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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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1
2012년 11월 07일 15시 21분  조회:3264  추천:2  작성자: 김희관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머리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앞두고 연변조선족문화 60년을 도리켜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여러 저작과 문헌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또한 필자가 문화와 TV방송분야에 봉사하면서 경험한 옛일들을 회억해 보았다. 그 와중에 떠오르는 소감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너무나 벅차다. 다만 민족이 살아 있어서 문화가 살아 있고 문화가 살아 있어서 민족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절실히 든다.
 
문화예술은 민족얼의 요람이요, 민족감정과 정서의 다이야몬드이다. 필자는 우리가 정치,경제,사회를 발전시키는 종착역은 문화예술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나이테도 이제는 60년이 다 되여 환갑을 맞게 된다. 지금은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다시한번 정중히 뒤돌아 볼 때가 되였다. 우리 겨례의 얼이 다이나믹하게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에 대해 반성을 하고 앞으로 적어도 천년은 함께 잘 살아가자고 약속이라도 하고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해방을 맞은 연변조선족문화예술
 
1945년 8월18일, 연길이 일제의 통치하에서 해방되면서 연변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은 민중의 기쁨은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역동적인 문예활동으로 피여나기 시작했다. 9월, 연길에서는 <간도예문협회>가 창립되여 문예활동이 조직적으로 시작되였다. 10월15일, <이스크라가극단>이 연길에서 창립되였고 11월 7일부터는 러시아10월혁명기념일을 맞아 연극<에미레종>, 바라이데<해방의 종소리>를 공연하기 시작하여 순회공연까지 하였다. 그 때로부터 쓰딸린극장은 매일 연극,가무와 영화상영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해방을 맞은 민중의 기쁨이 농촌에서는 촌마다 연극을 놀고 남녀로소가 못청껏 노래를 부르는 열광적인 대중문예의 축제로 이어졌다. 우리민족 연극계의 태두이신 허동활선생은 자신의 연극인생 60돐을 맞아 <예술세계>에 실은 회고록<인생이 녹아 연극이 되고 연극이 녹아 인생이 되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945년8월, 우리는 모두 <만세!>를 목청껏 웨치면서 해방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겨울에 접어들어 저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조양천 허촌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농민야학교 선생으로 나섰습니다… 1946년 설을 맞이 하여 마을청년들이 저에게 청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이번 설은 잘 놀아봅시다…> 행복한 고민에 빠졌던 어느날 저는 불꽃 튀는 아이디어를 잡고 무릅을 탁 쳤습니다. <연극을 해보자! 해방의 기쁨을 노래해야지! 내가 극본을 써보자!> 연극의 불꽃은 이렇게 점화되였고 그 연극의 불씨는 저의 첫작품<해방된 기쁨>을 낳았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민족의 문화예술은 중화대지에서 <노래와 춤의 고향>으로 발돋음하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민족문화예술의 기반을 다지던 세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시자이신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동지는 1949년 봄 연변에 부임되여 오시자마자 연변대학과 연변가무단을 창립하시고  우리민족의 교육,문화예술사업의 개척과 발전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하시였다. 지난 4월초 주덕해동지 탄신 100주년을 맞아 우리는 그의 공덕을 기리고 앞으로 우리의 자치주를 더욱 번영발전시킬것을 다졌다.
 
건국이후 연변의 문화예술계는 당의 민족정책과 문화예술방침의 지도하에 민족문화예술의 기반을 닦기위해 여러방면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50년1월, 중공연변지위 선전부장 최채동지의 창의하에 연변문예연구회가 성립되였고 그 기초상에서 1953년7월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문련)을 창립하였다. 문련기관지<연변문예><장백산>조문판월간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사진 등 성과작들을 실기 시작했다.
 
1956년8월, 국내 소수민족지구의 첫 작가협회인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창립되면서 기관지  월간잡지<아리랑>(원 <연변문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959년3월, 연변문련은 산하에 음악가협회, 무용가협회, 희극가협회, 미술가협회, 촬영가협회, 민간문학가협회를 성립했다. 얼마후 구연가협회,서예가협회를 성립했다. 1959년부터 1961년기간에 연변의 각현시에서도 문련을 성립하여 문예대오를 이끌기 시작했다.
 
연변조선족의 전업예술표연단체들을 일찍히 첫발을 내디디여 거족의 발전을 가져왔다. 연변가무단은 국내에서 가장 일찍히 성립된 가무예술표연단체이다. 연변가무단의 전신은 1945년12월에 건립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전대였다. 초기에는 길동보안군정치부 문예공작대였고 길동군분구정치부 선전대, 연변문공단으로 되였다. 1949년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 문공단이 전신인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문공단이 할빈에서 연길에 나와 연변문공단과 합류했다. 그후 연변문공단은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민족사무처 문공단, 연변문예공작단, 연변조선족자치구가무단을 거쳐 1956년4월에 연변가무단으로 자리 잡았다.
 
