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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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6003  추천:103  2008-04-18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역사는 발전하고 시대는 전진한다(歷史在發展, 時代在前進.)라는 말을 쌔빠지게 해왔다. 우리는 한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앵무새처럼 하던 말들을 유치하게 느끼고 멈추는 것과 같이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도 멈추는 것이 좋을 듯싶다. 결론을 말하자면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화할 뿐이다. 이것이 나의 소견이다. 우리는 역사에 대해 논의하려면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는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淸末 유명한 사상가 江천의 <<독자치언(讀者巵言)>> 중의 아래와 같은 대목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고대의 官은 단지 巫와 史일 뿐이었다.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관이 史이며 이는 <<說文>>에 史를 해설하여 “記事者也”라고 한 것으로 방증된다. 그리고 귀신을 섬기는 관을 巫라고 한다. ······관은 또 吏라고도 부르는데, 吏라는 글자는 史에서 나온 것이다. 관이 있으면 반드시 관장하는 일(事)이 있게 되는데, 이 事라는 글자도 또한 史에서 나온 것이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란 지나간 일들이다. 즉 선조들이 겪었던 ‘값어치’가 있는 지나간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구전으로 전해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나간 일들이 다 역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세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건만이 역사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김정룡이 외간 여자와 간통하다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들켜 맞아죽는 일이 일어난다면 재한조선족신문에서 보도하고 이것을 조선족 관련 사이트나 카페들에서 시끌벌쩍하게 떠들지는 몰라도 역사로 남을 가치는 없다. 만약 클린톤이 나와 똑 같은 일을 저질러 사망한다면 당연히 역사로 남는다.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 김정룡과 클린톤은 신분적 차이가 하늘과 땅과도 같기 때문이다. 후세사람들도 이 때문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헌데 역사란 것은 김정룡과 클린톤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지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불변지식과 가변지식이다. 가령 사각형의 내합을 북경에서 재이면 355이고, 서울에서 재이면 365이고, 동경에서 재이면 370이고, 뉴욕에서 재여야만 360이라는 법이 없다. 만천하 어디 가도 사각형의 내합이 360인데 우리는 이런 지식을 불변지식이라 한다. 이에 비해 역사라는 것은 어제 영웅이 오늘의 개똥이 되고 오늘의 개똥이 내일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역사란 가변성이 너무 많아 필자는 역사지식을 가변지식이라 부르고 싶다.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역사임에는 틀림없지만 같은 일도 어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주관적인 견해로 기록하고 평론을 다는가에 따라 일(事)이 달라지고, 또 후세사람들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일(事)을 보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 지게 되고 시비가 생기고 심지어 피비린 싸움까지 일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란 수학공식처럼 천편일률적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사관이 천차만별이어서 재래시장만큼이나 아니 훨씬 더 복잡하고 시끌 벌쩍 하게 말썽이 많다. 말썽 많은 여러 가지 사관을 아래와 같이 귀납해서 풀이할 수 있다. 첫째 正史와 外史(野史)의 문제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二十五史>를 정사, <<산해경>>을 비롯한 많은 서들을 외사로 취급하고, 한국에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정사, 김일연의 <<삼국유사>>를 외사로 취급해왔고, 일본에서는 <<日本書紀>>를 정사, <<古事記>>를 외사로 보아왔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 바 정사란 왕조중심의 역사를 의미한다. 한 민족 혹은 국가가 왕조중심을 정사로 취급하는 것은 그 민족 혹은 국가가 자신들의 왕조역사를 빌어 타민족 혹은 타 국가에게 ‘힘’을 과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개념은 왕의 세습제 역사를 의미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신화로 조상을 ‘지어 낸다’. 예하면 중국에서 공자시대에는 조상을 요, 순으로 보았는데, 전국시대에 오제를, 한조에 이르러 삼황을 조상으로 지어냈다. 조선반도의 단군신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민족 혹은 한 국가로 말하면 왕조역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인은 다문화시대에서 반드시 왕조역사를 중심으로 하던 것을 재야역사 즉 여태까지 취급해왔던 이른바 외사를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함이 옳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인류역사는 대지의 역사이고, 대지위의 인류역사는 왕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닮고 있는 역사야말로 진정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 선조들이 정사로 높이 받들어온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한 번만 읽어보고 팽개쳐 버렸다. 거꾸로 외사로 취급해온 김일연의 <<삼국유사>>를 한문과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적어도 열 번 정도는 읽어보았다. 내가 <<삼국유사>>를 중시하게 된 이유는 본서가 우리민족의 민속, 풍속, 경제, 신화, 민간이야기 등등이 잘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으며 역사문화이야기를 써내는데 훌륭한 참고서로 활용하게 되었다. 결론을 말하면 여태까지 취급해왔던 정사가 외사로, 외사가 정사로 회전되어야 하며 정치판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여당이 야당으로, 야당이 여당으로 되는 것처럼 바꿔야 만이, 그리고 왕조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절대다수를 차지해온 백성들의 삶이 단긴 역사를 알아야 만이 진정한 인류역사를 알 수가 있다. 여태까지 각국에서 왕조역사를 중시해 온 데는 제도라는 괴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제도는 정치라는 물건과 짝지어 따라 다닌다. 둘째 제도사에 관한 문제 인류가 산에서 대지에 내려오면서 군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집단마을을 형성한 것을 우리는 자연취락이라 한다. 세월이 흘러 도시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자연취락에도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게 되고 정부(조정)의 주도로 이뤄진 인위취락도 생겨난다. 상앙변법 10조목의 앞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인민을 什 · 伍의 단위로 조직하여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당시 진나라 조정은 촌락까지 통제하려고 했으나 간섭이 자연취락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자 마을사람끼리 서로 감독하고 감시하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즉 마을의 한 사람, 한 가정이 죄를 지면 인근 什·伍의 가정이 전부 함께 처벌을 받게 하는 제도였다. 이웃이란 낱말과 중국인이 말하는 臨居가 곧 여기서 유래되었다. 연대 책임을 지는 什·伍의 가정은 굳은 일, 좋은 일 모두 동고동락하면서 한 집안 식구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먼 사촌이 이웃보다 못하다는 우리말 속담도 여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伍長이란 군대말단직급이 있는데 역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2) 姦事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숨기는 자는 엄형에 처하고 간사를 상고하는 자는 적의 목을 벤 것과 동등한 상을 준다. 서주시기까지 첫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리는 ‘殺首子’란 풍속이 있었다. 뜻인즉 여자가 시집와서 낳은 첫 아이는 누구 아이인지를 알 수가 없고, ‘종자’가 불분명한 아이한테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는 데서 첫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는 당시 그만큼 정조관념이 희박하고 처녀들이 시집가기 전에 성생활이 활발했다는 방증이다. 하기야 자연취락에서 밭을 갈고 베를 짜고 밥 먹고 잠자는 외에 별로 할 일이 없었고 정치적으로 간섭이 덜 했던 자연취락 사람들이 할 일이란 무엇이었겠는가? 성생활밖에! 당시 정부가 민간의 성생활까지 간섭했던 이유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진나라는 기타 6국보다 힘이 약해다. 그래서 힘을 키우려고 서북쪽의 무인 황무지를 개간하여 군량도 해결하고 인민의 머리수를 늘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인위취락을 건설해야 한다. 인위취락은 자연취락과 달리 방방곡곡에서 사람이 모여들기 때문에 강력한 질서의 통제가 필요했고, 만약 자연취락의 사람들처럼 남녀가 성생활에 자유롭다면 기강이 약해지고 또한 남녀불륜이란 사회갈등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에 姦事를 엄하게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3) 남자가 2인 이상 있는 집은 분가시킨다. 만약 분가를 안 시키면 부세를 두 배로 징수한다. 이는 물론 세금징수를 늘리려는 목적이 있겠으나 도가와 유가적인 자연취락의 대가족문화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내린 조치였고 제도였다. 우리는 상앙변법을 기존의 자연취락을 중심으로 하던 분권제시대로부터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어 집권시대에로 이행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상앙의 덕분에 매우 촌스럽고 힘이 없었던 진나라가 부국강병 하여 최후 천하 대통일을 이루었다. 하지만 상앙을 비롯한 법가들의 운명은 비참했고, 그 후 중국역사는 도가와 유가적인 삶과 제도적인 틀에 얽매어 사는 갈등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제도를 만들어 인간을 속박하는 정치를 한사코 반대했다. 공자도 仁으로 세상을 다스리자고 호소했다. 도가와 유가의 삶은 인간이 가슴으로 사는 것인데 반해 법가의 제도적 삶은 머리로 살아야한다. 이것을 필자는 ‘마음의 문명’과 ‘두뇌의 문명’으로 명명하고 따라서 넓은 범위에서 말하자면 중국문명은 ‘마음의 문명’이라면 유럽문명은 ‘두뇌의 문명’이라 진단한다. 아울러 필자는 중국문명을 ‘情의 문명’으로 본다. 이는 거창한 문제여서 그 입증과정을 여기서 생략하고 금후 별도의 주제로 써낼 작정이다. 분권제시대로부터 집권제시대로 이행하게 된 주요 요소가 곧바로 일련의 제도의 확립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계급, 계층, 신분의 문제 서두에서 말한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는 계급문제일까? 계층문제일까? 신분문제일까? 당연히 계급문제도 아니고 계층문제도 아니며 단순한 신분문제이다. 왜냐? 김정룡과 클린톤을 말할 때는 단순히 개체를 의미할 뿐 집단의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렇게 신분은 개개인의 개체에 사용되는 것이다. 만약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에 기어코 집단을 개입시키려 한다면 계층이란 개념사용까지는 가능할 수 있다. 클린톤은 엘리트층 중의 최고 엘리트이고 김정룡은 엘리트층 중의 최말단 엘리트에 속하기 때문이다. 허나 김정룡과 클린톤의 문제에 있어서 계급이란 개념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계급이란 집단과 집단의 개념이 개입되고 따라서 계급과 계급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냄새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이란 말의 사용에 조심해야 한다. 10년 동란 때 14살짜리 철부지 김정룡이 2,500년 전 공자와 적대적인 계급관계로 설정되고 싸리 꼬챙이에 실을 똘똘 말아 “공자를 타도하자!”는 대자보를 써야했다. 과연 김정룡과 공자 어른이 적대적인 계급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일부 보수파 어른들은 아직도 그렇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얘기를 좀 해보자. 중국과 조선에 士·農·工·商의 분화가 있었다. 이에 굳이 집단개념을 주입하자면 네 개 계층의 분화였지 사계급분화가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이 네 개 계층의 분화는 각기 그들의 직업과 사회분공을 의미할 뿐이지 서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양반, 중인, 상인, 노비의 분화도 계층분화일 뿐 계급분화는 아니었다고 본다. 임어당이 “만약 중국에 계급이 있었다면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만 있었을 뿐이다.”고 지적한 데는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은 서로 세금을 바치고 그 세금에 의해 살아가는 관계인데 그 시대에 있어서 현재와 달리 서로 적대관계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계급이란 개념은 맑스가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불합리적인 사회현상을 파헤치면서 계급이란 개념을 도입했고 이것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유럽의 계급투쟁 모델이 중국에 도입되어 “계급투쟁을 절대 있지 말자!” “계급투쟁은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 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부부, 부자, 형제, 친척 친구 간에도 두 개 계급으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넷째 직선발전관과 정체관의 문제 19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벽두에 중국학계에서 막스·베버를 중시하는 바람이 일었다고 한다. 막스·베버는 칼·맑스, 니체와 함께 3대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막스·베버의 대표작을 말하라면 나는 그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유교와 도교>>라 생각한다. 