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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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서울행 우감(偶感) 댓글:  조회:3777  추천:0  2015-01-16
네가 가니 나도 간다며 얼낌덜낌에 서울을 오갔어도 볼 일은 본답시고 애꿎은 소주나 축내고 쫓기듯 돌아왔으니 남은 인상이란 뒤적거려도 몇 개 안 남았다.그래도 은연중 불끈거리는 생각이었다면 한국의 3D (힘들고,더럽고,위험한)업종 현장에서 희비애환이 사깔린 비화(悲話)를 연출하는 주연(主演)들과 마주하는 갈망이었다.이번 외출길에서 본 일화에 곁들이어 깜박거리던 생각의 일부를 략필(略筆)로 적어본다. 촌감1.서울의 한 친구에게 약속을 보냈더니 어언간 6、7명이 소만왕림(掃萬枉臨)하여 예고없는 친구 모임이 벌어졌다.고향에선 볼 수나 있을가 하던 친구까지 이국 땅에서 만나니 기쁨은 이를 데 없었다.이들은 모두가 계획경제의 기발 아래서 모범수상을 받아오던 지기들이다.그러나 낡은 체제의 정리에 따라 대책없이 빈곤의 골목길을 걸어야만 했던 그들, 발빈(拔貧)의 묘연한 희망을 품고 한국에로 뜬벌이를 온 것이다.만만찮은 술값을 서로 자기가 치른다고 뻐겨대며 용돈까지 호주머니에 질러주는데 보아하니 여유로운 모습이 확연했다. 이젠 돈도 얼마간 모았고 퇴직비도 어지간하고 애들도 용돈을 월부로 보내니 집에 가면 한국 부자가 부럽잖게 나날을 보내게 된단다.인젠 소일삼아 두 나라 사이를 오간다며 으스댔다. 조선족은 행운을 타고난 민족이다.삶의 으뜸인 생계 근심을 수월스레 털어버릴 수 있다면 어느 민족이 또 있을가? 촌감2. 한 친구는 조선족의 미래를 피력한다.우리는 격변기의 산전수전을 거쳐 경제상에서 중쑬쑬한 소강 단계에 들어섰다.인젠 스러지는 민족 전당(殿堂)의 재축에 힘을 경주함으로서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세계화의 물결과 중국의 발전은 조선족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게다가 한국 땅의 번영은 조선족에게 력사전환기를 무난히 넘길 수 있는 항선을 선물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새로운 계단을 만들어 주고 있다.우리는 문화 이질의 갈등에서 헤매던 시기를 초월하여 상부상조하는 새 단계에로 진입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비록 민족 정체성이 요동치고 있지만 해결의 길은 더욱 헌신적으로 한국 사회에 융합하여 경제적 에너지를 확보하고 글로벌네트웍(Global Network)을 구축하면서 고향 건설에 돌입하는 것이다. 차별과 기시에 눌리어 살며 술이나 먹어대고 세상사는 뒷전인 줄로 알았는데 어물한 말재주를 부리기에 이 술고래도 진땀을 빼고 돈깨나 벌더니 사람이 되는구나!고 눈을 비비며 다시 봤다. 촌감3. 어느 명문대를 나온 30대 금실커플이다.원래 북경의 대기업에서 화이트칼라(White-collar)로 근무하다 우월한 조건을 반납하고 강남구에 간이음식점을 차리고 있었다. 종잣돈을 만들고 파트너를 찾아 중국에 본사를 두고 국제무역업에 도전하려는 꿈을 날리고 있었다.중국 사정에 정통하고 한국의 물정을 꿰뚫은 문화 밑천과 지식 경험을 무기로 인생을 빛내려는 당찬 잉꼬부부였다. 세속에서 밑바닥 산업이라 부르는 밥장사 마당에서 서비스에 전념하는 모습이 바로 새 삶을 위하여 풍상고초를 달갑게 감내하는 우리 민족의 축도(縮圖)가 아니겠는가? 식객들을 향해 깍듯한 정지경례(停止敬禮)를 붙이고 안녕、감사、다시 수인사를 련발하는 가상한 뒷모습에다 조선족의 미래상을 그려보았다.. 촌감4. 한 친구의 20대 아들은 건설 현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자기는 밑천을 모아 때가 되면 고향에서 사업을 개척하려 한다고 속심을 밝히었다. 일취월장하는 시대를 바라보니 빈곤에서 벗어나고 더 상승하려면 고생은 하더라도 고향이 최적지라고 단언한다.는 게란다.간고하다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인생이 무의미할 것이니 기어이 본 때를 보이겠다는 결심이었다.청춘소년의 결단이 야무지어 말만 들어도 기특했다. 우리 후손들이 언젠가는 련어족(鰱魚族)이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고향을 현대화한 민족의 터전으로 재건할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였다.이것이 어두운 력사 터널을 헤가르며 지나오던 민족혼의 뿌리이겠다. 촌감5.한국인 친구들과 민족 사회를 화제로 올리었다.주제는 한국에서 조선족의 역할과 미래 발전이었다. 한국 친구의 말이다. 서로 소원하던 장벽을 넘어 공존공영의 전성시대를 개척한다는 력설이 공념불(空念佛)이 아닌 것만 같았다. 두만강 하류 지역의 국제적 협력、조선족 경제실력의 증장、중국의 지속적 발전 이 3대 요소는 민족사회의 새로운 구도를 형성시킬 것은 틀림없다.고향의 새 청사진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여담으로.한국 땅을 전전하는 친구들의 생존투쟁은 현재도 진행형이다.반갑다고 우쭐하는 내심은 진심이지만 발빈(拔貧) 전쟁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지 못한 실상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부평들이 류리방황(流離彷徨)의 가파른 오름길을 언제까지 걸어야 하고 고향에 돌아와 허리띠를 늦추는 수수한 꿈은 어느 왕갑년(往甲年)에 이루어 질가? 볼품없이 비어가는 고향을 서울에서 바라보니 더 참담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아마도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평초같은 떠돌이 살이를 해야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가 보다.그래도 위안이라면 조선족 특색을 가진 새 민족사회의 맹아가 분명히 우저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때고 이 가물든 땅에 해춘(解春)이 찾아오면 시들하던 애기싹들이 우후죽순마냥 숲을 이루며 넘실댈 것이다. (끝) 2014-06-042015-01-08 흑룡강신문
83    반부패 독백(独白) 댓글:  조회:3381  추천:1  2015-01-08
요즘 까마득히 높이 앉아 뻔뻔하던 어른들이 반부패 철퇴에 얻어맞아 곤두박질하는 모습들이 겁쳐지며 거의 매일 핫뉴스로 등장한다.여기저기서 기라성같은 유명인들이 범죄 패륜아의 배지를 달고 옥고를 치르는 응분의 치죄를 당하니 대중은 손뼉이 째지고 목이 터지는 갈채를 보내고 있다. 근간의 부패상은 상상이 어려운 양태로 번지는데 듣고보면 눈이 뒤집히는 멧세지도 하루건너 전해온다. 비리쟁이들의 횡령금액은 먹었다면 백만대이고 꼴깍했다면 천만대이고 꿀꺽소리나면 억대이다. 희한하게도 집안에 사닉(舍匿)한 현금만도 액면가 100원짜리 지페로 1톤 아니면 2톤도 넘는다 하니 기네스북에 신청해도 겹겹한 심사 게이트쯤은 훨훨 통과할 일이다. 직권을 람용하며 주위의 부나비들과 결탁하여 비리의 온상을 만들고 인민의 민고민지(民膏民脂)를 무한대로 짜먹는 수작에 사람들은 어이없어 덤덤하게 무감각할 지경이다. 온 세상은 이 알부랑자 전부를 콤비네이션블로(组合拳) 복싱기법으로 핵주먹을 날리어 녹아웃(권투KO)시키는 정채로운 연기을 갈망하고 있다. 인민의 재산과 혈세가 독버섯을 낫자래우는 푼푼한 먹거리로 되었으니 누구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무엇때문에 그 높은 자리에서 그리도 오래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천문학적 거금을 횡령할수 있었고 무슨 재주로 매관매직을 밥먹듯 하며 족보마저 쓸쩍 바꾸며 양반으로 탈바꿈할수 있었는가. 폭로된 비자금이 이것이라면 사증불능(查证不能)의 금액은 얼마일가. 그 둘레에 아이에나(鬣狗)처럼 몰려든 모리배들이 야합하여 긁어먹은 남의 돈 액수는 얼마이고 말아먹은 나라의 재산은 얼마일것인가. 인민을 락심시킨 후유증 치유는 어디까지 갈것인가. 터덕거리며 살아가는 서민들은 지켜보며 기운이 빠져버린다 권력과 부패는 쌍존(双存)하는 사회현상으로서 권력이 존재하는 한 후자는 필연적으로 그 뒤를 밀착회전하게 된다. 동서양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직무범죄는 심각한 페해로서 문제시되고 있다. 또한 권력의 람용과 오용의 방지를 위하여 무수한 장치들이 고속작동하며 거침없이 실권자들을 견제하고 경고사이렌을 울리지만 이 악페는 파리같은 번식력을 음양으로 끈질기게 과시하고 있다. 인류가 몇십만년을 지나오며 망사창을 달고 알쓸이장을 파헤치고 라켓으로 때려잡고 독약을 뿌리는 등 갖은 수단으로 전쟁같은 노력을 경주하여도 전멸못하는 두통거리 하나가 얄미운 파리이다. 인간은 물욕, 정욕, 영예욕, 번식욕 등등의 수많은 칠정육욕(七情六欲)이 집합된 고등 생물체이다. 이런 욕망은 인간 생활의 동력이 되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혹은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그의 행위를 지배하게 된다. 동시에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을 바른길에서 탈선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인간본성의 약점 즉 무한대로 존재하는 사욕이 탐욕으로 변하고 부패로 변신하는 당길힘이 그토록 집요한 원인은 바로 인간의 자연본성에 내재적 원인이 있는것이다. 보다시피 권력은 부패세균과 공존하는 동서(同棲)관계로서 만약 그 공간에 필요한 격리 혹은 제어시설이 부족하거나 범접한후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할 위협이 없다면 면역이 약한 권자는 일순간에 병원균의 침식을 받게 된다. 진정 그 접촉감염을 이겨냈다면 실로 희귀한 생명체로 봐야 마땅하다. "제도가 건전하면 불순자들이 세도를 부리지 못하고 제도에 하자가 있으면 좋은 사람들이 책임을 잘 할수 없고 지어 반면으로 나가게 된다." 등소평의 이 금언은 오늘의 반부패의 현실에서 더더욱 그 속뜻을 음미해 보지 않을수 없다. 이런 최적화된 제도의 건립과 효률적인 운영을 통하여 부패를 원천봉쇄하는것이 문제해결의 특효약이라는 선구자들의 교시이다. 반부패의 시책은 법치적 무관용(零容忍) 원칙이 적용되고 인민이 공정한 제도라고 인정할때 최고의 효과를 거둘수 있다. 물질재부는 행복한 사회의 필요조건일뿐 충분조건이 결코 아니다. 바로 18차 당대회에서 제출한 이 빛발치는 사회에서 풍요를 누릴때만이 진정한 리상사회가 된다. 부패가 득세하고 돈이 불의행세를 한다면 개혁과 발전을 위한 노력은 대량적으로 상쇄되고 무효화되며 쌓아올린 물질재부는 독균의 배양기로 되고 마는것이다. 반부패의 총적인 목표는 비리에 엄두를 못내고 상상도 못하고 감히 하지도 못하는 즉 미연에 방지하고 맹아 혹은 수정란상태에서 제거하는것이며 이 수요에 부응되는 중국특색의 제도와 과학적 메카니즘(机制)을 구축하는것이다. 이렇다면 전민의 능동성과 과감성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부정(不淨)에 의한 침해를 최소화하는 경지에 도달할수 있고 전사회는 공동히 행복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 당중앙은 권력이 공정한 제도로 짜인 투명한 초롱속에서 운행하는 체제를 건립하기 위하여 로선과 방침을 수립하고 호랑이와 파리 전부를 잡아내는 실천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작업은 지극히 어려운 시스템공사이지겠만 대중에 의거한 견결한 단행은 꼭 소기(所期)의 성과를 이룩할것이다. 중국특색사회주의 옥답의 권력 마당에서 독식물이 착근(着根)하는 토양을 끊임없이 싹쓸이하고 개화된 법치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전민은 당중앙을 따라 자기의 소임을 다해야 할때이다. 연변일보 2015-1-7
82    가을날 수상(隨想) 댓글:  조회:2776  추천:1  2015-01-05
창밖을 굽어보니 젊은 여성들이 각인 각양의 양산을 받쳐 들고 태양 복사를 차단하는 모습이 볼거리로 되었다. 이 해변 도시에서 마가을을 상징하는 특유의 거리 풍경이다. 여름날엔 기압이 낮고 습도에 온도까지 높아 행인들이 벌이는 부채의 방서(防暑) 작전과 땀을 씻어내는 수고가 만만찮은 역사였는데, 어느새 지구의 새로운 온도 배치에 따라 염증(炎蒸)이 동냥가듯 가버리고 유쾌지수가 서서히 높아가고 있다. 일광 조사가 세어지며 일교차가 커지고 열기가 선기에 밀리는 의 계절이다. 비록 여열의 잔류는 감돌아도 후덥지근한 인고에서 해방되는 성추(盛秋)에 진입한 것이다. 가을철의 식물은 푸름의 극치를 이루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나날들을 떠나 보내며 장엄한 조락으로 자기만의 특기인 광합작용 결실을 세상에 전납(全納)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린다. 무수한 미물들이 온도와 빛을 감지하고 시간을 또박또박 재면서 새소리와 더불어 환절을 호소하는 계절예보의 선률을 뽑아내는데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은 강렬한 삶의 자세로 화신(化身)의 자태를 바꾸며 자연에 순응하는 정중동(靜中動)의 멋진 철의 변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만물의 동태(動態)와 더불어 인간들도 작열하던 태양, 씽씽하던 나무들과 함께 대지의 숨가쁜 움직임에 동승하여 설렁거리는 추풍으로 수런거리는 사시의 변화를 갈채로 맞이하고 있다. 추래추거(秋來秋去)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우주의 무한순환이다. 식물 세계는 봄철에 초록 세상을 이루고 여름의 열띤 발돋음을 한 뒤에 여념없이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오달진 열매맺이로 한살이의 대미(大尾)를 수놓으며 책임 완성을 당당히 세상에 실증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들이 인류에게 펼쳐보이는 고오한 풍채이기도 하다. 