응할수 있었다. 출근 이튿날부터 곧바로 기층에 대한  조사연구에 들어가 조사를 하는 한편 문제해결에 착수했다.     리룡희가 맡은 사업은 상업, 대외경제무역, 상업국유자산경영과 공상관리 부문이다. 이런 부문들의  산하에는 수다한 기업과 단위가 있는 데 경영활성화와 정돈개혁의 임무가 십분 번중하다. 비컨대 상업국유자산경영공사 산하에만 해도 89개 국유 상업기업소가 있는데 그중 대다수는 결손기업이다. 대표적 결손 기업소로 중흥백화점을 들수 있다. 이 기업은 10여년간 결손의 음영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오랜 문제거리 단위이다. 2512명 종업원의 로임을 내주지 못해 종업원들의 래신래방이 그칠새 없는데다 새로운 문제들도 자꾸 터져 나와  시정부는 물론 성정부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리룡희는 중흥백화를 전반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 돌파구로 삼아 해결하기로 작심, 깊이있는 조사로부터 착수해서 문제를 발견하는 족족 해결책을 댔다. 법원 등 관련 부문에도 몸소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중흥문제를 가지고 도합 8차례의 회의를 소집, 올해 안으로 걸린 문제를 기어이 다 풀어내고야 손을 뗄 잡도리다.     이처럼 그는 도임해서 석달도 안되는 사이에 안고있는 문제가 돌출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십개 기업과 단위를 거의다 한두차례씩 훑었다.       그의 사업은 사실 무겁고 번거롭다. 해외로 로무일군을 파견하고 시장에서의 음식안전을 틀어쥐는데로부터 시작해서 초상인자대표단을 이끌고 해외고찰방문을 하고 내외 고찰단을 접대하는데 이르기까지 크고작은 일들이 항상 끊이지않는다. 사무실에 앉아서 문제를 연구할 시간마저 없다. 그러니까 조사하는 한편 문제를 해결하고 배우면서 일하며 일하는 가운데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 3월 초 이래 한주일에 그가 단독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은 시간은 불과 두시간밖에 안 된다. 그외 시간은 전부 기층에 내려 가 실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썼다.     사업과 생활면에서 리룡희는 자기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다. 직무가 진급함에 따라 그는 특히 렴정문제에 보다 자각적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당내의 감독, 법률의 감독과 군중들로부터 오는 감독을 접수하고 배금주의, 향락주의와 극단적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권력관, 명예지위관, 리익관과 인정관을 잘 넘기기에 십분 류의한다. 그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명히 가르고 “제1책임자”란 특수신분을 리용해 사리를 도모하거나 특수화를 부리지 않으며 주택, 승용차의 사용문제에서나 개인생활, 가족과 친척,인척의 취업 등 문제에서 종래로 단위에 페를 끼친적이 없다.       그의 과외애호는 주로 촬영이다. 1999년 2월부터 6월까지 길림성 제3기 미국견학 간부훈련반에 참가한 4개월간의 기회를 리용,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의 자료를 수태 찾아 읽고 연구하였으며 피타는 노력을 들여 미국사회 이모저모에 대한 대량의 사진을 찍어 사진 500여폭에 7만 여 字의 문자해설이 달린 책자 을 탈고, 출판했다. 독서 역시 그의 애호이다. 그가 읽는 책은 고금중외의 정치, 경제, 문화에 천문, 지리, 력사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아주 광범하다. 그외, 그는 컴퓨터기술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다. 외국어 공부도 내내 놓지 않고 있다.   , 료녕민족출판사, 2004년
2    연변항운협주곡 댓글:  조회:4244  추천:80  2007-03-30
   연변항운협주곡 높은 산 깊은 골 동트는 연항 망망한 대해를 헤치고 간다 야망과 패기가 가득찬 연항 진취적 기상은 우리의 자랑    --에서   연항--심신유곡에 떠오른 기적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오늘 세상은 환상과 신화를 현실로 만드는 시대에 와있다. 하늘에 올라 별을 딴다 해도 별로 놀랄 이가 없으리만치 세상은 많이 변해 있다. 연변항운공사의 다섯척 상선이 동아세아 각국의 주목례를 받으며 일본해, 황해를 주름잡아 달리고있다. △“연변1호”화학품특수선의 위용. 1992년 10월 10일, 연변의 첫 상선 인수식이 천진항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이날 연변, 길림은 해상선박이 없던 자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부터 나흘만인 14일, 는 화학제품을 가득 싣고 천진항을 떠나 18일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는 연변항운사의 뜻깊고 성공적인 첫 운항이였다. 드디여 1993년 6월 12일 연변항운공사가 자기의 탄생을 세상에 선고했다. 그후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변항운은 1,000여만 딸라에 달하는 거액의 투자로 네척의 선박을 구입, 국제 항선우에 륙속 띄움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래웠다. 바다와 부두를 끼지 않고 있는 내륙지로서 해운의 초창기에 이처럼 방대한 자금의 투하와 더불어 총적재톤수 2만톤을 육박하는 중형선박 다섯척을 연이어 경영에 투입시킨 일은 국제해운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물다 한다. *     *     * 지난 3월 4일, 연변자치주 정협 위원이며 연변항운공사 회장인 전룡만씨가 조선 평양에서 “각방면의 조화협력을 거쳐 부산--청진항로 개척의 모든 준비가 전부 끝났다. 3월 15일 우리 연변항운이 개척한 부산--청진 컨테이너 정기항선은 예정한대로 정식운항에 들어가게 된다”고 전화편으로 정식 통지를 해왔다. 금년 3월 15일!남북분단으로 끊어진 동해허리의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청진항 리용을 통한 일본해 진출을 실현하게 될 이날은 두만강지역 개발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하루로 세계 해운사에서도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될것이다. 청진--부산 직통!근해를 통해 세계로!이 꿈은 인제 우리 앞에 현실로 성큼 다가왔고 아울러 아득히 멀었던 세계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청진항은 현재 적극 개발중인 로씨야의 짜르비노항과 조선의 라진항 외 요즘 유일하게 열릴 우리 성의 대외 수출 항구이다. 