그는 “왜 유교국가인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중국학계에서 그를 중시하게 된 데는 아마 그의 어처구니없는 이 질문과 해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학자들은 그의 질문에 해답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여기서 막스·베버의 홍두께 같은 질문을 부정하고 기독교와 유교를 대비해 가며 논술하기엔 편폭상 무리가 있어 제쳐놓고 그의 이러한 사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려 한다. 고대 그리스는 찬란한 문화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 피타고라스 등 유명인을 배출해냈다. 그리스의 전통사관은 순환론이었으며 중국의 맹자의 일치일란의 사관과 비슷한 것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리스문화를 헬레니즘이라 한다. 그토록 찬란했던 헬레니즘이 기원 후 1세기로부터 중동에서 생겨난 히브리즘의 도전을 받았고, 이윽고 기원4세기 초반에 이르러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 함에 따라 헬레니즘을 비롯한 모든 이교문화가 말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서구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 천년의 역사는 신이 통치하는 암흑세계였다. 미국 신화연구학자 <<예수는 없다.>>의 저자 피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는 “서구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천년 동안 벽돌집 하나조차 제대로 지어보지 못했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서구의 신이 통치한 천년의 역사는 말 그대로 정체의 역사였다. 실제로 중국은 18세기 말까지 전 세계 경제총생산량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었다.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 등 기타 면에서도 찬란했다. 막스·베버의 말을 거꾸로 빌려 말하자면 중국이야말로 발전의 역사로 흘러왔다. 그러다가 17세기후반부터 서구에서 기계문명이 탄생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때를 빌어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을 빌어 중국정체론을 들고 나왔고 중국인은 전부 사기꾼이라 나발 불었다. 헤겔 이후 서구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두 개 파로 나뉘었다. <<서구의 몰락>>의 저자 슈펭글러, “신이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 등은 헬레니즘의 순환론으로 역사를 보았다. 이에 비해 칼·맑스, 막스·베버는 헤겔의 직선발전사관을 이어받았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다윈의 ‘적자생존론’, 막스·베버의 기독교윤리와 자본주의정신론, 헤겔의 ‘중국정체론과 게르만민족 제일주의’는 제국주의의 대외 식민지개척에 크게 이론제공과 명분이 아닌 명분을 제공했다. 이 가운데서 특히 헤겔의 중국정체론은 일본의 제국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즉 일본인들은 일본역사는 발전적인데 반해 중국역사는 정체적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중국인을 ‘동아병부’라 부르고 위대한 일본민족이 왜 섬에 머물러야 하나? 마땅히 북평(北平) 정도가 大和민족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륙침략에 나섰다. 발전이 이디에 있고 정체가 어디에 있는가? 역사란 어떻게 여행지를 정하고 티켓을 끊어 갖고 출발하여 일정기간이 경과하면 도착하기 마련인듯 직선적으로 발전한단 말인가? 나는 역사란 발전도 없고 정체도 없다고 본다.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중국은 발전이란 말에 얽매이고 목이 말라 모주석은 건국 초기에 15년이면 영국을 초과하고 2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허황한 슬로건을 내놓았고 그의 열정이 이성을 초월하여 무리한 대약진 운동과 문혁 같은 운동을 일으켜 오히려 국민경제를 파탄의 변두리에 이르게 만들었다. 문혁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발전했고, 모든 것이 세상에서 가장 선진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던 데로부터 개혁개방 후 우리가 한때 입이 아프도록 반대했던 자본주의문화와 ‘룰’이 도입되고 있고 이로서 이룩한 업적을 또 발전이라 한다. 과연 발전일까? 나는 발전이 아니라 변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 비해 발전했는가? 아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보다 변화된 사회에서 살아갈 뿐이다. 다섯째 역사유물주의와 역사유심주의 문제 우리는 애들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면 공통적으로 받는 질문이 있다. 즉 애들은 영화 속의 인물을 “저 사람이 좋은 편인가? 나쁜 편인가?”고 묻는다. 좋은 편이라 말해주면 눈동자가 반짝반짝 해지면서 앗싸 사기 나 하고 거꾸로 나쁜 편이라 하면 얼굴에 웃음기가 가셔지고 증오 심리를 드러낸다. 우리는 한 때 애들이 나쁜 편, 좋은 편을 가르고 무작정 애증을 나타내듯이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무릇 유물주의는 다 좋고 유심주의는 전부 때려 죽일 놈으로 보았고 행동했다.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개념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자연과 인간의 수많은 것들이 풀이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수천 년 전의 인간은 자연과 인간의 현상이 모두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천 년 전의 인류는 이 우주는 필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창조주를 본체라 보고 그 본체를 물질로 보느냐? 아니면 정신으로 보느냐? 하는 데서 유물주의와 유심주의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 중국은 서양의 이러한 이원론적인 철학을 도입해 자국역사를 해부 했고 따라서 무릇 유물주의는 다 좋고 모든 유심주의는 전부 나쁘다는 이분법을 적용하고 전통문화마저 다 때려 부수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자- 맹자- 동중서- 왕필- 한유- 주돈이- 이정- 주희- 육왕계의 도통은 전부 유심주의로 분류하고 타도하고, 왕충- 구양건- 범진- 유종원- 유우석- 왕안석- 왕부지- 대진 등 계열의 인물들이 유물주의로 취급되고 각광받았고 찬양의 인물로 되었다. 이외 도가 계열의 노자- 장자- ··· 등도 유심주의로 분류되고 타도당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중국은 전통문화와 단절을 맞게 되었고 그 후유증은 말치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서양사는 서양이고 중국사는 중국사이다. 我의 역사를 他의 역사에 꿰맞추고 규정해버린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비극이 초래되기 마련이다. 현대중국에서 곧바로 이러한 우를 범해왔다. 즉 봉건의 개념을 확대해석하고 군현제역사마저 서양의 ‘feudalism’에 두들겨 맞추고 봉건이란 낡은 것이고 낡은 것이면 다 나쁘다는 렛델을 붙여놓고 타도하는 ‘혁명’바람이 곧 중국역사와 문화를 단절시키고 전통의 미아가 되는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중국이 개학개방 이래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데 대해 러시아학자들이 “중국에 두 가지가 부럽다. 하나는 공부자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화교자원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중국은 공자를 부활시키고 있다. 역사란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순환론이 맞는 것 같다. 여섯째 종교와 역사의 문제 인류역사는 종교를 떠나서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종교가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실제로 유태인과 같은 민족은 종교와 역사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즉 그들은 그들의 종교가 곧 그들의 역사이고, 그들의 역사가 곧 종교이다. 종교란 신을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역으로 으뜸의 가르침을 종교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은 A종교를, 어떤 사람은 B종교를 으뜸의 가르침이라 믿고 따른다. 그래서 인류역사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신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기번은 그의 <<로마흥망사>>에서 “백성은 모든 종교가 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정치가는 모든 종교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고, 철학자는 모든 종교는 사기라고 여긴다.”고 지적했다. 리차드·닉슨은 그의 <<미래의 영수들에게>>에서 “백성은 영원히 백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발바닥 아래 흙만 볼 수 있을 뿐 지평선 너머의 세계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역사 이래 백성은 정부가 주도하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왕이 무슨 종교에 흥미를 느끼거나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국교로 정하면 백성은 그에 따르기 마련이다. 기독교는 본래 유럽의 산물이 아니다. 아시아 중동에서 생겨난 것을 유럽이 수입해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순수한 중동문화로만 형성된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예수는 신화다.>>의 저자는 기독교는 플라토이즘의 복사판이라고 주장한다. 뜻인즉 기독교의 교리교의의 핵심이 플라톤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서양철학의 거장인 버트란트·럿셀은 플라토이즘은 하나의 종교라고 말했다. 화이드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이 맞는다면 헤겔이나 맑스 철학도 그 뿌리는 플라톤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막스·베버는 근대화의 개념을 ‘탈주술적 시대’로 명명한다. ‘탈주술적 시대’란 신이 통치하는 종교시대로부터 이성적인 사고의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인류사회는 점차 탈종교화시대로 가고 있는 추세이다. 허나 종교란 신의 통치만 종교인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가 곧 종교인 경우가 많다. 예하면 중국의 도교와 유교는 중국인의 종교이자 전통문화이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차원에서 도교와 유교를 중시해야 한다. 일곱째 문화의 성취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보는 사관 대만국립대학 철학교수였던 方東美 선생은 그의 <<중국인생철학>>에서 중국철학의 일반특성을 역설하면서 “중국인의 깊은 사유의 삼대 중심문제는 ‘자연’과 ‘사람’과 ‘인간의 문화적 성취 즉 역사’라고 말했다. 방동미 선생은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제도사보다 문화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역사의 연구>>의 저자 토인비는 그의 저서에서 “인류문화를 도전과 응전의 패턴으로 흘러왔다.”고 지적했는데, 그는 이 이론으로 유명해졌다. 토인비도 역시 인류의 역사를 문화역사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文은 紋에서 왔고, 紋은 자연의 특징을 의미하며 인류가 자연을 파악한 상식을 뜻한다. 인류가 파악한 자연의 상식으로서 인간사회를 깨친다는 의미이다. 또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연의 특징을 인간사회특징과 연관시켜 인위적인 상식, 규칙, 법칙, 제도 등등을 만들어 낸 것이 문화이다. 문명이란 紋으로 인간사회를 밝게 한다는 의미이며 문화와 문명을 상대적으로 말하면 문화는 하위 개념이고 문명은 상위 개념이며, 문화는 개체적인 것에 쓸 수 있지만 문명은 집합적인 개념이다. 이를테면 고대 사대문명을 고대 사대문화라 하지 않고, 1993년 미국의 샤무엘·헌팅턴 교수는 미래 사회 각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 간의 충돌을 예측하는 글의 제목을 <<문명의 충돌>>이라 했다. 인류역사를 언급할 때 5천 년의 문명사라 말하는데, 뜻인즉 인류가 5천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를 소유하고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고로 인류역사는 문화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문화라는 개념은 그 사용 범위가 넓고, 내포하고 있는 의미도 광범위하다. 종교문화, 제도문화 등 거창한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성문화, 음식문화, 거주문화 등등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인류가 문화를 발견해서부터 문화 속에서 사는 것이 동물과의 구분이다. 아울러 민족마다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 전통문화란 한 민족의 관성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혁 때처럼 다시는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여덟째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이 명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이해한다. ㄱ. 역사의 관성 인간의 몸에 관성의 체계라는 것이 있는데 육체적인 관성뿐만 아니라 의식상의 관성도 있다. 한 민족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적인 패턴이 모두 역사의 관성에서 온 것이다. 즉 역사적인 축적관성이 현재의 삶에 표출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은 만만디 성격과 깊고 넓은 사고방식 등등의 민족성, 일본인의 세심하고 진지하고 아끼고 인내심이 강한 등등의 민족성, 우리민족의 멋을 좋아하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낙천적인 등등의 민족성은 모두 각기 초창기 마을이 형성될 때 처한 지리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을 里制문화라 하며 한 민족의 문화는 대다수가 이제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ㄴ. 역사를 중시하는 것은 오늘의 삶을 위해서이다. 역사는 오늘의 삶의 거울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역사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문혁 때 중국은 전례 없이 역사를 중시했고 동시에 역사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淸末의 疑古風은 역사를 재조명하여 조백을 가리는 작업이었는데 당시 궁극적인 관심은 역사에 있은 것이 아니라 홍수처럼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였다. 현대 중국에서 맑스의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반영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도입하여 전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했고, 역사유물론을 도입하여 전례 없이 중국역사를 해부했다. 이렇게 전례 없이 역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이란 대과제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이를 목욕시키는 것이 아이 몸의 오물을 씻어 내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아이를 버리려고 목욕시키지 않는다. 허나 현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목욕시키면서 통째로 버리는 우를 범해왔다. 그 우의 핵심과 근원이 곧바로 역사는 발전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2    일본여인의 보자기와 일본인의 정조관 댓글:  조회:9542  추천:84  2008-04-04
