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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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 100% 조선족 댓글:  조회:8856  추천:55  2010-01-09
중국 조선족의 문화공동체2100% 조선족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 교수  같은 한자 어휘가 중국어와 한국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祖國)”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現代漢語辭典》)”, 즉 자기에게 시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의 사전적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 층 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당신이 중국이나 한국 축구가운데 어느 팀의 스포츠풍격을 좋아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의문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라고 지적했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조선족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 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어나 중국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現代漢語辭典》)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제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조선족은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민족공동체(ethnic group)” 속의 전체와 일부분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 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코메리칸 아이덴티티를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미국적인 것과 다른가에 대한 시시비비”에서 발상된, “한국적인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섭섭하지 않은 상태의” 탈 한국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역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역사는 150년이나 된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이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한국)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한)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글 싣는 순서1. “조선족”은 누구인가2. 100% 조선족   3.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    4.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89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댓글:  조회:12019  추천:50  2009-12-28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황 유 복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계 교수 나는 세상에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다가와서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우긴다면 나는 거저 웃고 넘어가지 절대 그 사람과 론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론쟁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다. 이중성성격을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한 민족의 구성원가운데 나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나쁜 민족”은 없다. 이중성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로 해석된다. 한 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 하는 것도 그 민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조성일 선생님이 지구의 어느 구석에 있는 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고 주장했다면 나는 역시 거저 웃고 넘어갈 수도 있다.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생님이 “이중성”이라고 한 민족이 내가 일생을 바쳐 연구하고 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조선족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 조선족의 위상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는 일이 있고부터 나는 더 이상 웃고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2009년부터는 나는 나의 주장을 글로 쓰고 강연하게 되였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 , 《도라지》2009년 제3기“중국조선족의 문화공동체”, 《한반도 제3의 기회》(한국,서울)2009.5  “세계금융위기와 조선족”,<금융위기와 조선족 기업경제발전포럼>기조강연,  2009년5월11일,장춘.  “세계금융위기와 조선족의 정체성”, <송화강문화론단>강연, 5월17일, 길림.  “民族、族群与文化”, 연변대학 사회학과 특강강의, 7월 2일, 연길.  “조선족의 력사와 문화”, <흑룡강성 조선족중학骨干教师培训班> 강의, 7월 15일-17일, 할빈.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 제2회 중국조선민족사학회학술회의(8월 11일, 연길)발표 론문, 《료녕조선문보》2009년 9월 8일 제7면에 필자의 동의 없이 게재.  “중국조선족 문단의 특색과 문학지 현황”, 《에세이21》5주년 기념 한중 세미나에서 발표, 9월 17일, 서울.  “ 중국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한국국사편찬위원회 초청강연, 9월 18일, 서울.  “중국조선족과 한국”, 제9회 한국 재외동포포럼 강연, 9월 25일, 서울.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재외동포신문》,서울, 2009년10월12일 제185호. 2면.                                                     “중국조선족사회의 형성과 정체성”, 서울교육대학특강, 11월 14일, 서울.“조선족문화란 무엇인가?” , <제1회조선족문화포럼> 기조강연, 11월 21일, 길림.“글로벌코리안 네트워크와 동아시아공동체”, <제3회 재일조선족국제학술심포지엄> 기조강연, 12월 12일, 동경.앞의 글과 강연에서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고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조성일 선생님께서 최근에  “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 재론”이라는 글을 어느 인터넷사이트에 올렸다고 한다. 나는 좀 아둔한 편이여서 온라인에 떠있는 방대한 분량의 글들을 읽을 시간도 없고 또 옥석을 가리는 혜안이 없어 아예 사이트를 전혀 방문하지 않는다. 최근에 누군가가 조선생의 글을 복사해서 보내왔기에 읽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성일 선생님께서 또 한번 “二重性”과 “双重”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혼돈하시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조선생님의 글 중에서 소위 “이중성민족”의 근거로 제시한 부분이다.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이중성에 한해서 중국의 민족학 학자 왕아남(王亞南)선생은 “중국은 다민족국가인가 아니면 통일민족국가인가를 개략적으로 론함’이라는 글에서 “통일된 현대 중화민족국가내부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쌍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있다. 이는 그야말로 일종 회피할수 없는 력사유류(遺留)의 상황이다”. 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필자는 왕선생의 견해에동감을 표한다. 조선족도 쌍중신분 바꿔말하면 이중신분을 가지고있는것이다.> 1) 왕아남이 말한 “쌍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은 “이중성민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双重民族身份” 이란 말에서 双重은 두 개의 층면이란 뜻이다. 즉 “중화민족” 과 구체적인 어느 민족(예를 들어 “한족”, “몽골족” 등) 이라는 중층적 신분을 말한다. 여기서 “중화민족”과 “몽골족”은 “두 개의 대립되는 성질””이 아니다. 때문에 왕아남은 “双重民族身份” 이라고 했지 “二重性民族身份”이라고 하지 않았다. “쌍중신분”은 우리말로 “중층적 신분”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이중성신분”은 절대 아니다. 참조:双重 — 两层 两方面(多用于抽象事物):~领导|~任务。(《现代汉语词典》 1072页)二重性-- 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289页)앞에서 언급했지만 세상에 “나쁜 민족”이 없듯이  “이중성민족”도 있을 수 없다. 타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고 하는 학자도 없고, 자기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고 하는 학자도 없다. 조성일 선생님과 같은 분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중성민족”이란 말은 하나의 민족을 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2)그리고 조선생님께서 “개념정리에서의 어폐이며 불찰임을 자인”하면서도 내가 선생님의 글을 “단장취의(斷章取義)”했다고 하는데 내가 글에서 조선생님의 글 한 자연단락 전체를 인용했기 때문에 “단장취의(斷章取義)”가 될 수 없다. 참고로 아래에 “中國 朝鮮族의 文化共同體”라는 글에서 조선생님의 글을 인용한 부분을 제시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3)<조선족이 조선반도의 겨레들과 부동한국가에서 생존한지 반세기 남짓할뿐인데 이 사이에 조선족이 조선반도의 족속들과 다른 민족으로 변질했다는 말인가? 조선인과 한국인은 부동한 국가, 부동한 체제하에 살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래 서로 다른 민족이란 말인가?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상기 조성일 선생님의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족속”이 “서로 다른 민족이란 말인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민족”은 내이션(nation)이란 개념이고 nation 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도 “국민+민족”이다.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여기서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한국의 “韓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다. 그러나 서구의 “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南朝 梁조의 蕭子顯의 《南齊書》에서 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고대민족개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여진인과 구별하기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스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역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스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역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스닉(ethnic)을 한국의 문화인류학자들은 “민족”이라고 번역하는 사람과 “종족”이라고 번역하는 사람으로 나눈다. 그리고 중국에서에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스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 집단” 혹은 “종족집단”으로 번역된다. 에스닉(ethnic) 개념으로서 조선족은 “조선민족”이다. “조선민족”과 “韓민족”은 하나의 공동체로 된다. 하나의 ethnic--“族裔” 혹은 하나의 ethnic group --“族群”으로 된다. 즉 우리는 “韓민족”과 같은 “겨레”고 같은 “동포”다.4)그 외의 문제들은 더 대답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아래에 인용한 조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성일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황교수는 조선족구성원가운데서 “자신이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민족)은 도리어 선족(鲜族), 즉 조선족이다”라는 이른바 어떤 중국의 일부 “지성인”의 망언에 동조하여 “중국 다민족의 대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있다”고 력설하고있는것이다. 이른바 중국의 일부 “지성인”의 망언과 황교수의 력설은 중국 조선족에 대한 바람직하지 않은 견해이다. 우리 조선족을 이른바 중국을  리탈하는 “무엇”으로 몰아부치려 하는지 우려를  떨쳐버릴수가 없다. “문화대혁명”기간에 “8.2, 8.4”의 터무니없는 사건을 조작하여 우리 조선족을 “판국폭란(販國暴亂)”의 “반역자”로 매도한 참안이 문득 필자의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문화대혁명” 당시의 대자보와 같은 글을 평론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론쟁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다. 조선족이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말장난보다는 지성인들이 해야 할 사회적, 실천적 노력에 힘을 모으자.   
88    조선족 사회, 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2) 댓글:  조회:7272  추천:52  2009-11-10
조선족 사회, 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2)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생존을 위해 민족문화 계승 절실 중국 연해도시와 내륙뿐아니라 한국, 일본, 미국, 남미 진출 등 조선족은 명실공히 글로벌민족이 되고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에 로출돼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수 있어야 한다. 민족문화의 문제는 민족교육, 민족문화예술, 언어 등을 포함해서 생각할수 있는데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1996년 1200여개의 조선족학교가 2005년에는 400개로 줄어들었다. 학교가 줄어드는 속도는 조선족출산인구의 감소속도와 거의 맞먹는다. 도시공립학교의 인적자원과 공간을 활용해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다. 북경의 중앙민족대학부속초등학교에 120명의 조선족학생을 입학시켜 정규교육과 민족교육을 접목시키는 교육을 시험적으로 펼쳐 훌륭한 효과를 거둔적이 있다. 우리 민족의 신문, 문학지나 문예지를 살려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도움이 필요하다. 문학인, 예술인도 전통만 고집 말고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학협동을 통한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글로벌시대에 이중언어 구사는 큰 장점이다. 현재 2만여명의 한족학생이 한국에서 류학을 하며 한국어를 배우고있는데 반해 조선족젊은이들은 점점 우리 말을 소홀히 하고있는데 시급한 대책이 요구되고있다. 조선족네트워크구축이 필요 중국 대도시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들은 여러 명칭으로 된 단체활동을 하고있다. 대부분이 등록되지 않은 무허가단체지만 어렵게 조선족문화 관련 활동을 펼치고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모임, 장학회모임, 동호인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런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처럼 흩어져있지만 아직도 살아 숨쉬고있다는것을 상징한다. 이제 각 지역 단체들은 현지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지위 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를 계승할수 있고 주체성도 이어갈 수 있다. 이제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시스템도입이 시급하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력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왔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나가는데 힘쓰는 길밖에 없다.  
87    조선족사회, 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1) 댓글:  조회:7309  추천:65  2009-10-12
조선족사회,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1)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농촌공동체를 유지하던 조선족은 너도나도 도시로 진출했다. 개혁개방을 맞아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 도저히 더 잘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서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수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했다.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수많은 조선족들이 ‘코리안드림’의 유혹에 이끌려 한국으로 몰려들었고 불법체류자를 비롯해 입국사기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어서 조선족녀성의 한국으로 시집가기 붐도 일어 2000년말 현재, 약 6만명의 녀자가 한국으로 시집갔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조선족공동체를 유지해가야 하는 조선족녀성 3명중 1명이 한국으로 가버린것을 의미한다. 현재 조선족의 출산인구는 급하강선을 타게 되여 10년전에 비해 4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고있다. 조선족의 중국 내륙과 한국으로의 진출은 조선족사회의 부를 일군것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10억딸라 이상이 송금됐으며 휴대해 들어온 돈까지 합치면 20억딸라 이상으로 추산되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부의 창출과 더불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것들을 상실하게 됐다. ‘조선족의 문화령토’로 인정되던 조선족마을의 공동화와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선민족학교의 페쇄, 민족총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는 전통적가치관을 잃어가고있다. 급변하는 조선족사회는 지금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령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감소 등 여러가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있다. 조선족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중국 돈"을 벌어야 성공한다 중국조선족기업은 아직도 대부분 료식업, 유흥업, 려행사 등 단순서비스업종에 집중되여있다. 그래서 리윤, 마진이 빈약하다. 더우기 같은 지역에서 유사한 비즈니스로 시장을 공유하고 있어서 동족 기업간의 소모적경쟁이 빈발하다. 조선족기업의 또 다른 특징은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밀착되여있다는 점이다.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 많은 기업들이 자체의 생존공간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체의 발전공간을 제한하고있다. 조선족은 다른 민족 못지 않게 일찍 시장경제체제에 뛰여들었고 또한 이중, 삼중 언어의 우세도 있지만 중국 500대 기업 서렬에 든 조선족기업이 없고 상장기업도 없다. 다른 소수민족은 있는데 왜 우리는 없는것일가. 그들은 언어의 우세도 없고 우리처럼 해외관계도 없지만 ‘중국 돈’을 버는데 전념했기때문이다. 즉, 중국 현지특성에 맞춰서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펼쳐야 한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중 제조업분야는 점차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려고 하기에 자신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켜왔던 조선족기업들은 미래의 진로를 고민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중국의 10대 부자중 6명이 부동산업자다. 이들은 땅장사를 하는 ‘대지주’다. IT 등으로 돈을 버는 다른 나라의 부자와는 다른것이 중국의 특색이다. 그러므로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 돈’을 벌어야 한다.
