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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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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김파 / 최룡관 댓글:  조회:4427  추천:1  2015-03-27
  찬란히  터져오르는  이미지   --김파시인의 열번째시집 《태양의 언어》에 부쳐                          최흔    김파시인의 열번째 시집을 보았다.  립체시라는 일로를 줄기차게 걸어오던 김파시인이 오늘은 라는 디지털 하이퍼시라는 작탄을 터지웠다.  이미지들은 야밤의 폭죽불꽃처럼 찬란하다. 폭죽은 순간의 황홀을 보이고 사그러지지만 는 그런 순간을 영원으로 고착시키는 황홀경을 이룬다고 하겠다. 무의식, 하이퍼특점, 언어들의 독특성을 이 론문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무의식사유의 결실   김파의 열번째 시집 의 시들은 무의식에 절어있다. 사람들이 시를 쓰는 의식은 대개 세가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현실의식이고, 둘째는 잠재의식이고, 세째는 무의식이라겠다. 어떤 의식으로 시를 쓰는가는 시인마다 다르다. 현실의식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현실의식과 잠재의식을 혼합시켜 시를 쓰기도 하고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혼합시켜 시를 쓰기도 한다. 김파시인은 이런 류형의  사유로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무의식으로 시를 편집하고 있는같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의식이란 현실사물의 현상을 종합하고 처리하는 시를 말하고 잠재의식이란 한사물의 어느 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여 그 사물의 력사거나 시인의 기억을 더듬어 시를 작성하는것이라 하고, 무의식이란 말그대로 현실의식을 묵살해버리고 새로운 의식으로, 환상적으로 시를 시작하고 발전시키고 마무리하는 시라고 하겠다. 현실사물에 대한 모든 기성관념을 부정하고 새로운 관념으로 시를 쓰기에 무의식이라고 할수 있다. 때문에 시에 나타나는 제재들은 현실적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과 환각에 의하여 재구성된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이란 오직 시인에게만 있는 새로운 의식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없으면서도 있는 의식! 이제 김파시인의 시의 서두로써 이야기해 보자.     세월의 틈서리에 산란하는 말씀들 벼루기의 집장고도 --《무제》서두에서     시간의 얼마나 흘렀는가 고요가 사글어 곰팡이 낀다 고민이 쌓여 발요되는 열기 정감의 세포가 분해되고있다 --《무언의 대화》에서   태양이 늪얼음을 깁던날 치마자락으로 부채질하는 바람 바위살같에 소름이 돋힌다 녹 쓴 기억 닦아내고 윤활유 바르는 온도계 스케트날이 시간의 잔등 스친다. ---《기다리는 마음》   손톱끝에 지는 피방울 시간을 껍질벗긴다 후리드입술 콩나물 내뱉고 ---《예감에 찔리여》   우산 든 겨울 벌거 벗은 바위 --《서리낀 말씀》   다섯수의 시의 서두를 례로 들었다. 다섯수의 시의 서두는 김파시인의 시의 서두의 보편적인 표현이라고 할수 있다. 에서 와 에서 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우리앞에 낯선 세계를 펼쳐주고 있다. 이 두시구는 현실관념이라고 할수 있지만 다음줄에 나오는 시구들과 련계시키면 그렇다고만 할수도 없다. 이말은 시간이 고요에 곰팡이 끼게 한다는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주목되는 언어는 와 이다. 구상물에 곰팡이가 낀다면 말이 되지만 고요라는 추상물에 곰팡이 낀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시적으로 통하는가? 무의식으로 쓰는 시는 생활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시인의 절대적인 상상에 의하여 다시 조직되여 그려지는 허상이기때문이다. 재조직된 허상이 아닌 시는 무의식으로 쓴 시가 아니라고 하겠다. 무의식으로 쓴 시는 있는것을 없게 하고 없는것을 있게 하기라고 말할수 있겠다. 의 서두도 마찬가지이다. 하는데 시간이란 껍질이 있고 속이 있는 사물이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고 한다. 무엇이 시간을  껍질벗기는가 시인의 말대로 하면 이다. 피방울이 껍질을 벗기는 도구로 씌였으니까 피방울이 표현하는것은 피방울이 아니라 예리한 칼끝과 같은 은어의 표현으로 되고있다. 현실적인 의식이 슴배인것 같은 시행들이 실제는 아래에 오는 변형에 의하여 원뜻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의식에 동화되여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사물로 다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이 새로운 탄생은 시인의 시적사유의 사물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적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싸르트르는 이미지의 핵심을 허상이라고 했을것이다. 현실의식이 작용하는 사물들이 허상의 영향아래 언어자체의 본뜻을 거세당하고 새로운 뜻으로 전이하게 된다. 그러니 워낙 새로운 사물의 운동으로 시작된 나머지 례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 시행들은 100프로 환각된 사물의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어느 시구나 다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낸것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 여기서도 현실로 통하는것이 아니라 환각으로 통하는것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  이 의 서두도 허상적이거나 환상적이기는 위의 례들과 다를바 없다.
282    아방가르드/ 시론 댓글:  조회:4275  추천:0  2015-03-27
[아방가르드/시론]         디지털리즘의 시/ 질의응답의 현장   ―본 내용은 2005년 6월  배재회관에서 있은 한국시문학아카데미의 강연내용임        시문학아카데미 금요강좌(매주넷째주 금요일) 일 시: 2005년 6.24(금) 오후 5시 장 소: 배재회관(중앙일보사 근처) 연 제: 「디지털시대의 나의 시쓰기」(연사:오진현) 사 회: 이승복(홍익대 교수) 정 리: 이 솔(시인)       탈관념의 Showing ― '나의 시쓰기 과정'에 대한 몇 가지 질문/문덕수       오남구(오진현)은 그동안 탈관념, 접사와 염사, 디지털리즘 등의 화두를 던지면서, 자기 시의 논리화를 훨씬 넘어선 새로운 아방가르드 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 방면의 기수라는 느낌도 들고 그만큼 화제도 많이 되뿌렸다. 이러한 전위적 몸짓만으로도 귀한 것이지만, 슬로건을 외치고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면, 자기가 내세우는 이론을 밑받침할 수 있는 논리 구축도 불가결한 것이며, 자기에게로 되돌아 올 반론의 부메랑도 각오해야 한다. 뼈아픈 자기성찰의 필요성,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전제에서 오진현의 「접사와 염사의 시점(視點) 문제」를 면밀하게 읽었다.   (1) 오진현은 ‘디지털리즘’(digitalism)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 개념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오진현은 디지트(digit), 디지털(digital)의 어원을 설명하면서, 디지털은 2진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고,“디지털은 이런 가능성을 가진 것을 지칭한다.‘이즘’은 여기서 필자가 붙임”이라고 하여‘디지털리즘’이 자기의 조어임을 밝히고 있다.‘digital’에‘ism’이라는 말을 붙여 ‘digitalism’이라는 새 용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여기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기존 사전(Kenkyusha’s New English-Japanese Dictionary, 2002)에서는 digitalism을 “디지털리스 중독증”이라는 병리학의 용어라고 말하고 있다. ‘디지털리스’(digitalis)라는 것은 식물 이름이거나 그런 식물로 만든 일종의 강심제인 디지털리스 제제(製劑)를 의미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오진현이 쓰고 있는 디지털리즘은 digital+ism=digitalism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데,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을 하나의 개념 내지 관념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술어인지, 오진현 자신이 검증해야 할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영문학자나 철학자의 조언을 받는 것이 좋다.)   (2) ‘접사’와‘염사’는 모두 사물에 대한 탈관념 시점에서의 시쓰기의 방법으로 생각된다. 오진현이 그의 시론에 도입한 용어다. 그런데 우리가‘탈관념 운운’하지만, 이 개념은 조향(1917∼1984)의‘오브제론’김춘수(1922∼2004)의‘대상의 붕괴’(『의미와 무의미』), 문덕수의 ‘대상에서의 해방(「내면세계의 미학」)’ 등의 선행 이론에서 발전되었고, 그러한 선행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탈관념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론 등과도 관련된다.(불교의 유식론과도 관련될 것 같다.) 오진현은 이러한 여러 선행 이론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그 연속선상에서 자기 이론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3) 오진현은 ‘염사’(念寫)에 대하여 “내면세계의 잠재 영상을 촬영하는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일단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관념의 제로 포인트(탈관념 상태 ― 본질의 상태)인 물체를 촬영한다는 점에 주목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바로는“내면세계의 잠재영상”즉 있는 그대로의 내면세계의 현상이 현재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면세계의 잠재영상”은 생각 만큼 단순·소박한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의식(意識) 안팎의 시간과 공간의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융의 집단 무의식도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것을 오진현은 “잠재영상”이라고 포괄하여 ‘염사’로서 촬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로 가능할까. 또 불교의 선(禪)과도 관련시키고 있는데, 그 관련성에 대한 논리적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염사라는 촬영기술이 이런 무의식이나 집단 무의식의 촬영까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다.   (4) 20세기 모더니즘이 회화적 이미지를 강조하고‘말하기’(telling)보다는‘보여주기’(showing)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오진현의 디지털 시론에서는 말하기보다 보여주기 즉‘제시’(提示)를 강조하면서 자기 이론을 20세기 모더니즘과는  구별한다. 진일보라고 하겠다. 특히 자기 이론을 “디지털적 보여주기”라고 특정화한 것은 진전된 견해로 보인다.   (5) 오진현의 ‘염사, 접사’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논리화 하느냐에 따라 시론상의 논의가치도 결정될 것이다. 오진현은 염사와 접사의 시점(視點)을  탈관념 시론의 방법으로서 이를 중시하고 있다. 특히 단일시점과 다시점을 구별하고, 다시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다시점 설정의 정당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시점 설정의 ‘기준’은 아예 말하지 않고 있다.「도표 1」에서의 P1, P2, P3 등은 시점 표지에 지나지 않고, 피카소의 「도표 3」, 백남준의 「TV시계」의 예에서도 다시점(복합시점)의 보기일 뿐, 시점의 기준을 말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작품 「日出山行」이 다시점의 예로서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시점 발생의 가능성적 계기를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시점은 방위(동·서·남·북·상·하·좌·우 등), 차원(dimension: 공간적 넓이의 성질을 나타내는 1차원, 2차원, 3차원, n차원, 무한 차원 등), 주관과 객관, 인칭(1인칭, 2인칭, 3인칭 등), 관념(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기독교, 불교 기타) 등이 있겠지만, 자기가 주장하는 시점의 기준을 제시하여 분명히 밝혀야 한다. 오진현은 단시점보다는 다시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시점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는 수긍할 수 있으나, 자기 시론에서의 그 정당성이나 필연성을 보완하기 위한 강성논리(强性論理)의 개진이 요구된다.   (6) 오진현은 “인식의 대상인 사물을 A라고 하고, 시인의 변수(인식의 변수)를 x라고 하면…”이라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사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이 생략된 채 ‘A’라는 기호로 추상해버리는 것은 논술하는 방법으로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인의 변수(인식의 변수)”를 간단히 ‘x’라는 기호로 처리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대상을 대하는 시인의 변수 즉 “인식의 변수”도 x라는 기호로 처리하기 전에 타당한 논리와 객관적 설명이 요구된다. 시론에서는, 대상과,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시인) 사이의 상호관계는 매우 다양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탈관념의 시론이건 아니건 즉 어떠한 종류의 시론이건 반드시 확실하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론의 핵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심 카테고리를 뭉뚱그리고  요약하여 “A”나 “x”라는 기호로 추상하여 처리해버리는 것은 논리빈곤이라는 의심을 면할 수 없다. 특히 시론에서는 만부득이하거나 필연적 이유 없이 논리를 수학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덕수의 몇 가지 질문 등 ―대답과 보충 / 오남구     (1) 디지털리즘에 관하여   물론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을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디지털시대가 전개되는 어떤 상태에 따라서‘주의’‘주장’‘설’ 등이 나올 것입니다. 우선 먼저 생각되는 것은, 디지털이 가진 성질이나 기능(특히 일종의 언어기능을 하는)에서 비롯되는 21세기 첨단과학의 영상시대가 빚어내는 디지털의 “인간확장”으로서의 긍정적인 면과 “인간축소(도구화로 전락)”로서의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큰 이슈들이 나올 것이라 봅니다. 이를테면 조심스럽게 제기된, 미래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신체적 접근의 휴머니즘” 등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미래사회를 예측하여 무모하지만 ‘디지털리즘’을 선언했고 그 선억적 의미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디지털의 탈관념과 선행이론에 대하여   「대상의 붕괴」와 「대상에서의 해방」은 시의 대상에 초점이 있습니다.‘오브제’ 역시 대상(소재)를 해방시켜 버림으로써 ‘해방’이란 한 단어에 모아지는데, 여기에서‘관념의 해방’이란 관점에서 보면 모두 탈관념에 속합니다. 자크 데리다 등 언어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선행 이론들은 ‘언어의 탈관념’으로서,‘언어예술’과 언표의 확장은 이루었다고 봅니다. 물론 본인이 내세운 ‘탈관념’은 선행 이론의‘언어의 탈관념’에 기대면서, 역설적으로 언어의 반성적 이해를 하게 됩니다. 즉“언어가 처음 순수 직관에 의한 사물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언어주의(또는 언어예술)의 무의미시의 지향은 곧 언어의 본적(사물)을 부정해 버리는 모순에 빠집니다.‘시는 본적지를 부정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관념’은 문덕수 시인의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는 새로운 명제에 동참하게 되며, 협의의 탈관념으로서,“사물에 대한 탈관념”으로 좁히고, 그 방법으로서 ‘염사’와 ‘접사’라는 사진 기법을 디지털 시대의 시쓰기 기법으로 성립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점의 문제를 포함하여 선행 이론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염사’와‘접사’가 탈관념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언어로써 묘사하거나 기술하게 되므로, 선행 이론에 기대면서 기존과는 달리,“대상의 해방”이 아니라 대상의 ‘보여주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물성을 보여주는 디지털 시쓰기의 다양한 방법이 발전됨에 따라 언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디지털과 만나게 될 것이며‘디지털적 감각’의 또는‘디지털 방식’의 시적 수사학이 발달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3) 염사에 대하여   염사를 설명하여,‘선적현상(禪的現象)’이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나 이와 비슷한 자세에서 내면세계를‘보는, 또는‘떠오르는,‘느끼는’ 의미 등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염사와 접사는 ‘직관’이라는 같은 맥락에 있으며, 보거나 느끼는 방법으로서, 골똘히 생각하면 더욱 안 됩니다. 이때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연상에 지나지 않으며, 마치 그것은‘사고의 언어’와 같고, 무념한 상태에서 떠오르는 ‘잠재영상’은 ‘자연언어’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란, 바로 ‘잠재영상’그 자체를 지시하며 다양한 상태로 있는 내면세계의 영상이나 그 느낌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잠재영상을 떠올리는 방법은, 선을 해보면 알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긴장하지 않은 상태로, 눈을 감고 집중하면 쉽게 잘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동기술과 비교해 보면, 언어를 하나 백지 위에 써 놓고나면 자동적으로 그 다음이 써내려지는 자동기술을 체험한 적이 있는데, 이와는 달리 염사는‘회화적’이며, ‘느낌’이 움직이고, TV에서 방영되는 꽃을 보기만 해도 코앞에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작용을 input/output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4)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과 탈관념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은, 차연의 ‘차이’와‘연기’로써 설명됩니다.‘차이’는 소쉬르의 말로,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고, 기의 즉 언어의 의미는‘차이’에서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차이’에 의해서 경계도 생기고 이름도 생기고, 이런 의미는 곧 관념으로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이런 의미가 유동적이고, 불확실하고, 연기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미끄러짐으로써 해체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경계도 무너지고, 이름도 무너지고 주객의 구분도 없어지게 됨으로써 탈관념이 됩니다. 이것은 언어철학의 형식논리가 이른 탈관념일 것입니다. 저는 이와 구분하여‘직관시의 탈관념’이란 말로 거리 두기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형식논리 없이 사물의 직관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탈관념을 말함으로서,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선적’인 탈관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과는‘탈관념’에 똑같이 이른다 해도 방법론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면밀히 동질성과 차이점을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유 / 질의응답]   (1) 최근 포스트모던의 시와, 오진현 시인의 예문의 시를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른 ‘언어의 끼’랄까 맛을 느끼기는 한데, 아직 저로서는 특별히 잘 구분이 안 갑니다. 왜 그런지? 포스트모던과 간단히 비교해주십시오   최근 우리 문단의 포스트모던의 시들이 보여주는 경향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패러디’이고 그 하나는 ‘매직’이고 그 하나는‘미니멀’로 압축되고 있습니다.‘매직’에 대해서는 이미 김춘수의 시에서 보았듯 기교를 넘어선 ‘트릭’으로서, 시가 ‘트릭’까지 가는‘언어 유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역시 ‘패러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언어주의가 낳은 것으로, ‘창의성’이라든가 ‘독창성’이 문제 되는 일종의 ‘언어게임’으로 봅니다. 마지막 세번째,‘미니멀’은 언어의 다의적 의미를 절제하고 사물을 지시하며, 회화적 또는 구조적 표현을 하므로, 시의 ‘말하기’가 아닌‘보여주기’는‘이미지’ 성향의 시가 되겠습니다. 이 미니멀은 현대시의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언어중심주의’이므로,‘사물성’으로 이동한 인식논리의 디지털과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디지털은 감각적으로 명징하고 정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와 비교해 보면, 아날로그의 시계바늘을 보고 감각적으로 정확히 읽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은 숫자로 표현되므로, 정확히 1초 2초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디지털 감각이라 하는데, 그 표현이 톡 톡 튀고‘생생히 살아 있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선적이든 아니든 일단 오진현 시인이‘탈관념’을 해버리면 자크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주·객의 경계도 무너지고 해체된다고 보는데, 그렇다면‘누가 쓰고 누가 쓰여 지는가’의 중요한 주·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쓰고’‘쓰여지는’사이에 놓인‘의미’는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승훈의 『탈근대 주체이론 과정으로서의 나』란 책의 인용문에 나오는 윤효녕 교수의 말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체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이 “주체의 절대 부정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데리다의 주체 개념을 대승불교적 시각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고 하며, “나뉘어지고 연기되며 구성되는 주체”라고 보고 있는데, 이승훈은 임제의 말을 다시 이용하여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어디가든지 거기서 주인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대로 진실된 곳, 극락, 부처님 자리이다” 즉, “원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장소가 있고, 장소에 따라 이동하는 과정이 있고, 이 장소가 바로 주체, 주인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든 거기서 주체가 될 때 그곳이 바로 진리라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렇듯 데리다의 주체 개념은 방황, 표류가 아니라 이런 표류가 바로 자유와 통하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탈관념은 역시 이러한 대승적 개념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3) 실험시를 쓰며,‘아방가르드’를 한 지가 30여 년이라고 하는데, 시작한 그 동기와 그에 대한 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언어는 한계성(관념)이 있습니다.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첫말로써 말로는 도(道)를 말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성을 전제(前提)하고 있습니다. 시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언어의 숙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극복하는 염화시중(拈華示衆)1)의 묘법 같은, 언어 이전의 사물성(事物性)은 하나의 희망입니다. 사물을 보여줌으로써 서로 소통하는 이런 탈관념의 화법(‘x화법’ 또는 ‘거시기화법’)이 있다면 거대한 언어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처음 이러한 단순한 생각이 끔찍한 ‘실험 30여 년 외로운 길’을 가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1975년 등단하자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시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손에 꽃을 들고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누가 “꽃!”이라고 대답하면 꽃을 쓰레기 통에 던지면서, “쓰레기야!”라고 말했습니다. (『꽃의 문답법』 1999, 신세림, 출간) 이 해프닝은 ‘시=도(道)’라는 등식을 성립시켜놓고 벌인 의도적인 것이었으며, 이어서 “신은 고정관념의 대표 선수이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이 말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지 체험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당(未堂)의 영향이 컷던 것 같습니다. 등단 이후에 시가 참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의 시 모델이 될 작품을 골랐는데(선배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서정주의 「동천」, 김춘수의 「꽃」, 문덕수의 「꽃과 언어」, 이상의 「오감도, 시제1호」였습니다. 이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늘 어떤 전율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듯 하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여 커다란 산처럼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 시들은 내가 잘 이해하는지 모르지만, 30여 년 동안 실험해 온 과정이, 결국 모델로 골랐던 네 종류의 작품을 실험해 온 것처럼 생각됩니다.              