역사문화이야기 일본여인의 보자기와 일본인의 정조관념  김정룡 재한 조선족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한국여성단체 어떤 ‘유식’한 여성이 일부 여성을 시기하는 뜻을 가진 어휘를 폐지하고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그 한 예로 ‘올케’란 말이 오빠의 계집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여성의 주장에 따를 경우 수많은 고유어휘들을 버리고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행하고 있는 관습과 복장 등 그 유래가 현대인의 생활과 맞지 않기 때문에 다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악수하는 인사법은 서양에서 생겨난 것이 동양에 전해졌는바, 본래 호전적인 서양인들이 상대에게 나의 손에 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밝히려고 손을 내밀어 잡는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므로, 살상무기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현대인, 특히 동양인은 악수하는 인사법을 폐지해야 할 것이다.  일본여인의 복장(와후쿠:和服)은 등 뒤에 보자기가 달려 있다. 이는 예로부터 위생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일본인이 아무 곳에서나 섹스를 하는데  편리하기 위해 여성들이 항상 보자기를 등 뒤에 달고 다녔던 것이다. 허나 현대일본인이 보자기를 달고 다니면서 섹스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전통복장에서 보자기를 떼어내야 할 것인가? 만약 보자기를 떼어낸다면 전통복장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일본인은 왜 아무 곳에서나 수시로 섹스하기 위해 여성들이 보자기를 달고 다닐 정도로 성에 열광하고 있었을까?  일본열도는 예로부터 땅이 척박하고 메말라 경작지가 매우 적었다. 그런데다 태풍이 많고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일본인의 삶의 환경이 극히 열악했다.  일본인은 굶어죽고, 태풍에 죽고, 지진에 죽고,······ 하여튼 인구 증장이 매우 환만(繯慢)했다. 고로 일본인은 후대번식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후대번식을 늘리려면 열심히 남녀가 성교를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들이 아무 곳에서 또는 수시로 남자들부터의 ‘공격’을 받아들이려고 등 뒤에 항상 보자기를 갖춰 갖고 다녀야 했다. 이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내려오면서 전통복장인 와후쿠(和服)에 보자기가 달려 있게끔 만들었다.  일본인은 후대번식의 다급함 때문에 섹스를 많이 하고 또 아무데서나 하는데서, 하나는 여성윤리교육이 강화되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은 중국과 조선에 비해 정조의식에 희박해졌다.  일본여성의 윤리교육은 정조를 지킬 데 대한 것이 아니라 몸을 어떻게 거두고 남성을 어떻게 잘 모시고 남성들을 즐겁게 해주는가는 것들이었다.  예로부터 세상에서 유일하게 복장을 입는 정규교육을 시킨 것은 일본여성뿐이다. 이것도 그녀들의 윤리교육 내용 중의 하나였다.  우리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본남성들이 여자가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 하면서도 마누라가 잠자는 자세가 곱지 못하다고 이혼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일본인의 정조관은 우리와 다르다. 일본에 <<이민(移民)>>이란 소설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 주인공인 나츠코(夏子)라 부르는 여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장에 취직했다. 직장 상사인 반장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며 접근하니 그녀는 별 주저 없이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러던 와중에 브라질에 이민 가는 바람이 불었다. 정부는 부부가 함께 이민에 나설 경우 장례한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한 어리무던한 남자와 임시 결혼하고 이민 길에 나서게 되었다. 브라질에 향하는 도중 여객선 선장이 그녀에게 접근한다. 하여 그녀는 선장과 ‘풋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브라질에 도착해서는 역시 법적인 남편으로 함께 이민 간 남자와 그럭저럭 어영부영 살아간다.  우리민족의 관념으로 말하자면 나츠코는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치는 ‘화냥년’이다. 허나 일본인은 그녀가 매번 처한 환경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한다. 따라서 일본 독자들도 주인공에 대한 평가가 매우 관대하다. 이것이 일본인과 우리민족의 정조관념 차이이다.      그리고 일본인은 남녀혼탕이 있을 정도로 정조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녀들은 아내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교육(훈련)이 잘 되어 있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남자들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프랑스식 격조의 건물에서 일본마누라를 꿰차고 중국요리를 먹고 사는 것”이 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일본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성으로 꼽히고 있다. 
23. 도올 선생의 ‘원화관(源花觀)’에 대한 나의 이견(異見)  김정룡    필자가 전문루트를 거치지 않고 동서양의 역사, 종교, 문화, 철학 등 많은 지식을  빨리 습득하게 된 지름길이 바로 도올 선생의 40여 권의 저서와 모든 TV강의를 빼놓지 않고 보고 들은 덕분이 크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도올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하지만 나는 주제넘게 도올 선생의 일부 학술에 대해 이견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그이의 ‘원화관’에 대해 나의 소견을 말해보려고 한다.  ‘원화’란 신라 화랑의 전신이며 화랑도는 우리민족역사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화랑을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처럼 우매하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까지 화랑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화랑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과 억측이 난무한 실정이다.  도올 선생은 저서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원화’의 기원을 동양의 신화, 종교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연꽃에 연관시켜 풀이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우선 우리는 ‘화랑’이 되었든 ‘원화’가 되었든 그 주요한 이미지가 ‘꽃’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꽃’이란 무엇인가?······이 꽃의 이미지는 인도의 고유한 브라만교의 세계관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우주의 태초에 큰 바다 속에서 비슈누신이 출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천개의 꽃잎이 달린 금색의 연꽃이 피어나는데 그 연꽃 속에서 분천왕이 출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생류를 낳았다는 신화로부터 그 이미지가 발전한 것이다.······화랑은 곧 화엄(華嚴)의 랑이며 즉 ‘화랑세계’에 출현한 깨끗한 어린 영혼인 것이다. 그 화랑을 최초에 여성으로 했던 것은 곧 신라풍교의 무속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여성의 특수한 감수체계와 관련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강신무당의 주류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1)   이상 도올 선생의 ‘원화관’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폐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 도올 선생은 원화와 화랑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해서 언급했다고 본다. <<삼국유사>>에 “왕(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크게 신선을 숭상하고 낭자의 아름다운 자를 가리어 원화로 받들었다.1)”라는 대목이 있다. 이병도의 역주에 의하면 ‘원화제의 시초는 진흥왕(534~576) 때가 아니라 훨씬 오랜 옛날에 속했을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병도의 이 관점에 동의한다.  만약 원화제가 진흥왕 때에 앞서 훨씬 오래되었다고 한다면, 불교가 법흥왕(?~540) 집정 시에 정식으로 국교(527년)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원화는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신라원시종교신앙의 산물이라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나. 도올 선생은 원화와 화랑의 ‘화’가 모두 불교의 연꽃과 관련된다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 생각한다. 만약 화랑이 불교가 한참 발흥하기 시작할 때 세상에 등장했다 손치더라도 화랑의 전신이 원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화’가 불교의 연꽃에서 유래되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 도올 선생이 화랑이 최초에 여성이었던 것을 신라의 고유무속과 연관시켰고, 그것을 여성의 특수한 감수성, 또한 강신무당이 여성이 주류라는 현상과 맞물리는 것으로 풀이했는데, 이는 역사적 유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원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유래되었을까?원화는 한문으로 ‘源花’이다. ‘源’은 근원 즉 ‘뿌리’를 뜻하며 ‘花’는 꽃을 의미한다. ‘원’과 ‘화’의 합성어인 원화는 꽃의 시초(시조)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꽃은 자연의 꽃이 아니라 여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신라의 원화는 여성의 시조, 즉 선비(先妣)이다. 선비(先妣)를 또 여이(女夷)라 한다. 여기서 ‘夷’는 오랑캐란 뜻이 아니라 근본, 근원 즉 최초라는 뜻이며 여이(女夷)는 최초의 여성을 지칭한다. 하지만 후세에 내려오면서 선비(先妣)와 여이(女夷)는 모계시대의 여왕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되었다.  <<회남자·천문훈(淮南子·天文訓)>>에 이르기를, “여이(女夷)가 북치고 노래부르면서 하늘의 조화를 관장하고 백곡, 금수, 초목을 생장케 한다.1)”고 했다. 고유(高誘)가 주를 달기를, “여이(女夷)는 봄과 여름의 생장을 관장하는 신1)”이라고 했으며, 풍응경(馮應京)은 그의 <<월령광의(月令廣義)>>에서 “여이(女夷)는 곧 화신(花神)”이라고 말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이른바 여이(女夷), 화신(花神)이란 곧 원시모권제시대의 부족두령과 제사를 겸한 여신1)”이라고 지적했다.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꽃이 여자를 상징하는 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고 꽃이 열매를 맺는 동일한 생산성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이런 의미로부터 볼 때 원화는 곧 여이(女夷)이며, 화신(花神)이며 만물의 생장을 주재하는 선비신(先妣神)이다.  헌데 모권제시대의 선비신(先妣神)의 이미지는 서왕모의 본래 모습처럼 사납고 흉측한 반인반수형이었다. 그러다가 부권제시대에 진입하면서 서왕모를 비롯한 선비신(先妣神)들은 양귀비처럼 아릿다운 모습으로 변모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연나라 때 젊고 예쁜 ‘여중의 여’를 물색하여 원화로 삼고 국선으로 모시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모계시대 여성숭배의 잔재현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원화제가 연나라의 원화 풍속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원화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진흥왕 때 원화제를 폐지하고 젊고 영준하게 생긴 남아를 골라 남분여장시켜 ‘화낭(花娘)’이라 불렀으며 원화를 대신케 했다. 그러다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대량협공에 의해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젊은이들의 전의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여자를 상징하는 ‘화낭(花娘)’을 ‘화랑(花郞)’이라 고쳐 부르고 본격적으로 화랑도를 진흥시켜 수많은 젊은 장수를 배출해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 데는 물론 당제국과 연맹을 맺은 것이 주요하지만 신라 자체가 화랑도를 통해 강대해졌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신라의 원화와 화랑은 도올 선생이 주장한 것처럼 불교와 관련이 없이 동양의 고유한 신화와 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주해 1. 도올 김용옥 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통나무, 1989년, P201.       2. 第二十四眞興王······天性風味, 多尙神仙, 擇人家娘子美艶者, 捧爲源花.        3. 女夷鼓歌, 以司天和, 以長百谷, 禽獸, 草木.        4. 女夷, 主春夏長養之神也.        5. 吳天明著, <<中國神話硏究>>, 中央編譯出版社, 2003年, P90.  
