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http://www.zoglo.net/blog/jinzhe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역사문화이야기

전체 [ 63 ]

43    전사(戰士)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5145  추천:1  2013-03-16
전사(戰士)란 말의 유래   ‘士’를 중국과 한국은 선비 ‘사’라 하고 일본은 武士를 뜻하는 사무라이라 부른다. 왜 이렇듯 극명하게 다를까? 양쪽에 다 일리가 있다. 춘추시대에 사람은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로 구분하는데, 이를 계급이라 한다. 귀족계급은 다시 천자, 제후, 대부, 사(士)로 나뉘는데, 이를 등급이라 한다. 네 가지 등급가운데 앞에 세 가지 귀족은 모두 영지를 지니고 있어 ‘영주’라 부른다. 그러나 ‘사’는 영지가 없이 단지 제사권, 참정권, 참전권 등 세 가지 권리만 가지고 있었다. 춘추시대 전쟁은 제후가 통수권자이고 대부는 장군이고 평민은 참전권이 없어 ‘사’가 싸움의 주력군이었다. ‘戰士’와 ‘兵士’란 말이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귀족인 ‘사’가 병사 노릇하는 전쟁은 당연히 전국시기부터 있었던 전쟁에 비해 점잖고 재미있었다. 다시 말해서 춘추시대 전쟁은 양반 놀이었다면 전국시대 이후 전쟁은 상놈의 놀이었다. 염·황 시대 전쟁은 아무런 규칙이 없이 서로 마구 때리고 쫓고 도망가는 난전(亂戰)이었던데 비해 춘추시대 전쟁을 살펴보면 규칙이 엄격했는데 참으로 귀엽고 재미있었다. 첫째 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보통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집합하여 싸우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끝냈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초과하지 않으며 해가 지면 그만두었다. 둘째 지정된 장소에서만 싸웠다. 두 나라 국경선 변강(封疆이라고도 함)에서 싸웠다. 셋째 예의를 엄격하게 지켰다. 쌍방의 군대는 변강에 도착하면 일단 합숙에 들어간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포진을 시작한다. 포진이 끝나면 각기 장군이나 사절을 파견해 대화를 시작한다. 넷째 유희규칙을 중시했다. 우선 적진에서 온 사자를 절대 죽이는 법이 없었다. 다음 상대가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그다음 거듭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더 가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머리가 흰 사람은 포로로 삼지 않는다. 다섯 번째 오십 보 후퇴하는 자를 쫓지 않는다. 오십 보만 후퇴하면 되는데 굳이 백 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맹자의 '오십 보 백 보'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적군이 도망치는 전차가 구렁텅이에 빠지면 다가가서 구원해주었다는 것이다. 현대축구경기에서 상대팀 선수가 쓰러지면 다가가서 일으키는 것과 흡사했다. 어떻게 그토록 재미나는 전쟁이 가능했을까? 전쟁목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전쟁목적은 ‘겸병(兼竝:상대국을 멸망시켜 삼킨다는 뜻)’이 아니라 ‘쟁패(爭覇)’였기 때문이다. ‘정패’는 천자의 이름을 빌어 천하를 정치적으로 제패하는 것이지 영토 뺏기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춘추오패’는 기타 제후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패주가 되었을 뿐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다. ‘겸병’전쟁은 전국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겸병’의 수요에 따라 손무, 오기, 손빈 등 군사가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류의 전쟁은 냉정하고 야비하고 야만스러웠고 참혹했다. 춘추시기 일선에서 싸움하는 자가 ‘사’였다면 전국시기부터 평민이 싸움의 주력이었다. 그렇지만 평민출신군인을 ‘전민(戰民)’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춘추시기 관습에 의해 그냥 ‘전사’라고 불렀고 현대사회도 여전히 이 호칭이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 易中天의 시리즈강의 제2강 '병가의 사고' 참조.
42    박근혜 대통령당선은 천지개벽 댓글:  조회:12285  추천:17  2012-12-24
박근혜 대통령당선은 천지개벽   지난 12월 19일 한국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보수진영의 재집권이란 의미보다 여성대통령이 탄생되었다는 것이 더 큰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과 같은 전통유교국가에서 여성대통령의 탄생은 4년 전 미국에서 첫 흑인대통령이 나왔던 만큼이나 천지개벽의 의미가 크다. 한반도역사를 돌아보면 2천 년 전 삼국건립을 계기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과도되었다. 하지만 모계사회의 잔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천년동안 드러나고 있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자면 남자의 결혼을 ‘장가를 간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남자가 결혼하면 먼저 여자의 집에 가서 살면서 아이를 낳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다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남자의 집에 돌아와 정착하여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남자가 ‘丈家’에 가는 혼인관습이 조선조 초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개국은 유교이념을 통치무기로 삼았고 518년 동안 유교는 모든 종교를 밀어내고 우리선조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유교는 여성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남자 중심사회를 구축하는 이른바 남존여비사회의 핵심종교이다. 이런 풍토에서 여왕의 탄생은 아라비안나이트(天方夜談)와 같은 이야기였다. 유교국가관은 다른 문화권의 국가관에 비해 천양지차이다. 다른 문화권에는 ‘국’이지 ‘국가’가 아니다. 중국도 주공시대까지는 ‘국’이지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공자가 주공의 혼인 제도를 높은 단계로 승화시키고 ‘국’은 ‘가’를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국가관’을 설파했다. 즉 유고의 핵심이념인 ‘仁’은 먼저 ‘가’ 내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다음 사회에 전파되고 종국적으로 ‘국’에 널리 퍼지면 천하는 태평성세가 된다는 것이다. 또 공자의 국가관에 있어서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들 수 있다. 소인이 군자가 되는 길은 공부인데 공부하는 목적은 우선 몸을 다스리는 것(수양을 쌓는 것)이며, 몸을 잘 다스리는 것은 가정을 고르게(가족의 화목)하는 것이며, 가정이 고르게 되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나라가 잘 다스려져야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가’의 주체는 남자이고 여자는 그저 남자들의 의도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피동적인 존재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주체도 남자이지 여자는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교적인 국가관 조선조사회에서 어떻게 여왕이 탄생될 수 있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유교의 본산지는 중국이지만 조선조 518년을 통해 한반도는 중국보다 훨씬 더 유교적인 이념과 사상이 강했다. 필자는 유교가 동양3국에 미친 영향의 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중국유교는 ‘근육유교’, 일본유교는 ‘피부유교’, 조선유교는 ‘뼛속유교’이다. 동양3국은 과거도 그러했거니와 현재도 유교이념과 사상의 영향이 지대하다. 현재 한국은 불교신자가 26%, 기독교신자가 19%, 유교신자는 2%밖에 되지 않지만 어떤 종교 신자를 막론하고 한국인의 사회생활과 가족생활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유교이념과 유교사상이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피부유교’인 일본도 ‘근육유교’인 중국도 아직 정치권은 남자의 세상이지 결코 여성의 세상이 아니다. 중국은 공처가가 많으며 한반도에 비해 남존여비가 심하지 않다. 특히 모택동이 ‘여성은 하늘의 절반’이라고 표현한 이후, 더욱이 문화혁명시기 여자홍위병의 탄생에 의해 중국여성은 남성화가 강해 중국은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고(男不男) 여자는 여자답지 못한(女不女)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회로 되어버렸다. 세상에서 중국이 남녀평등이 잘 실천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가주석이나 총리자리에 여성이 오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거니와 정치국상무위원 7명 가운데 여성이 단 한명도 없는 실정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유교적인 이념과 사상이 훨씬 짙은 한국에서 여성대통령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성대통령이 현실로 되었다. 박근혜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었던 어쨌든 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는 했지만 앞으로 남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시각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갈 지가 자못 궁금하다. 한편 한반도역사에서 부계사회에 진입한 이래 신라시기 선덕여왕(632~647 집정, 제27대), 진덕여왕(647~654 집정, 제28대), 진성여왕(887~897 집정, 제51대)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은 진성여왕이후 1015년 만에 탄생한 ‘여왕’으로서 하늘땅이 뒤바뀔 정도의 천지개벽이다.    
41    19. 素女著書(황제와 소녀연재) 댓글:  조회:6157  추천:0  2012-07-02
19. 素女著書: 소녀저서 소녀, 을 짓다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 손자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전욱(典頊)이다. 전욱은 아들 궁선(窮蟬)을 낳았다. 전욱이 세상을 떠나자 현효의 손자인 고신(高辛)이 제위에 올랐다. 그는 황제의 증손자다. 고신의 아버지는 교극(蛟極)이며 교극의 아버지가 현효, 현효의 아버지가 헌원이다. 현효와 교극은 모두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며 고신이 제위에 올랐다. 고신은 전욱의 족자(簇子)이다. 고신이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방훈(放勳)을 낳았다. 또 추자씨(娵訾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지(摯)를 낳았다. 고신이 세상을 떠나자 지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동생인 방훈이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요(堯)다. 요는 인자함이 하늘처럼 넓었고 지혜로움이 신과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구름처럼 미묘하고 존귀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희(羲)와 화(和)에게 명하여 하늘의 뜻을 공손하게 따라 일월성신의 운행 궤적을 관찰해 법칙으로 삼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간을 신중하게 이끌었다. 우순(虞舜)은 중화(重華)라고 했다. 중화의 아버지는 고수(瞽叟), 고수의 아버지는 교우(橋牛), 교우의 아버지는 구망(句望)이며 구망의 아버지는 경강(敬康)이다. 경강의 아버지는 궁선이며 궁선의 아버지는 전욱,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이다. 이렇게 순에 이르기까지 7대였다. 일설에 의하면 헌원의 25명의 자녀 중 어떤 아들은 화하로 가고 어떤 아들은 변방으로 갔다. 창의의 어떤 아들이 북쪽 땅에 봉해져 대선비산(大鮮卑山)에 나라를 세웠다. 그 후손이 왕이 되어 유도(幽都)의 북쪽과 드넓은 사막 지역을 통일했다. 헌원은 토덕의 왕인데 북쪽의 습속에 따르면 토는 ‘탁(拓)’, 후는 ‘발(拔)’이라 부르니 ‘탁발’이란 바로 황제의 덕을 성씨로 삼은 것이다. 그 후손인 시균(始均)이 요임금에게 벼슬을 하사받고 발을 약수의 북쪽으로 쫓아냈다. 백성들이 그의 부지런함을 신뢰했고 순임금은 그를 어여삐 여겨 전조(田租)로 임명했다. 황제가 남긴 족적이 하도 굉장해 하(夏), 상(商)나라를 거쳐 주나라에 널리 전해졌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가 헌원에 대해 궁금증이 많아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은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대답하였다. 재아가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제가 영이에게 듣기로 황제가 삼백 년을 살았다 하던데 황제는 사람인가요, 사람이 아닌가요? 어떻게 삼백 년이나 살 수 있나요?” “우, 탕, 문, 무, 성왕, 주공의 사적(史迹)은 이미 충분히 보았다. 황제의 시대는 참으로 오래되었는데 너는 왜 이런 걸 묻는 것이냐? 옛사람들이라 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주기가 힘든 것이란다.” 재아가 재차 물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은미한 이야기들의 사적이 논쟁적이며 아득하고 불명확한 것이라 해서 경시해버리는데 그것은 군자의 태도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황제는 소전씨의 아들인데 헌원이라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아기 때부터 벌써 말을 할 줄 알았고 어린이가 되었을 즈음에는 세상 이치를 대부분 알았고 민첩했다. 자라면서 성품이 진득하니 아주 부지런했고 어른이 되자 총명해졌다. 음양오행에 밝았고 약(龠), 합(合), 승(升), 두(斗), 곡(斛)의 오량을 세워 백성을 위로하고 사방을 관측했다. 곰, 큰곰, 비휴, 표범, 호랑이 등을 길들여 판천의 들판에서 적제와 전쟁을 벌였는데 세 번 싸우고 나서야 뜻을 얻었다. 황제는 수를 놓은 옷을 입었고 큰 허리띠를 둘렀으며 흰 실과 검은 실로 도끼 모양의 수를 놓은 하의를 입었다. 용을 타고 구름 뒤로 올라가 천지의 질서와 음양의 연유, 삶과 죽음의 논설과 존망의 어려움 등을 따랐다. 때가 되면 온갖 곡식과 초목을 심어 조수 곤충까지 그 덕으로 교화했고 일월성신을 변별하고 토석금옥을 모두 다스리느라 수고했으며 백성들에게 시절에 따라 물과 불과 재물을 아껴 쓸 것을 가르쳤다. 그가 살아있을 때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백 년이나 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그의 신령함을 백 년이나 경외했고 또 그의 가르침을 백 년이나 따랐기 때문에 삼백 년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노라.” 평생의 동반자를 잃은 아소는 황제가 죽자 따라 저승길에 오르려 했으나 그가 승천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살아갔다. 그러나 백세가 넘는 할머니가 산다는 것은 생명을 겨우 연명해가는 것이기에 무의미했다. 아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후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기기로 했다. 헌원과 옥녀, 헌원과 아소의 정사(情事)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세련되고 가장 풍부한 교합이었다. 그리하여 아소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 집필에 들어갔다. 그녀는 책의 머리말을 이렇게 장식했다. 행복한 성생활을 위해 세상 모든 연인과 부부에게 드리는 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은 너무 많지만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의 삶은 모래밭을 걷는 고행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하게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다만 인간은 고급 동물이기 때문에 교합에 임할 때 본능에 충실함과 아울러 머리를 써야 합니다. 동물은 발정기라는 것이 있어 교합이 계절적이고 시간이 제한적입니다. 이에 비해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아무 때나 교합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권이어서 복을 받은 것이지만 한편 인간을 해치기 쉬운 요소이기도 합니다. 과거 한때 사내들이 여성의 생리기간에 교합을 하면 아기를 쉽게 밸 수 있다고 여겨 발광적으로 성교를 했습니다. 매우 어리석인 짓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성은 생리 전과 후의 1주 동안 회임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러나 생리기간엔 절대 회임이 될 수 없습니다. 여성이 생리가 오면 자궁막이 부드러워져 심하게 건드리면 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교합을 회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리기간이라 해서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위생을 잘 지키고 격렬하지 않게 방사를 나누면 남녀 모두 즐겁습니다.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난륜과 군혼의 형태로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 시기엔 지정된 남편이나 고정된 아내가 없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많아 교합의 도를 몰라도 교합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이런 세월이 막을 내리고 혼인제도가 인류사회에 등장함에 따라 사내든 여자든 교합 상대를 고르는 폭이 좁아졌습니다. 가령 권세 있고 재물이 풍부한 사내는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릴 수 있으나 절대다수의 사내는 한 여자를 상대로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혼인은 당사자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므로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아기자기 화목하게 살아야 다른 가족들도 모두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요?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부부란 흔히 난생 모를 남과 여가 만나 삶을 꾸려가기 때문에 다툼은 불가피합니다. 가령 당신이 부부싸움을 했다면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성격이 너그러운 쪽에서 먼저 화해를 요청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격이 좁은 상대가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행복이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내가 말이 없이 실제 행동으로 화해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실제 행동이 바로 교합입니다. 교합은 남녀가 알몸으로 엉키기 때문에 마음이 스르르 녹습니다. 게다가 여자는 교합을 통해 쾌감과 짜릿함을 맛보기에 화해가 쉽게 이뤄집니다. 부부싸움이 있은 후 가령 사내가 여자를 만지면 여자는 처음엔 뿌리칩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에서 오는 반사 동작입니다. 때문에 한두 번 뿌리치더라도 집요하게 만지고 흥분시키면 거부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양물을 빼고 박는 동작을 거듭하면 여자는 짜릿함을 만끽하느라 맺혔던 옹이 풀어지고 나빴던 일이 구중천으로 날아갑니다. 이렇게 화해는 말이 없이 교합하는 실제 행동에 의해 이뤄집니다. 아무리 법으로 한 사내 한 여자가 혼인하여 살아가게끔 규정한다 해도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흔히 다른 사내 다른 여자의 유혹을 못 이겨 외도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원망하기에 앞서 내가 무엇이 부족한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얼굴은 타고난 것이기에 개변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평생 얼굴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이 잘 생긴 것은 혼인 초에는 매력이 있으나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후천적인 요소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간은 남녀를 불문하고 배우지 않고도 성인이 되면 교합을 합니다. 그것은 타고난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합이란 그저 애무하고 사내의 양물을 여자의 음도에 박아 넣고 비비고 쑤시면 다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고정적인 한두 가지 동작으로 교합을 하면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사내든 여자든 큰 불행입니다. 사내는 아내가 외간남자를 탐내지 않게 하려면 자주 몸을 애무해주고 교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교가 없이 따분하게 한두 가지 체위만을 반복하면 아내는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음양교합의 도를 익혀야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사내가 하는 대로 가랑이를 벌리고 가만히 대주고 있으면 교합인 줄로 착각합니다. 실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도 교합의 도를 잘 수련하여 사내를 즐겁게 해주어야 모두가 행복합니다. 행복한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은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모두의 책임임을 통감하고 그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내와 여자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마칩니다. 모든 사람마다 음양교합의 도를 잘 터득하여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기를 바랍니다.
40    18. 晩年黃帝(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5995  추천:0  2012-06-13
晩年黃帝: 만년황제 헌원, 천하를 통일하다 한 세기를 살아온 신농씨는 늙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코가 냄새를 잃어 맛을 모르고 눈이 침침해 산나물의 생김새와 색을 분간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산마늘을 캐 먹는다는 것이 그만 비슷하게 생긴 박새를 먹어버렸다. 산마늘은 마늘 냄새가 강하게 나며 하나의 비늘줄기에 두세 장의 잎이 달린다. 박새는 여러 장의 잎이 촘촘히 어긋나 있으며 잎맥이 많고 주름이 뚜렷하다. 그는 박새를 먹고 나서 위에 머물던 음식물은 물론이고 소장과 대장에 썩어 있던 부식물마저 다 토해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예전에도 산나물이나 약초로 사용할 수 있는 풀을 먹어본다는 것이 그만 독풀을 먹은 적이 많았으나 그땐 젊은 시절이라 금세 몸이 회복되었다. 허나 지금은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신진대사 기능이 부실해 몸이 전혀 회복되지를 않았다. 그는 박새를 먹은 후 위로 토하고 아래로 쏟아내는 고통에 시달리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두머리가 죽자 그의 무리는 곧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때를 호시탐탐 노리던 치우가 신농씨의 무리를 먹어치우려 들었다. 헌원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형의 부족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반백을 넘긴 헌원이 비록 힘은 예전 같지 않지만 성욕은 여전히 왕성했다. 전쟁을 앞둔 전날 아소를 찾아가 한바탕 교합을 즐기면 그 쾌락이 싸움에 보탬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영리한 아소는 교합을 거절했다. 두 사람 사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은 내가 싫어진 것이오?” “아닙니다. 천만에 말씀인 걸요. 소녀가 감히 싫어할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사내가 큰일을 하기 전날 계집을 접하면 재수가 달아나 일을 그르칠 수 있어 거절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미 몸이 후끈 달아오른 헌원이 아소의 설득을 귓등으로 흘러버리고 달려들었다. 아소는 이게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헌원이 거세게 밀어붙여 어쩔 수 없이 음문을 열고 말았다. “기왕에 하는 것이면 이 소녀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대하듯 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내 사랑하는 그대를 어찌 하찮은 돌멩이 다루듯 한단 말이오.” “전쟁을 앞두고 상대를 하찮은 물건으로 대하듯 하라는 뜻이옵니다.” 그 간언에 따라 헌원은 이제까지의 체위와 달리 아주 거칠게 아소를 다루었다. 마치 천한 계집을 상대하는 것처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었다. 그럼에도 아소는 뜨거운 쾌감을 느끼었고 이는 헌원도 마찬가지였다. 헌원은 이 통쾌함의 기를 이어받아 내일의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헌원과 치우가 기주(冀州)의 판천(阪泉)에서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치우는 본래 용맹하고 날렵한데다 철갑모를 쓰고 나타나 헌원이 그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전쟁의 결과는 헌원의 예측과 달리 참담한 패배였다. 반년 뒤에 두 무리는 탁록(卓鹿)에서 다시 싸움이 붙었다. 그동안 헌원이 밤잠을 자지 않고 치우를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또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철갑모를 부술 방법만 찾는다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헌원은 아소를 찾아가 답을 구했다. “간단하옵니다. 자석 전차를 만드십시오. 그러면 치우의 철갑모가 자석에 끌려들어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석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오?” “음극과 양극의 원리로 철을 흡인하는 물건입니다.” “듣고 보니 암수의 원리이구만.” 헌원이 기분 좋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에서 승자가 되려면 군사적으로 강해야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장을 잘해야 합니다.” “정신적 무장은 투지가 아니요?” “물론 투지가 중요하죠. 그 외에도 정신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요?” “큰일을 앞둔 전날, 아니 3일 전부터 절대 계집을 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1차 전투에서 패한 원인이 아무래도 전날 아소와 방사를 나눈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밤을 새워 아소와 전투의 승리 기술에 대해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교접을 하지 않았다. 기주의 들판에서 한원과 치우가 또 다시 한판 전쟁에 들어갔다. 푸른 옷을 입은 헌원의 딸 발(魃)은 풍백과 우사가 불러일으킨 비바람을 멈추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응룡(應龍)은 물을 모아 치우를 공격했다. 마지막으로 자석전차를 몰아 치우를 생포했다. 두 부족의 우두머리는 모두 서쪽에서 온 이주민으로서 맹수처럼 용맹하고 패기가 넘쳤다. 그러므로 승패의 관건은 머리싸움이었다. 결국 헌원이 치우보다 머리가 더 총명하고, 영리한 아소 덕분에 최후 승자가 되었다. 헌원이 중원에서 가장 강한 군사를 자랑하는 치우를 굴복시키고 그의 무리는 물론 형인 신농씨의 부족까지 순조롭게 복속시켰다. 그날 이후 크고 작은 부족 무리들이 신하를 자칭하고 귀순해왔다. 이렇듯 헌원이 지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중원을 제패하고 패자가 되었다. 중원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면 도읍을 옮겨야 했다. 