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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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필)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댓글:  조회:4840  추천:58  2006-02-21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흔히 인간의 삶은 무한히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과 사랑은 일상의 사소한 에피소드의 집적(集積)이고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복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앤 타일러는 자신의 장편소설 《종이시계》에서 말한다. 타일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며 매일마다 하루 세끼의 밥을 먹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무한한 반복이라고 할수 있다. 몇년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廊橋遺夢)》의 주인공인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처럼 40대나 50대에 늦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인생의 반복이라 할수 있다. 그러한 리치를 시인 김용택은 지난 세기말에 《새로운 세기의 해가 뜨더라도 그건 어제의 해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무한히 반복한다는 생각은 거시적일 수밖에 없다. 미시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똑같은 반복은 있을수 없다. 어제 내가 먹었던 세끼의 밥과 오늘 내가 먹는 세끼의 밥은 그 내용이나 수량이 같을수 없다. 40대나 50대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20대나 30대 당시에 경험했던 사랑과는 닮을수가 없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인간은 생물학적 로화과정에서 무엇인가 부단히 망각해가면서 또 새로운것을 배우기때문에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일수 없다. 태양도 모든 행성들에게 빛과 열 에너지를 발산시켜 주면서 식어가고 있기때문에 《새로운 세기의 해》가 《어제의 해》일수 없다. 그렇게 보았을 때 나는 삶은 무한한 반복이라고 하는 타일러나 내일의 해가 《어제의 해》라고 하는 김용택보다는 마거릿 미첼의 말이 더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날린다는 뜻의 《飄》라는 책이름으로 번역된 미첼의 장편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남부 대지주의 딸인 스칼렛 오하라가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패배로 부귀영화도 사랑도 모두 바람에 날려버린 후 자신의 땅 타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래일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소설을 개작한 영화는 그 말을 《래일은 래일의 태양이 솟아오른다》로 대체하고 있다. 둘 다 래일은 오늘의 반복이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 보고있기때문에 미래지향적이여서 좋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실패와 성공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과 희열로 점철된것이라 할수 있다. 누구나 쉽게 경험하게 되는 실패는 우리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 실패가 클수록 우리가 감수하게 되는 불행과 고통은 커진다. 그러나 그 고통을 딛고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래일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 될수 있고 《래일의 태양》을 맞이할수 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공의 희열에 젖어만 있지 않고 새로운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역시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인 《래일의 태양》을 껴안게 될것이다.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7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시 외에도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동화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긴 인도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였을뿐만아니라 인도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나이와 관계없이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2004년의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새로운 한해가 낡은 해를 대체했기때문에 우리 모두의 년륜에 한살이 보태여졌다. 지난 한해에 실패하고 좌절하고 불행했던 사람들은 그 마음의 상처들을 2003년의 마지막 언덕에 묻어두고 지난해가 아닌 또 다른 한해의 시작을 시도해야 한다. 지난해의 성공으로 보람을 느꼈던 사람들도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새해의 태양을 맞이해야 할것이다. 2004년 원일 아침
29    (수필)선 택 댓글:  조회:4475  추천:53  2006-02-20
선 택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우선 태여날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선택할수 없다. 따라서 귀속 지위도 선택과 관계없이 결정된다. 부자집 자식으로 태여나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에서 인생을 시작하느냐 하는 가족배경과 가정출신 따위를 말한다. 더 큰 틀에서 본다면 민족출신, 국적 등도 선택전에 이미 운명적으로 결정되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인간은 커가면서 항상 선택하며 인생을 살게 된다. 첫돐 날 우리는 돌상 앞에 앉아 부모와 집안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장래의 운명을 점치는 인생의 첫번째 《선택》을 하게 된다. 전통문화의 해석과 달리 그때의 선택은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물하면서 가족일원으로 승인받는 의례일뿐이다. 좀 더 커가면서 선택은 잦아진다. 아빠, 엄마를 따라 백화점에 갔을 때 내가 선택한 장난감이나 먹거리를 갖기 위해 부모들에게 억지를 쓰기도 하고 나의선택을 현실화하기 위해 형제나 친구들과 싸우기도 한다. 가정이나 유치원에서 실시하는 조기교육의 효과로 《공융양리(孔融讓梨)》형 리타주의적 선택도 있으나 유아시기의 선택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전무한 상태에서 선천적리기주의에 립각한 현실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선택이라고 할수 있다.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는 진정한 선택의 방법론을 배우게 된다. 학교교육의 본질은 미래를 선택하기 위한 준비과정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 되면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과 직장을 선택하며 평생 함께 살아갈 인생의 배우자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들이 모아져서 한 인간의 인생항로를 결정한다. 선택은 항상 어렵다. 그것이 설사 미래와 별 관련이 없이 유아시기의 선택과 같은 현실에 대한 간단한 선택일지라도 누구나 자기가 한 선택을 후회해본 경험이 있을것이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산 옷이나 신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쫓아가 바꾸는 경우를 가끔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한 선택이 미래와 적결되였을 때 선택은 더 어렵다. 미래라는것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것이기때문에 선택을 어렵게 한다. 선택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분석할수 있어야 하고 선택을 위한 주변 여건들의 변화상황을 예측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눈앞의 리익도 미래의 희망도 제대로 선택할수 없는 사람을 우둔하다고 평가한다. 그대신 눈앞의 작은 리익은 잘 챙기지만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 결여해 큰 리익을 놓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 한족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소총명(小聰明)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약삭빠른 사람》이나《잔꾀부리는 사람》정도로 번역될수 있다. 미래에 대한 예지를 갖추고 래일의 큰 일을 위하여 오늘의 작은 리익에 대한 희생도 감수할수 있는 사람은 진짜 현명한 사람이다. 사회의 공공리익과 개인의 리익에 갈등이 생겼을 때 전자를 선택하여 후자를 희생시키는 사람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본보기로 되나 그와 정반대되는것을 선택한 사람은 그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된다. 나아가서 민적이나 국가의 큰 리익을 위해 비상상태에 개인의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으로 추대하며 민족이나 국가의 발전을 위한 항로를 선택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도자로 모신다. 어느 사회단체나 정당, 민족이 선택한 미래는 그 단체, 정당, 민족을 구성한 구성원 개개인이 선택한 미래의 총화이다. 중국 조선족공동체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200만 조선족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선택한 미래상이 합쳐져서 조선족공동체의 미래선택이 된다. 1999년 한해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3800명의 조선족 신생아가 태여났다. 그 수자는 10년전인 1989년에 비해 4분의 1을 좀 웃도는 것이다. 만약 조선족공동체가 출산인구 감소의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그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지난 10년동안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고 할 때 중국 조선족의 아기출산수는 2009년에 2000명으로 줄어들고 2019년에 500명, 2029년에 125명, 2039년에 31명, 그리고 2049년에는 0(Zero)으로 될것이다. 1999년에 출산된 조선족 녀자아이가 4000명 좌우인데 같은 해 한국으로 시집간 결혼적령기 녀성의 수자가 6000명을 초과했다는 사실과 출산인구 감소의 기하급수적 요소까지 계산한다면 중국에서 조선족 출산인구가 0으로 되기까지는 20년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것이다. 조선족 출산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조선족사회의 《처녀류실》과 직결된다. 조선족 공동체를 리탈하고 한국으로 시집간 녀자의 수가 6만명을 넘어섰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가야 할 조선족 녀성 3명중 1명이 한국으로 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수의 녀자들이 도시의 유흥업소에 몰려있다. 때문에 농촌 총각이 장가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정도로 어려워졌다. 만약 조선족 남자들이 일년에 마시는 술의 량과 놀음으로 소모하는 시간을 모두 4분의 1로 줄이고 그대신 과학기술과 생산기능을 열심히 배우면서 악착같이 일해가는 책임성 있는 인생 길을 새롭게 선택한다면 조선족 녀성들도 구태여 낯설고 물설고 차별시하는 한국으로 가거나, 도시의 유흥업소로 몰려갈 필요가 없어지고 중국에서 자신들이 미래를 담보해줄수 있는 조선족 총각들과 결혼하여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미래를 선택할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할 때 줄어든 4분의 3의 출산인구가 금방 보충되지 않더라도 21세기를 사는 중국 조선족 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은 충실한 구성원 모두의 현명한 선택으로 담보될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배 사람을 위한 순풍은 있을수 없다. 이제 《조선족호》라는 배도 21세기의 항로를 선택해야한다. 선택을 위해 주어진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제시된 메뉴도 간단하다. 방향 없이 표류하다가 침몰해버리는과 여타 55개 민족호 배와 함께 시련을 극복하면서 앞길을 열어나가는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것이다. 2001. 5
28    (수필) 벼이삭은 성숙될수록 고개를 숙인다 댓글:  조회:4503  추천:53  2006-02-17
벼이삭은 성숙될수록 고개를 숙인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그러나 수교 10년 만에 중국과 한국은 《우호협력관계》의 나라를 넘어 《동반자관계》의 나라가 되었다. 중⦁일 수교보다는 20년 늦었지만 서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상황에서 수교를 단행했기 때문에 두 나라간의 선린관계는 재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2001년 중국은 한국의 첫 번째 투자대상국과 두 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부상되었고, 한국은 중국의 세 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되여 두 나라 무역규모는 이미 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지금 중국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 가운데 한국인들이 숫자적으로 단연히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재중 외국인 유학생중 한국 유학생도 제1위를 점한다. 지난 한해에 중국으로 유학 온 한국 유학생은 1만 여명이나 되었는데 그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중한 두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는 급속히 발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재중한국인들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그 교류의 민간사절(使節)이자 주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장기체류자 제1위》라는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20만 재중 한국인 모두가 민간사절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을 때 동반자로서의 두 나라 교류는 계속 장족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서 두 나라 교류의 발전에 역(逆)역할을 하는 한국인들을 가끔 보게 된다. 굳이 마약제조, 사기 등 의도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두 나라 선린관계의 발전에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일 월드컵 때의 일이다. 6월 21일자 상해《청년보》에 《한 한국여자》가 쓴 《내가 본 중국사람》이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한국의 월드컵경기장에서 몇몇 중국인들이 한국축구팀의 선전(善戰)을 보면서 자기나라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글을 쓴 《한국여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응원하는 중국인들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물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는 모두 아시아인들이잖아요. 당신들이 아시아를 대표해서 이기고 있지 않습니까, 아시아의 영광인데 물론 기쁘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여자》는 중국인들의 대답이 너무나 《황당무계하다》고 쓰고 있다. 《오늘의 국제경쟁은 국가대국가로 진행되고 있지, 주(洲)대 주(洲)의 경쟁이 아니다. 그리스인은 영국의 영광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 (이 《한국여자》는 유럽공동체도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인민들의 영광이지 너희들이 거지처럼 구걸해 갈 것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한국여자》는 글에서 《우리 서울대학교는 과학기술면에서 너희 북경대학을 훨씬 앞질러 나갔고, 우리나라 기업(삼성, LG, 기아, 대우, 현대, JNC…등)은 폭풍마냥 너희 중국시장을 휩쓸고 있다.》 또 《유행 면에서 중국의 대부분 국토는 이미 ⟨한류⟩에 의해 완전히 소탕되고 말았다.》라는 등등 중국인들을 자극하는 오만함과 방자함을 서슴없이 표출시켰다.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이든지 《 오만한 자와 방자한 자들에게 등을 돌린》 다는 이치쯤은 알아야 한다. 월드컵 때 중국인 젊은이 층에서 일어난 반한(反韓)감정이 상기 《한 한국여자》와 같은 재중한국인들의 오만과 방자에 무관할 수 없다. 그 당시 한국 매스컴들은 한국팀의 4강 진출 과정에 일어난 일부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을 《중국인들의 대국주의의식 내지 고대의 종주국의식의 발로》라고 한 결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러한 의식이 더 진하게 남아있는 50대 이상 연령층의 중국인들은 도리어 한국의 4강 진출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반한감정으로 흐른 사람들은 대부분 《대국주의》, 《종주국》의식이 제일 희미한 20대들이었다. 그들은 《한 한국여자》가 글에서 표현한 《에 의해 완전히 소탕된》 소위 《친한파》들이였다. 물론 반한감정의 시원은 상업주의였다.(50만원 상금이 걸린 16강, 8강, 4강 맞추기 TV퀴즈응답에, 생각 밖으로 선전한 한국 팀 때문에 16강도 맞추지 못한)그러한 화풀이 식 반한감정에 기름 친 것이 바로 일부 한국인들의 오만과 방자함이었다. 어느 나라 민족이든 간에 그 나라 그 민족이 갖고 있는 문화적 장점이 있다. 우리는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나 그 민족의 문화적 장점을 겸손한 자세로 발견하고 배워야 한다. 오만과 방자는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 간의 우호교류의 금물이다. 벼이삭은 성숙될수록 고개를 숙인다. 2002. 11
27    (수필) 눈물없이 읽을수 없는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5470  추천:54  2006-02-16
