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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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댓글:  조회:4564  추천:53  2006-01-18
내가 만들었던 눈사람 나에게는 시작한 어떤 일이 잘 마무리되였거나 성공했을 때, 혹은 그와 반대로 좌절되거나 실패했을 때 쉽게 생각나는것이 하나 있다. 내가 어릴 때 난생 처음 만들어 본 눈사람이다. 이른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날이였다. 오후 늦게 눈이 그치고 하늘도 개이면서 날씨는 꽤나 포근해졌다. 나는 인적이 드문 집 뒷들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에 얼어서 벌겋게 된 두 손을 가끔 겨드랑이에 끼워 녹여가면서 추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작업했다. 눈사람의 머리에는 낡은 맥고자를 주어다 씌워 주고 숯덩어리로 눈썹과 눈을 만들고 할머니 몰래 움에서 빼내온 당근을 깎아 코와 입을 만들어 주었다. 어른들이 만든 눈사람보다는 왜소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사람이였다. 그 날 밤 나는 혼자서 예쁜 눈사람을 만들었다는 성취만족감에 도취되여 달게 잠들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뒷들에 쫓아갔다. 그러나 나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뒷들에 있던 반쯤 무너져버린 담장까지도 간밤에 기승을 떨며 몰아치던 눈보라에 묻혀 있었고 내가 만든 눈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한동안 허탈감에 빠져 울먹이였다. 나는 지금도 마음에 드는 글이나 론문을 마감했거나 학생들이 만족해하는 강의를 끝냈을 때, 혹은 남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때 가끔 나름대로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소년시절 처음 눈사람을 만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희열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또한 하던 일이 좌절되거나 실패했을 때 가끔 느끼게 되는 실의도 눈보라에 묻혀진 눈사람을 두고 울먹이던 그때의 허탈감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은 실패와 성공 그리고 그에 따르는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점철된 것이기도 하다. 자연인으로서 한 사람이 태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일지라도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실패한 사람의 경우라도 역시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성공의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인생이나 반대로 실패로만 이어지는 인생은 있을수 없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두어발쯤 떼여 놓다가 넘어진다. 아기는 울면서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는 두팔을 벌려 아기를 안아줄 자세를 취하면서 《걸음마-쩍쩍》 아기를 격려해 준다. 아기는 다시 일어나 엄마의 품을 향해 걸음을 익힌다. 넘어지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걸음걸이를 배운 사람은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외에는 없을것이다. 크고 작은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기쁨이 기대될수 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생겼을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스케이팅을 무척 즐겼다. 그런데 스케이트를 처음 배울 때 잘못 넘어져 뒤통수에 달걀만한 혹이 생긴 적도 있었고 심지어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가장 크고 아픈 실패는 첫사랑이 깨여진 결말이였다. 대학을 다닐 때 나는 내가 신명(晨鳴)이라고 부르던 사천성에서 온 녀자애와 첫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2년 정도의 열애관계는 《계급투쟁》이 사회생활 전반을 좌우하기 시작하던 불행했던 그 시대를 맞이하면서 삐꺽거리게 되였다. 내가 조선족출신이였기때문이였다.《문화대혁명》을 경험해 본 조선족사람이라면 《조선수정주의특무(朝修特务)》라는 《모자》가 란무하던 그 시대를 잊을수 없을 것이다. 《조선》이나 《남조선》과 멀리 떨어진 북경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였기때문에 나 자신이《조선특무》로 지목되거나 의심받은것도 아니다. 다만 그 많은《조선특무》들이 득실거리는 《조선족》중의 한사람이였기 때문에 신명이의 집식구들은 모두 우리의 사랑을 반대해 나섰다.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는 갈라졌다. 나는 거의 두달정도 숙소침대에 누워 두문불출하면서 《로신전집》을 읽었다. 그것은 첫사랑의 실패가 몰고온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나의 안간힘쓰기였다. 첫사랑의 실패는 가장 참담한 방식으로 나에게 《민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것도 내가 중앙민족대학 《민족리론과 민족정책》이라는 학과목에서 배울수 없었던 심층적인 것을 터득케 했다. 그때의 깨달음이 《조선족》에 대한 나의 사랑의 씨앗이 되였고 나의 학문의 에너지가 되였다. 암울했던 그때 내가 썼던 시 한수를 인용해본다. 한문으로 썼던 그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번거로워 그대로 적는다. 怨 艾 记得那是童年时代的一天 我在屋后的雪地里塑起雪人, 二月里雪后的天气温和而安谧, 我玩得好生高兴,独自一个人。 傍晚寒冷的暴风雪呼啸而至, 卷来一堆堆冰雪埋没了我的雪人。 我心里怨艾: 这暴风雪是有意来夺走我的欢乐的,它的一切恶意都是对我而来的。 如今寒冬的不眠之夜孤寂而悠长, 消失的甜蜜使我的世界变得倍加惨淡。当我把败者的怨艾锁入心底时, 突然记起了埋没在暴风雪中的雪人。 (1967.2) 실패는 우선 우리에게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실패가 클수록 우리가 감수하게 되는 불행과 고통도 커진다. 그러나 그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실패는 우리가 감수했던 고통을 위해 치러는 대가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선물해준다. 그 깨달음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2002. 10
9    (수필) 첫 사랑 이야기 - 둘 댓글:  조회:5200  추천:50  2006-01-17
첫 사랑 이야기 -- 둘 영국의 추기경이자 시인이였던 뉴우먼(New man)은 《신사론》에서 《신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남계인생수필》코너가 《도라지》에 개설되면서부터 나는 줄곧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첫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쓰다 보니 나는 이미 신사로서는 자격상실이 된것 같아 은근히 후회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가 있고《둘》이 없을수 없어 《살신성인》(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뜻이 아닌, 신사로서는 죽되 보통사람으로 된다는)의 각오로 계속 필을 들게 된다. 첫 사랑은 나의 인생에서 문화적 환경이 완전히 바뀌여지는 대변혁의 시기에 찾아왔다. 북경의 한 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하면서 나는 줄곧 몸담아오던 조선족학교의 조선족문화환경을 떠나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한족문화환경에 들어서게 되였다. 정원이 60여명이던 우리 반은 거의 전부가 한족학생이 아니면 만족, 회족 등 한족문화권의 소수민족이였고 유독 나만이 소수민족 학교 출신이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소수민족문자로 대학입시에 응할수 있는 제도가 없었고 다만 소수민족학교 학생들에게는 외국어와 고대한어를 시험에서 면제시켜주는 혜택이 있었을뿐이였다. 대학생활 첫주일에 나는 먼저 자신의 외국어와 고대한어 수준이 다른 학생들보다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체험하게 되였다. 고대한어는 그런대로 혼자서 노력할수 있겠으나 로어는 청강도 할수 없는상태였다. 담당강사가 학부에 상황보고를 했고 학부 교학 담당주임은 나를 불러 다른 학부로의 학적이전을 권유했다. 나는 내 전부의 자존심을 내걸고 따라잡기 위한 시간을 요청했다. 한정 시간내에 계속 청강수준 미달일 때 학부이전을 약속한 상황에서 학부주임은 흔쾌히 한 학기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로어를 자습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바로 내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중경시에서 온 진명이라는 녀동학이 나를 찾았다. 입학후 실시된 로어실력 검정고시를 거쳐 로어과 과대표로 지정된 그녀는 나에 대한 과외지도를 자진해 나섰다. 그때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그녀가 고마웠다. 우리는 매일 아침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운동장 남쪽 숲에서 만나 한족학교 고중 로어교과서에 따라 공부하기로 약속했다. 진양은 엄격히 잘 지도해주었고, 나는 열심히 따랐다. 덕분에 석달이 지나 나는 6권의 고중 로어교과서를 독파하고 담당강사의 검정을 거쳐 정상적인 청강에 림할수 있었으며 제3학기가 마감할 때는 진양과 나란히 최우수성적으로 로어과를 마칠수 있었다. 