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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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반부패 독백(独白) 댓글:  조회:3382  추천:1  2015-01-08
요즘 까마득히 높이 앉아 뻔뻔하던 어른들이 반부패 철퇴에 얻어맞아 곤두박질하는 모습들이 겁쳐지며 거의 매일 핫뉴스로 등장한다.여기저기서 기라성같은 유명인들이 범죄 패륜아의 배지를 달고 옥고를 치르는 응분의 치죄를 당하니 대중은 손뼉이 째지고 목이 터지는 갈채를 보내고 있다. 근간의 부패상은 상상이 어려운 양태로 번지는데 듣고보면 눈이 뒤집히는 멧세지도 하루건너 전해온다. 비리쟁이들의 횡령금액은 먹었다면 백만대이고 꼴깍했다면 천만대이고 꿀꺽소리나면 억대이다. 희한하게도 집안에 사닉(舍匿)한 현금만도 액면가 100원짜리 지페로 1톤 아니면 2톤도 넘는다 하니 기네스북에 신청해도 겹겹한 심사 게이트쯤은 훨훨 통과할 일이다. 직권을 람용하며 주위의 부나비들과 결탁하여 비리의 온상을 만들고 인민의 민고민지(民膏民脂)를 무한대로 짜먹는 수작에 사람들은 어이없어 덤덤하게 무감각할 지경이다. 온 세상은 이 알부랑자 전부를 콤비네이션블로(组合拳) 복싱기법으로 핵주먹을 날리어 녹아웃(권투KO)시키는 정채로운 연기을 갈망하고 있다. 인민의 재산과 혈세가 독버섯을 낫자래우는 푼푼한 먹거리로 되었으니 누구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무엇때문에 그 높은 자리에서 그리도 오래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천문학적 거금을 횡령할수 있었고 무슨 재주로 매관매직을 밥먹듯 하며 족보마저 쓸쩍 바꾸며 양반으로 탈바꿈할수 있었는가. 폭로된 비자금이 이것이라면 사증불능(查证不能)의 금액은 얼마일가. 그 둘레에 아이에나(鬣狗)처럼 몰려든 모리배들이 야합하여 긁어먹은 남의 돈 액수는 얼마이고 말아먹은 나라의 재산은 얼마일것인가. 인민을 락심시킨 후유증 치유는 어디까지 갈것인가. 터덕거리며 살아가는 서민들은 지켜보며 기운이 빠져버린다 권력과 부패는 쌍존(双存)하는 사회현상으로서 권력이 존재하는 한 후자는 필연적으로 그 뒤를 밀착회전하게 된다. 동서양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직무범죄는 심각한 페해로서 문제시되고 있다. 또한 권력의 람용과 오용의 방지를 위하여 무수한 장치들이 고속작동하며 거침없이 실권자들을 견제하고 경고사이렌을 울리지만 이 악페는 파리같은 번식력을 음양으로 끈질기게 과시하고 있다. 인류가 몇십만년을 지나오며 망사창을 달고 알쓸이장을 파헤치고 라켓으로 때려잡고 독약을 뿌리는 등 갖은 수단으로 전쟁같은 노력을 경주하여도 전멸못하는 두통거리 하나가 얄미운 파리이다. 인간은 물욕, 정욕, 영예욕, 번식욕 등등의 수많은 칠정육욕(七情六欲)이 집합된 고등 생물체이다. 이런 욕망은 인간 생활의 동력이 되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혹은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그의 행위를 지배하게 된다. 동시에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을 바른길에서 탈선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인간본성의 약점 즉 무한대로 존재하는 사욕이 탐욕으로 변하고 부패로 변신하는 당길힘이 그토록 집요한 원인은 바로 인간의 자연본성에 내재적 원인이 있는것이다. 보다시피 권력은 부패세균과 공존하는 동서(同棲)관계로서 만약 그 공간에 필요한 격리 혹은 제어시설이 부족하거나 범접한후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할 위협이 없다면 면역이 약한 권자는 일순간에 병원균의 침식을 받게 된다. 진정 그 접촉감염을 이겨냈다면 실로 희귀한 생명체로 봐야 마땅하다. "제도가 건전하면 불순자들이 세도를 부리지 못하고 제도에 하자가 있으면 좋은 사람들이 책임을 잘 할수 없고 지어 반면으로 나가게 된다." 등소평의 이 금언은 오늘의 반부패의 현실에서 더더욱 그 속뜻을 음미해 보지 않을수 없다. 이런 최적화된 제도의 건립과 효률적인 운영을 통하여 부패를 원천봉쇄하는것이 문제해결의 특효약이라는 선구자들의 교시이다. 반부패의 시책은 법치적 무관용(零容忍) 원칙이 적용되고 인민이 공정한 제도라고 인정할때 최고의 효과를 거둘수 있다. 물질재부는 행복한 사회의 필요조건일뿐 충분조건이 결코 아니다. 바로 18차 당대회에서 제출한 이 빛발치는 사회에서 풍요를 누릴때만이 진정한 리상사회가 된다. 부패가 득세하고 돈이 불의행세를 한다면 개혁과 발전을 위한 노력은 대량적으로 상쇄되고 무효화되며 쌓아올린 물질재부는 독균의 배양기로 되고 마는것이다. 반부패의 총적인 목표는 비리에 엄두를 못내고 상상도 못하고 감히 하지도 못하는 즉 미연에 방지하고 맹아 혹은 수정란상태에서 제거하는것이며 이 수요에 부응되는 중국특색의 제도와 과학적 메카니즘(机制)을 구축하는것이다. 이렇다면 전민의 능동성과 과감성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부정(不淨)에 의한 침해를 최소화하는 경지에 도달할수 있고 전사회는 공동히 행복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 당중앙은 권력이 공정한 제도로 짜인 투명한 초롱속에서 운행하는 체제를 건립하기 위하여 로선과 방침을 수립하고 호랑이와 파리 전부를 잡아내는 실천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작업은 지극히 어려운 시스템공사이지겠만 대중에 의거한 견결한 단행은 꼭 소기(所期)의 성과를 이룩할것이다. 중국특색사회주의 옥답의 권력 마당에서 독식물이 착근(着根)하는 토양을 끊임없이 싹쓸이하고 개화된 법치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전민은 당중앙을 따라 자기의 소임을 다해야 할때이다. 연변일보 2015-1-7
22    가을날 수상(隨想) 댓글:  조회:2784  추천:1  2015-01-05
창밖을 굽어보니 젊은 여성들이 각인 각양의 양산을 받쳐 들고 태양 복사를 차단하는 모습이 볼거리로 되었다. 이 해변 도시에서 마가을을 상징하는 특유의 거리 풍경이다. 여름날엔 기압이 낮고 습도에 온도까지 높아 행인들이 벌이는 부채의 방서(防暑) 작전과 땀을 씻어내는 수고가 만만찮은 역사였는데, 어느새 지구의 새로운 온도 배치에 따라 염증(炎蒸)이 동냥가듯 가버리고 유쾌지수가 서서히 높아가고 있다. 일광 조사가 세어지며 일교차가 커지고 열기가 선기에 밀리는 의 계절이다. 비록 여열의 잔류는 감돌아도 후덥지근한 인고에서 해방되는 성추(盛秋)에 진입한 것이다. 가을철의 식물은 푸름의 극치를 이루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나날들을 떠나 보내며 장엄한 조락으로 자기만의 특기인 광합작용 결실을 세상에 전납(全納)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린다. 무수한 미물들이 온도와 빛을 감지하고 시간을 또박또박 재면서 새소리와 더불어 환절을 호소하는 계절예보의 선률을 뽑아내는데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은 강렬한 삶의 자세로 화신(化身)의 자태를 바꾸며 자연에 순응하는 정중동(靜中動)의 멋진 철의 변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만물의 동태(動態)와 더불어 인간들도 작열하던 태양, 씽씽하던 나무들과 함께 대지의 숨가쁜 움직임에 동승하여 설렁거리는 추풍으로 수런거리는 사시의 변화를 갈채로 맞이하고 있다. 추래추거(秋來秋去)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우주의 무한순환이다. 식물 세계는 봄철에 초록 세상을 이루고 여름의 열띤 발돋음을 한 뒤에 여념없이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오달진 열매맺이로 한살이의 대미(大尾)를 수놓으며 책임 완성을 당당히 세상에 실증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들이 인류에게 펼쳐보이는 고오한 풍채이기도 하다. 이 수확의 향연은 눈물겨운 생업을 위하여 로고를 치르는 인간들을 몽환경에 몰아넣기도 한다. 이렇듯이 가을을 맞이한 식물들은 자신의 환생을 위한 결의와 영생을 향해 나가는 미학으로 인간을 얻음과 잃음의 대비 속에서 과거을 뉘우치고 새 생활을 잉태시키는 엄숙한 사색에 몰입하게 한다. 환열과 예찬으로 맞아야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추풍낙엽의 쓸쓸한 우수(憂愁)에 현혹되어 에이그 팔자타령이나 되풀이 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가을을 타는 계절성기분장애란 환절기증세 때문인가. 나이 들어 퍼석퍼석해지는 퇴행적인 심리 변화인가.생계 영위를 위하여 숨가쁘게 뛰다니며 늘 피해 의식에 물젖어 있고 운명도 세상도 나에게만 모질게 대한다고 타발병이 골병으로 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청량한 갈바람은 소슬한 기분만을 쌓아주고 햇빛 줄기가 줄줄 흐르는 나무 숲도 처량한 여음만을 실어주니 실로 이상자(異常者)의 감정도착이고 원인불명일 수 없는 이질적 역발상이다. 이 맥락을 따라 나를 돌아보니 적자생존이란 혹독한 생물론을 좇아다니던 업보가 늘 상반되는 반상(反想) 관습을 뿌리깊게 심어놓은 것인지 싶다. 잘 조명해 보면 운명의 기세에 눌리어 삶의 길에 잔뜩 개핀 고단함과 서글픔을 무마시키는 지혜가 태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긋한 삶의 혼돈과 갈등 속에서 가을의 초목금수(草木禽獸)처럼 풍요와 빈곤、부활과 사멸의 변증법적 이치를 얼마라도 이해했더라면 우주의 조화가 당신을 얼마 조롱하더라도 충분히 감수(甘受)하고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감수가 남기는 사색은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느낌이 달라진다. 어쩐지 늘 회한에 덧붙여 떠나보낸 추억과 야망이 눈 앞에 즐비하게 줄을 잇는다.주어진 그대로 만끽하고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참된 인생관은 외면하고 허무한 미련 덩어리들을 맘속에 쌓기만 하였으니 그 속이 편할 수가 있을가. 뭇사람들은 일년 일차의 가을 결실이 령적(靈的)인 축복이라며 환희속에서 재릿하던 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그 사람은 거친 란상에 휩쓸려 빌빌거리며 지난 환각에서 살아가고 있다. 늘 초목이 시드는 정서를 음울한 기분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하는 것이다. 전근대식 무한경쟁 이론을 금과옥조와 같이 선양하며 편싸움 맞싸움도 불사하는 어리떨떨한 현실을 비켜서 진실한 자기를 투영하여 이(利)를 위하여 의(義)를 도외시 않았던가를 까밝혀야 한다. 설익은 남가일몽이 자초했던 전세월의 버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당혹스럽고 랑패스러워도 가슴에서 진동하는 서글픈 망향가는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이 으슥한 수렁에서 빠져나와 쓰잘머리 없는 집착을 팽개치고 자연의 가을처럼 버리고 거두는 천리의 궤도에 당당히 올라선다면 가슴에 옭맺힌 태엽도 풀리고 정보시대의 공존공영、쌍리공생의 개화된 사상이 얼마라도 고일 것이다. 생각을 굴리다 보니 오늘이 냉철한 이성과 서릿발 치는 성찰로 자기를 살찌워야 할 적시적기란 느낌이 절박해 진다. 세속의 천박한 가치에 연연하며 불만족과 푸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구석진 골방에서 넋두리 독주만 마시지 말고 세월과 부침을 함께 하는 예지(叡智)를 키워야 한다. 곁사람들의 다수확을 자꾸 흘깃거리지 말고 가을이 가르치는 무언의 진리를 넌지시 넘어보며 생명을 잠식하는 시간을 빌어가지고 지난 인생을 진지하게 려과해 봐야만 한다. 달아나는 세월은 가속도 질주를 하고 있다. 이젠 세월이 내 편이 아님을 더 실감하게 된다. 그래도 멀쩡한 미래가 있으니 창조주와 자연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음을 개의치 아니하고 려명이 밝아오면 소년의 용기를 살리어서 약한 다리라도 힘을 올리어 다음 가을을 향해 쩌벅한 발짝을 뗄가 한다. (끝) 2015-01-04 동북아신문
21    새해 문턱을 딛고 댓글:  조회:2866  추천:1  2014-12-31