86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댓글:  조회:8774  추천:44  2009-08-31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             황 유 복/중앙민족대학 교수,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론문개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리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없다.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핵심어] 조선족, 정체성, 이중성민족, 민족집단 들어가면서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민이나 그들 후예로 구성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다. 조선민족의 중국이주의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왕조시기에 정치, 군사, 경제 및 기타 원인으로 발생된 이민 활동은 1945년 광복당시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17세기이전에 이주한 고대이민들의 후대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족, 몽고족, 만주족 및 기타 민족에 흡수, 동화되어 그들의 흔적을 역사문헌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조선족"이란 개념은 중국국적을 취득한 이민자 혹은 그들 후대 중에서 중국행정당국의 승인을 거쳐 "조선족"으로 분류된 자를 말한다. 조선이민이나 그의 후대가 아직 중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거나(조선교민, 한국인 영주권자), 혹은 조선이민의 후대가 이미 다른 민족 집단구성원으로 되었을 때 그들을 조선족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관찰해보면 조선족의 중국이주형태는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 주로 후금의 “정묘호란”과 청의“병자호란”피랍인;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관리이민(impelled migration)등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하북성 청룡현과 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년을 넘어선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회발전과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문화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라는 담론은 민족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선 조선족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체계적 리론의 부재도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기까지   중국에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최초의 문헌은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이다. 그 후에 작성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자료에서 시종일관하게 중국 조선 민족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민족 명칭을 “고려인”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특이하다.    그런데 그 시기 조선민족 이민들이 집중 거주하던 동북지역은 중화민국정부에 귀속되는 동북군벌정권의 유효 행정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 행정부가 조선민족 이민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사실상 외국거류민 으로 취급되었다. 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의 몇 년 사이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조선민족 이민들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한국거류민’,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민족구성원 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을 갖게 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 하게 되였다.     1950년 12월 6일자 《인민일보》는 “중국동북경내의 조선민족”이라는 논설에서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가 개막되면서 동북경내의 조선인민은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으로 각 형제 민족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중화인민 공화국 각 민족 인민가운데 이 새로운 구성부분은 각 형제민족 인민들의 관념 가운데서 교민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민들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1949年9月,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开幕,东北境内的朝鲜人民,以中国境内少数民族的资格,和各兄弟民族见了面。从此,中华人民共和国各族人民间这个新的组成部分,才在各兄弟民族人民的观念里,以侨居中国的朝鲜人民中区划出来。)”라고 지적하였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조선민족이 조선교민으로부터 중국 소수민족으로 탈바꿈한 시간을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 개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인민”,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조선족”이란 이름은 1951 년에서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 그 사이에 확정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내이션(nation)과 에트닉(ethnic)   민족에 대한 리론 가운데 개혁개방 전까지 우리가 경전으로 꼽았던 쓰딸린의 민족에 관한 정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 철학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독일의 력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의《허구의 민족주의》등 민족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이 담론하는 “민족”은 “근대민족” 혹은 “자본주의민족”, 즉 민족을 봉건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문화적 조형물로 인식하고 있다.    1903년, 량계초(梁啓超)가 독일학자의 민족개념에 관한 글을 번역하면서 서구의 “민족”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다. 내이션(nation)은 겨레, 국민, 국가 등 복합적 개념이 어울려진 용어이다.  여기에서 내이션은 정치적 령토와 관련되는 민족개념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는 “민족국가” 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 .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서구의 “근대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조 량조의 소자현의 《남제서》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고대민족개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녀진인들과 구별하기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트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트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트닉(ethnic)은 우리말로 ethnology를 “민족학”으로, ethnicity는 “민족성”이라고 하듯이 역시 “민족”이라 번역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에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트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집단으로 번역한다. 코메리칸과 조선족   나는 1987년~1988년에 미국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한 적이 있다. 사회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komerican-코리아와 아메리칸의 합성어)이라고 호칭한다. 왜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호칭하는데 미국에서는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이라고 하는가?    건국 력사가 200여년밖에 안 되는 미국은 총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세계 각국에서 온 외래 이민이거나 이민의 후예들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민족이란 계념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나 로서 국민들을  분류한다. 1929년에는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국가별로 이민 수자를 할당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미국인, 프랑스계미국인, 중국계미국인 등으로 불리 운다.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 대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국적을 취득한 후 미국의 관례대로 한국계미국인으로 호칭된다.      그러나 중국은 수 천 년 력사를 가진 나라이고 고대로부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족학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식별작업을 거쳐 56개 민족(nation)으로 국민을 분류하게 되었다. 150여년의 이민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도 1945년 이 후 중국에서 토지와 참정권을 부여받으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인정되고 한족, 만족 등 민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족으로 호칭되게 된다.    한국에서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조선족”이라는 호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사실, “한국계미국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미국인이라는 뜻에서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강조되었다면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라는 뜻에서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   조선민족과 한(韓)민족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 민족집단(ethnic group)은 령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민족 명칭의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겪게 된다.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서 각각 “조선” 과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집단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리념대립이 살벌해지면서 민족 명칭의 갈등도 심각해졌다. “한민족”그룹에게 있어서 “조선민족”은 “빨갱이”들의 대명사정도로, 그리고 “조선민족”그룹에게 있어서는 “한민족”은 “반동분자”들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여겨져 왔다.  1985년 내가  쯔꾸바대학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을 때 일본에서는 조총련과 한국민단이 대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어느 방송사가 우리말 강좌를 개설하면서 강좌이름을 한국어강좌라 하면 조총련에서 반발하고 조선어강좌라 하면 민단에서 반발하기 때문에 나중에 “안녕하십니까” 강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83년에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소개하는 글을《China Reconstructs》1983,No,3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을 한국의 《동아일보》가 번역해서 게재할 때 제목을 “<中共속의 코리아> 延邊自治州” 라고 했고 글 가운데 나오는 “중국”은 “중공”으로, 조선족은 “韓人”이라고 번역했다. 신문을 보고 나는 너무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1984년 겨울,  내가 코네티컷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에서 발간되는 한 한글신문의 글 부탁을 받고 나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전제로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라는 론문을 발표했다. 동서방의 리념대립이 아직도 살벌했던 그 당시 서방진영의 심장에다 “조선족”이라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거부감을 주는 이름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미국과  일본의 신문, 학술지에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 “中國の朝鮮族 その素顔” 등 여러 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기간 나는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대학교 등 10개 대학 의 초청강의를 담당하면서도 “조선족” 홍보를 계속했다.   오늘까지도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놓고 한국네티즌들과 조선족네티즌사이에 쟁론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랭전시대의 유물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조국과 고국사이          같은 한자 어휘가 한어와 조선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현대한어사전》)”, 즉 자기에게 공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사전의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재중한인”으로 호칭하다가 지금은 “재중교포”, “재중동포” 혹은 “조선족동포” 라고 부른다. “재중한인”이란 호칭은 내이션(nation)의 개념을 적용한 용어이므로 한국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한 조선족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포”는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를 지칭해야함으로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겨레라는 뜻이 강조되는 에트닉(ethnic) 개념으로 풀이되는 “동포”는 적당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 층 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의 저변에는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관심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라고 지적했다.    이중성 민족은 없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래에서 인용하게 되는 글은 어느 개인을 념두에 둔 것이 아니고 “이중성 민족론”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용상의 편의를 위한 것임을 집고 넘어가겠다.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바꿔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며 조선반도의 국민과 동일선상에 있는 조선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있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어나 한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을 말한다.    례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族裔”)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제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교수는 나에게 “조선족은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族群)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왔다.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조선민족(族群)” 속의 전체와 일부분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중국에는 조선족 이외에도  같은 민족집단(ethnic group--“族群”)이 중국국경선 밖에 독립된 단일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로씨아족, 몽골족, 까자흐족, 따지크족, 우즈베크족, 따따르족 등 7개 민족이 있다. 그리고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절반이 넘는 33개 민족이 소위 과계민족(跨界民族)이다. 그 어느 민족도 자기민족이 이중성 민족이라 하지 않는다.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이 조선족위상에 주고 있는 부정적 영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수준에까지 미치고 있다. 2002년 8월23일,《인민일보》사이트에 소하(肖河)가 쓴 “56개 민족은 한 가족, 중국은 이 모든 민족의 나라(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라는 글이 실렸다. 저자는 민족과 종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자기아버지의 말을 빌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离心离德)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조선족)은 중국과 정체성을 달리 한다”라고 했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나의 느낌은 우선 자제되지 않는 분노 그 자체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하(肖河)는 일반 네티즌이 아닌 북경대학교수였다. 그런데 중국의 민족정책에 관한 어느 좌담회에서 내가 소하의 조선족에 대한 비틀어진 인식을 비판하자 옆에 있던 한 한족출신의 교수가 조심스럽게 “지금은 조선족학자들이 자신들은 이중성민족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 조선족학자들만 사용하고 있는 그 말의 뜻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인 동시에 한국(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해왔다. 그때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렬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제발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으로 그들의 앞길에 걸림돌을 설치하지는 말자.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고홍주)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 력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력사는 150년이나 된다. 오랜 력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리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1992년 중국과 한국간의 수교가 단행되면서 조선족과 한국간의 내왕이 잦아지게 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찾아온 조선족동포들을 따뜻한 겨레(ethnic)의 정으로 맞아주었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조선족들도 한국경제인들의 중국진출을 도와 나섰다. 2006년, 한국보다 10년 먼저 중국과 수교를 실시한 일본은 대중경제교류에서 256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지만 한국은 도리어 254억 달러의 흑자를 얻었다.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협력관계는 2003년부터 중국이 한국의 최대수출대상국이 되고, 2008년 말 한국의 대중국수출액이 820억 달러로 상승되는 일이 가능케 했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1 Huang, you-fu 1992, "The History Migration of Koreans Into China", Studies of Koreans Abroad 3: Seoul .2 黄有福 2002, “中国共产党在各个历史时期的民族政策与朝鲜族”, ⟪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 pp85-86, 심양 : 료녕민족출판사 .3 《中國共産黨第6次全國代表大會, 關於民族問題的決議案》(1928.7.9),《民族問題文獻彙編》,中央黨校出版社,1991年참조,p.87。4 1948년 판 《조선연감》에서  1945년 8월 이전 동북거주 조선인을 210만 명으로 집계하였는데 1953년 중국의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조선족 인구수는 112만 명으로 나타났다. 1945년에서1953년까지의 자연 인구증가 숫자를 감안한다면 광복 후 귀국한 사람들을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5 中共中央東北局, <關於東北時局的具体主張>,《民族問題文獻彙編》,中央黨校出版社,1991年참조,p.751。6 《人民日报》, 1950,12, 6。7 《中國大百科全書》,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1986年, 民族券 참조.8 《南齊書》, 권54.9 에트닉(ethnic)을 이광규는 “민족”이라고(《세계의 한민족》,통일원,1996년,P.23) 했고, 한건수는 “종족”이라고(《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일조각,2003년,P.122) 했다.10 Huang, you-fu,1983, "Home of Koreans in China",《China Reconstructs》1983,No,3. 11 《동아일보》, “<中共속의 코리아> 延邊自治州” 1984년 3월 26일.12황유복, 1985,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세계신보》, 1985, 1, 1.13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14 黄有福,1985,"中國の朝鮮族 とその素顔”,《統一日報》, 東京. 1985,9,10~20.15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16 조성일, “《중국조선족문학사》편찬의 시말”, 《문화시대》2009년 제1기.17 조성일, “조선족문화  론강”,《문학과 예술》,2006년 제2기.18肖河 ,2002, “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人民網>, 2002, 8, 23.19 “我父亲以前从事民族宗教工作看来也挺合适,他的工作也帮助我确立了正确的民族观,有意思的是他说中国各少数民族中,藏族和维族虽然有所谓的藏独,疆独问题,但那只是有海外势力的活动,国内的藏族和维族还是认为自己是中国人。真正和中国离心离德的倒是鲜族,也就是朝鲜族。他们或忠于金氏父子,或嫌贫爱富自认为是韩国人,很少有人认为自己是中国人。从这里也可以看出内外有别。汉,满,蒙,藏,回(包括维族等)及其他少数民族都是我们中国自家人,各民族有自己的语言文化风俗,这些语言文化组成了我们整个中国的语言文化风俗。可是朝鲜人是真正的外来人,他们的风俗文化可能比藏蒙的风俗文化更接近汉人,但是他们却不认同中国。” 20 《중앙일보》,월요인터뷰, 2006.7.31.21) 조선족의 중국 이주의 시원에 대한 연구도 5가지의 설이 난립되어 있다. 황유복: <중국조선족 이민사의 연구>. 《중국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연구》, 민족출판사, 1996년, p14참조.