헌원이 처음 중원에 발을 붙일 때 도읍은 황릉이었다. 황릉은 지리적으로 편벽해 통일된 나라의 도읍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헌원은 이곳저곳을 둘러본 끝에 치우를 물리친 탁록을 국도(國都)로 정하기로 했다. 탁록은 중원의 중심지이다. 중원을 동서남북으로 나누고 방위론에 의해 동은 적색, 남은 청색, 서는 백색, 북은 흑색이고 가운데 중앙은 토(土)이며 황색이다. 헌원은 중원의 패자 ‘제(帝)’가 되었고 방위론에 의해 토덕의 상서로움이 있어 ‘황제(黃帝)’로 칭해졌다. 황제는 탁록에 도읍하고 관직의 명칭에는 모두 구름 운자를 썼다. 좌우 정승을 두어 만국을 감독하게 했고 만국이 평화로워지자 귀신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 일이 많아졌다. 또한 통일국가 황제가 된 헌원은 예전보다 할 일이 엄청 많아졌다. 수인씨가 발명한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먹는 화식(火食)을 널리 보급시켰다. 신하인 사황(史皇)이 그림을, 백여(伯余)가 의상을, 옹부(雍父)가 절구를, 공고(共敲)와 화적(化狄)이 배를, 휘(揮)가 화살을, 사관인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이 글씨를 만드는 것을 담당케 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옷을 발명하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는 옷이 사람의 몸에 딱 맞아야 안온하고 포근하며 행동이 자유롭다고 믿었다. 백여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딱 맞는 옷을 입으면 남녀의 생식기가 숨을 쉬지 못해 생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후대 번식이 가장 주요한 과제인데 생식력이 떨어지면 큰일이다. 그리하여 옷의 설계를 통풍이 잘 되게끔 헐렁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비록 천하지존의 신분이지만 신하들의 옳은 의견이라면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현명한 왕이었다. 따라서 신하들은 생각을 주저 없이 황제에게 진언했다. 백여는 왜 황제가 발명한 옷이 생식력에 지장이 있는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올렸다. 태초에 박씨 부부가 실 한 가닥 걸치지 않고 암수를 드러내 바람과 교감하여 천지를 창조하였다. 아득히 먼 옛날 인류 조상들이 여자의 임신이 사내의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바람을 맞으면 애를 밸 수 있다고 인식했다. 여인국에는 오로지 여자만 살지만 그녀들이 아기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여자들이 홀딱 벗은 채 남풍(봄바람)을 맞으면 잉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식은 필시 바람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옷도 남녀의 생식기가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 널찍하게 만들어야 했다. 황제는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을 만들어 음악을 바로잡고 오관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위계를 바로잡았다. 그가 이렇게 사람과 하늘의 관계를 조화롭게 한 덕분에 천지간의 아름다움이 생겨났다. 또 치우와 대성, 사룡, 축융, 대붕, 후토 등 여섯 신하를 얻어 천하를 다스리니 성스러운 밝음이 지극하게 되었다. 천도에 밝은 치우는 황제에게 복속한 후 시간을 관리했으며 군신 상하의 도리와 부자·형제간의 예의, 부부가 짝짓는 도리를 널리 보급시키고 안으로는 형벌을 엄히 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일으켜 강토를 넓혔다. 남녀, 자웅, 상하, 귀천을 구분하여 질서 있는 세상을 만들었고 관리들은 아첨하지 않고 청렴하며 공정했다. 모든 백성은 사사로운 욕심 없이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았고 도둑이 없었으며 늘 풍년이 들고 맹수들조차 사납게 굴지 않았다. 나아가 주변의 부족들까지 모두 공물을 바쳐오는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세월은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규칙적으로 흐른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장마가 쏟아지면 이어 햇빛이 든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아소는 춘추를 60번 넘게 맞이했다. 환갑이 지난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꽃처럼 곱던 얼굴이 할미꽃이 되었고, 백옥 같던 피부도 거칠어졌다. 낭창낭창하던 허리는 통살이 커져 예전에는 엉덩이의 칠할이었으나 이제는 구할이 되어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오십 초반엔 홍목단이 그나마 촉촉한 습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물기가 하나 없는 사막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면서 한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사내는 계집과 달랐다. 비록 젊었을 때의 멋진 모습은 사라졌으나 환갑이 넘은 황제는 여전히 성적으로 강했다. 가끔 그가 소녀를 덮칠 때면 사막이 되어버린 음문은 양물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고통스러웠다. 이미 교합에서 멀어진 아소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황제보다 수십년 더 젊다면 얼마나 좋으랴! 허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망상이다. 다만 자신이 사내를 받쳐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는 참으로 공평하지 못하다. 왜 계집의 생리구조를 든든하게 오래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사내에 비해 일찍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는가? 똑같은 나이의 남녀가 짝을 지으면 사내는 여전히 팔팔한데 비해 계집은 피하느라 쩔쩔 맨다. 아소는 이러한 차이를 감안하여 혼인을 할 때 사내가 적어도 여자보다 다섯 살 차이가 나도록 했다. 한편 황제가 성적 욕구가 여전하다는 것을 아는 아소는 대책을 세워주었다. 해가 저문 자신이 받쳐주지 못해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의 정력을 여전히 강하게 만들려 애썼다. 사내는 일단 정력이 세야 모든 일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었다. 통일제국의 황제로서 큰일을 해내야 할 황제가 정력이 쇠약해지면 국사를 망칠 수 있었다. 아소는 부지런히 옥즙을 다리고 산수유를 끓여 황제에게 바쳤다. 양물이 소처럼 힘을 쓰라고 우변(소의 성기)을 삶아 대접하고 해구변(물개 성기)처럼 강하라고 신하들을 풀어 구해들이게 했다. 기백에게 부탁해 정력에 좋은 보약을 지어 바치게 했다. 그러면서 회춘을 돕기 위해 인물이 반반하게 생긴 수많은 홍상미판의 소녀들을 뽑아 황제에게 바쳤다. 황혼에 접어든 황제는 성교의 재미는 어린 계집들과의 농탕질을 통해 맛보고 국사는 아소를 찾아 의논하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황제는 그만큼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가 이룬 업적의 절반은 아소가 기여한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였으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멋지게 산 인간은 죽음이 임박하면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더욱이 평생지기인 아소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홀로 저승으로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자식들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평생지기인 아소와 함께 수양산(首楊山)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구리를 캐내 보정(寶鼎: 보배롭고 귀중한 솥)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8개라 하여 무엇을 만들던 기둥을 8개로 했다. 그러나 헌원은 이러한 관례를 버리고 다리 3개만을 만들어 보정을 받치게 했다. 3개 다리로 물건을 떠받치는 것은 삼각형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헌원은 만년에 보정을 만들려는 꿈을 실현하게 되어 몹시 흥분되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심장이 멈추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쳤다. 네 부인 중 마지막 아내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었다. 헌원은 막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어미로서의 권위로 자녀들을 살필 것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아소를 안아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 같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만 흘러내렸다. 중원을 통일한 황제는 6마리 교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서태산에서 귀신들을 불러모았다.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팔방조가 비녀장을 잡았고 치우가 앞섰으며 풍백이 길을 닦고 우사가 비를 뿌렸다. 호랑이와 이리가 앞에 섰고 귀신이 뒤따랐으며 등사(螣蛇)가 땅에 엎드리고 봉황이 날아다녔다. 귀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청각(靑角)이란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인 헌원은 이승을 떠나 저승길에 올랐다. 곤륜산의 장례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토막을 내 큰 나무 위에 걸어놓아 까마귀가 뜯어먹게 했다. 까마귀가 죽은 시체를 뜯어먹고 산 사람이 그 까마귀를 잡아먹으면 생명의 순환이 이뤄진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강물에 밀어넣는다. 물고기가 시체를 뜯어먹고 산 사람이 그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역시 생명의 순환이 이뤄진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파묻었다. 황제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시비가 붙은 끝에 그의 시체를 교산(嬌山)에 묻기로 했다. 그의 무덤은 높이 백 길이나 되는 거대의 뾰족산을 이뤘다. 황제의 위엄을 죽어서도 세상만방에 과시하기 위함도 있거니와 황제가 양물의 원리로 천하를 얻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상징물로서 거대한 묘를 만들었다. 그런데 3일이 되는 날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거대한 무덤이 내려앉아 버렸다. 그리고 황제의 시체가 사라졌다. 아소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동방삭이 나타났다. 그는 슬퍼하지도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는 흉사가 아니라 길사요.” “시체가 사라지는 큰 변이 생겼는데도 길사라니요?” “그렇소. 길사라도 이런 굉장한 길사가 없습니다. 황제께서 부활하여 승천했소이다.” “네? 정말입니까?” “황제께서 지상의 주인 역할을 다 마치고 이젠 하늘에 계시기 위해 훨훨 날아올랐소.” 아소는 황제의 승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생명 순환의 원리에 의해 땅에 묻혀 있어야 새생명을 얻는데, 하늘나라로 가버리다니. 그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인가. 동방삭이 아소가 당황해 하는 이유를 알고는 위로를 했다. “인간이 죽어서 땅에 돌아가야 생명의 순환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나 황제만은 예외입니다.” “예외라니요?” “황제께서 생전에 땅을 딛고 인간 무리를 교화하는 지대한 기여를 했지요. 그 업적은 천추만대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분은 사후에 땅에 묻혀 계실 순 없지요. 마땅히 천령(天靈)이 되어 인간들을 계속 사랑하고 보듬고 가르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비록 대지에 육체를 남기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야 합니다.” 사당을 세우는 목적은 ‘조(祖)’를 수립하기 위함이다. 여왕이 판을 치던 시절에는 동식물을 조상으로 모시는 토템문화가 성행했다. 긴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역사는 개변이 없었다. 여인은 생리적으로 ‘무’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상징하는 젖가슴은 비록 밖에 드러나 있으나 그것은 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을 개변하는 힘이 없었다. 이에 비해 남근은 세상을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남근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 동방삭의 생각이었다. 동방삭이 창힐을 불러 ‘조’의 의미를 설명하고 글자를 지으라고 명했다. 창힐은 3일 동안 머리를 굴려 남근을 나타내는 문자 ‘且’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示’를 앞에 붙여 ‘祖’를 만들었다. 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부계사회의 성립을 나타내는 ‘조’가 생겨났다. 그날 이후 하나의 새로운 씨족이 출현하면 가장 중요한 일이 조상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며, 이 사당을 중심으로 족장이 씨족을 거느렸다. 이 주거지를 ‘籍(적)’이라 하며 조상을 기리어 ‘祖籍’이라 했다. 또 사당을 중심으로 군주가 백성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형태를 ‘國’이라 했다. ‘국’은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이란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39    17.勢力擴大(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6372  추천:1  2012-05-26
17. 勢力擴大: 세력확대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은 영원하리 아소는 이 세상 모든 여인에 비해 아름답고 도도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독을 품은 악녀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소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사내처럼 의리를 지키는 여인이다. 순진무구한 마음 씀씀이로 헌원을 대할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대하고 처신해왔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이 사내를 즐겁게 해주는 교합의 도를 고안하고 전수하려고 애썼다. 아소는 같은 여인으로서 누조의 마음을 쏙쏙 꿰뚫었다. 누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뱃속에 들어가 본 것처럼 알고 있었다. “마마께서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으로 짐작하옵니다.” 아소는 누조에게 예의를 갖추고 마주했다. 그러나 현효를 빼앗겼던 상처가 있는 누조는 그녀를 쌀쌀맞게 대했다. “마음고생은요? 그런데 어인 바람이 일었사옵니까?” “이 소녀가 그간 태자를 키운 것은 저의 자녀로 만들려는 욕심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였죠. 제가 갖고 있는 세상만사 지식을 전수하여 장차 아비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키우려는 욕심 외에 아무것도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이젠 태자가 다 장성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낭군님도 완전히 돌려드리겠사옵니다.” 한바탕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난리를 피워볼 심산이었던 누조가 아소의 너그러운 말에 머쓱해졌다. 누조는 속으로 ‘역시 천하 사내 중 으뜸 사나이인 헌원이 사랑하는 여인이라 그릇이 다르군’라고 생각했다. 아소는 누조의 손을 잡으며 당부했다. “앞으로 낭군님이 천하를 도모하는데 많은 참모가 필요하니 적극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간 아소의 훈련으로 현효와 창의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와 군자가 되는 도를 익히게 되었다. 천하를 품고자 하는 포부가 여느 부족 두령의 자식들에 비해 컸고 심지어 신농씨의 자녀들과 복희씨의 자식들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현효가 16세가 되자 아소의 의도에 따라 강수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으로 간 이유는 신농씨의 터전에 깊숙이 침투하여 선진문화를 익히려는 목적이었다.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를 알아야 했다. 이것이 아소의 계책이었다. 이듬해 창의가 16세가 되자 역시 타지로 보냈다. 그곳은 치우가 세력을 뻗히고 있는 약수였다. 치우는 곰을 조상으로 모시는 묘(苗) 부족이 살고 있는 중원에서 한참 서쪽에 위치한 곳에서 나고 자랐다. 무릇 중원의 서쪽은 험악한 산이 많고 낙차가 심한 폭포가 많고 굽이굽이 치는 강물이 많고 계곡이 많았다. 그런고로 인간의 성격이 중원 사람들에 비해 몹시 거칠었다. 중원에 진출한 치우는 신농씨와 다르게 우락부락하고 거친 사나이다. 헌원이 장차 치우 무리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큰 고민거리였다. 헌원이 두 아들이 태어난 이후로 동방에 위치한 부족 두령의 딸, 남방에 위치한 부족 두령의 딸, 북방에 위치한 부족 두령의 딸과 연이어 혼인하여 17명의 자녀를 보았다. 누조가 낳은 8명의 자녀를 합쳐 모두 25명의 자녀를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모계 풍속이 강한 중원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어미의 성을 따랐다. 아무리 천하의 헌원이라 할지라도 그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성이 같은 자는 둘뿐이었다. 청양(靑陽)과 이고(夷鼓)는 모두 기(己)씨이다. 청양은 뇌(雷)씨의 조카이고 이고는 동어(彤魚)씨의 조카다. 함께 태어났어도 성이 다른 자는 네 어머니의 아들로 각각 12성이다. 25명 중 성을 얻은 자는 14명이다. 12개의 성은 희(姬), 유(酉), 기(祁), 기(己), 잠(簪), 임(任), 등(藤), 순(荀), 희(僖), 길(姞), 환(懁), 의(依)다. 청양과 창림(蒼林)씨는 모두 헌원에게서 나왔고 희성(姬姓)이다. 헌원이 여러 무리와 혼인을 맺어 그 관계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아비는 하나이나 어미가 다른 25명의 자녀들도 무척이나 다사롭다. “인간이 무리를 짓는 까닭은 마음속에 맺는 바가 있고 밖으로는 배척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족이 경계가 생기는 연유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족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가족을 배척하게 되고 이어 향족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향족을, 부족이 되면 다른 부족을, 국족이 되면 다른 국족을 배척하게 됩니다. 무리와 무리 사이는 서로 배척하는 관계지 결코 대동태평의 상대가 아니옵니다.” 아소가 인간사회의 질서를 정리해야 한다고 헌원에게 설득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과 방식을 통해 정리한단 말이오?” “남을 배척하는 자는 자기 종족을 확장시켜 다른 종족을 침략하기 쉽습니다. 남에게 배척당하는 자는 자기 종족을 약하게 하여 세력을 확장시킬 수 없어 남에게 점령당합니다. 이 이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헌원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종족을 다스리기로 했으나 무작정 전쟁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먼저 천하 사람들에게 왕으로서의 위엄과 놀라움을 보여줘 제 발로 찾아오게끔 만들었다. 그에 따라 25명의 자식들을 앞세우고 숱한 일꾼들을 동원해 사통팔달의 길을 닦았다. 산길이 막히면 뚫고 물길이 막히면 다리를 놓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러 환산(丸山)에 올랐고 동악 태산까지 갔다. 서로는 공동(崆峒)에 이르러 계두산(鷄頭山)에 올랐다. 남으로는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러 웅이산(熊耳山)과 상산(湘山)에 올랐고 북으로는 흉노 땅에 이르러 부산(釜山)에서 동맹을 맺었다. 장년에 접어든 헌원이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하느라 노쇠해졌다. 그 멋지던 소년 헌원이 세파에 부대끼어 얼굴이 너덜너덜 거칠어졌다. 윤기가 가득 찼던 얼굴에 잔주름이 생기고 손으로 만지면 푸석거린다. 게다가 검정버섯까지 생겨나 나이를 속일 수 없었다. 천하 변강쇠였던 헌원이 부인 넷을 취하고 25명의 자식들을 이끌고 몸소 천하를 주유하면서 일을 거듭하느라 교합의 힘도 예전 같지 않았다. 헌원보다 2살 아래인 아소도 어느덧 칠칠은 49세가 되어 폐경기에 접어들었다. 사내는 팔팔 64세에 곡정이 말라버리지만 일부 사내들은 70이 넘어서도 호미자루를 들 힘만 있으면 성교를 할 수 있는데 비해 여인은 폐경을 맞으면 분비물이 사라져 교합을 원만하게 치를 수 없다. 젊은 남녀는 혈기가 왕성하고 분비물이 풍부하고 회복력이 빨라 아무렇게나 교합을 해도 잘되는데 비해 장년에 들어서 교합하고자 하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말고 기교를 연마하여 교합하는 것이 좋다. 이를 잘 아는 아소가 새로운 체위로 헌원을 이끌어 장년의 즐거운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몸의 여러 부위가 상함((機關厥傷: 기관궐상) 체력 소모를 당한 후에 기력이 회복되기 전에 억지로 사랑을 하면 간장에 해가 되고 대소변의 배설이 곤란해진다. 완급의 적당한 도수를 조절하지 못해 근골피로가 생긴다. 눈동자가 빛을 잃고 순환계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오래되면 악성 종기가 나고 음위(陰痿)가 함께 발생해 일어서지 못한다. 사내는 정면으로 눕고 여자가 얼굴을 마주하고 사내의 양 다리 위에 걸터앉는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져 향하고 천천히 양물을 들이민다. 동시에 여자는 허리에 힘을 주어 상하운동을 하고 만족되면 곧 정지한다. 모든 것이 닫힘(百閉: 백폐) 백폐는 나이 든 사내가 여자에게 음탕한 마음이 넘쳐 자제력을 잃어 생기는 병이다. 교합을 수차례 행하고도 절도가 없어 사내의 정기가 고갈된 상태에서 여전히 배설하려 하면 정액이 나오지 않는다. 이로 인해 모든 병이 발생할 수 있다. 우선 목구멍이 숯처럼 마르고 오줌이 통하지 않고 두 눈이 침침해진다. 사내가 정면으로 눕고 여자는 사내의 다리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앞으로 향해 엎드려 숙이고 두 손을 바닥에 붙여 몸을 지탱한다. 여자가 음도로 양물을 잡고 빨아들여 수축시킨다. 여자가 요동치고 만족되면 곧 정지한다. 사내가 배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혈이 메마름(血竭: 혈갈) 노동으로 몹시 피로한 상태에서 교합을 강행군하고 포악하게 진퇴운동을 하여 정원(精元)을 다 소모시켜 질병이 폭발하여 혈액이 고갈된다. 정기가 거의 상실되고 피부가 변색하고 요도에 통증이 생기고 음낭이 습윤하고 정액에 혈뇨가 생긴다. 여자가 정면으로 반듯하게 누워 엉덩이에 베개를 받쳐 음부를 높이고 양 다리를 뻗어 벌린다. 사내가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양물을 삽입하여 여자로 하여금 허리 부위를 요동치게 하고 만족하면 정지한다. 헌원의 네 부인은 이러한 교합 기교를 모르고 있어 낭군님이 찾아오면 의무적으로 가랑이를 벌리고 죽은 듯 들이대면 그만이었다. 오로지 아소만이 사내로 하여금 기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세월이 유수라더니 우리도 어느덧 장년이 되었네요. 해가 서산을 향해 서서히 기울고 있을 때이니 몸을 살펴 일하는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됩니다.” 헌원도 예전에 비해 힘이 딸리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녀의 생각으로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밭을 개간하는 등 일을 자제하고 자녀들과 신하들에게 맡기십시오. 대신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시고 성과가 쌓이면 천하 제패에 큰 도움이 되리라 짐작되옵니다.” 곤륜산은 산이 좋고 물이 좋은 고장이다. 게다가 산림이 많아 늘 청정한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곤륜산은 질병이 아주 적다. 반면 중원은 산이라 해야 야산이 조금 있을 뿐이고 산림이 아주 드물어 공기가 정화되지 못했다. 물은 모래 성분이 많아 늘 누렇게 흐리고 수질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쩍하면 황사가 바람을 타고 덮쳐와 공기가 흐리터분하다. 환경이 열악한 탓에 질병이 심하게 퍼졌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사람들이 죽어간다. 어느 해 여름 악성 이질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중 아소가 가장 아끼는 시녀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아소는 그때부터 의학을 발명해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지 않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의학을 발명하십시오.” 아소가 헌원에게 건의했으나 헌원은 쉬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농씨가 이미 의학에 밝지 않소?” “아닙니다. 신농씨는 사람이 배탈을 만나 설사하면 앵속을 다려 먹이고 사기(邪氣)가 몸에 침입하여 감기에 걸리면 녹두를 끓여 그 물을 마시게 하는 등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의학이란 과연 무엇이오?” “인체구조를 연구하여 병이 생기는 원인을 찾고 치표(治標)가 아닌 치본(治本)을 하는 것이 의학입니다. 소녀가 궁리해보니 기백과 손잡고 해낸다면 훌륭한 의학을 만들어낼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소의 제안에 의해 헌원과 기백이 머리를 맞대고 인체의 해부, 생리, 병리, 진단, 치료원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은 음양오행설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진리를 토대로 했다. 천인합일이란,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이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반영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또 경락을 연구하고 혈을 찾아내 침구(鍼灸)와 도인(導引) 등 물리요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의학을 발명하였다. 진단은 보고(望), 듣고(聞), 묻고(問), 진맥(切)하는 4가지에 의거하는데 그중 망진(望診)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이를테면 눈은 오장 정기의 자윤(滋潤: 음기를 길러 윤택하게 하는 효능)에 의지하므로 지나친 성교로 신장이 훼손되면 눈빛이 흐리고 눈 주위가 검게 된다. 성생활을 절제하고 음식과 운동 조섭(調攝)에 주의하면 흑안권(黑眼圈: 다크서클)이 개선된다. 인중이 특히 짧고 골이 평평하며 골의 가장자리가 선명하지 않고 색이 엷다면 자궁이 작고 자궁경관이 짧으며 발육이 부진해 자궁내막이 성장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궁경관이 느슨해 임신 후 누태(漏胎: 유산)되기 쉽다. 사내라면 음경이 작고 고환은 선천적으로 발육 불량이다. 성욕이 비교적 약하고 불임증인 경우가 많다. 여성은 초경이 늦고 양이 적다. 발기부전이나 유정(遺精: 성교를 하지 아니하고 무의식중에 정액이 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있으며, 정자의 활동성이 절반 이하이거나 정자의 수가 극히 적은 남성이 많다. 장수 노인의 이륜(耳輪: 귓바퀴)은 담홍색이고 부드러운 광택이 나며 살이 두툼하고 풍만하다. 이륜과 이수(耳垂: 귓볼)가 길고 폭에는 뚜렷한 변화가 없다. 단명한 사람의 이륜은 어둡고 창백하며 거칠고 윤기가 없다. 이곽(耳郭: 귓바퀴)은 살이 없고 얇으며 이륜과 이수는 짧다. 이곽의 두께와 길이가 신정(腎精)과 경맥기혈(硬脈氣血)의 성쇠뿐 아니라 장수단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발 바닥의 엄지쪽 마모가 심한 사람은 간장병을 잘 앓는다. 새끼쪽이 많이 닳았다면 심장, 특히 심실(心室)에 병이 많다. 왼쪽 새끼발가락의 마모가 뚜렷하면 좌심실, 반대라면 우심실에 병이 있다. 뒤꿈치의 마모가 심하면 수뇨관과 방광벽에 병이 있다. 좌우 신발 바닥과 좌우 수뇨관, 방광벽의 병변은 대응한다. 똑바로 누울 수 없고 밤에 소변을 자주 보며 야뇨증에 잘 걸린다. 뒤꿈치 외측 마모가 심하면 신장에 병이 있다. 