281    심상운 시와 기호 댓글:  조회:4298  추천:0  2015-03-23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2007,7,30, '시문학사')에 게재한  대담형식의 시론「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化)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에는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생략)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오늘의 시작법』2004, 개정판 )-   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80    문덕수 현대시론 댓글:  조회:4964  추천:0  2015-03-23
  한국(韓國)의 현대시(現代詩)   문 덕 수 (文德守))   1     시(詩)의 내용(內容)은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이다. 정서는 감화적(感化的) 요소(要所)로서, 유기체(有機體)의 전신적(全身的) 감각(感覺)이지만, 사상은 지각(知覺), 지식(知識), 신념(信念), 의견(意見)의 종합물(綜合物)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效用)이 궁극적(窮極的)으로는 감동(感動)과 쾌락(快樂)에 있으므로, 사상은 어디까지나 종속적(從屬的) 요소다. 그것은 언제나 정서와 융합(融合)이 되어 나타난다. 간혹 사상이 중시(重視)된 시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외다. 만약 사상 위주(思想爲主)의 시가 있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시의 형식(形式)을 빈 철학적(哲學的), 수상적(隨想的) 단편(斷片)일 것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시로서 족하다. 아무리 위대(偉大)하고 심원(深遠)한 사상일지라도, 정서와 융합된 것이라야 한다. ‘시는 사상의 정서적(情緖的) 등가물(等價物)’이라는 엘리어트의 말은 이 점에서 매우 시사적(示唆的)이다.   시의 정서는 일정 불변(一定不變)의 것이 아니다. 정서의 차이(差異)는 한이 없다. 생리(生理)에 따라, 또 그 시가 생산(生産)된 당대(當代)의 여건(與件)에 따라 천차 만별(千差萬別)이다. 이것이 정서(情緖)의 주관성(主觀性)이다. 그리고, 시의 참신성(斬新性)과 독창성(獨創性)도 여기서 나타난다.   한국(韓國)의 현대시(現代詩)에서 그 정서가 가장 불건전(不健全)하고 병적(病的)인 것을 찾는다면, 1920년 전후의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시일 것이다. ‘폐허(廢墟)’와 ‘백조(白潮)’를 중심 무대(中心舞臺)로 대량 생산(大量生産)된 이 무렵의 정서는 감상주의(感傷主義) 바로 그것이다. 비애(悲哀), 눈물, 애수(哀愁), 울분(鬱憤), 탄식(歎息), 절망(絶望) 등이 그 당시(當時)의 정서의 목록(目錄)이다.     검은 옷을 해골(骸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톳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生命)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莊嚴)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敬虔)한 주토(朱土)의 거리   해골(骸骨)! 무언(無言)!   번쩍이는 진리(眞理)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랴.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이러한 죽음의 예찬(禮讚)은 그 일례(一例)에 지나지 않는다. 박 영희(朴英熙)의 ‘유령(幽靈)의 나라’와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이 상화(李相和)의 ‘나의 침실(寢室)로’와 ‘이중(二重)의 사망(死亡)’, 그리고 홍 사용(洪思容)의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등은 이 무렵의 정서(情緖)의 극단(極端)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정(詩情)은 불가피(不可避)한 역사적(歷史的) 요청(要請)의 산물(産物)이었다. 3‧1 독립 운동(三一獨立運動)의 실패(失敗)로 인하여 조국(祖國)의 현실(現實)은 암담(暗澹)해졌다. 유럽의 낭만주의(浪漫主義)의 말기적(末期的) 증세(症勢)가 조수(潮水)처럼 밀려 왔다. 실의(失意)와 비탄(悲歎)에 잠긴 젊은 기질(氣質)은 그것들에 쉽게 동화(同化)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불행한 감상적(感傷的) 낭만주의의 포로(捕虜)가 되어 버렸다. 방법의 발견이나 사상의 확립(確立)을 위한 생(生)의 재인식(再認識)이 실행(實行)되지 못한 채 낭만적(浪漫的) 격정(激情)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이러한 낭만주의 시의 감상(感傷)과 대극적(對極的)인 것이 주지시(主知詩)의 정서다. 주지시는 낭만적 감정(感情)과 음악성(音樂性)을 배격(排擊)하고, 이미지와 지성(知性)을 중시(重視)한다. 이미지는 비유(譬喩)에 의하여 형성된 언어(言語)의 회화성(繪畫性)이다. 지성은 감정을 억제(抑制)하고 조절(調節)한다. 주지시의 무기(武器)는 정열(情熱)과 결부(結付)된 상상력(想像力)이 아니라, 지성과 결부된 ‘환상(幻想)’이다. 이것이 1930년대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이론(理論)이며, 그것은 그대로 흄, 파운드, 엘리어트 등의 영미(英美) 주지주의의 이론이기도 하다.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 정부(亡命政府)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急行列車)가 들을 달린다.             ‘낙엽’이 죽음이나 인생에 비유(譬喩)되지 않고, ‘망명 정부의 지폐’에 비유되었다. ‘길’과 ‘넥타이’의 유추(類推)도 참신(斬新)하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浪漫主義)와는 이질적(異質的)인 신선(新鮮)한 감각(感覺)을 느낄 수 있다. 시각적(視覺的) 이미지의 효과(效果)를 거두고 있다. 감정의 대량 방출(大量放出)도 억제(抑制)되고, 사물(事物)을 보는 태도(態度)도 다소 객관적(客觀的)이다. 김 광균(金光均)의 ‘외인촌(外人村)’에는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소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는 직유(直喩)와 은유(隱喩)가 겹쳐 있고,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사상이 스며들 여지(餘地)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주지시는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처지(處地)에서 ‘방법의 지각(知覺)’을 가지려 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劃期的)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基礎)가 되는 인생관(人生觀)과 세계관(世界觀)에 대한 인식(認識)이 없었다. 고전주의적(古典主義的)인 생(生)의 자각(自覺)이 없었다. 방법의 발견과 생의 자각은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동일(同一)한 것이다. 이것이 분리(分離)되어 강조(强調)될 때 기형(畸形)이 탄생(誕生)한다. 기형은 미숙(未熟)을 의미(意味)한다. 그리고, 시의 회화성(繪畫性)을 주장(主張)하면서도 시가 ‘언어(言語)의 예술(藝術)’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회화성이 한계(限界)에 부딪혔을 때 또 다른 감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의 주지시는 부분적 성과(成果)밖에 가두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2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언어는 음성(音聲)과 의미(意味)의 결합체(結合體)다. 또, 의미에는 형상(形象)이 있다. 음성은 음악(音樂)으로 통하고, 의미, 즉 개념(槪念)은 철학(哲學)으로, 형상은 그림으로 접근(接近)한다. 음성만을 강조할 때 순수시(純粹詩)가 되고, 형상만을 강조할 때 순수(純粹)한 회화시(繪畵詩)가 된다. 그리고, 개념만을 강조할 때 철학시(哲學詩)나 관념시(觀念詩)가 된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므로, 이 세 부분은 종합(綜合)되어야 한다. 만약 극단적(極端的)으로 분리되어 강조된다면, 시 자체의 본질(本質)에서 멀어지게 된다.   개념을 강조하는 시는 목적 의식(目的意識)을 가지기 쉽다. 그런 시는 자칫하면 선전(宣傳)이나 계몽(啓蒙)의 수단(手段)으로 타락(墮落)하기 쉽다. 감화적 요소인 정서(情緖)는 종속적(從屬的)인 것이 되거나 사상의 의상(衣裳)밖에 되지 않는다. 1925년 무렵의, 생경(生硬)하고도 조잡(粗雜)한 목적시(目的詩)가 그 표본(標本)이다. 6‧25 이후의 참여시(參與詩)도 그런 함정에 빠질 위험성(危險性)이 있었다.   조국이 외세(外勢)의 말굽 아래 신음(呻吟)할 때, 시가 애국 운동(愛國運動)에 참여(參與)함은 역사적(歷史的) 요청이다. 또, 시인이 그 시대에 대한 책임감(責任感)을 통절(痛切)히 느낄 때, 시가 사회에 참여함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 경우(境遇)에도 시는 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범(平凡)한 사실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시를 택할 것이냐, 조국을 택할 것이냐 하는 물음은 우문(愚問)에 불과하다. 문제는 애국적(愛國的) 정열과 사회적(社會的) 책임감이 시정(詩情)으로 승화(昇華)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데 있다. 시정이 영역(領域)은 한이 없다 애국적 정열과 사회적 책임감도 고귀(高貴)한 정서(情緖)다. 시정의 고상(高尙)한 영역에 속한다. 시의 사회적 참여에는 한계(限界)가 잇는 것이다.   목적시나 참여시의 대극(對極)에 순수시(純粹詩)가 있다. 순수시는 개념(槪念)까지 거세(去勢)하지는 않으나, 정치적(政治的) 목적 의식(目的意識)은 반대한다. 시는 언어의 예술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주옥(珠玉) 같은 언어의 조탁(彫琢), 청징(淸澄)하고 섬세(纖細)한 정서(情緖)의 순화(純化), 미묘(微妙)한 음악 등은 시를 예술의 위치(位置)에 올려 놓은 것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뗘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정치적 목적 의식(目的意識)은 전연 없다. 정서의 투명(透明)한 순화와 언어의 본연(本然)의 미감(美感)이 반짝일 뿐이다. 윤 선도(尹善道) 이후 잠시 가라앉았던 한국의 시정이 여기서 다시 발흥(發興)한 셈이다. 순수시(純粹詩)는 정서의 진수(眞髓)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력(魅力) 있는 정서의 결정(結晶)임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3     시의 발전은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기대(期待)할 수는 없다. 돌연 변이(突然變異)는 희귀(稀貴)한 예외다. 의식적(意識的)이건 무의식적(無意識的)이건 간에 전통(傳統)에 접맥(接脈)되어서 비로소 가능(可能)하다. 아직도 한국시(韓國詩)의 주류(主流)는 전통적(傳統的)인 시에 있다고 하겠다.   김 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은 고려 속요(高麗俗謠)인 ‘가시리’에 접맥(接脈)되어 있다. ‘가시리’에 담겨 있는 차원(次元) 높은 이별(離別)의 정한(情恨)은 ‘진달래꽃’에 와서 극한 상황(極限狀況)을 보여 준다. 설움, 눈물, 이별, 사랑 등의 정한은 민족의 보편적(普遍的) 정서(情緖)에 닿아 있다. 그러나, 그의 정서는 건강(健康)한 것이 못 된다. 감상의 색조(色調)를 띠고 있다. 또, 소극적(消極的)이다. 어떻게 냉혹(冷酷)한 이 현대(現代)를 감당(勘當)해 나갈지 의문(疑問)이다. 그리고, 그의 율조(律調)는 민요조(民謠調)이며, 사상적(思想的) 기반(基盤)은 유교적(儒敎的) 휴머니즘이다. ‘산유화(山有花)’에서조차 완전한 자연 귀의(自然歸依)를 성취(成就)하지 못했다. 그는 이 백(李白)에게보다 두 보(杜甫) 쪽에 더 접근(接近)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불행하였다.   전통에 접맥된 일군(一群)의 시인으로서 세칭(世稱) 생명파(生命派)와 청록파(靑鹿派)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40년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시사상(韓國詩史上)의 2대 산맥(二大山脈)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에게 오면 정서와 사상이 일체(一體)가 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편협성(偏狹性)이 적다. 한국시의 원숙(圓熟)한 일면을 보게 되는 기쁨이 있다.   생명파의 두 시인은 유 치환(柳致環)과 서 정주(徐廷柱)다. 이 둘은 초기(初期)에는 다 같이 니이체와 보들레르의 문전(門前)에 열심히 드나들었다. 이리하여, 이 둘의 기조(基調)는 우연(偶然)히도 생명 의식(生命意識)의 앙양(昻揚)이라는 점에서 일치(一致)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共通的)인 출발점(出發點)은 낭만주의(浪漫主義)다. 유 치환의 초기 시는 문명(文明) 이전의 건강(健康)한 원시적(原始的) 생명(生命)의 희구(希求)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다가, 동양적(東洋的)인 무위(無爲)와 허정(虛靜)의 세계를 거쳐 간다. 그는 한국 현대시(韓國現代詩)의 허무(虛無)와 의지(意志)라는 새로운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였다. 니이체보다는 보들레르에 더 심취(心醉)된 서 정주는 원죄(原罪)의 업고(業苦)를 짊어진 육성(肉聲)의 몸부림을 쳤고, 그것을 한동안 겪자 동양(東洋)의 숲 속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후(最後)로 안착(安着)한 곳이 불교(佛敎)와 신라(新羅)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春香)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이 시의 소재(素材)와 동기(動機)는 물론 우리의 고전(古典)이지만, 그 사상은 불교다. 특히, 불교의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정은 불교라는 종교 사상(宗敎思想)과 융합(融合)되어, 새로운 서정(抒情)의 변경(邊境)을 개척(開拓)하고 있다. 그는 ‘꽃밭의 독백(獨白)’이라는 작품에서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 앞에 섰을 뿐이다.”하고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바로 우리 시의 한 지평선(地平線)을 열고 있는 그 지난(至難)한 몸짓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현대시에 푸르고 아스라한 고도(高度)와 몸서리치는 유현(幽玄)한 심도(深度)를 더하고 있다.   생명파와 가까우면서도 조금 먼 듯이 보이는 일군(一群)의 시인은 청록파다. 박 목월(朴木月), 박 두진(朴斗鎭), 조 지훈(趙芝薰)은 모두 자연(自然)에 귀의(歸依)해서 각기 특색(特色)이 있는 산수도(山水圖)를 그려 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자연파(自然派)라고도 한다. 박 목월의 향토색(鄕土色)이 짙은 순수(純粹)한 산수(山水)의 서경(敍景), 박 두진의 기독교적(基督敎的)인 정결(淨潔)한 갈망(渴望)이 착색(着色)된 청산(靑山), 조 지훈의 선미(禪味)가 깃들인 고아(古雅)한 풍류(風流)는 가히 당대의 일품(逸品)이라 할 만하다. 지금까지 우리 시사(詩史)에는 자연 그 자체를 노래한 시는 없었다. 반드시 인생과 관계(關係)되어 표현되었다. 그런데, 청록파에 와서 비로소 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서 독립(獨立)된 의미(意味)와 정서(情緖)를 가지고 표현된 것이다. 한국의 신문학사(新文學史)를 통해서, 한국의 ‘자연’이 실재(實在) 그 자체로서 부각(浮刻)된 것은 청록파의 공로(功勞)라 하겠다. 이 밖에도 신 석정(辛夕汀), 김 용호(金容浩), 신 석초(申石艸), 박 남수(朴南秀), 김 현승(金顯承) 등의 작품에는 각기 특이(特異)한 시정이 담겨 있다.   4     6‧25는 현대시의 한 분수령(分水嶺)이었다. 사변(事變)을 계기(契機)로 하여 현대시는 참여시(參與詩), 순수시(純粹詩), 전통시(傳統詩), 주지시(主知詩) 등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시의 구조면(構造面)에서도 큰 변혁(變革)이 일어났다.   참여시란, 시의 사회 참여(社會參與)를 조장(助長)하는 현실주의 시(現實主義詩)를 말한다. 시인도 사회에 적극(積極) 참여하여, 사회적(社會的) 책임(責任)을 지고 시대의 증인(證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여시는 현실(現實)에 대한 비판(批判), 저항(抵抗), 고발(告發)의 내용을 담게 된다. 참여시와는 대극에 서는 것이 순수시(純粹詩)다. 이에는 객관적(客觀的) 순수시와 주관적(主觀的) 순수시가 있다 객관적 순수시는 낭만적(浪漫的) 주정(主情)을 배제(排除)하고, 참신(斬新)하고 선명(鮮明)한 이미지를 중시한다. 1934년부터 일어난 이 땅의 주지주의를 계승(繼承)한 것이다. 주관적 순수시는 심층 심리(深層心理)의 이미지를 포착(捕捉)하는 데 주력(注力)한다. 이상(李箱) 이후의 또 다른 내면 세계(內面世界)의 미학(美學)이 대두(擡頭)된 것이다. 객관적 공간(空間)과 객관적 시간(時間)의 질서(秩序)를 뒤엎고 내면 세계의 질서를 창조(創造)하는 것이다. 목적 의식이나 개념(槪念)을 배제하려고 하는 점에서 객관적 순수시와 같다.   전통시는 김 소월 서 정주, 박 목월 등의 정서(情緖)를 이어받고 있다. 멀리 고려 속요(高麗俗謠)와 향가(鄕歌)에까지 닿는다. 전통적 정서가 어떻게 현대화(現代化)하느냐가 큰 문제가 된다. 이와 상반(相反)되는 곳에 주지시가 있다. 영미(英美) 주지주의를 도입(導入)한 새 경향(傾向)이다. 기지(機智), 의식(意識)의 흐름, 패러디 등의 다양(多樣)한 방법이 실험(實驗)되고 있다.   6‧25 사변 이후의 특이한 현상(現象)은 시 구조(詩構造)의 변혁(變革)이다. 종래(從來)의 평면적(平面的)인 시가 입체적(立體的)인 시로 변화했다. 또, 종래의 무시간적(無時間的)인 것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가 공존(共存)하는 시간성(時間性)으로 변했다. 장시(長詩)도 많이 생산되었다. 시 속에 이야기 줄거리도 도입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현대시를 갈망(渴望)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내용을 요구한다. 방법과 내용의 혁신(革新)이 없이 새로운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의 창조는 과거의 시에 대한 반역(反逆)이요 모험(冒險)이다. 미래에 대한 창조적(創造的) 정열에 의거(依據)한 부정 정신(否定精神)이 필요한 소이(所以)다. [출처] 한국(韓國)의 현대시(現代詩)/문덕수|작성자 진솔당  