아침, 늦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보니 발부리에 새해 문턱이 채이는군요. 범백사물이 바야흐로 일시에 2015년에 돌입하게 됩니다.해가 바뀔 때의 느낌은 나이와 일터와 빈부에 따라 제가끔이라 합니다만 그래도 희노애락이 헷갈린 세월의 굽이굽이를 가파른 산행길처럼 지나왔다고 던지는 하소연은 똑 같습니다.누가 뭐라하던 곤욕과 아픔의 나날들은 지나가고 새날의 려명이 시방 막 밝아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송구영신이 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입니다. 희비가 교차된 지난 일들을 앨범 속에 갈무리해 두고 새해엔 만사를 일무차착(一无差错)으로 해 보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지요.아니라면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회성 일전(一转)밖에 없는 하루살이 생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가요.낡은 수첩을 새 것으로 갈며 손이 떨리더라도 슬픈 기록들을 일필구지(一笔勾之)로 지우시고 아팟던 기억들에 꺽자를 치십시오. 보지 않아도 끝맺지 못한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이 눈 앞에 포개져 있겠지만 지고 가야 할 짐도 만만찮은데 낡은 짐까지 겹쳐지면 너무도 버거울 것입니다. 해마다 이 때면, 호화 별장에서 으쓱거리며 나와 두 팔을 휘젓고 다니는 위인들이나 심산 벽곡의 오두막에서 먹거리 걱정으로 허덕이는 령세민들까지도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낸다고 넉타령을 하고 있습니다.아마 누구나 고초를 겪으면서 산다는 좌증이겠습니다.사람의 맘 속에 남겨진 달고 쓴 이왕지사에서 고초가 언제나 강세를 부리고 마음벽을 허비면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원인이 있는 같습니다.아무튼 아팟던 사연들과 기억회로에서 맴도는 기쁜 추억들을 잘 정리하시고 두 해의 이음새를 훌쩍 넘아야만 희망찬 한 해에 들어섰다고 뻐길 수 있겠지요. 열려오는 새 해,이 365일의 걸음이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힘차고 기세높이 걷는 것이 최선책입니다.우리는 유물론적 력사의 길에서 매진하고 있는 주인공들이지만 산전수전을 겪어야 하는 당사자들이기도 합니다.아직도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 속에서 생존경쟁의 홍역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속을 태우고 피를 말리는 적자생존의 투쟁 현실이 당신이 직면한 피치 못할 운명이지요.유사 이래 미증유의 풍요를 누린다고 외치지만 아직 행복과 행복 지수의 높낮이 계산은 잘 되지 않는 것 같군요.오묘한 리론이겠지만 행복을 향해 나가는 것만이 진정한 인간의 바람이란 이 점만은 틀림이 없습니다.부자가 못 되더라도 행복하십시오. 지난해 유감이었다면 개혁개방을 떠밀고 불균형을 조절하고 사람간의 균렬을 봉합해야 할 거물급 들이 부정축재에 가담했다는 추문이 부지런히 전해 왔다는 사실입니다.그들은 편가름에 골몰하면서 사회 전진에 감속운동을 부가하고 대항적 모순을 조장하여 불안한 사람들의 찌푸려진 눈귀는 아직도 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열혈 지성인들의 추동력이 이 친구들에 의해 얼마나 상쇄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인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효화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우리들은 내 사는 나라의 나를 위해서라도 정의의 리념을 주장하고 남을 없신여기는 못된 생각을 배격하며 타인의 재물을 가로채는 모든 불한당과 그 추종자들은 벼랑 밑으로 쫓아버려야 하겠습니다.우리는 바른길에서 핸들을 튼튼히 잡고 우리 사업을 지도하는 핵심적 력량이 가리키는 리상향(理想乡)을 향해 꿋꿋하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각, 이국에서 고난의 강파른 산등성이를 타는 겨레들이 있습니다.고생스럽겠다 말하면 잔소리죠.괴롭고 외로울 때 손에 손 잡으면 힘이 커지고 춥고 떨릴 때 서로 붙안으면 체열이 커지고 차디찬 가슴도 더워진다고 인간의 리치는 말하고 있으니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아집과 렬등의식과 우울의 노이로제에서 완벽하게 탈출하시고 심성이 어지럽다 싶으면 바로 맘의 문을 잠그십시오. 신년의 문지방을 밟았으니 새 삶에 정진하는 멋진 자세를 가져야 하지요.이 땅의 살붙이 피붙이들이 당신들의 멋진 행진을 지켜 보겠습니다. 세상이 험난하고 각박하다 푸념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재미가 너무 많아 잘 살면 꼭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의 앙금과 회한을 락조에 실어 보내시고 새 해는 두툼한 행복일기를 작성하는 풍수년이 되어야죠. 묵은 해 새벽부터 내쳐 달려와 세밑에 같이 이르렇습니다.행운의 녀신이 당신에게 평안과 재수를 물밀 듯 실어오는 만판 세월이 되기를 목놓아 기원합니다. 연변일보 2014-12-31
20    안녕하냐,지난 세월아! 댓글:  조회:2907  추천:0  2014-12-26
서울에서 소학교 동창생 몇 명 모이는 회합이 있었다.모두가 1966년 여름 소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보는 동문들이다.세월에 속히워 죽을 새 없이 살다가 세여보니 얼추 50년이 되어간다.애시적 기억에 아련하던 친구들이 백발을 만지며 반기는데 희비가 갈마드는 이야기판은 끝이 없었다. 동병상련인가 량과분비(兩寡分悲)인가 우리는 모두가 엉뚱한 부평 인생을 겪은 불운아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소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이란 선풍이 캠퍼스에 불어닥쳤다. 밖에서는 상급 학생들이 란 깃발을 들고 학교 벽과 거리 담장들을 대자보로 도배하면서 뭔가를 비판하고 짓부시는 집단적 횡포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무슨 감투끈었던지 소학생들까지 가세하여 비판한다고 들썽거리면서 선생들에게 모욕적인 대자보를 붙이는 어이없는 이벤트도 벌어졌는데 우리는 이 황파(荒波)에 휩쓸리다 졸업을 맞이하였다. 이것이 정규 교육과의 영원한 결별일 줄을 십세충년(十岁冲年)의 아해들이 알 길도 없었다. 졸업 후 사회 혼란은 무질서로 급전하였다. 흥분에 들뜬 사람들은 들을 무리로 잡아다 꼬깔모자를 씌워놓고 조리돌림을 한다.항간에는 누구누구가 타살되고 자살하였다는 소문이 풀처럼 무성하였고 학생、공인、농민들이 파별로 나뉘어 무력 대결을 벌이었으며 파란 청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참상도 눈앞에 삼삼하다.계급대오청리 때 수많은 들이 중세기식 혹형을 당하고 세상을 하직하던 전대미문의 비참한 장면은 아직도 우리 간담을 써늘하게 하고 있다.그 무겁한 인간 정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아리숭한 미스터리다. 1968년 말 경 교학을 회복한다고 초중에 입학하였으나 공부였다면 되풀이되는 정치 설교가 아니면 명분없는 로동과 나무총을 메고 를 타도하는 싸움 련습이었다.그러다 69년 말 어느날 돌연히 증서도 없는 중학졸업생이 되어 농촌으로 나가야만 했다.하늘땅과 싸운다고 고함치며 효률과 경제성이 전혀 무시된 원시농법의 고된 로동은 우리에게 차례진 숙명이었다.그야말로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사이적(奇事異跡)이 아닐 수 없다.이것이 바로 1969기 초중졸업생, 환언하면 1966년 소학교 졸업생의 비운이라 우리는 말한다. 그 때 구두선(口頭禪)으로  우리는 새 사회에서 태어나 붉은기 아래서 자란 복받이었다.허나 다시 돌아보니 그 인생길은 대약진、인민공사、3년자연재해,계급투쟁,문화혁명,농촌하향,림표공자비판,우경번안풍배격,4인방몰락,개혁개방,리직실업 등 기복이 많던 력사 산맥이었다.기황、방황과 혼돈이 점철되고 미망、공포、기대과 실망이 이어지던 나날의 우리 역경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현시대 인들에게는 불신뿐이다.태평성세라는 오늘에 여유도 누려보고 참담한 과거도 차분히 돌아보려 하니 세월은 우리에게 배당된 생명 60년을 삼켜버렸다. 는 말이 어쩌면 우리 만을 제외하는지 모른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 로후 준비도 바닥 수준에 머물러 있다.다만 세월이 몸부림을 무한정 허락할 수 없다는 엄연한 법칙의 좌지우지를 당신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미구하여 고생할 자리마저 빼았길 터수인데 치열한 생계 전쟁의 돌격수로 살아야는 것이 누구네의 궁색한 신세이다.대체 무슨 재구(災咎)를 쳤는지 재수는 용케도 요 우리들만을 피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무정 세월의 세파와 부침(浮沈)을 같이 하였어도 인간적 도덕정신과 애국 충정만은 청죽 같았다고 자신하고 있다. 지난날 우리에게 남긴 보귀한 재부라면 이것이다. 어쩌다 수(數)가 붙어 개혁개방의 덕을 보는 행운이 있었으므로 하여 살아온 값어치 얼마는 보상 받았다는 기분이다.이제 후대들이 시나브로 사라지는 이 사실(史实)을 청사(靑史)의 침적물로서 기억한다면 더 없는 만족이겠다. 확실히 우리는 그 날의 사서(史书)에 투영된 불행자 축소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세월에 소외하였어도 우리는 시대의 과객이 아니었으며 자력갱생의 의지와 기능을 소유한 력사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었다.이 희노애락의 스토리가 들어쌓인 파란만장의 인생사는 영원한 추억의 낙시터로서 우리의 여생을 동반할 것이다. 안녕하여라,지난 세월아! 신수 사나운 1966년 소학졸업생들의 기구한 삶과 앙금이 산적한 력사 상자를 잘 간직하기 바란다. (끝) 2014-09-26  
19    언어는 조선족의 전략무기 댓글:  조회:8653  추천:3  2014-12-17
  언어의 중요성을 굳이 말하면 귀찮아 지지만 한어와 조선어가 기본어인 조선족에게는 다기능 공구로서 특이한 생산력과 발전력의 작용을 발휘한다고 호소하기 싶다.중한 량국에서 각각 천금칠보(千金七宝) 외국어로 써먹는 우리의 언어 장점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데 외국인들이 북적이는 이 도시의 한족 친구들은 불부다 못해 흔들삐쭉 시샘할 지경이다.세상에 두세 가지 말에 거침없다면 몇 사람이 가능할가.남들은 외국어 공부에 애쓰고도 잘 안되어 애태우는데  우리는 생득(生得) 언어로서 날개를 펴는 발전 민족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90년대 초반 한국의 사업자들은 언어의 수요로 다부분 조선족과 결합하게 되었다.그 때 우리 청년들은 음성 말투가 어눌하고 대외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부족한 탓으로 죽도 밥도 아닌 범벅말을 번진다고 욕감태기를 뒤집어쓰고 다니며 얼마나 많은 핀잔과 타박을 받았는지 모른다.한동안 한국 사업자들이 한국인 류학생을 임용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였고 지어 중국 한국어과 졸업생들을 채용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해보니 아니되어 결국 조선족 곁으로 복귀하였다. 중국인 한국어 인재들도 많이 등장하였으나 통번역에 들어가면 감당이 안되어 두 손을 바짝 들고 조선족에 의뢰하기가 다반사였다.이 동네에서 한 고위급 간부의 한국어 보좌관에게서 협력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중국 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5년의 조선유학 경륜을 쌓았는데도 한국어의 난점을 돌파하기가 어지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소연을 되풀이 하였었다. 자기의 사업에는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 동반이 필수라고 실토한다. 조선족 통번역원들은 일반적 말뜻의 순간적 리해는 무난하지만 즉시적 정확한 표현과 언어의 감정 색채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단점이 완연하였다.여기의 기본 원인은 언어 지식의 부족이겠지만 이국 문화에 대한 접촉이 적었고 조선어에 대한 가치 오판으로 언어의 필요성을 느껴보지 못한 력사적 제한성도 작용하였다. 거기다 민족어를 홀시하는 조선어 허무의식도 반동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물론 긴 시간의 화합 과정에서 오늘은 력사적인 제고를 가져왔다. 언어 배우기란 결코 쉬운 장난이 아니다.허나 두개 언어의 자연습득 환경과 몇 세대 지성인들의 지성으로 구축한 문화적 기반이 있기에 우리는 이미 중한 이중언어의 패권자(霸权者)로서 무적의 고지에 서고 있다. 금후의 새 과업은 언어의 실력을 예술화 방향으로 양성해야 하는 시대수요에 따라 자기 말의 인문적 소양을 끊임없이 제고하는 것이다. 학교뿐만이 아닌 전체 민족은 짬 나는대로 듣고、말하고、읽고、쓰고、번역하기 수련에 정진하여 언어중추를 발달시키고 조선어 중심의 언어 수준을 전면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약소한 조선족에게 이것은 특별한 발전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현재 중국의 36개 대학이 한국어 인재를 육성하고 있으며  한국도 전례없는 한어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어떤 조선족 겨례들은 되려 홀시하거나 아예 자식들을 언어에서 단절시키고 민족어 궤도에서 탈선시키며 국제 경쟁의 감제고지(瞰制高地)에서 제풀에 퇴각하고 있다.자기의 법권(法权)이라고 리유를 주워섬기며 떳떳이 우길테지만 어쩐지 씁쓰레하다. 누가 뭐라던 귀한 물건이 값지다는 물이희위귀(物以稀为贵)의 희소성원리는 언어 인구수가 적을수록 수요의 상대 급증을 유발하고 현재 사용자의 무대를 더욱 활짝 넓힐 것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생계에 쫓겨 눈뿌리가 아찔할 때 조선민족어가 거지 사촌인 가난을 삽시에 몰아내는 필살(必杀)의 무기가 아니었던가! 오늘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 언어는 진학과 교류와 생계수단이란 일차원을 뛰어넘어 새 민족문화의 창달을 이루고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전략무기로 일변하였다.조선족의 언어 화원이 만발할 때 민족 터전은 중국과 세계 한민족들이 우호교류를 벌려가는 국제교량으로, 국제공항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게 된다.그 때의 매개 성원은 청청한 문화사절로, 거룩한 평화전령사로, 걸출한 국제친선의 세터(二传手)로서 세인의 례찬을 받을 건 말할 것도 없다. 조선족은 조선어와 한어에 능란한 것만으로도 명실상부한 언어의 강자이다.조선어를 잘 하면 한어 값이 가배(加倍)로 올리뛰고 한어를 잘 하면 조선어 값이 배가(倍加)로 치솟는다.두 언어를 동시 소유하는 숙명은 조선족의 천재일우의 행운이다. 민족의 찬연한 앞날과 후대들의 천행만복을 바란다면 해제지동(孩提之童)을 포함한 남녀로소 전체가 불퇴진(不退阵)의 의지로 조선민족어 공부의 새 세기를 열어야 할 것이다. 연변일보 2014-12-16