1956년1월 연변가무단의 연극대는 연길현문공대와 합병하여 연변연극단으로 재건됐다. 1956년6월부터 1961년기간에 연길현,화룡현,안도현,왕청현,훈춘현에 전업문예단체12개(한족문예단체포함)가 성립되였는데 연직원대오가 800여명에 달했다.
 
연변에서 조선족문화관사업도 일찍히 시작되였다. 1949년5월부터 1951년기간에 연길, 도문, 룡정, 화룡, 안도, 훈춘, 왕청 등지에 문화관이 성립되여 조선족대중문화사업의 선줄군이 되였다. 특히 1960년7월 연변군중예술관이 성립되여 <새이야기> <무지개> <해란강> 등 군중문화예술보도간물을 출판하고 여러가지 대중문화보급사업을 벌리면서 전주 조선족문화관의 중심추가 되여 전주 조선족군중들의 문화예술사업을 더욱 조직직이고 전업적으로 지도하고 이끌수 있었다. 또한 1956년 6월 연변총공회에서 연변로동자문화궁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연변각지의 도시와 향진의 업여문화구락부 3,700여개소가 운영되여 대중적인 문화예술활동이 활기에 넘쳤다.
 
민족문화예술이 꽃피기 시작한 시절
 
연변가무단은20세기 50년대초부터 민족예술의 꽃을 피우면서 국내외에서 그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건국1주년 당시 연변문공단은 국무원의 초청으로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택동주덕 주은래총리 등 당과 국가 령도자들을 모시고 독창<아리랑> <베짜기노래>, 무용 <밭갈이춤> <절구춤> <꼴호즈춤> 등 정채로운 절목을 공연하여 발수갈채를 받았다. 모택동주석은 연변가무단과 형제민족민족예술단의 공연을 보고나서 흥에겨워 <완계사 – 류야자선생에게 화답>이라는 저명한 시편을 쓰시였다. 또한 연변문공단 단장이 모택동주석에게 두루마기를 입혀드리고 벼루 등 기념품을 드리는 등 축하행사도 있어서 더욱 흥겨웠다. 그때부터 우리의 민족예술은 국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연변가무단의 대합창, 관현악협주곡과 녀성고음독창은 일찍부터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1956년8월 북경에서 열린 <전국음악주간>에서 대합창 <장백의 노래>가 절찬을 받았다. 1957년 쏘련 모스크에서 열린 제6차세계청년련환절 예술콩클에서 방초선의 녀고음독창 <처녀의 노래>, 대합창 <장백의 노래>(녹음작품)이 은상을 수여받았다. 그때로부터 우리의 민족예술은 세계무대에 데뷔했다.
 
1957년 연변가무단은 북경에서 열린 <전국무용주간>에서 <물동이춤>과 <농악무>를 표연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모택동주석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60년 주은래총리께서 <물동이춤>을 보시고 < <물동이춤>은 창작기교가 아주 높고 민족색채가 짙은 성공한 무용작품이다.>라고 평가하셨다. 후날에 연변가무단의 <농악무>와 <물동이춤>은 영화로 제작되여 전국에서 방영되였다.
 
연변가무단에서는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선후로 70여명의 무용배우들을 전국 12개 형제민족예술단에 보내여 <연꽃춤> <차따기춤> <신강손북춤> <몽골춤>  등 38개의 형제민족들의 춤을 배웠다. 그동안 연변가무단과 각현시문공단들이 다른 성시의 무대에서 정채로운 공연을 하여 여러민족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변가무단은 성립이래 대중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새로운 가무프로를 부단히 창작해 도시의 무대에 올릴뿐만아니라 농촌과 공장을 찾아 많은 공연을 하였다.  또한 1965년까지 북경에서 초청공연을 5차례나 했다. 또한 건국1주년, 건국10주년 경축연출에 참가함과 아울러 외국원수들과 우호인사들을 위해 특별공연을 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당과 국가 유관부문의 지대한 중시와 관심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변가무단은 국내외에서 연변을 <노래와 춤의 고향>으로 홍보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연변연극단은 건단이후 1966년까지 10년동안에 연극예술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여러차례 <길림성농촌공연선진단위>로 인정받았다. 그들은 연변각지와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지를 찾아다면서 60여부 연극을 2,100차례나 공연하여 153만 2천여명의 관중들이 그들의 정채로운 연극을 보면서 희노애락을 같이 했다. 그중에는 고전명작 <춘향전> <심청전> 등 4부와 번역극 <뢰우> <홍기보> <붉은바위> <청춘의 노래> <뢰봉> <네온싸인아래의 초병. 등 30여부를 공연했으며 창작극 <장백의 아들> <귀환병> <보통로동자를 위하여> <5.1절 전야> <광활한 천지> 등 32부를 공연했다.
 