로어 과외지도가 끝나는 날 진양은 향후 고대한어 지도를 제의해왔고 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마침 학기 중간시험 성적이 발표되면서 나의 고대한어 성적은 이미 만점으로 알려졌고 담당교수도 종합평가시간에 나를 특별히 칭찬해 주셨던 터라 그녀는 다시 과외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후 나는 한족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교수들과 동급생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한어구사능력과 외국어, 고대한어수준을 재빨리 향상시켰고, 남들이 별로 관심하지 않는 갑골문(甲骨文), 동정문(銅鼎文)에까지 관심을 갖고 공부했으며 전각(篆刻)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9개월이라는 시간이 나도 모르게 흘러갔다. 이듬해 5월, 교정의 라일락꽃이 유난히 향기를 발산하던 어느 주말에 진양은 나에게 데이트를 요청해 왔다. 북경전시관 극장에서 개봉되는 쏘련 영화 《부활》의 관람권을 구입해 온것이였다.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금방 본 영화와 레브 · 똘스또이의 원작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야기는 거의 나혼자 한 것 같다. 그후 좋은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우리는 토요일저녁을 골라 함께 영화를 보게 되였고 함께 산책하면서 영화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한 관계가 일년 넘게 지속되면서 주변에서는 우리가 련인관계라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하루 진양이 동석한 자리에서 짓궂은 한 급우가 나에게 진양과의 련애관계를 공개하라고 떠들어댔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당장 진양에게 데이트신청을 하겠다는것이였다. 나는 급급히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3-4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학교주변 우체국을 거쳐 보내온 두툼한 편지를 받게 되였다. 진양의 편지였다. 《2년전 로어과외로 시작된 당신과의 만남과 접촉은 어려운 사정에 처한 소수민족동학에 대한 나의 동정심에서 출발된것입니다.》그러나 《당신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면서 나는 그때의 〈동정심〉이 얼마나 유치한 선입견이였는지를 깨닫게 되였습니다.》《식을줄 모르는 탐구욕, 깊이를 잴수 없는 지혜, 해박한 지식, 문학과 예술의 재능 그리고 선량하고 정직한 인품, 당신의 그 모든것들이 하나의 항거할수 없는 힘이 되여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나는 2년동안 당신이 언젠가 저에게 사랑을 선언할것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당신이 영원히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때문에 불안해지고 있습니다……》진양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무엇인가 잘못 되였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답장을 썼다. 《당신은 내가 존경하는 선생이였고 은인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저는 조선족출신입니다. 조선족남자는 타민족 녀자와 결혼하지 않는 전통적인 풍속이 있습니다.》 편지가 전달된 다음날 진명은 청강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빈자리를 보는 순간 나는 죄장감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진명의 친구들이 그가 몸져누웠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의 자리가 이틀, 삼일째 비여지면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처음 나는 그것이 어려운 고비에 나를 도와주었던 은인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죄책감으로 생각하여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고민이 깊어지면서 나는 그것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녀가 있어야할 자리가 비여져있을 때 내 마음속에 와닿는 허전함과 불안함은 과연 무엇일까? 《타민족과 결혼할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동안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쉽게 사랑과 무관한 친구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나는 그녀가 이미 내 가슴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였다. 진명이 결석한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엄청난 마음의 고통이 나로 하여금 〈고정관념〉의 가면을 벗을수 있게 하였소,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의 진실을 찾을수 있었소.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소. 다만 그 가면때문에 볼수 없었던것이였소.》고통으로 창백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행복으로 새롭게 피여날 때의 그 예쁜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랑을 약속하면서 우리는 《약법3장(約法三章)》을 채택하였다. 《①사랑은 두 사람의 학업에 장애가 될수 없다. ②사랑은 분수에 넘는 소비나 사치와 련관될수 없다. ③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결혼과 같은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였다. 우리의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누군가가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것 같다. 우리가 열애하면서 함께 본 영화가운데 《2×2 =5》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웽그리아 영화가 아니였나 싶다. 계산으로 말하면 완전히 틀린, 그래서 계산되지 않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이였을것이다. 《약법3장》과 함께 약속된 우리의 첫사랑이 《계산》이란 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관계없이 우리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2003. 1
8    (수필) 첫 사랑 이야기 - 하나 댓글:  조회:4450  추천:38  2006-01-16
첫 사랑 이야기 - 하나 인류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낱말가운데 《사랑》이란 단어보다 더 다양한 해석이 란무하고 있는 낱말은 없을것이다. 굳이 다른 《사랑》은 다 제쳐놓더라도, 사전에서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는 남녀간의 《사랑》만 해도 수천수만가지 《해석》들이 범람하고 있다. 철학가들은 《사랑》이 정신적인것이냐 육체적인것이냐를 갖고 수많은 주장들을 펼쳐왔고, 인류학자들은 남방(열대지역)인들의 사랑은 《정감형》으로, 북방(온대지역)인들의 사랑은 《리상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설가나 시인들은 세상에 알려진 모든 아름다운 말과 모든 오탁한 말들을 등장시켜 사랑을 노래하거나 저주하고 있다. 사실 《사랑》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약속이기때문에 누구도 그 사랑을 모방하거나 복제해낼수 없는것이다. 따라서 열사람의 사랑은 열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수 있다. 아니 열가지 이상의 해석도 가능하다. 가령 한 사람의 《더없는 행복》으로 체험되던 사랑이 형언할수 없는 고통으로 전환되였을 경우,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한 리해는 달라질수밖에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랑》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각도 다양하니 말이다. 한국의 법정스님은 《오해》란 글에서 《사랑》을 《오해》라고 규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리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따라서 그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지도 모른다고 꼬집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정답을 찾기 위해 인간들은 전혀 식을줄 모르는 《탐구심》을 과시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주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사랑》에 서수사 《첫》자를 붙였을 때 쉽게 풀이할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것이다. 어떻게 보면 첫 사랑은 한 인간이 사랑할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이성을 찾기 위한 선택과정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그 한 사람의 이성을 찾아 우리는 사랑의 인생 려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첫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사이의 소중한 약속으로 시작될수도 있고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될수도 있다. 또한 어느 특정 이성에 대한 소년기의 사모를 사랑으로 간주할수 있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첫 사랑의 상대는 달라질수도 있다. 때문에 첫 사랑이란 말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첫 사랑이 누구였는가 라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는지 의문스럽다. 소년시절에 나의 가슴속을 질러간 사랑은 늘 혼자만의것이였다. 