18    자식농사의 극명한 시각차 댓글:  조회:3016  추천:0  2014-11-04
천륜에서 우러나는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사랑 속의 알사랑이라 일컬어도 어딘가 유부족(猶不足)이다.부모들은 태기(胎氣)를 느끼는 시각부터 아이에게 운수가 대통하는 인생을 마련해 주려고 희망과 우회(憂懷)의 경계를 얼마나 넘나드는지 모른다.그러나 아쉽게도 무작정한 사랑이 독이 되고 지나친 간섭이 덫이 되며 미래 오판이 영원한 함정이 되어 부모와 그 자식들이 랑패감에 허우적거리는 연출을 가끔 보군 한다.유소년기 애들의 길안내는 부모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 갈림길에서의 한 걸음 차이가 빚어내는 결과가 서로 왕청같다는 사실은 심각히 고민해야 할 인생 대사이다. 아이를 조선족 소학교에 입학시킨 타민족 부모와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애시적부터 조선어를 배우면 중학교의 졸업 즉시 대학 한국어과 수준에 이르고 중국어는 국어이니 별문제고 영어 공부에서도 몇개 언어가 서로 상보(相補)되고 류비(類比)되면서 조금 노력하면 도리어 추진 작용을 한다고 한다.그리고 조선어를 배우면 일본어 배움에서도 우세를 장악할 것이니 향후 진로의 취사선택에서 한족보다 두 갈래 길을 더 많아진다는 리론이다. 특히 조선어를 잘 하는 한족이 사회적으로 특유한 사회적 매력을 가지게 된다고 자신한다.이들은 조선어 공부를 간단히 취직이나 급여가 높다는 생계의 원초적 목적이 아닌 사회의 상류에 진출한다는 기점에서 선택하는 하는 것이다. 조선족 자식들이 민족 언어를 등지는 현상이 시비를 부른지 오래다.부모의 배치에 따라 조선어를 포기한 어느 젊은이의 하소연을 들어보았다.그는 조선어를 배운 대학생들과의 엄청난 렬세를 생존경쟁의 칼바람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단다. 오늘 쓴맛을 실컷 보고나서 후회가 막급인데 이젠 돌이키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이다.그는 사회에서 활약하는 조선족 인재 중 민족 문화를 포기한 사람이 성공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호소한다.오늘도 민족 문화를 외면하는 새세대들이 비일비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며 그 아이들이 때가 되면 뭐랄가는 로파심같은 걱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20년 이후 세상은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고 국제화 물결도 더더욱 도도할 터인데 어찌보면 시운의 변화는 뒷전이고 오늘의 작은 울타리에만 안주하는 구태연한 생각이다.우리의 문화가 생산력의 가치를 톡톡히 내고 있는 마당에서 되려 반문화적으로 나오니 근시안인가 바투보기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 전지구적인 개방 물결과 이중언어 교육의 강화로 하여 언어의 중요성은 나날이 부각되고 그 공부 환경도 전례없이 개선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매력으로 진학, 취직 생활에서 강세를 과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국제화, 다문화 시대에 걸맞는 인재로 각광받고 있다.몇 십년의 개방적 생활에서 우리의 다문화 민족적 가치가 날이 갈수록 불거지고 있음으로 하여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 문화를 새 시각으로 보고 있으며 사회의 곳곳에서 긍정적인 멧세지들이 전해오고 있다.이것은 우리의 가장 값진 자본이 바로 민족 문화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앞의 두개 사례의 천양지간(天壤之間) 같은 시각차에서 보듯이 애들이 미래를 기약하면서 사회 발전의 맥을 짚어내고 미래를 투시하는 것은 부모의 무작정한 사랑과는 다른 리성적이고 성스러운 책임이다.후대가 어떻게 하면 안일하게 살아야는가만 고집하지 말고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가를 더듬어내고 되도록 더 많은 선택의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부모 사랑이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교훈은 되새겨야 할 바이다.옥수수가 잘 자란 밭이라고 벼를 심는다면 웃길 일이다. 고루하고 협애한 구시대적 관념을 하루바삐 팽개쳐야 하는데 안타까운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오늘의 거친 처사가 애들이 자란 후 어떤 열매를 맺을가 자상히 숙고해야 마땅하다.작은 차질이 엄청난 결과 차이를 가져온다는 실지호리,차지천리(失之毫厘、差之千里)란 격언은 후대 교육에서 명심해야 할 지침이다. (끝) 연변일보 2014-11-4
17    입향순속은 삶의 지혜 댓글:  조회:4436  추천:2  2014-07-29
  는 속담을 우리말로 환원하면 입향순속(入鄕循俗)이된다.인구(人口)에 심심찮게 회자(膾炙)되는 이 금언(金言)은 되뇌거나 뜻풀이가 지극히 쉬운데 몸으로 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한국 땅에서 팥죽땀을 휘뿌리며 살아가는 겨레들 다부분이 현지 생활에 만족하고 재빠르게 주위와 친화되는 현실에 대비해 차별시와 멸시를 당했다고 쓰라림을 호소하며 여기저기 군데군데가 유감스럽다고 투덜대는 친구들도 자주 만났다.이런 불적응증이 원인이 되어 일상 생활은 물론 작업 현장에서까지도 상당한 트러블이 발생하며 수토불복(水土不服)으로 신심뇌(身心惱)을 사서 하는 심적현상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너무 가볍게 다룰 사안이 아닌 같다.   한국인 친구들과 재한 조선족들의 생활상을 담론하였었다. 는 친구의 하소연이다.리치에 닿는 듯한 말 같았다.   과거의 동료들도 진담으로 비스름한 견해를 피력하였다.시도 때도 없이 술에 얼큰하여 입싸움 몸싸움에 고함지르며 로상방뇨까지 빈발하는 게지레한 언동들이 시빗거리가 된지 오래다는 것이다.쩍하면 코를 세우고 뿔을 내밀고  아집을 부리는데다 매체에 이따금 등장하는데 상당한 폭력 경향,도로 무단횡단와 쓰레기 무단투기 등 거친 행동도 지역민들과의 마찰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거주국의 생활 습관과 문화 습득에 상당히 둔감하며 법집행 의식이 희박하기로 말이 아니란다.비록 소수인이지만….등등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표출되는데 조선족들에게는 별일도 아닌 같은 사사건건들이 한국인들인 속에서는 어두운 인간군 이미지로 각인되는 것이다.   현지인들과의 문화적 충돌과 트러블은 언녕 백일하에 나타난 사실이다.그 원인은   여러갈래일테지만 근본 문제는 살려고 찾아간 우리들의 자세에 있다고 봐야 한다.시야비야와 가타부타는 차치물론하고 우리가 눈치 빠르게 주위 판단을 잘 하고 그들의 심사를 미리아리로  알아채고 발빠르게 비위를 맞춘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일들인 것이다.넓은 아량으로 대방을 포용하고 대방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경청하며 설령 아니꼽게 보이더라도 인내성을 가진 성숙된 인간의 모습으로 슬기롭게 넘긴다면  존중과 례우가 저절로 따라오는 게 인간사회이다.     한국 문화와 사회의 일상 관습 및 법질서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재량(裁量)과 잣대로 남의 물건을 가로세로 재어대고 지동지서(指東指西)로 덜덜거린다면 마음고생을 자초하는 건 물론 살아간다는 서식(棲息) 자체까지 위협 받을 것은 뻔연하다.당연히 존재하는 차이와 대방의 의사를 무시하고 내 주장만 펼친다면 결국은 길을 잃고 지동지서(之東之西)하며 꼼짝 못하는 미아(迷兒)의 신세로 되고 만다.이 부류 친구들이 적지 않다는 생활 경험자들의 충고이다.중한 교류의 초기에 이런 불화의 고전을 겪었었는데 아직도 지속된다면 시세에 너무 둔감한 것이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세계에서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는 한반도와 불가분리의 수어지교(水魚之交)로 관계로 될 것은 다 알고 있는 현실이다.특히 한국 땅에서의 광범위한 생계형 생활은 현재가 진행형이지만 미래에도 지속형일 것은 틀림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유감、원망、실망、분노와 같은 배타적인 모순감정을 품기보다 입향순속의 슬기로서 대방을 리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심리적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유일하게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약소민족인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입향순속의 리치는 더덜이 없이 통습(通習)하고 확수(確守)하고 명패(銘佩)해야 할 좌우명(座右銘)이고 삶의 철학이다.부동한 문화인의 만남은 불협화음(不協和音)과 파찰음(破擦音)의 발생을 동반할 것이지만 나로부터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기에 귀를 세우고 신경을 도사린다면 불편을 자초할 수 없다.인젠 서로간의 차이에 대한 부동한 륜리관이나 리해도가 불본의(不本意)로 걸림돌이 되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수용자(受容者)에 대한 확고한 충성과 복종 정신, 제도와 가치관 차이를 재치있게 넘어가는 지혜, 정직과 근면으로 대방에 리익을 창조하는 리념적 조선족일 때 그는 일류의 지구촌 공민으로 부각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이리하여 남에게 돋보이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한국은 그  어디도 도처청산,가거지지(到處靑山,可居之地)로 되는 것이다.라는 잠언은 기억해 둘 말이다. (끝)     연변일보 2014-7-29  
16    탐식가(貪食家)의 투덜리즘* 댓글:  조회:2849  추천:1  2014-05-20
탐식가(貪食家)의 투덜리즘* 대련/김인섭  2014-04-05 헤어진지 몇십 년 되는 송아지동무들을 만나 희불자승(喜不自勝)으로 기쁜김에 량주가주(良酒佳酒)에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왕성한 먹새를 과시하며 먹어대고는 드라이브로 시내 구경을 나섰다. 가이드는 이 도시를 살아본 위인이 가로맡아 나서고 눈동냥 귀동냥으로 한 줌이나 저장했던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 내며 여기가 좋다는 열변을 쏟았다.기후가 좋고 경치가 좋고 교통도 좋고 먹거리도 풍성하고 경제도 발달하여 이 땅에서 이등이라면 서운한 도처청산 가거지지(到處靑山 可居之地)라고 력설했다. 입안의 침이 마르고 목까지 마르는 같았으니 아마 돈깨나 받는 전문직의 홍보대사를 만났더라면 목덜미를 잡히여 왜 내 밥그릇을 뺏으려냐고 질투를 들쓰는 드잡이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대련의 관광에서 남쪽의 빈해로(濱海路)는 너나없이 빼놀 수 없는 코스이다.  봄철이면 산비탈 혼효림 속에는 꽃들이 물결을 이루고 잔파도가 뒤덮인 무연한 바다의 괴암 도서들과 진균해안선(進均海岸線)은 천태만상의 아름다움、 웅위로움、 경이로움으로 일체를 이루며 뭇사람들의 넋을 앗아가는 별유풍경(別有風景)을 연출해 낸다. 볼거리에서도 백미(白眉)는 대자연의 장관을 펼치는 바다이다.억겁(億劫)이라는 세월을 지나오며 그는 무상한 우주의 조화와 가지가지의 인간 알륵으로 생겨난 세월의 앙금을 가라앉히고 수천만 사람들의 삶의 버거움과 온갖 번뇌들을 가로채갔던 것이다.거기서도 상상건*(上上件)은 그래도 바다와 하늘을 경계 짓는 짙푸른 수평선이다. 유장한 세월에 이 천혜(天惠)의 신비는 생고집을 앵부리며 대중을 청래(請來)하여 인생의 한순간을 카메라 기념으로 남기도록 구슬려왔다. 그런데 막상 왕견(往見)하니 원래와는 달리 연회색에 쌓인 해면에서는 근해의 잔문결이 어렴풋이 보일뿐 어지간히 맑은 날씨라면 어김없이 펼쳐지던 시수평(視水平)이 오간데 없다.분명 아나운서의 맑은 날씨란 옥음(玉音) 예보를 확인했던 바이다.도로관리자에게 왜 이 모습인가 물었더니 지금은 어제의 바다가 아니라고 사람마다 투덜거린단다. 일자(一字)로 짝 펴이였던 수평선은 일년에 보이는 날 수가 보일보각일각(步一步 刻一刻)으로 줄어든단다.빈해로의 가치가 반토막으로 평가절하가 되고 있었다.작심했던 걸음인데 별 구경도 없이 맹랑하게 돌아서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차에서의 화제는 기후 변화였다.온실가스의 무작정한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로 초미세먼지(雾霾)를 비롯해 극단적인 저온과 고온 그리고 폭우와 폭설 같은 전대미문의 재해가 주제이다. 령하 35도와 령상 35이상의 기후는 없다고 믿으며 우리는 자라 왔었다. 지금은 50도도 경계선이 아니다.모래폭풍과 스모그(雾霾)도 최근의 신조어이다.미생물의 돌연변이도 미지의 전염병을 발생할 개연성을 높혀주고 있다.우리의 후대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쯤은 생각해야 할 바이다. 위인도 얻어들은 풍월을 념불처럼 외워댔다.자원의 개발을 추구하는 경제학과 자연계의 보전을 지향하는 생태학은 다르지만 다가 인간이 어떻게 잘 사는가를 추구하는 과학이다.한정된 자원을 보호하면서 공생할 것이냐, 성장과 번영을 위해 활용할 것이냐에 따라 생태학과 경제학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벌이 욕망으로 줄곧 생태보호와는 반대방향인 개발 일변도로 달려온 것이다.오늘 이 해빈에서 잃어버린 수평선이 바로 생태학에는 소행머리 걸작이 아닐가! 어줍짢은 리론을 뻔뻔하게 풀었다. 한 친구는 을 한다고 싱거운지 을 한다고 거북한지,야! 무슨 손바닥보다 좀 큰 시내를 놓고 자랑질이야. 넌 하고 있어.글구 환경이구 뭐구 다 정치가,경제가나 국제주의자들이 할 일이지 우리와  뭐 상관이냐! 우리 일반백성들이야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살면 되는 거야.리론에 따르고 자연을 돌보고나면 대수 먹어야고 차도 타지 말고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다녀야 될 게 아니냐! 나는 할 말을 쫄딱 잃고 결국 그 톤을 높인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마음 구석의 생각이다.환경에 로심초사는 정치가와 환경가들의 짝사랑이 측은하다.그들이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뛰며 외치는 호소가 값없이 애절한 독백이 될 게 아닐가.진정 잘 살려면 정치가,환경가.경제가와 우리 같은 걸신쟁이들의 다리를 한데 묶어 사인오각(四人五脚)으로 황소걸음을  해야 할 때인 같았다. 허나 탐식가들의 향락 추구 정지마찰력과 돈에 혈안이 되어 명리에 급급한 경제가들이 일으키는 반동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집념파 정치가들과 순정파 환경가들은 짐이 무겁고 길도 멀겠고 임중이도원(任重而道遠)이겠다. (끝)   주: 투덜리즘: 투덜거리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 상 상 건: 좋은 것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