장막극<장백의 아들> (황봉룡 박영일 1959년 작)은 국경10주년 헌례작으로서 1930년대 장백산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배경으로 일제의 소굴에 침투한 항일지하공작자이며 공산당원인 박철의 영웅적형상을 묘사한 연극이다. 장막극<장백의 아들>은 <사상내용의 심도, 인물형상의 높이, 희극양상의 성숙정도를 보나 모두 손색이 없는 30여년래 연변조선족희극예술의 리정표식 가작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막극<장백의 아들>은 426차례나 공연을 하여 45만 5,300여명 관중들이 관람하여 <문혁>전 창작연극 관람관중 최고기록을 냈다. 고전명극<심청전>은 모두 672차례 공연하여 66만4400여명이 관함하여 건국이후에서 <문혁>전까지 연극관중 최고기록을 냈다. 고전명장<춘향전>은 국가문화부의 초청을 받아 북경에서 제1차 희극예술절에서 공연을 하여 집체1등상을 받았고 김재한은 연출상을 받았고 허동활, 리영근, 정인덕은 모두 배우3등상을 수여받았다.
 
조선족의 전통음악 <판소리>, 구연 <재담> <만담> <북타령> <3로인> <연변창담> 역시 관중들의 절찬속에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쳤다. 그중 <3로인>은 건국초기에 개발한 구연프로인데 초창기에 창작된 <호조조가 좋을시구>를 선두로 <풍년가. <집주인> <늑대의 끝장> 등 작품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중 <풍년가>는 1954년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업여문예콩클에서 공연하여 모택동 주은래 등 지도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군중문화활동을 돌이켜 보면, 1952년 9월 자치주성립이후부터 1966년 <문혁>전까지 모두 7차의 전주문예콩클을 개최했는바 전업문예단체는 물론이고 업여와 민간문예단체 등 70여개소 문예단체가 600여부(수) 절목을 표연했고 1,800여명의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문예콩클은 문예단체들의 예술성과를 교류함과 동시에 좋은 절목과 훌륭한 문예인재를 발굴하는데도 좋은 역할을 하였다.
 
연변의 업여문예표연단체들은 전성,전국의 업여문예콩클에 참가해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53년 연변업여연출조 8명은 길림성을 대표하여 전국제1차민간예술표연에서 <농악무> <퉁소합주> 표연하여 우수상을 받았다. 동년 10월 길림성제1차민간문예회보회에는 113명으로 구성된 연변민간예인대표단이 참가하여 <농악무> <부채춤> <학춤> <탈춤> 등 절목을 올려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1954년 연길현 조양천의 김옥순 등 11명은 길림성을 대표하여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업여무용콩클에 참가하여 민간예인 양창윤이 개작한 <부채춤>을 표연하여 <연출우수상>을 받았다. 1957년 연변민간예인연출조 10명은 전국제2차민간음악,무용콩클에 출전하여 <민악합주>와 <우산춤>을 올려 <우수상>을 받았고 배우들은 주덕위원장과 주은래총리의 접견을 받았다.
 
군중들의 자발적인 문예오락활동은 더욱 흥미진지하게 발전했다. 건국이래 특히는 1952년9월 자치주가 창립된이래 매년 <9.3>자치주창립기념일이면 부동한 규모의 군중성적인 경축활동을 진행하였는바 주와 각현시와 향진에서는 경축모임이거나 체육운동회을 열어 명절의 옷차림으로 대오를 지어 검열을 하고 더덩실 집체무를 추고 여러가지 유희를 놀고 씨름, 널뛰기, 그네타기 등 민속체육시합을 벌리고 하면서 즐거운하루를 보냈다. 매년 <6.1절> 또한 경사날이라 부모들은 물론이고 남녀로소들이 모두 어린이들을 위해 정성껏 하루를 함께 즐려주는 풍속도 자리매김하여 보귀한 대중문화로 자리잡았다. 광복나서부터 연변의 농촌과 도시에서는 로인독보조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여 활발한 독보활도을 벌여 이웃과 소식을 나누고 정을 나누었는데 로인독도조활동이야말로 연변에만 있는 독특한 로년들의 대중문화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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