소학교 3학년 때 나는 H양이라는, 반에서 제일 예쁘게 생긴 소녀와 나란히 한 책상을 쓰게 되였다. 그녀의 빨갛게 상기된 동실한 얼굴에는 항상 맑은 웃음이 어리여 있었던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자리를 같이 한 그날부터 H양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든가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때의 《사랑》은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자라나서 덤덤한 상태로 존재했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그 《사랑》의 흔적은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그녀는 고향에서 살고 있고 나는 늘 언젠가 꼭 만나보아야 되겠다고 그리워하면서도 단 한번이라도 만나려고 노력해본 적은 없다. H양에 대한 나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할수 있는지는 나도 판단하기 어렵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였다면 H양은 나의 첫 사랑이였을것이다. 고중 1학년 때 학교 앞 송화강변에서 가끔 만나는 소녀가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의 미인인 S양은 주일날 오후 2시부터 송화강변을 따라 한시간쯤 산책을 하군 했었다. 그런데 S양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항상 수심에 잠겨 있는듯 하였다. S양을 만나기 위하여 나는 같은 시간에 그녀의 산책길에 나타나군 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라 산책해보기도 하고 좁은 산책길에서 마주지나쳐 보기도 했으나 그녀의 관심을 모으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언젠가 그녀는 산책길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몇주일째 나가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후에 우연히 알게 된 일이지만 S양은 페결핵으로 장기치료를 받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때 내가 느꼈던 마음의 허전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춘기에 생긴 사랑의 감정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첫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자신이 없다. 고중 때 친구중에 C군이 있었다. 어느 한 겨울방학에 C군은 나에게 녀자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서란조선중학교에서 공부하는 E양은 문학소녀였고 C군과는 한 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수수한 용모였지만 C군은 문학에 대한 취향이 같다는 점을 력설하면서 련애대상자로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서너번 문학에 관한 편지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될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소개받은 첫 소녀였지만 첫 사랑과는 인연이 없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첫 련애편지를 받게 되였다. 음악과 무용에 특별한 소질이 있었던 고중동창 K양은 학교 무용서클의 안무였다. 졸업하고 헤여진지 2년만에 그녀는 내 고향의 소학교에서 음악과 무용선생으로 취직하게 되였다는 소식과 함께 뜨거운 련애편지를 보내왔다. 가령 K양이 2년전에 그러한 편지를 나에게 전해주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K양이 편지에서 형용한 현명하고 다감한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이 아니라오. 력사학도의 생활을 K양은 잘 모를것이오. 2년동안 나는 옛 선비들이 남긴 고서더미에 묻혀 바깥세상을 잊고 공부에 전념해왔다오. 누렇게 변질한 책들의 숨막히게 하는 오탁한 공기가 일으킨 화학반응으로 마음의 감정은 분해되여 찾을바 없고 두뇌의 리지만 남아 있는 상태라오. 지금도 나는 지난날 K양의 구애편지와 그것을 거부한 나의 답신을 읽을 때마다 그녀가 그 후에 겪었던 모든 불행에 대해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수가 없다. 나의 사랑다운 첫 사랑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들이 있은 후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한 첫 사랑들을 경험하지 않았었더라면 나의 《완전》한 첫 사랑이 있을수 있었을가 의심이 간다. 세계적 정신분석학자인 융의 리론에 따르면 남자들의 정신내면에는 《애니마(anima)》라고 하는 녀성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애니마를 이성에게서 찾는다. 즉 자기 마음속의 애니마와 닮은 녀성을 찾았을 때 금방 반해버린다는것이다. 융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애니마를 밖에서 찾아헤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H양도, S양도, E양도, K양도 내가 내 마음속의 애니마를 밖에서 찾아헤매일 때 우연히 만났던 소녀들일 것이다. 바로 그녀들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사랑은 소년기와 사춘기의 헤매임을 거쳐 좀 더 성숙된 첫 사랑을 찾아낼수 있었을것이다. 그래서 그들과의 만남을 나는 《첫 사랑》으로 마음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2. 10
7    (수필)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 댓글:  조회:4835  추천:58  2006-01-13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황유복 를 읽다 보면 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김선달이 람루한 옷을 입고 한 부자집 잔치에 갔는데 문지기가 들여놓지 않아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다시 좋은 옷을 빌려입고 갔더니 이번에는 들어갈수 있었다. 음식상을 마주한 김선달은 우선 맛있는 음식들을 집어 소매속으로 넣으면서 많이 먹으라고 중얼거렸다. 주인과 옆자리 손님들이 놀라서 물으니 ⟪잔치에 초대된것은 내가 아니고 이 옷이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위그르족의 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보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재부)을 더 중요시하는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를 뼈저린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학교 1학년을 마감할 무렵이였다. 학교강당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나는 학년말 시험에서 1등을 했던터라 교도주임이 1학년 수상자이름을 부를 때 수석으로 호명되였다.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 반주임선생이였던 H선생은 나의 어깨를 손으로 눌러 제자리에 주저앉혀놓고, 다른 학생을 대신 단상에 올려보내 상장과 상품을 받아오게 하였다. 시상식이 끝난후 H선생은 상을탄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거리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물론 수석을 차지했던 나는 그들과 함께 사진관으로 갈수 없었다. 그때 내가 당한 수모는 나의 람루한 옷때문이였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쉽게 짐작할수 있었다. 그들이 사진관으로 갈때 나는 조용히 우리 집부근에 있는 냇가 버드나무숲을 찾았다. 홀로 숲속에 앉아 실컷 울고난 다음 차분히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 가난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설날 설빔으로 단장한 동네애들과 어울릴수 없었던 고독함, 가끔은 끼니를 걸러야만 했던 굶주림의 고통, 처음 학교를 가게 되는 어린 손자에게 옷 한벌 못해 입히는 안타까움 때문에 밤새 소리없이 눈물 흘리시던 할머님의 아픈 심정…… 나는 가난을 그런 정도로 리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해 보고나니 그것만이 아니였다. 가난은 학교에서 1등을 한 어린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을수 있는 기쁨마저 빼앗아가는 괴물이였다. 그때 나는 세상에 가난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하게되였다. 그날 나는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옆집 친구들로부터 그날 일을 전해들은 할머니는 저녁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귀가한데 대해 할머니는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으셨다.저녁식사가 끝난후 할머니는 밥상을 마주하고 나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것은 네가 1등을 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밖의 일들은 있어도 없어도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네가 좋은 옷을 입고 단상에 올라가 상을 탔다 하더라도 너의 1등에 뭔가 더 보태질것도 없고, 남이 너 대신 상을 타다 주었다 해서 너의 1등에 무엇이 부족해진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오늘 일에서 너는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 가난은 가끔 사람들의 마음을 군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가난의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의 자세를 가질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사람이다. 