왼발 뒤꿈치 외측이 많이 닳았다면 왼쪽 신장, 오른발이 그렇다면 오른쪽 신장에 병이 있다. 오장육부와 조직기관은 경락을 매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 등 6음(六淫), 즉 자연계가 인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환경적, 물리적 요인 탓에 기혈 흐름에 이상이 생기면 장부조직에 병리 변화가 발생한다. 이 병리정보는 음양(陰陽) 한열(寒熱) 허실(虛實) 표리(表裏)로 장부와 상응하는 외부 조직과 기관에 드러난다. 헌원과 기백의 연구에 의해 인류 사상 처음으로 의학다운 의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헌원의 새로운 발명은 끊임이 없었다. 그는 세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지었다. 육십간지(六十干支) 혹은 육갑이라고도 한다. 육십갑자는 십간과 십이지의 결합에 의해 만들었다. 십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이고, 십이지는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이다. 결합 방법은 처음에 십간의 첫째인 갑과 십이지의 첫째인 자를 붙여서 갑자를 얻고, 다음에 그 둘째인 을과 축을 결합하여 을축을 얻는다.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하나씩의 간지를 구해나가 60개의 간지를 얻은 후, 다시 갑자로 되돌아온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간(干)에 6개의 지(支)가 배당되는 셈이다. 육십갑자는 원래 날짜를 세기 위해 썼다. 육십 주기는 두 달쯤에 해당하는 적당한 주기이다. 또 십간십이지는 음양오행설과 결합하여 만물의 길흉을 판단하는 데 쓰였다. 사람의 성질과 운세를 점치기도 하고, 나날의 길흉과 방위의 선택 등을 살펴보기도 했다. 범띠인 사람은 성질이 거칠다 하고, 소띠는 느긋하다 했다. 또 병오생(丙午生)인 여성에 대해서는, 오행설에 의하면 병(丙)은 화(火)이고 오(午)도 화이므로 화에 화가 겹쳤으니 이 여성은 불에 불이 겹쳤다 하여 성격이 거칠어 남편을 짓밟는다는 속신(俗信)이 생겨났다. 간지를 매일 하나씩 배당한 것을 일진(日辰), 매월 하나씩 배당한 것을 월건(月建), 해마다 하나씩 배당한 것을 태세(太歲)라 했다. 사주팔자도 육십갑자를 토대로 생겨났다. 헌원이 꾸준히 새로운 발명을 세상에 내놓자 신농씨 무리가 질투심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태자 현효가 신농씨 무리에 깊숙이 잠입하여 생활하면서 그곳 돌아가는 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신농씨는 어느덧 백세를 넘겼다. 너무 연로한 탓에 새로운 발명이 없었다. 새로운 발명이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부족 우두머리가 노쇠해지자 정치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우두머리가 통제력을 잃자 각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곧 귀신이 될 신농씨는 망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느 날 아소가 헌원에게 진언했다.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통일할 적기라 여겨집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농씨의 무리가 내분에 휩싸여 오합지졸이 되어 힘을 잃은 것이고, 둘째 님이 더 늙기 전에 천하를 평정하여 통일된 국가를 수립해 만백성을 평화롭게 살아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헌원이 아소의 조언에 동감이 가지만 신농씨를 무너뜨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농씨는 덕망이 높은 분인데 그를 해친다는 것은 어쩐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는 기분이 드오.” “아닙니다. 신농씨는 힘을 잃었으니 이미 제왕이 아닙니다. 님이 자비롭게 대한다고 해서 그 무리가 장차 좋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백성만 고달파집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고민에서 벗어나 우리 무리에 귀속시키는 것이 그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옵니다.” 큰집이 기울어도 3년은 간다. 겉보기에 신농씨 무리가 오합지졸 같으나 그 부족은 적어도 반세기의 역사를 갖고 있어 뿌리가 튼튼하다. 현효의 말에 의하면 신농씨의 신하들이 헌원과 기백이 심혈을 기울여 발명한 의학을 자기네 주인의 발명품으로 도둑질해 퍼뜨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농기구의 발명, 달력의 발명, 불의 발명 등등 많은 것들이 신농씨가 발명한 것이냐, 헌원이 발명한 것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여 시끌시끌했다. 그 과정에서 신농씨의 무리들은 헌원 무리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판이 심상치 않자 헌원이 아소의 건의에 따라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동방삭이 찾아왔다. “자네가 지금 신농씨의 무리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시기상조일세.” 헌원은 곤륜산에 있을 때부터 동방삭을 스승으로 모셔왔고 현재까지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내 말을 들으면 크게 놀랄 것이네. 신농씨는 자네와 동부이모(同父異母) 형제라네.” 헌원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면 그 말을 왜 이제야 하시는 것입니까?” “예전부터 자네에게 말을 하려다 참고 있었네. 자네가 알면 득보다 실이 더 클 것 같아 그랬지.” 신농씨와 헌원의 아버지는 옥황상제의 서자인 소전이다. 옥황상제는 소전을 용의 화신으로 변신시켜 중원에 보내 아들을 보게 했다. 그 아이가 바로 신농씨였다. 만약 그에게 무슨 변이라도 생기면 천하대업을 완수하는데 차질이 생길 우려 때문에 곤륜산에 들어가 아들 하나를 더 본 것이 곧 헌원이다. 헌원의 세력이 커지자 왕모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가 아신에게 살해당하자 동방삭은 그가 신농씨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감춰왔던 것이다. “자네가 친형을 직접 죽일 수는 없지 않는가, 조금만 기다리면 신농씨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네. 또한 자네 형의 무리가 비록 힘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전통 있는 부족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을 걸세. 큰 희생을 치러야 하지. 그렇게 되면 구려족(九藜族)의 우두머리인 치우가 어부지리를 얻어 천하의 주인이 될지 모르네. 때문에 신농씨 부족을 무너뜨리려 서두르지 말고 차라리 지금부터 치우와의 전쟁 준비에 몰두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38    16. 軒辕得子(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7291  추천:0  2012-05-09
16. 軒轅得子: 헌원득자 육체의 향기가 예전같지 않으나 아소가 왕모의 지위를 이어받을 성스러운 자리를 뿌리치고 헌원을 따라 중원으로 온 것은 인생 전부를 사내에게 거는 각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그 각오는 헌원이 장차 중원의 패자가 되어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기대에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사내로서 양물이 우람지고 교합 기교가 뛰어나 진정한 매력에 끌려 생겨난 것이었다. 아소는 헌원을 따라 중원에 온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헌원의 정사(政事)를 돕고 부족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금상첨화로 암수의 궁합도 잘 맞아 이들처럼 좋은 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허나 세상에 좋은 일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아소만큼 여러모로 훌륭한 여인이 없었으나 그녀는 생산 능력이 없었다. 그 일은 헌원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그를 원망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헌원과 누조의 혼인을 아무리 너그럽게 대하려 마음을 다짐해도 여인의 전매특허인 질투심이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속으로는 님이 사무치게 그리우면서도 정작 헌원을 보면 빈정거림이 앞섰다. “꿀보다 더 진한 신혼 단맛에 빠져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붙어 있어도 아쉬울 텐데 어인 일로 이 소녀를 찾아오셨나이까?” 헌원은 아소의 마음을 잘 알지만 짐짓 모른 체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소? 날 보고 싶지 않았소?” “고작 며칠인데 소녀가 설마 상사병으로 목을 매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하늘을 찌르고도 힘이 남아돌아 기고만장하던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고 반쯤 비어 있는 쌀가마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왜 그럴까? 사내는 모름지기 3대 욕(慾)이 있어야 한다. 식욕, 성욕, 일욕이다. 이 3대 욕구 중에 식욕과 성욕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며 일욕은 후천적이다. 한 인간이 식욕이 떨어지면 성욕도 떨어지고 덩달아 일욕도 사라진다. 그런데 먹는 것은 그 어떠한 인간도 그럭저럭 먹고 산다. 하지만 모든 사내가 성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며 능숙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내가 사내다운 기백을 발휘하려면 성욕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양물이 시원치 못하거나 교접 상대가 없다거나 마지못해 교접을 하면 모든 면에서 주눅이 들어 자신감이 사라진다. 특히 교접을 잘하지 못한다고 계집에게 투박을 받으면 언제나 기가 죽는다. 반대로 양물에 힘이 넘치는 사내는 계집에게 대접을 받는다. 또 밖에 나가서도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고, 그러한 사내에게는 희망이 있다. 음양설에 의하면 인간은 양인 천기와 음인 지기에 의해 생겨났으며 따라서 인간의 몸은 음양으로 나눈다. 즉 혈은 음이고 기는 양이며, 백(魄)은 음이고 혼(魂)은 양이며, 정(精)은 음이고 신(神)은 양이다. 혼비백산이란 말이 있는데 혼은 양이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올라가고 백은 음이기 때문에 땅에 흩어진다. 혼은 양이고 몸은 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시체는 땅에 묻는다. 정(精)은 쌀 미(米)와 푸를 청(靑)으로 합쳐졌다. 옛날 사람들은 정자(精子)를 곡정(穀精)이라 했다. 사내의 정자는 쌀에서 오기 때문에 곡정이라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정력이란 말이 생겨났다. 정력이 센 사내는 그 힘을 받아낼 수 있는 계집과 교합해야 희열을 맛볼 수 있다. 격투의 희열은 비슷한 실력을 갖춘 상대와 겨룰 때만이 맛볼 수 있었다. 호랑이를 때려잡던 사내가 고양이와 싸우면 아주 싱거워진다. 헌원이 16세에 아소와 그 일을 처음 치른 후 소녀는 앵속(罌粟: 양귀비)이었다. 앵속은 유혹의 마력이 실로 굉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앵속은 우주를 휩쓰는 돌개바람이 되어 사내를 빨아들였다. 사내가 빨려들면 빨려들수록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아소가 헌원을 빨아들이는 마의 도가니라면 누조는 작은 종지 그릇밖에 안 되는 여린 계집이다. 게다가 아소는 그의 어미를 비롯해 천하 교합의 달인인 여인네들과 지상의 생식을 관장하는 달 속의 월정인 상아에게서 교합의 도를 전수받아 기교가 일품이었다. 그에 비해 누조는 음양교합에 아예 까막눈이다. 누조의 몸이 동년배에 비해 큰 편이고 살집이 적당히 붙어 보기가 좋았다. 좁지도 않고 헐겁지도 않은 옹골은 사내의 양물을 수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외모로 따지면 사내를 유혹하기엔 조건이 충분하다. 하지만 교합에 까막눈인 그녀는 사내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목석처럼 가만히 대주고만 있었다. 흥분을 못 이겨 숨이 넘어가는 시늉을 낸다든지, 앞으로 내밀고 뒤로 빼는 기교를 부린다든지, 사내의 양물을 밀고 당긴다든지, 밀착했다 떨어졌다 하는 아양을 떤다든지 등 여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교를 일체 몰랐다. 사내의 혀가 입 안에 들어오면 빨아들인다든지, 혀로 감는다든지, 상대의 혓바닥을 자극하여 향기를 이끌어낸다든지 하는 감칠맛을 낼 줄도 몰랐다. 사내의 손이 몸에서 오르락내리락할 때 성감이 고도에 이를 수 있는 곳에 더 힘을 넣어 짜릿한 자극을 받을 수 있게 이끌 줄도 역시 몰랐다. 누조는 숙녀의 다소곳한 태도로 교합에 임했다. 사내의 반응을 살펴 알아서 몸을 뒤튼다든지, 흥분의 정도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가 자빠지든지,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든지, 넓적다리로 사내를 휘감아 밀착시킨다든지, 사내를 이끌어 교합의 맛이 절정에 이르게 할 줄을 몰랐다. 그냥 하나의 암컷으로 두 다리를 벌리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사내는 누조와 교합하는 것이 마치 소변이 마려워 배설하는 것과 같았다. 쾌감과 짜릿함을 바랄 수 없었다. 아소와 누조는 격이 달랐다. 구단과 초급의 실력 차이가 났다. 천하 변강쇠인 헌원이 만족할 리가 만무하다. 만족은 고사하고 싱겁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아소를 찾아온 것이다. 아소는 헌원에게 질투심이 일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양물을 무척이나 바라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새 신부와의 교합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말에 측은함이 일었다. 또 천하에서 자신이 교합의 명물이라는 칭찬에 헌원의 몸을 이끌었다. 그날 나눈 체위는 토끼가 털을 빤다의 의미의 ‘토연호(兎吮毫)’이다. 사내는 얼굴을 위로 향해 바로 눕고 두 다리를 쭉 뻗는다. 여자는 그 위에 가랑이를 벌리고 얼굴은 사내 다리를 향한다. 두 무릎은 꿇어앉고 벌린다. 손은 바닥을 짚고 머리는 아래를 향한다. 사내는 양물로 음핵의 중심을 찌른다. 여자가 흥분하여 음액이 샘과 같이 흘러나오고 얼굴색이 상기되고 고조에 오르면 동작을 멈춘다. 사내는 여자의 넓적다리 바깥쪽을 두 손으로 붙잡거나 엉덩이를 만지거나 아울러 마음대로 여자 몸을 애무할 수 있어 좋다. 교접할 때 반드시 여자가 주동이 되어 상하나 좌우로 엉덩이를 흔든다. 여자가 흔들 때 세심해야 한다. 토끼가 털을 빨듯 유연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엉덩이 오르내림의 동작이 거칠고 빠르면 양물이 빠지거나 꺾일 수 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다. 헌원이 아소의 몸을 통해 교합의 옛 맛을 되찾아 얼굴이 상기되었다. “소가 만 마리 있어도 잡아먹을 소가 없다더니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대만큼 뛰어나고 아리따운 여자는 없소.” 헌원은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 연신 아소를 애무하면서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아소는 헌원의 양물을 한 손으로 꼭 쥐고 한 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계집이란 참으로 괴상한 요물이다. 삐져 있다가도 사내가 물만 뿌려주면 금방 풀어진다. 그러나 아소는 철없는 계집이 아니었다. 헌원의 칭찬이 좋고 또 그와 교접을 치러 기쁘기도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소녀는 홍상미판은 고사하고 입상측녀의 나이도 지났습니다. 그러니 소녀는 경험으로 님을 즐겁게 해줄 수는 있지만 회춘을 돕지는 못합니다. 누조는 홍상미판의 여인이라 회춘이 될 것이옵니다.” “회춘이라 했소?” “그러하옵니다. 님은 천년만년 만수무강하여 천하를 바로잡고 온누리에 복이 가득 차게 해야 합니다. 장생불로 하시려면 갓 천계가 트인 여인과 자주 교합을 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젊고 발랄한 음기가 노쇠화 되어가는 양기를 회춘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누조와 하고 싶지 않아도 회춘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소녀는 명의 기백에게 명해 14~15세 계집애들의 초경을 받아 초경환(初經丸)을 제조시켜 헌원에게 바치게 했다. 그 약을 먹은 후 헌원의 얼굴에 기름이 돌고 혈기가 왕성해졌다. 또 정력도 더 세졌다. “훌륭한 사내는 반드시 자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누조와 교합을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초경환을 먹은 헌원이 아소의 침실로 찾아오자 아소는 그에게 자녀를 갖도록 권한 뒤 방사를 시작했다. 소녀가 오른 어깨를 깔고 가로 눕고 사내는 등 뒤에 매미처럼 달라붙는다. 소녀의 통로는 비가 쏟아지듯 흠뻑 젖는다. 사내의 손가락이 통로의 어구를 만질 때마다 온몸이 들썩거린다. 구석구석 세포가 수컷을 강렬히 원했다. 사내의 양물이 통로를 가르고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격렬하게 교합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양물을 조갑지에 살짝 끼워놓고 단맛을 느끼며 잔잔한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즐기려는 것이다. 사내의 양물이 호수에 들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죽어버린다. 몸을 움직여 힘을 쓰지 않더라도 손으로 젖가슴을 만지고 복부 혹은 풍만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살살 만져야 양물이 죽지 않는다. 양물을 집어넣고 힘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살살 긁어주면 암컷은 전율이 들락날락 하면서 짜릿함을 느낀다. 그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갑자기 양물을 팽창하는 동작을 가하면 암컷은 자지러지게 자극을 받는다. 이때 암컷의 흥분은 최고조에 이른다. 수컷이 양물을 빼내고 손바닥으로 음부를 철썩 때려주면 암컷은 좋다고 음부를 허공을 향해 솟구치거나 두 다리를 쫙 벌린다. 한번 때려줄 때마다 솟구치는 고도가 높아가고 벌어지는 폭이 점점 더 커지고 음부가 팽창된다. 빨리 수컷을 달라는 강력한 신호이다. 양물을 호수 어구에 대고 암컷의 다짐을 받으면 암컷은 그 어떠한 요구도 전부 수용한다. 이를 테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든지, 평생 당신의 노예로 살겠다든지, 당장 죽어도 원이 없다고 횡설수설 늘어놓는다. 이 세상 전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수컷이 침입해 들어오기만을 바란다. 수컷은 암컷을 완벽하게 정복했다는 만족감으로 희열을 만끽하면서 한바탕 용을 써 실컷 짓밟는다. 만약 수컷이 홱 돌아누우면 암컷은 미쳐버린다. 화산이 분출하기 직전에 이른 암컷은 자기수컷이 해주지 않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고 해달라고 구걸할 것이다. 자고로 인간은 어미 아비의 교합에 의해 탄생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건만 인간을 신격화 하려고 엉뚱한 탄생 신화들을 지어냈다. 이를테면 흙으로 빚고 콧구멍에 바람을 불어넣어 인간이 되었다, 성령에 의해 잉태했다, 새끼줄에 사람 모양의 흙을 매달아놓고 확 뿌렸더니 숱한 인간이 만들어졌다, 꿈에 용을 보고 잉태했다, 우물에 해가 떠 있는 물을 마시고 회임했다, 커다란 말발굽을 밟고 아기를 뱄다, 커다란 알에서 생겨났다, 박에서 미녀가 나타났다, 여인국 여인네들이 홀딱 벗고 남풍을 맞으면 임신된다, 회태천(懷胎泉)의 샘물을 마시면 회태가 된다는 등의 신화전설이 많고도 많다. 헌원의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서자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어머니인 유교씨도 분명 인간이다. 아소 역시 신의 종자가 아닌 인간의 씨앗으로 태어났다. 누조 또한 어미 아비의 인간적인 음양교합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다. 헌원이 비록 누조와의 교합이 영 재미가 없으나 소녀의 권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배설을 하듯 주기적인 교합을 했다. 누조는 보통 여인에 비해 마음 씀씀이가 착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러나 아소에 비하면 교합기교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많이 뒤쳐졌다. 그래서 늘 아소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하느님은 공평하다. 아소가 여러 면에서 뛰어났지만 회임을 하지 못하는 반면 누조는 소녀가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해내고 말았다. 물론 이 세상 여인네들이 거의 다하는 일이지만 그녀는 아소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되었다. 헌원과 혼인한 지 1년 만에 떡판 같은 아들을 낳고 어미가 되었다. 그녀는 어미가 된 그날부터 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딴듯 득의양양했다. 당시 중원에서는 첫 아이는 죽여 없애는 ‘살수자(殺首子)’ 풍속이 유행했다. 계집이 혼인하기 전에 친정오빠나 동네 남정네들과 정을 통해 아기를 밸 수 있고 그래서 시집와서 낳은 첫 아기는 누구의 아기인지 불분명했기에 차라리 죽여버린 것이었다. 이는 당시 처녀가 혼전불륜이 심각했다는 증거이리라. 누조가 아이를 낳자 죽이느냐, 살려두느냐는 시비로 떠들썩해졌다. 풍속에 따르면 죽여 없애야 마땅하지만 누조의 친정아버지인 서릉씨는 딸애가 혼전에 불륜관계가 없었음을 하늘에 맹세하노라면서 살려둘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헌원도 첫날밤 누조가 비천한 헌신짝(破靴: 불륜녀)이 아니라 신선한 처녀의 몸이라는 것을 주장해서 시비가 가라앉게 되었다. 헌원은 장자의 이름을 심오하고 심원하며 오묘하다는 ‘현(玄)’ 자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는 뜻의 ‘효(囂)’를 붙여 ‘현효(玄囂)’라 지었다. 누조가 아들을 낳자 아소는 괜히 불안해졌다. 하루 지나고 이틀이 지남에 따라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이 직접 현효를 키우기로 했다. 누조가 현효를 낳았으나 장차 후계자로 키워낼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는 말이 진리라면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더 크다는 것도 또 하나의 진리다. 현효가 눈가림이 생기기 전부터 키우게 되자 아이는 아소를 엄마처럼 따랐다. 아소가 현효를 키우자 위엄이 누조를 능가하게 되었다. 아들을 낳고 어깨에 힘이 생겼던 누조는 뜻하지 않는 날벼락을 맞았다. 우울해지던 그녀를 살린 것은 차남을 생산한 사건이었다. 누조는 장남 현효가 돌이 지나기 바쁘게 차남을 낳았다. 토끼 혼을 타고났는지 그녀는 생산성이 풍부해 연년생을 낳았다. 두 아이 모두 사내였다. 물건이 있다는 것은 ‘유(有)’의 상징이다. 두 아들이 장성하여 아비를 받쳐준다면 세상을 차지하는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다. 장남이 심오하고 오묘한 이치로 세상을 다스리게 한다면 차남은 창성하고 흥성하고 번성하고 아름답고 곱고 착하고 선량한 뜻으로 ‘창의(昌意)’ 라 이름 지었다. 태자 현효를 아소에게 빼앗긴 누조는 창의를 빼앗겨선 안 된다고 입을 앙다물었다. 아소는 현효를 키운다는 빌미로 헌원과의 사랑이 소원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 더 이상의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누조는 창의를 이용해 아소에게 도전을 걸기로 했다. 창의가 걸어다닐 때가 되자 자주 형을 찾아가게 했고 그때마다 형을 데리고 오게 시켰다. 그 기회를 이용해 장남의 마음을 돌리려 안달을 떨었다. 친어미의 지극정성에 현효도 피가 당기는지 살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조는 내친 김에 아소를 쫓아내리라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아소는 젊음을 유지하려 국화주와 옥즙을 상복하고 있지만 흐르는 세월이 비껴가지 않았다. 맑고 깨끗하던 옥에 잡티가 생겨나고 주름이 파였다. 야들야들 하면서도 비단 위에 굴러다니는 구슬 같았던 두 손도 거칠어졌다. 허벅지 근육의 탄성도 예전 같지 않게 물렁해졌다. 복근을 만져보니 주글주글 손에 잡힌다. 손바닥이 탕탕 튕겨나던 엉덩이도 이젠 힘을 잃어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가장 소중한 무기인 홍목단도 젊은 시절의 우윳빛을 잃어 흐리한 회색이 나고 흥분될 때 빨간 장미색이었던 것이 이젠 자줏빛이 비낀다. 갓 잡아 올린 잉어처럼 팔딱팔딱거리던 꽃잎도 이젠 소금을 뿌린 생선처럼 생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몸은 한물 갔어도 그나마 손끝을 홍목단에 넣어 보니 온기가 여전하고 촉촉한 물기가 느껴져 욕망이 살아있다는 증거라 다행이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헌원이 찾아오자 아소가 물었다. “곤륜산에서 하늘땅이 무너지도록 즐긴 후에 이 소녀에게 교합하고자 하면 어떤 여인이 좋고 어떤 여인이 나쁜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죠?” 헌원이 그때 그 시절을 기억 못할 리 없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소.” “홍상미판의 여인이 1품이란 말이 실감나지요? 다음은 사내에게 도움을 주는 입상측녀가 2품이고, 30세 여인은 3품이라 했죠. 님이 3품인 소녀를 버리지 않고 여태까지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사랑해준 것에 한없이 감격하옵니다.” 소녀가 허리를 굽혀 머리가 땅에 닿게 넙죽 절을 올렸다. 헌원이 아소의 돌발적인 행위에 어리둥절했다. “대체 웬 일이오?” 아소의 고운 두 눈에 20년 전에 맺혔던 처량한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비쳤다. “소녀는 이젠 여인으로서의 폐인인 불혹에 접어들었사옵니다.” 사내란 타고난 천성이 섬세하지 못하고 둔하다. 진작 알아차렸어야 할 것을 이제야 깨우쳤다. “아니오. 당신은 영원히 나의 소녀요.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소, 곤륜산을 떠날 때 하늘에 맹세하지 않았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영원히 변치 말자고.” 아소는 헌원의 변함없는 마음에 가슴이 녹아내렸다. 감격에 달아오른 몸을 사내에게 통째로 맡겼다. “님의 태산 같은 마음에 이 소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허나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입니다. 소녀는 이젠 폐인이 되었으니 여자로서 교접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다만 정신적으로만 도움을 주겠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는 이 소녀를 멀리하고 누조를 비롯해 궁녀들을 취하시기 바라나이다.” 헌원은 아소가 뭐라 해도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대와 사랑의 행위를 나눌 때가 삶에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때요. 앞으로 그런 말일랑 절대 하지 마시오.” 아소는 그 말에 감격해 결심과 달리 또 한번의 교접을 맺었다. 그날 행한 체위는 맥이 조화되는 ‘조맥(調脉)’이다. 여자를 옆으로 눕혀 좌로 향하게 하고 무릎을 굽혀 가슴을 향하게 하고 왼쪽다리를 바로 뻗는다. 사내는 여자 몸 위에 엎드려 측면을 정면에서 공격한다. 양물을 음도에 삽입하여 54차례 행한다. 다음은 혈을 쌓는 축혈(蓄血)이다. 사내는 위로 향해 반듯하게 눕고 피동자세를 취한다. 여자는 엉덩이를 들고 사내의 두 무릎 위에 엉덩이 양면에 두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꿇는다. 여자의 음호가 사내의 양물과 마주한다. 여자의 음문을 양물에 접근시키고 깊이깊이 삽입하고 상하운동을 63차례 한다. 다음은 정액을 더하는 익정(益精)이다. 여자는 아래를 향해 굽혀 엎드리고 하복부에 높은 베개를 받친다. 넓적다리에 비해 엉덩이를 높이고 음문을 치솟게 하여 볼록 나오게 한 후 삽입한다. 사내는 양 손바닥과 양 무릎으로 땅을 지탱하고 양 다리를 여자의 다리 안쪽에 걸터앉고 양물을 음도에 삽입해 박고 빼고를 72차례 한다. 다음은 온몸을 다스리는 도체(導體)이다. 여자가 위로 향해 반듯하게 눕고 두 다리를 뒤로 구부려 발꿈치가 엉덩이에 닿게 한다. 사내는 두 무릎으로 양쪽을 붙잡고 땅에 붙이고 양 다리를 여자 위에 절터앉아 삽입한다. 들어가고 나오기를 81차례씩 매일 9번씩 9일 동안 행하면 온몸이 잘 다스려진다. 다만 이 자세는 사내가 사정하지 말아야 하고 여자는 양 다리를 굽히느라 몹시 아프다. 그렇지만 고통을 참고 계속 행하면 몸이 잘 다스려진다. 아소의 조갑지에 물렸던 양물이 마무리에 접어들자 악센 악어 입에 물렸다. 양물이 끊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판단키 어렵다. 곡정을 한 바가지 듬뿍 받고나서야 악어 입이 풀렸다. 올가미에서 풀려난 양물은 그 짜릿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아소는 역시 소녀였다. 천하에 둘도 없는 여인이었다. 비록 육체의 향기가 예전 같지 않으나 교합 기교만은 세월을 거듭할수록 늘어갔다.