20    “독신주의는 문명의 변태이다.” 댓글:  조회:5964  추천:76  2008-01-10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1“독신주의는 문명의 변태이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임어당(林語堂)은 “동양중(불교의 스님과 비구니)이든 서양중(천주교의 신부와 수녀)이든 모두 문명의 변태이다.”라고 지적했다.  임어당의 이 지적은 인도, 유럽문명과 중국문명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중국문명전통은 음양조화가 핵심이기 때문에 독신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불교의 유입과 기독교의 유입에 따라 독신주의 문제가 불거졌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독신주의의 원시적인 유래와 독신주의 이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인류가 일부일처제 가족제도가 생겨난 이후로 독신상태의 발생이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즉 여자가 임신 중이거나 분만 후 일정 기간(중국인은 100일 동안 섹스를 금함) 남자는 독신상태로 살아야 한다. 도올 선생은 그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사실 인류학적으로 상고해보면 오늘 신부, 수녀, 비구, 비구니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쎌리바시(독신상태)의 형태는 이 해산전후 쎌리바시의 확대해석에서 생겨난 전통들이지만 물론 그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의미는 제각기 다르다.”고 지적했다.  도올 선생은 이어서 쎌리바시를 성립시키는 네 가지 철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기독교의 경우 거룩함과 관련해서 외재적 측면이 강한바, 신부는 하나님과 예수가 모두 독신이기 때문에 독신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자 공경이라 인식한다. 수녀는 하나님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속세의 남자들과의 혼인과 정사를 불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도문명의 경우는 신성이 존재자로서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속에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성교를 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나의 몸에 정결하게 축적시킴으로써 어떤 신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둘째 심신이원론에 의하면 육체는 인간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다. 섹스는 이런 감옥을 계속 생산하는 행위임으로 저주의 대상이다.  셋째 도덕성과 비범성의 문제 측면에서 볼 때 주기적으로 성교를 해서 생리적 욕구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짓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 보통사람이 못하는 어떤 도덕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런 도덕성은 비범한 어떤 신적 모습으로 독신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넷째 생활의 번잡성 문제이다. 즉 가정이라는 제도를 나의 몸에 얽매게 되고, 이 가정이라는 제도는 근원적으로 사심이 발생하게 되어 종교적 생활과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 독신주의 이념이 아무리 성스럽다 해도 이는 인도와 유럽인들의 것일 뿐, 음양의 조화가 핵심으로 된 중국문명은 “남자가 장성하면 장가가고 여자가 장성하면 시집가는 것(男大當婚, 女大當嫁)”이 천륜이었다.  허나 오늘날 이 천륜이 종교적, 철학적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여지없이 깨져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30~40대 노총각과 노처녀들이 수 없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인데,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경제시대에 먹고살기 힘든 문제도 있고,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 오직 자신들의 편리와 개성을 위해서 독신주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상은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고, 불륜문제가 사회의 잇슈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모택동시대까지만 해도 시집장가를 못가는 폐단이 없었으나, 개혁개방이후 독신자들이 생기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00교수는 “2020년이 되면 중국에 장가가지 못하는 노총각이 4,500만 명이 될 것이므로 그들의 범죄를 막으려면 정부에서 마땅히 공창을 세워 그들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이들은 독신주의자가 되고 싶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회 빈부격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는바, 시골총각과 도시 하층민 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해 중국, 몽골, 동남아 등지로부터 여자를 데려오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새로운 3고 여성(三高女性) 독신주의자들이 새로운 한 사회족속으로 살아가고 있다. 3고 여성이란 고학령, 고전문직, 고소득자인 노처들을 말한다. 그녀들은 시집가지 않고 혼자 살면서 남자생각이 나면 임시 만나 식사하고 섹스를 즐기고 하면서 그 어떠한 남자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부담 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편리한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3고 여성들은 종교적 이념을 지닌 독신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냥 번잡하고 거추장스런 삶을 회피하고 나만 편리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이 3고 여성 독신주의 현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조류(흐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독신주의자들의 출현과 흥행 현상이 또 하나의 새로운 현대문명의 변태라고 본다.   가령 현재 추세대로 독신주의자들이 늘어난다면 사회질서는 더 문란해지고 인구는 감소되고 인류사회는 최악의 저조기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19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댓글:  조회:6035  추천:81  2008-01-10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0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나라가 망하면 여자의 탓이라고 구차하게 변명해왔으며 그 죄를 여자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예하면 하나라(夏朝)는 매희(梅姬)가 망쳤고, 은나라(殷朝)는 달기(妲己)가 망쳤으며, 주나라(周朝)는 포사(褒姒)가 망쳤다고 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양귀비로 말미암아 일어났으며, 청말 8국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쑥대밭이 된 것은 자희태후(慈喜太后)가 시비를 불러일으킨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를 암탉에 비유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높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의미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고 또 속담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속담은 언제 어떻게 어떤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널리 전파케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고대사회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 전 왕조를 뒤엎으려면 반드시 명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주무왕(周武王)이 은주(殷紂)의 정벌에 나서면서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분을 걸고 호소했다.  “나를 따른 제후와 용사들이여, 이제 창과 칼을 들어라.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지금 주왕(紂王)은 여색에 빠져 스스로 제 집안을 망치고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나는 삼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주왕을 치러하는 것이니라.······”  주무왕이 이런 명분을 내건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은의 주왕은 하의 걸(傑)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있었다. 걸왕에게 매희가 있었다면 주왕에게는 달기가 있었다. 이 두 여인은 모두 유소씨 나라에서 헌상한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욕망은 끝이 없었다.  주왕은 달기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걷어 들이고 무자비하게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해 들였다. 이리하여 궁중에는 재물이 가득 차게 되었고 술은 못을 이루고 고기는 숲을 이룰 정도로 넘쳐났다. 또 호화찬란한 궁전을 짓고 동산과 못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음탕한 음악에 맞추어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젊은 남녀들이 주지(酒池)를 돌면서 서로 쫓고 쫓기며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지면서 연못의 술을 들이 키고 숲의 고기를 미친 듯이 뜯어 먹는다.  이런 미친 짓을 구경하면서 주왕의 몸에 자신을 맡기는 달기는 그제야 얼굴에 음탕한 만족의 빛을 드러냈다. 이 미치광이의 연화는 120일이나 주야로 계속되어 이를 ‘장야의 음(長夜之飮)’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옛날 고구려, 부여, 마한, 진한, 동예 등 동이족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있었던 ‘연일음주가무’는 ‘장야의 음’에 비해 새발의 피였다.  600년 역사를 자랑하던 은왕조가 주왕이 달기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려는 데서 썩을 대로 썩어 결국 주무왕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위 이야기는 <<사기>>에 실려 있으며, 본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매희나 달기처럼 무릇 왕에게 방탕하고 음탕한 욕망을 채우려고 청하는 말을 왕이 다 들어주기 위해 나라를 망쳐 먹은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훗날 유교가 정착됨에 따라 현모양처들의 올바른 말일지라도 남존여비의 무기를 들고 무작정 여성들을 억누르려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사용해왔다.  요즘에는 ‘수탉이 홰를 치면 먼지만 날리지만 암탉이 울면 알이라도 남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금알을 낳는다.’는 등 말들이 유행되고 있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참여도가 높아짐에 따라 여권이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모권제사회로부터 부권제사회에로 이행되어 남자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살아오던 것이 다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니 세상이 돌고 돈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18    상놈(常奴), 타마비(踏麻妣), 빠가(馬鹿) (김정룡) 댓글:  조회:6434  추천:89  2008-01-10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9상놈(常奴), 타마비(踏麻妣), 빠가(馬鹿)   김정룡   언어가 생겨나기 전의 인류는 화가 나면 흔히 화나게 만든 상대방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어가 생겨나면서 화날 때면 상대방을 욕을 하는 것으로 화를 풀어 살인현상이 많이 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류의 욕은 동서를 막론하고 성을 기본으로 이뤄진 것이 보편적이다. 영어에서 원래 수탉의 뜻인 ‘cock’가 속어로는 음경을 가리켜 욕이 된 것이 한 예이다. 동양, 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은 ‘X’이 가장 보편적인 욕으로 되어왔다.  우리민족은 ‘씨팔 새끼’와 ‘씨팔 년’이란 욕을 많이 하며 다음으로 ‘상놈’, ‘상년’, ‘상것들’이다. 우리민족도 조선시대 이전에는 성을 위주로 욕문화가 있었다가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인(常人)간의 차별이 하도 심해짐에 따라 ‘상(常)이 붙은 새로운 욕문화가 보급되었던 것이다. 거꾸로 “니네는 양반가문이 아니다.”라는 말도 치명적인 욕으로 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니 에미 씨팔’이란 말은 중국어 ‘操你媽’와 같은 뜻인데, ‘내가 너의 엄마와 X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제 에미와 X을 할 망종새끼’라는 의미다. ‘씨팔 년’도 ‘너는 제 애비와 X을 할 여자다.’라는 뜻이다.  중국인은 성을 위주로 욕을 하는데, 우리민족과 다른 점이라면 중국인은 조상을 곁들어 욕하는 경우가 많다. ‘너의 조상 할배, 할매와 X을 한다.’라고 걸쭉하게 욕한다. 이는 중국인에게 있어서 조상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또 일상생활에서 ‘씨팔’, ‘씨부랑께’라는 뜻으로 ‘타마비’, ‘타마디’란 욕을 많이 하는데 한자로 ‘他媽妣’, ‘他媽的’가 아니라 ‘踏麻妣’, ‘踏麻的’이다. 타(踏)는 밟는다는 의미로서 동물들이 성교 시 수컷이 앞발로 암컷을 ‘밟는 행위’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대 중국동남지역 일부소수민족들은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청춘남녀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서로 손잡고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를 ‘타거(踏歌)’라 했고, 행사가 끝나면 남녀가 짝을 지어 음산한 곳을 찾아 야합(野合)하는데 ‘踏’은 남녀성행위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마(麻)는 삼베 마인데 원시인류의 생활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상징물이며 선비(先妣)의 상징물이며 여신(愛神)의 상징물이며 여음의 상징물이며 생식력과 생명력의 상징물이었다. 비(妣)는 여음을 뜻한다.  한중일 삼국에서 일본인의 욕문화가 가장 ‘문명적’이다. 다 아시다시피 일본인의 보편적인 욕은 ‘빠갗와 ‘칙쇼오’로서 ‘성’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짐승과 연관되어 있다. ‘칙쇼오(畜生)’는 모든 짐승을 뜻하며, ‘빠갗는 한자로 ‘馬鹿’라 적는다. 왜 말과 사슴으로 사람을 욕할까? 그 유래는 아래와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가 조작하여 영정(嬴政)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황위에 올려놓고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는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어느 하루 조고가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려고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폐하, 이것이 말이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하들의 동태를 살폈다. 어떤 자는 말이 옳다고 했고, 어떤 자는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했다. 당연히 거짓말을 한 자는 살아남았고 거꾸로 사슴을 사슴이라고 바른말을 한 자는 모가지가 날아났다. 이로부터 중국에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指鹿爲馬)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으며, 뜻인즉 진실을 왜곡하여 억지를 부린다는 의미도 있고 다른 하나는 말과 사슴마저 분간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지록위마(指鹿爲馬)란 고사가 일본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인은 억지를 부리거가 멍청하거나 바보를 가리켜 말과 사슴마저 가리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서 ‘빠가(馬鹿)’라는 욕이 보급되었던 것이다.