85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 조선족(황유복) 댓글:  조회:8678  추천:82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 조선족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경제사회발전고문   1   나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에서 태생하였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경상북도이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나는 경북억양이 풍기는 우리말을 한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나는 연변이란 이름을 모르고 커왔다. 길림시조선족중학에 진학하면서 연변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의 절반 정도의 선생님들이 연변대학졸업생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도 “연변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연변” 은 나에게 있어서 막연하고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길림시조선족중학을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 역사학부에서 민족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때 배운 학과목가운데 <중국 소수민족지>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연변에 관한 지식을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소개에서 습득하게 되었다. 강의를 담당하신 강사님은 한족출신이었지만 연변에 가서 사회조사를 하신분이였기 때문에 연변의 자연, 지리 상황은 물론 조선족들의 사회생활, 가정생활과 풍속습관,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강사님이 “연변조선족들은 문화수준이 높고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노래와 춤에 능해 예술적인 민족”이라고 조선족을 칭찬할 때 막연하지만 나의 가슴은 긍지로 부풀어났다. 60명이 정원인 반에서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었기 때문에 한족동학들은 나를 “연변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가짜이긴 하지만 나는 “연변사람”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조교로 선택되어 대학에 취직되었다. 문화대혁명와중에 “공, 농, 병 대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 1971년에 평생 처음 연변에 출장으로 잠간 다녀오고 그 이듬해 1월에 대학에 조선어문학전공을 설치하기 위하여 나는 연변대학에 가서 6개월간 연수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연변에서 1주일이상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했다. 그때 난생처음으로 조선족아줌마들이 물건을 팔고 있는 재래시장과 조선족음식점을 구경할 수 있었고 자치주 주장의 가정에서부터 시골 농민의 집에까지 손님으로 초대되어 “연변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들어오던 “연변사람”들에 대한 풍문들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조선족은 어디에서 살던지 한겨레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연변에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나는 “연변처녀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경상도마을의 금기를 깨고 연변태생인 지금의 아내와 연애과정을 거쳐 결혼하게 되었다.    “10년 동란”으로 정의된 “문혁”이 막을 내리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여 나는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영문지로부터 중국조선족문화를 소개하는 논문을 부탁받았다. 나는 논문제목을 "Home Koreans in China" 라고 정했다. 물론 내 마음의 고향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글이었다. 그  논문은 지 1983년 제3기에 발표되었고 몇 달 후부터는 독일, 영국, 미국 학자들의 편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동아일보>가 1984년 3월에 “중국속의 코리아 연변자치주” 라는 제목으로 나의 논문을 번역해 게재하였다.   그 논문과 1981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Home on the Range”등 논문 때문에 나는 밀폐되어 있다가 금방 개방하기 시작한 중국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던 서방학자들로부터 북방민족연구학자로 인식되어 1983년 말부터 미국, 일본, 캐나다, 소련, 한국, 몽골 등 나라 대학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가게 되었다. 1972년 비연변태생인 내가 연변에서 체험하고 확인했던 조선족정체성이 나를 국제학술무대에 서게끔 뒷받침해주었다.  2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은 30년 전에 비해 GDP 67배의 성장을 이룩하여 GDP기준으로 세계 제3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단순한  경상지수의 대폭상승만이 아닌 일련의 광범하고 심각한 변혁이다. 농촌으로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 정치영역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고속 장성한 동시에 중국의 경제구조, 사회구조, 제도구조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30년의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은 고도로 집중된 계획경제체제로부터 활력이 넘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변, 폐쇄 반 폐쇄상태로부터 전방위로 세계경제에 융합하는 위대한 전변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개혁개방 30년은 중국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 생활방식과 사회적 관념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변화에는 우리민족의 기여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국조선족사회에는 30년 간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중국 조선족사회는 미증유의 충격을 받으면서 80년대에 이루어진 농민들의 도시진출을 경험하게 된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상품경제 시대에서는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 도저히 더 잘살 수 있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본금이 충족하지 않은 그들은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보다 넓은 지역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들을 떠나 부(富)를 찾아 나섰고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진출 붐에 따라 조선족들은 북경, 천진, 심양, 대련, 청도, 상해, 광주 등 연해개발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90년대의 또 다른 추세는 한국 노무의 붐이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코리안 드림"의 유혹에 끌러 한국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법체류 외국인 노무자가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조선족들의 한국입국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고 그들 노무 희망자들은 미화 6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의 수수료를 노무 중개업자들에게 지불하면서 "기회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 온 가족의 생계와 심지어 그들의 사활을 내 건 "도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가 빈발하면서 90년대 후반기에 한국과 조선족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무사기 사건들이 속출했다."코리안 드림"으로 시작된 조선족 사회의 한국노무 붐이 여성들의 한국으로 시집가기 붐으로 이어지면서 2000년 말 현재, 약 6만 명의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갔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 가야 하는 조선족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으로 가 버렸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중국조선족 출산인구는 급 하강선을 타게 되어 1999년 말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 수는 1989년의 1/4밖에 안 되는 3,800명이였다.조선족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우선 일인당 평균 경제수입의 증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조선족 전체의 경제수입 실태를 추출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나 개별지역 통계에서 우리는 그 전반을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노무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문화영토"로 인정되던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空洞化)와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선민족학교의 폐쇄,  민족 정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잃어가고 있다. 급변하는 중국조선족 사회는 지금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사회는 발전과 해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3   사실상 개혁개방이래 중국 조선족은 전통적인 거주지역인 동북 3성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 대도시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현재 중국 조선족의 거주판도는 동북 3성 대도시에 40여만 명, 현, 시 이하 농촌에 45여만 명 그리고 산해관 이남지역에 60만 여명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조선족의 해외진출도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법무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5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인구수가 23만 여명이었는데 2007년 초부터 방문취업제를 실시함에 따라 지금은 한국진출 조선족인구가 35만을 넘어서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에 8만 여명, 러시아에 5만 여명이 진출해 있으며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호주, 남미 등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까지 합치면 5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부터 나는 길림성 서란현 조선족사회에 대한 사회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서란시 조선족의 상황과 발전>(<舒兰市朝鲜族现状与发展>,中国社会科学出版社,2008年9月,北京)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서란시 각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10년 안으로 분산주거지역 조선족마을은 심양시 만융촌과 같은 대도시부근의 집중촌외에는 모두 소실될 것이라는 판단이 나온다. 그렇게 된다면 분산주거지역에서 국내 대도시나 국외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고향이 없는 “나그네”로 될 수밖에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사람”들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나그네”들의 고향으로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연변은 명실공이 모든 중국조선족의 고향으로 되어야 한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이산(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해온 유대교가 디아스포라들의 민족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스포라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디아스포라보다는 이민자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에 가깝다.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지속적으로 흩어진 조선족들이 공유할 수 있는 조선족문화를 창출해야한다. 그러한 문화는 흩어진 조선족들이 계속 하나의 민족으로 될 수 있는 민족정체성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민족 문화사업종사자들은 조선족사회가 오늘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키워드로 될 수 있다.     현제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에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민정국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지역의 절대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 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 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제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언어교육과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해야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러한 대도시 조선족단체들을 위한 항공모함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조선족문화 활동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하고 그들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연변의 연출단체들은 그들을 위한 순회공연을 당연한 책임으로 생각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성장과정에서 어머니의 정신과 정서를 마음의 보금자리로 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 보금자리를 심리적 구심점으로 만들어 간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구성원 모두의 어머니 품이고 심리적 구심점이다.                                   2008년 10월 4일 북경에서  
84    “혐한” “반한”정서의 “허”와 “실” 댓글:  조회:7467  추천:78  2008-09-25
“혐한”“반한”정서의 “허”와 “실”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2008년 8월 25일부터 26일까지 중국 국가주석 호금도는 북경올림픽이 금방 페막한뒤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중한 양국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가일층 추동했다. 두나라 정상의 상호 방문은 양국의 정치, 경제, 인문 등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했으며 특히는 양국 청소년들의 교육, 문화 교류를 확대했다. 중한친선협력관계의 깊은 발전은 양국 인민들에게 혜택을 갖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촉진했으며 선린친선, 공동발전의 윈-윈 국면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중국인의 "혐한정서"와 "반한정서"는 최근 한국언론의 열점화제로 떠오르고있다. 북경올림픽기간 한국 부분적 언론들은 전문 일부 부정적인 면들만 골라가며 꼬집어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다. 여자 양궁 개인종목 결승전을 두고 한국연합통신 등 언론은 중국관중들이 의식적으로 한국선수를 교란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언론들은 또 한국팀과 일본팀의 야구경기에서 중국관중들이 일본팀을 "응원"했다고 다루어 보도했다. 한국언론들은 상기 몇가지 사건을 한줄에 꿰여 집중보도하면서 중국인의 "혐한정서"와 "반한정서"에 대해 근심걱정했으며 지어 일부 한국인들은 "13억이나 되는 중국인 모두가 한국을 싫어하지 않을가"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다 한국의 《중앙일보》는 9월 1일에 한중 인민간의 감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으며 그 추세가 악화된 한일 양국 인민간의 감정과 못지 않다고 보도했다. 보도는 이어 "반한정서와 혐한정서"가 인터넷을 통해 중국에서 신속히 확산되고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중국 거주 한국인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중국 국내의 반한정서가 지금 10대와 20대 젊은 층과 인터넷 공간을 넘어 점차 전반 중국사회에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한정서를 제때에 치유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있다." 조사에서 한국의 응답자들은 양국 민간교류를 확대하여 양국 국민들로 하여금 상대방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함과 아울러 인터넷 등 매체의 사실에 대한 외곡보도에 신속히 대응해야한다고 대답했으며 민간교류에서 청소년 교류와 학술계 교류에 중시를 돌리고 양국 언론간의 상호 이해와 교류에도 중시를 돌려야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중국의 "반한정서"를 해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우리는 "혐한정서", "반한정서"라는 개념부터가 과장된 것이라고 여긴다. 문제가 한국언론들이 보도한것 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양국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분야의 교류와 협력이 늘어나면서 모순도 그만큼 많아지게 되기 마련이며 양국의 상호 교제에서 상대방 국가를 싫어하는 정서가 존재하는것은 정상적인 현상으로서 한국 국내에 일부 반중정서가 존재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이런 정서가 주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반한정서" 또는 "반중국정서"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으며 "혐한정서"와 "반한정서"는 사실보다 과장된것이다. 중한 민간교류서 확실히 일부 문제 출현 하지만 우리는 중한간의 민간 래왕에 확실히 일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에서 중국관중과 한국관중간의 분쟁2005년 강릉 단오축제의 세계무형문화유산 등록2006년 고구려 역사 문제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서 한국선수 "백두산은 한국 땅"이라는 패쪽 시위2008년 서울서 베이징올림픽성화봉송           사천지진 발생후 한국 개별적 네티즌들의 표현           SBS방송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장면 앞당겨 방송 등 《한국일보》는 8월 21일자 "중국의 '반한기류' 비난만 할게 아니다"라는 사설에서 "라싸사건"에서 성화봉송,북경의 대기오염에 이르는 온갖 논란과 시비에서 한국언론은 그 어느 나라보다 중국에 비우호적이였다고 지적했다. 사설은 중국인의 옹졸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분별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면서 우리는 응당 이런 태도가 가까운 이웃의 마음을 상하지 않았겠는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썼다. 중한 양국의 부분적 사람들이 상대방을 싫어하는것은 두렵지 않다. 그것은 접촉이 이전보다 많아졌기에 모순도 이전보다 많아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양국간의 교류가 날로 빈번해짐에 따라 양국 인민간의 상호 이해도 날로 강화되리라 믿는다. 양국의 식견있는 인사들은 양국관계의 큰 국면에 착안하여 각자의 역할을 적극 발휘해 대중을 인도하여 서로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게 해야한다. 중한 민간에 문제가 존재하는 원인  1.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    1) 동쪽 오랑캐(东夷)—한자(汉字), 공자    2) 티베이트 역사문제    3) 고구려 역사문제2. 언론의 무책임--장춘동계아시안게임서 한국선수들의"백두산은 우리의 땅" 패쪽 시위    SBS방송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앞당겨 방송 등3. 네티즌들의 자질 수준4. 홍보가 무기력   강릉단오절의 세계비물질문화유산 등록 등    중한 양국간의 건전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구축하고 양국 국민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학술계에서 중한 양국간의 우호협력관계 개선을 위한 대안을 공동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83    네트워크와 새문화창조가 조선족의 살길 댓글:  조회:6688  추천:95  2008-07-08
네트워크와 새문화창조가 조선족의 살길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현 정책 지속되면 조선족을 동포로 지켜낼 수 없을 것"-조선족 없어질 위기에 놓인 상황...보다 현실적 논의 필요"       중국 조선족은 한국정부의 재외동포정책과 상당한 관계가 있으며, 한국에서 재외동포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으로 결과적으로 조선족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다.이에 본인은 한국의‘재외동포’의미는 사전적 해석보다는 정치적인 개념으로 보고, 나름대로 3가지로 나눠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재외국민’은 자신이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이외 국가에 거주하는 한국사람이고, ‘재외교포’는 자신이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이외 국가에서 영주권을 취득해 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재외동포’는 자신이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이외 국가에 이민해 원국적을 포기하고 거주국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한국정부가 재외동포로 명칭을 통일한 것이 진정한 재외동포의 지원 보다는 재외국민이나 재외교포에게 지원을 더 하려는 것으로 의도로 보인다. 이는 실제 중국지역에 있는 동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족은 모두 '재외동포'이고, 이들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과거 김대중 정부 당시 10여 곳에서 한글(민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정부 측 소개로 당시 교육부 장관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더니 "우리가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지원해 주고싶으나 교육부에는 재외국민 교육 관련 예산만 있고, 조선족은 재외동포에 해당하니 재외동포재단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해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당시 김봉규 재단 이사장은 “교육부 예산이 100억 정도라면 재단예산은 10억이 있지만 미국, 일본 등지를 지원하다보니 중국에 지원할 예산이 없다”고 말했다.우리는 모국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선족들의 교육문화를 지속하는데 자체 힘으로 해왔고, 이광규 전 이사장이 있을 때 3천 달러 상당의 지원을 한차례 받은 적 있을 뿐이다.결국 한국정부는 정책적으로 한국사회를 잘 아는 재외국민이나 교포들을 위해서 돈(예산)을 사용할 뿐이고, 우리는 중국에 태어나서 이곳에서만 지내 이런 상관관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산을 받기가 어려워, 앞으로도 같은 정책이 지속된다면 한국정부가 조선족인 중국계 동포들을 동포로 지켜낼 수 없다고 본다.일부 한국언론은 중국동포 중 광복 이전에 건너간 동포인 ‘조선족’명칭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을 획득한 재미동포를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미국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냐?”에 따라 이민 온 사람들을 호칭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민족’으로 분류하면 된다.현재 중국에는 대부분 중국 국적을 취득한 193만 명의 조선족이 있으며, 또 2006년부터는 영주권제도를 시행해 약간의 영주권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70만명의 한국인과 한국인 중 약간의 불법체류자 등 총 300여만 명이 중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그렇다면 왜 조선족인가? 중국에서는 1903년 양계초가 독일학자의 개념을 번역하면서‘민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에서‘민족’은 한족, 몽고족 등을 뜻하게 됐으며, ‘조선족’은‘중국국민+조선민족’이 합쳐진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최근 조선족들의 거주지역이 변화하고 있다. 82년 이전에는 지린성에 110만명, 헤이룽장성 60만명, 랴오닝성 20만 명 정도로 일부지역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중국 내에서도 다양한 지역으로 분포가 확산됐다. 동북3성에 35만명, 하얼빈, 창춘, 선양, 다롄 등 쑹화강지역에 40만 명, 경진지역 15만 명, 황허하류지역 20만 명으로 흩어졌으며, 한국에 35만명, 일본 8만 명, 미국 5만명, 러시아 10만 명 등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이같이 분산된 조선족 사회를 유지하는 방안으로는 일부학자들이‘이산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 민족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 사회에는 걸맞지 않아 ‘트랜스네셔널(Transnational)’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조선족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을 가졌으며, 대상이 되는 조선족은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해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상당부분 주류사회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당히 진행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 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조선족이 없어질 위기에 놓인 현 상황에서는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2006년 이후 문닫는 조선족민족학교가 많아져 상당수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학교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민족문화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중국조선민족사학회’라는 NGO학회를 구성했다. 중국은 NGO설립이 어렵기 때문에 학술적인 이름을 넣어서 인가를 받아냈으며, 조선족문학인, 미술인들, 기업인들이 가입하도록 했다.이중 1억 이상 재산을 가지고 있는 20명이 모여 조선족 학생들을 위한 11개 민족학교 분교를 만들었고 올해에는 5개 분교가 설립됐다. 앞으로는 50개 학교설립을 목표로 민족교육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재외동포재단(한국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힘들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또한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엘리트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주축이 된 ‘글로벌코리안네트워크’가 구축돼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이 12회까지 진행됐다. 이를 통해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활용에 관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꾸준히 갖고 있다.이처럼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 가는 길밖에 없다.*본문은 6월 30일 <재외동포신문> 창간 5주년을 기념해 재외동포신문과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가 공동 주최한 ‘새 정부 정책수립을 위한 '2008 재외동포정책 세미나’에서 행한 기조연설문이다.