37    15.軒轅結婚(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5831  추천:0  2012-04-30
15. 軒轅結婚: 헌원결혼 사랑하지만 맺어질 수 없는 안타까움 이립지년(而立之年: 30세)의 문턱에 들어선 헌원은 아직도 자식이 없었다. 허나 그는 이 일 때문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늘 새로운 일에 몰두하느라 자식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헌원이 신농씨를 방문한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신농씨는 혼인하여 자식을 여러 명 보았다. 그중 장녀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고, 차녀는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며, 삼녀는 바람을 제어하는 신이다. 이들 세 자매는 아버지 신농씨의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헌원이 세 자매에게 굉장한 매력을 갖게 되었고, 이런 자식을 둔 신농씨가 몹시 부러웠다. 아소도 헌원과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아소에게 고민이 생겼다. 헌원과 함께한 세월이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회임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암수가 교합하면 새끼가 생겨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자연의 법칙이거늘. “왜 아기가 생기지 않을까?”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하듯 아기가 생기지 않는 원인을 스스로 알지 못해 명의 기백(岐伯)을 찾아갔다. 기백이 망(望: 살펴봄), 문(聞: 들음), 문(問: 물음), 절(切: 진맥)의 네 가지 진단법을 동원해 소녀를 진찰했다. “비대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은 여체는 회임에 적합한 것이요, 요부가 둔부의 칠 할이니 회임하기에 딱 맞는 비례입니다. 소녀께서 이 조건에 부합되니 마땅히 회임이 잘 되었을 것이지만.” 소녀가 조급해서 물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죠?” “인체의 병은 맥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부(浮: 뜨고)·침(沈: 가라앉고)·지(遲: 느리고)·삭(數: 빠르고) 등 27가지가 있지요. 그 가운데 회임을 알리는 것은 마치 비단에 굴러다니는 구슬처럼 부드러워 활맥(滑脈)이라 부르는데 안타깝게도 소녀는 그 회임 맥이 막혀 있답니다.” 회임 맥이 막혔다는 말을 들은 아소는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항상 활기에 넘쳐 있던 그녀가 목소리가 가늘고 약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내의 곡정이 착상되는 자궁막이 심한 상처를 입어 기능을 상실한 탓으로 회임 맥이 끊겼습니다. 그러니까 14세 때 처음으로 사내에게 혼절할 만큼 당했을 때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여자의 기능이 파괴되었습니다.” 기백의 설명을 들은 아소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고 기분이 우울해졌다. 자신이 회임할 수 없는 원인이 사랑하는 헌원에게 있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헌원은 이런 딱한 사정도 모르고 혼인하자고 떼를 쓴다. 아소가 적당한 핑계로 사내를 달랬다. “소녀는 이립지년의 문턱에 가까운 여인입니다. 하루로 말하자면 이미 오후에 접어들었고, 사계절로 말하면 이미 가을에 들어섰지요. 혼인하고자 하면 마땅히 홍상미판의 새파란 여인이 아니면 입상측녀를 구해 결혼해야 후대가 번창해집니다. 그래야만이 신농씨처럼 든든한 조력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황하 하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태산이다. 사람들은 태산을 신산(神山)이라 부른다. 인류가 왕정시대에 진입한 수만년 이래 역대 제왕들이 태산을 찾아 천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동방은 신선들의 산지이다. 인간이 신선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태산에 올라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의례를 거행했다. 우주만물은 모두 도가 있고 도의 근원은 바람이며 이를 무한한 본체라 한다. 인류사회에 무한한 본체가 등장한 것은 ‘물활론(物活論)’에 의해서다. ‘물활론’이란 모든 물체는 활(活)의 가능태라는 것이다. 원시인류는 밤이 가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식물이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살아나고, 개구리가 겨울에 사라졌다가 봄에 살아나는 동면(冬眠) 등 모든 물체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가능성이 있으며,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대지에서 만물이 생겨나는 데는 필시 인류가 알지 못하는 자연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 힘이 처음에는 바람이었다. 원시인류는 차츰 사유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의 힘인 바람을 신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힘, 바람, 신은 모두 추상적이어서 감을 잡을 수 없고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 정신적으로 인식되는 신을 구체화시켜 귀(鬼)라 불렀다. 이렇게 신을 구체화시킨 것이 곧 귀신(鬼神)이다. 귀신 가운데서 인귀(人鬼)가 가장 세고 두렵다. 인귀는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옥황상제, 수인씨, 왕모, 신농씨, 복희씨 등은 인귀이며 모두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신선도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자재로 공간을 넘나드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었다. 바람의 화신인 화서씨(華胥氏)가 복희씨를 낳았으며 복희씨의 성은 바람 ‘풍(風)’이다. 당시 사람들은 華, 伏, 風은 모두 바람으로 인식했다. 바람의 화신인 복희씨는 인귀이자 신선이다. 태초에 박씨(朴氏)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고 부인은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들 부부는 수컷과 암컷을 드러내고 기를 뿜어냈다. 맑은 기는 하늘이 되고 혼탁한 기는 땅이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기를 발산하니 우주만물이 탄생했다. 박씨 부부는 이렇게 천지개벽을 이뤄냈다. 우주만물은 결국 암수의 원리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이 복희씨의 생각이다. 그는 박씨 부부가 천지개벽을 이뤄낸 것을 숭상하고 따라서 세상만물이 암수의 원리에 의해 생겨나고 지속된다는 진리를 믿고 인간이 혼인의 방식으로 사회질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여겨 자신부터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개구리는 하루아침의 봄비에 수백수천 개의 알을 생산한다. 다산의 상징이다. 복희씨는 다산의 상징인 개구리화신 여와와 혼인했다. 인류 역사의 최초 혼인이다. 복희씨는 이로써 사내가 장성하면 장가가고 여자가 장성하면 시집간다는 가취제도를 창제했다. 곤륜산은 아직 왕모의 1인 통치하에 가취제도를 모르고 난혼, 군혼 상태에 있었으나 중원 일대는 복희씨 덕분에 남녀가 혼인하여 사내는 밭 갈고 여인은 길쌈하는 생활방식이 정착해갔다. 복희씨는 또 거미가 그물을 짜는 모습을 관찰하고 실로 그물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했다. 사내는 고기를 잡고 여자는 고기를 다듬어 요리를 만들었다. 중원의 여러 생활방식을 관찰해보니 사내는 바깥일을 주도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관장했다. 복희씨는 천문지리에 밝아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팔괘를 지어냈다. 괘(卦)는 걸어 놓는다는 괘(掛)와 통하여 천지만물의 형상을 걸어놓아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뜻이다. 그 구성은 암수의 원리에 의해 음효(陰爻:- -)와 양효(陽爻:―)를 1:2 또는 2:1 등의 비율로 셋이 되게 짝지어 이루어진다. 이로써 동방은 점술이 굉장히 발달했다. 복희씨가 발명한 것들은 어찌나 굉장한지 곤륜산에서 온 헌원과 아소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복희씨는 참으로 만민의 숭앙을 받을 위대한 인물이었다. 복희씨는 신농씨에 비해 더욱 점잖고 더욱 지적이고 더욱 인자한 사나이다. 헌원과 아소가 존경하는 복희씨에게 코가 땅에 닿게 넓죽 절을 올렸다. “자네들이 먼 서방에서 이곳 동방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헌원이 곤륜산에 있을 때 나름대로 천재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으나 중원에 온 후로 신농씨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복희씨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소인은 이곳에 온 후로 어마어마한 모습에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배울 것이 참 많습니다.” “아닐세. 자네 역시 훌륭한 업적이 있고 신농씨도 독특한 장점이 있으니 나를 포함해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평가는 있을 수 없네. 더욱이 나나 신농씨는 자네 나이 때는 세상에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네. 그러므로 우리 셋 중에 굳이 우열을 가린다면 자네가 가장 훌륭하네.” 복희씨의 칭찬에 헌원이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먼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스승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불청객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돕겠네.” “아시다시피 곤륜산에는 가취제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혼인법이 남녀질서와 농경에 큰 역할을 하기에 굉장히 매력이 있습니다.” “자넨 산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열매가 열리는 도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네.” 헌원이 혼인법을 문의하는데 복희씨는 열매 이야기를 꺼냈다. “열매와 혼인법이 무슨 관련이 있나요?” “관련이 있다네.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꽃이 열매를 맺는다. 배, 사과, 복숭아, 자두, 살구 등 열매를 맺는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면 꽃가루가 날린다. 재미나는 것은 꽃도 암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암수에서 생산되는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교배가 이뤄지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바람이 암수의 꽃가루를 날라 교배시키고 열매를 맺게 하니 중매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암수도 서로 짝을 이루려면 바람과 같은 중매자가 있어야 하고 그 중매자를 매신(媒神)이라 부른다. 매신이 남과 여를 맺어주고 혼인시키고 후대를 번식케 했다. 바람의 화신인 복희씨가 바로 매신이다. 태양은 양이기 때문에 암수를 맺어주는 매신이 될 수 없으나 달은 음이고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기에 암수를 맺는 매신이 될 수 있었다. 지상에 달의 대리인이 있는데 그를 월하노인이라 부른다. 월하노인은 남과 여를 맺어주고 혼인 기록을 남겨 장부를 만든다. 매신을 통한 혼인의 목적은 남과 여가 가정을 꾸리고 후대를 번식하는 것이다. 헌원이 복희씨를 매신으로 모시고 아소와 혼인하려 들자 아소가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했다. 정식 혼인하여 부부가 되면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생산이 막힌 아소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흥분에 들떠 있는 헌원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없어 안타깝다. 일단 사내를 기쁘게 해준 다음에 털어놓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청혼의 기쁨을 누리고자 오늘밤에는 새로운 체위로 교접을 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학교경(鶴交頸)이니 학이 목을 얽는 자세이다. 사내는 무릎 꿇고 살짝 벌려 앉고 여자는 그 다리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벌리고 앉는다. 두 손으로는 사내의 목을 껴안는다. 양물을 음도에 삽입하는 동시에 음순(陰脣)이 마찰되고 음핵이 자극 받는다. 사내가 두 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받쳐 여자의 들썩거림에 힘을 실어준다. 여자는 사내가 엉덩이를 받쳐주는 것이 사랑스럽고, 사내는 여자가 들썩거릴 때 유방이 가슴에 마찰되어 쾌감이 좋다. 일심불능이용(一心不能二用), 마음에 다른 심각한 고민이 있으면 교합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못한다. 소녀는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교합에 임하려 들었으나 얼굴이 맑지 못하고 눈에 정기가 부족하고 체온이 뜨겁지 못했다. 헌원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왠지 근심이 있어 보이오.” 소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동물세계는 수컷끼리 마음에 드는 암컷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다툰다. 싸움에서 승자가 되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은 본능적으로 강한 수컷을 원한다. 원시인류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놓고 수컷끼리 경쟁했다. 힘이 약하고 능력이 떨어지는 사내는 여자의 맛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부족 내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원시공동체의 재산은 공동 소유였다. 그런데 사내가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재물을 빼돌리는 현상이 사유재산을 낳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남녀질서가 혼란스러워 붕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혼인제도였다. 사유재산과 혼인제도의 등장은 계층과 계급을 탄생시켰다. 즉 재산이 많은 자는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를 취할 수 있고 아울러 더 많은 여자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재산이 적거나 없는 자는 추녀 하나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간의 혼인제도는 유지되었고 많은 후손들이 태어났다. 복희씨, 신농씨, 헌원이 중원에 살던 시대는 비록 사유재산이 태동하고 혼인법이 등장했지만 강력한 ‘국(國)’이 아닌 부족집단 형태였다. 이러한 부족집단이 2만여 개나 되었다. 그런 까닭에 강력한 힘을 가진 국이 필요했으며 그 국의 첫 주인공이 헌원이었다. 곤륜산에서 이주해온 헌원의 무리는 여자가 쌀에 뉘처럼 적고 절대다수가 수컷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다른 부족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후대 번식에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혼인법을 받아들였다. 물론 부족의 두령인 헌원부터 혼인해야 무리들이 따를 것이었다. 황릉에서 동남쪽으로 백리 떨어진 곳에 서릉(西陵)이 있었다. 그곳에 한 부족마을이 있는데 그들도 먼 서쪽 묘(苗) 부락에서 이주해왔다. 그들은 복희씨나 신농씨처럼 큰 힘을 가진 무리는 아니지만 웬만한 부족에 비해 꽤나 강했다. 그들은 야만적 집단이라 툭하면 다른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전리품으로 사치를 누리면서 힘을 키워갔다. 이런 야만적인 무리와 이웃하고 있는 헌원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정착 초기에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판에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헌원은 싸워 이길 자신은 있지만 전쟁이 붙으면 이긴다 해도 양방이 모두 피해가 크고 또 호전적으로 비쳐질까봐 걱정이었다. 전지전능한 동방삭이 헌원의 고민을 알고 중재에 나섰다. 서릉씨에게는 아들 셋, 딸 셋의 자식들이 있었다. 아들 셋은 아비를 닮아 우락부락하면서도 영리해 부친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딸들은 어미를 닮아 아름다웠다. 그중에서 15세 되는 셋째 딸 누조(嫘祖)가 미혼이었다. 그녀는 인물이 고운데다 총명하고 영리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부족 사내들은 물론이고 동네방네 총각들이 군침을 흘렸다. 그렇지만 서릉씨는 딸의 혼사를 서두르지 않았다. 유능한 사내를 사위로 삼아 부족 발전을 꾀하려는 타산으로 신랑감을 고르고 있었다. 동방삭이 헌원에게 그 딸과 혼인할 것을 권유했다. 혼인을 통해 두 부족의 화친을 도모할 수 있고 헌원도 훌륭한 자녀를 낳아 든든한 후계자를 둘 수 있다는 일거양득이었다. 헌원은 누조와의 혼인에 호기심이 동하지만 아소가 마음에 걸렸다. 헌원의 이런 심사를 알게 된 아소가 적극 설득하고 나섰다. “당신처럼 천하에 둘도 없는 뛰어난 사나이에게 자녀가 없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장차 천하를 도모할 왕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소녀 또한 이 일로 큰 죄책감의 포로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누조와 혼인을 하기를 바라나이다.” 헌원이 아소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동해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뜨거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니 교접을 아니할 수 없었다. 아소가 새로이 배워 행한 체위는 매미가 달라붙다는 뜻의 ‘선부(蟬附)’이다. 사내가 등 뒤에서 여자의 허리를 잡는다. 여자의 아랫도리가 미끈한 두 허벅지를 타고 스르르 흘러내린다. 등 뒤에서 8번 얕게 2번 깊게 온힘을 다해 콱 들이 박는다. 여자는 팔다리에 맥이 풀려 푹 쓰러져 엎드린다. 양물이 꽃힌 채 여자를 깔고 엎드리니 그 형상이 매미가 달라붙는 꼴이다. 여자가 조금 숨을 고르고 나서 양물이 삽입된 채 넓적다리를 약간 높이 쳐든다. 이때 양물로 적주(赤珠: 소음순)를 자극한다. 반복해서 54차례 행한다. 남녀 간의 춘정이 봄 아지랑이처럼 출렁이고 끈적끈적한 진액이 흘러넘친다. 여자의 통로가 대초원이 되어 탐스럽게 받을 대로 받아들이고 고조에 이르러 동작을 멈춘다. 이 체위는 3천 년 후 당 현종과 양귀비의 방사에 많이 사용되었다. 시인 백낙천(白居易) 의 아우인 백행간이 당 현종과 양귀비의 방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양귀비가 휘장을 열고 용상(龍床)에 기어오르니 화용월모(花容月貌)라 눈이 순식간에 맑고 요염해지누나. 여인을 잡아당겨 어루만져 옷을 벗기니 설옥(雪玉) 같은 피부가 드러나네. 풍윤한 옥둔(玉臀)에 황제가 세 번씩 두 차례 빼고 박으니 양귀비의 가이없는 정욕을 만족시킨다네.” 당 현종은 환갑이 지나 양귀비를 만났다. 그는 양귀비의 매력에 빠져 아무리 먹어도 만족이 없었다. 허나 육체적으로 이미 서산에 기운 그는 정력이 딸려 교합할 때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잔꾀가 바로 매미가 달라붙는 자세로 교합하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여자를 쉽게 만족시킬 수 있었다. 헌원이 드디어 누조와 결혼하게 되었다. 동방삭이 복희씨로부터 매신의 역할을 전수받아 중매자로 나섰다. 그런데 헌원과 누조의 결혼에 문제가 생겼다. 중원의 혼인 풍속은 남녀가 혼인하면 사내가 여자 집에 가서 일정 기간을 살다가 아기를 낳은 후 부인을 데리고 제 집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결혼생활을 했다. 부족의 우두머리인 헌원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여자 집에 가서 살 수 없었다. 또 자존심 문제도 걸려 있었다. 이 문제로 동방삭이 발이 닿게 양가를 넘나들면서 설득하고 조율한 끝에 마침내 처음부터 누조가 헌원에게 와서 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결혼이란 ‘혼(昏)’을 맺는다(結)는 말이다. 昏은 하루에 있어 낮의 양기가 쇠하고 음기가 살아나는, 즉 양기가 음기와 만나는 어슬녘이다. 이 자연의 이치에 맞춰 헌원과 누조의 결혼식 날을 양기가 음기와 만나는 칠월칠석으로 정했다. 결혼식을 거행하는 시간은 황혼 무렵이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昏 앞에 ‘女’를 붙여 ‘結婚’으로 되었다. 옥황상제, 복희씨, 신농씨 등 내로라하는 제신들과 이름 있는 신선들, 부족 두령 천여 명이 참석했다. 식은 동방삭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동방삭이 남쪽을 향해 서고 동쪽에 신랑을 비롯해 헌원의 사람들, 서쪽엔 신부 가족과 친구들이 선다. 신랑신부가 등장해 신랑은 서쪽을 향하고 신부는 동쪽을 마주하고 맞절을 올린다. 복희씨가 두 사람의 혼인 증인으로 나서 앞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변치 않고 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만 8천 명의 악사가 축하 음악을 연주했다. 그 소리는 중원 땅에 울려 퍼졌다. 술과 음식은 복희씨와 신농씨, 이웃 부족마을에서 보내와 그야말로 주지육림을 이루었다. ‘복(福)’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제사음식과 결혼음식을 福이라 했으며 그것을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 했다. 수만 명에 이르는 하객들이 배부르게 음복하고도 남았으니 실로 가장 거창한 결혼식이었다. 식의 하이라이트는 암수 모의 물놀이와 실제로 벌어지는 집단교합 의식이다. 젊은 사내들이 동쪽에 서고 계집들이 서쪽에 서서 암줄과 수줄을 드리우는 놀이를 한다. 올가미를 둥글게 틀어 수컷을 상징하는 나무를 넣고 당겨 비빈다. 주고받는 말들이 참으로 해괴하다. “잘 벌려야 쏙 들어가지.” “똑바로 꽂아야 잘 받지.” 이런 난장판이 끝나면 이어 수백 쌍의 동남동녀가 실제로 성행위를 하는 집단교합 행위가 벌어진다. 곤륜산에서 행하는 집단 라양과 다를 바가 없다. 수만 명의 암수가 발가벗고 치부를 드러낸 채 온갖 체위로 교접을 하는 모습은 실로 가관이다. 집단 성교의 신음소리는 중원을 넘어 온누리에 울려 퍼진다. 이 성스러운 집단 교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소박한 삶의 몸부림이다. 이제 남은 것은 주인공인 신랑신부가 수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실제 교합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교합이 시원치 못하면 두령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열과 성을 다해야 했다. 교합을 잘하면 후손이 번창해지는 증거로 남기 때문에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음양교합을 헤아릴 수 없이 멋지게 해왔던 신랑이지만 누조와 실천하려니 어색했다. 자꾸 아소가 마음에 걸려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나면 천하 헌원이 제신들과 만백성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만다. 이를 눈치 챈 아소는 눈물을 머금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식장을 떠났다. 신랑의 시야에서 소녀가 사라지자 헌원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양물에 온 힘을 주고 누조의 몸을 탐했으나 어쩐 일인지 아소와 교합하는 것에 비해 성욕이 왕성하게 살아나지 못했다. 쾌감과 짜릿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그러나 헌원은 필경 천하에 둘도 없는 사나이였다. 비록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여전히 그는 강했다. 갖은 기교를 부려 그 거대한 양물로 신부를 요리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침묵에 쌓인 평원에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절정에 오른 헌원의 양물이 끝없는 정액을 분출하며 교접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제신들과 백성들은 그 웅장한 교섭에 모두 기겁을 하고 찬사를 발했다. 새신부인 누조는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다. 역시 헌원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칭찬을 받기에 충분했다.