279    강경애 문학비 댓글:  조회:4220  추천:0  2015-03-23
강경애문학비 앞에서 (일송정 내)
278    김창걸 문학비 댓글:  조회:4648  추천:0  2015-03-23
김창걸문학비앞에서 (룡정 지신진)  
277    초현실주의와 앙드레 브르통 댓글:  조회:5270  추천:0  2015-03-21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초현실주의 소설)를 읽으면 무언가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교회탑의 종이 울고, 바람이 흐느끼고, 목격자인 돌과 나무가 증언하고 싶어하는 등등. 이런 작품을 초현실주의라 부르기에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문예사조를 초현실주의라 부르지만 난삽하거나 낯선 성질을 가진 것이면 어디에나 쉽게 끌어다 붙이는 말이 되었다. 게다가 어떤 환경에서는 '시적'이라는 말과 초현실적'이란 말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초현실주의는 그 윤곽이 허물어지고 그 핵심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그는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랭보의 명제와 '세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종합하려고 애썼다. 초현실주의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기욤 아폴리네르이다. 그는 "인간은 발걸음을 모방하려 했을 때, 다리와는 전혀 닮지 않은 바퀴를 창안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현실주의를 실천한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우리는 현실에 대해 자신이 지닌 개념을 바탕으로 또다른 현실을 창조할 수 있음을 말했다.   초현실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순수 항태의 심리적 자동운동으로, 사고의 실제 작용을, 때로는 구두로, 때로는 필기로, 때로는 여타의 수단으로 표현하기를 꾀하는 방법이다. 이성이 행사하는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가운데,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배려에서 벗어난, 사고의 받아쓰기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란 이성의 세계를 전적으로 저버리고 광인이나 도피의 예술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착란을 부러워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상태의 재창조' 를 요구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혹, 백일몽, 반수면 상태와 같이 정신의 중간 지대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인간 정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1924년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 삶에 대한, 삶이 지닌 것 가운데 가장 덧없는 것에 대한 믿음, 그러니까 내 말인즉 현실의 삶에 대한 믿음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에는 이 믿음이 망가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는 이 돌이킬 수 없는 몽상가는 날이 갈수록 그만큼 더 자기 신세를 불평하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물건들, 무관심하게, 혹은 노력하여 더맡게 된 물건들을 둘러보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초현실주의는 어느 날 우리가 우리의 적들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게 해줄 '보이지 않는 광선'이다. '너는 이제 떨지 않는다, 해골이여.' 이 여름  장미는 파랗다. 숲은 유리다. 녹음의 옷을 입은 대지는 유령처럼 나에게 별로 깊은 인상을 심지 못한다. 산다는 것과 살기를 그친다는 것, 그것은 상상의 해결책이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여기에서 초현실주의를 실현한 인물로 아라공, 바롱, 부아파르, 브르통, 카리브, 크르벨, 데스노스, 엘뤼아르, 제라르, 랭부르, 말킨, 모리즈, 나빌, 놀, 페레, 피콩, 수포, 비트락 등등을 꼽았다. (책표지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고 한 명의 여자는 브르통의 첫번째 아내 시몬 브르통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이 가장 결함없는 선구자로 인정하는 작가는 로트레아몽으로서 그의『말도로르의 노래』에 이런 구절에 주목한다. "네 번째 노래를 시작하려는 자는 사람이거나 돌이거나 나무이다." 주체는 인간에서 시작하여 광물과 식물에 걸쳐 있다는 것이며 주체는 세계와 자연 속에 잠재해 있는 어떤 보편적인 정신이란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현실주의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변함없는 원칙은 인간의 자유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의 능력 전체를 지금 이 자리에 불러내기 위해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은 언어를 대상으로 삼는, 언어의 힘을 빌린, 언어의 작업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늘이는 일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학식을 늘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언어의 개혁은 시의 개혁으로, 인간의 개혁으로, 세계의 개혁으로 연결된다. 이 점에서 초현실주의는 20세기의 전위 예술 운동 중에서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 삼은 거의 유일한 운동이다. 초현실주의는 시의 선동력과 언어의 잠재력에 전체를 걸었다.   그러면서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를 3개 소개했다. 깊은 감정과 직관의 윤택함과 배합의 활기가, 그 시대에 최고도로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는 것들이다.   지배자들 -폴 엘뤼아르   납으로 만든 대야 속에서 흔들리는 웃음의 절정에서 산새 한 마리를 아가리에 물고 있는 개의 날개를 달았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 침울한 얼굴을 간직하기 위해 그대들은 어둠을 만들려는가 아니면 우리 뜻에 다르려는가 천정에는 기름기가 창유리에는 침이 있다 빛은 끔찍하다   오 밤이여 잃어버린 진주여 괴로움이 악착같이 따라붙는 눈먼 낙하 지점이여   나에게 말하라 - 뱅자맹 페레   검은 그을음 검은 골탄 검은 검정이 그 사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망자들의 두 비석으로 보일 수도 있는 내 양쪽 귀에서 바다의 운모의 망령의 네 목소리의 메아리가 끝없이 되풀이하여 부르는 네 이름은 일식의 반대와 하도 많이 닮아서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내가 타오르는 석유 제비 한 마리가 도망치는 것을 보려는 희망에서 네가 문을 열어 줄 빙하 속 종달새의 한쪽 발이라고 믿지만 네가 원하면 종달새의 그 다리에서 불타는 석유의 샘이 솟아날 텐데 그렇게 한 마리 제비도 뇌우의 음악을 연주하려고 여름의 시간을 원하여 한 마리 파리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제조하고 그 파리가 꿈꾸는 설탕 거미줄이 걸린 눈의 수정체는 때로는 한 개 알에 비친 유성처럼 파랗고 때로는 벽시계에서 스미어 나오는 샘처럼 초록빛이고   흔들흔들 비단 자수 - 살바도르 달리   비단 자수는 오래오래 변함없으니 찻잔 하나를 부당하게 외면하네 그릇 공장에서 요즘 만드는 무어라도 좋을 포르투갈 찻잔을 찻잔 하나는 가장자리가 솟아오른 아랍 관청의 유연한 이율배반과 생김새가 닮았건만 내 아름다운 갈라의 눈길 내 아름다운 갈라의 눈길처럼 장막의 향기랄까 내 아름다운 갈라의 상피 조직 어릿광대의 등불 담당 그 상피 조직처럼           그렇고 말고 내 천번이라도 되풀이하리   비단 자수는 오래오래 변함없으니 찻잔 하나를 부당하게 싫어하네 그릇 공장에서 요즘 만드는 무어라도 좋을 포르투갈 찻잔을 찻잔 하나는 가장자리가 솟아오른 아랍 관청의 유연한 이율배반과 생김새가 닮았건만 내 아름다운 갈라의 눈길 내 아름다운 갈라의 눈길처럼 장막의 향기랄까 내 아름다운 갈라의 상피 조직 어릿광대의 등불 담당 그 상피 조직처럼           그렇고 말고 내 천번이라도 되풀이하리                                                                             앙드레 브르통 1896-1966      
276    초현실주의 혁명 댓글:  조회:4265  추천:0  2015-03-21
파리 문화탐방에서는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19세기 미술에 이어 20세기 미술사에 있어서 혁명이라고까지 일컬어지며 이 시기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은 물론 20세기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초현실주의 운동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초현실주의 운동이 지향하던 세계와 그들이 가져다 준 변화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지금에 와서 다시 초현실주의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며 재가치 평가를 하는가, 또한 이 운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자리가 될 것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돈시대에 태어나 그 당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변화를 가져다 준 이 운동은 4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망명한 작가들이 미국 땅에서 주요 미술운동의 선두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진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사라짐을 목격하며(에른스트 1976년, 미로 1983년, 마쏭 1987년 사망)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미니말리즘, 개념주의미술 등의 탄생을 지켜보며 우리는 더 이상 심리적인 것에서나 몽상의 세계 또는 자동기술법에서의 어떤 새로운 창작의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예술활동을 하나의 개념이나 태도, 가장 단순한 형태에 국한하여 버리는 경향은 그 위력을 잃었다. 대신 형상의 복합성, 쟝르의 혼합,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선보이는 즉흥적인 표현 등이 각광을 받으며 초현실주의의 직접적 간접적 영향을 위시한 작품들이 다시 출현하게 된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걸작품을 총망라한 30년이래 최대 규모  전 프랑스 국립 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낸 베르네르 스피스의 기획으로 성황리에 막을 올린 이번 전시는, 그의 1997년 직위 임명직후 기획안이 작성되어 그 후임자 장 자크 에야공에 의해 실현된 수년간에 걸친 땀과 노력의 산실이다. 스피스는 르 몽드 기자 필립 다졍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시 기획에 얽힌 이야기와 그의 초현실주의 운동과의 인연을 이렇게 밝힌다.  ≪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가 에른스트의 75세 생일을 기념하는 기사를 의뢰하였었죠. 저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일과 이런 신문기사에 대해 아무런 흥미가 없음을 시사하였지만 호기심에서 저와의 인터뷰를 승락하였고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지요.≫ 막스 에른스트의 전문가이면서 미술사학자인 스피스는 그의 이번 전시 기획이 사실 1966년 에른스트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30년이래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60여명의 작가와 600여점 이상의 작품) 퐁피두 센터에서 기획한, 20세기 미술사에 있어서 가장 왕성하고 활발한 창작이 이루어진 시기의 걸작들을 망라한 역사적인 이번 전시관람에 여러분의 각별한 관심의 발길을 기대한다.  ≪ 초현실주의 혁명 ≫  1917년 아폴리네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 초현실(Surreel) ≫ 이란 말에서 영감을 얻어 붙여진 초현실주의 운동은 앙드레 브르통의 ≪ 초현실주의 선언(Le Manifeste du surrealisme) ≫ (1924년 10월)의 발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막이 오른다.  이 선언을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의 기초를 마련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르넬가 15번지에 ≪ 초현실주의 연구 사무소 ≫를 개설하고 ≪ 초현실주의 혁명(La Revolution surrealiste) ≫ 이라는 전문 잡지까지 창간하게 된다. 이로써 다다이스트들의 반항과 허무주의에서 꿈과 무의식과 경이로움의 세계를 추구하며 프로이드와 로트레아몽의 이론을 바탕으로 초현실주의는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가게 된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막이 오름  반면 이에 앞서 1919년은 초현실주의 운동에 있어 중요한 연도인데 다다운동이 한창이던 이 해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배태기이기도 했고 브르통과 수포가 ≪ 자기장(Les Champs Magnetiques )≫ 이라는 자동기술법으로 저술한 책을 출판하여 큰 변화를 예고하던 해였다.  다다이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자들도 전쟁에 혐오를 느끼며 이를 저주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는 전통적 도덕관념이 이미 파멸되었을 뿐 아니라 미술과 문학과 과학, 철학, 정치 등 모든 것이 새로운 기반아래 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 인류학적 프로젝트는 특히, ≪ 초현실주의 혁명 ≫, ≪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 ≫, 그리고 ≪ Documents ≫ 이나 ≪ Minotaure ≫ 같은 잡지들을 통해서 그 틀을 갖추어 나간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프로이드의 작품이나 꿈과 무의식의 분석을 추구하는 해석학적 원칙을 체계화한다. 억제됨 없이 자유롭게 표현된 무의식의 세계는 이로써 세상의 명확성에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광기, 유년기, 미래에 대한 투시력, 불가사의한 경이감 등 방대한 주제들을 탐구함으로써 ≪ 미지의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 좀 더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자 ≫ 하는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새로운 기반하에 사회를 재구성한다는 목표  이번 전시의 연대기별 배치에서 엿보이듯 예술계와 사회에 반대기를 들고 일어난 다다운동의 영향은 민감하게 나타난다. 다다는 시와 회화의 새로운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잠복기의 구실을 하는 듯하다. 이어서 앙드레 부르통과 필립 수포의 ≪ Les Champs magnetiques ≫ 은 주관적 예술, 개인예술이라는 차원을 초월하는 시적형태를 소개한다. 반면 막스 에른스트와 앙드레 마쏭은 새로운 테크닉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런 예술운동에 있어서의 정당성을 보여주는데 주력하는데 곧 우리는 시각적으로 초현실주의를 구분해주는 두 가지 기술의 탄생을 지켜보게 되는데 자동기술법과 콜라쥬가 그것이다.  1921년 제작된 막스 에른스트의 ≪ 셀레브의 코끼리 ≫는 이 주의를 지향하는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되는데 코끼리의 형상을 하고 커다란 철제 가마솥을 연상시키는, 반은 동물이고 반은 기계의 모습을 한 거구의 짐승이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매우 낮게 자리잡은 수평선이나 하늘 위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보면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 회화에의 영향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외에 에른스트의 ≪ 오이디프스 렉스 ≫의 화살이 관통된 호두(1924), 같은 해에 그려진 미로의 ≪ 나의 금발여인의 미소 ≫, ≪ 아를르켕의 카니발 ≫(1924-25) 등은 초현실주의 운동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초현실주의 최초의 작품인 ≪ 셀레브의 코끼리 ≫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모든 역사적 초상 형태를 거부하고 전시대의 미술과 스타일에서 눈에 띠게 변화된 의식적인 단절을 시도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이들이 부인하던 가지각색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등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이는 세부사항에 충실하는 경향과 실물같이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 그리고 또한 인간이나 동물의 표본이 되는 형태를 무시한 생물학적 형상의 야만적 표현의 경우가 그 예일 것이다.  초현실주의 특히 회화의 경우 그 방대함과 주제의 다양함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당황스러움을 야기하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데 충분하다. 