82    조선족발전을 위한 글로벌네트워크 댓글:  조회:3351  추천:94  2008-07-06
조선족발전을 위한 글로벌네트워크황유복 중국중앙민족대학 교수1.중국의 개혁개방 30주년 성적표 ①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회 3중 전회에서 개혁개방 중대정책을 결의.  ②2008년 버아오포럼에서 후진토우중국 국가주석은  2가지 분투와 한가지 나아갈 방향을 다음과 같이 지적.-  중국인민은 확고부동하게 개혁개방의 위대한 길을 따라 나아갈 것이며; -소강사회의 전면적 건설과 나아가서 현대화의 기본적 건설을 위하여 계속 분투할 것이며;-인류평화와 발전이라는 숭고한 위업을 위하여 계속 분투할 것이라고 하였다.③2007년 중국 국내생산총액 24,66만억 원. 1978년의 67배;      중국의 GDP가 세계GDP의 1978년 1%에서 2007년의 5%이상 미국, 일본다음 제3위.      1인당 GDP 1978년의 381원에서 2007년 1,8665원. 49배 증가. ④중국의 수출입총액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 1978년 1%미만에서 2007년의 8%.       2007년 중국 수출입총액 21,738억 달러.      수출:     12,180억 달러.      수입:     9,558억 달러.     무역수지 흑자:   2,622억 달러.      국제무역성장 기여도: 12%. ⑤중국이 사용한 외자자본 누계: 7800억 달러. 세계경제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도: 10%초과. 2. “민족”의 정의에 따른 “조선족”의 IDENTITY 1) 에트닉(ethnic)  민족, 족군 2) 내이션(nation)  국민, 국가, 민족(정치적   영토와 관련시킨)  중국에서 1903년 양계초가 독일학자의 민족계념을 번역하면서 “민족”  이란 용어 사용. 3) 중국에서 내이션으로 민족을 정의. 조선족, 한족, 몽고족 따라서 “조선족”의 IDENTITY는 “중국국민+조선민족”. 4) 재미 코리언과 재중 코리언 재미코리언 --미국시민권자      --미국영주권자 --불법체류자 --공관 및 회사 직원(장기 체류자) **계: 200만 재중코리언 --조선족(193만) --상주 한국인(70만)      --한국인영주권자 약간 --조선인영주권자(조교, 10만정도) --불법체류자 약간 **계: 275만 5) 재중코리언의 IDENTITY는 하나의 Ethnic과 3개국 국민. Ethnic--한민족(조선민족) Nation--중국인, 한국인, 조선인 3. 중국조선족의 변화 1)중국조선족의 이민사 (1)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후금의“정묘호란”과 청의 “병자호란” 피랍인. (2)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3)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4)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이민(impelled migration) * 1945년 현재 재중 조선인 인구: 216만 명. 2) 인구의 추이 (1) 1945년 광복전야 중국거주 조선민족인구수는 2,163, 115명 (1948년 판 ≪조선연감)참조),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 간 사람들이 절반정도 된다. (2) 해방후 조선족인구의 변화        1953년      1,120,405명 1959년      1,237,200명 1964년      1,348,594명 1978년      1,680,000명 1982년      1,766,439명 1990년      1,920,597명 2000년      1,923,842명 (3)거주지역의 변화 * 1982년 이전: (가) 길림성(110만정도) (나) 흑룡강성(60만정도) (다) 료녕성(20만정도) * 현재 (가) 국내 a. 전통 거주 지역: 35만 b. 송화강, 료하 류역 (할빈, 장춘, 심양, 대련): 40만 c. 경진지역: 15만 d. 황하하류지역(산동): 20만 e. 양자강하류지역: 5만 f. 주강삼각주: 5만 g. 기타지역: 5만 (나) 국외 a. 한국: 35만 b. 일본: 8만 c. 미국: 5만 d. 러시아: 10만 e. 유럽, 남미, 동남아: 2만 4.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 1) 경제수입의 증가: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간 조선족노무자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2) 조선족사회의 해체위기          (1) 출산인구의 감소: 1999년 말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 수는 1989년의 1/4밖에 안 되는 3,800명이였다. (2)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1996년 조선족학교 수 1130개. 2006년400여개. (3)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전통거주 지역의 황폐화. 5. 동북아 시대와 글로벌 민족 1)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2007년 4월 10일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리고 11일에는 일본의 아베신조 총리와 각각 회담은 갖고 동아시 아 3국의 경제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2) 이어 4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중, 일, 한 30인 포럼에서 3 개국간 FTA 체결이 제안되었고, 3) 4월 21일 중국 해남도 보아우(博鳌)포럼에서는 "아시아경제공동체" 창설 제안이 잇따랐다. 4) 현재 중, 일, 한 3국은 서로가 각국별 무역거래에서 모두 4위 이내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은 일본에 대해, 일본은 한국에 대해, 한국 은 중국에 대해각각 209~256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취득하는 순환 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5) 이러한 동아시아시대를 살면서 중, 한, 일 3개 국어를 동시에 구사 할 수 있다는 것은 중국 조선족이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말 이다. 6. 글로벌 코리언의 생존을 위한 경제네트워크 1) 중국 조선족기업은 아직도 대부분 기업들이 요식업,  유흥업,  여행사 등 단순서비스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는 연간 4000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는 슈퍼 요식체인업체 (예를 들면 북경한라산 요식체인 기업)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윤마진이 빈약한 상태이다. 이들 기업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족 기업 간의 소모적 경쟁이 빈발하고 있다. 2)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 이다.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 많은 조선족 기업들이 자체의 생존 공간 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시각을 바꾸어 보면 스스로 자체의 발전 공간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다. 3) 글로벌경쟁시대에 있어서 자신들만의 우세와, 다른 민족 집단이 대체할 수 없는 특수한 역사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조선족 기업 들은 한국계 기업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 들과 생존을 함께하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 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7. 정체성 확보를 위한 민족문화공유는 코리언네트워크 뿐 1)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 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 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 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 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2)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이산(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 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 해온 유대교가 디 아스포라들의 민족  정체 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 주었 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 종교 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  스포라는 그대 로 적용될 수 없다. 3) 우리는 현실적으로 디아스포라보다는 이민자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 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에 가깝다.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 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 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4) 현재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 시 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 단체 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 에는  “심양시 조선족연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민정국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 지역 의 절대 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 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 운동회, 설맞이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 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 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 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5)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 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언어교육과 민족문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 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6)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글로벌조선족 네트 워크> 의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 이 시급하게 우 리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트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세계 적인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전체적인 경제사회 발전을 고민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네트워크가 조선족 사회의 민족문화와 경제발전에 촉매 역할 을 하게 해야 한다. 7) 이러한 글로벌네트워크만이 우리가 지금 까지 연구하고 도전해온 조선족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한 취지로 우리는 북경(2006년)과 부산(2007년)에서 제11회와 제12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글로벌 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활용에 관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8. 결  론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어렵지만 우리는 도전해야 한다.* 본문은 "개혁개방30년 및 조선족기업발전세미나"(2008년 6월 20일.할빈)에서 행한 특강내용입니다. 
81    한중문화의 이해를 통한 한중관계 개선 전략 댓글:  조회:6220  추천:120  2008-04-23
한국과 중국문화의 이해를 통한 한중관계 개선 전략 황유복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지도교수, 한국문화연구소장    지금 21세기에 우리가 가장 많이 대두되고 있는 담론이 세계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지역화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현재 그러한 시대에 맞추어 유럽 북미 등 세계는 서로 경제 협력을 하며 나아갑니다. 일본 한국 중국은 세계에서는 최초로 글로벌이 형성 되었었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중국의 문화가 전해졌었고(예; 한자, 유교, 쌀문화 등) 중국 한국 일본 이 세나라는 같은 지형을 형성했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 세 나라는  영토문제 역사문제 때문에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면 중국이 세계 중심이라 하여 중화 문화가 서에서 동으로 전파되었습니다만,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본에 근대화를 유치하며 일본에서 중국으로 문화가 전달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며 일본의 문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이런 문화의 흐름은 이념대립 때문에 문화 단절이 되었고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일중 수교, 한중수교가 실시되면서 문화의 흐름이 다시 재개되고 있고 모든것이 평등하게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    지금 현재 문화의 주류는 ‘한류’입니다. 한류는 대중음악, 드라마,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쿼터제가 생기면서 한류의 한계도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류가 대중문화에만 국한되는것 같이 보이나 사실 더 큰 한류가 중국에 오고 있습니다. 현재 8억의 농민들이 <신농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본뜬 것으로 많은 부분을 한국에서 배워왔습니다. 새마을 운동에 내제되어 있는 한국전통 사상, 두레, 계 등의 협력 정신이 중국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전체주의 문화와 자유주의 문화 입니다.    제 수업을 들으러 온 한국한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중국에 와서 느낀점이 무었입니까? 대부분 크다고 얘기합니다. 그럼 저는 또 묻습니다. 고궁에서 나무를 본적이 있느냐고? 다들 이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실 고궁에는 후화원을 제외하고는 한그루도 없습니다. 학계에서는 자객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중국에는 많은 오랑캐 나라(이웃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러 옵니다. 중국황제는 이들이 고궁에 들어오는 순간 그 웅장함으로 기를 죽여서 자신을 한없이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웅장한 느낌을 주려고 만든 고궁에 나무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위엄이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황제는 평생을 이 웅장한 고궁에서만 살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다릅니다. 창경궁에는 나무도 있고 호수도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곳을 거닐며 쉴 수 있고 때로는 나가기도 합니다. 과연 누구의 삶이 더 행복할까요?    민가에서도 두 나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민가를 가도 담장이 있습니다.중국의 민가는 잘 사는 집일수록 담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주위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조선 전통민가들은 담이 없습니다. 싸리울이나 바자울이 있지만 이런담은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가축의 출입을 제한하는 정도입니다. 즉, 한국은 자연과의 조화속에서 생활을 한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잡종과 순종을 들 수있습니다.    중국은 인종적으로 북방과 남방이 전혀 다릅니다. 북방은 아시아 몽고로이드계이고 남방은 인도네시아 계열입니다. 지금의 중국이 있기까지는 한자문화로 통일된 한족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제가 대학에서 역사 강의를 들을 때 한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중국의 漢族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잡종 그룹이다’ 라고 말입니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중국의 문화는 다양합니다. 한국은 반대로 단일 민족이고 순수를 강조합니다. 이것이 두나라 문화의 큰 차이 점입니다.    세번째, 문화에 대한 태도입니다.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큰 변혁을 겪었지만 한국은 문화 혁명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은 계승의 개념이고 뒤집을 생각은 안합니다. 중국 불교협회가  불교를 한국에서 배웁니다. 유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유는 중국은 문화대혁명시기에 많은 문화를 손실하였지만 한국은 계승하였고 발전시켜 와서 중국보다 더 깊은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중국의 문화 가운데 유교의 문화는 현재 거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 거북이 모양으로 한 금속, 옥 같은 것을 한국 노인들은 가지고 다니는데 이러한 문화는 예전에 중국에서 숭배하던 사상이 한국에 전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거북이의 뜻이 사용됩니다.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넘어 가던 시기에 이야기꾼들이 많이 생기면서 거북이의 의미를 하늘에서 땅으로 낮추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기를 ‘거북이는 암수가 교배를 못한다. 암? 탄舅隔?숫뱀과 교미를해서 가진다. 암거북이가 오줌으로 원을 그리면 뱀이 다가와 교미하고 숫 거북이는 오줌으로 경계를 만든주위에 다가가지 못하고 안타까워한다’라는 이야기가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남방 사람들의 욕가운데 鬼儿子(gui er zi;사생아) 있습니다. 또한 북방에서는 王八蛋(wang ba dan;거북이 알)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이러한 문화의 차이들을 깊이 알고있다면 중국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사람들은 ‘유교는 중국이 전통인데 중국에서는 예절이 없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인이 착각하는 점 중 하나입니다. 한국은 온돌문화이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이 보통이나 중국은 침대문화이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식으로 예절을 표합니다. 특히 요즘은 악수하는 서양문화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다른 분야에서도 훨씬 더 빠르게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세계화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로 서로 접근한다면, 중국과 한국의 교류는 훨씬 더 원활해 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80    조선족문화는 있는가? (황유복) 댓글:  조회:6379  추천:95  2007-07-01
조선족문화는 있는가?황유복《연변일보》사에서 《조선족문화에 대한 북경사람들의 시각》이라는 주제의 칼럼을 부탁받고 의도적으로 북경사람들과 조선족문화에 대한 대화를 해보았다. 북경에서 20년이상 거주한 《북경사람》들가운데 60대에서 20대까지 될수록 다양한 직업과 년령층을 골라 인터뷰해보았다.  그런데 생각밖에 북경사람들은 조선족문화에 대해 거의 아는것이 없었다. 50대의 한 공무원은 《우리가 어릴 때 최미선의 장고춤을 보고 무용예술의 극치라고 탄복했었습니다. 그리고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라는 노래는 누구나 다 부를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조선족의 춤도 노래도 있는지조차 모릅니다》라고 했고 몇명의 대학생들은 《우리 반에도 두명의 조선족이 있는데 조선말도 모르고 우리랑 별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족문화는 한족이나 만족의 문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조선족음식문화는 경험해보셨을것 아닙니까? 불고기, 김치, 랭면 그런것 말입니다》라는 나의 물음에 한 택시기사는 《글쎄요. 10여년전까지만 해도 북경의 거리마다 <조선족풍미(风味)> 라는 음식점이 많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한국풍미>라는 음식점만 남아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북경에서 관찰되는 조선족문화는 중국주류문화에로의 동화와 한국문화에로의 《동화》라는 두개의 극으로 달리고있음을 쉽게 파악할수 있었다. 《문혁》시기부터 조선족사회는《조선어무용(无用)론》이라는 악성바이러스에 시달리게 되였고 수없이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들의 의향에 따라 조선족학교를 포기하고 한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90년대초 동북3성의 주요도시에서 80%의 조선족어린이가 유치원에서 고중까지 한족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언어를 완전히 상실해왔다. 지금 점점 더 많은 민족언어를 모르는 조선족청소년들이 북경으로 진출하고있다. 언어와 문화는 떼여서 생각할수 없다. 민족언어가 민족문화를 그 민족사회성원들에게 공유하게 하고 또 그것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게 하기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이어가야 할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말을 상실하면서 민족문화를 전달받지 못하고 주류문화에 동화되고있음을 안타깝게 지켜볼수밖에 없다. 북경에 거주하는 우리 말을 아는 부분적 조선족젊은이들이나 50대이상의 조선족들에 의해 조선족문화는 한류에 편승한 한국문화에 《동화》되고있다. 조선문 신문이나 잡지는 《한국어》로 편집되고있고 지난 세기말에 존재했던 2000여개의 조선족음식점은 사라지고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한식점》들만 살아있다. 선대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50년이 넘는 어려운 정착과정을 거쳐 형성된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유했던 조선족문화도 건재하는가? 이제 우리는 조선족문화의 총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 문화의 총체성은 우리가 조선족일수 있는 기본요소일뿐만아니라 조선족이 외부를 향하여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경쟁력이기도 하기때문이다. 21세기의 화두는 문화이다. 그래서 오늘의 시대를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국가나 민족 발전의 키워드는 문화이다. 때문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조선족문화이고 중국문화의 한 부분이며 세계문화의 한 부분인 우리 문화를 재창출해야 한다.