36    13. 行進中原(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6485  추천:0  2012-04-09
13. 行進中原 : 행진중원 헌원과 소녀, 중원에 자리 잡다 옥녀의 허락을 받은 헌원과 아소는 산을 떠날 준비에 분주했다. 우선 동행으로 나설 사람들을 정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곤륜산의 일초일목, 하다못해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왕모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곤륜산의 땅을 딛고 공기를 먹고 사는 인간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전부 왕모의 소유였다. 개명수와 우돌은 힘이 천하장사인데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한번 먹은 마음은 변치 않았다. 이 둘은 본래 왕모의 신뢰가 깊은 신하였다. 헌원은 이 두 장수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지만 왕모의 윤허를 받아야 했다. 옥녀는 헌원을 떠나보내는 기회를 이용해 곤륜산을 암컷 천하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노예인 수컷들을 남겨 종족 번식은 하되 권력 주변에 맴돌고 있거나 하다못해 다리가 세 개 달린 파랑새까지 전부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만 속 편히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자네가 이곳을 떠날 때 개명수와 우돌 을 비롯한 힘깨나 쓰는 자, 나의 주변에서 맴도는 수컷을 전부 데리고 떠나게나.” “소인이 그들을 데리고 떠난다면 앞으로 누가 왕모님의 신변을 책임지고, 궁궐을 누가 호위할 것인지요?” “그것은 걱정하지 말고 말끔히 데리고 가게나. 나에겐 반인반조 군대가 있지 않는가. 그들은 나를 훌륭히 지키고 궁궐을 호위할 것이네.” 허원이 원하는 바대로 데리고 떠나고 싶은 자를 전부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자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고 싶네.” 옥녀가 말하자 헌원은 감동에 겨워 대답했다. “왕모님께서 소인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셨는데 원하시는 바를 전부 해드리겠습니다.” 옥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으나 눈에는 음욕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지금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네.” “동박삭 스승님의 말씀대로 해마다 은하수에서 상봉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년 칠월칠석까지는 앞으로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365일이 되지 않지만 심시(心時)로 따지면 삼천여 일이 된다. 지금 옥녀의 몸은 화산처럼 불타오르는데 언제 1년을 기다린단 말인가. 옥녀의 마음을 눈치 챈 헌원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신호에 맞춰 옥녀가 헌원의 양물을 쥐자 순식간에 엄청나게 큰 육모방망이로 돌변했다. “네가 이 맛난 양물을 어찌 잊으리!” 두 사람은 허겁지겁 맨몸이 되어 교합을 시작했다. 사내의 보물이 처음엔 조갑지에 살짝 물렸다. 조갑지가 차츰 메기의 입으로 변했다. 메기입이 다시 새끼 악어입이 되어 조금 억세졌다. 나중엔 큰 악어입으로 돌변하더니 앞으로 물고, 뒤로 물고, 내리 물고, 위로 물고, 서서 물고, 앉아 물고, 누워 물고, 가로 물고, 옆으로 물고, 바로 물고, 거꾸로 물고, 엎어 물고, 자빠져 물고 늘어진다. 헌원은 온몸의 기력이 완전 소진되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물고 또 물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다리 세 개 달린 파랑새와 두 개 달린 파랑새가 서로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두 사람의 질펀한 방사가 끝나자 헌원은 궁궐을 나와 길 떠날 차비를 했다. 개명수와 우돌은 옥녀에게 치도곤을 맞을까봐 불안하던 차에 헌원을 따라 곤륜산을 떠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들은 헌원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본래 곤륜산 일대 인간들은 절을 하는 법을 몰랐다. 동박삭이 중원에세 백성들에게 절하는 법을 가르치고 이곳에서도 그 예절을 가르쳐 사람들이 절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절 인간들은 짐승의 공격에 대비해 늘 무기를 들고 다녔다. 창이나 도끼 등을 끈으로 묶어 등에 매달고 다닌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당신을 해칠 의사가 없습니다.’라는 표시로 등을 보여주기 위해 절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굳어져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절을 한다. 다리 세 개 달린 파랑새도 헌원을 따라 중원으로 가게 되었다. 옥녀의 부하인 개명수와 우돌, 파랑새가 합류하게 되어 헌원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또 아소가 옆에 있으니 더욱 힘이 났다. 거기에 더하여 기술을 가진 사내들과 사냥을 하는 사내들도 헌원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곤륜산을 떠나는 시간이 임박해오자 헌원은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가는데 그 누가 착잡하지 않겠는가. 아소의 마음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머물면 옥녀의 뒤를 이어 왕모가 될 수 있으나 그녀는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과연 그녀 앞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잘 아는 헌원은 마지막으로 아소에게 말했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소. 그러니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주기 바라오.” 아소는 진심을 몰라주는 헌원이 원망스러웠다. “얼룩소를 잡아 피를 나눠 마시면서 언약을 드릴까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맹세 드릴까요. 소녀는 바람 따라 나붓거리는 갈대가 아닙니다. 바람 앞의 등불도 아닙니다. 오로지 변함없이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가 되고자 합니다.” 아소의 굳은 맹세에 헌원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영원히 변치 말자는 굳은 약속을 한 뒤 고향에서의 마지막 정사를 나누었다. “동박삭 스승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는 오상(五常: 인·의 ·예·지·신의 5가지 기본 덕목)이 있다 하였는데, 음양교합에도 오상이 있는 것이오?” “음양교합도 인간이 지켜야 윤리가 있기 때문에 오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내의 양물에는 다섯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평시에 은밀한 곳에 숨어 절개를 지키는 청빈한 선비가 되어야 하니 인(仁)이라 한다.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하니 의(義)라 말할 수 있다. 앞쪽 끝에 마디가 있는 귀두는 예(禮)라 할 수 있다. 교합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면 곧 왕성하게 발기되어 단단하고 꼿꼿해지며, 교합할 생각이 없으면 홀연히 얌전해지니 신(信)이라 할 수 있다. 방사에 임해서도 놀랍고 이상함을 평정하고 기를 고요히 하고 교합의 법도를 고민하니 지(智)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오상의 덕으로 성을 즐기는 것이다. 곤륜산을 떠나는 일행은 만여 명의 대부대였다. 장수 백여 명이 말을 타고 삼족오 깃발을 하늘 높이 쳐들고 앞장섰다. 그 뒤를 각종 물품을 실은 백여 대의 수레가 따르고 맨 마지막에 병사들이 줄을 섰다. 곤륜산에서 출발하여 중원에 도착하기까지 석 달 열흘이 걸린다. 실로 고된 만리장정이었다. 옥녀가 만여 명의 100일 식량을 선사했다. 아소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앞두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옥녀는 왕모답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너는 이 어미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개척해 나아가야 하느니라. 절대 좌절하지 말고 꼿꼿하게 살거라. 만백성의 여왕이 되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라.” 딸과 작별인사를 마친 옥녀는 헌원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지만 옥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놓고 돌아섰다. 그 침묵의 언어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을 것인가?“ 드디어 이산대오 행렬이 출발했다. 파르마 고원을 거쳐 중원에 이르는 길을 택해 행진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마다 이 행렬을 구경하느라 난리였다. 맨 앞에 선 헌원과 개명수, 우돌을 비롯한 장수들의 늠름한 풍채에 압도당했으며 무엇보다 처음 보는 깃발이 신기했다. 구경꾼들은 그 깃발을 보면 대뜸 엎드렸다. 누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행군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워낙 길고 거친 여정이라 고생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발이 부르터 걷지 못하는 자, 다리가 부어올라 몸을 이기지 못하는 자, 수토가 맞지 않아 전신에 두드러기가 돋아나고 배탈이 나 물똥을 싸대느라 수분이 다 빠져 가죽만 남은 자, 남폭한 약탈자들과 싸우느라 다친 자, 독뱀에게 물려 고생하는 자, 찬바람과 찬비를 맞아 병에 걸린 자 등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행렬에 합류하는 자들이 늘어 숫자는 여전히 만여 명이었다. 행렬의 최종 목적지는 중원의 중심인 섬서 황릉(黃陵)이었다. 황하하류 이른바 동방지역은 복희씨와 여와 부부가 지배하고, 그 서쪽 기주지역은 염제가 통치하고, 더 서쪽은 치우의 구역이었다. 그래서 세 집단의 손길이 닿지 않은 황릉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원시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동굴에서 생활했다. 헌원은 데리고 온 만여 명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곤륜산에서 집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무리에게 우선 집을 짓도록 했다. 1년 여가 지나자 만여 명이 살 수 있는 집이 마련되었다. 본토박이 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집을 짓기 시작해 이제 동굴이나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 그렇게 헌원에 의해 중원일대는 서서히 집의 숫자가 늘어났고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안거(安居)가 마련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낙업(樂業)을 일으켜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원은 아소에게 넌지시 말했다. “당신이 나를 따라와 고생이 많소. 내가 늘 미안하오.” “당치 않은 말씀이옵니다. 소녀는 오로지 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왔으니 그 어떤 세파도 이겨낼 자신이 있어요.” 헌원은 그런 아소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을 나눈 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헌원은 아소를 껴안고 귀에 소곤댔다. “그동안 내가 일에 바빠 당신의 음문을 멀리했소. 오늘밤은 만사 제쳐놓고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소녀가 기다리던 바이옵니다.“ 두 사람은 침실에 나란히 누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양교합에도 규칙이 있는 것이오?” “네, 그러하옵니다. 세상만물에 도가 있듯이 음양교합에도 당연히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잘 지켜야 교합이 원만하게 이뤄진답니다.” 여자와 교합하고자 하면 먼저 여자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먹고 두 다리를 굽혀 벌리게 한다. 사내가 그 사이에 들어가 입을 맞추고 혀를 빨고 양물을 음호 양 옆을 가볍게 살살 두드린다. 이와 같이 하다가 서서히 안으로 삽입한다. 양물이 비대하면 안으로 한 치 반을 삽입시키고 가늘고 작으면 한 치를 삽입한다. 움직이거나 흔들지 말아야 한다. 서서히 빼냈다가 다시 삽입하면 온갖 병이 없어진다. 양물이 옥문으로 들어가면 자연히 열이 나고 또 급해지는데 여자의 몸은 응당 위로 흔들린다. 그때 깊이 넣으면 사내와 여자의 백병이 없어진다. 얕게 금현(琴絃:음핵)을 세 치 반을 삽입해 막힌 입구를 찌른다. 하나부터 아홉까지 또한 깊게 하여 곤석(昆石: 외음부의 움푹 파인 곳) 옆까지 삽입하여 왕래한다. 이때 사내의 입을 여자의 입에 대고 기를 빨아들여 구구 팔십일의 도를 행한다. 헌원이 아소와 즐거운 성교를 맺는 것처럼 모든 일도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중원의 들판에 집들이 끊임없이 세워지고 황릉의 산꼭대기에는 깃발을 꽂았다. 깃발에는 헌원이 만민을 자애롭게 품고 있는 그림을 그려놓고 영고(鈴鼓)를 달아매 놓았다. 그 깃발을 소도(蘇塗)라 부르고 아울러 깃발이 꽃인 사방 10리를 성역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신성불가침으로서 구역 내에 들어온 사람은 도둑질을 했거나 폭행을 했거나 살인을 했어도 모든 죄인이 면죄부를 받았다. 이후로 헌원을 따르는 무리가 날로 늘어나고 황릉은 더욱 번창해갔다. 헌원은 소도를 중심으로 신단을 만들고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천단으로 삼았다.
35    한국엔 신화가 없다 댓글:  조회:6748  추천:3  2012-04-04
한국엔 신화가 없다   필자는 우리민족의 민족성 형성, 즉 우리민족의 인간타입형성과정을 바람문화라는 포인트로 역사소설로 만들어 보려고 10년 전부터 자료를 수집해왔다. 그런데 고조선시기 민속기록은 전무하고 부여, 예, 맥, 옥저, 삼한(변한, 진한, 마한)및 삼국시기 민속기록 다수를 중국고문헌에 의존해야만 했던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먼 옛날 우리선조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아 많은 민속이 전해지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다. 광복 후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비록 체계적이지 못 되지만 그나마 참고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꽤 많았다. 자료수집에 있어서 문제는 신화였다. 신화는 황당한 허구로 보이나 당시 역사문화를 가장 잘 반영한 ‘전설적인 기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반도엔 신화가 없다.” 왜냐? 原形이 없는 신화는 신화가 아니다. 이것이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아래 두 단락은 한반도창세기신화이다.   생쥐를 잡아다가/석문 삼치 때려내어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아느냐? 쥐 말이, “나를 무슨 공을 씌워 주겠습니까? 미륵님 말이, “너는 천하의 뒤주를 차지하라.” 한즉 쥐 말이, “금덩산 들어가서/한쪽은 차돌이요. 한쪽은 사우쇠(쇳덩어리)요/툭툭 치니 불이 났소. 소하산 들어가니 삼취(샘물) 솔솔 나와 물의 근본.“     옛날 옛 시절에/미륵님이 한짝 손에 은쟁반 들고 한짝 손에 금쟁반 들고/하늘에 축사하니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져/금쟁반에도 다섯이오 은쟁반에도 다섯이라 그 벌레 자라나서/금벌레는 사나이가 되고 은벌레는 계집으로 마련되고 은벌레 금벌레 자라와서/부부로 마련하여 세상사람이 낳았어라     위 두 한반도창세기신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금덩어리 나타나고 쇳덩어리, 금쟁반, 은쟁반이 출현한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창세신화이다. 미륵이란 석가의 다음으로 부처가 된다고 약속받은 보살이다. 도솔천에 살며, 장래 인간의 수명이 8만세가 되고 이 세계가 정토화 되면, 사바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어 3회의 설법을 한다고 믿어져 그 출현이 기대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고로 미륵불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역사를 살펴보면 백제에 384년 침류왕 때, 신라에 527년 법흥왕 때 본격적으로 불교문화가 유입되었고 그 후 고려말기까지 미륵신앙이 주류를 이어왔다. 서양의 역사분단(分段)으로 말하자면 중세기에 해당된다. 중세기에 유입되었고 흥성하기 시작한 미륵이 한반도창세기신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니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금과 은은 긴긴 원시공동체생활에서 한 걸음 진화하여 사유재산이 출현되고 물물교환이 이뤄지고 나서 한참 지나 화폐로 등장한다. 철의 발견은 청동기 이후이며 중국에선 전국시대에 이르러 철농기구와 철병기가 발달되었다. 한반도는 漢四郡시대부터 철의 사용이 보편화되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위 두 한반도창세기신화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며 아예 창세기신화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물론 현재까지 전해온 지구상의 창세기신화들은 절대다수가 인류흐름에 어긋나는 작품들이다. 무슨 말이냐? 인류역사를 시간적으로 따지면 부계사회가 모계사회에 비해 밤 11시 59분에 해당되는 극히 짧은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권력을 잡고 나서 모계사회신화를 포함한 문화를 많이 말살해왔다. 그 일례로 로마 창세기신화의 주인공은 본래 비너스였지만 부계사회에 들어 하나의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각색되어왔다. 그리스신화의 지고신은 제우스인데 그는 남자이며, 성경에 등장하는 창세기 주인공 여호와가 남성성 신이며 그는 남자를 먼저 만들고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로 지어버렸다. 중국에서도 본래 창세기신화의 주인공은 여와였으나 한나라 때 남자인 반고로 바꿔치기를 하였다. 이런 폐단들이 많으나 어찌되었든 후세 인간들이 당시 우주를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보고 인간사회 패턴을 바라보는 原形을 바탕으로 신화를 지어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반도창세기신화는 그러한 원형이 결여된 후대문명의 시각으로 지어낸 것이므로 가치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온 천지왕, 대별왕, 소별왕, 당금애기, 강림도령, 바리, 원강아미, 한락궁이, 황우양씨, 막막부인, 백주또, 소천국, 귀네깃또, 백조애기, 각시손님, 자정비, 문도령, 감은장애기, 안삼국, 사마동이, 오늘이, 매일이, 양이목사, 궁상이, 광청아기 등 한반도신화들은 어느 하나 불교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 세상에 외래문화로 자기네 신화를 포장한 민족은 한반도밖에 없는 줄로 필자는 판단한다. 한반도엔 원형이 잘 보존된 신화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단군신화는 원형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짜임새도 멋들어진 신화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 분위기(관련된 전문 학계를 제외하고)는 단군을 신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사실로 취급하기 때문에 신화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원형이 잘 보존된 그 멋진 제주도선문대할망, 삼신할매 등을 신화로 보지 않고 민속으로 취급하고 있어 한반도신화는 콩물이 빠진 찌꺼기만 남아 있어 신화가치를 떨어 뜰이고 있다. 문제는 한국엔 신화를 들먹이는 학자는 많아도 신화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생식숭배문화사상》을 지은 조국화 선생, 《중국신화연구》를 써낸 오천명 학자, 방대한《중국신화사》를 비롯해 많은 신화저작을 펴낸 중국신화연구전문가인 원가 등의 저작을 읽으면 거침없이 내려간다. 서양 쪽의 신화서적들을 읽어도 마찬가지이며 배울 것이 많다. 그러나 한국의 신화 책들을 읽으면 신화전문가가 아닌 필자조차 “이것 아닌데!” 하고 머리를 갸우뚱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 학자들은 우리민족문화 뿌리, 특히 우리민족 혹은 동양문화의 고유성, 다시 말해서 고대사회문화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핍하여 엉뚱하게 말도 안 되는 풀이를 펴내고 있다. 신라문화의 정수인 화랑은 연나라 원화 외피에 신라고유바람문화를 결합한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도올·김용옥 교수마저 원화와 화랑, 그 뿌리를 불교의 연꽃에서 찾으려고 애썼다(도올·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참조). 《바람 난 삼신할매》저자 박홍주 교수는 “삼족오는 분명 기형이다. 다리가 세 개인 새는 없다. 기형의 새를 굳이 그려 숭배한 것은 3이라는 수를 강조하고자일 것이다. 태양 속에 들어 있는 삼족오 형상에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수는 1(머리)과 3(세 다리)이다.”는 어처구니없는 두들겨 맞춤식의 억지춘향의 논리를 펴내고 있다. 까마귀는 다리가 분명 두 개다. 다리가 세 개인 삼족오는 웬 일이냐? 중국 앙소문화 채도에 그려진 까마귀는 다리가 두 개인 이족오다. 용산문화 후기 흑도에 다리가 세 개인 까마귀가 태양을 등에 지고 나는 그림이 있다. 중국신화학자들은 이족오는 모계문화의 상징이고 삼족오는 부계사회에 진입한 징표라 주장한다. 무슨 말이냐? 중국인은 남자의 성기를 발로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삼족오의 세 개 다리 가운데의 것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중국어 “第三者 揷足”란 말을 연상하면 삼족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삼족오의 출현은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에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삼족오를 천부경부터 시작해 삼국에까지 연관지어 3이란 숫자에 매달려 자국역사를 풀이하는 병에 걸려 있다. 한국엔 신화가 없다는 주장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가. 한반도신화는 원형이 결핍되어 있어 진정한 신화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나. 한반도신화 절대다수는 불교라는 외래문화로 포장되어 있어 순수 민족 신화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 신화는 광의적 의미로 보는 신화가 있고 협애적인 의미로 보는 신화가 있지만 한국 학자들은 이 면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 진정한 신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화연구전문가가 없어 신화다운 신화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4    12. 軒辕離山(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8120  추천:0  2012-03-31
12. 軒轅離山: 헌원이산 고래는 드넓은 바다에서 살아야 아신의 처형식날 옥녀를 비롯한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은 모두 속이 후련해 박수를 쳤으나 유독 아소만이 무덤덤하게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파랑새를 통해 헌원의 모친을 살해한 범인이 아신이라는 사실을 듣고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다. 비록 그가 살인자라 해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피는 물보다 진했기에 그녀의 마음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를 내 아버지가 죽이다니!” 슬픈 표정을 짓는 그녀 옆으로 헌원이 다가왔다. “얼굴에 우울함이 가득하오. 혹여 몸이 아픈 것은 아니오?” 아소는 헌원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몸에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탈이 생겼습니다.” “마음에? 왜 그런 일이?” 헌원은 아소와 아신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세상일이란 모르면 맘이 편하고 알고 나면 신경이 쓰여 편치 못한 것들이 많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중 하나였다. 단지 옥녀와 아소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비밀이 영원히 지켜질 수 있었다. 아신은 떠났지만 곤륜산은 변함이 없었다. 아침 해는 여전히 동산에 떠오르고 바람은 불어오고 강물은 흘러가고 산새는 지저귄다. 사람들은 여전히 왕모의 신궁 입주식 준비에 분주했다. 헌원의 마음도 안정되었고 아소도 평상심을 되찾았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젊은 남녀가 마음이 평화로우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이다. 두 사람은 궁궐 입주식 준비를 하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 “그동안 너무 소원했습니다.” 아소가 헌원의 품에 안겨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한시도 그대를 잊은 날이 없소이다. 그대의 음부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오.” “호호, 그간 양물은 잘 간직하셨나요?” “그대가 없으니 단 한번도 사용할 일이 없었다오.” “정말 감사하옵니다. 오늘은 새로운 체위인 ‘원박’을 행할까 하옵니다.” “그 무엇이든 나는 준비가 되었소.” 원박(猿搏)은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잡는다는 뜻이다. 여자가 반듯하게 누워 두 다리를 높이 든다. 사내는 얼굴을 여자를 향해 넓적다리 뒤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들어 여자의 다리를 떠받쳐 두 어깨 위에 멘다(걸친다). 여자의 두 무릎을 가슴 높이에 맞추고 엉덩이와 등을 끌어올린다. 그런 다음 귀두로 음핵을 자극한다. 여자가 천국에 이른 쾌락에 만족하며 진액이 비처럼 쏟아진다. 이때 양물을 깊숙이 삽입하면 형체가 단단하고 꿋꿋하게 굳어지고 여자가 고조에 이른다. 원박 체위는 사내의 어깨로 여자의 두 다리를 메는 것이 특징이다. 여자의 음호가 높이 쳐들려 볼록하게 튀어나오게 할 수 있어 교합을 하는데 편리하다. 여자의 음호 위치가 비교적 낮은 경우 더욱 그 결함을 보완할 수 있다. 만약 여자가 요조숙녀이고 사내가 뚱뚱하면 이 자세를 취하는 것이 참으로 알맞다. 뚱뚱한 사람은 교합 시 배 둘레가 매우 크기 때문에 양물이 음도와 접촉하는 깊이가 깊지 못해 쉽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을 원박 체위가 해결할 수 있다. 여자의 두 다리를 사내가 메는 것은 매우 신선한 동작이다. 다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여자와 교접을 할 때 이 자세를 취한다. 그렇지 않고 물통처럼 짧고 굵은 다리, 코끼리나 쇠다리처럼 둔중한 다리이면 오히려 쾌감이 줄어들고 심지어 3일 동안 구토가 올라올 수도 있다. 발도 작고 백옥 같이 고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곰발처럼 크고 못 생긴 발은 보기만 해도 성욕이 사라지는데 하물며 어깨에 멘다면 더욱 성욕이 감퇴된다. 중복이 되어 왕모의 신궁 입주식이 만백성의 축복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인류가 대지에 정착한 이래 가장 거창하고 장엄한 축제였다. 큰 잔치를 모두 치르자 헌원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게다가 아소와의 즐거운 교합을 통해 기가 더 맑아졌다. 그때 동방삭이 헌원의 거처에 나타났다. “내가 일전에 했던 제안을 고민해보았는가?” “네,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습니다.” “결론이 뭔가?” “곤륜산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동방삭이 헌원의 넓고 시원스런 어깨를 부여잡았다. “잘 생각했네. 자네가 이 곤륜산에 계속 머문다면 앞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네. 아무리 자네 뜻이 아니라지만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가네.” 그러나 헌원은 마음이 착잡했다. “소인이 이곳에서 태어나 그간 일궈놓은 일들을 버리고 떠나려니 너무 아쉽습니다.” “당연하지. 자네가 이곳에서 일궈놓은 것들을 가지고 갈 수는 없으나 자네의 재주는 가지고 갈 수 있네. 그러니 마음을 편히 먹게나.” 다음날 헌원은 옥녀를 찾아갔다. 그녀를 본 옥녀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환대했다. 헌원의 몸과 얼굴이 좋아진 것처럼 옥녀 역시 화색이 돌았다. “왕모님의 존안이 강녕해보이나이다.” 옥녀는 옥좌에서 일어나 헌원을 힘껏 껴안았다. “모두 그대의 은공이니라.” 그런데 그 껴안음이 단지 고마움의 표시 이상이었다. 입에서 암내가 물씬 풍기고, 껴안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밀착시키는 아랫도리가 금방이라도 헌원을 쓰러뜨릴 것 같았다. 옥녀는 헌원을 껴안고는 주위 신하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속삭였다. “이 호화로운 궁궐에서 한바탕 천륜을 즐긴다면 하늘의 신선이 되지 않을까?” 헌원이 머릿속으로 꼽아보니 옥녀와 방사를 나눈 지도 수년이 지났다. 그동안 너무 무정하게 대했다는 미안함이 든다. 얼마 전에 그녀가 실컷 꼬리를 저어댔지만 헌원의 양물이 사그라들어 교접에 실패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 이제 궁궐을 떠나면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날지 알 수 없었다. 헌원은 옥녀의 가슴을 슬그머니 쓰다듬으며 물었다. “십여 년 전 소인과 가위바위보 놀이를 했던 일이 기억나시는지요?” 옥녀는 그때 기억이 떠올라 금세 음문에 애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억이 나고말고. 내 어찌 그때 그 시절의 환희를 잊을쏘냐.” “그 놀이를 다시 한번 하옴이 어떠하신지?” “호홋. 정녕 내 바라던 바로다.” 옥녀가 음탕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그 많던 신하들은 언제 사라졌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시합에서는 옥녀가 이겼다. “내가 진즉부터 하고 싶었던 체위가 있었지. 바로 ‘용번’이라네.” 용번(龍飜)은 용의 뒤집음이라는 뜻이다. 여자가 음핵을 하늘로 향하고 반듯하게 눕는다. 사내는 여자 위에 포개 엎드린다. 살과 살이 접촉되는 면이 넓고 많아 그 어떤 자세보다 친근감이 훨씬 높다. 아울러 여자는 하늘이 감싸주는 포만감에 빠져든다. 음핵은 여자의 음부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음핵을 상실한 여자는 성욕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여자의 성욕을 생산하는 기관이 곧 음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핵의 가파로움은 거대한 돌을 깊은 계곡이 품고 있는 형상이다. 이에 ‘구천일심’을 행하여 종횡무진으로 끌고 당기며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급하며 때로는 깊고 얕게 21차례 출입하면 여자는 쾌락을 얻는다. 사내가 곧바로 그 틈을 치고 찌르면 참늑(磣勒: 전음순)을 높이 들고 요동치는 여자를 취하면서 완급을 조절한다. 양물로 음핵을 공격하면서 손으로 잡아 자궁에 넣어 좌우로 비벼준다. 서둘지 말고 서서히 빼내면 여자는 곧 진액을 쏟아내는데 사내는 물러서되 서두르지 말고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만일 시들어 빼내면 크게 손상을 입게 되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과거 한때 옥녀는 이 여하남상 체위를 거부했으나 지금은 헌원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용번 체위를 행한 것이다. 첫 번째 교접이 끝나자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는 까마득히 잊고 곧바로 다른 체위로 들어갔다. 헌원은 이제 옥녀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옥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젊은 남자와 성교를 나눈다는 기쁨에 두 사람은 온몸의 진이 다 빠질 때까지 새로운 체위를 즐겼다. 여자를 반듯하게 눕힌다. 손으로 두 다리를 들어올린다. 사내는 넓적다리 뒤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런 후 손을 밑으로 뻗어 여자의 허리를 안고 삽입한다. 단혈에서 봉이 노니는 모습이니 단혈봉유(丹穴鳳遊)이다. 여자를 반듯하게 눕히고 사내는 여자의 두 다리를 좌우 어깨에 걸친다. 손을 아래로 뻗어 여자의 허리 부위를 안고 삽입한다. 