15    가을 말일의 단상 댓글:  조회:3336  추천:5  2013-12-24
가을 말일의 단상 김인섭  2013-11-07 래일이 립동(立冬)이란다.일각(一覺)*하면 겨울에 들어서는 환절의 경계선에서 또 한 해를 마무르는 뒷정리를 해야 한다하니 어쩐지 우수(憂愁)가 몰려오고 허허롭게 쓸쓸해 진다.서성대다가 사무실 맞바라기*의 산을 바라보니 단풍의 유혹이 집요하고 은근하다. 해변에 자리 잡은 이 산간도시의 이때는 년중 제일의 호천기 계절인 것이다.일터에 담겨있어도 빈 껍질만 지키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육신 전부를 주어들고 청정한 공기도 마실 겸 마음도 가라앉힐 겸 야틈한 도시림 메숲을 찾아가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산객들의 산책을 배려하여 만들어 놓은 유보도에 들어서니 심산유곡은 아니라도 가을의 결실을 거두는 락엽기(落葉期)의 숭엄한 계절이 분명하다. 한해살이를 마무리하는 라신(裸身)을 드러낸 이령림(異齡林)속의 가을 풍경은 왠지 서럽고 을씨년스러움이 넘치는 애상이다. 인간의 무지에서 떠오르는 비상(悲傷)이 아닌지 모른다.나무들의 만개와 조락이 질서적으로 순환하며 자연의 경개가 이뤄지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며 그 존재의 가치가 아닐까.그런데도 인간은 처연한 심정이 되어 서글픈 망향가를  되뇌이고 있다. 식물학자들의 리론을 들어보니 이 지역에서 나무가 일년 삼백예순날을 수분이나 영양을 공급받는다면 겨울추위로 동사(凍死)한단다.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나무는 으로 단풍을 만들어 잎새들을 줄기로부터 떨어뜨려 래년 자신 부활의 밑거름으로 되게 한단다.이렇게 동면하는 동목(冬木)으로 되면서 자기의 새로운 도약을 벼른단다. 이들은 때가 되면 미련없이 묵은 것을 버리고 침묵으로 자기를 살찌우다가 봄이 오면 장엄한 환생으로 새 삶을 맞이하는 것이다.부정의 부정 철학을 한치의 어김도 없이 지키는 그 생명 론리는 실로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무한상승의 궤도를 따라가는 나무숲의 윤회전생(輪回轉生)을 보며 만물의 령장이라고 으시대는 인간 세계를 바라본다.최근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데 빛발치는 과거를 자랑하며 권좌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던 권력자들이 공권력을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휘두르면서 동물적 욕기(慾氣)를 발설하다가 쇠고랑을 차고 줄줄이 옥살이에 들어가는 뒷모습이다.지어 목을 내대는 락명(落命)의 반대급부(反對給付)를 지불하며 참회의 눈물을 짓는 가긍한 모습도 가긍하기도 하다.한심하게도 요즘엔 부정자금을 꿀꺽했다 하면 천만대에 억(億)소리가 울리는데 만민이 기가 막혀 기막힌 것도 모르고 있다.그 친구들이 는 때늦은 참회 소리를 들으며 입이 씁쓸하기도 하다. 세속의 천박한 가치기준에 연연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졸장부들의 막막한 사정을 보니 인간 자체의 푼수가 나무보다 모자라도 좀 모자라는 게 분명하다.한살이를 끝내고 래년을 기약해야 하는 세월 속에 차분히 침잠(沈潛)*하는 나무의 성격에서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무슨 리치를 터득해야 한다.과욕과 집착에 사로잡힌 나를 나무와 견주면서 냉철한 리성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보라! 인간도 수목같은 비움、떠남、버림의 철학으로 자기 승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자기를 잉태하는 지혜를 가진다면 참다운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매체에는 비판과 자아비판이란 말구절이 자주 들먹거린다.아마도 비판이라면 뭐를 비워라.내려놔라 하는 것이고 자아비판이란 이것을 내치고 저것도 버리겠다는 뜻일 것으로 이해한다.진정 나무처럼 버리고 비우는 미학을 마음에 심는다면 인간사회에 감도는 혼탁한 공기가 일소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거머쥐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전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되지 않을가! (끝)   주: 일각: 잠에서 한 번 깨어남 맞바라기: 마주 바라보이는 곳.     침잠: 물속에 깊숙이 가라앉거나 숨음    
14    글동네의 말썽거리 댓글:  조회:3652  추천:6  2013-10-10
                                              (대련)김인섭    2013-09-21 생계가 절박하여 분주히 헤매이다 여유가 생기면 간혹 인터넷 글동네에 들러  잠간이나마 어지럽던 심신을 가다듬어 본다.언제 봐도 소가족들이 모인 작은 부락인데 그래도 깊은 사유와 맑은 심안을 가진 문사들이 참신한 기상과 사상을 발산하는 글들을 펼쳐놓으면서 소임을 다하는 모습들이 경의롭다.이 자그마한 터전에서 민족의 새 력사를 애써 담아내고 그 밝은 미래를 묘파(描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이 부족한 어떤 친구들은 행간(行間)에 끼어들어 가시 돋친 글토막을 심심찮게 끼어넣고 이취(異臭)를 품어내어 씁씁할 때가 적지 않았다.어떤 말끝에 울떡 밸을 쓰거나 깊은 생각도 없이 내던지는 배라먹을!쯤하는 욕도 쉽게 간과하고 왈가왈부 시시비비(曰可曰否,是是非非)도 얼마던지 당연지사로 본다.그런데 겨례간의 대결과 리간을 부추기는 언사들인데 마치 작심하고 발설하는 듯하는 느낌이다.아무리 봐도 조각이 나고 분극화될 이유는 아닌데 제나름의 론리를 펴가며 동족을 매도하고 대립각을 세우는데 험담마저 아끼지 않는다. 저의(底意)는 무었일가?   부동한 지역의 문화 차이를 가진 대방이 어떤 생각이나 일처리 방식에서 자기와 부동하면 무작정하고 불량품이고 말짜라 비난하며 막말을 해댄다.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부동한 국가나 인문 환경에서 생활하면 그에 적응하여 생활양식,가치체계, 전통관념 등 면에서 특수성을 가지게 된다.이는 대립성이 아니고 문화의 다양성이며 다원적 발전 상태로서 여기의 이질성과 모순성은 시대의 변화와 서로의 소통,포용,화합에 의해서만 합일점을 찾아내고 고양(高揚) 혹은 지양(지揚)하는 선별을 하게 된다.생활문화에서 파생되는 각심소원(各心所願)은 지극히 마땅한 욕구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세불량립(勢不兩立)의 적아간 금을 긋는 이상행동은 어디서 삐져나오는 걸까!   우리 민족은 식민통치의 아픈 력사를 안고 여기저기 흩어지면서도 피땀으로 고유 문화를 지켜왔으며 타민족과의 영합 속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놓고 후대를 이으며 살아왔다.몇 세대를 걸치며 들인 각고노력의 성과는 세계화로 매진하는 오늘에도 우리 민족의 보귀한 재산으로 활용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주류 사회와의 융합과 거기에 따르는 생활관습이 수립을 꼴불견으로 보는 어른들이 타민족과의 단합에 찬물은 끼얹고 그 민족사회의 일취월장의 변화를 극구 부인하면서 타민족과의 불화를 부추기는데 참 이상하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흑백논리 주장을 펼치는 이 독선가들이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리념적 싸움을 꼬드끼며 서로 진을 쳐놓고 동족상잔의 구태를 재연하지 않나는 우려에 답답해 진다.수많은 지성인들이 민족의 대화합을 위하여 노력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상극、불신、증오의 씨앗을 뿌려댄다고 밖에 볼 수 없다.전 민족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키워온 성과를 풍화시키는 행위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언성을 더 높혀 말하면 력사 조류를 거스르는 반동(反動)적 횡포가 아직도 퍼렇게 살아있으니 약소 민족의 비애가 아닐가 생각한다.     이 어렵고 혼탁한 시대를 불 밝히려 나선 헌신적인 문인들의 독립사고를 고무하고 독립적 견해를 피력하도록 격려해야 한다.민족 구성원들은 서로간 배타(排他)적 관계가  아니라 의타(依他)적 관계임을 명심하고 이견자(異見者)들이 바로 진리를 파헤치는 공존공영해야 할 파트너임을 명심해야 한다.독설을 쏟아붓던 이들도 방향을 돌려 비판과 자기비판과 반비판의 무기를 들고 정의와 정리(正理)를 불러내는 궤도에 들어서면 좋겠다.서로간 경색이 아닌 소통으로 어혈을 풀어 가는 한민족의 전성기를 맞아올 수 없을가.   다양하고 력동적인 문화 정체성은 한민족의 제일 큰 공동재산으로서 반드시 보존하여야 하고 다른 견해들 사이에서는 마음을 활짝 열고 무릎을 맞댄 진솔한 대화로서 민족 발전의 진작(振作)을 시도해야 한다.또한 그 성과를 고부가가치의 상속재산(相續財産)으로 고이 간직하다 차세대에 전달해야 마땅하다.이것이 기성세대의 의무이다.문화의 다원성은 자산증식의 자본이 돼야 할 뿐이지 결코 민족끼리 불화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 민족을 헐뜯으며 자기 고귀성을 자랑해서 귀인이 될가! 꼭 사랑해야 할 제 민족마저 갈퀴질하는 위인이 남을 사랑한다고…? 그 소리가 쟁쟁할수록 남들이 더 찬웃음을 쳐대며 이죽거린다.우리의 글동네가 진정 타민족을 포함한 민족 대융합의 글마당이 되고 진리와 지혜의 샘터가 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13    착 오 론(錯誤論) 댓글:  조회:3252  추천:2  2013-06-15
                                                                                         착  오  론(錯誤論)                                                                                                               (대련)김인섭  2013-06-015 착오가 없는 사람이 없고 범했어도 고치면 된다는 소리가 단골소리로 된지 오래다.허나 이것은 원론적인 통설일 뿐 삼라만상의 현실을 조명해 보면 착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태도를 차분히 살펴볼 필요성을 늘 느끼게 된다.얽히고설킨 풍진세상을 살아가며 시행착오쯤 빈발하는 것은 숙명적인 당연지사로 봐도 무방하겠지만 착오에 대한 감각적 예민성의 차이와 그를 판단하고 극복하는 지혜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의 질적인 삶과 그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결과는 천양지차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장한 인생행로에는 살얼음 밟듯 조밀조밀(稠密稠密)하며 지나야 한다는 지뢰밭같은 위험지대가 도처에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 빚어내는 차질은 만만불가이다.법이란 이 대전(帶電)중인 을 범접하면 인생을 결딴내고 사회에 피해를 주며 자신도 기사회생 불능의 상거지로 전락한다. 도덕 불감증으로 탈륜리적 오점이 박힌다면 뭇 사람들의 찬 시선을 받으며 망신스레 살아야 한다.인신안전은 더 말 말고 건강한 육신이 없다면 당신은 일 뿐이다.준법성,도덕성,건강한 육신과 인신의 안전은 항시 사수해야 할 생활의 하한선이고 고이 간주하고 살아야 천칙(天則)이다. 정상적 인간의 생활에서 착오는 영형상수(影形相隨)의 동반자이다.누가 착오가 없다고 겉치장을 꾸민다면 삼척동자마저 웃길 것이다.지혜로운 사람들은 늘 자숙자계하며 남의 비평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 비평에 대한 총화로서 스스로의 내심 세계를 충실히 한다.그러나 코가 센 사람들은 옹고집을 부리며 찬사에만 귀를 활짝 열고 있을뿐 타인의 권고와 쓴소리에는 질색하며 심지어 선의적인 권고까지 팽개치면서 적의를 품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타인의 비평과 일깨움에서 얼마의 영양을 섭취를 하는가 즉 에서 얼마나 이익을 얻었는가에 결정적 의미가 있다. 유지군자(有志君子)들은 착오를 감추지 않거니와 변명하지도 않는다.그들은 자신의 착오를 과감히 폭로하며  선명한 개정의지를 보임으로서 타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내고 자신의 립지를 단단히 다진다.