이 수확의 향연은 눈물겨운 생업을 위하여 로고를 치르는 인간들을 몽환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이렇듯이 가을을 맞이한 식물들은 자신의 환생을 위한 결의와 영생을 향해 나가는 미학으로 인간을 얻음과 잃음의 대비 속에서 과거을 뉘우치고 새 생활을 잉태시키는 엄숙한 사색에 몰입하게 한다. 환열과 예찬으로 맞아야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추풍낙엽의 쓸쓸한 우수(憂愁)에 현혹되어 에이그 팔자타령이나 되풀이 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가을을 타는 계절성기분장애란 환절기증세 때문인가. 나이 들어 퍼석퍼석해지는 퇴행적인 심리 변화인가.생계 영위를 위하여 숨가쁘게 뛰다니며 늘 피해 의식에 물젖어 있고 운명도 세상도 나에게만 모질게 대한다고 타발병이 골병으로 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청량한 갈바람은 소슬한 기분만을 쌓아주고 햇빛 줄기가 줄줄 흐르는 나무 숲도 처량한 여음만을 실어주니 실로 이상자(異常者)의 감정도착이고 원인불명일 수 없는 이질적 역발상이다. 이 맥락을 따라 나를 돌아보니 적자생존이란 혹독한 생물론을 좇아다니던 업보가 늘 상반되는 반상(反想) 관습을 뿌리깊게 심어놓은 것인지 싶다. 잘 조명해 보면 운명의 기세에 눌리어 삶의 길에 잔뜩 개핀 고단함과 서글픔을 무마시키는 지혜가 태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긋한 삶의 혼돈과 갈등 속에서 가을의 초목금수(草木禽獸)처럼 풍요와 빈곤、부활과 사멸의 변증법적 이치를 얼마라도 이해했더라면 우주의 조화가 당신을 얼마 조롱하더라도 충분히 감수(甘受)하고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감수가 남기는 사색은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느낌이 달라진다. 어쩐지 늘 회한에 덧붙여 떠나보낸 추억과 야망이 눈 앞에 즐비하게 줄을 잇는다.주어진 그대로 만끽하고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참된 인생관은 외면하고 허무한 미련 덩어리들을 맘속에 쌓기만 하였으니 그 속이 편할 수가 있을가. 뭇사람들은 일년 일차의 가을 결실이 령적(靈的)인 축복이라며 환희속에서 재릿하던 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그 사람은 거친 란상에 휩쓸려 빌빌거리며 지난 환각에서 살아가고 있다. 늘 초목이 시드는 정서를 음울한 기분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하는 것이다. 전근대식 무한경쟁 이론을 금과옥조와 같이 선양하며 편싸움 맞싸움도 불사하는 어리떨떨한 현실을 비켜서 진실한 자기를 투영하여 이(利)를 위하여 의(義)를 도외시 않았던가를 까밝혀야 한다. 설익은 남가일몽이 자초했던 전세월의 버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당혹스럽고 랑패스러워도 가슴에서 진동하는 서글픈 망향가는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 으슥한 수렁에서 빠져나와 쓰잘머리 없는 집착을 팽개치고 자연의 가을처럼 버리고 거두는 천리의 궤도에 당당히 올라선다면 가슴에 옭맺힌 태엽도 풀리고 정보시대의 공존공영、쌍리공생의 개화된 사상이 얼마라도 고일 것이다. 생각을 굴리다 보니 오늘이 냉철한 이성과 서릿발 치는 성찰로 자기를 살찌워야 할 적시적기란 느낌이 절박해 진다. 세속의 천박한 가치에 연연하며 불만족과 푸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구석진 골방에서 넋두리 독주만 마시지 말고 세월과 부침을 함께 하는 예지(叡智)를 키워야 한다. 곁사람들의 다수확을 자꾸 흘깃거리지 말고 가을이 가르치는 무언의 진리를 넌지시 넘어보며 생명을 잠식하는 시간을 빌어가지고 지난 인생을 진지하게 려과해 봐야만 한다. 달아나는 세월은 가속도 질주를 하고 있다. 이젠 세월이 내 편이 아님을 더 실감하게 된다. 그래도 멀쩡한 미래가 있으니 창조주와 자연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음을 개의치 아니하고 려명이 밝아오면 소년의 용기를 살리어서 약한 다리라도 힘을 올리어 다음 가을을 향해 쩌벅한 발짝을 뗄가 한다. (끝) 2015-01-04 동북아신문
81    새해 문턱을 딛고 댓글:  조회:2865  추천:1  2014-12-31
아침, 늦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보니 발부리에 새해 문턱이 채이는군요. 범백사물이 바야흐로 일시에 2015년에 돌입하게 됩니다.해가 바뀔 때의 느낌은 나이와 일터와 빈부에 따라 제가끔이라 합니다만 그래도 희노애락이 헷갈린 세월의 굽이굽이를 가파른 산행길처럼 지나왔다고 던지는 하소연은 똑 같습니다.누가 뭐라하던 곤욕과 아픔의 나날들은 지나가고 새날의 려명이 시방 막 밝아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송구영신이 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입니다. 희비가 교차된 지난 일들을 앨범 속에 갈무리해 두고 새해엔 만사를 일무차착(一无差错)으로 해 보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지요.아니라면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회성 일전(一转)밖에 없는 하루살이 생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가요.낡은 수첩을 새 것으로 갈며 손이 떨리더라도 슬픈 기록들을 일필구지(一笔勾之)로 지우시고 아팟던 기억들에 꺽자를 치십시오. 보지 않아도 끝맺지 못한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이 눈 앞에 포개져 있겠지만 지고 가야 할 짐도 만만찮은데 낡은 짐까지 겹쳐지면 너무도 버거울 것입니다. 해마다 이 때면, 호화 별장에서 으쓱거리며 나와 두 팔을 휘젓고 다니는 위인들이나 심산 벽곡의 오두막에서 먹거리 걱정으로 허덕이는 령세민들까지도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낸다고 넉타령을 하고 있습니다.아마 누구나 고초를 겪으면서 산다는 좌증이겠습니다.사람의 맘 속에 남겨진 달고 쓴 이왕지사에서 고초가 언제나 강세를 부리고 마음벽을 허비면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원인이 있는 같습니다.아무튼 아팟던 사연들과 기억회로에서 맴도는 기쁜 추억들을 잘 정리하시고 두 해의 이음새를 훌쩍 넘아야만 희망찬 한 해에 들어섰다고 뻐길 수 있겠지요. 열려오는 새 해,이 365일의 걸음이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힘차고 기세높이 걷는 것이 최선책입니다.우리는 유물론적 력사의 길에서 매진하고 있는 주인공들이지만 산전수전을 겪어야 하는 당사자들이기도 합니다.아직도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 속에서 생존경쟁의 홍역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속을 태우고 피를 말리는 적자생존의 투쟁 현실이 당신이 직면한 피치 못할 운명이지요.유사 이래 미증유의 풍요를 누린다고 외치지만 아직 행복과 행복 지수의 높낮이 계산은 잘 되지 않는 것 같군요.오묘한 리론이겠지만 행복을 향해 나가는 것만이 진정한 인간의 바람이란 이 점만은 틀림이 없습니다.부자가 못 되더라도 행복하십시오. 지난해 유감이었다면 개혁개방을 떠밀고 불균형을 조절하고 사람간의 균렬을 봉합해야 할 거물급 들이 부정축재에 가담했다는 추문이 부지런히 전해 왔다는 사실입니다.그들은 편가름에 골몰하면서 사회 전진에 감속운동을 부가하고 대항적 모순을 조장하여 불안한 사람들의 찌푸려진 눈귀는 아직도 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열혈 지성인들의 추동력이 이 친구들에 의해 얼마나 상쇄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인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효화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우리들은 내 사는 나라의 나를 위해서라도 정의의 리념을 주장하고 남을 없신여기는 못된 생각을 배격하며 타인의 재물을 가로채는 모든 불한당과 그 추종자들은 벼랑 밑으로 쫓아버려야 하겠습니다.우리는 바른길에서 핸들을 튼튼히 잡고 우리 사업을 지도하는 핵심적 력량이 가리키는 리상향(理想乡)을 향해 꿋꿋하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각, 이국에서 고난의 강파른 산등성이를 타는 겨레들이 있습니다.고생스럽겠다 말하면 잔소리죠.괴롭고 외로울 때 손에 손 잡으면 힘이 커지고 춥고 떨릴 때 서로 붙안으면 체열이 커지고 차디찬 가슴도 더워진다고 인간의 리치는 말하고 있으니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아집과 렬등의식과 우울의 노이로제에서 완벽하게 탈출하시고 심성이 어지럽다 싶으면 바로 맘의 문을 잠그십시오. 신년의 문지방을 밟았으니 새 삶에 정진하는 멋진 자세를 가져야 하지요.이 땅의 살붙이 피붙이들이 당신들의 멋진 행진을 지켜 보겠습니다. 세상이 험난하고 각박하다 푸념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재미가 너무 많아 잘 살면 꼭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의 앙금과 회한을 락조에 실어 보내시고 새 해는 두툼한 행복일기를 작성하는 풍수년이 되어야죠. 묵은 해 새벽부터 내쳐 달려와 세밑에 같이 이르렇습니다.행운의 녀신이 당신에게 평안과 재수를 물밀 듯 실어오는 만판 세월이 되기를 목놓아 기원합니다. 연변일보 2014-12-31
80    안녕하냐,지난 세월아! 댓글:  조회:2897  추천:0  2014-12-26
서울에서 소학교 동창생 몇 명 모이는 회합이 있었다.모두가 1966년 여름 소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보는 동문들이다.세월에 속히워 죽을 새 없이 살다가 세여보니 얼추 50년이 되어간다.애시적 기억에 아련하던 친구들이 백발을 만지며 반기는데 희비가 갈마드는 이야기판은 끝이 없었다. 동병상련인가 량과분비(兩寡分悲)인가 우리는 모두가 엉뚱한 부평 인생을 겪은 불운아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소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이란 선풍이 캠퍼스에 불어닥쳤다. 밖에서는 상급 학생들이 란 깃발을 들고 학교 벽과 거리 담장들을 대자보로 도배하면서 뭔가를 비판하고 짓부시는 집단적 횡포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무슨 감투끈었던지 소학생들까지 가세하여 비판한다고 들썽거리면서 선생들에게 모욕적인 대자보를 붙이는 어이없는 이벤트도 벌어졌는데 우리는 이 황파(荒波)에 휩쓸리다 졸업을 맞이하였다. 이것이 정규 교육과의 영원한 결별일 줄을 십세충년(十岁冲年)의 아해들이 알 길도 없었다. 졸업 후 사회 혼란은 무질서로 급전하였다. 흥분에 들뜬 사람들은 들을 무리로 잡아다 꼬깔모자를 씌워놓고 조리돌림을 한다.항간에는 누구누구가 타살되고 자살하였다는 소문이 풀처럼 무성하였고 학생、공인、농민들이 파별로 나뉘어 무력 대결을 벌이었으며 파란 청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참상도 눈앞에 삼삼하다.계급대오청리 때 수많은 들이 중세기식 혹형을 당하고 세상을 하직하던 전대미문의 비참한 장면은 아직도 우리 간담을 써늘하게 하고 있다.그 무겁한 인간 정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아리숭한 미스터리다. 1968년 말 경 교학을 회복한다고 초중에 입학하였으나 공부였다면 되풀이되는 정치 설교가 아니면 명분없는 로동과 나무총을 메고 를 타도하는 싸움 련습이었다.그러다 69년 말 어느날 돌연히 증서도 없는 중학졸업생이 되어 농촌으로 나가야만 했다.하늘땅과 싸운다고 고함치며 효률과 경제성이 전혀 무시된 원시농법의 고된 로동은 우리에게 차례진 숙명이었다.그야말로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사이적(奇事異跡)이 아닐 수 없다.이것이 바로 1969기 초중졸업생, 환언하면 1966년 소학교 졸업생의 비운이라 우리는 말한다. 그 때 구두선(口頭禪)으로  우리는 새 사회에서 태어나 붉은기 아래서 자란 복받이었다.허나 다시 돌아보니 그 인생길은 대약진、인민공사、3년자연재해,계급투쟁,문화혁명,농촌하향,림표공자비판,우경번안풍배격,4인방몰락,개혁개방,리직실업 등 기복이 많던 력사 산맥이었다.기황、방황과 혼돈이 점철되고 미망、공포、기대과 실망이 이어지던 나날의 우리 역경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현시대 인들에게는 불신뿐이다.태평성세라는 오늘에 여유도 누려보고 참담한 과거도 차분히 돌아보려 하니 세월은 우리에게 배당된 생명 60년을 삼켜버렸다. 는 말이 어쩌면 우리 만을 제외하는지 모른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 로후 준비도 바닥 수준에 머물러 있다.다만 세월이 몸부림을 무한정 허락할 수 없다는 엄연한 법칙의 좌지우지를 당신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미구하여 고생할 자리마저 빼았길 터수인데 치열한 생계 전쟁의 돌격수로 살아야는 것이 누구네의 궁색한 신세이다.대체 무슨 재구(災咎)를 쳤는지 재수는 용케도 요 우리들만을 피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무정 세월의 세파와 부침(浮沈)을 같이 하였어도 인간적 도덕정신과 애국 충정만은 청죽 같았다고 자신하고 있다. 지난날 우리에게 남긴 보귀한 재부라면 이것이다. 어쩌다 수(數)가 붙어 개혁개방의 덕을 보는 행운이 있었으므로 하여 살아온 값어치 얼마는 보상 받았다는 기분이다.이제 후대들이 시나브로 사라지는 이 사실(史实)을 청사(靑史)의 침적물로서 기억한다면 더 없는 만족이겠다. 확실히 우리는 그 날의 사서(史书)에 투영된 불행자 축소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세월에 소외하였어도 우리는 시대의 과객이 아니었으며 자력갱생의 의지와 기능을 소유한 력사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었다.이 희노애락의 스토리가 들어쌓인 파란만장의 인생사는 영원한 추억의 낙시터로서 우리의 여생을 동반할 것이다. 안녕하여라,지난 세월아! 신수 사나운 1966년 소학졸업생들의 기구한 삶과 앙금이 산적한 력사 상자를 잘 간직하기 바란다. (끝) 2014-09-26  