79    한편의 동화,사람 얼마 먹여살리나? 댓글:  조회:5473  추천:116  2007-04-27
한편의 동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수있을가? 황유복(교수)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은 독일 하멜른(Hameln)이란 동네의 전설을 정리하여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서사시를 썼다. 브라우닝의 시때문에 하멜른의 전설은 세계적인 동화로 되였다.      브라우닝의 시에 따르면 13세기말 하멜른에서는 쥐가 들끓어 ⟪개를 떠밀고 고양이조차 물어 죽인다./ 요람속의 갓난아이를 물고/ 치즈 통을 휘젓고/ 주걱에 묻은 스프를 핥고, 소금에 절여놓은 생선을 갉아먹고⟫ 하여 사람들은 골치를 앓게 되였다.     어느날 마을에 광대옷을 입은 사나이가 나타나 상금을 주면 쥐들을 쫓아주겠다고 했다. 동네사람들은 거액의 상금을 약속했고 사내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 동네의 쥐들은 피리소리에 끌려 줄을 지어 광대의 뒤를 따랐다. 사내는 따라오는 쥐들을 강물속으로 인도하여 모두 빠져죽게 하였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약속했던 상금지급을 거절하자 광대는 다시 마을 복판에 나타나 또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을 어린이들이 쥐떼처럼 사내를 따라나섰다. 사내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곳펠벨크의 산중턱에 있는 동굴속으로 들어가버렸고 동굴입구는 절로 닫혀져버렸다. 그후 어린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하멜른은 2차세계대전 때 파괴됐다가 도심은 옛모습 그대로 복구되였고 지금은 6만명이 사는 작은 도시로 되였다. 그런데 매년마다 하멜른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50만명을 넘어선다. 물론 아름다운 경치때문이 아니고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동화때문이다.  하멜른사람들은 동화를 문화관광산업에 활용했다. 쥐모양의 액세서리와 기념품, 심지어 치즈와 빵도 쥐모양으로 만들어 팔고있으며 옛 도심의 길바닥에는 하얀 페인트로 그린 쥐들이 줄을 이어 관광객들을 인도한다. 동화속의 쥐떼와 어린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행로라는것이다. 주요 포인트마다 주변건물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여있고 붕겔로젠(Bun gelosen) 거리의 한 건물외벽에는 ⟪1284년 6월 26일, 성 요한과 성 바울로의 날, 하멜른에서 태여난 아이들 130명이 피리 부는 광대를 따라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하멜른의 전설은 하나의 문화콘텐츠이고 브라우닝은 그러한 콘텐츠를  세계적인 동화로 개발하면서 콘텐츠산업(content industry)화를 실현한 셈이다. 다시 하멜른사람들은 성공적으로 그러한 콘텐츠산업을 문화관광산업으로 이어나갔다. 한편의 동화때문에 몰려온 50만명의 관광객들이 소비하고 간 돈으로 6만명의 하멜른사람들이 먹고산다.      중국조선족은 150년이 넘는 이민과 정착의 력사를 갖고있다. 우리들의 고향마을마다에는 선대들의 얼이 슴배인 이민, 개척, 항일투쟁 등의 전설과 실화들이 깃들어 있다. 그러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것은 우리 문화인들의 몫이다.  얼마전 연변 진달래문화원정초식에 초청된적이 있다. 해란강변의 산야를 어떠한 형태의 문화산업단지로 개발할것인가 라는 자문을 받았을 때 나는 ⟪선구자의 노래⟫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레저관광산업을 권장했다.      노래의 작자가 구설수에 오르고있지만 ⟪선구자의 노래⟫ 자체는 반일성향으로 받아들여진 노래이고 또한 세계의 우리 민족가운데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고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 깊었나.       이 노래는 해란강변의 산야에서 말을 탈수 있는 경마장을 테마산업으로 한 레저관광산업의 성공을 뒤받침할수 있는 문화콘텐츠라고 생각된다.      사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동화에서 약속을 어긴 하멜른사람들의 행위도 자랑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하멜른사람들은 조상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문화관광산업에 활용함으로써 더욱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게 된것이다.      문화의 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도 문화산업, 콘텐츠산업, 창의산업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따라서 ⟪조선족의 브라우닝⟫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작자 E-mail : iks937@hanmail.net 2006년 4호
78    '돈 중독' 탈피 발상전환 필요하다 댓글:  조회:6543  추천:118  2007-03-08
'돈 중독' 탈피 발상전환 필요하다황유복2006년 12월 31일 밤, 프랑스의 낭트시 사람들은 «한해가 끝나는건 무덤으로 한발 더 다가서는것이고 그건 비극»이고 «우리는 늙어가는것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하면서«새해 반대 전선» 이라는 뜻의 «포나콩(FONACON)»이 주도한 «2007년 새해 저지»시위에 나섰다고 합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들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여나 볼가»라는 노래가락과 같이 세월을 흘러가지 못하게 하고싶은 인간들의 심리는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그러나 세월은 인간들의 심정을 전혀 읽지 못하는가 봅니다. 때가 되면 그 언제나처럼 낡은 해는 가고 새해는 저절로 찾아오니 말입니다. 정해년 돼지해도 꿀꿀거리며 찾아왔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에서 돼지가 상징하는 문화적기호가 «재부(財富)»인만큼 «돈(豚)의 해에 돈(金錢) 많이 버십시오.»라는 덕담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사실 돼지해와 관계없이 돈 많이 벌라는 말이 새해 덕담으로 된지는 오래되였습니다.개혁개방이후 우리는 오직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는 하나의 신념을 갖고 열심히 뛰여왔고 그리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중국에는 30개의 소수민족자치주가 있는데 그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봉급수준이 가장 낮습니다. 하지만 개인저축은 가장 많고 소비수준도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사회는 지금 «재부바이러스»에 감염되여 있지 않나싶습니다. 돈을 버는 일에 너무 급급한 나머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벌어 부자가 될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는 생각에 집착해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동분서주하다보면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마저 상실해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돈 중독현상입니다. 돈 중독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 금전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돈을 벌기 위하여 우리가 버렸기때문에 지금 점점 사라져가고있는것들을 다시 불러봅니다. 우리 선대들의 피와 땀과 얼이 절어져있는 고향의 땅과 마을이 사라져가고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선족일수 있게 했던 민족문화의 령토입니다. 우리의 후대가 계속 조선족일수 있게끔 우리 말과 글과 문화를 가르치던 학교들이 사라져가고있습니다. 56개 민족가운데서 가장 높은 리혼률을 자랑하면서 우리의 가정들이 해체되여가고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대를 이어가야 할 아기들이 줄어들고있습니다. 2006년 현재까지 10년동안 우리의 출산아기수는 60%나 줄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도시화», «세계화»라고 불렀습니다.전통, 가치, 도덕, 문화, 인성…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져가고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던 기쁨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노을을 마주하고 조용히 마시던 차의 향기도 사라지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던 온정도 사라지고… 우리의 삶의 질과 행복감도 퇴색하고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쫓는 속도경쟁속에서 우리 개개인들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초라해지고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보», «발전»이라고 했습니다.1979년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한후 우리는 28번째 새해를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그동안 중국은 GNP수준으로 세계의 제4대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했고 세계는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정보화사회에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미래학의 대부»로 불리는 하와이대학 미래전략센터의 짐 데이토(Jim Deator)소장은 «정보화사회 다음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꿈의 사회)라는 해일이 밀려온다.»고 단언하고있습니다. 꿈과 이미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는 드림 소사이어티사회에서는 경제의 주력 엔진이 «정보»에서 «이미지» 로 넘어가고 상상력과 창조성이 국가의 핵심경쟁력이 된다는것입니다. 경제발전만을 강조하던 중국도 지난해부터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을 두개의 날개로 정했고 창의(創意)산업을 부각시켜 «민족발전의 령혼»이라고 정의하고있습니다. 우리도 시대의 발전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지나간 한해를 돌이켜볼수 있고 새로운 꿈을 꿀수 있다는것이 새해의 문화적의의일것입니다. 우리 민족 구성원들도 새해를 맞이하여 «돈 중독»증을 탈피하고 참신한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조선족의 문화이고 중국문화의 한 부분이며 세계문화의 한 부분으로 우리 민족문화를 재창출해야 합니다. 문화는 단순히 인간의 정신적삶을 풍요롭게 할뿐만 아니라 오늘 이미 엄청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핵심적 기간산업으로 등장하고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려서는 안되는, 그러나 이미 버렸던 소중한것들을 다시 주어챙겨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독창적상상력과 창의적사고방식의 능력을 길러 미래에 대한 슬기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새해의 벽두에 «문학과예술»지의 지면을 빌려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머리를 조아려 세배 드립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다 사랑과 행복과 희망이 깃든 새로운 꿈 꾸어보세요.-«문학과예술»2007.1
77    조선족발전 5대 문제와 그 해결대책 댓글:  조회:3555  추천:97  2007-03-03
조선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다섯 가지 문제가 있다.  1.조선족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2.조선족 기업인들의 사명 3.조선족 농촌의 중요성 4.민족문화의 진흥문제 5.조선족사회의 정체성문제 1.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얼마 전에 사이트에서 SCK포럼에서 어느 지성인이 쓴 글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중국 조선족은 인구 마이너스성장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말을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필자는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은 조선족 역사발전의 필연적 현상이라 본다. 별거 아닌데 신경을 쓰며 걱정할것이 못된다. 어떤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한것이며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고 본다."라고 하면서 인구의 감소를 마치 도시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별거 아닌데 신경을 쓰며 걱정한다”는 식으로 오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족 인구감소현상의 본질은 조선족 농민들의 도시 진출로 인한 농촌인구의 감소가 아니라 조선족 출산인구의 감소라는 극히 심각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의 조선족 총 인구는 192만 3842명으로 집계되었다.                 2000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선족인구가 계속 집거지역에서 잡거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농촌인구의 도시진출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10년 전에 비해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의 조선족인구가 각각 3만 7879명, 6만 5633명과 314명이 감소된 반면 기타 성, 시의 조선족인구는 모두 증가되었다. 증가폭이 가장 큰 지역이 산동성인데 10년 전에 비해 2만 4433명이 증가되였다. 조선족의 도시 거주인구수는 88만 2308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45.8%를 점하고 향, 진 인구수는 104만 1534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54.2%를 차지하고 있어 아직도 농촌 인구가 절반을 웃돌고 있다. 그러나 20세에서 59세까지의 로동력 년령층의 46%가 도시에 집중되여 있는 반면 60세 이상 년령층의 74.8%는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조선족 농촌도 점차 노인들이 지키는 농촌으로 변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우리가 인구의 위기라고 하는 부분은 역시 조선족의 저출산률이다. 1991년--2000년의 조선족 신생아 수는 총 13만 6585명으로, 1981년~1990년의 32만 9207명에 비해 60%가 줄어든 실정이다. 민족을 나무에 비한다면 10년 동안 뿌리가 60% 나 잘린 셈이다. 민족을 이어갈수 있는 인구가 없어진다. 이걸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지성인들이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위기를 불러온다. 도시로 이주하다 보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고 말한다. 출산이 감소되고 있는 원인은 농촌 조선족 총각들이 장가 못 가기 때문이다. 조선족 출산률의 급격한 하락 현상에 관해서는 90년대 중반부터 상당한 분량의 론문들이 발표되여어 감소원인의 분석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들이 제시되어 왔다. 연변조선족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2000년과 2002년에 '연변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대책회의'를 2차례에 걸쳐 개최하였다.  일부 인구학자들은 조선족인구 현상을 '인구현대화'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회의 참석자들은 그러한 분석을 뒤엎고 '인구의 기형적 감소'라는 결론에 인식을 같이 했다.2002년 회의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해법을 위한 특별과제를 설립함으로써 조선족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중앙정부와 성, 자치주 관계부문 지도자들과 행정인원 그리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담당 기구가 설립되고 2003년 11월까지 정부차원의 정책건의가 마련되였다. 