착오는 감추려 애쓸수록 더 선명해 지며 과오은닉 자체는 범죄은닉과 동일한 사상론리가 밑바탕이 되므로 자연히 훨씬 큰 착오를 발효하는 배양기(培養基)로 될 것이며 타인 손해와 자기 실패에 또 다른 복선을 깔게 된다.현자들은 앙숙인 적수의 비평도 홀시하지 않는다.적들이 바로 당신의 결함을 더더욱 잘 살피고 심각히 연구하기 때문이다. 착오는 보는 시각의 부동함에 따라 착오일 수도 정확일 수도 있다.이 상황을 판가름하는 방법과 최상의 무기는 비평, 자아비평과 반비평이다.비판과 론쟁을 회피하면 개인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사회에는 정의가 자리매김을 할 수 없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고 만다.주장은 하되 아집과 독선에 빠지지 않는 활발한 비판문화가 사회 생활의 곳곳에 정착해야 하며 비판을 최고의 선물로 간직하는 사회적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한다.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소명하다는 이란 말은 결코 허투루 들어둘 말이 아니다. 착오에 대한 인식과 진리에 대한 인식의 무게는 동일한 바 모두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필수 과정이다.착오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정착할 수 없다.이 시각에서 바라보는 착오는 성공의 정상에 오르는데서 값진 이다.곡절은 있더라도 무난한 삶을 위해 위해 착오에 대한 내성(內省)이란 이 로순(路順)에서 옳바른 길을 잡아야 하며 끊임없는 방향타 조절을 진행해야 한다. 기로에 들어서면 빨리 뛸수록 그  실패와 락공(落空)은 더 끔찍하다는 선인들의 교훈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금석지언(金石之言)이다. 이다.대성했다고 호기만장한 어른들의 리면사(裏面史)를 짚어보면 거개가 착오를 범하고 고치고 재범(再犯)하고 재개(再改)하는 얼룩진 역사었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그들은 공통성이란 바로 착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연구에서 개정의 묘리를 터득하고 성공의 길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걸은 길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성공이라면 새 실패를 이어주는 한마디의 이음새였을 뿐이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은 착오에 대한 인과적 분석에서 수립되며 사회의 발전도 착오에 대한 총화에서 발전의 계기를 찾는다. 치렬한 반성철학과  진솔한 징개정신(懲改精神)을 좌우명으로 삼는 것은 디지털 시대라는 정보사회에서 개인의 영달을 이룩하고 조화사회의 건설을 추진함에서 가져야 할 근본리념임을 명심하자. (끝)  
12    여론 마당의 독필(毒筆) 댓글:  조회:5370  추천:3  2013-04-21
여론 마당의 독필(毒筆)                                                     김인섭   2013-04-18 간혹 사이트의 댓글을 보다보면 황당한 경우가 허다하다. 정언미행(正言美行)에 대한 찬미나 시비를 따지는 론변이나 정의를 주장하는 맵짠 비판은 의당사(宜當事)로 봐야겠다.쓴소리쯤도 수락하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혹시 어처구니없다며 욕설을 퍼붓고 비아냥 소리를 내던지는 것도 삼척동자의 생떼질처럼 앙증스레 느껴진다. 그런데 그 사이에 소량의 호사가들이 끼어 우리 겨례들의 상잔과 공멸을 부추기는 칙살한 생소리를 밥먹는 입사베기로 쏟아놓아 되게 식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게다가 숱한 미사려구들을 주워다 절세의 애국자이고 민족의 화신인 양 칠갑하고 방정맞게 촐랑거리니 토역증이 일며 심기가 자그만히 불편해 늘 걱정이다.   이즈음 누리꾼들은 아이디(ID) 하나만으로 온 지구를 거침없이 통하는 평등성을 지님으로써 전대미문의 자유과 편의성 혜택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심지가 불측한 악플러들은 새시대를 대변하는 고기술에 편승하여 입에 민망스러운 악담이나 일을 침소봉대하며 거리낌없이 댓글로 달아놓고 있으니 고민도 늘 따른다. 심사가 꿰진 이 트집쟁이들은 인간혐오형 망언을 종종 등장시키면서도 인터넷의 프라이버시(privacy)란  안전막 속에 숨어있는 게 관용적 오그랑수이다.그렇지만 이들의 행악질은 대중매체의 글발 속에서 극명하게 명암(明暗)으로 투영되어 민족을 해치는 반문화적 가운터컬처(counter- culture-하위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확실히 현재의 가상공간(cyber space)에는 익명으로 본성의 실체를 모습대로 나타내고 여과되지 않은 원초적 언어를 쏟아내며 사회나 민족의 존재를  조롱하며 나부대는 이상자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정보기술의 음지에 둥우리를 치고 독버섯 같은 지질이 문화를 만들면서 자유를 들먹일 것은 당연하지만 그 악플들이  동종의 역병에 걸리는 우매한 무리를 생산하는 의 원천지로 되지 않을가는 우려가 앞선다. 왜냐하면 이 부류들은 동족 증오의 고질을 가지고 동포들간의 사이를 벌여놓는 리간질에는 난다 긴다하는 재주꾼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민족간의 불화를 꼬드끼는 악담패설이 요동치면서 순진한 사람들이 미혹되는 사회적 이슈(issue)도 간과할 수 없다.타인의 말이나 뜻에 무임승차하여 악감정 속에서 헵뜨면서 유독가스가 풍기는 리플을 꺼리낌없이 올려대는 산독(散毒) 행위에 상당한 고정배기들이 말려드는 현실이다.이렇게 타인을 시궁창에 내몰며 민족의 불화를 조성하는 현상은 많은 부작용을 잉태하게 된다. 미생물 세계에서 잡균의 힘이 세듯이 여론 마당에서의 캔티즌들도 가공할만한 전파력이 가져올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요소에 대해 우리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할 수 없다.   는 옛말을 상기한다. 아무리 독설을 유포하기 쉬운 인터넷이지만 필경 생활의 불가분리의 공간이고 사회의 진보와 더불어 승화될 것도 틀림이 없다.최상의 방법이란 네티즌들이 우리의 문화 성역을 침범 못하는 방비책을 대고 자신이 감염되지 않는 면역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합심으로 간세지배들을 궁지에 내모는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다.우리는 이 사이버 폭력을 리성적이고 론리적인 무기로 대처하는 동시에  공생의 덕목과 자정의 자률을 기반으로 하는 기준에 따라 모든 문제를 봐내는 슬기로움과 옥석혼효(玉石混淆) 속에서 귀물을 선택하는 뛰어난 지혜를 가져야 한다.   댓글도 다양할 것은 당연하지만 신시대를 대변하는 고기술의 세계화 통로에서 악플은 시시각각으로 바로 잡아야 할 일그러진 단면이다. 이를 위하여 최우선 과제로서 사회의 주류를 이룬  리플러들은 순화된 의견을 표출하는 후덕한 누리꾼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마당이라면 악플러들이 내뿜는 어떠한 오물과 악취도 정의의 세찬 햇빛 속에서 중화되고 기운을 잃게 된다.우리의 대다수가 상생과 공존의 지반에 튼튼히 서 있다면  이런 잡초들이 뿌리를 들이밀 틈새도 사라질 것이다.   약소 민족의 생존과 발전의 힘이란 돈이 많기에 앞서 서로간의 무릎을 맏댄 소통과 남을 포용하는 지혜와 타인을 존중하는 례의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합심하여   민족의 인터넷 공간에서 파괴적 글귀를 서슴없이 올리는 말썽쟁이들을 이상의 취급을 안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튼실하게 구축한다면 사이트에서의 이런 기현상도 차차 진기(津氣)가 빠져버리지 않을가!? (끝)        
11    동천술회(冬天述怀) 댓글:  조회:4046  추천:3  2012-12-02
수필-동천술회(冬天述怀)                                                       김인섭   2012-11-18   오래만의 주(周休)휴라 늦잠에서 깨어일어나 창너머 뒤산의 혼성림 숲을 건너다본다. 북온대 해양성계절풍기후의 지역이라 소설(小雪)이 눈앞인데 산색이나 나무잎 매무새는 아직도 내 고향 연길의 만추 자태이다.올해는 풍조우순(風調雨順)의 호천후도 아니었는데 가을날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단풍잔치를 벌이던 매무시가 여전히 력력하다.해마다 되풀이되는 화사수류(花謝水流)의 기묘한 순환은 그 유혹이 집요하고 은근하였다.그 꼬드낌에 싱숭생숭하여 입노릇이나 대충하고 천리(天理)의 궤적을 드팀없이 따라가는 산림과 이신전심(以心傳心)의 기맥상통이나 해보려 신끈을 조이고 나섰다.   겨울 숲속의 정취를 만끽할 심산으로 유산객들의 발길로 다스러진 오솔길에 들어선다. 길 량옆은 여러 가지 활엽수들과 간혹 끼인 침엽수들로 울밀(鬱密)하게 푹 우거졌는데 능선길에는 아직도 만미(滿尾)의 풍엽에 두툼히 깔려있다. 짓수굿이 도렬한 수간(樹間)으로 텃새들이 날아돌며 적막을 깨뜨리고 약동하는 감흥을 일으켜 무척 정겹다. 풍겨오는 태고의 땅내음을 기껏 빨아들이며 묵묵히 걷다가 무심결에 낙엽 위에 드러난 바위돌에 앉아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자연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철없는 세월은 창조주가 하사하신 내 년치를 한 살이나 매몰차게도 썰어 먹는다.   나무에 엉성하게 매달려 찬바람의 조화를 서슴없이 감내하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니 그들에게는 지금이 한해살이를 정리하고 새 소생을 기약하는 장엄한 조락의 시절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이들이 새봄에 신록을 펼치고 력동적인 여름의 번성을 이루다 오늘은 가을의 결실을 안고 지난날을 반추하면서 한살이의 대미(大尾)를 수자(繡刺)하며 떠나는 슬픔을 감추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바로 어제가 춘초의 환생이었는데 매정한 계절의 재촉은 되려 사람의 가슴도 버겁게 한다.한 해 동안 뭘 했기에 이리도 빠를가 아쉽다는 허허탄식이다. 시들한 심경은 서글픈 망향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가파른 언덕에서 두발을 겨끔내기로 내디디며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솔바람을 실컷 먹어본다. 잡다한 일상으로부터 비켜서서 가슴을 허비는 속사잡사들의 번거러움에서 벗어나 건뜻한 마음만을 가지려는 욕심도 어른거린다. 거룩한 꿈을 가지고 성현들의 반열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거저 입살이가 목표인데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녀도 년년이 소망이 굽질리고 뒤틀어지어 는 촌극을 되풀이하는 연유는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항시 티없이 매서운 바람같은 수련을 받으며 심적 오예물(汚穢物)들을 실시로 털어버렸더라면 이토록 멋쩍지는 않았을가 생각해 본다.이 겨울날 하늘이 나를 비춰야 할 몸거울이 되기에 제격이다.   세월이 또 만물에 나이바퀴를 한 겹 둘러놓는다는 속마음도 여느 해보다 허우룩하다.저 추레해진 고엽(枯葉)들도 천체의 회전을 따라 새 숲의 벅찬 부활을 위하여 정숙한 동면을 위해 붙살이 하던 나무에서 미련을 털어 버리고 떠난다.이듬해 새 생명의 밑거름으로 기꺼이 되어진다.인간도 세속의 다툼이나 명리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들과 같은 삶의 궤적을 좇는다면 주제넘는 욕기나 기를 쓰고 토하던 망언망동도 싸악 버리고 기꺼이 새 도전에 마주할 것이다.   앙상한 가지들의 세찬 몸부림은 인간에게는 혹심한  시달림으로 각인되나 그들에게는 돌아오는 봄날의 찬란한 재생을 위한 기꺼운 통과의례(通過儀禮)이리라.틀림없이 일년생(一年生)을 거뜬히 마치고 풍성한 창조와 결실을 윽벼르는 드센 몸짓이다.늘 아집과 독선의 성채에 같혀 항간에서 시야비야를 주문하는 인간에겐 이 삭풍의 담금질이 안성맞춤이 아닌가 싶다. 만물의 령장이라 뽐내대는 우리들이 이 나무들처럼 배부른 투정이나 오기가 없이 살았더면 해마다 에돌아오는 랑패감은 없을 것이다.     이 계절은 우리들이 한풍같은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봐야 할 길목이다.비망(非望)의 굴레에 매여 드잡이하다가 배낭에는 캐캐묵은 구닥다리만 꽉 채우고 허허로운 빈손이 쑥스러워 자꾸 뒤로 감추는 나를 살펴보니 애처롭기만 하다.늘 세속의 천박한 가치기준에 연연하며 헤매는 내가 타고난 어디가 약간 모자라는 축이 분명하다.잘 아는 사람들이 올해는 뭐하며 살았냐고 물을텐데 외면하고 빠져나갈 구멍이 어디에 있나 찾아놓아야겠다.만나면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민망스런 면판은 어디 둘 것인고!   허방지방 해매던 해가 바야흐로 지나간다.마음은 서글퍼도 새해의 볼일들과 하고 싶던 일,사랑하는 일에 얼마 안되는 에너지라도 쏟아야 한다. 떡판같은 바람이나 번뇌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이 겨울나무의 서릿발 같은 정진을 한다면 행운과 축복이 닿으리라 희망해 본다.   뉴톤의 말이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쏟으라.   (끝)  
10    수필-사라지는 고향 댓글:  조회:5058  추천:1  2012-11-11