79    언어는 조선족의 전략무기 댓글:  조회:8649  추천:3  2014-12-17
  언어의 중요성을 굳이 말하면 귀찮아 지지만 한어와 조선어가 기본어인 조선족에게는 다기능 공구로서 특이한 생산력과 발전력의 작용을 발휘한다고 호소하기 싶다.중한 량국에서 각각 천금칠보(千金七宝) 외국어로 써먹는 우리의 언어 장점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데 외국인들이 북적이는 이 도시의 한족 친구들은 불부다 못해 흔들삐쭉 시샘할 지경이다.세상에 두세 가지 말에 거침없다면 몇 사람이 가능할가.남들은 외국어 공부에 애쓰고도 잘 안되어 애태우는데  우리는 생득(生得) 언어로서 날개를 펴는 발전 민족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90년대 초반 한국의 사업자들은 언어의 수요로 다부분 조선족과 결합하게 되었다.그 때 우리 청년들은 음성 말투가 어눌하고 대외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죽도 밥도 아닌 범벅말을 번진다고 욕감태기를 뒤집어쓰고 다니며 얼마나 많은 핀잔과 타박을 받았는지 모른다.한동안 한국 사업자들이 한국인 류학생을 임용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였고 지어 중국 한국어과 졸업생들을 채용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해보니 아니되어 결국 조선족 곁으로 복귀하였다. 중국인 한국어 인재들도 많이 등장하였으나 통번역에 들어가면 감당이 안되어 두 손을 바짝 들고 조선족에 의뢰하기가 다반사였다.이 동네에서 한 고위급 간부의 한국어 보좌관에게서 협력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중국 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5년의 조선유학 경륜을 쌓았는데도 한국어의 난점을 돌파하기가 어지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소연을 되풀이 하였었다. 자기의 사업에는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 동반이 필수라고 실토한다. 조선족 통번역원들은 일반적 말뜻의 순간적 리해는 무난하지만 즉시적 정확한 표현과 언어의 감정 색채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단점이 완연하였다.여기의 기본 원인은 언어 지식의 부족이겠지만 이국 문화에 대한 접촉이 적었고 조선어에 대한 가치 오판으로 언어의 필요성을 느껴보지 못한 력사적 제한성도 작용하였다. 거기다 민족어를 홀시하는 조선어 허무의식도 반동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물론 긴 시간의 화합 과정에서 오늘은 력사적인 제고를 가져왔다. 언어 배우기란 결코 쉬운 장난이 아니다.허나 두개 언어의 자연습득 환경과 몇 세대 지성인들의 지성으로 구축한 문화적 기반이 있기에 우리는 이미 중한 이중언어의 패권자(霸权者)로서 무적의 고지에 서고 있다. 금후의 새 과업은 언어의 실력을 예술화 방향으로 양성해야 하는 시대수요에 따라 자기 말의 인문적 소양을 끊임없이 제고하는 것이다. 학교뿐만이 아닌 전체 민족은 짬 나는대로 듣고、말하고、읽고、쓰고、번역하기 수련에 정진하여 언어중추를 발달시키고 조선어 중심의 언어 수준을 전면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약소한 조선족에게 이것은 특별한 발전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현재 중국의 36개 대학이 한국어 인재를 육성하고 있으며  한국도 전례없는 한어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어떤 조선족 겨례들은 되려 홀시하거나 아예 자식들을 언어에서 단절시키고 민족어 궤도에서 탈선시키며 국제 경쟁의 감제고지(瞰制高地)에서 제풀에 퇴각하고 있다.자기의 법권(法权)이라고 리유를 주워섬기며 떳떳이 우길테지만 어쩐지 씁쓰레하다. 누가 뭐라던 귀한 물건이 값지다는 물이희위귀(物以稀为贵)의 희소성원리는 언어 인구수가 적을수록 수요의 상대 급증을 유발하고 현재 사용자의 무대를 더욱 활짝 넓힐 것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생계에 쫓겨 눈뿌리가 아찔할 때 조선민족어가 거지 사촌인 가난을 삽시에 몰아내는 필살(必杀)의 무기가 아니었던가! 오늘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 언어는 진학과 교류와 생계수단이란 일차원을 뛰어넘어 새 민족문화의 창달을 이루고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전략무기로 일변하였다.조선족의 언어 화원이 만발할 때 민족 터전은 중국과 세계 한민족들이 우호교류를 벌려가는 국제교량으로, 국제공항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게 된다.그 때의 매개 성원은 청청한 문화사절로, 거룩한 평화전령사로, 걸출한 국제친선의 세터(二传手)로서 세인의 례찬을 받을 건 말할 것도 없다. 조선족은 조선어와 한어에 능란한 것만으로도 명실상부한 언어의 강자이다.조선어를 잘 하면 한어 값이 가배(加倍)로 올리뛰고 한어를 잘 하면 조선어 값이 배가(倍加)로 치솟는다.두 언어를 동시 소유하는 숙명은 조선족의 천재일우의 행운이다. 민족의 찬연한 앞날과 후대들의 천행만복을 바란다면 해제지동(孩提之童)을 포함한 남녀로소 전체가 불퇴진(不退阵)의 의지로 조선민족어 공부의 새 세기를 열어야 할 것이다. 연변일보 2014-12-16
78    맴을 도는 사람들 댓글:  조회:3162  추천:0  2014-11-26
삶의 필수요소인 의식주행흡(衣食住行吸)은 삼척동자도 알고 남는 사실이다.이 오보(五寶)에 부족이 있으면서 잘산다고 부르짖는다면 적어도 적지않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요즘 금의옥식의 풍요를 누리면서 멎진 자가용에다 호화사치를 과시하며 흥야망야하는데 행선지 가기가 날로 어려워지는 그 시시비비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혹심한 교통체증으로 길 위에서 번갈(煩渴)을 앓고 있는 사람들, 전에는 러시아워 때에만 볼 수 있던 도로 경색이 이슬아침부터 보리저녁까지 지속한다.어기적거리는 차속도는 걸음이 부러운 살풍경인데 교통버스、공무용、자가용、 택시들이 교착되어 골똑 찬 길에서 탑승자들이 애간장을 태우는 맹랑한 장면이 매일 보는 일과이다.툴툴대는 운전자, 안달떠는 직장인,탑승자 만빵인 버스에서 무가내하로 감내해야하는 진절머리는 로상의 미스터리(mystery)다.빈발하는 사고가 시시로 차의 발을 묶는데다가 얌체 차들이 곡예술 피우듯 종횡무진하는 마법(魔法)을 연출하여 기절한 이들의 쌍시옷 섞인 욕설은 단골말이 되었다.하루하루 깊어가는 행로 수심은 고속도 일로로 나가고 있다. 승차난은 교통체증의 난치 이 되어버렸다. 버스 운행시간의 지연으로 배차간격이 늘어나고 와야 할 버스들이 연착되어 정류장마다 객들이 줄지어 늘어서는데 서로 밀고닥치는 승차 경합이 상습화되고 있다.그러하니 택시차도 저속이 붙어 띠염띠염 보이는데 눈을 비비며 겨우 찾아 행선을 알려주면 뚜이부치(對不起) 인사에 손사래 보내기가 다반사이다.막히는 곳이니 안 간다!이다.버스 승차난.택시 잡기난으로 행인들이 맴돌이치는 장면이 간데족족 펼쳐진다. 주차가 전쟁이 방불하다.공극(孔隙)의 틈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차를 박아넣는데 불법 주차라는 개념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보도주차고 개구리주차고 마다하지 않는다.그런데다 가끔 교통 관리자들이 불쑥 뛰어나와 벌금 고지서를 부착하는데 성급한 친구들은 어디도 차가 바다인데 왜 나만이 처벌이냐고 당당한 시비를 주문하면 서슬푸른 법규를 코밑에 들이대고 잔말 말고 돈 내노세욧! 틀거지 차린 소리다. 노기등등하여 어이없다가도 주억주억 수긍한다. 차량의 무작정 증가와 주차 공간의 절대부족 이 대항성 모순에 해법이 따로 없을가! 고향 친구들과 이 도시의 보행난을 하소연했다가 헛대포란 핀잔을 받은 적이 있다. 침소봉대(針小棒大) 표현도 있겠으나 실로 걸을 공간이 없다시피 하다.원래 어지간한 거리는 걸음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보행로 거의가 주차장이 되다보니 모걸음 배틀걸음이 지겨워 부득이 차로를 걸어야 하는데 쌩쌩하는 차에 치일가 신경을 도사려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어디서 차에 치였다는 멧세지도 불쑥거리며 수시로 홍보되는데 보행로에서 량반걸음을 하던 세월이 신화시대였던 것만 같다. 최근 매체들이 도로 경색의 심각성을 종종 말밥에 얹고 있다.선진국들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라며 어정쩡한 솜방망이질로 뭉뚱그리기도 하는데 제발 선병자(先病者)의 전철을 밟지않도록 실효성 있는 미연의 방지책을 조명해 낸다면 좋겠다.식으로 후행손님만 된다면 영원히 낙후하게 된다.남보다 더 선진적 체제를 확립해야 웅변이 된다.란마같이 얽힌 난제들이 산적할 것이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풀어야 하고 점진적일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민초들의 불편이 방치된다면 뭐가 뭐라해도 발전이 아니라 퇴보라 해야 마땅하다. 맑은 햇빛,신선한 공기,깨끗한 물, 원생태 자연,인간본연의 생활 등 웰빙(Well-being)으로부터 날로 멀어가는 현대 문명, 혼탁한 공해 속을 살아가는 대중, 이 아이러니(irony)는 우리 사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대중교통을 중심으로 공공버스,자전거,보행 등 대중교통이 최적화로 이용되도록 명철한 정책과 정술(政術)을 수립하고 자가용 증가를 무작정 방임하는 구태의연한 가치관도 혁고정신(革故鼎新)해야 한다.웰빙을 숭상하는 사회적풍토,그 상부구조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안전망,변화에 동승하는 관리 메카니즘(Mechanism)이 바로 이 시대의 인 것이다. 시간에 짓쫓기어 창황망조(蒼黃罔措)하는 시민들, 이들에게 행의 쾌적을 찾아 줄 대안은 없을 것인가.인간이 중심이라는 이인위본(以人爲本)에 담긴 의미는 제한된 자원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킨다는 슬로건이다.이 외침이 공념불이 되지 말도록 하고 길라잡이들이 최대출력을 내고 실행 모델이 되게 하는 기치로 되었으면 좋겠다.넓다란 도로에 펼쳐진 차풍년만 보지 말고 그 그늘에서 맴도는 서민들의 일촌간장(一寸肝臟)은 누군가가 헤아려 봐야 할 것이다. (끝) 흑룡강신문 2014-12-06
77    연경기종 댓글:  조회:2867  추천:1  2014-11-19
 은 글줄에서 보기 드문 사자성어이나 목을 빼들고 발뒤축을 들고 멀리 보라는 뜻으로서 사람들이 선견지명(先见之明)의 예지가 있어야 한다고 타이르는 생동하고 직유적인 경구(警句)이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대이동과 90년대 초부터 발진한 한국행은 력사의 전진운동이었지만 우리는 민족 터전이 사막화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였다.이것은 대체로 사회진보에 동반하는 진통으로서 새 시대로 나가는 통행료로 봐야하지만 개중에서 아이들을 글공부 초입부터 타민족 학교에 보내어 민족어의 배움길을 원천 차단하는 부모의 처사는 모범(冒犯)으로서 한숨을 자아내는 시빗거리로 되었다.오늘 이 애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고배를 마시고 나서야 주춤세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심심찮게 보이고 들리군 한다.자기 피붙이니 나름대로 룡꿈은 따로 있겠으나 자식의 인생에 복수불반(覆水不返)의 랑비를 조성하는 도전(徒钱)으로 봐야 마땅할 것이라 늘 설득하고 싶다. 경제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가치관、생활방식과 사회구조는 충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오늘의 인류는 후정보사회의 디지털 시대라 부르짖으며 핸드폰의 간단한 터치로 사업과 일상사를 툭탁 처리하고 컴퓨터 클릭 한 방으로 세계의 뭔가를 반반 들춰내는 약진 시대에 들어섰다.이 세월의 특점이라면 매개인에게 뢰동부화(雷同附和)하는 삶이 아닌 선명한 개성과 창의성을 소유하기를 혹심하게 강요하는 것이며 도식(图式)적이고 획일적인 기준이 아닌 다종다양한 문화 문명과 공존할 수 있는 유능한 인적자원을 꼭 수요하는 것이다.한민족의 경제와 문화 여파가 세계를 향해 반달음박질로 광역화(广域化)되고 그 분지(分枝)인 조선족 문화의 가치도 평가절상으로 반등(反腾)하는 사실은 조선족이 이 국제화 시대의 선두주자로 될 필요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을 예고한다. 조선족 인구의 급감과 후계자의 감소 및 산지사방으로의 류실은 인재 공급부족의 타이트마켓(Tight market-紧俏市场)을 바야흐로 형성시키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그런데도 작금량일(昨今两日)에만 눈을 박고 앉은자리를 뱅뱅거리며 애들을 간선길에서 곁골목으로 방향을 돌려놓는다면 미래의 기회를 상실하는 참회를 불러올 것은 명약관화이다.줄기차게 발전하는 중국의 세계화적 변화와 가변성 미래를 무시한다면 향상을 바라는 애들이 인생길에서 모진 고민과 방황을 거듭였다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글로벌 시대에 대처할 준비가 허술한 부모들은 우리 문화의 가치가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다는 력사 변증법을 되새겨 봐야 마땅하다. 