조선족인구의 감소문제는 국가차원의 특별정책제정도 중요하지만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한 사회경제, 교육, 가치관 등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풀어나가야 해결될수 있는 문제이다.  국외로 시집가는 녀성들과 도시로 진출하는 녀성들이 늘어 총각들이 장가 못 간다. 교육위기, 문화위기도 출생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난다. 학생이 없기에 학교가 무너진다. 신문, 잡지를 보는 사람이 적어지기에 신문, 잡지도 무너진다. 여기에서 근본 원인이 출생 인구 감소인것이다. 국면 타개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사회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연변 조선족자치주정부의 정책적인 배려로 금년에는 조선족의 1가구 2자녀의 비례가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산재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대책이 있어야 된다. 총각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켜 농촌이든 도시든 관계없이 돈을 벌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 돈이 있으면 결혼 할수 있고 출산률도 늘수 있다.  2. 조선족 기업인들의 사명 제10회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도시화와 조선족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도시화를 실현한 민족은 조선족이라고 했다. 사실 그렇게 락관할만한 현황이 아니다. 조선족 가운데 도시거주 인구가 45.8% 된다. 개혁개방이후 도시진출 민족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민족으로 집계됐다. 올해 연변자치주에서 외국 로무를 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이 10억달러에 육박했으며 휴대한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된다. 중국에는 30개 소수민족 자치주가 있다. 이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봉급수준이 가장 낮지만 개인 저금은 가장 많다. 도시에 진출해 2, 3차산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정확히 따져야 한다. 중국 500대기업이나 상장기업 행렬에 든 조선족 기업이 없다. 기타 소수민족은 있는데 우리는 없다. 료식업, 제조업, 려행사, 유흥업 등에 진출해 있는데 기업인들이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 경제정책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점. 지금까지 중국은 세계 공장이라 할 정도로 투자유치를 해왔다. 그러는 중 자연자원에 대한 략탈성 개발과, 심각한 환경오염, 그리고 구미 나라들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반덤핑세 부과로 수출이 타격을 받는 등 부작용이 뒤따르고 있다. 한국제조업자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조선족기업들이 많이 위축되였다. 조선족 제조업자들이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것이다. 이제 조선족 기업인들은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해 중국공산당 16차 5중전회에서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는데 그 중 권장산업으로 창의산업이 지정되였다. 창의산업을 민족발전의 령혼이라고 평가했다. 대량의 인력을 사용하는 제조업보다는 창의성 하이테크산업이 진로이다. 문화산업이나 하이테크산업 및 조선족이 가장 취약한 류통업. 오염이 없고 정책적으로 지원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이점이 상당히 미흡하다. 례를 들어 조선족 대학생들을 보면 동아시아 3국 언어가 상당히 능숙하다.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중한일 3국 TV포럼에 참석했는데 3국 언어로 통역할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조선족 류학생들이었다. 이것을 우세로 생각하고 동시통역회사를 설립하는 등 이런 산업의 잠재력을 발굴해야 한다. 3.조선족 농촌의 중요성 우리 민족의 발전은 농촌문제를 떠나 생각할수 없다. 조선족공동체가 겪고 있는 모든 변화는 그 뿌리가 농촌문제에서 기인된다고 할수 있다. 우선 개혁개방을 맞아 대량의 농민들이 선조들이 개척한 땅을 떠나 도시로 진출한다. 그 결과 우리 민족 집거지역이 위축되거나 소실되고 있다. 처녀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거나 한국으로 시집가면서 농촌총각들은 결혼에서 외면당한다. 그 결과 우리 민족 인구가 마이너스 성장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고, 농촌에는 태여나는 애들이 없기 때문에 농촌에 있던 민족학교들이 문을 닫게 된다. 그 결과 민족교육은 위축되고 우리 민족 '문화영토'는 점차 축소 내지 소실되고 있다. 소위 '인구위기', '민족교육위기', '민족문화위기'는 그 근원을 농촌에 두고 있다.  제10회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집중촌건설, 녹색산업, 농촌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 등  3가지 문제가 집중 론의되였다. 도농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지난해부터 추진한 새농촌건설 운동은 제창할 바이다. 농촌에서 땅은 상당히 중요한 재산이다. 쉽게 버릴 문제가 아니다. 도시에 진출해 중등소득층의 10년 후 수입이 땅 가격에 못 미칠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다. 농촌은 꼭 지켜야 한다. 길림성 서란현의  한 50대 조선족농민이 60헥타르의 수전을 경영하고 있는데 한족 농민을 고용해 기계화 경작을 하는데 일년에 나가는 로무 비용만 30만원이 된다. 이는 상당한 기업인들도 도달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런 규모경영이나 록색 산업으로 농촌을 지켜야 한다.농촌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시와 농촌의 균형적 발전과 경제와 사회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두 개의 핵심적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 나가야 한다. 모두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농촌의 땅을 버리거나 , 돈은 벌었지만 조선족 사회는 무너져 버리는 그 어느 하나도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경제체제와 글로벌경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우리 민족 농촌경제가 형성되지 않는 한 조선족의 발전은 있을수 없다. 4.민족문화의 진흥문제 민족문화의 문제는 민족교육, 민족문화예술, 언어 등 3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교육문제이다. 학교가 적어지는 현재, 조선족들이 현성, 도시에 모이는 상황이다. 도시에서 민족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무너진 조선족학교를 도시로 옮기는것보다 도시의 공립학교의 인적자원과 공간을 리용하여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이 훨씬 효률적일수 있다. 몇 년 전에 북경의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조선족 학생 120명을 학비 2000원(한족학생의 학비는 300원밖에 안됨.)씩 지불하기로 합의를 보고 입학시켰다. 그리고 30만원을 투자해 학교 뒤 단층집에 기숙사를 마련했다. 오전은 한족학생들과 학교의 교육을 함께 받고 오후에는 기숙사에서 조선족 교원들이 두시간정도 조선어 학습, 숙제 지도를 완성하면서 훌륭한 교육의 효과를 거뒀다.  각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학교를 만드는것도 민족교육을 해결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수 있다. 문학예술에서 조선어 사용 인구가 줄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 신문, 문학지나 문예지는 살려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업인들의 도움이 상당히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문학인, 예술인들도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현대에 맞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것은 우리 문화인들의 몫이다. 문화의 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도 문화산업, 콘텐츠산업, 창의산업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언어에서 한족이나 기타 민족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는데 조선족 학생들보다도 더 표준적으로 우리 말을 구사한다. 동아시아 시대에서 두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수 있다는 것이 큰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조선어를 홀시하고 한어만 중시한다. 유명대학에 입학하는 만 중시하고 이후의 취직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을 졸업하든 두 가지 언어를 확실히 장악하면 취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현재 연변의 경우 정책상 원인으로 조선족 중소학교의 조선어 강의 시간을 많이 줄인다. 그러다보니 대학 입학시 조선어 학과에 오는 학생들은 조선어 수준이 매우 낮다. 이런 문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5.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정체성문제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력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했다. 조선족문화를 '변연문화', '2중성문화'라고 많이 담론하고 있는데 사실 '변연문화'란 100년 이전에 나온 리론이다. 아마존강류역과 같이 현대문명과 격리된 원시부락의 문화를 말한다. 연변이 중국의 변방지역, 조선반도의 변방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변연문화라고 하는것은 문화이론에 부합되는것이 아니다. 학문적인 정립이 필요하다. 중국의 주류문화에서 우리는 비주류라 할수는 있지만 조선족문화를 한족문화와의 비교에서 락후한것이라 할수는 없다. 지난 2000년 중국의 인구통계자료에서 조선족의 문화수준은 한족보다 높은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의 우리 문화를 '변연문화'라 하는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사실 중한 교류에서 북경이나 산동 등 내지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들의 역할이 엄청 크다. 변연문화란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중국조선족은 광복전의 조선문화도 아니고 현재의 조선반도 남과 북의 문화도 아닌  자체의 문화를 창조해냈다. '문화는 집단구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된(shared) 것'이라는 속성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문화는 조선족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된것이다. 조선족문화가 2중성문화이자면 그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조선족공동체가 2중성, 말하자면 2중국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선족은 2중 국적 소유자가 아니다. 그리고 문화의 변동은 또 다른 하나의 문화의 기본 속성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중국(한족, 만족 등 민족)문화와의 접촉에서  해방전의 조선(반도)문화요소가 중국문화요소에 의하여 변동이 유발되였는데 그것이 조선족문화이다. 미국은 200년 전 영국의 '와스프(WASP)'(영국계, 백인, 개신교도) 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이민 가서 세운 나라이다. 영국의 '와스프'문화와 흑인문화, 인디언과 에스키모 문화, 히스패닉문화 등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미국문화를 형성했다. 미국의 '와스프'문화는 영국문화와 전통을 같이 하지만 현저한 차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미국의 '와스프'문화를 2중성문화라 하지 않는다.  문화의 정체성은 그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사회의  정체성과 일치하다.1957년 반우파투쟁 후 중국은 조선력사에 관한 교육을 금지시켰다. 그러다보니 현재까지도 학생들은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있다. 력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한다는것이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대안을 우리 모두가 내와야 한다. 전통과 그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 문제를 확정해야 정체성을 확인할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 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여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네트워크 문제에서 192만 중국 조선족에서 50만은 관내에 진출해 있고 40만 정도가 해외에 진출해있다. 해외 진출 조선족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 네트워크가 없으면 해외 조선족들이 고독을 느낄수밖에 없게 되고 조선족 사회 구성원 감소로 나중에 민족 해체를 야기시킬 수 있다. 얼마 전 북경에서 개최된 제11회 중국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에서 국제 조선족 네트워크와 관련한 조선족 발전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조선족 발전을 위해 공헌하려는 일본, 유럽, 미국, 한국, 호주 등지의 조선족 대표들이 많이 참석했다. 대회의 총적 목표는 조선족 네트워크 구축이다.
76    [평론] 감자와 열매 댓글:  조회:6706  추천:72  2006-07-19