사라지는 고향                                                      김인섭  2012-0-07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사자성어는 동물의 귀소본능과 일부 어별들의 회귀본능과 맥을 같이하여 인간의 애향심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생물체의 귀가성으로부터 인출한 인류의 망향 정감도 동물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시류에 밀려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바닷가의 어디에 삶터를 잡은 역마살(驛馬煞) 나그네가 돌탄막급(咄嘆莫及)의 신세를 호소하기 위함이다. 만 사람이 한결같다는 향수의 발로이겠다. 장구한 나날 타향에서 헐떡이며 다녔어도 고향에 대한 모정(慕情)은 달아오를 뿐 식은 적이 없다.인제는 인생의 이순으로 바이없이 끌려가며 차차 여가도 많아지니 가슴속의 회향병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태생지로 내몰군 하였다.   늦가을 어느 날 용무차 시간을 내어 유소년 시절의 애환이 서려있고 생의 꿈을 키워주던 산간벽촌을 찾았다. 타지를 떠돈지 오래지만 마냥 고토를 등지고 지냈던 것은 아니다. 공사다망으로 부랴부랴 왔다가도 무심히 지나쳤을 뿐이다.여태껏 고향땅 모습이 아수라장이란 수풀 같은 소문에 귀를 주고 있다가 이번은 쪼아보기를 작심한 방문이었다.   내 고향은 연변의 어느 골짜기에 있는 안골 마을이다.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조선반도의 무자비한 인재(人災)와 가공할 천재를 대피하여 이 고장에 울짱을 박으려고 좁쌀 한 말의 대가로 풍수지리에 족집게라는 명풍을 모셔다 살자리의 택지(擇地)를 위촉하였다.두둑한 매복료(賣卜料)를 얻어챙긴 그는 여기저기 사곳을 누비다가 이 골안을 둘러보고 남녘 하늘을 향해 앙천축수하면서 가파롭게 올리벋은 뒷산은 서북쪽의 액귀를 막아주는 토지신이요 동남을 향해 탁 틔인 밋밋한 비탈은 풍년를 갖다주는 곡신의 놀이터인데 당신들의 명당이 다른 곳일 수 없는 바로 이 곳이란다.거기에 부연하여 윗쪽에서 흘러오는 석간수는 후손만대의 생명수요 앞쪽의 골개천 옹달샘은 장수를 키워내는 억겁의 령천인데 둘이 없을 길지라 간권(懇勸)하니 개척자는 귀가 번쩍 뜨이어 삽을 콱 박았다는 전설이다. 실로 그 천우신조의 은총이였던지 이 안동네에 해해년년 풍년이 찾아오는데다 아이들이 망백초(忘百草)로 건강하고 로인들이 학령(鶴齡)으로 장수하여 농사고장에다 장수촌이라 린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왕견(往見)하니,원래 간선도로에서 들어가는 토사도는 포장길로 멋진 탈바꿈하여 격세지감이 불끈 솟아올랐다.그래도 빛바랜 추억을 살리려고 승용차는 세워놓고 8리 길을 걸어 오른다. 마가을이라 갈걷이를 끝낸 들녘은 쓸쓸해도 경사진 곡저 량편에 계단을 이룬 전답이 예와 같이 정겨웠다. 헌데 지레짐작이 동인인지 지나치는 낯익은 동네들을 보면서 이 터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직하였다.기억에 아련한 농가들이 세월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하고 땅쪽으로 푹 가라앉아 그 모습이 구슬프기만 하다. 심란해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다 개울을 가로지른 줄다리에 앉아 다리쉼을 하며 내리다 보니 때는 갈수기여서 작은 물줄기가 까까스로 흐르는데 뿌유스름한 물색이 눈깔스럽다. 그 옛날 구갈이 나면 시름없이 마시던 일급수가 탁수로 되어버려 마음이 읍읍불락(泣泣不樂)이다.어쩐지 세멘트 길바닥도 무척 서먹서먹하였다.   굶주리던 모진 세월과 발빈전쟁(拔貧戰爭)의 세파 속에서 끈끈한 정을 나누던 옛 이웃들을 마주하려 마을에 들어선다.허나 회억은 가슴에서 숨쉬나 눈앞의 현실에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다.삼십여 호가 모여살던 터전이었는데 인적기 보이는 집은 대여섯 호 정도이다.거거의 대못으로 처깔한 집들 마당은 풀 풍년이고 돌담은 허물어지고 주저앉았고 어느 집은 기둥까지 썩어내려 눈이 호되게 시렸다.동네 탄생의 기념수인 아름드리 버들 밑은 한 길 되는 잡초가 꽉 서 있다. 가축들의 기척은 귀를 씻어도 안 들리는 마을에서 으쓱 무엇이 엄습하여온다. 장수촌이 몰락촌으로 일변하였다.   허전함에 헐헐거리다 죽마고우 옛친구와 마주했다.70고개가 보이는데 최년소라 촌민조장이란다.반짝이는 기억을 더듬으며 옛 이웃들의 안부에다 잡다한 일상까지 한담을 나누는 중 원주민들 거의는 외국으로, 도시로, 혹은 자식을 따라가고 남은게  6호인데 그 식솔이 합해야 11명이란다.그것도 로자,환자가 아니면 하느님의 분부대로 움찍거리는 약자들이다. 두메산골에 고고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린지 십년이 넘는단다.거자(去者)들이 버린 땅은 타민족들이 다루는데 이젠 그들이 가난티를 다 벗고 자가용으로 통근 농사를 하는 모양이다.세상이 이러하니 자기들은 입살이만큼 농사나 지으며 이럭저럭 살다가 때가 되면 떠날 생각이라고 속내를 꺼내 보인다. 내 고향 마당지기들이 씨가 바짝 마르고 있었다.   개혁개방이 경직된 낡은 체제를 수술대에 올리자 만백성은 가난의 사슬을 끊으려고 지동지서하며 치뛰고 올리 뛴다.약진하는 산업사회의 뒤를 따라 더 많은 점유와 신분 상승을 꾀하며 끝머리도 모르고 고공 줄타기를 한다. 이들 중 셈이 빠른 날파람군들은 마력을 발휘하여 부를 쌓았거나 도시민으로 기틀을 잡아가고 다부분은 소강상태에서 앉은걸음으로 어정거리는데 일부는 살인적 경쟁에 못배기어 고군약졸로 굳어지는 형국이다.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변혁에 둔감했던 이들과 바이없는 순정파들, 역운을 탄 힘없는 사람들은 가난 설음을 감내하며 탯자리 지킴이로 전락하였다.   친구는 무척 반기며 마누라에게 음식 대접을 주문하고 아랫 마을의 옛 친구도 불러온다.근처에 가게가 없어 엉뚱한 장면이나 때우려 시내로 갈 때면 상비로 갖췄다는 비축분을 꺼내어 초졸한 술상을 차리고 백주잔을 나누었다. 하는 이야기란 집체화 나날에 추위와 기근에 허덕이며 이 산골에 동잇땀을 쏟던 이야기와 팽글팽글 돌아가는 세상을 따라 못간다는 이야기에다 누구는 어쩌고 나는 저쩌고 하는 한담객설인데 어쩐지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처량한 행여소리로 들리며 가슴살이 찌근거리었다.실로 는 속담이 이게 아닌가는 생각을 거뜬 올렸다 내리웠다.그래도 이 선량한 향토민들이 최후의 동네파수군들이고 이 사회를 떠받친 의 영예로운 직원들임을 속저리게 느끼었다.   해넘이가 되어 발이 무거운대로 자리를 떴다. 친구의 작별 인사말이다.유서깊은 이 땅은 만고불변이겠는데 이 나그네는 바야흐로 완벽한 실향민이 되고 있다.    호텔에 돌아와 고향을 잃고 친구를 잃고 회억의 까지 깔끔히 잃는다는 상실감에 허우적거리며 저녁을 굶었다는 사실을 밤중에야 의식했다. 현대인들이 고향에 대한 련민의 깊이는 얼마일가!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하게 변해버린 고향을 어찌해야 할 지 앞이 오라가락하였다.오붓하던 그 산촌이 무너져 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휘영휘영하는 마음을 꽉 잡고 있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용무로 만든 술자리에서도 동네 이야기가 이어졌다. 근디말이여! 여출일구(如出一口)로 네 마을만이 아닌 조선족 사회가 끝장이라며 한결같이 숨 넘어가는 소리를 질러댄다. 북적이는 중생들이 돈방석을 노리고 태평세월을 찾아 맹이동하는데다 출산기 여인들의 대탈출과 생육 기피로 하여 민족의 관산이라 불리는 이 뜰이 인구의 격감.교육의 황페,경제의 기형이란 한파가 몰려와 위태로운 사지판에 오른지 한참 된다. 온 민족이 된 몸살을 해대는 이 터자리에 이 들었다는 실감이 머리를 짓누르도록 몰려왔다.   리향민들 다수는 나름대로 물질적 포만감에 쌓여 급제했던 반가 도령의 금의환향보다 못할 게 없다고 배를 만지며 자부하고 있다. 가난이 덕지덕지했던 궁상을 벗어내치고 풍요의 시대를 즐기며 세시의 행사 때나 경조사 때면 멋있는 차림에 자가용으로 포장도로를 내달리니 옛적의 고을 원님도 부럽지 않으리라.그러나 번쩍이는 외형의 안쪽에서  득은 무엇이고 실이 무엇인가를 생각이나 할가. 금전만에 샛별눈을 박고 있으며 잃은 것들의 귀중함이나 후대의 훗날은 꿈에나 꿀가!   이국 땅에서 말 못할 천대와 기시를 받으며 번 아까운 돈을 술놀이,카라오케,외적인 과시에 마구 날리며 전통과 문화의 계승에는 뒷전이고 후대의 민족언어 교육마저 시원히 팽개치는 게 남이 아닌 우리의 숱한 갑남을녀들이다.그렇게 귀한 애들을  반숭건숭 인간으로 전화시키는 싸가지결핍증 행실을 보며 이다. 가부간 조선족 공동체가 꺼져 내리고 그 문화가 불티나게 사라지는 게 확연한 모습이며 민족 절멸의 동녘이 보일보 다가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돈 번 뒤에 민족 상실이라면 이는 적자 장사에다 이다.   어느 땐가 철학 교원이 사회 발전은 파도식, 라선식의 전진상승이라고 력설하던 기억을 더듬는다. 이 영구진리와 조선족 사회에 등식을 세우려는데 이 둔한 머리로선 해법이 없었다.해진 군복에 낡은 총검을 차고 세계의 최강이라 뽐내던 일본 관동군을 향해 당장 네 땅으로 돌아가라!고 호통치던 주덕해 선생이 보고 싶었다.그는 애국애족의 불굴의 정신으로 당찬 조선족 사회를 건설하여 중화민족에 불후의 업적을 남기었다.그 본전을 후손이라는 뭇사람들이 빡빡 긁어 먹는 때 이 영걸이 재출현한다면 작게 반가우랴.   그러나 이는 푼수데기의 토막생각 이상은 아닐 것이다.급진급변을 거듭하는 디지털 시대에 사회의 변혁과 진보를 어느 한 카리스마적 호협한에 기대어 실현하다는 환상은 구시대적 정치 유물로 된지도 이슥하다.다름 아닌 조선족 공무원들의 의 탁월한 지혜, 지성인들의 창조정신과 민족의 신념각성이 더없이 필요하다.설법은 간단하나 심중한 심혈의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다. 고향과 문화가 사라지고 후대까지 사라진다는 오늘, 단결기래도명천(团结起来到明天)!※ 을 웨칠 때가 래일이 아닌 지금이다.   타향에서 삶을 꾸리는 내 같은 무리들은 생계 전쟁이 미완의 과제이다. 다만 기한에 허덕이며 동년을 자랐고, 섬찍한 동란에서 청소년을 보내었고, 개혁개방 시기는 지동지서로 헤매이는 긴긴 날이었는데 인생의 저녁엔 고향의 상실과 민족의 리산이란 고배를 마시며 개팔자 인생을 보낸다는 기분에 오늘도 가슴앓이 시련을 받고 있다.   자기의 무능함은 애써 숨기는 뒤소리군이지만 고향만은 사랑스럽다.그 이 든 땅에 라도 없을가! 파아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시내가의 실버들이 춤추던 동네에 사과배꽃,살구꽃,아기진달래가 활짝 피는 그 날을 돈수재배하며 기원한다. (끝)      
9    소수론리와 돌밥원리 댓글:  조회:4321  추천:3  2012-10-11
돌밥이란 뭐냐는 물음에 누군가 돌로 지은 밥이라고 대답했다면 희한한 웃음거리로 되여 차세대까지 전해질지도 모른다. 인간계에서 돌밥이든 콩밥이든 쌀을 모재(母材)로 한다는 것 쯤은 욕토미토(欲吐未吐)의 철부지까지 중소공지(衆所共知)하는 례사이다.그런데 필경 쌀밥인데 딴 밥이라 이르니 여기서 경계를 분명히 해야하는 필요성이 제기된다. 세월이 좋아지고 경작、타작、정미 기술이 발달하여 요즘엔 돌을 가리는데 신경을 별로 안 쓰고 밥을 지어도 돌을 씹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말을 꺼내니 춘풍추우의 지난날 물함박에 쌀을 일며 돌가리기에 마음을 사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선하다.그래도 밥을 먹으며 돌을 씹을 때가 푸술하여 간혹 한 개가 씹힌다면 그래도 뱉아버리고 마는데 두개를 넘기면 이거 진짜 돌밥이라며 툴툴댔다. 3개가 넘으면 물에 휭구어 돌을 가라앉이고 먹는 촌극도 벌어졌었다.만약 다섯 개 정도라면 이게 진짜 돌뭉치라고 내버렸을 것이다. 어느 밥점에서 모래가 한두 알이 있는 밥을 두세 번 팔았다면 가게가 사지판에 오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모래알을 겻들며 중언부언 해대는 리유는 그릇의 밥알 개수와 그 모래알의 비례를 티적거리며 설명하기 위함이다. 쌀알이 만알 정도인데 모래알이 세개라면 돌밥이 되고 5개 정도라면 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점이다. 다섯알의 모래와  쌀알의 수자를 대비하면 소수도 극소수도 아닌 리호(厘毫)의 량으로서 1/2000이 된다. 엄연한 사실은 이 정도라도 돌밥이라 취급하는게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요즘은 모래 한 알이 들어가도 밥의 성질이 개변되고 그 질과 상품가치가 쫄딱 다운되는 세월이 되어버렸다. 조글로 사이트에서 “교사절의 촌지(紅包),이대로 좋은가?”는 설문 페이지를 무심히 번져보았다. 대부분 애플러로 봐야 할 댓글 중에 “몇몇 반주임이 가지는 돈을 가지고 수많은 교원을 욕하니...정말 리해가 안된다.”는 리플이 달렸는데 그 론리가 눈귀에 거슬려 한참 머리를 굴리다 필을 들었다. 이 소수가 어느 소수를 말하는가 생각했다. 교육에 주는 가해는 도외시하고 그 정도면 괜찮다는 용서중심의 “리론”이 아닌가? 다수가 아니면  문제가 안된다는 시각이다. 만인이 질지이심(疾之已甚)하는 병페를 놓고 그게 뭐 대수냐고 방심하며 나긋한 용인술(容忍術)을 발휘하는 것이다. 대명천지를 어지럽히는 불량품마저 관대하는 성향이 만연하는 현실을 직지하며 촌지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말이다. 번져나가는 비리를 방치하는 얼빤한 사상로선이 아닐 수 없다. 이 친구분께서 그 소수론리를 필자가 꼬집는 돌밥원리에 대입하고 되풀이 해 보시기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날 일반에서 행해진다는 촌지가 심해진다는 소문은 들어왔지만 그 량과 폭이 량적으로 얼마인지는 알길이 없거니와 구구히 이야기할 생각도 없다. 다만 후대를 키우는 해맑은 성역을 잠식하는 이질물을 평가하는 방식이 시류를 거스르는 발상이 아닌가 뇌까리고 싶어서이다. 모래알이 얼마간 들어있다거나 또 몇 개 뿐이니 그래도 쌀밥이  아니냐는 사고방식의 무리한 답에 항변할 뿐이다.  정보화시대에다  지식화시대라는 디지털시대이다. 우리는 두루뭉실하게 지내던 전세월의 리념에서 벗어나 고속도로 회전하는 격변기의 엔진속에서 티끌 하나도 파멸적인 후과를 초래한다는 현대적 감각을 수립해야 한다. “천리 언제도 의혈에 일결한다.(千里之堤,毁于蚁穴)”는 경험철학을 되살리며….  