북해의 봉새가 나래를 펴고 나는 모습이니 현명붕저(玄冥鵬翥)이다. 사내가 두 다리를 벌리고 앉는다. 여자는 그 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사내를 껴안는다. 사내는 한 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받친 자세로 삽입한다. 원숭이가 나무를 껴안고 울부짖는 형상이니 음원포수(吟猿包樹)이다. 사내가 반듯하게 눕고 두 다리를 벌린다. 여자가 사내의 몸 위에 엎드려 양물을 깊이 밀어 넣는다. 그런 후 사내가 자세를 바꾼다. 여자의 등 위에 엎드려 공격한다. 고양이와 쥐가 한 구멍에서 노는 모습이니 묘서동혈(猫鼠同穴)이다. 여자가 당나귀처럼 두 손과 두 다리로 침상을 짚는다. 사내는 여자의 넓적다리 뒤에 서서 허리를 끌어안고 삽입한다. 맹(孟), 중(仲), 계(季)의 삼추에 나귀가 발정한 모습이니 삼춘려(三春驢)이다. 남녀가 함께 등 돌린 자세를 취한다. 두 손을 침상 위에 놓고 엉덩이 부위를 서로 바짝 붙인다. 사내는 머리를 낮게 숙이고 손으로 양물을 집어넣는다. 맹, 중, 계 삼추에 개가 발정나 행하는 모습이니 삼추구(三秋狗)이다. 마른 들판에 모처럼 단비가 내렸고 고인 늪에 생명수가 흘러들었다. 옥녀는 여러 차례의 방사가 끝났음에도 헌원의 맨몸뚱이 옆에 누워 교태스런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은 아직도 시들지 않은 헌원의 양물을 꼭 붙잡고 있었다. 마치 내 곁을 절대 떠나지 말라는 듯이. 그러나 헌원은 준비된 말을 해야 했다. “소인은 이 정든 곤륜산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하였사옵니다.” 청정하게 맑은 하늘에 난데없는 벼락이 치는 격이다. 헌원의 양물을 쥔 옥녀의 손아귀에 순식간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이뇨?” 헌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인은 왕모님 덕분에 여태껏 잘 먹고 잘 살아왔사옵니다. 하오나 제 운명은 여기를 떠나는 것입니다.” 옥녀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행여 그런 소릴랑은 하지 말도록 하라.” “우리의 운우지정은 여기까지인가 하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 헌원은 입을 다물고 눈도 감았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게. 누구냐?” “동방삭이 오셨습니다.” “음. 들라 이르거라.” 옥녀와 헌원은 침실에서 일어나 옷을 갖춰 입었다. “왕모님께서는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보는 바와 같이 사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다네.” 옥녀는 이 시점에 나타난 동방삭이 못마땅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의 복숭아를 훔치려고 온 것이더냐?” 수백 년 전 동방삭이 옥녀의 복숭아를 훔쳐간 적이 있었다. 그가 늙지 않고 언제나 청춘인 것은 그 복숭아 덕분이었다. “하하. 저는 이제 더 이상 복숭아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동방삭은 옥녀와 헌원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헌원이 곤륜산을 떠나기로 한 것은 소인이 권유한 것입니다.” “자넨, 늘 못된 짓거리만 골라하는구먼.” “실은 헌원은 이곳에 머물기엔 수토가 맞지 않습니다.”“수토가 맞지 않으면 피부병이라도 심하게 앓고 있다는 말이냐?” “곤륜산은 호랑이, 곰, 늑대 등의 기운이 가득 차 있는 곳이옵니다. 이런 곳에 용의 기운이 골수까지 스며 있는 헌원이 살기엔 곤란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헌원은 용의 활동 무대로 적합한 소택지(沼澤地)로 가득 찬 저 멀리 중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또 헌원의 재주로 미뤄 볼 때 만약 중원에 진출한다면 그곳에서 패자(覇者)가 되리라 믿습니다. 동왕공(東王公)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밤하늘의 별은 1년에 한 차례씩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은하수 동쪽에 견우가 있고 서쪽에 직녀가 있습죠. 그날이 곧 음기와 양기가 만나는 칠월칠석이옵니다. 음은 암컷이고 양은 수컷이죠. 암수가 만나 무얼 할까요? 천륜을 이행합니다.” “그것은 잘 아는 바요.” “견우가 있으면 마땅히 직녀가 있듯이 동왕공이 있으면 반드시 서왕모가 있어야죠. 곤륜산이 중원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니 왕모님께서 서왕모가 되는 것입니다. 동왕공과 서왕모가 매년 칠월칠석이면 은하수에서 만나 천륜을 즐기면 대지의 생산이 촉진되고 인간 무리가 무럭무럭 늘어날 것이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두 분께 내리는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헌원이 정작 산을 떠나려 결정하고 보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곧 아소였다. 그녀를 두고 떠날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아소는 헌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큰 근심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고민이 있사옵니까?” “아, 아니요.” “저를 속일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얼굴에 근심기가 보이는데요.” “근심이 아니라 오늘밤도 그대와 운우의 정을 나누려면 새로운 체위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 새 체위를 몰라서 그렇소.” “호홋. 그것은 소녀에게 맡기시고 헌원님은 그저 저를 따라오면 됩니다.” 그날 밤 헌원은 마음속의 근심을 깊이 감추고 아소의 손길에 따라 교합을 시작했다. 여자를 반듯하게 눕히고 두 다리를 굽힌다. 사내는 양 다리를 벌리고 여자의 양다리 사이에 쭈그리고 앉는다. 아울러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끼어 두 손으로 허리를 껴안고 양물로 음부를 공격한다. 물총새가 교접하는 동작을 모방하는 자세이니 비취교(翡翠交)이다. 여자를 옆으로 눕히고 양 다리를 들어올린다. 한쪽 다리는 사내의 다리 위에 놓고 사내는 여자를 따라 등에 붙는다. 한쪽 다리는 반쯤 무릎을 꿇고 한쪽 다리는 앞을 밟고 삽입한다. 한 쌍의 원앙이 교접하는 것을 모방한 자세이니 원앙합(鴛鴦合)이다. 사내를 바로 눕히고 양 다리를 뻗어 벌린다. 여자는 얼굴을 마주하고 사내의 위에 앉는다. 아울러 사내의 무릎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양물을 끌어 삽입한다. 나비가 공중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춤추는 형상이니 공번접(空飜蝶)이다. 사내를 반듯하게 눕히고 양 다리를 높이 들어 교차시킨다. 사내가 두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껴안는다. 여자 또한 두 손으로 사내의 허리를 껴안고 삽입한다. 물오리가 공중제비를 등으로 나르는 형상이니 배비부(背飛鳧)이다. 여자를 바로 눕히고 두 다리를 높이 들어 교차한다. 사내는 두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여자 또한 두 손으로 사내의 허리 부위를 안고 삽입한다. 누워 있는 소나무가 동굴을 덮은 모양이니 언개송(堰蓋松)이다. 남녀가 마주 향해 우두커니 선다. 입과 입을 마주하고 포옹하면서 삽입한다. 단상에 대나무가 솟아오른 형상이니 임단죽(臨壇竹)이다. 남녀 둘 중 한 사람이 반듯하게 눕고 한 사람은 엎드려 눕는다. 반듯하게 누운 자는 다리를 굽히고 엎드린 자는 위에서 말 타는 자세를 취해 음부가 서로 맞닿게 한다. 사내는 두 다리를 바로 뻗고 앉아 양물을 밀착시켜 상하를 공격한다. 난새 한 쌍이 춤추는 모습을 본뜬 형상이니 난쌍무(鸞双舞)이다. 여자를 침상 위에 반듯이 눕힌다. 사내는 침상 가에 선다. 여자의 다리를 들어올리고 삽입한다. 바다에서 갈매기가 나는 모습이니 해구상(海鷗翔)이다. 그런데 헌원은 오늘따라 삽입이 여의치 않다. 아소가 아무리 양물을 어르고 달래고 애무해도 발기되지 않고, 발기가 되어도 힘을 쓰지 못한다. “음양 교합은 육체로 하는 것이지만 정신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기가 맑은 하늘에 유유히 떠도는 하얀 구름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혈은 파도가 없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흘러야 합니다. 지금 님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 있으니 기가 창통(暢通)하지 못하고 혈이 거꾸로 흘러 교합이 건성으로 이뤄지고 있답니다.” 아소의 말에 헌원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오.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구려.” “인간은 희로애락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늘 기쁘고 즐거울 수만 없는 법이죠. 그렇지만 마음에 응어리가 맺히면 빨리 풀어야 합니다. 소녀가 처음으로 님에게 섭섭함을 느끼네요. 요즘 사내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못내 안타까워요. 홀로 속을 끙끙 앓지 말고 털어놓으세요.” 헌원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곧 곤륜산을 떠나 중원으로 가기로 결심했다오.” 아소는 헌원의 말이 끝나자 크고 아름다운 눈을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보옥수(寶玉水)처럼 맑은 눈물이 맺혔다. “개구리는 좁은 개울물에서 헤엄치고 돌고래는 만경창파가 넘실대는 드넓은 바다에서 헤엄쳐야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소녀도 벌써 짐작하고 있었사옵니다. 님은 개구리가 아니라 돌고래이니 이 좁은 산속에 머물기엔 너무 아쉽죠. 마땅히 드넓은 중원으로 나아가 원대한 꿈을 펼치셔야 합니다.” 헌원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두 팔에 힘주어 아소를 꼭 껴안았다. “내 꿈도 중요하지만 그대 역시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오. 나는 그대를 버리고 갈 수 없소.” 아소가 헌원의 품안으로 쓰러지며 애절하게 말했다. “소녀도 마찬가지옵니다. 꼭 저를 데리고 가주시기 바랍니다.” 헌원은 아소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아소의 등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사그라들었던 양물이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고민을 털어놓으니 내 양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소.” “어맛! 정말 다행이네요.” 아소는 손을 뻗어 헌원의 양물을 움켜쥔 뒤 중단한 체위를 계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을 새워 풍성한 사랑의 행위를 즐겼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옥녀가 호통을 쳤다. 그러나 헌원과 아소는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한시라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안 된다. 헌원은 원래 세상 사람이니 떠난다 쳐도 아소 너는 이 왕모의 딸이다. 장차 이 궁궐을 물려받아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 “저는 공주나 후계자나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한 소녀로서 사랑하는 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듣기 싫다. 썩 물러가거라.” 두 사람이 물러간 후 옥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아소를 보내주어야 할 것인가? 곤륜산의 궁궐을 물려받는 후계자마저 싫다니! 그토록 헌원이 좋단 말인가? 옥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파랑새가 날아와 물었다. “왕모님. 만일 왕모님이 아소 공주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 내가 만일 아소 공주라면? 그야 당연히.” 그제야 옥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아소 공주라면 모든 것을 뿌리치고 헌원을 따라갈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미의 입장에서 반대를 하다니. 옥녀는 무릎을 한번 치고는 신하에게 명했다. “아소와 헌원을 들라 일러라.” 두 사람이 궁궐에 들어오자 옥녀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떠나거라. 이곳을 떠나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라.”
33    11.矛盾激化(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5797  추천:0  2012-03-22
11. 矛盾激化: 모순격화 헌원에게 고난이 닥치다 옥녀의 지하궁궐에서 서북쪽으로 3,500보를 가면 봇나무, 소나무, 복숭아나무를 비롯해 수천 년을 묵은 여러 나무들이 수림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나무들이 가지를 빼곡히 뻗고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곤륜산 일대에서 가장 심산수림이다. 밀림의 크기는 사방 50리이며 밀림 한가운데에 둘레 천 길이 되는 보옥호수가 있다. 각종 들짐승들이 갈증이 나면 이 보옥호수 물을 들이켠다. 물이 좋은 덕분에 들짐승들은 저마다 눈동자가 빛나고 털이 윤기가 반지르르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10년 전부터 보옥호수 주변 아름드리나무에 100여 개의 커다란 둥지가 생겨났다. 둥지의 주인공은 네 발 달린 들짐승이나 덩치가 큰 조류가 아니다. 사람의 몸에 새의 날개가 달린 반인반조(半人半鳥)들이다. 기이한 것은 그 반인반조들은 단 한 마리의 수컷도 없이 모두 암컷들이다. 이들은 때에 따라 하늘색이었다가 때로는 푸른색으로 변하고 또 때로는 검은색이 되기도 한다. 반인반조들은 새처럼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고 사람처럼 걷기도 한다. 이들의 하는 일이란 매일 하루 종일 무예를 닦는 것이다.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풀 위를 걷고 때로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른다. 활을 쏘아 들짐승을 잡는데 아무리 날랜 호랑이나 빠른 노루도 이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날아다니며 사람의 급소를 가격하는 무예를 연마하여 천하장수인 개명수, 우돌, 육오 등 거인들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무리들이 10년 넘는 세월 동안 활동해 왔으나 이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옥녀와 아신, 파랑새뿐이다.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비밀이 새지 않았을까? 헌원이 태어난 이후 옥녀는 꿈에 용이 자주 나타나 괴롭힘을 당했다. 아신의 간계에 의해 개명수와 우돌을 보내 헌원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후 헌원이 입궁하여 옥녀와 여러 차례 질펀한 방사를 나누었으나 옥녀는 아신의 충고를 잊지 않고 비밀리에 대비책을 세웠다. 헌원이 역모를 꾸밀 일에 대비해 비밀 군대를 만든 것이다. 비록 옥녀가 헌원의 양물에 취해 밤마다 그것을 그리워하고 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의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오직 세 사람만 알고 있었다. 아신은 헌원을 미워하여 여러 차례 이 비밀 군대를 동원해 쥐도새도 모르게 처치해버리려 했으나 번번이 옥녀의 반대에 부딪쳤다. 아직 헌원이 쓸모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신은 신궁이 완성되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앞날을 예측해보니 헌원이 왕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이었다. “이대로 계속 옥녀를 섬기느냐? 아니면 옥녀를 배신하고 헌원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몇날며칠 고민한 끝에 아신은 옥녀를 계속 섬기기로 했다. 설사 헌원에게 간다한들 그가 받아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헌원은 사내다운 사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옥녀와 헌원은 교합에 실패했으나 신궁 잔치는 계속되었다. 인류가 천지개벽이 있은 후 첫 지상궁궐이 등장하면서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천신들과 신선들, 저 멀리 동방에 있는 복희와 여와부부, 신농(염제)과 치우 등 세상의 모든 신들과 반신반인들이 곤륜산에 모였다. 이들은 왕모의 입주식 날까지 보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잔치를 즐겼다. 왕모가 보름의 대축제를 위해 준비한 고기가 숲을 이루고 술은 연못을 이뤘다. 그야말로 주지육림이었다. 1만2천 개의 횃불을 준비해 사방 50리를 비추게 했다. 1,800명의 악사를 불러모아 주악소리가 사방 백리에 울려퍼졌다. 천여 명의 미남미녀들을 모아 장야의 음(長夜之飮)에 장야의 음(長夜之音)으로 축제 분위기를 돋구고 장야의 음(長夜之淫: 난륜)으로 축제를 고조로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이러한 준비를 하느라 옥녀는 몸이 축 늘어졌다. 사실은 일이 과해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헌원과의 방사에 실패한 탓이었다. 옥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쭈그러든 헌원의 양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 뜨거운 몸을 식혀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건만 헌원의 양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옥녀가 퇴짜를 맞은 셈이다. 하늘에 오르는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흥분이 심산계곡으로 추락했다. 옥녀는 실망감과 분노, 슬픔에 겨워 침실로 들어와 쓰러졌다. 잠시 후 누군가 옥녀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아신이옵니다.” “무슨 일이더냐?” “긴히 드릴 말씀이.” “들어오너라.” 옥녀는 침실에서 몸을 일으켜 위엄있는 자세로 앉았다. 신하에게 퇴짜 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신은 들어오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소신의 짐작으로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큰일이 발생할 것이라 사료되옵나이다.” “심상치 않는 큰일이라고? 그게 무엇이더냐?” “헌원이 큰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허나 여왕님께서는 걱정을 붙들어 매십시오. 소신이 그동안 반인반조 군대를 훈련시켜 신궁 주변에 대기해 놓았사옵니다. 여차하면 헌원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겠나이다.” “하하, 역시 자네답네.” 옥녀와 아신이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느닷없이 문이 열리며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개명수, 우돌, 육오였다. 화가 치민 왕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허락도 없이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괴물들이 왕모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거들먹거렸다. 개명수가 비웃듯이 말했다. “여기는 헌원이 지은 신궁입니다. 왕모님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굴러온 돌이 아니겠습니까.” 듣고 있던 아신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우주 만물이 전부 왕모님 것이란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곤륜산 일대의 일초일목이 모두 왕모님의 소유인데 신궁이라고 다를 바가 뭐더냐?” 세 괴물은 힘만 셌지 머리는 아둔하기 그지없었다. 셋 중에서 그나마 재상을 지낸 육오가 조리 있게 말했다. “왕모님께선 신궁을 죄다 둘러보셨겠죠?” 묻는 투가 몹시 괘씸했으나 옥녀는 이들이 왜 이런 망동을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잠자코 대답했다. “내 너희들의 무례함을 도저히 알 수 없구나. 신궁을 둘러본 것이 어쨌단 말이냐?” “신궁이 지하가 아닌 땅 위에 축조된 것은, 왕모님이 기거하는 지하 석실이 왕모님의 자궁을 상징한다면 이 신궁은 남근이 땅 위에 표출된 상징물이옵니다.” 아신은 그 말을 듣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헌원이 역모를 꾀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온 것이었다. 육오가 득의양양해서 계속 열변을 늘여놓았다. “신궁은 비단 외형뿐만 아니라 그 안에도 다리 세 개 달린 까마귀로 치장되어 있고 호랑이가 아닌 용으로 장식되어 있습죠. 아다시피 용은 암컷이 없고 수컷만이 존재합니다.” 옥녀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육오는 상대가 주눅드는 모습에 기세가 등등해졌다. “어디 그뿐인가요, 신궁의 지붕은 남근을 상징하는 삼각형 모양이고 그 위에 꽂은 깃발을 보았습죠? 그 깃발들 모두 철두철미하게 남근을 대변하는 표본이랍니다.” 아신이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냅다 소리를 쳤다. “네 이놈,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구나.” 그러나 세 괴물은 아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기가 충천한 육오가 결정적인 말을 했다. “자, 이젠 결론에 들어가죠. 왕모님께서 이 신궁에 입주하지 못할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지를 벗은 후 우람한 양물을 꺼냈다. “왕모님은 이와 같은 물건이 없는 것이 치명적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남근을 상징하는 신궁에 어떻게 남근이 없는 여인이 주인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아신이 신궁 주변에 배치해놓은 반인반조 군대를 불러들이자는 눈짓을 보냈으나 옥녀는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을 잘 알겠다. 한 가지만 묻겠다. 이 생각은 정녕 무식한 너희들의 생각이냐? 아니면 헌원의 의중이냐?” 세 괴물이 입에 재갈을 문 듯 머뭇거렸다. 옥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 무지막지한 놈들과는 말할 게 못되니 즉시 헌원을 불러들이라.” 파랑새가 포르르 날아가 헌원에게 명을 전했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전혀 모르는 헌원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헌원이 도착하자 세 괴물이 일제히 두 팔을 허공에 올리고 환호성을 올렸다. 어리둥절해하는 헌원에게 아신이 분노를 삭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헌원이 분기탱천해 세 괴물을 개 패듯이 패고 또 팼다. 괴물들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내뱉자 헌원은 옥녀에게 사과의 말을 올렸다. “왕모님께 죄송하고 또 죄송한 일이나 소인의 뜻과 무관한 행위였음을 재삼 맹세 드리나이다. 신궁은 왕모님을 위해 지은 것이니 조금의 의심도 갖지 말아주십시오. 오늘 오후 신시에 열릴 준공식과 보름 뒤에 있을 입주식을 약속대로 추진하겠나이다.” 준공식 다음날 아침 육오가 보이지 않았다. 다리 세 개 달린 파랑새가 헌원에게 소식을 알려주었다. “육오가 아신의 간계에 의해 저승의 염라대왕 먹이가 되었다네.” 천하지존인 왕모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그것도 치명적인 공격으로 왕모의 위상을 바닥에 떨어뜨렸으니 죽어도 마땅하다. 그러나 헌원에게 무서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번 일은 자신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나 언젠가는 왕모와 한바탕 전쟁을 치를 것이 분명했다. “음. 전쟁은 불가피해. 그렇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 주변에는 출모획책(出謀劃策)을 도와줄 참모가 없는 것이 유감이구나.” 헌원은 너무 똑똑하고 출중했기에 참모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런 신하와 영리한 참모가 있어야 하고 온갖 시련도 겪어보아야 했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헌원에게 준공식이 열리고 3일 후 동박삭이 나타났다. “나의 관찰이 틀리지 않다면 자네 요즘 큰 심병에 시달리고 있구먼.” 동방삭의 출현이 헌원에겐 가뭄에 시들어가던 곡식에 단비가 내린 셈이었다. 헌원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아버지가 죽음 직전에 말한 “큰 시련에 부딪치면 꼭 동방삭을 찾거라. 그 분은 틀림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유언이 떠올랐다. “네, 소인은 지금까지 험악한 구곡폭포를 물 따라 헤엄치듯 순탄하게 살아왔습니다. 헌데 요즘 들어 처음으로 큰 시련에 부딪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총명에 의지해 순탄하게 살아왔지, 허나 자네가 갖고 있는 총명과 재질을 언젠가는 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걸세. 그 시점이 바로 요즘이라네.” 헌원이 잘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뭇 백성들이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데 왜 가만두지 않는단 말인가? “그대의 능력이 돋보이면 뭇사람들이 따르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본의 아니게 우두머리로 떠오르게 되지. 그렇게 되면 새로운 권력을 쥐고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게 된다네. 자네는 그럴 생각이 없으나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가지. 이번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이라네. 인류 사회의 질서는 영구불변이 아니라 신생 세력에 의해 바뀌어간다네. 그 과정에서 승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지.” 동방삭의 차분한 설명에 헌원이 하나하나 터득하게 되어 머리를 끄덕였다. “싸움을 피하는 방법은 없는가요?” “싸우지 않으면 구질서가 신질서로 바뀌는 법이 없다네. 하물며 자네는 이미 본의 아니게 왕모에게 무서운 도전의 패를 던지고 말았다네. 자네가 발명한 정자 지붕과 쟁기, 깃발, 신궁 등은 남근 숭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왕모는 매우 불편해하네. 그러나 그것들은 백성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것이네.” “그렇다면 소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동방삭은 헌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네, 왕이 되고 싶지 않는가?” 헌원이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라 크게 놀랐다. “왕이라니요?” “자네는 용의 기운을 듬뿍 타고 났지. 또 창의력이 뛰어나고 통솔력이 훌륭해 왕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네.” 헌원이 머리를 가로 젓고 손사래를 쳤다. “행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왕모가 있는데 어찌 소인이 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때 소름 끼치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다리가 세 개 달린 파랑새가 후드득 날아들어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가 방금 비명횡사했습니다.” 아신의 농간이었다. 아신은 육오를 살해해 헌원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육오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헌원을 해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헌원을 죽이면 파장이 너무 커 뒤를 감당키 어려우리라 짐작되어 일단 멈추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렇게 궁리하다가 아신은 좋은 계략을 떠올렸다. 헌원을 궁궐에서 쫓아내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서는 그의 어미를 죽이면 될 것이었다. 아신은 반조반신 군대를 보내 헌원의 어머니를 죽이게 했다. 그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환을 생각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전해들은 헌원은 분노에 겨워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과 사내들, 노예들까지 모두 불러모았다. 아신과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그가 전술 작전을 모의하고 있을 때 동방삭이 찾아왔다. “우선 자네 모친의 불행에 대해 애도를 표하네.”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을 뿜는 헌원이 천하를 뒤엎을 태세였다. “소인은 왕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으나 아무런 죄가 없는 저의 어머니를 죽임으로 인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동방삭이 긴 한숨을 지었다. “어찌할 셈인가?” “악은 악으로 맞서야죠.” “뒤엎을 겐가?” 헌원은 이를 부드득 갈며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노를 잘 알겠네. 하지만 하나를 맞으면 하나를 갚는 식의 대처는 현명한 방식이 아닐세. 천하를 도모할 대장부는 참을 줄 알아야 더 큰 세상을 얻을 수 있다네. 내가 자네라면 이곳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가겠네.” “이곳을 떠나라고요?” 헌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훌륭한 재주를 이 좁은 곤륜산에서 펼치기엔 무대가 너무 좁네. 나는 일찍이 세상천하를 주유했네. 이 곤륜산은 저 동방의 중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세. 몇날 며칠 말을 타고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옥토도 끝없이 많다네. 그 너머에는 대양이 있어서 가도가도 끝이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지. 그리고 중원은 이곳에 비해 문명이 발달해 있지. 한 가지 유감스런 것은 강력한 우두머리가 없는 점이라네. 만약 자네가 중원에 진출한다면 곧 패자가 되고, 중원을 얻으면 천하를 얻게 될 것이네.” “모친의 원수를 갚지 않고 이곳을 떠나란 말씀입니까?” “두 세력이 붙으면 자네가 분명 이길 걸세. 그러나 양쪽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이네. 사적인 원수는 참고 기다리게나. 하늘이 해결해 줄 것일세.” 헌원의 어머니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소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헌원의 어머니를 죽이다니! 아소는 아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왕모를 찾아갔다. “아신이 헌원의 어머니를 죽였다 하옵니다. 여왕님이 다스리는 이 땅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을 그냥 놔두시렵니까?” 옥녀는 묵묵히 딸의 말을 들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여봐라. 아신을 붙잡아 들여라.” 호위병들이 우르르 몰려가 아신을 오랏줄로 꽁꽁 묶어 궁으로 데려왔다. “소신은 오직 왕모님께 충성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신궁의 잔칫날에 육오가 벌인 발칙한 행동을 잊으셨나이까?” “그것은 헌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 않느냐? 그리고 헌원의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옥녀는 그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싶었으나 결자해지를 위해 아신을 헌원에게 보냈다. 죽이든 살리든 땅에 생매장을 하든 구곡폭포에 수장을 시키든 알아서 하라는 처사였다. 동방삭의 예측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헌원은 아신을 한참 노려보다가 그가 측은한 생각이 들어 풀어주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신하가 반대했다. “사람을 죽인 자를 살려두면 이후에도 살인이 빈번할 것입니다.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인간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결국 헌원은 그를 죽이기로 했다. 산 채로 가죽포대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내는 형벌이었다. 헌원이 아신을 처리한 이 방법에 의해 세상에 또 하나의 규칙이 생겨났다. 바로 ‘법(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죄인을 강물(氵)에 띄워 보내는(去) 관습에 의해 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신이 물귀신이 되어 사라지자 천하가 고요하고 평화로워졌다.