감자와 열매황유복 지난해 3월 외국의 어느 영향력 있는 일간지가 뉴욕, 파리, 도쿄, 상해, 서울 등 세계5대 도시 대표서점의 베스트셀러를 종합 비교분석한 적이 있다. 감동과 지혜를 동시에 주는 따뜻한 이야기와 인생 충고를 담은 생활관련 실용서적들이 가장 많이 팔렸다는 통계가 나왔다. 소설분야에서는 사실(fact)과 픽션(fiction)을 융합시킨 팩션(faction)을 선호하고 비소설분야에서는 위로와 지식을 함께 얻는 《멀티플 독서》가 세계적 경향으로 되고있다. 그것은 오늘의 독자들은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원한다는 말로 풀이된다. 우리 문단의 수필계에서도 이제는 지식을 바탕으로 한 수필들이 많아지고 있어 "신변잡기"보다는 "감동과 지혜(지식)를 동시에 주는" 수필쓰기에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하고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수필에서 담론되는 지식은 우선 정확해야 한다. 사이비지식이나 비틀어지고 왜곡된 지식으로는 차라리 쓰지 않기만 못하다. 공자가 당나라말기 혹은 그 이후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뭘? 정신 나갔다고? 그러면 "4대발명이후 사상사에는 공자가 있고 시에는 리백과 두보가 있으며 서법에는 왕희지가 있고 그림에는 오도자가 있다"고 한다면? 유머가 아니다. 어느 지성인이 쓴 수필 《신성한 비애》에 버젓이 나와 있는 말이다. 중국의 4대발명중 제지술은 동한(東漢)때(기원 105년), 인쇄술은 수(隋)나라 때 (약 1300년 전), 지남침은 전국시대(약 2300년 전)에 그리고 화약은 당나라말기(약 1000년 전)에 각각 발명되였다. 때문에 "4대발명이후"라면 시간적으로 당나라말기이후여야 한다. 따라서 공자, 리백, 두보, 왕희지, 오도자 그 어느 한사람도 4대발명이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공자가 죽을 때까지는 4대발명중의 그 어느 하나도 발명되지 않았었다. 글쓴이는 4대발명외에도 도자기에서 지페의 발명 등 여러가지 발명들을 라렬한후 ⟪그러고보면 고대 중국은 세계첨단기술을 언녕 장악한 명실상부한 과학기술강국이였다. 그런데 그후의 염황자손들은 2천년동안이나 모두 무엇하러 갔는가? 부처님의 발아래 대국을 높이 베고 잠들어버렸는가? 인생고해를 건너서 래세의 극락으로 가느라고 그동안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것을 몰랐단 말인가?⟫라고 중국의 2천년 력사를 비틀고있다. 그런데 왜 2천년 력사를 싸잡아서 야유해야 하는가? 4대발명가운데도 1천년전이나 1천 300년전에 발명된것이 있고 글쓴이가 라렬한 수많은 발명가운데는 불과 수백년전의 발명도 있는데 어떻게 ⟪2천년동안이나 모두 무엇하러 갔는가? ⟫라는 질문을 할수 있단 말인가? 글쓴이의 론리적사유에 문제가 생긴것인지 아니면 수학개념에 혼돈이 생긴것인지 독자로서는 리해할수가 없다. 글쓴이가 그렇게 비틀어버린 중국의 2000년 문명사를 전문가들의 눈을 빌려 잠간 바라보기로 하자. 프랑스의 중국연구 전문가 에이리크 레푸쉐는 ⟪르몽드(Le Monde)⟫지 2005년 6월 16일자에 기고한 《룡의 약점》이라는 글에서 ⟪1820년전까지 중국은 세계의 주요한 강대국이였다. 그러나 공업혁명의 기회를 놓치면서 중국은 19세기의 유럽과 20세기의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였다. 오늘 이 모든것들은 력사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중국은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돌아왔다.⋯2020년 중국의 GDP는 현재의 4배로 증가될 전망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삼성경제연구소 박번순 연구원은 《아시아경제, 힘의 이동》이라는 론문에서 ⟪경제사가들은 력사적으로 중국을 세계 최대의 가장 앞선 국가라고 본다. 1820년부터 내전과 기근으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1820년의 중국의 GDP(국내총생산)는 세계 GDP의 33% 정도를 차지하였고, 2000년 이상 중국은 세계의 최고국가였다.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2세기까지는 서방세계의 1인당 GDP보다 높았고, 18세기까지는 세계 평균보다 더 높았다. 16세기 대 항해의 시기에 중국은 포르투갈이나 네델란드보다 더 대규모의 기술적인 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했다. 2004년 중국의 GDP는 세계에서 제6위였고, 2005년 GDP는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제4위가 되였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2005년 12월에 "구매력평가기준으로 중국 경제력이 2017년쯤 미국을 앞지를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것은 1820년 이후 세계력사의 흐름에서 강자의 위치를 내놓았던 중국이 200년 후에 다시 세계의 최강자로 재등장하게 된다는것이다. "염황자손들은 2천년동안이나 모두 무엇하러 갔는가? 부처님의 발아래 대국을 높이 베고 잠들어버렸는가?"라는 글쓴이의 물음에 중국경제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수치를 따지면서 "1820년전까지 중국은 세계의 주요한 강대국이였다","2000년 이상 중국은 세계의 최고국가였다"라고 대답한다. "진부한 관념상에서는 유구한 력사가 일종의 자랑일수도 있으나 현대시점에서는 전진의 길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주지하다싶이 유구한 력사는 획시대적이고 거족적인 발걸음에 반하여 현대화의 큰 강을 건너는데 이미 짐이 되였다"라고 하는 글쓴이의 시각에서는 중국의 "유구한 력사"가 아니꼽기만 하다. 그러나 만약 그 "유구한 력사"와 유구한 력사과정에서 축적해온 문화의 힘이 없었다면 중국이 최근 20여년간 세상을 놀라게 한 경제의 고도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룩해 제4의 경제대국으로 될수 있었겠는가? "모종 의미에서는 력사가 간단한 나라일수록 좋다", "미합중국을 보라. 그들은 200여년의 짧은 력사를 기록하고있으나 과학기술발전사는 세계를 놀래우고있지 않는가? 초대강국이 되여서 아메리카사자마냥 온 지구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제패의 발톱질을 하고있지 않는가?" 그런데 미국이라는 "국가"의 력사가 길지 않더라도 미국을 만든 사람들은 원래 공업혁명을 주도하던 "대영제국"의 국민들이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력사는 결코 간단하지도 짧지도 않다. "와스프(WASP-백색, 영국계, 개신교도)"들은 아메리카대륙에 건너가서 원주민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아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20세기 초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의 주도권을 쥘수 있었다. 미국은 력사가 짧기때문에 초대강국이 된것이 아니다. "채륜의 종이, 장형의 지동의, 꽃불로 하늘을 수놓는 폭죽, 좌청룡우백호따위나 찾는 지남침"이라고 글쓴이는 중국의 4대발명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폄하하고있다. 중국의 4대발명은 제지술, 인쇄술, 지남침과 화약이다. 지남침의 경우 "좌청룡우백호따위나 찾는"것이 아니라 "16세기 대 항해의 시기에 중국은 포르투갈이나 네델란드보다 더 대규모의 기술적인 선단(船團)을 거느리고있었다"고 한것처럼 중국은 16세기에 지남침을 항해에 리용했던것이다. 수필의 마지막에서 글쓴이는 "사람은 감자가 아니다. 뿌리에 매달려 클것이 아니라 뿌리가 공급하는 자양분으로 무성하는 가지에 주렁진 열매로 향기 풍겨야 바람직하다"라고 한다. "뿌리가 공급하는 자양분으로" 자란다는 의미로는 "뿌리에 매달⟫린 감자나 "가지에 주렁진 열매"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아무리 "향기 풍기"는 열매라도 뿌리가 없으면 자랄수도 존재할수도 없다. 구태여 감자와 열매를 구별시킨다면 괴상(塊狀)의 땅속줄기인 감자는 열매에 비해 모양이 투박하지만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영양소가 거의 다 들어있는 《건강식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열매도 비교되지 않는다. 쌀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식민통치시기 감자는 우리 민족 농민들을 아사(餓死)에서 구제해준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별 리유없이 글쓴이는 18세기 영국인들처럼 감자를 비천하게 생각하고있다는 느낌을 주고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글쓴이가 "200여년의 짧은 력사를 기록하고있으나 과학기술발전사는 세계를 놀래우고있"다고 한 미국도 감자가 아니면 력사가 분명히 바뀌였을것이다. 스튜어트 리 앨런이 쓴 "악마의 정원"이라는 책에 따르면 감자는 18세기 영국인 신교도들에게는 라태의 상징이였다. 그들은 아일랜드인들이 빵 대신에 지저분한 뿌리(감자)나 먹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잠이나 자고 간통이나 즐기는 족속으로 변해가고있다고 여겼다 한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영국인들도 감자를 받아들이였다. 감자는 밀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수 있었기때문이였다. 1845년 감자마름병이 발생하여 아일랜드의 감자산량이 5년간 90%가 감소되자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죽었고 130만명이 미국으로 이민했다. 케네디대통령의 조상도 그때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의 국부로 모셔지는 조지 워싱턴도 감자를 심던 농장의 농장주였다. 감자는 병사들의 식량으로 미국 독립전쟁에도 공헌했다. 1995년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식량으로 착안한 작물도 감자였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프렌치 프라이를 만드는데 년간 140만톤의 감자를 쓰고있다. 감자가 없는 미국의 음식문화는 상상조차 할수 없다. 감자이야기하다 보니 이승희의 시 《씨앗론》이 생각난다. 《꽃이 피거나/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본성이 아닌 거야/검은 흙 속을/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온 시간들이/단단하게 뭉쳐 있다가/풀리는 일이야//감자꽃이 피는 것은/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땅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생겨나고 있다고/고백하는 것이지》.
75    [수필] 푸른 꽃 댓글:  조회:6617  추천:66  2006-06-22
푸른 꽃황유복 독일 랑만파의 대표시인인 노발리스(Novalis)는 1801년, 29세의 나이에 페병으로 죽으면서 "푸른 꽃(Die Blaue Blume)"이라는 소설을 남겼다. 소설의 주인공 하인리히는 꿈에서 푸른 꽃과 푸른 꽃이 변한 상냥한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소녀를 찾아 먼 려행길을 떠난다. 마침내 아우구스부루크에서 시인 크링스오르와 그의 딸, 푸른 꽃에서 본 모습의 마틸데를 만난다. 그는 다시 마틸데가 거센 풍랑을 만나 죽는 꿈을 꾸는데 그 꿈은 현실로 변하고 마틸데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녀의 죽음은 그가 시인으로 되는 결정적인 체험으로 된다. 노발리스가 푸른 꽃을 사랑과 행복의 상징으로 선택했고 또 주인공이 그것을 찾아 먼 려행길을 떠나게 하는것을 보아 독일에서는 푸른 꽃이 너무나 희귀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 문단의 한 수필인은 최근에 발표한 수필 《꽃은 지고 욕망은 남고》("장백산" 2005년 5호)에서 "푸른 꽃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우리 조상들은 왜 "하늘빛과 초록빛⟫을 구별하지 않고 합쳐서 푸른빛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푸른 꽃⟫이라면 번거롭더라도 일단 그것이 하늘색 꽃인지 초록색 꽃인지를 가릴수밖에 없다. 노발리스의 "푸른 꽃"은 하늘색(Blaue) 꽃이 분명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하늘빛의 푸른 꽃으로는 현호색이나 염아자를 들수 있다. 현호색은 양귀비과의 독이 있는 작은 풀로 이른 봄 양지바른 숲속이나 논둑에서 연한 하늘색의 꽃을 피우는 약용으로 쓰이는 풀이다. 염아자는 도라지과의 식물로 골짜기 습지변에서 자라는데 꽃은 짙은 하늘색이다. 《꽃은 지고 욕망은 남고》를 쓴 수필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푸른 꽃"은 초록색 꽃인것 같다. 글쓴이는 "꽃은 푸르른 생명의 빛갈인 초록을 피"한다면서 "수많은 꽃중에 유독 저 흔한 푸른색은 없는 리유를 다시 생각는다. 빨강, 노랑, 분홍, 하양, 감장, 보라, 주홍 그리고 알락달락 혼합 꽃"그러나 유독 파란 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푸른빛 꽃을 상상해보라. 너무 기름져서 꽃이 꽃다워 보이겠는가"라고 자신의 주장에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그 "푸른빛 꽃을 상상"해야 할 리유는 전혀 없다. 초록색의 푸른 꽃은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할뿐만아니라 "꽃이 꽃다워 보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 푸른 꽃들은 "과학이 발전"하여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것도 절대 아니다. 우리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산이나 들에서 볼수 있는 고유식물중에서 초록빛의 푸른 꽃으로 가장 흔한것은 아마 천남생일것이다. 천남생과의 유독성식물로 중국 고대의 청동술잔모양의 록색 혹은 자색 꽃을 피우며 가을에는 붉은 열매를 맺는데 덩이뿌리를 약재로 사용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북경지역에서 흔히 볼수 있는 푸른 꽃은 록색꽃 란초와 록색꽃 국화일것이다. 꽃과 잎이 모두 록색이지만 꽃의 색갈은 잎보다 좀 연하기때문에 소박하면서 운치가 있어 좋다. 홍화록엽(紅花綠葉) 의 꽃들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눈에 강한 자극을 주기때문에 글을 쓰거나 책을 보다가 지친 눈을 휴식시키기에는 별로이다. 그러나 연한 록색꽃이 피는 춘란, 나비란(蝴蝶蘭) 그리고 소국(小菊), 국화는 서재에서 키우면서 눈의 피로를 가셔내는데는 일품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불교학사전"에서 수련(睡蓮)을 찾아보면 수련을 우담바라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푸른 꽃이 피는 수련을 가장 높이 치고있다. 련꽃도 푸른색 꽃을 피우는데 불교에서는 푸른색 꽃이 피는 수련을 가장 귀중하게 본다는것이다. 그보다도 우리가 가장 흔히 볼수 있는 푸른 꽃은 아마 강아지풀일것이다. 시골은 말할것도 없고 도시의 길가에서도 곧잘 자라기때문에 누구라 할것 없이 자주 만날 수 있는 풀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친구들과 놀면서 강아지풀의 꽃차례를 따 반으로 갈라 코밑에 붙여 수염으로 삼기도 했고 또 꽃차례를 따 손바닥에 놓고 가볍게 흔들어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강아지풀 게임도 했다. 우리는 흔히 강아지풀을 보잘것 없는 잡초로 생각하기때문에 강아지풀도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린다. 그러나 그토록 하찮게 보이는 강아지풀꽃에도 아름다운 꽃의 탄생 설화가 깃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옛날 로마에 유명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로 병도 치료해주었을뿐만 아니라 머리도 깎아주었다. 또한 그는 왕실 사람들의 치료와 리발도 맡아해주었다. 하루는 왕자가 평민들의 머리를 자르는 의사의 가위가 싫어 황금가위를 주면서 머리를 깎으라 했다. 황금가위가 잘 들리 없었고 몇올의 머리카락이 가위에 씹혀들자 왕자는 벌컥 화를 내면서 의사를 처형하겠다고 감옥에 처넣었다. 의사는 자신의 생명보다 왕자가 무고한 자기를 처형함으로써 왕자의 덕성에 허물이 생길것이 걱정되여 자결했다. 한편 부왕의 꾸지람을 듣고 잘못을 깨달은 왕자가 감옥을 찾았을 때 의사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후 의사의 무덤에 작은 풀이 돋아나 바람에 나부끼면서 긴 목을 빼들고 누군가를 향해 그건 아니라고 애처롭게 도리질을 했다. 바로 강아지풀이였다. 그 강아지풀들이 이제는 《푸른 꽃은 없다》고 하는 인간의 독선을 향해 그건 아니라고 도리질하지 않나 싶다. "꽃이 푸른빛을 피하는 까닭을 알면 세상이 편해진다.⟫라는 담론으로 시작되는 수필 《꽃은 지고 욕망은 남고》의 짜임은 3단 구성으로 되여 있다. ①꽃은 푸른빛을 피한다(파란 꽃은 없다) ②그 까닭을 알면 ③세상이 편해진다. 그런데 론술의 대전제로 되는 ①⟪파란 꽃은 없다⟫는 판단이 완전히 틀리기때문에 ② 푸른 꽃이 없는 까닭에 대한 론리의 전개는 공중루각일수밖에 없고 ③ ⟪세상이 편해진다"는 결론도 무효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론술과정에 "꽃은 여러 식물중에서도 유독 생명력이 짧다"라는 주장도 보이는데 너무나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여서 리해가지 않는다. 꽃을 식물의 한 종류로 분류할수 있단 말인가? 꽃은 꽃을 피우는 모든 식물에게 있어서 생명의 한 순간일뿐이다. 론술형 수필을 쓰면서 잘못된 판단을 대전제로 삼은 글들이 가끔 보인다. 수필 《팔이 안으로 굽혀지는 리유》("도라지"2005년 제5호)에서 글쓴이는 "조물주는 왜 인간에게만 안으로 굽히는 팔을 선사했을가"라는 질문으로 론리를 전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물주"가 인간뿐만 아니라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이나 원숭이들에게도 "안으로 굽히는 팔을 선사⟫했음은 유치원어린이들도 다 알고있는 상식이라는 점이다. 과학철학자 어니스트 네이글은 "과학의 구조"라는 저서에서 상식이란 코앞의 헛간을 총으로 쏘아 맞히는 정도의 헐렁한 기준을 만족시키는 지식이라고 했다. 누구나 다 알고있는 "헐렁한 기준을 만족시키는 지식"조차 올바르게 쓰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꽃은 인간을 위해 피는것이 아니다. 꽃은 자기 종족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하여 피여난다. 렬악한 환경에서 피여난 야생화일수록 꽃의 색갈과 향기가 더 짙어진다는것은 너무 어렵게 만나는 벌이나 나비들을 놓치지 않고 유혹하기 위하여 한껏 꽃의 매력을 발산하기때문이다. 꽃을 피우는것은 절박한 상황에서 종족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식물들의 처절한 몸짓이다. 그러한 꽃을 바라보면서 인간들이 정서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다. 한떨기의 작은 풀꽃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고 전설이나 꽃말을 만들어주는것은 인간의 랑만이다. 보잘것 없다고 여겨지는 작은 풀꽃 하나라도 생명이 소중하다는 리치를 알고 그 꽃들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가는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이다. 다만 내가 보지 못했으니 이런 혹은 저런 꽃은 없다든지 내가 싫어하는 색상의 꽃은 없다는, 상식조차 무시한 인간의 독선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74    남호손의 수필을 읽을 때 댓글:  조회:6020  추천:74  2006-06-01