주지하다싶이 여직껏 흑룡강, 길림, 내몽골 등 지역의 바다를 통한 수출수입은 거의다 멀고 붐비는 대련항을 통해 어렵게 진행돼왔다. 이 항선이 개통됨으로 해서 이 지역의 “3자기업”을 망라한 많은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리용하여 막대한 경제적 리익을 창출하게 될것이다. *    *    * 연변항운의 개척사업에 줄곧 큰 힘을 경주해왔던 연변자치주 남상복부주장은 연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연항은 중국내륙의 유일한 국제항운이다. 산골연변에 선 연항은 일대 기적이다. 연항의 신장발전으로 해서 연변과 주변지역의 수출입은 시간, 경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는 가까운 해상통로를 갖게 되었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이 지역의 경제는 커다란 활력을 얻게 될것이다. 실상 연항의 의의은 이 지역을 훨씬 초월한다.” 기회의 서광 휘여잡고 --사나이 전룡만의 “야심작”                              ---------------------------------------------------------------------- “연변1호”--디젤오일탱크선(유조선), 적재톤수 3404톤, 93년 7월 17일 일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 운항 구역: 한국의 울산--홍콩--중국의 대련, 상해, 광주--필리핀의 마닐라 ------------------------------------------------------------------- 80년대 하반으로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훈춘의 개방작업과 두만강출해권회복사업, 탈랭전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가온 두만강지역개발에의 유엔의 참여는 동북아의 중심, 속칭의 “황금의 삼각주”지대에 력사적인 발전기회를 시사했다. 국제적개발작업이 서막을 고한뒤 정부에서 “제2홍콩”건설을 영접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자국나게 펼치는 가운데 기회의 서광을 틀어잡고 바다에로의 직접진출을 시도, 행동에까지 옮긴 이는 다름아닌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금년 43세) 한사람 뿐이다. 85년도 창업의 난바다에 뛰여들어 갓 터진 시장경제의 모진 세파를 헤가르며 선후로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공사, 중조합자기업연진수산물합자경영공사, 중한합자기업 연고정수기유한공사 등 기업을 일떠세우고 드디여 연변대외무역경제개발그룹을 설립하기에 이른 전룡만씨가 진정 바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도 10월 중국해원대외기술복무 연변공사를 세울 때부터였다. 웅숭깊고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들먹이는 웅심으로 보다 큰 활무대에로의 출범을 계획한 그는 한국 해운계의 인사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서둘러 출두여건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드디여 당시 아직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에서도 국내 처음 한국 선주협회와 공식관계를 맺고 연변의 조선족가운데서 부원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한국,일본 등 나라의 상선에 수송하는 등 일들을 신용있게 추진해 나갔다. 수백명 선원을 외선에 보내면서 전씨에게는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국제물류업은 90%이상이 해운을 통해 실현되는데 우리 절로 해운업을 하면 어떠냐?“황금의 삼각주”에서 주무대로 등장한 연변이 으례당당 자기 몫을 해야 할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암시가 되어 그의 뇌리엔 차츰 “우리 항운을 세우자”는 대담한 구상이 륜곽을 그리며 나타났던 것이다. 전룡만씨의 구상에 대해 자치주 정부에서는 물심량면으로 열성껏 도와나섰다. 그와 수년간 합작을 해왔던 한국벗들도 발벗고 나서서 협력했다. 발뿌리 닳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입술이 닳도록 유세를 들이댄 결과 한국 금융계를 크게 감동시켜 마침내는 한국특수선 주식회사, 동북선박주식회사 등의 결정적인 련대보증밑에 거익의 국제금융을 도입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운데 전씨의 끝질긴 노력, 강한 추진력, 드높은 신용이 한국 벗들이 그를 믿고 도와 나서도록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국제표준의 중형해운회사를 일거에 일떠세운 전룡만씨에게는 할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유예함이 없이 일들을 벼락치듯 밀어나갔다. 항운의 원활한 성장을 유력하게 보좌하기 위해 외국 벗들과 공동히 투자하여 한국 서울에 장룡해운회사를, 홍콩에 룡방해운회사를 설립하고 북경에 영업부를, 서울, 홍콩에 선박대리점을 세웠으며 그 외 대련, 광주, 상해 등 10여 개 연해도시의 대외수송대리공사와 실무계약을 체결하고 중국대외수송집단 도문공사 등과도 실무협조협의를 달성했다. 최근에는 한국에 있는 해운집행자매사인 장룡해운회사와 함께 해운경영관리정책협의회를 정식 설립하고 연변항운 연변본사 조직기구도 새오 조정, 확인했다. 이로써 연변항운공사의 조직 기틀은 원만히 잡혀진 셈이다. 그러나 연변항운이 해야 할 일이 어찌 이에만 그치겠는가?   기둥재목이 수풀 이루게 --연항의 인재전략   --------------------------------------------------------------------  "연룡3호"--잡화물선, 적재톤수 8800톤. 93년 10월 24일 중국 영구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의 부산--중국의 영구, 룡구, 상해--대만의 기륭, 화현 ---------------------------------------------------------------------   “인재! 인재!” 항운공사를 세울 준비를 할때부터 전룡만씨의 머릿속에서는 내내 이 문제가 지꿎게 맴돌이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그마한 일을 벌려도 인재가 수요되는 법인데 황차 바다라는 개념과 황운이라는것을 전혀 모르는 연변땅에서 그가 세우려는 것은 국제대상의 현대화한 대형물류업이 아닌가! 