눈물없이 읽을수 없는 사랑이야기 ---박경식교수의 수필 읽기 중국 한족의 전통문화가 원앙새를 사랑의 심벌로 선정했듯이 우리 민족은 기러기를 사랑의 새로 꼽는다. 기러기는 암수의 의가 좋고 사랑이 깊을뿐만 아니라 짝이 죽으면 다시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 정절(貞節)의 새이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혼례에서는 나무로 만든 목기러기를 백년해로의 서약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사용한다.《 신랑은 목안(木雁)을 쥐고 / 신부는 건치(乾雉)를 쥐었으니/ 그 기러기 날 때까지/ 두 정 그치지 않으리…》(이옥-조선왕조시대 시인). 이러한 상징성때문에 홀로 된 사람을 짝 잃은 《외기러기》라고 한다. 박경식은 기러기띠 녀자이다. 그녀는 순정으로 살아간다.《누구나가 인정해주고 누구나가 부러워한》 행복했던 46년간의 결혼생활이 그랬고 악성뇌종양으로 남편을 잃고 《외기러기》로 된 외로움 역시 그러하다. 그녀는 길림성 영길현 천강 출신이다. 1953년 9월부터 1957년 7월까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에 만나 함께 로맨틱한 사랑에 빠져버린 련인(김도권)과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 뜨거웠던 사랑을 결혼에 골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에서 조선문학과 세계문학 강의를 담당했던 그들 기러기부부는 1994년 전후로 퇴직하게 된다. 슬하에 일녀 일남을 둔 가정생활은 화려하게 흐드러져가는 타입은 아니였지만 가끔 가다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일상의 련속이였다. 그러던 박경식은 뒤늦게 《인간의 행 불행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인것》임을 깨닫게 된다. 《절대적으로 행복한 사람도 없고 절대적으로 불행한 사람도 없다.》 2001년 3월, 일본의 어느 대학강단에서 쓰러진 《남편이 불의의 잔인한 병으로 수술대에서 겨우 잔명을 이어받은 때로부터》그녀의 《나날은 불안과 초조와 고통으로 범벅이 된 암담한 시,공간이였다.》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남편에게 기대여만 산 안해가 이제는 남편의 지팽이가 되여야 할것이다. 내가 성한 한 남편을 절대 허전하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다. 그런데 불행은 그것으로 끝난것이 아니였다. 언어능력과 기억력이 점점 쇠잔해지고 있는 남편을 간호하던 그녀에게 2002년 11월에 폐암진단이 내려진것이다. 《내 명이 이뿐이라면 굳이 더 살자고 모대길것 없이 흔연히 깨끗하게 떠나야지!》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내가 병원에 가고 없는 동안 그리 불안해 하더라는 남편을 보자 홀연 눈물이 고여올랐다. 〈그래,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버려두고 나 홀로 먼저야 못 가지요. 당신을 고이 먼저 보내드리고 뒤를 따르리다.〉》 (2002년 11월 22일, 일기) 그 시각부터 그녀는 남편 먼저 가면 안된다는 강한 집념으로 살아간다. 언어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의식마저 날따라 몽롱해가는 남편을 향한 그의 사랑은 자신의 불치병에 대한 공황을 초월한다. 병원에서 화학치료를 받으면서 그녀는 남편을 위한 《체념할수 없는 희망을 기탁하면서》 《센바쯔루》(천마리의 종이학)를 날마다 접는다. 《설사 그것이 나타날수 없는 기적이라 하더라도, 이뤄질수 없는 헛된 꿈이라 하더라도, 나는 한결같이 빌면서 접고 접고 또 접는다.》 (2003년 7월 4일, 일기) 이제 그녀의 사랑은 진지한 집념으로 나타나는 순정의 기호로 되여버린다. 2003년 12월 2일, 김도권교수는 안해가 병석에서 형언키 어려운 고통을 이겨가며 접은 《천마리 깨끗한 학무리에 옹위되여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이제 박경식은 《외기러기》가 되였다. 《꿈에 임을 보러 베개에 지혀시니/ 반벽(半壁) 잔등(殘燈)에 앙금(鴦衾) 참도 찰사/밤중만 외기러기소리에 잠 못 이뤄하노라.》(이정보) 《지난밤 꿈에 남편을 보았다. 그 새 지지리도 그리웠건만 꿈이 없더니 어제 밤에 보았다.》(2003년 12월 17일, 일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두개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내게는 아직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의지로 삼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나의 사랑이 수요된다…. 아버지의 몫까지 사랑을 주어야지!》(2003년 12월 12일, 일기)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추억의 곳간》에 모아둔 사랑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70이 되면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것인데 이제는 혼자 완성할수 밖에 없다. 이제 《불치의 병》도, 죽음도 그녀에게는 무서움으로 될수 없다. 그리움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생의 마지막 순간 남편을 찾아 떠나갈 준비가 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인생이 길지 않은만큼, 이 제한된 시간내에 서둘러야 할 일》이 있는 만큼 그녀는 《강한 의지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진지하게, 즐겁게, 열렬하게 살아온 그이와의 보람있는 생을 꼭 애들에게 보여주고 물려주기》(2003년 12월31일, 일기) 위해 박경식은 이미 한권 분량의 일기를 정리하고있다. 그러나 박경식 기록보관소의 비공개시효(時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그녀는 우선 4편의 수필을 내놓았다. 앞으로 계속 발표되였으면 싶다. 그녀의 글에는 작고 소사하고 감동적인 일상과 함께 사랑과 행복에 대한 작은 깨달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박경식의 사랑은 《감동바이러스》이다.그녀의 사랑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감동바이러스》에 감염된 《감동환자》가 되여버린다.그래서 그녀의 글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읽을수가 없다. 박경식의 사랑에는 여백이 없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그 한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했었고 그가 떠난후에도 그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때문에 사랑으로 가득 차버린 그의 가슴에는 슬픔이나 고통이 들어앉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행복하다. 콜린 하긴스 작 《19 그리고 80》의 주인공 모드는 《나는 아름다움을 보고 울어. 그건 인간만이 느낄수 있는 감정이야.》 라고 말한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싶은 사람들에게 박경식의 수필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읽기전에 손수건을 꼭 준비할것도 귀뜸한다. 2004. 8
26    (수필)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댓글:  조회:4581  추천:54  2006-02-15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랑은 동사》라는 담론은 참으로 멋이 있어 좋다. 우선 우리가 마음속의 사랑을 사전적 해석처럼 명사, 그것도 추상명사로 간주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중에서 구경 몇 사람이 그 사랑을 읽을수 있고 느낄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의 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행동으로 옮길 때 사랑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빛을 발할수 있을것이다. 지난 3월 초, 룡정에 있는 최려나의 집에서 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나 어머니가 숨지고 12살의 려나는 전신화상을 입어 위독한 사태에 처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 소식이 조선족 젊은이들이 꾸리고 있는 모이자 사이트에 뜨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지금 내가 봉직하고 있는 중앙민족대학 조선족 학생들이 려나의 치료비용에 보탬하기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평소에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면서 모아온 용돈을 생면부지의 려나를 위해 재거나 주저함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라는 꽃쌈지에 담아 헌납하고 있다. 나의 제자들 가운데 학문의 길을 버리고 돈벌이에 나선 사람도 적지 않다. 간혹 그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끝에 《저도 돈을 많이 벌면 민족문화발전을 위해 기부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듯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물론 그 말이 빈말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다음날 실천으로 옮겨질 때 역시 훌륭한 일이 될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 구성원 가운데는《돈을 많이 번》사람보다는 자기앞에 놓인 삶이 힘들고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다. 자신의 삶이 넉넉치 않으면서도 삶의 벼랑끝에 몰린 사람들의 불행과 힘겨운 사정을 리해해주고 또한 그 처지에 서서 볼수 있는,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삶은 그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모두가 풍요로워 질수 있다는것을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서 발견할수 있다. 려나의 불행과 힘겨운 사정을 헤아려주려는 대학생들의 쌈지돈 모금이 바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평범한 일상일것이다. 만약 우리가 《민족대개조론》과 같은 거대담론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겠다는것과 별다름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불행이나 아픔을 느끼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 려나와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를 당하거나 불치병에 걸려 절망에 빠진 사람,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려버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우는 사람 그 사람들의 불행과 아픔을 사랑으로 껴안지 못했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한 거대담론보다는 우선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메말라졌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며 우리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는 시대적 의식흐름에 편승한 나머지 너무나 숨차게 달려왔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가 왔지 않나 싶다. 우리 민족의 발전이란 것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든가, 국가의 령도층에 많이 진출했다든가, 유명인사들이 많이 생겼다는것과는 동의어가 될수 없다.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때 우리는 민족의 발전을 운운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행복의 키워드가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것일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돈, 권력, 명예 같은것으로 쉽게 행복해질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과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보다 힘없고 고단한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수 있을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 질수 있을것이다.《베풀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부자가 될수 있다》라는 말은 성 테레사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사실 항상 베풀며 살아가는 삶보다 더 풍요로운 삶은 있을수 없다. 이제 4월에 들어서면서 봄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목련꽃이 지게 되면 아카시아꽃이 만발하게 될것이다. 이 화창한 봄날에 우리 대학생들의 자그마한 사랑의 마음들이 봄꽃 같은 아름다움으로 나를 행복해지게 한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2004. 3
25    (수필)군자의 교제는 물처름 담담하고 댓글:  조회:5112  추천:58  2006-02-14
군자의 교제는 물처름 담담하고 몇년전에 만주학에 관한 책을 한권 출간한적이 있다. 그후 만족출신인 사회과학원의 관기신 연구원이 내 연구실에 찾아와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되여버렸다. 내가 대접하겠으니 점심 먹고 가라고 하니까 관교수는 《군자지교 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는 말을 거듭 하면서 사양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런데 얼마전 어느 수필가가 쓴 글을 읽다가 《군자지교 담여수》를 해석하여 《군자들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있다》고 주장한 구절이 눈에 띄여 당혹감을 금할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교수가 그때 내 연구실을 나서면서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귑시다》라는 말을 반복했단말인가 라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군자지교 담여수》는 중국의 고전 《장자(庄子)》의 《산목(山木)편》에 나오는 말의 머리부분이다. 《군자의 교제는 물처럼 담담하고, 소인의 교제는 감주처럼 달콤하다. 군자는 담담하게 친분을 돈독히 하고, 소인은 달콤하게 그 친분을 끊는다.(君子之交淡如水, 小人之交甘若醴 君子淡以親, 小人甘以絶〭)》 그리고 거기에는 《리해관계를 계산하지 않기때문에 담담하고 도가 합일을 이루어 친해진다.(無利故淡, 道合故親)》란 해석이 붙어있다. 즉 《군자는 리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교제를 하기때문에 뜻을 같이 할수 있고 따라서 친교가 돈독해진다》는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주장한것은 친구간에 거리를 두라는것이 아니라 반대로 군자는 서로 교제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이른바 《도합(道合)》이라는 최고경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것이다. 친구를 사귀면서 리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마음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것은 동서고금 성현들의 공통된 생각인것 같다. 《진정한 친구는 모든 행복감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을 주며, 리해타산을 따지지 않는다.》 (라 로슈푸코:《잠언집》) 《진실되고 참된 우정이란 서로가 공유하고 자신 의 행복이나 불행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감정 으로 림해야 하는것이다.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에 대한 격언》) 《요컨대,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와의 우정이라 부르는것은 서로 스스럼없이 말할수 있는 허물없고도 친밀한 관계를 이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우정은 서로 힘을 합쳐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는것이다.》 (몽테뉴:《우정에 대하여》) 《모든 것을 잊고 도취하는 사람은 애인이지만, 모든것을 알고 기뻐하는것은 벗이다.》 (보나르:《우정론》)《우정은 대등한 인간끼리의 리해를 떠난 거 래다.》 (골드 스미스:《좋아하는 사람》) 《벗이란 무엇인가? 두 사람의 육체에 사는 하 나의 령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에르티우스》) 《사랑이란 무엇일가? 두 마음이 한몸으로 되는 것. 우정이란 무엇일가? 두 몸이 한마음으로 되는것.》 (루: 《교구 목사의 명상》) 《우정은 령혼의 결합이고 마음의 결혼이며 덕 성의 계약이다.》 (펜:《고독의 열매》) 《리해타산을 따지지 않는다》든가 《순수한 감정으로 림해야》한다든가 《리해를 떠난 거래》라는것은 장자가 주장한 《물처럼 담담》해야 한다는것이고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는것》, 《하나의 령혼》, 《두 몸이 한 마음으로 되는것》, 《령혼의 결합》이라는것은 결국 장자가 말하는 《친(親)》이고 《뜻을 같이 한다》는 《도합》이다. 부정부패와 인성의 타락이 사회적 불신을 조장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리해타산을 앞세워 감언리설과 뢰물교환으로 가까이 사귀다가 리해충돌이 생기면 원쑤로 되여 갈라지는 《소인》배들의 교제보다는 리해관계의 계산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뜻과 가치를 같이 하는 《군자》의 교제가 인간관계의 일반론으로 되였으면 싶다. 글을 쓰면서 고전에 기록된 잠언을 리용하려면 문장의 본의를 존중할줄 알아야 한다. 글의 일부분을 잘라내여 본의와 다르게 제멋대로 사용한다든가 아전인수식으로 해석을 덧붙이는것은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대 금물이다. 2004.5
24    (수필)고슴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 댓글:  조회:4881  추천:64  2006-02-13
고슴도치도 0거리접촉을 한다 일반론 보다는 특수론을 따르는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얼굴모양 못지 않게 다양한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니말이다. 나와 너 혹은 너와 그 사람 사이의 거리를 두고 말하는 이른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사귀게 되는 사람은 수십명에서 수백명, 수천명 심지어 수만명이 넘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진정한 친구도 있을수 있고 보통 친구도 있을수 있을것이며 심지어 어디에서인가 우연히 만나 인사나 하고 갈라진 사람도 있을수 있을것이다. 사람에 따라 한사람을 사귀여도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진심으로 사귀는 사람이 있고 그와 반대로 자신의 마음을 단단한 껍질속에 감추어놓고 언제나 일정한 거리밖에서 사람을 사귀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겼을 것이다. 함석헌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사람/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가 있으니〉 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수 있는 그 사람/ 온 세상 찬성보다는 〈아니오〉 하고 머리를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약 한 사람이 죽음의 위험에 놓여졌을 때 살아남을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서로 양보할수 있는 친구를 가졌거나,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버려 외로울 때 내 마음을 포용해줄수 있는 친구를 가졌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스벤 레게너는 장편소설 《레만씨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이웃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주인공 프랑크 레만을 그려내고 있다. 서 베를린의 어느 술집 스텐더인 프랑크에게는 《몇권의 책과 빈 침대가 있는》 단칸방이 있는데 인생을 《살아가지만》 인생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그 거리를 빈침대가 담보해주고 있다. 《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진 건 아니예요》라고 말하던 그의 애인도 결국 다른 남자의 련인이 되여버리지만 그는 그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응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프랑크 레만형 인간들을 가끔 볼수 있다. 그들에게는 삶이나 사랑이나 그 모두가 지켜야 할 《거리》일뿐이다. 《친구 없이 사는 삶은 황량한 사막에서 사는것과 다름없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지고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불행해지는 법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우정이라는 빛은 우리의 불행을 치유해주는 유일한 빛이기때문이다》라고 말한 그리시앙의 잠언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지를 나는 상상조차 할수 없다. 우리는 로마법에 기준한 촌수라는 잣대로 친족성원간의 피의 농도를 잰다. 나와 내 부모, 나와 내 자식 사이는 1촌, 나와 내 친형제 그리고 나와 내 할아버지나 나와 내 손자 사이는 2촌, 나와 내 아버지 형제 사이나 나와 내 형제 자식 사이는 3촌…이렇게 친족 사이의 관계는 부단히 증가될수 있는 수자로 표시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친족이외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잴수 있는 눈금 있는 잣대는 없다. 그렇다 해서 수자로 표시할수 없는 관계가 꼭 수자로 표시할수 있는 관계보다 거리가 멀다는것은 아니다. 《신앙을 같이 하는 속에서 생긴 우정, 리념을 같이하는 곳에서 생기는 우정, 학문의 연구를 같이 하는 생활속에서 생기는 우정, 즉 가치를 같이하는 우정은 때때로 혈육의 정보다 더 뜨겁고 짙은 경우를 얼마든지 본다.》(송건호: 《우정에 대하여》) 《어미 팔아 친구 산다》든가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우리 말 속담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수 있을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박힌 가시를 빼줄수 있는것은 친구의 손밖에 없다.》(엘베시우스: 《잠언과 수상》)라는 잠언의 가치기준에 따라 친구를 사귈수도 있고 프랑크 레만처럼 어머니와 애인까지 포함한 모든 《이웃들》과 적정거리를 두고 사귈수도 있다. 다만 어떤 방식을 취하는가 하는것은 각자의 인생관이나 삶의 방식에 따를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친구나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적정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담론을 일반론으로 받아들일수는 없다. 너무나 가깝게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권태감이 생겨나 리혼하게 되기때문에 부부간에도 거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원인과 결과를 혼돈시킨 론리일수밖에 없다. 그렇게 리혼하게 된 부부는 시작부터 마음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기때문에 로맨틱한 사랑을 성숙된 사랑으로 가꾸지 못했을뿐이다. 마음의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는것은 《거리》를 없애지 못했다는 말인만큼 《거리》가 리혼을 부추긴것이지 《0거리》가 리혼을 불러온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슴도치에 관한 우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겨울철 서로 체온을 나눔으로 추위를 덜려고 하던 고슴도치들이 가까이 다가섰다가 서로의 가시침털때문에 상처를 입고 물러서서 적정거리에 머물수밖에 없었다는것이다. 가시침같이 날카로운 털을 곤두세운 고슴도치에 대한 선입견때문에 생긴 우화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을 우화로 리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우화이상의 뜻을 부여했을 때, 례를 들어 친구사이나 심지어 사랑하는 남녀사이에도 《적정거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낸다면, 자가당착에 빠질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슴도치도 《0거리》 밀착접촉을 하기때문이다. 어릴 때 고향의 참외밭에서 고슴도치를 관찰할수 있었다. 고슴도치는 적으로부터의 위협을 느꼈을 때 가시침털을 곤두세운다. 먹이를 나를 때에도 가시침털을 세워 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휴식할 때에는 그 털을 신체에 평행되게 눕히기때문에 밀착접촉하는데 아무른 지장이 없다. 고슴도치도 포유동물인 이상 암수가 교미도 해야 하고 새끼들이 어미젖도 먹어야 하기때문에 밀착접촉은 불가피하다. 서양의 고슴도치를 본적은 없지만 도리는 같다고 생각된다. 《옥스포드대사전》에서 HEDGEHOG(고슴도치)란 단어를 찾아보면 커다란 채색사진이 먼저 한눈에 안겨온다. 새끼 고슴도치 세마리가 서로 더 유리한 위치에서 어미젖을 빨기 위해 서로 밀고 닥치며 어미의 몸에 올라타는 광경은 새끼고양이들이나 강아지들이 젖을 먹을 때의 풍경과 조금도 다를바 없다. 고슴도치들도 0거리 밀착접촉을 하기때문에 친구 사이나 심지어 련인들 사이에도 《적정거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펴기 위하여 흔히 사용하는 고슴도치 우화도 인간의 독선일수밖에 없다. 고슴도치는 그들의 상상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나 사랑이나 결국은 거리이다》라는 담론보다는 《참된 벗은 또 하나의 나다》라는 키케로(《우정에 관하여》)의 잠언이 더 포근하게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것은 어쩔수 없다. 2004. 5