구운 옥수수를 먹는 기분으로 손 뜨거운줄 모르고 쥐기는 쥐였지만 뜨거워서 입에 대지 못한다.급하면 안되는줄로 안다. 너부 술술 읽게 되기 때문에 내가 속도를 공제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다 읽어내려가 버린다. 절대 급히 읽어서는 안되는, 빨리 읽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까운 글이라 나는 이렇게 천천히, 앞질러 달려가는 눈길의 옷자락을 당긴다. 천천히 읽어내려가며 음미하는 재미란 옛날 맛있는 사탕알을 천천히 녹여먹는 기분이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순수한 사랑이 아름답고 국제적의식이 우리 문화에 융합되여 표현이 된다. 아메리카에서 춘향의 수집음이 등장해도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허무궁: “나는 글을 이렇게 읽는다” 《도라지》2005.2
73    단평 댓글:  조회:5429  추천:70  2006-05-30
단평 황유복선생의 《선택》은 바로 우리 조선족들 모두의 앞에 놓여진 선택을 설교가 아닌 명확한 수치와 사실적 근거들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으로 태여나서 유아시절의 선택으로부터 성장기에 들어서 개인적인 인생선택, 그리고 나아가 사회적인 민족의 선택, 황유복선생은 개인과 민중, 민족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들이 거쳐 온 선택과 또 해야 할 선택들을 하나하나 귀맛있는 의론으로 렬거하면서 나중에 우리 민족앞에, 조선족으로서의 우리앞에 놓여진 선택을 끄집어낸다. 하기에 수필은 정론성이 강하지만 딱딱하지않고 읽을 맛이 있다. 더군다나 마지막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배사람을 위한 순풍은 있을수 없다》 는 철리적인 결론으로 황유복선생은 이런 선택 저런 선택 하지만 결국 우리앞에는 오로지 정진(精進)하는 하나의 선택밖에 없다는것을 말해준다. 전경업: “수필, 정서의 매듭을 풀어라”,《도라지》2001.4 현실적인 삶은 현장의 감각을 위주로 진행이 되지만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의미부여도 삶의 주요한 부분이 아닐수 없다. 토속적인 고향, 사모했던 처녀의 모습이 그에의 그리움으로 차있는 화자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에 걸쳐 유기적인 관계로 잘 펼쳐지고있는《옥년이와 봇나무》(《도라지》,2002.1) 에서, 참된 인간성에 대한 추구는 여전히《완강》하게 안겨왔다. 어릴적 옥년이한테서 봇나무를 배우고 젊어서 련인에게 봇나무를 읊조리고 이제 봇나무의 순리를 익히고 따르려는 저 모습은 하얀 내음이 가득 풍기는 살아있는 또 다른 봇나무인가. 김경훈: “정, 사랑, 진실과 가공의 사이”, 《도라지》2002.2 《도라지》에 실린 남계의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 》, ⋯는 그 어떤 생활현상이나 사실, 사건과정에 대한 표층적인 따분한 서술정도에 그치고마는것이 아니라 생활의 섭리, 인생에 대한 심층적사고에로 접근해가는 자세가 유달리 이뻤다. 《가난이 선물하는 삶의 지혜》에서 작자는 학창시절 어느 한번 학습에서 성적 1등을 따냈지만 가난때문에 람루한 옷으로 하여 선생이 다른 학생을 무대에 나가 상장을 받도록 하고 기념사진마저 못 찍게 한 설음을 되새기고나서 이렇게 쓴다. 《가난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바가 더욱 많다. 우선 가난은 인간에게 불편함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주면서 세상을 정확하게 볼수 있는 혜안을 선물해준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항상 꿈이 있기 마련이다. 그 꿈은 인간으로 하여금 눈앞의 가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심을 갖게 한다. 부족함과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뜻의 넉넉한 삶을 살아갈수 없다.》(《도라지》2002,3호, 제105페지) 그래서 공자님은 《인(仁)》과 함께 《인(忍)》을 인덕이라 하고 다른 한 현인은《궁하면 변혁을 꿈꾼다》고 튕겼던것일가. 상기 인용문은 작자의 인생살이에 대한 진실한 체험의 개괄, 신념의 확인일것이다. 인생을 심오하게 체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런 글을 써낼수 없는것이다. 이 수필은《가난》과《선물》이란 두 개 부호로 체험된 인생의 철학을 깨쳐주고있는것이다. 책이나 일상에서 떠도는 개념이나 설교에서 초월하여 자기나름대로의 사고를 할줄 아는 그 근엄한 얼굴표정이 유난히 미쁘다. 전국권:“수필창작의 황금시대”,《도라지》2002.4 수필가가 현실의 방관자일수 없다는 말이 성립된다면 수필이 과거지향적일수 없다는 말도 성립된다. 우리의 과거는 오늘을 위한 과거이고 우리의 력사는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력사이며 우리의 자연은 현제와의 관련속에 존재하는 자연이다. 현실과 격리된 과거는 과거를 위한 과거일뿐이고 현실과 떨어진 자연은 음풍영월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관조와 달관이라는 미명아래 꽤 오랜 시간동안 수필을 현실에서 격리시켰었다. 거기에는 또한 현실비판의 수필이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리유도 한몫했다.하지만 남계의 수필은 우리의 이러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된것인지를 잘 보여주고있다. 필자는 일찍《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란 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남계의 수필에 흠뻑 취했던적이 있다. 담담하고 조용하지만 진지하고 무게가 있었다. 현란한 수사나 의도적인 구성이 없지만 문맥이 류창하고 문체가 탄탄했다. 이번 《도라지》 4호에 실린《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역시 남계 특유의 진지한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의 비교속에서 오늘의 삶에 충실하는 인생이고 싶다는 소박한 다짐이 설득력 있게 잘 안겨온다. 이 수필의 설득력을 필자는 작자의 진지한 창작자세, 몸소 겪었던 두 번에 걸친 사고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성, 그리고 탄탄한 문체에서 찾고싶다. 한마디로 작자의 진지함과 그 진지함을 설득력으로 바꿀수 있는 문학적능력이 이 수필의 진정성을 확보하게 한다. 인생관조의 수필이 많아지면서 우리 수필계에도 죽음을 대상으로 한 수필이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사실 그 진지함보다는 일시적인 호기로 비쳐지는 경우가 많아 이 수필과 대조를 이룬다. 당위성을 강조한 제목에서 혹 설교조가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본문을 읽다보면 잔잔한 서술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력사학이 전공인 작자의 글이 어느 문학인의 작품 못지않게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점은 시사하는바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서영빈:“수필의 진정성을 위하여”, 《도라지》2002.5 황유복의 수필쓰기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리유는 그로 하여 우리가 학구적 치밀성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학자수필을 대할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영빈:“소비적인 삶과 수필문학의 선택”,《장백산》2004.1 남호손의 《,4월을 보내면서》에서는 례년보다 일찍 찾아온 작년 북경의 봄 더위와 그 《잔인한 더위》에 워낙 짧은 화기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져버린 봄꽃들, 그리고 작자 자신의 지나온 청춘의 아쉬움을 관련시키고 있다. 나이 지긋한 분이 웬 꽃타령이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꽃에 대한 감정은 나이에 별로 상관이 없다.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소실에 대한 서글픈 감정이 누구라고 다르랴. 꽃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의 존재기간은 매우 짧다. 거기다가 작년봄 북경의 화기는 이상기온 즉 너무 일찍 찾아든 고온과 강한 햇볕 때문에 더구나 짧았다. 그러니까 워낙 짧은 생을 너무 일찍 마감하고 스러진 꽃을 보며 처녀들이 떨어진 꽃잎을 줏는 행위는 너무도 당연하다하겠다. 저 유명한《홍루몽》의 림대옥도 그래서 떨어진 꽃을 주어 매장하고 장사한것이리라. 그런데 이 수필의 매력포인트는 바로 문화대혁명이라는 너무도 뜨거운 태양 때문에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자신의 청춘을 서글퍼한다는데 있다. 그것은 작자 한사람만의 불행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명과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작품에 인용된 꽃에 깃든 옛 시인들의 시구들은 이러한 감동을 우리 인생사 일반에 확산시키는 구실을 하는것 같다. 로년에 수필에 입문하여 등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써나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무르익어가는 문장의 세련미도 이 수필가를 돋보이게 하는 한 측면이다 장춘식: “도시적상상력: 수필시대가 도래하는가”,《도라지》 2005.1
72    한 사람의 힘 댓글:  조회:5647  추천:96  2006-05-26
한 사람의 힘 김 화(수필가, 교사) 대학시절에 죤 G. 아빌드슨이 감독한 영화 《파워오브원(The power of one)》을 본후로 한 사람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사람의 힘은 얼마나 될까? 인간세상의 움직임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위인들 개개인의 힘은 얼마이고 문학작품에서 풀로 자주 비유되는 평민백성의 힘은 얼마일가? 한 사람의 힘을 물리에서 뉴톤의 개념으로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어도 우리는 눈으로 귀로 그 힘의 정도를 느끼며 살고 있다. 지구상의 인간 개개인의 힘의 크기는 참으로 천차만별일것이지만 그런 힘이 합쳐서 인간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다시 영화를 상기시켜본다면 주인공인 PK는 특이한 생활경력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인민들의 마음속에 레인메이커(rainmaker)로 추앙되여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들에게 확고한 신념과 힘을 심어주었다. 영국인인 PK가 결국은 인종철폐운동에 나서는데 영화에서는 주인공 PK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아주 감명 깊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조선족사회의 한 성원인 이분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힘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중앙민족대학의 황유복 교수님이시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직접 황교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지난여름 한국에서 열린 《2003년 한국학국제학술회의》에서였다. 가까이에서 만난 황교수님은 듣던 소문 그대로 《틀이 없고 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리해를 해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분명히 밝히며 상대방을 끌어가는 강한 힘》이 있었다. 중국, 미국, 일본… 등 17개 나라에서 온 동포교육자들이 참석한 그번 학술회의에서 황교수님은 중국조선족동포교육현황에 대해 소개하고 존재하는 문제점과 해결책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2000년 전후의 한국경제와 중한경제교류의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면서 인력난을 겪고 있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소위 한국 내 《조선족불법체류자》들은 한국경제가 IMF를 극복하는데 일조한 공로자들이고 중국조선족은 한국경제발전의 공신들임을 역설하였다. 이어서 황교수님은 《한국정부와 한국국민은 대 중국 시각과 대 조선족 시각을 전환해야 할 시대가 왔음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청와대에서 대통령 영부인과 함께 한 자리에서 황교수님은 조선족을 대변하여 한국은 조선족동포들의 도움으로 생기는 대중무역흑자의 천분의 1이라도 조선족교육에 써달라고 요청했다. 황교수님의 연설은 마디마디 설득력이 있어 때론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때로는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했다. 황교수님의 파워는 조선족사회문제점을 적시적으로 감안하며 대안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또한 행동으로 밀고나가는데 있다. 황교수님은 민족교육이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 중국 내지 도시의 우리 민족 학생들의 민족언어상실문제를 제기하였다. 부모들을 따라 중국 내지도시에 들어온 학생들은 현지에 조선족학교가 없기 때문에 완전히 민족어를 상실하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족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속도가 빠를수록 우리말을 상실하는 청소년의 증가도 빨라지게 된다. 그는 민족언어를 상실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민족교육은 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민족언어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황교수님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아껴 모은 돈으로 1989년에 북경조선어학교를 설립하였다. 현재까지 심양, 장춘, 할빈, 목단강, 단동, 길림,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등 도시에 분교를 설립하여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뜻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가담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9회에 걸친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의 개최를 통해 민족교육, 민족경제, 민족인구, 민족문화 그리고 민족정체성 등 조선족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벤처산업인재육성, 장학재단운영, 민족문화사업 지원, 록색기술대학설립 등 황교수님은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국제적인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사회활동가로서 맹활약하고 있는 황교수님은 우리 마음속의 레인메이커이다. 그가 조선족발전에 기여한 많은 업적들은 필자의 짧은 필력으로 다 표현할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황교수님과 같이 우리민족을 위하여 힘을 바치는 사람들을 필자는 다 레인메이커라고 말하고 싶다. 가뭄이 들어 갈증으로 타들어가는 대지와 모든 생명에 비를 청하여 주고 지켜주는 레인메이커라고. 《우리 민족의 전체 구성원들은 남과 녀, 로와 소를 가리지 않고 힘을 합쳐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황교수님의 이 한마디 말로 끝을 맺으면서 우리 모두 이 사회속에서 자신의 힘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것이 어떨가 싶다. (《연변통신》2004.2)
71    인생달관자의 여유 댓글:  조회:5417  추천:89  2006-05-24
인생달관자의 여유 남복실(수필가) 《도라지》에 실린 황유복교수님의 수필을 거의 다 읽었다. 력사학자가 쓴 글인데도 오랜 문학수련을 거친 작가의 글처럼 참 편하게 읽혀진다. 첫사랑, 눈사람, 이름, 저녁노을, 할머니…등을 주제로 한 글에서 진솔한 내면의 고백이 가슴에 와닿는가 하면 사학자로서의 박학다식, 정의를 부르짖는 작가의 주장 등이 생경한 설교로서가 아니라 진실한 삶의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글 중간에 문득문득 튀여나오는 위트나 유머는 읽는이들을 흥분시킨다. 또한 비전문인이 쓴 글이라서 소재면에서 신선하고 다양하여 언제나 기대가 되는 글이다. 개인적으로는 《남자․술․ 그리고 약속》이란 글을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 서두, 결말은 물론이고 글 사이사이에 인생달관자의 여유와 멋이 넘치여 아주 인상깊다. (《도라지》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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