중국의 발전은 민족특색이 선명한 조선족을 수요한다.이러한 민족적 파워와 매력은 우리가 중국의 우수 민족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서 선행적 요건이다.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열린 세상의 앞날을 분명히 제시하고 중국 공민으로서 떳떳이 사는 조선족의 나갈길을 가르쳐야 한다.조선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태산이고 할 일도 산적(山积)하다는 사실과 전도양양이라는 기성사실(既成事实)을 가르치자면 어렵지도 않다. 천생의 문화적 특질을 주입해야 해야 할 대신 포기 쪽으로 핸들을 돌린다면 사회는 손해고 애들은 피해고 자기는 조지약차(早知若此)의 후회 삶을 사는 둔박한 짓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족 거주지가 동북아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인 우세는 우리에게만의 절대적 기회이다.이 지역의 미래에 대비하여 주변의 나라들과 많은 선진국들은 언녕 화려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으며 발생 가능한 변수들을 파악하면서 나름대로의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당연히 현지에서 조선반도와 긴밀한 혈연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족 사회에 흠모와 기대의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우리 매개인은 도래하고야 말 력사적인 새 변천에 대응할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진정 자기 문화의 주인이 될 때 이 찬란한 미래를 만끽할 자격당사자가 된다는 확신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조선어를 대화나 통역 차원의 협애한 생계 수단으로만 간주한다면 너무 짧은 토막생각이다.언어가 핵심을 이룬 민족문화의 터전은 세계화 물결 속에서 조선족의 교두보이고 새 시대로 도약하는 디딤돌로 되고 있다는 전략적 부가가치를 직시(直视)해야 한다.선진 문화를 기반으로 한 폭넓은 시야와 식견은 미래 사회에서 기어이 작용할 보귀한 마인드들이다.조선족 문화의 계승와 번성은 자신의 번영이고 나라의 공헌이고 인류문화의 보고(宝库)에 재부를 더하는 플러스로 된다는 점도 되풀이한다. 후대의 몸에 슴배인 문화의 물머리를 돌릴 때 복일가 화일가 복불복(福不福) 여부를 곰곰히 짚어봐야 하지 않을가.다양한 변화와 창조교육을 주창하는 다원화 세월에 민족의 개성화로 세계 앞에 나선다면 인격 가치가 배가(倍加)한다는 시류도 정시해야 할 세상사이다.아이들의 창발력과 창조력을 잠재우고 인생의 립지조건(立地條件)을 축소시키는 무지의 소치(所致)는 그만둬야 할 것이다. 급변(急变)、 급속(急速)과 급선회(急旋回)로 특징짓는 오늘의 세상은 디지털 의 시대로 일변하여 나라의 국경선도 급급히 무색해 지고 있다.자식을 가진 어시라면 명견만리(明見万里)의 예언가로 되지 못하더라도 아이의 20년 쯤 앞이야 똑바로 봐야 할 게 아닐가! (끝) 2014-11-18일 연변일보
76    자식농사의 극명한 시각차 댓글:  조회:3008  추천:0  2014-11-04
천륜에서 우러나는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사랑 속의 알사랑이라 일컬어도 어딘가 유부족(猶不足)이다.부모들은 태기(胎氣)를 느끼는 시각부터 아이에게 운수가 대통하는 인생을 마련해 주려고 희망과 우회(憂懷)의 경계를 얼마나 넘나드는지 모른다.그러나 아쉽게도 무작정한 사랑이 독이 되고 지나친 간섭이 덫이 되며 미래 오판이 영원한 함정이 되어 부모와 그 자식들이 랑패감에 허우적거리는 연출을 가끔 보군 한다.유소년기 애들의 길안내는 부모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 갈림길에서의 한 걸음 차이가 빚어내는 결과가 서로 왕청같다는 사실은 심각히 고민해야 할 인생 대사이다. 아이를 조선족 소학교에 입학시킨 타민족 부모와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애시적부터 조선어를 배우면 중학교의 졸업 즉시 대학 한국어과 수준에 이르고 중국어는 국어이니 별문제고 영어 공부에서도 몇개 언어가 서로 상보(相補)되고 류비(類比)되면서 조금 노력하면 도리어 추진 작용을 한다고 한다.그리고 조선어를 배우면 일본어 배움에서도 우세를 장악할 것이니 향후 진로의 취사선택에서 한족보다 두 갈래 길을 더 많아진다는 리론이다. 특히 조선어를 잘 하는 한족이 사회적으로 특유한 사회적 매력을 가지게 된다고 자신한다.이들은 조선어 공부를 간단히 취직이나 급여가 높다는 생계의 원초적 목적이 아닌 사회의 상류에 진출한다는 기점에서 선택하는 하는 것이다. 조선족 자식들이 민족 언어를 등지는 현상이 시비를 부른지 오래다.부모의 배치에 따라 조선어를 포기한 어느 젊은이의 하소연을 들어보았다.그는 조선어를 배운 대학생들과의 엄청난 렬세를 생존경쟁의 칼바람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단다. 오늘 쓴맛을 실컷 보고나서 후회가 막급인데 이젠 돌이키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이다.그는 사회에서 활약하는 조선족 인재 중 민족 문화를 포기한 사람이 성공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호소한다.오늘도 민족 문화를 외면하는 새세대들이 비일비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며 그 아이들이 때가 되면 뭐랄가는 로파심같은 걱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20년 이후 세상은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고 국제화 물결도 더더욱 도도할 터인데 어찌보면 시운의 변화는 뒷전이고 오늘의 작은 울타리에만 안주하는 구태연한 생각이다.우리의 문화가 생산력의 가치를 톡톡히 내고 있는 마당에서 되려 반문화적으로 나오니 근시안인가 바투보기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 전지구적인 개방 물결과 이중언어 교육의 강화로 하여 언어의 중요성은 나날이 부각되고 그 공부 환경도 전례없이 개선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매력으로 진학, 취직 생활에서 강세를 과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국제화, 다문화 시대에 걸맞는 인재로 각광받고 있다.몇 십년의 개방적 생활에서 우리의 다문화 민족적 가치가 날이 갈수록 불거지고 있음으로 하여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 문화를 새 시각으로 보고 있으며 사회의 곳곳에서 긍정적인 멧세지들이 전해오고 있다.이것은 우리의 가장 값진 자본이 바로 민족 문화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앞의 두개 사례의 천양지간(天壤之間) 같은 시각차에서 보듯이 애들이 미래를 기약하면서 사회 발전의 맥을 짚어내고 미래를 투시하는 것은 부모의 무작정한 사랑과는 다른 리성적이고 성스러운 책임이다.후대가 어떻게 하면 안일하게 살아야는가만 고집하지 말고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가를 더듬어내고 되도록 더 많은 선택의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부모 사랑이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교훈은 되새겨야 할 바이다.옥수수가 잘 자란 밭이라고 벼를 심는다면 웃길 일이다. 고루하고 협애한 구시대적 관념을 하루바삐 팽개쳐야 하는데 안타까운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오늘의 거친 처사가 애들이 자란 후 어떤 열매를 맺을가 자상히 숙고해야 마땅하다.작은 차질이 엄청난 결과 차이를 가져온다는 실지호리,차지천리(失之毫厘、差之千里)란 격언은 후대 교육에서 명심해야 할 지침이다. (끝) 연변일보 2014-11-4
75    입향순속은 삶의 지혜 댓글:  조회:4429  추천:2  2014-07-29
  는 속담을 우리말로 환원하면 입향순속(入鄕循俗)이된다.인구(人口)에 심심찮게 회자(膾炙)되는 이 금언(金言)은 되뇌거나 뜻풀이가 지극히 쉬운데 몸으로 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한국 땅에서 팥죽땀을 휘뿌리며 살아가는 겨레들 다부분이 현지 생활에 만족하고 재빠르게 주위와 친화되는 현실에 대비해 차별시와 멸시를 당했다고 쓰라림을 호소하며 여기저기 군데군데가 유감스럽다고 투덜대는 친구들도 자주 만났다.이런 불적응증이 원인이 되어 일상 생활은 물론 작업 현장에서까지도 상당한 트러블이 발생하며 수토불복(水土不服)으로 신심뇌(身心惱)을 사서 하는 심적현상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너무 가볍게 다룰 사안이 아닌 같다.   한국인 친구들과 재한 조선족들의 생활상을 담론하였었다. 는 친구의 하소연이다.리치에 닿는 듯한 말 같았다.   과거의 동료들도 진담으로 비스름한 견해를 피력하였다.시도 때도 없이 술에 얼큰하여 입싸움 몸싸움에 고함지르며 로상방뇨까지 빈발하는 게지레한 언동들이 시빗거리가 된지 오래다는 것이다.쩍하면 코를 세우고 뿔을 내밀고  아집을 부리는데다 매체에 이따금 등장하는데 상당한 폭력 경향,도로 무단횡단와 쓰레기 무단투기 등 거친 행동도 지역민들과의 마찰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거주국의 생활 습관과 문화 습득에 상당히 둔감하며 법집행 의식이 희박하기로 말이 아니란다.비록 소수인이지만….등등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표출되는데 조선족들에게는 별일도 아닌 같은 사사건건들이 한국인들인 속에서는 어두운 인간군 이미지로 각인되는 것이다.   현지인들과의 문화적 충돌과 트러블은 언녕 백일하에 나타난 사실이다.그 원인은   여러갈래일테지만 근본 문제는 살려고 찾아간 우리들의 자세에 있다고 봐야 한다.시야비야와 가타부타는 차치물론하고 우리가 눈치 빠르게 주위 판단을 잘 하고 그들의 심사를 미리아리로  알아채고 발빠르게 비위를 맞춘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일들인 것이다.넓은 아량으로 대방을 포용하고 대방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경청하며 설령 아니꼽게 보이더라도 인내성을 가진 성숙된 인간의 모습으로 슬기롭게 넘긴다면  존중과 례우가 저절로 따라오는 게 인간사회이다.     한국 문화와 사회의 일상 관습 및 법질서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재량(裁量)과 잣대로 남의 물건을 가로세로 재어대고 지동지서(指東指西)로 덜덜거린다면 마음고생을 자초하는 건 물론 살아간다는 서식(棲息) 자체까지 위협 받을 것은 뻔연하다.당연히 존재하는 차이와 대방의 의사를 무시하고 내 주장만 펼친다면 결국은 길을 잃고 지동지서(之東之西)하며 꼼짝 못하는 미아(迷兒)의 신세로 되고 만다.이 부류 친구들이 적지 않다는 생활 경험자들의 충고이다.중한 교류의 초기에 이런 불화의 고전을 겪었었는데 아직도 지속된다면 시세에 너무 둔감한 것이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세계에서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는 한반도와 불가분리의 수어지교(水魚之交)로 관계로 될 것은 다 알고 있는 현실이다.특히 한국 땅에서의 광범위한 생계형 생활은 현재가 진행형이지만 미래에도 지속형일 것은 틀림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유감、원망、실망、분노와 같은 배타적인 모순감정을 품기보다 입향순속의 슬기로서 대방을 리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심리적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유일하게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약소민족인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입향순속의 리치는 더덜이 없이 통습(通習)하고 확수(確守)하고 명패(銘佩)해야 할 좌우명(座右銘)이고 삶의 철학이다.부동한 문화인의 만남은 불협화음(不協和音)과 파찰음(破擦音)의 발생을 동반할 것이지만 나로부터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기에 귀를 세우고 신경을 도사린다면 불편을 자초할 수 없다.인젠 서로간의 차이에 대한 부동한 륜리관이나 리해도가 불본의(不本意)로 걸림돌이 되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수용자(受容者)에 대한 확고한 충성과 복종 정신, 제도와 가치관 차이를 재치있게 넘어가는 지혜, 정직과 근면으로 대방에 리익을 창조하는 리념적 조선족일 때 그는 일류의 지구촌 공민으로 부각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이리하여 남에게 돋보이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한국은 그  어디도 도처청산,가거지지(到處靑山,可居之地)로 되는 것이다.라는 잠언은 기억해 둘 말이다. (끝)     연변일보 2014-7-29  
74    조선족의 정신 인프라(infra-기초시설) 댓글:  조회:4002  추천:1  2014-06-03