모든 것이 충격적인 방향으로 제시되고 어떤 형상이나 주제들이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제시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물음을 던지게 하나 이는 해답 없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즉, 인과관계 법칙에 따라 형성된 세상을 보는 시각에 ≪ 극소수의 현실 ≫을 추구하는 원칙을 대조시키며 우리를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런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오늘날 그들의 특이성과 기이함을 잃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들의 가설들이 우리의 인지력이나 논의력, 추론하는 방식에 공헌하여 그만큼 익숙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설치, 비데오클립, 영화, 광고, 여러 인터락티브 분야들도 초현실주의 작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쓰여진 이마주나 거기에 부여된 의미들의 폭 넓은 전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의식의 혁명임은 물론 삶 자체의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었음에 틀림없다.  최초로 자동동작을 이용하여 그린 마쏭의 데생과 1926, 27년에 시도된 모래그림, 1942-43 의 신화로 가득 채워진 피빛의 주름진 부풀어 오른 살점 같은 육중한 그림들, 또는 새로운 땅의 발견에 경이로움을 표현한 그림 (Antille, Paysage iroquois) 등 최고의 걸작품 6점과 미로 최고의 전성기로 간주되고 있는 1925-1927의 작품들, 탕기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 모음 ≪ Je suis venu comme j'avais promis ≫, ≪ Adieu ≫(1926), 또한 야밤의 사냥꾼의 이마주, 공포, 욕망의 충족 등을 표현한 마그리트, 초현실주의를 이야기하며 빠뜨릴 수 없는 달리의 대표작 ≪ 욕망의 수수께끼(L'Enigme du desir) ≫와 ≪위대한 수음자(Le Grand Masturbateur) ≫ 등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이다.  [가나보부르화랑]  "초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초현실주의 명사, 남성형, 정신의 순수한 무의식적 자동성을 지칭하며, 이를 통하여 구두로나 저술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실제적 기능을 표현하고자 함. 이성에 의한 제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미학적이거나 도덕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사고의 표현.  백과사전, 철학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등한시되었던 일종의 연합을 이루는 형태들이 더욱 상위의 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꿈의 전능성, 사고의 무상성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다른 모든 정신적 메커니즘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삶의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이들을 대신하려고 한다.  아마도 진정한 삶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어린 시절일 것이다.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난 후, 인간은 누구나 갖는 통행허가증 이외에는, 오로지 몇 장의 특별 우대권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요행에 의존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초현실주의 덕분에 이러한 행운이 다시 찾아오는 듯 싶다. 이는 마치 우리가 구원이나 상실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다 하겠다. 어두운 그늘아래서 우리는 소중한 공포를 실감하게 되는데, 다행히 그것은 연옥의 상태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공포의 전율에 떨면서 신비론자들이 위험한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건넌다. 나는 지나가는 도중에 나를 노려보고 있는 괴물들을 깨워놓게 된다. 그들은 아직 나에 대해서 악의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내가 그들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여기서 살아남을 희망이 있는 듯 하다. 수포와 내가 예전에 그렇게 만날까 두려워했던 여인의 머리를 한 코끼리와 나는 사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나에게 아직도 적잖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용해되는 물고기도 자리하고 있다.  일조의 연합된 것으로부터 갑작스러움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쓰일 수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이붙이기 작업은 가장 세련된 문체의 문학적 작품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의도되지 않은 조각들, 예를 들면 신문에서 잘라낸 기사의 제목이나 혹은 제목의 조각들을 결합함으로써 획득해 낼 수 있는 것도 시라고 부를 수 있다. -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에서 발췌 - 
275    초현실주의 요약자료 댓글:  조회:4648  추천:0  2015-03-21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Surreaism(1924~1938/1946)(요약자료작성자:이승훈)  1>초현실주의 개요  1.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2차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36년까지 약20여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전위적인 예술운동으로 문학,회화에서 시작하여 연극  사진,영화,건축,조각,사업미술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미쳤다.  2.명칭은 1917년5월18일 공연된 발레 '퍼레이드'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최로로 사용됬고 같은해  아뽈리네르의 희곡으로 6월24일에 공연된 이라는 작품에서 유래되어 1917 년 브르통과 수포가 자장(磁場)이라는 문학지를 발간했을때 그들이 실험하던 즉흥적 방법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초현실주의를 채택했다.  3.초현실주의의 정식 발족은 앙드레 브르통의 1924년 10월 초현실주의선언과 함께 문을 연 '초현실주의연구소'에서부터이며 같은해 12월에는 이란 기관지를 창간한다.  문학적,심리학적 주조를 띠는 1924년 초현실주의 제1선언의 근간은 인생과 문학에 있어서 사 실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주장한 인간 상상력의 해방이라 할 수 있고, 정치적,논쟁적 성 격의 1929년의 초현실주의 제2선언에서는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각하지 않는 미,애정,재능등의 지금까지 표현하지 않은 미개척 부분을 밝히는 것을 목적이 다 라고 하고있다.  4.1925년 첫 그룹전을 시작으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에는 두갈래의 방향으로 진행 되었는데 추상적 초현실주의와 사실적 초현실주의가 그것이다.초현실주의는 전기의 시기에는 '자동기술법'에, 후기의 시기에는 '데페이즈망'에 의거한  회화로 분류된다.  5.초현실주의는 다다가 스스로의 논리적 결과로서 구체적인 운동으로는 단명하였을때 그 부정 정신에서 나타난등을 승화시키고 체계화 하였으며 또한 프로 이드의 이성의 통제를 뛰어넘어 잠재된 충동과 상상의 세계를 해방시킨다는 학설을 원용하여  자동기술법(automatism)에 의한 를 대표로 하는 다양한기법  을 계발했다.  6.의식의 자유로운 기술과 연상을 근거로 가능한 꿈의 세계를 사물에 대한 마술적인 환각을 통 해 창조해 내는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등에서 액션페인팅,타시즘등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 향을 미쳤는데 그림에 있어 다양한 기법에 대한 경험의 확대는 물론,대상에 대한 미지의 상상 도 동시에 문제 삼아 이른바 그림에 있어 취급하지 못할것이 없다는 막다른 논리까지 가능케 하여,예술에 무제한의 자유와 해방을 가져왔다  2>초현실주의 배경  1.1차세계대전은 르네상스 이래로 쟁취해온 인간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했고 인간의 지적,문화적,사회적 체계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기존 체계에 반항,인간의 본능적 욕구 에의 헌신,이어 세계와 자아와의 새로운 관계수립의 와중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메었다.  2.전통과 이성의 정부체제보다는 무정부가,합리적인 것보다는 비합리가 낫다는 사고아래 러시 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확산은 19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의 항거를 위한 통로를 제공하였다.  3.반전통적이고 기존의 가치관을 무시하였던 미래주의 예술이 잠시 보여준 반예술성은 차츰 발  전되어 시대적 사조로 전환되어 갔으며, 인간문화에 대한 항의는 다다이즘이란 모순과 혼란 으로 응어리진 반예술로 나타났다.다다 정신의 골수인 파괴,거부,부정의 정신은 파괴함으로 써 절대적 자유를 갖게 했으나 다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으로 초현실주의에 생명 을 부여하고 좌초하게 된다.  4.다다의 반예술적 활동과 반합리의 정신에서 초현실주의는 을 계승,획득했으며 반조 형적 표현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내면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으며 의식세계의 확장을 가져와 초현실주의의 등장은 조형영역의 확대를 얻게했다.  4.초현실주의자들은 로트레아몽을 그들의 스승으로 인정하고 있고 헤겔의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인 정당성을 찾기까지 하고 있지만 프로이드야말로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창시자이다.  3>초현실주의의 전개  1.쇠퇴한 다다를 뒤이어 체계적 정리가 없었던 모든 논리의 이면-꿈,무의식,광기,환각상태,불 가사의-을 실체로서 추구하는 방법을 목적으로 다다의 발전적 계승을 시도한 것이 초현실주 의이며 '다다의 잿더미속에서 초현실주의가 생겨났다'라는 말도 있으나 다다가 활발하게 움 직이고 있는 동안에 이미 그싹은 움트고 있었다.  2.1917년 브르통과 수포에 의한 초현실주의적인 문학지 자장을 발간한바 있는데 이렇게  문학에서 시작하였지만 문학적 표현의 좁은 영역을 벗어나서 보다 광범위한 영역-시,연극,심 리학,철학-에서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3.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선언이후 초현실주의 연구소의 기관지 에서 정신 의 무의식적 활동의 해방으로 새로운 인권선언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면서 자동기술법 (Automatism)에 의한 텍스트와 꿈의 서술 그리고 키리코,피카소,만레이,앙드레 맛송 등의  그림과 데생을 내용으로 다루었다.  4.1926~27년의 2년사이에 달리,탕기,마그리트의 등장으로 초현실주의는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들은 오브제 끼리의 만남이 아니라 이미지들 상호간의 만남을 사용한 새로운 수법을 들고  나왔는데 이때 요구되어지는 것은 사실적 묘사, 즉기법인 것이다.  5.1929년 앙드레 브르통은 정치적 논쟁적인 초현실주의 제2선언을 발표한 다음 새로운 기관지 를 창간하는데 막스레닌주의의 이입으로 작가간의 분열을 가져  왔으나 계속 발전하여 1935년 초현실주의는 절정을 이루게 된다.  6.1938년 파리에서 대대적인 이 개최되었는데 이는 초현실주의 최대의 결 산이 되었고 2차대전으로 이운동은 실질적으로 해채를 맞게되나 브르통,에른스트,탕기,마송, 달리등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여 미국 현대미술의 태동에 씨앗을 심었다.  4>초현실주의 주요작가  *1925년 최초의 초현실주의 단체전이 열리면서 만레이,키리코,아르프,클레,에른스트,마송,미로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 했고 나중에는 달리,탕기,마그리트등이 참여하였다.이들은 대채로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기호화 상징화한 추상적 경향과 꿈속의 장면과 같은것을 그리는 사실적 경 향이다.  1.사실적 초현실주의  1)막스 에른스트  2)살바도르 달리  3)이브탕기  4)르네마그리트  5) 포파울 델보  2.추상적 초현실주의  1)호안 미로  2)앙드레 마송  *1)파울 클레  2)프란시스 피가비아  3)마르크 샤갈    1.서양미술사 유파별정리 소논문모음-상명여대학원(고전주의~팝아트)  2.세계미술용어사전-월간미술편.중앙일보사.1989.  3.20세기의 미술-로즈마리 램버트.애경.1991.  4.현대미술의 역사(1)-H.H.애너슨.인터내셔널 아트 디자인.1991.  5.현대미술의 역사(2)-H.H.애너슨.인터내셔널 아트 디자인.1991.  6.20세기 미술의 시각-이영철편.인터내셔널 아트 디자인.1991.  7.ART NOW-루시 스미스.한국미술연감사.1985.  8.20세기 미술의 모험(1)-J.L.페리에 편저.A.P.I.1990.  9.20세기 미술의 모험(2)-J.L.페리에 편저.A.P.I.1990.  10.현대미술구조론(1)-유인수,최병기역.숭례문.1990.  11.현대미술구조론(2)-유인수,최병기역.숭례문.1990.  12.현대미술의 동향-정병관외.미진사.1987.  13.현대미술 개념풀이-로버트 앳킨스.시공사.1994. 
274    첫수확 노래비 댓글:  조회:4314  추천:0  2015-03-18
  왕청2중 교정에 세워진 《첫수확》노래비앞에서 출처(연변모이자 ) : 인물 - 《첫수확》, 《논물관리원》과 김세형   
273    류연산 문학비 댓글:  조회:5142  추천:0  2015-03-18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민속촌 뒤동산 내) 화산암으로 된 문학비 정면에는 《혈연의 강들 류연산문학비》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출처(연변모이자 yanbian.moyiza.com) : 評論 - 류연산문학비 고향 진달래민속촌에 경립 - http://yanbian.moyiza.com/m_07/492370                    
272    최룡관 시비 댓글:  조회:4208  추천:0  2015-03-18
           
271    김문회, 리근영, 박화, 최룡관 시비 (화룡 선경대) 댓글:  조회:4740  추천:0  2015-03-18
화룡 화룡적명인시비 제막     2008년 09월 26일 13:23     17일, 화룡시 당위와 정부에서 주최한 화룡적명인시비제막식이 화룡시선경대풍경유람구에서 있었다. 이번 시비는 조선민족의 우량한 문화전통을 지키고 화룡시문화관광을 흥기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어 관심사가 된다. 고 박화시인, 리근영시인, 고 김문회시인, 최룡관시인 등 4명 문인을 대표로 기념비가 제막되였다는 점에서 연변문학사상 최초의 정부주도형기념비라는 점에서 시선이 더 집중된다. 이날 제막식에는 김림성로동청부청장 신봉철을 비롯한 화룡시 당정지도간부들과 연변작가협회 그리고 주안의 부분적 시인, 평론가, 화룡시안의 문인들이 참가하였다(최국철기자).     래원: 연변일보                                                                                                  
270    심련수 시비 댓글:  조회:4233  추천:0  2015-03-18
  [서전서숙이 있던 자리]   [시인 심련수의 시비 : 지평선]   지평선 하늘가 지평선  아득한 저쪽에  휘연히 밝으려는  대지의 려명을  보라, 그 빛에  들으라, 그 마음으로  달려라, 해가 뜰  지평선으로  막힐것 없는  새벽의 대지에서  젊음의 노래를 높이 부르라.  룡정 실험소학교 내에 있는 심련수 시비 전문, 광복에 대한 열망과 그 믿음을 실천하려는 심련수 시인의 뜨거운 젊은 피가 지금도 굼틀대는것 같다. 광복을 며칠 앞두고 까닭 모를 변고로 저 세상으로 떠나간 시인의 청춘이 안타가울뿐이다.  다음 답사팀은 도보로 룡정 동산 북쪽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시인의 묘지를 찾아 떠났다.  룡정시 외곽의 토기동이라는 마을을 지나 산길을 따라 한참 오르다 그만 묘지를 지나친데서 장장 3~4시간을 옥수수밭과 풀숲, 눈밭을 헤매는 뜻밖의 "고생"을 맛보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다행히 시인에 대한 숭경심에 감복되였던지 해가 서산에 너울거릴 무렵 시인의 묘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시인의 묘지는 심씨네 산소에 모셔져있는데 몇해전 가족과 지인들이 수선했다고 한다.  묘비에는 "민족시인 심련수"라는 비명이 적혀있었다.  27세(1918.5~1945.5) 꽃나이에 비운을 맞은 시인, 그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민족과 문학, 생에 대한 불같은 사랑으로 펼쳐보이던 시인의 호연지기는 어느 하늘가에서 출렁이는가!  가족이나 지인들이 다녀간지 꽤나 이슥한지 묘지에는 마른 풀들이 어수선하게 꽂혀있어 보는이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심씨네 산소에는 심련수시인의 조부, 량친부모 등 분들이 모셔져있었다.  답사팀은 시인의 넋을 기리여 묵념을 올린후 석양빛속에서 귀가길에 올랐다. /김창희         
269    김파 시비 댓글:  조회:4984  추천:0  2015-03-18
  김파시인의 시비제막식 두만강변서 4월 1일 오전,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시비 제막식이 두만강변에서 있었다. 아름다운 문화관광도시인 도문시에 2009년에 설립된 정몽호시비에 이어 또 하나의 시비가 세워졌다. 화강암기초돌에 받쳐진 높이 2.6메터, 너비 1.2메터에 두께가 0.5메터인 유백색 대리석시비에는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이 조한문으로 정히 새겨졌다. 《돌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돌은 부서진 소리가/ 뭉쳐진 덩어리다//바이올린 선률도/ 피아노의 절주도/돌의 부서진 소리를 체로 쳐/ 빚어서 발효시킨 술/ 마시면/ 취한다.》 시비 정면에 새겨진 《돌의 음악》의 전문.