때문에 가난이란것은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것처럼 불행한것만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아쉬움일뿐이다. 아쉬움이 없는 넉넉함을 지향하면서, 너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어른으로 크게 된단다…⟫그날밤 나는 할머님의 품속에서 달게 잠들수 있었다. 그후에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가난은 줄곧 딱친구처럼 나의 인생을 동무해주었다. 남들이 입는 좋은 옷을 입을수 없었고, 남들이 먹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없었으며, 보고싶은 영화도, 사고싶은 책도 불가능케 했다. 한마디로 가난은 나의 생활에 제동을 걸어놓고 불편을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불행중의 다행이라면 나에게 공부할수 있는 외길만은 열어놓고 있었던것이다. 가난은 결코 ⟪문화대혁명⟫당시의 관념처럼 자랑거리로 되거나 행복한 일로 될수는 없다. 가난은 사람에 따라 어쩔수 없는 무능함이 될수도 있고, 게으름과 직결되는 부끄러움으로 될수도 있다. 그러나 가난은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바가 더욱 많다. 우선, 가난은 인간에게 불편함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주면서 세상을 정확하게 볼수 있는 혜안(慧眼)을 선물해준다.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속에서, 세상을 보는 인간의 눈은 밝아진다. 그리고 가난은 인간에게 의욕을 선물한다. 불편함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노력을 자극하기때문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꿈이 있기 마련이다. 그 꿈은 인간으로 하여금 눈앞의 가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심을 갖게 한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는⟪굶어 보아야 세상을 안다(굶주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참으로 알았다 할수 없다는 말)⟫거나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 산다(젊어서 고생하며 열심히 일하면 잘 살수 있다는 말)⟫등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할것 없이 짧은 인생을 부족함 없이 잘 살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함과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뜻의 넉넉한 삶을 살아갈수 없다.2002. 5
6    (수필) 옥년이와 봇나무 댓글:  조회:5963  추천:53  2006-01-12
옥년이와 봇나무황유복 나는 가끔 꿈에서 고향마을 뒷동산 언덕에 서있는 봇나무를 만난다. 어릴 때부터 봇나무를 무척 좋아했기때문일것이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여러 종류의 나무와는 달리 흰색의 줄기와 수없이 많은 작은 잎들과 잔가지들이 모아져서 무성한 수관(樹冠)을 이룬 미인형 ⟪체형⟫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구별된다. 닭 무리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이 서있는 광경은 본적이 없지만 고향의 산기슭에 서있는 봇나무를 볼 때면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을 실감나게 상상할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젊은 시절 련인에게 주는 ⟪시⟫에서 가끔 봇나무를 읊조리기도 했다. 신명에게 너는 내 꿈속의 언덕우에 홀로 서있는 봇나무 , 너의 우아하고 유연한 모습에서 나는 아름다움의 참뜻을 깨닫게 되였다. 너는 내 꿈속의 하늘가에 붉게 피여 나는 저녁노을, 너의 불타는 마음에서 나는 사랑의 참뜻을 깨닫게 되였다. (1963)(给晨鸣 你是在我的梦之山岗上伫立着的白桦在你那优雅的婀娜多姿里我悟到了美的真谛。 你是在我的梦之天际里 漂浮的晚霞 在你那燃烧的心里 我悟到了爱的真谛。) 한문으로 작성되였던 원문도 그렇지만 다시 우리 글로 옮겨보니 시라고 하기에는 꼴불견이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얼마나 봇나무를 좋아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용해본다. 열여덟살 때 고향을 떠나 북경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나는 줄곧 북경에서 살게 되였다. 그런데 북경주변의 들이나 산에서는 봇나무를 찾아볼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 교구에 주둔하던 해방군부대에서 ⟪단련⟫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트럭을 타고 북경시 통현역에 가서 동북에서 실려 나온 원목을 부리게 되였는데 내가 하역작업을 하던 차량에는 전부 봇나무 원목이였다. 쉬는 시간에 봇나무 껍질을 적당히 벗겨 간직했다가 병영으로 갖고 왔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서 책갈피에 끼워뒀다가 여가 시간에 오리고 붙이고 해서 그림을 만들면서 고향생각을 달래기도 했다. 그때 썼던 산문시를 옮겨본다. 미란다에게 내 고향의 산에는 봇나무가 많습니다. 줄기는 새하얗고 무성한 잎은 파랗습니다. 푸른 소나무나 사시나무와 함께 섞여 서있을 때 수려하고 우아한 풍경은 절경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기억되지만 어린 시절 해빙계절이 되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삼삼오오 산에 올라 신나게 놀다가 손칼로 봇나무 껍질을 짜개면 수정 알 같은 즙액이 뚝뚝 떨어지는데 컵에 받아 모았다가 단숨에 마시면 시원하고 향기롭고 감미롭기 그지없었습니다. − 기유년 세말 천진을 떠나 북경시 통현역에 도착하여 화목하역작업을 하면서 고향생각이 나 봇나무 껍질을 벗겨 돌아오다. 《백모녀》의 발레무용자세를 그림으로 만들어 미란다에게 주노라. (1969) (给米兰达 余之家乡山岳多桦矣。桦之树干洁白,茂叶油绿。或与青松翠杨参差并立,秀丽高雅绝此景致耳。尚记得孩童时,每遇解冻节气,三五童友上山玩耍,置利器于桦皮,晶莹滋液滴答而下,适盛于皿,一饮而尽,清凉芬芳,甘美可口。 巳酉年季,离津来京,抵通县车站卸货,遇此桦木,唤吾乡念。乃取其皮而归。绘制《白毛女》舞姿赠于米兰达。1969. 12. 天津塘沽) 이렇게도 나의 가슴깊이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간직된 봇나무를 접하거나 생각할 때마다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첫사랑의 련인이 아닌 어릴 때의 친구 옥년이다. 그런데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옥년이의 모습은 가무잡잡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꾀죄죄한 옷차림, 그 어느 하나도 이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옥년이는 내가 어릴 때 사귀였던 첫 번째 친구였다. 댓살 나던 해, 나는 할머님으로부터 혼자 옥외에 나가 놀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어느 날, 집 마당에서 혼자 놀던 나는 싸리울타리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내가 입고 있는 옷보다 더 람루한 옷을 입고 신뒤축이 꺽인 부들신을 신은 처녀애였는데 왼쪽 옆구리에는 싸리로 엮어 만든 광주리를 끼고 있었다. 내가 좀 놀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건네 왔다. 우리 같이 놀지 않을래? 고독했던 우리는 쉽게 가까운 사이로 될수 있었다. 나보다 대여섯살 우인 그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온갖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고 람루한 옷차림때문인지 마을 애들에게 따돌림받고 있었다. 나는 떼를 써서 옥년이와 함께 저녁노을이 피고 있는 서산에 오를 수 있었다. (수필:《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도라지)2001년 제4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동무해주곤 했다. 들이나 냇가에 가서 달래를 캐거나 미나리를 꺾을 때도 그랬고 산에 올라 더덕을 캐거나 참취를 뜯을 때도 그랬다. 옥년이는 아는것이 무척 많았다.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냇가에서 자라는 참쑥, 냉이, 달래, 미나리, 방가지똥, 고들빼기, 두릅, 참취, 고사리, 더덕, 도라지⋯⋯ 등 식용할 수 있는 나물 그리고 꽃과 열매, 풀과 나무에 대한 많은 상식을 나는 옥년이에게서 배웠다. 강에 나가 가재를 잡다가 으슥하게 후미진 곳에 소용돌이치는 물이 있으면 거기에는 물귀신이 있어 생사람의 머리를 잡아 물밑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접근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산에 갈 때면 끄트머리에 담뱃진을 바른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처럼 갖고 다니게 했는데 뱀이 담뱃진냄새를 제일 겁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봇나무에 대해서도 그는 많은 것을 배워주었다. 봇나무는 잔가지가 무성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큰 가지 하나만 짜르면 마당빗자루로 쓸 수 있다. 이른 봄날 산에 올라 더덕을 캐다가 목이 마르면 손칼로 봇나무 껍질에 Y자형 상처를 내고 흘러내리는 즙을 그릇에 받아 마시면 시원한 음료수가 된다. 그런데 옥년이는 나에게 봇나무에 대한 상식보다 더 중요한 삶의 리치를 가르쳐주었다. 사귄지 일년 남짓하여 옥년이네는 어디론가 이사가 버렸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 있다. 비록 짧은 사귐이었지만 옥년이는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친구였고 스승이였다. 가난과 계모의 학대때문에 열살이 넘도록 남들이 다 다니는 학교 문앞도 못가 본 옥년이였지만 그녀는 나를 대자연이라는 《학문》에 입문시킨 훌륭한 계몽 선생님이였다. 