23    (수필)상혼(商魂)에 절여진 사랑의 축제 댓글:  조회:4874  추천:56  2006-02-10
상혼(商魂)에 절여진 사랑의 축제 《젊어서는 건강과 시간을 팔아 돈을 바꾸고 늙어서는 돈을 팔아 건강과 시간을 바꾼다》는 담론은 인생을 관조하는 인간들의 자조(自嘲)가 아닌가 싶다. 지난해 내가 존경하는 한 학자가 간암진단을 받은 후 3개월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생명의 마지막 3개월간에 《치료비용》이라는 명목에 따라 지불하고 간 돈은 무려 수십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때 나는 죽음나라의 대문을 노크하고 있는 불치병 환자들의 돈주머니를 노린 의료, 의약, 보건식품 등 업계의 함정이 얼마나 많은가를 절감할수 있었다. 젊고 늙음을 떠나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돈 팔아 건강과 시간을 바꾼다》는 말도 한가닥의 희망을 빙자한 사기일수밖에 없다. 죽음은 인간들의 영원한 불치병이기때문일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들이 사랑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영원한 불치병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지 않나 싶다.《사랑의 날》이라고 하는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매스컴들의 보도기사가 하나같이 돈으로 도배되여 있는것만 보더라도 그러한 생각이 무리만은 아닌듯 싶다. ☞ 대도시 최고급 호텔들은 젊은 련인들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 상해의 한 호텔은 최고급 룸을 밸런타인데이 룸으로 꾸며놓고 하루밤 방값을 8만 8천 888원으로 올려놓았다. ☞ 련인들이 선물용으로 가장 많이 찾는 물건은 붉은 장미와 쵸콜릿이다. 밸런타인데이 전후에 북경의 꽃가게들은 평소 한송이에 3원씩 팔던 장미꽃을 송이 당 10~20원으로 가격을 인상시켜 놓았다. ☞ 심양시는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여 순도 99.95%의 기념은화를 발행했다. ☞ 무한시의 한 마켓컨설팅 회사는 밸런타인데이에 첫사랑을 찾아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특수를 누리고 있다. 첫사랑을 찾는데 지급하는 비용은 2000원이다. ☞ 올해의 밸런타인데이는 주말이다. 홍콩 려행사들은 대륙련인들을 유혹하기 위한 3박2일의 패키지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밸런타인데이를 전후로 꽃과 호텔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북경석간(北京晩報)》,《경화타임지(京華時報)》, 《위클리 홍콩》등 신문에서 인용함) 이런 기사를 읽다 보면 밸런타인데이가 《사랑의 날》이기보다는 《상인의 날》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짙어진다. 중국에 상륙한지 불과 십년도 안되는 사랑의 날이 시작부터 《소비형 축제》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슬픔이 아닐수 없다. 아무리 현대인들의 사랑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날》만큼은 돈과 관계없는 순수한 《사랑의 축제》였으면 하는 아쉬움때문일것이다. 물론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중국대륙에까지 성공적으로 상륙한 밸런타인데이는 이미 고도로 상업화된 축제였다.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80%가 밸런타인데이에 선물을 하기때문에 그날 10억장의 카드와 1억 1000만 송이의 장미 그리고 11억 달러 어치의 쵸콜릿이 미국시장에서 팔린다는 통계가 있다. 그리고 일본의 상점들은 불황을 탈출해보려는 몸부림으로 밸런타인데이(2월 14일-녀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에서 화이트데이(3월 14일-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까지의 기간을 젊은층 집중공략기간으로 잡아 판촉전을 벌인다고 한다. 금년 밸런타인데이에는 미국에서,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수치로 알려주는 《사랑탐지기 》가 출시되여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 장치가 작동되는 컴퓨터에 전화기를 련결한뒤 사랑하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 《탐지기》가 상대방의 음성을 분석하여 그 결과를 5점부터 마이너스 1점까지 7단계로 나누어 컴퓨터 화면에 데이지 꽃잎으로 점수를 매겨준다고 한다. 가장 뜨거운 사랑은 5점, 반대로 가장 미지근한 사랑은 마이너스 1점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랑탐지기》를 개발한 회사는 떼돈을 벌어 좋겠지만 사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탐지기》를 사용해서라도 진짜 사랑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탐지기》소비자들은 어딘가 측은해 보인다. 이렇게 《소비형 축제》나 《판촉형 축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상혼에 절여진 사랑의 축제는 아시아의 또 다른 하나의 문명고국인 인도에서 전통문화의 저항을 받고 있다. 지난해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앞에 모여 《밸런타인데이는 서구로부터의 문화적 오염》이라고 주장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금지하라고 국회에 촉구했고 인터넷 신문인 《테헬카》는 《밸런타인 데이는 제국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금년에는 《밸런타인데이가 전통적인 인도문화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힌두교《바즈랑 달》회원들이 밸런타인데이라고 적힌 대형 십자가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인도에 못지 않는 문명의 력사를 갖고 있는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밸런타인데이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차라리 우리에게 사랑에 관련되는 문화적 콘텐츠가 없었다면 그 답습을 쉽게 간과할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분명히 밸런타인데이보다 더 훌륭한 명실상부한 《사랑의 날》이 있는 실정이다. 《더 훌륭하다》는 수식어는 문화의 상대론적 립지에서 보았을 때 문제가 있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동양문화권의 립장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아래의 비교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주기 바란다. 최근 영국에서 500년전의 밸런타인 련애편지가 발견되면서 밸런타인데이 력사는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지만 축일의 기원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3세기에 순교한 성 밸런타인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주장과 로마이교도의 루페르칼리아 축제설이 엇갈리고 있고, 또 성 밸런타인과 구애습관과는 련관이 없고 다만 동면에서 깨여난 새들이 짝짓는다는 2월 14일이 성인 축일과 합일되여 사랑의 날이 되였다는 주장도 있다. 거기에 비교했을 때 우리에게는 3000여년의 력사전통을 가진 《사랑의 날》이 있다. 까치들이 모여 몸둥이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만난다는 칠석(음력 7월 7일)은 기원설화에서 전개되는 사랑이야기로 보나 력사의 깊이와 문화콘텐츠의 가치를 보아도 명실공히《사랑의 날》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조상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전통문화의 현대적 재개발에 게으름을 피워왔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전통적 사랑의 날은 상업주의에 편승한 밸런타인데이에 밀려나 사라져가고 있다. 조금은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얼마전에 페막된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부분 대표들이 청명, 단오, 추석을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정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 리유로는 젊은이들이 서양의 명절을 더 선호하고 있는 반면, 중국의 전통명절문화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휴일과는 상관없이 중국의 전통적 《사랑의 날》을 살리자는 주장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명절문화는 인간만이 행할수 있는 특수한 행위라고 할수 있다. 전통명절문화는 전통문화의 확립으로 그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정신적으로 그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하비콕스는 《일상적인것을 단절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과거로 개방시키는 제축과, 경험적 타산이 무시하고 통과해버린 방문을 낱낱이 열어봄으로써 혁신의 가능성을 확대시키는 환상》(《바보제》, 1973)으로 명절축제문화의 의미를 새겼다. 따라서 축제의 원형은 민족의 연원과 관계되는 아득한 태고로의 귀의이라 할수 있다. 이러한 귀의를 통해 문화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봄으로써 새로운 혁신과 창조의 에너지를 확보하게 된다.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불치병이다. 그 불치병 때문에 인간은 생명중 가장 귀중한 젊음을 불사르기도 한다. 그러한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동양과 서양에서는 사랑의 축일을 만들었을것이다. 이제 우리는 상혼에 가리여진 사랑의 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지 않나 싶다. 전통명절인가 수입명절인가를 떠나 우선 련인들의 돈주머니를 겨냥하는 사람이 없는 순수한 사랑을 위한 《사랑의 날》이 되였으면 싶다. 2004. 3
22    (수필)사랑의 신화학 댓글:  조회:5012  추천:67  2006-02-09
사랑의 신화학 사랑의 기원에 관한 두개의 색다른 신화가 있다. 그 색다른 두개의 신화때문에 인류는 영원히 사랑이라는 불치병을 앓게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철학가인 플라톤(platon)의 《향연》에 소개되여 있는데 사랑의 기원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신화로 평가되고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은 본래 두개의 얼굴과 네개의 팔, 다리를 가진 《완전한 형태》였다. 남성과 녀성의 성을 동시에 갖고있는 이 이중인간들은 무지무지한 체력과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기가 있어 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뭇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그들의 힘을 꺾어 더 이상 신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남자와 녀자 둘로 나누어버렸다. 사랑은 이렇게 둘로 나뉜 반쪽이 원래의 짝을 찾아 완벽하게 한덩어리를 이룸으로써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갈망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의 《아모르》와 《변신이야기》에서 또 다른 하나의 신화를 읽을수 있다. 우리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것은 우리의 의사와는 조금도 관계없이, 천성적으로 장난기가 있고 조금은 무책임하며 심술이나 앙심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는 나젊은 신인 큐피드(《욕망》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이름)가 쏜 금화살을 맞았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리고 큐피드가 쏜 납화살을 맞았을 때는 사랑에서 도피하게 되기도 한다. 원래 남자와 녀자는 한몸이였으나 두 몸으로 갈라졌고 그때부터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하려 한다는 플라톤 신화의 론리는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여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는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전개된다. 비록 《성경》이야기에서는 남과 녀가 평등하게 반반으로 갈라진것이 아니라 남자의 한부분으로 녀자를 만들었기때문에 녀자가 남자에 종속되여 있는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한 몸에서 두 몸으로 갈라진것만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융(jung)의 리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내면을 《애니마(anima)》와 《애니무스(animus)》로 나눌수 있는데 남성의 정신내면에 존재하는 녀성성은 《애니마》이고 녀성의 정신내면에 존재하는 남성성은 《애니무스》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애니마》나 《애니무스》를 이성에게서 찾게 된다는것이다. 즉 남성은 자기 마음속의 《애니마》와 닮은 녀성을 만나게 되면 첫눈에 반해버리고, 녀성은 자기 정신내면에 간직된 《애니무스》로 비춰지는 남성을《백마왕자》로 간주하게 된다. 융의 론리는 플라톤신화에서 두개의 몸으로 갈라진 인간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기억을 정신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과 닮은 반쪽을 만나면 결합하려 한다는 말로 풀이할수 있다. 플라톤의 신화는 사랑을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하려고 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보았고, 그와 반대로 오비디우스의 신화에서 사랑은 우리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큐피드의 금화살에 명중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피동적인 행위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첫사랑에 깊이 빠져본 경험과 사랑하는 사람과 상당한 기간의 지속적인 사랑을 해본 경험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시작과 지속이라는 두개의 서로 다른 상태의 단계를 거칠수밖에 없음을 감지할수 있을것이다. 한사람의 첫 돌사진과 환갑사진이 별로 닮은 점이 없듯이 사랑의 시작과 나중에 진행되는 지속적인 사랑은 전혀 달라보일수 있다. 따라서 사랑이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이라 할수 있다. 첫사랑은 흔히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찾아온다. 《사랑의 불길은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마음을 태우고 있다.》(마그리트 드 나바르) 《우리는 리유없이 사랑하고》(르나르), 《사랑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찾아온다》(톰프슨).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무의식적인것이라 한다. 우리는 합리적인 계산을 거쳐 《적합한》 사람을 선별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기질과 취향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수도 있고, 때로는 외모나 체질 등 조건이 흡족하지 않는 상대를 사랑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보았을 때 당신에게 더할나위 없이 적합해보이는 상대를 만났는데도 가슴에 불이 당기지 않아 사랑이 피여나지 않을수도 있다. 이러한 사랑의 부조리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큐피드 신에 전가시키고 있다. 우리의 소망과는 관계없이 큐피드 신의 금화살을 맞았기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되였고 큐피드 신의 납화살을 맞았기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대상자를 만났어도 사랑을 회피하게 된다는것이다. 큐피드의 금화살을 맞아 시작하는 사랑을 우리는 보통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상태》, 《사랑에 빠지는 상태》 혹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랑에 빠지는 일을 사랑의 본질로 리해한다. 그러한 《사랑에는 단 한가지 조건, 즉 열정이라는 조건밖에 없다. 그리고 이 조건은 누구나 충족시킬수 있다.》(존 암스트롱). 로맨틱한 열정에 대한 능력은 오늘날 인간성의 공동분모라고 할 정도로 보편화되여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급속히 친밀해지고 상대방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뚜렷한 확신을 갖게 되며 극단적인 환희와 기쁨을 느끼게 된다. 《사랑이란 이를 테면 깊은 한숨과 함께 사는 연기, 사랑은 맑아져서 련인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불꽃이 되고, 헝클어져서는 련인의 눌물로 넘치는 큰 바다가 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은 분별하기 어려운 광기, 숨구멍조차 막히게 하는 고집인가 하면, 그것은 또한 생명을 기르는 단 이슬이기도 하다.》(셰익스피어). 《정열적인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인생의 절반, 그것도 아름다운 쪽의 절반이 가려져 있는것이다.》(스탕달) 《사랑은 아름다운 꿈》(샤프)이고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즐거운것은 없다.》(롱펠로) 그래서 《사랑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삶도 시작된다》(스큐데리양)고 한다.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의 시작단계에 집중되여 있다. 그 다음에 다가오는 사랑을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사랑》 혹은 《성숙한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지속적인 사랑이며, 장기적인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난관에도 끄떡없는 사랑이다.》(존 암스트롱) 성숙한 사랑은 로맨틱한 사랑과는 별로 닮은점이 없다. 사랑의 비극은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을 사랑의 본질로 리해하면서 생기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체구조는 불같이 달아오르는 로맨틱한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끔 만들어져 있다. 성의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성간의 로맨틱한 련애감정의 유효기간은 길어서 3~4년 정도로 설정되여 있다. 유효기간이 종료되면 남녀사이의 로맨틱한 감정은 완전히 식어버린다. 그때 우리는 성숙된 사랑이라는 끈으로 남녀 사이의 인연을 계속 이어주어야 한다. 성숙된 사랑을 계속 큐피드의 금화살에서 기대할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오래 지속될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신화가 요청된다. 원래 한몸이였으나 두몸으로 갈라졌고 노력을 거쳐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새로운 합일을 이룬다는 플라톤의 신화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성숙한 사랑을 대변해주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완벽하게 한 덩어리를 이루어》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 된다는것은 성숙한 사랑이 아니면 이룰수 없는 경지이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로맨틱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사랑의 에너지를 리용하여 상대방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물론 그러한 일치는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일수 있다. 성숙된 사랑에서는 두개의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 둘로 남아있는다는 역설이 성립될수 있다. 플라톤신화에서 남녀가 합일을 이룬 《완전한 형태》일 때 《무지무지한 체력과 힘》이 생긴다는 론리는 사랑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남녀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은 모든 창조의 기초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남녀의 결합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초로 된다. 뿐만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인 령역에서도 사랑을 통해 남녀는 새롭게 재탄생된다. 인류가 창조한 모든 문명과 문화는 성숙한 사랑과 무관할수 없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하기》(에리히 프롬)때문이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능력은 누가나 갖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합일을 이루는 진정한 사랑은 성숙된 사람들의 몫일것이다. 2003. 11