8    송충이면 솔잎을 먹어라. 댓글:  조회:3876  추천:1  2012-08-15
  자기 분수와 정도에 알맞게 처신하라는 의미로 는 속담이 있다.이 명구는 인삼,녹용이 인체 보신에는 고급 한방약이라도 송충이에게는 사약(死药)이라는 자연 섭리의 반증이다.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리치에도 역시 적중하는 보편진리라고 고집해 본다.   해마다 일제히 폭주하는 학교 졸업에 동반하여 되풀이되는 구직 시즌이다. 그중에서 명마(名马)급 좌석을 점거한 친구들은 거물 업체가 최혜대우의 화려한 조건을 나부끼며  부랴부랴 가로채 간다.일부 동무들은 금권(金权)이란 를 교묘하게 리용하여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구멍이나 문틈새를 날쌔게 비집고 들어 량반의 반렬에 새치기한다.그래도 대다수는 나름대로 화려한 리력서를 혁명군 기발처럼 치켜들고 도전하는데 굴뚝 같은 마음이나 직장의 선택에서 미숙한 새내기들의 공통성을 늘 엿보게 된다.   인생의 첫 취직은 잠간 다리쉼 하는 농막을 짓듯이 손뼘재기나 걸음짐작으로도 취급해야 할 일이 아니다.이것은 밥그릇만에 아닌 한생을 두고 심각한 영향을 일으키게 되므로 심사숙려를 대전제로 해야 할 중대사이다.대체로 사회의 상류에 서 있는 유능인들을 보면 첫 직장부터 상승일로를 걸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인생의 려로에서 쓴맛단맛을 싸지게먹어댄 기성세대들의 진언(眞言)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고개를 쳐들었다.   진로의 선택에서 최우선은 자기가 어느 부류의 재료인가를 파악하는, 보기에는 여반장(如反掌) 같은 어려운 과제해결이다.말하자면 자신을 투철하게 료해하고,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명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누구도 바라던 바의 일은 멋지게 한다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환경요인과 부딪치면 엉뚱한 결과를 빚어내는 게 다반사이다.그러므로 유심적인 어리석음을 피하고 이란 잠언을 명기해야 한다.   사회 진출하려는 젊은 지성들은 미리부터 자신에 대한 자아적 평가, 사회적 평가와 바라는 희망을 집합시켜 완정한 자기를 설계하고 직업 선택에 들어가야 된다.일단 결정되었다면 주어진 조건에 충실하고 직임에 전력을 몰부음으로서 잠재능력을 최대한 현실화시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이것이야말로 일신의 사용가치가 목적하는 인생가치로 전화하는 힘찬 첫 걸음이다.   전력투구하면서 창의성을 키우고 발휘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이것은 자기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만족된 삶을 영위하는데서 첫째의 조건이다.어느 집단에서도 충실성과 창조성을 가진 일원이라면 늘 승진이 뒤따르고 상등석을 넘겨받는 건 천인일양(千人一样)이다.남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다는 통설은 디지털 시대에 한 치도 어김없는 세상 리치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예의가 바르고 성실한 태도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구축해야 한다.세간인 전부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인생의 행복한 변화는 흔히 거창한 계획에서가 아니고 작은 일, 작은 존경으로부터 파생된다는 현실을 간파해야 한다.눈앞의 큰일 작은 일 일체를 정갈히 끝맺어야 큰 일을 감당한다. 는 옛 현인들의 충언은 대충 들어둘 말이 아니다.   인생의 길은 길지만 자생하고 창조하며 사는 시간은 한 찰나이다.이 사이에 변신의 기회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 오고간다. 허나 그것은 잡아쥐려 로심초사해 되는 것이 아니고 흔히는 오늘을 열심히 살고 오늘의 일을 예의전심(锐意专心)으로 하는 어느 순간에 발견되고 찾아온다.매일에 최선을 다하고 매사에 정성을 부어넣는 이것은 기회 창조의 최고 비결이다.특히 사회 입문의 첫시작이 인생을 장식하는 제일의 황금기라는 성공 인사들의 경험담은 사회 생활에서 좌우명으로 기억해 랑패될 일이 없다.   자력갱생의 초입에서 세도(世道)에 어두운 햇내기들이, 산전수전을 겪은 로병사들의 실토정을 들어두면 적자생존 칼바람이 몰아치는 세상을 살아가는데서 플러스된다는 점, 숙지하면 노력의 성과가 배증된다는 점을 억지로도 알아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  
7    조선어, 미래 지향형 인재의 조건 댓글:  조회:4066  추천:3  2012-07-18
일전에 대련의 한 교수가 한국의 모 대학에서 인재 양성의 취지로 학교의 조선족 중에서 연구생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정작 적격자를 찾고 보니 전부가 조선어를 몰라 완곡히 사절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재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자기 언어를 모르는 탓에  진로가 어려워지고 있다. 2, 3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족들은 거의가 조선어를 알았고 적잖게는 일본어까지 잘 하여 졸업 즉시 일터로 내빼더니 요즘 교문을 나서면 대책없이 헤매는 애들이 다수란다. 그렇다고 영어나 한어 수준이 이전의 학생들보다 높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 인재에 대한 수요는 왕성하지만 역으로 학생이 줄어들고 조선어를 모르는 수가 꾸준히 늘어난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한 학교의 현상이지만 민족사회 내의 심각한 모순을 반영하는 축도가 아닌가 싶다. 현재 조선족학생의 급감으로 학교의 규모가 작아지고 페교의 극한 상황까지 계속 번져지고 있는데다 다수 학부모들이 으로 애들을 타민족 학교에 진학시켜 교육의 위기에 부채질하는 심각한 현실이다. 신성한 부모의 권리로 자식을 위한다는 구실로 자기 문화를 포기시키고 민족의 을 긁어버린다는 극명한 선언이다. 오늘까지 조선족의 발전은 언어를 바탕으로  한 문화가 기반이 되여있었다. 아쉽게도 그  은혜를  톡톡히 보는 기성세대(전부는 아니고)들이 살 만할  때가 되니 반전하여  제  자식들은  민족사회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목표가 따로 있을테지만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이 부류들은 일취월장하는 세월의 새 기상을 꼼꼼히 살피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오늘의 조선족은 중국을 기반으로 하고 한국과 세계 곳곳에 삶의 터전을 구축하였고 중국의 곳곳에서 개혁과 발전의 선두주자로 야심차게 사회무대에 오르고 있다. 조선족이 재도약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배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과 문화의 발전에 새로운 기반이 조성되고 있다는 청신호임이 틀림없다. 중한 문화에 익숙한 조선족 인재들이 날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세계의 한민족들은 대 중국 사업의 성패에서 조선족들이 큰 변수로 작용한다는 인식을 다져가고 있다. 한국에서 조선족의 활동 마당은 넓어만 가며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이 날로 높아가는 현실이다. 이는 우리들의 전 지구적 교류에서 갈수록 많은 기회를 지어주고있다. 수많은 민족의 지성인들은 전 지구적 한민족네트워크 건설에 혼신의 힘을 쏟고있으며 빛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차세대 젊은이들이 지역과 리념의 담벽을 허물고 통합과 협력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의를 한결같이 다지는 모습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공동한 인식의 근간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이미지를 승화시킴으로써 국제적인 경제, 문화 공동체를 건립해아 한다는 시대적 사명이다. 중국을 구심점으로 한 동북아 지역에서 국제 협력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력사적 변화에 직면하여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광활한 천지를 무대로 빛나는 역할을 일으키게 될 것이 전례없이 기대된다. 이런 불가역변화의 정세 속에서 조선족 인재에 대한 수요는 날로 증가되고 있으며 관련 국가, 단체들과 기업들은 중국과의 교류와 미해결 현안을 뛰어넘는 일차적 선택으로 조선족 사회에 눈을 돌리고 미래 지향적 조선족 인재들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유리한 고지에  서 있음을 명기해야 한다. 적어도 10년, 20년후의 앞날을 바라보며 후예들의 앞날을 그려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이라고 단언을 내린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상당한 부모님들이 자기의 금지옥엽들을 민족어와 차단시키고 있어 가뭄든 민족의 뜰에선 인재들이 바싹 말라들고 있다. 민족문화와 중국문화를 동시상장(同時上場)시키는 것만이 조선족이 가진 강력한 세계적 경쟁력이고 민족의 무한한 가치이고 나라와 세계에 공헌하며 살아가는 탄탄대로임을 설파하는 말이다. (끝) 원 제목:조선족 인재의 가물  
6    불가불언,불가부지야(不可不言,不可不知也.) 댓글:  조회:4146  추천:3  2012-04-02
2012年3月26日 저녁,CCTV 핫이슈담론(焦點訪談) 시간에 백암송(白巖松) 아나운서가 말문을 열었다.   3월 23일 에서 18세 되는 청년이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려 일사삼상(一死三傷)의 참안을 빚었다는 찌르릉한 뉴스였다. 지극한 사소지사로 인명에 칼부림을 들이대어 메체는 가 물론 만민이 우끈하고 불안의 나락에 떨어졌다.한심한 것은 턴센트 홈페지(騰訊網TENCENT)에서 사건의 앙케트 조사로 동 사건에 대해 희비 양자택일의 코너를 만들었는데 참가자 6161명 중 기쁨을 선택한 사람이 무려 4018명인데 자그만치 65%란다.다른 말빠른 친구는 (应该举国欢庆啊!鞭炮响起来!小酒喝起来!音乐开起来!)는 을 올렸는데 36100개의 중에서 하나지만 쾌재를 부르며  맞장단 OK를 친 어른들이 5172명이란다.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생사람이 생벼락을 맞았는데도 고소해 하는 세상이다,한참은 노이로제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 사망자 학교에서 추모회를 여는 동시에 위생부 고관이 범법자를 엄벌하라고 호소했다는 기사가 보이기에 리플란을 번졌더니 3만여개의 리플이 쇄도하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거개가 쓴소리고 간혹 반론도 뒤섞이어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데 내용은 대체로 병원이 환자를 볼모로 돈 짜내기에 혈안이고 죽는 사람에게도 약바가지를 가차없이 씌우는데 왜 이건 외면하고 분개한 사람만 그르다는가?는 주문이다. 상상의 극치인 병원 부패부터 징벌하라는 요청권의 행사였다.그 진의를 자세히 음미해 보니 비아냥거려도 죽음에 대한 찬사는 아니고 그것이었다.   병원에 가면 약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터무니없는 돈을 털리우고 가난하면 병원 엄두도 못내는데 의사가 약으로 뒷돈을 챙기고 외과의사는 사례금을 꿀꺽하고 돈이 없으면  짐승 취급을 받는다는 등등, 아무튼 병원의 비리에 대한 소문이 항간의 풍경이 된지 오래다.테레비,신문 지상에서 일부 병원이 검은돈 챙기는 비리를 적발한지 한두 번이 아니다.우선 사실의 진부는 차치하고 참사 앞에서 만민이 이런 악평을 내놓는다는 자체는 누구도 한 번 쯤은 반성해야 하지 않을가 싶다.장엄한 생명 찬가가 울려야 할 병원이 중인의 안목에 음지로 되었다면 조화사회는 멀어도 한참이다. 슬쩍 넘어 갈 일이 켤코 아니다.   의료 부패는 소수인에게 발생한다고 변명하며 자위(自慰)하는 부류들도 꽤 있었다.진짜 말이 말도 아니었다.론리적 시야비야를 떠나 례를 들어 보자.당신 밥공기의 밥이 10000 알이라 한다면 4999알이 모래라도 소수이다.당신의 소수란 무슨 개념의 소수인가?  그 밥에 모래알이 10개라면 0.001%인 극히 극소수인데 당신은 그 밥을 그냥 먹을 것인가?만약 당신의 육신에 돌을 삭이는 효소가 없다면 완전히 돌밥이라고 와락 쏟아버릴 것이다.이것이 인간사이다.의료 부패를 이 돌밥 원리에 대입해 보라.평가를 내려보라!   물론 동 사건은 의료 분규가 아닌 악성 형사사건인 만큼 범법자의 치죄는 물론이고 야멸찬 랭소를 퍼부운 네티즌들도 시비의 판가름을 받아야 마땅하다.