그에 걸맞는 상당수의 인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선진적인 선박을 아무리 많이 해놓는다 해도 그것은 실상 페철무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는 중해연변공사에서 해원송출사업을 할때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면서 풍부한 해원사업경험을 쌓은 량동섭, 엄영자 등 중견인물들을 중역진에 기용하는 한편 고급해원양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92년도부터 해마다 100여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해서 중등전문학교 졸업생을 남경항해학원에 19명, 광주항해전과학교와 대련해운학원에 40명을 학습보냈고 또 한국 선주협회와 연줄을 달고 반년에 2명씩 한국의 해운회사에 보내여 실습하도록 했다. 그외 해마다 영어에 능한 대학교 졸업생들속에서 엄격한 시험을 거쳐 신입사원을 10명씩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하다고 그는 인정했다. 참신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계기업의 발전추세를 따를수있는 그런 관리일군이 필요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취한 방법이 외국으로부터의 인재도입이다. 처음 청해들인 인재는 화교출신, 한국태생의 담도굉(한족, 32세)씨다. 84년도 한국고려대 기업관리학부를 나온 그는 현대그룹에서 유망한 관리일군으로 일하면서 오스트랄리아 주재원으로도 3년간 근무했었는데 상당한 외국어 회화능력과 현대화기업관리능력을 갖고있다. 다음은 신연우(24세)씨인데 특수산업학교인 부산해양대에서 항만, 운송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항운지식이 막히는데가 없고 조직능력도 갖고 있으며 영어에 또한 능란하다. 그들은 선후하여 서울서 전룡만씨의 눈에 우연히(?) 걸려들었던 것인데 허심탄회한 속심얘기들을 수차 나눈 끝에 담도굉씨는 현대그룹의 정예공업회사에서의 승진기회를 내버리고, 신연우씨는 미국의 대형물류회사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결국 “심산유곡의 연변항운”에서 하나와 같이 모이게 된것이다. 그들의 연변진출에서 연변개발의 밝은 전망이 전제로 작용한 것은 물론이지만 전씨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떠밀어주었던 것도 역시 사실이다. 연변항운에 온 첫날부터 그들이 공동히 겪은 것은 뛰고있는 바깥세상과는 의념과 사고방식이 판판 다른 그런 사업환경과 분위기였다.“환경 속에 내가 용해돼 버리고 마느냐 아니면 환경을 변화시켜 뛰는 세계에 적응시키느냐”가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도전을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적극적인 스타일로 그 도전에 응했다. 말그대로 항운이안 세계적인 물류서비스산업인만큼 국제관례에 따르도록 연항의 모든 기초사업을 다져가야 했다. 총경리 중임을 떠멘 담도굉씨는 이한 요구에 좇아 회장보좌, 통솔관리, 업무감독, 정책연구, 영어교수 등 일상사무를 타진해나가는 한편 “직원의 자질향상”,“회사의 대외이미지 향상”,“현대화기업질서수립”을 목표로 내걸고 그것을 회사의 전반 상버에 철저히 관철시켜나갔다. 전화를 받고 손님을 접대하는 례절, 상하급간의 례절로부터 시작해서 사업에 림한 자세, 실무자질제고 등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굳어진 재래의 습관을 새로운 이미지로 부각한다는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그것을 봉사정신, 애사정신, 분초정신 등 일련의 정신교육으로 받쳐주면서 아주 효과 있게 이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연항 종합기획실에 도임한 그날부터 신연우씨는 우선 지식과 경험의 결여로 초래되는 낮은 사업효률, 주, 부 순서가 뒤바뀌고 사업절차가 무시당하여 일어나는 질서마찰 등 곤혹을 자주 치러야 했다.하여 그는 자신이 익해 배워두었던 전업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선원, 선박, 재무, 해사 등 제반 부서에 대한 종합적 기획관리와 해운지식 전수 등 업무를 진지하게 수행함과 동시에 서둘러 모든 사업절차를 새로 분명하게 만들어내고 각 부서들에서 소정의 절차를 드팀없이 밟도록 확실한 조치들을 따라세우기에 전념을 했다. △“연변항운”은 태평양을 활무대로 삼아가지고 연변과 주변지역의 경제신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충정을 토설하고 있는 연변항운공사 회장 전룡만씨. 연항에서 외국의 선진적 관리경험을 도입하여 조직, 관리, 경영체계를 일원화하고 인사, 행정, 재정, 기획체계를 개혁, 조정하는 행정에 한국에서 온 이 두 젊은 일군은 각자의 사업분야에서 열심히 뛰는 정신, 상당한 실력과 높은 사업효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전 직원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영향과 전체 직원들의 노력 밑에 현재 연항에는 현대화 기업답게 완전히 새로운 사업분위기가 형성되였다. 여기에서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거나 사업질서를 흐리우거나 상급에 거역하는 직원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창의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맡은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반수 직원이 중등영어 수준에 이르렀고 전체가 컴퓨터 조작을 배워냈으며 또한 상당한 해운지식을 배워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중견력량들이 불끈불끈 솟아나오고들 있다. 바뀌여진 환경은 어느새 사람을 키우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     *     * 이 장에서 간과해 넘어가지 말아야 할 건이 하나 있다. 그것인즉 전룡만 회장이 한국에 스승 두 분을 모셨다는 것이다. 한분은 정책고문으로 한국동국대 경제학교수이며 동북아경제연구소 회장인 김태홍선생이고 한분은 한국 동북선박주식회사 리사인 한강륭선생이다. 1965년도에 연세대를 마치고 미국에 류학 가서 박사칭호까지 받은 김태홍교수는 귀국한 뒤 한때는 한국정부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으로도 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두만강 개발 등 국제 경제협력활동에 빈번히 참가하면서 , 등 저서도 펴낸 한국 1류의 중국경제연구 전문가이며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명망 높은 분이다. 1968년도에 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한국특수선주식회사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한강륭리사는 풍부한 해운경영경험을 가진 실력가인데 중국조선족선원송출사업에서 전룡만씨와 수년간 합작하면서 연항의 설립을 위해 크게 조력했던 분이다. 이 두분은 현재 연항으로부터 여러 가지 연구쩨마를 맡아가지고 연항의 순탄한 발전을 위해 고심들을 하고있다.   *     *     * 연항의 인재전략은 한마디로 말해서 현존인재를 기용하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며 외부인재를 도입하고 외계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회사에 적용시키는 전략이다.   동북아해운과 사고방식 전환 --김태홍교수,전룡만회장과의 인터뷰 -------------------------------------------------------------  “연룡4호”--세미컨화물선, 적재톤수 1600톤, 93년 12월 24일 부산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부산--청진 -------------------------------------------------------------   (연항에 대한 몇가지 관심사를 가지고 일전에 두분과 인터뷰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따로 가진 부동한 내용의 대화지만 서술의 편리를 위해 여기에 한데 묶어 적는 바이다.)   김태홍교수와 가진 인터뷰   기자:갓 탄생한 연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태홍교수: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지리적으로 불리하고 (바다와 떨어져있음을 말함--필자 주) 기초작업이 끝나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은 연변실정에서 이와 같은 큰일을 해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연항의 성과를 적어도 연해도시 상해나 대련에서 성취한 것의 200%로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의 삼각주”개발과 더불어 이 지역의 기업들은 연항의 선박을 최대한 리용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연항은 이 지역 경제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기자: 근년래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해운업도 진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김교수의 견해는요? 김교수: 연항이 국제해운저조기에 탄생한건 사실입니다만 실상 저저기의 끝은 상승의 시발점으로 되기에 연변항운도 상승의 기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동북아지역의 경제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경제기술합작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 무역을 통한 물동량이 급 장성하게 될 것인데 물동량 대부분은 항구를 통한 해운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항운은 이 지역 발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입니다. 기자: 연항의 성공에 대한 확신여부를 동북아 개발의 큰 시각으로 고찰함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국제해운의 특유의 존재발전법칙으로도 가늠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김교수: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해답하자면 이 지역 해ㅔ운의 성격부터 구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의 해운은 그 성격으로 보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이 지역과 같이 가까운 거리의 해운에는 중형선박이 알맞지요. 하지만 동북아의 일본, 중국, 한국, 로씨야 등 나라는 모두 해운 강국들인만큼 대부분의 국가 기간 해운 선사들이 모두 대형 선박들로 편성돼 있어서 원양해운에는 알맞지만 근거리해운에는 알맞지를 않아요. 소형 선사들은 내항이 위주여서 역시 이지역의 해운에 알맞지 않습니다. 황해, 일본해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지역에서는 주로 이삼천 톤, 만 톤 좌우의 중형선박들로 편성된 연변항운이 우세입니다. 대형선박해운과 소형 선박해운의 “틈새시장”--이것이 바로 동북아 연근해 해운입니다. 연변항운은 이 “틈새시장”을 최대한 리용해서 신속히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자: 대형상선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어렵다는 리유는 뭡니까? 김교수: 일본, 한국, 대만 등 나라와 지역의 경우, 비싼 인건비가 그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관건적 요인이 됩니다. 다음 륙상관리비가 너무 비싸고 비용이 많이 들어 도저히 리윤을 내기 어렵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되지요. 대형선박의 연근해해운은 수지가 맞지 않은 노릇이라 그거지요. 그러나 중국의 경우 저렴한 인건비의 선원을 양성할 수 있고 륙상관리비도 상대적으로 싸기에 한국, 대만 등과의 생존경쟁에서 충분한 우세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여건을 어떻게 리용하느냐는 완전히 연항 지도진의 역할에 달려있습니다. 요컨대 전룡만회장은 추진력이 아주 큰 사람이고 정부 측의 대폭적인 지지도 있기에 연항은 전망이 매우 밝다고 봅니다. 이를 확신하고 있기에 한국 측에서도 연항을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거죠. △국제금융도입은 신용을 생명으로 한다. 그만큼 전룡만회장의 어깨에 놓인 짐은 무겁다. 국제차관서약서에 싸인하고 있는 전씨(앞줄 가운데 사람).   전룡만회장과 가진 인터뷰 기자: 현재 여론은 연항이 전대미문의 사업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해나가면서 전회장이 가장 깊이 느낀 감수는 무엇입니까? 전룡만회장: 모든 일에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놀랍게 변해있는 바깥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요. 쉬운 례 하나 들어봅시다. 로임을 누가 주냐고 물으면 우리는 사장이 주는 게 아니라 고객이 준다고 말합니다. 사장이 준다는 것과 고객이 준다는 것은 완전히 상반되는 사고방식이지요. 로임을 고객이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다면 전화 한통을 받아도 심상히 넘겨버릴 수가 없습니다. 실상 전화 한통도 순간광고에 다름 아니죠. 친절한 표준어로 “안녕하세요! 연변항운입니다.”고 하면 그게 바로 광고가 되거든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냥 견지를 해나가면 그게 곧 큰 광고역할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전엔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요. 