21    (수필)사랑의 사회학 댓글:  조회:4590  추천:57  2006-02-08
사랑의 사회학 지난 주말,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북경 텔레비전 제3체널에서 방송되고있는 사랑에 대한 특별토론장면을 볼수 있었다. 미모의 녀성 사회자가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들먹이면서 중국남자들은 숙녀들에게 너무나 무뚝뚝하지 않느냐 라고 힌트를 주니까 토론에 참석한 20대 젊은 처녀로부터 6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자신들의 남자 친구나 남편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고 있다는 불만들을 늘어놓았다. 반론이 없이 일변도로 몰아가는 토론회는 중국 남자들에 대한 성토의 장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사랑이 모자라 《사랑실조(失調)》를 앓고 있다는 하소연도 아니고 남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에 너무나 린색하여 달콤한 사랑의 표현에 굶주리고 있다는 그녀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사랑도 어쩔수 없이 세계화되여가고 있구나》하는 기우지심(杞憂之心)이 짙어진다. 사실 중국어에도 영어 《아이 러브 유》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워 아이 니》라는 쉽게 련발할수 있는 사랑의 표준전달어가 있다. 다만 중국 남자들은 그 말을 별로 람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 대신 그들은 한번 결혼하게 되면 쉽게 리혼하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백년해로(百年偕老)》는 아직까지도 사랑의 보편적 가치로 중국의 기성세대들에게 인정되고 있다. 그에 비교했을 때, 《어쩌면 숙녀들에게 저토록 친절할수 있을까》라고 감탄할 정도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아이 러브 유》를 곱씹어 대는 미국남자들은 결혼후 쉽게 리혼한다. 미국인들의 리혼률은 1979년에 이미 3:1의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80년대 나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어느 정신의학자가 쓴 글을 읽은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란 말을 값싸게 되풀이하지 않고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하고 있지 않은 자기에게 자기 암시를 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의 지적은 《성실히 사랑하며 조용히 침묵하라. 성실한 사랑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라고 한 프리드리히 제어라인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 문화에 중독되여 가고있는 중국의 녀성들은 미국 녀성들의 삶을 흉내내고 싶어하고 그들의 개방문화를 따르려고 한다. 그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중국의 남자들도 마음에 내키든 내키지 않든 《워 아이 니》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게 되고 그러한 반복이 잦아질수록 리혼률은 도리여 높아지고 있다. 사실 태고시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사랑의 력사는 자유를 지향해온 력사라 할수 있다. 인류가 선택한 일부일처제에서 결혼의 본질은 배우자 서로가 사랑을 약속하면서 성관계의 배타적인 독점을 표방하는 사회적 계약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결혼이라는것은 배우자 서로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였다. 불과 백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일곱살이 되면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할수 없는》사회에서 자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중매군의 입놀림에 따라》사랑이 전무한 상태에서 결혼해 왔다. 서양인들이라 해서 더 나을것도 없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1837-1901)까지도 그들의 결혼은 쌍방의 가족 또는 중매인에 의해 계약되였고, 사랑은 일단 결혼이 성립된 다음에 전개되는것으로 인식되였었다. 그러한 혼인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인간사회는 여러 가지 법과 제도, 도덕과 여론, 종교 등 온갖 사회적 힘을 총동원하여 사랑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매려고 해왔다. 한편, 량산백과 축영대나 로미오와 쥴리엣 같은 동서방의 수많은 남녀들이 사랑의 자유를 위해 사랑을 구속해온 온갖 《사회적 힘》과 싸워왔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왔다. 사회의 진보와 함께 오늘날의 사랑은 선택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한셈이다. 요즘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들을 개의치 않고 포옹하고 싶으면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뽀뽀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또한 그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예전보다 훨씬 관대해졌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제는 혼전성관계나 동거도 사회적 간섭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며칠전 신문을 보다가 상해, 북경, 청도 등 대도시에서 《누드 신혼사진 붐》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놀란나머지 이제는 누가 공공장소에서 《라체결혼식》을 치렀다해도 놀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사랑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사랑의 안전성이 오히려 더 감소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사랑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에서 결혼했던 지나간 세대나 한정된 자유를 전제로 결혼한 우리 세대는 별로 리혼하지 않았다. 리혼은 마치 사랑의 자유를 충분히 맛본 세대들의 몫인것처럼 인식되여 가고 있다. 그들은 《위선적》인 부모세대를 비판하면서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찾아 로맨틱한 사랑을 하면서 결혼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커플들이 도리여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면서 헤어지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의 리혼률은 1999년에 2:1에 도달함으로써 세계화의 진원지인 미국을 훨씬 초월하였다. (리혼이 한국인과의 《위장결혼》과 련계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때 흔히 사용되는 구실이 《가짜리혼》이란 말이다. 그러나 법(法)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리혼은 《진짜리혼》이다.) 이제 사랑의 불안전성에 따른 리혼에 한해서만은 중국조선족이 미국을 향해 세계화개방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 싶다. 높은 리혼률로 아이들이 감수해야 할 상처는 어른들의 상처보다 훨씬 크다. 부모들의 사랑으로 커야 할 어린 시절, 가장 친밀했던 보호자들의 관계해체로부터 받은 상처는 평생을 두고 아픔을 줄수 있다. 사랑의 안전성이 감소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외도이다. 지난 80년대 중국의 민법이 《간통》을 형사범죄 범주에서 제외시키면서 혼외정사로 대표되는 불륜이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외도가 당사자에게 새로운 로맨틱한 사랑이나 쾌락이 될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배우자에게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가장 아픈 마음의 상처로 될수 도 있다. 중국에서 지금 매년 30%이상의 증가률을 보이고 있는 성병환자나 50%의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에이즈 환자도 불륜과 무관할수는 없다.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불륜이 사랑을 말초적이고 단순한 성 접촉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사랑은 없고 포르노만 남은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을 계속 희망할수 있을까.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자유는 점점 확대되여가고 있지만 사랑의 안전성은 반비례로 축소되기때문에 사랑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따라서 진실한 사랑은 더더욱 귀중해지고 있다. 리혼과 외도의 확산이 부추기는 가정의 해체와 사랑의 황폐화는 이제 우리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2003. 10
20    (수필)사랑의 민족학 댓글:  조회:5024  추천:49  2006-02-07
사랑의 민족학 가령 한 처녀가 자신을 사모하는 세 총각가운데서 어떻게 자신의 신랑감을 선택하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시되였다고 하자. 《세계화》에 중독되지 않은 서로 다른 민족출신의 처녀들의 선택기준은 같거나 비슷할수 있을가? 아랍계, 유태계 그리고 조선계 민족의 전통적 가치관의 해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랍민족 고전인 《아라비안나이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국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사촌 녀동생인 공주를 사랑하게 된다. 국왕은 세 왕자에게 충분한 돈을 주면서 공주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을 구해온 왕자가 신랑이 될것이라고 했다. 세 왕자는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 함께 돌아오기로 하고 헤여졌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큰 왕자는 망원경을, 둘째는 요술담요를 그리고 막내는 사과를 구해가지고 왔다. 큰 왕자가 망원경(아무리 먼 곳도 볼수 있는)으로 왕궁을 살펴보니까 공주가 병으로 곧 죽게 되여 있었다. 세 왕자는 둘째의 요술담요(씽하고 날아다니는)를 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내의 사과(무슨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는)를 먹여 공주를 살려냈다. 공주는 세 왕자 가운데 누구에게 시집가야 하는가? 맏이의 망원경이 없었다면 공주의 병이 위독함을 알수 없었고 둘째의 요술담요가 아니면 그렇게 빨리 병자곁에 도착할수 없었으며 사과가 없었으면 도착했다 해도 치료할수 없었다는 리유로 선물 구해오기 게임은 승자 없이 끝난다. 《유태인의 얼이 담긴 유태인의 문화유산》이라고 하는《탈무드(Talmud)》에는⟨마법의 사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왕국의 시골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맏이는 망원경을 둘째는 요술담요를 그리고 막내는 사과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국왕의 외동딸인 공주가 갑자기 죽을병으로 앓게 되였는데 유명하다는 의사들이 모두 와서 치료했으나 병은 점점 악화되였다. 임금님은《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방문(榜文)을 작성하여 성문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루는 큰 형이 망원경으로 서울 장안을 살펴보다가 성문에 나붙은 방문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삼형제는 둘째의 요술담요를 타고 순식간에 왕궁에 도착하여 막내의 사과로 공주를 치유시켰다. 공주는 방문에 제시된 조건을 따져 막내에게 시집간다. 조선 평양에서 출판된 《옛말》이라는 책에는 조선민족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한 고을에 예쁘고 일 잘하는 처녀가 살고 있었고 조선팔도에서 구혼자들이 몰려왔다. 예선에서 세 총각이 뽑혔는데 처녀는 그들에게 선물을 구해오라고 한다. 일년후 세 총각이 지정 장소에서 만났을 때, 총각 갑은 동경(구리로 만든 거울)을 구해왔고, 총각 을은 천리마를 그리고 총각 병은 사과를 각각 구해왔다. 갑이 거울(아무리 먼데 있는 사람도 비쳐볼수 있는)을 꺼내보니 처녀는 병으로 다 죽어가고 있다. 세 총각은 을의 천리마를 함께 타고 일순간에 처녀네 집 앞에 도착했고 병의 사과로 처녀를 살려내게 되었다. 처녀는 세 총각을 마주하고 앉아 조용히 결론부터 이야기하였다. 《저는 세분의 선물가운데 한분의 선물을 이미 접수하였습니다.》거울과 천리마는 선물 받은 사람이 선물한 사람을 아무 때나 비추어 볼수 있거나 그의 옆으로 쫓아 갈수 있는 좋은 선물이다. 다만 선물을 선택한 사람의 립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랑받기 위한 사랑의 선물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사과는 받은 사람이 위독할 때 치료하고 나면 남는것이 없는, 사랑을 주기 위한 사랑의 선물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처녀는 그 《주는 사랑》의 선물은 접수하였고 총각 병과 결혼하게 되였다. 아랍공주는 철저하게 아랍민족의 상업주의 원칙을 사랑에 적용시켰다. 투자 자금의 규모와 관계없이 지분의 비례에 따라 리익금이 분배되여야 하듯이 세 왕자의 선물이 공주의 병을 치유하는 과정에 크고 작던 간에 각자의 작용이 있었기때문에 공주는 어느 한 왕자의 손을 들어줄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유태 공주는 계약주의 원칙에 따라 사랑을 선택하고 있다. 아버지 국왕이 방문에서 《병을 고쳐주는》사람을 사위로 삼겠다 했지 공주의 환병사실을 발견했거나 빨리 쫓아온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한적이 없기때문에 막내를 선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민족 처녀의 선택은 아랍공주와는 다르고 유태공주와는 같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가치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 처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수밖에 없다. 유태공주는 계약에 대한 실천을 선택의 가치기준으로 삼았고 조선처녀는 참사랑을 가치기준으로 보았다. 사랑을 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충일하고 지순하다. 그래서 프랑스의 4대 랑만파 시인중의 한사람인 라마르틴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인간이지만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것은 천사이다.》라고 했고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세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영혼의 가장 고귀하고 바람직한 경지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주는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참사랑은 없다. 조선처녀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총각을 자연스럽게 선택한것이다. 사랑도 인간들의 문화적인 행위인만큼 그 행위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귀속되는 그 민족의 전통문화와 가치관의 영향을 받을수밖에 없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오던 말이다. 요새와 같이 쩍하면 《섭외혼인(국제결혼)》이 말밥에 오르내리는 《세계화시대》에는 좀 색바래진 말같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 꽤나 진지한 말로 간주되였다. 사랑은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녀자 사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때문에 민족출신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능하다는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시사하는것뿐일것이다. 《가능성》과 《합리성》 사이는 거리가 한참 멀다. 가령 성장과정의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부동한 민족이나 국적의 남과 녀가 서로 사랑을 약속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요즘 세상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적당한 기간 내에 서로 《사랑》을 즐기다가, 심지어는 《사랑》을 리용하다가 언제 그랬더냐 하듯 깨끗이 헤어지려는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으로 잘 가꾸어나가려 한다면, 그들이 건너야 할 외나무다리와 넘어야 할 가시밭 고개는 너무도 많다. 일반 련인들이 겪게 되는 성격, 취향, 생활습관 등의 차이로 빚어지는 갈등외에도 세속적인 편견, 문화적 갈등, 가치관의 충돌 심지어 민족이나 국가의 리익을 표방한 정치적 간섭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사랑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랑이 구성되는 방식은 사랑의 주인공들이 소속된 그 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특성에 좌우된다. 2003. 8
19    (수필)사랑의 언어학 댓글:  조회:5502  추천:56  2006-02-06