                                                                                                              대련/김인섭   2014-05-06  '눈물도 배가 불러야 난다.'는 옛말이 어투루 내던진 지날말이 아닌 같다.요즘 조선족 사업가들과 마주하면 담화의 내용이 확연히 달라짐을 감지하게 된다.예전의 자리는 늘 사업담으로 말판을 만들어 갔었는데 이젠 성업도 하고 기반도 단단히 다졌으니 자부의 희열을 표출하면서도 사막화 일로로 나가는 조선족 사회를 바라보며 랭철한 반성과 사색을 심심찮게 던져내고 있다. 여태껏 가난의 탈피와 재부의 축적에 도정신하며 살았다면 이젠 민족의 정신인프라 구축으로서 새로운 민족적 도약을 실현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조선족은 정확한 자아관(自我觀)을 수립하고 자아상(自我像)을 확실히 파악하면서  민족사회의 재기를 도모하고 새 목표를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수립해야 한다.조선족 사회의 부산한 현실은 신구 체제의 전환 과정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반드시 지나야 할 고빗길이고 성숙사회가 되는데서의 통과의례이며 사회 격변기의 재분화、재조합의 합법칙적 력사단계이다.우리에게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중한 두 나라 문화에 물젖은 독특한 우세와 오래동안 구축된 경제 문화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특히 중한 수교 이후 이 자산은 막대한 자본으로 전화되어 향후 발전을 위한 튼실한 물질적 기반을 구축하는 원동력으로 되었다.국제사회의 공력(共力)이 동아시아에로 대이동하는 현 시점에서 중화경제권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과 일본과 조선까지 포함하는 동북아 지역을 무탈하게 래왕할 수 집단인 조선족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부상되고 있다.우리의 이 전례없이 넓어지는 오늘 새 비약을 자신한다면 그 리유가 너무도 충분하다.   우리는 자문화를 트팀없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이것은 조선족이 무한한 발전을  실현하는 기본 조건이다. 허나 이러한 전승(傳承)은 부조전래(父祖傳來)의 전부를 마구잡이로 고수하는 승계가 아니고 타문화로부터 끊임없이 를 섭취하여 자기의 을 보강하는 개방적인 계승과 발전이어야 한다. 급변을 거듭하는 조석으로 변하는 정세의 수요에 부응하여 업그레이드(승화)된 민족 문화의 플랫홈(platform-승강장)을 현대적 감각에 알맞게 건설하고 여세추이(與勢推移=與世俱진)의 참신한 문화사회를 재건함으로 발전의 새시대를 열어가야 한다.우리들이 창조한 기존의 물질 자산이 선진문화와 결합할 때 그는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배가(倍加)의 가치로 전화되어 민족의 위상을 곱절로 폭등시킨다 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주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타민족과의 영합과 단합에서 눅진한 뉴대를 끈끈히 다져야 한다.이것은 우리가 조선족 사회를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데서 무상의 자본이었으며 미래에도 우리 자산의 교환가치를 갑절로 증폭시킬 보귀한 재산이다.타민족은 우리들이 영원히 공생공영해야 할 이웃이고 동도동지(同道同志)이며 우리 상품의 단골 매입자들이고 우리를 민족을 홍보하는 최고의 선전관(宣傳官)들이다.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최상의 신뢰를 심어줄 때가 민족사회의 발전과 리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로 된다.   미래 조선반도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조선반도의 정세는 음청(陰晴)을 되풀이하면서 다사다단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그러면서도 긴장이 완화될 때면 평화통일의 열망을 고조시키고 그 긴장이 대발할 때면 통일조선의 갈망을 더더욱 들쑤시는 피타게 안타까운 현실이다.여하간 동족상잔과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전체 겨레들이 한자리 모임을 학수고대한다는 일심(一心)만은 일맥상통하며 세인들의 기대도 한결만 같다.이란 천리와 력사의 조류는 막을 수 없다는 진리도 의심할 바 없다.우리는 이 미래를 정시해야 해야 한다. 우리는 동북아를 주름잡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전반에서 약동하는 민족으로 될 정신적 준비를 갖춰야 한다.   조선족의 언어, 즉 민족어와 중국어는 학교뿐만이 아닌 인민 전체가 그 질적인 수준을 부지런히 제고해야 할 제일 문화자본이다.더우기 민족언어에 대한 문화화 소양을 갖추도록 열의를 올려야 한다.이것은 민족의 발전에서 전제조건이며 비할바 없는 장점이기도 하다. 중국어에 대한 요구가 높아 질수록 조선어의 더 높은 수준을 박절히 수요하고 있으며 능란한 언어구사 능력의 중요성도 갈수록 불거지고 있다.현재  우리는 세인이 부러워하는 이중언어화자(二重言語話者)이지만 새 시대는 대량의 삼중언어화자(三重言語話者)들과 다중언어화자(多重言語話者)들이 더욱 수요하게 되는데 조선족은 이상하게 가능한 탁월한 기반이 있다.   민족 후대의 육성에 혼신의 힘을 부어야 한다.출산의 대대적인 저하와 삶터의 급격한 이동으로 인한 인구의 현상은 대략 10년 이후가 되면 틀림없이 인재의 갈급증(渴急症)이란 부병(負病)으로 이어진다.세계화 물결의 도도한 흐름과 중국의 력사유물론적 개혁이 가져오는 불가역적 변화로 하여 다중지능,다중문화,다중언어의 조선족 인재를 대량적으로 수요하게 될 력사시기가 눈앞에 박두하고 있다.인구수의 대량적인 감소를 대비하여 전체 후대들을 고품질 인재 집단으로 구성시킴으로서 량적인 부족을 미봉할 플랜(plan)이 지금부터 비상대책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외면적인 조선족 사회는 아닌 말로 하면 불성모양이 되어 된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해도 이것은 과거 시대에 형성된 결합조직에 대한 생리기능의 재조절이고 신장기(伸長期)의 성장통(成長痛)으로서 결코 쇠락이 아니고 더우기 퇴락은 아니다.이 현실은 우리에게 시대의 변화에 동승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야 할 때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일신월성(日新月盛)하는 우리 나라에는 조선족이 살아갈 비옥한 터전과 샛맑은 샘물과 청신한 대기가 있는데다 활짝 열린 세계무대까지 있다.   시대의 분수령 앞에서 참신한 도전정신으로 자기의 터전에 백화를 만발시켰을 때 우리는 중국 땅의 우수한 민족 구성원이 되고 세인이 흠모하는 모습으로 세계 민족의 대렬에 우뚝 설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끝)  
73    탐식가(貪食家)의 투덜리즘* 댓글:  조회:2839  추천:1  2014-05-20
탐식가(貪食家)의 투덜리즘* 대련/김인섭  2014-04-05 헤어진지 몇십 년 되는 송아지동무들을 만나 희불자승(喜不自勝)으로 기쁜김에 량주가주(良酒佳酒)에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왕성한 먹새를 과시하며 먹어대고는 드라이브로 시내 구경을 나섰다. 가이드는 이 도시를 살아본 위인이 가로맡아 나서고 눈동냥 귀동냥으로 한 줌이나 저장했던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 내며 여기가 좋다는 열변을 쏟았다.기후가 좋고 경치가 좋고 교통도 좋고 먹거리도 풍성하고 경제도 발달하여 이 땅에서 이등이라면 서운한 도처청산 가거지지(到處靑山 可居之地)라고 력설했다. 입안의 침이 마르고 목까지 마르는 같았으니 아마 돈깨나 받는 전문직의 홍보대사를 만났더라면 목덜미를 잡히여 왜 내 밥그릇을 뺏으려냐고 질투를 들쓰는 드잡이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대련의 관광에서 남쪽의 빈해로(濱海路)는 너나없이 빼놀 수 없는 코스이다.  봄철이면 산비탈 혼효림 속에는 꽃들이 물결을 이루고 잔파도가 뒤덮인 무연한 바다의 괴암 도서들과 진균해안선(進均海岸線)은 천태만상의 아름다움、 웅위로움、 경이로움으로 일체를 이루며 뭇사람들의 넋을 앗아가는 별유풍경(別有風景)을 연출해 낸다. 볼거리에서도 백미(白眉)는 대자연의 장관을 펼치는 바다이다.억겁(億劫)이라는 세월을 지나오며 그는 무상한 우주의 조화와 가지가지의 인간 알륵으로 생겨난 세월의 앙금을 가라앉히고 수천만 사람들의 삶의 버거움과 온갖 번뇌들을 가로채갔던 것이다.거기서도 상상건*(上上件)은 그래도 바다와 하늘을 경계 짓는 짙푸른 수평선이다. 유장한 세월에 이 천혜(天惠)의 신비는 생고집을 앵부리며 대중을 청래(請來)하여 인생의 한순간을 카메라 기념으로 남기도록 구슬려왔다. 그런데 막상 왕견(往見)하니 원래와는 달리 연회색에 쌓인 해면에서는 근해의 잔문결이 어렴풋이 보일뿐 어지간히 맑은 날씨라면 어김없이 펼쳐지던 시수평(視水平)이 오간데 없다.분명 아나운서의 맑은 날씨란 옥음(玉音) 예보를 확인했던 바이다.도로관리자에게 왜 이 모습인가 물었더니 지금은 어제의 바다가 아니라고 사람마다 투덜거린단다. 일자(一字)로 짝 펴이였던 수평선은 일년에 보이는 날 수가 보일보각일각(步一步 刻一刻)으로 줄어든단다.빈해로의 가치가 반토막으로 평가절하가 되고 있었다.작심했던 걸음인데 별 구경도 없이 맹랑하게 돌아서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차에서의 화제는 기후 변화였다.온실가스의 무작정한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로 초미세먼지(雾霾)를 비롯해 극단적인 저온과 고온 그리고 폭우와 폭설 같은 전대미문의 재해가 주제이다. 령하 35도와 령상 35이상의 기후는 없다고 믿으며 우리는 자라 왔었다. 지금은 50도도 경계선이 아니다.모래폭풍과 스모그(雾霾)도 최근의 신조어이다.미생물의 돌연변이도 미지의 전염병을 발생할 개연성을 높혀주고 있다.우리의 후대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쯤은 생각해야 할 바이다. 위인도 얻어들은 풍월을 념불처럼 외워댔다.자원의 개발을 추구하는 경제학과 자연계의 보전을 지향하는 생태학은 다르지만 다가 인간이 어떻게 잘 사는가를 추구하는 과학이다.한정된 자원을 보호하면서 공생할 것이냐, 성장과 번영을 위해 활용할 것이냐에 따라 생태학과 경제학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벌이 욕망으로 줄곧 생태보호와는 반대방향인 개발 일변도로 달려온 것이다.오늘 이 해빈에서 잃어버린 수평선이 바로 생태학에는 소행머리 걸작이 아닐가! 어줍짢은 리론을 뻔뻔하게 풀었다. 한 친구는 을 한다고 싱거운지 을 한다고 거북한지,야! 무슨 손바닥보다 좀 큰 시내를 놓고 자랑질이야. 넌 하고 있어.글구 환경이구 뭐구 다 정치가,경제가나 국제주의자들이 할 일이지 우리와  뭐 상관이냐! 우리 일반백성들이야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살면 되는 거야.리론에 따르고 자연을 돌보고나면 대수 먹어야고 차도 타지 말고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다녀야 될 게 아니냐! 나는 할 말을 쫄딱 잃고 결국 그 톤을 높인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마음 구석의 생각이다.환경에 로심초사는 정치가와 환경가들의 짝사랑이 측은하다.그들이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뛰며 외치는 호소가 값없이 애절한 독백이 될 게 아닐가.진정 잘 살려면 정치가,환경가.경제가와 우리 같은 걸신쟁이들의 다리를 한데 묶어 사인오각(四人五脚)으로 황소걸음을  해야 할 때인 같았다. 허나 탐식가들의 향락 추구 정지마찰력과 돈에 혈안이 되어 명리에 급급한 경제가들이 일으키는 반동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집념파 정치가들과 순정파 환경가들은 짐이 무겁고 길도 멀겠고 임중이도원(任重而道遠)이겠다. (끝)   주: 투덜리즘: 투덜거리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 상 상 건: 좋은 것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
72    치타슬로(cittaslow)를 엿본다. 댓글:  조회:3364  추천:0  2014-03-11