32    신규입국제도 재검토 필요 댓글:  조회:4967  추천:4  2012-03-17
신규입국제도 재검토 필요 동포기술교육 3월 19일 개강 접수자 700명밖에 안 돼, 하반기 H-2도 입국 저조할 듯, 한국업체들 인력난 우려 지난해 법무부가 시행한 중국동포신규입국신청자가 24만 명, 그 중 제일차 추첨 시 H-2 3만 명, 기술교육생 1만 2천명이 당첨되었고 H-2는 2012년 하반 년부터 입국케 하고 기술교육생은 1월부터 단계적으로 월 2,000명이 입국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2월 6일 첫 기술교육개강에 612명 접수되었고 오는 3월 19일 제2차 개강에 3월 14일 현재 등록접수자가 700명밖에 안 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신규입국제도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 동포사회의 반응이다. 본지는 중국현지여행사에 위탁하여 입국저조 이유를 알아보았다. -입국규제자가 포함 24만 명의 신청자 중 4만 2천명이 당첨되는 데 명단이 올랐다면 마치 로또에 당첨된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과거 여러 가지 이유로 불법체류 하다가 단속에 걸려 입국규제가 되어 있어 기쁨도 잠시 비자가 기각될 것이 빤한 일이기에 사증발급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연길시 이모 여인(39세)은 4년 전 강제퇴거 되어 귀국한 자이다. 기술교육 대상자에 당첨되어 여행사를 찾아 비자신청을 알아보았더니 이모 여인과 같이 입국규제가 되어 있는 사람은 비자가 불허된다는 맹랑한 소식을 들었다. 이모 여인과 처지가 같은 자가 꽤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현지 여행사들의 말이다. 또 과거 위명여권사용경력이 있는 자는 기술교육 대상자에 포함되었더라도 금년 1월 1일부터 한국의 공·항만에서 지문인식을 실시하여 입국불허 되고 있다는 소식에 의해 출국을 망설이는 자도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일단 비자를 받아놓고 보자 신규입국신청자 중 중국에서 직업이 괜찮은 젊은이거나 가정생활형편이 좋은 자녀들이 꽤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한국에 오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몰라 일단 한국행 비자를 받아놓고 보자는 심산으로 신청했다. 그래서 비자를 받고 나서도 서두르지 않고 있다. 용정이 고향인 장모(28세)는 천진에 있는 한국기업에 근무하고 있고 월 3천5백 위안을 받고 있어 여유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쪼들리는 것도 아니어서 기술교육 대상자에 당첨되었는데도 한국행을 미루고 있다. -돈이 없어 출국 못하고 있다. 기술교육시간은 과거 6개월에서 현재 6주로 줄었지만 당사자들한테는 부담이 준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6개월 교육시기엔 평일에 일을 하여 돈을 벌고 주말에 공부하였기에 경제적인 부담이 적었지만 현재는 평일에 몰아서 공부하기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하고 공부만 해야 한다. 입국비용, 학비, 생활비 게다가 취업교육이 끝난 후 취직이 가능하기 때문에 출국 시 적어도 300만 내지 3백5십 만원을 들고 와야 하기 때문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가정생활 형편이 괜찮거나 한국에 가족 혹은 가까운 친인척이 있는 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동포는 돈 때문에 입국 못하고 있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신청하지 않았는데도 당첨되었다. 본인은 신청한 적이 없는데 당첨되었으니 해당비용을 납부하고 출국을 서두라는 어처구니없는 통보를 받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 현지 여행사의 말이다. 상기 여러 가지 이유로 현재 기술교육 대상자의 입국상황이 저조한 것을 미루어 보아 하반 년 H-2 당첨자 입국도 역시 저조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렇게 되면 신규입국제도가 실효성이 떨어져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말경부터 H-2 5년 만기가 도래하여 해마다 7~8만 명의 동포가 출국해야 하고 그 빈자리를 신규입국으로 메우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고 따라서 한국 업체들에서 인력난을 심하게 겪을 것으로 짐작된다.
31    춘절문화 알아보기 댓글:  조회:7649  추천:1  2012-01-17
   춘절은 중국 전통 4대 명절(청명, 단오, 중추, 춘절) 중 가장 큰 명절로서 춘절문화가 굉장히 복잡하고 잡다하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두 가지 문화만 살펴보기로 하자. 춘절이면 집집마다 대문에 '복(福)'자를 붙이는 풍습이 있다. ‘복(福)’은 본래 제사음식을 뜻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제사음식이 ‘복(福)’이라니? 어찌된 영문일까? 상고시대 원시인은 생존환경이 굉장히 열악했기 때문에 큰일은 물론이고 일상소사에도 제사를 올리고 길흉화복을 점쳤다. 그러므로 원시인류에게 있어서 제사야말로 가장 큰 일이였다. 이런 삶의 형태는 은나라 때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주나라 때까지도 제사음식이 빈부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쉽게 말하자면 제사음식이 풍성하면 조상과 후대가 복을 받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복이 없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복(福)’자를 붙이는 풍습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의해 유래되었다. 강태공이 봉신(封神) 시 각 파의 신선을 타당하게 배분하였다. 그런데 그의 못 생긴 아내가 신위(신위) 한 자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강태공이 궁여지책 끝에 “당신이 나한테 시집 와서 가난하게 지냈으니 ‘궁신(窮神)’으로 봉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면서 신위를 주었다. 아울러 아내한테 무릇 ‘복(福)’자가 붙어 있는 곳을 가지 못하게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백성들은 ‘복(福)’자를 붙이고 폭죽을 터뜨려 ‘궁신(窮神)을 몰아내게 되었다. ‘복(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유래는 이렇다. 주원장이 ‘복(福)’자를 암호로 사람을 죽이려 하자 맘씨가 착한 마황후가 재난을 피하게 하려고 집집마다 ‘복(福)’자를 붙이라고 명했다. 그런데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백성 중에 ’복(福)‘자를 대문에 거꾸로 붙여 놓았다. 황제가 그것을 목격하고 대노하여 황후가 “거꾸로 붙인 것은 복이 왔다(福倒를 福到로 해석하였음)는 것을 의미하니 상서로운 일이옵니다.”라고 설명하여 황제가 굉장히 만족해하였다. 다음 춘절이면 오동통한 남아가 풍만한 잉어를 안고 있거나 각종 잉어의 연화(年畵)를 방 안의 벽에 붙이거나 걸어놓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원시인류는 질병에 죽고, 자연재해에 죽고, 전쟁에 죽고 해서 생존율이 3할 이하였다. 부족의 생존을 도모하려면 후대번식이 급선무였다. 후대번식은 아이를 많이 낳는 다산으로 해결해야 한다. 물고기는 동물 중 알을 많이 생산하여 다산의 상징이다. 원시인류는 물고기를 다산의 숭배대상으로 삼고 제사를 지냈고 그 신력을 빌어 후대번식을 기원하였다. 아울러 포개놓은 두 마리 잉어가 외형상 여음과 비슷하여 더욱 풍요다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잉어와 관련된 모든 연화는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춘절이면 ‘年年有餘’란 글귀를 흔히 볼 수 있고 또 춘절을 전후하여 중국인은 인사말로 ‘年年有餘’란 말을 곧잘 하는데 먼 옛적엔 ‘年年有餘’가 아니라 ‘年年有漁’였다. 그러니까 ‘yu’의 글자는 본래 남을 ‘餘’가 아니라 물고기 ‘漁’였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漁’는 풍요다산의 상징물로서 연중 가장 큰 명절인 춘절에 연화로 잉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참고로 황후가 타는 가마를 ‘漁駕’, 연애편지를 ‘漁書’라 하는데 ‘漁’가 붙은 어휘는 여자와 관련되며 따라서 생산성과 관련된다. 역사가 흐르고 흘러 종교의식이 퇴화됨에 따라 ‘年年有漁는 해마다 여유롭다는 ‘年年有餘’로 변화되었다.
30    성과 씨의 구분 댓글:  조회:7597  추천:34  2010-01-09
성과 씨의 구분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안재을의 중편소설 <정걸세계에로(도라지 2005.9~10)>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박주국과 류씨 사이에 자식이라곤 수향이라고 부르는 딸애가 하나뿐인데 그마저 벙어리다. 수향이는 시집갈 나이가 꽉 찼지만 벙어리인 탓에 마땅한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마누라를 한국에 보내고 홀아비신세로 살고 있는 철민이와 남몰래 재미를 보고 임신한다. 수향이는 배가 불어가게 되자 임신사실을 숨길 수가 없지만 아이아버지가 누구라는 것만은 한사코 비밀에 붙인다. 류씨는 처녀가 임신한 것도 그렇거니와 애비가 불분명한 애를 어떻게 세상 빛을 보게 할 수 있느냐며 떨어버리라고 닦달한다. 허나 주국의 생각은 달랐다. 다 익은 과일이 따먹는 임자가 없이 저절로 땅에 떨어져 썩어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손주를 안아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면서 기어코 낳아 기르겠다고 고집부리는 딸애에게 뒷심이 되어준다. 수향이는 방치돌 같은 아들을 낳는다. 철민이는 슬그머니 아이이름을 광(光)이라 지으라고 수향이한테 일러준다. 그리하여 아이가 이름이 있게 되었으나 성이 문제였다. 주국이는 마치 집집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멋대로 이름을 짓듯이 외손주의 성을 지어주기로 하고 인근마을에 없는 ‘나갈 진(進)’을 선택했다. ‘진광’. 안재을 씨는 이 이야기를 개괄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이렇게 진명촌 밀양 박씨네 집에서 조선족 씨족사에 없는 나갈 진씨가 발족되었다. 참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 여기서 ‘조선족 씨족사’라는 말에 상당한 어폐가 있다. 만약 문학에서는 성과 씨의 구분이 없이 혼동하여 써도 문제가 없다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문학도 상식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왜 어폐가 있는가를 말해 보려한다. 조선민족의 성씨는 중국 성씨문화를 본 따 사용해왔기 때문에 먼저 중국의 성씨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朱駿聲의 <<說文通訓定聲)에 의하면 “성이란 것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나타낸다. 女라는 글자와 生이란 글자로 분해되는데 회의자다. 이때 물론 生을 聲字로 볼 수 있다. 옛날의 신령스러운 성인들은 모두 그 어미가 하늘에 감하여 아기를 낳아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칭하여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하는 것이다. <春秋>隱公8년조에 좌씨가 단 주해에 이르기를 ‘하늘의 아들이 덕을 세울 때 그 태어난 바를 따라서 성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건대 신농의 어미가 姜水에서 살았고, 黃帝의 어미가 姬水애서 살았고, 舜의 어미가 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어미가 산 지명을 따서 그 성을 삼았다. 그러므로 성이란 어미의 생한 바를 따르는 것이다.” 성이 어미가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면 씨도 역시 마찬가지로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 이에 관해선 <<通志·氏族略序>>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삼대(夏商周)에 성과 씨를 구분하였다가 漢代부터 성과 씨의 구분이 없어진다. <<통지·씨족약서>>에 의하면 “삼대 이전에는 성과 씨를 둘로 나누고 귀한 자는 씨가 있고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그러므로 성을 씨라 부를 수는 있으나 씨는 성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성과 씨의 구분을 없애고 혼동하여 썼다(姓氏之稱,自太史公始混而爲一). 허나 성과 씨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예하면 ‘복희는 성이 풍씨였다.’를 결코 ‘복희는 씨가 풍성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뿐 결코 성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민족의 성씨는 중국성씨문화를 본따서 사용해왔지만 중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한족들은 조적 혹은 적관이 있기는 하나 조선민족의 본관과는 개념이 다르다. 한족들이 말하는 조적 혹은 적관은 조상들의 고향을 의미할 뿐 조선민족처럼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식으로 ‘무슨 왕씨’ ‘무슨 진씨’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족은 한고향이라는 향토의식이 뿌리 깊지만 조선민족처럼 초면인데도 본이 같다고 해서 벌을 따져보고 환갑이 넘은 노인이 새파란 젊은이를 삼촌벌이나 형님벌이 된다고 당장에서 깎듯이 대하면서 친척을 만났다고 기뻐하는(한국에서 아직까지 이런 기풍이 심하다) 등 유사한 행위가 없다. 조선민족은 이 본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지배하고 있어 씨를 붙이기를 좋아하며 성문화를 성씨문화라 하거나 상대의 성을 물을 경우 ‘성씨가 무엇인가?’ ‘성씨를 어떻게 쓰는가?’하면서 씨를 붙인다. 한족은 상대의 성을 물을 경우 씨를 붙이지 않으며 대답하는 사람도 자신의 성에 씨를 붙이지 않는다. 조선민족이 성에다 씨를 붙여 ‘최씨’ ‘김씨’라 부르거나 본관에 씨를 붙여 ‘밀양 박씨’ ‘김해 김씨’라고 부를 경우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붙이는 것이지 결코 씨가 성을 대체하거나 본관을 대체하지 않는다. 현재 중국조선족은 대다수가 성과 씨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또 본이란 무엇인지 모르며 아울러 씨를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인이 조선족을 만나 대화할 경우 거개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화룡, 왕청’이라 대답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허나 한국인이 묻는 것은 조상의 고향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니 할아버지(조상을 뜻함) 고향이 어디냐?”고 하면 절대다수가 “모름다.”고 대답한다. “그럼 본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아무리 나 어린 애들마저도 본을 모르는 조선족은 하나도 없다. “그 본이 곧 조상의 고향이자 당신들의 고향이요.”라고 말해주면 “우린 그런 걸 모름다.”고 툭 쏜다.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은 자신이 밀양 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밀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상대가 성을 물으면 ‘경주 최씨’ ‘전주 이씨’라고 대답한다. 혹은 초면에 인사 나룰 때 자신의 성에다 씨를 붙여 통성명한다. 남들 앞에서 ‘우리 최씨네는 여자들이 드살이 세다.’하거나 집안끼리 모여 ‘우리 선산 김씨는 술을 잘 마신다.’는 등 자기네절로 성이나 본에다 씨를 붙여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성 혹은 본에다 씨를 붙이는 것은 대단히 실례이다. 왜냐하면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사용해선 안 된다. 만약 자신에게 씨를 붙이면 자기 스스로 높이고 존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할 때 절대 씨를 붙이지 말고 ‘김가’ ‘최가’ 혹은 ‘밀양 박가’ ‘전주 이가’라 말해야 한다. 모두어말하자면 씨는 상대를 높이는 존칭이지 결코 성이 아니며 성을 대체할 수도 없다. 때문에 성과 씨, 본과 씨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할 때 될 수 있는 한 씨를 붙이지 말고 그냥 ‘김가’ ‘최가’라 하는 것이 합당하다. 만약 새로운 성이 나타나면 마땅히 객간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조선족 성씨역사에 없는 새로운 0가가 발족되었다.’고 말해야지 안재을 씨처럼 ‘조선족 씨족사에 없는 진씨가 발족되었다.’고 말한다면 상식에 어긋난다. 한 가지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중한일 동양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씨란 말은 원시 씨족사회를 지칭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라는데 대해선 더 의논의 여지가 없다. 중국학자들의 연구(오천명저, 중국신화연구)에 의하면 은상시대까지 중국(중국이란 국호는 3천 년 전 주나라 초기에 생겨났음)에는 2만 여개 씨족이 있었는데 각기 자기네 씨족명칭에 따라 성을 붙이게 되었다(華胥氏란 화서는 성이자 씨족명칭이다). 그러다가 주초에 분봉제와 정전제의 의해 華之諸族과 夏之諸族이 융합되어 화하족으로 통합됨에 따라 씨족이 부족으로 부족이 민족으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본래 혈통을 중심으로 되어 있던 씨족 관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의 통일국면을 맞게 됨에 따라 부족관념이 거의 사라졌고 또 漢代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통일중앙집권제가 확실하게 자리매김 되었고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함에 따라 본래 화하족이 한족(한족은 수만 갈래 혈통이 문화를 토대로 묶어진 민족임. 민족이란 개념은 혈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를 공통분모로 이루어진 집단공동체이다.)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대통합되었고 또 한족이란 통합민족 개념의 등장에 따라 주초 2만여 개 성씨가 대략 470여 개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백성이란 사회밑바닥에 있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굳어져왔는데 이는 성과 씨의 구분, 즉 성은 혈통을 의미하고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이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절대 ‘百氏’라 말할 수 없다. 중국은 역사기재가 가장 유구하고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벽하기 때문에 중국인의 씨족, 부족, 민족역사에 대해서 일단 파고들면 일복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민족은 역사기재가 형편없이 부재하기 때문에 자민족사를 연구하려면 엄청 힘들다. 예하면 한국역사교재나 통사류의 서적이거나 전문 서적을 뒤적거려보면 한반도 상고사에 관해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조선민족 씨족사에 관해선 도통 알 수가 없다.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되는 고조선사는 씨족이 아닌 부족사회부터이다. 그리고 삼한(변한, 진한, 마한)의 역사도 대충 78개 부족국가였다는 것과 민속 풍속을 서술하고 있으나 이러한 史實은 전부 중국고전 위서, 한서, 북서, 양서, 당서 등의 기재를 베껴온 것들이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씨족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씨족사란 말의 사용을 삼가라는 뜻이고 더욱이 씨족사가 결코 성씨사가 아니며 양자를 혼동하지 말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이 본격적으로 성씨문화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조선조 중후기의 일이기 때문에 씨족사란 말은 상당한 어폐가 있으며 가령 성씨역사, 성씨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에도 우리 머리에는 반드시 씨가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도 이 글에서 성에다 씨를 붙여 성씨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것은 조선민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29    중국인이 정확함(精確度)을 무시하는 이유 댓글:  조회:9974  추천:49  2009-12-25
중국인이 정확함(精確度)을 무시하는 이유 김정룡  100년 전 미국선교사 아더·스미스는 산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에서 22년을 생활하면서중국인의 인상에 대해 <<중국인의 소질(원제 지나인의 기질)>>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된 후 서구 여러 나라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반응이 좋았다. 이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당시까지 구미의 대중(對中) 전문가들이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하고 책을 많이 출간했으나, 아더·스미스가 최초로 중국인이 정확함을 무시한다고 지적해 중국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더. 스미스는 이 책에서 “중국인은 매사에 있어서 ‘차뿌둬(差不多:차이가많지 않다. 한국어 괜찮다와 비슷하다는 뜻.)’라는 말을 매우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표현이다.”라고 지적했다.  ‘차뿌둬’는 일상생활에서 차이가 많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됐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차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됐다는 뜻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웬만큼 차이는 따질 필요 없이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쏴라 쏴라! 짱꼴라(算啦�啦中國人)’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쏴라 쏴라’는 웬만하고 어지간한 일은 따지지 않고 “됐어, 됐어!” 라는 의미이다. 중국인은 일상생활에서 “쏴라 쏴라, 차뿌둬 쥬씽라(算啦�啦 差不多, 就行啦!”는 말을 많이 쓰는데, 확실히 아더·스미스의 지적한바와같이 중국인은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아더·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설명했다, 즉 중국인은 상대가 나이를 물을 경우 똑 부러지게 정확한 나이를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이 먼저 물어온 상대에게 얼마 되어 보이는 가고 되묻는다. 그리고 나서 겨우 하는 대답이 “불혹의 나이요, 환갑이 지났소, 고희에 가갑지요.”라고 대충 나이를 말한다. 노인들은 흔히 61세이면서도 “올해 60~70 먹었어요.”라고 나이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국인은 일반 사물에 대해 정확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자적인 것에까지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렇지만 남이 나의 흉을 보면 용납 못하듯이 중국지식인들은 아더·스미스의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지적하자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이청조(李淸照)는 “아더·스미스는 중국인에 대해 유(流)만 말했을뿐 원(源)을 짚지 못했으니, 편견이다.”라고 비판하고 나서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모든 사물을 머리로 따지지 않고 맘으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인의 정신>>의 저자인 고홍명(辜鴻銘)은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심령미를 추구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중국인이 사물에 대한 태도, 분석, 처리 등 다각도로 종합해 보면 “중국문명은 두뇌의 문명이 아니라 맘의 문명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싶다.  맘의 문명이란 곧 정(情)의 문명이다. 그러므로 중국문명은 곧 정의 문명이다. 이 면에 있어서 조선반도도 중국인처럼 마찬가지로 정의 문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정이 많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중국인처럼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대충대충, 어지간히, 건성건성,’과 ‘괜찮아’가 정확성을 무시하는 증거들이다.