사랑의 언어학 내가 미국 하버드 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던 1987년 가을이였다. 칼·메세이라고 하는 하버드대 언어학 박사과정생이 자신이 작성한 《 IN ABOUT 310 LANGUAGES (310가지 언어로 말하는 )》라는 론문을 갖고 나의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 론문은 310개 민족언어와 방언으로 된 사랑을 전달하는 말들을 수집한뒤 적당한 문법해석을 가한 글이였다. 그의 글에 따르면 사랑을 고백하는 말들은 어순의 형태로 보아 아래와 같은 두가지가 주종을 이루었다. ①《나 사랑 너》류형 인도-유럽어족의 다수언어와 한-장어족 다수언어가 본 류형에 속한다. 《아이 러브 유》(영어), 《워 아이 니》(한어). ②《나 너 사랑》류형 알타이어족 언어와 우랄어족언어가 본 류형에 속했다. 《비 심베 하이람비》(만주어), 《마 알마스탄 신드》(에스또니아어). 그 외에도 《사랑 나 너(사랑해 내가 너를)》류형 (아프로아시아티크 어족 일부), 《너 사랑 나(너를 사랑해 내가)》류형 (오스트로네시안 어족 일부), 《너 나 사랑(너를 내가 사랑해)》류형 (오마하어) 등 여러가지 류형이 있어 세계 언어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어란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로 되여 있어 론문이 수집한 언어들의 신빙성을 의심케 하였다. 《조선어는 어떻게 수집했습니까?》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한국 류학생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를 지적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영어 ⟨아이 러브 유⟩에 대한 번역문으로는 인정이 되나 조선말로 사랑을 나누는 련인들이 사용하는 말로는 적합한 말이 아닙니다.》 《왜 적합하지 않습니까?》 조선말을 전혀 모르는 칼에게 왜 우리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가를 설명하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리였다. 《그렇다면 코리언 남녀들은 어떤 말로서 사랑을 주고받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금방 말문이 막혔다. 사랑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 우리 민족 련인들은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종래로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얼버무려 《우리 민족 련인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자 나름대로의 말로써 사랑을 고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곧바로 옌칭도서관으로 쫓아가서 《춘향전》을 찾아놓고 리몽룡과 성춘향이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을 훑어보았다. 우리 민족의 《로미오와 쥴리엣》이라고 하는 고전 《춘향전》에서 《사랑한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찾을바 없고 《이성지합(李成之合, 二姓之合) 조흔 년분(緣分) 평생동락(平生同樂)하여 보자…》(리몽룡), 《한번 탁졍(託情)한 연후의 인(因)하야 바리시면 일편단심 이 내 마음 독숙공방(獨宿空房) 홀로 누워 우는 한(恨)는…》(성춘향) 그리고 《우리 두리 인연 매질 져그 금석뇌약(金石牢約) 매 지리랴》(리몽룡) 등 우회적 언어로 사랑의 관계설정 과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전의 《금병매(金甁梅)》로 일컬어지는 《가루지기타령》에서도 변강쇠가 옹녀에게 《당신은 과부지요? 홀아비니 둘이서 살면 어떠하겠소?》라고 말하면서 두사람의 관계가 이루어 진다. 결국 양반계층이나 최하층의 천민계층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셈이다. 우리가 현재 널리 사용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낱말이 자전(字典)이나 자학서(字學書)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1583년에 석봉 한호가 왕명을 받들어 《석봉천자문》을 편찬하면서 《애(愛)》를 《사랑 애》라고 주석한것이 처음이다. 그후에 편찬된 《왜어류해》(1720), 《신증류합》(1756), 《전운옥편》(1799)에서 1908년에 간행된 《자전석요》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랑 애》라는 한석봉의 주석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그러나 《석봉 천자문》보다 더 앞서 편찬된 《훈몽자회》(1527)에서는 《애(愛)》를 《다슬 애》라 주석을 달았는데 《닷다》,《닷을》은 《사랑》이라는 낱말에 밀려 지금은 없어진 사랑이란 뜻의 우리 민족 고대어이다. 만주어에도 《총애한다》의 뜻으로 《도손》, 《도소롬비》라는 낱말이 있어 《다슬》은 알타이어 어원임을 간파할수 있다. 《사랑》이란 낱말의 어원은 《생각하여 헤아린다》는 뜻의 《사량(思量)》에 두고있음을 《광주본 천자문》이 《사(思)》를 《사량(思量) 사(思)》라고 한 주석에서 읽을수 있다. 그런데 그 《사량(思量) 사(思)》가 《룡비어천가》,《월인석보》, 《목우자》 등 문헌에서 《사랑(思) 사(思)》로 변모되였다가 《석봉 천자문》에서 《다슬》을 쫓아내고 《사랑 애》로 뜻이 바꿔지고 그 대신 《사(思)》는 《생각 사》로 주석이 변해졌다. 영어의 《아이 러브 유》나 한어의 《워 아이 니》는 가장 간편하게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최적(最適)의 언어라 할수 있다. 《나》와 《너》 사이에 《사랑》이란 단어가 아무런 문법적 수식이 없이 끼여진 그 말은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특별히 규격화된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마치 규격화되여 획일적으로 대량 생산된 공업제품과 같아 개개인의 개성이 완전히 함몰된 상태일수 밖에 없다. 남과 녀, 로와 소, 허와 실 그리고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아이 러브 유》이고 《워 아이 니》이다. 아주 쉽게, 그래서 애쓴다거나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련발할수 있는, 한번 구해놓으면 변하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쓸수 있는 조화(造花)와 같은 언어, 그러나 그기에는 생기도 향기도 없다. 그 대신 우리 민족 언어에는 그런 규격화된 사랑 전달어가 없기때문에 우리 말로 사랑을 전달해야 하는 남과 녀는 개개인의 문화적 개성을 추구할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우리에게는 《사랑을 어떻게 전달할것인가?》라는 물음에 모범답안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사랑에 한해서만은, 어떻게 표현할것인가를 묻지 마라》라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사람만의 언어로 두 사람만의 비밀이나 즐거움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이다》라고 한 괴테의 눈으로 보았을 때도 누구나 입만 벌리면 튀여나올수 있는 규격화된 사랑 전달어보다 개성이 있는 두 사람만의 언어로 사랑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남녀가 훨씬 돋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동포인 피터 훼셜레는 《코리언은 사랑을 곡선적으로 은밀하게 표현할 줄 아는 슬기를 지니고 있다. 녀자 친구와의 은밀한 사이를 아무에게 알리지 않으면서 사랑의 편지를 봉하고 나서 뒷면에 나 라는 봉인을 살짝 누를수 있어 슬기롭다》라고 우리 민족 남녀들의 사랑 표현법을 극찬했다.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사랑의 표현은 진한 향기로 되여 상대에게 전해질수 있다. 2003. 7
18    (수필)남자 · 술 그리고 약속 댓글:  조회:5079  추천:63  2006-02-05
남자 · 술 그리고 약속 나는 조연현과 피천득의 수필을 즐겨 읽는다. 조의 수필은 지성(知性)적인 개성이 강한 대신 피의 글은 좀 더 정서적이지만 그들의 글에는 당신들의 삶의 정취와 여운이 흠뻑 배여 있어 읽을 때마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한잔의 차를 마주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술을 못 마신다. 《나의 무주도(無酒道)의 변》을 읽다보면 조연현은 《생리적으로 술이 받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고, 피천득은 《술》이라는 글에서 《체질》 때문에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모두 술을 례찬했고 주당(酒黨)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술을 먹지 않는다. 나는 나의 체질이 술을 받아주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약속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 60대 이상의 년륜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1970년대 말까지, 중국의 사회생활 전반에 만연되였던 좌경적 정치, 사상풍토를 쉽게 잊을수 없을것이다.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던 그해 나는 15세의 초중 3학년 학생이였다. 그 투쟁의 결과로 내가 존경하던 몇몇 선생들이 《우파》로 몰려 학교교정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선생들을 불행에로 내몬 결정적인 《죄장》들이 대부분 술좌석에서 나온 말들이였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이 좀 지나서 알게 되였다. 고중 2학년 때, 나는 나를 많이 관심해주던 은사님이 입원한 병원에 병문안을 간적이 있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는 조선족 남자들은 술이 몇잔 들어가면 호언장담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것이 조직에 보고되여 당사자를 불행에로 몰아가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억압분위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술에 의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게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앞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하자.》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던 나는 선뜻 선생님의 손을 잡으면서《약속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후 은사님은 술이 남긴 화근때문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선생님이 나에게 씌워 준 약속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점차 깨닫게 되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학생 식당에서는 명절 때마다 술을 공짜로 제공해주었다. 그때의 학생식탁은 《팔선탁(八仙卓) 》이라는 정방형 식탁이였는데 식탁마다 포도주 한병, 그러니까 매 8명에 술 한병씩 차려진 셈이다. 그리고 그때의 포도주라는것도 지금 흔히 볼수 있는 《중국건홍(中國乾紅)》이요 《장성건백(長城乾白)》이요 하는 식의 꼬냑형 와인이 아니고, 당분 함유량이 높고 알콜 함유량이 낮은 술이여서 누구라 할것없이 무난하게 마실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입학식이 끝나고 저녁 만찬 때 포도주가 나왔다. 대학생이 되였다는 긍지에 부푼 학우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 잔을 들고 《건배》의 짜릿한 맛과 멋을 함께 즐기였다. 그런데 나만은 그 금주(禁酒)의 약속때문에 학우들과 함께 휩쓸릴수 없었다. 그때 나는 완전히 따돌림당한 기분이였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 동학들은 술이 생길 때마다 반에서 유일하게 술을 안 마시는 나에게 술을 권하면서《술도 안 먹으면 어찌 사나이 대장부라 할수 있느냐》라고 빈정거리는것이였다. 대학 5년 동안, 그것도 멋 모르게 자존심이 한참 강했던 그 시절에, 술을 안 먹기때문에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라는 야유를 들을 때마다 찐하게 다가오는 치욕감을 고스란히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엄청난 고역을 치르게 되였다. 그러한 고역이 지속되면서 나는 무의식중에 《내가 진짜 사나이로서 무엇이 부족한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에 빠져 쉽게 해탈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졸업을 맞이하게 되였고 학우들은 학교부근의 음식점에서 작별을 위한 마지막 만찬을 마련하였다. 5년간의 우정과 오늘의 리별 그리고 내일의 행운을 위하여 60명의 동학들은 차례로 건배하게 되였다. 모두가 함께 하는 건배가 끝난후 친구였던 고(顧)군이 술잔대신 찻잔으로 건배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내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놓고 맥주잔을 쥐여주면서 래일 서장으로 떠나가는 자신을 축복해달라는것이였다. 대학시절 테니스를 함께 치면서 친구가 된 고군은 광서출신의 한족동창이였는데 자진해서 서장으로 가게 되였다. 지금과 달리 그때에는 대학졸업생 전원이 국가의 통일분배를 거쳐 직장이 결정되던 시절이였다. 나는 본 대학의 조교로 발탁되여 좋은 직장이 차려졌고 친구인 고군은 삶의 환경 조건이 가장 열악한 서장으로 배치되였던것이다. 그때 나는 술을 안 먹는다는 리유로 고군의 부탁을 거절한다는것은 돌아올수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친구에게 축복해주기를 거절하는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선생님과의 약속이 제동을 걸기 전에 나는 고군을 축복하여 맥주잔을 들었고 고군을 위해 그리고 북경을 떠나 멀리 변방으로 가게 되는 동창들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동창들을 축복하여 단숨에 500CC짜리 맥주잔 3개를 비웠다. 문자 그대로 일명경인(一鳴驚人)의 순간이였다. 놀라서 눈이 둥그레졌던 동창들은 한결같이 기립 박수를 쳐주었다. 이렇게 나는 평생 처음 술을 경험하게 되면서 선생님과의 약속을 깨쳤고 술에 대한 동정(童貞)도 잃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더 귀중한것들을 얻게 되였다. 우선 나는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킬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남 못지않게 술을 마실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였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5년간 내 가슴속에 묻어온 치욕감(술을 못 먹기 때문에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라는)을 훌훌 털어 버릴수 있었으며 불주(不酒) 콤플렉스에서 해탈할수 있었다. 《나도 술을 마실수 있다. 다만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시지 않을 뿐이다. 남들이 사나이 대장부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술의 유혹을 이겨내면서 약속을 지키는것이야말로 사나이대장부가 아니면 해낼수 없는 장한 일일것이다.》 그후부터 나는 긍지를 갖고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수 있었고 다시는 그 약속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였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나는 약속을 주문하신 선생님의 참뜻을 올바르게 읽어낼수 있었다. 사회전반이 열병을 앓고 있던 그 시대를 살면서 무사히 살아남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생님은 금주(禁酒)라는 호신부(護身符)를 나에게 달아준것이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고중 동창 10여명이 북경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달에 한두번정도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술좌석에 모였던 사람들이 국외에서 밀반입된 소책자를 돌려가며 읽은것이 화근이 되여 그들 다수가 감옥에 수감되여 옥고를 치르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술을 안 먹는 나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할수 있었다. 반우경(反右傾), 사회주의 교육운동, 문화대혁명 등 운동을 차례로 겪으면서 선생님의 본뜻대로 금주의 약속은 여러번 나를 위기상황에서 보호해주었다. 투쟁의 철학이 사회생활의 기본가치로 인정되던 그 시대가 사라지면서 선생님과의 약속도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되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술을 먹지 않는다. 《술도 모르고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애주가들의 말을 귀 아프게 들으면서 대학 때부터 술과 관계없는 곳에서 인생의 재미를 찾기 시작한것이 40대가 되면서 고칠래야 고칠수 없는 습관처럼 되어버린것이다. 남들이 술을 마시면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을 사귈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취향으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을 사귀였다. 자신의 전공외에 음악, 미술, 문학에 기웃거리기도 했고 테니스, 배드민턴, 수영, 스케이팅, 등산, 낚시 등 스포츠를 선호했으며 카드놀이, 바둑, 장기에서 마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임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술 외에도 삶의 정취는 어디서나 찾을수 있다고 믿게 되였다. 한문으로 쓴 시가 신문에 발표되거나 전각(篆刻) 작품이나 작사, 작곡한 노래가 발표되였을 때 아마추어답게 희열을 느끼면서도 그 분야의 친구들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지는것도 어쩔수 없었다. 《외도》중에서 내가 가장 긍지를 느끼게 된것은 미술에 대한 사랑이 밑거름되여 세번이나 800만원 이상 가치의 예술품 감정(鑑定)을 해낸것이고, 내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은 문혁초기 별 볼일 없어 의학공부를 좀 한것이 문제되여 군 부대농장에서 로동단련을 할 때 《맨발의사》자격으로 주변 농민들의 병을 봐준적이 있고, 1985년에는 할빈시 위생국으로부터 할빈시조선족병원 명예원장으로 정식 임명받은 것이다. 선생님과의 약속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술의 자리는 완전히 비여있다. 그 빈자리를 꽉 채워메운것이 바로 여러가지 취향이다. 그 취향들을 쫓아버리고 자리를 다시 비워 술을 쏟아붓는다는것도 당초에 술의 자리를 비우던것 못지 않게 어렵다는것을 불혹의 나이에 터득하게 된것이다. 그렇다 해서 나의 인생에서 술이 전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입으로 먹는 술의 자리는 비여 있지만 글로 읽는 술의 자리는 남 못지 않다. 술에 대한 글은 대체로 세가지로 구분되는데 예찬론, 혐오론 그리고 중용론이 그것일것이다. 예찬론의 백미는 《가장 좋은것이 뭔지 아나? 술에 취해 물가 모래밭에서 잠자는 것이야》라고 한 아르튀르 랭보의 명언일것이고, 혐오론중에 가장 정곡을 찌른 사람은 《모든 악덕중에 음주만큼 성공을 방해하는것은 없다》고 한 영국시인 월터 스코트일것이다. 중용론으로는 우리가 평시에 자주 듣게 되는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요, 과음하면 독약이다》라는 말이겠지만, 그보다 더 해학적인 속담을 1992년 몽고를 방문했을 때 울란바또르의 한 애주가가 들려준적이 있다. 《술을 마시면 죽는다, 그러나 마시지 않아도 죽는다》. 한국시인 조지훈은 술 마시는 사람들을 18등급인 9급 9단으로 나누고 있다. 나는 9급인 불주(不酒)급에나 속할는지 모르겠다. 아주 못 마시진 않으나 잘 안 마시는 사람이니까. 2003. 5
17    (수필)이순의 인생 댓글:  조회:5162  추천:52  2006-01-27