옥년이는 대자연과 더불어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순수한 아름다움에로 인도했다. 길림을 떠나 북경의 한 대학에서 생활해 온지도 사십여년이 되지만 그동안 나는 인생의 수많은 고비들을 옥년이에게서 배운 《학문》으로 풀어왔다. 처음 대학에 진학하여 한어수준이 너무 낮아 마음이 초조해 졌을 때, 첫사랑의 연인과 헤어지면서 마음의 상처가 깊었을 때,《문화대혁명》에 대한 몰리해로 심리적 갈등이 심해졌을 때⋯⋯ 나는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하였다. 가까이는 자죽원(紫竹園)이나 오탑사(五塔寺)의 숲을 찾았고, 멀리는 이화원북쪽의 서산에 올라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나뭇잎들의 속삭임속에서 산책하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수 있었다. 스트레스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것이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첩경은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였다. 그것은 어릴 때 옥년이가 나에게 터득시킨 삶의 리치였다. 나는 지금도 봇나무를 무척 좋아한다. 봇나무는 내가 평생을 살면서 찾았던 아름다움의 상징이였기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욕심에 따라 보탠것도 빼버린것도 없다. 쉰살이 넘으면서 나의 머리에 내린 흰 서리는 점점 짙어가고 있다. ⟪머리염색만 하면 십년은 젊어지겠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나는 단 한번도 염색해본적이 없다. 젊어지는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젊어지고 싶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가고 싶었기때문이였다. 지금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때문에 미쳐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짙은 화장으로 겉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정도가 아니고 수술칼을 들이 대여 쌍거풀을 하고 코를 높이고 턱뼈를 깎아내고⋯⋯ 수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 성형수술로 얼굴이나 신체의 근본을 고치려 하고 있다. 칼로 째고, 깎아내고, 붙이고 해서 현대인들의 외모가 더 예뻐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때문에 싸우고, 리혼하고, 자식을 내다 버리고, 자신의 무능과 비겁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술로서 자신을 마비시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 생활속의 아름다움은 분명히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만들어진 아름다움보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봇나무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그렇고 역경을 이겨나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어린 옥년이의 삶의 모습이 그렇다. 2002. 1
5    (수필)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 댓글:  조회:5148  추천:62  2006-01-11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황유복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적셔지는 일이 있다. 대여섯 살 때 일로 기억된다. 하루는 마을 어느 집에서 잔치에 나오시라고 할머님께 기별이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잔칫집에 가서 떡 하나 얻어먹는다는것은 지금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홍콩미식성(香港美食城)에 가서 800원짜리 랍스트 한 마리 대접받는 것보다 더 큰 유혹을 받게 되던 시절이였다. 물론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의 손을 떼여 놓으면서 못 따라나서게 했다. 울고불고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때 흐느끼고 있는 나를 타이르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다. 너를 잔칫집에 데리고 가면 남들은 〈저 할멈은 얻어먹이려고 손자까지 데려왔다〉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거지로 보는것과 별 다를것 없다. 가난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겨낼수 있지만, 그러나 가난하다고 자기의 인격과 자존심마저 지킬줄 모른다면 너는 구제불능의 정신장애자로 될것이고 그럴수록 영원히 가난해질수밖에 없다.》 할머니 말씀의 참 뜻은 내가 초중 3학년 다닐 때, 할머니께서 세상 뜨시면서 더욱 절실히 깨달을수 있었다.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과 싸우면서 자랐지만,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타이르고 걱정해주신 할머니의 사랑이 항상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자신으로 클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Yates)는 인간은 멀어져 가는 과거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내 가슴속에 찡하게 남아있는 그리운 할머니의 초상은 조금도 멀어져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리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것이다.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때로는 너그러운 위대한 부성의 사랑과 자애로우면서 항상 강인한 모성의 사랑을 함께 읽을수 있는 초상이 바로 내 가슴에 새겨진 할머니의 초상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적인 기준, 강한 자부심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 그리고 기본적인 가치 판단기준들이 해체되고 있는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할머니의 초상은 나에게서 결코 멀어지지 않는다. 일년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음력으로 정월 초닷샛날이 아닌가 싶다. 장백에서 무한으로 출장간다는 낯모를 사람이 훈이라 하는 아홉살짜리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그 사람은 훈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청에서 살던 훈이 부모가 리혼하면서 훈이는 아버지쪽에, 훈이 형은 어머니쪽에 맡겨졌다. 그런데 훈이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훈이의 불행은 점점 켜져갔다. 계모는 훈이를 심하게 구타하고 학대했다. 어느날 아버지는 훈이를 데리고 장백현으로 갔다. 그리고 속임수를 써서 훈이를 어느 집에 떠맡기고 돌아갔다. 훈이는 낯선 집에 버려져 학대 받다가 장백 교회에 옮겨졌다. 그때 마침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어린이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몇 사람들과 함께 우리 대학 부설소학교에 조선족 기숙반을 설치했던 터라 잡지에서 그 소식을 접한 장백교회는 훈이를 나에게 보내 온 것이다. 내가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 낯선 사람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떠버렸다. 어린 훈이는 오랜 기차려행끝에 멀리 낯선 집에 맡겨졌다는 사실에도 별로 충격받은 기색이 없었다.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후 이집 저집 옮겨지는 일에 습관된듯 했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해버린 무감각 상태였다. 어린 훈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먼저 할머니를 생각해 보게 되였다. 할머니는 이런 일을 어떻게 처사하셨을가? 나는 훈이를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훈이의 죽어버린 기를 살려주고 자존심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에게 돈을 넉넉히 맡기면서 옷과 신발, 그리고 학용품에 이르기까지 주변 학생들이 갖고있는 그대로 훈이에게 사주라고 부탁했다. 어린 훈이 가슴속을 꽉 메우고 있는 자비심(自卑心)부터 말끔히 가셔버려야 했기때문이였다. 그러면서 담임선생님은 친어머니 못지 않게 훈이에게 사랑을 쏟아부었다. 두달정도 지나면서 훈이 얼굴에는 생기가 되살아났고 전에 볼수 없던 웃는 모습을 가끔 볼수 있게 되였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부모가 없는 시대를 살고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의 어린이들이 여기저기 버려지고 있기때문이다. 그것도 어린애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10년간 출산아 수가 4분의 3이 감소된 시점에 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높은 리혼률때문에 훈이와 같이 버려지는 애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돈벌이라는 미명아래 애들을 할아버지 할머니나 친척집에 맡겨놓고 한국으로 가거나 도시에 몰려가는 사람들도 갈수록 흔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부모가 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사랑이 몰부어져야 하는것이며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저 애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만 안겨주면 좋은 부모로 될수 있는것인 줄 알고 있는가 보다. 훈이를 학교에 입학시키는 동시에 나는 훈이 부모들을 찾기 위해 《길림신문》사 와 《연변일보》사 기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 학기가 지나 훈이 부모들을 가까스로 찾을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훈이의 보호자인 아버지는 기자의 련락을 받자마자 잠적해버렸고 기별을 받은 훈이 엄마는 지체 없이 북경으로 쫓아왔다. 두 아이를 키우기 힘들면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더니 어려워도 자기 힘으로 키우겠다면서 훈이를 데려갔다. 시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순박한 아줌마인 훈이 엄마와 엄마의 품에 안긴 기쁨에 도취 되여 엄마의 손을 꼭 쥐고 따라가고 있는 훈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할머니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2001. 11