268    정몽호 시비 댓글:  조회:4249  추천:0  2015-03-18
                    ▲도문 두만강 공원에 세워진 정몽호 시인의 시비
267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댓글:  조회:5466  추천:0  2015-03-18
태항산조선민족영령들  호가장의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기자: [ 김청수 ] [ 길림신문 ][ 2012-10-07 19:21:51  ●중한수교 20돐 특별기획 지난세기 반세기에 걸친 세계반파쑈전쟁에서 우리 조선민족 애국지사들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 세계평화를 위해 진리의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중국인민들과 어깨겯고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정책에 맞서 싸워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중한 수교 20돐을 맞으며 당년 조선민족영웅들의 용감무쌍한 투쟁정신과 애국주의, 국제주의 정신을 기리고 중한 두 나라가 일제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민족애를 실현하고저 하나가 되여 함께 싸웠던 우정의 과거력사를 되새겨보고저 지난 6월말 북경대학교 중한대학원생 항일유적지력사탐방팀은 태항산항일전적지를 답사했다. 그들과 함께 동행한 필자는 《태항산에서의 조선민족영령》들의 위훈과 위용을 가슴 뜨겁게 느꼈다. 유적지답사 경로에 따라 《호가장의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호가장전투에서 순국한 《4명 렬사, 그들은 누구인가》, 팔로군부총참모장 좌권장군과 조선의용대 지도자 윤세주, 진광화 동지의 사적을 쓴 《혈전의 십자령과 석문촌 〈조선의용군기념관〉》, 태항산의 생활정경과 녀성대오를 소개한 《〈미나리타령〉과 부녀대장 리화림》, 조선의용군 최고지도자들의 역할을 적은 《태항산에서의 무정장군과 정률성》 등 몇기로 나누어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과 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조선의용군》의 영웅사적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한편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북경대학교 제5대 한국류학생연구생회와 윤세주렬사기념사업회에 감사를 드린다. 1. 호가장의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지난 6월 29일, 북경대학 중한대학원생 태항산항일유적지 력사탐방일행은 북경으로부터 석가장 원씨현 흑수하향 호가장으로 향발하였다.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한해를 맞이하면서 중한 두 나라가 일제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민족애를 실현하고저 하나가 되여 함께 싸웠던 우정의 과거력사 현장으로, 새세대 젊은이들은 손을 맞잡고 그 력사적 진실을 향해 탐방을 떠난것이다. 탐방일행을 실은 뻐스가 4시간정도 달려 하북성 석가장에 당도하자 이번 력사탐방 해설을 담당할 조선의용군기념관 관장인 상영생선생(한족)과 일행 왕춘향(한족)씨가 함께 차에 올라 동행하였다. 상영생관장은 석가장정치협상회 상무위원으로서 다년간 태항산일대 항일력사와 유적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중한수교후 태항산항일유적지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다시금 태항산항일투쟁사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한 조선의용군에 대한 연구에 살손붙이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하북성섭현 태항산기슭의 련화산자락에 세워진 조선의용군기념관운영을 담당하면서 조선의용군의 태항산에서의 항일투쟁력사에 대하여 심입되는 연구를 보다 폭넓게 진행하고있었다.왕춘향 역시 조선의용군의 태항산에서의 항일투쟁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많은 관련 지식들을 학습하면서 헌신적으로 해설사업에 나서고있었다. 그녀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성장한 화교로서 우리말 해설에 아주 능통한 해설원이였다. 그들의 안내로 뻐스는 곧장 조선의용군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맞대결을 펼쳤다는 호가장전적지를 향해 줄달음쳐갔다. 상영생관장은 달리는 차안에서 조선의용군에 대한 설명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20세기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로 조선의 무수한 애국지사와 열혈청년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중국땅에 망명하여 구국, 애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전면적인 항전의 서막이 열리고 중국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조선혁명가들을 비롯한 아시아 약소국 혁명가들은 중국의 항일전쟁은 곧 전 아시아 여러 약소국들이 독립의 길로 나아가는 전쟁이라 간주하면서 서로 단합하여 중국항일전쟁을 도와야 한다고 인식을 통일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인무장력량인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였다. 조선의용대가 건립되는 날 무한팔로군판사처 책임자이며 국민혁명군 정치부 부부장이던 주은래동지가《동방 각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자》는 정치보고를 하였고 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 청장인 곽말약동지가 축하시를 랑송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적후항일전장에서 활동하는 첫 국제종대로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1940년 국공합작이 파탄되고 국민당의 소극항일과 적극반공이 창궐해지고 부패무능이 드러나 국민당에 환멸을 느낀 조선의용대본부는 중경판사처 책임자인 주은래와 비밀리에 상의하고 남경, 중경, 계림에서 국민당통치구역의 봉쇄선을 뚫고 항일민주근거지인 팔로군해방구로 북상하게 된다. 1941년 7월까지 모진 어려움과 간난신고를 거쳐 마침내 태항산근거지에 집결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당지 주민들과 하나로 어울리며 가족같이 애대를 받았다. 그들은 경상적으로 각종 업종의 인사들로 사복하고 적구에 들어가 비밀리에 조선혁명단체를 조직하고 대량의 조선인들을 근거지에 와 학습하고 사업하도록 인도하였으며 적구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팔로군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그들은 또 적후선전공작을 펼쳐나가기 위해 무장선전대를 조직하였다. 무장선전대는 낮에는 주로 준비를 하고 밤이면 적의 점령구로 들어가 군중선전과 적군와해사업을 벌렸다. 마을에 들어서면 무장선전대의 성원들은 분공에 따라 한쪽에서는 군중집회를 열고 반제선전연설도 하고 노래도 배워주고《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단결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치자》는 구호들을 바람벽에 쓰고 또 한쪽에서는 적의 또치카 가까이에 다가가 메가폰으로 적군와해선전을 벌렸던것이다. 당시 호가장은 적구와 《접경》하고있는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최전선이였다. 무장선전을 나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분대 29명 대원들은 호가장마을에서 일제놈들의 포위공격에 맞서 치렬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4명이 희생되고 2명이 행방불명이 되였으며 그들을 엄호하러 온 당지 팔로군전사 12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우리 력사탐방일행은 드디여 목적지인 호가장전적지에 당도하였다. 창밖에서는 안개비가 내리고있었다. 대통로길 바른편 바로옆쪽에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가 비속에 호젓이 서있었다. 당시 행방불명이 된 2명중 한명인 김학철선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에게 포로되여 일본 나가사끼형무소에까지 끌려가 고된 고문과 혹형을 받았다. 그는 전향서를 쓰면 다리치료를 받을수 있다는 유혹도 물리치고 다리에서 구데기를 집어내고 나중에 다리를 절단해버리면서도 끝끝내 전향서를 쓰지 않았고 1945년 8.15해방을 맞아 드디여 감옥에서 풀려나왔던것이다. 그후 문화대혁명기간 정치몽둥이에 맞아 또 10년 지옥살이를 하면서 그는 총대신 필을 무기로 잡고 조선의용군에 관한 《격정시대》《항전별곡》《최후의 분대장》등 저서를 집필하여 《우리 력사에서 영원한 사각지대로 남겨질번했던 조선의용군의 항일독립운동력사를 기록》해내였으며 《20세기 신화》와 같은 날카로운 사실주의작품을 써내여 사회불의에 저항하였던것이다. 그는 생전에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작가다운 명언을 남겨 후세에 전해가고있다. 그의 문학비 뒤면에는 《밤 소나기 퍼붓는 령마루에서 래일 솟을 태양을 우리는 본다》는 비문이 씌여있었다. 그 비문을 읽으며 우리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의 위용을 가슴 벅차게 느껴보았다. 거기에는 또다른 문학비 《김사량항일문학비》가 나란히 서있었다. 그앞으로 서서히 다가가 어딘가 서먹한 이름, 《우리 력사에서 잊혀진 이름》에 보다 주의를 돌려 살펴보았다. 문학비뒤면에는 또 이런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이십구 용사가 서로 엄호해가며 내달려 올라가 진지를 잡았다는 호가산은 말이 없고 이끼 앉은 바위위에는 락엽만 쌓여있다…》김사량의 《노라만리》에 적혀있는 한단락의 글귀란다. 김사량, 그는 누구인가? 김사량은 워낙 《엄혹했던 시기 몸으로 부딪쳐 직접 일제와 맞선 대표적인 저항작가》로서 그의 항일문학은 오늘날 여전히 학술계의 연구대상으로 되여있었다. 그는 조선 평양에서 초중까지 졸업한 화교로서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 동경제국대학독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39년 10월 소설 《빛속으로》라는 작품으로 일본최고권위의 문학상 후보에 오른 유망한 작가였지만 1945년 2월 《조선출신 학도병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되여왔다가 북경에서 태항산항일근거지, 조선의용군주둔지로 망명했다. 그 망명과정을 소설로 쓴 작품이 《노마만리》란다. 그는 이 작품에서 태항산근거지에서의 항일활동을 핍진하게 그려내였으며 그는 태항산근거지에서 조선의용군에 참가한다. 그후 그는 6.25조선전장에서 희생되였다.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비 사이에는 또다른 홍황색의 돌기념비 하나 드팀없이 자리잡고있었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의 기습 포위 공격 / 어둑한 골짜기, 자욱한 총소리/ 그날, 조선의용군 네 전사 / 그들을 구원하려던 팔로군 열두 청년 /이곳에서 전사하였거니/ 이 보리밭 머리에 / 태항산의 돌을 깎아 비를 세우노라 》 중국하북성원씨현인민정부, 중국연변작가협회, 한국실천문학사가 2005년 8월 5일 이 호가장전적지에 세운 기념비였다. 이 기념비뒤로 안개속에 묻힌 호가장마을이 어렴풋이 보였다. 우리 탐방일행은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비에 생화를 올리고 렬사들을 추모하였다.  
266    김학철 문학비 (도문 장안 룡가미원) 댓글:  조회:4810  추천:0  2015-03-18
             
265    조룡남 시비 댓글:  조회:4694  추천:0  2015-03-18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워진 “반디불” 동요비   [출처] 저 명멸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워진 “반디불” 동요비   [출처] 저 명멸하는 반디불의 빛처럼|작성자 김 혁   하는 반디불의 빛처럼|작성자 김 혁  
264    최문섭 시비 댓글:  조회:4391  추천:0  2015-03-18
     
263    김례삼 시비 댓글:  조회:4827  추천:0  2015-03-18
                 
262    채택룡 시비 댓글:  조회:4231  추천:0  2015-03-18
                   
261    윤정석 시비 댓글:  조회:4941  추천:0  2015-03-18
           (연길공원 내에서)          
260    동시인 - 강려 댓글:  조회:4516  추천:0  2015-03-18
      강려동시집《또르르 뱅뱅》출간기념모임    2013/09/14 07:29            강려동시집《또르르 뱅뱅》출간기념모임이 지난 9월 13일에 열렸다.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모임에 주내 아동문학작가 30여명이 참석했다. 강려는 뇌성마비로  하여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한적도 있었지만 용케도 역경을 뚫고나와 아동문학의 길에서 자기만의 색갈을 갖춘 동시인으로 성장했다. 이날 출간모임에 참가한 평론가,  아동문학작가들은  떳떳하게 장애와  싸워 이긴 강려의  견강한 삶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면서 강려의 동시는 언어가 소박하고 형상이 생동하며 시적인 구성이 간결하면서도 예술적인 특점을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259    정판룡 문학비 댓글:  조회:4831  추천:0  2015-03-18
    [출처] 정판룡 문학비 앞에서 |작성자 김 혁         ▲ 연변대학 뒷동산의 정판룡문학비
258    연변 문학비 순례 댓글:  조회:4423  추천:0  2015-03-18
문학비 순례코스는 연변대학 서북쪽 언덕에 정히 모셔진 정판룡 문학비, 연길공원의 동시동네에 세워진 채택룡 시비, 윤정석 시비, 김례삼 시비, 윤동주 시비, 최문섭 시비, 연변사범학원내에 세워진 조룡남시인의 시비, 도문시 장안진 룡가비원에 세워진 김학철 문학비, 한락연 화가비, 도문시 두만강공원에 세워진 정몽호 시비, 김파 시비, 룡정시룡정중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룡정 실험소학교에 세워진 심련수 시비, 룡정고급중학 교정에 세워진 김성휘 시비, 룡정시 지신진에 세워진 김창걸 문학비, 룡정시 비암산에 세워진 강경애 문학비, 리태수, 조룡남 시비, 화룡시 선경대풍경구에 세워진 김문회, 현규동, 최룡관, 리근영 시비, 화룡시 로과에 세워진 리욱 시비,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민속촌 내에 세워진 류연산 문학비 ...  연변지역에 이미 세워진 문학비들,ㅡ \\\\\\\\\\\\\\\\\\\\\\\\\\\\\\\\\\\\\\\\\\\\\\\\\\\\\\\\\\\\\\\\\\\\\\\\\\\\\\\\\\\\\\\\\\   중국조선족 문화력사유적비 리스트     리욱시비/ 화룡 로과촌 현규동, 김문회, 최룡관, 리근영 시비/ 화룡 선경대유람구 내 김성휘시비/ 룡정고중 한락연동상/ 룡정 락연공원 강경애문학비/ 룡정 일송정 김창걸문학비/ 룡정 주덕해옛집/ 룡정 윤동주시비/ 룡정중학교 리상설기념비/ 룡정중학교 심련수시비/ 룡정 실험소학교 3.13추모비/ 룡정 서전서숙기념비/ 룡정 실험소학교 김학철문학비/ 도문 룡가촌 정판룡추모비/ 연변대학 뒤산 림민호동상/ 연변대학 교정 주덕해동상/ 연길 박물관 정몽호시비/ 도문광장 김파시비/ 도문광장 “첫수확”노래비/ 왕청중학교 “반디불”노래비/ 연변사범학교 연길감옥터기념비/ 연길예술극장 청산리대첩기념비/ 화룡 백리촌 봉오동전투기념비/ 도문 봉오동 소왕청항일유적비/ 왕청 마촌 김약연기념비/ 룡정 명동촌 “룡호”글자비/ 훈춘 “은사감사비”/ 연길 민주촌 “자치주창립의 노래”비/ 연길 진달래광장 김례삼, 채택룡, 윤동주, 윤정석, 최문섭 등 동시비/ 연길공원  
257    리태수 시비, 조룡남 시비 (룡정 일송정 내) 댓글:  조회:4982  추천:0  2015-03-17
      리태수시인의 시 한수  조룡남시인의 시        [출처] 일송정에서|작성자 설매  
256    선구자의 노래은? 댓글:  조회:4565  추천:0  2015-03-17
    선구자(윤해영 시 / 조두남 작곡)|    작곡자 조두남 선생은 1912년 평양에서 개화사상에 젖은 갑부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미국 콜럼비아대학을 나온 부친은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투옥되어 그가 18세때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여의고 의욕을 잃은 조두남은 21세때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조두남의 회고록「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에 의하면 만주를 방랑하던 1933년, 목단강 주변의 여인숙에 불쑥 찾아와 윤해영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가꼬깃꼬깃한 종이에 쓰인 '용정의 노래' 라고 쓰인 가사를 내밀었다.   초췌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독립운동가임을 알 수 있게 했던 청년은 『달포 뒤 찾아와 노래를 배우겠다』며 황망히 떠났으나 그 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조두남은 이 청년에게서 발견한 독립투사의 기상을 기리는 뜻에서 해방후「선구자」라고 제목을 고쳐 붙였다.    1987년 8월 16일 광복절날 특집으로 KBS라디오는 독립운동가 김동삼 일대기를 방송했는데 그가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나라사랑의 충정이 구구절절 베어있는 이곡은 듣는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곡은 민족의 노래로 애창되는 웅장하고 씩씩한 곡이다.    노래의 유래가 그러하듯 「선구자」가사는 그대로 용정의 모습이다.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떠나30Km 가량 북상하면 구릉지대가 끝나면서 탁 트인 평야를 만난다. 두만강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까지의 딱 중간쯤 되는 곳이다.일송정은 이곳 용정 너른 벌에 홀로 우뚝 솟은 비암산 정상에 서 있다.그러나 정작 일송정에 오르면「선구자」의 비장감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멘트골격에 울긋불긋한 색깔을 입힌 중국식 작은 정자가 워낙 생경한 까닭이다.원래 일송정은 가사대로 정자처럼 그늘이 넉넉한 한 그루 푸른 소나무였다. 늠름한 기개와 고절의 표상이었던 노송은 이제 등걸로도 남아 있지 않고 대신 그 자리를 차고 앉은조잡한 정자가 공연히 뻔뻔스러워 보인다. 번듯한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어 주변도 썰렁하기 그지없다. 비암산은 서울의 남산정도인 듯한데 주변이 평지인 탓에 상당히 높아 보이며 화강암이 곳곳에 노출된 골산이어서 일찍이 시인 김기림이 「간도의 내금강」이라고 읊었을 만큼 전체적 경관은 상당히 빼어난 편이다. 현지인들이 흔히 범이 웅크린 상으로 표현하는 비암산의 머리부분에 일송정이 있고 허리에 선구자 탑이, 그 아래쪽에 연변TV방송국의송신탑이 서 있다.그러나 지난 1991년 몇몇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구자탑은 1년도 채 안돼 민족주의의 발호를 우려한 중국당국에 의해 철거돼 기단만 흉한 몰골로 남아 있다. 비암산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용정은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모양이다.서북쪽 평강령 틈새를 간신히 비집고 나온 해란강이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도시 한가운데로 흘러간다.선구자가 말달리던 강변을 따라 연길과 함께 중국조선족의 양대 중심도시로 성장한 용정의 주택가가 길다랗게 형성돼 있다.용두레우물터는 용정시내 한복판 용정중학부근 삼거리 한켠에 조그만 가로공원으로 단장돼 남아 있다.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한글이 씌어진 높이2가량의 석탑옆에 이곳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880년경 조선이민 장인석·박인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해 우물가에 용두레를 세우고 우물이름을 용정이라 했으며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용두레는 우물물을 퍼올리는 장치로그 모양이 용머리를 닮았다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시내 초입 용문교에는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황금색 용장식이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양편을 치장하고 있다. 