이순의 인생 나는 남들보다 좀 일찍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셈이여서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반에서 제일 어린 축에 속했다. 고중까지는 그런대로 모르고 지냈으나 대학에 진학하여 한족 동학들이 나를 부를 때 성씨 앞에 《소(小)》자를 붙여 호칭하면서부터 나는 부지불식간에 《꼬마 콤플렉스》를 앓게 되였다. 그것도 열여덟살 때부터 한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기를 련 42년간이나 지속해 왔기때문에 교환교수나 객원교수로 국외대학에 가있던 몇년을 제외한다해도 내 인생의 3분의 2라는 긴 시간을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였다.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선배나 동창 출신의 교수들이 계속 성씨앞에 《소》자를 붙혀 호칭하는 바람에 그 호칭은 40여년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게 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서 살아온것 같다. 누가 회갑을 치른다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것은 으레 나와는 관계없는 남의 일로만 여겨왔고 언젠가 나도 회갑을 치르게 될것이라는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소》자를 붙여 나를 호칭해주던 마지막 동창출신 교수가 은퇴하면서부터 나는 서서히 늙음을 지각하게 되였다. 회의장이나 회식장소에서 나는 좌상자리에 앉게 되였고 나에 대한 호칭도 《로(老)》자 일색으로 변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달갑지 않은 회갑을 맞이하게 되였다. 나의 생일이 음력으로 1943년 2월 2일이니까 금년의 양력 3월 4일이면 만 60세가 된다. 종래로 생일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몇몇 제자들이 찾아와서 회갑을 치르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단연히 거절했다. 우선 회갑을 맞이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가까이 있는 석, 박사생들이 정성껏 마련한 생일잔치로 회갑연을 대체하게 되였다. 60세가 되였다는 것은 바로 늙는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 아무리 현대인들의 자연년령이 옛날 사람들보다 10여년이 더 연장되였다고 해도 60이 넘으면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생물학적으로 나타나는 육체의 로쇠현상은 어쩔수 없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늙음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관념과 문화적습관인식은 거의 부정적이다. 로인은 더 이상 쓸모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인식은 정년퇴직과 맞물려 더더욱 뚜렷해진다. 따라서 늙음은 두려움과 저주, 혐오, 기피의 대상으로 될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은 60이후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이나 부록과 같은 인생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늙음의 문화적표상을 거슬러 생각을 달리 해볼수도 있다. 생애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면서 정신적 성숙을 내포한 늙음에 긍정적의미를 부여해보는것이다. 공자는 《론어》에서 《60이 이순(六十而耳順)》이라 하여 60대를 이순으로 정의했다. 나이 예순에는 어떠한 말을 들어도 억지가 없이 만사를 사리대로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여유로워졌다는 뜻이다. 이순의 인생경지에 이르려면 세상살이의 다양성을 인식할수 있어야 하고 원숙한 인생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년륜이 60만 되면 누구나 자연히 이순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반백이 된 머리칼을 염색해서 늙음을 감추려 애쓰는것보다는 반백을 자연스럽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보는것이 훨씬 슬기로울수 있다. 생물학적인 로쇠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정신적 탐색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이순의 경지를 이루어 갈수 있을것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이상 누구라 할것없이 자기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갖게 된다. 젊은이들은 과거가 짧은대신 미래가 까마득할 만큼 길다. 그러나 60년 이상의 과거를 갖고있는 로인들은 자연히 미래가 짧을수밖에 없다. 자연의 섭리가운데서 모든 인간에게 가장 공평한것은 현재를 뜻하는 오늘이다. 생기발랄한 20대 청년에게 있어서나 래일이면 죽을지 모르는 로인에게 있어서나 길고 짧음이 없이 오늘의 하루는 모두 24시간이 된다. 과거는 돌이킬수 없는 시간들이다. 아무리 권력있고 돈있고 재간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를 고쳐 살수는 없다. 그대신 미래는 불확실하다. 누구나 미래를 예측할수는 있겠으나 모든 것이 예측대로 될수는 없다. 때문에 인간이 확실하게 지배할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어제도 아니고 래일도 아닌 오늘을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간을 조물주(가령 조물주가 있다고 한다면)는 남과 녀, 로와 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있다. 그러한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각자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젊은이의 오늘은 반드시 값진것이고 늙은이의 오늘은 꼭 허무한것만은 아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관계없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사회생활에 참여하면서 크든 작든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의 하루는 뜻있고 값질수 있다. 영국의 철학가 베이컨(Bacon) 은 《고목은 불을 때기에 좋고, 오래 묵은 술은 마시기에 좋고, 오랜 친구는 믿을수 있어 좋고, 로련한 작가의 작품은 읽을만 해서 좋다》라고 해서 오랜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원숙해지고 로련해진 늙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60평생은 《문화대혁명》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자족하게 된다. 끈질긴 노력으로 불민한 나도 대학의 교수로 될수 있었고 동료교수들 못지않은 연구업적도 쌓아왔다. 가족생활에서 훌륭한 아내를 맞이할수 있었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도 무난하게 자라나 이제는 자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에게도 생각조차 떠올리기 싫은 과거가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없이 자라면서 인간세상의 온갖 고초를 겪어보았으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는 가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겪게 된 10년이나 지속되였던 《문화대혁명》은 내 인생의 황금시절을 빼앗아갔다. 그렇지만 나는 자유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기때문에 삶의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낼수 있었다. 누군가가 60이후의 인생은 죽음을 준비해가는 인생이라고 했던 글을 본적이 있다. 자신의 생애를 어떻게 정리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것인가를 각오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였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을 리해할만하다. 개혁개방을 맞이하여 7개 나라의 10여개 대학에 쫓아다니며 가르치고 배우고 했던 《불혹(不惑)》의 40대 인생과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여 20여권의 책을 출판하고 6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면서 민족의 발전을 위한 현실참여로 눈코뜰새없이 보냈던 《지천명(知天命)》의 50대 인생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이제 이순의 인생을 맞이하였으니 죽음도 지척가까이 와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는 한 나의 귀중한 삶의 시간을 죽음과 련관시키고 싶지 않다. 비록 죽음이 래일 아침에 찾아온다해도 나는 오늘의 하루를 충실하게 살고 싶다. 《인생을 산다는것은 리허설이 아니며, 장담할수 있는것은 단지 오늘뿐이라는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인생이 얼마나 멋진것인지 늘 잊고 산다는게 아이러니지요. 살아갈 날이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많이 해야 할텐데, 까맣게 잊고들 지냅니다. 삶의 여백을 만들고 진짜로 사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라고 애너 퀸들런이 《어느날 문득 발견한 행복》이라는 책에서 지적한것처럼 확실하고 멋진 오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제 회갑을 보냈으니 몇년 더 지나가면 나도 정년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여도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갖고 하루하루, 한해한해를 충실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가장 귀중한 시간은 내가 살고있는 오늘 이 순간이고, 가장 귀중한 사람들은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삶의 참뜻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충실해질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의 래일은 또 다른 하루의 오늘이 될 것이다. 2003. 2
16    (수필)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댓글:  조회:4838  추천:59  2006-01-26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나는 항상 삶을 하나의 행운으로 생각한다. 빈곤과 풍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 이 모든것을 떠나서 나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봄날, 눈 녹은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풀들의 싱그러움에 취해버릴수 있는것도, 여름날 땀을 흘리며 등산한 끝에 산등성이의 고목 그늘에 누워 시원한 바람으로 목욕하면서 내 자신도 이 아름다운 자연에 녹아 들어간듯한 느낌을 느낄수 있는것도, 가을날 락엽이 쌓여있는 공원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드높아진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볼수 있는것도, 그리고 눈 오는 겨울날 숲속 오솔길을 걸으면서 리유없이 기분이 상쾌해질수 있는것도 우선 내가 살아있기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어서 한 오리의 연기가 되여 대기속에 사라지고 한 줌의 재가 되여 어디인가에 뿌려진다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볼수도 느낄수도 없을것이다. 살아있기때문에 나는 강의를 할수 있고 제자들을 가르칠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수 있고 쓰고 싶은 글을 쓸수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의 애환에 따라 울수도 웃을수도 있다. 또한 여행을 다닐수도 있고 등산을 하고 수영을 하고 스케트를 탈수도 있다. 내 가족이나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할수 있고 나를 관심하는 사람들에게 때아닌 성을 낼 경우도 있으며,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구에게 들이닥친 불행때문에 슬퍼할수도 있고 또 옛 동창이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수도 있다. 살아있기때문에 나는 사랑할수 있다. 나는 내 안해와 자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일하고 주거하는 생활공간과 주변 자연환경, 인문환경도 사랑한다. 내 민족과 내 나라도 사랑한다. 나는 항상 사랑할수 있어 행복하다. 만약 내가 죽어서 한 오리의 연기와 한 줌의 재가 되였을 때 나는 분명히 이 모든것들을 할수 없을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삶을 우리는 수십년정도밖에 누리지 못한다. 간혹 백살을 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너무나 드물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귀중히 여길수밖에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죽음은 수시로 우리의 삶을 빼앗아갈수 있다. 전쟁, 질병, 재해와 사고 등 수없이 많은 함정들이 인간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이나 그러한 함정에 빠져든적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서 두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갑자기 일어난 화재로 나는 머리에서 손에 이르는 부위까지 중화상을 입게 되였다. 지금도 내 얼굴의 왼쪽 부분과 왼쪽 손등에는 그 때의 화상흉터가 력력히 남아있어 나는 추남(醜男)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사고 당시 마을에 유일한 한의사가 와보고 살릴수 없는 애니까 포기하라고 할머니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온갖 정성을 몰부으시면서 나를 지켜주셨다. 약이 없어 상처에 된장을 발라 감염을 막아주었고 오직 사랑이란 약으로 나를 치유시켰다. 아무리 추남의 삶이라 해도 나는 저승사자의 손에서 생명을 다시 찾아준 할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삶에 충실하려고 한다. 또 한번은 1996년에 학술조사를 나갔다가 강서성 경내에서 내가 타고 가던 승용차가 마주 오는 차와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사태여서 《아차!》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를 구조하여 근처 병원에 옮겨주었고 병원에서 이마 가장자리에 난 상처를 봉합하여 지혈시킨 후 구급차로 남창시에 있는 성립병원으로 옮겨갔다. 이튿날 나는 비행기로 북경에 이송되여 치료 받게 되였다. 첫 이틀동안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간간이 의식이 회복되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있었던것이다. 흉터투성이인 나의 얼굴에 그것도 이마의 가장자리에 초승달모양의 흉터를 추가시킨 이번 사고로 나는 매일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았다는 인도의 어느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삶과 죽음사이는 《아차》 할 겨를도 없는 순식간일수도 있다. 죽음이 접근한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상황에서 죽어간 사람들에게 《준비된 죽음》 이라든가 《죽을 때 후회가 없도록》한다는 식의 설교는 아무런 련관성도 없는 빈말일수밖에 없다. 설사 불치병으로 장기 투병하다가 죽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림종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건강할 때부터 《죽음을 준비》 한다면 그러한 삶은 너무나 소극적일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매일 죽는 련습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죽을 때 후회가 없을가를 생각하거나 매 하루를 인생을 마감하는 날처럼 산다 할 때, 그러한 삶에 무슨 꿈이 있겠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을수 있으며 원대한 계획과 도전이 있을수 있겠는가. 죽음과 관계없이, 살아있는 오늘의 삶에 충실하다보면 살아있든 죽게 되든 언제나 떳떳해질수 있다고 생각된다. 종교인들은 래세가 있다고 믿고 있기때문에 짧은 인생을 어떻게 리해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때문에 내 삶의 시간적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럴수록 삶의 귀중함을 더 자주 되새기게 되고 살아있는 한 그 귀중한 삶을 죽음과 련관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열심히 일하면서 진실된 사랑을 나누면서 생활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할뿐이다. 설령 내가 래일 아침 죽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살아있는 오늘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꾸준히 일하겠지만 결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일은 하지 않을것이다. 《비록 래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한 루마니아 문학가 게오르규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태여난다. 모든 생명의 최종 귀추는 죽음이지만 한 마리의 쥐에서부터 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은 죽기 위해 태여나지 않는다. 죽음은 생명의 종말이지 삶의 목표가 아니다. 때문에 죽음을 위한 삶은 있을수 없다. 《우주에는 많은 생명이 있다. 생명의 본질은 살고자 하는것이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은 고귀한것이다》.《아프리카의 태양》 으로 불리우던 노벨평화상 수상자 프랑스 의사 시바이쩌의 명언이다. 의사였으며 동시에 철학가였던 그는 아프리카의 꺼져가는 생명을 구제하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나는 살아서 숨쉬는 동안만은 죽음을 거부하고 싶다. 죽음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죽음에서 공상적인 요소를 제거해버린다면, 자연적인 현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그렇다면 보귀한 삶의 시간을 죽음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을 갖고 호들갑떠는데 랑비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나는 영원한 죽음으로 귀의하게 될것이지만 그러나 나의 생물적 생명은 유전자 형태로 자식을 통해 연연해질것이고 나의 학문의 생명은 나의 글과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것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여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금방 피여난 꽃에서 찾아볼수 있는 삶의 발랄한 생기를 만끽하게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나의 하루하루는 즐겁기만 하다. 2002. 6
15    (수필)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댓글:  조회:4924  추천:55  2006-01-25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나는 지금까지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왔다. 《이름 없다》라는 말을 사전에서《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라고 풀이하고 있는것만 보아도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기 혼자만 사용하는 이름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간혹 례외가 있을수도 있다. 보통 이름하면 본명(本名)을 가리킨다. 《호(號)》,《자(字)》, 《필명》등 본 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름은 역시 본 이름이다. 본질적으로 따지면 이름은 남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한 사람, 한 사람마다의 기호(記號)이다. 그런데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의 문화수준과 취향, 그리고 시대적 영향때문에 우리는 주변에서 중복되는 이름을 자주 듣게 된다. 례를 든다면 1960년대 이전에 작명된 이름가운데 《춘자》, 《영자》, 《숙자》하는 식의 이름이 자주 중복되였으나 《문화혁명》기간에 지어진 이름에는 《설매》, 《홍매》하는 《매》자가 든 이름이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중복되는 이름도 역시 남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개인의 이름이다. 《춘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이름이 중복되는 녀성이라는것외에는 아무런 련관성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춘자》들을 한 개 무리로 묶을 수 있는 아무런 공동분모도 없다. 그 대신 어느 《개인》보다도 어떤 특수 부류에 속하는 《그룹(群體)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호칭이 있다. 우리 민족 습관에서 《남편이 죽어서 혼자 사는 녀자》들을 《과부》라 하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어난 자식》들을 《유복자(遺腹子)》라고 부른다. 유복이란 뜻은 아버지가 자식을 어머니배속에 남겨두고 죽었다는 뜻이다. 《과부》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유복》이란 이름도 어느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룹인》호칭일 뿐이다. 그래서 《유복》도 태여나서 남들과 구별하기 위한 개인의 이름이 지어지게 되고 다만 어릴 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아명(兒名)》처럼 《유복》이라고 불리우는 경우가 가끔 있을뿐이다. 그런데 나는 시골에서 유복자로 태여나서 이름 지어주는 사람이 없어 어려서부터 막연하게《유복》으로 불리였다. 내가 살던 동네에 또 다른 《유복》이 있었지만 그 소년은 개인의 이름이 따로 있어 학교 다닐 무렵에 《유복》이란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러나 남들과 구별하기 위한 개인 이름이 따로 없는 나는 《유복》이란 이름을 학교에까지 갖고 갔다. 그때의 광경이 가끔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1950년 초봄, 일곱살 생일을 갓 지낸 나는 고향인 쌍하진에서 제2완전소학(조선족 소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만 해도 봄학기에 학생모집을 할 때다. 시골에서 소학교 입학 등록하는 날이 되면 명절을 지내는 기분이 된다. 학부모들은 새 옷으로 차려입은 애들을 데리고 학교에 나와 운동장이나 현관에 삼삼오오 몰려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애들은 교도주임 사무실 밖 복도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한 사람씩 불려 들어가 입학 등록을 하게 된다. 등록할 때 신입생들의 지능(IQ)을 검사하기 위하여 본인 이름과 부모의 이름, 고향 그리고 10이나 100까지의 수를 세게 하는데 그것도 시험이라고 우리는 무척 긴장해져 있었다. 드디여 차례가 되여 사무실에 불려 들어간 나는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교도주임 앞에 서게 되였다. 테이블 옆 의자에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들인 젊은 녀자선생이 앉아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선생이라고 하는 그 녀는 나의 첫 학기 담임선생이였다. 교도주임이 낀 각테 안경때문인지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에 눌린 나는 겁에 질려 버렸다. 《성이 뭐냐?》