순간순간을 잘 해 나가는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벌린 게 “초(秒)관리운동”입니다. 매 하루를 분, 초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의 경쟁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자: 국제물류서비스기업으로서의 연항의 영업활동취지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통일적이고도 일원화된 경제체계 속에서 유력한 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민족과 국적, 지역과 국경에 상관없이 세계적인 조직망을 건립하여 영업활동의 국제화와 효률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타이 등 7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중 서울,연변의 륙상 근무 인원만 해도 16명이 외국인입니다. 사업효률성과 경제효과성에 구애 없이 월급을 주고 상금을 주던 그런 무책임한 관리체계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분공위임하고 그 책임과 근무여하에 따라 승진을 결정하고 공과를 판단하는 새로운 관리체계로 바꿔버리지 않으면 안 되지요. 우리는 항운의 현대화관리요구에 따라 20여세, 30세 좌우의 젊은이도 지도진, 중역진에 올려놓고 그렇지 못한 경우엔 원로파들도 말단 직원으로 배치하는 등 대담한 개혁조치를 댔는데 전반 사업에 대한 추진이 매우 컸습니다. 내부관리 측면으로 볼 때 우리의 사업효률은 이미 국제수준에 와있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자: 전회장의 최종목표는 무엇입니까? 전회장: 동북아 최대의 기업을 키워나가자, 이 지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어 사외에 보다 많은 재부와 가치를 창조해주자는 게 저의 리상이자 인생목표입니다. 목표를 크게 세워놓고 보니 어려움에 부딪칠 때도 많고 저의 능력과 회사의 능력에 비해 부하가 점점 커가고 있음도 느끼게 됩니다만 그럴수록 나 하나를 둘로, 셋으로 쪼개서 배 이상으로 뛰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국제해운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기업을 모델로 삼아 열심히 뛰고 있어요. 이 순간에 일본의 회사들은 어떤 스타일로 일하고 있느냐? 이런 생각을 안고 말입니다. 직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처사가 국제적인 흐름에 몹시 뒤진다면 회사가 도저히 살아남질 못할 테니까, 그리고 회사운영효률의 여하에 따라 직원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만큼 직원모두가 높은 자각을 안고 뛰고있는 거죠. 때문에 곤난도 많지만 신심으로 충만돼 있습니다. 뜻이 있는 사나이들이 애써 일한다면 사회의 지지 밑에 꼭 풍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연변자치주정부와 한국 벗들은 연항의 개척사업을 시초부터 물심량면으로 지지 협력해 왔다. 호상협력을 약속하며 뜨겁게 손을 잡은 자치주 남상복부주장(오른쪽)과 한국케미칼해운주식회사 박종규사장.   동트는 연항, 서막은 열렸다 --연변항운의 프로젝트와 밝은 전망 --------------------------------------------------------- “연룡5호”--잡화물선 적재톤수 2611톤, 93년 11월 5일 한국 서울에서 인수식 거행. 주요운항구역: 한국--일본--중국--조선 청진 -------------------------------------------------------- 금년 1월11일부터 이틀간 연변항운은 제1기 총회를 연길에서 가졌다. 이 회의는 1년 남짓한 동안의 준비와 연습을 거쳐 바야흐로 본격적 운영에 들어가는 시각에 열린,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될 중요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연항의 지난 단계 사업을 총화검토하고 세계경제,해운형쎄와 내외사업여건을 연구분석한 기초우에서 향후목표를 전략적각도에서 명확히 제출했다. 회의는, 40만톤의 화물수송과 1000만 딸라의 영업수입창출을 금년도 목표로, 년간 150만톤 화물을 수송할수있는, 총적재톤수가 5만톤에 달하는 동북아해상수송의 중견사로 발돋움하는것을 96년도 말까지의 목표로, 해륙공복합수송체계를 수립하는것을 세기 말까지의 목표로 제기했다. 연항의 “야심”만만한 삼단도약전략! 뽀세창고, 콘테이너적하장 등 기초시설의 마련, 컴퓨터련락망 설립 등 현대화고한리의 정착, 엄밀한 인재양성체계의 확립, 과학적조직, 관리체계의 진일보의 구축, 타사와의 업무제휴 등을 그 바탕에 깔고있는 이 프로젝트는 두만강 삼각주에 대한 국제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됨에 따라 허황한 신기루로가 아니라 뚜렷한 현실로 우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게 될것이다. 보라, “연변1호”는 가동해서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연습의 때를 지우고 흑자를 기록했고 그 외의 선박들도 흑자경영체계의 기치밑에 한국, 일본, 중국, 조선, 필리핀 구간을 부지런히 뛰고들있다. “연룡4호”도 당금 동북과 세계와의 거리를 엄청나게 줄여 이 지역 경제에 흥분제를 주입하게 될 것이다. 동북아지역 물동량의 급증추세는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연변항운은 부원 급 선원 700여명을 키워 국내외 여러 선사들에 수송했다. 그들은 연변 제1대의 해원들이다. 해륙공복합수송체계의 수립도 막연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소요의 거액신용차관을 약속해왔기 때문이다. 전룡만씨는 말한다-- “방향과 목표를 뚜렷이 잡아놨으니 아무튼 우선 금년을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촌놈”이 “신사무대”에서 겨루는 한해로! 아울러 겨루어 이기는 한해로! 이것은 심산유곡 연변항운의 세계로 향한 “야심”적인 도전이요, 진공태세인것이다. 이런 도전적 스타일은 1996년도 말, 본세기말에 가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약동하는 연항의 희망소재이기도 하다! (본문의 사진은 연변항운공사의 량동섭씨가 제공했음)  
1    중국 운반로케트 전문가 리상영 댓글:  조회:4172  추천:110  2007-02-18