최근의 건축물이대개 그렇듯 1988년10월에 만들어진 이 다리의 치졸한 모습도 「선구자」가사에 담긴 깊은 뜻과는 거리가 멀다.비암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었다던 저녁종소리 그윽했을 용주사도 터조차 알아볼수 없는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선구자의 자취는 찾기 힘들다. 용정은 이웃 연길을 뒤쫓는 상업중심지로, 백두산여행길에 반드시 들르는 역사관광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있다.   오랜정체에서 깨어나 아침마다 용문교의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자전거행렬로 메우는 용정사람들은 달라진 시대의 새로운 선구자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일보 94. 8. 30 기사에서 정리.편집    한편, 국민의 애창가곡 '선구자'에는 그후 작곡자, 작사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시비거리기 생기기도 했다. 표절시비와 작사자의 친일논쟁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소개한다.      「선구자」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 세계일보 96. 11. 27    장렬한 조국 광복의 웅지를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국민의 애창곡으로 손꼽혀온 가곡 「선구자」의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곡 「선구자」와 관련,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해방 때까지 2년여동안 조두남선생과 중국 흑룡강성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윤해영과는 1944년 처음 만난 후 45년 9월부터 한동안 작사가와 작곡가로 함께 일한 바 있는 김종화옹(75·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작사자로 알려진 윤해영은 국내에서 1933년 어느날 하얼빈에 살고 있던 조두남선생을 찾아가 시 한편을 내어놓으며 곡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에 오겠다던 그는 지금도 소식이 없어 세인들에게는 표연히 사라진 「독립군」 쯤으로 인식돼 있다가 91년 이후 변절한 친일 시인이라는 주장이 나와 이 노래의 무분별한 방송 연주에 제동이 걸려왔다. 그러나 김옹의 술회 내용이 맞다면, 윤해영은 현재 불리고 있는 「선구자」의 가사를 쓴 적이 없고,애수에 젖은 동요 외에 「척토기」 「발해고지」 「해란강」 「오랑캐 고개」 「낙토만주」 등의 친일시를 썼기 때문에 「변절」 운운할 필요가 없는 친일시인이며 「선구자」의 작사자는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된다. 김옹은 「용정의 노래」에는 「선구자」에 나오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의 구절은 전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등 유랑민의 서러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북경=연합>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 “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 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이런 이유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임정선열5위 영결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단체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2014.11.14 14:30|신고 추천해요1   답변 고마워요 정말로 시인 윤해영(尹海榮)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는 듯 합니다.   윤해영(尹海榮)   일제 강점기에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 함경북도 출생으로 룡정에서 교사로 근무했다는 것 외에는 신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가 항일 정신을 담은 노래로 알려져 대한민국에서 오래 불리면서 이 노래의 작사가로 유명해졌다. 윤해영은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을 통해 신비한 독립투사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조두남은 1932년 "선구자"를 작곡할 때 하얼빈의 한 여관에서 윤해영을 만나 가사를 받았으나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다시 보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만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이 되면서 오랫동안 접근이 쉽지 않아 조두남이 묘사한 내용에 따른 이같은 인식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당시 조두남과 함께 활동했던 음악인 김종화가 조두남의 회고록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폭로하면서 윤해영의 실제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작사자 윤해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으나, 원래 선구자의 시는 북간도 용정(龍井)을 배경으로 작시한 것으로 가사 첫머리의 "일송정(一松亭)고개"는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며, "해란강(海蘭江)"은 그 옆을 흐르던 강 이름이다. 또한, 작곡자 조두남은 당시 망명청년으로서 만주 모란강에서 1933년 21세 때에 이 시에 곡을 부친 것이다. 이 곡은 광복 후 대중들에게 잘 불리어졌다.   윤해영 (시인)
255    윤동주 시비 ㄴ 댓글:  조회:4167  추천:0  2015-03-17
254    윤동주 <서시>의 새로운 해석 댓글:  조회:5287  추천:0  2015-03-17
서시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n  하늘을 우러러 죽어도 죄 짓지 않으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n  어린 백성들이 어둠-바람에 흔들리고 위태로우니 왕은 괴롭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n  나의 미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백성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n  그러나 빛과 어둠의 길을 정 반대이니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n  오늘 밤에도 빛이 어둠에 터치 당하고 있다.       ** 윤동주 님의 시 “또 다른 고향”을 먼저 읽으시면 이 “서시”가 좀 더 쉽게 이해됩니다. /   ** 능금은 빛깔도 아름답지만 속살은 또 다르고, 영생의 씨가 있다. 그 님의 시는 그런 능금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그 속살 맛을 못 보니 안타까움이다.   ** 바이블의 창세기의 기술 원리와 같은 2중 글이지만 그보다 더 세련되고, 이야기의 전개-연결이 좋다. 다 함께 공부하고 알리면 세계 문화 유산이 될 수 있는 시이다. /       **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가지”가 자식이면 “잎새”는 백성이다. 그리고, 나무는 부모 이자 왕을 뜻한다. 바람(어둠)의 시대에 전체에게 따돌려지는 것이 실질적인 왕이다.   ** 시대의 바람에 모든 백성들이 죄 짓고 덮으니, 어둠에 물들지 않는 선인을 먼저 죽이는 구조 원리 시스템에 전체가 순서적으로 말려들어가 죽는 원리인데, 윤동주 시인은 그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홀로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한다. 모든 인생길은 죽어가는 길과 살아가는 길, 즉, 빛과 어둠의 두 길이 있는데, 전체 백성이 죽음의 막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제 따돌림 당하는 왕이 죽으면 전체 백성도 따라 죽게 된다.   ** 시대의 어둠 바람에 모든 백성들이 한 사람을 왕따 시키면, 그 한 사람이 작용반작용 원리에 따라서, 실질적인 빛이자 왕이 된다. 그리고 빛과 어둠은 공존-공멸의 관계가 된다.   ** 척을 지고 있는 어둠이 강하면 그 반작용으로써 빛도 강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공멸로 끌려가는 것이니,진짜 사랑한다면 빛을 죽이고 홀로 떠나야 한다.   **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영생”한다. 즉, 아담과 이브는 집단을 뜻하고, 종말의 위기라는 듯이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 라 하였으므로 그는 “선진 문명국”을 뜻한다. –창세기3장 말미- /원시국가부터 현대국가까지 인류 역사의 모든 나라가 전쟁을 통해서 태어났다. 달콤한 쥐약-선악과 먹고 덮어서 죽은 쪽의 살아남은 잔당은 조상의 땅에서 멀리 쫓겨나 황무지를 개간해야 한다.       2014-05-26. 오영석(청천)    //   또 다른 고향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 내가 우는 것인가, 내 백골이 우는 것인가,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인가?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해석; 오영석(청천)]       ** 서울에서 연희 전문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어른들과 이웃에게 문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무관심과 냉대이다. 시대의 변화의 바람에 세상이 깜깜하게 변했다. 이 현상은 서울과 고향 땅이 같은 현상이다.       ** “백골”; 죄 없는 사회적 죽음; 왕따; 왕족; 전체 어둠에 대비되는 극 소수의 빛; 별; ……   **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어떤 현상이나 모습이 일부와 전체가 같다. 즉, 전체가 어둠이다.   **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어둠은 시대의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이다.   ** “풍화작용(風化作用)”; 시대의 어둠-바람에 세상과 사람들이 황폐하게 되었지만 시인은 오히려 곱게, 밝게 되었다. (시인의 연희전문 시절의 기숙사 친구 “정병욱” 씨의 글에서, 윤동주 시인은 “풍화작용” 이 단어가 시어 답지 못하다고, 스스로 불만했다고 한다. )       ** “지조 높은 개”; 지조가 높아서 개가 되었다. 작용과 반작용을 하나로 표현.   **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밤을 새워 어둠에 대하여 글을 썼다. 시인 스스로 딱하다.   **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내가 나를 쫓는다. 내 탓이다.   ** 윤동주 시인은 어둠 바람에 위협 받고 쫓기면서, “내 탓이요” 하면서, 인사도 없이 도망가듯,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전쟁은 패배 측이 추하고, 승리 측이 상대적으로 아름답다.       ** 시인의 시는 당신 스스로 빛이자, 별이자, 왕이자, 위인이다. 당신 스스로 아름답다. “별 헤는 밤”에서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 자랑처럼 파란 풀이 무성할 거외다” 어떤 해설가는 이것을 나르시즘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많은 곳에 시인의 시비가 건립되어, 시인의 말대로 되었다.   그 님의 시는 바이블의 어느 대목보다 아름답고 위대하고 향기롭고 심오하다. 그 모든 이유가 “백골” 이 한 단어로 설명된다. 어둠의 시대에 죄 없는 사회적 따돌림. 이것은 빛과 어둠의 작용반작용, 대칭 관계를 뜻한다. 왕따는 어둠의 따돌림-배척으로 된 것이니, 그가 확실한 왕이다.   /       //   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용된다면 /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해석; 오영석(청천)]       ** 햇빛은 시인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 시인을 지켜준다. 그 햇빛은 사랑, 정의, 진실, 진리, 생명, 등을 뜻한다.이것은 윤동주 시인 자신을 교회 조직이 막고 있다는 뜻이고, 시인은 그 조직의 꼭대기로 올라가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 집안의 일원인 시인이, 무한정 기다려도 불러들여 주의를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당당하고 여유가 있다. “휘파람이나 불며…. “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 청년 예수 그리스도가 고국의 신학자들에게 죽임 당함으로써 불멸의 성인이 되었던 것처럼, 윤동주 시인도 그와 똑 같은 경우로서, 기쁘게 아름다운 죽음의 꽃을 피울 것이다. 라는 …. “ 전국적인 왕따는 어찌 됐든, 근본은 영광의 빛이자, 왕이다.           //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 /생략.       --우연히 패전 소식이 들리는데, 나는 슬프지 않으니, 내가 있는 이 다다미-방은 남의 나라가 확실하다. 나는 이제까지 슬픈 시만 써 왔는데, 지금은 기쁨을 적어보아야겠다……           //   태초의 아침 / 1941년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 사랑은 뱀과 함께 /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좋은 남자는 꽃뱀과 , 선녀는 육체부 아들과....  
253    윤동주 시비 댓글:  조회:4294  추천:0  2015-03-17
   
252    김성휘 시비 댓글:  조회:4558  추천:0  2015-03-17
  김성휘 시비 모교에 재건     저명한 시인 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이 11월 22일, 시인의 모교 룡정고중에서 있었다. 사실주의 시문학의 한봉우리를 이루고 간 조선족문학의 대표적인 시인 김성휘를 기리기 위해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는 동인들의 모금으로  1994년 7월 22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 정원에 김성휘시비를 세웠었다. 2003년, 룡정고중은 교내확장공사때문에 시비를 잠시 철거, 이번에  재건에 나섰다. 재건된 시비는 대리석으로 된 받침돌을 새로 축조하고 그우에   김성휘시인의 시 “시내물”을 음각한 전 시비를  복원했으며 시비 주위에  계단식란간을  둘렀다.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룡정고급중학교 주최로  된 시비재건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 원로시인 설인을 비롯한 문인들과 시인의 유가족, 룡정고중 사생대표 100여명이 참가했다.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김성휘시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고 그의 공적을 치하했고 룡정고중 방송산부교장은 “김성휘시비 재건은 연변문단은 물론 유서깊은 룡정의 문화재 건설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시비재건의 의취를 밝혔다.  김성휘시인은 1933년 룡정시 백금향 동명촌에서 출생,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 력임했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로 활약했다. “나리꽃 피였네”, “들국화”, “금잔디”,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고향생각”, “흰옷 입은 사람아” 등 시집과 장편서사시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등을 펴냈다. 제1, 2, 3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수상, 20세기 중국소수민족100명작가평전에 그 이름이 수록되였다. 조선족의 서정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창작과 젊은 시인 양성에서 큰 기여를 한 시인은 1990년 3월 25일 병으로 타계했다.   "종합신문" 08/11/30   김혁   ======================= 김성휘시인 시비 룡정고중에 재건 편집/기자: [ 김창희 ] [ 길림신문 ] [ 2008-11-25 ]  고 조선족 저명한 시인 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이 11월 22일,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룡정고급중학교 주최로  설인 원로시인을 비롯한 30여명 문인과 김성휘시인 유가족, 룡정고중 사생대표 등 6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룡정고중에서 있었다. 룡정고중은 2003년, 운동장확장공사때문에 김성휘시비를 잠시 철거했다가 이번에  재건하면서 대리석으로 된 받침돌을 새로 축조하고 그우에   김성휘시인의 시 《시내물》을 음각한 전 시비를  복원, 그리고 주위에  계단식란간을  만들어놓았다.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인 김성휘시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면서 부단히 정품창작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한 김성휘시인의 정신을 배워 우리 문단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룡정고중 방송산부교장은《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은 연변문단은 물론 유서깊은 룡정고중의 문화재를 건설하는데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제2기 졸업생인 김성휘시인은 생전에 모교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또한  룡정고중선배장학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는바 그것이 밑거름이 되여 장학회는 이미 620여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발급하였고 교원들에게도 공로금을 발급하고있다. 룡정고중은 김성휘시인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라고 했다. 조선족문학을 위해 혼신을 바친 김성휘시인을 기리기 위해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는 소속 위원들을 중심으로 시비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족문학계 100여명 동인들이 모금하는 형식으로  1994년 7월 22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 정원에 김성휘시비를 세웠다. 김성휘시인은 1933년 룡정시 백금향 동명촌에서 출생,  1956년부터 1984년까지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 력임했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로 활약했다. 《나리꽃 피였네》, 《들국화》, 《금잔디》,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고향생각》, 《흰옷 입은 사람아》,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 《결백한 사랑》(한어문), 《장백산아 이야기하라》(한어문) 등 시집을 출판했고 제1, 2, 3회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수상했다. 1990년 3월 25일 김성휘시인은 병으로 타계했다. 