                                                     치타슬로(cittaslow)를 엿본다.                                                                                                2104-02-19 세간에서는 호의호식하며 잘 산다는 언설이 넘쳐난다.그런데 아이러니(irony)라면 육신의 어느 구석에도 간단없이 흘러드는 물과 공기에 유해물이 가득하고 먹거리에 독이 있고 토양도 심한 오염되었다고 아우성이다.불가재생 자원의 소모에 가속이 붙고 돈이 된다면 전통과 문화 전부가 저쪽이란다.이상기후가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웃기는 작태들이 곤댓짓하며 떵떵거리니 지긋한 포문(飽聞)에 귀가 뜨거워 요즘은 늘 치타슬로를 넘보게 된다.   치타슬로(cittaslow))는 라는 뜻으로서 영어에서 슬로시티(slow city)라는 이탈리아어 표현이다. 여기 슬로시티는 라는 뜻이다. 이는 1986년 패스트푸드(fast food:卽席食)에 반기를 들고 첫걸음을 내디딘 슬로푸드(slow food:餘裕食)의 철학을 지역 전체에 확대시킨 사회운동이다.   1999년 10월 이탈리아의 포시타노를 비롯한 네 개의 소도시의 시장들이 모여 현대적인 개발 대신 을 만들어 행복한 삶을 이뤄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이란 의미를 부여한 의 창립을 선언했다. 현재 16개 나라와 나라의 110여 도시(혹은 지역)가 의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 등록시켰는데 한국에서 네 곳과 중국의 남경시고순현아계진(南京市高淳县桠溪镇)도 국제련맹의 인증을 받았다는 소문이다.   현대사회의 속도라는 가치관을 벗어나 느리게 사는 미학을 정착시키려는 것이 바로 슬로시티의 발전 리념이다. 그들은 오늘도 무한경쟁의 생산 지상주의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펼치고 있다.그들은 지역의 특성을 기반으로 한 토속적이며 독특한 맛과 멋을 자랑하는 음식의 진면목을 재조명하여 전래된 지역특성을 보존하며 전통적인 문화와 력사를 보전하고 발전시켜 후세에 전달하는 것을 지고무상의 책무로 간주하고 있다.   치타슬로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효율은 자연에 위반되며 생존균형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치부한다. 더불어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개연성을 가진 대규모적 경제활동과 사회적 통념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다. 그 실현을 위하여 회원 도시는 인구 5만 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의 가치기준이고 동양인의 관념에 반하는 마인드일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인증된 도시나 지역에서의 관광이나 산업은 특유의 브랜드로 인식되어 소득이 증대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다는 길보(吉報)가 전해오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치타슬로가 성공 모델이 될 것인지 두고 볼일이다. 우선 유럽의 풍토에서 살아가는 가 동양의 지리(地理)에서 보호벽이 세워질 것인가가 의문스럽다.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로서 내부 전체에서 차량통제는 물론이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로도 수 백 년 전 마차길이 그대로 보호되어 있다.그들은 또한 건물의 신축보다 기존 건물의 보존에 상당히 집착한다. 우리가 이처럼 옛 모습을 지키려 한다면 제도적인 장치가 뿐만아닌 주민들이 용납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도 없다.   좌우지간 불가재생 자원이 급감하고 자연과 전통이 파괴되고 인간이 이룩한 현대 문명이 부메랑(boomerang)이 되어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현상이 가심화되어 염증(厭症)이 날로 심해진다.어떤 이유를 들이 대도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거나 력사를 외면하는 행동이 능사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런 현실에서 치타슬로가 내건 기치에 난해한 모순은 있더라도 귀가 솔깃하여 곁눈질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족 사회가 위태롭다.민족의 정체성과 기존의 환경 그리고 전통과 문화도 퇴색을 재촉하고 있다.이는 합법칙적 변화의 일면도 있지만 경제적 락후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민족사회의 동시 발전을 외면한 원인도 있을 것이다.지금 현재도 외면 당하지 않나 눈길을 보내게 된다.우리는 자기를 보존하는 견지(見地)에서라도 치타슬로의 운동으로부터 어떤 계발을 받아야 되지 않을가.아무튼 누군가가 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신비한 사업에 도전한다면 필자는 열광하는 성원자로 되려 한다.   과학적 발전관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오늘이다.현대 문명의 표지가 화려한 건물 속에서 흥청망청 먹어대고 써대는 것인지 다시 수지타산을 해야 된다.행복한 생활이란 넘음이 넘치는 과소비일가 아니면 자원、환경과 전통을 애지중지하는 조금 빠듯한 살림일가? 이것을 덮어놓고 어느 어리석은 각주구검(刻舟求劍) 호고가(好古家)의 퇴행적 감정 기복이라고 몰아붙인다면 좀 억울할 같다. (끝)   슬로시티국제사이트:  www.cittaslow.net 한국슬로시티사이트: http://www.cittaslow.kr/new/index.asp 중국슬로시티사이트: http://chinacittaslow.com/index.php?_m=frontpage&_a=index
71    송년(送年) 넋두리 댓글:  조회:3295  추천:2  2013-12-31
송년(送年) 넋두리                                      (대련)  김인섭     2013-12-19 다사다난(多事多難)하고 도로무공(徒勞無功)하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하릴없이 세월에 떠밀리어 또 한 해의 끝자락에서 어스렁거리고 있다는 허전감이 감돌아친다.   젊은 시절엔 앞에 보이는 뭔가를 잡으려 내 뛰기만 하면서 년말년시를 무심히 지나치다가 많은 세월을 보낸 오늘엔 할 일이 산적(山積)한데  나이테만 늘어나고 걸을 길은 짧아 진다는 생각에 히뜩히뜩 뒤를 돌아보게 된다. 육신에 남은 시간 흔적을 보면서 맘속에 남아진 시간의 일력을 다시 뒤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싶다. 보고봐도 갈증이 나고 회한이 가득해 진다.   세상에 거칠 것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자만에 빠져 내달리며 거만한 행동을 되풀이했던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치기(稚氣)를 다스리지 못해 탐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리치나 자연의 섭리마저 외면했던 자기가 무척 낯설게 투영된다.실로 많은 아픔과 고난이 찬 길에서 혼쭐나며 지나왔다.가지가지 오착을 경험하고 크고작은  우여곡절도 겪으며 때로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 일어서기도 했었다. 흔히 말하기를 아픈만큼 성숙한다는데 이 위인은 무엇 때문에 숱한 고배를 마시고 시련을 감내하면서도 얻음의 슬기를 갖추지 못했냐는 감수가 특히 진하게 남는다..   세속에 부대끼며 살려면 욕심을 줄이고 번뇌도 내려놓고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수없이 듣고 배웠다. 그 덕으로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얼마간의 뭔가도 해놓은 같으나 턱없는 명리(名利)라도 따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동지서로 헤매이기도 했다.이토록 진창에서 허우적 거리며 간혹은 실패의 함정도 어물쩍 피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그런데도 해마다 송년 정산을 하고 보면 되풀이 되는 허탈과 아쉬움만 남았었는데 소견머리 없었던 자기를 곰곰히 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큰 것과 많은 것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리라.그 욕기의 충족을 위하여 아득한 목표만 바라보고 줄달음치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기가 일수였던 자신이다.지난날을 뒤집어 보면서 황홀한 도원경에 도취는 되더라도 오늘에 해야 할 사사건건의 일 전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정성들여 했을 걸 그랬다고 자탄하기도 한다.큰 일에만 집착하여 작은 일들을 무시해 버린다면 성공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잃는 것이다.시시각각 발부리를 잘 살펴야 하고 매 한 가지 일들을 소중히소중히 챙기며 나가야 한다.누군가가 라는 잠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더없이 감미롭다. 성과를 거두려면 만드는 전부를 명품으로 제조해야 한다.성공이란 당신의 가치에 대한 외부 세계의 인정이다.매 한 번의 청소,매 한 차례의 보고,매 한 페지의 서류 작성에서 최대의 정성을 넣어 으뜸의 제품으로 만들어 타인에게 유용한 사용가치를 창조할 때 당신은 미래를 얻는 것이다.어떠한 작은 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 하는 품격을 양성하고 발휘해야 한다.이것이 바로 성공자의 기본 자세이다.무수한 최고 품질의 부품들이 최고 엔진을 만들어낸다는 도리는 명기해야 할  명리(命理)임을 명심해야 했을 터인데 이 위인은 부실할 정도로 홀시했었다.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원칙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피하다.그러나 자기의 론리나 뜻이 불변의 진리라고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자칫하면 아만과 독선의 수렁에 빠지어 남들과 배타적인 립장에 서게 된다.이것이 바로 누구의 노력을 무효화시키는 단초이다. 고집을 공존의 자세로 탈바꿈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혜안을 갖추어야 한다.바로 고집의 승화라는 것이다.정직한 비평가의 쓴소리에서 그 참된 리치를 발견하고 그를 존중하는 것이 자기의 소중한 명분을 지키는 첫 방어선임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진다.   오늘 사회의 성향은 림기응변적인 융통성을 일반적으로 선호한다. 는 말이다. 여기에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면 된다는 저급한 뜻이 숨겨져 있다. 급하더라도 돌아가야 할 길이 있고 지켜야 할 법도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편법을 사용해도 무탈하다는 비륜리적인 발상이다.눈앞의 실리를 위하여 사회의 계률과 금도(襟度)마저 아랑곳하지 않는 독소에 령혼이 물들어 정의를 늘 도외시하였던 어느 누구이다. 정도(正道)가 있음에도 얄팍한 술수로 줄타기를 하던 내 모습을 다시 보니 눈이 감긴다.   누군가에 군림하려고 덤벙대며 오만하던 내가 얼마나 치졸(稚拙)했던지 다시 끄집어내 본다. 독선을 초월하여 냉철한 자기 절제와 겸양을 전제로 조화적인 하루하루를 보냈더라면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란 참회가 되풀이 된다. 터무니없는 련민과 집착의 세월을 보내면서 조금만 자성의 눈을 떴더라면 이 회한이 남았을가.   석양은 서산을 향하여 속절없이 기울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많은데 발길은 무겁게만 느껴진다. 내 인생에 얻은 것이 무엇이던가! 이젠 이 력년령(曆年齡)이면 오금도 못쓰고 사회의 변두리에서 텃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런저런 생각이 헷갈리어 곤혹 속에서 허둥대고 있음을 이실직고한다.이 때늦은 고해성사와 철없는 넉두리가 하다못해 내 후손들의 반면교사라도 되어 인생행로에서 몇 푼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는 진실한 마음을 피력한다. (끝)  
70    가을 말일의 단상 댓글:  조회:3326  추천:5  2013-12-24
가을 말일의 단상 김인섭  2013-11-07 래일이 립동(立冬)이란다.일각(一覺)*하면 겨울에 들어서는 환절의 경계선에서 또 한 해를 마무르는 뒷정리를 해야 한다하니 어쩐지 우수(憂愁)가 몰려오고 허허롭게 쓸쓸해 진다.서성대다가 사무실 맞바라기*의 산을 바라보니 단풍의 유혹이 집요하고 은근하다. 해변에 자리 잡은 이 산간도시의 이때는 년중 제일의 호천기 계절인 것이다.일터에 담겨있어도 빈 껍질만 지키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육신 전부를 주어들고 청정한 공기도 마실 겸 마음도 가라앉힐 겸 야틈한 도시림 메숲을 찾아가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산객들의 산책을 배려하여 만들어 놓은 유보도에 들어서니 심산유곡은 아니라도 가을의 결실을 거두는 락엽기(落葉期)의 숭엄한 계절이 분명하다. 한해살이를 마무리하는 라신(裸身)을 드러낸 이령림(異齡林)속의 가을 풍경은 왠지 서럽고 을씨년스러움이 넘치는 애상이다. 인간의 무지에서 떠오르는 비상(悲傷)이 아닌지 모른다.나무들의 만개와 조락이 질서적으로 순환하며 자연의 경개가 이뤄지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며 그 존재의 가치가 아닐까.그런데도 인간은 처연한 심정이 되어 서글픈 망향가를  되뇌이고 있다. 식물학자들의 리론을 들어보니 이 지역에서 나무가 일년 삼백예순날을 수분이나 영양을 공급받는다면 겨울추위로 동사(凍死)한단다.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나무는 으로 단풍을 만들어 잎새들을 줄기로부터 떨어뜨려 래년 자신 부활의 밑거름으로 되게 한단다.이렇게 동면하는 동목(冬木)으로 되면서 자기의 새로운 도약을 벼른단다. 이들은 때가 되면 미련없이 묵은 것을 버리고 침묵으로 자기를 살찌우다가 봄이 오면 장엄한 환생으로 새 삶을 맞이하는 것이다.부정의 부정 철학을 한치의 어김도 없이 지키는 그 생명 론리는 실로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무한상승의 궤도를 따라가는 나무숲의 윤회전생(輪回轉生)을 보며 만물의 령장이라고 으시대는 인간 세계를 바라본다.최근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데 빛발치는 과거를 자랑하며 권좌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던 권력자들이 공권력을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르면서 동물적 욕기(慾氣)를 발설하다가 쇠고랑을 차고 줄줄이 옥살이에 들어가는 뒷모습이다.지어 목을 내대는 락명(落命)의 반대급부(反對給付)를 지불하며 참회의 눈물을 짓는 가긍한 모습도 가긍하기도 하다.한심하게도 요즘엔 부정자금을 꿀꺽했다 하면 천만대에 억(億)소리가 울리는데 만민이 기가 막혀 기막힌 것도 모르고 있다.그 친구들이 는 때늦은 참회 소리를 들으며 입이 씁쓸하기도 하다. 세속의 천박한 가치기준에 연연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졸장부들의 막막한 사정을 보니 인간 자체의 푼수가 나무보다 모자라도 좀 모자라는 게 분명하다.한살이를 끝내고 래년을 기약해야 하는 세월 속에 차분히 침잠(沈潛)*하는 나무의 성격에서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무슨 리치를 터득해야 한다.과욕과 집착에 사로잡힌 나를 나무와 견주면서 냉철한 리성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보라! 인간도 수목같은 비움、떠남、버림의 철학으로 자기 승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자기를 잉태하는 지혜를 가진다면 참다운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매체에는 비판과 자아비판이란 말구절이 자주 들먹거린다.아마도 비판이라면 뭐를 비워라.내려놔라 하는 것이고 자아비판이란 이것을 내치고 저것도 버리겠다는 뜻일 것으로 이해한다.진정 나무처럼 버리고 비우는 미학을 마음에 심는다면 인간사회에 감도는 혼탁한 공기가 일소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거머쥐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전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되지 않을가! (끝)   주: 일각: 잠에서 한 번 깨어남 맞바라기: 마주 바라보이는 곳.     침잠: 물속에 깊숙이 가라앉거나 숨음    
