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하나만으로 청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서방흥아나운서였다.
단색TV도 없었고 라지오만이 신문과 더불어 세상이야기를 들을수 있는 유일한 소통수단이였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와 드라마,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보낸 사람들사이에서 서방흥아나운서는 단연 최고였고 마음속의 "스타"였다.
“매 시간 번갈아 화술강의를 진행하다보면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가며 살아야 합니다.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피곤합니다. 하지만 이런 수고가 우리 말을 지키는데 일조한다고 생각하면 ‘까짓 피곤함쯤…’ 하게 됩니다.”
지난 17일, 서방흥(68살)교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인사 대신 이런 말로 입을 뗐다. 1971년에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로 입문해 정년퇴직하기전까지 36년을 라지오부스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그, 그리고 퇴직후에도 대학강의는 물론 소학생, 중학생들의 화술지도를 맡아나서면서 우리 말 지킴이를 자처해나섰다.
사실 원래 아나운서를 꿈꾸던 사람은 아니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만화가를 꿈꿔왔던 그에게 그의 지인이 아나운서를 해보는게 어떻냐는 권유를 해줘서 지원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비록 남들보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늦깎이 방송”을 시작했지만 우리 말에 대한 배움의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방송이 일반인들의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혹독하게 공부했습니다”며 그는 우리 말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16년 동안 아나운서 실장으로 지낸 서방흥아나운서에 대해 그의 제자인 서태문아나운서는 “어휘선택에서부터 발음에 이르기까지 어찌나 혹독하게 평가를 하는지 가슴속으로 피눈물이 흐르는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수많은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을수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제 인생 2막은 퇴직후부터 시작됐습니다. 오히려 퇴직하고나니 대학강의부터 중소학교 학생들 화술강의로 눈코뜰새 없이 바삐 돌아치고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요즘 서방흥교수님은 매일 8시간이나 되는 강의 스케줄로 동분서주하고있다.
서방흥교수님은 10년 넘게 지금까지 꾸준하게 연변대학 예술학원 화술학과 강의를 이어오고있다. 강의를 시작한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말로 된 제대로 된 화술전문도서가 없었다. 이에 그는 몇년동안 공들여 준비한 자료로 《현대화술론》을 펴냈는데 이는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교재로 쓰이고있다.
그리고 지난 2007년부터 자신만의 화술학원을 차리고 중소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한 화술강의와 연변스튜어디스학원에서 고운말 바른말 쓰기 화술지도를 맡아나선데는 그만의 리유가 있기도 하다.
“요즘 우리 말의 생채기들이 보입니다. 한자말에 짓밟히고 외래어에 할퀴여서 상처투성이가 되여버린 우리 말의 처지가 자못 안타깝습니다. 남의 말을 함부로 끌어들여 뒤섞어쓰면 겨레의 삶으로 빚어낸 삶과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수 없습니다”라고 그 리유를 밝혔다.
중국조선족아나운서 제1임 방송교수인 서방흥아나운서는 그동안 자신의 공부의 결과를 론문이나 책으로 펴내 세상에 알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발표한 론문은 수십편, 학계에도 묵직한 영향을 끼친 《말하기와 읽기 기교》, 《현대화술론》, 《방송원입문》 등 저서는 우리 연변말의 화술표준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함에 있어서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 말 지킴이를 자처하며 살아온 세월의 보상인셈이기도 하다.
“오늘 하루 내 입술을 떠난 말은 어디에 어떻게 씨를 내렸을가. 쏟은 말들을 소쿠리에 담듯 건져보면 오늘 하루는 나에게 어떤 삶이였는지 헤아려볼수 있지 않을가…” 서방흥교수님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연변일보 글·사진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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