4    (수필) 군 감자와 <<이바구>> 댓글:  조회:6223  추천:60  2006-01-10
군 감자와 황유복 내가 태여났던 신농장 마을은 전쟁과 홍수로 말미암아 폐허로 되여버렸고 우리 집은 쌍하진에 들어와 곁방살이로 전전하다가 1947년 쌍하진이 해방되면서 비로소 내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1948년 봄에 실시된 토지개혁과정에서 우리 집은 적빈호로 평가되여 논밭과 함께 쌍하진에서 제일 큰 부자가 살던 집을 분여받게 되였다. 원래 집주인은 국민당군 장교인 아들을 따라 남방으로 도망간 대지주였다. 남향으로 된 3칸짜리 집과 동서 두 줄의 행랑방이 높은 토담에 둘려있어 우리는 어릴 때 ⟪담장마을⟫이라고 불렀다. 우리와 함께 여덟 집이 담장마을에 이사들었다. 식구가 기중 적은 우리가 넓은 남향집을 차지했는데 지금의 표준으로 말하면 우리 집의 인구당 주거면적이 가장 큰 셈이였다. 그래서인지 겨울날 저녁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이 저녁밥상을 물리고 우리 집에 모여들었다. 소학교에 다니던 나는 저녁밥술을 놓기 바쁘게 콩기름 등잔아래서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주방에 나가 설거지하는 동안 숙제를 끝마치고 나면 동네 할머니들이 한둘씩 들어선다. 할머니들은 화롯불을 중간에 놓고 둘러앉아서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면서 마을뉴스들을 교환한다. 그러다가 내가 ⟪할매요, 옛말 들려주세요.⟫라고 요청을 하면 ⟪응, 그래 이바구 해주마.⟫하고 이야기 주머니를 끌러놓기 시작한다. 나는 할머님들의 옛말을 듣기 위해 담뱃불을 붙여드리고 화로에 감자를 묻어 잘 구워서 대접하기도 했으며 시원한 찬물을 펌프에서 잣아다 드리기도 했다. 도깨비야기나 귀신이야기를 금방 듣고 찬물주문을 받게 되면 나는 어두컴컴한 주방으로 들어설 때 무서움 때문에 머리칼이 쭈뼛해지지만 그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물을 떠다 바친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로 시작된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태고적 호랑이는 할머님들처럼 담배를 무척 좋아하는 줄로 알고있었다. 고중을 다니면서 조선력사를 공부하다가 임진왜란(1592년~1599년)때 담배가 조선에 전래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고, 대학시절 미술사 공부를 하다가 ⟪범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토끼⟫라는 조선조말기의 민화를 보면서 할머님들이 옛말 서두에 쓰고 있던 말의 유래를 파악하게 되었다. 여하간 어릴 때 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 주머니는 밑도 끝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듣고 들어도 끝이 없는 할머니들의 옛말은 한결같이 화롯불에 둘러앉아 나누어먹던 군 감자와 같이 구수하였다. 부모의 병구완을 위해 벼랑중턱에 자라는 산삼을 캐오는 효자, 효녀의 이야기, 가난하거나 벼랑 끝에 몰린 약자를 도와주는 정의로운 사나이의 이야기, 사랑에 충실한 남과 녀의 이야기, 힘은 약하지만 지혜로 강자를 이겨내는 해학적 이야기, 나쁜 일만 골라하다가 벌 받는 교훈적 이야기⋯⋯ 할머니들의 이야기동산에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즐거움과 함께 꿋꿋한 힘, 반짝이는 지혜, 따스한 우정, 달콤한 사랑, 소박한 꿈, 훈훈한 인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러한 우리 민족전통문화의 풍속, 습관, 생활, 사상, 신앙, 가치관, 꿈과 소망, 웃음과 지혜, 사랑과 인정이 가득 차있는 ⟪담장마을⟫집에서 다섯살에서 열다섯살까지 10년을 살아왔다. 그 집에서 구수한 군 감자를 먹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으면서 우리 전통문화의 감각을 체험할수 있었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터득할수 있었으며 심미감, 정의감, 의지력, 책임감, 동정심, 상상력을 키울수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보아도 나는 그때가 너무나 행복했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는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 민족문화의 모유(母乳)를 마음껏 흡수하면서 자랄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나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갖고 대학에서 한족(漢族)의 주류문화를 더욱 진취적으로 배울수 있었으며, 미국이나 카나다와 같이 완전히 다른 문화권 나라들의 대학 연단에 섰을 때도 민족문화에 대한 긍지감 때문에 태연하게 강의를 림할수 있었다.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여 질수록 우리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래야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을수 있고 세계화에 대응할수 있는 용기를 갖출수 있게 된다. 나는 가끔 저녁이나 주말에 부모들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거나, 혼자서 치고 박고하는 전자게임을 하고 있는 애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른들을 위한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동심은 구겨지고, 폭력을 내용으로 하는 전자게임을 탐하면서 어린 나이에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아들애가 태여난 후, 어릴 때부터 나는 애에게 할머니들의 옛말을 더듬어 자기 전에 들려주었다. 그것이 버릇처럼 되여 우리 애는 항상 나와 같이 자야 했다. 그런데 한어로 들려주는 우리의 옛말, 그리고 온돌도 없고 화로도 없고 군 감자도 없는 아파트 방 침대에서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내 아들은 정녕 어느 정도 우리 전통문화의 정서를 리해하고 있을까?2002. 3
3    (수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댓글:  조회:6387  추천:70  2006-01-09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황유복 나는 열다섯 살 나던 해 시골고향을 떠나 도시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줄곧 도시생활을 해왔다. 도시생활은 모든 것이 편이하다는 리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시골생활을 해본 사람에게는 아쉬운 점도 많기 마련이다. 우선 맑은 공기와 만휘군상의 고요함이 아쉽고 인간의 번뇌를 가시여주고 사람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는 대자연-고기들이 헤엄치는 맑은 냇물, 꽃들이 피여 있는 파란들, 새들이 지저귀는 무성한 숲과 그 숲에 덮여 있는 산들이 그립다. 그중에서도 40년이 넘는 도시생활에서 내가 가장 아쉽다고 생각해온 것은 저녁노을이다. 시골에서 볼수 있었던 아름다운 붉은 노을을 도시에서는 볼수 없다. 도시먼지와 대기 오염물질들이 태양광선을 산란시키고있어 도시에서 볼수 있는 저녁노을은 그저 희뿌옇다. 그렇다 해서 빨간색과 희뿌연 색의 색상의 차이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은 어릴 때부터 나의 꿈이였기때문이다. 나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북쪽에 위치한 신농장이란 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고 두살 때는 어머님까지 여의게 되여 할머님슬하에서 자라났다. 나의 두뇌세포에서 짜낼수 있는 인생의 최초 기억이 바로 서너살 때부터 저녁노을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농사철이 되면 할머니는 날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밥을 지으시고 내보다 8살 이상인 삼촌과 4살 위인 형님을 깨워서 함께 들로 나가신다. 나는 혼자 집에 남아 자신을 돌봐야 했고 집을 지켜야 했다. 나는 거의 창가에 붙어 앉아 창밖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기나긴 하루를 보내군 했다. 하루시간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때가 바로 저녁무렵이 가까워 올 때다. 배고픔을 참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할머니의 귀가를 기다리는 초조함과 가나긴 고독이 불러오는 불안한 심정이 뒤범벅되여 울음을 자아내게 되는것도 바로 저녁무렵이다. 우리 집에서 서쪽으로 백보쯤 나가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버드나무숲이 있고 숲 뒤에는 송화강의 지류인 오룡하가 남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 너머에는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더 서쪽에는 우리가 어릴 때 서산이라고 부르던 산들이 이어져 있다. 