69    글동네의 말썽거리 댓글:  조회:3646  추천:6  2013-10-10
                                              (대련)김인섭    2013-09-21 생계가 절박하여 분주히 헤매이다 여유가 생기면 간혹 인터넷 글동네에 들러  잠간이나마 어지럽던 심신을 가다듬어 본다.언제 봐도 소가족들이 모인 작은 부락인데 그래도 깊은 사유와 맑은 심안을 가진 문사들이 참신한 기상과 사상을 발산하는 글들을 펼쳐놓으면서 소임을 다하는 모습들이 경의롭다.이 자그마한 터전에서 민족의 새 력사를 애써 담아내고 그 밝은 미래를 묘파(描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이 부족한 어떤 친구들은 행간(行間)에 끼어들어 가시 돋친 글토막을 심심찮게 끼어넣고 이취(異臭)를 품어내어 씁씁할 때가 적지 않았다.어떤 말끝에 울떡 밸을 쓰거나 깊은 생각도 없이 내던지는 배라먹을!쯤하는 욕도 쉽게 간과하고 왈가왈부 시시비비(曰可曰否,是是非非)도 얼마던지 당연지사로 본다.그런데 겨례간의 대결과 리간을 부추기는 언사들인데 마치 작심하고 발설하는 듯하는 느낌이다.아무리 봐도 조각이 나고 분극화될 이유는 아닌데 제나름의 론리를 펴가며 동족을 매도하고 대립각을 세우는데 험담마저 아끼지 않는다. 저의(底意)는 무었일가?   부동한 지역의 문화 차이를 가진 대방이 어떤 생각이나 일처리 방식에서 자기와 부동하면 무작정하고 불량품이고 말짜라 비난하며 막말을 해댄다.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부동한 국가나 인문 환경에서 생활하면 그에 적응하여 생활양식,가치체계, 전통관념 등 면에서 특수성을 가지게 된다.이는 대립성이 아니고 문화의 다양성이며 다원적 발전 상태로서 여기의 이질성과 모순성은 시대의 변화와 서로의 소통,포용,화합에 의해서만 합일점을 찾아내고 고양(高揚) 혹은 지양(지揚)하는 선별을 하게 된다.생활문화에서 파생되는 각심소원(各心所願)은 지극히 마땅한 욕구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세불량립(勢不兩立)의 적아간 금을 긋는 이상행동은 어디서 삐져나오는 걸까!   우리 민족은 식민통치의 아픈 력사를 안고 여기저기 흩어지면서도 피땀으로 고유 문화를 지켜왔으며 타민족과의 영합 속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놓고 후대를 이으며 살아왔다.몇 세대를 걸치며 들인 각고노력의 성과는 세계화로 매진하는 오늘에도 우리 민족의 보귀한 재산으로 활용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주류 사회와의 융합과 거기에 따르는 생활관습이 수립을 꼴불견으로 보는 어른들이 타민족과의 단합에 찬물은 끼얹고 그 민족사회의 일취월장의 변화를 극구 부인하면서 타민족과의 불화를 부추기는데 참 이상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흑백논리 주장을 펼치는 이 독선가들이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리념적 싸움을 꼬드끼며 서로 진을 쳐놓고 동족상잔의 구태를 재연하지 않나는 우려에 답답해 진다.수많은 지성인들이 민족의 대화합을 위하여 노력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상극、불신、증오의 씨앗을 뿌려댄다고 밖에 볼 수 없다.전 민족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키워온 성과를 풍화시키는 행위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언성을 더 높혀 말하면 력사 조류를 거스르는 반동(反動)적 횡포가 아직도 퍼렇게 살아있으니 약소 민족의 비애가 아닐가 생각한다.     이 어렵고 혼탁한 시대를 불 밝히려 나선 헌신적인 문인들의 독립사고를 고무하고 독립적 견해를 피력하도록 격려해야 한다.민족 구성원들은 서로간 배타(排他)적 관계가  아니라 의타(依他)적 관계임을 명심하고 이견자(異見者)들이 바로 진리를 파헤치는 공존공영해야 할 파트너임을 명심해야 한다.독설을 쏟아붓던 이들도 방향을 돌려 비판과 자기비판과 반비판의 무기를 들고 정의와 정리(正理)를 불러내는 궤도에 들어서면 좋겠다.서로간 경색이 아닌 소통으로 어혈을 풀어 가는 한민족의 전성기를 맞아올 수 없을가.   다양하고 력동적인 문화 정체성은 한민족의 제일 큰 공동재산으로서 반드시 보존하여야 하고 다른 견해들 사이에서는 마음을 활짝 열고 무릎을 맞댄 진솔한 대화로서 민족 발전의 진작(振作)을 시도해야 한다.또한 그 성과를 고부가가치의 상속재산(相續財産)으로 고이 간직하다 차세대에 전달해야 마땅하다.이것이 기성세대의 의무이다.문화의 다원성은 자산증식의 자본이 돼야 할 뿐이지 결코 민족끼리 불화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 민족을 헐뜯으며 자기 고귀성을 자랑해서 귀인이 될가! 꼭 사랑해야 할 제 민족마저 갈퀴질하는 위인이 남을 사랑한다고…? 그 소리가 쟁쟁할수록 남들이 더 찬웃음을 쳐대며 이죽거린다.우리의 글동네가 진정 타민족을 포함한 민족 대융합의 글마당이 되고 진리와 지혜의 샘터가 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68    반 포 지 효(反哺之孝) 댓글:  조회:3537  추천:4  2013-08-17
2013-06-21 지난6월18일 연변일보에 기재된이란 기사에서 왕청현 대흥구 류정파출소 소장-조흥군씨가 10여년간 독거 로인을 배려하였다는 보도가 잔잔한 명상을 불러왔다.   그 옛날 다자식 대가족의 시절에는 삶의 질이란 말 자체도 없었고 의식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만도 형언할 수 없이 렬악하였다.하지만 부모나 년로한 어른들만은 정신적 지주나 지도자로 추앙 받으며 존경과 섬김의 대상으로 되었던 미풍량속이 서슬이 퍼렇게 엄존하였으니 효성은 가정이나 사회를 올곧게 지탱하는데서 선결되어야 할 필요 조건이었다.그런 시대이니 부모들에 대한 로후의 부양은 자연히 자녀들의 몫이었고 누구도 지극한 의당사(宜當事)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오늘은 물질적으로 윤택해 지고 있는 데 대비해 전통적 가정 구조가 붕괴되고 있으며 로인들의 복지 문제는 점차 갖가지 말거리를 량산하고 있다.무자녀 무의탁 로인들은 사회가 껴안아야 할 사안이라 의논의 대상에서 제외되나 자녀와 별거하는 독거 로인을 필두로 심신이 불편한 로인들이 어쩔수 없이 운명의 배치만 기다리는 답답한 현상이 날로 증폭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전민이 마주해야 할 회피 불능의 과제물로서 정부와 매 사람의 생활권 안팍에 놓여있다.   사회 급변의 삭풍이 몰아치며 산업화 물결이 대가족제→핵가족제로의 이행을 세차게 떠밀면서 효친이란 이 천직천분(天職天分)은 어떡하냐는 수많은 난해(難解)한 난건(難件)을 우리 앞에 던져주고 있다. 부모에게 지성을 바치는 효자에 대한 찬사,효성을 드리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는 떠돌이 자식들의 아쉬운 소리들이 무성한가 하면 어시들의 존재를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부류들 등등 시대적 화젯거리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이 가지각색 사정들이 속출하는게 원인인가 지난 시대에 들어보지 못하던 까마귀의 효도란 뜻으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사자성구가 행간에 자주 비집고 오른다.   예로부터 까마귀는 흉조로서 악마의 상징으로 인심 속에 자리를 틀고 있다.그런데 어느 옛날 학자가 쓴 책의 내용에 따르면 까마귀도 새끼 시절에는 당연히 어미가 키울 것이나 어미가 늙어 거동이 어렵게 되면 자란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인인가 까마귀의 반포지효(反哺之孝) 옛말이 그들을 자오(慈烏)로 반전시키는 싹들을 키워내고 있음을 군데군데서 감지하게 된다. 현재는 생물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현대적 관점으로부터 까마귀도 익조라고 호소하는 학자들의 리론이 뒷바침되면서 그 본능으로부터 봐도 까마귀는 효친봉선(孝親奉先)적인 인자한 령물이라 인식하는 사람이 차차 많아진다.이젠 까마귀를 효조(孝鳥)라 불러서 욕사발이나 뒤집어 쓸 세상은 아닌 것 같다.   현재 우리 민족의 출산율은 세계의 최하위 수준이다. 젊은이들이 급격히 줄어드는데 비해 로인 인구의 상대수는 가파로운 증가세를 보임으로서 미구에 심각한 불균형이 대두할 상황이다.사회학자들은 65세 이상의 인구가 7% 이상인 사회를 고령사회,20% 이상인 사회를 초고령 사회라고 규정한다. 출산의 저조로 인구가 격감하고 그 유동이 가심해 지는 상황에서 로인 문제를 전적으로 개인에계 떠넘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사회가 함께 짊어져도 늘 허점과 공백이 생기는 어쩔수없는 현실이다.그늘진 구석을 돌아보면 늘 힘없는 로인들이 바이없이 적막하게 살아가는 민망스런 모습이 비일비재하다. 힘겹던 세월을 떠받쳐온 이 로인들을 착실히 공양하지 않는다면 까마귀보다 못하다는 핀찬을 누군가가 들어야 할 게 아닌가!   세찬 치부욕 항진(亢進)이 금전만능주의를 부추겨 전통적 가치관 전부를 깔보는 척박한 풍토가 위세를 부리는 세상이다. 허나 사회가 변하고 가치관이 달라져도 로년자에 대한 효는 여전히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지난날엔 자식의 경로(敬老)가 로후 복지의 중심이였다면  오늘엔 자녀,정부,사회가 3위 일체의 방식으로 구조를 바꿔야 하는 사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이런 때 사람심을 바탕으로 보여준 조흥군씨의 경로미행(敬老美行)은 새 시대 반포지효의 축도가 아닌가고 주목하여 보았다.그는 어느 구석진 두메산골에서 범인선사(凡人善事)의 빛을 뿌리며 사회 경로당(敬老堂)의 무대에 우뚝 서 있다.   조흥군씨는 남의 집 노인마저도 그토록 사랑하였으니 집안 로인이라면 더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는 속담을 인용해 본다.이 관용어가 옳은 말이라면 조흥군씨에게 나랏일을 맞겨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 (끝)  
67    엄 타 소 견 (嚴打 所見) 댓글:  조회:3956  추천:2  2013-08-07
엄 타 소 견(嚴打 所見)                                                   (대련)김인섭   2013-07-01 매체들에서 보고듣다 보면 어떤 위법 범죄가 급증하고 사회가 불안해 지면 강력히 응징하라는 의미로서 엄타(严打)라는 극언(极言)을 심심찮게 등장시킨다.아마 어떤 악행이나 비행이 만연하니 발동하는 긴급조치일 것으로 본다.그런데 간단한 철리로 풀어보면 이번이 엄타(严打)라면 이전은 틀림없이 슬쩍 친다는 관타(宽打)였을 것은 당연하다.같은 사건에 대하여 같은 법조목에 따라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때는 쇠방망이로 족쳐대고 어느 때는 솜방망이를 들이댄다거나 그때는 안 치고 오늘에야 두두린다는 론리인데 그 타당성에 대하여 고민을 하게 된다.   엄타란 사회의 체제 전환이나 기타 특정한 시기에  법률질서가 바로 잡히지 못하여 반사회적 행위가 만연하거나 돌발적 사태가 일어나 행정 질서가 혼란해 지는 경우 사회의 여러 방면의 력량을 동원하여 신속히 대처하여야 할 때 사용되는 필요한 수단이다.여러 나라들에서 늘 이슈화되는 이 부득이한 선택은 특수한 법적인 절차로 진행되는 정치 색채가 농후한  비상조치이다.바로 이러한 방식을 일상적 법률 집행에  적용하다면 이것이 합법성,공정성,정의성,일관성이란 법제의 리념에 부합되는가, 법률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법이란 사회의 기본적 틀이고 사회 관리의 핵심적 도구이며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동일한 사실에 동일한 규준으로 적용되어야 할 뿐 그때는 느슨하고 이때는 엄하게 임의적으로 적용한다면 적어도 완전한 법이 아니된다. 법률에서 엄하다는 의미는 모든 법위반 행위에 물매를 안기라는 뜻이 아니고 사건의 경중대소를 물론하고 엄격히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바로 엄격히 법에 준하여 경범죄는 경처벌로, 중범죄는 중처벌의 원칙이 관철되어야 한다.때를 선택하여 전체를 가중처벌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두들긴다면 이는 사실을 기초로 하고 법률을 준칙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리탈이 아닌가는 시비가름을 해야 한다.   