교도주임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하셨다. 《황가예요.》 《이름은?》 《유복이예요.》 그 동안 등록부에 무엇인가를 적던 교도주임은 머리를 들어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또 다른 이름이 있을 것 아니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 물음을 도무지 리해할수 없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였다는 느낌이 앞서면서 《이제는 퇴짜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김선생이 종이에다 무엇인가 적어서 교도주임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교도주임이 머리를 끄덕여 수긍하자 김선생은 일어서서 그 종이 장을 나에게 건네주시면서 《있을 유(有)》자에 복《복(福)자, 너의 한자 이름이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후에 있은 일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등록을 마치고 사무실 문을 나설 때 김선생이 따라 나오면서 《축복 받을 이름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고치지 말아라》고 당부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어 고맙다는 인사말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사람들을 피해 교실 뒤에 있는 살구나무 숲으로 뛰여 들어갔다. 부들로 삼아 신은 신발자국과 함께 눈물자국이 채 녹지 않은 숲속 흰 눈 위에 뚜렷이 찍혀졌다. 두 살 때 여의게 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던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김선생을 어머니로 생각해 보군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 김선생은 어디론가 멀리 시집갔고 그후 에는 종무소식이였다. 좀 더 커서 나는 입학 등록 때 있었던 대화의 뜻을 깨우치게 되였다. 내가 주장했던《유복》이란 이름은 어느 개인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여난 자식》들 모두가 사용하는 《그룹인》의 이름이였고 설사 어느 개인이 류용하더라도 배《복(腹)》자를 한자 이름으로 쓰기에는 너무나 고민되는 일이였기때문에 교도주임이 그렇게 나를 쳐다보았던것이였다. 그리고 김선생은 《有福》이라는 우리말 동음 한자로 《遺腹》을 대체시키는 방법으로 내가 계속 《그룹인》 의 이름을 빌려 쓸수 있도록 배려해준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글자가 변했기 때문에 적어도 한자 이름만은 내 개인의 이름을 갖게 된셈이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나는 이름으로 인한 새로운 갈등을 경험하게 되였다. 1961년 9월, 중앙민족대학 력사계에 입학한 후 친하게 된 동창들이나 은사들로부터 《有福》이란 이름은 너무 촌스러우니 고치라는 종용을 자주 받게 되였다. 그들은 하다못해 《有》자를 한어에서 동음자인 《友》자로 고치라고 권고해 왔다. 그들의 호의를 받아드린다면 이름의 한어 음은 변한게 없지만 우리말 발음은 《우복》으로 변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지금까지 없었던 내 개인의 이름이 생기게 되고 다시는 《그룹인》의 이름을 빌려 쓰지 않아도 되는 리점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이 생길 때마다 이름을 고치지말라고 당부하던 김선생의 말씀이 떠올라 나는 한족들이 촌스럽다고 하는 이름을 그대로 고집해 왔다. 1966년 6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문화혁명》이 발발하면서 나는 이름 때문에 생각 밖의 시련을 겪게 되였다. 《문혁》초기의 《홍위병》들은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 (破四舊)》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의 숙소 문 밖에 홍위병들의 《대자보》가 붙여졌다. 《봉건주의 악취가 물씬 풍기는《有福》이란 이름을 24시간 내에 고치라. 그렇지 않을 경우 《혁명적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최후 통첩이였다. 그 당시 소위 《혁명적 조치》라는것은 사람의 머리에 종이로 만든 고깔을 씌우고 거리에 끌고다니거나 《투쟁대회》를 열어 《투쟁》하는것이였다. 고민끝에 나는 그 어떤 가혹행위가 가해지더라도 이름만은 고치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시간을 보내느라고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 어록》이라는 작은 책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엥겔스 어록가운데서 《가난한 사람은 유복하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였다. 《맑스, 엥겔스 전집》제1권 제561페이지에 수록된 《런던에서 온 편지⟫라는 글에서 발췌한 어록이였다. 나는 흥분되여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 대여섯명의 홍위병들이 찾아왔다. 나는 그들 두목에게 《어록》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나서 《너희들은 혁명도사의 가르침을 무엇으로 여기느냐. 엥겔스께서 가난한 사람은 유복하다 하셨는데 너희들은 도리여 봉건주의로 몰아부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쩌겠다는거냐》라고 기분 좋게 훈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안》과 《용서》를 련발하면서 물러갔다. 그 후 나는 《궁인시유복적(窮人是有福的)》이라는 여섯 한자로 전각 인장을 만들어 호명(護名)용으로 사용하게 되였다. 다시 십여년이 지나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였다. 1980년, 나는 중국 조선족 종교문제 현지 조사를 해보았다. 조사 보고서는 국가 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 종교국에 제출되였고 일년이 지나 《중국 조선족 종교문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였다. 보고서에 우리말 성경출판의 필요성이 제기되였고 그 후우리말 성경 출판과 관계되여 국가 종교국의 도움으로 《성경》을 입수할 수 있었다. 짬이 나는 대로 조금씩 읽어보다가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라게 되였다. 《성경》의 《누가 복음⟫제6장에서》 가난한 자는 유복하나니》라는 구절을 읽게 된 것이였다. 다시 엥겔스 어록과 대조해 보니《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라는 전 구절을 엥겔스는 《성경》에서 인용했던 것이였다. 그것이 확인 되는 순간 나는 우선 김선생을 생각하게 되였다.《아, 그 분은 크리스천이셨구나. 그래서 부모 없는 가난한 어린이를 위하여 《有福》이라는 한자 이름을 쉽게 생각할수 있었고 《축복 받은 이름이니 고치지 말라》고 당부하셨구나.그후 나는 여러 사람을 통해 수소문 해보았으나 김선생을 다시 찾을수 없었다. 《성경》에서 한자 이름의 원류를 찾았을 때의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해진 나는 《그래도 한자 이름만은 내 개인의 이름》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꿈에서 깨여나고 말았다. 2000여년 전에 생긴 유대민족의 신화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들을 축복하여《有福》하다 하였으니 나의 한자 이름 역시 《그룹인》이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우리 말 이름도, 한자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불혹지년》을 코앞에 두고 뒤늦게야 이름이 없음을 깨닫게 되였으니 어딘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 나이에 이름을 새로 짓는다는 것도 싱거운 일이고 또 왜서인지 김선생의 당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나는 계속 이름도 없이 살아가고있다. 이름은 어디까지나 한사람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니까 없다 해서 못살것도 아니고 이름없는 대신 나는 좀 더 개성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고 생각해 보니 그런대로 살맛이 난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이름은 없어도 나만의 인생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2001. 9
14    (수필)택호 댓글:  조회:5051  추천:59  2006-01-24
택 호 20세기와 함께 사라진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운데서 가장 아쉽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택호》라는 호칭문화이다. 어릴 때 나는 동내 할머니들이 우리 집이나 우리 할머니를 《남호댁》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자주 들어왔다. 《남호댁이 뭐예요?》라고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우리집 택호란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내가 택호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은 수십년이 지나고서였다. 거의 모든 이민일세들이 다 그랬겠지만 할머님은 꿈에서도 당신의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했다. 아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왔지만 10년도 않되는 사이에 아들과 며느리를 여의고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가고 계시던 할머니는 당신께서 생전에 고향땅을 밟지 못 하더라도 손자가 커서 뿌리를 찾아가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집에 떡이나 별미가 생기면 할머니는 나를 불러 놓고 먼저 고향과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의 성함을 줄줄이 외우게 하였다. 거침없이 선친의 성함과 함께《강원도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지금은 울진군이 경상북도에 소속되지만 광복전에는 강원도에 속했다)》하고 고향주소를 외우게 되면 상을 주듯이 떡을 먹게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내 머릿속 뇌세포에 새겨넣어준 그 정보로는 뿌리를 찾을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생전에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방문초청을 받은 것은 1983년 서울대학교 문화인류학과가 주최하는 학술회의 초청이였다. 그런데 그때는 《남조선》이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지구상에서 중국공민이 갈수 없는 나라로 지정되여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한국방문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서독의 보홈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독일학자 휜들링그씨가 서울대학교의 학술회의에 참석했다가 나를 대신해 선친의 고향을 방문하여 산골마을에서 하루밤을 자면서 나의 소식을 그쪽 친척들에게 알려주었고 고향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보내왔었다. 휜들링그박사는 1982년에 처음으로 나를 유럽한국학학계에 소개한 학자였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나의 서울행기회가 좌절된 사실을 알게 된 휜들링그는 편지를 통해 나의 선친 성함과 고향주소 등 필요한 정보를 갖고 갔던것이다. 그런데 그는 족보에서 나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만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는 그가 독일학자이기 때문에 한자에 익숙하지 않아 족보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88년초에 나는 두 번째 한국방문초청을 받게되였다. 88서울올림픽개막식전야에 개최될 올림픽국제학술회의의 초청이였다. 그때 나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환교수로 보스턴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뉴욕주재 중국 총령사관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리붕(李鵬) 국무원 총리가 직접 사인한 한국방문 공식허가를 받을수있었다. 서울에서 학술회의와 올림픽개막식에 참석한 후, 올림픽국제학술회의 조직위원회는 한국의 10개 대학의 특강부탁을 하면서 한국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나는 주저 없이 선친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들의 배려로 나는 대학특강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타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을 떠나 승용차로 대전, 대구, 경주를 거쳐 포항까지 도착했고 포항에서 다시 동해안을 따라 흥해, 영덕을 거쳐 평해에 도착하였으며 평해에서 좌회전하여 백암온천쪽으로 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덕산리에 도착할수 있었다. 덕산리는 아직도 황씨 친족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황씨문중의 최년장자의 집을 찾아갔더니 반시간도 않되여 온 마을사람들이 다 모이였다. 몇년전 키가 큰 독일인이 대신하여 왔다간 적도 있었고 또 중국 북경의 어느 대학 교수로 알고있었는데 이번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명찰까지 달고 왔으니 고향사람들에게 비쳐진 나의 이미지는 《금의환향》한 《선비》정도가 아니였나 싶다. 나의 첫 고향방문은 이렇게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저녁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하는 푸짐한 잔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집안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앉아 족보를 앞에 놓고 나의 위치를 찾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성함은 족보에서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결국 휜들링그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을 한자에 상당히 익숙한 나도 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집안어른들은 이전 사람들이 평소에 쓰던 이름과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다르다고했다. 그리고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할머니도 모르실거라는 것이 였다. 족보는 족인의 일종의 신원보증서이기 때문에 족보에서 위치를 찾아낼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정체성은 확인될수 없게 된다. 고향사람들과의 촌수도 따질 수 없고 상하 세대관계도 계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우리》라는 일체를 이룰수도 없다. 나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혀 옴을 느끼게 되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그나마 탈출해 보려고 나는 될수록 화두를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몰아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할머니의 택호가 《남호》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밖에《기적》이 일어났다. 좌석에 앉아계시던 아저씨뻘(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되시는 세분 로인께서 이구동성으로 《남호댁아지매!》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족보를 뒤적이다가 《여기 있다》라고 하였다. 나도 목을 길게 빼고 족보를 들여다보았는데 할아버지 족보 성함자아래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수자돌림의 낱선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고 아버지함자아래에는 만주로 이민 갔다고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 혼돈은 사라지고 천지개벽이 일어난것처럼 모든 질서가 순식간에 정립되였다. 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과 나 사이의 상하 세대관계와 촌수관계가 금방 확정된것이다. 고향에는 나의 7촌, 9촌 숙부님들과 8촌, 10촌 형제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6촌형님 두분이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음을 알수있었다. 《택호》에 대한 사전적해석은 《장가든 곳의 땅 이름을 붙여 그 사람의 집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쉽게 말한다면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오기전에 남호리라는 마을에서 살았는데 결혼후 그 친정마을이름이 시집의 이름으로 된것이다. 옛날 호칭법이 까다롭던 시절, 결혼을 하여 어른이 되면 아무리 웃 세대라도 그냥 이름을 부를수 없었다. 그러한 호칭상의 불편을 덜수 있었던 지혜가 바로 택호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결혼하여 어른이 된후 개인의 이름보다는 할머니의 친정마을 이름으로 된 《남호댁》이란 택호로 통했기때문에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마을 로인들은 할아버지의 성함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택호는 기억하고 있었것이였다. 택호가 그렇게 중요한 문화적 기호라는것을 나는 첫 고향방문에서 절실하게 체험했다. 2005. 7
13    (수필)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 댓글:  조회:4700  추천:37  2006-01-23
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 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 적어도 수필가들의 눈에 비춰진 가을은 그렇다. 우선 가을은《풍요로운 계절》,《열매의 계절》,《수확의 계절》이고 《희열이 넘치는 보람찬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그 많은 나무의 잎들에 황금빛의 도금(渡金)을》 시킨 《생애의 황금기인양 잘 성숙된 숲》(마숙현)의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가을은 《외적인 찬란함과 그보다 더 값진 내적인 성숙을》(이지엽) 선물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례찬론자들은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정비석)한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가을의 《숲속에서는 고즈넉함이 있을뿐이고 외로움은 없다》(한흑구)고 한다. 그런데 가을 혐오론자들에게 느껴지는 가을은 《텅빈 들판》의 《한없이 쓸쓸한 계절》이고 《락엽이 굴러다니는》 《리별의 계절》이자 《외로운 계절》이고 《고독한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고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철중에서 가을을 제일 싫어한다》(노천명)고 그 심정을 토로한다. 차분히 음미해보면 례찬론자들은 수확전의 황금들판과 단풍이 곱게 물든 락엽 지기전의 숲을 이야기하고 있고 혐오 자들은 수확후의 텅빈 들판과 잎들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을 련상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풍성한 결실을 위한 합일의 계절인 봄이나 여름과는 달리 가을은 성숙과 분리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함께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대지는 눈부시게 찬란한 색채와 내실을 이룬 성숙으로 황금기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대지는 그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당신의 소산인 풍성한 열매들을 인간과 동물들에 미련없이 나누어주고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겨울이 가져올 흰색의 이불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리여주기 위해 아름다움을 뽐내던 단풍잎들은 나무에서 분리되여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분리는 사라짐이 아니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온 락엽들이나 추수가 끝난 논밭에 남아있는 곡식의 그루터기들도 봄이 오면 거름으로 되여 새로운 잎이나 열매로 태여나게 된다. 그런데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늦가을의 산과 들에서 무엇인가를 간과해버린것이 분명하다. 기운이 쇠잔해진 가을햇살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찬 서리를 걷어낼 때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과 락엽들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 있는 들국화의 매력을 잠깐만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나 《서글픈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여섯살 때 처음으로 들국화를 알게 되였다. 