251    詩碑의 是非 댓글:  조회:4218  추천:0  2015-03-17
  김성휘시비(诗碑)의 시비(是非)문제 조성일 김성휘(1933―1990)씨는 우리 조선족이 낳은 대표적인 당대시인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의 서정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창작과 젊은 시인 양성에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955년에 처녀작 서정시 “첫 괭이”로 문단에 데뷔하여서부터 1990년 3월 타계하기전까지 파란 많은 세월에 시창작에 목숨을 걸고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평생에 시집 《나리꽃 피였네》(1997. 7), 《들국화》(1982. 5), 《금잔디》(1985. 8), 《고향생각》(1989. 8), 《흰옷 입은 사람아》(1989. 8) 등과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1979. 9), 장편서사시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1989) 등을 출간하여 우리 조선족시단에 선물하였다.  김성휘씨의 시창작로정을 추적해보면 좌적사조가 살판치던 지난 세월, 특히 20세기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그 당시의 “조류”에 휘말려 이데올로기에 밀착된 “송가”창작에서 자유로울수가 없었다.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한후 우리 시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전성통(传声筒)으로부터 시문학의 본연에로 획기적인 전이를 해야 할 막중한 과제가 제기된 긴요한 관두에 시인 김성휘씨는 새로운 문학사조의 참조계에 기대여 지난날 자기 창작에 대한 치렬한 반성과 점검을 하면서 렴가적인 “송가”와 경직된 “팔고식”시풍을 버림과 더불어 현대시창작에 입문하려고 창의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는바 새로 창작하는 자기의 시작품에 현대시의 이미지 도입, 상징과 은유 등 기법을 활용하기에 신경을 세워 가시적인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창작성과에 대해 불만족하면서 인생과 창작의 길에서 더욱 새롭고 더 높은 고봉에로 등반하려고 마음속깊이 다졌다.  나는 걸어간다  죽음을 다 모르고  사랑을 다 모르기에  지금도 걸어간다  성실을 지팽이로   그것이 분질러지도록  멀리 가고만싶었다  갈수록 하늘은 높아지고   갈수록 별은 밝아져   걸으며 걸으며 부자가 되고싶었다 기차길, 자동차길 다 버리고  술놀이 꽃놀이 다 잊고  바람과 비와 한줄에 간다  먼저 간 친구들 무덤을 지나  동아선 이웃과 작별을 하고   기다려주는이 없는 길을   가다가 맥이 진하면   두만강 물새울음 가슴에 모아   선채로 굳어져 돌이 되려 나는 간다                    ―서정시 “나는 걸어간다”                             (시 전문 1990. 2) 염라대왕은 시인의 삶에 너그러움을 베풀지 않았다. 시인 김성휘는 너무 일찍 우리와 영별하였다. 시적천부를 가졌으면서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너무 일찍 타계함으로 하여 자기의 새로운 시학관의 본격적인 실천화와 현대시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할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시문학의 구태(旧态)에서 철저히 탈피할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조선족시문학이 지난날의 경직되고 직설적인 예술기법과 렴가적인 “송가풍”의 질곡에서 벗어나 현대시에로 전환함에 있어서 선두주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유명한 “과도기 시인”이라고 조심스럽게 평가해본다.  김성휘씨의 시창작실천을 더듬어보면 그의 시의 대상과 소재를 대체로 자기의 고향사람들속에서 고향의 자연과 풍물속에서 구하고 선택하고 거기에서 시적령감을 퍼내고 미적정서와 향기로운 시취를 일궈냈다.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토시인”이라고도 일컫는데 필자도 동감이다.   김성휘씨는 새로운 력사시기의 초기에 시창작에서 선두주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 시문학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뿐만아니라 조선족문단 특히 조선족시단을 이끄는 인솔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시문학에서의 젊은 유망주들에게 애정을 몰부은 스승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그를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김성휘씨의 이런 성과를 피부로 절감한 감동된 림원춘, 림연, 최홍일, 최룡관, 김인선, 석화 등을 비롯한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은 김성휘시인의 공덕을 기리고저 그의 시비 세우기에 나섰다.  시인 김성휘가 타계(1990년 3월 25일)한 이튿날부터 김성휘시비를 세울 문제를 토의하면서 여러모로 되는 어려운 준비작업을 거쳐 1994년 5월 31일에 민간차원에서 김성휘시비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주임: 최룡관  부주임: 김인선, 석화, 조룡남   위원: 최삼룡, 림연, 김응준, 김동호,         주천을(당시 룡정고중 교장)  재무: 임만설 김성휘시비위원회가 성립되여 일을 시작하자마자 시비 세울 아이디어를 제기할 때부터 일어났던 찬반의론이 더욱 가렬화되였다. 어떤분들은 뒤에서 김성휘시비를 세우는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고 어떤분은 신문을 통해  반대의견을 천명하였다. 이를테면 한 문인은 “시비박물관”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김성휘시비건립에 반대의견을 토로했다. 단칸방 세방살이에 목을 걸고 죽을 지경으로 사는 우리의 겨레들이 수두룩한 이 마당에 산 사람의 렬악한 주택사정은 아랑곳없이 죽은 사람의 일에 인력과 물력을 아끼잖겠다는분들의 량식(良识)― 사회인으로서의 량식―에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수 없다. 한 지성인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한마디― 좀 아플지는 몰라도― 물어보지 않을수 없다.   당신들은 버젓한 살림집을 갖구계시니까 남의 일은 꿈만하시죠? 김성휘시비위원회는 여론의 비난, 경제적인 어려움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통지문을 낸다, 장소를 정한다, 설계도를 그린다, 모금한다, 조각한다 등등 복잡다단한 작업을 힘차게 밀고나갔다. 하여 한달 남짓한 짧은 시간내에 흰 대리석 김성휘시비를 제작하여 1994년 6월 28일에 김성휘시인 모교인 룡정고중교정에 세웠다. 이 시비는 동북3성 100여명 문인들과 기업인들의 정 배인 모금과 두터운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시비는 높이 2메터 25센치, 너비 1메터 60센치로 구축되였는데 비석 밑부분에는 생전에 자연을 즐기였던 김성휘시인의 기호와 그의 시집 제명을 따서 들국화송이가 각인되여있고 웃부분의 하얀 대리석에는 김성휘의 시편중에서 선정해낸 서정시 “시내물”(1980. 1. 23)의 전문이 새겨졌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시내물의  흐름을  찬히 보아라 천리만리  먼먼길도  자신만만타 흐르고  흐르고  내처 흐르며 한생을  말쑥하게  가는 나그네 김성휘시비제막식은 1994년 7월 22일 김성휘시인의 모교 룡정고중교정에 세워진 김성휘시비앞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였다. 제막식에는 동북3성에서 모여온 작가, 시인, 평론가, 기업가 및 시인의 가족과 친우들 그리고 룡정고중 사생 등으로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제막식에서는 림원춘의 개막사, 최삼룡, 김기형(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등의 연설이 있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류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龙)》은 비(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비란 비(埤)의 뜻이다. 상고시대의 제왕들은 하늘과 땅에 보고하는 말들을 기록하여 그것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 의식을 거행했었다. 이때 비석을 세움으로써 산악의 높이를 더 늘어나게 하였으니 이를 가리켜 비(埤)라고 부르는것이다. 주(周)의 목왕(穆王)은 엄산에 올라갔을 때 산우의 돌에 기념으로 몇 글자를 적었는데 이것 역시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비라 할수 있다. 또 종묘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원의 뜰에 비가 있는데 이것은 동쪽과 서쪽에 해당하는 두 기둥사이에 세워진것으로서 단지 제사에 쓰일 희생(牺牲)을 메여놓기 위한것이였기에 거기에서 어떤 업적이나 미덕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수는 없다. 그러나 공훈을 기록할 그릇이 점점 부족하게 되자 후대에는 비석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금속 대신에 돌을 사용하게 된것은 그것 모두가 영원불멸을 나타내기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종묘안의 물건이던 비가 무덤에 세우는 물건으로 된것은 평평한 무덤에 흙을 쌓아올려 그 높이를 더한것과 같은 리치이다. 비를 세우는 이런 기풍은 후세에 전승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양되고있는것이다. 비의 종류는 그 재료에 따라 금비(金碑)와 석비(石碑)로 나누며 비문의 내용에 따라 순수비(巡狩碑), 기적비(记绩碑), 신도비(神道碑), 릉비(陵碑), 묘비, 송덕비(颂德碑), 기념비, 정려비(旌闾碑), 유허비(遗墟碑), 척경비(拓境碑)… 등으로 나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민족이나 나라에 기여가 큰 저명인사의 기념비나 시비거나 송덕비를 세워 수비립전(树碑立传)하고 가공송덕(歌功颂德)하며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교양에 이바지하는것은 제창할바이다. 이런 기풍은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 아름다운 기풍이요 정신문명건설의 하나의 장거이다. 한세기를 웃도는 파란만장한 세월에 훌륭한 문학거장이나 지성인들이 배출되였다. 하여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리욱시비, 김창걸문학비, 김성휘시비, 정판룡문학비, 채택룡문학비, 김학철문학비 등을 세워 그들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있는것이다. 이런 기념비 세우기에 앞장섰던 문인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2007년 12월      시비(诗碑)의 시비(是非)                                               박 화 마침내 김성휘시비가 일어섰다. 문인, 기업인, 가족들의 뜨거운 마음들이 오뉴월 서리치는 말썽을 이겨내고 끝끝내 일떠세운 장거이다.   그것이 장거라 함은 “남에 김영랑, 북에 김소월하였더니 이제 연변에 김성휘”가 나왔다고 평하는 문인까지 있듯이 우리 글 문학권에 명성 높던 시인의 시비는 그 개인에 대한 기념비로 된다기보다도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그 공로와 로고를 옳게 평가하고 잊지 않는다는데 더 큰 뜻이 있기때문이다. 무릇 우리의 문학과 예술과 학술에 기여가 큰분들은 세세대대 존경하고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 형식중의 하나가 조촐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다.   어떤분은 그러다가 기념비의 수풀이 일어서서 땅이 좁아지면 어쩔랴고 신랄한 풍자까지 하였으나 하늘이 무너질가 겁내는 기국사람으로는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오히려 기념비를 세워 길이길이 칭송할수 있는 작가, 시인, 예술가, 리론가… 등이 더 많이 나와 더 많은 기념비를 세울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문명건설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 되겠는가?  면적이 연변과 어슷비슷한 한국에는 시비와 문학비만 해도 무려 80개가 세워졌지만 땅이 좁아지기는커녕 문학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도를 과시하면서 세계에로 진출하고있다. 비록 조촐한 기념비이지만 현역작가군에게는 고무력이 되고 후배들에게는 분투의 길잡이가 된다. 비여있는 공간에는 예술적인 장식물이 생겨나 자연환경을 미화하고 정신생산에 대한 사회적존경도를 높이는 사회정화작용을 하여 적어도 일거사득이 되는데 이 좋은 일을 왜 마다해야 하겠는가?  문인상경(文人相轻)이란 고질된 악습이 문인상경(文人相敬)이란 고상한 품격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정치가, 교육가의 기념비나 반신상이 세워질 때는 야단치지 않던것이 연변문단의 저명한 시인의 시비에는 왜 말썽도 많았는지 지금도 리해되지 않는다. 세세대대 그 정신적, 심의적 영향력을 일으킬 훌륭한 작품들을 깊이 남겼거나 문학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길에 새로운 기여가 있어 후세에 영향주는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기념할 가치가 있는것이다.   더구나 리해되지 않는 일은 민가차원에서의 이러한 장거가 한때는 정부차원에서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 산소에 비석을 세우는 기념은 간섭하지 않다가도 문단에서 자발적인 기념은 왜 간섭해야 하는가? 작가가 과연 “인체령혼의 공정사”여서 지식을 존중하고 지식인을 존중한다는 구호가 입에 발라맞춘 말이 아니고 피와 살이 되였다면 과연 이런 일이 생길것인가? 정신문명건설은 구호뿐만아니고 하나하나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로 이루어질것이다.   무릇 유공자는 사회적존경을 받아야 하고 그 존경은 또한 말로만 그쳐서는 안될것이다. 무엇이나 실속있게 되여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기풍이야말로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 훌륭한 기풍이다. 이러한 기풍을 수립함도 정신문명건설의 한 내용인것이다. 그래서 명성 높던 시인의 사후에 조촐한 시비 하나쯤 세우는 일은 마땅한 일이고 이런 형식에 내재된 정신적내용은 길이길이 이어가고 빛내여야 할것이다.   시비 하나만으로도 깊은 사색을 자아내거늘 다른 일에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문제인것 같다.                                                        1994년 7월 31일                      (《문학과 예술》 1994년 11,12월호 7페지)  2008년 9월호  
250    리욱 시비 댓글:  조회:4794  추천:0  2015-03-17
화룡시 남평진 호곡령에 세워진 리욱 시비ㅡ     연변일보 문예지에 "조선족작가 문학비 순람"을 기획하고 시우들과 호곡령 리욱시비앞에서   (좌로부터 한영남 시인, 김혁 소설가, 류재학 사진작가, 리해룡 시인)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초자 리욱의 생애 리욱 (원명 리장원)은 1907년7월15일 러시아 불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흘러갔다가 리욱이 3살나던해인 1910년 봄, 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든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이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선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 “파경”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 “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잡지 “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 월촌, 홍엽, 단림, 산금, 월파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페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 “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 “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 한 모양”, “아침 해 욱”으로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 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 “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으며 1949년 두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민족출판사), 장시 “연변인민의 노래(한문)”(북경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 “장백산하”(북경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컨는 문화대혁명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 “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 “풏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중 1984년2월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였으며 1988년7월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살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249    시평 절록/ 김관웅 댓글:  조회:5300  추천:1  2015-03-15
김관웅 시평 절록부분,ㅡㅡㅡ 최룡관씨가 말도 안 되는《제2차 시혁명》의 주체로 부각시킨 이들은 물론 이미 고인이 된 박화나 정몽호 같은 시인들이나 김파나 남영전 같은 60세 좌우의 현역시인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 최룡관씨는 《제2차 시혁명》의 가상적인 《혁명의 주체》를 등장시키고 있다.  《네마리 척후병보다 다른 새로운 척후병들이 나와야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할수 있다. 네마리 척후병들이 제2차 시혁명에서 그냥 척후병이 되자면 이제까지의 자신을 이겨야 하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여나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간고한 작업이여서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것은 어찌보면 무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80년대의 청출어람이였다. 21세기에 와서는 그들을 바탕으로 하는 청출어람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이와는 관계없고 세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필자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들의 아래 세대에 희망을 건다.  그들이 누구인가? 필자의 졸견으로 보면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 시인들중에서 덩지 큰 시인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누가 되는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 모든 시인들이 아니고 다른 새로운 시인일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젊은 세대의 시인들이 아직 시를 쓸 시간이 많으니 선배를 초월하여 훌륭한 시인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신진시인들은 결코 최룡관씨처럼 혁명의 방법으로 이 《네 마리의 척후병》에 대해 무모한 을 단행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가 기성세대 시인들을 《젖혀버리는》식으로 발전될 수도 없거니와 아직은 그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건대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은 한영남, 김영건, 김승종,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김현순, 김춘택, 혀련화 등 《제2차 시혁명》의 혁명주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제2차 시혁명》의 주요한 혁명의 대상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 등으로부터 지극한 가르침과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문으로 많이 전해 들었다. 마치도 병아리가 어미닭은 졸졸 따라다니듯이 하는 이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선배이자 스승이고 은인들을 혁명하겠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일이다. 혁명의 본의(本意)는 목을 베는 것이니까.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매 장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상투어를 패러디해서 쓴다면 그야말로 《제2차 시혁명의 대상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의 위태로운 목숨이 어떻게 되였는가를 알려면 하회를 보아야 할것이다.》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도 모두 최룡관씨의 《제2차 시혁명》의 주장에 공감하거나 동참할 시인들은 아님을 잘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들중에는 시의 대문에 아직 들어서지 못한 초립동이들이 적지 않으며 《제2차 시혁명》을 일으키려는 동기나 그 리론적 준비나 배경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 최룡관씨가 지금 고취하고 있는 《제2차 시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할 것이며, 또 되려고도 하지도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시혁명의 주체가 없는시혁명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에서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지 않은 신진 시인들도 많으며 또 이들은 결코 그 시창작의 수준에서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은 신진시인들에 비해 짝지지 않다. 이들은 최룡관씨의 시창작주장에 더욱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최룡관씨의 《제2차 시혁명》은 애오라지 최룡관씨의 주관적인 발상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대중적인 기반이 없는 공상적인 혁명에 불과하다고 인정한다.  무릇 정치혁명이던 문학혁명이던 성공을 하자면 명확한 혁명의 대상과 그 혁명을 이끌어나갈 혁명의 주체 그리고 광범한 대중적기초와 충분한 혁명의 조건 및 혁명의 명분과 리유가 갖추어져야 한다.  필자는 최룡관씨의 이른바 《제2차 시혁명》은 이 모든 것이 결여되였거나 불충분하다고인정한다.  다만 최룡관씨의 혼자만의 주관성과 맹목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 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하다.                                                                                                                          2006년 6월 20일 연길에서 출처(연변모이자 ) : 김관웅 - 최룡관씨의 그릇된 시학관을 반박함 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김관웅 시평 절록부분,ㅡㅡㅡ  한국 황지우의 《無等》이라는 작품이다. 활자배렬에 의하여 무등산의 형태를 추상하여 기하학적 도형으로 그린 것이다. 활자로 그린 피라밋 같은 삼각형의 추상도형은 모든 산의 일반적인 추상도이지만, 렬거된 단어나 어구의 집합군이 표준언어의 문법을 파괴하고, 시의 관습화된 일반적인 형식까지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과격한 실험에도 불구하고 추상화된 활자도형과 어휘군이 암시하는 의미집단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기교는 한국에서는 리상이 시도한바 있고 1950년대는 구체시 확산운동이 확산되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구상, 황지우 등과 오늘날 연변의 최룡관 같은 시인들에게도 그 영향의 여파가 미치고 있다.   최룡관은 황지우(1954 -  )의 「무등(無等)」이란 시를 접할 가능성은 충분하게 있다. 그것은 최룡관이 문덕수의 『시론』을 읽었다고 술회했는데12), 바로 이 시론에서 황지우의 시를 실례로 들면서 고착심상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이다.13) 물론 황지우의 시집을 통해서도 접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춘, 최룡관, 김승종 등 시인들과 최삼룡, 김룡운, 정몽호 등 시평가들의 한국을 중개로 한 모더니즘의 수용은 모방 → 여과 → 문화해석→ 신 시양식의 창조라는 과정을 겪었다.   이들의 모더니즘에 대한 모방은 우선 모더니즘시문학의 예술적가치에 대한 인정으로서 이질적인 문화로서 자신의 시창작의 가치를 확증해보자고 한 노력이였다. 그러기에 최룡관 같은 이는 모더니즘의 초현실주의 시만 시라고 하고 다른 시는 시가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을 펼치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들은 자신의 가치표준에 좇아 한국 현대시와 현대시론을 나름대로 선택하여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즉 문화여과를 하여 수용했던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중국에서 오래 동안 지속되였던 시문학의 정치도구화와 시의 정치사상성에 대한 일면적인 강조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탐미주의적인 경향은 력사의 격변기에 처해 있는 중국조선족의 생존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많은 평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출처(연변모이자 ) : 김관웅 - 중한수교 이후 중국조선족시문학에 끼친 한국 시문학의 영향(일부분)     