법제의 기본요구는 는 것이다. 법위반 행위는 대소를 막론하고 발견하여 처리하고、 발견되면 처리하고、 발견하는 족족 처리해야 한다.우리에게 수요되는 것은 간헐적인 엄타가 아니고 경상적이고 일관적인 법 집행이고 법률에 규정된 관엄상제(宽严相济)의 방식을 재치있게 적용하여 매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평시에 무심히 지나다 심각해진 후 소나기식 단속을 진행하여 범죄 사슬의 면역을 키워주던 사실과 심심찮게 발생하는 오심(误审) 안건의 교훈에서 보다싶이 회오리바람식 처사가 남기는 역작용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된다.   석자 얼음이 하루의 추위에 어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위법 행위가 루적되었다면  엄격히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과제가 제출되지만 반드시 여지껏 무책임한 법집행이 없었을가 하는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엄타의 제기법을 엄격한 법집행과 법기관의 엄격한 자아성찰로 바꾸어야 한다.더우기 평시에 방심하다 엄타를 거쳐 실적을 쌓아놓고 그것을 공로부에 기입한다면 이것은 선후주차와 본말이 전도된 사시이비(似是而非) 처사가 아닐가 짚어봐야 마땅하다.사전에 엄격하였다면 엄타가 필요없을 것은 불보듯 빤할게 아니겠는가.사건의 발생이나 그 확대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집법 부문의 중대한 의무란 이 점은 기본적 상식으로 명기해야 할 바이다.   법률을 세우는 주목적의 하나는 그 집행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다.즉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한다는 살계혁후(杀鸡吓猴)이다.위법 행위는 발생 초기에 법적 처리를 진행한다면 행위인은 처벌을 면하거나 중처벌을 면하게 되고 사회는 손해의 최소화되게 된다.위법 요소들이 아직 싹일 때 잠초제근(斬草除根)하였다면 이는 법률의 최대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매 한 차의 투명하고 공정한 집법 행위는 생동한 법률 수업이라는 것과 준법 의식이 박약한 들에게는 최고의 보강약이라는 것은 언녕부터 전해지던 진리일 것이다.   요컨대 법은 준엄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닭 잡는 칼로 소를 잡아도 안되고 소잡는 칼로 닭을 잡아도 안된다.어느 법률 사업자가 이 두 자루의 쌍수검(双手剑)을 재치있게 써나가는 검법(剑法)을 몸에 지니고 법률 무대에서 걸출한 검술(剑术)을 연출한다면 그는 바로 인민의 강산을 지키는 검객(剑客)으로, 법률 리념이 성숙한 집법자로 추앙 받을 것이다.   (끝)      
66    착 오 론(錯誤論) 댓글:  조회:3251  추천:2  2013-06-15
                                                                                         착  오  론(錯誤論)                                                                                                               (대련)김인섭  2013-06-015 착오가 없는 사람이 없고 범했어도 고치면 된다는 소리가 단골소리로 된지 오래다.허나 이것은 원론적인 통설일 뿐 삼라만상의 현실을 조명해 보면 착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태도를 차분히 살펴볼 필요성을 늘 느끼게 된다.얽히고설킨 풍진세상을 살아가며 시행착오쯤 빈발하는 것은 숙명적인 당연지사로 봐도 무방하겠지만 착오에 대한 감각적 예민성의 차이와 그를 판단하고 극복하는 지혜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의 질적인 삶과 그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결과는 천양지차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장한 인생행로에는 살얼음 밟듯 조밀조밀(稠密稠密)하며 지나야 한다는 지뢰밭같은 위험지대가 도처에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 빚어내는 차질은 만만불가이다.법이란 이 대전(帶電)중인 을 범접하면 인생을 결딴내고 사회에 피해를 주며 자신도 기사회생 불능의 상거지로 전락한다. 도덕 불감증으로 탈륜리적 오점이 박힌다면 뭇 사람들의 찬 시선을 받으며 망신스레 살아야 한다.인신안전은 더 말 말고 건강한 육신이 없다면 당신은 일 뿐이다.준법성,도덕성,건강한 육신과 인신의 안전은 항시 사수해야 할 생활의 하한선이고 고이 간주하고 살아야 천칙(天則)이다. 정상적 인간의 생활에서 착오는 영형상수(影形相隨)의 동반자이다.누가 착오가 없다고 겉치장을 꾸민다면 삼척동자마저 웃길 것이다.지혜로운 사람들은 늘 자숙자계하며 남의 비평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 비평에 대한 총화로서 스스로의 내심 세계를 충실히 한다.그러나 코가 센 사람들은 옹고집을 부리며 찬사에만 귀를 활짝 열고 있을뿐 타인의 권고와 쓴소리에는 질색하며 심지어 선의적인 권고까지 팽개치면서 적의를 품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타인의 비평과 일깨움에서 얼마의 영양을 섭취를 하는가 즉 에서 얼마나 이익을 얻었는가에 결정적 의미가 있다. 유지군자(有志君子)들은 착오를 감추지 않거니와 변명하지도 않는다.그들은 자신의 착오를 과감히 폭로하며  선명한 개정의지를 보임으로서 타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내고 자신의 립지를 단단히 다진다.착오는 감추려 애쓸수록 더 선명해 지며 과오은닉 자체는 범죄은닉과 동일한 사상론리가 밑바탕이 되므로 자연히 훨씬 큰 착오를 발효하는 배양기(培養基)로 될 것이며 타인 손해와 자기 실패에 또 다른 복선을 깔게 된다.현자들은 앙숙인 적수의 비평도 홀시하지 않는다.적들이 바로 당신의 결함을 더더욱 잘 살피고 심각히 연구하기 때문이다. 착오는 보는 시각의 부동함에 따라 착오일 수도 정확일 수도 있다.이 상황을 판가름하는 방법과 최상의 무기는 비평, 자아비평과 반비평이다.비판과 론쟁을 회피하면 개인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사회에는 정의가 자리매김을 할 수 없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고 만다.주장은 하되 아집과 독선에 빠지지 않는 활발한 비판문화가 사회 생활의 곳곳에 정착해야 하며 비판을 최고의 선물로 간직하는 사회적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한다.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소명하다는 이란 말은 결코 허투루 들어둘 말이 아니다. 착오에 대한 인식과 진리에 대한 인식의 무게는 동일한 바 모두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필수 과정이다.착오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정착할 수 없다.이 시각에서 바라보는 착오는 성공의 정상에 오르는데서 값진 이다.곡절은 있더라도 무난한 삶을 위해 위해 착오에 대한 내성(內省)이란 이 로순(路順)에서 옳바른 길을 잡아야 하며 끊임없는 방향타 조절을 진행해야 한다. 기로에 들어서면 빨리 뛸수록 그  실패와 락공(落空)은 더 끔찍하다는 선인들의 교훈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금석지언(金石之言)이다. 이다.대성했다고 호기만장한 어른들의 리면사(裏面史)를 짚어보면 거개가 착오를 범하고 고치고 재범(再犯)하고 재개(再改)하는 얼룩진 역사었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그들은 공통성이란 바로 착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연구에서 개정의 묘리를 터득하고 성공의 길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걸은 길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성공이라면 새 실패를 이어주는 한마디의 이음새였을 뿐이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은 착오에 대한 인과적 분석에서 수립되며 사회의 발전도 착오에 대한 총화에서 발전의 계기를 찾는다. 치렬한 반성철학과  진솔한 징개정신(懲改精神)을 좌우명으로 삼는 것은 디지털 시대라는 정보사회에서 개인의 영달을 이룩하고 조화사회의 건설을 추진함에서 가져야 할 근본리념임을 명심하자. (끝)  
65    여론 마당의 독필(毒筆) 댓글:  조회:5361  추천:3  2013-04-21
여론 마당의 독필(毒筆)                                                     김인섭   2013-04-18 간혹 사이트의 댓글을 보다보면 황당한 경우가 허다하다. 정언미행(正言美行)에 대한 찬미나 시비를 따지는 론변이나 정의를 주장하는 맵짠 비판은 의당사(宜當事)로 봐야겠다.쓴소리쯤도 수락하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혹시 어처구니없다며 욕설을 퍼붓고 비아냥 소리를 내던지는 것도 삼척동자의 생떼질처럼 앙증스레 느껴진다. 그런데 그 사이에 소량의 호사가들이 끼어 우리 겨례들의 상잔과 공멸을 부추기는 칙살한 생소리를 밥먹는 입사베기로 쏟아놓아 되게 식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게다가 숱한 미사려구들을 주워다 절세의 애국자이고 민족의 화신인 양 칠갑하고 방정맞게 촐랑거리니 토역증이 일며 심기가 자그만히 불편해 늘 걱정이다.   이즈음 누리꾼들은 아이디(ID) 하나만으로 온 지구를 거침없이 통하는 평등성을 지님으로써 전대미문의 자유과 편의성 혜택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심지가 불측한 악플러들은 새시대를 대변하는 고기술에 편승하여 입에 민망스러운 악담이나 일을 침소봉대하며 거리낌없이 댓글로 달아놓고 있으니 고민도 늘 따른다. 심사가 꿰진 이 트집쟁이들은 인간혐오형 망언을 종종 등장시키면서도 인터넷의 프라이버시(privacy)란  안전막 속에 숨어있는 게 관용적 오그랑수이다.그렇지만 이들의 행악질은 대중매체의 글발 속에서 극명하게 명암(明暗)으로 투영되어 민족을 해치는 반문화적 가운터컬처(counter- culture-하위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확실히 현재의 가상공간(cyber space)에는 익명으로 본성의 실체를 모습대로 나타내고 여과되지 않은 원초적 언어를 쏟아내며 사회나 민족의 존재를  조롱하며 나부대는 이상자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정보기술의 음지에 둥우리를 치고 독버섯 같은 지질이 문화를 만들면서 자유를 들먹일 것은 당연하지만 그 악플들이  동종의 역병에 걸리는 우매한 무리를 생산하는 의 원천지로 되지 않을가는 우려가 앞선다. 왜냐하면 이 부류들은 동족 증오의 고질을 가지고 동포들간의 사이를 벌여놓는 리간질에는 난다 긴다하는 재주꾼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민족간의 불화를 꼬드끼는 악담패설이 요동치면서 순진한 사람들이 미혹되는 사회적 이슈(issue)도 간과할 수 없다.타인의 말이나 뜻에 무임승차하여 악감정 속에서 헵뜨면서 유독가스가 풍기는 리플을 꺼리낌없이 올려대는 산독(散毒) 행위에 상당한 고정배기들이 말려드는 현실이다.이렇게 타인을 시궁창에 내몰며 민족의 불화를 조성하는 현상은 많은 부작용을 잉태하게 된다. 미생물 세계에서 잡균의 힘이 세듯이 여론 마당에서의 캔티즌들도 가공할만한 전파력이 가져올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요소에 대해 우리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할 수 없다.   는 옛말을 상기한다. 아무리 독설을 유포하기 쉬운 인터넷이지만 필경 생활의 불가분리의 공간이고 사회의 진보와 더불어 승화될 것도 틀림이 없다.최상의 방법이란 네티즌들이 우리의 문화 성역을 침범 못하는 방비책을 대고 자신이 감염되지 않는 면역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합심으로 간세지배들을 궁지에 내모는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다.우리는 이 사이버 폭력을 리성적이고 론리적인 무기로 대처하는 동시에  공생의 덕목과 자정의 자률을 기반으로 하는 기준에 따라 모든 문제를 봐내는 슬기로움과 옥석혼효(玉石混淆) 속에서 귀물을 선택하는 뛰어난 지혜를 가져야 한다.   댓글도 다양할 것은 당연하지만 신시대를 대변하는 고기술의 세계화 통로에서 악플은 시시각각으로 바로 잡아야 할 일그러진 단면이다. 이를 위하여 최우선 과제로서 사회의 주류를 이룬  리플러들은 순화된 의견을 표출하는 후덕한 누리꾼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마당이라면 악플러들이 내뿜는 어떠한 오물과 악취도 정의의 세찬 햇빛 속에서 중화되고 기운을 잃게 된다.우리의 대다수가 상생과 공존의 지반에 튼튼히 서 있다면  이런 잡초들이 뿌리를 들이밀 틈새도 사라질 것이다.   약소 민족의 생존과 발전의 힘이란 돈이 많기에 앞서 서로간의 무릎을 맏댄 소통과 남을 포용하는 지혜와 타인을 존중하는 례의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합심하여   민족의 인터넷 공간에서 파괴적 글귀를 서슴없이 올리는 말썽쟁이들을 이상의 취급을 안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튼실하게 구축한다면 사이트에서의 이런 기현상도 차차 진기(津氣)가 빠져버리지 않을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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