나의 고향인 영길현 쌍하진에서는 보통 10월초에 벼가을을 하게 된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나는 할머님을 따라 논밭으로 나가 추수를 마친 논바닥에 흘리어진 벼이삭을 줍거나 빈병을 갖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 모으기도 했다. 바람이 좀 쌀쌀해질 때 할머니는 금방 베어낸 벼단을 세워 바람막이《집 》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쪼이곤 했다. 뛰여다니는 메뚜기를 쫓다보면 논밭이 끝나는 논둑까지 가게 되는데 바닥까지 말라버린 작은 도랑을 건너면 자갈들이 뒤섞인 들판이 펼쳐지게 된다. 들판에는 내 키 정도로 자라나 시들어버린 쑥대들과 잡초들이 무성한데 그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이 무더기로 피여있었다. 노란 꽃술을 중앙에 두고 연한 보랏빛 꽃잎들이 동그랗게 둘러있는 야생화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꽃들이 숨막힐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꽃을 한줌 꺾어서 열심히 낫질을 하시는 할머니곁으로 뛰여가 《할매요, 꽃》했더니 《응, 들국화꽃이구나》 하면서 계속 일손을 놀리시였다. 점심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들국화꽃묶음을 발견하시고 《아무리 임자없이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라도 일단 꺾었으면 함부로 버릴것이 아니라 집에 가져가 병에 꽂아 두든지 아니면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타이르셨다. 나는 그 꽃다발을 다시 주워 들고 집에 돌아와 몇 개의 병에 나누어 꽂아 창턱에 놓아두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꽃받침대에서 말라버린 꽃을 따서 내 베개속에 넣어주셨다. 그날부터 한 겨우내 나는 들국화의 특이한 꽃향기에 취해 잠들게 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들국화를 할머니의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꽃중에서 들국화를 제일 사랑하게 되였다. 고향을 떠난후 타향에서 들국화를 볼 때마다 할머님의 사랑으로 커온 어린시절과 고향의 들녘을 회상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당고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 나는 어느날 홀로 들국화가 활짝 피여있는 바다가 들판에 누워 인생을 반추해 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날 저녁에 쓴 한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七絶---野菊有感渤海碧濤連天涌,幽州素雲接地隱.叢菊兩開兒時願,孤魂一系南湖心.(1967年10月20日) 그날 나를 울게 한 들국화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는 분명히 망향초(望鄕草)였다. 지난해 10월 중순, 태항산 항일 반소탕 전투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태항산 오지에 위치한 산서성 좌권현에서 개최될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기 위하여 태항산을 간적이 있다. 회의가 끝난후 나는 회의참석자들과 함께 태항산에 묻힌 조선의용군렬사들의 전적지와 묘소들을 찾아 참배하게 되였다. 산서성 좌권현과 하북성 섭현, 찬황현의 태항산기슭에 고이 잠들어있는 조선의용군렬사들의 묘소를 찾았을 때, 가는 곳마다 묘소주변에는 한결같이 들국화들이 만개해 있었다. 처음 나는 들국화로 꽃다발을 만들어 렬사들의 령전에 헌화하려고 마음먹었다가 가을바람에 설레이는 들국화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바꿀수밖에 없었다. 태항산은 이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들국화를 무더기로 선렬들에게 봉헌해 놓았는데 내가 왜 그 꽃들을 꺾어가면서 꽃다발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국화의 숲속에 엎드려 렬사들의 묘소에 재배(再拜)의 큰절을 드렸다. 참배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무엇에 홀린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찬 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내 눈에 다가왔다. 2004. 1
12    (수필) 태항산 기슭에 핀 들국화 댓글:  조회:4706  추천:55  2006-01-20
가을이란 계절은 모순투성이다. 적어도 수필가들의 눈에 비춰진 가을은 그렇다. 우선 가을은《풍요로운 계절》,《열매의 계절》,《수확의 계절》이고 《희열이 넘치는 보람찬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그 많은 나무의 잎들에 황금빛의 도금(渡金)을》 시킨 《생애의 황금기인양 잘 성숙된 숲》(마숙현)의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가을은 《외적인 찬란함과 그보다 더 값진 내적인 성숙을》(이지엽) 선물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례찬론자들은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정비석)한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가을의 《숲속에서는 고즈넉함이 있을뿐이고 외로움은 없다》(한흑구)고 한다. 그런데 가을 혐오론자들에게 느껴지는 가을은 《텅빈 들판》의 《한없이 쓸쓸한 계절》이고 《락엽이 굴러다니는》 《리별의 계절》이자 《외로운 계절》이고 《고독한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고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사철중에서 가을을 제일 싫어한다》(노천명)고 그 심정을 토로한다. 차분히 음미해보면 례찬론자들은 수확전의 황금들판과 단풍이 곱게 물든 락엽 지기전의 숲을 이야기하고 있고 혐오 자들은 수확후의 텅빈 들판과 잎들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을 련상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풍성한 결실을 위한 합일의 계절인 봄이나 여름과는 달리 가을은 성숙과 분리라는 서로 다른 성격을 함께 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대지는 눈부시게 찬란한 색채와 내실을 이룬 성숙으로 황금기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대지는 그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당신의 소산인 풍성한 열매들을 인간과 동물들에 미련없이 나누어주고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겨울이 가져올 흰색의 이불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이불을 덮지 못한 어머니대지의 라신을 가리여주기 위해 아름다움을 뽐내던 단풍잎들은 나무에서 분리되여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분리는 사라짐이 아니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온 락엽들이나 추수가 끝난 논밭에 남아있는 곡식의 그루터기들도 봄이 오면 거름으로 되여 새로운 잎이나 열매로 태여나게 된다. 그런데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늦가을의 산과 들에서 무엇인가를 간과해버린것이 분명하다. 기운이 쇠잔해진 가을햇살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찬 서리를 걷어낼 때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과 락엽들 사이에 청초하게 피여 있는 들국화의 매력을 잠깐만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나 《서글픈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여섯살 때 처음으로 들국화를 알게 되였다. 나의 고향인 영길현 쌍하진에서는 보통 10월초에 벼가을을 하게 된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나는 할머님을 따라 논밭으로 나가 추수를 마친 논바닥에 흘리어진 벼이삭을 줍거나 빈병을 갖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 모으기도 했다. 바람이 좀 쌀쌀해질 때 할머니는 금방 베어낸 벼단을 세워 바람막이《집 》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쪼이곤 했다. 뛰여다니는 메뚜기를 쫓다보면 논밭이 끝나는 논둑까지 가게 되는데 바닥까지 말라버린 작은 도랑을 건너면 자갈들이 뒤섞인 들판이 펼쳐지게 된다. 들판에는 내 키 정도로 자라나 시들어버린 쑥대들과 잡초들이 무성한데 그 사이사이에 이름모를 꽃들이 무더기로 피여있었다. 노란 꽃술을 중앙에 두고 연한 보랏빛 꽃잎들이 동그랗게 둘러있는 야생화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꽃들이 숨막힐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꽃을 한줌 꺾어서 열심히 낫질을 하시는 할머니곁으로 뛰여가 《할매요, 꽃》했더니 《응, 들국화꽃이구나》 하면서 계속 일손을 놀리시였다. 점심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들국화꽃묶음을 발견하시고 《아무리 임자없이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라도 일단 꺾었으면 함부로 버릴것이 아니라 집에 가져가 병에 꽂아 두든지 아니면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타이르셨다. 나는 그 꽃다발을 다시 주워 들고 집에 돌아와 몇 개의 병에 나누어 꽂아 창턱에 놓아두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꽃받침대에서 말라버린 꽃을 따서 내 베개속에 넣어주셨다. 그날부터 한 겨우내 나는 들국화의 특이한 꽃향기에 취해 잠들게 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들국화를 할머니의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꽃중에서 들국화를 제일 사랑하게 되였다. 고향을 떠난후 타향에서 들국화를 볼 때마다 할머님의 사랑으로 커온 어린시절과 고향의 들녘을 회상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당고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 나는 어느날 홀로 들국화가 활짝 피여있는 바다가 들판에 누워 인생을 반추해 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날 저녁에 쓴 한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七絶---野菊有感渤海碧濤連天涌,幽州素雲接地隱.叢菊兩開兒時願,孤魂一系南湖心.(1967年10月20日) 그날 나를 울게 한 들국화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는 분명히 망향초(望鄕草)였다. 지난해 10월 중순, 태항산 항일 반소탕 전투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태항산 오지에 위치한 산서성 좌권현에서 개최될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기 위하여 태항산을 간적이 있다. 회의가 끝난후 나는 회의참석자들과 함께 태항산에 묻힌 조선의용군렬사들의 전적지와 묘소들을 찾아 참배하게 되였다. 산서성 좌권현과 하북성 섭현, 찬황현의 태항산기슭에 고이 잠들어있는 조선의용군렬사들의 묘소를 찾았을 때, 가는 곳마다 묘소주변에는 한결같이 들국화들이 만개해 있었다. 처음 나는 들국화로 꽃다발을 만들어 렬사들의 령전에 헌화하려고 마음먹었다가 가을바람에 설레이는 들국화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바꿀수밖에 없었다. 태항산은 이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들국화를 무더기로 선렬들에게 봉헌해 놓았는데 내가 왜 그 꽃들을 꺾어가면서 꽃다발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국화의 숲속에 엎드려 렬사들의 묘소에 재배(再拜)의 큰절을 드렸다. 참배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무엇에 홀린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찬 서리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여있는 태항산기슭의 들국화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 조선의용군선렬들의 넋으로 내 눈에 다가왔다. 2004. 1
11    (수필)《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면서 댓글:  조회:4925  추천:44  2006-01-19
《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면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로 평가되는 토마스 엘리엇 (Tomas S.Eliot)의 장편시《황무지》제1부 《죽은자의 매장》의 머리부분이다. 평론가들은《황무지》가 제1차 세계 대전후의 시대적 환멸과 한번 황폐해진 인간의 심성은 더는 영적생명 을 새롭게 피워낼수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린다는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러나 정작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시인 본인은 도리여⟪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일뿐이라고 평론가들의 해석을 일축하였다. 하지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구는 나름대로 여러 맥락에서 자주 인용되여 왔다. ⟪황무지⟫라는 시와는 전혀 관계없이, 금년 북경의 사월은 우리에게 진짜 ⟪잔인한 달⟫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해마다 북경의 봄은 소리없이 조용히 찾아온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傳令使)는 단연코 양지바른 땅에서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며 흙을 비집고 돋아오르는 파란 봄풀들일것이다. 살 구꽃과 산도화(山桃花)가 활짝 피면서 계절감각이 무딘 사람들도 봄을 느끼게 된다. 봄바람에 민감한 버드나무는 수관 꼭대기에서부터 초록빛 잎이 피여나 서서히 아래가지로 번져 내려가고 땅기운에 예민한 백양나무는 땅에서 가까운 아래 가지에서 윗가지 로 연두빛을 옮겨간다. 황금빛 개나리가 눈부시게 피여 나고 흰빛과 연자줏빛의 목련꽃이 고고한 자태를 선보이며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여나면서 봄은 서서히 짙어간다. 이어서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 홍매, 자등, 박태기, 해당화, 오동, 모란 등 꽃들이 줄줄이 화려한 봄의 화폭에 흰빛, 노란빛, 연분홍빛, 보랏빛, 자줏빛, 빨간빛, 연두빛의 물감을 칠하여 문자 그대로《만자천홍(萬紫千紅)》 의 계절을 성숙시킨다. 그러다 가 오월이 되여 노랑가시장미 와 라일락 그리고 아카시아가 다투어 향기를 자랑할 때 봄날은 조용히 물러간다. 봄날이 만들었던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화폭을 하나의 진록 색으로 덮어버릴 때 여름은 우리 앞에 바싹 다가온다. 그런데 북경의 이번 봄날에는 이변이 생겼다. 그 끔찍한 일 들이 일어나게 된것은 모두가 해님탓이였다. 화사한 봄날이여 야할 사월을 《잔인한 달》로 만들어버린 장본인도 물론 해님 이였다. 사월의 시작은 여느해처럼 꽃의 물결을 몰고 서서히 찾아 왔다. 그런데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온화해야할 해님이 마치 첫사랑에라도 빠진것처럼 갑자기 뜨거운 정열을 퍼붓기 시작 했다. 섭씨30도를 넘나드는 날씨가 지속되면서 봄날은 리듬을 잃고 말았다. 북경의 매스컴들은 《이상(異常) 고온 때문에 꽃 들이 10일정도 앞당겨 피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화신(花信)보다는 화기(花期)였다. 꽃소식이 열흘정도 앞당겨 진다는 것은 초여름에 피여야 할 꽃들도 봄에 피게 했다는 말 이겠지만 동시에 그 많은 꽃들의 화기를 줄여서 락화를 재촉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경식물원이 기획한 봄꽃축제들은 플 래카드를 내걸기 바쁘게 꽃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엉망진 창이 되여버렸다. 목련축제가 그랬고 벚꽃축제, 튤립축제, 모 란축제도 마찬가지였다. 4월 7일, 나는 안해와 함께 식물원의 목련축제를 구경하러 갔 다. 목련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만개한 목 련꽃무리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환희로운 감정도 잠깐이였다. 해님의 때 아닌 성화에 못이겨 피여난지 오래되지 않는 싱싱한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기때문이였다. 아무리 오래 필 수 없는것이 꽃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그 《오래 필수 없는》 화기도 못 채우고 지고있는 락화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심정이 짙어진다. 대여섯명의 젊은 녀성들이 손 수건을 펼쳐놓고 나무 아래 떨어진 목련꽃잎을 주어모으고 있었다. 무엇에 쓸려고 줍 고있느냐고 물었더니 ⟪때아니게 떨어진 꽃잎들이 애처롭다는 생각도 안드세요?⟫라고 반문해왔다. ⟪홍루몽⟫의 주인공 림 대옥이 떨어진 꽃잎들을 주어모아 장사를 지내던 그때의 심정 을 어느 정도 리해할것 같기도 하다. 식물원을 돌아나서는데 대추나무 한그루가 보였다. 초여름 에 가서야 늦잠에서 깨여나는 잠꾸러기 대추나무도 뙤약볕을 방불케하는 따가운 해빛을 견뎌낼수 없었던지 긴 기지개를 켜면서 철갑같이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연두빛 새싹들을 삐 죽삐죽 내밀고있었다. 그러니 그 연약한 꽃잎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나 싶었다.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시인 이형기는 락화를 청춘에 대한 송별사로 노래했다. 바람에 휘날리며 한잎 두잎 떨어지는 꽃잎은 얼마나 아쉬운가. 동양철학가인 김근선은 락화를 심리적 감상(感傷)으로 나타 냈다. 그들이 말하는《하롱하롱》,《한잎 두잎》 지는 꽃잎은 화기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지고 있는 락화이지만 내가 이봄에 본 락화는 그것이 아니였다. 이번 사월은 봄꽃과 초여름꽃들을 함께 모아 화기도 못채운 그 아름다운 꽃들을 《대량학살》시 킨것이다. 늦가을 락엽처럼 목련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게 했고 겨울날 눈보라를 방불케하는 살구꽃, 벚꽃,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의 꽃보라가 일게 했다. 지나간 사월은 그렇게도 《잔인》했다. 해는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의 생명의 원천이고 만물을 키워주 는 어머니의 품이다. 해는 모든것에게 젖을 주었나보다 동무여, 보아라 우리의 앞뒤로 있는 모든것이 햇살의 가닥-가닥을 잡고 빨지 않느냐. (이상화:⟪비 갠 아침⟫) 그 따스한《햇살》이라는《젖》을 먹고 들판의 봄풀들이 자라 나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여나며 모든 농작물과 기타 식물들이 성장하고 영글어간다. 그러나 생명의 상징으로 되는 그 해가 때에 맞지 않게 과다한 햇빛을 발산하게 되면 그에 의해 자라난 생명들도 말라죽어버리게 된다. 이번 4월에 화기를 못 채우고 분분히 떨어진 꽃들이 바로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뜨 겁게 내리비치는 햇살에 의해⟪끔찍⟫하게 ⟪대량학살⟫된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집착때문에 꽃은 아름다움, 사랑, 청 춘, 화려함, 즐거움, 번영, 영화로움 등 긍정적인 의미의 상징 물로 선택되여 왔다. 그 많은 비유나 상징가운데서 《청춘은 한순간이며 아름다운 꽃이다》라고 한 M. 오닐의 명제가 가장 설득력있게 나의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내가 제일 마뜩찮 게 생 각하는것은 《녀성은 꽃》이라는 비유이다. 그 비유에 는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의 냄새가 너무 짙게 풍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프랑스의 플로리스트(꽃 장식가?)인 다니엘 피숑이《꽃은 왜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에 《꽃은 금세 시들어버리기때문에 아름다운겁니다. …뭐든지 영원하다고 하면 아름답다고 할수 있을까요.》라고 대답한 것 처럼 인생에서 청춘도 《한순간》이기때문에 아름다운것이 아 닌가 싶다. 이번 사월의 락화를 보면서 나는 지나간 나의 청춘 을 반추해 보게 되였다. 1966년, 나는 23세의 나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발발한 《문화대혁 명》은 10년이나 지속되였고 나는 그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다가 청춘을 혼돈의 언덕에 묻고 말았다. 그때도 《붉은 태 양》이 너무 많고 뜨거운 빛을 뿌리고있었다. 이제 봄은 바야흐로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 해가 바뀌면 봄은 다시 오겠지만 그 봄은 또 다른 한 해의 봄일것이다. 금년의 봄은 묻혀버린 나의 청춘의 한 순간과 같이 두 번 다시 만날수 없다. 인간의 청춘이 단 한번뿐이듯이 봄도 그리고 그 봄에 피였다 사라진 꽃들도 단 한번뿐이다. 아무리 이 애틋한 봄날의 옷자락을 붙들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이 봄을 만날수 없다. 20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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