(음악이 시끄러우시면 Esc를 누르시고) 《장4B》총설계사, 총지휘로서의 리상영,7년 여에 10차례에 걸쳐 10종의 인공위성 16매를 전부 예정궤도에 정확히 발사, 《10발 10중》의 기적을 창조하다   전국로력모범표창대회에서.   《하량하리기금상》 수상자 《며칠전 또 한방이라,그러니까 이번이 10발10중 맞지요?》 2006년 11월 15일 북경 인민 대회당에서 거행된 《하량하리기금》 제13차 시상식에서 진지립 국무위원은 상해우주비행국 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이자 《장정4호B 형운반로케트》의 총설계사,총지휘인 리상영의 손을 열정적으로 잡아 흔들었다. 진지립이 말하는 《며칠전》이란 2006년 10월 24일에 있은 《실천6호》 위성 2매 발사를 가리킨다. 《압력이 만만치 않을테죠?》리상영이 미소하며 그렇다고 하자 진지립은 《그래서 압력이 동력이라고들 하는거 아닐가요!》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진지립의 《십발십중》운운은 한점 과장도 없는 사실 그대로의 얘기다. 다른 위훈은 제쳐놓고 《장정4호B 형운반로케트(략칭〈장4B〉)》의 총설계사,총지휘를 맡은 후의 공적만 보자. 1999년 5월 10일 《장4B》는 처음으로 한방에 인공위성 두개(《풍운1호C》와 《실천 5호》)를 예정궤도에 성공적으로 쏘아올렸고 1999년 10월 14일에는 《자원1호》와 《브라질》을, 2000년 9월 1일에는 《자원2호》를, 2002년 5월 15일에는 인공위성 《풍운1호D》와 《해양1호》를, 2002년10월 27일에는 《자원2호》를, 2003년 10월 21일에는 《자원1호》와 《창신1호》를, 2004년 9월 9일에는 두개의 《실천6호》위성을, 2004년 11월 6일에는 《자원2호》위성을, 2006년 4월 27일에는 《원격탐지위성1호》를, 2006년 10월 24일에는 《실천6호》 02조의 공간탐측위성 2매를 성공적으로 발사, 정확히 우주궤도에 진입시켰다. 1999년 5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7년 남짓한 기간에 그는 도합 10차례에 걸쳐 10종의 인공위성 16매를 전부 예정궤도에 쏘아 올림으로써 10발 10중의 기적을 창조해낸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리상영이 받아 안은 《하량하리기금상》은 1994년도 향항의 애국금융실업가 하선형, 량구거, 하첨, 리국위 등 4인이 향항페 4억원을 공동 기부하여 설립한 공익성 과기장려기금으로 중국과학계의 최고상, 중국의 노벨상으로도 불린다. 리상영은 지금까지 이 기금상을 받은 유일한 조선족과학자이다.   아름다운 꿈―준비된 과학자 리상영은 1941년 10월 19일 흑룡강성 오상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오상에서 조선족 소학교와 초중을 다닌 그는 늘 품행이 단정하고 공부를 잘하는 모범학생이였다. 조선족고중이 없어 한족학교에 붙은 그는 열심히 중어를 배웠는데 나중에는 《시경》까지 술술 외워 한족학생들까지 그에게 해석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중국우주비행사업이 창건된 이듬해인 1957년,쏘련에서 《스푸트니크1호》로케트로 인류사상 첫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세상을 놀래웠다. 영화뉴스에서 그 발사장면을 본 고중생 리상영은 《나도 로케트로 하늘에 위성을 쏴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1959년 그의 꿈은 현실로 되였다. 북경공업학원에 붙어 뜻대로 로케트총체학과를 전공하게 된것이다.5년 학습기간 그는 말 그대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했다. 때는 바로 우리 나라 3년 자연재해시기라 생활고가 심각했지만 정신면의 수확은 풍성했다. 이 기간 로어를 학과목으로 배우면서 영어도 자습했다. 1964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친 그는 아장걸음을 타기 시작한 중국의 우주비행사업에 투신했다. 상해우주비행연구원에 배치받은 리상영은 모든 정력을 기술연구사업에 몰붓기 시작했다.얼마 안 가 터진 《문화대혁명》에 일시 커다란 곤혹속에 빠졌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혼란속에서 일터도 자주 바뀌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로케트의 동력설계, 원격측정제어, 구조배치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할수 있어 로케트기술 전반을 장악하는데 좋은 기회가 됐던것이다. 이 기간에 리상영은 쏘련의 《련맹호》, 미국의 《타이탄(大力神)》,유럽의 《아리안(Ariane)》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계렬운반로케트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짙은 흥취를 가지고 무릇 운반로케트와 관련이 있는 자료는 빠뜨리지 않고 찾아보면서 그것들의 성능, 기술방안, 디자인 등 모든 문제를 의문이 풀릴때까지 캐고들어 그 뒤 장장 수십년간의 연구에 튼실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자유의 왕국 우리 나라의 우주비행사업은 1956년에 시작됐다.저궤도운반로케트 연구는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부터 착수됐다. 리상영이 《3년 재해》와 《문화혁명》이란 어려운 이 두 시기에 시간을 랑비하지 않고 고심히 쌓은 연구토대가 얼마나 귀중한것인지가 이때 와서 충분히 증명되였다. 바로 중국에서 지대공미사일(SAM)연구가 시작된 해인 1970년,당시 불과 29살밖에 안된 리상영은 벌써 크기가 미국의 강유력한 《타이탄2호》와 거의 맞먹는 2단식 신형 로케트 《폭풍1호(FB―1)》 로케트연구팀의 총체성능설계사란 중대한 과업을 맡는다. 이 과업을 맡은지 불과 5년만인 1975년 리상영과 그의 연구팀은 《FB―1》로 과학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이때로부터 그의 재능은 급속도로 발휘되기 시작,선후로 《장정4호A형》운반로케트(략칭 장4A) 부총설계사, 《장2D》 부총설계사, 유인우주선921―3 부총설계사를 력임하며 1999년부터는 《장4B》총설계사,총지휘를 떠메기에 이른다. 이 중대한 책임들을 맡아보면서 그는 각종 중대한 기술난제들을 거의 매년 두세가지씩 풀어나갔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대형의 3단식 운반로케트 《장정3호》를 연구 제조할 때 그는 3대 기술난제의 하나로 나선 수직방향결합발진문제,말하자면 로케트 몸체와 로케트 추진제 수송시스템 사이의 공진문제를 해결하는 저항법 진동수 계산물리모텔을 국내 처음으로 고안해 내여 통신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는데 크게 이바지한다. 《장4A》 부총설계사를 맡았을 때도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총체방안을 고안해내여 상규추진제 로케트의 운반능력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 기술면에서 국외 동류 로케트의 성능을 릉가했으며 우리 나라 최초로 1톤 무게의 위성을 쏘아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 로케트로 1988년과 1990년 두차례에 걸쳐 기상위성을 정확히 태공궤도에 진입시킨다. 