그러나 귀책사유를 당사자의 잘잘못으로만 치부말고 사건 발생의 역사적,사회적 원연과 근인,현상의 내인과 외인 전부를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옮음직 하다. 제도의 미비,공정공평의 이상(異常),인문정신의 부족,사회신임의 결손,빈부격차의 확대,자률정신의 결여,법률의식의 약화,의료분야의 부패 등 다수 요소들이 복합한 결과일 것이다.아까운 생명의 타계,노축암(怒蹴巖) (분한김에 바위를 찬다.) 만용을 부린 유치한 범죄자,몽니부리는 네티즌들의 가시 돋친 말 속에서 우리는 차분히 성찰해야 할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가! 이런 철학으로 사건의 종횡을 조감한다면 가해자,피해자와 전민은 나란이 피해자 반렬에 서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병보기가 비싸고 어렵다는 난제를 푼다고 외친지도 오래다.의료위생 분야의 주요 모순도 여기에 있다.물론 국가의 대량적인 투입과 정부 노력도 만만치 않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병원을 법제화된 민주 감독의 시야에 놓인, 련민과 사랑이 넘치는 천하백성의 성역으로 탈바꿈하고 자격 미달자는 즉시 수시로 몰아내는 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다. 좋은 제도가 있으면 악인도 호인이 될 수 있고 제도가 부실하면 호인도 악인으로 쉽게 변질한다. 생명의 수호천사 앞에서 암만 우직한 울뚝배기도 공격의 예봉만은 움추릴 것이다. 곤봉을 찬 엄엄한 경비원을 잔뜩 늘리고 번뜩이는 감시카메라를 대고 장치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명기해야 한다.참신한 의료체제의 확립, 오직 이것만이 위생사업 발전의 탄탄대로이다.   어느땐가 해맑은 새 제도가 건립된다면 병원은 전민의 성당이 되고 병원직이 숭봉하는 성직이 되고  의사는 하느님의 사자로 추대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인민의 갈망이고 력사의 필연이다.세상을 들썽한 이번 사건의 처리가 간단히 범죄자의 치죄로 끝내는 룡두사미식 마무리가 되지 말고 인민병원의 지붕에서 찬란한 인간애 기발이 휘날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끝)
5    조선족의 적응부전(适应不全) 댓글:  조회:3872  추천:2  2011-10-28
일전, 연길에 갔다가 조선족들이 타민족 학교에 많이 간다는 사실이 풍문보다 심한 참담한 현실을 보며 격세지감 때문에 얼마간 허우적거렸다. 원래 출산률이 낮아 교육이 심한 진통을 겪는데다 학생원이 다량 류실되여 후대 양성이 난행고행(难行苦行)이란다. 자민족 문화의 의식적 리탈로 봐야 하는 희한한 분화 현상을 두고 원인 규명으로 잠간이나마 머리를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개방의 급물살을 타고 조선족 사회에는 천지지변이 일어났으며 오늘 역시 변화의 진행형이다. 경제의 장성, 사회의 선변(善变), 부의 축적은 물론 사회 전체도 괄목하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허나 인구의 격감, 공동체의 요동, 정체성의 혼란 등등 부수적 부작용도 동반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출생률의 비정상 하강으로 학생원이 급감하고 학교수도 일소(日少)의 일로를 걷고있다는것이다. 전통적 교육체제의 동탕(动荡)으로 그 마당이 그야말로 만목황량이라는 문자 그대로다. 이는 신구 체제의 교체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겠지만 지켜보는 시선들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공직자들과 교원, 지성인들은 여전히 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하는 가시적 성과를 냄으로써 민족의 영광방(荣光榜)에 이채를 띠우고있다. 호요방(胡耀邦) 전주석의 휘호(揮毫)대로 민족인재를 힘써 배양하는 쾌거를 일궈내는 그 모습이 실로 가상하다. 맹랑하게도 국가의 민족인재 수요와 자기의 발전우세를 내치고 시대와 역행하는 민족어포기의 선택을 민족민 상당수가 감행하니 미상불 유감이 남는다. 중한 두 민족 문화를 몸에 지닌 조선족에 있어서 중국과 조선반도간의 상호협력, 장길도개방전략의 실시.7000만 한민족의 글로벌 네트웤 이것은 누구도 대체 못하는 다락같은 플랫폼이다. 게다가 정부의 방침으로 쌍어(双语)교육의 전략을 실시하는 오늘인데도 고유어를 내버리니 골수에 박힌 겨례문화를 차단하는 우행일뿐 미행(美行)일수 없다. 빈곤탈출에 로심하던 때의 고착관념으로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고 눈앞의 리익에 집착하면서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침착성을 잃는 것이 조선족 일부의 슬픈 현실이다. 발전하는 중국이기에 민족어공부에 정진해야 마땅한데 이런 가치혼돈이 자식의 민족문화원의 출입을 봉쇄하는 성급한 행동을 유발하는 기폭제인지 싶다. 한 개 문화 값의 시세는 간단한 가격법칙으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그냥 외면하는 무분별한 처사가 백출(百出)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는 반성이 누구나 필요되는 요즘이다. 우주관광도 꿈꾸는 시대인데 문화가치의 보존이 얼마마한 가치확장을 가져오는가는 선견지명도 갖춰야 한다. 쌍어를 겸비하는 항선으로 방향타를 돌려야 마땅하다는 동어반복이다. 불연즉(不然卽) 민족사회에서 도태된다. 민족어의 류의적 포기는 민족문화와 민족성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현상을 《물경천택, 적자생존(物竟天择,适者生存)》이란 다위니즘의 생존경쟁원리에 대입해 잣대질에 저울질 해도 도태라는 내적인 리유는 발견하지 못한다. 선배들이 남긴 물질문화적 기초, 나라의 방침정책, 국가발전의 수요, 민족집거 인문환경, 이 활무대라면 넉넉한 발전의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아니겠는가! 소견이 짧다는 아쉬움이 있다. 실로 민족어가 무용이라면 잠꼬대이고 두개 언어의 장악이 어렵다면 군소리다. 해서 오늘 로출되는 민족어 리탈은 이슬로 사라진다는 도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외부환경에 대한 적응이상(適應異常)으로 유발된 적응부전(適應不全)이란 《진단서》를 떼고 싶다. 우리는 조선족교육력사의 이 한고비를 슬기롭게 넘기 위해 근대의 어렵던 나날에 첩첩한 형극(荊棘)을 헤쳐오던 력사정신을 되살려 꼭 해야 한다는 사명감, 꼭 할수 있다는 신념, 꼭 해나간다는 강인한 의지로 후대교육의 전당을 《민족명품생산》의 궤도에 끌어넣어야 한다. 위하여서는 우리의 기성세대(교육사업자,교원)와 갑남을녀들이 민족적리념을 업그레이드(승화)하는 사업이 최우선 과제로 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의 리념 1.발전좌표 중국 발전의 선두에 선 문명한 집단으로, 세계의 모범적 지구인으로, 중국과 이국 본민족 간의 교류에서의 걸출한 사자(使者)로 되여야 한다. 2.생존철학 시대를 따르면서 창조성을 잃지 않고 조류에 따르면서 와중에 말리지 않고 리성적이면서 유연성을 잃지 않는 기지를 갖춰야 한다. 3.가치관 우리 문화를 중국 실제에 맞게 개화 발전시키며 중화민족의 우수한 민족구성원으로, 범민족중의 뛰여난 군체로서 사회무대의 전면(前面)에 서는것이다. 4.이미지 창조성과 홍익인간(弘益人间) 정신이 넘치는 중한 두 민족문화에 정통한 례의가 밝고 포용력이 큰 민족이여야 한다. 슬로건은 거창해도 민족교육은 여전히 혹한의 시련기에 있다. 허나 주천(周天)에 따라 소만왕림(扫万枉临)하는 화창한 봄날이 오면 거칠던 터전에서 오곡백과가 다시 무르익을 것임이 틀림없다.
4    귀성후 후미(厚味)와 후미(后味) 댓글:  조회:3979  추천:1  2011-10-14
일전, 어느 수상식 참가차 고향인 연길로 갔다. 시간이 빡빡하여 호텔에 들자 바로 옷주름을 펴려고 세탁소를 찾았다. 주인은 40대로 보이는 한족 녀성이였는데 약 20분 들여 반듯하게 다려내는 로련한 직업인이였다. 품삯을 물었더니 5원이란다. 너무 헐값이라 내가 되려 무안하여 10원을 반억지로 건네 주었다. 아주머니는 감사말을 되풀며 묻지 않는 말로 연변경제는 조선족들의 해외진출과 대외적 활약이 없다면 뒤죽박죽일 것이란다. 자기 고객도 대부분 조선족들인데 그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매출도 날로 높아가고 있다며 반색을 내보인다. 사업전망도 밝아 연변에서의 앉은 장사가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고 감격을 토한다. 고향에 내리자 타민족간의 끈끈한 금란지계(金蘭之契) 뉴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가식없는 진솔한 페부지언으로 받아들이며 심기도 꽤 훈훈하였다. 모범자치주라는 영예는 실로 여러 민족의 공동번영을 바탕으로 한 튼튼한 국기(國基)우에서 실덕으로 따온 계관이리라! 이 아줌마의 소박한 몇마디가 바로 연변의 민족경제발전과 민족단결의 축도였음을 실감하였고 민족간의 후의(厚誼)는 사회발전과 더불어 시민사회에 더 깊이 뿌리박을것이라는 심증을 굳히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후 주덕해를 위시한 우리의 선배들과 수천수만의 지성인들이 당의 령도와 민족구역자치법과 민족정책에 힘입어 끈질긴 노력으로 연변을 건설하고 우리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왔다. 바로 이 기반이 있었기에 조선족은 시류에 초승(超乘)하는 쾌거로 탄탄한 안거락업을 이룩할수 있었다. 연변의 건설을 위해 로심초사하던 창도자들에게 숙연히 머리가 내려진다. 불필재언(不必再言)으로 이 민족의 터전과 문화적 보루가 있었기에 조선족은 개혁개방의 선두에서 자기의 발전상을 세상에 과시하고 민족단결의 모범으로 자리매김을 한것이다. 그런데, 저녁의 연회석 간담에서 한가지 얘기가 귀구멍을 비집고 들어 귀청을 쌀쌀하게 만들었다. 인구의 급감으로 조선족교육이 고전을 치르는데다 조선족애들이 소학교부터(지어 유치원부터) 대량 한족학교에 진학하여 민족교육은 설상가상의 고생바가지를 쓰고있다는 실화다. 주요 리유라면 사는 땅이 중국이니 조선어는 별로여서 한어만 잘하면 족하다는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환경의 미비로 민족교육의 기회를 잃는다면 부득이한 상황이겠으나 빠짐없는 인문적 여건에서 조선족교육을 포기한다면 문자그대로 민족의 본바탕을 버리는것이다.중국의 신속한 발전과 급속한 성장, 조선반도의 력사적 변화, 전지구적 세계화의 물결, 7000만 한민족의 글로벌 네트웍, 이것은 조선족에게 차례진 무한한 자원이다. 언어를 위시한 조선족 문화와 생리별한대도 권리행위일 것은 당연하지만 가 가능한 멋진 와 결별하는 우행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싶다. 인구의 급감으로 미구에 조선족 인재의 수요가 급증한다는 판단도 무성한데 언어포기를 감행하는것이다. 조선족은 자신의 천부적인 문화로도 넉넉히 남의 존중을 받으며 잘 살수 있는 충족조건이 있는데 말이다. 적어도 발빠르게 발전하는 우리 나라의 시대적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조선어를 더욱 잘 배워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면 틀림이 없다. 조선족은 새로운 안목에서 자신의 높낮이를 가늠해야고 력사의 흐름을 따른다는 여사구진(與世俱進)의 지혜로 자기 발전의 좌표를 다잡아야 한다.중국조선족문화를 단순한 민족의 생존과 발전이란 협애한 테두리에서 벗어나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중화민족의 수림속에서 우수한 민족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고양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어진다. 부모들이 후대더러 자기 민족문화를 내치게 하는 분별없는 행위에 리해를 보낼수 없다. 친구들과 이 말거리를 집어내였더니 몇몇은 조선족은 원래 이런 역발상에 유명하다고 두덜렁거리며 한심하다는 탄사(嘆辭)를 련거퍼 내쏜다. 정적(靜的)만 보고 동적(動的)은 못보고 산마루만 보고 산너머는 못보는, 근시안적인 왜냄비적 성격이 확실히 우리 민족의 렬근성이 아닐가하는 생각이 눌러눌러도 자꾸 솟아 올랐다. 적어도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塞翁之馬)란 필연성을 념두에 둬야하고 자식의 미래에 여러갈래 선택의 립지를 마련해주는것도 부모로서의 사명이 아닐가하는 안타까움도 돋아난다. 하물며 우리 민족의 문화는 그 개화성과 대중성으로 세인들에게서 일진일신(一進一新)으로 평가절상을 받는 오늘이다. 애자지정에서 우러나는 무아애겠지만 쉽사리도 천부적인 문화토양과 분리시키는 거친 결단이 애들의 돌이킬수 없는 후회로 남는다면 이 은 어찌 할것인가! 일각에선 조선족에 대한 기대가 부풀고 맞각에선 민족리탈에 신경을 도사리니 단맛과 쓴맛의 운니지차(雲泥之差)가 원인인가, 고향행에서 받은 호인상과 악인상이 머리서 맴돌며 떠오르는 씁쓸한 생각을 떨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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