28    명분과 예의 댓글:  조회:6525  추천:30  2009-10-16
명분과 예의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을 것이다. 명분을 알고 보면 일종 체면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우리민족은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 민족이므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명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중국역사에서 부권제사회의 확립에 따라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 또는 소유의 대상이 된 뒤로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마치 음식이나 재물을 나누듯이 일정한 계획과 방식에 따라 여자를 분배하였다. 그러한 분배의 근거를 ‘명(名)’이라 하고, 분배의 규칙을 ‘예(禮)’라고 하였다. ‘명’은 ‘명분’의 의미이며 ‘이름’에 따라 나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면 ‘명분’이란 곧 지위라고도 할 수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많이 차지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적게 차지하거나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인 것이다.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음식이나 재물이나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를 분배할 때에도 이런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지위가 있는 권력자들은 백성들보다 여자를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명분을 만들어 냈다. 예기(禮器) 중의 하나가 옥으로 만든 ‘규(圭)’인데 그 모양이 마치 남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규의 크기는 지위에 따라서 달랐다. 천자의 것은 ‘진규(鎭圭)’라 하고 길이가 한 자 두 치였다. 공작(公爵)의 것은 ‘환규(桓圭)’로 길이는 아홉 치이고, 후작(侯爵)의 것은 ‘신규(信圭)’로 길이는 일곱 치였다. 그리고 백작(伯爵)의 것은 ‘궁규(躬圭)’로 다섯 치였다. 이는 남자가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남근도 크고 거꾸로 지위가 낮으면 낮을수록 남근도 작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남근의 크기에 따라 여자를 차지하는 것도 달라야 한다. 백성들의 남근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여자를 여럿 거느릴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례(周禮)>>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천자는 1명의 왕후와 3명의 부인, 9명의 빈(嬪), 27명의 세부(世婦), 81명의 어처(御妻)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제후는 다만 1명의 부인과 9명의 빈, 대부는 1명의 아내와 2명의 첩, 사(士)는 1처1첩, 백성은 한 명의 처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통사회의 명분과 예의는 모든 분야에서 등급과 상하 질서를 정해 놓고 존귀비천(尊貴卑賤)을 적용해 놓았다. 이를테면 대종은 존귀하고 소종은 비천하고, 양반은 존귀하고 상인(常人)은 비천하고,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고, 처는 존귀하고 첩은 비천하고, 적자는 존귀하고 서자는 비천하고 ······ 등등이다. 전통사회에서 뭐니 뭐니 해도 명분이 가장 불합리했던 것이 바로 인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비천한 존재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녀유별’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등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명분이란 결국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이 없는 자와 약한 자들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였다. 우리민족은 조선조 500년을 통해 유교를 본산지인 중국보다 뼈가 절도록 받아들인 데는 명분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에 없는 명분을 만들어 사회질서를 더욱 세분화했다. 예하면 중국에서는 무릇 양민이면 전부 과거급제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던데 비해, 조선은 양반가문만 그것도 서자는 안 되고 적자만 응시자격을 갖게끔 법으로 규정했다. 이는 극소수 양반과 그들의 적통(嫡統)들만 권력과 학문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27    한반도에 세계적인 석학이 없는 이유 댓글:  조회:6443  추천:49  2009-04-29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유태인이 가장 총명하고 그 다음으로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참말로 그럴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한민족과 유태인의 공통점이라면 두 민족이 주변 국가와 민족들로부터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는 동네북과 같은 불운의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일 뿐, 한민족은 유태인처럼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 사건도 없었고, 국제적으로 명함을 올릴만한 인물조차 없다. 우선 유태인은 세계를 뒤흔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예수라는 인물을 배출했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와 칼`맑스, 막스`베버, 니체 등 세계적인 사상가 및 미국정치, 금융, 언론을 장악한 위대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이에 반해 한민족은 말로는 반만년의 문화역사를 갖고 있고 유태인에 비견해서 자화자찬하지만 실상은 과학과 문학분야의 노벨상수상자가 단 한 명이라도 없을 뿐더러 국제적으로 명함을 내밀만한 석학조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름 있는 유태인을 제쳐놓고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노벨과학상과 문학상수상자가 수두룩한데 유독 우리민족만 제로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가 있는 민족과 종교가 없는 민족> 인류문화를 논함에 있어서 종교를 떠나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인류역사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따라서 자체종교가 있는 민족은 정체성과 주체성이 뚜렷한데 반해 자체종교가 없는 민족은 정체성과 주체성이 희미하다. 세계 3대종교로 꼽히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가운데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두 유태교에서 파생되어 생겨났을만큼 유태교는 뿌리가 굳건하며 유태인은 유태교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유태인답게 만들어왔고 살아올 수가 있었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태인의 지혜를 탈무드지혜라고도 하는데 탈무드는 유태종교의 핵심인 율법을 풀어 쓴 유태인의 삶의 지침서이다. 그래서 유태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태인의 총명과 지혜는 탈무드에서 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멀리 말고 이웃나라인 중국은 4천년의 문자역사와 사대발명과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할만한 문화가 뚜렷하며 특히 유교와 도교는 중국인을 중국인답게 만든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양대 문화이다. 아울러 중국인은 후한 말에 불교 를 도입하여 도교식 불교로 만들었는데 이를 격의불교라 한다. 중국은 불교의 도입에 따라 언어를 발달시켰고, 변문을 통해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전했고 유교와 도교와 어울려 중국인의 삶을 풍부케 했다. 일본은 자체종교인 신도가 있고 일본인의 인간타입은 신도적이라는 지적이 이미 8세기 초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 밝혀졌다. <문명이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 세계문명을 크게는 중국문명, 인도문명, 기독교적인 서방문명 등 세 가지로 나누고(이는 양숙흘의 나눔법이다), 작게는 유교문명, 불교문명, 기독교문명, 이슬람문명, 유태문명, 아프리카문명, 남미문영, 일본문명 등으로 나눈다. 과거에는 일본을 유교문명권인 중국문명에 포함시켰다가 미국 인류문화학자 루드`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이란 책을 출간해낸 이후부터 서방에서 일본을 중국문명과 분리해서 단독문명으로 취급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 문명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한 문명이 물어야 할 것은 고층빌딩의 건립이나 도로건설이나 대학설립이 아니라 그 문명이 형성시킨 인간타입이다.” 이는 고홍명이 그의 <<중국인의 정신>>에서 밝힌 대목이다. 물론 고홍명은 서양문화의 병폐를 꼬집고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한 말이지만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다는 말은 진리라 나는 생각한다.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는 견지에서 볼 때 한민족도 필경 중국인과 일본인과 구분되는 자체인간타입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아울러 한민족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자체 종교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문명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풍류도이고 신라시대 화랑도였으며 통속적으로 말해서 바람문화였다. 단재`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화랑을 모르고 조선민족을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처럼 우둔한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화랑도야말로 우리민족의 인간타입을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사실 고려 중기까지만해도 우리민족은 자체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자체문화가 뚜렷했다. 그러다가 신채호의 지적처럼 “국수파인 묘청집단을 숭송파인 김부식집단이 쓸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것을 잃기 시작했고,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신유학 외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조선반도는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고 우리 것을 철저히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조 초기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민간에 흝어져 있는 민속, 풍속을 수집해 들이라고 명하였으나 그 후 유교일변도로 번지면서 민속, 풍속을 유교에 위배되는 이단이라 취급하고 전부 없애버려 현재까지도 우리민족자체인간타입을 형성시킨 문화뿌리를 캐낼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직된 조선조는 희망이 없었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유학자들이 학문을 독점했고, 심지어 가령 누가 도교서를 번역작업시도를 하려고 해도 이단으로 몰아부치고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고 조정으로부터 민중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부 유교패턴으로 도배될 정도로 유교단일화로 되었다. 거기다 조정은 왜군의 침입을 눈앞에 두고도 당파싸움에 휘말렸고, 명과 청의 교체시기에 만주족을 배척하고 명을 받들고 소중화로 자칭할 정도로 공자왈 맹자왈에 빠져 있었다. 더욱이 고려 말까지 개성을 비롯해 상업이 발달해 주변국은 물론이고 멀리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드나들 정도로 대외교역이 활발했으나 조선조는 유교에 빠져 사농공상의 서열을 철저히 지키면서 상업을 경시하는 바람이 불어 대외교역은 물론이고 국내 상업이 얼어붙어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고단하게 되었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1860년대에 이르러 만주땅에 이주하는 바람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정은 무능하다못해 동학혁명을 진압하지 못해 청군의 요청을 바랐고, 이것이 기회라 엿본 일본이 끼어들어 중일갑오전쟁이 발발했고,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사유람단> 16세기 포루투갈과 에스빠냐가 대외식민지 개척에 나설 때 일본은 위기를 느끼고 1580년대 초 소년견구단을 유럽해 파견했다. 그들이 8년 간의 학업을 마치고 세계지도를 작성해 풍신수길에게 바쳤는데 풍신수길은 그 세계지도를 보고 조선과 중국침략의 야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은 많은 유학생을 서구에 파견하였고 서구문명을 수입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켰고 1868년에 이르러 명치유신을 통해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과거 일본이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던 시기는 옛말이 되었고 꺼꾸로 중국이 일본을 배우러 떼를 지어 갈 정도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겪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1860년대에 이르러 구미에 소년유학생과 성인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엄복은 과학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을 중국에 전파했고 서구사상을 중국에 전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유학생들은 구미 데모크라스와 사이언스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인문분야에서는 고홍명은 9개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정도였고 최초로 <<논어>>를 서양에 번역전파했으며 서구문명을 비평하고 중국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중국인의 정신>>이란 책을 써 서구를 놀라게 했으며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다.”는 이론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고홍명의 뒤를 이어 임어당은 <<중국인>>, <<생활의 발견>>등 저서를 통해 서구문명을 비평하고 중국문명을 서구인들에게 정확히 인식하게끔 하는데 정력을 몰두했다. 고홍명과 임어당은 구미에서 생활하면서도 종래로 양복을 입지 않았고 줄곧 중국 전통복장인 다부산자를 입고 살아왔다. 임어당은 제2차 세계대전기간 노벨상이 중단을 맞는 바람에 노벨상수상기회를 놓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석학이다. 임어당과 동시대에 양숙흘은 <<동서양철학과 문명비교>>를 통해 세계문명을 새롭게 포괄적으로 진단해냈다. 채원배, 호적등은 소장파학자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고 강유위, 양계초 등도 서구에서 인정하는 대학자들이었다. 일본유학을 거친 노신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문인이다. 자아, 일본은 중국보다 한발 앞서 개화했고, 중국은 비록 일본보다 뒤졌지만 그래도 중국적인 것을 지키면서 서양 것을 도입하는 작업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을 많이 배출해냈다. 허나 조선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미국과 일본에 유학생을 보냈으나 그들은 거기서 뭘 어떻게 배워야할지를 몰라 놀다가 귀국했다고 해서 그들을 신사유람단이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에 못간다> 어떻게 일이 있었을까? 우리말 속담에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에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무슨 말이냐! 과거 중국학자들은 학자라면 유불도에 모두 정통했다. 주자는 본래 도학에 심취해 있다가 불학에 흥미를 느꼈고 급기야 구국처방으로 내놓은 것이 신유학이었듯이 중국학자들은 모두 주희처럼 세 가지 학문에 통달한 사람들이다. 이는 한 가지 학문만 고집하고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학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머리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중국 학자들은 구미에서 새로운 학문을 접촉하고 접목하기가 쉬웠고 아울러 문명비평가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도 에도시대에 낮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밤에는 양명학을 학습하는 이른바 “주주야명”을 견지하므로써 다른 학문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머리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반해 조선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우리 것을 전부 잃어버리고 주자학 하나에만 매달리다 보니 마음과 머리가 경직될 대로 경직되어 개화기 구미나 일본에 막상 가보니 마치 도랑물 고기가 망망대해를 만나 어떻게 헤염치고 어떻게 적응하고 바닷물 고기들의 장점을 어떻게 배워야할지를 몰라 그냥 죽어버리거나 도랑물이 그리워 되돌아는 격이 되고 마는 꼴과 같았다. <문화의 단절> 역사란 흐름이다. 마치 물이 발원지에서 발원하여 강을 이루고 바다에 흘러가듯이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우회곡절을 겪는다. 이 지구상의 모든 부족과 민족은 초창기에는 모두 자체인간타입을 형성시킨 문화내지 문명이 있었다. 하지만 물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듯이 문화내지 문명은 강하고 우수한 것이 약하고 낙후된 곳에 흘러들어 본문화내지 본문명을 파괴하며 소실되게 만든다. 이것이 인류문명의 역사흐름이며 본문화내지 본문명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것을 문화 혹은 문명의 단절이라 한다. 서구는 본래 찬란한 고대그리스와 로마문명이 있었는데 기독교 유입에 따라 천년 동안 신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를 맞아 문명이 단절시기를 겪다가 오늘의 서구가 있기까지는 많은 진통을 겪었다. 브루노와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고 말해 종교재판소의 재판에 의해 통닭이 되었거나 될 뻔했던 사건이 말해주듯이 기독교는 과학을 철저히 배격했다. 16세기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인간의 존엄을 주장했고, 과학자들을 살리기 위해 “신은 이 지구를 만들 때 마치 시계에 탑을 감아놓고 저절로 돌아가게끔 해놓고는 손을 뗐다.”는 주장을 하여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도 신을 모독한 행위라고 종교계에서 큰 반발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서구는 종교와 과학, 종교와 정치의 분리시대를 맞아 근 200년 동안 크게 활발하게 움직여왔던 것이다. 중국은 서구와 같은 암흑시대가 없었고 유불도 3교통합을 추구해오듯이 줄곧 열린 사회로 흘러왔다. 비록 중국이 문혁을 통해 전통문화와 단절되는 시기가 있었으나 이는 근근이 10여 년의 일이다. 일본도 신도를 지키는 동시에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고, 문화의 단절시대가 없었다. 이에 비해 유독 조선만 조선조를 통해 문화의 단절시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개화기를 맞이한 조선학자들은 세계적인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석학도 배출할 수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넓이와 깊이에 대하여>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문화도 유구하여 인간타입이 넓이와 깊이가 있다. 일본인은 초창기 각박한 자연생활환경 때문에 넓이는 없지만 깊이는 있다. 이에 비해 한반도는 산수가 좋고 먹을 것이 딸리지 않아 인간타입은 낙천적이지만 넓이와 깊이가 없다. 거기다 조선조 경직된 사회를 500여 년이나 겪고나서 넓이와 깊이를 더욱 상실했다. 노벨상이라든가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하자면 그 민족의 역사적인 넓이와 깊이가 있어야 된다. 현재 한반도와 해외 700만 겨레를 포함해 노벨상수상자가 없고(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수상은 여기서 제외로 함) 세계적인 석학이 없는 주요 이유가 바로 우리민족이 넓이와 깊이가 없기 때문이라 나는 진단하고 싶다.
26    중국에 법률이 있었는가? 댓글:  조회:6676  추천:40  2009-01-02
중국에 법률이 있었는가?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법(法)이란 글자는 죄인을 가죽포대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내는 데서 유래되었다. 갑골문에 ‘법’이란 글자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 ‘법’이 생겨난 지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팔조법’으로 조선을 다스렸다는 역사기재도 있다. 허나 팔조법은 형벌에 관한 것일 뿐 모세의 ‘십계명’처럼 형법과 민법이 구비된 그러한 ‘법률’이 아니다. 법률은 법이 율(律)로서 하나의 체제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학자들은 고대 중국에 법은 있어도 법률은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주나라 초기 주공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제도 등 다양한 체제를 담은 내용의 책 제목을 <<주례(周禮) >>라 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법보다 예를 더 중시해왔고 심지어 법에 해당되는 것마저 예로 취급했다. 그러므로 중국역사는 법치가 아니라 예치로 흘러왔다. 물론 조선반도 역사도 법치가 아닌 예치의 역사이다. 더욱이 우리민족은 예와 법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다. 이를테면 “저 집은 법이 많다.” “중국인은 조선사람보다 법이 더 많다.”는 말에서 법은 풍속습관을 뜻하거나 예의, 예절을 의미한다. 중국과 조선이 법치가 아닌 예치의 역사로 흘러오게 된 이유는 두 나라가 모두 정의 문화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딱딱하고 무시무시해서 인간의 정을 메마르게 하는 반면에 예는 정의 문화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과 조선인은 법치보다 예치를 더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주나라 때 주공이 세운 ‘주례’ 때문에 사회는 정의 문화로 전화됨에 따라 법이 바르지 못해 천하가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라 하는데 저마다 천하를 바르게 하는 처방을 내놓게 되었으며, 이를 제자백가시대라 한다.제자백가 중에 한비자, 상앙 등을 비롯한 법가가 있었다. 이들 학파는 인의예지지신을 주장하는 유교 정의 문화가 천하를 구할 수 없으므로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의 대표적 인물인 상앙은 그의 변법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정했다.가. 인민을 십, 오의 단위로 조직하여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나. 간사(奸事)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숨기는 자는 엄형에 처하고 간사를 상고하는 자는 적의 목을 벤 것과 동등한 상을 준다. 다. 남자가 둘 이상 있는 집은 분가독립 시킨다. 만약 분가를 하지 않으면 부세를 두 배로 징수한다. 라. 군공이 있는 자는 그 정도에 따라 작위를 수여한다. 마. 사사롭게 싸움을 하는 자는 경중에 따라 벌을 준다. 바. 농사와 방직을 본업으로 삼아 일가 협력하여 곡식과 비단을 많이 산출하는 자는 부역을 면제한다. 사. 상공업의 이익에 힘쓰거나 또 게으름을 피워 가난하게 된 자는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아. 종실의 귀족이라도 군공이 없으면 속적에서부터 제외시켜버린다. 자. 존비와 작질(爵秩)의 등급을 명료하게 서열지우고 그 서열에 따라 전택(田宅)의 명의가 있게 하고 또 신첩(臣妾)·의복도 그 가격(家格)에 따라 질서 지운다. 차. 군공이 있는 자는 영화를 누릴 수 있으나 군공이 없는 자는 재력이 있어도 화려한 생활을 못하게 한다. 상앙이 제정한 이 변법내용을 보면 법률의 맛이 난다. 진(秦)나라는 법가들의 이러한 변법들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진시황은 이를 토대로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 허나 진시황이 천년만년을 이어갈 것이라는 진제국은 16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너무 딱딱하고 정이 메마른 법가 사상과 제도에 사람들이 지쳐버려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법가를 버리고 무위를 주장하는 도가로 치세하여 태평성세를 이룬다. 무제 때부터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또 다시 예치사회에로 진입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천하가 혼란하고 이민족 정권이 병립하여 법가가 설 틈이 없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도교로, 중기부터는 불교로 나라를 다스렸다. 송나라 때 왕안석이 변법을 시도해보았으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청 말까지 유교가 득세하여 또 다시 예치국가로 흘러왔다. 중국과 조선은 법치가 아닌 예치로 흘러왔기 때문에 현재 국민들은 법제의식이 매우 희박하다. 그렇지만 법치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나 정이 없는 두뇌 문명에 속하고 예치는 단점이 많으나 정이 있는 마음의 문명에 속한다. 사회발전추세를 보면 법치가 불가피하고 역사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면 예치가 마음에 와 닿는다. 이 법치와 예치의 갈등은 중국과 한국에서 앞으로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25    할례와 진담(김정룡) 댓글:  조회:6004  추천:105  2008-08-1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할례와 진담     김정룡 kzl0917@naver.com   할례(割禮)란 남자의 귀두 껍질을 제거하는 것과 여자의 음핵이나 처녀막을 제거하는 의식을 말한다. 할례의 원조는 아마 유태인일 것이다. 유태인의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라고 하니 대략 4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유태인의 할례는 모든 남자애들이 다 하는데, 태어나서 8일이 되는 날 랍비(기독교의 목사에 해당함)를 청해서 가위로 자지 끝의 깝질을 쏙딱 베어버린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자. 즉 왜 8일 만에 할례를 할까? 영아가 엄마뱃속에서 나와 7일이 지나면 ‘물기’가 가신다고 하며 또 산모도 7일이 지나면 음부와 자궁이 ‘원상태’로 수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일을 하고 7일이 되는 날 쉬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서양의 7일문화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릇 유태인남자라면 아무리 2천년 세월을 세상 산지사방에 흩어져 살아도 빠짐없이 할례를 한다. 2차 대전 시 히틀러의 어명에 의해 유태인을 대량 학살할 때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가려내는 방법이 바지를 벗겨보고 구분했던 것이다.현시대 청소년들이 포경수술을 하는 것도 역시 유태인 할례문화의 하나의 변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포경수술을 하면 성교 시 쾌감이 떨어지니 어쩌니 하면서 주춤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준 원장(原裝)이 제일이지 인위적으로 손을 대면 ‘맛’이 못한 것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대 어떤 민족들은 여자가 남편에게 불충하고 외간 남자와 바람피울까봐 음핵을 제거해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아마 고대인들도 여성의 음핵이 가장 민감한 성감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믿기 어려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는 아직도 여성의 음핵을 제거해내는 관습이 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주(後進州)여서 의료기술과 위생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 그리하여 음핵을 제거당한 여성들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어찌되었던 음핵을 제거당한 여성은 성욕이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성적 즐거움을 맛볼 수 없으니 쾌락은 운운할 여지가 없이 그저 여자로서의 ‘구멍’만 유지하고 살아가게 되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유교문화권에서는 ‘자연’을 숭상해왔으므로 예로부터 남자의 할례나 여자의 할례의식이 없었다. 다만 타문화권에 비해 도덕적으로의 정조를 매우 중시해왔다. 쉽게 말해서 유교문화권에서는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처녀막을 보존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이와 반대로 어떤 민족들은 처녀막을 제거하는 의식을 결혼식보다 더 정중하게 취급했으니 유교문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것이 곧 문화차이이다.원나라 성종 때 중국사신으로 크메르(캄보디아의 당시 중국음역)에 갔던 주달관(周達觀)이 당지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 designtimesp=9104>>란 책을 지었다. 이 책 제9장 실녀(室女:시집가지 않은 처녀)편에 처녀들의 처녀막을 제거해내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항상 결혼할 때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매우 우스꽝스러운 풍속이 하나 있다. 앙코르사람들은 딸을 낳아 9세가 되면 곧 스님을 청하여 송경(誦經)하고, 범법(梵法)에 따른 제식을 행하게 된다. 그 제식이란 승려가 손가락으로 처녀의 음문구멍을 휘저어 처녀막을 파손하고 거기서 흐르는 피를 취하여 그 처녀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다. 뿐만 아니라 그 처녀의 엄마의 이마에도 피를 취하여 도장을 찍는다. 이것을 리시(利市:기쁨, 축복)라 부른다. 이렇게 하면, 이 여자가 훗날 시집을 가서 남편과 사이가 좋아지며, 사람이 밝고 부드러우며, 가정에 행복이 가득 차게 된다고 한다. 이 의식을 ‘진담’이라 하고 그날 친인척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베풀고 그 처녀의 피를 술에 타서 참석자들에게 돌아가며 마시게 한다. ······모든 여자는 만 10살이 되면 지체 없이 시집을 간다. 만약 아내가 손님과 합방하게 되면 남편은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타인에게 말하곤 한다. “내 아내는 용색이 아름답고, 게다가 총명하다. 그래서 딴 남자들이 내 아내를 흘겨보는 것이다. 인도여자들이 아직도 이마에 빨간 점을 찍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처녀가 월경이 왔으니 시집가도 된다는 표식이다. 그리고 옛날 인도 엄마들은 딸애가 경도가 시작되었는데 시집보내지 못하면 대신해서 그 피를 마셔야 했다. 우리민족여성들이 옛날에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는 것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지역에 따라 민족에 따라 처녀막에 대한 인식과 아내의 정조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이는 문화상의 차이일 뿐 어느 민족은 문명하고 어느 민족은 야만이란 판단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유교문화의 잣대로 고대타민족의 문화를 임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24    종교와 미신은 어떻게 다른가? 댓글:  조회:5601  추천:77  2008-07-08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종교와 미신은 어떻게 다른가?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무한한 본체에 대한 신앙이 종교이고 유한한 물체에 대한 믿음이 미신이다. 이것이 곧 종교와 미신의 구분이다. 무엇이 무한한 본체이고 무엇이 유한한 물체인가?무한한 본체란 가시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세계의 존재로서 하나님, 도, 상제, 천주, 천지신명 등등이다. 유한한 물체란 가시세계의 존재로서 흔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무한한 본체가 인류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은 ‘물활론(物活論)’에 의해서이다. ‘물활론’이란 모든 물체는 활(活)의 가능태라는 것이다. 원시인류는 밤이 가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식물이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살아나고, 개구리가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살아나는 등 모든 물체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가능성이 있으며,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대지에서 만물이 생겨나는 데는 필시 인류가 모르는 자연의 ‘힘’에 의해 그렇다고 믿었다. 그 ‘힘’이 처음에는 바람이었다. 고대사회 여러 민족에게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발상이 모두 있었다는 것을 종교학자들이 누누이 지적해왔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토대는 샤머니즘이며 샤머니즘은 종교의 원시태인 것이 아니라 종교의 근본태이다. 예수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성령으로 난 것은 다 그러하느니라.”고 말했듯이 <<성경>>에도 바람이 자연의 형성과 인간의 영혼과 관련이 있다는 암시가 여러 곳에 있다. 원시인류는 차츰 사유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의 ‘힘’인 바람을 ‘신(神)’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힘’ ‘바람’ ‘신’은 모두 추상적이어서 감을 잡을 수가 없고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즉 정신적으로 인식되는 ‘신’을 구체화시켜 ‘귀(鬼)’라 불렀다. 이렇게 신을 구체화시킨 것이 곧 귀신(鬼神)이다. 귀신가운데서 인귀(人鬼)가 가장 세고 두렵다. 무한한 본체인 상제, 천주, 하나님을 인격화 시킨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유래된 것이다. 유태인은 구체적으로 여호와라는 이름까지 붙여 하나님을 인격화 시켰다. 종교도 결국 알고 보면 귀신놀음이지만 귀신가운데서 가장 센 귀신을 선택해서 믿고 따르고 할 뿐이다. 미신은 이를테면 복숭아나무로 활을 만들어 땅에 묻어두면 진사(鎭邪)한다든지, 꿈에 오줌을 싸면 생식력이 강해진다는 등 유한한 것을 믿고 실천에 옮겨 액막이를 한다든가 그 어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꿈에 나타나면 그것이 현실로 되기를 믿는 행위이다. 종교와 미신의 다른 점은, 종교는 인간에게 ‘경(經)’을 부여함으로서 인류사회를 참된 삶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미신은 아무런 ‘경’이 없는 일시적인 행위에 그치고 만다. ‘경’이란 실‘사(糸)’와 뿌리‘경(莖)’이 합쳐진 글자로서 본래 씨줄을 뜻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옛날 구차할 때 벼짚가마니를 짜보았거나 천을 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알고 있듯이 틀에다 날줄을 먼저 세우고 들줄을 끼워놓는다. 그 날줄이 곧 ‘경’이다. 이 날줄에서 유래된 ‘경’은 무수한 뜻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기본, 원칙, 규칙, 원리, 진리 등등이다. 종교는 이러한 ‘경’을 갖고 있기에 인간을 교화시킨다. 종교는 또 인간에게 안전성과 영원성을 부여해준다. 이에 비해 미신은 일시적인 방책에 불과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종교와 미신은 모두 귀신놀음이라는 점은 같으나 종교는 귀신가운데서 가장 센 귀신을 믿는 것이고, 미신은 ‘새우귀신’을 믿는 것이 다를 뿐이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