《장2 D》 부총설계사를 맡았을 때에는 운반능력,궤도진입 정밀도와 신뢰도가 월등한 2단식 로케트를 연구제조해 내여 련 3차례의 위성발사를 훌륭히 수행하며 《신주호》 우주선 부총설계사를 맡은 후에는 상해우주비행국 유인우주선에 대한 론증과 부분적 연구제조과업을 맡아 예비모형을 실전모형으로 승격시키는데 관건적 역할을 논다. 《장4 B》의 최초 제조과정에는 무려 153가지 부분을 새롭게 연구, 개진하는데 성능이 뛰여난 이 로케트는 현재 간편한 조정만 거치면 각종 류형의 인공위성을 보다 높은 운행궤도에 쏘아올릴수 있다. 《장4B》는 매차례의 발사때마다 대폭적인 기술개진과 창신으로 성능을 간단없이 제고했다. 작년 4월에도 리상영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4B》의 기술내포를 또 한차례 승격시켜 국내 최초로 3단식 발동기의 《2차 점화기술》을 적용, 원격탐측위성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중대한 성과들로 하여 그는 선후로 국가과기진보 특등상 2차, 1등상 2차, 2등상 2차와 성, 부급의 1등공 3차, 우주비행상과 과기진보상 등을 수상했다. 숭고한 사명 소년 리상영의 로케트꿈이 그 어떤 호기심에 바탕을 둔것이라면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는 우리 나라의 우수한 우주비행공정전문가로서의 리상영은 우주비행사업을 국가리익에 직결되는 최고사명으로 간주하고 혼신의 정감과 재질을 이 한 숭고한 사업에 깡그리 쏟아부었다. 1999년 5월초, 《장4B》 운반로케트 총설계사, 총지휘로서의 리상영은 기지에서 발사팀을 거느리고 한창 로케트발사준비를 다그치고있었다. 5월 8일 유고슬라비야 주재 중국대사관이 폭격을 당했다. 이 소식에 접한 리상영은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것 같았다. 로케트로 호된 반격을 가하고싶었다. 이때 향항《대공보》가 중국에서 이틀안으로 위성을 발사할것이라는 뉴스를 실었다. 어깨에 놓여진 짐의 무게를 느낀 리상영은 무언의 침착한 대응으로 발사현장의 모든 세부사항을 낱낱이 점검했다. 10일 오전 로케트는 리상영의 마음과 중국인민의 기개를 지니고 구중천을 힘있게 갈라 세계에 중국의 강대한 존재를 또 한차례 과시했다. 당의 16차 당대회가 열리기 직전, 리상영은 한차례의 위성발사준비를 끝마쳤다. 때는 바로 국가주석의 미국방문과 메히꼬 아태경제협력체(APEC)회의 참석 기간이여서 이때 위성발사를 한다면 그 성공여부가 커다란 파장을 몰아올것이 뻔했다. 그 압력은 엄청 큰것이였다.그에게 가해질 압력을 덜어주기 위해 상급에서는 확실한 성공을 파악하기 어려울것 같으면 발사시간을 연기하는것이 좋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이번 발사에 확고한 신심을 갖고 있었던 리상영은 위성발사를 예정대로 실시키로 결정했다. 발사전 최후의 동원대회에서 리상영은 이렇게 말했다. 《발사의 성공을 갈망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꼭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동이 조급해져서는 안되겠 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래일의 발사에 림해야 합니다.》 《장4B》운반로케트는 리상영의 뜻대로 《자원2호》위성을 우주공간에 정확히 쏘아올렸다. 발사현장의 지하통제실에서 발사장면을 긴장히 주시하고있던 중앙군위 조강천 총장비부 부장은 격동된 나머지 리상영을 끌어안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그 어떤 위성을 쏘아올리든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의의와 경제적가치는 대단히 큰것이다. 때문에 매 한매의 위성을 반드시 정확한 궤도에 진입시켜야만 하는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성공은 오늘만 의미할뿐 결코 래일의 성공을 대표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로씨야 같이 익숙한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는 그런 나라들도 발사에서 빈번히 실패하여 막대한 경제손실과 인명피해를 보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성공 아니면 실패일수밖에 없는 이런 과업을 한어깨에 짊어진 리상영은 시종 고도의 사상압력을 감수하지 않을수 없다. 성공차수가 많을수록 그 압력은 줄어드는게 아니라 늘어만 갔고 일단 발사에 특별의미가 부여되면 그 압력은 또 무게가 더해졌다. 그러나 사명감은 그에게 가해진 모든 압력을 동력으로 전환시켰다. 고도의 압력은 그의 몸에 늘 생리반응을 일으키군 했다. 수십년 종사해온 사업이고 발사기록을 봐도 첫 발사가 성공해서부터 한번도 실수도 없이 번번이 성공하여 《백발백중의 명장》으로 불려온 그지만 매번 새로 발사하기 직전이면 심장이 매분 100차 이상 뛰군 했다. 위성발사를 앞두고 심장에 이상이 와서 구심환 수십알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넣었던 적이 있다. 그날 발사를 성공리에 매듭짓고 축하연을 가졌는데 맥주도 물맛이요 간장도 물맛이였다. 보건의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무슨 약을 복용한게 아닌가고 물었지만 그는 도시 생각이 나질 않아 고개만 가로저었다. 후에 호주머니에서 나온 약병을 보고서야 약을 병채로 입에 털어넣었던 생각이 났다.   《대군》을 거느린 통솔자 상해우주비행국에서 실시하는 《장4B프로젝트》는 하나의 방대한 시스템이다. 산하에 통제, 발동기, 구조, 원격탐측,검측시험발사 등 10개의 계통이 주임설계사, 부주임 설계사 수십명의 지휘밑에 움직인다.  매 계통은 다 자체 연구소를 가지고있는데 통제계통처럼 전산연구소 등 여러 개의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계통 산하에는 수백개의 단일계기연구단위가 있다.례컨대 단일계기단위가 원격탐측계통에는 180여개가 있으며 통제계통에는 48개가 있다. 이 수백개의 연구단위에서 10만개도 넘는 부품을 연구해내며 그 제품생산은 전국 각지에 있는 수천개 공장의 몫이다. 이 행정에 동원되는 인수는 수천수만으로 헤아린다. 이 방대한 기술시스템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있어서 핵심고리로 되는것은 1급지휘계통인데 이 지휘계통의 일선 총지휘가 바로 리상영이다. 《장4B》의 매 차례의 위성발사는 모두 리상영의 지휘밑에 최신기술을 적용한 측정, 설계, 실험과 주도면밀한 현장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전반 행정에 그 어느 부문이든 지휘나 기술면에서 일말의 경솔성도 허용될수 없다. 어느 한 계통의 조그마한 실수도 궁극적으로 발사의 실패를 초래할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사업의 특질로 하여 기술에 대한 내부심사는 극도의 엄격성을 기할수밖에 없다. 고로 리상영은 하부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그냥 1차적으로 통과시킨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의문점만 발견하면 가차 없이 재고(再考)를 요구했다. 각 계통의 연구항목에 대한 리상영의 심사는 극히 엄격했다. 