17    중국인이 공처가(恐妻家)가 많은 이유 댓글:  조회:6758  추천:84  2008-01-0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8중국인이 공처가(恐妻家)가 많은 이유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일요일, 필자는 서울가리봉동에서 고향에서 온 친구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한참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쯤, 어찌어찌 하다가 공처가에 대한 화제가 나오게 되었다. 좌중의 한 친구가 “중국인이 마누라를 무서워하는 관습이 어찌 보면 앞선 문화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해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는 계속해서 “본래 남권절대주의로 살아왔던 우리민족과 일본인도 지금은 중국인처럼 마누라를 무서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느냐!”는 ‘논거’를 덧붙였다.  위 에피소드에 대한 견해와 이해는 독자들한테 맡기기로 하고, 필자는 본문에서 먼저 중국인의 대표적인 공처가들에 대한 고사를 말하고, 또 과거 중국과 같은 유교문화권이었던 조선과 일본은 남권절대주의로 흘러온데 비해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이 오히려 공처가가 많은 이유를 밝혀보려 한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공처가로서 당나라 초기 어사대부를 지낸 배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며, 그가 공처가로 유명해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공처가 이론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세 가지 무서운 것이 있소. 젊고 예쁠 때는 마치 살아 있는 보살 같으니 그것이 무섭소. 세월이 지나 자식들이 집안에 가득할 때는 똑 마치 구자마모(九子魔母:불경에 나오는 여신으로 동자를 잡아먹는다고 함)처럼 변하여 무섭소. 그리고 50살이나 60살쯤 되면 온통 검은 얼굴에 분을 발라 마치 구반도(鳩盤茶: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다는 불경 속의 귀신)처럼 보이는데 어찌 무섭지 않겠소.”  당시 궁중의 광대가 중종(中宗)과 그의 황후(韋氏) 앞에서 “세상을 살면서 공처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네. 밖에는 배담이 있고 안에는 황제가 계신다네!”라는 대사를 읊었다.  당나라 때 공처가로 소문난 황제가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고종 이치(李治)는 아예 국사마저 황후 무측천에게 맡겨버렸다.  송나라 때 아내가 소리 지르면 마치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처럼 두려워한다는 ‘하동사후(河東獅吼)’와 아내를 연지 바른 호랑이처럼 무서워한다는 ‘연지호(臙脂虎)’ 등 공처가에 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리고 여정기(呂正己)는 아내를 무서워해 관직까지 박탈당했다.  이렇듯 황제로부터 대신 및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공처가가 많았으니 일반 백성들이야 공처가가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필자가 중국에서 40여년 살아온 체험에 의하면 중국남자 중 십중팔구는 공처가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인은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대다수가 여자를 무서워한다. 이는 조선족사회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왜일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은 수천 년의 유교전통을 지닌 나라였다. 그렇다면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등 유교윤리에 의해 마땅히 남권절대주의 사회로 흘러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여자를 무서워하고 십중팔구가 공처가로 된 이유가 바로 도교문화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하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든다.”고 지적했다.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여성을 억압하는데 비해 후자는 여성을 숭배한다. 전자는 상제가 절대적 권위라 보는데 비해 후자는 도(道)를 절대적 권위라 여기고, 아울러 노자는 도를 여성의 ‘음부’에서 찾았으며 장자는 남녀교합이야말로 진정하고 지고한 도라고 보았다. 또한 중국문명은 생식숭배를 핵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생식숭배는 곧 여성숭배가 핵심이며, 따라서 이것도 도교문화에서 유래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교는 부권제확립과 실시에 역점을 둔데 비해 도교는 여성주체인 모권제사회를 숭상한다.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이 우선이라 볼 때 중국인의 뼈 속에는 유교적 요소보다 도교적 요소가 훨씬 더 많이 스며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분석해 보면 왜 중국인이 공처가가 많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16    '종군위안부'의 유래 (김정룡) 댓글:  조회:5686  추천:116  2007-12-08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7'종군위안부'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종군위안부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제2차 대전 시, 한국이나 중국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짓밟혔던 사실을 떠올리며, 일본인이 사상 처음으로 혹은 유일무일 하게 저지른 만행의 산물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종군위안부가 역사무대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중국춘추시기였다. 춘추시대 말기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정벌할 때 장수와 병사들이 가족을 그리워하여 군대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보고 여성 위문단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냈다. ‘중국의 남자와 여자’의 저자 역중천(易中天)은 “이것은 중국 최초의 종군위안부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 후 중국에서 종군위안부가 하나의 제도로서 정착되었던 것은 한무제 때었다. 당시 종군위안부를 ‘군영의 기생’이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영기(營妓)’라 불렀다.  ‘세상사’가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존재하기 마련인 것과 같이 ‘영기’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종군위안부는 임시방편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복잡했다. 즉 우선 종군위안부는 분배가 문제였다. 그래서 죄인의 아내나 딸들을 강제로 군사들에게 짝지어주는 제도도 생겨났는데, 이 또한 가족이 생기고 아이를 낳고 해서 너무 비대해져 통솔과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모든 병사들이 다 여자를 소유할 수는 없어 내부 갈등도 심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겨난 것이 곧 ‘영기’ 제도였다. ‘영기’ 제도는 모든 군사들이 공평하게 여자를 접할 수 있고 또 관리하기도 쉬웠으며 이동도 편리했다.  ‘영기’ 제도는 송나라 때까지 성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이 없을 때에는 ‘영기’가 지방 관리들의 노리개로 전락되면서 관리들의 부패를 부추기는 요소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영기’ 제도를 폐지하고 건도교(乾道橋)와 무정교(武定橋)에 관영기원, 즉 공창을 두었으며 관리들이 기생과 잠자리를 하는 것을 금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하지만 공창 또한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 강희(康熙) 12년(1673년)에 문을 닫았다.  종군위안부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적을 무너뜨리려고 미인계를 쓴다든가, 전쟁에서 패하면 승전국에게 미녀들을 바치는 것도 역시 위안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서시(西施)를 바쳤고, 한나라 때 왕소군(王小君 : 흉노로 가는 도중에 자살했음.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에 속한다.)을 흉노에게 바치는 등, 이들 미녀들이 곧 위안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중원이 주변 이민족에게 전쟁에서 패하면 미녀들을 상대에게 바친 사례가 허다하다. 그리고 1635년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청에 60만의 인질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중 90%이상이 젊은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청에 가서 사실상 위안부 노릇을 했다.  20세기에 들어 종군위안부가 기본상 사라졌지만 일본인이 종군위안부를 두려고 자국 내 여성들을 모집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등 주변국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일본인의 이런 만행은 규탄 받아야 하며 반드시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허나 아이러니한 것은 1973년 한국문화관광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일본인 관광객을 한국에 끌어들여 외화를 벌어들이려고 관광업계에 일본인을 상대로 기생관광판촉(선전)에 적극 나설 것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만행에 대해 규탄하는 것이 마땅하나 한국인은 스스로 자신의 수치스런 행위에 대해서도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한국의 양심 있는 학자들의 지적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일본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위안부문제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국제사회는 일본을 양심 있는 사과를 하라고 촉구하고, 일본은 강제성이 없었다고 뻗히고 있다. 이번에는 미국이 지난 26일 ‘위안부 결의안’을 하원 외교위원회에 통과시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돌아가는 국제형세를 지켜보며 종군위안부의 역사적 유래를 한번 살펴보았다.
15    풍류도와 ‘멋’, ‘맛’, ‘판’ (김정룡) 댓글:  조회:6345  추천:77  2007-11-02
16. 풍류도와 ‘멋’, ‘맛’, ‘판’   김정룡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외모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며, 곧 민족마다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다. 예하면 한중일 세 나라 사람이 모이면 외모로는 구분이 안 된다. 또 유럽백인이나 아프리카 흑인이 모였을 경우 마찬가지로서 외모로는 민족구분이 되지 않는다. 오직 언어로서 구분이 가능하다.  민족과 민족 간의 언어차이는 곧 문화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인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저서 ‘추한 한국인’에서 “멋이란 낱말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없는 유일하게 한국인만 사용하는 어휘이다.”라고 지적했다. 비록 ‘추한 한국인’이 얄밉기는 하지만, 필자는 그의 이 ‘멋’에 대한 지적에서 크게 힌트를 얻었다. 즉 필자는 한중일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말 ‘멋’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할 경우 대충 의역(意譯)은 가능하나 완벽하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해당 어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하면 ‘멋’은 중국어로 ‘美’, ‘瀟洒’, ‘帶勁’, ‘意思’, ‘浪漫’ 등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멋’의 뜻을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한다. “야, 너 대가리는 멋으로 달고 다니느냐?”에서 멋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정확히 옮길 수가 없다.  ‘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의 저자 유동식 교수는 ‘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곧 멋이다.” 그는 또 “멋은 풍류도의 기본정신이며 기본 넋이다.”라고 말했다. 고대우리민족은 교리교의가 있는 종교가 없었으므로 풍류도가 우리민족의 종교역할을 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과거 조선족에 관한 여러 편의 글에서 “우리민족은 멋의 민족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가 있다. ‘맛’이란 낱말도 중국어와 일본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예하면 중국인은 우리말 ‘맛’을 ‘미도(味道)’, ‘풍미(風味)’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중국의 도교와 풍류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은 ‘맛이 있다’를 ‘먹기 좋다’는 뜻으로 ‘하오츠(好吃)’라고 하는바 이 ‘好吃’는 우리말 ‘맛’의 뜻을 그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일본어에 우리말 ‘맛’에 해당되는 어휘로서 ‘아지(味)’가 있는데 ‘아지(味)는 우리말 냄새라는 뜻에 가깝다. ‘판’이란 낱말도 역시 우리민족만이 특이하게 사용하는 어휘이다. 예하면 ‘노래판’, ‘춤판’, ‘술판’, ‘오락판’, ‘도박판’, ‘싸움판’, ‘난장판’, ‘개판’, ‘X판’ 등 ‘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場’으로 번역할 수는 있으나 이 ‘場’은 우리말 ‘판’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우리말 ‘판을 치다’, ‘판이 깨지다’, ‘판을 흐리다’, ‘판에 뛰어들다’ 등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하기 매우 힘들다.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고전음악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 ‘판소리’는 곧 고대 우리민족이 풍부하고 다양한 여러 가지 ‘판’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판소리’가 중국고전음악과 일본고전음악에 비해 독특한 한민족의 특성을 반영하는 민족음악이라 할 때, 우리민족이 얼마나 ‘판’의 문화를 중시해왔는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어 말해서 ‘멋’, ‘맛’, ‘판’이란 낱말은 우리민족만이 지어낸 말이며, 이것이 곧 문화적으로 타민족과 구분되는 요소이며 이는 고대우리민족의 종교가 아닌 종교, 즉 풍류도에서 유래되었다.    
14    구리다는 말의 유래(김정룡) 댓글:  조회:6209  추천:102  2007-10-23