혼자서 울면서도 눈길은 자연히 집 앞에 난 오솔길을 따라 강가의 버드나무숲에 멈추게 되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돌아오실 때 당신의 익숙한 모습이 항상 숲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울음을 뚝 그치게 된다. 강과 논밭은 숲에 가리여 보이지 않고 숲의 꼭대기에는 서산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 지나가던 해가 서산 꼭대기로 내려와서 서서히 산뒤로 숨어버리는 과정에 둥근 해와 그 주변은 아름다운 빨간색으로 물들고 서쪽하늘도 형언하기 어려울만큼 예쁜 오렌지 빛으로 변해버린다. 그 황홀경에 빠져 나는 배고픔도, 기다림의 초조함도, 고독과 불안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고있는 가난한 어린이를 동무해 주기 위해 저녁노을은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찾아주었다. 《내가 좀 더 크면 저기 서산에 올라가 아름다운 노을과 만나볼테야.》 그때부터 노을은 어린 내 가슴속에 간직된 행복이였고 다정한 친구였다. 네댓살 나던 어느 하루, 나는 새로 사귄 옥년이라는 이웃집 누나에게 억지를 부려 그의 손에 이끌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서산에 등산할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밖에 서산 정상에서 나는 노을과 만날수 없었다. 서산너머에는 첩첩청산이 이어져 있었고 저녁노을은 수줍은 처녀애처럼 저 멀리 하늘가에 있는 산 뒤에 숨어있었다. 왜 노을이 나를 피했는지를 옥년 누나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크면 노을을 찾아 저 하늘 끝까지 갈거야.》라는 결심을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남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어려움을 이겨낼수 있는 강한 의지를 키우면서 《저 하늘 끝까지》찾아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준비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리치를 터득하게 되였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그 다음날 날씨가 맑아진다. 쉽게 말하면 저녁노을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며 혼신을 불태우는것이였다. 그렇다면 《저 하늘 끝까지》찾아가기 위한 능력과 의지력의 양성도 중요하겠지만 우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드디여 저녁노을은 찾고 싶은 《친구》나 《행복》의 차원을 넘어서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스승》으로 승화되였다. 어린 시절에서 젊은 시절에까지, 곱게 물드는 저녁노을은 내 전부의 꿈이였다. 사람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나 꿈을 갖기 마련이다. 그 꿈은 어릴 때 찾아올 수도 있고 좀 더 커서나 젊어서 생길수도 있다. 우리는 꿈이 없는 사람을 상상조차 할수 없다. 왜냐하면 꿈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지금은 가난하더라도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살면서도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수 있다. 마음속 구석구석에 꿈이 희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놓이거나 벼랑 끝에 몰리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재기할수 있다. 소년시절의 꿈은 가난과 고독에 쪼들리던 나의 어린 가슴에 행복을 가득 채워주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갈수 있는 능력과 의지력을 키워주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의 꿈이 나의 인생항로 설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부모 없이 가난에 쪼들리며 자라난 시골 소년이 대학교수로 클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의 그 꿈과 련관되지 않을수 없다.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에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1987~1988)도, 나는 때가 되면 버릇처럼 숙소였던 데이나스트리트 10번지(DANA st, No.10) 아파트 창문가에 서서 노을을 감상하면서 숙연해지군 했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아름다운 삶, 쾌적한 삶, 보람 있는 삶에 대한 가치 판단기준은 돈과 권력지위와 사회적 지명도에 따라 판가름되는것이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가치기준은 물질적인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의 풍요로움에 있다. 사회와 민족 그리고 나라에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삶에는 풍요로운 마음이 안주할 수 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면 다음날 날씨가 맑아진다. 저녁노을은 세상 사람들에게 다음날의 맑은 날씨를 기약하여 저 멀리 하늘가에서 혼신을 불태우고 있다. 2001. 7
2    (수필) 원일 아침 수상록 댓글:  조회:6035  추천:60  2006-01-05
(수필) 원일 아침 수상록남호손 1설날 아침이다. 내가 나서 자라난 시골 고향 같으면 이 시각에 수탉의 세번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질것이다. 이제 한창 도시의 빌딩숲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있다. 수십마리로 무어진 비둘기떼가 아빠트사이 공간과 푸른 하늘을 누비면서 빙빙 원무를 출연하고있다.가까운 창밖에는 두마리의 까치가 앙상해진 자귀나무가지를 오르내리면서《까-악》,《까-악》요란스럽게 울어대고있다. 어제밤 자정, 요란스럽던 폭죽소리에 놀란 원숭이해는 꼬리를 감추고 영원속으로 사라졌고 을유년 닭의 해의 시작을 알리는 눈부신 태양이 빛을 발산하고있다. 12년만에 딱 한번 찾아오는 《조류(鳥類)》의 해여서인지 뭇새들이 유난스럽게 극성을 부리고있다. 닭의 해 벽두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나무군 총각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있는데 포수에 쫓기는 노루 한마리가 쫓아와서 살려달라고 한다. 마음씨 좋은 나무군은 노루를 나무짐속에 숨겨두고 뒤쫓아온 포수를 속여 보내였다. 살아난 노루는 나무군을 인도하여 산속의 맑은 호수까지 간다. 그리고 래일이면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하게 되는데 그중 세째 선녀의 옷을 숨겨놓았다가 그 선녀를 안해로 삼되 네 아이를 낳기전에는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행복에 도취된 나무군은 세 아이를 낳은 선녀에게 옷을 돌려주었고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홀로 남아 고독해진 나무군은 수탉으로 변해버렸다. 수탉이 지붕이나 담장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우는것은 하늘에 있는 선녀 안해를 못잊어 그러는것이란다.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21세기판 《나무군과 선녀》의 이야기가 만연되여있음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수없이 많은 《선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몰려가고 그런 가정에서는 《나무군》만 고독하게 홀로 남아 안해가 돈보따리를 이고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고있다.2년전 나는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서 조선족《선녀》를 만난적이 있다. 함께 간 한국교수들이 음식주문을 하면서 《이 분은 멀리 중국에서 온 귀한 손님이니까 맛있는것으로 잘 대접해주세요.》라고 서비스 부탁을 하니까 주인아줌마가 30대 후반의 박씨라고 하는 조선족 웨이트리스를 보내 음식시중을 들게 했다. 식사하면서 갈비를 구워주고있는 박씨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는데 그녀는 길림성의 어느 작은 현성에서 왔다고 한다. 남편은 현정부산하 기관의 공무원이고 자신은 소학교 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돈을 벌기 위해 브로커에게 5만원의 돈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다고 한다. 첫 2년동안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달고도 억척같이 일하여 한국에 나오기 위해 빌렸던 빚을 몽땅 갚았고 금년(2003년)초에는 합법로무자의 자격을 취득하였는데 명년 5월까지 애 학비나 벌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집에 남아있는 남편외에 외지에서 대학 다니는 딸애까지 세식구가 세곳에서 생활을 하고있어 지금도 박씨는 혼자 있을 때 집생각때문에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건강하시고 열심히 돈을 벌어 될수록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라는 덕담을 남기고 박씨와 헤여졌다. 지난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박씨가 일하던 음식점에 들려 식사하게 되였다. 그런데 생각밖에 박씨를 다시 만나게 되였다. 《5월에는 집으로 가시겠다고 했잖아요》라고 하니까 돌아가도 할일도 없을것 같고 그래서 2~3년 더 일해 집 살 돈까지 마련해가지고 가기로 하고 눌러앉았다고 한다. 돈이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버리면 개도 안물어간다는 그 돈, 그러나 그 돈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수 없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다. 