그 어떤 분야에 가든 그 분야의 핵심문제를 포착, 관련된 구체 문제까지 제기하여 개진토록 요구했다. 주임설계사를 망라한 고급두뇌들이 지휘하는 각 계통의 전문연구는 국내 나아가 국제의 최고수준급이다. 그러나 심사때마다 보고를 세심히 청취한 뒤 리상영이 즉석에서 들이대는 일련의 질문은 왕왕 한다하는 전문가들로 하여금 《아뿔싸!》 하고 식은 땀을 빼게 했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들은 로케트 각 계통 심층기술에 대한 깊은 료해가 없이는 문제포착자체마저 어려운것이여서 관계 전문가들은 놀란 나머지 리상영을 우러러보지 않을수 없었다.그들은 모두 리상영을 본받아 산하 각 부처에 엄격한 관리를 실시했다. 이런 까닭에 리상영이 한번 돌아본 곳에서는 락자없이 새로운 기술공략전이 벌어지군 했다. 각 부문에 내려가 항목심사를 할 때마다 리상영을 따라다니는 항목계획관리원 채익비는 리상영에 대해 탄복한 나머지 한번은 리상영에게 조용히 이렇게 물어오기까지 했다. 《총지휘님은 그 많은 부문의 기술문제를 어쩜 다 그렇게 환히 뚫고 계십니까?》 작년 4월 《원격탐측위성1호》 발사 준비를 할 때였다. 이 위성은 무게나 체적 등 면에서 모두 《장4B》 가 이전에 발사했던 위성보다 무겁고 부피가 컸다. 《장4B》로케트 정류케스의 직경은 통상적으로 2.9메터와 3.35메터 두가지가 있는데 이 위성은 체구가 웅장해서 소요공간직경이 3.8메터에 달해 비행기동, 부하, 강도, 구조, 탄성, 통제 등 면에 모두 변화가 생겼다. 대규모의 기술조정은 불가피했다. 하여 리상영과 그의 연구팀은 《장4B》를 거의 새로 설계, 제조하다싶이 했다. 이때에도 리상영은 로케트와 위성의 세부까지 꿰뚫는 불가사의한 기술통찰력으로 각 부처의 기술문제를 분석하고 철저한 해결책을 대게 하였는데 결국 그것은 로케트 《2차점화》 새 기술의 도입 등 중대한 기술개혁으로 이어졌다. 그것과 관련된 기술개진 항목은 무려 161가지에 달한다. 《확대경》을 들고 《먼지》를 찾는 사람 리상영은 발사팀 성원들에게 매번 새로운 위성발사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장4B대오에는 과거의 성적에 만족할 자본이 없다. 항시 령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세로 과업수행에 나서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문제를 찾으라,문제를 발견하는 자가 영웅이다.》고 고무격려했다.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거나 원유설비를 개조하여 검측시험을 할 때 그는 한시도 시험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털끝만치라도 의문스러운데가 있으면 절대 그대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 로케트 내부의 각 부분을 이어주는 케이블은 생명선과도 같아서 어느 한오리라도 헛땜을 하거나 잘못 이으면 안된다.  한번은 삼거웃처럼 얼기설기 얽힌 케이블을 가리키며 리상영이 물었다. 《확대경으로 케이블검사를 했소?》 케이블팀 팀장이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리상영은 즉시 《안되오! 케이블이 플러그에 제대로 이어졌는지 확대경으로 한오리 한오리 100%로 검사하시오!》하고 엄령을 내렸다. 또 한번은 시험을 할 때 케이블단락현상이 나타났다.정황을 보고받은 리상영은 가차없이 책임추구를 결행했다. 책임부처에서 사고원인을 한창 작업교대중에 있던 설치반 로동자들의 탓으로 밀자 리상영은 책임부처의 일군을 호되게 비평했다. 그 일군은 억울해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나 직원이 눈물을 보인다고 해서 록록히 처리할 리상영이 아니였다. 그는 《장4B는 눈물을 믿지 않습니다》고 하면서 그 반조더러 즉시 생산을 중지하고 정돈을 하게 했다. 나아가 작업관리, 기술조작, 교대절차와 수속 그리고 관련 세칙에서 원인을 찾게 하고 제반 제도를 철저히 수정,  보완토록 했다. 와중에 비평을 받은 그 책임일군은 리상영에게 완전히 감복이 되여 비평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겨났고 작업질보장에 철저한 책임성을 보였다. 얼마후 그는 상해우주비행국의 선진에 당선되여 경험을 소개하게 되였는데 강연제목은 《압력은 질보장의 촉진제》였다. 인간 리상영 리상영은 사업이 아주 몸에 밴 분이다.그러나 마음의 탕개를 조금 풀 때도 있으니 그것은 위성을 방금 예정궤도에 띄워놓고 승리를 경축할 때의 한순간이다. 이 때면 그는 잠시나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만사를 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통쾌히 즐긴다. 팀멤버들이 총설계사에게 프로를 요청해 오면 그는 《시경》에 나오는 옛시도 멋지게 읊조린다. 《사이좋게 우는 저 징경이 하수가에 있네.곱고 고운 아가씨는 님의 좋은 짝이로세(關關雎鳩,在河之洲,窈窕淑女,君子好逑).》하고 궁글진 목소리로 읊어내리면 다들 신이나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는 어릴적 어머니에게서 배운, 평생 유일하게 부를 줄 아는 노래 《노들강변》을  한가락 불러넘기군 한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여나볼가...》 리상영은 《노들강변》노래를 부르는것은 어머니에 대한 가장 좋은 기념이라고 말한다. 작년에 외국출장을 하면서 흑룡강의 고향을 지나게 되였다. 어머니묘소에 내려 벌초라도 하고싶었지만 내릴수 없는 몸이였다. 당시 그는 《노들강변》을 입속으로 웅얼거렸다고 한다.   조선민요 《노들강변》을 열창중인 리상영.   백두산천지에서 부인 손광옥과 함께. 누구보다도 안해 손광옥과 두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리상영이다. 결혼해서 30여년간 내내 상해를 중심으로 북경과 태원 등 로케트발사기지 사이를 오가면서 장정호운반로케트 연구설계와 발사에 혼신의 정열을 쏟다보니 모든 가무일과 두 자식을 키우는 일은 전부 역시 과학연구일군인 안해가 전담할수밖에 없다. 리상영은 로케트와 인공위성에 대해 말하라면 노들강변 청산류수지만 자식의 신변사에 대해 물으면 세마디 안짝에 둬번 막히는 정도다. 그래도 남편의 사업을 자기 일 이상으로 지지하는 안해는 로케트 발사때마다 남편걱정으로 혈압이 뛰여오르군 했다.《안해가 불합격 남편을 리해해주고 아들딸들도 잘 커줘서 너무 고맙고 행복하다》고  그는 말한다. 딸은 지금 상해 서금병원 의사로 근무중이고 아들은 미국 하불대에서 MBA과정을 마치고 이미 귀국했다. 아들이 석사졸업식을 가진다는 소식을 알고 조직에서는 그에게 휴가를 주었다. 30여년간 번번이 휴가를 사절하고 일에만 전념해왔던 리상영은 이번에는 쾌히 접수했다. 안해와 함께 아들의 졸업식에 참가하여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싶었던것이다. 평생 처음 사랑하는 남편, 존경하는 아버지와 함께 유럽나라들을 구경하면서 안해와 아들은 너무 행복해했다. //  200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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