15. 구리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을 저질러 놓고 뒤가 켕기거나, 똥과 같이 더러운 냄새거나 퀴퀴하게 안 좋은 냄새를 흔히 구리다고 말하는데, 이 구리다는 말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중국역사에서 진(秦)에 이어 두 번째 통일왕조였던 한조(漢朝)는 서한과 동한을 거쳐 선후 40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한조 초기 ‘문경지치(文景之治’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의학 등 다 방면에서 전례 없던 발전을 가져왔고 한무제 때 강토가 전례 없이 넓어졌으며 본래 화하제족(華夏諸族)이 하나의 통일민족인 한족(漢族)으로 통합되었다. 지금 중국인을 한족, 중국어를 한어, 중국문자를 한문, 중국의학을 한의학이라 부르게 된 것이 곧바로 한조의 전례 없는 업적에 의해 얻어진 호칭들이다.  그렇듯 강성했던 한조가 후한(後漢) 말기에 이르러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졌고, 관리들이 부패했으며, 붕당(朋黨)이 심해 갈기갈기 분열되었고, 내시들이 권세를 잡고 배만 채웠으며, 수만 명의 신도를 보유한 태평도(太平道)라는 사교집단이 사처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국고는 거덜이 났다.  재정난에 허덕이게 된 조정은 벼슬자리를 팔아 돈을 모으려 했다. 당시 감투 값은 벼슬자리에 따라서 값이 매겨졌다. 영제(靈帝) 때 관직을 파는데 값을 매겨놓고 공개입찰(招標)까지 있었다. 가격은 4백 석짜리 벼슬이면 4백만금, 2천 석짜리 지방장관이면 2천만금, 이렇게 1석에 1만금씩 가격을 높였고 임명되면 절반 값을 먼저 지불하고 나머지 반은 부임한 후 백성들을 수탈해서 문다.  최열(崔烈)이란 돈 많은 부자가 5백만금을 주고 사도(司徒:지금의 문교부장관에 해당함)관직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 아마 이 양반이 양심이 있었던지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는 눈길로 보는 것 같이 느껴져 아들 최균(崔鈞)에게 “이상한 소문이 없더냐?”고 물었다. 아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별로 나쁜 소문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사도자리에서 구리 냄새가 난다고 하더랍니다. 아마 구리 냄새가 싫은가 보지요.” 이 말을 들은 최열이 아들놈이 제 아비를 놀린다고 곤장으로 때리려 드니 최균이 뺑소니쳤다. 더 열 받은 최열이 최균에게 “아비의 매를 피하는 것은 불효가 아니냐?”고 하자, “당년에 대순(大舜)이 아버님을 모실 때 작은 곤장으로 때리면 맞고 큰 곤장으로 때리면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도 대순은 효자였지요.”라고 최균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최열은 할 말을 잃었다. 왜냐하면 돈 주고 관직을 산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구리 냄새는 당시 돈이 구리로 만든 동전이었기 때문에 돈 냄새라는 뜻이다. 지금 5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돈이 구리로 만든 것이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세 때(철)’ 로 만들어진 돈을 동전이라 말하는 것이 곧바로 옛날 돈은 모두 동전인데서 유래된 것이다.  아무튼 후한 때 돈이 구리로 만든 것이고, 돈 많은 최 열이 금전으로 관직을 산 것이 께름직하고 뒤가 켕겨 사도자리에 구리 냄새가 난다는 말이 생겨났고, 이 이야기가 세세대대로 전해지면서 구리다는 말이 일상 언어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위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에 실려 있는 고사이며, 이것이 중국문화권에 속해 있던 한반도에 전해져 구리다는 말이 일상 언어로 되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리고 조선족은 뒤가 켕기거나, 똥 냄새거나, 퀴퀴하게 안 좋은 냄새를 ‘쿠리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상욕을 쌍욕, 상놈을 쌍놈이라 된소리로 발음하는 것과 같이 ‘쿠리다’는 구리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13    성녀와 기녀의 유래 (김정룡) 댓글:  조회:6668  추천:111  2007-10-23
14. 성녀와 기녀의 유래 김정룡    현대인의 의식속의 성녀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교양적이고, ‘남자를 모르고’, 세속풍진(風塵)에 물젖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깨끗한 여성이다. 허나 현대인이 성녀의 유래를 알게 되면 이러한 성녀의 이미지가 많이 다운(삭감)될 뿐만 아니라 놀라 자빠질 수도 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쳐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 토착민(土着民)들은 바알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로 불리는 농사를 지어먹을만한 가나안땅이 있다. 그런데 그곳은 사막에 둘러싸여 내내 가뭄이 심하다. 가뭄이 심하면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바알신앙을 갖게 되었다. 즉 남정네들은 바알림, 아낙네들은 바알롵을 상징하고 교회에 모여 열심히 성교를 한다. 왜 그랬을까? 남자의 정자는 비를, 여자의 몸은 밭을 상징하고 열심히 또 많이 성교를 하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경에 의해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보다 더 성스러운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성교행위는 성사(聖事) 중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사였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항시 교회에서 대기하면서 장정들이 찾아오면 열심히 성교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한다. 물론 아무런 금전거래도 없었으며 성교를 더 많이 하는 여성이 성녀중의 성녀로 인정받았다.  성녀란 이렇게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조선시대까지도 성황당에서 풍년을 빌기 위해 남녀가 모여서 성교행위를 감행했다.  현대 개별 학자들은 옛날 성황당은 매음굴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문화에 대한 왜곡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매음행위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뿐더러 성스러운 일을 수행한다고 믿었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일본의 농촌에서는 지금도 모내기가 끝나면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논두렁 위에서 청년남녀들이 성교를 행한다.”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인간의 몸은 세월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중국인의 관점에 따르면 칠칠사십구 해서 여자 나이 49세면 생리가 끝나고 성교행위도 시들어 간다. 또 개별적으로 몸건강이 좋지 못하면 49세 이전에 성교행위를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에서 성교를 제공하던 성녀가 성스러운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면 밥줄이 끊기게 된다. 인간은 감정동물이라 본래 그녀들과 성교행위를 하던 장정들이 개인적인 교분에 의해 찾아서 생계를 도와준다. 이때부터 남자는 돈과 재물로 여자의 몸뚱아리와 교환하는 사회현상이 생겨난다. 기생이란 이렇게 유래되었던 것이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의 견해에 의하면, “고대로마의 여신인 비너스는 로마인의 어머니였으며, 혼인을 관장하는 수호신이었으며, 동시에 창기의 여신이었다. 로마인들이 정조를 강구한 이후로 그녀는 정조수호신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매년 4월 1일이면 로마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고, 4월 23일이면 호객기녀라 불렀다.”고 한다.  중국에서 기생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역사기재가 없어 알 수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2600년 전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800여 명의 기생을 둔 공창(公娼)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에서 최초로 되는 기원이다.  기녀란 ‘기’는 본래 기술 ‘技’였다가 후대에 오면서 계집변인 ‘妓’로 변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기녀는 본래 청루의 여인들처럼 외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악기도 다루고, 노래도 부르고, 시를 짓고 읊었으며, 지식도 풍부해서 풍류문인, 고관대작들과 지음(知音)으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다종다양한 재주가 있는 여인들이었다.  명나라 때부터 ‘技女’가 ‘妓女’로 완전히 전락되어 오늘과 같은 기생모습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12    여자를 ‘꺾다’와 ‘따먹다’는 말의 유래 댓글:  조회:8147  추천:117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3여자를 ‘꺾다’와 ‘따먹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남자들이 판을 치는 부권제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나무신(樹神)은 남성신(男性神)으로 변모되었으나, 까마아득한 옛날에는 나무신은 여성신(女性神)이었다. 이는 나무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 여자가 아이를 낳는 동일한 생산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부터 나무, 특히 바람에 하느적거리는 나무가지는 여자를 상징하고 여자를 나무가지에 비유하는 문화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남자가 여자와 하는 성행위를 ‘여자를 꺾는다’는 표현이 유래되었다.  <<시경·정풍(詩經·鄭風)>>장중자(將仲子)편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바라옵니다 도련님, 우리 마을을 넘지 마소서, 내가심은 구기자나무가지를 꺾지 마소서······”, “바라옵니다 도련님, 우리 집 담을 넘지 마소서, 내가심은 뽕나무가지를 꺾지 마소서······”, “바라옵니다 도련님, 우리 안채 뜨락을 넘지 마소서, 내가심은 박달나무가지를 꺾지 마소서······”  이 시구는 2500년 전 정나라의 한 아릿다운 순박한 처녀가 이웃마을 총각에게 사랑을 애절하게 고백하는 ‘연애편지’이다. 여기서 ‘구기자나무가지’, ‘뽕나무가지’, ‘박달나무가지’는 여자를 상징하며 ‘꺾지 말라’는 것은 여자가 남자한테 ‘나를 취(娶)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반어법의 표현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남자가 여자와의 성적행위를 ‘여자를 꺾는다’고 하는 표현이 이미 2500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여자를 따 먹다”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자.  아득히 먼 페미니즘(남성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이 먹는 것(食)과 성행위(色)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告子曰; 食性, 人之本也.)이라고 여기고 동일한 패턴으로 보았다. 아울러 여성을 열매에 비유하고 열매가 여성을 상징한다고 여기고 여자와의 성행위를 여자를 따먹는다는 표현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가 농작물재배시대에 들어 고추, 가지, 바나나, 옥수수와 같은 열매들은 남자의 성기모양과 비슷하지만, 인류가 채집시대의 원초적인 열매 즉 복숭아, 사과, 배, 딸기, 앵두, 호두 등 절대다수의 열매가 외형상에서 여자의 성기와 신통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원시인류는 현대인처럼 사변적 사유(思辨性思維)가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사물에 대한 관찰에 있어서 대부분 외형적인 특징에 집착하여 문화를 창조하였다. 예하면 인류가 본능 상에서 모든 동물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동물을 숭배하고 닮고 싶어 하는 욕망에 의해 신화가 생겨났고 종교가 생겨났고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고기(잉어)가 외형상에서 여음과 닮았고 알을 많이 쓸기 때문에 물고기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면 그 신력이 인간(여성)의 몸에 전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시인류는 채집시대에 주먹거리인 열매가 외형상에서 여음을 닮았으므로 열매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또 열매의 생산성과 여성의 생산성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자들은 신의 과일(神實)인 복숭아(桃實)와 같은 여음을 가장 신통하게 닮은 열매를 많이 먹으면 성욕도 강해지고 “씨도 건실하게 뿌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서왕모가 제신(諸神)들을 모아놓고 3천년 묵은 복숭아를 먹이면서 번도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여기서 복숭아는 곧 서왕모를 상징한다.  그리고 열매도 맛있는 것과 맛없는 종류가 있는 것처럼 여자도 외형상에서 남자들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떨어지게 만드는 부류가 있다. 여자와의 성행위를 ‘맛이 있다’, ‘맛이 없다’, ‘굶었다’, ‘군을 뗐다’라고 하는 표현법도 열매가 여자를 상징하고 여자를 열매에 비유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11    여성을 꽃이라 하는 유래 댓글:  조회:6371  추천:94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2여성을 꽃이라 하는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현대인은 보편적으로 꽃이 아름답고 여성이 아름다운고로 꽃이 여성을 상징하고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피상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마치 중국 전족(纏足:쫑발)문화가 도가(道家) 성숭배에서 유래된 것을 여성들이 도망가는 걸 막기 위한 궁여지책에 의해 생겨났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여성을 꽃이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을 꽃이라 하는 것은 꽃과 여성의 외형상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아이를 낳고 꽃이 열매를 맺는 동일한 생산성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아래에 그 논거를 살펴보자.  꽃은 태고시대부터 아름답다. 허나 여성은 본래부터 외형상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부권제시대에 진입하여 여성도 재물과 같이 남성들의 분배대상이 됨에 따라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하기 시작해서부터 여성이 외형상 아름답게 변모되었던 것이다. 만약 여자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옷을 가지각색, 다양한 디자인으로 화려하게 입지 않고 머리모양을 가꾸지 않은 원초적 모습이라면 남자들에 비해 결코 아름답지가 않다. 이는 마치 암컷인 까투리가 수컷인 장꿩보다, 암소가 수소보다······ 모든 자성(雌性)이 웅성(雄性)에 비해 외형이 아름답지 못한 것과 같다.  더욱이 모권제시대 여성의 이상형은 서왕모이거나 선문대할망의 거녀 모습이었다. 모권제시대의 서왕모는 표범의 얼굴에 키가 구척이며 팔다리는 집기둥처럼 굵고 손발은 코끼리를 연상케하고 한 번 소리를 지르면 천지가 진동했다고 한다. 선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발이 목포 앞바다에 닿았다고 하며 내의를 지어 입는 데 100통의 비단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상이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으며 꽃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권제시대의 흉측한 모습(오늘의 여성의 아름다움 기준으로 하는 말)을 지닌 여왕들을 꽃신(花神)이라 했던 데로부터 꽃은 여성을 상징하고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하나의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는 어찌된 영문일까?  <<회남자·천문훈(淮南子·天文訓)>>에 이르기를, “여이(女夷)가 북치고 노래 부르면서 하늘의 조화를 관장하고 백곡, 금수, 초목을 생장케 한다.”고 했다. 고유(高誘)가 주를 달기를, “여이는 봄과 여름의 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했으며, 풍응경(馮應京)은 그의 <<월령광의(月令廣義)>>에서 “여이는 곧 화신(花神)”이라고 말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이른바 여이, 화신이란 곧 원시모권제시대의 부족두령과 제사를 겸한 여신”이라고 지적했다.  원시모권제시대 인류의 가장 큰 사명은 아이를 낳는 것과 먹거리  생산(채집)이었다. 그래서 동일한 생산성을 지닌 아이를 낳는 여성과 열매를 생산하는 꽃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왕을 화신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여음(女陰)을 ‘꽃잎’이라 하는데, 이는 여음이 꽃잎처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여음과 꽃이 동일한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은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어린애를 손잡고 정답게 걷는 어머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대문화의 본질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꽃이 될 자격이 없다. 