먹고 살만한 돈이 생기면 가전제품들을 갖추어야 하고 그것이 마련되면 좀 더 큰 내 집을 갖고싶고 그다음에는 자동차… 그리고 끝없는 소유욕때문에 우리는 돈의 노예로 되고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들은 《나무군과 선녀》처럼 《리산가족》생활을 하고있다. 과연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번 돈이 래일의 행복을 기약할수 있을가?떠오르는 을유년의 저 밝은 해를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의 《리산가족》들이 하루 빨리 《통일가족》으로 되기를 기원해본다. 2 《이아(爾雅)》는 주나라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지은 책이라고 전해지는데 혹자는 공자의 제자들이 편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아》의 《익(翼)》조에는 닭의 다섯가지 덕목을 기록해놓았다. 《머리우에 관(冠)을 썼으니 문(文)이요, 발에는 큰 발톱이 있으니 무(武)요, 적을 만나 필사적으로 싸우는것은 용(勇)이요, 먹이를 얻으면 서로 불러오는것은 인(仁)이요, 때를 맞추어 우는것은 신(信)이다.》(《首戴冠者, 文也; 足博距者, 武也; 敵前敢鬪者,勇也; 得食相告者, 仁也; 鳴不失時者, 信也.》)닭이 머리우에 볏을 달고있는것을 관을 썼다고 했고 관을 썼다는것은 벼슬을 하는것과 같은 뜻이니 문덕이 있다거나, 큰 발톱이 있어 무덕이 있다고 한것은 닭의 외관적 모양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별반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용, 인, 신은 닭의 행위에서 류추된 비유이기때문에 인간에 시사하는바가 크다. 수탉은 적을 만나면 처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운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자기보다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용감하게 싸워서 쫓아내고만다. 영어에서도 《싸움닭과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말이 《투지에 불타다(feel like a fighting cock,》라는 관용구로 정착되여있다. 싸움에 림하는 수탉은 오직 투지에 불탈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이아》에서 말하는 용(勇)이다.그다음 수탉은 먹이를 발견하면 꼭꼭거리며 처자를 불러 함께 먹게 한후 새 먹이를 찾아나서는데 그것을 인(仁)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탉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려주는 광명의 예언자이기때문에 신(信)이라 했다. 옛성인들이 수탉을 극구 칭찬하여 수탉은 처자와 가정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와 식구들에게 먹이를 배려해주는 어진 품성을 구비했을뿐만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벽을 온 천하에 알려주는 지혜와 신의를 갖추고있다고 하면서 수탉을 리상형 남성의 화신으로 보았다.다산 정약용은 《제변상벽모계령자도(題卞尙璧母鷄領子圖)》라는 시에서 암탉의 행위를 실감나게 묘사했다.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 닮았고/제 새끼 건드리면 꼬꼬댁 쪼아대네/....../낟알을 찾아내면 쪼는체만 하고서/새끼 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시에서 제 새끼를 잘 보호하고 배고프더라도 먹이를 먼저 새끼들에게 먹이는 암탉은 모성의 사랑과 보호본능을 가진 리상형 어머니의 화신으로 그려졌다.닭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닭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해 연길시 조선족의 리혼률은 68.4%, 즉 3:2를 훨씬 초과한 상태이고 리혼녀성의 50%가 해외돈벌이를 나갔다고 한다.(《흑룡강신문》05.1.26) 이제 우리는 조선족가정의 해체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리혼률은 하늘 높이 치솟고있고 가정의 해체와 녀성의 류실로 인한 출산인구의 감소는 바닥을 내리치고있다. 중국의 대륙에서 유유히 흐르던 조선족이라는 이 큰 강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고있는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감소현상때문에 원천에서부터 고갈되여가고있다.미국의 작가이자 음악가인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가족(FAMILY)》의 서문에서 《가정은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우리의 마지막 기적이다. 가족의 사랑은 바람과 같다. 본능적이고 꾸밈이 없으며 부서질듯 연약하지만 아름답고 때로 서로에게 화를 내도 결코 멈출수 없는 사랑, 그것은 우리 모두의 숨결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다.》라고 피력했다.우리 민족 남자들은 이 《최후의 위대한 발견이자 마지막 기적》을 지켜나가고 보호하려는 용기도, 능력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민족 녀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의 근원인 모성의 보호본능을 상실했단 말인가?옛 선비들이 칭찬한 닭의 덕목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반성해야 하지 않나싶다. 3한족(漢族)문화의 뿌리는 지신(地神)계렬에 두고있다. 염제(炎帝)는 그의 어머니가 화양(華陽)이란 곳에 놀러 갔다가 신룡(구렁이)의 머리에 교감이 되여 염제를 낳았다. 황제(黃帝)족은 곰도템씨족(有熊氏)과 뱀도템씨족(蛇氏)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염황자손(炎黃子孫)인 한족은 한나라 후기 이전에는 구렁이를 룡이라 하여 도템동물로 숭배하다가 불교가 전해오면서 인도의 룡과 구렁이룡을 결합하여 오늘의 룡을 만들어내였다.우리 민족 문화는 천신(天神)계렬에 뿌리를 내리고있다. 단군은 천제(天帝)의 아들과 웅녀사이에서 태여났고, 주몽은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여났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여났고 그의 왕후 알영은 닭의 화신이였다. 김알지왕의 탄생도 흰 닭과 관련된다.그래서 한족문화에서는 땅의 색갈인 검은 색이 숭상(한나라때까지도 황제의 면복은 검은색이였다)되였고 땅에서 기여다니는 구렁이(불교가 전해진후에는 룡이)가 도템동물로 숭배되였다. 그대신 우리 민족은 하늘을 대표하는 밝은 색갈인 흰색(백의민족의 옷, 조선조의 백자)을 선호하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숭배하며 조상이 알에서 태여났다(삼국시대)고 하거나 새를 수호신으로(솟대, 목안, 닭) 모시는 문화를 창조하였다. 중국 고대에 만들어진 천간(天干), 지지(地支)의 12지에는 뱀과 룡이 동시에 선정되여있지만 그 많은 새들가운데서 유독 닭만 선정된것도 한족의 지신숭배문화와 관련되지 않을수 없다.어제까지도 닭의 해가 시작되기전에 결혼을 서두르는 커플들이 몰려들어 결혼등록기관이 붐비고 결혼례식장, 웨딩 포토 스튜디오 등 결혼과 관련되는 업체들이 호황를 누렸다고 한다. 을유년에는 립춘이 빠졌기때문에 불길한 《과부의 해》라는 민간속설때문이였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시작되고있는 을유년은 미래형이여서 단언할수는 없지만, 어제밤에 사라진 갑신년 원숭이해는 《립춘》이 두번이나 있어 《대길(大吉)》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불길한 해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전쟁의 해였고, 쓰나미 지진해일로 25만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만 해도 지난 한해 각종 사고로 13만7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개의 립춘을 가진 원숭이해에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생겼을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원숭이해가 마감하기전까지 결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것을 보면서 한족들에게 있어서 전통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게 된다.한족문화의 속설과는 달리, 을유년 닭의 해는 우리 민족 민족사나 민족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운의 한해였다. 60년전, 그러니까 지난번 을유년 닭의 해에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우리 민족은 34년11개월 보름만에 나라를 찾았고, 식민지시대에 금단되였던 우리의 성씨와 우리 말, 우리 글도 함께 찾았다. 중국 조선족도 일제와 위만주국의 통치에서 해방되여 처음으로 자신들이 개간한 땅의 주인으로 되였고 정권수립에 참여하여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다. 60년만에 다시 돌아온 을유년 닭의 해를 맞이하여 조선족 모두가 힘을 합쳐 희망의 홰불을 다시 밝히고 가정의 해체와 출산인구의 격감 등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면싶다.
1    황유복 프로필 댓글:  조회:6373  추천:94  2005-12-21
황유복 프로필 *호: 남계, 필명: 남호손 iks937@hanmail.net *1943년 2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에서 출생. *1961년. 9-1966. 6 중앙민족대학 역사학부에서 민족사 전공. *1987.9-1988.12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환교수. *현재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 사회학학원 박사생 지도교수.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중국 조선(한국)사연구회 회장 중국 조선민족사학회 회장 *주요저서: ,, (공저)등 저서 28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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