248    "시지기 - 죽림"의 詩와 관련하여ㅡ(김관웅 평론) 댓글:  조회:4847  추천:1  2015-03-15
  《류행 따르기》와 《전통 지키기》 김 관 웅   회의 주최측(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 사전에 청하지도 않았고 발언을 해달라는 요청도 없다가 두시간 전인 오늘 아침에 갑자기 전화로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통지를 하여 전혀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귀만 가지고 배우려는 동기로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사회자님께서 발언을 해달  라고 부탁하니 황송하고 당황하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사전에 김승종의 시집을 보았으니 할 말은 좀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에서 발언한 여러분들처럼 체계가 잡힌 론문  이 아니라 피상적인 소감밖에는 말씀 올릴수 없음을 널리 량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평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리론으로 김승종의 시를 평하기도 하셨습니다  만 저는 의견을 같이 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론현상 자체만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에 들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지하다싶이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의 핵심적인물인 데리다(1931-- )의 헤체주의리론  중에는 《열독의 해체(解構閱讀)》도 있습니다. 데리다는 전통적인 열독과 포스트 모던적  인 열독을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열독방식의 목적은 진리를  찾고 작자의 원의(原意), 즉 원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함으로써 독자와 작자 사이의 의사 소통을 도모하는것인데, 이렇게 하다 보면 독자는 작자의 노복(奴僕)이 되고 만다는것입니 다. 이런 까닭에 데리다는 열독을 쾌락을 찾는 유희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예작품에 대한 열독과 감상은 그 원의(原意)나 본의(本意)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독(誤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즉 독자의 주관적인 창조성을 발휘할 것을 강조하 면서 텍스트(즉 본문)중의 기의점( 意點)을 찾아내고 자기의 리해와 자기가 수요하는 내  용을 덧붙이거나 부연(敷衍)하여 텍스트의 내용에 새로운 의의가 생겨나거나 본래의  의의가 확장되게 함으로써 의의가 확산되게 하는 열독으로 되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승종의 시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해석한 것은 대단한 주관적창조성을 발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종의 시작품에 담긴 원의와 본의와는 무관하게 김승종의 시를 해체주의적 으로 해석하셨는데 이는 분명히 김승종의 시에 대한 오독(誤讀)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 리 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김승종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리론은 알지 못하고 있을뿐만 해체주의시를 쓴는다는  명확한 창작의식과 동기를 가지고 시창작을 한것도 아님은 본인도 승인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러면 김승종이 비록 해체주의리론에 대한 의식적인 리론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예민한 직각으로 해체주의의 본질을 통찰했거나 해체주의리론대가 데리다 와 비슷한 사색의 경지에 오른것인가? 대답은 역시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러면 김승종이 마치도 눈 멘 고양이가 죽은 쥐와 맞부딛치듯이 해체주의시와 맞부딛  치게 되였을가요?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아주  낮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종을 포함한 우리 연변 조선족들이 비록 아직은 후기공업화시회에서 살고있다고는  할수 없으나 후기공업화사회, 정보화사회, 세계일체화 추세의 흐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  고있는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붐이 일었습니다. 데리다의 해  체주의는 철저한 회의주의(懷疑主義)와 허무주의(虛無主義), 상대주의 특징을 보여줌으써 포스트 모더니즘사조의 핵심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있는것  만은 사실입니다. 영향을 미칠수 있는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양사회도 력사적전통으  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해체주의의 사회심리적기반인 회의주의와 허무주의, 상대주의가 자생(自生)할수 있는 사회심리적인 토대가 마련되여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부 평자  들이 김승종, 김문학 등 요즘의 많은 문학현상들을 데리다의 해체주의리론으로 분석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 단적인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서방 후기공업사회의 산물인 해체주의가 우리 동양의 오늘날 현실사회에서도 공명을 일  으키고있는 까닭은 첫째로는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도는 가 봅니다. 가장 새롭고 전위적이라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열독리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견해는 이미 2천여년전의 중국에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낡고 진부하다는 중 국전통문론이 가장 새롭다고 할수 있습니다. 적어도 데리다보다는 2천여년이나 먼저 《해  채주의 열독리론》과 비슷한 명제를 내놓았으니 말입니다.  중국 고대 시론에는 《시무달고(詩無達 )》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 성구에서 달고(  達 )는 해석이라는 뜻이니, 글자대로 풀이를 한다면 시에는 명확한 해석이 있을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시는 똑부러지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문학적용어로 풀이를  한다면 시감상함에서의 심미적차이성이라고나 해야 할것이다. 《오뉴월에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다 제나름》이라는 우리 속담과 통하는 말입니다.  김승종의 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는 R와 일회용 삶》은 우선 제목부터가 제나름대  로 해석할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혹자는 모더니즘에 가져다 붙이고 혹자는 심지어 포스트 모더니즘에 가져다 붙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죄다 그 사람의 개인의  의견일 따름이지 똑부러지는 해석, 유일 정확한 해석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똑부러지는 해석, 유일 정확한 해석이 아니더라고 해도 자기의 해석을 밑받침하는  충분한 론거가 있으면 그런 시평은 그래도 수준급이라고 해야 합니다. 충분한 론거를 제시 히지 못하고 김승종의 시에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는데 대 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돼지자리에서 개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될 룡꿈을 꾸었다고 해몽한다면 그것은 빗나가도 너무 빗나간 해몽  일것입니다.  시란 흔히 그 함의가 드러나있지 않는 함축미와 암시적기능을 높이 사기에 감상과정에  서 독자의 련상적작용이 그 어느 쟝르의 문학보다도 더 절실히 요청되고 아울러 감상자들  의 심리, 정감이나 지식수준 같은것이 부동하기에 동일한 시라고 해도 감상자들이 부동함  에 따라서 부동한 해석이 나올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감상의 차이성을 반드시 승인해야 합 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감상의 공동성 혹은 감상의 객관적표준을 부인하는것은 언어도단  이 아닐수 었습니다. 《오뉴월에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다 제나름》이기는 하지만 꺼꾸로 먹으면 확실히 쓰고 또 그 맛이 쓰기에 대부분사람들은 꺼꾸로 먹지 않습니다.  최룡관님은 김승종의 이른바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현대시 정초자의 한사  람인 리상시인을 떠올리는 그런 스찔이 매우 다분하다》고 격찬하였습니다. 이 평가의 실  사구시의 여부를 떠나서 김승종의 사부(師父)로서의 최룡관님의 편애정도는 문단의 제씨  들도 리해하고 넘어가야 할줄압니다. 우리 속담에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리상(李箱)을 현대시의 정초자라고 한 최룡관님의 말씀에는 좀 어페가 있는것 같  습니다. 리상도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현대시의 정초자라고 할수 없습니다. 표현주의나 초  현실주의 같은 구미 모더니즘 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런 이상한 시나 소설들을 쓰게 된것이 니, 리상의 완전한 창조나 실험은 아닙니다. 리상이 이상(異常)한 존재로 지금까지 조선현 대시문학사에서 줄곧 대접을 받아오고있는 까닭은 적어도 조선에서는 이전에나 그 당시에  나 볼수 없었던 《이상한 시나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의 조선이라는 이 특  정한 사회적시공간에서의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험정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립해야 옳을가요? 필자는 《실험정신》은 《절대적실험정신》과 《상대적 실험정신》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전자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거나 세상에서 누구도 해보지 못한 바를 처음으로 실천해본것을 뜻하고, 후자는 선인들이 이미 실험을 해보았으나 자기가 처해있는 특정한 시공간속에서 선인들의 실험한바를 중복하거나 부연하거나 확장하거나 발휘하는것을 뜻한다.  그러면 김승종에게 《실험정신》이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참으  로 《절대적실험정신》은 없으나 《상대적실험정신》은 조금은 있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실험정신》은 흔히 《실험정신》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고 답습이나 모방 또는 경우를 봐서는 표절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실례를 하나만  들어 보기로 합시다.  시를 문자부호의 단순한 라렬로 생각할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도형(圖形)을 도입함으로써  시와 회화(繪 )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중국에서는 이미 천년도 넘는 옛날에 시작되였  숩니다. 본세기초의 이딸리아나 로씨야의 미래주의 시문학창작에서는 문자부호로 이루어진 시행을 조작하여 도형을 만들어 보려는 실험이 백년전인 본세기초에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 그 첫사람은 이딸리아의 아폴리네르인데, 그의 시 《비가 내린다》는 시행을 하늘에서  비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것처럼 배렬했습니다. 로씨야의 마야꼽스끼는 이폴리네르는  이러한 실험을 계승하고 발휘하여 계단식으로 시행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 절대적실험정신》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원로시인 구상선생도 한때는 시행 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아무리 유명한 시인으로 대접을 받고있다고 해도 이런 장난을 실험으로 치부할수 없으며 모방이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국  조선족시단의 박화나 최룡관 등 제씨들이 이미 이런 모방을 많이 해왔으니 김승종이 시행  배렬 면에서 아무리 고심참담 경영을 한들 《실험정신이 있다》는 평가를 듣기는 아주 어  려울것입니다. 그리고 수자를 시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이미 서양의 미래파  시인 아폴리네르의 《69 6666…69…》라는 시에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리상도 이러한 서양 모더니스트들의 영향을 입어 1933년 서울종로거리에서 경영했던다방의 이름을 《69다방》이라고 시큰둥하게 짓기도 했거니와 몇년전에 연변의 석화시인도 자기의 시에  난삽한 수학공식들을 삽입하여서 물의를 빚어내기도 했습니다.  김승종 본인은 자신의 시행배렬과 아라비아수자나 수학공식의 도입을 두고 아주 새롭다  고 자아감각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연변, 한국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안광으로 볼때 이러한 잔재주는 재주가 아니며 형편없는 낡투입니다. 재주를 피우려다가 메주를 쑬수도 있음을  잘 알아야 할것입니다. 참새가 황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수도 있  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지난 실험을 《실험》이라고 칭친하는것은  동기여하를 불문하고 한 젊은 사람을 그르칠수 있음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로신선생이 언  녕 경고한적이 있는 봉살(捧殺)―올리춰주어서 죽이는것임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이는 욕  해서 사람을 죽이는 마살(罵殺)보다 위해성이 더 큰것입니다.  시는 기교나 형식 면에서 실험도 중요하지만 내용 면에서의 실험이 더욱 중요한 줄로 압  니다. 내용 면에서의 실험정신은 모더니즘의 원조(遠祖)인 보들레르가 《나한테 똥을 달라 ! 그러면 나는 그 똥으로 황금을 만들테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시의 소재와 내용 면에서 전통을 반대하고 세상을 놀래우는 《이상한 주장》이나 《괴상한 구호》를 부르짖는 방식  으로도 체현할수 있지만, 또 전통을 고수하고 전통을 가꾸고 전통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체 현할 수도 있습니다. 표신립이(標新立異)--새로움을 표방하고 이상함을 내세우는것을 통해 체현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꾸밈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아무런 괴상한 재주를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것을 통 해서도 체현될수 있습니다. 후자의 가장 좋은 실례로는 한국의 천상병님이나 연변의 젊은 문학도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황송문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평상심은 바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하고, 동양시론에서는 《대기교(大技巧)는 무기교(無技巧) 》라고 한것 같습니다. 그러면 황송문님의 시 《간장》을 실례로 들어 보기로 합시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 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가자면  꽃답게 썩어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여나는  부활의 륜회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재생이게 해요  ―황송문 《간장》 전문 이 시는 가장 토속적인 간장을 이미지화하였고 전통적인 상징수법을 사용한것 외에는 아  무런 현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얼핏 보면 그야말로 토속의 간장처럼 아  무 새로움이 없는둣 합니다. 그러나 가장 새로움이 넘치고 웅숭깊은 내용을 담고있는 시이 기도 합니다. 죽움과 재생(death ad rebirth)의 신화적원형의 암시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한 시입니다.  우리 연변은 시골입니다. 시골사람들이 시골사람다운 시를 쓰면 그것이 오히려 세상사람  들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설것입니다. 소화도 하지 못한 모더니즘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요 하면서 시골에서 류행만 따르다 보면 오히려 중세기의 기사차림으로 모험길에 나선 동키  호테처럼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동양의 시골 촌놈이 빠리의 패션쇼에 어색한 양장차림으로 나서면 빈축(嚬蹙)을 사기 십상입니다. 다들 세계적인 류행을 따를  때 홀로 민족적인 전통을 지키는것도 하나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다들 양장을 할때 한복을 입고 나서면 오히려 그 차림새가 더 세인들의 이 목을 끌수 있습니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심의 해체》의 리론에도 맞는다고 생  각합니다.  가장 지역적인것이 가장 민족적인것이 될 수 있고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으로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래의 말로 저의 발언을 마치려고 합니다.  새것이 낡은것일수 있고 낡은것이 새것일수도 있습니다. 새것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것  은 아니고 낡은것이라고 해서 다 추한것은 아닙니다. 2002년 1월 29일 연길에서 출처(연변모이자 ) : 김관웅 - 《류행 따르기》와 《전통 지키기》     
247    시인 - 최룡국 댓글:  조회:4647  추천:0  2015-03-15
                                         (우측 첫번째 최룡국 시인) 비가  최룡국  별빛도 검은 밤하늘아래  내 령혼의 외로운 초불밑에서  타오르는 아픔을 읽는다  뼈 마디마디 멍든 가슴속  하나의 피줄기를 세차게 울먹이며  한송의 꿈으로 하얗게 피여나는  아름다운 슬픔을 흐느낀다  둘도 없는 사랑의 땅  내 마음의 꿈나라에서  밀여오는 무궁화꽃 향기 눈물짖고  흩어진 모습들이 깊은 상처  나의 표정을 거울같이 깨고있다  헤여짐에 응어리진 그리움  만남으로 풀릴수 없어  할아버지 전설은 유언처럼 쓸쓸이 남아있고  하늘마저 흔적없이 달라지는  죽음보다 진한 아픔을 따라  내 육신도 비참히 무너지고있다  ********  최룡국 략력:  1956년 길림성 왕청현에서 출생. 연변대학 졸업후 근 10년간 연변작가협회에서 창작활동을 함. 시집으로는 《가끔은 아침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을 만나고싶다》, 《아버지의 말소리》가 있고 역서로는 《슬픈 우리 젊은 날》, 《북도시선》, 《중국현대산문선집》 등 20여권이 있음        오늘시집 (15) 가끔은 아침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최룡국 시집 1992년 초판 출판사 : 오늘  발행일 : 1992.4.30 초판  저 자 : 최룡국 
246    시인 - 리련화 댓글:  조회:4675  추천:0  2015-03-15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와 한국윤동주문학상제정위원회가 공동주최한 제2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이 2월 28일 오전 연길시 세기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시상식에서 리련화시인이 《조각달》로 동시상을, 방산옥시인이 《밤》으로 신인상을 수상하고 한국의 김상회시인의 《사람의 심성》과 미국에 체류중인 조선족시인 강동환의 《피겨 소나타》가 대상의 영예를 지녔다. 동시상 수상자 리련화 (가운데)
245    시조시인 - 최혜숙 댓글:  조회:4740  추천:0  2015-03-15
      장백산 울 어매여 -연변시조협회 수상작(2004년)   힘장수 낳아 키운 장백산 울 어매여   새 천년 세월에도 장수 많이 낳으시되     형제간 칼부림하는 장수만은 낳지 마소   최혜숙(의학박사)          
244    시인 - 박룡철 댓글:  조회:4386  추천:0  2015-03-15
아침세수 ○ 박룡철 세면기의 수도물을  손바닥에 고여 담고  등을 굽혀 얼굴을  가져다댑니다 손바닥안에 쏙 들어오는  어제의 내 얼굴이  오늘의 찬물에 젖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갑니다 때묻지 않고 산다는건  참으로 어려운 일 비누거품을 칠하고  아직 남아있는  어제의 흔적들을  조물조물 문질러버리고 그리고나서 흘깃  거울을 쳐다봅니다 물방울 숭숭 달고섰는  또 이리 시원한 아침이  그 속에 비끼여  말쑥하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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