10    복숭아와 잉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유래 댓글:  조회:6466  추천:114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010. 복숭아와 잉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제사를 가장 중시한다. 제사를 치르자면 제사상부터 갖춰야 하고 제사상을 차릴 때 여러 가지 금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복숭아와 잉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금기의 유래에 관해 얘기해보려 한다. <<이조각문헌 풍속관계자료요지>>에 의하면 “도(桃)와 리(鯉)를 제사에 사용치 않는 것은 <공자가어(孔子家語)>와 황씨설(黃氏說)에 의한 것이라 했다. 후세인이 이 이자(二者)를 쓰지 않는 것은 속기(俗忌)에 의한다. 즉 도는 귀를 쫓고 리는 화룡(化龍)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중국 일부 학자들은 공자님이 복숭아와 잉어는 ‘여음’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물건(東西)이므로 남자를 계보로 하는 조상제사에 올리는 것을 금기로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럼 복숭아와 잉어가 어떻게 ‘여음’을 상징하게 되었는가는 유래에 대해 먼저 잉어부터 살펴보자.  원시인들은 질병,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인하여 평균수명이 20세 좌우였고 생존율은 50% 미만이어서 부족생존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원시인들은 부족생존을 위해 무리하게 불가항력적인 요소와 싸운 것이 아니라, 후대를 많이 번식시키는 것으로서 즉 아이를 많이 낳는 방법으로 부족생존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원시인류는 생식숭배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이는 여자가 낳는다. 그래서 여자가 숭배대상이 된 동시에 따라서 일차적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구체적인 부위인 ‘여음(女陰)’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신체 한 개 부위인 ‘여음’에 대한 숭배만으로는 다산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원시인류는 특정 자연물을 골라 제사를 통해 그의 신력을 빌어 인간의 다산을 촉진시켜려고 했다. 그 자연물이 외형상에서 ‘여음’과 신통하게 닮은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한번 알을 쓰면 수백, 수천 마리 새끼가 생겨난다. 다산의 상징이다. 더욱이 물고기 가운데서 두 마리 잉어를 포개놓으면 ‘여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하여 잉어는 전형적인 ‘여음’의 상징이 되었다. 중국에 가면 가정집에 오동통한 남자애가 풍만한 잉어를 안고 있는 그림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가문의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다음 원시인류의 주요 먹거리는 열매였다. 생식숭배 의식이 강했던 원시인류는 복숭아가 외형상에서 여자의 ‘여음’과 가장 닮았다고 보고 복숭아에 대한 숭배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에는 유명한 번도(嬏桃) 전설이 있다. 즉 서왕모가 수천 년 묵은 나무에 열린 번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생불로해진다고 한다. 서왕모가 삼황오제와 여러 신의 우두머리들을 모여 놓고 번도 연회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곧 생식숭배로 인한 복숭아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숭아가 ‘여음’을 상징하는데서 남자의 여자 관계운을 ‘도화운(桃花運)’이라 하고, 남녀가 연애로 몸을 그르치는 일을 ‘도화’라 비유하고, 남녀가 치정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도화안(桃花案)’이란 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도실(桃實)에 대한 숭배는 전체 도목에 대한 숭배로 확대되었으며 따라서 도목은 나무 중에서 으뜸으로 가는 신목(神木)으로 꼽혔다. 원시인류는 인간이 병드는 것은 사기(邪氣:귀신)가 침입한 결과라 보고 귀신을 쫓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겼다. 예를 들면 정신병환자는 동쪽으로 향한 도기(桃枝)로 머리를 때리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에서는 ‘목주(木主)’를 도목으로 만들고, 도교와 불교 사찰에서 ‘인부(印符)’를 도목으로 했으며, 도궁(桃弓)은 진사(鎭邪)한다는 등등의 전설이 많다.  이렇게 도실은 신실(神實)이요, 도목은 신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복숭아가 귀신을 쫓는다는 유래가 생겨났고, 이는 일차적으로 여성숭배와 생식숭배에 의해 복숭아가 ‘여음’과 가장 닮은 고로 ‘신격화’된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복숭아와 잉어가 ‘여음’, ‘여성’을 상징한다는 데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남자를 계보로 모신 조상제사에 복숭아와 잉어를 올리지 못하는 금기풍속은 또 하나의 남존여비 관습을 반영한 강력한 증거이다.
9    바람피우다와 까오퍼쎄(稿破鞋)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6325  추천:85  2007-10-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9바람피우다와 까오퍼쎄(稿破鞋)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같은 사물을 갖고 민족에 따라 그 언어 표현법이 다른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민족과 민족 간의 언어표현 차이는 곧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남녀불륜을, 우리민족은 바람피우다고 하고 중국인은 까오퍼쎄(?破鞋)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남녀 성을 표현하는 포인트가 우리민족은 ‘바람’이고 중국인은 ‘신발’이라는 것이다.  왜 전자는 ‘바람’이고 후자는 ‘신발’로서 표현할까? 여기서 먼저 후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인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전족(纏足:쫑발)’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현시대 사람들은 흔히 ‘전족’이 여성들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중국인은 세상에서 생식숭배사상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 중국은 세상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따라서 중국인의 남녀 성을 연구한 방중술(房中術:섹스 기술)이 가장 발달했으며 ‘전족’문화도 역시 중국인의 방중술에서 유래되었다.  즉 중국인은 발이나 신발이 성기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물론 이러한 관념은 고대사회 여러 민족이 갖고 있던 공통된 관념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는 신혼 첫 날밤 신랑신부가 동방(洞房)에 들 때 신부가 신랑의 신발을 벗겨주는 풍속이 있으며, 우리민족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여성들이 외간 남자 앞에 맨발을 드러내 보이는 행위를 터부시했다(여성이 맨발을 보이는 것은 치부를 보여주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인이 타민족에 비해 발이나 신발이 성기를 상징한다는 관념에 대한집착이 가장 강했다.  실제로 여자의 인체부위에서 ‘치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위 중 발을 애무하고 자극하면 흥분이 빨리 오고 가장 절정에 이른다. <<금병매>>에 서문경이 반금련의 발가락 사이에 포도를 끼워놓고 비벼 터치우고 혀로 빨아먹으니 반금련이 몸을 지체 못할 정도로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세상의 남성들이 여자의 성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매력적이라 여겼다. 그런데 중국인은 여자가 발이 작으면 성기도 작다는 인식이 타민족보다 강했다. 동양 최대 미인인 양귀비의 발이 10센치가 되나마나 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 양귀비가 최대 미인으로 평가된 이유 중에 ‘소족(小足)’이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양귀비는 당나라 사람이므로 ‘전족(송나라 때 생겨났음)’문화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인이 이미 ‘소족’에 대한 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결국 이러한 ‘소족’숭배에 의해 ‘전족’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인은 여자의 발과 신발이 여자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남녀 성행위를 말할 때 우회적으로 발(第三者揷足:제3자가 끼어들다.) 혹은 신발(?破鞋:바람피우다)로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까오퍼쎄(?破鞋)는 외간남자한테 ‘내맡기’는 여자의 성기는 헌 신발처럼 천하다는 의미도 있다.  다음 우리민족이 남녀불륜을 바람피운다고 표현하는 유래에 대해 아래와 같은 세 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여자의 임신이 남자의 역할에 의해 이루진다는 관념이 생기기 전에는 바람을 맞으면 여자가 애를 밸 수 있다고 인식했었다. <<이역지(異域志)>>에 “여인국이 있는데, 그 나라는 순수하게 음(여자)만 있는 곳이다 ······ 여자들이 몸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고 홀딱 벗은 채 남풍(봄바람)을 맞으면 바람에 감하여 잉태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대목이 있다. 나.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란 낱말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전통복장인 한복을 바람 옷이라 하며 통풍이 잘 되라고 옷 디자인이 굉장히 널찍하다. 이는 옛날 우리 선조들은 성기에 바람이 잘 통해야 성욕이 강하고 생육력도 강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이 추운 겨울에 내의를 입지 않고 팬티에 바지만 걸치는 습관이 역시 이러한 인식의 관성표현이라 볼 수 있다.  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오면 조정에서 직접 조직하여 수백 명의 여무(女巫:여자무당)를 동원하여 기우제(祈雨祭)를 거행하였다. 여무들이 굿판에 설 때 속옷은 벗은 채 치마만 걸쳐 입고 다리를 번쩌번쩍 쳐들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한국 소설가 김별아 씨는 그의 <<미실>>에서 고대 우리민족의 기우제 때 있었던 무당들의 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마르고 곡식이 타들어 갈 때, 궁중에서는 엄숙한 천제의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민간의 처방을 병행하여 기우제를 치렀다. 무당들은 속옷을 벗고 치마만 걸쳐 입은 채 굿판에 섰다. 물기 하나 없는 바람이 함부로 그녀들의 통통한 허벅지와 엉덩이를 매만졌다. 무녀들은 분노한 신령과 교접하며 영신했다. 치마를 들추어 바람을 희롱하며 가랑이를 번쩍번쩍 들어 한바탕 음란한 춤을 추었다. 가뭄이야말로 양이 음을 이겨 눌러 음력이 부족해 빚어진 탓이다. 그래서 무녀들이 지닌 음력의 발산을 통해 신령을 위로하고 천기를 다스리려 한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우리민족은 수천 년 동안 남녀 성행위가 바람의 역할과 연관이 크다고 인식하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녀 성행위를 바람피운다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다.  지난 밤 꿈에 문화혁명 때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게 헌 신발을 새끼줄로 꿰달아 목에 걸어놓고 대중비판투쟁을 하던 일이 나타나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8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5721  추천:103  2007-10-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8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이 만들어낸 고유어휘가 있고 외래종교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외래어휘가 ‘우리말’로 굳어져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휘도 있다.  중국은 하상주 삼대(夏商周三代)시기까지 유교와 도교를 주축으로 언어가 발달해 오다가 후한(後漢)시기부터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해서 수당(隋唐)시기에 불교의 ‘꽃’이 만개하여 불교용어가 일상생활에 침투되어 중국언어가 한층 풍부해졌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문화의 영향이 커 일상생활에서 유교와 도교적 용어를 많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1600년 전부터 불교가 유입되면서 불교의영향이 굉장히 크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문화재 80% 이상이 불교와 연관이 있고, 불교신자가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불교에서 유래된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전편에 얘기했던 ‘야단법석’, 본편에서 얘기하려는 ‘이판사판’도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언어이다.  ‘이판사판’이란 ‘이판’과 ‘사판’이 덧붙혀진 합성어이다. ‘이(理)’는 이상(理想), 이성(理性), 이지(理智), 도리(道理), 원리(原理) 등에서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뜻하고 있으나 종교에서 말하는 ‘이(理)’는 ‘성(聖 )의 세계’ 즉 천리(天理)를 의미한다. ‘이판(理判)’은 곧 ‘이(理)’를 맡은 스님을 뜻하며 또한 ‘이(理)’의 세계에 대한 판단을 의미한다. ‘사(事)’는 인간세계의 그 어떤 구체적인 일을 뜻한다. 불교에서 ‘업(業)’, ‘업보(業報)’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사업(事業)’이란 ‘사(事)’와 ‘업(業)’의 합성어로서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어휘이다. ‘사판(事判)’은 ‘사(事)’를 맡은 스님을 뜻하며 또한 구체적인 일(사물)에 대한 판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판’은 주로 이상세계에 대한 판단, ‘사판’은 주로 현실세계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부연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에 주자학(신유학)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주자학을 뼈가 절도록 받아들였다. 조선조 유생들이 맨날 허구한 날 ‘이(理)’냐? ‘기(氣)’냐? 하는 논쟁을 벌였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理)’가 불교에서의 ‘이(理)’와 같은 것이고, 유교에서 말하는 ‘기(氣)’는 불교에서의 ‘사(事)’에 해당된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이판(理判)’, ‘기판(氣判)’이란 말이 생겨나지 않은데 반해, 불교는 ‘이판(理判)’, ‘사판(事判)’이란 말을 지어냈다. 본래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따로따로 되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합쳐져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이 생겨났으며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굳어졌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이판사판(理判事判)’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막다른 데에 이르러 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된 판이라 해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것저것 따질 것 없다,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더 물러설 곳 없다는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를 맡은 스님(이판)이면 어떻고 ‘사’를 맡은 스님(사판)이면 어떠냐? 또한 이상세계면 어떻고 현실세계면 어떠냐? 굳이 꼭 갑이면 갑이고 을이면 을이라고 따질 것 있느냐?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7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6273  추천:69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7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사람들은 흔히 서구민주화의 뿌리가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에 있다고 해서, 그게 뭐 굉장히 대단한 줄로 여기고 있는데 기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다. 인류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런 ‘광장문화’는 고대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생활의 보편현상이었으며, 중국에도 있었고 한국에도 있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야단치다.’, ‘야단맞다.’,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거리다’ 라는 등의 말을 곧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으로 짐작된다.  이 ‘야단법석’이란 말은 고대 중국에서 불교의 유입과 전파에 따라 생겨난 것이며,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와 같은 것이었다.  야단(野壇)이란 세속도시(世俗都市)의 빈 공터, 즉 사람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에 단(壇)을 설치하는 것이며, 법석(法席)이란 법어(法語:佛語)를 말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불교로 놓고 말하자면 절간은 ‘성(聖)의 세계’라면 야단법석은 ‘속(俗)의 세계’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가 백성들을 신도로 불러들이려고 세속화(世俗化)하기 위해 야단법석이란 아이디어를 발굴했던 것이다. 이 야단법석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흔히 계급적 구분이 없이 각설이, 갑돌이, 짚세기 할 것 없이 아무나 모여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 예하면 씨름, 널뛰기, 제기차기, 재주넘기, 수수께끼내기, 남녀데이트, 심지어 어떻게 하면 남녀가 더 자극적이고 또 어떻게 하면 애를 쉽게 배고 낳고 하는 등등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담 없이 서로 주고받고 맘이 내키는 대로 한바탕 떠들어대는 장소였다. 야단법석이란 말은 한바탕 떠들어 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단법석은 그냥 한바탕 떠들어 대는 난장으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아니다! 이 야단법석은 겉보기에는 일종 난장 같지만 역사적으로 변문(變文)이란 최대의 성과를 이룩해냈다.  변문이란 당대(唐代) 승려(和尙)들이 야단법석에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무지한 민중에게 알아먹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변경)을 의미한다. 불경(佛經)이야기의 재미를 북돋우려고 악기도 곁들고 노래도 부르면서 잡예(雜藝)식으로 설경(說經)하였는데, 이로부터 강창문학(講唱文學)이 생겨났고, 제궁조(諸宮調:스님들이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설경하는 설창법)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생겨났고, 원곡(元曲)이 생겨났고, 명대(明代)에 이르러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소설문학으로 발전했고, 이윽고 20세기 초에는 백화문(白話文)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민족 역사에서는 야단법석을 통해 불교를 대중화 시킨 주인공으로서는 7세기 신라에 살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이다.  원효대사는 660년 당나라에 유학 가는 도중 해골 물을 마시고 득도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불교를 대중화 시키려고 촌촌락락(村村落落)을 찾아다니면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경을 재미있고 쉬운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바가지를 악기로 삼아 반주하며 노래를 곁들어 부르면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쳤다. 원효가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판을 벌이었다.  필자가 시골에 있을 적에 잔치 집에서 물독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이러한 관습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악기로 사용하는 것을 널리 보급시킨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우리민족이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기를 즐기는 관습이 모두 야단법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라 본다. 
6    중국인이 물건을 뚱시(東西)라 부르게 된 유래 댓글:  조회:5267  추천:76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6중국인이 물건을 뚱시(東西)라 부르게 된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중국어는 간결하면서도 뜻이 심오한 특징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어는 영어보다 의미전달(의사소통)력이 4.5배나 높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그 유래를 다 알고 사용되는 어종은 없으나, 특히 중국어는 그 어느 언어보다 어휘가 풍부하고 뜻이 넓고 깊으며 상용어휘라 할지라도 유래를 모르고 사용하는 것이 매우 많다.  그럼 여기서 중국인은 왜 물건을 ‘남북(南北)’이라 하지 않고 ‘동서(東西)’라 부르는가는 유래를 살펴보자.  남송시기 성온화(盛溫和)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다. 주희(朱喜)가 아직 출세하기 전 어느 하루, 시가지 골목길에서 대바구니를 들고 마주 오는 성온화를 만났다. “선생님, 어디 다녀오시려옵니까?”고 주희가 물으니 “저잣거리에 가서 ‘동서’를 사오려고 하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주희가 의아해서 “왜 선생님은 ‘남북’을 사지 않고 ‘동서’를 사려하옵나이까?”고 물었다.  성온화가 “자네, 오행(五行)을 알고 있지?”라고 말하니, 주희가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성온화는 “음, 그럼 됐네.”라고 말하고 나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행에 의하면 동은 목(木)이고 서는 금(金)이요, 남은 화(火)이고 북은 물이며 가운데(中央)는 토(土)일세. 만약 내가 이 대바구니에 불을 담으면 타버릴 것이고 물을 담으면 새어버릴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북’을 못 사고 ‘동서’를 사려고 하는 것일세.”  이로부터 중국인은 물건을 ‘뚱시(東西)’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    남편을 왜 ‘서방’이라 하는가? 댓글:  조회:5481  추천:78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5남편을 왜 ‘서방’이라 하는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민족 언어에 ‘서방’, ‘서방임’, ‘서방질하다’, ‘서방노릇하다’, ‘기둥서방’ 등 ‘서방’에 관한 말이 있는데, 이 ‘서방’이란 낱말은 성인남자가 성인여자와 이루어지는 성적결합행위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취(娶)하는 것을 ‘서방 간다(북한과 중국연변에서는 지금도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말하고 있음)’고 표현하고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서방’이란 낱말은 풍속학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선 중국 쪽의 ‘서방’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은나라 때부터 오색, 오방, 오행의 관념이 있었으며, 주나라 때부터는 모든 현상을 음양오행설에 꿰맞추고 풀이했다. 따라서 음은 서쪽이고 양은 동쪽이요, 여자는 서쪽이고 남자는 동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고 남자는 왼쪽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남서녀, 남좌우녀이다.  중국역사에서 왕모전설이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왕모는 곧 서왕모이다. 그녀는 동왕공(東王公)과 대응되는 여신이며 장생불로약을 지니고 있다든가, 남자들의 정력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와 로맨스가 있었다든가, 그 유명한 한무제가 7월 7석에 서왕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등등의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 동남서녀 관념에 의해 서방에 위치해 있는 왕모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미화되었으며 유명한 인물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가 꾸며졌다.  농경문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남경여직(男耕女織)의 상징이다. 그들이 7월 7석에 은하수에서 만나는데 견우는 동쪽에 위치해 있고 직녀는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7월 7석 날에 만나는가? 그것은 여름에 왕성했던 양기가 음기를 만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민족도 역사적으로 동남서녀의 관념이 굉장히 뿌리 깊었다. 특히 전설과 민담에 여자가 등장하면 십중팔구는 서방(서쪽)이 따라서 나타난다. 여기서 <<삼국유사>>에 등장한 여자와 서쪽에 관한 기록들을 간추려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가. 노파와 하서지촌(下西知村)  남해왕 때에 가락국해 중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이라 하니 혁거왕(신라초대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다.  나. 흰닭과 서쪽마을(西里) 영평삼년 경신년 8월 4일 박공이 월성 서쪽마을을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남을 보았다. 자색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또 흰닭(여자를 상징함)이 나무 밑에서 우는지라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다. 보희와 서악(西岳)  춘추공의 비(妃)는 문명황후 문희니 즉 유신공(庾信公)의 둘째 여동생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이 꿈을 해괴하게 여긴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말했다. 영리한 동생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그 방뇨몽을 산 덕분에 춘추공과 가연을 맺고 왕비가 되었으며 자식을 수두룩하게 낳았다.  라. 선도성모와 서란산(西鸞山)  신모는 본시 중국제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며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였다. 사소가 부황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은 후 소리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았고 신이 되었다. 그래서 서란산이라 하였다.  마. 호녀와 서산기슭  신라 원성왕 때 흥륜사를 돌던 김현이 자신을 따라 돌던 한 처녀와 정을 통한 후 그녀를 따라 갔더니 집은 서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 백호광(白毫光)과 서쪽  부득과 박박이 심산계곡에 들어가 도를 닭고 있던 어느 날밤 꿈에 백호광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빛 가운데서 금색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지었다. ...... 백호광은 후에 부득과 박박으로 하여금 목욕재계를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한 여자이다. 사. 선덕여왕과 서교여근곡(西郊女根谷)  선덕여왕이 영문사 옥문지(玉門池)에 숨어 있는 500명의 백제병이 잠복해 있는 것을 예지하여 소문났다. 신하들이 그 비결을 물었더니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즉 여근(女根:생식기)이니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러므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왕이 말했다.  이상 <<삼국유사>>에 실린 일곱 가지 이야기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고대한민족은 여자를 반드시 서쪽에 연계시켜놓았다.  또 고대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축제 때 남근과 여음의 모의물 놀이가 있었는데 동쪽에 남자, 서쪽에 여자가 위치해서 놀이를 하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대 우리민족은 여자는 서쪽, 서쪽은 여자라는 관념이 매우 강하게 또 매우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관념으로부터 남자가 여자를 취(娶)하는 행위(결혼)를 남자가 서쪽, 즉 서방에 가는 것으로 형용되었으며 비유되었다. 따라서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표현하고 갓 결혼한 남자를 ‘서방쟁(북한과 중국연변에서 쓰는 말)’이라 하며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4    수작이란 말의 유래와 우리민족의 음주가무관습 댓글:  조회:5169  추천:98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4수작이란 말의 유래와 우리민족의 음주가무관습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민족의 일상 언어에 ‘수작을 피우다.’, ‘수작을 걸다.’, ‘개수작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수작이란 말은 음주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술상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손님이 주인에게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혹은 손님에게서 받은 잔을 되돌려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술을 붓거나 스스로 따라서 마시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아무튼 수작이란 말은 술판에서 유래된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을 욕되게 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왜일까? 우리민족은 하도 술판이 많고 또 술판에서 서로 이래저래 명분을 달아서 권커니 작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다보면 서로 피곤하고 귀찮을 때가 많다. 그리하여 수작이란 말이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술만 마셨다 하면 노래와 춤판을 벌리는데 이는 하나의 관습으로 전승되어왔다. 그럼 우리민족은 왜 술판, 노래판, 춤판을 벌리기를 좋아할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제천의식  제천의식이란 농경문화에 있어서 주로 5월 파종이 끝난 후와 10월 수확이 끝난 후 하늘에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 3세기 중국학자인 진수(陳壽)가 동이족(東夷族:조선민족의 조상)들의 제천의식에 관해 <<위지동이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흔히 5월에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남녀노소가 모여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10월에 수확을 마치고 반복해서 이러한 제천의식을 거행한다.  당시 우리민족 조상들의 여러 갈래가 모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으며 모두 나라 안에서 촌락마다 군데군데 크게 모여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우리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년 역사는 족히 된다.  둘째 한의 역사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 우리민족은 유태인처럼 비록 나라는 잃지 않고 용케도 버텨냈으나 너무나도 빈번한 외래침략 때문에 나라는 늘 쑥대밭이 되었고 백성들은 가슴에 멍이 들고 한이 맺혔다. 그리고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 양반과 상놈간의 차별이 심했고 관리들은 당파싸움에다 부패했으며 또 자주 발생하는 자연재해 때문에 우리민족은 더구나 가슴에 한이 맺히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 낙천적이었던 우리민족은 술과 노래와 춤으로 한많은 인생살이를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셋째 명분의식  우리민족은 체면이 강한 민족이다. 매사에 있어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한다. 즉 음주가무 하는데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술판에서 타인에게 술을 권할 때 꼭 무슨 명분을 찾아서 연설하고는 권한다.  우리민족은 슬프면 슬프다고 마시고 기쁘면 기쁘다고 마시고 심심하면 심심하다고 마신다. 연변축구팬들은 연변축구팀이 이기면 기쁘다고 마시고 지면 슬프다고 마시고 비기면 아쉽다고 마신다. 그러니까 축구경기결과가 어떻든 간에 술을 마실 명분은 다 있다.  넷째 판의 문화  판이란 낱말은 우리민족만이 쓰는 특이한 언어이다. 술판, 춤판, 노래판, 도박판, 오락판, 개판, 한판 벌리다는 등 이러한 말은 타민족 언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필자의 가문에서는 어른들의 생일이면 마치 큰 잔치처럼 친척들이 크게 모여서 술판, 노래판, 춤판을 한바탕 벌리었다. 아마 조선족 가문에서는 거의 다 이러한 관습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세상에서 노래방이 가장 발달한 곳이 곧 한국과 연변이다. 이는 과거 우리민족의 판문화의 연속의 표현이다.  다섯째 종교가 없는 민족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신선사상과 무속신앙이 발달했을 뿐 교리교의가 있는 그렇다고 할 만한 종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옛날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던 관습이 하나의 생활종교로 되어왔다.  이상 다섯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우리민족은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즐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음주가무관습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생활신앙이 되어왔으며 본래는 매우 좋은 관습이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 관습이 많이 변질되어 부작용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사촌이 병들어 죽는다 해도 술을 권하거나 술판에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왕따시키거나 갓 시집온 색시한테 기가 넘어가도록 술을 권한다. 하여튼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술을 가장 잘 마시고 노래방에 잘 가고 기타 유흥에 탕진하는 비용이 가장 많다. 앞으로 더욱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면 사람마다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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